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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해리의 色色남녀] 너나 잘하세요

    햇과일이 나오고 가로수 은행잎들이 조금씩 물들어 가는 요즘 내 주변의 남자들도 가슴에 단풍물이 드는지 계절병을 앓는 것 같다. 아내가 있어도 외롭고, 누구는 아는 여자조차 없어 외롭다고 타령을 한다. 그러면 남편 때문에 외롭고 남친도 없는 여자들은 어떨까? 그녀들이 공통적으로 앓고 있는 병은 성욕감퇴로 보인다. 유부녀들은 흥분장애와 오르가슴 장애가 대부분이고 섹스경험이 거의 없는 무부녀(無夫女)들은 성욕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성욕구 장애를 갖고 있다. 그런데 성욕구 장애를 병으로 인식하지 않고 성에 관한 자신의 선택이라고 강변할 정도가 되면 상태는 심각하다고 여겨진다. 재미있는 사실은 어느 자리에서 섹스가 화제가 되면 유부녀들은 진지하게 경청하는 분위기인 반면 성욕구 장애를 가진 여자는 회피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유부녀의 성욕감퇴는 상대 남편의 책임이 본인보다는 더 큰 것 같다. 왜냐하면 여성의 신체적 구조와 심리적 메커니즘이 훨씬 복잡하기 때문이다. 시각적으로 예민한 남자들이 쭉쭉빵빵이를 보고 하반신에 전기가 오를지는 몰라도 여자들의 반응은 다르다. 멋진 남자는 잠시 눈을 즐겁게 할 뿐이다. 그런데 예외적인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남편과 성생활이 명절 뒤에 먹는 빈대떡처럼, 혹은 밥통에서 며칠 묵은 밥처럼 되었을 때, 그녀는 묘하게도 남편과 전혀 다른 타입의 남자에게 눈을 반짝이기 마련이다. 주변의 얘기를 들어보면 권태롭고 짜증나는 부부생활의 이유가 비슷하다.(1) 아내의 감정과 컨디션은 무시하고 자신의 욕망에 몰두해 세수와 양치질도 안한 상태로 돌진해올 때 사는 게 지겹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2) 짐승처럼 육탄공격을 하면서 제대로 ‘야수’ 노릇도 못하고 맥 없이 제 볼일만 보고 쓰러져 코 골며 자는 순간, 아내의 마음은 착잡해지고 몸은 찌뿌드드해진다고 한다.(3) 영화나 비디오의 주인공은 부드러운 키스와 애무도 잘해주고 달콤한 말로 사랑한다는 말도 잘 하던데 남편이란 작자는 어쩌다, 그것도 술에 떡이 돼 와서는 장돌뱅이 장터국밥 말아먹듯 후다닥 뚝딱 해치우니 꼭지가 돈다는 것이다. 언젠가 내 친구가 남편에게 사랑하느냐고 물었더니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사랑 타령을 하느냐고 핀잔을 줘서 ‘하다’ 말고 싸웠다고 한다.(4) 남편과 섹스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어도 이상한 오해를 받을까봐 냉가슴만 앓고 있는 것이다.10년이 넘도록 한 번도 그런 대화를 한 적이 없고 자칫하면 남편의 열등감에 자극 줄까봐 입도 벙긋 못한다고 한다. 자기네는 오로지 ‘정상위’ 한가지로 버텼다는 것이다. 그거라도 잘하면 좋으련만….(5) 아직까지도 아내가 언제 월경을 하는지조차 모른다는 것이다. 늘 자신의 세계에만 몰두해 있으면서 아내가 여자라는 사실은 잊고 그냥 한 지붕 밑에 사는 동거인 취급을 하는 것 같아 결혼에 대한 회의가 인다고 한다. 내 후배나 친구들 중에도 섹스리스(sexless)로 사는 여자가 있다. 그녀 자신은 다른 데서 삶의 가치를 찾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것은 인생의 중요한 과제를 유기하는 것이지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부부간의 성문제가 이혼의 중요한 이유가 되는 이상 무작정 덮어두고 곪게 방치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성칼럼니스트 sung6023@kornet.net
  • [이집이 맛있대] 진짜 굴비를 찾아서 광주 치평동 ‘황복’

    [이집이 맛있대] 진짜 굴비를 찾아서 광주 치평동 ‘황복’

    예부터 굴비는 ‘밥도둑’으로 통한다. 짭짤하고 쫄깃한 맛에 취하면 밥그릇이 금세 비워지기 때문이다. 참조기를 전통적인 방법으로 염장한 뒤 해풍에 말린 영광 법성포 굴비는 수라상에 오른 진상품이었다. 이런 굴비맛을 도심에서도 즐길 수 있다. 광주시 서구 치평동 상무지구 ‘황복’은 이런 굴비의 참맛을 즐길 수 있는 도심의 굴비정식집이다. 법성포 굴비만을 고집하며, 조리방식이 독특해 아주 짜지 않으면서도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이 음식점은 산지에서 들여온 굴비를 7∼10일 동안 숙성시킨다. 이를 쌀뜨물에 2시간가량 담가 짠맛을 어느 정도 없앤다. 이 과정에서 육질도 씹기 알맞게 부드러워진다. 불의 세기도 굴비의 몸체에서 기름이 빠져 나오고 누릿하게 익을 정도로 조절한다. 굴비맛은 원재료가 크게 좌우한다. 이 음식점은 산란을 위해 서해안으로 회유하는 참조기가 음력 3월 중순쯤 영광 칠산 앞바다를 지날 때 잡은 것을 골라 쓴다. 알이 충실하고 황금빛 윤기가 나는 최상품이다. 이 때 잡힌 참조기는 1년 이상 간수가 빠진 천일염으로 염장한 뒤 서해에서 불어오는 하늬바람(북서풍)에 건조한다. 이런 굴비만을 사용해 만든 주메뉴는 ‘굴비 정식’이다. 정성스레 마련한 구운 굴비와 참돔·전복·광어 등이 어우러진 회가 추가로 딸려 나온다. 밤·무화과·대추 등을 안에 넣고 쪄낸 단호박, 녹두 빈대떡 등도 곁들여진다. 분말 녹차와 얼음을 띄운 찬물에 밥을 말아서 잘게 찢은 굴비를 고추장에 찍어 먹는다. 찬 음식을 싫어하는 사람은 장국물을 주문하면 된다. 주방장 김상협(42)씨는 “계절별로 굴비 종류를 다양화해 손님의 입맛에 맛게 요리를 내놓을 예정”이라며 “굴비 맛에 반한 단골 손님이 늘고 있다.”고 자랑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낭만·추억등 명동엔 多있다

    낭만·추억등 명동엔 多있다

    1950년대 명동은 서울 최고의 멋쟁이들이 모여드는 낭만의 거리였다. 동시대 예술가들이 모여 커피향에 취해 시를 읊은 문화의 거리이기도 했다.60·70년대 명동은 통기타 가수들이 노래하고 DJ들이 음악을 들려주던 청춘의 거리였다. 오늘날 명동은 하루가 지나면 간판이 바뀌는 소비의 거리가 됐다. 반면 수십년이 지나도 단골이 있는 상점이나 연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장소도 적지 않다. 골목골목마다 깃든 ‘명동의 추억’을 찾아 떠나보자. 글 사진 이두걸 김유영기자 carilips@seoul.co.kr 명동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지만 반대로 외국 음식 전문점들도 군데군데 있어 우리나라 사람들이 색다른 정취를 느껴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콴챈루(중국 대사관 거리)에는 중국 물품이나 잡지를 파는 서점들이 즐비하다. 여기에 일제시대부터 운영된 음식점들도 있어 서울의 ‘작은 중국’으로 불릴 만하다. 중국전통과자를 파는 도향촌(776-5671)은 해바라기씨·잣·호두가 들어간 십월전병을 개당 3000원, 대추·팥이 들어간 장원병은 개당 1500원에 판다. 원하는 재료를 말하면 직접 과자로 만들어주기도 한다. 산동교자(778-4150)는 쫄깃쫄깃한 만두피에 중국부추가 들어간 물만두(4000원)와 오향장육(1만 8000원)이 유명하다.3대째 운영하는 취천루(776-9358)는 다른 메뉴 없이 오직 만두만 팔 정도로 만두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고기만두 4500원. 일품향(753-6928)의 굴짬뽕은 얼큰하면서도 진한 국물맛이 일품이다. ●TAJ 60년대 최고의 경양식집으로 손꼽히던 ‘코스모폴리탄’자리에 들어선 인도음식전문점. 조미료를 포함한 식재료 전반을 인도에서 직접 공수해올 뿐만 아니라 인도 출신의 조리사들이 현지 조리기구인 탄두, 멧돌을 이용해 요리한다. 식사후 입냄새를 제거해 주는 아니스와 인도산 슈거를 섞어 먹는 것도 재미있다. 치킨커리·인디언브레드가 함께 나오는 점심메뉴는 1만원. 전통카레는 각각 1만 5000∼2만원선.(776-0677) ●신정 40여년 이상 운영한 징기스칸 요리 전문점. 주인이 직접 목장을 경영하면서 고기를 공급하기 때문에 신선한 육질을 자랑하는 게 특징이다. 과거 명동이 금융 중심가였던 만큼 금융인들이 여전히 많이 찾는다. 독특한 스타일로 오리구이를 개발해 노린내를 없애고 담백한 맛을 살렸다. 가격대는 비교적 높다. 국수전골 1만 3000원, 오리구이 4만 4000원.(776-0338) ●아오자이(AODAI)베트남 전통의상을 가리키는 아오자이는 맛이 담백하면서 시원해 숙취해소에도 좋다. 주인이 직접 미국에서 베트남 요리 전문가에게 전수받았다. 베트남 쌀국수·볶음밥·닭고기 석쇠구이가 함께 제공되는 세트메뉴는 1만 2000원으로 한꺼번에 맛볼 수 있다. 디저트로 제공되는 베트남 커피는 일반 커피와 비교하는 재미도 있다.(754-1919). ■ 짠돌이 데이트족의 천국 쇼핑의 천국으로 알려진 명동이라지만 쇼핑과 무관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들도 많다. 특히 짠돌이 데이트족들에게 적합한 장소들을 추천한다. 유네스코 건물 2층에 있는 미지센터(서울청소년문화교류센터·755-1024)는 국내·외 최신잡지·간행물, 세계 문화를 탐구하는 책이 갖춰졌다. 인터넷이나 DVD자료, 음악감상, 보드게임 등도 즐길 수 있어 복합문화공간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같은 건물 옥상인 12층 작은누리(755-1105)에 들어서면 야생덤불숲, 풀꽃동산, 연못 등이 어우러진 마당이 펼쳐진다. 중국대사관에서 덕수궁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생태공원이다. 남산에서 날아온 새들도 볼 수 있다. 평일 오전 10시∼오후 4시에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다. 2호선 을지로입구역에서 이어지면서 웅진 건물 지하 1층에 있는 서점 리브로(757-8100)는 혼잡하지 않아 약속장소로 알맞다. 레코드점과 문구점도 있다. 아바타 지하 1층·1층에 위치한 인테리어 전문점 코즈니(3783-5069)는 아기자기한 소품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공주침대를 배경으로 사진 찍는 디카족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지하서점에서는 최신 잡지들을 앉아서 볼 수 있다. 명동성당(774-1784) 뒤편의 작은 정원에는 벤치가 있다. 평온한 분위기에서 울창한 나무를 바라보며 자판기 커피를 뽑아먹는 것도 좋다. 성당 입구 화장실은 가게 등에 딸린 화장실과 달리 볼일이 급할 때 눈치보지 않고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곳이기도 하다. 디 아모레 스타(709-6361)에서는 태평양의 기초·색조제품·매니큐어 등을 무료로 써볼 수 있으며 4층에서는 부정기적으로 전시회가 열린다. 대한음악사(776-0577)는 40여년째 명동을 지키고 있는 클래식 음악 전문 서점. 다섯평 남짓한 매장 벽에 악보가 빼곡이 쌓여 있다. 독일, 오스트리아 등 외국 악보는 물론 재즈, 팝 등 다양한 장르의 악보를 갖추고 있다. 이곳에 없는 악보는 국내에서 구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명동 섬 ‘섬’이라는 술집 이름은 보통명사다. 신촌, 인사동 등에도 있지만 주인은 다 다르다. 하지만 90년대 이전 대학가의 낭만이 넘치는 카페라는 점에서는 쌍둥이다.10평도 못 되는 2층 규모라 좁은 편. 그러나 맥주를 기울이며 옛 노래들을 듣고 있노라면 낯선 이들도 어느새 술친구가 된다. 기타와 전자피아노도 갖추고 있어 주인 아저씨와 ‘선수’ 손님들의 즉흥 연주와 빼어난 노래도 운 좋으면 만날 수 있다.‘공식적’인 영업시간은 오후 7시부터 오전 2시까지.756-0582. ●데바수스 2003년에 생긴 독일전통 맥주집이다. 라거 맥주인 헬레스, 밀맥주인 바이젠, 흑맥주인 둥클레스 모두 500㏄가 6000원으로 조금 비싸지만 매장에서 직접 제조한 독일식 맥주를 맛볼 수 있다. 독일식 특선 수제 소시지와 감자, 양배추 절임 등이 곁들인 모듬소시지(2만5000원)도 일품이다. 해산물 볶음밥, 마늘안심스테이크 등 식사도 할 수 있다.3783-4568,4321. ●명동골뱅이 40년 전통의 골뱅이 전문점. 이름 그대로 대구포와 오이, 양파, 대파를 넣고 고춧가루로 양념한 쫄깃쫄깃한 골뱅이무침이 ‘대표 선수’다. 늦은 오후부터는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붐빈다. 푸짐하고 담백한 계란말이도 요기와 술안주로 제격이다. 골뱅이 1만 5000원, 계란말이 1만원. 생맥주 500㏄ 3000원이다.778-1659. ●할머니국수집 외 식당 외관은 여느 분식집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국수맛은 국내 최고 수준이다. 비결은 질 좋은 멸치를 푹 끓여낸 뒤 고추장 양념을 한 국물맛에 있다. 얼큰하면서도 시원한 맛이 일품이다. 일반 국수보다 두꺼운 면발에서 쫄깃쫄깃한 맛이 더욱 살아난다. 할머니국수 2500원, 두부국수 3000원.778-2705. 명동막국수와 할렐루야칼국수에서도 저렴하면서도 맛있는 면요리를 즐길 수 있다. ●명동교자 칼국수 하나로 명성을 얻었다. 일본 등에도 널리 소개되면서 외국인이 내국인보다 더 많을 때도 있다. 담백한 면발에 걸쭉한 육수, 그리고 고소한 만두가 하나로 어우러져 진한 맛을 낸다. 시원한 맛의 바지락칼국수와는 다른 면에서 일가를 이뤘다. 마늘이 듬뿍 들어간 김치도 일품. 밥도 공짜로 준다. 만두도 웬만한 전문집보다 낫다. 가격은 모두 6000원.776-3424. ●고궁 비빔밥이 유명한 전주전통음식점. 쇠고기 사골 육수로 만든 밥에 육회, 은행, 잣, 호두, 육회, 애호박나물, 시금치, 도라지 등이 맛깔스럽게 얹혀 나온다. 모든 재료를 매일 전주에서 직접 들여와 신선하다. 놋그릇에 나와 식사를 끝낼 때까지 따뜻한 비빔밥을 먹을 수 있다. 일본인 관광객들이 유난히 많이 찾는 게 특징. 전주비빔밥 7000원·녹두빈대떡 1만 3000원.776-3211. ●평래옥 평안도에서 내려왔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 명동 중앙극장 맞은편 1·2층에서 영업하고 있는 냉면집이다. 이 집은 특이하게도 닭국물로 육수를 우려낸다. 주 요리도 초계탕이다. 삶은 뒤 시원하게 식힌 닭살과 메밀향 강한 국수, 그리고 계란, 오이, 배 등을 육수에 내온 보양식이다. 하나를 시켜 둘이 먹을 수 있다. 녹두빈대떡도 웬만한 집보다 낫다. 가격은 초계탕이 1만3000원. 녹두빈대떡은 6000원. 꿩냉면과 육계장 등 식사류가 5000원대로 명성에 비해 가벼운 편이다.2267-5892. ●금강섞어찌개 시원하면서도 얼큰한 찌개를 내오는 것으로 명성을 얻었다.70년대 찾았던 손님들이 자녀들과 함께 찾을 정도로 한결같은 맛을 내고 있다. 간판 메뉴는 섞어찌개. 오징어, 돼지고기와 함께 고추, 배추 등을 넣고 보글보글 끓는 모습만 봐도 군침이 가득 돈다. 부대찌개, 곱창전골, 해물전골 등도 인기를 끈다. 라면 등 사리도 넣을 수 있다. 찌개는 5500원, 전골은 7000원 선.778-6625. ●명동돈가스 1983년 문을 열었다. 호텔 돈가스보다 훨씬 맛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20년이 넘게 유명 인사부터 10대까지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다. 바삭바삭한 튀김 옷에 두꺼운 육질이 씹히는 맛이 그만이다. 우리 입맛에 맞는 소스와 아삭한 야채 맛도 빼놓을 수 없다. 추천 메뉴는 돈가스 살 속에 피자치즈와 피망, 양파 등의 야채를 듬뿍 넣은 코돈부루. 가격은 6500원∼1만2000원까지 다양하다.776-5300. ●따로집 30여년 된 명동의 명물 해장국집이다.24시간 이상 푹 고아낸 사골 국물에 고추장으로 양념을 해 시원하면서도 얼큰한 국물 맛이 일품이다. 거기다 소고기와 선지, 콩나물 등이 푸짐하게 들어가 6000원의 가격이 아깝지 않다. 모듬전, 고추전 등을 안주 삼아 소주 한잔 걸쳐도 그만이다.755-2455. ■ ‘돌고래 2004’ 사장 신경무씨 70년대까지만 해도 명동은 문학과 음악과 술이 넘쳐흐르는 ‘문화의 거리’였다. 그 중심에는 쉘부르 등과 함께 시대를 풍미하던 음악다방 ‘돌고래’가 있었다. 돌고래는 ‘명동백작’ 소설가 이봉구씨의 단골 ‘은성주점’ 자리에 둥지를 텄다. 청춘들은 이종환씨 등 당대 최고의 DJ가 들려주던 음악으로 시대의 아픔을 달랬다. 전축의 보급에 따라 자취를 감추었던 돌고래는 지난해 12월 다시 문을 열었다. 그 이름은 ‘돌고래 2004’. 중앙대 록그룹 블루드래곤 보컬리스트 출신인 사장 신경무(35)씨가 명동에서 유일하게 밴드의 라이브 연주가 가능한 카페로 다시 꾸몄다. 신씨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 사원이다. 일종의 ‘투잡족’인 셈이다. 업무 스트레스를 노래로 풀다가 음악인의 꿈인 라이브 카페를 아예 차렸다. 이곳의 주된 레퍼토리는 올드팝이다. 그러나 화요일은 모던록, 수요일은 퓨전재즈 등 다양한 장르의 밴드가 출연한다. 신씨도 자주 직접 기타를 잡고 무대에 오른다. 웬만한 곡은 다 소화하는 ‘준프로’다. 오후에는 그날 볶은 원두커피도 3000원에 내온다.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을 어색해하는 30·40대 손님들을 위한 배려다. 대학 동아리 후배들이 연주는 물론 서빙까지 도맡는다. 넘치지 않으면서도 섬세한 서비스가 가능한 이유다. 맥주는 4000원선. 안주는 1만 5000원∼2만원선이다. 번잡한 분위기를 피하기 위해 저렴한 생맥주는 내놓지 않는다. 신씨는 “낭만이 살아 숨쉬던 명동에서 음악의 숨결을 다시 불어넣는 공간으로 돌고래를 키워나갈 것”이라고 말했다.777-0440.
  • 스님도 담넘는다는 ‘불도장’

