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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궁화호 발사 연기/15일 넘기면 내년초 상용서비스 차질

    ◎태풍시속 1백60㎞… 위성체 손상 우려/피해 없을땐 8일까지 발사 가능할듯 방송·통신위성인 무궁화호가 카운트다운을 눈앞에 두고 허리케인의 「덫」에 걸려 발사가 48시간이상 늦어지게 됨에 따라 앞으로의 「위성계획」에 상당한 차질이 우려되고 있다. 발사체 주계약자인 맥도널 더글러스사는 허리케인 「에린」이 3일 정오(한국시간 3일 상오1시)를 고비로 케이프커내버럴공군기지를 빠져나갈 것으로 보고 늦어도 5일에는 발사가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한국통신 관계자도 다행히 8일까지 케이프커내버럴공군기지의 인공위성 발사일정이 무궁화호를 제외하고는 비어 있어 「코리아샛」을 쏘아올리지 못하고 마는 불상사는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특히 늦어도 오는 15일까지만 무궁화호를 쏘아올리면 내년초로 예정된 통신·방송서비스의 상용화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고 강조하고 있으나 발사가 장기간 연기될 경우 이같은 상용화계획은 어쩔 수 없이 그만큼 늦춰지게 된다. 아무튼 이번 허리케인이 올들어 생긴 태풍중 가장 거대한 규모로 무려 시속 1백44∼60㎞의 강풍을 동반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에 따른 무궁화호 위성체나 발사체에 결함이 생길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는 형편이다. 무궁화위성은 지난 24일 발사체·위성체의 결합을 끝낸 데 이어 비행준비상태 점검회의와 발사장∼관제소간 최종리허설도 마쳤다.이러한 상태에서 만약 허리케인으로 인해 위성체나 발사체에 결함이 생길 경우 이를 보완하려면 8∼10일정도의 시일이 더 소요될 것이란 분석이 나오고 있다. 무궁화호를 우주정지궤도까지 실어다 줄 맥도널 더글러스사의 델타Ⅱ로켓은 지난 8년간 47차례의 발사를 시도,1백% 성공함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발사체로 정평이 나 있다.또 무궁화호 위성체제작도 그동안 순조롭게 이뤄지는등 모든 발사준비가 원만히 진행돼옴에 따라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예정된 3일 발사가 확정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기술적인 문제에 앞서 발사에 결정적인 변수가 되는 것이 바로 발사당일의 「기상조건」이다.이번의 경우 역시 자연현상 앞에는 첨단과학기술도 두손을 들 수밖에 없음이 여실히 증명됐다. 일반적으로 위성이 성공적으로 발사되기 위해서는 발사장 또는 예정비행경로 18㎞이내에 낙뢰및 뇌우가 없어야 한다.또 발사 15분전에 지상으로부터 9㎞ 상공의 전계강도(대기중 전력강도)가 1㎾/m이내여야 한다. 그리고 비행경로상에는 온도가 섭씨 0도에서 영하 20도인 구름의 두께가 1.37㎞이상이어선 안된다.위성체와 발사대가 충돌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풍속도 24노트(12.35m/초)이하여만 한다.다시 말하면 위성발사의 적정풍속은 시속 45㎞안팎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길 바쁜 무궁화호는 시속 1백60㎞라는 허리케인의 초강풍에 발목을 잡혀 최소한 48시간은 꼼짝 못하게 된 것이다. 무궁화호의 발사예정시간은 기상조건이 하루중 가장 좋은 상오7시15분쯤(현지시간)으로 잡혀 있기 때문에 허리케인만 지나가면 이번 주안에 무궁화호는 우주공간으로 보내질 것으로 전망되고는 있다. 하지만 발사체·위성체·발사대등이 태풍으로 피해를 보는 최악의 경우에는 발사가 오랜 기간 연기될 수도 있어 관계자들의 걱정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다. ◎태풍 강타… 위성발사기지 표정/기지출입 통제… 기술진도 긴급대피/지하벙커에 9명남아 위성체 점검 ○…허리케인 「에린」은 시속 1백40㎞의 강풍과 폭우를 동반하고 플로리다반도 전면을 강타,현지에서도 비상한 관심. 때문에 발사기지 주변 코코아비치에서는 주민·관광객들이 긴급대피하고 일체의 출입이 통제됐으며 에린의 진로와 피해상황에 대해 CNN등 주로 방송사들이 뉴스시간 대부분을 할애해 집중보도. 태풍분류상으로 B급으로 분류됐지만 파장면에선 지난 78년 이후 최대규모로 예상되는 가운데 에린의 향후 진로는 2일 하오(한국시간) 플로리다 남단지역 상륙후 세력약화 정도에 따라 3일에야 판가름날 듯. ○…에린의 급작스러운 진로변경으로 케이프커내버럴 발사기지가 허리케인의 직접 영향권에 들어가자 무궁화위성 발사를 보기 위해 발사기지에서 가까운 코코아비치에 숙소를 정한 관계자 2백여명은 1일 하오 서둘러 해변으로부터 1백㎞ 떨어진 올랜도시로 대피. 이해욱 한국통신이사장,최순달KAIST인공위성연구센터장,서정욱 한국이동통신 사장,이종기 삼성화재 부회장,김주용 현대전자 사장,박동우 한국유선방송 협회장 등이 위성발사를 축하하기 위해 현지에 도착했으나 기상이변에 따른 상황변화에 무척 당황해하는 모습. ○…올들어 최대규모의 허리케인으로 알려진 에린의 내습으로 무궁화위성 발사관계자들이 긴급비상상태에 들어가 있으나 발사대의 안전에는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전망. 발사책임을 맡고있는 맥도널 더글러스사의 관계자는 『현재 무궁화위성 발사대는 허리케인의 영향에도 불구,문제가 없으며 발사대 지하 관제벙커에 9명의 기술진이 상주하면서 매시간마다 위성체를 원격점검중』이라고 설명.
  • 경주 남산 삼존석불(한국인의 얼굴)

    ◎아기처럼 천진한 얼굴… 평화 가득/소복한 눈두덩·꼭다문 입 “인상적”/곱슬머리에 살상투… 격식 갖춰 경북 경주에 가면 곳곳에 부처가 자리한 처처불소의 산이 있다.그 산은 경주시 남쪽을 둘러싸고 남북으로 길게 솟아난 남산이다.산자락을 깔면서 24개의 계곡을 품에 안았는데,골마다 불적이다.돌을 다듬어 만든 석불과 바위에 새긴 마애불을 합뜨린 불상이 79기요,석탑과 석등이 역시 79기에 이른다.또 도량으로 가꾸었던 절터가 1백4곳이나 자리했다. 그래서 남산은 신라인들의 마음속에 늘 부처가 머무르는 곳으로 각인되었다.그 남산의 한 골짜기인 선방사곡에는 신라인들의 불심을 사로 잡았던 석조삼존불이 서 있다.그 자리가 행정구역상 경주시 배동이라 해서 흔히 경주 배동석불입상으로 부르는 7세기 초반의 걸작 불교미술이다.한 가운데 본존불을 중심으로 양쪽에서 본존을 모시는 협시보살을 배치했다. 이들 삼존불을 바라다 보노라면 마음에 평화가 와 닿는다.특히 본존불 여래의 얼굴(상호)은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다가온다.더욱 평화스러울수 밖에 없다.얼굴 전체의 윤곽은 네모꼴이나 뺨이 도톰하여 생명의 근원적 활력이 어렸다.그래서 모나지 않은 얼굴이 되었다.돌의 질감대로 라면 뺨과 볼이 껄끄러워 보여야 마땅한데 그 볼에 금새라도 홍조가 피어날 듯 탄력이 있다.제 아기를 보고 막 돌아온 애비 석장이 서둘러 만든 불상인지도 모른다. 어떻든 본존불 여래의 얼굴은 천진난만하다.눈두덩은 소복히 부풀어 있다.가늘게 뜬 눈에는 웃음을 담았다.눈웃음이 분명하다.그런데 꼭 다문 입가를 살짝 올려 주고 가장자리를 깊이 파놓아 웃음이 한결 넓게 퍼졌다.마침내 아기웃음이 여래의 얼굴을 덮어 버렸다.여래의 머리는 곱슬머리 나발이고,그 위에 세단의 살상투를 올렸다.부처의 격식은 다 갖추었다. 그럼에도 종교적 카리스마가 엿보이지 않는다.협시보살들 사이에서 아기처럼 웃고 있을 뿐이다.주존 여래불을 모신 이들 두 협시보살을 관음과 세지로 보는 학설이 나와 있다. 우리나라에 섭론종이 들어온 근거는 없다.그러나 신라의 고승 원광(서기 555∼638년)이 수나라 유학길에서 섭론을 깊이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그래서 이 석조삼존불은 서기600년에 수에서 귀국한 원광과 무관치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또 석조삼존불이 조성된 7세기 초반의 신라불교에서 원광은 우뚝한 고승이었다.계율을 지키면서 참회의 공덕으로 죄업을 없애려는 이른바 멸참이 권고된 시기이기도 하다.
  • 일본 대형할인점/불상품 구매중단/핵실험재개 항의

    【도쿄 로이터 연합】 일본의 대형 할인점인 BIC 카메라사가 일본업체로는 처음으로 22일 프랑스정부의 핵실험계획에 대한 항의표시로 프랑스제품의 구매를 중지키로 했다고 밝혔다. 이 회사의 와카바야시 요시히로 과장은 『일본은 원자폭탄 공격을 받은 유일한 나라로 인도적인 견지에서 프랑스정부의 핵실험계획을 용인할 수 없으며 회사측은 핵실험과 관련된 문제가 만족스럽게 해결될 때까지 프랑스제품을 구매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회사측은 또 각 매장에 고객들에게 프랑스제품을 사지 말 것을 권하는 내용의 안내문을 게시했다.
  • 시위대가 장갑차 포위하자 장교 첫발표/「5·18」수사 의문점 규명

