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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아(자동차 5사 21세기 경영전략:2)

    ◎첨단 미래형 개발… 세계시장 도전/미·일 등 국내외 연구소 12곳… 탄탄한 기술력 자랑/개발비 1조원 집중투자… 98년까지 독자엔진 개발 「창업이래 오직 한길을 걸어온 기업」「자본과 경영이 분리된 전문경영인들의 기업」「노사가 따로 없는 기업」 기아자동차를 일컫는 표현들이다.그러나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있다.「한국기계공업과 함께 자라온 기업」이 그것이다. 기아자동차는 지난 44년 자전거로 창업해 2륜 3륜 4륜 등 바퀴수를 늘려가며 종합 자동차업체로 변모했다.한국자동차 기술진보의 역사이다. 지난 59년 일본 동양공업(현 마쓰다)와 3륜차 생산기술 협력계약을 맺으면서 자동차 기술개발의 대장정이 시작된다.그러나 본격적인 기술 축적은 지난 67년 중형 3륜차인 T­2000과 경소형 T­6000을 개발하면서부터이다. 기아자동차 관계자는 『73년에는 국내최초의 가솔린엔진을 개발했으며 고유모델은 아니지만 74년부터 국내 최초의 승용차라고 할 수 있는 배기량 9백85㏄짜리 브리사를 생산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81년 자동차산업의 불모지에서 봉고신화에 이은 프라이드신화를 일궈낸 경험을 바탕으로 91년 처음으로 독자기술로 고유모델인 세피아와 스포티지를 개발해냈다.스포티지는 국산차로는 처음으로 지난 해부터 자동차 선진국인 독일에서 현지생산돼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크레도스와 상용차 프레지오를 개발,전차종 풀라인업 체제도 구축했다. 기아의 성장은 탄탄한 기술력에서 비롯된다.부품 개발을 담당하는 미국 디트로이트연구소,디자인을 맡는 LA연구소,엔진 및 첨단전자부품을 개발하는 기아동경R&D센터 등 12곳의 국내외 연구소가 기술력의 모태이다. 기아는 완제품보다는 완전분해된 부품형태로 수출해 현지에서 조립 판매하는 녹다운(KD)수출에 주력하고 있다.상대국과의 무역마찰을 피할 수 있는 수출방식이지만 기술력이 뒷받침돼야 한다.지난해 독일 대만 필리핀 베트남 등 7개국에 6만8천4백48대를 녹다운방식으로 수출했다. 기아의 기술개발에 대한 의지는 끝이 없다.지난해 9월 창업 50년을 맞아 세계10대 자동차업체 진입을 목표로 수립한 「2단계 중장기 R&D(연구개발)발전전략」에서 잘 나타난다.발전전략의 1단계는 98년까지 개발기간 단축과 독자엔진 확보를 목표로 하고 있다.이어 2단계로 2001년까지 환경대응 제품과 수출전략형 월드카 등 첨단 미래형 차종개발로 세계시장에서 기술경쟁력의 우위를 확보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기아자동차는 연구개발비를 매출액 대비 7%까지 올리고 연구인력을 6천5백명으로 확대키로 했다.총투자비는 1조원에 이른다.모든 승용차에 에어백을 장착하는 것을 비롯,충돌방지장치,졸음방지장치,보행자보호장치,충돌시 연료차단장치 등 신기술개발 부문에 집중투자된다.내년까지 승용차무게를 20% 줄이고 리사이클링(재활용)을 전품목에 걸쳐 90%수준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독일과 영국 등 2곳의 해외연구소도 추가로 설립한다. 저·무공해 차량개발은 이미 실용화 단계이다.지난 86년에는 국내 최초로 베스타 전기자동차를 개발,아시안게임 마라톤 중계차량으로 시범활용해 호평을 받기도 했다.94년에는 국내 최초로 전기차 프라이드를 시판했다.이어 작년 11월 상용화가 가능한 세피아 전기자동차의 국산화율을 90%수준으로 끌어올렸다.
  • 춘천갑/성남수정/산청·함양(4·11총선 표밭 현장을 가다:17)

    ◎춘천갑/여 「강원도 간판」 한승수후보 독주/야권 이용훈·최윤씨 참신성 내세워 추격 춘천갑에서는 신한국당이 「강원도간판」으로 내세운 한승수 전 청와대비서실장(59)이 독주하고 있다. 야당에서 아직 뚜렷한 맞수가 나서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국민회의에서는 유봉여고교사인 이용훈씨(51)가,민주당에서는 경실련춘천사무국장을 지낸 30대의 최윤씨(39)가 나선 정도다.자민련은 행정관료 출신 공천이 내부사정으로 무위로 돌아가면서 아직 후보를 내지 못하고 있다.무당파국민연합에서는 춘천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인 이상수씨(64)가 출마채비를 갖추고 있다. 지역적으로는 신한국당 이민섭의원(4선)이 터를 닦아온 춘천군·인제·양구에서 춘천군이 춘천시와 합쳐 재분구된 곳이다. 공천과정에서 연고등을 내세워 경합을 벌이던 이의원은 『춘천갑·을의 동반당선으로 전통여도의 중심을 장악하자』는 여권 핵심부의 설득을 수용,춘천갑을 양보하고 춘천을로 지역구를 옮겼다. 13대때 민정당 소속으로 춘천에서 첫 금배지를 단 한전실장은 14대때 통일국민당후보이던 손승덕씨(작고)에게 5천여표로 낙선한 상처를 곱씹으며 「명예회복」을 다짐하고 있다. 원외이면서도 문민정부들어 주미대사,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낼 만큼 김영삼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얻은 한 전 실장은 영국 요크대학 경제학박사,케임브리지대와 서울대교수,상공부장관등을 지낸 경제전문가. 춘천첨단공업단지·동서고속도로개설등 지역현안을 위해서는 중앙부처와 손발이 맞을 수 있는 경륜과 전문성을 갖춘 인물이 돼야 한다는 「인물론」을 내세워 표밭을 다지고 있다. 한 전 실장은 『요직에 있으면서 지역발전을 위해 한 일이 뭐가 있느냐』는 야권 일부의 비난에 대해 『일일이 대꾸하지 않겠다.다만 중앙에서 국가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한 만큼 이제 지역발전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말했다. 춘천고와 강원대 3년을 수료하고 줄곧 재야활동을 해온 민주당 최씨는 때묻지 않은 청년야당인」을 내세워 젊은층을 파고들고 있다.젊음·참신성등을 무기삼아 「강원도 무대접론」에 기초한 반여표를 결집시켜내겠다는 전략이다. 국민회의 이씨는 비정치인이라는 참신성을,무당파연합의 이씨는 춘천농고와 강원농대를 졸업한 토박이임을 내세워 지지를 기대하고 있으나 아직 지명도가 낮다는 지적이다. 춘천상공회의소의 한 관계자는 『지명도나 경륜면에서 신한국당의 한씨가 유명세가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그러나 도청 소재지이면서도 낙후돼 있다는 의식 등이 어떤 방향으로 작용할 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성남 수정/검사출신 신한국 유제인씨 부상/이윤수 의원·이대엽 전 의원 접전가세 성남 수정은 재선을 노리는 국민회의 이윤수의원(57)과 설욕전을 벼르는 자민련 이대엽 전 의원(64)이 격돌하는 가운데 세대교체를 강조하는 신한국당 유제인 위원장(48)이 가세,불꽃튀는 격전지로 떠올랐다. 더욱이 이의원과 이 전의원은 양보없는 「자존심」싸움이 격렬하다.12대부터 네번째 대결이기 때문이다.해직교수출신의 민주당 김준기 위원장(58)도 최근 야성유권자를 겨냥,출사표를 던졌다. 이곳은 인근의 분당등 아파트단지와 달리 호남표가 45%에 달하고,다세대주택 등 서민층이 많아 역대로 야세가 강한 지역으로 꼽힌다.그러나 지난해 6·27 지방자치시장 선거때 예상을 뒤엎고 무소속 오성수씨가 호남출신을 제치고 당선됨으로써 변화의 조짐도 일고 있다.박종배씨(50·택시기사)는 『본격전인 선거바람이 아직은 불고 있지 않지만 지명도에선 국민회의와 자민련후보가 앞서고 있다』며 『호남 및 충청출신 몇몇이 무소속출마를 준비중이라 야당표의 분산도 예상된다』고 말했다. 신한국당의 유위원장은 유일한 40대의 참신성과 대전지검차장 등 20년간의 검사생활을 바탕으로 「인물론」을 부각시키고 있다.지난해 5월부터 이 지역에서 표밭을 갈고 있는 유위원장은 친화력을 바탕으로 저인망식 득표작전을 구사하고 있다.전북출신이라는 점을 내세워 호남표의 흡수를 노리며 이현·전의원간의 치열한 접전에서 어부지리도 기대하는 눈치.그러나 『연고도 없는 대표적인 낙하산인물』이라는 다른 후보의 공세가 부담이다. 국민회의 이의원은 그동안 의정활동실적을 의정보고서를 통해 홍보하면서 기존 호남지지표 단속에총력을 쏟고 있다.이밖에 50%가 넘는 여성층과 유권자(18만6백명)의 20%에 이르는 아파트촌과 농촌(10개동)지역의 틈새 유권자를 파고들고 있다.19%에 달하는 원주민,15%내외의 영남표 등도 주공략대상이다.이의원측은 2만표에 달하는 여당의 조직을 견제하지만 무엇보다 이곳에 고정표가 많은 이전의원의 역공에 대비하고 있다. 자민련 이전의원은 3선의 관록과 그동안 다져온 바닥표를 무기로 설욕을 벼른다.13대국회 교체위원장시절의 지역사업을 상기시키며 20%에 달하는 충청표와 40%에 이르는 40∼50대 장년보수층을 상대로 안정론을 강조한다는 전략이다. 민주당의 김위원장(전 신구전문대교수)도 20∼30대층을 겨냥,야당표 공략에 나서고 있다. ◎산청·함양/5선고지 권익현 의원 선두 질주/군대결 구도… 함양표 향배가 최대 변수 『그래도 사람이 그렇나.우리 부락사람 찍어야 안되것나』 경남 산청·함양의 택시에 동승한 한 촌로의 말이다.이렇듯 정당간의 대결도,보수논쟁도,지역할거주의도 별로 관심 없다.지난해 지방선거때 군수2명,도의원 4명중 3명이 무소속으로 당선됐다.여당후보가 당선이라는 등식이 엷어지고 소지역주의가 바탕에 깔려 있을 따름이다. 때문에 산청과 함양간의 지역대결구도로 전장이 펼쳐져 있다.함양 유권자는 3만7천6백명으로 3만5천4백28명의 산청보다 2천2백여명이 많다.출사표를 던진 인사는 산청출신 4명,함양출신 2명이다.산술적으로는 함양출신이 더 유리한 듯하다. 그러나 산청출신 가운데는 옛 민정당대표를 지낸 거물인 신한국당 권익현의원이 4선고지를 향해 거세게 버티고 있다.권의원은 지난 2일 지구당개편대회를 함양에서 치렀다.텃밭인 산청보다는 어떤 의미에서 적지공략이 더 시급함을 반영한다. 권의원측은 지난 11대에서 산청표의 60%,12대때 80%를 독식했듯이 산청쪽은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한다..한 관계자는 『산청출신 후보들의 동향표 잠식은 어느 정도 예상되지만 우려할 정도는 아니다』며 『함양 쪽도 11대 때부터 꾸준히 조직관리를 해왔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장담한다. 함양출신으로 권의원을 위협하는 인물은 무소속 임채홍 전의원(59).그는 『교육청 등 관공서는 산청,소방서는 거창으로 빼앗긴 데 대해 함양 유권자가 섭섭해 하고 있고,그래서 국회의원을 산청에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고 기대감을 표시했다.14대때 민자당 노인환의원에게 5천표차로 차점낙선한 뒤 2천번의 주례등 각종 관혼상제에 얼굴을 내밀며 설욕의지를 다져왔다. 산청출신 가운데 국민회의 정막선씨(63)가 남편 정영모씨의 다섯번 낙선을 설욕코자 나서 『야당불모지에 새바람을 일으키겠다』고 의욕을 불태우고 있다.무소속 조중신씨(54)는 자진해 함양농협조합장을 맡아 일찍부터 함양쪽 표밭갈이를 해왔다.민주당 도상수산청석재대표(63)도 가세했다. 또 함양출신으로 하상령씨(50)가 자민련으로 재도전에 나섰다.
  • 이회창 의장 「광주 신역할론」 제창/망월동 등 방문 이모저모

    ◎5·18은 한국민주화 앞당긴 불씨/이젠 광주가 「탈지역」 출발점돼야/이례적 유족대표 안내받으며 묘역 참배 신한국당의 이회창 선대위의장이 2일 「불모지」 광주에 안착했다.공항에서 망월동으로 직행,5·18묘역에 참배한 뒤 북갑지구당(위원장 정경주)개편대회에 들렀다.그는 골깊은 지역감정의 대안으로 광주의 「신역할론」을 제창했다. 집권 여당의 「대표급」으로 망월동 영령에게 헌화,분향하기는 그가 처음이다.여고생의 영정을 어루만지며 안타까운 한숨도 토했다.그는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라며 『유족이 바라는 후속조치가 마무리돼 광주만이 아닌 전국적 의미를 갖는 묘역이 되길 바란다』고 소감을 피력했다.여당 정치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자청한 유족대표의 안내를 받았고 전남대 학생대표의 요구서한도 품속에 넣었다. 이어 중흥동 신한국회관에서 열린 지구당대회에서 이의장은 격려사를 통해 『5·18책임자들이 재판에 회부돼 처벌받는다고 해서 응어리진 아픔을 풀 수 있는가.반목과 갈등의 해결 없이 온전한 정치가 있을 수 있는가』라고 반문했다.5·18을 4·19에 견주어 『민주화를 앞당긴 불씨로서 처절한 시민항쟁이며 문민정부 탄생의 원동력』이라고 규정짓고 『광주의 아픔을 온 국민의 아픔으로 승화해 함께 치유해야 한다』며 국민화합을 역설했다. 이의장은 『정치인이 조장한 망국적 지역주의는 5·18정신에도 반한다』면서 『새정치의 출발점으로서 광주가 「광명과 동참」의 빛을 일으켜야 한다』며 탈지역주의의 신역할론을 부르짖었다.『산자들이 돌아가신 이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용서와 화해를 실천할 때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를 이룰 수 있다』고 덧붙인 그는 『과거 청산의 공백을 건강하고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채워야 한다』며 지지를 호소했다. 스스로도 강조했지만 광주는 그에게 낯선 고장이 아니다.모친의 고향으로 초등학교를 이곳에서 나왔다.그러나 정치인으로서의 그를 「반긴」 것은 쇠파이프를 들고 행사장주변 시청앞 네거리와 역전광장 사이 6차선도로를 점거한 4백여명의 대학생 시위대였다.매케한 최루가스도 함께였다. 그는 『옛 추억이 많이 서린 고향에 온 것 같은 푸근한 느낌』이라면서도 『난생 처음 데모대의 환영을 받았다』고 만감어린 표정을 지었다.
  • CDMA 이동전화 세계 첫 상용화 「한국이통 4인방」

