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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당선 소감] 어느덧 길이 된 글…성근 글을 깊은 사유로 채워 나갈 것

    [2017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당선 소감] 어느덧 길이 된 글…성근 글을 깊은 사유로 채워 나갈 것

    글과 함께 오랜 시간 걸어왔습니다. 모르는 사이 글은 길이 되어 있었습니다. 글 속에서 또 다른 길들인 시·소설·평론이 태어났습니다. 서로 침투하고 기대고 나눠 주면서 글에 혈색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언제나 자신의 자리에 대해 말해 주는 이 글들을 껴안아 줍니다. 비평과 창작으로 경계 없는 글을 쓰겠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제는 평론으로 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문과 기호에 의해 한쪽으로 쏠려 버린 문학을 위해, 세공을 기다리는 원석들을 위해 성근 글을 깊은 사유로 채우며 문학을 자랑스러워하겠습니다. 아직 여지가 많은 글을 뽑아주신 이광호, 김미현 선생님 고맙습니다. 접었다 펴며 공간을 지워나가는 새의 날갯짓처럼 분발하여 그 여백을 메우겠습니다. 비평은 당당한 자아의 나타남이라고 하신 전영태 선생님, 시와 비평은 자신과 타자와의 혹독한 투쟁이라고 늦깎이를 격려해주신 이승하 선생님, 현실을 직시하고 대면하면서 소설을 쓰도록 하신 방현석 선생님, 너그러운 받아들임이 곧 글을 쓰는 마음임을 이제는 알겠습니다. 글에 빠져 찬란한 코발트블루 코로나를 꿈꾸는 아내를 가만히 바라봐 준 상천씨, 동희, 송희 사랑합니다. ‘젊은 소설’(계간 문학나무)에서 정용준 작가를 찾아내게 해 주신 황충상 선생님, 생기 넘치는 학우들, 누구에게도 물을 수 없는 질문을 척척 받아 준 책들과, 머릿속 소란을 가라앉혀 준 도서관에게도 머리를 조아립니다. ▲1961년 제주 출생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학예술학과 졸업 ▲중앙대 대학원 문학예술컨텐츠학과 박사 과정
  • [2017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 해부된 육체:부분이 발설하는 단서들 - 김효숙

    [2017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 해부된 육체:부분이 발설하는 단서들 - 김효숙

