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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닐봉지 메시’ 소년을 찾습니다

    ‘비닐봉지 메시’ 소년을 찾습니다

    비닐봉지로 만든 메시 유니폼을 입은 일명 ‘비닐봉지 메시 소년’은 어디에 있을까. 세계 축구팬들이 인터넷을 달군 한 장의 사진에 등장한 소년을 찾는 데 열중하고 있다. 소년은 리오넬 메시(FC바르셀로나)의 아르헨티나 대표팀 유니폼 복제품을 사 입을 형편이 안 됐는지 비닐봉지에 펜으로 스트라이프 무늬와 영문명 ‘MESSI’ 그리고 등번호 ‘10’을 그려넣었다. 터키 여행객이 이라크 동남부 쿠르드지역을 여행하다 촬영했다는 얘기도 있다. 영국 BBC 트렌딩은 맨 처음 트위터에 이 소년이 쿠르드 지역 도후크 마을 출신이라고 쓴 트위터 이용자에게 문의한 결과 “우리 부모가 도후크 출신이라 그곳 소년이라고 말했을 뿐이며 그나마 이라크에서 아는 곳이 그곳뿐이라 그렇게 적은 것”이란 답을 들었다. 지금까지 이 사진이 어디에서 찍혔는지 알 수 없으며 뒷얘기 역시 의문으로 남게 됐다. 또한 메시가 이 소년에게 진짜 유니폼을 보내고 싶어 했다는 얘기도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 메시의 팬을 자처하는 이가 지난 19일 트위터에 “우리는 (메시의) 팀으로부터 연락받았다. 그들은 이 소년이 누구인지, 레오가 어떤 일을 도울 수 있는지 알고 싶어 했다”고 적었다. 그러나 메시가 직접 공표한 것이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비닐봉지’ 메시 유니폼 입은 난민 소년 찾아주세요”

    "메시 유니폼을 입고있는 이 소년을 찾아주세요" 최근 영국 텔레그래프 등 해외언론들은 트위터 등 SNS 계정에 리오넬 메시(29·아르헨티나·FC바르셀로나) 유니폼을 입은 한 소년의 사진이 화제가 되고있다고 전했다. 지난 16일(현지시간) 터키의 한 축구팬 트윗으로 시작해 전세계로 퍼져나간 이 사진은 비닐봉지로 메시의 유니폼을 만들어 입은 한 소년의 뒷 모습을 담고있다. 터키 축구팬은 이 사진과 함께 "이라크 출신의 한 아이가 자신의 우상 유니폼을 입고 아름다운 게임을 했다"고 적었다.   파란색으로 아르헨티나 유니폼의 줄을 그리고, 메시의 등번호인 10번을 새겨넣어 애처로운 느낌까지 주는 이 사진은 곧 SNS 상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으며 가장 먼저 메시의 팬들이 화답했다. 69만명의 팔로워를 가진 메시 팬 트위터(@messi10stats)는 "이 사진을 메시 측에 전달했다"면서 "그들도 사진 속 소년이 누군지 궁금해하고 있다"고 전했다. 해외언론들의 반응도 뜨겁다. 언론들은 이 사진의 촬영 장소가 이라크 쿠르드 자치지역내에 위치한 도훅이라는 사실에 주목해 전쟁으로 황폐해진 지역에 사는 난민소년으로 추정했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막말’ 트럼프가 뜨니, 백인 우월주의 ‘KKK’도 덩달아…

    ‘막말’ 트럼프가 뜨니, 백인 우월주의 ‘KKK’도 덩달아…

    미국의 악명 높은 백인 우월주의 급진 단체인 이른바 'KKK(큐클럭스클랜)'가 미국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를 기리는 연방 공휴일을 맞아 대대적으로 전단을 살포했다고 미 현지 언론들이 18일(현지 시간) 보도했다. 미국 앨라배마주(州) 모빌 지역에 사는 주민들에 따르면, 인종차별에 항의하다 암살당한 킹 목사를 추모하기 위해 공휴일을 맞은 이 날 아침 도심 곳곳에 KKK 전단이 뿌려졌다. 비닐봉지 안에 들어 있는 여러 장의 전단은 전면에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비꼬는 글귀로 사람들을 현혹한 다음 백인 우월주의와 인종차별을 정당화하는 내용으로 가득 찬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단을 발견한 주민들은 "KKK가 회원들을 모집하기 위해 뿌린 것으로 보인다"며 "이런 악의에 찬 글들을 아이들이 볼까 두렵다"면서 KKK 단체의 행동을 비난했다. 미 언론들은 최근 '막말의 대명사'로 알려진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의 독설적인 발언들이 인기를 얻으면서 한동안 잠잠했던 KKK도 자신들의 세력을 다시 복원하기 위해 선전 활동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실제로 미국 뉴저지 주는 물론 각종 인권운동 단체들의 집회나 행사가 예정된 지역에 최근 들어 부쩍 KKK의 전단이 살포되는 횟수가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마틴 루터 킹 공휴일에 뿌려진 KKK의 전단 모습(현지 방송, WPMI 캡처, 위쪽 사진),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 후보(ⓒ AFPBBNews=News1) 다니엘 김 미국 통신원 danielkim.ok@gmail.com
  • [열린세상] 우리는 착한 사람들의 세상을 꿈꾸지 않는다/이형용 거버넌스센터 이사장

    [열린세상] 우리는 착한 사람들의 세상을 꿈꾸지 않는다/이형용 거버넌스센터 이사장

    # “정진아, 밥 먹자!” “스님도 참, 개가 이름이 무거워서 워디 제 명에 살겄어유?” 벌써 10년도 전에 잠시 머물던 충남 홍성의 한 절집에서 기르던 진돗개 이름이 정진(精進)이였습니다. 사람 좋던 주지 스님, 그 개가 다음 생에는 사람 몸을 입기를 바라는 자비심이 투사된 것이었을까요? 얼마 뒤 정진이가 사라졌고, 한바탕 소동이 났고, 행방에 대해 잠시 추측들이 난무했습니다. 구시렁대던 그 공양간 보살이 장난스레 그랬던가요? “워매 정진이가 출가한 것 아닐까유?” # “만경루가 어느 거예요?” 20년 전 전남 강진 백련사에 얼마간 머물고 있었습니다. 주말이면 대학생 차림의 젊은 친구들이 꽤 찾아왔습니다. 한가롭게 경내를 둘러보던 모습들과는 사뭇 달리 책 한 권을 들고 와서는 숙제하듯이 건물들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고 두리번거리며 묻곤 했습니다.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하던 그 문화유산답사기 책을 볼 기회가 생겼습니다. 서문에서 ‘아는 만큼 보인다’는 구절을 읽고는 책을 덮었습니다. 착시일 수도 있지만 주지주의(主知主義) 도그마 또는 패권의 그림자를 봤던 것 같습니다. 틈나면 풍광 좋은 곳 찾고 느낌이 좋은 데는 다시 가기도 하지만 우리는 다녀온 느낌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합니다. # 연전의 일입니다. 외국에서 오래 지내다 모처럼 귀국한 후배와 남산 순환로를 산책하던 중에 벤치에 앉아 ‘아이스께끼’를 먹고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고학년 같아 보이는 사내아이 몇이서 저마다 비닐봉지를 들고 둘레둘레 내려오더니 한 녀석이 다가왔습니다. “아저씨, 그 하드 쓰레기 저 주세요.” “응? 지금 먹고 있는데?” “그럼 다 먹으면 저 주세요.” “왜, 뭐하게?” “저 쓰레기 줍기 자원봉사 나왔단 말이에요.” 아뿔사! 정초입니다. 세상에 좋은 이야기, 기원들이 오갑니다. 사회 발전에 노심초사하고 정치권력에 주목하는 지성인들 사이에 저마다 ‘정의’ 주장이 넘치는 계절입니다. ‘선량’한 사람들이 잘사는 세상에 대한 염원도 함께합니다. 올해는 총선까지 있음입니다. 우리는 ‘착한 사람들의 세상’을 꿈꾸지 않습니다. ‘우리는 정의로워야 한다, 더 많이 알아야 한다, 국가를 위해 헌신 봉사해야 한다.’ 이런 이야기들 굳이 내세우지 않고도 더러 모자라고 허물도 있고 때로 모질기도 한 세상 사람들이 그럭저럭 저 하고 싶은 대로 살아도 큰 좌절이나 곡절을 겪지 않고 사는 세상을 소망합니다. 우리가 일궈 갈 다음 단계 사회의 전망이 ‘다원적 문명국가’(이를 ‘거버넌스 국가’의 지향이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라는 데 대체로 동의할 것입니다. 국가사회공동체 운영 차원에서 말하면 더 다양한 부문, 다양한 그룹들이, 나아가 모든 부문 영역들이 공동체의 의사 결정과 집행 과정에 더 많이 더 동등하게 참여하는 방안을 궁리해 가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정의를 세우고 선의가 지배하게 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그것뿐일까요? 주관적인 가치 간에도 줄을 세우고, 거의 모든 영역과 국면에서 상하, 귀천, 선악의 이분법이 지배하는 경박하고 강퍅한 관성을 넘어서는 것이 또한 중요하지 않을까요? 저마다 개성을 좇아, 생긴 대로, 인생관대로, 살아온 내력 따라 사회적 발언을 하고 그 발언 자체로 들을 수 있는…. 그것이 지독한 권력 집중, 중독 현상과 그에 따라 도처에 넘쳐나는 이중성을 넘어서는 데 중요한 걸음 아닐까요? 그것이 국민들 속썩이는 정치권력, 정치인들을 깡그리 폄하하고 조롱하면서도 또 어쩔 수 없이 그래도 정치가 중요하다고, 그래서 제대로 뽑는 게 중요하다고, 그러니 최선이 아니라 차선도 아니라 그저 최악만 피해 차악이라도 선택해야 한다고, 참으로 민망하고 사실은 공허한 아이디어를 내게 만드는 현실, 이 지독한 현실을 넘어서기 위한 기획의 첫 착지점이 돼야 하지 않을까요? 현대 대의제가 역사상 매우 훌륭한 제도이고 순기능도 많지만 어찌 그것이 절대적이고 또 영원하겠습니까? 끊임없이 수정, 보완, 보정될 것이고 언젠가는 더 좋은 체제와 제도에 자리를 내어 주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신년에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또한 선량(選良)들의 나라가 아닙니다.
  • “모전자전”…안젤리나 졸리 딸 2명, 캄보디아에서 선행 포착

