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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J감성여울 “임블리 빈소 방문…조문 거부당해”

    BJ감성여울 “임블리 빈소 방문…조문 거부당해”

    인터넷 개인방송 진행자(BJ) 감성여울(36·본명 김보라)이 생방송 중 유서를 작성하고 극단 선택을 시도했다 끝내 숨을 거둔 BJ 임블리(37·본명 임지혜)의 장례식장을 방문했지만 유족으로부터 조문을 거부당했다고 밝혔다. 19일 감성여울은 자신의 유튜브 커뮤니티에 이 같은 내용의 게시물을 올리면서 사죄했다. 감성여울은 “유가족분들이 조문을 원치 않으셔서 돌아가고 있다. 상중에 소란 떠는 게 더 상처가 될 거 같아 조용히 나왔다”라고 했다. 그는 조문을 거부당한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면서 “어떤 변명도 책임 전가도 하지 않겠다”라고 밝혔다. 이어 “제가 살인자 맞다. 정말 죄송하다. 죄송하다는 말도 죄송하다. 만약 제가 죽지 않는다면 평생 마음으로 속죄하겠다. 무엇으로도 제 죄를 씻을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죄송하다”면서 사과했다.앞서 임블리는 지난 11일 부천에서 활동하는 동료 BJ들과 술자리를 하던 중 감성여울과 말다툼을 벌인 뒤 홀로 귀가했다. 이후 유튜브 생방송 중 유서를 작성하고 극단 선택을 시도했다. 논란이 일자 감성여울은 지난 15일 유튜브 생방송에서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 (임블리가) 자기 마음대로 방송이 안 돼서 성질에 못 이겨서 그런 걸 누가 책임지라는 거냐. 방송이 자꾸 초상집이 되니까 벽 보고 울라 했더니 먼저 욕을 한 것은 그쪽”이라며 자신은 임블리의 극단 선택에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극단 선택을 시도한 임블리는 병원으로 이송돼 사경을 헤매다 19일 끝내 숨졌다.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전화 ☎1393, 정신건강 상담전화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청소년 모바일 상담 ‘다 들어줄 개’ 애플리케이션, 카카오톡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 영화 ‘난쏘공’ ‘엄마 없는 하늘 아래’ 이원세 감독 별세

    영화 ‘난쏘공’ ‘엄마 없는 하늘 아래’ 이원세 감독 별세

    이원세 감독이 노환으로 별세했다. 83세. 고인은 1940년 평양에서 태어나 1971년 영화 ‘잃어버린 계절’로 감독에 데뷔했다. 특히 1977년 ‘엄마 없는 하늘 아래’가 크게 흥행했다.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는 정신착란이 돼 어려운 처지에 놓인 아이들을 그렸다.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1년 조세희 작가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으로 사회비판 의식을 보여 줬다. 대종상 수상자에 선정됐지만 발표 직전 취소되는 등 고초를 겪기도 했다. 1973년 ‘나와 나’로 청룡상 신인 감독상을, 1981년 ‘전우가 남긴 한마디’로 백상예술대상 감독상을, 1984년 ‘그 여름의 마지막 날’로 대종상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다. 빈소는 경기 김포에 있는 뉴고려병원 장례식장 특1호실. 발인 21일.
  • 영화 ‘난쏘공’·‘엄마없는 하늘아래’ 이원세 감독 별세

    영화 ‘난쏘공’·‘엄마없는 하늘아래’ 이원세 감독 별세

    영화 ‘엄마 없는 하늘 아래’로 유명한 이원세 감독이 별세했다. 83세. 19일 영화계와 유족 등에 따르면 이 감독은 이날 정오쯤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1940년 평양에서 태어나 1971년 영화 ‘잃어버린 계절’로 감독에 데뷔했다. 특히 1977년 ‘엄마 없는 하늘 아래’가 크게 흥행했다.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는 정신착란이 돼 어려운 처지에 놓인 아이들을 그렸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영화를 보고 감동해 전국 초등학교에 단체관람을 하도록 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1년 조세희 작가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으로 사회비판 의식을 보여줬다. 대종상 수상자에 선정됐지만, 발표 직전 취소되는 등 고초를 겪기도 했다. 1975년에는 김호선, 이장호, 하길종, 홍파 감독 등과 함께 ‘영상시대’를 결성해 새로운 영화 미학을 모색하는 청년 영화 운동을 주도했다. 1973년 ‘나와 나’로 청룡상 신인감독상을, 1981년 ‘전우가 남긴 한마디’로 백상예술대상 감독상을, 1984년 ‘그 여름의 마지막 날’로 대종상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다. 영화 ‘여왕벌’(1985)을 마지막으로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2010년대 초 한국으로 돌아왔다. 빈소는 김포에 있는 뉴고려병원 장례식장 특1호실. 발인은 21일이다.
  • 60년대 농촌 현실을 소설로...이규희 작가 별세

