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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첩 트럼프? 자택서 비밀문건 11건 확보

    간첩 트럼프? 자택서 비밀문건 11건 확보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지난 8일(현지시간) 플로리다주 마러라고 리조트 내 도널드 트럼프(사진) 전 대통령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에서 총 11건의 비밀문건을 확보한 것으로 확인됐다. FBI는 간첩혐의까지 거론하는 반면 트럼프 측은 정치수사라며 반발하고 있어 향후 법적 공방이 예상된다. 12일 플로리다주 연방법원이 공개한 압수수색 영장에는 “법무부는 (트럼프 자택에서) 비밀 표시가 있거나 국방 정보 및 비밀 자료 전송과 관련한 모든 문서 또는 기록을 압수하겠다”고 명시됐다.영장에는 연방 기록의 은폐·제거, 연방 조사 기록의 파괴·변경, 국방정보 이전 등 세 가지의 형사범죄 위반 가능성이 적시됐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방첩법’(Espionage Act)을 위반했을 수 있다는 의미다. 세 가지 모두 위반했다면 이론상으로 연방공직을 보유할 수 없어 대선 출마가 좌절되고, 최대 20년형까지 받을 수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FBI가 이번 압수수색으로 1급 비밀(Top Secret) 문건 4개, 2급 비밀(Secret)·3급 비밀(Confidential) 문건 각각 3개, 민감한 특수정보(SCI) 문건 1개 등 모두 11건을 확보했다고 전했다. 정부의 특정 시설에서만 열람이 가능한 문건들이어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자택 내 소유는 위법일 수 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기밀문건에는 핵무기와 관련된 것이 포함됐다”고 보도했다. 미 대통령기록법에 따르면 대통령·부통령은 임기 후 모든 공문서를 연방정부 기록보존소(NARA)에 넘겨야 한다. 하지만 트럼프 전 대통령은 문건들을 자택으로 가져가면서 NARA는 이미 지난 1월에 15개 박스 분량을 마러라고에서 되찾아왔다. 또 지난 6월에는 트럼프 측 변호사가 모든 자료를 인계했다고 서명을 했지만 이번 압수수색 결과 사실과 달랐던 것으로 드러났다. 반면 트럼프 전 대통령은 트루스소셜에 “(FBI에 압수당한) 모든 문건은 비밀문서에서 해제된 것들이다. 그 문서들은 FBI가 (우리에게 요청만 하면 언제든지) 가져갈 수 있는 것들이다”라고 썼다. 미 대통령은 실제 기밀문건의 해제 권한이 있다. 따라서 FBI가 압수한 문건들이 실제 기밀문서에 해당하느냐가 관건이다. 여론도 극명히 나뉘면서 미 사회의 분열이 심화하고 있다. 지난 10일 폴리티코·모닝컨설트 여론조사에 따르면 전체의 58%가 트럼프의 기밀문건 보유를 범법행위라고 답한 가운데 민주당 지지자 중 90%는 범법이라고 한 반면 공화당 지지자 60%는 범법행위가 아니라고 했다.
  • 박지원 “남북 핫라인 조사? 안보 자해 행위”

    박지원 “남북 핫라인 조사? 안보 자해 행위”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은 16일 국정원이 지난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과 남북정상회담 당시 서훈 원장과 김영철 북한 통일전선부장이 주고받은 ‘핫라인’ 메시지를 조사한다는 보도와 관련해 “안보 자해 행위”라고 비판했다. 박 전 원장은 이날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정보기관의 존재 이유를 무력화하는 것이다. 이렇게해서 남북관계를 또 다시 파탄낸다면 세계가 우리를 어떻게 판단하겠느냐”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오늘 모 신문 보도에 의하면 서훈-김영철 간 오고 간 비밀문서들을 조사하며 평창동계올림픽 등 지원 사항 여부를 보고 있다고 한다”며 “세계 어느 나라도 정보기관의 비밀 접촉 등 내용들을 법정 비밀문서 보관 기간 내에 이렇게 흘려주고 보도하는 나라는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엄격하게 말한다면 국정원의 업무를 검찰이 수사한다는 것도 세계적 조롱거리다. 미국의 CIA를 보시면 이해하리라 믿는다”며 “국정원인지 검찰인지는 몰라도 이런식으로 매일 자고 일어나면 돌아가면서 언론에 한건씩 흘려준다면 스스로 국가기밀을 누설하는 못된 행위”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제가 방어권을 행사하면서 혹시라도 기밀사항을 말한다면 나라가, 안보가 어디로 가겠느냐”며 “의혹이 있다면 언론플레이 보다는 수사로 사실을 밝히고 발표해야 한다”고 했다. 또 박 전 원장은 “안보자해 행위를 중지할 것을 촉구한다”고 덧붙였다. 이날 국정원이 2018년 2월 평창동계올림픽부터 같은 해 4월 남북정상회담에 이르는 기간에 서 전 원장과 김영철이 남북 핫라인으로 주고받은 메시지를 집중적으로 들여다보는 것으로 알려졌다는 보도가 정부 고위 관계자발로 나왔다. 이를 통해 국가 비밀이나 보안이 요구되는 주요 정보가 북으로 흘러갔는지를 확인하는 한편, 평창동계올림픽 당시 북측 대표단을 위해 집행된 남북협력기금 세부 명세 등도 조사 중이라는 내용도 담겼다.
  • 신좌파 반전 시위대 정부기능 마비 노려… 촘스키·하워드 진 등 세계적 석학들 동참 [이상돈 명예교수의 지금의 미국 알려면 1970년대 읽어라]

    신좌파 반전 시위대 정부기능 마비 노려… 촘스키·하워드 진 등 세계적 석학들 동참 [이상돈 명예교수의 지금의 미국 알려면 1970년대 읽어라]