    ◎21일 전남도청앞 충돌전 장교위주 실탄분배­발포경위/전교사령관­31사단장 계통밟아 군병력 투입­군지휘권/광주시내 시위대처 급급… 병력운용 여유없어­무기피탈 방치/인명피해·뚜렷한 피탄흔적·파편 등 확인안돼­헬기 기총소사/8명의 사체서 자상 발견… 대검 사용 인정­대검등 사용/정지불응 미니버스에 총격… 10여명 사망­광주외곽 피해/「신원·사망경위 불명」 많아 확정 불가능­사망자수 검찰이 18일 「5·18」사건의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그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의문점들이 밝혀졌다.검찰수사 결과 드러난 발포경위 및 헬기 기총소사 여부,대검과 화염방사기 사용여부,사망자 수,무기피탈 고의방치 여부,광주 파견부대 지휘권의 2원화 여부 등 7가지 의문점을 정리해 본다. ▷발포경위◁ ▲공수부대의 발포는 5월20일 하오11시쯤 광주역 앞에서 시위군중에 발포하면서 계속되었는데 21일 하오1시쯤 도청 앞에서의 집단발포의 형태는 시위대의 차량돌진을 저지하기 위한 자위목적의 우발적 사격이 아니라 사전에 계획된 명령에 따라 이뤄졌다는 주장. ­광주에서의 최초발포는 5월19일 하오5시쯤 광주고부근에서 있었던 바,당시 사직공원을 수색하고 복귀하던 11공수여단 63대대 배속 장갑차가 이 학교 부근에 이르렀을 때 시위대가 장갑차를 포위공격하면서 불붙은 짚단을 던져 불을 붙이려 하자 장갑차에 타고 있던 한 장교가 장갑차 문을 열고 공포를 쏘고 다시 위협사격하는 과정에서 주위에 있던 고등학생 1명이 총격을 받아 부상당했음. 또 20일 하오11시쯤 3공수여단이 광주역일대에서 시위대와 공방을 벌이던 중 트럭·버스 등 시위대의 차량돌진으로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수세에 몰리자 3공수여단장은 경계용 실탄을 예하대대에 전달하고 대대장은 이를 장교 위주로 분배해 자신들을 향해 돌진하는 차량을 향해 발포했으며 광주역으로 실탄을 전달하러 가던 특공지원조가 시위대와 마주쳐 진로가 막히자 위협사격을 하는 한편 21일 다시 전남대 앞에서 장갑차·경찰가스차 등 시위대의 차량돌진공격에 대응해 발포,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이는 광주시민의 공분을 고조시킬 목적으로 사전에 계획된 의도적인 발포였다고는 할 수 없음. 이와 함께 21일 전남도청 앞에서의 발포경위에 대해 그동안 국회 청문회 등에서는 시위대의 1차 장갑차공격후 도청에서 철수하던 31사단 병력으로부터 공수부대가 소량의 실탄을 인수하여 장교들에게 분배한 상태에서 다시 시위대가 차량공격을 해오자 장교들이 자위적 차원에서 발포한 것이라고 주장돼왔으나 이번 수사결과 11공수여단 61·62대대는 도청 앞 금남로에서 시위대로부터 차량공격을 받은 후 시위가 소강상태에 들어간 20일 밤 12시쯤 대대장이 대대장 지프 등에 통합보관하고 있던 경계용 실탄을 대대장의 명령에 따라 위급시에만 사용하라는 지시와 함께 중대장이상 장교에게 15발들이 1탄창씩 분배하고 63대대는 21일 상오10시30분쯤 실탄을 분배함으로써 같은 날 하오1시쯤 시위대의 차량공격이 있기 전에 이미 장교 위주로 실탄이 분배돼 있었음이 확인됐음. 또 당일 하오1시쯤 시위대가 장갑차등으로 공수부대에 돌진,공격해오고 병사 1명이 장갑차에 깔려 사망하자 이에 대응해 첫 발포가 있었으며 다시시위대가 장갑차와 버스 등 차량돌진을 계속하자 공수부대 장교들이 집단적으로 발포했고 이와 비슷한 시점에 7공수여단 35대대도 철수하던 31사단 병력으로부터 실탄을 인계받아 이를 장교들에게 분배하는 한편 돌진하는 차량을 피해 인도와 인근 건물로 산개했던 공수부대원중 일부가 도청 및 주변건물 옥상에 올라가 경계를 하고 있다가 접근하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한 사실이 확인됐음. 따라서 이같은 발포는 대대장이나 여단장이상의 상급지휘관이나 별도의 지휘계통에 있는 특정인의 구체적인 발포명령에 따라 행해진 것이거나 광주시민의 공분을 고조시키기 위해 사전에 계획된 의도적인 것으로 인정할 수 없고 현장지휘관인 공수부대 대대장들이 차량돌진 등 위협적인 공격을 해오는 시위대에 대응해 경계용 실탄을 분배함으로써 이를 분배받은 공수부대 장교들이 대대장이나 지역대장의 통제 없이 장갑차 등의 돌진에 대응해 자위목적에서 발포한 것으로 판단됨. 그러나 그 이후 계속된 발포중에는 비록 시위대가 무장을 했다 하더라도 도로에 나와 단순히구호를 외치거나 총상자들을 구호 또는 호송하려 하거나 심지어는 시위현장 부근에서 구경하기 위해 나타난 경우 등 군에 대해 직접적 위협을 가하지 아니한 상태에까지 발포가 이뤄진 사실을 인정할 수 있어 당시 실탄 및 사격통제에 상당한 문제점이 있었음이 확인됐음. ▷군 지휘권◁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상급지휘관인 계엄사령관·2군사령관·전교사령관·31사단장의 정상적인 지휘계통하에 있지 아니하고 별도세력의 사전계획에 의해 지휘되고 있었다는 주장. ­7공수여단 2개 대대를 전남대 등 3개 대학에 배치한 것은 소요예방과 진압을 이유로 육본이 전국 92개 대학에 계엄군을 배치하는 조치의 일환으로 취해진 것이므로 이때 이미 군병력의 시위진압투입은 전제돼 있었다고 할 수 있으며 5월18일 하오 7공수여단 2개 대대가 광주시내 시위진압에 나선 것은 계엄확대선포후 전국에서 유일하게 광주시내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경찰이 군의 투입을 요청하고 있는 상황에서 계엄사령관→2군사령관→전교사령관→31사단장의 계통에서 군병력 투입을 결정한 사실이 인정됨. 11공수여단의 추가투입이 광주시내에서 공수부대원들과 학생들이 충돌하기 전인 18일 하오2시쯤 결정된 것은 사실이나 이는 광주 시위상황을 보고받은 육본에서 군병력의 증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다만 공수여단중 적절한 파견부대의 결정을 위해 특전사령관의 의견을 들어 11공수여단을 증원하기로 결정한 것임. 또 초기에 7공수여단을 시위진압에 투입한 후 5월18일 야간에 공수부대를 광주시내에 거점배치하고 19일 11공수여단의 추가작전통제에 다라 책임지역을 구분해 시위진압에 투입했으며 20일 3공수여단의 추가투입에 따라 다시 책임지역을 구분,시위진압에 투입하고 21일 공수부대를 시외곽으로 철수시키는 등 일련의 부대운용에 관한 지휘를 실제 31사단장과 전교사령관이 행한 사실이 인정됨. 21일 하오4시 31사단장의 2개 공수여단에 대한 작전지휘권이 전교사령관에게 전환된 후 광주 재진입작전은 전교사령관이 계엄사령관의 지휘를 받아 특전사령관 등의 자문과 조언을 참고해 그의 책임하에 수행한 것이 인정되며 군부대간의 오인사격은 전교사와 공수여단 및 전교사 예하 각 부대간에 상호 상황전파 및 통제의 미숙,단위부대 지휘관들의 상황판단미숙과 침착성 부족 등에 기인해 발생한 것으로 이를 두고 지휘권 이원화의 결과라고 할 수는 없음. 물론 광주에 파견된 3개 공수여단이 전교사령관이나 31사단장의 작전통제하에 있었음에도 31사단 등과는 무전교신체계가 상이한 상태에서 특전사 일부장교가 전교사에서 전용 무선 발수신장치를 설치해 각 공수여단과 별도로 교신하면서 상황을 파악하고 특전사령관이 11공수여단과 3공수여단의 증원결정에 의견을 제시하고 수시로 광주를 방문하면서 공수여단 지휘관들을 격려하고 광주 재진입작전인 상무충정작전을 수행함에 있어 특공부대를 선정하는 데 관여한 사실 등이 인정되나 이를 가지고 당시 공수여단에 대한 지휘권이 이원화됐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임. ▷무기피탈 방치◁ ▲사전에 계획된 시나리오에 따라 광주 재진입작전의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시민으로 하여금 무기고를 습격,무장을 하도록 상황을 유도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 근거로 광주시민이 광주 외곽지역에서 무기고를 습격하고 무기를 탈취해 광주로 돌아오는 동안 아무 제지를 받지 않았고 이후 외곽도로가 봉쇄되었다는 주장. ­광주에서 시위대에 의한 무기탈취는 19일 하오3시15분쯤 시위대가 기독교방송국을 점거하는 과정에서 31사단 경계병력으로부터 M16소총 1정을 탈취한 것이 처음으로 이 소총은 곧 회수됐으며 그후 20일 하오11시쯤 광주세무서 방화,점거시 지하실 무기고에서 칼빈 17정을 탈취했고 21일 하오1시쯤 광산 하남파출소에서 카빈 9정이 탈취됐으나 시위대가 본격적으로 무기탈취에 나선 것은 21일 하오1시쯤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의 발포가 있은 후로 시위대는 광주 인근지역으로 진출,화순·나주 등 지방의 지·파출소와 화순광업소·한국화약 등 방위산업체 등에서 대량의 무기와 실탄을 탈취했음. 당시 조기진압의지와는 달리 시위가 급격히 확산됨으로써 경찰과 군병력이 광주시내 시위에 대처하는 데만도 급급한 상태였고 지방경찰 병력도 대부분 광주시내로 차출돼 인근지방으로까지 진출해 무기를 탈취하는 시위대를 사전에 막기는 어려웠던 상황이었으며 특히 21일에는 전남대에서 3공수여단이,전남도청 앞에는 7공수여단과 11공수여단이 시위대와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결국은 전남도청 등을 포기하고 시외곽으로 철수하는 형편이었으므로 군이나 경찰이 병력운용에 여유가 있는 상태에서 의도적으로 무기고 습격을 방치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움. ▷헬기 기총소사◁ ▲광주에서 무장헬기의 공중사격으로 많은 인명피해가 야기됐다는 주장. ­군관계 자료상으로는 21일 2군사령부가 전교사에 수송용 헬기인 UH­1H 10대,무장헬기 AH­1J(코브라) 4대를 지원하고 사태기간중 헬기가 모두 48시간동안 무력시위를 했다는 기록외에 실제공중사격 실시여부에 대해서는 아무 기록을 발견할 수 없었음. 조비오신부가 헬기사격의 피해자라고 지목한 홍란은 검찰조사에서 부근 건물옥상에 있던 계엄군의 소총사격에 의해 다쳤다고 진술했으며 정낙평은 21일 하오2시쯤 광주경찰서 상공에서 기종미상의 헬기가 기관총 사격하는 것을 목격했으며 부근 진주다방의 종업원이 옥상에서 헬기가 쏜 기관총을 맞고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했으나 진주다방 종업원인 심동선씨(30)에 대한 검시조서에 의하면 사인이 M16소총에 의한 관통총상이고 당시 빌딩옥상에 있던 공수부대원의 사격에 의한 피격이라는 취지의 증언이 있음. 아놀드 피터슨목사는 헬기가 선회하고 상공에서 총소리가 들려 헬기에서 기총사격을 한 것으로 믿고 있으나 헬기사격 자체를 목격하지는 않았다는 것이고 피터슨목사가 사격장면을 촬영한 것을 검찰에 제출한 사진상의 헬기 하단 불빛은 기관총사격시 발생되는 섬광이 아니라 헬기에 부착된 충돌방지등 불빛임이 확인됐음. 이와 함께 광주시내 적십자병원·기독병원·전남대병원의 당시 진료기록부와 응급실 관계자들의 진술을 검토해도 그 당시 각 병원에 헬기총격에 의한 피해자가 들어왔거나 입원·치료를 받은 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고 광주시위 관련 사망자 1백65명에 대한 광주지검 사체 검시기록에서도 특별히 헬기기총사격에 의한 사망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근거를 발견할 수 없었음. 또한 AH­1J헬기의 장착무기인 토미사일,2.75인치 로켓,20㎜ 발칸포(1분당7백50발 발사),500MD헬기의 장착무기인 2.75인치 로켓,7.62㎜ 6열 기관총(1분당2천∼4천발 발사)에 의한 표적사격의 경우 나타나는 대규모 인명피해와 뚜렷한 피탄흔적·파편 등이 확인되지 않았음. ▷대검등 사용◁ ▲계엄군이 시위진압과정에서 대검과 화염방사기를 사용했다는 주장 ­당시 광주일원에 투입된 계엄군은 착검상태에서 트럭을 타고 위력시위를 하다가 시위대로부터 투석공격 등을 받으면 착검상태로 하차해 시위대를 추적,체포한 사실이 인정되므로 그 과정에서 대검으로 인한 피해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음. 실제로 사망자 손옥례·권근립씨등 8명의 사체에서 자상이 발견됐고 부상자 하헌남·최승기씨 등이 자상을 입은 점 등을 종합할 때 당시 시위진압현장에서 지휘관의 의사와 상관없이 공수부대원에 의해 대검이 사용된 사실이 인정됨. 군관계자들은 화염방사기가 토치카 또는 장갑차 공격용이므로 인체에 화염방사기를 직접 사용할 경우 전신 중화상으로 대부분 사망했을 것이라는 점 등을 들어 당시 광주에서 화염방사기가 사용되지 않았고 다만 소용진압용 작용제(CS분말)나 소요군중 식별용 유색수를 살포하는 데 화염방사기를 이용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계엄군이 화염방사기로 화염을 방사했거나 화염방사기에 의한 화상사망사실을 인정할 만한 자료를 발견치 못했음. 5월21일 광주시청 앞에서 시위대의 장갑차를 몰고가다 화염방사기 공격으로 화상을 입은 것으로 광주민중항쟁사료전집에 기록된 최강식씨(87년 사망)의 보상금지급 관련서류를 조사한 결과 최씨는 당시 광주시 중흥동의 한 건축현장에서 계엄군에 체포돼 전남대·광주교도소·상무대로 이동하면서 전신을 구타당하고 화상을 입은 것으로 파악됐음. 또 같은 날 전남대 앞 시위에서 계엄군의 화염방사로 안면화상을 입은 것으로 기록돼 있는 최병옥씨(당시 21)의 경우 당시 계엄군에 쫓겨 전남대부근 가정집의 화장실에 숨어 있던 중 화장실 환기창문으로 불꽃이 들어와 얼굴에 화상을 입었으나 그것이 화염방사기에 의한 화염인지는 목격하지 못했다고 검찰조사에서 진술하는 등 다른 피해사례나 목격담에 대한 조사에서도 화염방사기 사용사실을 확인하지 못했음. ▷광주외곽 피해◁ ▲5월21일 공수부대가 전남대와 전남도청 앞에서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하여 5월27일 재진입작전을 할 때까지 시외곽 봉쇄 및 도로차단 등과 관련해 여러 건의 민간인 피해사례가 있었다는 주장. ­이같은 주장 가운데 3공수여단 5개 대대는 5월21일 광주교도소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시위대 수십명을 천막등으로 덮은 트럭에 실어 호송하면서 더운 날씨에도 불구,과다한 인원을 탑승시킨 상태에서 최류탄을 터뜨려 화상환자를 발생시켰고 교도소 도착당시 트럭에는 질식 등으로 인해 5∼6명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음. 3공수여단은 또 같은 달 22일 하오10시쯤 광주교도소부근을 통과하던 김성수씨일가를 시위대로 오인,총격을 가해 가족 3명에 총상을 입히고 그중 김씨의 처 김춘아씨가 후유증으로 사망케 하는 등 24일까지 광주교도소를 방호하는 과정에서 무장시위대와 수차례 교전을 했고 이같은 교전및 부상자치료,철수과정에서 사망한사체 12구를 교도소부근에 가매장한 사실이 확인됐음. 광주∼목포간 도로를 차단하기 위해 효천역부근에 배치됐던 20사단 61연대 병력은 5월22일 상오5시40분과 9시쯤 2차례에 걸쳐 시위대로 오인하고 민간인에 총격을 가해 왕태경 등 2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했음. 5월22일 하오5시쯤에는 20사단 62연대 2대대가 광주통합병원을 확보하기 위해 민가를 사이에 두고 무장시위대와 교전하는 과정에서 인근주민 이매실·함광수씨 등이 총상을 입고 사망 또는 부상했고 23일에는 해남에 주둔하고 있던 31사단 93연대 2대대와 시위대간의 2차례 교전과정에서 박영철씨 등 민간인 2명이 사망했음. 11공수여단 62대대가 매복하고 있던 주남마을 앞 광주∼화순간 국도에서는 23일 상오10시쯤 정지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던 미니버스에 총격을 가해 박현숙씨 등 10여명이 사망했고 남자 중상자 2명이 후송도중 다시 총격에 의해 사망했음. 24일 하오1시30분쯤에는 주남마을에서 송정리비행장으로 이동하던 11공수여단 병력과 시위대 10여명이 송암동부근에서 총격전을 벌이던 중 공수부대의 난사로 전재수 등 어린이 2명이 사망했고 또 전교사 보병학교 교도대 병력의 오인사격을 받고 격분한 63대대 병력이 피격지점부근를 수색해 시위대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무장시위대원 1명과 권근립씨 등 주민 4명이 총격을 받고 사망했음. ▷사망자수◁ 정부 관련 자료에 근거한 광주시위 관련 사망자수는 군인 23명,경찰 4명,민간인 1백66명등 모두 1백93이고 이에 광주시위 관련 행방불명자로 인정돼 보상금이 지급된 사람이 47명임. 그러나 광주시위기간에 발생한 사체 가운데 신원및 사망경위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목격자 진술 등에 의해 사망자가 확인된 경우에도 당시 사체가 발견돼 확인됐는지 여부와 신원불상 사체와의 동일성 여부 등에 대한 판단이 현재로서는 곤란해 광주시위 관련 사망자수를 확정짓는 것은 불가능함.
  • 「5대 개혁과제」 복귀용 구호 인상/DJ 회견 내용속의 「비논리」

