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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원구 새달5일 ‘당뇨환자 걷기대회’

    당뇨병 환자들을 위한 이색 행사가 마련된다. 노원구는 다음달 5일 월계동에 위치한 초안산 비석골 공원에서 ‘당뇨인 산길 걷기대회’를 개최한다.참가자들의경쟁보다는 당뇨관리의 중요성을 홍보하기 위해 마련된 행사다. 참가자들은 개인별 주문 도시락으로 점심식사를 마친 뒤혈당을 체크하고 1시간 정도 산길을 걷는다. 걷기가 끝난후 다시 혈당을 체크해 운동 전과 후의 상태를 비교하고 전문의에게 평소의 건강관리 요령을 지도받는다. 참가 희망자는 선착순 100명으로 한정하며 구보건소 지역보건과로 접수하면 된다.문의 950-3424. 이동구기자yidonggu@
  • “진짜 곤장 맞으실 분~”

    “진짜 곤장 맞으실 분 없습니까” 충북 충주예총(회장 권대기)이 다음달 8일부터 1주일간 열리는 우륵문화제 행사 동안 조선시대 대표적인 형벌인 곤장맞기 체험장을 운영한다. 시민과 관람객들을 대상으로 선조들의 다양한 옛 민속을체험할 수 있도록 중앙공원(옛 관아공원)에 체험장을 마련한 것이다.곤장 맞기를 희망하는 관객은 즉석에서 칼을 뒤집어 쓰고 있다가 십자형 형틀에 묶인 채 포졸들이 휘두르는 곤장을 맞게 된다.곤장 맞기는 다른 전통 체험 행사 가운데에서도 공포 분위가와 웃음이 어우러져 관객들로부터인기를 끌 것으로 기대된다. 관람객들은 이밖에 화살던지기와 떡메치기,제기차기,비석던지기,자치기,구슬치기,사방치기,널뛰기 등의 민속놀이에도 참여할 수 있다. 매일 오후 6시에는 관찰사 집무 모습이 재현되고 전통 의복을 입은 포졸들이 창과 칼 등을 들고 관아 주변을 순찰하며 관광객을 안내한다.야간에는 정문에 청사초롱과 횃불을밝혀 관아 분위기를 조성하게 된다. 충주 김동진기자 kdj@
  • [편지로 본 1940년대 문단秘史](9)월북작가 김남천

    편지를 잡문 차원에서 본격적인 문학 토론의 마당으로 격조있게 끌어올린 사람은 김남천(金南天,본명 孝植·1911∼?)이다.평남 성천군청에 근무했던 아버지나,일본 유학중 결혼하게 된 첫 번째 부인의 아버지가 성천 군수였다는 사실은 김남천의 가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육중한 몸매에 미남이기도 했던 그는 일본 호세이(法政)대 시절부터 좌익운동에 투신,당대 운동권의 주역 임화,최승희의 남편 안막 등과 도쿄에서 카프 활동을 전개하면서 일약 지도적 인물로 부상한다. 이후 그의 이름은 언제나 임화와 나란히 붙어 다니면서 카프 후반기를 제압하는 주역으로,비단 문학활동만이 아니라 평양고무공장 파업(1930년)에 참여하는 등 현장성 강한 운동으로 제1차 카프 검거(1931년 8월)때 2년 실형을 선고 받았다. 1933년초 병보석으로 출옥하나 두 딸을 남겨둔 채 아내가죽어 조신하던 터라 이듬해 카프 제2차 검거 때는 구속을 면할 수 있었다.1935년 평양에서 상경한 그는 임화,김기진과함께 경기도 경무부에 카프 해산계를 제출하여,10년에 걸친한국문학사에서 카프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고,이 사실 때문에 이들 셋은 두고두고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여운형이 발행인이었던 조선중앙일보(1933년 2월 창간)에입사했던 그는 근대 민족언론사의 획을 그었던 손기정 일장기 말소사건의 간접적인 피해자가 된다.베를린 올림픽(1936년 8월1일)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의 사진을 국내에 처음소개한 것은 8월 25일자 동아일보였고,이 사건으로 사회부장이었던 작가 현진건이 언론계를 떠난 이야기는 다 아는 사실이다.신문사 끼리의 경쟁심리 때문에 조선중앙일보는 손기정 가슴에 새겨져 있는 일장기를 없애고는 그 위에다 희미한태극까지 부각시켜 자진 휴간(9월5일)을 거쳐 아예 폐간되었다.바로 김남천의 실직 사연인즉슨 이러하다.이즈음 그는 창작과 비평의 양수잡이로 맹활약하면서 문단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는데,최정희에게 보낸 편지는 이런 내막이 담겨있다. 그는 최정희의 소설 ‘흉가’에 대하여 월평 ‘여류작가의난관과 ‘흉가’ 검토의 중점’(조선일보 1937년 4월8일)에서 기대와 비판을 동시에 가하고 있다.당시 김남천의 태도에 대해서는 출옥후 이미 전향했다는 관점과,탄압 속에서도 꾸준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을 고수했다는 주장이 다 있는데,이 편지로 미뤄볼 때 후자 쪽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난다. 문학사적으로 매우 의미있는 글이다.김남천의 비평활동에 불만을 품은 작가들은 많았는데,편지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그를 비난한 건 극작가 김진수(金鎭壽.1909∼1966년)였다.평남 중화군 출신인 그는 릿교(立敎)대학 졸업 후 만주국 간도성 연길현(延吉縣) 용정가(龍井街) 은진(恩眞)국민고등학교에근무(1938∼45년)했다.1920년 캐나다인 부두일(富斗一)이 창립한 이 학교는 송몽규 문익환 윤동주가 다녔던,민족의식이강한 명문교인데 1946년 ‘룡정중학’으로 병합되어 오늘날중국 동북지역의 관광명소로 남아있다. 그가 최정희에게 보낸 편지지는 바로 이 학교 공문서 서식용지이며,내용은 김남천의 평문 ‘동시대인의 거리감-9월 창작평’을 화두로 삼는다.최정희의 ‘지맥(地脈)’을 언급한이 평문이 김진수에게는 무척 못 마땅했었던 것으로 썼지만속내는자신의 분풀이가 더 강한 것으로 볼 수 있다.글을 쓴 날자가 9월28일,책방에서 ‘문장’지를 샀다면서 그는 김남천을 한껏 물어뜯는다.누가 읽어도 편견과 속좁음이 느껴지는 이 글을 왜 썼을까.김진수는 일본 유학시절부터 황순원등과 학생예술좌를 창립(1935년),연극활동을 했는데,문단활동은 극예술연구회(1931년 김진섭 유치진 이헌구 등이 창립) 공모에서 장막극 ‘길’이 당선(1936년)되고서였다.그가 단막극 ‘향연’을 ‘조광’에 발표한 것은 1938년 11월호였는데,김남천은 발 빠르게 조선일보 창작평 ‘미성년의 문학-김진수와 권명수’(1938년 11월11일)에서 “극연(劇硏) 당선작가(불행히 나는 당선작을 읽지 못했다)김진수씨의 희곡 ‘향연’을 읽고 나서 나는 이 분이 미혼자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다”는 서두로 시작하여 그리 탐탁찮은 평을 가해댔다. 김남천에 대한 유감은 아마 이때부터 똬리를 튼 것 같다. 불만은 또 있다.김진수는 애시당초 문학에서 사회니,민족이니 하는데는 별 관심이 없었다.그러나 김진수의 울분 속에는 나름대로의 심미안이 탄탄하게 드러난다.작가 최명익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바로 김진수의 미학적 체질을 엿볼 수있는 대목이다.친일작가 장혁주와 최대의 친일평론가 김문집은 긍정하면서 김남천에 대해서는 못마땅하게 비꼰 김진수가 8·15 후에 어떤 자세를 취했을까는 물으나마나다.“유치진과 더불어 해방 이후부터 50년대 희곡계의 주도적 세력이었던 보수주의적 극작가들의 보편적인 유형”(박명진 ‘한국희곡 이데올로기’)이었다는 게 정평이다. 김진수에게 그렇게도 못 마땅했던 김남천은 8·15 후 임화와 함께 화려하게 재기,그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다가 월북,남로계의 몰락으로 남북한 문학사의 지평으로부터 사라져버린 별이 되었다.통일은 아마 이들의 복권과 더불어 다가 올것이다.역사는 어떤 탄압으로도 그 흐름을 막을 수 없다.평북 의주에서 태어나 니혼(日本)대학을 중퇴한 정비석(1911∼1991년)이 ‘성황당’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1937년)되어 상경을 꿈꾸다가 매일신보 기자가 된 것이 1941년 10월이니,그가 최정희의 소설 ‘인맥’(1940년 4월)을읽고 감동하여 보낸 편지는 이즈음의 것이다.그가 상경 직전 있었던 곳은 평북 용천군.황해도 연백 출신으로 백천(白川)온천을경영하며 많은 문인들에게 휴식을 제공했던 장만영(1914∼1975년)은 뭔가 최정희와 토라짐 같은 게 내비치는 사연을 담고 있다.마음껏 상상의 날개를 펼쳐 보시라. 이렇게 한쪽에서는 싸우며 고뇌하는 다른 한쪽에서는 그 고뇌하는 사람들에게 욕설을 퍼붓고,또 어느 다른 곳에서는 친일에 열을 올려 그 대가로 호사를 누리는가 하면 어느 곳에서는 유유자적 즐기고 있는 속에서 역사는 흐른다.이럴 때대체 남도출신 문학인들은 어디서 무얼 하고 지냈을까.김동리(金東里,본명 始鍾·1913∼1995년)는 이 무렵 참담한 심경으로 경신학교에다 휴학계를 내고 형 범부(凡父,1897∼1966년)가 살던 부산으로 내려갔다.동양사상의 대가인 이 당대의 수재이자 기인인 범부가 어렵사리 꾸려가는 살림살이에 얹히게 된 동리는 영도다리에 떨어져 죽어 버릴까도 생각했으나,어찌 연이 닿아 형이 은신처로 삼았던 경남 사천군 다솔사(多率寺)로 거처를옮긴 게 1935년이었다.신춘문예 당선상금을 밑천 삼아 창작에 몰두하겠다는 결의였다. 김종직(金宗直)의 17대손인 이들 형제의 성공담에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없지 않다.무오사화에 얽혀 부관참시형을 당한점필재 김종직의 후손들은 그 화를 피하여 월성군 서면 계림골로 숨어들어 정쟁을 피하곤 했다.이런 문중일수록 풍수지리에 밝아 김동리의 할아버지도 선산을 보유했는데,한 권세가가 그 터에다 묘를 쓰자 그는 겁도 없이 그걸 파헤쳐 버렸다고 전한다.권세가는 할아버지를 귀양보냈는데 돌아와서는또 그 권세가의 무덤을 파헤쳐 다시 귀양,또 귀향하여 파헤치기를 세 번 되풀이하자 세도가의 기가 꺾여 포기했다는 전설 아닌 사실이 전한다.그 할아버지의 본댁은 이 와중에서자살해 버렸고 재혼하여 얻은 아들이 김동리의 아버지 김임수(壬守)이다.권력의 피해를 입으면 이를 피하거나 동경하거나 혹은 도전한다.아니면 이 세가지를 다 겸하기도 한다.김동리 일가가 지녔던 이런 가풍은 그의 문학과 무관하지 않다.샤머니즘적 인습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로 입문한 것은 어머니였고,그녀의 영향으로 동리는 경주 제일교회 부속학교를나와 대구 계성학교에 다니다가 서울의 경신으로 전학했지만 중퇴했다. 다솔사에서 이내 해인사로 거처를 옮긴 김동리는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자 약간은 들떠서 상경하나 이 시골뜨기 신인에게 인정을 베풀기에는 당시 경성(京城,현 서울)문단은 너무 재재다사(才才多士)에다 각박했다.같은 해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동료인 서정주와 어울리면서 울분을달래던 그는 이듬해에 다솔사가 세운 광명학원 교사로 내려가게 된다.처음에는 다솔사에 기거하며 광명학원까지 걸어다니던 김동리는 그 지방의 몰락 토호집에 하숙하다가 그 집 딸 김월계와 결혼(1938년),학교 부근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이때 그는 쇠약과 우울증으로 수필 한 편도 쓸 수 없었던 지경인데도 선비의 후예다운 기개를 보여준다. “현실적으로 아무리 큰 불평이 있더라도 내 자신의 신념이,일테면 천지의 정기(正氣)와 통하는 것이라고 철칙같이 믿고 있으니까,그른 것은 현실의 그것이요,그 그른 현실은 천지의약속에 따라 시정될 것이라고,이건 ‘만만디’식이라고 웃으실는지 모르지만 여기엔 조곰도 독기(毒氣)가 들어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그러니까 말하자면 결코 염세자(厭世者)도 아니겠습니다.”이 편지들은 대략 1940년부터 1943년 그가 징용을 피해 사천읍에서 양곡조합 촉탁이 되기 이전에 보낸 것들인데,입장이달랐던 선배에게 꺼내기 어려운 화두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이만큼한 절조 위에서라야 순수문학은 제 자리를 찾을 수있을 터이다.그의 발신지 주소는 정확히 ‘사천군 곤명(昆明)면 원전(院田)' 이다. ▲임헌영 문학평론가·중앙대 겸임교수
  • 파인아들 김영식씨 공개 작고문인 서한의 의미

