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비극
    2026-04-11
    검색기록 지우기
  • 보수세
    2026-04-11
    검색기록 지우기
  • 주의보
    2026-04-11
    검색기록 지우기
  • 동해상
    2026-04-11
    검색기록 지우기
  • 언제
    2026-04-11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2,888
  • 여가부 장관 “위안부 할머니 증언에 화답할 것…생존자 지원은 최소영역”

    여가부 장관 “위안부 할머니 증언에 화답할 것…생존자 지원은 최소영역”

    이정옥 여성가족부 장관은 14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맞아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증언에 ‘의지의 기억’으로 화답하겠다”고 밝혔다. 이 장관은 이날 오전 충남 천안 국립망향의동산에서 열린 기림의날 기념식에 참석해 1991년 위안부 피해를 최초 고백한 김학순 할머니를 언급하며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은 역사의 시계를 돌리는 기폭제가 됐다”고 말했다. 이어 “‘증언’은 짐작은 했지만 외면했던 진실, 전쟁이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라면서 “할머니의 증언은 국내외에서 수많은 응답을 만들어 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할머니 자신도 소녀로 다시 태어났고 피해자에서 활동가로 변화했다”고 언급했다. 이 장관은 1992년부터 시작한 정기 수요집회를 거론하면서 “활동가가 된 할머니들은 일반인들에게 성폭력 피해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고 말했다. 이어 “정부도 1993년부터 생활안정금을 지원해 왔다”면서 “남은 17분의 생활안정, 맞춤형 치료는 국가책임의 최소영역”이라고 강조했다. 이 장관은 아울러 “돌아가신 분은 물론 생존피해자들 중에 과거를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요구를 하는 분들도 계시다”면서 “그분들의 존엄을 위해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책무가 있다”고 말했다. 또 “이제는 숨을 고르고 역사의 비극 속에서 무엇을 건져낼지 고민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 장관은 “영면하신 피해 할머니들께서도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길 기원한다”는 말로 기념사를 맺었다. 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 베이루트 폭발 순간 태어난 아기…모성애가 낳은 기적 (영상)

    베이루트 폭발 순간 태어난 아기…모성애가 낳은 기적 (영상)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순간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은 산모와 그런 산모 곁을 끝까지 지킨 의료진이 비극 속에서 기적을 건져냈다. 12일(현지시간) 아랍뉴스는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낸 베이루트 폭발 당시, 폐허가 된 병원에서 태어난 새 생명의 이야기를 전했다. 지난 4일, 엠마뉴엘 네이서는 레바논 베이루트 세인트조지병원에서 곧 태어날 아기와의 만남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남편 에드먼드 네이서도 한껏 기대에 부풀어 분만실 앞을 서성였다. 출산 전 과정을 기록하려 카메라도 손에 꼭 쥐었다. 드디어 엠마뉴엘이 분만실로 들어갔다. 그 순간, 커다란 소음과 함께 폭발이 발생했다. 남편 에드먼드는 “아내와 의료진이 분만실로 들어가고 10초 후 폭발이 일어났다”고 설명했다. 분만실 유리는 산산조각이나 산모와 의료진을 덮쳤고 의료도구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베이루트 항구 창고에 보관돼 있던 질산암모늄 2750t이 한꺼번에 폭발한 순간이었다. 끔찍한 비명이 이어졌다. 병원 안도, 밖도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하지만 아기는 세상 밖으로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엠마뉴엘은 “아기를 살려야 했다. 엄마인 내가 강해져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고 말했다. 의료진도 숨을 가다듬었다. 분만에 참여한 의사 중 한 명인 스테파니 야코브 박사는 “창 밖을 내다보니 온통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뿐이었다. 어디서 일어난 폭발인지, 폭발이 또 있을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었다”고 말했다.해는 졌는데 전기는 끊겼고 분만실은 난장판이 됐다. 의료장비도 모두 파손된 최악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아기를 살려야 했다. 산모를 복도로 옮긴 의료진은 휴대전화 불빛에 의존해 분만을 이어갔다. 그사이 폭발 충격으로 간호사 한 명이 사망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에드먼드는 “폭발 후 1시간 30분이 지났을 무렵 아들이 태어났다. 폭발 잔해 속에서 태어난 새 생명이고, 어둠 속의 빛”이라고 감격스러워했다. 간호사 1명 등 17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다친 비극 속에서, 끝까지 아기를 포기하지 않은 모성애와 의료진의 사명감이 만들어낸 기적이었다.로이터통신은 12일 산모와 아기 모두 건강한 상태로 퇴원해 집으로 돌아갔으며, 아기 이름은 태어난 병원 이름을 따 조지로 정해졌다고 보도했다. 베이루트에서는 4일 항구 창고에 보관돼있던 다량의 질산암모늄이 폭발해 최소 171명이 사망하고 6000여 명이 다쳤다. 30만 명은 이재민 신세가 됐다. 전기와 수도가 끊겼고 의료시설 절반이 파괴됐다. 재산 피해 규모만 150억 달러(약 17조8200억 원)로 추산된다. 권윤희 기자 heeya@seoul.co.kr
  • [여기는 중국] ‘황혼 비극’…85세 아내가 81세 남편 살해한 이유

    [여기는 중국] ‘황혼 비극’…85세 아내가 81세 남편 살해한 이유

    남편의 계속된 폭력에 지친 85세 아내가 81세 남편을 사망케 한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해 6월 22일 중국 장쑤성 화이안시 화이안구의 주택가에서 황혼의 노부부가 부부 싸움 중 남편이 살해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63년 동안 혼인 생활을 유지해 오면서 노년에 이른 노부부가 떠들썩한 살인 사건의 주인공으로 알려졌다. 당시 자신의 거주지 방 안에서 다량의 피를 흘린 채 발견된 남성은 81세 우 모 씨로 잔인한 살인 사건의 살해범이 함께 살던 85세의 아내였다는 점에 이목이 집중됐다. 우 씨의 주요 사인은 과다출혈이었다.장쑤성 화이안시 관할 법원은 피고인 디 모 씨가 고의로 남편을 사망에 이르게 한 것으로 보고 유기징역 10년을 판결했다고 12일 이 같이 밝혔다. 법원은 지난해 6월 22일 말다툼을 벌이던 중 우 씨가 아내 디 씨를 집 밖으로 내쫓은 뒤 문을 잠가버리자 이에 격분한 아내가 1층 창문으로 집 안에 진입, 격렬한 몸 싸움이 이어졌다고 밝혔다. 몸싸움 중 남편 우 씨가 시멘트 벽면에 머리를 부딪친 후 의식을 잃자 디 씨는 남편을 집 안에 방치한 혐의다. 사건 현장에서 그대로 방치됐던 우 씨는 과다출혈로 현장에서 사망했다. 남편 우 씨가 사망하자 아내 디 씨는 지인들에게 해당 사건의 진위에 대해 알리고 자수 여부를 고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사건이 발생한 이튿날 오후 피고 디 씨는 지인들과 함께 인근 관할 파출소를 찾아가 자수했다. 당시 파출소를 함께 찾았던 이웃들은 두 사람이 평소 자주 몸싸움을 하는 등 갈등이 잦았다고 증언했다. 이웃 주민 진 씨는 “사망한 우 씨와 디 씨 할머니는 평소 술에 취한 남편 탓에 자주 말다툼을 이어갔다”면서 “부부 싸움이 있을 때마다 나무 막대기로 폭력을 휘두르는 등 이웃 주민들이 두 사람의 부부 싸움을 다 알고 있을 정도로 폭력적인 성향이 짙었다는 기억이 난다”고 진술했다.실제로 우 씨가 사망하기 3년 전 부부 싸움 도중 농약을 마시고 자해를 시도했던 디 씨는 당시 긴급 출동한 구조대에 의해 응급처치를 받고 회복됐던 바 있다. 관할 공안국은 이번 사건과 관련해 피고 디 씨에게 징역 10년을 선고, 현장에 방치됐던 흉기 등을 모두 수거했다고 밝혔다. 특히 관할 법원 측은 디 씨가 고의로 남편 우 씨를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점에서 고의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디 씨가 고령이라는 점에서 징역 형량을 낮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제기됐다. 더욱이 디 씨가 사건 직후 스스로 파출소를 찾아가 자수, 범죄 사실 일체를 자백했다는 점에서 중징계를 면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 같은 지적에 대해 장쑤성 화이안시 화이안구 관할 법원은 부부 싸움 직후 남편 우 씨가 다량의 피를 흘리고 의식을 잃었을 당시 구조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했던 점을 지적, 이를 방치해 사망에 이르게 한 것은 명백한 살인이라고 중징계의 이유를 설명했다. 임지연 베이징(중국) 통신원 cci2006@naver.com
  • 폭우 피하다 숨진 8살… “오뎅탕” 조롱한 일베