    60년대 농촌 현실을 소설로...이규희 작가 별세

    1960대 농촌의 현실을 섬세한 문장으로 사실적으로 그려낸 소설가 이규희 씨가 지난 18일 오후 별세했다. 86세. 1937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대전사범학교를 거쳐 이화여대 국문과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3년 동아일보 장편소설 공모에 ‘속솔이뜸의 댕이’가 당선되면서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주요 작품으로는 장편 ‘수렁을 날으는 새들’(1967), ‘수줍은 연가’(1978), ‘잃어버린 눈물’(1978), ‘복사나무 고개바람’(1991) 등이 있다. 1998년에는 한국문학상을, 2010년에는 한국가톨릭문학상을 수상했다. 유족으로는 남편 천승준(문학평론가), 딸 천경화(계성고 교사), 사위 심도현(삼성증권 근무) 등이 있다. 고인은 한국 최초의 여성 장편소설가 고 박화성(1904~1988) 작가의 맏며느리이기도 하다. 빈소는 고려대 안암병원 장례식장 301호실, 발인은 21일 오전 7시 10분이다. (02)923-4442.
  • 한글대장경 번역 주도한 해룡 스님 열반

    한글대장경 번역 주도한 해룡 스님 열반

    한글대장경 번역에 앞장선 월운당 해룡 스님이 지난 16일 밤 입적했다. 세수 94세 법랍 74년. 해룡 스님은 1929년 11월 경기 장단군 진동면 용산리에서 태어나 1949년 남해 화방사에서 대강백 운허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부산 범어사에서 자운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고 1959년 운허 스님에게 입실해 월운(月雲)이라는 당호를 얻었다. 어릴 때부터 한학을 배워 교학에 탁월한 역량을 보였고 1979~1993년 중앙승가대 교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불교계를 대표하는 학승(學僧)으로 경남 합천 해인사가 소장한 고려대장경을 한글대장경으로 완간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역경보조위원에서 시작한 그가 1993년부터 역경원장을 지내며 작업을 이끈 덕에 2000년 ‘장경음의수함록’을 끝으로 318권이 완간될 수 있었다. 빈소는 그가 1976년부터 1994년까지 주지를 지낸 남양주 봉선사에 마련됐다. 영결식은 21일 봉선사 문도회장으로 치른다.
  • 밤낮없이 환자 살려온 아산병원 교수, 병원 앞 교통사고로 별세

