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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속보] 방용훈 코리아나호텔 사장 69세로 별세

    [속보] 방용훈 코리아나호텔 사장 69세로 별세

    방용훈 코리아나호텔 대표이사 사장이 별세했다. 69세. 조선일보사가 자사 직원들에게 보낸 문자에 따르면 방용훈 대표이사는 18일 오전 8시 18분 사망했다. 빈소는 서울 신촌세브란스 병원에 마련됐고, 조문은 오후 3시 30분부터 가능하다. 발인은 오는 20일이다. 방용훈 사장은 고 방일영 조선일보 회장의 둘째 아들이자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의 동생이다. 코리아나 호텔 사장이기도 하면서 조선일보의 4대 주주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그날 광주 일깨운 확성기… 전옥주씨 별세

    그날 광주 일깨운 확성기… 전옥주씨 별세

    “광주 시민 여러분, 지금 우리 학생·시민들이 계엄군에 맞아 죽어 가고 있습니다. 즉시 도청 앞으로 모여 싸웁시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애절한 목소리로 광주 시민의 참여를 호소하며 거리방송에 나섰던 전옥주(본명 전춘심)씨가 지난 16일 별세했다. 72세. 전남 보성 출신인 전씨는 서울의 한 대학교에서 고전무용을 전공한 뒤 마산에 무용 학원을 차릴 예정이었다. 그는 1980년 5월 19일 심부름차 서울의 막내 이모 집에 갔다가 광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5·18 민주화운동을 마주했다. 그는 항쟁 기간 차량에 탑승해 메가폰 등으로 가두방송을 하며 헌혈과 항쟁 동참을 촉구했다. 계엄군을 향해서는 “당신들은 피도 눈물도 없느냐”며 “이 나라가 누구의 나라냐”고 꼬집었다. 전씨는 최후 진압 작전 직후 간첩으로 몰려 계엄군에게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포고령 위반과 소요 사태 등의 죄목으로 15년 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하다가 1981년 4월 사면 조치로 풀려났다. 전씨의 사망 원인도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지병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빈소는 경기 시흥시 시화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전씨는 19일 발인식을 마치고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될 예정이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술 한잔 올리려”… 文대통령, 백기완 선생 조문

    “술 한잔 올리려”… 文대통령, 백기완 선생 조문

    “여러 번 뵙기도 했고, 대화도 꽤 나누었고, 집회 현장에 같이 있기도 하고 그랬습니다.”(문재인 대통령) “살아생전에 하신 말씀이 회담, 해방, 통일 그리고 세월호 가족들… 생전에 뵈었으면 더 좋은 말씀을 해 주셨을 텐데….”(백기완 선생의 장남 백일씨) “이제는 후배들한테 맡기고 훨훨 자유롭게 날아가셨으면 좋겠습니다.”(문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은 17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빈소를 찾아 “술 한잔 올리고 싶다”며 명복을 빌었다. 문 대통령이 빈소를 찾은 것은 2019년 1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복동 할머니 이후 2년 만이다. 고인의 장녀인 백원담 성공회대 교수가 “아버님이 세월호 가족들을 가장 가슴 아파하셨는데, 구조 실패에 대한 해경 지도부의 책임이 무죄가 돼 많이 안타까워하셨다”고 말하자 문 대통령은 “유족들이 원하는 방향대로 진상 규명이 잘 안 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답했다. 유족들은 고인이 문 대통령에게 통일에 대해 당부하는 메시지가 담긴 영상을 전했다. 고인은 “다가서는 태도, 방법 다 환영하고, 생각대로 잘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한마디 해 주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민중들이 주도했던 한반도 평화운동의 맥락 위에 섰다는 깨우침을 가지시길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유족들은 고인이 문 대통령에게 남긴 하얀 손수건과 책도 전달했다. 백 교수는 “아버님이 문재인 정부의 평화통일 노력에 찬사를 보내면서 통일열차가 만들어지면 이 손수건을 쥐고 고향(황해도)에 가고 싶다고 전달해 드리라고 하셨다”고 설명했다. 양기환 장례위원회 대변인이 “선생님의 마지막 글이 ‘노나메기 세상이었지만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올바로 모두가 잘사는 세상’이고, 특별히 관심을 가지신 것이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김진숙 힘내라’였다”며 “각별히 관심을 가져 달라”고 말하자 문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 대통령의 조문은 이례적이다. 2018년 1월 밀양 화재 피해자 합동분향소와 2019년 12월 소방헬기 추락 사고 합동영결식을 포함해도 네 차례뿐이다. 고인에 대한 각별한 마음을 직접 전하고 싶어 했다는 후문이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文대통령, 백기완 선생 빈소 조문

    文대통령, 백기완 선생 빈소 조문

    문재인 대통령이 17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빈소에서 조문을 마친 뒤 나오고 있다. 문 대통령은 영정 앞에 헌화하고 예를 올린 뒤 “술 한 잔 올리고 싶다”며 술잔을 올렸다.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 ‘5·18 가두방송’ 전옥주씨 별세…영화 ‘화려한 휴가’ 이요원 모티브

