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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장 행정] 물장구 치고 가재 보고 관악산 살고 체험 하고

    [현장 행정] 물장구 치고 가재 보고 관악산 살고 체험 하고

    “어린이 여러분, 이 가재는 어디에 살까요?” “민물이요!” “저런, 물에 산다고 하면 민물인지 바닷물인지 한 번 더 물어보려고 했더니. 그럼 가재는 맑은 물에 살아요, 더러운 물에 살아요?” “맑은 물이요!” 깨끗하고 맑은 일급수에서만 산다는 민물가재가 서울 관악산의 명물로 등장했다. 유종필 관악구청장은 24일 ‘관악산 생태탐험대’에 참여한 청룡초교 1학년 학생 10명과 함께 직접 민물가재를 풀어 주며, 관악산을 최고의 생태교육장으로 관리하겠다고 밝혔다. 연간 700만명이 찾는 관악산은 국립공원인 북한산 다음으로 등산객이 붐비는 곳이다. 2009년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됐으며 관악산 계곡에는 멸종위기 야생생물 관찰종으로 지정된 가재뿐 아니라 서울시 보호종인 두꺼비, 북방산 개구리, 줄장지뱀 등 다양한 생물이 살고 있다. 유 구청장은 평소에도 관악산 무장애숲길을 즐겨 찾으며, 관악호수공원이라 새겨진 돌비석에 ‘킹콩바위’란 애칭을 붙여 줄 정도로 관악산 곳곳에 애정을 갖고 보호에 앞장서고 있다. 킹콩바위는 뒤에서 보면 킹콩의 얼굴과 꼭 닮았다. 관악산 면적의 60%는 관악구에 있으며, 관악구 면적의 절반 정도를 차지해 관악구 최고의 자산이다. 10년 전부터 관악산에는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운영 중이다. 숲해설가와 함께 관악산을 오르며 풀에 얽힌 이야기, 침엽수와 활엽수의 차이, 개구리와 도롱뇽 알 비교하기 등을 듣고 체험하는 ‘관악산 생태탐험대’는 관악구 어린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참여해 보았을 인기 장수 프로그램이다. 덕분에 이날 탐험대에 참여한 어린이는 정열적인 숲해설가 할아버지의 참매미와 말매미 울음소리 구별하기, 무당벌레의 특징 등의 질문에 척척박사처럼 답을 내놓았다. 7, 8월에 관악산 계곡은 거대한 산수화 같은 풍경 속에서 더위를 식힐 수 있는 물놀이장으로 변신한다. 탈의장도 갖추고 있어 튜브를 챙긴 어린이뿐 아니라 인근 서울대생을 비롯한 젊은이들이 계곡에서 닭강정 등을 즐기며 여름을 보낸다. 관악산은 입구 근처의 시도서관, 숲속 작은도서관 등 도서관도 2곳이나 품고 있다. 시집만 5000여권 보유한 시도서관에서는 관악산을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시집을 빌릴 수 있다. 숲속 작은도서관은 생태체험관과 함께 운영되어 자원봉사 모임인 ‘관악산 숲가꿈이’와 함께 구연동화, 친환경 손수건 염색, 친환경 공책 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활동도 할 수 있다. 유 구청장은 “관악산 민물가재가 유명해서 등산객들이 채취하기도 하는데, 가재는 15~20도 정도의 찬물에서 살기 때문에 가정에서 키우는 것이 쉽지 않다”며 “거대한 생태자원의 보고인 관악산에서 도시 어린이들이 농촌체험을 맘껏 할 수 있도록 잘 보존하고 관리하겠다”고 강조했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임진강 아래 율곡과 우계의 깊고 치열했던 학문과 우정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임진강 아래 율곡과 우계의 깊고 치열했던 학문과 우정

    임진강 하류에서 상류의 적성 방면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낯익은 땅이름이 나타난다. 임진강이 남쪽으로 한바탕 돌아드는 곳에 임진나루가 있다. 조선시대 한양에서 출발해 북상하는 의주대로는 임진나루에서 잠간 뱃길로 이어졌다. 나루터 남쪽 임진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율곡(栗谷)리 언덕에 화석정이 있다. 대학자 율곡 이이(1536~1584)의 아호는 이 마을 이름에서 비롯됐다. 화석정 아래로는 37번 국도가 지닌다. 연천 쪽으로 3㎞ 남짓 달리면 오른쪽으로 파평면 사무소 쪽으로 언덕을 넘어가는 옛길이 나타난다. 2~3㎞ 달리면 오른쪽으로 파평 윤씨 연못이 보이는데, 그 앞에 나타나는 동네가 눌로리다. 동네 초입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눌로천 다리를 건너면 파산서원이다. 파평산을 휘감아 흐르다 임진강에 합류하는 눌로천 변을 예전에는 우계(牛溪)라고 불렀다고 한다. 율곡과 쌍벽을 이루었던 대학자 우계 성혼(1535~1598)의 아호 또한 고향 마을의 땅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성리학 두 거물… 한 해 9차례 대논쟁 펼치기도 안동 사람들은 흔히 자기 고장을 ‘한국 정신 문화의 고향’이라고 높인다. 안동에 퇴계가 있다면 파주에는 율곡과 우계가 있다. 분단의 역사가 임진각과 통일동산을 낳으면서 이른바 ‘안보관광지’로 인상지워진 파주지만 ‘한국 정신 문화의 또 다른 고향’으로 아무런 손색이 없다. 실제로 이이는 잘 알려진 대로 강릉 외갓집에서 태어났지만, 한양에서 벼슬살이하던 시기를 제외하고 노년기를 대부분 율곡에서 보냈다. 벼슬을 물리치기에 바빴던 우계는 파주 땅을 떠난 적이 거의 없다. 율곡과 우계는 이웃해 살았던 것은 물론 학문으로 이어진 친구 사이였다. 두 사람은 조선 성리학을 정립하는 데 기여한 일대 논쟁을 펼친다. 우율논변(牛栗辯)이라고도 하고 우율 왕복문답서(牛栗 往復問答書)라고도 하는데, 1572년 한 해 동안 모두 아홉 차례 글을 주고받았다. 앞서 13년 동안 110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 받은 퇴계와 고봉 기대승의 이른바 사칠논변(四七辯)에 이은 대논쟁이었다. ●절친의 학문적 견해차가 훗날 정치적 계파 비극으로 두 사람은 편지에 그치지 않고 서로의 집을 찾아가 한이불을 덮고 밤을 함께 보낸 사이였다. ‘올해도 저물어 온 산에 눈 내리는데/들길은 가느다랗게 숲 사이를 가른다/소를 타고 어깨 들썩이며 어디로 가나/우계에 그리운 벗을 찾아간다네’ 율곡의 시는 그 우정의 깊이를 짐작하게 한다. 우계 또한 율곡과 시냇가를 걸었던 기억을 ‘한가로운 사람 손에 책을 펴고 마주하여 돌아갈 줄 모르네’라고 화답했다. 이렇듯 절친했던 두 사람이지만 당신들의 뜻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훗날 율곡학파와 우계학파의 시조(始祖)로 다른 길을 가게 된다. 정치적으로도 율곡은 서인과 노론의 종장(宗匠), 우계는 서인에서 분파한 소론의 영수(領袖)로 파당을 달리하게 된다. 학문적 견해차가 학맥(學脈)을 가르고, 갈라진 학맥이 다시 정치적 색채를 구별하는 결과를 빚었으니 두 사람이 이런 것을 원했을 리 만무하다. 화석정은 율곡의 5대조인 이명신이 1443년 세운 것이라 한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의주로 피란 갈때 폭우가 쏟아지는 밤 화석정에 불을 붙여 강을 건널 수 있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미 세상을 떠난 율곡이 이런 날을 대비해 화석정에 기름칠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설명이 더해진다. 당연히 과장이지만 ‘임금이 곤경에 처했는데도 지척에 살면서 나와 보지도 않았다’는 우계에 대한 비난이 더해지면 정치적 의미는 매우 각별해진다. 파산서원은 1568년 우계의 아버지인 성수침을 제향하고자 세워졌다. 조광조의 문인인 성수침은 기호사림의 대표적 존재로 추앙받고 있었다. 우계는 인조 시대 추가로 제향됐다. 대를 이어 살았을 옛집은 남아 있지 않다. 파산서원 역시 교육 공간은 사라지고 사당만 남았다. 우계가 제자들을 가르치고자 세웠던 우계서실(書室)의 옛터를 알리는 비석도 보인다. ●임금 피란 전설 화석정… 파산서원은 사당만 남아 수도권에 살고 있다면 파주는 주말 가벼운 마음으로 드라이브하기에 좋은 거리다. 그렇게 화석정을 찾는다면 파산서원도 함께 둘러볼 일이다. 파산서원을 목적지로 했더라도 화석정까지 방문하기를 권한다. 여유가 있다면 법원리의 율곡 무덤과 자운서원, 율곡기념관, 향양리의 우계 무덤과 우계기념관도 돌아보면 좋을 것이다. 우리 정신 문화의 상당 부분이 파주에서 정리됐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다. dcsuh@seoul.co.kr
  •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남산 유린한 日 흔적·실향민 삶 담긴 해방촌, 근대부터 해방후까지… 겹겹이 쌓여 온 역사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남산 유린한 日 흔적·실향민 삶 담긴 해방촌, 근대부터 해방후까지… 겹겹이 쌓여 온 역사

    서울시 전역에는 372개의 미래유산이 지정돼 있다. 4대문 안과 성저십리(성 밖 4㎞ 이내)에 많이 분포해 있지만, 서울 사방에 고루 흩어져 있다. 미래유산은 문화재로 등록되지 않은 서울의 근현대 문화유산 중에서 다음 세대에 전달할 가치가 있는 유무형의 모든 자산을 의미한다. 서울 사람들이 근현대를 살아오면서 함께 만들어 온 공동의 기억과 감성이다. 서울시는 서울신문, 문화지평과 함께 기존 미래유산에 대한 보존과 홍보를 위해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을 진행하고 있다.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홈페이지(http://futureheritage.seoul.co.kr)에서 오는 9월 10일 김성수 가옥, 북촌 한옥 밀집 지역, 헌법재판소 백송(박규수 집터) 등 서울미래유산에 얽힌 이야기를 찾아가는 ‘북촌길 탐방’ 프로그램을 신청할 수 있다.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세 번째 시간은 명동에서 시작해 남산 옆구리를 타고 넘어 해방촌을 거쳐 숙대입구역에서 마무리했다. 이번 역사탐방의 핵심은 남산과 해방촌이다. 남산에는 한양공원비, 남산도서관 등 미래유산이 있다. 해방촌은 해방교회 근처인 용산구 신흥로 11나길 22 일대를 중심으로 집단거주 지역이 모두 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108계단도 미래유산이다. 이 탐방 코스에서는 일제강점기, 미군정 등 해방전후사와 근대화의 흔적을 퇴적층처럼 볼 수 있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날 해설은 손안나 서울미래유산 해설사가 맡았다. 손 해설사는 “저는 ‘히스토’(Histo)라는 휴먼 벤처기업을 운영하며, 아이들과 답사를 하면서 역사 교육을 할 때 내재한 잠재력이 개발된다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박광규 해설사는 답사 시작부터 끝까지 안전을 책임졌다. 서울시 미래유산보존위원회 위원인 권기봉 작가도 3차 답사에 동행했다. 권 작가는 ‘서울을 거닐면 사라져 가는 역사를 만나다’, ‘다시 서울을 걷다’ 등의 저서를 통해 서울의 과거에서 미래의 방향성을 찾아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앞으로 틈틈이 답사단에 합류하겠다고도 했다. 비공식 해설사 한 명이 더 생긴 것처럼 든든하다. 권 작가는 “급격히 변해 가는 서울에서 ‘지금의 우리’는 아직 깊은 의미를 이해하기 힘들지라도 다음 세대들이 ‘지금 우리 시대의 치열했던 풍경’을 톺아보고 비전을 찾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유산을 발굴해 관심을 환기하기 위한 발걸음”이라고 함께한 취지를 설명했다. 답사단은 명동역 인근 작은 공원에서 모여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의 취지와 코스를 설명들은 뒤 출발했다. 일행은 30m 정도 걷다가 퍼시픽호텔 옆에 멈춰 섰다. 호텔 안에는 한영양복점이란 서울미래유산이 있다. 서울에는 4개의 양복점이 미래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중구에 있는 종로양복점, 해창양복점과 은평구에 있는 청기와양복점 등이다. 이곳은 서울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이나 멋쟁이 ‘모던보이’들의 단골이었다. 한영양복점은 1932년 중구 남대문로1가 201번지에서 박정재라는 사람이 창업했다. 이 거리 500m 일대에서는 한국전쟁 이후부터 70년대 초 무렵까지 35개 업체가 성행했다. 한영양복점은 이후 몇 차례 주인이 바뀌다가 2011년 현 대표인 김길수씨가 지금 위치인 호텔 안에서 개업했다. 주인은 바뀌었으나 같은 상호로 같은 지역에서 오랫동안 운영한 이유로 미래유산에 선정됐다. 퍼시픽호텔 왼쪽, 행정구역상 도로명인 퇴계로 20길은 ‘재미로(路)’란 이름을 가지고 있다. 명동역에서 서울애니메이션센터까지 450m 길을 오래된 만화부터 최근 웹툰까지 주제로 꾸미면서 붙여진 것이다. 재미로를 거쳐 남산순환도로로 올라서면 그 유명한 남산케이블카가 나온다. 남산케이블카는 한국삭도공업주식회사가 1962년부터 운영하는 미래유산 시설이다. 남산케이블카를 지나면 도로변에 동그마니 커다란 비석 하나가 놓여 있다. 한자로 ‘漢陽公園’(한양공원)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 한양공원은 1876년 강화도조약에 따른 개항 이후 서울에 사는 일본인들이 증가하면서 일본 거류민단이 1897년 현 숭의여자대 자리에 왜성대공원(倭城大公園)을 만들면서 시작됐다. 이 일대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주둔했던 곳이란 명목을 내세웠는데 1908년에 토지를 대여받아 1910년 3월 개원했다. 일본 거류민단은 이 공원에 남산대신궁을 세웠다. 1918년 조선총독부가 조선신궁을 건설해 ‘경성신사’로 이름을 바꾸면서 한양공원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경성신사는 벚꽃이 흩날리는 봄날이면 ‘남촌의 작은 일본 마을’처럼 보였다고 한다. 당시 이 풍경을 담은 엽서도 찍어 냈다. 이런 이유로 1980년대 이후 일본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았다. 한양공원 전면 글씨는 고종 황제의 어필인데 표석은 1912년에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일 강제 합병이 된 지 2년 뒤에 고종은 왜 하필 한양공원이라고 이름을 지었을까. 비석 뒷면에는 공원 조성에 기여한 사람들로 추정되는 명단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훼손돼 알아볼 수 없다. 탐방에 참여한 시민 신자용(33)씨가 “누가 왜 명단 부분을 쪼아서 훼손시켰냐”고 묻자 손 해설사는 “기부자 명단일 경우 친일 행적으로 드러날까 두려워서 당대나 후손이 한 짓이 아니겠느냐”고 답했다. 어머니와 함께 나온 대학생 왕규원(21)씨는 “한양공원비 뒷면이 깨져서 정확한 기록을 알 수 없는 부분이 아쉬웠다”고 말했다. 이 비석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가 2002년 케이블카 승강장 인근 풀숲에서 극적으로 발견됐다. 손 해설사는 “남산은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면서 민족 정기의 중심 역할을 했다”며 “일본은 일제강점기 때 이러한 남산을 일본화하면서 훼손했다”고 설명했다. 한양공원비 건너편에는 지구촌민속교육박물관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이 계단은 일명 ‘삼순이 계단’이다. TV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주인공을 맡았던 탤런트 현빈과 김선아가 키스하며 해피엔딩을 맺은 곳이다. 지구촌민속교육박물관은 1970년 육영재단이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회관이다. 머릿돌에는 ‘1970. 5. 5 육영수’라고 적혀 있다. 개관 3일 만에 문을 닫았는데 이유는 하루에 3만명이란 예상치 못한 입장객이 몰렸던 탓이다. 1974년에는 국립중앙도서관으로 전환했다가 지금은 서울시교육연구정보원과 지구촌민속교육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손 해설사는 “이 건물 앞 일대에는 조선시대 전통 제당인 국사당이 있었는데 일제가 조선신궁을 세우면서 인왕산으로 옮겼다”며 “이는 한마디로 조선 개국의 정신을 보여 주는 상징적 건물을 없애는 말살 정책의 일환이었다”고 설명했다. 조선신궁 터 앞에는 결연한 표정의 안중근 의사 동상이 자리 잡고 있다. 남산에는 경복궁이 내려다보인다는 이유로 일제가 조선신궁을 비롯해 경성호국신사, 왜성대총독부청사, 총독 관저 등을 지었다. 이들을 모두 제압하듯 안 의사의 동상이 서 있는 모습이 더 의연해 보이는 것은 이 장소가 지닌 의미 탓이다. 손 해설사가 돌발 퀴즈를 냈다. 의사(義士)와 열사(烈士),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차이가 무엇인지. 일상에서 쉽게 듣고 쓰는 말이지만 답을 아는 사람은 없다. 손 해설사는 “모두 일제에 항거한 것은 같지만, 의사는 무력으로, 열사는 비무장으로 대항한 인물을 뜻하고, 순국선열은 일제에 목숨을 잃은 분들이고, 애국지사는 자연사한 분들”이라고 정리했다. 남산순환도로를 걸어 내려오다 만나는 남산도서관은 시립도서관이다. 역시 미래유산이다. 1922년 10월 5일 명동에서 경성부립도서관으로 개관한 후 1964년 12월 31일 현재 건물이 신축돼 옮겨졌다. ‘동장 이봉천 기적비(記蹟碑)’가 해방촌으로 들어선 답사단을 가장 먼저 반겼다. 실향민이었던 그는 1955년 해방촌 초대 동장이 된 후 관가의 도움 없이 지역 기반시설을 확충했다. 주민들은 그의 공로를 기록하기 위해 기적비를 세웠다. 권 작가는 “해방촌은 한국전쟁 이후 가진 것 없이 남쪽으로 내려온 피란민들과 전쟁 중 사망한 군경의 처자식을 위한 보금자리였다는 점에서 ‘소수자를 위한 인큐베이터’였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신흥시장에 들어서자 소설가 김치(44)씨는 “이곳이 아트마켓으로 탈바꿈하는 것은 좋은데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날까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일제가 남산을 유린하기 위해 만든 경성호국신사는 터를 정확하게 찾을 수 없다. 다만 신사에 오르내리기 위해 만들었을 108계단을 근거로 위치를 어림짐작하게 하고 있다. 108계단에는 2012년 해방촌 예술마을 사업이 시작되면서 벽화와 조형물이 설치됐지만, 지금은 관리가 안 돼 퇴색하고 있다. 서울시는 108계단을 1960~70년대 해방촌 향수를 느낄 수 있는 장소라는 이유로 미래유산으로 지정했다. 후암동 쪽으로 들어서자 ‘성의사’란 단출한 2층 건물이 눈에 띈다. 1953년 개업한 가운 판매점이다. 주로 교회 성가대 가운을 취급한다. 좀더 내려가니 ‘T. 본 스테이크’라고 간판을 단 음식점 ‘황해’가 나왔다. 1973년 개업한 부대찌개·스테이크 전문점이다. 정순자 대표는 “이 동네 부대찌개, 스테이크 원조는 우리 집인데 돈 주고 TV 나가는 것이 싫어서 안 했더니 주변 다른 집이 원조로 둔갑했다”며 “서울미래유산 현판도 번거로워 안 했는데 이번 기회에 꼭 달아 달라”고 부탁했다. 서울시 관련 부서 공무원이 동행한 덕분에 조만간 현판이 설치될 전망이다. 손 해설사는 중화요리 식당으로 미래유산에 지정된 덕순루를 마지막으로 설명을 마쳤다. 답사 내내 내리던 비가 거짓말처럼 갰다. 글 사진 유성호 ‘문화지평’ 대표
  • [新국토기행] 익산의 노을은 백제와 더불어 살아간다