    ◎정국 위기론­뚜렷한 근거없이 아전인수식 진단/민주당 내분­상당부분 자기책임… KT에 떠넘겨/통일의 주역­지역 등권론 외치며 민족통합 될까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의 18일 기자회견내용은 2년7개월만에 대국민약속을 뒤엎고 정계에 복귀,민주당을 깨고 신당을 창당해야만 하는 불가피성을 국민에게 이해시키기에 미흡했다는 게 정치권의 대체적 반응이다.「솔직하고 진솔한 자세」를 다짐했지만 정작 회견의 많은 부분은 아전인수식 변명으로 일관한 인상이 짙다는 지적이다. 김이사장은 정계은퇴 번복에 대한 사죄대목은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는 한마디로 넘어가고 은퇴당시와 현재의 상황변화가 엄청나 번복이 불가피하다는 점만 강조했다.현상황을 「심각한 국가적 위기」라고 진단하는 그는 『은퇴당시 기대대로 정부와 민주당이 해야 할 일을 다하고 있었다면 정계에 복귀할 엄두도 낼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말하자면 정부와 야당인 민주당이 모두 잘못해 국가적 위기상황을 초래,그 해결을 위해 자신의 정계복귀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현시국을 국가적 위기라고 볼 수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설령 그의 인식이 옳다고 하더라도 그런 상황이 곧바로 자신의 정계복귀를 정당화하는 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다. 각론으로 들어가 민주당의 난맥상과 관련,김이사장은 「9인9색」의 계파정치를 문제삼았다.그러나 그 원인의 대부분을 그 자신이 제공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많다.즉 은퇴이후에도 권노갑 부총재를 대리인으로 하여 당무에 대한 수렴청정을 계속해왔으며 이것이 곧 이기택총재의 지도력 약화,민주당의 분란으로 연결돼왔다는 것이다. 이총재측은 『김이사장측이 이총재와 당을 흔들어 내분을 일으켜놓고 그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있다』며 적반하장이라고 비난하고 있다.「한지붕밑 아홉가족」이 된 것도 김이사장의 원격조정을 위한 「분리·견제」전술의 결과라는 주장이다.또 총재를 「얼굴사장」으로 격하시키고 「오너」가 설쳐댄 결과 이총재가 대통령의 대화상대가 될 수 없었다면 그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느냐고 따진다. 경기지사 선거패배의 책임을 묻는 것 또한 명분이 약하다는 분석이다.서울에서 승리한 것은 오로지 김이사장의 공로이고 경기도 패배는 이총재만의 책임이라는 것도 자연스럽지 못하며 책임을 묻더라도 당헌·당규절차에 따라 전당대회를 통해 해야 하는 것이 순리이기 때문이다.전당대회에서의 폭력사태등 불상사가 우려된다고 했지만 이를 막기 위한 노력은 일체 생략한 채 신당을 창당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는 지적이다. 김이사장이 제시한 신당의 5대개혁과제에도 모순이 적지 않다.우선 젊은 세대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정치를 표방했지만 정국을 「후(후)3김시대」로 역류시킨 그가 과연 이런 역할을 자임할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많다. 또 개혁과제로 「단계적이고 평화적인 통일의 주역」을 자임하고 나선 데 대해서도 지역등권론을 들고나와 지역분할구도를 더욱 강화시킨 그가 민족의 대통합을 추진할 수 있겠느냐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전체적으로 김이사장이 제시한 신당의 개혁과제는 앞으로의 추진과정을 지켜봐야겠으나 자신의 정계복귀를 정당화하는 구호에 불과한 인상이라는 게정치권의 중론이다. ◎「대권 4수의 길」 DJ의 정당편력/87년 평민당 창당… 두번째 대권도전 고배/「꼬마 민주당」과 합당… 92년 대선 패배후 은퇴 「대권4수」의 길로 다시 들어선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은 40여년동안 숱한 정당생활을 거쳤다. 김이사장은 30살 때이던 지난 54년 목포에서 무소속 후보로 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원내진입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김영삼대통령이 25살의 나이로 최연소 당선기록을 세운 때였다.58년 4대 총선에 민주당후보로 나섰으나 낙선했고 5대 때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당선됐으나 5·16으로 며칠만에 내놓았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정당에 참여한 전력은 이보다 더 거슬러 올라간다.광복직후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와 좌익정당인 신민당에 잠시 참여했다.좌익에 환멸을 느껴 탈퇴했지만 이 경력은 그에게서 평생 「색깔론」의 꼬리를 떼어놓지 못하게 한 빌미가 됐다. DJ(김이사장)는 첫 소속정당인 민주당에 입당하면서부터 장 면박사의 총애를 받아 민주당 구파의 맥을 잇게 된다.60년 신구파의 대립으로 구파가 분당,신민당을 창당할 때 그는 민주당에 남아 있었다. 그러다 「5·16」으로 정치규제에 묶여 있던 인사들과 63년 민주당 재창당에 창당발기인으로 참여했다.65년에는 민주당이 윤보선총재가 이끄는 민정당과 통합,민중당을 창당할 때 합당 중재역을 맡았다. 그는 67년 양대 선거에 대비해 야권 통합운동이 본격화되면서 민중당과 신한당이 통합된 신민당에 참여했다.김대통령과의 경쟁은 원내총무 경선에서 처음 시작됐고 그는 패배했다. 이어 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서 대선 첫 패배를 맛보게 된다.72년 유신이후 망명생활을 하다 73년 일본에서 납치사건을 겪고부터 「재야」에 몸담게 된다.80년 「서울의 봄」 때도 김영삼총재의 신민당에 입당하지 않고 재야에 남아있었다. 80년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은뒤 무기징역,20년형으로 감형되는 과정을 거쳐 82년 도미,민주화 투쟁을 계속했다. 3년 뒤인 85년 2·12 총선 직전 귀국,김대통령과 함께 민추협공동의장 자격으로 신민당 돌풍을 일으키며 정치재개의 발판을 마련했다. 87년 이른바 「이민우구상」 등과 관련,김대통령과 함께 신민당의 대다수 의원들을 이끌고 통일민주당을 창당했으나 야권 대통령후보 단일화 문제로 김대통령과 결별,제갈길로 나섰다.이 때 평민당을 창당,대선에 두번째 도전해 다시 실패하지만 이듬해 여소야대 정국아래 제1야당의 총재가 됐다.그러나 90년 「3당통합」으로 하루아침에 소수야당의 총재로 전락했고 몇차례의 재야인사들을 흡수하면서 당명을 신민당으로 바꾸었다.이어 14대 총선에 대비,이기택 총재의 「꼬마민주당」과 합당,이총재와 공동대표를 맡았다. 이듬 해인 92년 대통령선거에 세번째 도전하게 되지만 또다시 패배한 뒤 93년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났다.
  • “생존공간 서너곳 더 있을듯”/기적의 생환­또 있나