    라오스 작전에 반전운동 재점화 상원 본회의장 폭발물 ‘쾅’ 혼란 25만명 워싱턴DC에 운집 예상 도로 점거 공무원 출근 방해 계획 존 케리 주도 참전용사들도 참여 의사당 앞 훈장 던지는 퍼포먼스 경찰, 1만 2000명 불법 체포·구금 미국 기본권 역사에 큰 오점으로베트남 전세를 반전시켜야 하는 닉슨 대통령은 라오스 내의 북베트남군 요충지를 공격해서 호찌민 루트를 차단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1970년 12월 의회는 미 지상군이 캄보디아와 라오스에 진입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닉슨은 마지못해 이에 서명했다. 따라서 라오스 작전을 수행하려면 미군은 베트남 영토 내에서 포격과 항공 지원을 하고 남베트남군이 국경을 넘어 40㎞를 진격해야만 했다. ●재앙으로 끝난 라오스 작전 1971년 1월 말, 닉슨의 명령에 따라 미군은 1968년에 철수한 케산 기지를 다시 확보해서 헬기 착륙장 등 후방시설을 건설했다. 남베트남군은 해병대, 공수부대, 레인저 부대 등 1만 7000명의 병력을 동원해 라오스로 진입했다. 하지만 이런 작전을 사전에 파악한 북베트남군은 병력 6만명을 동원해서 대기하고 있다가 남베트남군을 포위해서 공격했다. B52 등 폭격기가 1만회 출격을 해서 폭탄을 퍼붓고 헬기가 1만6000회 출동해서 근접 지원을 했음에도 남베트남군은 병력의 절반 이상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하는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해야만 했다. 북베트남군의 대공포화로 헬기 108대가 격추되고 200여대가 다시는 날 수 없게 손상을 입었으며, 공·해군 항공기 7대가 격추되는 등 미군도 큰 피해를 입었다. 케산 기지에 남아 있던 미군도 남베트남군 잔여 병력과 함께 철수하고 말았으니 이 작전은 재앙이었다. 닉슨 대통령은 남베트남군이 독자적으로 잘 싸웠다고 발표했으나 이를 믿는 사람은 없었다. 라오스 작전이 알려지자 한동안 잠잠했던 반전 운동이 다시 불타올랐다. 그해 3월 1일, 워싱턴DC 의사당 상원 본회의장 아래층에서 폭발물이 터졌다. 급진 폭력단체인 웨더 언더그라운드는 자신들이 폭발물을 터뜨렸다고 발표했다. 1969년 가을 모라토리엄 시위를 주도했던 신좌파 인물들이 다시 연락을 취해서 5월 1일 메이데이를 기념해서 워싱턴 DC에서 대형 집회를 갖기로 했다. 평화적으로 시위를 했던 모라토리엄 집회와는 달리 이번에는 워싱턴에 있는 정부기관이 기능하지 못하도록 다리와 도로를 차단하려고 했다. 의회 건물이 공격을 받은 상황에서 이런 정보를 입수한 법무부는 리차드 클라인딘스트(1923~ 2000) 차관 주재로 FBI 및 워싱턴DC 경찰과 함께 대책반을 운영했다. 닉슨 대통령은 이것은 단순한 시위가 아니라면서 강경한 진압을 지시했다.●참전용사들의 반전 시위 베트남에 참전했던 장병들이 전역 후에 만든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참전용사 모임’(VVAW)도 메이데이 시위에 참여하기로 했다. 이들은 전쟁에서 겪었던 경험을 공유하면서 더이상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그들의 의견을 워싱턴에서 표명하기로 했다. 예일대를 졸업하고 해군 장교로 메콩강 작전에 고속정 정장으로 참여해서 훈장을 받은 존 케리(1943~)가 이 모임을 주도했다. 이들은 백악관에서 멀지 않은 워싱턴 몰 광장에 텐트를 치고 자리를 잡았고, 경찰은 이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참전군인들이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에 나선 것인데, 조지 맥거번(1922~2012) 상원의원 등이 이들을 후원했다. 맥거번은 1972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서게 된다. 상원 외교위원회 윌리엄 풀브라이트(1905~1995) 위원장은 존 케리를 증인으로 출석시켜서 이들의 의견을 듣고자 했다. 4월 22일, 케리는 보도진과 청중으로 가득 메워진 상원 위원회에서 베트남 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설명하면서 “닉슨이 전쟁에서 패배한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 되지 않도록 누군가 전사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무의미한 전쟁을 당장 끝내야 한다고 열변을 토한 그를 향해 청중은 박수를 쳤고 언론은 그의 발언을 대서특필했다. 다음날 참전용사 800여명이 의사당 건물로 행진을 했고, 전쟁에서 세운 공적으로 받은 훈장을 던져버리는 퍼포먼스를 했다. 참전용사들의 시위 현장을 지켜본 많은 사람들 중에는 육군 장교 콜린 파월(1937~2021)이 있었다. 베트남에서 두 차례 복무한 파월은 당시 조지워싱턴대 경영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훈장을 던져버리는 모습을 착잡한 심정으로 보았다. 콜린 파월은 그 후 순탄하게 승진해서 합참의장이 되어 걸프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낸다. 존 케리는 그 후 상원의원을 지내고 2004년 대선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뒤 오바마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낸다.●메이데이 집회와 경찰의 반격 신좌파 단체가 주도한 메이데이 시위에 참여한 4만명은 웨스트포토맥 파크에 자리잡고 반전 가수들의 록 음악을 들으면서 5월 3일 월요일부터 워싱턴 시내로 향하는 다리와 도로를 차단할 계획을 세웠다. 미국 전역에서 이 시위에 참석하러 25만명 이상이 모여들 것으로 예상됐다. 이번 시위는 공무원들의 출근을 방해하려 했다는 점에서 단순한 시위가 아니었다. 닉슨 대통령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군대를 동원하라고 지시하고 캘리포니아 샌클레멘츠에 있는 자신의 저택을 향해 떠났다. 무장한 육군 공수부대와 해병대 병력이 백악관 등 주요 기관과 교통 요지를 지키기 위해 워싱턴DC로 진입했다. 워싱턴 경찰은 이들에 대한 집회허가가 취소됐다면서 2일 정오까지 파크에서 철수하라고 통보했다. 대부분 시위대는 파크를 떠났으나 남아 있던 수백명은 경찰에 연행됐다. 5월 3일 월요일 이른 아침부터 워싱턴 DC 경찰 병력 5000명이 시위대 검거에 나섰다. 웨스트포토맥 파크에서 철수한 시위대와 전국 각지에서 뒤늦게 도착한 시위대는 워싱턴 곳곳에서 교통장애물을 설치하는 등 시위를 벌였으나 경찰에 의해 거의 전원이 검거됐다. 3일 하루에 7000명 이상이 검거됐고 4일과 5일에도 검거가 이어지면서 총 1만 2000여명이 이 시위로 구금됐다. 이들은 워싱턴 콜로세움과 스타디움에 무더기로 수용돼 며칠 동안 고생을 했고 대부분은 과태료를 내고 풀려났다. 하지만 이들을 검거한 법적 근거는 불확실해서 결국에는 불법적 구금이었다는 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과거의 시위와는 달리 메이데이 시위대는 교통을 방해하는 등 폭력을 동원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여론은 호의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며칠 동안 무려 1만 2000명을 명확한 법적 근거가 없이 체포해서 구금한 이 사건은 미국의 기본권 역사에 오점을 남겼다. 전국에서 메이데이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버스를 대절해서 워싱턴에 모였는데, 보스턴에서는 메사추세츠공대(MIT)의 언어학자 놈 촘스키(1928~)와 보스턴 대학 역사학 교수 하워드 진(1922~2010) 등이 같이 왔다. 이 일행에는 대니얼 엘스버그(1931~)라는 MIT의 선임연구원도 있었다. 하버드와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하고 해병 장교로 군 복무를 한 엘스버그는 랜드연구소 연구원으로 핵 전략을 다루면서 하버드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랜드연구소와 국방부에서 일하면서 베트남 전쟁에 대해 회의감을 갖게 된 그는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 지시로 작성된 비밀문서 ‘펜타곤 페이퍼’를 공개하고자 했다. 랜드연구소에 비치된 이 문서를 복사한 그는 이를 몇몇 의원들에게 갖고 갔으나 비밀문서인 탓에 의원들은 난색을 표했다. 그러자 그는 뉴욕타임스를 찾아갔다. 뉴욕타임스는 닐 쉬핸(1936~2021) 기자에게 기사를 작성토록 했고, 6월 13일 ‘펜타곤 페이퍼’ 내용을 1면 머리기사로 내보내서 큰 파문을 일으키게 된다. 중앙대 명예교수
  • [포착] ‘죽음의 수용소’ 美 관타나모의 충격 실체, 20년 만에 공개

    [포착] ‘죽음의 수용소’ 美 관타나모의 충격 실체, 20년 만에 공개

    인권 침해 논란이 이어지는 미국 관타나모 수용소의 수감자 모습을 담은 사진이 공개됐다. 쿠바 남동쪽 관타나모 만에 설치된 관타나모 수용소는 일명 ‘죽음의 수용소’로 불린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각종 테러 용의자들을 가두려 이듬해 1월 관타나모 만에 있는 미 해군기지 안에 수용소를 급조했다. 아프간, 파키스탄 등 주로 중동에서 테러리스트로 의심되는 이들이 수용소에 구금됐고, 경비 병력만 1800명이 배치됐다. 관타나모 수용소의 수감자 상당수는 적법한 절차 없이 수감된 것으로 알려졌다. 부시 행정부 시절, 이곳에서 구타와 물고문, 수면 박탈 등 가혹행위가 자행됐다. 법치 대신 인권 유린이 난무했고, 그 결과 부시 행정부 시절에만 최소 수감자 9명이 숨졌다. 이중 6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지난 12일(이하 현지시간) 뉴욕타임스가 공개한 사진은 테러단체인 알카에다와 탈레반의 테러리스트들로 추정되는 수감자들이 미 공군기로 관타나모 수용소까지 이동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수갑은 물론이고, 쇠사슬과 테이프가 온몸에 감겨 있으며, 눈과 귀도 테이프로 칭칭 감긴 모습을 볼 수 있다. 관타나모 수용소 관계자들이 발이 묶인 채 관타나모에 도착한 수감자들을 들어 올려 수감소 내부로 이송시키는 모습의 사진도 있다. 과거 위키리크스는 비밀문서에서 “관타나모 수용소의 군인들은 이미 영양실조 상태인 수감자들을 쉽게 들어 올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번에 공개된 관타나모 수감자들의 모습은 2002년 촬영된 것이다. 삼엄한 경비 탓에 관타나모 수용소 내부의 모습이 외부에 공개된 적이 없었으나, 정보공개 전문 웹사이트인 위키리크스와 뉴욕타임스가 2011년 관타나모 수용소와 수감자들에 대한 비밀문서를 공개했다.당시 문서에 따르면 관타나모 수용소의 인권 침해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한 수감자는 개처럼 가죽끈으로 묶여 끌려나녔고, 성적 모욕을 당하거나 자신의 몸에 소변을 보도록 강요당하기도 했다. 수용소를 거쳐 간 수감자 중 100명가량은 우울증 등 정신질환을 앓는 것으로 밝혀졌다. 해당 문서와 관련 사진은 최근 정보의 자유법’(FOIA, 법에 명시된 9개의 예외 사항을 제외하고 정부가 국민에게 반드시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는 법률)에 따라 뒤늦게 대중에 공개됐다. 관타나모 수용소, 4월 기준 수감자 37명...폐쇄 약속 이행 안 돼  관타나모 수용소 운영 20주년인 올해 1월 기준, 20년 전 이송된 알카에다 조직원 20명 중 2명은 아직도 갇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뉴욕타임스에 따르면 한때 관타나모의 수감자는 800명에 달했지만, 오바마 행정부 시절 대거 수감자가 석방되면서 4월 기준 수감자가 37명으로 줄었다. 30여 명의 수감자를 관리하기 위해 관타나모에 배치된 미군과 계약업체 직원 등 관계자 수는 1500명에 달한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인권 침해 논란으로 문제가 된 관타나모 수용소의 폐쇄를 공약으로 걸었지만, 공화당의 반대로 무산됐다. 지난해 취임한 조 바이든 대통령도 관타나모 폐쇄를 약속했지만, 시기에 대해선 ‘임기 내’라고만 밝힌 상태다. 미 국방부는 “수감자 37명 중 2명은 군사위원회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고, 10명은 군사위 절차가 진행 중”이라면서 “7명은 (타국 교도소로의 이송 등을 논의하는) 정기심사위원회 심사를 앞두고 있고, 18명은 이송 대상”이라고 밝혔다.
  • [사설]北비트코인에 넘어간 현역대위,군기강 해이 이 정도인가

