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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곳에 마을이 있었다

    그곳에 마을이 있었다

    이 컬럼의 제목에는 ‘대(大)서울’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다. 행정구역으로서의 서울특별시만이 서울이 아니라, 집은 서울시 바깥에 있지만, 학교나 직장이 서울시 안에 있는 사람들이 사는 지역까지를 모두 서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대서울이라는 단어가 품은 뜻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서울시에 살고 있지는 않지만, 서울시를 자신의 주요한 활동권역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단지 그들이 잠자는 곳이 서울시 바깥이라고 해서 배제해버리면 서울과 주변 도시들의 메커니즘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서울에는 광명·과천·부천·안양·의정부·성남·하남·구리·김포·인천·시흥·고양·남양주 등의 일부 또는 전부가 포함된다. 서울시와는 별개의 생활권이 될 것을 예정해서 계획된 반월 신공업 도시 즉 오늘날의 안산이나, 서울시와는 구분되는 독자적인 생활권을 지니는 수원·광주·화성·오산·동탄 등은 대서울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렇게 설명하면 대서울이라는 개념은 부동산 업계에서 쓰는 ‘서울세력권’이라는 말과 일부 겹친다. 하지만 나는, 교통시설이 서울과 긴밀하게 이어지면서 부동산 가격이 서울과 연동하는 안성·원주·춘천 등의 지역까지 대서울에 묶기에는 사람들의 합의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판단한다.대서울에 포함되는 서울시 바깥의 도시들을 답사하며 현지 주민들을 인터뷰하는 작업을 최근 진행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대서울이라는 개념을 폐기할 정도는 아니지만 대서울의 서울시 바깥 지역을 바라보려면 새로운 접근 방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즉, 해당 지역이 농촌이나 어촌이던 시절부터 살아온 주민, 해당 지역에 신도시가 생긴 뒤 서울에서 그 지역으로 이주·정착한 주민, 그리고 현재 서울을 주요 생활권으로 삼으면서 신도시를 임시 거주지로 삼고 있는 주민, 이 세 부류가 서울시 접경 지역의 각 도시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세 유형의 주민들은 해당 도시와 경기도를 바라보는 관점이 서로 다르다. 이 가운데 최근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예전부터 그곳에 살고 있다가 신도시가 만들어질 때 고향 마을을 수용당하고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주민들이다. 이들 주민은 대개 아무 흔적 없이 이주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대대로 살아온 고향 마을이 재개발 앞에서 완전히 흔적을 지우는 것을 슬퍼하는 망향비를 세운다.이런 망향비는 전국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 가운데 최근 가장 인상깊게 본 것이 성남시의 1기 신도시 분당과 2기 신도시 판교의 딱 중간 지점에 자리한 ‘동간마을 모향비(慕鄕碑)’였다. 양반이니 선비니 하는 사람들이 세운 비석과는 달리 비석의 문장이 한글로 새겨 있고, 뒷면에는 마을 주민들의 이름이 일일이 새겨 있다. 어떤 망향비에는 여성 주민들의 이름도 새겨 있는 경우가 있지만, 이 경우에는 남성 주민들의 이름만 보였다. 그리고 그 옆면에는 ‘신도시에 솟은 정’이라는 제목의 절절한 망향가(望鄕歌)가 새겨 있다. “신도시란 새 이름은 희망도 들어 있어 고향 떠날 아픈 마음 참으려 해도, 멀리가는 아쉬움에 애가 타는 사연들, 조상님의 은공 쌓인 고향의 산천, 그 많은 세월 속에 쌓인 인정아. 못 잊을 이웃 정은 만날 수야 있지만, 정든 마을 산천초목 안타까워라”. 이런 망향비야말로 대서울 주민의 삶과 생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다. 성남시 분당의 중앙공원에는 이 지역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온 모 양반 가문의 묘소와 비석 등이 ‘문화유적’으로서 정비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양반 가문의 유적보다, 신도시 고층아파트단지 한 켠에서 신도시 주민들의 관심 밖에 놓여 거미줄 쳐있는 이런 마을 비석을 찾아가는 것이 더욱 즐겁다. 공원 안내판에 그 이름조차 표기되어 있지 않은 이런 비석이야말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주권자인 평범한 시민들이 대서울에 살아온 흔적이므로.글·사진: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 교수
  • 동화 속으로…중세를 걷다

    동화 속으로…중세를 걷다

    알고 보면 생각보다 가깝지만 알려진 게 많지 않아 멀게만 느껴지는 나라가 있다. 발트해의 작은 나라 에스토니아가 그렇다. 수도 간 거리로 보자면 러시아를 제외한 유럽의 도시 가운데 헬싱키에 이어 두 번째로 가까운 곳이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서울에서 약 7100㎞)이다. 한국에서 가는 직항편은 없지만 헬싱키를 거치면 지척이다. 핀란드해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헬싱키에서 비행기로는 30분이 채 안 걸리고 배로는 2시간 남짓 거리다.몇 해 전 에스토니아 정부가 외국인에게도 전자시민권을 발행한 일을 계기로 신흥 정보기술(IT) 강국으로 알려진 것 정도가 에스토니아 하면 떠오르는 거의 유일한 정보지만 최근 한국인들이 찾는 새로운 여행지로 부상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북유럽이나 러시아 패키지 여행상품에 발트 3국이 낄 때 반나절 머물다 가는 여행지 정도에 그치기 일쑤다. 그러나 에스토니아의 매력을 제대로 느끼고자 마음먹는다면 수도 탈린만 여행하기에도 하루가 짧다. ●13세기 한자동맹 중심 도시로 번성 에스토니아 북쪽 해안 중앙부에 위치한 탈린에는 나라 전체 인구 130만명 중 45만명가량이 모여 산다. 탈린(Tallinn)의 어원을 들여다 보면 덴마크(Taani)의 도시(Linn)라는 뜻이다. 13세기 초 덴마크 왕 발데마르 2세가 당시 레발라 지방으로 불리던 땅에 있던 에스토니아인들의 성채를 정복하고 성을 세우면서 도시의 역사가 시작됐다. 이후 한자동맹의 중심도시 중 하나로 번성했다. 중세도시의 흔적이 지금까지 남아 있어 구시가지(올드타운)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세계문화유산 올드타운 입구 ‘비루게이트’ 올드타운의 입구인 비루 게이트(Viru Gate)에 서면 성문 밖 왼편으로 길게 늘어선 꽃집들이 보인다. 24시간 문을 열고 손님을 맞는 꽃집들로 탈린의 명소라고 한다. 꽃집 위부터 이어지는 공원에는 남녀 한 쌍이 키스를 하는 동상이 서 있는데 연인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주홍빛 뾰족 기와지붕의 성탑 사이를 지나 올드타운에 발을 들이면 중세로의 시간 여행이 시작된다. 파스텔 톤의 노랑, 분홍, 하늘색 등의 옷을 입은 옛 건물 사이로 난 돌길을 걸으면 동화 속에 들어온 듯한 기분도 느껴진다. 길을 따라 쭉 걷다 보면 올드타운에서 가장 유명한 식당인 ‘올데 한자’(Olde Hansa)가 나온다. 중세 복장으로 차려입은 사람들이 수레 위에 갖가지 아몬드를 놓고 파는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 식당은 중세 요리를 재연한 곳으로 유명하다. 멧돼지, 순록, 곰고기 요리 등을 맛볼 수 있다. 중세 음악이 흘러나오는 가게는 3층 전체에 양초만 켜져 있어 정말 중세시대로 온 듯한 착각이 든다.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곳에는 한글 메뉴판도 구비돼 있다.올데 한자를 지나면 시청광장이 나온다. 유럽의 여느 도시가 그렇듯 구시가지의 중심이다. 비루 게이트에서부터 가장 먼저 보이던 뾰족탑이 옛 시청 건물 위에 솟아 있다. 첨탑 꼭대기를 자세히 올려다보면 풍향계 자리에 재미있는 모양의 청동인형이 있다. ‘올드 토마스’라고 불리는 인형으로 탈린의 상징이다. 지붕 옆으로 삐죽 솟은 두 개의 용머리는 빗물을 모아 뱉어내는 배수관이다. ●15세기 초 개업한 유럽 最古 약국 아직 성업 시청 맞은편 광장 구석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약국이 있다. 15세기 초에 개업해 지금까지 성업 중인 곳이다. 요즘 약도 팔지만 박물관 역할을 겸하고 있는 곳이라 누구나 들어가서 내부를 둘러볼 수 있다. 옛날 약병들과 약 조제기 사이로 중세 때 약재로 쓰였던 고슴도치, 두꺼비, 박쥐가 전시돼 있어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올드 타운을 내려다보기 위해 광장 서쪽 툼페아 언덕을 오른다. 발트해와 윌레미스터호수 사이의 평지에 자리잡은 탈린에서는 흔치 않은 고지대다. 과거에는 올드타운 내에서도 지체 높은 귀족들이 살았던 동네라고 한다. 샛길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언덕 위 광장이다. 성벽 아래를 내다보니 ‘덴마크 왕의 정원’에 덴마크 국기를 상징하는 조형물이 여럿 있다. 발데마르 2세가 이곳에 성을 지었을 뿐 아니라 덴마크 국기가 처음 만들어진 곳도 탈린이라고 한다. 전망대까지 가는 길에 만나는 건물들은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다. 까만 돔 지붕 위에 황금색 십자가가 독특한 건물은 탈린에서 가장 큰 정교회 성당인 알렉산더 네브스키 대성당이다. 정교회 성당답게 화려한 내부 장식과 경건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바로 옆 분홍빛 정면이 아름다운 건물은 현재 에스토니아 의회로 쓰이는 곳이다. 야트막한 오르막길로 조금 더 올라가면 세인트 메리 성당이 나온다. 정갈한 분위기의 흰색 벽에 검푸른 지붕과 둥글고 뾰족한 탑이 조화를 이루는데 전혀 다른 양식의 알렉산더 네브스키 대성당과 100m도 안 되는 거리에 이웃해 있다는 점이 재미있다. ●전망대 오르면 붉은 지붕과 바다 펼쳐져 언덕 위 세 곳의 전망대 중 올드타운 전망을 내려다보기 좋은 곳은 코투오차와 파트쿨리 전망대 두 곳이다. 올드타운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올레비스테 교회를 중심으로 붉은 지붕을 인 옛날 집들이 그림 같은 풍경을 이룬다. 마을 뒤로 펼쳐진 푸른 바다는 탈린이 해상무역으로 번성했던 도시임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언덕을 내려와 올드타운 북쪽으로 향하면 구 소련 정보기관 KGB의 에스토니아 본부로 쓰였던 건물을 볼 수 있다. 외관은 아름답지만 과거 고문이 자행됐던 곳으로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인다. 북쪽으로 몇 걸음 더 옮기면 올드타운의 등대 역할을 하는 올레비스테 교회다. 입장료를 내면 종탑 위에 올라갈 수 있다. 올드타운 북쪽 끝 탈린 해양박물관 옆 성문은 구시가지가 끝나는 지점이자 입구다. 성문 밖 공원에는 관광객들이 굳이 찾지는 않는 곳이지만 뜻깊은 기념물이 있다. 1994년 탈린에서 스웨덴 스톡홀름으로 향하던 여객선 에스토니아호 침몰 참사를 기억하고 희생자 852명의 넋을 기리는 위령탑이다. 희생자 이름이 빼곡히 새겨진 비석 위에는 붉은 꽃을 담은 화분이 조용히 놓여 있다. 이 밖에도 올드타운에는 러시아의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가 머물렀다는 집, 탈린의 명물 디저트 ‘마지판’을 탄생시킨 탈린 최초의 카페 ‘마이아스모크’ 등 발길을 사로잡는 장소가 가득하다.●전통 5일장 닮은 올드타운 수산시장 반나절 관광으로 탈린 여행을 끝마칠 게 아니라면 꼭 둘러볼 곳이 있다. 올드타운 북쪽 끝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있는 수산시장이다. 에스토니아어로는 칼라투르그라고 한다. 우리에게 낯익은 생선부터 생소한 생선까지 날것과 훈제의 모습으로 다양하게 판매된다. 여러 종류의 훈제햄과 꿀을 파는 상인도 나와 있다. 시장 한편에서는 악단이 민속음악과 러시아 가요 분위기가 뒤섞인 듯한 흥겨운 에스토니아식 ‘트로트’를 연주하고 나이 지긋한 현지인들이 어깨춤을 추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우리네 전통 5일장과 흡사한 풍경이다. 수산시장 근처에는 과거 소련 시절 공연장으로 쓰였던 거대 구조물이 들어서 있다. 오랜 기간 방치돼 다소 흉물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는 곳이지만 갈매기들의 쉼터이기도 하다. 탈린 시민들은 이곳에 올라 도시와 바다 전망을 즐기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다.1만 2000년 전…숲길을 걷다 ●국토 50% 숲… 시 외곽 습지 산책 추천 올드타운 북서쪽 탈린 기차역 부근에는 옛 공장 부지가 요즘 핫한 장소로 탈바꿈했다. 텔리스키비(Telliskivi)라는 동네는 정부가 버려진 공장을 예술가들에게 싼값에 임대해 주면서 변신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여러 카페와 디자인숍들이 들어서면서 서울의 홍대 거리 같은 활력 넘치는 공간이 됐다. 매주 토요일 오전에는 벼룩시장이 열린다. 탈린에서 숙박을 하며 하루 이상 묵어간다면 시 외곽에 있는 습지를 방문해 보는 것도 좋다. 에스토니아는 국토의 50%가 숲으로 이뤄진 나라로 다양한 생태를 자랑하는 습지도 잘 보존돼 있다. 올드타운 남쪽으로 차로 20여분 거리에 패스큘라 습지 트레일이 있다. 1만 2000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습지대에는 40여종의 이끼가 자생한다. 습지대 위로 소나무 등 삼림이 높게 자라 있고 그 사이로 친환경 나무데크를 조성해 누구나 쉽게 산책할 수 있게 꾸몄다. 곳곳에 자라난 버섯을 따는 재미도 쏠쏠하다. 운이 좋으면 여우, 노루 등 야생동물도 목격할 수 있다고 한다. 글 사진 탈린(에스토니아)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여행수첩 →핀란드 국영 항공사 핀에어가 인천공항에서 헬싱키를 거쳐 탈린까지 가는 항공편을 운영한다. 스톱오버 등을 이용해 헬싱키 시내를 둘러볼 수도 있다. 헬싱키까지 직항으로 간 뒤 실야라인 초대형 유람선을 타고 탈린으로 향하는 방법도 추천한다. 유람선 안에서는 쇼핑, 사우나, 슬롯머신 등을 즐길 수 있다. →한국보다 위도가 높은 에스토니아는 여름에 낮이 길고 겨울에는 밤이 더 길다. 날씨는 한국과 비슷하거나 조금 쌀쌀한 편이다. 밤이 길고 추운 겨울에 여행을 가기엔 꺼려질 수도 있지만 탈린 시청광장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 마켓은 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소문나 있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한국과 비슷하고 북유럽 나라들의 살인적인 물가와 비교하면 물가도 저렴한 편이다. 단돈 4유로에 한끼 식사로 부족함 없는 고급 샌드위치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에스토니아 사람들은 ‘레이브’라고 부르는 검은 호밀빵을 주식으로 먹는다. 에스토니아에서 가장 큰 섬 사아레마섬과 본토 사이에 있는 무후섬에서 시작된 ‘무후 레이브’의 대마씨를 넣은 빵이 전국적인 인기를 자랑한다고 한다. 텔리스키비에 분점이 있으니 에스토니아에서 핫한 빵을 맛보고 싶다면 들러봐도 좋다. 올드타운 내 ‘루키스’라는 카페에서 파는 빵도 유명하다. →만족스러운 한끼를 즐길 만한 곳으로 올드타운 내 ‘레이브’를 추천한다. 가게 이름이 ‘빵’인 이곳에서는 넓은 정원에서 여유를 즐기며 맛있는 음식을 즐길 수 있다. 에스토니아산 좋은 식재료만을 사용한다고 한다. 유럽의 많은 식당이 그렇듯 보통의 코스 요리가 차례로 준비되는 데 식사를 마칠 때까지 1시간 이상 걸릴 수 있다는 점은 유의하자.
  • 중랑구 망우역사문화공원서 독립열사 발자취 따라가볼까

