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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훈 선생 영전에 바치는 한국 최초 여성비행사 권기옥 지사 만장 발견

    심훈 선생 영전에 바치는 한국 최초 여성비행사 권기옥 지사 만장 발견

    ‘聞道玉京卽此樓(하늘에 옥경 있다더니 이 빈소가 거기라네), 紅塵官海不同流(번거롭고 속된 관리길 걷지 않았네), 春風到處美人恨(봄바람 일렁이면 미인들 한탄하고), 秋月明時孤客愁(가을달 밝으니 외로운 나그네 시름에 젖는구나)’ 우리나라 최초 여성비행사이자 독립운동가인 권기옥(1901~1988) 지사가 저항시인 심훈(1901~1936) 선생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만장(輓章)이 발견됐다. 만장은 고인을 애도하는 글을 비단이나 종이에 적어 깃발처럼 만든 것으로 친분이 있던 사람이 써서 바친다. 충남 당진시는 2일 송악읍 부곡리 심훈기념관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소장자료를 연구하다 이 추모시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심훈기념관은 권 지사의 양자인 외조카 등 후손으로부터 추모시 필체가 권 지사의 것임을 확인했다. 공책을 뜯어내 쓴 추모시는 칠언절구의 한시로 돼 있다. 기념관은 심훈 선생 문상을 온 권 지사가 애통한 마음에 영전에서 초서로 작성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시는 ‘哭小說家沈先生大燮靈座(소설가 심대섭 선생 영전에서 곡하다)’라는 제목으로 시작해 앞의 칠언절구를 읊고 ‘權其玉 狂生 挽 (권기옥이 만사를 짓다)’로 끝난다. 심훈 선생을 어지럽고 속된 세계를 걷지 않은 인물로 표현했다. 또 심훈 선생을 높이고 자신은 ‘狂生(광생)’이란 단어로 낮춰 존경을 표했다. 기념관은 심훈 선생과 권 지사의 관계를 알려주는 직접적 자료가 없었으나 이 추모시로 둘이 생전에 가까운 사이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장승률 당진시 학예연구사는 “연구가 더 필요하지만 심훈 선생과 권기옥 지사의 인연은 중국 상해 임시정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면서 “심훈 선생의 상해시절 임시정부와의 관계 등이 연구돼 선생의 더 많은 업적이 세상에 나오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권기옥 지사는 숭의여학교 비밀결사대인 송죽회를 통해 독립운동을 했고, 임시정부 추천으로 1923년 4월 운남육군항공학교 제1기생으로 입학해 한국 최초 여성비행사로 활동했다. 당진 이천열 기자 sky@seoul.co.kr
  • 김마리아 “애국부인회, 국권회복 나서야”… 여성 독립운동 ‘점화’

    김마리아 “애국부인회, 국권회복 나서야”… 여성 독립운동 ‘점화’

    ‘혈성부인회’ ‘대조선 애국부인회’ 통합 김마리아가 회장 맡으며 애국부인회로 3·1운동 후 수감자 구제 자금 모금운동 회원 대부분 간호원·교사 등 전문직 여성 주요 임원들 ‘치안 방해 혐의’로 징역형 독립사상 고취·임정 지원·외교관 파견 청년외교단 수뇌부도 징역 1~3년 선고“피고 김마리아, 황애시덕은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의 활동이 활발하지 못함에 분개하여 진흥을 꾀하기로 하고 1919년 10월 19일 김마리아의 숙소인 정신여학교 교내 미국인 선교사 천미례(L D Miller) 방에서 회동하고 조선독립을 위해 크게 노력할 것에 합의했다.”(1920년 6월 29일 대구복심법원 판결문 공소사실)여성 독립운동의 산실이자 비밀결사조직 애국부인회는 김마리아 선생이 회장을 맡으면서 부흥했다. 판결문에 드러난 ‘애국부인회 취지´를 보면 당시 여성들이 독립운동을 두고 고민한 흔적이 나타난다. ‘국가를 가정과 같이 사랑하자. 가족으로서 가족을 사랑하지 않으면 가정은 이룩되지 않는다.(중략) 우리 부인도 국민 중의 한 구성원이다. 국민성 있는 부인은 용기를 떨쳐 그 이상에 상통하는 목적으로써 단합을 주로하고 일제히 찬동하기를 천만 바란다´고 적혀 있다. 본부와 지부 규칙은 ‘본 회의 목적은 대한민국을 건설하는 데 필요한 일절의 외교를 강구, 진행함을 목적으로 하고 임시정부를 돕기 위해 외교를 실시하고(중략) 국권과 인권을 회복함을 표준으로써 전진하되 물러서지 않는다´는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법원은 이를 불온문서로 규정했다. 애국부인회는 1919년 4월 각각 결성된 혈성부인회와 대조선독립 애국부인회에 뿌리를 두고 있다. 두 단체는 대조선독립 애국부인회로 합쳐졌다가 3·1운동으로 투옥됐던 김마리아가 예심 면소 판결을 받고 석방된 뒤 회장을 맡으며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로 이름을 바꾼다. 공소사실에 나오는 10월 회동에서 회장 김마리아, 부회장 이혜경, 총무 황애시덕, 재무부장 장선희, 적십자회장 이정숙, 서기 김영순·신의경, 결사장 백신영이 결정됐다. 이들은 법원이 압수한 ‘불온문서´인 조선애국부인회간사부규칙 등을 정신여학교 등사실에서 인쇄해 조선 각지에 배포했다. 법원은 이를 치안방해 행위로 규정했다.애국부인회는 3·1운동 이후 수감자와 가족을 돕기 위해 운동 자금을 모았다. 각도에 지부장을 두고 회원을 모집했다. 회원 대부분은 여교사나 간호원 등 전문직 여성들이었다. 매월 회비 1원(현재 가치 약 4만원)이었는데, 지부에서는 회비의 3분의1을 본부로 보냈고, 본부는 그렇게 모은 자금을 임시정부에 헌금했다. 애국부인회는 활동 당시 100여명이 6000원(약 2억 4000만원)이라는 거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보낸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애국부인회 여성들은 남성을 보조하는 역할에 그치지 않고 독립운동의 주체로서 활동했다. 판결문에 인용된 신문조서를 보면 신의경은 “10월 19일 김마리아 집에서 ‘남자는 조선독립을 위해 노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인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음은 적절하지 않다’고 해 부인도 모임을 조직해 남자와 같이 독립을 위해 운동하자는 의견이 나오게 됐고, 모두 이에 찬성하고 모임 명칭을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로 정했다”고 말한다. 황애시덕은 “오현주가 조직한 혈성부인회는 불완전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완전한 것으로 조직을 변경하려는 것이 동기가 됐다”고 진술했다. 앞서 김마리아도 예심판사(검사)의 조사를 받으며 “조선 사람으로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오. 남자가 활동하는데 여자가 못 할 이유가 있소?”라고 항변한 것으로 전해진다. 임시정부도 애국부인회를 독립단으로 인정했다. 애국부인회를 일제에 밀고한 오현주의 신문조서에 따르면 1919년 4월 상하이 임시정부는 조선 각지의 독립단에서 모두 대표자를 정부에 파견하고 있으니 애국부인회와 혈성부인회 대표자도 와 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김원경이 두 단체의 공동 대표자로 파견됐다. 조선총독부 대구지법 가와무라 시미즈 예심판사는 “이들의 치안방해 행위는 제령 7호 1조 1항에 해당하고, 각종 문서를 저작·반포한 점은 출판법 11조 1항과 조선형사령 42조에 해당하므로 피고인 모두 법조에 따라 징역형을 선택하고 처단해야 한다”고 밝혔다. 대구복심법원 구리야마 겐키치 예심판사도 “피고인들은 조선인들은 남자는 물론 여자라도 서로 도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선독립 목적을 위해 행동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는 목적으로 부인 단체를 조직했다”고 말했다.애국부인회는 회장부터 서기까지 주요 임원들은 징역 1~3년을 선고받았다. 김마리아는 수뇌부 검거 과정에서 심하게 고문을 받아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이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애국부인회와 함께 적발된 청년외교단도 판결문에 함께 이름을 남겼다. 대조선독립 애국부인회 고문을 맡았던 이병철은 청년외교단의 총무였다. 이들은 ‘국치기념경고문´에서 “절치하라. 담대하라”며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재판부는 “청년외교단의 목적은 조선 내에서 동지를 규합하고 독립의 정신을 보급함과 동시에 상하이 임시정부를 응원해 세계 각국에 외교원을 파견하고 독립에 대해 각국 동정을 구하며 독립의 요구를 하려고 했다”고 판단했다. 청년외교단 수뇌부도 징역 1~3년을 선고받았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해방 뒤 경찰간부는 다 친일파? “독립운동가들도 있었다”

    해방 뒤 경찰간부는 다 친일파? “독립운동가들도 있었다”

