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불화
    2026-03-12
    검색기록 지우기
  • 군대
    2026-03-12
    검색기록 지우기
  • 공시
    2026-03-12
    검색기록 지우기
  • 문재인
    2026-03-12
    검색기록 지우기
  • 신화
    2026-03-12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5,675
  • 20억 복권당첨 후 다음날 사망 ‘비운의 남성’

    20억 복권당첨 후 다음날 사망 ‘비운의 남성’

    호주의 한 남성이 하루아침에 20억 원의 큰돈에 당첨되는 행운을 얻었지만 바로 다음날 사망해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남성’으로 기억됐다. 호주 일간 ‘시드니 모닝 헤럴드’에 따르면 퀸즐랜드 주에 살던 알렉산더 프랭크 산토는 지난해 2월 13일 복권에 당첨됐다. 금액은 무려 180만 호주달러(한화 20억원). 부족함 없는 노년을 보낼 수 있었지만 산토는 다음날 사망해 충격을 줬다. 당첨금을 한 푼도 써보지 못하고 사망한 산토의 기막힌 사연은 당시 호주에서 연일 뉴스에 소개될 정도로 유명해졌다. 1년이 흘러 산토의 사연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흐릿해졌지만, 최근 산토의 자녀 4명이 유산을 두고 법정 싸움을 하면서 다시 세간에 알려지게 됐다. 산토가 남긴 뜻밖의 큰 재산은 자녀들의 불화의 씨앗이 된 것으로 전해졌다. 법정에 선 자녀 4명은 각각 산토의 유산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 1년 동안 지루한 싸움을 계속했다. 아들 1명은 고인이 복권을 구입할 당시 자신과 당첨금을 나눌 것이란 뜻을 남겼다고 주장했으며, 딸은 “아버지가 사망할 당시 복권이 발견됐던 곳이 자신의 집이었다.”는 이유를 대며 단독 소유권을 주장했다. 타운스빌 대법원은 최근 4명의 자녀 중 사망한 산토와 실질적으로 관계를 유지했던 자녀 3명에게 복권의 당첨금을 배분할 것을 명령했다. 신문은 “고인이 이 복권을 혼자서 샀는지 아니면 다른 자녀와 상의해서 샀는지가 아직 변수로 남아있기 때문에 복권을 둘러싼 법정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강경윤기자 newsluv@seoul.co.kr
  • [고전 인물로 다시읽기] (5) ‘북학의’ 박제가

    [고전 인물로 다시읽기] (5) ‘북학의’ 박제가

    박제가(그림·1750~1805)는 ‘서얼’로 태어났다. 조선시대 서얼은 신분상의 제약과 차별 때문에 실력을 갖추어도 기량과 경륜을 펼치기 어려웠다. “우리를 믿지 않고 소인이라 하니, 무한한 마음속 계책 누구에게 말해 볼까?”라는 고민은 박제가에겐 숙명적인 것이었다. 박제가는 양반이면서 양반이 아닌, 경계인으로서 그 ‘존재성’에 대해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박제가는 사회적 차별에 굴하지 않았다. “고독하고 고매한 사람만을 골라서 남달리 친하게 사귀고, 권세 많고 부유한 사람은 일부러 더 멀리하며”(정유각집 ‘소전’편) 차라리 가난하게 살았다. 그는 패기와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 시대와 불화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는 당대의 사람들이 지당하게 받아들이는 모든 인습에 저항했다. ‘아교로 붙이고 옻칠을 한 눈꺼풀’을 떼어내고 천하를 응시하여 ‘심지를 열고 이목을 넓히라.’고 외쳤다. ●이덕무 “답습한 시는 가짜 시다” 박제가는 출세에 연연하지 않았다. 대신 당대 최고의 지성들과 나누는 우정의 향연 속에서 학문을 배우고 시와 글씨와 그림을 연마했다. 박제가에게 친구는 ‘기운을 나누지 않은 동기요, 한 집에 살지 않는 부부’였다. ‘나와는 둘이면서 하나인’ 이덕무, 박지원, 홍대용, 유득공, 이서구, 서상수, 유금, 백동수와 같은 친구들이 있어 외롭지 않았고 두려울 것이 없었다. 이런 친구들이 있어 박제가는 세상의 시와는 다른 시를 거침없이 쓸 수 있었다. “세대마다 시가 있고 사람마다 시가 있는 법이어서 시는 서로 답습할 수 없다네. 답습한 것은 가짜 시라네.”라고 채찍질한 이덕무와 같은 친구가 그의 곁에 있었다. 1700수가 넘는 시 작품엔 박제가와 이 멘토들의 우정의 숨결이 함께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박제가는 고군분투했다. 틀에 박히고 고루하고 진부한 시와 문장을 혐오하며 나만의 글쓰기를 찾아 나섰다. 당시 선비들은 두보의 시를 최고로 여겨 배웠고, 다음은 당나라 시, 그 다음은 송나라·금나라·원나라·명나라 시를 배웠다. 박제가가 보기에 전범에 매달리는 글쓰기는 남이 한 말의 찌꺼기나 줍는 행태에 불과했다. 자기 시대의 현장을, 자기의 말로 표현하는 것이 진정한 시요 문장이었다. 역설적으로 나만의 글쓰기를 개척하는 것이 진정 고인의 글쓰기에 다가가는 길이었다.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 있는 것이 모두 시다. 사계절의 변화와 온갖 만물의 웅성거리는 소리, 그 몸짓과 빛깔, 그리고 음절은 그들 나름대로 존재하고 있다.”(‘형암선생시집서’·炯菴先生詩集序) 지금-여기 살아 있는 만물 각각의 미묘한 움직임과 그 지극한 경지를 포착하는 것. 이것이 시의 출발이다. 사물에 대한 미세하고도 예리한 관찰은 시인에게는 절대적인 지상과제였다. 그랬기 때문에 당대의 문장을 순정한 문체로 되돌리겠다는 정조의 강력한 의지에 부응하여 반성문을 제출하면서도, ‘자송문’(自訟文)에 어울리지 않게 반성은 하지 않고 항변에 열을 올렸다. “소금이 짜지 않고, 매실이 시지 않고, 겨자가 맵지 않고, 찻잎이 쓰지 않음을 책망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그런데 만약 소금, 매실, 겨자, 찻잎을 책망하여 너희들은 왜 기장이나 좁쌀과 같지 않으냐고 한다든지, 국과 포를 꾸짖어 너희는 왜 제사상 앞에 가지 않느냐고 한다면 그들이 뒤집어 쓴 죄는 실정을 모르는 것입니다.”(‘비옥희음송인’·比屋希音頌引) 하나의 틀에 갇히지 않은 다양한 맛의 문장! 이것은 박제가가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던 글쓰기의 보루였다. 이는 당대의 복고, 혹은 의고문에 저항하는 방식이었으며, 더 나아가 만물의 보편 원리나 질서를 따르는 당대 성리학의 이념을 무용하게 만드는 길이었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을 동일하게 만드는, 오직 하나의 방식만을 강요하는 그 시대 ‘권력’에 맞서는 방법이었다. ●청나라 선진 문물 도입이 부국강병의 길 박제가는 29세 때인 1778년 사은사 채제공의 종사관 자격으로 중국에 가게 된다. 곳곳에서 맞닥뜨린 청나라의 문명은 실로 눈이 부실만큼 풍요롭고 세련되고 화려했다. 청나라는 더 이상 오랑캐의 나라가 아니었다. 게다가 기균·이조원·반정균·옹방강·나빙·이정원 등 청나라의 학술부흥운동을 주도한, 명망 있는 지식인들이 일개 조선의 선비와 흉금을 터놓고 학문을 논하자, 그들의 자유로움과 벽 없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박제가는 패러다임을 완벽하게 전환한다. 가난한 조선, 비문명국 조선의 갈 길은 북벌이 아니라 북학이라고. 진정한 오랑캐가 누구인지 먼저 분간하고 우리 안에 있는 진짜 오랑캐를 물리치기 위해 청나라를 힘써 배워야 한다고. 박제가는 ‘가난’을 싫어했다. 권력에 아부하기 싫어 ‘차라리’ 가난하게 산 것이지 가난을 편안하게 여긴 것은 아니었다. 젊은 시절 장인 이관원이 검소하게 살라고 말하자 이렇게 대꾸했다. “침향목과 단목으로 저를 조각하고 색실로 저를 수놓아 열 겹으로 싸서 간직하여 길이 후세에 전해 사람마다 보게 하고 싶습니다. 오늘날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집에서 소쿠리 밥에 표주박 물을 마시며 해진 솜옷을 입고 살면서도 좋고 나쁜 것을 알지 못하는 듯 지내는 것이 어찌 본마음이겠습니까?” 박제가에게 ‘안빈낙도’는 자신을 속이는 말이었다. 명분에 매이지 않고 욕망에 솔직했던 박제가. 청나라에 다녀온 이후 그는 확신했다. 조선의 빈곤 타파와 갑갑한 습속의 개혁은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배워야만 가능함을. 이 때문에 연행을 다녀온 직후 ‘북학의’를 저술한다. 이 책에는 청나라의 수레, 기와, 벽돌, 수차, 화폐, 종이, 의복, 문화예술 등을 적극적으로 배워 조선을 부강한 문명국으로 이끌고 싶다는 박제가의 패기가 넘쳐난다. “꽃에서 자란 벌레는 그 날개나 더듬이조차도 향기가 나지만 똥구덩이에서 자란 벌레는 구물거리며 더러운 것이 많은 법이다. 사물도 본래가 이러하거니와 사람이야 당연히 그러하다. 빛나고 화려한 여건에서 성장한 사람은 먼지 구덕의 누추한 처지에서 헤어나지 못한 자들과는 반드시 다른 점이 있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우리나라 백성의 더듬이와 날개에서 향기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북학의’) 가난하고, 학문은 고루하고, 견문은 좁고, 문화는 촌스럽기 짝이 없는 조선. 박제가는 새로운 세상을 꿈꿨다. 조선이 풍요롭고 세련된 문명 세계가 되기를, 조선 백성의 더듬이와 날개에서 문화의 향기가 넘쳐나기를. 박제가가 바라는 이상적인 사회는 물질적으로도 풍요롭고, 문화적으로도 향기 나는 사회다. 재화의 유통이 활발하고, 사치가 가능하며, 문화적 수준도 상당한 사회. 박제가는 문화예술과 사치품에 관해 논할 때 도덕주의적 관념을 개입시키지 않는다. 예술의 아름다움과 사치스러움은 재화와 물품을 마르지 않게 하는 원동력이다. 이 순간 조선의 선비 박제가는 소박하고 질박한 생활을 표상했던 유학적 가치와 완전히 결별한다. 박제가는 더 나아간다. 조선이 빠르게 청나라에 맞서는 문명국이 되려면 언문이 일치되는 중국어(북경어)를 사용하잔다. 영어공용론에 맞먹는 상상력이다. 중국어를 제2의 국어로 사용하자는 제안은 실로 급진적이다. 그에게는 조선 땅이 너무 좁았으며 조선의 현실이 너무 답답했다. 문명세계를 향한 박제가의 욕망은 중국어공용론으로 거리낌 없이 내달린다. 이런 정황상 북벌을 절대 이념으로 수호했던 당대 선비들이 이 열혈 북학자에게 당괴(唐魁) 혹은 당벽(唐癖)이라는 비방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으리라. ●너무 조숙한 세계주의자… ‘나’를 둘러싼 사회와 세계는 늘 살아 움직이고 변화한다. 어떤 고정된 틀에 얽매여 변화를 보지 못하고 인습적 규범에 갇혀 있다면 그건 진흙 소상을 모방하는 일과 같을 것이다. 박제가는 그 단단한 습속의 벽과 온몸으로 맞서 싸웠다. 비겁하지 않게 직설과 독설로 맞섰다. 그러나 박제가는 지나치게 조숙한 문명주의자요, 세계주의자였다. 북학파 중에 가장 급진적이었고 가장 앞서 나아갔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문명세계를 향해 돌진했다. 어쩌면 조선의 ‘현재’와 ‘새로운’ 문명 사이를 조율할 수 있는 천리안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그를 비호해주던 정조의 죽음 직후 박제가는 대비 김씨와 노론의 영수 심환지를 비방하는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를 당한다. 그는 외롭게 고투했다. 그가 희망한 바, “1000년 뒤에도 1000만명의 사람들과 다른 한 사람”으로 존재하기 위해. 길진숙 수유+너머 강원 연구원
  • [외규장각도서귀환하던날] 1차 도착분 75권, 수장고에서 24시간 숙면 ‘시차적응’

