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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 의정 초점] 도봉구의회 ‘日 구정견문록’ 살펴보니

    [구 의정 초점] 도봉구의회 ‘日 구정견문록’ 살펴보니

    도봉구의회 의원들이 일본 지바시(市) 등으로 연수방문을 다녀온 뒤 A4용지 21장짜리 분량의 장문의 견문록을 구의회 홈페이지에 올려 화제가 되고 있다. 이를 본 구청 공무원들은 “빼곡한 방문일정을 빠짐없이 실행한 것을 보면 ‘지방의원들이 외국에 놀러다닌다.’는 말은 옛말”이라고 입을 모았다. ●치밀한 준비와 강행군 23일 도봉구의회에 따르면 권은찬 부의장 등 의원 7명은 지난 1월 30일 8박9일 일정으로 일본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준비를 단단히 했다. 연수에는 권 부의장을 비롯해 김용석, 김원철, 이금주, 이성희, 이경숙, 조숙자 의원이 동참했다. 의원들은 도봉구가 벤치마킹할 일본의 생태식물원, 쓰레기처리장, 재래시장, 복지센터, 마을문고, 제설시설 등에 대해 방대한 자료를 수집했다. 수차례 토론회를 열고 출발 4일전에는 행정자치부 소속 전문강사를 초빙해 실전 세미나도 가졌다. 지바시 이나게 해변공원과 꽃 미술관, 마쿠하리 해변공원, 동물공원, 이즈미 자연공원 등을 발이 아프게 돌아봤다. 인공해변 공원인 이나게 공원에서는 주변의 숲을 주민 모금으로 조성한 것에 관심이 끌렸다. 예상보다 두배넘게 조성된 숲은 모금 참여자들의 이름을 비석에 새겨주기 때문인 듯했다. 미술관 주변을 500여 종류의 꽃이 감싸고 있는 꽃 미술관에서는 주민들의 소모임이 열리고 있었다. 동물 700마리를 사육하는 동물공원 관계자는 “적자가 나도 주민들이 좋아하니 문제없다.”고 말해 의원들의 부러움을 샀다. ●푸른 도봉을 위해 배울점 세다가야에서는 주민 스스로 마을을 가꿔 도로에 아이들의 그림을 새긴 타일을 깔아놓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하나미가와에서는 개인집 안에 마을의 공동 문고를 보유하고 있었다.‘가정문고’는 주민자치의 이상인 것처럼 여겨졌다. 일행은 한 일본인 주부가 “정부가 도와주면 그게 무슨 지원봉사인가.”라고 되물어왔을 때에는 할 말이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의원들은 귀국한 뒤 대규모 생태식물원 조성, 생활쓰레기 처리시설, 어린이전용도서관 건립 등 각종 현안사업을 처리할 때 일본에서 배운 것을 적용해 시행착오가 생기지 않도록 할 작정이다. ‘금연조례’를 도입하는 문제도 신중히 검토하고 있다. 일본이 제설제로 염화칼슘, 모래 대신에 염화나트륨, 돌가루를 사용함으로써 환경을 먼저 생각하는 점에 대해서도 느낀 점이 많았다는 점도 견문록에서 빠뜨리지 않았다. 한 국장급 공무원은 “연수에서 돌아온 의원들의 의정활동이 진지하게 보인다.”고 평가했다. 김경운기자 kkwoon@seoul.co.kr 그래픽 김선영기자 ksy@seoul.co.kr ■ “길거리 금연조례 검토” “일본의 지방의회 분위기가 우리나라와 비슷하다고 여겨 방문지로 결정했습니다.” 도봉구의회 일본연수단의 단장을 맡았던 권은찬(50·방학1·2동) 부의장은 23일 “지바, 하코네, 요코하마 등 방문지역도 도봉구가 벤치마킹을 할 부분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권 부의장은 “걸으면서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하는 금연조례가 있지를 않나, 길거리는 항상 비질이 돼 있고, 집 안에다 마을문고를 여는 등 곳곳에 놀랄 일이 많았다.”고 전했다. 또 “구정이나 자원봉사엔 주민이 먼저 나서고 모든 행사가 주민중심으로 진행되는 모습을 보고 솔직히 부러웠다.”면서 “우리도 잘해보자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고 말했다. 김경운기자 kkwoon@seoul.co.kr
  • 충훈비가 단체장 공적비?

    충훈비가 단체장 공적비?

    지방자치단체에서 지원한 수천만원의 보조금으로 만든 ‘6·25 참전 유공자 충훈비’가 참전 유공자들의 공적보다는 현직 자치단체장의 공적을 지나치게 부각해 유공자들이 반발하고 있다. 18일 경북 군위군 등에 따르면 군위읍 오곡리 872의1 일대 ‘6·25 참전 유공자 충훈비’ 현지에서 오는 24일 주민 등 7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충훈비 제막식을 가질 예정이다. 이 충훈비는 6·25 참전유공자회군위군지회가 2004년 11월 6000만원(도·군비 각 3000만원 보조)을 들여 제작한 것이다. 제막식이 늦어진 것은 주변 조경이 늦어진 때문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충훈비가 전쟁 참전자들의 유공보다는 단체장의 건립 공적을 기리기 위해 제작됐다는 오해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비신(碑身)의 전면에는 ‘나라를 지킨 유공자비’가, 후면 전면에는 비문과 단체장의 이름이 비교적 큰 글씨(사진 위쪽)로 새겨졌다. 또 좌측면은 지역 유지들인 당시 경찰서장, 교육장, 농협장, 관변단체장 등 비 건립추진위원 26명의 명단이 차지했다. 정작 비의 주인공들인 전사자 및 상이용사 등 군위지역 8개 읍·면 참전 유공자 1525명의 명단은 비신을 떠받치고 있는 좌대(座臺)에 작은 글씨(사진 아래쪽)로 올라 있다.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 군위군지회가 2001년 이 비석에서 5m 떨어진 지점에 세운 ‘무공 수훈자 전공비’의 수훈자 명단이 비신에, 단체장과 건립위원들의 명단이 좌대에 새겨진 것과도 대조를 보이고 있다. 이 지역 참전 유공자와 유족들은 “목숨을 걸고 전쟁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유공자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충훈비가 군수 공적비로 전락했다.”면서 “보조금을 지원한 군의 직·간접적 간섭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의혹을 제기했다. 이들은 또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울분을 토했다. 이에 대해 참전유공자회 홍영삼(74) 군위군지회장은 “비 제작 당시 추진위원들과 협의해 명단을 배치했다.”면서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명했다. 홍 회장은 이 지역 단체장과 절친한 사이인 것으로 알려졌다. 군 관계자는 “보조금은 지원했지만 충훈비가 어떻게 제작·건립됐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군위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어린이책꽂이]

    ●광개토태왕릉비(김용만 등 지음, 열린박물관 펴냄) 서기 414년,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이 죽고 2년후 국내성에는 거대한 무덤 옆에 6m가 넘는 비석이 세워진다. 아들이자 태왕의 자리를 이어받은 장수태왕이 2년에 걸쳐 만든 광개토태왕릉비다.1775자가 새겨진 비문에는 고구려의 역사와 태왕의 업적, 무덤을 지키는 수묘인에 대한 법령 등이 기록돼 있다. 추모왕(주몽)이 나라를 건국한 이래 700여년 동안 동북아시아 최강의 국가로 대륙을 호령한 광개토태왕의 진면목을 보여준다.9500원. ●이가 빠지면 지붕 위로 던져요(셀비 빌러 지음, 공경희 옮김, 비비아이들 펴냄) 미국 어린이들은 빠진 이를 베개 밑에 넣어 두고 잔다. 잠든 사이 이빨 요정이 방에 들어와 이를 가져가고 그 자리에 용돈을 놓아 둔다고 믿는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이를 물 컵에 담가 둔다. 그러면 밤 사이 ‘엘 라톤시토’라는 작은 쥐가 와서 물을 마시고 이를 가져가고 빈 컵에는 사탕이나 동전을 넣어두고 간다는 것. 일본에서는 윗니가 빠지면 땅바닥에 던지고, 아랫니가 빠지면 지붕으로 던진다. 그래야 새 이가 빠진 이를 향해 똑바로 난다고 믿는다. 세계 60여곳의 풍습을 소개.8500원. ●유유히 흐르는 강(린 체리 지음, 우순교 옮김, 킨더랜드 펴냄) 미국 매사추세츠와 뉴햄프셔 지역은 뉴잉글랜드라고 불리는 곳이다. 새로운 영국이라는 뜻이다. 모든 자연조건이 영국과 비슷해 그렇게 불렸다. 영국과 달리 이 지역은 수천년 동안 인디언과 자연이 조화 속에 공존해온 평화로운 곳이었다. 하지만 300여년 전 이곳에 유럽의 개척자들이 들어오면서 뉴잉글랜드의 내슈아 강은 오염되고 만다.1960년대부터 이곳 사람들은 강을 살리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벌인다.1979년 마침내 새끼 창꼬치, 퍼치고기 등이 내슈아 강으로 돌아온다. 내슈아 강의 역사를 소개.8000원.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하늘매발톱 지음, 주니어랜덤 펴냄) 신라의 충신 박제상에 얽힌 전설 ‘망부석이 된 아내’에서는 아직 세력이 크지 않았던 통일 이전 신라의 역사를, 살수대첩에 얽힌 전설 ‘을지문덕을 도운 스님들’에서는 지혜로 외세를 물리친 고구려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고조선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설 27개를 모았다. 책 제목은 김수로왕이 하늘에서 내려올 때 아홉명의 족장들이 불렀다는 노래 ‘구지가’의 한 대목.8500원.
  • [병자호란 다시읽기] (11) 누르하치, 명(明)에 도전하다 Ⅲ

