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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삼웅 칼럼] 2·8독립선언과 노애국지사들

    “3·1운동은 우리 근대사의 서리고 서린 산맥 가운데 위연히 솟은 한 고봉(高峰),이 봉우리 위에 서서 보면,외세의 침노 속에 끈질기게 저항하면서 생성 발전해온 우리 민족의 발자취가 멀리 가까이 제자리를 드러내면서 부각된다.3·1운동은 우리 근대민족운동사의 큰 호수,이 이전의 모든 근대 민족운동의 물줄기가 이리로 흘러들고,이후의 모든 근대 민족운동이 여기서 흘러나가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천관우,‘3·1운동 50주년 기념논문집’ 편집후기) 3·1운동은 근대 민족운동사의 거대한 호수다.그렇다면 3·1운동의 발원지는 어디인가? 바로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YMCA)에서 일본에 유학중이던 학생들이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서와 결의문을 선포한 것에서 비롯한다.재일 유학생들은 11명의 실행위원을 선출하여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2월 8일 오전 독립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도쿄 주재 각국대사관,일본정부,중의원,조선총독부에 보내고 오후 2시 500여 회원의 환호속에서 2·8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유학생 거의 전원이 모인 이날 독립선언회의에서 학생들은 독립실행방법을토의하려다가 일경에 강제해산당하고 실행위원들은 체포되었다.이에 앞서 송계백과 최근우가 선언서 일부를 국내로 반입하여 현상윤·송진우·최남선 등에게 전달,3·1운동의 직접적인 계기를 만들었다.재일 한국 독립운동의 성지 YMCA 건물은 그동안 부채로 존폐의 위기에 있던 것을 지난 연말 정부가 21억6,000만원을 지원하여 은행빚과 건물지하공사비를 갚게 되었다. 스가모감옥터의 노애국지사들 2월 8일 도쿄 YMCA 회의실에서는 2·8독립선언 81주년 기념행사가 조촐하게 거행되었다.재일본 한국 YMCA가 주최한 이날 행사에는 국내에서 윤경빈(尹慶彬) 광복회장과 이강훈(李康勳) 전 회장 등 생존 애국지사와 독립운동가후손 40여명이 참석하여 기념식의 의미를 새롭게 했다. 동경한국학교 초등부 어머니합창단이 ‘독도는 우리 땅’을 불러 참석자들을 숙연케 만들었다.행사후 가진 간담회에서 유학생 대표들은 활자로만 읽었던 노애국지사들과의 대면을 감격스러워하면서 새로운 한·일관계와 학생운동의 진로 등을 물었다. 다른 외국에 비해 ‘재일유학생’의 존재는 유별하다.그것은 한말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파견된 유학생중에 매국노로 변신하거나 2·8독립선언을 주도한 학생중에 악질 친일파가 된 경우, 일제시대 많은 유학생들이 총독부 관리나 법관이 되어 일제의 주구노릇을 하고 해방후에는 독재정권의 앞잡이로 전락한 때문이다.독립운동에 참가한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일본유학생들은 이 부분에서 갈등을 느낀다고 했다.그래서 말했다.같은 물을 소가 먹으면 젖을 만들지만 뱀이 먹으면 독을 만든다,어찌 일본유학생들뿐이겠는가.국내외의 명문대학 출신들이 친일파가 되고 독재의 주구노릇을한 다른 쪽에서는 의로운 길을 선택한 사람도 적지 않다,역사가 어느 쪽을승자로 기록할지는 자명하지 않은가라고. 방일 첫날 노애국지사들은 일제식민지 시대 많은 한인애국자를 수감하고 처형한 스가모(巢鴨)형무소를 방문했다.지금은 공원으로 바뀐 이곳은 이봉창·김지섭 의사 등이 옥고를 치르다 사형이 집행된 곳이다.이강훈 옹도 13년 옥살이를 했다.노애국지사들은 만감이 서린 표정으로 구석구석을 살피고, 우리 애국선열들의 명복을 비는 묵념에는 생존 지사들의 흐느낌이 배어 2월의 차디찬 스가모 공원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이곳에서 숨진 선열들을 기리는돌비석 하나라도 세웠으면. 도쿄헌책방의 노애국지사들 유학생들과의 간담회 자리에서 한 학생이 물었다.생존애국지사들이 대부분7,80 고령인데 사후 광복회의 존립문제와,일제와 맞서 싸운 세대가 아직 생존해 있는데도 독립운동사가 먼 망각의 역사로 퇴락하고 있는 터에 이를 잇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것이 어찌 일본유학생들만의 의문일까만 나는 예상외의 장소에서 ‘해답’을 얻었다.행사를 마치고 도쿄 번화가에 즐비한 헌책방에서 삼삼오오로 만난 우리 노애국지사들의 형형한 눈빛에서 그리고 그들이 찾는 일제시대의 자료와 일본을 알아야 한다면서 푼푼이 모은 용돈으로 일본현대사의 신간을 사는 모습에서,“노병은 사라질지언정 죽지 않는다”는 것을.-일본 도쿄에서[김삼웅 주필]
  • [외언내언] 고구려 영토

    고구려(高句麗)는 고대 삼국시대의 한 나라로 기원전 37년 갑신(甲申),북부여(北扶餘)의 주몽(朱蒙)동명왕(東明王)이 세웠으며 28대 보장왕(寶藏王)27년(서기 668년)에 이르러 나당(羅唐)연합군에게 멸망한 것으로 교과서에 수록돼 있다.또 700여년 동안 만주일대와 한반도의 넓은 영토를 통치하였으며,특히 제19대 광개토왕(廣開土王)때는 남북으로 영토를 크게 넓혀 만주 전역과 한강 이북을 장악하고,신라를 도와 왜군을 궤주(潰走)시키는 등 전성시대를 이뤘다. 만주 집안현(輯安縣)통구(通溝)에서 발견된 높이 6.27m의 광개토왕비석은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비석으로 비면(碑面)에는‘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고 쓰여 있으며,비문의 내용은 고구려·신라·가야가 연합해서 왜국(倭國)과 싸운 일과,왕의 일생 사업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최근 북한의 권위있는 역사학자 손영종(孫永鐘)이 쓴 고구려사(전3권,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가 소개됨에 따라 남북한의 고구려 역사에 대한 차이점이 새삼 관심을 끌고 있다. 한 사례로고구려의 건국 시기를 남한은 서력(A.D.)전후로 보고 있고 북한은 기원전 227년으로 잡고 있다.또 고구려의 최대 영토와 관련,서쪽과 북쪽경계에서 남북한 시각의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남한의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행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최대 판도를 이뤘던 5세기후반의 고구려 영토를 서쪽으로 요하 부근까지,북쪽으로는 북부여가 있었던북만주 일대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그러나 북한은 고구려가 서쪽으로는 요하보다 훨씬 서쪽인 대릉하 하류에서 의무려산에 이르는 곳까지,북쪽으로는 중국의 내몽고자치구까지 각각 이른 것으로 보고 있다. 손영종이 쓴 논문 ‘고구려의 영토확장 과정에 대하여’에 따르면 고구려는 초기에 이미 사방 2,000리라는 넓은 영토를 가진 나라로 되었고 6∼7세기에 와서는 동서 6,000리,남북 수천리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가진 크고 강한나라가 되었다고 기술했다.또 고구려의 영역이 내몽고자치구에 이르렀다는근거로 ‘고려성’등 고구려와 직접 관련있는 지명이 지금까지 여러곳에 남아 있는 사실을 예로 들었다.한때 고구려가 그 부근까지 진출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아무튼 북한 역사학자의 현지답사를 통해 밝혀진 고구려 영토확장은 고구려 역사조명에 크게 기여한 사료적(史料的)가치로 평가된다.우리 선조들이 만주와 내몽고까지 질주하며 산하를 누볐던 그 기상이 새삼 가슴속 깊이 진한 감동으로 느껴진다.그래서 우리의 통일이 더욱 절실한지도 모르겠다. 장청수 논설위원 csj@
  • 고려대장경 異體字는 7,514종 2만9,514자

    고려대장경 목판에 쓰인 한자의 이체자(異體字)는 모두 7,514종 2만9,514자인 것으로 10일 확인됐다. 이같은 사실은 고려대장경연구소(소장 종림 스님)와 중국 고대 청동문(靑銅文) 연구자인 연세대 중문학과 이규갑 교수가 지난 93년부터 지금까지 7년동안 고려대장경 이체자 연구를 실시한 결과 밝혀졌다.연구에 따르면 이체자를 하나 이상 보유한 표준한자는 약 8,000자나 된다. 이체자는 표준한자인 정자(正字)와 모양(體)이 다르지만 (異)뜻은 같은 글자로 정자에 비해 획수가 적어 비석 같은 금석문이나 목판인쇄에 주로 쓰인다. 이체자가 가장 많은 한자는‘뚫을 착’(鑿)자로 무려 57종의 이체자를 갖고 있었으며 부수별로는 손수(手)를 비롯한 4획 부수가 7,236자에 이르렀다. 종림 스님은 “이번 연구는 광개토왕비와 진흥왕순수비 등 국내 고대 금석문에 들어 있는 글자 가운데 뜻을 모르는 글자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될것”이라고 말했다. 김성호기자 kimus@
  • [의열 독립투쟁](8)김익상 의사