    광복군 출신 장동식·백준기·송병철 등 다수경찰청, 독립운동가 경찰 유공자 추진‘순사’로 대표되는 일제 강점기 경찰은 3·1운동 당시 민초들을 잡아들이는 등 암울했던 시대에 부역했다. 당시 조선인 경찰 다수는 광복 뒤 미군이 진주하자 미군정 경찰로 재차 채용됐다. 무장 독립투쟁의 선봉에 섰던 약산 김원봉을 해방 뒤 체포·고문했던 친일 경찰 노덕술(1899~1969)이 대표적이다. 이 때문에 우리 근·현대사에서 ‘경찰=부역’ 이미지가 있었다. 실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따르면 해방 직후인 1946년 기준으로 서울시내 10개 경찰서장 가운데 9명이 일본경찰 출신이었다. 나머지 1명은 군수 출신이다. 하지만 경찰청은 “독립운동에 투신하다 해방 뒤 경찰을 이끌었던 간부들도 많았다”며 3·1운동 100주년인 올해 독립운동가 출신 경찰관 32명을 발굴해 알리고 있다. 26일 경찰청이 발굴한 독립운동가 출신 경찰관의 면면을 보면 광복군 소속으로 일제와 싸우다 해방 이후 경찰관이 된 이들이 많다. 경찰 최고위직까지 오른 장동식 치안총감이 대표적이다. 그는 1943~1945년까지 광복군 정보장교로 복무하면서 일본군 내 한국 병사들을 탈출시킨 뒤 광복군에 합류시키는 역할을 했다. 광복 이후 순경으로 입직했다. 1954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1960년 총경으로 다시 임용된 뒤 1971년 6~12월 내무부 치안국장을 지냈다. 독립운동의 공을 인정받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기도 했다.또 광복군에서 적(敵) 정보수집 등의 임무를 수행했던 백준기 경위, 광복군에 입대해 항일활동을 하다 임시정부에서 근무한 송병철 순경, 천호인 등도 광복군 출신 경찰관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비밀결사 조직이나 학생단체 등에서 활동하다 해방 이후 경찰관이 된 경우도 있다. 노기용 총경은 1920년 항일 비밀결사 조직 ‘군사주비단’에 가담해 임시정부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했다. 1923년 군자금 모금 계획 도중 일제에 체포돼 7년을 감옥에서 보내기도 했다. 노 총경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1924년부터 학생단체를 조직해 항일 학생운동을 하고 일본 동경에서 신간회 활동을 했던 박노수 총경, 경찰이 되기 전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 활동 중 체포되어 1년 복역했던 최철룡 경무관 등도 해방 이후 경찰조직에 몸 담았다. 안창호 선생의 조카딸이기도 한 안맥결 총경, 초대 수도여자경찰서장이었던 양한나 경감, 부산여자경찰서장을 지낸 이양전 경감도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하거나 항일단체에서 활동했다. 경찰청은 자체적으로 발굴한 독립운동가 출신 경찰 가운데 서훈을 받지 못한 경찰에 대한 독립유공 심사를 보훈처에 요청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김구의 비서’ 김우전 前 광복회장 별세

    ‘김구의 비서’ 김우전 前 광복회장 별세

    광복군 출신으로 광복회장을 지낸 애국지사 김우전(金祐銓) 선생이 20일 오전 8시 12분쯤 별세했다. 98세. 1922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난 선생은 일본 리쓰메이칸 대학 법학과에 재학 중 재일 학생 민족운동 비밀결사단체인 조선민족 고유문화유지계몽단에 가입해 활동했다.1944년 1월 일본군에 징병돼 중국으로 파병되자 부대를 탈출해 그해 5월 광복군에 입대했다. 그는 이어 중국 제10전구 중앙군관학교 분교 간부훈련단 한광반을 졸업한 뒤 곧바로 광복군 제3지대 소속으로 미국 제14항공단에 연합군 연락장교로 파견됐다.1945년 3월 한미공동작전계획(OSS 훈련)에 따라 미군 OSS(국방부 전략지원사령부) 본부에서 광복군 무전기술 교재와 한글암호문을 제작하고, 국내 독립운동가와의 연락 임무 등을 수행했다. 같은 해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의 기요 비서(기밀을 다루는 중요한 비서)에 임명돼 활동하다가 해방과 함께 귀국해 경교장에서 김구 선생의 개인비서로 일했다.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선생은 1992년 광복회 부회장, 1999년과 2015년 한국광복군동지회 회장, 2003년 광복회장을 각각 맡았다. 그는 2003년 2월 광복회장 취임 이후 2004년 4월까지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은 월급 전액과 본인의 독립유공자 연금을 합친 돈 5000만원을 독립유공자 손·자녀 지원용 장학금으로 쾌척해 훈훈한 감동을 줬다. 선생은 ‘1948년 남북협상에 대한 역사인식의 부족과 왜곡’, ‘한국광복군과 미국 OSS의 공동작전에 관한 연구’,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선전포고에 관한 역사 재조명, ‘한국광복군의 OSS 특공작전’ 등 다수의 논문과 ‘김구통일론’, ‘김구선생의 삶을 따라서’ 등의 저서를 남겼다. 유족으로는 2남 2녀가 있다. 발인은 22일 오전 7시,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빈소는 서울중앙보훈병원 장례식장이다. (02)2225-1004.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단독] 신채호 中망명 전 살았던 삼청동 집터 발견…표지석 설치한다

    [단독] 신채호 中망명 전 살았던 삼청동 집터 발견…표지석 설치한다

    사업회, 칠보사 앞 주차장 공터로 추정 새달 서울시 문화재위원회 열어 검증 망명 전 대한매일신보에 이름·주소 적어 ‘집문서 분실…휴지로 처리’ 광고 내보내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 언론인으로 활동하다 순국한 단재 신채호(1880~1936) 선생의 집터로 추정되는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그의 업적을 기리는 표지석 설치가 추진된다. 이 집은 단재가 서울신문의 전신인 대한매일신보 주필과 황성신문 기자로 민족 정기를 진작하고 항일 투쟁을 벌이고, 항일 비밀결사조직 신민회와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하던 1905년부터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다.사단법인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이건흥 공동대표는 19일 “단재 선생은 1910년 조선이 국권을 상실하는 국치를 예감하고 자신이 살던 서울 종로구 삼청동 가옥을 떠나 중국 칭다오로 망명했다”며 “현재 삼청동 칠보사 앞 주차장으로 쓰이는 공터가 선생이 살았던 곳으로 추정되는데, 이곳에 표지석을 설립하는 방안을 서울시와 협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시 관계자도 “다음달 서울시 문화재위원회를 열어 단재 선생이 실제로 살았던 곳인지 등을 종합적으로 검증해 사실로 확인되면 표지석을 세울 것”이라고 밝혔다. 신채호는 중국 망명 직전 주필로 있던 대한매일신보의 1910년 4월 19일자 3면에 ‘본인 소유 초가 6칸의 문권(文券·집문서)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 분실하였기에 이에 광고하오니 쓸모없는 휴지로 처리하시오’라는 광고를 실었다. 광고 문안 뒤에 ‘경 북서 삼청동 이통사호 신채호 백’(京 北暑 三淸洞 二統四戶, 申采浩 白)이라고 자신의 주소와 이름을 적었다. 단재가 적시한 이 주소지는 현재 종로구 삼청동 2-1로, 중국 망명 이후 1912년까지 국유지였으나 그 이후 여러 사람의 소유를 거쳐 현재 한 불교재단법인이 소유하고 있다.단재의 며느리 이덕남(76)씨는 이 광고와 관련해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나라를 위해 재산과 가족, 목숨까지 버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며 “시아버지 단재 선생도 본인 소유의 집을 휴지로 처리하라고 할 정도로 어떤 미련도 없이 중국으로 독립운동을 하러 떠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는 “단재의 삼청동 가옥터가 발견됐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다”면서 “단재 선생은 역사서 ‘조선상고사’를 통해 민족주의 사관을 정립하고 언론인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다가 중국 감옥에서 순국한 혁명적 독립운동가인데, 기념관은커녕 그를 기리는 표지석 하나 없다는 게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최광숙 선임기자 bori@seoul.co.kr
  • 계산서 용지에 쓴 일기… 우리가 몰랐던 독립운동의 또 다른 모습