    “모전자전”…안젤리나 졸리 딸 2명, 캄보디아에서 선행 포착

    캄보디아와 베트남 등지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입양해 키우고 있는 월드스타 안젤리나 졸리의 딸이 엄마를 꼭 닮은 선행을 펼쳐 눈길을 끌었다. 13일(현지시간) 영국 일간지 데일리메일의 보도에 따르면 안젤리나 졸리와 브래드 피트 사이에서 태어난 첫 번째 딸인 샤일로(9)와 에티오피아 출신의 입양딸 자하라(10)는 최근 캄보디아 빈민촌을 찾아 현지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샤일로와 자하라는 캄보디아 빈민층 아이들과 함께 작은 상점을 찾아 200달러 어치의 의류와 자전거 2대 등을 구입해 그 자리에서 선물했다. 선물을 받은 아이 중 한명은 현지에 사는 16살 소년 레이다. 레이다에게는 12명의 형제가 있는데, 이들 가족이 가진 자전거는 1대에 불과했다. 게다가 매우 낡아서 사용하기가 힘들었는데, 졸리의 자녀들로부터 자전거 선물을 받은 뒤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레이다는 데일리메일과 가진 인터뷰에서 “샤일로와 자하라 및 그의 가족은 매우 좋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우리를 지원해준 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서 “샤일로와 자하라는 시내에서 처음 만났는데, 곧바로 스스럼없이 우리와 어울렸다”고 전했다. 이어 “멋진 자전거 외에도 쌀을 살 수 있는 돈과 옷, 신발 등을 선물 받았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이며, 우리의 삶을 더욱 편하게 해줄 것”이라고 덧붙였다. 현장에서 포착된 사진은 샤일로가 캄보디아 친구들에게 줄 선물을 즉석에서 구입한 뒤 커다란 비닐봉지에 담아 이동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자일로가 다른 아이들과 함께 자전거 가게에서 자전거를 구경하는 모습도 포착됐다. 두 아이 모두 월드스타의 자녀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매우 소탈한 옷차림과 행동을 보였으며, 옷과 신발을 선물받은 현지 아이들의 밝은 모습도 함께 공개됐다. 한편 안젤리나 졸리는 UN난민기구 특별대사로서 난민들을 위한 봉사에 앞장서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출산한 세 아이 외에도, 캄보디아와 에티오피아, 베트남에서 각각 입양한 아이 3명을 포함해 총 6명의 아이를 키우고 있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이주일의 어린이 책] 내 생활 습관이 ‘생태 발자국’ 남겨요

    [이주일의 어린이 책] 내 생활 습관이 ‘생태 발자국’ 남겨요

    내 발자국이 지구를 아프게 해요/에코박스 지음/홍수진 그림/지구의 아침/104쪽/9000원 지구는 생명의 별이다. 커다란 동물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체까지 수많은 생명이 산다. 그런 지구가 도움을 요청했다. ‘내가 많이 아프단다. 내 몸에 찍힌 발자국 때문이야. 너와 친구, 가족,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내 몸에 시커먼 발자국을 찍어서 아파. 발자국을 지우지 않으면 나는 더 많이 아플 거야. 그러니까 발자국을 지워 줘.’ 지구가 지워 달라고 호소한 발자국은 ‘생태발자국’이다. 생태발자국은 한 사람이 생활할 때 필요한 모든 자원과 에너지, 그리고 그것을 버릴 때 드는 비용을 땅의 크기로 바꿔 계산한 것이다. 자원을 만들고 소비되는 것을 지구에 찍히는 발자국으로 표현함으로써 지구 자원의 한계성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경제생활과 소비 습관이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는 먹을 때도, 물건을 살 때도, 버릴 때도 지구에 늘 착하지 않은 발자국을 남긴다. 휴대전화를 새로 바꾸면 고릴라가 죽고, 에어컨을 켜면 북극곰이 살 곳을 잃는다. 비닐봉지를 많이 쓰면 새나 거북이가 죽고, 나무젓가락을 사용하면 황사 바람이 분다.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생태발자국은 한 사람당 축구 운동장 두 개 반이다. 하지만 지구는 이미 포화 상태다. 이대로라면 지구가 하나 반 더 필요하다. 더 늦기 전에 ‘이 작고 아름다운 별에서 모든 생명이 함께 살 수 있도록 생태발자국을 지워 달라’는 지구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저자는 “우리의 소비 습관, 생활 습관이 지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조금만 신경 쓴다면 지구에 발자국을 덜 남길 수 있다”고 조언한다. 초등 전 학년.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2016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 그림자를 벗은 가벼움의 질주: -김지윤