    [외규장각도서귀환하던날] 1차 도착분 75권, 수장고에서 24시간 숙면 ‘시차적응’

    #114일 인천공항에 도착한 외규장각 의궤는 귀환에 걸린 145년 세월만큼이나 뒷얘기도 많다. 귀환의 첫 단추를 꿴 이는 역설적이게도 친일 사학자로 분류되는 이병도(1896~1989) 전 서울대 교수다. #2이 전 교수는 1955년 프랑스로 유학 떠나는 제자 박병선에게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외규장각 도서를 비롯해 우리 문화재를 많이 약탈해 갔으니 그것을 찾는 것이 사학도로서 가장 중요한 임무”라며 틈틈이 찾아볼 것을 강력히 당부했다. 20년 뒤 박병선은 프랑스 국립도서관 별관 창고에 처박혀 있던 도서를 마침내 ‘발견’하게 된다. #31차 도착분 75권은 ‘시차 적응’을 위해 상자 5개에 담긴 채로 24시간 동안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숙면에 들어갔다. 온도·습도 등 주변 환경이 갑자기 바뀌면 유물이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다. 15일 오후 박물관 관계자들과 에리세 박사가 공동으로 의궤 상태와 목록 등을 점검한다. ‘컨디션 체크’라고 부르는 절차다. #4의궤는 아시아나항공과 대한항공이 두 번씩 번갈아 가며 운송한다. 흥미로운 점은 아시아나(1, 3차분 책임)는 여객기 화물칸, 대한항공(2, 4차분)은 화물기를 동원한다는 사실이다. 대한항공 측은 “국보급 문화재인데 (화물) 전용기로 모셔 와야 한다.”며 은근히 경쟁사를 깎아내렸고, 아시아나 측은 “지난해 ‘고려불화대전’ 때도 여객기 편으로 아무 탈 없이 실어 날랐다.”고 맞섰다. 하지만 실질적인 이유인즉 아시아나는 파리 노선에 화물기가 없고 대한항공은 화물기가 있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의궤가) 깨지기 쉬운 도자기류가 아닌 책들이라 충격을 방지하는 완충재 사용 등 포장만 잘하면 화물기냐, 화물칸이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판정’했다. 두 항공사는 의궤 귀환의 역사를 의미를 감안해 비행기 티켓을 공짜로 제공하겠다는 뜻을 밝혔으나 이미 정부 예산에 운송료가 책정돼 있어 국립중앙박물관이 비용을 지불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대한항공 화물기가 뜰 때는 ‘프랑스 경호원’(학예사)은 어디에 배치될까. 대한항공 측은 “화물기라 하더라도 (승무원 등을 위한) 좌석 8개가 있다.”면서 “프랑스 학예사는 이 좌석을 이용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51993년 당시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돌려준 ‘휘경원원소도감의궤’(徽慶園園所都鑑儀軌) 1권은 국립중앙도서관에 거처를 틀었으나 이번 프랑스와의 협상에서 “모든 외규장각 도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한다.”고 합의함에 따라 중앙박물관으로 이사하게 된다. #6당초 정부는 145년 만의 귀환인 만큼 1차분 도착일에 환영행사를 열 계획이었다. 하지만 프랑스가 자국 내 반감 등을 들어 난색을 표시했고 우리 정부도 세 차례 귀환 일정이 더 남아 있는 상태에서 프랑스의 심기를 자극해 좋을 게 없다는 판단에 따라 ‘없던 일’로 했다. 글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사진 안주영·정연호기자 jya@seoul.co.kr
  • “청소년 3일에 1명꼴” ‘자살예방委’ 만든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초·중·고생이 8년째 해마다 100명을 넘고 있다. 청소년 자살이 늘어나자 교육과학기술부는 자살 대책으로 전국 초·중·고교에 ‘위기관리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했다. 하지만 청소년 자살자 4명 중 1명은 자살 원인조차 밝혀지지 않아 예방책 마련이 쉽지 않다. 이 때문에 관리위원회가 겉돌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지난달 7일 전남 목포에서는 고교 2학년인 17살 임모군이 스스로 몸에 불을 붙여 분신자살을 시도했다. 다행이 인근 주민들 신고로 목숨은 건졌지만 온 몸에 3도의 중화상을 입었다. 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진 임군은 성적도 좋은 데다 부모 속을 썪이지 않아 ‘엄친아’라는 말을 듣는 학생이었다. 하지만 임군은 부모의 기대에 비해 자신이 미치지 못하는 점을 부담스러워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10일 교과부에 따르면 지난해의 경우 스스로 목숨을 끊은 청소년이 146명이나 된다. 2003년 100명이던 자살 청소년이 2004년에는 101명, 2005년에는 135명으로 늘었다가 2006년 108명, 2007 142명, 2008년 137명을 거쳐 2009년에는 202명으로 급증했다. 다행히 급증세는 지난해에 다소 줄어들었다. 하지만 8년째 매년 1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자살한 학생은 고교생이 많았다. 2009년의 경우 자살 청소년 202명 중 고교생이 140명(69%)으로 가장 많았고 이어 중학생(56명·28%), 초등학생(6명·3%) 등이었다.  청소년 자살의 주요인으로는 가정문제가 첫손에 꼽혔다. 2005년부터 지난해까지 자살한 870명을 분석한 결과, 가정불화 등 가정문제로 인한 자살이 31.8%(277명)를 차지했다. 우울증 등 염세·비관으로 인한 자살(18.4%·160명), 성적 비관(11.5%)이나 이성문제(7.1%)로 인한 자살이 뒤를 이었다. 하지만 자살 청소년 4명 중 1명 꼴인 24.0%는 원인조차 밝혀지지 않았다.  이에 따라 교과부는 전국 16개 시·도교육청에 일선 초·중·고교 등에 청소년 자살을 예방하고 사건이 발생하면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위기관리위원회를 설치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학교장과 생활지도교사와 학부모 등이 참여하는 위원회는 학생자살 위기 관리체계를 만들어 운영한다. 또 학생 자살사건이 생기면 재학생 및 교직원 학부모 등 주변사람들의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나 자살 전염 방지 등 사후 대책도 마련하게 된다. 이와 함께 11일부터 28일까지 전국 초·중·고교 생활지도 담당 교사 및 교육청 직원 등 1만 2000명을 대상으로 ‘학생자살 예방 및 위기관리’ 연수도 진행하기로 했다.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생명의 窓] 종교의 권력화 국민이 막아야/박광서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생명의 窓] 종교의 권력화 국민이 막아야/박광서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다종교 국가 중 한국만큼 비기독교인으로 사는 데 불편한 나라는 없다고 한다. 종교의 자유가 헌법에 엄연히 있음에도 개신교인을 제외한 일반국민이 피부로 느끼는 종교의 자유 체감도는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일 것이다. 다소 과장하자면 한국에 개신교의 자유는 있어도 종교의 자유는 없어 보인다. 최근 드러나는 개신교의 힘자랑을 보면 더욱 그런 듯싶다. 지난달 3일 공개적인 행사인 국가조찬기도회에서 통성기도하자는 목사의 한마디에 무릎 꿇은 대통령, 엉거주춤 함께 꿇은 야당대표, 고위관리들과 군 장성들도 모양새가 영 아니다. 국민 모두를 무릎 꿇린 것 같아서 심히 자존심이 상한다. 국민은 두렵지 않은데, 종교권력은 두려운 것일까. 더 고약한 것은 하나님을 등에 업고 대통령 위에 군림하는 목사다. 대통령을 무릎 꿇리니 통쾌할까. 기독교 국가가 된 듯해 뿌듯할까. 종교권력을 확인하고 재생산하는 전형적인 정교(政敎) 야합의 해괴한 굿판이 되어버린 국가조찬기도회는 더 이상 공익법인 자격이 없다. ‘정교분리’의 헌법수호를 위해 국가조찬기도회를 해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유있게 들리는 까닭이다. 일부 대형교회 목사들은 쓰나미 같은 대형 자연재해 때마다 ‘신이 내린 징벌’이라고 독설을 퍼붓는다. 그런데 지난 2월 뉴질랜드에서, 그것도 이름마저 ‘크라이스트 처치’(Christ Church)라는 성스러운 도시에서 지진이 발생해 많은 사람들이 죽고 교회까지 무너질 때는 왜 아무 말도 안 했을까. 옥석도 못 가리고 집단학살하는 무자비한 신은 상상이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남의 불행을 먹고 사는 것은 악마밖에 없다는 것을. 종교지도자들의 탈세도 문제다. 10억대의 연봉을 받는 목사가 세금 한푼 안 내는 엉터리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수년 전 여론조사에서 ‘성직자도 세금을 내야 한다’는 의견이 89%나 되었지만, 정부는 개신교 위세에 눌려 잘못된 관행을 애써 모르는 척하고 있다. 쥐꼬리만 한 급여에 세금을 꼬박꼬박 내면서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일반서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은 클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은 ‘죽음’과 ‘세금’뿐”이라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말처럼 소득 있는 곳에는 예외 없이 세금이 부과되어야 하지만, 개신교 목사들만은 이 세상과 무관한 별천지에 살고 있는 셈이다. 더 크게 짓고, 더 높게 오르고, 더 많이 가지려는 인간의 욕망 위에 지은 누각은 종교사업자의 탐욕에 불과할 뿐 진정한 종교일 수는 없다. 어느 개신교인이 스스로 “오늘의 한국 기독교 상황이 정신나간 운전사에 조는 승객들로 가득 찬 버스와도 같다.”고 우려했다지만, 일부 힘 있는 성직자들의 막된 언행과 세속적 권력화의 반작용이 거대한 쓰나미가 되어 자신들을 덮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듯해 안타깝다. 국민은 종교지도자들의 무례한 언행과 무분별한 힘자랑이 불쾌하고 피곤하다. 종교의 권력화는 국민이 나서서 막아야 한다. 정치성향이 강한 종교인은 종교계 스스로 밀어내야 한다. 종교가 사회의 부조리와 불협화음을 해소하기는커녕 불화와 갈등의 씨앗이 된 지금이야말로 결단의 시기다. 한국 개신교가 유효기간이 지난 종교상품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는 길은 “나는 기독교 신학이 인류의 커다란 재앙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라고 했던 20세기 영국의 과학철학자 화이트헤드의 말을 화두 삼아 순수한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용기 있게 리셋(reset)하여 국민의 사랑을 다시 받기를 바란다. “종교는 무지렁이(일반대중)들에게는 진실로 여겨지고, 현자(賢者)에게는 거짓으로 여겨지며, 통치자들에게는 활용대상으로 여겨진다.”고 했던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의 말이 떠오른다. 정치인은 임기가 끝나면 국민이 표로 심판이라도 할 수 있지만, 종교지도자는 세뇌된 신도집단이 버텨주는 한 변화를 기대하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정치가 종교지도자들에게 활용대상이 된 한국사회는 그래서 더 큰 위험을 안고 있다. 종교계의 자정과 쇄신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 쿠사 망명작전은 MI6 ‘작품’이었다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의 ‘오른팔’이었던 무사 쿠사 전 외무장관의 망명은 영국 해외 정보기관인 MI6의 ‘작품’이었다. 쿠사가 영국 판버러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도 리비아 지도부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로 극비리에 진행됐다. 1일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에 따르면 쿠사 전 장관의 망명작전은 지난달 28일 (현지시간) 해질 무렵 수송차량을 타고 튀니지의 수도 튀니스로 향하면서 시작됐다. 차량에는 쿠사와 그의 아들이 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튀니지 언론은 쿠사의 방문이 “사적”이라고 보도했고, 보도에 놀란 리비아 정부 대변인은 당황해하며 “외교적 임무”라고 둘러댔다. 망명설이 흘러나왔지만 리비아 정부는 부인했다. 그의 최종 목적지는 영국이었다. 쿠사는 리비아로 돌아가지 않고 튀니지에 머물며 자금을 송금하는 등 망명준비를 서둘렀다. 준비를 마친 쿠사는 30일 오후 4시쯤 가족들과 함께 튀니스 남쪽 400㎞ 떨어진 휴양도시 제르바에서 민간 항공기에 올랐다. 6시간 뒤인 오후 10시쯤 쿠사 일행을 태운 스위스 항공기는 영국의 판버러 공항에 도착했다. 쿠사는 제3국 외교관을 통해 영국 정보당국에 먼저 망명 의사를 타진했다고 인디펜던트는 보안당국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쿠사가 망명을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12월 카다피의 아들 중 한 명과 불화를 겪은 직후부터였을 것으로 리비아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쿠사가 영국을 망명지로 선택한 데에는 그의 전력이 작용했다. 쿠사는 스코틀랜드 로커비에서 270명의 목숨을 앗아간 팬암기 폭파사건 유족들에 대한 보상과 이 사건 범인으로 지목돼 스코틀랜드 교도소에 수감중인 압델 바셋 알메그라히 석방 협상을 이끌었다. 1979년 영국 주재 대사로 부임했으나 1980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리비아 정부가 반체제 인사 2명을 살해할 계획이라고 발언했다 추방됐다. 2009년 외무장관이 되기 전 정보기관의 수장으로 15년간 일했다. 이 과정에서 중동지역에서 활동하는 영국 요원들과 친분을 쌓았고, 그 친분이 망명 성공에 톡톡히 역할을 했다. 김균미기자 kmkim@seoul.co.kr
  • 현상금 3억 울산 방화범 검거

    현상금 3억원이 걸린 울산 봉대산 산불 방화범이 경찰의 끈질긴 추적 끝에 붙잡혔다. 울산 동부경찰서는 25일 동구 일대에 17년에 걸쳐 산불을 낸 혐의(방화)로 김모(52)씨를 붙잡아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씨는 1995년부터 봉대산과 마골산 등에서 모두 93차례 불을 지른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은 울산의 한 대기업에 다니는 김씨는 “금전문제로 가정불화가 있었으며 불을 내면 마음이 후련하고 편안하다.”면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과 헬기 소리를 듣고 스트레스를 풀며 안정감을 느꼈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산불 현장의 폐쇄회로(CC)TV 화면을 분석, 김씨의 모습이 찍힌 것을 확인하고 범행을 자백받았다. 울산 박정훈기자 jhp@seoul.co.kr
  • [홀몸노인 말벗서비스] 구로구, 독거노인 26명에게 생일상 차리기 행사

