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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원 초안산에 수국 가득한 ‘힐링타운’ 생긴다

    노원 초안산에 수국 가득한 ‘힐링타운’ 생긴다

    서울 노원구가 초안산 비석골 근린공원 일대에 수국이 가득한 ‘초안산 힐링타운’을 조성해 내년 6월 선보인다고 7일 밝혔다. 지난 민선 7기부터 권역별 힐링타운을 조성해 온 노원구는 이번 초안산 힐링타운을 통해 ‘힐링 도시’를 완성한다는 방침이다. 구는 우선 시설 개선 공사로 비석골 공원을 새로 단장한다. 공원 입구 바로 옆에 있던 기존 관리실 건물을 철거하고 주민들이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인 ‘휴가든’을 조성한다. 또 아이들을 위한 물놀이 시설을 새로 설치하고 숲속 쉼터, 평상을 배치해 온 가족이 즐기는 휴식 공간으로 만들 예정이다. 공원 내 공연장으로 이용되던 야외 공간에는 인조 잔디를 깔고 농구 골대를 설치하는 등 활용도를 높이고, 공원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운동 기구는 한곳으로 모은다. 초안산의 아름다운 자연과 어우러지는 생태 연못과 초화원도 만든다. 불암산 힐링타운을 대표하는 철쭉동산처럼 초안산 힐링타운을 대표하는 수국동산으로 초화원을 꾸밀 계획이다. 장애인, 어르신, 임산부 등 보행 약자도 즐길 수 있는 산책로를 마련한다. 구는 민선 7기부터 자연을 활용한 권역별 힐링 공간을 조성한 데 이어 민선 8기에는 이 공간에 문화를 입히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불암산 힐링타운과 화랑대 경춘선 힐링타운은 지역을 넘어서 서울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로 자리잡았다. 오승록 노원구청장은 “불암산 철쭉동산처럼 초안산에도 수국이 만개하는 아름다운 공간이 생길 것”이라며 “초안산 힐링타운으로 ‘힐링도시 노원’을 완성하고, 그 공간에 문화를 입혀 문화도시로 나아가는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 ‘빈 살만 효과’ 무보, 사우디 수출입은행과 맞손…“수출 확대로 중동붐”

    ‘빈 살만 효과’ 무보, 사우디 수출입은행과 맞손…“수출 확대로 중동붐”

    “빈 살만 방한 계기 중동 수주 물꼬 트는 촉매제될 것”사우디아라비아의 실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겸 총리의 방한을 계기로 오일머니를 담을 중동 수출에 청신호가 켜진 가운데 한국무역보험공사가 사우디 수출입은행과 손잡고 양국 기업의 수출 금융 지원을 통한 ‘제2의 중동붐’ 실현에 속도를 낸다. 무보는 6일 서울 종로구 본사에서 사우디 수출입은행과 양국 기업 수출 확대를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고 7일 밝혔다. 사우디 수출입은행은 비석유부문 수출 확대를 위해 2020년 설립된 수출신용기관으로, 무보와 업무협약을 맺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무보는 “빈 살만 왕세자 방한을 계기로 경제 협력 분위기가 무르익은 가운데 체결된 이번 협약은 우리 기업의 중동지역 수주 물꼬를 트는 촉매제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양국 기관은 해외 프로젝트 발굴과 무역 금융 지원에 협력하는 한편 상대 국가가 희망하는 수출·수입 거래선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계획이다. 또 사우디 현지 인프라·에너지 프로젝트 관련 정보와 무역금융 노하우를 주고받으며 우리 기업의 사업 참여 기회를 확대하는 동시에 사우디가 현재 생산을 추진하고 있는 그린수소와 그린암모니아의 국내 도입을 추진한다. 무보는 앞서 사우디 국영기업 아람코와 재무부, 국부펀드(PIF)를 비롯한 주요 금융·공공기관과도 4차례의 업무협약을 체결했었다. 이인호 무역보험공사 사장은 “에너지·인프라 분야 최적의 파트너인 사우디 수출신용기관과의 협약으로, 3대 전략시장 중 하나인 중동과의 협력 네트워크 구축에 일조하게 돼 뜻깊다”면서 “사우디와 전략적 파트너십을 지속 강화해 우리 기업에게 더 많은 수출 기회가 제공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문태준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문태준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문태준 당신은 나조차 알아보지 못하네요를 깔고 아주 가벼운 이불을 덮고 있네한층의 재가 당신의 몸을 덮은 듯하네눈도 입도 코도 가늘어지고 작아지고 낮아졌네당신은 아무런 표정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네서리가 빛에 차차 마르듯이 숨결이 마르고 있네당신은 평범해지고 희미해지네나는 이 세상에서 혼자의 몸이 된 당신을 보네오래 잊지 말자는 말은 못하겠네당신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네우리들의 마지막 얼굴을 보네 당신이 혼자 가서 울고 싶은 장소는 어디입니까. 당신은 언제 가장 큰 소리로 웃었고, 언제 회한으로 얼룩진 가슴을 문지르며 발길을 돌렸나요. 오늘 본 얼굴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에 무섭고 아파서 눈물 흘린 적 있었나요. 팔순이 다 되어 가는 어머니는 제 얼굴을 알아볼 때도 있고, 알아보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요양원에서 누워 지내는 탓에 볕을 자주 쬐지 못한 피부가 순두부처럼 흽니다. 어머니는 자꾸만 이불을 만지작거리며, 입으로 가져가려 합니다. 나뭇가지처럼 마르는 몸, 가느다란 숨을 쉴 때마다 당신을 덮은 요가 조금 올라갔다 내려갑니다. ‘슬픔에도 기회를 줘야 한다’는 친구의 말에 기대어 살아가는 요즘입니다. 삶은 재위에 세운 비석처럼 쓰러지기 쉬운 것임을. 언젠가 내 얼굴도 마지막이 되어 ‘평범해지고 희미해’져 흙으로 돌아갈 거란 사실을 자주 잊고 살았습니다. 애도의 얼굴은 개별적이어서 각기 다른 무게와 온도로 옵니다. 충분히 슬퍼하려면 먼저 슬픔을 끌어안아야 합니다. 엎드려 울 때 우리의 얼굴은 낮아집니다. 바닥과 수평이 됩니다. 신미나 시인
  • 제주 곳곳에 일제잔재 비석·군사시설… 역사 바로 세우기 나서나

    제주 곳곳에 일제잔재 비석·군사시설… 역사 바로 세우기 나서나

    제주도가 일제잔재에 대한 조사 및 연구를 통해 친일문화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고 역사 바로 세우기 토대를 마련한다. 제주특별자치도는 ‘제주도 식민잔재 청산 활동 추진계획 수립연구용역’ 결과를 발표하고 후속 사업을 추진한다고 22일 밝혔다. 제주도내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이 조성한 군사시설, 일본 연호를 사용한 비석 등 일제잔재가 곳곳에 흩어져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제잔재’란 일제의 침략전쟁과 식민통치 기간 일본제국주의의 영향 아래 생산되거나 정착하였음에도 해방 이후 청산하지 못한 유무형의 부정적 유산을 가리킨다. 유사하게 사용되는 용어로 ‘식민잔재’ ‘친일잔재’ ‘친일문화잔재’ 등이 있다. 도내 일제 강점기 일본군이 조성한 군사시설을 조사한 결과 제주시 64개, 서귀포시 61개 등 총 125개가 확인됐다. 이 가운데 국가등록문화재로 등재된 것은 제주시 동지역 2개(건입동, 해안동), 제주시 읍면지역 3개(한경면, 조천읍, 성산읍), 서귀포시 읍면지역(대정읍) 10개 등 총 15개로 격납고 2개, 동굴진지 9개, 훈련소 2개, 탄약고 1개, 통신시설 1개 등이다. 대정읍 군사시설 19개 중 상모리 지역에는 15개가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특히 이번 조사에서 일본 연호가 새겨진 비석 176개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도내 비석에 새겨진 일본 연호는 대정(大正·일왕 요시히토 시대), 소화(昭和·일왕 히로히토 시대) 등 두 종류가 확인됐다. 일본 연호가 새겨진 비석은 지역별로 제주시에 161개, 서귀포시에 55개가 있다. 이들 비석은 주로 도내 14개 초등학교에 총 59개, 22개 마을에 총 30개가 소재한 것으로 조사됐다. 일본 연호 비석은 마을 회관 건립, 우물 축조, 학교 건립과 보수 등 당시 마을 발전과 교육 진흥을 도모한다는 명목 아래 재정 지원 및 토지 제공 등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 대다수다. 주로 읍면 지역 초등학교 교정에 건립된 비석이 다수이며, 그밖에 리사무소와 복지회관 및 경로당 등 마을 행정의 중심지에 세워져 있다. 등명대(燈明臺)는 일제강점기부터 제주도 내 소규모 포구마다 건립하여 등대의 역할을 한 축조물로 총 17개소가 있으나, 일본 연호가 각자된 비석이 세워진 곳은 조천읍 북촌리 등명대가 유일하다. 용역을 수행한 제주역사문화진흥원은 “일본 연호가 새겨져 일제강점기 식민잔재의 성격을 띠긴 했지만 모두 청산 대상은 아니다”면서 “오히려 일제강점기 제주민의 단합과 교육열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로 계속 보존하며 홍보 활동을 강화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 [정은귀의 詩와 視線] 어느 밤의 이야기/한국외대 영문학과 교수

    [정은귀의 詩와 視線] 어느 밤의 이야기/한국외대 영문학과 교수

    네위에네아래네곁에네밑에네옆에네너머네뒤에네안에 누가 밤을 면도날로… ―김혜순, ‘죽음의 자서전’ 중 시인은 예언자인가. 이토록 끔찍하고 서늘한 예언자인가. 시인은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무덤을 지키는 이. 이름도 없는 가엾은 죽음을 통곡하는 사람. 2016년에 출간된 ‘죽음의 자서전’은 세월호를 통과한 이 나라의 슬픈 죽음들에 대한 곡(哭)이었다. 아이고 아이고 어이 어이…. 어린 날 누군가의 장례식에서 곡을 하는 아버지의 음성을 들으면서 망자와의 관계에 따라 다르게 변주되는 저 소리는 무엇으로 번역될 수 있을까 혼자 상상하곤 했다. 저 애도의 언어는 기막힌 슬픔인 동시에 어떤 동참과 초대, 연대라는 생각. 망자 앞에서 누구나 죄인이 되는 몹시 난감한 그 별리의 현장을 함께 지키는 그 곡(哭)을 이 겨울 우리는 다시 하고 있다. 그토록 힘들게 떠나보낸, 아직 아직도 앓고 있는 죽음이 다시 우리에게 온 것이다. 자유롭고 발랄한 이태원의 밤거리에서. 이 시를 다시 읽으니 참사 이후 너무 아파 죽음을 앞당겨 선언하고 앓고 통과하는 시인의 처연한 울음이 바로 지금 여기 다시 도착한 156명의 떼죽음을 곡하는 것 같아 말문이 막힌다. 이어지는 구절 “누가 밤을 면도날로 긁고 있다고 말해야 하나 / 면도날 긁힌 자리마다 밤이 잠깐씩 환해진다고 말해야 하나”를 읽노라면 망자를 보내는 마흔아흐레의 통곡이 한 매듭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다시 순환하듯 시작된 것만 같아 애통하기만 하다. 시인의 말에서 시인은 부끄럽다고 한다. 아직 죽지 않아서. 젊은이들이 제 명에 살지 못하고 이런저런 사고로 연이어 죽는 나라에서는 어른으로 사는 일이 부끄럽다. 시인은 “시 안의 죽음으로 이곳의 죽음이 타격되기를” 바라는 소망에서 이 시를 낳았다고 말하는데, 죽음을 적음으로써, 죽음을 부름으로써, 이제 다시는 죽음 따위 쓰고 싶지 않은 마음, 그 통곡이 시의 언어로 죽음을 곡하게 만든 것이다. 영어로 번역돼 캐나다 그리핀시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한 시집을 다시 읽던 10월 29일의 밤. 평화롭던 일상의 휴식과 놀이가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방식의 죽음으로 바뀐 밤. 안전한 나라라는 믿음이 허구였음이 드러난 밤. 면도날로 날카롭게 베인 허약한 우리의 실체. 막 만난 이들의 숨결이 비명으로 차오른 그 밤의 죽음에 대해 우리는 아직 이해할 수 있는 말을 만나지 못했다. 국가가 정한 애도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헤맨다. 번호가 매겨진 주인 잃은 물건들도 곧 주인 없이 버려질 것이다. 철학자 데리다는 고정된 곳 없이는 애도는 허용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 밤의 통곡을 그 비석을 우리는 어디에 세워야 하는가.
  • 과거 공부보다 ‘위기지학’ 실천…최익현·임병찬 ‘항일의병’ 결의[이동구의 서원 산책]

