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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토 에세이 | 중국 무이산

    포토 에세이 | 중국 무이산

    몇 년 전부터 차(茶)를 좋아하는 몇몇 차인(茶人)들이 중국의 남쪽 복건성(福建省)에 있는 무이산(武夷山)에 꼭 가보라고 했다. 무이산은 유네스코 세계자연문화유산에 등재된 중국 5대 명산(名山) 중의 하나이고, 중국에서 손꼽히는 무이암차(武夷岩茶)와 서양 홍차(紅茶)의 발원지라는 것이었다. 중국차의 근원을 알고 즐기려면 반드시 가봐야 할 차의 원산지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조선조 때의 통치철학으로, 퇴계나 율곡에 의해 크게 발전했던 성리학의 뿌리인 주자학(朱子學)의 본고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주자 주희(朱熹) 선생이 태어나서 학문을 닦고 대성(大成)한 뒤 세상을 떠나 묻혀 있는 유적지로 그 발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고 했다. 차인들 권유에 마음속으로 가보고 싶다고 되뇌이고 있을 때, 마침 관심을 가진 가깝게 지내는 분들이 적지 않아 동호인의 단체여행으로 현장에 가게 됐다. 국내 여행사들은 아직 무이산을 관광상품화 시키지 못하고 있다. 중국에는 가볼 만한 관광지가 워낙 많은데다 무이산은 주로 차(茶)와 주자학 관계의 일부 전문답사팀으로 한정되어 있는 실정에서 그런 듯싶었다. 무이산은 중국이라는 규모로 볼 때 아주 작은 시골이다. 인구는 21만 명. 서울에서 직행으로 가는 비행기는 없고, 대만의 바로 건너편인 복건성의 항구도시 샤먼(厦門)으로 가서 국내선 비행기로 갈아타 내륙 쪽으로 40여 분 더 가야 한다. 비행기가 밤중에 도착해서 그런지 그저 그런 중국의 시골 비행장이었고,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 차창 너머로 보이는 거리도 어둡고 조용해 보였다. 그러나 차 관계 일로 무이산에 자주 왔다는 어떤 차인은 유네스코 세계자연문화유산 등재 10주년과 이곳에서 해마다 열리는 세계차박람회가 전 세계 차인들의 주목을 끌면서 무이산은 구시가지·신시가지로 나뉘어 무섭게 발전하고 있다는 말을 했다. 밝은 날에 보는 무이산은 관광객들로 붐볐다. 한국 관광객은 별로 보이지 않았으나 중국·대만·홍콩 등에서 온 단체가 대부분이었다. 무이산 관광의 하이라이트는 산 정상(頂上)에 오르는 것과 내려와서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대나무 뗏목으로 흘러 내려오는 정취이다. 그날따라 공교롭게도 비가 내렸다. 주저했으나 이곳에는 비오는 날이 많고, 비오는 날 산에 오르는 것이 더 운치가 있다는 말을 들으며 강행했다. 무이산은 해발 750m밖에 안 되지만 전체가 큰 바윗덩이 하나처럼 보였다. 정상인 천유봉까지는 바위를 깎아 848개의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안개 때문에 멀리 앞이 보이지 않는 가파른 돌 계단을 숨차게 오르며 잠시 잠시 둘러보는 풍광은 신비로운 선경(仙境)이었다. 아래는 산을 휘감고 흐르는 구곡(九曲)의 강이고, 강위에 점점이 흘러내리는 대나무 뗏목, 산능선을 오르는 돌계단 앞뒤로는 안개에 싸인 바윗덩이와 소나무들, 직벽을 타고 내리는 가느다란 폭포줄기가 멋졌다. 이래서 중국의 5대 명산에 들어간 것일까. 중국의 5대 명산은 안휘성의 황산, 산동성의 태산, 강서성의 노산, 사천성의 아미산 그리고 복건성의 무이산이다. 황산의 기이함, 태산의 웅장함, 화산의 험준함, 계림의 수려함을 찬탄하는데 무이산은 그 모든 것을 다 담고 있다고 이곳에서는 자랑한다. 걸어서 산에 오르기 힘든 사람들을 위해 가마꾼들이 산 밑에 대기하고 있었다.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데 400위안(한국 돈 7만 원)을 내라고 한다. 앞뒤로 두 사람이 둘러메는 가마로 지붕이 있어 비를 피할 수 있게 됐다. 앉아서 사방을 둘러보며 정상까지 오를 수 있어 편한데, 가마 타는 값이 좀 비쌌다. 한참 전이지만 안휘성의 황상에서는 100위안(한국 돈 1만8천 원) 했었고, 보통 200위안이면 될 듯싶지만 중국에도 인건비가 계속 올라간 느낌이다. 정상에 올라 기념사진들을 찍고 나면 다음은 뗏목을 타는 순서다. 굵은 대나무를 통째로 엮어 만든 뗏목 위에는 두 줄로 셋씩 여섯 개의 대나무 의자가 마련됐다. 앞뒤로 사공이 둘, 긴 대나무 막대기로 방향을 잡아가며 흘러간다. 여자 사공들도 간간히 눈에 띈다. “장엄한 바위산 밑으로 푸르게 흐르는 무이구곡을 대나무 뗏목 위 의자에 앉아 유유히 내려오며 맑은 바람이 머무는 바위 사이사이마다 차나무가 자라는 풍취에 잠겨 보라”고 차인들은 말했다. 앞과 뒤의 중국인 사공은 알아듣지 못하는 중국말로 쉬지 않고 주변 풍물을 설명하고 있고, 그와 상관없이 관광객들은 저마다 즐겁게 웃고 떠들었다. 현재 300여 개의 대나무 뗏목이 운용된다고 하며, 하류쯤에 도착한 뗏목은 자동차에 실려 상류로 옮겨진다. 이 무이계곡을 중심으로 옛날부터 불교·유교·도교가 성행했다고 하며 송(宋)·원(元) 시대 때부터 이곳에서 나는 차가 널리 퍼졌다고 한다. 무이산은 기후와 풍토관계도 있겠지만 차나무의 천국이라 불릴 정도로 차나무의 품종이 다양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여 종류가 넘는다고 한다. 그 가운데 4대 명차(名茶)로 대홍포·철라한·수금귀·백계관이 꼽히고 4대 명차에는 속하지 못하지만 흔하게 팔리는 차로 육계가 있다. 차 전문가가 아닌 보통 관광객으로서는 일일이 구별하기 어렵고, 그곳에서 제일로 치는 대홍포(大紅袍)도 여러 층이 있는 듯했다. 무이암차의 대표 브랜드가 대홍포이고, 누구나 대홍포를 찾기 때문에 저마다 대홍포라고 내놓는 것 같았다. 가는 데마다 시음을 시키는데 그게 그것 같을 뿐, 맛을 보고 구분할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될 것인가. 차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것만 자탄하며 다녔다. 대홍포라는 이름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옛날 어느 문인이 과거를 보러 상경하다가 무이산 천심사에 이르렀다. 그런데 갑자기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배가 아파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됐다. 그때 천심사의 승려들이 이를 발견하고 구룡(九龍) 암벽에서 찻잎을 따와 차를 달여 한 잔 주었다. 그것을 마시자마자 온몸이 가뿐해지고 아픈 배가 씻은 듯이 나았다. 그렇게 해서 그 문인은 무사히 과거를 보아 장원급제할 수 있었다. 그는 은혜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천심사에 다시 갔고, 그때 마시던 차를 가지고 돌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가 똑같이 배가 아프다고 하는데 궁중의 어의도 속수무책이었다. 그 문인은 마침 천심사에서 가지고 온 차를 황제에게 바쳤다. 그것을 달여 마시자 황제도 씻은 듯 건강을 회복했다. 그 후 다시 천심사를 찾은 문인은 자신이 걸쳤던 홍포를 차나무에 덮어 주었고, 그 홍포를 벗기는 순간 차나무가 빨간색으로 변했다. 무이산에는 대홍포의 모수(母樹)가 여섯 그루나 있어서 모두 소중하게 가꾸고 있고, 그 모수를 보려는 차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했다. 무이산에는 장예모 감독이 제작·연출한 <대홍포 산수실경 쇼>가 근래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다. 2,000여 명의 관객을 수용하는 야외극장으로 관객이 앉아 있는 자리가 360도 돌아가면서 200여 명 이상이 출연하는 대규모 쇼가 펼쳐진다. 레이저빔과 조명으로 무이산의 우람한 실경 봉우리가 어둠 속에서 나타나고, 강가 숲으로 말이 달리는가 하면 한쪽의 거대한 무대에서는 무이암차에 얽힌 전설과 남송(南宋)시대의 화려한 춤과 노래가 이어진다. 80분 동안 관객의 자리가 두 번 360도 돌아가며 자연경관과 화려한 무대를 앉아서 돌아가며 즐기게 하는 착상이 놀라웠다. 인구 21만 명밖에 안 되는 시골 소도시에서 비싼 입장료(한 사람 218위안(한국 돈 4만 원))에도 불구하고 연일 객석을 꽉 채운다는 사실이 불가사의하게 여겨졌다. 중국이니까 되는 중국적인 것일까. 차산업과 무이산 관광이 나날이 발전해가는 것에 비해 주자학의 주희(朱熹) 선생 유적지 관리에는 너무나 무관심하고 소홀했다. 솔직히 실망했다. 주희 선생의 묘소와 그 어머니 묘소는 작은 자갈돌을 모아 쌓은 봉분으로 그나마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풀이 나지 않는 묘역이니까 특별히 돌보지 않아도 외양은 그런대로 유지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주희 선생이 살았다는 주자고거(朱子故居), 무이산 자연공원 초입에 세워진 무이정사(武夷精舍)는 건물이나마 유지되고 있었으나 찾아오는 사람도 드물었고, 관리도 썰렁했다. 말년에 강학을 했다는 고정서원은 거의 버려진 것과 다름 없었다. 어린 시절에 수학했다는 병산서원, 홍현서원을 비롯한 유적지는 겉모양만 보일 뿐 주희 선생을 기리며 관리하는 것 같지 않았다. 이번에 같이 간 일행 중에는 주자 주희 선생의 32대손인 주덕화(朱德和) 평화사 대표 내외분이 조상의 유적지를 찾은 남다른 감회와 감사의 뜻을 보였다. 그러나 소홀한 관리에는 못내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한국의 신안(新安) 주(朱)씨는 주희 선생의 후손으로, 칭기즈칸의 몽골군이 원(元)나라를 세우고 주자학을 배척하는 바람에 고려 때 한국으로 망명하여 정착했다는 것이다. 주희 선생 묘소 근처에는 한국의 신안 주씨 중앙종친회에서 참배하고, 적지 않은 돈을 기증했다는 기념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글·사진_ 김용원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43) 강원도 영월 법흥사 밤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43) 강원도 영월 법흥사 밤나무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은 세월 따라 변하게 마련이다. 봄이면 꽃 피고, 가을이면 열매 맺는 나무도 세월 따라 몸피를 키우고 모양을 바꾼다. 당연한 노릇이다. 나무를 둘러싼 사람살이의 변화는 나무가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빠르다. 사람살이에 길들여진 눈으로 나무의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하는 이유다. 결국 한 자리에 오도카니 서서 살아가는 나무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단 한 순간도 움직이지 않는 생명은 없다. 운동과 변화는 생명의 기본 원리다. 나무 곁을 흐르는 세월은 필경 나무의 변화를 가져온다.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 나무의 작은 변화에 눈길을 돌리는 것은 우리 곁의 모든 생명을 지켜내는 첫걸음이다. ●200년 제 몫 다해 열매는 부실… 꽃은 잘 피워 입추, 처서가 지나자 강원도 영월 법흥사의 극락전 지붕 위로 불어오는 바람에도 가을 내음이 묻어나온다. 온 생명의 가을 채비가 뚜렷하다. 바람이 흐르다 머무르는 언덕 중간에는 한 그루의 오래된 밤나무가 결실의 계절을 준비한다. 법흥사 극락전 언덕의 밤나무가 세월을 희롱하는 듯 비스듬히 서서 스치는 바람을 품어 안았다. 야트막한 언덕의 곡선을 따라 살짝 비스듬하게 버티고 선 그의 모습에 여유와 풍요로움이 담겼다. 식물이 피우는 꽃 향기치고는 독특한 비린내의 유백색 밤꽃을 풍성하게 피웠던 밤나무다. 모든 나무들이 그렇듯 이제 열매를 맺을 차례다. “늙은 밤나무라서 그런지, 열매는 실하지 않아요. 꽃이 하얗게 잘 피어나긴 해도 열매는 잘 안 열려요. 그나마 열리는 열매들은 아주 잘거나 속이 빈 게 많죠. 먹을 게 못 됩니다.” 종무소 앞의 찻집 ‘다향원’에서 손님을 맞이하던 스님은 아쉬움을 드러낸다. 열매를 많이 맺는 나무들은 다른 나무들에 비해 비교적 수명이 짧은 편이다. 꽃이 화려한 나무들도 그렇다. 젊은 시절에 화려하게 부귀영화를 누린 탓이지 싶다. “오래된 나무지만, 누가 심었는지는 알 수 없어요. 특별히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도 없고요. 그저 보기에 좋은 나무이니 소중하게 여길 뿐이지요.” 법흥사 밤나무는 우리나라의 밤나무 가운데 손꼽히는 큰 나무 중 하나다. 내력이 온전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나무의 나이는 200살쯤 된 것으로 짐작된다. 생식 능력은 이미 고갈됐지만, 긴 세월 동안 그가 맺었던 열매를 생각하면 한 그루의 나무가 이 땅에서 해야 할 몫은 이미 다 치러낸 셈이다. ●키 27m? 눈대중으론 15m… 안내판 부정확 나무가 서 있는 언덕 아래에는 보물 제612호인 징효대사 보인탑비와 부도가 놓여있다. 징효대사는 법흥사를 처음 세운 신라 때의 자장율사와 함께 이 절을 대표하는 고승이다. 나무와 비석과 부도 사이에는 언제나 손에 잡힐 듯한 묘한 적막감이 휘감아 돈다. 비석과 부도, 그리고 징효대사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 일부러 심은 듯한 짐작이 생뚱맞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 옆에는 오래된 법당, 극락전이 있다. 법흥사에서는 몇 해 전부터 극락전을 대웅전이라고 고쳐 부른다. ‘극락전’이라는 현판도 떼어냈다. 사람살이의 변화를 따라 절집에도 찾아오는 당연한 변화이지 싶다. 그러나 밤나무에서는 극락전일 때나 대웅전일 때나 별다른 변화를 찾아 볼 수 없다. 살아 있는 생명체인 이상 나무도 분명 키를 키웠을 것이고, 몸피를 늘렸을 텐데, 사람의 눈으로는 알아챌 수 없다. “저게 밤나무 맞아요? 안내판에는 그렇게 써 있긴 한데, 꽤 크네요. 밤나무가 저만큼 크게 자랄 수 있나?” 고개를 갸우뚱하며 지나던 중년의 관광객이 한마디 던진다. 밤나무 앞에 세워놓은 보호수 안내판에는 나무의 줄기가 430㎝라고 돼 있다. 두 아름이 훨씬 넘는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27m라고 된 나무의 키는 좀체 믿기 어렵다. 눈대중으로는 아무리 크게 잡아도 15m 안팎이다. 그 정도만 해도 밤나무로서는 무척 큰 나무다. 살아 있는 이상 나무의 키나 둘레는 변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거의 두 배 가까운 차이가 나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보호수로 지정한 뒤에 벼락이나 태풍을 맞아 큰 가지가 부러지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 나무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2001년 이후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 아무래도 처음 측정에 문제가 있었지 싶다. 굳이 사람들에게 나무를 알리기 위해 세워둔 안내판이라면 보다 정확했으면 싶다. ●나무 곁으로 흐르는 사람 향기… 느린 변화를 안고 살아온 200살짜리 밤나무 앞으로 곱게 차려입은 노부부가 느릿느릿 다가온다. 중풍으로 몸의 한쪽을 못 쓰게 된 노인의 팔을 끌어안고 가만가만 걷는 노파의 걸음걸이가 조심스럽다. 힙겹게 걸음을 떼어놓는 노인에게 노파는 ‘적멸보궁까지는 못 올라간다니까요.’라는 말을 되풀이한다. 굳이 언덕 길을 따라 적멸보궁까지 오르자고 조르는 중이다. 얼핏 봐도 불편한 노인의 몸으로 500m쯤 되는 비탈 길을 오르는 건 무리다. 그러나 노파가 졌다. 늙은 밤나무를 뒤로 하고 노부부는 언덕 길로 접어든다. 한 걸음 떼어놓고는, 멈춰 서서 한숨을 내쉰다. ‘거 보세요. 안 된다니까요.’라면서도 노파는 적멸보궁을 향해 노인을 이끈다. 노부부의 몸짓에 느릿느릿 쌓이는 세월이 향기롭다. 절집이 변하고, 나무가 변해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향기만큼은 끝내 변하지 않을 것이다. 솔숲 사이로 바람 한 점이 건듯 불어온다. 바람따라 노인이 다시 한 걸음 떼어놓는다. 노부부를 지그시 바라보는 밤나무 줄기 위로 세월이 내려앉는다. 글 사진 영월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가는 길 강원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422. 중앙고속국도의 신림나들목으로 나가서, 지방도로 88호선 영월 방면으로 우회전한다. 19㎞쯤 가면 주천면 소재지에 닿고, 여기에서 1㎞쯤 더 가면 법흥사 계곡으로 들어서는 갈림길이 나온다. 법흥사 쪽으로 좌회전하면 곧바로 주천강을 건너는 작은 다리가 나온다. 다리를 건너 800m쯤 간 뒤에 나오는 다리를 다시 건너서 좌회전하여 계곡 길을 따라 10㎞쯤 가면 법흥사다. 나무는 극락전 바로 옆 언덕 중간에 있다.
  • [대구세계육상 D-9] ‘총알 탄 사나이’ 볼트 대구 일상 엿보니…