    ◎“「통신 본고장」 미에 기술수출 큰 보람”/2년6개월간 하루 4시간 잠자며 연구/“현실성 없다” 일부의 매도에 “결과로 말했죠”/뒤만 따르려는 노예근성 버려야 세계 최고 가능 우리나라가 지난 1월 세계 최초로 CDMA(코드분할다중접속)이동전화를 상용화 함으로써 올해는 디지털이동전화의 원년으로 불리게 됐다. CDMA이동전화는 기존 아날로그이동전화(핸드폰) 보다 통화용량이 10배이상 많을 뿐 아니라 통화중 잡음,절단현상이 없어 이동전화 분야에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이동통신은 이러한 새 이동전화서비스를 인천·부천에 이어 이달 중에는 서울·과천·성남·대전등으로 확대하고 신세기통신도 4월부터 서울등에서 같은 서비스를 시작할 계획이다. 또 LG정보통신과 삼성전자도 최근 통신선진국인 미국과 러시아에 CDMA이동전화기를 잇따라 수출,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앞선 CDMA기술 보유국임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이와같이 우리가 「CDMA 첫 상용화국」이라는 기록을 갖게 되기까지는 밤을 지새우며 신기술창출에 정열을 불태운 일꾼들이 큰몫을 했다. 한국이동통신 서울 장안동연구소 디지털사업본부 이주식 박사(35)를 축으로 한 서창원(37)·김후종 과장(31),송은하(37)대리등 30대 4인방이 바로 CDMA산실의 주역들이다. 서씨는 CDMA방식의 신호전달·네트워크 구축등의 교환시설 설치·운용작업을,김씨는 기지국이 최적의 기능을 발휘하도록 해주는 기지국 최적화작업을 지휘해 왔다.그리고 송씨는 CDMA전화와 기존 아날로그이동전화간의 연동체계업무를 전담했으며 이박사가 이들을 총괄하는 책임을 맡았다. 『지난 2년6개월간은 정말 외로운 싸움의 연속이었습니다.특히 연구팀의 피땀어린 상용화 노력을 외면한 채 장삿속만 내세운 일부 기업들이 CDMA를 현실성 없는 기술로 매도하는 것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지요』 이박사는 이동통신기술개발사업단이 세워져 시스템개발이 본격화된 지난 93년 9월이후 국내 통신업계에 끊이지 않았던 디지털이동전화 기술논쟁을 떠올리며 『「결과」를 가지고 모든 것을 말해 주겠다는 각오 하나로 이를 버텨 왔다』고 말했다. 이들 연구진이지난 2년반동안에 걸쳐 일궈낸 CDMA기술은 말 그대로 불모지에서 거둔 값진 결실이었다.아날로그방식에 대한 노하우조차 빈약한 국내 현실에서 이룩해낸 신기술이기 때문이다. CDMA원천기술을 맨 처음 내놓은 미국도 아직 이를 상용화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이들의 결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지난 2년여동안 4시간 이상 잠을 자본 적이 없습니다.교통량이 적은 밤에는 현장 시험통화를 위해 새벽 6시까지 이동차량을 몰고 서울전역을 누벼야 했지요.흔들리는 차속에서 모니터를 응시하며 주파수상태를 점검하다 보면 30분도 못견디고 멀미를 하기 일쑤였습니다』 이들은 『CDMA시스템이 전혀 상용화된 전례가 없는 데다 무선국간의 원천기술만 들여다가 새 시스템을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에 피를 말리는 고통이 뒤따랐다』고 털어놨다. 이들은 이제 모토롤라·퀄컴·노키아등 세계 유수의 이통업체들이 경쟁적으로 우리 시스템개발기술을 배우기 위해 한국을 찾아오는 데다 우리 CDMA통신설비를 통신의 본고장인 미국에 수출하게 된 것을 가장 큰 보람으로 여기고 있다. 이들은 그러나 『첨단에 서는 것이 두려워 뒤만 따르려는 노예근성으로는 절대로 세계 최고가 될 수 없다』며 국내 통신업계도 이제 전자식교환기(TDX)와 CDMA개발을 교훈삼아 신기술창조에 전념해야 한다는 소신을 밝혔다.
  • KIST/오늘 창립 30돌… 그 발자취와 현주소

    ◎선진과기 산업화 경제도약 뒷받침/연구수행 6,184건… 아라미드섬유 개발 등 개가/5공땐 KIST에 통폐합·연구기능 박탈 위기도/모방·개량 탈피… 원천기술 연구로 재도약 모색 국내 최초의 정부출연연구기관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원장 김은영)이 10일로 창립 30주년을 맞았다.한국과학기술연구원은 이날 상오 10시 연구원내 존슨강당에서 기념식등 다채로운 기념행사를 갖는 한편 2000년대를 바라본 웅비계획인 「KIST 장기비전」을 통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세계 초일류 종합연구기관으로서 도약을 다짐하고 있다. KIST는 1966년 2월10일 과학기술 불모지였던 우리나라 산업계에 필요한 산업기술개발과 기술지원이라는 사명을 갖고 설립됐다.당시 국민소득 1백25달러,국민총생산 2억5천만달러이던 시대에 정부는 1천만달러라는 거금을 연구소에 서슴없이 투자할 만큼 전폭적인 지원을 보냈다. KIST의 과학자들은 국민적인 기대에 부응해 밤잠을 자지 않고 선진기술을 국내에 전수시켰으며 60년대에서 70년대에 이르는 「개발의 연대」에 산업기술개발을통한 공업현대화를 뒷받침하고 과학기술기반을 확충하는데 기여함으로써 경제성장과 과학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했다. 또 경제발전이 궤도에 오른 80년대부터는 차세대 첨단기술 개발에 나서 기업의 국제경쟁력 강화를 뒷받침하고 있다. 30년동안 KIST가 개발에 성공한 기술은 인체에 무해한 최적의 석면대체 섬유로 97년부터 4억달러 규모의 세계시장에 도전할 아라미드섬유를 비롯,오존층 파괴물질인 CFC의 대체물질,다이아몬드 카본코팅 VCR헤드드럼,니켈·크롬·텅스텐을 주원료로 한 초내열 합금,공업용 다이아몬드 합성,항생제 네틸마이신 합성,인공신장용 막형 혈액투석기,인공수정체 개발등 열거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많다. 그동안 연구수행과제 건수만 6천1백84건,기업화된 기술이 6백95건에 이르며 산업재산권 출원 1천7백83건,발표논문 4천2백39편등의 성과를 올렸다고 KIST는 집계하고 있다. KIST는 정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으면서도 연구원처우와 연구소운영은 자율적으로 시행한 새로운 개념의 「정부출연 연구기관」의 첫 모델로서 국내 산업계의 수요에 따라 해당분야 전문연구기관을 분화시켜 나감으로써 많은 연구소 설립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KIST가 영광의 세월만을 보낸 것은 아니다.국방기술등 한국의 기술자립의지를 희생하고 미국에 접근한 5공정권 아래서 KIST는 한국과학원과 통폐합돼 이름이 없어지는 비운을 겪기도 했으며(81년∼89년),6공시절인 92년 재차 시도된 정부출연연구소 통폐합과정에서는 연구기능이 없어질 뻔한 위기를 맞기도 했다.5·6공시절의 10년은 KIST발전이 발목을 잡힌 시련의 시기였으며 이는 곧 정부출연연구소를 비롯한 국내 과학기술계 전체의 위상이 곤두박질친 시기로 평가된다. KIST가 탄생 30돌을 즈음해 채택한 장기비전은 이같은 과거의 손실을 복구하고 나아가 21세기 첨단산업사회를 대비하기 위한 도약의 다짐으로 볼수 있다.KIST 장기비전은 기존의 모방개량기술에서 탈피,원천기술 개발을 지향함으로써 2000년대까지 세계 초일류 기관인 일본의 이화학연구소,미국의 아르곤연구소,독일의 막스 프랑크연구소와 같은 국가를 대표하는 연구소로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개혁은 연구소 의지대로 되는 것만은 아니다.여기서 정부와 고위 정책결정자들의 의지가 가장 중요한 변수중의 하나가 된다. KIST개혁을 주도하고 있는 김은영원장은 『연구원들은 연구소내에서 저녁식사가 일상화됐을 정도로 연구분위기가 성숙돼 가고 있다』면서 『KIST육성특별법 제정등에 국가차원의 관심이 절실하다』고 털어 놓았다. ◎「한국두뇌의 요람」 어떤 인물 거쳐갔나/전문인력 3천6백명 산·학·연 맹활약 KIST는 한국의 꿈과 희망을 양어깨에 걸머졌던 국가 종합연구기관이라는 위상에 걸맞게 지난 30년동안 내로라하는 「한국의 두뇌」들이 모여들었던 곳이다. KIST 설립작업을 맡았던 최형섭박사(전과기처장관,산업과학기술연구소고문)는 국내는 물론 미국 등지로 날아가 우수한 과학자들을 끌어모았다. 그동안 KIST가 국내 산업계·학계·연구소에 배출한 고급 과학기술인력은 3천6백명에 이른다.국방과학연구소에서 미사일개발을 맡았던 이경서박사(국제화재 해상보험 부회장),국내 반도체기술의씨앗을 뿌렸던 정만영박사(금호그룹 고문),콩박사로 유명한 권태완박사(인제대 교수),한국기계연구소장을 지냈던 김훈철박사(한국기계연구원 연구위원) 등은 대표적인 유치과학자로 꼽힌다. 초창기 유치과학자들은 대학교수의 3배가 넘는 급여,구내아파트 제공 등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이들 중에서도 이용태박사(삼보컴퓨터 회장),성기수박사(동명정보기술대 총장),경상현박사(전 정통부장관)등 당시 컴퓨터센터 「삼총사」는 국내 전자통신 기술의 선구자로 지금도 학계와 업계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밖에도 KIST출신 인사들로는 산업계에 여종기LG중앙연구소소장,이주형삼성전자전무,허수웅대륙정밀사장,안영옥OLIN사장,황규복한국부가통신회장 등 5백여명이 있다. 학계에는 전무식한국과학기술원석좌교수,유성재 중앙대교수,이동영서울대교수,김재관인천대교수,김춘수단국대교수,배무이대교수 등 9백명이 있고 연구계에 채영복한국과학기술한림원사무총장,한문희·민태익전생명과학연구소장 등 1천8백명이나 포진돼 있다. ◎KAIST와 어떻게 다른가/KIST 연구개발이 주목적·서울 소재/KIAIST 석­박사 교육기관·대덕 소재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한국과학기술원」(KAIST)을 구별할 줄 알면 그 사람은 과학기술계에 정통하다고 자부해도 좋다.그만큼 두 기관을 놓고 어느게 어느 것인지 헷갈리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KIST는 66년 「KIST」육성법에 의해 산업기술연구기관으로 설립됐다.5년뒤인 71년에는 과학기술 인력양성의 필요성이 제기돼 석·박사 교육기관으로서 한국과학원(KAIS,Korea Advanced Institute of Science)이 설립됐다. 두 기관은 81년 5공정권에 의해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란 이름으로 강제 통폐합된다.이때 「한국과학기술원법」은 남고 「KIST육성법」은 자연스레 소멸됐다. 하지만 첨단 산업기술이 일본등을 통해 물밀듯이 들어오면서 첨단 원천기술을 개발하는 종합연구소 설립의 필요성이 재인식되기 시작했다.KAIST안에 「연구본부」를 차려 싹을 키우던 연구조직은 마침내 87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란 이름을 찾아 독립하게 된다. 그러나 「KIST 육성법」은 복원되지 않았다.이것이 KIST가 KAIST에 대해 피해의식을 갖게되는 한 대목이다. 두 기관은 이름이 비슷할 뿐 아니라 경쟁하는 측면도 많다.KAIST는 교육기관이면서도 여느 대학과 마찬가지로 연구개발도 활발히 하며,KIST는 연구기관이긴 하지만 4백여명의 석·박사 학위과정 연구생을 받아들여 「서로 비슷해지고」 있다. 더욱이 KIST가 새로 바뀐 교육법에 따라 단설대학원을 설립하게 되면 대덕연구단지에 있는 KAIST에 비해 서울이라는 유리한 입지조건으로 우수한 학생들을 확보할수 있게 돼 요즘 두 기관의 신경전이 한창이다. 어쨌든 같은 정부출연기관으로서 「경쟁과 협조」관계에 있는 두 기관이 가장 싫어 하는 것은 상대방의 이름으로 잘못 불리는 일이다.영문으로 넉자인 KIST는 한글로는 아홉자인 한국과학기술연구원,영문으로 다섯자인 KAIST는 한글로는 일곱자인 한국과학기술원이어서 『영문으로는 짧은게 한글 이름으로는 길더라』는 한 언론계 인사의 구별법이 참고가 될수 있을 것 같다.
  • 신한국당 「공란 21곳」 속사정과 전망

