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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만진의 도시탐구] 386세대의 초라한 성적표 미세먼지

    [최만진의 도시탐구] 386세대의 초라한 성적표 미세먼지

    386세대는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니고 1990년대에 30대가 된 세대를 지칭한다.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1980년대 군부독재에 맞서 투쟁을 벌여 민주주의를 크게 발전시킨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도리어 기득권을 가진 기성세대가 돼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유럽에서 이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은 1968년 프랑스 파리에서 시발된 ‘68운동’인데, 그 핵심 이슈는 미국의 베트남 참전을 계기로 한 전쟁 반대였다. 나아가서는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고착화된 양극화와 냉전, 이로 인한 무한한 군비경쟁과 세계 제3차 대전을 통한 인류 종말을 우려했다. 이는 미국으로 건너가 히피운동으로 발전돼 성과 인종 차별 그리고 권위의 타파와 자유로운 평등사회 건설까지도 주장하는 문화 혁명으로 진보했다. 한편 독일에서는 나치 전쟁범죄에 대한 과거사 청산이 최고의 화두로 떠올랐다. 이를 통해 어둠과 독재, 범죄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 밝고 투명한 새로운 사회를 구축하기를 원했다. 독일인은 이웃과 국가뿐만 아니라 자연과도 조화로워야 한다는 점을 발견한다. 산업화 과정에서 생긴 도시과밀화로 인한 환경오염과 자연의 파괴가 전쟁만큼이나 끔찍함을 알게 된 것이다. 또 석유 가격이 치솟아 심각한 세계 경제위기를 초래했던 1970년대의 오일 쇼크 사태를 보면서 에너지 대량 소비사회의 취약점도 깨닫게 됐다. 특히 위험천만한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반대해 투쟁하기도 했다. 생태수도인 프라이부르크는 인근의 원전 건설 중단에 대한 대안으로 에너지 자족도시를 만들기 시작함으로써 탄생했다. 1980년대에는 사회 전체가 환경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머리를 맞대기 시작했고 막대한 비용과 예산을 투입했다. 이러한 인식과 운동은 정치적으로도 큰 파장을 몰고 왔다. 1979년에는 독일 녹색당이 창당돼 환경보호는 물론이고 반전평화, 비폭력, 인권옹호, 사회정의 등을 중시하는 정책을 펼쳐갔다. 또한 군비 증강 반대, 원전 포기, 무기수출 억제 등도 주장했다. 처음 지지율이 매우 미미했던 녹색당은 1990년대 후반에는 연정을 통해 집권당이 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독일은 2022년도 원전 전면 폐쇄를 결정했다. 오늘날에는 생태 강국이 돼 쾌적한 건조 환경을 만들었으며 최첨단 환경기술로 경제 강국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우리 386운동은 민주화는 성취했으나 또 다른 민주 개념인 자연, 기술, 사람이 어우러지는 환경적 공생은 놓친 듯하다. 연일 발생하는 초미세먼지 사태는 이제는 기득권이 된 386세대가 미처 생각하고 대비하지 못해 자초한 초라한 성적표라 말할 수 있다. 현 정부 정책의 핵심 기조인 포용사회는 환경에도 포괄적으로 적용돼야만 한다.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만 달려온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자연과 평화롭게 어우러지는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일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독재 권력이나 무기가 아닌 환경파괴가 주는 재앙이 머지않아 우리를 멸망시킬 수도 있다.
  • “온국민 참여한 성공한 혁명” vs “잘못된 지도로 실패한 시위”

    “온국민 참여한 성공한 혁명” vs “잘못된 지도로 실패한 시위”

    “3·1운동은 신분과 직업, 종교의 구별 없이 도시와 농촌,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든 계층이 다같이 참여한 우리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었다.”(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3·1 인민 봉기는 외세 의존에 물젖은 인물들의 잘못된 지도로 빛을 보지 못하고 실패의 교훈만 남겼다. 구차스럽게 청원의 방법으로 ‘독립’을 얻으려고 했다.”(북한 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 3·1운동에 대한 두 가지 다른 평가다. 우리 학계에서는 3·1운동이 일제의 무단통치에 저항하고 한반도에 민주공화정을 세우는 밑거름이 됐다며 ‘5000년 역사의 최대 사건’으로 추켜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3·1운동이 그만한 찬사를 받을 만큼 파급력이 큰 사건이 아니었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3·1운동이 일어나 실제 광복이 되기까지 26년이나 걸렸기 때문에 둘 사이에 연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당시 민족지도자들이 우드로 윌슨(1856~1924)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를 잘못 이해해 시위에 나섰다는 시각도 있다. 과연 우리는 3·1운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고종 승하로 일제 억압에 대한 반발 터진 것 1919년 3월 1일 새벽 서울 종로와 서대문 일대의 주택가 담벼락에 다음과 같은 격문이 붙었다. “우리 이천만 동포여, 우리 폐하 붕어(사망)의 원인을 아는가. 모르는가. 역도를 사주해 시해를 하고자 윤덕영과 한상학에게 음식을 올리는 때를 기다리게 해 시녀로 하여금 식혜에 독약을 넣게 한 것이다.” 앞서 고종(1852~1919)은 1월 21일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건강 하나만큼은 ‘완전체’에 가깝다고 알려진 그가 돌연사하자 타살 의혹이 빠르게 퍼졌다. 이 격문은 3월 3일로 예정된 고종의 장례식을 노려 배포됐다. 고종이 일제에 독살 당했다고 대놓고 단정했다. 마지막에는 민족자결주의를 언급하며 “금일은 세계 개조, 망국 부활의 좋은 기회”임을 강조했다. 독립운동가들이 일본에 대한 분노를 최대로 끌어올리고자 고종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활용한 것이다. 실제 고종 독살설은 큰 효과를 낸 듯 하다. 경성은 고종을 조문하려고 올라 온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당시 남대문역(현 서울역) 하차 인원을 살펴보면 2월 28일 1만 4080명, 3월 1일 9686명, 3월 2일 2만 5903명이었다. 평소 남대문역 이용객이 하루 2000명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엄청난 인원이 서울로 몰려갔다고 볼 수 있다. 서울에서 시위에 참가한 이들은 고향으로 내려가서도 만세운동을 이어갔다.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3·1운동 발생 일별 통계표’에 따르면 3월 1~20일 하루 평균 12곳에서 만세 시위가 발생했다. 3월 21일~4월 10일엔 매일 전국 25곳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특히 3월 31일 39곳, 4월 1일 53곳, 2일 40곳, 3일 39곳으로 정점을 찍었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실제 3·1운동은 고종의 죽음에 안타까움을 느낀 조선인들이 그의 억울함을 풀어주고자 시위에 나선 것이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하지만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6일 “3·1운동의 직접적 원인이 고종의 독살설에 있다면 만세 시위는 고종의 장례식이 치러진 3일에 가장 격렬했을 것이다. 하지만 만세 시위 기간 동안 ‘고종을 추모하자’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던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신 위원은 “고종의 죽음이 3·1운동의 기폭제가 된 것은 맞다. 그렇다고 해서 3·1운동이 고종을 위한 시위는 결코 아니었다. 9년간 이어진 일제의 무단통치 억압에 대한 반발이 (고종의 죽음을 계기로) 터져 나온 것”이라고 분석했다.●각계 각층 민중들 평화 만세시위 역사상 처음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33인은 각 분야를 두루 아우르는 지도자로 보기 어렵다. 대부분 천도교와 기독교 관계자였다. 전국적 지명도를 갖고 있던 이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상당수는 3·1운동 직전인 1919년 2월 말에야 독립선언서 서명을 제안받았다. 일부는 선언서를 읽어보지도 못했다. 민족대표 가운데 소극적이나마 일제에 협조한 이들이 있었고, 일부는 친일파라는 오명도 남겼다. 이런 인사들이 주도한 만세 시위가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학계에서는 “3·1운동의 주인공은 민족대표가 아니라 시위에 참가한 민중 전체”라고 강조한다. 대표적 사례가 일제의 각종 보고서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만세꾼´이다. 이들은 밤마다 거리로 뛰쳐나와 전차에 돌팔매질을 하고, 수십명씩 짝을 지어 마을을 돌며 봉기를 유도했다. 기유정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연구원은 “3·1운동의 의미를 잘 몰라도 (조선독립을 위해) 무작정 만세를 외친 이들이 많았다. 3·1운동은 이런 민중들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분석했다. 김정인 춘천교대 사회교육학과 교수도 “만세 시위가 비폭력 운동으로 전개된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면서 “각계각층의 민중들이 무기를 들지 않고 만세를 부르며 시위에 나선 것은 우리 역사상 처음”이라고 강조했다. ●윌슨 영향 받았지만 민주공화제 계기 만들어 3·1운동은 조선독립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김원봉(1898~1958) 등 상당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은 3·1운동을 ‘실패한 시위’로 여겼다. 군사력도 없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의지해 만세운동에 나섰다가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는 비판이다. 이런 견해는 지금의 북한 학계도 마찬가지다. 애초 민족자결주의는 1차 세계대전 패전국(독일과 오스트리아 등)의 식민지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승전국인 영국 등이 발칸 지역 식민지를 접수하려고 하자 이를 막으려던 의도였다. 엄밀히 말해서 조선의 독립과는 관련이 없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불편한 진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윌슨에게 너무 큰 기대를 걸었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이런 한계에도 전 세계는 3·1운동에 경탄을 아끼지 않았다. 식민지 민족이 목숨을 걸고 몇 달간 치열한 시위에 나섰다는 소식은 중국 상하이부터 시작해 미국 샌프란시스코, 뉴욕, 워싱턴DC에 이어 러시아와 유럽에까지 알려졌다. 1919년 4월 6일 미국 일간지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는 1면 머리기사로 ‘조선의 비무장 봉기’를 게재하고 “조선의 독립 시위는 민족자결과 이상의 실현을 위한 소극적 저항의 ‘가장 경이로운 사례’”라고 평가했다. 같은 달 24일 뉴욕타임스도 사설을 통해 “조선인들은 세계가 생각하는 것보다 정치적으로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밝혔다. 일제의 영향력 아래 있던 중국에서는 더욱 적극적으로 3·1운동을 전했다. 문영걸 미도중국선교연구소 소장이 ‘기독교사상’ 3월호에 발표한 ‘중국 신문 속 3·1운동’에 따르면 1919년 3∼5월 중국 신문들은 104건의 관련 기사를 쏟아냈다. 승전국 식민지 가운데 맨 처음 혁명의 횃불을 들어올린 3·1운동은 중국의 5·4운동, 인도 국민회의파 독립운동, 필리핀과 아랍지역 독립운동을 촉발하며 이른바 제3세계 해방에 크고 작은 영향을 줬다. 이 때문에 3·1운동은 짧게 보면 ‘실패한 시위’일 수도 있지만 길게 보면 ‘성공한 혁명’이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김삼웅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공동대표는 “3·1운동은 전 민족이 하나가 돼 자주 독립을 선언했다는 점과 근대적인 민주공화제로 전환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 등에서 중국 신해혁명(1911)이나 프랑스혁명(1789~1794)보다도 높게 평가받을 부분이 있다”면서 “3·1‘운동’ 대신 ‘3·1혁명’으로 불러야 그 의미를 제대로 기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82세 중환자실 누운 알제리 대통령 때문에 프랑스·미국까지 발칵