    1921년 9월12일 오전 10시10분경.일제의 조선 통치의 거점인 서울 남산 왜성대(倭城臺·현 중구 예장동 일대)의 조선총독부 청사(구 한국통감부 청사)2층에서 굉음소리와 함께 폭탄이 터졌다. 일제 식민통치의 심장부에 폭탄이터진 이 사건으로 일제가 초긴장함은 물론 경성(서울) 시내가 떠들썩했다.일제는 범인을 잡기 위해 헌병과 경찰을 총동원하였으나 범인은 좀처럼 잡히지않았다. 일제로서도 이 사건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총독부 정문에는 항상 무장한 헌병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고 총독부 관리나 고용원이 아니면 임의로 출입을 못하게 돼 있었기 때문이었다.폭탄을 휴대한 수상한 인물이,그것도 벌건 대낮에 총독부 청사에 들어간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다.사건의 진상은 해가 바뀌고 그 해 겨울이 다 지나도록 오리무중이었다. 사건이 있은 후 6개월이 지난 1922년 3월28일 오후 3시30분 육중한 몸체의배 한 척이 상하이 부두에 입항하였다.상하이는 국제도시인 만큼 평소에도중국인·조선인·서양인·인도인·일본인 등 여러나라 사람들이 들끓었다.특히 이 날은 필리핀을 방문하고 상하이에 들르기로 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田中義一·후에 수상 역임)를 맞기 위해 중국의 고관,상하이 일본 총영사관직원,각국 신문기자,일본거류민이 부둣가로 몰려나와 더욱 혼잡한 상황이었다. 배에서 내린 다나카는 출영나온 인사들의 환영을 받는 바로 그때 군중 속에서 중국인 옷을 입은 한 청년이 다나카를 향해 권총을 발사하였다.세 발의총성이 울리자 총을 든 청년은 그곳에서 ‘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그러나불행하게도 총탄은 다나카에게 맞지 않았다.총탄은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다나카 앞을 급히 지나던 젊은 서양 여자의 가슴에 박혔다. 청년은 다나카가 맞은 줄 알고 독립만세를 외쳤던 것이다.놀란 다나카일행은 황급히 달아났다.그런데 이번엔 양복을 입은 또 다른 한 청년이 달아나는 다나카를 권총을 쏘고 이어서 폭탄을 던졌다.그러나 이 총탄도 역시 다나카에 명중되지 않았고 폭탄도 불발되고 말았다.다나카는 두번의 피습을 용케피했고 두 청년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중국 옷을 입은청년은 오성륜(吳成崙·본명 李正龍)이었고,양복을 입은 청년은 김익상(金益相)이었다.6개월전에 일어난 ‘조선총독부 투탄사건’은 김익상 의사가 체포된 후 심문과정에서 김 의사의 의거임이 비로소 밝혀졌다. 조선총독부 청사에 폭탄을 던지고 상하이에서 다나카에게 폭탄을 던졌던 김의사는 당시 28세로 아내와 딸 하나를 조국에 두고 온 몸이었다. 서울 태생인 김의사는 15세때부터 서울 용산역 철도노동자,용산전기회사,황해도 수안의 광업회사 등에서 노동자로 일하였다.일본인 밑에서 일한 까닭에일본어에 능통했고 일본인들의 습관까지도 몸에 익히고 있어 거사에 나섰을때 능숙하게 일본인 행세를 해 곳곳의 일경들의 경계망을 돌파할 수 있었다. 김익상 의사는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도 큰 꿈을 지니고 있었다.장차 비행사가 돼 폭탄을 싣고 일본을 향해 투하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유년시절아버지가 일본인에게 멸시·학대당하는 것을 보고 분개한 김 의사도 일본인밑에서 냉대와 학대를 뼈저리게 경험하였다. 김 의사는 이 고통이 자신만의 고통이 아니라 민족 전체의 고통이란 사실을자각하였다. 그리고 독립운동에 투신하겠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1920년 5월 조국을 떠나,1921년 5월에는 베이징으로 가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을만난 뒤 의열단에 가담하였다. ‘조선총독부 투탄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조국독립을 위해 일제 통치거점에 폭탄을 안기자는 의열단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김 의사는 거사를 자청했다.1921년 9월10일 김원봉으로부터 폭탄 3개와 권총 1정,탄환 100발 및 현금 200원을 받아 베이징을 출발했다.김원봉 이하 동지들이 베이징역두에 나와 장도에 오르는 김 의사를 전송하였다.동지 가운데 한 사람이 “壯士一去兮 不復還일세(壯士가 한번 가면,돌아오지 못하는구나)”하고 격려의 말을 건네자 김 의사는 “쓸데없는 소리 말게.이제 1주일이면 내 넉넉히성공하고 돌아올 것이니 술상이나 잘 차려놓고 기다리게”하고 껄껄 웃으면서 화답하였다. 그처럼 담대했던 김 의사는 일본인으로 위장하여 경계망을 돌파한 뒤 서울로 들어와,전기수리공으로 변장하고 총독부 구내로들어가는데 성공하였다. 총독부 청사에 폭탄을 던진 후 경비병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홀연히 김의사는 청사를 빠져 나왔다. 다나카 저격직후 체포된 김의사는 일본 나가사키로 이송됐고 1923년 11월 6일 항소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사형이 집행되기 전 일본 황태자(후에 昭和천황이 됨)의 결혼식으로 일제로부터 은사(恩赦)를 받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또 1932년 2월에는 만주국 독립기념 명목으로 다시 20년으로 감형됐다.1942년 김 의사는 30대의 몸으로 감옥에 들어간 이래 20년만에 50대 중노인이 돼 규슈 구마모토 감옥을 나왔다.서울로 돌아온 김의사는 해방직전한 일본인 형사에 의해 연행되었는데 그후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현재 조선총독부의 청사가 있었던 자리 인근(현 예장동 숭의여자대학 입구)에는 의열단원 김익상이 이곳에서 폭탄을 던졌다는 내용이 적힌 비석 하나만외롭게 서 있다. [염인호 서울시립대 교수] -金의사 투탄 조선총독부는… 김익상 의사가 폭탄을 던진 조선총독부 청사는 지난 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철거된광화문 청사가 아니라 남산에 있던 초기 청사였다. 1905년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한 뒤 대한제국 정부의 외교권을 박탈한일제는 한국통치기관으로 한국통감부를 만들었다. 청사는 남산 중턱에 있던구 일본공사관 건물을 사용했다.1910년 8월 한일병합으로 대한제국의 국권을찬탈한 일제는 남산 통감부 청사에 ‘조선총독부’ 간판을 내걸고 이 건물을조선총독부 청사로 사용하였다.1926년 경복궁 앞마당에 조선총독부 신청사가 건립되기까지 16년동안 이곳은 일제 조선통치의 본거지였다. 김익상 의사는 바로 이곳에 전기수리공으로 변장,잠입해 폭탄을 던진 것이다. 경복궁의 조선총독부 신청사는 1916년 6월 25일 기공식을 갖고 공사가 시작되어 10년만인 1926년 10월 1일 ‘시정(始政)기념일’을 맞아 준공하였다.일제는 당시로서는 거액인 670여만엔을 들여 10여년에 걸쳐 조선총독부 신청사를 건립하면서 이곳을 조선의 영구통치의 본거지로 삼고자 했다.그러나 신청사 준공 19년만에 패퇴하여 이 땅에서 물러갔다. 정운현기자 jwh59@
  • 한원영씨 8·15광복이후 신문소설연구서 펴내

    신문소설의 재미는 혀끝으로 핥아서 얻어지는 가볍고 얕은 맛에 있고,문예지소설은 어금니로 씹어서 얻어지는 무겁고 깊은 맛에 있다고들 한다.부정하는 사람도 많지만 다양한 층을 독자로 하는 특성상 얼마간의 통속성을 인정하는 데서 나온 말들일 것이다.최근 나온 한원영의 ‘한국현대 신문연재소설연구’(국학자료원)를 읽고 있노라면 이런 얘기들을 어느 정도는 공감할 수있게 된다.이 책은 8·15 광복 이후 신문소설을 다룬 본격 연구서지만,여기서 언급한 신문소설사(史)의 에피소드들도 그냥 지나쳐버리기에는 아깝다. 현존하는 중앙일간지로 해방 이후 처음 소설을 연재한 것은 대한매일의 전신인 서울신문이다.46년 5월15·16일 이틀 동안 안회남의 ‘봄(紅桃花이야기)’을 나눠 실었다. 신문소설사에서 가장 큰 스캔들을 남긴 것도 54년 정비석의 ‘자유부인’을 실은 서울신문이다.전후의 방종과 퇴폐상을 묘사해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대학교수를 모독했다”는 황산덕 서울대교수와의 공개 설전으로 장안의 화제를 모았다.‘자유부인’논쟁은 또산업경제신문이 4월1일자에 사회면톱으로 “황교수와 정씨가 다방에서 격투를 벌여 정씨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만우절 특집’기사를 싣는 해프닝으로 이어졌다. 62∼63년 조선일보에 연재된 박영준의 ‘결혼학교’는 주인공을 영화계의스타 네사람으로 모델을 삼았다.문정숙과 신성일(현재 이름은 姜申星一)·엄앵란·김향이가 그들이었다. 홍성유의 데뷔작으로 58년 한국일보에 연재된 ‘비극은 없다’도 삽화를 맡은 우경희 화백이 여주인공의 얼굴을 인기배우인 김지미를 모델로 삼아 화제가 됐다. 손창섭은 68년 동아일보에 ‘인간공장’을 연재키로 하고 초고까지 만들었으나,허겁지겁 ‘길’을 대신 내보내야 했다.‘인간공장’에서 중학교 입시제도가 가져다주는 폐단을 그리려고 했으나 연재에 들어가기 직전 중학입시제도가 폐지됐기 때문이다. 박용구가 63∼65년 경향신문에 연재한 ‘계룡산’은 연약한 여인들을 색욕의 제물로 삼는 사이비 교주 이야기가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검찰에입건되는 등 처음으로 외설시비를 불러일으켰다.중앙일보는 95년 정신과의사 김정일의 메디컬 사이코 스릴러 ‘미로찾기’를 싣는 실험을 하기도 했다. 가장 오래 연재된 신문소설은 69∼77년 조선일보에 실린 월탄 박종화의 ‘세종대왕’으로 2,456회다.이어 황석영의 ‘장길산’이 74∼84년에 걸쳐 한국일보에 2,092회를 실어 뒤를 잇는다.월탄은 54∼57년 ‘임진왜란’을 서울신문과 조선일보에 동시에 연재하는 기록도 남겼다. 물론 신문소설의 개념을 이렇듯 사소한 에피소드만으로 파악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한국문단에서 신문은 아직까지도 소설,특히 장편소설의 가장 중요한 발표창구다.신문을 통해 발표되어 문학사에 길이남을 작품들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게다가 종합일간지의 경우 최근에는 통속화 경향도전반적으로 개선되고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서동철기자 dcsuh@
  • [굿모닝 새천년 기초부터 다지자](9)자원봉사정신