    ◎미정 많은 TK지역 김대표 의견 반영될듯/서울 노원을 박종선·정형진/광진을 양지청·남상태씨 경합/강원 삼척 3파전 치열/인천 계양­강화갑 이승윤씨 추대 움직임 신한국당이 2일 1차공천자를 발표함에 따라 공천 미확정 지역은 21개가 남았다. 이 가운데는 대구 동을,전남 여수등 공천신청자가 없거나 함량미달인 지역이 5곳정도이며 나머지는 영입인사 배려지역 및 경합이 치열해 보류한 곳이다. 신한국당은 계속해서 이들 지역에 대한 정밀조사를 벌여 오는 6일 전당대회 전까지는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남은 지역의 공천자를 확정할 방침이다. 보류지역 공천과 관련,청와대의 한 고위관계자는 『경합지역에 대해서는 김영삼대통령과 김윤환대표위원이 전당대회전까지 협의해서 발표 할 것』이라고 밝혀 상대적으로 미확정지역이 많은 대구·경북지역에 대해서는 김대표의 의견이 반영될 것임을 시사했다. 서울의 미확정지역은 노원을·광진을·성북갑·서대문을 등 4곳.노원을은 박종선사회개발연구소실장이 공천될 것으로 거론됐으나 최근 정형진KIST부원장이 급부상해 우열을 가리지 못해 보류된 것으로 알려졌다. 광진을은 양지청국토개발연구원 연구위원과 지구촌신문창간 준비위원장인 남상태씨가 경합하고 있으나 양씨쪽으로 기울 가능성이 높다.성북갑은 심의석국책자문위원과 강종원당중앙상무위원 둘다 인지도가 낮아 공천이 보류됐다. 서대문을은 안성혁장애인고용촉진 공단이사장을 공천하려했으나 본인이 고사해 보류지역으로 남았다.당은 이들 지역에 대해 정밀조사를 거쳐 결론이 좋지 않으면 영입인사들로 채울 가능성도 높다. 대구의 수성갑은 이민헌전국구의원과 이원형전대구시의원이 경합했으나 당에서는 이 지역이 자민련의 박철언전의원과 겨루는 지역이라는 점을 감안,결정을 보류해 놓고 있다. 동을과 북갑은 대구의 반신한국당 정서를 반영하듯 신청자가 없어 비워 놓고 있다.당에서는 이수담전국구의원,이수성총리의 동생인 이수인전의원을 투입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인천 계양·강화갑은 지구당원들이 이승윤전부총리를 추대하려하고 있어 이전부총리가 외유에서 돌아오면 출마를권유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경기 평택갑은 김영광의원과 민주계에서 지원하고 있는 원유철21세기 황해포럼대표가 팽팽한 접전을 벌여 판단이 보류됐다. 부천오정은 오성계위원장에 대한 여론조사결과가 높지 않게 나와 보류된 지역이나 별달리 대안이 없으면 오위원장이 공천될 것으로 보인다. 강원의 삼척은 김정남의원과 신현선새마을금고이사장,진경탁국회연구실장이 여론조사 결과 팽팽한 접전을 벌여 판단이 보류됐다. 홍천·횡성도 이응선전의원과 이상용전강원지사의 우열을 가리지 못해 역시 보류지역으로 남았다. 이밖에 전북 군산갑,전남 여수등은 마땅한 후보자가 없어 당은 인물 영입에 고심하고 있다. 다른 지역보다 보류지역이 많은 경북은 사정이 복잡하다.경주갑은 김대표등 민정계의 지원을 받는 황윤기의원과 민주계가 미는 정종복전검사가 맞서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다.영주·영풍은 당에서는 장수덕국제화학연구소회장을 공천하려 했으나 지구당위원장인 금진호의원이 미는 김준협전신탁은행장과의 조직분규가 예상돼 보류지역으로 묶여있다.김천은 이미 불출마를 선언한 박정수의원이 윤성태전의료보험조합이사장을 지원하고 있으나 당에서는 정해창전대통령비서실장을 염두에 두고 공천자를 확정하지 않았다.신한국당은 분위기를 보아가며 정전비서실장의 영입을 시도할 것으로 보인다.울진·영양·봉화는 지역구가 합친 관계로 영양·봉화지역의 강신조의원과 울진의 김광원위원장이 지역대결을 벌이고 있다.경산·청도는 이영창의원과 박영봉씨,박재욱경북여전학장이 팽팽한 접전을 벌이고 있다. ◎의외의 공천자 누구인가/서정호 4선의 신상식의원 눌러/홍준표·강신성일·이방호씨 낙점 눈길 2일 하오 당무회의에서 발표된 신한국당 1차공천자 2백32명의 명단에는 예상치 못했던 의외의 인물이 곳곳에 끼여 있어 막판 경합과 반전이 치열했음을 여실히 드러냈다. 여권 핵심부에서 「히든 카드」를 내놓기 위해 고심한 흔적도 곳곳에서 감지된다. 통일민주당 전문위원출신으로 젊은 당료로는 유일하게 공천을 받은 서정호(39)당연수원교수는 4선의 거물 신상식의원(59)을 누르고 경남 밀양의 공천을 따내 이변으로 기록됐다.지역여론이 워낙 좋았다는 후문이다.김대통령의 고향인 경남 거제에 민주계 중진 3선인 김봉조의원(58)대신 그동안 끊임없이 설로만 나돌던 김대통령의 핵심측근 김기춘전검찰총장(56)이 낙점된 대목도 눈에 띈다.김전총장은 김대통령 집권 후반기에 요직에 기용될 것이라는 소문도 나돌고 있다. 15대 총선부터 선거구가 통합조정된 경북 문경·예천에 서울지역 재입성을 노렸던 황병태전주중대사(61)가 이승무(문경·52)·번형식(예천·62)두 현역의원을 누르고 공천을 따낸 것도 다소 의외로 받아들여진다.13대 공천에서 탈락,이변을 낳았던 민정당 대표위원출신 권익현전국구의원(62)이 경남 산청·함양에 입성한 부분도 두드러진다.지역 거물로 지지기반이 탄탄해 당선 가능성이 높다는 평이다. 서울 송파갑에 홍준표변호사(42)가 낙점받은 것도 종전과 달리 개혁성향이 강조된 수도권지역의 공천기준을 입증하고 있다.13대총선에서 강신영이란 이름으로 서울 용산에 출마했다가 탈락한뒤 신한국당의 불모지 대구 동갑에서 이름까지 바꿔가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 명문 경북고 출신 강신성일영화배우협회 상임고문(58)의 공천도 이채롭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몸이 불편해 지역구 공천이 의문시됐던 심재철당부대변인(38)도 과거 투쟁경력과 개혁성향이 평가돼 안양 동안갑에서 공천자 대열에 끼였다. 경남 진해에는 지난 지방선거때 무소속후보로 선전한 해군교육사령관 출신 허대범국방대학원군사연구위원(60)이 공천장을 거머쥐었다. 삼천포 수협조합장 출신으로 수협중앙회 초대 민선회장에 출마해 여러 경합자들을 물리치고 당선,파란을 일으켰던 이방호씨(51)가 경남 사천지역에 발탁된 대목도 특징이다.당시 투표에서 그가 보여줬던 「파괴력」을 당지도부가 높이 평가한 것으로 전해졌다. ◎여 공천탈락자 반응·움직임/7­8명 “무소속 출마” 반발/김동권의원 등 일부는 자민련 입당 시사 신한국당의 1차공천자가 2일 발표되자 공천에서 탈락한 현역의원들과 지구당위원장들을 중심으로 반발움직임이 두드러지고 있다.일부는 여의도 당사에 직접 찾아와 격렬한 항의를 하는가 하면 일부는 아예 무소속 출마 채비를 서두르며 분풀이를 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탈락의원들은 무소속 출마의사를 굳힌 경우가 많고 일부 경북지역출신 탈락자들은 자민련을 기웃거리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이번 공천에서 탈락된 현역의원은 불출마를 선언한 16명을 제외하면 모두 18명이다. ○분풀이 출마 별려 서울 마포을을 희망했던 강신옥의원(전국구)은 『공천심사는 형식적이라 아예 공천신청도 하지 않았다』면서 『앞으로 탈당기자회견을 갖고 무소속으로 출마하겠다』고 밝혔다.서초갑에서 최병렬전서울시장에게 밀린 김찬진위원장측은 『모처에서 탈락 연락을 받았다』면서 『어떤 배려가 있을 암시는 있었으나 그게 제대로 안되면 다른 방안도 강구하겠다』며 무소속출마도 고려중임을 시사했다.중랑을에서 탈락한 이연석의원(전국구)은 무소속출마를 굳힌 것으로 알려졌다. ○“아예 신청 안했다” 부산 서구의 곽정출의원은 『이번 공천은 공당의 공천이 아니라 사당의 공천』이라면서 『보름전부터 무소속출마를 결심하고 표밭을 갈고 있다』고 말했다. ○낙하산식 공천 비난 또 강서에서 탈락한 송두호의원은 『아무나 낙하산식으로 오면 당선되겠느냐』면서 『무소속으로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다짐했다.정상천(중·동),허재홍의원(남갑)등도 『공천에 구애받지 않고 무소속으로 출마,지역구민들의 심판을 받겠다』고 반발했다.구속중인 허삼수의원은 측근들을 통해 옥중출마의사를 전했다. ○금진호의원 불출마 경기 과천·의왕에서 안상수변호사에게 공천을 빼앗긴 박제상의원은 이날 중앙당사를 방문,탈당을 선언하면서 『지역에 한번도 다녀간 적이 없는 이방인 낙하산 공천자가 겪어야 할 정치적 한계를 확실히 보여주겠다』고 언성을 높였다. 경북 의성의 김동권의원은 『지역정서상 공천에 떨어진 것이 그리 억울하지도 않다』면서 『조만간 자민련에 입당해 출마하겠다』고 주장했다.이틀전 지구당원들을 동원,한차례 항의시위를 벌였던 번형식의원(문경·예천)은 『성격상 자민련이 맞지 않지만 며칠전 자민련 핵심 당직자를 만났다』고 자민련 입당을 시사했다.그러나 노태우전대통령의 동서인 금진호의원(영주)은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경남의 권해옥의원(거창·합천)은 『지역에서 분개하고 있다』고 전하면서 『그러나 아직 출마여부에 대해서는 결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신상식의원(밀양)도 측근들이 출마여부를 결정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배명국의원(진해)은 『당을 위해 피눈물나는 노력을 했는데 이런식으로 공천할 수 있느냐』면서 『앞으로 지구당원들과 시민의 뜻에 따르겠다』고 반발했다. 강원의 유종수의원(춘천을)은 『나눠먹기식 공천이 있을 수 있느냐』면서 무소속출마를 시사했다.
  • 무용가 이정희씨(이세기의 인물탐구:90)

    ◎영적 표현이 자연스런 「거리의 춤꾼」/긴 연습·강훈련으로 무대마다 진한 메시지/「또 하나의 나」로 데뷔… “현대무용 불모지” 한때 좌절/“4월엔 한라·지리산 거슬러 오며 「거리의 춤」 출 것” 이사도라 던칸은 샌프란시스코 바닷가에서 태어났다.그리고 춤에 대한 그의 최초의 관념은 「파도와 리듬」이다.던칸은 언제나 주변풍경과의 하모니를 생각하며 춤추어 왔다.대상과의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낱 거짓 움직임에 불과할 것이다. 이 시대의 춤꾼 이정희는 눈이 시리도록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맨발로 춤춘다.도심을 흐르는 강물,머리위로 부는 바람,별이 빛나는 하늘아래서 그곳에 모인 군중의 숨결과 나뭇가지의 흔들림,바람과의 조화를 꾀하며 호핑(도약)과 스키핑(가볍게 점프),이단 도약 삼단도약을 활기차게 구사한다.그 때마다 그의 춤은 움직여서 넘치지 아니하며 멈추어서 모자라지 않는다.음악의 광선과 진동이 육체의 회로를 가로질러 샘물처럼 흘러넘치듯 가장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영적 표현을 창출해낸다.이 때의 역동적인 동작선은 사방으로 확산되지만 결코 안으로 소멸되지 않는다.한을 품어도 흥을 버리지않고 흥겨운 가운데 칙칙한 한이 스며있는 것이 인상적이다.이를 가리켜 박용구씨는 「시간과 공간속에서 그의 육체의 언어는 끊임없이 살을 풀어나간다」고 말한다.「살을 푼다는 것은 액땜이지만 그의 춤은 액을 풀어헤쳐 탈이 난 것을 물리친다는 뜻」이 내장되어 있다.땅위에 엎드린채 온몸을 뒤집고 뒹굴고 요동치면서 「대지와의 교감」속에서 「한단계 고양된 삶」을 성취해내려는 것이다. ○흥겨움속 한 스며있어 그중에서도 그의 「살풀이」시리즈는 인간의 탄생을 원천적으로 파헤치면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비극성과 모순성」 일상적인 고뇌와 권태감의 실상을 반영한 사회적인 춤이라고 할수 있다. 일그러진 현대인의 얼굴,오늘의 기계화되고 산업화된 인간의 삶의 풍경을 「극무용적」으로 연출하여 「달리고 뛰쳐오르고 가볍게 뛰는」 모든 동작은 「무용」이며 모든 움직임이 「언어」임을 일깨운다.그리고 「누구든지 어디서나 춤출 수 있다」는 신념으로 변화 가운데 질서를 유지하고 질서 가운데 변화를 유지한다.그러나 그는 하나의 주제에 천착하거나 무대라는 일정한 공간에 얽매이지도 않는다. 이른바 뉴욕의 현대무용가인 루신다 차일즈의 거리춤,데보라 헤이의 도시의 춤에서 연유한 그의 거리의 춤 「봄날 문밖에서」는 운동복과 운동화 트레이닝을 입고 한강변이나 바닷가나 산자락을 배경으로 힘차게 도약한다. 그는 언제 만나도 조용하고 차분하다.아무리 큰 사건도 나직한 목소리로 핵심만을 말한다.마치 2차대전시절의 샹송가수처럼 전쟁의 참상과 부조리,뼈저린 슬픔을 참고 견디는 감연한 의지와 인간을 감싸안는 부드러운 자세로 노래부른다.그래서 그의 육체의 언어(가사)는 그냥 춤추는 것이 아니라 춤을 「의식」하고 「자유롭기 위해」「대지를 느끼기 위해」 춤출 뿐 아니라 「왜 춤추는가」 무엇을 어떻게 출 것인가」를 확고히 정하고 춤을 실천시킨다. 그의 방배동 연습실에 가보면 평소의 온화한 이정희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이마에 머리띠를 질끈 동여맨 밴디드댄서가 되어 그는 단원들에게 「척추의 마디마디가 수직상태가 되도록 몸을 길게 늘리고 신선한 산소로 육체를 일으켜 세우라」고 열정적으로 채찍을 가한다.그래선지 강훈련과 긴연습끝에 올려진 그의 무대는 그 때마다 진한 메시지와 함께 관객으로 하여금 심오한 사색에 잠기게 한다.「짙은 먹구름짱에서 벗어나 화사한 마음의 의상을 입고 그는 원과 원을 돌면서 원이 좁으면 원밖에서도 음악과 주변과의 관계를 조화시켜 절묘한 작품을 보여준다」는 김영태의 말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언제 만나도 차분한 사람 미국유학시절 광주민주항쟁에서 죽은 한 젊은이의 사진을 보고 구상했다는 「살풀이­80」은 「사람이 다른 상대방을 학살하고 사형한다는 것은 참으로 있을 수 없는 비극」이며 「다시는 이땅에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말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원」을 담아 젊은 넋을 위로하고 고통을 뿌리치는 제의식을 섬뜩하게 이어나간다. 귀국직전인 80년 뉴욕 소호의 포퍼밍 개리지에서 이 춤을 선보였을 때 그해 댄스 매거진(10월호)은 「삶과 죽음,빛과 어둠이 윤회하는 경이적 율동」으로 호평했고 지난 10년동안 한해도 거르지 않고 줄기차게 춤추더니 3년전 아홉개의 시리즈로 이를 완결했다. 그는 편안한 가정의 1녀2남중 장녀로 태어났다.「가랑잎만 굴러가도」 잘웃고 잘우는 서정적인 성격에다 숭의여중에 다닐 때부터 그림을 그리고 발레를 추었다.고교 2학년이 되던해 마침 한국에 왔던 호세 리몬의 공연을 보고 그는 「미진했던 발레에 대한 감정」을 미련없이 버렸다.그 때까지는 튀튀와 토슈즈를 신고 필루트(회전)와 아라베스크를 취하는 것만이 춤인줄 알았으나 고도의 테크닉을 요구하는 인공적인 훈련과는 달리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현대무용이야말로 정신의 비전을 반영할 수 있는 창조의 원심력임을 깨달았다. 대학 졸업작품인 「또하나의 나」로 무용계에 데뷔, 「별빛 같은 6인의 신인 무용가」로 선정되기도 했으나 현대무용이 정착된지 10년도 못되는 한국적 현실에서 그가 뛰어넘기엔 너무나 「벅찬 벽」과 「험산」을 느끼자 71년 도일,의상디자이너나 되자고 마음먹었으나 춤의 혼령이 끈질기게따라붙어 그를 끊임없이 부추겼고 길거리에 나붙은 춤공연 포스터만봐도 전율 같은 율동이 전신을 관통하는 아픔을 느꼈다. 「춤이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내가 춤을 버린 것」을 자각하고 1년만에 다시 귀국,친구의 무용발표회에 가서 불꺼진 객석에 앉아 「솟구치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채 하염없이 흐느껴 울면서」그는 꺼져가던 춤의 불씨를 서서히 되살렸다. ○광주항쟁 사진 보고 구상 30세 되던해 미국에 유학,뉴욕에서의 3년간은 그곳의 살아있는 춤의 열기로 인해 무용의 신은 당연히 그를 향해 미소지었고 언제부턴가 그는 「춤추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춤추지 않았던 시절은 사라져버리라」고 외칠 수 있게 되었다.비디오 아티스트인 이동현씨(44)와 84년 뒤늦게 결혼,「춤과 비디오의 만남」의 작업을 함께 하면서 나이 40살에 첫딸 루다(9),5년후 둘째딸을 낳았다. 지난해엔 북경·말레이시아를 돌며 공연,오는 4월에는 멀리 한라산 끝자락에서 지리산·설악산을 거쳐 북으로 거슬러 올라오면서 거리의 춤「봄날 문밖에서」를 춤출예정이다. 「댄서는 모름지기 자연과의 하모니속에서 공기나 빛이나 음악처럼 춤춘다」는 던칸의 말대로 그는 모든 자연속에 새처럼 자유롭게 춤추어왔고 이제부터는 「인생을 위해」 그리고 자연의 일부가 되어 그의 「숨을 춤추게」하면서 춤추고 난 자리에 불꽃의 항적(항적운)을 남기고 싶은 것이다. ▷연보◁ ▲1947년 서울 출생 ▲1970년 이대 무용과 졸업,송범 육완순사사,한국컨템포러리 무용단 멤버 ▲1975년 이대 대학원졸업,창작무 「꼭두인간」 발표 ▲1977년 「누군가 내 영혼을 부르면」안무 출연,중앙대·연대 출강,도미,마사그레이엄·머스커닝햄무용학교 및 호세리몬 엘빈에일리테크닉사사 ▲1980년 뉴욕데뷔고야연 「살풀이­80」(퍼포먼스 개리지),귀국공연 「살풀이­하나」,중앙대교수,대한민국무용제 참가이후 매회 참가 ▲1982∼92년 「살풀이­셋」부터 「살풀이­9」 발표,현대무용제참가 ▲1984년부터 거리의 춤 「봄날 문밖에서」(서울 삼호아파트단지,덕수궁,마로니에공원,여의도광장,국립극장분수대 등),제1회청소년예술제참가▲1986년부터 부군 이동현과 「춤과 영상과의 만남」(6차례 공연) ▲1987년 한국현대춤작가 12인전 「낙원추방」 발표이후 해마다 참가,거리의 춤 미국공연(뉴욕센트럴파크,그랜드캐니온 하와이와이키키해변 등) ▲1988년부터 솔로 「검은 영혼의 노래」연작발표 시작 ▲1989년 비엔나 국제안무 경연대회베스트9 참가(비엔나 오데온극장),이정희·남정호 포스트모던댄스 공연 ▲1990년 「현대춤과 현대미술의 만남」(국립현대미술관) ▲1993년 지방순회공연(광주·대전·부산 및 서울 예술의 전당),JADE(재팬 아시아댄스 이벤트)93 독무 「미사키절벽」 발표(도쿄 아키다) ▲1994년 중국 북경무용원 초청 및 말레이시아공연.「우리시대의 춤꾼 이정희」(서울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 ▲현재…중앙대교수,한국현대춤연구회회장 ▲수상…대한민국무용제안무상 및 개인상(80·81년)비엔나국제안무경연대회 안무상(89)년 올해최고예술가상)92년
  • 불 사회과학대학 한국학 석좌교수직 설치/유럽대학으론 처음