    계산서 용지에 쓴 일기… 우리가 몰랐던 독립운동의 또 다른 모습

    “어떤 조선인 경찰이 와서 나의 몸을 수색하였다. 이에 내가 질책을 하면서 물러가라고 하였다. (중략) 이로부터는 단지 한 번 죽을 마음만 있어서 혹 며칠 동안을 밥을 먹지 않기도 하였으며, 혹 대나무 젓가락을 가지고 귀 사이를 스스로 찌르기도 하였다.” “조사를 할 시간이 되면 7권으로 장정된 책자를 펼쳐 놓고서 물었다. (중략) 내가 본국에서 중국으로 건너온 이후의 사정에 대해서 하나하나 기재되어 있었으며, 항주 및 북경 등에서 한 일에 대해 내가 잊고 있었던 것도 그들은 오히려 기록해 놓고 있었는데 이런 일들은 모두 나로서는 기억할 수 없는 것이었다.”독립운동가 이규채(1890~1947)가 죽기 몇 해 전 자신의 삶의 궤적과 독립운동 여정을 기록한 일명 ‘이규채 연보’에 담긴 내용이다. 1920년대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을 지내고, 이후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했던 이규채는 만주지역 항일 무장투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한 상점의 계산서 용지 32장 분량에 적힌 ‘이규채 연보’는 이규채가 자신의 상세한 기억을 바탕으로 작성한 덕분에 다른 자료에서는 볼 수 없는 현장감이 뚜렷하다. 독립운동 당시 목숨을 수시로 위협받던 일부터 일제의 혹독한 감시를 피해 다니면서 느낀 고단함, 독립운동가 사이에서 벌어진 갈등 등이 고스란히 담겼다. 예를 들면 1932년 쌍성보 전투에 참여했던 이규채는 왼쪽 손에 총을 맞아 부상을 당했다는 것을 전투가 끝난 한참 후에 곁에 있던 사람이 알려줘서야 알게 됐다고 적었다. 중국 청나라 말기 민간 비밀결사단체인 대도회(大刀會)를 만나 수색을 당할 당시 ‘일본의 정탐꾼’으로 오인당해 몸이 묶이고, 그 끈을 말 안장에 매달고 말을 달리게 하는 바람에 “목숨을 잃을 것만 같았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 밖에 공산주의자들과의 갈등으로 생매장당했다가 구사일생으로 구출된 일, 지난날 함께 활동했던 이민달(李敏達)이라는 자의 밀고 때문에 일본 경찰에 체포된 일, 체포된 이후 일본 영사관에서 조사받을 당시 일본 경찰이 7권 분량 책자를 펼쳐 놓고 신문한 일 등 당시 이규채가 겪었던 역경과 고뇌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박경목 서대문형무소역사관장은 “그간 독립운동사 자료는 ‘전투에서 누구를 처단하고 거사를 행했다’는 식의 활동 내용이 중심이지만 ‘이규채 연보’는 이규채 자신이 마적을 만나서 물건을 털리거나 목숨을 빼앗길 뻔한 이야기 등이 가감 없이 드러나 있다”면서 “사람들이 모르는 독립운동의 상세한 여정과 독립운동의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규채 연보’에는 이규채가 독립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만났던 수많은 사람의 이름이 등장한다. 이규채의 손자 이성우씨는 “이 자료에 100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분들이 많다”면서 “민족문제연구소나 독립기념관 등의 기관에서 무명 독립운동가들을 발굴하고 그들을 기념하는 탑을 만드는 등의 실천적인 운동을 했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비장한 한용운·처연한 유관순… 감시받은 4858명의 흔적

    비장한 한용운·처연한 유관순… 감시받은 4858명의 흔적

    처연하지만 어딘가 결연해 보이는 유관순의 눈빛, 파르라니 깎은 머리로 정면을 차갑게 응시하는 한용운의 비장함, 대형 태극기 앞에서 무표정하게 자세를 취한 이봉창….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하고 있는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등록문화재 제730호) 중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들의 면면이다. 1920~1940년대 조선총독부 경기도경찰부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는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일제 경찰이 감시했던 4858명에 대해 작성한 신상카드다. 안창호, 이봉창, 한용운, 유관순, 김마리아 등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를 포함해 한때 독립운동에 매진했으나 후일 친일 활동에 나선 이광수, 주요한, 최린 등도 포함돼 있다. 카드 중에는 ‘고등과 수배용’, ‘형사과 수배용’이라고 적힌 경우도 있는데 중요 범죄자의 사후 관리를 위한 용도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감시대상 인물은 4858명이나 사람에 따라 카드가 복수로 작성된 탓에 전체 카드 매수는 6264매다. 카드 앞면과 뒷면에는 상반신 사진(경우에 따라 전면 혹은 측면 사진)과 나이, 키, 본적, 출생지, 주소 등 기본적인 인적 사항 외에도 죄명, 형기, 언도관서(재판소 명), 언도 연원일, 입소 연월일, 출소 연월일, 형무소 명 등의 수형 정보가 펜으로 적혀 있다. 죄명을 살펴보면 ‘보안법’, ‘치안유지법’, ‘국가총동원법’, ‘폭탄투척사건’, ‘안녕 질서에 관한 법’, ‘출판법’, ‘육군형법’, ‘주거침입’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사진은 대부분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전면 상반신 사진의 경우 현재 백과사전 등에서 해당 인물을 소개하는 사진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희귀한 사료로서 항일 민족운동가나 독립운동가들을 조사하거나 연구할 때 신빙성 있는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관계자는 “1919년 3·1운동 이후 각종 사회 사상운동과 비밀결사 운동이 증가하면서 일제가 대상자들을 신속하게 검거하고 탄압하기 위해 제작한 카드로, 어떤 사람들을 감시 대상으로 삼았고, 어떤 명목으로 감시했는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고 설명했다. 6000여장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지만 카드의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1980년대 치안본부(현 경찰청)에서 국사편찬위원회로 이관돼 앨범에 보관돼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 베이스(http://db.history.go.kr)에서 누구나 열람할 수 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미스터 션샤인’ 고애신 몰래 도운 유한양행·교보생명 창업주

    ‘미스터 션샤인’ 고애신 몰래 도운 유한양행·교보생명 창업주

    최근 종영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은 주인공 고애신(김태리 분)이 의병을 조직해 활동하는 데 도움을 준 숨은 독립운동가를 조명해 더욱 인기를 얻었다. 특히 민족기업은 당시 일제에 의한 파산 위험을 무릅쓰고 독립운동 자금을 몰래 지원했다. 국가보훈처가 내부 문헌 자료 및 해당 기업 등을 조사해 100년 전 군자금을 댄 3개 기업을 확인했다. 보훈처 관계자는 26일 “독립유공자 공훈록 등을 확인한 결과 유한양행, 동화약품, 교보생명을 각각 세운 유일한, 민강, 신용호 선생이 독립운동을 지원하거나 실제 독립투사로 활동했다”고 밝혔다.1894년 평양 출생인 유일한 선생은 1905년 미국으로 건너가 한인소년병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았고 1919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서 ‘한국 국민의 목적과 열망을 석명하는 결의문’을 작성·낭독했다. 제너럴일렉트릭사의 회계사로 근무하던 그는 1926년 연희전문학교 교수 초청으로 귀국해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그의 신념은 ‘건강한 국민만이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였다. 이후 미국 내 모든 한인 단체를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집행부 의원으로 일명 ‘맹호군’으로 불린 한인국방경위대를 편성하는 데 후원했다. 지속적으로 군자금을 출연해 독립운동을 후원한 것도 확인됐다. 1944년에는 미군의 한국침투작전을 위해 특수공작을 주임무로 하는 한인훈련부대가 설치되자 이곳에 입대해 1조 책임자로 임명됐다.민강 선생은 1883년생으로 14세 때 선친이 세운 동화약방의 초대 사장으로 취임했다. 1909년 각계 인사 80여명과 비밀결사단인 대동청년당을 조직해 국권회복운동에 나섰다. 1910년 경술국치 후에는 남대문 밖에 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에 매진했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고 한성임시정부 수립과 국민대회 개최를 추진했다. 이를 위해 동화약품을 연락 거점으로 자금조달 활동을 펼치다 옥고를 치렀다. 당시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 후 비밀 연락기관이었던 서울연통부의 책임자도 겸했는데 1921년 연통부가 발각되면서 또다시 1년 6개월간 감옥에 갇혔다. 출옥 후 상하이에서 교민단의사회의 학무위원 등을 역임했지만 1924년 일본 경찰에 체포돼 다시 옥고를 치렀고, 출소 직후 순국했다.1917년생인 신용호 선생은 독립운동 가문에서 태어났다. 맏형은 전남 영암의 항일농민운동의 주동자였고, 셋째 형도 일본 도쿄에서 항일 학생운동에 가담한 독립운동가였다. 20살 때 중국으로 떠나 사업을 시작했고 1941년 북일공사를 설립해 미곡 유통을 통해 얻은 수익으로 직간접적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이후 30살 때 광복된 조국으로 돌아와 민주문화사를 설립했다. 자원이 없는 국가의 대안은 교육과 자본이라고 생각해 1958년 대한교육보험회사(교보생명)를 창립했다. 특히 자녀가 진학하면 보험금 전액을 돌려받는 진학보험은 일제시대와 6·25전쟁 이후 인재 양성에 기여했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단독]‘미스터 션샤인’의 그들, 드라마 보다 극적인 활약상 찾았다