    *학국문학사 빈공간 메워줄 귀중한 자료””. 한국문학사는 흔히 ‘겨울언덕에 홀로 서 있는 나목(裸木)’으로 비유된다.작가들에 대한 작품론은 풍성한 편이지만,작가들이 활동한 시대와 작가들의 개인적 여건 등을 알 수있는 연구는 미흡하기 때문이다.이는 서류 등 자료를 소홀히 하는 경향에다,사생활에 관한 자료를 노출하기 꺼려 하는 풍토 탓이다. 최근 김영식씨가 공개한 문인 48명의 사신(私信) 214통은 한국문학사의 이같은 ‘빈 공간’을 메워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서 학계와 문단의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그동안 더러 문인들의 육필서한이 공개되기는 했지만 수량이 적었다.아울러 특정문인에 한정된 것이어서 한국문단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반면 김영식씨가 내놓은 서한들은 수량도 방대하거니와 일제하 민족진영과 친일성향의 작가는 물론 해방후 월북작가 등 각 분야를 망라하고 있어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편지는 1930년대 중반부터 1940년대 중반까지 오고간 것이 대부분이다. 김영식씨는 이달말 파인(巴人) 김동환 시인의탄생 100주년에 맞춰 기념행사를 갖기 위해 8년여전부터 각종 자료를모아왔다.이 편지는 자신이 소장해오던 것과 최정희 여사에서 태어난 이복형제들이 갖고 있던 것들이다. 김영식씨는 “문인들의 편지 속에서 선친과 관련된 ‘흔적’을 발견하고 반가움과 함께 복잡미묘한 감정이 들었다”면서 “가치있는 자료는 수요자,특히 연구자에게 자유롭게활용될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편지를 공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 “이 편지들은 첫 공개되는 것이고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문단교류기의 편린들로 당대의 문예사조,동호인관계,특정 문인의 개성,송수신자간의 내밀한 사연까지 고루 다루고 있다”면서 “이번에 밝힌 편지 말고도 60여통이더 있으나,관련자들 가운데 여럿이 생존해 있어 추후 공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번에 공개된 문인들의 사신은파인 김동환 시인이 부인 신원혜에게 보낸 32통을 제외하면,나머지 182통은 모두 문학사적 가치가 큰 ‘사료’들이다. 이 편지의 수신자는 주로 소설가 최정희 여사인데,이는 그가 당시 파인 김동환 시인이 운영하던 삼천리사의 기자로근무하면서 문인들에게 원고청탁 등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파인 김동환 시인의 편지가 적은 것은 1946년 12월 당시 파인 가족이 서울 종로구 적선동 183번지(현 정부세종로청사자리)에 살고 있을 때 집에 불이 나 각종 자료 등이 모두없어졌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임헌영씨는 이 편지들에 대해 “우리 근대문학사 한 세기를 담아낸 기록”이라면서 “문인 몇 사람의 사신 차원을 넘어 문화재적 가치를 갖는 사료”라고 평가했다.임헌영씨는 또 “외국의 경우 문인들의 개인 전집에 작품은 물론 그가 주고받은 사신도 전부 수록하고 있다”면서“문인 인물연구는 물론 그동안 숨겨진 우리 문단사의 상당부분을 되살릴 수 있을 만한 자료”라고 말했다. 임헌영씨는 이 편지들은 ▲일제 때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KAPF)-비(非)카프계열 문인들의 교류 파악 ▲남북한의 주요 문인 망라 ▲파인에서부터 학생시인 박봉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층 포함 ▲최정희-모윤숙-노천명 등 당시 여류문인의 인간적 관계와 사생활 이해 ▲김남천의 문학비평 소개 ▲김사량의 편지를 통한 재일조선인 문단의 활동상 파악 ▲문단과 거의 교류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진 이육사의 문단 교류 등의 사실을 처음 또는 재확인할 수 있는 자료라고 밝혔다. 임헌영씨는 대한매일에 이 편지를 토대로 한 시리즈를 연재하기 위해 지난 한달여동안 기존 문단사와 비사 등을 확인하고 김영식씨로부터 가족사 등에 대해 청취했다. 정운현기자 jwh59@. ■파인 김동환·최정희는. 파인 김동환(1901∼1950년 납북후 사망 추정).그는 ‘국경의 밤’으로 우리 문학사에 굵은 획을 그은 작가이다.장편서사시와 민요시 창작을 주도했다.1925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에 가담하는 등 한때 계급문학에 관심을보였으나 주된 정조는 민족정신이었다.고전에 몰두해 가사문학 등 전통문학과의 접목을 시도하면서 민요시를 왕성하게 발표했으며,1929년에는 종합 대중잡지 ‘삼천리’를 창간하기도 했다. 그러나 치열한 현실 의식의 부족으로 30년대 말부터 친일문학의 늪에 빠져들었고,1941년8월 친일단체를 망라한 ‘임전대책협의회’의 발족에 앞장서기도 했다.1931년쯤 ‘삼천리’에 입사한 최정희와의 ‘관계’가 1942년에 알려져화제가 된 뒤 43년부터 동거에 들어갔다. 소설가 최정희는 1931년 ‘정당한 스파이’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뒤 주로 일제하 지식인 여성의 고통을 다룬 작품을 발표했다.‘인간문제’로 유명한 당대의 여류소설가 강경애가 민족의 수난과 정면대결을 시도한 작가였다면 최정희는 여성의 문제에 일찍 눈을 뜬 작가였다.‘지맥’‘인맥’‘천맥’ 등의 대표작에서 신여성의 진보적 의식이 당대의경제적 사회적 관습에 어떻게 짓눌리는가를 주로 다뤘다. 이종수기자 vielee@. ■편지 주인공들. 파인 김동환 시인과 최정희 여사가 보관해오던 편지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우리 근대문학사에 뚜렷한 발자국을 남긴‘거목’들이다. 이들 중에는 국권상실기에 문학을 통해 일제에 대해 저항의식을 표출하던 사람도,친일성향을 띠었던 사람들도 있다. 또한 광복 후 북한에서 활동한 사람들도 제법 많다.이는 우리 역사의굴곡을 여실히 보여준다.이들은 편지에서 생활의 애환을 털어놓거나,문학과 역사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모습을 보여주는 등 문인의 각종 고뇌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우선 편지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국내에 비교적 자료가 적은 월북시인 및 작가들의 것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이들에대한 문학적 연구는 지난 90년대초 월북문인 해금조치로 조금씩 이뤄지고 있으나 사료가 적은 탓에,학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편지를 남긴 월북 시인 및 작가는 박태원·한설야·이태준·김남천·이현욱·안회남·박찬모·이용악·김사량 등이다.박태원은 말년에 중풍으로 전신불수,실명상태에서 ‘갑오농민전쟁’을 탈고해 ‘한국의 밀턴’으로 불린다.한설야는 북한에서 교육문화상·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을,김남천·이태준은 각각 문학가 단체에서 요직을 지냈다.또 이현욱은 임화의 두번째 부인으로,지하련이라는 필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또 편지를 남긴 사람들 가운데는 친일성향의 작품이나 글을 남겼거나,친일단체에서 활동한 인사들도 적지 않다.김동환을 비롯해 백철·이헌구·정인택·박종화·유진오·정비석·노천명·모윤숙 등이 그들이다.박종화는 학병권유 글을 썼고,노천명은 일제의 태평양전쟁을 미화하는 시를 썼다. 다른 여러 인사들도 친일성향의 글을 몇 편씩 남겼다.그러나 ‘민족시인’ 이육사의 엽서 1통도 보여 눈길을 끈다. 최근까지 활동했던 소설가 김동리(95년 작고)와 황순원(2000년 작고)의 편지도 포함돼 있다.또 말년까지 고향인 경남 진주에서 언론인으로 활약한 설창수 시인의 편지도 있다. 그는 일본 유학시절의 항일운동 공로로 지난 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특히 편지를 주고받은 사람이 최정희인지라 같은 여성인 모윤숙(22통),노천명(21통)등과 나눈 편지가 많다.이들 3명은 당시 문단에서 ‘쌈바가라스’(‘삼총사’의 일본식 표현)로 불릴 만큼 정이 도타웠다.편지에는 이들의 사생활과 개인적 친분관계가 숨김없이 드러나 자못 흥미를 끈다. 정운현기자
  • ‘義牛의 눈물’을 아시나요

    경북 상주시가 정의(情誼)있고 의리있는 행동으로 잔잔한감동을 주고 있는 소의 의행(義行)알리기에 나섰다. 상주시는 9일 사벌면 묵상리 임봉선할머니(67)의 13년생 한우가 자연사하면 적당한 장소를 선정해 의우총(義牛塚)을 만들고 유적지화하는 등 민속사료로 보존될 수 있도록할 계획이다고 밝혔다. 이 암소는 주인이 아니면서도 오랫동안 날마다 먹이를 주고 쓰다듬어 주는 등 자신을 정성스레 보살펴준 이웃집 김보배 할머니(당시 83세)가 94년 5월 23일 숨지자 그 정을 못잊어 망자의 삼우제날 외양간을 뛰쳐 나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6㎞가량 떨어진 김 할머니의 묘지를 찾아가 눈물을 글썽였다.주민들은 이를 목격하고 감동해 마지 않았다. 더구나 이 소는 주인과 함께 김 할머니의 산소에서 집으로돌아오면서 곧바로 자기 외양간으로 가지 않고 이웃의 김 할머니 빈소를 찾은 뒤에야 외양간으로 돌아왔다.김 할머니의유족들도 감동해 이 소에게 조문객들과 똑같이 장례식 음식을 대접했다. 이후 마을 주민들은 마을회관 앞에 이같은 한우의 의행을기리기 위해 ‘의로운 소’ 비석을 건립하는 등 각별하게 보살펴 왔다. 특히 최근에는 김 할머니의 손자 서동영씨(47)와 동물 관련 민속사료 연구가인 우영부씨(55) 등이 이 소의 도축 거래를 막기 위해 소값 200만원을 소유주인 임 할머니에게 주고 아예 소유권을 공동화했다. 상주 한찬규기자 cghan@
  • 공동육아조합 ‘우리 어린이집’