    스님도 담넘는다는 ‘불도장’

    오는 14일은 말복.더위에 지친 몸을 위한 보양식을 찾을 때다.입맛 없는 여름철에 몸을 보할 수 있는 건강식으론 흔히 삼계탕이 꼽히지만 여름 보양식의 으뜸은 단연 불도장(佛跳牆,호티아오치앙)이다.불공 드리던 스님도 그 냄새에 이끌려 담을 뛰어넘는다는 불도장.그 깊은 맛과 멋의 세계에 빠져보자. 글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사진 도준석기자 pado@seoul.co.kr ●광둥성 지방의 고급요리 불도장은 원래 중국 광둥 지방의 고급요리다. 한국에서는 10여년 전부터 특급호텔 중식당을 중심으로 확산돼 지금은 웬만한 고급 중국 레스토랑에서도 불도장 맛을 볼 수 있다. 불도장 요리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중국 청나라때 푸젠성의 한 관원이 집에서 연회를 열었는데, 그의 부인이 20여 가지의 각종 고기를 소흥주 항아리에 채운 뒤 한참을 고아 요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를 맛본 사람들은 크게 감탄했고, 훗날 정춘발이라는 요리사가 그 부인으로부터 비법을 전수받았다. 그는 특히 해산물을 많이 써 맛과 향을 보탰다. 불도장 요리는 이렇게 진화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하늘과 바다와 땅의 합작품 불도장의 재료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다양하고 진귀하다. 몸에 좋은 것은 거의 다 들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울프라자호텔 중식당 ‘도원’에서 23년동안 일해오고 있는 조리장 유방녕(49)씨는 이렇게 말한다.“불도장에 이것은 꼭 들어가야 한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육·해·공, 즉 들짐승과 해산물, 날짐승이 모두 들어간다고 할 수 있지요.”‘도원’에서는 돼지고기 힘줄, 도가니, 관자, 전복, 해삼, 상어지느러미, 오골계 등을 주된 재료로 사용한다. 또 자연송이와 표고버섯 등이 1인분에 한 두 쪽씩 들어간다. 이밖에 은행, 인삼, 동충하초, 산약, 녹각 등 약재도 곁들인다. 불도장에 쓰이는 재료는 각 중식당의 전통이나 주방장의 특성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재료의 양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다.‘도원’에서는 사용하지 않지만 죽순, 양 허벅지, 돼지발굽 힘줄, 부레, 사슴 힘줄, 상어 입술, 돼지내장, 비둘기알, 오리, 조개, 새우 등이 들어가기도 한다. 불도장 재료 중에는 국내에서는 유통 자체가 불법인 것들도 적지 않다. ●소흥주로 맛낸 찜 혹은 탕 불도장의 조리법은 간단한 편이지만 상당한 정성이 필요하다. 유 조리장은 자신의 불도장 조리법을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불도장은 찜과 탕의 중간 단계다. 불도장 재료를 토기에 담고 노계(老鷄)를 이틀 정도 고아 만든 육수를 채운다. 늙은 닭을 쓰는 것은 그 육수가 진하기 때문이다. 소금과 소흥주를 넣고 180도쯤 되는 펄펄 끓는 찜통에서 5∼6시간 동안 흠뻑 쪄낸다. 그렇게 하면 건더기는 흐물흐물해지고, 바닥에는 그야말로 진국만 남는다. 조리의 핵심은 영양소가 파괴되는 것을 막는 일. 요리할 때 ‘숨쉬는 그릇’, 즉 토기를 사용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코냑 한 방울의 여유와 미학 불도장은 다른 음식에 비해 재료가 고급이고 다듬는데 손이 특히 많이 간다. 정성으로 똘똘 뭉친 음식이다. 불도장을 먹을 때는 굴소스 원액에 홍초와 생강즙을 첨가한 불도장 소스를 찍어 먹어야 그 맛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코냑을 한 방울 떨여뜨려 먹기도 한다. 그러면 해산물 특유의 냄새가 줄어든다. ■ 어디서 먹을까?서울프라자호텔 ‘도원’(02-310-7345)에서는 불도장을 1인분에 6만 5000원(세금, 봉사료 별도)에 판매하고 있다. 불도장이 포함돼 있는 봉황(1인 19만원)과 도원(1인 26만원)등 두 가지 코스요리도 마련돼 있다. 서울프라자호텔이 운영하는 서울역사 4층에 위치한 캐주얼 중식당 ‘티원’(02-392-0985)에서는 9월까지 한시적으로 불도장 세트 메뉴를 5만원(1인분, 세금별도)에 판매한다. 서울 밀레니엄 서울힐튼에서는 중식당 ‘타이판’(02-317-3237)의 불도장(1인 6만원, 세금·봉사료 별도)외에 캘리포니아 레스토랑 실란트로(02-317-3062) 뷔페에서도 불도장이 있다. 점심 4만 2350원, 저녁 4만 4770원(세금·봉사료 포함)이다. 불도장으로 유명한 일반 중국 레스토랑으로는 종로구 부암동 하림각(02-396-2442·1인 6만원·부가세 포함)과 강남구 역삼동 대려도(02-555-0550·1인 9만원·부가세 별도)가 있다. ■ ’서울 광화문 장뚜가리’ 퓨전 한식당 ‘장뚜가리’ 세종문화회관점은 국내에서보다 외국에서 더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음식점이다. 이 집에서 파는 ‘김치감정’과 ‘12오겹살’의 맛에 매료돼 일본 관광객은 물론 주변 외국계 회사에 근무하는 외국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최근에는 일본 아사이 TV에 ‘한국의 맛집’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이 집이 원조 맛집들이 즐비한 광화문에서 새로운 ‘외식 코드’로 자리잡은 비결은 젊은 감각에 맞춘 깔끔한 맛과 분위기에 있다. 강원도 사투리로 ‘장독’을 의미하는 장뚜가리의 대표 메뉴는 ‘12오겹살’. 오겹살의 두께가 자그마치 ‘12㎜’에 이르는데 이 두께가 가장 맛있는 오겹살 두께라고 한다. 일반 오겹살의 두께가 5㎜안팎인 것과 비교해 두배이상 두껍다. 고기도 수입산에 비해 2배 이상 비싼 최고 품질의 국내산 돈육만 고집한다. 무엇보다 돼지고기 특유의 비린내가 없다는 게 장점이다. 고기를 굽기 전에 파인애플과 양파로 비린내를 제거한 뒤 아삭한 김치와 함께 구워 곁들여 먹는 맛이 일품이다. 오겹살의 고소한 맛의 여운이 입안에 오래 감돌아 감칠맛을 낸다. 김치는 전남 순창과 광주에 주문 제작해 가져온다. 무공해 유기농으로 재배된 배추를 원료로 하여 전통적인 방법으로 담아 1년 이상 숙성된 묵은 김치다. 김치감정은 조선시대 궁중 수라간에서 왕을 위해 만든 매운 김치찌개의 맛을 재현해 낸 것이다. 잘 익은 김치를 사용해 조미료를 넣지 않았으며, 담백한 맛을 내기 위해 멸치로 다시 한번 국물을 우려냈다. 찌개에 돌솥밥이 곁들여 나오는데 시원한 맛이 느껴진다. 여기에 살얼음 동동주와 김치치즈계란말이를 함께 먹으면 무더위쯤은 시원하게 날려버릴 수 있다. 모든 메뉴를 이 집 사장인 유성호(38)씨가 직접 고안해 낸 것이다. 유씨는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영국 유학시절 한식당 주방에서 아르바이트한 경험을 살려 2년간 전국을 돌며 김치와 돼지고기의 맛을 찾아다녔다.12오겹살은 직접 1∼20㎜까지 잘라 구워 먹으며 수십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찾아낸 것이다. 김치도 유씨가 직접 맛을 보고 선별한다. 장뚜가리 1호점인 광화문점을 외국계 은행에 다니던 부인 김지현(35)씨에게 맡기고 최근 이곳에 2호점을 오픈해 운영하고 있다. 유씨는 음식은 비법이 아니라 과학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철저한 맛에 대한 연구와 분석, 여기에 정성을 더하면 새로운 전통 맛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말했다.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충남 당진군 ‘게눈 감추듯’ 간장게장은 ‘밥도둑’이다. 입맛에 착착 당기는 이 한 가지만 있어도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기 때문이다. 충남 당진군 송악면 고대리 내도(안섬)에 이처럼 밥을 해치우는 것을 묘사한 ‘게눈 감추듯’이라는 간판을 내건 간장게장 집이 있다. 주인 이은순(48)씨는 “집에서 20년간 간장게장을 담가 먹어왔는데 맛을 본 이웃들이 ‘맛있다. 음식점 한번 내봐라.’고 해서 1년3개월 전 게장 전문점을 차렸다.”고 말했다. 뛰어난 맛은 담글 때의 비법도 있지만 원료가 좋기 때문이다. 주인이 해마다 5월 인근 포구나 태안 안흥항 등에서 알이 꽉 찬 꽃게만을 골라 사온 뒤 냉동시켜 1년 내내 쓴다. 냉동시켜야 게장을 담글 때 살이 빠져나가지 않고 질기지가 않다. 비린내도 안 나고 맛이 좋아지는 점도 있다. 냉동게를 꺼내 8시간쯤 내놓으면 자연히 녹는다. 이를 제조한 간장에 통째로 담가 냉장고에서 3일간 숙성시킨다. 게장을 담그는 간장은 감초, 월계수잎, 참숯, 양파, 파, 마른 고추 등을 넣고 3∼4시간 졸인 뒤 식혀 만든다. 참숯과 감초는 혹시 남아 있을 비린내를 최대한 없애기 위해 넣고 있다. 숙성된 게장은 잘라서 손님상에 올린다. 다른 양념을 넣지 않아 순수한 게장맛이 나지만 매운 맛을 즐기는 이에게는 청양고추를 썰어 넣어주기도 한다. 꽃게도 국산이나 곁들여 나오는 녹두빈대떡, 머위무침, 늙은오이무침 등 밑반찬 원료도 모두 직접 가꾼 것이다.1인분에 꽃게 한 마리가 들어간다. 구수한 된장찌개와 돌솥밥이 함께 나온다. 아직은 덜 알려져서인지 주말보다 평일에 손님들이 많다. 인근 직장인들이 평일에 찾아서다. 이 집은 50m 거리에 ‘대현수산’이라는 수산물 판매점도 운영, 산 꽃게와 주꾸미, 낚지 등을 시중보다 20%쯤 싸게 살 수 있다. 지금은 금어기로 9월 들어서야 구입이 가능하다. 게다가 70m 앞이 바닷가여서 시원스럽게 펼쳐진 바다를 볼 수 있는 점은 이 집을 찾는 또 하나의 덤이다. 당진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자연과 예술 찾아 여행 떠나볼까?

    ■ 공주 미술전 마을 주민들이 자연을 이용, 직접 자연속에 미술작품을 만들어 인간과 환경간의 조화를 생각케 하는 ‘예술과 마을’전이 5∼20일 충남 공주시 신풍면 동원1리 원골마을에서 펼쳐진다. 올해로 9번째를 맞는 야외 미술전에는 주민 76명과 국내 자연미술작가 50명 등 126명이 참가해 150여점의 미술작품을 마을입구와 개울, 담, 논밭, 숲 등에 설치한다. 재료는 농촌에 흔히 있는 밀짚모자, 삼태기, 짚, 헌옷 등이다. 행사기간 중에도 주민들이 창작품을 만들고 관람객들도 자신이 준비하거나 마을이 제공하는 재료로 작품을 직접 만들 수 있다. 올해부터는 마을에서 민박도 할 수 있다. 마을에서는 또 관람객들에게 칼국수와 빈대떡 등을 싸게 제공하고 주민들이 생산한 표고버섯, 고추, 옥수수, 잡곡 등을 저렴하게 판매한다. 이 마을은 올해 공주시로부터 ‘테마마을’로 지정되면서 나온 2억원을 재원으로 연중 전시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드는 데 사용할 계획이다. 지금까지는 행사가 끝나면 작품을 모두 철거했다. 행사 홍보부장을 맡고 있는 주민 이성진씨는 “내년부터는 관람객들이 마을의 논밭이나 냇가에서 손수 채소를 가꾸거나 가재를 잡아보는 체험행사도 마련할 계획”이라고 말했다.(010-3944-2881) 공주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춘천 인형극제 2005 춘천인형극제(www.cocobau.com)가 오는 9∼15일 춘천인형극장과 육림랜드 등 시내 곳곳에서 열려 동심을 사로잡는다. 올해로 17회째를 맞는 춘천인형극제는 ‘초록아띠’를 주제로 해외 7개국 8개 극단과 국내 68개 극단이 참가해 모두 200여회의 다채로운 인형극 공연이 펼쳐진다. 특히 올해 춘천인형극제 개막 거리 퍼레이드는 일반인들도 함께 참가할 수 있도록 꾸밀 계획이다. 매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코코바우열차’가 14일 청량리역과 춘천을 왕복하며 하루동안 인형극을 만들어 공연하는 ‘번개인형극’등이 꾸며진다. 축제기간 중인 10∼14일 매일 오후 8시 국악 색소폰 재즈 등 다채로운 장르의 공연을 감상할 수 있는 공연이 펼쳐지며, 인형극 교육의 현황을 살펴볼 수 있는 포럼, 아마추어 인형극인들을 위한 다채로운 워크숍 등이 마련된다. 개막식은 축제 당일인 9일 오후 8시 춘천인형극장 축제무대에서 열려 ‘초록아띠’가 공연되며 세계적인 불꽃예술가 피에르 알랭 위베르(프랑스)가 환상적인 불꽃놀이를 선사한다. 춘천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 강원 춘천 ‘유포리막국수’

