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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드루킹 특검, 수사기간 연장 안한다···배수진 친 허익범 특검호

    [단독]드루킹 특검, 수사기간 연장 안한다···배수진 친 허익범 특검호

    드루킹 댓글조작 사건’을 수사하는 허익범 특검팀이 수사기간 연장 요청 없이 오는 25일 특검 수사를 종료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확인됐다. 특검법에 따라 특검팀은 주어진 1차 수사기간인 60일이 끝나기 전에 추가 30일 연장을 청와대에 요청할 수 있지만, 특검팀은 요청 자체를 고려하지 않고 ‘배수진’을 친 채 남은 25일의 수사기간에 총력을 기울일 방침이다.1일 특검 관계자 등에 따르면 특검팀은 지난달 30일 사무실이 입주해있는 서울 강남역 J빌딩 측에 “(1차 수사기한이 끝나는) 8월 26일부터는 2개층만 사용하겠다”고 밝혔다. 특검팀은 현재 J빌딩 6개층을 임대해 사용하고 있지만, 1차 수사기한이 끝나면 사무실을 2개층으로 줄이고 공소유지를 위한 최소 인력만 남게 된다. 특검팀 관계자는 “앞으로 8층과 9층만 사용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6월 27일 공식 출범한 특검팀은 일차적으로 60일간 수사를 진행할 수 있다. 이후 기간 연장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문재인 대통령의 승인을 거쳐 30일을 연정해 총 90일간 수사를 벌일 수 있다. 실제로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을 수사한 박영수 특검팀은 주어진 70일이 부족하다며 수사기간 연장을 요청했지만, 황교안 당시 대통령 직무대행이 승인하지 않아 수사가 종료됐다. 당시 황 권한대행은 “검찰 수사 기간을 포함해 115일간 수사가 이뤄졌다”는 이유를 들었다. 이에 특검팀 내부적으로도 수사 연장을 요청해도 승인되지 않을 것이란 회의론이 팽배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 때문에 특검팀은 수사기간 연장 여부 자체를 변수에서 제외하고, 남은 25일의 수사기간을 계획적으로 진행할 방침을 정한 것으로 해석된다. 다만, 특검팀이 지난 30일 김경수 지사의 관사 대한 압수수색 영장 발부에 실패하면서 수사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박상융 특검보는 지난달 31일 취재진에게 수사기간 연장 여부와 관련해 “특검팀 내부적으로 논의하지 않는 사항”이라고 밝혔다. 나상현 기자 greentea@seoul.co.kr
  • “같은 이름 버스정류소, 숫자·영문 넣어 혼동 줄여야”

    “같은 이름의 버스정류소 명칭에 숫자나 영문 등을 추가해 혼동을 줄였으면 좋겠습니다.” 서울시의회는 지난 6월 의정모니터링 시민 의견심사회의에 접수된 39건 가운데 홍성민(30·마포구 공덕동)씨의 ‘시내버스정류소 동일명칭에 분류 두기’를 포함한 6건을 우수 의견으로 선정했다고 31일 밝혔다. 서울시의회는 의정발전과 선진의회 구현을 위해 20세 이상 시민 354명을 의정모니터로 위촉하고 서울시 주요 정책이나 의정 활동에 대한 의견을 매달 듣고 있다. 홍씨는 “서울시 교통정보를 제공하는 사이트에서 광화문 버스정류장을 검색하면 광화문, 광화문새마을금고, 광화문광화문빌딩 등 정류소가 10건이 나오는데 ‘광화문’이란 동일명칭만 무려 6곳이라 정확한 위치를 알기 어렵다”면서 “동일명칭을 가능하면 만들지 않고 뒤에 숫자나 영문 또는 근처에 있는 유명 건물이라도 명칭에 추가했으면 한다”고 제안했다. 구로구 고척동에 사는 김창일(43)씨는 ‘소화전 5m 내 주차금지표시’를 제안했다. 김씨는 “소화전 내 5m 이내에 주차금지가 8월 시행되는데 모르는 사람도 있다”고 설명했다. 마포구 공덕동에 사는 박성우(37)씨는 “서울시 주민센터나 구청, 시청 담당부서 또는 산하 기관에 전화나 방문 문의 시에 당일 문의가 종료된 이후 일주일 안에 만족도 해피콜 서비스를 제공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손창명(60·은평구 응암동)씨는 “잦은 보행로 공사는 예산 낭비가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면서 “보행로 공사를 왜 하는지 자세하게 공지하고, 공사 이전 사진 등을 설치했으면 한다”고 제안했다. 이 밖에 ‘서울시 장애인홈페이지 하단에 농인상담(수어·문자) 상담안내 제공’, ‘생일 맞은 서울시민에게 서울시티투어 버스 등 할인 제공’ 등이 우수 의견으로 꼽혔다. 송수연 기자 songsy@seoul.co.kr
  • [그때의 사회면] 여의도 개발 50년/손성진 논설고문

    [그때의 사회면] 여의도 개발 50년/손성진 논설고문

    박원순 서울시장이 서울 여의도를 통개발한다고 한마디 하는 바람에 여의도 집값이 요동치고 있다. 올해는 서울시가 여의도를 본격 개발한 지 50년이 되는 해다. 제24대 서울시장 김현옥이 한강과 샛강에 둘러싸여 여름이면 범람하곤 했던 여의도에 윤중제를 건설해 준공식을 거행한 것은 1968년 6월 1일이었다. 그해 2월 20일 착공, 연인원 52만명을 동원해 87만평의 새 땅을 장만했다. 원래 예정된 공기는 1년이었지만 ‘불도저’ 김 시장의 지휘로 단 100일 만에 완공했다. 언론은 여의도를 ‘수중도시’라고 불렀다. 준공식엔 박정희 전 대통령 등 3부 요인이 참석했고 박 전 대통령은 승용차를 타고 7.6㎞의 윤중제 도로를 달렸다(경향신문 1966년 6월 1일자). 여의도는 조선시대엔 잉화도·나의주·나의도 등으로 불렸다. 지금의 국회의사당 자리에는 양과 말을 방목하던 양말산(羊馬山)이라는 나지막한 산이 있었다. 한강이 범람하면 양말산은 머리를 살짝 내밀어 ‘나의 섬’, ‘너의 섬’ 하고 부르던 게 한자로 여의도가 됐다고 한다. 양말산 아래에는 500여 가구 20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일제는 1916년 여의도에 남북으로 활주로가 뻗은 간이비행장을 만들었다. 1922년 안창남이 비행기를 몰고 여의도에 나타났을 땐 5만여명이 몰렸다. 윤중제 건설 직후 건축가 김수근은 허허벌판 여의도에 개발계획도를 그렸다. 서쪽에는 국회의사당이, 동쪽에는 대법원과 서울시청, 종합병원이 들어서게 돼 있었다. 그러나 와우아파트 사건으로 김 시장이 물러나고 양택식 시장이 부임하면서 계획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동아일보 1971년 8월 10일자). 대법원 자리에는 시범아파트 등이 건축되고 종합병원 자리에는 나중에 63빌딩이 들어섰다. 박 전 대통령의 지시로 한복판에는 거대한 광장이 만들어졌다. 유사시 비행장으로 쓸 목적이었다고 전해진다. 서울시청은 국회 바로 옆으로 위치가 옮겨져 1976년까지 이전하기로 했다가 무산됐다. 시범아파트 등 주거지구를 늘린 것은 재정 확보와도 관련이 있다고 한다. 여의도를 통행금지가 없고 야간활동이 자유로운 지역으로 만들겠다는 구상도 포함됐다. 당시 서울시의 관심은 여의도보다 강남 개발에 쏠려 있었다. 지하철 2호선은 여의도를 통과할 계획이었지만, 강남을 지나가는 순환선으로 변경됐다. 서울시청 영동 이전설(동아일보 1975년 9월 9일자)이 불거지기도 했지만, 시청은 결국 현 위치를 고수했다. 이렇듯 여의도 개발만 놓고도 서울시의 정책은 조변석개(朝變夕改)였다.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한효주 건물 매입, 한남동 55억 빌딩 이어 갈현동 27억대 소유

    한효주 건물 매입, 한남동 55억 빌딩 이어 갈현동 27억대 소유

    배우 한효주의 건물 매입 소식이 또 전해졌다. 한효주는 지난해 9월 서울 한남동 건물을 55억원에 매입한 데 이어 최근 은평구 갈현동에 27억대 빌딩을 사들였다. 부동산업계에 따르면 한효주는 지난 5월 해당 부동산을 매입, 가족법인 명의로 최근 등기를 마무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건물은 대지 약 393㎡, 연면적 약 443㎡, 지상 2층 규모의 상가 건물이다. 서울 한남동 한남더힐에 거주 중인 한효주는 2017년 여름 자신의 집에서 내려다보이는 건물을 매입해 화제를 모았다. 그리고 불과 1년 만에 새로운 빌딩을 매입하며 건물 투자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편 한효주는 영화 ‘인랑’으로 관객과 만나고 있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전문] 문희상·이정미·심상정·김호규 노회찬 의원 영결식 조사