    [홀몸노인 말벗서비스] 구로구, 독거노인 26명에게 생일상 차리기 행사

    “아무도 내 생일에 눈길을 주지 않았어요. 뒤늦게나마 축하 인사를 곁들인 푸짐한 점심 대접을 받으니 만금(萬)을 얻은 것보다 더 기뻐요.” 조영자(73·구로4동) 할머니는 21일 지역 음식점인 H회관에서, 뜻밖의 생일상을 받은 뒤 줄곧 눈물만 훔쳤다. 원래 생일이 1월인 할머니는 1남 1녀를 뒀으나 아들은 군입대 영장을 받고 친구들과 만난 뒤 귀가하다 교통사고로 숨졌고, 딸은 현재 경남 남해에서 살지만 식당 허드렛일 등으로 어렵게 지내 노모를 보살필 여력도 못 된다. 남편도 4년 전 질환으로 사망, 기초노령연금 9만원으로 겨우 버티고 있다. 게다가 허리 디스크에 무릎도 아파 혼자 움직이기엔 여간 불편하지 않다. 같은 동네에 사는 이방자(86) 할머니 또한 생일을 잊은 지 오래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으나 31세 때 가정불화로 홀몸 신세가 되고 말았다. 파지(破紙) 수집으로 연명하는 할머니는 이웃들이 차린 생일상 앞에서 처음엔 말문도 못 열었다. 구로구가 펼치는 ‘독거노인 생신상 차리기’ 행사에서는 21일 두 할머니를 포함해 구로4동 15명, 개봉3동 6명, 오류2동 5명 등 26명이 기쁨을 맛봤다. 구는 생일을 놓치는 홀몸 노인 700여명을 연말까지 돌아가며 초대할 계획이다. 구로4동에선 자원봉사 모임인 ‘희망나눔 실천회’ 회원들이 자리를 마련했다. 지난해 10월 35명으로 똘똘 뭉친 뒤 고교생 10명에게 20만원씩 장학금을 전달했고 경로잔치도 연 2회 갖기로 뜻을 모았다. 개봉3동 자원봉사 캠프에서는 이순(67) 회장 등 비슷한 연령대의 노인들이 홀로 지내는 노인들과 외로움을 달래며 즐거움으로 바꿨다. 오류2동에선 김복임(73) 할머니 등이 잔칫상을 받아들고 모처럼 오붓한 시간을 즐겼다. 이성 구청장은 “고령화, 핵가족화 심화에 따른 홀몸 노인의 증가세에 발맞추는 시간을 이어 가겠다.”고 말했다. 글 사진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독일서 잠자던 ‘한국 유물’ 깨어나다

    독일서 잠자던 ‘한국 유물’ 깨어나다

    프랑스에서 외규장각 도서가 돌아오고 일본에서 조선왕조의궤가 반환될 움직임도 보이고 있는 가운데 독일에 잠들어 있던 한국의 고미술품들이 한자리에 전시된다. 한국국제교류재단은 21일 ‘한국의 재발견-독일 박물관 소장 한국의 보물’전이 독일에서 열린다고 밝혔다. 독일 소재 10개 박물관에 소장된 6000여점의 한국 유물 가운데 116점을 엄선해 오는 25일부터 2013년 2월까지 쾰른 동아시아미술관, 라이프치히 그라시민속박물관, 프랑크푸르트 응용미술박물관, 슈투트가르트 린덴박물관 4곳을 순회 전시하는 일정이다. 2009년 논의를 시작해 20개월의 준비 작업을 거쳤다. 대부분 민속품이긴 하지만 수준 높은 작품들도 있다. ‘고려수월관음도’는 쾰른 동아시아미술관 창립자인 아돌프 피셔가 1901년 조선을 방문했을 때 사들인 작품이다. 관음도답게 부처가 쓰고 있는 천이 투명하게 묘사된 것이 고려 불화의 특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라이프치히 그라시민속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18세기 조선백자 컬렉션은 독일인 무역상들의 손을 통해 독일로 넘어 갔다. 궁중 사람들이 내다 판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5~6세기 신라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귀걸이, 1794년 제작된 조선시대 8폭병풍, 19세기 말 동경제국대 교수를 지낸 칼 코트셰가 1884년 조선 여행길에 사들인 대동여지도 사본 등도 함께 전시된다. 민영준 교류재단 베를린사무소장은 “유럽에서 이렇게 성대하게 한국 유물을 전시하는 것이나 독일 10개 박물관이 공동으로 참가하는 것 모두 처음이라 독일에서도 역사적 전시라는 평이 나오고 있다.”면서 “영어와 독일어 도록도 제작돼 유럽인들에게 한국 유물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妻子와 愛人을 음독시킨 아, 내이름 家長”

    “妻子와 愛人을 음독시킨 아, 내이름 家長”