    [대구세계육상 D-9] ‘총알 탄 사나이’ 볼트 대구 일상 엿보니…

    ‘지구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로 불리는 우사인 볼트(25·자메이카)는 누구보다도 소탈했다. 세계를 평정한 그이지만 자메이카 대표팀에서는 한낱 평범한 선수에 불과했다. 볼트는 지난 16일 저녁 동료 9명과 함께 대구에 입성해 수성구 범어동 그랜드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17일에도 식사 등을 숙소에서 해결했다. 특급 스타답게 호텔에서 가장 비싼 스위트룸을 이용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아사파 파월(29) 등 다른 동료와 마찬가지로 일반실에 투숙했다. 자메이카 대표팀은 볼트의 키가 196㎝로 큰 편임을 고려해 침대 바깥으로 다리를 편하게 뻗을 수 있도록 간이침대를 요청했다. 볼트는 호텔 781호 방에 머무는 동안 더블베드에 누워 액정표시장치(LCD) TV를 보며 한가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랜드호텔 관계자는 “층마다 있는 스위트룸은 자메이카육상연맹 임원들이 사용하고, 볼트는 일반실에 머물고 있다.”고 말했다. 호텔 측은 치킨너깃을 좋아하는 볼트가 원하는 음식을 언제라도 제공받을 수 있도록 했다. 볼트의 이번 대회 출전료는 30만 달러(3억 4900만원)다. 그의 능력치에 비해 적은 액수다. 세계기록을 보유한 특급 육상 스타들은 출전 자체가 대회 흥행 보증수표로 통하는 만큼 몸값이 대략 50만 달러(5억 8000만원) 안팎에서 결정되는 것과 견줘도 낮은 액수다. 그가 이 같은 액수를 부른 것은 당초 참가를 약속했던 2009년 대회에 오지 못한 것을 매우 미안해하며 지난해 제시한 금액에서 한 푼도 더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성품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대구의 유일한 특급인 인터불고호텔을 택한 미국 선수단은 대부분 2인 1실을 쓰고, 앨리슨 펠릭스와 카멜리타 지터 등 제법 유명한 선수들만 독방을 쓴다. 펠릭스와 지터가 사용할 독방에는 트윈베드가 들어갔다. 27일 개막식에 맞춰 방한하는 자크 로게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 라민 디악 국제육상경기연맹(IAAF) 회장 등 유수의 IOC 위원들은 미국 선수단이 쓰는 인터불고호텔에 묵는다. 볼트를 앞세운 자메이카 육상대표팀은 선수촌에 들어가기 전날인 22일 팀 훈련을 공개한다. 19일에는 경산종합운동장 앞 나무 심기 행사에 참여한다. 경산시 관계자는 “세계 최강 자메이카 선수단이 종합운동장에서 훈련하는 것을 기념해 나무를 심고 비석도 세울 예정”이라며 “19일 저녁에는 경산시장 주재 만찬도 잡혀 있다”고 말했다. 자메이카와 함께 대회에서 양강 구도를 형성할 미국의 저스틴 게이틀린, 펠릭스, 지터 등은 19일 오후 대구 시민운동장에서 미디어데이 행사를 연다. 대구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경상북도 봉화-산골마을에 퍼지는 ‘워낭소리’

    경상북도 봉화-산골마을에 퍼지는 ‘워낭소리’