    강원 춘천 ‘유포리막국수’

    “찌는 듯한 삼복더위에는 시원한 물막국수 한그릇이 제격입니다.” 막국수의 고장 강원도 춘천에서 35년전통의 ‘유포리 막국수집’을 모르는 사람은 이곳 사람이 아니다. 소양강댐 인근의 한적한 시골에 위치해 있지만 이곳 막국수에 맛들인 사람들은 다른 곳을 찾지 않는다. 시원한 동치미국물과 김, 양념간장만으로 담백하게 손님상에 내는 이곳 막국수의 맛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의 입맛을 자극하는 달고 느끼한 조미료를 섞어 내는 퓨전 막국수와는 거리가 먼 ‘단순한’ 맛으로 승부하지만 늘 손님들로 북적인다. 평일에도 예약을 해야 제시간에 먹을 수 있다. 우선 이곳의 막국수는 양이 많다는 것이 특징이다. 시골인심이 듬뿍 묻어난다. 그래서 나이드신 손님들이 더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또 숭덩숭덩 썬 무와 함께 얼려서 육수로 내는 동치미국물은 적당히 삭혀 감칠맛을 더한다. 막국수에 고명으로 올라오는 것도 김과 양념간장이 전부다. 이렇게 올라온 막국수에 동치미국물을 붓고 식초와 겨자, 설탕을 살짝 뿌려 한입 먹으면 신선이 부럽지 않다. 반찬으로 열무김치 맛도 일품이다. 더구나 막국수의 원료인 메밀은 고혈압과 당뇨병 등 현대 성인병의 예방과 치료효과까지 있다니 건강식으로도 제격이다. 더구나 물 맑고 공기 좋은 강원도 춘천의 한적한 시골풍경속에서 먹는 막국수맛이란 어디와도 견줄 수 없다. 술과 고기, 스트레스에 찌든 도시인들은 한번쯤 찾아 봄직하다. 이 곳에서는 내는 메뉴는 물막국수(4000원)외에 돼지고기 편육(7000원), 녹두 빈대떡(4000원), 감자부침(4000원), 직접 만드는 촌두부(3000원), 직접 담그는 동동주(5000원)가 있다. 막국수집 주인 황남중(48)씨는 “어머니때부터 수십년동안 손끝으로 만들어 내는 막국수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 춘천에서는 막국수의 원조로 더 잘 통한다.”고 말했다. 춘천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 [교원평가 어떻게-릴레이 인터뷰] (1) 이원희 교총 수석부회장

    [교원평가 어떻게-릴레이 인터뷰] (1) 이원희 교총 수석부회장

    최근 교원평가제를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교육인적자원부는 늦어도 이달 말부터 시범실시에 들어가야 한다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반면 교원단체들은 충분한 논의를 거쳐 신중하게 도입해야 할 제도라며 교육발전을 위한 범국민협의회부터 구성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학부모단체는 학부모의 실질적인 참여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원평가에 대해 교원단체와 학부모단체, 교육부의 생각을 차례로 들어본다. “교육부는 당장 범국민협의회를 구성해 신중한 논의를 시작해야 합니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이원희 수석부회장은 “교원평가제 도입을 둘러싸고 더 이상 소모적인 논쟁을 해서는 안 된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정해진 일정에 따라 시행을 서두르다 보면 부작용은 물론 교육계 전체가 파탄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우리가 교원평가제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평가받을 것은 받아야 하지만 교육부의 시안대로라면 부작용이 너무 많다고 했다. 특히 학부모와 학생의 참여에 대해서는 지역이나 학교·교사 자율에 맡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학교 자율에 따라 1년에 한두 차례의 설문조사 형태로 학부모나 학생이 참여하는 방식이라면 굳이 이를 획일적으로 규정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교육부안대로면 부작용 너무 커 “교육은 공부만 잘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때에 따라서는 나무라기도 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가르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육부의 시안대로라면 인기 위주의 수업으로 흐르거나 동료 교사들끼리도 보여주기식 수업 때문에 위화감만 생길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는 수업의 질을 높이고 교사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서라면 이같은 방식으로는 안 된다고 못박았다. 일단 교사 자율로 평가하도록 하되, 교원을 늘리고 수업시간을 줄이는 등 제도적인 지원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근평 보완 부적격교사 퇴출을 그는 이른바 ‘부적격 교사’의 퇴출 방안에 대해서도 교육부를 비판했다.“성적조작이나 문제지 유출 등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당연히 처벌받아야 합니다. 문제는 학부모들이 보기에 ‘문제 있는 교사들’을 평가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 역시 현재 근무평정제도를 보완하는 규정을 만들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는 “현재 근평을 그대로 두고 부적격교사에 대한 퇴출방안을 별도로 마련하게 되면 혼란만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이 부회장은 대안을 제시했다. 지금부터라도 교육부와 교원단체와 학부모단체, 시민단체, 학생 대표 등이 모두 머리를 맞대고 의견 차이를 좁혀보자는 것이다. 그는 “교육발전을 위한 범국민협의회를 구성해 합의되는 부분부터 시범 실시해보고, 주장이 다른 부분은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합의해 시행해도 늦지 않다.”면서 “시간에 쫓기듯 도입해서는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우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재천기자 patrick@seoul.co.kr
  • 명동 상인들 “장사안돼 간판 바꾸기 바빠”

    명동 상인들 “장사안돼 간판 바꾸기 바빠”

    경기가 좀체 풀리지 않으면서 한동안 상승세를 탔던 소비기대심리도 푹 꺼지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현장의 체감경기는 의외로 냉랭하다. 서울 강북에서 10평 규모의 호프집을 운영하고 있는 A씨는 “경기가 나아졌다는 뉴스가 가끔 TV에 나오는데 그때마다 TV를 부수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해 월 매출은 300만원을 넘었는데 올들어서는 이보다 훨씬 못미친다고 털어놨다. 그는 이어 “이달에 임대기간이 끝나 호프집을 처음에 인수한 권리금 2000만원의 절반인 1000만원에 내놓았는데 보러 오는 사람이 없다.”고 한숨지었다. ●“기대했던 여름특수도 실종될 판” 그나마 괜찮다는 할인점과 백화점도 사정은 비슷하다. 경기도의 한 신설 할인점 관계자는 “이미 들어서 있는 점포는 전년 대비 매출증가율이 물가상승률을 약간 웃도는 4% 수준”이라면서 “그나마 크게 꺾이지 않은 게 고마울 뿐”이라고 밝혔다. 필요한 물건을 한꺼번에 사가거나 끼워주기를 하지 않으면 사지 않는 고객의 소비 행태도 매출이 늘지 않는 요인이라고 말한다. 여름철 특수상품인 에어컨 판매도 줄곧 늘다가 7월부터 더위가 없을 것이라는 기상청 발표 이후 확 줄어들고 있다. 신세계백화점(전국 기준)은 4월 매출이 전년 대비 2.3% 증가에 그쳤다. 재래시장인 남대문시장은 더 죽을 맛이다. 시장안에서 300석 규모의 ‘명동삼계탕’을 운영하는 이모(58)씨는 “더위가 일찍 찾아와 올해 여름은 장사가 좀 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텅텅 비기 일쑤”라면서 “외국인 손님을 끌기 위해 외국인 아르바이트생을 구해 점심 때 입간판을 내걸어도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 ‘유행 1번지’ 명동의 가게들은 하루가 다르게 간판을 바꿔달고 있다. 일본이나 중국 관광객들을 겨냥해 발빠르게 변신하는 측면도 있지만 이런저런 가게를 열어도 장사가 안돼 한 달이 멀다하고 가게 문을 닫아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까지 명동의 한 3층짜리 건물에는 전통죽집과 빈대떡집, 성형외과가 들어섰지만 최근 죽집과 빈대떡집이 문을 닫아 건물은 폐허처럼 변했다. 성형외과 원장은 “두 음식점이 폐업하는 바람에 우리 병원도 문을 닫은 줄 알고 손님들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여의도는 말이 없네(?) 서울 여의도 증권사 건물들이 몰려 있는 지하철 5호선 여의도역 근처. 한식당 ‘초정’을 운영하는 박일국(45)씨는 “요즘 경기요? 이제는 그러려니 합니다.”고 운을 떼었다. 2000년 5월쯤 다니던 은행을 그만두고 자그마한 식당을 차린 박씨는 “IMF사태 이후에는 한 달을 벌어 집세와 종업원 월급 등을 주고도 600만원 정도를 손에 쥐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절반인 300만원 벌기도 빠듯하다.”고 말했다. 직장생활 12년째인 S증권 김모(40) 차장은 ‘라이터 지수’라는 생소한 말을 꺼냈다. 김 차장은 “외환위기 직후 경기가 살아났을 때 증권가 근처의 술집 여종업원들이 거리에 나와 직장인들에게 일회용 라이터를 나눠주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면서 “한창 라이터를 돌릴 때 지수가 100이라면 지금은 20정도 되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그나마 지방은… 부산 범일동의 부산진시장 번영회 박기호 총무과장은 “소비심리가 다소 살아나면서 전반적으로 작년대비 매출이 약간 상승 추세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은행 부산지점 천병철 차장은 “지난 4월 부산지역 경기지표 증가율은 7.9%로 지난 3월과 비슷한 추이를 나타내고 있다.”면서 “전국에 비해 경기하락이 상대적으로 낮은 것은 제조업 비율이 낮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물 경기가 안 좋지만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율이 15%에 불과해 충격이 덜하다는 얘기다. 롯데백화점 홍보실 조재민 계장은 “백화점은 매출이 다소 신장됐다. 여름성수기를 앞두고 에어컨 등 냉방제품 수요가 다소 증가했고 소비심리가 약간씩 살아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재래시장은 수도권과 비슷하다. 광주 양동시장의 경우 비수기로 접어들면서 울상이다. 양동시장㈜ 김영식(59) 전무는 “가을·겨울에는 시제와 혼수용품으로 그런대로 장사가 되지만 날씨가 더워지면 손님이 뚝 떨어지고 지난해에 비해서도 달라진 게 없다.”고 말했다. 부산 김정한·광주 남기창·서울 전경하 이창구 장세훈기자 window2@seoul.co.kr
  • 부시, 캘빈대졸업식서 곤욕 이라크전 항의 침묵시위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또 한차례 곤욕을 치렀다. 부시 대통령은 21일(현지시간) 미시간주 그랜드 래피즈의 기독교계 캘빈대학 졸업식에 참석해 졸업생들의 적극적인 사회활동 참여를 독려하는 축사를 했지만 일부 교직원과 학생들이 벌인 반대시위 탓에 빛이 바랬다고 CNN이 보도했다. 부시 대통령은 축사에서 “여러분 세대가 세계에서 어떤 역할을 맡을 때 여러분 모두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며 “구경꾼이 될 것인가, 아니면 시민이 될 것인가를 결정하고 이 세계에서 무언가를 하고자 한다면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예배는 물론 학부모회 같은 단체나 로터리 클럽, 심지어 정원손질 클럽 같은 곳에라도 참여할 것을 권했다. 연설 도중 그는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 지난 1835년 펴낸 책 ‘미국의 민주주의’를 인용,“미국의 성공 비밀은 공동의 선을 위해 국민의 역량을 한 곳에 결집시키는 능력에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연설하는 동안 졸업생과 교직원의 약 20%는 “신은 민주당이나 공화당이 아니다.”라고 적힌 스티커를 가슴에 단 채 침묵시위를 벌였다. 또 일부 졸업생은 부시 대통령이 소개될 때 항의 표시로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앞서 21일 지역신문 ‘그랜드 래피즈 프레스’에는 이 대학 직원 중 3분의 1이 서명해 부시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이 광고 형식으로 실렸다. 이 서한에서 교직원들은 기독교도로서 이라크 전쟁 등 부시 대통령의 정책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건강칼럼] 여름과 다이어트

    여름, 노출의 계절이면 여성뿐 아니라 남성들도 아랫배를 쓸며 권상우의 몸매를 생각하게 된다. 아랫배는 몸매만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복부나 내장비만을 초래하며,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심장병과 암 등 무서운 질병의 지표가 되기도 한다. 또 유방암과 대장암, 전립선암 증가와도 관련이 있다. 어디 이뿐인가. 청소년이나 어린이의 당뇨와 고혈압이 빠르게 증가하는 것도 비만과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다이어트가 많은 관심을 모으는 세상이 됐다. 방법도 민간요법부터 약물요법, 지방흡입술, 지방분해술, 메조테라피까지 세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하다. 방법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치료가 어렵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주변에 많은 다이어트 방법이 알려져 있지만 어떤 방법이든 간과할 수 없는 3원칙이 있다. 첫째는 건강을 지켜주는 식습관과 세 끼 꼭 챙겨먹기. 둘째는 하루 30분 이상씩 큰 걸음으로 빨리 걷기. 셋째는 필요한 비타민이나 과일 챙겨먹기가 그것이다. 단식이나 원푸드(one-food) 다이어트의 문제는 영양 불균형으로 몸을 망치기 쉽다는 것이다. 영양 부족은 폭식증이나 거식증을 유발, 요요현상을 불러 더 살이 찌게 하거나 치명적으로 건강을 해친다. 필자를 찾은 한 여학생은 단식 후유증으로 거식증이 생겨 생리까지 끊긴 상태였다. 고기를 먹으면 안된다는 잘못된 다이어트 지식을 맹신해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다행히 꾸준한 치료 덕분에 겨우 정상을 회복했으나 지금도 안심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다. 성경에 예수가 물고기와 호밀빵을 나눠주는 대목이 있다. 호밀빵은 도정이 덜돼 당지수가 낮기 때문에 흰빵보다 흡수가 늦고 식이섬유가 많아 비만 예방에 좋다. 또 생선은 칼로리가 낮고 불포화지방산과 단백질, 미네랄이 풍부해 다이어트에 제격이다. 여기에 싱싱한 야채와 사과 반쪽 정도의 과일이면 멋진 다이어트 식단이 된다. 훌륭한 ‘예수 다이어트’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안된다면 주저 말고 전문의의 도움을 받는 게 현명하다. 자칫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태울 수도 있으니…. 이승남 강남베스트클리닉 원장
  • 진~한 탁배기 한잔에 취해볼까

    ‘민족의 술 막걸리 골고루 맛보세요.” ‘2005 대한민국막걸리축제’가 14∼15일 고양시 일산구 마두동 호수공원앞 미관광장서 열린다. 대한민국막걸리축제조직위원회(위원장 김향수)가 주최하고 경기도·고양시·가평군·강화군·양평군·포천군이 후원하며 경기도·전라도·경상도·충청도 등 전국에 산재한 1000여개 막걸리 양조업체 중 인지도와 제품 경쟁력이 높은 전통 생막걸리, 인삼막걸리·잣막걸리·밤막걸리 등 50여개 업체의 명품 막걸리 50여종이 출품된다. 14일 오전 10시부터 모든 막걸리를 무료로 시음할 수 있다. 도매가 이하에 직접 구매할 수 있고, 막걸리용 전통 안주와 파전·빈대떡·묵 등도 판매한다. 옛 사대부들의 음주 예법을 재현하는 향음주례가 시연되고, 경기민요·고전무용·밸리댄스 등 공연과 막걸리 천하장사 선발 등 이벤트도 준비됐다. 고양 한만교기자 mghann@seoul.co.kr
  • 중랑구 26일 주민나눔장터

    서울 중랑구(구청장 문병권)는 26일 오전 10시부터 구청앞 광장에서 ‘주민 나눔장터’를 연다. 이번 행사는 새마을 부녀회 주최로 주부회원들과 일반주민 등이 참여하게 된다. 장터에서는 의류를 비롯, 도서·가전제품 등 집에서 사용하지 않는 생활용품 등을 매매 또는 교환할 수 있다. 장터 주변에서는 막걸리·빈대떡 등 전통음식과 음료·한방차 등을 맛볼 수 있는 먹을거리 장터도 함께 운영된다.(02)490-3491. 고금석기자 kskoh@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현대家 ⑨-KCC 그룹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현대家 ⑨-KCC 그룹

