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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66) 낙산사와 해수관음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66) 낙산사와 해수관음

    놀라운 일이 생기면 사람들은 ‘맙소사!’,‘아이구, 하나님!’이라거나 ‘어머나!’를 외친다. 그런데 예전 사람들은 ‘나무관세음보살….’이 입에 붙어 있었다.5일 식목일, 한국 관음도량의 진원지인 천년 고찰 낙산사가 화염에 휩싸인 장면을 보면서 ‘나무관세음보살’이라는 탄식이 절로 터져 나왔다. 관음보살은 화마도 물리친다는데…. 지난해 10월 낙산사를 답사했지만 ‘사람들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곳’이라는 생각에 막상 글은 쓰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 낙산사가 잿더미로 변했다. 동해의 ‘관해 1번지’는 두 말할 것 없이 낙산사다. 교과서에도 나오는 곳이라 오히려 수학여행 코스에서 빠질 정도로 널리 알려진 낙산사가 쑥대밭이 되었으니, 고찰의 운명이란 이런 것인가. ●남해 보리암·강화 보문사와 함께 3대 관음도량 관음보살은 관세음, 또는 관자재보살이라 한다. 대자대비의 화신으로 사바세계의 중생들이 진심으로 부르기만 해도 고통과 번민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관세음보문품’에 부처께서 이르기를 “선남자여! 많은 중생이 온갖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을 때 관음을 한 마음으로 부르면 그 소리를 들으시고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신다. 활활 타는 뜨거운 불길에 갇힌다 해도 타지 않으니, 관세음보살의 위력 때문이다. 큰 물길에 떠내려간다 해도 관음을 부르면 곧 안전한 땅에 이르게 될 것이다.”고 했다. 큰 일 닥쳤을 때 저절로 관세음보살을 외치는 것은 이런 관음 영력을 믿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낙산사는 남해 보리암, 강화 보문사와 더불어 한국 3대 관음도량이자, 세계 8대 보타성지다. 그 중 관음신앙의 원조는 아무래도 낙산사다. 의상조사가 세운 가람이기 때문이다. 순조시절의 범해(梵海)가 찬한 동사열전(東師列傳)에 다음 같이 의상의 행장을 밝히고 있다.“귀국하는 당나라 사신의 배에 실려 입당, 화엄의 2대 조사인 종남산 지엄의 방에 들어가 함께 화엄경에 관해 문답하였다. 화엄경의 오묘한 뜻을 논함에 있어 깊숙하고 은밀한 부분까지도 철저히 해부, 분석하니 가히 청출어람 격이었다.”이렇듯 해동 화엄종의 시조라 하여 그는 의상조사로도 불린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의상은 원효와 가까웠던 도반이다. 뜻을 같이 해 중국유학길에 오르다 원효는 되돌아오고, 의상은 건너갔다.661년에 산둥반도 끝에 있는 무역항 등주로 들어갔으니 이 때 그의 나이 이미 30대 후반. 오늘날까지 불교의식에서 빼놓지 않고 애송되는 그 유명한 법성게도 바로 의상조사의 창작이다. 화엄경의 심오한 진리를 7언시 30구로 응축시켜 놓았으니 본래 이름은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이다. 의상은 일관되게 실천하는 삶을 살았으니, 철저한 신분제 계급사회인 당대에 거대한 토지와 노비를 거느린 사찰의 영화를 끝내 거부하였다. 그런 그가 세운 가람이 바로 낙산사이다. 설악산의 준수한 줄기가 양양쪽 동해로 흘러 내리다가 빚어낸 오봉산 품안에 넉넉하게 자리잡아 산은 작되 옹골지며, 산세가 수려하여 송림이 우거졌고, 동해를 벗하여 가히 해산(海山)의 격조를 말해 준다. 벼랑 때리는 파도를 벗삼아 잠들고, 다시금 파도 소리에 선잠을 깨는 가람이다. 오봉산은 본디 보타산 낙가산이었으니, 낙산이란 관음보살이 산다는 포타라카(Potalaka)의 음역으로, 낙가산 혹은 낙가로도 불린다. ●당에서 귀국한 의상, 관음 계시로 낙산사 지으니 당에서 귀국한 의상은 온 나라를 주유하며 뜻을 펼칠 마땅한 땅을 찾다가 이곳에 이른다. 해변 석굴에 관음 진신이 산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높이 100자가 넘는 해식 단애의 깎아지른 바위 틈으로 쉴 새 없이 파도가 드나드는 험한 곳. 그곳에서 관음 진신을 만나길 간구했으나 뜻을 못이루자 그대로 바닷물에 몸을 던진다. 마침내 관음이 그 정성에 감복하여 진신은 드러내지 않은 채 수정염주 한 꾸러미를 건냈으며, 동해 용왕도 여의보주 한 알을 내렸다. 그러나 의상은 다시 이렛동안 진심으로 기도하여 마침내 관음을 친견한다. 관음은 의상에게 굴 위 산꼭대기에 쌍죽이 솟아날 것인즉, 그곳에 절을 짓도록 계시한다. 낙산사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중국 보타산을 알아야 한다. 관음도량인 보타산은 오대산 문수보살, 아미산 보현보살, 구화산 지장보살 도량과 더불어 중국 불교의 4대 성지다. 바다 가운에 꽃처럼 피어있는 보타산은 상해에서 쾌속선으로 1시간 반, 항주 이남의 영파에서는 4시간이 걸리는 곳이다. 불긍거관음원(不肯去觀音院)은 보타산의 여러 사원 가운데 중심이며, 조음동사원은 우리 낙산사와 주위 경관이나 지형이 너무도 흡사하다. 동해 일출의 관해지인 의상대와 바닷물이 절벽 아래까지 밀려들어와 절벽을 치며 동굴에서 파도를 일으키는 홍련암 관음굴이 너무 비슷해 하나의 의문이 풀린다. 의상이 일찍이 중국 보타산을 순례하고 그곳 지형과 거의 흡사한 동해안에서 바다로 돌출한 해식 동굴을 찾아내 그 위에 건물을 올렸던 것이 다양한 연기설화로 전해진 것은 아닐까. 그동안 불긍거관음원을 세운 유래를 불조통기(佛祖統記)란 자료를 통해 일본 승려 혜악(慧鍔)선사와 관련지어 설명하는 학설이 주류였으나, 신라 상인들이 지었다는 설이 강력하게 대두되고 있다. 북송 말 서긍은 고려도경(1124)에서 “석교의 산록 위에 양무제가 세운 보타원이 있고, 전각 안에는 영험한 관음상이 있다. 옛날에 신라 상인이 오대산에 갔다가 그 불상을 조성해 싣고 본국으로 돌아가려 했다. 바다로 나아갔으나 배가 암초에 걸려 더 나아가지 아니하므로 관음상을 바위 위에 내려 놓았다. 관음원의 승려 조악이 전각 안으로 모셨더니 해상으로 왕래하는 이들이 반드시 나아가 기도하매 감응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적었다. 글은 보타산이 관음보살의 주도량이며, 항해를 위한 기도도량으로 조성된 사실을 알려준다. 실제로 관음원 앞바다에는 신라초(新羅礁)로 불리는 조그마한 암초까지 남아 있다. 의상을 비롯한 많은 고승들의 중국유학, 보타산과 비교되는 낙산사, 그리고 보타산의 신라인 흔적은 해로를 통한 중국과의 왕성한 교류를 잘 암시한다. ●중국 보타산과 주위경관·지형 흡사 낙산사에는 관음과 얽힌 여러 설화들이 전해진다. 삼국유사를 보면 원효 역시 낙산의 관음 참배에 나선다. 낙산 근처에서 흰옷 입은 여인이 벼를 베기에 원효가 다가가 장난삼아 벼를 달라고 하니 여인은 벼가 흉작이라 줄 수 없다고 답한다. 다리에 이르니 한 여인이 서답을 빨고 있기에 마실 물 좀 달라고 청하니 서답 빨던 더러운 물을 주는지라 원효는 냇물을 새로 떠마셨다. 그랬더니 들판의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휴제호와상아”라고 말하는데, 모습은 보이지 않고 소나무 밑에 짚신 한 짝만 남아 있었다. 절에 이르러 보니 관음상 아래에 방금 전에 보았던 짚신이 한 짝 있음을 보고서야 자신이 만난 여인이 관음임을 깨닫는다. 원효가 다시 암굴에 들어가 관음 진신을 보고자 했으나 풍랑이 크게 일어나 들어가지도 못한 채 낙산을 떠나야 했다. 원효의 관음 친견까지 더해 관음도량 낙산사의 격을 한층 높이는 설화다. 관음의 주장처이면서도 정작 낙산사는 늘 편치가 않았다. 고려시대 몽골군의 침략으로 초토화되어 관음상도 부서진다. 오대산에 자주 나다니던 세조는 원통전 석탑을 7층으로 늘리고 중창 불사를 단행한다. 그로부터 20년 뒤(1485)에 낙산사를 찾은 남효온의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를 보면, 그 때까지는 의상이 만들었다는 관음소상이 관음전에 안치돼 있었고, 관음굴에는 파도가 돌을 쳐대는 전각도 있었으며, 그 시대에도 낙산 일출의 장관을 보려는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것 같다. 관동팔경의 하나인 낙산일출은 이미 조선시대부터 유명세를 치렀으니 최소한 600년이 넘는 전통이다. ●여러번 화마에 휩싸였던 낙산사 또 ‘고통’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절은 다시 무너진다. 광해 11년(1619)에 관음굴을 중건하며, 인조 9년(1631)에 재건하여 어느 정도 복원된다. 그 모습은 겸재 정선이 힘찬 필치로 그린 낙산사와 관음굴에 잘 남아 있다. 이후 낙산사는 중건을 거듭하며 1925년에는 의상대까지 세워 동해 일출의 적지로 자리매김한다. 그러나 삼팔선 근역에 위치, 한국전쟁의 격전지가 되면서 다시금 금석물과 원통전 앞 원문을 제외한 모든 당우가 불타버린다. 불자들이 가장 많이 찾아오는 고려시대 불상인 건칠관음보살좌상(보물362호)을 모신 원통보전도 전쟁 이후 새로 세운 것이다. 연꽃을 타고 바다를 건너는 관음이니, 낙산사 홍련암이란 검푸른 동해에 떠있는 붉은 연꽃, 즉 관음의 분신이렸다. 홍련암 마루바닥에는 10㎝ 가량의 구멍이 있어 파도가 들이치는 모습이 한 여름에도 전율을 느끼게 한다. 해일이 몰아쳐서 집채만한 파도가 몰아쳐도 홍련암만큼은 버텨 왔다. 의상이 관음을 친견하고 동해 용왕이 여의주를 내린 장소로 손색이 없다. 이상하게도 벼랑 위에 위태롭게 세운 홍련암은 온갖 병화에도 끄떡없다. 그것 또한 관음의 원력은 아닐런지. 그러나 이 모든 게 이번 산불로 다시 잿더미가 되고 말았으니 낙산사는 본디 애초의 출발지였던 관음굴로 되돌아 간 셈이다. 원통보전은 물론이고 해수관음을 상징하던 보타루도 사라졌다. 한가롭게 바다를 굽어보며 차를 마시던 솔숲이 흉물스럽게 그을렸다. 바닷가 홍련암 요사채도 사라지고 관음굴만이 화마를 피했으니 본디 낙산사의 원점으로 회귀한 폭이다. 붉은 장송이 하늘을 가린 아름다운 솔밭길을 올라가면 해수관음상이 있는 신선봉이 나오는데, 그 솔밭도 그만 타버렸다.1977년에 700여t의 돌을 들여 높이 16m로 세운 해수관음만이 남아있어 먼 동해를 굽어보며 서있을 뿐이다. 관음보살이 중생들의 원력을 시험하려고 하심인가. ●집채만한 파도 몰아쳐도 버텨온 홍련암 죽어 자빠진 소나무의 몰골들이 귀신을 부를 것만 같은데 화마가 훑고 갔어도 낙산의 일출만은 어제와 다를 바 없으니, 그 아름다운 관해의 1번지를 모두의 공력으로 다시 세울 일이다. 관해의 명당이어서 만은아니다. 역사적으로나, 규모로나 동해안 사찰의 태두 격인 낙산사의 화마 소식에 실로 안타까운 헌사를 바치지 않을 수 없다. 삶의 덧없음을 갈파한 낙산사 조신설화처럼 사람의 인생뿐 아니라 말 못하는 문화유산도 덧없는 것이런가. 아름다운 원장(垣墻)이 처참하게 불에 그을린 채 동해를 굽어보는 모습이 참으로 안쓰럽고 민망하다.
  • 신성한 건축/캐롤린 험프리 등 지음