    경북 봉화는 ‘소’같다. 긴 속눈썹에 크고 깊은 눈망울, 무던하고 천진한 입매의 그 소를 닮았다. 봉화가 영화 <워낭소리>의 촬영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경북 봉화는 ‘소’같다. 긴 속눈썹에 크고 깊은 눈망울, 무던하고 천진한 입매의 그 소를 닮았다. 봉화가 영화 <워낭소리>의 촬영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시간의 채찍질에도 아랑곳없이 길가의 풀을 뜯는 소처럼, 봉화는 오지라 불러도 좋을 산골어귀에서 당신과 나의 고향인 듯 터를 잡고 있던 탓이다. 잠시 봉화라는 달구지에 몸을 실어 볼 것. 딸랑… 딸랑… 아련하고도 청량한 워낭소리가 산바람에 실려 환청인 듯 들려올 것이다. 에디터 트래비 글·사진 Travie writer 서동철 취재협조 봉화군청 culture.bonghwa.go.kr 1 최 노인의 집은 누추하지만 정겨웠다. 마당 한 쪽에 걸려 있는 액자에는 영화 속 장면이 담겨 있어 <워낭소리>를 추억하게 한다 2 영화의 주요 장면과 줄거리가 새겨져 있는 마을 입구의 조형물 3 최 노인과 누렁이가 논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재현한 동상도 마을 입구에 서있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누렁이, 여기 잠들다 차는 봉화 읍내를 지나 내성천을 건너고 다시 봉긋한 산들로 둘러싸인 마을에 들어선다. 여기 어디쯤이라는데, 여느 호젓한 시골에서 흔히 만나볼 수 있는 풍경에 영화 <워낭소리>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러던 중 넓은 논 사이로 가지런히 난 흙길을 따라 터덜터덜 느릿한 걸음을 옮기는 소 한 마리가 눈에 들어온다. 그 뒤엔 거짓말처럼 영화 속 주인공인 최 노인이 달구지에 실려 있다.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30년 넘게 반복되어 온 풍경이 그렇게 재현되고 있었다. 변한 것은 소 한 마리뿐이다. 영화에 나왔던 소는 죽어 땅에 묻혔고, 지금은 튼실해 보이는 젊은 소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푸석푸석했던 털은 윤기가 흐르고 할아버지처럼 바싹 말랐던 몸은 근육질을 자랑한다. 요 녀석의 나이는 일곱 살, 이 누렁이도 그전 누렁이처럼 마흔 살(사람으로 치면 120살쯤 된다고 한다)까지, 잘 살아 줄까? 그들이 걸어 나왔던 길을 되짚어 가니 누렁이와 할아버지의 일터가 나타났다. 논밭 주위로는 영화 속 대사가 적힌 벤치들이 수시로 발걸음을 붙잡는다. “말 못하는 짐승이라도 나한테는 이 소가 사람보다 나아요.” “농약 치면 소 먹고 죽어. 사료 먹이면 살쪄서 애 못 낳아!”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리듯 생생한데, 그중 한 대사에 코끝이 찡하다. “노인네들 겨울 잘 보내라고 나무를 이레 해놓고 떠났다 아입니꺼.” 그 옆엔 누렁이가 묻힌 무덤과 비석이 자리하고 있다. ‘누렁이(1967~2008)’ 할아버지 최고의 친구이자, 최신의 농기구, 최고급 자가용인 누렁이가 그렇게 잠들어 있었다. 이제는 코뚜레와 워낭을 내려놓고 편히 쉬고 있을는지. 일터에서 할아버지 댁까지는 약 1km 정도. 소처럼 느릿하게 걸어 봉화군 상운면 하눌리에 자리한 할아버지의 집에 들어서니 영화 속 정경이 그대로 펼쳐진다. 이른 새벽 허연 김을 뿜어내며 쇠죽을 끓이던 솥이며, 여기저기 쌓여 있는 나뭇짐 그리고 아담한 외양간 들이 묻혀 있던 기억을 속속 끄집어낸다. 외양간에는 아까 그 젊은 누렁이가 긴 혀로 여물을 먹고 있다. 가끔씩 녀석의 턱에 매달린 워낭이 딸그랑 소리를 냈다. 그 워낭소리가 산사의 풍경소리처럼 청아하게 마당에 울린다. 어쩌면 변한 것은 없는지도 몰랐다. 우직한 일소들은 하나같이 똑 닮아서 크고 깊은 눈망울에 덤덤하고 천진한 입매를 하고 있다. 그 믿음직한 얼굴과 몸짓이란. 할아버지를 부탁해! 1 거북바위와 연못 그리고 가지런한 돌다리가 환상적인 궁합을 이루는 청암정 2 충재 종택은 고향 할머니의 품처럼 넉넉하다. 소풍을 나온 아이들도 할머니 댁에라도 온 듯 마음껏 재잘거린다 3 계곡에 바짝 다가선 석천정사는 자연에 가까이 다가서기 위한 옛 사람들의 노력을 엿보게 한다 4 향기로운 전통차를 음미하며 청량산의 풍광까지 감상할 수 있는 안심당은 청량사의 명물이다 5 청량산의 하늘다리는 보는 것만으로 오금을 저리게 한다. 하지만 그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장쾌하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금닭의 품속으로 걸어 들어가다 할아버지와 누렁이를 뒤로하고 찾아간 곳은 ‘석천정사石泉精舍’이다. 내성천의 지류인 석천계곡을 따라 오르다 보면 울울창창한 숲길을 지나 멋스러운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너르게 흐르던 물길은 좁아지며 콸콸콸 시원한 물소리를 내고, 그 물길만큼이나 수려한 석천정사가 자연 속에 폭 파묻힌 채로 방문객을 맞이한다. 석천정사는 16세기 중반 충재 권벌의 장남인 청암 권동보가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것이다. 정사를 정자와 구분할 때 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의 유무를 따진다는데, 그래서인지 꽤 규모가 크다. 돌로 축대를 쌓아올리고 계곡에 바짝 붙어선 모습은 자연에 가까이 다가서기 위한 옛 사람들의 노력을 엿보게 한다. 정사에 올라서면 계곡과 바위와 숲이 온통 ‘내 것’인 듯 유유자적한 풍경이 펼쳐진다. 석천정사에서 더 상류로 올라가니 갑작스레 숲이 잦아들고 너른 평지가 나타났다. 그 너머로 기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충재 권벌이 조선시대 기묘사화로 관직에서 물러나 자리를 잡기 시작해 안동 권씨의 집성촌을 이룬 곳이다. 경주의 양동마을, 안동의 하회마을과 내앞마을 그리고 이곳 ‘닭실마을’까지를 영남의 4대 길지로 꼽는단다. 뒤로는 야트막한 산이 버티고 있고, 앞으로는 넉넉한 논과 밭이 이어지다간 깨끗한 물길이 마을을 감싸고 흘러간다. 마을 이름도 풍수지리적으로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는 금계포란金鷄抱卵에서 따온 것이다. 세월을 살짝 비껴간 듯한 마을은 고향의 냄새로 가득하다. 명절 때면 500년 전통을 자랑하는 닭실마을의 한과를 만드는 손길이 분주하고, 우뚝한 솟을대문을 자랑하는 충재 종택에는 안동 권씨의 일가친척들이 모여 전 부치는 냄새가 진동할 터이다. 가지런한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기억 속의 할머니가 버선발로 달려 나올 것처럼 정감 그득한 마을이다. 닭실마을 동쪽에 자리한 ‘청암정靑巖亭’은 마을 산책의 즐거움을 절정에 이르게 한다. 거북이 모양의 넓적하고 거대한 바위 위에 정자를 짓고, 그 주위를 둥글게 파서 연못을 만들었다. 정자를 등에 진 거북이가 연못 위를 노니는 형상이랄까. 연못을 건너 정자로 넘어가는 약 6m의 돌다리도 멋스럽기 그지없는데, 우리나라의 직선으로 된 돌다리 가운데 가장 긴 것이라고. 거북바위, 정자, 돌다리, 연못이 기막힌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 어딘가 낯익다면 기억을 더듬어 보시라. 특히 청암정의 돌다리는 <동이>와 <바람의 화원>을 비롯해 여러 드라마와 영화에서 주인공들의 애틋한 장면이 연출되었으니 꼭 한 번 건너봐야 한다. 원수를 만나는 외나무다리가 아니라, 비껴갈 수 없는 사랑의 외돌다리(?)이니 운명적인 만남이 이뤄질지도 모를 일 아닌가. 닭실마을┃주소 경북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963 문의 054-674-0963 www.darsil.kr 열두 연꽃잎으로 감싸인 청량사 청량산(870m)으로 오르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일주문에서 시작된 가파른 길은 ‘청량사淸凉寺’까지 부단히도 이어지며 장딴지를 묵직하게 했다. 사찰의 경내로 진입해서도 마찬가지. 어찌 이런 지형에 사찰을 건립할 생각을 했던 것인지 경이로울 만큼 가람배치가 독특하다. 가파른 산의 경사면에 건물을 올리려니 높다란 석축을 만들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여느 산사들보다 더욱 입체적인 가람배치가 형성된 것이다. 이른 아침 산안개가 자욱하게 몰려드는 경내에 서 있자니 주위가 온통 봉우리들로 가득하다. 주봉인 장인봉을 비롯해서 선학봉, 자란봉, 자소봉, 탁필봉, 연화봉, 향로봉 등 12개 봉우리가 우뚝우뚝 솟아 있고, 청량사는 그 한가운데에 자리한 형국이다. 열두 연꽃잎에 감싸인 꽃술이 바로 청량사인 셈이다. 특히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5층 석탑에 서면 청량산의 장쾌한 풍경이 펼쳐져 산행의 고단함을 단숨에 날려버린다. 원효대사가 663년 창건했다는 청량사에는 그 깊은 역사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 오고 있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피난을 왔다가 이곳 청량사에 들렀다고 한다. 약사여래를 모신 ‘유리보전琉璃寶殿’의 현판이 바로 공민왕의 친필이라고 하며, 사찰 오른편에 자리한 응진전에는 공민왕과 그의 부인인 노국공주의 영정이 걸려 있기도 하다. 또 통일신라 말기의 뛰어난 학자였던 최치원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고운대와 독서당, 명필 김생이 10년간 은거하며 글을 썼다는 김생굴, 퇴계 이황이 성리학을 집대성한 청량정사 등이 산 곳곳에서 여행객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듯하다. 청량사에서 숨을 돌리고 다시 산길을 더듬어 한 30분 정도 오르면 ‘하늘다리’이다. 해발 800m의 높이에 자란봉과 선학봉을 연결하고 있는 하늘다리는 보는 것만으로 아찔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고 가장 높은 현수교라는데, 발을 디딜 때마다 조금씩 출렁이는 것이 오금을 저리게 한다. 하지만 다리를 건너기 시작하면 좌우로 펼쳐지는 풍경이 장관이다. 태백산맥 끝자락에 걸린 봉화는 면적의 83%가 산이다. 산과 산들이 중첩을 이루며 하늘 끝으로 멀어져 가고, 그 사이사이 작은 마을들이 들어선 모양새는 아득하고 또 신비롭다. 청량사로 되돌아와서 산을 내려오려는데 어디선가 그윽한 차향이 흘러나온다. 시원한 통유리로 청량산의 정경을 감상하며 솔바람차, 오미자차, 작설차 등 전통차를 음미할 수 있는 찻집이다. 그 이름도 ‘안심당安心堂’이다. 차 한 잔을 시키고 창밖을 바라본다. 문득 영화 <워낭소리>가 떠올랐다. 누렁이가 세상을 떠나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이 가파른 산길을 올라와 5층 석탑 앞에서 소의 영혼을 위해 기원을 드렸다. 멀리서 들려오는 산새소리가 마치 워낭소리인 듯 ‘딸랑’ 귓전을 스치고 지나간다. 청량산도립공원┃주소 경북 봉화군 명호면 청량로 255 문의 054-679-6653 mt.bonghwa.go.kr Travel to Bonghwa ▶봉화 찾아가는 길 경상북도 봉화를 찾아가는 관문 도시는 영주, 안동, 영양, 울진, 태백 등지다. 사통발달 길이 통해 있지만 자가용을 이용하지 않을 경우 시내버스나 택시로 갈아타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서울에서 영주까지 기차(무궁화호)로는 3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영주와 봉화를 오가는 버스는 하루 종일 5~1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봉화버스터미널 054-673-4400, 영주여객(시내버스) 054-633-0011 ▶봉화에서 가볼 만한 곳 재래시장의 질펀한 흥겨움‘봉화시장’ 봉화군청에서 철길을 건너면 왁자한 시장골목이 시작된다. 봉화시장은 예로부터 영월, 삼척, 울진, 안동, 예천 등지에서 장을 보러 올 만큼 사람들로 붐벼 ‘들락날락 봉화장’이라는 유행어까지 있었다고 한다. 최근에는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지원하는 전통시장 활성화 시범사업인 ‘문전성시 프로젝트’가 한창 진행 중이어서 장보는 재미가 더욱 쏠쏠해졌다. 오일장(2, 7일)이 서는 날이면 각설이 공연에 민속품 경매까지 흔히 볼 수 없는 장터 풍경이 펼쳐지니 살 것이 없더라도 눈이 즐겁다. 시장문화사랑방 054-674-2008 이몽룡은 실존인물이다! ‘계서당’ 봉화 읍내에서 내성천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이몽룡의 생가로 알려진 계서당이 나온다. <춘향전> 연구의 대가로 알려진 연세대 설성경 교수가 오랜 연구 끝에 이몽룡이 실존 인물이었음을 밝혀낸 것. 이몽룡은 본래 봉화의 성이성이란 사람이었는데, 계서당은 그가 1610년 즈음 건립하여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라고 한다. 이중으로 기단을 올려 높다랗게 지은 사랑채와 오른쪽 끝에 만들어놓은 간이 화장실(?)이 볼거리이다. 주소 경북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 301 그 씁쓸하고 톡 쏘는 맛! ‘오전약수’ 봉화군에는 두내, 다덕, 오전 세 개의 약수터가 유명하다. 그중에서 물야면 오전리에 자리한 오전약수는 위장병과 피부병에 특효가 있기로 잘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전국 약수대회에서 1등 약수로 선정됐다고도 하니 그 명성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탄산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 톡 쏘는 맛이 강하고, 철도 많아 매우 씁쓸한 것이 특징이다. 강원도와 경상도를 넘나들던 보부상들이 발견했다고 하여 약수터 옆에는 보부상 조각이 서 있기도 하다. ▶봉화의 맛 3선 송이돌솥밥 봉화는 매년 9~10월 즈음에 ‘봉화송이축제’를 개최할 만큼 자연산 송이가 맛난 지역이다. 송이돌솥밥은 얇게 저민 송이를 밥 위에 살짝 얹고 쪄낸 것으로 향긋한 송이의 향이 입 안을 감도는 맛이 일품이다. 봉화읍내의 ‘솔봉이’ 식당이 송이돌솥밥으로 유명하다. 송이돌솥밥 1만5,000원, 송이전골 1만5,000원, 송이구이 4만원. 주소 경북 봉화군 봉화읍 내성리 232-11 문의 054-673-1090 봉성돼지숯불구이 봉화군 봉성면에는 ‘봉성돼지숯불단지’가 형성되어 있어 식사 때가 되면 돼지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을 한다. 예전에는 이곳에 시장이 있었는데, 암퇘지 고기를 소나무 숯불에 구워내는 남다른 향에 사람들이 장보는 것도 잊고 고기를 즐겼다고. ‘상봉숯불식당’도 봉성돼지숯불단지에 자리한 식당 가운데 하나이다. 돼지숯불구이 9,000원, 생삼겹살 1만원. 주소 경북 봉화군 봉성면 봉성리 363-1 문의 054-672-9783 봉화한약우 봉화는 산악지형이라는 지역적 특성상 작약, 당귀 등 약초 재배가 활발하다. 이러한 한약재를 첨가한 사료를 먹여 키워낸 한우를 ‘봉화한약우’라 한다. 올레인산을 비롯한 불포화지방산의 함량이 높기로 잘 알려져 있다. 봉화읍내에 자리한 ‘은하숯불회관’도 봉화한약우 전문식당이다. 육회 3만원, 생갈비살 2만원, 소고기버섯전골 1만원. 주소 경북 봉화군 봉화읍 내성리 352-2 문의 054-673-1303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위 기사는 기사콘텐츠 교류 제휴매체인 여행신문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 관한 모든 법적인 권한과 책임은 여행신문에 있습니다.
  • 수요시위 1000회 기념 ‘평화비’ 세운다

    수요시위 1000회 기념 ‘평화비’ 세운다

    1992년 1월 8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모여 “일본 정부는 사과하라!”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렇게 시작한 ‘수요 시위’가 20년 가까이 이어져 오는 12월 14일 1000회를 맞이한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수요 시위 1000회를 기념하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투쟁을 역사에 남기기 위해 의미 있는 걸음을 시작한다. 주한 일본대사관 앞을 ‘평화로’라 부르고, 할머니들이 매주 수요일마다 지켜온 자리에 ‘평화비’를 세우는 사업이다. 6일 정오에 열린 제977차 수요 시위는 평화비 건립을 위한 희망릴레이 발대식으로 진행됐다. 희망릴레이는 평화비 건립을 위해 1000원 이상의 후원금을 낸 사람이 ‘희망 주자’가 돼 다음 희망 주자에게 모금 배턴을 이어주는 캠페인이다. 이날 발대식에서는 평화비의 가안이 공개됐다. 조각가 김운성·김서경씨가 디자인한 평화비 가안은 높이 120㎝로, 일제에 끌려가던 소녀의 모습을 형상화한 비석이다. 정대협 관계자는 “할머니들이 소녀 때 일제에 의해 끌려갔다는 역사적 사실과 이 소녀들이 할머니가 되도록 역사가 흘렀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윤미향 정대협 상임대표는 “수요 시위가 1000회째 이어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이미 이 장소는 역사적 유적지가 됐다.”고 말했다. 김소라기자 sora@seoul.co.kr
  • 울진에 국내 최대 비석 전시관

    울진에 국내 최대 비석 전시관

    경북 울진에 국내 최대 규모의 비석 전시관이 문을 열었다. 23일 개관식을 가진 죽변면 봉평리의 ‘봉평 신라비 전시관’은 지난 2001년부터 최근까지 총 180억원을 들여 실내전시관을 비롯해, 야외 비석공원, 비석거리 등을 갖춘 비석 전문 전시관이다. 지하 1층, 지상 2층에 연면적 2393㎡ 규모의 실내전시관에는 봉평리 신라비와 고구려·백제·신라시대의 주요 비석 모형 10점 등이 전시돼 금석학의 계보와 시대별 비의 양식 변화 등을 엿볼 수 있다. 또 야외 비석공원에는 삼국시대~조선시대를 아우르는 국보· 보물급 모형비 25점과 울진지역 송덕비 45점이 마련됐다. 봉평신라비는 1988년 죽변면 봉평리 논에서 주민이 객토를 하던 중 발견됐다. 신라 법흥왕 11년(524년) 세워진 비석으로 높이 204㎝, 너비 32~55㎝의 돌에 신라시대 노인법과 신라6부의 존재, 17관 등 명칭, 지방관명 등 문헌에 없는 귀중한 정보가 399자의 글귀에 담겨 있어 국보 제242호로 지정됐다. 임광원 군수는 “이 전시관은 우리 비석문화의 집결지”라면서 “봉평비를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알리는 동시에 전시 콘텐츠의 다양한 개발을 통해 울진의 대표 관광명소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울진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특파원 칼럼] 태극기와 성조기/김상연 워싱턴 특파원