    노회찬 정의당 의원의 영결식이 27일 오전 국회 본청 앞에서 국회장으로 엄수됐다. 영결식에서는 국회장 장의위원장인 문희상 국회의장이 영결사를 맡았으며, 이정미 정의당 대표와 심상정 의원, 김호규 금속노동자가 조사를 낭독했다. 다음은 영결사와 조사 전문. 문희상 의장 “어떻게 하다가 이 자리에서 노회찬 의원님을 떠나보내는 영결사를 읽고 있는 것입니까?” 노회찬 의원님! 이곳 국회에는 한여름 처연한 매미 울음만 가득합니다. 제가 왜 이 자리에 서있는 것입니까? 어떻게 하다가 이 자리에서 노회찬 의원님을 떠나보내는 영결사를 읽고 있는 것입니까? 태양빛 가득한 계절이건만 우리 모두는 어두운 터널에 들어선 듯 참담한 심정으로 모여 있습니다. 둘러보면 의원회관 입구에서 본청입구에서 노회찬 의원님의 모습이 보일 듯합니다. 삶에 대한 치열한 고민 속에서도 여유 가득한 표정의 우리 동료, 노 의원님을 만날 것만 같습니다.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믿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이라는 것에 황망함과 비통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깊은 슬픔입니다.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충격이 가시질 않습니다. 노회찬 의원님! 당신은 정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은 항상 시대를 선구했고 진보정치의 상징이었습니다. 정의를 위해서라면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만류에도 거대 권력과의 싸움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남긴 메시지에서도 노동자의 삶을 함께 아파했고 사회적 약자의 승리를 함께 기뻐했습니다. 정치의 본질이 못가진자, 없는 자, 슬픈 자, 억압받는 자 편에 늘 서야 한다고 생각했던당신은 정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노회찬 의원님! 당신의 삶은 많은 이들의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경기고등학교 재학시절부터 서슬 퍼렇던 유신에 항거했습니다. 보장된 주류의 편안한 삶 대신 민주주의와 노동현장에서 온몸을 던져 투쟁했습니다. 낡은 구두, 오래된 셔츠와 넥타이가 말해주는 대중정치인의 검소함과 청렴함은 젊은 세대에게 귀감이 되었습니다. 한국 정치사에 진보정치와 생활정치의 깃발을 세워 사회적 약자와 노동자, 서민의 버팀목이 돼주었습니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가는 이 발자취는 뒷사람의 이정표가 된다.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답설야중거 불수호난행)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 마치 이 말씀을 온 몸으로 실천하듯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고 권력에 굴복하지 않았으며, 명예를 중시하고 신중했던 삶이었습니다. 당신의 삶은 많은 이들의 이정표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노회찬 의원님! 당신은 22일 저녁 병상의 어머님을 찾아뵙고 동생의 집을 들렀지만, 만나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그 누구도 꿈속에서조차 상상하지 못했을 마지막 밤을 보내고 우리 곁을 떠나갔습니다. 차마 이 길을 선택한 노회찬 의원님의 고뇌와 번민, 회한과 고통을 생각하면 주체할 수 없는눈물만 흐를 뿐입니다. 당신은 여기서 멈췄지만 추구하던 가치와 정신은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노회찬 의원님! 지난 닷새 동안 당신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수많은 이들이 눈물 속에서 꽃을 건넸습니다. 흐드러지게 꽃피었어야 할 거인과의 갑작스런 작별을 온 국민이 애도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마지막을 동료들과 함께 국회장을 치를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유가족 여러분께 가슴 깊이 우러나오는 감사의 말씀과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노회찬 의원님, 이제 평생을 짊어졌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영원한 평안을 누리십시오. 당신이 한국정치사에 남긴 발자취와 정신은 우리 국회와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서 길이 빛날 것입니다. 부디 영면하소서. 이정미 대표 “‘여기서 멈추겠다’고 했던 노회찬은 결코 멈추지 않고 우리와 함께 ‘당당히 나아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대표님! 수만의 시민들이 전국 곳곳에서 대표님을 추모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초등학생부터 구순 어르신까지. 막 일을 마치고 땀자국이 선연한 티셔츠를 입고 온 일용직 노동자부터 검은 정장을 정중히 입은 기업 대표까지. 남녀노소 각계각층의 많은 분들이 오셔서 원내대표님의 마지막 가는 길에 함께 했습니다. 나이도 성별도 하는 일도 다르지만 이 분들이 저의 손을 잡고 울먹이며 하시는 말씀은 모두 같습니다. “대한민국에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꼭 필요한 사람’. 이보다 노회찬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없을 것입니다. 노회찬 원내대표가 세상을 떠나자 많은 단체가 추모 성명을 냈습니다. 그들은 해고 노동자이고, 산재로 자식을 잃은 어미이자 아비였으며, 장애인, 여성, 성소수자였습니다. 노회찬이 우리 정치에 없었다면 ?간절한 외침을 전할 길이 없었던 약자들이 노회찬의 죽음에 누구보다 슬퍼하고 있습니다. 노회찬의 정치 이력은 바로 이들을 대변하고, 이들의 삶을 바꾸는 길이었습니다. 대학생 노회찬은 노동 해방을 위해 용접공이 되어 인천으로 향했고, 일하는 사람을 대변하는 진보정당을 만들기 위해, 이제는 이름조차 기억하기 힘든 진보정치 단체들을 두루 이끌며 청춘을 바쳤습니다. 진보정당 탄생 후에는 그 성공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 순간, 그가 만들고 키워 온 정의당을 위해 그의 삶을 통째로 바쳤습니다. 그래서 노회찬을 잃은 것은 그저 정치인 한명을 잃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약자들의 삶을 바꿀 수 있는 민주주의의 가능성 하나를 상실했습니다. 노회찬, 당신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치인은 아닐지라도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단 한 사람이었습니다. 2013년 2월 14일 삼성 X파일 대법원 선고로 의원직을 상실한 날, 억장이 무너진 당직자들에게 당신이 처음 했던 말이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였습니다. 분노의 눈물을 삼킨 동료들에게 오히려 웃음과 유머를 보였습니다. 당신은 하늘이 주신 이 재능으로 시민들에게 정치의 통쾌함과 즐거움을 안겼습니다. 그 유쾌함은, 위기와 역경을 낙관으로 이겨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내면의 단단함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노회찬은 불같은 분노와 강직함을 함께 갖고 있었습니다. 2013년 의원직 상실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다시 그날로 돌아가도 삼성 X파일을 공개 하겠다”고 말하는 지독한 고집쟁이였습니다. 마지막 유품인 10년이 넘은 양복 두벌과 낡디 낡은 구두 한 켤레에서, 스스로에게 엄격했지만 너무도 소박했던 노회찬을 봅니다. 우리 정치를 이상적이고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노회찬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국민들은 이런 노회찬을 보며 저기 국회에도 자기 편이 한명 쯤은 있다고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한결 같은 노회찬을 보며, 많은 정치인들은 정당과 정견은 다르더라도 그를 존중했습니다. 이처럼 소중한 노회찬이, 무겁고 무거운 양심의 무게에 힘겨워 할 때 저는 그 짐을 함께 나눠지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오직 진보정치의 승리만을 염원하며 스스로가 디딤돌이 되겠다는 선택을 할 때도 그 곁에 있어주지 못했습니다. 당원들과 국민들께 너무나 죄송합니다. 정의당은 약속드립니다. 조문 기간 백발이 성성한 어른께서 저의 손을 잡고 “정의당 안에서 노회찬을 반드시 부활시키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저와 정의당은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노회찬의 정신은 정의당의 정신이 될 것이며, 노회찬의 간절한 꿈이었던 진보집권의 꿈은 이제 정의당의 꿈이 될 것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문희상 의장님과 선배 동료 의원 여러분! 노회찬 대표의 2012년 정의당 창당대회 연설을 기억합니다. 노 대표는 투명인간들에 대해 말했습니다. 매일 새벽 4시 서울 구로구에서 6411버스를 타고 강남의 빌딩으로 출근하는 여성노동자들은 진보정당에서조차 투명인간이었다고, 그는 반성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분들이 냄새 맡을 수 있고, 손에 잡을 수 있는 곳으로, 이 당을 함께 가져가자”고 했습니다. 노회찬의 이 다짐이 정의당만의 다짐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한국 정치가 너나 ?없이 투명 인간으로 취급해 온 일하는 사람들, 소수자들, 약자들을 향해 이제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되도록 정치개혁과 시민의 삶을 바꾸는 개혁에 나서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여기서 멈추겠다.”고 했던 노회찬은 결코 멈추지 않고 우리와 함께 “당당히 나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한국 정치 변화의 상징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의 벗, 존경하는 나의 선배 노회찬 이시여. 부디 영면하십시오. 먼 훗날 다시 만나면, 수많은 노회찬의 부활로 진보정치의 큰 꿈을 이루고 이 나라가 평등 평화의 새로운 대한민국이 됐다고 기쁘게 이야기 나눌 것입니다. 심상정 의원 “노회찬이 있었기에 심상정이 있었습니다. 가장 든든한 선배이자 버팀목이었습니다.” 노회찬 대표님! 나의 동지, 사랑하는 동지, 영원한 동지여! 지금 제가 왜? 왜? 대표님께 조사를 올려야 한단 말입니까? 저는 싫습니다. 꿈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뒤로 숨고만 싶습니다. 생각할수록 자책감에 서러움이 밀려옵니다. 쉬운 길 놔두고 풍찬노숙의 길을 자임한 우리들이었기에, 수많은 고뇌와 상처들을 기꺼이 감당해왔던 믿음직한 당신이었기에, 우리 사이의 침묵은 이심전심이고 믿음이며 위로였기에, 지금껏 그래왔듯 그저 침묵으로 기도하면 될 줄 알았습니다. 저의 아둔함에 가슴을 칩니다. 칠흑 같은 고독 속에 수 없는 번민의 밤을 지새웠을 당신을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집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노회찬 동지여! 돌아보니 우리가 함께 한 세월이 30년이 되었습니다. 당신은 인천에서, 저는 구로공단에서 노동운동가로 알게 되어 이후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통합진보당 그리고 정의당에 이르기까지 노회찬, 심상정은 늘 진보정치의 험준한 능선을 걸어 왔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패배로 점철되었던 진보정치의 역사에서 함께 좌절하고, 함께 일어섰습니다. 그 간난신고의 길,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던 시간이었습니다. 당신이 열어주셨기에 함께할 수 있었고 당신과 함께였기에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역사와 국민의 부름 앞에서 주저 없이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의 뜻을 국민들께서도 널리 공감해주시기 시작한 이 때, 이렇게 황망하게 홀로 떠나시니 원통합니다. 당신 없이 그 많은 숙제를 어찌 감당해야 합니까? 그러나 이제 슬픔을 접으려 합니다. 당신을 잃은 오늘, 우리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깨끗하고 정의로운 정치를 위해 당신이 감당했던 천근만근 책임감을 온몸으로 받아 안을 것입니다. 저와 정의당이 그 유지를 가슴깊이 아로새기겠습니다. 당신이 목숨보다 아꼈던 진보정치, 정의당은 더 강해지겠습니다.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아름답고 품격 있는 정당으로 발돋움 하여 국민의 더 큰 사랑 받겠습니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노회찬 없는 진보정당, 상상할 수 없습니다.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노회찬과 함께 할 것입니다. 당신이 끝끝내 지켜내고자 했던 진보정치의 꿈, 정의로운 복지국가, 저와 정의당 당원들이 함께 기필코 이뤄낼 것입니다. 사랑하는 노회찬 동지여! 나의 동지여! 마지막으로 생전에 드리지 못한 말을 전합니다. 노회찬이 있었기에 심상정이 있었습니다. 가장 든든한 선배이자 버팀목이었습니다. 늘 지켜보고 계실 것이기에 ‘보고싶다’는 말은 아끼겠습니다. 대신 더 단단해지겠습니다.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2011년 대한문 앞에서 함께 단식농성하며 약속했던 그 말, ‘함께 진보정치의 끝을 보자’던 그 약속, 꼭 지켜낼 것입니다. 정의당이 노회찬과 함께 기필코 세상을 바꿔낼 것입니다. 노회찬 대표님, 이제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편히 쉬소서. 국민들과 함께 소탈하고 아름다운 정치인 노회찬을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영원히 사랑할 것입니다. 김호규 금속노동자 “진보정당운동과 노동운동의 후배로서 선배의 유지를 받아안고 산 자의 결기로 나아가겠습니다.” 노회찬 선배께 “노동자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너무나도 소박한 요구를 밤새 가르방으로 긁어 유인물로 만들고 새벽찬 어둠을 뚫고 잰걸음으로 인천, 부천지역 공단 주변 집집마다 돌리고 먼 길을 돌아 출근했던 노동자 생활이 떠오릅니다. 서로 얼굴도 모른 채 가명으로 활동한 1986년 늦가을이 생각납니다. 벅찬 가슴안고 뚜벅뚜벅 걸었던 노동자의 길을 기억 합니다. 그 길에서 만난 노회찬 선배. 30년이 지난 오늘 영원한 안식의 길에서 만나게 되는군요. 제가 부족했습니다. 노동운동의 노선과 조직이름이 바뀌어도, 함께했던 선배였기에,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산별노조 양날개론을 증명해보고자 실천한 선배였기에, 온갖 시련과 갈등이 혼재된 진보정당운동에서 대중적인 정치인으로 우뚝 선 선배였기에, 그저 믿었습니다. 저희가 안일했습니다. 예전 조직활동을 했던 때처럼 분명하게 비판하고 조직적으로 결정했다면 이렇게 허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필요할 때만 전화했던 이기심이 부끄럽습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선배의 고민을 함께하지 못했던 얄팍함을 반성합니다. 그래도 노동자 민중의 정치를 위해 희망을 만들었던 선배를 존경합니다. 푸근한 호빵맨으로, 적절한 비유로 비판의 경지를 한 단계 높여 대중적인 진보정치의 새로운 길을 열어낸 선배의 열정을 사랑합니다. 낮은 울림이 큰 첼로를 연주할 수 있는 정치인으로, 온 국민이 악기 하나쯤은 연주 할 수 있는 나라를 꿈꿨던 선배의 감성을 배우겠습니다. 1986년 부천에서 노동자의 길을 시작한 저에게 지난 30여 년 동안 선배와의 인연은 일선의 현장활동가로서 가까웠지만 사안에 따라 다소 멀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울산에서의 다양한 활동에 대한 선배의 지도는 늘 좋았고 명쾌했습니다. 갈등했던 기억은 잠시 뒤로 미루고, 울산 바닷가에서 의기투합했던 도원결의는 간직하겠습니다. 선배를 보내는 이 자리는 회한과 슬픔이 앞서지만 넋 놓지 않고 다시 한 번, 진보정당운동과 노동운동의 후배로서 선배의 유지를 받아안고 산 자의 결기로 나아가겠습니다. 더 이상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는 선배를 통해 체득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활동하는 동안 놓치지 않고, 노동자의 길로 나아가는 발걸음마다 나지막이 퍼져가도록 하겠습니다. 장례기간 동안 선배를 추모하는 긴 추모행렬을 보았고, 다양한 국민들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이제 노동자의 길을 걸었던 노동운동가에서 진정한 정치인으로 우뚝 선 선배이기에 영원한 안식의 공간에서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가고 싶은 곳을 자유롭게 가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광화문 정동길 금속노조 사무실 옥상에서 선배를 기억하며 서성이는데 붉은 고추잠자리가 제 주위를 맴도네요. 추억과 동심의 잠자리 모습에서 씨익 웃는 선배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번뜩 내려와 ‘귀로’라는 노래를 들으며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노래 중에 이런 대목이 다가옵니다. “무지개가 뜨는 언덕을 찾아 넓은 세상 멀리 헤매 다녔네 그 무지개 어디로 사라지고 높던 해는 기울어가네 새털구름 머문 파란 하늘 아래 푸른 숨을 쉬며 천천히 걸어서 나 그리운 그 곳에 간다네 먼 길을 돌아 처음으로” 엄혹했던 노동운동가에서, 치열한 진보적 대중 정치인으로. 이제는 자유로운 인간으로 국민들의 가슴 속에 첼로의 운율을 남긴 만큼 먼 길 돌아왔습니다. 처음처럼, 아가처럼 편히 쉬십시오.
  •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성공과 실패 동시에 겪은 일본 생활… ‘프리메이슨’ 활동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성공과 실패 동시에 겪은 일본 생활… ‘프리메이슨’ 활동

