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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33] 불상 없는 불전 적멸궁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33] 불상 없는 불전 적멸궁

     강원도 정선 사북에서 만항재를 넘어 영월 상동으로 가는 길은 별빛이 가장 아름다운 드라이브코스로 알려져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해발 1330m의 만항재는 포장도로가 놓인 고갯길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다고 한다.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1573m의 함백산과 1567m의 태백산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정선카지노가 있는 사북에서 고한을 거쳐 414번 지방도에 접어든 뒤 만항재로 오르다 보면 왼쪽에 정암사가 나타난다. 그저 퇴락한 산골 암자처럼 소박한 모습이지만, 내력을 살피고 나면 별빛을 찾아나선 여행이 더욱 뜻깊어질 것이다.  정암사에도 적멸궁(寂滅宮)이 있다. 흔히 통도사와 오대산 중대, 사자산 법흥사, 정암사를 4대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고 한다. 설악산 봉정암을 더하기도 한다. ‘보배 보(寶)’자로 이름부터 화려하게 장엄한 다른 적멸보궁과는 달리 정암사 적멸궁은 과장이 없다. 다른 적멸보궁과 마찬가지로 정암사 적멸궁도 불상이 없는 절집이다. 부처님 자리에는 연꽃을 수놓은 붉은 방석이 하나 놓였을 뿐이다.  대신, 적멸궁 뒤로 돌계단이 놓여진 가파른 산길을 100m쯤 오르면 7층짜리 수마노탑(水瑪瑙塔)이 나타난다. 적멸궁은 수마노탑에 예배 드리는 공간이다.  수마노란 붉은색, 검은색, 흰색이 곱게 어우러진 석영의 일종이라고 한다. 신라 자장법사(590∼658년)가 당나라에서 수도하고 645년 돌아올 때 용왕이 건넨 수마노로 탑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정암사에 전한다. 하지만 지금의 탑은 고려시대에 수마노가 아닌 석회암을 벽돌처럼 다듬어 쌓아올린 이른바 모전석탑이다.  정암사의 옛 이름은 석남원(石南院)이다. 자장은 석남원을 창건하면서 중국에서 가져온 진신사리를 수마노탑에 봉안했다고 한다. 진신사리란 부처님의 유골이다. 부처님을 모셨는데, 부처 모습을 흉내낸 불상을 적멸궁에 두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런 형태의 적멸궁은 우리나라에서 창안되었다고 한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7세기 신라불교가 이미 외래 교리를 주체적으로 소화하여 새로운 상징체계를 만들어 낼 수 있었을 만큼 성장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적멸(寂滅)은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고뇌가 소멸된 상태를 가리킨다. 부처가 깨달음을 이룬 보리수 아래는 그래서 적멸도량이 된다. 깨달음의 장소를 건축적으로 구현한 것이 적멸궁이다. 법왕(法王)이 머무는 곳이니 궁(宮)이다. 정암사 수마노탑과 적멸궁은 불교의 본질이 깨달음이라는 것을 웅변한다.  글 서동철 수석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시리즈 전체보기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32] 당간과 당간지주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32] 당간과 당간지주

     1977년 어느날, 국립경주박물관에 기차편으로 가마니에 싼 무거운 수하물 하나가 배달됐다. 풀어보니 황금빛이 찬란한 용의 머리로, 당간(幢竿)의 꼭대기 부분이었다. 지금은 국립대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금동용머리는 경북 영주군 풍기읍에서 하수도 공사를 하다 발견됐다. 9세기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높이가 65㎝, 대각선 길이는 80㎝에 이르는 당당한 모습이다.  웬만큼 유서 깊은 절에 가면 들머리에서 당간지주(幢竿支柱)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두 개의 석재를 위로 올라갈수록 갸름하게 깎아 마주세워 놓은 모습이라면 무엇인지 기억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당간지주는 쇠로 만든 당간을 튼튼하게 고정시키는 구실을 하는 구조물이다. 당간의 꼭대기에는 당(幢)이란 깃발을 단다. 부처의 세계와 속세와 가르고 사(邪)된 것을 물리치는 의미를 가진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다. 풍기의 금동용머리에는 턱밑 공간에 도르레를 만들어 놓았다. 깃발을 달아 끌어올리는 장치이니 당간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당간지주는 적지 않게 남아있지만 당간은 대부분 사라져 좀처럼 보기 어렵다. 풍기에서 가까운 부석사와, 소수서원이 들어선 숙수사터에도 훌륭한 통일신라시대 당간지주가 남아있다. 풍기읍내에서 찾아낸 용머리 장식을 부석사나 숙수사와 연결지어 상상해 보는 것도 자연스럽다. 당간과 당간지주에 깃발까지 갖춘 건조물 전체를 ‘삼국유사’는 법당(法幢)이라고 표현했다. 충남 공주 갑사와 충북 청주 용두사터에는 드물게 당간이 상당 부분 남아있다. 풍기의 용머리 장식과 연결지어 보면 완전한 법당의 위엄있는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감사와 용두사터 당간은 모두 철제 원통을 연결하여 만들었다. 용두사 것은 64㎝ 높이의 원통 20개가 남아있는데, 당간에 새겨진 ‘용두사철당기’(龍頭寺鐵幢記)에 따르면 당초엔 원통이 30개였다. 원통 높이만 19.2m에 이르렀다는 계산이 가능하니 하부에 기단, 상부에 용머리 같은 장식이 더해지면 20m를 넘었을 것이다.  법당은 중앙아시아와 중국에서도 만들어졌다. 하지만 중국에서 통일신라시대에 해당하는 것은 둔황 막고굴(莫高窟) 제331굴 것이 유일하다. 반면 우리는 통일신라 당간만 23기에 이르고 고려·조선시대 것을 모두 합치면 수백기가 흔적을 남겨놓고 있다. 절에 불상과 석탑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절의 입구에는 법당이 당연히 서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퍼져있었다는 뜻일 것이다. 법당의 유행을 전통적인 천신(天神) 숭배와 연관지어 해석하기도 한다. 강원도를 비롯한 몇몇 지역에서는 당간을 짐대라고도 부른다. 짐대란 마을의 안녕과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며 마을 입구에 세우는 솟대의 다른 이름이다. 솟대가 마을 어귀에서 내부를 성역화하듯 당간도 절이 차지하고 있는 사역(寺域)을 성역화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서동철 수석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시리즈 전체보기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31] 소리나지 않는 마애종의 역설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31] 소리나지 않는 마애종의 역설

     안양(安養)은 불자들이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서방정토, 곧 극락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니 경기도 안양시 역시 극락이다. 안양이라는 땅이름은 안양사라는 절에서 따온 것이다. 안양은 불국토(佛國土)라는 자부심을 갖게 하는 존재를 하나 더 갖고 있다. 만안구 석수동에 있는 마애종(磨崖鐘)이다. 우리나라 전국을 통틀어 마애종은 이 것밖에 없다.  얕게 돋을새김되어있는 조각은 다분히 회화적이다. 종을 거는 고리 구실을 하는 용뉴와 음통을 포함한 높이가 126㎝, 종 몸통의 높이가 101㎝이니 아담한 느낌이다. 작은 화면에 화강암 재료의 한계 때문인지 흔히 범종에서 보이는 화려한 장식은 보이지 않는다. 양쪽에는 기둥을 세우고, 보를 가로질러 종을 매달아 놓았고, 왼쪽에는 당목(撞木)을 잡고 있는 스님의 모습을 형상화해놓았다. 종을 치는 순간이라기 보다, 스님은 종을 치고 나서 가만히 그 소리에 귀기울이고 있는 듯 하다.  종소리란 부처님이 가르친 절대적 진리를 상징한다. 범종을 만들고, 또 치는 것은 부처님의 진리를 널리 퍼져나가게 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니 마애종에서는 일년 사시사철, 하루도 쉬지않고 진리의 말씀이 시방으로 퍼져나간다. 범종이 가진 상징성을 명확하게 이해하여 과감하게 발전시킨 뛰어난 아이디어의 산물이 바로 마애종이다.  범종에서 울리는 소리를 흔히 법음(法音)이라고도 부른다. 부처의 진리가 불상의 입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닌 것처럼, 범종도 쇠가 울리는 물리적인 소리로 중생이 번뇌를 끊을 수 있도록 제도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실제 울리는 범종과 소리가 날리 없는 마애종의 본질도 다르지 않다. 관악산 산허리를 감싸고 도는 바위에 새겨진 조촐한 조각이 그런 원리를 꿰뚫고 있으니 놀랍다.  안양 마애종은 고려시대 초기 조성된 것으로 학계는 추정한다. 통일신라시대 만들어진 상원사동종이나 성덕대왕신종과 가까워 보이는 양식이지만, 외곽선이 유려하지 못하고 전체적으로 단순한 것은 통일신라 범종을 모범으로 삼은 후대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고려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범종을 모델로 삼은 조각장(匠)의 솜씨라면 더 후대로 내려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마애종을 가만히 보면 좋을 치는 당목의 높이와 당목이 닿는 범종 당좌(撞座)의 높이가 서로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각장은 물론 조각을 의뢰하고, 감수의 역할까지 맡았던 사람 조차 종의 상징성에는 능통했지만, 종 자체에는 능통하지 않은 흔적이 보이고 있다.  마애종을 조성한 주체는 아마도 이웃한 안양사일 것이다. 과거에는 중초사로 불렸지만 2007년 발굴조사에서 한자로 ‘안양사’라고 새겨진 기와조각이 수습됐다. 그런데 절터에 남아있는 높이 3.73m의 당간지주에는 신라 흥덕왕 원년(826) 8월 6일 돌을 캐서 이듬해 2월 30일에 세웠다는 내용의 명문이 남아있다. 중초사가 어느 시절 안양사로 이름이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관악산을 조금 더 오르면 안양사라는 절이 또 하나 나타난다.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서동철 수석논설위원 dcsuh@seoul.co.kr
  • 판화로 담아낸 원불교 가르침

    판화로 담아낸 원불교 가르침

    독일에 케테 콜비츠(1867~1945)가 있다면 한국에는 이철수(61)가 있다. 그는 오윤 등과 함께 1980~90년대 민중의 삶과 시대의 아픔을 판화 형식으로 담아낸 민중미술가였다. 그가 원불교 ‘대종경’의 가르침을 203점의 판화에 담아 풀어냈다. 연작 판화집 ‘네가 그 봄꽃 소식 해라’(문학동네 펴냄)는 여러 물음과 제언으로 이뤄져 있다. 대종경은 소태산 대종사가 행한 법문과 일상 속 가르침을 모아 놓은 책으로, ‘정전’과 함께 원불교의 중요한 경전으로 읽히고 있다. 이철수는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대종경을 꼭꼭 곱씹어 가며 읽은 뒤 그만의 해석을 더했다. 예컨대 ‘승려는 불상의 제자가 되어 가지고…부처님의 무상대도는 세상에 알려지지 못하고’(93쪽)라는 소태산 대종사의 말에 ‘백년하청입니다! 일원(원불교의 상징) 상의 제자는 어쩌시겠습니까’라고 덧붙여 놓았다. 원불교의 경전 속에 들어가서도 원불교에 얽매이지 않는 모습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철수는 1990년대 후반부터 상대방에 대한 거친 분노를 앞세우기보다는 집단 속 개인의 성찰과 공동체의 보편적 가치, 과제 중심으로 작품 세계를 변모시켜 왔다. 불교 혹은 원불교도가 아니면서도 선(禪)과 명상이라는 불교적 세계관과 맞닿는 대목이다. 그의 작품 하나하나마다 오래 눈길이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판화 속에 새겨진 화두와 거기에 보태진 그의 해석은 모두 영어로 번역됐다. 전국 순회 전시회도 갖는다. 오는 21일부터 다음달 3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을 시작으로 내년 1월까지 대구, 광주, 익산, 부산, 대전 등 6개 도시에서 열린다. 작가와의 대화, 판화 체험 등의 프로그램도 마련된다.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 판화로 담아낸 원불교 가르침