    [단독]‘미스터 션샤인’의 그들, 드라마 보다 극적인 활약상 찾았다

    유일한·민강·신용호 선생, 100년전 독립자금 지원민강 선생은 직접 나서 독립운동하다 투옥 후 순국 최근 종영한 드라마 ‘미스터션샤인’은 주인공 고애신(김태리 분)이 의병을 조직해 활동하는 데 도움을 준 숨은 독립운동가를 조명해 더욱 인기를 얻었다. 특히 민족기업은 당시 일제에 의한 파산 위험을 무릅쓰고 독립운동 자금을 몰래 지원했다. 국가보훈처가 내부 문헌 자료 및 해당 기업 등을 조사해 100년 전 군자금을 댄 3개 기업을 확인했다. 보훈처 관계자는 26일 “독립유공자 공훈록 등을 확인한 결과 유한양행, 동화약품, 교보생명을 각각 세운 유일한, 민강, 신용호 선생이 독립운동을 지원하거나 실제 독립투사로 활동했다”고 밝혔다. 1894년 평양 출생인 유일한 선생은 1905년 미국으로 건너가 한인소년병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았고 1919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서 ‘한국 국민의 목적과 열망을 석명하는 결의문’을 작성·낭독했다. 제너럴일렉트릭사의 회계사로 근무하던 그는 1926년 연희전문학교 교수 초청으로 귀국해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그의 신념은 ‘건강한 국민만이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였다. 이후 미국 내 모든 한인 단체를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집행부 의원으로 일명 ‘맹호군’으로 불린 한인국방경위대를 편성하는데 후원했다. 지속적으로 군자금을 출연해 독립운동을 후원한 것도 확인됐다. 1944년에는 미군의 한국침투작전을 위해 특수공작을 주임무로 하는 한인훈련부대가 설치되자 이곳에 입대해 1조 책임자로 임명됐다.민강 선생은 1883년생으로 14세 때 선친이 세운 동화약방의 초대 사장으로 취임했다. 1909년 각계 인사 80여명과 비밀결사단인 대동청년당을 조직해 국권회복운동에 나섰다. 1910년 경술국치 후에는 남대문 밖에 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에 매진했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고 한성임시정부 수립과 국민대회 개최를 추진했다. 이를 위해 동화약품을 연락 거점으로 자금조달 활동을 펼치다 옥고를 치렀다. 당시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 후 비밀 연락기관이었던 서울연통부의 책임자도 겸했는데 1921년 연통부가 발각되면서 또다시 1년 6개월간 감옥에 갇혔다. 출옥 후 상하이에서 교민단의사회의 학무위원 등을 역임했지만 1924년 일본 경찰에 체포돼 감옥에 갇혔다. 이후 출소 직후 순국했다. 1917년생인 신용호 선생은 독립운동 가문에서 태어났다. 맏형은 전남 영암의 항일농민운동의 주동자였고, 셋째 형도 일본 도쿄에서 항일 학생운동에 가담한 독립운동가였다. 20살 때 중국으로 건너가 사업을 시작했고 1941년 북일공사를 설립해 미곡 유통을 통해 얻은 수익으로 직·간접적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이후 30살 때 광복된 조국으로 돌아와 민주문화사를 설립했다. 자원이 없는 국가의 대안은 교육과 자본이라고 생각해 1958년 대한교육보험회사(교보생명)를 창립했다. 특히 자녀가 진학하면 보험금 전액을 돌려받는 진학보험은 6·25전쟁 이후 인재양성에 기여했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특검 “드루킹 일당의 목표는 ‘재벌 인수해 공동체 건설’”

    특검 “드루킹 일당의 목표는 ‘재벌 인수해 공동체 건설’”

    댓글 조작 사건으로 재판을 받게 된 ‘드루킹’ 김동원씨 등 ‘경제적 공진화 모임’(경공모) 회원들은 내부적으로 “경제민주화를 내세워 재벌기업을 인수·합병해 얻은 수익금으로 공동체를 건설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허익범 특별검사팀은 2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2부(부장 성창호) 심리로 열린 김씨 등 9명의 댓글 조작 사건 첫 공판에서 이런 내용이 담긴 내부 문서와 진술 등을 공개했다. 특검에 따르면 김씨가 김경수 경남도지사에게 자신이 운영하는 네이버 카페 ‘경공모’를 소개하는 문서에서 “동학농민혁명군처럼 혁명을 위한 조직으로 일사불란한 의견과 행동, 조직 등을 갖췄다”고 설명했다. 이 문서에 담긴 경공모의 규약에는 “정치적 비밀결사체로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사회경제적으로는 재벌을 대신해 기업을 소유하면서 국가와 소통하고, 한민족의 통일을 지향하며 매국노를 청산한다”는 등의 결성 목적이 설명됐다. 조직원들의 삶에 “요람에서 무덤까지 개입한다”는 등의 문구도 포함됐다. 김씨는 이 문서에서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나눈 대화라며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유시민 전 장관의 강연을 듣고 김씨가 경공모의 목표를 소개하자, 유시민 전 장관으로부터 “하려는 계획이 지배구조 개혁인데, 작은 기업도 아니고 삼성에 대해서도 가능하겠느냐. 그러려면 생물학적 생명까지 걸어야 한다”는 반문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문에 김씨는 “경제 혁명에 성공하고 사람 사는 세상의 원칙을 만들 수 있다면 생명은 얼마든지 걸 수 있다”고 답변했다고 주장했다. 이 밖에도 김씨는 경공모가 2009년 네이버의 ‘숨은 카페’로 시작해 2014년 열린 카페를 개설하고 온·오프라인 모임을 하는 단체로 발전했고, 회원들을 7단계 등급으로 나눠 3개월 넘게 유료 강의 청취 등 활동을 해야 숨은 카페에 가입할 수 있는 시스템을 운영한다고 설명했다. 숨은 카페 회원은 500여명, 열린 카페 회원은 4500여명이라는 주장도 했다. 특검은 김씨 등이 김경수 지사와 접촉, 공모해 2016년 11월쯤부터 올해 2월까지 댓글 조작 프로그램 ‘킹크랩’을 이용해 불법 여론조작을 벌였다고 보고 있다. 또 올해 6·13 지방선거까지 댓글 조작을 계속하기로 하고, 지난해 연말 김씨의 측근 도모 변호사를 일본 센다이 총영사직에 앉히기로 했다고 의심하고 있다. 김씨가 김경수 지사 등 정치권에 접근한 경위도 문서에 나온 경공모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것이라는 도 변호사의 진술도 공개됐다. 도 변호사는 “당시 경공모의 최종 목적은 재벌을 적대적 인수·합병(M&A)해 기업 지배 활동으로 얻는 이익으로 ‘두루미 마을’이라는 공동체를 건설하려는 것이었다”면서 “사실상 어려운 일이다 보니 대선 국면에서 국회에 영향력을 확대해 인수합병 관련 법 개정 등 정치권의 도움을 받으려 한 듯하다”고 설명했다. 당시 ‘외부용’으로 만들어진 경공모 설명자료에는 “대선에 승리해 정권을 장악하고, 국민연금공단을 통해 재벌 지배 및 구조 변경을 추진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고 특검팀은 소개했다. 이 자료에는 자신들이 주장하는 ‘경제민주화’에 대해 “강력한 정부에 의한 재벌 통제로 실현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김종인식’과 차이가 있다. 소액 주주의 조직적 결집으로 지배구조를 변경하려는 목적”이라고 해설한 대목도 나온다. 김씨 등이 주고받은 텔레그램 대화 내용 등을 볼 때 오사카 총영사 인사 청탁도 그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인 것으로 보인다. 도 변호사는 김씨에게 전달한 편지에 “제가 일본 대사로 가려 하는 것은 개인의 영달이나 명예가 아니라 일본의 자금력을 동원하기 위한 것”이라고 적었다. 김씨가 김경수 지사에게 보낸 메시지에는 “우리는 자리를 탐하는 양아치가 아니다”라면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보탬이 되는 ‘개성특별행정구 프로젝트’를 하면서 일본의 자금을 끌어들일 만한 직위가 필요했다”는 설명도 나온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김대영의 무기 인사이드] 국내최초 중형급 잠수함 도산안창호함(KSS-Ⅲ)

    [김대영의 무기 인사이드] 국내최초 중형급 잠수함 도산안창호함(KSS-Ⅲ)