    [新국토기행] 익산의 노을은 백제와 더불어 살아간다

    전북 익산시는 백제 왕도를 품은 역사·문화·관광도시다.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관광객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호남선과 전라선이 분기하는 교통·물류·유통 중심 도시로 볼거리와 먹거리가 풍부하다. 전북의 서북부 지역으로 금강을 사이에 두고 충남과 마주 본다. 29개 읍·면·동으로 이뤄졌다. 도내 14개 시·군 가운데 전주시에 이어 두 번째로 인구(31만명)가 많다. 국내 유일의 국가식품클러스터를 기반으로 세계적인 식품도시로 발돋움한다는 청사진을 가지고 있다. [볼거리] ●미륵사지·왕궁리… 백제 왕도와 만날 시간 익산시에는 백제와 마한의 역사유적이 산재해 있다. 어딜 가나 흔하게 과거가 현재에 오버랩된다. 국보 3개, 보물 8개, 다수의 사적이 분포한다. 이 가운데 지난해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이 가장 유명하다. 미륵사지는 백제 최대 가람으로 미륵신앙의 구심점이다. 당시 백제의 건축·공예 등 각종 문화 수준이 최고로 발휘됐다. 신라의 황룡사가 1탑 3금당식인 것과 달리 미륵사는 3탑 3금당식 가람 배치다. 대중까지 용화세상으로 인도하겠다는 미륵신앙이 바탕을 이뤘다. 사적 제150호인 미륵사지에는 국보 제11호인 미륵사지 석탑과 보물 제236호인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왕궁리 유적은 1998년 9월 사적 제408호로 지정됐다. 면적은 21만 6862㎡에 이른다. 미륵사지와 함께 백제 최대 규모 유적으로 꼽힌다. 백제의 왕도였다는 왕도설과 백제 후기 익산 천도설 등 역사적 가설이 뒷받침되는 유적이다. 이곳에는 국보 제289호인 왕궁리 5층 석탑이 남아 있다. 이곳에서 출토된 국보 제153호인 사리장엄구 등을 전시하는 유적전시관이 2008년 개관했다. ●국내 유일 보석박물관… 눈 호강할 시간 왕궁면 호반로에 자리잡은 국내 유일의 보석박물관이다. 부지 14만 1990㎡, 지하 1층, 지상 2층 연면적 1만 2403㎡ 규모다. 진귀한 보석 11만 8000점이 있다. 일상생활에서 볼 수 없는 보석 꽃, 탄생석, 오봉산일월도 등 진귀한 보석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 2010년 9월 개관한 주얼팰리스에는 65개 매장이 들어서 시중보다 싼 값에 보석을 판매한다. 일본, 중국 등 해외 업체도 입점해 다양한 보석을 선보인다. 2011년 이후 매년 보석대축제를 개최한다. 보석박물관 옆에는 화석전시관과 공룡테마공원이 조성돼 가족단위 휴식공간으로도 인기를 끈다. ●이병기 생가… 고풍스러운 선비의 삶 엿볼 시간 여산면 가람1길 64-8에 자리잡은 전북 기념물 제6호다. 생가의 탱자나무는 전북 기념물 제112호다. 이병기 선생은 한국을 대표하는 근대문학의 선구자다. 현대시조 중흥을 이룩한 시조시인이다. 별, 난초, 냉이꽃 등 문학적 가치가 높은 작품을 다수 남겼다. 우리말과 얼을 지키기 위해 힘썼던 선생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전북대 교수를 역임하며 후진을 양성해다. 생가는 조선 후기 양반집 배치를 따랐다. 안채와 사랑채, 고방채, 모정 등이 남아 있다. 모정 앞쪽에는 작은 연못 2개를 파 놓았다. 초가지붕이고 건물 자체는 큰 특징이 없지만 사랑채에서 고풍스러움이 묻어난다. 모정과 연못이 선비 집안의 조촐한 느낌을 준다. ●4대 종교 성지… 신과 대화할 시간 익산은 불교, 천주교, 기독교, 원불교를 상징하는 4대 종교 성지를 간직하고 있다. 숭림사(웅포면 백제로 495-57)는 신라 경덕왕 때 진표율사에 의해 창건됐다. 보광전은 보물 825호다. 청동은입문향로는 도 유형문화재 67호, 목조석가모니불좌상은 도 유형문화재 188호다. 나바위성당(①·망성면 나바위1길 146)은 국가사적 제318호다. 한국인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가 중국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금강하구인 황산 나루터에 상륙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됐다. 1897년 본당을 설립한 베르모렐 신부가 1906년 신축공사를 시작해 1907년 완공했다. 프랑스의 프아넬 신부가 설계하고 중국 노동자가 건축했다. 붉은 벽돌의 서구식 건축양식에 한국식 기와지붕을 얹은 독특한 양식이다. 두동교회 구본당(성당면 두동길 17-1)은 전북 문화재 제179호다. 1923년 한옥 형태로 지은 교회다. 오른편에 예배를 알리는 데 쓰는 종탑이 있다. 기독교와 한국의 전통을 잘 살린 건축물이란 평가다. 건물 내부 한쪽은 남자석, 다른 한쪽은 여자석으로 구분하고 중앙에 휘장이 처져 남녀가 서로 볼 수 없게 했다. 원불교 중앙총부(익산대로 501)는 1924년 9월 최초로 총부가 건립된 이후 개축과 개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등록문화재 제179호다. 소태산 박중빈이 원불교를 선포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곳이다. 원불교의 역대 지도자들 유해를 봉안한 곳으로 원불교의 상징적 공간이다. 본원실, 공회당, 대각전 등 목조 건축물 8동과 소태산 대종사 탑, 비석 석조물 등이 있다. ●웅포관광지… 강 위 일몰에 반할 시간 웅포(②)는 바다가 아닌 강 위로 일몰을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곳이다. 서해 낙조 5선 중 하나인 웅포 곰개나루에는 캠핑장이 있다. 금빛으로 물들이는 금강을 곁에 끼고 지는 해를 바라보며 낭만을 즐길 수 있다. 캠핑장은 일반캠핑장 58면, 오토캠핑장 6면을 갖췄다. 시원한 풍광을 좋아하는 캠퍼들이 즐겨 찾는다. 캠핑장 옆 수상레저클럽에서는 수상스키 등을 즐길 수 있다. 그 옆으로 난 자전거길을 달리며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기도 좋다. 입점리 고분전시관, 숭림사, 함라산 둘레길 등 인근에 볼거리가 풍성하다. 캠핑장 옆 덕양정에서는 낙조를 감상할 수 있다. 곰개나루는 포구의 지형이 마치 곰이 금강물을 마시는 형상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이곳은 고려말 최무선 장군이 왜구를 물리쳤던 진포대첩의 현장이기도 하다. 매년 12월 31일에는 해넘이 축제가 열린다. 익산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먹거리] ●고구마… 날씬이로 만들어줘요 고구마는 익산을 대표하는 농특산물이다. 익산의 고구마 재배는 1834년 전라관찰사였던 서유구가 전파한 것으로 알려졌다. 1950년대 ‘황등고구마’로 명성을 날렸다. 색깔이 붉고 목이 막힐 정도로 포근포근한 밤고구마로 유명하다. 2000년대 다이어트 붐을 타고 ‘날씬이고구마’로 소비자들의 인기를 끌었다. 2010년 익산의 농산물 대표 브랜드 ‘탑마루고구마’로 이름 붙여졌다. 삼기면, 황등면, 왕궁면, 팔봉동 등이 주생산지다. 2600여 농가가 750㏊에서 1만 965t의 고구마를 생산해 160억원의 소득을 올린다. 익산 고구마는 오염되지 않고 비옥한 황토밭에서 재배된다. 구릉지대로 토질, 기후, 강수량 등이 고구마 재배에 천혜의 조건을 갖췄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고구마는 당도가 높고 칼륨과 인, 비타민C가 풍부하다. 익산시가 기후와 토질에 맞는 우수 품종을 개발하고 무병묘, 유기질 비료, 땅 뒤집기 지원을 한다. 재배 단계별로 엄격한 품질관리를 하고 하품은 출하를 금지한다. 최근에는 밤고구마와 물고구마의 장점만 가진 신품종을 재배해 인기가 더욱 높아졌다. ●마약밥… 마의 모든 맛을 보여드려요 신동 마요리 전문점 ‘본향’은 ‘마’를 이용해 각종 음식(③)을 선보이는 한정식집이다. 200여가지의 창작요리를 선보인다. 문화체육관광부 지정 ‘전국 100대 음식점’에 선정된 전국구 맛집이다. ‘2006 대한민국 우리 농산물 요리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2007년 국제음식박람회 향토요리경연대회’에서는 농림부장관상 금상을 받았다. 마 전문 음식점이란 타이틀에 걸맞게 모든 음식에 마가 들어간다. 익산지역에서 생산되는 마를 주재료로 한다. 마는 한방에서 위장장애, 소화불량, 당뇨예방에 좋은 약재로 쓰인다. 마즙, 마죽, 마샐러드, 마녹차전, 마튀김, 마조림, 마떡갈비 등은 기본이다. 잘게 채를 썬 마를 고명으로 얹은 오징어 먹물 잡채, 유부 안에 마와 두부를 다져 넣어 만든 마누라가 유명하다. 마와 연어, 다시마를 곁들여 먹는 마삼함, 마식혜, 각종 약재와 마를 담아 쪄낸 약밥이 절로 구미를 당기게 한다. 여름에는 보양식으로 오방색 삼계탕이 인기다. ●고려당… 50년 전통의 만두 맛이 끝내줘요 중앙동 익산역 앞 골목길에 있는 50년 역사의 분식집이다. 대표 메뉴는 만두와 찐빵, 메밀국수다. ‘백종원의 3대 천왕’에 나온 이후 손님들의 발길이 줄을 잇는다. 만두는 어른 주먹 크기의 옛날식 만두다. 피가 거칠고 두껍지만 자연 발효시켜 식감이 쫄깃하면서 부드럽다. 만두소는 말린 무가 주재료로 소화가 잘된다. 당면과 돼지고기가 듬뿍 들어 있다. 꼬들꼬들한 식감과 담백한 뒷맛이 일품이다. 8개 1인분에 6000원으로 가격도 착하다. 찐빵은 인공발효제나 감미료를 사용하지 않는다. 팥 앙금이 가득한 옛날 찐빵의 풍미를 그대로 간직한다. 메밀국수는 무즙 대신 땅콩가루를 뿌려 먹는다. 시원하면서 정갈한 맛을 자랑한다. ●황등비빔밥… 토렴할까요, 그냥 낼까요 황등면에는 유명한 비빔밥 식당 3곳이 있다. 2곳은 밥 위에 더운 선짓국물을 여러 번 부었다가 따라내는 토렴을 거치는 육회비빔밥집이고 1곳은 토렴을 하지 않는 식당이다. 토렴을 하면 밥이 질척해지면서 찰기가 생기고 양념이 스며들어 구수하면서 깊은맛을 낸다. 진미식당은 토렴을 거친 비빔밥 위에 황포묵과 파채, 김, 시금치 등 고명을 얹어 낸다. 간이 세지 않아 심심한 맛이나 질리지 않고 은근한 풍미를 자랑한다. 풍물시장 안에 있는 시장국밥은 밥과 콩나물을 함께 토렴한 뒤 시금치를 넣고 참기름 양념장과 비벼 먹는다. 특별한 고명은 없지만 파채와 함께 무쳐진 특유의 육회 맛과 돼지비계에서 나오는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한일식당은 토렴을 하지 않은 비빔밥 위에 메밀묵과 당근, 호박, 콩나물 등 각종 계절 나물 고명을 얹는다. 알싸한 고추장 소스가 식감이 풍부한 나물과 어우러져 깔끔한 맛을 낸다. ●탑마루쌀… 전국 최고의 쌀로 밥 지어보세요 익산시 공동브랜드 탑마루쌀(골드라이스)은 전국 최고의 쌀로 유명하다. 2013년 전국 고품질 브랜드 쌀 평가에서 금상을 받는 등 수상 경력이 화려하다. 쌀의 품위, 품종 순도, 식미 등 25개 항목 평가에서 모두 상위 평가를 받는다. 태릉선수촌에 납품돼 국가대표 쌀로 통한다. 농가들이 영농조합법인을 만들어 생산, 수집, 가공, 포장 등 각종 과정을 철저히 관리해 고품질을 유지한다. 익산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김중업 건축혼·민주화 꽃핀 세실… 근현대 미래유산 보물창고 ‘정동’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김중업 건축혼·민주화 꽃핀 세실… 근현대 미래유산 보물창고 ‘정동’