    1888년 아버지와 이모부의 사업을 돕고자 일본으로 간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은 고베에서 16년간 살면서 성공과 실패를 모두 맛봤다. 그는 사업이 번창해 큰 돈을 벌었고 결혼도 했다. 지역 스포츠클럽 사무국장을 맡아 리더십을 발휘했다. 반면 비밀결사단체로 알려진 ‘프리메이슨’에도 가입하는 등 미스터리한 면도 보였다. 16세 소년 베델이 고베에 왔을 때는 일본이 고베항을 개방(1868년)한 지 정확히 20년이 되던 해였다. 고베는 개항 당시만 해도 사람이 거의 없던 허허벌판이었다. 하지만 바다 수심이 깊어 큰 배가 쉽게 들어오면서 외국의 자본과 기술이 빠르게 퍼졌다. 인구도 1895년 15만 3382명, 1901년 25만 9040명, 1910년 38만 7915명으로 급속히 늘었다. 20세기 초 조선의 수도 한양의 인구가 20만명 안팎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이곳이 얼마나 크고 활기찬 도시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지금도 일본에서 쓰이는 “성공한 사람은 교토에서 공부하고, 오사카에서 돈을 벌어, 고베에 산다”는 말은 이 무렵부터 생겨났다. 베델은 일본 시절 초기 이모부인 퍼시 알프레드 니콜(1848~1899)의 집(고베시 73번지)에 기거하며 일을 배웠다. 현재 이곳에는 1992년 지어진 ‘신크레센토 빌딩’이 들어서 있다. 고베시 문서관의 ‘재팬 디렉터리’에 따르면 니콜은 적어도 1883년부터 일본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사업이 번창하자 1886년 동서이자 베델의 아버지인 토머스 행콕 베델(1849~1912)에게 동업을 제안했다. 토머스 행콕도 본업이 궤도에 오르자 자신은 영국쪽 일을 맡고 큰아들 베델을 일본에 보내 분업에 나섰다. 베델은 고베의 이모부와 런던의 아버지 사이에서 업무를 익히며 사업 노하우를 체득해 갔다.이들이 했던 사업은 완호물(玩好物) 매매였다. 완호물은 쉽게 구하기 어려운 외국산 물품을 말하는데, 당시 영국인에게는 일본산 도자기나 골동품, 칠기, 장신구가 그런 것들이었다. 네덜란드 출신의 후기 인상파 거장 빈센트 반 고흐(1853~1890)가 일본 판화에 매료돼 그 화풍을 모방했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듯 당시 영국을 비롯한 서양 여러 나라에서는 중국과 일본의 예술작품이 인기를 얻었다. 이를 반영하듯 고베에는 외국인을 상대로 옛날 그림과 유기제품, 동전, 고의상, 갑옷 등을 파는 상점들이 많았다.베델이 사업을 하던 19세기 말은 영국이나 일본 모두 무역으로 번영을 구가하던 때였다. 그는 두 나라가 크게 성장하던 시기에 런던에 있던 아버지를 도와 상당한 부를 모을 수 있었다. 베델은 성격이 외향적이고 활달했다. 1909년 5월 7·8일자 ‘배설공의 약전’에는 그가 “각종 유희를 좋아하고 활발용장한 품성을 가졌다”고 기록돼 있다. 고베 시절 그는 여러 가지 운동과 음악을 즐겼고 체스도 잘 뒀다. 술과 담배도 좋아했다. 고베 지역 영자지 ‘고베 크로니클’에는 그가 사람들 앞에서 거리낌없이 노래를 부르곤 했다는 기사가 수차례 등장한다. 그가 적극적이고 사교적인 성격이었음을 잘 보여 준다. 베델은 1901년 고베 외국인 스포츠클럽 ‘고베 레가타 앤드 어슬래틱 클럽’(KR&AC)에서 사무국장을 맡기도 했다. 1901년 1월 30일자 ‘고베 위클리 크로니클’에는 자신을 ‘다섯 살 난 (KR&AC) 멤버’라고 밝힌 이가 “지난해 열린 레가타(여러 명이 함께 요를 젓는 요트) 대회 선수 선발 과정이 공정하지 않았다”고 KR&AC를 비난하는 기고가 실렸다. 그러자 베델은 2월 6일자 기고를 통해 “우리 클럽에 5살짜리가 있는 줄 처음 알았다”고 비꼰 뒤 “나이에 비해 글을 꽤 잘 썼지만 생각은 매우 어리석다”며 그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가 논쟁을 피하지 않는 불같은 면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1899년은 베델에게 큰 전환점이 된 해였다. 아버지 토머스 행콕은 두 번째 동업을 정리하면서 자신의 일본 사업을 대신 맡아줄 사람이 필요해졌다. 여기에 이모부 니콜도 세상을 떠났다. 51세였다. 그는 사업차 고베에서 영국 런던으로 배를 타고 가다가 포르투갈 해상에서 숨을 거뒀다. 평소 지병이 있었던 것 같다. 베델에게 ‘사업 스승’ 니콜의 죽음은 적잖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현재 니콜은 고베 외국인 묘지에 안장돼 있는데, 서울신문은 취재 과정에서 니콜의 묘지를 찾는 후손과 연락이 닿아 이 사실을 전달했다. 27살이던 베델은 이 때부터 독자 사업에 나섰다. 베델은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고자 자신의 첫 회사인 ‘베델 브러더스’를 세웠다. 이 회사는 이름처럼 삼형제인 베델과 허버트(1875~1939), 아서 퍼시(1877~1947)가 함께 운영했다. 이들은 각각 고베와 요코하마, 런던에 사무실을 내고 완호물을 사고 팔았다.이때 베델은 회사 설립을 위해 잠시 영국에 들렀다가 은행원 존 게일의 둘째 딸 메리 모드 게일(1873~1965)을 만났다. 이들은 이듬해인 1900년 고베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베델 부부는 1901년 외아들 허버트 오언 친키 베델(1901~1964)을 낳았다. 그는 ‘짐’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는데, 이름 가운데 ‘친키’는 일본어로 ‘新規’(새로운 것)라는 단어다. 그가 일본에서 얻은 아들을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다. ‘베델 브러더스‘는 한동안 승승장구했다. 아버지가 물려준 영업처를 형제들이 잘 관리했던 것 같다. 베델은 이때 번 돈으로 1901년 오사카 남쪽 사카이 지역에 러그(깔개나 무릎덮개 용도로 쓰는 직물제품) 생산공장을 차렸다. 당시 러그는 영국인 가정의 필수 품목이었다. 이미 만들어진 제품을 중개하는 수준에서 한발 더 나아가 직접 제품을 생산하는 자본가로 성장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는 훗날 베델이 일본 사업을 포기하는 원인이 된다. 한편 베델은 일본에서 ‘프리메이슨’에 가입해 활동했다. 프리메이슨은 중세 교회 건축가 집단에서 출발했다가 기독교 보수성에 반발해 조직된 비밀결사체로 알려져 있다. 프리메이슨이 ‘그림자 정부’(세계를 은밀히 지배하고 있다는 초국가적 조직)의 배후에 있다는 음모론도 있다. 정성화 명지대 사학과 교수와 한국학 자료 수집가 로버트 네프가 함께 쓴 ‘서양인의 조선살이,1882~1910’에는 베델이 조선에서 프리메이슨 설립 멤버로 활동했다고 전한다. 프리메이슨 서울 지부인 ‘한양롯지’ 홈페이지에도 베델을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소개한다. 영국에서 만난 베델의 손녀 수전 제인 블랙(62)은 “할아버지(베델)는 영국 선박업자 조지 쇼어의 소개로 일본 거주 시절 프리메이슨에 가입했다”면서 “할아버지는 (비밀주의 원칙을 지키려고) 가족에게도 프리메이슨 내부 이야기를 말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반면, 영국 출신 역사 연구가인 에이드리언 코웰(62)은 “베델은 (일본에서 프리메이슨에 가입한 것이 아니라) 1908년 영국 법원 판결에 따라 중국 상하이에서 3주간 복역하고 돌아온 뒤에 서울에서 가입했다”면서 “당시 조선에서 프리메이슨이 막 생겨나던 때였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요직을 맡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안신 배재대 복지신학과 교수는 그의 논문 ‘한국 프리메이슨의 역사와 특징’에서 “프리메이슨은 신종교 성격을 띤 엘리트주의 모임”이라면서 “다만 베델이 조선에 왔던 시기 프리메이슨은 종교적 의미보다는 친목과 자선을 위한 형제공동체적 성격이 강했다”고 설명했다. 고베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런던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노 의원, 우리 같은 꼴찌 위해 버티지”…6411번 버스는 웁니다