    ◎상판과 기둥 엇갈리며 틈새 생겨/A동 엘리베이터탑 주변 등 유력 「지하 생존공간」을 찾아라. 지난 15일 박승현(19)양이 17일만에 기적적으로 구조되면서 합동 구조반원들은 제2,제3의 박승현양이 매몰돼 있을 또다른 지하생존공간을 찾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다. 구조반원들은 특히 이번 박양의 구조를 계기로 생존자가 더 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박양을 구조한 곳은 앞서 구조했던 최명석(21)군과 유지환(18)양이 갇혀있던 곳과 달리 생존가능성이 희박한 장소로 추정해왔기 때문이다. 지난 9일 구조될 때까지 최군이 갖혀있던 공간은 가로 1.5m,세로 1.7m,높이 1m정도의 비좁은 곳이었으며 유양이 갇혀있던 곳도 가로 1.3m,세로 1.5m,높이 0.5m정도의 공간이었다. 이 곳은 모두 무너져 내리는 콘크리트더미가 에스컬레이터 등에 부딪치면서 삼각형 모양의 「생존가능 공간」을 만들었을 것으로 예상했던 장소였다. 반면 박양이 매몰돼 있던 가로 2m,세로 1.5m,높이 0.6m정도의 공간은 콘크리트더미가 거의 수평으로 내려앉아 생존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추정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박양이 갇혀있던 A동 지하1층 아동복매장의 틈새는 다행히 천장이 지하2층 주차장기둥에 부딪치면서 비스듬히 내려앉은데다 환풍구도 보조버팀목 역할을 해준 기적의 공간이었다. 구조반원들이 이러한 공간이 여러 곳에 형성됐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고 아직도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 생존자를 찾는데 주력하고 있다. 현재 구조반원들이 이러한 생존가능공간이 있을 것으로 보는 장소는 A·B동사이의 중앙홀 앞과 뒤쪽 출입구주변,A동 중앙부 에스컬레이터부근,A동 남·북측 엘리베이터탑 주변 등 4곳. 이 곳은 주변매장이나 식당등에 있던 직원과 손님등 실종자들이 붕괴당시 「꽝」하는 굉음소리와 함께 탈출하기 위해 한꺼번에 몰렸을 가능성이 높은데다 상판과 기둥이 엇갈리게 무너져내리면서 최군과 유양이 있었던 곳과 비슷한 공간이 형성됐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특히 상판의 함몰정도가 상대적으로 덜한 A동 북쪽 엘리베이터타워부근을 생존가능성이 높은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백화점이 무너질때 중앙은 지하3층까지 완전히 내려앉았으나 양쪽 가장자리는 비스듬히 내려앉았기 때문이다. 대책본부에서는 또 2곳의 출입구가 있는 중앙홀주변에도 주기둥이 온전히 남아있어 이 기둥을 중심으로 해 생존자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사고대책 본부에서는 박양 구출을 계기로 중장비를 투입해 잔해제거 및 인명구조 작업을 가속화하고 있다.더이상 작업속도를 늦추다가는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 생존자를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그동안 붕괴우려때문에 중장비투입을 미뤄왔던 A동 북쪽 건물주변의 잔해도 신속히 제거한다는 방침이다. ◎잔해 옮긴 난지도서도 「시신찾기」/「삼풍」 구조현장·병원 이모저모/최군·유양·박양 평소 잘아는 사이/실종 프랑스 무역업자 사체 발굴 생환 이틀째를 맞은 박승현(19)양이 입원해 있는 강남성모병원 3충 중환자실에는 16일 이홍구 국무총리와 조순 서울시장,송월주 조계종 총무원장등 각계 인사들이 방문,박양의 쾌유를 기원하고 또다른 생존자가 나오기를 바랐다. ○…박양의 구조에는최명석(20)군의 아버지 봉렬씨도 한 몫을 한 것으로 뒤늦게 알려져 화제. 최씨는 박양이 구조되기 하루전인 14일 하오 박양이 매몰된 붕괴현장에서 포클레인으로 작업을 하던 산천개발의 소장에게 이 일대에 대한 집중적인 구조활동을 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는 것. ○…박양의 매몰지점을 처음 발견,구조에 성공한 안양소방서 소속 119구조대원 정용수(32)씨는 『생애 최고의 기쁨』이라며 흥분하면서 『박양이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뒤 구조할때 까지의 15분처럼 긴장하고 애태운 순간은 없었다』고 술회. ○…「기적의 생환자」 최명석군,유지환(18),박승현양이 평소 알고 지낸 사이였던 것으로 밝혀져 이들 「삼풍삼총사」가 맺은 인연이 화제. 이들은 모두 무너진 A동 지하1층 매장에서 일하다 10일을 넘겨 구조된데다 나이도 비슷한 「신세대」로 지난3월 최군이 「엘리펀트 샌달」이라는 수입아동화 코너에 판촉사원으로 취직하면서부터 매개역할을 맡았다고. 최군에 앞서 유양은 지난해 12월부터 수입도자기 코너에서,그리고 이번에 구조된 박양은 아동복코너에서 계산원으로 지난해 10월부터 근무. 이들이 일하고 있던 매장은 불과 10∼20m 안팎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있어 이들은 거의 매일 서로 얼굴을 대면해 왔다는 것. ○…서울시 대책본부는 이날 실종자가족 대표들과 만나 이미 경찰로부터 검시필증을 받는 등 신원이 완전히 확인된 시신이라도 만약의 경우를 대비,화장을 하지 말고 가매장만 해달라고 가족들에게 부탁. 한 관계자는 『그동안 사체를 둘러싸고 사기극이 일어나는등 말썽이 일어난 것에 비추어 앞으로도 신원확인이 제대로 되지 않는 시신을 두고 적지 않은 불상사가 일어날 것이라고 판단,이같이 결정했다』고 설명. ○…박승현양의 구조작업이 생존확인에서 구조까지 불과 15분밖에 걸리지 않은 「초특급」으로 진행된데 대해 많은 사람들이 「최명석군과 유지환양의 구조에는 1∼2시간씩 걸렸는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구조작업이 이뤄졌나』며 의아해하는 반응. 구조관계자들은 이에 대해 박양의 생존공간이 아래방향이 아니라 옆방향으로 위치해 있었는데다 철근이나 콘크리트,철판 등이 가로막고 있지 않아 손과 야삽으로 흙더미를 헤쳐내는 것만으로 쉽게 구출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설명. ○…실종자가족 위원회는 오는 18일부터 매일 상오9시부터 하오6시까지 실종자 가족들이 입회한 가운데 난지도 매립장 잔해물확인 작업을 벌이기로 서울시와 합의. 이같은 조치는 콘크리트·철근등 잔해더미에 시신의 일부가 섞여 버려질 것을 우려한 가족들의 요구에 따라 이루어진 것. ○…김수환 추기경이 신부 5명과 함께 이날 상오 서울교대 체육관을 방문,실종자 가족들을 위로.김추기경은 이에 앞서 서초구 서초성당에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관련 희생자와 실종자를 위한 특별미사를 집전. ○…삼풍참사로 실종된 4명의 외국인가운데 한명인 프랑스인 무역업자 장 피에르 프랑수아 랑팡씨(34)의 사체가 16일 상오백화점 A동 지하1층 웬디스 헴버거가게 부근에서 발굴돼 국립의료원 영안실에 안치. 프랑스의 유제품회사인 「봉그랑사」의 아시아 담당이사인 랑팡씨는 지난달 29일 하오 치즈상담 문제로 삼풍백화점에 들렀다 변을당한 것.
  • 부상 임산부 15일만에 퇴원/“임신8개월” 삼풍직원 당연숙씨