    판화로 담아낸 원불교 가르침

    독일에 케테 콜비츠(1867~1945)가 있다면 한국에는 이철수(61)가 있다. 그는 오윤 등과 함께 1980~1990년대 민중의 삶과 시대의 아픔을 판화 형식으로 담아낸 민중미술가였다. 그가 원불교 ‘대종경’의 가르침을 203점의 판화에 담아 풀어냈다. 연작 판화집 ‘네가 그 봄꽃 소식 해라’(문학동네 펴냄)는 여러 물음과 제언으로 이뤄져 있다. 대종경은 소태산 대종사가 행한 법문과 일상 속 가르침을 모아 놓은 책으로, ‘정전’과 함께 원불교의 중요한 경전으로 읽히고 있다. 이철수는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대종경을 꼭꼭 곱씹어 가며 읽은 뒤 그만의 해석을 더했다. 예컨대 ‘승려는 불상의 제자가 되어 가지고…부처님의 무상대도는 세상에 알려지지 못하고’(93쪽)라는 소태산 대종사의 말에 ‘백년하청입니다! 일원(원불교의 상징) 상의 제자는 어쩌시겠습니까’라고 덧붙여 놓았다. 원불교의 경전 속에 들어가서도 원불교에 얽매이지 않는 모습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철수는 1990년대 후반부터 상대방에 대한 거친 분노를 앞세우기보다는 집단 속 개인의 성찰과 공동체의 보편적 가치, 과제 중심으로 작품 세계를 변모시켜 왔다. 불교 혹은 원불교도가 아니면서도 선(禪)과 명상이라는 불교적 세계관과 맞닿는 대목이다. 그의 작품 하나하나마다 오래 눈길이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기도 하다. 판화 속에 새겨진 화두와 거기에 보태진 그의 해석은 모두 영어로 번역됐다. 그의 단아하면서도 고졸한 느낌이 나는 판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지만 언어도 장애물이 될 수 없도록 한 세심함의 결과물이다.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29] 용미리석불입상이 상징하는 고려시대 사회안전망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29] 용미리석불입상이 상징하는 고려시대 사회안전망

     혜음령은 경기 고양시 고양동과 파주시 광탄면을 잇는 고개다. 지금은 자유로와 통일로가 서울과 개성을 간선도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고려나 조선 시대에는 혜음령을 지나는 의주대로가 한양에서 개성은 물론 평양, 의주를 잇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삼국시대 한강과 임진강 일대는 치열한 격전장이었다. 고구려와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하려 각축을 벌이던 당시 임진강을 넘나드는 통로는 오늘날의 적성·연천 일대였다. 임진강에서 갈수기에는 걸어서도 건널 수 있는 최남단 지역이다. 옛 장단 땅인 연쳔 장남면에 고구려의 호로고루, 적성에 신라의 칠중성 등 국방 유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고려시대가 되면 남북 통행로는 당연히 수도인 개경, 즉 개성을 중심으로 재편된다. 고려는 장단대로에 위치해 갈수록 규모가 켜져가던 양주를 문종 21년(1067)에 남경(南京)으로 승격시킨다. 이후 남경의 중심이 한양 일대에 자리잡으면서 상당한 거리를 돌아야 하는 장단길보다 개성에서 임진나루를 거쳐 곧바로 남하하는 ‘의주대로’를 자연스럽게 선호하게 된다.  혜음령은 고양향교가 있는 고양동에서 흔히 용미리공동묘지로 불리는 서울시립용미리공원묘지로 넘어가는 고개라고 설명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의주대로는 지금 고양시와 파주시의 협력으로 조선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게 정비되어 있다. 서울시와 경기도가 경계를 이루는 고양시 삼송동에서 임진강과 만나는 임진나루까지는 걸어서 탐방할 수도 있다.  혜음령과 광탄면 사무소 사이에는 혜음원(惠陰院)터와 용미리석불입상이 있어 의주대로의 역사를 알려준다. 혜음원은 고려시대 개경과 남경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자 예종 17년(1122) 세운 국립 숙박 시설이다. 왕의 행차를 위한 별원(別院)과 사찰도 있었다. 발굴 조사에서는 한자로 ‘혜음원’이라고 새겨진 암막새 기와가 출토됐고, 동서 104m, 남북 106m에 걸친 9개 석단의 27개 건물터와 연못터를 비롯한 놀라운 규모의 유구가 확인됐다.  혜음원에서 북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나타나는 장지산 기슭에 높이 17.4m의 우람한 석불입상이 세워진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2구로 이루어진 용미리석불입상은 일반적으로 고려시대 불상으로 알려지고 있었지만, 불상에 남아있는 명문을 토대로 성화 7년(1471) 조성한 것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성화(成化)는 명나라 헌종의 연호다. 명문에는 시주한 사람들의 이름도 줄줄이 면면도 적혀있으니 석불입상의 조성과 연관짓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석불입상에 얽힌 구전설화와 혜음사 창건 배경을 담은 김부식의 글을 찬찬이 읽다보면 석불입상의 고려시대 조성설(說)에 다시 마음이 기운다. 설화에 따르면 고려 선종이 자식이 없어 원신궁주를 맞이했는데, 여전히 태기가 없었다. 궁주가 어느날 꿈을 꾸었는데, 두 도승(道僧)이 나타나 ‘매우 시장하니 먹을 것을 달라’고 하고는 사라졌다. 궁주의 말을 들은 왕이 그들이 있다는 곳을 찾아가게 했더니 과연 큰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었다. 왕이 바위에 두 도승을 새기게 하고 불공을 드렸더니 왕자인 한산후(漢山候)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김부식은 ‘혜음사 신창기’(惠陰寺 新創記)에서 이 길을 두고 ‘산이 깊고 초목이 우거져 범과 이리가 떼 지어 모이고, 도둑의 무리도 숨기 쉬워 통행하는 사람들이 무리를 모으고 병기를 휴대해 (혜음령을) 지나가는데도 죽음을 면치 못하는 자가 한해 수백 명’이라고 탄식했다. 이런 실상을 파악한 신하가 ‘허물어진 절을 새로 지어 중을 모으고, 그 옆에 집을 지어 노는 백성들을 정착시킨다면 짐승과 도둑의 해는 절로 멀어져 통행하는 데 어려움이 없어질 것’이라고 진언하고, 왕이 그대로 따르자 ‘무서운 길이 평탄한 길이 되었다’는 것이다.  용미리석불입상 창건 설화와 혜음사 신창기는 의주대로 주변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구제한다는 면에서 일맥상통한다. 단순히 산도적을 토벌하는 차원에 그치지 않고 빈민의 배고픔을 막아 도둑의 길에 빠져들지 않게 한다는 적극적 사고는 오늘날에도 배울 만하다.  석불입상의 창건 설화는 상징성의 강한 설화의 특성상 구구절절한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지만 신창기 방식의 사고를 함축하고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용미리석불입상은 의주대로의 안전을 위해 비슷한 시기 혜음원과 일종의 세트로 조성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세조와 정희왕후가 일시에 깨달을 것을 미륵에 기원했다’는 명문에서 비롯된 조선시대 창건설(說)은 아무런 감동이 없다.  서동철 수석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시리즈 전체보기
  • 명품 + SPA = 대박…올가을, 프렌치 컬래버레이션 열풍

    명품 + SPA = 대박…올가을, 프렌치 컬래버레이션 열풍

    감각적인 멋을 추구하는 프랑스 문화가 패션, 전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환영받고 있다. 프랑스 명품 브랜드와 손잡고 한정 제품을 내놓는 ‘프렌치 컬래버레이션’이 많아져 눈길을 끈다. ●H&M·발망, 새달 출시… “텐트 치고 줄 서겠다” 매년 새로운 협업 제품을 선보이는 제조유통일괄의류(SPA) 브랜드 H&M은 올해의 파트너로 프랑스 명품 ‘발망’을 정했다. 지난 5월 발망의 1986년생 수석 디자이너 올리비에 루스탱이 H&M과 함께 남녀 의류를 출시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전 세계 패션계는 열광했다. 옷 대부분이 수백만원인 발망의 스타일을 합리적인 가격에 소장할 기회이기 때문이다. 다음달 5일 전 세계 H&M 매장에서 발매되는 발망 컬렉션을 구입하기 위해 전날부터 텐트 치고 줄을 서겠다는 말들이 나온다. ●‘유니클로 앤드 르메르’ 출시 첫날 완판 또 다른 SPA 브랜드 유니클로는 이번 가을·겨울 시즌에 ‘프랑스 3부작’을 내놨다. 프랑스 톱 모델 출신 디자이너 이네스 드 라 프레상주, 라코스테와 에르메스 디자이너 출신 크리스토퍼 르메르, 패션잡지 보그 파리 편집장 출신 카린 로이펠트 등과 손잡고 각각 컬렉션을 출시했다. 유니클로의 기능성 내의 히트텍은 프랑스 속옷 브랜드 프린세스 탐·탐과 협업해 새로운 디자인을 선보였다. 특히 ‘유니클로 앤드 르메르’는 국내 출시 첫날인 2일 상품 대부분이 모두 품절돼 화제가 됐다. 화장품 브랜드 헤라는 프랑스 패션 디자이너 올림피아 르 탱의 디자인을 헤라의 UV미스트 쿠션, 립스틱, 섀도 등 대표 색조 제품에 적용한 협업 컬렉션을 선보여 호응을 얻었다. ●애플·에르메스도 1500달러짜리 시계 출시 패션, 뷰티업계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전자제품도 프렌치 스타일에 ‘러브콜’을 보낸다. 애플은 지난달 프랑스 명품 에르메스와 함께 1500달러(약 175만원)짜리 최고급 애플워치를 출시했다. 애플이 명품과 손잡은 첫 사례로 기록됐다. 삼성전자도 같은 달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에서 프랑스 가구 디자이너 로낭에르완 부훌레크 형제와 함께 만든 세리프 TV를 공개했다. 가구 같은 TV로 손쉽게 옮길 수 있다. 현대백화점은 오는 15일까지 한불상공회의소와 함께 서울 압구정 본점과 판교점 등 4개 점포에서 ‘프렌치 고메 페스티벌’을 연다. 프랑스 국민 커피 르후, 과일주스 전문 레토크 블랑쉬 뒤 몽드, 쇼콜라 데 프랑세 등 프랑스 유명 디저트와 식품 30여개 브랜드를 선보인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발길 닿는 곳마다 세계유산… 고대도시로의 초대