    밤낮없이 환자 살려온 아산병원 교수, 병원 앞 교통사고로 별세

    밤낮없이 응급환자 수술을 책임졌던 서울아산병원 흉부외과 의사가 병원 인근에서 교통사고로 숨졌다. 17일 서울 송파경찰서와 서울아산병원에 따르면 이 병원 심장혈관흉부외과 주석중 교수가 전날 오후 1시 20분쯤 송파구 풍납동의 한 아파트 앞 교차로에서 자전거를 타고 횡단보도를 건너려다 우회전하던 덤프트럭에 치여 사망했다. 당시 횡단보도 신호는 빨간불이었으며 덤프트럭 운전자가 신호를 위반한 것은 아닌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자세한 사고 경위를 조사 중이다. 주 교수는 대동맥박리 등 대동맥질환, 대동맥판막협착증 등 응급 수술이 잦고 의사 인력이 많지 않은 전문 분야에서 활동해왔다. 대한흉부심장혈관외과학회 상임이사, 대동맥연구회 위원장 등을 지냈으며 서울아산병원 심장병원 대동맥질환센터소장을 맡은 바 있다. 주 교수는 병원과 가까운 곳에 살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응급 환자 수술에 매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병원 측에 따르면 이 병원 의료진 중에서는 병원의 응급 호출 등에 대비해 병원 인근을 거주지로 정하는 경우가 많다. 생명을 살리는 필수의료 진료과 의사가 부족한 상황에서 흉부외과 의사의 갑작스러운 사고 소식이 전해지자 의료계에서는 애도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송석원 이대서울병원 심장혈관흉부외과 교수는 전날 페이스북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슬픔으로 가슴이 찢어진다”면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애도했다. 노환규 전 대한의사협회 회장(흉부외과 전문의)은 이날 페이스북에 “2년여 전 수술 환자의 출혈이 많아 저녁을 함께 못하게 됐다며 다음 약속을 기약했었는데, 끝내 얼굴 한 번 못 보고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됐다”면서 “‘탁월하고 훌륭한’이라는 표현으로 부족한 인재의 부재로 누군가는 소생의 기회를 잃게 될 것”이라고 썼다. 주 교수의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20일이다.
  • 남양주 봉선사 조실 해룡 월운 스님 열반

    남양주 봉선사 조실 해룡 월운 스님 열반

    경기 남양주시의 조계종 제25교구본사 봉선사는 조실 월운 해룡대종사가 16일 오후 10시36분 원적에 들었다고 17일 밝혔다. 세수 95세 법납 74년. 장례는 봉선사 문도회장으로 치러지며 영결식은 21일 오전 11시에 엄수된다. 빈소는 제25교구본사 남양주 봉선사에 차려졌다. 월운스님은 1929년 11월 경기 장단군 진동면에서 출생, 15세에 국교 졸업 후 한학을 수학하고, 1949년 21세 단옷날 화방사에서 운허스님을 은사로 득도하여 법명을 해룡으로 받았다. 24세에 부산 범어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하고, 은사 스님을 모시고 첫 안거를 성만했다. 28세에 합천 해인사 강원에서 운허스님 강석에서 대교과를 시작하여 그 다음해인 29세 8월에 대교과를 졸업하고, 12월에 통도사 강사를 맡았다. 30세에 임시승적을 봉선사로 바로잡고, 1959년 4월 운허스님께 입실, 제78세 법손으로 월운(月雲)이라 당호를 받았다. 1970년 <대반야경>을 출판했다. 1976년부터 1994년 10월까지 봉선사 본사 주지소임을 역임했다. 또한 1979년부터 1993년 12월까지 중앙승가대학교 교수도 역임하고, 1993년 11월부터 2009년까지 4대 동국역경원장을 역임하면서 1996년부터 2016년까지 봉선사 능엄학림 학장을 지냈다. 2000년 9월 은사 운허스님의 유지를 받들어 이어서 한글대장경 전318권 완간했다. 그 공덕으로 한글학회 외솔상(2001년), 대통령 은관문화훈장(2005년)을 받기도 했다.
  • 배우 박수련, 낙상사고 사망… 장기기증 결정한 유족