    ◎“꽝” 순간 배감싸… “태아 무사해 다행” 『건물이 무너지면서 강한 돌풍에 떠밀리는 순간 본능적으로 배를 감싸안았습니다』 겹겹이 쌓인 사람들 틈에 깔려있다 겨우 구조돼 병원으로 실려오는 동안 내내 아기걱정만 했다는 당연숙(27·백화점 직원)씨는 14일 서울 강남성모병원에서 보름만에 무사히 퇴원하게돼 너무 기쁘다고 했다. 사고 당시 임신 8개월이었던 당씨는 골절상을 입어 깁스를 한 오른쪽다리는 앞으로 4주가 지나야 완치되고 얼굴과 팔,다리등에는 실로 꿰맨 상처가 10여군데나 남아있지만 아기가 무사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감내할 수 있다고 했다. 사고가 난 29일은 당씨가 백화점일을 그만두기 하루 전날이었다.지난 93년 결혼해 2년만에 가진 첫아기였으나 시부모와 함께 사는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 위해 임신 8개월의 몸으로 백화점 A동 1층 수입코너에서 일하고 있었다.갑자기 이웃 매장의 한직원이 『천장이 무너지는 것 같다』고 소리쳤다.당씨는 무슨일인가 싶어 에스컬레이터옆을 지나 삼풍아파트쪽으로 나있는후문으로 뛰었다.그 순간,건물전체가 『꽝』하는 굉음과 함께 무너져내리면서 강한 회오리바람이 일어 당씨는 순식간에 콘크리트 더미와 함께 문밖으로 떠밀려나갔으나 다행히 배가 눌리는 불상사는 피할 수 있었다. 『최명석군과 유지환양이 기적적으로 구조됐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반가웠다』는 당씨는 『막상 퇴원하려고 하니 중상자들과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은 실종자가족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고 안타까워 했다.
  • 세계 문화재(외언내언)

    경주 석굴암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 불교조각의 걸작품으로 꼽힌다.입구에 안치된 본존불의 당당한 위엄과 부드러운 곡선,둘레의 벽면에 새겨진 39체 불상의 유려하고 섬세한 조각솜씨는 신기에 가깝다는 평을 듣는다. 조각의 탁월성뿐만 아니라 석굴의 입지선정이 또한 놀랍다.토함산 중턱,동남쪽으로 동해를 바라보는 위치에 인공석굴을 조성,해돋이때부터 벽면의 불상을 시시각각으로 바꾸어 놓는다.빛의 광량을 계산한 독창적 의장에 대해서는 현대건축공학도 감탄을 한다. 그 석굴암과 함께 해인사의 고려 팔만대장경판 및 경판고,조선왕조의 신궁인 종묘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수많은 문화재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지만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이 되는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우리의 문화재가 세계적으로 공인을 받은 셈이 된다.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려면 독특한 예술적 업적과 창조적인 재능의 걸작품을 대표해야 하며 매우 희귀하거나 오래된 것등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시켜야만 한다.지금까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문화유산은 3백26점.중국의 만리장성,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사원,프랑스의 베르사유궁전 등이 포함돼 있다. 오는 12월 정식 등록되면 국제기구로부터 훼손방지 및 보존을 위한 기술·재정지원을 받게 되며 세계 문화유산으로 홍보된다.우리 문화재의 세계화다. 우리의 문화재는 조상들의 예지와 슬기로 만들어 놓은 것이지만 현대에는 인류문화의 공동유산으로 평가되고 있다.이집트의 아스완댐 건설로 나일강 유역의 아부 심벨 신전이 수몰위기를 당했을때 19 64년 유네스코가 유적 구출에 앞장선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우리 문화재가 세계문화 유산의 반열에 올려졌다는 긍지로 보호에 힘써야 할 것이다.
  • 미·중마찰의 악영향 우려한다(사설)

    이등휘 대만총통의 방미허용으로 표면화한 미국과 중국간의 불편한 관계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중국은 그 보복으로 인권운동가인 중국계 미국시민권자인 해리 우씨를 전격 구속한데 이어 이미 허가했거나 서명단계에 있는 2개 미국회사의 대중투자 프로젝트를 철회할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이에 맞서 미국도 중국에 대한 역보복 조치들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중국은 이미 지난달 17일 주미 중국대사를 소환해놓고 있어 양국간에는 무대사관계라는,외교적으로 대단히 불행한 사태를 맞고 있다.79년 수교이래 최대의 외교적 불상사다. 우리는 한반도에 적지않은 영향력을 갖고있는 두나라간의 이러한 마찰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염려하지 않을수 없다.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사태는 없을까 하는 것이다.양국간 불편한 관계의 뿌리는 옛소련 붕괴와 중국이 최근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급격히 팽창하고 있는데 따른 미국의 대중국 견제심리와 중국의 맞대응이다. 72년 상해공동성명 이래 양국관계의 일대 시련기라 할 수 있다.미국 일부에서는 벌써부터 「중국 봉쇄론」이 제기되기도 하나 미국이 당장 중국 봉쇄 정책을 쓰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중국에 대한 봉쇄정책을 택할 객관적인 근거가 희박하다. 그러나 양국간에는 당장은 아닐지라도 마찰과 충돌의 가능성이 항상 내재해 있다.우리는 그러한 사태를 상정하고 대비할 필요가 있다.우리는 미·중관계 악화가 동북아의 안정에 바람직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한다.미·중은 동북아안정 유지가 양국의 국익에도 부합되는 동시에 공동의 책임이라는 것을 명심해주기 바란다. 아무튼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비하는 것은 않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며 최선의 방어책은 결국 남북간의 화해와 협력이다.남북합의서 정신의 복구를 위한 노력이 요망되는 것이다.
  • 백제 금동관세음보살입상(한국인의 얼굴:36)

    ◎점잖은 웃음… “백제인의 모습”/전래 서역의 흔적 벗은 7세기 작품/두터운 눈꺼풀·부드러운 콧날… 원만한 성품 엿보여 우리나라 불교에서 「관음경」만큼 널리 퍼진 불경도 드물다.「관음경」은 「법화경」의 「관세음보살보문품」을 별개의 경으로 만든 것이다.관세음보살의 영험은 현세의 이익적 공덕과 맞물려 많은 신도들로부터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이에 따라 관세음보살상은 삼국시대 이후 우리나라에 크게 유행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보물 195호 금동관세음보살입상은 그러한 신앙을 뒷자락에 깔았다.머리에 쓴 화관에 화불이 들어있기 때문에 관음보살이라는 사실이 금새 드러난다.7세기께 백제인들이 만든 작품인데,원만한 얼굴과 화관이 어울려 아주 보살다운 모습을 했다.이 보살의 얼굴과 화관은 바로 작품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얼굴에서 외래적인 요소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그래서 백제의 얼굴로 보아도 좋을 만큼 지극히 동양적이다.6세기말 관음신앙이 뿌리를 내렸으니까,7세기가 되면 그 경배대상으로서의 관음상은 백제화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가졌을 것이다.백제에 관음신앙이 들어온 시기는 백제승려 발정이 서기 502∼519년 사이 중국에 머물다가 월주의 관음도량을 참배하고 돌아온 이후로 보인다. 이 7세기의 백제보살상 얼굴에는 은근한 미소가 어렸다.부여 군수리 출토 6세기 후반의 백제금동보살입상(서울신문 5월19일자 13면) 웃음에 비해 퍽 점잖다.눈꺼풀이 약간 두텁고 눈자위는 꺼지지 않았다.이른 시기의 불상에 흔히 나타나는 서역의 요소가 없는 골상이다.코도 날카롭지 않다.더 작아보일 수도 있는 입이 웃음을 머금은 탓인지 좀 커졌다.이 보살상의 미소가 엷기는 하나 입과 눈에서 웃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보살이 몸에 걸친 윗옷(천의)과 치마(군의)는 곱고 부드럽다.구술을 꿰어만든 영락을 어깨로부터 길게 늘어뜨려 배에 와서 ×자로 교차시키고 나서 다시 늘어뜨렸다.팔꿈치를 굽혀올린 오른손의 엄지와 인지가락으로 큰 구슬(보주)을 쥐고 어깨위로 쳐들었다.왼손은 내려 어린 아이들이 마치 꼬까옷을 자랑하듯 율동적 자세로 천의자락을 잡았다.참으로 아름답고 섬세한 보살상이다. 이 금동관음보살입상은 충남 부여군 규암면에서 구한말인 1907년에 출토되었다.규암면은 부여읍 낙화암에서 바라다 본 백마강 대안의 땅이다.사비시대 백제의 영특한 군주 무왕(재위 600∼640년)이 즐겨 찾았던 왕흥사가 거기 있었다.야심만만한 정복군주로 불교에 심취했던 무왕은 서기 634년 2월 백마강 건너 오늘의 규암면 지역에 왕흥사를 세우고 몸소 찾아가 예불을 올렸다는 것이다. 일본쪽 사료를 보면 백제는 서기595년에 백제의 공장을 시켜 관음상을 일찍 만들어 주었다.그런데 규암면에서 1907년에 출토된 또다른 백제의 금동관음보살이 일본에 유출되었다고 한다.애석한 일이다.
  • 한국 잇단 참사/“김 대통령 잘못이 아닌데도…”