    82세 중환자실 누운 알제리 대통령 때문에 프랑스·미국까지 발칵

    중환자실에 누워 대선 출마를 선언한 82세 대통령 때문에 알제리는 물론 프랑스, 미국까지 발칵 뒤집혔다. 알자지라 등은 3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등지에서 5선 출마에 반대하는 알제리계 수천명의 시위가 열렸다고 전했다. 프랑스는 1962년까지 알제리를 식민 지배했다. 현재 프랑스에는 500만명이 넘는 알제리계가 거주한다. 이날 시위에 나선 한 알제리계 시민은 “우리는 알제리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리려고 여기에 모였다”라면서 “부테플리카 정권은 시민들을 볼모로 삼았던 정권이다. 5선만은 안된다”고 알자지라에 말했다. 또 다른 시민은 “조국에서 벌어진 시위에 힘을 실어주고 싶어서 나왔다. 알제리에서 비폭력 투쟁을 벌이는 내 형제들을 응원한다”면서 “이번 시위는 알제리에 부패와 비효율을 만연하게 한 대통령의 책임을 묻는 것이다. 권력자들을 서민들을 희생시켜 부자가 됐다”고 밝혔다. 미국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에서도 알제리계 시민 수백명이 거리로 뛰어나왔다. 이날 뉴욕 유니언스퀘어에서 열린 집회에 나선 한 시민은 “우리 역사를 통틀어 불의에 맞서 싸우고 더 나은 알제리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동포들과 단결하려 한다”면서 “부테플리카 5선은 알제리인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할 것”이라고 말했다. 푸테플리카는 1999년 당선해 2014년까지 4선에 성공했다. 2013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프랑스·스위스 등을 전전하며 치료를 받았다. 이후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은 거의 없다. 부테플리카의 최측근은 최근 그가 4월 18일 열리는 대선에서 5선에 도전하겠다고 선언해 파문을 일으켰다. 알제리 전역에서 부테플리카의 대선 출마 중단과 대통령직 사임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강신 기자 xin@seoul.co.kr
  • [시흥 3·1만세운동] 수암면 비석거리 성별·연령·계급 뛰어넘은 시흥 최대 만세운동지

    [시흥 3·1만세운동] 수암면 비석거리 성별·연령·계급 뛰어넘은 시흥 최대 만세운동지

    온 국민이 대한의 독립을 외쳤던 3·1운동이 올해로 100주년을 맞았다. 비폭력·평화를 표방한 전국적인 항일운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며 민족 독립의 초석을 놓았다. 경기도 시흥은 3·1운동이 발생한 서울과 가까이 있어 시위 초기부터 열기가 고조됐다. 마을 곳곳에서 펼쳐진 단발적 만세 시위였지만, 철저한 사전 준비로 15일간 지속하며 주변 지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시흥시가 그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되새기고 독립지사의 숭고함을 기리기 위한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수암면 비석거리에서 펼쳐진 시흥지역 최대 만세운동 1919년 3월 30일, 통문을 전해 들은 수암면 주민들이 수암리 비석거리로 모여들었다. 당시 스물여섯 청년이었던 윤병소(1893~미상) 지사는 이 소식을 듣고 수암리로 갔다. 그는 각 리에서 모인 2000여명 군중의 선두에서 만세를 부르며 행진했다. 일본 경찰이 해산을 요구했지만 계속해서 면사무소 근처까지 진출하며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날 수암면 비석거리에 울려 퍼진 ‘만세’는 시흥일대 최대 만세운동이었다. 이 지역은 현재 안산시 수암동이지만 군면통폐합 이전에는 시흥군 수암면이었다. 1914년 부·군·면 통폐합으로 시흥시 북부지역은 부천군 소래면, 중남부는 시흥군 수암면, 서남부는 군자면이 각각 설치됐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촉발된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하던 시기에 시흥도 만세 운동에 동참했다. 3월 24일 소래면 주민들의 만세 시위를 시작으로 수암면 비석거리와 군자면 장곡·선부·죽율리, 군자면 구장터 등 곳곳에서 독립의 열망이 피어올랐다. 윤병소 지사와 더불어 수암면 비석거리에서 투쟁 시위를 이끈 또 한 명의 위인은 바로 윤동욱(1891~1968) 지사다. 흥분한 군중들이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하려 했지만 “독립하면 관공서는 국가의 재산이 되니, 국유재산을 털끝만큼이라도 상하게 하지 말라”며 평화적인 만세운동을 독려했다. 그는 시위를 진압하러 온 순사 임건호에게 오히려 시위 동참을 촉구했으나 임건호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태형 90대의 가혹한 형벌을 받은 윤동욱 지사는 경찰 신문 과정에서 “만세를 부른 것은 조선독립을 꾀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하며 민족 자긍심을 높였다. ●일제에 맞선 군자면 김천복 지사 징역 1년형 선고로 옥고 해마다 시흥시 군자초등학교에서는 3·1절 기념행사가 열린다. 지금의 군자초등학교와 군자파출소 인근은 시흥의 3·1운동이 활발히 이뤄진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3월 29일 군자면 장곡리와 월곡리, 31일 군자면 선부리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4월 4일 거모리에 수백명이 운집하면서 확대됐다. 특히, 군자면 죽율리(현 죽율동)에 거주했던 김천복(1897~1968) 지사는 당시 군자면사무소 앞에서 만세 시위에 합류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를 이유로 5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군자면 구장터(서안산나들목 부근, 석곡산대장)도 기억해야 할 역사적 현장이다. 장현리에 거주하던 스무 살 서당 생도 권희(1900~1955) 지사는 그해 4월 7일 구장터에서의 만세운동 동참을 촉구하는 비밀통고를 작성했다. 장수산(1900~1981) 지사가 이를 마을 구장의 집 앞에 두고 주민들이 서로 돌려보게 하는 등 비밀리에 만세운동을 계획했지만,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 모의는 무산됐다. 가슴에 품은 태극기를 펼치지는 못했으나 숭고한 그들의 정신은 영원히 남아 우리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내년까지 장수산·윤동욱·권희·윤병소 지사 기념비 건립 시흥시는 시흥의 3·1운동을 돌아보고 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3·1운동 기념비를 건립했다. 1995년 8월 15일 군자초등학교에 ‘독립운동 유적지’ 비를 건립한 이래로 광복 70주년을 맞은 2015년에는 ‘시흥시 삼일독립운동 기념비’를 세워 시흥지역 만세운동 참여자들의 고귀한 독립정신을 알리고 있다. 그날의 함성을 주도했던 독립유공자의 고귀한 희생도 기린다. 시는 지난해 7월 17일 시흥시 죽율동에 김천복 독립지사 기념비를 건립했다. 이를 시작으로 2020년까지 장수산·윤동욱·권희·윤병소 지사의 기념비가 역사적 현장에 들어설 예정이다. 기념비에는 무력 진압에도 굴하지 않고 목숨을 내던졌던 항일 열사 다섯 분의 애국정신을 기록한다. 2012년 윤동욱 지사 묘에서 처음 시작된 시흥시 3·1절 기념행사는 2013년부터 군자초등학교에서 진행 중이다.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원년인 올해는 3·1절 기념식과 더불어 주민이 일상 속에서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열린다. 시흥지역 3·1운동 소책자 발간, 유적지 탐방, 독립유공자 힐링캠프 등 3·1정신을 이어가는 행사가 준비돼 있다. 시흥지역 3·1운동의 역사적 가치와 의의를 찾는 여정은 이후에도 계속될 전망이다. 시흥시는 독립유공자 유족들로 구성된 광복회 단체를 설립해 지원체계를 구축하고, 미래 세대를 위해 정기적인 교육을 진행한다. 또 시흥지역 3·1운동 기초조사를 통해 3·1운동 관련 문화 콘텐츠 개발에도 힘쓴다는 계획이다. 시 관계자는 “성별과 나이·계급을 뛰어넘어 모두가 한마음으로 외쳤던 100년 전 그날의 함성이 오늘의 시흥을 만든 초석이 됐다”며 “시흥시는 역사를 기억하고 독립지사를 예우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겠다”고 말했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사설] 3·1운동 100주년 아침에 되새기는 민주주의의 가치