    발길 닿는 곳마다 세계유산… 고대도시로의 초대

    카트만두는 네팔의 수도이자 분지 형태의 ‘카트만두 밸리’를 통칭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통일 네팔왕국이 수립되는 1769년까지 카트만두 밸리에선 카트만두와 박타푸르, 파탄 등 3개 왕국이 독립적으로 번성했다가 스러졌다. 당시의 흔적이 지금도 카트만두 밸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아울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8개의 유적 가운데 석가모니 탄생지인 남부의 룸비니 외에 7개가 카트만두 밸리에 있다. 이 문화유산들을 돌아보는 여정도 쏠쏠한 재미를 안겨 준다. 카트만두 밸리의 유네스코 유적지는 모두 7개 구역으로 나뉜다. 카트만두와 박타푸르, 파탄, 스와얌부나트 불교 사원, 보더나트 불탑, 파슈파티나트 힌두교 유적, 창구 나라얀 힌두교 유적 등이다. 지난 4월 대지진 때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지만, 조금씩 정비돼 가는 모습이다. 크리파수르 셰르파 네팔 문화관광장관은 “대지진으로 네팔의 세계문화유산 중 20% 정도가 훼손됐지만, 탐방엔 아무 문제 없다”고 전했다. 세 고대도시를 돌다보면 구성이 대체로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왕궁이 있는 더르바르(왕궁) 광장 주변으로 각각 힌두사원과 티베트 불교사원이 마주 보고 있고, 주변에 스투파(탑) 등 다양한 문화재들이 산재한 구조다. 하지만 속성은 다소 상이하다. 카트만두가 정치, 박타푸르가 문화의 중심이라면 파탄은 예술의 중심지다. ●대지진도 이겨낸 냐타폴라 힌두사원 ‘미(美)의 도시’란 뜻의 랄릿푸르 중심지인 파탄에는 이름처럼 아름다운 건축물이 많다. 카트만두에서 5㎞쯤 떨어져 있다. 파탄은 가장 오래된 불교도시인 동시에 힌두교와 불교가 공존하는 지역이다. 55개의 주요 사원과 136개의 초크(안마당 또는 중정)가 대부분 더르바르 광장 주변에 밀집돼 있다. 카트만두의 더르바르 광장보다 규모는 작지만 구성이 일목요연해 미의 도시다운 느낌이 확연하다. 아름답고 정교한 건축 유산들과 마주하고 서면 현재의 인류 문명이 과연 진보한 것인지, 한 문명이 보다 진보한 다른 문명을 퇴조시킨 건지 도무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박타푸르는 고대 네와르 왕국의 도시로 15세기 후반에서 1769년까지 말라 왕조의 수도였다. 목재, 금속, 석재 등의 공예가 발달해 문화의 보고라 일컬어진다. 카트만두 중심가에서 16㎞ 정도 떨어졌다. 워낙 볼거리가 많고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만큼 입장료도 15달러에 달한다. 네팔 사람들의 소득 수준에 견주면 대단히 비싼 액수다. 박타푸르는 크게 타우마디탈 광장과 달발 광장 등 2개의 광장으로 나뉜다. 타우마디탈 광장에서는 5층짜리 냐타폴라 힌두사원이 가장 웅장하다. 1702년 지어진 사원으로, 네팔에서 가장 높고 견고한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힌다. 높이가 무려 30m에 이른다. 지난 4월 대지진에도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견고하다. 박타푸르는 마을 전체가 세계유산이다. 특히 힌두교 사원 기둥에 조각된 작품들이 인상적이다. 노골적이고 다양한 형태의 ‘19금’ 성애 장면들을 조각했다. 이는 박타푸르뿐 아니라 힌두 사원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볼 수 있다. ●힌두교의 살아 있는 소녀신 ‘라즈 쿠마리’ 카트만두 더르바르 광장은 옛 칸티푸르(카트만두) 왕국의 궁전 앞 광장이다. 힌두교의 ‘원숭이 수호신’ 하누만이 지키고 있는 옛 왕궁 단지 ‘하누만 도카’, 여섯 개의 팔을 가진 시바신 ‘칼리 바이라브 석상’, 힌두양식과 불교양식이 혼합된 18세기 중엽의 ‘쿠마리사원’ 등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산재해 있다. 특히 쿠마리 사원이 인상적이다. 쿠마리는 힌두교 처녀신을 일컫는 표현이다. 초경 전의 석가족(族) 소녀 중 한 명을 선발해 쿠마리의 화신 ‘라즈 쿠마리’로 삼아 신처럼 떠받든다. 라즈 쿠마리가 살고 있는 곳이 쿠마리 사원이다. 하루 한두 차례 2층 창문으로 라즈 쿠마리가 살짝 얼굴을 내미는데, 이때 사진 촬영은 엄격히 금지된다. ●시내 관통하는 ‘윤회의 공간’ 바그마티강 바그마티강은 윤회의 공간이다. 카트만두 시내를 관통하는 강으로 인도의 갠지스강으로 이어진다. 이 강변에 힌두교 파슈파티나트사원이 있다. 현지인들은 이 강에 발을 담그고 이 세상 떠날 때 곧바로 천국으로 간다고 믿는다. 강 건너는 영 떠난 육신을 불로 소멸시키는 화장장이다. 죽음이 흐르는 강이지만 현지인들은 머리를 감고 목욕재계할 만큼 성스러운 공간으로 여긴다. 소멸에 익숙하지 않은 이라면 화장 장면을 뚫어지게 쳐다보지 말길 권한다. 문화적 충격을 받을 수도 있다. 보드나트 불탑은 세계 최대 규모의 티베트 불탑이다. 높이만 38m에 이른다. 대략 5세기경에 세워졌다고 한다. 보드나트는 보드(Bodh·깨달음)와 나트(Nath·사찰)가 결합된 이름으로 ‘깨달음의 사원’이라는 의미다. 네팔에서 가장 높은 사리탑으로, 우리의 달항아리 닮은 흰색 돔이 인상적이다. 돔 위엔 원래 깨달음을 얻기 위한 13단계를 뜻하는 13층 첨탑이 솟아 있었다. 하지만 지난 대지진 때 무너져 현재 보수공사 중이다. 탑 기단부엔 마니차(불경이 새겨진 경통)가 세워져 있다. 수많은 현지인들이 마니차를 돌리며 탑돌이하는 모습이 이채롭다. 경통을 돌릴 때마다 불경을 한 번 읽은 셈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보드나트 주변은 네팔 속의 작은 티베트다. 티베트 음식을 맛보고 골동품도 살 수 있다. 스와얌부나트는 약 2000년 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불교 사원으로, 힌두교 사원이 함께 섞여 있다. 워낙 원숭이가 많아 ‘원숭이 사원’으로도 불린다. 성정이 포악한 원숭이들이 많아 물릴 수 있으니 가까이 접근하는 건 피하는 게 좋다. 300여개에 달하는 계단을 올라 사원에 들면 여러 시기에 걸쳐 조성된 무수한 탑들과 돋을새김으로 새겨진 각양각색의 불상들과 만날 수 있다. 사원 초입에서 굽어보는 풍경이 빼어나다. 카트만두 밸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글 사진 카트만두(네팔)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발길 닿는 곳마다 세계유산… 고대도시로의 초대

    발길 닿는 곳마다 세계유산… 고대도시로의 초대

    카트만두는 네팔의 수도이자 분지 형태의 ‘카트만두 밸리’를 통칭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통일 네팔왕국이 수립되는 1769년까지 카트만두 밸리에선 카트만두와 박타푸르, 파탄 등 3개 왕국이 독립적으로 번성했다가 스러졌다. 당시의 흔적이 지금도 카트만두 밸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아울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8개의 유적 가운데 석가모니 탄생지인 남부의 룸비니 외에 7개가 카트만두 밸리에 있다. 이 문화유산들을 돌아보는 여정도 쏠쏠한 재미를 안겨 준다. 카트만두 밸리의 유네스코 유적지는 모두 7개 구역으로 나뉜다. 카트만두와 박타푸르, 파탄, 스와얌부나트 불교 사원, 보더나트 불탑, 파슈파티나트 힌두교 유적, 창구 나라얀 힌두교 유적 등이다. 지난 4월 대지진 때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지만, 조금씩 정비돼 가는 모습이다. 크리파수르 셰르파 네팔 문화관광장관은 “대지진으로 네팔의 세계문화유산 중 20% 정도가 훼손됐지만, 탐방엔 아무 문제 없다”고 전했다. 세 고대도시를 돌다보면 구성이 대체로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왕궁이 있는 더르바르(왕궁) 광장 주변으로 각각 힌두사원과 티베트 불교사원이 마주 보고 있고, 주변에 스투파(탑) 등 다양한 문화재들이 산재한 구조다. 하지만 속성은 다소 상이하다. 카트만두가 정치, 박타푸르가 문화의 중심이라면 파탄은 예술의 중심지다. ●대지진도 이겨낸 냐타폴라 힌두사원 ‘미(美)의 도시’란 뜻의 랄릿푸르 중심지인 파탄에는 이름처럼 아름다운 건축물이 많다. 카트만두에서 5㎞쯤 떨어져 있다. 파탄은 가장 오래된 불교도시인 동시에 힌두교와 불교가 공존하는 지역이다. 55개의 주요 사원과 136개의 초크(안마당 또는 중정)가 대부분 더르바르 광장 주변에 밀집돼 있다. 카트만두의 더르바르 광장보다 규모는 작지만 구성이 일목요연해 미의 도시다운 느낌이 확연하다. 아름답고 정교한 건축 유산들과 마주하고 서면 현재의 인류 문명이 과연 진보한 것인지, 한 문명이 보다 진보한 다른 문명을 퇴조시킨 건지 도무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박타푸르는 고대 네와르 왕국의 도시로 15세기 후반에서 1769년까지 말라 왕조의 수도였다. 목재, 금속, 석재 등의 공예가 발달해 문화의 보고라 일컬어진다. 카트만두 중심가에서 16㎞ 정도 떨어졌다. 워낙 볼거리가 많고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만큼 입장료도 15달러에 달한다. 네팔 사람들의 소득 수준에 견주면 대단히 비싼 액수다. 박타푸르는 크게 타우마디탈 광장과 달발 광장 등 2개의 광장으로 나뉜다. 타우마디탈 광장에서는 5층짜리 냐타폴라 힌두사원이 가장 웅장하다. 1702년 지어진 사원으로, 네팔에서 가장 높고 견고한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힌다. 높이가 무려 30m에 이른다. 지난 4월 대지진에도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견고하다. 박타푸르는 마을 전체가 세계유산이다. 특히 힌두교 사원 기둥에 조각된 작품들이 인상적이다. 노골적이고 다양한 형태의 ‘19금’ 성애 장면들을 조각했다. 이는 박타푸르뿐 아니라 힌두 사원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볼 수 있다. ●힌두교의 살아 있는 소녀신 ‘라즈 쿠마리’ 카트만두 더르바르 광장은 옛 칸티푸르(카트만두) 왕국의 궁전 앞 광장이다. 힌두교의 ‘원숭이 수호신’ 하누만이 지키고 있는 옛 왕궁 단지 ‘하누만 도카’, 여섯 개의 팔을 가진 시바신 ‘칼리 바이라브 석상’, 힌두양식과 불교양식이 혼합된 18세기 중엽의 ‘쿠마리사원’ 등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산재해 있다. 특히 쿠마리 사원이 인상적이다. 쿠마리는 힌두교 처녀신을 일컫는 표현이다. 초경 전의 석가족(族) 소녀 중 한 명을 선발해 쿠마리의 화신 ‘라즈 쿠마리’로 삼아 신처럼 떠받든다. 라즈 쿠마리가 살고 있는 곳이 쿠마리 사원이다. 하루 한두 차례 2층 창문으로 라즈 쿠마리가 살짝 얼굴을 내미는데, 이때 사진 촬영은 엄격히 금지된다. ●시내 관통하는 ‘윤회의 공간’ 바그마티강 바그마티강은 윤회의 공간이다. 카트만두 시내를 관통하는 강으로 인도의 갠지스강으로 이어진다. 이 강변에 힌두교 파슈파티나트사원이 있다. 현지인들은 이 강에 발을 담그고 이 세상 떠날 때 곧바로 천국으로 간다고 믿는다. 강 건너는 영 떠난 육신을 불로 소멸시키는 화장장이다. 죽음이 흐르는 강이지만 현지인들은 머리를 감고 목욕재계할 만큼 성스러운 공간으로 여긴다. 소멸에 익숙하지 않은 이라면 화장 장면을 뚫어지게 쳐다보지 말길 권한다. 문화적 충격을 받을 수도 있다. 보드나트 불탑은 세계 최대 규모의 티베트 불탑이다. 높이만 38m에 이른다. 대략 5세기경에 세워졌다고 한다. 보드나트는 보드(Bodh·깨달음)와 나트(Nath·사찰)가 결합된 이름으로 ‘깨달음의 사원’이라는 의미다. 네팔에서 가장 높은 사리탑으로, 우리의 달항아리 닮은 흰색 돔이 인상적이다. 돔 위엔 원래 깨달음을 얻기 위한 13단계를 뜻하는 13층 첨탑이 솟아 있었다. 하지만 지난 대지진 때 무너져 현재 보수공사 중이다. 탑 기단부엔 마니차(불경이 새겨진 경통)가 세워져 있다. 수많은 현지인들이 마니차를 돌리며 탑돌이하는 모습이 이채롭다. 경통을 돌릴 때마다 불경을 한 번 읽은 셈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보드나트 주변은 네팔 속의 작은 티베트다. 티베트 음식을 맛보고 골동품도 살 수 있다. 스와얌부나트는 약 2000년 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불교 사원으로, 힌두교 사원이 함께 섞여 있다. 워낙 원숭이가 많아 ‘원숭이 사원’으로도 불린다. 성정이 포악한 원숭이들이 많아 물릴 수 있으니 가까이 접근하는 건 피하는 게 좋다. 300여개에 달하는 계단을 올라 사원에 들면 여러 시기에 걸쳐 조성된 무수한 탑들과 돋을새김으로 새겨진 각양각색의 불상들과 만날 수 있다. 사원 초입에서 굽어보는 풍경이 빼어나다. 카트만두 밸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글 사진 카트만두(네팔)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여래와 예수로 본 동서양의 조형원리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여래와 예수로 본 동서양의 조형원리