    ‘다양한 인종,철저한 경쟁의 자본주의사회,억만장자가 있는가 하면 지하철역 주변에 거지가 득실거리는 미국사회가 용케도 버텨 나가는 힘은 무엇일까’ 워싱턴특파원을 지낸 한 기자는 “3년여의 미국 생활을 끝낼 무렵 자원봉사정신과 기부문화가 미국사회를 지탱하는 두 축이라는 결론을 얻게 됐다”고말했다. “선거운동원,정당원도 기본적으로 자원봉사자였고,양로원 재활원도서관 등 사회복지시설 소요인력의 상당수가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충족되고 있었으며 심지어 지역소방서도 몇몇 기간요원을 빼고는 의용소방대원들로구성돼 있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선진사회일수록 시민들의 자원봉사정신을 바탕으로 한 자발적인 사회활동 참여가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힘의 원천이 되고 있다.때문에 새 천년은 자발적인 봉사와 참여를 근간으로 하는 ‘시민운동의 시대’라는 말이나올 정도다. 손혁재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은 “상대적으로 소수인 이익집단이 그들의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분야에서 사회를 지배하도록 허용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물결을 막지 못한다면 21세기에는 가장 극단적인 빈부격차가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시민의 자발적인 참여를 바탕으로한 시민사회 운동만이 신자유주의의 폭주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강조했다. 국민 개개인의 자발적인 참여,즉 자원봉사 활동을 체계화,조직화한 시민사회 운동이 현대 사회를 이끌어 가는 주요한 동력원이 되고 있다. 이같은 시민 운동은 현대사회를 이끌어 가는 두 축 가운데 하나인 정부나 국회 등 권력기관이 국민의 행복과 이익에 어긋나는 방향으로 나가고, 또다른 축인 기업이 이윤을 목적으로 국민에게 해로운 짓을 하는 것을 감시·견제하고 바로잡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시민사회 운동은 현대사회를 이끌어 가는 제3의 축으로 당당히 자리매김하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민사회운동은 이 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의 소외 계층을 상대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계층간,지역간,세대간 갈등과 불신을 치유하고 사회통합을 이끌기도 한다.어떤 사회학자들은 소외된 자들을향한 시민사회운동은 ‘가진 자’와 ‘없는 자’ 사이의 위화감과 반목이 깊어지면서 공동체가 붕괴하고,이 결과 덜 가진 사람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견디다 못해 ‘가진 자’들에 대해 저항할 때 야기될 수 있는 극단적인 사회불안을 예방하는 가장 효과적인 안전망이라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시민사회 운동이 기본적으로 자원봉사정신과 이를 토대로 하는 사회참여 활동이기 때문에 다가오는 새 천년의 한국사회에서는 그만큼 더 자원봉사 정신을 함양해야 된다는 것이다.따지고 보면 자원봉사 정신이 시민사회 운동을낳고 이 운동이 사회 통합을 촉진시킨다고 할 수 있다.결국 ‘가진 자’의자원봉사정신은 ‘못 가진 자’들을 위한 ‘시혜’가 아니라 바로 자신들의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가진 자’나 사회지도층일수록 이같은 자원봉사 정신을 더 발휘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있다. 현대사회에서 중요성이 날로 증대되고 있는 시민사회운동이 성공하려면 이를 지원할 다양한 자원봉사자들의 활동이 필수적이다.자원봉사자들의 질과양이 새 천년의 우리사회가 직면할 다양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결정적 변수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아울러 민주시민사회가 모든 사회구성원의 자발적인 참여를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원봉사활동은 사회가 개인들에게 요구하는 의무이자 권리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다시말해 자원봉사활동이 ‘여유있는 사람이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을 돕는’ 자선이나 동정의 차원을 넘어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책무수행’인 것이다. 김인철기자 ickim@ * 美·日·獨의 자원봉사활동[워싱턴 최철호특파원·황성기기자] 한국에서 직장 일로 미국에 온 류모씨(40)는 금요일이면 동네 운동장에 나가 아이들과 축구를 한다.축구선수였거나 자격증을 가진 것은 아니다.자녀가 다니는 학교의 사친회(PTA)에 등록하면서 30개가 넘는 자원봉사 가운데 ‘축구지도’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이들이 축구를 하는데 필요한 도구준비나 정리,뒷마무리 등 수반되는 모든 잡일도 맡아한다.이처럼 미국에서는 거의 모든 이들이 한두가지씩의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산다. 시민활동은 거의가 자원봉사활동 방식으로 이뤄져 시민문화는 곧 자원봉사활동 문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류씨처럼 자녀를 둔 학부모의 경우 자녀에 무관심하지 않은 이상 PTA에 가입하게 되며,이 경우 자원봉사활동은 의무적이다. 자녀가 속한 교실내 정리정돈부터 학교도서관 정리,방과후 각종 서클활동지도,야외학습시 동반,학교행사시 보조활동 등 갖가지 방법으로 학교에서 봉사활동을 한다. 학부모가 아니더라도 일반 시민들이 갖가지 자원봉사활동에 나서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미국의 시민정신이 높다고 평가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바로 이 자원봉사활동이 활발하기 때문일 것이다. 적십자 활동에서부터 불우이웃돕기,지지하는 정치인을 위한 봉사,지역행사도우미,동네 교통안전을 위한 봉사에 이르기까지 생활주변에만 수백가지의영역이 있다. 50년 역사를 자랑하면서 아프리카 기아,보스니아 내전,아프칸 내전 등에서의료 및 고아 지원사업으로 명성이 높은 ‘CARE’나,‘흑인 대학보내기운동’ 등은 대표적인 자원봉사단체 가운데 하나다.의무봉사기간을 거친 뒤 혜택이 주어져 약간 성격이 다르긴 하지만 우리에게 잘 알려진 평화봉사단도 미국의 전통적 자원봉사단체다. 그렇다고 우리처럼 자원봉사를 한 뒤 소정의 봉사료가 주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특히 정치 후보를 위한 자원봉사활동에서는 봉사자 자신들이 도시락까지 싸들고와 무보수로 활동한다. 일본은 500만명에 가까운 사람이 자원봉사단체에 등록하고 있는데 등록하지 않은 사람까지 더하면 700만명을 웃돌 것으로 어림된다.자원봉사단체는 5만6,100여개로 봉사자의 95% 이상이 크고 작은 단체를 통해 봉사활동을 하고있다. 자원봉사활동의 중추역을 맡고 있는 전국사회복지협의회가 전국의 3,400여개 지역협의회를 통해 자원봉사활동을 조직화하고 있다.다른 선진국처럼 일본도 어릴 때부터 자원봉사가 몸에 저절로 배도록 고입이나 대입 사정에서자원봉사활동란을 따로 두어 평가하고 있다. 독일의 경우 공식집계는 아니지만 8,000만 인구중 2,000만명이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서로가 서로를 도우며 살아가는 ‘공생(共生)사회’를 실현하고 있는 셈이다.스포츠 분야에만 200만명의 자원봉사자가 8만개에 달하는 스포츠클럽의 코치나 관리자로 활약하는 등 자원봉사자가없으면 사회를 지탱할 수 없다고 할 만큼 이들의 활동은 눈부시다. hay@ *자원봉사 어떤 일을 할 것인가 ■무슨 일이든지 한다는 생각 자원봉사자들도 편한 사무실 일을 선호하고힘든 현장의 업무는 기피한다.하지만 무슨 일이든 하겠다는 자세가 중요하다. ■자원봉사,가깝고 쉬운 일부터 주변에는 할 일들이 많다.가까운 친척 할머니들 가운데 혼자 사는 할머니를 정기적으로 찾아 보는 일,새벽에 내 집 앞길을 말끔히 쓰는 일이 그 예이다. ■취미에 맞는 일,재미있는 일 아무리 자원봉사라 해도 사명감,봉사정신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일에 흥미를 느껴야 한다.자원봉사업무 자체에 흥미를 갖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가능하다면 전공과 과거의 경험을 최대한 살리는 것이 좋다 예컨대 컴퓨터 공학과 학생들은 사회복지관의 인터넷 교육프로그램에 참여하고,외국어에 능통한 사람은 박물관 등에서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외국인들에게 설명해주는 것이 좋다. ■학교 안에도 자원봉사 할 일 많다 도서관 장서 정리하기,도서 추가로 확보하기 위한 기금 마련,기업과 학교간의 협력체제 구축,연구단체 및 사회단체의 연구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일 등 찾아보면 할 일들이 많다. * [밀레니엄 탐방] 자원봉사모임‘사랑터’ 사랑터(회장 李明雨)는 어렵고 고통받는 이웃에게 따뜻한 사랑을 전달하는자원봉사자들의 모임이다.청소년들에게 봉사의식을 길러 주며 보다 나은 사회공동체 형성에도 앞장서고 있다. 서울 경찰청 교통정보센터에 근무하는 이명우 경사가 지난 87년 만든 이래12년째 회원 200여명과 함께 각종 봉사활동을 펼치며 소외된 이웃을 돌보고있다.회원은 교사 경찰 택시기사 상인 주부 등 다양하다. 매달 셋째 토요일에는 불우 이웃돕기에 나선다.회원들로부터 회비 또는 농수산물 생활용품 등 현물을 거둬 무의탁노인 8명이 거주하는 서울 성북구 석관동 ‘마이러하우스’,장애아동 20명이 수용돼있는 종로구 경운동 ‘라파엘의 집’ 등 서울시내 불우이웃 수용시설 12곳을 찾아 나눠준다.시설에 있는 노인들의 어깨를 주물러 주거나 야채도 다듬어 준다. 둘째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회원 10여명이 청소년 100여명과 함께 자원봉사활동을 나간다.토요일에는 창경궁과 종묘로 나가 잡초를 제거하고 청소를 한다.4월부터 10월까지 일요일에는 국립현충원에서 묘지를 관리한다.청소년들은 비석 청소와 잡초 제거 등 힘든 일을 체험하면서 정신·안보교육도 받는다. 청소년들을 참여시키는 것은 자원봉사활동을 하면서 인간 존중 정신과 태도를 형성하고,공동체 의식을 배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자원봉사활동은 지역사회 공동체의 부족한 일손을 메꾸는 등사회복지비용을 절감하는 효과가 있다”면서 “그러나 밖으로 알려지는데서오는 보람보다는 자기 성취에서 오는 만족이나 거기서 얻어지는 마음의 평화가 더 큰 기쁨”이라고 강조했다. 김영중기자 jeunesse@
  • 沿海州의 카레이스키(하)-항일독립운동 발자취