    3·1운동 100주년 아침이다. 100년 전 선대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던 독립만세의 현재적 의미를 곱씹어 볼 만하다. 더는 식민지가 아니라고 해서, 독립된 나라에서 산다고 해서 그저 3·1운동을 과거의 일로 박제화해 역사 교과서에 가둬서는 안 된다. 정부는 2월 26일 3·1운동의 상징처럼 여겨진 유관순 열사에게 독립유공자 1등급 서훈을 추가했다. 유관순 열사 외에도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이상룡, 영화 ‘암살’의 김원봉 등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독립유공자들의 공훈 및 삶을 재조명하는 것 또한 반드시 해야 할 일 중 하나다. 3·1운동 정신의 정수는 평화와 국민 화합, 민주주의에 있다. 이는 21세기에 더 심화해야 할 가치들이다. 100년 전 오늘 서울 탑골공원 앞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됐고, 전체 인구의 10분의1가량인 200여만명이 참가한 사실 등을 학자들이 새로운 역사적 증거로 찾아냈다. 총칼로 진압한 일본 헌병대에 맞서 비폭력으로 항거했던 탓에 7509명이 숨졌고 1만 5850명이 다치는 등 희생이 컸지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제국주의 식민 지배를 받던 여러 나라 민중들에게 민족자주에 대한 깊은 감화를 주었다. 특히 인도의 비폭력 독립운동, 중국의 반제 반봉건 5·4운동 등은 3·1운동에서 비롯된 도미노 효과였다. 한반도는 66년간 ‘전쟁 중단’ 상태지만, 한반도에 평화의 뿌리를 내리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평화 통일은 3·1운동 정신의 정수와 맥이 닿는다. 실제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로 시작하는 100년 전 독립선언문은 인류공영의 지혜를 담은 세계평화 선언문이다. 독립선언문 후반부에서 ‘동양평화로 중요한 일부를 삼는 세계 평화, 인류 행복에 필요한 계단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선언했다. 이는 과거 우익세력들이 강조했던 민족주의와는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음을 보여 준다. 향후 새롭게 만들어질 동북아 평화질서의 패러다임 속 한국이 해내야 할 역할을 고스란히 적시한 100년 전 가르침이다. 어제 베트남 하노이에서 만난 북미 정상은 기대했던 ‘종전선언’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하지만 한반도는 물론 지구촌 어느 곳에서도 더이상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되며 평화의 가치를 통해 공영을 추구해야 한다는 과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국민 통합의 과제 또한 3·1운동으로부터 반드시 되새겨야 할 가르침이다. 3·1운동에 나선 이들은 남녀노소, 직업, 계급, 지역, 종교의 구분도 없었다. 각자의 처지와 이해관계는 서로 달랐지만, 독립이라는 지상명제 앞에서 화합하고 일치단결했다. 진보와 보수, 종교, 노사, 남녀 등 여러 형태의 갈등과 대립이 얽혀 국가의 에너지를 하나로 모아 내지 못하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크다. 각자가 가진 차이를 인정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범국가적 과제 앞에서는 국민 통합을 이뤄 내야 한다는 당위성은 3·1운동이 우리에게 준 또 다른 교훈이다. 특히 평범한 장삼이사들이 자발적으로 떨쳐 일어났다는 점은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민주주의를 확인하는 과정으로도 인식된다. 나라의 주인은 왕이나 양반과 같은 특권 계층이 아닌, 바로 국민이라는 인식은 2016년 대통령 탄핵의 촛불집회까지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헌법 전문에서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의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밝히고 있듯 3·1운동으로부터 시작한 민주주의를 더욱 발전시키고 심화시켜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지난 100년 우리는 민족과 국가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왔다. 그 결과 변방에서 세계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경제와 문화, 정치 등에서 한국의 저력을 세계에 알리며 ‘한국식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이 아침 100년 전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화합과 평화, 민주주의의 가치를 다시 한번 되새기며 또 다른 100년을 향해 민주주의적 가치를 실천할 때다.
  • “최후의 1인, 최후의 1각까지 일어나라” 독립 열망 불 지폈다

    “최후의 1인, 최후의 1각까지 일어나라” 독립 열망 불 지폈다

    재심(再審). 확정된 판결의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위법행위나 중대한 하자가 있었음이 확인되면 사건을 다시 심판할 수 있다. 군부독재 시절 불법 감금과 고문에 못 이겨 토해낸 거짓 자백과 거짓 증거로 유죄판결을 받은 국가보안법 관련 피고인들은 반세기에 이르러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일제 치하에서 일제가 만든 법으로 일제 사법부에 의해 내란범·치안방해범·강도 등으로 몰린 무수한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수많은 독립투사들의 재심이 이뤄지길 바라며, 일제의 판결문에서조차 고스란히 드러난 투사들의 독립 의지를 재구성했다.#손병희 외 47명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 일본 형법상 소요죄 “피고인들은 조선이 제국의 굴레에서 벗어나 독립국을 형성하는 것을 기도했다. 조선민족 대표자 손병희 등의 이름으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선언서를 비밀리에 인쇄하여 조선 전 도(道)에 배부했다. 민중을 선동하여 왕성하게 조선독립 시위를 일으켰다.” (1920년 8월 9일 경성지방법원 다치가와 판사가 쓴 판결문에 담긴 공소사실 일부) 1919년 3월 1일, 서울 종로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민족대표 33인을 비롯해 초기에 ‘3·1운동’을 주도한 48명은 일제의 판결문에 ‘치안 방해를 선동한 자’로 비교적 가볍게 규정됐다. 독립선언을 주도한 천도교 3대 교주 손병희 선생은 “한때 친일파에 속했다가 병합(한일합병) 이후 자신에 대한 대우가 정당하지 못하다고 불쾌감이 있던 자로,…(중략) 교당 신축 기부금을 반납하라는 명을 듣자 크게 불만을 품고” 독립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폄하됐다. 그러나 일제는 판결문 속 “독립의 희망을 품은” 48명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불러온 힘을 결코 모르지 않았다. “불온한 문서”로 지목된 독립선언문 한 장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도 알았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 판사들은 사건 관할에 관한 결정서에서 “독립 사조가 조선에 널리 퍼져 인심이 동요했고, 100만 신도의 추앙을 받는 천도교 손병희의 이름을 거명한 독립선언서는 민중 선동의 커다란 효과로 나타났다”면서 “독립만세의 소리가 도시와 시골을 뒤덮었다”고 두려워했다.●결정·판결문 4건 모두 “최후의 1인” 대목 인용 천도교 인사들을 중심으로 기획된 독립운동은 순식간에 종교와 계층을 아울렀고, 전국에 만세운동을 촉발시켜 독립의 불씨를 키워냈다. 손병희, 보성고등보통학교장 최린, 도사 권동진·오세창 등 천도교 핵심 인사들은 1918년 말부터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논의했다. 그해 초 미국 우드로 윌슨 전 대통령이 제안한 ‘새로운 전후(戰後) 질서의 14개조 원칙’ 가운데 ‘민족자결주의’(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를 빌려 세계에 조선의 식민지배 상황과 독립 의지를 밝히고 지원을 요청하기로 했다.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의 독립운동 원칙은 손병희가 세웠고 구체적인 실행은 최린이 맡았다. 역사학자이자 언론인인 최남선은 “조선은 독립국임과 조선인은 자주민임을 선언한다”로 시작하는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다. 이승훈(판결문엔 본명 이인환) 선생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준비하던 기독교계도 천도교와 함께하기로 했다. 1919년 2월 21일 최린은 이승훈에게 “독립운동은 민족 전체의 문제로 종교가 다르고 같음에 관계없이 합동해야만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사흘 뒤 기독교계가 합류하기로 했고, 장로교 길선주·양전백 목사, 감리교 신흥식 목사, YMCA 간사 박희도 등이 이승훈과 민족대표로 참여하기로 했다. 27일엔 강원 양양의 신흥사 승려 한용운과 경남 합천 해인사 승려 백상규(백용성) 등 불교계 인사들도 동참하기로 해 종교계 연합을 이뤘다. 별도로 독립선언을 준비하던 연희전문학교 김원벽, 보성법률상업학교 강기덕 등 학생 대표들도 종교계의 운동에 합류했다. 2월 27일 오후 5시부터 밤 11시까지 천도교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 2만 1000장이 인쇄됐다. 48명 가운데 인쇄소 사장 이종일과 공장 감독인 김홍규도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고 헌법 문란의 문서를 인쇄(또는 방조)한 죄’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인쇄가 끝나자마자 선언서는 서울은 물론 전남, 전북, 충북, 강원, 함경, 평안 등 전국으로 퍼졌다. 48명 중에는 독립선언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 서울을 출발한 지 2~3일이 지나 일본 도쿄와 만주에서 체포된 교사들도 있었다. 3월 1일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기로 한 민족대표들은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음식점인 태화관으로 장소를 옮겼다. 29명이 참석한 가운데 독립선언서가 낭독됐다. 이들은 경찰에 자수해 그 자리에서 체포됐다. 일제는 독립선언서 가운데 “최후의 일각(一刻), 최후의 일인(一人)에 이르기까지 독립의 뜻을 밝혀 완성해야 한다”는 대목에 특히 주목했다. 48명에 대한 법원의 결정문과 판결문 4건에는 모두 이 대목이 인용됐다. 일제는 이 문장에서 조선의 독립 의지를 가늠했다.●일제, 3·1운동 초기 주도자들 극형 시도 일제는 독립운동에 불을 지핀 민족대표 등 3·1운동 초기 주도자들을 극형에 처하려 했다. 이들을 수사한 일제 검사는 보안법·출판법 위반 혐의로 1919년 3월 5일 경성지방법원에 예심을 청구했고, 8월 1일 경성지방법원 예심판사 나가시마는 일본 형법 77조 내란죄에 해당하므로 고등법원의 특별 권한에 속한다고 판단했다. 나가시마는 “제국 영토의 일부분인 조선을 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할 목적으로 전 조선인에게 교란을 선동하고 헌법을 문란하게 하는 불온한 문서를 공표함으로써 각지에서 조선 독립만세를 게시하게 하고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폭동을 일으켰다”고 밝혔다. 그러나 사건을 심리한 고등법원 판사 와타나베, 요코다, 이시카와, 미즈노, 하라는 1920년 3월 22일 “‘최후의 일각, 최후의 일인’까지라는 표현으로 독립의사를 발표했으나, 폭동을 일으키거나 교사한 문구는 없다”며 내란죄가 되지 않는다고 봤고, 사건의 관할이 경성지법에 있다고 결정했다. 민족대표들을 강하게 처벌할 경우 조선인들의 반감을 키울 것을 우려해 일제 의회 등이 법원에 가벼운 형벌을 요구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다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사건을 맡게 된 경성지방법원 다치가와 판사는 1920년 8월 9일 “공소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고등법원의 결정문에서 이 사건이 경성지법 관할이라고만 했을 뿐 경성지법에 사건을 송치한다고 밝히지 않았다”는 허헌 변호사의 ‘관할 위배’ 주장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검사의 불복으로 경성복심법원으로 다시 재판이 넘어갔고, 그해 10월 20일 48명 중 37명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손병희·최린·권동진·오세창·이종일·이승훈·함태영·한용운은 독립선언서의 작성과 인쇄, 배포에 주동적 역할을 하고 조선독립만세를 불러 치안을 방해한 죄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보안법 위반 혐의의 최고 형량이 2년, 출판법 위반이 1년으로 이들은 혐의별 최고 형량을 선고받았다.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최남선은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창작 오페라 ‘열사 유관순’에 주민참여합창단 올린 노원