    폭우 피하다 숨진 8살… “오뎅탕” 조롱한 일베

    침수 주택에서 대피하던 8살 어린이가 숨진 채 발견된 비극적인 사건을 두고 지역비하 표현으로 조롱한 일간베스트 회원을 경찰이 쫓고 있다. 광주지방경찰청은 최근 광주·전남 지역 홍수 피해자를 조롱하는 게시물이 다수 올라온 것과 관련해 내사에 착수했다고 11일 밝혔다. 전남도가 밝힌 집중호우 피해상황보고에 따르면 지난 5일부터 9일까지 지역의 인명피해는 10명, 이재민은 3187명으로 집계됐다. 특히 8일에는 전남 담양군에서 침수된 집을 빠져나와 대피소로 가던 A(8)군이 불어난 물에 휩쓸려 결국 숨진 채 발견되는 안타까운 사고가 있었다. 극우성향 커뮤니티로 여러 논란이 있었던 일간베스트의 한 회원은 이를 ‘오뎅탕 맛집’ ‘갓 잡은 새끼 홍어’라며 비아냥댔다.이 게시물을 올린 일베 회원은 광주 납골당의 침수 피해 소식에는 ‘죽어서도 벌받는다’ ‘미숫가루’라는 글도 올렸다. 장시간 노출된 문제의 게시물들은 논란이 되자 삭제됐다. 일베에는 호남 지역을 비하하는 게시물들이 끊임없이 올라왔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전남담양폭우 희생된 8살아이에 오뎅탕이라는 일베유저 엄벌요구합니다’라는 게시물이 올라왔다. 청원인은 “폭우로 전라도뿐 아니라 전국이 많이 힘든 상황에서 재난이 쓸고 간 자리를 축제라도 되는 양 지역감정이라는 망국적인 식칼로 난도질하고 있다”면서 “삶이 부서진 피해자들을 두번 세번 죽이는 인간이하의 집단을 대대적으로 수사해 더 이상 대한민국에 지역감정조장, 지역비하가 발붙일 수 없도록 조치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68가구 철원 이길리의 비극… “마을 통째 옮겨 달라”

    68가구 철원 이길리의 비극… “마을 통째 옮겨 달라”

    “정든 마을이지만 물난리에 이제 지쳐”주민 141명 중 90% 이상 이주에 찬성철원군 “이전 부지·비용 지원하겠다”“비만 왔다 하면 집이고 세간살이고 남아나는 게 없습니다. 상습 수해지역인 철원 이길리 마을 전체를 이주시켜 주세요.” 11일 49일째 장맛비가 계속되는 가운데 집중호우로 마을 전체가 물속에 잠겼던 강원 철원군 동송읍 이길리 주민들이 마을을 ‘통’으로 이주해 줄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길리는 지척에 한탄강과 철원평야를 끼고 있는 68가구 주민 141명의 작은 농촌마을이다. 마을은 1979년 북한의 오성산에서 관측되는 곳에 주택을 지으려는 당시 정부의 전략촌 정책에 따라 하천가에 건설됐다. 하지만 마을이 한탄강 강둑보다 4~5m 낮은 곳에 건설되면서 입주 당시부터 주민들이 수해를 입을 수 있다고 문제 제기를 했지만 묵살됐다. 그 결과 이길리는 장마가 오거나 태풍이 불면 어김없이 마을이 물에 잠겼다. 과거에도 수해가 발생하면 마을을 옮겨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이번처럼 많은 주민 입에서 나온 적은 없었다. 김종연(54) 이길리 이장은 “마을이 하천변 저지대에 있어 해마다 크고 작은 수해가 발생하고 있고, 1996년과 1999년에 이어 이번 집중호우까지 벌써 세 번째 마을 전체가 침수되는 피해를 입었다”며 “이번 피해를 마지막으로 마을 전체를 이전하는 방안이 힘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수해 이튿날인 지난 4일에는 이장, 반장 등 주민대표 12명이 마을 언덕의 안전지대에 모여 마을 이전을 집중 논의했다. 이후 대피소에 모여 있던 주민들에게 마을 이전에 대한 찬반 설문을 한 결과 90% 이상이 이전에 찬성했다. 마을 주민 이창민(81)씨는 “40년 넘게 땀 흘리며 일궈 온 정든 마을이지만 해마다 물난리를 겪는 데도 이제는 지쳤다”면서 “이번 침수를 끝으로 마을 사람들이 마음 놓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마을 전체가 안전지대로 이전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이전 장소로 현재 마을에서 동북쪽으로 800~1000m 떨어진 야산 기슭을 꼽고 있다. 주민들은 마을 이전 작업이 정부 주도로 이뤄지길 기대하고 있다. 이길리의 한 주민은 “대부분의 주민이 이주 능력이 없는 60대 이상”이라면서 “정부 정책에 의해 만들어진 마을인 만큼 이주에도 정부와 지자체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어야 한다”고 하소연했다. 강원도와 철원군도 마을 이전에 긍정적이다. 임태석 철원군 홍보계장은 “이전 부지와 비용 등이 구체적으로 거론되면 주민들이 원하는 집단 이주를 적극적으로 지원한다는 것이 군의 입장”이라고 말했다. 최문순 강원도지사도 지난 6일 이길리 마을을 찾아 “철원군과 협의해 주민들을 이주시킬 수 있는지, 근본적인 대책은 없는지 모색하겠다”고 밝혔다. 철원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세 번째 침수 68가구 철원 이길리의 비극… “마을 통째 옮겨 달라”

    세 번째 침수 68가구 철원 이길리의 비극… “마을 통째 옮겨 달라”

    “비만 왔다 하면 집이고 세간살이고 남아나는 게 없습니다. 상습 수해지역인 철원 이길리 마을 전체를 이주시켜 주세요.” 11일 49일째 장맛비가 계속되는 가운데 집중호우로 마을 전체가 물속에 잠겼던 강원 철원군 동송읍 이길리 주민들이 마을을 ‘통’으로 이주해 줄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길리는 지척에 한탄강과 철원평야를 끼고 있는 68가구 주민 141명의 작은 농촌마을이다. 마을은 1979년 북한의 오성산에서 관측되는 곳에 주택을 지으려는 당시 정부의 전략촌 정책에 따라 하천가에 건설됐다. 하지만 마을이 한탄강 강둑보다 4~5m 낮은 곳에 건설되면서 입주 당시부터 주민들이 수해를 입을 수 있다고 문제 제기를 했지만 묵살됐다. 그 결과 이길리는 장마가 오거나 태풍이 불면 어김없이 마을이 물에 잠겼다. 과거에도 수해가 발생하면 마을을 옮겨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이번처럼 많은 주민 입에서 나온 적은 없었다. 김종연(54) 이길리 이장은 “마을이 하천변 저지대에 있어 해마다 크고 작은 수해가 발생하고 있고, 1996년과 1999년에 이어 이번 집중호우까지 벌써 세 번째 마을 전체가 침수되는 피해를 입었다”며 “이번 피해를 마지막으로 마을 전체를 이전하는 방안이 힘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수해 이튿날인 지난 4일에는 이장, 반장 등 주민대표 12명이 마을 언덕의 안전지대에 모여 마을 이전을 집중 논의했다. 이후 대피소에 모여 있던 주민들에게 마을 이전에 대한 찬반 설문을 한 결과 90% 이상이 이전에 찬성했다. 마을 주민 이창민(81)씨는 “40년 넘게 땀 흘리며 일궈 온 정든 마을이지만 해마다 물난리를 겪는 데도 이제는 지쳤다”면서 “이번 침수를 끝으로 마을 사람들이 마음 놓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마을 전체가 안전지대로 이전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이전 장소로 현재 마을에서 동북쪽으로 800~1000m 떨어진 야산 기슭을 꼽고 있다. 주민들은 마을 이전 작업이 정부 주도로 이뤄지길 기대하고 있다. 이길리의 한 주민은 “대부분의 주민이 이주 능력이 없는 60대 이상”이라면서 “정부 정책에 의해 만들어진 마을인 만큼 이주에도 정부와 지자체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어야 한다”고 하소연했다. 강원도와 철원군도 마을 이전에 긍정적이다. 임태석 철원군 홍보계장은 “이전 부지와 비용 등이 구체적으로 거론되면 주민들이 원하는 집단 이주를 적극적으로 지원한다는 것이 군의 입장”이라고 말했다. 최문순 강원도지사도 지난 6일 이길리 마을을 찾아 “철원군과 협의해 주민들을 이주시킬 수 있는지, 근본적인 대책은 없는지 모색하겠다”고 밝혔다. 철원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베이루트 참사 현장 배경으로 ‘기념 사진’…무개념 커플 논란