    “나도 할래,나도 하고 싶어” “차례를 지켜야지,조금만 기다려” 5일 오전 서울 마포구 성산동 ‘우리어린이집’ 1층 주방은 아이들의 소리로 떠들썩하다.다른 방에서 나는 꼬마들의 깔깔대는 웃음소리까지 보태져 ‘쏴’하는 비소리도 묻힐정도다. 우리어린이집은 공동육아를 꿈꾸는 부모 60여명이 지난 94년 450만원씩을 출자해 설립한 국내 최초의 공동육아협동조합 어린이집이다.2층 주택을 임대해 꾸며진 이곳은 현재 39가구 아이 41명의 보금자리다.교사 9명은 모두 별명으로 불린다.아이,부모,교사가 동등한 인격체라는 이념에 따라 서로 반말을 쓴다. 아이들이 주방에서 만들고 있는 것은 점심 때 반찬으로 쓰일 계란말이.먹거리는 모두 유기농법으로 재배한 것이다. 음식은 교사의 안내에 따라 아이들이 직접 만든다.‘꽃다지’ 이경의 교사(26·여) 옆에 앞다퉈 달라붙어 앉은 경진이(6·여),진영이(6·여),한결이(6·여),윤재(6),준현이(6),힘찬이(6),서윤이(6),재희(5),권범이(5)는 서로 자기가 계란을 풀겠다고 난리다. 아이들이 아웅다웅하는 사이경진이는 능숙한 솜씨로 호박과 당근을 썬다.잘게 썬 호박과 당근을 칼로 그릇에 담는품새가 여섯살배기로는 보이지 않는다. “재희야 이번엔 계란을 말아볼까?하나,둘,셋 하면 조금씩 달걀을 말아 올려.하나,둘,셋!” “히히,잘 안돼” “괜찮아,다시 한번 하나,둘,셋!” “야,됐다.이번에 됐어!” 한쪽에 앉아 구경만 하던 재희도 프라이팬에서 노릿노릿익어가는 계란을 마는 것이 재미있는 모양이다. “너무 크게 썰면 안돼” “이렇게?” “그렇지,아주 잘 하네” 돌돌 말려진 계란말이를 아이들의 입에 알맞은 크기로 써는 것은 준현이가 맡았다.아이들과 장난만 치더니 꽤 익숙한 솜씨로 칼을 놀린다. “자,다 됐다.이번엔 방으로 음식을 날라야지” 아이들은 한아름이나 되는 음식 접시를 가슴에 가득 안고낑낑대며 2층 방으로 나른다.방에서는 가윤이(4·여)와 기웅이(4)가 잽싸게 상을 편다. 꽃다지가 아이들을 상 주위로 빙 둘러 앉힌 뒤 노래를 부르자 모두들 까르르 웃으며 합창을 한다.노래가 끝나자 아이들의 눈은 된장국 배식을 맡은 오늘의 ‘국도우미’ 힘찬이에게 모인다. “서윤이 나와,경진이 나와,예림이 나와,예빈이 나와…아저씨두 나와!” 힘찬이가 이름을 부르자 귀를 쫑긋 세웠던 아이들은 차례로 줄을 선다.순서를 두고 다투는 법은 없다.커다란 접시에 자기가 먹을 만큼 밥과 계란말이,김치볶음 등을 담아 자리로 와 먹기 시작한다. “야,내거야.왜 니가 먹냐?” “좀 먹으면 어떠냐!” 이내 시끌벅적해진다.서로 꼬집고 때리기도 한다. “오늘 설거지 당번은 의연이와 준현이지?” 아이들이 깨끗이 비운 자신의 밥그릇을 1층 주방으로 나르자,한결이와 서윤이가 아이들의 키에 맞도록 낮게 만들어진 싱크대에서 부지런히 설거지를 한다.아이들이 처리하기에벅찬 큰 그릇은 이날 아마(아빠+엄마) 봉사자인 ‘하마’손용태(孫龍泰·41)씨의 몫이다. 손씨는 성준이(4)의 아버지다.설거지가 끝나자 당번에게는상으로 포도 주스 한잔씩이 주어진다. 원감 ‘그대로’ 정영화(鄭榮花·34·여) 교사는 “공동육아협동조합은 말 그대로 내 아이가 아닌 ‘우리 아이’를‘우리’가 키우는 영·유아 보육기관”이라면서 “날마다오전에는 성미산이나 한강둔치 등으로 나들이를 나가 아이들이 자연 안에서 마음껏 뛰놀도록 한다”고 설명했다. ‘우리어린이집’은 자연친화적인 교육방법을 가장 중시한다.계절마다 바뀌는 자연을 관찰하고 그 안에서 마음껏 뛰어놀게 한다. 강강술래,딱지치기,투호놀이,긴줄넘기,사방치기,비석치기등 우리 고유의 놀이도 함께 한다.한글이나 수학,영어 등은 일절 가르치지 않는다. 빗소리도 잦아들 즈음 방 곳곳에서는 아이들이 평화스러운 표정으로 낮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전영우기자 anselmus@. ■ 정병호 한양대 교수“남의 아이 행복이 내 아이 행복”. “내 아이만 잘 키운다고 그 아이가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국내 공동육아 운동을 이끌어온 한양대 정병호(鄭炳浩·46·문화인류학) 교수는 “‘내 아이’도 ‘남의 아이’와 함께 살아가야 하므로 ‘우리 아이’를 잘 키워야 행복한 삶에 이를 수 있다”며 이같이 반문했다. 정 교수는 “산업화와 도시화를 통해 잃어버린 공동체의복원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시급히 이뤄야 할 목표”라면서“공동육아를 통해 부모들이 네트워크를 형성,자기 동네와지역사회에 관심을 갖게 되고 ‘시민적 참여’에까지 이르게 된다”고 공동육아 운동의 의의를 강조했다. 특히 아버지들이 육아와 집안일에 적극 참여하게 돼 가정이 더욱 화목해지는 부수적 효과도 있으며 아이들의 ‘대안적 사회화’와 어른들의 ‘건전한 재사회화’도 이뤄진다는게 정 교수의 설명이다. 공동육아로 키운 아이들이 취학 뒤 학업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우리 사회에서 일반화된 과잉 조기교육이야말로 어린이의 인권을 유린하는 것”이라면서 “발달 단계에 맞는 교육을 받아야 지적 호기심을 유지,공부에대한 흥미를 잃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어 “한글이나 숫자를 제대로 모르고 들어간 아이들이 초등학교에서 높은 학업 성취도를 보이는 사례가 많다”고 덧붙였다. 정 교수는 “공동육아가 유일한 대안은 아니며 지금도 계속 제도권 교육의 폐해에 대한 다양한 대안을 찾기 위해 노력중”이라면서 “우리의 미래인 아이들이 따뜻한 마음씨와 탐구정신을 지닌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금이라도국가와 사회가 적극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동환기자 sunstory@. ■공동육아란…부모가 교육에 직접 관여 . 요즘 젊은 부모들이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공동육아란 공동체 이념에 입각해 취학 전 아동이나 초등학생들을 여러가족이 함께 기르고 가르치는 ‘대안’ 교육방식이다.내 아이,남의 아이를 가리지 않는 ‘확대 가족’을 지향한다. 지식이나 인지능력 발달을 중시하는 기존의 유아교육과는달리 자연친화적인 교육 방법 등을 통해 나이에 걸맞은 건전한 인격의 발달을 1차적인 목표로 한다.아이들이 마음껏뛰어놀 수 있도록 배려함으로써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사고와 함께 주위사람들과 강한 정서적 유대를 가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다. 보육기관 설립·운영 방식은 협동조합과 품앗이 방식 등여러가지가 있다.협동조합 방식은 부모들이 수백만원씩을출자,보육기관을 운영할 장소를 임대하거나 구입해 직접 운영한다.품앗이나 두레 형태로 자신들의 집을 개방,돌아가면서 아이들을 돌보는 조금 저렴한 방식도 있다.공동육아협동조합,품앗이공동육아,희망세상 어린이집 등이 공동육아를실천하는 대표적인 곳이다. 공동육아의 가장 큰 특징은 교사가 중심이 되는 기존 제도권 교육과는 달리 부모들이 교육에 직접 깊숙이 관여한다는 것이다.직접 교사로 나서는 학부모도 있다. 학부모들이 이사장을 비롯,교육·홍보·생활문화·조직·시설·회계 등의 이사를 맡아 운영을 책임진다.부모들은 최소한 한 부문에 참여해야 한다.매월 한번씩 청소 등 노력봉사를 해야 하고,교사들과 함께 토론을 거쳐 구체적인 교육프로그램도 짜야 한다. 지역별로 30세대 안팎이 공동육아협동조합을 구성,운영하고 있는 어린이집은 전국에 걸쳐 37개로 1,000여명의 어린이들이 다니고 있다.최근에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방과후 프로그램도 확산되고 있으며,내년에는 정원 10명 안팎의 대안초등학교도 설립될 전망이다. 그러나 협동조합식 운영 방식은 초기에 수백만원의 출자금을 내야 하고,매월 들어가는 교육비도 30만원 안팎이어서“중산층 이상을 위한대안이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되고있다. 공동육아연구원 손이선(孫利瑄·33·여) 사무차장은 “공동육아는 아이들의 교육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안 초·중등학교를 통해 잃어버린 사회의 공동체 정신을 회복하려는데 궁극적인 목표가 있다”면서 “별도의 기금을 조성,전국에 저소득층을 위한 4개의 ‘방과후’ 프로그램을 운영중이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자신의 출자금을 저소득층과 탈북자,편부모 등에게 기증하는 운동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영우기자.
  • [이사람] 영월문화재 지킴이 이예진양