    1. 속도에의 욕망과 잃어버린 것들 우리는 속도가 일상이 된 시대에 살고 있다. 내연기관의 발명과 함께 시작되었던 근대적 속도가 낯설고 경이로웠던 시절에, 속도는 삶의 영역을 끝없이 확장하여 무한한 공간을 열어주는 듯했고, 그 가능성의 마력에 매혹된 도시의 길들은 질주하는 기계들로 가득 찼다. 그러나 인간사의 모든 매혹이 그렇듯, 익숙해진 후에는 무뎌짐과 권태가 찾아든다. 이제 빠른 것들은 도처에 흔하게 넘쳐나고 현대가 ‘속도의 시대’라는 말은 진부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주는, ‘더 빠른 것’을 계속 갈구해 왔다. 급기야 ‘클릭 한 번으로 어디든 닿을 수 있는’ 빛보다 빠른 통신망을 이루어내는 데에 이르렀고, 시간과 공간의 개념은 획기적으로 변화했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로 빨라진 것일까? 사실 ‘속도’의 이면에는 사람들이 간과해 온 진실이 숨겨져 있다. 속도에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현대인들은 줄곧 커다란 대가를 치러왔다. ‘움직임’을 상실하고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 속도를 내는 대신, 인간들은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교통수단 안에 부동자세로 앉은 채, 혹은 컴퓨터 모니터나 핸드폰 화면에 얼굴을 묻은 채 속도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을 따름이다. 자기 자신의 움직임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어디론가 ‘가는 것’이 아니라 사실 ‘옮겨질’ 뿐이다. 스스로 속도를 내 본 사람이라면 안다. 귀청이 먹먹하게 울부짖는 바람의 저항에 맞서 속력을 높인다는 것은 자신의 전 존재를 건 아찔한 일이라는 사실을. 자신의 몸으로 속도를 내는 이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여 속도가 주는 고통과 환희의 감각을 날카롭게 느끼고 견디며, 거센 바람 소리로 현재를 가득 채운다. 반면에, 이동하는 ‘탈것’ 안에 안전하게 앉아서 닫힌 창문 밖으로 내다보기만 하는 사람들은 어떤 감각도 느낄 수 없다. 지나치게 빠른 속도는 스쳐가는 모든 풍경들을 일그러지게 만든다. 밖을 내다보는 사람들은 그 일그러짐이 심하면 심할수록, 지나쳐가는 대상들이 금방 시야에서 사라질수록, 속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인지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몸이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바깥 풍경과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그들은 속도의 체험으로부터 사실상 단절된다. 결국 감각할 수 없는 풍경들은 개별적 장소로서의 의미를 상실한다. 속도에 안전하게 ‘탑승’한 이들에게는 오로지 ‘빠르게 도착해야 하는 지점’만이 남아 있을 뿐이고 수많은 길목들은 소거된다. 이원의 세 번째 시집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문학과 지성사, 2007)는 바로 이런 문제를 마주하고 있다. 이 시집에 수록된 시편에서 시인은 속도와 질주에 대한 끈질기고 깊은 사유를 보여 준다. 이 시집에서는 가장 큰 모티프로 ‘오토바이’가 등장한다. 얼핏 생각할 때 또 하나의 ‘속도 제조기’로 느껴지는 오토바이에는 과연 다른 교통수단들과 무언가 차이를 만드는 점이 있는 것일까. 오토바이를 타는 행위 자체가 위험에 직접 노출되어 맨몸으로 겪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오토바이는 사실 매우 모순적인 존재다. 기계의 속도를 빌려 질주하면서도 강렬한 신체적 경험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오토바이가 속도를 올리며 나아가기 위해서는 더 많이 기울어져야 하는데 그때마다 탑승자는 온몸을 함께 움직여야 한다. 또한 오토바이는 다른 ‘탈것’들과 달리 길이 아닌 데서도 달릴 수 있다. 자유롭게 길을 벗어나 오프로드를 달리기도 하고 수많은 길을 넘나들 수 있다. 그렇다면 이원 시 속 ‘가벼운 오토바이’와 그 오토바이의 질주는 다른 수많은 현대적 속도들과 구별되는 점이 있을 것이라는 예감을 가지게 된다. 1968년생인 이원 시인은 청년기에 사이버 문화를 접한 소위 ‘모니터킨트’ 1세대에 속한다. 80년대 도입되어 90년대를 풍미했던 PC통신은 사이버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정보소통의 길을 열어 보여주었다. 아날로그적 유년기와 디지털 청년기의 간극을 몸소 느낀 최초의 세대인 것이다. 필연적으로 이 두 가지 모순된 특징은 어떤 내면적 딜레마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 자신을 형성해 준 유년기와 완전히 패러다임이 바뀐 청년기 사이의 간극과 자신의 이중적 정체성에 대한 인식은 시인의 시적 언어에 어떤 정신적 흔적을 남겼을까. 오토바이의 모순성은 바로 그러한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겹침’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겹침의 힘으로 인해 모든 장소를 사실상 ‘무장소’로 만드는 디지털 세상의 무감각성과 획일화에 대항하여 느낌과 의미, 그리고 숨결을 불어넣을 수 있다면, 우리는 거기에서 이 시대의 문학이, 그중에서도 가장 아날로그적인 장르라 할 수 있을 ‘시’가 어떤 응전력을 획득할 가능성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광속도의 디지털문명 속에 살면서 느리게 곱씹어 읽어야 하는 빈 여백투성이인 시를 쓴다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의 답에 다가갈 수도 있지 않을지. 이 글은 바로 그런 기대와 호기심에서 출발했다. 2. 파편화된 주체의 공백, ‘길 없음’과 찾을 수 없는 ‘나’ 일단 이 시집 제목의 ‘오토바이’ 앞에 붙어 있는 ‘가벼운’이라는 형용사에 눈길이 간다. 그냥 가벼운 것도 아니고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라는 것이다. 교통수단으로서의 오토바이가 ‘가볍다’는 것은 사실 상당한 불안감을 느끼게 하는 요소다. 튼튼하고 무겁고 길에 잘 붙어 있을수록 안전성을 확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가볍다고 한 것은, 오토바이를 탄다는 것에 기본적으로 내재한 불안을 증폭시키기 위한 의도가 아닐까. 이 시집의 오토바이는 너무나 가볍기 때문에 바람결에 떠다니는 가랑잎만큼이나 위태롭다. 오토바이는 금방이라도 길을 벗어날 듯 불안한 주행을 하고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길 자체가 불안하기 짝이 없고, 도무지 안전성을 확보할 수 없는 길이라면 그 위기감은 최고조로 증폭된다. 이원의 시세계의 근원을 살펴보기 위해 바로 전 시집인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2001, 문학과 지성사)를 먼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 시집에서 ‘길’에 대한 인식이 이미 드러나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독특한 것은 ‘길’에 사막의 이미지가 덧입혀져 있다는 점이다. 사막이라는 공간의 특징 중 하나는 바로 뚜렷한 길이 없다는 것이다. 모래의 특성상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도 흔적이 남지 않기 때문에 길이 만들어질 수 없다. 사막에서 끝없이 부는 바람은 모래바람을 일으키고, 바람결에 움직이는 모래로 인해 사막은 끊임없이 다른 지형으로 변모한다.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에서 가장 화제가 되었던 시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속의 시적 화자는 ‘인터넷을 가볍게 따닥 클릭’하는 행위로 많은 것들을 클릭하고, ‘세계를 연속 클릭’하기까지 한다. ‘클릭 한 번에 한 세계가 무너지고 한 세계가 일어선다.’ 그리고 수많은 클릭의 맨 끝에, 화자는 결국 ‘나를 클릭한다.’ 그러나 인터넷 공간 검색 엔진 안에 ‘나에 대한 검색 결과’로 나타난 수많은 사이트 어디에도 나라는 실체는 없다. 그러나 꼭 금방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아서, ‘나’는 자꾸만 ‘클릭’을 한다. 나는 나를 찾아 차례대로 클릭한다 광기 영화 인도 그리고 나… 나누고 …나오는…나홀로 소송…또나(주)… 나누고 싶은 이야기…지구와 나…… 따닥 따닥 쌍봉낙타의 발굽 소리가 들린다 오아시스가 가까이 있다 계속해서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부분 검색하는 과정이 무한한 하이퍼링크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나라는 텍스트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끝없는 하이퍼텍스트를 참조해야만 한다. ‘오아시스가 가까이 있다’는 착각처럼 나를 찾으려는 욕망은 곧 실현될 것만 같지만, 점점 더 퍼져나가 무수한 파편이 되는 ‘나’를 찾아가는 길은 험난하기만 하다. 검색어와 연관어를 따라 클릭을 거듭하다 보면 때로는 처음의 검색어와 전혀 다른 것이 되곤 한다. 찾을수록 미궁에 빠지는 것이다. 마치 계속 모래바람이 불어 지형이 바뀌는 사막처럼, 길이 계속 생명체처럼 모습을 바꾸며 혼란시키기 때문이다. 결국 길은 없다는 것, 또한 원하는 목적지에 가 닿을 아무런 방법도, 지도도 없고 어떤 검색 엔진으로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이 시의 요지다. 그러니 이 시의 제목처럼 클릭함으로써 나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클릭할수록 나는 ‘편재’한다. 점점 더 파편화되고 실체를 찾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결국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이 아니라 존재를 결코 확인할 수 없음을 확인하는 과정이 되는 셈이다. 이원 시인의 코기토가 디지털문명의 사유를 넘어서서 존재론적 사유로 확장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에서 ‘나는 부재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제목의 시로 변주되고 있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결론이 결국 ‘부재’에서 끝났다면 이 시는 부재함으로써 존재한다는 패러독스를 보여 주면서 한 단계 더 나아간 존재론적 성찰을 담는다. 모든 부재는 존재를 드러낸다. 누군가의 빈자리가 그 사람의 존재감을 오히려 도드라지게 만드는 것처럼. 그러므로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공백이 필요해진다. 주체의 자리는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비워져야 한다. ‘나는 부재한다 고로 존재한다’에서 “생기는 순간마다 제 몸을 삼키는 것이 시간이며 그러므로 매 순간 다시 삼켜야 할 제 몸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 시간이며 그 시간의 몸이 바로 나이며”라는 시 구절은 이런 과정의 고통스러움을 드러내고 있다. 존재가 ‘없음’으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이 필연적으로 내적 불안을 동반하는 것처럼 이원 시에서의 ‘길’은 대부분 갑자기 끊기거나 모습을 바꾸는 등 ‘길 없음’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불안하고 위태로운 것으로 그려진다. 파편화된 주체의 공백이 존재를 찾으려는 욕망을 생성시키는 것처럼, 계속해서 변형되고 사라지며 다시 만들어지는 임시적이고 위태로운 길은 건너가고자 하는 욕구를 더욱 증폭시킨다. 그리고 이런 길을 건너가려면 길에 매달리고 집중해야만 한다. “내 앞까지 온 길은 거울 앞에서 접촉 불량 회로처럼 끊어졌다.” “내가 일어서자 거울 밖으로 나갈 노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녹슬고 구겨진 길들” 방금 나열한 구절들은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의 수록시 ‘모니터, 캔산소, 거울’에 언급된 ‘길’에 대한 부분들이다. 이원 시에서 길들은 대개 이렇게 위태위태하고 불길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에서 길에 대한 그러한 인식은 더욱 심화된다. 이 시집 속에 나오는 길들은 위험을 배태하고 있는 지뢰밭과 같고, 안전하지도 완전하지도 않다. 그런데 이런 불안한, 사막과 같은 길에서 오토바이를 탄다고? 3. 휘발되는 불빛들 사이를 질주하는 오토바이 이 시집의 많은 주인공들은 오토바이를 탄다. 그들은 폭주족, 오토바이 배달부, 퀵서비스맨이다. 오토바이는 자동차 사이사이로 빠져나갈 수도 있고, 정해진 길이 아니어도 달릴 수 있다. 길이 없는 데서도 달릴 수 있다는, 바로 그 점에서 오토바이는 다른 모든 탈것들과 차별화된다. 폭주족들이 끊어진 길을 굉음을 내며 건너뛴다/ 뒤따라 달려오던 한 무리의 폭주족들은 끊어진 길 속으로 빠진다/ 끈적끈적한 괴성과 경적이 함께 묻힌다/ 봄밤이 눈물처럼 반짝이다 마른다 매몰의 시간을 잘 아는/ 길은 금방 아문다/ 시간의 만다라로 타오르며 폭주족들은/ 길을 꿀꺽꿀꺽 삼키며 달린다 하나의 길을/ 삼키는 순간 다시 두 개의 길이 생겨난다/ 휘발되지 않으려면 질주해야 한다 길과 폭주족들은 서로에게/ 로프처럼 매달린다/ 온몸이 구멍인 허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폭주족들이 히드라처럼 꿈틀거린다 길은/ 시체와 꽃이 함께 떠다니는 갠지스 강이 된다. ‘폭주족들’ 부분 그 다음 시의 제목이 ‘영웅’이고 역시 폭주족을 다루고 있듯, 폭주하는 이 오토바이족들은 ‘영웅’들로 간주된다. 