    KCC 하면 아직도 생소하게 느끼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페인트 ‘숲으로’ 하면 ‘아∼’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금강고려화학의 영문 첫글자를 아예 사명으로 정한 KCC는 조금만 속을 들여다보면 우리네 삶과 매우 밀접한 기업이다.KCC 제품 없이는 집을 지을 수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유리, 창호재, 바닥재 등 웬만한 건축자재는 거의 다 만든다.“없는 것은 시멘트와 철골뿐”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1958년 8월, 스물두살의 대학생이 “장형의 유학 제의를 뿌리친 채” 직원 일곱명을 데리고 서울 영등포에 ‘금강스레트공업주식회사’를 세운 게 KCC그룹의 출발이다. 땀에 흥건히 젖어 ‘슬레이트’를 직접 찍어내던 대학생 사장이 바로 오늘날의 정상영(69) 명예회장이다. 현대그룹 창업주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왕 회장)의 막내동생이기도 하다. “왕 회장의 형제나 자식들은 대부분 크든 작든 기업체를 떼어 받았지만 정 명예회장은 오롯이 혼자 힘으로 기업을 일으켰다. 공장의 벽돌 한 장, 물빠지는 배수로 위치, 못 하나까지 직접 얹고 정하고 박았다.” 정 명예회장과 30년 가까이 동고동락해온 한 임원의 얘기다.KCC가 짧은 시간 안에 급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현대’라는 확실한 납품처 덕도 있었지만,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한 창업주의 저력을 빼놓을 수 없다. KCC그룹은 지난해 1조 9000억원의 매출과 1300억원의 순익을 올렸다.KCC건설(옛 금강종합건설), 코리아오토글라스(자동차유리 생산업체), 고려시리카(유리원료 제조사), 금강레저(골프장 운영업체) 등 7개 계열사 모두가 흑자를 내고 있는 재계 서열 29위(공기업 제외)의 알짜그룹이다. 특히 건축·산업자재 부문에서는 2위와의 격차를 갈수록 넓히며 독주하고 있다. 자산규모는 4월1일 현재 3조 5300억여원으로 현대백화점그룹(3조 7800억원)과 비슷하다. ●왕회장도 꺾지 못한 막내의 고집 그 자신 “공부가 싫어 소학교 졸업장이 전부가 된 것이 아니었기에, 아우들은 유학 아니라 그 이상도 해주고 싶었던”(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 가운데) 왕 회장은 동국대 경영학과에 다니던 막내동생 상영(SY)도 유학보내려 했다. 그러나 SY는 “나도 내 사업을 하겠다.”며 고집을 피웠다. 왕 회장의 한마디가 곧 법이었던 현대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현대가 사람들은 “막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유학자금을 불모지나 다름없던 건자재 사업밑천으로 털어넣은 SY는 “통금시간(밤 12시)에 맞춰 퇴근하고 해제 사이렌(새벽 4시)에 맞춰 출근”했다. 운도 따라주었다. 때마침 새마을운동이 일어나면서 초가 지붕이 속속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었고, 금강스레트는 찍어내기가 바쁘게 팔려 나갔다. 제법 돈이 모이자 젊은 상영은 슬몃 욕심이 생겼다. 당시 인기있었던 초콜릿시장 쪽을 기웃댔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장형의 호된 꾸지람이 돌아왔다.“초콜릿은 네가 아니어도 할 사람이 많다. 이왕 사업을 할거면 국가경제에 도움되는 것을 하라.” 정신이 번쩍 든 SY는 이때부터 건축·산업자재 국산화에 매달리며 한 우물만 팠다. 변변한 기술 하나 없이 선진국이 장악하고 있던 도료(74년), 유리(87년), 실리콘(2003년) 사업에 차례로 진출했다. 다들 “무모하다.”며 말렸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13년이나 걸려 완공한 전주의 실리콘공장은 SY의 뚝심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룹을 이끌고 있는 정몽진(45) 회장은 언젠가 사석에서 “전후복구사업과 수입대체 사업으로 국가경제에 이바지했다는 아버지의 자부심은 큰아버지(왕회장)에 못지 않다.”고 말했다. 불같은 성정도 비슷하다. 왕 회장에게 혼쭐나 넋이 나간 현대건설 임원이 출입문 대신에 캐비닛 문을 열고 들어갔다는 일화가 유명하듯,KCC에는 한 임원이 정 명예회장에게 야단맞던 도중에 기절한 실화가 ‘전설’처럼 전해 내려온다. 아들들이 소신껏 일하도록 부러 13층 회장실에는 출근하지 않는 정 명예회장은 대신 지방공장 순시로 ‘취미’를 바꿨다. 전국 13개 시·도에 모두 공장이 한 곳씩 있어 발길 닿는 대로 불쑥 들러 젊은 날 자신이 직접 들여놓은 설비들을 살펴보곤 한다. ●5개국어 능통한 정몽진 회장 SY는 아들만 셋을 두었다. 지난 2000년 그룹 경영을 장남인 몽진씨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명예회장으로 물러 앉았다. 이 해는 그룹의 양축인 ‘금강’(슬레이트 등 무기화학 전문)과 ‘고려화학’(페인트 등 유기화학 전문)이 합병돼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장남에 대한 정 명예회장의 신뢰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 회장은 미국 조지 워싱턴대 MBA(경영학 석사) 출신이다. 귀국후 1991년 고려화학 이사로 경영에 합류했다. 예나 지금이나 비즈니스 영어는 그룹 안에서 그를 따라올 사람이 없다. 영어뿐 아니라 중국어, 러시아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하다. 중국 곤산의 페인트공장 준공식 때는 유창한 중국어로 식사를 해 현지인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실리콘 기술 개발을 위해 해외 과학자들과 담판을 벌일 때도 통역 없이 직접 설득에 나섰다. 이런 그를 보고 정 명예회장은 임원들에게 “어떻게 하면 외국어를 저렇게 잘 하는 거야.”라고 했다고 한다. 물론 왕 회장을 닮아 칭찬에 인색한 정 명예회장은 아들 앞에서는 일절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정 명예회장이 그룹의 기반을 닦았다면 정 회장은 ‘3대 키워드’로 제2 도약을 노리고 있다. 첫번째 키워드는 해외다. 국내시장은 이미 포화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현재 3곳(중국 2, 싱가포르 1)인 해외 생산공장을 앞으로 3년 안에 5개를 더 지어 8곳으로 늘릴 계획이다. 환경 파괴를 대체할 차세대 성장산업인 실리콘과 건자재 유통도 핵심 키워드다.“유통을 빼앗기면 이름없는 하청업체로 전락한다.”는 것이 정 회장의 지론이다. 한 임원의 얘기다.“명예회장님은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스타일이다. 그러다보니 다소 보수적이다. 반면 회장님은 해외유학파답게 세계시장의 변화와 큰 흐름을 빨리 읽어낸다.” 장남 특유의 카리스마가 있으면서도 세 아들 가운데 가장 털털해 친화력이 좋다. 한때 고려대 ‘막걸리 시범조교’로 활약했던 술 실력을 바탕으로 해마다 경기도 여주 남한강변에서 임직원들과 삼겹살 소주 파티를 벌이곤 한다. 요즘에는 위장이 나빠져 와인으로 주종을 바꿨다. ●SY의 또다른 자부심 둘째 아들 몽익 둘째 아들 몽익(43)씨는 미국 시러큐스대학에서 경영정보시스템(MIS)을 전공했다. 이어 조지 워싱턴대학에서 국제재정학 석사학위를 땄다. 그는 이 전과정을 4년만에 끝마쳤다. 금강과 고려화학 합병 직후 시너지 효과가 일어나도록 경영시스템을 새로 구축한 주역이 바로 그다. 최근에는 사무실 기기를 최신 오피스용 가구로 교체하고 소프트웨어도 업그레이드시켰다. 그룹의 보이지 않는 경쟁력을 강화시켜온 덕분에 올 2월 KCC 대표이사로 승진했다. 물론 직급은 총괄 부사장으로 같은 대표이사인 형보다 아래다. 입사(89년 금강)는 형보다 2년 빠르다. 적절한 긴장관계를 통해 건전한 경쟁을 이끌어내려는 정 명예회장의 의도가 엿보인다.KCC 지분을 몽진(17.7%)-몽익(8.82%)-몽열(5.29%) 세 아들에게 모두 나눠준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풀이된다. 정 부사장은 형보다 더 꼼꼼한 편이다. 과묵해서 임원들이 말붙이기를 다소 어려워한다. 의외로 운동은 형제들 가운데 가장 좋아하고 잘한다. 고등학교 때는 전국체전에서 승마로 금메달을 따기도 했다. 농구·스키·수영 실력도 프로급이다. 골프는 싱글(핸디 10)에 가깝고 엄청난 장타다. 반면 정 회장은 운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대신 클래식이나 재즈 등 집에서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한다. 정 회장이 동생 얘기가 나오면 사석에서 곧잘 하는 얘기가 있다.“딜(deal)은 아무래도 내가 좀 더 강하다. 그러나 디테일은 동생을 따라갈 수가 없다. 내가 협상을 통해 골격을 세우면 그 골격에 맞게 디테일을 짜는 것은 몽익이다.” 유난히 용산고 출신이 많은 것도 KCC가의 특징이다. 막내 몽열씨를 빼고는 3부자(父子)가 모두 용산고를 나왔다.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도 용산고 출신이다. 모교에 대한 정 명예회장의 애정은 유명하다. 장남 몽진씨가 이른바 ‘뺑뺑이’로 용산고에 배정됐는데도, 발표난 그 길로 친구들에게 한 턱 냈을 정도다. 용산고에 승마반도 만들어줬는가 하면 농구 코트까지 지어줘가며 허재 등을 영입, 오늘날의 ‘농구 명문’으로 키워냈다. 몽진씨와 몽익씨는 고등학교-대학교(고려대)-대학원(조지 워싱턴) 동문이기도 하다. ●‘스위첸’ 성공시킨 ‘리틀 정상영’ 셋째 아들 몽열 89년 미국 FDU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스물여섯살의 나이에 고려화학에 입사한 셋째 아들 몽열(41)씨는 97년 금강종합건설 상무가 되면서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자타가 인정하는 ‘건설 체질’이다. 공사판에서 소주잔 기울이기를 좋아하고, 낭만도 아는 기분파다. 그러나 한번 화가 나면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는다. 그룹 임직원들이 정 명예회장 다음으로 무서워하는 존재다. 정 회장도 “우리 형제 가운데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은 아들이 막내”라며 “몽열이가 화나면 나도 무섭다.”고 농반진반 얘기할 정도다. 작고 단단한 체구나 사업 수완도 아버지를 빼닮았다. 2003년 사장으로 승진한 몽열씨는 주택사업 시장에 과감히 뛰어들었다. 그리고 2년 만에 ‘스위첸’(아파트)과 ‘웰츠타워’(주상복합)를 유명 브랜드 반열에 올려놓았다. 여기에는 정 사장의 정보기술(IT) 지식도 한몫 했다. 컴퓨터학을 전공한 그는 일상생활은 물론 기업 경영에도 IT를 일찌감치 접목시켰다. 선진국형 전산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고, 공사를 맡은 주택의 소프트웨어에도 “유별날” 만큼 공을 들였다. 덕분에 KCC건설은 도급순위 32위, 신용도 9위의 중견업체로 성장했다. ●‘창업동지’ 조은주 여사 현대가의 가풍이 그렇듯 정 명예회장은 연애결혼을 했다.“큰형님 회사(현대건설)를 드나들면서 경리팀의 동갑내기 아가씨에게 반해” ‘작업’을 건 것이 결혼까지 이어졌다. 조은주(69) 여사다. 서울 진명여고를 나온 조 여사는 당시 이화여대에 합격해 놓고도 등록금이 없어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독립군이었던 외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군인이 된 아버지가 6·25전쟁 때 전사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고 한다. 결혼 후에도 조씨는 ‘대학생 사장’을 남편으로 둔 덕분에 물일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슬레이트공장 인부들의 밥이며 새참은 으레 그의 몫이었다. 직원들 식사를 지어 나르는 일은 그후로도 20년 넘게 이어졌다. 지금도 서울 서초동의 구사옥에서 근무하는 고참 직원들 가운데는 사원식당에서 밥을 짓는 조 여사의 모습을 기억하는 이가 적지 않다. ●큰며느리는 음대… 셋째며느리는 미대 자유연애로 결혼한 정 명예회장은 아들들의 ‘사랑’에도 너그러웠다. 몽진씨는 서울대 음대에서 플루트를 전공한 홍은진(41)씨와 ‘소개팅’으로 만나 결혼했다. 홍씨는 한때 아이스크림 ‘퍼모스트’로 유명했던 옛 퍼모스트유업 사장의 딸이다. 전자부품회사인 ‘퍼시픽 컨트롤스’ 홍준 사장이 처남이다. 그렇다면 소개팅 주선자는 누구일까. 다름아닌 사촌형 정몽윤 현대해상 이사회 의장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촌동생에게 친구의 처제인 음악도를 엮어준 것. 정 의장과 죽이 맞아 처제를 소개팅 장소로 내몬 이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치과 주치의이자 성균관대 교수인 임순호 박사다. “연애할 때 플루트를 불어주던 모습에 반해 결혼했다.”는 정 회장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며 “결혼후에는 한번도 플루트를 들어보지 못했다.”고 투덜대곤 한다. 내로라하는 재벌 집안과의 혼사는 몽익씨에 이르러 이뤄졌다.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여동생인 정숙씨의 딸 최은정(42)씨가 부인이다. 가톨릭 계통인 일본 성심대학 교육심리학과를 나왔다. 최씨의 언니 은영씨는 조수호 한진해운 회장과 결혼했다. 조 회장이 몽익씨의 손위동서인 셈이다. 막내 몽열씨는 큰형수의 영향을 받았는지 서울대 미대를 나온 이수잔(35)씨와 결혼했다. 독특한 이름 때문에 외국인이라는 오해를 받지만 한자이름이다. 중소기업체를 운영하는 장인이 ‘쌓을 잔( )’자를 썼다고 한다. 여자들의 사회활동을 싫어하는 가풍 탓에, 큰동서와 마찬가지로 결혼과 동시에 그림을 접었다. 막내 며느리답게 활달한 편이다. ●‘숙부의 난’ 할 말 많지만… 정 명예회장은 조카 며느리인 현대그룹 현정은(고 정몽헌 회장의 부인) 회장과 경영권 다툼을 벌였었다. 현대가 사정에 밝고 당시 분쟁에도 깊숙이 개입했던 한 관계자는 “이 문제에 대한 명예회장님의 생각은 분명하다. 현 회장의 외가를 포함해 정씨 집안 사람이 아닌 제3자가 큰형님이 평생을 바쳐 일군 현대를 넘보려 한다면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현대상선 등 관련 지분을 팔지 않고 계속 갖고 있는 것은 이를 위한 최후의 보루다.”라고 설명했다. 자금난에 시달리던 정몽헌 회장에게 200억원을 조건없이 내준 것이 ‘의리’가 아니라 ‘경영권을 염두에 둔 계산된 행보’라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서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고 일축했다. 이어지는 그의 얘기. “지나간 상처를 다시 헤집고 싶지는 않다. 명예회장님도 더이상 언급하지 말라며 함구령을 내리셨다. 다만 이 말만은 하고 싶다. 명예회장님은 장조카인 고 정몽필 인천제철 사장이 아버지(왕 회장)와의 갈등으로 방황할 때 형님 눈치 보지 않고 우리 회사 부사장 자리를 선뜻 내줬다. 또다른 조카가 외환위기로 자금난에 시달릴 때 70억원을 조건없이 빌려준 분도, 몽헌 회장이 군 복무를 6년이나 할 때 뒤를 봐준 분도, 명예회장님이었다.” ●“숫자는 기본” 전문 경영인들 건장한 체격의 김춘기(59) KCC 대표이사 사장이 단연 첫손에 꼽힌다. 정몽진 회장이 “(그룹에)꼭 필요한 분”이라고 언급한 이다.75년 고려화학으로 입사해 꼬박 30년을 KCC와 함께했다. 특히 영업쪽에서 잔뼈가 굵었다. 마당발 인맥과 철저한 고객관리로 KCC의 영업력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을 받고 있다. 말단사원에서 최고경영자(CEO)에 오른 이력도 흔하지는 않지만 ‘국가대표 스키선수’라는 경력이 더욱 눈길을 끈다. 강원도 강릉에서 나고 자란 그는 중학교때 우연히 본 스키영화 ‘백령의 왕자’에 푹 빠져 스키선수가 됐다. 대학생(경희대)때는 동계 유니버시아드와 올림픽 대회에도 국가대표 선수로 출전했다. 그러나 취직과 동시에 “스키는 깨끗이 잊었다.”고 김 사장은 털어놓았다. 꼼꼼함은 모든 임원들의 공통점이지만 김 사장은 유난히 치밀하고 숫자에 밝다.“노력은 능력을 앞선다.”는 게 30년 직장생활의 신조다. 김 사장의 좌우 양쪽으로는 정몽진 회장에 버금가는 영어 실력으로 수출을 책임지고 있는 김영호(55·부사장) 해외본부장과 전문 무기화학 지식으로 제품 개발을 책임지고 있는 정복동(58·부사장) 생산기술본부장이 포진하고 있다. 금강레저 박연구(51) 대표와 고려시리카 이성수(53) 대표는 대학 졸업장 없이도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준 대표적인 전문인력들이다.“학교 공부는 다소 게을리했을지 몰라도 추진력과 친화력은 (전교 1등보다)훨씬 낫다.”는 KCC의 독특한 사풍이 반영된 결과다. 코리아오토글라스 주원식(62) 사장과 금강화공의 한상기(57) 중국 곤산·신세균(55) 베이징 법인장,KCC 박성완(47) 싱가포르 법인장 등은 전문 기술인맥의 계보를 잇고 있다. 일본 아사히글라스 출신의 시마나가 모토야스(61) 부사장 등도 KCC를 떠받치는 핵심 인력들이다. hyun@seoul.co.kr ■ 정상영 일가 ‘밥상머리 교육’ 정상영 명예회장의 세 아들 부부는 한주 걸러 일요일 오후 5시면 어김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 이태원 본가를 찾는다. 온 가족이 저녁식사를 같이 하기 위해서다.“밥상머리 교육이 중요하다.”며 자식들과 아침식사-사실상 새벽밥-를 함께 했던 왕 회장에 비하면 며느리들의 부담이 한결 덜하다. 음식도 각자 집에서 ‘주특기’ 한가지씩을 싸들고 와 끓이기만 하면 된다. 며느리들의 음식솜씨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 한 토막. 정 명예회장은 며느리를 들이면 반드시 반년씩 데리고 살았다. 그래야 가풍도 익히고 속정이 든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대학 내내 플루트만 불다온 큰며느리가 음식을 잘 할 리 만무했다. 둘째며느리에게 기대를 걸었다. 요리학원을 다녔다는 재벌가의 둘째며느리는 “듣도 보도 못한 음식”을 내놓았다. 견디다 못한 정 명예회장은 급기야 “이러다가 굶어죽겠다.”며 하소연했다고. 그 며느리들이 ‘사원식당 주방장’으로 명성을 날렸던 시어머니의 특별지도 아래 지금은 ‘선수’가 됐음은 물론이다. 정 명예회장은 자식들에게 매우 엄격하다. 그 영향을 받아 정몽진 회장도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는 아들 명선(11)군을 굳이 외국인 학교나 사립학교가 아닌 집 부근의 일반 공립학교에 보내고 있다. 학교도 자가용을 태우지 않고 걸려서 보낸다.“어렸을 때부터 보통사람, 못사는 사람의 삶도 느껴봐야 한다.”는 지론에서다. 다만 큰딸 재림(15)양은 미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 귀국해 “성적 스트레스를 주지 않으려” 외국인 학교에 보냈다. hyun@seoul.co.kr ■ 정 명예회장 ‘씨름꾼 경영론’ 왕 회장이 ‘빈대의 철학’으로 유명하다면 정상영 명예회장은 90년대 중반 ‘씨름꾼 경영론’으로 회자됐다.“씨름은 씨름꾼에게 맡겨야 한다.”는 단순 명쾌한 논리였다. 정 명예회장은 “씨름꾼이 아닌 사람이 씨름판에서 승리하기 어렵듯 기업간의 경쟁은 기업가에게 맡겨야 한다.”며 기업 경영의 자율성을 강조했다.KCC그룹의 사시인 ‘맡은 자리의 주인이 되자’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이는 왕 회장의 지론이기도 하다. 지역 거상들이 장악하고 있던 총판(판매실적에 관계없이 물건값 선지급) 체제에 맞서 팔린 만큼만 대금을 지급하는 코카콜라식의 ‘루트 세일’을 도입해 유통 혁명을 일으킨 것이나, 당시로서는 ‘생뚱맞기’ 그지없는 슬레이트 홍보영화를 만들어 275개 시·군에 배포해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도 큰형에게 영향받은 ‘발상의 전환’이었다. 이렇듯 정 명예회장에게 있어 왕 회장의 존재는 절대적이었다. 형이라기보다는 아버지에 가까웠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이 차이만 스물 한살이었다. 조카인 정몽구 현대차 회장과는 두살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젊었을 때 잠깐 초콜릿사업에 눈돌린 것 외에는 한번도 한 눈을 팔아본 적이 없는 그가 1970년 8월 현대차 부사장으로 홀연히 옮겨간 것도 “와서 미수금 70억원을 해결하라.”는 장형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이자까지 회수해주고 다시 KCC로 돌아왔을 때는 1년 반이 흘러 있었다. 훗날 정 명예회장은 “중요한 시기에 내 사업에 공백을 가져 아쉬워한 적은 있었어도 불평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회고했다. 여기에는 다른 주장도 존재한다. 왕 회장이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막내동생을 가까이 대했던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KCC측은 펄쩍 뛴다. 한 임원의 얘기다. “92년 대선 패배 이후 두문불출하던 왕 회장이 다시 산업현장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95년 KCC의 여주 유리공장 3호기 점화식에서였다. 또 거동이 심하게 불편해지기 전까지 왕 회장이 거의 매일같이 들러 골프를 친 곳이 금강CC였다. 라운딩 멤버는 언제나 정상영 회장이었다. 인간적으로 좋아하지 않았다면 왕 회장 성격에 이런 일이 가능했겠는가.” 정 명예회장도 세상 사람들의 짐작 이상으로 장형에게 극진했지만, 왕 회장 역시 막내동생에게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는 설명이다. hyun@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길섶에서] 열차집 2층/이용원 논설위원