    서울신문이 지난달 2일부터 매주 토요일 오전 서울시, 답사 단체인 ‘문화지평’ 등과 함께하는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을 시작했다. 근대 외교 중심가인 정동 일대 답사를 시작으로 올해 말 마포구 염리동 소금길까지 총 20회에 걸쳐 진행된다. 미래유산이란 현재는 문화재가 아니지만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가치가 있는 유·무형의 모든 것을 말한다. 서울미래유산탐방 홈페이지(http://seouldaily.webmaker21.kr)에서 오는 27일 서대문 영천시장과 서소문역사공원, 서울역고가 등에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가는 ‘만초전과 그 주변’ 프로그램을 예약할 수 있다. “자 이제 출발하겠습니다.” 이필용(47) 서울미래유산해설사가 본격적인 답사 시작을 알렸다. 지난달 2일 오전 10시 서울시청 인근 대한문 앞에서 모인 서울미래유산 탐방 답사단 30여명은 이 해설사를 따라 발걸음을 세실극장으로 옮겼다. 장마 기간이었는데도 이날만 반짝 날씨가 화창했다. 이날 전상봉(30) 서울미래유산해설사는 안전을 책임졌다. 김중업 역작 ‘세실극장’ 답사단이 처음 마주한 세실극장(중구 세종대로19길 16)은 1976년에 건립된 소극장으로 대학로가 만들어지기 전 1970~80년대 연극의 메카였다. 건축가 김중업의 1970년대 작품 가운데 하나로 보존 가치가 높아서 2013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세실극장을 설계한 김중업은 김수근과 함께 우리나라 1세대 건축가로 삼일빌딩, 프랑스대사관, 드라마센터 등을 남겼다. 세실이란 이름은 일제강점기 대한성공회 4대 주교였던 세실 쿠퍼(한국명 구세실)에서 따왔다. 세실극장의 지하에 있는 세실 레스토랑은 1980년대 민주화의 성지였다. 이 해설사는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인사들이 주로 이곳에서 만나 운동 방향을 논의했다”며 “한국 현대사를 흔든 각종 시국 선언과 기자회견 장소로 애용됐다”고 설명했다. 서슬 퍼런 군사독재 시절 민주 인사들이 덜 불안해하면서 세실 레스토랑을 애용한 이유는 이곳이 성공회성당과 연결된 덕분이다. 명동성당과 같이 해외에 본부를 둔 종교 시설은 군사정권이 발을 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세실극장은 당시 320석 규모로 개관했다. 세실극장에서 영국대사관으로 오르다 우측으로 접어들면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 후문이 나온다. 매주 토요일이면 성당 안내 자원봉사를 하는 김선동(사무엘)씨가 반갑게 일행을 맞았다. 김씨는 “1922년 대성당을 짓기 시작했지만, 자금 사정 등으로 1926년 미완성인 채 70여년을 사용하다가 1993년 영국도서관에서 도면이 발견되면서 1996년 현재 모습으로 완공했다”며 “서울에서 보기 드문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이면서도 한국적 정서의 처마장식, 기와지붕 등을 적용한 아름다운 건물”이라고 소개했다. 처마 품은 성공회 대성당 대성당은 1978년 12월 18일에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돼 보존 가치를 인정받았다. 대성당 뒤편에 있는 전통적인 한옥 양식 건물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이 해설사는 “이 건물은 양이재(養怡齋)라고 하는데 과거 경운궁(덕수궁의 옛 이름) 내에 건립돼 왕족과 귀족 자녀들의 교육을 담당했던 곳”이라고 설명했다. 1920년 성공회가 조선총독부로부터 사들여 지금 자리로 옮겼다. 양이재 앞에는 표지석 하나가 단단하게 박혀 있다. ‘6월 민주항쟁 진원지’를 나타내는 이 표지석에는 ‘유월민주항쟁이 이 자리에서 시작되어 마침내 민주화의 새 역사를 열다’라고 적혀 있다. 한혜경 가톨릭대 중어중문학과 교수는 이날 “종교란 개인의 구원을 넘어 전 인류의 안녕과 해방을 모토로 해야 한다는 평소 신념에서 바라봤을 때 대성당이 민주화운동의 진원지가 됐다는 사실이 매우 의미 있다”고 소회를 밝혔다. 대성당을 가로막고 섰던 국세청 남대문별관 건물은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 건물은 1937년 일제가 조선총독부 체신청(우체국) 청사로 지었다. 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의 생모였던 귀비 엄씨 사당(덕안궁터)이 있던 자리다. 서울시는 담벼락 한쪽만 남기고 철거한 옥인아파트처럼 기둥이나 벽면 일부만 기념물로 남긴 채 없애 버리기로 했다. 그렇게 되면 대성당이 시청 앞 큰길에서도 훤히 보이게 된다. ‘ 근대사 굴곡’ 서울시의회 대성당 정문으로 빠져나온 답사단은 서울시의회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곳은 근대사의 굴곡을 담은 경성부(京城府·일제시대 서울의 이름) 부립 부민관이던 곳이다. 일제가 다목적 회관으로 지은 건물로 일제 말기에는 전쟁을 독려하는 정치 집회 장소로 이용기도 했다. 해방 직전인 1945년 7월 24일 ‘애국청년 조만기, 류만수, 강윤국 등이 친일파 박준금 일당 연설 도중 폭파한 자리’라는 표지석이 남아 있다. 친일과 반일의 이데올로기가 첨예하게 대립했던 곳이다. 광복 후에는 미군이 사령부로 사용했고 한국전쟁 중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이후에는 입법의 중심 국회의사당으로 변모했다. 한때는 미래유산인 세종문화회관 별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현재는 시의회 의사당과 사무처, 기자실 등이 들어서 있다. 답사단은 도로원표에 다다랐다. 영문으로는 ‘The zero milestone’다. ‘0’에서부터 뭔가를 시작한다는 의미다. 도로원표란 전국 시·군 간의 거리를 측정하는 기준점이다. 서울시 도로원표는 1914년 설치 당시 광화문 광장 중앙에 위치했다. 그러던 것이 1937년 교보빌딩 앞 칭경기념비전(고종 어극 40년 기념비) 안으로 옮겨 왔다. 도로원표는 2013년 지정된 미래유산이다. 구세군 중앙회관을 지나면 왼쪽으로 작은 골목이 하나 있다. 이곳을 조금 오르면 간판도 없는 한옥 두부 요리집이 있고 그 옆으로 굳게 닫힌 철문이 보인다. 다름 아닌 영국대사관으로 연결되는 덕수궁 돌담길 구간이다. 영국대사관 부지와 맞닿아 1884년부터 통행이 금지됐던 곳이다. 이 길을 복원하기 위해 시의회는 최근 적지 않은 예산안까지 통과시켰다. 이 철문이 열리면 대성당 후문, 세실극장 앞과 연결된다. 영국대사관이 길을 열어 줄지는 아직 미지수다. 영국대사관 건물은 1890년에 지어진 것으로 미래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하비브하우스라는 별칭을 가진 미 대사관저를 지나 미래유산인 정동극장을 거쳐 답사단은 중명전에 이르렀다. 덕수궁 대화재로 인해 고종 황제가 머물렀던 중명전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을사늑약이 이뤄졌다. 중명전 뒤쪽 언덕 위에는 고종이 세자와 함께 건양 1년(1896년) 2월 11일 파천한 러시아공사관이 보인다. 이른바 ‘아관파천’한 고종은 1년 뒤인 1897년 2월 20일 덕수궁으로 환궁했다. 고종이 머물던 중명전 고종과 정동은 떼려야 뗄 수 없을 정도로 이 지역에서 많은 생활을 했다. 그래서 시의회는 고종의 흔적을 되살려 이번 답사로와 거의 일치하는 2.5㎞ 코스의 ‘대한제국의 길’을 조성할 계획이다. 정동 일대에는 서울미래유산이 대거 몰려 있는 문화 역사의 보고(寶庫)이자 근대 열강들의 외교 각축장이었다. 러시아공사관 맞은편에 있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 한국관구는 과거 외교관 구락부로 사용된 기록이 있다. 구한말 이 지역에는 러시아, 독일, 프랑스, 영국 등의 공사관이 밀집해 있었다. 독일공사관은 서울시청 서소문 별관에서 흔적을 발견할 수 있고, 프랑스공사관은 창덕여중 운동장 한쪽에 비석으로 덩그러니 남아 있다. 정동길을 따라 강북삼성병원 쪽으로 한참 올라가면 왼편으로 미래유산인 중화기독교 한성교회를 만날 수 있다. 1958년 세워진 이 교회는 국내 화교 기독교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열강 외교 각축장 ‘정동’ 답사단은 마지막으로 서울시립미술관을 들렀다. 이 해설사는 “이곳은 일제시대엔 경성재판소, 해방 후에는 대법원 청사로 쓰이다가 대법 청사가 서초동으로 이전한 후 2002년부터 시민을 위한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설명을 마지막으로 첫 서울미래유산 탐방 답사를 마무리했다. “늘 서울 하면 강남과 강북으로 대변되는 풍요와 빈곤, 성공과 실패, 경쟁과 낙오의 이미지로만 각인돼 왔을 뿐 정작 이 도시가 품고 있는 역사성이나 문화적인 가치에 대해서는 무심하거나 간과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사는 이 도시를 제대로 알고 이해함으로써 자본의 논리에 의해 재단되는 도시가 아니라 역사와 문화의 토대 위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함께 어우러지는 살아 숨쉬는 도시로서의 인식을 공유하게 된다면 장차 서울에 대한 철학적 접근도 가능해질 것이다. 앞으로 진행될 서울의 미래유산 탐방 프로젝트가 더더욱 기대가 되는 이유다.” 한혜경 교수의 이런 답사 후기는 남은 19회차를 제대로 잘 달려가라는 채찍 같았다. 글 사진 유성호 ‘문화지평’ 대표
  • [최영미와 함께 읽는 세계의 명시] 그녀에게 장미가 아니라 벼룩을 바친 시인