    절대자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인간의 욕망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것은 흔히 기독교 교회나 가톨릭 성당, 불교 사원, 이슬람 모스크 등 종교적인 건축물의 형태로 나타난다. ‘신성한 건축’(캐롤린 험프리 등 지음, 김정우 옮김, 창해 펴냄)은 선사시대 거석 기념물에서 진흙이나 풀로 지은 검박한 종교 건축물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가장 매혹적이고 성스러운 건축물들을 골라 소개한다. 책은 ‘산으로서의 사원’이라는 개념을 제시해 눈길을 끈다. 힌두교와 불교 사원의 형태를 보면 ‘우주의 산’이라는 개념이 뚜렷이 드러나 있다. 그것은 또한 자궁 혹은 동굴의 상징과도 통한다. 산처럼 생긴 불교의 스투파(사리탑)에 우주의 ‘알’이라 불리는 감실이 있는 것이 그 한 예다. 계단식 피라미드를 가리키는 지구라트도 산봉우리를 뜻하는 바빌로니아 말에서 나온 것이다. 종교 건축물뿐 아니라 일상적인 목적으로 지어진 건물에도 영원을 향한 인간의 열망이 담겨 있다. 북극지역에서 볼 수 있는 얼음 벽돌집 이글루 역시 이런 신성한 의미를 담고 있다. 책에 따르면 이글루의 돔형 지붕은 하늘을, 얼음 창문은 태양을, 문간은 달을 각각 나타낸다. 여성의 질에 해당하는 출입구 통로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 자궁을 상징하는 실내공간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 책은 ‘집은 살아 있다’고 믿는 동남아 사람들의 주거 관념도 신성한 건축의 차원에서 다룬다.2만 50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주여,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나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남은 인생 남을 위해 헌신하며 살겠습니다.”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원로목사들이 한 자리에 모여 참회하는 행사를 열었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회장 김명혁 목사)는 8일 서울 도곡동 강변교회에서 ‘제가 잘못했습니다’라는 주제로 월례 조찬기도회와 발표회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에서는 김명혁 목사의 사회로 김창인(충현교회), 강원용(경동교회) 원로목사와 조용기(여의도순복음교회) 목사 등이 각각 15분씩 ‘제가 잘못했습니다’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가장 먼저 발표자로 나선 김창인 목사는 광복 이후 교회재건운동을 펼치면서 교회의 분열을 막지 못한 점을 반성했다. 김 목사는 “1945년 광복 후 개신교는 일제 때 신사참배 문제를 놓고 장로교와 고려파로 분열했는데, 이를 막지 못한 책임이 나에게도 있다.”고 고백했다. 강원용 목사는 개신교 내의 일치문제에 소홀했던 것, 환경문제에 무관심했던 것 등에 대해 스스로 회초리를 들었다. 강 목사는 “1965년부터 불교, 원불교 등 종교 간 대화운동을 펼쳐왔는데, 정작 가장 먼저 해야 할 기독교 내 대화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며 “서로 갈라지고 대립해온 우리 개신교가 참된 대화와 협력에 힘썼다면 뭔가 달라지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조용기 목사는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가 제시한 ‘값 싼 은혜’라는 말을 들어 자신의 죄를 반성했다. 조용기 목사는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의 삶이 없는 ‘값싼 은혜’를 가지고 살았다.”고 회고하며 “앞으로 율법과 계명을 받들고 은혜와 진리 속에서 새 사람으로 살겠다.”고 약속했다. 조 목사는 이어 “말로만 사랑을 외쳤고, 이웃에 대해 너무 무관심했으며, 사회의 고통과 부도덕에 너무 침묵했다.”며 “이제부터라도 있는 힘을 다해 사회의 정의를, 우주의 하나님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인사]