    서울 중랑구는 8일 학생, 학부모 등 120명을 대상으로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문학길 역사탐방을 진행한다. 망우역사문화공원은 3·1운동을 주도한 만해 한용운 선생을 비롯해 오세창, 문일평 등 독립열사와 애국지사가 안장된 곳이다. 2016년 역사문화교육특구로 지정됐으며, 공원에 안장된 독립 열사 8명의 묘소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이번 역사탐방은 공원 내 애국지사와 문화예술인의 묘역을 이은 인문학길을 따라 공원에 안장된 근현대사의 유명 인사들의 묘역과 연보비를 따라 걷는 코스다. 참석자들은 향토문화해설사에게 독립열사들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묘역 주변 쓰레기 줍기, 비석 닦기 등의 자연정화활동도 함께 하며, 참석자들은 자원봉사시간 3시간을 받을 수 있다. 중랑구는 역사탐방이 큰 호응을 얻으면서 다음달에도 같은 프로그램을 진행할 예정이다. 류경기 중랑구청장은 “이번 역사탐방을 통해 소중한 문화자원에 대해 배우고, 그 가치를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흥미진진 견문기] 지킬 것인가, 받아들일 것인가… ‘양화나루의 고민’ 재현

    [흥미진진 견문기] 지킬 것인가, 받아들일 것인가… ‘양화나루의 고민’ 재현

    뜨겁던 여름의 열기도 태풍에 대한 걱정도 내려놓은 저녁, 아름다운 밤 풍경을 기대하며 옛 양화 나루로 출발했다. 하지만 처음 마주한 것은 잠두봉의 붉은 노을이 아니라, 순교자들의 붉은 피로 물들었던 절두산 순교성지였다. 잔혹한 형벌 도구들과 순교당한 성인들의 조각상을 지나 뜬금없이 서 있는 척화비를 바라보며 “그때 쇄국이 아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 이곳은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있을까”라는 덧없는 생각을 해 본다.수백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으로 들어섰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 아펜젤러 선교사의 비문에 숙연해진다. 선교사들의 작은 비석이 묘원을 둘러싼 빌딩보다 높아 보이는 이유이다.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며 난지 생명 길을 따라 한강의 밤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양화대교의 아치와 붉은 노을은 한강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이 되고, 이어폰 가이드시스템을 통해 전해지는 가곡 ‘한강’은 마음을 적셨다.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질 때쯤 망원정에 도착했다. 월산대군의 ‘추강에 밤이 드니…’, ‘무심한 달빛만 싣고…’ 등 시조 2편을 들었다. 그때와 지금의 풍경은 사뭇 다르겠지만, 마침 떠오른 보름달과 선선한 바람만은 예나 지금이나 헛헛한 마음을 채워 주고 쓰다듬어 줬다. 다시 난지 생명길로 들어서자 아름다운 조명의 성산대교와 웅장한 서울함 공원이 시선을 끌어당겼다. 서울함 공원에 전시된 세 척의 배를 보니 마음이 든든했다. 타고난 낭랑한 목소리 신수경 해설사가 들려주는 망원동 이야기는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기존의 것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것인가? 100여년 전 양화나루에서의 고민이 망원동에 재현되고 있었다. 피 철철 흘러넘쳤던 절두산의 악몽이 재현되지 않기를 바란다. 어색하지만 신구가 공존하는 망리단길, 대형할인매장과 공생협약을 맺고 새롭게 변화하려고 애쓰는 망원 전통시장에서 우리가 가야 할 미래를 살포시 점쳐 봤다. 황미선 책마루독서교육연구회 연구원
  • 오승록 노원구청장, 국정과 시의원 경험 생활 현장에 실현

    오승록 노원구청장, 국정과 시의원 경험 생활 현장에 실현

    “답은 현장에 있습니다. 현장을 가보지 않고는 문제 해결의 큰 그림을 그릴 수가 없습니다.” 민선7기 오승록 노원구청장의 최고 강점은 샘솟는 아이디어다. 청와대 비서관으로 5년, 서울시의원 8년을 거치며 많은 아이디어를 발굴하고 실행에 옮겼다. 그때마다 답은 현장에서 나왔다. 2007년 제2차 남북정상회담 당시 노란색 군사분계선 출발행사는 지금까지 회자된다.오 구청장의 아이디어는 구청장이 된 이후에도 주목받고 있다. 전국 최초의 ‘24시간 야간 무더위 쉼터’가 대표적이다. 올 여름 사상 최악의 폭염으로 전력 사용이 크게 늘어나면서 아파트 정전이 이어졌고, 오 구청장은 아파트 현장에서 더위에 지친 노인들의 모습을 봤다. ‘젊은 사람들도 견디기 힘든 더위를 노인들이 어떻게 견딜까’하는 마음이 쉼터 조성으로 이어졌다. 쉼터는 관내 경로당 5곳으로 시작해 10곳까지 늘어났다. 이용자만 모두 2040명에 달한다. 전국적인 관심 속에 행정안전부 장관이 쉼터를 다녀갔고, 서울시는 방학 중인 초등학교 11곳을 야간쉼터로 활용하는 등 전국으로 정책이 확산됐다. 지난 2주간 오 구청장은 현장 60여곳을 둘러봤다. 하루에 적게는 5곳, 많을 때는 10여 곳을 방문했다. 임기 초라 모든 부서의 업무보고를 받고, 현안을 챙겨야 했지만 오 구청장의 눈은 항상 현장을 향했다. 주민 생활불편도 현장에서 놓치지 않았다. 하계동 한글비석로 도로정비와 당고개역 기업은행 사거리에서 동막골까지의 상계로 확장공사 구간을 방문해 도로 개통 후 개선될 교통 여건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 중에서도 월계2동 주민센터 옆 도로는 보도가 패이고 틀어져 그동안 인근 학교 학생들이 큰 불편을 겪던 곳이다. 주민들이 즐겨찾는 공원 내 불편사항도 마찬가지다. 충숙 근린공원을 비롯한 5개 근린공원의 노후 화장실 리모델링을 지시했다. 뿐만 아니라 양지 근린공원은 우기 시 흙탕물이 인근 교회 담장을 넘어들어 붕괴 위험이 있는 등 5년째 고통을 겪고 있다는 교회 측의 의견을 수용해 배수로 정비 뿐만 아니라 집수정을 설치해 공원 빗물을 원천 차단하도록 했다. 노인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도 눈에 띈다. 인근에 휴식 공간이 없어 주차장에 판자를 깔고 휴식을 취하는 월계1동 21통 지역 어르신들을 직접 찾아 애로사항을 듣고 주택을 매입을 통한 경로당 건립을 지시했다. 또한 곧 건립하는 하계 행복발전소에는 노인들도 이용할 수 있도록 보완을 지시했다. 노원의 미래 모습을 바꿀 대규모 정책 사업도 빼놓을 수 없다. 대표적인 것이 15만㎡에 이르는 광운대 역세권 개발사업이다. 시행사인 현대산업개발이 코레일과 토지 매입절차를 진행 중으로 시행사가 구에 공공용지로 기부하는 1만㎡의 부지를 어떻게 활용할지 주민들과 논의 했다. 화랑대역 테마공원 조성과 관련해서는 근대 문화재로 지정된 화랑대역의 역사성과 최초의 민족자본을 건립한 경춘선의 의미를 되새기도록 주문했다. 아울러 서울에서 유일하게 보존된 간이역으로서의 가치가 있는 만큼 관광상품화 할 수 있는 방안을 지시했다. 오 구청장은 “이번 첫 현장 방문은 바쁜 일정이었지만 지역에 무한의 책임을 지는 단체장으로서 현안 사항을 천천히 살펴볼 수 있었던 기회였다”면서 “주민들의 손에 잡히는 작은 행복도 중요한 만큼 자연과 문화, 건강 등 민선7기 힐링도시 노원의 기반을 다질 사업들을 추진하는데 초점을 맞추겠다”고 말했다. 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 [조성룡·심세중의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죽음 앞에서 동등…묘지도 도시처럼 설계하다

    [조성룡·심세중의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죽음 앞에서 동등…묘지도 도시처럼 설계하다