    베이루트 참사 현장 배경으로 ‘기념 사진’…무개념 커플 논란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서 발생한 대형폭발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가운데 이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 무개념 커플이 목격돼 비난에 휩싸였다. 지난 10일(현지시간) 미국 폭스뉴스 등 외신은 베이루트 폭발 현장 인근 다리에서 사고지역을 배경삼아 사진을 찍은 커플이 논란이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유럽 보도사진통신사인 EPA 기자가 포착해 전세계에 보도된 이 사진은 지난 9일 폭발 현장인 베이루트 항구가 잘 보이는 인근 다리 위에서 촬영된 것이다. 사진을 보면 다소 선정적인 옷차림을 한 여성 관광객이 참사현장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보도에 따르면 이 여성과 함께 한 남성 역시 반바지 차림으로 이곳을 찾아 기념사진을 촬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외신은 이 커플의 국적이 어디인지,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에 올리기 위해 이같은 사진을 촬영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전했다.현지 언론은 "이 커플의 행동에 주위에 있던 현지인들도 황당해했다"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고 쓰러진 비극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과거 아우슈비츠,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배경으로 환하게 웃는 셀카를 찍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덧붙였다. 한편 지난 4일 베이루트 항구 창고에서 발생한 폭발사고로 현재까지 220명이 사망하고 6000여 명이 다쳤다. 레바논 정부는 베이루트 항구 창고에 6년 전부터 보관된 인화성 물질인 질산암모늄 약 2750t이 폭발한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폭발사고로 인한 국민적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10일 레바논 내각은 총사퇴를 발표했다. 이날 하산 디아브 레바논 총리는 대국민 연설에서 “우리는 대규모 참사를 맞았다”며 “베이루트 폭발은 고질적인 부패의 결과”라고 밝혔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친박 윤상현 “국민통합은 박근혜 사면으로부터” 호소

    친박 윤상현 “국민통합은 박근혜 사면으로부터” 호소

    과거 박근혜 전 대통령을 ‘누나’라고 불렀다는 얘기가 있을 만큼 친박계 핵심으로 꼽히는 무소속 윤상현 의원은 11일 박 전 대통령의 사면을 요청했다. 윤상현 의원은 이날 페이스북에 “관용의 리더십은 광화문 광장을 ‘분열의 상징’에서 ‘통합의 상징’으로 승화시키는 것이고, 그 첩경은 박근혜 전 대통령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며 “그것을 해결할 분은 문재인 대통령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는 8.15 광복절에는 ‘분열의 상징’으로 변해 버린 광화문 광장을 ‘국민통합의 상징’으로 복원 시켜 주시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윤 의원은 “박 전 대통령이 감당한 형틀은 정치적, 인도적으로 지극히 무거웠다. 이미 역대 대통령 중 가장 긴 40개월째 수감생활을 이어오고 있다”고 강조했다. 윤 의원은 “국민통합의 리더십을 몸소 실천한 세종대왕 동상 앞이 국민 분열의 상징이 되어버린 비극적 모순을 이제는 종결해야 한다”며 “용서와 화해만이 촛불과 태극기를 더 이상 ‘적’이 아닌 ‘우리’로 만들 수 있다”고 덧붙였다. 윤상현 의원은 2012년 18대 대통령 선거 후보 박근혜의 경선 공보단장 및 수행총괄단장 등 직책을 맡았다. 박근혜 정부 출범 후인 지난 2013년 6월부터 1년간 원내수석을 역임하면서 ‘일요일의 남자’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으며 2015년에는 청와대 정무 특보를 지냈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레바논 내각 물러났지만…“2주 후엔 빵도 바닥난다”(종합)

    레바논 내각 물러났지만…“2주 후엔 빵도 바닥난다”(종합)

    하산 디아브 레바논 총리는 10일(현지시간) 텔레비전으로 방송된 대국민 연설에서 베이루트 폭발 참사와 관련해 내각의 총사퇴를 발표했다. 지난 1월 이슬람 시아파 정파 헤즈볼라의 지지를 얻어 출범한 내각은 7개월 만에 좌초하게 됐다. 미셸 아운 레바논 대통령은 새 총리 지명을 위해 의회와 협의에 나설 전망이다. 디아브 총리는 “우리는 대규모 참사를 맞았다. 베이루트 폭발은 고질적인 부패의 결과”라면서 “국가를 구하려고 노력했지만 부패 시스템이 컸다”고 말했다. 앞서 지난 4일 베이루트에서는 대형폭발이 발생한 뒤 160여명이 숨지고 6000여명이 다쳤다. 레바논 정부는 베이루트 항구 창고에 6년 전부터 보관된 인화성 물질 질산암모늄 약 2750t이 폭발한 것으로 보고 있다. 정부 관료들이 위험한 질산암모늄을 베이루트 도심과 가까운 곳에 사실상 방치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레바논은 막대한 국가부채와 높은 실업률, 물가 상승, 레바논 파운드화 가치 하락 등으로 경제 위기가 매우 심각하다. 지난 8∼9일 베이루트 도심에서는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8일에는 대규모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 과정에서 경찰 1명이 숨지고 시위 참가자 및 경찰 230여명이 다쳤다. 9일부터 장관 4명이 잇달아 사임 의사를 밝혔다. 총리가 내각 총사퇴를 발표한 이날 역시 베이루트 도심의 국회 건물 주변 등에서 시민 수백명이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고 경찰과 시위대의 물리적 충돌이 빚어졌다.기독교 대통령·이슬람 총리…독특한 정치구조 시위 참가자 앤서니 하셈은 현지 언론에 “내각 총사퇴는 우리가 원하는 최소한의 것”이라며 기득권을 타파하는 근본적인 정치 개혁을 요구했다. 지중해 연안 국가 레바논은 이슬람교 수니파 및 시아파, 기독교 마론파 등 18개 종파를 반영한 독특한 정치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명목상 대통령제(임기 6년의 단임제)이지만 총리가 실권을 쥐는 내각제에 가깝다. 종파 간 세력 균형을 위해 대통령은 마론파 기독교, 총리는 이슬람 수니파, 국회의장은 이슬람 시아파 출신이 각각 맡는 게 원칙이다. 이런 권력안배 원칙은 종파 및 정파간 갈등과 정치적 비효율성을 초래한다는 지적을 받는다.유엔 “2주 반 지나면 빵도 바닥난다” 유엔은 데이비드 비즐리 세계식량계획(WFP) 사무총장은 이날 유엔 회원국들을 대상으로 열린 레바논 상황에 관한 원격 브리핑에서 2주 반 안에 레바논에서 빵이 다 떨어질 수 있다는 점을 “매우 매우 우려한다”고 말했다고 AP통신이 보도했다. 폭발 참사로 망가진 베이루트항이 레바논 곡물 수입의 85%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즐리 사무총장은 “2주 안에 1만7500t의 밀가루를 실은 배가 베이루트에 도착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모든 레바논 국민의 식탁에 빵을 올려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30일치인 3만t의 밀을 가져와야 하고, 그다음에는 60일치인 10만t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마크 로콕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 사무국장은 “신속하고 광범위한 인도주의적 대응은 이번 비극에 대한 3단계 대처 중 첫번째 단계일 뿐”이라고 말했다.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몽골에 ‘항일 병원’ 개원… 독립운동자금·의열단 지원한 애국지사

