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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쪽 상임위…야당 불참속 한나라 외통위 열어

    야4당이 장외로 나간 10일 국회에서는 한나라당이 소집한 반쪽짜리 상임위가 열렸다. 국회 외교통상통일위는 이날 민주당 등 야당의 불참 속에 한나라당 단독으로 전체회의를 열어 외교통상부의 현안 보고를 받았다. 회의는 당초 오전 10시에 열릴 예정이었지만 야당의 불참으로 시간을 미루다 오후 3시에 열렸다. 회의에 앞서 자유선진당 간사인 박선영 의원이 “야당 의원들은 서울광장에서 비바람을 맞고 있고 한나라당은 편법으로 국회를 운영하려고 상임위부터 열었다.”면서 “꼼수와 편법을 부리고 있다.”고 비난하는 등 여당과 설전을 주고 받았다. 박 의원은 “한나라당은 국정 운영의 동반자인 동료 의원들을 존중하고 오만과 독선을 그만해야 할 것”이라면서 “편법으로 열리는 상임위에는 동참할 수 없다.”고 말한 뒤 곧바로 퇴장했다. 이런 가운데 유명환 외교부 장관은 현안보고에서 최근 열린 한·미 외교장관 회담과 관련해 “한국과 미국이 강력한 내용의 안보리 결의를 조속히 채택할 필요가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면서 “북한의 추가적인 상황 악화에 대비하고, 진정한 비핵화를 향한 의미있는 대화를 시작하기 위해 한·미 공조를 바탕으로 일·중·러 등 5자간 협력을 강화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 장관은 오는 16일로 예정된 한·미 정상회담에 대해 “공고한 한·미 동맹에 기초한 안보태세를 재확인할 것”이라면서 “북한의 완전하고 검증가능한 비핵화를 달성하기 위한 양국간 공조와 협력을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환경노동위도 한나라당 요구에 따라 개회는 했지만 여야 간사끼리 안건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곧바로 산회했다. 김지훈기자 kjh@seoul.co.kr
  • ‘바보’의 땀내 배어있는 옹기굴 부활

    고(故) 김수환 추기경의 아버지가 옹기를 구웠던 경북 군위의 옹기굴이 복원된다. 군위군은 10일 군위읍 용대리 김 추기경의 옛집 인근에 있었던 옹기굴을 원형에 가깝게 복원키로 했다고 밝혔다. 이 옹기굴은 고 김 추기경의 아버지 김영석씨가 주민들과 함께 옹기를 굽던 곳이다. 군은 용대리 주민들의 증언과 김 추기경이 1993년 3월 용대리 옛집을 방문했을 당시 들려 준 옹기굴에 대한 이야기 등을 토대로 내년쯤 복원할 계획이다. 다섯 살 때 부모를 따라 경북 선산에서 군위로 이주해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칠 때 까지 용대리 옛집에서 살았던 김 추기경은 옛집을 찾았을 때 옹기굴에 대한 기억을 또렷이 회상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군은 현재 옹기굴 등의 복원을 위해 천주교유지재단 측과 협의하고 있다. 용대리 주민들에 따르면 추기경의 옛집과 7~8m 거리의 옹기굴은 길이 20~30m의 통가마 형태로 40여년 전쯤만 해도 중하 크기의 옹기를 주로 생산했다. 그러나 옹기 생산이 중단되면서 방치된 채 비바람에 허물어졌고 지금은 일대에 잡초만 무성한 채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지금도 옹기굴 터를 조금만 파면 옹기를 만들 때 이용했던 황토와 깨진 옹기 파면이 즐비하게 널려 있다. 주민 손정분(71) 할머니는 “47년 전 이 마을로 시집오던 해까지만 해도 마을 주민들이 이 옹기굴에서 옹기를 구워 냈으나 이듬해부터는 중단됐다.”면서 “그로부터 한참 이후 마을 어른들로부터 김 추기경의 아버지가 이 옹기굴에서 옹기 굽는 일을 했고, 어머니는 옹기 행상을 하면서 5남3녀와 함께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박영언 군위군수는 “용대리 옹기굴 복원은 김 추기경의 옛집 주변을 소담한 추모공원으로 조성하는 사업 중 하나”라며 “김 추기경이 용대리 옛집을 찾았을 당시 옹기굴에 큰 관심을 보였던 점 등을 감안했다.”고 말했다. 군위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 부모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 부모야

    우리나라 부모들 만큼 자식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는 사람들은 아마 세상 어느 나라에도 없을 거야. 물론 그 사랑에는 부모의 못다 이룬 꿈을 자식이 이뤄지기를 원하는 바람도 포함되어 있을 거야. 그래서인지 요즘의 부모의 자식사랑이 크게 변질되어 가는 경향도 있더구나. 또한 자식들도 예전처럼 부모 마음을 이해하거나 보답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 같아. “세상에 태어나게 했으면 자식이 원하는 것을 다 해줘야 하는 거 아냐? 누가 낳으라고 했어? 제대로 키우지 못할 바에 뭣 때문에 낳았어?” 이처럼 부모의 가슴에 못 박는 말을 아무런 생각 없이 내뱉기도 한단다. 그래, 고슴도치 자식이니 고슴도치일 수밖에 없어. 그러나 그 고슴도치도 자식은 끔찍이 사랑한단다. 유태인 격언에 “사람을 바꾸려 해도 바꿀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자기 부모다”라는 말이 있어. 부모와 자식은 한 몸이기 때문이야. 부모가 있어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났으며, 태어날 때 부모의 피와 뼈를 이어받았기 때문이야. 이 세상에 뿌리 없는 나무가 없고 근원이 없는 샘이 없듯이, 부모 없는 자식이란 있을 수 없는 거야. 그래서 나를 낳아 사랑과 정성으로 길러주신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은 자식의 도리이며 가장 사람다운 일이라고 했단다. 부모에게 자식의 의미는 무엇일까? 불경에 나오는 금언처럼 “내 목숨이 있는 동안은 자식의 몸을 대신하기 바라고, 죽은 뒤에는 자식의 몸을 지키기 바란다”는 것일 거야. 부모의 삼천 장 깊은 마음속까지 애간장을 다 끓이는 데도 미워할 수 없고 마지막까지 용서하면서 자식의 기쁨이 곧 내 기쁨으로 알고 살아가는 게 부모야. 부모는 항상 빚진 사람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자식에게 주고 싶은 거야. 부모는 자식이 내미는 그 손에 모든 것을 쥐어주면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진자리 마른자리 골라 눕히면서 정성과 애정으로 돌보면서 늙어가는 거야. 그래도 부모는 자식에게 더 많은 것, 더 좋은 것을 주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한단다. 자식은 부모에게 항상 처음이고 마지막인 거야. 부모의 마음은 자식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좋은 것만 먹이고, 원하는 것은 모두 해주고 싶은 거야. 자식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며, 있는 것 없는 것 모두 자식에게 퍼준단다. 아니 자식이 필요하다면 목숨까지도 내주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야. 왜 그런지 아니? 《부모은중경》엔 열 가지 부모의 은혜를 말하고 있는데 그게 바로 대답이야. “잉태한 후 열 달 동안 지키고 보호해준 은혜(懷耽守護恩), 출산을 당하여 고통과 수고를 겪은 은혜(臨産受苦恩), 출산 후 모든 근심을 잊어버린 은혜(生子忘憂恩), 쓴 것을 삼키고 단 것은 뱉어 먹여준 은혜(咽苦吐甘恩), 진자리 마른자리를 골라 뉘어준 은혜(廻乾就濕恩), 젖을 먹여 길러준 은혜(乳哺養育恩), 더러운 몸과 옷을 깨끗하게 해준 은혜(洗濯不淨恩), 먼 길을 떠나면 항상 걱정해준 은혜(遠行憶念恩), 자식을 위해서는 죄짓는 것도 마다 않는 은혜(爲造惡業恩), 끝까지 자식을 연민히 여기는 은혜(究竟憐愍恩)”야.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 바로 부모란 이름의 꽃이야. 평생 아름다운 마음을 잃지 않고, 나이가 먹어감에도 색이 퇴색되지 않으며, 가장 향기롭고 그윽한 향기를 가슴 가득 퍼지게 만드는 꽃, 부모란 꽃이야.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꽃은 없고 소중하지 않은 사람은 없어. 부모의 씨앗인 자식이 세상에 뿌리를 내리고 제몫을 다해 자랄 수 있도록 밑거름이 되어 주는 건 어머니인 땅이고, 아버지인 물인 거야. 장 파울도 말했듯이 “어머니는 우리의 마음속에 얼을 주고 아버지는 빛을 준다”고 한 것처럼, 부모는 그 작은 생명들이 살아가면서 비바람이 불어 닥쳐 시련에 시달릴 때 자기 안에 있는 지혜를 찾아낼 수 있도록 바른 길로 인도해 주는 태양과 같은 존재야. 태양은 그 어느 것도 편애하지 않고 세상의 것들과 함께하는 것처럼, 부모는 자식의 가슴 안에 늘 함께하는 거야. 세상은 변해도 부모 마음은 변하지 않아.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회초리를 들고, 그렇치 않은 부모는 떡 하나 더 준다”고 했기에 너희들이 잘못된 길을 갈 땐 죽비를 내려칠 거야. 그 죽비를 맞는 너희들은 잠시 동안 아프겠지만 부모 마음은 평생 동안 아플 거야. 그래, 너희들에게 가르칠 말 한마디도 없고 꾸짖을 말 그 무엇 하나 없음을 잘 알아. 그러나 먼 훗날 너희들이 부모 삶의 발자취를 보고 느낄 때 성실하게 부끄럽지 않게 욕하지 않을 만큼만 최선을 다해 살려고 노력할게. 글 이지상 자유기고가
  • 盧 전대통령 노제에 울릴 ‘이유있는 추모곡’

    盧 전대통령 노제에 울릴 ‘이유있는 추모곡’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노제에 울려 퍼질 추모곡은 어떻게 선정됐을까. 오늘(29일) 오후 1시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열리는 노제(路祭)에서는 국민장 장의위원회가 유족의 뜻에 따라 선정한 양희은의 ‘상록수’, 안치환의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윤도현 밴드(YB)의 ‘후회 없어’가 무대에 올려진다. 제 16대 노무현 전 대통령의 파라만장했던 삶과 그를 보내는 국민들의 애통한 마음을 대변해줄 3곡의 노래들은 고인과 어떤 연을 맺고 있을까. ◇ [盧 애창곡] 양희은 ‘상록수’ 이 곡은 노 전 대통령의 애창곡으로 잘 알려져 있다. 대선이 치뤄지던 지난 2002년, 편안한 차림으로 기타를 치며 ‘상록수’를 부르는 노 전 대통령의 모습은 국민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가사 또한 상록수의 강직함을 노래하고 있어 굴곡진 삶을 살았던 노 전 대통령의 생애를 그려낸 듯 하다. ”저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온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리다. 서럽고 쓰리던 지난 날들도 다시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 (상록수 가사 中) 양희은은 생전 노 전 대통령과 개인적인 친분은 없었지만 2002년 취임식 당시 연합 합창단과 함께 무대에 올라 ‘상록수’를 불렀던 바 있다. ◇ [盧 민중의식 담은 곡] 안치환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안치환은 민중가요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과 ‘마른 잎 다시 살아와’를 부르며 ‘서민 대통령’으로 불렸던 노 전 대통령을 회고하는 자리를 만든다. 당초 안치환은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부를 것으로 알려졌지만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모 동영상의 UCC에 삽입돼 화제를 불러 모으며 곡목을 수정했다.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은 양성우 시인의 시를 가사로 붙여 만든 곡으로 5.18 민주화 운동의 탄압과 희생을 노래하는 내용이다. 이 곡은 민중의 곁에서 아픔을 함께 나누려던 노 전 대통령을 기리는 의미를 지닌다.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나 이미 떠났다고 대답하라. 기나긴 죽음의 시절, 꿈도 없이 누웠다가 이 새벽 안개 속에 떠났다고 대답하라. 흙먼지 재를 쓰고 머리 풀고 땅을 쳐 나 이미 큰 강 건너 떠났다고 대답하라.”(’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中) ◇ [盧 정치적 소신 담은 곡] YB ‘후회 없어’ 윤도현이 이끄는 밴드인 YB는 이 날 노제의 마지막 무대에 오른다. 이들은 자신들의 8집 수록곡인 ‘후회 없어’로 마지막 이승길을 떠나는 고인을 위로한다. 이 곡은 마지막까지 정치적 소신을 지키려 했던 노 전 대통령의 삶을 대변해 주고 있는 곡이라는 점에서 피날레를 장식할 추모곡으로 선정됐다. ”비겁한 세상 비내린다면 그 비를 맞겠어. 날 가로막고 내 눈 가리고 내숨을 조여와도. 후회없어 걸어왔던 날들 이젠 다시 시작이야. 끝이 없는 험한 길이라도 이대로 난 걸어가 그것뿐야.” (’후회 없어’ 가사 中) 한편 지난 23일 서거한 노 전 대통령의 국민장은 오늘(29일) 오전 5시 경남 김해 봉하마을 발인을 시작으로 오전 11시 서울 경복궁 영결식, 오후 1시 서울광장 노제로 이어진다. 오후 3시 수원 연화장에서 화장된 유해는 오후 9시에 봉하 마을 사저 뒷산의 정토원에 안치되며 모든 절차를 마무리 짓게 된다. 서울신문NTN 최정주 기자 joojoo@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중견 만화가들 한국 만화의 역사와 미래를 말하다

