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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에 이런일이]웨딩컨설팅寺

    “부처님의 자비 속에 불공을 드리며 배우자감을 찾으세요.” 한 사찰이 중매카페를 개설하고 ‘커플매니저’로 본격적으로 나서 화제다. 충북 옥천군 옥천읍 교동리 태고종 사찰인 대성사는 지난 11일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에 ‘따뜻한 만남’(cafe.daum.net/dasungsa)‘이라는 중매카페를 개설하고 미혼 남녀의 만남을 주선하고 있다. 문을 연지 10여일 만에 50여명의 남녀가 회원으로 가입해 맞선을 신청했다. 사찰측은 “적령기를 넘기고도 마땅한 연결고리가 없어 결혼 상대를 찾지 못하는 불자 가족들이 의외로 많다는 데 착안, 카페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사찰에서 운영하는 중매카페이어서 가입 조건은 무척 까다롭다. 신청자는 반드시 불교신자여야 하고, 집 주변 사찰이나 스님의 신원보증이 있어야 한다. 신청자들의 만남은 매주 일요일 오전 10시 열리는 ‘선남선녀 특별법회’를 통해 이뤄진다. 원하는 경우 가족과 친구 등이 함께 법회에 참석해 상견례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점도 특징이다. 주지인 혜철 스님은 “각박해지는 세상 속에서 좋은 연을 맺어주는 것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일이라는 생각에 카페를 개설했다.”면서 “불자들의 반응이 뜨거워 카페운영이 즐겁다.”고 말했다.
  • 윤이상재단 이사장에 박재규 前장관

    윤이상 평화재단 설립추진위원회(공동위원장 원택 황석영 이강일)는 23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대표 발기인 모임을 갖고 재단이사장으로 박재규 전 통일부 장관을 선임했다. 또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원택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이강일 나사렛한방병원 원장이 부이사장으로 뽑혔다.
  • [우수기업&우수상품] 한국오르비스 ‘아이존 브라이트 베일’

    한국오르비스의 ‘아이존 브라이트 베일’은 다크서클(눈 밑 그늘)로 고민하는 여성을 위한 컨실러(concealer)다. 오렌지색 베일이 보색으로 작용해 다크서클 부위를 가려준다. ‘소프트킵 파우더’가 피부를 밝고 생기있게 연출해주고 ‘소프트피트 베일’이 뭉침없이 깨끗하게 유지시켜준다. 아몬드 원액은 눈가의 건조를 막아준다. 이 제품은 좁은 범위에도 사용하기 쉬운 ‘칩 온 타입’으로 돼 있다. 출시기념으로 다음달까지 1만 6000원에 판매한다(정상가 1만 7000원). 한국오르비스는 일본에 본사를 둔 화장품 기업으로 모든 제품을 전화(080-301-5050)와 인터넷(www.orbis.co.kr)만으로 판매한다. 현재 500만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2001년 한국에 처음 진출해 화장품 통신판매를 시작했다. 전국 무료배송, 주문제품의 테스트용 샘플 증정, 30일 이내 100% 환불교환, 고객만족실 운영 등 통신판매의 한계 극복을 위해 노력했다는 게 관계자의 설명.
  • [나눔세상] 독거노인에 ‘사랑’ 날라요

    [나눔세상] 독거노인에 ‘사랑’ 날라요

    할머니가 뚜껑을 열자 작은 조기 지짐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 올랐다. 할머니는 차가운 손을 따뜻한 도시락에 문지르며 “몸도 불편한 사람이 매번 여기까지 오느라 욕보지요.”라며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자 정운홍(55)씨는 “그러니 할머니가 더 건강해지셔야죠.”라며 어깨를 주물렀다. ●독거노인과 노숙자의 시름 나누기 거리에 내몰린 처지이면서도 이웃의 독거노인들을 남몰래 돕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서울 성북구 보문동의 ‘아침을 여는 집’에 머물고 있는 노숙자 12명이 주인공.‘아침을 여는 집’은 불교신도들이 십시일반으로 정성을 모아 만든 노숙자 생활시설. 문을 열고 2년이 지난 2000년부터 독거노인들과 인연을 맺어왔다. 이들은 일주일에 한 차례씩 독거노인들에게 도시락을 갖다 주고 집안일을 돕는다. 도시락은 매년 서울시에서 받는 노숙자 자활프로그램 지원금 400만원을 아껴 정성껏 마련한 것이다. 22일 점심시간에 맞춰 보문동 권소출(83) 할머니의 지하 단칸방을 찾은 정씨는 5살 때 척추후만증을 앓아 등이 굽었다. 하지만 할머니 앞에선 힘들거나 어두운 내색을 하지 않는다. 그는 “어려운 사람끼리 서로 도우면 마음이 통한다.”며 쑥스러워했다. 정씨는 2003년 3월 ‘아침을 여는 집’에 들어간 직후 할머니를 알게 됐다. 할머니는 10m만 걸어도 잠깐씩 쉬어야 할 정도로 몸이 편치 않다. 하지만 신장염으로 10년째 거동이 어려운 딸(44)을 돌보랴 폐휴지를 모아 고물상에 내다 팔랴 쉴틈이 없다. 권 할머니는 “딸아이가 있다는 이유로 기초생활수급대상자도 되지 못한다.”면서 “그래도 이렇게 찾아주는 이웃이 있어 마음이 훈훈하다.”고 고마워했다. ●반찬나누기로 사랑과 재활의지 키워 비슷한 시각, 외환위기의 후유증으로 노숙자가 된 이강원(45)씨도 하일선(74) 할머니의 지하 단칸방에 쌀과 반찬을 내려놓았다. 혼자 살고 있는 하 할머니는 “쌀이 떨어져 걱정했는데 이렇게 고마울 수가 있느냐.”며 이씨의 두손을 꼭 쥐었다. 근처 김분기(64) 할머니의 단칸방에는 지난해 10월 ‘아침을 여는 집’에 입소한 3급 지체장애인 김영진(32)씨가 쇠고기를 들고 찾아갔다. 그는 “장애인이라고 좋은 일을 마다할 수 있느냐.”며 퇴행성관절염을 앓는 김 할머니를 수시로 찾고 있다. 김영진씨는 “할머니와 나누는 정이 기운을 나게 한다.”면서 “그냥 반찬이 아니라 사랑을 전달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침을 여는 집’의 최윤순(34) 상담실장은 “남을 도울 처지가 못된다며 자괴감에 빠진 노숙자가 많아 처음엔 참여가 적었는데 갈수록 희망자가 늘어난다.”면서 “반찬나누기는 노숙자가 자활의지를 키우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이주원(35) 소장은 “처음 문을 열 때는 노숙자 시설이라는 이유로 주민의 반대가 워낙 심했다.”고 돌아보고 “노숙자들의 정성이 주민들의 마음까지 녹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웃었다. 박지윤기자 jypark@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7) 계룡산과 신종교들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7) 계룡산과 신종교들