    문화재 지킴이.그에게 참 잘 어울리는 말이다.고향인 강원도 영월의 문화유적지 보호에 앞장서 온 이예진양(18).그의 삶의 풍경은 또래의 학생들과는 달랐다.많은 친구들이 H.O.T.에 열광할 때 그는 전통 문화재의 아름다움을 찾아다녔다.그러나 문화유적지들은 훼손되고 향기를 잃어가고 있었다.그는 어른들의 나태함의 벽을 무너뜨려 퇴락해 가는 문화유적지에 다시 생명력을 불어넣도록 했다.그렇지만 문화재 지킴이라는 말만으로는 그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그는 꿈도 많고 하는 일도 많다.“아직은 어리지만 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하고 많은 실패를 해도 괜찮은 나이에 많은 경험을 하고 싶다”고 말할만큼 당돌하다.학교라는 틀안에 머물며 공부만 하기에는 ‘끼’가 넘쳐흘렀다.그렇다고 학교공부를 게을리한 것은 아니다.학년 전체에서 5∼6등을 유지했다.그는 시간의 그릇에 많은 것을 알차게 채워오고 있다.우리 사회도 그의 톡톡 튀는 ‘창의적인 삶’을 수용할 만큼성숙했다.영월군청은 그가 건의한 문화유적지 개선안의 80% 정도를 실행했다.그의 작은힘이 큰 역사를 만들었다.그는 또 올해 연세대 수시모집에서 문화재관리 특수재능 보유자로 사회계열에 합격했다. 예진이는 지금 너무 행복하다.고3학생으로 명문대학에 이미 합격했으니 얼마나 좋겠는가.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기분이란다.그의 단아한 얼굴에도 행복한 웃음이 가득했다.그러나 그는 한발 더 나가고 싶어한다.“세계와의 소통을 위해 우선 영어공부를 열심히 해야겠어요”라고 말한다.그의초롱초롱한 눈에는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하는 욕망의 빛이번뜩인다.그는 지금 행복 속에 미래를 설계하고 있지만 세월의 시계를 조금만 뒤로 돌려보면 고통의 날들도 많았다.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어른들의 세계였다.문화재보수를 건의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예산이 없다’라는 말이었다.문화유적지를 복원하거나 보수하는 일은 꼭 필요한데 왜 어른들은 예산타령만 할까.‘학생이 공부나 하지 왜귀찮게 구느냐’는 핀잔도 많이 들었다.“군청은 적의 요새같이 느겨졌어요.군청에 갈 때는 전쟁터로 가는 것같아 단단히 마음을 먹고 찾아갔지요.” 그러나 생각이 바뀌었다.“지금은 군청에 감사드리고 있어요.저의 요구를 많이 들어주시고 귀찮아하지도 않아요.저같은 일개 학생의 건의를 정책에 반영해 주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보람도 느끼고요.개인을 존중하는 민주사회라는 것을 실감하고 있어요”.단종의 무덤인 장릉이나 청령포 등 문화유적지에 온 사람들이 ‘달라졌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때도 기분이 좋았다고 한다.휴일이나 방학땐 관광안내도 해왔다. 그는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좋아한다.그 영화가 너무나 감명깊었다고 말하는 그의 표정에 영화를 볼 때의 감동이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영화에 등장하는 키딩 선생님의 자유로운 사색과 창조적인 삶을 강조하는 교육철학이 좋았어요.”키딩 선생은 어느날 수업중 갑자기 책상위로 올라가 “이 위에 선 이유는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보려는 거야”라고 말한다.예진이에게는 그런 키딩 선생님이 너무나 멋졌다.그는 키딩 선생님이 들려준 ‘carpe diem(현재를 즐겨라·현재의 기회를 잡아라)’이라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있다. 그는학교공부 외에 많은 것을 하고 싶어했다.초등학교 때부터 문화재 답사도 다니고 우표수집도 했다.중·고등학교때는 글짓기 대회,과학실험대회,청소년 창작프로그램공모전 등에도 나갔다.한 번 시작하면 놀라운 집중력을 보였다.“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반드시 해야 한다”고 말하는 그의눈빛이 강렬하게 빛났다.그 결과 수많은 상을 탔다.우표수집 청소년분야에서는 97년부터 금상등을 탔다.세계우표전시회에도 입상했다.과학실험대회,창작프로그램 공모전,글짓기 대회 등에서도 입상했다.문화재 보호활동과 관련해서는 지난해 11월 제2회 전국 중·고생 자원봉사대회에서 문화관광부장관상을 탔고 지난 5월에는 외국계 금융회사인 프루덴셜이 주는 지역봉사상을 받았다. 예진이는 그의 튀는 행동 때문에 ‘오버 걸(over girl)’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그는 이 별명을 싫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튀는 행동 때문에 중학교 2학년 때 ‘왕따’ 당한아픈 경험을 갖고 있다.“문화재에 관심이 많은 저와 연예인들에게 관심이 많은 친구들 사이에 대화가 단절됐어요.외톨이가 됐지요.울기도 하고 점심을 같이 먹을 친구가 없어언니반에 가서 먹기도 했어요.거의 1년이 지난후에 결국 친구들이 저의 문화재 사랑을 인정하고 저를 받아주었어요.” 그는 지금 서울에서 혼자 살고 있다.지난 6월11일 영월의석정여자종합고등학교에서 서울의 구정고등학교로 전학왔기 때문이다.“처음에는 부모님들의 반대가 심했어요.그러나폭넓은 대학입시 공부를 위해선 서울로 가야한다는 저의 고집에 결국은 부모님들도 손을 들었죠.”(그 때는 연대에 합격하기 전이었다)그의 가족은 네식구다.아버지 이병덕(44)씨와 어머니 그리고 영월고등학교 1학년인 남동생이 있다. 부모들은 영월에서 18년째 카인테리어 업체를 하고 있다.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는 단란한 가족이다. 그는 연대에 응시하기 위해 꼼꼼하게 정리된 많은 양의 다양한 활동 자료를 제출했다.입학관리담당 교수는 “다양한사회활동을 높이 평가했다”고 그에게 말했다고 한다.그는면접도 잘 본 것 같다고 말했다.면접시험 이야기에서도 그의 당돌함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여성 고위공무원 25%채용 목표제를 어떻게 생각하는냐’는 질문에 “반대한다”고 대답했다고 한다.“여성들도 자신의 노력과 실력으로 올라가야 합니다.그 제도가 도입되면 여성들이 노력을 덜 할지도 모릅니다.”그런 대답에 면접교수들은 비교적 흡족한표정이었다고 말했다.“즐거운 마음으로 면접에 임했다”는 그의 말도 인상적이다.그는 “면접장에서 많은 학생들이면접에 관한 책을 보는 것을 보고 실망했어요.책에 있는 면접기술보다는 창의적인 자신의 생각을 잘 말하는 것이 더중요할 텐데…”라는 말도 했다. 그는 의사가 되어 슈바이처 박사처럼 아프리카에서 의료봉사를 할 생각을 했었다.그러나 의사의 꿈은 접었다.그는 다른 방법으로 세상을 밝고 아름답게 하고 싶다고 한다.그의희망은 기자가 되는 것이다.“기자가 되면 세상의 밝고 아름다운 이야기도 많이 쓰고 좋은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할수 있을 것 같아요.”그의 꿈과 열정이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답게 만드는 밀알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이창순 편집위원 cslee@. *** 이예진양 문화재 사랑 앞장선 계기. 예진이가 문화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향교를 조사해 오라는 방학숙제를 하기 위해 향교에 갔을 때 처마의 곡선미가 아름답게 느껴진 후 문화재에 관심을 갖게 됐다.일요일이나 방학 때 자전거를 타고 영월에있는 문화유적지를 찾아다녔다. 중학교 때 영월전통문화학교에서 3개월간 교육을 받은 후새로운 시각에서 문화재를 보기 시작했다.문화유적지 보존에 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그 때부터는 건물의앞이 아니라 먼저 뒤로 돌아가 관리의 여러가지 문제점을찾아냈다.문화유적지 보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동강댐 때문이었다.동강댐 백지화 문제가 큰 이슈가 되며 군청과 주민들이 동강댐문제에만 신경쓰자 문화재 관리가 소홀해졌다.군청의 예산도 동강댐과 관련된 행사에 집중됐다. 영월이 충절의 고향 영월일 수 있는 것은 단종의 무덤인장릉 등 단종과 관련된 문화재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고등학교 1학년 때인 99년 문화재 보호를 위해 본격적으로 행동에 나섰다. 장릉,용의 눈물 촬영지로 유명한 청령포,단종에 충성했던충신들의 비석이 있는 금강정,단종이 사약을 받았던 관풍헌과 자규루,김현식 군수 청덕비각,효부각,단종의 영정이 있는 금몽암과 보덕사,문화예술회관 등 10곳에 대한 자세한답사를 1년간 실시했다.그해 말에 문화 유적지의 문제점과개선방안을 담은 보고서를 사진과 함께 등기우편으로 영월군청에 보냈다.군청은 보고서를 바탕으로 보수에 나섰다.
  • 둔산공원에 모형 광개토대왕碑

    대전에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 모형비가 세워진다. 계룡장학재단(이사장 李麟求)은 29일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현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크기·모형·석질이 똑같은 비석을 서구 둔산동 둔산문예공원에 설치하기로 했다. 재단은 곧 학술조사단을 지린성에 파견,실사작업을 벌인 뒤 내년 상반기까지 비석 설치를 마칠 계획이다.또 광개토대왕비에 있는 글자를 풀이한 높이 1.5m,너비 3.5m 크기의 ‘설명비’도 모형비 옆에 세워 이곳을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키로 했다.특히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뒷받침한다며 일본이 내세우는 비문내용과 관련,재단측은 ‘가야는청동기·철기문화 국가로 부족형태였던 일본의 지배는 말이안된다’는 등 당시 정황을 토대로 이 설의 허구를 밝혀 설명문을 쓸 계획이다. 대전 이천열기자 sky@
  • 그곳에는 천국을 닮은 숲이 있다