    “노 의원, 우리 같은 꼴찌 위해 버티지”…6411번 버스는 웁니다

    노회찬 2012년 정의당 대표 수락 연설때 ‘6411번 버스’ 청소 노동자들의 삶 언급 그 후 6년…魯는 없지만 승객들 그대로 새벽 4시 첫 차… 출발 15분 만에 만석 서로 가방 들어주며 매일 출근길 눈인사 “노동자 살기 좋았던 때 있었나” 한탄도“6411번 버스를 아십니까.” 고(故) 노회찬 정의당 의원의 ‘명연설’에 언급됐던 ‘6411번 버스’가 새삼 화제가 되고 있다. 2012년 10월 진보정의당 대표 수락 연설에서 노 의원은 “6411번 버스는 매일 새벽 같은 시각, 같은 정류소에서 같은 사람이 탑니다. 누가 어느 정류소에서 타고 어디서 내릴지 모두가 알고 있는 매우 특이한 버스”라고 소개했다. 그는 “이 분들은 이름이 있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다. 그냥 아주머니, 청소하는 미화원일 뿐”이라며 “한 달에 85만원 받는 이 분들은 ‘투명인간’이다. 존재하되 우리가 존재를 느끼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는 분들”이라고 지적했다. 지하철이 다니지 않는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 첫 버스를 타고 서울 구로구 구로동에서 강남으로 가는 청소노동자의 삶을 보듬어 줘야 한다는 간절한 내용이었다.●“누가 노 의원만큼 우리 대변해줄지 걱정” 노 의원이 지난 23일 안타깝게 생을 마감하면서 버스 안 ‘투명인간들’도 깊은 슬픔에 잠겼다. 서울신문은 26일 새벽 4시 정각 구로동 영업소에서 출발하는 ‘6411번’ 첫 차와 3분 뒤 출발한 두 번째 버스에 올라 노 의원이 품으려 했던 청소노동자들을 만났다. 그들은 노 의원을 “우리 편에 섰던 사람”으로 기억했다. 실제 버스에서 만난 승객 대부분은 노 의원의 연설대로 여성 청소노동자들이었다. 노 의원이 말한 것처럼 신기하게도 출발한 지 15분 만에 버스는 꽉 찼다. 구로동 영업소를 출발한 첫 버스는 첫 정류장인 거리공원에서 7명을 태웠다. 이 중 한 명인 강모(64)씨는 강남에서 빌딩을 청소한다. 강씨는 “노동자들이 새벽부터 치열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정치인은 노 의원이 유일했다”며 “노동자들이 이렇게 힘들게 살지 않고도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정치를 하셨다”고 말했다. 같은 시간 구로구 남구로역 정류장에서 6411번 버스를 기다리던 서모(72)씨는 ‘노회찬’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금세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최근 5년 동안 강남구 선릉역 주변 빌딩을 청소하고 있는 서씨는 “노동자들 편에 섰던 좋은 분”이라면서 “노 의원은 하늘나라에서도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한 정치를 할 거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남구로역에 도착하니 남은 좌석이 없었다. 앞쪽에 앉아 있던 김모(65)씨도 강남의 한 빌딩을 청소하는 노동자였다. 김씨는 “매일 아침에 첫 차를 탄다”면서 “오전 6시까지 출근하게 돼 있지만 5시 20분까지는 도착해야 여유 있게 일을 끝낼 수 있다”고 말했다. 김씨와 함께 근무하는 21명의 동료는 노 의원의 비보를 접하고 “‘아무리 어려워도 죽으면 끝인데 왜 돌아가셨을까’라며 가슴 아파했다”며 안타까워했다. 김씨는 “약자 편에 서서 법도 많이 만들었는데, 하늘나라에서는 평안하길 바란다”고 명복을 빌었다. 버스 기사 윤모(56)씨는 “정치적인 적(敵)이 없는 것만 봐도 노 의원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 수 있지 않느냐”면서 “앞으로 누가 노 의원처럼 노동자들을 속시원하게 대변해 주고 우리를 위해 힘써 줄지 모르겠다”고 걱정했다.첫 번째 버스보다 3분 늦게 출발한 두 번째 버스에 탄 첫 승객도 강남구 학동에 있는 빌딩을 청소하는 노동자였다. 구로구 신도림역 정류장에서 탑승한 정모(54)씨는 “점점 살기가 절박해지는 것 같다”며 “최저임금이 올라도 용역회사는 오히려 식대를 줄여 임금이 지난해와 2만~3만원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강남구 선정릉역 인근의 빌딩 청소를 한 지 3개월 됐다는 김모(60)씨도 “오래 일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최저임금이 오르자 용역회사에서 일하는 시간과 월급도 같이 줄였다고 한다”고 말했다. 2년 정도 강남 빌딩에서 청소 일을 한 신모(68)씨는 “청소하는 사람들은 편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한탄했다. 이어 “남편이 아파서 몇 년째 쉬고 있기 때문에 청소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청소하는 사람들이 만날 하는 소리가 ‘허리 아프다’, ‘손목 저린다’, ‘몸이 찌릿찌릿하다’ 이런 말들이다”고 덧붙였다. 6411번 버스 승객들 사이에는 자리에 앉은 사람이 서 있는 사람의 가방을 들어 준다. 모르는 사람인데도 서로 대화를 하고 내릴 때에는 눈인사를 하기도 했다. 10년 넘게 이 버스를 탔다는 신모(68)씨는 “다 똑같은 일을 하고, 매일 같은 버스를 타니까 서로 모르면서도 잘 안다”면서 “나이가 비슷하면 친구가 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두 번째 버스의 좌석도 출발한 지 20분이 지나자 꽉 찼다. 뒷문으로 오르는 계단은 또 다른 의자가 됐다. 승객 4명은 미리 준비했다는 듯 가방에서 비닐 깔개를 꺼내 뒷문 계단에 깔더니 그 위에 앉았다. 그렇게 앉은 네 명의 승객은 두 명씩 짝을 지어 이야기를 나눴다. 곧이어 발 디딜 틈 없이 사람이 찼고 앞문도 제대로 닫히지 않을 정도가 됐다. 청소노동자들은 동작구 노들역 정류장에서 5명 정도씩 내리기 시작했다. 강남구 구반포역 정류장에서부터는 10여명씩 한꺼번에 내렸다. 1시간 10여분이 지나 선릉역 정류장에 도착하자 승객 대부분이 하차했다. 오전 5시 10분, 이들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빌딩으로 들어갔다. ●“형! 다음 생에서 만나요”… 울먹인 유시민 “회찬이 형! 형! 형! 다음 생에서 또 만나요.” 공동장례위원장으로 노 의원과 2012년 진보정의당을 창당하고 함께 팟캐스트에 출연하는 등 각별한 인연을 이어 왔던 유시민(58) 작가는 연세대 대강당에서 열린 노 의원 추도식에서 추도사를 낭독하다가 울먹였다. 유 작가는 “생전에 한 번도 형이라고 부르지 못하다 오늘 처음 형이라고 부른다”며 “완벽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좋은 사람이어서 형을 좋아했다”고 말했다. 그는 “다음 생에는 더 좋은 곳에서 태어나 더 자주, 멋지게 첼로를 켜고 아름다운 글을 더 많이 쓰고 (부인) 김지선님을 만나 더 크고 깊은 사랑을 나누세요”라며 “가끔은 물 맑은 호수로 저와 단둘이 낚시를 가자, 형과 함께한 모든 시간이 좋았다”고 덧붙였다. 노 의원의 넋을 기리기 위한 추모문화제는 연세대 이외에 노 의원 지역구인 경남 창원에서도 열렸다. 서울 서대문구 연세장례식장에 차려진 빈소에는 26일 오후까지 2만 8800여명의 추모객이 다녀간 것으로 알려졌다. 노 의원의 장례는 26일부터 국회장으로 승격됐다. 장례 마지막 날인 27일 오전 10시 국회에서 영결식이 엄수된다. 이후 고인은 서초구에 있는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돼 장지인 경기 남양주 마석 모란공원에 안치된다. 기민도 기자 key5088@seoul.co.kr 이근아 기자 leegeunah@seoul.co.kr 유영재 기자 young@seoul.co.kr
  • [서울포토] ‘기선 제압’

    [서울포토] ‘기선 제압’

    25일 63빌딩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제18회 한화생명배 세계 어린이 국수전’에 참가한 선수들이 본선 경기를 치루고 있다. 18회를 맞은 한화생명배 세계어린이 국수전은 매년 1만명 이상, 현재까지 18만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참가한 세계 최대규모의 어린이 바둑대회다. 2018. 7. 25최해국 선임기자 seaworld@seoul.co.kr
  • 보기만 해도 시원…거대한 인공폭포 설치한 中 빌딩

    보기만 해도 시원…거대한 인공폭포 설치한 中 빌딩

    지구 곳곳에서 이상 고온이 이어지는 가운데, 보고만 있어도 시원해지는 거대한 인공폭포 빌딩이 중국에 등장했다. 중국 중신망 등 현지 언론의 22일 보도에 따르면 구이저우성(省) 구이양(貴陽)에 등장한 높이 121m의 빌딩은 외벽에 만들어진 거대한 인공폭포 덕분에 연일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 인공폭포는 초대형 전기 펌프를 이용해 물이 뿜어져 나오는 상층부까지 물을 끌어올린 뒤 낙하시키는 방식으로 제작됐으며, 멀리서 보면 마치 높은 건물이 물을 토해내는 듯 보일 정도로 웅장하다. 높은 곳에서 흩뿌려지는 물은 햇빛과 만나 아름다운 무지개를 만들기도 한다. 연일 고온이 이어지는 가운데, 시원한 폭포가 쏟아지는 장면은 무더위에 지친 행인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인공폭포를 설치한 것은 현지의 유명 부동산업체로,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 제작했다고 밝혔다. 해당 업체 관계자는 현지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인공폭포에 쓰는 물은 모두 재활용하는 수돗물이나 빗물 등”이라며 “우리 빌딩은 지하 4층 깊이의 물 저장 탱크 및 배수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폭포로 사용한 물을 계속해서 정화해 재사용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친환경적으로 운영하기 때문에 1시간 당 전기 요금이 800위안(약 13만 3000원) 정도다. 덕분에 우리는 매일 인공폭포를 가동할 수 있으며, 이 도시에서 가장 특별한 축제를 열 수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업체 측의 ‘친환경’ 강조에도 불구하고, 일부 네티즌들은 쓴소리를 내기도 했다. 일부 네티즌은 “누구 아이디어인지 모르지만 끔찍하다. 이렇게 에너지를 낭비할게 아니라 에너지를 아껴써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위험한 수혜국’에서 ‘SNS 강국’으로...필리핀은 지금 변화 중