    인간의 몸이 고깃덩어리와 무엇이 다른가. 이러한 질문은 인간에 대한 전일적 관점을 위반하는 데서 시작한다.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도발적 상상력을 끌어와 보면 이러한 점은 더 명백해진다. 인간을 꿈틀거리는 생명덩어리, 즉 고기로 표현한 그의 이미지에 기대면서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새로이 증명할 방법을 탐구한다. 이때 우리는, 완벽한 몸이라는 정형을 벗어나 감각과 존재를 해방하고 자유를 부여하기 위해 본능의 심연까지 가 닿으려 한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인간의 살과 고기의 살점을 저울에 달 때와 정용준의 관점은 다음 같은 문장에서 겹친다. “모든 고기는 저울 위에서 평등하기 때문이다”(‘개들’,105쪽). 함량과 수치만을 기준으로 따지면 인간은 고기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무게가 고기와 동급으로 처리된다는 사실이 어리둥절하다. 베이컨의 고기-인간들은 2) 육체라는 전체성으로부터 해방되면서 정형과 규격을 위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뇨·혈액·타액·정액 같은 체액들, 한쪽이 지나치게 비대하거나 홀쭉해진 형체들을 그의 그림은 보여 준다. 여기에 정용준의 소설은 해부하고 해체한 육체의 일부분들과 조각들, 먹다 버린 음식물 찌꺼기처럼 넘치는 비만한 살들, 지문, 주민등록번호, 냄새 같은 기호들을 추가한다. 육체라는 전체로부터 일부분이 끊임없이 탈주하는 그곳에서 인간은 재정의된다. 흘러나온 육체의 일부분들이 스스로 의미를 발설하면서 전체성으로서 육체의 허위가 무너지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존재자가 이 지구 상에 있는 한 완결할 수 없는 질문, 그래서 우리는 반복하여 묻는다. 그 물음이 단지 존재의 물질성을 해명하려는 것이 아닌 한 실존 그 자체로서 무수한 질문을 품는다. 해부된 육체의 일그러지고 녹아내린 듯한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라고 누군가가 주문한다면 공포를 주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갈가리 찢어지거나 분해된 육체 3)의 성분들, 일부분이 지나치게 비대한 육체는 미학적이지 않으므로. 그래서 우리는 물질과 물질이 부딪쳐 상처 나고 찢어진 것을 원상태로 되돌리려 애쓴다. 완결된 육체, 곧 육체의 전체성으로부터 이탈하는 현상을 죽음으로 보기 때문이다. 온전한 형태를 갖춘 몸이 와해될 때 인간은 이른바 고기가 되고 말 테니까. 살점 일부와 한 컵의 피, 한 바가지의 오줌으로 존재가 정의된다면 그것은 과연 한 점 얼룩일 뿐일까. 이러한 의문을 품고서 정용준의 소설로 들어가보면 우리는 거기서 육체의 질곡과 해방을 동시에 경험한다. 정용준의 소설은 세계를 이루는 존재자들을 되도록 부분적으로 보여 준다. 완전체로서 육체가 아니라 그것을 쪼갬으로써 개별성과 존재다움을 드러낸다. 쪼개진 그 조각에 장식이란 없으며 당연히 아름답지도 않다. 자연 상태 그대로 인간들은 거칠고 낯설고 섬뜩하기까지 하다. 몸의 조직에 정신을 심으면서 정용준의 소설은 국부로 전체를 드러낸다. 그것은 전체성으로서보다 피 한 방울, 지문, 살점 일부분들에 압착되어 있다. 몸은 해체되면서 전체를 말하고, 부분은 전체로 나아간다. 정용준의 소설은 가족공동체로부터 발화되는 경우라 하더라도 유사한 소재를 다루는 동시대 작가들과 구별된다. 그는 존재를 말하기 위해 우리 삶의 작은 조직들에 주목하고, 몸을 해체하듯 관계를 해체한다. 롤랑 바르트 식으로 말하면, 우리는 그러한 조직들에 대해 말할 수 없지만 정용준은 ‘말한다’. 사진만이 인간의 육체를 죽임으로써 전체를 보여 준다는 바르트의 사유방식으로 말하면 정용준은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우리 몸을 죽이지 않음으로써 일부분으로 접근한다. 미소한 부분으로부터 존재의미를 캐면서 가장 생생한 육감을 재현해 내려 한다. 심지어 보이지 않는 존재에게까지도 정용준의 육감은 벋는다. 존재가 어느 한 부분의 신체조각으로 증명될 때 우리는 이 세계의 존재자들에 대한 또 다른 이해방식을 얻게 된다. 보이지만 ‘없는’ 쁘리즈락 우리 몸은 ‘근대’라는 개념이 만들어 낸 하나의 물질이다. 시간은 몸의 물기를 쥐어짜면서 흐르고, 우리의 몸은 점점 건조해지고 단단해져 간다. 시간에 휩쓸려 가는 물질로서의 육체는 점점 추악해지고, 위선 속에서만 순결성을 띤다. 이 세계는 온통 ‘금지’ 구역이자 그것을 무너뜨리려는 육체들이 에너지를 발산하는 곳이기도 하다. 육체를 무너뜨리고 분해하고서야 위선의 고리는 끊어진다. 개인을 넘어선 인류 전체의 육체에 대한 이야기가 그때 탄생한다. 그것은 어느 개인의 몸에 관한 담론이 아니며, 불멸하는 육체를 이미지화한 비개인적인 것이다. 금지에 결박된 덩어리로서 몸이 아니라, 타고난 본성을 그 몸의 일부로 자유롭게 구가하는 생명성이다. 사회의 습속을 배반하고서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몸, 자연의 일부를 떼어다 놓은 듯 거칠고 기이한 몸들은 그때 허위에서 해방된다. 자연의 법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따지지 않는 상태로 존재한다는 사실. 이때 우리 몸은 사회라는 인위적이고 완강한 간섭보다 자연이라는 거칠고 전체적인 범주 안에서 더 자유롭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소설이란 바로 그러한 지점에 구겨 박힌 육체를 불러내는 장르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 세계가 우리에게 존재란 무엇인지를 다시 물어온다면 위와 같은 단언만으로는 그 답이 불충분하다. 여기에 정용준 소설의 고민이 자리한다. 내가 누구인지를 말할 필요 없는 사회적 기호를 우리는 두 개 갖고 있다. 지문과 주민등록번호다. 전자가 개별 신체의 주소지라면 후자는 개인의 번지수다. 두 개 코드는 인간 개체에게 한편의 안정과 다른 편의 위험을 동시에 안겨 준다. 존재를 나타낸다는 것은 안전을 보호받는다는 의미와 그것이 위협당하는 현상을 동시에 내포한다. 인간의 나타남이 사회의 가시적 존재임을 증명해 준다면, 존재의 숨김에 대한 탐문은 비가시적 공간의 인간에 대한 것이 아닐까. 가시적이라는 분명한 현상 가운데서도 모든 타자는 불가사의할 수밖에 없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비가시적 존재와 가시적 존재 간 차별성은 없다. 가시적인 존재자에 대한 탐문도 결국에는 보이지 않는 부분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474번’에서 우리는 이런 존재를 만난다. “그의 지문은 등록되어 있지 않았고 실제로 그에게는 주민등록번호 자체가 없었다.” 가시적이지만 증명이 불가능한 존재를 어떻게 명명해야 할까. ‘그’라는 3인칭만이, 열다섯 명을 살해한 흉악범이라는 오명만이 그를 말해 준다. 살인을 한 이유도 ‘그냥’이다. 지문과 주민등록번호가 없는 무존재자가 그것이 있는 존재자를 살해했으므로 사건은 실종된다. 법이 작동하는 곳은 물리적 공간인데 그것을 적용할 존재가 없다. 죄를 물어야 하지만 죄인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사건은 애당초 일어나지 않았다며 종결지으면 될 일이 아닌가. 정용준은 여기서 ‘사건 있음’과 실존재의 부재라는 현상을 넘어 하나의 알레고리를 던져 준다. ‘가해자 없음’과, 분명히 누군가가 죽어 없어진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을. 여기에 이 소설의 발화의지가 있다. 가해자 없음으로부터 정용준은 오히려 존재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지문’ 부재현상으로부터 소설로 접근해 가자. 지문은 인간의 몸에 새겨진, 인간의 개별성을 나타내는 유일한 기호이므로. 정용준은 이 소설에서 지문 없는 존재 곧 몸이 없는 존재와, 살인자의 ‘의도’를 추적하기보다 살인 ‘현상’을 보여줌으로써 그 존재의 ‘없음’에 대해 말한다. 살인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무심코” “거리낌 없이” 몹시 “자연스러운 것”으로. 이러한 살인자에게 우리는 정신병력이 있는지,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지, 금품이 필요했는지 등을 물을 수가 없다. 작가가 살인동기부터 이렇게 밝혀 놓고 있어서이다. 그렇다면 살인동기의 자연스러움을 그 존재의 어떤 특성과 연계해야 하는가. 살인이란 타자가 가지고 있는 모든 가능성을 절멸하는 것이기에 범죄임이 분명한데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가해자 없음’과 ‘무심코’라는 두 가지 단서를 얻었다. 이에 대한 단정은 잠시 유보하고 또 다른 단서를 위해 조금 더 앞으로 나가 보자. 그 살인현상에 대해 정용준은 이렇게 해명한다. “사자가 사슴의 숨통을 끊고서 자신을 만든 창조자에게 용서를 빌지 않”고 “자신의 용맹함을 자랑하며 포효하”듯 그가 살인을 했다고. 그는 “잔인한 성향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스스로도 정신이상에 대해 부정”한다고. 그는 죄책감이 없으며 살인을 해놓고도 용맹을 자랑하는 존재다. 이쯤에서 우리의 사고에 진전이 있어야 한다. 무성無性, 이렇게 존재를 확정하고서 정용준이 보여 준 살인자의 특성으로 다시 돌아가 보면 손에 잡혀 오는 것이 있다. 그의 본성의 그러함과, 보이지 않는 현상으로부터 확보한 ‘그’라는 존재. 존재를 감추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그는 탁월한 킬러다. 존재가 은닉하는 문제를 감추는 식으로 존재하는 자를 신으로 명명한 하이데거 방식대로라면 그는 최상의 존재자 4)다. 자연 이후 문명 이전의 존재자, 인간의 죄를 물으며 공격적으로 성장한 종교현상을 빗대는 존재다. 그가 누구인지 증명할 수 없으므로 죄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니 ‘무성’이다. 이렇게 단정하고 보면 생각의 가지는 다시 갈라진다. 정용준은 ‘그’로부터 신의 존재를 환유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는,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이원적 사고를 넘어서려 한다는 것을, 그의 소설은 이것일 수도 저것일 수도 있는 열린 지층이라는 것을. 단정은 그의 소설의 지층을 단면화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하나의 지층을 거기에 더 얹어 놓자. 그는 아버지와 누나 사이에 태어났지만 이 부부는 혼인신고를 할 수 없는 근친이다. 그래서 현실공간으로 부상할 수 없는 존재, 정용준의 표현대로 ‘쁘리즈락’이다. 가시적이므로 분명한 존재자이지만 사회의 법망에 등록할 수 없으므로 ‘없는 사람’이다. 법의 그물망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존재들과 달리, 정화할 수 없는 원죄의 피가 흐르는 몸, 주소지도 번지수도 없으므로 무성의 캐릭터다. 이 ‘없음’ 현상에 ‘신’이라는 비가시적 존재가 자꾸만 얹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뭔가가 자꾸 겹쳐지는데도 명징하지 않은 그 존재가. 도스토옙스키가 ‘백치’에서 미쉬낀 공작에게 신의 속성을 심어놓았듯 정용준은 ‘474번’의 그에게 신의 속성을 이식하지 않았을까. 극단적으로 말하면,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으나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소재지에 신도 ‘그’도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은 것이 아닐까. 작가의 질문은 이어진다. 자연에서 벌어지는 살해에 과연 의도가 있는가? 의도된 살해가 증오나 이해관계의 결과물이라면, 의도 없는 살해는 자연현상처럼 일상적인 것이 아닐까라는. 살해 후의 정서와 애도 행위가 죽음과 나를 관계 맺게 하지만 이때 살해에는 아무런 정감도 없으므로 죽음에 대해 내가 떠안을 책무란 없다. 살해는 일상처럼 이뤄진다. 충동·쾌락·분노 같은 격동이 없으므로 그에게는 괴로움도 없다. ‘도깨비감투’를 쓰면 자신이 남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동화에서처럼, 존재의 사라짐과 비밀의 완전 봉인은 동시에 진행된다. 그런 점을 알게 된 아이가 악행에 빠지듯 그는 ‘순수’하게 살인을 한다. 지능 높은 어린이들을 훈련시켜 체제에 반대하는 양민을 죽이게 한 폴포트 정권도 이러한 순진무구함이 더 악랄하다는 것을 입증하지 않았던가. 순수함과 죄책감 없음은 동류의 정서임을, 그러므로 순수하다는 것은 오히려 나쁜 것이며, ‘순수한 죄인’은 더 극악함을 일깨운다. 도깨비감투를 쓴 아이, 지능 높은 순수한 아이, ‘474번’의 그는 이때 최상의 존재자가 된다. 정용준의 소설은 이러한 방식으로 이 세계에 널린 ‘현상’들을 증명한다. 그의 소설의 두께는 그렇게 형성된다. 그러니 앞서 우리가 본 ‘그’가 ‘지문’ 곧 육체가 없는 존재임을 확인한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소설의 또 다른 문면으로 접근하기 위해 ‘그’의 주민등록번호 부재 현상을 보자. 번호가 부여되면서 존재를 인정받는 사회에서 번호 부재는 곧 존재 부재를 일컫는다. 정용준은 이 존재를 쁘리즈락이라고 부르지만 우리는 이를 요즘 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유령현상과는 구별하고 싶다. 번호가 존재를 증명하지만 그 번호가 사실은 존재를 희미하게 지워 나가는 기호임을 우리는 ‘벽’의 염전 일꾼들에서 본 바 있다. 가혹한 구타, 죽음 같은 침묵의 공간, 감정은 일체 거세된 채 오직 복종하고, 죽음에 이르러 물질이 되어 가는 그들의 몸을 보면서 우리는 21, 23, 9 같은 숫자일 뿐인 그들이 누구였는지 알 수 없어진다. 존재를 지워 존재를 드러내는 이러한 화법으로부터 우리의 생각은 다시 갈라진다. 그러면서, 번호는 우리의 육체를 알기 위해 매겨진 하나의 기호이며, 육체를 아는 것으로부터 모든 지식은 출발한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언제나 타자일 수밖에 없는 육체, 거울로서의 육체, 이 육체로부터 우리의 모든 ‘앎’은 출발한다. ‘그’의 몸이 없으므로 우리가 그를 알 수 없는 것은 그러므로 당혹스러운 일이 아니다. 사건 수사관들이 ‘유령’이라며 고개를 젓고, 지문도 주민등록번호도 없어서 존재증명이 불가능한 그. 상대는 나를 볼 수 없으나 나는 상대를 꿰뚫어보는 일방향의 시선이 목적성을 가질 때 악의든 호의든 가장 완벽한 존재자가 되는 지점을 이 소설은 놓치지 않는다. 상처 충돌의 흔적-체액들 다시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는 일에서부터 사유가 탄생한 그리스 철학과, 그리스로의 회귀를 꿈꾼 셰익스피어가 ‘리어왕’(1막 4장)에서 물은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맥락 안에서 인류가 존재를 증명해 온 것이 사실이다. 정의는 다르지만 결국 하나의 맥락으로 수렴되는 존재증명, 그것은 결국 인간의 ‘몸’이 ‘운동’할 때부터 물질로 전락하는 때까지를 이르는 것이 아닐까. 존재에 대한 탐색은 그 무엇보다 꾸준히 정치하게 진행되어 왔고, 정용준의 소설은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이른바 ‘겹치는’ 존재자들로부터 인식의 깊이를 수립한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타자의 시선이 되어야 한다는 인식하에 우리는 언제나 바라보는 ‘시선’이었으며 동시에 ‘응시’당하는 존재이지 않은가. 이는 하이데거가 타자를 ‘함께 있음’ 즉 서로 관계하는 방식으로 본 것으로, 정용준 소설의 타자들 중에는 냉혈한의 정서로 관계망을 형성한 인물들이 제법 있다. 이를테면, 한 점 살이나 오줌 얼룩으로 존재를 말하고, 각기 다른 피들이 혼종된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음습하게 그리면서 존재를 증명하는 ‘개들’, 혈액 투석으로 빠져나가는 단백질을 채워 넣는 일에 골몰하며 계란을 먹어치우는 아버지를 보여 주면서, 새 피를 보충하고 허약해진 ‘근육’을 회복하려는 남성의 고투를 그린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가 그러하다. 한 점 살과 피·눈물·오줌 같은 체액들로 그가 누군지를 말하기 위해 정용준은 미소한 부분을 응시한다. 피는 수치數値라는 정확성으로 우리를 근원의 비밀로 이끌지만 정용준의 소설은 이러한 과학적 접근을 위해 긴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거부함으로써 ‘수치’를 따지려드는 우리를 긴장시킨다. 이 소설에서 피는 부패의 습격을 막으려는 살에 대한 메타포가 아닐까. 살과 몸은 제 안에서 피를 단속할 때는 부패하지 않지만 피가 쏟아져 살만 남을 때 몸은 썩는 것. 그러므로 살아 있는 살과 몸에는 피가 방부제다. 존재는 보여 준다, 인간의 체액 중 피가 가장 원초적인 진실이라는 것을. 존재의 근원을 은폐하는 것과, 진실을 은폐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가장 깊은 속성에 관계된 것임을 작가는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여기, ‘피’라는 물질만이 개별자와 가족을 묶는 준거가 될 수 있는지를 묻는 작품이 있다. 타자의 피와 내 피의 원소가 겹쳐 하나의 혈맥을 이루는 양태를 생물학적으로는 가족으로 정의할 수 있으나, 피가 섞이지 않은 가족도 정용준의 소설에는 등장한다. ‘개들’에서 ‘곰’은 동물세계의 지배자와 동격이다. ‘모란’은 그의 하인이자 아내·종업원·딸이다. 모란이 곰의 하인이자 종업원이라는 데에는 의미 부여가 달리 필요 없다. 그러나 아내이자 딸이라는 자격은 보편을 위반하는 강한 금지를 동반한다. 성생활과 혼인관계의 교차로가 가족이라면, 아내이자 딸이라는 모란의 자격은 근친상간이라는 강한 장치를 내포한다. 성생활의 특권을 합법적으로 누릴 수 있는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근친상간이 꽃피는 두려운 비밀의 세계, “불가결의 접합부로서 끊임없이 환기되고 거부” 5) 되면서 관계의 틀 안으로 수렴되는 욕망이 곰의 아내이자 딸인 모란에게서 발산된다. 그러나 모란이 손님들로부터 ‘연변아가씨’라고 불리는 데에 이르면 또 다른 소격현상에 우리의 의식이 밀린다. 