    ◎한국 국제교류재단서 1백만불 기금/“한·불 역사­문화 인식 향상의 새 전기로”/개설 이끈 손주환본사사장 등 60여명 기념식 유럽 대학에서 처음으로 한국학 석좌교수직이 생겼다. 프랑스 국립 사회과학대학원(EHESS)은 24일 파리시내 대학부속 아시아관에서 한국학 석좌교수직 설치 기념식을 가졌다.이날 석좌교수직 설치는 한국의 국제교류재단이 1백만달러의 한국학 진흥기금을 대학원측에 전달한데 따라 이뤄진 것이다.한국학 석좌교수직은 이 대학 한국학연구소소장인 정성배교수가 맡게 됐다.앞으로 담당교수가 변동되더라도 한국학 석좌교수직은 계속 보장되기 때문에 한국학 연구가 영구화될수 있게 됐다. 사회과학대학원의 한국학 석좌교수직 설치로 한국학 연구가 유럽지역에서 본격화돼 21세기 한국학 발전의 터전을 마련했다.사회과학대학원은 프랑스 최고 엘리트 코스중의 하나로 학부과정없이 석사 및 박사과정만 개설해 놓고 있다. 한국의 국제교류재단은 한국학 불모지인 프랑스에서 한국학을 진흥하기 위해 지난 94년 사회과학대학원과 한국학 석좌교수직 설치에 합의,1백만달러의 기금을 제공하기로 했으며 동시에 대학원측도 이에 상응하는 기금을 한국학과에 지원하기로 합의했었다. 국제교류재단이사장 재직당시 프랑스정부 및 대학원측과 협의를 거쳐 석좌교수직을 설치키로한 손주환서울신문사장은 이날 기념식사에서 『프랑스 최고명문인 사회과학대학원에 한국과 프랑스의 공동투자로 한국학 석좌교수직이 설치된 것은 프랑스 대학에서 한국학이 더욱 발전하고 굳게 뿌리를 내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것』이라며 『나아가 프랑스 국민들이 한국이해를 증진시키고 양국관계 발전에 공헌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손사장은 또 『이를 계기로 두 나라 국민간의 이해를 높이는 노력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며 『국민간의 이해증진은 상대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이런 몫은 대학이 담당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날 기념행사에는 자크 르벨 총장,마크 오제 전 총장 등 프랑스 및 한국인사 60여명이 참석했다.
  • 민주 이기택고문,해운대 출마 선언

    민주당의 이기택고문은 10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15대 총선에 부산 해운대구에서 출마하겠다고 밝혔다. 이고문은 『지난 35년동안 정통야당의 맥을 이어온 야당의 지도자로서 내 모든 정치 역정을 부산시민들에게 심판받겠다』고 말했다. 이고문은 『전통야도였던 부산을 더이상 야당의 불모지로 남겨둘 수 없어 출마를 결심했다』면서 『나를 7선의원으로 키워준 부산시민들의 냉철한 판단을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 정부출연연구소 활성화(G7으로 가는 길:2)

    ◎외국기술 모방·개량 중심체제 탈피/독창적 프로젝트 개발… 특성 살려야/기초과기 연구 선도체제 갖춰야/산·학·연 인력순환… 유기적 연구활동 보장/「창의적 연구」 적절한 평가로 사기 진작을 지난해에는 서울대 출신의 물리학박사가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해서 화제가 됐다.그것도 거의 해마다 노벨상 수상자를 내 온 미국의 명문 버클리대에서 학위를 받은 사람이었다. 이 「사건」은 과학기술계에는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기회가 있을 때마다 고급인력 부족을 지적해 왔던 터에 이토록 우수한 인재를 붙잡지 못한데 대한 자탄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의 전공은 생물물리.생물학과 물리학이 난해하게 얽힌 이 생소한 학문은 외국에서도 최근에 와서야 연구에 눈을 뜬 첨단분야다.그런 만큼 국내에서도 열심히만 하면 선진국들과 어깨를 견주며 창의적 연구성과를 낼 수 있는 유망분야인데도 우리 연구계는 이를 수용할 만한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현재 정부가 출연금을 대고 있는 이공계 연구소는 모두 24곳.최초의 정부출연 연구소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을 만들어 국가의지로 과학기술을 키워온 지는 올해로 꼭 30년이 된다. 그런데도 한국은 아직 노벨상에 있어서는 「노메달」국가에 머물고 있다.노벨상은 고사하고 해마다 각국에서 7백명씩 올라가는 후보명단에도 한국인 과학자는 단 한번도 낀 일이 없다는 사실은 세계 12위 수준의 경제대국임을 자부하는 현실과 어떻게 비교설명해야 하는 것일까. 그 해답은 당초 정부출연연구소의 설립목적에서부터 찾아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정부출연 연구소가 60년대 경제개발시기에 「산업계 지원」이라는 실용적 임무를 띠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들 연구소는 지난 30년동안 기술불모지나 다름없던 국내 산업현장에 외국에서 배우거나 모방개발한 기술을 열심히 이전해 주었다.국내 산업계는 이를 바탕으로 생산한 상품을 수출함으로써 오늘날 국민소득 1만달러를 구가하는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전전자교환기 TDX,초고집적 반도체 등 수출업계의 효자노릇을 하고 있는 많은 기술들이 정부출연연구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정부출연연구소들이 80년대와 90년대에 이르러 국내외 환경변화에 효과적인 대응을 해왔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이 시기는 내부적으로는 민간부문의 기술수준이 점차 발전하고 기업 부설연구소의 규모와 숫자가 증가함에 따라 초기의 정부출연연구소들이 담당했던 외국기술의 단순모방이나 개량과 같은 기술개발활동이 민간기업 내부에서도 해결될 수 있게 된 시기였다. 따라서 70년대에는 정부출연연구소 연구자금의 80%를 민간부문에서 조달하는 형편이었으나 80년대를 넘어서면서 역전돼 이제는 80%를 정부에서 조달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이에 따라 상대적으로 많은 연구비를 출연해야 하는 정부가 투자효율을 따지기 시작했으며,정부출연연구소의 역할을 재정립하기 위해 몇차례의 통폐합조치를 단행하기도 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정선호박사는 『정부가 바뀔 때마다 거듭된 연구소 통폐합이 국가전체 시스템을 고려한 기술개발 전략없이 수행되는 바람에 정부출연연구소의 역할 재정립을 지연시킨 것은 물론,연구원의사기마저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면서 창의적 기술개발을 선도해야 하는 공공연구소의 위상까지 흔들어 놓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세계의 모든 기업들이 자유롭게 경쟁하는 세계무역기구(WTO)체제 아래에서는 일류기술을 바탕으로 한 일류상품이 아니고서는 생존하기가 어렵다』고 전제하고 『강대국의 기술보호가 강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일류상품을 만들자면 기술개발의 기본방향을 과거의 모방개량연구에서 창의적인 연구개발로 전환하고 제조기술은 민간기업이,기초과학 및 원천기술은 정부연구소가 이를 선도하는 역할정립이 신속히 이뤄져야 하는데도 10년동안 정책의 혼란이 되풀이 됐다』고 밝혔다. ○연구소 통폐합 잦아 현재까지도 정부의 연구과제는 대부분 산업체가 함께 참여하는 조건아래서만 연구비가 지원되며 정부출연연구소는 산업계로부터 연구수탁을 많이 받아야만 연구소재정이 해결되는 계약경영체제를 유지하고 있다.이같은 체제는 자유로운 연구분위기는 물론 국가차원의 기술개발 체제에도 많은 문제점을 가져오고 있다. 무엇보다 연구원들은 연구자체보다 연구과제를 따내는 작업에 시간을 소비하게 된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지적이다.최근 미국에서 귀국한 한 연구원은 『미국에서는 근무시간의 70%를 연구에 보내고 30%를 보고서작성에 보냈는데 한국에서는 거꾸로 70%를 연구기획서 작성과 회의에 매달리고 있다』고 연구시간 부족을 하소연했다. 다음으로 이 체제는 결과가 확실한 연구만을 하게 함으로써 창의나 모험연구를 회피케 하는 부작용이 있다.즉,백화점식으로 이것저것 연구과제를 수행,연구활동의 우수성에도 불구하고 국가 전체적으로는 기초과학과 원천기술 분야에서 상대적으로 낙후하는 현상을 가져오게 된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정책연구소 김영우소장은 『한국도 이제 창조적 프로젝트를 수행할 시점에 왔다』고 진단하고 『이를 위해서는 연구원이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분위기조성이 중요하며 올해부터 시작될 추천연구원제도와 스타프로젝트는 그 작은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추천연구원제도는 국내 연구사상 최초로 창의적 연구를 수행할 젊은 연구원 20명을뽑아 한해 1억원씩 3년동안 안정적 연구비를 지원하는 제도.스타프로젝트는 연구소의 특성과 전문성을 살린 창의적인 대형연구사업이다. 김소장은 『지금처럼 연구소 인력만 대학으로 빠져 나가는 일방통행방식이 아닌 쌍방통행식의 산·학·연간의 인력순환이 이뤄지고 실패확률이 높은 「창의적 연구」에 대한 적절한 평가제도를 수립해야 연구활력이 되살아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모험연구 회피 부작용 올해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창의적인 젊은 두뇌들의 순수과학 연구기관인 고등연구원이 설립되고 감성공학,핵융합 등 기초과학이 G7프로젝트에 신설돼 창조적인 연구분위기가 서서히 일게 될 전망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자들은 모처럼 조성된 이 분위기가 모든 제도에 적절히 반영돼 좀더 자유롭고 안정적이며 자율적인 정부출연연구소를 가꿔나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전문가 인터뷰/「KIST 2000」 프로젝트 추진 김은영원장/“세계수준의 원천기술 개발에 전력”/“5∼6년뒤 입체TV 핵심기술 등 선사” 『두고 보십시오.앞으로 5,6년 뒤면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이 우리나라 전자산업계에 멋진 입체TV 핵심기술을 선사할 것입니다』 국내 과학기술계에서 일찌기 창의적 연구의 필요성을 외치며 「KIST2000」프로젝트를 추진해온 김은영KIST원장(59). KIST2000 프로젝트는 김원장이 종래의 구멍가게식 연구과제를 훌훌 털고 최소한 5∼10년을 내다보는 창의적인 기초·원천기술 개발을 목표로 마련한 대형 장기프로젝트. 그는 93년 최초의 KIST 연구원출신 원장으로 취임하자마자 『한국 과학기술의 메카인 KIST가 이대로는 안된다』는 위기의식을 갖고 이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KIST는 전통적으로 산업체와 계약연구를 수행하던 기관입니다.그러나 기업체와 함께 일하다 보니 기업의 관심분야만 연구하게 되고 프로젝트숫자만 많아지면서 만물박사처럼 깊이가 없어지는 겁니다.민간연구소도 많이 생겼는데 국가적으로도 큰 낭비지요』 그는 선도성이 강하고 기술적 파급효과도 큰 원천기술 몇개를 개발해 세계수준에 올려 놓겠다는 계획아래 5개의 대형 과제를 선정했다.3차원 영상시스템,휴먼로봇 시스템,의과학기술,멀티미디어 미래소자,신소재 공정연구과제가 그것이다.한번 정한 것은 강력하게 밀고 나가는 그의 추진력 덕분에 정부예산도 50억원이나 확보,KIST2000 프로젝트는 94년부터 발진시킬 수 있었다. 입체TV기술은 3차원 영상시스템의 한 활용분야다.기업체들이 고선명TV(HDTV)기술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을때 이보다 한발짝 더 나아가 입체TV라는 차세대 기술을 생각한다는 것이 그가 말하는 창의적 연구,선도적 핵심기술 개발의 요체다. 『우리나라가 모방개량기술을 갖고 국민소득 1만달러에 도달했으나 일본의 3만5천달러 수준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아직 멀었습니다.창조적인 기초과학과 신규성을 지닌 원천기술을 개발해야 합니다』 일본도 겨우 2∼3년 전 이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으니 우리로서는 너무 이른 것이 아니냐 하는 반론도 있지만 『우리는 쫓아가는 처지라 더 바쁜 상황이며 정부재정도 이를 충분히 감수할 만하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김원장은 창의성의 발휘를 위해서는 정부의 출연연구소 지원제도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지금처럼 연구원들이 관련부처를 찾아 다니며 연구과제를 주워 모아야 하는 체제는 시간낭비,연구비낭비가 많아 오히려 창의적 연구를 저해할 우려가 많기 때문에 정부가 연구비를 일괄지원하는 미국의 내셔널랩(국가연구기관)체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원장은 서울대 화공과 및 대학원을 거쳐 독일 다름슈타트공대에서 고분자를 전공,공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KIST설립 이듬해인 67년 KIST에 들어와 KIST개혁을 이끌고 있다.
  • 파리 7대학 한국학 과장 최승언 교수(세계속의 한국인:5)