    ■ 재정경제부 ◇국장급 전보△국세심판원 상임심판관 金容珉△국세청 법무심사국장 파견 金度亨 ■ 중앙인사위원회 ◇서기관 승진△혁신인사기획관실 朴勇洙 柳志勳△정책총괄과 李景煥△인재기획과 李啓周△능력발전과 金成勳△인재채용과 張点煥△급여후생과 徐正斗 ◇시설서기관 승진△중앙공무원교육원 총무과 吳定昊 ■ 한국인삼공사 ◇승진△영업지원부장 權福煥△마케팅부장 金永文△전략기획부장 崔森圭△경영조정부장 尹三容△수출1부장 張敬燮△고려인삼창 계획부장 韓草洙△〃 제품부장 徐彰壎△〃 총무부장 金學中△〃 자재부장 金賢守△〃 품질관리부장 裵東贊△서울북부지점장 延東熙△서울남부〃 劉昌鎬△서울서부〃 全潤植△인천〃 李鍾林△충남〃 白種成△충북〃 金珍基△남부원료사업소장 趙重允 ◇전보△감사실장 趙誠敦△신유통팀장 金成玉△울산지점개설팀장 南廷錫△인사부장 朴魯禎△재무관리부장 李五泳△경영정보팀장 廉成勳△사업개발부장 金萬會△기술개발부장 禹尙起△음료사업팀장 尹汝康△생산관리부장 鄭址澈△생산기획부장 朴鐘坤△해외기획부장 白仁鎬△고려인삼창 환경시설부장 蔡弘基△서울동부지점장 朴炯喆△경기〃 宋寅洪△전남〃 姜河鍾△경남〃 李載永△북부원료사업소장 金時東△중부〃 崔羽祥 ■ 대신증권 △감사팀장 金盛太△남대문지점장 朴炯根 ■ 현대불교신문 △편집국장 위영란△편집부국장 이경숙△HBMC 방송단장 이중희 ■ 세종증권 ◇부장 승진△대구지점 金用純△경영관리팀 李商澤△돈암동지점 鄭珍旭 ◇차장 승진△중앙지점 薛鎭泰△광주지점 朴營△대전지점 崔亨宅△경영관리팀 延炯模△리서치센터 林廷錫△경영관리팀 金佐泳△법인영업팀 韓昌勳 ■ YTN (기획조정실)△기획팀장 韓永圭△홍보〃 겸 방송심의〃 姜興植(경영관리국)△타워운영부장 全武福△재무회계팀장 겸 DMB 경영지원팀장 辛光豪△방송행정〃 金忠汕(보도국)△편성운영팀장 柳熙林△경제부장 李洪烈△사회1〃 金益鎭△문화과학〃 崔修豪△스포츠〃 직대 千相圭△국제〃 朴聖鎬△편집2팀장 尙秀鍾△편집3〃 李貴英△앵커〃 柳碩鉉△제작〃 尹斗鉉△영상특집〃 金載東(미디어국)△매체관리팀장 金天錫(마케팅국)△마케팅기획부장 沈昌來△마케팅1〃 金鎭熙△마케팅2〃 金倫燮△마케팅3〃 직대 金海中(기술연구소)△기술연구소장 직대 鄭明烈△총괄부장 黃明洙△채널운영팀장 朴喆遠△정책기획〃 李東憲△데이터서비스〃 奇正勳△기술〃 林暎善
  • 박경조 서울교구장 주교 서품식

    대한성공회 차기 서울교구장으로 선출된 박경조 신부의 주교 서품식이 7일 서울 정동 성공회 서울대성당에서 현 교구장인 정철범 주교의 집전으로 열렸다. 서품식에는 일본성공회 관구장인 우노토루 대주교를 비롯해 홍콩성공회 피터 퀑 주교, 타이완성공회 라이 주교 등이 참석했다. 국내에서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백도웅 총무, 한국정교회 트람바스 대주교, 불교조계종 원택·진월스님, 정동채 문화관광부장관, 이명박 서울시장, 이재정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등 1000여명이 참석했다. 지난해 6월 서울교구 차기 교구장으로 선출된 박경조 신부는 11월 승좌식(취임식)까지 부주교로서 현 교구장인 정철범 주교를 보좌하게 된다.1944년 경남 통영에서 출생한 박 신부는 1975년 10월 사제서품을 받아 성북·수원교회, 서울대성당에서 사역하고 서울교구 교무국장과 전국기관인 관구 교무원장을 지냈다.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산불 이재민 구호에 佛心 다할 것”

    불교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 스님은 7일 영동지역 산불피해와 관련, 재난 복구와 낙산사 복원 불사에 전국민이 동참해줄 것을 호소하는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법장 스님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종단은 다시는 이런 참담한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산하 사찰에 긴급지침을 시달하고 향후 종합대책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법장 스님은 나아가 사찰 방화선 확립, 소화전 확보, 방화벙커 설치 등 문화재 재난 예방과 관련한 대책을 내놓았다. 이에 따라 조계종은 사찰 전각 주변의 나무를 벌목해 주변 임목이나 울타리 높이의 1.5배 이상의 방화선을 확보, 산불화재시 전각에 불이 옮겨붙지 않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또 상수도와 별도로 저장수를 상시 비축하고 전각마다 소화전을 설치하는 한편 중국이나 프랑스 등의 세계 유명 박물관처럼 방화벙커를 설치해 유사시 문화재를 옮길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한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총무 백도웅 목사도 이날 성명을 내 “낙산사의 전소로 크게 낙심하고 있는 이웃 종교인 불교계 분들에게 위로의 마음을 전하고자 한다.”며 “정부는 낙산사 복원이 불교계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화유산임을 깨닫고 모든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종교플러스] 조계사 대웅전 중수불사 상량식

    대한불교 조계종 조계사(주지 원담 스님)는 9일 오전 11시 대웅전 앞마당에서 대웅전 중수불사 상량식을 봉행한다. 조계사는 천장 상부의 목재들이 심각하게 틀어지고 불화가 훼손되는 등 안전·보존상의 문제로 대웅전 해체 보수공사를 2002년부터 진행해왔다.
  • 안성에서 맞이하는 봄맞이축제