    ‘5·18 가두방송’ 전옥주씨 별세…영화 ‘화려한 휴가’ 이요원 모티브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의 참여를 독려하며 거리 방송에 나섰던 전옥주(본명 전춘심)씨가 지난 16일 별세했다. 72세. 1949년 12월 전남 보성에서 태어난 전옥주씨는 서울에 있는 한 대학교에서 고전무용을 전공한 뒤 마산에 무용학원을 차리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평범한 30대 여성이었던 전옥주씨는 1980년 5월 19일 심부름으로 서울에 있는 막내 이모 집에 갔다가 광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5·18 민주화운동을 마주했다. 그는 항쟁 기간 차량에 탑승해 확성기나 메가폰 등으로 가두방송을 하며 헌혈과 항쟁 동참을 촉구했다. 당시 전옥주씨는 “광주 시민 여러분, 지금 우리 학생·시민들이 계엄군에 맞아 죽어가고 있습니다. 즉시 도청 앞으로 모여 계엄군에 대항해 싸웁시다” 등을 호소하며 시민들의 참여를 독려했다. 또 계엄군을 향해 “계엄군 아저씨 당신들은 피도 눈물도 없느냐”며 “이 나라가 누구의 나라냐”고 꼬집었다.전옥주씨의 당시 행적은 5·18을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배우 이요원씨가 맡은 ‘박신애’ 역에 반영됐다. 다만 영화의 장면과 달리 5월 27일 새벽 계엄군 최후진압 작전을 앞둔 시민군의 ‘마지막 방송’은 당시 여대생이었던 박영순씨가 전남도청 1층 방송실에서 한 것이다. 전옥주씨는 최후진압 작전 직후 ‘말솜씨가 좋다’는 이유로 간첩으로 몰려 계엄군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후 포고령 위반과 소요사태 등의 죄목으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하다 1981년 4월 사면 조치로 풀려났다. 약 1년 만에 풀려났지만 전옥주씨는 평생 고문 후유증과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괴로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고인의 사망 원인도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지병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따. 고인의 빈소는 가족이 있는 경기도 시흥시 시화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당초 18일로 알려졌던 발인식은 19일로 변경됐다. 발인식을 마친 고인은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국립 5·18 민주묘지에 안장될 예정이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故 백기완 선생이 文대통령에게 전하려던 마지막 메시지는?

    故 백기완 선생이 文대통령에게 전하려던 마지막 메시지는?

    장례위측 “중대재해법, 김진숙 관심 가져달라”… 文대통령 ‘끄덕’ 김복동 할머니 이후 2년만… 김종필, 노회찬, 박원순 등 조문 안해 “아버님하고는 지난 세월 동안 여러 번 뵙기도 했고, 대화도 꽤 나누었고, 집회 현장에 같이 있기도 하고 그랬었습니다(문재인 대통령).” “살아생전에 하신 말씀이 회담, 해방·통일, 그리고 세월호 가족들을 대상으로… 살아생전에 (대통령을) 뵈었으면 더 좋은 말씀 해 주셨을 텐데…(고 백기완 선생의 장남 백일씨).” “이제는 진짜 후배들한테 맡기고 훨훨 그렇게 자유롭게 날아가셨으면 좋겠습니다(문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은 17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빈소를 조문했다. 문 대통령이 직접 빈소를 찾은 것은 2019년 1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복동 할머니를 조문한 이후 2년 만이다. 빈소를 찾은 문 대통령은 고인의 영전에 술잔을 올렸다. 고인의 장녀인 백원담 성공회대 교수가 “세월호 분들, 아버님이 가장 가슴 아파하셨는데, 구조 실패에 대한 해경 지도부의 구조 책임이 1심에서 무죄가 되고 많이 안타까워하셨다”고 말하자, 문 대통령은 “정부는 할 수 있는 조치들은 다 하고 있는데, 유족들이 원하는 방향대로 진상 규명이 속 시원하게 아직 잘 안 되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고 답했다. 유족들은 고인이 입원하기 전에 문 대통령에게 당부하고 싶다는 취지로 남긴 영상메시지를 전했다. 영상 속에서 고인은 “다가서는 태도, 방법 이런 것 다 환영하고 싶습니다. 생각대로 잘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한마디 해 주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한반도 문제의 평화로 가기 위한 노력이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역사에 주체적인 줄기였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바로 이 땅의 민중들이 주도했던 한반도 평화 운동의 그 맥락 위에 섰다는 깨우침을 가지시길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백원담 교수는 문 대통령에게 고인이 남긴 선물의 의미를 설명하며 하얀색 손수건과 책 1권을 전달했다. 백 교수는 “아버님이 문재인 정부의 평화·통일 노력에 굉장히 찬사를 보내시면서 통일열차가 만들어지면 꼭 이 하얀 손수건을 쥐고, 고향 황해도에 꼭 가고 싶다고 이걸 전달해 드리라고 하셨다”면서 “이건 마지막에 쓰신 책으로, 아버님의 모든 사상이 여기에 담겨 있다”고 했다. 자리를 함께한 양기환 장례위원회 대변인은 고인이 마지막까지 중대재해기업처벌법과 해고노동자인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에 관심을 가졌다고 강조했다. 양 대변인은 “선생님께서 병원에서 말씀을 못하시고 대화를 하실 때 글로 쓰셨는데 마지막 글이 ‘노나메기 세상이었지만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올바로 모두가 잘사는 세상’이었고, 특별히 관심을 가지신 것이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그리고 ‘김진숙 힘내라’였다”고 말했다. 이어 “각별히 선생님께서 마지막 뜻이기도 하시니까 말씀드린다. 각별히 관심을 가져 주시기 바란다”고 말하자 문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 대통령의 조문은 사뭇 이례적이다. 현 정부 들어 김종필 전 총리(2018년 6월)와 노회찬 의원(2018년 7월), 이희호 여사(2019년 6월)에 이어 지난해 7월 박원순 서울시장과 백선엽 장군 별세 당시에도 일각에서는 직접 조문을 할 것이란 관측이 나오기도 했지만, 비서실장 등이 대신하고 조화로 갈음했다. 그만큼 문 대통령이 고인에 대한 각별한 마음을 전하고 싶어했다는 후문이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서울포토] ‘고 백기완 소장’이 문 대통령에 남긴 영상메시지