모란이 곰과 혈연관계가 아니며, 원시공간 속 여성 대명사로서 문명 이전 세계에서 가족이 형성되는 양상을 보여 주는, 아직 자연으로부터 미분화한 존재라는 점 때문이다. 이러한 진단은 우리가 앞서 본 ‘474번’의 그가 실정법에 매이지 않는 존재임을 확인하는 순간과 같은 정서를 몰아온다. 곰과 모란을 이해하기 위해, 이 부부와 동거하는 고아인 ‘나’를 보자. ‘나’에게서 풍기는 다소 불쾌한 징후들, 이를테면 ‘나’는 곰의 아들이라는 자격으로 한 집에 살지만 곰의 아내인 모란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다. 지금이야. 비가 오면 여자들은 마음이 부드러워지거든. 모란의 방에 찾아가. 마음을 고백하고 결혼하자고 말해. 모란도 원하고 있을 거야. 병구는 얼굴이 빨개졌다. 그리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발을 동동 구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정말?” “정말.”(‘개들’, 120쪽) ‘나’는 욕망의 자연스러운 발현에 충실하다. 노련한 ‘나’가 병구를 꼬드기지만 그것은 불가능을 주문하는 것이고, ‘나’도 그 점을 잘 알기에 모란을 두고 병구와 경쟁하는 짓은 하지 않는다. 경쟁 상대가 아니기에 사실은 어떤 주문도 가능할지 모른다. 지능이 모자란 병구가 사랑을 위해 고투하는 어수룩한 형태의 결말은 빤하고, 모란을 향한 병구 마음의 경사도와 실패 가능성 또한 비례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니까 모란에게 자신의 존재를 나타낼 날을 기다리며 묵묵히 ‘근육’을 단련하는 냉혈한이다. 이렇게, “이두박근, 승모근, 상박근, 하박근 등 근육”을 키우며 “내 근력은 곰에 비해 어느 정도”인지를 은밀하게 확인해 나간다. ‘곰’은 원시자연의 지배자이므로 나는 곰이라는 법을 뛰어넘기 위해, 즉 모란을 얻기 위해 근육을 단련한다. 곰의 근력에 근접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강화해 가야 할 욕망의 저장고, 그곳은 근육을 단련함으로써만 채워질 것이다. 어머니이자 누나인 모란의 육체와의 연속성과 경계 없음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곰처럼 완력을 갖춰야 한다. 어머니-누나의 경계가 없는, 있다 할지라도 나와 비혈연인 모란과는 피차 내재적 질서가 없는 관계이므로, 우연과 외면성으로 정해진 관계이므로 ‘곰’과 ‘나’에게 모란은 혈연이라는 필연에 묶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남성의 욕망을 대변하는 두 인물은 이 세계에 유일한 하와, 곧 자연의 속성을 그대로 간직한 모란에게 똑같이 집중하는 것이다. ‘개들’의 인물 중 우리는 ‘병구’를 지나칠 수 없다. 곰과 ‘나’가 근육으로 자신의 존재를 표명한다면, 병구는 근육들의 세계로부터 일찍이 소외된 자로서 또 다른 신체의 일부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것도 죽음으로써. 모란의 방문이 열리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곰”을 보았고, 그 뜻을 알았고, 아는 순간 세계가 열리는 그 지점으로부터 병구를 들여다 보자. 그리고 그 순간 침묵하는 병구의 심정을 헤아려 보자. 모호함이 순간적으로 벗겨지면서 충격을 가하는 인식세계, 병구는 곰의 건장한 몸을 보고 있었고, 성을 인식했고, 그 순간의 눈뜸은 새로운 세계로 입문하는 입사식과 같다. 새로운 세계의 도래는 ‘앎’이라는 충격파가 이전세계의 인식을 부수는 것이다. 곰과 모란이 아프로디지아(aphrodisia, 어떤 형태의 쾌락을 제공해 주는 행위·몸짓·접촉 ; 푸코, 같은 책, 55쪽)를 누리고 있는 그때 수다쟁이인 그가 말이 없어지고, 울보가 울지 않고, 칭얼거리지도 않고, 화도 내지 않고, “멍하니 어둠의 한 지점을 응시”하면서 “무엇인가 깨닫”는 그곳이 ‘앎’의 정곡이다. 그의 시각을 충격하는 것은 미학적인 감정이기보다 본능에 대한 자극이며, 지식에 대한 충동이 그 대상과 맞닥뜨린 순간이다. 병구가 본 곰은 나체였고, 곰의 몸 중 일부분이었으며, 그 조각만으로도 세계의 비밀은 누설되었을 터, 곰의 벗은 몸으로부터 흘러나온 비밀이 그를 충격한다. 일부분이 세계 전체의 환유일 때 그 조각은 본래 체적을 초과하여 팽창하는 게 아닐까. 좁은 문틈으로 바라볼 때도 바깥세계의 면적은 팽창하는 이치대로. 벌거벗은 ‘곰’처럼 ‘개들’은 고깃덩어리 같은 육질을 갖고 있다. 우리는 이 작품에서 어떤 덩어리가 툭, 이 세계를 흔드는 것을 감지한다. 병구가 곰의 나체를 응시하는 한 몸에 대한 의미생산은 이어진다. 남녀 상호 간 본능적으로 생산되는 몸의 기호들이 상대의 감각을 지배할 때 거기서 비밀이 탄생하고, 그것에 휘어잡히고, 사로잡힌 자는 몸이 부단하게 발설하는 비밀의 노예가 된다. 그러나 비밀은 ‘복종’하지 않는다. 주인인 몸을 언제나 벗어난다. 탈주를 노릴 때만 비밀은 자신의 신분을 확정한다. 그러니 절대성을 갖는 비밀은 없다. 모란의 몸이 생산하는 기호들이 병구에게 와 닿자 세계의 비밀은 열리기 시작했고, 그렇게 누설된 비밀 때문에 병구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세계의 비밀을 알아버린 죄인으로서 스스로 그 비밀이 선고한 사형수가 된 셈이다. 성에 대해 발설하는 순간 언어는 세속화라는 폭발력을 갖게 된다. 그 과정은 수습 불가능한 자기 증식력을 동반한다. 그러니 침묵할 수밖에 없다. 그것에 대한 노골적 담론화는 죽음으로 가는 직행통로다. 나타나는 순간 폭발하는 속성 때문에 성은 자신을 숨기는 대가로서만 유지된다. 병구의 죽음은 이렇게 그것의 나타남을 몸소 덮어버린 철저한 제의다. 성을 버리는 것, 그것은 죽음처럼 깊고 캄캄하지만 가장 분명한 가시성이다. “이십 년을 살다 죽은 병구의 사체는 십 개월을 산 도사견보다 작아 보였다”는 지점에는 세계의 비밀을 보게 된 자신을 폐기해 버린 왜소한 몸과, 삶의 마지막 기표인 “오줌으로 변색된 면바지가 까”맣게 남는다. 경련이 일고, 감각이 빠져나가고, 몸은 굳어간다. 이때 흘러나온 오줌은 산 자를 해체하는 마지막 운동의 징표다. 죽음 직전 감각이 마지막으로 운동한 흔적이며, 인간이 물질화되는 바로 직전 현상이다. 병구는 오줌 얼룩을 남기며 이 세계의 비밀로부터 도망쳤고, 그 얼룩은 성이라는 불경스럽고 속된 것으로부터 병구 자신의 욕망을 확인한 육체의 기호일 것이다. 욕망하면서도 수치스럽게 여겨질 수밖에 없는. 안타깝게도, 병구가 스무 살 성년의 문턱을 막 넘어서다 직면한 세계는 그의 진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세계인식의 빛은 병구가 눈을 뜨는 순간 번쩍임과 사그라짐이 동시에 진행되고 만다. 병구는 발설되어서는 안 될 것을 싸안고 캄캄한 죽음 속으로 투신한다. 억압되었으므로 알 수 없었으나 억압을 통해서만 검토되는 성에 대해 허용된 그 시각, 병구는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고, 동시에 죽었다. “나를 죽여 주세요”라고 자신의 서투른 삶 같은 글씨를 써놓고서. 베이컨의 그림 한 컷처럼, 그의 가장 강렬한 경험과 인식, ‘지식애’(피터 브룩스)의 흔적은 오줌 얼룩으로 남는다. 그의 몸에서 마지막으로 빠져나온 액체인 오줌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일어난 격렬한 경련의 징표다. 그가 죽음으로써 성이 노출되는 것에 대한 염려도 무화되었다. 부재하고 비표명되도록 숨겨야만 성은 생동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성의 본성은 오래도록 은밀하게 유지되어 왔을까. 죽음처럼 절대적인 침묵은 없으므로 차라리 죽음으로써 입을 다물어 버린 병구, 자신에게는 허용되지 않은 저 세계의 문을 죽음으로써 영원히 닫아 버린 것이다. 그럼으로써, 말해져서는 안 될 세계는 폐기되고, 병구의 목숨도 그 비밀처럼 폐기된다. 변하는 살 냄새에 존재 묻기 정용준 소설의 인물들에게서는 눅눅한 냄새가 난다. 이 또한 ‘존재’에 접근하기 위한 후각의 발현으로 보인다. 죽은 것에서는 냄새가 나지 않으므로. 시각에 의존하는 문명인과 달리 정용준의 캐릭터들은 원시 인간처럼 퇴화하지 않은 후각으로 존재의 진실에 접근한다. 원시공간에서 막 생성된 존재가 바닷물로부터 비릿함을 감아올릴 때처럼 개 냄새, ‘모란’ 냄새, 곰팡이 냄새, 비린내, 게 냄새 등으로. 하층계급과 중간계급의 관심사에서 보이는 중요한 차이가 냄새에 대한 태도에 있다는 지적 6)대로라면, 정용준 소설에서는 소외계층의 냄새가 불유쾌한 조짐들을 몰고 온다. 하층민일수록 그들의 습관은 냄새에 더 잘 실려 있다. 이웃은 그들의 습속을 냄새로 타자에게 실어 나르고, 냄새는 이웃에게 번지면서 생명에서 비생명으로 진행한다. 이때 ‘썩음’이라는 현상을 동반하는데, 냄새를 맡는 일은 사멸할 것에 대한 불쾌한 감각의 마지막 쏠림이다. 부패 현상의 끝과 죽음은 같은 지점에 있으며, 죽음이 가까울수록 냄새도 강렬하다. ‘개들’에서의 냄새는 어디에서 오는가. 비와 오물과 진흙으로 뒤범벅된 곳은 개가 도륙당하는 도축장이다. 죽음 냄새가 음습하게 번지면서 불쾌함이 주조를 이룬다. 오래 맡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냄새, 기분을 바꾸려고 다른 데로 신경을 써도 여전히 붙들리는 냄새. 악취도 오래 맡다 보면 휘발되기 마련이나, 그렇지 않다면 어디선가 지속적으로 살이 썩고 있다는 증거다. 오래 씻지 않은 하층민의 삶처럼 눌어붙은 냄새, 고질화된 고통, 그것은 썩어가는 살의 증표다. 생명체는 예외 없이 부패하고, 부패선상에서의 피 흘림과 절규는 살이 단단해지고 건조해질 때까지 진행된다. 그때까지만 우리의 몸은 냄새를 풍긴다. 살 냄새, 즉 우리가 살아 있다는 냄새를. 비가 싫다. 마당은 오물과 진흙으로 뒤범벅되고 냄새는 진해진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개 냄새. 주변을 장악하고 오염시키는 우울한 기운들. 마르지 않은 오줌 위에 누워 철창 밖으로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수십 개의 노랗고 빨간 눈들. 플라스틱 바구니를 무겁게 채워 팔이 끊어지도록 들었다 놨다를 반복해도 불쾌한 기분은 가시지 않는다.(‘개들’, 100쪽) 우울하고 물기 마를 날 없고 갈망으로 충혈된 “노랗고 빨간 (개의) 눈들”. 개들처럼 인물들도 습도 높은 공간의 음습함에 지배당한다. 찌든 ‘개 냄새’가 어두운 기운에 섞인 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이질감, 그것은 곧 도축될 짐승의 살 냄새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우울한 정서가 깔린 공간에 떠 있는 개들의 처절한 눈빛에서 예정된 죽음을 본다. 질척한 죽음의 세계를 눈에 핏발이 서도록 바라보는 개들. 전망 없이 하강하는 비, 그 빗금들을. 소설 읽기는 해석학의 유혹 7)을 동반한다. 표층 의미가 견인해 내는 숨은 의미를 찾아 들어갈 때 느끼는 쾌락이 없다면 독서행위를 지속하기란 어렵다. 비평은 독서행위의 연장인 만큼, 소설 읽는 즐거움의 다른 표현임을 부정할 수 없다. 정용준 소설의 존재들은 눅진한 그림자처럼 천천히 몸집을 불렸다가 작아지며 이렇게 소설 공간으로 편입된다. 어둠의 한쪽을 잠시 떼어낸 듯한 그 그림자들은 인간의 살이 흘러나온 것처럼 자유롭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를 그것으로부터 격리시킨다. 아래 예문의 ‘비린내’는 핍진한 생명의 냄새를 풍긴다. 나는 수도꼭지를 꽉 잠그고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겨 있는 삶은 계란 두 개를 꺼내들었다. 열려 있는 창문에서 습한 바람이 들어왔고 어디에선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비린내가 났다. 나는 창문을 닫고 탁자에 걸터앉아 계란껍데기를 깠다. 갑자기 견딜 수 없이 배가 고팠고 현기증이 났다. 하얗고 부드러운 계란을 반으로 나누고 한쪽을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65쪽) “정체를 알 수 없는 비린내”. 그것은 생명의 발원지로부터 확산하는 냄새다. 투석 환자인 아버지가 과도하게 식탐을 부려 다른 환자들보다 계란과 치즈를 더 많이 먹고, 다시 혈액에 독이 쌓여 삶과 죽음이 동시에 진행되지만 생명의지는 죽음을 거부한다. 예문에서 보듯 이러한 생명의지가 ‘나’ 또한 존속게 한다. 인류가 출현하던 그때, 바다에서 시작된 생명이 비린내를 몸에 내장하고 나온 후 우리들 세포에 그대로 삼투된 냄새, 체액을 품은 살이 비린내를 풍기고, 땀을 많이 쏟을수록 생명체는 냄새를 더 짙게 풍긴다. 살아 있으므로 우리의 살은 냄새의 진원지가 되는 것, 그러나 우리는 날마다 썩어가면서 살고 있고, 냄새를 풍기고 살면서 동시에 죽어간다. 살이 내장한 액체들이 다 마르기 전까지만 우리는 생명체인 것이다. 정용준의 소설은 이렇게 인간의 살 냄새와 피 냄새를 그리워하며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 또는 ‘사이’의 문학이다. 다시 ‘474번’으로 돌아가 누나가 사갖고 들어온 꽃게에서 풍기는 ‘진짜’ 냄새를 맡아 보자. 그 냄새는 이제까지 먹어 온 가짜 게맛살과 달리 생경하다. 지금까지 ‘나’는 게맛살이 가공식품이라는 것을 의심해 본 적이 없고, 누나는 누나로서 존재했으므로. 그러나 누나가 꽃게를 사들고 와 ‘진짜’ 모성을 풍김으로써 비극이 불거진다. 몰라도 상관없을 세계를 ‘나’가 알아버린 것이다. “누나가 어머니라는 사실”처럼 가짜 냄새와 진짜 냄새가 겹치고, 이제 진짜가 출현함으로써 자아 탐문이 다른 방향성을 갖는다. ‘나’가 누구인지는 ‘가짜’가 규정해 왔지만 진짜를 아는 순간 나를 충격하는 세계, 끝까지 누나여야 할 존재가 ‘진짜’ 어머니가 된 이때부터 게는 썩은 냄새를 풍긴다. ‘나’가 누나의 존재를 아는 순간부터 진행되는 게의 부패현상, 이는 정용준이 ‘개들’에서 병구를 통해 보여 준 인식의 자국을 따라간다. 앎으로써 세계는 열리지만, 앎이 죽음을 몰고 와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는 것이다. 어머니/누나, 진짜 냄새/가짜 냄새로 나뉘는 세계, ‘나’의 존재는 진짜 꽃게 냄새와 게맛살 냄새처럼 섞인다. 어느 쪽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모를 겹침 현상이다. 꽃게는 점점 썩어가고, 냄새는 확산되고, 존재는 죽어간다. 죽음 뒤에는 냄새를 풍기지 않을 존재,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살아 있는 한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를. 존재를 규정하는 데 완벽한 준거가 있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 정용준은, 육체의 일부분들을 열어놓고 그 조각들을 비개인적 욕망의 역사라는 맥락에서 풀어나간다. 피와 눈물과 오줌의 물기가 번들거리는 살은 아름답지 않지만 그것으로도 존재는 증명되고 해방된다. 정용준 소설에서의 ‘부분’들은 비천함의 육체적 표지이기보다 욕망의 현실적 드러남이다. 근대의 합리와 원칙과 정형을 따르지 않고 결합·분해·해체하여 인류의 근원적 욕망을 그 조각에 실어낸 표식이며 현상이며 증상이다. 그곳에 근접해 보면 고귀하다고 할 수 없는 이 작은 조직들에 박힌 ‘존재’가 보인다. “정육점에 들어가서 고깃덩어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살피” 8)는 화가의 역설적 심미안에 정용준의 소설은 다시 중첩된다. ‘나’가 ‘곰’을 죽인 후 “손목을 타고 피와 내장이 그리고 그의 생명이 바닥으로 쏟아지”(‘개들’, 128쪽)는 여기, ‘나’는 아버지를 죽임으로써 모란을 포함하여 모든 부권을 계승하게 될 것이다. 아버지의 몸에서 빠져나온 몸의 일부분이 ‘개의 간식’으로 먹히는 현장에서 벌이는 아들의 저항과 투쟁이 보이는가. 과연 지금, 모든 고기는 저울 위에서 평등하다. 그것은 ‘중량’의 문제가 아니며, 존재가 거부되거나 수용되는 경계에서 육체의 일부분들이 뭉치거나 녹아내리거나 해체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장에 다다른 생명체들에서 오히려 인류의 영속적인 생명의지를 반어법으로 만나면서 ‘존재’를 재확인한다. 소설이 반드시 미의식을 표방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품고 정용준 소설 속 원시의 육체를 바라볼 때 우리는 의도 없는 듯 냉담한 그곳으로부터 낮게 울려나오는 목소리를 듣는다. 남성들조차도 중성 코드를 띠는 곱다란 사회에서 정용준의 소설은 다소 거칠게 인간 육체의 일부를 들어낸다. 전체성에 대한 해체와 저항, 부분으로 해석되는 육체들은 그때도 욕망한다. 전체로부터 흘러나온 조각과 살 냄새로부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자 한다. 그래서 그 물질들의 전일적 주체인 인간은 끊임없이 재정의되고 재증명된다. 나.는.누.구.인.가. ■각주 1)정용준 창작집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문학동네, 2015), ‘가나’(문학과지성사, 2012)를 참조하였다. 이 글은 이 작품집에 실린 ‘개들’, ‘474번’, ‘벽’,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에 대한 고찰이다. 2)프랜시스 베이컨의 회화에서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을 만들어 내는 고독·공포·절규가 가득하며, 흘러넘치는 비가시적인 힘들이 잔뜩 뒤틀린 채 표현된다. 프랑크 모베르, 박선주 옮김, ‘인간의 피 냄새가 내 눈을 떠나지 않는다’, 그린비, 2015, 117쪽. 3)노태훈은 “인간 근원의 존재론적 탐색을 지속하는 여러 작가들과 (정용준이) 변별되는 중요한 지점이 바로 ‘몸’이라는 실체에 대한 꾸준한 관심”이라고 말한다. 이는 정용준 소설의 지향을 적시한 것으로 보인다. 노태훈, ‘문학성을 회복하는 방법-정용준,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문학의 오늘’, 2015, 겨울호, 216쪽. 4)엠마뉘엘 레비나스, 김도형 외 옮김, ‘신, 죽음, 그리고 시간’, 그린비, 2013, 9쪽. 5)미셸 푸코, 이규현 옮김, ‘성의 역사 1’, 나남, 2015, 126쪽. 6)슬라보이 지제크, 이현우 외 옮김, ‘폭력이란 무엇인가’, 난장이, 2014, 232쪽. 지제크는 이웃을 “냄새 풍기는 자”로 정의한다 7)위의 책, 118쪽. 지제크는 이를 보다 깊은 의미나 숨겨진 메시지를 찾고자 하는 유혹이라고 말한다. 8)데이비드 실베스터, 주은정 옮김, ‘나는 왜 정육점의 고기가 아닌가’, 디자인하우스, 2016, 161쪽. 저자와 베이컨의 대담 부분.
  • [신년 특별 대담] 남재희 “촛불은 민주주의·정의 철저히 실천하자는 시대정신”