    서울 노원구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창작 오페라 ‘타오르는 불꽃, 열사 유관순’을 다음달 23일 노원문화예술회관에서 공연한다고 27일 밝혔다. 노원구는 이번 공연을 통해 3·1 만세운동의 바탕인 비폭력, 평화정신을 세대 간 공유한다. 특히 공모 및 오디션으로 최종 선정된 아동·청소년 합창단과 성인합창단 등 57명으로 구성된 주민참여합창단이 100년 전 만세 함성을 재연하는 주민참여형 공연이다. 무료 공연으로 관심 있는 지역주민, 보훈단체 등 600여명이 관람할 예정이다. 출연진은 김지혜, 한정민 등 국내 정상의 성악가들과 오케스트라, 노원구연합합창단 등 100여명으로 구성됐다. 공연은 봉화를 통해 함께 힘을 모아 민족의 자존심을 세우고 평화적 시위를 이끌었던 유관순의 만세운동과 핍박과 회유에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던 선조의 정신과 모습을 담았다. 오승록 노원구청장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해 애국선열들에게 구민들과 함께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는 공연으로 기획했다”면서 “주민참여합창단의 3·1절 만세운동 재연을 통해 주민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하고 감동의 시간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 [3·1운동 100년]3·1운동, 中·인도 등 전파… 전 세계 식민지국가 ‘횃불’이 되다

    [3·1운동 100년]3·1운동, 中·인도 등 전파… 전 세계 식민지국가 ‘횃불’이 되다

    1918년 11월 첫 번째 세계대전이 끝났다. 당시 인류의 4분의 3 정도가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혹은 반(半)식민지 주민이었다. 1919년 1월 우드로 윌슨(1856~1924) 미국 대통령이 파리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다. 패전국(독일과 오스트리아, 오스만 제국 등) 식민지들은 다소나마 독립의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선처럼 승전국(영국, 미국, 일본 등)의 지배를 받던 나라들은 열강의 힘에 눌려 해방을 논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이때 우리 민족이 일본을 상대로 대담하게 독립을 선언했다. 3·1운동을 통해 승전국 식민지 가운데 맨 처음 혁명의 횃불을 들어올린 것이다. ●대한민국 뿌리 되는 임시정부 수립 미국 뉴욕타임스는 3월 13일자 기사에서 “조선인들이 독립을 선언했다. (우리에게) 알려진 것 이상으로 3·1운동이 널리 퍼져 나갔다. 수천여명의 시위자가 체포됐다”고 밝혔다. 비슷한 시기 AP도 “조선 독립선언문에 ‘정의와 인류애의 이름으로 2000만 동포의 목소리를 대표한다’고 명시됐다”고 보도했다. 3·1운동 상황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있어 감리교 선교사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1889~1970)의 헌신이 컸다. 3·1운동은 한반도 안팎에서 임시정부의 탄생을 이끌었다. 독립선언서 첫 구절에 “이제 우리는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한다”고 밝혀 뜻있는 이들이 주권 기관을 세워 이를 정당화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곳곳에서 임시정부가 생겨났다. 이 가운데 제대로 된 조직을 갖춘 곳은 러시아 대한국민의회(노령정부)와 중국 대한민국임시정부(상하이정부), 서울의 한성임시정부 등 세 곳이었다.노령정부는 독립전쟁을 치르기 좋은 위치였지만 일본의 공세에 노출돼 있었다. 상하이정부는 정치 활동이 자유로웠지만 국내에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거리가 너무 멀었다. 한성정부는 민주적 절차를 지켜 정통성이 컸지만 조선총독부가 자리잡은 서울에서 활동한다는 게 불가능했다. 세 정부는 힘을 모으고자 통합에 나섰다. 수개월간의 논의 끝에 1919년 9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3곳의 통합을 선언했다. 앞서 상하이정부는 4월 11일 생겨났는데,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했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고 선언했다. 더이상 왕이나 신분제는 우리 민족의 것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상하이정부는 대한민국의 시원(始原)이 됐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통합 임정’은 끝없는 갈등과 내분으로 여러 번 해체 위기를 겪었다. ‘식물 정부’로 전락해 명맥만 유지하던 때도 있었다. 그래도 임정은 우리 역사 최초로 근대국가 수립을 선포하고 27년간 외교 노력과 의열투쟁을 병행하며 독립운동의 총괄체로 자리매김했다. 독립운동사 거두인 조동걸(1932~2017) 국민대 명예교수는 “왕족이나 정부 계승자도 아닌 이들이 민중의 뜻으로 임시정부를 세워 30년 가까이 제국주의 국가와 투쟁한 것은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고 평가했다. 1948년 7월 대한민국 정부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1875~1965)은 “대한민국이 임정을 계승했다”는 사실을 수차례 밝혔다. 1987년 국회는 9차 개헌을 통해 대한민국의 법통이 임정에 있다고 다시 한번 천명했다. ●中 “3·1운동은 5·4운동 본보기 역할” 우리나라가 올해를 3·1운동 100주년으로 기념하듯 중국도 5·4운동 100주년의 해로 기린다. 1차 세계대전 뒤 일제는 중국 베이징 군벌정부에 패전국 독일이 점령했던 산둥반도를 조차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이를 막아내고 반제국주의·반봉건 투쟁에 나섰는데, 이것이 5·4운동이다. 3·1운동은 5·4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 사실은 중국의 문헌자료에도 잘 나타난다. 한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난 뒤 베이징에서 발행된 ‘매주평론’(1918년 창간된 문화사상잡지)은 같은 달 16일자를 3·1운동 특집호로 꾸몄다. ‘조선 독립의 소식’을 싣고 2·8독립선언과 3·1독립선언서를 소개했다. 3·1운동의 시위 상황을 객관적으로 해설하고 분석했다. 이 내용은 베이징대 학생들을 강타했다. 학생들이 직접 만들던 잡지 ‘신조’(4월 1일자)에 ‘조선 독립운동의 새로운 교훈’과 ‘조선 독립운동의 감상’이라는 논문이 실렸다. 신조는 1919년 1월 창간된 월간지로 훗날 5·4운동의 주동자가 된 푸쓰넨, 뤄자룬 등이 편집책임자였다. 특히 푸쓰넨은 3·1운동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중국인에게 호소했다. 그는 “조선의 3·1운동이 ‘세계혁명사에서 신기원을 열었다’고 할 수 있는 3개의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 준다”고 강조했다. 바로 ‘무기를 들지 않은 혁명’과 ‘불가능한 것을 알고도 한 혁명’, ‘순결한 학생혁명’이다. 푸쓰넨의 호소에 마음을 움직인 학생들은 5월 4일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 모였다. 이들은 선언문을 낭독하고 시위에 나섰다. 이날 발표된 베이징학생선언문에서는 “조선이 ‘독립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일어섰다. 일본이 산둥지역을 뺏으려 하니 우리 중국인도 일어서자”고 호소했다. 이날의 운동이 주요 도시에 파급돼 5·4운동으로 퍼져 나갔다. 리궁중 중국 난징대 교수는 “3·1운동은 중국의 거울이 됐다. 독립국가 개념 형성의 중요한 촉매였다”며 “3·1운동은 중국의 5·4운동의 본보기 역할을 했으며 20세기 전반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동남아시아·중동 민족운동에도 기여 3·1운동은 중국뿐 아니라 인도와 동남아시아, 중동지역 민족운동에도 기여했다. 인도에서는 3·1운동의 비폭력 방법을 적극 채택했다. 인도 국민회의파는 1919년 4월 5일 ‘사타야 그라하 사브하’(진리 수호)운동을 비롯한 비폭력 독립 운동에 나섰다.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1869~1948)는 남아프리카에 있다가 3·1운동 소식을 듣고 곧바로 귀국해 비폭력 투쟁을 시작했다. 1929년 3월 인도 독립운동 지도자인 시인 라빈드라나드 타고르(1861~1941)도 3·1운동의 영향을 잊지 않았다. 그는 ‘동방의 횃불’이라는 시를 써 조선인에게 헌사했다. “아시아의 황금시기에/한국은 횃불이었지/그 횃불 이제 다시 타오르길 기다리네/동방에 광명을 비추기 위해.” 1919년 3월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에서도 과도입법위원들이 독립선언을 한 뒤 워싱턴DC에 독립사절단을 파견했다. 같은 해 3~6월 이집트에서도 독립시위운동이 일어났다. 학생과 농민을 중심으로 완전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가 퍼져 나갔다. 이집트에서는 이를 공식적으로 ‘1919년 혁명’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3·1운동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승전국 식민지들이 자신들의 독립국가를 세울 수 있도록 ‘기폭제’ 역할을 했다.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는 “3·1운동의 영향으로 중국 5·4운동, 인도 국민회의파 독립운동, 필리핀과 아랍지역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이들 운동을 주도하던 정당과 단체가 그대로 성장해 독립국가 재건의 주역이 됐다”고 설명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日, 세계 평화주의 흐름 오판해 동아시아를 수렁에 몰아”

    “日, 세계 평화주의 흐름 오판해 동아시아를 수렁에 몰아”