    과거 공부보다 ‘위기지학’ 실천…최익현·임병찬 ‘항일의병’ 결의[이동구의 서원 산책]

    영암 구림, 나주 금정, 정읍의 원촌은 호남의 3대 양택지로 꼽힌다. 그중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원촌리에 자리잡은 서원이 무성서원이다. 호남정맥(노령산맥)을 바라보며 특이하게도 마을 안쪽에 자리잡고 있다. 조선의 서원들이 대개 백성이 살고 있는 마을을 벗어나 한적하고 자연경관이 뛰어난 곳에 자리를 잡아 유생들로 하여금 학문과 유식을 통해 심신을 수양하도록 했던 것과 사뭇 다르다. 서원의 제향 인물 등 무성서원만의 내력에서 그 원인을 엿볼 수 있으리라 짐작한다. ●마을 안에 위치하지만 단출한 멋 무성서원은 여느 서원과 달리 단출하다. 서원의 출입문이자 누각인 현가루(絃歌樓)와 강학기능의 명륜당(明倫堂), 제향자의 신위가 모셔진 태산사(泰山祠)가 전부다. 유생들이 기거하던 동재와 서재조차 없고 서원담장 밖에 강수재(講修齋)라는 작은 건물 한 채뿐이다. 가장 기본적인 건축물로만 이루어져 파격적이다 못해 고즈넉한 분위기가 서원을 압도한다. 건물 수를 늘리는 건축행위를 자제함으로써 검소하고 청빈으로 대변되는 선비 정신을 유지하려는 의지가 느껴진다. 현가루의 좌우에는 서원과 이 지역에 공적을 남긴 이들을 칭송하는 비석과 비각이 줄지어 있다. 안성렬(64) 무성서원 별유사는 “서원이 위압적이거나 요란스럽지 않고 단순해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줄 정도로 평안하다”면서 “마을 안에 위치한 데다 편안한 분위기로 사람 중심의 서원이라 자랑하고 싶다”고 했다. ●호남의 수원… 세계문화유산 등재 무성서원의 사당인 태산사는 최치원(崔致遠)을 비롯해 신잠(申潛), 정극인(丁克仁), 송세림(宋世琳), 정언충(鄭彦忠), 김약묵(金若), 김관(金灌) 등 7위를 제향하고 있다. 우리나라 유학사상 최초의 도통(道通)으로 추앙받는 최치원은 통일신라 정강왕 때 태산(지금의 태인) 군수로 부임해 이 지역과 인연을 맺었다. 상춘곡의 저자 정극인은 이곳에서 고현동 향약을 창시했고, 신잠은 태인현감으로 부임해 4개의 학당을 세우는 등 모두가 이 일대의 학문 발전과 선정을 이끌었던 인물들이다. 무성서원이 마을 한가운데에 입지하면서도 품격과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지역을 선정으로 다스렸던 관리를 향사하고 주민과 한데 어우러지면서 지역문화를 이끌어 왔기 때문이라 평가되고 있다. 숙종 22년인 1696년에는 무성서원이 조정으로부터 사액을 받았으나 현판의 저자는 지금껏 확인되지 않고 있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무성서원은 전라우도의 수원(首院)으로 필암서원, 포충사와 함께 훼철을 면해 호남의 대표 서원으로 남았다. 서원에 아로새겨진 ‘사림수선’(士林首善)이란 문구가 무성서원의 위상을 대변해 준다.무성서원은 호남지역의 성리학에 깊이를 더했을 뿐 아니라 나라가 위태로울 때는 분연히 일어날 수 있는 정신적 기반이 됐다. 1906년 최익현과 임병찬 등이 의병(丙午倡義)을 일으키기로 결의한 곳도 바로 무성서원이다. 무성서원의 강회(講會)와 유림 동원력, 대표성을 기반으로 가능했던 의거로, 이 서원의 정신사적 위상을 가늠케 한다. 취재에 동행한 신시섭 한국의서원통합관리 본부장은 “담백하고 강직한 선비의 정신세계가 잘 드러나는 곳으로 평가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데도 큰 이견이 없었다”고 했다. ●춘추향사, 황토가 뿌려진 신도 무성서원의 춘추향사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에 거행된다. 향사 이틀 전에 서원에 모여 집사를 정하는 분방의식을 행한다. 향사에 필요한 제물을 현가루부터 사당까지 중앙의 문을 통과해 운반하는데 이 길을 신도(神道)라고 한다. 다른 서원과 달리 이 신도 양쪽으로 드문드문 황토를 깔아 놓는다. 황토를 깐 안쪽이 신도임을 나타냄과 동시에 제물에 부정한 일과 악귀가 침입하는 것을 막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기자가 찾은 날은 추계향사를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서원 마당에는 뿌려진 황토가 여전히 제 빛을 잃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특이하게도 향사 때에 제수 목록에 소금(형염·刑鹽)이 포함된 것도 다른 서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관행이라고 한다. 서원에 모셔진 인물에게 향을 올리고 예를 갖추는 것은 ‘봉심’(奉審)이라고 한다. 무성서원에 봉심한 사람들의 방명록인 무성서원 심원록(尋院錄)에는 1858년부터 1879년에 이르기까지 약 20년 동안의 봉심객 이름과 사는 곳, 방문 날짜등이 소상히 자필로 기록돼 있다.●학문 강의로 도를 밝히는 강습례 서원은 설립 초기부터 개개인의 인격적 완성을 공부의 일차 목표로 삼았다. 관학이 과거 공부에 얽매여 있는 것을 비판하며 오직 학문의 가치만을 추구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장소로 서원이 설립된 것이다. 무성서원 또한 원규에서 이 같은 원칙을 고수했다. “성현의 글이나 성리의 학설이 아니면 서원 안에서 읽을 수 없다. 역사책은 반입을 허락하되 만약 과거 공부를 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다른 곳에서 하도록 한다”고 명문화했다. 무성서원에서 발간된 ‘무성서원지’에는 강습례(講習禮)라는 독특한 성격의 강회를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강회를 준비하는 과정과 참석자들의 위치, 몸가짐을 비롯해 유생들의 앉고 서는 위치까지 그림에 담았다. 1873년(고종 10년)부터 개최하기 시작한 강습례는 ‘학문 강의로 도를 밝히는’ 서원의 본질적인 기능을 모범적으로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서원철폐령 이후 서원에 대한 재정 지원 등이 끊기면서 강습례는 고을의 선비들이 모여 학덕과 연륜이 높은 사람을 주빈으로 모시는 향음주례(鄕飮酒禮)로 대체되기도 했다. 유학자들은 향음주례를 통해서도 화목한 사회가 이뤄질 수 있는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훼손된 경관 회복은 숙원 무성서원에서는 요즘도 정가수업(향음주례 때 사용됐던 시조 등 선비들의 음악)을 비롯해 붓글씨 수업과 인문학 강의 등이 열리고 있다. 이 지역 유림과 향토 학자들, 그리고 성리학 등 한학에 관심이 많은 주민 30여명이 매주 1차례 이상 모여 토론과 강의를 이어 간다. 선비정신을 배우고자 하는 가족단위 방문객과 학생 및 청소년들의 방문도 이어진다. 무성서원은 자치단체와 함께 서원 인근에 현대식 수련원 건설을 추진 중이다. 물론 지역민 청소년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에도 나서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후 지금까지는 문화재청의 재정 지원으로 서원주변 경관정비 사업도 꾸준히 진행해 왔다. 자치단체로부터는 춘추 향사비 등 각종 행사비도 지원받고 있으나 충분하지는 않다. 더욱이 내년부터는 일부 재정 지원이 끊길 위기에 있어 걱정이다. 무성서원은 다른 서원과 달리 마을 안쪽에 위치하고 있어 입구가 좁고 시야가 막혀 있는 게 아쉽다. 게다가 서원 앞에는 민가 2~3채가 자리하고 있어 탁 트인 경관 확보가 어렵다. 서원의 누각인 현가루의 진가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재정적인 지원이 절실하다. 서원의 운영과 관리를 총괄하고 있는 안 별유사는 “서원이 머물면서 선현의 학덕을 체험하고 배우고, 느낄 수 있는 본연의 공간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꾸준한 재정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 영규, 휴정 승군 통솔 이전에 공주서 봉기… 청주성 탈환 일등공신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영규, 휴정 승군 통솔 이전에 공주서 봉기… 청주성 탈환 일등공신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영규, 전국 의승 기치 높이 든 기폭제왜군 “승산 없다” 판단 청주서 퇴각청주 앞서 1·2차 금산성전투에 참여 휴정 제자 영규는 동명이인설도당상관 제수 했으나 금산서 전사조선왕조, 전사 영규 유교식 예우무덤 만들고 진영 모시고 제사도임진왜란의 의승장(義僧將)이라면 서산대사 휴정과 사명대사 유정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휴정이 조선 승군을 통솔하기 이전에 공주 의승장 영규가 있었다. 영규대사의 봉기는 전국의 의승이 잇따라 기치를 높이 드는 기폭제가 됐다. 