    안성에서 맞이하는 봄맞이축제

    얼쑤∼. 흥겨운 풍물소리가 봄을 열었다. 예년보다 봄꽃이 늦게 피어 상춘객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있지만 그래도 봄은 봄이다. 그렇다면 봄의 흥겨움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가족들과 오붓하게 어디론가 떠나고 싶지만 마땅한 곳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이럴 땐 지난 주말부터 바우덕이 풍물단의 남사당놀이 토요상설공연이 시작된 경기도 안성이 ‘안성맞춤’. 눈꽃을 닮은 화사한 배꽃이 은은한 향을 날리고, 뛰어난 광택을 자랑하는 안성유기에 천년고찰 칠장사와 청룡사의 멋진 풍광을 볼 수 있다. 마당놀이는 조선시대 전국 제일의 남사당으로 이름을 떨쳤던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꼭두쇠 바우덕이의 후예들이 펼치는 공연.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외줄타기 공연이 압권이다. 특히 공연과 주요 관광지의 주차·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봄을 타고 온 짜릿함과 흥겨움 “꽹괘 꽹괘 꽹꽹꽹!!!” 4월 첫 주말인 2일 오후 6시30분. 꽹과리 소리가 어스름한 저녁 하늘에 울려퍼지자 안성시 보개면 복평리 남사당전수관 야외공연장에 모인 상춘객 500여명의 어깨가 장단에 맞춰 들썩거린다. 오는 10월까지 계속되는 안성시립 남사당 바우덕이 풍물단(www.baudeogi.com·031-675-3925)의 첫 공연. 악사들의 풍물반주에 맞춰 고사굿이 시작되고 설장구 합주와 살판(땅재주 놀이), 덧뵈기(탈놀이), 버나놀이(가죽접시돌리기), 상모놀이 등이 숨가쁘게 펼쳐졌다. “잘하면 살판이요 못하면 죽을 판이다.” 살판이 벌어져 어릿광대와 재주꾼이 묘기를 부리며 쏟아내는 재담에 공연장에는 한바탕 폭소가 터진다. 이어 인형의 목덜미를 쥐고 있다는 말에서 유래된 인형극 ‘덜미’ 공연이 시작되자 아이들의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드디어 공연의 최고 절정인 어름(외줄타기) 공연이 시작되자 이내 장내가 숨을 죽였다. 악사의 반주에 맞춰 줄광대(어름산이)가 3m 높이의 줄 위에 부채 하나 달랑 들고 아슬아슬 줄을 탄다. ‘얼음 위를 걷듯이 조심스럽다.’는 뜻에서 어름이라고 불리는 공연. 줄광대는 30대의 젊은 나이에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김대균씨. 그가 줄 위에서 중심을 잃은 듯 표정을 취하면 관객들의 ‘어이쿠’하는 외마디 비명이,‘별 것 없는 공연 보러 먼 길들 오셨네.’라며 익살을 부리자 장내는 웃음바다가 된다. 20여분간의 공연은 어름산이가 줄 반동을 이용해 수차례 1∼2m 솟구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풍물단의 전신은 조선 최고 처녀 꼭두쇠 바우덕이의 후예들.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꼭두쇠로 남사당패 100여명을 이끌어 전성기를 이루다 23살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바우덕이의 애달픈 전설은 공연의 흥미를 배가시킨다.1848년 태어난 그녀는 다섯살 때 병든 홀아비를 떠나 남사당패에 들어와 기예를 배웠다. 타고난 천부적인 재능과 미색을 겸비해 경복궁 복원공사 때 풍물놀이를 벌여 대원군으로부터 정3품 벼슬아치에게 주는 옥관자를 하사받은 일화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21살에 폐병에 걸려 꽃다운 나이인 23살에 요절하고 만다. 그녀의 시신은 그녀를 사모하던 이경화란 남사당에 의해 이름없는 냇가에 묻혔다고만 전해진다. 바우덕이 공연과 함께 매주 토요일 오후 4시 안성 태평무 전수관(www.taepyungmu.net·678-2812)에서 열리는 전통무용. 태평무와 부채춤, 무당춤, 학춤 등 태평무 이수자와 강선영 무용단의 공연이 1시간 동안 무료로 펼쳐진다. ●배꽃 향기와 안성맞춤 볼거리 바우덕이가 어린시절 외줄을 타던 서운산 자락 불당골엔 4월 중순이면 새하얀 배꽃 물결이 일렁인다. 곳곳이 배 과수원인 안성에서는 어느 곳에 가도 배꽃 천지지만 시내에서 57번 지방도를 타고 남으로 서운산 자락의 배밭길을 달리는 것이 장관이다. 특히 청룡저수지 아래 개울가에는 바우덕이의 커다란 가묘를 만들어 그녀의 예술혼을 기리고 있다. 볼거리도 적지 않다. 삼국시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의 각축장으로 수도권의 경주라고 할 만큼 다양한 문화유산이 있다. 송문주 장군이 몽고군을 격퇴시킨 죽주산성(경기도 기념물 제69호)을 비롯해 불교문화의 보물창고 칠장사에는 혜소국사비, 칠장사 철당간, 오불회 괘불탱 등 국보·보물급의 문화재를 다량으로 보유하고 있다. 이밖에 죽산리 5층석탑(보물 435호)과 죽산향교, 영창대군묘, 이덕남 장군묘 등이 있다. 또 시인 조병화의 생가인 편운재문학관(674-0307)과 혜산 박두진 시비 등과 함께 천주교 초대 신부인 김대건 신부의 묘를 모신 미리내 천주교성지, 죽산 성지 등을 찾으면 종교·예술인들의 발자취도 느낄 수 있다. ‘안성맞춤’이라는 말을 탄생시킨 뛰어난 광택을 자랑하는 안성유기(중요무형문화제 제77호)를 전시한 안성맞춤박물관(676-4352)과 안성맞춤 유기장, 안성브랜드 센터 등 안성의 특산물을 한 곳에서 볼 수 있다. 가족단위 나들이를 하기에는 남사당 전수관 옆의 갤러리 아트센터 마노(www.mahno.co.kr)가 좋다.‘거꾸로 선 집’과 ‘옆으로 지어진 집’ 등 이색적인 미술전시관과 레스토랑, 펜션은 신기함과 호기심을 자극한다. 또 3만평의 농원에 펼쳐진 2000여개의 장독대가 장관인 서일농원(673-3171)도 봄나들이 최적지. 이 곳에서 담근 각종 장아찌와 청국장·된장찌개(7000원)는 고향의 맛을 느끼게 한다. 또 안성천문대(777-1771)에서는 밤하늘의 별자리를 감상할 수 있다. 먹을거리도 풍부하다. 안성 쌀밥과 쫄깃하고 고소한 안성 한우는 여행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옛날 손맛을 그대로 대물림해온 80년 전통의 한우탕 집 안일옥(675-2486)과 청룡호수 부근 민물새우 매운탕집 남한산성(674-5923)이 맛있다. 일죽 IC 부근에 있는 찜질마을 건강나라(674-8255)에서 심신의 피로를 말끔하게 해소하는 것은 여행의 보너스. 평일에는 1만원, 주말에는 1만 3000원. 안성시 문화체육관광과(678-2064). ● 강릉 다른 지역의 가면극과 달리 연회자가 관노들이었다는 특징에서 지어진 강릉 관노가면극은 지역색이 물씬 풍겨나는 전통공연이다. 한국의 가면극 중 유일한 무언극으로 대사 이전에 춤과 몸짓으로 연회가 구성돼 있다. 매주 토요일 오후 7시, 일요일 오전 11시에 강릉관노가면전수회관에서 열린다.(033)642-1008.(www.kwanno.or.kr) ● 수원 정조대왕의 옛 발자취를 따라 가는 화성행궁 토요상설마당도 지난달 27일 개막돼 오는 11월26일까지 매주 토요일 오후 3시 경기 수원시 화성행궁에서 열린다. 매월 다른 프로그램이 진행되는데 이달에는 ‘새벽에 창덕궁을 떠나다’를 주제로 열린다. 재단법인 성정문화재단 (031)257-4500.(www.sungjung.org) ● 양주 중요무형문화재 2호로 지정된 양주별산대놀이가 지난 3일 막을 올렸다. 오는 10월30일까지 펼쳐지는 행사는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오후 3시에 경기 양주시 양주별산대놀이 전수회관에서 열린다. 경기도 지방에 전승돼 온 가면극으로 대표적인 서민 오락이다. 거드름춤과 깨끼춤의 몸짓으로 연극적 요소를 가미하고 덕담과 재담으로 서민의 애환을 풍자해 왔다. 양주별산대놀이 전수회 (031)840-1389.(www.sandae.com) ● 남원 남도민요와 판소리를 들을 수 있는 남원 민속국악상설공연이 지난 1일부터 매주 토요일 오후 2시부터 전북 남원시 광한루원에서 열린다. 춘향전과, 흥부전, 심청전, 시집가는날, 남원전 등 공연과 우리가락 따라부르기 등 관객과 함께하는 행사가 진행된다. 공연이 끝난후 30분간 영상레이저 쇼도 상영한다.(063)620-6484.(www.namwon.jeonbuk.kr) ● 안동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서 열리는 하회별신굿탈놀이는 널리 알려진 유명한 마당놀이.4월에는 매주 토요일 오후 3시부터 열리며,5∼10월까지는 토요일과 일요일 오후 3시에 열린다. 무동마당과 주지마당, 백정마당, 할미마당, 파계승마당, 양반선비마당 등 6개 마당 공연과 관람객과의 뒤풀이 한마당이 펼쳐진다.(054)851-6393.(www.hahoemask.co.kr) ● 부산 오는 11월12일까지 매주 토요일 오후 3시 부산시 용두산공원 민속놀이마당에서 진행되는 전통민속놀이마당에서는 부산의 중요무형문화재인 동래야류, 수영야류, 좌수영 어방놀이, 부산농악 등 매주 다양한 행사가 이어진다.(051)888-3281.(www.festival.busan.kr) 안성 글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3) 변산 태진스님과 정감록 사건(上)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3) 변산 태진스님과 정감록 사건(上)