    [병자호란 다시읽기] (11) 누르하치, 명(明)에 도전하다 Ⅲ

    누르하치가 만주의 패자(覇者)로 등장하기 전까지, 명이 상대하기에 가장 버겁고 까다롭게 여긴 대상은 예허였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누르하치가 하다, 호이파, 울라를 멸망시킴으로써 예허는 고립되었다. 명은 이제 예허를 다독여 누르하치의 후금을 견제하려 했고, 위기에 처한 예허도 명에 의지하여 생존을 도모하는 수밖에 없었다. 흔히 누르하치를 청 태조(太祖)라고 부르지만, 그가 애초부터 명에게 도전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명과 후금 사이의 현저한 국력 차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명과 맞서는 것을 애써 피하려 했다. 하지만 상황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명, 예허와 결탁해 만주 견제 누르하치에게 복종과 배신을 거듭했던 부잔타이는 1613년 울라가 망하자 예허로 망명한다. 같은 해 9월, 누르하치는 예허에 세차례나 사자를 보내 부잔타이를 송환하라고 요구했다. 예허가 자신의 요구를 일축하자 누르하치는 4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예허 정복에 나섰다. 다급해진 예허의 국주 긴타이시(錦台什)는 명에 사자를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누르하치가 예허를 정복하고 나면 랴오양(遼陽)을 쳐서 수도로 삼고 개원(開原)과 철령(鐵嶺)을 목초지로 만들 것’이라는 ‘경고’까지 곁들였다. 명은 누르하치에게 사자를 보내 예허를 공격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한편, 병력 1000명을 예허로 파견했다. 누르하치를 견제하기 위한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한 것이다. 황제의 ‘명령’을 접한 누르하치는 명에 보내는 국서에서, 과거 예허가 주동이 된 해서(海西)연합군이 자신을 먼저 침략했던 것과 부잔타이가 배신을 거듭했던 사실을 적고 자신의 예허 공격은 정당하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명이 예허만 편드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했다. 주목되는 것은 누르하치가 국서를 들고 명군 주둔지인 푸순성(撫順城)까지 직접 가서 전달했던 점이다. 당시 누르하치는 명에게 여전히 공손한 자세를 보였던 것이다. 명과 정면으로 부딪히지 않으려는 누르하치의 바람과는 달리 명의 견제와 압박은 갈수록 커져갔다. 1615년, 명의 광녕총병(廣寧總兵) 장승음(張承蔭)은 시하(柴河), 무안(撫安), 삼차(三 ) 등지에 대대로 살았던 만주의 농민들을 내쫓고, 수확을 금지하는 조처를 취했다. 허투알라와 푸순 사이에 위치한 세곳은 누르하치가 공들여 경작하고 있던 땅이었다. 명은 경작과 수확을 막아 경제적 기반을 차단함으로써 누르하치의 숨통을 조이려 했던 것이다. 누르하치는 격렬하게 반발했다. 사실 그는 격분할 만했다. 누르하치는 1608년 푸순 지역의 명군 지휘관들로부터 과거부터 대대로 살아온 자신의 거주영역을 존중해 준다는 약속을 받아낸 바 있다. 당시 백마를 잡아 하늘에 맹서하고,‘만일 약속한 경계를 침범하면 침입자를 죽일 수 있고, 침입자를 그대로 두면 묵인한 사람이 재앙을 받을 것’이라는 내용을 새긴 비석을 세웠다. 누르하치는 명의 사자를 만난 자리에서 장승음이 맹서를 어겼다고 성토하고,“대국이 소국이 될 수 있고, 소국이 대국이 될 수도 있는 것이 하늘의 이치”라며 ‘뼈 있는’ 말을 남겼다. 명과의 정면 대결을 암시하는 발언이었다. ●‘공격´ 주장 신료 말리며 역량 키워 1615년, 명이 일방적으로 예허의 편을 들고 경작까지 금지하는 조처를 취하자 누르하치의 신료들은 격앙됐다. 그들은 당장 명을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누르하치는 신중했다. 그는 신료들에게 ‘명을 치려면 하늘이 우리를 인정하여 도울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는 충분한 저축이 없기 때문에 명을 공격하여 약간의 승리를 얻어봤자, 백성들만 고달프게 될 뿐’이라고 공격론을 일축했다. 스스로에 대한 냉철한 진단이자 평가였다. 당시 아무리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해도 명은 여전히 대국이자 강국이었다.‘썩어도 준치’라고 했던가? 명의 인구는 만주보다 수백배나 많았고, 명의 대군은 만주가 갖추지 못한 화포(火砲)로 무장하고 있었다. 장승음의 ‘견제 조처’가 나온 직후의 ‘만주실록(滿洲實錄)’을 보면, 내실(內實)을 다지기 위해 애쓰는 누르하치의 모습이 부쩍 많이 나타난다. 만주의 각 니루(牛 )에서 장정 열명과 소 네 마리씩을 내게 하여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경작에 힘쓰도록 한 것, 창고를 세워 식량을 저장하고 그것을 관리하기 위해 전담관원을 임명한 것, 신료들에게 쓸 만한 인재를 추천하라고 강조한 것, 백성들이 소송(訴訟)을 제기한 사안을 공정하게 처리하여 억울함을 없애라고 강조한 것 등이 그것이다. 이 무렵 국가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누르하치가 보인 행보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몽골과의 동맹관계를 더욱 굳게 했던 점이다.1614년 4월부터 1615년 1월까지 10개월 남짓한 기간 만주는 몽골과 모두 다섯 차례나 혼인관계를 맺는다. 1614년에는 홍타이지를 비롯한 누르하치의 네 아들들이 몽골의 자루트( 特)와 코르친(科爾沁) 부족의 딸들을 아내로 맞았다.1615년에는 누르하치가 코르친 부족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1617년 1월, 누르하치의 장인인 코르친 부족의 밍간(明安) 국주가 자신을 찾아온다는 소식이 오자, 누르하치는 왕비와 모든 신료들을 대동하고 허투알라에서 100리나 떨어진 곳까지 마중을 나갔다. 밍간은 누르하치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허투알라에서 한달을 머물다가 돌아갔다. 이렇게 중첩된 사돈관계를 통해 우호를 유지했던 것은 만주에게 큰 힘이 되었다. 실제 1618년 누르하치가 명에게 선전포고하고 푸순을 공략할 때, 원정군 가운데는 그의 몽골인 사위들도 끼어 있었다. 당시 몽골은 남쪽으로 명, 동쪽으로 만주 사이에 위치한 전략 요충이었다. 누르하치가 명에 대한 섣부른 공격 대신 몽골을 회유하고 우대하는 정책을 취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7대 원한´ 내걸고 명에 선전포고 누르하치는 명과의 격돌을 피하면서 내실을 다지려 했지만 상황은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가 후금(後金)의 건국을 선포하고, 칸(汗)으로 즉위했던 1616년. 명 조정은 광녕 순무(巡撫)로 이유한(李惟翰)이란 인물을 임명했다. 광녕 순무는 사실상 요동의 군사업무를 책임지는 자리이자, 누르하치 등 여진 부족들과 교섭하는 최고위급 ‘채널’이었다. 누르하치는 이유한이 새로 부임한다는 소식을 듣자 신료 강구리(綱古里)와 팡기나(方吉納)를 인사차 파견했다. 그런데 이유한은 강구리를 비롯한 후금의 사절 11명을 쇠사슬로 묶어 구금해 버렸다. 이어 사자를 보내, 누르하치가 경계를 넘어온 한인(漢人)들을 죽인 것을 질책하고 ‘한인 살해’에 가담한 자들을 넘기라고 협박했다. 누르하치는 과거 ‘월경한 자들을 죽이지 않으면 재앙이 자신에게 미친다.’고 비석에 새겼던 내용을 상기시키며 사자를 설득하려 했지만 되지 않았다. 누르하치는 결국 광녕에 억류된 강구리 등을 살리기 위해 편법을 쓴다. 후금이 구금하고 있던 예허의 포로 10명을 ‘한인 살해자’로 이유한에게 넘겼던 것이다. 강구리 등은 약속대로 풀려났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누르하치는 명을 공격할 결심을 굳히게 된다.1618년 4월13일. 누르하치는 신료와 장수들을 모아 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누르하치는 그 자리에서 명을 공격해야만 하는 ‘일곱가지 원한’, 이른바 칠대한을 제시했다.1583년, 이성량이 자신의 부조(父祖)를 살해했던 것이 첫 번째 원한이었다. 나머지 여섯 가지는 명이 예허를 편든 것, 맹서를 어기고 한인들의 월경을 방조한 것, 만주인들을 세 주거지에서 내쫓고 경작과 수확을 금지한 것 등이 골자였다. 명이 자신과 후금을 능멸하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이윽고 제천의식이 끝나자 기병과 보병 2만명으로 편성된 원정군이 푸순성을 향해 진격했다. 바야흐로 동아시아 전체를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던 명청교체(明淸交替)의 서막이 올랐던 것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산이 좋아 산으로] 경남 남해 설흘산