    [신년 특별 대담] 남재희 “촛불은 민주주의·정의 철저히 실천하자는 시대정신”

    사회: 이경형 주필 새해에는 탄핵 정국이 개헌·대선 정국과 맞물려 돌아가게 된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분노한 시민들의 촛불 함성은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하기에 이르렀다. 국회의 탄핵안 의결로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되고 황교안 국무총리의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가 권력 공백의 과도기를 관장하고 있다. 정치권은 여당의 분열로 4당 체제로 운영되는 가운데 정파별로 조기 대선에 대비한 전선 구축에 여념이 없다. 지금 한반도 주변 정세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의 등장과 시진핑, 블라디미르 푸틴, 아베 신조 등 강성 지도자의 포진으로 대단히 유동적이고, 북한 김정은은 핵 무장에 집착하고 있다. 이 같은 나라 안팎의 위중한 시기를 맞아 경제 석학으로 국무총리를 역임한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과 국회의원 4선에 노동부 장관을 지낸 진보적인 정치비평가 남재희 언론인의 대담을 통해 새로운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과제들을 진단해 본다. 사회 지난 2개월의 촛불 정신은 박근혜 대통령 퇴진이나 탄핵을 넘어서 앞으로 국가가 추구해야 할 비전과 가치에 관해 문제를 제기했다고 봅니다. 국가 운영의 틀이나 사회 작동의 시스템을 개조해야 한다는 관점도 있습니다. 촛불이 요구하는 시대정신은 무엇이라고 봅니까.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1960년대 후반 미국 내 베트남전 반대 시위가 있던 격동의 시기를 미국의 신문과 잡지는 ‘양적인 혁명’과 ‘질적인 혁명’이라는 용어로 해석했습니다. 기존의 가치나 사상 체계를 그대로 실천하고 이행하는 것이 양적인 혁명이라면 한발 더 나아가 새로운 차원의 모색을 하는 것이 질적인 혁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개념을 빌리면 이번 촛불의 시대정신은 질적인 혁명보다는 양적인 혁명 쪽 비중이 더 높습니다. 거창하게 새로운 사회를 추구한다기보다 기존에 갖고 있던 민주주의와 정의를 철저히 우리 사회에도 적용하고 실천하자는 시대정신이 압도적입니다. 질적인 혁명 측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추구의 열망도 보입니다. 실업난과 양극화 등의 심화 속에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 열망 같은 것이 겹쳐진 이중적 구조로 현 상황을 분석해야 한다고 저는 봅니다. 정운찬 전 국무총리 저도 촛불시위에 세 번 나갔습니다. 정말로 남녀노소,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다 왔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는 이번 촛불의 시대정신을 ‘정의’와 ‘함께 잘 살자’라고 규정합니다. 정의라는 것은 간단하게 ‘보편적 상식이 사회작동 원리로 기능하는 것’을 말합니다. 보편적 상식이란 열심히 일하면 응분의 대가를 받는 것, 부모의 재산과 사회적 지위 없이도 본인의 능력으로 성공할 수 있는 것, 법 앞의 평등을 의미합니다. 또 대통령은 헌법을 수호하고 국가와 국민을 위한 공익 증진을 위하는 것이 보편적 상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최순실 일가의 이익을 위해 대통령직을 이용했습니다. 사익 추구를 위해 정경유착과 인사전횡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박근혜 정부에서는 우리가 갖고 있는 보편적 상식이 사회작동 원리로 기능하지 않았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시민이 광장에 나와 ‘보편적 상식이 사회작동 원리로 기능하는 정의사회’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함께 잘 살자’라는 가치 구현이 요구된다는 점입니다. 그동안 모든 사회 변혁의 밑바탕에는 경제적 불평등이 깔려 있었습니다. 경제적 불평등은 모든 역사에 존재했지만 최근의 경제적 불평등은 신자유주의 논리에 의해 더욱 확대되고 제도화됐다고 생각합니다. 신자유주의 논리는 ‘개인의 자유’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의 활동은 ‘자본’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를 확대한 것은 결과적으로 ‘자본의 자유’ 확대로 나타납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인간이나 공동체는 등한시하고 개인과 자본의 자유만 강조하게 된 결과가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적 불평등 사회입니다. 저는 경제적 불평등을 제도화하는 신자유주의적 가치에서 공동체 사회가 건강해야 개인도 행복할 수 있다는 ‘함께 잘 살자’라는 동반자 가치가 시대정신이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헌법재판소에서 박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심판이 진행 중이고, 국정은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정권 교체를 앞둔 과도기적인 행태를 띠고 있는 것이지요. 권한대행 체제의 국정운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남재희 영어로 ‘인터레그넘’(interregnum)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직역하면 ‘왕위 공백기’란 뜻인데, 현재가 민주주의시대의 통치권 공백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 대통령이 이를 알아차리고 자진해서 하야를 했으면 그만큼 통치권 공백기가 단축됐을 텐데, 김종필 전 총리가 한 언론 인터뷰에 이야기한 것처럼 박 대통령은 5000만명이 하야하라고 해도 안 할 사람입니다. 정치 생명은 이미 끝났는데 법률과 헌법적 명운이 남아 헌법재판소에서 몇 달을 끌지도 모릅니다. 헌재가 시간을 끌면 끌수록 통치권 공백기간은 더 길어져 국가에 어마어마한 손실을 초래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통령 리더십이 없는 공백기에 황교안 권한대행이 뭘 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 뭘 해서도 안 됩니다. 황 권한대행은 과거 고건 전 총리의 역할을 모델로 해서 ‘선의의 관리자’로 역할을 끝내야 합니다. 자기가 능동적으로 새로운 시책을 한다고 나서면 안 됩니다. 일본의 한 방송에서 발표한 올해 10대 국제 뉴스를 보니 1위가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이었습니다. 트럼프라는 새로운 형태의 정치인이 당선되니까 각국은 비상사태에 돌입했습니다. 근데 국제 뉴스 2위가 ‘박근혜·최순실 사태’였습니다. 그만큼 국제적으로 우리나라가 웃음거리가 되고 조롱거리가 된 상황입니다. 국제 무대가 어떻게 요동칠지 모르는데 권한대행이 나서서 협상이 될 리 만무합니다. 우리나라의 통치권 공백기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운찬 황교안 권한대행은 선출된 권력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권자의 권리를 제한하거나 영향을 주는 정책과 법을 새롭게 만들거나 집행하는 것은 권한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황 총리는 국정농단 사태에 책임을 공동으로 지는 사람입니다. 총리로서 최순실이 국정을 농단하는 것을 예방하지도 못했고 결과적으로 최순실의 국정농단 정책을 집행한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정윤회 문건 사건 때 관련자들을 법대로 처벌했다면 최순실의 국정농단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황 총리가 당시 법무부 장관으로 재임하며 정윤회 문건 사건을 법대로 처리하지 않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황 총리는 현상유지 차원의 관리 이상의 활동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기존 정당들의 각종 개혁이나 혁신 작업을 어떻게 보십니까. 특히 시대적 화두로 떠오른 개헌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고 계십니까. 남재희 저는 현재 활동하는 정치인들과 생각이 좀 다릅니다. 탄핵 정국에서 개헌 문제를 논의하는 것을 ‘불 났는데 밤 구워 먹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일각에서는 개헌 논의가 악의적으로 박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희석시키는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헌법이 만약 살아 있는 생명체라면 지금 억울해서 엉엉 울 판입니다. 왜 헌법의 잘못으로 돌리느냐고 말이죠. 어떠한 개헌이냐에 대한 합의점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각책임제에서 이원집정제, 대통령 중임제까지 개헌의 종류는 많습니다. 그러나 내각책임제는 분단국가인 우리나라 상태에서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장면 내각의 실패도 있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정당의 전통과 안정성, 정체성 등이 아직 멀었다고 생각합니다. 거기다가 남북분단의 현실 등은 정권이 지리멸렬하게 바뀌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대통령 4년 중임제는 초기 산업시대의 제도라 생각합니다. 지금 어마어마한 속도로 변화하는 시대에 8년은 너무 길다고 생각합니다. 급속도로 발전하는 사회에 5년이면 충분합니다. 또한 4년 중임제를 하면 어떤 무리를 해서라도 8년을 하려 들 겁니다. 대통령 임기와 국회의원 선거를 같이하자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도 대통령 선거 중간에 의원 선거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의 정치적 축제인 동시에 엄청난 정화 기능을 합니다. 예산이 낭비된다고 하는데 어차피 인건비는 다 국민에게 돌아가는 것이고, 종이값 외에는 특별히 낭비되는 예산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개헌이 전혀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개헌을 한다면 대통령 결선 선거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프랑스처럼 50% 국민의 지지를 얻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과반수가 안 되면 정책 연대를 하거나 연정, 협치를 하면 됩니다. 그 과정에서 소외된 세력이 그만큼 정치에 반영되고 우리 정치도 발전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개헌을 한다면 제1차적 명제가 ‘결선투표제의 도입’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정운찬 촛불시위는 주권자인 국민이 자신의 주장을 광장에서 직접 표현하는 것인데, 1987년 민주화 이후 30년이 지났지만 광장의 촛불은 반복적으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국민들의 요구를 제도권 정치에서 수용하지 못했다는 방증이라고 생각합니다. 장기적으로는 비정규직을 대변하는 정당, 환경 문제에 천착하는 정당 등 다양한 사회적 필요를 대표하는 정당들이 만들어져 이들의 주장이 정책에 반영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내각제에 대해서는 한번 생각해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하나는 사람의 문제이지만, 다른 하나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자질도 풍부하고 공적인 마인드를 가졌다면 이런 일이 안 벌어졌을 것이고 사람이 좀 모자란다 할지라도 제왕적 대통령 제도가 없었다면 이런 일도 안 일어났을 것이라고 봅니다. 제도의 변화가 중요한데 저는 내각제로 권력 구조가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960년대 장면 내각제는 오늘날보다는 덜 성숙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촛불시위에 나선 시민들을 보면 ‘우리도 내각제를 한번 해봐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또 하나는 권력이 분산돼야 한다는 점입니다. 내각제에서도 강력한 총리가 있을 수 있고, 대통령을 세울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정치인들입니다. 지금의 사태를 가져온 제왕적 대통령 문제를 놓고 순수한 논의를 하면 좋은데 다들 차기 대통령 선거에 대비해 자기 정파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것 같아 우려스럽습니다. 남재희 정 전 총리께서 우리나라의 문제점이 언론권력, 재벌권력, 검찰권력에 의한 ‘특권 카르텔’이라고 지적한 칼럼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특권 카르텔로 재벌, 언론, 관료를 꼽는데 그중 관료의 구성원은 시대마다 달라졌습니다. 해방 직후에는 경찰이 그 관료였고, 박정희 쿠데타 이후에는 중앙정보부가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이후 은행 융자를 관할하고 세무 사찰을 하면서 재무부와 국세청이 쥐고 흔들었습니다. 요새 와서는 검찰이 권력을 쥐고 흔들고 있습니다. 대통령과 국회, 대법원장 등이 추천하는 검찰위원회 구성을 헌법 조항에 넣으면 더이상 검찰이 ‘권력의 시녀’가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권 카르텔을 무너뜨리는 데 있어 핵심은 경제력입니다. 경제력을 무너뜨리려면 정치력이 강해야 합니다. 그러나 내각책임제에서는 강한 정치력을 기대하기 힘듭니다. 역시 특권 카르텔을 혁파할 수 있는 힘은 개혁 의지를 가진 대통령이라야 가능합니다. 내각책임제는 우리가 남북 통일이 되고 개혁 과제가 별로 없는 상황이 되면 모르겠는데, 특권 카르텔과 빈부 격차가 심화되고 고통받는 청년층들이 늘어가는 지금 상황에서는 불행의 늪에 빠질 수 있습니다. 정운찬 제가 내각책임제를 한번 해봄직하지 않냐는 말씀을 드린 데는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내각책임제를 위해서는 재벌의 힘을 효율적으로 제한하는 장치가 반드시 마련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권력이 한 군데에 집중해서 나온 현상에 놀라서 드린 말씀입니다. 세계에서 제대로 된 대통령제 국가는 미국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과연 대통령제가 잘되고 있는가에 대한 반성이 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가능하면 개헌을 해서라도 권력 분산을 했으면 좋겠다는 뜻입니다.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 1934년 충북 충주 출생 ▲ 청주고, 서울대 법학과 ▲ 조선일보 정치부장, 논설위원 ▲ 서울신문 편집국장, 주필 ▲ 제10, 11, 12, 13대 국회의원 ▲ 노동부 장관
  • ‘세계서 가장 예쁜 얼굴 100인’에 나나 등 韓연예인 14명

    ‘세계서 가장 예쁜 얼굴 100인’에 나나 등 韓연예인 14명

    걸그룹 애프터스쿨의 멤버 나나(임진아)가 ‘올해 가장 아름다운 얼굴’ 3위에 꼽혔다. 미국 영화 사이트 TC캔들러는 27일(현지시간) 유튜브를 통해 ‘2016년 가장 아름다운 얼굴 100인’(The 100 Most Beautiful Faces of 2016) 목록을 발표했다. TC캔들러는 지난 1990년부터 매해 12월 영화 비평 전문인들로 구성된 ‘인디펜던트 크리틱스’(Independent Critics)와 함께 단순 인기 투표가 아닌 전 세계의 스타 중 우아하면서도 고전적인 대표 미인을 뽑아왔다. 2014년과 2015년 2년 연속 1위를 차지했던 나나는 올해 아쉽게도 3위에 그쳤다. 1위의 영광은 영국의 탑 모델 조단 던(26)이 차지했다. 그녀에게는 8살 된 아들 하나가 있다. 2위에는 필리핀계 미국인 배우이자 모델인 라이사 소베라노(18)가 올랐다. 그녀는 현재 미국 할리우드에서 가장 핫한 섹시 스타로 알려졌다. 특히 이번 순위에는 국내에서 활동하는 연예인들이 대거 이름을 올렸다. 그중에서도 걸그룹 멤버들이 강세을 보였다. 한국 출신은 아니지만 트와이스의 쯔위가 지난해 13위에서 8위로 올랐고, 소녀시대의 태연은 지난해 24위에서 19위로 올랐다. 태연은 2013년 9위를 기록한 바 있다. 이어 레드벨벳의 슬기도 2년 연속 순위에 올랐다. 슬기는 지난해 71위에서 무려 42계단 상승한 29위에 안착했다. 같은 그룹의 리더 아이린은 올해 처음 100인 목록에 들어 71위에 올랐다. 반면 걸스데이의 유라는 지난해 17위에서 35위로 다소 주춤했다. 올해 화제의 걸그룹 블랙핑크의 멤버 지수와 리사는 각각 22위와 41위에 올랐다. 또 순위에는 국내 배우들도 이름을 올렸다. 고아라는 6번째 TC캔들러의 가장 아름다운 얼굴 100인 목록에 진입했으며, 올해는 45위를 기록했다. 반면 ‘태양의 후예’로 국내와 중국에서 많은 사랑을 받은 송혜교는 98위에 턱걸이 했지만, 국내 연예인 중 최다 진입인 7회를 기록했다. 소녀시대 출신의 가수 제시카도 6번째 100인 목록에 들었다. 올해 49위를 차지한 제시카는 지난 2012년 5위를 기록한 바 있다. ‘국민 첫사랑’이란 수식어가 붙은 수지는 올해 62위에 올랐다. 또한 올해 처음 순위에 진입한 이들도 있었다. 스텔라의 민희는 76위, 배리굿의 다예는 87위에 올랐다. 이밖에도 이스라엘 출신 미국 배우 겸 감독 나탈리 포트만이 44위, 이탈리아 배우 모니카 벨루치가 91위, 영국 출신 미국 배우 키이라 나이틀리가 72위에 올랐다. 세 미녀 배우는 지금까지 각각 19회, 18회, 15회 100인 차트 진입 기록을 세웠다. ※전체 목록을 보려면 이곳을 클릭하세요.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서울신문 오피니언 면이 새롭게 바뀝니다

    서울신문 오피니언 면이 새롭게 바뀝니다

    새해부터 오피니언 면이 새롭게 바뀝니다. 월요일 특별칼럼에는 강명구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의 ‘문화로 세상읽기’, 강태진 서울대 공대 교수의 ‘코리아 4.0’, 최준식 이화여대 한국학과 교수의 ‘거듭나기’가 새롭게 선보입니다. 화·토요일에는 김용석 성균관대 정보통신대학 교수의 ‘상상 나래’, 김형준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의 ‘정치비평’, 남상훈 캐나다 빅토리아대 경영대 교수의 ‘글로벌 리더십 읽기’, 서동욱 서강대 철학과 교수의 ‘파피루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의 ‘경제 인사이트’, 이공현 법무법인 지평 대표변호사의 ‘공론장’, 이덕일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장의 ‘역사의 창’, 한필원 한남대 건축학과 교수의 ‘골목길 통신’이 찾아갑니다. 목요일자에는 고진하 시인의 ‘山典水典’, 이재무 시인의 ‘오솔길’, 정찬주 소설가의 ‘산중일기’, 황인숙 시인의 ‘해방촌에서’라는 에세이가 신설됩니다. 토요일 주말판에서는 김혜주 알덴테북스 대표의 ‘포크&라이프’,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의 ‘서울살이’, 이은미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의 ‘뮤知엄’, 최만진 경상대 건축학과 교수의 ‘도시탐구’가 독자 여러분을 만납니다. 아울러 월요일에는 백승종 한국과학기술교육대 대우교수의 ‘역사 산책’, 유진모 칼럼니스트의 ‘테마토크’가 새로 게재되며 월요일에는 ‘그때의 사회면’, 목요일에는 ‘기자의 시각’이 실립니다. 또한 열린세상 필진에는 김종면 언론인, 박명호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송경진 세계경제연구원장, 신봉길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객원교수, 유효상 차의과학대학 융합경영대학원장, 이병윤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이인희 경희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이현주 동북아역사재단 사무총장, 전호환 부산대 총장, 조지선 연세대 인간행동연구소 연구원, 진달용 캐나다 사이먼프레이저대 교수가 새로 참여합니다. 문화마당에는 윤가은 영화감독이 동참합니다. (이름은 가나다순)
  • 데이비드 보위부터 카스트로까지…올 해 세상 떠난 명사들