    ◎“한국인 사고때마다 정부 공격”/뉴스위크지 보도 지난 29일의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등 최근들어 한국에서 잇단 참사가 발생하는 것이 김영삼 대통령의 잘못이 아닌 데도 대통령이 비난을 받고 있다고 뉴스위크지가 10일자 아시아판에서 보도했다. 이 잡지는 「사고의 왕국」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한국인들이 추락,붕괴,폭발사고 등 대참사가 일어날 때마다 정부를,특히 대통령을 비난하는 경향이 있으며 대통령은 감독 불충분을 들어 국민에게 사과해야 했다고 지적했다. 뉴스위크지는 심지어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불상 하나를 제거했기 때문에 악운이 생겼다는 풍설을 부인하기 위해 기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하기까지 했다고 밝히고 부실시공이 삼풍백화점 붕괴의 원인이며 「김대통령의 잘못으로 돌릴 수는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 잡지는 김대통령이 취임당시 피할수 있는 인재의 원인이었던 부패와 책임부재가 발본색원 될 것이라는 희망을 고조시켰던 장본인으로,지난해 10월 성수대교 붕괴사건후 서울시의 부패를 일소하도록 최병렬씨를 서울시장에 임명했으나 이제 최시장의 행정팀 자체가 삼풍백화점의 안전을 기약하지 못한 책임을 추궁받게 됐다고 말했다. 또한 김대통령에 대한 평판은 급속히 무너져 내리고 있어 최근 4대지방선거 실시로 지난 61년 군사쿠데타이후 폐지된 지자제를 회복하겠다는 공약을 성실히 이행했으나 결과는 「정적들의 지역분할주의」로 서울시장 자리를 야당에게 내주는등 참패를 기록했다고 이 잡지는 덧붙였다. 이 잡지는 이어 김대통령의 반대자들은 김대통령의 군림하는 통치 스타일,반대의견의 불용,각료들의 잦은 해임 등이 이번 선거에서의 패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말했다.불교사찰과 성당에서 농성중인 파업 근로자들을 강제 해산시킨 일도 김대통령의 평판을 해쳤다고 잡지는 지적했다.또한 대북관계에서 강경과 유화 사이를 오락가락한 것도 김대통령의 인기를 떨어뜨렸다고 뉴스위크지는 분석했다.
  • 북,우리정부 뜻 바로 헤아려야(사설)

    「인공기」게양강요사건으로 중단됐던 대북쌀제공이 북한당국의 공식사과로 재개케 된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우리정부는 북한이 성의 있는 태도를 보이지 않을 경우 대북쌀제공을 전면중단할 것이라고 천명한바 있지만 북한당국이 이례적일 만큼 신속하게 사과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함으로써 쌀을 다시 보낼 수 있게 됐다. 북경쌀회담의 북측대표 전금철명의로 된 북한당국의 「사과」와 「재발방지약속」은 우리 정부로서는 미흡한 부분이 없지 않지만 정부가 굶주리고 있는 북한동포를 돕겠다는 인도적인 차원에서 쌀제공을 결정했던 만큼 대국적인 견지에서 이를 받아들인 것은 잘한 일이다.지금까지 남북관계에서 극단적 버티기를 불사해오던 북한이 이번 사건에서 보여준 태도는 실리를 택한 결과로 분석된다. 그 이유는 북한당국의 다급한 사정 때문일 것이다.우리쌀 제공이 무산될 경우 임박한 김일성사망 1주기행사,곧 이어질 최고인민회의와 김정일의 권력승계등 중요한 정치일정이 차질을 빚을 우려가 있고 일본쌀 도입도 어려워질 것이란 현실적 판단이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제 북한당국은 쌀제공을 재개키로 한 우리정부의 깊은 뜻을 똑바로 헤아려야 할 것이다.또다시 불상사가 발생한다면 쌀제공은 영원히 중단될 수밖에 없음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정부도 이제부터는 북의 고의든 실수든 이번과 같은 불상사가 재발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고 빈틈없이 대처해나가야 할 것이다.대북 쌀수송및 인도과정에서 서두르지 말고 차분히,그리고 냉철하게 임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번 사건에서 짚어야 할 또 하나의 문제는 북쪽 도선사의 위협에 대한 씨 아펙스호 선장의 대응이다.북측이 위협한다고 간단히 인공기를 게양한 것은 승무원의 안전을 위해서 불가피했다지만 만족스런 대응이라 할 수 없다.수송선은 우리 영토다.우리의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는 처신이 아쉬웠다. 앞으로 우리쌀을 실은 우리 국적선이 북한항구에 잇따라 입항할 예정이다.정부는 선장및 선원들에게 명확한 지침을 시달하는 한편 선장들은 대한민국 선장다운 품위를 보이도록 각별히 노력해주기 바란다.
  • 호암갤러리서 오는 15일부터 「대고려 국보전」

    ◎고려시대 문화유산 한자리에/불상·도자기 등 명품 2백66점 선보여 고려시대의 찬란한 문화유산을 한자리에 모은 대규모 전시회가 열린다. 오는 15일부터 9월10일까지 호암갤러리(771­2381)에서 열리는 「대고려 국보전­위대한 문화유산을 찾아서」에는 그간 해외에 흩어져 있어 볼 수 없었던 문화재를 포함해 불상·범종·불화·도자기·금속공예·나전칠기·회화·서예·팔만대장경 등 고려시대 문화 전반을 망라하는 명품이 대거 선보인다. 출품작은 국보 25점,보물 19점,해외문화재 27점을 비롯해 총 2백66점.해외문화재는 일본에서 들여온 것이 25점이며 영국의 대영박물관,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서 들여온 것이 각 1점씩으로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문화재가 다수 포함돼 있다. 특히 국내에 단 한 1점밖에 없는 고려 나전칠기가 이번 전시회에서 처음으로 8점이 한꺼번에 소개되며,4m가 넘는 현존 세계 최대의 「수월관음도」(일본 경신사 소장)가 최초로 공개된다.또 영국 대영박물관이 좀처럼 일반공개를 하지 않는다는 「청자진사채 당초문완」도 이번 전시회에서 꼭 챙겨봐야 할 명품이다.이 그릇에 사용된 진사기술은 청자와 금속활자 기술을 접목시켜 세계 최초로 고려인이 창안한 것으로 예술성과 호화로움이 단연 뛰어나다. 사상적으로는 불교를,정치적으로는 귀족정치를 근간으로 한 고려왕조(918∼1392)의 문화는 각종 미술분야에서 섬세함과 우아함,화려함을 특징으로 한다.이번 전시회는 당나라의 문화를 거의 답습한 통일신라 문화와 달리 중국문화를 독창적으로 소화,한국미의 규범을 제시한 고려문화의 진수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출품작 중 48점은 초·중·고교 미술 및 국사교과서와 대학교재에 수록된 것들이다.
  • 민주/「6·27승리」 국정 운영에 부담감

    ◎「삼풍」 관련 추궁보다 재발방지 촉구 6·27지방선거이후 국정을 대하는 야권의 자세가 사뭇 달라지는 모습이다.스스로 자평했던 지방선거에서의 「승리」가 일정부분 국정운영에 대한 「책임감과 부담감」으로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야권의 자세변화는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다. 민주당의 박지원 대변인은 2일 논평을 통해 『모든 국가시설물에 대한 철저한 안전점검을 약속한다』고 밝혔다.책임규명과 처벌을 요구하는 내용은 쏙 빠졌다.큰 일만 터지면 정부여당을 난타하기 일쑤이던 그전과 달리 지방행정에 대한 책임의식이 묻어 나왔다.한광옥 부총재를 단장으로 한 사고진상조사단의 활동도 책임추궁 못지않게 재발방지대책을 마련하는 데 모아지고 있다. 자민련의 안성열 대변인도 「타성」대로 정부관계자의 책임을 성토했다가 김종필 총재로부터 『지금은 책임을 따질 때가 아니다』라는 질책을 받았다는 후문이다. 물론 5일 임시국회가 열리면 대정부공세 역시 강화될 것으로 여겨지지만 일단 야권의 신중한 자세는 지방자치선거가 가져온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야권이 이처럼 조심스럽게 대응하는 데는 무엇보다 이번 사고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짙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서울을 비롯한 8개 광역단체의 지방행정을 직접 주도하게 됨으로써 이제 수권정당으로서의 자질을 심판받는 처지에 놓였다.그리고 그 첫 심판대가 될 내년 4월의 총선은 불과 9개월 앞으로 다가와 있는 실정이다.이 짧은 기간안에 국정관리능력을 검증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장 야권의 현실은 이 시험기간을 무사히 넘기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이 안팎의 지적이다.제1야당인 민주당조차 원만한 당정협의를 자신하지 못하고 있다.당헌에 중앙당과 민선단체장의 협조를 위해 「지방정책협의회」를 구성하도록 규정해 놓았지만 구체적인 운영절차등이 마련되지 않아 유명무실한 상태다.더욱이 정책개발능력을 높이기 위한 방안 역시 각 지구당에 정책실장을 두는 정도에 그치고 있어 크게 미흡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지방단체에 대한 간섭을 철저히 배격한다는 방침이지만 일부 단체장들의인사전횡등의 「불상사」를 우려하는 목소리 또한 적지 않다.서울의 25개 구청가운데 23개를 장악한 선거결과도 기쁨을 넘어 부담이 되고 있는 눈치다.「바람 잘날 없는 가지많은 나무」가 된 꼴이기 때문이다.이와 관련,민주당의 김근태부총재는 『정책대안 없이 비난으로 일관하던 야권의 체질을 시급히 개선해야 한다』고 자체진단하고 『그러나 이를 위한 당의 준비는 크게 부족한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 사라진 미풍양속(두만강 7백리:18)