    지난 9월 14일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우리나라 최초로 건조된 3,000톤급 차기 잠수함 도산안창오함의 진수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도산안창호함은 국내에서 독자적으로 설계하고 건조한 장보고-Ⅲ 잠수함 1번함이다. 이 함정은 지난 2012년 방위사업청이 대우조선해양과 계약을 체결한 이래 2014년 착공식과 2016년 기공식을 거쳤다. 도산안창호함은 해군에 처음으로 도입되는 중형급 잠수함으로, 첨단과학기술을 집약하여 건조됐다. 전방위적 위협에 대응할 수 있는 국가 전략무기체계로서, 해군의 책임국방 역량을 한층 강화시킬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또한 이번 도산안창호함 진수로 대한민국은 잠수함을 독자적으로 설계하고 진수한 10여 개 국가 대열에 합류했다. 도산안창호함은 3,000톤급 규모로, 길이 83.3미터, 폭 9.6미터에 수중 최대속력은 20kts(37km/h), 탑승 인원은 50여명이다. 해군이 현재 운용중인 214급과 비교해 크기가 약 2배 정도 커졌으며, 공기불요추진체계 즉 AIP에 고성능 연료전지를 적용해 수중 잠항 기간도 증가했다. 더불어 도산안창호함은 초기 설계단계부터 민, 관, 군 협력으로 주요 핵심장비를 개발하여 탑재, 전체 국산화 비율을 향상시켰다. 구체적으로는 잠수함의 두뇌 역할을 하는 핵심장비인 전투 및 소나 체계를 비롯해 다수의 국내 개발 장비가 탑재됐다. 해군은 장보고-Ⅲ 잠수함에 독립운동에 공헌했거나 광복 후 국가발전에 기여한 인물을 명명하기로 한 원칙에 따라 위원회를 열고 함명을 결정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1906년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해 국권회복운동을 펼쳤으며, 흥사단을 설립해 부강한 독립국가 건설과 인재양성에 헌신했다. 특히, 도산 안창호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주도하며 독립전쟁의 통합을 이끌었다. 또한 자주독립을 위해 민족의 힘을 기를 것을 강조하셨는데 이런 점에서 책임국방 기조와도 걸맞다. 올해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탄생 140주년, 서거 80주년이기도 하다. 이밖에 도산안창호함 진수식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1913년 창립한 ‘흥사단’ 단원 30여명도 참가했다. 흥사단 단원들은 도산안창호함 진수에 의미를 더하기 위해, 지난 12일부터 군함을 타고 울릉도, 독도를 탐방하는 동해 해상순례를 다녀왔다. 도산안창호함을 시작으로 장보고-Ⅲ가 해군 잠수함 사령부에 본격 배치될 예정이다. 도산안창호함은 앞으로 인수평가 기간을 거쳐 2020년~2021년 사이에 해군에 인도되며, 이후 12개월여 간의 전력화 과정을 마치고 실전 배치될 계획이다. 도산안창호함의 진수로 우리나라는 수중배수량 기준 동북아에서 네 번째로 3천톤급 잠수함 보유국에 들어갔다. 러시아는 킬로급 잠수함을 운용하고 있으며, 중국은 039A/B급 잠수함 그리고 일본은 소류급 잠수함을 보유하고 있다. 비록 주변국에 비해 늦었지만 장보고-Ⅲ 잠수함은 주변국 동급 잠수함들에 비해 강력한 공격력을 자랑한다. 기존의 209나 214급 잠수함과 달리 유도탄을 발사할 수 있는 수직발사관 6개가 특별히 장착되었다. 도산안창호함을 포함 총 9척이 전력화될 장보고-Ⅲ 잠수함은 향후 수직발사관의 개수를 점차 늘릴 예정이다. 김대영 군사평론가 kodefkim@naver.com
  •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만주로 러시아로 쫓겨난 ‘독립운동 일가’ 후손들은 대한민국 국적 회복 퇴짜 맞아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만주로 러시아로 쫓겨난 ‘독립운동 일가’ 후손들은 대한민국 국적 회복 퇴짜 맞아

    왕산(旺山) 허위 일가는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만주와 국내에서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다. 일부는 귀국하기도 했지만 많은 이들이 일제에 쫓겨 이역만리를 전전하다 그곳에 뼈를 묻었다. 후손들은 중국과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우크라이나, 북한 등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다.맏형 방산(舫山) 허훈(1836~1907)은 전 재산인 논 3000마지기를 동생들의 의병투쟁과 독립운동을 위해 내놓았다. 왕산은 4남4녀를 두었다. 1913년 선생의 바로 위 형인 성산(性山) 허겸(1851~1940)의 인솔로 허위 일가는 모두 만주 서간도로 떠났다. 왕산 선생의 사촌인 범산(凡山) 허형, 시산(是山) 허필 일가도 1915년 만주로 떠나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허겸은 의병운동을 하다 1912년 만주로 들어가 중어(中語)학원을 세우고 남만주 농민 자치기관인 부민단 단장을 지냈다. 71세의 고령이던 1922년 부하 30여명과 국내에 잠입해 군자금을 모집하다 동대문경찰서에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다. ●허위 장손녀 국적 회복에 5년 걸려 장자 허학(1887~1940)은 만주에서 동화학교와 동흥학교를 세워 후진 양성에 힘썼다. 1914년 독립의군부 사건의 주모자로 동지 54명과 함께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허학은 아우 허영, 허준, 허국과 함께 일제의 요시찰 인물로 수배를 받았다. 그는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한 뒤 일본인 밀정에게 체포돼 카자흐스탄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허위의 장손녀들인 허학의 두 딸 중 허로자가 2011년 어렵사리 국적을 회복해 현재 서울에서 살고 있다. 정부는 문서상의 미비점 등을 이유로 번번이 국적회복 신청에 퇴짜를 놓았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할아버지 나라의 국적을 찾는 데 무려 5년이나 걸렸다. 허위의 둘째아들 허영(1890~?)의 아들이자 허위의 장손인 허경성씨가 대구에서 살고 있다. 허위의 셋째아들 허준(1895~1956)도 중국 동북지방에서 항일운동에 앞장서다 본인과 장남 광배는 북한에서 사망했으며 1남3녀가 북한에 있다. 허준의 둘째아들인 웅배는 우즈베키스탄에서 ‘고려일보’ 발행인과 모스크바대 교수를 지냈다. 한국과 러시아의 국교 수립에 큰 역할을 했다. 허준의 셋째아들 환배는 우크라이나에 살고 있고 한국에 다녀갔다. 허위의 넷째아들 허국(1899~1971)도 맏형 허학과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했다. 5남4녀를 두었고 두 아들 허 게오르기와 허 블라디슬라브는 2006년 조국으로 특별귀화했다. 그러나 블라디슬라브는 2년 정도 살다 다시 키르기스스탄으로 돌아갔다. ●사촌 형의 외손자는 저항시인 이육사 허위의 사촌 형 범산 허형(1843~1922)은 을사늑약 이후 1906년 예순을 넘긴 나이에 오적암살 사건에 연루돼 체포됐다. 허형에게는 3남1녀가 있었다. 허위가 순국하자 허형은 둘째아들 허발과 가솔을 이끌고 만주로 향했다. 허발(1872~1955)은 3·1운동 때 남만주 대표로 국내로 잠입해 1년간 활동했다. 1933년 국내로 들어와 활동하다 체포되기도 했다. 허형의 셋째아들 허규(1884~1957)는 1928년 군자금 모금과 동지 규합을 위해 국내에 잠입했다가 체포돼 5년의 수형생활을 했다. 광복 후 미군정 입법의원을 지냈다. 허형의 외동딸 허길(1876~1942)은 안동 진성 이씨 가문에 출가해 아들 여섯을 낳았다. 둘째아들이 옥사한 저항시인 이육사(본명 이원록)다. 맏형 이원기는 의열단 등 만주 독립운동단체들의 국내 활동을 후원했다. 비밀결사 암살단을 조직하기도 했고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관여한 혐의로 동생 육사와 원일, 원조와 함께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범산 허형의 동생 시산 허필(1855~1932)은 한학과 의학에 조예가 있어 만주에서 한약방을 열어 일가를 부양하고 독립운동을 도왔다. 둘째아들 허형식(1909~1942)은 독립운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1936년 동북항일연군 제3군 제1사 정치부 주임이 되어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1937년 4월에는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에 임명되어 1941년까지 제3로군을 지휘하며 독립투쟁을 벌였다. 1942년 8월 만주국 토벌대에 포위되어 장렬하게 전사했다.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성공과 실패 동시에 겪은 일본 생활… ‘프리메이슨’ 활동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성공과 실패 동시에 겪은 일본 생활… ‘프리메이슨’ 활동