    [특파원 칼럼] 태극기와 성조기/김상연 워싱턴 특파원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태극기를 밟고 찍은 사진이 한국에서 논란이 된 모양이다.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니 아니나 다를까 둘로 갈려 있었다. “총리까지 지낸 사람이 태극기를 짓밟다니, 대한민국을 떠나라.”라는 비난과 “별걸 다 트집 잡는다. 그럼 태극기를 엉덩이에 두르는 것은 괜찮으냐.”라는 두둔이 드잡이하고 있었다. 내 알량한 분석력을 총동원해 판단하건대, 한 전 총리가 고의로 태극기를 밟은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아마도 취재진의 스포트라이트를 의식하느라, 또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석에 헌화하느라 태극기에 신경을 쓰지 못한 듯하다. 정말 작심하고 모독하고 싶었다면 굳이 신발을 벗고 태극기 위에 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 전 총리를 비판하는 쪽에서는, 적어도 잠재의식 속에서라도 그가 태극기를 무시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다른 사람 같으면 태극기를 밟거나 엉덩이로 깔고 앉았더라도 실수로 봐줄 수 있지만, 한 전 총리는 통혁당 사건으로 복역했던 전력으로 미뤄 의심이 간다는 것이다. 한 전 총리의 잠재의식 속에 정말 ‘태극기 무시’가 들어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의 모습에서 태극기에 대한 극진한 애정이 묻어나지 않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여기서 ‘극진한’이라 함은 부모님 영정만큼, 아니면 자신이 존경하는 전직 대통령의 영정만큼 끔찍이 위한다는 의미다. 만약 그랬다면 아무리 경황이 없더라도 태극기에 발을 올려놓는 일은 저어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이런 글을 쓰는 나는 어떤가. 고백하건대, 나 역시 태극기를 극진히 예우하는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국경일에는 ‘애국심을 꼭 표현해야 맛인가.’라는 자의적 논리로 국기 게양의 귀찮음을 합리화했고, 평소 태극기를 들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촌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월드컵 응원할 때나 돼서야 맘 떠난 애인 손잡듯 찾는 게 태극기였다. 왜 그랬을까 ‘분석’해 보니 과거 군사정부 시절 강요된 애국심에 대한 무의식적 반발심리였던 것 같다. 그때는 길을 걷다가 저녁 무렵 애국가가 울리면 그 자리에 부동자세로 서서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를 웅얼거리던 시대였다. 민주주의도 자라고 나도 자랐지만, 태극기에 대한 나의 정서는 유년기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나는 미국에 와서 ‘개과천선’했다. 미국 국민의 성조기 사랑은 가히 설화적이다. 어느 정도냐 하면, 공사장 타워크레인 꼭대기에 성조기를 꽂아놓고 일을 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중고차 판매장에 진열된 수백대의 차 하나하나에 성조기가 붙어 있는 모습도 봤다. 이러니 미국에서는 따로 국경일에 국기를 내걸라고 계도할 필요가 없다. 미국인의 이런 태도는 세계 최강대국 국민이라는 자부심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일류대학, 일류직장에 다니면 자랑하고 싶은 심리다. 미국인들에게 있어 성조기 사랑은 불온한 파시즘이나 유치한 우상숭배가 아니라, 국기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자신감을 끌어올림으로써 행복감을 느끼는, 유쾌한 ‘퍼포먼스’인 셈이다. 삼류대학, 삼류직장에 다닌다고 생각하면 우울해지는 것처럼 삼류국가 국민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국기를 자랑스러워할 수 없다. 성조기를 자랑스러워하는 미국 공사장 노동자가 태극기를 자랑스러워하지 않는 한국의 화이트칼라보다 더 행복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결국 국기 홀대는 자신을 홀대하는 것이고 국기 사랑은 자신을 사랑하는 행위인 것이다. 만약 북한 인공기를 너무 흠모한 나머지 태극기에 정이 안 가는 분이 정말 있다면, 그 마음 씀이 너무 박절하다고 말하고 싶다. 태극기는 남북이 분단되기 훨씬 전부터 우리와 가시밭길을 함께한 ‘겨레의 조강지처’이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의 혈서를 받은 것도 태극기였고, 유관순 누나가 아우내장터에서 손에 들었던 것도 태극기였다. 지난주에는 프랑스의 한류팬들이 우리보다 더 열렬하게 태극기를 흔들었다. carlos@seoul.co.kr
  • 유가상승 따른 구매력감소 10년새 2배로

    유가상승 따른 구매력감소 10년새 2배로

    유가 상승이 우리 경제에 미치는 손실이 1990년대 말 이후 크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18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김동석 선임 연구위원은 ‘유가 상승에 따른 경제적 부담 및 변화추이’라는 보고서에서 유가가 10% 상승할 경우 국내총생산(GDP) 대비 구매력 감소분은 2010년에 약 0.6% 포인트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1990년대에 0.3% 내외였던 것에 비해 두 배로 늘어난 것이다. 유가 상승에 따른 구매력 감소분이 높다는 것은 원유와 석유제품에 대한 의존도 또는 국제유가 변동이 국민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가 상승에 따른 구매력 감소분은 프랑스와 일본·중국 등 다른 나라들도 증가 추세지만, 우리나라는 이들 국가보다 높은 수준을 지속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프랑스와 일본 중국 등은 2010년에 0.2% 포인트 내외로 우리나라의 3분의1 수준에 불과했다. 1990년대 말 이후 유가 상승이 무역 손실에 미치는 영향도 커진 것으로 분석됐다. KDI는 유가가 안정적인 수준을 유지한 1990년대 중반까지는 우리나라 전체의 교역조건 악화에 따른 실질 무역 손실 가운데 유가 상승 기여분이 30% 수준을 유지했지만, 유가 급상승이 시작된 1990년대 말 이후에는 유가 상승이 실질 무역 손실의 대부분을 설명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KDI는 또 유가 상승이 기업과 가계에 미치는 영향을 석유제품 가격 상승에 따른 비용증가분을 비석유제품에 전가하는 경우와 그러지 않는 경우를 나눠서 분석했다. 비석유제품에 전가하지 않을 때는 유가 상승에 따른 구매력 감소분의 80%를 기업이, 나머지 20%를 가계가 부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비석유제품에 전가할 때는 유가 상승에 따른 구매력 감소분의 60%를 가계가, 정부와 기업은 각각 10~15%, 20~25%를 부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 연구위원은 “국민경제에 대한 유가 상승의 부정적 효과는 증가하는 추세이고 다른 나라에 비해서도 크게 높은 수준이며 이는 상당 부분 원유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경제구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재생에너지와 원자력 비중 증대 등 정부의 에너지 공급 정책 방향은 비교적 타당한 것으로 판단된다.”면서 “유가 상승이 에너지 사용의 효율성 제고로 연결되도록 수요관리 측면에서도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황비웅기자 stylist@seoul.co.kr
  • 나는 영국 시골에서 귀족처럼 쉰다