    필자의 원래 전공은 불상조각이지만 불화(佛畵)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특히 괘불(掛佛)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2004년 9월 통도사 괘불전시실에서 전남 해남의 달마산 미황사 괘불을 조사하면서 문득 불화에 눈을 뜨는 감동적 순간을 체험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깨달음의 첫 단추를 열었을 뿐이었다. 인생과 학문을 닦는 과정은 단계를 밟아 일시에 깨닫는 점수돈오(漸修頓悟), 단번에 진리를 깨친 뒤 번뇌와 습기를 차차 소멸시켜 가는 돈오점수(頓悟漸修)의 과정을 무한히 반복하는 것이라는 것을 나름으로 깨달았다. 이후 불화의 연구는 속도가 붙었고 국내외에서 관련 논문과 저서를 세상에 냈다. 눈을 떴다고 하나 또 다른 참된 깨달음은 훨씬 후에 일어났다. 안방 머리맡에 미황사 괘불의 상반신으로 만든 포스터를 붙여 놓았다. 애수(哀愁)에 잠겨 있는데 그런 얼굴은 처음이었다. 어느 날 여래의 머리 선이, 붕긋붕긋한 머리털 중간에 있는 이른바 중간육계(中間肉髻·살이 불룩 솟아 상투 같은 모양)와 연결되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다시 머리 맨 위에 정상육계(頂上肉髻)가 있는데, 그때까지 그 두 개의 육계 관계를 세계 학계는 밝히지 못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정상 계주건 중간 계주건 골육이 융기하되 상투 같아서 육계라 하며, 불상 32상 중 하나인 존귀상으로 알려져 있다. 또 머리칼이 돌고 있어서 이른바 나발(髮·소라껍질 모양으로 돌아 올라간 머리칼)의 형태를 짓고 있다. 그 육계의 연원은 흔히 불교경전에서 찾으려 했다. ‘중아함경’이나 ‘방광대장엄경’ 등은 “정수리에 육계가 있어 둥글고 가지런하며 머리칼은 소라처럼 오른쪽으로 돌아 오른다”고 설명한다. 모두 ‘머리칼이 나발임’을 지적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여래의 머리에는 머리칼이 있을 수 없다. 원래 인도 본토 마투라에서 만들어진 불상의 머리에는 하나의 큰 소라 모양이 솟아 있으며, 그다음 단계에서는 작게 도르르 말린 머리칼이 수없이 덮여 있다. 간다라 지방에서는 그리스·로마의 영향을 받아 곱슬머리로 표현했다. 그런데 마투라건 간다라건 머리칼이라 부르는 것은 모두 영기문으로, 제1영기싹으로 나타내어 여래와 보살로부터 발산하는 영기문임을 알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현실에서 보는 곱슬머리나 상투를 가지고 육계를 바라보기 때문에 육계의 본질을 어찌 알 것인가. 필자는 미황사 괘불의 석가여래 머리를 과감히 깎았다⑥, ⑦.그러나 깎은 것은 머리칼이 아니라, 제1영기싹이 연이어 여래로부터 발산하는 강력한 기운을 나타낸 붕긋붕긋한 영기문이었다. 그것이 여래의 본질인 큰 보주를 가리고 있었다. 영기문을 제거하니 2000여년 만에 여래의 신비한 모습이 나타났다. 즉 솟아오른 여래의 머리가 보주화(寶珠化)해 맨 윗부분에 구멍이 있지 않은가. 그 구멍으로부터 하나의 보주가 솟구쳐 나오고, 다시 그 보주로부터 강력한 두 줄의 영기문이 나와 서로 나선형으로 꼬이며 양쪽으로 뻗어 나가다 태극을 이루고 다시 강력히 뻗어 나가 우주에 충만해진다. 불교경전들은 결국 정답을 주지 못했다. 여래는 용과 마찬가지로 보주의 집적이었다. 여래로부터 하나의 보주가 나오지만 무량한 보주를 발산해 대우주에 가득 찰 것이다. 하나의 보주에서는 무량한 보주가 나온다. 한 분의 용으로부터 무량한 보주가 나오듯이…. 이제 기독교에서 예수의 본질을 파악해 보기로 하자. 아칸서스라고 알고 있는 조형들이 얼마나 심각하게 서양미술사 내지 문화사의 발목을 붙들고 있는지 알았다. 그러나 아직 충분한 증명은 부족해 본격적인 영기화생 조형을 해석하려 한다. 서양미술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아칸서스에 대해 의문을 가지며 여러 가지 아칸서스의 조형에 대해 생각하고 채색분석하는 동안 문양집에서 불과 27x21㎝에 불과한 흑백 삽화를 접했다. 이른바 아칸서스가 가득한 그림이었다. 스캔하여 확대해 본 결과 엄청난 조형들을 발견했다. 작고 흐려서 안 보이는 부분이 많았으나 백묘를 뜨고 채색분석에 들어갔다. 수많은 보주들과 영기잎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전개해 가는데, 중심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모습이 있다. 만일 이것들을 보석이나 아칸서스로 보면 아무 의미가 없어지지만, 영기잎과 보주로 보면 기독교 미술의 매우 중대한 신비와 상징이 드러난다. 프랑코 왕국의 샤를 2세(823~870), 별칭으로 ‘샤를 대머리’라고 불리는 왕에게 헌정된 미완성의 ‘미사 전례 기도집’에 뛰어난 삽화 여섯 장이 들어 있다. 그러니까 일종의 필사본 정밀 삽화로 불교회화로 치면 사경변상도(寫經變相圖)에 해당한다.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사제와 미사에 쓰이는 기도집이다. 870년에 제작된 것으로 지금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삽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장면은 죽음과 부활을 동시에 보여 준다①. 필자가 처음 접한 흑백사진이다. 영기화생론으로 채색분석하면서 해석해 보자. 전체 그림을 그려서 채색분석하자면 너무도 가슴 벅찬 많은 상징과 세밀한 그림이 치밀하게 그려졌기 때문에 한 회로 끝낼 수 없다. 3년 전에 분석한 것을 부족하나마 싣고, 십자가 오른쪽의 위아래로 긴 장방형 안의 조형은 원래 그림에서는 너무 비좁아 따로 채색분석했다. 가운데 십자가를 중심으로 자세히 새로 다시 그리고 채색분석했다②. 맨 밑 부분의 영기문을 보자. 중심에 빨간 작은 보주들과 일체를 이루는 복잡한 매듭들을 채색분석해 보니 그 흐름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전체에서는 세부가 보이지 않으므로 부분을 확대하기로 한다. 맨 밑에 좌우로 긴 영기문을 시발점으로 상하좌우로 복잡하게 전개한다. 좌우로 뻗어 나가 십자가 양옆 공간을 가득 채우고, 위로 올라가 십자가가 화생한다. 자세히 보면 제3영기싹의 제1영기싹 끝에서 각각 초록색과 붉은색 영기문이 생겨나 복잡한 매듭과 보주들을 거쳐 십자가로 연이어 감으로써 십자가는 영기문이 된다. 십자가가 영기문이라면 모두가 의아해할 것이지만, 조형을 따라가 보면 그렇지 아니한가. 제3영기싹의 위치도 매우 중요한 것을 보면 삽화 작가는 누군지 모르지만 무명의 뛰어난 장인임이 틀림없다. 양쪽으로 십자가가 올라가는가 하면 예수의 양쪽 팔이 뻗어 못 박힌 횡으로 긴 십자가는 아랫부분의 매듭으로 얽힌 영기문을 축소한 영기문, 제3영기싹의 제1영기싹 끝에서 생긴 영기문이 뻗어 나와 좌우 십자가를 완성하며 십자가 전체가 양쪽의 영기문과 아래 영기문에서 화생한 셈이다④, ⑤. 즉 십자가가 영기화생하고, 그 영기화생한 십자가에서 예수가 화생한다. 이미 조형적으로 죽은 예수가 영기화생하고 있다. 화생(化生)의 개념은 서양의 문자언어에는 없지만 조형언어에는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예수님 자체의 못 박힌 손과 발에서 피가 흐르는데 보주로 표현하고 있다. 생명의 피다. 옆구리의 창에 찔린 자리에서도 피가 아니라 보주들이 줄줄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예수의 머리가 보주로 이루어져 있다. 불교 여래의 머리가 보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과 맥을 같이하고 있지 않은가. 예수가 자리 잡은 노란색 공간은 공간이 아니라 영기의 넓은 띠다. 양쪽 맨 가의 제1영기싹 공간에서 넓은 아칸서스 모양으로 끝나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 영기잎 줄기마다 보주들과 겹쳐 있다. 끝으로 광배. 둥근 광배는 보주로 이루어져 있으며 두광에서 반복하고 있는 십자가도 보주들로 이루어져 있다. 영기문과 보주들로 이루어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전체 이미지는 놀랍기만 하다. 그리고 뱀. 그러나 뱀이 아니다. 용성을 지닌 영기문이다. 놀랍게도 만물생성의 근원인 제3영기싹에서 화생하고 있다. 그 영기문의 입에서 다시 양 가닥의 영기문을 토해 내고 있다. 뱀만 다시 채색분석한다③. 뱀에서 중요한 것은 부활의 상징성이다. 부활이라는 상징을 놀랍게도 영기화생으로 표현했다. 전체 그림에서 십자가 부분 외의 모든 부분은 힘찬 영기잎들과 보주들로 이루어져서 중심의 예수와 십자가를 화생시키고 있다. 예수의 ‘영기화생’은 예수의 ‘부활’과 일치한다. 뱀은 부정적인 이미지에 가려져 있긴 하지만, 동시에 오래전부터 두렵고 신성한 존재로 여겨 와서 여러 신화나 설화 속에서 신에 버금가는 존재로 등장한다. 뱀의 특성과 연관돼 있다. 뱀은 죽을 때까지 쉼 없이 탈피하는 동물이므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다시 살아난다고 생각했고, 뱀은 부활·치유·재생의 대명사가 됐다. 그래서 많은 의료기관이 뱀을 심벌로 사용한다. 그리스·로마 신화의 죽음 및 재생과 관련된 신으로는 오시리스, 아도니스, 예수, 미트라 등이 있다. 세계적으로 심리학, 종교학, 신화학 등에서 뱀과 신의 부활이라는 주제가 심도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십자가 위에 해와 달이 의인화돼 표현되어 있는데, 예수가 못 박힌 십자가와 반드시 함께 나타나는 해와 달에 대해서는 놀라운 도상들이 그리스 이래 수없이 나타난다. 놀랍게도 이 십자가를 화생시킨 맨 아래 매듭과 무량한 보주들에서 양쪽으로 뻗어 나간 긴 영기문에서 십자가 좌우에 가득 찬 영기문으로 발산하고 있다. 그리고 오른쪽의 글씨, ‘Te igitur’(테 이구투르)는 미사통상문으로 우리나라에서는 ‘Te igitur’(당신께 그러므로), 이 부분을 빼고 다음과 같이 번역해 사용하고 있다. 즉 ‘인자하신 아버지 (당신께 그러므로)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간절히 청하오니….’ 아칸서스, 팔메트, 반 팔메트, 인동문(Honey Suckle), 장미, 모란, 덩굴, 석류, 메달리온, 거북~귀갑문, 그로테스크, 스파이럴(渦), 파문(巴文), 만(卍)자문, 뇌문(文), 칠보(七寶) 등 수없이 많은 잘못된 용어들을 바로잡아 가는 동안 새로운 조형의 세계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연재의 마지막 부분은 아칸서스라고 하는 하나의 틀린 용어를 바로잡아 가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전혀 새로이 해석할 수 있게 됐다. 그러므로 35회에 걸친 이번 연재는 우리가 ‘비의(秘儀)의 무대’를 지나가다가 장막을 한 손으로 걷어 올리며 힐끗 한 번 안쪽을 엿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의 모든 종교는 궁극적으로 밀교(密敎)의 속성을 지닌다. 조형언어란 그런 의미에서 밀교적 언어다. 필자가 말하는 ‘인류’란 ‘동서고금’이다. 부분만 연구해서는 인류를 만날 수 없다. 필자는 동서고금의, 즉 인류 조형예술의 비밀을 풀어 내고 있다. 보이지 않았던, 무엇인지 몰랐던 조형의 본질을 풀어 내고 더 나아가 우리가 전부였다고 생각했던 빙산의 일각의 엄청난 오류를 고쳐 나가고 있다. 인류 문화에 대한 근본적 인식 변화가 시작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영기화생론’은 인류 조형예술의 기원을 푸는 열쇠가 돼 미래의 새로운 길을 열어 줄 것이라 확신한다. 용이란 조형의 본질을 파악해 보니 모든 조형이 용 하나에 수렴됨을 알았다. 봉황과 식물 모양 영기문들은 모두 용이나 용성(龍性)으로 귀결한다. 용의 조형은 변화무쌍해 ‘주역’(周易)에 자주 나타난다. 용의 조형에서 추출한 제1, 제2영기싹과 보주 등으로 모든 보이지 않았던 조형들이 완벽히 풀린다. 지금까지 동양과 서양은 전혀 다른 것으로 모든 사람들은 생각해 왔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거대한 빙산의 조형 원리는 동서양이 똑같았다. 세계는 하나라는 것을 증명했다. 동서양의 조형 5000여점을 채색분석해 얻은 성과다. 1㎜의 오차도 없다. ‘세계조형예술, 용으로 읽다’라는 주제로 연재를 시작했을 때부터 가장 염려했던 분은 국제정치학이 전공인 필자의 형 강범석 명예교수다. 매번 가슴 졸이며 연재를 정독하고 이메일로 논평을 해 왔다. 한 해 가까이 과분한 지면을 베푼 서울신문에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내내 긴장과 환희,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의 나날이었다. 필자의 학문적 생애의 작은 매듭을 짓는다. 모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 해외여행 | [Surprising China] 산시성- 놀라운 중국 역사의 중심지 산시성陝西省