    [사설]北비트코인에 넘어간 현역대위,군기강 해이 이 정도인가

     북한 공작원에게 비트코인 4800만원 어치를 받은 현역 장교가 군 전장망(戰場網) 해킹을 시도하다 구속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전장망은 군이 훈련을 할 때 정보를 주고 받는 통합전시관리시스템이다. 해외에 거주하는 해커로 알려진 북한 공작원은 현역 대위 A씨와 가상화폐투자 회사 대표를 각각 포섭해 전장망인 ‘한국군 합동지휘통제체계’(KJCCS)를 해킹하려고 했다. KJCCS는 전쟁이나 군사훈련 때 육·해·공군 및 주한미군과 비밀문서를 실시간으로 공유하는 일종의 통신시스템이다.  육군 A대위는 대학 동기 소개로 북한 공작원과 알게 됐는데, 당시 가상화폐 투자로 크게 금전 손실을 봐 빚에 쪼들리던 상태에서 포섭됐다고 한다. A대위는 지난해 11월 이 공작원의 지시에 따라 ‘국방망 육군 홈페이지 화면’과 ‘육군보안수칙’ 등을 휴대전화로 촬영해 텔레그램으로 전송한 것으로 알려졌다. 7억원 어치의 가상화폐를 북한 공작원에게 받은 가상화폐투자사 대표는 A대위에게 택배로 USB형태의 해킹장치를 보냈다고 한다. 다행히 이 장치가 A대위에게 전달되기 전에 수사당국에 적발됐으나, 만일 검거가 조금만 늦었더라도 군 전장망이 통째로 뚫리며 국가안보에 큰 위협이 될뻔 했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다.  현역 군인이 북한 공작원에게 포섭돼 간첩활동을 벌이다 붙잡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북한 공작원과 대면접촉 없이 텔레그램 등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포섭돼 활동한 것도 이례적이다. 개인의 일탈이라곤 하지만 대한민국 현역 장교가 북한의 간첩 노릇까지 했다니 말문이 막힌다.  이번 사건은 문재인 정부 들어 군 기강이 크게 해이해졌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청와대 행정관이 육군 참모총장을 카페로 불러내 인사문제를 논의하는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공군 여중사 사건 등 군대내 성폭력 사건도 끊이지 않고 있다. 임기말 정권이지만 군기강 해이를 더 이상 이대로 좌시해서는 안된다. 수사당국은 A대위 말고 유사한 사례가 없는지 전방위 조사에 나서는 한편 철저한 재발방지 대책도 마련해야 할 것이다.  
  • [사설]北비트코인에 넘어간 현역대위,군기강 해이 이 정도인가

    [사설]北비트코인에 넘어간 현역대위,군기강 해이 이 정도인가

     북한 공작원에게 비트코인 4800만원 어치를 받은 현역 장교가 군 전장망(戰場網) 해킹을 시도하다 구속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전장망은 군이 훈련을 할 때 정보를 주고 받는 통합전시관리시스템이다. 해외에 거주하는 해커로 알려진 북한 공작원은 현역 대위 A씨와 가상화폐투자 회사 대표를 각각 포섭해 전장망인 ‘한국군 합동지휘통제체계’(KJCCS)를 해킹하려고 했다. KJCCS는 전쟁이나 군사훈련 때 육·해·공군 및 주한미군과 비밀문서를 실시간으로 공유하는 일종의 통신시스템이다.  육군 A대위는 대학 동기 소개로 북한 공작원과 알게 됐는데, 당시 가상화폐 투자로 크게 금전 손실을 봐 빚에 쪼들리던 상태에서 포섭됐다고 한다. A대위는 지난해 11월 이 공작원의 지시에 따라 ‘국방망 육군 홈페이지 화면’과 ‘육군보안수칙’ 등을 휴대전화로 촬영해 텔레그램으로 전송한 것으로 알려졌다. 7억원 어치의 가상화폐를 북한 공작원에게 받은 가상화폐투자사 대표는 A대위에게 택배로 USB형태의 해킹장치를 보냈다고 한다. 다행히 이 장치가 A대위에게 전달되기 전에 수사당국에 적발됐으나, 만일 검거가 조금만 늦었더라도 군 전장망이 통째로 뚫리며 국가안보에 큰 위협이 될뻔 했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다.  현역 군인이 북한 공작원에게 포섭돼 간첩활동을 벌이다 붙잡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북한 공작원과 대면접촉 없이 텔레그램 등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포섭돼 활동한 것도 이례적이다. 개인의 일탈이라곤 하지만 대한민국 현역 장교가 북한의 간첩 노릇까지 했다니 말문이 막힌다.  이번 사건은 문재인 정부 들어 군 기강이 크게 해이해졌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청와대 행정관이 육군 참모총장을 카페로 불러내 인사문제를 논의하는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공군 여중사 사건 등 군대내 성폭력 사건도 끊이지 않고 있다. 임기말 정권이지만 군기강 해이를 더 이상 이대로 좌시해서는 안된다. 수사당국은 A대위 말고 유사한 사례가 없는지 전방위 조사에 나서는 한편 철저한 재발방지 대책도 마련해야 할 것이다.  
  • 美, 베트남 철군 시작… ‘반전·반문화의 절정’ 1969년 저물어 [이상돈 명예교수의 지금의 미국 알려면 1970년대 읽어라<3>]

    美, 베트남 철군 시작… ‘반전·반문화의 절정’ 1969년 저물어 [이상돈 명예교수의 지금의 미국 알려면 1970년대 읽어라<3>]

    1969년 1월 20일 리처드 닉슨은 37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닉슨은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법무장관을 지낸 윌리엄 로저스(1913~2001)를 국무장관에, 하원의원 멜빈 레어드(1922~2016)를 국방장관에, 자신의 선거운동을 지휘한 존 미첼(1913~1988)을 법무장관에 임명했다. 닉슨은 또한 헨리 키신저(1923~)를 안보보좌관, 오랜 참모였던 밥 핼더먼(1926~1993)을 비서실장, 그리고 존 얼릭먼(1925~1999)과 찰스 콜슨(1931~2012)을 보좌관으로 임명했다.●측근들이 포진한 닉슨 백악관 닉슨은 대통령으로서 자신의 주된 임무는 대외정책이라고 생각했다. 닉슨은 관료주의가 지배하는 국무부를 불신해서 로저스 국무장관보다 키신저가 베트남 문제 등 대외정책을 주도하게 됐다. 닉슨 백악관은 철저하게 상명하복 방식으로 운영돼 케네디 백악관 시절과는 인적 구성뿐만 아니라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남부 캘리포니아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인근의 휘티어대학을 졸업하고 듀크대 로스쿨을 장학금으로 다닌 닉슨은 동부 엘리트, 특히 하버드대 졸업생을 좋아하지 않았다. 노스캐롤라이나에 위치한 듀크대는 닉슨이 다닐 적에는 오늘날 같은 명문대학이 아니었고, 닉슨은 졸업 후 큰 로펌에 자리잡지 못했다. FBI에도 취직을 못한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변호사를 했고 2차 세계대전 중에는 해군 장교로 복무했다. 전쟁 후 닉슨은 그 지역 공화당 기업인들에 의해 하원의원 후보로 추대돼 현직 민주당 의원을 꺾고 당선됐다. ●하버드 출신을 혐오한 닉슨 닉슨은 하원 비미(非美)활동위원회 위원으로 앨저 히스(1904~1996)를 거세게 추궁해 명성을 얻었다. 청문회에서 히스는 자신이 하버드대를 나왔음을 내세워서 닉슨을 격분하게 만들었는데, 히스는 위증죄를 선고받고 복역했다. 닉슨은 1950년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해서 민주당 후보 헬렌 더글러스를 공산주의 동조자로 몰아붙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 인해 닉슨은 상대방을 공산주의자로 공격하는 사람으로 인식됐으나 소련이 붕괴한 후 공개된 비밀문서는 히스가 실제로 소련 간첩이었음을 확인해 주었다. 초선 상원의원이던 닉슨은 아이젠하워에 의해 러닝메이트로 발탁돼서 부통령을 지냈고, 1960년 대선에서 하버드 출신인 존 F 케네디에게 패배했다. 동부 엘리트, 그리고 이들이 장악한 언론에 대한 닉슨의 적대적 감정은 그의 정치적 행로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닉슨은 무엇보다 베트남전쟁을 명예롭게 매듭짓겠다는 공약을 지켜야 했다. 미군 수뇌부는 베트남전쟁은 승리할 수 없으며 미군이 철수하면 남베트남은 북베트남에 의해 점령될 것으로 판단했다. 닉슨과 키신저, 그리고 레어드 국방장관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하지만 닉슨은 전쟁을 끝내더라도 미국의 위신이 손상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제 미국은 국가 체면을 위해 전쟁을 지속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닉슨은 북베트남이 평화협상에 응하지 않으면 큰 대가를 치르게 됨을 인식시켜야 한다고 믿었다.●보급기지 캄보디아 폭격도 닉슨이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69년 2월 말, 북베트남군이 공세를 강화해서 3주일 동안 미군은 1100명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보았다. 격분한 닉슨은 캄보디아 내의 북베트남 보급 기지를 비밀리에 폭격하라고 명령했다. 북베트남은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통해 남베트남으로 병력과 군수물자를 보내고 있어서 미군 지휘부는 캄보디아 내의 북베트남 보급 루트에 대한 폭격을 주장했지만 존슨 대통령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로저스 국무장관과 레어드 국방장관이 난색을 표명했음에도 닉슨은 캄보디아에 대한 비밀 공습을 강행했다. 3월 18일 괌 기지에서 발진한 B52 폭격기 편대는 베트남과 접해 있는 캄보디아 영토 내에 폭탄을 퍼부었다. 조종사들은 남베트남의 베트콩 지역을 폭격하는 줄 알았으나 마지막 순간에 캄보디아 영내로 진입해서 폭격을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대규모 폭격으로 2차 폭발이 일어나는 등 북베트남 기지는 큰 피해를 입었으나 전쟁이 캄보디아로 확대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닉슨은 전쟁을 확대하면서도 베트남에서 미군을 철수하겠다는 약속을 이행해야만 했다. 6월 8일 닉슨은 미드웨이에서 남베트남 대통령 응우옌반티에우(1923~2001)를 만나서 남베트남군에 대한 지원을 약속하고 미군은 점차 철수할 것임을 통보했다. 닉슨은 이를 베트남전쟁의 ‘베트남화(化)’라고 불렀다. 그해 8월부터 미군은 철수를 시작했다. ●반(反)문화와 반전(反戰) 운동 1960년대는 장발과 청바지, 마리화나와 록 뮤직으로 대표되는 히피 문화가 성행했다. 반전(反戰)·평화 운동과 결부된 이 같은 ‘반(反)문화’(counter culture) 운동은 1969년에 절정을 이루었다. 그해 7월에 개봉된 영화 ‘이지 라이더’는 대표적인 반문화 영화로 손꼽힌다. 8월 15~18일 뉴욕 근교의 농장에서 열린 ‘우드스톡 페스티벌’에는 미국 전역에서 젊은이 40만명이 몰렸다. 나흘 동안 진행된 록 뮤직 페스티벌에는 재니스 조플린, 지미 헨드릭스, 조 코커, 존 바에즈, 제퍼슨 에어플레인 등이 출연했다. 발 디딜 곳도 없이 모여든 히피 차림의 젊은이들은 록 음악에 열광하면서 전쟁을 거부하고 평화와 사랑을 요구했다. 8월 8~10일 로스앤젤레스에선 배우 샤론 테이트 등 7명이 찰스 맨슨 일당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가수를 꿈꾸면서 히피 집단생활을 하던 맨슨과 그를 따르던 젊은이들이 악마 의식을 치르면서 희생자를 살해해서 미국인들은 히피가 위험하기도 한 존재임을 깨달았다. 이 사건으로 ‘1960년대 반문화’가 종지부를 찍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10월 15일 워싱턴에선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모라토리엄 시위가 대대적으로 열렸다. 25만명의 군중은 피켓을 들고 워싱턴 거리를 누비면서 전쟁 반대를 외쳤다. 뉴욕에서도 같은 시위가 열렸는데, 존 린지(1921~2000) 뉴욕시장이 시위대를 지지하는 연설을 하고 뉴욕 시청에 반기(半旗)를 게양했다. 런던의 미국 대사관 앞에선 옥스퍼드대에서 유학 중이던 빌 클린턴이 소규모 반전 집회를 주도했다. 11월 3일 닉슨 대통령은 ‘조용한 다수’(Silent Majority) 연설을 했다. 닉슨은 미국에는 자신들의 의견을 강요하려는 시끄러운 소수와 현실에서 일하는 위대한 조용한 다수가 있다면서, 자기가 추구하는 베트남 정책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11월 12일 시모어 허시 기자가 1968년 구정 대공세 기간 중 베트콩을 수색하러 나간 미 육군 병력이 밀라이 마을에서 베트남 민간인 수백 명을 살해했음을 폭로했다. 처참하게 살해된 여자와 아이들의 사진이 공개돼 충격을 주었지만 여론은 학살에 참여한 장병들보다는 베트남에 군대를 보낸 정책 결정자들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11월 15일 워싱턴에서 열린 2차 모라토리엄 시위에는 50만명이 참가했다. 피트 시거, 존 덴버, 피터 폴 앤드 메리 같은 대중 음악가들이 평화를 요구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격려했다. 같은 날 샌프란시스코에선 25만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샌프란시스코 고등학생 절반이 학교에 가지 않고 시위에 참여했다. 혼돈의 1960년대는 이렇게 저물어 갔다. 중앙대 명예교수
  • “러시아, 내년 초 우크라이나 침공한다…100개의 대대급 전술 포함”