    기왕 변산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조선 영조 때 태진(太眞) 스님에 관한 이야기를 여기서 빠뜨릴 수가 없다. 그는 남원에서 발생한 불온 벽보 사건에 연루됐었고 그 사건은 조선왕조의 정사(正史) ‘왕조실록’에 비교적 자세히 나온다. 이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반역죄인을 취조한 기록을 엮은 ‘추안급국안’이란 책자에도 상세하다. 태진은 반역에 관한 혐의로 엄중한 조사를 받았던 것인데, 이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월명암은 월출암의 다른 이름? ‘실록’ 등엔 태진이 부안 변산에 있던 월출암(月出菴)의 승려라고 했다. 그런데 내가 찾아본 부안 지방의 고문헌에는 월출암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 절의 스님이 역모사건에 관련됐던 관계로 폐찰(廢刹)이 되고 만 게 아닐까 짐작되기도 하지만, 꼭 옳은 짐작일지는 모르겠다. 그런 식이었다면 역사상 큰 절치고 문 닫지 않고 배겨날 절이 하나도 없을 것 같다. 달리 생각해 보면, 절의 이름이 잘못 적혔을 가능성도 없지 않고, 또 그런 불미스러운 사건을 계기로 절 이름이 다소 바뀌었을 수도 있겠다. 대역부도 사건 등이 발생한 다음엔 고을의 명칭이 바뀐 사례가 많았다는 역사적 사실이 참조된다. 그런 점에서 일단 혐의를 둘 만한 암자가 하나 있는데 월명암(月明菴)이 바로 그 경우다.‘달이 뜬다.’는 뜻을 가진 월출(月出)이나 ‘달이 밝다.’는 월명(月明)은 서로 통하는 점이 있다. 변산의 제2봉인 쌍선봉(498m) 중턱에 자리한 월명암은 경관이 수려하다. 월명암 뜰에 서면 변산의 수많은 봉우리를 발아래 깔고 있는 듯이 느껴지고, 암자 뒤 낙조대(落照臺)에 올라 서쪽을 바라보면 점점이 늘어선 고군산군도의 뭍섬들이 아름답다. 이 절의 이름이 하필 월명(月明)인 것도 잘 생각해 보면 그 일대에서 목격되는 달 뜨는 정경 또한 기막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렇다면 월명암은 월출암의 다른 이름일 가능성이 충분하다. 월명암은 본래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호남의 명승(名僧) 진묵대사(震默大師·1562∼1633)가 중건하였다. 그 뒤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암자에선 허다한 고승들이 배출됐다. 선가(禪家)에선 대둔산 태고암, 백양산 운문암과 함께 도인을 많이 키워낸 3대 성지로 손꼽힌다. 내가 지금 이야기하는 태진 역시 당대의 ‘명승(名僧)’으로 존경받던 스님이었다. 여느 스님들과는 달리 그는 양반가 출신이었는데 참선수행을 했을 뿐만 아니라, 당대 정치현실에 대해서도 예리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화근이 돼 태진은 결국 조정으로부터 엄벌을 받았다. 어쩌면 그가 몸담았던 불교계조차 그를 영구히 추방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 정말 있었다 해도 나는 태진을 비난할 마음이 조금도 없다. 오히려 거꾸로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태진은 부조리한 18세기 조선의 현실을 변혁시킬 꿈을 꿨다. 그런 점에서 그는 뒷날 같은 목적을 가지고 월명암을 찾았던 강증산, 소태산, 백학명 등 근대 종교계의 큰 별들과 일맥상통했고, 그가 연루됐던 사건은 우리의 주목을 끈다. ●영조가 직접 심문 나선 ‘괘서’ 사건 때는 영조9년(1733) 음력 7월 말이었다. 한여름 불볕더위가 조금씩 수그러들고 아침저녁으론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와 구중궁궐에 계신 영조임금부터 강원도 두메산골 김첨지네 복슬강아지에 이르기까지 다들 살맛을 되찾아 가고 있던 차에 불길한 사건이 터졌다. 그것도 서울에서 700리나 떨어진 전라도 남원에 괴문서 한 장이 나붙은 거였다. 먼 시골 도시 성벽에 밤새 어떤 사람이 종이 한 장을 붙였기로 그게 무슨 큰 야단이라고들 호들갑인가, 현대를 사는 우리로선 납득이 잘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괘서’(요즘말로는 벽보) 사건은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는다. 문제의 벽보는 우선 그 내용이 ‘매우 흉악했다.’ 지엄하신 상감마마와 동궁을 저주할 뿐만 아니라 이제 세상이 곧 뒤집어진다는 믿기 어려운 소리가 가득했다. 역모의 혐의가 명백하게 느껴지는 ‘불충한’ 글이었다. 더구나 이 괘서의 상당부분은 이미 4년 전에 진압된 ‘무신란(戊申亂·경종의 독살설을 주장하며 소론과 남인들이 일으킨 반란)’의 주동세력이 각지에 퍼뜨린 소문이나 선동적인 구호와 일치했다. 영조로선 두 번 다시 생각하기도 끔찍한 ‘무신 잔당’의 부활을 입증하는 증거로 의심해볼 만했다. 영조는 몹시 긴장했으며, 그를 보좌해 국정을 이끌던 조정대신들 역시 마음이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시급히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 역모사건을 전담하는 의금부며, 사건발생지역의 수장인 전라감사, 그리고 조정에서 현지로 파견된 관리인 남원부사 등이 열흘 이상 이 사건에만 매달리다시피 했다. 피의자에 대한 고문과 취조가 날마다 계속되었고 그동안 영조는 몸소 수사를 진두지휘하다시피 했으며, 직접 신문에 나서기도 했다. 일반에는 문예부흥기로 알려져 있지만 영조와 정조 때는 실상 이런 역모 사건들이 그 어느 때보다 빈번하게 발생해 조정을 긴장으로 몰아넣었다. ●월출암 승려 태진이 소장했던 ‘남사고 비결’ 이 사건의 발단이 된 예언서는 ‘남사고 비결(南師古秘訣)’이었다. 태진이 가지고 있었던 그 책은 갑자년을 기점으로 해마다 일어날 사건들이 예언돼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편년체 예언서였다. 이 책엔 역모사건으로 정국이 뒤숭숭했던 무신년에 대해서 “또한 좋지 않다.”든가 “피가 흘러 내를 이루고 길이 막히며 민호에 연기가 끊긴다.”는 예언이 적혀 있었다. 실제 영조4년(1728) 무신년엔 하3도(충청, 전라, 경상)에서 반역사건이 있었으나 곧 진압됐었다. 그러므로 ‘남사고’의 예언은 그런대로 잘 들어맞은 셈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남사고’도 역시 편년체로 돼 있다. 그러나 예언서의 시작은 갑자년이 아니라 경인년으로 돼 있어 태진이 소장했던 ‘남사고’와는 분명히 다르다. 위에서 예로 든 무신년에 대해서도 “제갈량(諸葛亮)이 이미 죽었으니 어떤 성 한쪽에 금성(錦城)이 피폐하구나. 경시(更始)는 자리를 긁고 범증(范增)은 등창이 나는구나.”라고 했다. 자구상 표현은 전혀 다르지만 그 해의 운이 무척 나쁘다고 본 점에선 우연히 일치한다. 그밖에도 태진이 소장한 ‘남사고’엔 백저 안답(白猪按答), 봉목 장군(蜂目將軍), 승입병도(僧入丙都), 노색연절(路塞煙絶), 만가여일(萬家如一) 등의 표현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글귀는 현재의 ‘남사고’엔 전혀 없다. 책의 이름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지만 그 내용은 똑같지 않은 줄을 미루어 짐작하겠다. 평소 태진이 소지했던 ‘남사고’에는 무신년 이후로도 여러 해 동안 나쁜 일이 계속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돼 있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남사고’도 역시 그런 내용이다. 예컨대, 무신년으로부터 4∼5년이 지나면 “세상일이 이미 끝이로다.”라고 했다. 그 참상은 “백 가호에 소가 한 마리요, 열 계집에 한 남편이로다.”라는 구절에 가장 잘 압축돼 있다. 요컨대, 세상은 최후를 맞이하고야 만다는 것인데, 햇수를 따져보면 영조9년이 바로 그 말세운이었다. 영조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로선 이런 ‘남사고’의 예언을 그저 웃으며 지나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조정의 금지명령을 비웃기라도 하듯 ‘남사고’를 비롯한 ‘정감록’의 대중적 인기는 갈수록 높아져 조정은 속수무책일 뿐이었다. 