    데이비드 보위부터 카스트로까지…올 해 세상 떠난 명사들

    어김없이 다사다난했던 2016년 한 해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많은 해외명사들이 숨을 거둔 해이기도 하다. 정치, 문학, 예술, 학술, 스포츠계에 길이 남을 거대한 족적을 남기고 떠난 이들의 생애를 돌아봤다. 1. 데이비드 보위(1947.1.8 ~ 2016.1.10) 본명 데이비드 로버트 존스. 1947년 영국 남부 브릭스톤에서 태어나 1963년부터 가수, 작곡가 겸 배우로 활동했다. 50년 넘게 혁신적 예술가로 추앙됐으며 70년대의 작품들로 특히 인정받았다. 특유의 독창적 음악세계와 무대연출은 세계 대중음악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생전에 1억 4000만 장의 앨범을 판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앨범을 판 음악가 중 한 명으로 기록됐다. 말년에 세간에 알리지 않은 채 간암으로 투병했으며 1월 10일 마지막 앨범인 ‘블랙스타’가 출시된 지 이틀 만에 세상을 떠났다. 2. 알란 릭먼(1946.2.21 ~ 2016.1.14) 영국의 배우. 활동 초기엔 왕립연극학교를 나와 로열셰익스피어극단에서 고전극과 현대극을 연기했다. 영화 활동으로는 ‘다이 하드’(1988)의 악역 ‘한스 그루버’로 유명세에 올랐고, 노년에는 ‘해리 포터’ 시리즈의 ‘세베루스 스네이프 교수’역으로 세계 영화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1996년 영화 ‘라스푸틴’에서 러시아의 괴승 라스푸틴을 연기해 골든글로브 상을 받았다. 2015년 4월, 19세 때부터 50년간 교제해왔던 영국 노동당 당원인 리마 호튼과 결혼해 화제를 모았으나 이듬해 1월 췌장암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해 안타까움을 남겼다. 3. 위르켄 힌츠페터(1937.7.6 ~ 2016.1.25) 광주 민주화운동의 참상을 전 세계에 알린 독일 언론인. 1963년 처음 공영방송 영상 기자로 경력을 시작해 1967년 베트남 전쟁을 취재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목숨을 걸고 당시 계엄 사태의 심각성을 취재, 광주의 비극을 외부 세계에 알리면서‘푸른 눈의 목격자’로 불리게 된다. 같은 해 9월엔 김대중 전 대통령 사형 판결에 항의하며 ‘기로에 선 한국’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했으며 1986년에는 서울 광화문 시위 현장에 참여했다가 경찰의 폭력으로 목과 척추에 중상을 입기도 했다. 지난 2004년 지병인 심장질환으로 일시적으로 생명이 위독해지면서 “국립 5·18묘지에 묻히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1월 25일 독일의 한 병원에서 지병으로 숨을 거둔 이후 생전 밝힌 뜻에 따라 광주 망월동 묘지에 안장됐다. 4. 움베르토 에코 (1932.1.5 ~ 2016.2.19) 이탈리아의 기호학자, 철학자, 역사학자이자 미학자이다. 1956년 논문 ‘토마스 아퀴나스의 미학적 문제’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문학비평계와 기호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이래 현대미학과 문학비평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며 학계 총아로 떠올랐다. 1968년 기호를 개념, 유형, 의미론, 이데올로기 등으로 명쾌하게 분석 정리한 ‘텅빈 구조’와 ‘기호학 이론’등 저서로 세계적 기호학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기호학·철학·미학·역사학 등 여러 학술 분야에 더불어 9개 국어에 능통한 천재로 알려져 있으며 제임스 조이스 학회 명예 이사, 예일대 방문교수, 볼로냐 대학 교수, 이탈리아 인문학 연구소 소장 등 여러 직위를 역임했다. 또 케임브리지 하버드 등 세계 명문에서도 강의했다. 출판계에서 일하던 여자친구의 권유로 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해 1980년 최초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발표한 이래 ‘푸코의 진자’, ‘전날의 섬’ 등 작품을 출간하며 소설가로서도 세계적 인기를 끌었다. 오랜 암 투병 끝에 올해 2월 19일 자택에서 별세했다. 5. 앨빈 토플러 (1928.10.3 ~ 2016.6.27) ‘정보화 사회의 도래’를 의미하는 ‘제3의 물결’을 예견한 미국의 미래학자겸 작가. 젊은 시절 생산직 노동자, 백악관 출입기자, 포춘지 노동관계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경제·경영·첨단기술에 대한 지식과 관심사를 넓혀 관련 저술을 시작했다. 뉴욕대학교·마이애미대학교 등 5개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고, 코넬대학교 객원교수를 역임했다. IBM등 대형 기업들의 의뢰로 첨단기술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을 다각적으로 분석했으며 미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 정부 및 비영리민간단체, 일반기업을 대상으로 컨설팅 프로젝트와 강연을 진행했다. 본인과 같이 작가 겸 미래학자인 하이디 토플러와 결혼해 연구와 저술활동을 함께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6월 27일 자택에서 잠을 자던 중 세상을 떠났다. 6. 무하마드 알리 (1942.1.17.~2016.6.3.)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는 명언을 남긴 복싱계의 전설. 12세였던 1954년에 아마추어 복서 활동을 시작해 1960년 로마 올림픽 라이트헤비급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후 약 20년 간 활약하며 총 19회에 걸쳐 챔피언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으며 통산전적 55승 5패를 기록했다. 베트남 전쟁 징병을 거부했다가 챔피언 자리를 박탈당하고 기소됐으나 오랜 법정싸움 끝에 무죄를 선고 받았다. 이 때문에 3년 5개월의 경력 공백이 발생했지만 곧 재기에 성공, 1981년까지 선수로 활동했다. 권투뿐만 아니라 흑인민권운동가로서도 왕성하게 활동했다. 노년에는 파킨슨병을 앓았으며 6월 3일 합병증인 호흡기 질환으로 영면에 들었다. 7. 피델 카스트로 (1926.8.13 ~ 2016.11.25) 쿠바 해방을 이끈 혁명가인 동시에 쿠바를 장기간 지배한 독재자. 스페인 출신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나 1945년 아바나대에 입학하며 학생운동을 시작했고 1947년 쿠바인민사회주의당에 입당하며 사회주의자가 됐다. 1952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풀헨시오 바티스타 정부에 저항, 몬카다 병영을 습격했다가 수감되면서 혁명가로서의 이름을 처음 널리 알렸다. 2년 뒤 사면돼 멕시코로 망명해 체 게바라 등 중남미 해방운동가를 흡수한 뒤 1956년부터 쿠바에서 전쟁을 재개한 끝에 1959년 수도 아바나에 입성, 내각 책임제의 국무총리로 취임하면서 혁명에 성공한다. 혁명으로 군부정권을 타도했으나 정작 본인도 쿠바를 장기간 독재하는 모순된 모습을 보였다. 1965년에는 쿠바를 일당 사회주의국가로 만들고 스스로 쿠바 공산당 제1서기에 올랐으며 1976년에는 각료 회의 의장 및 국가평의회 의장, 쿠바군 최고 사령관 등을 겸직하며 독재 체제를 강화했다. 2006년에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에 권력을 이양하고 2011년 정계에서 공식 은퇴했으며 지난달 25일에 사망이 공식 발표됐다. 카스트로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린다. 무상교육·무상의료 등 복지정책을 실시해 국민적 지지를 얻고 소련 해체 이후 중남미의 사회주의 노선을 이끌면서 사회주의의 대부로 높이 평가 받은 바 있으나 강력한 언론탄압과 반대파 숙청을 자행한 독재자라는 비난 역시 면할 수 없었다. 카스트로 사망 소식을 접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카스트로라는 단 한 명의 사람이 주변의 세상과 인물들에 남긴 거대한 족적을 기록하고 평가하는 것은 역사의 몫일 것”이라는 말로 고인을 기렸다. 8. 조지 마이클 (1963.6.25 ~2016.12.25) ‘Last Christmas’로 전 세계적 인기를 끌었던 그룹 왬!(Wham!)의 멤버 조지 마이클이 12월 25일(현지시간) 크리스마스 오후에 53년의 짧은 일기를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조지 마이클은 왬!으로 활동하던 1970년대 ‘Last Christmas’이외에도 ‘Club Tropicana’ 등 히트곡을 냈으며 왬!활동 막바지부터 이후 솔로로 활동하며 ‘Careless Whisper’, ‘Outside’와 같은 곡으로 대중에게 사랑받았다. 약 40년의 활동기간 동안 마이클이 판매한 음반은 1억장 이상에 이르며 지난 1990년 발표된 앨범 ‘Listen Without Prejudice Vol. 1’을 곧 재발매할 예정이었다.고인은 25일 오후 1시 42분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으며 죽음을 둘러싼 수상한 정황은 발견되지 않았다. 고인은 지난 2011년에도 폐렴으로 위독했던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마이클의 홍보담당자는 “어렵고 힘든 시기에 유족들의 사생활이 침해돼선 안 될 것”이라며 “현재 단계에서는 추가로 발표할 사안이 없다”고 밝혔다. 방승언 기자 earny@seoul.co.kr
  • [지금, 이 영화] 에곤 실레:욕망이 그린 그림

    [지금, 이 영화] 에곤 실레:욕망이 그린 그림

    오스트리아 화가 에곤 실레는 1890년에 태어나 1918년에 죽었다. 스물여덟 해를 살았을 뿐이지만 그의 이름은 서양 미술사에 남았다. 유화 300여점과 데생 및 수채화 2000여점을 그린 덕분이다. 물론 양이 많다고 해서 꼭 질이 좋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실레는 일찌감치 자기 스타일을 확립한 작가였다. 그가 뛰어난 그림을 그리든, 변변찮은 그림을 그리든 간에 사람들은 그것이 실레의 그림임을 알았다. ‘키스’로 유명한 구스타프 클림트는 자신보다 서른 살 어린 후배의 재능을 높이 샀다. 두 사람이 만나 그림을 교환했을 때 클림트는 이렇게 말했다고 알려져 있다. “왜 굳이 그림을 바꾸려고 하지? 당신 그림이 더 나은데.” 독특한 그림만큼이나 실레의 삶은 범상치 않았다. 가족부터가 그랬다. 정신이상 증세를 보인 아버지는 가산을 불태웠고, 어머니는 심약한 아들을 냉대했으며, 여동생 게르티는 오빠를 지나치게 아낀 나머지 실레의 (누드)모델이 돼 주었다. 이성 문제도 복잡했다. 모아·발리·에디트 등이 그와 관계를 맺었던 여성들이다. 또한 누드화를 자주 그렸던 탓에 실레를 둘러싼 외설 시비는 끊이지 않았다. 무죄로 판명됐으나 여아 유괴 혐의로 기소된 적도 있다. 스물여덟 해를 살았을 뿐이지만 그의 인생은 제1차 세계대전에 휘말린 당시 오스트리아처럼 전쟁 같았다. 이런 실레의 생애를 다룬 영화가 디터 베르너 감독의 ‘에곤 실레:욕망이 그린 그림’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붙인 ‘욕망이 그린 그림’이라는 부제는 이 작품의 의미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 모든 예술―그림은 욕망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해석의 핵심은 도대체 이것이 ‘어떤 욕망’인가를 밝히는 데 있다. 영화의 원작은 힐데 베르거가 쓴 ‘죽음과 소녀:에곤 실레와 여자들’이다. 그래서 베르너 감독도 영화의 부제로 ‘죽음과 소녀’를 썼다. 두 사람은 실레의 욕망을 해명하는 키워드가 그의 대표작 ‘죽음과 소녀’라는 점에 동의했다. 그런 점에서 아랫글은 영화를 볼까 말까 하는 당신의 선택에 참고가 될 것이다. 1988년 11월 빈에서 ‘죽음과 소녀’를 직접 보고 쓴 재일 조선인 작가 서경식의 에세이다. “그때 나는 이미 30대 중반을 넘어섰지만 부모님이 두 분 다 세상을 뜨신 직후였고, 나 자신은 가족도 일정한 직업도 없었다. 나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승리를 기약하기 어려운 투쟁, 이루지 못한 꿈, 도중에 끝나 버린 사랑, 발버둥치면 칠수록 서로 상처밖에 주지 않는 인간관계, 구덩이 밑바닥 같은 고독과 우울, 그런 것뿐이었다… 죽고 싶다고 절실하게 생각한 적은 없지만, 죽음이 항상 내 곁에서 숨쉬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이 그림 앞에 섰을 때 내가 격렬한 전율에 사로잡힌 것은 반드시 추위 탓만은 아니었다.”(‘청춘의 사신’, 김석희 옮김, 창작과비평사, 2002) 문장에 공감한다면 영화도 보기를 권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 청춘인 것 같다. 22일 개봉. 청소년 관람불가. 허희 문학평론가·영화칼럼니스트
  • [당신의 책]

    [당신의 책]

    조선 최고의 문장 이덕무를 읽다(한정주 지음, 다산초당 펴냄) “홀로 깊이 탐구해 독창적인 조예에 이르렀고, 진부한 것은 결코 좇아 배우지 않았다”(연암 박지원). 대표적 북학파 실학자이자 ‘책만 읽는 바보(간서치)’로 알려진 18세기 조선 지식인 이덕무의 삶과 철학을 온전히 되살려냈다. 조선 최고의 문장가로 평가받는 이덕무가 남긴 시와 산문, 문예비평, 백과사전적 연구서 등 다양한 글을 고전연구가인 저자가 여덟 가지 시선으로 재구성했다. 이덕무 평전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이 책은 그의 호쾌한 문장론과 삶의 자세를 마주하게 한다. 또 그와 교류했던 당대 지식인들의 문장과 내면세계를 탐구하며 18세기 조선의 지성사를 생생히 복원했다. 548쪽. 2만 5000원. 인생의 발견(시어도어 젤딘 지음, 문희경 옮김, 어크로스 펴냄) 유럽의 대표적인 역사학 지성인 저자가 인류의 영원한 화두인 ‘행복하게 살기 위한 길은 어디에 있는가’를 성찰하며, 세상의 모든 지혜를 연결하는 지적 모험을 한다. 거대한 주제를 다루지만 모호하거나 진부하지는 않다. 역사 속 여러 인물들의 삶을 교차하면서 28가지의 질문을 던지며 독자의 생각을 자극한다. 모두 우리가 인생에서 소중히 여겨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더 나은 삶을 위해 가져야 할 물음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질문들이다. 저자는 우리가 과거를 새롭게 발견하고 풍성하게 재맥락화할수록 현재와 미래에 관한 선택지가 넓어진다고 말한다. 알랭 드 보통은 이 책을 ‘모든 젊은이들에게 권하는 책’으로 꼽았다. 448쪽. 1만 6800원. 제3의 식탁(댄 바버 지음, 임현경 옮김, 글항아리 펴냄) 저자인 댄 바버는 ‘농장에서 식탁으로’를 의미하는 ‘팜 투 테이블’(Farm-to-table) 운동을 펼치고 있는 미국의 유명 요리사. 그는 뉴욕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농장 겸 레스토랑 ‘블루 힐 앳 스톤 반스’를 운영하면서 주변에서 나는 질 좋은 식재료로 만든 음식을 선보이고 있다. 이 책은 서양 음식과 농업의 최근 역사를 토대로 우리가 지금까지 어떻게 식탁을 차려왔는지 살핀다. 저자는 주어진 재료를 조화롭게 활용하여 식탁에 올리는 일 중에서도 ‘농장 전체를 활용한 요리’ 이른바 제3의 식탁을 말한다. 저자는 “제3의 식탁은 관습을 따르기보다는 재료를 공급하는 환경을 보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맛을 조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672쪽. 2만 8000원.
  • <재개봉작> ‘블루 벨벳’ 티저 예고편 공개

    <재개봉작> ‘블루 벨벳’ 티저 예고편 공개

    데이빗 린치 감독의 문제적 걸작 ‘블루 벨벳’이 오는 29일 재개봉을 확정한 가운데 티저 예고편을 공개했다. ‘블루 벨벳’은 어느 날 잘린 귀를 발견하고 사건을 추적하기 시작한 대학생 ‘제프리’(카일 맥라클란)와 용의자로 지목된 매력적인 여가수 ‘도로시’(이사벨라 로셀리니), 그리고 그들을 위협하는 ‘프랭크’(데니스 호퍼)를 둘러싼 기묘한 이야기를 담은 미스터리 로맨스 영화다. 공개된 티저 예고편은 ‘블루 벨벳’에서 손꼽히는 명장면과 함께 ‘죽기 전에 꼭 들어야 할 팝송’(로버트 다이머리)으로 회자되는 OST ‘In Dreams’ 곡이 흘러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이어 모든 사건의 시작인 ‘잘린 귀’를 발견하는 제프리(카일 맥라클란)의 모습과 도로시의 붉은 입술과 푸른색의 아이 메이크업을 한 모습, 또 어두운 도로 위에 선명한 노란색 차선과 함께 프랭크(데니스 호퍼)의 강렬한 눈빛이 짧지만 강한 인상을 남긴다. ‘블루 벨벳’은 사랑과 관능, 억눌린 욕망이 뒤엉킨 잔혹한 로맨스로 대중과 평단의 사랑을 동시에 받으며 제59회 아카데미 감독상, 제44회 골든글러브 각본상 노미네이트 되었고, 제12회 LA 비평가 협회상 감독상, 제21회 전미 비평가 협회상 감독상을 받으며 데이빗 린치를 거장의 반열로 올린 작품이다. 영화 ‘블루 벨벳’은 개봉 30주년을 기념해 2016년 12월 29일 개봉 예정이다. 청소년 관람불가. 120분. 사진 영상=유로커뮤니케이션 문성호 기자 sungho@seoul.co.kr
  • <재개봉작> ‘블루 벨벳’ 티저 예고편 공개