    ●정감록, 대항 이데올로기, 신종교, 주체적 근대화운동은 함수관계 ‘정감록’과 나의 만남은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을 꺾기 위한 대항 이데올로기가 과연 존재했느냐 하는 화두에서 비롯됐다. 이 문제를 풀려고 나는 서양의 종교사, 중국의 태평천국, 백련교 등에 관한 책을 읽으며 암중모색을 하던 중 ‘정감록’, 대항 이데올로기, 신종교 그리고 주체적 근대화운동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믿게 됐다.“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원불교, 다양한 농촌운동을 전개한 천도교의 경우에서 보듯 신종교는 근대화운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았다. 뭉뚱그려 말하면, 조선 후기 평민 지식인들이 생산·보급한 ‘정감록’은 동학·증산교 및 원불교 등 한국의 대표적인 신종교들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들 신종교는 성리학에 대항한 새 이데올로기일 뿐만 아니라 근대화를 위한 대안의 구실도 할 만했다.19세기 말부터 이들 신종교는 민중의 입장에서 ‘제생의세’(생명을 살리고 병든 세상을 치료)와 ‘해원상생’(원한을 풀어 서로를 살림) 운동을 전개했다. 이것은 평민 지식인들이 주도한 운동이란 점에서 한국사상사의 큰 결실이었다. 그러나 이런 신종교들이 기성 이데올로기를 대체하기 전에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한국 사회는 조선 후기 평민 지식인들이 애써 창안한 대항 이데올로기를 외면한 채 기독교, 자본주의, 사회주의 등을 수입하는 처지가 됐다. 새 이데올로기를 도입한 사회세력들은 신종교를 일괄 매도하는 경향이 심했다. 그들은 신종교를 ‘유사종교’라든가 ‘사이비종교’라며 무시하고 억압했다. 비유컨대, 수입상품을 팔아먹으려고 토산품에 대해 흑색선전을 펴는 격이었다. 간혹 일부 신종교 단체들이 물의를 일으켰다 해도, 그것으로 신종교 전체를 매도해서 될 일인가. 참고로 말하면 일제시기 신종교 단체들의 인기는 대단했다. 오늘날의 기독교나 천주교보다 수십 배 신도 수가 많았다. 우리는 더 이상 냉혹한 비판자의 편향된 시각에서 신종교 단체들을 홀대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수십년 전 수백만 민중의 지지를 받던 신종교는 ‘정감록’에서 영감을 얻었거나,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 그런 점 때문에 ‘정감록’을 이야기하다 보면 자연히 신종교를 말하게 되고, 신종교를 논의하면 당연히 정감록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다. 정감록이 신종교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친 부분은 ‘때가 되면 진인이 나와서 계룡산에 도읍한다.’는 대목이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신종교마다 일치하지 않아 여러 형태로 구별된다. 나는 편의상 그 형태를 청림교형·보천교형·원불교형 등 3가지로 구분해 부르겠다. 이들의 차이점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정감록, 대항 이데올로기, 신종교 그리고 자주적 근대화운동의 상관관계라는 큰 주제에 접근하는 내 나름의 방법이다. ●전통적 정감록 신앙에 근접한 청림교형 신종교 단체들 가운데 조선 후기의 전통적인 정감록 신앙에 가장 가까운 형태를 띠는 것을 나는 청림교(靑林敎)형이라 한다. 엄밀히 말해, 청림교가 늘 그랬다는 뜻은 결코 아니며, 단지 1932년에 발생한 이른바 청림교 사건에서 드러난 그 교단의 모습에서 정감록 신앙의 원초적 형태를 재발견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자취 없이 사라진 청림교지만 본래 1920년 동학에서 갈라져 나올 때만 해도 그 세가 만만치 않았다. 교당이 만주와 지린에까지 세워져 한때 신도 수가 30만명을 오르내릴 정도였다. 청림교는 항일운동에도 열심이어서 일제가 눈엣가시처럼 여겼다고 하는데 마침 1932년 2월 말에 터진 청림교 사건이 결정적인 탄압의 구실이 됐다. 당시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상상하던 정감록과 신종교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해 사건의 내용을 개관해 보자.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정감록’을 빙자해 ‘어리석은 백성’을 현혹하는 신종교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물론 언론에 밝혀진 사건의 상당 부분은 일제가 조작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봐야 한다. ●자하도 진인이 보내온 만병통치약 1932년 2월27일자 경성일보에 따르면 일본 경찰은 청림교주 태두섭을 비롯한 30명을 긴급체포했다. 전국 각지에서 농민들에게 금품을 갈취해 사복을 채운 혐의로 붙들려온 이 교단의 간부 11명에게는 결국 실형이 선고됐다. 청림교측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고 한다. “바야흐로 계룡산에 신국가 건설사업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정감록’에 약속된 대로 곧 진인이 나와 국권을 손에 쥘 것이다. 진인은 이미 청림교 간부들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는 단계에 있는데 남해 자하도라는 무인도에 숨어 있는 칠성관이 바로 정감록에 예언된 진인이다. 누구든지 청림교를 제대로 믿기만 하면 이 다음에 크게 벼슬한다. 몸에 병이 있는 사람도 아무 걱정하지 마라. 청림교에는 자하도에서 몰래 가져온 신약이 있다. 이 약만 복용하면 만병이 통치되고 불로장생한다.” 청림교에서 말한 자하도와 칠성관은 물론 가공의 섬, 가공의 인물이었다. 다만 ‘정감록’에 남해의 어느 섬에서 진인이 나와 계룡산에 도읍한다고 돼 있는 것만은 사실이라서 많은 정감록 신봉자들은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고 본다. 청림교측은 진인의 실체를 칠성관으로 파악하고 있던 데다가 진인이 머무는 남해의 섬을 자하도로 정확히(?) 밝혔고, 또 그 진인과 이미 왕래를 하고 있다는 주장까지 하는 바람에 그럴싸하게 들렸던 것이다. 또한 청림교측은 진인이 직접 조제했다는 선약(仙藥)을 시판하기도 했다.‘정감록’에는 진인이 약을 만든다는 말이 전혀 없다. 그렇긴 해도 사람들은 세상을 구하러 나올 진인이라면 그 정도 능력쯤이야 있을 법하다고 믿었다. 진인이란 용어가 본래 도교적인 데다 도교는 장생술(長生術)을 추구하므로 진인과 선약의 관계는 누구에게나 밀접해 보였을 것이다. 이런 사정으로 미뤄 볼 때 불치병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청림교측이 파는 선약에 관심을 가진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만일 식민지 경찰의 수사 결과가 사실이었다면, 청림교 간부들은 이런 ‘황당한’ 거짓말로 ‘어리석은’ 농민들을 속여 사기행각을 거듭했던 셈이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일제가 발표한 청림교 사건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는다. 이 사건은 청림교를 탄압하기 위해 일어난 것이었고, 수사 과정에 혹독한 고문이 있었다. 따라서 사건에 관한 보도 가운데도 일경의 왜곡과 조작이 섞여 있을 수가 있다. ●정감록 신앙의 원초적 형태 어쨌거나 청림교 간부들의 언동에는 조선 후기에 널리 퍼져 있던 정감록 신앙의 원초적인 모습이 재발견된다. 계룡산 천도설의 주인공인 진인의 능력을 빌미로 신도를 끌어들이고 조직의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는 방법 말이다. 비슷한 일이 18세기 정조 때도 있었다. 그때 어떤 사람들은 진인이 해도에서 몰래 군대를 기르고 있다며 군인들이 입을 군복을 마련한다는 빌미로 금품을 거둔 사례가 있었다. 또 어떤 이들은 해도에 있는 진인에게 물어 미래의 운세를 봐주겠다며 의뢰인에게서 복채를 챙기기도 했다. 묘향산 등지에 머무는 진인에게 부탁해 액막이를 하겠다며 제수용품조로 거금을 제공받은 이도 있었다. 청림교 사건에 투영된 신종교의 모습은 대강 이렇다. 이 단계의 신종교는 아직 기성 이데올로기에 대항할 만큼 뚜렷이 정제된 이념을 갖지 못했다. 그 단체의 수장은 스스로를 진인이나 새 세상을 건설할 주역으로 제시하지도 못하는 가운데 정감록에 언급된 진인을 내세워 교단의 조직을 보강하고 운용자금을 거두는 정도다. 이들 신종교는 그저 ‘정감록’을 시세에 맞춰 풀이해 현세적 이익을 도모하는 정감록 신앙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일제시기 계룡산에 난립해 있던 신종교 단체는 대체로 그 수준이었다. 각지로부터 계룡산에 이주해온 정감록 신봉자들 중에는 일인교단(一人敎團)에 머문 경우도 많았다. 계룡산을 처음 찾았던 1980년대 후반에도 나는 이런 형태의 정감록 신자들을 많이 보았다. ●국가적 차원에서 천지개벽을 바라본 보천교형 그와 다른 차원에서 정감록의 계룡천도설을 수용한 신종교 단체들도 있었다. 정연한 교리체계를 갖추고 국가나 민족의 입장을 내세운 경우인데, 그 대표적인 사례로 나는 보천교(普天敎)를 손꼽는다. 지금은 그 존재가 희미해졌지만 일제시기 보천교는 위세당당한 신종교였다. 보천교는 1911년 증산교에서 독립됐다. 창립자는 차경석(車京石·본명은 輪洪)으로 그는 증산교와 동학의 교리를 녹여내 나름대로 새 세상을 준비했다. 인의(仁義)의 실천을 기본교리로 정했고 경천(敬天)·명덕(明德)·정륜(正倫)·애인(愛人)을 4대강령으로 삼아 상생(相生)·대동(大同)을 강조했다. 한데 이 신종교의 가장 큰 특색이라면 교주 차경석이 ‘정감록’을 적극 원용한 점이다. 그는 천지운도(天地運度·새 세상)를 열 사람은 자기뿐이라며 진인을 자처했다. 새날이 오면 한국은 세계 종주국가가 된다던 차경석의 주장은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1920년대 말 보천교는 동아시아가 한세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일제의 대동아공영권에 동조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하였지만, 보천교의 본래 모습은 그렇게 친일적인 것이 아니었다. 보천교 신도들은 일본 상품을 철저히 배격했고 토산품 자급자족운동을 했다.1919년 독립만세운동이 끝난 뒤 허탈감에 빠져 있던 민중은 이런 보천교의 민족적인 성격에 호응해 교세가 급속히 팽창했다.1920년대 중반은 보천교의 전성기로 간부 수가 55만명을 헤아렸고 신도는 6백만명을 넘었다고 한다. 곧이듣기는 어렵지만 1920년 당시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기독교 신자 총수 32만 3574명과 비교해 볼 때 보천교의 교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보천교는 기독교의 20배쯤 되는 신도 수를 자랑했던 것이다. 그들은 ‘정감록’을 인용해 대한독립이 임박했다고 주장했으므로 일제는 보천교의 일거수일투족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교세가 워낙 큰 데다 교주 차경석의 카리스마가 절대적이어서 감히 교단 해체를 명령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비유하면 당시 보천교는 구한말 동학이 누렸던 민중종교의 위상을 가졌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식민지 당국이 보천교의 활동을 방치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일설에 따르면 일경에 체포돼 곤욕을 치른 보천교 신도가 3만명 이상이었다고 한다. 조선총독부는 보천교를 반국가적 ‘음모단체’로 규정해 놓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다. 보천교의 ‘음모’는 대한독립을 목적으로 삼은 것이었고 그 핵심이 ‘정감록’의 계룡산 도읍설이었다.‘정감록’에 “계룡산의 돌이 하얗게 되고, 초포에 배가 다닐 때 세상일을 알 수 있다(鷄龍白石 草浦行舟 世事可知).”는 구절이 항상 문제였다.‘세상일을 알’ 거란 문구를 보천교측은 교주 차경석의 등극으로 풀이했다. 그런데 마침 1924년은 육십갑자가 새로 시작되는 갑자년이라 보천교 신도들은 그 해를 신국가 출범 시기로 보았다. 이른바 지상낙원인 후천세계(後天世界)가 시작될 갑자 원년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종교적 카리스마가 막강했던 차경석은 일반인들 사이에도 인기가 높아서 사람들은 동양을 지배할 권력자라는 의미로 그를 차천자(車天子)라고 불렀다 한다. 물론 비웃음을 담아 그렇게 부른 경우도 적지 않았을 테지만. 1929년 낙성된 보천교의 본부 건물 십일전(十一殿)은 보천교의 교세를 반영한다. 전북 정읍에 건립된 이 건물은 지붕을 덮은 기와가 황금빛을 뿜었으며, 경복궁 근정전보다 무려 2배나 컸다.1924년 등극설이 무위로 끝났기 때문에 보천교측에선 바로 그 십일전에서 기사년(己巳年·1929년) 기사월(己巳月) 기사일(己巳日)에 교주 차경석이 천자로 즉위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기(己)와 사(巳)는 글자의 생김이 서로 비슷한데, 두 글자는 10간과 12지의 중간으로 최상의 양기를 상징한다. 특히 뱀을 뜻하는 巳는 용(辰)과 더불어 성인(聖人) 즉 임금을 가리킨다. 따라서 “기사년 기사월 기사일”이라면 보통 임금이 아니라 전 세계를 뒤흔들 만큼 지도력이 강한 왕이 등장할 시점으로 해석된다. 이 소문으로 수백만 보천교도들은 대한독립의 임박을 믿었고, 그러자 식민지 당국자들은 행여 큰 소요라도 일어날까 봐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차경석은 왕이 되지 못한 채 1936년 병으로 죽었다. 조선총독부는 그 소식을 환영했고 보천교 분쇄공작에 나섰다. 졸지에 지도자를 잃은 보천교는 사분오열돼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차경석이 죽은 뒤에도 보천교 신도의 상당 수는 여전히 ‘정감록’의 계룡산 도읍설에 건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신왕조의 수도로 예언된 계룡산에는 후천개벽의 기운이 넘친다. 머지않아 계룡산 신도안에 도읍할 정진인은 차경석의 손자 정동영이 틀림없다.” 일부 신도들은 이런 말을 퍼뜨리며, 차경석의 어머니가 이웃의 정모라는 사람에게 성폭행을 당해 차경석을 낳았기 때문에, 그의 실제 성은 정씨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폈다. 1930년대 후반 총독부 관변 민속학자 무라야마 지준이 쓴 조사보고서를 읽어 보면, 당시 차경석의 손자는 행방불명이 되고 없었다. 그 점에 대해 신도들의 설명은 달랐다.“차천자의 손자 정동영은 깊은 산속에 숨어 밤낮으로 심신을 수련하고 있다. 이제 정동영이 다시 나타난다. 새 세상에선 정동영을 받드는 사람들이 신양반이 돼 요직을 차지한다.” 성폭행설까지 조작해 자기네 교주의 성까지 바꾼 것은 억지스럽고, 교주가 ‘천자’에 즉위한다고 했던 점은 시대착오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천교의 주장엔 긍정적으로 평가될 부분이 있다. 그들은 정감록 신앙을 대한독립, 지상천국인 후천세계의 관념과 결부시킴으로써 일제에 저항할 원동력을 제공했고, 단순히 항간에 떠도는 예언이 아니라 식민지 지배체제에 대한 대안으로 탈바꿈시켰다. 비록 엉성하긴 했지만 큰 변화였다. 한편 원불교에선 계룡산을 무엇으로 이해했는가 하는 문제는 따로 살펴보겠다.(푸른역사연구소장)
  • [학교소식]

    [학교소식]