    [선데이서울 73년 7월 8일호 제6권 27호 통권 제 247호]  귀여운 두 아이들의 영혼은 지금 어느 곳을 헤매고 있을까? 꿇어 엎드린 그 젊은이의 뺨에는 하염없이 회한의 눈물만 흘러내린다. 아내는 복역 중에 있고 연인은 영원히 떠나버렸다. 사랑과 미움의 갈림길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천애의 골짜기로 굴러 떨어진 어떤 가장. 재기의 몸부림과 속죄의 절규로 썼다는 애독자 김모씨(기사 원본엔 풀 네임 적시돼 있음)의 수기를 싣는다.   아마 기억하고 있는 독자는 흔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지난 해(1972년) 9월8일자 각 일간지 사회면에는「일가족 집단 음독자살」 제하의 기사가 난 일이 있었다. 나는 이 사건의 일가족 가장이다. 이제 내 나이 30살. 그리하여 나는 이 사건으로 귀여운 아이들을 잃고 속죄의 몸부림으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그러니까 사건의 시초는 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음독자살 미수에 그쳐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던 鄭京淑(25·가명)이라는 여인 이야기를 신문을 통해 보고 왠지 동정심에 이끌려 찾아가 치료와 퇴원 수속까지 자비로 해준 일이 있었다. 동정은 사랑으로 변하여 결국 부모와 친척이 없다는 그녀를 집에 데려다 동거하게 되었다.  그 뒤 나는 군에 입대했고 파월(월남 파병을 말함) 되었다가 69년 8월에 귀국, 제대했다.  제대를 한 뒤 나는 그녀와 결혼을 하겠다고 어머님과 가족들에게 얘기했으나 과거가 있는 그 여자(실연 후 음독했다고 함)와는 절대로 결혼시킬 수 없다는 완강한 반대를 받았다. 그러나 나는 끝내 69년 8월27일 나의 집이 있는 서울을 도피해 인천시내 K예식장에서 가족들이라고는 한 사람도 참석치 않은 둘만의 결혼식을 올렸다. 그 후 약 1년 동안은 집에 들어갈 수가 없어 서울 금호동 변두리에 셋방을 얻어 생활했다. 아내가 첫딸을 낳자 어머니도 어느 정도 이해하여 집으로 들어 가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녀와의 결혼을 극력 반대하던 어머니의 감정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은 탓인지 어머니와 아내는 서먹서먹 했고 보이지 않는 불화가 계속되었다. 그러는 사이 아내는 또 아들을 낳아 우리는 1남1녀를 두었다.  당시 나는 어느 회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서울에서 인천으로 전근이 되어 그곳으로 출퇴근을 했다.  교통이 불편해서 나는 직장 부근에 하숙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 집에는 일주일에 한두번 갈 정도가 되었다. 그 즈음 나는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던 지(池)모양(20)과 사귀게 되었다. 둘 사이는 급속도로 가까워 졌으면 결국 몸을 하락하게 되었다.  나는 아내가 있다고 그녀에게 고백했다. 池양은 펄쩍 뛰며 아내와 헤어질 것을 요구해 왔다. 결국은 아내와 본격적인 이혼문제를 논의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때 나는 장님이 되었던 것 같았다.  아내도 설마 내 말이 거짓이겠지 하며 『사실이라면 사귀고 있는 여자와 직접 만난 다음에 합의해 주겠다』고 얘기했다. 그 후 두 여인은 몇차례 만났으며 그때마다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두 여인의 사이는 외면적으로는 사이가 좋아보였다.  그러나 막상 아내가 이혼 조건으로 요구하는 위자료를 그 당시 나의 입장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어 어렵게 되어 하루 하루 이혼문제는 지연되었으며 자연 池양과 나는 시내 여러 곳으로 남의 눈을 피해 생활하게 되었다. 그러나 池양의 가족들은 나의 환경을 알게 된 후 자기 딸을 집에다 감금하다시피 꼼짝 못하게 했다. 더우기(더욱이) 그녀의 아버지는 딸의 머리까지 가위로 빡빡 깎아 버렸다.  그러나 그녀는 머리를 수건으로 쓰고서라도 또 집을 뛰쳐나와 나에게 빨리 이혼할 것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지난 해 9월4일 아내는 이혼 조건을 대폭 완화하여 9월5일 합의이혼 수속을 끝내자고 말해 池양은 이 사실을 알고 기뻐했다. 하지만 깊은 정이 든 아내와 막상 헤어지자니 망설여졌다. 나는 나의 확실한 마음을 결정하지 못하고 아는 선배를 찾아가 나의 입장을 설명하고 어떠한 판단이 옳은 지를 상의했다.  선배는 두 자식을 위해서 절대로 아내와 이혼을 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나도 그것이 옳은 것 같았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 두 여인을 한 자리에 불러놓고 池양에게 헤어질 것을 요구했다. 池양은 여태껏 미루어 온 결정을 눈 앞에 놓고 무슨 얘기냐고 흥분하여 서로가 옥신각신 심한 언쟁을 했다.  이 광경을 옆에서 보고있던 아내는 池양이 처녀의 몸으로 당신과 사귄 것인만큼 또 한 여인을 희생시킬 수 없으니 자기가 물러나겠다고 했다. 나는 아내의 말에 지금의 내가 말한 것은 심중히 생각한 결론이며 움직일 수 없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얘기가 쉽게 끝나지 않아 그날 밤 10시경 두 여인과 나는 집 부근에 있는 여관으로 장소를 옮겨 밤 늦도록 얘기를 나누었지만 결론을 못 얻었다.  밤이 늦어 잠깐 잠이 들어 새벽 5시경 눈을 떠보니 두 여인은 어린 것을 데리고 내가 풀어논 팔뚝시계와 외투에 든 돈 등을 꺼내 가지고 행방을 감춰버렸다.  나는 혹시 집으로 간 것이 아닌가 하여 집으로 가본즉 池양이 새벽 4시경 집에 들어와 잠자고 있던 맏딸 주현(3세)을 마저 업고 나갔다는 사실을 어머니로부터 들었다. 불길한 예감에 하루 온종일 두 여인의 행방을 찾아 헤맸으나 허사였다. 밤 9시가 조금 못되어 집에 돌아왔다가 다시금 집 근방에 있는 여관마다 두 여인을 찾아 헤맸다. 겨우 신림동에 있는 K여관 101호실에 투숙한 사실을 알고 방문을 「노크」했으나 응답이 없었다. 여관 종업원이 창문으로 들어가 방문을 열었다.  방에는 싸늘한 체온의 두 자식과 시체와도 흡사한 두 여인이 눈 앞에 뒹굴고 있었다.  나는 즉시 인근 파출소에 신고를 하고 급히 S병원으로 옮겼으나 그날 밤 자정이 조금 지나 주현이가 숨지고 다음 날 하오 2시경 장남 재훈이마저 숨이 끊어졌다.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심정으로 그때까지도 의식불명인 두 여인의 회복을 미칠 것같은 심정으로 지켜보고만 있었다.  약 46시간만에 점차 의식이 회복되는 두 여인을 뒤로 하고 나는 당면한 병원비와 입원비를 마련코자 집으로 뛰어가 세간살이와 집을 헐값에 급히 팔아 가지고(내놓고의 뜻으로 보임) 병원으로 돌아오니 이미 대기했던 각 신문사 기자와 방송사 기자들의 취재가 어지러울 정도로 시작되었다. 동시에 관할 경찰서 형사가 두 여인과 나에게 조서를 받아가고 다음 날 아내는 (직계)비속 살인죄로 기소되었으며 회복되는대로 구속된다는 사실을 형사로부터 들었다.  