낫으로 무장한 영규의 승군은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근접전의 전력을 당대 최강으로 끌어올린 왜군을 압도하는 전투력을 과시했다. 왜군이 청주성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영규의 승군과 부딪쳐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서산대사 휴정의 문하로 20년 공부 기허당(騎虛堂) 영규(靈圭·?~1592)의 흔적이 가장 진하게 남아 있는 고장은 당연히 고향인 충남 공주다. 공주에서 논산으로 가는 국도는 계룡산 자락과 함께 남쪽으로 달리는데 갑사 초입에 계룡면 소재지가 있다. 영규대사를 기리는 한 칸짜리 작은 여각(閭閣)은 계룡면행정복지센터 마당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고 보니 행정복지센터 앞길의 이름도 ‘영규대사로(路)’다. 이 길을 따라 논산 방향으로 조금 더 달리면 영규대사 묘를 알리는 표지판이 나타난다. 그런데 ‘스님의 무덤’이라니 좀 생소하다. 고승이 입적하면 화장해 부도에 모시는 것이 불교의 전통이다. 무덤 아래 그의 진영을 모시고 제사 지내는 영정각도 보인다. 조선왕조는 금산성싸움에서 전사한 영규대사를 불교식이 아닌 유교식으로 예우한 것이다. 속성(俗姓)이 밀양 박씨로 알려진 영규는 계룡산 널티(板峙)에서 태어났다. 갑사로 출가하고, 휴정 문하에서 공부를 마치고는 처음 머리를 깎은 갑사 청련암으로 돌아가 무예를 익혔다고 한다. ‘회양 표훈사 청허당 휴정대사비’에는 대사의 제자로 영규라는 이름이 있지만, 두 사람이 꼭 사제 관계였는지는 그다지 분명치 않다는 느낌도 든다. 갑사에 전하는 ‘임진의병승장복국우세 기허당대선사일합영규사실기’(事實記)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영규는 성품이 침착하고 강직했으며, 말수가 적고 용력이 뛰어나며 공부의 진척 속도가 빨랐다. 경전과 그 밖의 책을 20년 남짓 공부하고 나자 휴정은 영규에게 이제 고향인 호서로 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유했다는 것이다.갑사로 돌아온 영규는 스스로 불목하니가 돼 장작을 패고 불을 지피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절에서 가장 위계가 낮은 불목하니는 영규의 이력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각종 전승에는 영규가 장작을 다루며 무기로 만들어 무예를 익히는 모습을 부각시킨다. 금산 보석사에 1840년(헌종 6) ‘의병승장비’(義兵僧將碑) 건립을 주도한 당시 영의정 조인영도 비석 뒤편 ‘영규대사순의비명병서’에 ‘영규는 본래 신통한 힘이 있어 선승들이 쓰는 지팡이로 무예를 연마했다’고 적었다. ‘사실기’에는 갑사 대중이 “왜 불목하니 역할을 하느냐”고 묻자 영규는 “다른 사람이 반나절 걸리는 일을 나는 단번에 해낼 수 있기 때문”이라면서 “내가 번거롭더라도 잠깐 동안 열 군데 불을 때면 되는데 어찌 다른 사람을 쓰겠는가”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곧바로 ‘휴정의 제자’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605년(선조 38) ‘선무원종공신’ 명단에는 영규(靈圭)라는 이름을 가진 승려가 둘이다. 당대 의승군으로 활약한 동명이인의 존재를 보여 주는 게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우리가 영규에 주목하는 이유는 당연히 그의 법맥(法脈) 때문이 아니다. ● 영규 천체 움직임에서 국난 조짐 읽어 조선 후기 문인 연경재 성해응(1760 ~1839)은 ‘금산순절제신전’(錦山殉節諸臣傳)에 영규의 봉기 과정을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서술했다. 영규는 천체의 움직임에서 국난의 조짐을 읽었다. 살생을 하지 말라는 불가의 계율에도 국가에 은혜를 갚고자 나무로 무기를 만들고 낫 수천 개를 주조했으며 오백 남짓한 용맹한 승려를 모아 때를 기다렸다. 10년이 지나지 않아 왜적이 침입했는데 승려들이 흩어지려 하자 의(義)를 일으켜야 한다고 호소하면서 3일 낮밤을 통곡하니 감동한 승려 1000명 남짓이 죽기를 각오하고 갑사에서 봉기했다는 것이다. 하이라이트는 임진년 8월 1일의 청주성 전투다. 선조수정실록은 ‘영규는 사람됨이 장건하고 키가 보통 사람의 갑절이나 됐으며 지략과 계책이 있고 많은 무리를 잘 부렸다. 청주 전투도 실로 영규가 지휘하고 계획한 것이었다. 조헌이 금산전투를 굳이 고집하면서 자기의 말을 따르지 않자 틀림없이 패하리라는 것을 알고도 권율에게 서면으로 보고하고 군사를 합쳐 진군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의열(義烈)로 세상에 일컬어졌으니, 불교가 있은 이래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다’고 했다. 청주성 탈환의 일등 공신으로 영규를 꼽은 것이다. 영규와 승군의 청주성전투 과정은 충청도 관찰사 윤선각의 문집인 ‘문소만록’(聞韶漫錄)에 비교적 자세히 담겨 있다. 훗날 윤국형으로 이름을 바꾸는 윤선각은 의병 활동을 방해한다며 조헌이 불만스러워했던 인물이다. ‘문소만록’의 영규 관련 서술도 고위 인사의 냉정한 시각으로 한껏 내려다보는 분위기지만 평가만큼은 정밀하다는 인상이다. 윤선각이 만난 영규의 인상은 이랬다. ‘매우 건장하기는 하나 별다른 지혜나 꾀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녹록한 사람에 비할 바는 아니어서 한 방면을 방어하게 할 만은 했다. 내가 “만일 그대에게 승군 약간 명을 준다면 그대는 이들을 거느리고 가서 적을 치겠소?” 했더니, 그는 기꺼이 승낙했다. 이에 내포의 승군 수천 명을 뽑아서 그에게 거느리게 하고, 승병패두(僧兵牌頭)라 불렀다.’ 윤선각은 ‘영규는 글을 알지 못하고 사람들의 성명 정도만 조금 분별했다’고도 적었다. 윤선각은 ‘영규는 청주성전투로 안팎에서 명성이 났다’고 했다. ‘청주 전투 이후 승병이 곳곳에서 계속 일어났으니, 실로 영규가 불러일으킨 것’이라는 것이다. 조정에 올린 장계에는 ‘영규가 저희 무리를 많이 모았는데, 모두 낫을 가졌고 기율이 매우 엄해 적을 보고도 피하지 않았다’고 했다. 전투 과정의 일화도 흥미롭다. ‘영규는 청주에서 적을 칠 적에 관군 수령들이 혹 물러서면 짚고 있던 큰 몽둥이로 등을 치면서 “평일에는 고기를 먹으며 잘 지내더니, 이제 와서는 도망갈 생각밖에 없느냐?” 하니 감히 뒤처지는 수령이 없었다’는 것이다.● 왜적 침입하자 “義 일으켜야” 봉기 선조실록은 “충청도는 적의 요새가 되는 곳이다. 그런데 적이 청주를 차지한 지 벌써 넉 달이 넘었다. 중 영규가 의(義)를 분발해 성 밑으로 진격했는데 제일 먼저 돌입해 마침내 청주성을 공략했다. 그가 호령하는 것을 보면 바람이 이는 듯하여 그 수하에 감히 어기는 자가 없었고 질타하는 소리에 1000명의 중들이 돌진하자 다른 군사들도 이들을 믿고 두려움이 없었다’는 비변사의 보고 내용을 옮기고 있다. 영규의 의승군은 청주성전투에 앞서 전라도 의병장 고경명이 순국한 제1차 금산성전투에도 참여한 듯하다. 고경명의 종사관 유팽로가 남긴 ‘월파집’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해가 질 무렵 성문을 두드리며 들어오는 자가 있었다. 그가 급하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전일 말씀하신 영규상인(靈圭上人)이 승도 수백 명을 거느리고 왔습니다.” 공(고경명)은 즉시 나가서 맞아들여 인사를 나눈 다음 장수들에게 말했다. “영규가 왔으니 이는 반드시 하늘의 도움이다.”’ 호남의 대표적 유학자 고경명 진영의 불제자 영규에 대한 예우가 깎듯하기만 하다. 제2차 금산성전투의 경과는 ‘문소만록’을 참고한다. 조헌에 대한 윤선각의 시선이 차갑다는 것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영규는 “전라도 순찰사가 군사 수만 명으로 진격하려 하면서 나에게 선봉이 돼 주기를 청했으나 시기가 정해지지 않았으니, 경솔히 나갈 수는 없다”며 조헌에게 순찰사와 날짜를 약속하도록 권했다. 그런데 답장이 오기도 전에 조헌은 적을 속히 쳐야 한다고 고집하면서 금산으로 들어가니 영규도 마지못해 따랐다. 부하들이 “반드시 패할 것이니 가지 마소서” 했으나, 영규는 “가부를 의논할 때는 말을 좇지 않을 수도 있지만, 먼저 갔는데 따르지 않는다면 누가 구원하겠느냐?”고 했다.’ 당시 금산성의 왜군은 1만명을 헤아린 반면 조선군은 조헌 의병이 700명 남짓, 영규 의승군도 600~1000명 수준에 그쳤다. ‘문소만록’의 영규 관련 서술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청주의 적을 몰아냈다는 보고가 의주에 이르자, 조정은 이를 가상히 여겨 영규에게 당상관을 제수하고 옷감까지 보냈다. 하지만 영규는 이미 금산에서 죽어 받지 못했다.’
  • 아름다운 한복, 세계와 어울린 종로