    진보적 언론으로서도 이례적 보도 평가 아베 개헌 추진·군비 확장에 경종 의미 “조선 전역서 비폭력으로 日군경에 맞서 독립선언서는 아시아의 미래도 통찰” 마이니치신문도 “日에 저항한 독립운동”‘3·1운동에 대한 일본 군경의 탄압은 극도로 가혹했다. 강덕상(재일사학자)의 ‘현대사 자료 조선2편’에 따르면 ‘3분간 사격에 51명 즉사’라는 내용이 군 보고서에 적히기도 했다.’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일본 아사히신문이 27일 1개면을 할애해 100년 전 한국에서 일어났던 3·1운동의 역사와 의미, 당시 일본의 무자비한 탄압 등을 다룬 특집기사를 실었다. 아사히는 ‘기로의 1919년…동아시아 100년의 그림자’라는 제목의 기획기사를 통해 1919년 1차 세계대전의 전화를 딛고 세계에는 평화주의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일본은 이 흐름을 잘못 파악해 오판을 함으로써 동아시아를 수렁으로 몰아넣었다고 지적했다. 아사히가 상대적으로 진보적 색채가 강하다고는 해도 일본 언론으로서는 이례적인 보도라는 평가가 나온다. 헌법에 자위대를 명기하는 방향으로 개헌을 추진하고 막대한 방위비를 지출하며 군비 확장을 꾀하고 있는 아베 신조 정권에 대한 경종의 의미가 담긴 것으로 보인다. 잘못된 길로 접어들었던 100년 전을 상기시킴으로써 아베 정권에 반성과 각성을 촉구한다는 것이다. 아사히는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조선 민중은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빼앗긴 채 헌병의 감시 아래 침묵을 강요당했다”며 “이에 1919년 3월 1일 서울 중심부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됐고 수십만명이 거리에 나와 ‘독립만세’를 외쳤다”고 전했다. 이어 “독립운동은 조선 전역으로 확산됐고 민중들은 비폭력 정신을 내걸고 일본 군경에 맞섰다”고 소개했다. 그럼에도 일본은 무자비한 탄압에 나서 그해 5월 말까지 3개월 동안 희생자는 사망 7509명, 부상 1만 5961명에 달했다고 박은식 선생의 ‘조선독립운동지혈사’를 인용해 전했다. 아사히는 독립선언서를 일본 정치인과 학자에게 보낸 독립운동가 임규(1867~1948) 선생에 대해서도 다뤘다. 임규 선생은 3·1운동 당일 밤 자신이 일본어로 번역한 독립선언서를 들고 도쿄역에 도착한 뒤 이를 200통 복사해 당시 총리 등 정치인, 학자, 언론사, 대학 등에 보냈다. 아사히는 독립선언서 내용 중 ‘2000만 조선인을 힘으로 억누르는 것은 동양의 평화를 보장하는 길이 아니다. 4억 중국인들이 일본을 더욱 두려워하고 미워하게 하여 결국 동양 전체를 함께 망하는 비극으로 이끌 것이 분명하다’는 대목을 들며 “독립선언서는 아시아의 미래도 통찰하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아사히는 “그러나 조선의 이런 외침이 일본 사회에 퍼지지는 못했다”며 ‘역사평론’이라는 잡지가 독립선언서를 게재해 일본의 독자들에게 알린 것은 패전 후인 1948년이었다고 설명했다. 아사히는 동아시아를 전화에 빠뜨린 일본의 책임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1차 세계대전 후 전 세계에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고양되고 ‘부전(不戰)조약에 의해 전쟁을 불법화하려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었지만, 일본은 이러한 신조류를 잘못 읽었고 결국 그것이 동아시아를 불행에 빠뜨렸다”고 썼다. 마이니치신문도 이날 문답형 기사를 통해 “한국의 3·1운동은 일본의 한반도 지배에 저항해 전국적으로 퍼진 독립운동”이라고 설명했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3·1운동 100년] 평화행진 첫날부터 발포한 日, 만행·사망자 조직적 은폐·축소

    [3·1운동 100년] 평화행진 첫날부터 발포한 日, 만행·사망자 조직적 은폐·축소

    “서울에서 발생한 일이다. 어린 학생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자 일본 헌병이 칼로 그의 오른손을 잘랐다. 오른손이 잘린 학생은 다시 왼손에 국기를 들고 더욱 높은 소리로 만세를 외쳤다. 그러자 헌병은 그의 왼손마저 잘랐다.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 한 서양인이 사진을 찍어 남기려다가 헌병에게 끌려갔다.”(1919년 4월 12일자 중국 국민공보) “체포된 한인들은 밤낮으로 잔인한 고문을 당한다고 한다. 한인 가운데 죽은 자가 과연 얼마나 되는지 알려진 것이 없다. 서울에서 50마일(약 80㎞) 이내 무수한 촌락이 불탔다. 시체 썩은 냄새가 코를 찌른다.(1919년 5월 19일자 국민공보)●시위 확산 3월 말부터 조준 발포… 희생 급증 일제는 3·1운동에 나선 조선인들을 총칼로 탄압했다. 그들의 눈에 태극기를 든 시위대는 식민지 체제를 전복하고자 선량한 조선인들을 선동하는 폭도에 불과했다. 만행과 학살이 일상이 됐다. 총을 든 일본군과 경찰, 시위 주동자에게 다가가 몸에 색분필을 발라두는 조선인 밀정까지 뒤섞이면서 만세운동은 시작과 동시에 아수라장으로 변하곤 했다. “파리채로는 감당이 되지 않는다. 단호한 처치만 필요할 뿐”이라던 한 일본 경찰의 외침 속에 3·1운동을 대하는 일제의 태도가 그대로 드러난다. 26일 국사편찬위원회의 ‘3·1운동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3·1운동 참가 인원 가운데 사망자는 최대 934명으로 집계된다. 일제가 파악한 사망자 553명보다 두 배 가까이 많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내놓은 7483명, 박은식(1859~1925)이 쓴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분석한 7509명에는 크게 못 미친다. 이와 관련해 국편 측은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망자수가 최소 934명이라는 것”이라며 “자료의 오류 수정과 추가 발굴 등의 연구가 진행되면 숫자는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밝혔다. 사망자수에서도 알 수 있듯 일제의 만행은 도를 넘었다. 3·1운동 첫날인 1919년 3월 1일부터 발포가 이뤄져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점이 최근 연구에서 드러났다. 만세운동이 격화된 3월 말~4월 초 사이에 사망자가 집중됐다는 사실도 재확인됐다. 실제로 3월 1일 평양에서 주민 5000여명이 참가한 시위를 기록한 외국인 자료에는 “총상 환자 5명이 병원에서 숨졌다”는 기록이 나온다. 같은 날 평북 선천에서도 시위 중 체포된 11명의 학생 가운데 3명이 사망했다는 보고가 있다. 이들은 가혹한 태형으로 중상을 입고 숨을 거둔 것으로 추정된다. 시위 첫날부터 무자비한 폭행이 가해졌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이계형 국민대 특임교수는 “아무래도 서울 시내는 외국인이나 선교사 등 보는 눈이 많아서 조선총독부 입장에서도 발포가 조심스러웠을 것”이라면서도 “(더는 서양인의 눈치를 보지 않기로 결심한) 3월 말부터 사람을 직접 조준 발포가 잦아졌다”고 말했다. 국편이 파악한 3·1운동 관련 사망자 934명 가운데 47.6%(445명)가 3월 28일~4월 6일 사이에 몰려 있다. 서울에서는 사망 추정자가 3명에 불과하지만 외국인이 거의 없던 평안도에서는 423명이나 됐다.●日軍 4만여명 준계엄체제… 2만 6713명 검거 3·1운동이 대부분 비폭력 평화운동으로 진행됐음에도 시간이 갈수록 사상자수가 늘어난 것은 시위가 사그러들지 않고 전국으로 확산되는 것에 불안감을 느낀 총독부가 강경 대응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총독부는 수시로 총독 명의의 유고(諭告·담화문)를 발표했다. 3월 7일에는 “허튼소리로 인심을 흔드는 자에 대해서는 가차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4월 10일에는 “지방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중앙정부에 군대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으니 화를 입지 말도록 하라”고 최후통첩성 발언을 내놨다. 일본 군경의 총기 사용을 용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일본측 발포가 없는 날은 7~8일에 그쳤다. 이양희 충남대 충청문화연구소 연구원은 “1919년 3월 11일쯤 일본 육군성 차관이 만세운동 초기 진압에 실패한 것을 두고 조선총독을 질책했다”면서 “무력 탄압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일본 내각의 명령에 의한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것으로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3·1운동 기간 중 최악의 사태로 꼽히는 ‘제암리 학살 사건’도 일본의 강경 진압이 최고조에 달한 1919년 4월 15일 발생했다. 보병 79연대 중위 아리타 도시오는 “화성 발안장 만세운동의 주동자를 검거한다”며 제암리 마을에 들이닥쳤다. 15세 이상 남자들을 교회당 안으로 몰아넣은 뒤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이때 한 부인이 어린 아기를 창 밖으로 내놓으며 “아기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일본 군경은 아이마저 찔러죽였다. 일제는 만행의 증거를 없애고자 교회당에 불을 질렀다. 이 사건으로 제암리에서만 23명이 목숨을 잃었고 인근 지역 참살까지 포함하면 사망자가 30명을 넘는다. 고주리에서는 일가족 6명의 목을 쳐서 죽인 뒤 시신을 토막 내 짚가리 위에 올려놓았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 조선군사령관으로 재직 중이던 우쓰노미야 다로가 쓴 일기에는 “일본군이 약 30명을 가두고 학살과 방화를 했다. 사실을 사실대로 밝히고 처분하면 간단하지만 이렇게 되면 학살을 자인하는 꼴이 돼 제국의 입장에서 불이익이 크다. 이 때문에 간부회의에서 조선인들이 저항해 살육한 것으로 하고 학살은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적혀 있다. 일본 스스로도 정당한 행동이 아니었음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국제 여론이 나빠지자 사건을 일으킨 아리타 중위는 재판에 회부됐지만 4개월 뒤 무죄로 풀려났다. 4월 초 일본에서 조선으로 추가 파견된 ‘임시조선파견보병대대’도 조선 민중들에게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3·1운동 확산의 원인 가운데 하나를 병력 부족으로 본 일본 내각과 조선총독부의 이해가 맞물린 것으로, 6개 대대 4200명 규모였다. 3·1운동 발발 당시 일본군 2개 사단이 상주해 3만~4만명가량 군이 있었던 점을 감안해보면 1919년 4월 일본군은 최대 4만 5000명까지 늘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임시파견대대는 1905년에 개발된 근접 전투용 무기인 ‘38년식보병총’과 기관총, 수류탄을 소지하고 있었다. 이양희 연구원은 “임시파견대대는 시장에서 무장을 한 채 훈련을 하는 등 만세운동을 준비하려는 조선인들에게 겁을 주는 행동이 잦았다”며 “일제가 3·1운동에 대해 준계엄 체제로 대응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조선총독부 내부 자료를 보면 3·1운동 시작부터 4월 30일까지 약 두 달간 검거된 조선인은 2만 6713명이었다. ●3·1운동 약화 유화책 펼쳐… 단속·감시 체계화 일제는 3·1운동을 약화시키고자 무력 진압 외에도 의료선전 활동, 시장 개시(開市) 독려 등 유화책을 썼다. 당시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는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가 3·1운동에 참가했다가 부상당한 이들을 무료로 진료할 것”이라는 내용의 기사가 나온다. 서울시내 유력 상인 40여명을 설득해 상점을 다시 열게 하는 등 조선인들이 일상으로 돌아가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뒤로는 경비인력을 늘리면서 3·1운동이 재발하지 않도록 조치를 이어갔다. 3·1운동 이전 1만 3230명 수준이었던 경찰 수는 1921년 2만명을 넘어섰다. 일제의 단속과 감시가 더욱 체계화됐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조용철 기자 cyc0305@seoul.co.kr
  • 유관순 열사 서훈 ‘1등급’으로…문 대통령 “독립운동가 예우 자세 새롭게”

    유관순 열사 서훈 ‘1등급’으로…문 대통령 “독립운동가 예우 자세 새롭게”