    1888년 아버지와 이모부의 사업을 돕고자 일본으로 간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은 고베에서 16년간 살면서 성공과 실패를 모두 맛봤다. 그는 사업이 번창해 큰 돈을 벌었고 결혼도 했다. 지역 스포츠클럽 사무국장을 맡아 리더십을 발휘했다. 반면 비밀결사단체로 알려진 ‘프리메이슨’에도 가입하는 등 미스터리한 면도 보였다. 16세 소년 베델이 고베에 왔을 때는 일본이 고베항을 개방(1868년)한 지 정확히 20년이 되던 해였다. 고베는 개항 당시만 해도 사람이 거의 없던 허허벌판이었다. 하지만 바다 수심이 깊어 큰 배가 쉽게 들어오면서 외국의 자본과 기술이 빠르게 퍼졌다. 인구도 1895년 15만 3382명, 1901년 25만 9040명, 1910년 38만 7915명으로 급속히 늘었다. 20세기 초 조선의 수도 한양의 인구가 20만명 안팎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이곳이 얼마나 크고 활기찬 도시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지금도 일본에서 쓰이는 “성공한 사람은 교토에서 공부하고, 오사카에서 돈을 벌어, 고베에 산다”는 말은 이 무렵부터 생겨났다. 베델은 일본 시절 초기 이모부인 퍼시 알프레드 니콜(1848~1899)의 집(고베시 73번지)에 기거하며 일을 배웠다. 현재 이곳에는 1992년 지어진 ‘신크레센토 빌딩’이 들어서 있다. 고베시 문서관의 ‘재팬 디렉터리’에 따르면 니콜은 적어도 1883년부터 일본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사업이 번창하자 1886년 동서이자 베델의 아버지인 토머스 행콕 베델(1849~1912)에게 동업을 제안했다. 토머스 행콕도 본업이 궤도에 오르자 자신은 영국쪽 일을 맡고 큰아들 베델을 일본에 보내 분업에 나섰다. 베델은 고베의 이모부와 런던의 아버지 사이에서 업무를 익히며 사업 노하우를 체득해 갔다.이들이 했던 사업은 완호물(玩好物) 매매였다. 완호물은 쉽게 구하기 어려운 외국산 물품을 말하는데, 당시 영국인에게는 일본산 도자기나 골동품, 칠기, 장신구가 그런 것들이었다. 네덜란드 출신의 후기 인상파 거장 빈센트 반 고흐(1853~1890)가 일본 판화에 매료돼 그 화풍을 모방했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듯 당시 영국을 비롯한 서양 여러 나라에서는 중국과 일본의 예술작품이 인기를 얻었다. 이를 반영하듯 고베에는 외국인을 상대로 옛날 그림과 유기제품, 동전, 고의상, 갑옷 등을 파는 상점들이 많았다.베델이 사업을 하던 19세기 말은 영국이나 일본 모두 무역으로 번영을 구가하던 때였다. 그는 두 나라가 크게 성장하던 시기에 런던에 있던 아버지를 도와 상당한 부를 모을 수 있었다. 베델은 성격이 외향적이고 활달했다. 1909년 5월 7·8일자 ‘배설공의 약전’에는 그가 “각종 유희를 좋아하고 활발용장한 품성을 가졌다”고 기록돼 있다. 고베 시절 그는 여러 가지 운동과 음악을 즐겼고 체스도 잘 뒀다. 술과 담배도 좋아했다. 고베 지역 영자지 ‘고베 크로니클’에는 그가 사람들 앞에서 거리낌없이 노래를 부르곤 했다는 기사가 수차례 등장한다. 그가 적극적이고 사교적인 성격이었음을 잘 보여 준다. 베델은 1901년 고베 외국인 스포츠클럽 ‘고베 레가타 앤드 어슬래틱 클럽’(KR&AC)에서 사무국장을 맡기도 했다. 1901년 1월 30일자 ‘고베 위클리 크로니클’에는 자신을 ‘다섯 살 난 (KR&AC) 멤버’라고 밝힌 이가 “지난해 열린 레가타(여러 명이 함께 요를 젓는 요트) 대회 선수 선발 과정이 공정하지 않았다”고 KR&AC를 비난하는 기고가 실렸다. 그러자 베델은 2월 6일자 기고를 통해 “우리 클럽에 5살짜리가 있는 줄 처음 알았다”고 비꼰 뒤 “나이에 비해 글을 꽤 잘 썼지만 생각은 매우 어리석다”며 그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가 논쟁을 피하지 않는 불같은 면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1899년은 베델에게 큰 전환점이 된 해였다. 아버지 토머스 행콕은 두 번째 동업을 정리하면서 자신의 일본 사업을 대신 맡아줄 사람이 필요해졌다. 여기에 이모부 니콜도 세상을 떠났다. 51세였다. 그는 사업차 고베에서 영국 런던으로 배를 타고 가다가 포르투갈 해상에서 숨을 거뒀다. 평소 지병이 있었던 것 같다. 베델에게 ‘사업 스승’ 니콜의 죽음은 적잖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현재 니콜은 고베 외국인 묘지에 안장돼 있는데, 서울신문은 취재 과정에서 니콜의 묘지를 찾는 후손과 연락이 닿아 이 사실을 전달했다. 27살이던 베델은 이 때부터 독자 사업에 나섰다. 베델은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고자 자신의 첫 회사인 ‘베델 브러더스’를 세웠다. 이 회사는 이름처럼 삼형제인 베델과 허버트(1875~1939), 아서 퍼시(1877~1947)가 함께 운영했다. 이들은 각각 고베와 요코하마, 런던에 사무실을 내고 완호물을 사고 팔았다.이때 베델은 회사 설립을 위해 잠시 영국에 들렀다가 은행원 존 게일의 둘째 딸 메리 모드 게일(1873~1965)을 만났다. 이들은 이듬해인 1900년 고베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베델 부부는 1901년 외아들 허버트 오언 친키 베델(1901~1964)을 낳았다. 그는 ‘짐’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는데, 이름 가운데 ‘친키’는 일본어로 ‘新規’(새로운 것)라는 단어다. 그가 일본에서 얻은 아들을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다. ‘베델 브러더스‘는 한동안 승승장구했다. 아버지가 물려준 영업처를 형제들이 잘 관리했던 것 같다. 베델은 이때 번 돈으로 1901년 오사카 남쪽 사카이 지역에 러그(깔개나 무릎덮개 용도로 쓰는 직물제품) 생산공장을 차렸다. 당시 러그는 영국인 가정의 필수 품목이었다. 이미 만들어진 제품을 중개하는 수준에서 한발 더 나아가 직접 제품을 생산하는 자본가로 성장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는 훗날 베델이 일본 사업을 포기하는 원인이 된다. 한편 베델은 일본에서 ‘프리메이슨’에 가입해 활동했다. 프리메이슨은 중세 교회 건축가 집단에서 출발했다가 기독교 보수성에 반발해 조직된 비밀결사체로 알려져 있다. 프리메이슨이 ‘그림자 정부’(세계를 은밀히 지배하고 있다는 초국가적 조직)의 배후에 있다는 음모론도 있다. 정성화 명지대 사학과 교수와 한국학 자료 수집가 로버트 네프가 함께 쓴 ‘서양인의 조선살이,1882~1910’에는 베델이 조선에서 프리메이슨 설립 멤버로 활동했다고 전한다. 프리메이슨 서울 지부인 ‘한양롯지’ 홈페이지에도 베델을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소개한다. 영국에서 만난 베델의 손녀 수전 제인 블랙(62)은 “할아버지(베델)는 영국 선박업자 조지 쇼어의 소개로 일본 거주 시절 프리메이슨에 가입했다”면서 “할아버지는 (비밀주의 원칙을 지키려고) 가족에게도 프리메이슨 내부 이야기를 말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반면, 영국 출신 역사 연구가인 에이드리언 코웰(62)은 “베델은 (일본에서 프리메이슨에 가입한 것이 아니라) 1908년 영국 법원 판결에 따라 중국 상하이에서 3주간 복역하고 돌아온 뒤에 서울에서 가입했다”면서 “당시 조선에서 프리메이슨이 막 생겨나던 때였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요직을 맡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안신 배재대 복지신학과 교수는 그의 논문 ‘한국 프리메이슨의 역사와 특징’에서 “프리메이슨은 신종교 성격을 띤 엘리트주의 모임”이라면서 “다만 베델이 조선에 왔던 시기 프리메이슨은 종교적 의미보다는 친목과 자선을 위한 형제공동체적 성격이 강했다”고 설명했다. 고베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런던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장준우의 푸드 오디세이] 이것이 천국의 맛? 수도원 맥주 트라피스트