    아름다운 한복, 세계와 어울린 종로

    서울 종로구가 우리 옷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선보이고자 개최한 ‘2022 종로한복축제’가 지난 8~9일 광화문광장 일대에서 3년 만에 대면으로 개최됐다. 구는 종로한복축제가 한글날 연휴를 맞아 광화문 일대를 찾은 시민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10일 밝혔다. ‘한복과 세계문화의 어울림’을 주제로 ▲한복패션쇼 ▲한복뽐내기대회 ▲종로한복예술제 ▲강강술래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펼쳐져 오가는 시민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종로구 자매결연도시 무형문화재 예술가들이 선보이는 ‘북의 판타지’ 공연도 펼쳐졌다. 이 밖에도 시민들이 광화문광장에서 한복을 빌려 입고 특별한 추억을 남길 수 있는 포토존이 진행됐다. ‘한복 바르게 입기’ 부스에서는 우리 옷을 제대로 착용하는 방법을 전했다. 대형 윷놀이나 비석치기를 즐길 수 있는 ‘전통놀이 라운지’, 오방색 매듭팔찌와 노리개를 만드는 ‘만들기 체험’ 부스 등 광화문광장 곳곳에 우리 문화를 만끽할 수 있는 공간이 열렸다. 정문헌 종로구청장은 “한복을 매개로 세계인과 소통하는 작은 문화외교의 장이었다”며 “많은 시민께서 한복문화의 정수를 담아낸 종로구 대표 축제를 즐기고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 가셨길 바란다”고 밝혔다.
  • 낫을 든 의승군에 왜군 야반도주하다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낫을 든 의승군에 왜군 야반도주하다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임진왜란의 의승장(義僧將)이라면 서산대사 휴정과 사명대사 유정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휴정이 조선 승군을 통솔하기 이전에 공주 의승장 영규의 봉기가 있었다. 영규대사의 활약은 전국의 의승이 잇따라 기치를 올리는 기폭제가 됐다. 낫으로 무장한 영규의 승군은 전국시대를 거치며 근접전에서 당대 최강이었던 왜군을 압도하는 전투력을 과시했다. 왜군이 청주성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던 것도 영규의 승군과 부딪쳐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기허당(騎虛堂) 영규(靈圭·?~1592)의 흔적이 가장 진하게 남아있는 고장은 당연히 고향인 충청남도 공주다. 공주에서 논산으로 가는 국도는 계룡산 자락과 함께 남쪽으로 달리는데 갑사 초입에 계룡면 소재지가 있다. 영규대사를 기리는 한칸짜리 작은 여각(閭閣)은 계룡면행정복지센터 마당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고 보니 행정복지센터 앞길의 이름도 ‘영규대사로(路)’다. 이 길을 따라 논산 방향으로 조금 더 달리면 영규대사 묘를 알리는 표지판이 나타난다. 그런데 ‘스님의 무덤’이라니 좀 생소하다. 고승이 입적하면 화장해 부도에 모시는 것이 불교의 전통이다. 무덤 아래 그의 진영을 모시고 제사지내는 영정각도 보인다. 조선왕조는 금산성싸움에서 전사한 영규대사를 불교식이 아닌 유교식으로 예우한 것이다.  속성(俗姓)이 밀양 박씨로 알려진 영규는 계룡산 널티(板峙)에서 태어났다. 갑사로 출가하고, 휴정 문하에서 공부를 마치고는 처음 머리를 깎은 갑사 청련암으로 돌아가 무예를 익혔다고 한다. ‘회양 표훈사 청허당 휴정대사비’에는 대사의 제자로 영규라는 이름이 있지만, 두 사람이 꼭 사제관계였는지는 그다지 분명치 않다는 느낌도 든다.  갑사에 전하는 ‘임진의병승장복국우세 기허당대선사일합영규사실기’(事實記)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영규는 성품이 침착하고 강직했으며, 말수가 적고 용력이 뛰어나며 공부의 진척 속도가 빨랐다. 경전과 그 밖의 책을 20년 남짓 공부하고 나자 휴정은 영규에게 이제 고향인 호서로 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유했다는 것이다. 갑사로 돌아온 영규는 스스로 불목하니가 되어 장작을 패고 불을 지피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절에서 가장 위계가 낮은 불목하니는 영규의 이력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선지 각종 전승에는 영규가 장작을 다루며 무기로 만들어 무예를 익히는 모습을 부각시킨다. 금산 보석사에 1840년(헌종 6) ‘의병승장비’(義兵僧將碑) 건립을 주도한 당시 영의정 조인영도 비석 뒷편 ‘영규대사순의비명병서’에 ‘영규는 본래 신통한 힘이 있어 선승들이 쓰는 지팡이로 무예를 연마했다’고 적었다.  ‘사실기’에는 갑사 대중이 “왜 불목하니 역할을 하느냐”고 묻자 영규는 “다른 사람이 반나절 걸리는 일을 나는 단번에 해낼 수 있기 때문”이라면서 “내가 번거롭더라도 잠깐동안 열 군데 불을 때면 되는데 어찌 다른 사람을 쓰겠는가”고 했다는 이야기가 실려있다. 이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곧바로 ‘휴정의 제자’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605년(선조 38) ‘선무원종공신’ 명단에는 영규(靈圭)라는 이름을 가진 승려가 둘이다. 당대 의승군으로 활약한 동명이인의 존재를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우리가 영규에 주목하는 이유는 당연히 그의 법맥(法脈) 때문이 아니다. 조선 후기 문인 연경재 성해응(1760~1839)은 ‘금산순절제신전’(錦山殉節諸臣傳)에 영규의 봉기 과정을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서술했다. 영규는 천체의 움직임에서 국난의 조짐을 읽었다. 살생을 하지 말라는 불가의 계율에도 국가의 은혜를 갚고자 나무로 무기를 만들고 낫 수천개를 주조했으며 오백 남짓한 용맹한 승려를 모아 때를 기다렸다. 10년이 지나지 않아 왜적이 침입했는데 승려들이 흩어지려하자 의(義)를 일으켜야한다고 호소하면서 3일 낮밤을 통곡하니 감동한 승려 1000명 남짓이 죽기를 각오하고 갑사에서 봉기했다는 것이다.  하이라이트는 임진년 8월 1일의 청주성 전투다. 선조수정실록은 ‘영규는 사람됨이 장건하고 키가 보통 사람의 갑절이나 되었으며 지략과 계책이 있고 많은 무리를 잘 부렸다. 청주 전투도 실로 영규가 지휘하고 계획한 것이었다. 조헌이 금산전투를 굳이 고집하면서 자기의 말을 따르지 않자 틀림없이 패하리라는 것을 알고도 권율에게 서면으로 보고하고 군사를 합쳐 진군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의열(義烈)로 세상에 일컬어졌으니, 불교가 있은 이래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다’고 했다. 청주성 함락의 일등공신으로 영규를 꼽은 것이다. 영규와 승군의 청주성전투 과정은 충청도 관찰사 윤선각의 문집인 ‘문소만록’(聞韶漫錄)에 비교적 자세히 담겨있다. 훗날 윤국형으로 이름을 바꾸는 윤선각은 의병활동을 방해한다며 조헌이 불만스러워했던 인물이다. ‘문소만록’의 영규 관련 서술도 고위인사의 냉정한 시각으로 한껏 내려다보는 분위기지만 평가만큼은 정밀하다는 인상이다.  윤선각이 만난 영규의 인상은 이랬다. ‘매우 건장하기는 하나 별다른 지혜나 꾀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녹록한 사람에 비할 바는 아니어서 한 방면을 방어하게 할 만은 했다. 내가 “만일 그대에게 승군 약간 명을 준다면 그대는 이들을 거느리고 가서 적을 치겠소?”했더니, 그는 기꺼이 승낙했다. 이에 내포의 승군 수천 명을 뽑아서 그에게 거느리게 하고, 승병패두(僧兵牌頭)라 불렀다. 윤선각은 ‘영규는 글을 알지 못하고 사람들의 성명 정도만 조금 분별했다’고도 적었다.  윤선각은 ‘영규는 청주성전투로 안팎에서 명성이 났다’고 했다. ‘청주 전투 이후 승병이 곳곳에서 계속 일어났으니, 실로 영규가 불러 일으킨 것’이라는 것이다. 조정에 올린 장계에는 ‘영규가 저희 무리를 많이 모았는데, 모두 낫을 가졌고 기율이 매우 엄해 적을 보고도 피하지 않았다’고 했다. 전투 과정의 일화도 흥미롭다. ‘영규는 청주에서 적을 칠 적에 관군 수령들이 혹 물러서면 짚고 있던 큰 몽둥이로 등을 치면서 “평일에는 고기를 먹으며 잘 지내더니, 이제 와서는 도망갈 생각밖에 없느냐?”하니 감히 뒤처지는 수령이 없었다’는 것이다.  선조실록은 “충청도는 적의 요새가 되는 곳이다. 그런데 적이 청주를 차지한 지 벌써 넉달이 넘었다. 중 영규가 의(義)를 분발해 성 밑으로 진격했는데 제일 먼저 돌입해 마침내 청주성을 공략했다. 그가 호령하는 것을 보면 바람이 이는 듯하여 그 수하에 감히 어기는 자가 없었고 질타하는 소리에 1000명의 중들이 돌진하자 다른 군사들도 이들을 믿고 두려움이 없었다’는 비변사의 보고 내용을 옮기고 있다. 영규의 의승군은 청주성전투에 앞서 전라도 의병장 고경명이 순국한 제1차 금산성전투에도 참여한 듯 하다. 고경명의 종사관 유팽로가 남긴 ‘월파집’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해가 질 무렵 성문을 두들리며 들어오는 자가 있었다. 그가 급하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전일 말씀하신 영규상인(靈圭上人)이 승도 수백명을 거느리고 왔습니다.” 공(고경명)은 즉시 나가서 맞아들여 인사를 나눈 다음 장수들에게 말했다. “영규가 왔으니 이는 반드시 하늘의 도움이다”’ 호남의 대표적 유학자 고경명 진영의 불제자 영규에 대한 예우가 깎듯하기만 하다.  제2차 금산성전투의 경과는 ‘문소만록’을 참고한다. 조헌에 대한 윤선각의 시선이 차갑다는 것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영규는 “전라도 순찰사가 군사 수만 명으로 진격하려 하면서 나에게 선봉이 되어 주기를 청했으나 시기가 정해지지 않았으니, 경솔히 나갈 수는 없다.”며 조헌에게 순찰사와 날짜를 약속하도록 권했다. 그런데 답장이 오기도 전에 조헌은 적을 속히 쳐야 한다고 고집하면서 금산으로 들어가니 영규도 마지못해 따랐다. 부하들이 “반드시 패할 것이니 가지 마소서”했으나, 영규는 “가부를 의논할 때는 말을 좇지 않을 수도 있지만, 먼저 갔는데 따르지 않는다면 누가 구원하겠느냐?”고 했다. 당시 금산성의 왜군은 1만명을 헤아린 반면 조선군은 조헌 의병이 700명 남짓, 영규 의승군도 600~1000명 수준에 그쳤다.  ‘문소만록’의 영규 관련 서술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청주의 적을 몰아냈다는 보고가 의주에 이르자, 조정은 이를 가상히 여겨 영규에게 당상관을 제수하고 옷감까지 보냈다. 하지만 영규는 이미 금산에서 죽어 받지 못했다’    
  • ‘이런 것도 있네’ 문화재 신기술 5형제… 당신의 선택은?

    ‘이런 것도 있네’ 문화재 신기술 5형제… 당신의 선택은?