    몽골에 ‘항일 병원’ 개원… 독립운동자금·의열단 지원한 애국지사

    현실과 타협해 안주할 수 있는 전문직인 의사들 중에도 독립운동에 뛰어든 이들이 많다.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아 포상을 받은 의사 또는 의대 재학생은 70여명이며 포상을 받지 못한 이들을 포함하면 150여명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고 한다(‘일제시기 한국 의사들의 독립운동’, 의사학(醫史學) 통권 33호). 1908년 배출된 세브란스의학교 1기 졸업생 7명 가운데 김필순, 박서양, 주현측, 신창희 등 대부분이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김마리아의 숙부로 안창호와 의형제를 맺은 김필순은 서간도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박서양은 대한국민회 군사령부의 군의(軍醫)였다. 대한의원 부속의학교 학생이었던 오복원과 김용문은 이재명 의사와 함께 이완용 처단에 가담해 각각 징역 10년형과 7년형을 받았다.‘몽골의 슈바이처’, ‘신의’(神醫)로 불리는 이태준도 빼놓을 수 없다. 세브란스의학교 2회 졸업생으로 김필순의 후배인 이태준은 몽골에 병원을 세워 의술을 베풀고 독립운동에 깊숙이 관여한 인물이다. 지난달 17일 경남 함안군 군북면에서는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이태준의 고향인 군북면에 ‘이태준 기념관’을 짓는 첫 삽을 뜬 것이다. 기념관은 이태준 서거 100년이 되는 내년 1월 완공된다. ●고향 군북면에 ‘이태준 기념관’ 내년 개관 이태준 선생은 1883년 11월 21일 함안군 군북면 명관리에서 출생했다. 위쪽으로 경전선 철도가 지나가는 백이산의 서쪽 자락이 명관리인데 선생의 생가터는 명관저수지에 수몰돼 있다. 이태준은 일찍 결혼해 두 딸을 낳았는데 첫 부인 안위지는 둘째 딸을 낳고 사망했다. 두 딸은 동생 이태식이 길렀다. 한학을 배운 선생은 20대 초반에 상경해 24세 때인 1907년 10월 세브란스의학교에 입학했다. 상경과 입학 과정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기독교 선교사의 도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선생은 재학 시절 도산 안창호를 만났다. 안창호는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 의거 후 일제에 체포됐다가 이듬해 2월 석방돼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있었다. 안창호는 선생의 구국 의지를 알아보고는 신민회의 자매단체인 청년학우회에 가입하도록 소개했다. 그러는 사이 나라는 일제에 넘어갔다. 선생은 1911년 6월 학교를 졸업하고 세브란스병원에서 의사로 일했다.1912년 초 선생은 중국으로 망명했다. 망명 동기는 중국 난징으로 간 직후 미국에 있던 안창호에게 보낸 1912년 7월 16일자 편지에 밝히고 있다. 날로 심해지는 일제의 탄압에 분개하던 차에 1911년 10월 발발한 중국의 신해혁명에 크게 감동했다는 것이다. 선배이자 스승인 김필순의 영향도 컸다.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에 걸려든 김필순이 먼저 탈출하고 선생은 상황을 봐 가면서 뒤따라 결행하기로 했다. 1911년 마지막 날 김필순은 신의주 세브란스분원에 출장 간다며 경의선 열차에 올랐다. 여동생 김순애가 동행했는데 김순애는 후일 이태준과 몽골로 함께 간 독립운동가 김규식과 결혼한다. 김필순을 배웅하고 병원으로 돌아온 이태준은 뜻밖에도 자신이 중국으로 갈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있음을 알고 황급히 기차를 타고 망명길에 올랐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난징에서 힘든 나날을 보내던 선생은 중국인 기독교도의 도움으로 기독회의원 의사로 취직했다. 김필순은 서간도에서 병원을 열어 독립군 군의관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했는데 1919년 사망하기 전 선생과 만났다는 기록은 없다. 1912년 중반 선생은 한인 유학생들과 교류하며 어떻게 독립운동에 나설지 고심했다. 선생의 선택은 몽골이었다. 이는 김필순의 매제인 김규식의 권유 때문이었다. 미국 프린스턴대학에 유학하고 귀국해 연희전문학교 교수 등을 하던 김규식이 국내를 탈출해 중국 상하이에 도착한 것은 1913년 중반이었다. 김규식은 신해혁명에 자극을 받아 몽골에 비밀군관학교를 설립할 작정이었다. 선생은 김규식과 1914년 무렵 몽골 수도인 고륜(庫倫·현 울란바토르)으로 갔다. 후일 비행사가 되는 서왈보라는 애국청년도 동행했다. 그러나 세 사람의 계획은 국내 지하조직에서 약속한 자금이 도착하지 않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해 가을 김규식은 피혁 판매업을 시작했고 선생은 고륜에 동의의국(同義醫局)이라는 병원을 열었다. ‘같은 뜻’이라는 병원 이름에서도 선생의 항일의식을 읽을 수 있다. 몽골을 떠난 김규식은 1918년 5월 앤더슨 마이어 회사의 울란바토르 지점장이 돼 고륜으로 다시 올 때 사촌 여동생 김은식과 함께 왔고 선생은 김은식과 결혼했다.●몽골 보그드칸 어의돼 최고등급 ‘국가 훈장’ 당시 몽골인들 사이에는 성병이 번져 70~80%가 감염돼 있었다. 선생은 특히 몽골인들의 성병 퇴치에 큰 공을 세웠다. 미신적 치료법밖에 모르던 몽골인들에게 근대 의술을 펼친 선생은 신과 같은 존경을 받았다. ‘까우리(고려) 의사’ 이태준을 모르는 몽골인이 없을 정도였고 ‘신인’(神人)이나 ‘여래불’(如來佛)로 불렸다(여운형, ‘몽고사막 여행기’). 선생은 왕궁의 두터운 신임도 얻어 몽골 활불(活佛), 즉 몽골 왕 보그드 칸의 어의(御醫)가 됐다. 1919년 7월 보그드 칸은 이태준에게 최고 등급의 국가훈장을 수여했다. ●상하이 임시정부 군의관 감무로도 활동 이태준은 독립운동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하고 지원했다. 번 돈의 대부분을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썼고 고륜을 오가는 애국지사들에게 숙식과 교통을 비롯한 갖은 편의를 제공했다. 그의 병원과 집은 하루에 사오십 명의 독립운동가들이 묵기도 한 연락처 겸 거점이었다. 김규식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파견될 때 당시로서는 거액인 2000원을 지원한 것도 선생이었다. 선생은 상하이 임시정부의 군의관 감무(監務)로도 활약했다. 한인사회당이 소비에트 정부에서 받은 40만 루블어치의 금괴 운송에 선생이 깊숙이 관여한 일도 주목할 만하다. 선생은 한인사회당의 비밀연락원이었다. 40만 루블의 1차분인 8만 루블에 해당하는 금괴를 선생과 김립은 1920년 초겨울 고륜에서 상하이까지 성공적으로 운반했다. 무게가 수백㎏이었다고 하니 들키거나 도둑맞지 않고 옮기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금괴 운반을 마친 선생은 베이징에서 의열단장인 김원봉을 만나 자신의 차량 운전사이던 폭탄제조 기술자 마자르를 소개했다. 헝가리인 마자르는 선생이 죽은 후 의열단에 폭탄 제조법을 알려주었다. 마자르의 폭탄 제조법 전수는 의열단 거사의 큰 전환점이 됐다.선생은 러시아 백위파 운게른 부대가 고륜을 점령한 1921년 2월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3000여명의 대원을 거느린 운게른은 러시아혁명군에 쫓겨 몽골로 들어온 잔혹한 성격의 인물이었다. 운게른은 중국군을 몰아내고 대대적인 약탈과 살육을 자행했다. 운게른 부대의 일본인 장교들은 선생을 체포해 처형하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선생은 고륜을 빠져나와 상하이로 가던 도중 붙잡혀 고륜으로 끌려가 잔인하게 처형당했다. 선생의 나이 38세였다. 11개월 된 딸도 죽임을 당했다. 선생은 중국군 사령관의 퇴각 동행 요구도 거절했다. 고륜에 남아 김원봉에게 마자르를 소개하기로 한 약속 등을 지키려 했던 것이다. 고륜의 구릉에 있던 이태준의 묘를 찾은 여운형은 “이 땅의 민중을 위하여 젊은 일생을 바친 한 조선청년의 거룩한 헌신과 희생의 기념비”라고 애도했다. 선생의 묘는 그 뒤 개발 과정에서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몽골 정부는 묘를 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찾지 못했다. 2001년 7월 울란바토르에 이태준 기념공원이 문을 열어 넋을 기리고 있다. 정부는 1990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자유·저항의 대학로… 치열했던 ‘청춘들의 행진’

    자유·저항의 대학로… 치열했던 ‘청춘들의 행진’