    ◎「한국학 불모지」서 한국어 심기 15년/69년 석사취득후 도불… 학부부터 다시 공부/정식교수론 단 한명… 불 교육계에서도 인정/부친은 문학평론가 최재서씨… 누님도 미서 한국학 가르쳐 서울과 파리의 거리는 1만4천여㎞(8천7백12마일).비행기를 타고도 14시간을 쉬지않고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머나먼 거리다. 그런 파리에서 두나라 사이를 가깝게 하는 가교역할을 하면서 프랑스와 세계에 한국을 심는 사람이 있다.파리7대학의 한국학과 최승언(50)학과장.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파리시내를 수놓은 지난 19일 파리동쪽에 위치한 파리7대학의 강의실.12명의 프랑스 학생의 파란눈은 최교수의 한국어강좌에 집중됐다. 최교수가 「너」와 「당신」의 미묘한 차이를 설명하자 「합니다」와 「하십니다」의 다른 점이 무엇이냐는 날카로운 학생들의 질문도 이어졌다.파비앙 뷔트군(20)은 한국어를 배우는 이유를 『희귀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뷔트군의 말처럼 한국은 프랑스 뿐 아니라 유럽에서 희귀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아직은 먼나라다.88서울올림픽과경제성장으로 많이 알려지기는 했지만 지리적 괴리만큼 아직도 여전히 「조용한 아침의 나라」로 인식되고 있는 현실이다. 남한과 북한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가 하면 심지어 3개월이상 머물려면 반드시 받아야 하는 체류증에 국적을 「북한」으로 기재해 발급해주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학생들 수업태도 진지 이런 한국의 불모지 프랑스에서 최교수는 외롭게 한국과 한국어를 심어 나가고 있다.프랑스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곳은 몇군데가 있지만 모두 더부살이를 하는 상태다.동양학연구소(INALCO)에서는 일본·한국학과이고 리옹대학과 보르도대학에는 한국어 강좌만 개설돼 있을 뿐이다. 파리7대학 한국학과는 독립된 과로서는 유일한 교육기관이고 현재 한국인 정식교수는 최교수 혼자다.그의 실력은 한국인 사회만이 아니라 프랑스 교육계에서도 그대로 인정받고 있다. 파리4대학의 로제총장이 아는 한국인 교수의 이름은 최교수밖에 없고 파리7대학의 드동데 문과대학장은 『최교수의 실력은 탁월하다』고 높이 평가한 것으로 전해진다.그의이런 실력은 남들과는 전혀 다른 학문적 역정에서 비롯된다.최교수는 박사논문을 쓰다가 어느 날 갑자기 다시 대학생으로 공부를 시작했다.서울대불문과에서 학사·석사학위를 받고 69년 프랑스에 도착해 툴루즈대학에서 3년동안 박사과정을 밟다가 다시 대학교 학생생활로 불어를 처음부터 공부했다.학위만 받으면 열리는 순탄한 대학교수의 길을 마다하고 스스로 바닥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한 셈이다. ○서울대 교수직 사양 『박사과정에 있으면서도 교수의 강의를 듣고 노트 필기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실력으로 논문을 쓰고 불문학을 공부한다는 사실이 창피하고 프랑스문화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자괴심 때문에 대학교 학부생활을 다시 하게 됐다』고 최교수는 설명한다.요즘도 수업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박사논문을 써내 당당히 대학교수가 되는 적지않은 유학생들에게도 그의 이런 「용기있는」 행동은 귀감이 될 것 같다. 예비교수에서 대학생이 된 그는 프랑스학생들과 함께 밤새워 공부하고 치고박고 싸우기도 하면서 학사와 석사·박사학위를 받아냈다.지난 79년 박사학위를 받기까지 걸린 시간은 파리에 도착한지 꼭 10년.그만큼 그의 학위는 노력과 땀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문학적인 감수성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프랑스를 완벽히 이해하는 몇 안되는 불문학자 가운데 한사람이다.또 이런 실력이 프랑스 학생들에게 수업을 하고 동료 프랑스인 교수들과 당당히 맞설 수 있게 한 힘의 원천이다. 최교수는 박사학위를 받은뒤 서울대 불문학과 교수로 초빙됐으나 개인적인 이유등으로 서울대 교수직을 마다하고 지난 82년부터 이국땅에서 한국학을 가르치고 있다.이런 보기드문 경력등으로 파리교민사회에서 그는 「기인」으로 꼽힌다.교수로서의 권위보다는 학자로서의 「최교수」일 뿐이다.번드르한 각종행사에 초대받아도 가지 않고 교수로서의 직업에만 충실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이런 행동에는 영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부친 최재서(1908∼1964)씨의 영향이 많았던 듯하다.최교수는 주지주의적 비평을 시도,한국문학사에 과학적 비평방법을제시한 최재서씨의 4남2녀중 막내이다.바로 위 누님 양희씨(62)도 미국 캔버라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쳐 한국어학 가족을 이루고 있다. ○학생유치 적극 활동 그의 수업법은 독특하다.언어학이나 문학을 가르치기 보다는 한국어를 가르친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예를들어 『설렁탕 한그릇 주세요』라는 표현이 학생들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도록 한다.수업을 받은 학생들의 입에서는 한국어가 스스럼없이 튀어나온다. 최교수는 학생들의 문학이나 언어학적 소질이 자신보다 뛰어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 학생들에게 한국과 한국어 이해능력을 심어주는 데 중점을 둔다.이를 테면 학생들의 소질에 날개를 달아주는 보조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한국학을 배우려는 학생들의 숫자가 88서울올림픽이후 한때 30여명까지 올라가 한국학 붐이 잠깐 일어났었으나 오래지않아 시들어버렸던 일도 있었다.그래서 단 2명으로까지 줄어들었다.바로 옆의 중국학과나 일본학과 학생의 숫자가 1백명정도씩으로 북적대는 점을 감안하면 프랑스인의 한국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는 충분히 짐작이 간다. ○장서 2만3천권 소유 그래서 최교수는 적극적인 학생유치에 나서 동양학부 학생들에게 2개 언어를 배우도록 했다.상대적으로 학위받는 데 많은 부담을 주지 않도록 배려도 하는 등 학생들이 한국학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유도했다. 이런 노력탓에 이제는 한국학을 배우는 학생은 1학년에 30여명을 비롯해 모두 60여명.그러나 이들 가운데는 한국학을 부수적으로 배우는 학생들이 적지 않아 최교수는 안타까워한다. 동양학을 배우는 학생들의 최대관심은 동양문명의 발상지인 중국에 있고 그다음이 경제대국인 일본이다.최교수는 『경제력이 학생들마저 불러모으는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며 한국학의 전파는 국력과 직결돼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최교수가 중국학과나 일본학과에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점이 있다.한국학과는 유일하게 자체 도서관을 갖고 있고 소장 장서만도 2만3천권에 이른다.한국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소중한 자료들이다. 올해부터는 한국국제교류재단측이 한해에 5만달러씩(약 4천만원)지원,큰 도움을 주고 있다.5명의 학생들에게 1인당 5천달러씩의 장학금도 줄 수 있는 부유한 학과가 됐다.국립인 프랑스 대학에서 장학금은 거의 생각할 수 없어 한국학과의 장학금은 앞으로 한국학 희망자들을 더욱 늘어나게 할 것으로 최교수는 기대한다. 최교수가 파리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안타깝게 여기는 일이 있다면 한국인 입양아 문제다.한국인 입양아는 프랑스에만 모두 1만명 가까이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한국인 입양아들이 한국학을 공부하는 경우는 드물게 있어왔지만 3년전부터 부쩍 늘었다. 이제는 프랑스인 학생들 틈바구니에서 한국인의 모습으로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이 한학년에 3∼4명씩 된다.프랑스인 부모들이 『너의 모국은 한국이니 한국을 알아야 한다』며 한국학을 공부하도록 권유한다는 것이다.모국찾아주기의 배려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한국어를 배우는 일이 모국어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또다른 외국어를 배우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영어를 배울 때보다 더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특히 어려서 입양된 학생들의 경우 이런현상은 심할 수 밖에 없다. ○“한국전문가 양성” 자부 최교수는 이들에게 경제학이나 지리학등을 복수전공으로 택하도록 권유한다.한국학과 경제학을 함께 공부하면 프랑스에서는 한국경제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계산에서다.3백만명 이상의 실업자가 득실대는 프랑스에서 한국을 공부하면서 취업을 보장할 수 있는 길은 한국전문가가 되는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한 프랑스인 한국전문가들이 많이 쏟아져 나오면 한국과 유럽의 거리는 그만큼 가까워질 것이다. ▷최승언 교수 신상메모◁ ▲45년 서울출생 ▲63년 경기고등학교 졸 ▲67년 서울대 불문학과 졸 ▲69년 서울대 불문학과 석사 ▲69년 프랑스 툴루즈대학 박사과정 ▲73년 툴루즈대학 언어학 학사 ▲75년 툴루즈대학 언어학 석사 ▲79년 툴루즈대학 문학박사 ▲80∼81년 서울대 조교수 ▲82∼88년 파리7대학전임강사 ▲88년∼현재 파리7대학 한국학과장 ▲역서 「소쉬르의 일반 언어학강좌」
  • 퇴임 각료·수석 10여명/「표밭갈이」돌입

    ◎“15대 총선 출마” 지역구 입성/홍재형 전부총리 「자민련 바람막기」 출사표/김용태·김영구·김중위 전장관도 격전지로/한승수·한이헌·홍인길 등 전비서진도 분주 개각 때 물러나는 장관은 으레 뒷모습이 어둡기 마련이다.또 퇴임후 설계에 대해서는 대개 『당분간 쉬면서 생각해보겠다』고 말한다.그러나 「12·20 개각」에서 퇴진한 11명의 각료 중 홍재형 전경제부총리를 비롯해 김용태 전내무·최인기 전농림수산·김중위 전환경·이성호 전보건복지·김영구 전정무1장관 등 지역구출마를 염두에 둔 전직 각료들은 쉴 틈이 없다.불과 3개월여 앞으로 다가온 내년 4월의 15대 총선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홍재형 전부총리는 『자민련의 충청바람을 차단하라』는 김영삼 대통령의 특명을 받고 청주갑에 특별히 차출된 케이스.관세청장 등 오랜 재무관료의 경험과 수출입·외환은행장,재무·기획원·재정경제원 장관 등 화려한 경력을 배경으로 곧 청주고동문들을 상대로 맨투맨식 표다지기에 들어갈 예정이다. 지역구 출신 현역의원인 김용태·김영구·김중위·이성호 전장관은 곧바로 격전장에 투입됐다.김용태 전장관은 퇴임 다음 날인 21일 당장 지역구(대구 북을) 행사 참석을 위해 대구로 내려갔다.곧 상주체제에 들어간다. 4선경력의 김영구 전장관(서울 동대문을)은 중량급답게 내주부터 동별로 의정보고 활동을 벌이는 등 표밭갈이에 돌입한다.김중위(서울강동을)·이성호(남양주) 전장관도 의원신분으로 되돌아가 당장 지역구활동에 나섰다.신한국당 현역 지역구의원이 한명도 없는 전남 나주지구당 위원장인 최인기 전장관 역시 불모지인 호남개척에 들어갔다. 그러나 과천·의왕출마를 강력히 권유받고 있는 오명 전건설교통장관은 고민이 많다.전자공학박사로서 우리나라 통신혁명을 이룩한 장본인인 그는 내심 정치보다는 학계 쪽을 원한다.하지만 여권핵심부의 출마권고가 너무나도 간곡해 곤혹스럽다. 이번에 물러난 한승수 전청와대비서실장(춘천갑)과 한이헌 전경제(부산동)·홍인길 전총무수석(부산 남갑) 등도 총선 출마 채비에 바쁘다.특히 자민련 최각규 강원지사에 맞서 신한국당의 강원대표주자로 나선 한전실장은 정무장관직 제의도 물리치고 『무소속출마도 불사하겠다』는 같은 당 이민섭 의원의 반발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최우선 과제이다. 오랜 상도동 가신출신의 홍인길 전수석은 허재홍 현의원의 양위를 받을 경우 비교적 순탄한 의회진출이 예상된다.반면 경제관료 출신의 한이헌 전수석은 12·12관련자로 검찰수사를 받은 같은 당 허삼수 의원의 벽을 넘어,지난 지방선거때 문정수 부산시장을 위협했던 노무현 전의원을 제압해야 하는 난제를 안고 있다.
  • 대덕연구단지/연구개발 예산개혁 앞으로 1개월

