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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툰베리 만큼 화난 한국 10대도 ‘등교 거부’

    툰베리 만큼 화난 한국 10대도 ‘등교 거부’

    지난 23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열린 ‘UN 기후위기 정상회담’ 중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매섭게 노려보는 한 소녀의 사진이 화제를 모았다. 그 주인공은 스웨덴 출신의 10대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16). 그는 지난해 8월부터 기후 위기에 대한 세계 각국의 미온적 대응을 고발하고자 학교 대신 스웨덴 의회 앞에 출석해 1인 시위를 벌였다. 10대 소녀가 쏘아 올린 기후 위기에 대한 따끔한 일성은 전 세계 150여 곳에서의 적극적인 행동으로 이어졌다. 특히 유럽과 미국 곳곳에서는 매주 금요일마다 청년과 청소년들이 참석하는 대규모 ‘결석 시위’(school strike)가 열렸다. 이들은 ‘미래 세대를 위해 현실을 직시하라’며 기후 위기에 뒷짐만 지는 ‘못난 어른’들을 향해 소리를 높였다. 청소년들의 정치 참여가 극히 제한적인 한국에서도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감지된다. 지난 25일 서울 중구 서울NPO지원센터에서 ‘결석 시위’를 기획하며 세계 기후 파업에 동참하고 있는 한국의 청년과 청소년들을 만났다. 이들은 오는 27일 오전 10시 광화문 일대에서 대규모 ‘결석 시위’를 준비하고 있다.“결론부터 말하자면 너무 실망스러웠죠. 기후 위기에 근본적으로 책임이 있는 게 누군데 지금?” 청소년기후행동네트워크 김도현(16)양은 최근 ‘결석시위’를 앞두고 만난 환경부 장관 등 정부 관계자들과의 만남을 언급하며 이같이 말했다. 김양은 “‘대견하다’, ‘기특하다’며 ‘너희가 주체가 돼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기후 위기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것은 바로 정부”라며 “우리는 보호의 대상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 양은 특히 “(환경부 한 관계자가) 한국 온실가스 감축 목표는 37%인데 이대로 가면 목표 달성이 불가능할 게 뻔하다고 말하는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면서 “지키지 못할 걸 알면서도 지금의 정책을 고수하는 건 스스로 파국의 길을 선택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그는 “진지한 고민 없이 부처 홍보 사진만 찍으며 ‘기특한 청소년’ 정도로 우리를 소비하기 바쁜 어른들의 모습이 부끄럽다”며 “책임의식을 갖춘 어른들이 우리와 연대하기를 원한다”고 호소했다. 같은 단체의 김보림(26)씨 역시 “어른들은 당연히 누려왔던 것들을 지금 우리 세대는 누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면서 “어른들은 미래 세대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감을 느끼고 당장 행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지난 5월 광화문 시위에서의 일화를 소개했다. 김 씨는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알리고자 시위를 나갔지만 돌아온 건 냉소뿐”이었다며 “한 번은 왜 거리에 나왔느냐는 질문을 받고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이야기했더니 ‘우리 때는 경제 성장을 하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요즘 애들은 스펙 쌓으려고 별짓을 다 한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말했다.기후 위기는 미래 세대뿐만 아니라 사회적 약자를 위협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오연재(17)양은 “기후 위기는 가난하고 힘없는 약자들에게 더 큰 타격을 줄 것”이라면서 “지난해 폭염으로 인한 4500여 명의 온열질환자 중 사망자가 48명이나 됐다. 기후 위기를 방관하는 것은 사회 불평등의 비극 또한 방관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학교를 빠지면서까지 시위에 동참할 필요성을 묻는 물음에 이들은 “미래가 없는데 미래를 위한 공부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물었다. “정부와 정치인들이 기후 위기에 대한 제대로 된 정책을 시행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가 책상에만 앉아 있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저희도 정말 학교로 돌아가고 싶어요.” 박지은 PD jieun1648@seoul.co.kr
  • 학교 폭력에 사망한 美 왕따 중학생…장기기증 후 천국으로

    학교 폭력에 사망한 美 왕따 중학생…장기기증 후 천국으로

    약 일주일 전 미국에서 발생한 학교폭력의 피해 학생이 결국 사망했다. 폭스뉴스와 CBS 등 현지언론은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 카운티의 한 중학교에서 있었던 폭행 사건의 피해자 디에고(13)가 현지시간으로 24일 임상적 사망 선고를 받았다고 전했다. 디에고는 지난 16일 리버사이드 카운티 모레노밸리 시에 위치한 랜드마크중학교에서 동급생에게 폭행을 당했다. 이날 동급생 한 명이 휘두른 주먹에 맞고 넘어진 디에고는 콘크리트 기둥에 머리를 부딪치면서 큰 부상을 입고 말았다. 위독한 상태로 병원으로 옮겨진 소년은 결국 뇌사 상태에 빠졌으며 지난 24일 사망에 이르렀다. 리버사이드 카운티 경찰은 “지난주 랜드마크중학교에서 발생한 폭행 사건의 피해 학생 디에고가 임상적 사망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알리게 돼 안타깝다”면서 “사건에 연루된 모레노의 동급생 2명은 소년원에 수감된 상태로 기소했다”고 밝혔다.ABC 보도에 따르면 디에고를 폭행한 동급생 2명은 모두 우등생으로, 우수반에 포함돼 있었다. 학교 관계자는 “피의 학생 2명은 모두 우등생이었다”면서 “우수반 소속으로 절대 집단 따돌림 같은 문제 행동을 일으켜선 안 됐다”고 의아해했다. 그러나 랜드마크중학교 학생들은 디에고의 죽음이 예견된 사고였다고 입을 모았다. 디에고와 같은 반 학생들은 피의 학생을 비롯해 급우 몇몇이 SNS 등을 이용해 디에고를 괴롭혔다고 증언했다.이 학교에 재학 중인 크리스털 로드리게스는 “학우들 간의 폭력 사건이 자주 일어났지만 학교 측의 별다른 조치가 없어 힘들었다”면서 “경비나 보안관이 캠퍼스 곳곳에 있지만 폭행 현장에 도착하기까지는 늘 오랜 시간이 걸렸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학부모 중 한 사람인 호르헤 퀴테로는 자신의 딸도 집단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다면서 “왕따 문제와 관련해 학교가 손을 놓고 있다”고 격분했다. 현지 사법당국 관계자도 그간 디에고에 대한 집단 따돌림에 대한 보고나 경고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고 덧붙였다.디에고의 어머니 재스민 모리니는 학교 캠퍼스에 마련된 임시 분향소에서 “제정신이 아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며 통곡했다. 모레노밸리학교연합 측은 “비극을 겪은 랜드마크중학교 학생과 교직원, 그리고 지역사회 구성원들을 돕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할 것”이라면서 “상담교사들을 추가로 배치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디에고의 부모는 “아들은 비록 비극적으로 사망했지만, 모레노의 죽음이 다른 누군가의 삶에 선물이 되기를 바란다”라면서 장기 기증 의사를 밝혔다.  권윤희 기자 heeya@seoul.co.kr
  • [문소영 칼럼] 도덕적 우위 없이 사회개혁 어렵다

    [문소영 칼럼] 도덕적 우위 없이 사회개혁 어렵다

    ‘조국 대전’이 블랙홀이 되고 있다. 사람들은 지치지도 않고 조국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 사퇴 문제로 열을 올린다. 한쪽에서는 익명의 교수들이 시국선언을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실명을 공개한 교수들이 시국선언에 참여한다. 서울 광화문에서는 ‘조국 퇴진’ 집회가 거의 매일 열리고,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앞에서는 오는 토요일에 7회째 ‘윤석열 사퇴’ 집회가 열린다. 2016년 겨울, 촛불정국에서 ‘동지’였던 사람들끼리도 이제 격렬히 총질한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가 정의당에 당원 사퇴서를 내자, 소설가 공지영은 “좋은 머리도 아닌지 박사 학위도 못 땄다”고 저격했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조 장관의 부인 정경심 교수의 PC 반출을 “증거보존”이라며 ‘어용 지식인’의 면모를 뽐냈다. 증거인멸 우려가 합리적인 의심이라 법원에서 자꾸 검찰의 압수수색 영장을 받아 주건만 대체 무슨 망언이란 말인가. ‘사노맹 출신의 강남 좌파’로 알려진 조 장관의 가족이 ‘그들만의 리그’ 소속이었음이 만천하에 드러난 탓에, 386세대는 파렴치한으로 전락했다. 비극이다. 그런 상황을 만든 그가 지난 6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주장했을 때 공감하기 어려웠다. 영국 극작가 버나드 쇼는 “합리적인 사람은 자신을 세상에 맞추지만, 비합리적인 사람은 세상을 자신에게 맞추려고 애쓴다. 따라서 진보는 전적으로 비합리적인 사람에게 달려 있다”고 했다. 조 장관은 자신을 사회주의자로, ‘비합리적인 사람’으로 진단한 모양이지만, 버나드 쇼의 기준에 따르면 그는 그 누구보다도 ‘합리적’이었던 터라 시민은 분노하고, 씁쓸해했다. 특권과 반칙 없는, 상식 있는 사회를 만들려고 ‘아버지 찬스’를 자식에게 쓰지 않은 사람들은 주변에 적지 않다. 386의 윗세대지만, 미국 스탠퍼드대 MBA에 진학하겠다며 ‘아버지 추천서’를 써 달라는 아들의 요청을 재직 중에 거절한 전 한국은행 총재는 그 이후에 아들과 불화하며 살고 있다. 84학번인 한 원내대표는 ‘아버지 지역구 밖의 공립학교에 진학하면 안 되겠느냐’는 아들의 간곡한 요청을 거절해, 그 아들은 견디기 힘든 10대를 보내며 간신히 고교를 졸업했다. 85학번인 한 언론사의 논설위원은 한영외고 재학 중인 딸의 소논문 작성을 도와줄 테니 50만원을 내라는 학부모 그룹의 제안을 거절한 뒤 입시정보 공유에서 배제됐다. 87학번의 전 청와대 비서관 아들은 최종학력이 고졸로 최근 군복무를 마쳤다. 무엇보다 여론이 양분돼 양자선택을 강요하는 현 상황은 바람직하지 않다. 표현의 자유야말로 민주주의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인데, 요즘 조 장관이 사퇴해야 한다고 발언을 하면 적폐로 내몰리고, 윤 총장이 사퇴해야 한다고 발언하면 어용으로 내몰리는 탓에 입을 다문 사람이 많아졌다. 언론이 검찰에 붙어 국정농단 때보다도 많은 120만건의 기사를 생산했다는 가짜뉴스를 뿌리면서, 조 장관만이 검찰개혁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과연 옳은 것인가. 검찰은 여야가 국회 인사청문회에 합의한 직후인 8월 27일 전격 압수수색에 나섰고, 인사청문회가 끝나는 날 피의자 소환도 없이 조 장관의 부인을 기소한 것이 ‘검찰 쿠데타’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고민들이 깊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9일 “의혹만으로 임명하지 않는다면 나쁜 선례가 될 것”이라며 조 장관을 임명했다. 그 판단에 나는 유감이었다. 정치행위나 국정운영의 원칙은 법보다 도덕이 우선한다고 믿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는 재벌 2세나 총리나 장관 후보자들이 꼭 위법했기에 비판한 것은 아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도덕적 책무에 부합하지 않았기에 비판하고 개선을 요구해 왔다. 한 예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에버랜드 전환사채(CB) 저가 인수는 편법이었기에 비난받았다. 현 정부는 진영을 뛰어넘어선 정의로 탄생한 정부다.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어 달라고 합심한 것이었다. 그 요구는 이제 ‘공정’을 요구하는 20대와 30대가 추구하는 미래로 수렴돼야 한다. 조 장관만이 검찰개혁이라는 역사적 과업을 이룰 것이라며 진영으로 뭉치는 386꼰대들의 바람으로 수렴돼서는 절대 안 된다. 더 높은 도덕적 우월성에 기초해야만 검찰개혁뿐만 아니라 노동개혁, 재벌개혁, 젠더갈등도 극복하고 성공할 수 있다. 조 장관은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위해서라도 결단해야 한다. ‘비합리적인’ 사고를 잃어버렸거나 잊어버린 386이라면 더는 역사의 전면에 서 있을 필요가 없다. symun@seoul.co.kr
  • [사설] DMZ 국제평화지대 구상, 북미 화답 기대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현지시간 24일 유엔총회에서 기조연설을 갖고 비무장지대(DMZ)의 국제평화지대화를 유엔 회원국들에 제안했다. DMZ의 국제평화지대화는 70년간 남북 군사적 대결이 낳은 비극적 공간인 DMZ를 군사적 충돌이 영구히 불가능한 지역으로 만들어 평화를 확산시키자는 구상이다. 지난해 남북 정상은 4·27 판문점선언 2조 1항에서 ‘DMZ를 실질적인 평화지대로 만들어 나가기로’ 뜻을 모은 바 있으며 9·19 군사분야 합의에서도 ‘DMZ를 비롯한 대치지역에서의 군사적 적대관계 종식을 한반도 전 지역의 전쟁 위험 제거로 이어 나가기’로 합의했다. 비핵화가 달성되면 북한이 재래식 무기의 위협을 느낄 수 있는 만큼 동서 250㎞, 남북 4㎞의 광대한 지역을 평화지대로 설정해 충돌을 소멸시킴으로써 체제안전 보장을 이루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국제평화지대화 구상이 획기적인 것은 남북이 공동으로 가입한 유엔 산하 기구와 평화·생태·문화와 관련한 기구를 평화지대에 유치하고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아 자연 생태계의 보고가 된 DMZ 전역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자연유산으로 등재시킨다는 데 있다. 또한 DMZ 내 38만발의 지뢰를 유엔지뢰행동조직 등 국제사회의 협력을 얻어 단시간 내에 제거한다는 계획도 담겼다. 국제평화지대 구상이 실현되려면 북한과 미국의 화답은 물론 유엔 회원국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어야 한다. 북·미 비핵화 협상이 성공을 거두고 3차 북미 정상회담이 연내에 열려야 한다. 그런 점에서 유엔 기조연설에 앞서 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뉴욕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북한에 대한 무력행사를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재확인한 것은 대북 메시지로 적절했다. 비록 이날 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밝혔던 대북 정책의 ‘새로운 방법’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어 아쉬웠으나 싱가포르 합의 정신을 강조한 것은 향후 북미 협상에 청신호를 던졌다. 하노이 회담의 교훈을 북미 정상은 되새겨야 한다. 북미가 기존 셈법을 버리고 과감한 양보를 통해 신뢰를 구축하고 통 큰 거래에 나서야 한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북한이 얘기하는 안전보장이나 제재해제 문제 등에 열린 자세로 협상한다는 게 미국 기본 입장”이라고 한 발언은 주목할 만하다. 미묘하지만 미국의 입장 변화를 감지하게 하는 대목이다. 국가정보원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11월 부산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참석과 5번째 중국 방문 가능성을 밝혔다. 북핵 회담 성공이 전제이지만, 연말까지 남은 3개월이 한반도의 명운을 좌우한다는 점을 남북미 정상이 명심했으면 한다.
  • [글로벌 In&Out] 한국을 조국으로 사랑한 외국인들이 섭섭해한다/알파고 시나씨 아시아엔 편집장