    ‘위험한 수혜국’에서 ‘SNS 강국’으로...필리핀은 지금 변화 중

    ‘대기업 총수 필리핀 가사도우미 불법 고용’, ‘필리핀 여행하던 한국인 피살’, ‘태풍이 할퀴고 지나 폐허가 된 필리핀 현지’. 아시아 대륙 남동쪽에 있는 섬나라 필리핀에 대해 언론이 수시로 조명하는 부정적 단면이다. 이런 단면은 마치 필리핀의 전부인 것처럼 낙인이 됐다. 많은 사람이 필리핀을 ‘가난하고 위험한 나라’로 인식했다. 그러나 지난 7일부터 11일까지 한·중·일 그리고 10개국 아세안 청년들과 함께 직접 방문해 목격한 2018년의 필리핀은 알려진 것과 전혀 달랐다. “이번 주 태풍 소식이 있지만, 이렇게 좋은 손님들이 필리핀을 방문했다는 소식만으로도 참 기쁩니다”라며 환하게 웃는 필리핀 사람들의 미소는 화사했다.자연재해와 가난으로 드리운 그늘 대신, 글로벌 디지털 시대에 발맞추려 달리고 있는 필리핀의 밝은 미래를 기대하는 필리피노들의 긍정이 도심 곳곳에 가득했다. 국제기구 한-아세안 센터는 지난 7일부터 5일간 필리핀 마닐라에서 한·중·일 그리고 아세안 청년 70명과 함께 ‘글로벌 디지털 시대의 한-아세안 청년’을 주제로 한 아세안 청년 네트워크 워크숍을 진행했다. 아시아 각지에서 모인 청년들과 함께 찾은 마닐라는 평소 언론을 통해 태풍으로 무너진 건물 사진으로 많이 접했던 필리핀의 모습과는 달랐다. 도심에는 한참을 올려봐야 할 높이의 고층 빌딩이 즐비했다. 또 최근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문제로 지적됐던 ‘스몸비(스마트폰 좀비)’ 현상도 시내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었다. 길거리를 지나는 필리핀 시민들은 걸으면서도 손에 든 스마트폰에 푹 빠져 있었다.인터넷 이용률도 높았다. 워크숍에 참가한 필리피노는 대화를 나누다 말문이 막히자 곧장 “구글에 검색해보겠다”며 검색한 내용을 들이밀었다. 한 필리피노는 “SNS 팔로워 해도 될까요?”라고 묻더니 “인스타그램이면 더 좋겠어요. 최근에 페이스북은 ‘눈팅’만 하거든요”라고 덧붙였다. 한국 젊은이들의 디지털 문화와 영락없이 닮아 있었다. 주필리핀 대한민국 대사관에 따르면 필리핀은 지난해 기준 인구 중위연령 23세(한국 42세)의 ‘젊은 국가’다. 젊은 인구가 많은 까닭에 필리피노들은 ‘해비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유저’로 유명하다. 지난해 영국 SNS 자문회사 ‘WEARESOCIAL’이 발표한 집계에서 필리핀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 SNS 접속 시간이 하루 평균 4시간으로 이용자 평균시간 중 세계 1위를 차지했다. 인터넷 테스트 전문 기업 Ookla의 Speed Test Index에 따르면 필리핀의 인터넷 속도는 지난 2014년 3.5Mbps에서 올해 17.62Mbps로 급격하게 상승했다. 이는 같은 기간 아세안 10개국 중 상승률 1위였다. 필리핀 정부는 최근 디지털을 비롯한 각종 인프라 구축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마닐라에 새로 개발된 지역인 마카티, BGC 등 신도시 지역 주민의 IT기술 활용도는 선진국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다.또 필리핀 내 각종 인프라 구축을 위한 사업 계획을 집대성한 ‘Build-Build-Build’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지난 10일 한-아세안 센터 관계자들과 만난 BBB 위원회 관계자들은 “첫 사업은 마닐라의 골칫덩이인 교통체증을 해결하기 위한 지하철 건설로 2020년 1호 지하철이 운영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디지털 문화의 약진과 더불어 시민참여도 늘고 있다. 참가자들이 마닐라 본사를 방문한 온라인 언론사 래플러(Rappler)는 최근 시민들의 큰 지지를 받으며 필리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래플러는 처음 페이스북 페이지로 시작했지만,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2012년 개별 언론사로 독립했다. 기사의 형식이나 게재 방식 등이 전통적인 언론의 모습과 사뭇 다르나 대통령과 신경전까지 벌일만한 위치까지 올라섰다. 특히 최근에는 두테르테 정부의 강력한 정책을 비판한 기사로 국제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필리핀 정부는 지난 1일 “외국인이 국내 언론사를 소유할 수 없다는 국내법에 반해 래플러의 지분 일부가 외국펀드에 속해 있다”면서 래플러의 법인 등록을 취소했다. 이에 래플러측은 “경영과 무관한 외국인의 재무 투자에 불과한데 이를 트집 잡은 것은 정부 비판적인 언론 길들이기”라고 주장하며 법원에 제소해 관련 재판이 진행 중이다.최근 필리핀 정부는 그간 성장의 발목을 잡던 ‘위험한 나라’ 오명을 벗고자 치안 개선 노력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필리핀 방문 외국인 수 1위에 달하는 한국인을 고려해 한국 경찰과의 협력 사업이 한창이다. 지난 2016년부터 ‘필리핀 경찰 수사 역량 강화사업’을 통해 필리핀 경찰의 초동조치 역량을 강화하고자 경찰청에서 전문가 파견, 한국연수 등을 지원하고 있다. 또한 ‘코리안 데스크’ 제도를 도입해 6명의 한국 경찰청 소속 경찰관이 필리핀 지방경찰청에서 근무하며 한국인 보호에 힘쓰고 있다. 이에 따라 평균 10명에 달하던 한국인 범죄 피살 사망자 수는 지난해 기준 1명으로 크게 줄었다. 한동만 주필리핀 대한민국 대사는 “두테르테 대통령이 마약 등 범죄억제에 대한 강력한 의지와 더불어 대사관과 한인 사회의 합동 노력으로 최근 한인 피살 사건이 크게 줄었다”면서 “한국인 방문객과 교민의 수가 워낙 많다 보니 사건 사고도 잦지만, 카지노나 불법 안마소 등을 이용하지 않고 기본적인 수칙만 잘 지켜도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마닐라 이하영 기자 hiyoung@seoul.co.kr
  • “디지털은 ‘양날의 검’...활용법 찾는 건 우리의 몫이겠죠!”

    “디지털은 ‘양날의 검’...활용법 찾는 건 우리의 몫이겠죠!”

    “디지털은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파괴적일 수도 있고 건설적일 수도 있는 ‘양날의 검’인 것 같습니다. 이를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하는 것이 바로 우리 한·아세안 청년들이 직면한 도전이겠죠!” 국제기구 한-아세안 센터가 지난 7일부터 11일까지 필리핀 마닐라에서 개최한 ‘2018 한-아세안 청년 네트워크 워크숍-글로벌 디지털 시대의 한-아세안 청년’ 참가자 에피 크리스천 조지(26·필리핀 국립대 아시안센터)는 이렇게 말했다.이 워크숍에 참가한 한·중·일 그리고 아세안 10여개국 청년 70명은 필리핀 내에 빠르게 퍼져 나가고 있는 진행되고 있는 디지털 문화를 살펴보고, 디지털을 통해 아세안 국가 간 협력을 증진할 방안을 모색했다. 각국에서 모여든 아시안 청년 70명과 함께 찾은 마닐라 시내에는 고층 빌딩이 즐비했다. 평소 언론을 통해 태풍으로 무너진 건물 사진으로 많이 접했던 필리핀의 모습과는 달랐다. 시내를 지나는 필리핀 시민들은 걸으면서도 손에 든 스마트폰에 빠져 있었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문제로 지적됐던 ‘스몸비(스마트폰 좀비)’ 현상도 흔히 찾아볼 수 있었다. 인터넷 이용률도 높았다. 워크숍에 참가한 필리핀 청년들은 대화를 나누다 말문이 막히자 곧장 “구글에 검색해보겠다”며 금세 검색한 내용을 내보였다. 한 필리피노는 “인스타그램 팔로우 해도 될까요? 전 페이스북은 ‘눈팅’만 하거든요”라고 덧붙였다. 한국 젊은이들의 디지털 문화와 영락없이 닮아 있었다.10일 한-아세안 청년들을 만난 한동만 주필리핀 대한민국 대사는 “필리핀은 지난해 기준 인구 중위연령 23세의 ‘젊은 국가‘라면서 “젊은 인구가 많은 까닭에 필리피노들은 ‘해비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유저’로 유명하다”고 전했다. 지난해 영국 SNS 자문회사 ‘WEARESOCIAL’이 발표한 집계에서 필리핀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 SNS 접속 시간이 하루 평균 4시간으로 이용자 평균시간 중 세계 1위를 차지했다. 필리핀 정부는 최근 디지털을 비롯한 각종 인프라 구축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마닐라에 새로 개발된 지역인 마카티, BGC 등 신도시 지역 주민의 IT 기술 활용도는 선진국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다. 또 필리핀 내 각종 인프라 구축을 위한 사업 계획을 집대성한 ‘Build-Build-Build’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디지털 문화의 약진과 더불어 시민 참여도 늘고 있다. 참가자들이 본사를 방문한 온라인 언론사 래플러(Rappler)는 최근 필리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래플러는 처음 페이스북 페이지로 시작했지만, 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2012년 개별 언론사로 독립했다. 최근에는 두테르테 정부의 강력한 정책 추진 방식을 비판하며 정부와 신경전을 벌여 국제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한국인 참가자 정하승(21·한국조지메이슨대학교 국제학과)씨는 “아세안 국가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제한적이었는데 이번 기회로 새로운 모습을 발견했다”면서 “디지털 세계화 속 한-아세안 관계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도 깨달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마닐라 이하영 기자 hiyoung@seoul.co.kr
  • 中, 한국 등 4개국 철강 반덤핑 조사

    13억弗 규모… 中 점유율 50% 초과 포스코·日신일철 주금 등 8개사 대상 중국이 미국 관세를 면제받은 한국 철강 제품에 대해 관세를 부과할 조짐이다. 중국 상무부는 한국을 포함한 4개국 철강 제품 13억 달러(약 1조 4700억원) 규모를 대상으로 반덤핑 조사에 착수한다고 23일 발표했다. 미·중 무역전쟁에 따른 국내 산업 피해가 현실화되고 있다. 상무부는 한국, 일본, 유럽연합(EU), 인도네시아산 철강 스테인리스 빌릿과 스테인리스 열연강판 제품에 대해 반덤핑 조사에 나선다고 밝혔다. 이번 조사는 산시(山西)성 타이강(太鋼)철강유한공사의 신청에 따라 이뤄진 것으로 2014∼2017년 관련국 제품의 중국 시장 점유율이 50%를 초과했다는 것이 조사 이유다. 지난해 4개국에서 수입한 해당 제품의 수량은 중국 전체 수입량의 98%를 차지했다. 상무부의 반덤핑 조사 대상은 한국 포스코, 스페인의 아세리녹스, 핀란드의 오우토쿰푸, 룩셈부르크의 아페람, 일본의 닛신제강·신일철 주금·JFE스틸과 인도네시아의 피티 진달 스테인리스로 모두 8개사다. 상무부는 “심사 결과에 따라 2018년 7월 23일부터 1년간 EU, 일본, 한국, 인도네시아산 제품에 대해 반덤핑 조사를 한다”면서 “설문, 샘플 조사, 공청회, 현장 실사 등의 방식을 통해 조사가 진행된다”고 설명했다. 중국은 전 세계 스테인리스강의 약 절반을 생산·소비하는데 타이강철강유한공사가 반덤핑 조사를 신청하게 된 계기는 인도네시아산 제품 때문으로 알려졌다. 최근 몇몇 중국 개인기업이 인도네시아에 빌딩을 건설하면서 값싼 니켈 합금 인도네시아 제품이 중국에서 대거 판매됐다. 타이강철강유한공사는 인도네시아 제품의 빠른 유입으로 중국 시장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중국의 인도네시아산 철강 제품 수입은 2015년까지 전혀 없다가 2016년 5% 증가했으며 지난해 1분기에 최대 86% 증가율을 보였다. 인도네시아산 제품의 수입 가격도 지난해는 톤당 1867달러를 기록해 전년도의 톤당 2436달러보다 23% 포인트 하락했다. 타이강철강유한공사 측은 반덤핑 조사 신청서에서 “저가 제품이 중국 시장에 계속 들어와 시장을 점유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국내산 제품은 줄어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동수 산업연구원 베이징지원장은 “중국산 철강이 미국에 이어 유럽 수출도 어려워지자 견제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며 “중국 정부가 관세 조치를 하더라도 한국 산업에 큰 영향은 없지만 철강 산업의 세계적 무역 규모 축소에 따른 타격이 클 것”이라고 말했다. 베이징 윤창수 특파원 geo@seoul.co.kr
  • 서울 강서구 마곡지구 ‘스마트에너지시티’ 조성