    “러시아, 내년 초 우크라이나 침공한다…100개의 대대급 전술 포함”

    우크라이나 접경 50개 대대병력“지난 훈련의 두 배 규모”美 “용납하지 않겠다” 러시아가 이르면 내년초 17만5000명의 군대를 동원해 우크라이나 국경 지대 여러곳을 동시에 침공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미국 워싱턴포스트(WP)가 보도했다. 3일(현지시각) 미 정보당국에 따르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국경으로 군대를 이동 시키고 있으며 국경 지대 여러 곳을 동시에 침공할 준비를 하고 있다. 정보당국 관계자는 “올해 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국경 근처에서 실시한 훈련보다 2배 이상 규모를 늘렸다”며 “빠르면 2022년 초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공격을 계획할 것”이라고 했다. 이어 “이 계획에는 장갑, 포병 및 장비와 함께 약 17만5000명의 인원으로 구성된 100개의 대대급 전술 그룹의 광범위한 이동이 포함된다”고 했다. 미 정보당국이 작성한 러시아 국경 근처 위성 사진과 비밀 문서 등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현재 국경 지역 4곳에서 집결한 것으로 전해졌다. WP는 현재 새로 도입한 탱크, 포병과 함께 50개의 전투전술그룹을 배치한 상태라고 보도했다. 러시아가 국경 근처에 배치한 병력은 약 7만명이었지만 이번에 공개된 비밀문서에 따르면 최대 17만5000명까지 증원될 것으로 보인다.조 바이든 대통령 “레드라인 용납하지 않겠다” 해당 보도에 대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우리는 오랜 기간 러시아의 행동에 대해 파악하고 있다”며 “레드라인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의 경고가 소문에 근거한 것이며 러시아는 아무도 위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푸틴이 침공할 경우 치러야할 대가를 늘리는 방안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번 병력 증원은 미국과 러시아의 갈등 가운데 나온 것이다. 앞서 러시아는 미국에게 우크라이나의 미·유럽 연합군 성격인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을 허용하지 말고, 우크라이나 주변 지역에서 나토의 군사 활동을 자제하라고 요구해왔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과 회담을 하루 앞두고 기자들에게 “푸틴대통령이 침공을 결정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가 명령만 내리면 곧바로 침공할 수 있도록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안다. 모든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대선후보 역사관 난타… 이재명 “尹 친일” vs 윤석열 “李 반미”

    대선후보 역사관 난타… 이재명 “尹 친일” vs 윤석열 “李 반미”

    여야가 지난 주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의 대미(對美) 인식,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의 대일(對日) 인식을 두고 공방을 이어갔다. 윤 후보가 한일 갈등의 책임을 문재인 정부에 돌리자 여당은 ‘친일적’이라고 몰아세웠다. 반면 이 후보가 한일합병과 남북 분단, 한국전쟁 등에 대해 미국 책임론을 제기하자 야당은 ‘반미적’이라고 공세를 폈다. 박찬대 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 수석대변인은 지난 13일 “(윤 후보가) 일본의 우경화를 두둔하고 그 책임을 한국에 돌리는 충격적인 대일 역사관을 드러냈다”며 “일본 우익세력의 대변자를 자임하는 행태로 유감스럽다”고 비판했다. 민주당의 윤 후보 ‘대일 역사관’ 비판은 이 후보와 윤 후보가 대일 정책을 두고 설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나왔다. 윤 후보는 12일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재확인해 한일관계를 개선하겠다’고 공약하면서 ‘김대중 정부에서 한일관계가 좋았지만 같은 민주당 정부인 문재인 정부에서는 악화됐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 후보는 “원인과 결과를 잘못 이해한 것”이라며 ‘한일관계 악화의 원인은 일본의 우경화’라고 지적했다. 그러자 윤 후보는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미래를 위한 협력을 제안했는데, 그게 제대로 잘 굴러왔다면 일본 정부나 다수 여론의 입장이 바뀌지 않았을 것”이라며 “단순히 일본 사회의 우경화 문제로만 볼 수 없다”고 반박했다 민주당의 ‘친일’ 공격에 국민의힘은 “친일 프레임은 유효기간이 만료됐다”고 응수했다. 허은아 수석대변인은 13일 이 후보가 윤 후보를 향해 “일본 정부에게 과거사 문제 해결과 위안부 문제 사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못한다”고 한 데 대해 “지난 9월 윤 후보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를 만나 “일본의 사과를 반드시 이끌어내겠다”고 말했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이 후보의 ‘가쓰라-태프트 밀약’ 관련 발언을 재차 비판했다. 허 대변인은 “(이 후보의 윤 후보 비판은) ‘가쓰라-태프트’ 발언을 덮기 위한 화제 전환”이라며 “역사의 맥락을 반미 감정으로 편협하게 해석한 이재명 후보의 ‘가쓰라-태프트 협약’ 발언은 국민에게 큰 불안감을 안겼다”고 지적했다. 앞서 이 후보는 12일 존 오소프 미국 상원의원을 접견한 자리에서 “한국이 일본에 합병된 이유는 미국이 가쓰라-태프트 협약을 통해 승인했기 때문”이라고 언급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미일 양국이 1905년 일본의 러일전쟁 승리 직후 일본의 한국 식민통치와 미국의 필리핀 식민통치를 상호 양해하는 내용을 담은 비밀문서다. 이 후보의 언급처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이 일본의 한국 식민통치를 인정했다는 평가가 있다. 반면 이 밀약은 정식 조약이나 협정이 아닌 대화 비망록에 불과하며 일본이 밀약 내용을 과장 홍보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이에 이 후보가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역사적 의미를 섣불리 일반화했다는 비판도 나왔다.
  •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자료, 미국 국무부 기밀문서로 보관