그 후 두 여인의 건강은 놀라울이(놀라울) 만큼 빨리 회복돼 갔으며 음독을 하게 된 경위를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새벽에 여관을 나선 그들은 시계를 팔아 받은 돈으로 수십 곳의 약방을 돌아 음독할 약을 구입했다는 것이다.  아내는 이혼을 해주고 어린 자식들을 다른 여자에게 주느니 차라리 자식과 함께 삶을 포기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고 池양은 나의 배신으로 말미암아 앞으로 닥쳐올 가족들의 비난과 자신의 운명을 비관한 나머지 각자의 이유는 달랐으나 죽는다는 것에 합의를 보아 기묘한 동반자살을 (시도)하게 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며칠 뒤 池양의 가족들은 나를 혼인빙자 간음죄로 고소했으나 웬일인지 고소를 취하, 나는 풀려났으며 그 해 10월27일 두 여인은 노량진경찰서에 구속되었다.  나의 잘못으로 죄 없는 어린 두 자식이 희생됐고 또 두 여인이 구속된 사실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나는 수차 자살을 기도했으나 뜻을 못 이룬채 두 여인이 구속돼 있는 경찰서로 면회를 갔었다. 그러자 아내가 그 전 내가 자기 오빠뻘이 되는 사람 집에 있을 때「타이어」 2개를 갖고 간 일이 있다고 해서 절도죄로 피소, 나 역시 11월1일 구속되어 한 경찰서 감방 안에는 뭇사람들의 웃음과 조롱거리가 된 두 여인과 내가 마주 쳐다보이는 쇠창살문 안에서 고통스런 3일을 함께 지냈다.  11월5일 두 여인은 먼저 영등포구치소로 넘어가고 나 혼자 있다가 11월10일 나도 구치소로 넘어가 영등포구치소로 내에 3인이 같이 수감됐다. 검치가 시작되어 매일 검사 앞에 푸른 수의를 걸친 두 여인과 나는 같은 검사실에서 취조를 받았다.  그러나 아내는 범행을 순순히 시인하나 池양은 내가 약을 사줬으며 자기는 절대 간여한 사실이 없다고 끝내 부인했다. 그러나 나는 살인죄에는 간여한 사실이 없다고 인정되어 절도죄로 10월 구형에 6월형을 선고받아 머리를 깎고 기결수로 노역장에 출역을 했으며 복역 중에는 두 여인의 공판 하루 전날 증인으로 소환되기도 했다. 두 연인은 구형에서 징역 5년씩을 선고받았다. 池양 측에서는 변호인을 선정하여 변론을 했으나 아내는 변호인도 없이 선고공판에서 징역 3년이 확정됐으며 池양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이 확정되어 석방되었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나는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크며 돌이킬 수 없는 과오인가를 뉘우치며 짧은 복역기간 동안이나마 열심히 반성하고 일했다.  나는 형기가 만료되어 지난 5월3일 구치소의 육중한 철문을 나와 자유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그 날 나는 아직도 구치소 안에 혼자 남아있는 아내를 면회하였다.  아내는 슬프게 흐느끼면서 『당신을 전과자로 만들고 두 자식을 죽인 내가 죄가 많아요. 이제라도 당신의 행복을 위해 池양과 결혼하라』고 얘기하는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당신이 석방되어 나오는 날까지 나는 꼭 당신만을 기다리겠소. 당신의 깊은 사랑을 나는 이해할 수 있으니 다른 생각하지 말고 몸 건강히 있으라』고 일러둔채 말문이 막혀 돌아서 나왔다. 이렇게 해서 첫날 면회를 간 후 이틀이 멀다 하고 나는 면회를 가며 매일 편지를 띄우고 있다. 이제 오직 나에게는 아내가 나오는 날까지 과거의 아픔을 거울삼아 힘껏 못다 이룬 둘만의 행복을 향해 줄달음칠 결심이다. 그래서 참되게 살겠다.  ■한 가족 음독자살 당시의 보도  「선데이서울」제207호 72년 9월24일자 P16에 보면 9월8일 金모여인과 정부 池모양이 신림1동 C여관에서 함께 음독자살을 꾀한 사건이 났다고 보도되었다. 여기에는 물론 金씨의 수기에서와 같이 金씨의 아들(1살) 딸(3살)도 함께 어른들에 의해 음독, 72년 9월8일 현재 아들만 죽고 나머지 3명은 가료 중이라고 되어 있다. 이 기사에는 池양과 金씨가 동거하는 곳에 나타난 金씨의 아내 鄭여인이 『위자료를 내면 양보하겠다』고 요구하여 옥신각신 하던 끝에 집에 돌아온 金씨가 『싸우려면 나가서 싸워라. 둘 다 꼴보기 싫다』며 내쫓아 버렸는데 엉뚱하게 본처와 정부가 동반자살을 하려다 실패, 딸만 절명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 ‘MB노믹스’ 밑그림 그린 주인공

    ‘MB노믹스의 설계자’, ‘MB의 경제 멘토’, ‘강고집’ …. 강만수 산은금융지주 회장 내정자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는 현 정부 경제 정책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감세와 규제 완화, 작은 정부와 큰 시장, 성장과 투자촉진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MB노믹스’의 밑그림을 그린 주인공이다. 경제부처에서는 세제와 금융, 예산 분야 등 핵심 요직을 두루 거친 정통 경제 관료로 평가받는다. 소신이 강하지만, 이는 고집스러움으로도 비쳐져 이따금 주변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뚝심과 성실, 추진력이 강 내정자를 요약하는 단어다. 공직 생활 중 부가가치세 도입, 금융·토지실명제 도입 등 경제사에 굵직굵직한 이슈가 있었을 때 항상 그 중심에 자리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고조되며 책임론이 불거졌으나 한·미 통화 스와프를 이끌어내며 이명박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재확인했다. 경상수지 개선을 위해 환율 상승을 주도했다. 시장은 글로벌 금융위기 상황에서 그의 성장주도형 경제정책을 비판했지만 강 내정자는 거침없는 화법으로 자신의 소신을 밝혀 시장과의 불화를 불렀다. 그리곤 2009년 개각에서 경제 사령탑에서 물러났다. 그럼에도 대통령의 신임은 달라지지 않았다. 대통령 자문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위원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청와대에 들어올 때마다 이 대통령과 단독 면담을 가졌고, 이후 대통령 경제특별보좌관까지 맡았다. 현 정부의 간판 실세에서 숨은 실세로 변신한 셈이다. 이 대통령과는 20년 이상 소망교회를 함께 다니면서 각별한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이 대통령이 서울시장이었던 2005년 서울시정개발연구원장을 맡아 정책을 조언했다. 17대 대선 과정에서는 일류국가비전위원회 부위원장 겸 정책조정실장을 맡아 이 대통령의 공약을 총괄 정리했다. 1970년 행정고시 8회에 합격해 경주세무서 총무과장으로 공직을 시작한 강 내정자는 재무부 보험국장과 이재국장, 국제금융국장, 세제실장, 주미대사관 재무관, 관세청장, 통상산업부 차관, 재정경제원의 마지막 차관 등을 두루 거쳤다. 외환위기 이후 공직에서 물러나 무역협회 상근 부회장, 디지털 경제연구소 이사장 등을 맡기도 했다. 가족으로는 부인 하인경(64)씨와 2남 1녀가 있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29년전 버림받은 아들 친모·의붓아버지 살해