    배우 박수련, 낙상사고 사망… 장기기증 결정한 유족

    향년 29세…뮤지컬 ‘김종욱 찾기’ 등 출연유족 “누군가에게 가서 심장이 뛰면 위로” 뮤지컬 배우 박수련(본명 박영인)이 불의로 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향년 29세. 12일 유족 등에 따르면 박수련은 전날 오후 귀가하던 중 계단에서 낙상 사고를 당해 뇌사상태에 빠졌고, 인근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끝내 숨을 거뒀다. 고인은 이튿날 13일 제주도 공연을 앞둔 것으로 알려졌다. 유족은 고인의 갑작스러운 사망에 애도하는 한편, 따뜻했던 심성을 기리는 마음으로 장기기증을 하기로 했다. 고인의 모친은 “머리만 의식이 없고 심장은 뛰지 않나. 누군가 절실하게 (장기가) 필요한 사람이 있을 것”이라며 “엄마·아빠의 마음은 누군가에게 가서 심장이 뛰면 그것에라도 위로를 받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라고 애통한 마음을 스타투데이에 전했다. 박수련의 갑작스런 사망 소식에 소셜미디어(SNS)에는 추모의 글이 이어지고 있다. 박수련과 함께 호흡을 맞췄던 배우 이원장은 “이게 무슨일이야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 너와 함께 공연한게 엊그제 같은데 항상 밝은 에너지와 웃음으로 우리한테 행복을 주던 너였는데 누구보다 열심히 사는 영인이였는데 이건 아니잖아”라며 애도했다. 김도현도 “사랑하는 동생이자 그 누구보다 빛나던 영인이가 밤하늘의 별이 됐다”며 “그곳에선 절대 아프지도 슬프지도 않고 웃는 얼굴로 신나게 놀고 있기를 바란다”고 적었다. 고인의 빈소는 경기도의료원 수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이날 오후 4시 입관식이 거행되며 13일 오전 발인이 엄수된다. 장지는 수원승화원으로 알려졌다. 한편 박수련은 2018년 창작뮤지컬 ‘일 테노레’로 데뷔했다. 이후 ‘김종욱 찾기’, ‘사랑에 스치다’, ‘싯다르타’, ‘우리가 사랑했던 그날’ 등 굵직한 작품에 출연해 얼굴을 알렸다.
  • ‘도깨비’ 출연 배우 가슴 찢어지는 소식 전했다

    ‘도깨비’ 출연 배우 가슴 찢어지는 소식 전했다

    배우 최범호가 모친상을 당했다. 고인의 빈소는 경기도 분당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발인은 오는 12일 오전 7시이며, 장지는 구례군 광의면 온당리 진등묘지다. 최범호는 1993년 드라마 ‘제3공화국’ 시작으로 100여 편의 다양한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탄탄한 연기력을 쌓았으며 영화 ‘위기의 용사 반달가면’으로 스크린에 진출했다. MBC 드라마 ‘하얀거탑’, ‘이산’, ‘히어로’, ‘마의’, ‘제왕의 딸, 수백향’, 영화 ‘알투비 : 리턴투베이스’ 등에 조연으로 출연하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는 ‘회장 전문 배우’라는 수식어도 갖고 있다. OCN ‘TEN’ 시리즈에서는 경찰국장으로, tvN ‘도깨비’, MBC ‘자체발광 오피스’, ‘돌아온 복단지’ 등에서는 회장으로 출연했다.
  • 예능 출연했던 프로야구선수…가슴 아픈 소식

    예능 출연했던 프로야구선수…가슴 아픈 소식

    KT 위즈 투수 박선우(26)가 부친상을 당했다. 고인의 빈소는 경상남도 함안시민장례식장에 차려졌다. 발인은 오는 11일 오전 9시이며 장지는 창원 상복공원이다. 박선우는 188cm, 85kg의 준수한 신체조건을 갖춘 우완 오버핸드 투수이다. 그는 부산고등학교 졸업 후 2016년 신인드래프트 1차 지명으로 롯데 자이언츠의 지명을 받았다. MBC ‘아무튼 출근!’에 출연하며 주목을 받았다. 그는 프로 입단 이후 상당히 간결하고 안정적인 투구자세로 교정해 이닝 당 볼넷 허용이 0.3개 정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제구가 좋은 편이다. 삼진을 잡기보다는 땅볼을 유도하는 땅볼 투수다.
  • ‘노무현 후원회장’ 이기명 노무현재단 고문 별세

    ‘노무현 후원회장’ 이기명 노무현재단 고문 별세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후원회장을 맡았던 이기명 노무현재단 고문이 5일 오전 10시33분쯤 서울 강서구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유족이 전했다. 87세. 서울 종로에서 태어난 고인은 동국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1961년 KBS PD로 입사했다. 이후 1962년 문화공보부 현상모집에 연속방송극 ‘평화스런 날의 작별’이 당선되며 드라마 작가로 데뷔했다. 라디오 드라마 ‘김삿갓 방랑기’를 집필했다. 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를 지냈다. 1989∼2003년 노무현후원회장을 맡았고, 2002년 새천년민주당 노무현대통령후보 언론문화 고문, 2005년 국민참여연대 상임고문을 역임했다. 20대 대선에서는 당시 후보자였던 문재인 전 대통령의 특별고문을 맡았다. 저서로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위하여’가 있다. 유족으로는 이진호·정호·인호씨가 있다. 빈소는 이대목동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7일 오전 10시.
  • 안타까운 비보…모델 이평, 암투병 끝 숨져