    서울 종로1가 뒷길인 피맛골은 오래된, 그리고 서민적인 음식점이 즐비한 골목이다. 그 가운데 빈대떡집인 ‘열차집’은 출입한 지 20년이 넘은 단골집이다. 어느 시인의 말마따나 부슬비라도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이면 문득 떠오르는, 그래서 절로 발걸음이 향하는 그런 선술집이다. ‘열차집’ 문을 열면 실내는 빈대떡 지지는 연기로 뿌옇고 술꾼들이 내는 소음이 가득하다. 안주 두세 가지를 함께 올려놓기에 좁은 탁자와 엉덩이를 겨우 걸칠 만한 긴 나무의자. 그나마도 다닥다닥 붙여놓아 뒷자리 손님과 등을 맞대기 일쑤다. 그런데도 불평하는 이가 없는 까닭은 그 분위기야말로 ‘열차집’답기 때문이다. 며칠전 퇴근길에 횡단보도 앞에서 친구를 조우해 곧 ‘열차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문을 여니 합석할 만한 공간이 한쪽 구석에 남아 있었다. 들어서려는데 주인이 2층으로 가라고 권한다.‘아,2층이 있다는 소리를 전에도 들은 적 있지.’중얼거리며 층계를 올라갔다.2층은 넓었다. 탁자 간격도 여유 있었고, 손님이 적어선지 조용했다. 막걸리에 빈대떡을 한참 즐기다 갑자기 이게 아닌데 싶었다.‘열차집’을 좋아한 건 빈대떡 맛 때문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용원 논설위원 ywyi@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현대家 ①-창업주 故정주영회장 일가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현대家 ①-창업주 故정주영회장 일가