    29년 전 자신을 버리고 집을 나간 친어머니와, 그와 재혼한 의붓아버지를 흉기로 잇따라 살해한 30대 남성이 범행 4시간 만에 경찰에 자수했다. 서울 강서경찰서는 9일 29년 만에 만난 친어머니 최모(55)씨를 흉기로 찔러 살해한 이모(35)씨에 대해 존속살해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이씨는 지난 8일 오후 4시쯤 서울 방화동의 한 아파트로 찾아가 미리 준비한 흉기로 어머니 최씨를 찔러 숨지게 한 혐의를 받고 있다. 또 이씨는 같은 날 오후 6시 40분쯤 경기 양주로 가 최씨가 집을 나갈 당시 최씨의 애인이었던 의붓아버지 노모(52)씨를 음식점으로 유인해 흉기로 찔러 살해한 혐의도 받고 있다. 경찰 조사에서 이씨는 “7살 때인 1982년 어머니와 노씨가 육체 관계를 갖는 장면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다. 이후 어머니는 노씨와 서울로 도망갔고, 12살 때인 87년 아버지는 농약을 마시고 자살해 동생과 함께 고아원에서 생활했다.”고 진술했다. 95년까지 부산의 한 고아원에서 성장한 이씨는 자신의 어려운 신세를 집 나간 어머니 탓으로 돌려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는 최근 건강보험 때문에 가족관계 증명서를 발급받다 최씨의 주소를 알아냈고, 8일 낮 12시쯤 최씨를 만나 4시간 동안 함께 소주 2병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이때 이씨는 최씨에게 “어머니가 문란한 생활을 해 내 인생이 꼬였다.”며 반성하라고 다그쳤고, 최씨가 “내 아들이 아닌 것 같다. 주민등록증을 보여 달라.”고 말하자 미리 준비한 흉기로 최씨를 살해했다고 경찰은 전했다. 또 모든 불화의 원인이 노씨 때문이라고 생각한 이씨는 다시 노씨를 찾아가 흉기로 수차례 찔러 살해했다. 이날 두 차례나 살인 행각을 벌인 이씨는 오후 10시 40분쯤 “죄책감 때문”이라며 서울 신림동 자신의 집 근처 파출소를 찾아가 자수했다. 경찰 관계자는 “이씨가 우발적으로 친모를 죽였다고 진술하고 있지만 흉기를 미리 준비했던 점으로 볼 때 계획적인 범행으로 보인다.”면서 “오랫동안 떨어져 지냈던 친모를 갑자기 찾아간 이유를 캐는 등 정확한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양진기자 ky0295@seoul.co.kr
  • [새음반]

    ●디퍼런트 기어, 스틸 스피딩(Different Gear, Still Speeding) 갤러거 형제의 불화로 영국의 슈퍼밴드 오아시스는 2년 전 해체됐다. 동생 리암이 오아시스에서 함께했던 앤디 밸(베이스), 겜 아처(기타) 등과 ‘비디 아이’(BEADY EYE)란 밴드를 결성했다. ‘다른 장비를 가지고 여전히 속도를 낸다’는 앨범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오아시스 팬이라면 기대해도 좋다. 오는 5월 15일 내한공연이 확정됐다. 소니뮤직. ●미션 벨(Misson Bell) ‘기가 막히게 섹시한 남부 포크뮤직 보이스’란 평가를 받는 블루노트의 대표 싱어송라이터 에이모스 리가 3년 만에 4번째 앨범을 내놓았다. 빌보드와 아이튠즈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했다. 사랑하는 여인이 꿈을 이루기 위해 곁을 떠났다는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윈도스 아 롤드 다운’(Windows Are Rolled Down) 등 서정성이 돋보인다. 워너뮤직. ●해빗(Habits) 2005년 밴드 결성 이후 킬러스의 북미 투어 오프닝 밴드로 공연하면서 주로 인디 신에서 활약했던 네온트리스의 데뷔 앨범이다. 첫 싱글 ‘애니멀’(Animal)은 빌보드 싱글차트 13위, 얼터너티브차트 1위를 차지했다. 거친 질감의 개러지 록(1960~70년대 느낌의 영국풍 음악)과 뉴웨이브의 결합이 돋보인다. 유니버설뮤직.
  • 뼛속까지 박힌…폭력을 마주하다

    뼛속까지 박힌…폭력을 마주하다

    변형되고 재단되지 않으면 기억은 그 자체로 고통이고 폭력이다. 자칫 삶을 뿌리에서부터 부정하지 않도록, 삶에 대한 나름의 만족감을 안겨줄 수 있도록, 그래서 삶을 이나마 지탱시켜줄 수 있도록 적당히 뒤틀리고 적당히 각색되어야 한다. 세월 속에 마모된 기억이 불쑥 튀어나와 가끔은 현란한 언어를 구사하며 스스로 우쭐대곤 하는 이유다. 기억의 미덕이고, 마법이다. ●친구의 죽음·민간인 포격… 평범한 이의 유장한 오딧세이 그러나 일생에 걸쳐 근원적 폭력이 새겨진 기억은 조금 다르다. 여기, 삶의 곳곳 대목마다 폭력과 죽음을 맞닥뜨린 이가 있다. 폭력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불안의 심상은 일생에 걸쳐 곁에 뒀던 바다의 아득한 포말과 맞닿는다. 그리고 우리 사회 우울했던 시대가 내지른 광기 서린 폭력과 교직한다. ‘나’는 초등학교 입학 시절 우리 사회가 요구한 ‘질서정연한 앞으로 나란히’에서 죄악의 첫 기준을 접한다. 그리고 중학교 3학년 때 교사의 학생 타살 사건이 벌어진다. 월남전 참전의 기억을 늘 자랑스레 얘기하며 폭력을 일삼던 교련 교사에게 맞아 우물에 던져진 학생은 이미 같은 반 친구들에게도 집단 괴롭힘을 당했던 이였다. 이렇듯 가해와 피해의 기억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함께 남겨진다. 얼마 뒤 전교 1등 하던 또 다른 친구는 하굣길 바닷가 절벽에서 몸을 던졌다. 모든 일들은 교실 앞쪽에 걸린 ‘강파른 눈매로 내려다보는’ 대통령 사진 아래에서 이뤄진다. 졸업 뒤 세상에 나와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훈련소 동기는 구타에 못이겨 바다에 몸을 던지고, 자대배치받은 최전방 섬 부대에서는 훈련 중 민간인이 탄 어선을 포격하는 오발 사고가 벌어진다. 같은 부대 사병은 총을 들고 대치하다가 동료 군인의 총에 맞아 담요에 싸인 채 실려나온다. 고등학교 때 약간 껄렁했던 친구는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뒤 변소에서 목을 매 죽는다. ‘강파른 눈매의 대통령’이 부하의 총에 맞아 죽고, ‘남쪽의 폭동’이 일어나던 때다. 사회에서 맞닥뜨린 폭력은 조금씩 형태를 달리한다. 회사 내부에서 적당한 물리적 폭력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간교함을 앞세워 승승장구하는 후배에 밀려난다. 중국땅으로 떠난 ‘나’는 선박회사 작업장에서 악착같이 삶에 애착을 갖던 중국인 동료를 또 다시 사고로 잃는다. 북극권의 노르웨이 선박회사로 자리를 옮긴 뒤 불면과 불안, 알코올 의존을 거듭하며 내면을 더욱 여실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장편소설 ‘육도경(六島經)’(자음과모음 펴냄)은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온 이가 겪은 비범하면서도 유장한 오딧세이아다. 폭력과 죽음이 내면에 새겨놓은 공포의 기억을 고개 돌리지 않고 마주하는 것, 철저히 불화할 것만 같은 대상과 화해하고 치유하는 것의 가능성을 조심스레 내딛고 있다. 제1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이다. 작가는 문호성(53). 직함(이탈리아 선급협회 등록업무부장)이 이채롭다. 조선설계기술사로 일하면서 첫 번째 장편소설을 내놓았다. ●공포의 기억 앞에서 내면 치유를 위해 화해 손짓 소설은 산해경(山海經)의 형식을 차용해서 동도경(東島經), 북도경(北島經), 서도경(西島經) 등으로 장을 나눴고, 절영도, 곡도, 울도, 마억도 등 여섯 개 가상의 섬을 배경 삼아 이야기를 풀어낸다. 늦깎이 등단한 문호성은 “배를 타는 사람끼리는 흔히들 ‘철판 한 장 아래가 죽음’이라고 얘기한다.”면서 “망망한 바다 위의 섬, 또는 배와 같이 폐쇄된 공간에서 흔히 교차하는 죽음의 이미지를 시대의 서사와 함께 노래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바다가 죽음만이 아닌 환생의 이미지를 함께 갖고 있음도 넌지시 내비치고자 했다.”고 덧붙였다. 기억의 왜곡에 정직하게 맞서려는 주인공 내면의 심리를 때로는 시적(詩的) 서정의 환기로, 때로는 객관적 거리를 유지한 채 담담하면서도 끈질김으로 묘사하는 문체가 돋보인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타이완 인기 아이돌그룹 ‘비륜해’ 오존 탈퇴설