    ●글짓기·미술 등 7개상 받는 졸업생도 은석초등학교(www.eunseok.seoul.kr)는 22일(화) 학교 대강당에서 졸업식을 열고 103명 졸업생 전원에게 음악, 체육, 영어, 체험학습 등의 특기적성별 상장을 수여한다. 이번 졸업식에서는 우수지(13)양이 최다 수상기록을 남기게 됐다. 우 양은 특별공로상, 공로상, 글짓기장학상, 불교신행상, 문예특기상, 미술특기상, 파라미타 지부장상 등 총 7개 상을 수상한다. 졸업식의 단골 메뉴인 송사·답사도 이색적으로 진행된다. 졸업생과 재학생이 함께 학교 생활을 돌아보며 대화를 나누는 형식이다. ●특성화고 지정후 첫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서울관광고등학교는 특성화고교 지정 후 처음 맞이하는 신입생을 위한 오리엔테이션을 갖는다.22일(화)∼23일(수) 1박 2일 동안 강원도 원주 동서울유스텔에서 진행된다. 오리엔테이션에는 1학년 신입생 250명과 신입생을 축하해 주기 위한 특별공연팀 관광고 난타반 10여명도 동행한다. 신입생들이 학교생활에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학교의 특징과 학사일정을 소개하고 학생들의 성격과 자질을 알아 보는 자아발견 프로그램도 진행할 예정이다. 또 신입생들의 진로 설계에 도움이 될만한 ‘선배와의 대화’ 시간도 마련된다. 대한한공 국제선 객실 승무원 조희정(29·여)씨와 아시아나 항공에서 사무직으로 일하고 있는 윤숙희(29·여)씨가 강연자로 나선다. ●해외대학 진학예정 신입생 학부모 모임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www.ewha-gfh.hs.kr)는 25일(금) 오후 2시 학교 2층 유학반 교실에서 학부모 모임을 연다.2005학년도 신입생 학부모 중 자녀들의 해외 대학 진학을 결정한 학부모들이 참가한다. 이화외고는 지난 5일과 19일 신입생 학부모를 대상으로 두차례 유학반 설명회를 개최했었다. 학부모들은 유학반 지원 신청서와 자녀의 반명함판 사진 3장을 지참해 참가하면 된다. 이번 모임에서는 유학반의 구체적인 수업과 운영계획 등에 관한 간단한 설명회도 열린다. ●삼각산高·미양中 등 3개교 친환경 시공 2007년에 개교하는 삼각산고등학교, 신도림고등학교, 미양중학교가 친환경적 학교로 지어진다. 서울시 교육청은 올해부터 환경부가 시행하는 친환경학교 인증제 적용 우선 시범학교를 선정, 올해부터 적용한다고 밝혔다. 세 학교는 학교 면적의 3분의 2가 생태녹화 공간으로 조성되고 태양열 에너지 시설도 설치해 학교 소요 전력의 20%를 공급할 수 있게 된다.
  • [인사]

    ■ 건설교통부 ◇국장급 전보 △서울지방항공청장 孫政雄△국무조정실 전출 鄭昌洙 ■ 정보통신부 ◇국장급 전보 △통신위원회 상임위원 金仁植△우정사업본부 경영기획실장 金在燮△정보통신공무원 교육원장 朴升圭△정보통신부 지식정보센터장 李圭太△경북체신청장 金鎬 (계약직 신규) △정부통합전산센터 추진단장 李永熙 ■ 교육인적자원부 ◇과장 전보△기획법무담당관 韓晳洙△학사지원과장 朴隆洙 ■ 동국대 (서울캠퍼스)△영상대학원장 閔丙錄△기획처 기획예산팀장 金潤吉△〃 심사평가〃 朴君緖△〃 인사관리〃 安瀅澤△대외협력처 대외협력실장 尹東奎△〃 대외협력담당관 申寬浩 黃來烈 羅炳昱△교무처 교무기획팀장 朴相寬△연구처 연구개발팀장 朴明浩△〃 산학연구지원〃 朴光鎬△학생처 취업지원센터 진로교육상담〃 孫在英△〃 〃 취업지원〃 韓文愚△총무처 구매〃 文龍周△제3캠퍼스 건립추진단 건설본부장 河正鈗△대학원 행정지원실장 柳國鉉△영상대학원 〃 金鍾伯△불교대학원 및 불교대학 통합행정지원실장 金七石△행정대학원 및 사회과학대학 〃 崔大錫△경영대학원 및 경영대학 〃 李永勉△교육대학원 행정지원실장 具泰會△언론정보대학원 및 국제정보대학원 통합행정실장 吳光鎭△산업대학원 및 정보산업대학 〃 安載奉△문화예술대학원 및 예술대학 〃 李康賢△야간강좌 행정지원실장 趙庚辰△교양교육원 〃 朴昇鍾△사회교육원 〃 黃禹烈△교수학습개발센터장 朴明姬△보건소장 林成祐△기숙사관장 朴文基△동대신문사 편집인 겸 주간 尹載雄△〃 부주간 金愛珠△산학협력단 산학기술협력센터소장 겸 산업기술연구원장 李鍾台△〃 창업지원단장 林重延
  • [열린세상] 근본주의적 단식의 문제점/김진석 인하대 철학과 교수

    지율 스님의 단식은 사회적 동의를 확보하지 못한 국가 환경정책에 거듭 제동을 걸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지만, 장기화된 단식에 나는 매우 갑갑했다. 이 갑갑함은 나만 느낀 것은 아닌 듯하다. 오죽하면 단식을 하겠느냐며 처음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도 점점 그 단식의 방식에 갑갑해하고 불안해했다. 최악의 사태가 일어나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환경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단식을 통한 문제 해결 방식에는 답답해했다. 환경영향평가를 요식 행위로만 여기면서 사회적 설득을 게을리 한 정부의 무책임과 무능력은 비판받아야 한다. 이 점에 다시 주의를 환기시킨 것은 승려 지율의 큰 성과다. 그러나 그의 단식은 생태운동의 순전한 성과이며 승리일까? 이 물음은 매우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공적 언론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그러면서 이상하게도 그의 단식에만 온통 관심을 쏟았다. 가만히 보면 환경분쟁의 해결 방안에 관심을 기울이는 대신 그의 단식에 관심을 쏟는 왜곡된 현상 자체가 이 이상한 일의 이면이었다. 한 승려의 항쟁이 가져온 승리는 그 안에 갑갑함과 불안을 내포하고 있었다. 왜 승려 한 사람이 목숨을 걸고 국가적 분쟁을 해결하려고 나서야 한단 말인가? 물론 이 경우 그의 목숨은 단순히 개인의 목숨이 아니라 생명가치를 교리 차원에서 옹호하고 있는 불교계의 목숨을 상징하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불교계가 범 교단의 차원에서 행동에 나선 것은 아니었고, 그렇게 하기도 어려웠다. 심지어 교단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나섰다고 해도 항거는 성사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오히려 연약한 여자 승려 홀로 극단적인 단식에 나섰기 때문에 항거는 관심을 끌었고, 정부는 굴복했다. 그 단식은 한국 생태운동의 성과이지만 동시에 함정이 아닐까? 왜냐하면 그것은 시민들의 광범위한 연대를 통해 이루어진 게 아니라, 한 승려의 도박에 가까운 단식을 통해 얻어진 성과이기 때문이다. 아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단식은 사람들을 열광하게 했지만, 사람들은 꼭 그 단식에 동의해서 열광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방식의 극단성에 홀린 듯하다. 나는 여기서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과격한 저항 자체를 비판하자는 게 아니다. 사회적 동의를 얻는 데 실패한 정부 정책에는 얼마든지 저항할 수 있다.80년대 이후 유럽 녹색당 계열의 운동가들도 상당히 격렬하게 정부의 에너지 정책이나 교통 정책에 대해 반대하고 저항했었다. 그러나 그들의 저항행위가 생태 운동단체의 내부적 동의와 합의에 따른 집단적 저항행위였던 것과 비교하면, 승려 지율의 저항방식은 개인 중심의 시위일 뿐 아니라 과도하게 근본주의적 성향을 띤다. 왜 생태운동은 합리적이고 시민참여적인 방식에 의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종교적 근본주의 방식에 의존한 채 뒤뚱거리는가? 이 물음은 환경운동단체에도 화살이 돼 날아간다. 왜 환경운동은 시민들의 저변적인 참여와 연대를 확산시키지 못하고, 명망가적 개인과 사제들의 극단적 투쟁에 엉거주춤 기대고 있는가? 왜 민주주의는 정부 단체와 시민들이 민주적인 방식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합의하는 과정에 이르지 못한 채, 비참여정부와 종교적 근본주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가? 물론 종교단체는 생태운동에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또 해야 한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지나치게 교리 자체의 순수성에 의존하는 것은 위험하다. 교리의 이념성에서 출발했더라도 시민 사회의 세속적이고 사회적인 동의로 확대되고 확산돼야 한다. 또 명망가적 사제의 영향력에 너무 의존하는 대신, 자발적인 시민들의 민주적인 연대로 녹아들어가야 한다. 사법 만능주의에 빠질 필요는 없지만, 일단 민주적 절차에 의한 재판에서 결정이 나면 승복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그와 달리 근본주의적 단식은 이런 민주적 저항 방식과 충돌하기 십상이고, 자칫하면 도박이 될 위험이 있다. 한국 사회에 뿌리 깊은 도박적 개발주의와 자본주의가 고질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생태적 저항조차 도박적 근본주의로 가야 할까. 그 경우 갈등과 도박의 악순환만 초래될 것이다. 김진석 인하대 철학과 교수
  • 지하철에 웬 ‘사찰’

    지하철에 웬 ‘사찰’

    거미줄처럼 뻗어나간 서울 지하철의 역사(驛舍) 인근에는 없는 게 없을 정도로 시민들과 친근한 공간으로 나날이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절, 장난감 나라, 예식장 등 ‘과연 이런 게 여기에 있을까.’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만한 곳도 더러 눈에 띈다. 지하철 2호선 종합운동장역 지하1층에 절(卍)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시민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 같다. 지하철역에 기독교인들이 둘러앉아 예배 등 각종 행사를 갖는 공간도 많다. 하지만 불상을 바라봐야 하는 불교 신자라면 사정이 다르다. 지하철공사 직원 250여명으로 이뤄진 ‘법우회’가 이곳에 법당을 마련해 놓았다. 조계종 총무원에 등록까지 마쳤으니 규모로 보나 시설로 보나 사찰과 다름없다. ●공사 직원들의 안전운행 기원 공간 이곳에 법당이 있다는 것을 아는 시민들도 그렇게 부른다. 전통건물을 갖춰야 하는 문화관광부 등록 요건을 갖추지 않아 법적으로 사찰 이름을 얻지 못했을 뿐이다. 1991년 5월 출범한 법우회는 이듬해 10월 4호선 사당역에 20여평짜리 법당을 만들었으나 공간이 비좁아 93년 이곳으로 옮겼다. 법당 넓이는 40여평이나 된다. 매월 둘째·넷째 화요일 오후 7시부터 한시간 반 남짓 정기 모임을 갖고 법회를 연다.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 용문산 ‘사나사’ 주지인 화암 스님을 지도법사로 초청했다. 회장인 서울지하철공사 민병훈 기술본부장은 “시민들의 발인 지하철을 운행하면서 늘 안전이 지켜지도록 기원하는 데 첫 목적이 있다.”고 귀띔했다. 그는 이어 “인근 선수촌아파트 등 주민들이 지하철을 이용하며 이따금씩 들러 예불을 하는 등 시민들과도 가까워진 것 같아 기쁘다.”고 덧붙였다.(02)520-5012. 지하철 역에는 장난감을 무료로 빌려 주는 곳도 있다.2호선 을지로입구역에서 지하보도를 따라 시청, 덕수궁 방면으로 걷다 보면 ‘장난감 가게’가 나타난다. 서울시 보육정보센터가 운영하는 이른바 ‘녹색장난감도서관’이다. 이곳에서는 각종 장난감을 비롯해 교육도서와 비디오테이프 등을 대여해 준다. 2001년 12월 들어선 장난감도서관에는 하루에 50여명, 많게는 80여명이 찾아온다. ●을지로입구역엔 장난감 무료 대여소 자동차, 오토바이, 미끄럼틀 등 100여종에 5000여점을 갖췄다. 각종 놀이시설을 아이들과 즐기기 위해 찾아도 좋다. 이 곳을 이용하는 주부들이 많아 동호회도 생겼다. 회원이 17명인 ‘두두인형 만들기’모임이다. 처음 가입하는 준회원은 2000원의 회원 예탁금을 내야 한다. 한 차례에 장난감 2점을 열흘간 대여할 수 있다. 가입한 뒤 12회 동안 반납기일 연체나 파손 없이 이용하면 정회원으로 승급하는데, 예탁금 2000원을 돌려받고 대여 품목과 기간도 3점,14일로 늘어난다. 또한 새 장난감이 들어오면 우선권도 주어진다. 오전 10시에 문을 열어 평일 오후 7시30분, 토요일엔 오후 3시30분까지 운영한다. 일요일과 공휴일은 휴무다.(02)753-0222∼3. 7호선 상도역 지하1층에도 ‘로야 장난감대여점’이 있다. 동작구가 운영하며 구민이면 누구나 연 회비 2000원으로 회원에 가입할 수 있다. 동작구 상징물인 백로를 형상화한 캐릭터 ‘로야’에서 이름을 따왔다. 면적은 50여㎡에 물품은 650여점.1회에 2점을 10일 동안 빌릴 수 있다. ●모유 수유방·예식장도 지난해 6월 개설한 이래 장난감 대여는 3500여건을 기록했다. 회원 800여명을 거느렸다. 오전 9시부터 평일 오후 6시까지, 토요일 1시까지 운영한다.(02)820-1632. 이밖에 5호선 광화문역과 7호선 고속터미널역에는 각각 모유 수유방이 마련돼 있다. 또 6호선 녹사평역엔 멋진 분위기 속에서 무료로 백년가약을 맺을 수 있는 예식장도 들어섰다. 글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선승들이 들려주는 ‘일상속 참선’