    [글로벌 In&Out] 한국을 조국으로 사랑한 외국인들이 섭섭해한다/알파고 시나씨 아시아엔 편집장

    이 칼럼을 맡은 지 거의 1년 지나갔다. 칼럼에서 매번 한국 사회의 문제들에 대해 색다른 해결 방안을 제시하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설렘으로 글을 썼다. 이번에는 설렘보다 얽히고설킨 마음으로 글을 썼다. 한국 사회에서 열심히 활동한 외국인 여성의 페이스북 포스팅에 마음이 아팠던 탓이다. “정말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 속하려고 노력을 아주 많이 했다. 한국말도 아주 열심히 배워서 내가 봐도 외국인으로서 이루기 힘든 레벨까지 올라왔고, 사회활동, 교회활동, 알바, 봉사활동 등도 최대한 많이 했다. 한국에 대한 좋은 인식을 계속 유지하고 싶었지만, 내가 노력하는 만큼 한국 사회에서 멀어진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중략) 왜냐하면 사람으로서 나를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니었다. 한국어를 배운 외국인이 신기해서였다는 것이 느껴졌고, ‘나´를 궁금해하지 않는 것이 상처가 됐다. 오늘의 나는 한국이 나의 제1의 집이 될 정도로 잘 적응했지만 내 인생을 바친 이 한국이란 나라가 나에게 1도 익숙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뼛속까지 느끼고 있다. 매일 아침 운동 삼아 자전거를 타러 나갈 때 사람들이 고개 돌리면서까지 나를 쳐다보는 모든 순간이 내 가슴을 화살로 찌르는 듯이 힘들다. 스펙이 보통이 아닌 내가 알바든 직장이든 이력서 100개를 넣고 한두 곳에서라도 답장 오면 긍정이든 부정이든 상관없이 다행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무시당하는 것이 나의 현실이다.” 이 포스팅에 공감하면서도 동의하지는 못했다. 이 칼럼에서 한국 사회와 그 친구에게 각각 하고 싶은 말을 독자 여러분과 같이 공유하고 싶다. 현대 한국의 탄생 과정을 살펴보려면 약 150년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신미양요, 병인양요 사건 이후에 흥선대원군의 지시로 척화비들이 잇따라 세워지면서 한국인들의 머릿속에 현대적인 ‘우리와 타인’의 개념이 생겼다. 옛적 구도인 왕조ㆍ양반ㆍ백성으로 구성된 한국 사회는 점점 ‘우리’만으로 단순화돼 갔다. ‘우리와 타인’이라는 개념은 특히 일본의 침략 이후에 더 뚜렷해졌다. 다시 말하자면 민족주의는 독립의 키포인트였고, 독립의 문을 열어 준 신의 한 수 역할을 했다. 광복을 맞이한 한국 사람들은 1948년 출범한 대한민국으로 주권을 얻었지만, 직후에 북한에 세워진 공산권 정부, 그리고 1950년에 발발한 6·25전쟁으로 민족 분단이라는 비극을 겪었다. 38선 이남에 있는 한국인들은 그동안 외세의 내정간섭으로 받은 트라우마가 컸다. 하지만 그것보다 민족 통일을 위한 민족주의 의식의 강화가 다시 어젠다에서 제1순위가 됐다. 지난 100년간 한국 사회의 번영과 자유에 핵심적 역할을 했던 민족주의가 이제 한국에는 부담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의 민족주의 정의는 수정돼야 한다. ‘진정한 한국인은 단군 할아버지의 자손이다’라는 신화는 버려야 한다. 민족 통일을 지향하면서도, 한국의 안보를 자신의 안전으로 일치화하면서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이라면 한국인으로 봐야 한다. 한국을 조국으로 삼고, 자기 인생을 한국에 바칠 정도라면 그 사람을 더는 외국인으로 보면 안 될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민족주의에 섭섭해하는 페이스북의 외국인 친구들에게 한마디하고 싶다. 조금 전에 필자가 언급하고 바랐던 그 사회적 분위기는 아직 없지만, 형성되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불과 120년 전에 미국에 노동하러 갔던 중국인 철도 노동자들은 큰 차별을 당했고,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은 지적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뚜렷했다. 그러나 오늘날 그런 문제들은 거의 사라졌다. 미국 같은 ‘이민자가 만든 나라’에서도 천천히 사회가 개방됐다. 마찬가지로 세계 각국에 자동차나 스마트폰을 파는 한국에 아주 짧은 기간에 너무 많은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싶다.
  • ‘너노들’ 송재림, 1년 전 비극 바로잡기 위해..‘애달픈 악역 열연’

    ‘너노들’ 송재림, 1년 전 비극 바로잡기 위해..‘애달픈 악역 열연’

    배우 송재림이 극의 흐름을 주도하는 열연을 선보였다. 지난 23일 방송된 ‘너의 노래를 들려줘’ 29-30회에서는 윤영길 (구본웅 분)의 살해 용의자로 체포되기 전 1년 전 그날의 비극을 바로잡기 위해 조용히 움직이는 남주완 (송재림 분)의 모습이 그려졌다. 강 교수 (송영규 분)으로부터 이영 (김세정 분)의 교통사고 소식을 전해들은 남주완은 즉시 이영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만난 장윤 (연우진 분)으로부터 자신과 윤영길의 실랑이가 담긴 영상과 목격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김이안 (김시후 분)도 죽였냐며 추궁하는 장윤에 분노 섞인 억울함을 토로하던 남주완에 이번엔 유다가 게시판에 윤영길의 살해범으로 남주완을 지목하며 단원들에게 보이콧까지 당했지만, 남주완은 담담히 자신의 일상을 이어갔다. 또한, 남주완은 이안과 이영에 대한 묵은 빚을 갚 듯 심증만 있던 1년전 그날의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남주완은 강명석을 찾아가 1년전 사건에 대해 물으며 도발했다 흥분한 강명석은 발악하듯 자신의 죄를 고백했고, 그런 그를 싸늘하게 쳐다보다 허무한듯 웃는 남주완의 모습이 어딘가 시원 섭섭해 보여 어쩌다 살인자가 된 그의 현 상황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송재림은 모든 것을 다 잃을 위기에서도 담담히 일상을 이어가며 자신만의 방법으로 죄를 갚으려는 남주완의 복잡한 속내를 절제된 감정 표현과 미세한 눈빛의 변화, 남주완 특유의 알 수 없는 미소를 적절히 버무려가며 표현, 송재림 만의 매력적인 남주완 캐릭터를 구축해냈다. 특히, 고뇌에 빠진 남주완의 무표정은 서늘하면서도 슬퍼 보여 악역 임에도 오히려 보듬어 주고 싶게 만들기도 했다. 한편, KBS 2TV ‘너의 노래를 들려줘’ 최종회는 오늘 밤 10시에 방송된다. 사진 = 서울신문DB 연예부 seoulen@seoul.co.kr
  • 서울대 비정규직 노동자들 천막농성…처우 개선·차별 철폐 요구

    서울대 비정규직 노동자들 천막농성…처우 개선·차별 철폐 요구

    서울대학교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처우 개선과 차별 철폐를 촉구하며 천막농성에 나섰다. 서울대학교 청소·경비, 기계·전기, 생활협동조합 노동자들 350여명은 24일 오후 서울 관악구 서울대 행정관 앞에서 집회를 열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차별을 철폐해 달라”고 밝혔다. 집회에는 총학생회를 비롯해 서울대 학생들, 지역 단체 인사 등도 함께했다. 이날 민주노총 민주일반연맹 서울대 기계전기분회 임민형 분회장은 “학교 측의 노동자 무시와 탄압에 분노한다”며 무기한 단식 농성을 선언했다. 임 분회장은 기계·전기 노동자들과 함께 서울대 행정관 앞에 천막을 치고 농성을 이어갈 계획이다. 이들은 “지난해 3월 학교는 760여명의 청소, 경비, 기계, 전기 노동자들을 직고용으로 전환했지만, 임금과 노동조건은 용역 시절만도 못한 처우를 강요하며 수십 년의 용역 생활을 청산하지 않고 있다”고 말하며 “얼마 전 열악한 휴게실 안에서 돌아가신 청소 노동자의 죽음은 이를 가장 비극적으로 보여준 사례”라고 강조했다. 지난달 9일 서울대 제2공학관 건물에서 근무하던 청소 노동자 A(67)씨가 열악한 환경의 휴게실에서 쉬던 중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면적이 3.52㎡(1.06평)에 불과할 정도로 비좁은 휴게실에는 창문도 없었으며 에어컨도 설치돼 있지 않았다. 도정근 서울대 총학생회장은 “파업이 이어지면 학생들이 불편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그만큼 노동자분들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뜻”이라며 “그들의 권리가 지켜지길 함께하겠다. 학교는 이들의 문제를 외면하지 말고 책임질 수 있는 자세를 보여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계·전기 노동자들은 시중 단가 수준의 임금과 명절휴가비 등을 지급하고, 노조 전임자에 대한 무급 탄압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청소·경비 노동자들도 천막농성에 동참해 65세 이상 고령 노동자 퇴직 중단과 정년 연장, 최저임금보다 낮은 기본급 인상 등을 요구했다. 지난 23일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무기한 파업에 나선 식당·카페 노동자들 역시 천막농성에 돌입했다. 이들은 기본급 3% 인상, 명절휴가비 지급, 임금제도 개선, 휴게시설 및 근무 환경 개선 등을 요구했다. 곽혜진 기자 demian@seoul.co.kr
  • “선감학원서 ‘굶고, 맞고, 빠져 죽은’ 아이들… 특별법 제정해 달라”