태진이 ‘남사고’를 손에 넣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었다고 한다. 그는 전국의 명산을 두루 유람했는데, 충남 보령의 오서산(烏棲山·791m)에 들른 적도 있었다. 거기서 그는 도승(道僧) 자명(自明)을 만났다고 했다. 태진은 그것이 기유년(1729)의 일이라고 회상했는데 그 기억이 정확한지는 확인할 수 없다. 어쨌거나 태진은 오서산에 이틀 동안 머물렀고 그 때 자명이 가진 ‘남사고’를 처음으로 구경했단다. 태진이 이 책에 큰 관심을 보이자 자명은 필사해 주었다. 태진은 평소 세상사에 관심이 많은 편이어서 어딜 가나 늘 ‘남사고’를 휴대했다. ‘남사고’의 예언은 현실로 입증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것이 태진의 변함없는 믿음이었다. 어서 빨리 세상이 바뀌어 현세가 미륵세상으로 바뀌기를 그는 열렬히 바랐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변화를 알리는 예언서를 무척 좋아했다. 더욱이 변산은 한국 미륵신앙의 출발점이었고, 태진은 그런 사상적 전통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자기가 믿을 만하다고 판단한 사람들에게 ‘남사고’의 내용을 들려주었고, 그 예언을 시세에 맞게 적절히 풀이해주는 것을 직업으로 삼다시피 했다. 그러다 보니 태진의 주위에는 ‘남사고’를 베껴 나눠 갖는 사람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태진, 남원 양반 최봉희를 사귀다 태진은 기회가 되는 대로 속세의 여러 사람들과 사귀었다. 때론 산사를 찾아온 양반들과도 자연스레 친교를 맺었다. 그는 그런 사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유년(1729) 10월, 전북 진안의 팔공암(八公菴)에 있을 때야. 그 암자가 경치 좋고 한가한 곳이란 소문이 있어 찾았던 게지. 내가 그곳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지. 젊잖아 뵈는 세 양반이 그 절간엘 들렀어. 무슨 약초를 캐러 왔던 모양 같아. 한 분은 이름을 최봉희라 했는데 남원서 온 가난한 양반이었고, 또 한 분은 윤징상이라고 했지 아마. 그리고 또 정원덕이라는 분이었을 거야. 이 양반들은 서로 친구사이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팔공암의 노스님을 모신 승방에 들어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참 진지하게도 나누었지. 부처님의 법이 공자의 가르침과 과연 다른 것인가, 사람이 죽으면 무엇이 되는가, 부모에게 효를 다한다는 것은 결국 어떻게 한다는 것인가, 등등 얼핏 철학적으로 들리지만 실은 매우 현실적인 주제를 폭넓게 다루었어. 승방 한담이란 게 흔히 그러하듯 한참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화제가 자연 정치 문제에 미쳤지. 무신년(영조4년 1728)에 있었던 난리에 대해 또 한참을 이야기하게 됐어.‘그때 참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많다.’는 게 중론이었어. 난 빙그레 웃기만 하고 별 말을 안 했지. 그래도 영 암말 안 하고 가만히 앉아 있기는 좀이 쑤셔, 내가 소장하고 있던 ‘남사고’에 관해 몇 마디만 들려주었어. 그 이튿날 세 양반 중에 나이가 가장 많은 분이 글쎄 날더러 ‘남사고’를 보여 달라는 거야. 암자에 계시던 노스님도 한 번 보여주라고 자꾸 권하셔서 나중엔 바랑에서 그 책자를 꺼냈어. 다들 눈이 휘둥그레지더군. 이 왕조의 끝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눈치 챘던 모양이야.” 그날 오전 최봉희가 일행을 대표해 태진에게 이렇게 물었다.“선사(禪師)께선 양반 자제로 불가(佛家)에 입문하셨고 덕이 높아 평소 많은 불자들이 대사(大師)라 부른다 들었습니다. 옛날 강원도에 머무실 때는 여러 지방관들이 선사께 서찰(書札)을 보내 시문(詩文)을 구하느라 야단법석이었다고도 하더군요. 시사(時事)가 장차 어찌 될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남사고’의 예언을 가지고 계신단 말씀을 잠깐 들었습니다만, 저희는 시골의 무식한 선비라 아직 그런 책을 한 번 읽어보지도 못했습니다. 혹시 선사께서 아시는 대로 설명을 좀 해 주실 수가 없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극진한 예의를 갖춰 간청해 마지않는 세 양반들의 겸손한 태도에 태진은 거의 감격했다. 그는 평소 가슴에 조용히 담아둔 몇 마디 말을 꺼냈다.“이런 말세(末世)를 당해서 백성이 보존될 수 있는 곳은 산림(山林)뿐인데, 선비님들께선 야지(野地)를 버리고 산협으로 들어오셨으니 진실로 살 길을 얻으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윤징상이 ‘백성이 보존될 수 있는 곳이란 산림이다.’라는 말씀은 어느 책에 있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그러자 태진은 마치 그 말이 있기를 기다렸단 듯 ‘남사고’에 그런 말이 나온다며 한참 동안 설명했다. 태진의 말에 가장 큰 관심을 보인 양반은 최봉희였다. 최는 가문은 매우 훌륭했으나 이미 가세가 기울 대로 기울어 가엾은 시골의 한사(寒士)에 불과한 처지였다. 서글픔 속에서 끼니 걱정을 하고 지내는 최봉희인지라 세상에 대해 유난히 불평불만이 많아 보였다. 마침내 최는 젊은 정원덕의 도움을 받아 ‘남사고’ 한 벌을 베낄 수 있었다. ●김원팔, 최봉희의 ‘남사고’를 베끼다 남원으로 돌아온 최봉희는 가까운 친구들에게 ‘남사고’ 자랑을 한껏 늘어놓았다. 김원팔과 김원하 형제, 김태기, 김중기 등 7명이 필묵계(筆墨契)를 맺어 서로 절친하게 지냈는데, 김원팔 등은 최봉희의 이야기를 듣자 ‘남사고’를 구경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들은 ‘남사고’를 ‘무신년 난서(亂書)’라고도 불렀다. 무신란에 대한 예언이 기막히게 잘 들어맞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여러 계원들 중에서도 최봉희와 특히 친했던 사람은 김원팔 형제였다. 원팔의 아우 김원하는 마침 논밭이 최의 집 근처라 매일 같이 만나는 형편이었고, 김원팔은 당시 전주(全州)에 살고 있어 평소 여행을 좋아하는 최봉희의 입장에선 우정을 핑계대어 출입이 잦은 편이었다. 최는 사방을 돌아다니며 수상쩍은 소문을 수집해다 친구들에게 퍼뜨렸다. 김원팔은 그 점을 예를 들어가며 이렇게 설명했다. “지난해(영조8년) 10월 최봉하가 내 아우 김원하(金元河)를 찾아가서 중국 서쪽의 양만족들이 전쟁을 일으켜 청나라 측이 조선에 청병(請兵)했다고 말했고, 물가가 급등한다는 등 쉽게 믿을 수 없는 말을 많이 했다. 심지어는 북부 지방에선 소가 기린(麒麟)을 낳았으므로 이제 성인(聖人)이 나올 차례라고도 했다. 하여간 남원 제일의 소식통은 최봉희다.” 남원의 선비들 가운데는 최봉희를 통해 세상사를 알아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가 들려주는 황당한 이야기에 왠지 가장 솔깃해하는 사람은 김원팔과 그 아버지 김영건이었다. 원팔은 최봉희를 줄기차게 졸라 가지고 ‘남사고’를 모두 필사했다. 그런데 그 당시엔 좀 신기하다 싶은 남의 글이나 책자를 베끼는 일은 보통이었다. 아들로부터 책을 전해 받은 김영건은 한문을 제대로 읽을 만한 실력이 없어 그 책을 그저 무신란의 실상을 묘사한 것으로 짐작하는 정도였다. 김원팔이 아버지에게 바친 책자엔 ‘남사고’ 외에도 ‘요람(要覽)’이란 예언서가 포함돼 있었다.‘요람’의 주인 역시 최봉희였는데, 김원팔은 양반의 서얼인 이서방(李書房)에게 위촉해 책의 대부분을 필사하게 했다. 그러나 그 책의 마지막 대목만은 원팔이 자필로 베꼈다. 이쯤에서 나는 한 가지 중요한 문제에 봉착한다. 김원팔 부자는 태진 등이 소장했던 예언서를 구해다 도대체 무엇에 이용할 생각이었을까? 그들은 과연 역모를 계획하고 있었던 걸까? 또는 누군가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예언서를 필요로 한 것일까? 태진 사건과 관련해 여러 가지 의문이 고개를 드는데 자세한 것은 다음호를 기약한다. (푸른역사연구소 소장)
  • [식목일 산불] 낙산사는 어떤 절