    지난달 19일 늦은 오후.우수리스크에서 남동쪽으로 40여㎞ 떨어진 ‘크로우노프카’의 한 강가에서 뜻밖의 행운을 만났다.발해의 옛 절터를 찾아가는길에 블라디보스토크 대학 고고학연구소의 샤브구노프 블라디미르 교수(43)를 만나게 된 것이다. 교수의 아버지인 샤브구노프 에른스 교수(69)는 발해연구의 대가.1937년 이 절터를 발굴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고 나중에는 우리나라 학술팀과발해유적을 공동발굴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교수는 20여명의 학생을 이끌고 19일째 천막생활을 하면서 아버지가 못다한 발굴작업을 하고 있었다.교수는 아버지가 발굴한 절터 바로 옆에서 발해의민가 유적을 발굴하고 있는 중이었다.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발굴작업을 구경하다가 대학에 들어와서 본격적인 연구를 했다”고 말했다. 교수는 원래 주르젠(여진족)에 대한 연구를 했으나 ‘아버지가 발굴을 마무리하지 못하면 대신 하기로 한다’는 약속에 따라 3년 전부터 직접 나섰다. 2대째 이어진 러시아인의 발해연구 현장을 만난 것은 반드시 고맙거나 반가운 것만은 아니었다.동행했던 ‘발해사 연구회’ 조태형(趙台衡·48)회장은“연해주는 만주지방과 함께 발해유적의 보고(寶庫)인데도 그동안 현장 접근이 안돼 중국·러시아·일본 등의 자료에만 의존해왔다”면서 “이 나라들이 그동안 발해를 자신들의 역사에 유리하게 끌어들이는 작업을 해왔다”고 말했다.발해유적지 주변에는 러시아 이름이 붙여지고 있어 시간이 흐를수록 연구에 더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같은 날 오후,동행한 고려인은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면서 일행을 우수리스크 시내 외곽의 한 솔밭으로 안내했다.현지인들이 ‘피밭’이라고도부르는 곳이었다.강제이주가 이루어지기 직전 이곳에서 숱한 한인 지도자들이 처형을 당했다.체제에 협조하지 않은 러시아인도 희생됐다. 친척들은 당시 살벌했던 사회분위기가 무서워 시체를 거두지도 못했다고 한다.숲 가장자리에는 ‘스탈린의 탄압을 당한 이들에게 바친다’는 문구가 적힌 비석만 초라하게 남아 있었다. 안내자는 “이곳처럼 세상에 제대로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 유적지가 많다”고 전했다.그는 우수리스크 ‘아게이바’ 거리에 일제시대 문을 연 한인사범학교가 있는데 몇해 전까지 그 위치가 잘못 알려져 많은 관광객들이 엉뚱한 건물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웃지 못할 일들도 있었다고 소개했다. 연해주는 항일운동의 본거지로 많은 유적과 항일운동사가 묻혀 있는 곳이다.이곳을 거쳐가지 않은 독립운동가가 없을 정도로 한때 만주보다 더 활동이왕성했다.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우리에게까지 잊혀진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그리고 왜곡된 독립운동사를 발굴하고 복원하는 일도 시급해 보였다. 연해주 이지운기자 jj@
  • KBS2TV 8·15특집‘도전 지구탐험대’

    KBS2TV ‘도전! 지구탐험대’는 8·15특집으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황영조 등이 남태평양 사이판 바다 속에 일제 징용 희생자의 위령비를 세우는 장면을 보여준다. 황영조와 함께 이 일을 한 사람들은 수중공사전문가 김지중,전문다이버 이정수,대학생 장언(서울예대 2년),강지원(한양대 2년)씨 등.여기에 수중촬영팀과 제작팀도 참가했다. 이들은 지난 8일 출국,무인도에서 수중작업 훈련을 받은 뒤 16일 사이판 앞 마나가하섬 부근의 12m깊이 해저에 길이 1.8m 무게 2.5t짜리 수중 위령비를 세웠다.이 곳에는 2차대전 당시 일본군에 의해 격추된 B-29폭격기 잔해가남아 있다. 당초 작업은 7시간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됐으나 예기치 못한 어려움에 부딪혀 9시간으로 늦어졌다.비석을 배에서 내리다 무게 때문에 크레인의 유압호스가 터지는가 하면 빠른 조류로 위치를 잡기 조차 어려웠다.황선수 등은끝내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 태평양 전쟁시 희생되신 영혼이시여 고이 잠드소서’란 문덕수 시인의 시가 새겨진 비석을 세우는 데 성공했다. 사이판은 요즘 신혼여행지로 유명하지만 태평양전쟁 당시에는 한국인들이징용과 종군위안부라는 치욕적인 이름으로 끌려가서 희생됐던 한많은 땅이다.또 IMF 이전 만해도 한국인교민이 5,000명이나 살고 있었다.그러나 관광객의 감소 등으로 일이 없어지면서 교민의 생활도 힘들어졌다.8·15와 교민을동시에 생각하며 기획한 이 위령비 건립은 1년동안 준비기간을 가졌다.최종건PD는 스킨스쿠버 마스터 자격증을 가진 황영조선수에게 이 역할을 맡겼고,수중공사 건설업체인 김지중(37·인목엔지니어링)대표,사이판 앞바다를 잘아는 전문다이버인 교민 이정수씨 등의 도움을 얻었다.사이판관광청에선 북마리아제도의 대통령전용헬기와 배를 3번이나 빌려주기도 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이후 처음 느끼는 큰 감동”이라고 소감을 밝힌황영조선수는 정신대 동굴 등 사이판 곳곳의 역사현장을 탐방하고 징용1세대인 김학봉씨 일가를 만나 취재활동도 펼쳤다.이 결과 징용에서 살아남은 9명의 한인이 뭉쳐 ‘화목계’를 만들었고 그들이 호적등본과 행동강령을 항상품안에 지니고다녔다는 기록 등을 찾아냈다. 올림픽의 영웅을 감동시킨 이번 ‘도전’은 광복절인 8월15일 오전 9시40분방송된다. 허남주기자 yukyung@
  • 고령 가야대학교에 ‘日 개국터’ 비석 세운다

    경북 고령 가야대학교에 이곳이 일본 천황가의 출신지임을 알리는 비석이 선다.가야대는 오는 28일 오전11시 교정에서 ‘고천원고지(高天原故地)’비 제막식을 갖고 오후에는 강당에서 강연회 및 토론회를 갖는다. 고천원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는 지명으로 일본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이 살았다는 곳이다. 가야대가 비석을 세우는 이유는 대가야의 도읍지인 고령이 바로 고천원으로추정되기 때문이다. 고천원을 고령으로 비정(比定)하는 학설은 한·일 학자들 사이에서 두루 제기되었다.지정학적으로 보면 가야는 한반도의 어느 지역보다 일본과 가깝고교류가 많았던 곳이다.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기술된 일본 신들의 계보는 이자나기와 이자나미 두 신에서 시작된다.국민대 총장을 지낸 이종항교수는 이자나기(伊邪那崎)와 이자나미(伊邪那美)는 대가야 건국신화에 나오는 이진아시(伊珍阿鼓)와 동일인이며 이자나기는 천부(天父)신,이자나미는 지모(地母)신이라고 했다.또 이자나기의 딸로서 일본 국조신으로 추앙받는 아마데라스오오미카미(天照大神),아마데라스오오미카미의 손자로 일본 개국신인 니니기노미코도(邇邇藝命)는 고천원에서 살았다고 말한다. 부산일보 동경지사장 최성규씨는 ‘일본왕가의 뿌리는 가야왕족’이라는 논문에서 ‘다카마노하라(高天原)’의 ‘다카마(高天)’는 고유명사로서 곧 ‘다카마(高靈)’에서 온 말이고 ‘노’는 조사,‘하라(原)’는 장소를 뜻한다고 했다. 일본 연구자 아라 에이세이(荒榮誠)는 일본 건국신의 하나인 다가미무수비노미코도(高皇産靈尊)가 가야의 고령출신이고 ‘高靈’과 ‘皇産’(천황을 산출한다)의 두글자로 구성됐다는 설도 있다고 말한다. 일본 쓰쿠바대학 명예교수 마부치 가즈오(馬淵和夫)박사도 일본서기에 나오는 신 수사노오노미코는 성질이 난폭해 고천원에서 추방된 뒤 신라국에서 살았다며 고천원을 신라 서쪽에 인접한 나라인 대가야,곧 고령으로 비정했다. 가야대 이경희 총장은 신화를 상상의 세계로 한정할 것이 아니라 현실세계를 신화형식으로 빌려 표현한 것으로 봐야 한다며 가야는 일본왕조형성에 깊이 관련돼 있다고 말했다. 동상 제막식이 끝난 오후에는 마부치 교수가 고대 한일 문화교류에 관해 주제발표를 하고 향토사학자 김문배씨,가야대 엄경호교수,이종항 전 국민대총장 등이 토론을 벌인다. 임태순기자 stslim@
  • 몽골방문 金대통령 이모저모

    울란바토르 양승현특파원 김대중(金大中)대통령 내외는 30일 오후(이하한국시간) 3박4일간 러시아 국빈방문을 마치고 몽골 울란바토르에 도착,몽골 국빈방문 일정에 들어갔다.이에 앞서 29일에는 디닐로프 수도원을 방문,알렉세이 2세 총주교를 면담하고 스테파신 총리 주최 오찬에 참석한 뒤 볼쇼이 공연 관람으로 러시아 문화·예술을 접했다. 몽골 도착 및 러시아 공항 환송행사 김대통령 내외는 이날 저녁 울란바토르 보양트 오하공항에 도착,토야외무장관과 갈바드라흐 주한몽골대사 내외,우르진훈데브 의전장의 영접을 받고 공항 환영행사에 참석한 뒤 징기스칸 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이날 울란바토르 공항에는 개항 후 처음으로 대형 보잉 747-400기가 착륙하게 돼 아시아나 항공사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특별기 착륙연습을 하는 등 만전을 기했다는 후문이다. 현지 주요 일간지들은 일제히 김대통령의 국빈방문 사실을 보도하면서 김대통령 내외의 일대기나 양국의 역사적 관계를 소개하는 등 관심을 보였다. 몽골리안 메데지는 “몽골 국회에서 국빈자격으로 연설하는 것은 김대통령이 처음”이라고 소개했고,우눈두르지는 “가장 오래된 한국관련 문헌자료는 732년에 세운 쿨테긴왕 비석의 비문중 4번째 줄에 나온다”고 보도했다. 정치연합당수접견 김대통령은 같은날 오후 숙소인 영빈관에서 러시아의 야당인 야블린스키 야블로코 정치연합당수를 접견했다. 김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해 “통일은 상당히 먼 얘기고 지금은 평화공존이 중요하다”며 “대북 화해·협력 정책을 러시아를 비롯한주변 4강이 지지해 평화공존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야블린스키 당수는 “러시아의 현 옐친 정권에만 기대하지 말고다음 정권에도 지지를 기대해도 좋다”고 한국에 대한 러시아의 지속적인 지지 입장을 약속했다. 볼쇼이관람 김대통령 내외는 29일 밤 마지막 러시아 방문 일정으로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볼쇼이 갈라 발레 공연을 관람했다.김대통령은 공연 후골로브키나 볼쇼이 발레학교 교장,바실리예프 볼쇼이 극장장,발레리나 10여명 등과 다과를 함께 하며 환담했다. 김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발레가 이같이 아름답고 힘차다는 것을 몰랐다. 감동을 뭐라 말할 수 없다.잘 가르친 덕분”이라고 말했다.또 볼쇼이학교에재학중인 한국 학생들을 격려했다. 골로브키나 교장은 “서울에 자매학교를 세우기 위해 서울 삼육대와 협의중”이라고 밝혔다. TV회견 및 한반도 전문가 초청 조찬 김대통령은 같은날 오후 숙소인 영빈관에서 러시아 국영 에르테에르(RTR)TV와 회견을 가졌다. 김대통령은 대북 햇볕정책의 전망에 대한 질문에 “조금씩 좋아지고 있으나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다”며 “이번 러시아 방문은 한반도 주변 4대국의 지원체제를 완성시킨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김대통령은 이에 앞서 숙소인 영빈관에서 비탈리 이그나텐코 이타르타스통신 사장 등 러시아의 한반도 전문가들과 조찬을 함께 하며 한반도문제와 한·러관계 등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김대통령은 “과거 정부 때와 달리 러시아와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있는 만큼 여러분을 한국으로 초청하는 등 적극 협력해 나가겠다”고 말했다고 박준영(朴晙瑩)청와대대변인이 전했다. 이그나텐코 사장은 “한·러 수교 10주년이 되는 내년에 ‘러시아와 한국,과거와 미래’라는 주제로 대한제국 국왕의 친서,100년전 한국지도 등의 전시회를 한국측 민간 조직위와 공동추진하고 있다”며 김대통령에게 당시 지도 한부를 선물했다. 김대통령은 이그나텐코 사장의 한국정부 지원 요청에 “문화관광부가 관심을 갖고 이인호(李仁浩)대사와 협의토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 제3회 참전수기 호국문예작품공모 /최우수작