    지난 15일 경북 경주의 경주화백컨벤션센터(HICO)에서 개막한 ‘2022 국제문화재산업전’에서는 신기술을 선보인 5개 업체가 우열을 가리기 힘든 기술력으로 관람객들의 눈길을 끌었다. 3층 산업관 중앙에 위치한 참가업체 신기술 투표 현장 역시 각축 속에 열기가 뜨거웠다. 이번 국재문화재산업전에서 만난 신기술을 소개한다. 나만의 박물관을 가져볼까 ‘나도 큐레이터’작품 활동을 하는 누구나 전시를 하고 싶은 꿈을 꾼다. 그러나 전시관을 대관하고 실제 전시를 하고 관객을 초대하는 일련의 과정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비용도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징검다리커뮤니케이션은 이런 제약을 손쉽게 극복할 수 있는 기술을 들고 나왔다. 원래는 미술관, 박물관 등의 오프라인 전시를 온라인 전시로 구현하는 업무를 하다가 개인들의 전시 욕구를 읽고 맞춤형 전시를 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 사용자는 실제 모양 그대로의 전시관에 자신의 작품을 걸 수 있다. 액자도 가능하고, 위치 조정, 크기 조정도 다 가능하다. 실시간으로 작품을 거는 것이 큐레이터가 된 기분을 느끼게 한다. 인터넷 주소만 알면 누구나 볼 수 있어 접근성이 높은 것도 큰 장점이다. 업체 관계자는 “오프라인 전시보다 더 많은 사람이 찾는다”고 소개했다. 자신의 작품뿐만 아니라 유명한 작품들도 이미지 파일만 있다면 전시관을 꾸밀 수 있다. 세계적인 박물관 곳곳에 흩어진 유명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을 수 있는 꿈의 전시관도 가능하다. ‘걸어본’ 사이트에서 전시관을 꾸밀 수 있다. 문화재 훼손 걱정 없는 ‘디지털 탁본’탁본은 동양의 한자 문화권에서 오래된 문화다. 그러나 문화재가 오래될수록 탁본 뜨기는 고난이도의 작업이 된다. 해당 문화재가 오래도록 건조하게 놓여 있는 경우 탁본을 뜨려고 물을 먹이면 먹이는대로 흡수되기도 하고, 탁본을 뜨려고 힘을 가하면 문화재 훼손 우려가 있어 완벽하게 찍히지 않은 탁본이 나올 때도 있다. 문화유산사진연구소의 디지털 탁본은 이런 문제를 일거에 해결한다. 업체가 개발한 알고리즘에 의해 탁본을 뜨는데, 기존 탁본보다 훨씬 글자가 선명하다. 무엇보다 원거리에서 사진을 찍어 뜨는 탁본이기 때문에 훼손 우려가 없다. 다른 글자와 중첩된 낙관을 구별하는 데도 유용하다. 비석에 새겨진 글씨의 경우 기존 탁본한 결과물보다 획을 더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어 글씨체의 완전한 형태를 파악할 수 있다. 장선필 대표는 “팔만대장경 탁본도 훼손 없이 작업이 가능하다”면서 “혹시 소실되거나 했을 때도 선명한 탁본을 가지고 원형을 재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탄소중립과 효율성 높인 신형 안내판문화유적지를 탐방하면 꼭 보게 되는 것이 안내판이다. 그러나 음각으로 새긴 안내판의 글씨가 중간중간 사라진 것도 종종 있고, 점자 안내문이 없는 경우도 많았다. 문제가 있는 안내판을 교체해야 하는데, 일체형으로 된 탓에 전체를 갈아야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포스코스틸리온과 고담은 ESG(환경·사회·기업지배구조의 영어 약자)의 시대에 맞춰 보다 효율적인 안내판을 제작했다. 기존 방식이 안내판과 안내문이 일체형이었다면 두 기업이 선보인 기술로는 안내문만 따로 교체할 수 있다. 수리가 필요할 때 낭비되는 부분이 줄어든 것이다. 기존의 안내판이 음각으로 새겨졌다면, 새로운 안내판은 양각으로 새겨진 것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안내문이 지워지는 것도 음각으로 새겨 기온에 따라 변형되면서 발생하는 것인데 양각으로 새기면서 이런 문제를 해소했다. 새로 설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안내판에도 덧씌울 수 있는 형태라 효율성도 높다. 두 업체가 선보인 기술이 적용된 안내판은 조만간 서울 청와대 권역에도 설치될 예정이다. 천연 발수제를 재현한 ‘명유’조선왕조실록 태조 13권에는 ‘궁궐을 고쳐 칠하기를 명하였는데 명유 4백두를 썼다’는 기록이 나온다. 명유는 전통 목조 건축물에 바르는 천연 발수제다. 명유를 바르면 방수도 되고 색도 지킬 수 있다. 그러나 명유는 일제시대를 거치며 명맥이 끊겼다. 수입 발수제로 바르긴 했지만 문제가 생겼다. 이에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끼리 합심해 명유를 복원해냈다. 문화재는 전통의 방식대로 원형을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문화재청 규정에는 명유를 사용하도록 돼있다. 보존소재연구소가 이번 행사에 선보인 명유는 문화재에 유용하게 쓰인다. 가치가 중요한 문화재에는 조금 더 고급스러운 명유를 쓰고, 보급용으로 쓸 수 있는 신명유도 함께 소개됐다. 분진 막는 천연 리무버목조건축물에 새로운 칠을 하기 위해선 안료를 벗겨 내는 작업이 필수다. 그러나 이 작업을 하기 위해선 고된 노동과 분진을 피할 수 없다. 동화특수산업 김석천 대표는 지난해 에어 대패로 동궁과 월지의 기둥, 서까래 등의 안료를 벗겨 내고 나서 쌓인 분진을 보고 새로운 방식이 필요함을 체감했다. 연구 끝에 개발한 것이 ‘에코 젤 리무버’다. 붓에 발라 나무에 칠한 뒤 도구를 사용해 벗겨 내면 손쉽게 벗겨진다. 분진이 날리는 기존 방식과 달리 분진이 날리지 않고 가볍게 벗겨지는 것이 특징이다. 이제 막 선보이는 따끈따끈한 신기술로 앞으로 상용화에 대한 기대가 크다. 기존 리무버보다 유효 시간이 긴 것이 장점이다. 업체 측은 1시간 정도 간다고 설명했다. 디지털 신기술이 대세인 현장에서 실제로 문화재에 적용될 수 있는 기술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 [서울광장] 일제가 파괴한 비석군 ‘세계유산’ 충분하다/서동철 논설위원

    [서울광장] 일제가 파괴한 비석군 ‘세계유산’ 충분하다/서동철 논설위원

    한일 관계가 화제에 오를 때마다 너그러운 소수 의견에 동조하곤 한다. 저들이 우리에게 한 짓은 용서하기 어렵지만 21세기 외교에서 다소의 유연성은 발휘해도 좋지 않겠느냐는 주장에 손을 든다. 문제는 탄압을 넘어 역사 말살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현장을 둘러보면 나같이 생각해서 될 일인가 싶은 반성도 깊어진다는 것이다. 상대가 있는 외교와는 달리 우리 스스로 역사의 진실을 축적하는 작업을 게을리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제강점기 폭파된 전북 남원의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를 찾았을 때가 그랬다. 황산대첩은 훗날 조선을 창건하는 삼도도순찰사 이성계가 고려 우왕 6년(1380) 운봉 황산에서 왜구 대부대를 섬멸한 싸움을 이른다. 일본은 비석을 다이너마이트로 부순 것도 모자라 글자를 일일이 정으로 쪼았다. 어휘각도 훼손했다. 이성계가 함께 싸운 원수와 종사관의 이름을 싸움터 바위에 새겨 놓은 곳이 어휘각이다. 안내문에는 훼손이 1945년 1월 17일 이루어졌다고 적었다. 일제가 비석을 대거 훼손한 것은 조직적이었다.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1943년 경무국장에게 보낸 ‘유림의 숙정 및 반시국적 고적의 철거에 관한 건’이라는 공문에는 없애버려야 할 문화재가 망라돼 있다. 황산대첩비 대목에는 ‘일본의 한반도 침입 역사를 보여 주는 것은 자랑스럽지만, 이성계에게 패했다는 사실은 바람직스럽지 못하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경무국은 공문을 다시 전국의 일선 경찰서에 보내 ‘철거’를 ‘집행’토록 했다. 임진왜란의 의승장 사명대사 유정을 기리는 ‘사명대사 석장비’도 이때 네 동강 났다. 사명대사는 1610년 경남 합천 해인사 홍제암에서 입적했는데, ‘홍길동전’의 작가 허균이 유정의 일생을 기록해 광해군 4년(1612) 비석을 세웠다. 사명대사는 만화에도 등장하듯이 ‘조선에 보배가 있느냐’는 왜장 가토 기요마사의 물음에 ‘모두 당신의 머리를 가장 귀한 보물로 노리고 있다’고 일갈했다. 임란 당시 왜군의 호남 침공을 막아내고, 결과적으로 국토를 보전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금산에는 특히 ‘반시국적 고적’이 밀집해 있다. 모르는 사람이 없을 칠백의총의 ‘중봉 조헌 일군 순의비’ 역시 일제 말 폭파됐다. 1603년 세워진 순의비가 부서지자 지역 수민들은 훼손된 순의비를 땅에 묻었고, 1952년 성금을 모아 다시 세웠다. 조각난 순의비는 국립문화재연구소가 2009년 옛 모습에 가깝게 폭파된 부재를 이어붙여 오늘에 이른다. 금산성을 공격한 호남 의병장 고경명의 순절비각은 눈벌 어귀에 있다. 일제 말기 훼손된 순절비는 비각 내부에 조각조각 모셔져 있다. 왜군의 전주 침입을 봉쇄한 권율의 이치대첩비 역시 폭파된 상태로 보존되고 있다. 금산 공방전에서 처음 목숨을 바친 금산군수 권종의 순절비가 크게 훼손되지 않은 채 땅에 묻혀 다시 세울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일제 치하에서 존망의 위기를 겪은 역사적 비석들이 다른 이유도 아닌 폭파되거나 깎여 나갔다는 이유로 문화재 가치 평가에서 소외되고 있는 현실은 매우 유감스럽다. ‘반시국적 고적’으로 지목돼 황산대첩비처럼 비문이 깎여 나간 행주산성의 행주대첩비가 국가지정문화재인 국보도, 보물도 아닌 경기도유형문화재로 지정돼 있는 현실도 안타깝다. 일제가 민족정기를 말살하고자 훼손한 문화재라면 오히려 같은 이유로 문화재적 가치는 높아졌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 사명대사 석장비만 해도 완벽한 상태로 보존돼 있을 때보다 일제가 의도를 갖고 훼손한 이후 훨씬 역사적 가치가 높아지지 않았는가. 무엇보다 일제의 식민지 석조 문화재 훼손은 당사자인 한일 두 나라뿐 아니라 세계인에게 교훈을 줄 수 있다고 본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은 바로 이런 역사의 흔적을 등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 “오죽했으면” 우크라와 러시아에서 눈에 띄는 ‘푸틴 무덤’

    “오죽했으면” 우크라와 러시아에서 눈에 띄는 ‘푸틴 무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겪는 어려움 때문에 더욱더 와그너 그룹과 같은 용병 알선업체에 더욱 의존하고 있다는 미국 온라인매체 비즈니스 인사이더 기사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묘지 사진이 눈에 띄어서다. 유럽 최대의 원자력 발전 설비가 자리한 우크라이나 자포리자 근처에서 지난 5월 9일 촬영한 사진인데 푸틴 대통령의 사진까지 넣어 한껏 정성을 들여 꾸민 묘비석 위에 우크라이나 병사가 오른손을 턱 갖다댄 모습이 눈길을 끈다. 무고한 인명이 희생되는 전쟁을 일으킨 책임에다 개전 200일이 되도록 전쟁을 부득부득 고집하는 바람에 유럽을 고유가·고물가에 난방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차가운 겨울로 안내하고 있는 그의 죄과는 죄과지만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의 묘를 쓴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반발할 수 있겠다. 하지만 무람한 짓을 벌였다고 누가 함부로 꾸짖을 수 있을까?같은 기사 가운데 무참하게 생명을 저버린 러시아 병사들이 아무렇게나 뒹구는 무덤을 우크라이나 병사들이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진도 눈길을 붙들어맨다. 푸틴이 다스리는 러시아 영토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나베레지녜 첼니란 도시에 사는 카림 야마다예프가 지난 3월 30일의 구금과 10만 루블의 벌금을 물어낸 일이 있었다.
  • 70년 만에… 제주 해녀들 독도를 밟다