    [식목일 산불] 낙산사는 어떤 절

    낙산사(洛山寺)는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전진리 오봉산(五峯山)에 있는 고찰이다. 신라 문무왕 재위 시절인 671년 의상대사(義湘大師)에 의해 창건됐으며 사찰 전체가 시·도유형문화재 35호로 지정돼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낙산사는 처음에 의상이 관음보살을 만나 창건했으며, 그 직후에 의상과 함께 신라 불교의 쌍벽을 이룬다고 평가되는 원효대사가 이곳을 찾기도 했다. 그만큼 유서가 깊은 사찰로서 한국 고대 불교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다. 낙산사는 관동팔경(關東八景) 가운데 하나로, 이곳에서 보는 동해의 일출이 빼어나기로 유명하다. 또한 인천 석모도의 보문사, 경남 남해 금산의 보리암과 더불어 3대 관음기도 도량 가운데 하나로 365일 기도를 드리는 신자들이 끊이지 않는다. 낙산사는 그동안 다섯차례 화마(火魔)에 휩싸여 다시 지어지기를 반복했다.786년 화재로 사찰 대부분이 불에 탔다가 858년 범일(梵日) 스님에 의해 중건됐다. 이후 1231년 몽고의 난 때 전소된 낙산사는 조선 세조 때 중창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 때도 소실됐다가 1953년에 다시 창건됐다. 낙산사에는 명성에 걸맞게 각종 유물도 많다. 보물 479호인 낙산사 동종은 높이 1m58㎝, 입지름 98㎝로 1469년 조선 예종이 아버지 세조를 위해 낙산사에 보시한 종이다. 보물 499호 낙산사 칠층석탑은 1467년에 조성됐으며, 수정으로 만든 염주와 여의주가 탑 속에 봉안됐다고 한다. 낙산사는 대웅전이 없는 대신 원통보전(圓通寶殿)이 본전 역할을 하고 있다. 건축학적으로는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팔자 모양으로 돼 있는 원통보전 안에는 보물 1362호 낙산사 건칠관음보살좌상이 모셔져 있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깔깔깔]

    ●고해성사 한 노인이 성당의 고해성사실에 들어갔다. “신부님, 저는 올해 75세인데 50년동안 결혼생활을 했지요. 그동안 다른 여자에게 눈길 한번 안줬는데, 두달전에 28세 아가씨를 만나 외도를 하고 말았습니다.” “두달전이라고 하셨나요? 그럼 그동안 성당에 한번도 안나오셨습니까?” “성당엔 오늘 평생 처음 오는 거예요. 저는 불교 신자거든요.” “그럼 지금 왜 저에게 얘기를 하고 계신가요? ” “동네 사람들에게 다 자랑했는데 신부님에게만 안했거든요.” ●조언 A : 자네 아들은 귓병을 고치는 전문의가 될 줄 알았는데, 자네 말을 듣고 전공을 치과로 바꾸게 됐다면서? B : 나는 아들이 알아서 하도록 일임하다시피 했다네. 다만 귀는 둘 밖에 없지만 이는 서른 두 개나 된다는 걸 일깨워줬을 뿐이지.
  • [교황 서거] 국내 가톨릭·종교계 표정