    안타까운 비보…모델 이평, 암투병 끝 숨져

    모델 이평(43·이경미)이 암 투병 끝 지난달 31일 세상을 떠났다. 빈소는 서울 강남성모병원 장례식장 23호실에 마련했으며, 발인은 2일 오전 9시다. 서울추모공원을 거쳐 울진추모공원에서 잠들 예정이다. 이평은 18세에 모델로 데뷔했다. 앙드레김(1935~2010), 이상봉, 곽현주 등의 패션쇼 무대에 섰다. 2016년 ‘제31회 코리아 베스트 드레서 스완어워드 여자모델부문’ ‘Asia 美 Awards 모델상’ 등을 받았다.
  • ‘극한직업’ 배우 김종수, 오늘 부친상

    ‘극한직업’ 배우 김종수, 오늘 부친상

    배우 김종수가 부친상을 당했다. 소속사 아티스트컴퍼니는 31일 “김종수 배우의 부친께서 금일(31일) 별세하셨다”라고 밝혔다. 이어 “김종수 배우는 현재 가족 분들과 슬픔 속에 빈소를 지키고 있다”라며 “장례는 가족 및 친지분들과 조용하게 치를 예정이다, 유가족 분들께 깊은 위로와 애도의 마음을 전한다”고 고인을 기렸다. 김종수 부친의 빈소는 부산 시민장례식장 302호실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6월 2일 오전 6시이다. 한편 김종수는 1984년 극단 ‘고래’에 입단해 연극 ‘에쿠우스’를 시작으로 다양한 연극을 통해 연기력을 다져왔다. 이후 영화 ‘범죄와의 전쟁’ ‘아부의 왕’ ‘전설의 주먹’ ‘스파이’ ‘스물’ ‘헌트’ 에서 감초 역할을 해왔다. 또 드라마 ‘미생’에 김부련 부장 역으로 출연했으며, 영화 ‘1987’에서 박종철 열사의 부친 역으로 열연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최근 개봉한 영화 ‘드림’에도 등장했으며, 현재 방영 중인 KBS 2TV 드라마 ‘어쩌다 마주친, 그대’에 나서고 있다.
  • 교육부 장관·서울시교육감 지낸 문용린 교수 별세

    교육부 장관·서울시교육감 지낸 문용린 교수 별세

    교육부 장관과 서울시교육감을 지낸 문용린 서울대 명예교수가 29일 별세했다. 76세. 유족에 따르면 고인은 오랜 기간 앓아 온 패혈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1947년 만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서울대 교육학과와 대학원을 거쳐 미국 미네소타대에서 교육심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1989년부터 서울대 교수로 재직했다. 김영삼 정부 때부터 교육자치제 개혁, 교원정책, 유아교육의 공교육화 등 교육 정책에 깊이 관여하면서 전문성을 인정받았고 김대중 정부 시절이던 2000년 교육부 장관으로 발탁됐다.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이 직을 잃으면서 2012년 12월 치러진 서울시교육감 선거에 보수 단일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2014년 6월 재선에 도전했으나 실패했다. 이후에는 학교폭력 예방 단체인 푸른나무재단 이사장, 한국교직원공제회 이사장, 한국청소년단체협의회 회장을 지냈고 대교문화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하며 경계선 지능 학생의 학습 지원 등을 위해 힘썼다. 유족으로는 부인 구경모씨와 1남 1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13호실, 발인은 31일 오전 8시 30분.
  • 영화 250편 출연한 60년대 스타 김석훈 별세