    “선감학원서 ‘굶고, 맞고, 빠져 죽은’ 아이들… 특별법 제정해 달라”

    ‘6일 경기도 경찰국에서는 5일 자정을 기해 도내 전역에서 부랑아 일제단속을 단행해 77명을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또한 적발된 부랑아 전원은 선감도 선감학원에 수용 조치했다고 한다.’ 1963년 3월 7일 인천의 한 지역 신문에 실린 기사다. 서울시도 1962년 ‘부랑아 없는 서울 거리’를 목표로 집중 단속을 벌여 그해 3000명 넘는 아이들을 고아원 등 전국 보호시설에 분산 수용했다는 기사도 있다. 일부 신문이 과잉 단속을 지적했지만 서슬 퍼런 군사정권 시절이었던 당시 정부가 눈 하나 깜짝할 리 없었다. 단속 실적에 눈이 먼 경찰과 공무원들은 길거리에서 닥치는 대로 아이들을 붙잡아 갔다. 행색이 남루하거나 집 주소를 외우지 못한다는 이유로 아이들은 순식간에 부랑아로 낙인찍혀 영문도 모른 채 가족들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그 시절 경찰에 붙잡혀 초등학교 시절을 선감학원에서 보냈던 김영배(64) 경기도 선감학원 아동피해대책협의회 회장은 “대체 누가 부랑아인가”라며 “대부분 부모와 가족이 있었는데 강압에 의해 납치를 당했다”고 말했다.-‘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지’라고 원망했을 것 같다. “1963년 서울에 사는 큰누나 집에 가는 길에 서울역 앞에서 경찰에 붙잡혔다. 그때부터 내 자아는 없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5년 넘는 세월을 갇혀 지냈다. 선감학원을 나온 뒤로도 나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그저 잊고 살려고 했을 뿐이다.” -외면하려 해도 당시 기억이 또렷하게 남아 있을 것 같은데. “8살 때 붙잡혀 갔다. 아이들을 일렬로 줄 세워 놓으면 제일 앞에 설 정도로 어린아이에 속했다. 잠을 잘 때는 옷을 벗겨 서랍 안에 넣고 자물쇠로 잠갔다. 탈출을 못하게 하려고 그렇게 한 것 같다. 좁은 방에 20명가량의 아이들이 발가벗긴 채로 누워 있는 형상이 꼭 궤짝에 담긴 생선들 같다는 기억이 있다.” -피해 생존자들은 강제 노동과 폭행이 일상이었다고 증언한다. “염전, 농사, 축산, 양잠 등 강제 노역에 시달렸다. 일일 노동 할당량을 못 채우면 쉴 수조차 없었다. 적어도 3년 동안 저녁때마다 매맞고 시달렸던 것 같다. 그 안에도 서열이 있었다. 아이들 중 힘센 아이들을 ‘사장’, ‘반장’으로 뽑았는데 이 아이들이 기합을 줬다.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나무껍질, 열매는 물론 곤충, 뱀, 쥐를 잡아먹기도 했다.” -피해자들이 꽤 많을 것 같다. “피해 규모를 알려면 과거 정부 기록을 확보해야 하는데 제대로 된 조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경기도의회가 2016년 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조사를 진행했지만 조례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현재로선 선감학원 퇴원연도를 알 수 없는 120명과 1955~1982년 28년간 4571명 등 총 4691명의 원아대장으로 피해 규모를 추정할 뿐이다. 피해 생존자들의 모임에서 출발한 선감학원 아동피해대책협의회에는 50여명의 회원이 가입돼 있다. 형편이 어려워 회비를 못 내는 회원들도 있다.” -한 역사학자는 선감도 비극을 ‘굶어죽고, 맞아죽고, 빠져죽고’ 이렇게 세 단어로 압축했다. “맞는 얘기다. 특히 원아대장에 나오는 퇴원 아동 4691명 중 무단이탈자 833명을 주목해야 한다. 탈출도 아니고 무단이탈이다. 탈출에 성공했다고 할 수도 없고, 죽었다고 할 수도 없다. 땅속에 적어도 300명가량이 묻혔을 것으로 보는데 그래도 500명이란 숫자가 설명이 안 된다. 도망가서 지금 살아 있다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그중 몇 명이 죽었는지 모른다는 것도 가슴 아프다. 이게 현실이다. 그런데도 사망자가 24명뿐이었다고 한다. 이게 말이 되느냐.” -선감도에 묻힌 유해도 발굴해야 할 텐데. “유해 발굴도 순서가 있다. 묘를 파기 전에 우선 누가 죽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사람이 죽었는데 기록이 없다는 걸 믿을 수 없다. 기록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고 유해 발굴을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한다.” -국가는 사과를 했나. “올 초 이재명 경기지사를 찾아가 사과를 요구했는데 진상규명을 한 뒤 사과를 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이 말을 듣고는 몸에 병이 올 정도로 힘들었다. 그러면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해 공식 사과한 오거돈 부산시장은 그걸 몰라서 했겠나. 지금으로서는 경기지사가 책임 있는 행동을 해서 피해 생존자들의 명예가 회복돼야 한다. 그게 출발이다.” -떨고 계신 것 같다. “선감도 얘기만 하면 그런다. 옛날에 있었던 일을 끄집어내면 가슴이 막 떨린다. 이걸로 끝나는 게 아니다. 자면서 악몽을 꾼다. 어느 날은 자다가 발길질을 해서 발톱 절반이 깨졌다. 요즘 와서 더 심해졌다. 이게 트라우마라는 걸 이제 알았다. 속으로 ‘괜찮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래도 증언을 이어 가는 이유는. “이건 ‘진실 게임’이다. 내가 마음으로 울어야 상대가 그걸 알아준다고 생각한다. 한 달 전에 하던 사업(중장비 임대업)도 관뒀다. 가족회의를 열고 두 가지 일은 못하겠다고 했다. 우리 애들이 ‘아빠,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는데 선감도 일 마무리하시라’고 하더라. 정말 어렵게 사업을 걷었다.” -가족들은 선감도를 언제 알았나. “2014년 처음 선감도 얘기를 꺼냈다. 그전에는 용기가 안 났다. 자랑거리는 아니었으니까. 선감도 생활을 전해들은 가족들이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애들이 이런 얘기를 했다. ‘아빠는 영웅이야.’ 쑥스러웠다. 가슴에 항상 상처로 남아 있었는데 좋게 얘기해 주니 용기가 나더라.” 김 회장은 인터뷰 도중 손목에 찬 팔찌를 보여 줬다. 둘째 딸이 1년 전에 만든 팔찌라고 했다. 팔찌 가운데에 영어로 ‘영웅’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용기를 내서 증언을 했는데 변화가 있었나. “2017년 11월 국회에 와서 첫 기자회견을 했다. 그때만 해도 기대가 컸다. 그런데 2년여가 지나도록 한 치의 진전도 없었다. 피해자들이 보호를 받지 못한 데 대해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그래도 이번에 ‘선감학원 피해사건의 진상규명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안’이 발의됐다. 의미가 있다고 본다.” -국가인권위원회도 정부와 경기도에 특별법이 마련되기 전까지 피해 생존자들에 대한 생계 및 주거 지원을 했으면 한다는 의견을 냈다. “공무원들한테 이런 얘기를 한다. 피해 생존자들을 지원해 주면 그들이 죽을 때 그걸 갖고 가냐고. 얼마 안 되는 기간이나마 사람답게 살게끔 해 달라는 것이다. 그래봤자 안정적인 숙소와 쌀이다. 일반인들은 선감도에 들어가 살게 하면서 우리한테는 왜 문을 안 열어 주는지 모르겠다.” -피해 생존자들이 선감도에 다시 돌아가길 원하나. “참 아이러니다. 선감도에 모여 사는 걸 원한다. 당시 함께 갇혀 있던 친구가 오랜만에 연락해 왜 자꾸 선감도가 생각나는지 모르겠다고 하더라. 인생에 있어 어린 시절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주는 게 아닐까. 그 시기를 선감도에서 보냈기 때문에 그곳이 고향인 거다. 물론 선감도가 보기 싫어 쳐다보지도 않는 사람도 많다. 똑같은 시기에 똑같은 기합을 받아도 고통을 느끼는 정도는 사람마다 다른 것 같다.”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 선감학원은 일제강점기인 1942년 조선총독부가 군인 양성을 목적으로 당시 경기 부천군 선감도(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에 세운 부랑아 수용소다. 해방 이후 1946년 경기도가 인수해 국가의 부랑아 정책에 따라 부랑아 강제수용 시설로 사용하다가 1982년 폐쇄했다. 학원 폐쇄 뒤에도 뒤틀린 삶이 회복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지난해 인권위가 실시한 피해 생존자 28명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기초생활수급자와 월 100만원 이하 소득 생활자가 40%로 집계됐다. 초등학교 이하 학력이 82.1%(23명)를 차지한다.
  • 하청 노동자 또 비극… 매일 1명씩 사라진다

    하청 노동자 또 비극… 매일 1명씩 사라진다

    충남 태안화력발전소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숨진 고 김용균씨처럼 일터에서 목숨을 잃는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최근 3년간 1000명이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22일 이용득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2016∼2018년 산재로 숨진 하청 노동자는 모두 1011명이었다. 2016년 355명, 2017년 344명, 2018년 312명으로 집계됐다. 전체 산재 사망자 10명 중 4명은 하청 노동자였다. 2016년과 2017년은 전체 산재 사망 노동자 중 40.2%, 2018년에는 38.8%가 하청 노동자로 나타났다. 이 의원은 “산업 현장에서는 위험의 외주화가 여전하다”며 “원청이 산재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고용노동부가 적극적으로 지도·감독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올 1월 발표한 간접고용 노동자 실태조사에 따르면 하청 노동자 가운데 37.8%가 업무상 재해를 경험했다. 이는 원청업체 소속 노동자(20.6%)보다 훨씬 높은 수치다. 특히 산재를 경험한 하청 노동자 가운데 38.2%는 산재보험이 아닌 본인 부담으로 치료를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위험한 업무를 하청업체를 비롯한 간접고용 노동자에게 맡기는 이른바 ‘위험의 외주화’을 막고자 정부는 지난해 말 산업안전보건법을 전면 개정했다. 하지만 산업현장에서의 사고는 끊이지 않고 있다. 올해 2월에는 현대제철 당진제철소에서 철광석을 이송하는 컨베이어벨트 부품 교체작업 중 외주업체 소속 노동자 이모(50)씨가 숨졌다. 6월에는 포스코 광양제철소에서 배관 보수업무를 하던 하청노동자 서모(62)씨가 폭발사고로 목숨을 잃기도 했다. 민주노총 금속노조에 따르면 지난 20일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하청 노동자 박모(60)씨가 절단 작업을 하던 중 구조물에 몸이 끼여 사망했다. 노조는 “표준작업을 무시한 채 작업지시를 했고 해제 작업 중 튕김이나 추락 또는 낙하 등 위험요소 예방을 위한 위험감시자를 배치하지 않아 발생한 사고”라고 주장했다. 노조는 긴급 간부회의를 열어 사고현장에 긴급 작업중지권을 발동하고 노동부에 이를 신고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한국도 네팔도 외면한 청년의 죽음…“아이 두고 왜” 아내의 통곡