    해외여행 | [Surprising China] 산시성- 놀라운 중국 역사의 중심지 산시성陝西省

    수천년 동안 한자리를 지키던 수천명의 병사들. 그들은 지금 누구를 지키고 있는 것일까. 빙마용(병마용, 兵馬俑)의 거대한 군대에서 시작한 놀라움은 당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를 품은 화칭츠(화청지, 华清), 중국 5악 중 하나로 꼽히는 화산華山으로 이어진다. 중국 지도에서 한가운데 있는 산시성(섬서성, 陝西省). 빙마용만 보고 돌아오면 아쉽다. 산시성 구석구석에 담긴 역사와 문화를 찾아보자. 세계 4대 역사 도시 중 하나인 시안 중국의 역사를 느끼기 위해 꼭 한 곳만 가야 한다면 시안서안, 西安으로 떠나야 한다. 산시성의 성도인 시안은 오랫동안 중국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지도를 봐도 산시성은 중국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당나라 시인 두보는 ‘추흥팔수秋興八首’에서 ‘진중자고제왕주(진중은 예로부터 제왕들의 터였다네, 秦中自古帝王州’)라고 읊었다. 중국 최초로 통일왕국을 이룩한 진나라뿐만이 아니다. 13개 왕조를 거치는 1,180여 년 동안 시안은 중국의 수도였다. 시안은 정치뿐만 아니라 종교의 중심지였다. 중국에서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가장 먼저 전파된 곳도 시안이고 중국 8개 불교 종파 중 6개 종파가 시작된 곳도 시안이다. 뿐만 아니라 시안은 실크로드의 출발지이자 종착점이기도 했다. 중국은 실크로드를 통해 비단을 수출했고 이 길을 통해 불교를 받아들였다. 아테네와 로마, 카이로와 함께 세계 4대 역사 도시로 꼽히는 시안은 한때 인구 100만명을 자랑하는 국제도시이기도 했으며 문화와 종교가 섞이고 동양과 서양이 만나던 용광로였고 사상과 문화를 중국 곳곳으로 퍼트린 통로였다. 당나라 때 시안은 오래도록 평안하라는 뜻의 ‘장안長安’으로 불렸다가 수도를 비롯해 국가 경제·문화 중심이 동부 베이징으로 이동한 이후 서쪽이 편안하라는 의미에서 ‘시안’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왕조가 바뀌고 전쟁이 계속되면서 아방궁이나 대명궁같이 황제의 권력으로 건축이 가능했던 화려한 건축물들은 사라졌지만 친숙한 중국 여행의 상징인 빙마용(병마용, 兵馬俑)과 무용(舞俑, 무희 등을 형상화한 인형)을 만날 수 있는 유적지들이 과거와의 연결고리가 되어 준다. 수천년 동안 한자리를 지켜 온 빙마용 시안 여행의 스타는 뭐니뭐니 해도 빙마용이다. 빙마용은 흙으로 빚어진 병사를 말하는 것으로 진시황의 명령에 따라 그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빙마용이 세상에 드러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74년 3월 우물을 파던 농부에 의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수천년의 기나긴 침묵을 끝내고 찬란한 모습을 드러낸 빙마용은 세상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 무려 6,000여 개가 넘는 사람과 말의 토우가 그곳에 매장되어 있었다. 빙마용은 실제 사람과 비슷한 크기로 제작되었는데 어느 것 하나 같은 모습이 없고 핏줄이나 근육 모양, 표정 등까지도 세밀하고 생생하게 묘사돼 있어 놀라움을 준다. 빙마용은 모두 동쪽을 향해 있는데, 궁전과 성의 문 위치도 동일하다. 시안에서 3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빙마용 갱은 3개의 전시관으로 이뤄져 있다. 1호 갱은 당시 농민이 발견한 것인데 규모가 제일 크다. 2호 갱에는 1,300개의 전사와 말이 있으며 다섯명의 병사는 가까이에서도 볼 수 있다. 대부분의 빙마용들은 서 있는 자세지만 화살을 쏘는 사수도 있고 갑옷을 입은 장군도 있다. 사수는 마치 소총을 쏘듯 한쪽 무릎을 꿇고 반대편 무릎으로 몸을 지탱하고 있다. 활쏘기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원래 중앙, 또는 오른쪽에 틀어 올리는 상투를 왼쪽으로 튼 것도 재미있다. 진시황 사후 3년째 되던 해, 진시황이 초나라를 짓밟았을 때 이에 대한 원한으로 항우가 빙마용 갱에 불을 질렀는데 석 달이 넘도록 불길이 잡히지 않았다고 하니 그 규모는 상상에 맡긴다. 이때 전리품으로 병마용 병사들이 갖고 있던 창과 방패를 가져가는 바람에 병마용 갱의 병사들은 모두 무장해제된 상태다. 당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 무대, 화칭츠 빙마용 갱에서 1.5km 떨어진 곳에는 진시황릉이 있다. 진시황릉은 높이 79m, 동서 475m, 남북 384m에 달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무덤으로 능을 만드는 데 70만명이 투입되었다고 전해진다. 막상 진시황릉 앞에 서면 무덤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산이라는 느낌이 든다. 역사서 <사기史記>를 보면 진시황릉의 지하궁전에 대해 ‘지상의 궁전을 본떠 만들었으며 대량의 수은을 사용해 황허(황하, 黄河)와 양쯔강(양자강, 揚子江)을 조성하고 매일 진시황의 관이 중국 전역을 주유할 수 있도록 설비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밖에서 보기에는 산이지만 무덤 안에는 하나의 세계가 들어 있던 것이다. 역대 황제들의 별장이었던 화칭츠도 시안 여행에서 결코 건너뛰면 안 된다. 화칭츠는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가 사랑을 나누던 곳으로 아름다운 풍경과 질 좋은 지하 온천수로 유명해 역대 제왕들의 사랑을 받았다. 내부로 들어가면 현종과 양귀비가 목욕했다는 하이탕탕(해당탕, 海棠湯)을 비롯해 롄화탕(연화탕, 蓮華湯), 타이즈탕(태자탕, 太子汤) 등 여러 유적들이 과거를 상상하게 만든다. 화칭츠 안에서도 가장 많은 이들이 모이는 곳은 양귀비가 목욕을 막 끝내고 나오는 동상 앞. 비록 동상이지만 양귀비와 기념사진을 찍기 위한 이들로 북적인다. 저녁이 되면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다룬 바이쥐이(백거이, 白居易)의 서사시 <장한가長恨歌>를 현대판 무용으로 연출한 공연이 펼쳐진다.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애절한 음악과 함께 공연을 보다 보면 현종과 양귀비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에 푹 빠지게 된다. 성벽과 종루, 다안타, 베이린박물관 등 역사의 보고 시안 시내에도 둘러볼 곳들이 많다. 시안 성벽과 다안타(대안탑, 大雁塔), 산시성박물관, 베이린(비림, 碑林)박물관 등 시안 시내를 돌아보는 데 적어도 며칠이 필요하다. 시안에서 해봐야 할 것 중 하나가 시안 성벽 위에서 자전거 타기다. 시안 시내를 둘러싸고 있는 시안 성벽은 14세기 명나라 초기 홍무 때 축성한 것으로, 중국 성벽 중 보존이 가장 잘 된 성벽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높이 12m에 두께는 12~18m, 전체 둘레 13.7km로 4개의 문을 가지고 있다. 각 문마다 드나드는 이들이 달랐는데, 그중 남문은 황제만 다닐 수 있었다고. 북문은 사절단이 오가는 문, 동문은 각 지방에서 올라오는 공물이 들어오는 문, 서문은 실크로드를 향한 문이었다. 성벽이 둘러싸고 있는 시안 중심에는 중러우(종루, 鐘樓)와 구러우(고루, 鼓楼)가 있다. 중러우와 구러우는 명나라 때 성문이 열리고 닫히는 시간을 알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과거에는 시간을 알려 주는 관직에 있던 이만 오를 수 있었다지만 지금은 누구나 오를 수 있다. 중러우와 구러우 사이에 있는 광장은 젊은이와 여행자들에게 만남의 광장으로 유명하다. 또한 밤에는 시안 시내의 아름다운 야경을 볼 수 있으며 근처에는 이슬람 거리가 있어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다안타는 츠언사(자은사, 慈恩寺) 경내에 있는 전탑으로 당나라때부터 과거 급제한 이들이 이 탑에 올라가 이름을 새긴 것으로 유명하다. 다안타는 삼장법사로 알려진 현장이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과 불상을 보존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7층 높이다. 중국 5악 중 하나인 화산 시안에서 동북부에 자리하고 있는 시엔양(함양, 咸陽)에는 진시황릉과 분위기가 다른 시엔양릉이 자리하고 있다. 시엔양은 진시황이 다스린 진나라의 황궁이 위치한 곳으로 관중평야에서도 웨이하(위하, 渭河)의 하류 지역으로 리산(여산, 驪山)을 끼고 있는 풍수지리가 좋은 땅이다. 