    불문학자이자 문학 평론가인 황현산(1945~2018) 선생의 영결식이 열린 건 사흘장의 발인 날 아침이었다. 고려대 교수로 정년 퇴임하셨고 같은 대학 병원에서 투병하셨으니 장소는 고려대병원 장례식장이었다. 기억할 만한 2018년 여름의 태양이 이른 아침부터 새하얗게 내리쬐었다. 평생의 도반 김인환 선생의 조사와 후배 문인, 가족들의 마지막 인사는 빈소 안에서 조용히 이루어졌다. 빈소 밖에는 훨씬 많은 조문객이 모여들었다. 행렬이 영정을 따라 3층의 빈소부터 1층까지 걸어 내려와 정문 옆으로 좁게 난 쪽문을 비집고 나가자, 주차장에 운구차가 트렁크 문을 열고 서 있었다. 바퀴 달린 카트에 실려 온 관이 매끄럽게 올라탔을 때 선생의 사모님은 기사에게 잠시 문을 닫지 말아 달라 부탁하셨다. “아주까리 꽃 그림자 흔들리는 섬 속에 / 하모니카 안타까운 강남달 시절 / 갈매기 울어 울어 해 지는 선창에 / 모자를 흔들면서 떠나던 사람아.” ‘풍각쟁이’ 최은진(58) 선생의 ‘아주까리 수첩’이 울려퍼졌다. 일제강점기의 시인 조명암이 작사하고 목포 사람 이봉룡이 작곡한 1940년대 노래다. 남도 섬의 헤어짐과 기다림을 그린 이 노래를, 황현산 선생은 그로부터 열흘 전 병상에서 마지막으로 들었다. (‘아주까리 수첩’은 선생의 다음 책 ‘전위와 고전’이 수록될 시리즈의 제목이기도 하다.) 음반 출시를 앞두고 고향이 전남 신안 비금도인 선생께 먼저 들려드렸을 때 “얼마나 예뻐” 하시더니, 사모님이 따로 청하여 이루어진 무대였다.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고마웠습니다. 모두 선생님께 인사드리겠습니다.” 가수 최은진 선생의 마이크 소리에 맞춰 모인 이들이 마지막 인사를 드린 그 장면은, 모두에게 아름답게 기억되었으리라 믿는다.노래의 여운은 짧았다. “자, 다음 발인 못 하고 있거든요. 빨리 나가 주세요.” 상조 회사 옷을 입은 아저씨가 뒤를 몰아쳤다. 운구차와 버스는 화장장으로 떠나고, 각자 타고 온 차들이 줄지어 나가고, 사정없는 햇볕 아래서도 남은 자들의 마음은 눅눅하다. “1990년대부터 갑자기 바뀐 거 같아요. 90년대 초반까지는 입원해 있다가도 임종이 임박하면 집으로 모셨잖아요. 그래서 아시아선수촌 아파트 설계할 때 승강기 구조를 고쳐서 관을 수평으로 운구할 수 있도록 만들었어요. 비좁은 아파트 살던 시절에 부모님 빈소를 마련했는데, 상주도 문상객도 불편하더라고요. 그게 떠올라서 건물 사이에 공간을 많이 비워서 천막을 칠 수 있게 했어요. 거기서 노제도 하곤 하더니, 어떻게 순식간에… 없어졌어요.” 영결식에서 돌아오는 길에 조성룡 선생은, 묘지 이야기를 꺼냈다. 스웨덴의 건축가 시구르드 레베렌츠가 조경을 맡은 스톡홀름의 우드랜드 묘지공원(스콕쉬르코고르덴 묘지공원), 이른바 ‘숲의 화장장’부터 시작한다.“시내에서 전철로 갈 수 있어요. 굉장히 넓은 땅인데 전차에서 내려 조금 걸으면 정문이 있어요. 들어서면 숨막히게 아름다운 풍경이 나타나요. 멀리 언덕 너머에 소나무 숲이 걸려 있고 거대한 십자가 모양 조형물이 눈에 들어와요. 대개는 정면의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죠. 하지만 안내자를 따라 오른쪽의 ‘양탄자 깔듯이’ 잔디로 조성한 언덕, 느릅나무 있는 곳으로 갔어요. 원래 있던 숲의 일부를 조정해 인위적으로 만들었음을 드러내는 구간이죠. ‘기억의 작은 숲’을 지나 1㎞ 떨어진 ‘부활 교회’까지 긴 길을 걸었어요. 숲속을 걸으면서 죽음과 대화하는 시간이었죠. 레베렌츠가 쓴 짧은 수필이 하나 있는데, 묘지에 수직 구조물을 바라지 않는다, 수평으로 낮은 비석이 근대 시민에게 어울린다고 썼어요. 소나무가 울창한 숲속에, 그런 묘비들이 햇빛을 받으면 보석처럼 반짝이지요.” “스웨덴이 100여년 전에 사회민주주의를 하면서 고민한 제일 중요한 것이 노동자 주거 정책이고 의료, 노숙자, 노인 대책을 열심히 만들었나 봐요. 그중에 하나가 묘지예요. 사람들이 도시로 몰리는 현상은 유럽 어디나 산업혁명 하면서 겪었고 그러다 보니까 묘지가 난개발이었죠. 이 사람들이 고민하면서 여러 논의를 해 나가죠. 인간이 죽음 앞에서 동등하다, 민주주의 가치에 따른 묘지를 만들자는 논의를 하면서 국제 현상 설계 공모를 해요. 지침부터가 대단히 자세했어요.” 1912년에 스톡홀름 시 의회가 소나무가 무성한 채석장을 확보한 다음에 내세운 공모 지침은 자연 풍경을 훼손하지 말 것, 품위 있게 설계할 것, 디테일까지 예술적일 것, 기존 채석장의 돌을 활용할 것 등이었다. “스웨덴 사람들은 독일 묘지를 본뜨려고 했어요. 그런데 공모를 하자마자 1차 대전이 터지니까 독일은 전쟁에 빠져들었죠. 그 바람에 젊은 국내파들이 당선된 거예요.” 스웨덴 사람들이 모델로 삼았던 것은 1907년에 설립된 뮌헨의 숲 묘지였다. 뮌헨 지자체에서는 하나의 거대한 묘역을 조성하는 대신 도시 외곽의 동서남북 네 군데 묘지를 나누어 숲 묘지를 조성했다. 그것은 “죽은 자들의 도시”이자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정화해 주는 자연이었다. “군나르 아스플룬드라는 건축가가 건물을 맡고 전체 조경 계획은 레베렌츠라는 사람이 맡아요. 묘지가 완성을 볼 때까지 30~40년이 걸려요. 굉장히 오랜 시간이죠. 아스플룬드하고 레베렌츠가 학교 동창이야. 그런데 두 사람이 약간 달랐어요. 아스플룬드는 성공의 길을 아는데, 레베렌츠는 하기 싫은 건 안 하는 거야. 이 사람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적도 없고 생각을 글로 남기지도 않았어요. ‘숲의 화장장’도 한동안 아스플룬드가 한 거로 알려졌어요.” 숲의 화장장에서 ‘건물과 풍경이 하나’ 되는 작업이 이루어진 것은 레베렌츠의 주도였다. 사업 자체가 워낙 장기화되고 바뀌면서 레베렌츠가 해임되는 일도 있었다. 레베렌츠는 한동안 창문 새시 공장을 운영하면서 다른 공공건축을 해나갔다. 그러나 1940년 아스플룬드가 먼저 세상을 떠난 후 레베렌츠가 마무리 작업을 맡게 된다. 1970년대 들어 재조명되기 시작한 스톡홀름 우드랜드 묘지공원은 1994년에 유네스코 세계 유산 목록에 등재되었다.레베렌츠의 작업 중 또 하나의 묘지가 1916년에 설계 경기로 당선된, 항구도시 말뫼의 동부 묘지다. “평화롭고 고요한 묘지라면서 좋아들 하지요. 그런데 나는 그것보다는 도시를 봐요. 스톡홀름의 묘지가 거대한 장묘 단지라면 말뫼 묘지는 도시의 일부 같거든요. 지형에 따라 두 구역으로 구획하고 그 사이 도로변에 방문자센터, 화장장, 기념 교회, 광장, 추념 공간을… 마치 도시처럼 계획했어요. 마지막으로 묘지 입구에 거친 콘크리트로 아주 작은 꽃집(1974년)을 지었어요. 그때 레베렌츠 나이가 89세였어요. 우드랜드나 레베렌츠를 소개하려는 게 아니에요. 결국 우리 문제 말이죠. 일제 때의 묘지 계획 답습하면서, 오히려 그 뒤로 더 나빠졌어요. 우리가 신도시를 계획할 때 묘지를 미리 제대로 숙고해 본 적이 별로 없어요. 말로는 동방예의지국이니 하면서요. 그래 놓고서 유럽 어디 갔더니 무슨 묘지 멋있더라, 그렇게 감상적으로 접근할 일이 아닙니다. 도시 계획 자체로 생각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국가가 나서야 한다고 봐요. 그랬다면 우리 동네에 대형 화장장, 납골당은 절대 안 된다는 이야기가 이렇게 심했을까요. 광화문광장 고치는 문제보다 아파트 단지마다 동네마다, 운구차가 멈췄다 떠날 작은 장소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나.”집에서 관이 나오면, 망자가 살던 마을 어귀에서, 일하던 장터 입구에서도 노제를 하는 것을 불과 20년 전에도 볼 수 있었다. 길바닥에 돗자리 깔고 병풍 치고 꽃상여 걸쳐 놓고서 다시 제를 지냈다. 이웃들은 대개 그 언저리에서 술 한잔으로 먼 길을 배웅한다. 그럴 때 상엿소리를 하거나 풍물을 치거나 살풀이며 종이꽃을 만드는 갖가지 재주가 산 사람과 죽은 사람 사이를 잇거나 떼어 주는 일을 맡았다. 이제 그런 일들이 하나하나 예술이 되었다. 그 예술은 우리의 비루한 삶과 죽음 속에서 궂은 기능을 맡지 않는다. 장례식장의 발인장은 주유소를 닮았고 관은 컨베이어벨트처럼 바퀴 위에 실린다. 알지 못하는 301호와 204호 누군가가 십 분 간격으로 기다리는데, 우리는 애틋한 의식의 시간을 나눌 수 없다. “어렸을 때 마을 뒷동산 기슭에 공동묘지가 있었죠. 가면 쭈뼛하죠. 그렇게 죽음이 곁에 있구나 하는 것을 어렴풋이 배우죠. 동네마다 조금씩 작은 무덤을, 평화롭게 만들면 좋겠지. 무덤을 가까이 못 두면 아파트 단지 어디에 거기 살다가 죽은 가족을 기억할 작은 숲이라도, 나무 몇 그루라도 둘 수는 없는가. 의식을 하려면 장소가 있어야 하는 거예요. 그냥 마음만으로 되는 게 아니거든요. 우리 조상들이 그렇게 수천 년 동안 왜 마을 뒤에 싫은 묘지를 두었는가, 그걸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고 다음 세대에 교육할 때, 우리 삶이 정말 좋아지고 정말 민주 사회가 될 거예요.” 황현산 선생의 영결식은 아름다웠다. 비금도 섬 그림자가, 다도해의 물결이 잠시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사소하지만, 노래 한 곡절로도 우리는 한결 잘 헤어졌다. 죽으면 다 소용없다고, 어른들은 말했다. 그렇겠지. 그러나 이 품위는 죽은 사람을 위한 건가, 산 사람을 위한 건가. “도시 사람들은 자연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자연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도 없다. 도시민들은 늘 ‘자연산’을 구하지만 벌레 먹은 소채에 손을 내밀지는 않는다. 자연에는 삶과 함께 죽음이 깃들어 있다. 도시민들은 그 죽음을 견디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거처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철저하게 막아 내려 한다. 그러나 죽음을 끌어안지 않은 삶은 없기에, 죽음을 막다 보면 결과적으로 삶까지도 막아 버린다. 죽음을 견디지 못하는 곳에는 죽음만 남는다.”-황현산, ‘소금과 죽음’(한겨레신문 2009년 8월 15일자) 기획 수류산방 조성룡 건축가·도시건축 대표 심세중 수류산방 편집장■ 시구르드 레베렌츠(1885~1975)는 스웨덴의 건축가로 원래는 엔지니어링을 공부했다. 군나르 아스플룬드(1885~1940)와 함께 29세이던 1914년에 스톡홀름 남쪽 우드랜드 묘지공원 설계 공모에 당선되었다. 이후 한동안 건축을 멀리하다가 말년에 다시 설계를 맡았다. 레베렌츠가 설계한 묘지와 교회, 시립 극장과 노동자 주택 등은 대부분이 공모를 통한 공공 작업이었다. 오로지 건축 현장에서 작업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려고 한 드문 근대 건축가이자 조경가,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1970~80년대에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우드랜드 묘지공원은 1994년에 유네스코 세계 유산 목록에 등재되었다. 세계 유산 목록에 수많은 묘지가 있지만 근대 건축가가 계획한 사례는 유일하다.
  • [홍석경의 문화읽기] 상하이에서 읽는 동아시아

    [홍석경의 문화읽기] 상하이에서 읽는 동아시아

    사람마다 꿈꾸는 도시가 있을 것이다. 나에게 그 도시는 상하이였다. 오랫동안 프랑스에 살았기에 올 8월에야 처음 방문하게 된 상하이. 물론 국제학회에서의 발표를 위해 왔지만, 도시 전체가 텍스트인 이곳, 하루 정도 ‘발로 하는 독서’의 매력을 물리칠 수 없다. 아편전쟁의 결과로 19세기 후반 서구 열강에 조계를 내줄 수밖에 없었던 이곳은 오랫동안 서구와 동아시아 간 순간이동 터널 역할을 했다. 상하이를 통로로 서구가 동아시아로 쏟아져 들어왔고, 동아시아인은 상하이에서 멀고 먼 프랑스와 영국 등 서구의 일부를 만났다.서구에도 상하이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 벌어지는 신비한 곳이었다. 오손 웰스의 1947년 영화 ‘상하이에서 온 여인’의 주인공 리타 헤이워스는 상하이에서 보낸 몇 년의 과거와 중국어를 한다는 사실에 힘입어 영화 역사상 가장 강력한 팜파탈의 반열에 오른다. 그녀는 유명한 거울 신 속에서 죽는데, 이 장면이 중국을 다시 글로벌한 동서 간 문화교류 속으로 끌어들인 이소룡에 의해 ‘용쟁호투’(1973)에서 패러디됐던 것도 우연이 아니리라. 대한민국에게 상하이는 문자 그대로 동아시아에 열린 서구의 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젊은 장군 드골이 대서양을 건너가 런던에 임시정부를 세울 것을 생각하기 무려 20년 전 근대국가를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하고 식민지가 됐던 조선의 엘리트들은 3·1운동으로 깨어나 이곳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웅지를 틀었다. 이 사건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는 당시 조선의 어두운 미래와 조선인의 힘든 삶을 실감할 수 없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청나라에 이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대륙 침탈을 준비하는 일본의 기세 속에서 자신과 가족의 운명을 내걸어 민족의 정당하고 자주적인 미래를 도모한다는 결의와 실행은 얼마나 큰 결심과 신념이 있어야 가능했을까. 레지스탕스를 부르는 드골의 런던 행보에 대한 프랑스의 역사적 대접을 보면서 임시정부에 대한 그간의 한국 내 이견이 부끄러웠다. 당시 경성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암살’ 속에서 주인공들이 거사 전날 모여 샹송에 맞춰 춤을 추는 장면에서 임시정부의 상하이 커넥션이 강하게 암시된다. 1930년대 상하이와 조선의 커넥션은 영화 속에서 임시정부를 넘어선다. 중국 영화사에서 가장 빛나는 별 진린은 한국인이었다. 동아시아 대중문화의 중심이었던 당시 상하이의 위상을 고려할 때, ‘동양의 루돌프 발렌티노’라고 불렸다는 이 한국인 남자 배우의 의미는 되새겨볼 만하다. 한국 이름 김염, 그의 부친은 독립운동가 김필순이고 고모부가 무려 김규식이니, 아무리 험난한 세월 속 인척 간 교류와 교육의 영향이 크지 않았더라도 그의 존재는 조선의 독립운동과 상하이, 중국을 잇는 노드(node)다. 동아시아의 초국적 인기인의 전형과도 같은 노래하는 배우 장국영과 그 뒤를 잇는 한류 스타들이 있기에 앞서서 1930년대 글로벌 상하이에 한국인 배우 김염이 있었던 것이다. 밤이 되니 팔월에 크리스마스같이 치장한 불야성의 상하이가 펼쳐진다. 강의 이쪽과 저쪽이 이처럼 극적으로 서로 다른 모습이라니. 하늘을 향해 다투어 치솟는 푸둥 고층 건물들의 화려한 파사드를 마주 보는 와이탄의 강변로에는 프랑스 니스 해변의 콜로니얼 건축을 닮은 건물들이 육중하게 늘어서 있다. 와이탄 지역은 명·청대의 상점과 정원을 배경으로, 70년대 재개발 서민촌을 닮은 거리를 감추고 있다. 어두운 골목 끝 고담시티를 연상시키는 상하이타워가 구름 속으로 치솟는다. 중국의 들끓는 자본주의적 욕망처럼. 윤봉길 의사 기념관이 있는 훙구공원에 해가 뉘엿뉘엿하자 노인들이 배 두드리며 나와 바람을 쐰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 서구 문호들의 동상 군집에서 멀지 않은 곳엔 새로 세워진 중·일 청년들의 우의를 다짐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시내 도처에서 한국어가 들리지만 한국 사드가 지나간 중국 어느 곳에도 한류의 자취는 없고, 일본식 바와 음식점이 즐비하다. 거대한 쇼핑몰 벽에 붙은 한류 스타를 똑 닮은 중국 배우의 모습이 묘하게 과거와 현재의 상하이, 그리고 동아시아의 굴기 속 중국의 욕망을 느끼게 해 준다.
  • 2018년 상하이에서 감상해 본 1930년대 동아시아