    한국도 네팔도 외면한 청년의 죽음…“아이 두고 왜” 아내의 통곡

    자살 네팔 이주노동자들의 이야기 최근 10년(2009~2018년)간 한국에서 일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네팔 노동자는 모두 43명. 더 큰 비극은 죽음 뒤에서 기다린다. 사람이 죽었는데 한국이나 네팔 정부 어느 곳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통계표에 건조하게 적힌 사망자수 외에 이들이 왜 죽음에 내몰렸는지는 누구도 따져 보려 하지 않았다. 비전문취업비자(E9)로 한국에 들어오는 16개 국가 중 네팔은 지난해 가장 많은 이주노동자(8404명)를 보냈다. 네팔 노동자의 죽음은 우리 곁의 모든 이주 노동자의 얘기일 수 있다. 그들에게 한국은 왜 죽음의 땅이 됐을까. 서울신문은 네팔 카트만두와 동카르카, 포카라 등에서 유가족 등 40여명을 만나 그들의 사연을 들었다. 이 가운데 여전히 죽음의 이유를 찾아 헤매는 세 노동자 가족의 이야기를 정리했다.#28세 게다르 디말시나 유리 테이프가 성의없이 나붙은 사람 키 높이만 한 관이 공항 밖으로 빠져나왔다. 볼품없는 관에는 겨우 스물여덟 된 앳된 남성이 들어 있었다. 네팔 청년 게다르 디말시나였다. 그는 지난달 21일 오전 9시쯤 부산 사하구의 한 수산식품 공장 창고에서 목을 맨 채 발견됐다. 닷새가 흐른 지난달 26일 시신은 여객기 화물칸에 짐짝처럼 실려 네팔 카트만두 트리부반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밖에서 기다리던 친척들은 한국 경찰이 보내준 단출한 서류를 넘겨보다가 수군거렸다. “아무리 봐도 자살한 이유가 없어.” 가족들은 게다르가 왜 극단적 선택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르에게는 오히려 생의 의지를 다잡을 만한 축복만 있었다. 아내 번더나 디말시나(28)가 불과 25일 전 아빠와 똑 닮은 아이를 낳은 것이다. 번더나의 큰오빠는 “게다르가 아이 출산 나흘 뒤 친구들을 불러 파티할 만큼 기뻐했다”면서 “그런 사람이 왜 20일 후에 느닷없이 자살하겠느냐”며 갑갑해했다. 환갑을 맞은 어머니를 남겨둔 채 먼저 갈 무심한 아들도 아니었다. 가족들을 더 답답하게 만든 건 두 나라 관계기관의 태도였다. 게다르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누구도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았다. 주한 네팔대사관이나 한국 경찰은 시신을 돌려보내 준 것만으로 역할을 다했다고 믿는 듯했다. 경찰은 “외관상 타살 흔적이 없고 자살 동기가 명확하다”며 사고 현장의 폐쇄회로(CC)TV를 살피거나 휴대전화 포렌식을 하지 않았다. 번더나의 큰오빠는 취재진에 “어떻게 CCTV와 휴대전화 확인도 하지 않을 수 있느냐. 한국에서는 이래도 되느냐”고 반문했다.경찰이 파악한 ‘명백한 자살 동기’는 가족을 탓하는 내용이었다. 게다르가 아내를 통해 땅을 샀는데 이 과정에서 사기를 당해 힘들어했다는 동료 진술이 있었다는 것이다. 취재진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번더나와 가족들은 “거짓말”이라며 흥분했다. “땅은 1년 전에 샀는데 290만 루피(약 3000만원)였던 토지가 435만 루피(약 4500만원)까지 뛰었다”고 주장했다. 가족들은 게다르의 유품조차 돌려받지 못했다. 한국 경찰 관계자는 이유를 묻는 취재진에 “주한 네팔대사관에 물어보니 유가족들이 물품 받길 원치 않는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가족 얘기는 달랐다. 유품 문제를 두고 대사관과 통화한 적이 없다고 했다. 이에 대해 주한 네팔대사관 관계자는 “시신과 사망 진단서를 확실하고 빠르게 네팔로 보내는 게 우리 역할”이라면서 “대사관은 중요한 물건이 아니면 보낼 수 없다”고 답했다. 게다르의 시신은 도착 당일 갠지스강 상류의 바그마티강으로 옮겨졌다. 관 뚜껑을 열어 남편을 확인한 번더나는 얼굴을 만지며 통곡했다. “아이를 두고 어떻게….” 가족들은 강물로 게다르의 입을 적신 뒤 불을 입속에 넣어 화장했다.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떠났다가 죽은 채 고국에 돌아온 그는 4시간 만에 불과 함께 사라졌다.#32세 발 바하두르 “아이들을 정말 사랑하던 사람이었어요.” 지난달 30일 네팔 포카라에서 만난 리리 마야 구릉(28·여)은 선글라스 안으로 휴지를 밀어 넣으며 말했다. “매일 아이들을 볼 때마다 남편이 떠오른다”고 했다. 남편 발 바하두르 구릉(당시 32세)은 지난해 6월 12일 서울 중랑구 월릉교에서 몸을 던졌다. 당시 CCTV 화면에는 발 바하두르가 다리 위를 수차례 오가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담겼다. 끝까지 망설였지만 이틀 전 불법체류자 신분이 된 그는 ‘한국에서 쫓겨날 수 있다’는 불안감 탓에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했다. 발 바하두르는 원래 허가받은 노동자로 한국땅을 밟았다. 2017년 10월 E9 비자를 받고 입국한 그는 이듬해 3월 일하던 사업장에서 나와 고용노동부에 구직등록을 했다. 이주노동자들이 구직등록 후 3개월 안에 직장을 못 구하면 체류자격을 상실한다. 잠시 네팔에 돌아와 가족과 보낸 시간을 빼고는 한국에서 일자리를 찾아 헤맸지만 맞는 곳을 발견하지 못했다. 시간은 매몰차게 흘렀다. 3개월이 지났고 불법체류자가 됐다. 리리 마야는 한국에 와 남편의 시신을 수습했다. 당시 그를 도왔던 네팔인 라마 다와 파상(43)은 “한국에서 일하다 숨진 이주노동자의 가족들은 사망 소식을 듣고도 형편 탓에 대부분 한국에 오지 못한다”면서 “대사관이 하는 건 없다”고 털어놨다. 발 바하두르는 사망 두 달 전 네팔에서 아내와 즐겁게 데이트를 했다. 그 모습을 지켜봤던 동네 사람들은 리리 미야에게 “그렇게 행복했던 사람이 한국에 가서 왜 그렇게 됐느냐”고 곧잘 묻는다. 군인이었던 발 바하두르의 아버지는 삼 형제 중 막내인 아들의 사망소식을 듣고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네팔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집에 영정사진을 두고 아침저녁으로 향을 피운다. 일곱 살인 딸이 “이건 죽은 사람한테만 하는 거잖아. 아빠 죽은 거야”라고 물었다. 리리 마야는 “아빠는 외국에 있다”고 답했다. 그러곤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저도 죽고 싶었지만 아이를 생각하면 그럴 수 없어요.”#40세 던 라즈 갈레 “나는 결백합니다. 회사가 나를 속였어요. 나는 미치지 않았어요. 회사가 나에게 서명을 받았습니다. 반드시 진실을 밝혀 주세요.” 2011년 6월 대구 달서구의 한 이불공장에서 일하다 스스로 목을 맨 네팔 이주노동자 던 라즈 갈레(당시 40세)가 남긴 영어 유서 중 일부다. 2010년 9월 한국에 온 그는 네팔행 티켓까지 예매해 놓고 비극적 선택을 했다. 지난달 31일 포카라 집에서 만난 그의 아내 만 마야 갈레(48)와 동생 빔 라즈 갈레(36)는 어렵게 8년 전 이야기를 털어놨다. 동생 빔 라즈는 형이 자살한 이유를 모른 채 보낼 수 없다며 한국에 갔다. 아이를 정말 사랑하고 성실했던 형이었기에 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형이 남긴 유서를 보고서야 “회사에서 괴롭힘을 당했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형은 뭔지 모르는 문서에 사인한 후 회사가 나쁜 짓을 한다고 생각하고, 걱정돼 우울증이 생긴 것 같다”고 전했다. 던 라즈는 네팔어로 된 짧은 유서도 남겼다. “나는 잘못이 없다. 회사에서 몽골 사람과 싸운 적이 있다. 몽골 친구가 한국 사람한테 무슨 말을 했는지 (회사가) 나를 속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던 라즈의 이런 주장을 회사는 모두 부정했다. 괴롭힘이나 따돌림은 없었고, 서류에 서명한 적도 없다는 것이다. 던 라즈는 한국에서의 주·야간 교대 근무를 힘들어했다. 특히 사망 두 달 전인 4월 중순부터는 야간 근무만 했다. 만 마야는 “남편이 야간 근무를 하면서 잠을 아예 못 잤다”고 말했다. 당시 대책위 활동을 했던 노조 관계자는 “야간 근무를 하면서 따돌림까지 겹치자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은 것 같다”면서 “나중에는 회사가 사실상 해고할 것처럼 나오자 스트레스를 더 받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네팔에는 외국에서 일하고 온 이웃이 선물을 사와 앞집, 옆집과 나누는 문화가 있다. 만 마야는 “아이가 이웃으로부터 선물을 받았을 때 아빠 생각이 났는지 얼굴빛이 안 좋았다”며 눈물을 쏟았다. 이제 중학생이 된 아들은 아빠의 부재를 자각할 무렵 “그렇게 만든 사람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다. 대학생이 된 딸은 여전히 “죽어도 외국은 가지말자”고 말한다. 그래도 만 마야와 빔 라즈는 한국인이 밉지 않다고 했다. “한국에도 네팔처럼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고 남편은 나쁜 사람을 만났을 뿐이라고 생각해요. 그 사람 때문에 한국인을 싸잡아 비난하는 건 맞지 않죠. 그래도 나쁜 사람은 꼭 처벌받았으면 좋겠어요.” 카트만두·포카라·동카르카 기민도 기자 key5088@seoul.co.kr ●제보 부탁드립니다 서울신문은 이주노동자와 결혼이주여성, 이주아동이 겪는 각종 문제를 집중적으로 취재해 보도할 예정입니다. 이주노동자로서 임금체불, 산업재해 은폐 강요, 폭언과 폭행 등 부조리를 직접 경험했거나 이를 목격했다면 제보(key5088@seoul.co.kr) 부탁드립니다. 또 결혼이주여성이나 이주아동을 향한 폭언·폭행, 따돌림 등 혐오와 폭력에 대한 취재도 이어갈 예정입니다. 제보해주신 내용은 철저히 익명과 비밀에 부쳐지며 끝까지 취재해 보도하겠습니다.
  • 月300만원 기대감 뒤엔… 탈출구 없는 ‘주60시간 노동’ 절망감