    중견 만화가들 한국 만화의 역사와 미래를 말하다

    한국 만화 100주년이다. 일반적으로 1909년 6월2일 대한민보 창간호 1면에 실린 이도영 화백의 시사만화를 한국 근대 만화의 출발점으로 본다. 한국 만화는 100주년을 맞아 새로운 100년을 향한 도약을 꿈꾸고 있다. 관련행사도 다채롭게 열린다. 시대의 흐름과 함께 호흡하며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켜왔던 김동화(59) 화백, 이희재(57) 화백, 박재동(56) 화백이 지난 20일 남산 자락의 서울애니메이션 센터 인근 찻집에서 한국 만화가 걸어온 길과 앞으로 가야 할 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만화는 무엇인가. 김동화 만화는 간식이다. 안 먹어도 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지만 만화는 새로운 면을 보여주며 생활을 즐겁고 윤택하게 만든다. 이희재 영양가 있는 간식이면 더욱 좋겠지. 작가 입장에서 보면 그리는 대상이 무엇이든 친철하고 쉽게 표현하는 게 쉽지 않다. 만만하고 쉬운 것 같지만 노하우와 내공이 있어야 한다. 박재동 그림과 시와 연출 등이 집약된 게 만화다. 예술 양식의 정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폭발력 있게 무엇을 전달할 수 있는 매력적인 방법이다. 작가는 그것을 위해 고통스러운 즐거움을 누린다. 만화는 정말 사랑스러운 매체다. →한국 만화가 순탄한 길만 걸어온 것은 아닌데. 김동화 내가 가진 한국 만화 이미지는 대체로 회색 풍경이었다. 비바람, 눈보라 등 알록달록한 화려함보다 무채색이다. 사회적 여건이 어려웠다. 사전 검열이 가장 그랬다. 창작하는 사람들은 아름답고 감동적인 것을 찾아내야 하는데 검열에 걸리고 수정해야 하는 그런 상황이 이어졌다. 칼을 제대로 그릴 수도 없었고, 찢어지거나 때묻은 군복을 입은 군인을 그려서도 안 됐다. 박재동 어릴 때 부모님이 만화방을 했다. 남들은 만화를 골라서 봤지만 나는 무차별적으로 봤다. 너무 행복했다. 그런데 학교 선생님들은 만화방에 가지 말라고 했고, 학부모들은 만화를 찢어버렸다. 단속 때문에 부모님이 잡혀가기도 했다. 만화는 천시받고 금기시됐다. 또 울며겨자먹기로 재미 없는 책도 사야 할 정도로 독점 자본식 출판사가 횡포를 부렸다. 그런 사회적 편견과 출판사의 횡포가 검열과 함께 우리 만화 발전을 막았다. →지금은 만화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됐나. 김동화 굉장히 달라졌다. 과거에는 오해가 많았다. 만화를 보지 않는 세대가 사회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직접 보지 않고 나쁘거나 반사회적이라고 재단했다. 우리는 굉장히 억울했다. 지금도 동시대 작가를 보면 동료라기보다는 전우라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현재는 만화를 보고 자란 세대가 사회를 이끌어간다. 만화를 봤고, 좋아했기 때문에 반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희재 조선 시대 500년 동안 글 중심의 유교적 사고 속에서 살아 왔다. 글을 알아야 현자가 되고 출세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림은 가벼운 것이라는 의식이 생겼다. 그림 그리는 사람을 환쟁이로 낮춰 불렀다. 많이 달라지기도 했지만 500년 관습이 유전자처럼 조금은 남아 있는 것 같다. 박재동 과거에는 한글도 천하게 생각해 한글 소설은 불량한 것으로 여긴 적이 있었다. 요즘은 소설을 권장한다. 입시에 나오기 때문이다. 영상 시대인데 글을 우위에 두는 것은 여전한 것 같다. 그렇지만 교과서에 만화가 실리고, 만화학과도 생기다 보니 인식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다. 아마 시험 문제로 만화가 출제되면 더욱 달라질 것 같다. 내가 대학에 갔을 때 어머니는 만화방 아들이 대학에 갔다고 동네방네 소리치셨다(웃음). →한국 만화의 기념비 같은 작품을 꼽는다면. 이희재 각 시대마다 대중들과 호흡한 작품들을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김종래의 ‘엄마 찾아 삼만리’는 1950~1960년대 히트했다. 전쟁 뒤 이산가족이 많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1960년대 김산호의 ‘라이파이’는 우울한 현실을 잊게 하는 환상적인 영웅으로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1970년대는 이상무의 독고탁이 절대적이었다. 서울 변두리를 무대로 우리들의 동생 같은 주인공을 내세워 당시 정서를 듬뿍 담았다. 1980년대에는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이 있다. 과거와는 달리 비호 같은 날렵한 템포로 질주하는 까치를 통해 사람들은 대리만족과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1987년 민주화의 물결과 함께 허영만이 한국 최초 이데올로기 만화인 ‘오! 한강’을 발표하기도 했다. →최근 들어 만화 장르에 스포트라이트가 쏠리고 있다. 김동화 당연한 현상이다. 이제는 콘텐츠 시대다. 즐기는 시대인데 그 중심에 만화가 있다. 글과 그림을 함께 가지고 있는 만화로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 영화, 게임도 만들 수 있다. 만화가 뜨는 것은 세계적인 흐름이다. 중국이 발표한 5대 국가 사업에 만화와 애니메이션 육성이 들어가 있다. 이희재 문화 시대에는 원천 소스가 중요하다. 1990년대 이후 문화·예술 관련 창작품 한 개가 자동차 10만 대를 파는 것 이상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인식이 퍼졌다. 문화의 힘을 알고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만화는 여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투자 대비 파급 효과가 가장 큰 고부가가치의 장르다. 수많은 창작 만화가 나왔을 때 어떤 작품이라도 문화 폭탄이, 문화적 영약이 될 수 있다. →이제 한국 만화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김동화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었던 일본 만화는 1960년대에 문학과 겨뤄보자며 양장에 평론까지 붙인 고급 만화를 내놓기도 했다. 우리는 검열 등 외부 여건과 싸우는 데 시간을 소모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노하우와 실력을 쌓았다. 실력으로 따지면 우리 작가들은 세계적이다. 이제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좋은 작품을 내놔야 할 때다. 내부 혁명이 있어야 한다. 다양성이 있어야 한다. 그동안 아동·청소년에게 집중했는데, 이제는 아저씨·아줌마·할아버지·할머니를 위한 작품도 늘려야 한다. 100명의 작가가 있다면 100개의 이야기가 나와야 하는 것이다. 박재동 100명의 작가, 100개의 이야기는 정말 중요한 말이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힘에 신경을 써야 한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주로 만화가가 되는데 나중에 보면 늘 스토리에서 부딪히게 된다. 만화의 본질은 스토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한계를 일찍 드러내게 된다. 이희재 작가들에게 그림은 기본이다. 그런데 그림은 내용을 담는 그릇일 뿐이다. 우리가 먹는 것은 그릇에 담긴 밥이다. 맛있는 만화를 짓기 위해 인문학을 공부하고 또 창작을 할 때 몰입해야 한다. 그래야 독자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선사할 수 있다. 스토리가 부족하면 좋은 스토리 작가와 협력하면 된다. 예술가는 혼자 하려는 성격이 강하지만 좋은 결과를 위해 만남과 협력의 폭을 넓혀가는 게 필요하다. →창작 만화를 발표할 통로가 줄어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김동화 예전에는 출판물만 중요하게 여겼지만, 요즘은 인터넷이라는 바다와 같은 잡지가 있다. 만화 독자는 늘었지만 만화 잡지를 사는 독자는 줄었다. 그들은 인터넷으로 만화를 본다. 환경이 변한 것이다. 적극적으로 인터넷을 활용해야 한다. 지금은 적응하는 시기라 힘들지만 곧 극복할 것으로 본다. 이희재 인터넷은 만화시장의 문제이자 해법이다.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진다. 하지만 창작자가 스스로 설 때까지 안전 장치가 필요하다. 독자를 구축하고 성과가 이익으로 돌아와 작업을 계속할 수 있는 작가가 전체 5% 정도다. 그 폭을 적어도 20~30%로 늘려야 한다. 창작 인력을 발굴하고, 일선에 오래 머물게 하며 내공을 키워 거인이 될 수 있게 하는 토대를 마련하는 게 만화계와 정부의 숙제다. →한국 만화의 미래는 어떠한가. 김동화 60억이라는 120배 시장이 있는 세계로 나가야 한다. 일본을 비롯한 세계의 만화 작가들이 한국 만화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우리는 다양한 역사가 있고, 아픔이 많은 민족이라 필연적으로 만화 왕국이 될 수밖에 없다. 전국에 만화 관련 학과가 140~150개가 있다. 해마다 1000명 정도의 만화 인력이 배출된다. 지금 당장은 일본과 차이가 있겠지만 빠른 시일 내에 만회할 것이다. 박재동 노인들 사랑 이야기를 담은 만화가 등장할 정도로 폭이 넓어졌지만 일본 만화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부분도 있다. 나는 미래를 준비하자는 말을 하고 싶다.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찍은 스필버그가 성공한 것처럼, 우리 어린이들에게 어릴 때부터 만화를 그리는 풍토를 만들어 주면 좋겠다. 그렇게 10년을 키우면 더욱 탄탄해지지 않겠나. 이희재 우리 만화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한국 만화 100년이지만 우리가 가진 생각을 신명나게 풀어낸 것은 10년 정도밖에 안 됐다. 일제 시대, 권위주의 정부 시절 탄압, 이현세의 ‘천국의 신화’ 사건에 이르기까지 힘든 과정을 겪었다. 지금은 세계에서 만화를 가장 활발하게 지원하는 나라가 될 정도로 상황이 달라졌다. 가을에는 한국만화영상진흥원도 출범한다. 이제 만화가들의 어깨가 무거워졌다. 정리 홍지민 강병철기자 icarus@seoul.co.kr 사진 손형준기자 boltagoo@seoul.co.kr ●김동화 화백 한국형 순정만화의 아버지. 한국만화가협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한국만화 100주년 위원회 공동위원장이다. 대표작으로는 ‘요정 핑크’, ‘기생 이야기’, ‘황톳빛 이야기’, ‘빨간 자전거’ 등이 있다. 부인이 한승원 작가로 만화가 부부다. ●이희재 화백 우리시대 최고의 리얼리스트. 우리만화연대 대표를 지냈으며 한국만화 100주년 위원회 집행위원장이다. 대표작으로 ‘악동이’,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간판스타’, ‘저 하늘에도 슬픔이’ 등이 있다. 소설가 이문열과 ‘만화 삼국지’를 펴내기도 했다. ●박재동 화백 국내 대표 시사만화 작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애니메이션과 교수이자 한국만화 100주년 위원회 공동위원장이다. 대표작으로는 ‘목 긴 사나이’, ‘만화 내사랑’, ‘정치야 맛좀 볼텨’ 등이 있다. 애니메이션 ‘오돌또기’를 만들었다.
  • [도시와 산] (8) 광주 무등산