    ◎홍살문 자리에 문혁열사 기념비가…/문혁이후­“토호열신 타도”… 사찰·성황당 등 불태워/「모택동 선집」·곡괭이·삽을 결혼예물로/개방바람 타고 최근 기우제·농악놀이 되살아나 두만강 양안 마을마다에는 혁명열사 및 혁명전적기념비가 전망좋은 자리에 서 있다.이와는 반대로 그 많고도 많았던 민족 전통풍물은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이를테면 혁명을 당해 사라진 것이다. 용정시 삼합진 북흥촌 혁명열사비는 제법 자리를 제대로 잡았다.왜냐하면 일제가 조선민족의 혈맥을 끊는답시고 쇠말뚝을 박았던 산혈에 세웠기 때문이다.그러나 화룡시 노과진 죽림촌의 열사비는 자리를 잘못 선택했다는 생각이다.산언덕에 세운 이 기념비 자리는 본래가 마을 어귀에 있었던 홍살문 자리여서 찜찜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종교를 미신 행위로 이 홍살문은 마을 사람들이 고사를 지내는 한 처소였다고 한다.해마다 음력 10월 초순이면 찰떡을 메로 치고 돼지를 잡아 홍살문 앞에 한상 차려놓고 단군성인께 치성을 드렸다.다음해에도 제발 풍년이 들게해달라고 넙죽넙죽 절들을 했다.치성이 끝나면 제물을 집집이 나누어 창호지에 싸다가 곡식더미 속에 묻었다.그리고 나서 다음날에 가서야 음식을 먹었다. 그래서 홍살문에 얽힌 사연도 많다.한국전쟁 당시 강건너 북한에 사는 안흥국이라는 사람은 홍살문 치성에 참석했다가 떡을 가져다 볏가리에 묻어두었다.그날 마침 미군 비행기가 떼로 날아와 폭격을 해댔다.그 때 벽가리에도 폭탄 파편이 튀었는데,공교롭게도 찰떡에 파편이 박혀 화재를 면했다는 것이다.하지만 홍살문이 없어진지 이미 오래되었다.마을 노인들의 아쉬운 마음이야 아직도 남아있지만…. 노인들에게는 홍살문 뿐아니라 여러 가지의 민족풍속이 머릿속에 살아있다.그저 생생한 추억으로만 남은 민속을 놀아보지 못 하는 한을 오래도록 지닌 사람들이 오늘날 조선족 노인들이다.젊은이들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되지 못하지만 노인들은 두고두고 말한다. 『어디 홍살문에만 제사했나….국사당에도 치성을 드렸다.가뭄이 들면 돼지잡아 피를 뿌리고 비를 달라고 기도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비가 안와도 기우제를 지내면 마음이 놓였다 이기야.기우제를 지낼때 과부들은 옷을 훌렁훌렁 벗어내치고 알몸에 물을 뿌리면서 통곡을 해댔디.더러워서라도 하늘이 비를 내릴 것이라고 기런거야』 민족들 가슴에 묻어온 수천년 전래의 풍속이 저의 다 없어졌다.세 차례 혁명에 철퇴를 너무도 세게 맞아 풍비박산이 났다.민족의 전통풍속은 1947년 이른바 토호열신을 타도하는 운동에서 첫뺨을 얻어 맞았다.오늘날 화룡시 덕화진 구역 선경대에는 1885년 하홍락 스님이 지은 절이 있었다.그 후에 불에 탄 것을 1940년 강원도에서 황정숙이라는 비구니가 불상과 종을 가지고 와 절을 복구하고 칠성사라고 불렀다.해마다 초파일이면 이웃 촌민들이 떡을 치고 감주를 빚어와 칠성사에서 불공을 드렸다. ○족보까지 태워 없애 그러다 1947년 정부가 불교를 미신행위로 몰아붙였다.그것도 반동적이라는 명목으로….그 때에 군중이 동원되어 절에 불을 질렀다.절간에서 쫓겨난 그 비구니 소식을 아는 사람은 없다.절의 종은 신흥동학교로 떼어가 오랫동안 학교종으로 썼다. 두만강연안의 수십개 마을을 편답하는 동안 용정시 삼합진 북흥촌에서 성황당 나무 두 그루를 보았다.1958년 반우파투쟁때 성황당 나무를 닥치는대로 잘라버린 터여서 그것은 참으로 요행이었다.원래는 마을에 네 그루였으나 허수라는 사람이 두 그루는 찍어다 화목으로 썼다.반우파투쟁 이후에 이 나무들에는 왼새끼나 창호지 가닥 대신에 포탄피가 매달렸다.종을 대신한 포탄피는 마을 사람들을 불러모으는데 이용되었다. 문화대혁명은 모든 전통을 더욱 깡그리 말살해버렸다.상두를 불살라 사람이 죽어서도 덜컹거리는 수레에 실려나갔다.닭을 풀어놓아 묘자리를 잡는 일도 어림없게 되었다.부자간에도 갈라져 「자산계급혈통론」이 나오고 족보까지 태우는 풍파가 일어났다.결혼 때 주고 받는 예단도 「모택동선집」이 제일이요,남자에게 주는 예물은 곡괭이나 삽이었다. 결혼식날 신부는 치마 저고리 대신에 당시 유행하던 군복을 입었다.잔칫상에 개떡이 올라 옛날 지주집 머슴 살던 때를 회상하기 일쑤였다.그래서 잔칫날 대성통곡하는 소리가 들렸다.어떤 신부는결혼식날 새벽에 망태에다 집징승 똥을 거름으로 담아왔대서 당원으로 발탁되었다.농악놀이에 돌리는 상모가 공산당 영도력을 부정하는 몸짓으로 해석되어 농악을 복고주위로 낙인 찍어버리기도 했다. 더욱 한심한 것은 친척관계가 엉망으로 변한 것이다.연변에서는 한 때 할아버지는 아바이,할머니는 아매로 불렀다.그러니 외가나 다른 노인들이라고 별수가 없어서 아바이와 아매로 통했다. 아버지 나이를 기준으로 백부는 맏아바이,백모는 맏아매였다.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말하는 아바이·아매와 혼동을 가져왔다.또 아버지 나이를 기준으로 그 아래 친인척을 죄다 아주바이,아주머니로 호칭되었다.그러나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대로 둔 것을 보면 지금도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전통풍속이나 신앙을 뿌리째 말리지는 못했다.1958년 부동골에 극산병이 돌아다닐 때 마을사람들이 스스로 쌀을 모아 떡을 치고 돼지를 잡아 치성을 올렸다.문화대혁명 당시 우리 고향 화룡시 서성진 북대촌에 투쟁을 맞은 비구니가 살았는데,어렸던 내가 아프기만 하면 어머니께서 그 비구니를 찾아가곤 했다는 것이다. ○정치투쟁에서 해방 개혁개방 이후는 구질구질한 정치투쟁에서 해방되어 이제 하고 싶은 일은 하게 되었다.지난해 여름 심한 가뭄이 연변지역에 들자 두만강 연안 용연동에서 기우제를 지냈다.이 때 상화촌 과부 몇이 알몸으로 두만강에 들어가 옛날 사람들이 하던대로 통곡을 하면서 몸을 씻었다.화룡시 용성향 봉산동 마을 옆 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어린이들이 자주 생명을 잃자 실로 오랜만에 마을에 솟대를 세웠다. 1938년 경상도에서 집단으로 이주해와 안도현에 자리잡은 신툰의 노인들은 마을에 농악을 보급시켰다.그래서 신툰농악은 지금 조선족의 한떨기 꽃으로 피어나는 참이다.지난해 선경대가 길림성관광지로 개발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북두칠성 절이 복구될 것이라는 소식이다.옥으로 만든 불상은 벌써 옛 절자리에 먼저 안치해 놓았다. 어떤 풍속을 미신으로 매도만 해서는 안된다.전통적 관습으로 마음에 자리잡은 공동체 삶의 한 부분이다.그것은 때로 위로가 되고 신바람을 불러일으키는 민족의 단합요소로도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 삼대석굴/중국 운강석실 훼손심각/주변탄광 석탄가루등 쌓여 급속풍화

    중국에 있는 1천5백여년 역사의 운강석굴이 심각한 훼손 위기에 놓였다. 돈황·용문석굴과 함께 중국 3대석굴로 꼽히는 운강석굴이 대기오염과 먼지등으로 급속히 풍화돼 손상되고 있다며 운회보(문회보) 등 현지언론과 전문가들이 대책 마련을 호소하고 있다. 문회보는 최근「운강석굴이 시꺼먼 상장을 뒤집어 썼다.대기오염이 천년 문화유산에 재앙을 미쳤다」라는 제목으로 대기오염으로 인한 운강석굴의 손상 내용을 다루었다. 서기 460년 위·진 남북조시대 북위 왕실에 의해 만들어진 이 석굴의 위치는 내몽고와 맞닿아 있는 산서성 대동부근.최근 대동부근이 화북지역의 주요 석탄 채굴탄광이 되면서 운강석굴은 고비사막의 먼지와 석탄가루가 혼합된 시커먼 먼지로 손상되고 있다. 특히 주변 석탄채굴 탄광에서 날아오는 먼지말고도 운강석굴 입구의 주 도로인 1백9번 국도를 지나는 하루 1만6천여대의 석탄운송차량이 쏟아놓는 시커먼 석탄가루는 운강석굴에 치명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전문가들은 5만1천여개의 크고 작은 불상들에 한겹의시커먼 먼지가 뒤덮여 산화현상을 재촉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문회보는 최근 국가환경보호국의 조사 결과,불상이 온통 미립자들로 뒤덮인 것은 물론,이산화황·이산화망간·이산화연 등 이산화화합물이 불상표면과 화학작용을 일으켜 풍화작용을 가속시키고 있다고 경고했다. 17m크기의 대불에서부터 2m짜리 소불까지 5만1천여개나 되는 불상 대부분과 45개 석굴 모두가 급속한 속도로 산화,풍화의 대상에서 예외가 없다는 것이다. 문회보는 찬란한 고대문물을 보호하기 위해선 주변 대기오염과 석탄채굴탄광에 대한 종합적인 대책을 마련하고 석탄운송차량이 다른 곳으로 다닐 수 있도록 1백9번 국도 이외의 다른 도로를 건설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재정확보를 위해 역사유적지에 가라오케장을 만들고 지방정부가 관광객유치를 위해 훼손이 우려되는 고분발굴까지도 주도하고 있는 것이 이곳 실정이고 보면 적잖은 돈을 들여 문화재 애호가들의 「배부른 건의」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또 대동지역과 인접해 있는 하북성일대가 최근 북경·천진일대의 발전과 함께 급속한 공업화의 길을 걷고 있어 백옥같은 미소의 운강석굴은 멀잖아 변색된 일그러진 웃음으로 바뀔 것이라는 걱정까지 나오고 있다.
  • 북,필요 양곡 10%도 못 구했다/평양 곡물도입 현황