    보는 이마다 다르겠지만 현대를 삼성보다 앞세우는 사람들은 현대의 창업 정신을 강조한다. 현대는 남이 일궈놓은 기업을 인수하기보다는 밑바닥에서부터 하나하나 주춧돌을 올렸다. 건설이 그랬고, 자동차가 그랬으며, 중공업이 그랬다. 창업주인 고(故) 정주영 회장은 이를 평생의 긍지요, 자랑으로 여겼다. 서슬 퍼렇던 군사정권 시절,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 끌려가서도 “사정상 어쩔 수 없었던 인천제철만 제외하고는 어느 하나 내 손으로 말뚝을 박고 길을 닦아 시작하지 않은 공장이 없다.”며 기업 강제 통·폐합에 맞섰을 정도였다. 1947년 5월25일 서울 중구 초동의 허름한 자동차 수리공장 한 귀퉁이에 ‘현대토건사’라는 간판을 내건 지 60여년. 삼성보다 10년 가까이 늦은 출발이었지만 현대는 이내 1위 기업으로 우뚝 섰고,‘경영권 다툼’이 일어났던 2000년까지 그 지위는 차돌만큼이나 단단했다. 이때 현대그룹의 자산규모가 87조여원. 계열사 수만 40개가 넘었다. 비록 그룹이 쪼개지면서 외형상의 규모가 작아지고 재계 서열은 떨어졌지만, 경제 전문가들은 ‘전화위복’이라고 입을 모은다. 자동차(현대차그룹), 유통(현대백화점), 해운·제조(현대그룹), 조선(현대중공업), 금융(현대해상·현대기업금융) 등 각자 전문그룹의 길로 나서면서 경쟁력은 더 강화되고 동반 부실의 위험은 현격히 줄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다른 그룹들이 이제서야 계열분리 등으로 홍역을 앓는 동안 현대의 대표주자들은 세계를 상대로 싸우고 있다. 현대산업개발,KCC, 한라, 성우 등 창업주의 형제들이 이끄는 그룹들도 각자 독자영역을 굳혀가고 있다. 언뜻 봐도 느껴질 만큼 현대에 뿌리를 대고 있는 기업들은 유난히 굴뚝업종이 많다. 고용된 인원과 딸린 부품·협력업체가 많다는 얘기다. 국민경제 기여도로 따지면 현대가 여전히 1위라는 말은 그래서 나온다. 또 한 가지, 현대를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현대정신’이다. 현대에는 일단 해보자며 덤비는 정신, 밀어붙이는 힘이 있다. 때로는 비합리성을 낳기도 하지만 현대맨들은 이를 “맨바닥에서부터 기업을 일군 현대만의 저력”이라고 자부한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는 이를 “진정한 기업가(起業家) 정신”이라고 불렀다. 제각각 ‘마이 웨이’를 걷고 있는 오늘날의 현대가를 묶는 보이지 않는 끈이기도 하다. ●담(淡)한 혼맥… 후한 연애결혼 다른 재벌가에 비해 현대의 혼맥은 의외로 소박하다. 낭만을 즐겼던 고 정 회장이 자식들의 연애에도 너그러웠던 영향이 가장 크다.‘왕 회장’이라는 별칭으로 더 자주 불렸던 그 자신, 강원도 통천의 평범한 고향처녀(변중석)와 결혼해 평생을 함께했다. 슬하에 9남매(8남1녀)를 두고 동생이 일곱(한명은 어려서 사망)이나 됐지만 눈에 띄는 혼사는 손가락을 꼽는다. 직계가족 중에 굳이 꼽자면 다섯째아들 고 몽헌(MH)씨와 여섯째아들 몽준(MJ)씨를 들 수 있다. 몽헌씨는 신한해운 현영원 회장의 딸 정은씨와, 몽준씨는 김동조 전 외무장관의 막내딸 영명씨와 각각 결혼했다. 오랜 세월 재계를 주름잡았던 현대의 위상에 견줘 혼맥이 조촐한 데는 창업주의 성공과정과도 무관치 않다.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나 부두 막노동꾼을 거쳐 대기업 총수에 오른 그는 살아생전 “세상에 공짜란 없다.”며 담(淡)한 마음을 갖자고 입버릇처럼 강조하곤 했다. 권력이나 부(富)를 결코 싫어하지 않았지만 굳이 혼사줄까지 대가며 공짜를 탐할 이유 또한 없었던 것이다. 정략결혼의 흔적이 적은 대신에 유난히 많은 손(孫)과 맞닥뜨리는 게 현대라는 집안이다. 이런 현대가 대(代)를 건너뛰면서 LG, 롯데, 한진, 이건, 비비안 등 내로라하는 그룹들과 사돈을 맺은 점은 흥미롭다. 현대가의 2세들이 ‘몽(夢)’자 돌림이라면 3세들은 딸이 ‘이(伊)’, 아들은 ‘선(宣)’자 돌림을 쓴다.4세는 ‘진’자(딸),‘창’자(아들) 돌림이다. ■ 현대의 핵심축 아들들 ●장남 몽필… 쌍용가와 인연 큰아들 몽필씨는 나이 50도 안돼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국영 적자기업 인천제철을 인수해 정상화에 여념이 없던 1982년 4월 어느날, 울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고속도로에서 그가 탄 승용차가 트레일러를 들이받았다. 이 때가 마흔아홉살. 수도여대 출신의 부인 이양자씨와 두 딸 은희·유희씨는 망연자실했다. 몽필씨가 떠난 지 한달 뒤, 정주영 회장은 동서산업 공장장이던 이영복씨를 사장으로 파격 승진시켰다. 이씨는 몽필씨의 처남, 즉 이양자씨의 친동생. 졸지에 가장을 잃은 장남 가족에 대한 배려였다. 하지만 이양자씨마저 91년 위암으로 눈을 감고 말았다. 큰딸 은희씨는 최근 미국에서 귀국했다. 둘째딸 유희씨는 김석원 쌍용양회 명예회장의 장남 지용씨와 결혼해 두 아들(진석·진하)을 두었다. 지용씨는 현재 용평리조트 상무를 맡고 있다. ●2남 몽구… 글로벌 현대차그룹 리더 몽필씨의 죽음으로 사실상 집안의 장남 역할을 도맡아 한 이는 둘째아들 몽구(MK)씨였다. 유희씨가 결혼할 때 부모 역할을 대신 한 사람도 몽구씨 부부였다. 현대정공(현 현대모비스) 사장 시절,‘갤로퍼 신화’를 만들어낸 그는 기아차마저 인수해 지금의 현대·기아차 그룹을 이끌고 있다.2000년 자동차전문 그룹으로 출범한 지 몇 년도 안돼 그룹을 세계 6위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출범 당시 10개였던 계열사 수는 28개로 불어났다. 그룹의 올해 매출 목표액은 지난해보다 17% 늘어난 85조원.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미국의 ‘소비자 보고서(컨슈머 리포트)’는 최근 현대차의 뉴쏘나타를 세계에서 가장 결함이 적은 차로 선정했다. 갤로퍼 신화 때부터 MK가 강조해온 ‘품질 경영’의 힘이다. MK는 평범한 집안의 딸 이정화씨와 결혼해 3녀1남을 두었다. 큰딸 성이씨는 저명한 정형외과 의사이자 영훈의료재단을 설립한 고 선호영 박사의 아들 두훈씨와 결혼했다. 둘째딸 명이씨는 정경진 종로학원장의 아들 태영씨와, 셋째딸 윤이씨는 미국 MBA(경영학석사) 출신인 신성재씨와 결혼했다. 둘째사위와 셋째사위는 그룹 계열사인 현대카드·캐피탈 사장, 현대하이스코 사장을 각각 맡고 있다. 막내이자 외아들인 의선씨는 지난 11일 기아차 대표이사 사장으로 승진했다. 그룹내 직함은 현대·기아차기획총괄본부 담당 사장으로 기아차의 기획, 재무, 수출, 연구·개발(R&D) 등 핵심 업무를 관장하고 있다. 일찍 결혼해 슬하에 1남 2녀를 두고 있다. 부인은 정도원 강원산업 부회장의 큰딸 지선씨다. ●3남 몽근… 소리없이 유통명가 키워 셋째아들 몽근씨는 일찌감치 유통을 넘겨받아 현대백화점 그룹을 이끌고 있다.‘빅3’(MK·MH·MJ)에 가려 조명은 덜 받았지만, 묵묵히 외길을 걸으면서 소리없이 유통 명가로 키워낸 주인공이다. 현대백화점, 현대H&S(非 백화점 계열), 현대홈쇼핑 등 주력 계열사를 토대로 지난해 5조 50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전문 최고경영자(CEO)들이 소신있게 일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 주면서도 거의 매일같이 매장을 둘러봐 조직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바로 위 형 몽구씨와는 고등학교(경복고)-대학교(한양대) 동문인 데다 선굵은 외모까지 비슷하다. 옛 현대그룹에서 고문을 지낸 우호식씨의 딸 경숙씨가 부인이다. 두 아들은 각각 부회장, 기획담당 이사로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큰아들 지선씨는 고 황산덕 전 법무장관의 손녀인 서림씨와 결혼했다. 둘째아들 교선씨는 자동차부품 전문기업인 대원강업 허재철 부회장의 큰딸 승원씨와 지난해 말 깜짝 결혼식을 올렸다. 교선씨의 결혼식에는 큰아버지인 정몽구 회장을 비롯해 집안 어른들이 대거 참석해 모처럼 우애를 다지기도 했다. 현대가는 한때 딸만 남기고 떠난 몽필씨의 대를 잇기 위해 지선씨를 양자로 입양하는 방안을 의논했었다. 유교식 법도대로라면 바로 아래 동생인 몽구씨의 아들을 입양해야 했으나 의선씨가 외아들인 탓에 지선씨가 선택된 것. 하지만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실제 입적은 이뤄지지 않았다. 정주영 회장의 장례식때 의선씨가 ‘종손’ 자격으로 고인의 영정을 든 것은 이 때문이었다. ●외사위 희영… 천마산스키장 운영, 이건·비비안과 사돈 현대가는 자손이 많은데도 딸은 귀한 편이다. 외동딸 경희씨는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재원. 그러나 바깥 활동은 없다. 대신 남편(정희영)이 선진종합㈜ 회장이다. 공교롭게 고 정주영 회장의 여동생 희영씨와 이름이 똑같다. 서울대 상대 출신으로 1965년 현대건설 공채로 입사했다. 이명박 서울시장이 입사 동기다. 조선 수주에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 창업주의 눈에 들어 사위가 됐다. 정주영 회장은 딸 경희씨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자 희영씨를 도쿄법인 이사로 발령내 자연스러운 교제를 유도했다고 한다. 이후 희영씨는 조그만 해운회사(선진해운) 하나를 갖고 독립, 장인의 그늘에서 벗어났다. 천마산 스키장은 오롯이 그가 독립해 만든 회사다. 외아들 재윤씨가 선진종합㈜ 상무다. 두 딸은 각각 이건그룹과 비비안그룹으로 시집갔다. 큰딸 윤미씨의 남편이 이건창호 박승준 상무, 둘째딸 윤선씨의 남편이 비비안 남석우 부회장이다. ●4남 몽우… BNG스틸 통해 부활 넷째아들 몽우씨는 숙명여대를 떠들썩하게 했던 ‘미인’ 이행자씨와 연애결혼했다.40대에 현대알루미늄 회장을 맡은 그는 그러나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결국 1990년 4월 45세의 젊은 나이에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남겨진 유족을 돌보는 일도 사실상의 장남 몽구씨의 몫이었다. 조카 셋을 모두 현대차그룹의 계열사인 BNG스틸(전 삼미특수강)에 입사시켰다. 큰조카, 즉 몽우씨의 장남인 일선씨는 경영능력을 인정받아 최근 BNG스틸 대표이사 사장으로 승진했다. 일선씨에 이르러 비로소 현대는 내로라하는 재벌가와 사돈관계를 맺는다. 일선씨의 부인은 구자엽 희성전선 부회장의 딸 은희씨다. 구 부회장은 구태회 LG전선 명예회장의 아들이자 구인회 LG그룹 창업주의 조카이다. 일선씨의 동생 문선씨는 김영무 김&장 법무법인 대표변호사의 딸 선희씨와 결혼했다. ●5남 몽헌… 못다 이룬 꿈, 현 회장이 힘찬 날갯짓 ‘비운의 황태자’ 몽헌씨는 1998년 그룹 공동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화려한 비상을 시작했다.1983년 현대전자(현 하이닉스반도체)를 설립해 4년 만에 흑자로 돌려놓으면서 아버지 정주영 회장의 두터운 신임을 끌어냈다.2000년에는 형들을 제치고 그룹 단독 회장에 추대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북 송금’ 사건에 연루돼 검찰 조사를 받던 중, 극심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2003년 8월4일 서울 계동사옥에서 몸을 던지고 말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부인 현정은씨가 경영에 뛰어들었다. 급작스러운 남편의 죽음으로 황망히 그룹을 물려받았지만 사업가 집안의 딸답게 배포와 합리적 리더십으로 1년 만에 그룹을 정상궤도에 올려놓았다. 사상 최대 호황을 누리고 있는 현대상선, 올해 첫 흑자를 넘보고 있는 현대아산, 주가 1000시대의 수혜주 현대증권 등을 축으로 재계 10위권 진입(현재 19위)을 눈앞에 두고 있다.2010년까지 매출 20조원을 달성해 10위권에 진입한다는 ‘2010’ 프로젝트를 가동중이다. 현 회장은 고 정주영 회장이 직접 ‘점지한’ 며느리로도 유명하다. 현 회장이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린 결혼 뒷얘기는 이렇다.“당시 현대상선 회장이던 아버지(현원영)를 따라 선박 명명식차 울산에 내려갔다가 남편을 처음 만났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명예회장(정주영)께서 나를 선보러 미리 내려오셨었다. 명예회장께서 중매를 서신 셈이다.” 큰딸 지이씨는 현대상선 재정부 대리로 근무 중이다. 아버지를 잃었을 때 고3 수험생이었던 외아들 영선씨는 졸업후 미국 유학을 준비중이다. ●6남 몽준… 세계1위 현대중공업 ‘건조’ 지금은 정치인의 이미지가 더 강하지만 세계 일류 현대중공업의 뒤에는 기업인 몽준씨가 있다. 형제중에 학벌(서울대-미국 MIT 경영대학원)이 가장 좋아 ‘신문대학’(소학교만 졸업한 정주영 회장은 신문을 통해 지식의 대부분을 얻었다며 자신을 신문대학 출신이라고 소개하곤 했다) 출신인 왕 회장이 유난히 예뻐했다는 몽준씨는 31세에 현대중공업 사장으로 전격 발탁되면서 집중 조명을 받았다.1988년 금배지를 처음 달면서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시도했다. 경영은 CEO에게 맡기고 자신은 대주주로서 회사의 중요한 의사결정만 내리고 있는 것. 지금도 현대중공업의 어떤 직함도 갖고 있지 않다. 공식 직함은 5선의 국회의원이자 축구협회 회장. 아버지의 뒤를 이어 200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현대중공업의 올해 매출 목표액은 10조원. 웬만한 그룹과 맞먹는다. 부인 김영명씨와는 미국 유학시절에 만나 결혼했다. 큰아들 기선씨는 연세대 경제학과를 나와 올해 학사장교(ROTC)로 임관했다. 이로써 부자(父子)가 ROTC 선후배가 됐다. 두 딸 남이씨와 선이씨는 미국 유학 중이다.‘월드컵 베이비’로 유명한 늦둥이 아들 예선씨는 초등학교 4학년이다. 우리나라가 98년 프랑스 월드컵 예선전을 최종 통과한 것을 기념해 이름을 ‘예선’으로 지었다고 한다. ●7남 몽윤… 현대해상으로 컴백 몽윤씨는 지난해 말 업계 2위의 손해보험회사인 현대해상의 등기이사 겸 이사회 의장으로 돌아왔다.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지 8년 만의 전격 복귀였다. 방카슈랑스(은행상품과 보험상품의 교차판매) 확대 시행 등 변화하는 금융환경에 맞춰 공격적인 경영 행보를 보이고 있다.1981년 김진형 부국물산 회장의 딸 혜영씨와 연애결혼해 정이양과 경선군을 두었다. ●8남 몽일… 할부금융으로 내실 막내아들인 몽일씨는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마친 뒤 현대상사 등에서 근무하다가 2000년 현대기업금융을 차려 독립했다. 기업대출 등을 주로 취급하는 회사다. 권영찬 현대파이낸스 회장의 딸 준희씨와 결혼해 고등학생인 현선(영국 유학중)군과 중학생인 문이양을 두고 있다. ■ 현대의 또 다른 축 형제들 고 정주영 회장의 형제들은 동생이기 이전에 창업 동지요, 사업 동료였다.6·25전쟁 직후 고령교(대구와 거창을 잇는 교량) 복구 공사를 덜컥 떠맡았다가 부도 직전까지 내몰렸을 때, 내남없이 살던 집을 팔아 돈을 내놓은 것도 동생들과 매제였다. 이 때문에 20명이 넘는 대식구가 한 집(돈암동)에 모여 살아야 했지만 누구 한 사람 불평하지 않았다. 지금은 모두 독립해 각자의 그룹을 이끌고 있다. ●옛 영화 꿈꾸는 한라·성우 동아일보 외신부 기자로 활동하던 첫째 동생 인영씨는 1953년 현대건설 전무로 입사하면서 경영에 본격 합류했다.75년 말 중동 진출 때 신중론을 펴 형과 이견을 빚을 때까지 그룹의 초석을 닦았다. 당시 독립해 만든 한라그룹은 한라건설·한라시멘트·한라중공업·만도기계 등을 거느리며 재계 서열 12위로까지 도약했다. 그러나 외환위기 때 자금난이 가중되면서 그룹이 부도나는 시련을 겪었다. 지금은 둘째 아들 몽원씨가 한라건설 회장을 맡아 재기를 꿈꾸고 있다. 큰 아들 몽국씨는 94년 아버지가 동생을 그룹 후계자로 지목하자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한때 배달학원 이사장을 맡았으나 지금은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부인 이광희씨는 배달학원 계열인 한라대 총장을 지내기도 했다. 현대시멘트·성우종합건설·성우리조트·현대종합금속 등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는 성우그룹은 둘째 동생 순영씨 일가가 이끌고 있다. 순영씨는 명예회장으로 물러앉고 2세 경영을 정착시켰다. 큰아들 몽선씨가 현대시멘트와 성우종합건설을, 둘째아들 몽석씨가 현대종합금속, 셋째아들 몽훈씨가 성우전자, 넷째아들 몽용씨가 성우오토모티브를 각각 맡고 있다. 몽선씨는 사촌인 정몽윤 현대해상 이사회 의장과 함께 정몽헌 회장의 부검을 임관하기도 했다. ●‘기계박사’가 일군 한국프랜지 자동차부품회사인 한국프랜지공업의 김영주 명예회장은 고 정주영 회장의 유일한 매제다. 정주영 회장은 ‘이 땅에 태어나서’라는 두 번째 자서전에서 “그가 다가가기만 해도 기계가 저절로 고쳐졌다.”며 매제를 ‘기계박사’라고 불렀다.1946년 정주영 회장이 미 군정에서 불하받은 토지에 ‘현대’(현대자동차공업사)라는 상호를 처음 내걸었을 때, 감격적으로 지켜본 이도 영주씨였다. 두 사람의 인연은 이로부터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인기직종이던 운전기사 출신의 영주씨는 황해도 홀동광산에서 역시 운수업을 하던 정주영 회장과 뜻이 맞아 사업을 같이 도모했고, 매제까지 됐다. 부인 정희영씨는 2001년 정주영 회장이 노환으로 세상을 떴을 때 “대통령 한번 못해보고… 우리 오빠 불쌍해서 어쩔거나.”하며 가장 서글프게 울었던 동생이다. 장남 윤수씨가 회사를 물려받아 한국프랜지공업 회장으로 있다. 둘째아들 근수씨는 독립해 울산화학·퍼스텍 등의 계열사를 거느린 후성그룹 회장을 맡고 있다. 윤수씨의 장남 용석씨가 프랜지공업 계열사인 서한산업(자동차부품회사) 대표이사 사장이어서 3세 경영체제를 갖춰 가고 있다. 둘째아들 용범씨는 이름을 용태로 바꿨다. ●‘포니 정’ 부자(父子)의 변신 ‘포니 정’이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넷째 동생 세영씨는 외아들 몽규씨와 함께 1999년 3월 현대그룹에서 독립해 건설시장에서 영역을 확실하게 굳혔다. 꼼꼼한 시공과 치밀한 분양으로 현대산업개발을 국내 도급순위 4위 업체로 키워놓았다.‘포니 정’이라는 별명은 1976년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국산 고유모델 자동차 1호 ‘포니’를 만들어낸 데서 붙여졌다. 이같은 열정과 헌신을 인정받아 87년 형에게서 현대그룹 회장직을 물려받기도 했다. 분가한 뒤로는 현대산업개발 경영에만 매달렸다. 몇 년 전 폐암수술을 받았지만 지난해 희수연을 치렀을 만큼 건강을 되찾았다. 회사 경영은 아들 몽규(회장)씨가 책임지고 있다. 지금의 서울 삼성동 사옥은 몽규씨가 직접 지었다. 지나칠 정도로 꼼꼼하다는 게 주위의 평가다. 현대가 맺은 최고위층 사돈도 세영씨 집안에서 나왔다. 큰딸 숙영씨가 노신영 전 국무총리의 장남 경수(서울대 교수)씨와 결혼한 것. ●“아… 신영아”-교통사고 아닌 병으로 요절 다섯째 동생 신영씨는 고 정주영 회장이 가장 자랑스러워했던 동생이다. 서울대를 나와 동아일보 기자로 있다가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함부르크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을 밟던 중 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 1962년. 처음에 어떤 기자가 교통사고사로 쓰면서 오랜 세월 세상에 잘못 알려졌지만 정확한 사인은 지병이라고 유족은 본지에 밝혔다. 당시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잠시도 일에서 떠나본 적이 없는 정주영 회장이 일주일을 손놓았을 만큼 가족의 슬픔은 컸다. 서울대 음대 출신의 첼리스트였던 미망인 제수씨(장정자)에게 현대학원(현대고)을 경영토록 했다. 지금도 현대학원 이사장을 맡고 있는 장정자씨는 남북이산가족 상봉때 대한적십자사 부총재로 남한측 방문단장을 맡았었다. 장홍선 전 극동도시가스 회장의 누나다. 신영씨는 1남1녀를 두었다. 아들 몽혁씨는 32살의 젊은 나이에 현대정유(현 현대오일뱅크) 대표이사로 취임해 인천정유(구 한화에너지)를 인수하고 오일뱅크라는 브랜드를 만드는 등 두각을 드러냈다. 그러나 외자유치와 함께 2002년 전문경영인에서 물러나 그 해 건축자재 유통회사 ‘에이치애비뉴앤컴퍼니’를 설립해 돌아왔다. 부인 이문희씨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은 동원 이홍근 선생의 손녀이다. 사업가이자 문화재 수집가였던 동원 선생은 평생 모은 문화재 4941점을 1980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딸 일경씨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블룸버그대학 회계학과 교수인 남편 임광수씨와 함께 미국에서 살고 있다. ●‘리틀 정주영’이 이끄는 KCC 막내동생인 상영씨는 ‘불에 타지 않는 바닥재’ 등으로 유명한 자재 전문그룹 KCC를 이끌고 있다. 불도저 같은 추진력과 성격 등이 고 정주영 회장을 가장 많이 닮아 ‘리틀 정주영’으로 불린다. 큰형과 나이 차이가 21살이나 나 아버지처럼 따랐다. 장조카 몽구씨와도 2살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또 다른 조카인 고 정몽헌 회장이 자금난에 몰렸을 때 200억원을 선뜻 내놓았을 만큼 의리도 강하다. 그러나 조카의 죽음 이후 현정은 회장과 경영권 다툼을 벌이면서 다소 빛이 바랬다. 그룹 경영은 두 아들에게 맡긴 상태다. 큰아들 몽진씨가 대표이사 회장, 둘째아들 몽익씨가 대표이사 부사장이다. 셋째아들 몽열씨는 계열사인 금강종합건설 사장을 맡고 있다.KCC는 몽익씨를 통해 롯데·한진그룹과 사돈으로 연결된다. 몽익씨의 부인 은정씨가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외조카(신 회장의 여동생인 정숙씨의 딸)이다. 은정씨의 언니 은영씨는 한진해운 조수호 회장의 부인이다. 몽익씨와 조 회장이 동서지간인 셈이다. ●현대가의 여자들 현대가의 딸이나 며느리들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 이화여대(정경희-이양자-현정은-김혜영-정유희 등) 출신에 해외유학(김영명-정지선-황서림-허승원 등)까지 다녀온 재원들이 적지 않지만 경영에 참여하거나 대외활동에 나서는 사람이 거의 없다. 하다못해 남편을 따라 공식행사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도 드물다. 유일한 경영자인 현정은씨도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전업주부’였다. 오너 일가를 가까이서 들여다본 한 관계자는 “지금도 명절 때면 청운동 집(정주영 회장이 생전에 오랫동안 살던 집)에 몇 대에 걸친 며느리들이 모두 모여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음식을 직접 장만한다.”면서 “옷차림들도 수수하고 인상이 소박해 언뜻 봐서는 재벌가 며느리란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고 전했다. 그러면서도 한결같이 미인들이다. 어떤 이는 그 이유를 ‘유난히 많은 연애결혼’에서 찾는다. ●그룹분리 가속화시킨 ‘경영권 분쟁’ 2000년 ‘형제간 다툼’은 현대가를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핵분열시킨 결정적 계기였다.99년 12월 마지막 날, 고 정몽헌(MH) 회장쪽 인사로 분류되던 박세용 당시 그룹 구조조정본부장이 정몽구(MK) 회장 계열의 현대차 회장으로 전격 발령나면서 시작된 형제간의 경영권 갈등은 그룹 후계자로 MH를 지목한 고 정주영 회장의 육성 테이프가 공개되기까지 석달여에 걸쳐 숨막히게 전개됐다. 효심이 남달랐던 MK는 아버지의 육성이 공개되자 깨끗이 승복하고 자동차 계열사를 이끌고 그룹에서 나왔다. 이 과정에서 아픔도 적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현대의 지배구조를 선진화시키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오는 21일 왕 회장의 4주기에 모처럼 형제들 모두가 함께 제사를 지낼 예정이다. 이날은 공식적으로 가족화합이 됐음을 안팎에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현대가에 정통한 소식통은 전했다. hyun@seoul.co.kr ■ 정주영 회장의 ‘빈대론’ 창업주인 고 정주영 회장은 ‘해당화가 찬란하고 눈(雪)이 많은’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에서 1915년 6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죽어라고 일해도 콩죽을 면할 길이 없는 농군이 진절머리나게 싫고 지겨워”(첫번째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에서) 소학교를 졸업한 열네살 무렵부터 줄기차게 가출을 시도했다. 무작정 길을 나서 보기도 하고, 아버지의 소 판 돈을 훔쳐도 봤다. 그러기를 네번째. 열아홉살 마지막 가출에 성공해 인천부두 막노동꾼으로 새 삶을 시작했다. 한 푼이 아까워 몸을 기댔던 곳이 노동자 합숙소. 뼈가 으스러지는 중노동으로 누가 떠메고 가도 모를 만큼 고단했지만 좀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빈대들의 공격 때문이었다. 궁리 끝에 밥상 위에 올라가 잠을 잤다. 빈대들의 공격이 잠시 뜸해지는 듯싶었다. 하지만 이내 밥상다리를 타고 기어올라와 온 몸을 물어 뜯었다. 다시 머리를 써야 했다. 무릎을 탁 칠 만한 묘안이 떠올랐다. 밥상다리 네 개를 물 담은 양재기 넷에 하나씩 담근 뒤 그 위에 올라가 잔 것이다. 빈대를 밥상다리로 유도해 양재기 물에 익사시키자는 계략이었다. 쾌재를 부른 것도 이틀여. 빈대들은 또다시 물어뜯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떻게 양재기 물을 건넌 것일까.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나 불을 켜본 젊은 정주영 회장은 기겁을 하고 말았다. 빈대들이 밥상다리 대신 벽을 타고 천장으로 올라가 사람을 겨냥해 뚝 떨어져 목적 달성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역경에 부딪칠 때마다 정주영 회장은 ‘빈대의 노력’을 떠올렸다.“난관은 극복하라고 있는 것이지, 걸려 넘어지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든지 “빈대만도 못한 놈”이라는 단골 지청구는 모두 여기서 비롯됐다. 아무것도 없는 백사장(울산 염포리) 사진 한 장 달랑 들고 조선소 투자금액을 유치할 때나,20세기 최대 역사(役事)로 꼽히던 중동 주베일 공사 입찰전에 뛰어들 때나, 직원들이 불가능하다고 도리질칠 때면 “이봐, 해봤어?”라고 불호령을 쳤던 것도 빈대의 집요한 노력을 떠올리면서였다. “자본가가 아니라 부유한 노동자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정의했던 정주영 회장은 근검과 노력을 평생의 신조로 삼았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평등한 자본금” “한강에 기적은 없다. 성실하고 지혜로운 노동이 있을 뿐” “고선지부지설(苦蟬之不知雪;여름철 서늘한 나무 그늘에 앉아 노래만 하다 겨울이 오기 전에 없어지는 매미는 한겨울 펑펑 쏟아지는 눈을 알 수 없다)” ‘아산 정주영 어록’에 실려있는 그의 유명한 말들이다. hyun@seoul.co.kr ■ ‘현대家 대모’ 변중석 여사 열여섯살에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여섯살 연상의 고향총각 정주영에게 시집온 변중석씨는 현대가의 산 증인이다. 올해로 84세. 젊어서 남편이 사준 재봉틀 하나를 자신 소유의 유일한 재산으로 여기며 한결같은 근검과 후덕함으로 ‘현대가의 여자’라는 상징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고 정주영 회장이 매일 새벽 5시의 ‘밥상머리 교육’을 통해 동생들과 자식들에게 근검을 가르쳤다면, 변씨는 새벽 3시반부터 손아래 동서·며느리들과 아침 준비를 함께 하면서 “언제나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겸손하라.”고 일렀다. 가혹하리만치 자식 교육에 엄격했던 정주영 회장이 아이들을 자가용으로 등교시키는 며느리들을 보고 “젊었을 때 콩나물 버스에 시달려봐야 나중에 자가용을 샀을 때의 기쁨을 안다.”며 역정을 내자 “손주녀석들 키우는 문제에까지 시아버지가 잔소리를 할 거냐.”며 막아준 이도 변씨였다. 칭찬에 인색했던 정주영 회장도 아내를 가리켜 “늘 통바지 차림에 무뚝뚝하지만 60년을 한결같고 변함이 없어 존경한다.”고 자서전에서 고백했을 정도다.“아내를 보며 현명한 내조는 조용한 내조라는 생각을 굳혔다.”고도 했다. 그러나 자식을 먼저 땅에 묻는 참척의 고통과 여자로서의 마음고생을 거치면서 ‘살아있는 보살’도 탈이 났다. 거동이 불편해 10년 가까이 병원(현대아산병원) 생활을 하고 있다. 사실상 맏며느리인 이정화씨 등 며느리들이 틈날 때마다 병실을 들여다보고 있다. hyun@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최광숙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뒷골목 맛세상] 공덕동 시장안의 인심