    [도시와 산] (8) 광주 무등산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 흘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김준태 시인이 5·18민주화운동 직후 지방 일간지에 발표한 시의 한 대목이다. 이 때문에 해당 신문은 폐간되고, 그는 엄청난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 이후 무등산은 고은·김남주·황지우·문병란·양성우 등에 의해 저항문학의 단골 소재가 됐다. 5월의 무등산은 신록이 눈부시다. 장불재 부근엔 철쭉이 산허리를 불태우고 있다. 도심에서 ‘광풍’이 몰아치던 1980년 5월에도 그랬다. 그 이후 매년 정월 초하루 수만명의 인파가 중머리재에 몰려 새해를 맞았다. 하고 싶은 말과 가슴 속에 숨겨둔 무언가를 외쳐댔던 곳이다. 원효·나옹 등 고승들의 발자취가 서린 사찰과 암자도 즐비하다. 무등산은 숱한 국난과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수천년간 지켜본 산증인이다. 부드러운 곡선을 이룬 능선은 인구 150만 도시를 품고 있다. 그래서 어머니로 자주 비유된다. 시민들에겐 ‘산’이란 장소성을 뛰어넘어 또 다른 의미를 지니는 이유이다. ●불교와 민속의 중심 무등산(1187m)은 광주광역시의 동쪽 가장자리와 전남 담양·화순에 걸쳐 우뚝 솟아 있다. 무진악, 서석산, 무당산 등으로 불리다가 ‘고려사’에 처음 무등산이란 기록이 나온다. 노산 이은상은 무등산이 불교적 용어인 무유등등(無有等等·부처님은 중생과 같지 않다)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한다. 이와 걸맞게 곳곳에 사찰과 고승들의 전설이 서려 있다. 증심사·약사사·원효사·관음암·규봉암·석불암·문빈정사 등 현존 사찰 이외에 서봉사지·개선사지·백천사지 등 문헌상으로 전해지는 절터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증심사~중머리재 구간에 있는 천제단과 송풍정 등은 나라가 어렵거나 백성이 도탄에 빠졌을 때 하늘에 제를 올린 곳이다. 이나라(32·여) 광주 동구문화원 사무국장은 “무등산은 예부터 기우제, 당산제, 철쭉제, 억새제 등 각종 산제사를 모시는 신령한 곳으로 여겨졌다.”며 “산제사는 시민들의 화합과 공동체 의식을 심어줬다.”고 말했다. 무등산은 남북 주능에서 뻗어난 몇개의 가지 능선으로 이뤄졌다. 북서릉은 정상~중봉~바람재~향로봉~장원봉~잣고개를 넘어 국립5·18민주묘지가 위치한 망월동쪽으로 이어진다. 남서릉은 정상~장불재~백마 능선까지는 남북 주릉과 함께 달리다가 화순과 광주의 경계를 이루는 너릿재로 가지를 낸다. 그러나 어느 방향에서 보더라도 한 덩어리처럼 육중하게 보인다. ●빼어난 풍광 예부터 수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무등산의 ‘경승’을 노래했듯이 각 지점마다 빼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꼭대기는 천왕·지왕·인왕봉 등 ‘정상 3봉’으로 이뤄졌다. 이 중 천왕봉(1186.7m)이 가장 높다. 현재 정상 3봉 일대는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어 현장 접근은 불가능하다. 이 부근에 오르면 남서쪽은 나주평야와 월출산이 지척이다. 청명한 날이면 다도해가 아스라이 내려다보인다. 이보다 조금 낮은 서석대(1100m)와 입석대(1017m)는 가히 절경이다. 이들 봉우리는 육지에서는 보기 드문 주상절리대를 형성하고 있다. 서석대는 저녁노을이 물들 때 햇빛이 반사되면 수정처럼 빛을 발해 ‘수정병풍(水晶屛風)’이란 별명도 갖고 있다. ‘천만년 비바람에 깎이고 떨어지고/ 늙도록 젊은 모양이 죽은 듯 살아 있는 모양이/ 찌르면 끓는 피 한줄 솟아날 듯하여라.’ 시인 이은상이 입석대를 노래한 시구이다. 억겁의 풍상을 겪는 동안 쪼개지고, 깎이면서 고통을 견뎌냈다. 이들 두 봉우리는 2005년 문화재청에 의해 천연기념물 제645호로 지정됐다. 10년 넘게 산을 오르내린 이길용(47)씨는 “철 따라 주변 환경이 환상적으로 변하는 입석·서석대는 신령스런 분위기를 풍긴다.”고 말했다. ●도시의 허파이자 쉼터 무등산은 도시의 허파이자 생태계의 보고이다. 진달래, 철쭉, 산나리 등 1000여종의 온대성 식물들이 철따라 변신하며 장관을 연출한다. 천연기념물인 붉은배 새매·황조롱이를 비롯해 삵·멧돼지·고라니 등 100여종의 조류와 포유류가 둥지를 틀고 있다. 시민들은 무등산을 동네 공원쯤으로 여긴다. 도심과 맞닿아 있어 맘만 먹으면 언제나 오르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등산 코스 역시 산책로 수준인 1시간 대에서부터 6~7시간 정도의 코스까지 선택할 수 있다. 문현석(48·북구 용봉동)씨는 “산행을 할 때마다 친구나 직장 동료 등 한두 명의 지인을 꼭 만나게 된다.”고 말했다. 가장 많이 이용하는 코스는 서남쪽인 증심사를 출발, 약사사~새인봉 삼거리~중머리재~장불재~정상 구간이지만 ‘증심사지구 자연환경 복원 사업’으로 최근 잠정 폐쇄됐다. 대신 북쪽인 원효사 지구에서 출발, 꼬막재~규봉암~장불재~정상 코스 등으로 등산객이 많이 몰린다. 요즘은 철쭉철이라서 관광버스를 동원한 외지 등산객의 발길도 줄을 잇는다. 5월 초부터 해발 400~500m 능선인 토끼등·바람재 일대에서 철쭉이 피기 시작, 20일 이후이면 장불재 등 정상 구간까지 만발한다. 주말과 휴일엔 2만~3만명이 산을 찾는다. 공원관리사무소측은 최근 동구 산수동~충장사~원효사~서석대에 이르는 11.87㎞의 옛길을 복원하고 일부를 개방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실개천옆 정자엔 임을 향한 행진곡~~ 무등산의 북동쪽 줄기는 원효계곡을 따라 지실마을을 거쳐 전남 담양군 봉산면으로 이어지면서 평야지대를 이룬다. 지금은 지실마을 부근에 광주호가 생겼지만 예전엔 무등산 계곡으로부터 발원한 물길이 남면·봉산면 일대 들녘을 관통했다. 계곡 양 안은 무등산 줄기에서 뻗어 나온 야트막한 산과 그런 야산에서 갈라져 나온 실개천이 여럿 있다. 이 일대에 조선 초·중기부터 유학자·유배자·풍류 가객들이 몰려들었다. 자연스레 정자들이 들어섰다. 이를 중심으로 지체 높은 양반들의 발길이 잦아지면서 나름대로 ‘누정 문화’가 탄생했다. 개인적 수양이나 후학의 교육, 현실도피적 은둔 등 정자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각양각색이다. 무등산권 정자들이 역사적으로 의미를 갖는 이유는 국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조선조 ‘가사문학’이 꽃피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곳이 광주호 상류 소나무 숲에 있는 식영정이다. 서하당 김성원이 그의 장인이자 스승인 임억령을 위해 1560년(명종 15년)에 세웠다. 송강 정철이 25살 때 이곳에 머물면서 무등의 4계절과 강호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성산별곡을 지었다. 이곳으로부터 1㎞쯤 상류에는 양산보(1503~1557)가 건축해 은둔생활을 했던 소쇄원이 자리한다. 소쇄원은 한국 정원의 전형으로도 꼽힌다. 이곳을 찾아 시를 남긴 인물로는 김인후·김성원·기대승·고경명·정철 등이 있다. 식영정과 불과 250여m 건너편에는 김윤제(1501~1572)가 지은 환벽당이 있다. 정철이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학문을 닦기도 했다. 광주호 아래쪽인 담양군 봉산면 제월리엔 송순(1493~1583)이 지은 면앙정이 있다. 국문학사에 주옥 같은 ‘면앙정가’가 탄생한 곳이다. 무등산 원효계곡과 맞닿은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에는 송강정이 자리한다. 송강이 1585년 대사헌으로 지내다가 당쟁에 휘말려 3년간 머물던 장소이다. 연군지정(戀君之情)을 읊은 ‘사미인곡’이 탄생했다. 광주 북구 충효동과 원효계곡 하류엔 취가정과 풍암정이 있는 등 조선조 때 이 일대가 풍류를 아는 시인과 묵객들의 쉼터였다. ‘무등산’의 저자 박선홍씨는 “무등산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풍경이 권력에서 소외되거나 당쟁에 휘말린 선비들을 자연스레 모이게 했을 것”이라며 “이들 정자를 잘 보존해 후세 교육의 장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광주 최치봉기자
  • 김기문 중기중앙회장 “中企중심 정책 추진에 기대”

    김기문 중기중앙회장 “中企중심 정책 추진에 기대”

    이명박 대통령은 22일 청와대 녹지원에서 중소기업 및 소상공인 등 4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희망 창조, 중소기업인과의 대화’를 갖고 노고를 격려했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5분으로 예정됐던 인사말을 20분 가까이 이어가는 등 중소기업인들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표시했다. 이 대통령이 “행사 준비하는 사람들이 비가 와서 (행사를) ‘실내에서 해야 한다.’고 하기에 ‘이 사람들은 비바람 맞으며 기업하는 사람들이니 (예정대로) 그냥 하라.’고 했다.”고 말하자 좌중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이 대통령은 최근 글로벌 경제위기를 언급하며 “이번 위기는 아래로 갈수록 힘들다. 대기업보다는 중소기업이, 중소기업보다 소기업이, 소기업보다 소상공인이 더 힘들다.”며 “연말이면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경제가 지수상 좋아지더라도 체감하는 것은 1, 2년 더 갈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이 대통령은 최근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확산되는 ‘잡셰어링(일자리 나누기) 운동’에 대해 언급, “(다른나라) 기업들은 어려울 때 사람을 내보내는 것을 선제적으로 하는데 한국(기업)은 참고 참고 해서 내보낸다.”며 “한 사람의 일자리라도 더 챙겨보려는 여러분이 고맙다.”고 치하했다. 또 “그걸 몰라주는 노조원이 있으면 마음이 아프긴 하겠지만 노사가 조금씩 양보해 일자리를 지키겠다는 정신은 기업 입장에서는 어느 나라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에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장은 “취임 초 대기업 위주 정책이 있을 것이라는 일부 우려가 있었지만 중소기업 중심의, 현장 중심의 정책이 꾸준히 추진되는 것을 보고 신뢰와 기대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한편 이 대통령은 이날 행사에서 훈·포장 및 대통령표창 수상자인 모범 중소기업인에게 훈장을 달아주면서 격려했다. 이종락기자 jrlee@seoul.co.kr
  • [엄마와 읽는 동화] 허수아비와 들쥐/김소연