    서울 강서구 마곡지구 ‘스마트에너지시티’ 조성

    서울 강서구 마곡지구에 친환경 미래 도시로 각광받는 ‘스마트에너지시티’가 조성된다. 서울에너지공사는 23일 시청 브리핑룸에서 기자설명회를 갖고 GS건설, LG전자, GS파워 등과 함께 서울 마곡지구 3070만㎡를 스마트에너지시티 대표 모델로 구축한다고 밝혔다. 스마트에너지시티는 정보통신기술(ICT)을 활용해 친환경 에너지 사용을 늘리고 시민들 삶의 질을 높이는 도시 발전 모델이다. 재생에너지와 4차 산업혁명 융합을 통해 미세먼지와 기후변화 같은 문제를 해결할 방법으로 평가받고 있다. 공사는 마곡지구에 스마트에너지 홈·빌딩·커뮤니티·타운·히트 그리드(지역난방) 등 5가지 스마트에너지시티 대표 모델을 구축할 계획이다. 공사는 “이들 5가지 모델들이 성공적으로 확산되면 2022년까지 마곡지구 내 전력자립률 30% 달성, 미세먼지 연간 190톤 감축, 온실가스 연간 18만톤 감축이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스마트에너지 홈은 사물인터넷(IoT) 기술을 활용해 가전제품 등의 에너지 사용 현황을 실시간 모니터링하고 원격 관리하는 시스템이다. 스마트에너지 빌딩은 조명, 냉난방 같은 에너지 사용설비와 연료전지, 태양광발전 등 에너지 생산설비를 최적으로 운용하는 건물을 뜻한다. 스마트에너지 커뮤니티는 아파트단지 내 에너지 공유를, 타운은 개인 간(P2P) 거래 등 에너지 사업을, 히트 그리드는 지역난방 열네트워크 구축을 의미한다. 박진섭 서울에너지공사 사장은 “세계 여러 도시들이 직면한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신재생에너지와 미활용에너지 이용을 확대하고, 에너지 효율 개선을 통해 수요 관리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방학역세권 ‘방학역 모비우스 스퀘어’ 복합 쇼핑몰 개발… 투자자 주목

    한국은행은 지난 13일 기준금리를 1.5%로 동결한다고 발표했다. 금리 인상이 예상되던 시점에 금리 동결 발표로 저금리 기조가 더 지속될 것으로 전망되면서 부동산 투자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대출, 청약 규제에 더해 최근 다주택자 양도세 규제, 보유세 등으로 주택 시장의 불안정성이 높아지면서 상대적으로 규제가 덜한 상업용 부동산 시장에 투자자의 눈길이 쏠리고 있다. 상업용 부동산은 주택 분양과 달리 청약통장이 필요없다. 또한 주택이나 오피스텔에 비해 규제가 덜한데다 입지 여건을 갖춘 경우 시중 금리보다 높은 수익을 확보할 수 있어 선호도가 높다. 실제 한국감정원에 따르면 2017년 서울시 상업용 부동산 임대수익은 중대형 상가 6.74%, 소규모 상가가 6.52%를 기록했다. 이는 전년 대비 각각 0.3%, 0.68%씩 증가한 수치이며, 시중은행의 평균 예금 금리 1.8%의 3.7배 수준이다. 상업용 부동산 거래량 증가도 눈에 띈다. 2017년 상업용 부동산 거래량은 38만 4182건으로 한국감정원이 해당 통계를 집계한 이래 최대치를 기록했다. 이는 전년 대비 25만 7877건보다 49%가량 급등한 수치다. 같은 기간 아파트 거래량 증가량은 약 14%가량에 불과했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아파트, 오피스텔 투자가 규제로 시들해지면서 상업용 부동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상업용 부동산은 입지에 따라 수익성이 차이가 나기 때문에 배후수요, 희소성, 미래가치 등을 고려해 입지를 꼼꼼히 따져야 한다. 요즘은 탄탄한 수요가 있고, 도시재생으로 새롭게 변화하는 구도심 역세권이 유망 투자처로 평가 받는다”고 전했다. 최근 투자자들 사이에서 ‘방학역세권’이 관심을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방학역세권’은 밀집주거지역으로 배후수요가 많고 역세권 유동인구가 많은 대표적인 구도심 역세권이다. 최근 멀티플렉스 영화관을 갖춘 복합 쇼핑몰 개발 소식이 들리면서 일대 상가 개발에 발 빠른 상업용 부동산 투자자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피데스개발은 최근 옛 KT 방학빌딩 부지를 복합 쇼핑몰 ‘방학역 모비우스 스퀘어’ 개발 계획을 발표했다. 많은 유동인구에도 대부분 노후한 소규모 상가가 많아 수요에 비해 상업시설이 부족했던 방학역세권에 복합쇼핑몰 개발이 개발되면서 이 일대가 구도심 역세권 재생사업의 핵심으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특히 배후수요에 민감한 CGV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7개관 1000여 석 규모로 일찌감치 입점을 확정하면서 이어지는 상가 개발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방학역은 지난해 서울도시철도 집객 기준 일평균 2만 여명이 이용했으며, 사업지 바로 앞 중앙버스정류장은 일평균 7000여명이 이용해 약 2만 7000여명의 유동인구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여기에 홈플러스 방학점, 롯데 빅마켓 도봉점 등 다양한 생활편의 시설이 밀집해 있으며, 인근으로 도봉구청, 도봉 스마트워크센터, 서울북부보훈지청, 녹산교회 등이 등과 함께 주거 밀집지역으로 반경 2km내 12만여명의 배후수요로 고정 집객 효과를 기대해 볼 수 있다. 추가로 현재 개발 예정인 SK가스충전소 부지, 도봉소방학교 부지 개발 등 방학역 주변으로 다양한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방학역 모비우스 스퀘어’는 도봉구 방학동에 지하 5층~지상 10층 규모로 조성되며 오는 9월 철거 공사를 시작해 2020년 말 완공될 예정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남북경협 넘어 신동북아 경제지도] 日, 北과 교류 재개 조건은 ‘납치문제 해결’…北·美 대화 변수로

    [남북경협 넘어 신동북아 경제지도] 日, 北과 교류 재개 조건은 ‘납치문제 해결’…北·美 대화 변수로

    “저기 아래 보이는 니가타 항구에서 바로 13살밖에 안 된 요코타 메구미가 납치됐어요.” 지난 4일 일본 니가타현 니가타시 반다이지마 빌딩 13층 일본 동북아경제연구소(ERINA) 사무실 창문에서 바라본 니가타항은 을씨년스러웠다. 마침 한반도를 비껴간 7호 태풍 쁘라삐룬의 영향 탓에 비바람이 몰아쳤기 때문이었을까. ERINA 사무실에서 만난 북한전문가 미무라 미쓰히로 선임 연구위원은 첫 인사를 나누자마자 항구를 가리키며 일본 납치 문제의 상징인 메구미 사건을 대뜸 거론했다.니가타현은 해방 이후 북한과의 교류가 가장 활발했지만, 납치 문제가 얽혀 일본인과 재일조선인의 복잡미묘한 감정이 뒤섞인 지역이다. 만경봉 92호는 해방 이후 일본 니가타현과 북한 강원도 원산을 왕래하면서 재일조선인들의 북한 송금과 냉장고, 세탁기, 자전거 등 중고 물품 전달을 하는 최대 창구였다. 하지만 2006년 북한의 미사일 발사 이후 일본이 만경봉 92호의 입항을 금지했다. 북한과 일본의 경제협력도 점차 끊어졌다.만경봉 92호는 북한이 일본인 납치 목적으로 활용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니가타에 사는 일본인들의 납치 문제에 대한 공포감과 반감은 상상 외로 컸다. 미무라 연구위원은 “자기 아들, 딸이 납치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다들 공포에 떨어야 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북한이 왜 일본인을 납치했는지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일본인들의 반감과 공포감은 재일조선인들에 대한 차별로 이어졌다. 지난 4일 니가타시에서 만난 김종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니가타지부 위원장은 니가타 유일의 조총련계 조선학교 교장을 12년 동안 역임했다. 그는 “조선학교는 올해 3월에 중학교 3학년 마지막 학생이 졸업하면서 휴교 상태”라면서 “니가타 납치 문제의 화살이 조선학교 학생들에 대한 폭행과 위협으로 이어져 다들 일본학교로 떠났다”고 전했다.일본 정부는 납치 문제 해결이 동북아 경제협력, 작게는 북·일 교류 재개의 전제 조건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북한의 비핵화 프로세스 역시 북·일 교류 재개를 위한 중요 조건이지만, 납치 문제는 일본의 국민정서를 납득시켜야 하는 정치적 사안이다. 지난 2일 도쿄에서 만난 일반재단법인 국제경제교류재단 구사카 가즈마사 회장(전 경제산업성 관료)은 “납치 문제는 일본의 대북제재에 대한 압박 수단이 아니라, 인도주의 차원에서 국민을 지키는 중심 가치”라고 강조했다.그러나 납치 문제 해결은 쉽지 않은 난제다. 일본 정부가 인정하는 공식적인 납치 피해자는 17명. 북한은 2002년 북·일 평양선언을 계기로 이 가운데 5명을 일본에 돌려보냈다. 나머지 8명은 사망으로 집계했다. 그럼에도 일본이 석연치 않다며 재조사를 요구했으나 북한은 납치 문제가 해결됐다는 입장을 보였다. 2004년에는 메구미가 1994년 자살했다며 일본으로 유골을 보냈지만 DNA 검사 결과 가짜로 판명 났다. 이에 대해 일본의 주장일 뿐이라는 비난도 있을 만큼 논란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일본은 현재 ‘납치 피해자 전원 귀국’ 방침인 반면, 북한은 ‘납치 문제는 이미 해결’이라는 입장이다. 문제는 일본 정부는 물론 북한조차도 납치 피해자들의 정확한 현황을 모른다는 것이다. 조총련 니가타지부 김 위원장은 “일본이 주장하는 납치 피해자들 가운데 일반 행방불명자도 있을 수 있어 100% 해결은 어렵다”고 잘라 말했다. 이쥬인 아츠시 일본경제연구센터 수석연구원은 “아베 신조 총리가 전원 귀국 방침을 관철할지, 한 사람이라도 귀국하는 것을 우선할지는 어려운 판단”이라면서 “북한에 대한 금전적 지원 규모가 거액이 되면 여론의 환영 무드도 식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일본 정부는 북한에 대한 유엔 제재 등 강경압박 대응 방침을 고수해 왔다. 이 때문에 일본 기업들이 북한에 투자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최근 북·미 정상회담의 성공적 개최로 미국이 북한에 유화적 태도를 보이면서 일본 정부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미무라 연구위원은 “일본의 상사들은 미국과의 거래에서 커다란 이익이 있기 때문에, 다 버리고 북한과 거래하겠다는 회사는 없다”면서도 “북·미 관계가 좋아지면 일본도 북한과의 관계개선에 나설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동북아 경제협력 논의에서 일본이 소외되는 ‘재팬 패싱’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지난 5일 도쿄에서 만난 캐논글로벌전략연구소에 있는 외교정책연구소의 미야케 구니히코 대표(전 외무성 관료)는 “일본이 한국 전쟁의 당사자가 아니고 관여하지도 않았기에 미국, 중국, 한국 등과 입장 차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면서 “미국이 경제적 지원을 하지 않을 것이므로 동북아 경협에서 북한에 대한 일본의 지원을 위한 관계정상화는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아베 정권은 향후 납치 문제 해결을 전제 조건으로 2002년 북·일 평양선언에 기초해 북한과 국교정상화를 하겠다는 입장이다. 평양선언에 따르면, 북한과 일본은 양국이 재산청구권을 포기하고 국교 정상화 이후 다양한 형태의 경제협력을 실시한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북한은 과거사 보상을 위한 대일청구권으로 100억 달러 내지 300억 달러의 보상액을 요구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일본 공산당 도시오 우에키 홍보부장은 “동북아시아가 평화 무드로 가고 있는데 일본만 동떨어져 있는 상황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일본이 식민지 시대의 한반도 지배를 진짜 반성한다면 경제협력과 배상을 병행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글 사진 도쿄·니가타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포토] ‘시원한 몸매 뜨거운 현장’ Ms&Mr 선발대회