    숲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런 숲이 숨어 있다는 건 하나의경이(驚異)요 축복이다.거기에 더해 이처럼 경이로운 숲이나약한 한 인간에 의해 일궈졌다는 걸 안 순간 개인의 위대함에 고개 숙이게 된다.프랑스 작가 장 지오노의 소설이원작인 애니메이션 ‘나무를 심은 사람’이 떠오른다.1913년부터 전쟁으로 황폐해진 프로방스에서 도토리를 심는양치기 이야기다.그는 “혹시 신께서 나를 더 살게 해 주신다면 지금의 1만그루는 큰 바다 가운데 한 방울의 물에지나지 않을 것이오”라고 말한다.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도 그는 여전히 나무를 심었고 그런 모습은 그의 나이 87세 때까지 이어진다.그가 일군 숲은 그의 말대로 ‘큰 바다’가 돼 사나운 바람을 잠재우고 시냇물을 흐르게 하고,온갖 새와 짐승과 사람이 깃든 낙원을 만들어 냈다.그가워낙 말 없이 그 일을 해냈기에 세상은 그 숲이 저절로 이루어진 것으로 안다. 그 숲을 전남 장성의 축령산에서 발견하고 몸을 떨었다. 영화 ‘태백산맥’과 ‘내 마음의 풍금’을 찍은 장성군서삼면 금곡리 영화마을 위로난 황톳길을 따라 한 300m걸음을 옮겼을까.우뚝우뚝 헌걸찬 ‘장수’들이 길을 가로막는다. 20∼30m 높이의 삼나무,편백나무 가지들이 하늘을 찌를듯뻗어 있다. 무려 90만평.어찌나 빽빽히 나무가 들어차 있는지 간벌작업이 한창인데도 햇살을 온전히 쳐다보는 데힘이 든다. 숲은 사람을 소생시킨다.매연과 공해에 찌든 도시인들의폐를 소생시키는 건강한 숲을 발견한 기쁨에 사람들은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고(故) 임종국 선생이 이곳에 나무를 심기 시작한 것은지난 56년.전쟁의 상처가 채 가시지 않은 때 한 선각이 이산골에 이 숲을 가꾸어나갔다.그는 이 곳 말고도 북하면월성리 두곳 등 모두 세곳에 삼나무와 편백나무 숲을 조성했다.이웃에게 빚을 내면서까지 묘목을 사다 심었다. 황톳길은 6㎞나 이어진다.콜록콜록하던 이들도 이 숲에들어서는 순간 코와 가슴이 시원스레 열리는 느낌을 받는다.여름에도 긴팔 옷을 입어야 할 정도로 서늘해 해충들이자리할 여지가 없다.경사도 완만해 온 가족이 손잡고 거닐어 볼 만하다.황톳길을 다 걷자면 1시간30분,왕복 3시간정도 잡으면 된다. 유한킴벌리와 산림청 등은 이 숲을 ‘22세기를 위해 보존해야 할 21세기의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했다고 한다.산림청은 임씨가 사망한 뒤 10여 명이 소유한 이 숲을 사들여 ‘느슨한 개발’을 하겠다고 산주와 협의하고 있지만가격 차가 워낙 커 성사되지는 않고 있단다. 함께 간 일행은 이구동성으로 애원한다.“제발 팔지 마세요.그리고 제발 포장하지 말고 이대로 흙먼지 날리게 놔두세요” 전국 곳곳에 널린 30여곳의 관·민영 자연휴양림의 폐해를 잘 알기 때문이다.그런 전철을 이 곳만은 밟지 말아야한다는 절규가 담겨 있다. 그런 절규를 부디 숲이,하늘이 들어 주었으면 한다.거기희망의 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장성 글·임병선기자 bsnim@. ***여행 가이드. ■가는 길 기찻길이 편안하다.무궁화나 새마을호로 장성까지 간다.4시간 소요.장성읍에서 금곡마을까지는 버스가 하루 4번 다닌다. 승용차는 호남고속도로 백양사 나들목으로 나와 장성댐 아래까지 내려온 다음 호암사 방면 군도를 탄다.898번 도로를 갈아타 영화촌 팻말이 나올 때까지 간다.장성 나들목으로 나와 거슬러 영화마을까지 이르는 방법도 있다. ■둘러볼 곳 영화 ‘내마음의 풍금’에서 전도연이 살던집이 보존된 금곡리 영화마을을 들를 일이다.영화 ‘태백산맥’과 TV드라마 ‘왕초’도 여기서 찍었다. 금곡마을에서 축령산 산책로를 통과하면 계곡에 찻집과 추암관광농원이 있다.데이트 코스로 그만이다.한겨울 삼나무에 눈이 내리면 절경이 펼쳐진다. 여기에서 홍길동 생가터는 승용차로 15분거리. 생가터 조금 못미쳐 조선 명종때 청백리로 이름 높았던 아곡 박수량이 죽자 왕이 직접 비석을 내리며 “여기 이름을새기면 그 이름에 누가 끼친다”며 그냥 놔두었다는 백비가 나온다. ■맛집 장성읍에서 35년이나 명맥을 유지해온 한식당 ‘장성골 명가’(061-394-9292)의 한우고기는 서울에서 맛볼수 없는 신선미가 장점.장성호 아래 상오마을 미락단지안‘거송식당’(061-394-8866)의 가물치회도 쉽게 접하지 못하는 민물회의 참맛을 선사한다.메기찜은 초야식당(061-393-0734) 청암가든(061-393-8823)이유명하다.
  • 5·18 21돌기념식 정치권 움직임

    광주민주화운동 21주년 기념식이 열린 광주 5·18묘역은여야가 당사를 이곳으로 옮겨놓은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정치인들로 가득했다.특히 5·18 공식 기념식에 처음 참석한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총재를 예전과 달리 광주 시민들이 따뜻히 맞아 눈길을 끌었다. 또 정치인들에 대한 시민과 대학생들의 야유 및 묘역 진입 저지 등이 일절 없었으며,지난해 술판을 벌여 구설수에 올랐던 여야 386의원들도 별도 모임 없이 참배만 했다. ◇여야 지도부 설전=묘역 관리사무소에서 조우한 여야 지도부는 5·18민주유공자법 처리를 놓고 신경전을 벌였다. 먼저 민주당 김중권(金重權)대표가 “민주유공자법 처리를 도와달라”고 말하자,이 총재는 “6·25 참전용사 등 다른 유공자들과 한꺼번에 묶어 기본법을 만드는 게 바람직하다”고 받았다. 이에 김 대표가 “그렇게 하면 재정이 엄청나게 필요하다”고 강조하자,이 총재는 “법 얘기는 나중에 하자”고 화제를 돌렸다.김 대표는 ‘구 정권 인사’라는 이미지를 의식한 때문인지 기념식 후 기자간담회를 갖고 “5·18의 진상을 알게 된 것은 13대 국회 청문회때”라고 말했다. ◇이 총재의 호남 민심 잡기=한나라당은 이 총재의 광주방문에 맞춰 민심 잡기를 위해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했다.민주당은 19명의 현역 의원이 광주를 찾은 반면 한나라당은 28명의 의원이 대거 이 총재를 수행했다.특히 이 총재가 광주공항에 도착하자 한나라당 광주·전남 지구당원 50여명이 도열,열렬한 박수로 환영했다. 이 총재는 망월동묘역에서 김 대표와 대화 도중 “임진왜란때 이순신(李舜臣)장군이 왕에게 올렸다는 ‘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란 글귀가 공항에 걸려 있더라”고 상기시키기도 했다. 또 기념식이 끝난 뒤 30분 이상 묘역을 일일이 돌며 비석을 어루만지고 시민들과 포옹을 하는 등 친근감을 표시했다. 시민들도 이 총재에게 “오시느라 고생 많았다”고 덕담을 하는 등 성숙한 시민 의식을 보였다. 반면 김 대표는 “오늘은 영령들을 추모하러 온 것이지세를 과시하기 위해 온 게 아니다”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광주 김상연기자carlos@
  • [21세기 담론-생명을 말한다](7)함석헌선생의 ‘씨알사상’

    (7)박재순박사에 들어본 咸錫憲선생의 '씨알(아래아)사상'. ●함선생님은 ‘씨알(아래아)’(씨알)의 옛글자 ㅇ을 큰 나(하늘),ㆍ(아래아)는 작은 나,ㄹ은 둘을 관계짓는 역동성이라고 풀이 하셨는데 개개인을 하늘이라고 보신건가요. 하늘의 기운과 뜻이 씨알 하나에 맺혀 있다.씨알 하나가하늘과 맞닿아 있다.사람 속에 하나님의 씨앗이 있다.이런뜻이지요. ●함선생님이 지금 살아 계신다면 생명운동을 하실 거라는생각이 듭니다. 선생님은 생명(生命)을 ‘생의 명령’이라고 풀이하신 적이 있습니다.‘살까’‘말까’가 아니라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이라는 거지요.삶의 기본 원리는 ‘스스로 함’(自由)에두었습니다.스스로 하는 존재니까 삶은 새롭고 다양하면서도 하나로 통한다고 보셨습니다.동양의 무위자연과 서양의주체적인 사상이 융합돼 있습니다. ●선생님은 삶 자체를 싸움으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생명의 조건을 유지하기 위해 주변환경과 부단히 싸워야 한다는 건 삶 속에서 갈등과 투쟁을 일종의 숙명으로 보신 건가요? 숙명이 아니고 ‘스스로함’에 대한 거스림과 반생명에대한 맞섬 이지요.선생님은 새가 나뭇가지에서 노래할 때지구의 중력과 싸움이 있어서 노래가락이 나온다고 봤습니다.순간순간 죽음과 싸움으로써 삶이 존속하고 삶 자체가솟구쳐 오르는 생명의 본래 모습을 지키려는 부단한 싸움이라고 보신 거지요.이 싸움을 그치면 죽음 입니다.사회적인삶에 있어서도 밀고 당기는 싸움을 통해서 공동체적 삶을유지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반생명과 맞섬,조화를 이루기 위한 싸움과 평화가 어떻게양립 할까요. 벌레 한마리가 상처를 입고 있어도 측은지심이 일어 나는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생명의 아픔에 반응하고 함께 하는 마음이 우주적으로 있다고 보셨지요.삶에는근원적으로 하나임을 느끼게 하고 큰 조화를 이루고 서로어울리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씨알’즉 생명은 하나님(전체,영원)과 맞닿아 있으므로 자기 안에 불멸의 힘이 있습니다.이 불멸의 힘을 깨닫고 마음을 열게 하는 데는 비폭력이라야 합니다.비폭력 투쟁은 모든 인간(상대방을 포함)에게빛,즉 양심이 있음을전제한 싸움입니다. ●불멸의 힘과 관련해 선생님 글중에 [클로버 씨앗 하나가소와 말의 내장을 통과하고 똥 속에서도 죽지 않고 있다가싹이 터,온 들을 푸르름으로 꾸민다’]는 대목이 인상적 입니다. 소나 말의 내장은 험난한 역사를 비유한 것입니다. ●힘 없는 민중,비폭력 투쟁이 끝내는 이긴다는 뜻이겠지요. 비석에 새겨진 역사나 문화는 죽은 역사,죽은 문화입니다. 그것은 지배자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산역사 산문화를 보려거든 민중 속으로 들어가라.]50년 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1970∼80년대에 유행한 민중담론을 앞지른 것이지요.여기서 영감을 얻어 민중신학이 나왔고 세계적으로 붐을일으켰습니다. ●씨알 하나에 수억년 생명의 역사가 응축돼 있다는 대목은요즈음 생명공학에서 말하는 유전자 이야기와 상통 합니다. 씨앗이 대개 둥글다는 관찰도 생태학자들이 말하는 생태순환론과 맥이 닿고요. ‘네 속에 5천년 역사가 있고 무궁무진한 미래가 있다’는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씨알 하나,한 생명이 그만큼 소중하다는 뜻이지요.둥글기 때문에 그 착지점은 한점,즉 많은 공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 입니다.묘하게도 그 후 문익환,김지하,박노해 등이 모두 감옥에서 창틀이나 담장 틈새에서 피어난 풀씨를 인연으로 생명의 힘을 깨닫고 생명사상을 말하게 되는데 이 씨앗이 주는 어떤 영감이 있는 것같아요. ●한 점 입지(立地)는 ‘맨사람’과 연결되는 것 같은데 지금은 누구도 ‘맨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그 시절만 해도 우리 사회가 농민 노동자가 절대다수여서그런 말씀이 자연스러웠습니다.대통령이든 죄수든 사회적규정을 벗어 던지고 자기를 들여다 보면 씨알이 되겠지요. ●태평성대였더라면 노자 같은 분이 되셨을 것 같아요. 씨알을 억압하는 정치·사회적 구조에 대한 저항이지 정치·사회적 욕심은 없었습니다.성공은 못했지만 농장 공동체를 여러번 시도하시기도 했고요. ●‘씨알(아래아)의 소리’ 창간호에 [천하 씨알(아래아)이다 소리를 내도룩 하기 위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생이살아 계신다면 요즈음 세무조사를 둘러싼 언론탄압 논쟁에대해 뭐라고 하실까요? 선생님은언론자유를 매우 소중하게 여기셨습니다.‘씨의 소리’ 자체가 언론자유를 함축하고 있는 것처럼.아까그 말씀도 이런 전제가 있습니다.[씨알이 나라의 주인이다. 정부나 언론사가 망해도 씨알은 영원히 남는다.씨알을 억누르는 지배층의 소리만 요란하고 씨알은 침묵을 강요 당한다.] ●언론의 자유지 언론권력의 자유가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그렇지요.씨알의 언론자유거나 씨알을 대변하는 언론자유지 씨알의 뜻을 왜곡하고 기득권의 이익을 대변하는 언론자유가 아닙니다.그것은 이미 언론이 아니니까요. ●선생의 유명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의 ‘생각’과데카르트가 말한 ‘생각’은 어떻게 다를까요. 요즈음 생태학에서는 데카르트를 자연에 대한 인간,여성에 대한 남성,감성에 대한 이성의 이분법적인 우위 내지 지배문명의 단초를 연 것으로 보거든요. 함선생님은 생각을 ‘하는 생각’과 ‘나는 생각’으로 나누셨습니다.여기서 ‘나는 생각’은 일종의 영감(Inspration)이고 ‘하는 생각’이란 이성적인 것으로 볼 수 있어 결국 서양 철학과 동양철학이 융합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체와 하나의 조화 철학이군요. 그렇지요.함선생님의 생명사상은 개인주의적,생물학적 생명론이 아니라 민족과 민중단위의 역사적 삶에서 피어난 주체적 사상입니다. △함석헌선생 연표. ▲1901년,평북 용천에서 태어남 ▲1919년 3·1운동 참가,오산학교 입학,스승 이승훈,유영모 만남.▲1923년 동경유학,첫 수감,1924년 동경사범학교 입학 ▲1928년 귀국,오산학교 역사교사 ▲1930년 오산학교 ML당 사건으로 두번째,1940년 세번째,1942년 네번째 수감 ▲1976년 3·1 구국선언 사건으로 여덟번째 수감,1977년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한 협의회 창설,한국인권운동연합회 의장 ▲1979년 10·26후 YWCA 위장결혼 사건으로 아홉번째 수감,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1980년 가택연금,‘씨 의 소리’폐간 ▲1985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1987년 암으로 입원,1988년 서울평화올림픽위원장으로 추대,‘씨 의 소리’ 복간 ▲1989년별세(89세)△박재순 박사. ▲1950년생.▲1974년 서울대학교 철학과 졸업 ▲1978년 한국신학대학교 신학과 1978년 동대학교 대학원 졸업 ▲1994년 한국신학대학교 신학박사 ▲한국신학연구소 번역실장,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 연구실장 역임 ▲저서 민중예수운동과 밥상공동체’‘민중신학과 씨알사상’‘한국생명신학의 모색’외 5권 ▲번역 도로테 죌레의 ‘사랑과 노동’대담 김재성 논설위원 jskim@. * ‘씨알’ 4·19정신 표상 암흑기의 횃불. ‘씨알’은 함석헌(咸錫憲)선생의 시,역사철학,종교,정치,민족 사상을 일관하는 단어다.선생은 일평생 ‘씨알’을 화두로 삼았다.민족의 얼이 짖밟히는 것을 참지 못해 독립투사로 나섰고 ‘씨알’의 자유가 억압되는 것을 보고만 있을수 없어 민주 투사로 나섰다.선생의 시는 ‘씨알’의 노래요 선생의 역사철학은 한 알의 ‘씨알’이 섞어서 수많은‘씨알’로 다시 태어나는 역사를 이론화한 것이다. ‘씨알(아래아)의 소리’는 4·19 10주년인 1970년 4월에 창간됐다.그래서 시종일관 4·19 정신을 이어 받았고 5·16군사정권에 저항했다. 4·19가 씨알의 부활이라면 5·16은 씨알의 짓밟음이기때문이다. 선생은 ‘씨알(아래아)의 소리’를 내는 목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하나는 한 사람이 죽는 일입니다.씨알의 속에는일어만 나면 못 이길 것이 없는 정신의 힘이 있습니다.말중에 가장 강한 말은 피로써 하는 말입니다.전체 씨알을 봉기케 하는 데는 피로써 말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둘째는 유기적인 공동체가 생겨야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혼자서는 못삽니다. 사람이 강해지는 것도 이 때문이요, 약해지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평소에 약하던 사람도 여럿이 뒷받침해 주면놀라운 용기를 얻어 보통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게되고 반대로 아주 용감하던 사람도 자기가 감옥에 갇힌뒤어린 것들이 길가 헤맬 생각을 할 때 그만 간장이 녹아버립니다.그러므로 악과 싸우려면 개인 플레이를 해서는 안됩니다.] ‘씨알(아래아)의 소리’는 끝없는 탄압과 무수한 칼질을당했다. 그래도 이 연약한 ‘씨알(아래아)의 소리’를 매개로 민주인사들은 장작불처럼 열정을 모아 겨울공화국을 녹였다.
  • 윤영자 조각인생 50년 회고전