    2018년 상하이에서 감상해 본 1930년대 동아시아

    사람마다 꿈꾸는 도시가 있을 것이다. 나에게 그 도시는 상하이였다. 오랫동안 프랑스에 살았기에 올 8월에야 처음 방문하게 된 상하이. 국제학회에서의 발표를 위해 왔지만, 도시 전체가 텍스트인 이곳, 하루 정도 ‘발로 하는 독서’의 매력을 물리칠 수 없다. 아편전쟁의 결과로 19세기 후반 서구 열강에 조계를 내줄 수밖에 없었던 이곳은 오랫동안 서구와 동아시아 간 순간이동 터널 역할을 했다. 상하이를 통로로 서구가 동아시아로 쏟아져 들어왔고, 동아시아인은 상하이에서 멀고 먼 프랑스와 영국 등 서구의 일부를 만났다.서구에도 상하이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 벌어지는 신비한 곳이었다. 오손 웰스의 1947년 영화 ‘상하이에서 온 여인’의 주인공 리타 헤이워스는 상하이에서 보낸 몇 년의 과거와 중국어를 한다는 사실에 힘입어 영화 역사상 가장 강력한 팜파탈의 반열에 오른다. 그녀는 유명한 거울 신 속에서 죽는데, 이 장면이 중국을 다시 글로벌한 동서 간 문화교류 속으로 끌어들인 이소룡에 의해 ‘용쟁호투’(1973)에서 패러디됐던 것도 우연이 아니리라. 대한민국에게 상하이는 문자 그대로 동아시아에 열린 서구의 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젊은 장군 드골이 대서양을 건너가 런던에 임시정부를 세울 것을 생각하기 무려 20년 전 근대국가를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하고 식민지가 됐던 조선의 엘리트들은 3·1운동으로 깨어나 이곳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웅지를 틀었다. 이 사건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는 당시 조선의 어두운 미래와 조선인의 힘든 삶을 실감할 수 없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청나라에 이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대륙 침탈을 준비하는 일본의 기세 속에서 자신과 가족의 운명을 내걸어 민족의 정당하고 자주적인 미래를 도모한다는 결의와 실행은 얼마나 큰 결심과 신념이 있어야 가능했을까. 레지스탕스를 부르는 드골의 런던 행보에 대한 프랑스의 역사적 대접을 보면서 임시정부에 대한 그간의 한국 내 이견이 부끄러웠다. 당시 경성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암살’ 속에서 주인공들이 거사 전날 모여 샹송에 맞춰 춤을 추는 장면에서 임시정부의 상하이 커넥션이 강하게 암시된다.1930년대 상하이와 조선의 커넥션은 영화 속에서 임시정부를 넘어선다. 중국 영화사에서 가장 빛나는 별 진린은 한국인이었다. 동아시아 대중문화의 중심이었던 당시 상하이의 위상을 고려할 때, ‘동양의 루돌프 발렌티노’라고 불렸다는 이 한국인 남자 배우의 의미는 되새겨볼 만하다. 한국 이름 김염, 그의 부친은 독립운동가 김필순이고 고모부가 무려 김규식이니, 아무리 험난한 세월 속 인척 간 교류와 교육의 영향이 크지 않았더라도 그의 존재는 조선의 독립운동과 상하이, 중국을 잇는 노드(node)다. 동아시아의 초국적 인기인의 전형과도 같은 노래하는 배우 장국영과 그 뒤를 잇는 한류 스타들이 있기에 앞서서 1930년대 글로벌 상하이에 한국인 배우 김염이 있었던 것이다. 밤이 되니 팔월에 크리스마스같이 치장한 불야성의 상하이가 펼쳐진다. 강의 이쪽과 저쪽이 이처럼 극적으로 서로 다른 모습이라니. 하늘을 향해 다투어 치솟는 푸둥 고층 건물들의 화려한 파사드를 마주 보는 와이탄의 강변로에는 프랑스 니스 해변의 콜로니얼 건축을 닮은 건물들이 육중하게 늘어서 있다. 와이탄 지역은 명·청대의 상점과 정원을 배경으로, 70년대 재개발 서민촌을 닮은 거리를 감추고 있다. 어두운 골목 끝 고담시티를 연상시키는 상하이타워가 구름 속으로 치솟는다. 중국의 들끓는 자본주의적 욕망처럼. 윤봉길 의사 기념관이 있는 훙구공원에 해가 뉘엿뉘엿하자 노인들이 배 두드리며 나와 바람을 쐰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 서구 문호들의 동상 군집에서 멀지 않은 곳엔 새로 세워진 중·일 청년들의 우의를 다짐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시내 도처에서 한국어가 들리지만 한국 사드가 지나간 중국 어느 곳에도 한류의 자취는 없고, 일본식 바와 음식점이 즐비하다. 거대한 쇼핑몰 벽에 붙은 한류 스타를 똑 닮은 중국 배우의 모습이 묘하게 과거와 현재의 상하이, 그리고 동아시아의 굴기 속 중국의 욕망을 느끼게 해 준다. 글·사진: 홍석경 서울대 언론학과 교수
  • [73주년 광복절] “누명 벗은 조봉암 선생, 독립유공자 서훈 더 늦으면 안 돼”

    [73주년 광복절] “누명 벗은 조봉암 선생, 독립유공자 서훈 더 늦으면 안 돼”

    3·1운동 선봉장… 현실 진보정치 선구자1959년 간첩죄 사형 2011년 무죄 판결 동명의 국방헌금 내역에 심사 3번 탈락‘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하냐.’ 이는 1956년 진보당을 창당하고 3대 대통령선거에 나서는 등 ‘현실주의적 진보정치’의 선구자로 불리는 조봉암(위)의 어록에 있는 글귀로, 그가 묻혀 있는 서울 중랑구 망우리 묘의 비석에도 새겨져 있다. 지난 13일 서울 중구 충무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곽정근(아래·85) 회장은 “조봉암 선생은 항일독립운동과 근로 대중을 위해 한평생을 살았던 분이다”면서 “선생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곽 회장은 “조봉암 선생은 20살 때인 1919년 3·1운동 선봉에 서다 징역 1년을 살았다”면서 “당시에는 독립운동의 일환이기도 했던 조선공산당 활동을 하다 1933년 상하이에서 체포돼 신의주형무소에서도 7년을 옥살이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국가보훈처는 일제 치하에 있던 시기인 1941년 12월 23일자 ‘매일신보’에 “인천 서경정에 사는 조봉암씨가 국방헌금 150원을 냈다”는 단신 기사를 문제 삼아 조봉암의 서훈을 거부하고 있다. 이를 이유로 조봉암은 2011년, 2015년, 2018년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심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곽 회장은 “기사에 나온 장소는 조봉암 선생과 살던 곳도 다르고 선생은 그만큼의 돈도 없었다”면서 “만약 사실이라면 정치적인 적들이 친일을 했다며 이용했을 텐데 그런 기록도 없다”고 반박했다.고향인 충남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인천으로 올라와 고학을 하던 곽 회장은 신문사에서 진보당 당원들이 토론하던 모습을 보고 조봉암의 사상에 매료돼 1956년 대선 선거운동에 뛰어든다. 곽 회장은 “당시에는 선거운동만 해도 잡아가는 시기라 운동원도 5~6명 정도였다”면서 “인천부두노동자들이 조봉암 선거 운동 차량에 손을 흔들며 따라오던 모습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고 돌이켰다. 초대 농림부 장관과 2대 국회부의장까지 지낸 조봉암은 간첩죄 등 혐의로 대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59년 7월 31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곽 회장은 “선생이 주장한 ‘진정한 민주주의’, ‘서민경제’, ‘평화통일’이라는 시대정신은 미래지향적이었다”면서 “대선이 끝나고 위협을 느낀 이승만에 의해 간첩으로 몰려 ‘법살’(법에 의한 살인)을 당했다”고 아쉬워했다.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조봉암이 일제에 항거하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복역한 사실이 있으므로 독립유공자로 인정하는 것이 상당하다”고 했다. 2011년 대법원 무죄 판결로 명예도 되찾았다. 곽 회장은 “내년이면 조봉암 선생 탄생 120주년, 서거 60주년”이라면서 “늦었지만 건국훈장을 받게 될 것이라고 믿고 싶다”고 말했다. 기민도 기자 key5088@seoul.co.kr 류재민 기자 phoem@seoul.co.kr
  • 울산객사 터에 발견된 일본 신사 비석 처리 ‘고민’

    울산시가 옛 울산객사 부지에서 발견된 울산신사의 비석 처리를 놓고 고민하고 있다. 울산객사는 외국사신이나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묵던 숙소다. 13일 울산시 등에 따르면 2015년 시립미술관 건립을 위해 울산객사 터인 옛 울산초등학교를 철거하는 과정에서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울산신사 기둥 문으로 추정되는 비석이 나왔다. 이 비석은 전체 1.8m 길이지만 파손돼 두 동강 난 상태다. 표면에는 일본 황자 탄생을 축하하는 의미인 ‘皇太子殿下御降誕記念鳥居(황태자전하어강탄기념조거)’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비석 측면에 ‘昭和(소화) 9년(1934년) 10월 6일’이라는 제작 시기도 적혀 있다. 당시 옛 울산초 부지 매장문화재 정밀조사를 맡은 울산발전연구원 측은 이 비석을 보온 덮개와 비닐 천막으로 싸서 현장에 뒀으나 최근 해당 부지에 임시주차장 공사가 시작되면서 덮개가 벗겨져 방치된 상태다. 지역 문화계 일각에서는 비록 일제 잔재이기는 하나 역사적 기록인 만큼 보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 관계자는 “공사 부지 내 회화나무 밑에 놓인 돌무더기에 비석이 별다른 보호 조치 없이 노출돼 있다”며 “조선통신사들의 하행 길에 둘렀던 동헌과 객사 사이 일본 신사가 들어섰던 곳으로 치욕의 산물을 역사적 교훈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울산시는 울산발전연구원 측과 협의해 활용·보존 방안을 찾을 계획이다. 시 관계자는 “비석이 유물로서 가치가 크지 않고, 앞으로 건립될 시립미술관과 객사에 일본 신사 비석을 다시 놓는 것이 옳은 지도 고민”이라며 “관계 기관 등과 활용방안을 찾다”고 말했다. 울산 박정훈 기자 jhp@seoul.co.kr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영원한 ‘별들의 고향’… 경성의 낭만을 소환하다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영원한 ‘별들의 고향’… 경성의 낭만을 소환하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13회 극장순례(영화의 고향) 편이 지난 4일 서울 종로와 충무로 일대에서 진행됐다. 여름 야행 두 번째 행사를 맞아 서울미래유산을 사랑하는 답사단 일행 30여명은 모자와 부채, 손풍선 등으로 완전 무장했지만 쏟아지는 폭염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웠다. 안전사고를 막고자 도보 코스를 줄이고, 서울신문사에서 때마침 제공한 ‘아이스 쿨 스카프’에 의지해 답사를 마쳤다. 참가자들은 이날 오후 6시 지하철 종각역 3번 출구 앞 종로타워빌딩(옛 화신백화점) 앞에서 집결, 우미관 옛터~인사동 조선극장 옛 터~허리우드극장~단성사 옛터~서울극장~충무로 영상센터 순으로 2시간짜리 극장순례를 다녀왔다. 서울극장에서 충무로 영상센터까지는 지하철로 이동했다. 지난해와 올해를 통틀어 답사 중 첫 대중교통 이용사례다. 해설을 맡은 심흥식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흘러간 추억의 영화는 물론 자신이 경험한 70~80년대 영화의 주제가를 직접 부르면서 영화와 극장 분위기를 전달해 공감과 호평을 얻었다.서울은 극장의 도시이다. 한국영화의 고향이기도 하다. 근대화의 산물이자 대중문화의 상징인 영화는 일제강점기의 수도 경성에서 화려하게 꽃피었다. 1920년대 전후 ‘문화로써 생활의 중심으로 삼는 사상’ 즉 문화주의와 문화운동이 전개되었고, 그 중심에 영화가 있었다. 일제의 통치방식이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로 색깔을 바꾼 것도 영향을 미쳤다. 일제의 문화정치는 진정한 의미의 문화주의 정치가 아니라 식민지의 ‘문명개화’(文明開化) 혹은 ‘문치교화’(文治敎化)의 흉내에 불과했지만 500년 봉건왕조의 지배에서 막 깨어난 대중을 유혹하기엔 충분했다. 영화로 대표되는 서울의 대중문화는 양반 선비문화, 고급 엘리트문화에 대항한 문화적 민주주의의 시발점이었다.1930년대 접어들면서 신파극, 뽕짝가요, 영화 등 3대 장르가 주도하는 ‘조선식 대중문화’가 경성에서 폭발했다. 근대화와 식민지 정서가 뒤섞인 독특한 문화양식이었다. 당대 경성의 신인류를 지칭하는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이 낭만주의적 퇴행성을 대표하는 식민지 근대성의 표식이라면, ‘장한몽’(이수일과 심순애),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홍도야 울지 마라) 같은 신파극은 이율배반적 비극미의 표출이었다. 3대 장르에서 짜내는 부조리한 눈물은 대중에게 위안을 제공했다. 체제 순응이라는 자학적 죄의식을 외면하는 핑곗거리를 제공했다. 대중문화는 정치 이데올로기 전파의 수단으로 사용됐다. 특히 영화(Screen)는 성(Sex), 스포츠(Sports)와 함께 ‘3S’의 대명사였다. 1919년 제작돼 한국영화의 기원으로 간주하는 ‘의리적 구토’는 과도기 성격의 영화이다. 연극 무대에서 구현이 어려운 장면이나 풍경을 활동사진으로 찍어서 중간에 끼워 보여주는 연쇄극이었다. 단성사 사장 박승필은 명월관, 청량리, 홍릉, 장충단, 한강철교 등 경성의 명소를 찍어 단성사에서 공연하는 연극의 중간에 삽입했다. 한국영화의 전성기는 1926년 나운규의 ‘아리랑’과 함께 막을 올렸고, 1937년 나운규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렸다. 최초의 무성영화이자 흥행 대작이었다. 식민지 조선의 암울한 현실과 대중의 민족 정서를 반영한 이 영화는 상영 첫해에 110만 명의 관객을 모았다. 아리랑이라는 걸출한 영화 한 편이 영화를 대중문화의 간판산업으로 밀어 올렸다. 1935년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이 히트를 한 이후 1938년 경성 시내에서 영화와 연극관객이 하루 평균 1만명에 이르렀고, 1942년에는 연인원 2000만명이 영화와 연극을 관람했다고 한다. ‘영화 경성시대’였다.한국영화는 1950~60년대 르네상스를 맞았다. 1955년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은 정비석이 서울신문에 연재한 동명 소설을 영화화해 영화 부흥의 기틀을 마련했다. 교수 부인의 바람은 전통적 가부장제를 밑바닥에서 흔드는 발칙한 소재였다. 1961년 한국영화사상 최대의 문제작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을 시작으로 신상옥, 김기영 감독의 작품이 뒤이었다. 1970년대 유신 시절 침체기에 접어든 한국영화는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 등 호스티스 영화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사회성 짙은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 등으로 되살아났다.극장은 신파극, 뽕짝가요, 영화 등 오락문화를 쓸어 담는 그릇이었다. 본래 연극 공연장이던 극장은 무용·음악·예능 등 무대예술 공연장으로 영역이 확대됐다. 19세기 말 영화의 발명 이후 극장과 영화관이 구별됐다. 무대와 조명을 갖춘 국내 최초의 실내극장은 1902년 서대문밖에 세워진 협률사였다. 로마 원형극장을 본뜬 협률사가 최초의 관립극장이자 서양식 극장이었다면 1908년 신문로에 설립된 이인직의 원각사는 최초의 사설극장이었다. 활동사진 상설극장으로 가장 먼저 개관한 곳은 1910년 종로구 관철동 경성고등연예관이다.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뀐 뒤 1915년 수용인원 1000명 규모의 상설영화관 우미관으로 거듭났다. 판소리와 창극을 공연하던 단성사는 1918년 활동사진 전용관이 되기 전까지 경성에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유일한 극장이었다. 무성영화 시절 유명한 변사는 대부분 우미관 출신이었다. 찰리 채플린이 제작·감독·각본·주연을 맡은 무성영화 ‘황금광시대’도 우미관에서 상영했다. 우미관은 단순한 극장이라기보다 종로상권을 넘보는 청계천 이남 남촌에 근거지를 둔 일본 야쿠자의 북촌 진출을 막는 방어선이었다. 종로 주먹 김두한의 사무실이 우미관에 있었다. 영화 ‘장군의 아들’, 드라마 ‘야인시대’의 주 무대이다. 종로2가 길가 화단에 표석이 남아 있다. 답사단이 찾은 종로타워 뒷골목 우미관은 1959년 관철동 우미관이 불타 없어진 뒤 화신백화점 뒤로 옮긴 곳이다. 이전 후에는 이류 재개봉관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다가 1982년 폐업, 지금은 우미관 주차장이 됐다. 1907년에 개업한 단성사는 1919년 ‘의리적 구토’를 시작으로 ‘장화홍련전’과 ‘아리랑’을 상영하면서 장안의 영화 중심가로 떠올랐다. 이후 ‘서편제’ ‘태백산맥’ ‘장군의 아들’ 등을 개봉했다. 1913년 황금연예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한 국도극장은 일본인 거주지역인 을지로를 대표하는 극장 황금좌로 운영되다가 1948년 개칭했다. 지금은 국도호텔로 변신했다. ‘미워도 다시 한번’ ‘별들의 고향’ ‘겨울여자’를 각각 개봉했다. 1922년에 건립된 인사동의 터줏대감 조선극장은 영화상영과 판소리, 가무곡 공연 겸용관이었다. 김기진 등이 신파극에 대항해 근대 신극운동을 펼친 토월회의 창립공연을 비롯해 명창대회가 열린 유서 깊은 장소이다. 1936년 방화로 소실된 뒤 이런저런 장소로 떠돌다가 포장마차 골목으로 쓰이고 있다. 뒷면 대나무 숲 앞에 조선극장 터 표석이 서 있었으나 훼손돼 사라졌다. 황금좌, 우미관, 단성사, 조선극장이 경성의 4대 극장으로 군림했다. 1935년 설립된 연극전용 동양극장은 1976년 폐관될 때까지 서대문을 대중연극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다음 일정 : 서울의 문학1(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일시: 8월11일 토요일 오후 6~8시 ●집결장소: 청계광장(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5번 출구, 1.2호선 시청역 4번 출구) ●신청(무료):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http://futureheritage.seoul.go.kr)
  • “이산상봉, 국군포로 송환까지 이어졌으면…형님 만나고 싶어요”