    <재개봉작> ‘블루 벨벳’ 티저 예고편 공개

    데이빗 린치 감독의 문제적 걸작 ‘블루 벨벳’이 오는 29일 재개봉을 확정한 가운데 티저 예고편을 공개했다. ‘블루 벨벳’은 어느 날 잘린 귀를 발견하고 사건을 추적하기 시작한 대학생 ‘제프리’(카일 맥라클란)와 용의자로 지목된 매력적인 여가수 ‘도로시’(이사벨라 로셀리니), 그리고 그들을 위협하는 ‘프랭크’(데니스 호퍼)를 둘러싼 기묘한 이야기를 담은 미스터리 로맨스 영화다. 공개된 티저 예고편은 ‘블루 벨벳’에서 손꼽히는 명장면과 함께 ‘죽기 전에 꼭 들어야 할 팝송’(로버트 다이머리)으로 회자되는 OST ‘In Dreams’ 곡이 흘러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이어 모든 사건의 시작인 ‘잘린 귀’를 발견하는 제프리(카일 맥라클란)의 모습과 도로시의 붉은 입술과 푸른색의 아이 메이크업을 한 모습, 또 어두운 도로 위에 선명한 노란색 차선과 함께 프랭크(데니스 호퍼)의 강렬한 눈빛이 짧지만 강한 인상을 남긴다. ‘블루 벨벳’은 사랑과 관능, 억눌린 욕망이 뒤엉킨 잔혹한 로맨스로 대중과 평단의 사랑을 동시에 받으며 제59회 아카데미 감독상, 제44회 골든글러브 각본상 노미네이트 되었고, 제12회 LA 비평가 협회상 감독상, 제21회 전미 비평가 협회상 감독상을 받으며 데이빗 린치를 거장의 반열로 올린 작품이다. 영화 ‘블루 벨벳’은 개봉 30주년을 기념해 2016년 12월 29일 개봉 예정이다. 청소년 관람불가. 120분. 사진 영상=유로커뮤니케이션 문성호 기자 sungho@seoul.co.kr
  • 천재적 건축의 토대 시작은 가느다란 붓

    천재적 건축의 토대 시작은 가느다란 붓

    르코르뷔지에(1887~1965)는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건축가다. 타임지 선정 ‘20세기를 빛낸 100인’ 중 유일한 건축가인 그가 프랑스, 인도, 일본 등 7개국에 남긴 17개의 건축물이 지난 7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만 봐도 그렇다. 유네스코는 그가 과거의 건축방식을 넘어 새로운 건축 원칙과 기술을 발명했으며 이를 통해 세계 인류문명에 큰 공헌을 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건축과 도시계획을 아우르고 화가이자 비평가로 수많은 글과 그림을 남긴 현대문화의 아이콘 르코르뷔지에의 예술정신을 기리는 전시회가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르코르뷔지에 재단이 주최하고 코바나컨텐츠가 기획한 전시는 ‘현대건축의 아버지 르코르뷔지에: 4평의 기적’이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결국은 본질만 남는다”고 했던 그가 마지막에 머물렀던 집이 고작 4평짜리 오두막집이었던 데서 착안한 것이다. 세계문화유산 등재 이후 처음 열리는 전시회인 만큼 규모도 크다. 드로잉, 회화, 건축모형 등 르코르뷔지에 재단 소장의 미공개 작품 140점을 포함해 500여점이 선보인다. 건축보다는 회화에 지나치게 무게를 실었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방대한 양의 회화 작품들은 르코르뷔지에가 추구한 건축이 어디에서 비롯됐으며 그의 조형언어가 어떻게 진화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가치가 충분하다. “나는 매일 그림 그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 속에서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개념을 매일매일 얻어냈다. 얻지 못하면 그것을 찾아낼 수 있을 때까지 그림을 그렸다. 형태의 비밀들, 영혼을 발전시키는 발명들을 얻었다.”“내가 건축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림이라는 운하를 통해서이다.”(르코르뷔지에) 이번 특별전 큐레이터인 다니엘 폴리 파리 국립건축 현대역사연구소 교수는 “그는 날마다 오전 시간을 그림을 그리는 데 할애했다. 공간에서의 형태적 관계에 매료된 르코르뷔지에는 데생을 하면서 끊임없이 탐구했다”며 합리적인 구조, 모듈성과 기하학적인 질서도 그 자신이 ‘인내심이 있는 비밀 연구’라고 명명했던 ‘회화 작업’에서 비롯됐다”고 설명했다. 르코르뷔지에는 샤를르 에두아르 잔느레라는 이름으로 1887년 스위스 쥐라산맥에 위치한 라 쇼드퐁 마을에서 태어나 가업을 잇기 위해 1902년부터 예술학교에서 회중시계 장식 세공사 교육과 데생 교육을 받았다. 건축가의 꿈을 품은 젊은 잔느레는 1907년부터 외국 여행과 체류를 시작한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예술적 도시를 둘러보고 비엔나, 파리, 베를린를 거쳐 1911년 5월부터 11월까지 터키와 그리스를 여행했다. 여행은 그의 생애와 작품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여행 이후 건축가로서의 삶을 결정하고 고향에서 건축가로 첫발을 내딛는다. 1917년 파리에 정착한 그는 화가 아메데 오장팡과 함께 ‘순수주의’를 창시하고 잡지 ‘에스프리 누보’(새로운 정신)를 창간했다. 순수주의는 피카소를 비롯한 다수의 입체주의에 대항한 새로운 사조로 좀 더 장식을 없애고 본질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에스프리 누보에 실린 에세이들을 모은 책 ‘건축을 향하여’(1923)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그는 얇은 바닥판과 그것을 지탱하는 기둥과 오르내릴 수 있는 계단으로 이뤄진 ‘돔이노’ 시스템을 만들고 이를 확대해 ‘현대 건축의 5원칙’을 만들었다. 인간을 건축의 중심에 두고 건축의 개념을 새롭게 창안한 그의 건축 원리는 지금까지 건축의 교과서로 남아 있다. 그의 가장 큰 공적은 20세기의 도시에 거주하는 서민들이 처한 주거문제를 해결했다는 점이다. “집은 살기 위한 기계”라며 좁은 공간에서 사람이 움직이기에 불편함이 없는 최적의 황금수치를 개발해 ‘모듈러’라 명명했고, 이를 적용해 한 건물에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대규모 공동주택을 지었다. 그가 만든 건축의 5원칙이 그대로 적용된 빌라 사보아(1929), 최초의 대규모 공동주거인 마르세유의 유니테 다비타시옹(1945~1952), 르코르뷔지에의 예술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롱샹 성당(1950~1955)의 모형을 볼 수 있다. 전시의 마지막 섹션에는 르코르뷔지에가 니스의 캅 마르탱 휴양지에 지은 오두막집(카바농, 1951)을 재현해 놓았다. 모듈러 이론을 바탕으로 16㎡의 공간에 지은 오두막은 ‘4평이면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전시는 내년 3월 26일까지.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책꽂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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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록과 함께한 시베리아 탐험일지(리처드 부시 지음, 정재겸 옮김, 우리역사연구재단 펴냄) 19세기 말 시베리아와 극동 지역의 역사, 지리, 원주민 문화에 대한 탐험 일지. 우리 한민족과의 연관성을 유추할 수 있다. 640쪽. 2만 2000원. 우리는 모두 조선족이다(신혜란 지음, 이매진 펴냄)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인 저자가 영국 런던 뉴몰든에서 중국 칭다오까지 퍼진 조선족 디아스포라의 양극화와 계급성을 지정학적으로 탐구한 보고서. 336쪽. 1만 8000원. 시장으로 나간 조선백자(박은숙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경매시장에서 수억을 호가하는 조선백자를 만들었던 사람과 백자가 탄생한 장소에 관한 이야기. 384쪽. 1만 8500원. 미래는 더 나아질 것인가(과학기술정책연구원 미래연구센터 지음, 알에이치코리아 펴냄) 국내 28명의 전문가들이 인공지능, 4차 산업혁명 그리고 인간의 미래를 통찰하며 날카로운 분석과 전망을 담았다. 364쪽. 1만 7000원. 도서관으로 문명을 읽다(정병설 외 25인 지음, 한길사 펴냄) 26명의 인문학자들이 세계 각국을 대표하는 도서관을 통해 문명의 접점을 찾아 나간 도서관 기행기. 340쪽. 2만원. 김국장의 놓치기 쉬운 운영 노하우(김진문 지음, 빅애플 펴냄) 광고회사 기획자가 각종 이벤트, 프로모션, 박람회 등의 운영과 관련한 노하우를 체계적으로 담아냈다. 256쪽. 2만 5000원.
  • 데이비드 보위부터 카스트로까지…올 해 세상 떠난 해외 인사들

    데이비드 보위부터 카스트로까지…올 해 세상 떠난 해외 인사들

    어김없이 다사다난했던 2016년 한 해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많은 해외명사들이 숨을 거둔 해이기도 하다. 정치, 문학, 예술, 학술, 스포츠계에 길이 남을 거대한 족적을 남기고 떠난 이들의 생애를 돌아봤다. 1. 데이비드 보위(1947.1.8 ~ 2016.1.10) 본명 데이비드 로버트 존스. 1947년 영국 남부 브릭스톤에서 태어나 1963년부터 가수, 작곡가 겸 배우로 활동했다. 50년 넘게 혁신적 예술가로 추앙됐으며 70년대의 작품들로 특히 인정받았다. 특유의 독창적 음악세계와 무대연출은 세계 대중음악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생전에 1억 4000만 장의 앨범을 판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앨범을 판 음악가 중 한 명으로 기록됐다. 말년에 세간에 알리지 않은 채 간암으로 투병했으며 1월 10일 마지막 앨범인 ‘블랙스타’가 출시된 지 이틀 만에 세상을 떠났다. 2. 알란 릭먼(1946.2.21 ~ 2016.1.14) 영국의 배우. 활동 초기엔 왕립연극학교를 나와 로열셰익스피어극단에서 고전극과 현대극을 연기했다. 영화 활동으로는 ‘다이 하드’(1988)의 악역 ‘한스 그루버’로 유명세에 올랐고, 노년에는 ‘해리 포터’ 시리즈의 ‘세베루스 스네이프 교수’역으로 세계 영화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1996년 영화 ‘라스푸틴’에서 러시아의 괴승 라스푸틴을 연기해 골든글로브 상을 받았다. 2015년 4월, 19세 때부터 50년간 교제해왔던 영국 노동당 당원인 리마 호튼과 결혼해 화제를 모았으나 이듬해 1월 췌장암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해 안타까움을 남겼다. 3. 위르켄 힌츠페터(1937.7.6 ~ 2016.1.25) 광주 민주화운동의 참상을 전 세계에 알린 독일 언론인. 1963년 처음 공영방송 영상 기자로 경력을 시작해 1967년 베트남 전쟁을 취재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목숨을 걸고 당시 계엄 사태의 심각성을 취재, 광주의 비극을 외부 세계에 알리면서‘푸른 눈의 목격자’로 불리게 된다. 같은 해 9월엔 김대중 전 대통령 사형 판결에 항의하며 ‘기로에 선 한국’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했으며 1986년에는 서울 광화문 시위 현장에 참여했다가 경찰의 폭력으로 목과 척추에 중상을 입기도 했다. 지난 2004년 지병인 심장질환으로 일시적으로 생명이 위독해지면서 “국립 5·18묘지에 묻히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1월 25일 독일의 한 병원에서 지병으로 숨을 거둔 이후 생전 밝힌 뜻에 따라 광주 망월동 묘지에 안장됐다. 4. 움베르토 에코 (1932.1.5 ~ 2016.2.19) 이탈리아의 기호학자, 철학자, 역사학자이자 미학자이다. 1956년 논문 ‘토마스 아퀴나스의 미학적 문제’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문학비평계와 기호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이래 현대미학과 문학비평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며 학계 총아로 떠올랐다. 1968년 기호를 개념, 유형, 의미론, 이데올로기 등으로 명쾌하게 분석 정리한 ‘텅빈 구조’와 ‘기호학 이론’등 저서로 세계적 기호학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기호학·철학·미학·역사학 등 여러 학술 분야에 더불어 9개 국어에 능통한 천재로 알려져 있으며 제임스 조이스 학회 명예 이사, 예일대 방문교수, 볼로냐 대학 교수, 이탈리아 인문학 연구소 소장 등 여러 직위를 역임했다. 또 케임브리지 하버드 등 세계 명문에서도 강의했다. 출판계에서 일하던 여자친구의 권유로 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해 1980년 최초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발표한 이래 ‘푸코의 진자’, ‘전날의 섬’ 등 작품을 출간하며 소설가로서도 세계적 인기를 끌었다. 오랜 암 투병 끝에 올해 2월 19일 자택에서 별세했다. 5. 앨빈 토플러 (1928.10.3 ~ 2016.6.27) ‘정보화 사회의 도래’를 의미하는 ‘제3의 물결’을 예견한 미국의 미래학자겸 작가. 젊은 시절 생산직 노동자, 백악관 출입기자, 포춘지 노동관계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경제·경영·첨단기술에 대한 지식과 관심사를 넓혀 관련 저술을 시작했다. 뉴욕대학교·마이애미대학교 등 5개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고, 코넬대학교 객원교수를 역임했다. IBM등 대형 기업들의 의뢰로 첨단기술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을 다각적으로 분석했으며 미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 정부 및 비영리민간단체, 일반기업을 대상으로 컨설팅 프로젝트와 강연을 진행했다. 본인과 같이 작가 겸 미래학자인 하이디 토플러와 결혼해 연구와 저술활동을 함께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6월 27일 자택에서 잠을 자던 중 세상을 떠났다. 6. 무하마드 알리 (1942.1.17.~2016.6.3.)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는 명언을 남긴 복싱계의 전설. 12세였던 1954년에 아마추어 복서 활동을 시작해 1960년 로마 올림픽 라이트헤비급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후 약 20년 간 활약하며 총 19회에 걸쳐 챔피언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으며 통산전적 55승 5패를 기록했다. 베트남 전쟁 징병을 거부했다가 챔피언 자리를 박탈당하고 기소됐으나 오랜 법정싸움 끝에 무죄를 선고 받았다. 이 때문에 3년 5개월의 경력 공백이 발생했지만 곧 재기에 성공, 1981년까지 선수로 활동했다. 권투뿐만 아니라 흑인민권운동가로서도 왕성하게 활동했다. 노년에는 파킨슨병을 앓았으며 6월 3일 합병증인 호흡기 질환으로 영면에 들었다. 7. 피델 카스트로 (1926.8.13 ~ 2016.11.25) 쿠바 해방을 이끈 혁명가인 동시에 쿠바를 장기간 지배한 독재자. 스페인 출신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나 1945년 아바나대에 입학하며 학생운동을 시작했고 1947년 쿠바인민사회주의당에 입당하며 사회주의자가 됐다. 1952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풀헨시오 바티스타 정부에 저항, 몬카다 병영을 습격했다가 수감되면서 혁명가로서의 이름을 처음 널리 알렸다. 2년 뒤 사면돼 멕시코로 망명해 체 게바라 등 중남미 해방운동가를 흡수한 뒤 1956년부터 쿠바에서 전쟁을 재개한 끝에 1959년 수도 아바나에 입성, 내각 책임제의 국무총리로 취임하면서 혁명에 성공한다. 혁명으로 군부정권을 타도했으나 정작 본인도 쿠바를 장기간 독재하는 모순된 모습을 보였다. 1965년에는 쿠바를 일당 사회주의국가로 만들고 스스로 쿠바 공산당 제1서기에 올랐으며 1976년에는 각료 회의 의장 및 국가평의회 의장, 쿠바군 최고 사령관 등을 겸직하며 독재 체제를 강화했다. 2006년에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에 권력을 이양하고 2011년 정계에서 공식 은퇴했으며 지난달 25일에 사망이 공식 발표됐다. 카스트로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린다. 무상교육·무상의료 등 복지정책을 실시해 국민적 지지를 얻고 소련 해체 이후 중남미의 사회주의 노선을 이끌면서 사회주의의 대부로 높이 평가 받은 바 있으나 강력한 언론탄압과 반대파 숙청을 자행한 독재자라는 비난 역시 면할 수 없었다. 카스트로 사망 소식을 접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카스트로라는 단 한 명의 사람이 주변의 세상과 인물들에 남긴 거대한 족적을 기록하고 평가하는 것은 역사의 몫일 것”이라는 말로 고인을 기렸다. 방승언 기자 earny@seoul.co.kr
  • [유용하 기자의 사이언스 톡] “수면 시간 1시간만 늘려도 美 경제 26조원 증가 효과”