    한국 여성조각계의 선구자 석주(石洲) 윤영자(77ㆍ예술원회원)가 50년 조각세계를 정리하는 회고전을 마련한다. 13일부터 29일까지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석주미술상 역대 수상자들도 작품을 함께 내 빛을 더한다.석주미술상은 지난 90년 윤씨가 설립한 석주문화재단이 매년 여성미술인 1명을 선정,시상해온 것으로 1회(정경연·섬유미술)에서 12회(차우희·서양화)에 이르기까지 12명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윤씨가 선보일 작품은 ‘율(律)’‘애(愛)’‘망(望)’‘기다림’등 50여점.부드러운 선을 중심으로 한 구상과 비구상의 경계를 오가는 작품들이다.주된 주제는 여인상과모자상.근대 이후 거의 모든 조각가들이 즐겨 다뤄온 이주제를 통해 그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생명주의’다. 그의 조각의 원형을 이루는 여인상과 모자상에는 생명의율동감이 넘친다. 윤씨가 본격적으로 조각작업에 나선 것은 1947년 조각가윤효중·윤경렬에게 조각을 사사하면서부터다.이어 홍익대에 미술학부가 창설되던 1949년에 이 대학에 입학해 여성조각의 새 지평을 열었다.그는 최근까지도 행주산성의 권율 장군 비석과 서울 남산의 정약용 동상,인천의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탑 등을 제작하는 등 작품에서 손을 놓지않고 있다.(02)720-1020. 김종면기자
  • 정주영씨 영결식 이모저모

    맨손으로 국내 최대 기업을 일구고 남북 화해의 물꼬를 튼고 정주영(鄭周永)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25일 43년 동안살았던 서울 종로구 청운동 자택을 떠나 경기도 하남시 창우동 선영에 안장됐다. 그동안 청운동 빈소에는 북한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의조문사절단 등 3만7,000여명이 찾아 조문했다.111개 국·내외 빈소와 인터넷을 통한 조문까지 합치면 100만명을 넘는다는 것이 현대의 공식 발표다.화환 수는 모두 646개로 10t트럭 30대 분량을 넘는다. ●청운동 발인=오전 8시 정몽구(鄭夢九)현대·기아자동차회장 등 유가족과 현대 임원진 6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유교식으로 거행됐다.유족들은 발인에 앞서 오전 6시 고인에게 영결을 고하는 ‘조전’을 올렸고 8시에 발인제를 지냈다.발인제는 맏상주인 몽구 회장이 먼저 재를 올린 뒤 형제들이 차례로 절을 올렸다. 고인의 유해는 주요 계열사와 집무실(본관 15층)이 있는계동 사옥의 임직원 등 500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5분 동안 건물 주위를 돌다가 영결식장으로 향했다. ●서울중앙병원 영결식=검은색 옷차림의 조문객 7,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호상(護喪)인 유창순(劉彰順)전경련 고문은 추모사에서 “수많은 경제인들,국민들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살아 있는 신화였던 회장님 편안히 가십시오”라며 아쉬움을 표시했다. 구상(具常)시인이 고인에게 바친 “촌부자(村夫子) 모습에다 시문을 즐기시어 나같은 서생과도 한평생 우애지녀 영원의 그 동산에서 머지않아 반기리…”라는 내용의 추모시를탤런트 최불암씨가 낭독하는 동안 정몽준(鄭夢準)현대중공업 고문은 슬픔이 북받치는 듯 울음을 터뜨렸다. 고인은 대형 멀티비전을 통해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마지막 메시지를 전했다. ●창우동 장지=경기도 하남시 창우동 선산 주변에는 유족과지인, 현대 임직원 외에 주민들까지 몰렸다.유해는 태극기로 덮인 연갈색 목관에 실려 운구 요원 36명에 의해 양지바른 검단산 자락의 선영을 향해 올랐고 유족들이 곡(哭)을하며 뒤따랐다. 유족들은 ‘하동정씨봉식지묘’라는 비석이 서 있는 정 전명예회장 선친의 묘 앞에서 반혼제를 지냈다. 고인의 묘 자리는 선친의 묘로부터 3m 정도 떨어진 곳에마련됐으며,고인의 뜻에 따라 특별히 풍수지리를 따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 전 명예회장은 30여분간의 하관식을 거쳐 낮 12시쯤 유족들이 오열하는 가운데 반평 남짓한 묘에 평화롭게 안장됐다. 주병철 안동환기자 sunstory@
  • 서울시 추진 계획과 외국사례 점검

    서울시가 시내 첫 화장장·납골시설인 ‘추모공원’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매장에서 화장 중심으로 장묘문화가 급속히 바뀌어가고 있는 가운데 ‘생활속의 장묘문화’를 본격 실험하게 된 것이다. 현재 후보부지중 하나로 거론되는서초구 일부 주민들이 강력 반발하는 가운데 땅이 절대 부족한 우리 실정상 “생활속 장묘시설은 피할 수 없는 대세”란 의견도 많다. 추모공원 건립 추진 개요와, 국민들의장묘문화 인식,생활속의 장묘문화를 실천하는 선진외국의사례,전문가들의 의견 등을 짚어본다. ◆어떻게 지어지나 공원개념의 첨단 종합장묘시설로 2004년까지 건립할 계획이다.무연·무취의 화장로 20기가 설치될 첨단 화장장과 5만위가 안치될 수 있는 추모의집(납골당),장례식장이 들어서게 된다. 장묘시설이 혐오시설이라는 이미지를 벗을 수 있도록 산책로와 벤치,분수대,꽃동산,공연장 등을 갖춰 인근 주민들의 문화·휴식공간으로 꾸밀 계획이다. 현재 18명으로 구성된 부지선정위원회가 부지를 선정중에있다. 서초구 내곡동,중랑구 망우동,강서구 오곡동,강남구대모산 일대 등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당초 이달말까지 부지를 최종 확정할 계획이었으나,후보지 인근 주민들의 의견수렴절차 때문에 다소 늦어질 전망이다. ◆생활속의 장묘시설은 대세 한국장묘문화개혁범국민협의회가 최근 만 20세이상 서울시민 1,03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전화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본인이 살고 있는 자치구에 화장·납골시설을 세울 경우 수용하겠다는 응답이 69.2%에 달했다. 화장·납골시설의 증설과 관련,필요하다(88.6%)는 응답이필요치 않다(6.5%)는 의견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매장중심의 장묘문화를 화장·납골 중심으로 바꾸는 게바람직하다는 응답도 85.4%로 그렇지 않다(8.9%)는 의견을압도, 장묘문화에 대한 시민들의 의식이 크게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었다.실제로 서울시 화장률이 95년(29%) 이후 급격히 높아져 지난해엔 50%에 달했다. ◆선진외국에선 장묘시설이 생활의 일부 일본 도쿄의 경우화장률이 98.7%에 달한다.23개 화장시설에 165기의 화장로를 갖추고 있으며,이중 8개소는 도심 한복판에 위치해 있다.이들 시설들은 벚꽃으로 유명한 도쿄 아오야마영원이나오사카의 승화원처럼 빌딩숲이나 아파트에 인접, 시민들에게 휴식공간을 제공하는 시민공원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땅이 넓은 미국은 아직 매장문화가 대세다.하지만 대부분의 추모공원을 봉분형이 아닌 평장형으로 조성함으로써 묘지보다는 잘 관리된 골프장을 연상케 한다. 따라서 시민들도 추모공원을 묘지보다는 시민공원으로 인식해 즐겨 찾으며,추모공원내 교회에서는 결혼식도 치러진다.이에 따라 추모공원이 인근에 있는 주택가는 다른 지역보다 오히려 집값이 비싼 경우가 많다.하와이의 누아누 추모공원,로스앤젤레스 포레스트로운 추모공원 등이 대표적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장묘시설이 들어서는 지역주민들의 반발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따라서 ‘장묘시설=혐오시설’이라는 인식 전환이 급선무다. 서울시립대 김창석 교수는 “문화적 명소화 내지는 특색있는 주제를 부여해 공원으로서의 기능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그는 추모공원내 야생화정원이나 식물원·동물원 조성,야외 조각공원·미술관·민속박물관 건립을통한 전시기능을 도입 등을 대안으로 제시한다.또 봉분이나 비석,탑 등 인위적인 구조물을 버리고 가급적 자연에순응하는 형태의 최소한의 기념물만 쓰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한국행정연구원 박희정 행정팀장은 “박물관이나 미술관등 각종 문화시설이나 생태학습장 등을 조성,지역 주민과학생들에게 교육·학습의 기회를 제공하는 장소로 활용케하면 이미지 개선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임창용기자 sdragon@
  • 2001 길섶에서/ 오만과 무지