    영국만큼 과거를 부둥켜안고 사는 나라가 있을까? 옛것을 오롯이 간직하고 살며, 그 자부심으로 오늘을 사는 영국인들. 그들이 목숨을 걸고 보존하려는 것은 왕정 체제와 각국에서 강탈해 온 대영박물관의 유적들만은 아니다. 영국만큼 과거를 부둥켜안고 사는 나라가 있을까? 옛것을 오롯이 간직하고 살며, 그 자부심으로 오늘을 사는 영국인들. 그들이 목숨을 걸고 보존하려는 것은 왕정 체제와 각국에서 강탈해 온 대영박물관의 유적들은 아니다. 글 사진 = 최승표 기자 / tktt@traveltimes.co.kr 영국의 중세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한 코츠월드(Cotswolds) 지방에서는 사람과 자연과 낡은 건물이 공존하고 있다. 누구도 주인공이 아닌, 어울림의 멋을 간직한 풍경은 여행자에게 안식을 준다 나는 영국 시골에서 귀족처럼 쉰다 영국만큼 과거를 부둥켜안고 사는 나라가 있을까? 옛것을 오롯이 간직하고 살며, 그 자부심으로 오늘을 사는 영국인들. 그들이 목숨을 걸고 보존하려는 것은 왕정 체제와 각국에서 강탈해 온 대영박물관의 유적들만은 아니다. 시골 지역이야말로‘옛 영국’의 멋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그들의 자부심이다. 런던에서 2시간 거리에 있는 보석 같은 마을을 찾아 떠났다. 영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원 풍경을 가진 코츠월드(Cotswolds) 지방에 들러 동화같은 마을을 산책했고, 도자기마을 스토크온트렌트(Stoke-on-trent)에서는 중세 귀족들처럼 고급스러운 찻잔에 애프터눈티를 즐겼다. 21세기로 돌아오기 싫었다. 글·사진 최승표 기자 취재협조 주한영국관광청 www.visitbritain.co.kr 1 코츠월드는 영국 중부와 남부에 걸친 구릉지대이다. 푸른 초지 위에서 풀을 뜯는 양떼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2, 3 버튼온더워터는‘영국의 작은 베니스’라는 애칭이 붙을 만큼물과 마을이 어우러진 풍경을 자랑한다. 코츠월드의 수많은 마을 중에서 가장 방문객이 많은 곳이다 전원에 안겨 누리는 보편적 쉼 COTSWOLDS ‘영국식’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영국 고유의 문화들이란 런던 같은 대도시보다는 지방의 마을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영국식 정원, 영국식 휴가 문화, 영국식 아침식사, 심지어 영국식 영어발음까지. 하여 이번 여행에서는 런던을 비껴 북서쪽에 위치한 코츠월드(Cotswolds) 지방으로 향했다. 초록의 풍경 속을 거닐며 심신의 안식을 누렸고, 중세시대의 귀족처럼 500년 묵은 호텔에서 잘 먹고, 잘 쉬었다. 해리 포터를 탄생시킨 동화마을 런던을 출발해 옥스퍼드(Oxford)로 가는 기찻길,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이 어딘가 익숙하다. 완만한 구릉의 초지에는 소 떼, 양 떼가 뒹굴고 있고, 오래된 주택들에서는 장작을 때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유럽의 여느 시골과 다를 바 없는 풍경이다. 허나 옥스퍼드역에서 차를 타고 서쪽으로 향해 가자 진한 벌꿀색의 낡은 주택들이 나타나면서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코츠월드의 동쪽 관문 위트니(Witney)에 접어든 것이다. 영국 중서부와 남부, 6개 주에 걸쳐 있는 구릉지대인 코츠월드는 영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들을 품고 있다. 미국의 여행작가 빌 브라이슨은 코츠월드를 여행하고 “영국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정교하게 꾸며진 전원 풍경을 누리고 있다. 그런데도 분통이 터지도록 그 사실에 대해 잘 모른다”고 말했다. 그런데 빌 브라이슨의 지적은 조금 잘못됐다. 코츠월드는 중세시대 양모 산업의 중심지로 부유층이 몰려든 후로 지금까지 부호들의 휴양지로 명성이 자자하다. 런던에 사는 도시인들에게는 코츠월드에 별채를 소유하고, 주말마다 휴식을 취하는 게 로망이라고 한다. 브라이슨은 코츠월드의 상징인 석회석 돌담벽이 사라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워 분통이 터진다고 한 것이리라. 군데군데 남아 있는 야트막한 돌담벽과 목가적인 전원 풍경은 제주도와 어딘가 닮아 있다. 돌담과 가옥의 구성물이 현무암이라는 사실만이 눈에 띄게 다를 뿐이다. 그래서일까? 영국 국립 걷기 코스의 일부인 ‘코츠월드웨이(Cotswolds Way)’는 지난해 제주올레와 ‘우정의 길’ 협약을 맺었다. 코츠월드웨이는 남쪽의 배스(Bath)에서 북쪽의 치핑 캠든(Chipping Campden)에 이르는 160km의 도보여행 코스로 험난한 오르막길은 없고, 느릿느릿 걸으며 풍광을 즐기고 예쁜 마을들에서 농촌 사람들의 일상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올레길과 흡사하다. 코츠월드라는 지명보다 그 풍경이 우리에게 친숙한 것은 숱한 영화가 이곳을 배경으로 하는 까닭이다. <해리 포터>의 작가 J.K. 롤링은 코츠월드 지방의 예이트(Yate) 마을에서 나고 자랐으며, 영화 장면 중 일부를 코츠월드에서 촬영했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 <섀도우랜드> 등도 코츠월드를 배경으로 했다. 코츠월드와 인연이 깊은 유명인들도 많다. 영화배우 케이트 윈슬렛은 촬영이 없을 때 북부 코츠월드에 있는 자신의 집에 머문다고 한다. 찰스 왕세자도 어릴 적 이곳에서 자랐고, 폴로를 배웠다고 한다. 차를 타고 목초지가 펼쳐진 길을 달리는데 왕가의 후손처럼 보이는 소년들이 폴로 경기를 즐기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6개 주에 걸쳐 있는 코츠월드에는 약 200개의 마을이 있다. 각각의 마을들은 가옥의 형태가 조금씩 달라 고유한 매력을 가졌으니 머무를 마을을 결정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숙제가 아니다. 돌담과 가옥을 구성하는 석회석은 북쪽 지역은 진한 노란색을 띠고, 남쪽으로 갈수록 검은 빛깔이 강해진다. 코츠월드의 마을 중에서 바이버리(Bibury)는 영국에서 가장 예쁜 마을로 손꼽힌다. 콜른(Coln) 강이 잔잔히 흐르고 송어가 평화로이 헤엄을 치고 있다. 동화 속에서 금방 튀어나온 듯한 집들은 코츠월드의 어느 마을보다 동화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바이버리는 아트 & 크래프트 운동을 주도했던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가 가장 사랑했던 마을이기도 하다. 예술마저 대량생산되던 산업혁명의 시대에 반기를 들고 수공예를 활성화시킨 예술가의 눈에 가장 아름답게 보인 마을이라니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코츠월드에서 가장 대중적인 마을로는 버튼온더워터(Burton on the Water)가 꼽힌다. ‘영국의 작은 베니스’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 마을에는 청계천보다 얕은 냇물을 사이에 두고 아기자기한 앤티크 상점들이 줄지어 있고, 마을 곳곳에 볼거리를 간직하고 있다. 모터 뮤지엄에는 구식 자동차와 오토바이 등이 전시되어 있고, 버튼온더워터 마을을 9분의 1 크기로 축소시켜 놓은 모델빌리지도 흥미롭다. Gardens & Gardeners 영국식 정원은 ‘상상력’이다 코츠월드의 예쁜 마을들은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정원 같은 풍경을 연출하고 있지만 각 마을마다 인간의 상상력으로 빚어낸 신비한 정원을 곳곳에 품고 있다. 몸체 속에 작은 인형을 겹겹이 품고 있는 러시아 인형처럼 정원 속에는 작은 텃밭이 감춰져 있고 텃밭에 뿌리내린 각각의 식물들은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머금고 있다. 영국은 도시와 농촌을 불문하고 나라 전체에 숱한 정원을 갖고 있다. 런던에 있는 하이드파크(Hyde Park)도 정원의 확장에 다름 아니다. 영국 시골 정원의 주인은 중세시대 지주들이었고, 런던 정원의 주인은 왕이었기에 권력의 크기만큼 정원의 크기가 차이가 날 뿐이다. 영국을 벗어나도 영국인들이 스쳐간 곳에는 어김없이 근사한 정원이 있게 마련이다. 미국과 영연방 제국에는 어김없이 보태닉 가든, 영국식 정원이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영국인들은 왜 이렇게 정원에 열광할까? 지금의 ‘영국식 정원’은 18세기를 거치면서 급속히 확대됐다고 한다. 당시 영국 귀족들은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절대 권력과 엄격한 이념에 대항해 자유로운 정신을 정원에 표현해냈다. 그러니까 영국식 정원이란 자연의 모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도의 속박에 대한 반동이었으며, 상상력의 표출 창구였던 것이다. 영국식 정원들은 정형화된 정원의 패턴을 과감히 거스른다. 독특한 형태의 나무들 사이를 걸으며, 진한 풀꽃향기를 맡으면 꿈에서나 보았던 ‘비밀의 화원’에 온 듯한 착각이 절로 든다. 코츠월드에는 영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아름다운 정원들이 많다. 영국 HHA(Historic Houses Association)에서는 매년 ‘올해의 정원’을 선정하고 있는데 코츠월드 지방에 있는 정원들이 단골로 이 상을 거머쥔다. 버튼온더힐(Burton on the Hill) 마을에 있는 버튼하우스가든을 찾았다. 3월의 정원은 초록의 단색만이 그득했다. 나무를 손질 중이던 백발의 정원사는 “4월에 접어들면 거짓말처럼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필 것입니다”라고 소년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2006년에 ‘올해의 정원상’을 받은 이 정원은 18세기 영주가 살았던 곳으로 코츠월드의 정원은 단지 풀과 꽃을 구경하는 공간만은 아니다. 이곳에서는 수시로 자선행사가 열리며, 사진전, 미술전도 열리고, 예식장으로도 사용된다. 다음으로 1988년 ‘올해의 정원’으로 선정된 반슬리하우스에 들렀다. 시런세스터(Cirencester)에 위치한 반슬리하우스도 화려한 정원을 가진 17세기 영주의 주택이었으나 2001년 럭셔리한 호텔로 재탄생했다. 수백년 된 건물의 내부를 모던한 분위기로 180도 변화시켰으며, 호화로운 스파까지 갖췄다. 24개 객실은 모두 다른 디자인으로 설계했으며, 독립된 별채는 동남아 풀빌라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자랑한다. 투숙객들로 하여금 중세 귀족이 된 듯한 환상에 빠지도록 완벽하게 연출된 공간이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1, 2 영국인들은 정원 속에 그들의 상상력을 담는다. 중세 말, 유럽의 정세가 격변할 때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던 영국인들의 자유분방한 의식이‘영국식 정원’의 출발지점이다 3 중세 귀족들의 주택은 20세기를 거치면서 근사한 호텔로 변모했다. 반슬리하우스는 동남아 풀빌라를 무색케 하는 화려함을 갖췄다. 고풍스러운 외관에 모던한 실내는 영국이 아니고서는 경험할 수 없는 조화다 1 코츠월드는 시간마저 17세기에 멈춘 듯한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2 테트버리(Tetbury)에는 7세기에 지어진 성모마리아 교회가 있다. 이 교회 또한 코츠월드산 석회석으로 지어져 벌꿀색을 띈다 3 코츠월드는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굳이 촬영을 위한 세팅이 필요 없어 보인다. 오래된 호텔에는 낡은 책들이 세월의 흔적을 안고 있다 4‘ 비교적’번화한 테트버리 중심가에는 앤티크 상점들이 줄지어 있다 5 봄을 기다리는 정원은 정원사들의 세심한 손길로 다듬어지고 있었다 6 코츠월드에는 작은 호수가 많고 호수에는 어김없이 백조가 있다. 호텔 이름 중‘스완(Swan)’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7 마을마다 자리한 교회의 한 켠에는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비석이 행렬을 이루고 있다. 묘지의 분위기는 스산하기보다 정겹다 Accomodation 영국 시골 여행을 위한 최선의 선택 영국 시골 여행의 정수는 호텔에서 누릴 수 있다. 코츠월드에서 ‘호텔=잠자는 곳’이라는 등식은 절대 성립되지 않는다. 근사한 정원을 갖추고 있으며, 세심한 서비스를 제공해 중세 귀족들이 누린 호사로운 문화를 오롯이 느낄 수 있는 까닭이다. 호텔 안에 정원이 있다는 느낌보다는 정원 속에 호텔이 있다는 느낌이다. 이른 아침 지저귀는 새소리에 창을 열면 비밀의 화원에서 하룻밤을 난 듯한 기분이 들 정도다. 코츠월드의 호텔들이 가진 미덕이 여기에 있다. 대부분의 호텔이 20개 전후의 객실만을 갖고 있으며, 심지어 4개뿐인 곳도 있다. 체인 호텔이란 찾아보기 어렵고 , 어느 호텔을 막론하고 주변의 경관을 해치는 튀는 디자인도 없다. 가격은 런던의 호텔보다 훨씬 저렴하니 오래 머물기에도 좋다. 코츠월드의 호텔들은 한결같이 오랜 전통을 자랑한다. ‘17세기풍’은 단순한 수식어가 아니라 실제 17세기부터 시작된 호텔의 역사를 의미한다. 오래된 외관은 우리의 고택을 연상시킨다. 차이점이 있다면 뛰어난 보존정신과 현대 디자인의 요소를 적절히 수용했다는 데 있다. 위트니에 있는 올드스완(Old Swan) 호텔은 15세기 여관이 스파까지 갖춘 고급 호텔로 재탄생한 곳이다. 16개 객실은 최소한의 레노베이션으로 중세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주며, 46개 객실은 외관은 그대로 두고, 실내만 모던한 분위기로 변화를 꾀했다. 낚시와 승마 등 각종 레포츠를 즐길 수 있고, 최근에는 스파 시설도 선보였다. 올드 스완은 <나니아 연대기>로 유명한 영문학자 C.S 루이스가 애용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바이버리에 있는 스완 호텔은 콜른 강을 앞에 두고 너른 정원을 간직하고 있어 코츠월드 내에서도 가장 인기가 많다. 객실은 단 22개뿐이다. 코츠월드에는 호텔뿐 아니라 B&B(Bed & Breakfast), 게스트하우스도 많다. 가이드에게 “미국에서는 B&B란 통상 저렴한 숙소를 일컫는데 코츠월드 같은 부호들의 휴양지에 있다는 게 어색하다”고 말하자, 콧방귀로 답을 대신했다. 그리고는 “코츠월드의 B&B는 비싼 호텔을 가지 못한 여행객들이 가는 곳이 아니라 영국 농촌에서의 휴가를 누릴 수 있는 최선의 숙소 형태”라고 설명했다. 세대를 거듭하며, 정원을 다듬고, 몇 되지 않는 객실을 애정을 갖고 보존해 온 주인들의 시골 사람 인심을 체험하고 싶다면 호텔보다 B&B가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호텔이든 B&B든, 예약은 서둘러야 한다는 것. 야생화가 만발하는 봄철에 코츠월드를 방문하려면 최소한 6개월 전에 예약을 해야 안전하다. 코츠월드관광청의 웹사이트를 방문하면 다양한 숙소 정보와 유용한 여행 팁도 얻을 수 있다. www.cotswolds.com 1, 4 위트니에 위치한 올드스완 호텔은 6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레노베이션을 최소화한 객실에 머물면 중세시대로 돌아간 듯 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2 영국 시골 여행의 미덕은 영국인들이 애써 지켜온 그들의 휴가문화를 오롯이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3 17세기 영주들의 주택을 개조한 고급 호텔들은 실내를 모던한 디자인으로 꾸몄다. 햇볕 드는 밝은 객실은 아늑한 분위기를 극대화시켰다 food 미식가, 대식가를 만족시킨 영국의 맛 영국에 대한 가장 ‘억울한’ 편견 중 하나는 음식에 관한 것이다. ‘피쉬 앤 칩스를 제외하고는 먹을 게 없다’거나 ‘양은 많고 짜기만 하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3~4시간씩 수다를 떨며 와인과 함께 식사를 하는 비상식적인 사람들(프랑스)과 지중해의 축복으로 연중 식재료가 풍부한 아랫동네 허풍쟁이들(이탈리아) 때문에 저평가를 받은 것이라고 영국인들은 항변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영국의 시골에서는 이 편견이 여지없이 깨지기 마련. 지방에서 재배한 신선한 재료로 만들어진 음식들은 충분히 우리의 미각을 만족시켜 준다. 코츠월드에서의 아침식사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잉글리시 브렉퍼스트’라는 고유명사를 낳았을 정도로 영국의 아침 밥상은 특별하다. 풀 브렉퍼스트라고도 불리는 영국 조식은 이름처럼 양이 많다. 호텔에 따라 뷔페식으로 알아서 가져다 먹는 방식이 있지만 주문형으로 큼직한 접시에 음식을 꽉 채워서 정성스레 가져다 주는 경우는 양이 정말 많다. 소시지, 베이컨, 블랙푸딩(순대와 비슷한), 스크램블 에그, 칠리 콩, 구운 토마토, 삶은 버섯, 감자 튀김이 기본이다. 식성에 따라 보기만 해도 질릴 수 있다. 각종 빵과 과일, 시리얼까지 곁들여지면 위장이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다. 기자의 식성 탓일까? 어느 나라에서의 조식보다 영국식은 만족스러웠다. 단지 배만 부른 것이 아니었다. 어느 음식 하나 대충 만들어진 것이 없었다. 이에 비하면 시리얼과 빵 조각, 커피로 아침을 떼우는 콘티넨탈 조식은 요기만 면하는 수준이다. 영국에서 먹는 문화의 대표격은 ‘애프터눈 티’라 할 수 있다. 영국은 어디를 가나 호텔이나 찻집에서 애프터눈 티를 즐길 수 있지만 한 폭의 그림 같은 코츠월드의 절경과 함께하는 맛은 비교할 수 없다. 따뜻하게 구워낸 스콘과 함께하는 홍차 한잔은 오후에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특히 영국의 홍차 맛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차 때문에 전쟁까지 불사한 나라가 아니던가. 영국에서는 최근 음식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맛없는 음식의 나라’라는 불명예를 떨치기 위해 국가적으로 스타 요리사를 집중 육성시켜 음식관광의 활성화를 노리고 있을 정도다. 이와 별도로 10년 전 구제역으로 나라 전체가 홍역을 앓은 뒤, ‘믿을 수 있는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오가닉푸드(Organic Food)가 대두됐다. 코츠월드에는 유기농 을 ‘라이프 스타일’로 확장시킨 데일스포드(Daylesford)가 유명하다. 최근 한국 백화점에도 진출해 우리에게 익숙한 데일스포드는 직접 농장에서 재배한 유기농과 기른 가축을 판매하는 상점과 식당, 유기농 화장품으로 즐기는 스파 시설까지 갖추고 있으며, 영국인들은 물론 코츠월드를 찾는 외국인들에게도 인기를 얻고 있다. www.daylesfordorganic.com 5 영국은 오가닉 푸드 문화를 선도하고 있다. 유기농을 직접 생산해 다양한 제품으로 판매하는 데일스포드는 코츠월드에서도 명소로 꼽힌다 6 영국에서의 세 끼니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은 햇살 드는 창가에 앉아 조식을 먹을 때다. 잉글리시 풀 브렉퍼스트의 진수를 코츠월드의 호텔에서 누려볼 수 있다 7 홍차 한잔과 달콤한 스낵을 즐기는 오후의 여유는 영국 여행의 백미라 할 만하다. 근사한 애프터눈 티를 위해서라면 점심과 저녁을 희생할 만하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위 기사는 기사콘텐츠 교류 제휴매체인 여행신문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 관한 모든 법적인 권한과 책임은 여행신문에 있습니다.
  • “생가터에 달랑 표석 하나… 쓰레기만 수북”