    [유용하 기자의 사이언스 톡] “수면 시간 1시간만 늘려도 美 경제 26조원 증가 효과”

    수면 부족 따른 경제적 손실 수치로 환원한 최초의 연구 숙면의 경제적 효과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1547~1616)는 “잠은 피로한 마음의 가장 좋은 약”이라고 했고, 프랑스의 비평가이자 소설가 상플뢰리(1821~1889)는 “산다는 것은 앓는 것이다. 잠이 열여섯 시간마다 그 고통을 경감시켜준다”고 말했습니다. 어젯밤 푹 주무셨나요? 날이 쌀쌀해지면서 아침에 따뜻한 이불 속을 벗어나기가 더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이불 속에 오래 있다고 숙면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수면부족으로 美경제 48조원 손실 현대인들은 빠르게 변하는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잠시라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불안감과 끊임없는 스트레스를 느낍니다. 여기에 밤에도 대낮처럼 환한 빛공해까지 더해져 불면과 수면 부족을 호소하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국내 불면증 환자는 400만명에 이른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생의 3분의1 정도를 잠으로 보냅니다. 잠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수입니다. 고갈된 신경전달물질을 보충해 활발한 뇌 활동도 돕습니다. 숙면을 취한 다음날은 상쾌하고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는 신경이 곤두서고 매사에 의욕을 느끼지 못하는 경험은 누구나 했을 것입니다. 구 소련 체르노빌 원전 폭발이나 미국 우주왕복선 챌린저호 폭발 모두 작업자의 수면 부족으로 인한 판단착오 탓에 발생한 사고라고 합니다. 수면 부족에 대한 경제적 효과를 추정하기는 쉽지 않다고 합니다. 고려해야 할 변수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난 1일 미국의 대표적인 싱크탱크 랜드(RAND)연구소 산하 유럽분소가 근로자들의 수면 부족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수치로 환원한 최초의 연구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연구에는 미국·영국·캐나다·독일·일본의 근로자가 참여했습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수면 부족은 근로자의 사망 위험률을 증가시킵니다. 예컨대 7~9시간 자는 근로자에 비해 수면시간이 6시간 이하인 근로자의 사망 위험률이 13% 올라간다고 합니다. 미국의 경우 근로자들의 수면 부족 시간을 종합하면 연간 120만일, 이를 경제손실로 환산하면 411억 달러(약 48조 1897억원),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2.28%입니다. 수면시간을 1시간만 늘려도 미국 경제에 226억 4000만 달러(26조 5680억원) 증가 효과가 나타난다고도 합니다. 국가별 경제 손실을 보면 일본 138억 달러(16조 2012억원, GDP 2.92%), 독일 60억 달러(7조 440억원, GDP 1.56%), 영국 50억 달러(5조 8700억원, GDP 1.86%), 캐나다 21억 4000만 달러(2조 5123억원, GDP 1.35%)로 계산됐습니다. ●이자까지 붙는 ‘잠빚’을 아시나요 수면 과학자들은 ‘잠빚’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깨어 있는 2시간당 1시간 정도의 잠이 필요한데 잠을 충분히 못 잘 경우 신체는 다음날 반드시 부족한 잠을 채우려는 속성을 보인다고 합니다. 적정 수면시간을 채우지 못하면 잠이 빚처럼 쌓여 잠의 양이 늘어나는 거죠. 2시간짜리 잠 빚은 이자까지 붙여서 2시간 이상 자야 풀린다고 합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발표에 따르면 2015년 기준 우리나라 근로자 1인당 연간 평균 노동시간은 2113시간으로 OECD 평균인 1766시간보다 347시간, 43일 더 많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지난해 우리나라 평균 실질임금은 3만 3100달러로 OECD 평균인 4만 1253달러의 80% 수준에 불과합니다. 일하는 시간이 늘어나는 만큼 잠자는 시간이 부족해지는 것은 당연한 현상입니다. 더군다나 자는 시간까지 줄여 일하고 있지만 보상은 그만큼 받지 못하는 우리 국민들 정말 이대로 괜찮을까요. 정말 행복하고 잘사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edmondy@seoul.co.kr
  • [유용하 기자의 사이언스 톡] “수면 시간 1시간만 늘려도 美 경제 26조원 증가 효과”

    [유용하 기자의 사이언스 톡] “수면 시간 1시간만 늘려도 美 경제 26조원 증가 효과”

    수면 부족 따른 경제적 손실 수치로 환원한 최초의 연구 숙면의 경제적 효과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1547~1616)는 “잠은 피로한 마음의 가장 좋은 약”이라고 했고, 프랑스의 비평가이자 소설가 상플뢰리(1821~1889)는 “산다는 것은 앓는 것이다. 잠이 열여섯 시간마다 그 고통을 경감시켜준다”고 말했습니다. 어젯밤 푹 주무셨나요? 날이 쌀쌀해지면서 아침에 따뜻한 이불 속을 벗어나기가 더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이불 속에 오래 있다고 숙면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수면부족으로 美경제 48조원 손실 현대인들은 빠르게 변하는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잠시라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불안감과 끊임없는 스트레스를 느낍니다. 여기에 밤에도 대낮처럼 환한 빛공해까지 더해져 불면과 수면 부족을 호소하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국내 불면증 환자는 400만명에 이른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생의 3분의1 정도를 잠으로 보냅니다. 잠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수입니다. 고갈된 신경전달물질을 보충해 활발한 뇌 활동도 돕습니다. 숙면을 취한 다음날은 상쾌하고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는 신경이 곤두서고 매사에 의욕을 느끼지 못하는 경험은 누구나 했을 것입니다. 구 소련 체르노빌 원전 폭발이나 미국 우주왕복선 챌린저호 폭발 모두 작업자의 수면 부족으로 인한 판단착오 탓에 발생한 사고라고 합니다. 수면 부족에 대한 경제적 효과를 추정하기는 쉽지 않다고 합니다. 고려해야 할 변수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난 1일 미국의 대표적인 싱크탱크 랜드(RAND)연구소 산하 유럽분소가 근로자들의 수면 부족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수치로 환원한 최초의 연구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연구에는 미국·영국·캐나다·독일·일본의 근로자가 참여했습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수면 부족은 근로자의 사망 위험률을 증가시킵니다. 예컨대 7~9시간 자는 근로자에 비해 수면시간이 6시간 이하인 근로자의 사망 위험률이 13% 올라간다고 합니다. 미국의 경우 근로자들의 수면 부족 시간을 종합하면 연간 120만일, 이를 경제손실로 환산하면 411억 달러(약 48조 1897억원),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2.28%입니다. 수면시간을 1시간만 늘려도 미국 경제에 226억 4000만 달러(26조 5680억원) 증가 효과가 나타난다고도 합니다. 국가별 경제 손실을 보면 일본 138억 달러(16조 2012억원, GDP 2.92%), 독일 60억 달러(7조 440억원, GDP 1.56%), 영국 50억 달러(5조 8700억원, GDP 1.86%), 캐나다 21억 4000만 달러(2조 5123억원, GDP 1.35%)로 계산됐습니다. ●이자까지 붙는 ‘잠빚’을 아시나요 수면 과학자들은 ‘잠빚’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깨어 있는 2시간당 1시간 정도의 잠이 필요한데 잠을 충분히 못 잘 경우 신체는 다음날 반드시 부족한 잠을 채우려는 속성을 보인다고 합니다. 적정 수면시간을 채우지 못하면 잠이 빚처럼 쌓여 잠의 양이 늘어나는 거죠. 2시간짜리 잠 빚은 이자까지 붙여서 2시간 이상 자야 풀린다고 합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발표에 따르면 2015년 기준 우리나라 근로자 1인당 연간 평균 노동시간은 2113시간으로 OECD 평균인 1766시간보다 347시간, 43일 더 많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지난해 우리나라 평균 실질임금은 3만 3100달러로 OECD 평균인 4만 1253달러의 80% 수준에 불과합니다. 일하는 시간이 늘어나는 만큼 잠자는 시간이 부족해지는 것은 당연한 현상입니다. 더군다나 자는 시간까지 줄여 일하고 있지만 보상은 그만큼 받지 못하는 우리 국민들 정말 이대로 괜찮을까요. 정말 행복하고 잘사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edmondy@seoul.co.kr
  • 지구와 딴판인 ‘갈색 왜성’서 외계생명체 발견 가능성 높다

    지구와 딴판인 ‘갈색 왜성’서 외계생명체 발견 가능성 높다

    “슬픈 광경이다. 저곳들에도 누군가 살고 있다면, 얼마나 많은 비극과 어리석음이 있을 것인가. 저곳들에 아무도 살고 있지 않다면, 이 얼마나 심각한 공간의 낭비인가.” 영국의 비평가이자 역사학자인 토머스 칼라일(1795~1881)은 ‘여러 세계들에 관하여’라는 글을 통해 밤하늘의 별을 보며 느낀 감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인문학자인 칼라일의 이런 생각은 현대 천문학과 우주생물학에서 중요한 연구 주제로 자리잡고 있다. ●英에딘버러대 연구진 논문 초안 온라인판 공개 우주생물학(astrobiology)은 지구를 포함한 우주에서 생명의 기원과 본성, 진화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최근 급속히 발전하고 있는 분야다. 지구상 생명의 기원에 관한 지식을 바탕으로 태양계의 주요 행성과 위성에 우주선을 보내 우주의 화학적, 물리적 구조를 탐구한다. 천문학 기술을 이용해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행성도 찾고 있다. 우주생물학에서 중요한 질문은 ▲생명이 거주할 수 있는 세계는 얼마나 많을까 ▲생물학은 지구에서만 타당할까 ▲우주 어딘가에 지적이며 소통 가능한 문명이 있는가, 이 3가지이다. 과학자들은 우주에 생명체가 생기기 위해서는 태양 같은 별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곳에 별이 있어야 한다고 가정하고 있다. 생명이 시작되려면 물이 필수적이고, 어느 정도 일정 온도가 유지돼야 하기 때문이다. 또 해가 두 개인 쌍성은 그 주변을 도는 행성 궤도가 불안정해서 일정한 환경을 유지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에 생명체 거주 환경 후보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많다. 결국 지구와 유사한 환경을 갖추고 있어야 생명체가 탄생하기 쉽다는 것이 지금까지 과학자들의 판단이었다. 그렇지만 영국 에든버러대 물리천문학부와 천문학연구소 연구진이 외계 생명체가 지구와 유사한 형태의 행성이 아닌 갈색 왜성(brown dwarf)에서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 결과 발표를 준비하고 있다. 천문학 분야 국제학술지 ‘천체물리학 저널’도 이번 연구의 중요성을 감안해 논문 초안을 지난달 29일(현지시간)에 온라인판으로 공개했다. 갈색 왜성은 지구나 화성 같은 행성보다는 크지만 항성(별)보다는 질량이 작고 가시광선 영역의 빛을 내지 못하는 천체다. 보통 질량은 태양의 약 0.07~0.09배 크기이며 질량이 작기 때문에 다른 항성들처럼 안정적으로 수소핵융합을 한다. 이 때문에 표면 온도가 낮아 진홍색 또는 갈색의 약한 빛을 내는 것으로 알려졌고 직접 관측된 적은 없으며 간접적인 방법으로만 존재를 파악하고 있는 별이다. 연구진은 2013년 7월 지구로부터 7광년 떨어져 있는 곳에서 발견된 갈색 왜성 ‘WISE 0855-0714’를 분석한 결과 물을 머금은 구름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를 바탕으로 공기 중에 떠다니면서 살 수 있는 미생물의 크기와 밀도, 수명 전략 등을 계산했다. 연구진에 따르면 갈색 왜성의 상층 대기는 지구의 온도와 압력이 비슷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열(熱)상승 기류에 떠다니는 미생물이 생기기 충분하다는 것이다. 연구를 주도한 행성과학자인 잭 예이츠 에든버러대 지구과학과 교수는 “이번 연구는 외계 생명체가 살 수 있는 거주 영역을 확장해서 봐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있다”며 “생명체가 꼭 지표면에 붙어서 살아야 한다는 원칙은 없다”고 강조했다. 외계 생명체들은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이나 동식물들처럼 지표면에 발을 딛고 사는 것이 아니라 물속을 떠다니는 해파리처럼 대기를 떠다닐 수 있다는 것이다. ●연구진 “외계생명체 거주영역 확장해서 봐야” 이번 연구결과를 공상과학(SF)영화나 소설에서 나오는 이야기로 치부할 수 없다. 생물학계에서는 지구에서도 상층 대기에 바람을 따라 움직이는 미생물을 확인한 바 있기 때문이다. 이를 바탕으로 유명한 미국의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1976년에 목성의 약한 대기권에서 햇빛을 먹이 삼아 진화하는 생태계를 예측하고 ‘싱커’(sinker)라는 부유 플랑크톤의 존재를 상상하기도 했다. 세이건은 외계 생명체는 물고기가 부레를 이용해 움직이는 것처럼 자신의 몸속 공기의 압력을 조절해 공기 속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움직일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영국 세인트앤드루스대의 우주생물학자 던컨 포건 교수는 “이번 연구 결과에서 보듯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뛰어넘는 생명체가 우주 어딘가에 있을 가능성은 항상 열어 둬야 한다”고 설명했다. 유용하 기자 edmondy@seoul.co.kr
  • 대서사 드라마 ‘사일런스’…마틴 스콜세지 감독, 교황과 만나다!