    선승들이 들려주는 ‘일상속 참선’

    조계종 90여 선방에서는 매년 2000여 스님들이 화두를 들고 수행에 정진한다. 그런가 하면 50여 곳에 이르는 전국의 시민선방들은 수만 명의 재가 수행자들로 붐빈다. 웰빙과 명상 열풍 속에 사회적으로도 다양한 수행 담론들이 넘쳐난다. 그중에서도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단연 간화선(看話禪)과 위빠사나다. 간화선이 하나의 화두를 가지고 끊임없이 생각하는 참선법이라면, 부처가 행한 수행법으로 알려져 있는 위빠사나는 매순간 일어나는 현상의 무상한 특성을 알아차리는 훈련이다.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새로운 선풍이 요구되는 요즘, 한국 불교의 대표적 수행법인 간화선 대법회가 마련돼 관심을 모은다. 부산 범어사와 현대불교신문사가 함께 주최하는 ‘범어사 설선(說禪)대법회’가 그것이다. 설선대법회는 ‘문 없는 문을 열다.’라는 주제로 3월5일부터 5월7일까지 매주 토요일 오후 2시 범어사 보제루에서 열린다. 선(禪) 중심사찰인 범어사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선승들이 대거 초청된 가운데 열린다는 점에서 이번 법회는 그 의미가 남다르다. 경허, 용성, 만해, 동산, 탄허 스님 등 숱한 선사를 배출한 범어사는 1913년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으로 지정된 선수행의 중심도량. 범어사 조실 지유 스님과 동화사 조실 진제 스님이 각각 입재(3월5일)와 회향(5월7일) 법회를 주관하고, 석종사 선원장 혜국 스님(3월12일), 각화사 선덕 고우 스님(19일), 범어사 금어선원 장 인각 스님(26일), 화엄사 선등선원장 현산 스님(4월2일), 조계종 기본선원장 지환 스님(9일), 축서사 선원장 무여 스님(16일), 해인총림 수좌 원융 스님(23일), 봉암사 태고선원장 정광 스님(30일)이 법주로 나선다. 원융 스님이 공개 법회에 나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법회가 특히 주목받는 것은 수행자가 아닌 일반인에게 초점을 맞춘 ‘간화선 대중화’의 자리라는 점. 선승들이 직접 나서 감로 법문에 목말라하는 출·재가 수행자들과 비(非)불교인에게 올바른 간화선 수행법을 전수한다는 방침이다. 법회는 질의 법사와 재가 질의자가 법회별로 한 명씩 지정돼 법주에게 질문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질의 법사는 부처가 생존할 당시 사리불 존자가 대중을 대표해 질문했듯, 법주 스님의 법문에 대해 질의해 대중의 이해를 돕는다. 마지막 회향법회는 지위 고하나 재가ㆍ출가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법을 묻는 무차선법회(無遮禪法會)로 열릴 예정이다. 법회가 끝난 뒤 희망자는 참선(오후 7∼11시)과 철야정진(오후 11시 이후)도 스님들의 지도 아래 행할 수 있다. 전체 법회 참가자에게는 수료증이 발급되며, 참선에 참가한 사람에게는 안거증(安居證)이 주어진다. 범어사 교무국장 성중(聖中) 스님은 “이번 법회는 수많은 참선학인을 배출한 대표적인 선 수행 사찰이 평소에 뵙기 어려운 선 수행 스님들을 모시고 선의 대중화에 본격적으로 나섰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051)508-3122.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조계종 새 紋章 ‘삼보륜’ 확정

    대한불교조계종(총무원장 법장 스님)은 종단의 문장(紋章)을 개발, 최근 일반에 공개했다. ‘삼보륜(三寶輪)’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문장은 선정(禪定)과 법륜(法輪)을 상징하는 일원상 안에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와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상징하는 3개의 점이 찍혀 있는 형상이다. 1998년부터 새 문장 개발에 착수한 조계종은 2003년 최종 시안을 종무회의를 통해 확정한 뒤 지난해 12월20일 특허청으로부터 특허출원을 받았다. 조계종은 이번에 개발한 문장을 종단 산하 사찰표지판 등에 통일적으로 적용하는 한편 다양한 디자인을 개발해 차량, 상패, 명함 등에도 적극 활용할 방침이다.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6) 신도안은 대한독립의 소망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6) 신도안은 대한독립의 소망