    대한매일신보사와 국가보훈처가 공동으로 주관한 제3회 참전수기 및 호국문예작품 공모에서 구일모(안산 석수초등학교 3년)군이 출품한 ‘현충일’이 초등부 시부문 최우수작으로 뽑혔다. 초등부 수필부문 최우수작은 변유영(대구 불로초등학교 6년)양의 ‘할아버지의 눈물’이 선정됐다. 중·고등부 시부문 최우수상은 이한주(경북 청송여중 2년)양,수필부문 최우수상은 김보경(부천 시온고 3년)양에게 돌아갔다. 일반부 시부문 최우수상은 곽홍란(여·대구 수성구 시지동 135-14)씨,수필부문은 강정(여·대구시 수성 수성4가 보성아파트 101동 1906호)씨가 선정됐다. 참전수기 부문에서는 최종태(경기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 112 주공하얀마을6단지 608동 402호)씨의 ‘국군이 된 인민군분대장’이 최우수작으로 뽑혔다. 응모 작품은 모두 3,500편이었으며 당선작은 모두 35편이다. 입상자에게는 상패와 10만∼100만원의 상금을 수여한다.오는 6월3일 오후 3시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시상식을 갖는다. - 호국문예 詩 최우수작 현충일 구일모(초등부) 난 현충일에 생각했어요 동작동 국립묘지 언덕에 앉아서 수많은 비석이 보였어요 너른 언덕에 가지런히 서 있는 비석의 날짜와 이름이 선명했어요 목숨 바쳐 가신 분들 한사람 한사람이 보이는 것 같았어요 이런 것이 애국심이구나 혼자 생각했어요 이젠 나도 더욱 바르고 씩씩하게 생활하겠다고 다짐했어요 소나무 가지에 지저귀는 새 한마리 푸드득 날아가는 언덕에서 난 물끄러미 하늘을 보며 현충일날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일기에 적어 볼래요나의 꿈 이한주(중고등부) 나는 화가가 되고 싶습니다 분단된 우리 땅 휴전선 싸악 지우고 평화를 그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는 한 마리 새가 되고 싶습니다 하얀 꿈을 싣고 평화의 날개로 떠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는 한줄기 강물이 되고 싶습니다 한움큼 햇살이 뿌려둔 행복의 씨앗을 남에서 북으로 북에서 남으로 전해 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는 작은 눈물이 되고 싶습니다 가슴속 깊숙히 새겨둔 아픔과 슬픔을 싸악 지우고 자유를 싹틔우고 평화를 피워서 행복이란 열매를 맺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해 봅니다 우리의 작은 행복이 통일을 위한 존재라는 것을…다부원에 피는 꽃 곽홍란(일반부) 아버지 다부원에는 풀꽃이 느낌표로 핍니다 초록보다 더 푸르른 청춘을 내어 걸고 산허리 솟은 혈맥을 골골이 넘습니다 한 마리 풀벌레조차 못 죽이던 사람들이 제주에서 평양으로 뜻 다른 이 찾아 총부리 겨누던 한숨이 저리 피고 있습니다 아버지 다부원에는 뭇별들도 꽃이 됩니다 이름을 가진 장미나 백일홍,목련꽃보다 제 이름 알 수 없는 꽃이 여기선 더욱 곱습니다 주리고 비틀어진 낙강의 허리채 안고 끝끝내 깍지 끼어 목숨으로 바꾼 이들, 오늘은,그 넋들이 내려 꽃으로 피고 있습니다 아버지 다부원에는 풀꽃들도 꿈을 꿉니다 흩어진 전우들의 깊은 잠,잠시 깨워 생채기진 군복일랑 벗어 색동으로 갈아입고 차마 못다 푼 한은 두견에게 맡겨 두고 피어린 능선을 넘고 넘어 그리운 이름들과 백두대간 오고 가는 저 환한 웃음에 오늘은,내가 잔을 올립니다
  • KBS’역사스페셜’ 특집2부작 광개토대왕비·장군총 비밀 규명

    높은 인기를 얻고 있는 KBS 1TV‘역사스페셜’이 고구려 특집 2부작을 마련한다.5월 1일과 8일 방송되는 ‘고구려 비밀의 문-광개토대왕비’과 ‘동방의 피라미드-장군총의 수수께끼’는 잊혀진 고구려의 실체를 되살린다.오후8시 방송. 고구려는 광대한 영토를 가진 나라였다.중국과 함께 고대 아시아를 양분해지배했던 저력의 국가로 알려져 있다. 이같은 위업을 이뤄낸 광개토대왕의 비석이 발견된지 120년.지금까지 광개토대왕비에 대한 연구는 ‘신묘년 왜가 바다를 건너 백제 신라를 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는 이른바 신묘년 조항에 집중됐었다.일본이 비석에 석회칠을 하고 비문을 조작했다는 등의 확인할 수 없는 주장을 반박하는데 많은 신경을 쏟은 것이다. 광개토대왕비는 우리 역사상 가장 큰 비석으로 높이가 6m39㎝에 이른다.이비는 단순한 능비가 아니라 고구려 사람의 폭넓은 세계관과 당당한 자존의식을 천하에 선언한 민족선언비였다. “강력했던 고구려가 남진정책으로 구태여 통일을 하지 않았던 것은 동일민족인 백제 신라 가야를 지배하는일에 별 의미를 두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으로 이는 고구려가 보다 큰 세계관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책임연출자 남성우 주간은 스스로를 천하의 중심으로 생각했던 고구려의 기상을 이 시대에 다시 한번 되새기는 일은 의미가 크다고 강조했다. 이 프로는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고구려의 속국이었다는 기록도 제시한다. 신라의 왕릉급 고분에서 광개토왕의 이름이 적힌 유물 ‘호우’가 발견되고,신라인이 광개토왕의 죽음을 애도하고 제사를 지냈다는 사실이 전해지고 있음을 예로 든다. 허남주기자yukyung@
  • [‘4·19’ 39주기]기념비 순례(上)/각종 행사

    독재와 불의에 항거해 아낌없이 생명을 바친 젊은 영령들의 혼이 붉은 진달래로 다시 피어난다는 ‘4·19’.민주주의를 갈망하며 뿌린 피로 세워진 기념비들이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4·19 국립묘지를 비롯,고려대와 서울대,경희대,경기고 등 서울에 있는 ‘4·19 기념비’를 찾아 봤다. 4·19국립묘지 ‘이 나라 젊은이들의 혈관 속에 정의를 위해서는 생명을능히 던질 수 있는 피의 전통이 용솟음치고 있음을 역사는 증언한다(중략)해마다 4월이 오면 봄을 선구하는 진달래처럼 민족의 꽃들은 사람들의 가슴마다에 되살아 피어나리라’ 서울 강북구 수유리 ‘4·19국립묘지’의 4월학생혁명기념탑에 새겨져 있는 비문은 63년 시인 이은상(李殷相)선생이 젊은 영령들의 넋을 기려 지은 것이다.또 영령들의 드높은 기상을 높이 21m의 우뚝솟은 7개의 화강암으로 형상화한 기념탑은 조각가 김경승(金景承)씨가 디자인했다. 기념탑 중앙에 서 있는 ‘군상환조’(群像丸彫)는 4.19혁명을 지켜보는 민중을,‘군상부조’(群像浮彫)는 암울한 시대상황과 자유에 대한 염원과 승리·자유·평화 등을 각각 상징한다. 고려대 ‘(전략)사악과 불의에 항거하여 압제의 사슬을 끊고 분노의 불길(중략)천지를 뒤흔든 정의의 함성을 새겨 그 날의 분화구 여기에 돌을 세운다’ 고려대에는 ‘4·18의거 기념탑’이 있다.4·19혁명 보다 하루 앞선 18일시위를 벌인 고대생들의 자부심에서다.기념탑은 61년 4·18의거 1주년을 맞아 교내 본관 오른쪽 언덕에 깎아 세웠다.높이가 4m로 직사각형태이다.탑의부조는 한국미술협회 고문인 민복진(閔福鎭·73)씨가 만들었다.자유와 민권쟁취를 위해 궐기했던 고대생들의 용맹과 슬기를 찬양하고 구국의 위업을 길이 빛내기 위한 뜻을 담았다.비문은 당시 고려대 문리대 교수인 시인 조지훈(趙芝薰)선생이 썼다. 민씨는 “당시 학생들이 맨주먹으로 불의와 부정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고그 느낌을 형상화했다”고 말했다. 서울대 ‘젊은 학도 봉화를 들었으니 사랑하는 겨레여 4·19의 외침을 길이 새기라’ 관악산 자락 900여평의 ‘서울대 4·19기념공원’에는 ‘4월 학생혁명기념탑’과 청동상,3개의 추모비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있다. 기념탑은 4·19혁명 1주년인 61년 경무대 앞에서 경찰의 총에 맞아 숨진 김치호(金致浩·당시 수학과 2년)씨를 기려 당시 문리대 학생들이 동문들의 성금을 모아 세웠다.5m 높이의 통화강암 조형물로 가운데 높은 부분은 ‘정의의 칼’을,양쪽 돌은 정의를 받드는 학생들의 기상을 상징한다.조소과 55학번인 공주대 이정갑(李廷甲·64) 교수가 설계했다. 경희대 ‘조국의 구원과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후략)’ 서울 회기동 경희대 본관 분수대 옆에 세워져 있는 ‘4월학생혁명 기념탑’에는 39년 전 독재에 항거해 젊음을 불사른 한 학생을 추모하는 시인 조병화(趙炳華)선생의 시가 새겨져 있다.높이 150㎝,너비 130㎝의 이 기념탑은 당시 시위에 참가했다가 총을 맞고 숨진 법학과 이기태(李基泰·당시 23세)씨를 기리고 있다. 정독도서관 ‘(전략)피기도 전에 그 봉우리가 뿌린 피는 그러나 방울방울다시 꽃으로 맺힌다 민주의 꽃이 자유의 꽃이 피련다.(후략)’ 서울 종로구 화동 1번지 옛 경기고자리인 정독도서관 본관 옆 잔디밭에 서있는 ‘민주혁명학생위령비’는 당시 희생된 최정규·박동훈·고완기·이종량씨 등 경기고 졸업생과 재학생 4명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이 비석은 4·19혁명이 일어난 60년 10월3일 제막돼 기념물로 가장 오래됐으며 국어학자 이희승(李熙昇)선생이 비문을 썼다. 이 밖에 서울에는 동국대 ‘동우탑’과 중앙대 ‘의혈탑’,단국대 ‘4·19기념탑’ 등이 있다. 김영중 조현석 주현진기자 jeunesse@ - 4·19기념도서관 준공식…각계인사 200여명 참석 독재권력에 항거한 4·19 정신을 기리는 ‘4·19 기념 도서관 준공식’이 16일 오후 각계 인사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서울 종로구 평동에 있는 기념도서관은 64년에 지은 건물을 헐어내고 지하2층,지상 7층에 연면적 2,208평으로 재건립됐다. 4·19혁명 부상자동지회와 희생자 유족회 사무실이 입주했으며 1층은 기념홀,2·3층은 도서관이다. 나머지 층은 일반인에게 임대할 예정이다. 준공식은 테이프 절단식과 기념홀 관람,4·19혁명부상자들에 대한 표창 및감사패 수여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김종필(金鍾泌) 국무총리를 비롯,최학규(崔圭鶴) 국가보훈처장,국민회의 한광옥(韓光玉)·양성철(梁性喆)의원,자민련 이태섭(李台燮)의원,유인종(劉仁鍾) 서울시교육감 등이 참석했다. 박종구(朴鍾九) 4·19혁명부상자회장,윤재락(尹在洛) 4·19혁명희생자유족회장,정원찬(鄭圓纂) 4·19회 회장 등도 참석했다. 김영중기자 - '4·19' 뜻 기리며…각대학들 학교·묘역서 마라톤 4·19혁명 39주년을 사흘 앞둔 16일 서울시내 일부 대학에서는 4·19혁명의 숭고한 뜻을 기리는 총학생회 주최 마라톤대회가 열렸다. 서울대 총학생회는 오후 2시 1,0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교내 아크로폴리스광장을 출발해 신림사거리와 봉천사거리를 돌아오는 7.5㎞ 구간 마라톤대회를 열었다. 한국외국어대,덕성여대,동덕여대,성신여대 등 8개대 학생들도 학교 주변 도로를 달리거나 수유동 4·19국립묘지에 이르는 마라톤 행사를 가졌다. 4·19국립묘지에 도착한 학생들은 기념탑 등에 차례로 참배했다. 주현진기자 jhj@
  • [제2공화국과 張勉](15)분출하는 욕구(下)/기고