    1868년의 일이다.아라비아 사막 부근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베두인족이 어느날 비석을 발견했다.알 수 없는 글씨가깨알같이 적힌, 꽤 낡은 비석이었다.마침 서양인 선교사가달려와 비문을 탁본했다. 고대사의 비밀이 담겼을지 모른다는 직감 때문이었다. 유럽 여러나라 관계자들이 비석을 손에 넣으려고 앞다퉈나섰다.너나없이 후하게 값을 쳐주겠다고 했다.베두인족은고민에 빠졌다.회의 끝에 비석을 팔지 않기로 했다. 비석안엔 황금이 들어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이들은 마을 한복판에서 불을 지피고 비석을 넣었다.비석이 벌겋게 달아오르자 물을 부었다.몇 차례나 반복했다.그러나 끝내 황금은 나오지 않았다.구약성경에 나오는 모아브왕에 관한 기록을 담은 비석은 그렇게 사라졌다.비문은 성서가 역사적사실에 기반하고 있음을 입증한 최초의 글이었다. 얼마전 아프가니스탄 정권이 세계 최대의 바미안 석불을파괴해 세계를 경악케 했다.세계의 문화유산이 오늘날도인간의 오만과 무지로 사라져가고 있다는 사실이 서글프다. 최태환 논설위원 yunjae@
  • “”신화를 역사속으로…”” 획기적 변화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놓아라.내어놓지 않으면 구워먹으리라.(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가야의 건국설화에 나오는 유명한 노래 ‘구지가(龜旨歌)’다.삼국유사에 전하는 가야 건국설화에 따르면 가야 땅을 다스리던 아홉 우두머리(九干)가 구지봉에 모여 제사를 지내는데,문득 하늘에서 알 여섯개가 담긴 금합이 자주색 끈에 매달려 내려왔다.그 알이 차례로 깨어지며 아이가 하나씩 나왔는데,맨 먼저 나온 이가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이라는 것이다. 가야의 아홉 우두머리가 새로운 왕을 염원하면서 ‘구지가’를 부르고,하늘에서 여섯개의 알이 내려왔다는 곳이 바로경남 김해시 구산동에 있는 구지봉(龜旨峰)이다.높이가 200m에 불과해 봉(峰)이라고 부르기에도 조금은 민망한 소나무동산이다. 문화재청이 지난 6일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이 구지봉을사적 제429호로 지정했다.신화(神話)를 당당히 역사에 편입시켜 보호하겠다는 뜻으로 문화재 정책의 획기적인 변화라할 만하다. 사적(史蹟)이라는 단어를 풀어보면 ‘역사’와 ‘흔적’으로 나눌 수 있다.그러나 구지봉에는 설화는 있지만 삼국유사기록 그대로가 역사적 사실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과거의 흔적’이라는 측면에서도 구지봉은 보잘 것 없다. 정상부에는 서기전 4세기쯤의 것으로 보이는 남방식 지석묘가 하나 있다.삼국유사에 따르면 김수로왕이 탄강(誕降)한것이 서기 42년이라니,가야 건국설화와는 관계가 없다.상석에 ‘구지봉석(龜旨峰石)’이라고 새겨 있지만,한석봉 글씨로 전하는 만큼 후세에 남긴 것으로 보인다.정상에는 1908년세웠다는 ‘대가락국 태조왕 탄강지지(大駕洛國太祖王誕降之地)’비석도 있다.결국 가야시대 사람의 손에 닿은 흔적은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셈이다. 물론 설화적인 이야기를 근거로 사적을 지정한 사례가 전혀없는 것은 아니다. 1968년 사적 제163호로 지정된 경주 낭산(狼山)도 삼국유사에 기록을 남기고 있다.실성왕 12년(413년)에 ‘왕이 낭산에 상서로운 구름이 서린 것을 보고 신하들에게 신선의 영혼(仙靈)이 하늘에서 내려와 노니는 곳이니응당 복지다.이제부터 낭산의 나무 한그루도 베지 말라’고명령하여 ‘신유림(神遊林)’이 형성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낭산 일대는 선덕여왕릉과 문무왕 화장터,능지탑,왕실의 원찰인 황복사터와 삼층석탑 등이 있는 문화재 밀집지역이라는 점에서 구지봉과는 다르다.한영우 문화재위원(서울대 교수)은 “구지봉은 거북이가 엎드린 지형을 하고 있는등 설화를 뒷받침해 신비에 싸인 가락국의 실체를 규명할 수있는 중요한 유적”이라면서 “이웃한 김수로왕비 허황후의능 및 김해국립박물관과 연계하여 사적공원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서동철기자 dcsuh@
  • 전사처리 국군포로 이기탁씨 아내 “”이 하늘아래 계시다니…””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으로 여기고 살아왔는데….” 죽은 줄 알았던 남편 이기탁씨(73)의 생존 소식을 접한 조금례씨(70·대구시 서구 내당동)는 “국립묘지에 비석을 세우고 매년 참배까지 한 남편이 살아 있다니 꿈을 꾸는 듯하다”고 말했다. 조씨는 지난 46년 15살때 3살 연상인 이씨와 결혼했다.그리고 4년여동안 자식이 없어 고민하던 차에 지금의 아들 태석씨(50)를 얻었지만기쁨도 잠시.6·25전쟁이 터졌고 남편 이씨는 떠난다는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한채 징집돼 전쟁터로 떠나버렸다. 53년 전쟁은 끝났지만 남편 대신 전사통지서까지 날아 들었고,국립묘지에 남편의 비석까지 세워졌다. “첫 참배를 하던 때의 슬픔과 비통함이 너무도 새삼스럽다”는 조씨는 그동안 경북 성주에서 홀로 시부모를 모시고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고 외아들 태석씨는 지금도 성주에서 참외농사를 짓고 있다. 태석씨는 “매년 동짓달 10일을 기일로 정해 아버지 제사를 지내왔다”며 “사진 한장 남아있지 않아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이지만 하루빨리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대구 황경근기자 kkhwang@
  • 루스벨트 ‘휠체어 동상’6년 투쟁끝 내일 제막

    ‘뉴딜정책’으로 미국을 경제공황에서 이끌어낸 프랭클린 D 루스벨트 32대 미 대통령.1921년 39살 때 앓은 소아마비 장애를 극복,더 높이 평가받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실물 크기 ‘휠체어 동상’이 10일워싱턴 DC 루스벨트 기념관에서 제막된다고 워싱턴포스트가 7일 보도했다. 어쩌면 당연해 보이는 ‘휠체어 동상’의 제막은 미 장애인 단체들이 지난 6년간 투쟁 끝에 얻어낸 결실.95년 피터 코플러라는 한 주식투자가가 장애를 극복한 루스벨트의 인간적 모습을 묘사하는 동상 건립에 100만달러를 기부하고 장애인 단체들이 적극 동조하고 나섰다. 그러나 루스벨트의 손자인 데이비드 루스벨트 등이 포함된 추모위원회측은 “생전에 장애가 공개되는 것을 원치 않은 고인의 뜻애 어긋나는 행위”라며 반대,논쟁을 거듭해왔다. 월남전에서 어깨와 팔에 장애를 입은 밥 돌 전 상원의원과 지미 카터·조지 부시 등 전 대통령,그리고 많은 의회 지도자들이 루스벨트의 지도력은 “장애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장애 때문에 더 개발된것”이라고 힘을 실어주면서 휠체어 동상 쪽으로 대세가 굳어졌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재임기간(1933∼45년) 자신의 장애 노출을 극도로 꺼렸다.현재 국립문서보관서에 남아 있는 1만여장의 사진중 4장만이 휠체어를 탄 모습이다.97년 개관된 기념관의 3m 높이 동상 역시어깨 위에 걸친 외투로 휠체어를 가리고 있다. 전미장애인기구의 앨런 라이히 총재는 7일 “동상 제막은 장애를 가리는 부끄러움의 외투를 벗어던지는 것”이라며 의의를 강조했다.그는 “초대형 링컨 대통령상이나 제퍼슨 동상에 비해 턱없이 작게 보이는 실물 크기 동상을 만든 것도 그의 인간적인 왜소함과 신체적인장애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10일 루스벨트 동상의 제막식에는 빌 클린턴 대통령이 참석,직접 제막한다.동상 옆에는 루스벨트의 수족 역할을 한 부인 엘리너 여사의어록 비석도 함께 공개된다.“프랭클린의 질병은 그에게 전에는 갖지못했던 힘과 용기를 가져다줬다. 삶의 근원을 숙고하게 했고 무한한인내와 신념이라는 가장 위대한 교훈을 얻게 만들었다.”김수정기자 crystal@
  • 서울대 報恩의 추모제