    “생가터에 달랑 표석 하나… 쓰레기만 수북”

    서울 중구 초동 18-5 명보아트홀 앞. 충무공 이순신이 태어난 생가터이지만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맨홀 두 개와 전봇대, 가로등, 그리고 담배꽁초가 가득 담긴 대형 화분 6개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오토바이와 택배 차량, 단속차량까지 충무공의 생가터를 침범했다. 그 흔한 안내 표지판도 없었다. 지나가는 시민 대부분도 이곳이 공(公)의 생가터임을 처음 알았다고 말했다. 공은 1545년 이곳에서 태어나 소년시절을 보냈던 것으로 전한다.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으로 꼽히는 충무공. 그렇지만 28일 공의 466주년 탄신 차례상은 1평도 채 안 되는 은박 돗자리에 올려진 과일 몇개와 떡, 막걸리 한병이 전부였다. 이를 마련한 이는 서울시도, 중구도, 충무공 기념사업회도 아니었다. 생가터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서 거리판매점을 하는 이종임(76·여)씨였다. ●거리판매 상인 26년째 관리 이씨는 자비 5만여원을 들여 양초와 막걸리, 떡, 딸기, 토마토, 바나나 등을 직접 마련했다. 바람에 돗자리가 날아가고, 양초에 붙인 불이 꺼지기도 했지만 이씨 외에는 손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중구 소속 쓰레기무단투기 단속요원은 “상이라도 하나 갖다 놓지, 정말 초라하네. 당국이 이런 상황을 왜 모르나.”고 말했다. 이씨는 1985년 높이 1m 가량의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 표석이 세워진 이후 26년째 공의 생가터를 지켜왔다고 했다. 그는 “표석에다 가래 뱉고 오줌 싸고 한 것을 혼자서 다 치워왔다.”며 “당국은 아예 관리를 하지 않는다. 어찌 한번도 와보지 않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생가터로부터 100m정도 떨어진 곳에서 중구와 기념사업회가 개최하는 충무공 탄신기념 다례가 성대하게 치러졌다. 나경원 한나라당 의원, 박노현 중부경찰서장 등을 비롯해 200여명이 공의 탄신을 기렸다. 그러나 정작 공의 생가터는 아무도 찾지 않았다. 한복을 차려입고 행사에 참석한 공의 한 후손은 “비석이라도 좀 큰 걸로 세우지 무슨 애완용도 아니고.”라면서 “중구에 압력을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구 관계자는 “생가터엔 돌로 된 표석 하나 있는데 관리하고 말 것도 없고, 배정된 예산도 없다.”며 “서울시가 세웠고 관리도 한다.”며 책임을 회피했다. 서울시 문화재관리팀 관계자는 그러나 “중구가 관리하며, 훼손되면 보고를 받고 조치한다.”며 중구에 책임을 넘겼다. ●市·중구청은 서로 책임 회피 노명호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위인의 생가터는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이라면서 “아무리 작은 표석이라도 눈에 잘 띄게 표지판도 설치하고 주변관리를 잘하면 사적 가치는 높아진다.”고 강조했다. 한편 충남 아산시 현충사 경내에 있는 공의 고택은 잘 관리되고 있었다. 이곳은 인근 활터 등과 함께 사적 155호 ‘이 충무공 유허’로 지정돼 있다. 이 고택은 공이 무예수련을 위해 10년간 머물던 처가이다. 부인 방씨가 무남독녀여서 공 후손들이 이 집에서 살았다. 아산 이천열·서울 이영준기자 apple@seoul.co.kr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28) 부여 백강마을 ‘부여동매’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28) 부여 백강마을 ‘부여동매’

    매화만큼 옛 선비들의 사랑을 받은 나무도 없다. 고즈넉한 선비의 정원 귀퉁이에 홀로 은은한 향기를 자아내며 피어 있는 매화는 특히 겨울에서 봄으로 옮겨 가는 길목에서 화사한 꽃을 피운다. 선비들은 한겨울에 눈 속에서 고아한 자태로 피어나는 매화의 결기가 세상사에 휘둘리지 않고 오롯이 제 길을 가는 선비를 닮았다고 보았다. 은근하게 배어나는 매화 향기는 사락사락 책 갈피 넘기는 소리만 살아 있는 극단적 고요 속에서 더 짙게 느낄 수 있다. 옛 사람들이 매화 향기를 귀로 들어야 제격이라며 문향(聞香)이라는 말을 지어낸 것도 그래서다. ●볼모로 잡혀 갔던 청나라서 몰래 들여와 적막감이 감돌 만큼 나른한 봄날 오후 충남 부여 규암면 진변리 백강마을의 깊은 침묵을 깨뜨린 건 은은한 향을 담고 화사한 꽃을 피운 한 그루의 매화나무였다. 마을회관 옆집에 사는 김영갑(83) 노인이 매화 꽃의 봄노래를 한 수 거들고 나섰다. “400년 전 병자호란이 났을 때, 인조의 세 아들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인평대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갔어. 그때 그들이 붙잡혀 간 곳은 압록강보다 더 북쪽인 심양이었지.” 김 노인은 나무를 바라보며 400년 전 조선의 역사부터 아주 느릿하게 풀어 놓았다. “심양은 오줌을 누면 오줌발이 그대로 얼어붙을 만큼 엄청나게 추운 곳이야. 선비 중에 백강 이경여 선생이 왕족을 수행하기 위해 심양까지 갔지. 선생이 어느 날 그 추운 곳에서 환하게 핀 꽃을 본 거야. 얼마나 놀라웠겠어. 이 양반이 나뭇가지를 한뼘만큼씩 꺾어서 몰래 들여와 여기에 심었지. 그중에 두 그루는 빨간 꽃이 피는 홍매고, 한 그루는 하얀 꽃이 피는 백매였어.” ‘부여동매’라는 고유명사로 부르는 백강마을의 매화나무는 그러나 그만큼 오래돼 보이지 않는다. 기껏해야 50년 정도 돼 보이는 나무인데, 일제 침략기에 천연기념물 제105호로 지정됐던 나무라고 한다. 나무의 나이와 나무에 얽힌 이야기의 연대 아귀가 맞지 않는다. “세 그루의 매화나무가 잘 자랐어. 워낙 추운 지방에서 꽃을 피우던 나무여서 여기에서도 추운 겨울에 꽃을 잘 피웠지. 한데 그중에 두 그루의 홍매는 오래전에 죽었고, 백매 한 그루만 남게 됐어.” 이야기가 길어지자 노인은 아예 길가로 이어진 밭 둔덕에 주저앉아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마을 정신적 중심에 놓인 한 그루 나무 김 노인의 말 끝에는 나무에 대한 사랑뿐 아니라 이 마을 선조에 대한 자부심까지 가득 묻어 있다. 노인은 자신의 10대조 할아버지가 조선 중기의 예학자인 김장생 선생인데, 매화나무를 이 자리에 심은 백강 이경여 선생은 김장생의 아들인 김집 선생 때에 이르러 사돈 관계를 맺었다고 했다. 매화나무 바로 뒤편으로 보이는 부산서원은 이경여 선생이 벼슬에서 물러나 손수 세우고, 후학을 양성하던 마을의 정신적 중심이다. 지금은 이경여 선생과 사돈 간인 김집 선생을 함께 배향하고 있다. 선생의 뜻을 이어받아 마을은 백강마을로 불린다. 매화는 예로부터 선비 정신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부여동매는 조선 중기에 우의정 영의정을 모두 지낸 이경여 선생이 특별히 애지중지하며 키운 까닭에 마을 사람들에게는 보물처럼 여겨질 뿐 아니라 선비 마을의 자존심이기도 했다. 마을의 극진한 보호 덕에 일제 침략기까지만 해도 이 나무는 나라 안에서 가장 훌륭한 매화나무로 자랐다. 일본인들까지도 이 나무의 아름다움에 감탄해 천연기념물로 지정했고, 나무 앞에 ‘조선의 동매’라고 새긴 돌비석을 세우기도 했다. 그때 세운 비석에 새겨진 글씨들은 세월의 바람에 깎여 알아보기 어려운 상태로 남아 있다. 최근 그 곁에 새로 ‘부여동매’라는 글씨를 선명하게 새긴 새 비석을 세웠고, 부여군에서는 나무의 내력을 담은 큼지막한 안내판을 놓았다. “저 안내판에는 이경여 선생이 심은 나무가 불에 타 죽고 나서 한참 지난 뒤에 죽은 나무의 뿌리에서 새로 싹이 나서 이만큼 자랐다고 하는데, 말도 안 되는 이야기야. 불에 타 죽은 나무에서 어떻게 새 싹이 돋겠는가. 지금 저 나무는 40년 전에 규암면장을 지낸 이가 새로 갖다 심은 거야. 그러니까 겨울에 꽃을 안 피우고, 이렇게 따뜻한 봄에 꽃을 피우는 거지.” 부여동매는 해마다 동지 즈음에 하얀 꽃을 피우고, 이듬해 봄이 되면 다시 또 한 차례 꽃을 피웠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이 나무는 겨울에 꽃을 피우지 않고 봄에만 꽃을 피운다. ●천년의 향을 담고 오랜 세월을 살아 나무는 그저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무척 건강하고 우람했다고 한다. 둘로 나눠지며 자란 줄기 중 하나에는 그네를 매 뛸 만큼 단단했다는 것이다. 동매가 쇠약해지고 죽음에 들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전한다. 우선 김 노인은 “나무가 하도 좋아서 일본 사람들이 너도나도 꺾어 가는 바람에 약해졌다가 나중에는 아예 불을 질러 죽인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다른 이야기로는 일본인들이 물러간 직후 홍수가 들었고, 마을 앞 백마강이 나무를 덮쳐 죽게 됐다고도 한다.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건만 나무의 죽음에 대한 정확한 이야기는 알 수 없다. 하지만 400년 전의 역사를 안고 살아 왔던 매화나무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대를 이어 가는 애정만큼은 분명했다. 김 노인이 앉아 있는 밭 둔덕 위로 상큼한 봄 내음을 가득 담은 매화꽃 바람이 건듯 불어 온다. 한 그루의 매화나무는 지금의 김 노인처럼 이 자리에 주저앉아 우리 역사의 한 토막을 서리서리 풀어낼 것이다. 하얗게 센 노인의 머리카락 사이로 흘러드는 봄바람에 1000년의 향이 담겼다. 글 사진 부여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 13개 왕조의 도읍 ‘세계적 古都’ 중국 시안