    [산이 좋아 산으로] 경남 남해 설흘산

    남해군 남면에 자리한 설흘산은 동쪽으로 앵강만, 서쪽으로 한려해상국립공원 여수만, 남쪽으로 태평양의 출발점 남해를 두루 끼고 있어 산행 중 어디서든 바다 조망이 가능하다. 특히 ‘설흘산 공룡능선’으로 불리는 암릉에 서면 마치 파도 위에 누운 거대한 용의 등뼈를 걷는 듯 짜릿한 황홀경을 맛볼 수 있다. 산행은 대체로 응봉산(472.7m)을 한데 넣어 이뤄진다. 전체적인 산군은 설흘산을 기준점으로 했을 때 동쪽 망산(406.9m)과 서쪽 응봉산을 포함하는데, 암릉은 주로 응봉산에 집중돼 있어 두 산을 연결해 산행하는 것이 좋다. 지형도 상에는 서쪽 바위길 위에 문산(422m)·낙뇌산(257m)·옥녀봉(171m) 등이 늘어서 있지만 특별한 이정표가 없으므로 손쉽게 찾아내기 힘들다. 공식적으로 암릉은 ‘진입금지’가 원칙이며 안전한 우회길이 열려 있다. 선구마을 ‘노을펜션’ 이정표를 보고 시멘트 포장길을 들어서면 수령 350여년이 넘었다는 큼직한 팽나무가 산행객들을 반긴다. 초입을 지나 숲길로 들어서면 왼쪽에 인공으로 파놓은 듯한 굴이 하나 나온다. 굴 속을 잠시 살펴보고 오름길을 따르면 곧 쉬어가기 좋은 너른 암반이다. 능선을 따라 8분쯤 걸으면 제단 같은 평평한 바위와 만난다. 비석도 세워져 있으나 비바람에 마모돼 글씨를 읽어내는 일은 어렵다. 오솔길 걷듯 부드러운 능선을 따르는가 싶으면 무너져 내릴 것처럼 포개진 바위들이 길을 막고 서서 걷는 재미를 높인다. 응봉산을 2㎞ 못 남긴 지점으로 산은 서서히 공룡 등뼈로 변신한다. 초입을 출발 35분 후쯤 뾰족뾰족한 암릉이 산행객들을 맞는다. 암릉 시작 구간엔 밧줄이 쳐 있고 ‘진입금지’ ‘길 없음’이란 경고문구가 붙어 있다. 바위벽을 왼쪽에 두고 안전한 우회길을 선택해 10분쯤 올라선다. 암릉구간은 ‘설흘산의 공룡능선’이란 별명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아찔하다. 암릉은 20분 정도 흘러가다 잠시 숨을 돌린다. 등을 돌려 바닥으로 내려서면 계단이 설치된 우회길(암반)이다. 암릉은 10여분간 더 이어지다가 응봉산 정상을 500m 앞두고 그 기운이 쇠잔해진다. 응봉산에서 이정표를 따라 내려서면 완연한 오솔길이다. 육조문 갈림길을 지나면 너른 헬기장(설흘산 1.5㎞ 전방)이 나오고 헬기장을 지나자마자 두어 개의 갈림길을 만나는데, 설흘산 봉수대에 올랐다가 이곳 안부로 회귀해 가천마을로 하산하는 경우가 많다. 정상이 가까워지면서 길이 가파르다.10분쯤 힘을 쏟고 올라서면 다시 홍현마을로 내려서는 갈림길이 나온다. 정상은 진행 방향 오른쪽으로 100m 남았다. 나뭇가지 사이로 봉수대에 올라선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설흘산 봉수대는 높이 6m 직경 7m 정도의 방형 봉수대로 왜구의 침입과 재난 시 남해 금산과 전남 돌산 봉수대로 연락되었던 곳이다. 번잡한 봉수대에서 남쪽으로 5분쯤 가면 서포 김만중이 유배생활을 했던 섬 노도가 코앞에 보이는 전망바위에 닿는다. 전망바위에서 곧바로 이어진 길은 산행 안내도마저 제대로 표기하지 않은 곳이지만 등산로는 뚜렷하다. 산행 마무리는 가천마을이 되어야 한다. 설흘산 든든한 기운을 병풍 삼아 펼쳐진 가천마을 옹골진 다랑이논엔 새파란 마늘이 한창이다.‘옛날에 한 농부가 논을 갈다가 집에 가려고 삿갓을 들어보니 그 안에 논이 하나 더 있더라.’는 유래에서 ‘삿갓배미’라고도 불리는 가천의 촘촘한 농토에는 자투리 땅도 소홀히 할 수 없었던 남해인의 억척스러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 여행 정보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진주IC에서 남해고속도로로 진입 후 사천IC로 나와 3번 국도를 따르면 창선·삼천포대교와 만난다. 남해대교를 건너려면 진교나 하동IC에서 19번 국도를 따른다. 그후 1024번 지방도로로 진입한다. 초입인 선구리(사촌해수욕장 옆)는 남해읍에서 남면 소재지 가기 전 삼거리에서 우회전해 10분 정도 걸리고, 창선·삼천포대교를 건넜다면 이동면을 거쳐 가천(다랭이마을)을 지나 20여분 진행한다. 글 이영준 황소영(월간 MOUNTAIN 기자)
  • [산이 좋아 산으로] 전북 고창 선운산

    [산이 좋아 산으로] 전북 고창 선운산

    낮지만 깊은 산, 선운산(336m)은 계절의 이른 길목에 서서 봄을 맞는다.‘선운사 동백꽃을 보러갔더니’로 시작되는 서정주의 시 ‘선운사 동구’ 때문에 선운산은 동백으로도 유명하지만 푸른 보리밭을 바라보는 즐거움도 빼놓을 수 없다. 고창은 백제시대 ‘보리의 땅’이라는 뜻의 모양현(牟陽縣)으로 불려왔다. 예부터 보리농사가 잘 되었다는 말이다.10월에 뿌린 씨는 2월이면 푸른 싹이 돋기 시작한다. 선운산의 본 이름은 도솔산으로 알려져 있지만 ‘대동여지도’에는 선운사의 이름을 딴 선운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선운산을 흐르는 도솔계곡은 풍수지리학적으로 서출동류(西出東流)의 형상이다.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우리나라의 지형에서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물은 곧 손에 잡히지 않는 꿈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겨우내 추위와 바람을 이겨내고 움트는 보리싹이 그렇듯, 산정에 올라 맞는 푸른 바람은 낮지만 깊은 희망 하나씩 안겨줄 수 있을까. 선운산 오르막은 대부분 선운사를 기점으로 한다.1979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돼 산길은 잘 정비되어 있는 편이다. 높지 않지만 아기자기한 수림과 계곡은 부담 없는 산행에 그만이다. 집단시설지구가 있는 선운사 입구 삼인리를 제외하고는 교통이 불편하기 때문에 원점회귀산행으로 계획하는 것이 좋다. 선운산은 주변에 경수산(444m), 도솔산(336m), 개이빨산(345m), 청룡산(314m), 비학산(307m) 등 300m를 조금 넘는 산들이 모여 있다. 경수산에서 시작해 삼인자연학습원으로 내려오는 U자형 능선 종주는 15개 봉우리를 넘어야 하기 때문에 10시간이 넘게 걸린다. 중간에 내려오는 길이 많으므로 상황에 따라 코스를 정하면 된다. 산을 오르기 전 선운사 일주문을 지나 오른쪽 울창한 숲에 있는 부도전에서 추사 김정희가 쓴 백파선사비문 보기를 권한다. 글씨는 비석 뒤쪽에 있다. 숲에서 나오면 곧장 선운사 경내로 들어간다. 천연기념물인 동백나무 숲은 대웅전 뒤편에 있고 자투리 나무로 만든 만세루의 기둥과 보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도솔산에서 개이빨산, 소리재에서 낙조대 사이에도 용문굴과 도솔암, 마애불 등으로 빠지는 샛길이 많으므로 굳이 능선종주를 고집하지 않는다면 곳곳의 명소를 둘러보는 것이 좋다. 산길이 단순하고 표지시설이 잘 되어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지만 바위산인 만큼 중간에 암릉구간이 있어 주의해야 한다. 쥐바위와 사자바위 구간은 가파른 바위길로 암릉구간에는 고정 로프 등 안전시설이 되어 있다. 잔설이 남아 있는 곳이 있을 수도 있으므로 아이젠을 준비하도록 한다. 선운산 전체 능선에는 식수를 구할 곳이 없으므로 미리 준비하도록 한다. # 여행정보 미당 서정주의 생가가 있는 고창에는 생가 주변 선운리에 미당시문학관을 짓고 시인을 기념하고 있다.2001년 폐교를 개조해 문을 연 시문학관은 시인의 유품과 작품 등 2300여점을 전시해 놓았으며 관리실에 요청하면 무료해설도 받을 수 있다. 시문학관 바로 옆에는 시인의 생가를 복원해 놓았다. 관람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로 연중무휴다.www.seojungju.com (063)560-2760. 글 사진 이영준(월간 MOUNTAIN 기자) www.emountain.co.kr
  • “일제때 맺어진 간도협약은 무효”