    [포토] ‘시원한 몸매 뜨거운 현장’ Ms&Mr 선발대회

    22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그랜드호텔에서 열린 해운대구 보디빌딩협회장배 Ms&Mr 선발대회에서 참가자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돌연 뛰어든 日무역…아버지의 모험이 한국 가는 운명의 시작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돌연 뛰어든 日무역…아버지의 모험이 한국 가는 운명의 시작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은 16살이던 1888년 일본으로 건너가 사업을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 토머스 행콕 베델(1849~1912)이 돌연 극동 무역업에 뛰어들면서 세 아들에게도 일을 맡기는데, 이는 나중에 베델이 한국을 찾아오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토머스 행콕은 15년 넘게 브리스톨의 맥주회사에서 사무직원으로 일하다가 1886년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일본 무역 일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의 나이 37세였다. 예나 지금이나 평범한 샐러리맨이 불혹(不惑)의 나이에 사업을 하겠다고 결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가 이를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동업자 퍼시 알프레드 니콜(1848~1899)의 지원이 컸다. 19세기까지 ‘대영제국’은 세계의 바다를 누비며 글로벌 무역 패권을 장악한 중심 국가였지만 상대적으로 일본과의 무역은 활발하지 않았다. 유럽인들이 한국과 일본을 지금도 ‘극동’(Far East)이라고 부르듯 당시 영국인들에게 일본은 ‘세상의 끝’이었다. 당시 니콜은 이미 일본에서 골동품 사업으로 상당한 부를 모은 때였다. 그는 영국과 거리가 멀어 경쟁자가 많지 않은 일본과의 무역을 ‘블루오션’(신성장 사업)으로 보고 사업을 키우고자 토머스 행콕에게 동업을 제안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토머스 행콕은 니콜과 함께 일본으로 가 효고현 고베에 ‘니콜 앤드 컴퍼니’라는 회사를 세워 일을 시작했다. 당시 고베는 일본이 외국인에게 사업을 허용한 거류 지역이었다. 2년간 일본에서 업무를 익힌 토머스 행콕은 1888년 영국으로 돌아가 런던 중심가에 ‘베델 앤드 니콜’을 세웠다. 니콜이 고베에서 ‘니콜 앤드 컴퍼니’를 통해 일본산 도자기 등을 보내면 토머스 행콕은 런던에서 ‘베델 앤드 니콜’을 통해 이를 되팔았다.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이들의 첫 번째 회사가 ‘니콜 앤드 베델’이 아닌 ‘니콜 앤드 컴퍼니’였다는 점이다. 회사 이름에 동업자인 토머스 행콕이 빠졌다는 것은 사업 초기 그의 기여도가 크지 않았음을 뜻한다. 아마도 니콜이 이 회사 설립 자금 대부분을 대고 토머스 행콕은 시쳇말로 ‘바지사장’ 역을 맡은 것 같다.그렇다면 ‘전주’(錢主)인 니콜은 왜 ‘사업 문외한’인 토머스 행콕과 손을 잡았을까. 두 사람의 동업은 추후 베델이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기에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지금껏 학계에서는 이에 대해 명확한 답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서울신문은 베델 취재 과정에서 이들이 동서지간이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니콜의 후손을 통해 토머스 행콕의 아내 마사 제인 홀름(1848~?)과 니콜의 아내 세라 홀름(1953~1898)이 자매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간 ‘P.A. 니콜’로만 알려졌던 그의 정확한 이름도 찾아냈다. 니콜은 동서인 토머스 행콕이 회계와 영업 일을 해 사업의 기본을 갖췄고 가족이어서 믿고 돈을 맡길 수 있다는 점을 높이 샀던 것 같다. 1909년 주한 영국총영사 아서 하이드 레이는 조선에서의 베델의 경력을 본국에 소개하기 위한 보고서에 니콜을 베델의 아저씨(uncle)라고 썼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이 표현을 후견인이나 보호자 정도로 생각했지만, 서울신문 취재로 이모부를 뜻하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베델의 손자 토머스 오언 베델(59)은 “주로 사무실에서만 일하던 증조 할아버지(토머스 행콕)가 왜 갑자기 안정적인 회사 생활을 접고 불확실성이 큰 사업에 뛰어들었는지 후손들도 늘 궁금하게 여겼다”며 “이제야 수수께끼가 풀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반적인 동업 관계가 그러하듯 이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불화가 생겼다. 결국 토머스 행콕은 런던에 ‘베델 앤드 니콜’을 설립한 지 3년 만인 1891년 이 회사 이름에서 ‘니콜’을 지우고 ‘베델 앤드 컴퍼니’로 개명했다. 니콜 역시 토머스 행콕과의 교류를 끊고 고베에서 혼자 ‘니콜 앤드 컴퍼니’를 운영했다. 동업이 끝난 것이다. 이후 토머스 행콕은 5년간 혼자 사업을 하다가 1896년 극동 무역을 하는 세 회사와 통합해 ‘프리스트·마리안스·베델·모스 앤드 컴퍼니’라는 긴 이름의 회사를 새로 차렸다. 두 번째 동업이었다. 대외적으로 하나의 회사지만 영업은 기존 네 곳 대표가 독립적으로 하는 방식이었다. 비슷한 일을 하는 회사를 묶어 구매력을 높이고 운송·물류비도 줄이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듯, 네 개의 무역상이 한데 모인 이 회사 역시 운영이 원활하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각자 이해관계가 부딪혀 ‘팀워크’가 깨졌다. 결국 이 회사는 통합 3년 만인 1899년 총회를 열어 기존 이사진을 교체했는데, 토머스 행콕도 이때 손을 뗐다. 두 번째 동업도 막을 내렸다. 이 회사는 지금도 ‘프리스트·마리안스 앤드 컴퍼니’라는 이름으로 남동부 항구도시 켄트에 터를 잡고 영업 중이다.베델은 아버지 토머스 행콕이 런던에 ‘베델 앤드 니콜’을 만든 1888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아버지와 이모부(니콜)가 함께 시작한 무역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자 모자란 일손을 돕기 위해서였다. 당시 베델은 16살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때였다. 서양인들이 우리보다 독립적이라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혼자서 일을 할 나이는 아니었다. 그는 고베에 있던 ‘니콜 앤드 컴퍼니’에 들어가 이모부에게 실무를 배웠다.토머스 행콕은 1896년 네 무역상을 통합한 회사를 차린 뒤로 줄곧 일본 지점을 맡아 일했다. 하지만 1899년 이들과의 동업이 깨지자 자신의 일본 사업을 도울 새 파트너가 필요했다. 그는 장남 베델이 적격이라고 생각했다. 일본에 와서 무역 일을 배운 지 10년이 넘어 자금과 능력은 충분했다. 아버지의 동업 실패가 베델에게 창업 기회를 준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같은 해 동생 허버트(1875~1939)와 런던에 무역회사 ‘베델 브러더스’를 세웠다. 이때 토머스 행콕이 50살, 베델이 27살이었다. ‘베델 브러더스’는 베델 형제 무역 사업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했다. 베델과 허버트는 일본에서 활동했고 런던 사무소는 주로 막내동생 아서 퍼시(1877~1947)가 지켰다. 세 아들이 협력해 사업을 순조롭게 진행하는 모습을 지켜본 토머스 행콕은 이들을 믿고 일선에서 물러나 부유한 은퇴 생활을 즐겼다. 이후 ‘베델 브러더스’는 처음 문을 연 런던 쇼디치 폴 스트리트 87·89번지에서 100년 가까이 영업하다가 1991년 영국 중부 리즈로 이전했다. 베델의 손녀 수전 제인 블랙(62)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최근 경영이 어려워져 폐업했다고 들었다. 할아버지(베델)의 유산이 이렇게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안타깝다”고 전했다. 베델 회사가 있던 건물은 지어진 지 100년이 넘어 ‘리스티드 빌딩’(등록문화재)에 올라 있다. 바로 옆 사무실인 91번지에서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는 영국인 피터 설링스는 “(베델 브러더스가 있던) 쇼디치 지역은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젊은 시절 극단을 운영했던 곳이어서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이곳에 베델과 같은 숨은 영웅의 이야기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고 감탄했다. 런던·브리스톨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이정수의 덕업일치] 빅뱅·블랙핑크 가는 구내식당 줄 서기도 ‘소확행’

    [이정수의 덕업일치] 빅뱅·블랙핑크 가는 구내식당 줄 서기도 ‘소확행’