    문화재라 하면 으레 건축물이나 도자기 같은 것을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서울미래유산은 그 폭이 좀더 넓다. 문화재로 지정되거나 등록되지 않은 서울의 근현대 문화유산 가운데 미래세대에게 전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무형의 모든 것을 대상으로 한다. 영화도 한 카테고리다. 대표적인 것으로 1975년 개봉한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이 있다. 소설가 최인호가 쓴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비판적 사고를 거세당한 채 살아가는 대학생들의 불안과 좌절, 비애, 상실감 등 우울한 자화상을 묘사한 영화다. 1970년대 서울 대학가와 그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영화로 보전 가치를 인정받아 서울미래유산이 됐다.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20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11회 ‘서울의 영화-바보들의 행진’을 준비하면서 이 영화를 간접적으로나마 떠올릴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 고민했다. 젊음과 낭만의 거리라 불리는 대학로가 좋은 사례 중 하나일 듯싶었다. 혜화동로터리에서 이화사거리까지 1㎞ 남짓한 도로를 중심으로 펼쳐진 대학로는 연극이나 뮤지컬과 같은 공연을 볼 때면 누구나 한 번쯤 들러봤음 직한 젊은이들의 공간이다. 한복판에 있는 마로니에공원을 거닐다 보면 여유롭게 거리공연을 펼치는 악사에서부터 비보잉을 하는 댄서들까지, 자유로운 분위기에 누구나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곤 한다. 물론 원래부터 이곳이 대학로라 불린 것은 아니고 공원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이 지역의 근대는 식민지와 함께 왔다. 애초 이곳의 터줏대감은 일제강점기였던 1924년 들어선 경성제국대학이었다. 의학부와 법문학부, 대학본부가 마로니에공원 일대에 있었고 거기에 들어가기 위한 예비학교 격인 예과가 청량리에 있었다. 이후 서울대가 이곳에 들어선 것은 광복 뒤인 1946년이었다. 법대와 문리대, 의대 등이 마로니에공원과 주변 서울사대부속 초·중교 자리에 자리잡았다.당시 풍경은 어땠을까. 영화 ‘바보들의 행진’에서 어렴풋하게나마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가수 송창식이 부른 ‘고래사냥’과 ‘왜 불러’ 등이 영화 전편에 흐르면서 무기한 휴강과 입대, 장발 단속 등 10월 유신의 풍속도가 리얼하게 펼쳐진다. 그러나 현실은 영화보다 차가웠다. ‘왜 불러’뿐만 아니라 극 중 영철의 테마곡인 ‘고래사냥’이 대학가 시위 현장에서 곧잘 불리면서, 두 노래는 결국 금지곡이 되고 말았다. 감독 자신은 현실과 타협한 영화라고 자조했는데, 어떤 면에서는 그렇기에 더 역설적으로 당시를 이해하는 텍스트가 돼 주기도 한다. 실제로 개봉 당시 서울 관객 15만명을 동원하는 등 흥행에도 성공했던 영화에 삽입된 노래를 금지곡으로 지정한 박정희 정권은 서울대를 아예 관악산으로 이전해 버린다. 대학로 시절 서울대 주변이 유신체제 반대 시위가 연일 계속되는 등 학생운동의 중심이 되다 보니 동숭동, 용두동, 종암동, 공릉동 등 서울 각지에 흩어져 있던 단과대들을 당시만 해도 변두리이자 정문과 후문만 봉쇄하면 시위대의 시내 진출을 막을 수 있던 관악산 골프장 터로 몰아넣듯 옮겨버린 것이다. 영화 개봉연도와 같은 1975년의 일이었다.대학로의 변화는 1980년대 들어 더욱 극적으로 펼쳐진다.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신군부는 각종 공안사건을 조작함으로써 자신들에 대한 반대 움직임을 억제하려 했다. 대표적인 게 1982년 벌어진 ‘학림사건’이었다. 학생운동가들이 학생단체를 조직해 사회주의 폭력혁명으로 정권을 붕괴시키려 했다는 사건이었다. 마로니에공원 맞은편에 있는 학림다방에서 첫 모임을 열었다 해서, 또 ‘숲’(林)처럼 무성한 ‘학’(學)생운동 조직을 일망타진했다 해서 학림사건이라 불렸다. 1985년부터는 이곳의 분위기가 질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민주화운동의 현장이란 인식이 강했던 이 일대에 정부가 ‘문화예술의 거리’를 조성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서울 곳곳에 있던 문화예술단체와 공연장, 소극장 등을 유치함으로써 자유와 저항의 공간에 낭만적인 이미지를 덧씌우려 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한국의 청년들이 그리고 시민사회가 영화의 분위기처럼 순응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지칠 줄 모르는 민주화운동은 끝내 독재를 종식시키고 오늘의 한국을 만들어 냈다. 당시 피해자들도 2010년 열린 재심에서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전두환 정권에 의한 조작 사건이라는 결론과 함께. 학림다방은 그런 한국 현대 정치사의 현장이었기에, 나아가 훗날 문학으로 명성을 얻은 이청준이나 김승옥, 황지우, 김지하 등의 단골집이었다. 김민기 등 음악인들의 주요 거처이기도 했다. 학림다방도 2013년 서울미래유산에 등재됐다. ‘서울대 문리대 제25강의실’이라고도 불렸던 학림다방 입구에 걸려 있는 서울미래유산 동판이 흘러간 옛이야기를 담담하게 증언해 주는 듯싶다. 대학로는 내막을 모르면 그저 로맨틱해 보이기만 하는 문화 예술의 공간이자 맛집들이 즐비한 소비공간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눈앞에 보이는 모습만을 보고는 그 안의 내력이나 사건들 사이의 맥락을 이해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그런 면에서 마로니에 공원을 중심으로 서 있는 아르코미술관과 아르코예술극장, 그리고 옛 샘터 사옥이자 현 공공그라운드 빌딩 또한 생각할 지점을 던져 준다. 적벽돌 외장이 인상적인 이 건물들은 모두 ‘한국 건축의 풍운아’라 불렸던 김수근이 설계한 건물들이다. 서울대 건축과를 다니다가 6·25전쟁 때 일본 도쿄예대 건축과에 유학해 막 대학원을 수료한 김수근은 이승만 정권 말기인 1959년 29세의 나이로 새 국회의사당 건축설계안 현상공모에서 1등을 차지하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의 작품 가운데 한국인에게 익숙한 게 한둘이 아니다. 잠실 서울올림픽 주경기장을 비롯해 남산 타워호텔과 자유센터, 세운상가, 워커힐호텔, 옛 국립부여박물관과 청주 및 진주박물관 등이 있다. 단순히 건축 설계만 한 게 아니라 국내 잡지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월간 ‘SPACE(공간)’를 창간하고 다양한 예술인들을 후원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1977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그를 르네상스의 예술 후원가라 평가받는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에 빗대 ‘서울의 로렌초 메디치’라 평하기도 했다. 그에게도 밝은 역사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1987년 6·10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현장인 남영동 대공분실 역시 그의 작품이었다. 나선형 계단을 설치해 방향 감각을 상실케 하고 피조사자가 투신할 수 없게끔 창문 폭을 15㎝ 정도로 좁게 하는 등 전적으로 고문에 적합하도록 치밀하게 설계된 그 건물 말이다. 아르코 미술관과 예술극장, 그리고 옛 샘터 사옥은 겉으로는 수십 년이 지나도록 모던함을 유지해 오는 훌륭한 건축물이다. 하지만 유심히 들여다보면 인간 내면의 복잡다단한 면에 대해 성찰하게끔 유도하는 경전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이번 그랜드 투어의 마지막 방문지는 서울대병원이었다. 1907년에 건립된 옛 대한의원은 광복 뒤 경성의전과 통폐합돼 현재 서울대 의대로 바뀌어 있고 그 병원은 서울미래유산이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1922년 의학 실험에 희생된 동물들의 넋을 위로하겠다며 설치한 ‘실험동물공양탑’은 이번 투어의 압권 중 하나였다. 말 못하는 짐승을 위해서도 공양탑을 세웠던 이들의 마음을 자비롭다고 해야 할까. 서울 대학로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유골이 무더기로 발견된 적이 있다. 2008년 말 한국방송통신대학 맞은편에 위치한 한 건물을 철거하면서 14구의 유골이 발견된 것이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석 달에 걸쳐 정밀분석한 결과 유골의 주인공이 14명이 아니라 28명에 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젖먹이의 유골도 3구나 됐다. 과연 그 뼈들의 주인공은 누구이며 왜 그곳에 집단으로 묻힌 걸까. 해답은 ‘그 땅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곳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경성의전 해부학교실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그렇기에 더더욱 실험동물공양탑은 의외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실험동물의 목숨도 함부로 하지 않던 이들이 정작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인종적이며 체질적인 차이를 조사하는 등 몰인권적인 우생학과 인종론의 기초를 다지기 위한 연구도 진행했으니 말이다. 영화에서 보여 주는 이미지가 묘사 대상의 전부는 아닌 것처럼 우리가 맞닥뜨리는 여러 사안들도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중하다가는 본질을 파악하지 못할 수 있다. 또 반대로 호기심과 지속적인 문제의식을 견지한다면 묘사된 풍경 너머의 맥락을 이해하는 길에 가닿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예컨대 ‘바보들의 행진’은 언뜻 보면 명랑한 청춘극 같지만 자세히 보면 비극보다 더 진한 슬픔을 자아내는 영화이고 일견 로맨틱해 보이는 대학로이지만 그 속엔 시대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했던 이들의 정열이 녹아 있다. 글 권기봉 ‘다시, 서울을 걷다’ 저자 사진 김학영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연구위원 ●다음 일정 : 제12회 돈의문 주변 ●출발일시 : 8월 15일 오전 10시 ●신청(무료) :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 : 서울도시문화연구원(www.suci.kr)
  • [근대광고 엿보기] 셰익스피어 작품 최초 소개 광고