    타이완 인기 아이돌그룹 ‘비륜해’ 오존 탈퇴설

    아시아를 대표하는 아이돌 그룹들이 하루가 멀다 않고 해체설과 탈퇴설에 휩싸이는 등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국내 최고의 한류그룹으로 손꼽히는 동방신기는 일부 멤버와 소속사의 분쟁으로 인해 현재 두 명만이 남아 활동하고 있다.  일본에서 최고의 주가를 자랑하고 있는 카라도 멤버 불화설과 소속사 부당계약 등의 이유로 한차례 홍역을 앓은 가운데, 이번에는 타이완을 대표하는 최고의 아이돌 그룹인 비륜해(페이룬하이·飞轮海)가 도마에 올랐다. F4에 이어 지난해 국내에서 타이완 홍보대사로 위촉돼 더욱 이름을 날린 4인조 그룹 비륜해(진역유·왕둥성·오존·염아륜)는 드라마와 가요무대를 오가며 명실상부 최고의 타이완 아이돌로 자리 잡았다. 이중 오존(吳尊·31)은 타 멤버보다 훨씬 두터운 팬층을 거느린 리더지만, 지난 달 28일 자신의 공식 홈페이지 오픈 행사에서 “비륜해 멤버가 아닌 오존으로서 홀로 서고 싶다.”는 탈퇴 의사를 밝혀 팬들을 놀라게 했다. 오존이 현재 소속사와 계약기간이 만료됐지만 재계약과 관련해 어떤 진전도 없는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오존의 매니저는 지난 1일 기자회견에서 “재계약 조건에 합의를 보진 못했지만 비륜해를 탈퇴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부인했다. 이처럼 소속사와 골수팬들이 오존의 탈퇴 논란을 진화하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지난달 24일 베이징에서 열린 한 공식행사에서 오존을 제외한 멤버 3명만 참석한 것이 알려지면서 그의 탈퇴는 사실상 기정사실이 되고 있다. 한 현지 언론은 “동방신기와 JYJ, 슈퍼주니어와 한경 그리고 비륜해 등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음악 이외의 영역에서 재능을 발휘하고파 하는 멤버와 회사의 이해관계가 상충하면서 해체설과 탈퇴설이 끊이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한편 오존은 탈퇴 희망 발언 이후 어떤 공식적인 입장도 내놓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송혜민기자 huimin0217@seoul.co.kr
  • 親서방 개혁파… 아버지와 충돌 빚기도

    아버지 대신 정국 수습에 나선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의 아들 사이프 알이슬람 카다피(39)는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대외관계를 중심으로 행동반경을 넓혀 왔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후계자라는 설을 “(이 나라는) 물려받을 농장이 아니다.”라는 말로 공식 부인했다. 사이프는 카다피가 둘째 부인인 사피아 파카시에게서 낳은 둘째 아들이다. 오스트리아 빈의 IMEDA대학 경영대학원(MBA)을 나와 런던정경대에서 박사학위를 딴 배경을 지닌 만큼 그는 서방 친화적인 행보를 보여 왔다. 뉴욕타임스도 지난해 그를 “서방 친화적이며 리비아의 개방과 개혁 희망을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묘사했다. 실제로 리비아 경제 개방을 이끌어 온 그는 핵무기 개발 포기와 대규모 원유 개발 추진 등으로 서방 정부와 대화의 물꼬를 텄다. 2008년에는 국정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아버지와의 불화설이 나돌았다. 개혁을 주창해 온 탓에 엘리트 기득권층과도 충돌을 거듭했다. 전문가들은 보수 반대파들이 그의 형제들인 국가안보 보좌관 무타심과 고위급 군 관리인 카미스를 지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시론] 소셜 미디어와 명예훼손/최진봉 美 텍사스 주립대 저널리즘 스쿨 교수

    [시론] 소셜 미디어와 명예훼손/최진봉 美 텍사스 주립대 저널리즘 스쿨 교수

    소셜 미디어 시장이 급속히 성장하고 있다. 지구촌 곳곳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페이스북은 가입자가 6억명에 이르렀고, 트위터는 가입자가 1억 9000만명을 기록하며 2억명에 바짝 다가섰다. 한국에서도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소셜 미디어 이용자들이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다. 이처럼 가입자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는 소셜 미디어 이용자들은 자신이 무심코 소셜 미디어에 올린 글이 법적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최근 미국에서는 유명 록 가수가 트위터와 마이스페이스(MySpace)에 올린 글을 문제 삼아 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미국 디자이너의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이번 사건은 미국에서 유명인이 소셜 미디어에 올린 글로 인해 정신적 피해와 명예훼손을 당했다며 소송을 제기한 첫 번째 사례로 법원의 판결이 주목된다. 사건의 발단은 지난 2009년 3월 미국의 록 가수인 ‘코트니 러브’(Courtney Love)가 트위터와 마이스페이스에 패션 디자이너인 ‘돈 영거 스미스’(Dawn Younger-Smith)에 관한 글들을 올리면서 시작되었다. 코트니와 돈은 원래 패션 디자인 사업을 함께 하던 사이였는데, 사업이 실패하면서 경제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되자 두 사람 사이에 불화가 생기게 되었다. 돈에게 화가 난 코트니는 트위터와 마이스페이스 등 소셜 미디어 사이트에 돈과 돈의 패션 디자인 사업을 헐뜯는 내용의 글과 돈이 범죄행위를 저질렀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그러자 돈은 코트니가 소셜 미디어에 올린 글이 자신의 명예와 디자이너로서의 명성 그리고 자신이 운영하는 패션 디자인 사업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며 코트니에게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LA법원에 제기했다. 법원은 오는 3월 8일 이 소송에 대해 첫 재판을 진행할 예정이다. 이 재판의 결과가 소셜 미디어에서 어떤 내용의 글까지 게재해도 괜찮은지에 대한 기준을 처음으로 제시하게 된다. 소셜 미디어 사용 인구가 증가하면서 많은 이용자들이 법적 책임에 대한 고려 없이 자신들의 생각을 실시간으로 소셜 미디어에 올리고 있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한 변호사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소셜 미디어에 올린 글은 도로상에 설치되어 있는 대형 광고판에 글을 올리는 것과 같다고 지적하고 있다. 어떤 형태로든 소셜 미디어에 글을 남긴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타인을 상대로 한 글의 발행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소셜 미디어를 이용하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남긴 글을 타인을 대상으로 한 글의 발행으로 보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러다 보니, 별 생각 없이 타인이나 회사·단체 또는 기관에 피해를 입힐 수 있고, 법적 책임까지도 질 수 있는 내용의 글을 게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러한 실수를 막기 위해서는 소셜 미디어에 글을 올리기 전에 자신의 글이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법적 책임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소지를 안고 있지는 않은지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예를 들어 트위터에 어떤 식당에 대한 이용 후기를 올리는 경우, 그 식당의 음식이나 인테리어 그리고 종업들의 친절도 등에 대한 평가를 올리는 것은 괜찮다. 하지만 그 식당에서 먹은 음식 때문에 식중독이 걸렸다는 내용의 글을 올리게 되는 경우에는 반드시 해당 식당의 음식으로 인해 식중독이 걸렸다는 증거를 갖고 있어야 법적 책임을 면할 수 있다. 소셜 미디어의 이용자 증가로 인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증대하면서, 앞으로 소셜 미디어에 게재된 글로 인한 법정 소송도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소셜 미디어 이용자들은 글을 올리기 전에 자신의 글이 다른 사람이나 단체의 명예를 훼손할 소지가 있는지 살펴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제 현대사회에서 중요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자리잡은 소셜 미디어. 이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해(害)가 될지 득(得)이 될지는 이용자들이 이를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 위키리크스 설립자 어산지에 대한 상반된 두 시선

