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정부규제, 量보다 質이 문제/김종석 홍익대 경제학 교수
정부규제는 세금과 같다.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지만,세금 없는 정부를 상상할 수 없듯이 규제 없는 정부도 상상할 수 없다.실제로 정부규제를 ‘감추어진 세금’이라고도 한다.무슨 규제든 국민입장에서는 규제를 지키려면 돈과 시간,노력이 들 수밖에 없어 사실상 세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정부규제와 세금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세금은 국민의 대표가 동의한 법률에 의해서만 징수되고,그 지출 내용이 국민의 감시를 받지만,정부규제 때문에 국민과 기업이 져야 하는 경제적 부담은 그 금액이 얼마인지,그 규제가 들인 비용에 비추어 정당한 효과가 있는지에 대해서 아무런 통제나 점검없이 만들어지고 집행된다.
더구나 주무 부서가 해당 분야를 가장 잘 알 것이라는 전제 아래 규제 집행부서에 사실상 입안부터 집행까지 백지 위임되어 있다.그러다 보니 많은 정부규제가 집행자 편의위주로 절차와 기준이 정해지고,국민이 져야 하는 부담이나 부작용에 대한 면밀한 검토없이 마구잡이로 도입되는 것이다.이것이 바로 정부규제가 고비용 저효율의 구조적 문제를 가지게 된 배경이다.
최근 정부가 경제 활성화를 위해 정부규제 완화를 추진하겠다고 한다.정부규제가 사실상의 세금과 같다면,완화해서 국민과 기업의 규제비용을 줄여 주어 세금 감면과 같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기업 민원 해소 차원의 규제 완화와 고비용 저효율의 정부규제를 개선하는 차원의 규제개혁은 구분되어야 한다.
과거에 규제완화 또는 규제개혁의 이름으로 추진된 많은 조치들이 사실은 기업들의 규제비용을 낮추어 주는 일종의 감세처분인 경우가 많았다.불법행위에 대한 과징금을 낮추어 준다든지,정기검사를 면제해준다든지,구비서류를 줄여준다든지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그러나 지금 정부가 기업환경을 개선하고 경쟁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해야 하는 규제개혁은 이런 민원해결 차원의 시혜조치들이 아니다.
규제가 많다고 하니까 그 대책으로 규제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다.어휘 선택의 잘못으로부터 초래되는 착각이다.아직도 우리는 정부규제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다른 나라 특히 선진국과 비교해보면 특별히 많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 기업인들이,그리고 전 세계를 누비면서 사업을 하는 다국적 기업이 왜 정부규제가 심해서 기업하기 어렵다고 하는가.그것은 규제가 많아서가 아니라 정부규제가 저질이기 때문이다.기업인은 물론 대부분의 국민을 가장 피곤하게 하는 것이 바로 정부규제와 제도의 불투명성이다.많은 정부규제 제도의 절차가 복잡하고,기준이 모호하고,결과를 예측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모든 것이 공무원의 재량적 판단에 달려 있다.다시 말해 대한민국 관청에서는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게 되어 있다.그러니까 국민들은 관청에만 가면 기가 죽고 공무원의 눈치를 보게 되는 것이다.그 과정에서 부정과 비리의 가능성이 높아짐은 물론이다.
이에 더해 소위 괘씸죄라고 해서 정부의 규제권이 정당하지 못하거나 규제도입 취지가 아닌 목표를 위해 오남용되는 것도 고질적 문제다.최근 여론의 지탄을 받고 있는 기업들의 불법 정치자금 제공도 그 배경에는 규제제도의 이런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심지어 세계 최고 수준의 다국적 기업도 한국에 와서는 비자금을 만들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오히려 되는 일은 확실히 되고,안 되는 일은 절대로 안 되도록 된다면 역설적으로 기업 활동이 더 자유롭고 투명해질 수 있다.권력에 밉게 보여도,공무원에게 잘 보이지 않아도 떳떳하게 사업을 할 수 있다면 어느 기업인이 정치인과 관료들에게 뇌물을 주겠는가.기업부담을 줄이기 위해 규제를 없애고 완화하는 것도 좋지만,진정으로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려면 정부규제의 품질부터 개선되어야 한다.정부규제의 문제는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다.
김종석 홍익대 경제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