    [뒷골목 맛세상] 공덕동 시장안의 인심

    서울 마포구 공덕동 시장 안에 간판도 없는 서너 평 남짓한 선술집이 있었다. 주로 시장 안의 상인들이 목이 마르면 선 자리에서 막걸리 한 사발이나 혹은 소주 한 병을 신김치나 술국을 안주 삼아 벌컥벌컥 마시고는 곧장 가게로 달려가는 곳이었다. 이 간판 없는 술집의 소중한 값어치를 소위 글쟁이들 중에서도 눈 밝은 어떤 이가 발견하였다. 1980년대 초였는데, 둥근 드럼통을 잘라 만든 술탁 3개가 전부인 그 선술집을 글쟁이들은 멍청이집이라고 불렀고, 술집 아주머니를 일러 멍청이아줌마라고 불렀다. 당시 40대 언저리의 멍청이아줌마는 글쟁이들의 그런 호칭을 전혀 개의하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멍청이집과 멍청이아줌마는 글쟁이판은 물론 신문사 문화부의 문학이나 출판 담당 기자들이며 영화판이나 굿판 같은 딴따라판에서까지 꽤 유명한 집이 되고 말았다. ●간판조차 없었던 선술집 ‘멍청이집’ 글쟁이판에서 가장 먼저 멍청이집을 발견한 것은 당시에 공덕동 시장 가까운 골목에 있는 금성출판사의 주간이자 시인인 강민, 시인인 유제하, 이병희, 성귀영, 지금은 문학동네 발행인으로 있는 강태형, 시조시인 김원각, 작가 이채형 등 소위 ‘금성사단’이었다. 그 뒤로 나를 위시한 시인 이시영이며 윤재철, 윤중호, 김사인, 작가 윤후명, 김민숙, 김상렬에 이어 영화감독 이장호, 장선우 등이 줄을 섰다. 하루 종일 시장 상인들을 상대로 고작 잔술이나 팔던 버릇을 해서 워낙에 안주에 대한 개념이 없던 멍청이아줌마에게, 우리 같은 글쟁이들은 얼핏 상상이 안 되는 특별한 손님이었다. 적어도 글쟁이들이 드나들기 전에는 술국이나 신김치 이외에는 전혀 안주가 필요하지 않던 술집이어서 미리 준비한 안주가 없던 터라, 우리가 안주를 시키면 그때야 부랴부랴 시장에 있는 생선가게로 달려가고는 했는데, 안주감도 꼭 우리가 시키는 데 맞추어, 꽁치며 고등어, 생태, 오징어, 주꾸미, 낙지 등속을 사왔다. 그리고 나중에 계산을 할 때면 약간 더듬거리는 어눌한 말투로 미안한 듯 말했다. “저기, 꽁치나 고등어 같은 것은 탄불에 굽기만 했으니께, 기냥 생선가게에서 산 대루 주기만 하면 되구라우, 오징어하고 쭈꾸미는 양념값 오십원을 따로 보탰구먼이라우. 그렁께 쏘주 네 병에다가 이거저거 모다 합치먼, 오메, 삼천원이 넘는 갚소잉?” 멍청이아줌마의 술값은 으레 자신이 시장에서 사온 생선값에 양념값 얼마를 더하는 식이었고, 이런 계산법에서 바로 멍청이란 호칭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처음에는 우리 또한 이런 계산법에 서투른 나머지 차라리 멍청이아줌마의 계산에 얼마를 더하는 우리 식의 계산법이 따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1980년 당시에는 주꾸미며 낙지 같은 해산물을 양념을 발라 석쇠에 올려 연탄불에 구워먹는 소위 주꾸미양념구이나 낙지양념구이 같은 요리는 시중에 아직 개발되지 않고 있었는데, 엉뚱하게도 멍청이집에서 비롯되었다. 처음에 내가 낙지며 주꾸미를 양념에 발라 구이를 해먹겠다고 하자 멍청이 아줌마는 대뜸 손사래부터 쳤다.“오메, 우찌께 낙자나 쭈구미 같은 물것을 탄불에다 꾸어 잡순다요? 물것은 기냥 데쳐서 잡사야제, 탄불에 꾸먼 오그라들어 맛이 없을 거인디.” 멍청이 아줌마가 손사래를 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내가 숙수로 나섰는데, 우선 주꾸미를 생물로 한번 굽고 약간 꼬들꼬들해졌을 때 고추장이며 고춧가루에 설탕이며 파 마늘, 간장을 넣어 갠 양념장을 발라 탄불 위에 올려 불을 쏘이자마자 그대로 먹는 식의 주꾸미 양념구이가 만들어졌다. 그러자 다 만들어진 주꾸미양념구이를 한 점 맛본 멍청이아줌마가 큰소리를 냈다. “오메, 쭈꾸미가 우찌께 이런 맛이 다 난다요?” 멍청이아줌마는 주꾸미 한 점과 곁들여 당연히 우리가 따라주는 소주 한 잔도 곁들였는데, 그러다보면 에라, 모르겠다, 하고 아예 우리 자리에 퍼질러 앉아 함께 어울리며 술자리의 흥을 더하기도 하였다. 멍청이집에서는 이런 식으로 주꾸미에서 비롯해서 낙지까지 몇 가지 요리가 더 만들어졌는데, 이를테면 낙지를 살짝 데친 다음에 애호박을 채 썰어서 역시 살짝 데쳐내어 식초와 설탕 고주장, 고춧가루에 마늘이며 파 같은 갖은 양념을 하여 버무려 먹는 낙지회무침 같은 것이었다. ●글쟁이 술꾼들이 안주 개발하기도 멍청이아줌마로서는 파천황의 대사건이 일어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날따라 일행이 많아서 모두 대여섯 명이 탁자에 둘러앉아 낙지연탄불구이며 낙지회무침을 위시해서 평소보다 많은 안주를 시켰는데, 어느 순간부터 멍청이아줌마가 좌불안석으로 우리 곁은 빙빙 돌더니 더 이상 못 참고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술 잡숫는디, 죄송하제만이라우.” “예, 뭐 잘못된 것이라도 있는가요?” “그거이, 그거이.....” “말씀하세요.” “오메오메, 시방 술값이 만원이 넘었당께요.” 멍청이아줌마로서는 선술집을 시작한 후로 술값이 만원을 넘은 손님은 내가 처음이었던 것이다. 이 마음씨 좋고 정이 넘쳐나던 멍청이아줌마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풍을 맞는 불행한 일을 당해 반신을 못 쓰게 되는 바람에 가게 문을 닫았고, 아울러 글쟁이들의 흥겨운 공덕동 시절도 시들해져 버렸다. 멍청이아줌마의 추억이 담겨 있는 공덕동 시장은 20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서는 주변에 대형 빌딩들이 들어서는 바람에 대부분이 먹자골목으로 변했다. 지하철 5·6호선이 만나는 공덕역 5번 출구를 빠져나오면 우선 유명한 최대포집이 나오고, 거기서 비롯하여 마포골뱅이 골목, 마포오향족발이며 궁중족발, 소문난영양족발 같은 족발 골목, 마포할머니빈대떡이며 청학동부침개의 모듬전 골목 등이 이제 막 시장기를 느끼기 시작한 손님들의 걸음을 멈추게 할 터이다. 바로 마포할머니빈대떡 골목을 들어서서 10여 미터 시장 안으로 들어오면 수건만한 크기의 아크릴 간판에 전주식당(02-711-0238)이라고 써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전주식당은 4000원짜리 가정식백반이 유명한데, 가게방으로는 모자라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노점에 앉아 불편하게 식사를 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마포 일대의 빌딩에 근무하는 샐러리맨들 사이에 점심 무렵이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만큼 인기가 높다. ●가게방 모자라 노점서 식사해도 장사진 전주식당의 인기는 무엇보다도 전주출신인 주인 아주머니 김정자씨의 큰 손에 있다. 무슨 반찬이든지 접시에 수북수북 쌓이지 않으면 직성이 안 풀리는 그이가 가정식백반에 담아내는 반찬은 생굴무침, 조기구이, 고사리나물, 봄똥김치, 묵은김치, 고구마순, 시래기무침, 감자샐러드에 한번 맛보면 손님들이 누구나 빠져드는 청국장의 깊은 맛이 곁들인다. 그러나 전주식당의 참맛을 알려면 아무래도 저녁이 되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저녁이면 홍어삼합이며 홍어회, 아구찜을 파는데, 여기에서 비로소 주인 되는 이의 큰 손과 맛에다가 넉넉한 인심과 넘치는 정이 제대로 빛을 내는 것이다. 홍어삼합의 경우 커다란 대형 접시가 넘칠 정도로 전라도의 묵은김치며 돼지고기, 홍어가 가득히 나오는데, 네댓 명이 먹을 수 있는 양이 3만원이고, 서너 명이 먹을 수 있는 양은 2만원이다. 게다가 곁들여 나오는 홍어탕은 진한 맛이 일품인데, 두세 번 얼마든지 시켜도 된다. 홍어회며 아구찜도 같은 값인데, 양 또한 넘쳐날 정도인 것은 물론이다. 얼마 전에 환갑을 지난 김정자씨는 술자리가 어우러지면 어느 새 소주 한 병과 생선찌개를 들고 천연덕스럽게 손님자리에 끼어든다. “옛수, 요건 서비스요오.” 그리고 손님이 술을 권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 마시고는 어느 새 술자리를 이끌어 나간다. 이를테면 그이는 천성적인 놀이꾼이자 신명꾼이다. 아니, 그이만이 아니다. 남편되는 칠순의 조과영씨마저도 어쩌다 가게에 들리면 기꺼이 손님들과 어울린다. 그렇게 부부가 신명이 오르면 김정자씨가 소리친다. “장사 때레치우고 노래방에나 갑시다아.” 지하철 5호선 마포역 1번 출구를 나와 용강동길로 접어들면 한화오벨리스크 뒤편이자 마포주차장 건너편 먹자골목 어귀에 주꾸미집(02-719-8393)이 있다. 무슨 옥호도 없이 간판이 그저 주꾸미집이다. 그런데 이 단순한 주꾸미집이라는 이름에 대한 주인 되는 이진숙씨의 생각이 뜻밖에 철학적이다. “이름을 뭘로 해야 주꾸미를 가장 잘 나타낼까 고민 많이 했제라우. 근디 주꾸미한테다가 벨 이름을 다 붙에봤자 주꾸미가 살아나덜 안해라우. 그래서 할 수 없이 기냥 주꾸미집이라고 했어라우. 그라고 낭께 주꾸미 파는 집서 주꾸미집처럼 잘 어울리는 이름이 달리 없더랑께요. 아자씨는 생각이 어쩌요?” 주꾸미집은 과연 주꾸미집답게 메뉴가 주꾸미숯불구이에다가 왕새우구이가 다다. 아니, 주꾸미숯불구이를 시키면 따라 나오는 해물된장이 더 있다.1인분에 8000원 하는 주꾸미숯불구이는 그 양이 만만치 않아서, 만일 양이 적은 사람이라면 혼자서 1인분을 다 먹기가 약간 부담스러울 정도이다. 양념한 주꾸미를 석쇠 위에 올려 숯불에 구워내는 식인데, 특이한 것은 무슨 상추나 배추 같은 야채에 싸서 먹는 것이 아니라 생김에 싸먹는다는 것이다. 마늘이며 고추를 곁들여서 주꾸미를 생김에 싸먹는데, 그것들이 입안에서 어울려드는 맛이란 뜻밖으로 환상적이다. 이따금씩 커다란 냉면사발 한 가득 얼음이 둥둥 뜬 동치미로 입가심을 하고 나면 아무리 배가 불러도 저절로 다시 주꾸미에 손이 간다. ●생김에 싸먹는 주꾸미구이 맛 환상적 저녁 무렵만 되면 손님이 붐비기 시작하는데, 달리 종업원을 두지 않고 주인 내외가 눈코 뜰 사이 없이 어지럽게 움직인다. 돈도 많이 버는데 종업원 좀 두지 그러냐는 질문에 바깥주인 되는 문태복씨가 엉뚱하게 메뉴판을 손짓해 보였다. “종업원을 두면 나야 펜하제만, 저걸 감당하지 못항께요.” 무슨 뜻인지, 하고 눈으로 묻자 그이는 뒷말을 이었다. “종업원 한 사람 두면 아메도 저 팔천원이 만원으로 올라갈 꺼이요. 안그러면 양이 적어지던가. 나가 주꾸미집을 하는 한 그짓은 못하겄소. 기냥 몸으로 때워야제.” 주인 내외가 고향인 전라남도 나주시 공산면을 떠나온 것은 1976년이었다. 원래 한 마을의 위아랫집에서 처녀총각으로 살았는데, 어쩌다가 밀밭이며 방앗간을 오가면서 정분이 났다. 결국 마을에 소문이 나는 바람에 처녀총각이 밤보따리를 싸고 말았다. 그리하여 서울이며 경기도 일대의 변두리를 전전하는 인생유전의 고생이 시작되었다. 내외는 부천 오정동, 약대동, 광명시 철산동, 서울의 왕십리 등 무려 25번을 이사한 끝에 마포 도화동에 대지 15평짜리 내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내외는 그때 하도 돈에 포한이 져서 큰딸 이름을 봉황이라고 지었는데, 한문이 봉우리 봉(峯)에 황금 할 때의 황(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돈에 포한이 진 주인 내외라지만, 표정은 구김살 하나 없이 밝은데, 거기에 대한 안주인의 대답이 또한 걸작이다. “우리 내외가 둘 다 워낙에 놀기롤 좋아헌단 말이요. 아무리 없이 살어도 노는 디라면 빠지지 않고 다니제라우. 글다본께 남들 눈에는 근심걱정 한나도 없는 사람으로 비치는 모양입디다.”
  • [길섶에서]유리닦는 시인/이호준 인터넷부장