    대서사 드라마 ‘사일런스’…마틴 스콜세지 감독, 교황과 만나다!

    세계적인 거장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신작 ‘사일런스’의 국내 개봉 소식과 함께 스콜세지 감독이 교황과 만났다는 소식이 전해져 관심을 모은다. 현지시간으로 30일 오전, 교황청은 프란치스코 교황과 스콜세지 감독이 바티칸에서 만나 환담했다고 밝혔다. 스콜세지 감독은 ‘사일런스’ 개봉을 앞두고 로마에서 공부를 하거나 활동하는 예수회 수사 300여명을 대상으로 시사회를 열기 위해 바티칸을 찾았다. 영화 ‘사일런스’는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한창이던 17세기 일본에서 실종된 스승을 찾아 나선 2명의 예수회 수사의 이야기를 담은 대서사 드라마다. 앤드류 가필드, 리암 니슨, 아담 드라이버가 주연을 맡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예수회가 배출한 사상 첫 교황으로 젊은 시절 일본에 선교사로 파견되는 소망을 품었으나 건강 문제로 뜻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 프란치스코 교황이 17세기 일본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이 당하는 핍박과 박해를 그린 이 ‘사일런스’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면서 스콜세지 감독과 만나게 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프란치스코 교황을 알현한 스콜세지 감독은 18세기 일본 화가가 그린 성모마리아 그림을 포함해 그림 2점을 교황에게 선물했고 교황은 묵주로 답례했다. 작가 엔도 슈사쿠가 1966년 출간한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올해 전미비평가협회 각색상을 수상했고, 올해의 작품으로 선정됐다. 또 2017년 아카데미 주요 부문 유력 후보로 거론되며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영화 ‘사일런스’는 2017년 2월 국내 개봉 예정이다. 영상=Paramount Pictures 유튜브 채널 문성호 기자 sungho@seoul.co.kr
  • [김욱동 창문을 열며] 이삭 줍는 여인들

    [김욱동 창문을 열며] 이삭 줍는 여인들

    지난달 말부터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는 ‘프랑스 국립 오르세미술관 전(展)’이 열리고 있다. 이번에 전시하는 작품은 프랑스 정부에서 좀처럼 해외 반출을 허락하지 않는 국보급 작품이지만 한국과 프랑스 수교 130주년과 오르세미술관 개관 30주년 기념으로 특별히 한국 관객에게 소개하게 됐다. 오르세미술관을 떠나 한번 외부에 전시되면 앞으로 몇 년 동안 빛이 완전히 차단된 창고에 보관할 만큼 프랑스 정부가 무척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작품들이다. 장프랑수아 밀레의 ‘이삭 줍기’를 포함해 빈센트 반 고흐의 ‘정오의 휴식’ 등 오르세미술관을 대표하는 회화, 데생 작품 130여 점을 선보인다. 이 밖에도 클로드 모네, 폴 고갱, 폴 세잔, 에드가르 드가, 외젠 들라크루아 등 19세기 서양 미술을 빛낸 거장들의 작품이 예술사조별로 다섯 주제로 묶여 전시된다. 이번 전시에 대해 자비에 레 오르세미술관 수석 큐레이터는 “19세기 펼쳐졌던 아름다움의 세계가 예술에서 어떻게 표현됐는지 보여 주려고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낭만주의와 고전주의, 아카데미즘과 후기 인상파 작품까지를 소개하면서 19세기에서 20세기로 연결되는 미(美)의 세계에 대한 전반적 흐름을 소개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은 역시 프랑스 사실주의의 대표적인 작가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이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시골 이발소나 미장원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을 만큼 이 그림은 한국 사람들에게 무척 큰 사랑을 받았다. 추수가 끝난 가을 저녁 무렵 들판을 배경으로 이삭을 줍는 여인들의 모습이 우리네 농경생활과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화가 중 한 사람인 박수근은 밀레의 그림을 보며 열두 살 때 화가의 꿈을 키웠다고 전해진다. 얼핏 보면 이삭을 줍는 여인들의 모습이 목가적이고 평화스럽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좀더 찬찬히 뜯어보면 가난한 농민들의 고단한 삶의 모습이 짙게 배어 있다. 농장 주인이 곡식을 거두고 난 뒤 땅에 떨어진 이삭을 줍기 위해 등을 굽히고 있는 아낙네들의 모습이 여간 안쓰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밀레의 이 그림에서는 19세기 중엽 먹을 것이 없어 떨어진 이삭이라도 주워 모아야 했던 소작농들의 고단하고 피폐한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림 속에서는 저 멀리 이미 거둬들인 곡식더미가 언덕을 이루며 높이 쌓여 있고 추수단을 쌓느라 바쁜 사람들, 추수한 곡식 일부를 마차에 실어 나르는 모습은 등을 굽혀 이삭을 줍는 여인들의 모습과는 자못 큰 대조를 이룬다. 그런 모습과 비교해 보면 아낙네들의 모습은 한없이 초라해 보일지 모른다. 옷에서는 땀 냄새가 나고 입에서는 한숨 소리마저 들리는 듯하다. 모든 것이 궁핍하던 일제강점기 정지용이 ‘향수’에서 노래한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과 그리 다르지 않은 풍경이다. 그래서 보수와 진보 양쪽에서 몇몇 비평가들은 밀레의 이 그림에서 저마다 의미를 찾으려고 했다. 가령 힘들게 이삭을 줍는 여인을 두고 ‘빈곤을 주재하는 운명의 세 여인’이라고 비아냥거렸는가 하면, ‘마치 프랑스 혁명군을 닮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삭 줍는 여인들’에서 밀레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운명도 혁명도 아니다. 고단한 삶일망정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지 않고 꿋꿋이 살아가는 건강한 농부의 모습이다. 이 여인들을 일부러 지평선 아래에 배치한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대지는 정직하고 노동은 신성하며 농부들의 삶은 지평선처럼 영원무궁하다. 인간이 비루해지는 것은 땀 흘려 노동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땀을 흘리지 않고서 노동의 대가를 얻으려 할 때다. 그러고 보니 17세기 초엽 유럽을 떠나 신대륙에 정착한 청교도들이 왜 밀레의 ‘만종’과 함께 ‘이삭 줍는 여인들’을 좋아했는지 알 만하다. 노동과 근면 그리고 성실을 목숨처럼 소중하게 생각한 개신교 윤리에서 보면 그들의 태도가 쉽게 이해가 간다. 청교도들은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에 옮기며 살아가지 않았던가. 문학평론가·UNIST 초빙교수
  • 자본주의의 무기가 된 TV·광고·스포츠

    자본주의의 무기가 된 TV·광고·스포츠

    재미가 지배하는 사회/오팡시브 지음/양영란 옮김/갈라파고스/360쪽/1만 8000원 현대인의 일상 패턴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루 종일 주어진 일을 하고 저녁 시간에 집으로 돌아와 텔레비전 앞에 앉아 리모컨을 누른다. 드라마나 오락프로그램, 스포츠 중계를 보고 뉴스를 시청한다. 프로그램들 사이의 광고나 쇼핑채널을 보고 소비를 하고 휴가 때면 여행사의 상품을 구입해 관광을 한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향유하는 대중문화가 자본주의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 기획된 메커니즘이라면 쉽게 동의할 수 있을까? ‘재미가 지배하는 사회’는 우리 시대의 신화라고 할 수 있는 광고와 텔레비전, 스포츠, 관광이 어떻게 자본주의 지배논리를 대중에 주입하는지, 공동체의 일원인 대중이 어떻게 점차 무분별한 소비자로 파편화되는지를 파헤친다. 프랑스의 좌파단체 오팡시브 리베르테 소시알(OLS)이 펴내는 문화비평 계간지 ‘오팡시브’에 실린 평론과 대담을 묶은 건조한 문화비평서다. 책은 ‘텔레비전을 깨부수자’는 선동적인 구호로 시작한다. 사람들은 텔레비전이 즐거움을 주는 동시에 교육적인 역할도 한다고 생각하지만 텔레비전은 우리의 정신에 세뇌와 비슷한 효과를 미친다. 이처럼 텔레비전은 불과 몇십년 사이 의미와 사회적 규범, 집단 상상력 등을 생산해 내는 활동을 독점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가 원활하게 기능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광고는 보다 더 집요하게 우리의 신경정신망을 파고든다고 책은 지적한다. 사람들은 필요해서 어떤 물건을 사는 게 아니라 광고를 보고 물건을 사기 위해 필요 없는 필요를 만들어낸다. 광고는 선택의 자유를 들먹이며 소비를 부추기고 개성을 찾고 싶으면 새로운 제품을 사라고 유혹한다. 광고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심리학, 인문과학, 뇌과학이 광고제작자들과 협력하고 있다는 점을 책은 강조한다. 텔레비전과 광고가 자본주의를 유지한다면 스포츠는 자본주의적 질서를 체화시키는 수단이다. 사람들은 스포츠를 통해 경쟁, 승자독식, 서열, 복종, 이성애 중심의 가부장적 질서를 자연스럽게 익힌다. 규격화된 노동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기 위한 관광여행 역시 자본주의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자본주의의 확산이 낳은 대중문화의 발전은 기존 사회적 관계망을 해체하며 개인은 공동체의 일원이 아닌 고립되고 파편화된 ‘소비 기계’로 전락한다고 책은 비판한다. 책은 ‘대중의 이익에 역행하는 대중문화’라는 역설적인 메시지를 전하면서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의식을 되살릴 것을 제안한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최영미와 함께 읽는 세계의 명시] 그대가 나를 사랑해야 한다면

    [최영미와 함께 읽는 세계의 명시] 그대가 나를 사랑해야 한다면

    그대가 나를 사랑해야 한다면(If thou must love me) -엘리자베스 브라우닝 그대가 나를 사랑해야 한다면, 다른 아무것도 아닌 오직 사랑을 위해서만 사랑해 주세요. “난 그녀의 미소 때문에, 외모 때문에, 상냥스러운 말투 때문에, 내 생각과 잘 어울리는 재치 있는 생각 때문에, 어느 날 즐겁고 편안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에 그녀를 사랑해”라고 말하지 마세요. 사랑하는 이여, 이러한 것들은 스스로 변하거나, 당신 마음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으니, 그렇게 엮인 사랑은 또 그렇게 풀릴지도 모릅니다. 내 뺨에 눈물을 닦아 주고픈 그대의 연민 때문에 나를 사랑하지도 마세요. 그대의 위로를 오래 받은 사람이 울기를 잊어버리면, 그대의 사랑을 잃을지도 모르니까요! 오로지 사랑만을 위해 나를 사랑해 주세요, 사랑의 영원함 속에서, 언제까지나 그대가 나를 사랑하도록. If thou must love me, let it be for nought Except for love’s sake only. Do not say “I love her for her smile-her look-her way Of speaking gently,-for a trick of thought That falls in well with mine, and certes brought A sense of pleasant ease on such a day-” For these things in themselves, Beloved, may Be changed, or change for thee,-and love, so wrought, May be unwrought so. Neither love me for Thine own dear pity’s wiping my cheek dry: A creature might forget to weep, who bore Thy comfort long, and lose thy love thereby! But love me for love’s sake, that evermore Thou mayst love on, through love’s eternity. * 철없던 시절에 읽은 엘리자베스 브라우닝(1806~1861)의 시를 나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다른 아무것도 아닌, 사랑 그 자체만을 위해 사랑해 달라니. 뭔 뜻일까. 연애소설만 들입다 읽었지 연애의 문턱에도 가 보지 못했던 스무 살의 내게 브라우닝의 저 유명한 연애시는 물음표로 남아 있었다. 작년이던가. 관악구민들을 위해 시 강의를 준비하며 ‘If thou must love me’가 새롭게 다가왔다. ‘그대가 나를 사랑해야 한다면’은 영국의 시인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이 그녀의 남편이 될 로버트 브라우닝(1812~1889)에 대한 애정과 고민을 녹여 쓴 14행의 소네트다. 그대가 나를 ‘사랑한다면’이 아니라 ‘사랑해야 한다면’이다. 그만큼 절박하고, 아무 사랑이나 받지 않겠다는 결의가 내비친다. 대화체에 인용문이 삽입돼, 사랑이라는 단어가 열 번이나 나오는데도 지루하지 않다. 내가 감탄한 구절: ‘그대의 위로에 익숙해진 내가 울기를 잊어버리면, 그대의 사랑을 잃을지도 모르니까요!’ 얼마나 재치 넘치는 표현인가. 연민과 사랑의 차이를 귀엽게 증명한 그녀. 여섯 살이나 어린 로버트가 그녀에게 왜 반했는지 짐작이 간다. 장애인이었던 그녀는 당시 의학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통증을 달고 살았다. 지금은 뜨겁지만 언젠가 로버트가 병약한 자신을 떠나지 않을까 두려웠으리. 환자였던 그녀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진실을 보았다. 미소 때문에, 외모 때문에, 상냥스러운 말투 때문에, 재치있는 말 때문에 나를 사랑하지 마세요. 사랑만을 위해 사랑해 달라는 말투에서 시대를 앞서간 페미니스트의 자의식이 엿보인다.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은 자메이카에서 사탕수수 농장을 경영하는 아버지 밑에서, 12명의 자녀 중 맏딸로 영국의 더럼에서 태어났다. 소녀 시절은 시골집에서 행복하게 보냈다. 어머니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여섯 살부터 시를 지었고, 열네 살에 첫 시를 발표했다. 열다섯 살에 척추를 다쳐 극심한 두통과 척추통을 앓아 하루 종일 집 안에 틀어박혀 책을 벗 삼아 지냈다. 1838년에 처녀 시집을 펴내고 시골의 저택에 칩거하다 남동생 에드워드가 물에 빠져 죽은 뒤로는 가까운 몇몇 외에는 사람 만나는 것을 병적으로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이름은 문단에 두루 알려져 있었고, 1844년에 나온 ‘E 배럿의 시집’에 영국의 독자들은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녀의 시는 대중적인 성공을 거뒀지만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지는 못했다. 1845년 1월에 그녀는 6살 연하의 무명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으로부터 뜨거운 편지를 받았다. “친애하는 배럿양. 귀하의 시를 진심으로 아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건대 귀하의 시집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그리고 배럿양 당신을 사랑합니다.” 영문학 사상 가장 아름다운 로맨스라는 브라우닝 부부의 러브스토리는 그렇게 시작됐다. 처음엔 편지만 주고받다 초여름에 두 사람은 만났다. 이들의 만남은 엘리자베스의 아버지에게는 비밀에 부쳐졌다. 이즈음 그녀가 쓴 ‘그대가 나를 사랑해야 한다면’에는 주저하는 여자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1846년, 마흔 살의 신부 엘리자베스는 런던의 아버지 집에서 브라우닝과 비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한 뒤에도 그녀는 1주일을 더 런던의 친정집에서 살았다. 두 사람의 관계가 알려지자 아버지는 물론 남동생들도 그녀를 비난했다. 브라우닝 부부는 이탈리아로 이주했고, 엘리자베스의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딸을 용서하지 않았다. 부부는 피렌체에 정착했고 1849년 아들을 낳았다. 말년에 그녀는 사회·정치 문제에 관심을 쏟아 미국의 노예제도를 비판하는 시를 썼다. 엘리자베스는 1861년 여름, 심한 독감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부인이 죽은 뒤 로버트는 재혼하지 않고 77세까지 장수하며 영문학사에 길이 남을 걸작들을 생산했다. 사랑이 영원한 건지, 예술이 영원한 건지. 변치 않을 무엇이 그리운 계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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