    “6·25전쟁 때 학도병 자원입대한 형님 한국군 포로로 北 생존 소식 알게 돼 한국 정부가 도와주길 간절히 바라” 北 국군포로 6만명… 생존자 500여명 “저는 미국 남가주에 살고 있는 82세 시니어입니다.” 전날 본지 1면에 실린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다룬 기사(“북·미 갈등 얘기만 나오면 피가 말라, 6·25 때 헤어진 세 언니 못 만날까 봐”)를 읽었다며 미국에서 김모씨의 이메일이 왔다. 정중하게 서두를 시작한 그는 “문재인 대통령의 남북 화해를 위한 노력으로 통일의 희망이 멀리서 나마 보이는 듯한 이때,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진다니 반갑다”며 “6·25 전쟁 때 포로가 된 국군포로들의 송환문제도 이 기회에 이뤄졌으면 한다”고 바랬다. 그는 헤어진 형님(86)에 대해 소상히 기억하고 있었다. 1950년 6월 대구로 피란을 갔고 한 달 만인 7월에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했다. 이듬해 12월에 평안북도 신안주의 박천 전투에서 행방불명 됐고, 1952년 7월에 육군본부로부터 전사자로 통지받았다. 이후 그는 매년 현충일에 국군묘지의 무명용사 비석 앞에서 형을 추모했었다고도 했다. 하지만 미국으로 이주한 뒤 외려 미 국방성에서 형님이 한국군 포로로 북측에 생존하고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됐다고 했다. 그는 “한국 정부가 도와주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편지를 마무리했다. 북한 국군포로는 약 6만명으로 추정된다. 이 중 현재 생존자는 500명 정도로 예상되며 이들의 평균 연령은 80세를 넘었다. 10명 중 6명이 80세를 넘은 이산가족과 마찬가지로 가족 상봉이 시급하다. 더 나아가 국내 송환 협의도 서둘러야 한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북한은 국군포로 문제에 유독 민감해 해왔다. 2002년부터 2007년까지 몇 차례의 남북 적십자 회담 합의문에 국군포로 가족상봉 문제가 명시된 적이 있지만, 당시에도 국군포로를 ‘전쟁 시기와 그 이후 시기 소식을 알 수 없게 된 사람들’로 명시했다. 특히 북측에 국군포로가 자의적으로 남은 것이 아니라면 인권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지난달 22일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 적십자 회담의 공동보도문에도 국군포로 가족상봉은 공동보도문에 명시되지 않았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내가 조선의 국모다”… 명성황후의 비극 서린 산책길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내가 조선의 국모다”… 명성황후의 비극 서린 산책길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10회 홍릉산책(홍릉수목원) 편이 지난 14일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과 회기동, 성북구 종암동과 하월곡동을 넘나들며 진행됐다. 정릉천을 경계로 동대문구와 성북구가 갈리고 정릉천과 중랑천 사이 천장산 자락에 홍릉수목원을 비롯해 의릉, 북서울 꿈의 숲, 배봉산 등이 안겨 서울 동북부의 허파를 형성하고 있다. 이날 홍릉수목원은 33도를 기록하는 살인적인 무더위를 피하면서 피톤치드가 충만한 삼림욕까지 즐기는 일석이조의 피서지였다.참가자들은 고려대역 3번 출구에서 만나 정릉천~한국국방연구원(KIDA)~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홍릉수목원(국립 산림과학원)~카이스트 서울캠퍼스~옛 한국농촌경제연구원~한국콘텐츠진흥원 콘텐츠인재캠퍼스~수림문화재단~세종대왕기념관 코스를 걸었다. 다들 “서울의 부도심에 이런 울창한 숲과 고즈넉한 시가지가 남아 있다는 게 경이롭다”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땅 향기가 살아 있는 홍릉수목원의 그늘은 마치 딴 세상 같았다. 다만 주말에도 개방하는 홍릉수목원과 세종대왕기념관 이외 다른 공공기관은 휴관 중이거나 공사 중이어서 볼 수 없는 점이 아쉬웠다. 서울미래유산 해설자로 첫 데뷔한 숲 전문가 임혜란 해설사는 해박한 생태지식과 구수한 입담으로 투어단을 이끌었다.홍릉수목원이 있는 청량리는 조선시대 능행과 농경 제례의 상징공간이었다. 청량리는 태조의 건원릉이 있는 왕실 최대 묘역 동구릉으로 향하는 능행길이자 능행행차를 통해 왕실의 존엄을 내보이는 홍릉 묘역이었다. 또 청량리 일대는 농경사회의 수호자인 왕이 몸소 경작의 시범을 보이고, 풍년을 기원하는 제례를 올리는 신성한 장소이기도 했다. 사대문을 둘러싸고 형성된 성저십리(성 밖 10리)를 뜻하는 동교, 서교, 남교, 북교 등 교외지역 중 청량리와 왕십리로 대표되는 동교지역의 위상이 다른 지역보다 높은 까닭이다. 능행은 선왕의 기억과 권위에 기대 효를 다하는 왕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고도의 정치 행위였다. 문상외교, 문상정치와 뿌리를 같이한다. 왕의 견문을 넓히고, 도성 밖 사대부나 지방 백성과 소통하는 중요 행사였다. 왕은 최대한 천천히 가면서 피지배 계층에게 권위를 보이고, 민원을 청취한 뒤 덕을 베풀었다. 민원이 있는 백성은 꽹과리를 두드리며 소란을 피워 가마를 멈추게 한 뒤 억울함을 고한다. 이때 왕은 소란죄로 가볍게 처벌한 뒤 민원을 듣고, 우선 처리해 주는 ‘능행정치쇼’를 벌였던 것이다. 정조는 배봉산(서울시립대 뒷산)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 영우원을 옛 수원(화성시) 현륭원으로 옮기면서 12차례 한강을 건너는 효행을 선보였다. 정조의 능행잔치는 조선 최대의 볼거리, 즐길거리였다. 이 덕분에 정조는 세종대왕과 함께 백성이 인정하는 ‘대왕’의 반열에 올랐다. 1883년 서울을 방문했다가 능행을 구경한 독일인 마예트는 ‘코리아의 수도 서울 견문기’에서 “시내가 구경꾼으로 가득 차서 왕의 행차가 지나가는 길에는 집 창문이나 대문간, 뜰에 흰옷을 입은 사람들로 메워졌다”면서 “도로는 깨끗하게 치워졌고 길 중간에는 붉은 흙이 깔려 있었다. 왕은 말을 타지 않고 지붕이 있는 가마를 탔다”고 능행 풍경을 묘사했다.홍릉이 먼저인가, 청량리가 먼저인가. 우문이지만 헛갈리는 사람이 많다. 당연히 청량리가 주인이요 홍릉은 객이다. 홍릉은 청량리에 22년간 잠깐 깃들었다가 떠났을 뿐이다. 그러나 신라의 고찰 청량사에서 유래한 청량리라는 유구한 지명은 홍릉이라는 19세기 비극의 장소성에 밀렸다. 비명에 간 명성황후는 지아비 고종을 따라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의 ‘진짜 홍릉’으로 떠나고 없지만 나라와 국모를 잃은 당대인의 가슴속에는 청량리보다 ‘빈 홍릉’이 각인됐다. 옛 홍릉의 기억이 청량리라는 장소를 지배하게 됐다. 그렇게 주객이 전도돼 이제는 홍릉이 청량리를 떠올리게 한다. 장소의 역사란 이렇게 이율배반적이다. 22년간 이뤄진 고종·순종의 숱한 홍릉능행 덕분에 청량리라는 작은 마을이 유명해지고 서울 동북방의 중심지로 떠올랐다.능행의 정치사에서 흥릉은 일개 황후 능에 불과했지만 조선 말, 대한제국 초에는 개국조 이성계의 건원릉을 능가하는 역사의 무대였다.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의 첫 번째 황제 고종의 황후 능이요, 마지막 황제 순종황제의 친모 능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1895년 10월 8일 경복궁 건청궁에서 일본군인에 의해 비명에 간 황후의 장례식이 2년 2개월 후인 1897년 11월 22일에 치러졌다는 시간 흐름을 주목해야 한다. 국장 1개월 전인 1897년 11월 22일 최초의 근대국가이자 황제국인 대한제국으로 국호와 연호를 바꾼 점도 놓쳐선 안 된다. 명성황후의 죽음 자체보다 죽음이 몰고 온 파장이 더 컸다. 국장은 3개월을 넘기지 않는 게 관례였지만 시간을 끌면서 배일, 극일을 모색한 끝에 1896년 아관파천에 이어 1897년 대한제국 탄생 선언으로 이어진 것이다. 결과적으로 명성황후의 비극적 시해와 홍릉 조성은 대한제국의 탄생 및 멸망사와 궤를 같이한다. 홍릉은 어렵게 얻은 장지였다. 안감천(성북구 안암동)과 회암(양주시 회암동) 등 모두 7곳을 놓고 의견이 갈렸다. 결국 고종의 마음에 차지 않아 다른 7곳을 골랐고 그중 연희궁 터(연희동 일대)와 청량리가 부각됐다. 권세를 누린다는 연희궁보다 ‘평안하고 길한 땅’으로 평가된 청량리가 선택됐다. 동구릉에서 멀지 않고, 참배도 쉬운 점이 점수를 땄다. ‘명성황후 발인반차도’에 따르면 상여를 따라가는 수행원은 대략 4800명이었다. 역사상 최초의 황후 장례식이기 때문에 역대 어떤 왕의 국장보다 성대했고, 수행 인원이 많았다. 상여가 가는 코스는 경운궁(덕수궁)~청계천 혜정교~흥인지문~동관왕묘(동묘)~보제원(제기동)~한천교~청량리 홍릉으로 이어졌다. 홍릉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국고를 털었다. 절과 민가 92호에 보상비 3만냥을 주고 철거했으며, 무연고 묘와 연고 묘 450총을 이장하는 비용 2만 2000냥, 홍릉 아래 전답 수용에 4만 6000냥을 지불했다고 기록돼 있다. 명성황후의 죽음을 애통해한 고종을 노국공주를 잃은 고려 공민왕에 비유한다. 3년간 국상을 치르면서 수없이 홍릉길을 오간 고종이 1919년 67세를 일기로 숨지자 금곡 홍릉에 합장했다.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는 사별한 지 24년 만에 저승에서 만나 해후했다. 청량리 홍릉 옛 황후능 터에는 소나무 한 그루와 비석 한 개가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홍릉은 전설로 남았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다음 일정 : 도봉(창포원의 붓꽃) ●일시 : 7월21(토) 오전 10시~12시 ●집결 장소 : 도봉산역 2번 출구 ●신청 :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 (futureheritage.seoul.go.kr) *혹서기인 7월28일부터는 저녁 6 시부터 8시까지 야간에 진행됩니다.
  • [열린세상] 일본 도호쿠 지방에서 새로운 백 년의 평화를 상상한다/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부교수