그들은 금방이라도 사라지고 끊어질 듯 위태로운 길에서 불안을 딛고 달린다. 여기서 오토바이라는 소재는 빛을 발한다. 버스든, 기차든, 비행기든 대부분의 교통수단들에게는 도로, 철로나 항로와 같이 정해지고 계산된 길 안에서 안전하게 달릴 것이 요구된다. 그러나 오토바이는 주어진 길을 벗어날 수 있다. 그들은 오프로드를 달림으로써 규정된 길이 아닌 새로운 길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들이다. 길은 자꾸만 단절되고 사라지지만, 수동적으로 길을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길을 새로 만들어가며 필사적으로 계속 전진하려는 것이 폭주족들의 목적이다. 그래서 그들은 ‘끊어진 길을 굉음을 내며 건너뛴다’. 이 도약은 늘 성공적인 것은 아니며, 전력을 다해 내질렀던 ‘괴성’ 같은 그의 시도는 바닥으로 고꾸라져 버린다. ‘매몰의 시간’이다. 하지만 ‘길은 금방 아문다’. 폭주족들은 길 안에 매몰되어서 그 길을 삼켜버리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안에서 길을 만들어 낳는다. 하지만 “하나의 길을 삼키는 순간 다시 두 개의 길이 생겨난다”라는 구절은 근본적으로 그들의 시도가 절망스럽다는 것을 표현한다. 끝없이 길을 찾으려고 하지만 길은 계속 갈라지고 갈림길들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미로가 된다. 가면 갈수록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어진다. 하지만 점점 더 미로화되면서 결국 길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텅 빈 길’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절실해진다. 그래서 “길과 폭주족들은 서로에게 로프처럼 매달린다”. 이 지점에서 폭주족은 ‘왜 질주하는가?’란 질문에 “휘발되지 않으려면 질주해야 한다”라고 대답한다. 이 시집의 다른 시 ‘주유소의 밤’에서도 비슷한 구절이 등장한다. ‘세상의 모든 차들은 휘발되는 불빛을 믿고 길을 만들고’라는 이 시의 의미심장한 구절은 휘발되는 것이 ‘불빛’임을 보여 준다. 불빛은 길을 길답게 만드는 존재다. 길이 길일 수 있는 것은, 그 길을 따라가면 어디엔가 ‘도착’하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어딘가 도달하기 위해 전진하려면 길이 그쪽으로 뻗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사막처럼 방향을 알 수 없는 곳에서, 길의 물질성이 사라진 곳에서 물리적인 길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불빛이다. 오랜 옛날부터 사막에서 길을 찾는 이들은 별빛에 의지했다. 길이 사라진 데서도 별빛은 오롯이 빛나며 길을 찾는 사람들을 인도했다. 별빛이 만드는 방향성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또 하나의 길이 된 것이다. 소위 ‘전자사막’인 도시의 밤, 어둠이 깔린 도로에서 길을 찾기 위해 필요한 것도 ‘불빛’이다. 신호등과 네온사인, 자동차 라이트 등이 만드는 불빛은 도시의 밤길을 길답게 만드는 필수 요소다. 그런데 시인은 이 불빛이 항구한 것이 아니라 ‘잠깐만 빛나는’, 즉 ‘휘발되는’ 것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길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꿈 역시 휘발되는 것이다. 언젠가 깨고 마는 꿈처럼 도시의 밤을 밝히는 불빛은 언젠가는 꺼지기 마련이다. 바로 여기에 질주의 이유가 있다. 휘발되어버릴 꿈, 비전을 사라지기 전에 잡아야 하므로 폭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길은 ‘휘발되는 불빛을 믿고 길을 만들고’ 그 길을 가는 모든 ‘탈것’들은 그 속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위태로워진다. 그래서 상당수의 폭주족들은 질주하다 ‘벽’을 만나고 결국은 ‘질주하던 몸은 날계란처럼 터지’고 만다. 그래서 ‘폭주족들’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끝난다. “길은 시체와 꽃이 함께 떠다니는 갠지스 강이 된다”고. 시체가 불타는 갠지스 강은 인도인들이 몸을 씻으며 기도하는 성스러운 강이다. 숭고한 구도의 마음으로 이 성스럽고 절망스러운, 찰나의 불빛을 따라 길을 만들고 또 만들면서 끝없이 전진하는 인간은 ‘영웅’이 된다. 시 ‘영웅’에서 낡은 오토바이 위의 시적화자는 ‘무서운 속도로’ ‘철가방을 싣고’ 달린다. 이 철가방은 그의 순수한 염원과 욕망을 표상한다. 그의 철가방은 ‘안팎이 똑같이 은색’이고, ‘겉과 속이 같은 단무지와 양파와 춘장’으로 상징되는 거짓되지 않은 절실한 욕망을 담고 있는 플라스틱 그릇들은 ‘불에 오그라든 자국’을 숨김없이 노출한다. ‘배달’은 곧 자신의 욕망이 어딘가에 도달함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는 시간 안에 달려가려고 애쓴다. “오토바이가 기울어도 짜장면이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것/ 그것이 내 생의 중력이야/ 아니 중력을 이탈한 내 생이야”라는 구절은 이 시를 관통하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중력은 짜장면을 한쪽으로 쏠리지 않게 유지시켜주는, 말하자면 ‘현실원칙’인 셈이지만 중력을 이탈해버리면 아예 자유로워진다. ‘몸이 기운 쪽이 내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어느 쪽으로 기울든 그쪽이 중심이 된다면 짜장면이 어느 쪽으로 쏠리든 상관없다. 그래서 ‘영웅’은 “기우는 오토바이를 따라/ 길도 기울고 시간도 기울고 세상도 기울고/ 내 몸도 기울어/ 기울어진 내 몸만 믿는 나는/ 그래 절름발이야”라고 내뱉는다. 오토바이의 특징 중 하나는 강렬한 현장성이다. 달리는 행위 그 자체를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오토바이는 반드시 맨몸으로 타야 한다는 조건 때문이다. 즉, 그의 온몸, 전 생을 지금 이 순간에 걸었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기우는 오토바이를 따라 길도 기울고 시간도 기울고 세상도 기울고 내 몸도 기울’게 되는 것이다. 지제크의 책 제목과 같이 ‘삐딱하게 보기’가 가능해지는 순간이다. 지제크는 이 책에서 ‘비스듬한 왜상적 응시’로만 실제 세계를 명확하게 보는 것이 가능하다고 했다. 실체에 도달하기 위한 ‘길’이 비정상적이기 때문에, 진실을 바라본다는 것은 정상적인 응시로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삐딱하게 보기를 결정하는 순간 그는 세상이 규정한 ‘정상’이라는 범주에서 나와야 한다. “삐딱한 내게 생이란 말은 너무 진지하지/ 내 한쪽 다리는 너무 길거나 너무 짧지/ 그래서 재미있지/ 삐딱해서 생이지 절름발이여서 간절하지/ 길이 없어 질주하지”라고 시적화자는 말한다. 비정상의 영역, 삐딱한 시선의 세상은 진지한 현실원칙들을 위배하는 ‘재미’를 선사한다. 하지만 이 ‘삐딱함’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세상이 허용하는 가치들에서 비껴나 ‘간절’함으로 구해야 하는 것이다. 삐딱하게 보아야 볼 수 있는 저 ‘불빛’은 견고한 어둠에 가끔 생기는 균열에서 흘러 들어오는 것이며 현실세계가 아닌 저 너머의 ‘실재계’에서 오는 것이다. ‘영웅’ 폭주족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표지판이 가리키는 곳은 모두 이곳이 아니야/ 이곳 너머야 이 시간 이후야”라고 말하면서도 그는 반짝이는 찰나의 불빛이 가리키는 희미한 저곳을 향해 폭주하여 달려가며, 자신을 땅에 붙들어 놓았던 현실원칙인 ‘중력’을 이탈하려 한다. 하지만 과연 도착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기 때문에 그는 더욱 비장해진다. “이유 없이 비장해지고 싶을 때가 있어/ 생이 비장해 보이지 않는다면/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온몸이 데는 생의 열망으로 타오르겠어/ 그러나 내가 비장해지는 그 순간/ 두 개의 닳고 닳은 오토바이 바퀴는 길에게/ 파도를 만들어주지/ 길의 뼈들은 일제히 솟구쳐 오르지/ 길이 사라진 곳에서 나는/ 파도를 타고 삐딱한 내 생을 관통하지” 이 지점에 이르면 도착한다는 것은 이미 그에게 의미가 없다. 도착할 수 없음이 너무 명확하게 의심되는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질주이며 도약 그 자체이고, “무한한 진행”이다. ‘한 남자가 간다’에서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흔들린다 지금만 텅 빈다”라는 구절은 그래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비어 있다는 것은 채워짐을 욕망하므로 끝없는 현재로서 질주를 멈추지 않기 위해서 ‘지금’은 텅 비어야 한다. 4. 나는 것들은 그림자를 만들지 않는다. 이원 시에서 없음, 허공의 이미지는 매우 강박적일 정도로 반복된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다시피 부재는 역설적으로 존재를 드러내며, ‘없음’이 절실해지는 것은 존재에 대한 욕망 때문이다. ‘온몸이 구멍인 허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폭주족들’은 그 욕망에 자신을 전부 맡김으로써 폭주가 가능해졌다. 오토바이를 타고 속력을 높이다 보면, 공중의 허공으로 몸을 날리다 보면 필연적으로 가벼워진다. 속도가 줄 수 있는 쾌감은 마치 탈중력의 상태와 같은 지극한 가벼움이다. 노자는 유와 무의 관계를 통해 생명성을 강조했다. 특히 ‘무’와 ‘허’(虛)는 생명의 근원으로 해석되곤 한다. 노자는 바퀴의 가운데를 가리켜 ‘무의 쓰임’이라고 하고 바퀴는 바퀴살이 꽂혀 있는 ‘가운데의 없음’이 없다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내 한쪽 눈은 지금 감옥에 가 있다 내 몸속의 신이 깔고 누워 있던/ 죽음을 엿본 죄다 죽음과 정면으로 마주쳤던 눈은 내게서 파내졌으므로 나는 죽음을 모르므로 생의 시간으로/ 일렁인다 낯선 얼굴을 매달고 라면을 먹는다/ 낯선 얼굴도 입을 오물거린다 그 입에서도 고소한 스프 냄새가 난다/ 햇빛들이 창 속으로 빠르게 들어온다 부딪쳐 멈출 곳이 없는 둥그런 탁자는 쉴 새 없이/ 시간의 트랙을 돈다 라면은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다 ‘얼굴이 달라붙는다’ 부분 욕망은 실현되는 순간 ‘빈 곳’이 없어지기 때문에 결코 충족되지 않는 욕망이어야 끊임없는 추구가 가능하고, 영원히 지연되는 미완의 쾌락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채워짐’은 욕망의 끝이며, 곧 죽음을 의미한다. 이 시에서 화자는 ‘죽음을 엿본 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 있다. 이 시는 자연스럽게 오이디푸스를 연상시킨다. 오이디푸스의 눈이 파내진 것은, 삶을 계속하게 하기 위함이다. 진실을 알고자 하는 그의 욕망이 끝나버렸음에도 오이디푸스는 죽지 않는다. 도려낸 눈구멍의 빈자리를 드러낸 채 그는 광야에서 계속 걸어간다. 이 시에서도 시적화자는 ‘욕망을 정면으로 마주쳤던’ 눈 자체를 없애버림으로써 다시 결핍을 만들었고 그 덕분에 그는 ‘생의 시간으로 일렁인다’. ‘빈 곳’은 삶을 지속시키는 필수 요인이다. 그는 계속 살아가려고 라면을 먹는다. 삶이란 무한한 진행이므로, 그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먹는’ 장소인 ‘둥그런 탁자는 쉴 새 없이 시간의 트랙을 돈다’. 또한 상징적 의미에서 ‘라면’은 ‘먹어도 먹어도’ 끝없이 줄지 않아야만 한다. 검은 비닐봉지 하나가 허공을 난다 울음 속에서 살을/ 쏙쏙 빼먹으며 난다 활짝 열어놓은 안이 불룩하다/ 보여주지 않는 안이 팽팽하다 보이는 밖이 남김없이 검다/ 위태로워 반짝인다 공기들이 비닐봉지의 천수관음으로 붙어간다/ 비닐봉지가 잉잉거린다 바람의 안쪽이 맥박처럼 터진다 천수관음이 된 비닐봉지에/ 시간의 모서리가 닳는다 사라지는 자리가 쌉싸름하다/ 그렁그렁하다 시간이 둥글어진다 천 개의 손이 눈이/ 다 둥글어진다 둥근 것은 뜨겁다 비닐봉지가 허공을/ 오므린다 허공이 주렁주렁하다 나는 것들은 그림자를 만들지 않는다 ‘비닐봉지가 난다’ 전문 비닐봉지는 비어 있다. 그러므로 가벼울 수 있고, ‘살을 쏙쏙 빼먹으며’ ‘맥박처럼 터진’ 등의 표현에서 보듯 생명력을 충전하며, 터질 듯 생동감 있게 허공을 마음대로 날아다닌다. 시집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에서는 시 ‘비닐봉지가 난다’와 ‘매트리스, 매트릭스’ 두 편 모두에서 비닐봉지가 등장한다. 시 ‘비닐봉지가 난다’에 나오는 것은 ‘검은’ 비닐봉지다.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어두운 색이라 ‘보이는 밖이 남김없이 검다.’ 그런데 이 시는 바로 이어서 ‘위태로워 반짝인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날아다니는 비닐봉지는 분명 위태롭다. 그리고 어두컴컴하다. 그럼에도 이 비닐봉지가 어둠 속에서도 반짝임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 ‘활짝 열어’ 놓은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이 열림, 이 균열로부터 새어 들어오는 한 줄기 불빛이 있기 때문에 이 비닐봉지에는 빛남이 존재할 수 있다. 그렇기에 완전히 어둡지 않은 것이다. 이원 시에서 유난히 많이 나오는 어둠의 이미지는 두 가지의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눈앞을 가리는 칠흑 같은 절망의 어둠- 시 ‘길’에서 ‘어둠이 길들을 천천히 멍석처럼 말아갑니다’라고 노래했듯 길을 없애고 ‘세계를 닫는’ 어둠, ‘점점 더 가파르’게 변해가는 ‘밤’으로 묘사된 그런 어둠-이기도 하고, 어떤 근원적인 것, 살아 있는 모든 것이 회귀하기를 꿈꾸는 자궁의 어둠을 말하기도 한다. 