    [엄마와 읽는 동화] 허수아비와 들쥐/김소연

    너른 들판에 가득 찬 벼 이삭들이 가을바람에 춤을 춥니다. 논 한가운데 서 있는 허수아비의 낡은 저고리도 덩달아 나부낍니다. “허! 그 놈 참 험악하게도 생겼다.” 논두렁을 지나던 이웃 농군들이 허수아비를 보며 흉인지 칭찬인지 한마디씩 던집니다. 농부는 망태 할아범처럼 생긴 허수아비가 여간 마음에 드는 게 아니었어요. 허수아비를 세워 둔 후론 얄미운 참새들이 얼씬도 못했으니까요. “금쪽같은 내 곡식들, 잘 지켜야 한다.” 농부 말에 어깨가 으쓱해진 허수아비가 무서운 얼굴로 고함을 쳤어요. “어떤 놈이든 논가에 얼씬만 해라. 이 허수아비님이 가만 안 둔다!” 가을들판엔 허수아비 빼곤 개미새끼 한 마리 눈에 띄질 않았어요. “내 덕분에 올 해도 풍년이구나.” 허수아비는 한껏 으스댔지만 그 모습을 보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어요. 아침에 한번 농부가 나와 둘러볼 뿐, 하루 종일 허수아비 혼자였지요. 따가운 햇살에 머리가 지끈거려도, 차가운 밤비에 옷이 젖어도 누구하나 얘기 나눌 친구가 없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뒷산에서 들쥐 한 마리가 들판으로 내려왔어요. 벼가 다 익어가니, 겨우내 먹을 쌀을 장만하러 오는 게지요. 들쥐는 허수아비가 서 있는 논 한가운데로 들어왔어요. 잘 익은 벼 이삭 하나를 똑 잘라 물고 나가다 그만 허수아비에게 들키고 말았지요. “웬 놈이 남의 벼를 훔쳐 가느냐!” “아이고 깜짝이야. 간 떨어지겠네.” 천둥 같은 고함소리에 놀란 들쥐가 자리에 서서 사방을 두리번거렸어요. “에이, 난 또 뭐라고…. 허수아비잖아.” 들쥐는 허수아비를 보고는 어깨를 한번 으쓱거렸어요. 그리고 놓쳤던 이삭을 입에 물고 제 갈길을 갔어요. “아니, 네 이 놈! 내가 누군 줄 알고 이 논에 함부로 들어 온 게냐? 혼구멍이 나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허수아비는 큰소리로 으름장을 놓았어요. 자기를 보고도 놀라기는커녕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들쥐가 괘씸했거든요. 하지만 들쥐는 허수아비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며 콧방귀를 뀌었어요. “어쩌려고요? 막대 팔로 날 잡으려고요?” “뭐, 뭐라고? 너는 내가 무섭지도 않느냐?” “무서워요? 그 우스꽝스러운 바가지 얼굴이 무서워요? ” 들쥐의 대답에 허수아비가 할 말을 잃었어요. “아저씨, 나는 겁쟁이 참새하고는 달라요. 허수아비가 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요.” 들쥐는 거침없이 말을 이었어요. “아저씨는 그저 속 빈 강정이에요. 저고리 속은 텅 비어가지고 논바닥에 쿡 박혀 꼼짝도 못하는 그야말로 허깨비, 그게 바로 허수아비죠.” ‘속 빈 강정? 허깨비?’ 허수아비는 생전 처음 듣는 말에 화 낼 생각조차 잊어버렸어요. “그럼, 이만. 내일 또 봐요.” 들쥐는 멍하니 서 있는 허수아비를 두고 벼 포기 사이로 유유히 사라져버렸어요. 다음날부터 생쥐는 제 멋대로 들판을 오가며 벼이삭을 물어갔어요. “도둑놈 같으니. 당장 나가지 못 해!” 허수아비는 들쥐를 볼 때마다 고함을 지르며 내쫓으려 했지만 들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지요. 보다 못한 허수아비가 들쥐를 나무랐어요. “너는 남이 일 년 내내 공들여 키운 곡식을 허락도 없이 축 내는 게 부끄럽지도 않느냐?” 이 말에 들쥐가 발길을 멈추었어요. “우리 짐승들에겐 이 벼들도 산에서 나는 열매와 다를 게 없는 걸요.” “무슨 소리야? 이 논엔 엄연히 주인이 있는데.” “그거야 사람들끼리 하는 소리지, 어디 이 땅이 생길 때부터 농부 것이었나요?” “그래도 모를 내고 벼를 키운 건 바로 주인 농부라고.” 허수아비는 제가 마치 농부인 양 점잖게 말했어요. “산에 나는 열매는 저절로 큰 줄 아세요? 하늘이랑 바람이랑 산이 서로 도와가며 키운 것이지.” 들쥐는 반들거리는 코를 벌름거리며 대꾸했어요. “따져보면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산에 올라와 마음대로 열매를 따가잖아요. 사람들이 언제 산이나 하늘에 허락받고 가져 간 적 있나요? 지난 봄에는 나무꾼이 다람쥐네 참나무를 통째로 베어갔어요. 하루아침에 집을 빼앗긴 다람쥐 가족이 얼마나 울었는데요.” 들쥐의 말에 허수아비가 입맛을 다셨어요. “다람쥐네 식구들한텐 안 된 일이군.”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허수아비가 조그만 소리로 말했어요. “그래도 너무 많이 물어가진 말아다오. 내 체면도 있으니까.” “그럼요. 저도 염치가 있는데.” 들쥐가 방긋 웃으며 대답했어요. 다음날, 벼이삭을 물고 이랑 사이를 지나던 들쥐가 갑자기 허수아비 어깨위로 쪼르르 올라왔어요. “아저씨. 혼자 심심하지 않으세요?” “심심하다니. 난 지금 일하는 중인데.” 허수아비는 두 눈을 부릅뜨고 들판을 살피며 말했어요. ““근데, 며칠 다녀보니까 이 논에는 아저씨 말고는 메뚜기 한 마리도 안보여요.” “그야 당연하지. 너처럼 맹랑한 녀석이면 모를까, 다들 날 무서워하거든.” 들쥐는 잘난 체하는 허수아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어요. “다들 아저씨를 무서워만 하는데, 슬프지 않아요? 친구 하나 없이?” “친구? 그런 것 보단 내 몫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한 법이야.” 허수아비 말에 들쥐가 입을 쌜쭉거렸어요. “피~. 그런 게 어딨어. 아저씨, 그러지 말고 제가 아저씨 친구 할까요?” “친구랍시고 논에 있는 벼 맘 놓고 훔쳐가려고?” 허수아비가 어림도 없다는 듯 눈썹을 추켜세웠어요. “치! 아저씬 벼밖에 몰라.” 들쥐는 혀를 쏙 내밀더니 어깨에서 내려가 버렸어요. 들쥐는 그 후 며칠 더 왔다 갔다 하더니, 이후론 나타나질 않았어요. 허수아비는 벼를 훔쳐가는 들쥐가 사라지자 마음이 놓였어요. 그래도 혼자 심심할 때면 들쥐의 또랑또랑한 눈이 생각났어요. 얼마 후, 추수가 시작되었어요. 농부는 콧노래를 부르며 벼를 거두었어요. 그리고 허수아비를 벼 그루터기 사이에 던져놓고 가버렸어요. 이제 허허벌판엔 허수아비만 덩그러니 남았어요. “가을 내내 고생한 나를 쓸모없어졌다고 내버리다니….” 허수아비는 농부의 야속한 얼굴을 떠올리며 중얼거렸어요. 날은 갈수록 추워졌어요. 허수아비가 쓰던 벙거지는 늦가을 찬바람에 떠밀려 어디론지 날아가 버리고, 저고리도 비바람에 헤져 여기저기 찢겼지요. “이제 겨울이 닥쳐오면 얼어 죽겠지….” 허수아비는 힘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어요그때, 갑자기 머리 위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아저씨. 여기 누워서 뭐하세요?” 어느 틈에 왔는지, 들쥐가 머리맡에 서서 허수아비를 빠끔히 내려다보고 있질 않겠어요? “아니. 너 여기 웬일이냐?” 허수아비는 반가운 마음에 큰소리로 물었어요. 들쥐는 대답 대신 허수아비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중얼거렸어요. “지나가는 길에 와봤더니…. 농부가 그예 버리고 갔구나!” 그 말에 허수아비는 두 볼이 벌게졌어요. “정말 이렇게 있다간 한 겨울에 얼어 죽겠어요.” “그게 허수아비 운명이라면 할 수 없지.” 허수아비가 체념한 듯 우물거렸어요. “가만있자…, 아! 좋은 생각이 났다.” 들쥐가 논두렁 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갔어요. 잠시 후, 볏짚을 잔뜩 물고 온 들쥐는 허수아비 저고리 속으로 쏙 들어갔어요. 들쥐가 저고리 안을 헤집고 다니는 바람에 허수아비는 간지러워 웃음이 터졌어요. “뭐하는 거야? 히히히….” “저고리 속을 짚이랑 마른 풀로 가득 채우면 바람도 막고, 추위에 끄떡없을 거예요.” 이 말에 허수아비는 웃음을 멈추고 멍한 눈으로 들쥐를 쳐다봤어요. 그러자 들쥐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어요. “우린 친구잖아요.” 들쥐는 하루 종일 쏘다니며 마른 풀들을 모아 저고리 속을 채웠어요. 덕분에 저녁노을이 질 무렵, 허수아비는 두툼한 외투를 걸친 것처럼 뚱뚱해졌지요. 들쥐는 손을 흔들며 산으로 돌아갔어요. 밤이 되자 첫 눈이 내렸어요. 밤새 내린 눈은 솜이불처럼 허수아비를 덮어 주었어요. 그래도 저고리 속은 휑하니 찬바람이 가득했어요. 그때였어요. “허수아비 아저씨! 어디 계세요?” 들쥐의 목소리가 눈 쌓인 들판에 울려 퍼졌어요. 허수아비가 서둘러 대답했지요. 들쥐는 허수아비에게 다가와 바가지 얼굴에 덮인 눈을 쓸어냈어요. 허수아비는 들쥐를 보자마자 두 눈이 커다래졌어요. 들쥐는 마치 큰 싸움이라도 한 것 같았어요. 콧등엔 할퀸 자국이 선명하고, 털은 땀과 흙이 범벅인데다 이마에는 멍까지 들었어요. “어떻게 된 거야? 겨우내 집에서 따뜻하게 지낸다더니.” 그 말에 들쥐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어요. “어젯밤, 난데없이 오소리가 쳐들어왔어요. 창고에 가득 채워둔 식량을 빼앗더니, 집까지 부셔버렸어요. 간신히 목숨만 구해 도망쳐 나왔어요.” 들쥐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허수아비를 바라보았어요. “아저씨한테 작별인사 하러 왔어요. 먹을 것도, 집도 잃었으니 이번 겨울은 나기 어려울 거예요. 아저씨 부디 안녕히 계세요.” 들쥐가 힘없이 뒤돌아섰어요. “무슨 소리야? 여기가 네 집인데.” 들쥐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어요. “네? 어디가요?” “어디긴. 바로 내 저고리 안이지. 얼마나 따뜻하고 아늑한데.” 허수아비는 뽐내듯 가슴을 쭉 내밀었어요. “겨울동안 나랑 같이 지내자. 들판엔 농부가 떨어트리고 간 이삭도 제법 있으니 양식 걱정은 말고.” 허수아비가 왼쪽 눈을 찡긋하더니 한마디 덧붙였어요. “어때, 친구?” “아저씨!” 들쥐는 연못에 뛰어드는 개구리처럼 허수아비의 품으로 뛰어들었어요. 그제야 허수아비는 온 몸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답니다. ●작가의 말 힘겹게 농사지은 쌀을 훔쳐가는 들쥐는 얄미운 도둑이지요.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사람이야말로 자연의 가장 큰 도둑일지도 몰라요. 사람들은 자연에게 한없이 베풀어 달라고 조르면서 막상 제가 가진 것은 쌀 한 톨도 그냥 내어주지 않으니까요. 곡식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눈을 부라리는 허수아비야말로 그걸 세워 둔 사람의 진짜 모습이 아닐까요? 혼자서 모든 걸 독차지 하려고 아무에게도 곁을 주지 않는, 그래서 밤낮 홀로 서 있는 허수아비. 그런 허수아비에게 친구를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약력 ▲2004년 단편 ‘행복한 비누’가 샘터문학상 동화부분에서 최우수상을 받으며 등단 ▲2007년 창비가 주관한 좋은 어린이책 공모에서 장편 ‘명혜’가 당선 ▲2008년 창작동화집 ‘꽃신’ 발표 ▲지은 책으로는 ‘명혜’ ‘꽃신’ ‘나불나불 말주머니’ ‘선영이, 그리고 인철이의 경우’등
  • [진우석의 걷기좋은 산길] (19) 전남 보성 일림산