    중국이 간도 분쟁의 완전한 종식을 위해 ‘장백산(백두산) 공정’을 이용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간도문제 전문가인 포항공대 박선영 교수는 19일 “중국은 ‘장백산 문화’를 새롭게 만들어내 간도지역 문화를 중국 문화의 일부로 포함시킴으로써 자연스럽게 영토분쟁 문제도 해결하려는 속셈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중국은 이처럼 적극적으로 간도에 관심을 갖고 있는데, 우리는 전혀 움직임이 없다.”면서 “우리 국민들이 이 문제를 정확히 알고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가 ‘간도 왜 논란인가?(아시아학회 펴냄·비매품)’라는 제목의 60쪽짜리 소책자를 발간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북한이 중국과의 관계 때문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우리까지 간도 문제를 도외시하다가는 중국의 의도대로 자연스럽게 중국 영토로 확정될 수밖에 없다는 게 박 교수의 생각이다. 박 교수는 “간도 문제가 미해결된 문제라는 사실을 중국과 국제사회에 천명하고, 다시 이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 교수는 ‘간도 왜 논란인가?’에서 4부로 나눠 관련지도와 사진 등을 곁들여 핵심쟁점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간도(墾島), 간토(艮土), 간도(間島) 등 여러가지 명칭으로 불리는 간도는 1712년 ‘백두산 정계비’에 “서쪽으로 압록, 동쪽으로 토문”으로 청과 조선의 경계가 규정된 이후 일반적으로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하는 토문강 이남지역을 말한다. 박 교수는 한·중간 간도 분쟁의 원인이 불명확한 과거의 협의와 무관치 않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청이 간도지역에 이른바 ‘봉금지대’를 설정, 양국 국민들의 출입을 막은 뒤에도 조선인들이 땅을 개간해 경작하자 ‘백두산 정계비’를 세웠지만, 이 비석의 성격에 대해 양국이 입장을 달리한 데다 비석에 새겨진 ‘서위토문(西爲土門)’ 글귀도 계속 논란이 됐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1885년과 1887년 조선과 청의 외교담판이 결렬됐고,‘을사늑약’ 이후 1909년 일본이 남만주 철도 부설권과 푸쉰 탄광 개발이권 등을 얻는 대가로 청과 불법적인 ‘간도협약’을 체결, 간도를 중국에 귀속시켰다. 박 교수는 “1945년 이후 일제시대에 맺어진 다른 조약은 모두 무효화되었는데 간도협약만 여전히 유효한 것처럼 중국이 간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면서 “1962년 북·중 국경조약도 국제사회에 비공개된 것이기 때문에 통일한국에서는 재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간도는 한반도 안전을 보장해주는 요새가 될 수 있다.”면서 “통일한국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서도 간도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와 아시아학회는 이 책자를 금명간 만화로 발간해 청소년 등의 교육자료로 활용토록 할 계획이다. 문의 054)279-2036.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석촌동 삼전도비 훼손

    서울 송파경찰서는 7일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 있는 사적 제101호 삼전도비(三田渡碑)가 훼손됐다는 송파구청의 수사 의뢰서를 받아 조사에 나섰다고 밝혔다. 훼손된 삼전도비에는 붉은 페인트로 앞면에 ‘철 370’, 뒷면에 ‘거 병자’라고 씌어 있었으며 둔기 등을 때려 망가진 부분은 발견되지 않았다. 경찰은 2일 밤 순찰 때 아무 이상이 없다가 5일 오전 9시30분쯤 페인트 칠이 발견됐다는 비 관리사무소측의 진술에 따라 훼손 행위가 지난 주말에 이뤄진 것으로 보고 목격자를 찾고 있다. 삼전도비는 조선시대 병자호란 때 조선이 청나라에 당한 굴욕사를 담은 비석으로 서울시는 후세에 교훈이 되도록 하기 위해 1983년 비 일대에 500평 규모의 소공원을 조성했다. 경찰 관계자는 “최근 일고 있는 반 중국 감정 때문에 사건이 발생했는지 등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수사하고 있다.”고 말했다.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儒林(756)-제6부 理氣互發說 제4장 儒林(13)

    儒林(756)-제6부 理氣互發說 제4장 儒林(13)

    제6부 理氣互發說 제4장 儒林(13) 사마천은 공자의 가르치는 방법에 대해서도 이렇게 분석하고 있다. “…공자는 사람을 가르칠 때에도 상대가 스스로 분발해서 배우려 하지 않으면 굳이 계발(啓發)해주지 않았고, 사우(四隅:동서남북의 네 방향) 중에서 일우(一隅)를 들어 깨우쳐 주었을 때 나머지 삼우를 깨닫고 반문해 오지 않았을 때에도 더 이상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공자의 가르침에 대한 열정도 수제자 안연과 애제자 자로가 죽자 곧 꺼져 버린 듯 보인다. 그리고 거듭되는 불행과 절망으로 마침내 병이 난 듯 보인다. 논어에는 공자의 병을 암시하는 내용이 나오고 있다. “공자께서 병이 심하게 나시자 자로가 문인으로 하여금 공자의 가신(家臣)노릇을 하게 하였다. 병이 약간 차도를 보이자 이를 알고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오랫동안 자로가 나를 속여 왔구나. 가신이 없는데도 가신이 있는 것처럼 꾸몄지만 내가 누구를 속이겠는가. 하늘을 속이겠는가. 또한 나는 가신들 손에 장사 지내지기보다는 차라리 자네들 손에서 장사지내지고 싶다. 또 내가 비록 성대히 장사지내지 못한다고 해도 설마 길거리에서 죽게 되기야 하겠는가.” 그 무렵 공자는 곳곳에서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고 있다. ‘심히 내가 노쇠하였구나. 오랫동안 나는 주공을 다시는 꿈속에서 보지 못하고 있다.’라고 탄식하기도 하고,‘봉황새도 날아오지 않고 하도(河圖)도 나타나지 않으니, 나는 끝장이로구나.’라고도 말하였던 것이다. 주공은 공자가 이상으로 삼았던 주나라초기의 예의 제도를 제정했던 어진 인물. 실질적으로 공자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것이다. 또한 봉황새는 태평성대에 나타난다는 전설적인 새이며, 하도는 황하에서 용마가 지고 나타났다는 중국의 고대문물을 상징하는 전설적인 도문(圖文)인 것이다. 그러므로 ‘봉황새도 날아오지 않고 하도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공자의 탄식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옛 문물제도도 부흥시켜 놓지도 못하고, 자신의 생애가 끝장에 이르렀음을 절망적으로 나타낸 탄식이었던 것이다. 안연과 자로가 죽은 후 공자가 사랑했던 제자는 바로 자공. 나는 스승의 묘를 6년간이나 지키면서 심었다는 벼락 맞은 나무 곁에 세워진 비석을 천천히 손으로 쓰다듬어 보았다. 비석은 원래의 글자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새카맣게 사람들의 손때가 묻어 있었는데 그것은 아직도 스승의 죽음을 슬퍼하는 자공의 눈물로, 비석이 항상 촉촉하게 젖어있다는 전설 때문이었다. 그런 전설 때문일까.‘자공수식해(子貢手植楷)’라는 글자가 새겨진 비석은 물기에 젖어 있었다. 자공은 비록 스승의 임종은 지키지 못하였으나 스승의 최후를 지켜본 유일한 제자. 공자가 죽기 일주일 전 자공은 깊은 병에 들어있는 스승을 찾아 병문안을 한다. 이 장면을 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공자가 병이 들었다. 자공이 병문안을 갔더니 때마침 공자는 지팡이를 짚고서 마당을 거닐고 있었다. 자공을 보자 말하였다. ‘사(賜:자공)야, 어째서 이토록 늦게야 왔느냐.’”
  • 儒林(755)-제6부 理氣互發說 제4장 儒林(12)

    儒林(755)-제6부 理氣互發說 제4장 儒林(12)