    [장준우의 푸드 오디세이] 이것이 천국의 맛? 수도원 맥주 트라피스트

    이름도 희한한 그것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건 기자 초년병 시절, 저녁 어스름이 깔린 을지로 노가리 골목에서였다. 생맥주 한 잔을 쭉 들이켠 선배는 잔을 내려놓자마자 대단한 비밀이라도 알려주는 양 실눈을 뜨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트라피스트라고 알아?” 선배의 말인즉 서울역 인근의 작은 맥줏집에서 트라피스트, 일명 수도원 맥주라는 것을 파는데 맛도 최고, 가격도 최고라는 것이었다. 수도원에서 맥주를 만든다는 것도 신기한데 맛도 훌륭하다니. 비밀결사단체 같은 이름의 그 맥주를 언젠가 먹어 보겠노라 다짐했지만 딱히 볼 일이 없었기에 기억 한 켠에 고이 묻어 둔 채 일상을 보냈다.트라피스트와의 첫 만남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이뤄졌다. 이탈리아로 날아와 주방에서 일하던 어느 날, 1년에 한 번 크게 열리는 마을 맥주 축제에서 무심코 마신 맥주 맛에 깜짝 놀라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알고 보니 그게 바로 수도원 맥주였다. 맥주 한 모금에서 적어도 열 가지 이상의 풍미가 파도처럼 차례차례 몰아치는 황홀한 경험이란…. 인생을 둘로 나눈다면 아마도 그 맥주를 맛보기 전과 후가 되지 않을까. 결국 트라피스트를 쫓아 맥주의 성지, 벨기에로 가기로 결심했다. 훗날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 도착하고 나서야 알게 됐다. 내가 그때 마셨던 건 네덜란드 수도원 맥주였다는 사실을. 요즘과 달리 불과 수년 전까지만 해도 트라피스트는 맥주 마니아들 사이에서 아는 사람만 아는 궁극의 맥주로 통했다. 트라피스트는 이름 그대로 트라피스트 수도회 산하의 양조장에서 만들어내는 맥주를 뜻한다. 그런데 신을 모시는 신성한 종교단체에서 술을 만들다니, 그래도 되는 걸까. 유럽의 역사를 살펴보면 수도원이 술을 만드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기독교가 태동한 유럽에서 수도원은 종교시설뿐 아니라 생산시설의 역할도 겸했다. 기독교 포교를 위해 유럽 곳곳에 생겨난 수도원은 대부분 양조장을 갖고 있었다. 공중위생 개념이 생기기 이전 유럽에서 술은 일종의 정수 역할을 했다. 자칫 오염된 물을 먹고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았는데 물을 포도주, 맥주 등의 발효주와 함께 섭취하면 취할지언정 위생상으론 비교적 안전했다. 양조를 위해서는 기술뿐 아니라 대규모 시설과 노동력이 필요했는데 중앙집권화가 되지 않았던 당시 유럽에서 수도원 말고는 딱히 이 기능을 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특히 ‘노동하는 것이 곧 기도하는 것’이라는 계율을 가진 시토회 수도원은 자급자족이 원칙이었다. 수도원은 소유한 과수원과 밭, 목장에서 수확한 농작물을 가공해 직접 소비하거나 판매했다. 맥주도 이 중 하나였다. 17세기 무렵 시토회가 추구하던 경건한 정신을 부활시키고자 프랑스에서 트라피스트회가 만들어졌고 이것이 트라피스트 맥주의 시작이었다. 당시 최고의 지식 집단이었던 수도원에서 양조기술을 발전시켜 고품질의 맥주와 와인을 만들어 냈다. 그 시절 맥주 맛이 그대로 전해졌다면 좋으련만, 오늘날 맛볼 수 있는 트라피스트 대부분은 현대에 와서 완성됐다. 중세의 맛과는 차이가 있다는 뜻이다. 유럽이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많은 수도원 양조 맥주의 명맥이 끊겼다. 특히 전쟁물자 동원을 위해 양조장의 금속이 징발되면서 생산시설 자체가 사라진 경우가 많았다. 겨우 살아남은 소수의 양조장은 고난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20세기 들어 빛을 보기 시작했다. 맥주 장인인 수도사가 전통방식으로 만들어낸, 혹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레시피로 만들어진 맥주라는 이미지가 더해지면서 미국과 독일이 장악하고 있는 맥주시장에서 수도원 맥주는 큰 인기를 끌었다. 트라피스트가 상업적으로 인기를 누리자 너도나도 수도원 맥주를 자처하는 짝퉁들이 생겨났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트라피스트 수도원들은 1997년 국제트라피스트협회를 만들었다. 이후 협회의 엄격한 인증을 받은 맥주에만 육각형의 트라피스트 로고를 붙일 수 있게 됐다. 초기에는 여덟 곳으로 시작했지만 지금까지 공인된 트라피스트 맥주 양조장은 총 12곳이다. 벨기에에 6곳, 네덜란드에 2곳, 오스트리아와 미국, 이탈리아, 영국에 각각 한 곳이 있다. 재미있는 건 정작 트라피스트회가 탄생한 프랑스에는 협회의 인증을 받은 양조장이 한 군데도 없다는 사실이다. 올해 영국 레스터셔주의 세인트 버나드 수도원이 새로운 트라피스트회 멤버로 승인되면서 양조를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올여름쯤에 영국을 방문한다면 열두 번째 트라피스트 맥주를 맛볼 수도 있겠다. 트라피스트는 누군가에게는 종교적인 체험에 가까운 황홀감을, 누군가에게는 죄를 지으면 가는 곳에 들어선 기분을 선사해 준다. 각 양조장마다 맛과 개성이 확연히 달라 호오가 분명한 편이다. 트라피스트에 영감을 받은 많은 양조장에서는 이른바 수도원 스타일의 맥주를 만들어내고 있다. 어떤 것들은 트라피스트 이상의 놀라운 맛을 보여 주기도 하기에 꼭 인증을 받은 맥주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래도 그 맛이 궁금하다면? 의외로 천국은 우리 가까이에 있다.
  • 이영애 주연 ‘이몽’ 건국 100주년 기념 2019년 방송 확정 ‘첩보 멜로’

    이영애 주연 ‘이몽’ 건국 100주년 기념 2019년 방송 확정 ‘첩보 멜로’

    배우 이영애가 캐스팅되며 화제를 모으고 있는 첩보 멜로 드라마 ‘이몽’이 2019년 방송을 확정짓고 건국 100주년 기념 드라마로 도약한다. 드라마 ‘이몽’은 일제강점기 경성과 만주, 그리고 중국 상해를 배경으로 펼치는 첩보 멜로 드라마로 독립투쟁의 최선봉이었던 비밀결사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과 일본인에게 양육된 조선인 외과의사 이영진(이영애 분)이 상해임시정부의 첩보요원이 되어 태평양 전쟁의 회오리 속에서 활약하는 블록버스터 시대극이다. 김원봉 역을 포함한 주요 배역들의 캐스팅이 진행 중이며 올 가을 몽골, 상해 등의 로케이션을 시작으로 본격 촬영에 돌입할 예정이다. ‘이몽’의 촬영이 코앞에 다가오자 아시아 전역 및 미주, 이란과 중동 등에서까지 판권 문의가 뜨겁다는 전언. 더욱이 2019년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인만큼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민족영웅들을 소재로 하는 드라마 ‘이몽’에 대한 국내외 기대감이 한층 높아지고 있다. ‘태양의 후예’의 제작총괄로 최근 ‘이몽’ 프로젝트에 합류한 한석원 부사장은 “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뜨거운 화제를 모으고 있는 ‘이몽’은 다가오는 2019년, 글로벌 프로젝트의 첫 사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며 “건국 100주년 기념 드라마에 걸맞게 국내외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퀼리티 높은 드라마를 선보이겠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건국 100주년 기념 드라마 ‘이몽’은 현재 캐스팅 막바지에 있으며, 2019년 전 세계 방송 예정이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드루킹이 만든 경공모의 실체···“비밀결사대, 신입은 노비, 배신자 추적”

    드루킹이 만든 경공모의 실체···“비밀결사대, 신입은 노비, 배신자 추적”

    네이버 등 포털에서 기사 추천을 조작해 업무방해 혐의로 구속된 김모(49·인터넷 필명 드루킹)씨가 2014년 만든 ‘경제적 공진화 모임’(경공모)의 베일이 조금씩 걷히고 있다. CBS 김현정의 뉴스쇼는 16일 경공모 한 회원 A씨를 음성변조로 인터뷰했다. 신분을 가르기 위한 것으로 이름도 나이도 공개되지 않았다. A씨는 경공모에서 “동양철학 또는 우주 사상 이런 것을 강의했다”며 “일반인들은 좀 황당할 수도 있겠지만 들어보면 쉽게 빠져들고 흥미를 끈다”고 말했다. 그를 이를테면 “우리 조직(경공모)은 예언서 ‘송하비결’과 서양 예언서 등에도 나오며 선택을 받게 된다”고 주장했다. 경공모는 회원이 한때 2500명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드루킹은 “일본은 결국은 침몰한다라고 믿고 있다. 그러니까 일본을 벗어나 정착할 자본과 그런 시점이 온다고 준비를 한다. 당연히 그쪽에서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 줄을 대야 되는 게 맞을 것”이라며 “침몰하면 그 많은 사람들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가까운 우리나라라든지 북한이라든지, 심지어는 만주라든지 이런 쪽에 결국은 공간이 필요할 텐데, 우리 조직도 그런 부분을 준비해야 한다. 이런 식의 계획”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일본 쪽에 미리 기반을 다지기 위해 ‘오사카 총영사’가 필요하다는 것이 드루킹의 논리라는 것이다.A씨는 또 경공모와 관련해 “‘우리는 비밀결사다’는 이야기를 자주하고 ‘조직 내 배신자는 끝까지 쫓는다’”며 디소 강압적인 모임 분위기를 전했다. 회원들은 드루킹을 ‘추장님’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A씨는 “신입 회원은 ‘노비’ 즉 제일 천한 신분이고, 등급이 높아지면 제일 높은 ‘우주’”로 불린다”며 “5단계의 등급이 있다”고 전했다. 댓글과 관련해 A씨는 “모임 차원의 댓글 작업을 대선 때 전후로 했다”고 털어놨다. 열심히 댓글 활동을 하자는 공감대를 이룬 상황에서 자기 계정을 가지고 선풀운동을 한다고 했다. A씨는 ‘그 당시 매크로를 동원했느냐’는 질문에 “없었다”며 “매크로 필요성은 작년 말”이라고 했다. 그런 부분들 때문에 회원들 상호간에 의견 상충이 있었고, A씨 자신은 그 뒤로 더 이상 활동하지 못했다고 했다. 보통은 회원들이 승급에 욕심이 있어서 드루킹에게 자신의 ID를 주면서 매크로를 돌리는데 동의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은 ID가 600개에 이른다. ID 600개가 600명의 회원을 말하는 것은 아니며 한 사람이 많게는 10~20개의 ID를 줬다고 했다.드루킹이 지지자에서 비판자로 돌변한 이유와 관련해 그는 “경제적 공진화가 되고 민주화가 되고 했을 때에는 똑같지는 않겠지만 소액주주와 같은 방식의 운동을 통해서 우리도 대기업의 주인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기득권이 될 수 있다, 그런 비전을제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며 “그렇게 하려면 정치권에 줄을 대야 빠르다. 김경수 의원 또는 다른 의원이 제일 빠른 길이라고 판단했으며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A씨는 “드루킹이 먼저 김경수 의원에 접근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드루킹이 김경수 의원에게 텔레그램으로 A4용지 30장 분량 보냈다는 것과 관련해 A씨는 “우리가 선플운동을 한다고 해도 이렇게 보내도 읽지도 않네, 이런 식으로 여러차례 얘기를 했다”며 “대선 끝나고도 연락이 안 된다고 여러차례 이야기를 했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부고] 항일 학생운동 이주호 선생 별세