    일제 강점기인 1929년 발발한 광주학생독립운동과 관련한 자료가 미국 국무부 기밀문서로 묶여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2일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김재기 교수에 따르면 지난 2016년부터 미국 메릴랜드주에 있는 미국 국가기록원(NARA)에서 광주학생독립운동에 관한 자료를 찾던 중 ‘비밀문서’(Confidential File)로 존재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이 비밀문서는 당시 우리나라 상황을 분야별로 구분해 적고 있는데,목차를 보면 사회 분야에서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정작 본문에는 ‘비밀문서 참조’(See Confidential File)라고만 밝히고 있어,해당 문서가 별도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김재기 교수는 미국 국가기록원 측에 해당 자료의 공개를 요청했으나,“기밀자료로 분류되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이 자료는 당시 주한 미국영사관이 작성해 본국에 보고했다는 점에서 학술 가치뿐만 아니라 당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전개 양상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김 교수는 “당시 미국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을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한 것으로 봤고,이 때문에 이를 별도의 비밀자료로 분류했던 것 같다”며 “92년이 지난 이 비밀문서는 조속히 공개돼야 한다”고 말했다.김 교수는 미국 현지 조사를 통해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에서 광주학생독립운동을 보도한 자료를 발굴하는 등 광주학생독립운동에 대해 꾸준히 연구해 오고 있다.
  • 美, ‘12·12 역쿠데타 모의’ 알았지만 반대했다

    미국이 12·12쿠데타로 세력을 잡은 전두환 군부에 반대해 ‘역쿠데타’ 모의 세력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지만, 더 큰 혼란이 벌어질 수 있다며 반대한 사실이 미국 정부 문서를 통해 처음 확인됐다. 16일 미 카터대통령기록관이 최근 우리 외교부에 전달한 ‘한국군 내 반(反)전두환 움직임 관련 첩보 입수’라는 제목의 문서에 따르면 주한미국대사관은 1980년 2월 1일 백악관 상황실에 ‘이범준 장군’(General Rhee Bomb June)으로부터 한국군 내 반전두환 음모 정보를 입수했다고 보고했다. 미 대사관은 이 문서에서 “한국군 내 분열은 12·12사태보다 더 큰 파장을 가져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미 대사관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상기 음모 정보 및 미측이 양측에 대해 강하게 경고했다는 내용을 전달하고자 하니 상부 승인을 바란다”는 전문을 백악관에 보냈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1980년대 초 역쿠데타 음모는 잘 알려져 있었으나 이에 관한 전문이 발견된 것은 처음”이라며 “음모에 대한 정보를 미측에 알려준 것으로 특정된 이범준 장군의 신분 파악이 필요하다”고 평가했다. 문서에 등장하는 ‘이범준 장군’은 당시 국방부 방위산업차관보였던 이범준 전 교통부 장관일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나오지만, 2007년 작고해 확인할 방법은 없다. 그는 육사 8기로 전두환(육사 11기)의 선배이며 12·12사태에 부정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 [책꽂이]

    [책꽂이]

    여자들은 집을 찾기 위해 집을 떠난다(장민지 지음, 서해문집 펴냄) 미디어 전문가인 저자가 지방에서 서울로 이주한 여성 청년 12명이 생각하는 ‘집’에 관한 이야기를 묶었다. ‘따뜻하고 친밀한 공간’으로서 집은 여성을 억압하는 편향적 성격이 있다고 분석하고, 보수적인 집과 가족에게서 벗어나길 원하는 여성 청년들의 열망을 기록했다. 284쪽. 1만 8000원.글자 속의 우주(한동훈 지음, 호밀밭 펴냄) 서체 디자이너의 시각으로 노포 간판부터 여러 상품 브랜드까지 곳곳에서 눈에 띄는 글자의 내력과 의미를 짚었다. 기아자동차 ‘프라이드’의 로고나 도쿄올림픽 공식 엠블럼 등 다채로운 글자 모양들이 저자의 눈을 통해 우리 사회와 시대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로 다시 태어난다. 436쪽. 2만 5000원.분노란 무엇인가(바버라 로젠와인 지음, 석기용 옮김, 타인의사유 펴냄) 역사학자인 저자가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현대 신경과학에 이르기까지 우리 삶을 지배하는 분노의 의미를 12가지 담론으로 엮었다. 분노를 피해야 한다는 주장과 분노의 긍정적 영향을 인정하는 견해, 분노를 인간의 본능으로 보는 시각 등 3가지 관점에서 정리한다. 284쪽. 1만 5000원.초현실주의자들의 은밀한 매력(데즈먼드 모리스 지음, 이한음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 생태학자이자 초현실주의 화가인 저자가 20세기 모더니즘 미술의 한 축인 초현실주의 사조를 쉽게 설명했다. 살바도르 달리, 파블로 피카소 등 전통과 관습에 맞섰던 예술가 32명의 인간적이고 내밀한 이야기를 그림을 곁들여 소개한다. 424쪽. 2만 2000원.미국 비밀문서로 읽는 한국 현대사 1945~1950(김택곤 지음, 맥스미디어 펴냄) 방송 기자 출신인 저자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를 20여년간 취재해 발굴한 비밀문서를 토대로 해방 이후 6·25전쟁까지의 현대사를 재조명했다. 광복군의 험난한 귀국길과 좌우합작 실패 등 중요한 고비들을 미국 정부의 시각에서 생생하게 보여 준다. 752쪽. 3만 5000원.차문디 언덕에서 우리는(김혜나 지음, 은행나무 펴냄) 2010년 ‘오늘의 작가상’을 받은 김혜나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 ‘정크’ 등 작품으로 20대의 고민을 치열하게 담았던 작가는 30대 여성의 불안과 격정을 섬세하게 그렸다. 주인공 ‘메이’는 요가 수련을 위해 인도 여행을 떠나나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현실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308쪽. 1만 4000원.
  • [서울광장] 김원웅 광복회장께/김상연 논설위원

    [서울광장] 김원웅 광복회장께/김상연 논설위원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의 패색이 짙어졌을 때 미국은 일본 열도를, 소련은 만주를 각각 우선적으로 차지(점령)하고 싶어 했다. 한반도는 그다음 순위였다. 특히 미국은 소련이 일본 점령에 숟가락을 얹는 시나리오를 극도로 경계하며 대응 전략까지 수립했을 정도다. 반면 한반도에 대해서는 1943년 12월 카이로회담 이전에 이미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연합국 공동의 신탁통치를 구상했다. 다른 이유도 많았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당시 한반도가 미국에 그다지 매력적인 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제 미 전쟁성 민정국은 1945년 7월 6일 “한반도에서의 미국의 이익이 크지 않으므로 소수의 미군을 사용해 연합국에 의한 국제 신탁통치에 참여…”라는 내용의 의견서를 작성했다. 반면 부동항 확보 등 영토적 욕심이 컸던 소련은 한반도에 친(親)소련 정권을 세워 공산화한다는 계산 아래 치밀하게 움직였다. 1944년 당시 야코프 말리크 주일 소련대사가 “소련의 최대 목적은 만주와 조선, 대마도, 쿠릴열도를 지배하에 두고 태평양으로 나가는 출구를 확보하는 것”이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썼을 정도다. 이런 역사를 알고 보면 김원웅 광복회장이 지난달 “소련은 스스로 해방군이라고 표방했고, 미군은 스스로 점령군이라고 밝혔다”며 미국을 비판한 발언은 위험하다. 단편적 역사적 사실을 들어 전체적인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 회장의 발언에서 점령군은 침략군의 뉘앙스를 풍긴다. 또 소련이 야욕을 감춘 채 겉으로 해방군이라고 밝혔다고 해서 호평하는 것은 나쁜 사람이 스스로를 좋은 사람이라고 소개했다고 해서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것과 같다. 소련의 참전은 한국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서라는 사실은 소련 붕괴 후 공개된 소련 정부 비밀문서 등을 통해 이미 확인됐고, 학계에서도 논쟁이 끝난 사안이다. 1945년 9월 7일 맥아더가 발표한 포고령이 한국인을 ‘개무시’했다고 한 광복회의 비판도 지나치다. 지금 눈높이로 보면 고압적이지만, 해방 직후의 상황은 간단치 않았다. 당시 미군은 일본과 필리핀에서의 전후 처리 때문에 종전 후 거의 한 달이 돼서야 한반도에 들어왔다. 그 틈에 좌익세력이 이미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다. 미군정으로서는 공산화를 경계해 단호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던 측면이 있다. 김 회장은 역대 광복회장 중 가장 직설적으로 친일을 비판하고 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 지나치다고 비판하는데, 그런 비판을 비판하고 싶다. 광복회장이 친일을 비판하지 않으면 누가 비판해야 하는가. 친일파의 후손들이 지금도 사회 곳곳의 힘있는 자리에서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 상황에서 그 정도로 비판할 수 있는 건 보통의 용기로는 힘들다. 다만 반일 주장이 종북(從北)으로 이어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친일 비판의 순수성이 의심받고 이념 공세의 빌미를 준다. 이재명 경기지사가 “친일세력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 깨끗하게 나라가 출발하지 못했다”고 해 논란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지사의 발언은 역사적 사실에 비춰 틀린 게 없다. 다만 점령군이란 표현이 비판적 문장에 들어가면 침략군의 뉘앙스를 풍긴다. 따라서 그냥 ‘미군정’이라고 표현했다면 완벽한 발언이었을 것이다. ‘개무시’라는 말은 지나치지만 해방 전후 미국이 우리를 무시했던 것은 사실이다. 1945년 9월 8일 인천으로 입국해 일본 총독부의 항복을 받은 존 하지 중장은 “조선인은 일본인과 똑같은 고양이”라고 폄훼했다. 미국이 그런 마인드였으니 한반도에 크게 애정이 없었고 편의상 38선을 그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실에 너무 집착해 미국을 탓하는 것은 일견 구차하다. 우리 스스로 힘을 키우지 못한 책임을 면제하고 강대국에 기대려는 습성을 정당화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종전(해방) 후 일본에 머물던 맥아더는 3년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는다. 그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기념식에 참석해 이런 연설을 한다. 읽다 보면 왠지 모를 슬픔이 밀려온다. “인위적인 장벽이 여러분의 국토를 양분하고 있다. 이 장벽은 반드시 제거되지 않으면 안 되며, 반드시 제거될 것이다. 여러분이 자유로운 국가의 자유스러운 인간으로서 통일하는 것은 누구로부터도 저지돼서는 안 된다. 한국 국민은 명예를 존중한 조상의 혈통을 이어받은 만큼 분열을 일삼는 외래의 사상에 굴복해 그 신성한 대의를 저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 9·11테러 20년… 사우디 정부 연계 여부 ‘베일 열리나’