    제6부 理氣互發說 제4장 儒林(12) 그러나 청나라의 강희(康熙) 연간에 이 나무는 벼락을 맞고 타죽어 버렸으므로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비석과 정자를 세운 것이었다. 자공(子貢). 공자의 제자 중에서도 특히 외교활동이 뛰어나 살아 생전에 스승보다 더 유능하고 뛰어난 인물이라고 평가를 받았던 자공. 스승 공자로부터도 ‘자공은 천명대로만 살지 않고 재산을 불렸고, 그의 예측은 거의 적중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던 뛰어난 정치가이자 재산가였던 자공은 그러나 이러한 외교활동으로 스승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였다. 스승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였다는 자책감으로 자공은 6년 동안이나 공자의 무덤 곁에서 여막을 치고 묘를 지켰던 것이다. 이에 대해 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공자는 노나라의 도성 북쪽 사수가에 매장되었다. 제자들은 모두 3년간 상을 입었다. 또 3년간의 심상을 끝내고서도 서로 이별하려 할 때에는 소리 내어 울었다. 어떤 제자들은 그대로 머물기도 하였다. 자공은 무덤 곁에 초막을 짓고 6년이 지난 후에야 물러났다. 제자들이나 노나라 사람으로서 집을 공자의 무덤 곁으로 옮긴 것이 100여가가 되어 이곳을 공리(孔里)라고 불렀다.” 고향으로 돌아와 죽을 때까지 5년 동안 공자는 육경을 제자들과 함께 스스로 편찬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쉬지 않고 제자들을 가르쳤던 것이다. 공자를 만세사표(萬世師表)라고 부르는 것은 이처럼 ‘옛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그것을 갈고 닦아 알게 된 사람(好古敏以求之者)’으로서 ‘옛것을 잘 습득하여 새로운 것을 알아낸 진리(溫故而知新)’를 책으로 펴냈을 뿐 아니라 끊임없이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펼쳐 마침내 전 인류의 스승으로 자리잡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공자는 지금도 남아있는 행단(杏壇) 근처에서 끊임없이 제자들을 가르쳤다. ‘공자는 제자들을 시(詩), 서(書), 예(禮), 악(樂)을 가지고 가르쳤다.’고 사기는 기록하고 있는데, 제자들의 숫자는 3000명으로 추정되며, 육예(六藝)에 능통했던 제자들만 해도 72명이나 되었다고 사마천은 증언하고 있다. 물론 공자는 평생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공자가 집중해서 제자들을 가르친 것은 68세의 나이로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부터였던 것이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공자의 가르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공자는 네 가지 방법으로 제자들을 교화하였다. 즉 문(文:학문을 배워 인륜도덕의 이치를 밝힘), 행(行:자신의 행실을 닦음), 충(忠:자기의 마음을 다함), 신(信:언어가 신실하여 행동과 일치함)이다. 공자는 인격적으로 분석해볼 때 다음의 네 가지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즉 사의(私意)가 없었고, 기필코 무엇을 이루겠다는 의욕도 없었으며, 고집을 부리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자아를 버려 손쉽게 남을 따르려 하는 점도 없었다. 공자가 특히 삼간 점이 있었는데, 제(齊:제사를 드리기 앞에 근신하는 일), 전쟁, 질병이 그것이다. 공자는 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이(利)를 말하기도 했으며, 그러나 이를 말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천명(天命)과 인(仁)을 더불어서 말했다.…”
  • “고구려 정신으로 무장하라”

    “타성에 젖은 관행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고구려 정신으로 무장하라.” 광진구 1100여명의 전 직원에게 특명이 떨어졌다. 정송학 광진구청장은 ‘고구려 프로젝트’를 시행하기에 앞서 직원들을 대상으로 고구려 역사에 대한 이해 교육을 실시하도록 지시했다. 12일 오후 1시30분 광진구청 대강당에 직원 500여명이 굳은 표정으로 모여들었다. 이날부터 이틀 동안 진행되는 ‘고구려 역사 찾기’ 교육을 받기 위해서다. 구청과 16개 동사무소 직원의 절반가량이 한자리에 모였다. 정 구청장은 힘차고 엄숙한 어조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면서 “우리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갖고 동북아시아를 호령한 고구려의 기상을 계승해 대한민국이 세계중심 국가로 우뚝 서는 초석을 만들자.”고 강조했다. 직원들은 무용총 등 고구려의 고분벽화를 소개하는 영상물을 숨 죽이고 시청했다. 아차산의 홍련봉 보루 등 유적지를 보여주는 영상물도 상영했다. 이어 전국을 돌며 중국의 고구려 역사왜곡에 대해 일깨우는 이이화 서원대 석좌교수가 강의를 시작했다. 그는 ‘고구려가 왜 우리의 역사인가’를 설명하면서 ‘중국의 역사왜곡 실태’에 대해 통렬히 비판했다. 이 교수가 “고구려에 대한 더 깊은 연구가 이뤄지고 테마공원 조성 등을 통해 고구려에 대한 대중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하자 박수가 터졌다. 이날 오후 3시30분 강의가 끝나자마자 5급 이상 간부 20여명은 아차산에 올랐다. 숨 돌릴 틈도 없이 고구려 교육은 계속됐다. 아차산에는 고구려 병사들이 200년 동안 주둔했던 보루(참호)가 16곳이나 있다. 그 가운데 9곳이 광진구 관할이다. 나머지 4곳이 중랑구,3곳이 경기도 구리시에 속해 있다. 발굴된 보루 6곳에선 화살촉 등 유물 1680점이 쏟아져 남한 유일의 고구려 유적지로서의 가치를 더 했다. 광진구로선 아차산이 보물과도 같은 곳이다. 간부들은 동행한 향토사학자 김민수씨의 설명에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광진구는 이곳에 828억원을 들여 고구려 박물관을 짓고 주변에 역사테마공원을 조성하는 야심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고구려 영토 모양으로 성곽을 조성하고 광개토대왕비의 실물 크기 비석도 세운다. 구리시도 고구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으나 고구려 기념부지가 사유지여서 사업 추진에 애를 먹고 있다. 정 구청장은 4년 임기 중에 추진할 목표로 지역경제, 균형발전과 함께 고구려 프로젝트를 꼽았다. 연말 조직개편을 통해 ‘고구려 태스크포스팀’(가칭)을 출범시킨다. 광진구 관계자는 “이제 협조가 필요한 정부, 서울시가 광진구와 함께 고구려 프로젝트를 펼쳐나갈 것인지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김경운기자 kkwoon@seoul.co.kr
  • 儒林(754)-제6부 理氣互發說 제4장 儒林(11)

    儒林(754)-제6부 理氣互發說 제4장 儒林(11)

    제6부 理氣互發說 제4장 儒林(11) 둥근 반원 형태로 만들어진 수수교(洙水橋) 밑으로는 그러나 흐르는 물이 거의 없었다. 원래 물 이름 수(洙)자가 나온 것은 공자의 고향을 흐르는 수수(洙水)라는 강이름에서 비롯된 것으로, 공자가 생전에 수수와 사수(泗水) 강가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던 데서 수사학(洙泗學)이란 학통이 생겨났었는데, 그러나 강물이 끊겼기 때문일까,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은 거의 없었고 대신 그 위로 알이 굵어진 싸라기눈만이 부스러진 쌀알처럼 어지러이 흩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용도(甬道)를 따라 걸었다. 공림을 참배하는 많은 사람들이 물밀 듯이 밀려오는 인해전술의 해방군처럼 쏟아지는 눈발을 맞으며 행진하고 있었다. 이윽고 당묘문( 墓門)이 나타났다. 당묘문은 옛날부터 제사를 지낼 때 제주들이 옷을 갈아입기도 하고 제물을 마련하기도 하던 곳. 실질적으로 공자의 묘역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당묘문을 나서자 용도 양편에 네 개의 석조물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첫 번째 것은 화표(華表)라고 불리는 거대한 석주였다. 망주(望柱)라고도 불리는 이 돌기둥은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천문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람들은 모두 시끌벅적하게 낙천적으로 웃으며 극락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화표를 뛰어넘고 있었다. 그 다음의 석조물은 문표(文豹). 표범모양으로 생긴 이 석조물은 용맹과 충성을 상징하는 석상이며, 세 번째 석조물은 괴수모양의 녹단( 端). 상제의 마차를 끌던 동물로 하루에 1만 8000여 리를 달리고, 온갖 말을 다 알고, 모든 일을 다 안다는 전지전능의 정명(精明)을 나타내는 상징물이며, 마지막 네 번째 석조물은 옹중(翁仲). 유일하게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석상으로 일찍이 진(秦)나라의 장수로, 이민족과의 싸움에서 맹위를 떨쳤다는 완옹중(阮翁仲)을 가리키는 석상이었던 것이다. 만리장성을 구축하였다고는 하지만 흉노의 침입을 막지 못하였던 진시황은 키가 20척이나 되고, 힘은 수백 명을 당할 정도의 남해의 거인 완옹중을 발탁하여 오랑캐를 물리쳤던 데서 비롯된 이 석상은 ‘돌하르방’으로 변형이 되어 우리나라의 제주도에서도 수호신으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용도가 끝나자 향전(享殿)이 나타났다. 이곳은 조상들의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던 향당(享堂).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동한(東漢)시대 때부터 청대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 동안 계속 중수를 거친 것이었다. 그러므로 용도에 세워진 네 개의 석상들도 모두 송나라와 명나라 때 만들어진 석조물인 것이다. 향전을 돌아가자 해정(楷亭)이 나타났다. 정자 안 비석에는 오래된 해수(楷樹)가 조각되어 있고, 정자 곁에는 말라죽은 늙은 나무가 한 그루 남아있었다. 원래 자공(子貢)이 이곳에 움막을 짓고 시묘를 할 때 심은 해나무로 이로 인해 공목(孔木)이라고도 불리던 나무였다. 이를 기념하듯 정자 앞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子貢手植楷”
  • [HAPPY KOREA] 충남 3곳 주민활동 탐방