    영화 250편 출연한 60년대 스타 김석훈 별세

    1960년대 훈훈한 외모로 인기를 끈 원로 배우 김석훈(본명 김영현)이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29일 영화계와 유족에 따르면 고인은 전날 오후 1시 46분쯤 숙환으로 눈을 감았다. 일제강점기인 1929년 경기 이천에서 태어난 김석훈은 청주사범대를 나와 서울지방법원 서기로 근무하다가 1957년 유재원 감독의 눈에 띄어 ‘잊을 수 없는 사람들’로 데뷔했다. 이 영화로 일약 스타가 된 그는 약 250편의 영화에 출연해 대부분 주연을 맡았다. 고인은 ‘햇빛 쏟아지는 벌판’(1960), ‘두만강아 잘 있거라’(1962), ‘정도’ (1972) 등의 액션물뿐 아니라 ‘내 마음의 노래’(1960), ‘슬픈 목가’(1960), ‘비련십년’(1966) 등의 멜로물에도 출연했다. 공포영화 ‘목 없는 미녀’(1966)와 ‘설야의 여곡성’(1972)도 그가 출연한 작품이다. 한창 인기의 절정을 달리다 신성일, 남궁원, 김진규가 간판스타로 떠오르면서 1960년대 중반 이후 조연으로 활동했다. 고인의 마지막 영화는 곽재용 감독의 ‘비오는 날의 수채화 2’(1993)였다. 2005년 대종상 특별연기상을 받았다. 2002년 서울 서초구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 ‘명배우 회고전’에 참석해 “잊혀 가는 것, 그 또한 아름답지 않으냐”는 말을 남겼다. 한 영화계 인사는 “김석훈은 깊고 따뜻한 눈빛을 가진 배우로 성품이 온화했다”고 돌이켰다. 유족은 “내성적이고 감수성이 예민하며 멋쟁이인 분이었다”고 돌아봤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30일 오후 1시 20분이다.
  • 60년대 훈남 스타 김석훈 “잊혀져가는 것도 아름답지” [메멘토 모리]

    60년대 훈남 스타 김석훈 “잊혀져가는 것도 아름답지” [메멘토 모리]

    “인생은 지나고 나면 모두 꿈과 같은 거다.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살아온 길 돌아보면 각자가 영화 한 편을 찍은 거나 같다.”(2019년 영화인복지재단 송년회 인터뷰 중) 1960년대 훈훈한 외모로 인기를 끈 원로 배우 김석훈(본명 김영현)이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29일 영화계와 유족에 따르면 고인은 전날 오후 1시 46분쯤 숙환으로 눈을 감았다. 일제 강점기인 1929년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난 김석훈은 청주사범대를 나와 서울지방법원 서기로 근무하다가 1957년 유재원 감독에게 발탁돼 ‘잊을 수 없는 사람들’로 데뷔했다. 당시 유 감독이 요즈음 말로 길거리 캐스팅을 했다고 해서 화제가 됐다. 이 영화가 인기를 끌어 일약 스타로 떠오른 그는 약 250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대부분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 고인은 ‘춘희’(1959, 신상옥 감독), ‘햇빛 쏟아지는 벌판’(1960, 정창화 감독), ‘두만강아 잘 있거라’(1962, 임권택 감독), ‘정도’(1972) 등 액션물뿐 아니라 ‘내 마음의 노래’(1960), ‘슬픈 목가’(1960), ‘비련십년’(1966) 등 멜로물에 출연했다. 공포영화인 ‘목 없는 미녀’(1966)와 ‘설야의 여곡성’(1972)도 그가 주연한 작품이다. 대표작으로는 임권택 감독의 데뷔작이기도 한 ‘두만강아 잘 있거라’를 꼽을 수 있다. 이 영화에서 김석훈은 일본군에 맞서 학생독립단을 이끄는 투사 역할을 맡아 열띤 액션 연기를 펼쳤다. 장일호 감독의 ‘의적 일지매’(1961)에서는 신영균과 호흡을 맞췄다. 한참 인기 절정을 달리다 신성일, 남궁원, 김진규가 간판 스타로 떠오르면서 1960년대 중반 이후 조연으로 활동했다. 김석훈이 마지막으로 스크린에 나온 것은 곽재용 감독의 ‘비오는 날의 수채화 2’(1993)였다. 이 영화에서 그는 주인공 ‘지수’(김명수)의 양아버지 ‘최 장로’ 역을 맡았다. 영화계의 한 인사는 “김석훈은 깊고도 따뜻한 눈빛을 가진 배우로, 1960년대에는 그야말로 인기 스타였다”며 “개인적인 성품도 온화했다”고 회고했다. 유족은 “내성적이고 감수성이 예민하며 멋쟁이인 분이었다”며 “한 편의 영화처럼 살다가 가신 것 같다”고 말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30일 오후 1시 20분이다. 2005년 대종상 특별연기상을 수상했다. 2002년 서초동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 ‘명배우 회고전’에 참석하며 “잊혀져 가는 것, 그 또한 아름답지 않느냐”는 말을 남겼다.
  • ‘1960년대 미남 스타’ 원로배우 김석훈 별세