    [부고] 항일 학생운동 이주호 선생 별세

    일제강점기 대구 지역에서 항일 학생운동을 이끈 애국지사 이주호 선생이 지난 1일 오전 별세했다. 97세.2일 광복회에 따르면 선생은 대구사범학교에 재학 중이던 1940년 교내 비밀결사인 문예부에 가입해 항일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듬해에는 동료들과 조직을 확대해 ‘다혁당’(茶革黨)을 결성했다. 민족차별 반대운동 등을 주도하던 선생은 1941년 7월 교내 비밀결사가 일제 경찰에 적발돼 고문을 당하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유족으로는 배우자 최순종씨, 아들 구섭·문섭·명섭씨, 딸 청희·정희씨가 있다. 빈소는 부산보훈병원 장례식장이며 발인은 3일 오전 7시 30분,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이다.
  • 국가보훈처, 황용순·유종남 선생에 건국훈장

    식민통치가 극에 달하던 1943년, 전북 전주의 전주사범 교직원과 학생 신분이었던 황용순(당시 21세)과 유종남(당시 18세). 엄혹한 시기에 두 청년은 민족의식 관련 서적을 서로 돌려 읽으며 의기투합했다. 일본군에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어떻게 주변 사람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킬지 밤새 논의하곤 했다. 전쟁 말기 일제의 전시동원체제, 즉 황국신민화의 본질을 간파해 민족의식으로 정면 대응을 시도한 것이다. 두 사람은 결국 일제 경찰에 검거됐고, 각각 징역 1년과 징역 단기 1년·장기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일제의 판결문에는 두 사람에 대해 “조선의 독립을 학수고대하는 자”라고 적혀 있다. 그토록 염원했던 해방의 기쁨도 잠깐, 이번엔 동족 간 전쟁이 두 사람을 또 시련 속으로 내몰았다. 그래도 운명은 두 사람을 또다시 하나로 묶어 줬다. 6·25전쟁에 동반 참전한 두 사람은 1950년 8월 13일 함께 전사했다. 독립운동에 이어 구국의 참전, 그리고 동시 전사까지 황용순 선생과 유종남 선생의 기막힌 이야기는 지금까지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다. 국가보훈처는 다음달 1일 제99주년 3·1절을 맞아 황 선생과 유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키로 했다고 27일 밝혔다. 두 선생과 함께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는 인사 중에는 국내와 미주지역에서 활발히 활동한 여성 독립운동가 차인재 선생도 포함돼 있다. 차 선생은 1920년 6월 경기 수원에서 삼일학교 교사로 근무 중 비밀결사조직 구국민단 교제부장을 맡아 임시정부에서 국내로 보낸 독립신문, 대한민보 등을 배포했다. 같은 해 8월 미국으로 건너가 주로 로스앤젤레스 지역에서 대한인국민회, 대한여자애국단,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등의 단체에서 중견 간부로 활동하면서 1922년부터 1945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 남편 임치호 선생에게도 지난해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이번 3·1절 기념식에서 포상을 받는 독립유공자는 이들을 포함해 모두 50명이다. 박홍환 선임기자 stinger@seoul.co.kr
  • 언론 통해 국권회복에 힘쓴 신채호 선생 82주기 추모식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 언론인으로서 대일 항쟁에 나섰던 단재 신채호 선생의 순국 82주기 추모식이 21일 오전 10시 30분 충북 청주에 있는 단재 선생 사당 및 묘정에서 열린다. 사단법인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회장 유인태) 주관으로 열리는 추모식은 각계 인사와 독립운동 관련 단체 대표 및 회원, 유족, 시민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다. 단재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언론을 통해 국권회복에 힘썼다. 특히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활약하며 일제의 침략과 친일파의 매국행위를 강력 비판했다. 안창호 선생 등과 비밀결사 ‘신민회’를 창립했고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해 중국과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던 단재 선생은 일제에 체포돼 안중근 의사가 순국했던 중국 랴오닝성 다롄의 뤼순 감옥에 수감돼 1936년 옥사했다. 박홍환 선임기자 stinger@seoul.co.kr
  • 컴퓨터 대신 달에 로켓 쏴 올린 ‘그녀들’

    컴퓨터 대신 달에 로켓 쏴 올린 ‘그녀들’

    당시 여성 불모지에서 주도적 자기 계발…끈끈한 유대로 편견과 차별 당당히 극복 로켓 걸스/나탈리아 홀트 지음/고정아 옮김/알마/416쪽/1만 8500원 지난 3월 국내에서 개봉한 영화 ‘히든 피겨스’는 미국 우주 개발에 큰 공헌을 한 흑인 여성 삼총사의 이야기를 그렸다. 인종 차별과 여성 차별이라는 큰 장애물 속에서 거듭되는 난관을 유쾌하게 극복하는 모습이 잔잔한 울림을 남겼다. 직업적인 선구자로서 이들이 일군 업적과 삶을 대하는 진정한 태도에 감동한 관객이라면 미국 과학자 나탈리아 홀트가 쓴 ‘로켓 걸스’에서 또 다른 재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책은 1940~5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 패서디나의 항공우주국(NASA) 제트추진연구소(JPL)에 입사해 ‘인간 컴퓨터’로 불리며 일했던 여성 과학 기술자들의 삶을 좇는다. 홀트는 2011년부터 약 4년간 JPL에서 일했던 여성 연구자와 그들의 가족, 동료 직원들과의 인터뷰, 인터뷰한 사람들이 제공한 임무 보고서·서신·일기 등의 자료 분석을 통해 ‘소리 없는 영웅’들의 삶을 자세하게 복원해 냈다. 특히 수학에 흥미가 많은 괴짜 여학생들이 전문직 여성이자 워킹맘으로서 성장하는 과정과 일과 가정의 균형을 유지하고자 고군분투한 모습은 오늘날 여성들이 현실에서 겪는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로켓이 비주류 과학으로서 진지한 대접을 받지 못하던 1940년대 JPL은 로켓의 속도를 계산하고 궤적을 작성하는 수학자들로 여성들을 채용했다. ‘메모리를 갖춘 중앙처리장치’라는 컴퓨터의 현대적인 정의가 생겨나기 이전에 이들은 종이와 연필 그리고 오로지 머리만으로 복잡한 수학 방정식을 풀어냈다. 미국 최초의 인공위성을 발사하고, 달에 우주선을 보내는 등 행성을 탐사하는 데 필요한 모든 계산을 책임진 이들은 당시 여성에게는 척박하기만 했던 과학기술계에서 새 길을 개척한 전문가 집단이었다. 당시 대다수 여성들이 선택했던 비서, 교사, 간호사라는 직업 대신 여자들의 불모지와 다름없는 곳에서 일한 이들은 자신의 삶을 꾸릴 때도 주도적이고 도전적이었다. 남성 엔지니어들이 자신들을 ‘여자 계산원’으로 부르는 것을 거부하고 스스로 ‘여성 단체’라고 일컫는가 하면 프로그래밍 강좌를 통한 신기술 공부 등 자기 계발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직장인 여성으로서 엄마 역할을 동시에 해내는 것은 이들에게도 역시 쉽지 않았다. 행복한 균형을 얻기 어렵다는 깨달음 속에서도 그들에겐 그저 해내겠다는 강인한 의지가 있었다. 연구소 안팎에서 수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서로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여성 동료들과의 우정 덕분이다. 삶의 어려운 문제를 함께 푸는 즐거움 속에서 끈끈한 유대를 쌓았던 이들에게 JPL은 그런 의미에서 “직장이라기보다는 비밀결사 같았다.” 5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 ‘로켓 걸스’들이 작성한 코드는 우주선, 기후 연구, 화성 탐사 로봇에 계속 쓰이고 있다. 2012년 이후 계속 화성을 탐사하고 있는 큐리오시티 탐사 로봇에서부터 2004년 이후 토성을 돌고 있는 카시니 궤도선 등 이들의 위대한 역사는 광활한 우주에 뻗어 있다. 물론 미래의 지구 궤도 비행 장치들에서도 이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편견과 차별을 당당히 극복하고 자신의 미래를 새롭게 쓴 그들의 진취적인 삶이 하늘을 향해 주저 없이 날아오르는 로켓과 꼭 닮았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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