    月300만원 기대감 뒤엔… 탈출구 없는 ‘주60시간 노동’ 절망감

    이주노동자 벼랑끝 내몬 ‘네 가지 방아쇠’ 무엇이 네팔 노동자들을 벼랑 아래로 떠밀었을까. 지난 10년간 국내 공장·농장 등에서 일하던 네팔 이주노동자의 자살이 끊이지 않자 국내외 노동·의학단체들은 그 이유를 두고 머리를 싸맸다. 정영섭 이주공동행동 집행위원은 “한 가지 동기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서울신문은 자살의 ‘방아쇠’를 찾기 위해 원진재단부설 녹색병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이주노조와 함께 국내 네팔 이주노동자의 ‘스트레스 및 정신건강 실태조사’를 했다. 국내 언론사 최초의 시도다. 지난 8월 네팔 출신 141명이 참여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놨다. 또 네팔 정부의 ‘2018년 이주 노동 현황 보고서’와 국제노동기구(ILO)의 ‘네팔 노동자의 실패’ 보고서(2016년), 주한 베트남·네팔·태국·미얀마 등 대사관 등에서 입수한 자국 노동자 사망·자살 통계 등도 분석했다. 연구·취재 결과 네팔인들을 극단적 선택으로 내모는 방아쇠는 모두 4가지였다. ▲기대감의 상실 ▲닫혀 버린 탈출구 ▲주변의 기대 ▲무너진 가족·연인 등이다. 네 원인은 서로 뒤엉켜 이주노동자를 흔들다가 삼켜 버린다. 그들의 죽음은 사회적 타살일 수 있다는 얘기다.# 기대의 상실 네팔 노동자들에게 한국은 기회의 땅이다. 고국에서 손에 쥐는 임금의 5~8배를 벌 수 있고 생활환경도 편하다. 명문대 졸업자 등 고학력자까지 한국행 비전문취업비자(E9)를 따려고 애쓰는 이유다. 그러나 정작 좁은 문을 통과해 한국 땅을 밟으면 쉼 없이 자신을 갈아 넣어야 하는 노동환경과 적지 않은 차별 앞에 상실감을 느끼게 된다. 네팔 노동자를 극단으로 몰아넣는 첫 번째 방아쇠다.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네팔 이주노동자들은 한국에서 일하고 생활할 때 가장 힘든 일로 ‘한국 입국 전 생각했던 노동환경과 너무 달라 느낀 실망 또는 절망감’(28.0%·복수응답)을 꼽았다. 또 25.1%의 응답자는 ‘가족 또는 연인, 음식 등 네팔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힘겹다고 했다. 돈을 벌기 위해 타국으로 떠나와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잔뜩 쌓였는데 기대와 달리 가혹한 노동환경을 경험하면서 절망하게 된다는 얘기다. 실제 서울신문 인터뷰에 응한 네팔 이주노동자들은 격무에 지친 경험을 털어놨다. 네팔 최고 국립종합대학인 트리부반대에 다니다 한국으로 와 버섯농장 등에서 3년째 일하는 수렌드라 보가티(28·가명)는 “네팔에 있을 때는 ‘한국에 가면 월 200만~300만원은 벌 수 있다’는 기대감에 들떴을 뿐 노동자들이 어떤 생활을 하는지는 누구도 알려 주지 않았다”며 “직접 와 보면 일이 고되고 문화가 달라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한국의 장시간 노동 문화에 적응하기 어려웠다고 털어놨다. 제대로 된 휴식 시간도 없이 매일 12시간씩 일했는데 네팔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노동환경이라는 것이다. 보가티는 또 “그 과정에서 기술이라도 배운다면 견디겠는데 대부분 단순 수작업이었다”고 말했다. 실제 실태조사에 참여한 응답자 중 법이 정한 주당 노동시간 한계치인 52시간을 넘겨 일한다는 사람은 45.6%나 됐다. 또 과로 산재 인정 기준인 주 60시간 이상 근무한다고 답한 노동자도 19.1%였다. 주5일제를 보장받는 노동자는 10명 중 2~3명(26.1%)뿐이었다. # 닫혀 버린 탈출구 네팔 이주노동자 케서브 스레스터(당시 27세)는 한국에 온 지 1년 4개월 만인 2017년 6월 어느 날 새벽 회사 기숙사 옥상에서 몸을 던져 사망했다. 밤낮을 바꿔 가며 하루 12시간씩 일하는 노동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심한 불면증에 시달린 게 화근이었다. “견디기 힘들면 회사를 옮기면 될 것 아니냐”는 흔한 반문은 스레스터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이주노동자가 일터를 바꾸는 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레스터는 유서에 “건강 문제와 불면 탓에 치료를 받았지만 나아지지 않았고, 스트레스가 심해 다른 공장에 가고 싶어도 허락되지 않았다. 네팔에 잠시 돌아가 치료받고 싶어도 안 됐다”고 적었다. 이 같은 현실은 실태조사에서도 확인됐다. 조사 참여 노동자들에게 ‘사업장 변경을 시도한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니 71.1%가 ‘있다’고 답했다. 응답자 중 최대 10번까지 사업장 변경을 요구한 이도 있었는데, 평균적으로 2.7번 시도했다. 일터를 바꾸려 한 이유는 스레스터와 비슷했다. ‘긴 노동시간과 위험한 사업장 등 노동환경 때문’이라는 응답이 36.4%로 가장 많았다. 고용허가제를 통해 한국에 들어온 노동자들은 3년간 최대 3번까지 사업장을 바꿀 수 있다. 하지만 사업주의 허락이 필수적이다. 최정규 변호사는 “업체 사장들과 통화를 해 보면 한 명을 바꿔 주면 다른 이들도 바꿔 줘야 한다고 말한다”면서 “소규모 사업장들이기 때문에 이주노동자가 하루라도 없으면 공장이나 농장이 운영되지 않는다며 변경을 거의 허락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사업주가 임금을 체불하거나 성폭력 등을 저질러 노조나 이주민단체가 함께 싸워 주지 않으면 이주노동자들의 사업장 변경은 사실상 어렵다. # 주변의 기대감 견디기 힘든 격무에 내몰린 노동자에겐 ‘귀향’이라는 선택지가 있을 법하다. 그러나 이주노동자들은 “노동환경이 가혹하고 사업장을 바꿀 수 없어도 네팔로 돌아가긴 힘들다”고 말한다. 어렵게 한국행 티켓을 손에 쥔 자신에게 거는 가족들의 기대와 주변 시선을 알기 때문이다. 이주노동자들을 자살로 모는 세 번째 방아쇠다. 네팔 출신인 우다야 라이 이주노조 위원장은 “한국에 가서 일하면 300만원을 벌 수 있다는 식으로만 알려져 있기 때문에 사업주가 노동자를 때린다거나 임금 체불 등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며 “이렇게 ‘좋은 나라’에서 그냥 돌아왔다고 하면 주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따돌림을 당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10년 동안 청주네팔쉼터를 운영 중인 수니타(41·여)는 “돈을 빌려 한국어능력시험까지 쳐서 떠났는데 힘들다는 이유로 돌아오면 ‘일도 못하고 힘없는 남자’라고 소문이 나 괴로워하는 사람이 많다”면서 “네팔인들이 일이 힘들어도 한국에서 안간힘을 쓰며 버티다 결국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고 말했다. 실제 네팔 정부 보고서에 기록된 17명의 자살자(2008~2014년)는 모두 가정 내 부양 의무를 무겁게 진 남성들이었다. # 무너진 가족·연인 악조건 속에서도 가족이나 연인을 생각하며 가까스로 견디던 이주노동자들은 마지막 버팀목마저 흔들리면 스스로 무너진다. 네팔 카트만두에서 만난 라메시 타파(29·가명)는 “내가 일했던 한국 공장에서도 젊은 친구 2명이 자살했다”며 “한 명은 집안 문제, 다른 한 명은 애인 문제였다. 귀국하려고 비행기표까지 준비했는데 그 전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전했다. 한국에서 일한 적 있는 크리시나 스레스터(45·가명)도 “한국에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면서 힘들게 일하는데 가족 문제까지 터져 정말 힘들었던 적이 있다”며 “휴가도 제대로 쓰기 어려운 형편에 잠시 귀국해 문제를 해결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나이가 어리고 사회 경험이 없는 이들이 이런 스트레스를 이겨 내기는 더 어렵다. 카필 달 네팔 트리부반대 인류학과 교수는 지난달 29일 카트만두 자택에서 서울신문과 만나 “고등학교 졸업 후 첫 사회생활을 가족 없이 외국에서 혼자 시작하는 것은 힘든 일”이라면서 “가족을 위해 일하며 자기 미래까지 고민해야 해 여러 압박감을 한번에 받게 된다”고 설명했다. 상황이 이렇지만 한국은 물론 네팔 정부조차 자살 동기 등을 연구한 적이 없다. 민간 연구도 전무하다. 달 교수는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중동과 유럽으로 나가 자살하는 네팔 노동자도 있다”며 “그런데도 정부나 정치권은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주노동을 외화벌이 수단으로 생각하며 정작 노동자들의 건강이나 자살 문제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한 네팔대사관 관계자는 “(네팔) 정부에 연구를 위한 지원금을 요청해 봤지만 진전이 없다”면서도 “네팔 이주민을 대상으로 정신건강 상담도 하며 자살자를 줄이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라이 위원장은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은 집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다”면서 “사람이 죽어 주한 네팔대사관 등에 신고하면 한국으로 올 수 있는 고용허가제 인원수가 줄어들까 봐 쉬쉬하며 시신을 본국에 보내기 바쁘다”고 비판했다. 카트만두·포카라·동카르카 기민도 기자 key5088@seoul.co.kr ※위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서울신문과 베트남 국영통신사 VNA가 공동 취재해 작성한 기사입니다. ●제보 부탁드립니다 서울신문은 이주노동자와 결혼이주여성, 이주아동이 겪는 각종 문제를 집중적으로 취재해 보도할 예정입니다. 이주노동자로서 임금체불, 산업재해 은폐 강요, 폭언과 폭행 등 부조리를 직접 경험했거나 이를 목격했다면 제보(key5088@seoul.co.kr) 부탁드립니다. 또 결혼이주여성이나 이주아동을 향한 폭언·폭행, 따돌림 등 혐오와 폭력에 대한 취재도 이어갈 예정입니다. 제보해주신 내용은 철저히 익명과 비밀에 부쳐지며 끝까지 취재해 보도하겠습니다.
  • 리우 빈민가 여덟 살 소녀 경찰 총격에 희생, 강경 치안대책 탓?

    리우 빈민가 여덟 살 소녀 경찰 총격에 희생, 강경 치안대책 탓?