    [근대광고 엿보기] 셰익스피어 작품 최초 소개 광고

    ‘영국 대문호 사옹(沙翁) 만년 대저(大著) 사극 마구베스.’ 영국의 극작가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를 극장 ‘유락관’에서 공연한다는 1917년 7월 11일자 매일신보 광고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작품이 국내에 제대로 소개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광고 속의 맥베스는 1917년 미국 존 에머슨 감독이 만든 무성영화다. 셰익스피어는 1616년에 사망했으니까 사후 301년 만이다. 1906년에는 새뮤얼 스마일스의 ‘자조론’ 번역본에서 ‘세이구스비아’로 처음 언급됐다고 한다. 이후 셰익스피어는 ‘索士比亞 (색사비아)’, ‘酒若是披霞(주약시피하)’ 등으로도 표기됐다. 유락관은 1915년 9월 경성 중구 본정(本町) 1정목(一丁目), 지금의 명동 밀리오레 자리에 세워진 일본인 전용 상설영화관이었다. 남촌으로 불리는 당시의 명동과 충무로 지역은 일본인 거주지이자 상권의 중심지였다. 이 광고가 한글과 한자로 제작된 것을 보면 특정 계층의 한국인들도 유락관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광고에 설명자, 즉 변사 3명이 소개되어 있는데 모두 일본에서 활동하던 일본인이다. 관람료는 1등석 2원, 2등석 1원, 3등석 50전이다. 당시에 쌀 한 가마니 가격이 5원 안팎이었다. ‘200만 원의 작품을 사소한 50전으로 관람할 수 있다’고 과대 홍보하고 있다. 제작비가 200만 원이었까. 倫敦(윤돈·런던)에서 최저 2파운드, 紐育(뉴육·뉴욕)에서 최저 10달러, 도쿄 제국극장에서 5원의 관람료를 받는 작품이라고도 했다. 일본인 극장은 두 개가 더 있었다. 한국 최초의 상설 영화관인 경성고등연예관은 1910년 현재의 서울 을지로 옛 외환은행 본점 자리에 들어섰는데 1915년 세계관으로 개칭됐다. 다른 하나인 대정관은 지금의 중구 인현동 1가에 있었다. 대정관을 세우고 운영한 일본의 니타상회가 나중에 경성고등연예관을 사들이고 유락관까지 세워 세 극장을 모두 운영했다. 유락관은 관객 정원이 1000여명에 이르던 남촌의 대표 극장이었다. 1918년부터는 희락관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영화를 상영했고 1945년 광복 직후 소실돼 없어졌다. 지금도 밀리오레가 있는 땅의 지가가 전국에서 가장 비싸듯이 희락관이 있던 곳은 당시에도 입지가 가장 좋은 곳이었다. 길 건너 남산 기슭은 왜성대라고 불리던 곳으로 경복궁 자리로 옮겨가기 전까지 조선총독부 청사가 있었다. 그 주변 예장동 일대는 일본인의 집단 거주지여서 일인들에게 접근성이 좋은 곳이었다. 부산에도 유락관이 있었다. 일본인 전관거류지(全管居留地·일본인이 모여 사는 마을)가 확대되면서 1922년 동구 좌천동에 유락관이 들어섰다.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안녕? 자연] 알프스 몽블랑 빙하 녹아 내린다…지구온난화의 비극

    [안녕? 자연] 알프스 몽블랑 빙하 녹아 내린다…지구온난화의 비극

    '유럽의 지붕'으로 불리는 알프스 산맥의 최고봉(峰) 몽블랑의 일부 빙하가 붕괴될 위기에 처하자 급기야 대피 명령까지 떨어졌다. 지난 7일(현지시간) 영국 BBC 등 해외 주요언론은 몽블랑의 한 빙하(Planpincieux glacier) 중 일부가 붕괴될 위기에 처하자 이탈리아 당국이 해당 지역에 위치한 75명의 주민과 관광객에게 대피 명령을 내렸다고 보도했다. 현지의 관광지로 유명한 아오스타 계곡 위 쪽에 위치한 이 빙하는 대략 축구장 만한 크기로 위성 사진 분석결과 언제라도 녹아 떨어질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점쳐진다. 보도에 따르면 이 빙하는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점점 녹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지난 2012년 이후부터는 아예 모니터 대상으로 분류됐다. 또한 지난해 여름에는 추가 조사가 진행돼 모니터링의 정확도를 높일 장비도 투입됐다.몽블랑의 빙하가 이렇게 녹아 사라지기 시작하는 이유는 지구온난화 때문이다. 기후 변화로 인한 온난화 영향이 해발 4807m의 서유럽 알프스산맥 최고봉인 몽블랑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빙하는 눈이 오랫동안 쌓여 단단하게 굳은 얼음층을 일컫는데 몽블랑에는 여의도의 34배인 100㎢에 달하는 빙하가 여러 곳에 분포한다. 특히 빙하가 녹으면서 생기는 이상 현상은 알프스 주변에서 연이어 보고되고 있다. 지난달 초에는 이탈리아 북동부 트렌토 인근 알프스 산맥 끝자락에 있는 프레세나 빙하(Presena Glacier)에서 분홍색으로 물든 눈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는 조류(물 속에서 생육하며 광합성에 의해 독립영양생활을 하는 식물) 때문에 생기는 일반적인 현상인데, 결과적으로 빙하가 빠르게 녹을 수 있다는 신호다. 빙하는 태양에서부터 오는 복사열의 80%를 반사하는데, 조류가 빙하의 윗부분을 덮어 짙은 색으로 변할 경우 더 많은 복사열이 흡수돼 빙하의 녹는 속도가 빨라질 수 있다.또한 얼마 전에는 알프스 몽블랑 북쪽면에 위치한 보송 빙하에서 1966년 1월 20일 자 인도 신문이 발견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역시 오랜 시간 꽁꽁 묻혀있던 빙하가 녹으면서 신문이 밖으로 노출된 것이다. 지난해 10월 스위스 정부는 지구온난화 영향으로 20세기 들어 스위스 알프스의 빙하 중 약 500개가 사라졌고, 나머지 4000여 개 빙하는 2100년까지 90%가 사라질 위험에 처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곰과 사진 찍으려다…러 11세 어린이 곰에 물려 숨져

    곰과 사진 찍으려다…러 11세 어린이 곰에 물려 숨져

    러시아에서 곰과 사진을 찍으려던 소년이 사망하는 비극적 사고가 발생했다. 6일(현지시간) 소치24는 소치 다고미스 지역의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던 11살 남자 어린이가 곰에게 물려 숨졌다고 보도했다. 사망한 소년은 4일 게스트하우스에 마련된 곰 우리 가까이 들어갔다가 변을 당했다. 목격자는 “다른 여자아이 2명과 이야기를 나누던 소년이 갑자기 곰 우리 밖 담장 문을 열고 들어갔다”라고 밝혔다. 그리곤 곰들이 있는 철창 앞에 서서 곰 발바닥을 툭툭 치는 등 자극했다고 전했다.소년의 도발에 흥분한 곰들은 순식간에 소년을 낚아챘다. 곰들은 철창 밑으로 파놓은 구덩이를 통해 소년을 우리 안으로 잡아끌었고 거칠게 공격했다. 목격자는 “곰들은 마치 공을 주고받듯 소년을 이리저리 집어던졌다. 할퀴고 물어뜯었다”라고 몸서리를 쳤다. 그러면서 “소년이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여자아이들 앞에서 용기를 과시하려고 곰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라고 안타까워했다. 눈 앞에 펼쳐진 끔찍한 장면에 공포에 질린 여자아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부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목격자를 포함해 누구도 난폭해진 곰들을 제압할 수 없었고, 그 사이 소년은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게스트하우스 직원들은 곰 두 마리를 모두 사살한 뒤에야 피투성이가 되어 숨진 소년의 사체를 수습할 수 있었다. 뒤이어 도착한 구급대는 현장에서 소년에게 사망선고를 내렸다. 사고 소식이 전해지자 현지에서는 게스트하우스의 시설 관리가 미흡했다는 비난 여론이 조성됐다. 곰 우리 밖 담장 문이 잠겨있지 않았던 탓에 비극이 벌어졌다는 지적이다. 이에 따라 경찰은 게스트하우스 운영자에게 과실치사 혐의를 적용했다.소치 시장 알렉세이 코파이고롯스키도 즉각 대응에 나섰다. 시장은 “아이들 안전을 절대 보장할 수 없다”라면서 “리조트를 비롯해 휴양지 내 모든 숙박시설에 마련된 동물 우리를 폐쇄하라”라고 명령했다. 현지언론에 따르면 사살된 곰 2마리는 고아로 떠돌다 새끼 때부터 게스트하우스 우리에서 살았으며, 참혹한 사고 현장을 목격한 여자아이들은 모두 심리 치료를 받고 있다. 권윤희 기자 heeya@seoul.co.kr
  • [핵잼 사이언스] 판다 보호하려다 …中 보호구역 내 표범·늑대의 비극