    9·11테러 20년… 사우디 정부 연계 여부 ‘베일 열리나’

    희생자측, 법원에 정부 비밀문서 열람 신청 예정민주당 의원 3명도 법무부 등에 문건 공개 서한9·11 테러 가담한 19명 중 15명 사우디 출신에 이들의 미국 생활 도운 배후에 사우디 관리 추정미·사우디 밀월 원한 트럼프는 문서 공개 안 해할말 하겠다던 바이든 행정부 선택에 이목 집중 2001년 벌어진 9·11테러의 20주기를 2개월여 앞둔 가운데 ‘사우디아라비아(사우디) 정부의 테러 지원 여부’가 담긴 미 정부 문건에 대해 공개 압박이 커지고 있다. 희생자 가족들은 관련 소송을 준비하고 있으며, 미 민주당도 법무부에 해당 문건을 공개하라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미국 정부는 그간 해당 문건을 비공개로 유지해 왔지만, 당시 19명의 테러범 중 15명이 사우디 출신인 점 등을 근거로 희생자 가족들은 사우디 정부가 테러를 지원했다는 의혹을 제기해왔다. ABC방송은 5일(현지시간) “피해자 측 변호인단은 9·11 테러와 관련한 정부의 비밀문서를 열람할 수 있도록 해당 문건에 대한 법원의 보호명령을 해제해 줄 것을 요청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9·11 테러 피해자와 유족은 사우디 정부를 상대로 벌이는 소송을 위해 사우디 정부의 직접 개입 여부를 밝힐 수 있는 미국 정부의 자료를 공개하라고 요구했지만 미 법원은 지난해 결정을 유보한 바 있다. 2016년 통과된 ‘9·11 소송법’에 따라 테러 피해자들은 직접 해당 국가를 상대로 배상 요구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리처드 블루멘탈 상원의원 등 3명의 민주당 의원들도 미 법무부와 FBI에 해당 문건을 공개하라는 서한을 보냈다고 더힐이 보도했다. 그간 사우디 정부는 테러와 관련이 없다며 철저히 선을 그어 왔다. 미국 내 9·11 조사위원회 등도 사우디와 연관성 자체는 부인하지 않았지만, 사우디 정부와 직접적인 관련성은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우디와 연계된 자선단체의 자금이 우회적으로 알카에다로 흘러 갔을 가능성은 꾸준히 제기돼왔다. 또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보고서에 따르면 테러범들은 미국에 도착해 거주지를 얻고 은행 계좌를 열 때 사우디 정부와 연관됐을 수 있는 인물 2명에게서 도움을 받았다. 또 이들 2명을 배후에서 지휘한 조력자가 사우디 정부의 고위 관리일 가능성도 있는 상황이다. 사우디와 밀월관계를 유지했던 도널드 트럼프 전 행정부는 해당 문건을 공개하지 않았다. 트럼프는 2018년 사우디의 반체제 언론인인 자말 카슈끄지를 살해하는 작전을 승인한 실권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에 대해서도 외교·경제 관계가 먼저라며 진실규명이나 제재를 하지 않았다. 반면 조 바이든 대통령은 대선 경선부터 카슈끄지 사건에 대해 무함마드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고 이른바 왕따로 만들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따라서 9·11 테러 문건도 공개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상대적으로 높다. 다만 바이든 역시 지난 2월 카슈끄지 사건과 관련된 76명의 사우디 시민권자에 대해 비자 발급을 중지하면서도 무함마드는 제외해 사실상의 면죄부를 줬다는 비판을 받은 바 있다.
  • 조선 최고 무신 가문 출신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한 참군인

    조선 최고 무신 가문 출신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한 참군인

    김좌진, 홍범도, 지청천, 양세봉, 김경천…. 일제강점기에 만주에서 활약한 독립군 사령관들이다.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인물로 동천(東川) 신팔균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선생은 조선 후기 최고의 무신 가문 출신으로서 편안한 삶을 버리고 만주 벌판에서 싸우다 끝내 스러져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했다. 선생은 1882년 5월 19일(음력) 서울 정동, 지금의 영국 대사관 자리에서 태어났다. 선조가 대대로 살아온 고향은 충북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다. 선생의 조부 신헌은 삼도수군통제사, 병조판서를 지낸 무신이었다. 신헌은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때 조선 측 대표를 맡아 개항에 핵심적 역할을 한 외교관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큰아버지 정희는 형조판서와 금위대장을, 아버지 석희는 병마절도사, 포도대장을 거쳐 한성부 판윤을 역임했다. 이런 집안에서 출생한 그가 무관의 길을 걸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선생은 1900년 10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보병과에 제2기생으로서 입학, 1903년 9월 졸업했다. 병서(兵書)에 능통하면서 유학(儒學)과 문장에도 비범해 문무를 겸비한 강직한 군인으로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1907년 7월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됐다. 그러나 선생은 바로 해임되지 않았다. 황실을 지키는 근위보병대 등에서 근무했고 이렇게 쌓은 경력은 나중에 항일투쟁을 하는 바탕이 됐다. 1909년 7월 보병 정위(正尉)로 승진한 선생은 더이상 울분을 견디지 못하고 군복을 벗어버렸다. 바로 고향 진천으로 낙향해 보명학교(현 이월초등학교)를 세우고 안희제·김동삼·남형우 등과 대동청년단을 설립해 계몽운동과 항일운동을 시작했다. ●조부 신헌, 삼도수군통제사·병조판서 지내 1910년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자 선생은 중국으로 망명해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망명 시점은 정확히 전해지지 않지만 1914년 이전으로 추정되고 있다. 선생은 조부가 지은 진천 고가를 저당 잡히고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했다. 고향을 떠나기 전 선조의 묘 앞에 엎드리고는 선충후효(先忠後孝·먼저 나라에 충성을 바치고 효도하겠다는 뜻) 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선생은 베이징과 만주, 연해주를 오가며 동지들을 규합하고 투쟁 방략을 모색했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에는 동삼성(東三省) 민족지도자 38인 중 1인으로 무오독립선언을 발표했다. 1911년 이상룡, 김동삼, 이회영 등 만주 서간도로 망명한 우국지사들은 유하현 추가가에 터를 잡고 경학사라는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면서 산하에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교육기관으로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 이듬해 추가가 동남쪽 통화현 합니하로 옮겨가 신흥무관학교 건물 낙성식을 열었다. 비로소 서간도에 모두가 염원하던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한 것이다. 선생은 지청천, 김경천, 이범석 등과 교관으로 활동하며 수많은 독립군 전사들을 키워 냈다. 지청천, 김경천과 함께 ‘남만주 삼천’이라 불릴 정도로 명망이 높았다. 졸업생 대부분은 서로군정서를 비롯한 독립군 부대에 들어가 항일투쟁에 참가하는 등 독립운동에서 중추적 역할을 했다. 일제는 신흥무관학교의 명성이 높아지자 1920년부터 애국지사와 가족을 살해하며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해 6월 봉오동에서 홍범도 부대는 일본군을 대패시켰고 지청천·김동삼이 이끄는 400여명의 교성대(신흥무관학교 졸업생 무장부대)는 청산리 전투에 참전, 일군을 무찔렀다. 일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양민을 학살하고 독립군 기지를 초토화하는 경신참변을 일으켰다. 신흥무관학교는 폐교를 피할 수 없었다. 독립군들은 일제의 토벌을 피해 남북만주와 연해주로 이동했다. 선생은 부하들을 인솔하고 흥경현으로 옮겨 재기를 준비했다. ●동삼성 민족지도자 38인 무오독립선언 발표 선생은 중국 본토에서도 활동했다. 독립운동 통합을 위해 열린 국민대표대회에서는 임시정부를 새로 구성하자는 창조파 쪽에 섰다. 베이징에서는 군인구락부, 한교교육회, 중한호조사 등을 주도적으로 조직했다. 한교교육회는 일제의 간도학살 때 발생한 한인 고아를 교육한 단체였다. 선생은 베이징 한인 사회를 이끈 중요 인물이었다. 무장투쟁주의였던 창조파는 1923년 6월 임시 헌법을 제정하고 국민위원회를 조직했는데 선생은 위원으로 선임됐다. 코민테른의 지원 약속을 받은 국민위원회는 그해 8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해 고려공산당 중앙집행부와 합쳤고 선생은 군무위원장에 선출됐다. 한편 1922년 8월 남만주에서 활동하던 8단 9회(八團九會)의 독립단체는 통합을 시도한 끝에 대한통의부를 발족시키고 의용군을 편성했다. 그러나 대한통의부는 왕정복고를 둘러싸고 대립이 극심했다. 이런 상황에서 1924년 4월 선생은 통의부 추대를 받고 군사위원장 겸 의용군 사령관에 취임했다. 선생은 의용군을 5개 중대로 재편했다. 또 ‘사관학원’을 세우고 자질이 부족한 군인은 직접 훈련시켰다. 의용군의 전투력은 점차 강해져 독립단 최고가 됐다. 그러나 선생은 겨우 석 달 만에 최후를 맞는다. 그것도 일본군이 아닌 중국군에 의한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1924년 7월 2일 이른 아침부터 선생은 흥경현 이도구의 산악지대에서 훈련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후 1시쯤 중국군이 공격해와 약 3시간 동안 전투를 벌였다. 이른바 ‘흥경사변’ 또는 ‘이도구사변’이다. 독립군은 황급히 전열을 갖추어 교전했지만 선두에서 지휘하던 선생이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중대장 김하석이 선생을 등에 업고 포위망을 탈출했지만 끝내 운명하고 말았다. 겨우 42세였다. 선생은 “일제와 싸우다가 죽으려고 하였더니 무관한 중국 사람과 싸우다가 죽는구나” 하며 통분했다고 한다. ●1924년 의용군사령관 취임 석 달 만에 운명 전투는 일제가 중국군에게 독립군을 공격하라고 사주해서 발생했다. 선생의 일생을 연구해 온 충북대 박걸순 교수는 지난해 세미나에서 동변도윤(東邊道尹) 병극장(克莊)의 비밀 연락을 받고 만나려 하던 중 중국 군대와 충돌해 전사한 것이라고 규정했다. 병극장은 선생과 절친한 사이였으니 일제와 중국군에 속은 셈이다. 중국군은 군인이라기보다 마적(馬賊) 집단에 가까웠다. 박 교수는 “신팔균의 전사는 사이토 총독 저격 의거에 대한 일제의 보복이었다”고 했다. 부인 임수명과 자식들의 최후는 더 비극적이다. 임수명은 1912년 서울의 한 병원에서 간호원으로 일할 때 일경에 쫓겨 환자로 위장해 입원하고 있던 선생을 만나 1914년 결혼했다. 선생이 중국으로 망명하자 선생을 도와 비밀문서 전달, 군자금 모금, 독립군 후원 등의 활동을 했다. 1921년에는 밀명을 띠고 입국한 선생을 따라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도왔다. ●“일제, 사이토 총독 저격 의거에 대한 보복” 선생이 순국할 당시 임수명은 베이징에서 어렵게 연명하고 있었다. 더욱이 만삭의 몸이었다. 동지들은 대한통의부장으로 장례를 치른 후 부인에게 남편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귀국을 주선했다. 임수명은 1924년 9월 서울로 돌아와 사직동에서 셋방 한 칸을 얻어 근근이 살다 유복녀를 출산했다. 다른 자녀들도 데리고 있었다. 임수명은 남편의 죽음을 알고 꼭 넉 달 후인 11월 2일 갓난 딸과 함께 자결했다. 박 교수는 “신팔균 전사 후 같은 해에 임수명과 두 자녀가 죽었고 1930년 맏아들 신현충이 자결해 명가 일문 5인이 독립운동으로 비명에 스러졌다. 신팔균 가족과 같은 애잔한 사례는 찾기 어렵다”고 말했다. 정부는 1963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부인에게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선생 부부는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다.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역사 바꿀지도…美대학생들, 15세기 양피지서 ‘비밀문서’ 발견