    수줍게 웃는 이 여덟 살 소녀의 비극적인 죽음을 어찌할 것인가?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빈민가에서 범죄 조직 소탕에 나선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숨진 아가사 비토리아 살레스 펠릭스란 이름의 소녀다. 펠릭스는 지난 20일(이하 현지시간) 밤 리우 시 북부 콤플레수 두 알레망 빈민가에서 할머니와 함께 소형 밴에 타고 있었는데 경찰이 모터사이클을 타고 달아나는 괴한과 대치하는 상황에 애꿎게 희생됐다. 리우에서는 지난 1월 위우손 윗제우 주지사가 취임한 이후 강경한 치안 대책을 시행해 올 들어 지난달까지 경찰 작전에 희생된 이만 1249명에 이른다고 영국 BBC가 22일 전했다. 펠릭스는 경찰에 희생된 다섯 번째 어린이였다. 경찰은 총격전 상황에 벌어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펠릭스 가족들은 경찰이 모터사이클 탄 이에게 멈추라고 했는데 멈추지 않자 다짜고짜 총기를 발사했으며 단 한 발이 펠릭스의 목숨을 앗아갔다고 반박했다. 총격전 같은 상황은 아예 벌어지지도 않았다는 것이다.수십 명의 주민들은 다음날 경찰 폭력을 비난하는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를 행진했으며, 소셜미디어(SNS)에는 경찰의 과잉 단속과 윗제우 주지사의 치안 대책이 오히려 애꿎은 죽음을 재촉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좌파 정당 소속 하원의원은 “윗제우 주 정부가 손에 피를 묻히고 있고 그 때문에 또 하나의 가정이 고통받고 있다”면서 “리우 주 정부에 의해 대량살상 행위가 자행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리우 공공안전연구소(ISP)에 따르면 지난 7월에는 194명이 숨진 것으로 확인돼 1998년 이래 가장 많았다. 올해 1∼7월 누적으로는 1075명이 사망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0%가량 늘었다.우파 기독교사회당(PSC) 소속인 윗제우 주지사는 경찰의 범죄조직원 사살을 두둔하는가 하면 사형제도와 고문 행위를 지지하기도 했다. 헬리콥터에 저격수를 태워 마약조직원들이 은거하는 빈민가 파벨라스 습격을 허용하고 있다. 애꿎은 이들의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다. 미주기구(OAS) 산하 미주인권위원회(IACHR)는 리우 경찰에 의한 사망자 증가세에 우려를 표시하기도 했다. 아마존 화재를 방관하다시피 했던 자이르 보우소나루 브라질 대통령도 용의자에 대한 무력 사용을 옹호해 여러 차례 “좋은 범죄자는 죽은 범죄자”라고 공언하며 공권력 사용을 정당화했다. 한편 22일에는 수도 브라질리아의 노사 세뇨라 다 사우지 성당에서 카지메르츠 보인(71) 신부가 전날 밤 침입한 강도들에게 손발이 묶인 채 살해된 주검으로 발견됐다.사제관 직원 한 명은 인질로 붙잡혀 있다가 풀려났다. 세계 최대의 가톨릭 국가인 브라질의 치안 불안은 가톨릭 사제의 목숨도 빼앗고 있다. 보인 신부는 폴란드 출신으로 46년 전부터 이 성당에서 사제로 일해 왔으며, 사건 당시 성당 공사 상황을 점검하던 중이었다. 앞서 지난 4월에는 강도들이 이 성당에 침입해 금으로 만든 성체함(聖體函)을 훔쳐 달아나기도 했다. 강도들은 성체함을 암시장에서 단돈 160헤알(약 4만 5000원)에 처분했는데 이를 사들인 고물상 주인이 성당에 되돌려줬다. 지난 2017년 3월에는 리우 이타보라이 지역에 있는 한 교회에서 예배를 주관하던 쿠스토지우 곤사우비스(59) 목사가 괴한들이 쏜 세 발의 총탄에 맞아 숨졌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동영상] 잔지바르 바닷물 속에서 결혼 프러포즈하던 남자 익사

    [동영상] 잔지바르 바닷물 속에서 결혼 프러포즈하던 남자 익사

    미국의 백인 남성이 흑인 여자친구에게 바닷물 속 프러포즈를 하다 익사하고 말았다. 비운의 주인공은 루이지애나 배턴루지 출신의 스티븐 웨버로 아프리카 탄자니아 펨바 섬에 있는 만타 리조트의 바닷물에 잠긴 객실 밖에서 고글과 오리발을 낀 채 잠수해 객실 안의 여친 케네샤 앙트완에게 결혼 반지를 보여주고 결혼해달라고 요청하는 손글씨 편지를 유리창에 대 보여준 뒤 숨지고 말았다. 앙트완은 객실에서 이 모든 과정을 동영상에 담고 있었다. 앙트완은 페이스북을 통해 남자친구의 죽음을 확인하며 그가 “그 깊은 곳에서 떠오르지 못했다”고 적었다. 만타 리조트는 21일(이하 현지시간) 영국 BBC와에 19일 저녁 “수중 객실 밖에서 혼자 프리다이빙을 즐기다 비극적으로 익사했다”고 밝혔다. 잔지바르 경찰은 사고 원인 수사에 들어갔다. 두 사람은 해안으로부터 대략 250m쯤 떨어진 바닷속 객실에 나흘 숙박을 예약하고 묵었다. 하루 1700달러(약 202만원)였다. 두 사람은 버킷 리스트에 있던 이 호화 리조트 숙박을 “일생에 한번 뿐인” 일로 기억하고 싶어했다. 이 객실은 10m 수심 아래에 잠겨 있다. 웨버는 사흘째 묵던 날에 바닷물 속 결혼 프러포즈 이벤트를 벌였다. 그가 유리창에 댄 손글씨 편지에는 “당신을 사랑하는 모든 것에 대해 얘기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숨을 참을 수 없다. 하지만 당신의 모든 것을 사랑하고 매일 더 사랑한다!”라고 적혀 있었다.그는 코팅된 편지지를 뒤집어 “나랑 결혼해줄래”라고 쓴 글씨를 보여준 다음 반바지에서 결혼 반지를 꺼내 보여준 뒤 헤엄을 쳐 시야에서 사라졌다. 리조트 최고경영자인 매튜 사우스는 직원들이 “물에서 문제가 발생한 뒤” 대응했으나 도착했을 때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고 말했다. 앙트완은 페이스북 글을 통해 웨버가 “내 대답을 결코 들을 수 없었지만” 자신의 답은 “수백만 번이라도 예스였다”고 털어놓은 뒤 “우리는 결코 포옹하지도, 남은 삶을 함께 시작하겠다는 것을 축하하지도 못했다. 우리 생애 최고의 날은 최악의 날이 되고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잔인하게 운명이 뒤틀리고 말았다”고 밝혔다. 동영상을 붙일까 말까, 너무 잔인한 것 아닌가 고민했는데 무모한 프로퍼즈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운다는 측면에서 싣기로 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잊혀진 교훈, 반복되는 비극…코리안드림은 그렇게 스러졌다

    잊혀진 교훈, 반복되는 비극…코리안드림은 그렇게 스러졌다

    8월 한달 간 네팔·베트남 현장 취재…23일부터 보도“내 동생처럼 시신으로 돌아오는 사람이 더는 없었으면 좋겠어요. 한국과 네팔 정부가 막아줬으면 해요.” 2017년 경북 군위의 돼지 농장에서 분뇨를 치우다가 황화수소에 질식사한 태즈 바하두르 구릉(당시 25세)의 형 발 바하두르 구릉(31)은 지난달 31일 네팔 포카라에서 만난 서울신문 취재진을 붙잡고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동생은 3년간 농장에서 일하면서 단 한번도 작업 안전수칙을 설명들은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전형적인 인재(人災)였습니다. 너무 이른 나이의 가족을 떠나보내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알기에 형 구릉은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고 수차례 강조했습니다.하지만 우리 사회는 아픔에서 얻은 교훈을 금새 잊었고, 비극이 반복됐습니다. 한국에서 일하던 이주노동자가 사고로 숨지는 일이 올해에도 수차례 벌어졌습니다. 지난 10일 경북 영덕의 오징어젓갈공장 폐기물 지하 탱크에서 이주노동자 4명이 질식사한 것은, 태즈 구릉 사건과 꼭 닮은 ‘쌍둥이 참사’였습니다. 당시 노동자들은 안전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이같은 현실은 통계에도 어렴풋이 드러납니다. 20일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법무부의 ‘비전문취업(E-9)자격자 국내 체류 중 사망 현황’에 따르면 2008년부터 2019년 8월까지 비숙련취업(E-9) 이주노동자 1137명이 숨졌습니다. 이 가운데는 장시간 노동이나 차별 등 환경을 견디다 못해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노동자도 적지 않게 있습니다. 코리안 드림을 꿈꿨던 이들의 꿈도 생을 마감하면서 함께 꺾입니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요? 답을 얻기 위해 서울신문은 지난달 아시아의 대표적 인력송출국인 네팔과 베트남 등을 찾아 한국에서 일하다 사망한 이주노동자들의 유족을 만났습니다. 또, 한국에서 일한 경험이 있거나 한국행을 꿈꾸는 네팔인에게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들의 꿈이 꺾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그 해법을 오는 23일부터 지면과 온라인 기사를 통해 공개합니다. 기민도 기자 key5088@seoul.co.kr
  • [포토인사이트]동상이몽-갈등고조 바른미래당

    [포토인사이트]동상이몽-갈등고조 바른미래당

    바른미래당이 하태경의원의 18일 윤리위의 중징계로 당권파와 비당원파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다. 손학규대표 체재이후 이질적인 정치집단의 물리적 결합의 비극적인 결말을 보는듯 하다.
  • 뉴욕서 16세 소년 흉기에 찔려 죽어가는데 교우들은 비디오 촬영만

    뉴욕서 16세 소년 흉기에 찔려 죽어가는데 교우들은 비디오 촬영만

    미국 뉴욕에서 10대 소년이 흉기에 찔려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데 동료 학생 수십 명이 수수방관하고 일부는 비디오 촬영에 열중했던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롱아일랜드의 오션사이드 고교에 재학 중인 카신 모리스(16)는 지난 16일(현지시간) 오후 학교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상점가에서 타일러 플래치(18)와 방과 후 다툼을 벌이다 흉기에 찔렸다. 상처는 단 한 군데 났지만 피를 많이 흘려 끝내 후송된 병원에서 한밤 중 사망했다. 경찰은 둘의 드잡이 과정을 지켜본 아이들이 “50명, 60명, 70명” 정도 되지만 그들 대다수는 참극을 막기 위해 어떤 행동에도 나서지 않았다고 전했다. 스티븐 피츠패트릭 형사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아이들은 그저 서 있었고 카신을 돕지 않았다. 그들은 되레 비디오 찍는 데 열심이었다”고 개탄했다. 싸움은 한 피자 가게 밖에서 시작했는데 한 소녀와 사귀는 문제로 다투던 플래치가 6~7명의 아이들과 함께 무장도 하지 않은 모리스를 공격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모리스와 함께 17세 소년도 머리와 어깨를 크게 다쳐 입원 치료를 받고 있다. 지켜보던 아이들은 동영상을 촬영해 스냅챗을 비롯한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매들린 싱가스 검사는 19일 “끔찍한 비극”이라며 “열여섯 살 어린 아이다. 어린 아이의 살해 사건 만큼 끔찍한 일은 없다”고 개탄했다. 플래치는 이전에도 무기를 소지하고 다른 사람을 공격한 일로 체포된 적이 있었다. 그의 변호인은 의뢰인이 “강하게 결백을 주장하고 있다”면서 “책임있게 단계를 밟아나가면 결국 무죄를 밝혀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유죄가 확정되면 그는 무기형을 선고받게 된다. 현지 매체에 따르면 용의자는 “BabyTy”로 통하는 유망한 래퍼인데 유튜브에서 뮤직 비디오를 찾을 수 있는데 댓글은 볼 수가 없다고 방송은 전했다. 카신의 충격적인 죽음이 알려지자 성난 댓글이 쏟아지고 있다. 미국 abc 굿모닝 아메리카에 따르면 모리스의 누이 케얀나는 “카신은 누군가를 돕는 사람이었는데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마침내 마음에 드는 학교를 찾아 대단히 기쁘다고 어머니에게 말했던 것이 엊그제 일인데”라고 말을 잇지 못했다. 경찰은 이왕에 촬영한 동영상이 있으면 이를 모두 경찰에 제출해 모리스가 어떻게 죽음에 이르게 됐는지 경위를 명확히 밝히는 게 모리스에게 다할 도리라며 협조를 요청하고 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참전용사는 말합니다… 빚진 것 없으니 자유를 전달하라고”

    “참전용사는 말합니다… 빚진 것 없으니 자유를 전달하라고”