    위키리크스 설립자 어산지에 대한 상반된 두 시선

    ‘비전과 카리스마가 있는 디지털 시대의 체 게바라’ 대(對) ‘극단으로 치닫는 무분별한 테러리스트’. ‘정보 민주주의의 첨병 역할을 하는 민중의 정보기관’ 대 ‘국가 외교에 심각한 해를 끼치는 범죄 단체’. 비밀문서 폭로 사이트인 위키리크스와 설립자인 줄리언 어산지에 대한 엇갈리는 시각이다. 상반되는 견해를 그대로 담은 위키리크스에 대한 두 권의 책이 거의 동시에 나와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 순위 50위권에 진입했다. ‘위키리크스: 마침내 드러나는 위험한 진실’(대니얼 돔샤이트베르크 지음, 배명자 옮김, 지식갤러리 펴냄)과 ‘위키리크스: 권력에 속지 않을 권리’(마르셀 로젠바흐·홀거 슈타르크 지음, 박규호 옮김, 21세기북스 펴냄)는 제목처럼 저자의 성격이 판이하다. ‘마침내’의 저자 돔샤이트베르크는 위키리크스의 초창기 멤버이자 2인자로 활약했지만 어산지와의 불화로 지난해 9월 위키리크스를 떠났다. 한 술 더 떠 위키리크스의 경쟁 사이트인 오픈리크스를 열었다. 돔샤이트베르크는 책 출간을 앞둔 기자회견에서 “어산지의 여성 취향은 단순하다. 어려야 하고 22세 이하를 좋아한다. 어산지는 18살 때 당시 16살의 여자 친구를 만나 관계를 맺었으며 1년 뒤 아들 대니얼이 태어났다. 대니얼은 현재 20살”이라고 폭로했다. 책을 쓴 목적에 대해서는 “어산지가 광신적인 추종 대상이 되기 전에 바른 기록을 남길 필요가 있었고, 어산지와 불화하게 된 배경을 명백하게 알리고 싶었다.”고 밝혔다. ‘권력에’의 저자 로젠바흐와 슈타르크는 독일 주간지 ‘슈피겔’의 기자로 수년 동안 어산지, 돔샤이트베르크 등과 접촉했다. 책에는 어산지가 성폭행 혐의로 구속되기 바로 이틀 전까지 저자들과 나눈 대화내용뿐 아니라 2010년 9월 돔샤이트베르크와 어산지가 채팅으로 싸운 내용도 그대로 실려 있다. 내용이 자극적인 만큼 돔샤이트베르크가 쓴 ‘마침내’의 판매 순위가 좀 더 높다. 30년간 이집트를 통치했던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이 민주화 시위에 굴복해 권좌에서 물러난 뒤에는 위키리크스가 있었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튀니지 정부의 부패상을 담은 미국의 외교전문은 튀니지에서 ‘재스민 혁명’이 일어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튀니지에서 시작된 민주화 열풍은 이집트로 번져 30년 무바라크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기폭제가 됐다. 2010년 미 국무부 외교문서 25만여건을 공개해 전 세계를 경악시켰던 위키리크스의 설립자 어산지는 지난해 미 시사주간지 타임의 네티즌 선정 ‘올해의 인물’ 1위에 선정됐다. 위키리크스는 올해 유력한 노벨평화상 후보이기도 하다. 돔샤이트베르크는 “세상을 더 좋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 나와 줄리언을 단번에 하나로 묶어 주었다.”고 회고했지만 “어산지처럼 그렇게 극단적인 사람은 지금껏 본 적이 없다. 그는 극단적으로 자유로운 사고를 지녔다. 극단적으로 에너지가 넘친다. 극단적으로 천재적이다. 극단적으로 권력에 사로잡혀 있다. 극단적 편집증이다. 극단적 과대망상이다.”라고 어산지를 평가했다. 그는 위키리크스에 합류하기 전에 일렉트로닉데이터시스템(EDS)에서 네트워크 보안을 책임졌으며 약 5만 유로의 연봉을 받았다. 카오스컴퓨터클럽이란 커뮤니티가 주최한 행사에서 돔샤이트베르크는 어산지를 만났고, 2008년 위키리크스에 합류하게 된다. ‘슈피겔’의 기자들은 어산지가 돔샤이트베르크를 어떻게 여겼는지 밝혔다. 위키리크스 사람들은 돔샤이트베르크를 그냥 대외적으로 조직을 대변하는 인물로 여겼다. 어산지는 그를 불안 요소로 보았다. 그는 돔샤이트베르크가 능력이 부족하다고 여겼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그가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인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어산지는 그에게 너무 많은 권력을 주지 않으려 했고, 이것이 돔샤이트베르크에게는 불만이 됐다. 어산지에 대한 ‘슈피겔’ 기자들의 평가는 호의적이다. “위키리크스가 저널리즘을 완전히 대체하지는 않겠지만 그것을 변화시킬 수는 있다.”고 전제하면서 “어산지는 호감을 불러일으키고, 그들을 열광시키고 추종자로 만드는 재능이 있다. 이 점은 다른 많은 문제점을 보완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강력한 흡인력을 발휘한다.”고 말했다. ‘마침내’ 1만 3800원, ‘권력에’ 1만 5000원.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올해 ‘이승엽 시프트’는 계속될까

    올해 ‘이승엽 시프트’는 계속될까

    이승엽(35)이 일본진출 첫해(2004년)에 부진했던 것은 리그 적응 문제였을까.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이승엽 공략법은 그때와 비교해 보면 어느 정도일까. ‘아시아 홈런왕’이란 거창한 수식어를 안고 일본 무대에 뛰어든 이승엽의 성패는 시범경기에서부터 결정난것이나 다름 없었다. 지바 롯데와 시범경기를 치른 세이부 라이온스는 경기 후 이승엽의 약점과 공략법을 알아냈다. 당시 세이부 감독이었던 이토 츠토무(현 LG 트윈스 배터리 인스트럭터)는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변화구와 몸쪽 빠른 속구, 특히 결정구를 몸쪽 높게 던지면 틀림없이 이승엽의 배트가 나온다는걸 파악했다. 최근 몇년동안 부진했던, 아울러 지금에서야 이승엽의 공략법이 알려져 있기에 특별하게 생각할 것은 없지만, 당시만 해도 이러한 분석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한국에서는 몸쪽,바깥쪽을 가리지 않고 홈런을 쳐냈던 이승엽이었기 때문이다. 현역시절 최고의 수비형 포수라 칭송받던 이토의 이러한 눈썰미는 이후 다른 팀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이승엽 공략법이 설정되기도 했다. 또한 몸쪽을 너무 의식하고 있기에 바깥쪽으로 공이 오면 순간적으로 잡아 당겨 치려 한다는 것도 파악했다. 그래서 생긴것이 ‘이승엽 시프트(Shift)’였다. 투수들은 의식적으로 몸쪽으로 공을 뿌렸으며 수비수들은 센터라인을 중심으로 좌측을 포기하고 우측으로 이동시키는 그만의 시프트가 탄생된 것이다. 이러한 이승엽의 타격 스타일으로 인해 당시 바비 발렌타인 감독은 이승엽에게 밀어칠 것을 꾸준히 주문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던 이승엽은 결국 감독과 불화까지 겪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타자의 타격성향에 따라 수비수들의 수비위치가 바뀌는 수비 시프트의 원조는 ‘메이저리그의 전설’ 테드 윌리암스다. 테드 윌리암스가 활약하던 당시 그의 극단적인 잡아당겨치기식 타격을 보고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루 부드로 감독이 그를 잡기 위해 고안해 낸게 바로 시프트의 시초다. ‘루 부드로 시프트’가 탄생됐던 것. 그럼 당시 테드 윌리암스는 저런 수비시프트를 뚫고 어떠한 타격을 했을까. 놀랍게도 그는 자신의 타격스타일을 버리지 않고 주구장창 우측으로 잡아당겼다고 한다. 그 이유는 ‘ 우측으로 잡아당기면 안타몇개는 손해를 보겠지만 홈런은 더 치기 쉽다. 투수는 몸쪽으로 공을 던질것이고 나는 그걸 알고 게스히팅(Guess hitting)을 하면 되기 때문이다.’ 라고 언급했다. 테드 윌리암스는 수비수가 없는 좌측으로 가볍게 밀어치면 얼마든지 안타를 생산할수 있었지만 투수가 자신의 몸쪽으로 공을 던진다는걸 알고 노려쳤다. 수비 시프트와 게스히팅은 이렇듯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올해 오릭스로 이적한 이승엽 부활의 열쇠는 여전히 밀어치기다. 요미우리 시절에도 보통 타자라면 3-유간을 꿰뚫은 안타성 타구가 3루수 글러브로 빨려 들어간 경우가 많았던게 이승엽이다. 안타성 타구가 잡히면 슬럼프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밀어쳐서 안타를 생산하기 시작하면 수비수들의 위치는 혼란스럽게 돼 있다. 현재 스프링캠프에서 이승엽은 공을 최대한 오랫동안 관찰한 후 스윙을 시작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토스 배팅시 공이 최고 높이로 왔을때 스윙을 하는게 아닌 떨어지는 시점에서 스윙을 시작하고 있는 것. 이것은 당연히 공을 오래보고 밀어치겠다는 계산에서다. 이렇게 되면 밀어치기 효과에 더해 타격시 몸의 무게 중심이 뒷쪽에 머무는 효과도 얻게 된다. 체중을 끌고 나와서 스윙을 하는것이 아닌, 스트라이드(Stride)시 앞발은 멀리 내딛지만 상체는 뒤에 남아 사람 인(人)자 모양의 밸런스 형태를 띠는 것과 같은 원리다. 올해도 역시 ‘이승엽 시프트’는 계속될게 자명하다. 이걸 역이용해 상대팀 3루수와 좌익수들을 혼란스럽게 할 것인지는 이승엽 하기 나름이다. 스프링캠프에서 자신의 문제점도 알고 해법을 찾기 위해 노력중인 이승엽의 올 시즌이 궁금하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해외야구통신원 윤석구 http://hitting.kr
  • 서장훈 “불화설 유포에 분노…법적 책임 물을 것”

    서장훈 “불화설 유포에 분노…법적 책임 물을 것”

    농구선수 서장훈이 부인 오정연 KBS 아나운서와 불화설에 대해 법적 대응 방침을 밝혔다. 최근 인터넷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돌고 있는 “서장훈 부부가 불화에 시달리고 있고 곧 이혼할 것”이라는 증권가 정보지에 대해 강력하게 대응하겠다는 것이다.  서장훈은 18일 일간스포츠와의 인터뷰에서 “며칠 전 지인을 통해 불화설을 알았다.”며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라 처음에는 무시했지만 인터넷에 일파만파 퍼지자 가만히 두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서장훈은 “아내를 한 순간에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악의적인 글에 분노를 느낀다.”며 “아내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최초 유포자와 글을 퍼다 나른 사람들에게 확실하게 법적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장훈은 불화설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도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말이 안되는 이야기”라고 잘라 말한 뒤 “심지어 나는 그 증권가 정보지에 기재된 여의도 L아파트에 살고 있지도 않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 일은 한 사람의 명예를 완전히 짓밟는 이야기”라며 “아내는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아내도 나도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성세정 KBS 아나운서 팀장도 인터넷매체 OSEN과 인터뷰에서 “서장훈·오정연 부부의 불화설 내용은 터무니없는 내용”이라며 “너무 악의적이어서 KBS 법무팀과 함께 이 문제를 파악해 허위 사실을 유포한 사람들에 대한 소송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서장훈과 오정연은 2009년 5월 결혼했다. 서장훈은 인천 전자랜드에서 뛰고있고, 오정연은 지난해부터 KBS 1TV ‘6시 내고향’을 진행하고 있다. 인터넷서울신문 event@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