    서울대(총장 李基俊)가 최초의 사재 장학금을 기탁한 고 이원경(李元卿)여사의 25주기가 되는 내년부터 해마다 보은의 추모제를 열고묘역도 정비하기로 해 눈길을 끌고 있다.이를 위해 2001년 예산에서500만원을 편성했다. 우선 내년 4월5일 한식에 경기도 광주 공원묘지에 있는 이 여사 묘지의 비석을 새로 바꾸고 울타리를 단장하기로 했다. 이 여사는 수십년간 삯바느질과 미군부대 세탁일을 하면서 모은 푼돈으로 힘겹게 마련한 서울 충현동 2층 양옥집을 팔아 73년 당시로는 거액인 300만원을 장학금으로 내놓았다.76년 11월21일 숨을 거두면서 전세금 150만원과 자신의 장례비로 준비했던 110만원마저 모두 기부했다. 이 여사는 당시 “나라의 고귀함은 빼앗긴 나라에서 살아본 사람만이 압니다.나라를 아끼는 유능한 인재를 키워주세요”라고 유언했다. 이후 해마다 6명의 학생들에게 등록금 전액을 지급하고 있다. 구한말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 등과 함께 개화당의 중심 인물이었던 이규영(李圭永)선생의 맏딸인 이 여사는 러시아로 망명한아버지를 따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소학교를 마치고 귀국,3·1운동에 참여해 11개월 동안 옥살이를 치렀다. 군정 입법의원을 지냈던 남편 유진희(兪鎭熙)박사가 독립운동으로옥고를 치르다 얻은 병으로 죽자 이 여사는 삯바느질 등을 하며 어렵게 살면서도 옛 서울대 동숭동 캠퍼스 옆에 방을 얻어 고학생 20여명을 뒷바라지했다. 서울대 박영래(朴泳來)장학과장은 “내년부터 고인의 아름다운 정신을 기리기 위해 11월20일 학교 차원에서 공식 추모제를 지내기로 했다”고 말했다. 안동환기자 sunstory@
  • 오늘 단기 4333년 개천절 되짚어 본 단군

    ‘단군은 단순히 민족주의적 신화의 우상인가 아니면 역사적 실체인가’최근 언론사 사장단과 문화계 인사 등 남측 인사들의 잇따른 북한 단군릉 방문을 계기로 강단 학자와 재야 사학자들의 논쟁이 다시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또 단군학회는 2일 단기4333년 개천절을 앞두고 단군을 중심으로 한 상고사 관련 교과서 개정을 위한 대규모 학술대회를 열어 학계 안팎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최근 가열되는 단군논쟁은 지금까지와는 색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단군이 신화적 존재든 역사적 사실이든 그 실체를 규명해야 하며 그것이 민족구심을 위한 사상정립의 대안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그요체다. 우선 실체 규명의 차원에서 일고있는 단군실재론 재조명론은 주류학계의 입장을 강하게 비판한다.현행 초·중·고교 국사교과서에 반영되고 있는 주류 학계의 고조선 건국과 단군조선의 기원,강역에 대한 기술이 수정돼야 한다는 주장이다.이들은 ▲초·중학교 교과서가단군의 건국과 관련 “곰이 웅녀가 돼 환웅과 결혼해 단군을 낳았다”는 신화화된 내용만을 싣고 있고 고교 교과서에선 ▲고조선의 실재를 인정하면서도 단군을 신화적 인물로 규정하며 ▲한반도의 청동기를 기원전 10세기로 보면서 단군 건국은 기원전 24세기(2333년)로 적고 있음은 모순이라고 말한다.기원전 2500년경의 역사를 입증하는 고조선의 고고학적 증거들이 발견되고 있는데도 이같은 기술이 나오고있는 것은 주류 학계가 일제의 황국사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재야학자들 사이에선 단군조선의 세력범위에 대해서도 만주·한반도 일대에서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일고있다. 이같은 논의는 최근 북한의 접근방식과 맞물려 더욱 확산되고 있다. 북한의 학계는 단군이 민족의 시조임을 부정했으나 단군릉에서 5,011년 전의 단군유골이 출토됐다며 93년 단군릉발굴보고를 내고,94년 단군릉을 대대적으로 재건,공개했다.이후 관련유적과 기념물을 정비하면서 매년 전 학계를 동원해 단군과 상고사 학술회의를 개최해오고있다. 남측 학계는 이에대해 “정치적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는 시각이주류를 이루고 있긴 하지만 “남북간 관련정보를 공유하고 양측 주장을 검증할 공동연구의 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적지않게 제기되고있다. 또다른 논의는 단군의 역사적 실체를 재해석,민족통일과 세계의 미래에 기여할 보편적인 담론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이다.단군은 학파와 종교를 초월해 공유할 수 있는 민족 정체의식을 확립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같은 단군의 실체규명에 대한 논의는 더욱번져나갈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최근 논의가 ▲학문으로의 기본요건에 충실해야하고 ▲단군의 모습을 시대과제에 맞게 재해석,민족성원들을 실천의장으로까지 이끌어내 민족적 과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동력을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즉 민족에 대한 애정은 덕목이 될 수있지만 그 애정이 과학적 엄격성을 약화시키는 명분이 돼선 안된다는것이다. 한말·일제기의 단군은 저항민족주의의 요구에 부응했지만지금은 다르다는 지적이다. 현재 단군에 대한 인식은 혼란 그 자체다.강단 학자들 간 뿐만 아니라 ‘강단학계’와 ‘재야학계’,그리고 국민들의 편차가 너무 크다. 실제로 최근 월간 ‘뉴휴먼丹’이 전국의 18세 이상 성인 5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선 54%가 단군을 역사속의 실존인물,34%가 신화속의 인물이라고 답했다.종교별로도 개신교신자는 32%만이 실존인물이라고 한 반면 비개신교 신자는 50∼68%가 실존인물로 보고있는 것으로 나타나 큰 편차를 보여주고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정영훈 교수(정치학)는 “지금의 단군연구는 전체적으로 만연한 혼란상 정리를 우선 과제로 삼아야 한다”며 “학계는 엄격한 사료를 근거로 다양한 가능성들에 대해 문을 여는 개방적인 자세로 공동연찬의 장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성호기자 kimus@. *교과서에 나타난 단군. “1970년대 시험문제를 1990년대 교과서 내용에 근거해 채점한다면정답이 바뀌거나 문제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것도 적지않다.지난 20∼30년 동안 국사교과서의 무책임성을 교정하지 않고 되풀이 한다면 언젠가는 이 문제로 소송이 벌어지는 사태도 올 것이다” ‘한국 상고사의 쟁점-국사교과서 개편방향과관련하여’를 주제로2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개천절 기념 학술토론회에서 정영훈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의 주제발표 내용 가운데 일부다. 우리나라는 국사교과서를 1974년부터 국정으로 편찬하고 있다.정교수의 지적은 그동안 우리 국사교과서가 다루어 온 상고사의 문제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문제점은 고조선 및 단군에 대한 기술에서도적지않게 나타난다. 인문계 고등학교 교과서를 보면 고조선의 중심지를 놓고 74년판은“고조선의 옛 지역에 낙랑군이 설치되었다”면서 지도에 낙랑을 평양지역에 표기함으로써 중심지가 평양지역임을 나타냈고,이런 서술은 82년판까지 이어졌다.90년판부터 “고조선은 랴오닝(遼寧)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여 점차 인접한 군장사회들을 통합하면서 한반도까지발전하였다”고 하여 중심지가 이동해왔음을 밝혔다.96년판부터는 “초기에는 요령지방에 중심을 두었으나,후에 대동강 유역의 왕검성을중심으로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하면서 발전하였다”고 이를 분명히했다. 단군이 고조선의 건국자인가 하는문제를 놓고도 미묘한 차이가있다.74년판은 그저 단군신화가 존재했고 단군신화가 고조선사회를이끌어가는 세계관의 구실을 했다고만 언급했다.그러나 82년판에 단군왕검은 제정일치 시대의 족장이었다고 적음으로써 고조선의 건국자가 단군일 수 있음을 암시했다.기원전 2333년이라는 건국연대를 소개했다는 것은 상당한 진전으로 평가되지만,단군왕검을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명사로 해석함으로써,고조선의 건국시조로 분명한 인상을 심어주지 못했다.이같은 서술경향은 90년판과 96년판에도 이어지고 있다. 서동철기자 dcsuh@. *북한 단군릉 답사기. 98년 11월 첫 방북취재 중 평양시 강동군 문흥리 대박산 기슭에 위치한 단군릉을 방문했다.북에 오기 전에 사진으로 보기는 했지만 능입구에 도착한 순간 그 규모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눈부신흰색 화강암 계단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고,그 정상에는 피라미드를연상시키는 단군릉이 우뚝 솟아 있었다.그런데 능 입구에 모서리 일부가 떨어져 나간 오래된 비석이 하나 서 있었다.높이는 2m 정도.1936년에 세워진 ‘단군릉 기적비(紀蹟碑)'였다.비석에는 수많은 한자 이름들이 새겨져 있었다.일제가 이 곳에 위치한 단군릉을 파괴하자 이에 분노한 뜻있는 조선인 인사들이 단군릉 수축기성회(修築期成會)를 조직,단군릉을 보존 관리하기 위한 기금을 모았는데 성금을 기부한사람들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는 내용의 비문이 적혀 있었다.기자는다시 한번 놀랐다.그러면 일제하에서도 이 곳에 단군릉이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는 말인가.해설 강사는 일제하 뿐만이 아니라고 했다.조선시대에 간행된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평양의 단군릉에 대한 기록이 있고 ‘조선왕조실록’에도 숙종·영조·정조 조에 강동의 단군묘를 수리,관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는 것이다.또한 단군릉 주변의 지명도 대박산(밝은 산),단군호,단군동,아달동 등 단군과 관계있는 것들이 많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북의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평양 단군릉의 실재 여부를 두고 논쟁이 많았는데 김일성 주석이 단군릉으로 알려진 강동군의 작은 무덤을 실제로 발굴해 진위를 과학적으로 밝히라는 교시를 내렸다. 역사학자들이 발굴을 시작한 결과 사람의 뼈가 나왔는데 남자의 것으로 추정되었다.유럽의 전문 연구기관에 의뢰해서 전자스핀공명법으로 뼈의 연대를 추정한 결과 5011년전(오차 267년)의 것이라는 결과가 나와 이 뼈를 단군의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해설 강사의 설명을 들으며 화강암 계단을 올랐다.계단은 무려 279개.돌계단 중간에는 선돌을 연상시키는 돌기둥이 대문처럼 세워져 있었고 양쪽 끝으로는 단군의 네 아들과 여덟명의 신하상이 능을 호위하듯 서 있었다.모두 눈부신 흰색 화강암들이었다.279개의 계단을 다오르자 한 변이 50m, 높이 22m,9층 계단식 무덤인 단군릉이 위용을드러냈다.1994년에 준공되었음을 기념해서 모두 1,994개의 화강암 돌로 짜맞추었다고 했다.이처럼 숫자에 의미를 부여해 건축하는 것은북의 건축물 곳곳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단군릉의 모양은 광개토왕릉으로 추정되는 퉁거우의 장군총을 본뜬것이라 했다.무덤의 네 모서리에는 코끼리 만한 돌호랑이상이 세워져있었고, 그 앞에는 높이7m의 비파형 동검이 서 있었다.비파형 동검은 고조선의 대표적 무기다.능 뒤쪽에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이 있었다.안으로 들어가보니 이곳에서 발굴된 86개의 단군과 그아내의 뼈가 나무관 내부의 밀폐된 유리관 속에 보존되어 있는데 빛과 습기·공기로 인한 손상을 막기 위해 유골은 참관시키지 않는다고했다. 평양 단군릉에 대해서는 실재성에 대한 근거도 있고,또 그에 대한반론도 있다.이 문제는 앞으로 남북의 역사학자들이 합동연구로 밝혀내면 될 일이다.또한 북이 ‘민족의 시조' 단군릉을 그처럼 거대하게개건한 것은 ‘평양'이 아니라 ‘민족'을 내세우기 위함이라고 보는 편이 보다 합리적인 시각일 것이다. 평양 신준영기자 jun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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