    [열린세상] 일본 도호쿠 지방에서 새로운 백 년의 평화를 상상한다/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부교수

    지난 칼럼에 센다이에서 김기림의 평화주의를 생각하자고 제언했다. 이에 관심을 가져 주는 사람들이 늘어 올 하반기에 센다이에서 행사를 개최할 가능성이 생겼다. 센다이에 유학을 가거나 여행 가는 사람들이 어쩌다 센다이가 루쉰의 유학지라는 사실을 알고 그의 시비나 흉상 앞에서 사진을 찍는 일은 있어도 김기림을 아는 사람이 없어 안타까웠던 터였다. 그를 기리는 작은 시비라도 건립돼 센다이를 거쳐가는 우리 국민이 그의 시비 앞에서 아픈 기억을 새로운 미래의 희망으로 되새길 수 있다면 기쁜 일이다. 센다이와 그 주변에는 한국인이 꼭 찾아봐야 할 곳이 몇 군데 있다. 우선 센다이에서 동북쪽으로 약 5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이시노마키시(石?市)의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현창비(顯彰碑)다. 영화 ‘박열’을 본 사람이면 그 이름에 익숙할 것이다. 후세는 1880년생으로 조선 침략의 부당성과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일제에 저항했던 조선 청년들을 변론한 사람이다. 그가 조선인 사건과 관련해 처음 변론에 나선 것은 1919년 2·8독립선언 관련 출판법 위반 사건이었다. 한때 이시노마키시 문화센터에는 그에 관한 상설 전시 코너가 있었다. 그러나 3·11 동일본대지진으로 문화센터가 침수한 뒤 복합문화시설 구상이 마련돼 새로운 전시실 등이 세워지고 있으나 후세 다쓰지의 상설 전시 코너는 따로 마련돼 있지 않다. 우리 정부는 그에게 200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으나, 이후 그를 기리는 어떤 행사가 열렸는지 들어 본 바가 없다. 이시노마키 시민들이 후세 다쓰지를 기리는 운동을 시작한 게 1986년이었다. 그들의 노력으로 이시노마키시의 한 공원에 현창비가 세워졌다. 그러나 3·11 쓰나미 이후에 들어선 가설 주택에 가려 ‘민중과 함께 살고, 민중을 위해 죽겠다’는 그의 의지가 잊혀지고 있다. 그가 사회주의자였던 탓에 한국 사회가 그에게 무관심하다면 이념으로 역사를 지우는 과보가 두렵다. 이시노마키시에서 서쪽으로 35킬로미터, 센다이에서 북쪽으로 35킬로미터 거리에 후루카와(古川)라는 곳이 있다. 1920년대 일본의 다이쇼 민주주의를 이끈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의 고향으로 기념관이 있다. 그가 천황주의를 긍정하고, 민본주의에 입각해 식민지의 합리적 지배를 원했던 관대한 제국주의자였다는 비판은 타당하다. 그럼에도 당대 일본의 최고 지식인들 가운데 드물게도 조선 문제에 관심을 갖고, 3·1운동에 이해를 표시하며 독립을 주장하는 조선의 청년에게 다가가려 했다. 특히 그가 여운형의 식견과 인품을 높이 평가해 그가 가진 정의를 일본이 포용하지 못하면 일본에 장래가 없다고 경고한 것은 그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자로서 보편적 정의에 서고자 한 노력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요시노 사쿠조 기념관에서 간혹 그와 조선의 관계를 주제로 한 특별전이 열리지만, 방문하는 한국인들이 얼마나 되는지 잘 모르겠다. 후루카와에서 다시 북쪽으로 약 17킬로미터, 센다이로부터는 약 52킬로미터 올라가면 구리하라시가 나온다. 여기에 다이린지(大林寺)라는 절이 있다.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이라는 안중근 의사의 글귀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여기에 이 글이 새겨진 비석이 있다. 안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사형당하기 직전 간수였던 지바 도시치(千葉十七)에게 써 준 글이다. 안중근의 인격에 감복한 지바가 제대 후에 고향에 돌아가 안중근의 유묵을 소중히 간직하다가 1980년 도쿄 한국연구원의 최서면 원장을 통해 한국에 기증했다고 한다. 다이린지에는 지바의 유패가 봉인돼 있으며, 안중근의 유묵이 기증된 뒤 비석이 세워졌다. 안중근이 태어난 9월 2일 해마다 추도 법요가 열린다. 일본 사회가 우경화하던 2013년 말 다이린지의 안중근 위령제와 현창비를 문제 삼아 일본 우익 시민단체가 미야기현에 항의서를 보낸 적이 있다. 미야기현은 ‘민간단체’가 추진한 것이라고 하여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시노마키와 후루카와, 구리하라가 모두 조선 독립 운동의 역사와 얽혀 있다. 이 세 도시를 엮어 도호쿠 평화 순례의 길을 열어 한ㆍ일의 시민들이 함께 걸어 보는 것은 어떨까? 3·1운동 100주년이 내년이다. 도호쿠 평화 순례의 길에서 새로운 백 년의 평화를 상상해 보자.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공양왕 3부자 교살한 태조, 삼화사서 수륙재 열어 왕생 기원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공양왕 3부자 교살한 태조, 삼화사서 수륙재 열어 왕생 기원

    삼척은 삼국시대 초기 실직국의 중심이었다. 이 나라는 102년(파사왕 23) 신라에 병합됐고 장수왕의 고구려에 함락되기도 했다. 신라는 505년(지증왕 6) 이 지역을 되찾아 실직주라 했고 757년(경덕왕 16) 삼척군으로 개칭한다. 고려시대엔 척주로 불리기도 했다. 오늘날 삼척은 수도권에서도 영동고속도로와 동해고속도로를 타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과거의 삼척은 오지의 이미지가 강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을 폐위시켜 삼척으로 보낸 것도 이 때문이었다.이성계 세력은 우왕과 창왕은 왕씨가 아니라 신돈의 자식이라는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을 내세우면서 ‘가짜 왕을 폐위시키고 진짜 왕을 세워야 한다’는 폐가입진(廢假立眞)을 주장했다. 그러면서 1389년 신종의 7대손 정창군 왕요를 즉위시켰으니 곧 공양왕이다. 하지만 공양왕도 결국 이성계 세력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게 된다. 공양왕은 1392년 7월 12일 이성계의 사저에서 술자리를 갖고 있었다. 이때 배극렴이 왕대비에게 폐위를 청했고 공양왕은 왕위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공양왕은 원주로 보내졌고, 이성계는 17일 즉위한다. 사흘 뒤인 20일자 태조실록에는 ‘왕요를 공양군으로 삼아 간성군에 두고 요의 아우 우는 귀의군으로 봉해 마전군에 두어 왕씨 제사를 주관하게 하며, 전조 왕대비 안씨는 의화궁주로 삼았다’는 대목이 보인다. 공양왕을 공양군으로 격하하고 원주에서 다시 간성으로 보내기는 하지만 ‘세상이 바뀌는 마당에 관대한 은혜를 베풀고자 한다’는 즉위교서의 정신이 아주 사라지지는 않은 듯하다. ●조정 공론 후 전국의 왕씨 후손들 대거 살육 하지만 이성계의 측근들은 공양왕을 비롯한 왕씨들을 잠재적 화근으로 보고 있었다. 그해 9월 대사헌 남재 등은 ‘만일 무뢰배들이 왕씨를 구실로 삼아 난을 일으키려 한다면…’이라는 이유를 들어 ‘원컨대 모두 강화도와 거제도에 거처토록 하여 미리 방비하소서’라고 건의한다. 그런데 1394년(태조 3) 1월 참찬문하부사 박위가 연루된 사건이 하나 일어난다. 박위가 동래현령 김가행과 염장관 박중질을 맹인 점술가에게 보내 “전조 공양의 명운이 우리 주상 전하와 비교해 누가 낫겠는가. 또 왕씨 가운데 누가 명운이 귀한 사람인가” 하고 물었다는 것이다. 처벌은 전조의 왕실 인사 전체로 확대됐다. 이 사건 이후 형조는 ‘공양군을 비롯한 왕씨들을 섬에 안치하는 것은 물론 대역죄에 속하는 만큼 제거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청하게 된다. 그러자 태조는 경계의 대상으로 삼았던 왕씨들을 귀양 보내는 결정을 내린다. 간성의 공양군 삼부자도 삼척으로 옮겼다. 이후 태조는 왕씨의 운명을 조정의 공론에 맡겼고, 의견은 곧바로 왕씨에 대한 ‘처분’으로 모였다. 조정은 중추원부사 정남진과 형조의랑 함전림을 삼척에 보냈다. 형조전서 윤방경과 대장군 오몽을은 강화, 형조전서 손흥종과 첨절제사 심효생은 거제로 갔다. 삼척의 공양왕과 두 아들은 4월 17일 교살됐다. 15일과 20일에는 각각 강화와 거제의 왕씨들이 바다에 던져졌다. 이어 전국의 왕씨 후손을 모두 처형토록 했다. 이후 이성계의 태도는 흥미롭다. 왕씨를 대거 살육하고 3개월이 지난 1394년 7월에는 금으로 ‘법화경’을 사경해 내전에 펼쳐 놓고 읽었다. 이어 ‘수륙의문’(水陸儀文)을 판각해 ‘법화경’과 함께 강화에서 가까운 개성 관음굴과 삼척 삼화사, 그리고 견암사에 내렸다. 견암사는 거창 우두산의 고견사로 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태종 때 조성된 공양왕릉 석호, 문·무신상 등 갖춰 태조는 이듬해 2월부터 세 사찰에서 수륙재를 열도록 했다. 수륙재란 원통하게 죽어 물과 육지를 헤매는 외로운 영혼을 위로하는 불교의식이다. 수륙의문은 수륙재의 의식 절차를 적어 놓은 문서를 말한다. 자신이 강화와 삼척, 거제에서 살해한 왕씨들의 명복을 빌고자 했다. 그러니 삼화사 수륙대재는 공양왕 삼부자의 왕생을 기원하는 것이 목적이었다.태조의 집안과 삼화사는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 이안사가 전주에서 삼척으로 이주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세종실록에는 ‘전 현감 김계가 효령대군을 통하여 아뢴 이야기’라면서 ‘삼척의 노인들이 서로 전하되, 삼화사에 간직된 금은자경(金銀字經)은 목조께서 손수 쓴 불경’이라는 대목이 보인다. 이안사가 삼척에 머무는 동안 아버지, 곧 이성계의 5대조 이양무와 부인 삼척 이씨가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의 무덤인 준경묘와 영경묘는 지금 삼척의 태백산 동쪽허리에 남아 있다. 공양왕릉은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에 있다. 북쪽으로는 맹방해수욕장과 대진항, 남쪽으로는 초곡항과 장호해수욕장이 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언덕에 남서향을 하고 있는데, 그 동쪽 너머는 휴양객들이 많이 찾는 궁촌해수욕장이다. 돌계단을 오르면 네 기의 무덤이 나타난다. 오른쪽의 호석을 두른 무덤이 공양왕릉이다. 나머지 두 기는 왕자의 무덤, 다른 한 기는 왕의 시녀 혹은 왕이 타던 말의 무덤이라고 한다. 무덤에 오르면 남쪽으로 뻗어 내려가는 태백준령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나름대로 좌청룡, 우백호를 제대로 갖춘 명당인 듯하다. 하지만 무덤에 석물(石物)은 보이지 않는다. 공양왕릉은 경기 고양시 원당동에도 있다. 공양왕과 부인 순비의 무덤으로 알려진다. 이성계의 아들인 태종 이방원이 재위 16년인 1416년 공양군을 공양왕으로 봉하면서 새로 조성한 것이다. 고양의 공양왕릉은 삼척과 달리 무덤 앞에 비석과 상석, 석등, 석호, 문·무신상이 늘어서 있다. 석호, 곧 돌호랑이는 전통적인 고려 양식이면서도 조선 태조 건원릉의 그것과 닮아 있다고 미술사학자들은 설명한다.삼화사는 642년(신라 선덕여왕 11) 창건설이 전한다. 자장이 당나라에서 돌아온 뒤 두타산에 이르러 흑련대(黑蓮臺)를 창건했는데 이것이 삼화사의 전신이라는 것이다. 이후 화재와 중건을 이어 오다가 1907년에 일본군이 의병이 머물렀다는 이유로 불을 질러 대웅전을 비롯한 200칸 남짓한 당우가 잿더미가 되기도 했다.●공양왕 제향 대상에 포함돼 ‘수륙재’ 막 내려 동해 시내에서 삼화사로 들어가는 길 주변에서는 거대한 규모의 시멘트 광산과 공장이 우선 눈에 띈다. 하지만 삼화사가 있는 무릉계곡에 접어들면 그야말로 선계와 같은 경치가 펼쳐진다. 옛날부터 그 자리에 있던 사찰처럼 자연스럽다. 하지만 지금의 삼화사는 시멘트 공장 부지에 있던 절을 1979년 옮긴 것이다.삼화사는 공양왕의 고혼을 위로하고자 베푼 국행수륙도량(國行水陸道場)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삼화사 수륙재’는 국가무형문화재 제125호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조선 초기 삼화사에서는 공양왕의 초상을 제단에 올려놓고 수륙재를 올렸다. 고려시대부터 남아 있던 초본을 바탕으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화사의 공양왕 수륙재는 조선왕조가 공양왕을 복권시키고 전 왕조 제향 대상에 공양왕을 포함시키면서 자연스럽게 막을 내린 듯하다. 하지만 삼화사 수륙재는 소멸되지 않고 대상을 한정 짓지 않은 불교의식으로 오히려 확대될 수 있었다. 글 사진 사진 dcsuh@seoul.co.kr
  • [별별 이야기] 1만원권 안의 천문학/김종수 한국천문연구원 책임연구원