    [진우석의 걷기좋은 산길] (19) 전남 보성 일림산

    계절의 여왕 5월의 꽃은 철쭉이다. 철쭉은 진달래, 산벚꽃 등의 봄꽃들이 모두 져버린 늦은 5월에 산비탈과 능선을 온통 진분홍빛으로 물들인다. 고산 지대의 추위와 비바람을 견뎌 내느라 철쭉이 개화시기를 늦춘 것이다. 덕분에 5월이면 눈부신 신록과 더불어 산을 화려하게 물들이는 철쭉의 장관을 감상할 수 있다. 철쭉 명산 중에서 최근에 가장 주목받는 곳이 보성 일림산이다. 보성에는 5개의 바다가 있다고 한다. 소리의 바다, 마음의 바다, 녹차의 바다, 진짜 바다, 철쭉의 바다. 섬진강 남서쪽 지역의 가늘고 애잔한 소리 서편제, 남도의 후덕한 인심, 우리나라 최대의 녹차밭, 율포해수욕장과 득량만 그리고 일림산 일대를 진분홍빛으로 물들이는 철쭉의 바다가 그것이다. ●국내 최고 철쭉 명산으로 떠오른 일림산 일림산이 알려진 건 고작 10여 년이 안 되지만, 부드러운 산세와 무려 100만 평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 해풍을 맞고 자라 유난히 붉고 선명한 꽃 덕분에 우리나라 최고라는 수식어가 붙게 되었다. 일림산의 철쭉 산행 코스는 계곡이 빼어나고 원점회귀 산행이 가능한 용추계곡을 들머리로 하는 것이 좋다. 이 길은 이정표가 깔끔하게 정비돼 있는 데다 힘든 곳이 거의 없어 가족과 연인들에게 더욱 좋은 코스다. 웅치면 용추계곡 주차장에서 계곡을 따르면 나무다리를 만난다. 입구에 현 위치 ‘용추계곡’이라 적혀 있다. 다리를 건너면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편백숲이 심신을 평화롭게 정화해 준다. 이어 갈림길이 나오는데, 오른쪽 골치(1.2㎞) 방향으로 오르면 정상을 거쳐 왼쪽 길로 내려오게 된다. 작은 계곡을 건너 10분쯤 가면 임도를 만나고, 임도를 따르다 다시 만난 산길을 15분쯤 오르면 갑자기 길이 평지처럼 순해진다. 그 길을 300m쯤 가면 능선에 붙게 된다. 여기가 골치 사거리다. 우측은 제암산(7.5㎞)과 사자산(3.4㎞), 직진하면 장흥 방향, 일림산 정상(1.8㎞)으로 가려면 좌측 길을 따라야 한다. 지금부터는 호젓한 능선길이다. 길섶이 모두 철쭉이라 꽃구경 하다 보면 힘든 줄 모른다. 멋진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 ‘작은봉’을 넘어 ‘큰봉우리’에 오르면 입이 쩍 벌어진다. 정면 일림산 정상을 필두로 시야에 들어오는 산사면 전체가 온통 진홍빛으로 불타 오르고 있다. 불타는 일림산에 마법처럼 10여 분 끌려가면 드디어 꼭대기에 올라선다. 정상에서는 그동안 숨어 있던 득량만이 철쭉밭 뒤로 시원하게 펼쳐진다. 뒤를 돌아보면 사자산까지 이어진 능선과 그 유명한 제암산의 임금바위가 장관이다. ●하산길에 만나는 보성강 발원지 정상에서 내려서면 봉수대 삼거리다. 여기서 바라보는 일림산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봉곳한 봉우리는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부드럽고 그 안은 진분홍빛 철쭉 광채가 뿜어져 나온다. 이어지는 발원지 사거리 10여 분이 산행의 하이라이트다. 철쭉 터널을 따라 꿈결처럼 부드러운 길이 이어진다. 님에게 가는 길이 이토록 달콤할까? 발원지 사거리에 이르면 아쉽게도 능선길이 끝이 난다. 용추계곡 방향으로 200m쯤 내려오면 보성강 발원지에 이른다. 이 물은 곡성군 압록에서 300리의 긴 여정을 마치고 섬진강과 합류, 하동을 지나 남해바다에서 생을 마감한다. 물맛은 강의 발원지라 그런지 신비롭고 달콤하다. 이제 산행은 막바지. 들머리이자 날머리인 주차장까진 2㎞. 길은 좌측으로 휜다. 10분이면 임도에 닿는다. 임도를 가로지르면 산길이 열려 있다. 그윽한 편백숲을 지나면 출발했던 갈림길에 닿는다. 다리를 건너기 직전 우측 계곡을 따라 100m쯤 오르면 팔각정과 함께 와폭인 용추폭포와 용소가 자리 잡고 있다. 여기서 발을 담그고 땀을 씻으면 황홀했던 산행이 기분 좋게 마감된다. 용추계곡을 들머리로 정상을 거쳐 원점 회귀하는 코스는 약 6㎞, 3시간 남짓 걸린다. <여행전문작가> ●가는 길 서울에서 보성으로 가는 버스는 강남 센트럴시티터미널(www.exterminal.co.kr)에서 하루 두 번뿐이다. 따라서 서울이든 부산이든 일단 순천까지 가는 게 좋다. 순천에는 보성으로 가는 버스는 자주 있고 시간은 1시간쯤 걸린다.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동광주·목포·순천IC 등을 통해 보성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 후 웅치면(895번 지방도로)으로 진입한다. 보성읍에서 용추계곡 가는 버스는 06:10 08:00 11:10 12:50 15:00 16:50 19:10에 있다.
  • “과학자 되어 난치병 낫게 하는 신약 개발할래요”

    근육병의 시련도 국토 종단을 향한 아버지와 아들의 굳건한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온몸의 근육이 점점 약해지는 ‘근이영양증’을 앓는 배재국(13·대전 옥계초 5년)군이 아버지 종훈(43)씨와 함께 전동휠체어를 타고 국토 종단에 성공했다. 지난달 13일 전남 해남군 땅끝마을을 출발한 배군은 3주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670㎞를 달려 3일 오후 2시30분쯤 임진각 평화누리공원에 무사히 도착했다. 비바람을 맞으며 하루 평균 8시간씩 도로를 달리는 일정은 건강한 성인도 쉽지 않은 터다. 다리를 못 움직이고 팔에도 강한 힘을 주기 어려운 배군에게는 더욱 힘겨웠다. 그러나 아버지 종훈씨는 비가 오면 아들에게 우의를 입혔고, 도로에서 전동휠체어 배터리가 방전되면 수동휠체어로 옮겨 태워 종단을 계속했다. 국토종단 내내 아들 옆에서 함께 한 종훈씨의 눈에는 해냈다는 성취감과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눈물이 배어 나왔다. 그는 “재국이가 몸이 더 굳어지기 전에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 국토종단을 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배군도 “과학자가 돼 저처럼 아픈 사람들 낫게 하는 신약을 개발하고 싶다.”며 씩씩하게 답했다. 이들 부자는 난치병 어린이들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한국메이크어위시’ 재단의 도움으로 국토 종단을 시작했으며, 3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이들의 곁에서 ‘인간 승리’의 감동을 함께 했다.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日 후지산케이 클래식 ‘지존’ 신지애 준우승

    ‘지존’ 신지애(21·미래에셋)가 26일 일본 시즈오카 가와나 호텔 골프장(파72·6464야드)에서 열린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 투어 후지산케이 레이디스클래식 마지막날 2라운드에서 버디 4개와 보기 2개를 묶어 2언더파 70타를 쳐 준우승을 차지했다. 신지애는 최종합계 4언더파 140타로 우승자 타미 더딘(호주)에 3타 뒤졌다. 3라운드로 예정된 이 대회는 전날 2라운드 경기가 강한 비바람으로 중단됐고 이날도 강풍 탓에 중단과 재개를 반복한 끝에 2라운드 대회로 종료됐다.황비웅기자 stylist@seoul.co.kr
  • [밸런타인챔피언십] 비바람의 제주 톱 랭커들 “악”

    거센 비바람이 심술을 부린 24일 제주 서귀포시 핀크스골프장(파72·7361야드). 유러피언프로골프(EPGA) 투어 밸런타인챔피언십 2라운드 4번홀(파5)에서 힘차게 티샷을 날린 로베르트 얀 데르크센(네덜란드)의 공은 오른쪽으로 날아가 러프 속에 자취를 감췄다. ‘잠정구’를 쳤지만 이번엔 왼쪽 러프에 빠졌다. 데르크센은 양쪽 페어웨이를 오가며 ‘원구’와 잠정구를 찾았지만 모두 감쪽같이 사라졌다. 규정대로라면 각각 1벌타씩 받고, 티박스에서 다시 티샷을 해야 했다. 그때 두 번째 티샷을 살폈던 경기 진행요원(Fore Caddie)이 “분명히 잠정구가 떨어지는 걸 봤다.”고 ‘증언’했다. 이 덕에 데르크센은 분실에 따른 1벌타를 면제받았다. 앞서 3번홀까지 1타를 줄인 데르크센은 이 홀에서 ‘더블보기’로 홀아웃했지만 이후 버디 4개를 보태 3언더파 69타, 중간합계 9언더파 135타로 2라운드 선두에 올랐다. 포어 캐디의 증언만으로 ‘무벌타’를 받은 건 아주 이례적인 일. 2006년 타이거 우즈(미국)가 미국프로골프(PGA)투어 브리지스톤 인비테이셔널에서 “갤러리 가운데 누군가 공을 가져갔다.”는 포어 캐디의 말에 무벌타 판정을 받아 ‘특혜 논란’이 일었던 적도 있다. 결국 데르크센의 경우도 ‘제3자에 의한 분실’로 인정된 것이다. 초속 4.5m의 강풍과 폭우 속에 ‘파워샷’으로 무장한 ‘노장’ 강욱순(43.안양베네스트)이 보기는 1개로 막고 버디 4개를 골라내 3타를 줄인 7언더파 137타로 공동 2위에 오른 가운데 어니 엘스(남아공)는 2오버파를 기록, 공동28위(2언더파 142타)로 내려 앉았다. 프레드 커플스(미국)는 4오버파로 망가져 합계 1오버파로 겨우 컷을 통과했다. 제주 조은지기자 zone4@seoul.co.kr
  • [진우석의 걷기좋은 산길] (18) 태백 금대봉 분주령 꽃길