시엔양릉은 한무제의 아버지인 한경제의 무덤으로 함양국제공항과 시안 사이의 고속도로를 건설하다 발견되었다. 시엔양릉에서 출품된 도자기 형태의 인형들은 빙마용의 그것과는 다르다. 50~60cm의 자그마한 크기에 팔도 없이 앙상한 모습에 실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쯔진청(자금성, 紫禁城)과 경복궁을 크기만으로 비교할 수 없듯이 시엔양릉의 도용 역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산을 좋아하는 이라면 시안에서 북쪽으로 120km 거리에 있는 화산을 찾아보자. 중국 오악 중 서악에 속하는 화산은 기암괴석이 많아 무척 험하다. 평지라고는 거의 없고 아슬아슬한 절벽이 이어져 있다. 화산은 중국 무협소설의 대가인 김용의 작품에 나오는 화산파의 배경지로 중국 무협지 주인공처럼 포즈를 하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곳들이 많다. 화산은 옥녀봉을 비롯해 5개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동쪽 봉우리는 일출을 보기 위해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travel info Shanxi Airline 대한항공과 에어차이나 등 여러 항공사에서 인천-시안 직항편을 운항하고 있다. 소요시간은 3시간 15분. FOOD 후이족회족, 回族 거리에 가면 두건을 두른 후이족들이 곳곳에서 특색 있는 길거리 음식과 국수를 팔고 있다. 양꼬치와 해산물 꼬치를 비롯해 다양한 먹거리를 만날 수 있다. SPOTS 진시황릉과 시엔양릉 외에도 산시성 곳곳에는 수많은 황제의 능이 자리하고 있다. 시안에서 서쪽으로 45km 떨어진 곳에는 5대 황제인 한무제의 묘 ‘무릉’이 있다. 한무제는 실크로드 개척자로, 무릉 근처에는 한무제 때 장수 곽거병의 묘도 있다. 또 시안에서 80km 떨어진 곳에는 중국 유일의 여황제 측천무후의 ‘건릉’도 자리하고 있어, 중국 역대 황제들의 흔적을 밟고 싶은 이라면 능을 테마로 산시성을 여행하는 것도 추천할 만하다. museum 역사에 관심많은 당신에게 산시성 역사박물관은 중국의 3,000년 고대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36만여 점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전통 궁전양식의 외관에 3개의 전시실이 자리했다. 옛 중국의 도서관 시안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박물관 중 하나가 베이린박물관이다. 베이린박물관은 시안에서 출토된 비문을 모아 놓은 박물관으로 유명 서예가들이 새긴 수천개의 비석이 나무숲처럼 빼곡히 모여 있다. 비석은 종이가 없던 시절부터 기록하기 좋은 재료였던 것을 생각하면, 베이린박물관은 옛 중국의 도서관이나 마찬가지다. 베이린박물관 주변에는 시안의 인사동으로 불리는 문서거리가 있다. 서책과 문방사우를 파는 시안의 명물거리다. 에디터 트래비 글 Travie writer 채지형 사진 Travie writer 채지형·트래비CB 취재협조 중국국가여유국 서울지국 www.visitchina.or.kr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 황해도 살던 효녀 심청, 연꽃 타고 곡성으로 내려왔나?

    황해도 살던 효녀 심청, 연꽃 타고 곡성으로 내려왔나?

    “심청이 고향이 전남 곡성? 콩쥐는 전북 완주 출신?” 자치단체들이 심청전이나 홍길동전, 콩쥐팥쥐, 흥부전 등 고전 소설이나 동화의 주인공을 내세워 지역 홍보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문화콘텐츠의 힘이 막강하기 때문이다. 학술연구를 근거로 주장하는데, 고향이나 연고권에 수긍이 갈 때도 있지만 ‘진짜?’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례도 없지 않다. 전남 곡성군은 8일부터 11일까지 섬진강기차마을에서 제15회 곡성심청축제를 개최한다. ‘심청이의 고향 곡성’이라며 대대적인 홍보를 한다. 심청과 곡성의 인연은 지난 2000년 연세대학교의 심청 관련 연구결과 발표를 근거로 KBS 1TV 역사스페셜에 소개되면서부터이다. 유근기 곡성군수는 “심청전이나 판소리 심청가는 근원이 곡성의 홍장설화이기 때문에 곡성군이 바로 심청전이 탄생한 고장”이라고 주장했다. 전남 송광사 박물관에 소장된 ‘관음사 사적기’에는 삼국시대에 중국 사람들에게 팔려간 원홍장이라는 처녀가 불상을 만들어 보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했다는 설화가 적혀 있다. 곡성군은 원홍장이 심청으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심청의 실제 모델이라고 한다. 따라서 심청의 고향은 관음사가 있는 곡성이고 인당수(印塘水)는 변산반도 격포 앞바다의 임수도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나온 작가 미상의 대표적인 고전소설 심청은 대체로 이렇게 시작한다. “옛날 황주 도화동에 눈멀어 앞을 못 보는 심학규와 곽씨 부인이 살았는데, 이 부부는 나이 마흔이 되도록 자식이 없는 게 걱정이었다”라고. 황주는 고려시대부터 황해도에 있다. 그러니 심청의 고향은 황해도 황주군이란 주장이 적지 않다. 또한 중국과 교역하던 장사치 뱃사람들이 심청을 공양미 300석에 사가 인당수라는 서해에 제물로 바쳤으니 서해와 가까운 지역에 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내륙으로 들어가 깊은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곡성이라니 어리둥절하다고 한다. 서해 인당수에 천착해 인천시 옹진군도 심청의 고향이라고 주장했다. 군은 심청전의 지리적 무대가 백령도라며 1999년 심청각을 건립하기도 했다. 구전 설화인 ‘콩쥐팥쥐’의 고향 논란도 재밌다. 김제시는 전주대에, 완주군은 우석대에 용역을 주어 서로에게 유리한 근거를 내세워 연고를 주장한다. 콩쥐팥쥐전에서 ‘전주 서문 밖 30리’라는 대목이 있는데 이 지역이 완주군 이서면 앵곡마을 일대라고 한다. 반면 김제시는 전주 서문 밖 30리는 김제시 금구면 둔산마을 일대라고 맞선다. 또 이곳에 콩쥐 아버지(최만춘) 성씨인 최씨 집성촌과 인근에 팥쥐 어머니인 배씨 집성촌이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들고 있다. 그러나 콩쥐팥쥐의 고향이 ‘프랑스 파리’라는 엉뚱한 주장도 있다. 콩쥐팥쥐가 17세기 프랑스 민담을 정리한 샤를 페로의 ‘신데렐라’ 유형인 덕분이다. 태양왕 루이 14세와 청나라 황제가 교류한 탓에 페로의 신데렐라가 중국의 전족 아가씨의 이야기를 각색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중국판으로 ‘싸라기 언니와 겨 동생’이 있다. 전북 남원시는 ‘흥부와 놀부’의 고향이라고 홍보한다. 판소리 ‘흥보가’의 ‘제비노정기’와 ‘박타령’에 나오는 지명 덕분이다. 경희대에 의뢰한 학술용역을 근거로 제시했다. 흥보가는 “전라도는 운봉이요 경상도는 함양이라. 운봉 함양 두얼품(사이)에 흥부가 사는지라” 하고 시작해 운봉과 함양 사이인 인월면과 아영면 일대가 흥부마을이라고 한다. 아영면과 인월면이 서로 다투다가 인월면은 흥부의 고향이고 아영은 흥부가 부자가 돼 산 지역으로 서로 나눠 가졌다. 전남 장성군은 강원도 강릉시와 1997년부터 홍길동 연고권을 두고 갈등하다가 끝내 쟁취했다. 장성군은 1996년 연세대 국학연구원의 용역 결과와 조선왕조실록을 근거로 홍길동이 500여년 전 장성에서 태어난 실존 인물이라고 주장했고 강릉시는 소설 홍길동의 저자인 허균의 고향이라고 강조했다. 장성군은 홍길동 생가를 복원하고 매년 봄에 ‘장성 홍길동축제’를 연다. 올해 10만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 열녀 설화 ‘도미 부인’의 연고지는 충남 보령시가 선점했지만, 다른 지자체가 뛰어들고 있다. 보령시는 1990년대 초 오천면 소성리에 도미 부인 사당인 ‘정절사’를 짓고 매년 경모제를 지낸다. 1995년 정부 인증 도미 부인 표준 영정도 제작했다. 성주 도씨 문중이 2003년 경남 진해시의 도미 부부 추정 묘를 보령시로 이장했다. 그런데 뒤늦게 경기 하남시가 ‘도미 설화가 백제의 개루왕과 연관된 만큼 도미 부부의 거주지는 궁과 가까운 지역이고, 또 팔당댐 아래 도미천이 있다”고 주장한다. 한성 백제의 터전 서울 송파구와 강동구 등도 가세했다. 강동구는 2004년 한강변에 도미 부인 동상을 세웠다.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곡성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보령 이천열 기자 sky@seoul.co.kr
  • 하승진과 김태술 돌아오니 KCC 1311일 만에 5연승