    [서울포토] ‘고 백기완 소장’이 문 대통령에 남긴 영상메시지

    문재인 대통령이 1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故)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빈소를 조문한 뒤 생전 고인이 문 대통령에게 남긴 영상메시지를 보고 있다.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 문 대통령, 고 백기완 선생 빈소 찾아 조문

    문 대통령, 고 백기완 선생 빈소 찾아 조문

    문재인 대통령이 17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빈소를 조문했다. 문 대통령은 빈소에서 고인을 추모한 뒤 유족들을 만나 위로했다. 문 대통령이 직접 빈소를 찾은 것은 2019년 1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고 김복동 할머니를 조문한 이후 2년 만이다.2019년 6월에는 북유럽 3개국 순방 도중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고 이희호 여사가 별세하자, 귀국 직후 동교동 사저를 방문해 유족들을 위로한 바 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남김없이’… 하얀 리본 품은 추모 물결

    ‘남김없이’… 하얀 리본 품은 추모 물결

    권영길 전 대표 “혁명 꿈꾼 로맨티스트”홍세화 “사랑·명예·이름도 없이 가셨다”가수 전인권·김동명 위원장 등 빈소 찾아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빈소에는 부음 이튿날인 16일에도 노동·사회·정치 등 각계 인사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빈소를 찾은 시민들도 전날보다 더 늘었다. 3층 장례식장 입구는 조문객들이 하얀 리본 모양의 종이에 쓴 추모 문구로 가득했다.지난 15일 고인이 폐렴으로 별세한 뒤 50여개 시민단체가 주축이 돼 구성된 ‘노나메기 세상 백기완 선생 사회장 장례위원회’는 “18일까지 일반 시민에게도 빈소를 개방하고 공식 조문을 받는다”며 “부산, 대구, 대전, 광주 등 전국 13곳에 분향소를 차렸다”고 밝혔다. 장례위원회는 장례 마지막날인 19일 오전 8시 발인 뒤 오전 9시 대학로 거리에서 노제를 하고, 오전 11시 서울광장에서 영결식을 열기로 했다. 이후 장지인 경기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으로 이동해 오후 2시 하관식을 한다.장례식장을 찾은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는 “백 소장은 혁명을 꿈꿨던 로맨티스트였다”면서 “통일운동가로 단정 짓기 힘든 사람”이라고 회고했다. 두 사람은 민주화운동 동지로서 오랜 세월 함께했다. 특히 권 의원은 1997년, 2002년,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 후보로 출마했고, 백 소장은 1987년과 1992년 대선에서 민중 후보로 출마했다. 그는 “고인은 투병 중에도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청와대 앞 기자회견에 참여했다”며 “코로나로 힘들어하는 해고 노동자들의 편에 섰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홍세화 장발장은행 대표는 “우리 시대의 큰 별이 가셨다”며 “고인이 지은 노랫말대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가셨다”고 애도했다.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도 “살아 계실 때 너무 힘들게 애 많이 쓰셨는데 이제 뒷사람들이 이어서 잘할 테니 하늘에서 편히 쉬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가수 전인권씨는 고인의 딸 백원담 성공회대 중어중문학과 교수와 인사를 나눴다. 그는 “생전에 고인께서 공연도 자주 보러 오셨다”며 “어제 백 교수에게 전화해 ‘건강을 꼭 챙겨야 고인도 마음이 편하시다’고 당부했다”고 말했다. 이 밖에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 임순례 영화감독, 정현백 전 여성가족부 장관, 김두관·양이원영·김영주·이학영 더불어민주당 의원, 정근식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 등도 차례로 빈소를 찾았다. 시민들도 옷에 ‘임을 위한 행진곡’ 가사에서 따온 ‘남김없이’라고 쓰인 하얀 리본을 달고 빈소로 들어섰다. 한편 이날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은 전두환 정권 당시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규탄대회를 주도하다 고인이 구속되자 미 하원의원들이 주미 한국대사와 주한 미국대사에게 보낸 외교전문 2건을 공개했다. 최영권 기자 story@seoul.co.kr
  • 이낙연, 백기완 조문 “선생님의 꿈과 투혼. 잊지 않겠다”

    이낙연, 백기완 조문 “선생님의 꿈과 투혼. 잊지 않겠다”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일생을 헌신해온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이 지난 15일 향년 89세로 영면한 가운데, 빈소 마련 이틀째인 16일 오후에도 시민·정치인 등의 조문이 계속됐다.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대표는 이날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故)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빈소를 조문했다. 이 대표는 조문을 마친 뒤 페이스북에 “고난을 겪으시면서도 선생께서는 한 번도 굽히지 않고 통일, 민주, 정의, 복지를 줄기차게 외치셨다”고 애도했다. 그는 “그러면서도 선생께서는 달동네, 새내기, 동아리 같은 아름다운 우리 말을 새로 만드셨다. 외국 민주화 시위에서도 불린 ‘임을 위한 행진곡’을 인류에게 선물하셨다”며 “선생께서 저희 세대에 함께해 주셔서 감사하다. 선생님의 꿈과 투혼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백 소장은 지난 15일 오전 서울대병원에 입원 중 별세했다. 그는 지난해 1월 폐렴 증상으로 입원해 투병 생활을 이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백 소장은 1932년 황해도 은율군 동부리 출생으로, 1950년대부터 농민과 빈민운동 등 한국 사회운동 전반에 적극 참여했다. 1960년대에는 한일협정 반대 투쟁을 계기로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백 소장은 1967년 통일문제연구소의 모태인 ‘백범사상연구소’를 세웠으며, 3선 개헌 반대와 유신 철폐 등 활동에도 참여했다. 1974년에는 유신헌법 철폐 100만인 서명 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옥살이를 했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독자 민중후보로 출마했지만 김영삼·김대중의 후보 단일화를 호소하며 사퇴했고, 이후 1992년 독자 민중후보로 다시 대선에 출마했다. 대선에서 낙선한 백 소장은 이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뒤, 자신이 설립한 통일문제연구소에서 통일운동과 노동운동 등을 지원했다. 백 소장은 창작활동에도 힘을 썼는데, ‘장산곶매 이야기’와 ‘부심이의 엄마생각’ 등 소설과 수필집을 펴내기도 했다. 한편 백 소장의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장례는 ‘사회장’으로 엄수된다. 발인은 19일 오전 8시다. 김채현 기자 chkim@seoul.co.kr
  • [포토] 안철수 대표, 고 백기완 선생 빈소 조문