    ●신도안 사람 김씨 김철호(가명) 노인(78세)을 다시 만난 것은 금년 초였다. 옛날 신도안 사람들의 생활이 궁금해 거기 살던 이를 수소문하던 참에 그와 재회하게 된 것이다. 1988년 봄, 먼지가 풀썩거리는 시골길을 따라 소형차를 몰고 간 곳이 충남 논산군 두마면 부남리였다. 나는 종교사회학적 입장에서 신도안을 조사할 계획이었다. 부남리에서 여러 사람을 만났는데 유독 김씨가 기억에 가장 오래 남았다. 차분하면서도 다부진 말씨도 인상적이었지만 그 집안 내력도 독특했다. 김철호씨는 3대째 신도안에 살고 있는, 이를테면 신도안 토박이였다.19세기 말 그의 조부 김병선이 평안도 정주에서 문전옥답을 다 처분하고 식구를 인솔해 들어온 곳이 바로 부남리였다. 밥술이나 먹던 김씨의 조부가 하루아침에 고향을 등진 것은 ‘정감록’의 예언을 좇아서였다.‘머지않아 난리가 난다. 조선이 망하고 새 왕조가 계룡산에 들어선다.’ 김씨의 조부는 신도안에 들어가면 난리도 피하고 새 세상에서 벼슬도 할 수 있단 말에 귀가 솔깃해 마침내 고향을 등졌다고 했다. 구한말에는 외세의 간섭이 심해지고, 각종 민란과 갑오동학농민운동 등으로 사회가 몹시 혼란했다. 그 시절에 신도안으로 이주하는 현상이 본격화됐던 것인데 이주민 중엔 수 백 년 동안 지역차별에 희생됐던 서북 출신이 많았다. 본래 살림살이가 유족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정감록’이 처음 출현한 곳도 서북지역이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볼 때 김철호씨의 조부는 전형적인 초기 이주민이었다. 신도안의 토착인구는 19세기 초까지 수십 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부터 이주민이 점증한 결과,1918년 말 총 584호에 남녀 2667명으로 불어났다. ●신도안의 여러 뜻 ‘정감록’의 신봉자들은 누구나 새 도읍지를 신도안이라 믿었다. 이 태조가 대궐 터를 닦던 곳이고 계룡산에서 가장 빼어난 명당이기 때문에 거기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그 신도안이란 지명엔 흥미로운 유래가 있다. 신라 때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계룡산에 왔는데, 그는 신라 사람들이 계룡산의 정상인 천황봉 아래 있는 제자봉(帝字峰)을 제도(帝都)라 일컫는 사실을 알고 격노했다. 엄연히 중국에 황제가 있는데 신라같이 작은 나라에 제도(帝都)란 말은 당치 않으니 당장 바꾸라고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은 할 수 없이 ‘제도’의 ‘제(帝)’ 자에서 양편 획(劃)을 떼 신(辛)자로 고쳐 ‘신도(辛都)’라 불렀다 한다. 신도안이란 지명을 둘러싼 해석은 제각각이다.1988년 조사 당시 내가 현지서 만난 계통불명의 어느 신종교단체 교주는, 새 세상을 가져다줄 구세주가 도읍할 곳이므로 ‘신도안(新都案)’ 즉, 신도읍 예정지라고 했다. 단군을 모신다는 어느 신종교단체의 사제는 이곳은 신정(神政)이 베풀어질 곳이라 ‘신도안(神都案)’이라 해야 옳다고 주장했다. 그런가 하면 동학 계통의 어느 신종교인은 정감록에 예정된 정씨(鄭氏)의 도읍인 때문에 조선왕조의 도읍은 아니라는 뜻이 있어 ‘新都안’이라고 했다. 그는 ‘안’은 아니라는 부정의 뜻이라고 재삼 강조했다. 김철호 씨를 비롯한 현지 주민들은 ‘새로운 도읍지의 안쪽’ 즉, 신도내(新都內)로 이해했다. 이번에 다시 만났을 때 김씨는 21세기엔 드디어 신도안 시대가 열려 한국이 세계의 중심이 될 거라 했다. 그는 아직도 3대를 품어온 희망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다. 지명에 대한 해석은 서로 달랐지만 신도안이 장차 일대변화를 불러올 중심지여야 한다는 믿음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정감록’의 신봉자들은 세상이 그냥 이대로 지속돼선 안 된다, 뭔가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확신을 가진 듯하다. 따지고 보면 이런 믿음은 기독교와 불교를 비롯한 이른바 모든 고등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굳이 차이점을 찾는다면 ‘정감록’ 신봉자들은 질적 변화의 진원지를 신도안이란 구체적인 장소로 못 박은 점이다. 신도안의 지리적 범위를 묻는 내 질문에 김철호씨는 이렇게 답했다.“계룡산 정상에서 남동쪽으로 한참 내려오면 암용추와 숫용추 두 폭포가 있어. 바로 그 아래 한 자락이 신도안이지. 충남 논산군 두마면 부남리, 석계리, 용동리, 정장리에 대덕군 진잠면 남선리를 더한 5개 마을이 신도안이란 말이여. 일제 때부텀 행정구역으론 그랬어.” 지도를 펴놓고 보니 대략 동서 6㎞, 남북 7㎞ 정도 공간이었다. ●3·1운동으로 조성된 신도안 열풍 1919년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신도안을 향한 이주 물결이 한층 거세졌다. 엄밀한 의미로 독립만세운동은 실패가 아니었다. 그 영향으로 상해임시정부가 세워졌고 식민당국도 무단통치를 이른바 ‘문화정책’으로 바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세운동에 앞장섰던 수십만 명이 일경의 체포, 구속, 구타로 시달림을 겪은 터라 후유증이 몹시 컸다. 상당수 민중은 일종의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져 심리적 위안을 받는 일이 시급했다. ‘정감록’이 그 문제를 떠맡았다. 알다시피 정감록은 현재의 평안과 미래의 성공을 기약하는 길지(吉地)를 선사했다. 정감록을 믿었던 민중은 가족을 거느리고 이주대열에 섞였다. 무엇보다도 신도안이 가장 인기 있는 길지였다. 거기서 기도하면 소원성취 할 수 있다, 암수 폭포수가 흐르는 신도안 개울물에 서식하는 올챙이를 복용하면 만병통치 효과가 있다는 소문까지 들렸다. 김씨가 부친 김연수에게 들은 바로,1920년쯤 3·4월이면 올챙이를 잡으러 개울가로 몰려드는 인파가 수천 명이나 됐단다. 김씨도 개구쟁이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올챙이를 꽤 많이 잡았다고 한다. 실제로 1919년 이후 4∼5년 동안 신도안의 인구는 급성장했는데 이 점은 통계로도 입증된다.1923년 말 1570호에 7008명으로 5년 전인 1918년에 비해 3배가량 늘어났다. 신도안은 이미 사람이 가득 찼기 때문에 그 주변 마을로 이주민이 몰려들 지경이었다. 그들은 대개 ‘정감록’을 신봉하는 신종교단체들에 속했다. 아예 그런 신종교단체가 수백 명의 신도들을 이끌고 이주해온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금강교가 그랬다.‘금빛 병풍 산기슭에 만 명이 살 수 있다’는 ‘정감록’의 구절을 근거로 금강교도들은 신도안에 근접한 충남 연기군 금남면 금천리에 터를 잡았다. 하루아침에 100호도 넘는 큰 마을이 들어섰다. ●신도안에서도 꺼지지 않는 대한독립의 꿈 나로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점이지만, 신도안 이주는 독립에 대한 열망과 맞물려 있었다. 이미 1910년대 중반에 그런 현상이 나타났다. 당시 증산교의 일파인 음치교와 태을교 측은 다음과 같은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승리로 돌아간다. 정진인이 한국 출신 장교를 거느리고 독일편에서 싸우기 때문이다. 세계전쟁이 끝나면 천변지이(天變地異)가 일어나 인류가 모두 사멸하게 돼 있으나 음치교나 태을교를 믿는 신도들만은 재난을 면한다. 어쨌거나 세계전쟁을 마무리지은 정진인은 대한독립을 이룬 다음 계룡산에 도읍한다. 이때가 되면 음치교나 태을교 신도들은 신앙심과 포교성적에 따라 관직을 상으로 받는다는 것이 그 요지이다.. 흥미롭게도 그들 신종교단체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승리할 것으로 점쳤고, 그 이유를 정진인에게서 찾았다. 당시 독일은 일본과 적대관계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심정적으로나마 독일편을 들었다고 풀이된다. 음치교나 태을교도 그랬지만 신종교의 대부분은 정감록을 믿었다. 그들은 진인왕의 등극을 기다렸는데 그것은 나라의 독립을 뜻하기도 했다. 진인왕은 어떤 경우에도 일본의 꼭두각시일 수가 없었다. 여러모로 허황된 예언이었지만 신종교 단체가 퍼뜨린 유언비어에는 대체로 독립을 열망하는 민중의 마음이 얼마간 담겨 있었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뒤부터 민중은 국가의 독립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일단 나라를 되찾아야 개인의 평안과 출세도 가능하다는 인식이었다. 식민지 당국은 이들 ‘위험한’ 신종교단체를 탄압했다. 일제는 그런 단체들에게 사기, 폭력, 금품 갈취, 음란행위 따위의 죄목을 씌워 마음대로 탄압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그들 단체의 특징이었던 민족주의 성향에 대한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었다. 빌라도 총독이 신종교 지도자 예수를 처형할 때 파렴치범과 나란히 십자가에 매달았던 것도 그 비슷한 이유에서가 아니었을까. 1920년대에도 신도안 이주를 부추기는 유언비어들이 계속해서 나돌았다.1921년쯤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에는 다음과 같은 소문이 유행했다.‘정감록’에 왜왕(倭王) 3년을 지내고 가도(假都) 3년이 되면 참된 정씨 왕이 나타나 계룡산 신도에 나라를 세운다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왜왕 3년이란 총독 삼대(데라우치 마사타케, 하세가와 요시미치, 사이토 마코토)요, 가도 3년은 상해임시정부 3년이다. 요컨대 1921년쯤 계룡산 신도안에 임시정부가 도읍을 세운다는 예언이었는데, 그 말이 퍼지자 신도안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1921년 한 해 동안 모두 610호에 2443명이 신도안에 정착했다. 김철호씨는 고향마을 선배 중에도 그 때 이주해온 집안이 적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경기도 교하 지방에도 조선독립에 관한 유언비어가 널리 퍼졌다. 계룡산 바위틈에서 다음과 같은 글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이었다.‘음력 2월15일은 독립을 외치는 날이다.10번을 외치면 일가를 보존하게 되며,20번을 외치면 독립을 회복한다. 이 취지를 쓴 종이 두 장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면 자기 한 몸이 보존되고,8장을 전하면 충신 효자가 된다. 만일 이를 남에게 전하지 않으면 천벌을 받는다.’고 했다. 주술적 효과를 가진 종이 쪽지가 계룡산 바위틈에서 발견됐다는 소문이 퍼졌다는 것은 어느덧 계룡산은 독립을 실현해 줄 희망의 등잔이요, 신도안은 그 불꽃이 타오를 심지가 됐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어느덧 신도안은 민족의 성지로 자리매김된 것이다. ●신도안의 명물 칠성교의 ‘지푸라기 북’ 1920년대 민중의 관심사는 신도안이 과연 언제 도읍이 되는가, 달리 말해 나라가 독립될 시기를 점쳐 알아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1924년 신도안 사람들은 지푸라기 북(草鼓) 하나를 만들었다. 그 북은 김철호씨의 고향 부남리의 칠성각에 안치되었는데 정확히 말하면, 그 마을에 있던 칠성교란 신종교의 보물이었다. 부남리에 관한 일이라 나는 김씨에게 그 북을 아는지 물어보았다. 뜻밖에도 김씨의 부친과 평안도 박천에서 내려온 부친의 친구 분이 모두 칠성교를 믿었다고 한다. 김씨 역시 어린 시절 부모의 손에 이끌려 칠성교당에 다녔단다. 1928년 그 북을 쳐 만약 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으면 한국 종교계의 우두머리로 삼는다는 소문이 원근에 파다했다. 이 소문을 듣고 각지에서 몰려든 구경꾼만 해도 무려 2만 5000명이었다. 당황한 식민지 경찰은 서둘러 지푸라기 북을 불태워버렸다. 그러나 민중의 아쉬움은 수그러지지 않아 2년 뒤 북을 다시 만들었다고 한다. 지푸라기 북이 소리를 낼 리는 없다. 하지만 ‘정감록’ 속의 정진인이 나온다면 그 정도 기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게 민중의 믿음이었다. 1989년 김씨를 포함한 신도안 주민들은 신도안에서 쫓겨났다. 이른바 6·20 사업으로 신도안 일대에 군사시설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제5공화국의 시퍼런 서슬에 누구도 감히 저항하지 못했다. 알고 보면 신도안의 ‘정감록’ 신봉자들은 1970년대를 거치면서 신앙이 약화되었다. 상당수는 생계의 어려움과 자녀들의 교육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이나 부산 등 대도시로 떠나갔다. 김씨는 고집스럽게 신도안에 눌러앉았지만 그의 두 자녀만 해도 이미 오래 전에 서울로 나갔다고 한다. 지금은 지푸라기도 북도 없고,‘정감록’의 예언에 목을 매는 이들도 많지 않지만 때로 간절한 소망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다. 팔순을 바라보는 김철호 씨가 아직 신도안 시대를 꿈꾼다 해도 그 허망함을 탓하기만 해야할지 모르겠다.(푸른역사연구소장)
  • [인사]