    70년 만에… 제주 해녀들 독도를 밟다

    70여 년 전 독도에서 물질을 했던 제주해녀들이 후배들과 함께 다시 독도를 찾았다. 오영훈 제주특별자치도지사는 18일 오전 11시 제주해녀 34명과 함께 독도를 방문했는데 1950~1960년대 열악한 환경에서 강인하게 살아온 해녀들의 발자취를 되짚고, 독도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 해녀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제주해녀항일운동 90주년을 맞아 70년 전 독도에서 물질을 했던 제주해녀인 김공자, 고정순, 임영자, 홍복열씨가 함께 방문한 것. 제주해녀들은 일제강점기 때 최초로 독도를 방문했고, 1953년 이후에는 독도에 거주하며 활발한 조업 활동을 펼쳤다. 주로 제주 한림지역 해녀들이 독도 물질을 갔다. 실제 한림읍 협재리 마을회관에는 1956년 건립된 ‘울릉도 출어부인 기념비’가 남아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비석 뒷면에는 30여명의 해녀 이름이 빼곡이 적혀있다. 1950년대 울릉도와 독도에 출어 했던 제주 한림읍 협재 해녀들의 이름이다. 제주와 독도의 인연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현재 독도의 유일한 주민인 김신열 할머니도 제주 한림읍 명월리 출신 해녀다. 제주해녀들의 물질은 수산물 채취를 넘어 울릉도와 독도 어민들과 함께 지역의 어업권뿐만 아니라 영유권을 지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날 독도에 도착한 제주해녀들은 테왁 장단에 맞춰 노 젓는 소리인 ‘이어도사나’를 부르며 감회에 젖었다. 70여 년 전 당시 독도의 제주해녀들은 궂은 날씨로 조업을 하지 못했을 때 임시 숙소를 마련한 서도 물골에서 노래와 춤을 추며 고향 제주를 향한 그리움을 나눴다. 이날 공연에 참여한 제주해녀 이금숙 씨는 “독도를 개척한 선배 해녀들과 함께 독도 땅을 밟으니 너무 벅차고 가슴이 뭉클하다”고 말했다. 오 지사는 “70여 년 전 제주해녀들이 독도까지 와서 물질을 한 기록이 있고 당시 독도에서 조업을 한 해녀 네 분과 함께 독도를 방문했다”며 “독도 영토의 실효적 지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제주해녀의 강인한 정신을 대한민국 곳곳에 알리는 소중한 계기여서 더욱 뜻깊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제주도와 경상북도의 생태적 가치를 높이는 친환경 활동을 지속 추진하고, 양 도의 관광교류 증진을 위한 다양한 사업도 발굴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독도에 도착한 오 지사는 독도경비대를 격려하는 한편,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입증하는 한국령 표석을 찾아 독도를 개척한 제주해녀의 발자취를 확인하고 ‘실효적 지배’를 더욱 강화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일 것을 다짐했다.
  • 800년 세월… 8만 1258번의 가르침, 기적을 직관하다

    800년 세월… 8만 1258번의 가르침, 기적을 직관하다

    아마도 인연이었을 것이다. 해인사를 찾게 된 것은. 어쩌면 불자들의 표현처럼 부처의 가피를 입은 것일 수도 있겠다. 경남 합천군청 행사가 해인사에서 열린다는 걸 우연히 귀동냥으로 주워들었고, 그 덕에 팔만대장경과 경내 암자까지 돌아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해인(海印)이란 이름에 담긴 뜻을 깨닫는 데만 평생이 걸릴 수 있다는데, 겨우 반나절 돌아본 것이 뭐 그리 대단할까만, 법보(法寶)라는 팔만대장경을 범부들이 ‘직관’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그 반나절의 값어치는 금새를 뛰어넘는다. 해인사는 지난해부터 ‘팔만대장경 순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스님의 안내로 해인사도 둘러보고 팔만대장경도 친견할 수 있다. 채 1시간이 못 되는 짧은 시간이지만, 해인사에 대한 안목을 넓히는 데 적잖은 도움이 된다. 이날 합천군 행사에선 팔만대장경 연구원에서 보존국장을 맡고 있는 일한 스님이 안내자로 나섰다.장경판전으로 곧장 간다. 팔만대장경이 있는 당우다. 네 동의 건물이 직사각형 형태를 이루고 있다. 들머리 구실을 하는 남쪽 건물은 수다라장(修多羅藏), 마당을 두고 마주한 북쪽 건물은 법보전(法寶殿)이다. 동쪽과 서쪽엔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사간판전이 있다. 길게 뻗은 남북 건물은 국간판전, 동서 건물은 사간판전이다. 국가기관인 대장도감에서 새긴 목판을 보관한 곳은 국간판전, 사찰이나 지방 관청에서 새긴 목판을 보관한 곳은 사간판전이라 부른다. 장경판전 구역에만 국보가 셋이다. 흔히 팔만대장경으로 알려진 ‘대장경판’과 남북의 ‘장경판전’ 건물, 그리고 동·서사간판전에 봉안된 ‘고려목판’ 등이다. 장경판전은 1995년, 대장경 등 목판들은 2007년에 각각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현재 일반인이 볼 수 있는 건 법보전 내부와 팔만대장경이다. 석가고행도, 고승들의 문집 등을 새겼다는 고려목판과 소승불교 경판이 보관된 수다라장은 공개되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그렇듯 언젠가 이들과도 ‘인연’이 닿길 희망한다. 예약하지 않는 관람객은 법보전 앞마당까지만 갈 수 있고, 법보전 창살 사이로 팔만대장경을 봐야 한다.춘분과 추분에 연꽃 모양의 그림자를 남긴다는 수다라장 연화문을 지나면 곧 법보전이다. 낡은 기둥에 매달린 두 개의 주렴이 여행자를 맞는다. 각각 원각도량하처(圓覺道場何處)와 현금생사즉시(現今生死卽是)란 문구가 새겨졌다. 일한 스님은 이를 “깨달음의 도량은 어디인가, 지금 나고 죽는 이 세상이 바로 그곳”이라고 해석했다. 삶의 모든 순간은 첫 순간이면서 마지막 순간이고 유일한 순간이다. ‘지금’과 ‘여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한 시인의 표현처럼 어제의 비로 오늘의 옷을 적실 까닭이 없고, 내일의 비를 위해 오늘의 우산을 펼 이유도 없는 것이다. 법보전 건물은 안팎이 수수하다. 장식성 짙은 공포와 화려한 단청으로 법보를 감싸고 있을 법한데, 뜻밖에 여염의 건물보다도 소박하다. 법보전의 진정한 가치는 놀라울 만큼 과학적인 구조에 있다. 아마 우리 국민 누구나 학창 시절 수없이 듣고 외웠을 터다. 건물 정면과 후면 창살의 모양, 위치, 크기 등이 다른 건 원활한 공기 흐름을 위해서라는 것, 바닥에 황토와 숯, 횟가루, 소금 등을 섞어 다져 습도를 조절했다는 것 등 말이다. 일한 스님은 “그 덕에 20여년 동안 청소를 하지 않아도 거미줄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쾌적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리고 마침내 팔만대장경. 무려 780여년 전에 제작된 목판들이 마치 어제 가져다 놓은 양 단정하게 5층 판가(板袈·경판꽂이)를 채우고 있다. 경판의 숫자가 8만 1258장, 8만 4000개의 법문을 실었다고 해 팔만대장경이다. 불가에선 종종 ‘팔만 사천’을 ‘많음’의 의미로 쓴다. 그러니 팔만대장경엔 경판과법문의 개수 외에도 ‘부처의 깨달음과 법문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의미가 담겼다고도 볼 수 있다. 경판 하나하나에 담긴 정성과 지혜 역시 헤아릴 수 없이 깊다. 대장경판은 가로 약 70㎝, 세로 약 24㎝ 크기다. 두께는 어른 손가락 두 마디 정도. 양옆의 손잡이는 경판보다 5㎜ 정도 더 두껍다. 그 덕에 모든 경판 사이사이로 바람이 지날 수 있고, 경판을 넣고 꺼낼 때 글자들끼리 부딪히지 않는다. 글자수는 5272만 자다. 글자 하나를 새길 때마다 각수(刻手)들이 삼배를 올렸다고 한다. 그러니 글자를 모두 새기기까지 얼추 1억 6000번 가까이 절을 올렸을 것이다. 대장경은 고려 시대에 두 차례 제작됐다. 11세기에 만든 초조대장경은 몽골군의 침입으로 소실됐고, 해인사에 보관된 경판은 두 번째로 만든 재조대장경이다. 고려 고종 19년인 1237년에 조성이 시작돼 1248년에 완성됐다. 준비 기간까지 합하면 총 16년이 걸린 것으로 전해진다. 나무로 만든 대장경판이 오늘에까지 이를 수 있었던 건 기적이다. 해인사에 일곱 번 화마가 덮쳐도, 6·25전쟁 등 수많은 전란을 겪고도, 8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습기, 추위와 싸우면서도 온전히 살아 부처의 진리를 전할 수 있었던 건 기적이라는 단어로밖에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다. 우리 선조들이 경판을 새기고, 장경판전을 세울 지혜와 정성을 갖게 된 것 역시 기적적인 일이지 싶다. 대장경의 여운은 강렬했다. 저물녘 범종 소리까지 들은 뒤라야 산사에서 발걸음을 뗄 수 있을 듯했다. 그사이 암자 순례에 나섰다. 해인사의 산내 암자는 모두 16개다. 하루에 돌아볼 수는 없어, 해인사 동쪽 코스의 암자 3곳을 묶어 돌아봤다. 백련암은 ‘가야산 호랑이’ 성철 스님이 주석하던 암자다. 경내에 비석처럼 서 있는 불면석이 독특하다. 희랑대는 꽃계단(花階)이 아름답고, 금강산 보덕굴에 비견되는 지족암은 뒤 산자락에 불족도를 토대로 조각한 불족바위가 인상적이다.어둑어둑해질 무렵 사람들이 해인사 범종각 앞에 모였다. 템플스테이에 참가한 내외국인, 여행객 등이 뒤섞였다. 두 스님은 법고와 범종, 목어, 운판의 순서로 쳤다. 법고는 지상의 생명들, 범종은 지하의 생명들, 목어는 물속 짐승들, 운판은 날짐승들에게 전하는 구원의 소리란다. 여행자에게 범종이란 일종의 축객령과 같은 것. 이제 해인사를 내려갈 때다. 기분 탓일까. 땀과 홍진에 절어 까매진 목깃이 그제야 말끔하게 씻겨진 듯하다. ■ 여행수첩 매주 월요일 예약 사이트 ‘광클’ 전쟁 -‘해인사 팔만대장경 순례’ 프로그램은 매주 토·일요일, 오전 10시와 오후 2시에 진행된다. 회당 최대 20명까지 신청을 받는다. 매주 월요일에 누리집예약 사이트를 오픈하는데, ‘광클’ 전쟁이 벌어진다고 한다. -물병 등 액체류, 라이터 등 화기류, 삼각대 등 카메라 장비, 가방 등은 일절 법보전 안으로 가져갈 수 없다. 슬리퍼, 하이힐, 반바지, 민소매, 레깅스 등의 차림으로도 입장할 수 없다. -대장경에 가려 못 보기 십상인데, 법보전 안의 비로자나불상도 보물이다. 국내 최고(最古) 목조 불상이다. 화재나 도난이 감지되면 고급 외제차의 엠블럼처럼 순식간에 특수장치가 부착된 단 아래로 사라진다고 한다. -범종 타종 시간은 하안거, 동안거 등 시기에 따라 다르다. 미리 종무소에 확인해야 한다. 요즘엔 오후 7시 30분쯤 범종을 친다.
  • 일본식 사찰에 놓인 ‘평화의 소녀상’ 대중 앞에 모습 드러내나