    [포토] 안철수 대표, 고 백기완 선생 빈소 조문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와 의원들이 1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故)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2021.02.16 연합뉴스
  • “1987년, 단일화 간절함에 부르르” …‘나와 백기완’ 정치인들의 추모법

    “1987년, 단일화 간절함에 부르르” …‘나와 백기완’ 정치인들의 추모법

    민중운동과 통일운동의 살아있는 역사였던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이 15일 별세한 후 역사의 일부를 함께한 정치인들의 추모가 쏟아지고 있다. 그들의 사연 있는 추모에는 과거의 백 소장이 뚜렷했지만 마지막 백 소장의 모습은 희미했다. 백 소장이 1980~90년대 반독재 민주화 투쟁과 통일운동의 전면에 서고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요구로 대선후보로도 나섰기 때문에 당시 학생운동을 이끌던 정치인들의 추모에는 그때의 이야기가 주로 담겼다.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민주당 한 의원은 16일 통화에서 “선생님은 대학을 돌아다니시면서 대중강연을 정말 많이하셨다”며 “그때 강연을 듣고 나면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대학생으로서 정의로운 길을 어떻게 갈 것인지 한 줄기 빛을 보는 심정이었다. 그때의 경험이 있던 많은 의원들이 추모를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이인영 “1987년 전대협 출범 때 강연 잊지 못해” 실제 86그룹의 리더이자 1기 전대협 초대 의장을 지낸 이인영 통일부 장관은 전날 빈소를 직접 조문한 뒤 “1987년 전대협이 출범할 때 그 자리에 오셔서 강연해 주셨는데, 그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게 들린다”며 “선생님 영전에 마음속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러드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장관은 “장산곶매로 부활하셔서 평화와 통일로 가는 우리 겨레의 앞날에 길잡이가 되어주셨으면 좋겠다”고 추모했다.백 소장은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이후 열린 13대 대통령 선거에 학생·노동자·민중의 요구를 받아 독자 민중후보로 출마한 후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단일화를 호소하며 사퇴했다. ●‘···옥색치마 휘날리며’ 읽고 편지 부친 송영길 고등학교 3학년 때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라는 책을 읽고 편지를 백 소장께 부쳤다는 송영길 의원은 “1987년 겨울, 대학로에서 뵈었던 선생님의 모습은 35년의 시간을 훌쩍 건넌 지금도 여전히 생생하다. 대통령 직선제를 되찾은 후 맞는 첫 선거에서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선생님은 양김의 단일화를 목이 쉬도록 주장하셨다”며 “노여움과 간절함, 절박감에 부르르 떨리던 사자후를 기억한다. 그러다 목이 메이면 한동안 침묵으로 청중들의 소름을 돋게하던 그 절망스런 표정을…. 저는 잊을 수 없다”고 적었다. 김원이 의원도 1987년 대학교 1학년 시절 백 소장을 댁에서 직접 만난 이야기를 꺼내며 “1987년 대통령 선거. 열정과 건강한 몸 하나만으로 백기완 선생님을 도와 열심히 선거운동을 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결국 불출마를 선언하셨지만...”이라며 고인을 기렸다.