    1961년 2월4일 장면(張勉)총리는 반도호텔에서 열린 관훈클럽 창립4주년 기념모임에 초청받아 ‘언론의 자유와 그 책임’을 주제로 강연한다. 장면은 “약간 과장해서 말하면”이라고 전제한 뒤 “북한 괴뢰의 앞잡이들이 ‘조선인민보’나 ‘해방일보’를 발행하겠다고 등록신청을 해도 막을 도리가 없을 만큼 완전한 언론출판의 자유가 허용되고 있다”고 밝혔다.그러면서 ‘무책임하고’ ‘사실을 의도적으로 왜곡하며’ ‘독선적인’ 언론이 횡행하는 현실을 우려했다. 장면은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모든 압제에 반대해야 하는 것과 같이,자유가 자유 그 자체를 파괴하도록 방임해서도 안된다”는 말로 연설을 끝맺었다.무절제한 언론에 대한 이 경고를,관훈클럽은 훗날 발간한 ‘40년사’에서“언론에 경종을 울리는 진지하고도 의미심장한 내용이었다”고 평가했다. 이승만(李承晩)독재권력을 무너뜨리는 데 신문은 학생세력·민주당과 더불어 일등공신 노릇을 했다.자유당 정권은,비록 그후의 박정희(朴正熙)·전두환(全斗煥)시대만큼 가혹하지는 않았지만그래도 독재체제를 유지하고자 언론에 대해 탄압을 거듭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59년 4월30일 경향신문을 폐간시킨 것이다.가톨릭계인 경향신문은 그 무렵 자유당 정권에 가장 비판적이었으며 장면이 대표하는 민주당 신파를 지지했다.따라서 60년 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몇가지 꼬투리를 잡아 경향신문에 철퇴를 가했다. 그러나 도하 각 신문은 이에 굴하지 않고 자유당 정권의 비정(秕政)과 ‘3·15 부정선거’,그리고 이에 따른 학생·시민의 항거를 끊임없이 보도했다. 따라서 4월혁명후 언론은 명실공히 입법·사법·행정에 못잖은 ‘제4부’로떠올라 그 힘은 역사상 어느 때보다 강력했다. 언론계의 변화는 먼저 양적인 팽창으로 나타났다.1960년 3월31일 현재 국무원 사무처에 등록된 각종 정기간행물의 숫자는 그 변화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일간신문은 4·19 전의 41종에서 112종으로,일간통신은 14가지에서 274가지로,주간신문은 136종에서 476종으로 급격히 늘어났다.그야말로 ‘사무실 한평에 등사판 하나만 갖추면 통신사 간판을 내걸고 실업자 서너명만 모으면신문사 간판을 내걸 수 있는’시절이었다. 언론사가 급증하자 사이비기자가 판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고 이에 따라강경·논산 등 일부 지역에서는 주민들이 “사이비기자 물러가라”며 데모하기도 했다.한국일보가 1961년 2월 말 연재한 ‘기자가 취재한 기자군(記者群)-공갈기자’시리즈를 보면 그들의 성분과 폐해를 짐작할 만하다. “‘공갈기자’와 ‘진드기기자’들에게는 전직이 있다.…연무대 주변에서진을 친 이들의 대부분은 전직이 헌병대 문관 아니면 형사,또는 CIC군관,이밖에 퇴역군인이다.그래서인지 ‘진드기기자’들의 취재 태도는 이미 일어난 사건을 그대로 보고듣는 것이 아니고 드러나지 않은 범죄를 탐색하고 사람을 취조하는-말하자면 ‘범죄수사’를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전통있는 언론사야 행태가 물론 달랐지만 그들 역시 정부 시책을 사사건건물고 늘어져 비난하는 것을 신문의 의무로 아는 듯했다.당시 언론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3·15 부정선거’의 주범 가운데 하나인 자유당 간부장경근(張暻根)이입원중인 병원을 탈출,일본으로 밀항한 사건이 발생한다.이에 서울일일신문은 “면이와 경근이 때문에 창피해서”라는 설명과 함께 두손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을 그린 만평을 실었다.‘장씨 종친회’라는 제목의 이 만평은 국무총리 장면과 부정선거 혐의로 구속된 장경근을 한데 엮어 비난한 것이었다. 장총리의 공보비서관인 송원영(宋元英)이 서울일일신문의 이관구(李寬求)사장을 찾아가 항의하니 이사장도 “이건 너무했다”면서 윤전기를 멈추고 만평을 뺐다고 한다(송원영 회고록에서). 경향신문 정치부장으로 있다 바로 공보비서관이 된 송원영은 “모든 매스컴이 장면정권을 두들겨팼다.마치 언론자유는 장정권을 타도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처럼”이라고 회고했다. 한편 신문이 보도 면에서 신중과 자제를 잃어(宋建鎬 표현) 독자들에게 수난을 당하는 사태도 자주 일어났다.부산일보는 동아대 학생들의 습격을 받아 20일동안 휴간했으며,한국일보는 ‘혁명전야’라는 연재소설에서 작가 정비석(鄭飛石)이 연세대생을 모욕했다는 항의를 받자 연재를 중단했다.박태선(朴泰善)장로교회 신도 수천명이 대낮에 동아일보 사옥에 침입,난동을 부린일도 있었다. 장면정부는 언론의 이런 태도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설득하는 이외의 방법은 쓰지 않았다.장면정부의 언론 주무장관인 정헌주(鄭憲柱) 국무원 사무처장은 “심지어는 없는 사실도 만들어서 쓰곤 했지만 그래도 정부로서는‘시간이 흐르면 스스로 자리를 잡겠지’하는 생각에서 일체 간섭을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언론도 세월이 흐르면 책임을 깨닫고 스스로 바로 설 것이라는 그 자율기능을 믿은 것이다. 장면정부는 오히려 언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고 애썼다.가끔 ‘대통령 유시’나 발표하고 기자회견은 1년에 한 두차례 하는데 그쳤던 이승만과는 달리 기자회견을 매주 한차례 정례화했다.그럴 때면 전 각료를 동원하다시피해 갖가지 질문에 답했다. 또 KBS라디오를 통해 ‘주례 국정보고’도 방송했다.매주 토요일 오후 7시30분에 시작한 이 방송에서 장면은 민주당 정부의 방침을 국민들에게 설득조로 이야기했다. 4월혁명을 이룰 때까지 민주당과 신문은 ‘동지’였다.그러나 장면정부가들어서자 어제의 동지는 ‘적’으로 돌변했다.5·16쿠데타후 신문은 장면정부를 망친 ‘3신(新·신문,민주당 구파가 분당한 신민당,신파 소장파 모임인 신풍회)’ 가운데 하나로 인구에 회자됐고 군사정권 아래서 모든 자유를 빼앗겼다. 이용원기자 ywyi@[기고] 언론자유 수호 自淨운동 싹 틔워4·19로 이승만(李承晩)정권이 무너진 후 한국 언론은 비로소 자유를 누릴수 있게 됐다.정부의 언론에 대한 간섭과 통제가 급격히 사라졌고,언론 스스로도 과거의 잘못을 청산하려고 노력했다. 허정(許政)과도정부는 1960년 7월1일 법률 제553호로서 ‘신문 및 정당 등의 등록에 관한 법률’을 공포했다.이로써 허가제를 규정한 미 군정법령 88호는 폐지됐고,이제 등록만 하면 누구나 정기간행물을 발행할 수 있게 됐다. 또한 과거 대통령 직속의 독립된 부서였던 공보실이 폐지됐고,국가보안법과선거법에 삽입된 언론통제 조항도 삭제됐다.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한동안 언론은 과거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자유를 누렸다.그러나 갑자기 언론자유가 주어지자 우후죽순처럼 정기간행물이 쏟아져 나와 일간지나 주간지가 4·19 전에 비해 3배 가량 늘어날 정도가 되면서 사이비 언론과 사이비 언론인들로 인한 폐단도 적지 않게 드러났다. 한편 1960년 5월 부산을 시작으로 하여 대구·서울 등지의 여러 신문사에서 노조가 차례로 결성됐고,KBS도 ‘방송중립화 운동’을 펼쳐 공정방송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그리고 1961년 2월13일에는 일본 거류민단계의 조용수(趙鏞壽)가 중심이 되고 국내 혁신계 인사인 송지영(宋志英) 윤길중(尹吉重)고정훈(高貞勳) 등이 참여한 민족일보가 창간되어 혁신계 세력을 대변하게됐다. 이런 가운데 자신들에 관한 보도에 불만을 품은 일부 독자들이 신문에 대해 항의시위나 난입,그리고 불매운동을 벌이는 일도 생겼다.이같은 사태는 무책임하고 부정확한 보도를 한 언론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지만,물리력을 동원해서라도 자신들에게 불리한 기사를 막으려고 한 일부 독자들의 잘못된 의식도 작용한 결과였다. 이렇듯 제2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언론자유가 급격히 신장됐지만,언론자유는점차로 제약되는 경향을 보였다.집권 이후 국민들의 요구를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한 민주당 정권은 언론규제 장치로 ‘외국 정기간행물 국내 배포에 관한 법률안’을 만들었다.이것은 신문이 등록제로 대체되면서 폐기된 미군정법령 88호중 제5조만 유효하다는 유권해석과 함께 그것을 대신하는 법령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또한 창간되기도 전에 민족일보에 대해 국회에서 조총련계 자금으로 제작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논란도 있었다.창간 이후 민족일보는 서울신문 공무국에서 제작됐는데,민주당 정권은 61년 3월 초에 서울신문에 압력을 가하여 이 신문의 조판과 인쇄를 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이런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정권이 직접 언론에 대해 적극적인 개입과 통제를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언론자유는 대체로 보장된 편이었다.또한 ‘신문망국론’이라는 비난이 나올 정도로 심각하던 사이비 언론과 사이비 언론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언론계가 스스로 나서기 시작하였다. 제2공화국 시기는 한국에서 제대로 된 언론자유가 처음으로 허용됐고 또 이를 정착시키고 발전시키기 위한 언론계 스스로의 노력도 시작됐다는 점에서역사적 의의가 있었다. 그러나 모처럼 보장된 언론자유를 지키고 언론을 발전시키기 위한 자율적인 노력이 결실을 맺기도 전에 5·16쿠데타가 터졌다.5·16 이후 언론자유는말살되고,언론은 정권의 통제와 특혜 속에 제 몫을 하지 못하며 기업적 성장에만 집착하게 됐다. [박용규 상지대 교수·신문학]
  • [특별기고] 장묘문화의 새 지평을 열자