    ■ 정보통신부 ◇신규 △정보통신협력국 지역협력과장 南英淑 ■ 법무부 ◇전보 (법무부)△법무심의관실 검사 朴聖根 徐奉揆 姜智植△법무과 〃 李喆熙△국제법무과 〃 鄭銖峯 崔容熏△송무과 〃 柳在榮△인권과 〃 黃淳哲△특수법령과 〃 李秉洙△검찰국 〃 鄭承冕△검찰1과 〃 金廣洙△검찰3과 〃 金鍾必△보호과 〃 裵在德△관찰과 〃 裵龍贊(대검)△연구관 李東烈 朴潤海 金會宗 尹章碩 沈雨廷(서울중앙지검)△검사 김현채 李廷會 李憲相 金賢哲 權重榮 金明熙 李泰炯 金國一 金潤相 全錫洙 朴贊日 盧相吉 申成植 林炫 鄭圭永 윤주영 朴哲雄 高敬順 孫榮培 孫錫仟 李南錫 李俊燁 閔奇鎬 朴奉熙 李鎭琇 李朱亨 崔在珉(서울동부지검)△부부장 金昌熙 柳好根 李起錫 李大衍 李相龍△검사 姜敬遠 車承祐 明在權 沈學鎭 朴惠敬(서울남부지검)△부부장 김석우 李秀澈 孫峻鎬△검사 柳長萬 魏聖國 丁珍雄 鄭會逸 金寧基(서울북부지검)△부부장 柳源根 白成根△검사 趙商喆 沈在千 金度完(서울서부지검)△부부장 池碩培 車京煥 權五成△검사 朴勝煥 崔永云 朴恩貞 梁東勳(의정부지검)△부부장 丁在封△검사 韓大燮 朴在映 洪瀯恩 申昇熙(고양지청)△부부장 朴亨修 柳宗完△검사 尹錫悅 李庚勳(금융감독위원회 파견) 都鎭浩 金大龍 柳政元 金載淏 崔盛椀 李映林(인천지검)△부부장 金容柱 金昌會△검사 李泰翰 金賢洙 崔昌鎬 裵成孝 金正浩 金洋洙 李泰官 張相貴 張宴華 卞秀良(부천지청)△부부장 金鐘徽△검사 沈在桂 都尙範 鄭鎭鎬 李政峯 曺廣煥(수원지검)△부부장 崔運植 宋晋燮△검사 朴星洙 鄭美京 李龍一 朴鍾根 李奉昶 金南佑 盧萬錫 梁仁哲 韓廷和 朴在億 金澤均 金仙花 이창영 李桂漢 鄭熙道 潘宗郁(성남지청)△부부장 權益煥△검사 金玉煥 姜亨旻 閔庚天 申英植 李在鎬 申乘浩 李丞浩 朴俊炫(여주지청)△검사 安瑩駿 金鍾根 洪容浚 金善永(평택지청)△검사 宋奎鍾(경력검사) 金度均 李榮祥 朴光炫 崔任烈(안산지청)△부부장 張泳敦△검사 朴主日 朴鍾一 尹相皓 姜東根 朴賢濬 沈載賢 崔珉鎬 金賢德 裵盛訓(춘천지검)△부부장 金台勳△검사 金成烈 金孝貞(강릉지청)△검사 黃鉉德(경력검사) 李喆鎬 鄭映學 朴世鉉 金溟雲(원주지청)△검사 鄭鎭宇 權純汀 朴赫洙(속초지청)△검사 崔宰赫 金炯錫(영월지청)△검사 具兌姸 嚴熙竣(대전지검)△부부장 羅錡湊 安秉翼 李相虎△검사 金贊中 金志憲 金奉奎 李榮喆 朴炳奎 金周弼 徐正植 李鎭鎬 劉錫哲 李禎燮(홍성지청)△검사 明点植(경력검사) 閔庚喆(공주지청)△검사 朴戊英 李義秀(논산지청)△검사 韓台和 裵在洙(서산지청)△검사 金泰權 朱祥鎔 金善規 全倫慶(천안지청)△검사 金承勳 姜浩庭(청주지검)△부부장 崔世勳 金聖恩△검사 洪卓均 鄭淵憲 金鍾五 申銀善 金載根(충주지청)△검사 朴興俊(경력검사) 宋岡 黃秉柱 崔榮娥(제천지청)△검사 具滋賢 李侑眞(영동지청)△검사 任大赫(대구지검)△부부장 金榮大 鄭鍊福 金基文 金星鎭 李鍾根△검사 李興洛 曺尙駿 崔憲滿 崔誠桓 金裕喆 崔龍圭 鄭聖鎬 朴相鎭 楊軫皓 許丁穗 金志姸 田炳珠 權寧彬 金載夏 朴賢珠 尹中鉉 金英逸 閔柄煥 崔海日 金台運 崔恩禎 申大炅(안동지청)△검사 李鎭孝 李東奎 李仁杰(경주지청)△검사 朴英濬 金池蓮(포항지청)△검사 李定桓 孫準晟 安炳洙 孔鳳琡(김천지청)△검사 金成勳 안동완 李光佑 金善文 金容子(상주지청)△검사 禹基烈 鄭銀惠(의성지청)△검사 蔡洙亮(영덕지청)△검사 陳賢一(부산지검)△부부장 孫太根 李重霽 洪旬甫 李明淳 朴鎔浩△검사 吳仁瑞 鄭太榮 姜鍾憲 朴官洙 安孝禎 尹源祥 禹南準 鄭珍溶 金潤燮 李昌洙 朴起東 金南順 林恩貞 朴勝大 金晟柱 姜成龍 崔仁相 金楨珍(부산동부지청)△부부장 邊光鎬 李柱壹 金聖俊△검사 具滋憲 柳志悅 李東洙 孔太究 徐範俊 河澹美(울산지검)△부부장 白種宇 朴炯官△검사 朴大圭 朴榮彬 崔盛國 金泰勳 朴祥振 成祥旭 梁盛弼(창원지검)△부부장 林珍燮 金熙準△검사 朴哲完 權珖鉉 金準培 李知玧 金昌雨 金榮奎 金鳳鉉 鄭聖燁 林鍾弼 金昌煥 신지선(진주지청)△검사 李南京 張文壽 李喜東 段成翰(통영지청)△검사 金智雄 金公珠(밀양지청)△검사 玉成大 崔斗泉(창원지청)△검사 鄭鍾善(광주지검)△부부장 楊富男 李千世 朴鐵 金宇鉉△검사 李炯澤 金弘泰 李起先 吳宗根 양중진 潘成寬 鄭鍾和 曺聖奎 吳政姬 千奇弘 金尙佑 魯坰華(목포지청)△검사 朴億洙 金潤泳 金弘佶 崔昌玟 송지용(장흥지청)△검사 朴倫錫(순천지청)△부부장 兪炳圭 金龍昇 金辰淑△검사 李在鉉 梁碩祚 尹正燮 申炯湜 金垂貞 金賢晶(해남지청)△검사 申鉉成 李昌原(전주지검)△부부장 朴文洙△검사 金泰佑 李炳錫 李太日 吳昌燮(군산지청)△검사 高殷錫(경력검사) 金熏榮 李卜鉉 趙相元 金香連 李宗珉(정읍지청)△검사 李泳揆 趙南喆(남원지청)△검사 張贊洙(제주지검)△부부장 金成日 金炯俊△검사 高京熙 金種七 羅贊基 鄭惟美(타기관 파견복귀)△부부장 李錫煥(금융감독위원회 파견 복귀)◇검사 신규임용△서울중앙지검 李明信 李峻東 申太勳 李燦揆 金琪勳 崔在雅 曺娥羅△서울동부지검 白龍夏 洪完喜 許準 張惠榮△서울남부지검 姜百信 李壽載 金龍植 文芝善△서울북부지검 朴建昱 丁光洙 陳惠媛 이효진△서울서부지검 鄭源斗 李完熙 安晟熙△의정부지검 尹棟煥 李大煥 權善英△고양지청 兪禎澔 朴石一 金桐熙△인천지검 鄭永洙 鞠相佑 李相旼 趙祉殷 羅懿燁 朴起煥△부천지청 李容均 金敏娥 金海敬△수원지검 曺旻佑 金永男 權性熙 李晟範 李侑宣△성남지청 李正培 姜善兒 劉美羅△여주지청 趙映贊△평택지청 黃賢娥△안산지청 趙萬來 金泳吾 鄭仁景△춘천지검 朴慧永△원주지청 張珠然△대전지검 朴桂賢 李勝亨 曺喜英△홍성지청 姜承熙△천안지청 白尙烈 李一揆△청주지검 許修眞 陳元斗△대구지검 金東柱 馬秀烈 鄭漢根 韓楨逸 金姸實 崔大健△포항지청 具美玉△김천지청 吳世榮△부산지검 朴志容 崔埈豪 朴成俊 朴明姬 朴炫奎 姜旼廷△부산동부지청 白承周 金柱仁△울산지검 曺碩奎 皇甫炫希△창원지검 林有慶 金珠華△진주지청 趙忠泳△통영지청 辛昇祐△광주지검 丁榮震 金俊成 정지은 丁炫升△목포지청 金皓三△순천지청 金一權 李秀炫△전주지검 권현유 朴美英△군산지청 金平浩 金炳文△제주지검 趙杞濟 張允瑛◇의원면직△법무부 국제법무과 검사 柳爀△대검 첨단범죄수사과장 白承旻△인천지검 부장검사 韓昌錫△수원지검 검사 崔洛顯 廉龍表△울산지검 〃 鄭濬吉△창원지검 〃 朴赫◇4.1 일자 검사 신규임용 예정△서울중앙지검 박영진 具承模 洪性元△서울동부지검 金昌珍△서울남부지검 許仁碩△서울북부지검 徐政湜△서울서부지검 陳哲珉△의정부지검 金祐奭△인천지검 李德珍△수월지검 徐楨旼△강릉지청 千寬英△대전지검 崔智錫△서산지청 金漢祚△청주지검 全俊喆△충주지청 朴柱鉉△대구지검 李相炯△포항지청 金甫炫△부산지검 朴夏英△부산동부지청 柳千烈△울산지검 海德珍△창원지검 孫佑昌△광주지검 高泌亨△순천지청 林昌國△전주지검 崔雄善 ■ 경찰청 △혁신기획단 趙吉衡△서울경찰청 경비2과장 丁喆秀△남대문서장 李康德 ■ 특허청 ◇과장 승진△금속심사담당관 孫容郁△정밀화학심사〃 趙成信△특허심판원 심판관 姜鎬根 李永昌 柳基爀 權五熙 柳東賢 全相鉉 吳興秀 梁熙勇 金奉涉 金熙泰 張馨一◇3급 전보△생명공학심사담당관 鄭淳城△특허심판원 심판관 金鍾得△세종연구소 파견 金榮宇◇4급 전보△총무과장 金胄鎬△출원서비스담당관 李哲雨△상표3심사담당관 李濟明△상표4〃 姜陽遠△국제상표〃 文三燮△유기화학〃 鄭勳△환경화학〃 表載昊△식품생물자원〃 鄭韻宰△컴퓨터〃 諸大植△전자상거래〃 金宰弘△특허심판원 심판관 黃呂炫 孔敏浩 趙殷英△국제지식재산연수원 기획총괄과장 林準鎬 ■ 중앙인사위원회 ◇국장급 전보△인력개발국장 安良鎬△중앙공무원교육원 교수부장 金顯得◇국장급 승진△중앙공무원교육원 기획지원부장 朴昌洙◇과장급 전보△혁신인사기획관 盧炳燦△심사임용과장 金泰萬◇과장급 승진△기획예산담당관 崔勝鉉 ■ 한국철도시설공단 ◇1급 전보△수도권지역본부장 崔欣周△충청〃 金善鎬 ■ SBS ◇전보△라디오본부 R편성사업팀장(부장급) 金東雲△〃 1CP (부국장급) 全允杓△〃 2CP(부장급) 金國恩 ■ 일요서울 △편집국장(이사대우) 鄭先燮△정치부장 洪性哲 ■ 동국대 (서울캠퍼스)△대학원장 徐閏吉△불교대학원장 曺勇吉△행정대학원장 겸 사회과학대학장 金甫煥△경영대학원장 겸 경영대학장 韓振洙△교육대학원장 韓龍煥△언론정보대학원장 겸 국제정보대학원장 朴瑾浩△산업대학원장 겸 공과대학장 겸 정보산업대학장 田英一△문화예술대학원장 겸 예술대학장 洪申善△문과대학장 朴鍾勳△이과〃 宋嬉子△생명자원과학〃 李明薰△정보관리실장 金寅宰△중앙도서관장 鄭鎭環△사회교육원장 兪光震△교양〃 黃鐘淵△국제〃 겸 국제교류실장 金英敏△홍보실장 郭大瓊 ■ 외환은행 ◇부장 전보 △인사운용부 張甲淳 ◇국내 영업점장 △부산 金有範△성서 韓成椿△소공동 陳泰洪△수내동 崔其五△시화공단 朴祥必△신갈 洪能澤△영업부 金學成△울산 權五景 ◇지점장(개인금융)△평촌 崔鍾大(기업금융)△사당역 姜錫宇△스타타워 李喜重◇영업점 개설준비위원장 △파주 金容九 ■ 그린화재 △상무(기획담당) 朴明善△이사(개인영업담당) 金亨東 ■ 대신투신운용 (팀장)△채권운용팀 梁承一 ■ 서울우유 ◇승진△상무 李東英
  • 학위3개 동시취득 동국대 최고령 졸업자 이용복씨

    “배움엔 나이가 없습니다.” 환갑을 눈앞에 두고 학사 학위를 3개나 취득하고 대학원에 진학하는 이용복(59)씨는 “나이는 정말 숫자에 불과할 뿐,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의지”라고 강조했다. 이씨는 오는 18일 동국대를 최고령자로 졸업한다. 아들뻘인 20대와 나란히 학사모를 쓰게 되지만, 학위는 경영학·외교정치학·문학사 등 무려 3개를 동시에 취득한다. 그는 2001년 이 대학 경영학과 야간에 수시모집으로 입학했다. 이씨는 “컴퓨터와 영어를 따라가지 못해 한때 포기할까도 생각했다.”면서 “하지만 늦은 만큼 더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쉴틈 없이 학업에 매달렸다.”고 돌아봤다. 최근 3학기 동안엔 잇따라 단과대 수석을 차지했다. 이씨는 1967년 동국대 부설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당시 담임 교사가 서울대 진학을 권유할 정도로 성적이 뛰어났다. 그러나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진학을 포기하고, 사회로 발길을 돌렸다. 건설회사와 운수회사 등을 전전하다 1990년 청소용역회사를 설립,‘사장님’소리를 듣게 됐다. 하지만 이씨는 “대학을 졸업한 친구들을 보면서 자존심이 상했고, 회사를 경영하다보니 배움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껴 대학 문을 두드리게 됐다.”고 말했다. 경영과 학업을 병행하기란 쉽지 않았다. 영어 단어는 돌아서면 잊혀졌고, 손이 굳고 눈이 침침해 컴퓨터는 멀게만 느껴졌다. 이씨는 “나를 ‘큰 형님’이라고 따라준 학교 친구(?)들과 아들 삼형제가 훌륭한 ‘과외선생님’이 돼 주었고, 회사 일은 아내가 도와주었다.”고 고마워했다. 그는 4년 동안 주말과 휴일에도 제대로 쉬지 않고, 북한학과 불교학을 복수 전공했다. 하지만 3개의 학사학위도 모자라 이씨는 이 대학 언론정보대학원에 진학하게 됐다. 이씨는 “대학원에 가서 더 많은 것을 깨닫고 공부하고 싶다.”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국악인 최초 대학 수장 오른 박범훈 중앙대 신임총장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국악인 최초 대학 수장 오른 박범훈 중앙대 신임총장