    ◎세계적 「싱크탱크」 도약 계기로/열심히 일하는 연구원 우대 분위기 조성/과학기술사업 경쟁력·효율성 크게 높여/안정적 연구위한 제도적 뒷받침 마련해야 프로젝트 베이스 시스템(PBS)이라는 혁명적인 예산회계제도의 전면실시를 1개월 앞두고 대덕 과학기술연구단지가 긴장에 휩싸여 있다.프로젝트 베이스 시스템은 투입비용과 성과측정이 분명한 연구관리의 투명성,열심히 연구하고 성과있는 연구원이 우대받는 경쟁적인 연구분위기 조성,연구원이 중심이 되는 연구소운영등을 내걸고 과학기술처가 의욕적으로 추진해온 국가연구관리체제 개혁방안. 하지만 밤낮 없이 연구에 몰두해야 할 연구원은 「지원」측면보다 「생존경쟁」을 요구하고 있는 낯선 새 제도를 놓고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고 연구를 지원해야 할 행정직은 새 제도를 익히느라 여념이 없는 모습이다. 과학기술처는 지난 2월 프로젝트 베이스 시스템 도입의지를 처음으로 공표,이를 추진한 끝에 오는 96년부터 22개 정부출연 과학기술연구기관에 전면실시하기로 했다.연구소들은 오는 10일까지 이와 관련된 자체규정 개정안을 마련,과기처에 보고하고 이달말까지 이사회에서 확정시켜야 한다.갈길이 바쁜 속에 뭔가 중요한 변화가 예상되는데도 아직 확실한 것이 잡히지 않는다는 게 연구원의 지적이다. 프로젝트 베이스 시스템의 출발점은 무한경쟁시대를 맞아 국가연구개발사업과 정부출연 연구소 운영에 경쟁력과 효율성 향상이 시급해졌다는 인식에 있다.특히 시장개방바람을 타고 정부연구개발사업도 가까운 시일내 개방이 불가피한 시점에서 연구사업관리체제도 선진화가 불가피하고 지금처럼 느슨한 체제로는 투자의 생산성도 제고시킬 수 없다는 게 정부의 인식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연구소 일정인원에게 정부예산으로 인건비를 주고 여기에 연구사업비를 더하는 방식으로 연구소예산을 지원해오던 것을 고쳐 연구사업(프로젝트)단위로 정부지원비를 주는 프로젝트 베이스 시스템 회계제도를 도입하기로 했다.이렇게 되면 인건비 따로,연구비 따로 이원화돼온 회계방식이 연구사업단위로 일원화돼 연구소는 연구소대로 정원조정등을 자유롭게할 수 있고 정부는 정부대로 어떤 연구원이 어떤 성과를 올렸는지 파악이 쉽게 돼 효율적인 연구관리,연구활성화를 기할 있다는 것이다.정부는 이에 덧붙여 연구사업은 대학과 민간연구소·출연연구소중에서 능력 있는 기관에게 주는 경쟁체제를 도입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와 같은 개혁방안을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적지는 않다.한국화학연구소의 한 연구원은 『프로젝트 베이스 시스템이 되면 연구소가 종전처럼 인원동결 때문에 곤란을 겪을 필요도 없고 일하는 사람과 안하는 사람이 분명히 가려질 것』이라며 기대를 나타냈다.『어차피 가야 할 방향』이라는 전제 아래 『혼란 없이 잘 정착됐으면 좋겠다』는 연구원도 있다. 그러나 대덕연구단지의 많은 연구원은 새 제도에서 프로젝트를 따지 못한 연구원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당장 돈이 되지 않는 연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궁금증을 나타내며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한국화학연구소의 또 다른 한 연구원은 『새 제도는 정부가 연구소운영비를 주지 않고 연구소가 스스로 벌어서 해결하라는 것인데 이 경우 연구원의 봉급보장이 안돼 우수인력이 연구소를 떠나고 말 것』이라고 우려했다.한국기계연구원의 한 연구원은 『지금까지 민간기업연구소의 70%도 안되는 대우를 받고도 국가에 기여하는 연구를 한다는 긍지로 마음만은 부자로 살아왔다』고 말하고 『그러나 앞으로 당장 돈댈 고객이 있는 연구만을 하라고 한다면 그마저 사라져 더이상 정부연구소에 몸담을 이유가 없어질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새 제도로는 실패할 확률도 있는 창의적인 연구,진취적인 도전을 할 수가 없을 것』이라면서 『이 때문에 현실만 좇아가는 연구를 하다가 첨단추세에서 낙오돼 후진연구자로 전락해버리지 않을까 걱정』이라는 연구자도 있다.『아직도 국내 중소기업은 재정이 열악한데 앞으로 인건비까지 모두 내고 연구소에 연구의뢰를 하라고 하면 이를 감당할 수 있을지 염려된다』며 중소기업의 기술지원위축을 우려하는 소리도 나왔다. 정부는 이같은 지적에 따라 기관고유사업을 발굴,지원하고 핵심 우수연구원을 선발해 창의적인 연구를 3년간 안정적으로 지원하며 중소기업 수탁연구사업에 대해서는 정부가 대응자금을 지원하겠다는등 3개항의 보완책을 발표했다.그러나 이것도 연구원의 마음을 붙들어놓는 석연한 대책은 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생명공학연구소의 한 연구원은 『한 연구소에 1∼2명 핵심연구원 선정은 연구소의 팀워크를 해칠 우려가 있는데다 1인당 연간 연구비 1억원은 대기업에 비하면 많은 액수도 못된다』고 지적했다.그는 또 『기관고유사업비의 경우 연구소의 모자라는 인건비 보전항목이 있어 결국 예산일원화라는 당초목표가 실종된 셈이고 중소기업 대응자금도 확보대책이 분명치 않아 변수가 많다』며 어느것도 분명한 것은 없다고 지적했다. 프로젝트 베이스 시스템이 잘되고 있는 선진국과 우리와는 기술개발여건 자체가 다르다는 지적도 있다.한 연구자는 『지난 1년간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매달려온 프로젝트의 연구비가 8백만원이었는데 미국에서는 비슷한 성과를 낸 연구를 갖고 4년동안 12만달러 정도를 받았다』며 열악한 국내여건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그러나 연구자는 새 제도의정착여부를 떠나 이의 출발점이 됐다는 연구소에 대한 인식 자체를 무엇보다 더욱 안타까워하는 분위기다.거기에는 지난 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설립 이후 약 30년간 기술의 불모지에서 반도체수출대국의 신화를 일궈낸 한국의 산업발전을 뒷받침해온 과학기술자가 지금 받고 있는 대우는 합당한 것인가에 대한 회의가 깔려 있다. 과학기술자는 한국과학기술 1기는 기술개발계획수립을 위한 정책연구가 필요했고 2기에는 해외기술이식을 위한 자료연구가 필요했으며,3기인 지금은 국제경쟁을 위한 창의적 연구가 필요한 시기라고 말한다.그러나 지금 필요한 것이 창의적인 연구라 해서 1,2기 수요에 부응하던 연구자를 생산성 없는 개혁대상으로 규정해야 하는지 한 연구자는 되물었다. 『예전 KIST시절에는 통근버스를 타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러웠다.그러나 지금은 집에 돌아가 아내 쳐다보기가 안쓰러울 뿐이다』라고 말하는 대덕연구단지의 분위기는 인근 민간연구소에게도 남의 일로만 보이지 않는다.LG화학기술원의 한 간부는 『정부연구소가 잘될 때선의의 경쟁도 되고 정부가 앞장서 연구를 해줄 때 기업도 따라가는 연구를 할 수 있다』면서 『그러나 현재 분위기는 너무나 침체돼 과학기술계 전체의 앞날을 걱정할 정도』라고 말했다.과학기술계 전체가 문제점이 있는 것처럼 언급되고 개혁이 반복되면서 우수한 젊은 인재가 이공계 지원을 회피하는 경향마저 감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과기처 집계에 따르면 올해 정부연구소에서는 8월 현재 전체의 3.7%인 3백15명이 연구소를 떠난 것으로 밝혀졌다.그중에는 박사가 1백명이나 된다.경제전쟁시대에 과학기술개발의 국가적 중요성이 인정된다면 연구인력에게는 압박보다는 오히려 획기적인 지원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다.대덕연구단지는 프로젝트 베이스 시스템도 연구소 안정성확보등 제도적 뒷받침을 마련한 후 각 부처가 동시에 실시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대덕연구단지는 어떤 곳인가/동양 최고의 「테크노폴리스」 74년 조성… 52개 연구소 두뇌 1만명/834만평에 생활기반시설 모두 갖춰 대덕연구단지가 명실상부한 세계수준의 연구·교육단지인 「테크노폴리스」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과학기술처가 최근 발표한 「대덕연구단지의 인원변화추이분석」결과에 따르면 95년11월 현재 모두 52개 연구기관이 입주,1만5천4백23명이 연구활동에 종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특히 출연연구기관의 박사급 연구인력이 매년 1백여명 안팎으로 이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박사인력의 증가는 이를 상쇄하고도 매년 1백여명씩 증가하고 있는 점이 눈길을 끌고 있다. 대덕연구단지는 지난 74년 단지기반시설조성과 연구기관건설이 착수됨으로써 세계적인 연구단지로서의 기틀을 마련했다.연구단지내에 본격적인 연구소가 들어선 것은 지난 78년3월.한국표준연구소가 정부출연연구기관으로는 처음으로 입주했으며 이후 출연연구소 이외에도 79년3월 쌍용중앙연구소가 입주한 이래 각종 민간기업연구소도 앞을 다퉈 대덕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현재는 정부출연연구소 17개 기관에 7천6백40명,민간연구소는 21개 기관 3천2백63명이 종사하고 있다.앞으로도 산업보건연구원·한진종합연구소 등이 입주할 계획이어서 대덕연구단지는 국내 최고의 연구단지로서의 입지를 더욱 확실히 굳힐 것으로 기대된다. 대덕연구단지에는 연구소만 있는 것이 아니다.KAIST·충남대·충남전문대 등의 고등교육기관,6개 국민학교,3개 중학교,3개 고등학교가 자리잡고 있어 연구원 및 종사자의 자녀교육을 전담하고 있다.이밖에도 문화센터,2백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탁아시설,종합운동장,체육공원 등이 들어서 있어 대덕단지가 하나의 생활기반으로서 충분히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대덕연구단지는 설립당시 선진국의 사이언스파크를 모델로 미국의 「트라이앵글 리서치 파크」,소련의 「노보시빌 스키」,일본의 「쓰구바 파크」등이 중심이 됐다.현재 8백34만평규모를 자랑하고 있는 대덕연구단지는 경부고속도로 회덕인터체인지를 기점으로 광주행 호남고속도로와 대전엑스포단지 갑천을 경계로 조성돼 있으며 대덕과학문화센터를 중심으로 서부와 동부로 나누어져 있다. 1차 서부지역에는 주로 정부관련 연구소가 입주하고 있고 동부는 87년 공영개발방식에 의해 삼성·유공 등과같은 기업부설연구기관이 입주해 있는 상태다. 전체적인 시설분포를 살펴보면 총 8백34만평 가운데 자연녹지가 44%,연구교육시설 47%,기타 주거지역이 9%로 구성돼 있어 전형적인 전원형 과학기술도시라고 말할 수 있다. 앞으로 대덕연구단지는 진정한 의미의 테크노폴리스로 자리잡기 위해 정부 제3종합청사 유치를 비롯,단지 동쪽의 대전 제1,제2공단과 연계해 연구단지에서 쏟아지는 첨단과학기술을 바로 산업화시켜 생산라인으로 직결시키는 야심찬 계획을 실현해갈 예정이다.
  • 중국속의 한국 붐(한·중 새 시대:4)

    ◎북경 등 대도시에 우리 기업 광고탑 즐비/한국어과 개설 열풍… 한국식당 성업/한국특수속 조선족사회엔 「한국병」도/곳곳에 한국산 자동차… 가전제품 매장 “북적” 증국은 더이상 한국인에게 낮선곳은 아니다.수도 북경의 관문,북경공항에 내리면 개인용 짐수레에는 어김 없이 국내 대기업 광고판이 부착돼 있다.공항에서 시내까지 30분가량 달리는 동안 고속도로 양편 길옆으로 현대·대우·우방등 국내 기업의 대형 간판이 늘어서 있다. 북경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중심도로인 장안대로주변으로 국내기업들의 대형광고탑이 경쟁하듯 솟아있다.중국학술연구의 전당이라는 사회과학원 본부건물 옥상엔 삼성전자 광고탑이 일본 도시바 것과 함께 서 있고 전국신문공작자 건물위에는 한아항공(아시아나항공)의 네온사인이,국무빌딩에선 대한항공 광고판이 빛나고 있다.번화가인 동단과 왕부정거리엔 아예 금성등 국내 가전품 전문매장이 자리잡고 있다.한국기업의 광고탑은 북경만은 아니다. ○공항 짐수레에도 광고 요녕성의 성도 심양의 상징인 거대한 모택동주석 동상뒤로 양담배인 「켄트」 광고판과 함께 영문으로 골드스타(금성)라는 대형광고탑이 눈에 들어온다. 거리에는 프린스와 엘란트라·쏘나타등 대우와 현대 자동차가 적잖게 눈에 띈다.북경 뿐 아니다.베트남과 국경지역인 운남에서나 변방인 청해도에서도 한국차는 거리를 질주하고 있다.중국인에게 한국차는 한국을 대표하는 상징과 같다.한국차는 한국의 경제기적의 표본 같은 것이다. 한국 사랍이 택시에 오르면 운전사들은 일본 사람이냐는 질문을 더이상 하지않는다.대뜸 한국인이냐 묻는 경우도 늘고 있다.그만큼 한국인이 북경등 주요도시마다 메워 터진다.수교다음해인 93년 15만명에서 지난해엔 30만명이 중국을 다녀갔다.올 연말엔 50만명을 넘을 것이라고 주중대사관은 예상한다.고급쇼핑센터,관광지 등에선 한국 사람을 부딪치지 않고 지나가는 방법은 없다.북경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고궁에는 동시 통역서비스 7개 언어 가운데 우리말이 들어있다.북경공항에는 조선족 관광안내원이 상주해 있고 우의상점,북경호텔 상품부등 주요 쇼핑지의 귀금속과 고가품점에는 조선족종업원이 어김 없이 자리를 지킨다.중국 사람은 한국인이 홍수처럼 밀려오고 있다고 말한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에 대해 묻던 택시운전사들의 요사이 질문이 노태우씨의 비자금사건으로 바뀔정도로 한국에 대해 관심이 높다.TV와 신문에서도 한국관련 기사를 적잖게 다루는 것도 이유다. ○한국 사정에 많은 관심 북경 거리의 조선족음식점과 한국음식점이 우후죽순처럼 부쩍늘어 수교이후 한국인의 물밀듯한 중국진출현상을 상징한다.두산주가·경복궁·보배원·진로주가·대정·한국음식점경영은 북경과 중국의 대도시에서 유망산업이다.두사람의 한번 식사에 2백∼3백위안(2만∼3만원)정도는 거뜬히 나오는 이 한국식당의 3분의 2 가량의 손님은 중국인이다.예약 없이 갔다간 낭패하기 십상이다.보배소주에서 직영하는 보배원의 고병창부장은 『북경에만 조선족음식점을 제외하고도 1백여개의 한국인 음식점이 있다』면서 『한국인을 겨냥한 한국음식점의 진출이 오히려 중국인의 입맛을 바꾸어 놓을 정도로 중국인의 큰 반향을얻으며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북경의 한국음식점은 소규모투자에서 대규모 기업형으로 바뀌고 있다.싸이트어호텔부근에서 개인이 운영하던 싸이트어 아리랑은 개점초기부터 자리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호황을 맞자 효성그룹이 달려들어 합작형태로 규모를 2배가량 넓혔다.기업형 투자의 대표적인 성공사례인 한우리의 서라벌은 북경시에만 체인점을 4곳으로 확장하기도 했다.이러한 한국음식점은 심양·청도등 한국인이 많이 모이는 곳은 물론 해남도에까지 뻗어있다.수백개를 헤아리는 북경의 가라오케 가운데 상당수는 한국인을 겨냥한 곳이다.아예 간판도 한글인 경우도 적잖다. 대학등 학원가는 중국의 한국열기가 가장 뜨거운 곳중 하나다.수교전 십수명에 불과하던 한국학생은 3년사이에 6천명으로 뛰어올랐다.인민대학 70명,어언문화대 어학연수생 5백50명등 7백명,북경대 어학연수생 89명등 2백30명….하오삔 북경대 부총장은 『올 신학기(9월학기)부터 한국이 일본을 제치고 유학생수로 가장 많은 나라가 됐다』고 한국 유학생의 급증 추세를 설명했다. 이러한 한국열기를 타고 북경대·상해복단대·어언문화대등 주요 대학의 한국학 연구와 한국어학과 개설붐이 일고 있다.지난 93년 길림대·대련외국어대등,지난해엔 북경외대·요령대·산동대·산동사범대등에 한국어학과가 개설되고 올 9월 새학기엔 북경어언문화대·북경 제2외국어대학·남개대학등 13개 대학에 무더기로 한국어학과를 개설해 한국열기를 입증하고 있다. ○한국학 연구센터 발족 북경 서성구의 184중학(고교과정)에선 한국어학과를 설치,올해 35명의 학생을 모집하는 등 우리말 배우기 열풍이 고등학교까지 퍼져나가고 있다.어언문화대학의 양경화총장은 『지난 93년부터 국제교류재단의 협력으로 추진해온 한국어과를 신설,올 신학기부터 학생들을 받게 됐다』며 『한국어학습 및 한국학열기는 두나라 관계발전과 국민사이의 이해의 폭을 넓히는데 디딤돌이 될 것』이라고고말했다.수교후 중국사회과학연구의 본산이라는 사회과학원과 북경대학에 각각 한국학연구센터가 발족,불모지였던 한국학연구의 새지평이 열리고 있다.중국의 2백만 조선족사회에서의 한국열기는 이제 과열단계를 넘어섰다.한국가면 돈번다는게 한국행의 직접 동기다.주중대사관은 올 한해 1만3천여명의 조선족이 한국으로 건너갔다고 밝히고 있다.정식비자를 얻기 어려워지자 비자위조에서 밀입국,위장결혼까지 갖가지 방법이 동원되는 등 「한국병」이란 신조어를 낳고 있다.이제 한참 달구어지기 시작한 한국열기는 중국사회 각 분야에서 더욱 뜨겁게 달아오를 것으로 보인다.
  • 호태왕비(압록강 2천리:11)