    [HAPPY KOREA] 충남 3곳 주민활동 탐방

    올바른 리더가 조직의 성공을 일궈내는 데 얼마나 중요한 지는 설명이 필요없다. 최고경영인(CEO)의 자질에 따라 기업의 흥망이 좌우되기도 한다. 마을이나 지역의 발전도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마을을 구성하는 주민 개개인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개인의 발전을 지역의 발전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지도자는 한 사람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 ‘의좋은 마을’ 이복현씨 예로부터 시골에서 양조장이나 정미소, 제재소를 갖고 있으면 ‘3대 부자’로 통했다. 그 자제들은 아쉬울 것도, 남부러울 것도 없어 보였다. 충남 예산군 대흥면 동서·상중리 ‘의좋은 마을’ 이복현(53)씨도 인근 광시중학교의 어엿한 교감 선생님이지만, 동네에서는 양조장집 둘째 아들로 더 잘 불린다. 이씨는 ‘있는 집안’의 거드름 피우는 아들이 아니라, 마을을 위해 봉사하는 일꾼으로 인정받고 있다. ●‘양조장집 둘째아들’ 별명은 ‘회장님’ 추수가 끝난 가을 밤, 형제가 서로의 빠듯한 살림을 걱정해 볏단을 몰래 가져다주는 중간에 만나 얼싸안고 울었다는 일화는 1956∼2000년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리며 널리 알려졌다. 지난해부터는 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되고 있다. 출처가 불분명한 민담으로 여겨졌던 이 이야기가 고려 말 실화라는 사실은 마을 주민들로 이뤄진 ‘대흥현 보존회’ 주도로 고증을 거쳐 밝혀졌다. 이씨는 보존회 회장이다. 그는 “형님이 일 때문에 타지로 이사해서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면서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마을에 보존돼 있던 비석에서 관련 내용을 발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씨가 마을의 역사 복원에 관심을 갖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대흥현은 대흥면의 조선시대 명칭이다.1914년 대흥군이 예산군에 편입되기 이전까지 군소재지로 번성했던 곳이다. 때문에 면 단위 지역으로는 드물게 초·중·고교가 지금도 위치해 있다. 하지만 1964년 마을 앞에 예당저수지가 들어서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예당저수지는 330만평으로 전국 최대 규모지만, 주민들 입장에서는 그 만큼의 농지가 물에 잠겨 생계 수단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씨는 “저수지가 들어선 이후 마을 규모가 10분의 1정도로 줄어들 만큼 상전벽해를 실감한 곳”이라면서 “생산기반이 사라진 상황에서 마을을 되살릴 길은 풍부한 문화유산을 복원하는 것뿐”이라고 강조했다.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 보존회는 매년 11월 ‘의좋은 형제 축제’를 개최하는 것은 물론, 마을 인근에서 청동기시대 유물유적지를 발굴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특히 이곳에서 발견된 나팔형 동기는 국내에서 유일한 것이다. 이씨는 현재 대흥동헌과 대흥향교 등을 복원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조선 초기에 창건된 대흥동헌은 2002년 지방문화재로 등록됐다. 마을 뒷산에 위치한 백제 부흥운동의 근거지였던 임존성 복원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는 “노력을 인정해 주셨는지, 지금은 주민 모두가 보존회 회원으로 가입한 상황”이라면서 “내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며 웃음지었다. 이어 “하나 뿐인 아들이 ‘고향 지킴이’가 되겠다고 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글 사진 예산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문산·동곡마을’ 주형로씨 요즘같은 세상에 자식에게 대를 이어 농사를 지으라고 권하는 부모가 있다면 지청구를 듣기 십상이다. 충남 홍성군 홍동면 문당리 문산·동곡마을 주형로(48)씨는 예외다. 아들 이름을 농민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바람인 ‘하늬’로 할 만큼 농촌 사랑이 자식 사랑 못지 않다. 주씨는 “농촌이 발전하려면 지도자 양성이 중요하다. 대를 이어 꿈을 일궈나가겠다는 취지”라고 강조했다. ●촉망받던 배구선수에서 싹수있는 농사꾼으로 주씨는 풀무농고(현 풀무학교) 재학 당시인 1977년 문당리에 친환경 농법을 도입했다.1993년에는 국내 최초로 오리농법을 시도했다. 지금은 문당리 일대 250만평의 농지에서 친환경 농업이 진행되고 있다. 전국 최대 규모다. 일반쌀 80㎏ 한가마당 16만원 정도지만, 이곳 쌀은 26만원선에 거래가 이뤄진다. 마을을 찾는 방문객도 연간 2만명이 넘는다. 그럼에도 주씨는 모든 공을 스승인 홍순명 전 풀무농고 교장에게 넘긴다. 주씨는 “중학교 때까지 배구선수로 활약했지만, 성장이 멈춰 운동을 지속할 수 없어 풀무농고에 진학했다.”면서 “6개국어가 가능했던 홍 전 교장 선생님이 농사와 관련된 각종 외국서적을 끊임없이 번역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며 겸손해했다. 특히 주씨는 2000년에 서울대 환경대학원과 녹색연합의 도움을 받아 ‘21세기 문당리 발전 100년 계획’을 세웠다. 문당리는 지금도 모든 일을 계획서대로 진행하고 있다. 계획 수립과 함께 주민들이 참여하는 협업공동체운동을 시작했다.‘홍성 환경농업마을 영농조합법인’을 만들어 정미소·황토방·농촌생활유물관 등을 공동 운영해 이윤을 골고루 나눠주는 것은 물론, 지역교육사업과 친환경농업 보급 등 비영리사업도 병행하고 있다. 마을 공동기금만 15억원에 이른다. 주씨는 “우리나라의 경우 마을 단위 발전계획이 전무하다시피하고, 공동체운동이 성공한 사례도 거의 없는 실정”이라면서 “농촌도 잘 살 수 있다는 계기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농활 나온 여대생, 문당리 총각에 빠지다 최근 10년간 문당리를 떠난 사람은 한명도 없다. 오히려 같은 기간 10여가구가 이주해 왔다. 농촌 총각들의 결혼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곳 총각들은 농활 나온 여대생들과 결혼한 커플만 지금까지 10여쌍에 이른다. 주씨는 현재 노령층과 젊은층이 공존할 수 있는 농촌형 주거공간인 ‘희망나눔동산’을 조성하기 위해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 그는 “친환경농업과 자연순환을 통해 자립하는 농촌 마을을 만드는 게 꿈”이라면서 “꿈을 이루려면 지도자 양성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체계적인 교육시스템도 만들 계획”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이어 “지금은 3대가 살고 있지만, 대학생 아들이 돌아오면 4대가 함께 살 것”이라며 웃었다. 글 사진 홍성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풀꽃이랑마을’ 외지출신 주민 3총사 ‘굴러온 돌이 박힌 돌보다 나을 수 있다.’ 마을과 생사고락을 함께 해온 토박이만이 마을의 리더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뜨내기로 간주되는 이주민들이 변화를 몰고 오는 신선한 자극제가 되기도 한다. 충남 공주시 정안면 고성리 풀꽃이랑마을의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풀꽃이랑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촌마을로, 주민이래봐야 70가구 150명이 고작이다.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정안 밤’의 산지이지만, 주민들의 삶의 질을 끌어올리기에는 역부족이다. 밤 이외에 소득기반도 신통한 게 없다. 국유림과 고성저수지 등에 대한 환경훼손 문제가 우선적으로 고려됐기 때문이다. 마을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이주민이 하나둘씩 늘어난 90년대 말부터다. 인천에서 교직생활을 하던 서명석(65)씨는 1999년 퇴직 후 이곳으로 내려왔다. 경기도 일산에서 외국계 기업에 다니던 최인규(63)씨와 화가인 임성복(64)씨 등도 2000년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서씨는 “지리적으로 외부와 단절된 동네라, 모든 게 악조건으로 간주됐다.”면서 “하지만 자연환경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는 장점을 살려보고자 힘을 모으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들은 우선 마을 중·장기 발전계획을 수립했다. 계획에 따라 지난 9월 마을 명칭을 현재의 이름으로 바꾸고, 팜스테이와 산촌학교 운영을 시작했다. 지금은 주민 모두가 팜스테이 운영회원으로 가입할 만큼 원주민들의 마음도 움직였다. 최씨는 “시골에 인적 자원이 부족하다는 것은 변화를 몰고 올 지도자가 없다는 의미”라면서 “악조건, 호조건을 논하는 것은 그 다음 문제”라고 강조했다. 공주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711년만에 인각사에 복원·제막

    삼국유사를 집필한 보각국사 일연(1206∼1289)스님의 비(보물 제428호)가 일연 탄생 800주년을 맞아 복원, 제막된다. 보각국사비 복원은 경북 군위 인각사에 주석하던 일연이 죽자 고려 충렬왕 21년(1295년) 왕명으로 그의 일대기를 담아 제작된 이후 711년 만이다. 경북 군위 인각사(주지 상인스님)는 24일 오전 11시 사찰 경내에서 지역 기관·단체장 및 불교계, 주민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보각국사비 제막식을 갖는다. 새로 복원된 보각국사비는 높이 2m 35㎝, 너비 1m 70㎝, 두께 30㎝의 웅장한 규모다. 무게는 3t. 비석의 앞면과 뒷면엔 일연 스님의 일대기와 비의 건립 내력 등을 4050자(字)의 왕희지체로 새겼다. 비 제작에 들어간 예산은 토목공사 등을 포함, 모두 3억 8000만원이다. 이번 비문 복원은 보각국사비 연구에 헌신한 재야 서지학자 박영돈(71)씨를 중심으로 관련 학자들이 30여년 동안 국내외에서 축적한 30여종의 기존 비문 탁본을 비교 대조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당초 보각국사비는 충렬왕의 명을 받아 당시 저명한 문장가 민지(閔漬)가 문안을 지었고 서성(書聖)으로 불리는 왕희지 글씨를 집자(集字)해 만들었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비석의 몸체가 동강나고, 무분별한 탁본으로 훼손돼 지금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다. 비문도 전체의 10% 정도만 확인되고 있다.군위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24일 TV 하이라이트]