    [진우석의 걷기좋은 산길] (18) 태백 금대봉 분주령 꽃길

    강원도 태백시의 금대봉(1418m)과 대덕산(1307m) 일대는 국내 최고의 야생화 군락지로 천연기념물인 하늘다람쥐가 날아다니고 꼬리치레도롱뇽이 집단 서식하는 자연생태계 보전지역이다. 한강의 발원지 검룡소를 품고 있어 일찍부터 주목받았으나 그 속에 풍부한 야생화 군락은 최근에야 알려졌다. 복주머니란, 한계령풀, 갈퀴현호색, 노랑무늬붓꽃 등 희귀식물을 비롯해 다양한 종의 식물들이 봄에서 가을까지 능선과 계곡을 수놓는다. 특히 금대봉과 대덕산 사이의 분주령(1080m) 일대는 점봉산의 곰배령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드문 고산초원을 이뤄 풍광이 빼어나다. 분주령으로 접근하는 길은 두 가지다. 태백의 두문동재(싸리재)에서 능선을 따르는 코스와 창죽동에서 계곡을 오르는 코스. 다양한 들꽃을 만날 수 있는 계곡을 따라 분주령에 이르고 능선을 따라 대덕산까지 갔다가 내려오는 원점 회귀 코스가 좋다. ●천연기념물 하늘다람쥐 등 서식 검룡소 입구인 태백시 창죽동에서 산길이 시작된다. 주차장에서 10분쯤 들어가면 검룡소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은 검룡소, 분주령으로 가는 오른쪽 길을 따르면 토종 민들레가 지천으로 깔려 있다. 갈림길에서 분주령까지 40분쯤 걸리는데, 중간 중간 계곡 사이로 보이는 홀아비바람꽃, 얼레지 등이 발목을 붙잡는다. 꽃을 쓰다듬으며 인사를 나누고 이마에 땀이 송송 맺힐 무렵 분주령에 도착한다. 분주령 일대는 드넓은 꽃밭이다. 현호색, 산괴불주머니, 노루귀, 꿩의바람꽃 등이 어우러져 한바탕 꽃잔치를 벌인다. 특히 군락으로 자라는 보랏빛 얼레지는 하늘을 향해 올라간 꽃잎의 우아한 자태가 아름다워 봄의 여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봄꽃들은 다른 산이라면 이미 시들지만, 금대봉과 대덕산은 산이 깊어 4월 중순쯤 만개한다. 배부르게 꽃구경을 했으며 대덕산으로 이어진 능선을 탄다. 길은 부드럽고 꽃으로 덮여 힘이 든 줄 모른다. 꽃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서 꽃을 캐면 안 된다. 간혹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은 꽃을 뿌리째 뽑아가는데 야생화는 인간의 손이 닿으면 대부분 죽기 때문에 아무 소용이 없다. 대신 사진을 찍으면 그 아름다움과 감동을 오랫동안 간직할 수 있다. 또한 야생화 도감을 준비해 이름 모를 꽃을 만날 때마다 찾아보면 야생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쌓을 수 있다. ●신비로운 분위기 검룡소 분주령에서 대략 40분 지나면 갑자기 나무 그늘이 사라지고 하늘이 열린다. 가슴이 후련해지는 들꽃 세상, 바로 대덕산 정상이다. 바람 부는 이곳에 풀을 베고 누우면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고요히 흐른다. 천상의 세계가 따로 없다. 남쪽 방향으로는 금대봉~은대봉~함백산~태백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마루금이 장관이다. 정상에서 마음껏 시간을 보냈으면 하산은 남쪽을 따른다. 15분쯤 능선을 걸으면 오른쪽으로 내려서는 길을 만나게 된다. 20분쯤 내려오면 검룡소 갈림길에서 분주령으로 올라오던 길과 만나게 된다. 하산길에 한강의 발원지 검룡소에 꼭 들려보자. 한강의 발원지답게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철철 넘치고, 이무기가 용이 되려고 승천하면서 몸부림쳤다는 폭포가 장관이다. 검룡소는 금대봉과 대덕산 능선에 숨어 있는 제당굼샘과 고목나무샘에서 솟아나는 물이 땅속으로 스며들었다가 나오는 것이다. 그 물을 한 모금을 들이켜면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 시원하다. 태백시 창죽동에서 시작해 분주령, 대덕산을 거쳐 창죽동으로 원점 회귀하는 코스는 약 8㎞, 4시간쯤 걸린다. ●가는 길과 맛집 태백시에서 창죽동 가는 버스가 뜸해 자가용을 이용하는 게 좋겠다. 태백시에서 35번 국도를 타고 피재를 넘으면 창죽동이 나온다. 창죽동 검룡소 주차장(무료)에 차를 세우고 산행을 시작한다. 들꽃 트레킹 가이드와 숲해설사가 필요하면 태백의 숲전문가인 김부래(011-9919-3267)씨에게 문의하면 된다. 주말엔 무료로 가이드를 하는데, 태백시청(033-552-1360) 환경과에 반드시 예약해야 한다. 태백 시내의 태성실비집(033-552-5287)은 연탄불에 질 좋은 태백 한우를 구워 먹고, 너와집(553-4669)은 너와지붕의 전통 가옥에서 전통음식을 맛볼 수 있다. 너와정식 1만 5000원 이상. 쌈밥정식 8000원. <여행전문작가>
  • “아무리 모진 인생도 희망 잃지 않으면 새 삶이…”

    “아무리 모진 인생도 희망 잃지 않으면 새 삶이…”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라는 작품이 있다. 주인공 니나 붓슈만, 그는 어떠한 고난의 삶이라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어려워도 슬퍼도 울지 않으며 항상 웃는다. 그의 삶은 그 자체로 ‘언저리’가 아닌 ‘중심’에 있다고 믿고 모진 비바람, 폭풍우가 모질게 몰아쳐도 기꺼이 이를 감당한다. 많은 이들이 그를 희망의 우상으로 여기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힘든 가정사… 노모·딸 생각하며 새출발 낯 간지럽게(?)도 나이 60넘어 희망이란 무엇인지, 꿈이란 어떤 것인지를 진정 알게 됐다는 그다. 그것도 자살 문턱까지 가서 얻은 깨달음이다. ‘과수원길’ ‘한번 만나줘요’ 등으로 유명한 남성 듀오 서수남·하청일. 둘은 1990년까지 20여년간 12장의 음반을 낼 정도로 인기를 누리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하청일씨는 1998년 IMF 체제때 사업이 망해 미국으로 건너가 국내 지인들과 아예 소식을 끊었다. 서수남(66)씨는 그 무렵 29년간 알콩달콩 금실좋게 살아온 부인과 헤어졌다. 부동산, 증권 등 재테크를 하겠다던 부인이 사채업자에게 휘둘려 16억원의 빚을 진 나머지 견디지 못하고 그만 집을 나가버렸던 것. 서씨 앞에 남은 것이라곤 어둡고 긴 터널뿐이었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뛰어내릴 생각으로 꽉 차 있을 때 노모(93)께서 이를 미리 간파하고 아들을 달래고 보듬었다. 서씨는 이후 새로운 삶을 계획했다. 노모의 간절한 모습과 딸 셋을 생각했다. 살아야 한다고 간절하게 다짐했다. 2002년 부인과 이혼한 지 5년여만에 빚을 어느정도 다 청산했다. ‘좌절하지 말고 용기를 내자.’며 다시 일어섰다. 새 출발이다. 모든 것이 ‘잘 될 거야.’라고 주변에 얘기했다. 이젠 후배들을 위해, 그리고 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전해주는 길로 가야 한다고 방향을 틀었다. 그런 마음으로 최근에 앨범도 냈다. 제목은 ‘잘 될꺼야’로 정했다. 열심히 살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온다는 희망을 담은 노래다. 2009년, 사진예술을 배우면서 고난을 극복한 사람들과 만나는 ‘인터뷰어’가 됐다. 이런 내용들은 그의 블로그(http://blog.naver.com/suhsoonam)에 들어가보면 상세히 알 수 있다. 블로거 고정팬만 2000여명이나 된다. 카메라를 들고 세상 구석에서 꿋꿋하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만나면서 희망을 전파하는 그를 지난주 서울 강남의 한 찻집에서 만났다. 모습은 여전히 소박했다. “많이 힘들었습니다. 남부럽지 않게 결혼 생활도 했고, 주변의 사고를 보면서 남의 이야기로만 생각했거든요. 시간이 지나 모진 세상, 속고 울고 다시 일어나고, 그런 것이 인생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66세의 나이지만 강하고 단호했다. 새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그에게서 후배를 아끼는 후덕함이 풋풋하게 배어 나온다. 그는 “이 나이에 진정 할 일이란 후배들을 아끼고 음악인으로서 뭔가 남기면 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남은 제 인생은 봉사하는 것입니다. 우여와 곡절을 겪었고, 거기에서 교훈을 얻었으니 후배들한테 그걸 고스란히 전해 줘야 한다고 믿는 거지요.” ●데뷔 40주년… ‘희망 전도사’로 “인격이란 그 사람의 포장입니다. 알맞은 행복, 깨달음의 옷을 입고나면 주변 이웃들에게 행복과 평화를 줄 수 있습니다. 가문의 영광이나 명예, 결국은 무덤을 향해 있습니다. 인생 살면서 욕심 부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서씨는 경기도 분당에 산다. 노모를 모시고 출가하지 않은 딸과 함께 셋이서 지낸다. 서씨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더니 “소외계층, 불우한 이웃들에게, 음악을 사랑하는 후배들에게 희망을 주는 전도사로 살아가겠다.”고 말했다. 서씨는 1969년 데뷔해 올해로 40주년을 맞는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요즘 경제도 어렵고 취직도 어렵지만 꿈과 희망을 가지면 반드시 난관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얻게 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글 김문 문화부장 km@seoul.co.kr 사진 이호정기자 hojeong@seoul.co.kr
  • [도시와 산] (3) 울산 문수산