    ‘현장’과 ‘사람’에는, 책과 자료로 걸러지지 않은 것들이 남겨져 있기 마련이다. 인천상륙작전 때 뻘밭에서 죽어간 군인들에 관한 이야기, 전장에 투입되는지도 모른 채 한국 땅을 밟은 사연들이 그런 것이다. 현효제(40)씨가 이런 이야기들을 줄줄 내어놓을 수 있는 건, 그가 ‘현장 속 사람들’을 직접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6·25 참전용사를 찾아다니며 무료로 사진을 찍어 주고 있는 사진작가이다.엔젤 에세베도 버나드는 다른 6만 1000여명의 푸에르토리코 출신처럼 반바지 반팔 차림으로 참전했다가 제대로 된 군복 없이 헝겁과 붕대로 몸을 감싸며 난생처음 눈을 맞고 혹한을 겪었다. 눈, 비, 배고픔은 푸에르토리코 출신 참전용사들에게 6·25에 대한 기억의 대부분이다. 상륙정의 문이 열린 뒤 그에게는 가장 큰 비극이 펼쳐졌다. 아무도 그곳이 뻘밭이라고 미리 말해 주지 않았고, 앞서 먼저 내린 전우들은 한국땅을 밟아 보지도 못하고 익사했다. 그 자신도 고향 친구들의 어깨와 몸을 밟고 밟아 땅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뻘밭에서 몸부림쳤던 너무 많은 친구들과, 살기 위해 그들을 밟고 나가야 했던 기억이 아직도 그를 괴롭힌다.미 해병대 출신 살 스칼라토는 장진호 전투 때 정찰 중 쏟아진 포탄에 부모는 죽고 손목이 절단된 채 누나 품에서 울던 5살쯤 된 어린아이를 발견했다. 아기를 안고 뛰어 병원에 데려다주고 나왔는데, 가슴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끊어진 아기 손목을 다시 전달해 주려 들어갔더니 이미 아이는 죽어 있었다. 안을 때 자신의 목덜미를 잡았던 아이의 손이 2019년 88세 나이에도 느껴진다 했다. 17세에 참전한 영국 리버풀 출신 앨런 가이는 미국령 버뮤다로 가는 줄 알고 군에 지원했는데, 어느 날 눈을 떠 보니 부산항이었다. “북진 때 탔던 미군 기차에는 고기, 치즈, 빵, 우유, 초콜릿이 있었는데 나중에 탄 영국군 기차에는 딱딱한 빵에 햄 한 장 들어간 샌드위치에 물도 주지 않아 ‘미군에 입대했어야 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고 했다.윌리엄 웨버 미국 예비역 육군 대령은 그에게 “고조선의 역사를 아느냐”고 물었던 미국인이었다. 2차 세계대전 말기 소위로 참전, 첫 부임지인 필리핀에서 맥아더 사령관으로부터 “일본에 가서 조선소, 비행장 등 군수공장의 ‘조선인 노예’를 해방하고 본국 송환을 도우라”는 첫 명령을 받았다. 자신이 담당한 곳의 자료를 찾아 700여명을 안전하게 귀국시켰고,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인과 결혼하는 등 남을 수밖에 없었던 이들은 핍박을 면하게 하기 위해 안전지역으로 옮겼다. 종전 이후에도 일본에 남아 한국인 관련 업무를 담당하면서 그는 한국 역사를 꿸 정도가 되기에 이르렀다. 6·25 때는 대위로 참전했다. 전투 중 포탄에 오른쪽 팔이 절단돼 후송되다 호송 차량이 포탄을 맞아 같은 날 오른쪽 다리가 절단되었다. 미군은 필사적인 노력으로 그를 살려냈는데 “감각이 없을 정도로 모르핀을 많이 맞았다”고 한다. 워싱턴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공원’의 ‘수색하는 병사’ 19명 중 하나가 그다. 1000여명의 외국인 참전용사를 만났다니, 현씨는 6·25전쟁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그는 한양대 사학과를 다니다 중퇴하고 미국 샌프란시스코 아카데미예술대학(AAU)에서 사진을 전공했다. 2010년 귀국해 ‘라미스튜디오’를 차렸다.-언제부터 참전용사 사진을 찍기 시작했나. “2013년 육군 모 사단 홍보 동영상 작업을 하게 됐다. 그때 군생활 28년간 사진첩 반 권을 채우지 못했다는 한 원사의 가족사진을 찍어 주고 큰 보람을 느꼈다. 이를 계기로 다른 군인들과 그 가족들의 사진도 찍게 되었다. 2014년 ‘육군지상군 페스티벌’ 영상 작업을 하면서는 군복에 관심을 갖게 됐다. 스웨덴은 2년마다 남녀 모델을 써 계절과 용도, 상황에 맞는 군복 착용법을 다룬 책자를 낸다. 다른 선진국들도 그렇게 하는데 우리 군은 그런 게 없다. 군복의 연원과 변화와 종류를 알기 어려웠고 사진도 없다. 2014~2016년 3년간 60여개 군 부대를 돌며 육군 군복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군 단체, 군 가족, 한국전쟁 참전용사 개인 및 단체 사진을 찍으며 5000여명의 군인을 만났다. 그중 1000여명은 외국인 참전용사들이다.” -비용이 많이 들지 않았나. “많이 들었다. 처음부터 돈을 받을 생각도 없어지만 초기부터 ‘사진 찍어다 어디에 팔려 하나?’거나 ‘군을 팔지 말라’ 등 오해하는 분들이 있어 더욱 생각을 굳히게 됐다. 방위산업전 군복시리즈 전시, 국군의날 특별사진전 등을 거치며 ‘나도 찍혀 봤으면’ 하는 마음에 연락 오시는 분들이 늘면서 편지로 사연을 받기 시작했다. 정말 모든 편지가 마음을 움직이고 발길을 이끄는 사연들을 담았다. ‘나는 군인이다’에서 ‘우리는 군인이다’, ‘우리는 군인가족이다’ 등으로 프로젝트가 진화했다. 이 과정에서 외국인 참전용사들을 알게 됐고, 영국과 미국을 20번 정도 오가게 됐다.” -비용은 어떻게 마련했나. “학교를 졸업하고 나무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이것들을 팔아 돈을 마련했다.”(그는 초기에 나무 사진작가로 이름을 얻기 시작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4850세 ‘므두셀라 나무’, 가장 부피가 큰 ‘제너럴셔먼 나무’, 가장 키가 큰 종인 자이언트세콰이어의 ‘쓰러진 모나코 나무’ 등 유명한 나무들을 찾아가 앵글에 담았다.)” -그래도 비용 감당이 어려워 보이는데. “2억원쯤 썼는데 스스로도 버틴 게 신기하다. 정작 어려움은 액자 비용이었다. 사진은 액자로 전달될 때 완성된다고 생각했다.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SNS 등을 통해 사연을 접하고 액자비를 후원해 주시는 분들이 생겨났다. 현지에 가면 차량, 숙박 등을 제공해 주시는 분들도 늘어 가고 있다. 참 감사하다. 참전용사들이 액자를 전달할 때면 꼭 ‘얼마냐’고 물어온다. ‘69년 전에 이미 지불하셨습니다’라고 하면 꼭 껴안아 주신다. 그런데 윌리엄 웨버 대령은 ‘그게 아니야. 너는 틀렸어. 모든 자유를 가진 사람은 자유를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 자유를 전달하는 의무가 있어. 우리는 그 의무를 다한 것뿐이고, 너희는 우리에게 빚진 것이 없다. 다만 우리 덕분에 자유를 얻었다면 너희들도 의무가 있다. 북에 있는 너의 동족, 동포들에게 자유를 전달하는 게 너희의 의무야’라고 했다. 웨버 대령은 ‘우리 때문에 분단의 비극이 왔다’면서 ‘통일을 보는 것이 소원’이다.” 현씨는 내년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2년간 미국을 누비며 참전용사들을 만나 사진을 찍을 계획을 세우고 있다. “죽기 전에 빨리 와 달라”는 연락들이 많아져 마음이 급하다. 미국에서만 날마다 대략 400명꼴로 세상을 뜨고 있다. 작년에만 18만명이 작고했다. 그들 대부분이 다른 누구로 남기보다 6·25 참전용사로 기억되고 싶어 하는 것을, 현씨는 잘 알고 있다. jj@seoul.co.kr
  • 진전 안되는 남북대화…통일장관의 ‘임중도원’

    진전 안되는 남북대화…통일장관의 ‘임중도원’

    ‘강력한 대화론자’로 기대 컸지만 남북경색 국면 쌀 지원 등 ‘물거품’ 개성공단 방북승인에도 北 무응답 일각선 “강연·축사에 치중” 비판도 金장관 “남북 소통 채널 열어둘 것” 이달말 북미 대화 재개로 다시 ‘희망’김연철 통일부 장관이 지난 3월 장관으로 지명됐을 때 보수 야당은 격렬히 반대했다. 대표적 대화론자인 그가 급진적 남북대화를 추구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반년이 지난 지금 남북관계는 어디까지 왔을까. 표면적으로는 거의 전진하지 못했다. 2월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의 여파로 남북관계도 꼼짝없이 발목이 잡혔기 때문이다. 강력한 대화론자인 김 장관마저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남북관계는 북미관계에 종속돼 있음을 실감케 한 지난 반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 장관의 측근들에 따르면, 김 장관은 북미관계와 남북관계가 답보 상태에 빠진 것을 놓고 사석에서 답답한 심경을 토로하곤 했다. 물론 김 장관은 지난 4월 8일 취임할 때 북미관계가 좋지 않은 상황을 의식한 듯 서두르지 않겠다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취임사에서 ‘임중도원’(맡겨진 일은 무겁고 길은 멀다)이라는 말을 인용했는데, 돌이켜 보면 지난 반년이 그의 말대로 된 셈이다. 아마 그 말을 한 김 장관 스스로도 교착상태가 이처럼 길어지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을 법하다. 물론 김 장관이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 통일부 차원에서 남북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는 아이디어들을 궁리해 냈다. 우선 대북 쌀 지원이다. 통일부는 지난 6월 대북 인도적 협력은 정치·안보 상황과 분리해 일관되게 추진해야 한다며 쌀 5만t 지원 계획을 발표했다. 김 장관으로서는 최선의 성의를 보인 셈이지만 북한은 8월 한미 연합 훈련이 그간의 합의사항에 어긋난다고 반발하며 쌀 수령을 거부했다. 결국 당초 전달 완료 목표 시점인 9월에도 절차에 착수하지 못한 상황이다.개성공단 기업인들의 개성 시설 점검 역시 정부에선 방북승인을 내줬지만 북한이 응답하지 않고 있다. 개성공단은 김 장관이 인사청문회에서 “언론 기고글에서 개성공단 중단에 대해 제재가 아니라 자해라고 한 바 있는데. 여전히 같은 생각이냐”라는 자유한국당 의원의 질문에 “그렇다”고 답할 정도로 강한 소신을 드러낸 분야이기도 하다. 또 통일부는 이산가족 화상상봉 시설 개·보수 공사까지 진행했지만 이산가족 상봉은 지난해 8월 이후 한 번도 열리지 않고 있다. 통일부 고위 관계자가 “앞으로 남북관계 활성화가 돼 질문이 폭주해 2시간쯤은 기자들에게 브리핑할 수 있길 기대한다”고 말할 정도로 답답한 상황이다. 남북대화가 막히자 김 장관은 각종 국내 강연 일정을 적극적으로 소화하고 있다. 실제 9월 공식일정 중 국회 출석 외엔 전북대 옴니버스 특강, 한민족공동체방안 30주년 기념행사 기념식 참석 등이 대부분이다. 이를 두고 통일부 장관을 역임한 정세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이 “지금 장관이 축사를 하고 다니는 것은 참 국가적 비극”이라고 힐난하기도 했다. 그나마 9·19 평양 선언 1주년 기념행사가 기대를 모았으나 아프리카돼지열병으로 축소 개최되는 불운을 맛봤다. 1년 전 이맘때 평양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고 개성에서 남북 공동연락사무소 개소식이 있었다는 점과 대조된다. 그러나 김 장관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 모습이다. 그는 19일 9·19 1주년 기념사에서 “북미 실무협상에서 좋은 성과가 나올 수 있도록 미국 측과 긴밀히 협력하고 남북 간 대화와 소통의 채널도 항상 열겠다”고 했다. 이달 말 재개될 것으로 예상되는 북미 실무대화에 대한 기대감을 내비친 것이다. 지금 김 장관의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이 들어 있을까. 그는 장관이 되기 전인 2018년 서울신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결국 한국의 역할은 내비게이터다. 어려운 고비가 오면 남북 관계가 북·미보다 한 발 정도 앞에 나가면서 해소 국면을 끌어낼 수 있다.” 서유미 기자 seoym@seoul.co.kr
  • ‘조국 사태’ 뒤 소모적 정쟁… 그 뒤엔 바뀌지 않은 친일파 세상