    [최영미와 함께 읽는 세계의 명시] 그녀에게 장미가 아니라 벼룩을 바친 시인

    시인이라면 잊지 못할 연애시 한편은 남기고 죽어야 한다. 내가 읽은 가장 재미난 연애시는 존 던(1572~1631)의 ‘벼룩’(The Flea)이다. 이 벼룩을 좀 보아요, 그리고 그 속에서 당신이 날 거절함이 얼마나 하찮은 일인지 보세요. 이놈은 먼저 나를 빨고, 이제 그대를 빨아, 이 벼룩 속에 우리의 두 피가 섞였지요 이것은 죄도 아니고, 수치도 아니며, 처녀성의 상실도 아님을 당신도 알고 있지요. 그런데 이놈은 구혼하기도 전에 즐기며 두 사람의 피가 하나로 된 것을 실컷 먹어 배가 불렀지요, 그러니 이는, 아 정말이지, 우리가 하고 싶은 것 그 이상이네요 오 멈추세요, 한 마리 벼룩 속의 세 목숨 해치지 마세요, 이 속에서 우리는 거의 결혼, 아니 그 이상을 했지요. 이 벼룩은 당신과 나,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결혼 침대이며, 혼례식을 올린 성스러운 곳이요; 비록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고, 당신도 내켜하지 않지만, 우리는 이미 만났고, 이 흑옥(黑玉)의 살아 있는 벽 속에 숨어 있지요 비록 당신은 나를 죽이는 습관이 있지만 거기에 자살을 추가하지는 마세요, 그리고 셋을 죽여 세 가지 죄를 짓는 신성모독을… 하하-. 연인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데 ‘벼룩’을 이용하다니! 남들은 징그러워 오래 쳐다보지 않는 벌레, 무서운 전염병을 옮기는 벼룩을 보며 남자와 여자의 피의 ‘혼인’을 떠올린 참신한 발상에 나는 탄복했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두 대상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것이 상상력이다. 하긴 사랑도 전염병이니, 벼룩과 연애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곤 할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를 만난 적은 없으나, 존 던은 무척 귀여운 남자였을 것 같다. 벼룩을 보며 웃을 여자가 있을까. ‘벼룩’을 읽으며 웃지 않을 여자가 있을까. 이렇게 재치 넘치는 언어로 구애하는 남자한테 안 넘어갈 여자가 있을까. ‘여자를 웃게 하면 그녀의 침대에 반쯤은 걸터앉은 거나 마찬가지다’라는 서양 속담이 있지 않은가. ‘두 사람의 피가 하나로 된 것을 실컷 먹어 배가 불렀지요’(pampered swells with one blood made of two)는 임신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두 번째 연을, 무심코 벼룩을 때려 죽이려는 애인을 말리는 구어체 감탄사인 “Oh stay,”(오 멈추세요)로 시작해 극적인 긴장감을 높였다. ‘흑옥(黑玉)의 살아 있는 벽’은 벼룩의 검은 몸체를 말한다. ‘벼룩’처럼 재기발랄한 연애시를 쓴 사람이 훗날 세인트폴 대성당의 사제가 되었으니, 존 던의 파란만장한 삶 자체가 한편의 시대극이다. 던은 1573년 런던의 유서 깊은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상인이었던 아버지는 던이 세 살 때 죽었고, 던의 어머니는 ‘유토피아’를 쓴 토머스 모어의 조카딸이었다. 토머스 모어는 헨리 8세에 의해 대법관에 임명되었으나 반역죄에 몰려 처형당한 가톨릭 성인이다. 수장령을 선포한 헨리 8세의 딸인 엘리자베스 1세의 재위 기간에 가톨릭 순교자의 피가 흐르는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던의 생이 순탄할 리 없다. 그는 옥스퍼드에서 3년 공부했지만 가톨릭 신앙 때문에 영국 성공회의 충성맹서를 하지 않아 학위를 따지 못했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도 공부만 하고 학위를 따지 않았다. 1593년 가톨릭 신부를 도와주다 체포된 동생 헨리가 감옥에서 죽자, 던은 가톨릭 신앙에 회의를 품게 된다. 상속받은 상당한 유산을 여자와 여행으로 탕진하고, 런던으로 돌아온 던은 당대 정계의 실력자인 토머스 에저튼 경의 비서관이 되었다. 에저튼의 후원 아래 착실한 경력을 쌓던 던은 스물여덟 살 되던 해에 에저튼의 조카딸인 열여섯살의 앤과 사랑에 빠졌다. 1601년 앤과의 비밀결혼이 발각되어 던은 해고되고 결혼식의 증인이었던 신부님과 함께 투옥되었다 곧 풀려났다. 앤의 사촌이 젊은 부부를 위해 시골에 피난처를 제공했고 부유한 친척과 친구들의 도움으로 결혼축시를 써 주거나 법률 자문을 하며 간신히 생계를 유지했다. 앤은 15년의 결혼생활 동안 12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6명만 살아남았다. 사십 세가 되도록 가난을 면치 못하던 던은 1615년에 성직에 들어갔다. 제임스 1세에 의해 성공회 사제로 임명되며, 드디어 오랜 돈 걱정이 끝났는데 1617년에 부인 앤이 열병을 앓다 사망한다. 던은 ‘가장 잘 선택되고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여인, 가장 귀엽고 순결한’ 아내를 기리는 비석을 세워 앤의 죽음을 애도했고 다시 결혼하지 않았다. ‘하나님 밑에서 그의 유해와 그녀의 유해가 합쳐져 새로이 결혼할 것을 서약하노라’는 비명(碑銘)이 말해주듯 두 사람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운명의 짝이었다.
  • [서울 핫 플레이스] 궁산 소악루에 올라 선비의 지조·절개 정선 예술혼 만나다

    [서울 핫 플레이스] 궁산 소악루에 올라 선비의 지조·절개 정선 예술혼 만나다

    서울 강서구가 새로운 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다. 마곡지구에 LG·롯데·이랜드 등 50여개 중소·대기업을 유치하며 첨단 연구·개발(R&D) 산업단지를 마련한 게 대표적이다. 지난해 12월 의료관광 특구로 지정된 것을 계기로 관광종합안내센터 건립 등 의료관광 기반 마련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하지만 강서구에는 ‘미래’뿐 아니라 ‘과거’ 역사 유산도 많다. 서울에 있는 유일한 향교인 양천향교부터 조선시대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소악루, 겸재 정선 미술관까지 한꺼번에 둘러볼 수 있으니 말이다. ●서울 유일의 600년 전통 양천향교 강서구 가양동 지하철 9호선 양천향교역에 내려 궁산 근린공원 방향으로 10분 정도 걸으니 단청(목조건물에 여러 가지 빛깔로 무늬를 그린 것)을 입힌 여러 채의 건물이 한눈에 들어온다. 서울에서 단 하나뿐인 향교, 양천향교다. 태종 12년인 1411년에 창건돼 지방 향리들의 자제를 교육하고,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의 제사를 모시는 문묘행사를 담당했다. 수세기 동안 황폐화됐던 양천향교는 1981년 전면 복원됐고, 1990년에는 전통적 가치를 인정받아 서울시 문화재기념물 제8호로 지정됐다. 향교 입구에는 붉은색을 칠한 홍살문이 자리하고 있다. 기둥 사이에는 화살 모양의 뾰족한 나무를 나란히 박아 연결했다. 붉은색은 악귀를 물리치고 화살은 나쁜 액운을 화살로 공격한다는 의미다. 홍살문을 지나니 송덕비들이 눈길을 끈다. 노현송 강서구청장은 “송덕비는 관아나 향교 근처에 현령들의 공덕을 칭송하기 위해 세운 비석들”이라고 설명했다. 외삼문과 내삼문을 지나 대성전·명륜당·전사청·동재·서재까지 둘러보니 조선시대 양천현아(현 강서구 가양동)의 현령이라도 된 듯싶다. 양천향교의 명륜당과 대성전은 구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 중이다. 명륜당에서는 지역주민과 초·중·고교생을 대상으로 한문과 서예, 사군자 등을 가르친다. 한문교실을 거쳐간 학생 수만 2000여명에 달한다. 봄가을에는 대성전에서 공자의 위패를 모시고 덕을 기리는 행사로 석전제를 개최해 전통문화 계승에 전력을 쏟고 있다. 석전제는 1986년 중요무형문화제 제85호로 지정됐다. ●겸재 정선의 기분을 느껴보자, 소악루 양천향교를 나와 뒷산인 궁산으로 향했다. 조금은 가파른 언덕배기라 숨이 차오른다. 10분 정도 올라가니 고풍스러운 정자 소악루가 자리하고 있다. 소악루에 올라 내려다보는 한강의 풍광이 시원하다. 바람과 함께 그간의 스트레스가 날아가는 듯하다. 소악루는 조선시대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이 양천 현령으로 부임해 그림을 그렸던 장소로 소악후월, 안현석봉 등의 작품이 유명하다. 아쉽게도 겸재 정선의 손길이 닿아 있는 조선 시대 원 건물은 오래전 화재로 소실된 상태다. 1994년 복원된 현재의 소악루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다만 복원된 위치는 한강의 조망을 고려하다보니 강서구 가양동 일명 세숫대바위 근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시대 소악루와 조금 달라졌다. 그럼에도 소악루에 올라 오늘의 강서구 일대와 200년 전을 비교해 보며 겸재 정선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는 건 놓칠 수 없는 재미 포인트다. ●삼국시대 석성(石城) 양천고성지 내친걸음으로 궁산 정산까지 올라가 봤다. 풀밭으로 변해버린 양천고성지가 보인다. 2만 9370여㎡ 넓이의 옛 성터로 1992년 국가사적 제372호로 지정됐다. 동국여지승람, 대동여지도 등 문헌기록에도 등장하는 곳이다. 양천고성은 행주산성, 오두산성과 더불어 삼국시대부터 한강 어귀를 지키는 주요한 군사 요충지라 중요한 역사적 가치가 있다. 아직 성의 정확한 축조 시기와 형태는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다만 2013년부터 강서구가 한얼문화유산연구원과 함께 3차 시굴 조사(시험적으로 파보는 것)까지 진행해 성곽의 주요 구조물인 치성부(성벽 바깥으로 돌출한 부분), 통일신라 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태선문(굵은 금무늬) 기와 조각들을 발굴했다. 새해 첫날에는 많은 주민이 해맞이를 보기 위해 모여들어 소원을 빌기도 한다. ●탐방길의 끝, 겸재정선미술관 탐방을 마치고 돌아가려다 보니 궁산 중턱에 하나의 건물이 눈에 띄었다. 바로 겸재정선미술관이다. 이곳에선 소악후월, 안현석봉, 소악루와 같은 작품을 볼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모형도로 재현해 낸 양천현의 모습도 만나 볼 수 있다. 겸재 정선의 생애를 연대별로 정리한 전시물을 보고 싶다면 겸재전시실을 방문하면 된다. 지적 호기심이 채워지지 않는 방문객들은 미술관에서 진행하는 현장탐방 프로그램을 신청해 전문적인 해설을 들으며 겸재가 걸었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것도 좋다. 노 구청장은 “겸재 정선 선생 화풍을 체험할 수 있는 겸재정선미술관과 우리의 전통 예절과 멋을 느낄 수 있는 양천향교 등 궁산 일대의 각종 문화유산은 우리 구의 대표적 문화 상품”이라면서 “많은 분들이 이곳을 방문해 역사의 숨결을 느껴보는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 신규 지정된 국보·보물 내년부터 연례 특별전

    문화재청과 국립중앙박물관은 국보와 보물로 신규 지정된 문화재들을 소개하는 특별전을 내년부터 해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공동 개최한다고 19일 밝혔다. 첫 전시는 내년 하반기 열릴 예정이며, 올해 지정된 문화재들이 한자리에서 공개된다.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는 문화재는 한 해 30건 안팎이다. 문화재청은 “개인이나 사립 기관이 보유해 평소 접하기 어려운 국가지정문화재들도 감상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며 “소장자에게도 자신이 소중히 보관해 온 문화재의 의미와 가치를 국민과 함께 나누는 뜻깊은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두 기관은 문화재의 국외 전시 추진에 대한 협의, 박물관 소장품 지정 조사와 정보 공유 확대, 국가지정문화재 보존 처리 협력 등을 진행하기로 했다. 이 같은 조처는 국립중앙박물관이 2013년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사자상을 보존 처리한 뒤 제때 문화재청에 알리지 않아 드러난 문화재 관리의 허점을 보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문화재청은 국립중앙박물관이 관리하고 있던 보물 제6호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의 비신(碑身·비석 몸체)을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보물로 지정할 계획이다. 고려시대 만들어진 원종대사탑비의 비신은 1915년 쓰러져 8조각으로 깨졌고, 1963년 비신을 제외한 귀부(거북 모양의 받침돌)와 이수(뿔 없는 용을 새긴 비석의 머리)만 보물로 지정됐다. 현재 원종대사탑비에는 2014년 복제된 비신이 놓여 있고, 원본은 깨진 채로 여주박물관에 대여된 상태다. 2000년 고달사지 발굴 과정에서 나온 석제품 2점도 원종대사탑비 이수의 일부로 확인돼 제자리에 복원하기로 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신규 국가지정 문화재 내년부터 연례 특별전

     문화재청과 국립중앙박물관은 국보와 보물로 신규 지정된 문화재들을 소개하는 특별전을 내년부터 해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공동 개최한다고 19일 밝혔다. 첫 전시는 내년 하반기 열릴 예정이며, 올해 지정된 문화재들이 한자리에서 공개된다.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는 문화재는 한 해 30건 안팎이다. 문화재청은 “개인이나 사립 기관이 보유해 평소 접하기 어려운 국가지정문화재들도 감상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며 “소장자에게도 자신이 소중히 보관해 온 문화재의 의미와 가치를 국민과 함께 나누는 뜻깊은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두 기관은 문화재의 국외 전시 추진에 대한 협의, 박물관 소장품 지정 조사와 정보 공유 확대, 국가지정문화재 보존 처리 협력 등을 진행하기로 했다. 이 같은 조처는 국립중앙박물관이 2013년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사자상을 보존 처리한 뒤 제때 문화재청에 알리지 않아 드러난 문화재 관리의 허점을 보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문화재청은 국립중앙박물관이 관리하고 있던 보물 제6호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의 비신(碑身·비석 몸체)을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보물로 지정할 계획이다. 고려시대 만들어진 원종대사탑비의 비신은 1915년 쓰러져 8조각으로 깨졌고, 1963년 비신을 제외한 귀부(거북 모양의 받침돌)와 이수(뿔 없는 용을 새긴 비석의 머리)만 보물로 지정됐다. 현재 원종대사탑비에는 2014년 복제된 비신이 놓여 있고, 원본은 깨진 채로 여주박물관에 대여된 상태다. 2000년 고달사지 발굴 과정에서 나온 석제품 2점도 원종대사탑비 이수의 일부로 확인돼 제자리에 복원하기로 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선진국형 농업의 리더 될 것…광주 정서로 전북 판단 말라”

    “선진국형 농업의 리더 될 것…광주 정서로 전북 판단 말라”