우리는 자궁에서 분리되어 이 세상에 던져진 순간, 필연적으로 분열을 겪어야 한다. 일체의 분열이 이루어지기 이전의 원초적인 나, 자궁 속의 어둠을 그리워하지만 그것은 회귀 불가능한 공간이다. 이원의 다른 시 ‘자궁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이 ‘어둠’에 관한 어떤 처연한 광경을 보여 준다. 아기는 ‘제가 두고 온 어둠을 미끌미끌한 길을 빨아댄다.’ 아기는 ‘알몸으로 빠져나온 자궁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하다. ‘매장의 시간에 익숙한 여자의 손 안에서 아기의 머리통이 녹는다 순식간에 상한다 검어진다.’ 여기에서 ‘검어지는’ 것은 자궁의 어둠과는 다르다. 절망적이고 견고한 어둠 속에서 썩어가는 부패의 ‘검은색’이다. 이에 반해 자궁의 어둠은 어둠이되 ‘적막하고 환한 물속의 집’으로서 어둡지만 환한 곳이다. 그런데 어둠이 환하다면 과연 완전한 어둠이라 할 수 있을까? ‘어두운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아니 때로 아름다운 것은 어두운 것이다’(‘사막에서는 그림자도 장엄하다’)라는 시 구절처럼 환함과 아름다움이 남아 있기에 자궁의 어둠은 불완전해진다. 어둠이되 어딘가에 구멍이 뚫려 있는 어둠인 것이다. 자궁에는 항상 산도(産道)라는 입구가 있고 ‘열림’의 가능성을 배태하고 있기에, 언젠가 열릴 것이거나 언젠가 열렸었던 공간이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회귀할 수 없는 원초적인 시간에 머물러 있기에 절망적이다. 자궁은 여전히 열린 틈새로 ‘환한 집’을 보여 주고 있지만 돌아가거나 닿을 수는 없다. 다시 시 ‘비닐봉지가 난다’로 돌아가 보자. 이 검은 비닐봉지의 어둠은 어떤 어둠인가. 이 비닐봉지는, 어쩌면 아기를 밀어낸 후 텅 비어 있는 자궁과 같이 활짝 열려 있다. 그러나 보여 주지 않는 비닐봉지의 안은 ‘저 너머의’ 세상이기에 그 안을 제대로 볼 수는 없다. 시인은 비닐봉지가 ‘천수관음’이 된다고 말한다. 천수관음의 천수천안은 모든 이의 괴로움을 천개의 눈으로 보고, 천개의 손으로 구제하고자 하는 염원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천수관음의 세상은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 소원을 성취시키는 유토피아 그 자체이며 현상적 규정을 초월하는 영원불멸한 ‘저 너머’이므로 ‘시간의 모서리가 닳’아서 ‘시간이 둥글어진다’. 천수관음의 ‘천개의 손이 눈이 다 둥글’어진다는 표현은 불교의 ‘일원상’(一圓相)을 연상시킨다. 우주만유의 본원이며 시작도 끝도 없는 이 ‘一圓’은 가운데가 빈 허공이기도 하다. 허공을 나는 비닐봉지는 그 자체가 공(空)인 것이다. 반면에 ‘매트리스, 매트릭스’에서의 비닐봉지는 비어 있지 않고 오렌지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무겁다. 그런데 비닐봉지를 들고 가던 여자가 순간 봉지를 놓치고 만다. 아마도 꼭꼭 묶여져 있었을 비닐봉지는 여자가 손에서 놓지 않는 현실원칙이며 생명체를 살게 하는 음식은 그 현실과 직결되는 ‘무거운 것’이다. ‘젖이 불은 유방 같은 오렌지 하나가 매트리스 앞으로 굴러간다.’ 오렌지 하나가 비닐봉지를 탈출한 것이다. 묶여져 있는 비닐봉지에서 오렌지가 나오려면, 비닐봉지는 분명 터져 버렸을 것이다. 터진 틈새로 ‘몸을 놓칠세라 그림자가 앞서간다’. 집요하게 몸을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오렌지의 그림자는 나를 현실에 붙들어놓는 ‘중력’과 같은 것이다. 오렌지는 필사적으로 굴러가지만, 그림자는 오렌지를 붙들고 여자는 터진 비닐봉지의 틈새를 알아차린다. 이 균열을 감수할 것인가, 아니면 봉합할 것인가. 균열을 감수한다면, ‘위태로운 반짝’임이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이 반짝임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어서 그녀를 현실로부터 일탈하게 하여, 어쩌면 미치게 할 수 있을 어떤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광기도 위태로움도 받아들일 수 없기에 ‘헤진 그림자로 온몸을 틀어막고 주저앉아’ 멈추어 있기를 선택한다. ‘매트리스, 매트릭스’에서 시인이 직접 주석을 달아 놓은 바와 같이 매트릭스는 고어로 자궁이라는 뜻이다. 결국 매트리스로 회귀하려는 오렌지의 시도는 실패한다. 그림자를 떨쳐내지 못한 오렌지는 땅바닥을 굴러 매트리스까지 가지 못하고 ‘매트리스와 여자 사이에서 멈춰 있다.’ 시 ‘비닐봉지가 난다’의 시의 결구는 의미심장하다. ‘나는 것들은 그림자를 만들지 않는다’는 구절이다. 날아가는, 중심을 이탈한, 가벼워진 것들에는 그림자가 필요 없다. 그러나 ‘철망 같은 제 그림자를 온몸에 뒤집어쓰고’(‘광화문에서’) 있으면 결코 가벼움을 획득할 수 없다. 그림자를 떼어내어 버리고, 온전한 ‘텅 빔’이 되어서 그림자를 벗은 가벼움이 되어 질주하는 것이 주체의 소망이다. 이 시집에서 불로 뛰어드는 불나방과 같은 시적 화자들의 질주는 영웅적이라고 간주되며, 한계를 넘어가는 위반의 극치를 보여 준다. 모든 것을 ‘무’로 돌린다는 것은 새로운 생성의 가능성을 극단적으로 증폭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모든 ‘없음’은 에너지의 새로운 분출로 다시 시작하려는 근본적인 의지를 내부에 품고 있다. 새로운 에너지를 가져다주는 창조적인 행위이며, 현 상태에 안주하지 않고 부정함으로써 탄생한 ‘공백’의 상태에서 새롭게 시작하려는 의지의 표명이다. 5. 흔들리면서 ‘저 너머를 향해’ 가기 자아의 안락과 현실에의 순응을 추구하는 쾌락원칙이 맹렬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데도, 그 너머의 금지된 희열을 향한 충동은 여전히 강하게 지속된다. 충동은 현실적인 삶이 부과한 경계 너머의 실재를 향한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라캉은 모든 충동을 ‘죽음충동’이라 보기도 했다.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죽음, ‘무’의 상태로 되돌려 공백의 상태에서 새로운 질서가 탄생할 수 있도록 만드는 창조의 의지인 것이다. 진정한 새로움은 무로부터 만들어질 수 있다. 공백은 창조의 시작이다. 탈(脫)이데올로기의 시대를 맞았던 90년대 우리 문학은 어떤 세기말적 징후로 가득해 있었다. 방향성을 잃었다는 느낌, 어떤 ‘파국’이 도래하였다는 감각은 이전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복고지향이나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으로 나타났다. 거대담론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자기 안으로 침잠했고 일종의 자폐성을 띤 2000년대 시는 1인칭의 내면 고백으로 가득 찼다. 2007년에 나온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는 혼잣말 같은 메모장과 일기장 밖 현실 세상으로 나온 존재가 새로운 시작을 꾀하려 하는 모색의 지점을 보여준다. 방향이 없는 곳에서, 길이 없는 곳에서, 새로운 길을 만들고 저 너머로 넘어가려는 이 시집의 역동성은, 끊긴 길 앞에서 멈추어 정체되어 있던 걸음을 다시 옮기게 만드는 에너지를 분출한다. 가속되는 디지털화, 인문학의 위기와 경제 불황 등으로 인해 ‘문학의 종언’이 이야기되는 시대에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더 처절하게 고민하려는 것이 2000년대 중반 이후 새로운 문학의 흐름이라 할 수 있다면, 이원의 2000년대 시집들에서도 이런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이원의 시편들의 이런 문제의식은 앞서 언급했던 시인의 ‘모니터킨트 1세대’라는 특징과도 연관시켜 생각해 볼 수 있다. 소위 한국형 ‘X세대’의 맏형 격인 세대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시대적 변화의 시점에서 성인으로의 전환기를 보낸 이들에게는 ‘완전히 새로워진’ 세계를 이해하고 인식하려고 노력했던 경험이 강렬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60년대 이후 출생한 문학인들이 90년대에 활동을 시작하며 주목받았던 것은 탈냉전에 접어들며 가치의 혼란과 부재, 문학의 위기를 논하던 90년대 한국문단에 새 흐름을 형성했기 때문이었다. 장정일, 유하의 경우와 같이 60년대 이후 출생 시인들은 소비사회, 매스컴과 테크놀로지 등 변화하는 세태에 대한 새롭고 첨예한 감각을 보여 주었다. 1968년생이며 1992년 ‘세계의 문학’ 가을호로 등단하고 96년에 첫 시집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를 출간한 이원 시인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 그들이 유년기를 보내며 정체성을 형성해 갔던 시기는 인터넷과 디지털 문화가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시대가 아니었다. 이원 시에서 찾아볼 수 있는 기술과 소비사회에 대한 매우 예민한 반응 역시 디지털 시대에서 태어난 최근의 젊은 세대처럼 태생적인 디지털문화에서 자라나지 않은 까닭 때문일지 모른다. ‘초기 X세대’들은 디지털을 ‘학습한’ 세대이면서도, 처음으로 인터넷과 네트워크의 기본을 만들었던 세대라는 약간 이중적으로 보이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런 세대적 특성은 이원 시에도 일련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원이 전자제품과 사이버문화를 광범위하게 시의 직접 소재로 삼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고찰하는 방식은 비교적 고전적이라는 점이다. 기술을 이야기하고는 있지만, 그에게 테크놀로지는 묵직한 존재론적 질문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기술의 혜택을 보고는 있지만 내면 깊은 곳에서 그 기술을 사용하는 자기 자신을 생경하게 바라보는 자아의 어떤 이질감 같은 것이 숨길 수 없이 드러난다. 디지털 환경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살아가고는 있지만 후천적으로 익힌 것이기에, 디지털 문화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자신의 몸처럼 편안히 여기는 최근 세대들에 비해 때때로 불편하고 낯선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그렇기에 그는 디지털 문명을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볼 수 있다. 세계의 변화에 대한 예민한 인식은 전망 부재의 시대에 ‘새로운 시작’을 모색하게 해주는 힘이 된다. 시를 쓰는 것은 물론 읽는 것 역시 ‘길 없음’ 속에서 계속 나아가는 일과 같지 않을까. 이원의 비유를 빌리자면 ‘가벼운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는 일이다. 의미에 도달한다는 것의 불가능성 속에서 간신히 앞으로, 점점 전진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2010년대에 도달하여 출간한 시집 ‘불가능한 종이의 역사’(2012) 표지 뒷면에 적혀있는 시인의 말은 뼈저리다. “넘어가지 못한다 해도 너머가 보이지 않는다 해도, 넘어가지 못하는 그곳에는 보이지 않는 너머에는, 닿아야 했다.” 시인은 ‘불가능한 종이의 역사’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의 시를 마치는 결구에서 이렇게 말한다. ‘첫 페이지는 비워둔다/ 언젠가 결핍이 필요하리라.’ 이원 시집에 등장하는 무수한 ‘오토바이를 탄 이들’은 바로 이 결핍 때문에 달린다. 그들의 목표는 최종 목적지가 아니다. 어차피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결국 목적은 달리는 것, 그 자체이고 현재를 사는 지금 이 순간, 질주와 속도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인 것이다. 불가능성 때문에 추구는 더 집요해지고, 시 ‘영웅’의 화자처럼 ‘온몸이 데는’ 것도 불사하는 경지에 이른다. 서커스에서 불타오르는 원형의 가운데를 뛰어넘는 오토바이 묘기와 같다. 이 불타는 허공으로 뛰어드는 묘기에 무슨 목적이 있겠는가? 단지 통과하는 것이 목적일 뿐이다. 삶은 지속되어야만 하는 무엇이다. 그렇기에 오토바이를 탄 사람들은 질주한다. 온몸을 걸고, 온 생이 기울어지고 흔들리면서. 목적지에 닿기 위해 정해진 길로 달리며 획일화된 ‘무장소’에서 체험을 상실하는 현대인들의 ‘속도’와 달리, ‘가벼운 오토바이’와 그 오토바이의 질주는 다른 수많은 현대적 속도들과 확실히 구분되며, 그 속성들을 거스를 수 있는 힘을 가진다. 결핍 속에서, 그 결핍을 채우려는 욕망 속에서 순간적으로 강렬해지는 삶, 그 강도 높은 삶의 기록을 끈질기게 추적하는 것, 도착하리라는 희망이 없는 상태에서도 계속 ‘보이지 않는 너머’에 닿고자 하는 것, 그것이 ‘문학’의 욕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형편없이 미끄러지고 고꾸라지면서도 다시 또 오토바이 위에서 속력을 높이는 이원 시 속 화자들처럼, 끝없이 의미에 ‘미끄러지는’ 언어들로 계속 행간에 발을 헛디디면서도 이 미끄럽고 위태위태한 길을 속도로 넘어가 보고자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끝없이 맴돌기만 할 뿐 영원히 실패한다고 해도, 계속 달려간다면 길은 끊어지고 또 새롭게 만들어질 터이다. 어차피 삶은 여정 위에 있다.
  • [나우! 지구촌]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가스 배달