    ‘1960년대 미남 스타’ 원로배우 김석훈 별세

    1960년대 스크린에서 잘생긴 외모로 인기를 끈 원로 배우 김석훈(본명 김영현)이 별세했다. 94세. 29일 영화계와 유족 등에 따르면 김석훈은 전날 오후 1시 46분쯤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일제강점기인 1929년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난 김석훈은 청주사범대를 나와 서울지방법원 서기로 근무하다 1957년 유재원 감독의 영화 ‘잊을 수 없는 사람들’로 데뷔했다. 당시 유 감독은 길을 가다가 김석훈의 외모가 눈에 띄어 그를 발탁한 것으로 알려져 화제가 됐다. 이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일약 스타로 떠오른 그는 약 250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대부분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 김석훈은 ‘햇빛 쏟아지는 벌판’(1960), ‘두만강아 잘 있거라’(1962), ‘정도’(1972) 등 액션물뿐 아니라 ‘내 마음의 노래’(1960), ‘슬픈 목가’(1960), ‘비련십년’(1966) 등 멜로물에도 출연했다. 공포영화인 ‘목 없는 미녀’(1966)와 ‘설야의 여곡성’(1972)도 그가 주연한 작품이다. 대표작으로는 임권택 감독의 데뷔작이기도 한 ‘두만강아 잘 있거라’를 꼽을 수 있다. 이 영화에서 김석훈은 일본군에 맞서 학생독립단을 이끄는 투사 역할을 맡았다. 장일호 감독의 ‘의적 일지매’(1961)에서는 신영균과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김석훈이 마지막으로 스크린에 나온 것은 곽재용 감독의 ‘비오는 날의 수채화2’(1993)였다. 이 영화에서 그는 주인공 ‘지수’(김명수)의 양아버지 ‘최장로’ 역을 맡았다. 유족은 연합뉴스에 “내성적이고 감수성이 예민하며 멋쟁이인 분이었다”면서 “한 편의 영화처럼 살다가 가신 것 같다”고 말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11호실이며 발인은 30일 오후 1시 20분이다.
  • 해직 기자 출신 최일남 전 작가회의 이사장 별세

    해직 기자 출신 최일남 전 작가회의 이사장 별세

    해직 기자 출신으로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을 지낸 최일남 작가가 28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91세. 1932년 전북 전주에서 출생한 최 작가는 전주사범학교를 거쳐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56년 ‘현대문학’에서 ‘파양’을 추천받아 본격적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1962년 경향신문에 기자로 입사한 뒤 1980년 신군부 언론탄압으로 동아일보 편집부국장과 문화부장을 겸하던 중 해직당했다가 1984년 복직했으며, 1988 ~1991년 한겨레신문 논설고문으로 일했다. ‘거룩한 응달’ (1982), ‘덧없어라 그 들녘’ (1996) 등 소설과 ‘말의 뜻 사람의 뜻’ (1988) 등 여러 에세이를 쓰면서 전반적으로 당대의 사회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의식을 해학적이고도 개성 있는 문장으로 풀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02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됐고 2008~2010년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을 지냈다. 이상문학상, 인촌문화상, 김동리 문학상, 장지연 언론상 등을 받았다. 빈소는 분당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3호실이며 발인은 30일 오전 9시에 예정돼 있다.
  • ‘비판적 사실주의 소설가’ 최일남 전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별세