백 소장은 1992년 14대 대통령 선거에도 민중후보로 추대된 바 있다. 1991년 고려대 총학생회장 지낸 허영 의원은 “온몸으로 민중해방의 길을 걸어오셨다”며 “제가 뽑은 제 생애 첫 대통령이셨다”고 했다. 1994년 성균관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박용진 의원은 “오늘 아침 그분의 선거운동원으로 뛰었던 92년 대선의 겨울과 노동자 민중의 정치적 각성을 호소하던 명연설들의 장면이 떠올랐다”며 고인과 함께 찍은 사진을 올렸다. ●조희연 “늘 야단 맞을까봐 조마조마” 86그룹의 선배 세대인 서울대 77학번인 유기홍 의원은 “백기완 선생을 처음 본 건 1978년 4월 성공회 서울성당에서”라면서 “‘제1회 민족문학의 밤’ 행사에서 시를 힘차게 낭송하던 청년 백기완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후 제가 의장을 맡았던 민청련, 한청협에서 지도위원을 역임하는 등 함께 활동했다”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조희연 서울교육감은 “저는 백 선생님과 대화를 할 때면, 언제나 ‘야단 맞을까봐’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며 “왜냐하면 우리말을 제대로 쓸 줄 모르고 미국말을 한국말처럼 사용한다고 매번 주의를 받고 때로는 야단을 맞았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그러면서 “핸드폰이라는 말이 나오면 왜 손전화라고 하지 않느냐고 야단치시고, ‘화이팅’ 하면 ‘아자아자’ 또는 ‘지화자’라고 말하라 야단치셨다”고 설명했다. 백 소장은 1986년 ‘권인숙 부천 성고문 진상 폭로 대회’를 주도한 혐의로도 체포된 바 있다. 당사자인 권인숙 의원은 “부천서 성고문 사건규탄대회를 여시려다 감옥에 갇히시기도 했다”며 “80년대 말 몇 번 뵙고 제 결혼식에도 오셨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가깝게 안부를 묻지 못하고 지냈다”고 고인과의 인연을 꺼내놨다. 그러면서 그는 “제가 경험한 사람 중 가장 특별한 연설능력을 가지신 분이셨다”며 “논리력, 선동력, 이야기하듯 엮어내는 구수한 문장력과 멋진 목소리가 엄청난 조화를 이루었고 87년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나왔을 때 많은 지지자와 함성을 모으셨다”고 고인을 추모했다. ●권영길 “백기완은 혁명을 꿈꾸는 로맨티스트”1997년 2002년 2007년 진보후보로 대선에 출마하며 백 소장의 뒤를 이은 민주노동당 권영길 전 대표는 “저는 백기완 선생님을 혁명을 꿈꾸는 로맨티스트라고 늘 얘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권 전 대표는 이날 라디오에서 “선생님은 자본주의의 지배로 소외되고 탄압받고 하는 민중들을 고통해서 해방시켜야 한다는 큰 사상을 갖고 있고 그것을 몸으로 거리에서 실천해온 분”이라며 “그래서 단순히 민주화 운동가다. 단순한 통일운동가라고 하는 건 백기완 선생님에게 너무 폭 좁은 그런 예우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백 소장의 별세한 후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주목한 추모가 계속되자 마지막까지 진보운동을 함께한 권 전 대표가 이렇게 말한 것이다. 권 전 대표는 “이제 길거리로 쫓겨나서 생존권 투쟁하고 있는 해고노동자들을 누구에게 기댈 것인가.. 이런 걱정이 먼저 앞선다”며 “노동자, 농민, 힘없는 사람들의 버팀목인 백 선생님께서 가셨으니 이걸 어떻게 하느냐는 슬픔과 걱정이 태산같이 밀려온다”고도 했다.정의당 의원들은 진보정치의 맥락을 담아 고인을 추모했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은 “역사가 곧 자기의 거울이라며 빗으로 머리를 빗는 것조차 삼갔던 꼿꼿한 혁명가의 의기를 기억한다”며 “수많은 진보 정치인, 운동가, 지식인들이 선생의 둥지에서 태어나 진보정당의 초석이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 민초들이 생존을 다투는 현장에는 늘 선생님이 계셨다”며 “백기완 선생님은 민중들의 광장을 지키는 하얀 수호신이셨다”고 덧붙였다. 이은주 의원은 “전설 속의 선생님이 내 삶 속으로 들어오신 건, 내가 지하철노동자가 되었을 때부터였다”며 “내가 나갔던 모든 투쟁의 현장에 검은 두루마기, 흰 민복의 회오리 머리칼을 휘날리며 선생님은 항상 그곳에 계셨다. 언제까지나 늘 그곳에 계실 거라 생각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진보정치 3세대 장혜영, 다시 읊는 ‘묏비나리’ 진보정치 3세대로 불리는 장혜영 의원은 20년 전 오이도역에서 장애인 리프트가 추락한 후 장애인들이 벌인 이동권 투쟁을 백 소장의 ‘묏비나리’ 시에 비유하며 고인을 추모했다. 그는 “맨 첫발. 딱 한발 떼기에 목숨을 걸어라. ‘임을 위한 행진곡’의 모태가 되는 선생의 시, 묏비나리의 첫 두 줄”이라며 “늘 삶의 모순을 드러내는 싸움의 현장에 계시던 백기완 선생을 다시금 추모한다. 그리고 맨 첫발, 딱 한발 떼기에 목숨을 거는 그런 정치를 이어가겠다”고 했다. 기민도 기자 key5088@seoul.co.kr
  • 백기완 선생이 병상에서 문재인 정부에 남긴 말