    “호남이 아니라 전주와 나주·제주도를 합쳐 전라도였고, 전라도의 원주인은 전북이고 전주입니다.” 송하진(64) 전북도지사는 지난달 27일 서울 여의도 켄싱턴 호텔에서 한 서울신문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구한말 전국 3대 도시였던 전주의 자존심을 되찾고 싶다”며 이렇게 강조했다. 국회 의원회관에서 전북 지역 국회의원 10명과 정책협의회 조찬 모임을 막 마친 그는 “광주 정서로 전북의 정서를 평가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맞지 않다”고 덧붙였다. 그는 행정고시 24회로 전북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해 전주시장을 거쳐 전북지사가 된 덕분인지 ‘전북 DNA’로 꽉 차 있다. ‘명문가의 자제’로 알려졌지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자수성가의 길을 밟았을 뿐”이라며 “요즘 젊은이들은 그런 기회가 적어졌다”고 안타까워했다. 2006년 전주시장 시절부터 뛰어 10년 만에 ‘탄소산업’에 시동을 건 송 지사는 “‘삼락농정’으로 선진국형 농업대국의 길을 전북이 열겠다”고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전북은 정치적으로 광주·전남을 쫓아가지 않나. -언론에서 전북을 호남의 일부로 다루는 데 불만이 크다. 전북과 광주는 정서도 민심도 완전히 다르다. 현대에 와 광주가 커졌다고 형 대접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옳지 않다.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 제주도를 합한 것이다. 그 전라도의 수부가 전주다. →전주·전북이 광주와 호남으로 묶여 피해를 봤나. -피해가 많다. 공공기관과 기업의 호남 본부가 광주에 있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국민 화합을 위해 ‘동진정책’ 하느라고 전북이 역차별받고 소외됐다. ●자수성가 정치인… 전북 떠난 적 없어 →명문가·금수저 출신 아닌가. 강암 송성용 선생의 막내 아들이고, 송하철 전 전북부지사, 서예가 송하경 성균관대 교수, 송하춘 고려대 교수와 형제다. -김제의 가난한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강암 선생이 비석 글씨 써 주고 쌀 한 말 받는 식으로 사시다가 서예가로 이름난 것은 60세가 넘어서다. 그때 친구들 도움을 받아 전주로 나왔다. 근대 교육을 받은 큰 형님이 9급 공무원이 돼 처음으로 돈을 벌었다. 전북 공무원으로 있다가 붓글씨 잘 쓴다고 상장에 글씨를 쓰라고 8급 때 서울 내무부에 불려 올라갔다. 둘째·셋째 형님에 나까지 ‘응팔’에 나온 쌍문동 산비탈에 있는 큰형님 집에서 학교를 다니며 어렵게 학업을 마쳤다. 송하경 교수도 돈 없어서 김제에서 농사짓다가 아버지 몰래 성균관대 시험 봐서 장학생으로 학교 다녔다. 명함만 보면 그럴듯한데 형제들이 이렇게 자수성가했다. 전형적인 한국의 출세 모형이다. 나도 도지사가 되고 보니까 엄청 출세한 것 같은 사람이 됐다. 하지만 벅차다. →성공에 가슴이 벅차다는 것인가. -능력이 벅차다. 도민의 선택으로 여기까지 왔다. 부족한 사람은 채우려고 노력한다. 금수저란 생각을 안 하니까 빈자리를 채우려고 뼈 빠지게 노력했다. 정치적으로도 자수성가했다. 시골 바닥에서 출발해 여기까지 왔다. 국회의원 한 번도 안 해 보고 도지사 된 사람이 나밖에 더 있나. →안희정 충남도지사가 있다. -국회의원 안 했어도 대통령 만든 사람인데…. →요즘 20대들이 ‘흙수저’라며 절망하는데 자수성가한 사람으로서 조언한다면. -사회 구조적인 측면이나 경제적 시스템을 수정하는 것은 중앙정부가 할 일이다. 개인의 입장에서 돌아보면 자기에게 맞는 길을 찾아 열심히 노력하는 길이 가장 빠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요즘 젊은이들이 우리 때보다 기회가 적어졌다. 문명이 고도로 발달했지만 국민들이 골고루 기회를 갖는 것은 아니다. 골고루 기회를 주기 위해 농업이 중요하다. →왜 농업이 중요한가. -미래에 농업, 농식품, 농생명 산업으로 가지 않으면 무궁무진한 일자리를 창출할 수 없다. 농촌 인구 감소는 농업을 키우지 않고 막을 수 없다. →선진국은 농업대국이다. -당연하다. 궁극적으로 선진국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한 나라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거꾸로 농업은 안 하고 2·3차 산업만 하면 경제대국으로 갈 것으로 믿는다. 잘못됐다. 농업, 농민, 농촌 세 가지가 다 즐거운 ‘삼락농정’이 필요하다. 기아에 허덕이는 인류가 10억명이 넘는 만큼 양적인 농업 증대와 농산물의 질을 높이는 농생명, 농식품 산업을 함께해야 한다. →행정고시 출신인데 전북도청에서 공무원을 시작했다. -원래 목표가 전북이었다. 부처를 선택할 때 1순위 내무부, 2순위도 내무부, 3순위는 문화부라고 썼다. 큰형님의 영향이 컸다. 이왕이면 고향에서 일해 보고 싶다는 생각도 강했다. 여산 송씨인데 본관도 전북에 있고 전북을 떠나 본 일이 없다. 그렇다 보니 전북이 보였다. ●‘농도’서 선진농업 꿈… 청년에도 기회 →전북이 어떤 모습으로 투영됐나. -적자인데 서자 취급받는 아픔이 보였다. 산업화 이전에는 전북이 농도로서 최고였다. 그런데 265만명이던 인구가 187만명으로 줄었다. 조선 말에 전주는 3대 도시였다. 오늘날에는 20대 도시를 넘어섰다. 내가 태어나고 뿌리를 박았던 내 고향이 낙후되는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전주시장 8년을 하면서 느낀 점이 너무 많았다. →전북도 DNA만 가진 행정가처럼 발언한다. -전북을 살리려는 사람은 전북을 정확히 냉철하게 봐야 한다. 금수저는 흙수저 심정을 모른다. 당해 보지 않은 자는 모른다. →정세균 국회의장과 친하다는 소문이다. -대학 선배다. 총학생회장 할 때 난 고시 공부했다. 공교롭게 그분이 당직을 맡고 계실 때 정치에 입문했다. 출마하라고 권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데 53세 때 명퇴했다. →어떻게 출마를 결정했나. -전북도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할 때 나에게는 정치인이 될 DNA가 없다고 생각했다. 전북도 기획관리실장을 하며 시야가 넓어져 생각이 바뀌었다. 당시 서울에서 출마하겠다는 각오를 밝히지 않고 정치인 100여명을 만났다. 국회의원, 시장·군수 당선자, 낙선자, 시·도 의원까지 두루 만났다. 당시 가장 궁금한 게 정치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나, 조직은 무엇을 조직이라 하는가, 배경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등이었다. 하지만 다 필요 없다는 것을 알았다. 선거에 나가도 되겠구나 생각했다. →조직은 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정책학에서 ‘느슨하게 연결된 조직’이란 게 있다. 우호 세력이 많으면 더 유리하다는 것이다. 나는 살아오면서 우호 세력을 비교적 많이 보유한 사람 중 하나다. →비결은 뭔가. -성격과 출신이다. 성격은 화이부동(和而不同)이다. 남들과 잘 섞이되 내 주관을 잃어버린 일이 없다. 남들이 나를 너무 물렁하고 사람 좋아 보인다고 하지만, 자신에겐 서릿발 같고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 같은 ‘지기추상 대인춘풍’(知己秋霜 對人春風)을 체화했다. 농촌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학교를 다녔다. 초등학교는 김제, 중학교는 익산, 고등학교는 전주, 대학교는 서울에서 다녔다. 외가는 완주다. 전북 180만 인구 가운데 120만은 나와 인연이 있다는 것이다. “정치하려고 어려서부터 그렇게 돌아다녔냐”고 농담하는 분도 있다. →국내 탄소산업의 선구자로 알려졌다. -내가 대한민국에서 탄소산업이란 용어를 탄생시킨 주인공이다. 전주시장 8년 동안 연구개발비로 1200억원을 투입했다. 금방 성과가 나오는 일도 아닌 일에 기초정부가 그 많은 예산을 투입하기는 어려웠다. 정치적 오해, 방해, 모함, 협박까지 받았다. 중앙 부처는 물론 광역정부인 전북도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 지방정부 단체장 혼자 설쳐 2년 전 발의한 탄소산업육성법이 지난 4월 국회를 통과해 자랑스럽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전북의 미래는. -4차 산업혁명이 오고 있다. 지금까지 방식으론 경제 흐름을 잡을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전북이 가장 유리하다. 탄소, 농생명, 관광, 새만금 등이 키워드다. 관광도 막연한 관광이 아니다. 전주시장 때 한옥마을을 키운 이유다. ●새만금 후퇴 안 해… 드론 산업 추진 →노태우 정부에서 시작한 새만금은 아직도 공사 중이다. 지금이라도 발 빼야 하지 않나. -방조제 끝물막이 공사가 끝난 지 10년이 지났다. 절대로 후퇴할 수 없다. 같은 해 착공한 상하이 푸둥지구는 이미 완공돼 중국 개혁개방의 상징이 됐다. 지금 필요한 것은 좌고우면이 아니라 속도다. 한·중 경협단지 추진, 규제 특례지역 조성 등으로 개발의 호기다. 대규모 재정 투입으로 새만금 기본계획대로 2020년까지 완공돼야 한다. →새만금에서 추진할 새로운 사업은. -드론산업이다. 주변에 공장도, 주택도 없어 하늘과 땅이 모두 필요한 드론을 연습할 수 있는 천혜의 여건을 갖췄다. 가상현실 산업도 좋다. →새만금 신공항 건설 가능성은. -새만금은 여의도 140배의 새 땅이다. ‘영남권 신공항 백지화’를 새만금 공항과 연계하는 건 부적절하다. 국토부의 제5차 공항개발 중장기 종합계획에 새만금 신공항 건설계획이 반영됐다. 공항은 건설돼야 한다. →2023 세계잼버리 유치 전망은. -새만금은 천혜의 야영지다. 경쟁지인 폴란드 그단스크에 앞선다는 평가다. 폴란드는 전·현직 대통령과 노벨평화상 수상지 바웬사 등 정부가 적극 나섰다. 2015년 일본에서 열린 대회가 실패했다는 평가가 우리에게 부담이다. 정부의 적극적인 관심과 협조가 필요하다. 개최 결정까지는 1년 정도 남았다. 유치에 최선을 다하겠다. 대담 문소영 사회2부장 정리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꿈꾸는 에코 빌리지 오바마小浜町 ①오바마의 킨포크 라이프