    요즘 우리 사회에 선조들에 대한 지나친 숭조관념 때문에 장례문화가 시대에 역행하고 있다는 여론과 함께 ‘명당’에 대한 무속적 기복주의에 심취되어 있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는 지적이 폭넓게 제기되고 있다. 전통적 숭조관념의 하나로 승계돼 내려온 오늘날의 장례절차와 명당을 묘지로 선정하려는 관행은 시대착오적,비과학적인 요소가 많다.그 뿐 아니라 국토를 잠식하고 자연경관을 크게 훼손하고 있어 의식과 관행의 전환은 국가정책적 차원에서도 시급히 개선해야할 현실적 과제 중의 하나이다. 서양인들도 조상을 섬기고 부모에 대한 사랑과 존경은 한국인 못지않게 솔직하게 표시한다.그러나 이들의 장묘문화는 한국과는 대조적으로 퍽 실용적이다.장례절차는 가족과 가까운 친지들만이 모여서 간소하고도 정중하고 경건하게 치러진다.그리고 시신은 대부분 화장돼 국가,또는 지방자치단체나 종교단체에서 조성한 공원묘지에 안장된다. 묘지와 비석의 크기도 표준화돼 있으며,한 묘지에 전가족이 안장된 가족묘도 상당히 많다.공원묘지는‘공원’이라는 뜻 그대로 아름다운 관상수와 꽃들로 잘 가꿔져 있다.그리고 도심에 위치해 있거나,도시로부터 멀지 않은 교외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연고자는 언제라도 쉽게 방문할 수 있고,주위에 거주하는 시민도 공원이라는 친근감을 가지고 산책을 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한국 장례문화는 어떠한가.전통적인 장례절차는 상복과 조문객을 맞이하는 절차부터 음식의 접대와 노제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번거로움으로 가득찬 비현실적 형식들이다.또한 자기과시적인 허례허식,음성적인 비리,술과 화투 등으로 얼룩진 경박한 분위기의 경우가 많다. 한국의 국토는 분묘들로 얼룩지고 황폐해 가고 있다.분묘의 수가 전체인구의 43%에 이르며,그 면적 또한 무려 9만6,000여㏊로 전체 산림면적의 1.5%에 해당하고,여의도 면적 900㏊의 120배나 된다.그리고 매년 늘어나는 분묘수도 20여만기여서 해마다 88㏊의 국토가 추가로 잠식되는 추세이다.이만큼 넓은 면적을 묘지가 점유하며 국토가 비생산적인 용도로 잠식당하고 황폐화돼가는 나라는 하늘 아래 한국뿐이다. 더욱 놀라운것은 전국에 산재한 개인묘지의 면적이 전체 묘지면적의 77.5%에 이르고 있으며,한때 100평 이상의 호화롭게 치장된 호화묘지가 109개소에 이르렀다는 점이다.이런 맥락에서 작년에 작고한 재벌총수가 자기와 부인을 화장해 줄 것을 유언한 것은 전근대적인 장례문화의 관행에 경종을 울리는수범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젠 한국도 장례문화의 허례허식,고비용 그리고 번거로운 절차의 전근대성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검소하고 간편하며 정중한 선진국형으로 획기적인 전환을 해야할 때다. 그리고 비생산적 목적으로 엄청난 면적의 국토를 잠식하고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는 분묘문화의 비과학성에서도 벗어나야 한다.‘명당’의 관념이 전혀없고 매장보다는 화장이 일반화돼있는 대부분의 서구사회가 우리보다 훨씬먼저 선진화되고 더 잘 살고 있는 현실은 ‘명당’에 의한 기복주의의 허구성을 실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화장에 대한 국민들의 의식이 긍정적으로 변하고 있다.지난해 생활개혁실천범국민협회가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94년도의 50.1%에서 무려 15%이상 증가한 65.2%의 응답자들이 화장을 수용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이러한 변화의 추세에 부응하여 정부는 장례시설을 현대화하고,묘지의 크기를 보다 더 엄격히 규제하며,묘역의 명실상부한 공원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아울러 현재 계류중에 있는 공설화장장과 납골시설 설치 등을 지방자치단체의 의무사항으로 규정한 장묘법의 조속한 입법화를 추진해야 한다. 한국 장묘문화의 새 지평을 열기 위해서는 국민의식의 전향적인 전환과 제도 및 시설개혁이 함께 할 때만이 비로소 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실천적인 안목으로 다시 한번 성찰해야 한다. 문석남/전남대교수 사회학
  • “진흥왕순수비터에 模造碑라도…”

    72년 북한산서 중앙박물관 이전뒤 유지만 건립북한산 비봉(碑峯)의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 터에 모조비(模造碑)를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등산객들 사이에 나오고 있다.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년)이 한강 유역을 영토로 편입한 뒤 세웠고 국보 제3호로 지정된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는 마모와 훼손이 심해 지난 72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대신 그 자리에는 ‘신라 진흥왕순수비 유지(遺址)’라는 비석이 세워졌다. 그러나 이 비석은 보기에도 흉해 없느니만 못하다는 지적이다.안내간판도없다.등산객들은 따라서 ‘진흥왕순수비 유지’ 비석을 없애고 그 자리에 복제 모조비와 안내판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북한산을 자주 찾는 金天坤씨(56·서울 양천구 목동)는 “모형물을 세워 역사적 의미를 알려줘야 한다”면서 “북한산 성곽도 복원하고 있는 마당에 비석 하나 복원하지 못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말했다.가림산악회 鄭連良등반대장(33)은 “가족 등반객들이 많이 찾는 곳인데도 안내판이 없어 무엇인지 모르고 내려가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지적했다. 문화재관리국 관계자는 “복원문제가 검토되지는 않았으나 필요성이 제기되면 고려하겠다”고 말했다. 김영중 기자
  • 순창 회문산 안보 관광명소로 거듭 난다

    6·25 당시 빨치산 남부군의 본거지였던 전북 순창군 회문산이 국가안보를주제로 한 관광코스로 개발된다. 남원시에 소재한 서부지방산림관리청은 회문산 자연휴양림 안에 빨치산 남부군의 사령부 건물과 빨치산들이 지내던 움막,빨치산 정치학원 등 당시 상황을 알수 있는 각종 시설물을 복원,한국전쟁 발발 50돌이 되는 내년에 개장할 계획이라고 17일 밝혔다.주민들에게 전쟁의 참혹함과 분단의 아픔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다. 산림청은 정확한 고증을 위해 관련자료를 다양하게 수집한 뒤 남부군에 대한 자료를 이곳에 전시할 계획이다. 순창군도 지난해부터 복흥면 추령제에서 열고 있는 비목제를 내년부터 회문산으로 옮겨 개최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군은 내년 9월까지 회문산 안에 비목공원(가칭)을 조성한다.공원 안에는 6·25 당시 희생된 영령들을 기리는 위령탑과 나무로 만든 100개의비목 조형물,추모시가 새겨진 비석 등도 세워진다.행사 기간에 비목 깎기 경연대회와 비목 추모 공연,전쟁 사진전 등도 마련된다. 林得春 순창군수는 “회문산을 주민들의 호국 안보 의식을 고취하는 안보관광 코스로 개발하겠다”고 말했다. 회문산은 영화화된 소설 ‘남부군’의 주요 배경이기도 하다.
  • 분묘도굴 주변 이모저모