    [나우! 지구촌]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가스 배달

    중국 산둥성(山東省)의 한 마을에 거대한 비닐봉지가 등장했다. 길이 6m에 달하는 초대형 비닐봉지를 모터가 달린 자전거로 운반하는 주민의 모습이 포착됐는데, 비닐봉지 안에 든 것은 다름 아닌 천연가스로 밝혀졌다. 7일(현지시간) 중국 둥팡IC의 보도에 따르면 산둥성 둥잉시(東營市)에서는 운송비를 아끼기 위해 직접 천연가스를 운반하는 주민들의 모습이 빈번하게 목격된다. 자체 천연가스 운반에는 파손이 쉬운 6m 길이의 거대한 비닐봉지가 주로 사용된다. 사진 속 주민 역시 인근 천연가스 공장에서 직접 가스를 구입해 비닐봉지에 넣은 뒤, 이를 집까지 운반하고 직접 자신의 집의 가스관과 연결해 가스를 충전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비닐봉지로 천연가스를 운반하는 것은 자칫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천만한 행위다. 이동 중 비닐봉지가 파손되거나, 작은 불꽃 혹은 담배에 노출되는 즉시 대형 폭발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전문가가 아닌 주민이 비닐봉지와 가스관을 연결하는 과정에서도 사고가 발생할 위험이 높다. 때문에 중국 내에서는 수 년 전부터 대형 비닐봉지를 이용해 천연가스를 운반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당국은 이에 대한 명확한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또 심각한 에너지 부족난을 겪는 일부 도시에서는 아예 비닐봉지에 천연가스를 담아 농민들에게 판매하는 불법 가스판매업자도 늘고 있어, 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비닐봉지에도 벌벌떠는 거대 덩치 ‘겁쟁이 견공’

    몸길이 182㎝, 몸무게 95㎏, 바닥에서 어깨까지의 높이 96㎝이라는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하지만 작은 소리 하나에도 겁을 집어먹는 귀여운 견공 한 마리가 화제를 모으고 있다. 영국 매체 텔레그래프는 26일(현지시간) 영국 웨스트미들랜드 주에 살고 있는 2살짜리 개 프레슬리를 소개했다. 애완동물 용품점을 운영하는 주인 시안 바렛(47)에 따르면 프레슬리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두려워하는 겁쟁이 개다. 청소기 소리에 도망치는 것은 물론이고 비닐봉지가 움직이는 것만 봐도 깜짝 놀라기 때문에 집 안에서는 프레슬리가 보기 전에 비닐봉지들을 숨겨두어야만 한다. 프레슬리는 불안감을 덜어줄 전용 쿠션도 하나 가지고 있는데, 집 안에서는 이것을 항상 물고 다녀야 마음을 놓는다. 바렛은 “산책을 나섰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프레슬리는 즉시 쿠션부터 찾아서 안정을 취한다”고 밝혔다. 공원에서 산책을 하다가 자그마한 개에게 겁을 먹고 먼 곳으로 도망쳐 숨은 적도 있다. 바렛은 “그 작은 개가 확실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기 전지는 절대로 숨은 곳에서 다시 나오려 하지 않았다”며 웃었다.  바렛은 프레슬리가 태어난 직후부터 직접 돌봐주었는데, 이 때문에 프레슬리가 극도로 소심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직접 돌본 탓에 프레슬리가 ‘마마보이’가 된 것 같다. 내가 가는 곳을 항상 쫓아다니고, 잠을 자기 위해 위층으로 올라가면 간혹 울음소리를 낼 때도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프레슬리 특유의 얌전하고 온화한 성격은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끄는 비결이기도 하다. 바렛은 “사람들은 프레슬리와 같은 그레이트데인 종의 애견을 목격하면 그 크기에 매우 놀라고는 한다. 그러나 프레슬리는 얌전한 성격 덕분에 결국 그들의 경계심을 허물고 마음을 얻어 낸다”고 설명했다. 방승언 기자 earny@seoul.co.kr
  • 비닐봉지만 봐도 줄행랑… ’허당’ 그레이트데인

    비닐봉지만 봐도 줄행랑… ’허당’ 그레이트데인

    몸길이 182㎝, 몸무게 95㎏, 바닥에서 어깨까지의 높이 96㎝이라는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하지만 작은 소리 하나에도 겁을 집어먹는 귀여운 견공 한 마리가 화제를 모으고 있다. 영국 매체 텔레그래프는 26일(현지시간) 영국 웨스트미들랜드 주에 살고 있는 2살짜리 개 프레슬리를 소개했다. 애완동물 용품점을 운영하는 주인 시안 바렛(47)에 따르면 프레슬리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두려워하는 겁쟁이 개다. 청소기 소리에 도망치는 것은 물론이고 비닐봉지가 움직이는 것만 봐도 깜짝 놀라기 때문에 집 안에서는 프레슬리가 보기 전에 비닐봉지들을 숨겨두어야만 한다. 프레슬리는 불안감을 덜어줄 전용 쿠션도 하나 가지고 있는데, 집 안에서는 이것을 항상 물고 다녀야 마음을 놓는다. 바렛은 “산책을 나섰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프레슬리는 즉시 쿠션부터 찾아서 안정을 취한다”고 밝혔다. 공원에서 산책을 하다가 자그마한 개에게 겁을 먹고 먼 곳으로 도망쳐 숨은 적도 있다. 바렛은 “그 작은 개가 확실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기 전지는 절대로 숨은 곳에서 다시 나오려 하지 않았다”며 웃었다.  바렛은 프레슬리가 태어난 직후부터 직접 돌봐주었는데, 이 때문에 프레슬리가 극도로 소심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직접 돌본 탓에 프레슬리가 ‘마마보이’가 된 것 같다. 내가 가는 곳을 항상 쫓아다니고, 잠을 자기 위해 위층으로 올라가면 간혹 울음소리를 낼 때도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프레슬리 특유의 얌전하고 온화한 성격은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끄는 비결이기도 하다. 바렛은 “사람들은 프레슬리와 같은 그레이트데인 종의 애견을 목격하면 그 크기에 매우 놀라고는 한다. 그러나 프레슬리는 얌전한 성격 덕분에 결국 그들의 경계심을 허물고 마음을 얻어 낸다”고 설명했다. 방승언 기자 earny@seoul.co.kr
  • “인분 교수, 상상 초월한 폭행” 양형 기준 넘는 12년刑 중벌

    제자를 수년간 때리고 인분을 먹이는 등 잔혹한 가혹행위를 일삼아 재판에 넘겨진 ‘인분 교수’에게 징역 12년의 중형이 선고됐다. 이는 대법원이 정한 양형 기준인 10년 4개월의 상한을 넘고, 검찰 구형량(징역 10년)보다 2년이 더 많은 것으로 재판부의 중벌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수원지법 성남지원 제1형사부(부장 고종영)는 26일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등 혐의로 구속 기소된 경기도 모 대학교 전직 교수 장모(52)씨에게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또 가혹행위에 가담해 함께 기소된 장씨의 제자 장모(24)·김모(29)씨에게 징역 6년을, 정모(26·여)씨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 장씨는 디자인학회 사무실 공금 1억 4000만원을 횡령하고 한국연구재단을 속여 3억 3000여만원을 편취한 것만으로도 죄질이 무거운데 피해자의 업무 태도를 빌미로 장기간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한 수법으로 폭행을 일삼았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피해자의 허벅지를 때린 알루미늄 막대기가 휘어지자 야구방망이와 호신용 스프레이(최루가스)를 이용해 폭력을 행사했다”고 잔혹성을 지적했다. 재판부는 “최루가스를 이용한 가혹행위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인분 먹기와 최루가스’ 중 선택하라는 피고인 요구에 피해자가 인분을 선택했다는 진술도 나왔다”고 구체적인 가혹행위를 상세히 열거했다. 장씨는 자신이 대표인 디자인학회 사무국에 취업시킨 제자 A(29)씨가 일을 잘 못한다는 이유 등으로 2013년 3월부터 2년여간 수십 차례 야구방망이 등으로 폭행한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A씨의 얼굴에 비닐봉지를 씌운 채 호신용 스프레이를 쏘아 화상을 입히고 인분을 먹이는 등의 가혹행위를 한 사실도 수사 과정에서 드러났다. 김병철 기자 kbchul@seoul.co.kr
  • [길섶에서] 배려심/손성진 논설실장