    정부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유관순(1902~1920) 열사에게 최고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가 서훈하기로 결정했다. 정부는 26일 서울 백범기념관에서 개최한 현장 국무회의에서 국민의 올바른 역사관과 애국정신을 길러 민족정기를 드높이고 국민통합에 기여한 유관순 열사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가로 서훈하기로 의결했다고 밝혔다. 유관순 열사에게는 3등급인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으나 최근 유 열사의 공적을 평가할 때 훈격이 너무 낮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포상 현황에 따르면 김구·안창호·안중근 등 30명이 대한민국장(1등급)이고, 신채호 등 93명은 대통령장(2등급)으로 분류돼 있으나 유 열사는 이들보다 낮은 단계인 독립장(3등급)에 포함돼 있다.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우리 정부는 그동안 독립운동 역사를 기억하고 독립운동가를 예우하는 국가의 자세를 새롭게 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며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이고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된 뿌리가 됐기 때문”이라고 유관순 열사 훈격 격상 배경을 설명했다. 또 “이곳 백범기념관과 함께 후손들에게 독립운동 정신과 민주공화국 역사를 건설할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도 계속되고 있다”며 “이 모두가 우리를 당당하게 세우고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오늘 유관순 열사에게 국가 유공자 1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를 의결하는 정신도 같다”며 “유관순 열사는 3·1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16살 나이로 당시 시위를 주도하고 꺾이지 않는 의지로 나라의 독립에 자신을 바친 유관순 열사를 보며 나라를 위한 희생의 고귀함을 깨우치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유관순 열사가 3·1 독립운동의 표상으로 국민에게 각인돼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1등급 훈장 추서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이번 추서가 3·1 독립운동 100주년의 의미를 한층 더 높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국가보훈처는 “국내외 유관순 열사의 서훈 상향을 요구하는 열망에 따라 기존 독립운동 공적 외 보훈처에서 별도 공적심사위원회(유관순 열사 추가 서훈 공적심사위원회)를 구성해 참석위원 만장일치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가 서훈하기로 심의·의결했다”고 전했다. 당시 공적심사위는 유관순 열사가 “광복 이후, 3·1운동과 독립운동의 상징으로서 전 국민에게 독립정신을 일깨워 국민통합과 애국심 함양에 기여했다”며 “비폭력·평화·민주·인권의 가치를 드높여 대한민국의 기초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문 대통령은 제100주년 3·1절 중앙기념식장에서 유관순 열사 유족에게 훈장을 직접 수여할 예정이다. 보훈처는 “유관순 열사 추가 서훈과 함께 올해 100주년을 맞는 3·1운동에 대한 다양한 행사와 기념사업을 통해 100년 전 3·1운동에서 나타난 조국독립과 자유를 향한 정신을 계승하고 국민의 역사적 자긍심을 높일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정부가 유관순 열사에게 국가 유공자 1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기로 하자 충남도와 지역 정치권이 일제히 환영의 뜻을 밝혔다. 양승조 충남지사는 이날 도청 프레스센터에서 간담회를 하고 “정부의 결정은 조국의 독립, 자유와 평화, 인권과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국민적 열망을 반영한 것”이라고 환영했다. 양 지사는 “유 열사의 서훈 상향을 위해 진행했던 100만인 서명 운동은 중단할 계획”이라며 “유 열사의 숭고한 정신이 세계평화 정신으로 승화되고 민족사에 깊이 뿌리내리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박완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충남 천안을)도 논평을 내고 “문재인 정부가 대한민국이 나가야 할 새로운 100년의 이정표를 제시했다”고 평가했다. 박 의원은 “이는 단순히 유 열사 개인에 대해 합당한 예우를 하는 차원을 넘어 대한민국이 앞으로 새로운 100년 동안 지향해야 할 가치를 천명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며 “유 열사에 대한 건국헌장 1등급 추서가 저평가된 독립운동가의 공적을 새로 발굴하고 합당한 예우를 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유관순 열사의 고향인 천안도 감격으로 들썩였다. 구본영 천안시장은 “70만 천안시민과 함께 환영을 뜻을 밝힌다”며 “선조들의 호국정신과 민족의 얼이 담긴 3.1운동 정신을 계승하는 일에 우리 천안이 중심에 설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인치견 천안시의회 의장은 “같은 공적에 대해 훈장을 다시 추서하거나 변경을 할 수 없도록 한 현행 법규를 개정하기 위해 지난해 ‘상훈법 개정 촉구 건의문’을 채택하는 등 노력해왔다”며 “그동안 천안시의회의 노력이 빛을 본 것 같아 기쁘게 생각한다”고 전했다. 유관순 열사는 이화학당 재학 중인 1919년 3월 5일 서울 남대문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했고, 이어 4월 1일 충남 천안시 병천면 아우내 장터의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이후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1920년 18세 꽃다운 나이로 옥중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열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하동군 3·1운동 기록물, 군 홈페이지에 전시

    하동군 3·1운동 기록물, 군 홈페이지에 전시

    경남 하동군은 26일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100년 전 1919년 하동읍·옥종면 등 군 곳곳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함성과 발자취를 살펴 볼 수 있는 ‘하동군 3·1운동 기록물’을 군 홈페이지에 전시한다고 밝혔다.군 홈페이지에 전시하는 기록물은 하동군기록관에 소장돼 있는 ‘범죄인명부’를 비롯해 독립기념관 소장 하동 ‘대한독립선언서’ 사본, 하동군 3·1독립만세운동과 관련된 국가기록원 소장 ‘판결문’, ‘집행원부’, ‘3·1독립운동 피살자 명부’ 사본 등 5종 29건이다. 또 국가보훈처에 3·1운동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하동군 출신 28명 가운데 25명의 기록도 볼 수 있다. 홈페이지 전시는 오는 28일 부터 올해 말까지 할 예정이다. 보안법 위반 등으로 재판을 받은 독립운동가의 판결법원과 판결일자, 형량 등이 기록된 적량면 ‘범죄인명부’, 고전면 ‘범죄인명부’, 화개면 ‘전과자명부’는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기록물이다.군은 독립기념관이 제공한 하동 ‘대한독립선언서’는 지방에서 독자적으로 작성한 독립선언서로 희소성과 내용면에서 역사적 가치가 높은 기록물이라고 밝혔다. 당시 하동군 적량면장이었던 박치화 등 12명이 서명 한 이 독립선언서에는 ‘주저하거나 관망하지 말고 한마음으로 뭉쳐 용감하게 광복의 땅으로 나아가자’는 굳은 독립의지가 담겨 있으며, 민족자결·동양친목·세계평화와 비폭력 독립운동을 추구하는 3·1운동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국가기록원이 제공한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에는 당시 독립만세운동 전개 과정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군은 판결문을 통해 당시 운집한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던 현장과 일본 제국주의의 강압적 식민지 지배에 맞서 독립투쟁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와 수많은 군민의 민족자결 의지 등을 짐작할 수 있다고 밝혔다. 군 관계자는 “이번 전시는 전국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의 큰 물결 속에서 하동군 전역에서 한달여 동안 계속된 3·1운동이 어느 지역보다 뜨겁게 일어났음을 보여주고, 민족자결을 열망하며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던 하동군민의 용기 있는 투지를 본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동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공연으로 되새기는 독립… 28일 ‘도봉100人 평화음악회’

    서울 도봉구는 오는 28일 창동역사문화공원에서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도봉100人 평화음악회’를 개최한다. 도봉문화원에서 주관하는 이번 행사는 비폭력 평화정신의 메시지를 담아 도봉구민 100명이 출연하는 다양한 문화행사로 진행될 예정이다. 낮 12시부터 행사장에서는 독립운동 훈장만들기, 독립운동가와 임시정부청사 포토존 부스를 운영한다. 문화해설사와 함께하는 유적지 답사, ‘암살’ 영화 상영, 저항시 낭송 등도 이어진다. 오후 7시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도봉100人 평화음악회’에서는 평화의 소녀상 무용 퍼포먼스, 뮤지컬 ‘창동의 세 마리 사자’, 도봉필하모닉오케스트라 연주 등이 펼쳐진다. 이동진 구청장은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는 행사로 준비했다”고 말했다.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 의왕시, 자녀와 ‘비폭력대화’법 부모교육 집단상담 개최

    “폭력은 충족되지 않은 욕구의 비극적 표현이다.” 경기도 의왕시가 ‘비폭력대화’(NVC)로 자녀와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는 학부모 대상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시는 ‘내 아이와 마음으로 만나는 비폭력대화’를 주제 부모교육 집단상담을 개최한다고 18일 밝혔다. ‘비폭력대화’는 연민의 대화로 부르기도 한다. 우리 마음 안 폭력이 가라앉고 자연스러운 본성인 연민으로 돌아간 상태를 일컸는다. 견디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인간성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대화(커뮤니케이션) 방법이다. 시청소년상담복지센터가 주관하는 이번 프로그램은 학부모를 대상으로 총 6주간에 걸쳐 진행된다. 자녀와의 소통 이해하기, 비폭력 대화로 공감하고 표현하는 방법 등 다양한 소통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을 마련했다. 집단상담을 통해 부모의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고 자녀의 마음을 공감으로 들을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자녀와 질적인 유대관계를 돕는다. 지난해 부모교육 특강에 참여한 학부모의 확대 요청으로 올해 처음 6주 심화과정으로 편성됐다. 다음달 13일부터 매주 수요일 열린다. 한국비폭력대화센터 관계자가 강사로 참여할 예정이다. 프로그램에 참여할 학부모 12명을 18일부터 오는 28일까지 모집하며 참가비도 있다. 정부순 센터장은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 부모들이 자녀와의 올바른 소통과 공감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남상인 기자 sanginn@seoul.co.kr
  • [씨줄날줄] 세계 민중사 바꾼 3·1운동/박록삼 논설위원