    롯데 辛格浩회장 부친(辛鎭洙) 묘소가 파헤쳐져 유해가 도난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5일 롯데그룹은 사건 수습을 놓고 대책을 숙의하느라 부산한 움직임을 보였다. ▒일본에 체류중인 辛회장은 4일 밤 金性會 부속실 상무로부터 전화로 이번사건에 대한 보고를 받았으며 5일 매스컴에 일제히 보도되자 최고경영진을심하게 질책한 것으로 알려졌다.한 측근인사는 辛회장은 사건 보도로 범인이 잠적함으로써 선친의 시신을 찾지 못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辛회장의 장조카인 辛東仁 롯데쇼핑 부사장과 金炳一 롯데호텔 사장(전 롯데그룹 기조실장) 등은 이번 사건이 지금까지 쌓아온 기업이미지에 큰 타격을 줄 것을 우려해 직원들에게 함구령을 내리는 등 그룹내부 단속에 만전을기하고 있다.그러나 신문과 방송 보도를 본 직원들은 매우 황당해하면서도이번 사건으로 辛회장 일가의 호화분묘 실태가 공개됨으로써 국민들로부터비난을 받지나 않을까 염려하기도 했다. ▒辛회장의 부친 鎭洙씨 묘는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 구수리 대동마을 뒤 충골산 중턱 해발 200m쯤에 모친 묘와 나란히 위치해 있다. 서쪽으로 향해 있는 150여평의 묘터는 앞이 훤히 트여 언양읍이 한눈에 들어오며 두 묘의 중간에 큰 상석 1개와 앞에 작은 상석 각 1개씩이 있고 부친 묘 왼쪽에 비석이,좌우에는 석등이 각각 세워져 있다.부친보다 먼저 작고한 모친은 처음 생가 근처에 묘를 썼으나 73년 부친 작고때 이장했다. ▒현장을 감식한 경찰은 鎭洙씨의 유해는 사후 23년이 지났으나 보존이 잘돼있어 수술자국까지 알아 볼 수 있을 정도였다고 밝혔다.감식결과 범인들은 방부처리된 유해의 머리부분만을 가져갔으며 나머지 유해는 수의에 쌓여 있었다. ▒묘지는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 辛회장 생가와는 3㎞쯤 떨어져 있다.생가 관리를 맡고있는 辛회장의 친척 辛기엽씨(74)는 “묘지에는 폭우때 등 가끔 한번씩 둘러본다”고 말했다. 辛회장 일가는 지난 68년 지금의 대암댐 건설 전까지 댐 안쪽에 50여가구와 함께 살다 댐 건립 때 근처로 생가를 옮겼다.당시 흩어졌던 이주민들은 매년 4월 생가에서 모임을 갖으며 이때는 辛회장도 꼭 참석한다.辛회장은 1년에 2∼3차례 생가에 들를 때 성묘를 하며 올 1월 초 다녀간 것으로 알려졌다.
  • [변혁으로서의문학과역사] (15) 예술활동 보장하라 문화인 성명

    작품에서 ‘나’는 고결한 예술가상으로 부각되어 국민들이 고통을 당하는판에 음악가라고 잘 살 수는 없다고 여기며 부당한 이익이 주어진대도 거절할 의지를 분명히 드러낸다.‘나’는 선전부장관 부인의 우아한 자태 앞에서도 속으로는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나의 아내보다 손톱만치도 어여쁘다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고 할 정도였는데,이런 시각으로 본 전시하의 부패타락상에 대하여는 자못 비장하다.“나는 도학자도 아니고,또 무슨 수신선생님도 아니고 노래를 즐겨부르는 성악가입니다.춤인들 왜 싫어하겠습니까! 천만에! 싫어할 이가 있습니까! 나도 이십대 대학생 시대에는 춤에 미쳐서 세상을 모르고 날뛰던 시절도 있었습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피난지에서의 그 광란의 겨울밤을 ‘나’는 “미쳤다! 미쳤어! 모두 머리가 돈 세상이다! 사움은 누가 해주기에.....우리나라 장관이나 고관이나,그리고 그들의 귀부인들은 반드시 댄스 파티를 가지고 거기 도취해야 하는 것인가?”라고 고발한다.“버터나 잼이 맛이 있다는 것도 잘 압니다.그러나 나는 지금 빵이나 버터 보다는 김치 깍두기를 더 소중히 생각해야할 시대와 환경에 있습니다”라는 것이 성악가 ‘나’의 가치관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선전부장관 부인 ‘너’는 댄스홀에서 “어떤 외국 장교같은 사람의 품에 안기어서 미친 듯이 빙빙 내앞을 지나가면서 나에게 던진눈짓”인 “추파”를 보내는 여인으로 그려지는데,그 순간 ‘나’는 “드러운 연!” “일국의 장관의 부인이라는 연이.....”로 명칭을 바꾼다.그러면서도 ‘나’는 ‘너’에게 “온 백성이 다같은 운명에서 괴로운 삶을 이어나가는 것입니다.당신만이 슬프고 당신만이 외로운 것이 아닙니다”고 거듭 충고하며,육욕의 본능에서 헤어날 것을 종용한다. 소설이 이렇고 보면 50년대적인 계엄령 하의 문화풍토에서는 발칵 뒤집힐만한 일이다.그런데 정작 현실비판 의식에 대한 반성은 사라져 버리고 모델문제만 폭력으로 부각되어 버린건 한국적 권위주의 사회의 반영이기도 하다. 더욱 가관인 것은 작가에게 폭행을 행사하고 난 뒤의 처리방법이다.변호사와 언론인과 문화인들에 의한 헌법 제14조(학문과 예술의 자유)에 근거한 부당한 처사라는 항의가 잇따랐다.심지어는 현직 대검찰청 검사까지도 폭행사실을 위법이라고 힐난했는데,당국은 아랑곳 없이 이 작품 게재 잡지에 대한압수를 시작(2월 18일)했고 이에 한국기자협회에서 항의하고 나섰다.그러나이철원 처장은 이 소설에서 ‘선전부장관 부인’이란 어휘 중 ‘선전부장관’이란 다섯자만 삭제하고 계속 발매하도록 타협했다는 공문을 보내는 한편으로는 각신문사 편집국장 앞으로 이 기사를 다루지 말아줄 것을 당부하는공문(2월19일)도 보내 더욱 사건을 복잡미묘하게 만들어 버렸다.당연히 비밀로 내려졌을 이 공문은 정부 기관지였던 ‘서울신문’이 사진판으로 그대로공개(2.22)해버림으로써 이 필화는 드디어 언론계에까지 확대되었다. 당시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에서는 이 사건을 둘러싸고 김광섭·모윤숙의 불문에부치자는 주장과 절대다수의 강경대응책이 맞섰는데,위원장 박종화는 중립적인 입장이었다.이 사건으로 믿던 도끼인 ‘서울신문’에 발등을 찍힌 공보처는 박종화사장의 경질을 노려 경무대 비서 김광섭을 천거했으나 표대결에서박종화에게 고배를 마셨다.그러나 공정보도의 의지를 지녔던 오종식 주필은물러났고,이 사건의 취재를 주도했던 사회부장 역시 일찌감치 퇴사했다는 후일담은 한국 현대언론사의 또 하나의 흑막을 보여준다. 이에 대한 다른 문화인들의 자세는 어땠을까.우선 재구(在邱.대구로 피난한 문화인들)문화인 45명(전숙희·김팔봉·최정희·박두진·조지훈·박목월·정비석·홍성유·박인환 등 문인과 김동원·이해랑·최은희·김승호 등 예술인)은 성명서를 발표(2.21)했는데 그 요지는 인권유린의 폭력범 처벌과,이철원 처장 부인 이씨는 “김광주씨를 비롯하여 전국 문화인에게 신문지상을 통하여 사죄하라”는 것,그리고 “진정한 민주예술 활동의 발전과 보장”이 포함되어 있었다.전시 아래서 이만한 성명이 나온 것은 가히 기념비적인 사건이라 하겠다. 문학예술을 재단하는데 익숙한 권력은 바로 이런 성명이 발표되던 날 돌연정책을 바꿔 ‘광무신문지법’에 의거해 잡지 ‘자유세계’에서 ‘나는 너를 싫어한다’가 실린 16쪽 전체를 삭제토록 지시했다. 任軒永 문학평론가
  • 與圈, 정책난맥상 해법찾기 골몰

    집권 2년째를 맞는 국민회의 앞엔 간단치 않은 미래가 놓여있다.‘밀월시대’를 마감하듯 여론은 앞다퉈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숨죽이던 각종 이해단체들도 서서히 자기 색깔을 드러내는 상황이다. 지난 1년 국민회의가 도출한 성과도 적지 않지만 ‘초보 집권당’이란 일각의 우려가 말끔히 씻겼다고 보기는 어렵다.대표적인 것이 정책의 혼선이다. 사회안전망 구축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던 국민연금 실시가 유보됐고 1년전부터 공언했던 인권위 설립도 무한정 표류 상태다.여론 수렴없이 발표한 한자병용 실시 방침도 곳곳에서 마찰이 일고있다.IMF 한파로 찌든 국민들의 걱정을 오히려 가중시키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하지만 여권은 봇물 터지듯 불거지는 정책 난맥상을 겸허히 수용하면서 심기일전의 각오를 다지고 있다.26일 朴智元청와대 대변인은 “일부 부처나 당정간 사전 정책조율이 안되고 있다는 지적을 겸허히 받아들인다”며 시정 의사를 분명히 했다.朴대변인은 이어 “앞으로 각 부처가 정책을 발표하기 전에 관계부처와 여당의 조율을 거쳐야 한다”며 정책혼선 방지에 주력할 뜻을 밝혔다. 여권도 최근의 정책혼선이 사전 예방이 가능했던 ‘인재(人災)’로 판단,구체적인 대책마련에 나섰다.청와대와 당의 핵심간부가 참여하는 ‘국정운영전략회의(가칭)’와 같은 비공식 협의기구를 운영하는 방안이다.청와대 각 수석비석관과 각 부처 차관,당의 정조위원장이 참여하는 ‘국정운영조정회의’의 신설도 검토 중이다. 여권의 이러한 ‘다짐’이 현실로 이어지려면 적어도 몇가지 구조개선이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적지않다.우선 ‘대행체제’라는 지도부의 취약성을극복하고 ‘책임경영’이 정착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권한도 책임도 없는 현 지도부의 무기력이 당의 침체로 이어지고 무책임한 정책이 남발된다는 진단이다. 당의 구심력을 회복해 강력하고 활기찬 조직으로 재건돼야 한다는 처방전도 많다.權魯甲전부총재의 당무복귀에 대해 당 안팎의 기대가 쏠리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시민단체에서는 ‘정체성 회복’과 ‘원칙있는 정치’를 주문했다.개혁의주체와 대상이 혼재된 상황에서자칫 ‘개혁정치’의 실패로 이어질수 있다는 우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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