    13개 왕조의 도읍 ‘세계적 古都’ 중국 시안

    중국 산시성(陝西省)의 성도 시안(西安)은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고도(古都)입니다. 최초로 중국 대륙을 통일한 진(秦), 화려한 문명을 구가한 당(唐) 등 13개 왕조가 시안을 도읍으로 삼았습니다. 그 덕에 1100여년 동안 황제 70여명의 생멸을 지켜본 천자(天子)의 도시로 군림할 수 있었지요. 실크로드의 기점이기도 합니다. 둔황, 우루무치 등을 가리키는 시내 이정표에서는 서역의 느낌이 강하게 와닿습니다. 황사 발원지인 네이멍구 자치구에 접해 사철 희뿌연 곳. 지금은 중국 서부대개발의 열풍에 휩싸여 있지요. 고도의 깃발이 개발의 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시안에 다녀왔습니다. ●거대한 죽음의 지하 왕국… 병마용 vs 한양릉 시안은 중국 중서부 내륙의 비옥한 관중평야를 타고 앉은 도시다. 도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너른 평원에 솟은 크고 작은 구릉들을 만난다. 중국을 지배했던 황제들의 무덤들이다. 시안 일대에만 72개 능에 73명의 황제가 묻혀 있다. 당 고종과 여황제 측천무후가 함께 묻힌 건릉(乾陵) 때문에 황릉보다 황제의 수가 하나 더 많다. 워낙 능이 많아 ‘시안에서 성공하려면 (유물을 캐기 위한) 곡괭이만 있으면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공공연하게 회자되기도 한다. 시안 시내에서 강태공이 낚시를 했다는 위수(渭水)를 건너 동북쪽으로 30㎞쯤 가면 양씨 집성촌인 서양촌에 닿는다. 1974년, 이 마을 감나무 숲에서 우물을 파던 양신만(楊新滿) 등 촌부들은 특이한 형태의 토기 파편들을 발견했다. 이게 2000년 넘는 세월 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진나라 대군이 긴 잠에서 깨어나는 단초가 됐다. 당시 양씨 일행이 발견한 것은 진시황(BC 259∼210년)의 병마용 종장갱(從葬坑·부장품을 넣어둔 구덩이)이었다. 이듬해 본격적인 발굴작업이 시작됐고, 양씨 등이 발견한 1호 병마용갱(兵馬俑坑)에 이어 1976년 2호갱과 3호갱이 잇달아 발견됐다. 병마용갱의 규모는 거대하다. 특히 1호갱은 길이 230m, 폭 62m로 ‘A매치’가 열리는 축구장보다 넓다. 그 안에 참호를 판 뒤 도용(陶俑·흙으로 만든 인물상)과 도마(陶馬)들을 오와 열에 맞춰 배치했다. 병마용의 모습은 소름 끼칠 정도로 사실적이다. 얼굴 표정은 물론 복장, 계급 등도 제각각이다. 전투 명령이 떨어지면 당장이라도 ‘돌격 앞으로!’에 나설 기세다. 병마용의 재료는 황토. 시안이 황사의 발원지 가운데 하나란 것을 생각하면,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선택한 셈이다. 각 갱에 묻힌 병마용은 모두 6000여점인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발굴과 전시가 동시에 이뤄지고 있다. 도용의 크기는 175~196㎝다. 현지 가이드에 따르면 진나라 남성의 평균 신장이 158㎝였다니, 실제보다 과장되게 표현된 셈이다. 특이한 점은 도용들의 손에 병장기가 들려 있지 않다는 것. 이는 진나라 말기 수도 함양을 침공한 항우의 군대가 진시황릉과 병마용갱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도용들의 실제 병장기를 자신들의 무기로 재사용하기 위해 수거했기 때문인 것으로 전해진다. 1호갱은 당시 보병 중심의 1개 군진 규모다. 2호갱은 보병과 기병, 궁노수 등 여러 병종을 혼합 편성했다. 가장 규모가 작은 3호갱은 사령부인 것으로 추정된다. 진시황 병마용갱이 군진 위주의 호전적인 형태라면, 한양릉(漢陽陵)은 보다 작고 다양한 계층의 도용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한(漢)의 4대 황제 경제(景帝)의 무덤으로, 갱 위에 강화유리를 붙여 관람객들이 발 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게 했다. 80여개의 갱 가운데 10여개만 발굴됐다. 전체 크기는 20㎢로, 진시황 병마용갱과 비슷하다. 그런데 병마용들의 크기는 60㎝ 정도로 대폭 축소됐다. 혹독한 세금과 징용으로 파탄 났던 진나라를 본보기 삼아 병마용의 크기와 개수를 대폭 줄여 작은 죽음의 왕국을 만든 것이다. 원래 옷을 입은 형태로 제작됐으나, 세월이 관복을 삭혀 생식기까지 드러난 상태로 남았다. 도용의 종류도 병마용갱과는 사뭇 다르다. 황제에게 버림받은 ‘냉()궁녀’와 환관 등 황궁에 기거했던 사람들은 물론, 약국 등 저잣거리의 습속도 형상화했다. 특히 소, 돼지 등 가축들은 저마다 배가 불룩하다. ‘저승에 가면 열 마리가 될 것’이라며 전부 새끼를 밴 모습으로 조각한 당대 사람들의 재치가 엿보인다.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 놀이터 화칭츠  동서고금을 통틀어 가장 유명한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 가운데 하나가 당나라 6대 황제 현종과 양귀비 커플이다. 그들의 러브 스토리가 오롯이 남아 있는 곳이 시안 동쪽 교외의 화칭츠(華淸池)다. 43도의 온천수가 나오는 곳으로, 현종이 양귀비를 위해 증축하면서 화칭궁(宮)이라 칭했다.  화칭츠는 여러 개의 욕실이 전각 형태로 모여 있다. 양귀비와 현종이 함께 들었던 해당탕(海棠湯), 목욕 후 함께 머리를 말렸다는 양발전(陽髮殿) 등이 고스란히 남아 1300년 전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전각들이 어깨를 맞댄 마당에는 옥으로 조각한 반라의 양귀비 상(像)이 있다. 늘씬한 S라인이라기보다는 ‘자질풍염’(資質豊艶)이란 기록처럼 풍만하고 농염한 쪽에 가깝다. 현지 가이드는 “목욕을 마치고 나온 27세 때 양귀비 모습을 기록에 따라 형상화했다.”고 설명했다.  화칭츠 뒤편은 리산(驪山)이다. 1936년 장제스(蔣介石)가 은신했다가 체포됐던 ‘시안 사건’의 현장이다. 화칭츠와 리산은 밤이 되면 거대한 세트장으로 변한다. 현종과 양귀비의 비극적 사랑을 그린 백거이의 시 ‘장한가’(長恨歌)가 영화감독 장이머우의 지휘 아래 화려한 쇼로 재현된다.  낮보다 화려한 시안의 밤풍경도 인상적이다. 시안 도심을 감싸는 둘레 13.7㎞의 장안성에 경관 조명을 해뒀다. 대안탑과 대당불야성, 대당부용원 등은 꼭 찾아봐야 할 곳. 대안탑은 ‘삼장법사’ 현장(玄奘)이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을 번역한 뒤 보관한 곳이다. 역시 탑 주변에 경관 조명을 해 밤에도 풍광이 빼어나다. 대당불야성은 대안탑 북문광장과 마주하고 있다. 개인이 사재 50억 위안(약 8400억원)을 털어 당나라 시대 거리를 재현했다. 양 꼬치구이 등 무슬림들의 음식을 맛볼 수 있는 회민거리도 가볼 만하다. ●(古都)에서 열리는 원예박람회  오는 28일~10월 22일 찬바 생태구에서 ‘2011시안세계원예박람회’가 열린다. 옥외 전시단지는 모두 109개. 면적만 서울 여의도의 절반쯤 된다. 34개 국가관 중엔 한국관인 애련정(愛蓮亭)도 있다. 2013년 국제정원박람회를 여는 전남 순천시를 상징하는 정자다.  높이 99m의 장안탑에 오르면 박람회장이 한눈에 보인다. 대안탑을 본뜬 것으로 수·당대 건축 양식에 현대 기술을 접목했다. 장안탑 왼쪽엔 산시 4대 보물관이 들어선다. 친링(秦領)의 네 가지 보배로 통하는 판다·따오기·들창코 원숭이·타킨(사향소와 비슷한 포유류)이 전시된다. 중국 국가여유국과 동방항공은 둔황, 우루무치 등 인근 관광지와 박람회 입장권, 숙박권을 연계해 20~50%의 할인 혜택을 제공할 예정이다. 중국여유국 한국사무소 (02)773-0687.   ▲여행수첩  항공편: 아시아나항공(화·목·토·일)과 대한항공(월·수·토)이 인천~시안 직항편을 운항한다. 3시간 15분 소요. 시차는 우리나라보다 1시간 늦다.  날씨: 4월 기온은 10~20도 정도로 우리나라보다 건조하고 덥다. 황사지역과 인접해 있어 마스크를 준비하는 게 좋다.  맛집: 예전 서태후가 맛을 봤다는 딤섬(만두) 전문점 더파창(德發長)이 유명하다. 딤섬의 종류는 380여 가지. 가격은 15~180위안으로 다양하다. 시안 중심지인 고루(鼓樓) 인근에 있다.  숙박: 찬바 생태지구에 위치한 켐핀스키호텔과 시안 시내 하얏트호텔 등이 깨끗하다.  주변 관광지: 화산(2160m)은 중국 오악 중 하나다. 시안 시내에서 2시간가량 걸린다. 비림(碑林)박물관은 중국 명필대가의 비석 3000여점이 전시돼 있다. 당나라 시대 대명궁터도 가볼 만하다. 글·사진 시안(중국)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길섶에서] 환상/이춘규 논설위원

    초등학교 고학년 때 학교에서 걸어서 1시간 이상 걸리는 야트막한 산으로 소풍을 갔다. 고향집에서도 보인다. 드넓은 들판이 시작되는 곳에 능선들이 성곽처럼 이어져 있다. 그때 산 정상과 능선에서 보았던 거대한 무덤들은 수수께끼였다. 옛 왕릉일지 모른다는 아이들도 있었다. 오랜 세월 정말 왕릉인지가 궁금했다.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다. 드디어 며칠 전 산에 올라가 봤다. 커다란 무덤들은 그대로 있었다. 새로 세워진 비석이 많았다. 한자·한글로 비문들이 새겨져 있다. 비문에는 무덤 주인의 생전 신분과 사회 공헌 내용이 담겨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다는 내용이 많았다. 무덤 주인은 그동안의 상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고분들도 아니었다. 왕릉도 없었다. 이장·면장·기초의회 의장·지방관리 등이 주인공이었다. 조금 특별한 이웃의 무덤이었다. 40년 이상 간직했던 환상이 와르르 무너졌다. 호기심을 참지 못한 탓에 마음속의 환상을 스스로 깨버렸다. 환상은 깨지 않고 간직하는 것이 좋다는데…. 이춘규 논설위원 taein@seoul.co.kr
  • 노 前대통령 추모비 건립…수원 연화장에 올 5월 제막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해를 화장한 경기 수원시 연화장 주변에 노 전 대통령을 기리기 위한 추모비가 건립된다. ‘고 노무현 대통령 작은비석 수원추진위원회’는 31일 수원시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오는 5월 22일 제막을 목표로 연화장 또는 인근에 추모비를 건립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불교와 원불교, 기독교 등 종교계 인사들로 구성된 추진위는 4월 1일~5월 14일 총 5000만원을 목표로 성금 모금 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20일까지 추모비 조감도를 완성한 뒤 조형물 제작에 들어가 5월 22일 제막식을 갖기로 했다. 추진위는 추모비 건립 위치를 수원시 측과 협의하기로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9년 5월 29일 연화장에서 화장됐으며, 국민장의 일부 공식행사가 연화장에서 치러졌다.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 그들 작품 속엔 늘 고향이 있었다

    그들 작품 속엔 늘 고향이 있었다

    김남천, 노천명, 박영준, 안수길, 윤곤강, 윤석중, 이원수, 정비석…. 시인과 소설가의 작품 속에는 늘 고향이 있었다. 삶의 터전으로서, 혹은 상실한 공간으로서, 또는 새롭게 건설해야 할 지향점으로서 고향은 자리매김돼 왔다. 나라를 빼앗겼던 일제 강점기였기에 고향과 조국은 얼마든지 상치될 수 있는 개념이기도 했다. 대산문화재단과 한국작가회의가 다음 달 7일 서울시의 후원으로 개최하는 ‘2011년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학제’는 ‘이산과 귀향, 한국 문학의 새 영토’라는 주제로 열린다. 1911년생 문인 8명이 주인공이다. 장편소설 ‘대하’를 쓴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대표하는 김남천, ‘모범경작생’을 쓴 농민소설의 대표 작가 박영준, ‘북간도’의 안수길, ‘자유부인’의 정비석 등 소설가와 ‘사슴’의 노천명, ‘나비’의 윤곤강 등 시인, 윤석중과 이원수 같은 아동문학가 등이 있다. 7일 심포지엄은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에서 열린다. 다음 날에는 연희문학창작촌 야외 무대에서 작품을 낭독하는 문학의 밤, 문학 그림전, 작가별 학술회의 등이 열린다. 기획위원장을 맡은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는 ‘고향의 발견’을 주제로 한 심포지엄 총론에서 “암울한 식민지 현실의 중심부를 관통한 1911년생 작가들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고향’이라는 문학적 주제가 발견된다.”면서 “고향은 ‘잃어버린 낙원’ ‘새로운 삶을 구축하려는 삶의 터전’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고 말했다. 또한 “이들이 정신적, 실제적 생활 터전의 확보, 역사 창출과 인간의 실존 양식을 문제 삼으면서 발견한 고향이라는 주제는 이후 한국 사실주의 소설 발전에 한 기틀이 됐다.”고 평가했다. 이은봉 작가회의 사무총장은 “8명 가운데 일부는 친일 논란, 친독재 논란 등이 있으나 이들까지 문학적 논의의 장에서 다루는 것이 맞다고 판단해 모두 재조명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사과나무를…” 루터를 베낀 스피노자?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사과나무를…” 루터를 베낀 스피노자?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 17세기 네덜란드 철학자 스피노자(1632~1677)의 명언으로 잘 알려져 있는 문구다. 마르틴 루터는 15살인 1498년부터 1501년까지 부모님을 떠나 아이제나흐에 있는 라틴어학교를 다녔다. 그가 청소년기에 머물렀던 아이제나흐의 소박한 2층집 앞에는 ‘그리고, 내일 세상이 멸망함을 알지라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 마르틴 루터’(Und wenn ich wte, da morgen die Welt unterginge, sogeht, wurde ich doch heute mein Apfelbaumchen pflanzen.)라고 새겨진 기념비석이 사과나무 한 그루와 함께 세워져 있다. 스피노자의 아포리즘이 왜 이곳에 세워져 있을까. 그것도 100년도 훨씬 전 인물인 루터의 이름까지 박아서? 설명을 들으면 더욱 어리둥절해진다. 그러나 이 문구는 젊은 루터가 일기장에 적은 글귀다. 독일 등 유럽에서는 아무런 의심없이 루터의 명제로 알려져 있다. 다만 일기장의 기록이라면서도 당시 일기 기록 날짜와 그 문구 외의 내용 등이 덧붙여지지 않은 점은 정확한 근거를 내세우지 못한 것으로 보여 아쉬움으로 남는다. ‘모든 것 안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범신론(汎神論)을 주장하던 스피노자의 사상과 맞아떨어진 명제이기에 아무런 의심 없이 국내에서 읽혔을 수도 있다. 신이 깃들어 있는 사과나무를 심음으로써 신에 대한 무한한 존경을 표하는 말처럼 읽히기도 한다. 종교개혁 시기에 많이 회자된 말이기에 스피노자가 인용했다는 해석도 있다. 실제로 루터의 아버지 한스 루더(루터는 나중에 자신의 성을 ‘루터’로 바꿨다.)는 일찍이 총명하며 공부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아들이 법학자가 되기를 바랐다. 아버지의 남다른 교육열 아래 자란 루터는 아이제나흐로 오기 전에는 마그데부르크로 유학을 하며 2년 동안 중세 수도원적 공동생활의 영성을 깊게 배웠다. 그리고 라틴어 공부를 마친 뒤에는 다시 에르푸르트대학으로 옮겨 인문학 석사과정까지 마친다. 스피노자의 것인지, 루터의 것인지 시비를 가리기에 앞서 분명한 점은 ‘아이제나흐 최고의 학생’으로 평가받던 어린 루터가 이룬 철학적 사유의 경지다. 충분히 주목하고 둘러볼 만한 독일 튀링겐주의 작은 시골마을이다. 글 사진 아이제나흐(독일)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한국, 12억배럴 UAE유전 확보