    ◎연초부터 7∼8개국에 3백만톤 지원 타진/장기저리·구상무역 방식… 구입길 한계에 올들어 북한측의 해외곡물 도입 노력이 한계에 부딪친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북경 남북 당국간 쌀회담의 타결에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식량난이 내핍으로는 더 이상 버틸 수을 만큼 최악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기에다 외미 도입길마저 막혀 체면손상을 감수하면서 남한쌀을 받을 수 밖에 없는 막다른 상황이라는 얘기다. 통일원·외무부등 관계 당국에 따르면 북한은 올연초부터 7∼8개국에 식량지원을 타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중에는 중국·이집트등 우호관계를 유지해온 국가들 뿐만 아니라 미국·일본·호주·캐나다등 서방국들도 포함되어 있다. 북한은 특히 올들어 태국·대만·말레이시아등 개발도상국들에게도 손을 내밀었다는 소식이다. 북측은 이들 국가들로부터 장기저리 연불상환이나 구상무역 방식으로 총 3백여만t 이상의 식량지원을 요청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최대 곡물지원국이던 중국은 지난해부터 자체수급 사정을 이유로 북한과의 식량교역에서 경화결제를 요구했다. 때문에 1·4분기중 북한이 중국으로부터 도입한 곡물 총량은 1만2천t에 불과했다. 북측은 올2월 이성록 국제무역촉진위원장을 태국에 파견,싸라기쌀 35%가 포함된 30만t 도입계약을 합의해 이중 일차로 5만t을 들여온 바 있다. 하지만 93∼94년 태국으로부터 외상매입한 대금을 7월15일까지 지급해야 한다는 전제조건 때문에 나머지 25만t의 추가도입은 사실상 어려운 형편이다. 북한은 지난 4월 이집트에도 쌀지원을 요청했으나 이집트 정부가 무상원조 대신 현금 결제를 요구함에 따라 쌀 수입계획이 무산됐다. 북한의 올해 곡물부족분은 대략 2백60만t으로 추정되고 있다.북한당국의 식량배급시 쌀과 잡곡의 혼합비율이 평양시민 기준으로 3대 7정도이므로 쌀만 보더라도 최소한 80만t의 외부 지원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5월말 현재 북한이 해외로부터 도입한 곡물총량은 민간구호단체인 국제선명회측이 보낸 수수 4백80t을 포함해도 절대 식량부족분의 10%에도 미치지못하고 있다.
  • 부여 정림사지 출토 흙인형(한국인의 얼굴)

    ◎둥근얼굴… 살짝 다문입에 조용한 미소/인물상 머리모양으로 성 구별/남자농관·쌍상투 여자는 곱슬하거나 단발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 정림사 절터가 있다.정림사라는 이름이 후세에 알려진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1942년 일본인학자(등택일부)의 학술조사 이후다.당시까지만해도 무명의 절터였는데 학술조사에서 발견한 기왓장의 글씨 「대평팔년술진정림사대장당초」를 통해 본래의 가람 이름을 알게 되었다.「대평팔년」은 중국 요의 연호로,고려시대인 AD 1208년에 해당한다. 그러나 연호가 있는 기왓장은 고려시대의 가람 재건을 의미할 뿐 정림사는 백제의 절이었다.이는 현존하는 백제시대 5층석탑에서 입증할 수 있지만 지난 1979년 충남대박물관의 전면발굴에서는 더욱 뚜렷한 백제의 절로 확인되었다.특히 출토유물 가운데 소조불상은 백제의 색깔이 진하다.그리고 소조불상과 함께 무더기로 나온 흙인형들은 백제인들이 자기네 공간에서 재창조한 사비시대 인물상이다. 이들 흙인형은 오랜 세월을 땅속에서 잘 견디어냈다.그래서 오늘을 사는 사람들 앞에 온화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내밀었다.모두가 옛 모습대로 웃는 얼굴이다.머리에 관을 썼거나 쌍 상투를 틀어올린 점잖은 남자상도 웃는다.생머리를 한 여인상과 곱슬머리의 여인상까지 따라 웃는데,까까머리 동자승인들 어찌 웃음을 참겠는가.정림사 절터에서 나온 백제 흙인형들은 다 웃고 있다. 이들 흙인형의 성과 역할은 손질한 머리 모양새를 빌려 구분했다.그러나 웃음들은 한결 같다.전부가 입을 다문채 빙그레 웃음을 지어 한껏 조용한 분위기를 자아낸다.이른바 농관이라는 관을 쓴 남자 인물상은 얼굴이 둥글다.반달모양 눈썹에 눈이 가늘고 입술은 도타운데 작다.눈과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턱 밑으로 3줄의 목주름(삼도)이 잡혀있다.머리의 농관을 옆에서 보면 얇은 널빤지(판장)처럼 조각되었다. 이렇듯 농관을 쓴 2점의 남자인물상 이외에 쌍상투를 튼 다른 남자인물상 1점이 더 나왔다.여자인물상의 하나는 머리카락이 내려와 귀를 가렸다.요즘의 퍼머머리 모양을 한 또 다른 여자인물상에서는 서역적 요소를 느낄 수 있다.그리고 아주앳된 얼굴의 인물상은 삭발을 했기 때문에 동자승이 분명하다. 얼굴이 온전한 흙인형은 9점이고 나머지 5점은 얼굴이 망가진채 발굴되었다.4∼7㎝ 크기의 이들 인물상은 절터 회랑자리 서남쪽에서 진흙으로 빚은 불상파편들과 함께 나왔다.한 구덩이에 쓸어묻은 흔적이 역력했다.여기서도 백제의 비극이 보였다.그러니까 AD660년 정림사가 사비성과 운명을 같이 한뒤 쓸어묻은 유물일 것이다.19 89년 발굴조사때 건물자리에서 확인한 넓은 면적의 불탄 흙바닥(소토층)은 정림사 최후를 연상하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웃고있는 얼굴들,아련한 백제문화의 잔영이다.중국의 남북조시대 북위와의 교류과정에서 눈여겨 보아두었던 문물을 백제땅에서 다시 꽃피운 걸작의 예술이기도 하다.
  • 7세기 백제 소조불두(한국인의 얼굴:32)

    ◎순한 콧날·실한 입술… “토속적 백제인”/큰 귀에 웃음 머금은 눈·입… 친근감 가득/상투 없는 머리칼엔 종교적 권위 안보여 백제물상은 지극히 인간적인 데가 있다.그 중에도 충남 부여군 부여읍 부소산 서남쪽 기슭 절터에서 나온 소조불두가 더욱 그렇다.지난 1980년에 출토된 이 불두는 높이가 5.6㎝에 지나지 않는다.그토록 작은 얼굴인데도 평화가 넘쳐 흐른다.자비와 상통하는 평화로운 얼굴에서 불상이라는 사실이 암시될 뿐 전체적으로 소박한 인간 모습을 했다. 얼굴에서 서역의 요소가 모두 사라졌다.이 불두를 만든 7세기는 백제에 불교가 들어온 4세기(AD384년)로 부터 어언 3백여년이 지난 뒤였기 때문이다.그래서 얄팍하지 않은 눈꺼풀이며 꺼지지 않은 눈자위,또 순한 콧날과 실한 입술을 가진 토속적 얼굴이 되었다.두꺼워 보이는 눈꺼풀이 감긴듯 한데,이는 슬며시 웃음을 머금은 탓일 것이다. 실한 입술도 따라 웃음을 지어냈다. 부처다운 큰 귀에 비해 머리칼은 격식이 없는 소발이다.여래상 헤어스타일에 흔히 나타나는 살상투가 생략되었다.종교적 권위를 드러내지 않는 이 불상의 얼굴,백제 여느사람들 모두가 가까이 했을 얼굴이기도 하다.흙으로 빚어 만든 소상의 특징이 그대로 살아나 매끄럽지 않은 질감을 풍겨준다.더 친숙해지고 싶어 지는 이유의 하나를 약간 거친느낌이 드는 흙의 질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소상은 진흙으로 만든 사람의 형상을 의미한다.흔히 조각에서 주물의 원형으로 쓴다.부소산 기슭 절터에서 나온 이 소조불두는 백제 조각의 한 제작방법을 엿보게 하는 유물인 것이다.특히 부여 정림사절터에서 많은 소상이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소상이 백제 조각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어렵지 않다. 소상은 진흙으로 사람형상을 빚어 그냥 말리거나 약한 불(저화도)에 초벌구이 정도로 구어서 완성한 작품이다.따라서 땅속에서 오래 원형을 간직할 수 없을 만큼 물기에 약하다.그점에도 부소산 출토의 이 소조불두는 원형을 잃지 않고 다시 평화로운 얼굴로 바깥 세상에 나왔다.오늘을 사는 후세 사람들이 만난 소조불두는 부처의 얼굴(상호)이라는 의미도 물론 지니지만,더 반가운 것은 백제인의 얼굴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소조불두가 나온 절터는 발굴결과 1탑1금당식의 가람이 있었던 자리로 밝혀졌다.중문,탑,금당을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하면서 강당은 빼 버렸다.유독 강당을 제외한 까닭은 백제 왕실과 깊은 연관이 있는 내원의 기원사찰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소조불두 말고도 청동향로뚜껑,금동제허리띠꾸미개,연꽃무늬 수막새 등의 7세기 백제문화상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러면 내원의 왕실 기원사찰에 이렇듯 소박한 불상이 있었을까.우리는 이 소조불두를 통해 당시 백제불교를 읽어야할 것이다.사비시대 백제불교는 철저한 계율불교였다.그리하여 법왕과 같은 군주는 불살생의 계율을 설천하면서 자비와 평화의 종교윤리를 백성들에게 심어주었다.이 시기가 바로 사비시대이기도 하다.
  • 한통 노조간부 13명 구속/어제 아침/명동성당·조계사에 공권력투입

    서울지방경찰청은 6일 상오 한국통신 노조원 13명이 농성을 벌이고 있던 서울 명동성당과 조계사에 경찰을 들여보내 농성자들을 모두 연행,구속했다. 경찰은 이날 상오 8시쯤 명동성당과 조계사 주변에 3백60명씩의 경찰을 배치하고 20명씩의 사복경찰을 들여보내 성당입구 계단에서 16일째 천막을 치고 농성을 하고 있던 6명과 조계종 총무원 앞뜰에서 11일째 농성을 벌이던 7명을 5분만에 모두 끌어냈다. 연행과정에서 경찰과 농성간부들 사이에 약간의 몸싸움이 있었으나 별다른 불상사는 없었다. 명동성당에 경찰이 들어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조계사에는 지난해 4월 조계종 내분사태에 이어 두번째다. 경찰은 연행된 노조간부 13명 가운데 이미 구속영장이 나와 있는 노조쟁의실장 장현일씨등 6명을 구속수감하고 나머지 7명도 이날 업무방해 등 혐의로 구속했다. 서울경찰청 안병욱 청장은 이날 『법질서 확립을 책무로 하고 있는 경찰이 더 이상 법집행을 주저해서는 안된다는 국민여론의 뒷받침을 받아 영장을 집행하게 됐다』고 밝혔다. 명동성당과 조계사측은 이날 경찰투입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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