    ●있을때 잘해(MBC 오전 7시50분) 진우 어머니의 점심식사 초대를 받은 순애는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여유있게 식사를 한다. 한편 영조의 의식불명 상태를 알게 된 유진은 곧장 영조한테로 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린다. 그러고는 동규에게 영조의 과거가 담긴 서류를 건네주고, 영조가 사고를 낸 원인이 서류내용 때문일 수도 있다는 말을 남긴다.   ●사랑과 전쟁(KBS2 오후 11시5분) 불임으로 고생하던 선경과 규철 부부. 갖은 노력에도 애가 들어서지 않자 입양까지 고려하고 있을 무렵 남편의 아이를 가졌다며 윤미라는 여자가 집으로 찾아온다. 규철은 윤미와의 관계는 실수였으며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한다. 선경은 윤미가 아이를 낳을 때까지만 집에 데리고 있기로 하는데….   ●열아홉 순정(KBS1 오후 8시25분) 혜숙이 춤바람 났다는 윤정의 말을 들은 옥금은 충격을 받는다. 선화는 취직시켜준 답례로 동국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동국은 묘하게 설레는 느낌을 갖는다. 괜히 들떠 보이는 동국이 의심스러운 명혜는 동국의 휴대전화 통화내역을 살펴본다. 한편 건형은 제대해 신형을 만나러 온다.   ●시네마 천국(EBS 오후 11시55분) ‘범죄의 재구성’의 노련한 사기꾼에서 ‘타짜’의 도박고수에 이르기까지 무심한 듯 태연해 보이는 표정과 엉뚱한 행동 뒤에 진정한 통찰력을 지닌 백윤식의 영화세계를 만난다. 결혼이라는 제도에 또 다른 시선을 보내는 두 편의 영화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감상한다.   ●신동엽의 있다! 없다?(SBS 오후 6시50분) 검은 비석에 새겨진 이름 네 글자 ‘순결바위’. 비석에는 ‘사생활이 순결하지 못한 사람은 들어갈 수 없다, 들어가면 바위가 오므라들어 나올 수 없다.’고 쓰여있다. 남녀의 순결을 시험하는 순결바위의 정체를 밝힌다.11월 넷째 주를 장식한 이 주의 뜨거운 사진 ‘털 없는 고양이’를 만나본다.   ●사이언스+(YTN 오후 1시40분) 예로부터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의 인삼은 고려인삼으로 불리며 세계적으로 각광받을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아 왔다. 그 이유는 다양한 종류만큼이나 많은 효능 때문이다. 인삼은 가공 방법에 따라 그 성분이 달라져 각 종류마다 성분의 차이를 나타낸다. 세계인의 웰빙 식품, 인삼의 모든 것을 알아본다.
  • [사설] 수목장이 산림을 훼손해서야

    수목장이 산림 훼손을 부채질하고 있다고 한다. 장묘 업자들이 유가족의 성묘 장소를 만들기 위해 숲을 훼손하는 사례가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또 수목장 주변에 각종 석물을 설치하기 위해 함부로 벌목하는 예도 있다고 한다. 친환경적인 장묘제도라는 취지가 무색하다. 우선 사찰이나 개인 등 수목장 운영업자가 난립하고 산림 훼손이 심각한데도, 행정당국이 고민한 흔적을 보이지 않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규제가 엄격한 공원묘지나 납골당과는 달리 수목장은 사업자가 임의로 자신의 땅에 만들어 분양할 수 있는 허점을 안고 있다. 하지만 훼손이 안 되도록 관리하고 지도하는 것은 기본이다. 법률적인 규제나 관리 규정이 없다며 책임을 회피할 일이 아니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수도권 수목장의 경우 수목장용 나무 한그루 값이 최소 200만원에 이른다고 한다. 앞으로도 난립은 불을 보듯 뻔하다. 정부는 공원묘지로 허용된 땅이 아니면 개인 소유의 땅이라도 매장이나 비석 설치 등을 규제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장사 등에 관한 법률’의 개정을 조속하게 마무리해야 한다. 하지만 법안 정비와는 별도로 국민들의 그릇된 인식을 바로잡는 게 시급하다. 살아있는 동안 본의 아니게 자연을 훼손했던 채무를 죽으면서 자연에 돌려주겠다는 게 수목장의 기본 정신이다. 이런 수목장이 그 취지와는 정반대로 새로운 환경파괴의 빌미가 된다면 망자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은 소박한 꿈을 유가족이 꺾어서야 되겠는가.
  • [儒林 속 한자이야기] (146) 神道碑(신도비)

    儒林 723에는 ‘神道碑’(귀신 신/길 도/비 비)가 나오는데,‘임금이나 二品(이품) 이상 官僚(관료)의 墓地(묘지) 남동쪽 큰길가에 세운 石碑(석비)’를 말한다. ‘神’은 원래 번개가 번쩍이는 모양을 본뜬 ‘申’(신)이었는데 후에 ‘제사’와 관련된 뜻을 나타내기 위해 ‘示’(시)를 붙였다. 본 뜻을 보존하기 위해 만든 게 ‘電’(전)이다. ‘道’는 원래 길과,梟首(효수)된 사람의 머리 상형인 ‘首’(머리 수)를 합해 國法(국법)의 준엄함을 의미하는 글자였다. 그 뜻이 ‘거리’나 ‘길’로 확장되었고, 사람이 지키고 실천해야 할 ‘도리’,‘조리있게 말하다’의 의미도 派生(파생)하였다. ‘碑’는 意符(의부)인 ‘石’(석)과 聲符(성부)인 ‘卑’(비)가 합쳐진 會意字(회의자).‘石’자는 甲骨文(갑골문)의 발견으로 손아귀에 잡을 수 있는 크기의 날이 있는 돌의 상형임이 밝혀졌다.‘卑’의 윗부분은 儀式(의식)에 쓰이는 일종의 儀仗(의장)이며, 아랫부분은 오른손의 상형인 ‘又’(우)의 변형이다. 의식 행위에서 의장을 들고 도열하는 사람들은 신분이 낮았다는 데서 ‘낮다’‘천하다’의 뜻으로 쓰였다. 碑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며 내용에 따라 墓碑(묘비),塔碑(탑비),神道碑(신도비),事蹟碑(사적비),遺墟碑(유허비),記功碑(기공비),頌德碑(송덕비),旌閭碑(정려비) 등으로 부른다.碑의 형태는 일반적으로 臺座(대좌)와 碑身(비신)과 蓋石(개석)으로 구성되어 있다.臺座는 碑身을 받치는 받침대로 네모 형태와 거북 모양이 주류를 이룬다. 비신은 직육면체로 앞면을 碑陽(비양), 뒷면을 碑陰(비음)이라 한다. 비의 상단부나 개석에는 題額(제액)을 새긴다. 일반적으로 篆書(전서)로 쓰기 때문에 篆額(전액)이라고도 한다. 무덤 앞에 세우는 비석을 총칭하여 墓碑(묘비)라 하는데,神道碑(신도비),碑(비),碣(갈),表石(표석) 등이 있다.碑에는 故人(고인)의 성명, 본관, 원적, 행적, 경력 등의 事蹟(사적)을 기록한다. ‘神道碑’는 원래 중국 漢(한)나라에서 종2품 이상의 官僚(관료)들에 한하여 세웠다. 우리나라에서는 東文選(동문선)등의 문헌으로 보아 高麗(고려)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王陵(왕릉)에도 신도비를 건립하였으나 文宗(문종)이 법으로 금하였다.2품 이상의 관원에게만 허용되었기 때문에 신도비는 집안의 位相(위상)과도 관련이 있었다.功臣(공신)이나 碩學(석학) 등에게는 왕이 직접 건립을 명하기도 하였다. 옛날에는 碑와 碣(갈)이 통용되었으나, 후대로 오면서 벼슬 등급에 따라 명칭을 달리하였고, 형태도 달라졌다.碑는 長方形(장방형)으로 지붕 모양의 蓋石을 얹는다. 반면 碣은 덮개 없이 碑身(비신)의 상단부를 둥그스름하게 만들고, 비에 비해 규모도 작다.3품 이하 관원의 무덤에는 墓碣(묘갈)을 세운다. 墓에 대한 分辨(분변)장치는 碑나 碣(갈)에 그치지 않는다. 천재지변 등으로 인한 인멸에 대비하여 墓誌(묘지), 혹은 誌石(지석)을 설치한다. 금속판이나 돌,陶板(도판)에 죽은 사람의 原籍(원적)과 성명, 생년월일, 행적, 묘의 위치 등을 새겨 무덤 앞에 묻는 것을 말한다. 김석제 경기도군포의왕교육청 장학사(철학박사)
  • [씨줄날줄] 의자왕의 무덤/ 이용원 수석논설위원