    한국, 12억배럴 UAE유전 확보

    우리나라가 국내 역사상 최대 규모인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의 아부다비 유전개발권을 확보했다. UAE를 공식방문 중인 이명박 대통령과 칼리파 빈 자이드 알 나흐얀 UAE 대통령은 13일 오후 정상회담을 가진 뒤 알 나흐얀 왕세자와 함께 이런 내용을 골자로 하는 한국석유공사와 아부다비석유공사 간의 ‘석유가스분야 협력개발 양해각서(MOU)’ 및 ‘3개 유전 주요조건계약서(HOT)’ 서명식에 임석했다. 이 대통령은 ‘한·UAE 정상회담 결과 발표’를 통해 “한국은 실제 채굴할 수 있는 매장량 기준으로 최소 10억 배럴의 대형 생산 유전에 참여하게 됐다.”면서 “2012년 중에 본계약을 체결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번 서명으로 우리가 개발하게 되는 원유 규모는 12억 배럴수준으로 약 132조원 규모에 해당된다고 정부는 밝혔다. 아부다비 김성수기자 sskim@seoul.co.kr
  • [옴부즈맨 칼럼] 서울신문은 재미있는 신문인가/강청완 경희대 언론정보학부 4년

    [옴부즈맨 칼럼] 서울신문은 재미있는 신문인가/강청완 경희대 언론정보학부 4년

    일고여덟살 무렵부터 우리 집에서 가장 먼저 신문을 펼치는 사람은 나였다. 아침에 눈만 뜨면 내복바람으로 달려나가 신문을 집어들고 와서 먼저 펼쳤던 것이 ‘TV편성표’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색연필까지 들고서 만화영화의 편성시간대에 체크를 하고, “~하고 마는데…” 하고 끝나는 프로그램 예고기사를 두근거리는 맘으로 읽기도 했다. 여덟 살 꼬마에게 신문읽기는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는 의식이었다. ‘신문사랑’은 계속되었다. 열살 때는 연재소설에 맛을 들였다. 그런데 그 내용이 지금 생각해도 상당히 야했다. “보지 마라.”는 부모님의 핀잔은 어린 가슴에 불을 댕겼고, 그 이후로 아침마다 가장 먼저 신문을 읽고 나서는 안 읽은 척, 새 신문인 것처럼 각을 잡아놓곤 했다.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몰래 읽는 스릴이 최고였다. 나이가 들고 관심의 영역이 넓어지면서 스포츠 섹션, 시, 짤막한 칼럼, 독자참여란이나 오피니언 등의 순서로 ‘열독 코너’의 수준이 높아지고 범위가 확장되어 갔다. 서울신문에서 요즘 가장 즐겨 읽는 코너는 토요일자 서평 섹션이다. 마음만큼 책을 읽지 못하는 욕구불만을 서평으로 대리만족하곤 한다. 이렇게 자잘한 재미를 찾아 신문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신문과 친해지고 그 이로움을 알 수 있었다. 무엇을 위하여 신문을 읽는가?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얻고 세상을 보는 눈을 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소소한 즐거움이 있기에 신문을 집어들게 된다. 매일 아침 펄떡거리는 새 뉴스를 상에 올리는 신문이지만 고정적으로 즐겨 찾는 밑반찬 같은 코너가 있다는 것에서 느끼는 즐거움과 위안은 자못 큰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서울신문은 ‘재미있는’ 신문일까. 눈에 들어오는 편집과 디자인 덕에 전체적으로 읽어 나가기에는 쉬운, 젊은 느낌의 신문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을 붙일 만한 피처기사들이 상대적으로 적거나 취약하다는 점은 아쉽다. 유머는 한물간 것이고, 날씨는 지면 중간 애매한 곳에 있어 가독률이 떨어진다. 만화, 만평, 운세는 다른 신문과 별반 차이가 없다. 풍부하고 충실한 내용 이외에도 독자의 충성도를 높여줄 ‘갈고리’를 추가로 장착할 것을 제안한다. 서울신문은 지난 1954년 정비석의 ‘자유부인’을 연재하면서 많은 화제를 모았다. 한국 신문소설의 역사, 나아가 현대문학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이었다. 손안의 스마트폰으로 전자책을 읽는 시대지만 여전히 연재소설이 주는 즐거움은 무시할 수 없다. 과거의 전력을 살려 세간의 화제를 불러일으킬 만한 실험적인 작품의 연재는 어떨까. 서평이나 문화면에서도 차별화를 권한다. 서평 전문기자의 충실하고 풍부한 서평은 지금도 좋다. 책의 주제를 쉽게 함축한 디자인에는 눈이 덜컥 가서 걸린다. 하지만, 책을 고르는 기준이 궁금하다. 그냥 화제작이나 신간만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출간된 지 오래되었지만, 다시 읽어 볼 만한 책이라든지 특정 주제의 책을 묶어 소개하는 식으로 기준을 다양화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구색갖추기용 지면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어느 연구 결과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이 신문을 읽을 때 먼저 1면을 대충 훑어보고 그 다음 뒤로 넘겨 신문을 펼친다고 한다. 오피니언 면에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좋은 거리가 ‘길섶에서’와 ‘씨줄날줄’ 이다. 주제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담담히 풀어낸 글은, 편하게 앉아 현명한 인생선배의 이야기를 전해듣는 것 같아 좋다. 기사를 읽기 전 혹은 후에 쉬어갈 수 있는 코너가 많았으면 좋겠다. 아무리 알차고 풍부한 내용이라도 쉼 없이 읽어 내려면 생각만 해도 숨이 찬다. 물론 그런 것이 신문의 본질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정공법 말고 다른 것이 필요할 때도 있다. 젊은 층이 신문을 외면하는 것은 ‘재미가 없기 때문’도 가장 큰 이유가 된다. 어릴 적 그 설렘을 다시 떠올리며 깊이 있는 신문, 살아있는 신문에 더해 재미있는 신문, 정이 가는 서울신문이 되기를 기대한다.
  • 호남 민심 얻으려다… ‘발’병 난 안상수

    호남 민심 얻으려다… ‘발’병 난 안상수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가 26일 또 구설에 올랐다. 이번엔 ‘말’이 아닌 ‘발’이 문제였다. 5·18 민주묘지 참배 과정에서 상석(床石·무덤 앞에 놓인 제단)에 발을 딛고 선 게 화근이 됐다. ‘보온병’, ‘자연산’ 발언으로 설화(舌禍)를 자초했던 안 대표가 또다시 시련 속에 내몰리게 됐다. 새해 첫 현장 최고위원회의를 한나라당의 정치적 험지(險地)인 광주에서 열었다는 의미마저 퇴색됐다. 안상수 대표 체제 이후 첫 ‘광주행’은 내년 총선과 대선을 겨냥한 ‘지역 민심 다지기’ 행보의 본격 시동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현장 최고위원회의에 앞선 당 지도부의 국립 5·18 민주묘지 참배는 남다른 의미가 실렸다. 그러나 안 대표가 박관현 열사의 묘비 상석을 발로 밟으면서 당 지도부의 ‘광주행’은 파문으로 일그러졌다. 파문이 확산되자 한나라당 배은희 대변인이 나서 “이유를 막론하고 죄송스럽게 생각한다.”면서 “오십견 수술을 받아 어깨가 불편한 안 대표가 관리소장의 안내로 무리해서 묘비에 두 손을 올리다 보니 몸이 비석 가까이 갈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야당과 ‘5월 단체’들의 비난을 막지는 못했다. 민주당 차영 대변인은 “상석을 밟은 것은 광주 민주화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짓밟는 것과 같다.”면서 “상석을 밟는 것은 본인 스스로 제물이 되겠다는 것과 같은데 이제 제발 제물이 되어 달라.”고 꼬집었다. 5·18 관련 4개 단체 역시 성명을 내고 “5·18 민주화 영령이 잠들어 있는 묘역의 상석을 밟는 것은 5월 영령에 대한 큰 결례이며, 정부 여당을 대표하는 정치인의 바른 행동이 아니다.”라면서 “크게 뉘우치고 책임 있는 자세로 사과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구혜영·광주 홍성규기자 cool@seoul.co.kr
  • 세상의 모든 상처받은 것 위로… 문단 보듬은 ‘큰 나목’

    세상의 모든 상처받은 것 위로… 문단 보듬은 ‘큰 나목’

    늘 수줍어하던 문학소녀였다. 가까운 후배들에게조차 제대로 곁을 주지 못할 정도로 부끄러움을 탔다. 하지만 후배들은 어려움이 있으면 늘 그를 찾곤 했다. 친정 어머니 같고, 큰누이 같던 그의 마음 씀씀이 한 자락을 살며시 내비친 것이 빈소 입구에 붙여진 ‘부의금은 정중히 사양한다.’는 글귀다. 생전에 했다는 “나 죽으면 가난한 문인들에게 부의금을 받지 말라.”는 말이 뒤늦게 전해지며 후배들을 더욱 사무치게 했다. 세상의 모든 상처받은 것들을 위로해 주던 ‘영원한 현역 작가’ 박완서는 그렇게 먼 길을 떠났다. 80세. 지난해 뒤늦게 발견된 담낭암으로 투병해 오던 그는 지난 22일 새벽 서울삼성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1970년 불혹의 나이에 늦깎이로 등단한 뒤 꼬박 40년을 한결같이 써온 글쓰기도 함께 끝냈다. 지난해 여름 펴낸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와 같은 박완서 특유의 넉넉한 성찰과 위안의 글은 이제 활자로만 남게 됐다. ☞[포토] 한국 현대문학의 거목 박완서 타계●“6·25 없었으면 선생님 됐을 수도” 한국현대사의 굴곡은 그 시대 누구에게나 그러했듯 그에게도 굵직한 생채기를 남겼다. 서울 숙명여고를 졸업한 그는 1950년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한국전쟁이 터져 곧바로 중퇴해야 했다. 의용군으로 나간 오빠는 부상을 입고 돌아온 지 여덟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학교 중퇴 이후 미8군 PX에서 일하다 박수근 화백을 만나 등단작 ‘나목’(裸木)의 모티브를 얻기도 했다. 상처는 쉬 가시지 않았다. 19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되며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박완서는 일관되게 한국전쟁을 들여다봤다. 전쟁이 보통의 사람들, 특히 여성들에게 어떻게 억압이자 상처로 작용했는지에 대한 탐구였고 스스로 치유하는 과정이었다. 지난해 계간문예지 ‘문학의문학’과 나눈 대담에서 그는 “6·25가 없었으면 글을 쓰지 않고 선생님이 됐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전쟁·참척의 고통까지 관조 1980년대에는 ‘살아있는 날의 시작’(1980), ‘서 있는 여자’(1985),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1989) 등의 작품을 통해 작가 입지를 굳혔다. 특유의 부드럽고 다독이는 문체 속에 급속한 산업화 속에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소외감과 상실감에 시달리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문단으로 본격 호출한 것이다. 1988년 남편을 폐암으로 잃었다. 석달 뒤 외아들마저 떠나보내는 참척(慘慽)의 고통을 겪었다. 가톨릭에 귀의한 그는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1994),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1995), ‘너무도 쓸쓸한 당신’(1998) 등을 통해 개인적 상처마저 관조하는 힘을 보여 줬다. “경인년 꽃다운 20세에 6·25전쟁을 겪고 어렵게 살아남아 그 해가 회갑을 맞는 것까지 봤으니 내 나이가 새삼 징그럽다. 더 지겨운 건 육십년이 지나도 여전히 아물 줄 모르고 도지는 내 안의 상처다. 노구지만 그 안의 상처는 아직도 청춘이다.” 깊은 상처 속에서도 늘 글 속에 유머를 잃지 않았던 그는 가장 최근에 쓴 ‘내 식의 귀향’이란 글에서 이런 말을 한다. “남편과 아들이 잠들어 있는 천주교 공원묘지를 다녀왔다.…비석엔 내 이름도 생년월일과 함께 새겨져 있다. 다만 몰(沒)한 날짜만 빠져 있다. 멀지 않은 곳에 김수환 추기경의 묘소가 있는 게 저승의 큰 ‘빽’이다.” 이어지는 글. “다만 차도에서 묘지까지 내려가는 길이 가파른 것이 걱정스럽다. 운구하다가 관을 놓쳐 굴러떨어지면 늙은이가 살아날까 봐 조문객들이 혼비백산(하겠지)…실 없는 농담 말고 후대에 남길 행적이 뭐가 있겠는가.” ●유니세프 활동 ‘한국의 오드리 헵번’ 그는 소설 바깥의 활동도 소홀하지 않았다. 1993년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친선대사를 맡은 이래 소말리아, 에티오피아, 몽골, 인도네시아 등을 찾아다녔다. 암을 발견하기 직전인 지난해 9월에도 부산까지 내려가 유니세프 후원행사에 직접 참석했다. 유니세프 한국위 직원들은 “한국의 오드리 헵번 모습을 발견했다.”며 그 웅숭깊은 속내를 기렸다. 이제 지상에서 글쓰기는 끝났다. 그는 천상으로 자리를 옮겨 또 다른 소통과 위로의 글쓰기를 시작할 것이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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