    갈대가 우거진 아름다운 양수리 강변에서 배려심이란 말이 떠올랐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나로서는 또 눈에 거슬리는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 누가 막걸리를 마시고는 플라스틱 빈 병을 풀숲에 던져 놓고 가버렸다. 주변엔 다른 쓰레기들도 널려 있다. 몽환적인 물안개에 취했던 내 마음을 옥에 티처럼 상하게 한 일이었다. 산이나 강변을 다니면서 아무렇게나 버려 놓은 쓰레기를 보면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먹고 난 병이나 비닐봉지를 가방 속에 넣어 집으로 가져가기가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자연에 대한 배려심이 없다는 말이다. 누군가에게 치우는 부담을 주고 무엇보다 환경을 망치는 짓이다. 배려심이란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마음을 쓰는 것을 말한다. 물론 자연이나 무생물보다는 인간관계에서 더 중요하다. 특히나 약자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배려의 손길이 필요하다. 길을 가다 할머니의 짐을 들어주고, 불우한 이웃에게 적은 돈이라도 건네는 따뜻한 마음씨…. 자신보다는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야말로 사회를 밝게 해줄 소중한 가치가 아니겠는가. 손성진 논설실장 sonsj@seoul.co.kr
  • 11m ‘초대형 고래 사체’ 英서 발견…“쓰레기 먹고 죽은 듯”

    11m ‘초대형 고래 사체’ 英서 발견…“쓰레기 먹고 죽은 듯”

    영국 켄트주 해안에서 거대한 밍크 고래 한 마리가 죽은 채 발견돼 충격을 주고 있다. 현지 일간지인 인디펜던트의 14일자 보도에 따르면 켄트주 클리프톤빌에서 발견된 이 고래는 몸 길이가 11m에 달하며, 종(種)은 밍크고래인 것으로 추정된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발견 당시에 이미 고래의 숨이 끊어진 후였으며, 생후 4년가량 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이 살핀 결과 이 고래는 바다에 버려진 비닐봉지와 쓰레기 등을 먹은 뒤 죽은 것으로 추정했다. 고래들은 종종 물 위에 떠 있거나 물에 가라앉은 쓰레기를 해파리로 착각하고 이를 삼키는데, 이러한 쓰레기가 소화기관에서 문제를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는 것. 현지 전문가들은 조만간 죽은 밍크고래를 해부해 정확한 사인을 찾을 예정이다. 런던의 자연사박물관의 전문가들 역시 사체로 발견된 밍크고래의 조직 샘플을 채취해 정밀 조사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자연사박물관의 한 관계자는 현지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조직 샘플이 죽음의 원인을 밝혀줄 것이다. 고래가 죽기 직전 먹은 것뿐만 아니라 질병이나 기생충의 영향은 없었는지 등을 밝히고 이에 따른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 “죽은 고래의 크기(11m)로 보아 성체인 것으로 추정되기는 하지만, 이 지역에서 밍크고래가 발견된 적은 없기 때문에 정확한 종을 알기는 어려운 상태”라고 덧붙였다. 일반적으로 밍크고래의 수명은 50년 정도이며, 10m 이상의 몸길이를 가진 것은 매우 드물다.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국제적 멸종위기 개체로 지정돼 포획이 금지돼 있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부실 급식 싫어 점심 외출했는데…그것도 막아요”

    “부실 급식 싫어 점심 외출했는데…그것도 막아요”

    “급식에서 비닐봉지나 머리카락 같은 이물질이 나왔다는 얘기를 전부터 자주 들었어요, 지난 4월에 급식비를 내지 못한 아이에게 교감이 밥 먹지 말라고 막말한 것도 그렇고, 이번 비리 의혹도 그렇고, 학교가 하는 일을 믿을 수 없네요.” 아들이 충암고에 다니는 최모(48)씨는 13일 기자를 보고 이렇게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4일 서울시교육청 감사 결과 발표로 광범위한 급식 비리 의혹이 제기된 충암중·고교는 학생과 학부모, 학교 간에 불신이 팽배해 있었다. 학교 측이 이미지 실추를 우려해 학생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면서 인근 상인들은 “장사가 되지 않는다”고 볼멘소리를 내고 있다. 일부 학부모는 ‘충암 아이들아 미안해, 충암 엄마들’, ‘지켜 주지 못해 미안해’란 문구가 적힌 팻말을 교문 인근에 세워 두고 시위 아닌 시위를 벌였다.  3학년 학생들은 이날 전국적으로 치러진 수능 모의고사(전국연합학력평가)를 보고 있었고 1학년, 2학년 학생들은 중간고사를 치르고 있었다.  낮 12시 20분쯤 오전 시험을 마친 고3 학생들이 건물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학교 앞에서 만난 3학년 학생은 “문제가 커질까 봐 선생님들이 쉬쉬하고 있다”고 학교 내부 분위기를 전했다. 전 교장과 행정실장, 용역업체 직원 등이 최소 4억 1000만원의 급식비를 빼돌렸다는 서울시교육청 감사 결과에 대해 A군은 “선생님들이 ‘교육청 감사 내용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학교 측에서 적극 대응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부모님들에게도 그렇게 설명하라고 했다”고 전했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전부터 급식비에 비해 음식 질이 떨어진다는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점심시간에 나가서 끼니를 때우거나 매점에서 빵을 사 먹는 학생이 적지 않았다고 A군의 친구가 전했다.  급식 비리 의혹이 불거진 뒤로 학생들의 외출은 더 어려워졌다. 학교 인근에서 10년 넘게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김모(55·여)씨는 “학생들 중 일부는 예전부터 급식의 질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급식비 4000원을 내고도 점심시간에 외출해 식사를 해결해 왔다”며 “하지만 급식 비리 의혹이 세상에 알려진 뒤로는 학교 측이 학생들의 외출을 적극적으로 통제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씨는 “아무래도 학생들이 학교 밖에서 식사를 해결하면 학교 이미지가 실추될까 봐 그런 게 아닌가 싶다”고 추측했다. 충암중·고 총동문회와 학부모들은 지난 8일 ‘충암중·고 정상화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를 꾸리고 진상 조사에 나선 상태다. 총동문회 사무실에서 만난 한 학부모(52·여)는 “몇 년 전부터 매주 화·목요일마다 학부모들끼리 돌아가면서 식자재 검수부터 식단표, 조리된 음식 점검에 이르기까지 급식 모니터링을 실시해 왔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다가 교육청 감사 결과에서 식용유 재탕, 삼탕 소식이 나와 충격을 받았다”고 토로했다. 학부모들의 급식 모니터링에서는 별다른 문제점이 발견되지 않아 여전히 감사 결과가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다른 학부모는 “검찰 수사로 비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학교 측은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면서도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 학부모들, 교사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더이상 학교 구성원들을 흠집 내거나 호도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답답한 심경을 드러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부실 급식 싫어 점심 외출했는데 그것도 막아요”

    “부실 급식 싫어 점심 외출했는데 그것도 막아요”

    “급식에서 비닐봉지나 머리카락 같은 이물질이 나왔다는 얘기를 전부터 자주 들었어요, 지난 4월에 급식비를 내지 못한 아이에게 교감이 밥 먹지 말라고 막말한 것도 그렇고, 이번 비리 의혹도 그렇고, 학교가 하는 일을 믿을 수 없네요.” 아들이 충암고에 다니는 최모(48)씨는 13일 기자를 보고 이렇게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4일 서울시교육청 감사 결과 발표로 광범위한 급식 비리 의혹이 제기된 충암중·고교는 학생과 학부모, 학교 간에 불신이 팽배해 있었다. 학교 측이 이미지 실추를 우려해 학생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면서 인근 상인들은 “장사가 되지 않는다”고 볼멘소리를 내고 있다. 일부 학부모는 ‘충암 아이들아 미안해, 충암 엄마들’, ‘지켜 주지 못해 미안해’란 문구가 적힌 팻말을 교문 인근에 세워 두고 시위 아닌 시위를 벌였다. 3학년 학생들은 이날 전국적으로 치러진 수능 모의고사(전국연합학력평가)를 보고 있었고 1학년, 2학년 학생들은 중간고사를 치르고 있었다. 낮 12시 20분쯤 오전 시험을 마친 고3 학생들이 건물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학교 앞에서 만난 3학년 학생은 “문제가 커질까 봐 선생님들이 쉬쉬하고 있다”고 학교 내부 분위기를 전했다. 전 교장과 행정실장, 용역업체 직원 등이 최소 4억 1000만원의 급식비를 빼돌렸다는 서울시교육청 감사 결과에 대해 A군은 “선생님들이 ‘교육청 감사 내용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학교 측에서 적극 대응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부모님들에게도 그렇게 설명하라고 했다”고 전했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전부터 급식비에 비해 음식 질이 떨어진다는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점심시간에 나가서 끼니를 때우거나 매점에서 빵을 사 먹는 학생이 적지 않았다고 A군의 친구가 전했다. 급식 비리 의혹이 불거진 뒤로 학생들의 외출은 더 어려워졌다. 학교 인근에서 10년 넘게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김모(55·여)씨는 “학생들 중 일부는 예전부터 급식의 질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급식비 4000원을 내고도 점심시간에 외출해 식사를 해결해 왔다”며 “하지만 급식 비리 의혹이 세상에 알려진 뒤로는 학교 측이 학생들의 외출을 적극적으로 통제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씨는 “아무래도 학생들이 학교 밖에서 식사를 해결하면 학교 이미지가 실추될까 봐 그런 게 아닌가 싶다”고 추측했다. 충암중·고 총동문회와 학부모들은 지난 8일 ‘충암중·고 정상화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를 꾸리고 진상 조사에 나선 상태다. 총동문회 사무실에서 만난 한 학부모(52·여)는 “몇 년 전부터 매주 화·목요일마다 학부모들끼리 돌아가면서 식자재 검수부터 식단표, 조리된 음식 점검에 이르기까지 급식 모니터링을 실시해 왔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다가 교육청 감사 결과에서 식용유 재탕, 삼탕 소식이 나와 충격을 받았다”고 토로했다. 학부모들의 급식 모니터링에서는 별다른 문제점이 발견되지 않아 여전히 감사 결과가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다른 학부모는 “검찰 수사로 비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학교 측은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면서도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 학부모들, 교사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더이상 학교 구성원들을 흠집 내거나 호도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답답한 심경을 드러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온몸 결박’ 숨진 家長, 자살일까 제3자 개입했나