    꿈꾸는 에코 빌리지 오바마小浜町 ①오바마의 킨포크 라이프

    꿈꾸는 에코 빌리지 오바마小浜町 소박하지만 풍요로웠다.골목마다 다정한 물길이 흘렀고 사람들은 맑았다.손끝에 살짝만 닿아도 물이 들었다.저녁마다 오바마로 내려오는 진홍빛 석양 혹은 홍조. 오바마의 킨포크 라이프 오바마의 첫인상은 무덤덤했다. 일본 나가사키현 시마바라 반도, 그 반도의 서쪽 해안에 자리잡은 운젠시 오바마는 특이한 이름에 비해 개성이 적어 보이는 마을이었다. 알고 보니 보물창고였던 구릉지대의 주거지는 도로를 장벽처럼 막아선 료칸에 가로막혀 아예 보이지도 않았었다. 그래서 첫인상이 꽤나 중요한 료칸들의 외관은 옹색해 보였다. 교체하기가 무섭게 부식해 가는 파이프와 페인트, 쉼 없이 뿜어 나오는 증기가 한몫을 했을 것이다. 아무튼 세련됨,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3일 만에 생각이 180도로 달라졌다. 오바마는 살아 보고 싶은 곳이다. 한 일주일쯤 머물면서 아침마다 동네 빵가게에 들러 바삭거리는 빵을 사고, 낮에는 다치바나만으로 나가 바다 수영을 하고 바로 들어와 온천탕에 몸을 담그고, 저녁에는 석양을 바라보며 샴페인 한잔을 곁들인 해산물 찜요리를 즐긴 후 밤늦게 출출해지면 동네 이자카야에 모인 동네 주민들과 어울려 맥주 한잔 기울이고 싶은 곳이다. 그러다 심심해지면 차를 빌려 하루는 화산 트레킹을, 다음날은 바다낚시와 돌고래워칭을, 다음날에는 규슈 올레길을 걷고 싶다. 이 모든 것이 차로 20분 정도 움직이면 가능하다. 거창한 계획이 아니다. 실제로 오바마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이다. 관광객들이 운젠온천에 몰린다면, 현지인들이 선택하는 곳이 오바마온천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논밭을 일구는 오바마 촌부들이 여름휴가를 보내는 방법, 겨울 농한기를 보내는 방법이다. 요샛말로 킨포크 라이프Kinfolk Life다. 세상 그 무엇도 부럽지 않은. 참! 오바마小浜町는 원래부터 오바마다. 아무 사연이 없다. 그래도 2008년엔 버락 오바마의 미국 대통령 당선을 열렬히 기원하긴 했다. 당선 후에는 그의 얼굴을 그려 넣은 수건도 만들고 관광안내센터 앞에 동상도 세웠다. 오바마 대통령은 모르겠지만, 귀여운 무임승차다. 퇴임 후 그가 오바마에 와도 좋을 것 같다. 만족을 보장한다. ●1,300년 동안 꺼내 쓴 화수분 아무리 써도 남을 정도로 온천수가 풍족한 곳. 그래서 오바마는 인심도 넉넉하다. 스며들어 며칠 살아 보면 풍족한 물만큼이나 정이 넘치는 곳임을 알게 된다. 행복은 바다에서 솟아난다 “용출되는 온천수의 양이 너무 많아서 70%를 그냥 버릴 정돕니다. 다른 곳처럼 온천수를 재활용할 필요가 전혀 없죠!” 오바마 사람들이 입을 모은 자랑이다.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고 했던가. 오바마의 곳간은 바다 속 10km 아래에 있다. 마그마에 데워진 지하수가 해안가 암반 틈새에서 솟아오르기 시작한 것이 1,300여 년 전. 지금까지도 매일 1만5,000톤의 용출량을 자랑하다. 꺼내도 꺼내도 채워지는 화수분이 따로 없다. 그 첫 기록은 713년 쓰인 <비젠 풍토기>에 남아 있다. 오바마가 본격적으로 병을 고치는 탕치湯治장으로 이용된 것은 1614년, 혼다湯太라는 이름의 유다유湯太夫(온천을 관리하는 대관)가 임명되면서부터다. 1924~1938년 사이에 철도가 개통되면서 여객과 여관이 함께 늘어났고, 오바마온천의 이름이 알려지면서 가객 사이토 모키치1882~1953년, 다네다 산토카1882~1940년 등 일본의 저명인사들도 오바마를 찾아왔다고 한다. 그 모든 흔적은 오바마역사자료관에서 볼 수 있다. 에도 시대에 100엔(지금으로 치면 7,000만원 정도의 값어치라고 했다)을 주고 시마바라성에서 구입해 왔다는 대문을 통과해 마당으로 들어서면 커다란 목재 구조물이 보인다. 온천수를 끌어올렸던 펌프 시설인데, 실상은 끌어올릴 필요도 없이 온천수가 저절로 솟구쳐 올랐다고 한다. 족욕탕 뒤의 커다란 저택은 1844년에 지어진 고택으로 혼다 유다유 가문의 여러 유품과 초상화, 사이고 타카모리1828~1877년 등 역사 속 인물들의 친필 족자 등이 전시되어 있다. 온천수만 솟구쳐 올랐다면 좋았겠지만 200년 주기로 운젠화산의 마그마도 분출했다. 1792년 1만5,000명의 사망자를 낸 시마바라 대변島原大變은 일본 최대의 화산 재해로 기록되었고 1990년부터 5년간 지속됐던 분출은 시마바라 반도 최고봉의 위치를 바꿔 버렸다. 그 직접적인 피해가 오바마로 향하지 않았던 것을 이곳 사람들은 용의 수호 때문이라고 믿는다. 오바마 신사의 배전拜殿 천장에 용이 그려져 있고, 손을 씻는 데미즈야에도 용상이 세워져 있는 이유다. 온천마을로 부침을 거듭하는 동안 오바마의 모습은 많이 달라졌다. 사람과 말이 흙을 실어 날랐던 100년 전 방조제 사업은 간척사업으로 이어졌고, 지금은 상전벽해桑田碧海, 즉 바다가 육지가 됐다. 파도가 찰랑거렸던 오바마역사전시관 계단 아래부터 마린파크까지가 모두 사람이 만든 땅이다. 그 안에 도로가 놓이고, 빌딩형 료칸들이 들어서고, 족욕탕, 공원 등 시민 복지시설도 마련됐다. 살기는 좋아졌지만 유서 깊은 이야기들은 가려졌다. 그래서 오바마의 속살을 보기 위해서는 한 걸음 더 안쪽으로 들어가야 한다. 료칸 너머 마을 속으로. 오바마역사자료관 나가사키현 운젠시 오바마쵸 기타혼마치 923-1 9:00~18:00(매주 월요일 휴무)100엔(특별기획전 시 200엔) 한 걸음 더, 오바마의 속살 아침 7시, 집합령이 떨어졌다. ‘조조워킹’이라니, 이름도 무시무시한 아침산책을 이끄는 지도자는 이세야 료칸 오카미상료칸의 안주인인 쿠사노 유미코 여사였다. 가벼운 아침체조로 몸부터 풀고 시작하는 마을 투어는 1시간 내내 숨이 가빴다. 오바마 최고의 명소인 105m 길이의 족욕탕에서 시작해 곳곳에 세워진 조각상과 비석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고, 마을 안쪽 카리미즈 지구로 들어가서는 1934년에 건조된 목조 건물(나가사키현에 남은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됐다)인 공회당 너머 몇 개의 신사와 샘터로 코스가 이어졌다. 그 행렬을 따라잡기 힘들었던 이유는 줄지어 등교하는 초등학생부터 자전거를 타고 언덕을 오르는 고등학생들까지, 동네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사람이 마주 오면 한쪽으로 비켜서야 할 만큼 골목은 좁고 복잡했지만 이상하게 금방 익숙해졌다. 장소마다 푯말이 세워져 있어서 혼자서도 마을 투어를 할 수 있다. 구릉을 따라 더 올라가면 동백꽃 군락지, 삼림온천욕장도 있다고 했다. 손자들 사진을 자랑스레 내건 유센베가게, 벨을 눌러야만 2층에서 할머니가 내려와 가게 문을 연다는 앤티크숍, 80년이 넘도록 같은 사물함을 쓰고 있는 동네 목욕탕, 료칸의 오카미상들이 주 고객이라는 미용실 등등 한 집 한 집 알수록 더 궁금하다. 마을도 여행도 건강하게! 이세야 료칸 오카미 쿠사노 유미코 조조워킹을 안내해 준 쿠사노 여사의 별명은 ‘수다쟁이 오카미’다. 짧은 시간 동안 양조장을 운영하던 부모님의 빚 때문에 야쿠자에게 쫓기다 시마바라에서 료칸을 운영하던 조부모댁으로 도망쳐 어려서부터 온갖 허드렛일을 도우며 돈을 벌었다는 영화 같은 스토리가 쏟아졌다. 그때 배운 춤과 노래 솜씨, 그리고 여전한 미모와 말솜씨에 활발하고 진취적인 성격으로 료칸의 안주인 역할은 물론 오바마온천관광조합 여성부, 전국 상공회 여성회 운젠시부, ‘체인지 오바마’를 포함해 여러 모임을 주도하고 있다. 여행을 통해 건강을 증진하고 일상생활까지 풍요롭게 만드는 헬스투어리즘Health Tourism의 개념을 오바마에 소개한 것도 그녀다. 조조워킹을 진행하면서 마을 주민들이 관광객들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그녀를 포함한 오카미상들에게 ‘수고한다’는 인사를 건네오기도 한다는 것. 그런 작은 환대가 오바마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350년간 이어져 온 이세야 료칸 로비의 아동 놀이방, 휠체어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진심으로 ‘오모테나시’를 실천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서비스나 호스피탈리티와는 다른, ‘성심을 다해 손님을 모신다’는 일본의 정신이다. 오바마 조조워킹 매주 화, 목, 토요일 오전 7시에 시작해 1시간 가량 진행된다. 간단한 체조 후 마을을 돌면서 유적과 명소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투숙하는 료칸에서 예약할 수 있다. ●낭만의 체감 온도 105℃ 오바마는 뜨겁다. 물이 끓는 온도보다 높다. 일본에서 용출되는 온천수 중 가장 높다는 105℃의 물이 철철 넘친다. 그래서 오바마의 석양은 더 붉고, 사람들의 마음은 더 따뜻하다. 앗 뜨거! 내 발을 돌려줘. 꽃샘추위가 매서웠다. 오들오들 떨다가 도착한 곳이 오바마 마린 파크의 족욕탕 ‘홋토훗토 105’였다. 오바마 온천수의 온도가 105℃, 그래서 족욕탕의 길이도 105m다. 온도를 낮추기 위해 바닷물을 섞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계단식 원천지도 설치해 놓았다. 하지만 이미 감각이 없어진 발을 족욕탕에 넣는 순간 ‘홋토 훗토!’란 외침이 절로 나왔다. ‘Hot Foot’이란 뜻이다. 그 입을 막은 것은 뜨끈한 온천 달걀. 누구나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증기 찜가마에서 방금 꺼내 온 것이다. 개장 6년 만에 홋토훗토 105는 연간 수십만명이 다녀가는 오바마 최고의 명소가 됐다. 지압을 하며 걸어 다닐 수 있을 만큼 넉넉한 길이다. 염화온천의 나트륨 성분은 자연팩 효과를 주어 피부 미용에도 좋고, 신경통과 류마티스에도 좋다. 가족들은 달걀이나 고구마를 간식으로 쪄 먹고, 연인들은 석양을 함께 감상한다. 족욕탕의 마지막 구간은 애완견 전용탕이다. 달걀을 반으로 쪼개니 노른자가 유난히 더 노랗다. 어느새 오바마에 석양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석양은 오바마 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자부심이다. 료칸에서는 매일의 일몰 시간을 체크해 투숙객들에게 알려 줄 정도다. 홋토훗토 105나가사키현 운젠시 오바마쵸 기타혼마치 905-68 4~10월 10:00~19:00, 11~3월 10:00~18:00찜가마 사용 무료. 매점에서 달걀, 고구마를 판매하고 있으며, 200엔에 바구니도 대여해 준다. 본인 것을 사용해도 된다(휴일 매달 첫 번째 월요일 오전). 무료 은밀하게, 위대하게 오바마에 있는 동안 서성거리기만 했던 온천탕이 둘 있었다. 마음은 이미 탈의실에 가 있었지만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다. 첫 번째는 해상 노천탕 나미노유 ‘아카네’다. 탁 트인 다치다나만을 내다보며 즐길 수 있는 은밀한 온천욕이 가능한 곳이다. 남녀로 탕이 나뉘어져 있어서 1인 요금을 내고 이용해도 되고, 가족이나 연인 단위로 대여해 오붓하게 전세탕으로 이용할 수도 있다. 바람이 센 날에는 파도가 방파제를 넘어 노천탕으로 들어올 만큼 바다와 가까운 위치다. 원래 바닷물을 섞은 온천수이니 수질이야 상관없지만 심한 악천후에는 아예 탕을 운영하지 않는다. 두 번째는 80년이나 된 와키하마 대중목욕탕脇浜共同浴場이다. 1937년 개장 당시 ‘와타나베 타시’와 ‘타쿠시마 하루’가 공동으로 경영했으며 와타나베 타시의 할머니 이름을 따와 지금도 오탓샹 목욕탕으로 불린다고. 목조 건물의 낡은 외관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서 안으로 쓱 들어가 봤다. 누가 오고 가는지 전혀 관심이 없는 할아버지는 TV에서 눈을 떼지 않았고, 그 너머로 남자탈의실이 훤히 보였다. 그곳에서 당황한 사람은 나 하나, 남녀 탈의실의 칸막이는 엉성하기 짝이 없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거울도 수건도 없다. 자물쇠도 없이 한자로 번호를 써 넣은 낡은 사물함과 쇼와 12년(1937년)부터 지금까지 같은 자리에 걸려 있는 온천 효능 안내판, 그 모든 것에 너무 잘 어울리는 주인 내외분까지 모든 풍경이 앤티크다. 물 좋은 오바마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난 4월호에 오바마쵸가 속한 운젠시를 소개하면서 말했듯이 시마바라 반도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지질공원이다. 그 땅에서 솟아난 다양한 물은 지역민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시마바라 반도에는 운젠온천의 유황온천, 오바마의 나트륨온천, 시마바라시의 탄산온천 등 3가지 온천수와 함께 탄산수와 용수도 여러 곳에서 솟아나고 있다. 그렇게 골라 마시는 재미가 있으니 ‘물 투어’가 심심치 않다. 가리미즈 지구를 돌다 보면 주택 사이로 보글보글 공기방울을 뿜어내는 작은 탄산 광천샘이 보인다. 끓어오르는 모양새지만 만져 보면 25~27도 사이로 차갑고, 철분과 탄산이 많아서 피부미용에 특히 좋단다. 마셔 보면 약하게 유황냄새가 나지만 예전에는 이 물로 사이다를 만들기도 했단다. 가리미즈 광천에서 불과 몇분 거리에는 물 맛 좋기로 유명한 카미노카와 용천수가 샘솟는다. 멀리 나가사키 사람들도 수통을 들고 찾아올 정도다.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마을 샘터에서 물을 떠 먹고, 동네 목욕탕에서 150엔에 온천수를 즐길 수 있는 곳. 물 좋은 오바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해상노천탕 아카네 나가사키현 운젠시 오바마쵸 마리나 20 +81 957 74 2672 성인 1시간 300엔, 어린이 200엔4~10월 10:00~19:00, 11~3월 10:00~18:00 (휴일 악천후 시) 오바마온천욕장1937년에 문을 연 오래된 공중목욕탕. 8:00~21:00 성인 150엔, 아동 70엔 글 천소현 기자 사진 Travie photographer 이진혁 취재협조 운젠시 관광물산과 www.city.unzen.nagasaki.jp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17세기 글씨에서 20세기 추상화를 보다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17세기 글씨에서 20세기 추상화를 보다

    현대미술에 관심을 가질수록 옛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는 사람을 심심치 않게 만난다. 초기의 한자는 3차원인 표현 대상을 2차원으로 묘사한 일종의 구상화라고 할 수 있다. 이 구상화는 곧 해체와 재조합 과정을 거쳐 진전된 형태의 한자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이렇게 태어난 한자, 혹은 한자의 배열을 조화롭게 재구성하는 작업이 서예라고 할 수 있다. 구상에서 추상으로 이행한 서양미술의 발전 단계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비문 작은 글씨 하나에도 짙게 배인 창조 정신 강원도 삼척에 있는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를 보면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미수 허목(1595~1682)의 삼척부사 시절 글씨다. 척주는 삼척의 옛 이름이라고 한다. 전서체(篆書體)로 크게 씌어진 ‘척주동해비’ 다섯 글자는 조형적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 주는데, 20세기 추상화를 보는 듯 현대적 감각이 물씬 풍긴다. 역시 전서체인 비문의 작은 글씨 하나하나에도 창조 정신이 짙게 배어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척주동해비는 글씨의 아름다움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설화를 남기기도 했다. 당시 삼척은 파도가 읍내까지 밀려오고, 오십천이 범람해 피해가 극심했다고 한다. 이에 미수가 동해송(東海頌)을 지어 정라진에 척주동해비를 세우자 바다가 잠잠해졌다는 것이다. 추종자들은 미수의 위민 정신이 천지자연마저 감응시킨 사례로 든다. ‘실제로 그랬다면…’이라는 전제가 필요하지만, 비석에 새겨진 미수의 예술적 성취가 발산한 영기(靈氣)도 천지자연을 움직이는 데 조금은 기여하지 않았을까 싶다. 남인의 영수였던 미수는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의 상복(喪服) 문제가 발단이 된 이른바 기해예송(己亥禮訟)에서 3년복을 강력히 주장했다. 하지만 현종이 1년복을 주장하는 서인의 손을 들어줌에 따라 좌천된 자리가 삼척부사였다. 동해송과 척주동해비는 미수가 지방관으로 소임에 철저했다는 증거로 종종 제시되기도 한다. 동해송은 동해 큰바다에 대한 찬양의 뜻을 전하고, 바다와 인간이 공존하는 세상을 희구하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허목은 눈썹이 눈을 덮을 정도로 길어 눈썹 미(眉), 늙은이 수(?) 자로 호를 지었다고 자신의 문집 ‘기언’(記言)에 밝혔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그의 초상화도 희고 두터운 눈썹이 남달라 보인다. 화폭 상단에 적힌 채제공의 글에 의하면, 정조는 허목의 인물됨에 크게 감동하여 은거당이 그린 82세의 허목 초상을 당대 최고 화사 이명기에게 재현하도록 했다고 한다. 채제공은 정조시대 탕평책을 추진한 핵심 인사다. ●中 상고시대 문자 탐구해 특유의 서체 만들어 미수는 만년에 남인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기도 했지만, 오랫동안 정치적 소수파에 머물렀다. 예술가로서 허목은 산림(山林)에 머물던 시절 중국의 상고시대 문자를 탐구해 특유의 서체를 만들었는데 세상은 미수의 전서라는 뜻에서 미전(眉篆)이라고 불렀다. 그의 글씨에 담긴 미래지향적 창조 정신은 당시 사람들에게도 크게 인정받았던 것 같다. 허목의 예술 정신은 오늘날 더욱 각광받는다. 국가 및 지방 문화재만 각각 22건과 26점에 이른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허목수고본’(許穆手稿本)에는 척주동해비의 원본 글씨도 들어 있다. ‘완귀정’(玩亭)은 영천에 있는 완귀 안증(1494~1553)의 정자를 위해 쓴 것이다. 이 글씨에는 미수가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즐겁게 바라본다는 뜻의 완(玩)자는 한쪽이 뚫린 듯 허전하다. 미수는 같은 의미를 가진 완(?)자로 과감하게 대체했다. 획이 많아 번다해 보이는 거북이 구(龜)자는 연못에서 헤엄치는 새끼 거북이를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변형시켜 조화를 완성해 냈다. 17세기 작업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추상 미술의 경지다. 안동 하회마을의 ‘충효당’(忠孝堂)도 대표작의 하나다. dcsuh@seoul.co.kr
  • 강남구, 호국 보훈의 달 오감(五感) 만족 안보행사