    [핵잼 사이언스] 판다 보호하려다 …中 보호구역 내 표범·늑대의 비극

    중국이 애지중지하는 판다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이 오히려 다른 일부 야생동물의 생태를 위협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4일(현지시간) CNN 등 주요언론은 대왕판다를 보존하려는 중국 당국의 노력이 의미있는 성과를 거뒀지만 반대로 표범 등 일부 야생동물의 개체수는 급감했다는 연구결과를 보도했다.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있는 동물로 꼽히는 판다는 지난 1990년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이 '멸종위기종'으로 지정했을 만큼 한때는 멸종을 걱정해야 할 처지였다. 이후 중국 당국은 서식지 보호 및 관리 등 본격적인 '판다 구하기'에 나서 꾸준한 감소세를 보이던 개체수를 반등시키는데 성공했다. 이에 IUCN은 지난 2016년 판다를 멸종위기종에서 '취약종'으로 한단계 등급을 낮추면서 그 노력은 대외적으로도 인정받았다. 그러나 판다 구하기 탓에 반대로 피해를 받는 동물도 있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판다는 중국 내에서 대표적인 '우산종'으로 평가받는다. 곧 판다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들이 우산처럼 펼쳐져 다른 종 보호에도 모두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 실제로 이같은 노력은 서식지를 공유하는 많은 야생동물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드러났다.그러나 덩치가 큰 일부 육식성 야생동물의 경우는 그 반대였다. 중국 베이징대 등 국제공동연구팀은 대왕판다 자연보호구역 73곳에 설치된 10년 치 카메라 촬영분에 대한 분석 작업에 들어갔다. 판다보호구역으로 지정되기 전과 후를 비교해 이곳에 서식하는 다양한 야생동물들의 움직임을 분석한 것. 그 결과 표범 개체수는 81%, 설표 38%, 늑대 77%, 승냥이는 무려 95%가 사라진 것으로 드러났다. 연구진은 "표범이나 늑대와 같은 종은 판다보다 20배나 많은 공간을 돌아다니며 사냥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판다에만 초점을 맞추는 보존 노력이 모든 종에게 효과적일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표범 등 육식동물이 사라지면 사슴과 가축이 자연 서식지를 돌아다니며 훼손하고 이는 결과적으로 판다에게도 악영향을 미친다"면서 "대형 육식동물을 포함한 모든 종을 위한 정책을 함께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연구결과는 과학저널 ‘네이처 생태와 진화‘(Nature Ecology & Evolution) 최신호에 발표됐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여자 앞에서 용기 과시하려다…‘곰과 셀카’ 시도한 소년 비극적 죽음

    여자 앞에서 용기 과시하려다…‘곰과 셀카’ 시도한 소년 비극적 죽음

    러시아에서 곰과 사진을 찍으려던 소년이 사망하는 비극적 사고가 발생했다. 6일(현지시간) 소치24는 소치 다고미스 지역의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던 11살 남자 어린이가 곰에게 물려 숨졌다고 보도했다. 사망한 소년은 4일 게스트하우스에 마련된 곰 우리 가까이 들어갔다가 변을 당했다. 목격자는 “다른 여자아이 2명과 이야기를 나누던 소년이 갑자기 곰 우리 밖 담장 문을 열고 들어갔다”라고 밝혔다. 그리곤 곰들이 있는 철창 앞에 서서 곰 발바닥을 툭툭 치는 등 자극했다고 전했다.소년의 도발에 흥분한 곰들은 순식간에 소년을 낚아챘다. 곰들은 철창 밑으로 파놓은 구덩이를 통해 소년을 우리 안으로 잡아끌었고 거칠게 공격했다. 목격자는 “곰들은 마치 공을 주고받듯 소년을 이리저리 집어던졌다. 할퀴고 물어뜯었다”라고 몸서리를 쳤다. 그러면서 “소년이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여자아이들 앞에서 용기를 과시하려고 곰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라고 안타까워했다. 눈 앞에 펼쳐진 끔찍한 장면에 공포에 질린 여자아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부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목격자를 포함해 누구도 난폭해진 곰들을 제압할 수 없었고, 그 사이 소년은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게스트하우스 직원들은 곰 두 마리를 모두 사살한 뒤에야 피투성이가 되어 숨진 소년의 사체를 수습할 수 있었다. 뒤이어 도착한 구급대는 현장에서 소년에게 사망선고를 내렸다. 사고 소식이 전해지자 현지에서는 게스트하우스의 시설 관리가 미흡했다는 비난 여론이 조성됐다. 곰 우리 밖 담장 문이 잠겨있지 않았던 탓에 비극이 벌어졌다는 지적이다. 이에 따라 경찰은 게스트하우스 운영자에게 과실치사 혐의를 적용했다.소치 시장 알렉세이 코파이고롯스키도 즉각 대응에 나섰다. 시장은 “아이들 안전을 절대 보장할 수 없다”라면서 “리조트를 비롯해 휴양지 내 모든 숙박시설에 마련된 동물 우리를 폐쇄하라”라고 명령했다. 현지언론에 따르면 사살된 곰 2마리는 고아로 떠돌다 새끼 때부터 게스트하우스 우리에서 살았으며, 참혹한 사고 현장을 목격한 여자아이들은 모두 심리 치료를 받고 있다. 권윤희 기자 heeya@seoul.co.kr
  • 의사협회장 환자 손에 사망한 의사 조문하며 “의대 증원 위선”

    의사협회장 환자 손에 사망한 의사 조문하며 “의대 증원 위선”

    임세원 교수 사망 1년 반만에 똑같은 비극 발생 지난 2018년 말 고(故)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숨을 거둔지 2년도 채 안 되어 부산에서 똑같은 비극이 발생하자, 정신과 전문의가 절절함 심정을 토해냈다. 5일 오전 부산 북구 화명동 소재 한 정신병원에서 환자(60대·남)가 의사(50대·남)에게 흉기를 휘둘렀고, 의사는 인근 대학병원으로 이송돼 치료 도중 숨졌다. 이 환자는 범행 후 몸에 휘발유를 뿌린 상태로 병원 10층 창문에 매달려 있다가 출동한 경찰에 붙잡혔다. 신경정신과 전문의 정찬영 원장은 “고 임세원 교수가 환자의 흉기에 목숨을 잃은 지 1년 반 만이다”라며 “그때도 지금도 그 흉기가 내 몸을 관통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고 참담한 심정을 토로했다. 정 원장은 “의사들이 정신과 입원 환자로부터 가족을 살해하겠다는 협박을 받아도 경찰의 도움을 받는 것을 본 적이 없다”며 “경찰은 오히려 그런 정신질환환자들을 데려와 의료진의 도움을 받아왔다”고 강조했다. 2007년부터 정신질환자가 스스로 입원하는 비율이 95%가 넘는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정 원장은 흉기를 휘두르거나, 휘발유통을 들고 병원에 오는 등 모골이 송연하던 일이 이어졌다고 돌아봤다. 직원들이 맞거나 다치고 환자로부터 성추행과 성희롱을 당해도 차마 신고할 수도 없었다고 덧붙였다. 그동안 정신건강의학과 환자에 대한 낙인을 키울 수 있다는 우려에 한 번도 공개한 적이 없었지만, 정신과 의사의 죽음 뒤에는 전국 대부분 정신의료기관을 민간에서 운영하는 진실이 있다고 진단했다. 정 원장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의료 수가로 세 배나 많은 환자를 3분의 1의 인력이 치료하고 있다고 밝혔다.전공의 파업 시작…국내 빅5 병원 “진료 차질없어” 그는 “고위험군에는 고위험에 맞는 서비스가 가능하도록 예산과 시스템을 서둘러 뒷받침해야 한다”며 “진료를 시작했더라도 감당하기 벅찬 환자는 안심하고 의뢰할 수 있는 의료기관이 있어야 하고, 경찰을 비롯한 당국의 상시 지원이 있어야 한다”고 대안을 제시했다. 최대집 대한의사협회장도 6일 부산의 한 정신건강의학과의원에서 자신이 돌보던 환자에게 불의의 습격을 받아 유명을 달리한 고 김 원장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면서 “무려 가슴과 복부 등에 열여섯번의 공격을 가한 정말로 참혹한 사건”이라며 “반의사불벌죄의 폐지, 정당한 사유가 있을 때 진료거부권의 도입, 의료기관 비상벨 설치, 대피공간과 대피로 설치 그리고 이를 위한 재정지원과 의료기관 내 폭력에 대한 무관용의 수사 등 어느 것 하나 이루어진 것이 없다”고 비판했다. 김 회장은 “의료인과 환자를 위한 안전한 진료 환경 구축과 10년 후 활동할 소위 지역의사의 양성 가운데 무엇이 더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인가”라며 정부의 의대 증원 정책을 지적했다. 이어 “지금 정부여당은 의사 수가 부족하지 않은 나라에서 자신들 지역구 챙기기 하느라 또 정부가 제멋대로 부릴 수 있는 ‘의사 공노비’가 필요하니 의대정원을 확대한다면서 국민들을 위하는 척 온갖 위선적 명분들을 늘어 놓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서울대병원과 삼성서울병원, 서울아산병원,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등 국내 빅5 병원은 수련 중인 전체 전공의가 2300여명이며, 그 중 상당수가 집단휴진(파업)에 들어간 것으로 파악하고 있지만 교수와 임상강사(펠로우)를 투입해 진료 현장에는 별다른 영향이 없다는 입장을 7일 밝혔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금요칼럼] 역사 갈등의 끝판/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겸임교수