    ‘비판적 사실주의 소설가’ 최일남 전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별세

    해직 기자 출신으로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을 지낸 최일남 작가가 28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91세. 대한민국예술원과 유족에 따르면 최 작가는 이달 26일 몸 상태가 악화해 병원에서 치료받다가 이날 오전 0시 57분쯤 숨을 거뒀다. 1932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난 최 작가는 전주사범학교를 거쳐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53년 ‘문예’지에 단편소설 ‘쑥 이야기’가 추천된 데 이어 1956년 ‘현대문학’지에 ‘파양’(爬痒)이 최종 추천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그는 경향신문에 기자로 입사한 1962년 이후로는 거의 작품 활동을 하지 않다가 1966년부터 다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후 197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왕성하게 작품들을 내놨다. 최 작가는 출세한 촌사람들이 도시에 와서 겪는 객지 생활의 애환과 산업화의 그늘 등을 풍부한 토착어를 바탕으로 한 개성적인 문체로 그린 작가로 꼽힌다. 언론사와 정치권을 배경으로 정치권력의 위선과 횡포, 지식인의 타락을 풍자한 비판적 사실주의 경향의 소설들도 작품 세계의 다른 중요한 축을 이룬다. 작가이자 언론인으로 왕성하게 집필한 최 작가는 전반적으로 당대의 사회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의식을 해학적이고도 개성 있는 문장으로 풀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단편집으로는 1975년 출간한 ‘서울 사람들’을 비롯해 ‘홰치는 소리’(1981), ‘거룩한 응달’(1982), ‘그리고 흔들리는 배’(1984), ‘하얀 손’(1994), ‘아주 느린 시간’(2000)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그리고 흔들리는 배’는 1990년대 초반 각색돼 KBS에서 일일드라마로 방영되기도 했다. 장편으로는 ‘거룩한 응달’(1982), ‘하얀손’(1994), ‘덧없어라 그 들녘’(1996), ‘국화밑에서’(2017) 등을 남겼고, ‘말의 뜻 사람의 뜻’(1988), ‘정직한 사람에 꽃다발은 없어도’(1993), ‘어느 날 문득 손을 바라본다’(2006) 등 에세이집도 내놨다. 언론인으로서 출간한 대담집과 사회평론집도 있다. 고인은 생전에 월탄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이상문학상, 인촌문화상, 한무숙문학상, 김동리문학상을 받는 등 작품성을 인정받았고, 2001년에는 정부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2002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됐고 2008~2010년에는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을 지냈다.최 작가는 민국일보, 경향신문을 거쳐 동아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 1980년 신군부의 언론탄압 등으로 동아일보 편집부국장과 문화부장을 겸하던 중 해직당했다. 1984년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복직했으며 1988~1991년 한겨레 신문 논설고문을 지냈다. 80년 해직언론인협의회 회장, 방송문화진흥회 이사로도 활동했다. 1995년에는 장지연 언론상을 받았다. 유족은 1남 1녀와 사위, 며느리 등이 있다. 빈소는 분당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3호실이며 발인은 30일 오전 9시에 예정돼 있다.
  • 최일남 전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별세

    최일남 전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별세

    해직 기자 출신으로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을 지낸 최일남 작가가 28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91세. 1932년 전북 전주에서 출생한 최 작가는 전주사범학교를 거쳐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56년 ‘현대문학’에서 ‘파양’을 추천받아 본격적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서울사람들’(1957), ‘타령’(1977), ‘홰치는 소리’(1981), ‘누님의 겨울’(1984), ‘때까치’(1994), ‘아주느린시간’(2000), ‘잊을수 없는 밥 한 그릇’(2015) 등 다수의 단편집을 출간했다. ‘거룩한 응달’(1982), ‘하얀손’(1994), ‘덧없어라 그 들녘’(1996), ‘국화밑에서’(2017) 등 여러 장편 소설을 썼다. 한국일보문학상, 이상문학상, 인촌문화상, 한무숙문학상, 김동리문학상 등으로 작품 세계를 인정받았다. 1995년에는 장지연 언론상을 받았다. 2002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에 선임됐다. 2008∼2010년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을 지냈다. 민국일보, 경향신문을 거쳐 동아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 1980년 신군부의 언론탄압으로 동아일보 편집부국장과 문화부장을 겸하던 중 해직당했다. 1984년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복직했으며 1988∼1991년 한겨레신문 논설고문을 지냈다. 유족은 1남 1녀와 사위, 며느리 등이 있다. 빈소는 분당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3호실. 발인은 30일 오전 9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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