    [별별 이야기] 1만원권 안의 천문학/김종수 한국천문연구원 책임연구원

    2021년 8월 부산에서는 제31회 국제천문연맹(IAU) 총회가 열린다. 100여개국 약 1만 3000명 천문학자로 구성된 국제천문연맹은 3년마다 총회를 열어 새로운 연구 결과와 동향을 발표한다. 부산 총회 국내 준비위원회는 총회 엠블럼을 공모했고 4개의 후보작 중에서 최종 엠블럼을 결정했다. 엠블럼은 ‘일월오봉도’와 부산을 상징하는 광안대교를 소재로 디자인됐다. 이 엠블럼을 보면서 일월오봉도가 새겨져 있는 1만원권 지폐 도안이 떠올랐다.필자는 외국 천문학자들이 한국에 오면 경복궁에 데려가 소개한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와 박상진 교수의 ‘궁궐의 우리 나무’라는 책 덕분에 민간 문화와 나무 해설사 역할을 쉽게 할 수 있다. 특히 경복궁 근정전 어좌 뒤편에 있는 일월오봉도를 설명할 때는 지갑에서 1만원권 지폐를 꺼내 앞면의 세종대왕 초상, 용비어천가, 일월오봉도를 보여 준다. 세종대왕은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훈민정음을 알기 쉽게 풀이한 해례본을 집필해 한글을 창제, 공표했다는 점과 새로 만든 한글을 활용하기 위해 집현전 학자들과 용비어천가를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또 세종대왕은 과학자들에게 천문관측기기, 해시계, 물시계를 만들고 역법을 정리하게 하는 등 한국 역사상 가장 과학이 발달한 시대를 이끌었다는 점도 빠뜨리지 않는다. 사실 우리나라 1만원권 뒷면은 천문학을 주제로 디자인돼 있다. 혼천의, 천상열차분야지도와 우리나라에 설치된 가장 큰 망원경인 보현산 천문대의 1.8m급 망원경이 조화롭게 도안됐기 때문이다. 혼천의는 고려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국보 제230호 ‘혼천시계’의 일부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와 달, 행성의 위치를 측정하는 천문기기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조선 태조 때 고구려 천문도(圖) 탁본을 비석에 새긴 천문도이다. 조선 숙종 때는 태조 석각본을 다시 비석에 새겨 두었다. 태조와 숙종 때 만들어진 석각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경복궁 고궁박물관에 각각 국보 제228호와 보물 제837호로 지정돼 보관 중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고구려 시대 전체 하늘의 별을 표현한 지도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별자리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보현산 천문대 1.8m 망원경은 1996년 경북 영천시 보현산에 설치된 직경 1.8m 광학망원경으로 국내 천문우주과학의 위상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경복궁 사정전 앞에 설치된 해시계 앙부일구의 원리를 설명하고 고궁박물관에 있는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보여 주면서 이런 설명을 이어 가면 외국 천문학자들은 세종 시대 천문학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1만원권 뒷면 디자인이 매우 흥미롭고 이례적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조선 최대 필화사건 일으킨 소설 ‘설공찬전’ 쓴 채수의 정자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조선 최대 필화사건 일으킨 소설 ‘설공찬전’ 쓴 채수의 정자

    속리산에서 흘러내린 이안천이 내려다보이는 경북 상주의 기장리 언덕에는 쾌재정(快哉亭)이 있다. 조선 초기 문장가 나재(懶齋) 채수(蔡壽·1449~1515)가 벼슬길에서 물러난 뒤 부인 안동 권씨 고향에 정착해 지은 정자다. 상주와 점촌을 잇는 경북선 철도가 시내를 건너고 있어 급할 것 없이 달려가는 무궁화호 열차를 바라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채수라면 ‘설공찬전’(薛公瓚傳)이라는 소설을 써서 조선 최대의 필화 사건을 일으킨 인물이다. 쾌재정은 송나라 시인 소동파가 자주 찾았다는 중국 쉬저우(徐州)의 정자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채수와 쾌재정에 얽힌 이야기는 문장과 글씨에 두루 뛰어났던 남곤(1471∼1527)이 지은 나재 무덤 앞 신도비 비문에 보인다.‘병인년(1506년) 반정 때 공이 공신의 맹약에 참여해 관례에 따라 가정대부로 승진하고 인천군에 봉해졌다. 그런데 동료 벼슬아치들이 거의 다 세상을 떠나고 주변에 없는 것을 보고 탄식하여, 이내 가족을 데리고 남쪽으로 돌아가 아무런 욕심 없이 스스로 즐기며 살았다. 사는 집 남쪽에 뚝 끊긴 산봉우리가 흐르는 물가에 자리잡았는데, 그곳에 작은 정자를 지은 다음 편액을 쾌재(快哉)로 붙여 놓고 날마다 술을 마시고 시를 읊으면서 다시금 세상의 조그만 일도 마음에 두지 않은 채 여유롭게 노닐며 천수를 마쳤다’이렇듯 나재는 중종반정에 가담해 공신의 반열에 올랐지만 곧바로 낙향했다. 야사에는 여기에 얽힌 일화가 전한다. 반정을 주도한 박원종은 “오늘 일은 덕망 높은 선비로 무게 있는 인물이 없어서는 안 될 터이므로 채수를 청해 오라”고 했다. 누군가 “동참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자 박원종은 “오지 않으면 목이라도 취해 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채수의 사위 김감은 위협을 감지해 부인으로 하여금 장인을 만취토록 하여 대궐문 앞에 데려갔고, 나재는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거사에 이름을 올렸다. 나재는 쾌재정에서 글을 쓰곤 했다. ‘늙은 내 나이 예순일곱인데, 지난 일 생각하니 아득히 멀구나’로 시작하는 한시 ‘쾌재정’도 그렇게 태어났다. 나재가 역사에 깊은 흔적을 남긴 것도 쾌재정에서 지은 소설 ‘설공찬전’ 때문이다. 귀신이 주인공인 이 작품은 죽은 이의 혼령이 현실 세계에 나타나 저승 세계의 소식을 전한다는 이야기다.하지만 ‘설공찬전’은 한동안 제목만 남아 있는 소설이었다. 조정의 공론으로 ‘설공찬전’을 모두 거두어 불살랐기 때문이다. 1511년(중종 4년) 사헌부는 “‘설공찬전’은 화복(禍福)이 윤회(輪廻)한다는 논설로, 매우 요망한 것인데 안팎이 현혹되어 문자로 옮기거나 언어(諺語)로 번역하여 전파함으로써 민중을 미혹시킨다”며 채수를 탄핵했다. ‘언어’는 곧 한글이니 그만큼 인기가 높았다는 뜻이다. 사헌부는 ‘정도(正道)를 어지럽히고 인민을 선동한 율(律)’을 들어 채수를 교수(絞首)에 처해야 한다고 주청했다. 그런데 훗날 영의정을 지낸 만보당 김수동(1457~1512)의 변호가 흥미롭다. 그는 “형벌과 상은 중용을 지키도록 힘써야 한다”면서 “이 사람을 죽여야 한다면 ‘태평광기’나 ‘전등신화’를 지은 자들도 모조리 베어야 하겠느냐’고 반문했다. ‘태평광기’는 송나라 태종의 명으로 정통 역사책에 실리지 않은 기록과 소설을 500권에 모은 중국 역대 설화집이다. ‘전등신화’는 명나라 구우의 소설로 조선에서도 필독서가 됐다. 매월당 김시습이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금오신화’를 쓴 것으로 알려진다. 결국 “죄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죽이는 것은 지나치다’는 중종의 뜻에 따라 채수는 파직에 그쳤다.‘설공찬전’이 정치적 탄압을 받은 결정적 이유는 다음과 같은 내용 때문일 것이다. 설공찬이 전하는 저승 소식의 일부다. ‘이승에서 비명에 죽었어도 임금에게 충성하여 간하다가 죽은 사람이면 저승에서도 좋은 벼슬을 하고, 비록 여기서 임금을 했더라도 주전충 같은 반역자는 다 지옥에 들어가 있었다.’ 주전충(852~912)은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잔당을 평정해 실력자로 떠오른 뒤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양나라를 세운 인물이다. 중종 임금부터가 가습이 뜨끔했을 것이다. ‘설공찬전’이 다시 햇빛을 본 과정은 이렇다. 국사편찬위원회는 1996년 이복규 서경대 교수에게 이문건(1494~1567)이 지은 ‘묵재일기’의 내용을 살피고, 뒷장에 적힌 한글 기록도 검토해 달라고 의뢰한다. 이 교수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일부가 그동안 사라진 줄 알았던 ‘설공찬전’, 그것도 한글본이었기 때문이다. “언어(諺語)로 번역하여 전파함으로써 민중을 미혹시킨다”는 사헌부의 탄핵 내용 그대로였다. ‘셜공찬이’라는 한글 제목 아래 3472자가 남아 있었다. 필사를 도중에 중단해 전체 분량이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하기 어렵다. 이렇게 ‘설공찬전’은 허균의 ‘홍길동전’을 제치고 한글로 적힌 최초의 소설이 됐다. 쾌재정은 중부내륙고속도로 북상주 나들목에서 멀지 않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3번 국도를 타고 문경 방향으로 북상하다 이안교차로에서 왼쪽길로 접어들어야 한다.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받을 수 없으니 ‘상주시 이안면 가장리 230-1’이라는 주소를 이용해 찾아가는 것을 권한다. 지금의 쾌재정은 18세기 중반 중건한 건물이다. 벌판 가운데 솟은 봉우리에 있으니 거칠 것 없는 시야를 자랑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무와 풀에 둘러싸여 주변 풍광을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이안천 건너에서 바라봐도 지붕의 모습만 어렴픗하다. 채수의 무덤은 쾌재정 남쪽의 공검면 율곡리에 있다. 포털사이트 지도에서 ‘나재채수신도비’를 치면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율곡리 길가에는 최근 것으로 보이는 신도비도 있다. 옛 신도비가 풍우에 시달려 비문을 읽을 수 없게 되자 1996년 후손들이 다시 세웠다고 한다. ‘셜공찬이’의 발굴이 계기가 됐음을 짐작케 한다. 북쪽 야산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면 옛 신도비의 비각이 보인다. 비석은 당당한 모습이다. 상주에 남은 신도비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한다. 인상적인 것은 신도비의 받침돌이다. 대개 거북이 모양인데, 독특하게도 사자다. 커다란 비석을 등에 이고 있는 사자의 모습은 귀엽기만 하다. 조금 더 올라가면 무덤이다. 채수의 위패를 모신 임호서원은 무덤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 너머 동쪽에 있다. 역시 ‘상주시 합창읍 신흥리 377’이라는 주소로 찾아가는 것이 좋다. 서원은 1693년 함창 서쪽 10리 입암산 아래 검암서원으로 출발했다. 1871년 대원군이 훼철한 것을 1988년 지금 자리에 다시 세웠다. 간소한 데다 연륜도 짧은 만큼 서원 특유의 분위기를 느끼기는 어렵다. 사당에는 경현사(景賢祠)라는 편액이 붙었다. ‘설공찬전’의 배경은 전북 순창이다. 학계는 나재가 순창 설씨 족보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과 허구의 인물을 섞은 것으로 보고 있다. 설공찬의 증조할아버지로 나오는 설위는 대사성을 지낸 세종시대 실존 인물이다. 하지만 설공찬이라는 이름은 족보에서 찾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중종실록에는 채수에 대한 탄핵 과정에 검토관 황여헌의 “설공찬은 채수의 일가이니, 반드시 믿고 혹하여 지었을 것”이라는 발언이 실려 있다. 설공찬은 채수의 친척인 실존 인물이었고, 소설 또한 체험담에 근거했을 수 있다는 추정을 가능케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순창군은 순창 설씨 집성촌이 있는 금과면에 ‘설공찬문학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이광식의 천문학+] 별자리로 보는 별점, 정말 맞을까?​

    [이광식의 천문학+] 별자리로 보는 별점, 정말 맞을까?​

    요즘도 잡지나 일간지에 '오늘의 운세'라든가 '별점 코너' 같은 게 실려 있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과연 별자리 점이 맞을까? 일단 이 꼭지를 다 읽고 스스로 판단해볼 문제다. 달에 갈 수 있는 지금 세상에 아직도 그런 점 같은 거 믿는 사람이 있나, 생각하기 쉽지만, 독일의 한 여론조사 전문기관이 여론조사를 해본 결과, 여전히 3분의 1의 사람이 믿는 경향을 보였고, 반 가까운 사람들이 다소 믿는 쪽이라는 조사결과를 내놓았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예상 외로 많은 사람들이 미신과 점을 믿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별점은 물론 서양의 점성술(astrology)에서 나온 것이다. 인간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천문학상의 현상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믿는 신앙체계에서 나온 것이 바로 점성술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시리우스가 지평선 위로 떠오르면 곧 우기가 시작되고 나일강이 범람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는 농사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별의 운행을 보고 미래에 일어날 자연현상을 예측하는 패턴 읽기는 어느덧 역전되어, 시리우스가 뜸으로써 나일강이 범람하는 것으로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천체의 운행을 사람의 운명과 결부시키게 된 동기다. 점성술의 탄생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점성술의 시조는 최초로 황도 12궁 별자리를 만든 바빌로니아의 칼데아인으로 추정되고 있다. 기원전 1700년부터 1500년 사이에 이 지역에서 만들어진 비석을 살펴보면, 7개 행성의 위치와 전쟁, 기근, 왕위 교체 등과 관련된 예언이 발견되고 있다. 이것이 점성술에 관해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문헌이다. 이후 이들은 기원전 625년 신바빌로니아 제국을 건설했고, 점성술은 서서히 체계를 갖추어갔다. 황도 12궁과 일곱 행성(태양, 달,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과의 관계에서 성립된 고대 바빌로니아의 점성술에서 태양과 달을 포함하는 7개의 행성은 신이며, 의지를 갖고 움직이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이 모두 같은 궤도 위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각 궁에 나름대로의 의미가 생성되어, 행성과 행성의 관계뿐만 아니라, 각각의 행성과 그 행성이 머물고 있는 궁과의 관계도 예언 속에서 연관 맺게 되었다. 그 결과, 구체적이고 다방면에 걸친 예언이 가능해지게 되었다. 이 바빌로니아 점성술은 유럽뿐만 아니라 널리 이집트, 인도까지 퍼져나갔다. 기원 2세기 천동설의 결정판인 '알마게스트'(Almagest)를 쓴 프톨레마이오스도 생업은 점성술사였다. 이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책인 '테트라비블로스'(Tetrabiblos)를 쓴 사람이 바로 그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저서에는 "천문학은 제1의 과학이며 독립적인 것이다. 점성술은 제2의 과학이며, 제1의 과학의 응용에 지나지 않는다. 그 자체는 2류의 과학이다"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하긴 천문학을 하면서 점성술로 밥을 먹은 사람은 그뿐이 아니다. 17세기에 행성운동의 3대 법칙을 발견한 불세출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도 궁해지면 점성술로 돌아오곤 했다. 슬픈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점성술은 어머니인 천문학을 먹여살리는 창녀일 뿐이다.” 그 시절에는 천문학과 점성술의 경계가 모호하기는 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갈릴레오와 케플러에 의해 굳건히 자리잡음에 따라 천문학과 점성술은 비로소 확연히 나뉘게 되었고, 점성술은 크게 힘을 잃기에 이르렀다. 1755년 11월 1일 토요일 기독교 성인들을 기리는 만성절 날 아침, 포르투갈의 리스본에 진도 9의 대지진이 일어났다. 포르투갈 왕국을 덮친 역대급 재앙인 리스본 대지진은 화재와 해일까지 불러와 리스본의 건물 중 85%가 파괴되고 10만 가까운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역사상 최악의 지진이었다. 당시 충격받은 유럽 지식층 일각에서는 이런 말이 나왔다고 한다. “만약 점성술이 맞다면 각기 다른 별자리에 태어난 10만 명의 사람이 어찌 한날한시에 다 같이 죽을 수 있단 말인가?” 현대 서양점성술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은 주로 황도 12궁이다. 12궁의 각각은 탄생 시기를 나타내며, 사람의 성격을 분석하고 점성학적 자료를 통해 미래를 예측한다. 동양에서 12간지로 하는 띠별 운세와 비슷하다. 점성술사는 새로 바뀐 별자리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며, 천체의 실제 위치보다는 2000년 넘게 내려온 오래된 별자리를 이용하여 관습적으로 점을 본다. 별점을 믿고 안 믿고는 개인이 선택할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이광식 칼럼니스트 joand999@naver.com 
  • [제45회 서울보훈대상] 전몰군경 유족 이맹임, 나라 사랑 배지 달기·지역·현충 시설 정화