    ◎1천6백년전 대륙 호령하던 고구려 위엄이…/청나라 관명산이 발견… 최근 비문탁본 떠 횡재/일서 통째로 반출기도… 지난 82년 새 비각세워 오늘날 집안시는 청나라 연호로 광서 28년(1902년)부터 1965년까지는 집안현이었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 압록강 중류의 오른쪽 대안을 통틀어 통구라고도 한고 더 옛날에는 비류곡이라 불렀다고 한다. 기원전 2년부터 서기 427년가지 고구려의 도읍지 국내성이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국내성 시대의 굵직굵직한 고구려유적이 많지만 그 으듬은 호태왕비일 것이다. 고구려의 장수왕이 서기 414년 부왕의 공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이 거대한 비석의 새김글씨 금석문 내용은 당시 고구려 역사이자 주변 동아시아역사다. 왕의 묘호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마지막 세 글자를 따서 호태왕비로 부르는 이 거대한 사면비는 어른 세 사람의 키를 포갠 것보다 높다. ○굵직한 고구려 유적 많아 집안시에는 태왕향이라는 구역이 있다. 향 구역내에 호태왕비(광개토왕비)와 태왕릉,장군총,통구의 옛 무덤떼가 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 분명했다. 압록강 건너 북한당 만포시로 가는 국제열차가 발차의 기적을 울리는 집안역도 태왕향에 속해있다. 집안해관(세관)을 비롯,변경검사장(국경검문소),대외무역운수회사,집안판사처,집안검역소 및 동식물검역소 등의 국가 주재기관이 모두 태왕향에 밀집되었다. 그리고 집안시내를 다녀보면 「태왕식당」이나 「태왕상점」이 눈에 띄고 「태왕가라오케」까지 생겼다. 1천6백여년전 대륙을 호령하던 대왕의 이름이 시장경제시대의 간판에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호태왕비로부터 얼마 멀지않은 태왕릉과 마주한 자리에 태왕조선족소학교가 있어서 한결 마음이 흐뭇했다. 조선족 어린이가 대왕의 품에 안겨 공부를 한다는 생각에 이르자 자긍심마저 들었다. 청나라는 백두산을 자신들의 성조발상지로 보고 1677년에 봉금지로 만들었다. 그로부터 2백1년동안 집안은 인적이 없는 불모지에 불과했다. 1877년에 접어들어 청나라는 통화현과 회인현(환인현)을 설치했다. 그 회인현 설치위원이었던 장월이라는 사람 밑에 관월산이라는 서사가 있었다. 본디 석공출신인 관월산이 바로 무인지경에 외로이 서있는 호태왕비를 찾아낸 장본인이다. 관월산은 장월의 허락을 받아 호태왕비 인근에 초가를 짓고 어렵게 사는 초천부를 고용했다. 산동성 문등현 사람은 초천부는 어린 아들 초균덕을 데리고 살았는데 비석에 덕지덕지 긴 이끼를 벗기는 일을 맡았다. 초천부는 사다리를 놓고 매일 비석에 달라붙어 일을 했으나 이끼가 너무 두꺼워 다 벗기기가 부지하 세월이었다.그래서 쇠똥을 잔뜩 발라놓고 불을 질렀다. 그래도 시원치 않아 나중에는 기름을 부어 태워버렸다. 이때에 애석하게 비석에 금이 가고 터져 어떤 글시는 알아볼수 없게 되었다. 현재 애매모호한 글씨로 남은 1백22자가 불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한다.어떻든 비문이 나타나자 성경(심양)등지에서 곡학자와 금석문 학자들이 몰려들었다. 초천부가 명을 받아 탁본을 떴다. 현아문과 학자들에 바치고 더러는 성경과 안동(단동) 사람들에게 팔아 초천부가 돈을 챙겼다. 초천부한테 사간 탁본은 외국인들에게 되팔려 나가기도 했다. ○탁본 외국학자에 인기 1902년 집안현이 생기면서 현은 초천부에게 탁본업 허가증을 내주고 일정한 수량만 바치고 나머지는 사사로이 팔도록 했다. 30여년전 호태왕비에 매달려 살던 초천부가 세상을 뜨자 아들 초균덕이 탁본업을 이어받았다. 빨리는 하루에 1장,늦으면 사흘에 1장식을 찍어내어 민국연간돈으로 1장에 10∼12원씩 받았다. 탁본으로 이름이 나서 그를 초대비로 불렀다고 한다. 그는 70살에 탁분일을 놓고 청석진으로 이사하여 살다가 1946년에 세상을 떠났다. 1907년 한반도를 침략한 일본 육군 제57연대장 소택덜평이 압록강을 건너와 호태왕비를 둘러보았다. 고구려와 왜구간의 전쟁기록이 있는 것을 보고 당시 행정책임자인 집안임지현 오광국을 만나 호태왕비를 팔라고 졸랐다. 진사출신으로 해박한 학식을 갖추었던 오광국은 고구려 역사의 진실을 담은 국보를 판다는 것은 천주에 용서받지 못할 죄악임을 잘 알고 있는 터였다. ○“국보는 팔 수 없다” 거절 그 때에 오광국과 소택덕평과의 대화내용을 사료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 비석은 대단히 무거워 일본까지 운반할 수가 없습니다.』 『그거야 쉽지요. 우리 병선이 이 비석보다 훨씬 더 무겁지 않습니까? 병선으로 옮기려 합니다.』 『이 비석은 비록 지방에 있지만 국보입니다. 나는 지방에 있는 보잘것 없는 관리인데 내 어찌 국보를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교양이 깊으신 분이니 나의 고충을 이해하시리라 믿겠습니다.』 『저는 사실 문물에 많은 흥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값은 부르는대로 드릴테니 양도해 주시지요.』 『그처럼 흥미가 있으시면 내가 가진 탁본 몇 점을 선물로 드리지요.』 소택덕평은 그냥 돌아갔다. 만주사변 이후 동북을 강점한 일제가 어이하여 호태왕비를 그대로 두었는지가 의심스럽다. 만주지역은 물론 아시아가 저들의 소유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 탓이었을까. 그런 와중에 호태왕비는 제자리에 지금 남아있다. 밑부분 너비 1.34∼1.97m,윗 부분 너비 1∼1.6m,높이 6.39m나 되는 거대한 비석은 비각에 안치되었다. 비각은 당초 집안임지현 유천성이 1925년 모금을 해서 지었는데 너무 낡아 1982년 집안현 문물관리소가 다시 지었다. 중국사회과락원 부원장겸 고고연구소 소장 하내가 「호태왕비」라고 쓴 편액이 걸려있다.
  • 사진작가 임응식(이세기의 인물탐구:84)

    ◎“셔터 외곬 인생”… 한국 사진예술의 선각자/“비예술성” 홀대속 국전 사진부문 신설 앞장/“인간의 살아있는 순간을 포착… 영원을 간직”/입학 선물 카메라가 첫 인연… 8순 넘은 지금도 활동 「인간은 살아있는 모든 순간을 멈출 수 없지만 카메라는 파인더를 통한 순간포착으로 영원을 담아낸다」 불모지 한국사단의 개척자이자 사진예술의 선각자로 불리는 임응식 원로의 사진예술관이다.미술평론가 이경성씨는 그의 사진과 관련된 일관된 자세를 프랑스의 사진작가 앙리 카르디에 브레송에 비유하기를 주저치 않는다.「그의 눈은 과학자가 자연을 분석하고 연구하듯이 생의 본질을 잡기 위해 인간세상의 구석구석을 경건하게 통찰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인위적으로 생산된 사진,연출된 사진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브레송의 말대로 「그들의 사진예술의 공통점은 기록성이 확대되어 역사성으로 이어지고 한장의 사진을 찍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노력과 정성의 불식」임을 지적하고 있다. ○베레모·검은 안경 차림 사진가는 늘 현장에 있어야 한다는 숙명을 쫓아 8순이 넘은 나이에도 그는 베레모에 검은 안경,간단한 촬영기재를 챙겨들고 아침마다 직장에 출근하는 것처럼 명동으로 나간다.명동은 「서울의 변화」이자 「한국의 문화사적 변천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거울」이며 그가 지나온 흔적이고 희망찬 미래이기 때문이다.20여년전까지만해도 전봇대위에 올라가 명동거리를 찍고 있는 그를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으나 지금은 서울 한복판에 서서 살아움직이는 명동의 표리를 응시하고 사유한다. 「나의 일생은 마라토너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골인지점 하나만을 똑바로 보고 혼자서 싸우며 앞을 향해 달렸기 때문에 성취감이 특별히 남다를 수 밖에 없다」 사진계에서 이룩한 수많은 그의 업적중에서도 57년 뉴욕근대미술관 25주년기념행사였던 「인간가족전」유치를 빼놓을 수 없다.작품을 운반하는 데만 대형트럭 70대,관람객 30만명을 동원하는 가 하면 뉴욕 타임스를 비롯한 68개국의 쟁쟁한 현역들이 참가한 「인간종합 전시의 파노라마를 연출했다」는 평을 들었다. 또 「사진쟁이가어떻게 문화인이며 예술인이냐」는 인식이 팽배한 가운데 온갖 수모를 딛고 문총(예총전신)에 사진을 가입시킨 일이며 12년에 걸친 완강한 고투끝에 국전에 사진부문을 설치한 것은 그만의 끈질긴 고집과 자존심,강직함의 승리라해도 과언은 아니다. 특히 국전 사진부 설치과정에서 조각가 윤효중씨와의 극도의 갈등은 한국사진사와 국전의 자취를 정리할 때마다 언제나 거론되는 사건의 하나다. 단지 사진이 한국미협에 소속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대한미협을 대표하는 윤효중씨는 국전의 사진부 신설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섰고 심지어는 「한국미협에서 탈퇴한다면 당장 국전 사진부문 설치는 물론 홍대에도 사진과를 신설하겠다」고 회유했다.「아무리 목적달성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의리를 저버릴 수 없다」는 자세로 이를 묵살했으나 그가 60년도 서울시문화상 수상자로 추천된 자리에서 당사자인 윤효중씨가 「감언이설 따위에 미동도 하지않는 도도한 태도는 참으로 본받을 만한 예술인의 자세」로 칭송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드디어 64년 국전에 사진부가 탄생되긴 했으나 이번에는 최고상인 대통령상 국무총리상등 최고상에서 사진을 제외시키는 바람에 굴욕을 느낀 그는 국전심사위원직을 사퇴,국전의 차별성과 부당성을 성토하는 한편 주무당국에 시정을 촉구하는 건의서와 각 신문지상에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그 때의 비참했던 심경을 그는 「렌즈에 담은 소명」이란 글에서 「우리는 비굴할 정도로 참아냈다」고 표현하고 있다. ○6·25때는 종군작가 활동 그의 예술가로서의 자세는 원리원칙과 정의를 주장하는 비타협주의로 응집되어있다.그리고 그것은 한 작가의 명예와 성문때문이 아니라 사진의 위상을 지키려는 사단의 자존심임은 두말의 여지가 없다. 초기에는 정물과 풍경,인물과 누드를 소재로한 인상파적 표현기법에 천착하여 「사진미학의 완성자인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에 접근한다」는 평을 들었고 실제로 30,40년대 「침몰」같은 작품은 카메라를 쓰지 않고 인화지위에 직접 물체를 두고 빛을 쬐어 빛과 그림자만의 그라데이션으로 영상을 처리한 포토그램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가 현실에 눈돌리기 시작한 것은 6·25직후 USIS가 파견한 인천상륙작전 종군작가로 일하면서부터다.그와 친밀했던 「라이프」지의 기자 핸크워커가 「시체의 행렬」을 카메라로 끝 없이 쫓는 것을 보고 그는 사진만이 할 수 있는 「진실한 기록」에 눈떠갔다.전후 폐허가 된 음습한 명동의 풀빵가게앞에서 허기진 배를 달래는 슬픈 부녀와 직업을 구하기 위해 거리를 방황하는 청년의 「구직」은 인간존엄의 상실과 살기 위한 절박한 몸부림을 「사진은 사진」이라는 차원에서 그려낸 새로운 시각의 작품들이다.「인간의 몸에서 피가 뚝뚝 흐르고 살점이 썩어가는 마당에 회화적 아름다움이니 관념적 자연미 추구는 한낱 한가로운 「음풍농월」이었고 그는 스스로 자책하여 싱싱한 「생활주의 리얼리즘」을 지향하기에 이르렀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그는 대학에서 최초로 사진을 강의하는가 하면 국립현대미술관에 예빙되어 사진가로선 처음으로 고희기념전을 개최,하셀블라드 같은 고급 카메라를 쓴적은 없지만 그의 작품 4백20여점은 미술관에 영구보존되는 영예를 누리고 있다.그는 제자들에게 「아무리 위대한 인물묘사도 한장의 사진이상 설득력이 없으며 사람의 눈이 미치지 못하는 미세한 부분을 가차없이 포착하는 카메라의 눈에 자부심을 가지라」고 당부해 마지않는다. ○미술관에 420점 보존 그는 부산에서 한말 관리였던 임춘화씨와 김복덕 여사의 4남2녀중 막내로 태어났다.소년시절엔 바이올리니스트 화가를 꿈꾸기도 했으나 도쿄 와세다중학 입학기념으로 둘째형(응구씨 재일화가)이 사다준 박스형 카메라 한대가 그의 인생을 결정짓는 계기가 되었다.그리고 그가 무엇을 하던 엉뚱하게도 일본 풍도체신학교 졸업후 강릉우체국에 근무한 것까지도 결국 「사진」에 도달하기 위한 한 과정에 불과했을 뿐이다.사진에만 몰두하여 집안살림은 여유가 없었으나 신교육을 받은 부인 박갑득 여사가 3남 4녀를 훌륭히 키워냈고 장남인 범택(한양대 교수)씨가 부친의 뒤를 잇고 있다. 「여야일록」.화가 석도륜씨가 카메라를 메고 명동을 도는 그의 모습을 「들판의 한마리 외로운 사슴」에 비유한 휘호다.그러나 순간을 멈추고순간을 영원히 남기려는 그의 도정은 「도심을 꿰뚫는 혁혁한 형안」이란 표현이 한층 어울릴지 모른다. 이제 그에게서 쾌심작을 기대하기란 어려울 수도 있지만 「사진이 인생의 모든 것이 돼버린 작가」만의 「삶의 지혜와 인생을 체관한 시각」은 그를 능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명동을 겨냥하는 그의 셔터소리는 시간을 정지하는 소리며 그의 카메라는 낭만과 전쟁과 역사의 비풍참우,인생의 모든 것이 충만하게 담긴,한국 제일의 보물상자에 틀림없을 것같다. □연보 ▲1912년 부산 출생 ▲31∼34년 부산사진 여광 구락부 가입,일본 와세다(조도전)중학 및 일본 풍도통신학교졸업,일본「사진살롱」지에 「초자정물」발표 ▲35∼37년 강릉우체국근무 ▲47년 부산예술사진연구회발족 ▲50년 인천상륙작전 종군,「경인전선 보도사진 개인전」 ▲52년 제1회 도쿄국제사진살롱에 「병아리」입선,한국사진가협회결성 ▲53∼73년 서울대를 필두로 이후 이대 홍대 건대 덕성여대 서울여대 숙대 서라벌예대출강 ▲55년 미국 사진연감 「포토그라피 애뉴얼」에「나목」수록 ▲57년 「인간가족사진전」유치(경복궁미술관) ▲64∼82년 국전초대작가 ▲69∼71년 월간「공간」지 주간 ▲72년 임응식회고전(서울,부산) ▲73년 한국사진협회 이사장 ▲74∼78년 국전운영위원,한국사진교육연구회창립 대표 ▲74∼90년 중앙대교수 ▲82년 국립현대미술관초대 회고전 ▲83년 미국LA한국공보원초대전 ▲89년 주불한국문화원초청「임응식 사진전」(파리) ▲95년 삼성 포토스페이스 개관 임응식회고전 서울시 문화상(60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71년) 문공부현대사진문화상(78) 은관문화훈장(89) 「한국의 고건축」(5집)「임응식 사진집」(79)「풍모」(82)「임응식 작품집」(95)외 「사진표현과 작가」「사진사상」등
  • 한·중 민간교류의 새장 열다/서울신문 손주환 사장 방중 결산