    [도시와 산] (3) 울산 문수산

    도심 속의 산은 존재만으로 사계절 내내 도시민들에게 청량제 역할을 한다. 봄이면 온갖 꽃으로, 여름에는 짙은 녹음으로, 가을에는 붉디붉은 단풍으로 도시민들의 정서를 풍성하게 해준다. 겨울에는 능선비탈에 하얗게 드리운 잔설로 삭막한 도시에 아름다움을 전한다. 울산시민들에게는 그렇게 활력소 역할을 하며 일상으로 자리잡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산인 문수산이 있다. 울산 울주군 청량면에 자리한 문수산(해발 599.8m). 문수산은 시민들에게 삶의 활력을 불어 넣어 주는 ‘도심의 허파’로 불린다. 동쪽으로 영취산(해발 340m)과 남쪽으로 남암산(해발 543m)을 품고 있다. 울산의 젖줄 태화강은 문수산 북쪽을 돌아 동해로 흘러간다. 문수산은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울산사람들의 취향만큼이나 다양한 길이 있다. 다리가 불편하거나 체력이 달리는 사람들은 율리 안영축에서 일명 ‘깔딱고개’ 코스를 선택한다. 체력에 자신이 있거나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 보고 싶은 이는 울산양육원을 출발해 정상에 오른다. 역사의 숨결을 느껴 보고 싶으면 율리농협 창고 뒤에서 망해사를 거쳐 영취산으로 오르는 코스도 좋다. 더 큰 문수산을 맛 보고 싶으면 범서 천상마을에서 오른쪽 계곡 깊숙이 들어가 둥글게 북쪽 능선을 따라 문수산성을 거쳐 정상을 밟을 수도 있다. SK에너지 봉사단 최한수 과장은 “장애우들과 함께하는 문수산 등반계획을 세우기 위해 산을 찾았다.”면서 “문수산은 울산의 도심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어 혼자 등산이 힘든 장애우들과 함께하는 나눔 등반의 최적 코스”라고 말했다. 이모(54)씨는 제2의 삶을 준 문수산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그는 “5년 전 폐암 치료로 힘든 나날을 보내던 시절 친구의 권유로 산과 인연을 맺었다.”면서 “문수산을 몇 년간 오르면서 항암치료로 빠졌던 머리카락이 다시 나고, 잠겼던 목소리도 돌아왔다.”고 설명했다. 문수산은 산업도시 울산의 특성을 반영하듯 각 기업체의 신입사원 극기훈련 장소로도 이용된다. 특히 지리산 ‘백무동 계곡’의 축소판인 개방골이 인기가 많다. 몇 년 전만 해도 코스가 어려운 이 계곡을 산행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최근에는 입에서 입으로 알려지면서 등산로가 제법 반지르르하게 나 있다. 개방골은 작지만 매끄럽고 넓은 암반과 자그마한 폭포, 깊디 깊은 소, 조경한 것 같은 암석 등이 유난히 많다. 조선업체에 근무하는 박경식(44)씨는 “개방골 계곡은 신입사원들에게 강한 근성을 심어 주고, 함께 땀흘리며 동료애를 느끼게 해줄 수 있는 좋은 코스다.”며 “전체 사원을 대상으로 하는 야유회 겸 등반대회는 상대적으로 오르기 편안한 안영축~문수사~대암댐 코스를 선택한다.”고 말했다. 또 문수산에는 옛날 ‘빨치산’들이 기거했다는 아지트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는 편안함을 가지고 있는 반면 빨치산들이 숨어들 만큼 일반인들의 접근을 용납하지 않은 곳도 문수산이다. 윤석 울산생명의숲 사무국장은 “문수산은 운동복 차림으로 가볍게 오를 수도 있고, 등산장비를 갖춰야 하는 가파름도 있다.”면서 “시민들이 문수산을 많이 찾는 이유는 근접할 수 없는 화려함보다 삶에 활력을 주는 소박함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문수산은 시내에서 자동차로 5~30분이면 도착할 정도로 가까이 있다. 그러나 역사의 숨결은 거리의 반비례로 진하다. 율리농협과 영축마을을 출발해 문수산 정상을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문수사를 거쳐야 한다. 문수사는 1300년 전 신라 원성왕 때 연희국사에 의해 창건된 절로 당시에는 조그마한 암자였다고 한다. 이후 통도사 청하 스님과 롯데 신격호 회장 등의 노력으로 지금의 대가람을 이뤘다. 고려 때는 라마교의 전당으로도 불려졌다. 신라 때는 문수보살이 산세가 청량하고 아름다워 이 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신라의 마지막 군주인 경순왕의 전설도 간직하고 있다. 경순왕이 백척간두에 선 신라의 운명을 문수보살에게 묻기 위해 문수산을 찾았다고 한다. 태화강을 건너 무거동에 도착했을 때쯤 한 동자승(문수보살 현신)이 마중을 나왔다. 그 동자승은 잠시 길을 함께 한 뒤 어디론가 사라졌다. 경순왕은 이를 보고 ‘하늘이 나를 저버렸구나.’하고, 경주로 돌아가 신라를 고려에 받쳤다고 한다. 문수사는 1999년부터 등산객을 상대로 점심을 공양하고 있다. 평일엔 200명, 주말엔 600~1000명에 이른다. 또 문수사 대웅전 앞에는 법당과 연결한 유리막사가 눈에 들어온다. 벼랑 위의 대웅전이 좁아 법회 때 많은 불자들이 대웅전 밖에서 비바람과 추위에 떠는 것울 막아 주기 위한 배려다. 울산 박정훈기자 jhp@seoul.co.kr 사진 이종원기자 jongwon@seoul.co.kr ■ 飮~ 미나리 봄 비빔밥 쓱싹 새콤달콤 울산배 아삭 문수산 초입에 위치한 영해마을(150가구)은 평일 하루평균 1000~2000명, 주말·휴일 하루 5000~7000명이 찾아 ‘등산객 특수’를 톡톡히 누린다. 등산객들은 산에 올랐다 그냥 가는 일이 없다. 산행이 끝나면 반드시 음식점에 들러 다양한 먹거리를 즐긴다. 또 봄에는 미나리, 가을에는 배와 감 등 각종 농산물을 사들고 돌아간다. 이 때문에 평범한 농촌이었던 영해마을은 부농(富農)의 꿈을 키우고 있다. 영해마을 주민들이 등산객들을 상대로 판매하는 농산물은 배, 감, 밤, 미나리 등이다. 배 재배 10여 농가는 연간 100t 규모를 등산객에게 판매한다. 배 농가의 수익은 3억~5억원에 이른다. 문수산 주변에서 생산되는 배는 당도가 높아 최고의 상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많은 양을 주문하면 택배로 배달도 한다. 밤과 감을 재배하는 농가도 비슷한 수준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요즘은 제철을 맞은 미나리가 상종가를 치고 있다. 문수산의 청정수로 생산되는 ‘문수산 미나리’는 20여 농가에 연간 3000만원씩의 고소득을 보장하고 있다. 문수산 미나리는 향이 좋아 봄철 입맛을 돋우는 제철 식품이다. 주부 장영주(38)씨는 “영해마을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은 무농약이라 안심할 수 있다.”면서 “산지에서 직접 구매해 값도 싸고, 믿을 수 있다.”고 말했다.등산로를 따라 들어선 100여곳의 음식점은 연 매출 1억원이 넘는 곳도 많다. 닭, 오리, 파전, 국수, 도토리묵, 동동주, 막걸리 등 등산객의 발길을 잡기에 충분하다. 허름하고 오래된 집은 전통의 맛으로, 최근 건축된 가든은 도심의 레스토랑 못지않은 최상의 서비스와 깔끔한 맛으로 손님의 입맛을 유혹한다. 울산 박정훈기자 jhp@seoul.co.kr
  • 물 위에 둥둥 뜨는 수중 스피커 화제

    물 위에 둥둥 뜨는 수중 스피커 화제

    물놀이용 풍선공을 꼭 닮은 스피커가 소개돼 화제다. 미국 샌디에고의 그레이스 디지털사가 내놓은 ‘아쿠아 사운더’는 송신기의 신호를 공모양 스피커로 보내 사운드를 출력하는 무선 기기다. 제작사에 따르면 공모양 스피커는 감전 위험이 전혀 없도록 설계되어 바닷가며 풀장 같은 물놀이 공간, 심지어 뜨거운 욕조에 띄워 놓고 즐기는 것도 가능하다. 스피커의 동작 과정은 전면에 배치된 LED 불빛에 표시 되고 견고한 방수처리는 물론 바닷가의 비바람까지 견딜 수 있다. 공 모양 스피커는 AA 건전지 6개면 6시간 연속 재생이 가능하다. 송신기의 경우 AA 밧데리 4개를 넣어 휴대할 수 있고 AC 아답터를 꽂아 실내에 배치해도 된다. 45m에 달하는 송수신 거리 덕분이다. 스피커 사이즈는 3인치 5와트로 채널 별 3와트의 출력을 내며 송신기 하나가 이들 ‘풍선공’ 10개를 수용할 수 있다. 송신기와 스피커 1개를 합친 가격은 150달러(한화 약 20만원)로 스피커는 1개의 개별 가격은 93달러다. 사진=gracedigitalaudio.com 서울신문 나우뉴스 해외음악통신원 고달근@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노찾사, 김민기를 노래하다

    노찾사, 김민기를 노래하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이 다시 김민기를 노래한다. 그리고 화가 이택희씨와 만난다. 10~11일 서울 홍익대 인근 롤링홀이다. 노찾사의 소극장 공연은 10여 년 만이다. 나들이 주제는 6·15 공동선언 8주년 즈음이던 지난해 6월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에서 펼쳤던 콘서트와 맥락이 같다. 당시 노찾사는 김민기 노래를 레퍼토리로 노찾사의 뿌리와 고향을 찾아가는 공연을 했다. 이번 공연은 앙코르의 성격이 짙다. ‘아침이슬’로 저항가요의 태산북두가 된 김민기. 그는 노찾사라는 ‘노래의 방주’가 세상을 향해 닻을 올리는 데 힘을 보탰다. 1984년 발표된 노찾사 1집의 기획과 프로듀싱을 맡았던 것. 1980~1990년 대 노래운동의 큰 축으로 자리매김한 노찾사는 방송 가요 프로그램 순위에 등장하며 민중가요와 대중가요의 경계를 허물기도 했다. ‘사계’나 ‘솔아솔아 푸르른 솔아’는 대중가요계의 거북이나 MC스나이퍼가 리메이크했을 정도. 이번 공연이 지난해와 다른 점이 있다면 ‘화가 이택희와 더불어’라는 부제가 붙었다는 것. 이택희씨는 연필 하나를 가지고 흑·백으로 세상을 표현해 내며 국내 현대미술의 흐름을 뛰어넘어 독자적인 세계를 개척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작가다. 이 만남이 우연히 이뤄진 것은 아니다. 김광석과 친구였던 그는 김광석이 세상을 뜬 뒤 라이브 앨범 ‘노래 이야기’, ‘인생 이야기’를 제작하고 표지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또 노찾사 멤버인 문진오 솔로 2집의 표지에 그림을 제공했다. ‘새벽길’, ‘친구’, ‘작은 연못’, ‘봉우리’ 등 20곡 안팎의 김민기의 명곡들이 무대에서 울려 퍼지는 동안 이택희씨의 작품들은 노래와 어우러져 관객들의 시선을 붙잡게 된다. 이택희씨는 “평소 노찾사나 김민기의 노래를 좋아하던 차에 이번 공연에 대한 제안을 받고 흔쾌히 참가하게 됐다.”면서 “선곡된 곡들에 어울릴 만한, 주로 풍경을 소재로 그리움이 녹아든 작품을 골랐다. 앞으로 기회가 닿는다면 기존 작품이 아니라 공연 테마에 맞는 그림을 직접 그리는 작업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송숙환, 최문정, 신지아, 유연이, 문진오, 조성태, 김명식(이상 노래), 권오준, 염주현, 이필원, 조규원(이상 연주) 등이 세월의 모진 비바람에도 퇴색하지 않은 음색과 하모니를 선사한다. 10일은 오후 8시, 11일은 오후 7시30분. 인터넷 예매는 2만 2000원, 현장 판매는 2만 5000원. (02)325-6071.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진우석의 걷기좋은 산길] (13) 천마산 팔현계곡