    서울 강남구는 호국 보훈의 달을 기념하기 위해 12일부터 ‘오감(五感) 만족’ 안보행사를 개최한다고 9일 밝혔다. 첫날인 12일엔 지역 초·중·고등학생 120명이 국립 서울현충원을 방문, 비석 닦기와 잡초 제거 등 봉사활동에 나선다. 15일 강남역에선 ‘하나된 대한민국의 힘’을 주제로 나라사랑 플래시몹이 펼쳐진다. 플래시몹은 불특정 많은 사람이 정해진 시간·장소에 모여 미리 약속한 행동을 한 뒤 곧바로 흩어지는 행위다. 이날은 명지대 소속 비보이들의 댄스 배틀이 포함돼 참전 용사들에게 감사를 전하는 마음을 표현하기로 했다. 참여팀들은 각각 ‘방황’, ‘전쟁’, ‘승리와 화합’의 메시지를 춤에 담아 펼친다. 17일엔 국가보훈처장이 구민회관을 방문해 ‘새로운 도약을 위한 호국정신 함양’이란 강연을 한다. 20일 같은 장소에선 6·25 전쟁을 주제로 한 안보 뮤지컬 ‘전우’가 서울 자치구 중 최초로 공연된다. 안보행사 마지막 날인 25일 1박 2일로 구성한 ‘아빠와 함께하는 병영 체험’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초등학생 5·6학년생들이 아빠와 함께 장비 견학, 제식 훈련, 환자 응급처치를 비롯해 서바이벌 체험 등 병영 생활을 직접 겪어볼 수 있다. 구 관계자는 “참여자들이 자주국방의 소중함을 다시 느끼며 가족 간 추억도 쌓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외에도 20일에서 24일까지 구청 1층에서 6·25 참전국 사진전시회가 열린다. 강남구는 지난해부터 지역 37개 학교, 4500여명의 초등생·유치원생을 대상으로 태극연 날리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데니 태극기’ 게양 등 어린이 눈높이에 맞춘 안보교육에도 힘쓰고 있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길섶에서] 부부 위패/박홍기 논설위원

    현충원을 찾았다. 큰 문이 활짝 열려 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희생, 영원히 있지 않겠습니다’라는 큰 글귀가 들어왔다. 수많은 묘비를 빼고는 산도, 나무도 온통 푸르다. 허리가 굽은 한 노인이 지팡이에 의지한 채 묘역 쪽으로 걸었다. 어린이들을 데리고 온 젊은 가족도 눈에 띄었다. 찾는 이들의 사연은 묘비만큼 많을 듯싶다. 현충탑 뒤편 위패봉안관 왼쪽에 부부 위패비가 있다. 태극 문양의 받침돌을 한 검은 비석이다. 번호와 함께 두 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한 분이라도 애국지사일 경우 함께 봉안할 수 있다. 올해 초 뒤늦게 모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계신 곳이다. 할머니는 3·1 운동 당시 공주 장터에서 독립운동을 이끌다 체포돼 모진 옥고를 치르셨다. 돌아가신 지 10년이 넘어 건국포장이 추서됐다. 묵념을 했다. 위패봉안관에 들렀다. 영현승천상이 살아 있는 듯하다. 국화 향기와 향내가 짙었다. 위패 앞에 놓인 꽃다발에는 ‘처음 인사드립니다’, ‘다녀갑니다’, ‘편히 쉬세요’라는 메모들이 꽂혀 있다.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한참 위패를 쳐다보고 서 있었다. 무슨 사연이 있으시길래.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박홍기 논설위원 hkpark@seoul.co.kr
  • 전사·순직 경찰관 추모공원 문 열어

    전사·순직 경찰관 추모공원 문 열어

    경찰청은 현충일인 6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맞은편의 의주로 소공원에 경찰기념공원을 개원하고 지휘부·유가족·보훈단체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개원식과 추도식을 열었다. 경찰기념공원은 지난해 10월 경찰 창설 70주년을 맞아 전사·순직 경찰관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추진된 지 약 8개월 만에 완공됐다. 전사·순직 경찰관 1만 3700명의 명패를 새긴 추모벽과 와비석, 기념탑 등을 마련했다. 와비석에는 ‘조국의 가슴에 그 이름을 새기노라’는 문정희 시인의 추모시를 새겼다. 이미 미국 워싱턴DC에 있는 국립법집행관기념관이나 영국 런던의 전국경찰기념관 등은 매년 수백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명소다. 강신명 경찰청장은 “우리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세계 속의 치안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전사·순직 경찰관들의 희생과 애국심 덕분”이라며 “현장 경찰관의 처우 개선을 위해 위험 직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의 희생에 대해 합당한 보상과 지원 체계를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수요 에세이] 6월의 꽃/최민호 전 국무총리실 비서실장·배재대 석좌교수

    [수요 에세이] 6월의 꽃/최민호 전 국무총리실 비서실장·배재대 석좌교수

    6월에 들어서면서 붉은 장미꽃이 탐스럽게도 여기저기서 만개하고 있다. 고급 정원을 장식하는 장미도 있고, 담장 위에서 무더기로 피어나는 넝쿨장미도 있다. 장미의 붉은 색깔은 어쩌면 저리도 고울까. 파란 하늘 아래 피어 있는 붉은 장미는 참으로 아름답기만 하다. 하지만 6월에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은 붉은 장미만이 아니다. 눈물 아롱아롱/ 가신 님의 붉은 넋/ 이 강산의 꽃이 되어/ 조국을 지키리니… 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고 지금은 산화한 혼령으로 강토를 지켜 주는 호국 영령의 넋이야말로 장미보다도 더 붉고, 더 아름다운 영원한 꽃이다. 2002년 6월 29일 서해에서 북한의 불시 선제공격으로 우리 고속정 참수리호가 피격당하고, 윤영하 소령을 비롯한 6명의 장병이 전사했다. 그날 서해의 푸른 바다가 이들이 흘린 피로 붉디붉게 물들어 갈 때, 월드컵 4강 진입을 앞둔 우리 국민은 감격에 젖어 있기만 했다. 함정 안에서도 목이 터져라 월드컵 한국을 응원했다는 연평해전의 장병들. 그리고 2010년 3월 26일 우리 해군 천안함이 피격돼 꽃다운 청춘 46명의 장병이 서해 아래에서 소리도 없이 산화했고, 북한의 느닷없는 포격으로 연평도에서 2명의 해병대 대원이 희생됐다. 비단 이들뿐이랴. 6·25를 비롯해 조국을 위해 희생한 호국 영령들이…. 생각해 보면 1년에 하루 현충일 날 우리는 이들 전몰 장병을 추모하곤 하지만, 이들이 바친 희생은 조국이 존립하는 마지막 날까지 잊어서는 안 되는 숭고한 것이다. 이 장병들의 살신성인으로 우리 국민은 무사하고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평해전의 영웅 6명의 이름을 기리는 윤영하함, 한상국함, 조천형함, 황도현함, 서후원함, 박동혁함. 조국은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잊지 않고자 한다. 어느 문명국에서도 그들의 조국을 위해 희생한 유공자를 소홀히 대접하거나 잊는 법이란 없다. 2차 대전의 패전국이요, 전범국이라 할 독일과 일본도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전몰 희생자들에 대해서는 정치적 의미를 떠나 최고의 명예를 부여하며 그들의 애국심을 기린다. 조국에 희생한 목숨의 값어치는 동일하다. 미국 버지니아주에 있는 알링턴 국립묘지에서는 ‘평화, 승리, 용기’를 상징하는 무명 용사의 묘를 최고의 존경과 존엄성을 부여해 추념하고 있으며, 장군이든 사병이든 모든 묘역의 면적은 동일하다. 5월 첫 주 월요일인 미국의 메모리얼데이(현충일)에는 비석마다 일일이 40만개의 성조기가 바쳐져 그들의 애국심을 기리곤 한다. 6월 6일 대한민국의 현충일. 6·25가 끝나고 3년이 지난 1956년 4월 19일 우리의 현충일은 제정됐다. 24절기 중 손이 없다는 한식날 사초와 성묘를 하고, 망종일에는 제사를 모셔 왔던 우리 전통적인 풍습에 따라 1956년의 망종일이었던 6월 6일을 현충일로 제정했다. 이후 60년간 서울과 대전 현충원 등 9개 국립묘지에 안장된 호국 영령 수는 약 40만위. 우리는 얼마나 치열한 역사를 살아왔던 것일까? 1865년 남북전쟁 후에 만들어진 미국의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된 영령 수 40만여위와 1953년 6·25 이후 안장된 우리 국립묘지의 영령 수 40만위. 알링턴 국립묘지가 미국의 유일한 국립묘지는 아니지만, 한반도 위의 작지만 소중한 조국을 위해 희생한 우리의 애국 영혼들은 이렇듯 엄청나게 많다. 나라가 작고 약했기 때문에 우리의 희생 영령들은 더 많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의 조국을 위한 이러한 희생이 중단될 수는 없을 것이라 믿는다. 조국을 위해 피를 흘리고, 부상을 당해 상이군경으로, 고엽제 환자로, 보훈대상자로, 그 유가족으로 살고 있는 이 땅의 은인들에게 우리 국민은 행복의 빚을 지고 있다. 돌아가신 넋들의 희생에 감사하는 만큼 살아 있는 부상자와 유가족들을 그만큼 보살펴 드려야 함은 최소한의 도리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현충원과 국립묘지에 고이 잠들고 계시는 호국 영령들이시여, 붉디붉은 보은의 단심(丹心)을 봉헌합니다. 6월의 붉고 아름다운 장미를 받으소서.
  • 부산 피란수도 밤을 누비다…새달 3·4일 ‘부산 야행’

    부산 피란수도 밤을 누비다…새달 3·4일 ‘부산 야행’

    부산 피란수도 건축·문화 자산을 탐방하고 피란민들의 생활상을 재조명하는 ‘밤여행’(夜行)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부산시는 문화재청 공모사업인 상반기 ‘피란수도 부산 야행(夜行)’을 다음 달 3일과 4일 이틀간 서구 일대에서 진행한다고 30일 밝혔다. 서구에는 임시수도 정부청사(현 동아대 석당박물관)와 대통령 관저(현 임시수도기념관), 피란민 이주지역인 아미동 비석문화마을 등 부산만의 특별한 건축·문화 자산이 있다. 이번 행사는 야경(夜景, 야간개방 시설 관람 및 야간 경관 조망), 야로(夜路, 피란수도 역사 투어), 야사(夜史, 피란수도의 과거·현재·미래 이야기), 야화(夜畵, 그림 속 피란 시절), 야설(夜設, 밤에 하는 공연), 야식(夜食, 피란 시절 음식체험) 등 6가지 테마로 이뤄진다. 다음 달 3일 오후 7시 임시수도 정부청사 특설무대에서 개막식이 열린다. 야경과 야로는 다음 달 3, 4일 오후 5시부터 11시까지 임시수도 정부청사, 대통령 관저,비석문화마을 등 당시의 건축·문화 자산을 둘러본다. 문화해설사가 흥미로운 당시 이야기를 들려준다. 야사는 실제 운행했던 부산의 마지막 전차인 부산전차 탑승과 피란 시절 거리 재현 퍼포먼스, 육군 헌병 재현 및 교대식 퍼포먼스 등으로 진행된다. 야화는 한국전쟁 종군기자로 활동했던 서구 출신의 임응식과 우리나라 1세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최민식의 사진을 전시해 전쟁과 가난, 재건의 사회 분위기를 살펴본다. 야설은 피란 시절 노래 경연대회와 비보이 댄스 경연대회, 천마산 에코하우스 단편영화 상영 등이다. 야식 행사에서는 주먹밥, 보리개떡 등 피란 시절 음식을 직접 시식하게 된다. 부산시 관계자는 “이번 피란수도 부산 야행은 올해 처음 시도하는 문화재를 활용한 야간 문화 향유 프로그램”이라며 “피란수도 부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부산 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태산이로다… 가야 할 길도 돌아올 길도