    일본식 사찰에 놓인 ‘평화의 소녀상’ 대중 앞에 모습 드러내나

    110여 년 전인 일본 승려들이 건립한 절, 전북 군산시 동국사(東國寺)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 최근 일본식 사찰에 놓인 평화의 소녀상 이전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소녀상의 숭고한 의미 확장을 위해 시민들이 쉽게 찾을 수 있는 옛 시청광장이나 근대문화역사 거리 등 공공장소로 옮겨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면서다. 한복 차림의 단발머리 소녀상은 지난 2015년 8월 12일 군산 시민들의 자발적인 성금을 모아 고광국 조각가가 만든 것으로 전북지역에서는 처음 세워졌다. 소녀상 건립 당시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했고 결국 찾은 곳이 동국사다. 그러나 동국사 내에 자리한 탓에 그 숭고한 의미를 시민들에게 널리 알리는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을 줄곧 받아왔다. 서동완 군산시의원은 “소녀상을 일본식 사찰에 가둬놓는 것은 이런 역사성에 반하는 것”이라며 “사유지인 동국사에 있는 평화의 소녀상을 많은 시민과 관광객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는 외진 곳에서 공공장소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군산평화의소녀상 기념사업회 역시 소녀상 이전에 적극적이다. 군산시도 지난해 ‘군산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념사업 지원 및 평화의 소녀상 보호관리 조례안’을 만들며 이전 준비를 마쳤다. 다만 5년 넘게 소녀상을 관리해 온 동국사 측이 동국사의 이미지가 되다시피한 평화의 소녀상을 옮기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군산시와 기념사업회는 이전을 둘러싸고 동국사와 갈등을 빚는 것은 원치 않아 일단 기다리겠다는 입장이다.소녀상 건립에 참여했던 송미숙 군산시의원은 “일제 강점기 만행을 참회하는 비석을 옆이 나름 의미와 상징성이 있다고 보고 적당한 장소를 찾을 때까지 임시로 소녀상을 세워두고 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다”며 “소녀상이 공공 조형물로 지정돼 체계적 관리를 받을 수 있도록 동국사 측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고 설명했다. 군산시 관계자는 “군산 평화의 소녀상이 사유지에 개인과 단체, 기업 등의 모금으로 건립되었기 때문에 그동안 군산시가 관여할 수 었었던 만큼 공공조형물로 지정할 수 있는 규정을 마련했다”며 “기념사업회와 동국사 측이 협의해 소녀상을 시에 기부채납하면 공공조형물로 지정해 공공장소로 이전하고 직접 관리할 생각이다”고 말했다.
  • 양주 회암사지,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 등재

    양주 회암사지,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 등재

    ‘양주 회암사지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됐다. 문화재청은 26일 “지난 20일자로 ‘양주 회암사지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됐고, 오늘 세계유산센터 공식 홈페이지에 최종 게재됐다”고 밝혔다. 이로써 한국은 총 13건의 세계유산 잠정목록을 보유하게 됐다. 경기 양주시에 위치한 ‘양주 회암사지 유적’은 고려 충숙왕 15년(1328) 원나라를 통해 들어온 인도의 승려 지공이 처음 지었다는 회암사가 있던 자리다. 그러나 회암사가 지어지기 이전에도 같은 장소에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전기 이색이 지은 ‘천보산회암사수조기’에 의하면, 고려 우왕 2년(1376) 지공의 제자 나옹이 “이곳에 절을 지으면 불법이 크게 번성한다”는 말을 믿고 절을 크게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조선 전기까지 전국에서 가장 큰 절이었다고 전해지는 회암사는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서 물러난 뒤 이곳에서 수도 생활을 한 곳으로도 알려졌다. 명종 때 문정왕후의 도움으로 전국 제일의 사찰이 됐다가, 문정왕후 사후 억불정책으로 불태워졌다. 현재는 70여 동의 건물지가 확인된 중심사역과 부도·석등·비석 등 고승들의 기념물이 남아 있다. 이번에 유네스코에 제출한 잠정목록 신청서에서는 이 유적이 14세기 동아시아에 만개했던 불교 선종 문화의 번영과 확산을 증명하는 탁월한 물적 증거이자 불교 선종의 수행 전통과 사원의 공간구성 체계를 구체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점을 ‘탁월한 보편적 가치’로 제시했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려면 반드시 잠정목록에 올라야 하고, 잠정목록 등재 뒤 최소 1년이 지나야 세계유산 등재 신청 자격이 생긴다.
  •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 또 늘었다… ‘양주 회암사지 유적’ 등재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 또 늘었다… ‘양주 회암사지 유적’ 등재

    ‘양주 회암사지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됐다. 문화재청은 26일 “지난 20일자로 ‘양주 회암사지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잠정목록에 등재됐고, 오늘 세계유산센터 공식 홈페이지에 최종 게재됐다”고 밝혔다. 이로써 한국은 총 13건의 세계유산 잠정목록을 보유하게 됐다. 경기 양주시에 위치한 ‘양주 회암사지 유적’은 고려 충숙왕 15년(1328) 원나라를 통해 들어온 인도의 승려 지공이 처음 지었다는 회암사가 있던 자리다. 그러나 회암사가 지어지기 이전에도 같은 장소에 이미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전기 이색이 지은 ‘천보산회암사수조기’에 의하면, 고려 우왕 2년(1376) 지공의 제자 나옹이 “이곳에 절을 지으면 불법이 크게 번성한다”는 말을 믿고 절을 크게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조선 전기까지 전국에서 가장 큰 절이었다고 전해지는 회암사는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서 물러난 뒤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한 곳으로도 알려졌다. 명종 때 문정왕후의 도움으로 전국 제일의 사찰이 됐다가, 문정왕후 사후 억불정책으로 불태워졌다. 현재는 70여 동의 건물지가 확인된 중심사역과 부도·석등·비석 등 고승들의 기념물이 있다. 이번에 유네스코에 제출한 잠정목록 신청서에서는 이 유적이 14세기 동아시아에 만개했던 불교 선종 문화의 번영과 확산을 증명하는 탁월한 물적 증거이자 불교 선종의 수행 전통과 사원의 공간구성 체계를 구체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점을 ‘탁월한 보편적 가치’로 제시했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려면 반드시 잠정목록에 올라야 하고, 잠정목록 등재 뒤 최소 1년이 지나야 세계유산 등재 신청 자격이 생긴다.
  • ‘반성없는 일본’…日 전범 위령 시설 중국, 미얀마 등 건립 추진돼

    ‘반성없는 일본’…日 전범 위령 시설 중국, 미얀마 등 건립 추진돼

    중일전쟁 당시 30만 명이 희생당한 난징대학살의 현장인 중국 난징에 일본군 A급 전범들을 기리는 위패가 봉안돼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지 하루 만에 이 같은 시도가 중국 윈난성에서도 있었다는 사실이 추가로 발견됐다. 중국 매체 왕이망은 윈난성의 한 사찰에 일본군 1288명의 위패를 봉안하려 했던 시도가 추가로 있었던 것이 최근 조사 결과 밝혀졌다고 23일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일본군 참전용사단은 지난 1980년대 초 윈난성 룽링의 푸룽사(伏龙寺)를 찾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윈난성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일본군 전범 1288명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해 거액의 돈을 제안했으나 현지 관계 당국에 의해 거절당한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일본군 참전용사단은 해당 사찰에 위패 봉안료로 거액의 기부금을 제안하고 관할 지역 정부에게도 교육 기관 설립과 장학금 지원, 유해발굴, 기념시설 건립 등을 제안하며 회유했으나 불허가 통보를 받았다고 현지 매체들은 전했다.하지만 이후 일본 참전용사단은 현지 당국의 위패 봉안 불가 통보 이후 푸룽사 땅에 전쟁 당시 사망한 일본군 사자 명부 한 부를 몰래 묻어 놓은 것이 주민들에게 발각된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주민들에게 발각된 ‘사자 명부’에는 쑹산 전투에서 전사한 일본군 1288명 장병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와 관련해, 이 매체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일본군 참전용사단과 전범 유가족 등을 주축으로 한 일본의 민간 단체들이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해외 각국을 찾아다니며 위령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이들이 추진한 활동에는 전쟁 중 사망한 일본군의 사망 지역에 위령 시설을 건립, 전사자 명단을 봉안하는 것이 주요했다. 대표적인 사찰이 바로 지난 22일 공개돼 중국을 발칵 뒤집었던 난징의 지우화산공원 내 쉬안짱(현장·玄奘)사다. 이 사찰에는 지난 2018년부터 지난 2월까지 일본군 A급 전범인 마쓰이 이와네를 비롯한 다니 히사오, 노다타케시, 다나카 군키치의 위패가 봉안돼 있었다. 마쓰이 이와네 일본군 사령관은 난징대학상의 주범으로 지목된 인물로, 1937년 12월~1938년 1월 국민당 정부의 수도였던 난징을 점령해 중국인 포로와 일반 시민을 무차별 학살하고 성폭행, 약탈, 방화 등을 자행한 인물이다. 난징대학살로 중국은 당시 총 30만 명의 민간인이 희생당했다고 추정하고 있다.마쓰이 이와네는 이후 국제전범재판소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1948년 일본 도쿄에서 교수형에 처해졌으나, 다니 히사오와 노다타케시, 다나카 군키치 등의 일본군 전범들은 난징 현장에서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군 전범들의 위패를 봉안해 논란이 된 사찰 사례는 비단 중국에서만의 일이 아니다. 미얀마 양곤의 일본인 묘지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얀마에서 사망한 일본군 전범 100여 명의 위령비와 사자의 이름을 새긴 비석이 마련돼 있다. 지난 2013년 5월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미얀마를 방문했을 당시 이 묘역을 찾은 바 있다. 
  • 日군함도, 중국인 강제동원만 인정…서경덕 “천벌받을 짓”

    日군함도, 중국인 강제동원만 인정…서경덕 “천벌받을 짓”