    ‘태고의 용트름이/빚어놓은 선율이여…풀려마라 갚으려마라/네가슴의 눈물방울/이땅에서 살자꾸나/피리소리 뿌려가며/북망산 가는 길에도/듣고 싶은 네가락.’ 도올 김용옥 교수가 산사(山寺)에서 산보하던 중, 문득 한 음악인이 생각나 즉시(卽詩)를 써서 보냈다. 그러자 그 음악인은 곡(曲)을 붙여 화답했고 송창식이 노래를 처음 불렀다. 제목은 ‘이땅에서 살자꾸나’였다. ●국악계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위 그의 음악은 불혹의 경지를 넘어섰다. 풍진에도 흔들림 없다. 청아한 혼의 소리로 휘휘 감겨 있다. 때로는 백두대간을 관통한다. 아시아를 넘어 세계를 지휘한다.86아시안게임,88서울올림픽,2002년 한·일월드컵 때에는 세계를 충격과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그의 소리는 태고의 한을 풀어낸다. 또 동서양을 오가며 인류의 미래문명을 화음(和音)해낸다. 그랬다. 고집스럽게 우리 소리를 찾아다녔다. 소리가 곧 인생이요, 삶의 은인이다. 지난해에는 우리시대 국악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위로 뽑혔다. 맞다. 그는 분명 우리 국악계의 거목으로 자리해 있다. 작곡가·지휘자·교육자·연주자로 숨가쁜 전방위 활동을 펼쳐 왔다. 이제는 교육행정가의 길을 하나 더 쌓고 있다. 박범훈(58) 중앙대 신임 총장. 국악인으로는 처음으로 대학총장에 올라 화제가 됐다. 총장 집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취임식(2월3일) 직후여서 그런지 축하 화환이 입구에 쭉 늘어서 있었다. 우선 국악인이 대학총장에 선출된 것은 국악계의 큰 경사요, 대학행정에도 많은 변화가 있지 않겠느냐고 인사말을 건넸다. 그는 “어제 취임식 때 이어령 교수가 축하인사차 참석해 ‘대학이 살아나려면 개혁과 새로움을 추구해야 하는데 중앙대가 먼저 앞서나가는 것 같다.’는 말을 했다.”면서 “(총장에 선출된 된 것과 관련해)중앙대 교수들의 사고가 열려 있다. 열리지 않으면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의미있는 대답을 했다. 또한 그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려면 화합이 가장 중요하며 전공처럼 화합과 창조를 화두로 삼아 변화를 추구해갈 것”이라면서 “특히 많은 해외 유학생들이 중앙대에서 맘껏 공부할 수 있도록 여건 조성에 주력할 계획”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우리나라 대학교육의 현실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대학은 큰 가르침의 전당인데 과연 이에 걸맞은 역할을 해왔는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대학은 우후죽순 늘어나면서 반대로 고급인력이 과잉공급되는 기현상, 즉 일을 부리는 사람만 양성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결국 놀아도 대학은 나와야 한다는 풍조가 만연했고 이러한 풍조는 곧 그동안 많은 대학들이 덕을 본 셈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구조조정이라는 현실 앞에서 새로운 변화를 추구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우리 대학교육의 현주소라고 강조했다. ●예술가의 손으로 세계적 대학 키울 것 “그동안 지휘봉을 잡고 세계를 누빈 저력이 있지 않습니까. 예술가의 창조적 머리와 화합의 손으로 세계적인 대학으로 키울 작정입니다.” 그의 행보에는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1987년 우리나라 최초의 순수 민간 국악관현악단인 ‘중앙국악관현악단’을 창단했다.8년간의 악단 경험과 그의 역량은 국립국악관현악단 창단으로 이어졌다.94년에는 세계 최초의 ‘한·중·일 아시아민족악단’을 창단했다.99년에는 서울국악유치원을 설립했으며 국악중학교를 신설, 중등 국악교육의 장을 새로 마련했다. 특히 중앙대 김희수 이사장에게 부탁해 우리나라 유일의 중앙대 국악대학과 국악교육대학원을 설립했다. 다들 소리의 종자를 키우려고 정신없이 뛰어다닌 결과물이었다. 그는 1948년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어디서든 소리만 들리면 몽유병 환자처럼 소리를 찾아다녔다. 초등학교 음악시간에 처음 들어본 풍금소리에 반해 밤마다 교무실을 무단침입했다. 풍금건반을 더듬어 자작곡 ‘생쥐 소나타’를 치다가 숙직 선생에게 걸려 혼쭐이 났다. 인근 동네에 풍물패가 왔다는 소문을 듣는 대로 달려가 해산할 때까지 풍물패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중학교 때에는 양평읍내를 행진하는 브라스 밴드부가 너무 멋있게 보여 그날로 밴드부에 가입, 트럼펫을 불기 시작했다. 16살 때 인생의 전환점이 된 남사당패거리를 만났다. 이들은 양평 동네에 우연히 들렀다가 그의 사랑채에 기거하게 됐다. 사랑채에는 하루 종일 장구소리가 났으며 항상 동네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이때 소년 박범훈은 남사당패를 이끌었던 남운용 선생의 권유로 한국국악예술학교(현 서울국악예고)에 입학하게 된다. 당시만 해도 그는 가정형편상 서울 유학은 엄두를 못낼 상황이었다. 어머니는 해질 무렵이면 이집저집 쌀을 꾸러 다녔고 아버지는 술에 의지한 채 허송세월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6·25때 8사단 소속으로 전투에 참여했다가 포로로 붙잡혀 6년 동안 감옥생활하다가 포로교환이 이루어지면서 귀환했다. 그러다 보니 세상일을 거의 포기한 채 술만 마셔댔다. 결국 남운용 선생의 끈질긴 설득으로 서울 유학길에 올랐다. 국악예술학교 재학 시절 그는 박봉헌 교장의 권유로 피리를 배우게 됐고 지영희 선생을 평생 스승으로 모시게 됐다. 지 선생은 당시 예술부장으로서 국악관현악 지휘와 피리·해금 등을 가르쳤다. 지 선생 외에도 당시 내로라하는 명인들로부터 공부를 하게된다. 판소리 김동진 선생한테 새로 작곡한 가곡을 배우는 즐거움이 그만이었다. 또 김희조 선생한테는 음악이론을 배웠다. 박귀희 선생은 학생을 보는 대로 잡아다가 병창을 가르쳤고, 성금련·김윤덕 선생은 가야금, 신쾌동 선생은 거문고, 한범수·김광식 선생은 대금, 한영숙 선생은 무용, 전사종·전사습 선생은 농악을 배우라고 권유했다. ●유학시절 전두환대통령 취임식 곡 만들어 1968년 국악예고를 졸업하던 해 그는 멕시코올림픽에 파견되는 민속예술단에서 음악을 담당하게 됐다. 이때 가슴에 태극기를 단 유니폼을 입고 양평 고향을 방문하자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 “이제는 박씨네 집 고생 끝났다.”며 환영을 해주었다. 이후 육군 기갑부대에서 40주 동안 훈련만 받다가 의가사제대를 한 뒤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음악과에 진학, 본격적인 음악공부의 길로 들어선다. 맨처음에는 서울대 국악과에 진학하려 했으나 우리 것과 서양의 것을 접목시키자는 소명의식으로 서양음악의 작곡공부를 선택했다. 이때 학과장은 ‘자장가’로 유명한 김대현 교수가 맡고 있었다. 그는 중앙대에 다니면서 한편으로는 국악예고에 전임강사로 나갔다. 또 국립극장 개관공연 무용극 ‘별의 전설’을 비롯해 많은 작품을 작곡했다. 대학생치고는 돈도 꽤 벌었다. 오아시스레코드사와 계약을 맺어 편곡 아르바이트 일도 했다. 이때 바니걸스의 노래 ‘님아’도 작곡했다. 대학4학년 때 일본 학습원 대학원의 초청으로 일본으로 간 것이 계기가 되어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일본의 민족악기들이 서양악기와 어우러져 연주되는 것을 보고 자극을 받았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무사시노음악대학에 학부 1학년으로 입학해 현대음악 작곡을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그는 유학 3학년때 전두환 대통령의 취임식에 연주할 곡을 작곡하기 위해 잠시 귀국했다. 유학을 다 마치고 돌아온 그는 도올 김용옥 교수를 만나면서 불교음악에 빠지게 된다. 특히 국사암의 석상훈 스님과 만나 20년 넘는 형제의 인연을 맺었고 ‘달마의 소리’를 깨닫게 됐다. 이후 동국대에서 5년간 고행을 거쳐 우리나라 최초의 ‘한국 불교음악사연구’를 만들어냈다. 그의 음악은 장르를 넘나드는 오묘함이 있다.‘사의 승무’(73년 송범 안무) 등 대형춤곡만 23편을 작곡했다. 또 윤문식과 김성녀씨를 만나면서 ‘허생전’‘별주부전’ 등 마당놀이극을 위한 작곡도 11편에 이른다. 국악관현악 12곡, 아시아민족악기를 위한 9개의 곡, 그리고 ‘교성곡’‘찬불가’ 등 불교곡도 수십편에 이른다. 이밖에 86아시안게임 개막식곡 ‘청실홍실’,88올림픽 개막식곡 ‘해맞이’,2002년 월드컵 개막식곡, 부산아시안게임 개·폐막식곡 등 ‘대∼한민국의 소리’를 만들었다. “오늘날 중앙대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 대학행정을 책임지게 된 것도 음악을 사랑한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린 아직도 잃어버린 소리를 열심히 찾아야 합니다. 그 소리엔 조상이 있고 대한민국이 들어있기 때문이지요.”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48년 4월 경기 양평 출생 ▲68년 서울국악예술고 졸업 ▲76년 중앙대 음악학과 졸업 ▲83년 일본 무사시노 음악대학원 석사 ▲86아시안게임·88서울올림픽 음악담당 ▲87년 중앙관현악단 창단 ▲93년 아시아민족악단 창단 ▲95년 국립국악관현악단 초대단장 겸 예술감독 ▲2001년 중앙대 제2캠퍼스 부총장 ▲2002년 한·일월드컵 개막식 음악감독 ▲2003년 중앙대 국악교육대학원장 ▲2005년 2월 중앙대 총장 ● 저서 한국불교음악사연구, 박범훈의 예술세계, 내가 만난 소리 내가 만든 소리
  • [토요일 아침에] 자기 성찰과 마음의 평안/권도갑 원불교 도봉교당 주임 교무