    백제의 마지막 임금 의자왕에 대한 평가는, 역사가 망국의 군주를 어떻게 대접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사서에 따르면 의자왕은 젊어서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불릴 만큼 백성에게 존경받았다. 왕이 되고서도 국력 증강에 힘 쏟아 숙적 신라와의 전쟁에서 연전연승했다. 그러나 660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대대적인 침공에 항복하고 말았다. 의자왕은 아들 부여융을 비롯해 대신·백성들과 함께 당나라 수도 낙양(洛陽)으로 끌려갔는데, 울분이 깊어서인가 며칠만에 병들어 세상을 떴다. 의자왕 사후 그에 관해 남은 기록은 가혹하다. 그가 말년에 황음무도(荒淫無道)해 백성에게 외면 받았으며 결국 망국을 자초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젊어서는, 공자의 고족제자 중에서도 효심 깊고 덕행 높기로 으뜸인 증자와 비견되던 인물이 말년에 180도 바뀌었다는 기록은 의혹을 사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백제가 멸망할 때 ‘3천 궁녀’가 낙화암에서 투신자살했다는 투의 전설은, 이긴 쪽의 의자왕 깎아내리기가 얼마나 집요했는지를 역으로 보여준다. 당시 백제의 인구·국력 등을 살펴 보면 ‘3천 궁녀’가 존재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중국 낙양시 문물당국이 3년전부터 인근 망산에 있는 고분군을 전면 조사해 왔으며, 올해 안에 일차 작업을 마무리한다고 최근 외신이 전했다. 흔히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이라는 의미로 쓰는 북망산이 바로 망산이고, 그 산에는 고대 한국인들도 적잖게 묻혀 있다. 의자왕과 함께 끌려간 아들 부여융과 장군 흑치상지, 아울러 고구려 멸망후 당에 귀의한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과 남산, 그리고 그 후손들의 묘지가 모두 망산에 있다. 그 가운데 연개소문 후손들의 묘는 지난봄에 확인되었다고 한다. 중국사서인 ‘구당서’는 의자왕이 죽자 망산의 손호·진숙보 묘지 곁에 장례 지내고 비석을 세워주었다고 기록했다. 따라서 국내에서도 부여군을 중심으로 의자왕 무덤을 찾는 사업을 활발히 벌여왔으나 아직 발견하지 못한 상태이다. 이번 낙양시 문물당국의 전면조사에서 의자왕 무덤이 확인되고, 그에 관한 유물이 출토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까. 그래서 망국의 오욕을 한몸에 뒤집어쓴 의자왕이 역사적으로 복권되는 일은 불가능할까. 이용원 수석논설위원 ywyi@seoul.co.kr
  • 儒林(724)-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5)

    儒林(724)-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5)

    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5) 그러나 아이로니컬하게도 비석 뒷면에는 ‘가례에 언급된 대로 간략하게 순서대로 기록하라’는 퇴계의 유계는 그대로 지켜진 셈이 되었으나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여 짓게 하면 기대승처럼 서로 잘 아는 사람은 반드시 실속 없는 일들을 장황하게 늘어놓아서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라는 유계는 지켜지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비석 뒷면에 새겨진 퇴계의 사적을 기록하고 있는 명문은 퇴계가 생전에 걱정하였던 대로 기대승이 직접 글을 지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퇴계는 자신의 임종을 앞두고 차근차근 주변을 정리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병세가 위중해지자 퇴계는 다른 사람에게서 빌려온 서적과 병족들을 돌려주라고 지시하는 한편 조카를 불러 호화로운 장례식과 묘지를 만들지 말 것 등의 장례절차를 직접 유언으로 남긴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남은 절차는 서당주위에 머물고 있던 제자들과의 이별이었다. 이때 계상서당에는 애제자 이덕홍을 필두로 칠십여 인의 제자들이 초조하게 퇴계의 임종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친족에게 유계를 마치고 난후 퇴계는 마침내 서당주위에 머물고 있던 제자들을 한자리에 모이도록 당부하였다. 이에 대한 기록이 퇴계 선생 연보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12월4일. 이날 낮에 퇴계의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와서 계상서당 주위에 머물고 있던 제자들을 만났다.” 이때 이덕홍을 비롯한 많은 제자들이 아무래도 무리이니 만나지 말 것을 종용하였으나 퇴계의 태도는 단호하였다. 퇴계는 이덕홍에게 부탁하여 자신의 몸을 일으키도록 하였다. 한 달 가량 몸져누워 있었으므로 퇴계의 몸은 검불처럼 가벼웠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앉긴 하였으나 퇴계는 자신의 몸무게를 지탱하기도 무리인 듯 그 자리에 쓰러지곤 하였다. “아니되옵니다.” 보다 못한 이덕홍이 쓰러지려는 퇴계의 몸을 부축하면서 말하였다. “병이 쾌차하시면 그때 제자들과 만나도 늦지 않습니다.” 그러자 퇴계는 이덕홍을 돌아보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니다. 내 병은 내가 잘 안다. 죽고 사는 것이 갈리는 이때에 만나보지 않을 수가 없다.(死生之際 不可不見)” 그러고 나서 퇴계는 이덕홍에게 자신의 의관을 입혀주도록 부탁하였다. 제자 정유일(鄭惟一)은 스승 퇴계의 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 적이 있었다. “스승께서는 평상시에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 갓을 쓰고 띠를 띠어서 서재에 나가면 얼굴빛을 가다듬고 단정히 앉아 조금도 어디에 기대는 일이 없으셨다.” 평상시에 그러한 율신의 태도를 취하였던 퇴계였으니 비록 병이 위중하였으나 마지막으로 제자를 만나는 영결(永訣)의 순간 의관을 정제하여 제자들에게 예를 갖추는 스승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 儒林(723)-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4)

    儒林(723)-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4)

    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4) 퇴계가 실질적인 유계(遺戒)를 내린 것은 다음 날인 12월4일이었다. 이날은 마침 퇴계의 병세가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자 퇴계는 주위를 물리치고 조카 영(寗)을 불러 자신의 곁에 앉게 한 다음 지필묵을 준비토록 하였다. 이때의 장면이 ‘퇴계언행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2월4일. 병이 조금 덜해진 틈을 타서 좌우를 물리치시고 조카 영에게 유계를 받아 적게 하셨다. 기침 소리가 심하였는데, 좌우를 물리치고 말씀하실 때에는 문득 질병이 몸에서 떠난 듯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쓰기를 마치자 직접 한번 읽어보시고는 영에게 봉하고 서명하라고 지시하셨다. 그런 뒤에야 기침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하였다.” 물론 퇴계의 유계는 그가 죽은 후에야 밀봉이 뜯기고 공개되었다. 퇴계가 남긴 유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국장(國葬)을 쓰지 말라. 해당 관청에서 규례에 따라 국장을 청하면 반드시 유명(遺命)이라 말하고 상소하여 고사토록 하라. 2. 유밀과(油蜜果)를 쓰지 말라. 과일은 넉넉지 못할 것이니 간소하게 한 단씩만 차리고 그 외에는 일절 쓰지 말도록 하라. 3. 비석(神道碑)을 세우지 말라. 다만 작은 돌에다 그 앞면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쓰고, 그 뒷면에는 향리(鄕里)·세계(世系)·지행(志行)·출처(出處)의 대략을 ‘가례(家禮)’에 언급된 대로 간략하게 순서대로 기록해라.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여 짓게 하면 기대승처럼 서로 잘 아는 사람은 반드시 실속 없는 일들을 장황하게 늘어놓아서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래서 일찍이 뜻한 바를 스스로 적고자 하여 먼저 자명문(自銘文)을 지었으나 그 나머지는 미루다가 마치지 못했다. 그 초고가 여러 원고들 중에 섞여 있을 것이니 찾아서 쓰도록 하라. 4. 선세(先世)의 묘갈(墓碣)을 세우는 일을 마치지 못하고 이렇게 되니 영원한 한이 된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일이 이미 갖추어져 있고, 형편도 어렵지 않으니, 반드시 문중 사람들과 의논하여 새겨서 세워라. 5. 동쪽의 작은 집은 본래 너(퇴계의 맏아들 준을 가리킴)에게 주려했고, 적(寂)을 위하여 따로 작은 집 한 채를 짓고 있었는데, 반도 못 짓고 이렇게 되었다. 적의 모자는 가난해서 반드시 완성하지 못할 것이니, 네가 맡아서 집을 완성해주면 정말 좋겠다. 만약 형편이 어려우면 차라리 네가 그 재목과 기와 등의 물자를 가져다가 재실(齋室) 등에 사용하고 적 모자에게는 이 집을 그대로 주는 것이 좋겠다.” 퇴계의 유계는 지금도 엄격히 지켜지고 있다. 도산의 동쪽 끝자락인 청량산 쪽으로 달려 나와 온계에서 흘러내린 퇴계의 물이 하계마을에 이르러 낙천물과 합쳐지는 지점을 직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건지산 기슭에 묻힌 퇴계의 묘소 앞 비석에는 다만 다음과 같은 10자의 비문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도산으로 물러나 만년을 숨어산 진성이씨의 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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