    [제45회 서울보훈대상] 전몰군경 유족 이맹임, 나라 사랑 배지 달기·지역·현충 시설 정화

    이맹임(66)씨는 대한민국 전몰군경유족회 서울특별시지부 용산구지회장이다. 서울·대전현충원의 참배객 안내를 진행하고 환경 정화 운동 및 현충일 행사 시 내방객에게 음료를 제공하는 봉사 활동을 펼쳤다. 또 나라 사랑 배지 달기와 함께 초등학교 앞에서 태극기 알기 운동을 펼치는 등 다양한 선양 활동으로 보훈 문화 확산에 기여했다. 독거·고령 회원과 자매결연을 맺고 명절 위문품 전달, 청소 등을 함께 하며 재가회원들의 복지 증진에 기여했고 효창공원 등 지역사회 정화 활동을 위한 길거리 캠페인을 진행하는 등 기초질서를 발전시키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진행했다. 또 6·25참전학도순적비(용산), 이원등상사상(노들) 현충 시설 오물 제거, 낙엽 쓸기, 비석 닦기 등 현충 시설 정화활동을 통해 애국 정신을 고양하고자 했다.
  • 여덟번의 오르내림 … 인생이다

    여덟번의 오르내림 … 인생이다

    해발 327.4m 단출한 듯 가파른 봉우리… 숨이 차오르면 쉼과 절경을 내준다오… ‘8폭 병풍’ 아래 홍천강은 더없는 벗이라오등산로에서 인생을 보았다고 한다면 거창한 해석일까요. 아득한 봉우리를 목표 삼아 길을 오르고, 정상에서 청량한 바람 한 줄기에 좋아라 하다가, 넘어질세라 노심초사하며 길을 내려옵니다. 평탄한 지형에서 숨을 고르기도 잠시, 또다시 육중한 암벽이 앞을 막아섭니다. 암벽과 씨름하다가 걸음이 멈칫할 때도 있지요. 몇 걸음 앞에 보이는 건 제 몸집만 한 바위뿐. 길을 잘못 들어섰나 싶은데 가까이 다가가면 바위 뒤로 철 계단이 있습니다. 막다른 길인 줄 알았는데 길이 이어질 때의 안도감이란. 이 모든 게 어찌 산행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일까요. 오르락내리락을 여덟 번 되풀이하는 홍천 팔봉산은 고되다 즐겁다 파고를 이루는 인생과 닮았습니다.팔봉산은 해발 327.4m다. 높이가 동네 뒷산처럼 낮지만 2002년에 산림청이 선정한 100대 명산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팔봉산이 명산이 된 건 홍천강 위로 봉우리들이 솟은 풍경과 암봉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산을 타는 재미 때문이다. 봉우리 여덟 개를 오르는 일은 만만치 않다. 이 바위에서 저 바위로 낑낑대며 옮겨가거나 밧줄을 잡고 오르거나 손바닥만 한 철 발판에 몸을 맡겨야 한다. 여덟 번의 정상에서 맞는 초여름 바람은 선풍기 바람보다 시원하다. 산을 감싸 흐르는 홍천강에선 산행의 땀과 더위를 씻어낼 수 있다. 여름날 풍류를 즐기기 위한 조건들을 두루 갖춘 셈이다. ●롤러코스터처럼, 클라이밍처럼 역동적인 산 봉우리가 여덟 개여서 팔봉산이다. 흙이 아니라 바위 봉우리다. 300m를 조금 넘는 산이라고 우습게 봤다가는 큰코다친다. 1봉에서 8봉까지는 2.6㎞. 길이는 짧지만 암벽 사이로 등산로가 난 데다 오르내림이 많은 산세다. 바위 타기를 하거나 밧줄을 잡는 일의 연속이다 보니 등산객들의 얼굴에는 암벽 등반에 나선 산악인이 된 듯 비장한 기운마저 감돈다. 클라이밍을 방불케 하는 팔봉산 등산로는 단출하다. 오르는 길은 등산 들머리에서 1봉으로 가는 길뿐이다. 길도 일방통행이라 봉우리까지 올랐다가 내려오고 다시 다음 봉우리로 오르기를 반복하면 된다. 그에 비해 하산로는 네 개나 된다. 8봉으로 내려오는 게 정석이지만 2봉과 3봉, 5봉과 6봉, 7봉과 8봉 사이에도 하산로가 있다. 바위를 잡을 일이 많으니 등산 장갑은 필수다. 1봉까지 오르는 시간은 40여분. 안내 표지판에는 여덟 봉우리를 오르는 데 2시간 30분, 먼저 다녀간 이들의 인터넷 후기에는 3시간이 걸린다고 나와 있다. 첫 봉우리부터 시간을 너무 잡아먹었나 싶지만 평지부터 올랐으니 이 정도 시간이 걸리는 게 당연하다. 앞으로 마주할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는 15분 내외면 오를 수 있다. 지척에 있는 듯 보여도 다음 봉우리까지의 여정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바위 절벽에 밧줄과 발 받침대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팔봉산 최고봉인 2봉 정상에는 아담한 당집, 삼부인당이 있다. 조선 선조 때인 1590년대부터 팔봉산 일대 사람들이 마을의 평온을 빌며 당굿을 해오던 곳이란다. 당집 맞은편 전망대에 서면 속이 트이는 정도가 아니라 뻥 뚫린다. 바람을 가로막는 바위가 없어 강바람에 땀이 식는다. 3봉은 철제 계단이 정상까지 이어져 있어 오르기 편하다. 지나온 2봉과 가야 할 4봉이 양옆에 우뚝 솟아 있고 곡선을 그리는 홍천강이 보인다. 지금까지 언뜻언뜻 보이던 홍천강이 제 모습을 확 펼쳐 보이는 구간이 이곳이다. 홍천강 일대를 완상하기에 최고의 장소다. 300m가 조금 넘는 산에서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한 풍경 그 이상이다. 물은 여기에 산은 저기에, 누군가 정성껏 배치한 듯 짜임새 있는 경치가 아름답기도 하다. 겹겹이 이어진 능선은 진초록, 산 따라 흐르는 강물은 연청빛이다. 한껏 물오른 초록과 파랑에 눈이 시원하다. ●보물찾기하듯 숨은 비석 찾기 ‘인증샷’ 4봉은 봉우리보다 오르는 길에 난 굴 때문에 유명하다. 바위틈 구멍을 빠져나오는 어려움이 출산하는 고통과 같다고 ‘해산굴’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사람 하나 들락날락할 정도로 비좁아 밑에서 받쳐주고 위에서 끌어주지 않으면 산행 초보자는 빠져나오기 어렵다. 굴을 통과할 엄두가 안 난다면 옆에 난 우회 다리를 건넌다. 5봉부터 7봉까지도 해 볼 만하다. 길이 험하긴 하지만 도저히 닿지 못할 난공불락의 요새는 아니다. 산을 오르는 또 다른 즐거움은 보물찾기하듯 각 봉우리의 비석을 찾아내는 것이다. 크기가 크지 않아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잘 살펴야 한다. 비석 앞에서 ‘인증샷’을 남기는 이도 여럿이다. ●고통스럽던 오르막도 쉬어가는 내리막도 인생길 8봉 앞에서는 많은 등산객이 머뭇거린다. 8봉은 가장 위험한 코스니 등산 경험이 적다면 하산하라는 경고판이 발목을 붙잡는다. 이 악물고 마지막 봉을 오른 이에게는 고생한 만큼의 보상이 주어진다. 수직 절벽 아래로 홍천강이 돌아나가는 수려한 풍경도 그러하지만, 지나온 봉우리를 돌아보며 드는 성취감은 아찔한 쾌감에 가깝다. 내려갈 때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바짝 주고 끝까지 긴장을 놓지 말 것. 내리막길이 급경사이긴 하지만 밧줄과 발판, 철 손잡이가 있어 위험하진 않다. 산행은 숨찬 오르막과 가파른 내리막을 반복한다. 길이라고 할 수 없는 바위 사이를 더듬어 가며 오르고, 밧줄이 있으니 이 길이겠거니 짐작하며 내려온다. 이 길과 저 길 사이에서 헤맬 때는 앞서간 이들의 리본이 길잡이가 돼 준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에는 누군가의 도움도 받는다. 팔봉산 등산로가 인생길의 축소판 같다고 하면 과장된 해석일까. 인생길은 혼자만의 등정이 아니라 길 앞에서 머뭇대고 누군가와 함께 가는 여정일 수 있다. 외려 그 편이 삶의 아름다움을 찬찬히 살펴보기에 더 낫지 싶다.●물놀이·낚시… 홍천강서 즐기는 여름날 풍류 등산으로 땀을 흠뻑 흘렸다면 차가운 강물에서 쉬어 갈 차례다. 강에 들어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산로에서 마주하는 강을 가로지르거나, 팔봉교를 건너 주차장 쪽으로 걸어와 강변으로 내려가거나. 방법이 어찌 됐든 산을 오른 뒤 땀을 식히기에 이만한 곳도 없다. 여덟 개 봉우리가 병풍처럼 펼쳐진 팔봉산 아래, 강물이 휘감아 돈다. 고개를 들면 산자락이 펼쳐지고 앞을 보면 물줄기가 유유히 흘러가니 산 좋고 물 좋은 강원도에서도 이만하면 풍경으로 뒤지지 않는다. 홍천강이 인기 있는 건 풍경 때문만은 아니다. 물고기가 잘 잡히는 낚시터이자 수심이 얕아 어린아이가 있는 가족에게 훌륭한 물놀이장이다. 팔봉산관광지 앞쪽 강물은 어른 허벅지 정도 깊이라 아이들도 몸을 풍덩 담글 수 있다. 강변에는 손맛을 느끼고픈 낚시꾼들이 낚싯대를 드리운다. 견지나 투망 같은 간단한 낚시 도구로도 메기, 쏘가리, 모래무지 같은 민물고기가 잘 낚인단다. 강줄기를 따라 팔봉산, 밤벌, 반곡 등 10여 개의 오토캠핑장이 늘어서 있어 캠핑족도 많다. 강을 찾은 이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경치를 즐긴다. 바지를 걷어 올리고 탁족하는 이들, 물가에 돗자리를 펴고 이야기를 나누는 가족들, 강변 조약돌이 내는 달그락달그락 소리에 푹 빠진 사람들…. 산자락 아래, 홍천강에서 여름날 풍류가 한창이다. 글 이수린(유니에스 여행작가) 사진 권대홍(사진작가) ■여행수첩(지역번호 033) →가는 길:서울양양고속도로 남춘천IC삼거리에서 ‘양평, 춘천, 비발디파크’ 방면으로 우회전, 광판삼거리에서 ‘양평, 남산’ 방면으로 좌회전한다. 팔봉산로에서 팔봉산 방면 왼쪽 길로 향하면 주차장 입구다. 팔봉산 매표소와 들머리는 팔봉교 건너편에 있다. →맛집:팔봉산 관광지에 식당이 몰려 있다. 주차장 옆 팔봉산 오뚜기식당(434-7666)은 쏘가리, 송어 등 민물고기 회와 잡고기 매운탕을 판다. 팔봉산 매표소 옆 오동나무집(434-0537)은 막국수와 산채비빔밥을 낸다. 홍천 하면 화로구이를 빼놓을 수 없다. 고추장 양념을 버무린 삼겹살을 참나무 숯불로 구워낸 음식이다. 중앙고속도로 홍천IC에서 차로 5분 거리에 화로구이 골목이 있는데, 양지말 화로구이(435-7533)가 원조다. →잘 곳:홍천강 물길을 따라 펜션과 캠핑장이 즐비하다. 펜션푸름(432-9411)은 리조트형 풀빌라 펜션으로 야외 수영장, 스파, 개별 바비큐 시설을 갖췄다. 밤벌 오토캠핑장(434-8971)은 밤나무가 많아 여름에도 무덥지 않은 오토캠핑장이다. 휴토피아 글램핑(1599-7130)은 깨끗한 시설을 자랑하는 글램핑장이다. 침대형 글램핑과 온돌형 글램핑, 두 가지 타입의 객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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