    ‘온몸 결박’ 숨진 家長, 자살일까 제3자 개입했나

    서울 강서구 일가족 사망 사건과 관련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1차 부검 소견이 나왔지만 사망 원인에 대한 의문은 풀리지 않고 있다. 가장 이모(58)씨의 사인은 질식사일 가능성이 커졌지만 아내와 딸의 사인은 오리무중이다. 9일 서울 강서경찰서에 따르면 국과수는 전날 강서구 내발산동의 한 빌라에서 숨진 채 발견된 이씨와 아내 김모(49)씨, 고등학생 딸(16)의 부검을 진행했다. 이씨의 사인은 비교적 명확해졌다. 국과수는 육안으로 확인한 1차 부검에선 이씨의 사망 원인으로 ‘산소 결핍성이나 비구(鼻口) 폐쇄성 질식사 가능성’을 꼽았다. 즉, 코와 입이 막혀 질식사했다는 의미다. 그러나 안방에서 발견된 김씨와 딸에 대해선 ‘사인 불명’ 소견을 내놨다. 외상 흔적이 없을뿐더러 위의 내용물에서 알약 등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내와 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이씨에 의해 살해당했는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경찰은 현장에 남아 있던 유서 등을 바탕으로 남편이 아내와 딸을 먼저 살해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유서에 빚을 많이 진 아내에 대한 원망이 적혀 있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그럼에도 아내와 딸이 자발적으로 독극물을 삼켰을 상황 역시 배제할 수 없다. 김씨 가족은 기초수급대상자였으며 내발산동 빌라 임차료도 SH공사에서 ‘긴급주거비’ 명목으로 지원받았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생활고에 시달려 동반 자살을 감행했을 수도 있다. 아내는 자궁암 말기 환자여서 삶에 대한 의지 역시 약했을 수 있다. 이씨의 질식사를 두고 제3자가 개입한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된다. 이씨는 발견 당시 거실에서 얼굴에 검은 비닐봉지를 쓴 채 발목과 무릎이 흰색 천으로 결박된 상태였고 손목은 뒤로 묶여 뒷짐을 진 모습이었다. 혼자서 이 자세로 목숨을 끊기엔 부자연스럽다는 시각이다. 하지만 이씨가 사망 전 처조카 김모(28)씨에게 유서가 담긴 편지를 보내는 장면이 우체국 폐쇄회로(CC)TV 화면에 찍혀 혼자서 범행을 주도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경찰 관계자는 “사망 상황을 추정할 만한 독극물이 나오지 않아 정밀 검사를 의뢰했다”며 “이씨 주변 인물들에 대한 조사도 확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 일가족 3명 숨진 채 발견, 생활고 자살사건 잇따라..‘어떤 사연이길래?’

    일가족 3명 숨진 채 발견, 생활고 자살사건 잇따라..‘어떤 사연이길래?’

    ‘일가족 3명 숨진 채 발견’ 서울 강서구 내발산동 한 다세대주택에서 시신 3구가 발견됐다. 경찰은 생활고를 겪던 남편이 수면제를 먹여 아내와 딸을 숨지게 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고 수사에 나섰다. 서울 강서경찰서는 7일 오후 2시쯤 이모(58)씨와 아내 김모(49)씨, 고등학생 딸 이모(16)양이 집 안에서 숨진 채로 발견됐다고 밝혔다. 얼굴에 검은색 비닐봉지를 쓴 이씨는 거실에 있었다. 손은 뒤로, 무릎과 발목도 헝겊 끈으로 묶여 있었다. 아내와 딸은 안방에서 발견됐다. 아내는 바닥, 딸은 침대에 반듯이 누워 있었다. 경찰은 이씨의 처조카 김모(28)씨의 신고를 받고 출동했다. 이씨는 자살을 암시하는 A4 용지 6장 분량의 편지를 김씨에게 보냈다. 편지엔 ‘아내의 빚 때문에 생활고를 겪고 있다’ ‘친척들이 뒤처리를 부탁한다’ 등의 내용이 담긴 것으로 전해졌다. 이씨는 이날 오전 이양 담임교사와의 통화에서 “아내가 숨져 딸이 경황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했다”고 말한 것으로 조사됐다. 담임교사는 이양이 결석하자 경위 파악을 위해 전화를 했다.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은 없었다. 아내와 딸에겐 저항이나 외상 흔적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내와 딸의 시신이 발견된 안방 벽에는 ‘삶이 고단해 먼저 가니 부검을 원치 않는다. 언론에 알려지지 않기를 바란다’는 내용을 적은 A4 용지가 붙어있었다. 이씨의 아내는 암 환자로 병원 치료를 받아왔던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은 감식 결과를 토대로 이씨는 질식, 아내와 딸은 수면제 등 약물복용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했다. 시신 상태로 보아 아내와 딸은 전날 사망한 것으로 봤다. 경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부검을 의뢰해 정확한 사인을 조사할 예정이다. 일가족 3명 숨진 채 발견, 일가족 3명 숨진 채 발견, 일가족 3명 숨진 채 발견, 일가족 3명 숨진 채 발견, 일가족 3명 숨진 채 발견 사진 = 서울신문DB (일가족 3명 숨진 채 발견) 뉴스팀 seoulen@seoul.co.kr
  • 일가족 3명 숨진 채 발견, 고등학생 딸과 부모 숨진 채..‘어떤 사연이길래?’

    일가족 3명 숨진 채 발견, 고등학생 딸과 부모 숨진 채..‘어떤 사연이길래?’

    ‘일가족 3명 숨진 채 발견’ 서울 강서구 내발산동 한 다세대주택에서 시신 3구가 발견됐다. 경찰은 생활고를 겪던 남편이 수면제를 먹여 아내와 딸을 숨지게 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고 수사에 나섰다. 서울 강서경찰서는 7일 오후 2시쯤 이모(58)씨와 아내 김모(49)씨, 고등학생 딸 이모(16)양이 집 안에서 숨진 채로 발견됐다고 밝혔다. 얼굴에 검은색 비닐봉지를 쓴 이씨는 거실에 있었다. 손은 뒤로, 무릎과 발목도 헝겊 끈으로 묶여 있었다. 아내와 딸은 안방에서 발견됐다. 아내는 바닥, 딸은 침대에 반듯이 누워 있었다. 경찰은 이씨의 처조카 김모(28)씨의 신고를 받고 출동했다. 이씨는 자살을 암시하는 A4 용지 6장 분량의 편지를 김씨에게 보냈다. 편지엔 ‘아내의 빚 때문에 생활고를 겪고 있다’ ‘친척들이 뒤처리를 부탁한다’ 등의 내용이 담긴 것으로 전해졌다.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은 없었다. 아내와 딸에겐 저항이나 외상 흔적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내와 딸의 시신이 발견된 안방 벽에는 ‘삶이 고단해 먼저 가니 부검을 원치 않는다. 언론에 알려지지 않기를 바란다’는 내용을 적은 A4 용지가 붙어있었다. 이씨의 아내는 암 환자로 병원 치료를 받아왔던 것으로 조사됐다. 일가족 3명 숨진 채 발견, 일가족 3명 숨진 채 발견, 일가족 3명 숨진 채 발견, 일가족 3명 숨진 채 발견, 일가족 3명 숨진 채 발견 사진 = 서울신문DB (일가족 3명 숨진 채 발견) 뉴스팀 seoulen@seoul.co.kr
  • 당신이 버린 ‘비닐봉지’ 바다거북의 목숨 빼앗는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버리는 비닐봉지가 얼마나 생태계에 악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 자료가 공개됐다. 최근 호주 환경단체들은 비닐봉지를 먹고 죽은 거북의 부검 모습을 사진과 함께 공개했다. 공개된 사진을 보면 '경고' 문구가 따로 붙어 있을만큼 끔찍하다. 이 거북의 내장에서는 엉켜있는 많은 비닐봉지가 발견됐으며 장에는 일부 구멍난 흔적도 확인됐다. 결과적으로 비닐봉지를 잔뜩 먹어치운 거북이 아사한 것으로 일부 독소도 내장에서 검출됐다. 세간에 어느정도 알려진대로 비닐봉지는 석유와 폴리에틸렌으로 만들어지며 그 과정에서도 대기오염을 발생시킨다. 문제는 비닐봉지가 특성상 거의 영구적으로 분해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 때문에 쓰레기가 된 비닐은 우리가 사는 땅과 바다를 오염시키는 주범이 되고 있다. 특히 이 비닐 쓰레기는 바다로 많이 흘러 들어가는데 이 과정에서 가장 피해를 입는 것이 바로 거북이다. 호주의 수의학자 레리 보겔네스트 박사는 "바다 거북은 물 위에 떠다니는 비닐봉지를 해파리로 착각해 먹는다" 면서 "바다 거북의 70%가 비닐봉지를 먹고 있으며 이중 20%는 얼마 못가 죽는다"고 설명했다. 호주 환경단체들이 연합으로 거북 부검 사진을 공개한 이유는 있다. 호주 내에서 비닐봉지 사용을 완전 금지하자는 운동을 펼치고 있기 때문. 실제 세계 각국에서도 비닐봉지 억제 정책을 펼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비닐봉지 사용을 줄이기 위해 유료화와 재활용, 에코백 사용을 권장하고 있으나 아예 금지시킨 나라도 있다. 지난 7월 하와이주는 슈퍼마켓에서 비닐봉지를 나눠주는 것을 미국 전체 주에서 최초로 금지시켰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일가족 3명 숨진 채 발견, 생활고 자살사건 잇따라..

    일가족 3명 숨진 채 발견, 생활고 자살사건 잇따라..

    서울 강서구 내발산동 한 다세대주택에서 시신 3구가 발견됐다. 경찰은 생활고를 겪던 남편이 수면제를 먹여 아내와 딸을 숨지게 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고 수사에 나섰다. 서울 강서경찰서는 7일 오후 2시쯤 이모(58)씨와 아내 김모(49)씨, 고등학생 딸 이모(16)양이 집 안에서 숨진 채로 발견됐다고 밝혔다. 얼굴에 검은색 비닐봉지를 쓴 이씨는 거실에 있었다. 손은 뒤로, 무릎과 발목도 헝겊 끈으로 묶여 있었다. 아내와 딸은 안방에서 발견됐다. 아내는 바닥, 딸은 침대에 반듯이 누워 있었다. 경찰은 이씨의 처조카 김모(28)씨의 신고를 받고 출동했다. 이씨는 자살을 암시하는 A4 용지 6장 분량의 편지를 김씨에게 보냈다. 편지엔 ‘아내의 빚 때문에 생활고를 겪고 있다’ ‘친척들이 뒤처리를 부탁한다’ 등의 내용이 담긴 것으로 전해졌다. 뉴스팀 seoule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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