    역사 바꿀지도…美대학생들, 15세기 양피지서 ‘비밀문서’ 발견

    미국 로체스터공과대(RIT) 학생 연구팀이 신입생 때 개발한 이미지처리시스템을 사용해 15세기 양피지에서 숨겨진 문서를 발견했다. 이 비밀문서는 원래 글의 일부나 전체를 지우고 다시 쓴 고대 문서인 ‘팰럼시스트’(Palimpsest)인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양피지는 워낙 고가였기에 필요 없어진 사본을 재활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일(현지시간) 로체스터공과대 발표에 따르면, 이번 연구는 같은 대학의 체스터F.칼슨 이미지처리과학센터에 소속된 대학생 3명이 완수했다. 처음에는 19명의 학생이 신입생 프로젝트의 일부분으로, 자외선형광 이미지처리 기술을 이용한 이미지처리시스템을 제작하기 시작했지만,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지난 3월부터 수업이 온라인으로 전환하면서 프로젝트는 중단됐었다. 하지만 조이 라레나와 리사 에녹스 그리고 맬컴 젤이라는 이름의 세 학생은 포기하지 않고 기부금을 모아 여름 방학 기간에도 프로젝트를 계속해서 진행해 수업이 재개된 이번 가을 이미지처리시스템을 끝내 완성했다. 이후 세 사람은 이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할 겸 교내 도서관인 캐리 그래픽 아츠 컬렉션(Cary Graphic Arts Collection)에서 보관 중인 15세기 양피지를 대상으로 이미지처리 작업을 진행했다.라레나는 “양피지 여러 개를 빌려 와 자외선 장치 밑에 놓아봤다. 그러자 그중 한 장에서 프랑스어로 된 문서가 떠올랐다”면서 “이 양피지는 십여 년간 도서관 보관소에 방치돼 있던 것으로 지금까지 누구도 비밀문서를 발견하지 못했기에 매우 놀라웠다”고 회상했다. 양피지의 문자는 오렌지 과즙과 해면(스펀지)으로 간단하게 지울 수 있다고 12세기 서적 ‘여러 가지 기법에 대하여’(De Diversis Artibus)에 기술돼 있다. 즉 이런 방식으로 지운 문자는 맨눈에 보이지 않지만 자외선이나 엑스선을 이용한 스캐너로 볼 수 있어 때때로 역사적으로 귀중한 문서를 찾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새로 발견한 프랑스어 문서는 아직 해독이 완료되지 않았지만 이번에 조사한 양피지는 ‘에게 컬렉션’(Ege Collection)이라는 역사서의 저자 오토 에게가 제공한 30쪽짜리 같은 사본 중 하나다. 따라서 다른 29장에서도 비슷한 내용의 숨겨진 문서가 발견될 가능성이 크다.이에 대해 도서관 큐레이터 스티븐 갤브레이스는 “비슷한 중세 양피지를 미국의 한 연구자가 조사하고 있지만 숨겨진 문서가 발견된 사례는 없어 이번 결과는 매우 놀랍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발견된 팰럼시스트에는 4세기의 시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복음서나 고대 로마 법학자 가이우스가 쓴 ‘법학제요’의 거의 완전한 문서라는 매우 중요한 고대 문서도 있다. 따라서 이번 비밀문서도 해독 결과에 따라 역사를 바꿀 중대한 사실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정종수의 풍속 엿보기] 국도 천도