    ◎언론분야­“양국 발전 촉진” 균형잡힌 역할 모색/학술분야­원로학자와 회동… 한국학 연구 활성화 인민일보사 공식초청으로 10일부터 5일간 이루어진 손주환 사장 등 서울신문 대표단의 중국방문은 두 언론사의 협력확대 차원을 넘어 비정부차원에서 한·중교류의 폭과 깊이를 한단계 높이는 계기였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이번 방문을 통해 손사장은 당과 정부 학계 언론계의 고위관계자 등 각계 인사를 두루 만나 현안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는 등 양국의 상호이해및 공감대의 토대를 넓혔으며 발전 방향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손 서울신문사장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지이자 최고권위지인 인민일보의 소화택사장과 양사의 제휴협력에 합의하고 기존 우호협력관계를 갖고 있던 북경일보와는 협력을 확대해 나가기로 하는 등 언론교류의 폭을 넓혔다.더욱이 중국대표적 지성인 북경대총장 등 학계원로와의 모임과 한국학 연구교수들과의 간담회 등은 비정부차원에서 한·중교류의 폭과 깊이를 두텁게 했으며 두나라 국민의 이해교류 기반을 다졌다는점에서 이번 방문의 성과로서 더 강조돼야 될 점이다. 손 서울신문사장은 13일 귀빈루호텔에서 오수청 북경대총장,외교관 전문양성기관인 외교학원의 유산원장,양경화 어언문화대학총장,여신 사회과학원부원장 등 중국 학계및 문화계의 대표적 인사들과 민간교류및 학술협력 증진 방안 등을 논의했다.이에 앞서 12일 화평호텔에서 양통방 북경대한국학연구센터소장,한진섭 사회과학원교수,허유한 북경어언문화대학 한국교육문화연구센터소장,심정창 한·중문화관계연구회 비서장 등 중국의 한국학연구 대표학자 10여명과 한국학연구 활성화와 언론의 역할의 모색을 위한 모임도 있었다. 12일 한국학 연구교수들과의 간담회에서 양통방 북경대교수 등 참가자들은 『지난 2년여 동안 북경대,어언문화대(전어언학원),상해 복단대,사회과학원 등 주요대학및 연구소에 한국학연구센터가 설립되고 이들에 의해 한국관련 간행물 출판과 한국연구가 비로소 시작됐다』면서 『불모지였던 한국학연구가 지난 92년말부터 국제교류재단의 적극적인 연구지원과 활동으로 불이 붙고 있다』고 설명했다. 손사장은 『한국학연구는 한·중 두나라 국민의 유대및 이해의 기반을 다지는 기초사업』이라고 전제,『92년말 국제교류재단 이사장으로 취임,연구센터설립,간행물발간,인재 양성 등을 적극 지원,중국내에 한국학연구가 자리잡게된 것을 보람있게 생각한다』고 말했다.양경화총장,허유한교수 등은 『손사장이 국제교류재단 이사장 시절 개설을 추진,지원해온 어언문화대학의 한국어과가 11일 첫 입학생을 받는다』며 이 대학의 한국어과 개설이 중국에서의 한국학 연구·발전에 새 이정표가 될 것으로 평가했다. 손사장은 12일 정치국원겸 중공당 선전부장인 정관근을 예방,1시간여동안 강택민주석의 방한에 대한 의미,등소평의 건강,중국의 경제건설,외교정책및 한중관계 등 전반 문제에 대해 설명을 듣고 논의했다.이자리에서 정부장은 『한·중 수교 3년 동안 양국 지도자들의 상호방문은 서로를 이해하고 관계발전에 큰 힘이 됐다』면서 『강주석의 방한은 두나라 관계발전의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손사장등 대표단은 12일에는 유술경 외교학회회장의 초청으로 외교학회 관계자들과 양국 현안문제에 대해 폭넓은 의견을 나눈데 이어 13일 외교부 고위관계자의 초청으로 조어대에서 한·중관계및 외교현안에 대한 중국지도부의 입장과 시각을 듣고 논의하는 시간도 가졌다.외교부및 외교학회 고위관계자들은 이자리에서 서방언론의 중국위협론 등에 언급하면서 한국언론의 중국문제 보도에 있어 무책임한 외국기사 전재 등에 따른 문제점을 지적하고 중국내의 불만을 전달했다. 중국의 언론및 선전활동을 책임지는 당선전부장을 겸임하기도한 정관근정치국원도 『한중관계 발전을 위해 두나라 언론의 역할과 교류가 강화돼야 할 것』임을 강조했다. 손사장등 대표단은 한편 재회원 인민대외우호협회 회장,주목지 중한우호협회회장,이녹야 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겸 중국국제문제연구센터 이사장 등 중국외교계의 원로 등과 만나 민간차원에서의 한·중관계의 활성화방안과 언론의 역할 등을 논의했다.
  • 골프장 개발 수익사업인가/신동식 논설위원(서울논단)

    골프장 허가가 다시 러시를 이룰 전망이다.이미 전국적으로 1백19개소를 허가하여 전국 5개 직할시나 9개도에 골프장 없는 곳이 없게 되었지만 이번에는 자치단체가 재정확충을 위해 앞다퉈 골프장 추진에 나서고 있다는 소식이다. 개중에는 1개군 1골프장을 만들어 수입을 늘려야겠다고 밝힌 도도 있고 산림 울창한 곳 3개소를 짚어 골프장을 만들겠다는 자치체도 있다. 골프장은 지금 영업중인 곳 91개소나 건설중인 곳 40여개소중 상당수가 크고 작은 말썽을 빚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서도 그 개발을 쉽게 생각할게 아니다. 허가 받아놓고 아직 착공하지 않은 69개소 중에도 그 허가를 취소해야 한다는 민원이 적지 않다.물론 금전적 이득을 노리는 조작된 민원도 있지만 골프장을 단순하게 「체육시설의 설치·이용에 관한 법률」로 허가되는 체육 운동시설 개념이나 수익사업수단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 ○무조건 거부 안되지만 골프장 개발조성 그 자체를 맹목적으로 적대시 하거나 죄악시하는 태도는 물론 바람직스럽지 못하다.쓸모없는 야산 불모지같은 곳을 골프장으로 개발하는 것은 국토의 이용도 내지 생산성 향상이라든가 자연환경 보호관리차원에서도 바람직한 측면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뿐만 아니라 골프장의 피해를 필요이상으로 과장하는 태도도 국민소득 1만달러 시대에는 맞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골프장 건설로 상당한 자연환경이 훼손되고 있는 것이 문제다. 그간 골프장이 들어선 마을중에는 우물이 줄고 개울물이 오염되어 축산이나 농업에 피해도 있어 왔다. 최근에는 골프장마다 나무와 잔디에 뿌려대는 갖가지 농약으로 새로운 환경파괴를 우려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환경부가 할수없이 밝힌 경우만 해도 그 농약 살포 실태는 심각하다. 골프장 농약 살포량이 해마다 느는 것은 물론 그 종류도 94종으로 다양해지고 있다. 그 중에는 소나무 솔잎 혹파리나 솔나방 제거에만 한정적으로 사용하도록 한 포스팜액제,지오릭스등 맹독농약이 포함돼 있다. ○환경평가를 제대로 이 맹독농약은 동식물등 여러 생명체뿐 아니라 인체에도 그 피해가 커서 일반 농가에서는 접할수도 없게 한정 판매하는 농약이다.골프장에 살포된 농약은 그 골프장에만 잔류하는 것이 아니다. 골프장 나무와 풀에 살포된 농약은 바람을 타고 상당한 거리까지 날아가 농작물에 피해를 주고 대기호흡하는 생물체에 영향을 미친다. 토양에 스며든 독성 농약은 빗물에 씻겨 하천 수서생물에 피해를 주는 것이 입증되기도 했다. 따라서 환경평가를 제대로 해야 한다.우리보다 수십배나 많은 수의 골프장을 갖고 있는 일본에선 큰 문제가 없는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수익과 비용 따져봐야 자연생태학계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골프장이 들어선 산지나 구릉지 토양은 거의가 사질토이다. 잔디를 입힌후 물을 자주 주지 않으면 여름에도 잘살기 어려운 환경이다. 이런 곳에 우리 토양에는 생소한 외국산 잔디까지 심어 무리하게 푸르름을 유지하려고 과다한 비료를 주고 농약까지 살포하며 많은 지하수를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골프장 한곳 면적을 18홀 기준으로 약 30만평으로 잡고 있는데 그 곳에 뿌리는 비료와 농약, 지하수를 생각해보라. 그 양이 얼마나 엄청날 것이며인근 마을에 누적되어 생태계에 작용할 것임은 상식적으로도 가늠할수 있는 일이다. 한국에서는 영국같은 초지가 자연적으로는 유지될수 없다는 것이 생태학자들의 결론이다. 골프의 종주국인 영국도 원래 식물재배가 어려운 황무지 초지에서 하던 골프가 농경 가능지를 잠식하면서 부터는 그 개발규제를 아주 강하게 하고 있다. 비료와 농약 사용을 엄격하게 규제하고 기준에 위반하면 그 제재가 대단하다. 골프장으로 인한 수익과 자연 피해및 오염으로 치를 비용을 계산해보는 지혜를 시·도가 갖기 바란다.
  • 북미연안 수산자원 고갈/오염·남획에 어장 황폐화 가속

    ◎대구·넙치 등 어획고 30∼20%씩 줄어/어민들 수년새 절반 감소… 파산 속출 미국의 연안 어민들이 울상을 짓고 있다.물고기가 크게 줄어들어 빈 투망질만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3백70년 동안 어족자원이 풍족했던 미 동서 연안의 어장들이 물고기 불모지로 변한 지도 오래다.40억달러 상당의 미 상업어업 종사자들이 점차 일자리를 잃어가고 있다.올해들어 수산업 관련 주가도 40%가량 뚝 떨어졌으며 선주들은 서둘러 어선을 처분해 버린다.흥청대던 어촌마을은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버려 적막하다. 황금어장으로 불리던 미국 동해안 뉴잉글랜드의 경우 최근 2∼3년 사이에 트롤어업에 종사하던 연안어민 4만7천여명 가운데 2만2천명 가량이 바다를 떠났다.근해어업이 금지된 지난 7월1일 이후 플로리다 앞바다에서 자망어업을 하던 어민 2천6백명도 일자리를 잃었다. 멕시코만 연안에서 새우잡이 어부들의 투망질도 영 시원치 않고 북서태평양 연안 어민들의 파산이 속출하고 있다.태평양 연어떼도 산란기에 알을 낳는 깨끗한 하천이 오염되거나 댐 건설로 인해 거의 사라졌다.미 북서부의 강물을 오염되기 이전의 상태로 원상회복하는 데만 20억달러 이상이 드는 것으로 어류전문가들은 추산하고 있다. 이에따라 미 정부는 자연재해 차원에서 대서양 연안 어민에 대해 최근 3천만달러의 구제금을 지급했으나 현지 어민들은 턱없이 모자란다고 아우성이다. 미국 해양어류협회에 의하면 지난해 말부터 뉴잉글랜드 연안의 주요 어종인 대구가 30%,넙치는 20%로 급격히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이에따라 미 정부는 어족자원 보호를 위해 올해 사상 처음으로 각종 어류들이 많이 몰려드는 대륙붕인 조지뱅크의 대부분을 봉쇄했다.또 연간 어로일수를 제한,앞으로 5∼7년간 뉴잉글랜드 근해에서의 어획량을 50%까지 줄이는 안을 승인했다. 뉴잉글랜드의 어업 전진기지인 글로스터에서 4대째 고기잡이를 해온 연안어민 폴 펠레그리니씨(33)는 요즘처럼 자신의 생업에 회의를 느낀 적이 없다고 한탄한다.어획고가 높던 80년대말 그는 융자금을 받아 대구·넙치·다랑어,게잡이등을 위해 최신 장비를 구입해 사업을 확장했다.그러나 지난해의 수입이 한창때의 20∼30% 수준인 8만∼10만달러로 줄어들어 어선 1척만 남겨두고 모두 처분해 버렸다. 이곳 어민들은 『10년 전만 해도 배 사이를 걸어다닐 수 있을 만큼 어선들이 많았다』고 회상하며 『내년에는 대구·넙치류에 대한 규제가 더욱 심해져 글로스터 항구가 한층 썰렁해질 것 같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뉴잉글랜드 근해에서는 일본·독일·스페인의 대형어선들이 대구·농어·도미 등 고급어종을 훑던 시절이 끝난 뒤 미국 어선들의 어획량은 최근 수년간 기록적인 경신을 보였다. 미국 연안 경제수역을 12마일에서 2백마일로 확장시킨 맥너슨 어로법(76년)이 제정됨에 따라 외국어선이 사라진 대신 첨단장비를 갖춘 미국어선들에 의해 더욱 심각한 어족남획이 저질러진 것이다. 지난해 미 식품농업국의 보고서에 의하면 전세계 17개 주요 어장들 가운데 9개 어장이 심각한 어획량 감소를 겪고 있다.이중 4곳은 이미 상업적 고갈상태에 이르렀다.
  • 「한·약협진 체제」 개발이 과제다(사설)

    한방을 둘러싼 극단적 대결국면이 다소 진정기미를 보여 여간 다행스럽지 않다.어떤 경우든 집단이기주의의 갈등으로 국민들을 실망시키는 일을 우리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그런 국민감정을 간파한다면 향후의 판단도 현명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이 기회에 우리는 한의약문제에 관한 근원적 문제를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특히 한약학과를 약학대학에 설치하는 문제를 놓고 양쪽에게 반반의 이익을 나누어준 미봉책인 것처럼 비친 것은 잘못된 일이다.이 문제는 약사법개정당시에 이미 충분히 논의된 일이다. 우선 한약사제도가 도입된 것은 의약분업을 앞둔 의약행정의 기본 구도라고 할 수 있다.의사의 파트너가 약사이듯이 한의사의 파트너는 한약사가 되는 이른바 「2+2」의 논리인 것이다.이 구도가 「의료 일원화」에 장애가 되고 한양방분리를 고착시키는 것이므로 부당하다는 이론이 있지만 이미 11개의 한의과대학이 있고 거기서 배출되는 한의인력이 불원간 수만명에 이르게 되는 것이 현실이고 보면 물리적 일원화이론은 무리다.다만 어떻게 효율적인 협진체제를 개발하느냐만이 앞으로의 과제이다. 또한 의약분업 정책을 수행하려면 다소 포화상태에 있는 약학인력은 또다른 부담이다.그러므로 약학대학 정원의 범위안에서 한약학과를 설치하는 문제가 합리적으로 연구된 것이다.그와함께 한약학 인력을 새로 양성하면서 국가적 차원에서 기대하는 소중한 목적이 있다.그것은 국제경쟁력있는 신약을 개발하는 일이다.아직은 전적으로 불모지에 있는 것이 이 분야다.한방약의 발전에 그것을 고대하는 것이다.약학적 학문체계에 의한 우수한 한약사인력이 양성된다면 신약개발의 핵심주자를 그쪽에서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학이라는 학문기관을 통해 한방의 학문적 축적이 이뤄진 연구와 경험을 살리고 약학의 학문 체계로 무장한 인력을 통해 그런 목적을 조기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한약시장의 이익을 놓고 소모적인 이권다툼에 갈등을 겪는 일은 이같은 막중한 가능성을 멸실시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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