    태산이로다… 가야 할 길도 돌아올 길도

    해외여행 하면 당연히 비행기로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무엇보다 목적지에 빨리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항에서의 번잡한 입·출국 수속, 장시간 대기 등 불편이 뒤따른다. 또한 기내 좁은 통로와 좌석 간격 때문에 불만이 쌓일 때가 있다. 이 때문에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여유로운 만족감을 찾으려는 여행객들이 선호하는 ‘선박여행’이 새 여행 트렌드로 부상하고 있다. 한·중 합작회사인 위동항운의 선박여행은 한국에서 배로 닿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중국 지역인 산둥성(山東省)을 들여다보는 뱃길여행이다. 세계 4대 성인 중 한 사람인 공자를 비롯해 맹자 등 뛰어난 사상가들의 고향인 산둥성은 문화적으로도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일정은 이 땅의 고대인들이 중국과의 문화 교류를 위해 오갔던 옛 ‘황해의 뱃길’ 그대로다. 인천 제2국제여객터미널에서 산둥성의 관문인 칭다오(靑島)까지 주 3회 운항하는 위동 페리호는 3만t 급의 초대형 선박이다. 카페리로는 아시아 최대를 자랑한다. 17시간에 달하는 운항시간이 무척 지루할 것 같지만 위동항운에서 자체 개발한 ‘펀(Fun) 페리’ 프로그램 덕분에 걱정은 출항 즉시 말끔히 사라진다. 김종철 여객판촉 부장은 “불꽃놀이를 비롯해 매직쇼, 승무원 공연, 칵테일 파티 등 다채롭고 즐거운 선내 여흥프로그램을 상시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동창회 등 단체고객에 한해 신청을 받아 진행하는 선상 칵테일 파티는 사교모임의 장으로 인기가 높다. 고등학교 동창 4쌍이 부부동반 여행에 나섰다는 김병환(58)씨는 “칵테일파티도 맘에 들지만 배 위에서 일몰과 일출을 감상할 수도 있을 것 같아 기대된다”며 즐거워했다. 일몰 시간이 다가오자 승객들이 갑판 쪽으로 서둘러 몰려갔다. 시간을 지체하면 자칫 결정적인 장면을 놓쳐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바다에서의 일몰 체험은 황홀경 그 자체다. 시시각각으로 하늘의 색감이 변해 가자 탄성이 터져 나온다. 대자연이 빚어내는 엄숙하고도 환상적인 광경이다. 장엄한 오후가 태양이 뿌리는 환희의 빛과 함께 조용히 저물었다. 칭다오 맥주를 곁들여 선상 식사를 마치면 이내 불꽃쇼가 기다린다. “피웅∼피웅~” 선수쪽 갑판에서 하늘로 치솟는 불꽃 감상은 위동해운 카페리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각별한 추억이다. 삶의 고단함을 가라앉혀 주는 깊은 밤, 파도 소리와 함께 잠을 청한 후 눈을 떠보니 산둥반도의 최대 항구 칭다오가 조금씩 눈에 선명해 진다. 칭다오는 ‘중국 속의 독일’이자 맥주의 도시다. 19세기 말 독일 식민지 시절 맥주공장이 설립돼 전수받은 제조기술로 지금까지 중국 맥주의 본산 역할을 해오고 있다. 꼭 들러야 할 여행코스인 칭다오 맥주박물관에서는 초창기 제조시설과 작업장 등을 살펴볼 수가 있다. 생맥주 원액을 맛볼 수 있는 기회도 제공된다. 칭다오 구도심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 포인트로 신하오산(信号山)공원이 있다. 신하오(信号)는 독일 점령 당시 칭다오 최초의 무선기지국이 설립되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정상의 회전전망대에 오르면 빨간색 지붕으로 지어진 독일 건축양식의 아기자기한 건물들과 푸른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사방이 모두 아늑하고 멋스러운 모습들이다. 칭다오에서 태산(泰山)을 품고 있는 타이안(泰安)까지는 버스로 5시간이 소요된다. 산둥성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태산. 학창시절 배웠던 양사언의 시조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를 떠올린다면 다소 과장 섞인 풍류일 만큼 실제 높이(1545m)는 우리나라 오대산(1563m)과 비슷하다. 그러나 태산은 해발고도로 평가받기를 거부하는 산이다. 역사적으로 진시황 등 천명을 받은 제왕들이 하늘과 대화하는 최적의 장소로 선택한 신성하고 영험한 산이다. 이 같은 역사적 배경과 더불어 기암괴석과 숲의 어울림이 뛰어나 유네스코가 세계자연유산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태산을 오르는 길은 다양하다. 대개 해발 800m 고지의 중텐먼(中天門)까지는 셔틀버스로 이동한다. 중톈먼부터는 정상까지 오르는 코스를 선택해야 한다. 십팔반(十八盤)은 태산 등정의 최고 난도 구간으로 벼랑 사이 가파른 계단 1633개를 두 시간 동안 ‘수행하는 마음’으로 오르는 길이다. 중텐먼에서 만난 한국인 관광객 이효선(48)씨는 또 다른 등산로인 ‘한국길’로 오르겠다고 했다. 중국 측에서 계단을 싫어하는 한국 등산객을 위해 태산 동남쪽 4시 방향으로 흙길과 바윗길로 된 등산로를 따로 만들어 2013년 개통했다는 것이다. 태산의 등산로가 계단길인 이유는 단순하다. 황제를 태운 가마가 태산 정상까지 닿기 위해서다. 가장 편한 방법은 케이블카를 이용하는 것이다. 시간에 쫓기는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케이블카를 선호한다. 중텐먼에서 갈아탄 케이블카에 10분 정도 몸을 맡기면 난텐먼(南天門)에 도착한다. 태산의 정상인 위황딩(玉皇頂)이 어렴풋하게 눈에 들어온다. 난텐먼부터 펼쳐지는 천가(天街·하늘길)에는 음식과 등산용품, 기념품 등을 파는 가게들이 죽 늘어서 있고, 이곳을 지나면 도교(道敎)의 유명한 궁관인 비샤츠(碧霞祠)에 이른다. 지금도 태산에는 소원을 품은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태산의 여신인 벽하원군(碧霞元君)을 모신 사당에서 비를 뚫고 소원을 비는 사람들의 모습이 경건하다. 향로 주변에 채워진 이름 새긴 황금색 자물쇠들은 누군가의 간절한 기원을 이뤄줄 수 있을 듯 견고해 보인다. 비샤츠를 지나 다다른 대관봉. 당나라 현종 등 역대 황제들의 제사 내용의 글귀가 새겨져 있는 곳이다. 대관봉에서 계단 길을 계속 오르니 ‘태산극정(泰山極頂) 1545m’라는 글귀가 적힌 비석이 눈에 들어온다. 마침내 태산의 정상인 위황딩이다. 자고로 황제를 위한 산이었던 태산. 상나라, 주나라 등 72명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의 지존인 옥황상제께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치렀다. 나이 스물넷의 두보는 “기필코 태산에 올라, 뭇 산들이 작은 것을 한 번 내려다보리라”고 읊었던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구름에 어깨를 가린 겸손한 산봉우리들이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가히 무변풍월(無邊風月)이다. 웨이하이(威海)는 한국과의 해상거리가 가장 가까운 산둥반도 가장 동쪽에 있는 도시다. 웨이하이에서 차로 1시간 남짓 가면 1200년 전의 신라인을 만날 수 있다. 해상왕 장보고가 당나라의 신라인 거주 지역 신라방에 세운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은 그의 숨결이 남아 있는 곳이다. 법화원은 중국 산둥반도 최초의 불교사원으로 국제 해상무역의 본거지였고 한국 TV드라마 ‘해신’의 영향으로 많은 한·중 관광객들이 찾아온다. 황해 바다를 굽어보는 장보고의 동상을 보면서 해상왕의 호연지기를 느껴봄직하다. 글 사진 칭다오·타이안(중국) 이종원 선임기자 jongwon@seoul.co.kr ■여행수첩 →가는 길:위동항운에서 인천~칭다오, 인천~웨이하이 구간을 주 3회 왕복운항한다. 카페리와 호텔, 현지 교통편 등을 연결한 산둥성 일주 패키지 상품도 판매하고 있다. 산둥성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K버스가 편리하다. 쾌적한 버스라는 의미인 쾌(快, Kuai) 자의 영어 앞 글자 ‘K’를 이름으로 썼다. 시설이 일반 버스에 비해 한결 좋다. 2위안. 버스전용차도를 오가는 BRt(간선급행 버스체계)도 편리하다. 2위안. 노선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일반버스를 이용하는 것도 좋겠다. 1위안. 택시는 기본요금이 6위안이다. →숙박:산둥성 성도인 지난(齊南)시와 칭다오 등 대부분의 도시에서 다양한 등급의 호텔, 리조트를 쉽게 선택할 수 있다. 위동항운(www.weidong.com). (032) 770-8028~9.
  • 위령비엔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습니다”라는 주어 없는 글귀가

    위령비엔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습니다”라는 주어 없는 글귀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오는 27일 방문하는 일본 히로시마시 평화공원은 요즘 수학여행철을 맞아 하루에도 수 만명의 학생 방문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공원은 1945년 8월 6일 미국이 원자폭탄을 투하한 기점이 된 원폭돔(옛 히로시마 물산장려관) 등 폭심지 주변을 정돈해 1952년에 조성됐다. 정문 격인 공원 남쪽 입구에는 ‘폭풍 속의 모자상’이 세워져 있다. 원폭으로 인한 열선(熱線)과 초강력 태풍 속에서 두 아이를 업고 안은 채 어떻게든 보호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성을 표현했다. 바로 뒤 분수를 지나면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이 나온다. 세계 최초 원폭 피해 자료들을 모아 놓은 곳이다. 원폭 화상으로 숯덩이처럼 형태를 분간할 수 없게 된 소녀의 얼굴, 타고 녹아버린 손과 발, 원폭의 열에 녹아 고철이 된 자전거, 원폭으로 부서지고 녹아버린 건물과 기물 잔해들, 희생자 유품, 백혈병, 암 등 각종 후유증으로 천천히 고통을 받다가 죽어간 피폭자들…. 이곳을 한번 돌아보면 “가해국 일본이 피해만을 강조한다”는 말이 쑥 들어간다. 자료관은 그만큼 원폭의 처참함과 무서움을 실감케 한다. 히로시마에서만 원폭 투하 직후 7만명이 폭사했고 또 다른 7만여명은 후유증으로 죽었다. 지난달 27일 주요 7개국 히로시마 외무장관회담 뒤 이곳을 찾은 존 케리 미 국무장관도 “마음을 흔들어대고, 속을 쥐어짜는 전시”라고 말을 잊지 못했다. ‘원폭의 비극과 평화의 염원’을 모티브로 한 이 공원을 돌아보고 오바마 대통령은 어떤 메시지를 전할까. 구름다리로 이어진 두 동의 자료관 뒤에는 이 공원의 핵심 조형물인 ‘원폭사망자위령비’가 서 있다. 석관을 형상화한 조형물을 무지개를 연상시키는 아치 모양의 석조 구조물이 싸고 있다. 기자가 찾은 23일 일본인 학생과 방문객들은 두 손 모아 기도를 드리고 있었고 외국인들은 기념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단체로 온 일본 학생들은 추모 노래를 부르며 희생자들을 위로했다. 이들 역시 공원을 오가면서 오바마를 화제에 올리고 있었다. 원폭사망자위령비에는 ‘편안히 잠드십시오.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습니다’라는 주어가 없는 글귀가 적혀 있다. 위령비 주변을 둘러싼 연못 바닥에는 한국어 등 8개 나라말로 같은 글귀가 쓰인 동판이 깔려 있었다. 이 위령비가 일본인뿐 아니라 모든 희생자를 위한 것임을 알리는 동판들이었다. 참혹한 역사의 증언장은 1996년 세계유산으로 등록돼 외국인들의 발길을 잡아당기는 곳이 됐다. 원폭 위령비 앞에 서면 평화를 염원하며 타고 있는 ‘꺼지지 않는 불꽃’을 마주하게 된다. 그 뒤로 원폭돔이 일렬로 눈에 들어온다. 뼈대만 남은 원폭돔은 보수 중이었다. 한때 위용을 자랑하던 101년 된 이 건물은 원폭에도 무너지지 않은 몇 채 안 되는 건물로 원래 이름은 물산장려관이다. 왜 원폭이 투하됐는지에 대한 설명은 부족해 보였다. 오바마는 자료관을 둘러보고, 위령비에 헌화할 예정이다. 앞서 존 케리 국무장관은 방문 당시 예정에 없던 원폭돔까지 갔었다. 원폭사망자위령비에서 서쪽으로 3분여 거리에는 나무들 사이에 거북이 모양의 받침대 위에 석주를 세운 높이 5m, 무게 10t의 한국식 비석인 ‘한국인희생자 위령비’가 있다. 1970년 세워진 것을 1999년 일본 우익과 조총련 등의 반대를 뚫고 공원으로 옮겼다. 이곳은 평화공원을 찾는 일본 학생들이 꼭 들러가는 곳이 됐다. 현장에서 만난 도야마현 가미이치 중학생들은 피폭단체 회원 등 자원봉사 해설사들로부터 “한국인들은 강제징용 등으로 이곳에 와서 살다가 5만여명이 피폭되고 2만여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설명을 듣고 두 손을 모아 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당시 히로시마에는 한국인 8만여명이 살고 있었다. 원폭 투하 당시 전차 안에 있다가 피폭됐던 박남주(84·여) 피폭자대책위 고문은 “한국인들이 많이 희생됐다는 사실을 오바마가 꼭 알아줬으면 좋겠다”면서 “미국의 사과를 요구하는 일본은 먼저 한국에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글 사진 히로시마 이석우 특파원 jun88@seoul.co.kr
  • [World 특파원 블로그] 한숨 쉬는 ‘한국인 위령비’

    [World 특파원 블로그] 한숨 쉬는 ‘한국인 위령비’

    “2만명이 넘는 한국 사람은 왜 이곳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으로 목숨을 잃게 됐을까요.” “이 위령비는 한국 등 이웃 나라들에 일본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주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런 일이 되풀이해서는 안 되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한다.” 요즘 일본 히로시마 평화공원 안에 있는 ‘한국인 원폭희생자위령비’ 주위에서는 이런 설명들이 하루 종일 이어지고 있다. 한국인 위령비는 수학여행철을 맞아 평화공원을 찾는 초·중·고생들이 꼭 들르는 곳이다. 1999년 공원 안으로 옮겨진 위령비는 이제 평화공원의 중요한 부분이 됐다. 섭씨 27~28도로 무덥던 지난 18일에도 거북이 모양의 받침대 위에 석주를 세운 높이 5m, 무게 10t 남짓한 전형적인 한국식 비석을 둘러싸고 학생들은 안내인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피폭단체협의회 회원 등 자원봉사자들은 학생들에게 학교에서는 들어보지 못했던 역사를 생생하게 전해줬다. “나라도 빼앗기고, 이름도 강제로 고쳐야 했던 식민지 백성이 일자리가 없거나, 강제로 와서 일하다가 2만여명이 목숨을 잃고 5만여명이 피폭됐다”는 설명이 끝나자 교복 차림의 학생들은 위령비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올렸다. 도야마현 가미이치 중학교에서 왔다는 한 학생은 “너무 불쌍하다”며 말을 잇지 못한 채 눈물을 훔치며 기도를 드렸다. 오는 27일로 예정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평화공원 방문에 대해 아베 신조 정부가 “전쟁도발 등 일본의 가해 역사는 지우고 피해만을 부각시키려 한다”는 경계도 있지만, 이곳에는 과거사 미화는 용납할 수 없다는 분위기로 아베 정권의 태도와는 사뭇 다르다. 오바마에 대한 사과 요구도, 핵무기 사용 포기 요구 등 반핵, 반전의 연장선에 있다. 한 자원봉사자는 학생들에게 한국인 위령비 앞에서 “나라의 잘못된 정책이 주변 나라 사람들까지 얼마나 불행하게 만드는지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한 80대 자원봉사자는 학생들에게 “한국인 위령비의 거북이 머리가 서쪽을 향하고 있는 것은 돌아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고 영문도 모른 채 폭사했던 한국인 희생자들의 마음을 표현한다”고 설명했다. 같은 원폭 피해자로서의 공감대와 연민으로 히로시마 시민과는 국적을 넘어선 연대를 가능하게 하고 있었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와 일본 우익의 반대를 넘어 ‘한국인 위령비’란 이름으로 평화공원 안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분위기가 있어 가능했다. 한국인 위령비 앞에서 눈물 흘리고, 기도하는 학생들의 마음은 국적을 넘어선 인간 연민이자, 평화와 연대를 가능케 하는 자산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난해 8월 6일 평화공원에서 있었던 원폭희생자 70주년 추도식에서 연설하던 아베 신조 총리에게 “당신은 평화를 말할 자격이 없어”, “(안보법 개정과 관련) 전쟁 그만둬” 등의 강한 야유와 조소를 보내 연설을 여러 차례 중단시켰던 히로시마 시민의 비판정신과 역사에 대한 기억과 아픔은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히로시마는 급속히 우경화하는 일본 사회에서 평화와 연대를 향한 거점이자 보루다. 글 사진 히로시마 이석우 특파원 jun88@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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