    하승진(221㎝)과 김태술이 나란히 돌아온 KCC가 철옹성이 됐다. 국가대표팀 훈련 도중 햄스트링을 다쳐 1라운드 여덟 경기에 나서지 못했던 하승진은 6일 전주체육관에서 열린 프로농구 1라운드 마지막 경기를 22분19초나 뛰며 9득점 9리바운드로 전자랜드를 73-58로 격파하는 데 앞장섰다. 696일 만에 4연승을 달렸던 여세를 몰아 무려 1311일 만에 5연승을 내달린 KCC는 6승3패로 선두 오리온과의 승차를 2로 줄였다. 아시아농구선수권을 끝내고 지난 3일 귀국한 김태술도 22분51초를 뛰며 6득점 3리바운드 2어시스트 4스틸로 큰 힘이 됐다. 둘이 돌아오니 안드레 에밋(22득점 6리바운드)과 리카르도 포웰(17득점 6리바운드) 두 외국인의 행동 반경도 넓어지고 김태술과 전태풍이 번갈아 경기를 리딩하니 공수의 안정감이 훨씬 더했다. KCC가 리바운드 수 40-35로 앞섰다. 기선을 잡은 것은 전자랜드였다. 1쿼터 박성진이 8득점으로 앞장섰고 KCC는 포웰이 7득점으로 맞서 13-13으로 마쳤다. 2쿼터 에밋이 13득점으로 불을 뿜었다. 전자랜드는 김지완의 3점슛 두 방을 앞세워 전반 종료 2분여를 남기고 28-30까지 쫓아갔으나 정영삼이 허리를 크게 다치는 불상사를 만났다. 스스로 들것에 올라가지 못할 정도의 큰 부상이라 전자랜드 전력에 큰 누수가 불가피하게 됐고 KCC가 전반을 34-30으로 앞섰다. 하승진은 전반 10분1초를 뛰며 2득점 4리바운드를 기록했고 김태술은 6득점 2리바운드 3스틸로 거들었다. 3쿼터 7분 남짓 전자랜드가 정효근의 7득점만으로 버티는 틈을 타 KCC는 계속 달아났고, 유도훈 전자랜드 감독은 알파 뱅그라를 투입했지만 별 재미를 보지 못하고 45-54로 뒤졌다. 4쿼터 포웰이 다시 코트에 돌아와 내외곽을 헤집은 KCC는 5분35초를 남기고 63-47로 달아나 사실상 승기를 굳혔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23] ‘카프’ 김복진의 20세기 불상 조각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23] ‘카프’ 김복진의 20세기 불상 조각

     카프(KAPF)라는 영문 약칭이 더 익숙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지도자였던 정관 김복진(1901~1940)은 현대적 개념의 조각가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물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한때 불문(佛門)에 귀의하기도 했다는 그는 불모(佛母)로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반면 서양미술에 바탕을 둔 조각 작품은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다. 50점 남짓한 작품 가운데 동상은 제2차 세계대전 막판 일제의 쇠붙이 공출로 사라졌고, 목조와 소조의 유작도 동생인 팔봉 김기진의 인쇄소 창고에서 6.25전쟁 때 소실됐다고 한다.  불상으로는 충북 보은 법주사의 미륵대불이 그의 작품이었다. 미륵대불은 김복진이 머리 부분을 완성하고 전체 비례를 잡아놓은 상태에서 자금난으로 중단됐다고 한다. 미완성으로 남아있던 미륵대불은 1963년에야 완성됐다. 미륵대불은 흔한 시멘트 조각이라는 이유로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지만, 김복진으로서는 오히려 시멘트라는 새로운 재료를 거대 불상 조성에 이용하는 실험이었다. 미륵대불은 1990년 금동상으로 다시 만들어졌다. 두 차례 다른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도 김복진의 체취는 여전히 남아있다.  전북 김제 금산사 미륵전의 본존불도 김복진의 작품이다. 미륵전은 내부가 아래위로 뚫려있는 3층으로 본존불은 높이가 38척이니 12m가 넘는다. 삼존불은 미륵전을 중창한 인조 13년(1635) 조성한 것이다. 서양조각의 재료인 석고로 금산사 미륵본존불은 조성한 것은 특기할 만 하다. 그런데 삼존불 가운데 좌우 협시보살은 제외하고 본존불만 조성했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그래선지 그가 본존불을 조성했다는 사실조차 한동안은 묻혀있다시피했다. 미륵전에는 본존불만 조성한 이유를 알 수 있는 기록이 남아있다.  미륵전 본존불은 특이하게 커다란 무쇠솥 위에 봉안되어 있다. 참배객들은 삼존불에 배례하고는 무쇠솥과 본존불의 대좌 사이 공간에 시줏돈을 넣고는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1934년 3월 9일 저녁 시줏돈을 거두어 가는 소임을 맡은 동자승이 촛불을 잘못 다루는 바람에 솥 내부에서 불이 났다고 한다. 불길은 곧바로 소조상 내부 목재에 옮겨 붙었고 본존볼은 무너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금산사는 미륵본존의 복원불사를 추진했다. 공모에는 김복진과 보응 문성, 금용 일섭, 이석성 등이 응모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대를 대표하는 화승들인 보응, 금용, 이석성은 서울 안양암의 천오백불상도 함께 조성한 적이 있다. 금산사 미륵불 역시 세 사람이 공동 응모했을 가능성이 큰 것 같다. 이당 김은호 화백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것도 눈길을 끈다. 김복진에게 금산사 미륵불 복원에 응모를 권유한 것도 이당이었다고 한다.  김복진은 도쿄미술대학에서 공부한 뒤 1923년 신극운동 단체인 ‘토월회’를 조직한다. 1924년에는 일본 제국미술원전람회, 1925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각각 나체 조각 작품으로 입선한다. 이듬해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나체상 ‘여인’이 특선에 올랐다. 하지만 김복진은 카프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던데다 조선공산당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1928년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일본경찰에 붙잡혀 6년 가까이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김기진은 감옥살이 당시의 형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참담한 감옥살이 중에도 김복진은 먹지 않고 남긴 밥을 주물러 점토처럼 만들고는 인물상과 불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솜씨에 놀란 간수들이 김복진을 목공소로 보내 작은 목조불상을 깎게 해서 감옥소 직매장에서 팔게했다는 것이다. 김복진이 불교조각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진 것은 이 기간이었던 것 같다. 금산사 미존불 조상에 나선 것은 풀려난 직후가 된다.  김복진의 불상 작품으로 남아있는 것은 10점 남짓이다. 금산사 미륵불과 그의 흔적이 여전한 법주사 미륵대불, 서울 영도사 석가모니불입상, 충남 예산 정혜사 관음보살좌상, 충남 공주 계룡산 소림원 미륵입상 등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소림원 불상이다. 석고로 만든 높이 117cm의 소림원 미륵입상은 금산사 미륵불을 조성하기 위한 축소모형이라고 한다. 다만 머리 부분의 비례가 소림원 쪽보다 금산사 쪽이 조금 더 커보이는 것은 높이 올려다 보아야 하는 대형 불상인 만큼 의도적인 조정이라는 것이다.  서동철 수석논설위원 dcsuh@seoul.co.kr  
  • “하루 평균 자살자 39명…남성 70%”-경찰청 국감자료서 드러나

     우리나라에서 하루 평균 39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그 중 남성이 70%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야당 간사인 새정치민주연합 정청래 의원이 28일 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3년 자살한 사람은 총 1만 4271명이었으며, 그 중 남성이 9920명(70%), 여성이 4346명(30%)으로 집계됐다. 성별 불상자는 5명이었다.  직업별로는 무직자가 6733명(47%)으로 가장 많았고, 자영업 899명(6%), 회사원 848명(6%) 등으로 뒤를 이었다. 원인별로는 정신과적 문제가 4011건(28%)이었고, 질병과 경제 문제가 각각 2905건(20%) 등이었다.  정 의원은 “허술한 사회 안전망과 경제 양극화가 대한민국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국가 자살률 부동의 1위라는 오명을 씌웠다”고 지적했다.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아시아 국가 교류 속 한국 불교조각의 전통을 본다

    아시아 국가 교류 속 한국 불교조각의 전통을 본다

    한국 불교조각의 전통을 인도, 중국, 베트남, 일본과의 교류 속에서 조명하는 이색 특별전이 열린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 이전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한 고대불교조각대전 ‘불상, 간다라에서 서라벌까지’이다. 반가사유상, 일본으로 건너간 삼존불 등 국내 5개 기관과 인도, 미국, 중국, 영국 등 세계 7개국 21개 기관에 소장된 불상 210점이 한자리에 모인다. 25일 개막하는 전시는 4부로 구성됐다. 1부 ‘인도의 불상-오랜 역사의 시작’은 인도에서 불상을 처음 제작한 목적과 방법에 초점을 맞췄다. 인도에선 기원 전후 간다라와 마투라 지역에서 비슷한 시기에 불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 아래 독자적으로 불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불상 모습도 다르다. 전시에선 두 지역에서 출토된 불상과 보살상을 통해 성상(聖像)에 대한 접근법과 관심사의 차이에 대해 살펴본다. 2부 ‘중국의 불상-시작부터 수대(隋代)까지’에서는 오호십육국(304~439)부터 수(581~618)로 이어지는 중국의 불상 제작 흐름을 보여준다. 인도 굽타 시대 불상, 베트남 지역에서 발견된 불상과 동 시기 중국 불상의 비교를 통해 아시아 국가들이 교류를 바탕으로 새로운 양식의 영감을 얻는 모습을 보여주는 코너도 마련됐다. 3부 ‘한국 삼국시대의 불상’에선 외래의 상을 본떠 만든 최초의 상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국적 논란을 포함해 삼국시대 불상 제작 초기 양상을 살펴보고, 삼국시대 불상이 중국 남·북조와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전개되다 6세기부터 점진적으로 한국적인 모습으로 변화해 나가는 모습을 조명한다. 4부 ‘반가사유상의 성립과 전개’에선 한국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종교적·예술적 성취를 이룬 반가사유상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전시에는 1965년 봉화 북지리에서 출토된 석조반가사유상이 출품된다. 추정 높이 3m에 달하는 이 상은 한 사원의 주존으로 모실 만큼 반가사유상이 신앙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50년 만에 처음으로 원소장처인 경북대학교박물관을 떠나 중앙박물관에 전시된다. 2004년 이후 11년 만에 국보 78·83호 두 반가사유상도 동시에 선보인다. 박물관 측은 “인도에서 불상이 처음 등장한 시기부터 우리나라에서 반가사유상 제작이 정점에 이른 700년까지 불교조각의 진수를 보여주는 불상과 보살상이 전시된다”며 “한 종교의 예배상이 창안되는 순간과 그 확산 과정을 두루 살펴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11월 15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안전 대한민국 서울신문고] 경기 수원시 보행 민원 해결