    백기완 선생이 병상에서 문재인 정부에 남긴 말

    “민중의 자존심을 갖고 소신대로 해보시오.” 평생 민중·민족·민주 운동의 불쌈꾼(혁명가)이자 큰 어른으로 살아온 백기완(88) 통일문제연구소장. 외세의 압제와 분단, 군부독재 등 현대사를 90년 가까운 삶에 아로새긴 그의 시선은 늘 못 배우고, 못 가진 사람들을 향했다. 병상에서 백기완 선생은 “나 같은 사람의 이야기가 귀에 들리진 않겠지만 그저 병실에서 한마디 남깁니다”라며 문재인 정부를 향해 당부의 말을 남겼다. 백기완 선생은 “문재인 정부가 한반도 문제에 관해서 다가서는 그 태도, 방법. 다 환영하고 싶습니다. 생각대로 잘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한마디 보태주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라며 말문을 열었다. 세월호 리본을 단 백기완 선생은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노력이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역사에 주체적인 줄기였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바로 이 땅의 민중들이 주도했던 한반도 평화운동의 그 맥락위에 서있다는 깨우침을 가지시길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백기완 선생은 “지난 촛불혁명은 우리 한반도의 참된 평화요, 민주요, 자주통일. 민중이 주도하는 해방통일이었습니다. 그 맥락위에 서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문재인 정부 민중적인 자부심과 민중적인 배짱을 갖고 소신대로 한번 해보시오!”라고 힘을 실어주었다.고문으로 몸이 반쪽이 될지라도 백기완 선생은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투사, 사회운동가인 동시에 새내기, 동아리, 달동네 등 수많은 한글어를 만들어낸 우리말 운동가, 소설 <버선발 이야기>, 자서전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등을 펴낸 문필가였다. 그는 1932년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동부리에서 아버지 백홍렬과 어머니 홍억재 사이에 4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인 백태주는 천석꾼의 부자로 장련면의 유지로 있으면서 3.1 운동 당시 수천장의 태극기를 제작하여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하는 등 민족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아버지 백홍렬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기자로 재직했고, 청년운동에도 나섰다. 두 부자는 각각 1923년 평안도와 황해도 지방에 수해와 지진피해가 있었을 때와 1934년 삼남지방 수재 당시에 의연금을 기부하고 구휼에 힘쓰는 등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지만 조부 백태주가 독립군에 군자금을 대어주다가 발각돼 고문 끝에 옥사당한 이후 가계가 급격히 몰락했다.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고 남북이 분단되며 가족도 나뉘어 살게 됐다. 백 선생은 이때 부산제5육군병원에서 군 복무를 했다. 전쟁 통에 징용된 작은 형이 죽기도 했다. 이같은 가족사는 이후 백 선생이 통일운동에 매진하는 계기가 됐다. 1964년 함석헌·계훈제 등과 함께 한일협정 반대운동을 벌이며 민주화 운동의 전면에 나섰다. 투옥과 고문은 일상이 됐다. 장준하 등과 ‘유신헌법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 운동’을 벌였다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투옥됐다. 1979년엔 ‘YMCA 위장결혼 사건’을 주도했다가 용산구 보안사령부로 끌려가 몽둥이로 두드려 맞고 무릎을 앞으로 꺾이고 손톱을 뽑히는 등 혹독한 고문을 당했고 건장하던 몸은 반쪽이 됐다. 두 번째 옥고도 치렀다. 당시 옥중에서 썼던 시 ‘묏비나리’는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원작이 됐다.마지막 원고엔 “김진숙 힘내라” 그는 인생의 막바지까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삶을 살았다. 2014년 세월호 진상규명 집회, 2016년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 등의 현장에서 맨 앞자리를 지켰다. 가장 최근 행보는 지난해 12월 ‘연내 중대재해법 제정과 김진숙 복직을 촉구하는 사회원로 기자회견’에 이름을 올린 것이었다. 당일 백 소장은 몸이 불편한 탓에 하루 온종일을 들여 쓴 육필 원고를 보내왔다. 그의 원고에는 “김진숙 힘내라”는 여섯 글자가 담겨있었다. 백원담 교수는 “아버지가 마지막 남긴 글귀는 ‘노나메기’였다. 너도나도 일하되 모두가 올바로 잘사는 세상이라는 뜻”이라고 밝혔다. ‘노나메기 세상 백기완 선생 사회장 장례위원회’는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빈소를 차리고 장례는 오일장으로 치르기로 했다. 전국 16개 지역에 분향소 및 온라인 추모관(baekgiwan.net)도 운영한다. 발인일인 19일 오후 종로구 대학로에서 노제가 진행된다. 여야는 모두 고인을 애도했다. 더불어민주당 신영대 대변인은 “영원한 민중의 벗, 백기완 선생님의 정신은 우리 곁에 남아 영원할 것”이라고 했다. 국민의힘 김은혜 대변인은 “우리가 누리는 평등한 세상은 고인의 덕분”이라 했다. 정의당 정호진 대변인은 “사회적 약자들을 역사상 처음으로 정치의 주인으로 호명했다”고 추도했다. 장례위원회는 “선생님의 뜻에 따라 조화를 받지 않는다. 선생님은 (생전) 조화를 보낼 값으로 어려운 사람을 도우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이어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으로부터도 (문재인 대통령 명의의) 조화를 보내겠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거절했다”고 덧붙였다. “내 이야기를 듣고 발을 구르던 젊은이들은 지금 다 뭘 하는지. 그러나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가슴에 심어 주는 것 자체가 성공의 역사라고 믿는 것, 그게 진보사상이고 이야기예요.”(2013년 4월 22일자 서울신문 인터뷰)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백기완 빈소 이튿날... 권영길, 홍세화, 이부영 등 민주화 운동 동지들 조문