    낯선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나에게는 늘 두려움과 불안이 따라 다녔다. 그동안 이를 없애려고 노력하였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괴로웠다. 지난 삶을 돌아보면 내 앞에는 언제나 못마땅하고 미운 사람들이 마주하고 있었다. 성직자로서 나는 이들을 사랑하고 가슴으로 품어야 했는데 이것이 유감스럽게도 잘 되지 않았다. 마음이 깨어나면서 지금까지 상대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이 바로 나의 것임을 발견하였다. 습관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문제를 퍼 넘겨서 그들의 것이라고 비난하며 무시하고 있었다. 이로 해서 스스로 보이지 않은 죄의식에 젖어 있었던 것이다. 그의 허물이 바로 나의 것이라는 것을 속마음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 두려울 수밖에 없었으며, 다른 사람이 이를 알아차릴까 불안했다. 이때 나는 오히려 주위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은 강한 욕심이 일어났으며, 그러지 못할 때는 마음속에서부터 분노가 치솟았다. 때때로 상대의 잘못을 바라보며 내면을 관찰해 보니, 현실에 나타난 경계는 정말로 나를 위한 고마운 거울이었다. 이제는 주어진 인연이나 상황을 통해서 이들을 원망하는 어리석음을 내려놓아야 했다. 현실은 있는 그대로 무한한 은혜로서 나의 앞에 놓여 있으며 인과의 이치는 정확히 일어나야 할 일들만 일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이해를 통해 나는 마음의 평안을 얻었고, 이 모든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릴 수 있었다. 자신의 문제가 아니면, 이상하게도 상대의 것을 보면서 비난하거나 탓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 속의 미숙한 존재는 자기를 보지 않고 상대의 문제를 민감하게 바라보며 거부하고 불평하였다. 나는 자신의 어두운 마음을 책임지며 밝고 건강한 감정을 스스로 선택해야 했다. 주위 상황이나 여건에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이들에게 구속되는 노예 같은 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단호히 이러한 굴레를 벗어나고 싶었다. 평소에 만나는 인연들을 통해서 발견한 문제점을 보면 교무인 나는 인색하고, 이기적이었다. 권위적이며 자기주장이 강하였다. 욕심이 많으며 위선적이었다. 이들이 모두 보이지 않게 쌓아온 허물이었다. 그런데도 이를 상대의 것이라고 불만을 표하였고,“나는 아니다.”라고 당당히 거짓을 말하였다. 때문에 많은 시간을 법신불 앞에서 참회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제 만나는 인연이 누구이든지 그가 어떤 자세를 보인다 하여도 그 가치는 존귀하고 위대하다는 사실을 믿는다.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의 신비요 기적이다. 그들에게는 문제가 없으며, 언제나 옳다. 만나는 사람은 누구나 상생(相生)의 인연이다. 이들은 나를 돕는 천사이고 나를 보호하는 신장불이며 수호신들뿐이다. 지금 그가 어느 위치에 있으며 무슨 과오가 있다 하여도 그들은 나의 모습을 비춰주는 은혜로운 존재이다. 나는 이들을 무조건 존경하며 사랑한다. 이렇게 상대를 소중히 받아들일 때 자연히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었다. 비로소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으며, 나 자신이 용서되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나를 진실로 사랑하고 인정하는 길과 둘 아님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많은 죄업으로 오염되었다 하여도 이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동안 내가 무엇을 하였는가보다 지금 어떤 모습으로 있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오늘의 내가 이처럼 존재하도록 안내하고 가르침을 주신 스승님과 법신불님의 크신 사랑에 깊이 감사드린다. 권도갑 원불교 도봉교당 주임 교무
  • 지율스님 단식 100일째 “저혈압 심각”

    지율스님 단식 100일째 “저혈압 심각”

    고속철 천성산 터널공사를 막기 위해 몸을 던진 지율(48·여) 스님이 단식 100일째를 하루 앞둔 2일 심각한 저혈압 증세를 보였다. 지율 스님은 ‘소박한 장례’를 부탁하는 등 마지막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지율 스님을 살려 보려고 노력하지만 ‘공사강행’이라는 입장엔 달라진 게 없다.‘불의의 사고’가 예견되는데도 아무런 대책이 없는 실정이다. 반면 각계는 지율 스님 살리기에 적극 동참하고 나섰다. 지율 스님은 지난해 10월27일 청와대 앞에서 네 번째 단식을 시작하면서 “터널공사가 천성산의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제대로 조사하자.”고 요구했다. 터널을 뚫으면 생태계가 파괴되고 습지와 계곡의 물이 마르게 되므로 3개월간 발파공사를 중단하고 환경영향 평가를 다시 하자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정부는 “국민의 세금으로 이뤄지는 국책사업을 일개인 때문에 자꾸 중단하기 어렵고, 환경영향평가 절차도 이미 법적으로 끝난 만큼 받아들일 수 없다.”며 거부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정부 입장은 달라진 게 없다. 그러나 지율 스님이 동의하지 않는 한 강제로 병원에 입원시키기도 어려운 상황”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지율 스님의 단식이 계속되자 종교계는 물론 정치인들까지 나서서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다. 야당 의원들은 ‘환경영향평가 재실시’ 결의안 상정 등을 약속하며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불교조계종 총무원장 법장 스님은 이날 서울 서초동 정토회관에서 단식 중인 지율 스님을 방문해 위로했다. 김수환 추기경도 정토회관을 찾았으나 지율 스님을 만나지는 못했다. 오영교 행자·강동석 건교장관과 남영주 국무총리실 민정수석도 정토회관을 방문했다. 지율 스님은 법장 스님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음을 정리한 듯 “천성산과 함께한 모든 인연을 자애로운 마음으로 거두어 달라.”고 부탁했다. 한편 지율 스님은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장례를 동생(36·여)이 맡아서 치러 줄 것을 부탁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용수 이효용기자 dragon@seoul.co.kr
  • “백범은 7~8개 종교 넘나든 汎종교인”

    조선시대 성균관 유생들은 죄를 지으면 자신의 이름을 써 붙인 북을 성균관 안에서 치고 다니며 널리 알리던 ‘명고축출(鳴鼓逐出)’이라는 벌을 받았다. 유생들에게 벌로 주던 이 명고축출이 일제시대 승려에게 내려져 큰 충격을 준 일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강대련 명고축출 사건이다.1922년 3월26일, 종로에서는 한 스님이 ‘불교계 대악마 강대련 명고축출’이라는 깃발을 들고 거리를 왕복하는 희한한 장면이 연출됐다. 장본인은 일제시대 불교계 실력자였던 수원 용주사 주지 강대련. 불교유신회 회원들이 불교개혁에 반대하고 친일매불 행위를 한 강대련에게 명고축출의 벌을 내린 것이다. 당시 한국 불교의 친일상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주필을 지낸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이 펴낸 ‘사건으로 본 한국의 종교사-종교, 근대의 길을 묻다’(인물과사상사)는 이같은 한국 종교계의 부끄러운 이면사를 일제 강점기에 초점을 맞춰 들춰낸다. 수치스러운 역사는 기독교 또한 예외가 아니다. 일제시대 천주교를 포함한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은 그리스도 대신 일본의 신사에 참배하고 이를 권유하면서 일제의 민족말살정책과 침략전쟁을 찬양하고 앞장섰다. 저자는 안중근 의거를 둘러싼 천주교의 두 얼굴을 비판한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1909년 ‘10·26의거’ 뒤 한국 가톨릭 교단은 안 의사를 살인범이라는 이유로 신자 자격을 박탈했다. 한국 천주교는 84년 만인 1993년에서야 안 의사를 천주교 신자로 복권시켰다. 책은 7∼8개의 종교를 넘나들며 파란만장한 인생만큼이나 다양한 종교인의 모습을 보인 백범 김구의 종교편력도 상세히 다뤄 눈길을 끈다. 저자는 백범의 애국심의 바탕에는 종교와 신앙심이 깔려 있다고 강조한다. 백범은 무속, 유교, 풍수, 관상학, 동학, 불교, 기독교 등 거의 모든 종교를 ‘섭렵’하고 사후에는 가톨릭의 성세(聖洗)를 받아 베드로라는 세례명도 얻었다.“백범의 정신사는 곧 당 시대 우리 종교사의 변천과정”이라는 게 저자의 말이다.90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말말말˙˙˙

    오늘날 우리 국토의 뭇생명들은 인간의 이기로 인한 무차별적인 개발의 명분 아래 평화로운 삶을 하나둘 잃고 있다.-불교 조계종 전국비구니회 회장 명성 스님이 지율 스님의 단식과 관련해 발표한 ‘생명과 환경보존을 위한 참회와 발원의 글’에서 “자연과 인간이 함께 호흡하며 어우러져 환희에 찬 법계가 열리기를 간절히 발원한다.”며-
  • [지율스님 단식 100일째] “아무것도 안보인다”… ‘마지막’ 준비

    [지율스님 단식 100일째] “아무것도 안보인다”… ‘마지막’ 준비

    종교계와 시민·사회단체, 정치권이 지율 스님 사태의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 있는 가운데 단식 99일째인 2일 스님이 거처하고 있는 서울 서초구 서초동 정토회관에는 각계 인사와 정부 관계자의 방문이 잇따랐다. ●시민단체등 도롱뇽 접기하며 건강 기원 오후에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앰뷸런스가 대기하는 등 긴박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밤이 되자 신도와 시민단체 회원 등 60여명이 법당에서 도롱뇽접기를 하며 지율 스님의 건강을 기원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날 오전 11시40분쯤 조남호 서초구청장과 함께 정토회관을 찾았다. 김 추기경은 정토회 지도법사 법륜 스님과 40분간 건강상태와 단식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고 지율 스님을 직접 만나지는 않았다. 김 추기경은 “정부나 지율 스님이나 어느 쪽이든 자신과 다른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겼으면 한다.”고 말했다. 정부 인사의 발걸음도 잇따랐다. 강동석 건교부장관은 오후 5시20분쯤 방문해 법륜 스님과 대화를 나눴다. 그는 “정부가 환경에 대해 전문가들을 동원해 조사할 것으로 안다.”면서도 “현재 정부 입장은 변함이 없고 진행중인 공사를 중단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앞서 이날 오전 8시20분쯤에는 불교조계종 총무원장 법장 스님이 지율 스님을 잠시 만나 단식 중단을 완곡히 당부했다. 이날 국무총리실 남영주 민정수석 비서관도 정토회관을 찾았고 오후에는 도법 스님, 세영 스님 등 불교계 인사들도 방문했다. ●“혈압 낮아 쇼크사 위험” 지율 스님은 외부인을 일절 만나지 않고 3층 염화실에 머물고 있다. 저혈압 증세를 보이는 등 건강이 악화된 가운데 차분히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법륜 스님은 “숨이 끊어질 듯하다가도 정신을 가다듬는 등 뭐라 말하기 어려운 상태”라고 말했다. 그는 “소금마저 넘기지 못해 물에 간장을 타서 마시는 상태”라면서 “3일 전 혈압을 재 보니 70에 40까지 떨어져 쇼크사가 우려된다.”고 전했다. 지율 스님은 이날 아침에는 “햇볕을 쬐니 좋아졌다.”면서 다소 호전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정토회 측은 “지율 스님이 의식을 잃더라도 어떤 조치도 하지 말라는 뜻을 분명히 했다.”면서 “생을 마감하더라도 끝까지 뜻을 지킬 것”이라고 밝혔다. 지율 스님은 지난 1일 오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호소했고, 법장 스님에게 전달한 편지도 직접 쓰지 못하고 대필했다. 법륜 스님은 “자포자기한 것은 아니다.”면서도 “자신의 장례는 10명 정도만 참석한 가운데 소박하게 치러 달라고 당부했다.”고 덧붙였다. ●“단식 100일을 가십거리로 만들지 말라” 지율 스님은 단식 100일이 가까워지면서 세인들의 관심이 단식 자체로 집중되는 것에 몹시 부담스러워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내가 제시한 짐을 내가 짊어지고 가려고 정리를 다 했는데….”라면서 “목숨이 왜이리 질긴지….”라고 말했다는 후문이다. 이효용기자 utility@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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