    일제 강점기 조선인들이 강제 노역했던 아픈 역사의 장소인 군함도(정식 명칭 하시마)에서 해저 탄광을 운영했던 일본 기업 미쓰비시가 중국인의 강제 노역만을 인정했다.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역사를 부정하는 천벌 받을 짓”이라고 일갈했다. 서 교수는 18일 인스타그램에 “영화와 MBC ‘무한도전’을 통해 널리 알려진 군함도(하시마)”를 언급하면서 “우리에게는 일제 강점기 조선인들이 끌려가 강제노역을 했던 아픈 역사의 장소”라고 밝혔다. 서 교수는 “하지만 군함도에서 조선인과 중국인을 강제노역시켰던 일본 기업 미쓰비시가 중국인 강제동원만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우호비’를 세운 것이 최근 밝혀져 큰 논란이 되고 있다”며 “이 우호비의 이름은 ‘일중 우호 평화부전의 비’이며, 비석은 나카사키시 변두리의 한 작은 공원에 세워졌다”고 설명했다. 일본 나가사키현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시민단체 측은 최근 미쓰비시머티리얼이 낸 돈으로 ‘일·중우호 평화부전(不戰)의 비’(이하 우호비)를 주문 제작해 나가사키시 변두리 작은 공원에 설치했다. 군함도 등에 강제 연행된 중국인 피해자 또는 유족과 미쓰비시머티리얼이 2016년 6월 화해하면서 약속한 화해 사업의 일환으로 건립됐다. 비석에는 약 3만9000명의 중국인 노동자가 일본에 강제 연행돼 열악한 조건 아래서 노동을 강요당하고, 많은 중국인 노동자가 숨졌다고 명시했다. 통절한 반성과 심심한 사죄, 애도의 뜻도 담겼다. 서 교수는 “이는 일본 정부가 조선인 강제 연행과 강제 노역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상황으로 볼 수 있다”며 “그야말로 역사를 부정하는 천벌을 받을 짓”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지난 2015년 군함도 등 일제의 강제 동원 산업시설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될 때 일본은 강제노역 피해 사실도 제대로 알리겠다고 했었는데, 7년이 지난 지금까지 약속을 이행하고 있지 않다”고 비판했다. 일본은 조선인 강제노역이 있었던 사도광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또 등재하려고 계획 중이다. 서 교수는 “우리는 군함도의 사례를 거울삼아 이번에는 반드시 저지시켜야만 할 것”이라면서 “아울러 이번 기회를 잘 이용해 사도광산뿐만 아니라 군함도까지 조선인 강제노역의 역사적 사실을 일본이 꼭 인정하게끔 세계적인 여론을 통해 일본 정부를 지속해서 압박해 나가야만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 충무공 흉탄 맞자 대신 함대 지휘…진중 온갖 일 논의 참모 중의 참모[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충무공 흉탄 맞자 대신 함대 지휘…진중 온갖 일 논의 참모 중의 참모[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이 방답진첨절제사 이순신(李純信)의 부임 인사를 받은 것은 1592년 1월 10일이다. 그런데 1월 16일자 ‘난중일기’에는 ‘병선(兵船)을 수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방답진의 군관과 관리에게 곤장을 쳤다’는 내용이 보인다. 훗날의 충무공(忠武公)이 역시 무의공(武毅公)이 되는 신임 첨사의 군기를 단단히 잡은 모양새다. 무의공은 이후 충무공의 가장 충실한 참모가 되어 모든 해전의 선봉에 섰고, 노량에서 충무공이 흉탄에 맞아 쓰러지자 대신 수군 함대를 지휘하기도 했다. 무의공 이순신(1554~1611)은 태종의 세자이자 세종대왕의 큰형인 양녕대군의 6대손이니 조선 왕실의 혈통을 이어받은 종친이다. 충무공 이순신(1545~1598)과 우리말 이름이 같지만 무의공은 전주, 충무공은 덕수로 본관부터 다르다. ●임기 초 긴장관계 빠른 시간에 극복 조선시대에는 남자가 성인이 되면 이름이 아닌 자(字)를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충무공의 자는 여해(汝諧), 무의공의 자는 입부(立夫)다. ‘난중일기’에는 ‘이(李)입부가 다녀갔다’거나 ‘입부와 무엇무엇을 했다’는 글귀가 140차례나 나온다. 무의공이 임기 초의 긴장관계를 빠른 시간에 극복하고 충무공의 ‘측근 중 측근’으로 떠올랐음을 알 수 있다. 경기 광명시 일직동에 있는 무의공의 무덤은 KTX가 서는 광명역에서 가깝다. 입부의 집안은 양녕대군의 3대손인 증조할아버지 이윤의 때부터 당시의 시흥땅에 살았다. 입부는 아버지 이진과 어머니 복주 김씨 사이 다섯 아들의 막내로 태어났다. 입부 형제의 이름은 순서대로 이순인·이순의·이순례·이순지·이순신이다. 맹자가 인간 본성의 네 가지 덕(德)이라 지칭한 인(仁)·의(義)·예(禮)·지(智)에 믿음을 뜻하는 신(信)을 보탠 것이다. 입부의 넷째 형 비변랑 이순지는 충무공이 한성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나왔을 때 옥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난중일기’에 적혀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무의공도 거쳐 간 비변랑(備邊郞)은 비변사의 종6품 무관이다. 입부의 두 아들 이탁과 이숙도 1603년 계묘 정시에서 무과에 급제했다. 미수 허목(1595~1682)은 입부의 묘갈(墓碣)에 ‘공은 젊었을 때에 유학에 전념했으나 공을 이루지 못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혀 25세에 알성시 을과에 급제했다’고 했다. 무의공도 처음에는 문과 급제를 꿈꿨지만 여의치 않자 무과로 선회한 것 같다. 무인에 대한 차별이 심하지 않았던 조선 중기까지는 양반사회에서 이런 현상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무의공의 둘째 아들 이숙이 아버지만큼이나 충무공의 측근이었던 흥양현감 배흥립의 사위가 됐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왜란 당시 이순신(李舜臣)을 정점으로 하는 조선수군이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데는 충무공의 리더십에 무의공과 효숙공 같은 참모진의 서로에 대한 신뢰가 더해지면서 ‘화학적 결합’이 이루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하게 한다. 효숙(孝肅)은 배흥립의 시호다. 무의공은 충무공보다 아홉 살이 적다. 충무공은 31세이던 1576년(선조 9), 무의공은 24세이던 1577년(선조 10) 각각 무과에 급제했다. 두 사람의 ‘관계 개선’은 부임 다음달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2월 8일자 ‘난중일기’에는 ‘우후 이몽구가 방답에서 돌아왔는데, 첨사가 방비에 진력하더라고 극찬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우후(虞侯)는 수군절도사나 병마절도사의 보좌관이다. 충무공은 2월 19~27일 전라좌수사 휘하의 순천·광양·낙안·보성·흥양과 방답진·사도진·여도진·발포진·녹도진에 대한 검열에 나섰다.방답진 검열은 5관 5포 가운데 마지막으로 26~27일 이루어졌다. 충무공은 ‘장편전(長片箭)은 쓸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서 걱정했으나, 전선(戰船)은 어느 정도 완전해서 다행이었다’고 했다. 장편전은 긴 화살인 장전(長箭)과 작은 화살인 편전(片箭)을 가리키니 ‘화살 준비가 매우 불충분하다’는 표현이다. 충무공은 검열을 마치고 북봉(北峯)에 올라 진성 안팎의 지형을 살펴보고는 ‘외롭고 위태로운 섬이라 사방에서 적의 공격을 받을 수 있고, 성안의 연못 또한 지극히 엉성하여 참으로 걱정스러웠다. 첨사가 애는 썼으나, 미처 시설을 갖추지 못했으니 어찌하랴’고 했다. 한 달 전 부임한 첨사가 진성의 방어 시설까지 완벽하게 갖출 수는 없다는 것은 충무공도 잘 알고 있었다. 방답진은 여수 앞바다 돌산도에 있었다. 방답진성 자리는 이제 어항(漁港)이자 여수시의 돌산읍 소재지로 명맥을 이어 가고 있다. 다만 방답이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옛 진성 주변은 군내리로 불린다. 그러니 동헌과 군관청, 비석 등이 남아 있는 방답진의 흔적을 둘러보려면 내비게이션에 ‘군내리’를 입력해야 한다. 미수의 묘갈에는 ‘공은 처음에는 별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김성일 공이 한번 보고는 그의 현명하면서도 재능이 뛰어난 것을 알아 극력 추천한 것’이라고 했다. 학봉 김성일이라면 1590년 조선통신사의 부사로 일본에 다녀온 뒤 침략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해 왜란 발발 이후 파직되기도 했지만, 이후 경상도초유사로 전란 수습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참모장으로 충무공 출정명령 하달 그해 4월 13일 왜군선이 부산포 앞바다에 몰려오면서 무의공의 존재는 뚜렷해지기 시작한다. 출정 직전인 5월 1일자 ‘난중일기’에는 ‘진해루에 앉아 방답첨사 이순신, 흥양수령 배흥립, 녹도만호 정운 등을 불렀다. 그들은 모두 매우 분하여 격동했으며, 자기 한 몸을 잊어버릴 정도였으니, 과연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할 만하다’고 했다. 행간에서 한시라도 빨리 전선으로 나가자고 재촉하는 참모들의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진다. 마침내 5월 3일 녹도만호 정운과의 대화에서 결심을 굳힌 충무공은 중위장인 방답첨사 이순신을 불러 다음날 새벽 출정한다는 명령을 전군에 하달토록 한다. 중위장(中衛長)이라면 참모장이다. 당시는 순천도호부사 권준이 전라좌수영의 중위장이었으나 전라도관찰사가 호출하는 바람에 자리를 비워 무의공이 대신한 것이다. 도호부사와 첨절제사는 종3품으로 품계는 같지만 순천부사는 광양·낙안·보성·흥양을 모두 휘하에 거느리고 있었던 만큼 전라좌수영에서는 선임이었던 듯하다.무의공은 옥포·합포·적진포로 향한 1차 출전에서 왜적의 대선(大船) 1척씩 모두 3척을 깨뜨리는 눈부신 전과를 거두었다. 사천·당포·당항포로 2차 출전한 5월 29일에는 권준이 중위장으로 복귀함에 따라 무의공은 전부장(前部將)으로 나선다. 6월 5일 당항포해전에서 조선수군은 26척으로 이루어진 적 함대를 공격해 25척을 가라앉혔다. 무의공은 남은 한 척이 도주할 것으로 예상하고 다음날 새벽 잠복하고 있다가 적선을 침몰시키고 100명 남짓한 왜적을 몰살시켰다. 무의공은 직접 활을 쏘아 왜장을 사살했다. 무과 시험장에서 선조의 눈에 들었던 그의 활쏘기 실력은 충무공을 앞섰다. 7월 6일 3차 출전은 한산대첩으로 이어진다. 충무공은 조정에 올리는 장계에 ‘방답첨사 이순신은 왜적의 대선 1척을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사로잡아 왜군의 머리 4급을 베었는데, 다만 사살하기에만 힘쓰고 머리를 베는 데는 힘쓰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 2척을 쫓아가서 일시에 불살랐다’고 썼다. 당시 전공을 평가하는 기준은 적의 머리, 곧 수급의 숫자였다. 그런데 충무공은 적을 사살하고 적선을 분멸(焚滅)하는 데 초점을 맞추되 공로를 인정받고자 무리하게 접근해 적의 머리를 베는 데 급급하지 않도록 했다. 이렇듯 무의공은 충무공이 제시한 전투 원칙에도 가장 충실한 장수였다. 무의공은 1594년 4월 충청수사에 오른다.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로 줄곧 충무공을 지원한 이억기와 더불어 충무공이 가장 신뢰하는 무의공이 서·남해 방비를 책임지는 지휘부가 완성된 것이다. 하지만 이 환상의 지휘 체계를 깨뜨린 원균이 칠천량에서 처참하게 패한 것은 우리가 모두 안타까워하는 사실이다. 무의공은 통제사에 복귀한 충무공이 명량해전에서 승리하고 두 달 남짓 지난 1597년 11월 다시 경상우수사에 임명됐다. 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은 1598년 11월 19일 새벽 시작됐다. 통제사 이순신을 잃었지만 조선과 명나라 연합수군은 200척 남짓한 적선을 쳐부수는 대승을 거뒀다. 무의공은 1604년 선무공신 3등에 올랐고 1607년 완천군(完川君)에 봉해졌다. 전라도병마절도사 시절 군영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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