    [씨줄날줄] 세계 민중사 바꾼 3·1운동/박록삼 논설위원

    명월관은 고급 요릿집이었다. 궁중 음식을 책임지던 안순환이 지금의 광화문 사거리에 만들었다. 1909년이었으니 일제의 강제 병합인 경술국치 바로 그해였다. 조선의 국권이 완전히 일제로 넘어가던 때 임금의 요리사가 저잣거리로 나온 셈이니 그 씁쓸한 상징성 또한 컸다. 가야금과 창가에 능한 미색의 기생들이 있어 당대 고관대작들이 무시로 드나들며 풍류를 즐겼다. 우리가 역사책 속에서 봐왔던 3·1운동의 시발이 된 역사적 장소 태화관은 바로 이 명월관의 별관이다. 민족 대표 33인은 1919년 3월 1일 오후 1시 남짓 태화관에 모여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로 시작하는 독립선언문을 낭독 없이 채택한 뒤 총독부에 그 사실을 알렸다. 민족 대표들은 체포를 위해 인력거를 가져온 헌병들에게 자동차를 가져오라고 돌려보냈고 택시 일곱 대에 나눠 타고서야 경무 총감부로 붙잡혀 갔다거나, 학생 대표들이 찾아와 거세게 항의했지만 탑골공원 앞에서 낭독하기 어렵다는 민족 대표들의 뜻을 바꾸지 못했다는 등 ‘몇몇 소소한 사실관계’는 많은 이들에게 3·1운동의 무기력함, 자조감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3·1운동은 폄훼될 대상이거나 교과서 속에 박제될 사안이 결코 아니다. 이날 비슷한 시간, 오지 않는 민족 대표를 기다리던 수십만의 학생, 노동자, 농민, 상인 등 각계각층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외친 ‘조선독립만세’를 시작으로 3~4월 사이 일제 헌병과 기마부대의 폭력적 진압 속에서도 수천 회의 만세 시위가 전국적으로 펼쳐졌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혈사’에 따르면 3·1운동에 참여한 인원은 200여만명이며, 7509명이 숨졌고 1만 5850명이 다쳤다. 체포된 이 또한 4만 5306명에 이른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몇몇 지도자 혹은 조직된 단체 주도가 아니라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떨쳐 일어난 전민항쟁에 가까운 성과였다. 나아가 군주제를 극복하고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의 정치적 토대를 쌓는 계기가 됐다. 3·1운동이 아닌 ‘3·1혁명’이라는 위상이 더욱 걸맞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이유다. 3·1 운동은 당시 뉴욕타임스, AP통신, 민국일보 등 주요 외신을 통해 세계에 타전됐고, 식민통치에 신음하는 해외 민중들에게 희망의 씨앗이 됐다. 인도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의 모체가 됐고, 서구 열강의 각축장이었던 중국 민중들이 5·4운동을 일으키는 촉매제가 됐다. 국가보훈처가 지난 14일 3·1운동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만시지탄이지만 반드시 성사시켜야 할 일이다.
  • 광화문광장에 31운동 100주년 기념탑 세운다

    광화문광장에 31운동 100주년 기념탑 세운다

    유공자 후손 도울 봉사 프로그램 발굴내년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서울 광화문광장에 기념사업 홍보탑이 세워진다. 대통령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는 20일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상 앞에서 홍보탑을 공개하고 한국자원봉사협의회, 한국자원봉사센터협회 등과 함께 독립운동 관련 자원봉사 활성화 업무협약을 체결한다. 이날 제막식을 하는 홍보탑은 3·1운동을 상징하는 형태로 마련됐다. 홍보탑은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를 모티브로 했다. 기념탑 외벽은 임시정부가 활동했던 중국 상하이 현지에서 생산된 적색 벽돌을 사용했다. 출입문도 임시정부 수립 이후 지나간 시간의 흔적을 질감으로 느낄 수 있게 만들었다. 홍보탑 상단에는 3·1운동의 비폭력 평화정신과 임시정부의 민주주의 가치를 계승하는 의미로 100, 태극, 악수, 불꽃 등을 형상화한 엠블럼과 슬로건을 설치했다. 이날 제막식에는 한완상 위원장과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 위원회 홍보대사인 래퍼 비와이 등이 참여한다. 추진위는 홍보탑 주변지역을 ‘100주년 광장’으로 이름 붙였다. 또 ‘동상 행위예술가’들이 제막식에 참여해 과거 임시정부 요원들의 모습을 재현한다. 홍보탑은 내년 4월까지 운영할 예정이다. 자원봉사 업무협약은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자원봉사 프로그램 발굴과 국민 이해와 관심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춘다. 협약기관인 자원봉사협의회와 자원봉사센터협회는 전국 규모의 자원봉사단체협의체로 자원봉사 문화 확산을 맡고 있다. 이들 기관에 소속된 자원봉사자들이 나서 독립운동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높일 예정이다. 신형철 기자 hsdori@seoul.co.kr
  • 아프리카 가나 간디 동상 철거...인종차별 담은 친필 메모 논란

    아프리카 가나 간디 동상 철거...인종차별 담은 친필 메모 논란

    비폭력 저항 운동을 이끈 인도의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마하트마 간디(1869∼1948)의 동상이 아프리카의 한 대학에서 철거되는 수모를 겪었다. 13일(현지시간) 영국 BBC방송에 따르면 아프리카 가나의 수도 아크라에 있는 가나대학 내부에 건립됐던 간디 동상이 전날 철거됐다. 이 동상은 2016년 6월 가나대학 캠퍼스를 방문했던 프라나브 무케르지 당시 인도 대통령이 양국 연대의 상징으로 선물한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 교수들을 중심으로 한 철거 청원에 1000명 이상이 서명하면서 2년여 만에 철거가 시행된 것이다. 가나대학 교수들은 간디가 인종차별주의자였다고 주장하며 간디가 젊은 시절 21년간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살면서 남긴 친필 메모를 근거로 들었다. 그 메모에는 간디가 흑인을 ‘깜둥이’(kaffir)라고 언급한 내용이 들어 있고, ‘인도인들이 흑인보다 절대적으로 우월하다’는 표현도 포함됐다. 특히 깜둥이(kaffir)이라는 단어는 지금도 모욕적인 단어로 분류된다. 가나대학 법학과 학생인 나나 아도마 아사레는 BBC에 “간디의 동상을 두는 건 그가 옹호하는 모든 것을 우리도 옹호한다는 의미이며 (의혹이 제기된 것처럼) 그가 인종차별을 옹호한다면 그의 동상을 두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프리카 말라위 정부도 인도의 컨벤션센터 건립 지원에 대한 화답으로 간디 동상 설립을 추진하고 있지만 3000여명이 반대 서명에 나서 논란을 빚고 있다. 간디의 손자이자 전기작가인 라즈모한 간디는 할아버지가 흑인에 대해 무지했고 편견이 있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성동 ‘뚝섬항일운동’ 아시나요

    성동 ‘뚝섬항일운동’ 아시나요

    서울 성동구는 지난 4일 구청 8층 대회의실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 준비위원회’ 발족식을 개최했다고 9일 밝혔다. 성동구는 “내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주민들과 함께 3·1운동 정신을 계승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준비위원회를 꾸리게 됐다”고 설명했다. 준비위원회는 역사분과, 종교분과, 문화분과, 구민참여분과 총 4개 분과 25명의 위원으로 구성됐다. 역사분과는 뚝섬항일운동 등 지역의 항일운동 발자취를 찾고, 강연 등을 통해 3·1운동 가치를 알리는 역할을 한다. 종교분과에선 지역 내 종교계 참여를 유도하고, 기미독립선언서 낭독 등 집회를 연다. 문화분과에선 3·1절 100주년 기념 주간을 지정, 사진 전시회 등 다양한 문화 행사를 진행한다. 구민참여분과에선 태극기 퍼포먼스, 태극기 달기 운동 등 독립운동 정신을 기릴 여러 행사를 추진한다. 구 관계자는 “행사 기획부터 준비, 진행까지 관이 아니라 주민 주도로 이뤄진다”며 “이번 행사를 통해 우리 구 뚝섬 지역에서도 항일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졌다는 점을 구민들에게 널리 알릴 것”이라고 했다. 정원오 성동구청장은 “3·1운동은 비폭력적이고 민주적으로 진행된,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평화독립운동이자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새로운 대한민국의 시작점”이라며 “준비위원회를 중심으로 구민 모두가 역사적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뜻깊은 기념행사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여성 항일투쟁의 선봉… 김원봉만큼 조국 사랑했던 그녀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여성 항일투쟁의 선봉… 김원봉만큼 조국 사랑했던 그녀