    서울신문 창간 114주년, 한층 젊어진 지면 개편과 함께 ‘덕후’(마니아) 기자가 시작하는 ‘덕업일치’ 첫 회. 덕업일치는 관심사를 직업으로 삼게 됐다는 뜻의 신조어다. 남몰래 아이돌 전문가를 꿈꾸다 문화부에 갓 입성한 기자가 연예계를 동분서주하며 ‘성덕’(성공한 덕후)에 이르는 길을 밟아 갈 예정이다. 아이돌 팬이라면 그들이 땀 흘리던 연습실, 매일 오가는 일터가 가장 궁금한 것은 당연한 일. 케이팝 한류의 주역들인 아이돌 기획사들을 차례로 탐방하는 것으로 연재를 시작한다.첫 회에서 찾아간 곳은 1996년 설립된 국내 최고의 연예 기획사 중 한 곳인 YG엔터테인먼트다. 찜통더위가 이어진 지난 17일 한낮에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YG 본사를 찾았다. ‘뚜벅이’ 기자가 합정역에 내려 한강 방향으로 10분쯤 걷자 주택가 골목 사이로 YG 사옥이 모습을 드러냈다. 2010년 완공 당시부터 독특한 외관으로 화제를 불러모았던 건물이다. 방송 등에 꾸준히 소개된 곳이라 외관만큼은 내 집처럼 익숙했다. 사옥에 몇 걸음 더 다가가자 정문 맞은편 편의점 앞에 한눈에도 팬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서성이는 모습이 보였다. 조금 더 가까이 가 보니 여남은 명의 외국인. 그중 한 명에게 말을 걸었다. 중국 랴오닝성에서 친구와 함께 왔다는 시통허(19)양은 “6년째 빅뱅 지드래곤의 팬”이라고 밝혔다. 그는 “지드래곤이 군대에 가 있어 보지 못할 걸 알지만 그의 소속사인 이곳에 꼭 와보고 싶었다”며 “팬들 사이에서는 반드시 들러야 할 핫플레이스”라고 말했다. YG 사옥 방문은 두 번째로 한국에 왔다는 그가 한국을 찾은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외국 팬들이 서 있는 곳 뒤편 주택 담벼락엔 YG 소속 가수 이름, 팬의 이름, 하트 표시 등 낙서가 빼곡했다. 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으로 수년 동안 덧씌운 낙서로 더 쓸 공간을 찾기 힘들 정도였다. YG 소속 아이돌들이 회사에 올 때면 그 시간을 귀신같이 아는 팬 수십명이 북적이는 일도 많다고 한다. 회사 앞에 진을 치고 있는 팬들 때문인지 사옥 현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경비실에 소속과 이름, 연락처, 방문 목적, 서명 등을 적어서 내고 YG 로고가 새겨진 출입증을 받았다. 미리 연락한 회사 관계자가 내려온 뒤에야 사옥 안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YG 사옥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오래전부터 합정동 맛집으로 유명세를 탄 구내식당일 것이다. 최근 JYP엔터테인먼트가 강동구 성내동 신사옥으로 이전하면서 훨씬 큰 규모로 구내식당을 마련하긴 했지만 지난 8년간 가수 기획사 유일의 구내식당으로 명성을 떨쳐 온 곳이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 YG에 왔는데 지하 1층 구내식당 밥맛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침 초복인 이날 메뉴는 삼계탕이었고 낮 12시부터 2시까지인 점심시간 내내 식당이 붐볐다. 한쪽 까만 벽면 전체에 물이 흘러내리는 게 인상적인 아늑하고 세련된 인테리어의 식당은 30여석의 크지 않은 규모라 평소에도 줄을 서서 먹는 때가 많다. 지하 1층에는 아이돌들이 땀 흘리며 춤을 추는 공간인 연습실이 두 곳 있다. 지난달 새 앨범을 내고 왕성히 활동 중인 블랙핑크가 콘서트 준비까지 하고 있어 한 곳은 요즘 거의 블랙핑크 전용 연습실로 쓰이고 있다. 연습실 앞 지하로 들어가는 좁은 복도에 검은색 여행가방 20여개가 일렬로 늘어서 있는 게 독특했다. 소속 아티스트들의 의상을 담아 나르는 가방이라고 한다. 회의실 세 개가 나란히 있는 6층에는 YG 대표 아티스트들의 대형 사진이 차례로 전시돼 있었다. 초창기의 지누션, 원타임부터 위너, 아이콘에 이르는 소속 가수뿐 아니라 배우 강동원, 코미디언 유병재 등의 사진이 보였다. 복도 끝 회의실에 들어가 보니 고급스러운 대리석 인테리어가 양현석 대표의 취향을 반영하는 듯했다. 정남향 통유리 너머로는 한강 조망이 넓게 펼쳐졌다. 저만치에 여의도 국회의사당도 내려다보였다. 꼭대기층인 7층에는 양 대표의 집무실이 있고, 나머지 층은 대부분 사무실로 쓰인다. 녹음실은 프로듀서 등 소수의 관계자에게만 접근이 허용된다고 했다.사옥 바로 옆에서는 내년 이맘때쯤 완공될 예정인 신사옥 공사가 한창이었다. 신사옥은 대지 3145㎡에 연면적 1만 8905㎡의 지하 5층, 지상 7층 빌딩으로 지어진다. 공사 금액만 약 458억원인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양 대표는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신사옥 모형과 조감도를 공개하기도 했다. 본사 직원만 400명가량인 YG는 사옥이 좁아 인근 건물 등에 일부 세 들어 살고 있다. 신사옥이 완공되면 16개에 이르는 계열사 일부도 입주할 전망이다. tintin@seoul.co.kr
  • ‘낙후’ 대전역 주변 본격 개발

    대전의 대표적인 낙후 지역인 대전역 주변 개발이 본격화된다. 코레일은 18일 옛 충남도청 대회의실에서 대전시와 동구, 중구 및 지역상인회 등과 대전역세권 개발을 위한 상생협력 협약을 체결했다. 참석자들은 대전역세권 복합2구역 개발을 통해 원도심 및 지역상권 활성화 등 균형발전에 협력하고 유기적 협조체계를 구축하기로 했다. 대전시는 대전역 인근 정동·소제동 일대를 개발하는 대전역세권 개발사업 부지를 1~3구역으로 나눠 진행할 계획인데 코레일 부지가 포함된 2구역을 우선사업대상지로 선정했다. 복합2구역은 사업비가 총 1조원에 달하는 대규모 개발사업이다. 상업부지 3만 2444㎡ 중 코레일 부지가 86%(2만 7740㎡)를 차지하고 나머지도 국유지여서 사업 추진에 탄력이 기대된다. 상업부지에는 지하 5층, 지상 53층 규모의 랜드마크 빌딩으로 판매·업무·문화 등 도심복합시설이 조성돼 생활권 중심지로 재탄생하게 된다. 특히 대전역에는 오는 2021년 택시와 시내버스, 세종∼대전 간 광역간선급행버스(BRT) 승강장이 포함된 복합 환승센터가 들어선다. KTX나 무궁화호 등 철도 및 지하철과 연계 환승이 가능해져 원도심 활성화를 위한 거점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코레일은 대전역세권 재정비계획에 대한 협의를 조속히 마친 뒤 연말까지 사업자를 선정할 계획이다. 대전시는 상생협력계획 총괄 및 민자 유치를 지원하고 동구·중구는 판매시설 개설과 등록 등 행정절차를 뒷받침할 계획이다. 오영식 코레일 사장은 “대전역은 관문이자 대전발전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상징적인 곳이지만 기반시설과 도시환경이 열악해 낙후됐다”면서 “지자체, 지역상인과의 협력을 통해 지역의 랜드마크이자 균형발전의 모범사례가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대전역세권 개발사업은 2008년부터 추진됐지만 참여기업이 없어 무산됐고, 2016년 코레일도 복합2구역에 대한 민자유치에 실패했다. 하지만 지자체와 상인들의 참여로 걸림돌이 제거되면서 사업 추진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대전 박승기 기자 skpark@seoul.co.kr
  • [4차 산업혁명 현장을 가다] 스마트폰페이 편의점 ‘로손’

    [4차 산업혁명 현장을 가다] 스마트폰페이 편의점 ‘로손’

    도쿄 내 3개 점포서 시범 운영 구인난 해결하고 비용 절감도 “완전 무인화 아닌 계산만 대체”지난달 28일 오후 3시쯤 도쿄 시나가와구 오사키 지역의 초대형 빌딩 게이트시티오사키. 일본의 3대 편의점 체인인 로손의 ‘스마트폰페이’ 매장이 이 건물 3층에 마련돼 있다. 로손은 올 4월부터 이곳을 포함한 도쿄 내 3개 점포에서 스마트폰페이 서비스를 시범적으로 운용하고 있다. 미국, 중국 등에는 있었지만 일본에는 처음인 이 서비스는 손님들이 산 물건 값을 계산대에서 치르지 않고 스마트폰만으로 모든 지불 절차를 마칠 수 있는 체계다. 편의점에 온 손님들은 스마트폰을 꺼내 그 안에 깔려 있는 애플리케이션(앱)을 실행시켰다. 그리고 나서 빵, 과자, 껌, 사탕, 생수, 콜라 등 구매 상품을 진열대에서 꺼내 든 뒤 스마트폰 카메라를 포장 겉면에 인쇄돼 있는 바코드에 갖다 댔다. 스마트폰 스크린에는 구매 상품들의 가격이 표시되고, 손님들은 출구에 설치된 전용 리더기에서 스마트폰으로 결제했다. 손님들이 사전에 지정한 신용카드에서 실제 지불 처리가 이뤄지는 방식이다. 이 점포는 스마트폰 이용이 낯선 손님들을 위해 일반 계산대도 같이 운용하고 있다. 그쪽에 길게 줄 선 사람들보다 스마트폰페이를 이용하는 쪽이 한결 빠르고 간편하게 계산을 마치는 걸 볼 수 있었다. 이 건물에서 일하는 30대 여성은 “스마트폰페이의 사용법이 복잡한 것 같아서 주저하다 용기를 내 이용해 봤는데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며 “계산대에 줄 서 있는 사람들보다 다만 1~2분이라도 빠르게 일을 마치고 사무실로 복귀할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이 서비스의 장점은 우선 손님들의 편의성이다. 로손이 사원들만을 대상으로 실험을 한 결과, 매장에 들어와 물건을 사서 나가기까지 전체 시간이 기존 시스템에 비해 최대 3분 정도 단축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점원 업무의 4분의1에 해당하는 계산 과정을 없앰으로써 일손 부족에 대응하려는 목적도 크다. ‘스마트폰 1대=계산대 1대’의 개념을 통해 계산기계와 계산대 설치공간 및 운영·관리비를 절감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일본의 편의점 업계는 인력 부족으로 인건비는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데, 시장포화 상태에서 점포 간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현재 일본 전역의 편의점은 약 6만개로 포화 상태에 다다른 지 오래인 데도, 신규 출점은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 보니 세븐일레븐, 패밀리마트, 로손을 비롯한 대형 7개 체인의 점포당 손님 수는 계속 줄어들고 있다. 특히 편의점의 철칙인 ‘24시간 영업’을 지키기 위한 심야·새벽 시간대 종업원 확보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로손도 일손 부족으로 24시간 영업을 포기한 점포들에서 상품재고 관리 차질이나 급격한 매출 하락 등 부작용이 나타나 비상이 걸린 상태다. 로손은 오는 9월부터 전국 1만 4000개 매장 중에서 점주가 희망하는 곳에 한해 스마트폰페이 시스템의 보급을 본격화할 계획이다. 로손 홍보 담당 리밍은 “편의점의 완전 무인화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고 계산만 무인으로 해결하게 될 것”이라면서 “술·담배를 팔 때 성인 인증을 거쳐야 하는 편의점 특성도 있지만, 손님들의 문의나 불편에 응대할 인력은 필수적으로 있어야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리밍은 “대도시로의 인구 집중이 계속되다 보니 소도시나 지방촌락은 슈퍼마켓, 서점, 약국 등이 쇠락하면서 주민들이 생활필수품을 구입하는 데조차 애를 먹고 있다”며 “다양한 물건을 판매하는 편의점이 대안이 될 수밖에 없는데, 이를 위한 인력 부족 문제는 결국 스마트폰 앱을 이용한 무인 결제 시스템으로 극복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고 말했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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