    백기완 빈소 이튿날... 권영길, 홍세화, 이부영 등 민주화 운동 동지들 조문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빈소에는 이튿날에도 노동·사회·정치 각계 인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3층 장례식장 입구에는 조문객들이 하얀 리본 모양의 종이에 쓴 추모 문구로 가득했다. 지난 15일 고인이 폐렴으로 별세한 뒤 50여개 시민단체가 주축이 돼 구성된 ‘노나메기 세상 백기완 선생 사회장 장례위원회’는 “18일까지 일반 시민에게도 빈소를 개방하고 공식 조문을 받는다”며 “광주, 대구, 대전, 부산, 춘천, 제주 등 전국 13곳에 분향소를 차렸다”고 밝혔다. 장례 마지막날인 19일 오전 8시 발인 뒤 오전 9시 대학로 거리에서 노제를 하고 오전 11시 서울광장에서 영결식을 연 뒤 장지인 경기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으로 이동해 오후 2시 하관식을 한다. 장례식장을 찾은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의원은 “혁명을 꿈꿨던 로맨티스트였다”면서 “통일운동가라는 단순한 한마디로 단정짓기 힘든 사람”이라고 회고했다. 두 사람은 민주화 운동 동지로서 오랜 세월 함께 했다. 특히 권 의원은 1997년, 2002년,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 후보로 출마했고, 백 전 소장은 1987년과 1992년 대선에서 민중 후보로 출마했다. 그는 “고인은 투병 중에도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청와대 앞 기자회견에 참여했다”며 “(살아계셨다면) 코로나로 힘들어하는 해고 노동자들의 편에 섰을 것”이라고 했다. 이날 1시쯤 장례식장을 찾은 홍세화 장발장은행 대표는 “우리 시대의 큰별이 가셨다”며 “고인이 지은 노랫말대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가셨다”고 애도했다.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도 “살아계실 때 너무 힘들게 애 많이 쓰셨는데 이제 뒷사람들이 이어서 잘 할테니 하늘에서 편히 쉬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가수 전인권 씨는 흰 상복을 입은 고인의 딸 백원담 성공회대 중어중문학과 교수와 인사를 나눴다. 그는 “생전에 고인께서 공연도 자주 보러 오셨다”며 “어제 백 교수에게 전화해 건강을 꼭 챙겨야 고인도 마음이 편하시다고 당부했다”며 유가족에 대한 걱정을 했다.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 박수현 전 청와대 대변인, 임순례 영화감독, 정현백 전 여성가족부 장관, 김두관·양이원영·김영주·이학영 더불어민주당 의원, 정근식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위원장, 최열 환경재단 이사장 등도 차례로 빈소를 찾았다. 정근식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장은 “백기완 선생님은 70년대 중반 긴급조치 등 국가의 부당한 공권력 오·남용을 이겨낸 증인”이라며 “진실화해위원들과도 큰 별을 잃었다는 이야기를 나눴다”고 했다. 김두관 의원은 “정치적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이뤄졌지만 사회경제적 민주화라는 고인이 남기신 과제를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이날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은 전두환 정권 당시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규탄대회를 주도하다 고인이 구속되자 미 하원의원들이 주미 한국대사와 주한 미국대사에게 보낸 외교전문 2건을 공개했다. 최영권 기자 story@seoul.co.kr
  • 못다 한 ‘임을 위한 행진’… 저 하늘에서 계속되리라

    못다 한 ‘임을 위한 행진’… 저 하늘에서 계속되리라

    한일협정 반대로 민주화 운동 전면 나서YMCA 위장결혼 사건 등 수차례 옥고백원담 “父 마지막 글귀는 ‘노나메기’”“김미숙·김진숙 힘내라” 병상 메시지도 “그 돈 이웃 도와야” 유지… 靑조화 거부전국 16곳 분향소… 19일 대학로 노제“내 이야기를 듣고 발을 구르던 젊은이들은 지금 다 뭘 하는지. 그러나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가슴에 심어 주는 것 자체가 성공의 역사라고 믿는 것, 그게 진보사상이고 이야기예요.”(2013년 4월 22일자 서울신문 인터뷰) 백기완(88) 통일문제연구소장이 15일 새벽 폐렴 투병 끝에 별세했다. 평생 민중·민족·민주 운동의 불쌈꾼(혁명가)이자 큰 어른으로 살아온 그는 민중의 장쾌한 수호자 ‘장산곶매’가 돼 하늘로 떠났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정숙씨와 딸 원담(성공회대 교수)·미담(화가)·현담(출판사), 아들 일(울산과학대 교수)씨가 있다. 90년 가까운 그의 삶엔 외세의 압제와 분단, 군부독재 등 질곡의 현대사가 아로새겨져 있다. 그는 못 배우고 못 가진, 그리하여 배우고 가진 자들에게 압제받는 이들을 위해 기꺼이 ‘앞서서 나가는’ 삶을 선택했다.백 소장은 1933년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동부리에서 태어났다. 정규교육이라고는 국민학교 4학년까지 다닌 게 전부인 데다 분단으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비극을 겪었지만 독학으로 통일 문제와 사회 모순에 대한 인식을 키워 나갔다. 6·25전쟁 중 해외 유학을 권유받았으나 ‘조국을 두고 나 혼자만 유학을 갈 수 없다’며 거절했다. 1964년 함석헌·계훈제 등과 함께 한일협정 반대운동을 벌이며 민주화 운동의 전면에 나섰다. 투옥과 고문은 일상이 됐다. 장준하 등과 ‘유신헌법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 운동’을 벌였다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투옥됐다. 1979년엔 ‘YMCA 위장결혼 사건’을 주도했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한 뒤 계엄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당시 옥중에서 썼던 시 ‘묏비나리’는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원작이 됐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치러진 13대 대선에서는 김영삼·김대중 후보 단일화를 압박하기 위해 독자 민중후보로 출마했다가 직전에 사퇴했다. 1992년 14대 대선에서는 노동자 민중후보로 추대됐지만 현실 정치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는 인생의 막바지까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삶을 살았다. 2014년 세월호 진상규명 집회, 2016년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 등의 현장에서 맨 앞자리를 지켰다. 송경동 시인은 “백 선생이 병상에서 쓰신 마지막 글귀는 ‘김미숙 어머니 힘내라’, ‘김진숙 힘내라’였다”고 전했다. 백원담 교수는 “아버지가 마지막 남긴 글귀는 ‘노나메기’였다. 너도나도 일하되 모두가 올바로 잘사는 세상이라는 뜻”이라고 밝혔다. ‘혁명이 늪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선다’는 평소 지론답게 여러 권의 수필집과 시집을 냈다. 우리말 사랑도 남달랐다.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 ‘장산곶매 이야기’, ‘젊은 날’, ‘버선발 이야기’ 등을 출간했다. ‘노나메기 세상 백기완 선생 사회장 장례위원회’는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빈소를 차리고 장례는 오일장으로 치르기로 했다. 전국 16개 지역에 분향소 및 온라인 추모관(baekgiwan.net)도 운영한다. 발인일인 19일 오후 종로구 대학로에서 노제가 진행된다. 장례위원회는 “선생님의 뜻에 따라 조화를 받지 않는다. 선생님은 (생전) 조화를 보낼 값으로 어려운 사람을 도우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이어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으로부터도 (문재인 대통령 명의의) 조화를 보내겠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거절했다”고 덧붙였다. 여야는 모두 고인을 애도했다. 더불어민주당 신영대 대변인은 “영원한 민중의 벗, 백기완 선생님의 정신은 우리 곁에 남아 영원할 것”이라고 했다. 국민의힘 김은혜 대변인은 “우리가 누리는 평등한 세상은 고인의 덕분”이라 했다. 정의당 정호진 대변인은 “사회적 약자들을 역사상 처음으로 정치의 주인으로 호명했다”고 추도했다. 이두걸 기자 douzirl@seoul.co.kr기민도 기자 key5088@seoul.co.kr
  • ‘화살시편’ 김형영 시인 별세… 시신 기증