    “사랑이여/ 그대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마저 바치리/ 그러나 사랑이여/ 조국의 자유를 위해서라면/ 내 그대마저 바치리”(헝가리 시인 페퇴피 산도르의 시)의열단장 김원봉은 고국이 해방되자 이역에서 숨진 아내 박차정의 유골을 가슴에 안고 귀국했다. 김원봉은 피 묻은 박차정의 속적삼을 친정 식구들에게 전하고 비통한 심정으로 고향인 경남 밀양 부북면 제대리 뒷산에 유골을 묻었다. 13년이란 짧은 세월이었지만 중국 땅에서 함께 투쟁한 동지이자 반려자였다. ●중국서 만난 김원봉과 13년간 항일독립운동 제대리에서 내려 농가를 지나 야산으로 들어가 수풀을 헤치고 올라가니 띄엄띄엄 무덤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동묘지였다는데 나무와 덤불로 뒤덮여 있었다. 100m쯤 올라가니 박차정의 묘소가 나타났다. 마른 솔잎이 봉분을 뒤덮는 바람에 풀이 자라지 않아 메말라 있었다. 피 흘리며 싸우다 숨진 여성 독립운동가의 묘소로는 너무 초라했다. ‘약산 김원봉 장군의 처, 박차정 여사의 묘’란 비문만이 묘주(墓主)가 누구인지 알려준다. 묘소에서 멀리 너른 들녘이 보이고 밀양강이 굽이쳐 흐른다. 밀양강 바로 북쪽, 해천 옆에 남편 김원봉의 생가가 있었다. 그 위쪽 부북면 신작로에는 해방 후 귀국해 고향을 방문한 김원봉을 환영하는 인파가 발 디딜 틈도 없이 들어찼었다.‘빨갱이’로 낙인찍힌 김원봉의 배우자란 딱지는 박차정의 공훈을 인정받는 데도 오랫동안 장애물이 됐다. 1995년에야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박차정의 생가는 부산 동래구 칠산동 동래고등학교 담벼락 옆 동네 안쪽에 있다. 지금은 옛날 모습대로 깔끔하게 복원돼 드문드문한 관람객의 방문을 받고 있었다. 충절의 고향 밀양에서 태어난 약산(若山) 김원봉(1898~1958)은 어릴 때부터 반일 감정이 남다른 소년이었다. 나라를 잃은 슬픔에 방황하던 김원봉은 대한광복회의 암살 활동에 충격을 받고 중국으로 가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다. 약산은 난징 진링대학에 입학한 이듬해 터진 3·1운동의 비폭력에 실망했다. 그가 선택한 길은 암살·파괴활동이었다. 조국 독립을 위해 열혈 운동가들은 민중 속에 잠재한 폭력의 위력을 끌어내는 뇌관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1919년 11월 9일 중국 지린성 반 아무개 농부의 집에 우국 청년 10명이 모였다. 밤샘 토론 끝에 김원봉을 의백(義伯·단장)으로 하는 의열단이 결성됐다. 조선 총독 이하 고관, 군부 수뇌, 친일파 거두 등을 ‘칠가살’(七可殺)로 규정, 처단의 목표로 삼았다. 단원들은 거사에 서로 가겠다고 싸울 정도로 죽음을 겁내지 않았다. 첫 거사 모의는 그만 악명 높은 조선인 경찰 김태석에게 발각돼 윤세주 등 6명이 붙잡히고 말았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 최수봉의 밀양경찰서장 폭탄 투척,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육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 암살 기도, 나석주의 동양척식회사 습격 등 잇단 의거를 감행했다. 헝가리인 마자알의 고성능 폭탄 제조법 전수와 의열단 정신을 명문화한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으로 의열단의 기세는 더욱 높아져 단원이 100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의열단원 김지섭은 화물선 석탄창고 속에서 열이틀을 지낸 끝에 일본에 도착해 황궁에 폭탄을 던졌다. 의열단원들의 잇단 항거는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김원봉에게는 김구 선생보다 많은 100만원(현재 가치 약 320억원)이란 막대한 현상금이 붙었다. 김원봉은 잠자리를 자주 옮겨 다니고 같이 사진을 찍고 나서는 원판을 회수하는 치밀함을 보이며 일경을 따돌렸다. 신출귀몰이었다. ●신출귀몰 약산, 김구 선생보다 현상금 더 붙어 5~6년 동안 수백건의 투쟁을 했지만 자금이 바닥나자 의열단의 활동도 주춤해졌다. 장제스가 교장으로 있던 황푸군관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 약산은 군관학교에 다니던 조선 학생들을 가입시키면서 의열단 재건에 나섰다. 김원봉이 박차정을 만난 것은 이즈음이다. “천궁에서 내다보는 한 조각의 반월이/ 고요히 대지 위에 비칠 때(…)/ 옛 기억이 마음의 향로에서 흘러넘쳐서/ 비애의 눈물이 떨어집니다(…)” 여성 독립운동가 박차정(1910~1944)이 18세 때 모교(동래 일신여학교·현 동래여고) 교지에 발표한 시 ‘개구리 소리’다. 꿈 많은 문학소녀였던 박차정은 항일 정신으로 무장된 집안의 3남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박용한은 일제의 침략에 비분강개해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여학교를 졸업하고 항일 여성운동 단체인 근우회의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선출된 박차정은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이어 1930년 1월에 서울 여학생시위사건을 배후에서 지도했다. 바로 ‘근우회 사건’이다. 두 번의 구금으로 혹독한 고문을 당해 몸은 거의 반신불수가 되었다. 병석에 누워 있던 박차정을 중국으로 부른 사람은 의열단에 몸담고 있던 둘째 오빠 박문호였다. 박차정은 곧바로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에 합류했다. 1930년 3~4월쯤이었다.●독립투쟁·문학 공통관심… 사랑으로 발전 박차정은 등단을 권유받을 만큼 문학에 조예가 깊었고 김원봉도 톨스토이와 투르게네프 등의 러시아 문학을 좋아했다. 독립투쟁과 문학이라는 공통의 목표와 관심사는 사랑으로 승화됐다. 두 사람은 1931년 3월 결혼했다. 김원봉은 난징으로 활동 무대를 옮겨 장제스의 지원으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개설해 투사들을 양성했다. 이육사는 이 학교 1기 졸업생이었다. 박차정은 교관으로 힘을 보탰다. 김원봉은 일본의 침략이 격화되자 혁명세력의 통합을 위해 민족혁명당을 창당했다. 박차정은 그 산하에 난징조선부녀회를 만들어 당원 가족을 중심으로 한 여성들을 규합해 항일투쟁을 독려했다. 약산은 중일전쟁 발발 후인 1938년 10월 10일 항일 무장부대인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약산은 의용대장이 됐고 박차정은 부녀복무단장을 맡았다. 의용대는 주로 일본군을 상대로 한 선전활동을 했고 총을 들고 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1939년 2월 박차정은 장시성 쿤륜관 전투에서 적탄에 맞아 크게 다치고 말았다. 그 후 조선의용대의 일부는 화베이지방으로 북상해 팔로군과 함께 전투에 참가했다. 김원봉은 화베이로 가지 않고 임시정부에 합류해 광복군 부사령관, 임정 군무부장에 취임했다. 군무부장 취임 직후인 1944년 5월 27일 부상의 후유증이 깊어져 아내 박차정은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김원봉은 광복을 맞아 근 30년 만에 귀국했으나 더 가혹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좌익 인사 김원봉에게 반대파의 백색테러와 암살 위협이 지속됐다. 미군정에 체포됐을 때 고문을 하고 수모를 준 경찰이 친일 앞잡이 노덕술이었다. 김원봉은 풀려난 뒤 너무나 분해서 사흘 동안 통곡했다고 한다. 김원봉이 월북한 데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북한에서는 검열상과 노동상이란 고위직에 오르기도 했지만 그는 1958년 숙청당하고 말았다. 남북 양쪽에서 버림받은 것이다. 그는 본질적으로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좌우를 넘나들며 독립을 염원한 민족주의자였다.●약산 생가터엔 의열기념관… 서훈은 거부 당해 밀양 내이동 김원봉의 생가터에는 의열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그 앞에 흐르는 해천변에는 항일테마거리가 조성돼 있다. 이준설 학예연구사는 “김원봉뿐만 아니라 박제혁, 최수봉, 강우규 의사 등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이라면서 “의열단에 최초로 참여한 사람은 알려진 대로 13명이 아니라 10명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약산 집안의 9남2녀 중 4형제는 6·25 때 보도연맹사건으로 총살당했다. 막내 김학봉(86)씨가 생존해 있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입원 중이다. 김원봉에 대한 유족과 밀양시민들의 서훈 신청은 번번이 거부됐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법 위에 권력자… 아프간의 비극 불렀다

    법 위에 권력자… 아프간의 비극 불렀다

    부패권력은 어떻게 국가를 파괴하는가/세라 체이스 지음/이정민 옮김/이와우/314쪽/1만 6000원 저자가 10여년간 취재한 ‘부패 보고서’ 주택 개발로 차익 챙긴 대통령 가족 등 정치인 도덕적 붕괴가 경제 붕괴 원인 내전 종식 후 아프간 상황 생생한 증언‘예절, 절제, 그리고 옮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의 부재는 경제적으로도 대재앙을 일으킨다.” 2008년 파탄 직전까지 갔던 아일랜드 사태를 색다른 시각으로 분석해 주목받은 아일랜드 칼럼니스트 핀턴 오툴의 유명한 일갈이다. 공직자와 은행 고위간부, 그리고 부동산 개발업자들이 똘똘 뭉친 부패정치 네트워크를 파헤친 오툴은 이렇게 경고한다. “시민들은 자신을 둘러싼 명백한 범죄에 정면 대응하길 꺼린다. 그 경향은 부패와 연관될 때 더욱 심해진다.”#1.아프가니스탄 고위 공직자가 거액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체포된 뒤 검찰이 관련 혐의 증거와 함께 거액의 현금 다발까지 확보했지만 현직 대통령이 석방을 지시하고 TV에까지 등장해 무고를 주장한다. 이후 사건을 수사한 검사는 보직 해임되고 체포 영장을 승인한 검찰 부총장은 스파이 누명을 쓴 채 해임된다. #2.세관, 부패한 관리와 기업가들이 결탁해 불법으로 물건들을 들여오고 값싼 수입품들을 무한한 가격 경쟁력으로 시장에 깔아 놓는다. 권력에 줄이 없는 지역 상품 생산자며 수입업자들은 경쟁력을 잃고 도산한다…. 1996년 탈레반의 카불 점령으로 시작해 5년간 지속된 아프가니스탄 내전. 수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낳은 이 내전은 종전 이후의 비참한 양상 탓에 더욱 회자된다. 책은 10여년간 폐허가 된 아프가니스탄에 살면서 건져낸 ‘부패 고발서’로 눈길을 끈다. 부패권력이 국가를 망쳐 가는 과정과 암묵적 동조가 부른 비극상이 생생하다. 아프간의 부패상은 지독하다. 내전 종식과 함께 탈레반이 떠난 칸다하르에는 폭력이 난무했다. 폭력을 피해 시민들이 모여든 공유지에 대규모 주택단지가 들어서고 주택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대통령의 형과 그 형제들이 공유지를 헐값에 사들여 주택단지를 개발, 시민을 상대로 비싼 가격에 집을 팔아 엄청난 차익을 거둔 것이다. 탈레반 수감자들의 말을 전하는 관리들의 증언이 충격적이다. 탈레반 가입 동기가 민족적 편견이나 이슬람교 무시, 미군 영구 주둔에 대한 우려, 민간 사상자들에 대한 원한 때문만이 아니라고 말한다. “아프간 정부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부패했고 부패가 확산되다 못해 제도적으로 자리잡자 비폭력적 방법으로는 아프간 정부의 근본적인 문제를 바로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물론 당시 아프간과 탈레반의 국제, 정치적 역학 관계는 슬쩍 비켜간 진단일 수 있다. 하지만 아프간 관리들과 시민, 탈레반 수감자들의 생생한 증언은 그 부패상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고스란히 입증한다. 특히 아프간과 연결해서 소개한 이집트, 튀니지, 나이지리아의 부패 사례는 우리의 얼굴에 자연스럽게 포개진다. 르네상스 시대의 최고 인문주의자로 통하는 에라스무스는 일찍이 간파했다. “그렇게 입이 쩍 벌어지는 소득 격차는 우연히 생기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권력층에게 유리하도록 온갖 법을 개정하고 특혜를 몰아준 결과다.” 600년 전 에라스무스가 경고한 부패의 문제는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게 저자의 판단이다. 경제평론가 알다 지그문트 도티르의 말을 결론삼아 전한다. 정부 관리들과 은행 간부들이 결탁한 부패정치 탓에 2008년 경제 붕괴를 맞은 아이슬란드를 꼬집은 말이다. “아이슬란드의 붕괴는 경제적 붕괴일 뿐 아니라 도덕적 붕괴이기도 하다. 수십년간 우리 사회의 표면 아래서 꿈틀댄 광범위한 정치부패와 방치를 우리는 전혀 모르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재판은 반드시 필요하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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