    [금요칼럼] 역사 갈등의 끝판/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겸임교수

    며칠 전 누군가 내게 물었다. “교수님, 한일 양국의 역사 문제는 언제쯤 해결될까요?” 답답하기는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골똘히 생각하는데 20년 전 대학생들과 함께 만든 책 한 권이 떠올랐다. ‘아버지, 난 누구예요’(궁리, 2000). 지금은 중년이 된 그 당시 청년들이 두 나라의 역사적 갈등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알려 주는 글도 여럿이었다. 책에서 어느 학생은 자기 집안 이야기를 꺼냈다. 자신의 큰아버지가 일본으로 징용을 갔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한 비극이었다. 한 시골 마을에 일제의 파출소(‘지서’)에서 심부름하는 이가 있었는데, 그는 상부의 명령대로 일본어를 아는 사람들의 명단을 만들었다. 얼마 후 그 명단에 이름이 적힌 사람은 모두 일본으로 끌려갔다. 학생의 큰아버지도 그렇게 군수공장으로 잡혀갔단다. 세월이 흘러 해방은 왔으나 그는 돌아오지 못했다. 하필 그가 탄 귀국선이 침몰했단다. 얼마 전까지도 가슴 저린 이런 이야기를 어디서나 들을 수 있었다. 우리 책에서 다른 학생도 동의했듯,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일본의 악랄한 침략 행위를 고발하는 슬픈 이야기가 너무 많아 한국 사람이 일본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당연했다. 동시대 일본의 시민들은 강점기에 한국인이 겪은 부당한 고통을 과연 짐작이나 했을까. 우리 책에는 서울로 유학 온 일본 학생도 등장한다. 그는 그런 역사를 한 번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고 고백했다. 그 유학생은 대중매체를 통해 한국에 관한 정보를 얻는 것이 전부였다며 매우 충격적인 한 가지 기억을 상세히 소개했다. 1990년대 초반 텔레비전에서 본 장면이었다. ‘위안부’ 문제로 서울의 일본대사관 앞에서 항의하던 시민들이 이토 히로부미의 초상화가 그려진 1000엔짜리 일본 화폐를 불태우고, 이토의 얼굴을 짓밟았다. 지폐에 초상화가 등장할 정도면 대단한 위인인데 한국인들이 저렇게 함부로 모욕해도 되는가 싶었단다. 이렇듯 20년 전 한일 양국의 청년들은 역사적 기억을 공유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때 그들이 미래에 거는 기대만은 똑같았다. 일본인 유학생은 과거사를 언급할 때마다 느끼게 되는 불쾌감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말했다. 양국이 공동의 역사 인식을 토대로 관계를 개선하기 바란다는 소망이었다. 한국 대학생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 역시 한일 양국 시민이 역사적 진실을 공유하게 되기를 소망했다. 세월은 흘러 우리 책이 나온 지 20년이 지났다. 그사이 양국 관계는 더 나빠졌다. 진실을 왜곡하며 양국의 화해를 가로막는 사람도 적지 않은 것 같다. 근자에 서울의 교수 한 사람이 일본의 우익 잡지에 글을 실어 물의를 빚었다. 그는 징용 간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해 자원한 경우가 태반이라고 했다. 또 위안부도 취업 사기를 당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이 과연 역사의 진실이라는 말인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일본에도 양심적인 역사연구자가 상당수 있다는 사실이다. 위안부 문제만 해도 일제강점기의 정치·사회적 배경을 고려해야 본질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2015년 5월, 16개의 일본 학술단체가 공동성명서를 발표해 위안부의 강제연행은 이미 실증된 사실이라고 밝혔다. 정말 딴 세상의 이야기지만 요하네스 라우 독일 대통령의 20여년 전 발언이 주목된다(1999년 12월 17일). “독일 국가와 기업은 과거의 범죄행위에 대해 연대책임을 져야 합니다.” “저는 오늘 독일의 지배 당시에 노예노동, 강제노동을 강요당한 모든 사람을 기억하며 독일 민족의 이름으로 용서를 빕니다.” 라우 대통령은 나치 독일이 폴란드에 저지른 죄악을 고백하며 화해를 청했다. 언제쯤이면 일본에도 이처럼 용감하고 책임감 있는 지도자들이 등장할 것인가.
  • ‘폭탄 공격’이라더니… “아무도 몰라” 하루새 말 바꾼 트럼프

    ‘폭탄 공격’이라더니… “아무도 몰라” 하루새 말 바꾼 트럼프

    전날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서 발생한 폭발 참사에 대해 ‘끔찍한 공격’이라고 규정했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하루 만에 ‘아무도 모른다’는 식으로 한발 물러섰다. 트럼프 대통령은 5일(현지시간) 백악관 브리핑에서 “끔찍한 일이지만 그들은 그것(폭발 원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아직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은 누구라도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매우 강력하게 들여다보고 있다”며 “내 말은 어떤 사람은 그것이 공격이었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뜻”이라고 했다. 전날 레바논 당국은 베이루트 항구 창고에 장기간 적재돼 있던 폭발성 물질인 질산암모늄이 폭발했다고 밝혔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폭발 원인으로 “어떤 종류의 폭탄”을 지목했다. 이날 브리핑에서도 “누군가가 끔찍한 폭발물 형태의 장치들을 (창고) 주변에 두고 갔다면 사고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공격이었을 수도 있다”고 했지만, 전날과 달리 아직은 누구도 원인을 알 수 없다는 데 초점을 맞췄다. 또 트럼프 대통령은 전날 “공격일 수 있다”는 말을 군 장성에게서 들었다는 취지로 말했지만, 정작 이날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은 애스펀 안보포럼에서 “대부분 사람들은 보도된 대로 사고였다고 믿고 있다”고 밝혔다. 마크 메도스 백악관 비서실장은 CNN에 출연해 트럼프 대통령을 방어하려는 듯 “초기 보고서에는 공격도 있었다. 우리는 아직도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또 “그것(상황)을 보면서 계속 평가할 것”이라며 “비극적 사고였을 뿐 테러 행위가 아니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워싱턴 이경주 특파원 kdlrudwn@seoul.co.kr
  • ‘최숙현 비극’ 없도록… 인권위, 체육계 인권침해 조사

    ‘최숙현 비극’ 없도록… 인권위, 체육계 인권침해 조사

    지난 6월 26일 최숙현 철인3종경기 선수가 사망한 이후 국내 체육계의 고질적인 폭력 문제가 다시 논란이 되자 국가인권위원회가 체육계 인권침해 발생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확인하기 위한 조사에 들어갔다. 인권위는 “선수와 지도자의 스포츠인권 인식, 훈련 실태 및 여건, 인권침해 발생 여부 등을 심층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지난달부터 현장조사를 실시하고 있다”고 6일 밝혔다. 조사 대상은 학생선수, 지도자, 종목단체 임직원, 학부모, 과거 선수로 활동했던 학생 등이다. 인권위 조사관이 실제 훈련 현장을 방문해 선수·지도자와 일대일 면담을 하고, 지도자 및 학부모 등과 간담회를 하는 방법 등으로 조사가 진행된다. 인권위는 “방문 대상 기관은 종목과 지역을 안배해 무작위로 선정한다”며 “꼭 인권침해가 발생한 곳을 방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인권위는 또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스포츠인권을 보호·증진하기 위한 제도 개선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덧붙였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