    ‘조국 사태’ 뒤 소모적 정쟁… 그 뒤엔 바뀌지 않은 친일파 세상

    조국으로 시작해서 조국으로 끝난 한 달여 시간을 보냈다. 전 국민이 조국 사태에 매달렸다. 그 상황의 중심에 정부 여당과 자유한국당의 적대적 대결이 존재했고 그 가운데 조국 사태가 있었다. 특이하고 낯선 광경이지만 비슷한 상황을 2년 내내 겪었다. 그러나 그 전인들 달랐으랴. 정치권의 후진적인 광경을 언제까지 봐주어야 할지 의문이다. 인류사회의 가장 오래된 질문은 싸움에 관한 것인데 한반도는 지난 200년 동안 원치 않는 싸움을 겪었다. 조선 후기의 농민반란과 동학혁명, 망국에 저항한 의병운동, 식민통치하에서의 독립운동과 전시동원 등 형극의 길을 걸었다. 동학혁명 후 자행된 대량 살육과 식민지 말기에 군국주의가 강요한 징병과 징용, 정신대와 위안부 등 전방위적인 수탈은 가혹한 고통이었다. 이 모든 상황이 독립으로 보상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해방된 조선은 역사로부터 배신당하고 강대국에게서 배신당했다. 조선이 좌파도 우파도 아닌 친일파에게 점거되면서 해방의 꿈은 사라졌다. 해방된 조선에서 친일파의 부활은 모든 환란의 원인이었고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이었다. 구약 말씀을 빌리면 ‘태초에 친일파가 있었다’. 해방으로 일본군은 물러갔지만 친일파로 인해 일본의 흔적은 지워지지 않았다. 제1공화국에서 지금의 제6공화국에 이르기까지 대통령은 거듭 바뀌었지만 친일파의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4월혁명으로 들어선 제2공화국이 군사쿠데타로 무너졌을 때 그 자리는 일본 육사를 나온 박정희가 차지했다. 일본군 장교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음지의 친일 권력은 양지로 확장됐다. 이 상황은 1960~70년대의 박정희 시대를 관통했고 박정희가 사라진 1980년대로 연장됐다. 1990년대에도 무늬만 바뀌었다. 그러므로 친일파 문제는 1945년 이전의 과거사가 아니라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현재진행형이며 반일종족주의로 드러난 식민지근대화론은 그 하나의 병증에 불과하다.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역사는 되풀이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그것도 비극적으로 되풀이된다. 그래서 역사청산에 거듭 실패했다. 1940년대에는 해방에도 불구하고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했다. 반민특위는 해산됐고 애국자가 학살되고 배제된 자리를 친일파가 채웠다. 1960년대에는 4월혁명에도 불구하고 제1공화국을 청산하지 못했다. 1980년대에는 전두환의 광주학살로 박정희를 청산하지 못했다. 1990년대에는 6월항쟁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시대를 청산하지 못했다. 그래도 역사는 발전했고 그 정점에 6월항쟁이 있다. 해방 후 정치는 6월항쟁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특히 정치변동의 경우 1987년 이전의 정변이 6월항쟁 후에는 대통령선거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승만 정권은 4월혁명으로, 장면 정권은 군사쿠데타로, 박정희 정권은 부마항쟁 직후 암살로, 전두환 정권은 6월항쟁으로 무너졌다. 모두가 정변이었다. 그러다가 6월항쟁으로 대통령직선제가 부활하면서 선거가 정치변동의 제도적 계기로 작동했다. 한 단계 질적 도약을 이룬 것이다. 1987년 6월항쟁은 1980년 광주항쟁의 좌절을 7년 만에 성공으로 복원해 낸 희망의 횃불이었고 한국 현대사의 거듭된 실패를 바로잡을 수 있는 황금 같은 기회였다. 그러나 6월항쟁으로 쟁취한 대통령직선제의 첫 번째 결과는 노태우 집권이었고, 두 번째 결과는 3당 합당이었다. 기대에 반하는 두 번의 실패로 전두환 독재는 사실상 살아남았다. 전두환뿐만 아니라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진 굴절된 현대사가 살아남았고, 부패 기득권 세력은 반성도 처벌도 없이 민주사회에 정착해 민주화의 혜택을 누렸다. 오늘날의 모순적인 정당체제, 언론체제, 재벌체제, 신앙체제, 교육체제가 그 미완성의 산물이며 소모적인 정치적 대결도 여기서 시작됐다. 돌이켜보면 정치적 민주화의 진전과 역사청산의 실패, 이 두 가지 언어의 모순적인 조합이 6월항쟁 이후 한국 정치의 갈등 구조를 만들었다. 민주주의 제도는 작동하지만 청산되지 못한 역사가 민주주의를 껍데기로 만드는 상황, 새로운 대한민국을 향한 열망은 간절하지만 친일파와 부패 기득권 세력이 압도하는 상황, 정의와 도덕을 향한 의지는 강하지만 불의와 부도덕이 판치는 세상, 이 둘 사이에서 벌어지는 끝없이 소모적인 대결, 이것이 민주화된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한국 정치는 이렇게 구조화된 역사사회적 대결 구조를 여의도 방식으로 지루하게 반복적으로 표출한다. 이것이 여의도 현실 정치의 민낯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다시 이명박·박근혜 시대를 청산하는 과제와 맞닥뜨려 있다. 이 과제는 지난 9년간의 국정 파탄을 정리하는 일이지만 그 속에 청산되지 못한 현대사가 오롯이 녹아 있다. 두 전직 대통령과 몇몇 측근이 구속됐지만, 중요한 것은 인신 구속이 아니라 나라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그러나 쉽지 않다. 정부와 정치권의 한계도 있지만, 역사청산에 반대하는 기득권의 저항이 만만치 않다. 탄핵 이전의 헌정 질서 문란과 탄핵 이후의 정치적 갈등 역시 그 저항의 일환이다. 대통령 탄핵 이후의 국회는 소란한 동물국회와 무능한 식물국회를 합친 동식물 합동국회로 전락해 버렸다. 삼권의 한 축인 국회에서는 모든 안건이 논란으로 비화하고, 논란은 저급하기 짝이 없고, 어떤 형태의 시시비비조차 가리지 못하고,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는 상태가 돼 버렸다. 국회는 가장 나쁜 사람들의 집합소인 양 타락해 버렸다. 국회가 실종되고 삼권분립체제가 무너진 상황이다. 그 근저에 친일파가 있고 친일파에서 변신을 거듭해 오늘에 이른 부패 기득권 세력이 있다. 친일파는 해방 정국에서는 반공주의자로, 군사쿠데타 후에는 경제역군으로, 6월항쟁 후에는 자칭 산업화 주역으로 변신을 거듭했다. 그러나 그 뿌리가 친일파이고 근본 속성이 부패 기득권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민주화 과정에서 친일 전력과 부패 문제가 불거지자 이들은 반공안보 논리에 기대어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민주화가 부패 기득권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싸움은 추상적 이념 대결이나 단순한 정책 대결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미래상을 만들어 가는 본질적인 과정이다. 결국 현대사의 누적된 이 갈등 구조를 해결해야 하는데, 그 방식이 역사적 대결일지 역사적 타협일지를 결정해야 할 양자택일의 임계점에 도달했다. 지금까지는 묵인과 지연이 용납됐지만, 더이상은 어려운 상황이다. 지금과 같이 소모적인 정파적 대결이 계속되면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도 없고 장차 나라의 미래가 위협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들도 저급한 정파적 대결을 더이상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이 국면에서 역사적 대결론은 확실한 역사청산을 통해서 현대사를 바로잡고 그것으로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하자는 것이다. 역사적 타협론은 부패 기득권 세력이 역사적 과오를 시인하고 우리 사회가 그 반성을 수용하는 방식으로 공존을 모색하자는 것이다. 어느 경로를 선택하든 내년 국회의원 총선거와 그 후의 대통령선거가 역사청산의 마지막 계기가 될 것이다. 바로 이 역사의 전환기 국면에서 촛불이 혁명으로 발전했고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촛불은 과거를 태워 미래를 밝힌다. 촛불혁명은 30년 전 거세게 타올랐던 6월항쟁의 횃불을 계승해 6월항쟁의 미완성 의지를 복원하기 위한 혁명으로 자리잡았다. 촛불혁명은 부패 권력의 국정농단에 대한 저항이라는 1단계 현재시제를 표상하지만 아울러 6월항쟁이 이루지 못한 역사청산의 최종적인 종결을 지향하는 과거완료형인 동시에 조만간 다가올 통일된 대한민국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미래완료형으로서 과거와 미래까지 함축한다. 새로운 대한민국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그 2단계와 3단계를 기대한다. 상지대 총장
  • 조국 법무장관 “검찰 조직 문화·근무평정 제도 개선” 지시

    조국 법무장관 “검찰 조직 문화·근무평정 제도 개선” 지시

    조국 법무부 장관이 검찰의 고질적인 병폐 중 하나인 상명하복식 조직 문화를 바꾸기 위해 검사에 대한 지도 방법 및 근무평정 제도를 전반적으로 재검토할 것을 지시했다. 조국 장관은 “검찰 조직 문화 및 근무평정 제도 개선에 대한 검찰 구성원의 의견을 듣는 등 구체적 개선 방안을 마련해 시행하라”고 법무부 검찰국과 검찰개혁 추진 지원단에 지시했다고 법무부가 16일 밝혔다. 법무부 검찰국은 검사 인사권으로 전국 검찰청을 지휘·감독한다. 또 전국 검찰청의 주요사건 수사 진행 상황을 들여다볼 수 있는 요직 중 한 곳이다. 앞서 조 장관은 2016년 당시 김대현 서울남부지검 부장검사로부터의 상습적인 폭언과 과도한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 김홍영 검사의 묘소를 지난 14일 참배했다. 조 장관은 고인의 묘소에 참배한 뒤 “부하 교육 차원이라고 볼 수 없는 (상급자의) 비위 행위로 비극이 발생했다”면서 “향후 검찰 조직 문화, 검사 교육 및 승진 제도를 제대로 바꿔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아야 고인의 죽음은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조 장관은 이달 안에 직접 검사와 검찰청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을 만나 의견을 듣는 자리를 만들 계획이다. 또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는 전국의 검사와 직원들도 자유롭게 의견을 밝힐 수 있도록 온라인을 통한 의견 청취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조 장관은 또 “법무·검찰 개혁이 국민을 위해, 국민과 함께 이뤄질 수 있도록 온라인 등으로 국민 제안을 받는 방안을 시행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국민 제안을 활성화하기 위해 대국민 홍보를 하고, 접수된 의견을 곧 출범할 제2기 법무·검찰개혁위원회에 안건으로 상정하는 등 제도 개선에 적극 반영할 것을 주문했다고 법무부는 전했다. 앞서 조 장관은 특수부(정치인과 경제인의 비리 사건을 수사하는 부서)를 중심으로 한 검찰의 직접수사를 축소하는 방안을 만들 것을 지시하고 검사에 대한 감찰 활동을 강화하기로 했다. 검찰의 직접수사 축소는 윤석열 검찰총장도 국회 인사청문회에서의 답변을 통해 동의한 방향이다. 조 장관은 “검사의 비리 및 위법사항에 대해서는 더 엄정한 기준을 적용해야만 지금까지의 관행과 구태를 혁파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면서 “공석인 대검찰청 감찰본부장의 임명 절차를 신속히 마무리할 것”을 지시했다고 법무부는 지난 11일 밝혔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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