    ‘화살시편’ 김형영 시인 별세… 시신 기증

    시집 ‘화살시편’(2019)을 펴낸 김형영 시인이 15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77세. 1944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난 김 시인은 1966년 ‘문학춘추’ 신인 작품 모집과 1967년 문화공보부 신인예술상에 각각 당선돼 문단에 등단했다. 고인은 소박한 일상에서 곡진한 서정과 깊은 영성의 파동을 포착해 낸 시인으로 평가된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17일이다. 고인의 시신 기증으로 별도 장지는 없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민주지도자 백기완 석방 촉구”…1987년 美 하원 외교 전문 공개

    “민주지도자 백기완 석방 촉구”…1987년 美 하원 외교 전문 공개

    고(故) 백기완 선생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 위반 혐의로 수감됐을 당시 그의 석방을 요구했던 미국 하원의원들의 외교 전문이 공개됐다.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은 16일 미국 하원의원들이 1987년 주미 한국대사와 주한 미국대사에게 보낸 외교 전문 2건을 발표했다. 백 선생은 1986년 7월 19일 개최된 ‘부천서 성고문 범국민폭로대회’와 관련해 집시법 위반 혐의로 수배됐다. 그해 12월 10일 경찰에 검거돼 구속된 백 선생은 건강 악화로 같은 달 29일 병원으로 이송됐다. 이듬해 2월 28일 백 선생은 건강이 회복되지 못한 상태에서 재수감됐다. 로버트 므라젝 등 미국 하원의원 8명은 1987년 2월 13일 김경원 당시 주미 대사에게 외교 전문을 보내 “한국의 민주 지도자인 백기완의 구속에 유감을 표하며 양심수인 백기완의 즉각적인 석방과 인권회복을 한국 정부에 촉구한다”고 밝혔다. 백 선생이 재수감된 후 같은 해 3월 5일에도 미국 하원의원 7명은 제임스 릴리 당시 주한 미국대사에게 백 선생 석방과 인권회복을 위해 전두환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해달라는 내용의 외교 전문을 보냈다. 이들은 이 외교 전문에서 “백기완의 건강이 나쁘므로 우선 최소한 입원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한국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번에 공개된 사료는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 망명 당시 조직한 한국인권문제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던 것이다. 한편 지난해 1월 폐렴 증상으로 입원해 투병 생활을 해온 백 선생은 지난 15일 오전 향년 89세 나이로 영면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2호실에 차려졌다. 발인은 19일 오전 7시다.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포토] ‘고 백기완 선생 빈소’ 각계 조문 행렬

    [포토] ‘고 백기완 선생 빈소’ 각계 조문 행렬

    가수 전인권이 1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故)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빈소를 찾아 조문을 마친 뒤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 [포토] ‘고 백기완 선생 빈소’ 각계 조문 행렬

    [포토] ‘고 백기완 선생 빈소’ 각계 조문 행렬

    가수 전인권이 1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故)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빈소를 찾아 조문을 마친 뒤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 “민주지도자 백기완 석방 촉구”…1987년 美 하원 외교 전문 공개

    “민주지도자 백기완 석방 촉구”…1987년 美 하원 외교 전문 공개

    고(故) 백기완 선생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 위반 혐의로 수감됐을 당시 그의 석방을 요구했던 미국 하원의원들의 외교 전문이 공개됐다.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은 16일 미국 하원의원들이 1987년 주미 한국대사와 주한 미국대사에게 보낸 외교 전문 2건을 발표했다. 백 선생은 1986년 7월 19일 개최된 ‘부천서 성고문 범국민폭로대회’와 관련해 집시법 위반 혐의로 수배됐다. 그해 12월 10일 경찰에 검거돼 구속된 백 선생은 건강 악화로 같은 달 29일 병원으로 이송됐다. 이듬해 2월 28일 백 선생은 건강이 회복되지 못한 상태에서 재수감됐다. 로버트 므라젝 등 미국 하원의원 8명은 1987년 2월 13일 김경원 당시 주미 대사에게 외교 전문을 보내 “한국의 민주 지도자인 백기완의 구속에 유감을 표하며 양심수인 백기완의 즉각적인 석방과 인권회복을 한국 정부에 촉구한다”고 밝혔다. 백 선생이 재수감된 후 같은 해 3월 5일에도 미국 하원의원 7명은 제임스 릴리 당시 주한 미국대사에게 백 선생 석방과 인권회복을 위해 전두환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해달라는 내용의 외교 전문을 보냈다. 이들은 이 외교 전문에서 “백기완의 건강이 나쁘므로 우선 최소한 입원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한국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번에 공개된 사료는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 망명 당시 조직한 한국인권문제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던 것이다. 한편 지난해 1월 폐렴 증상으로 입원해 투병 생활을 해온 백 선생은 지난 15일 오전 향년 89세 나이로 영면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2호실에 차려졌다. 발인은 19일 오전 7시다.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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