    [안전 대한민국 서울신문고] 경기 수원시 보행 민원 해결

    박병석(48·경기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씨는 지난달 25일 오전 7시 16분 안전신문고에 “길을 지나다가 쓰러진 나무를 발견했다”는 글을 올렸다. ●교통사고 우려 등 주민 안전 위협 박씨는 23일 “밤새 천둥·번개와 함께 몰아친 비바람 때문에 생긴 불상사로 보이는데 보행에 불편할 뿐 아니라 다른 사고를 일으킬 수도 있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오래된 매실나무는 제법 컸다. 오래되지 않았더라도 태풍 등 악천후로 수분이 빠지면 약해지면서 잘 부러져 주민들의 안전을 위협하기 마련이다. 아름드리나무가 쓰러져 굴러다니다 차도로 떨어지면 이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운전자들이 치는 바람에 교통사고로 종종 이어진다. 그래서 큰 나뭇가지를 치는 작업을 이따금씩 해야 한다. 신고를 접수한 국민안전처 안전정책실에서 곧장 박씨와 통화해 구체적인 사실 점검을 벌였다. 정확한 처리를 위해서다. 결국 수원시 연계기관에 이첩하기로 했다. 시민봉사과로 연락을 취했다. 도로 안전을 담당하는 부서 소속이 지방자치단체마다 달라서다. 수원시 시민봉사과는 관할 구역인 장안구의 안전건설과에 담당자를 지정하도록 조치를 내렸다. 같은 날 오후 10시 12분쯤 나무를 제거했으니 신고를 받은 지 3시간도 채 걸리지 않은 것이다. 박씨는 “이처럼 대처를 빨리하는 줄 몰랐다”고 말했다. ●민원 신청인에게 문자로 통보 마지막으로 신고 이튿날인 지난달 26일 민원 신청인인 박씨에게 문자메시지 발송 서비스(SMS)로 조치 사실을 알렸다. 구청은 ‘앞으로 녹지정책에 대한 시정이 필요하거나 궁금한 점에 대해서는 구청 안전건설과 녹지팀에 연락하면 된다’며 담당 주무관 연락처도 남겼다. 송한수 기자 onekor@seoul.co.kr
  • 고대불교조각대전 ‘불상, 간다라에서 서라벌까지’

    고대불교조각대전 ‘불상, 간다라에서 서라벌까지’

     한국 불교조각의 전통을 인도, 중국, 베트남, 일본과의 교류 속에서 조명하는 이색 특별전이 열린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 이전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한 고대불교조각대전 ‘불상, 간다라에서 서라벌까지’이다. 반가사유상, 일본으로 건너간 삼존불 등 국내 5개 기관과 인도, 미국, 중국, 영국 등 세계 7개국 21개 기관에 소장된 불상 210점이 한자리에 모인다.  25일 개막하는 전시는 4부로 구성됐다. 1부 ‘인도의 불상-오랜 역사의 시작’은 인도에서 불상을 처음 제작한 목적과 방법에 초점을 맞췄다. 인도에선 기원 전후 간다라와 마투라 지역에서 비슷한 시기에 불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 아래 독자적으로 불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불상 모습도 다르다. 전시에선 두 지역에서 출토된 불상과 보살상을 통해 성상(聖像)에 대한 접근법과 관심사의 차이에 대해 살펴본다.  2부 ‘중국의 불상-시작부터 수대(隋代)까지’에서는 오호십육국(304~439)부터 수(581~618)로 이어지는 중국의 불상 제작 흐름을 보여준다. 인도 굽타 시대 불상, 베트남 지역에서 발견된 불상과 동 시기 중국 불상의 비교를 통해 아시아 국가들이 교류를 바탕으로 새로운 양식의 영감을 얻는 모습을 보여주는 코너도 마련됐다.  3부 ‘한국 삼국시대의 불상’에선 외래의 상을 본떠 만든 최초의 상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국적 논란을 포함해 삼국시대 불상 제작 초기 양상을 살펴보고, 삼국시대 불상이 중국 남·북조와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전개되다 6세기부터 점진적으로 한국적인 모습으로 변화해 나가는 모습을 조명한다.  4부 ‘반가사유상의 성립과 전개’에선 한국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종교적·예술적 성취를 이룬 반가사유상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전시에는 1965년 봉화 북지리에서 출토된 석조반가사유상이 출품된다. 추정 높이 3m에 달하는 이 상은 한 사원의 주존으로 모실 만큼 반가사유상이 신앙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50년 만에 처음으로 원소장처인 경북대학교박물관을 떠나 중앙박물관에 전시된다. 2004년 이후 11년 만에 국보 78·83호 두 반가사유상도 동시에 선보인다.  박물관 측은 “인도에서 불상이 처음 등장한 시기부터 우리나라에서 반가사유상 제작이 정점에 이른 700년까지 불교조각의 진수를 보여주는 불상과 보살상이 전시된다”며 “한 종교의 예배상이 창안되는 순간과 그 확산 과정을 두루 살펴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11월 15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제주 어린이집, 원장 일가족 4명 사망..가장이 유서남겨 “최근 이혼 논의” 가정불화 가능성

    제주 어린이집, 원장 일가족 4명 사망..가장이 유서남겨 “최근 이혼 논의” 가정불화 가능성

    제주 어린이집, 원장 일가족 4명 사망 ‘경악 사건’ 대체 누가? 알고보니.. ‘제주 어린이집’ 제주 어린이집에서 원장 일가족 4명이 숨진 채 발견돼 충격을 주고 있다. 제주의 한 어린이집에서 원장의 일가족 4명이 숨진 채 발견돼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21일 경찰과 제주소방안전본부 등에 따르면, 이날 오전 7시58분께 제주 외도동 모 어린이집에서 원장 A 씨(41·여)와 남편 B 씨(52), 아들 C 군(14), 딸 D 양(11)이 숨진 채 발견됐다. 이날 어린이집에 출근한 보육교사가 B씨가 목을 매 숨져 있는 것을 최초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어린이집 원장인 부인 40살 A 씨는 흉기에 찔려 숨졌다. 중학교 1학년 아들 C군과 초등학교 4학년인 딸 D양도 마찬가지였으며 모두 이불에 덮여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가장인 52살 B 씨는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가장 B 씨가 식구들을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고 있다. B 씨는 어린이집 버스 등을 운전하면서 아내의 어린이집 운영을 도왔던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 현장 감식 등 수사가 진행되고 있어서 아직 정확한 사건 경위는 나오지 않았다. 다만 부부가 최근 이혼을 논의했다는 주변의 말에 따라 가정불화로 인한 불상사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현장에서 B씨가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잘 떠나겠다”라는 내용의 유서가 발견됐으며 아내와 아이들에 대한 언급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A 씨와 B 씨는 4년 전 재혼한 부부로, 숨진 아이들은 A씨와 전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제주 모 어린이집에는 30여 명이 등록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방송 캡처(제주 어린이집) 뉴스팀 seoulen@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20] 몽고군 침입에 파묻은 불상 25구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20] 몽고군 침입에 파묻은 불상 25구

     숙수사는 소수서원 자리에 있던 절이다. 지금도 경북 영주시 순흥면의 소수서원 뜰에는 높이 3.91m의 당당한 통일신라 양식 당간지주가 보인다. 이 정도 규모 있는 당간지주가 세워졌을 정도면 숙수사는 상당한 규모의 사찰이었을 것이다.  1953년 12월 소수서원 곁에서는 고등공민학교를 새로 짓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런데 1m 지점에서 작은 불상이 한꺼번에 25구나 나왔다. 불상은 당간지주에서 북쪽으로 150m 떨어진 지점에서 나왔다. 초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김재원 박사의 회고다.  당시 학교측은 학생을 동원해 불상들을 발굴했다고 한다. 당시 문화재 관리 주무부처였던 문교부는 국립중앙박물관에 현지조사와 동시에 유물을 인수하는 임무를 맡겼다. 이듬해 3월 김원룡 당시 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이 현장에 파견됐다.  국립대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숙수사 불상은 6세기 후반~8세기 것이다. 여래상, 보살상, 반가사유상, 탄생불, 신장(神將)상, 공양자상 등으로 다양하다. 작은 것이 6.5㎝, 큰 것이 17.5㎝로 한 손에 잡힌다. 지름 60㎝에 높이가 75㎝를 넘는 항아리에 한꺼번에 담겨 묻혔다. 불상을 땅속에 서둘러 파묻은 스님들의 긴박한 움직임이 눈에 선하다.  통일신라시대 이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대형 토기의 존재는 불상이 묻힌 시기를 짐작케 해준다. 당시 김원룡 연구관도 불상은 고의로 매몰한 것 같고, 따라서 스님들이 전란을 피하여 불상을 파묻고 사찰을 비운 것이 아니었겠느냐는 의견을 내놓았다.  소수서원은 풍기군수 주세붕(1495~1554)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순흥 출신의 유학자 안향(1243~1306)을 모시는 사묘(祠廟)를 세우고 신비들이 공부하는 장소로 삼았다가 중종 38년(1543) 백운동서원을 설립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그런데 고려시대 문신 임경식(1099~1161)의 묘지(墓誌)에는 아직 숙수사가 건재한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한편으로 주세붕의 문집에는 안향이 이곳에서 독서했기 때문에 사당을 짓고 서원을 창시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안향의 어린시절에는 숙수사가 건재했다는 뜻이다. 이렇게 보면 폐사는 13세기 중반 이후의 어느날로 보아야 한다.  김재원 박사는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과 연관지었다. 당시 대구 부인사 대장경과 경주 황룡사 9층탑에 불탔다. 특히 고종 41년(1254) 자랄타이가 대군을 이끌고 몰려왔을 때는 사로잡힌 사람이 20만명에 사망자는 헤아릴 수 없었다. 숙수사도 이 때 불타고, 스님들도 모두 죽거나 잡혀가 훗날 불상을 수습할 사람조차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서동철 수석논설위원 dcsuh@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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