    그가 모처럼 찾아왔다. 눈에 이어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연락도 없이 회사앞까지 와서 불쑥 전화를 했다.“비가 오니 빈대떡 생각이 나서….” 비 때문에, 선배가 보고 싶어서 그가 무작정 버스를 탄 곳은 대전이었다. 그 곳이라고 빈대떡집이 없을 리 없다. 그는 마주앉아서도 별 말이 없다.“일은 어때? 추운데 괜찮아?” 검게 탄 얼굴과 거친 손이 안타깝다.“할 만해요. 추울 땐 추운 대로 더울 땐 더운 대로….” 그는 줄에 매달려 빌딩유리를 닦는다. 대학 때 산을 오르던 인연으로 시작한 일이 직업이 되었다. 그는 시인이기도 하다. 삶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바람에 흔들리기도 하지만, 높은 곳에서 익힌 관조의 시선으로 노래하면 그만이다. 세월에 목마른 사람은/떠나가는 계절에 기대어/노랫가락 한 소절을 흥얼거린다(중략)//여윈 가지 힘없이 흔드는 바람으로/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지만/불현듯 떠오르는 그리움마저 떨칠 수 있을까. 그는 삶을 따뜻하게 껴안는데 인색하지 않다. 그리고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한다. 양지에 깃든 새만이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건 아니다. 이호준 인터넷부장 sagang@seoul.co.kr
  • 개설 100돌 광장시장 “명성 회복”

    개설 100돌 광장시장 “명성 회복”

    ‘동대문 시장의 아성을 되찾겠다!’광장시장이 개설 100주년을 맞아 재도약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오는 4월이면 지난 2002년부터 30개월에 걸쳐 진행된 환경개선사업을 마치고 준공식과 함께 상인들이 자체적으로 개발 중인 CI(이미지 통합) 선포식을 가질 예정이다.‘동대문 시장’으로 불리며 도·산매 유통을 주름잡던 1960∼80년대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상인들이 나선 것. 골목마다 지붕을 얹는 등 새단장을 거의 마친 채 색동저고리 설빔과 굴비, 한과 등을 푸짐하게 차려놓고 설 손님 맞이에 분주한 광장시장을 찾았다. “여섯살 여자아이면 화사한 색동 저고리에 연분홍색 치마를 입혀 보세요. 꽃신을 신기고 아얌까지 씌우면 정말 예쁘지 않겠어요? 한번 입혀 보시죠.” 능숙한 상인의 말솜씨에 6살 아영이 엄마 김영신(35)씨는 선뜻 지갑을 열었다. 앙증맞게 한복을 차려입은 아영의 활짝 웃는 얼굴을 떠올려 보니 치마와 저고리에 아얌, 속치마가 포함된 설빔 세트를 사는 데 들어간 4만원이 아깝지 않은 눈치다. 김씨는 “올해는 연휴가 긴 덕분에 오래간만에 친정에도 다녀올 계획이어서 아이의 설빔을 마련했다.”며 “광장시장은 싸고 예쁜 한복이 많아 혼수도 여기서 했고, 한복 살 일이 있으면 늘 이곳을 찾는다.”고 말한다. 지난달 3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예지동의 광장시장은 추운 날씨만큼 얼어버린 경기지만, 그래도 설빔과 제수용품 등을 사러 온 사람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다. 아이들 한복점, 채소 및 생선가게, 한과 전문점 등에는 평소보다 많은 손님들이 몰려 설대목 분위기가 느껴졌다. ●한복세트 소매상 절반가격에 살수 있어 이곳 한복가게에서 어린이용 한복세트를 사는 데 드는 비용은 약 4만∼7만원. 어린이용 한복 가게들이 모여있는 광장시장 1층 청계천쪽 골목에서 ‘대동강 한복’을 운영하는 박진철씨는 “대부분 한복·포목점들이 도·산매를 겸하고 있기 때문에 소매상점보다 50% 정도 저렴한 도매가에 옷을 살 수 있다.”며 “수십년간 장사를 해온 베테랑 상인들이 많기 때문에 무조건 깎으려 하지 말고 색상과 사이즈, 가격까지 믿고 맡기는 게 좋다.”고 당부한다. 5000여개의 점포 중 포목, 주단, 의류부자재 등 섬유관련 매장이 80% 이상을 차지하는 만큼 의류 및 원단 시장으로 알려진 곳이지만, 설빔이나 차례용품을 저렴하게 파는 가게들도 많이 있다. 종로변 농협 뒤편 광장시장 입구에서 청계천 쪽으로 들어가 첫번째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채소·과일·한과·생선·정육·떡집 등 차례용 음식을 마련할 수 있는 가게들이 쭉 늘어서 있다. 이 덕분에 설빔 사러 왔다가 차례용품까지 마련해 가는 사람도 많다. 이곳에서 5인 가족 차례상을 차리기 위한 재료를 마련하는 데 드는 비용은 10만원선으로 비교적 저렴한 편이다. 한과 등을 팔고 있는 조명자씨는 “이곳 식품 상점들은 전통이 오래된 만큼 40년 이상 거래한 업체에서 물건을 들여오기 때문에 가격보다는 품질이 뛰어나다.”며 “이곳의 야채·한과는 청와대로 들어가고 있을 정도로 질이 좋다.”고 자랑한다. ●과일·한과등 제수도 한꺼번에 구입가등 “‘100년 전통’은 살리되 노후된 시장이라는 이미지는 벗어 던질 것입니다.” 종로 광장상인총연합회 장병학 회장은 “올해는 광장시장이 상설시장으로 개설된 지 꼭 100년이 되는 의미 깊은 해”라며 “환경개선사업을 통해 바닥과 간판을 깔끔하게 정비하고 지붕을 얹어 어떤 날씨에도 쇼핑하기 편하게 개선했다.”고 말한다. 그는 특히 “포장과 쇼핑백에 쓰일 CI 개발도 하고 있어 2005년을 ‘광장시장 재부흥의 해’로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광장주식회사 김학석 상무이사는 “1905년 ‘동대문시장’으로 불리던 광장시장이 등록된 이후 점차 동대문운동장 쪽으로 확대된 것인데, 그 쪽에 현대식 쇼핑몰이 들어서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손님이 많이 줄었다.”며 “그러나 여전히 광장시장은 최고급 원단 생산의 중심지이며, 앞으로 인터넷쇼핑몰 구축 등을 통해 더욱 경쟁력 있는 시장으로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글· 사진 서재희기자 s123@seoul.co.kr ■먹을거리 골목-족발·국수 군침 절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족발 한 접시를 앞에 놓고 소주잔을 기울이며 고단한 몸을 녹이는 도매상인들, 장을 보러 왔다가 시장 바구니를 옆에 둔 채 장터국수를 먹으며 허기를 달래는 주부들…. 빈대떡을 뒤집는 아주머니의 손놀림에 아예 입을 떡 벌리고 서있는 아이들은 광장시장의 ‘먹을거리 골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종로에서 청계천 방향으로 길게 뻗어있는 ‘먹을거리 골목’은 광장시장에서 ‘별미’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통통한 순대 한 줄에 5000원, 큰 대접에 담긴 팥죽 한 그릇에 3000원 등 5000원이면 배부르게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양이 푸짐한 데다, 어느 가게를 선택해도 후회없을 정도로 맛이 훌륭하다는 점이 이곳의 큰 매력이다.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좌판 수도 하나둘 늘어나 지금은 점포가 360여개에 이른다. 야간장으로 운영되는 의류가게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주단·한복 점포들은 오전 6∼7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문을 열지만, 먹을거리 골목은 밤 12시까지도 영업하는 곳이 많으므로 느지막한 저녁에 찾아가도 괜찮다. 글 서재희기자 s123@seoul.co.kr
  • [공연리뷰] 거울공주 평강이야기

    [공연리뷰] 거울공주 평강이야기

    아카펠라 뮤지컬 ‘거울공주 평강이야기’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익히 알고 있는 평강공주와 온달장군 이야기를 약간 비튼 이 작품의 주인공은 평강공주의 몸종 ‘연이’. 공주가 되고 싶었던 연이는 평강공주가 애지중지하는 거울을 훔쳐 숲 속으로 달아난다. 우연히 만난 야생소년을 온달처럼 가르치며 평강 흉내를 내던 연이. 그러던 차에 둘은 온달 암살 임무를 띤 후주국 비밀병사로부터 ‘진짜’로 오인받아 붙잡힌다. 연이를 구하려다 야생소년은 죽음을 맞고 연이는 자아에 대한 소중함을 다시 회복하게 된다. 다소 동화 같은 이야기가 전혀 지루함을 주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작품의 독특한 형식과 몸을 아끼지 않는 배우들의 열연 때문이다. 이야기꾼이 등장해 무대 위의 배우, 관객들과 상호교통하며 극을 진행하는 방식부터 눈길을 끈다. 대나무 숲을 그려 넣은 세트 말고는 텅 빈 무대. 음향도 일절 없고 소품도 최소화했다. 배우들은 몸과 입으로 숲, 바람, 나무, 호수 등을 형상화해낸다. 장면마다 기발한 상상력이 녹아 들어 연신 배꼽을 잡게 한다. 특히 고전 발레 ‘백조의 호수’ 테마를 읊으며 물결과 파도를 온몸으로 표현해 내는 호수 장면과 배고픔에 지친 후주국 비밀병사가 부르는 ‘빈대떡송’에 관객은 떠나갈 듯한 웃음과 박수소리로 화답했다. 한 가지 꼬집자면 정색하고 뮤지컬이라 부르기에 좀 뭣한 배우들의 노래 실력. 프로페셔널에는 못 미치는 수준이지만 한편으로는 그 풋풋함에 오히려 너그러워질 수도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출신들이 모여 만든 공연배달서비스 간다의 첫 작품으로 지난해 가을 초연돼 호평을 받았다. 그저 한바탕 유쾌하고 웃고 싶은 이들에게 ‘강추’다.20일까지 소극장축제(02)741-3934. 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 [성공시대]한 판 5000원 이동식 피자

    [성공시대]한 판 5000원 이동식 피자

    불황에는 아무래도 저렴한 먹을거리가 인기다. 합리적인 소비자들은 비싸지 않으면서도 맛 좋은 간식 앞에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멈춘다. 이동식 피자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이한교(50)씨는 거품을 뺀 5000원짜리 ‘맞춤 피자’로 하루 50만원 매출을 거뜬하게 올리고 있다. 이태원과 양재동·논현동 등을 오가며 자신의 소형트럭을 명물 가게로 일궜다. ●‘맞춤 피자’로 고객 입맛 사로잡아 그가 만든 피자에는 치즈가 듬뿍 담겨 있다. 콤비네이션과 불고기, 양송이, 야채, 페페로니 등 5가지 피자가 그의 손을 거쳐 구워진다. 최근 유행하는 고구마피자나 단호박피자 등 퓨전피자는 빠졌다. 가지수를 한정하면 고객이 기호에 따라 ‘어떤 재료를 넣고 뺄 것인가’하는 요구사항이 반영되는 ‘맞춤피자’를 만들 수 있다. 5분 이상 기다려야 하는 대기시간에도 불구, 재료를 아끼지 않고 만드는 그의 손놀림은 쉴 틈이 없다. “노점은 자리를 잡는 데만 6개월 이상이 걸립니다. 사람들이 이곳에서 제가 피자를 판다는 것과 노점 피자의 맛이 괜찮다는 사실이 퍼질 때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화요일부터 시작되는 그의 1주일 시간표는 화·수요일 후암동, 목요일 신사동, 금요일 논현동, 토요일 이태원, 일요일 양재동으로 짜여진다. 한 곳에 오래 머물기 보다 이동하면서 특정 요일에만 판매하는 것이 매출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서다. 좋은 자리를 잡는 데도 유리하다. “피자가게를 하던 친구집을 드나들면서 어깨 너머로 피자 만드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그 친구는 밀가루 반죽까지 직접했는데 노점피자는 빨리 구워야 하는 특성상 밀가루타일은 만들어진 것을 이용합니다.” 그가 피자를 팔게 된 계기는 4년전 개인적인 사정으로 슈퍼마켓을 접고 새로운 장사를 시작하면서 부터다. 피자에는 ‘일가견’이 있던 터라 아이들이 좋아하는 먹을거리로 아이템을 정했다. 최근에는 자신감이 붙어 알음알음으로 피자가게 컨설팅에도 나섰다. 몇 군데를 도와줬는데 자신보다 매출이 높은 가게까지 나왔다. ●1000만원 투자… 한달 순익 300만~400만원 그의 창업자금은 소형트럭과 오븐 등을 합쳐 1000만원이 투입됐다. 하루 팔리는 피자는 80∼100개, 하루 매출액은 40만∼50만원이다. 한달에 1500∼2000개 팔리는 피자는 4년 동안 줄잡아 10만개 정도 구웠다. 매출에서 순이익 비율은 40%, 월 300만∼400만원의 순이익을 거둔다. “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날에는 사람들이 이탈리아 빈대떡인 피자를 더 찾습니다. 봄·가을에 매출액이 높으며 아무래도 너무 덥거나 추운 날에는 매출액이 30%정도 떨어지죠.” 오후 5시에 문을 열어 자정이나 새벽 1시까지 장사를 한다. 오후 5∼6시,9∼10시에 손님들이 몰린다. 대부분 한 번씩이라도 먹어본 사람들이 찾으며 젊은층이 많다. 저렴해서 한꺼번에 몇 판씩 구입하는 손님도 있다. 매출에서 불고기와 콤비네이션피자가 70%를 차지한다. “재료는 다른 피자가게처럼 공급업체에서 받아 불편한 점은 없습니다. 대신 토마토소스는 제가 변형시켜서 직접 만들어요. 제 아이들이 먹는다는 심정으로 피자를 구워내며 손님들이 요구하는 세심한 부분까지 모두 들어줍니다.” 우연찮게 피자장사를 시작했지만 슈퍼마켓과 우유가게를 통해 쌓은 이력은 손님을 대하는 방식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재빠르게 구워야 하며 손님들이 다양하게 요구하는 탓에 짜증이 날 법도 하다. 하지만 얼굴을 찌푸리지 않는다. 피자에 콜라를 끼워 팔면 매출액이 높을 것 같다고 제안하자 그것은 인근 가게의 몫이라며 사양했다. “불황에 저렴한 피자가 맞아떨어진 셈이죠. 하지만 노점은 자리가 불안정해 여러가지로 애로사항이 많아요. 내 가게를 열 정도로 기반이 잡히면 피자와 다른 업종을 섞어 점포를 하나 낼 생각입니다.” 글 사진 이유종기자 bel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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