    [진우석의 걷기좋은 산길] (13) 천마산 팔현계곡

    봄은 거북이걸음이다. 느리고 굼뜨지만 지나온 자리마다 환한 꽃을 남기는 마술을 부린다. 봄의 걸음걸이는 꽃의 북상 속도를 알아보는 것으로 측정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봄꽃은 하루 25~30㎞의 속도로 북상한다. 한 시간에 1㎞가 안 되게 움직이는 셈이다. 비록 느리지만 쉬지 않고 잠도 안 자기에 2월 말 서귀포에서 개화한 봄꽃은 4월이면 서울에 개나리, 진달래, 벚꽃, 목련 등을 축포처럼 피워 낸다. ●봄의 전령 야생화들 손짓 지상의 봄은 이러한 경로를 밟지만 깊은 산속은 좀 다르다. 2월 중순~3월 산빛이 온통 거무튀튀할 무렵 봄의 전령인 복수초, 너도바람꽃, 앉은부채 등은 아무 예고도 기척도 없이 언 땅을 녹이고 은밀하게 피어 난다. 종종 꽃이 핀 이후에 눈이 내리기도 한다. 그래서 운이 좋으면 눈속에 핀 꽃을 만날 수 있다. 봄을 즐기기에 야생화 산행만 한 것이 없다. 지상에서 벌어지는 각종 꽃축제들은 구름처럼 몰려든 인파로 꽃구경이 아닌 사람구경으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간단한 먹을거리를 준비해 봄산으로 들어가면 아름다운 야생화들과 함께 행복한 봄날을 만끽할 수 있다. ●너도바람꽃 등 가득한 팔현계곡 천마산(812.4m)은 수도권에서 가장 풍부한 야생화 군락지다. 기록에 의하면 이미 일제시대부터 식물 조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고 한다. 천마산 산행은 일반적으로 교통이 편리한 호평동에서 시작하지만, 야생화 산행은 오남면 팔현리로 접근해 꽃이 그득한 팔현계곡(천마산계곡)을 답사하는 것이 요령이다. 이 계곡은 길이 순하고 찾는 사람이 뜸해 호젓한 봄철 가족산행 코스로 그만이다. 계곡 초입의 음식점들을 지나면 작은 폭포가 나오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모퉁이를 돌아 계곡 주변을 자세히 보면 팔랑팔랑 흔들리는 들꽃들이 인사를 건넨다. 피나물은 짙은 노란빛이라 금방 눈에 띄고, 현호색, 개별꽃 등이 차례로 등장한다. 근처를 잘 찾아보면 앉은부채를 볼 수 있다. 앉은부채는 다른 산에서는 보기 어려운 식물이지만 천마산에는 흔하다. 땅바닥에 바투 붙어 자라고, 부채와 비슷한 꽃덮개가 둥근 도깨비방망이 모양의 꽃대를 감싸고 있어 특이하다. 꽃덮개가 외부의 추위를 막아 주어 남들보다 일찍 꽃을 피워 내는 앉은부채는 꽃이 시들 무렵인 4월에는 잎이 배추만큼 크게 자라난다. 다시 계곡을 따라 15분쯤 오르면 넓은 묵정밭과 큰 전나무를 볼 수 있다. 그 앞에서 길이 갈리는데 혼동하지 말고 계곡 본류만 따르면 길을 잃지 않는다. 좀 걷다 보면 산길 옆 비탈이 흉측하게 파헤쳐진 것이 간간이 눈에 띈다. 어떤 몰지각한 사람들이 앉은부채를 뿌리째 캐 간 흔적이다. 야생화는 원래 자란 곳을 떠나면 대개 살 수 없으니 꼭 눈으로만 구경하자. 두어 번 계곡을 건너면 하나 둘 너도바람꽃이 등장한다. 이 꽃은 워낙 작아 주의 깊게 봐야 눈에 들어온다. 바람꽃은 변산바람꽃, 너도바람꽃, 나도바람꽃, 꿩의바람꽃, 홀아비바람꽃 등 종류도 많고 생김새도 다양하지만 꽃 색깔은 모두 눈처럼 희다. ●돌핀샘에서 목 축이면 정상이 지척에 바람꽃 중 가장 이른 봄에 피는 너도바람꽃은 10㎝ 안팎의 작은 키에 손톱만 한 흰 꽃이 피는데, 꽃술에 작은 구슬 같은 노란 꿀샘이 앙증맞게 달려 있다. 계곡이 끝나는 지점부터는 제법 가파른 산비탈과 능선이 이어지는데 이곳에는 현호색과 얼레지가 기다리고 있다. 분홍빛의 얼레지는 주로 군락으로 몰려서 피기에 봄산을 가장 화려하게 장식한다. 현호색은 종류가 다양하지만 천마산에는 우리나라 특산종인 점현호색이 많다. 천마산에는 이밖에도 노루귀, 복수초, 미치광이풀, 올괴불나무 등 귀한 야생화들이 가득하니 천천히 둘러보며 봄꽃들과 눈을 맞춰 보자. 다시 산비탈을 20분쯤 오르면 커다란 동굴이 앞을 가로막는다. 이곳이 유명한 돌핀샘이다. 시원한 약수 한 바가지를 들이켜고 된비알을 올라서면 천마산 정상이다. 정상 조망은 장쾌하다. 북쪽으로 철마산까지 이어진 유장한 능선이 시원하고, 북동쪽으로 손에 잡힐 듯한 축령산 너머로 가평의 크고 높은 산들이 첩첩 펼쳐진다. 하산은 올라왔던 팔현계곡을 되짚어 내려온다. 팔현리에서 팔현계곡을 따라 정상까지 오르내리는 코스는 약 7㎞, 5시간가량 걸린다. 여행전문작가 ●가는 길과 맛집 대중교통이 불편해 자가용을 이용한다. 47번 국도에서 오남읍 이정표를 보고 빠져나온다. 오남읍에서는 팔현계곡 이정표를 보고 우회전해 팔현1리로 들어간다. ‘숲속옹달샘가든’ 식당 이정표를 따라 들어가는 것이 요령이다. 식사를 하지 않아도 주차가 가능한 이곳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산행을 시작한다. ‘숲속옹달샘가든’(031-527-4437)은 잣국수가 별미다. 팔현리 고로쇠작목반(031-575-1358)에서는 4월 말까지 천마산에서 채취한 고로쇠 수액을 판매한다. 1.5ℓ에 6000원.
  • [데스크 시각] ‘용산 특검’ 與 당당히 수용해야/박찬구 정치부 차장

    [데스크 시각] ‘용산 특검’ 與 당당히 수용해야/박찬구 정치부 차장

    그날, 무너진 건 망루뿐만이 아니었다. 사람답게 살고, 또 그렇게 죽을 수 있다는 빈자(貧者)의 믿음과 최소한의 권리가 외면당했다. 국가가 서민의 재산과 생명을 지켜줄 것이라는, 소박한 바람이 사그라졌다. 망루의 절박한 사투는 공권력과 용역이 합작한 몰상식한 진압 작전에 사위어갔다. 그날 이후, ‘실용’과 ‘경제’의 구호로 포장된 정부를 향한 신뢰와 기대도 무너졌다. “이런 나라에 정말 살기 싫어요.” 유족의 외침에는 메아리가 없다. 오히려 참사의 본질을 왜곡하고, 호도하려는 시도와 징후가 불거지고 있다. 정부는 그들이 왜 망루에 올랐는지 고민하기보다, 망루에서 어떻게 행동했는지만 놓고 되돌이표를 그리고 있다. 신뢰가 곤두박질치고, 본질이 가려진 시대에 다시 정치의 본연을 생각한다. 격랑과 비바람에 시달리는 뱃사람에게 365일 일관되게 직선의 불빛을 비춰주는 등대의 희생과 헌신에서 정치의 역할을 떠올린다. 그날 이후, 권력의 출혈을 감수하고라도 여권이 참사의 본질과 진상을 제대로 짚어나갔다면 시위대가 도심 거리에서 겨울밤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집권 여당의 지도자들이 제 몸을 사리지 않고 권력 핵심과 공권력에 직언하고 잘잘못을 따졌다면, 스스로 그토록 중요하다고 되뇌던 2월 입법국회가 지금처럼 ‘용산 국회’로 점철되지 않았을 것이다. 되레 여권은 정권의 안정을 얘기한다. 야당이 용산 참사를 빌미로 위기를 부추긴다고 강변한다. 집권 2년차의 속도전과 효율을 강조한다. ‘실용’이 대북 정책에서 빛이 바래고, 믿음을 잃은 정부의 경제정책이 참화를 부를 것이라는 경고가 빗발쳐도, 여권은 마이동풍이다. 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 가치가 무엇이고, 권리가 무엇이냐며 일상(日常)을 좇는 무감각한 행태와 다르지 않다. 유한한 정권의 위기보다 더 치명적인 건 신뢰 상실의 위기이며, 5년간의 권력보다 더 준엄한 건 국민과 생명의 가치라는 이성적인 판단을 현 여권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청와대 홍보지침 이메일 파문에서 정부는 “모른다.”, “사실무근이다.”, “공문이 아니다.”라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렸다. 국민을 우습게 알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메일을 보낸 청와대 행정관 한 사람의 사퇴로, 정부는 5공(共)식 여론 조작을 연상시키는 엄청난 사안을 서둘러 덮으려 한다. 온당치 않다. 일개 청와대 행정관이 개인 아이디어 차원에서 공조직인 경찰에 홍보지침을 내려보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경찰 내부에서는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하기 위해 말맞추기가 자행됐다는 의혹과 제보가 야당에 쏟아지고 있다. 이마저 반(反)이명박 세력의 정치 공세로 몰아붙일 것인가. 귀를 닫고 눈을 감는다고 진실이 영원히 묻히는 건 아니다. 불신과 의혹은 고스란히 현 정부에 ‘성난 민심’이라는 재앙으로 부메랑처럼 돌아갈 것이다. 이미 늦었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 여권이 지금이라도 야당의 특검과 국정조사 요구를 당당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야당의 주장에 공감하는 익명의 다수도 엄연히 여권이 안고 가야 할 국민이다. 특검이든, 국정조사든 피할수록 의혹은 쌓여가고 불신은 깊어진다. 털어서 문제가 없다면, 도려낼 건 도려낸다면, 여권의 정책 행보가 한결 가뿐해질 것이다. 굳이 의혹 덩어리를 안고 위험한 질주를 감행할 이유가 있는가. 70, 80년대 개발의 속도전은 90년대를 붕괴의 시대로 만들었다. 다리가 무너지고, 백화점이 동강나고, 건물이 내려앉았다. 죽어간 사람의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망루의 붕괴는 신뢰와 가치를 상실한 21세기형 속도전의 결말을 예고하는 불길한 단초일 수 있다. 무엇을, 왜 망설이는가. 박찬구 정치부 차장 ckpark@seoul.co.kr
  • [시론] 정초에 보내는 위기극복 응원가/차동엽 신부·인천가톨릭대 교수

    [시론] 정초에 보내는 위기극복 응원가/차동엽 신부·인천가톨릭대 교수

    연초에 필자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강의 현장에서, 인사차 들른 곳에서 각계각층 분들을 만났다. 그들과의 만남에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것은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한 절망의 그림자가 생각보다 짙고 내면의 불안감이 짐작보다 크다는 사실이었다. 절망한 이들에게 희망을 설파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필자는 여러 원천에서 ‘뿌리 깊은 희망’의 단초를 찾아내 열심히 희망을 전하고 있다. 필자는 감히 예언한다. “대한민국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가장 먼저, 또 제일 모범적으로 극복한 사례가 될 것이다.” 이러한 응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실적 시련으로 힘겨워하는 분들에게 격려의 말을 전한다. “비바람이 지나면 반드시 무지개가 뜹니다! 힘내세요.” 낙심의 계절을 지내고 있는 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일화가 있다. 세계 제일의 경영자이자 부호였던 철강왕 카네기의 사무실 한쪽, 화장실 벽엔 볼품없는 그림 한 폭이 걸려 있었다. 그저 커다란 나룻배에 노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인 이 작품을 그는 보물처럼 아꼈다고 한다. 나룻배 밑에 화가가 써 놓은 글귀 때문이었다. “반드시 밀물은 오리라. 그날 난 바다로 나아가리라.” 카네기는 춥고 배고팠던 청년 시절 이 그림을 만났다. 그림 속 글귀를 읽고 ‘밀물’이 밀려올 그날을 희망하며 기다렸다. 훗날 세계적 부호가 된 카네기는 자신에게 용기를 심어 준 나룻배 그림을 고가에 구입해 화장실 벽에 걸어 놓은 것이었다. 그렇다. 우리에게도 카네기처럼 반드시 밀물이 올 게다. 마음속에 커다란 희망을 품고 확신을 갖자. 바다로 나아갈 준비를 하자. 차제에 굳이 역경이 아니라 한창 승승장구하고 있을 때에라도 새삼스럽게 우리 삶을성찰하게 해 주는 이야기 한 토막을 소개한다. 중국 고사에 ‘이소산금’(二疏散)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한(漢)나라 때 태자를 가르친 스승으로, 삼촌과 조카 사이인 소광(疏廣)과 소수(疏受)가 있었다. 태자가 훗날 황제가 됐을 때 엄청난 권력과 부를 갖게 될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소광이 소수에게 말했다. “만족할 줄 아는 이는 욕된 일을 당하지 않고 그칠 줄 아는 이는 위험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이제 그만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가자.” 소수는 흔쾌히 동의했다. 낙향한 두 사람은 황제가 내려준 황금을 팔아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초대해 매일 잔치를 베풀고 즐기는 데 썼다. 보다 못한 한 이웃이 그 돈으로 자손들을 위해 논밭을 사두라고 충고하자 소광은 이렇게 말했다. “이미 자손들이 열심히 가꾸면 보통의 생활을 할 수 있는 정도의 땅이 있소. 거기에 재물을 더하면 게으름만 가르치게 될 것이오. 부자는 원래 사람들의 원망을 쉬이 사니, 자손들이 원망을 듣는 것을 원치 않는다오.” 이처럼 재물을 자신과 집안을 위해 쓰지 않고 주위 사람들과 함께 즐기며 썼다는 말에서 ‘두 소씨가 황금을 뿌리다.’라는 뜻의 ‘이소산금’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철학자들은 세상의 가치를 ‘목적가치’(행복·기쁨·평화 등)와 ‘수단가치’(목적가치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되는 부귀·권세·명예 등)로 나눴다. 궁극적으로 가치 있는 것은 목적가치다. 따라서 우리가 목적가치를 향해 나아가더라도 수단가치에 매여 이미 누리고 있는 목적가치를 과소평가한다면 불행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희망을 다시 한번 점검하자. 지금 이 순간 우리 곁에 진정한 희망이 숨어 있으니 말이다. 차동엽 신부·인천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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