    [정종수의 풍속 엿보기] 국도 천도

    도읍지는 한 시대의 역사를 이끌어 나가는 중심지다. 왕조가 바뀌면 국호를 개칭하거나 국도를 천도하는 것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권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삼국을 통일한 고려도, 고려를 대신한 조선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 나라의 수도를 옮긴다는 것(遷都)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대사로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을 타파하고 민심을 일신하는 데 천도만큼 효과가 크고 빠른 것도 없다. 서울의 부동산 광풍은 때아닌 세종시로의 수도 이전이란 핵폭풍을 불러왔다. 마치 620여년 전 태조 이성계의 한양 천도를 떠올리게 한다. 1392년 7월 17일 개성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른 태조는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즉위 한 달도 채 안 돼 천도를 공포하고 후보지 물색에 나섰다. 나라를 세우면 국호를 새로 정하고 제도 정비가 급선무다. 얼마나 천도가 급했으면 국호를 바꾸지도 않고 태조 즉위 2년 뒤까지 여전히 고려라 불렀을까. 왜 태조는 그토록 급하게 도읍을 옮기려 한 것일까. 고려 말부터 조선 건국을 전후해 “개성의 지기는 이미 쇠했다”거나 “개성은 신하가 임금을 폐하는 망국의 터다”라는 참설이 끊임없이 오르내렸다. 신하로서 임금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자신도 언젠가 다시 신하에 의해 폐왕의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등으로 이미 지덕이 다한 개성을 하루라도 빨리 떠나고자 했다. 서둘러 1392년 8월 13일 도읍을 한양으로 옮길 것을 명하고 이틀 뒤 15일에는 이염을 보내 궁실을 수리토록 하고, 9월 30일엔 종묘 터를 물색했지만 신료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다음해 2월 1일 친히 잠저 때의 친구요, 정치적 고문인 정중화가 올린 새 도읍지, 지금의 세종시와 가까운 계룡산 신도안을 향해 출발 8일 만에 도착했다. 닷새 동안 머물면서 직접 산세와 지형을 꼼꼼히 살펴본 태조는 마음에 들어 국도 건설을 추진토록 했다. 수천 명의 인부를 동원해 시작된 국도 공사는 10개월 만에 경기도 관찰사 하륜의 건의로 중지됐다. 그 이유가 첫째, 한 나라의 수도는 중앙에 위치해야 균형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는데, 계룡산은 너무 남쪽에 치우쳐 있다는 것이다. 통일신라의 수도인 경주가 너무 동쪽에 치우쳐 있어 대구 천도 문제가 거론된 적이 있었고, 불편을 덜기 위해 충주·원주·청주·강릉·남원 등에 오소경을 두기도 했다. 둘째 계룡산 신도안이 금강과 너무 떨어져 있고 해안에서도 멀어 물자 수송이 불편하다는 점이다. 셋째 풍수지리적으로 계룡산 도읍지도 개성처럼 곧 망할 땅이라는 것이다. 놀란 태조는 하륜에게 서운관의 비밀문서들을 주어 고려 왕릉과 개성의 길흉 여부를 조사시킨 결과 사실로 확인되자 다시 천도 후보지를 물색하도록 한 곳이 지금의 서울 신촌 일대 무악이다. 태조가 친히 무악에 올라 땅을 살펴보고 이곳에 궁궐을 지어 천도하고자 했지만, 무악을 천거한 하륜을 제외한 모든 신료들이 하나같이 무악이 나라의 중앙에 위치해 운송도 좋기는 하나, 주산이 낮고 골짜기에 끼어 있어 도읍지로 좁다는 이유로 무산됐다. 차선책으로 선정된 곳이 고려의 남경 터였던 지금의 경복궁 일대다. 지루하게 3년을 끌어 왔던 천도 문제는 1394년(태조 3) 10월 8일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마무리됐다. 국도인 개성을 버린 것이나, 계룡산 신도 공사를 중지한 결정적 이유는 실용성보다 망할 땅이란 풍수지리적 결함 때문이었다. 세종시로의 수도 이전은 부동산의 광풍도, 풍수지리설도 아닌 통일 후 국가의 백년대계란 틀에서 봐야 한다. 모름지기 한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못 다스려지고는 통치술에 있지 지리의 성쇠에 달린 것이 아니며, ‘도읍을 정할 때는 무엇보다 군왕의 통치술이 풍수도참설보다 앞서야 한다’는 삼봉 정도전의 충정이 새롭게 다가온다.
  • 다큐로, 콘서트로, 강연으로… TV서 항일의 역사를 만난다

    다큐로, 콘서트로, 강연으로… TV서 항일의 역사를 만난다

    EBS 봉오동·청산리 전투 다큐KBS, 박정현 등 참가 콘서트서3·1운동 100주년 기념곡 첫 공개JTBC도 비와이 ‘나의 땅’ 무대15일부터 광복 75주년을 기념하고, 항일운동을 재조명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시청자를 찾아간다. EBS 1TV는 광복절 당일 오후 5시부터 국방TV가 제작한 특집 다큐멘터리 ‘승리의 기억, 봉오동 전투’와 ‘독립군의 위대한 유산, 청산리 전투’를 연이어 편성했다. 다큐멘터리는 올해 두 전투 100주년을 맞아 홍범도 장군의 행적이 남아 있는 카자흐스탄을 시작으로 독립군 감시 문서가 있는 일본 외무성, 두 전투의 중심지였던 봉오동 골짜기와 청산리 일대를 훑는다. 1부에서는 독립군들이 스스로 ‘독립전쟁 제1회전’으로 칭하며 첫 승리를 거둔 봉오동 전투에 대해 살펴본다. 당시 의병 출신 홍범도 부대 등으로 이뤄진 독립군 연합부대는 1920년 6월 봉오동으로 집결, 유인작전으로 적을 가두고 허를 찌르는 기습 공격을 통해 일본군을 궤멸시킨다. 독립군의 전투력에 매우 놀란 일본군은 비밀문서에 “북간도 지역이 이제 곧 독립될 것 같다”고 적었다.2부에서는 독립군의 체계적인 군사교육과 무기 구매 과정을 살펴본다. 봉오동 전투 이후 일본의 대규모 토벌 작전에 맞선 독립군 부대들은 청산리 일대로 속속 모여든다. 청산리 전투 주역들은 1912년 우당 이회영이 설립한 신흥무관학교부터 1920년 북간도의 사관연성소까지 체계적 군사훈련을 받았다. 북로군정서 총사령관 김좌진은 독립군 정예장교를 양성하고 근대식 무기까지 사들인 것으로 전해진다. 10월 21일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3~4배 규모의 일본군에게 대승을 거두면서, 청산리 전투는 이후 항일 투쟁의 실질적 기반이 됐다. 방송은 당시 기록과 재현, 전문가 분석을 통해 6일간의 치열했던 전투를 이해하도록 돕는다.KBS는 15일 오후 5시 30분 특집 콘서트 ‘당신이 대한민국입니다’를 방송한다. 13일 서울 여의도 KBS홀에서 무관중 녹화로 진행된 공연으로 역사, 인물, 현대사 등 세 가지 테마를 통해 재일동포의 조국애를 돌아본다. 인순이, 포레스텔라, 김호중, 이봉근, 폴킴, 위키미키, 민영치 밴드 등이 무대에 오른다. 박정현은 지난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작곡가 정재일과 만든 노래 ‘대한이 살았다’를 방송에서 처음 선보인다.JTBC ‘차이나는 클라스’는 오는 18일 오후 11시 ‘광복절에 읽는다, 육사와 동주’ 편을 꾸린다. 정재찬 한양대 국어교육학과 교수와 함께 1900년대 일제강점기 시절을 대표하는 두 저항시인 이육사와 윤동주의 삶과 작품을 살펴보고, 래퍼 비와이가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만든 곡 ‘나의 땅’ 무대를 펼친다. 김지예 기자 jiye@seoul.co.kr
  • “조명받지 못한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삶 만나보세요”

    “조명받지 못한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삶 만나보세요”

    “남성들에 가려져 조명받지 못한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애국심 느껴보세요” 충북도가 청주시 방서동 미래여성플라자 1층에 마련한 충북여성독립운동가 전시실이 다음달 3일 문을 연다. 100여㎡ 규모인 이곳에는 윤희순·어윤희·박자혜·임수명·이화숙·연미당·오건해·신순호·신정숙·박재복 등 지역 출신 여성독립투사 10명의 흉상과 그들의 생애 등을 살펴볼수 있는 안내판이 설치됐다. 이들은 직접 항일운동에 참여하거나 남편의 광복운동을 적극 지원하며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 윤희순 선생은 한말 최초 여성의병장으로 지속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단재 신채호선생의 부인 박자혜선생은 간호사로 일하며 3.1운동 부상자를 치료하고 ‘간우회’를 조직해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연미당 선생은 윤봉길의사 의거 당시 폭탄을 보자기에 싸준 인물로 전해진다. 임수명 선생은 항일비밀문서 연락과 배포 등을 지원하다 남편인 신팔균장군 전사 소식을 듣고 자결했다. 신정숙 선생은 중국으로 가 조선의용대에 참여했으며 김구 선생 비서로도 일했다. 전시실 관람은 무료며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다. 주말과 공휴일은 휴관한다. 도청 인터넷 홈페지이에 접속하면 온라인으로 전시실을 둘러볼 수 있다. 투입된 사업비는 총 6억원이다. 도는 정부의 3·1절 100주년 기념사업에 이 사업을 신청해 국비 1억 5000만원을 지원받았다. 도 관계자는 “건국훈장애족장 이상을 받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을 흉상으로 제작했다”며 “민족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았던 여성들의 정신을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여성독립운동가들 흉상을 만들어 상설전시공간을 마련한 것은 충북이 처음이다. 청주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 “한국전쟁 때 日 민간인 전투 참여” 日언론, 美비밀문서 통해 첫 확인

    “한국전쟁 때 日 민간인 전투 참여” 日언론, 美비밀문서 통해 첫 확인

    한국전쟁 때 일본 민간인 남성 60명이 미군과 함께 한반도로 건너갔고, 이 가운데 18명이 실제 전투에도 참가했던 사실이 새롭게 확인됐다고 마이니치신문이 22일 보도했다. 마이니치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보관된 ‘한국에서의 일본인 무허가 수송과 사용’이라는 제목의 843쪽짜리 미군 비밀문서를 바탕으로 작성한 기획기사에서 “한국전쟁 개전 직후인 1950년 7월쯤 일본 민간인 60명이 한반도에 도항했다가 1951년 1~2월 귀국했다”며 “이들 중 27명이 총, 칼 등 무기를 지급받았고 18명은 전투에서 이를 실제로 사용했다”고 전했다. 마이니치는 “한국전쟁 때 수중 기뢰 제거 및 후방 업무지원 등 과정에서 일본인 57명이 사망한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지만, 민간인이 실제 전투에 참가한 사실은 이번 비밀문서를 통해 새로 밝혀진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60명 중 48명은 당시 주일 미군기지 직원들이었으며 46명이 10~20대였다. 1명은 사망, 1명은 실종된 것으로 기록됐다. 마이니치는 이들의 도항 경위에 대해 “미군이 공식적으로 데리고 간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관계를 이용해 정식 허가를 받지 않고 대동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이 문서에 대해 방위성은 “사실관계를 알지 못하고 있어 답할 입장이 아니다”라고 마이니치에 밝혔다. 오누마 히사오 교아이가쿠엔마에바시국제대 교수는 “한국전쟁 당시 옛 소련과 북한이 ‘일본인들이 유엔군으로서 참전하고 있다’고 비난했지만, 직접 전투에 참가했다는 공식 자료는 발견된 적이 없었다”며 “자세히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평가했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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