    [교황 서거] 국내 가톨릭·종교계 표정

    국내 천주교계는 교황 서거와 관련, 조문단을 구성해 바티칸 현지에 파견키로 하는 한편 전국 각 교구성당에서 장례미사를 일제히 봉헌키로 했다. 한국천주교 주교회의(의장 최창무 광주대교구장)는 3일 오전 서울 혜화동 가톨릭대학 성신교정 본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김수환 추기경과 주교회의 최창무 의장·정명조(부산교구장) 부의장·장익(춘천교구장) 총무 등으로 조문단을 구성, 오는 6∼7일쯤 바티칸 현지에 파견키로 했다고 밝혔다. 이날 회견에서 김수환 추기경과 장익 춘천교구장은 요한 바오로 2세를 추모하며 개인적인 추억을 털어놨다. 김 추기경은 “교황께서는 모든 이를 사랑으로 품어 인간의 존엄과 자유, 세계평화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하신 분”이라며 “마지막 순간까지도 예수님이 겪은 수난에 동참하는 심정으로 임종의 고통을 받아들이셨다.”고 애도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한국 방문 전 그의 한국어 공부를 도왔던 장 주교는 “교황께서 1984년 한국을 방문하기에 앞서 우리말을 배우시겠다고 해 40여차례 한국어를 가르쳐드렸다.”며 “교황께서는 일정이 워낙 바쁘셨는데도 나를 5분 이상 기다리게 한 적이 없고, 놀랄 정도로 진지하게 공부에 임하셨다.”고 말했다. ●“그의 뜻 받들어 실천에 옮기자” 요한 바오로 2세의 서거 소식이 전해지자 국내 천주교계와 각 종교계 수장들이 일제히 메시지를 발표한 가운데 명동성당을 비롯한 전국의 각 교구성당에 마련된 분향소에는 애도의 발길이 이어졌다. 한국천주교 주교회의는 바티칸의 교황 서거 발표 직후 최창무 의장 명의의 대국민 메시지를 통해 “모두의 빛나는 귀감이었던 어른이 우리 곁을 떠나신 것을 더없이 애석해한다.”며 “교황님은 분단된 이 나라 이 겨레의 평화통일을 간절히 염원하며 그 실현을 향해 음으로 양으로 끊임없이 노력하셨다.”고 추도했다. 불교조계종 총무원장 법장 스님은 “반목과 갈등이 심한 이 세상에 우뚝 서 평화·평등·자유를 주창하신 교황은 병들고 소외된 계층을 어루만지는 어버이 같은 분”이라며 “우리는 슬퍼하거나 허전함 속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되며, 그분의 평소 뜻을 받들고 실천에 옮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최성규 대표회장은 “온 세계인과 함께 교황의 서거를 진심으로 애도한다.”면서 “전 세계 가톨릭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있기를 기원한다.”고 밝혔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백도웅 총무도 “서거하신 교황께서는 세계의 평화와 종교간 대화에 크게 기여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질병의 고통 속에서도 가톨릭을 하나로 묶는 데 애쓰신 교황의 서거를 진심으로 애도한다.”고 밝혔다. 최근덕 성균관장은 “교황은 세계 각국과 각 민족을 뜻을 같이하는 친구로 여기고 직접 찾아 다니시는 등 인류 평화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분이셨다.”면서 “그분이 남긴 평화의 가르침을 우리 모두가 이어가길 바란다.”고 존경과 애도의 메시지를 전했다. ●평소 2배이상 신자 몰려 한편 이날 서울 명동성당에는 이른 아침부터 평소보다 2배 이상 많은 신자들이 몰리는 등 하루종일 교황의 서거를 애도하는 신자와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검은 옷을 입은 신자들은 예배당에 들어가기 위해 정문 앞까지 길게 줄을 섰고 교황의 대형 초상화가 걸린 예배당 안은 통로까지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찼다. 밤을 새워 묵주기도를 했다는 천주교 신자 전남순(52·여)씨는 “교황께서는 살아계시는 동안 늘 어려운 곳을 살피셨으니, 이제 가셨지만 그 정신은 계속 살아서 움직일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김종면 박지윤기자 jmkim@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11년만에 국보법 무혐의 ‘태백산맥’ 작가 조정래 인터뷰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11년만에 국보법 무혐의 ‘태백산맥’ 작가 조정래 인터뷰

    1930년 프랑스의 앙드레 모루아가 대하소설(大河小說,roman-fleuve)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대하’의 흐름처럼 계속된다는 뜻이다. 유럽에서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대표적으로 꼽는다. 하지만 세계 문학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대기록이 한국에 있다.1질도 힘들다는 대하소설을 무려 3질이나 썼다.‘태백산맥’(10권)에서 시작돼 ‘아리랑’(12권)을 부르며 ‘한강’(10권)에 이르렀다. 등장인물만 하더라도 1200명이다. 실타래처럼 풀어놓은 삶의 희로애락, 켜켜이 쌓여진 원고지 높이가 7m30㎝에 이른다. 과연 몇명이나 읽었을까. 팔린 부수로 계산해보자. 태백산맥 600만부, 아리랑 350만부, 한강 200만부, 합치면 1150만부에 달한다. 태백산맥의 경우 인세수입은 30억원이며 아직도 대학도서관 대출순위 1위에 오를 정도로 기록깨기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1질도 힘든 대하소설 3질이나 집필 최근에는 태백산맥을 원고지에 베껴쓰는 독자들도 많아지고 있다. 영어 일본어 중국어 스페인어로 번역돼 세계로 무대를 넓혀간다. 사람들은 작가를 가리켜 ‘접신(接神)’이라고도 한다. 조정래(63)씨. 빨치산과 분단문학가로 대표된다. 서울 서초동의 한 전통찻집에서 만났다. 태백산맥으로 11년만에 굴레를 벗었다. 그래서일까. 꽃이 만발한 들판에서 뛰노는 아이같은 느낌이 풍겨왔다. 인사말이 오고갔다. 먼저 태백산맥의 보안법 무혐의에 관한 얘기가 나왔다. 그는 “검찰의 용단에 감사한다. 목에 감겨 있던 쇠사슬이 풀린 기분이다. 빼앗긴 창작의 자유를 되찾아 홀가분하다.”고 소감을 피력했다.“그동안 동료작가들의 심리적 위축이 많았다. 이제는 후배작가들이 추구하려는 분단문학의 수준을 한단계 높이게 될 것”이라면서 “(이번 결정은)검찰의 성숙된 변화이며 진정한 통일의 길을 한가닥 열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빼앗긴 창작의 자유 되찾아 홀가분” 누가 가장 반가워했느냐는 물음에 주저없이 “온갖 고초를 함께 겪어온 아내”라면서 “(아내는)‘여보, 당신 이젠 자유야.’라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 대답했다. 순간 11년의 굴레가 생각났는지 잠시 창밖을 응시한다. 회한이 교차했을 법하다. 그의 눈가에는 이슬이 맺히는 듯했으나 금방 웃음으로 바꾼다. 차 한잔을 마신다. 순천 벌교에 들어설 ‘태백산맥문학관’사업이 탄력을 받게 됐다고 했다.“문학관사업은 원래 9년전 구체적으로 진행되다가 자유총연맹과 공안당국의 방해 등으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지난해 다시 구체화됐다.”면서 “최근 착공됐으며 내년 5월에 개관될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설계는 건축가 김원씨가 맡았다. 김씨와는 지난해 6월 사단법인 남북어린이어깨동무에서 주관한 평양어린이병원 개원과 관련해 방북 때 동행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문학관에는 육필원고와 태백산맥의 사건 일지, 협박편지, 방송녹화자료 등 고통의 흔적들도 전시할 예정이다. 특히 2편의 유서도 선보인다. 조씨는 태백산맥으로 늘 미행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했다. 까닭에, 어느날 갑자기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 끝에 94년 2월과 97년에 유서를 썼다. “태백산맥 2회분을 쓰고나서 공안당국의 협박에 시달렸죠. 하루는 아내한테 ‘아이 데리고 견딜 수 있겠느냐.’고 했지요. 그랬더니 아내는 ‘작가가 두려워서 글을 못쓰면 작가도 아니다.’고 했어요. 아울러 ‘어차피 작가의 영욕(榮辱)은 반반’이라고 하더군요. 제겐 큰 위로가 됐습니다.” 조씨 부인은 시인 김초혜씨다. 둘은 문단에서 소문난 캠퍼스 커플이다. 조씨와 함께 동국대 2학년때 문학서클 ‘용운문학회’ 멤버로 만나 결혼했다. 둘은 문학적 논쟁 외에는 부부싸움 한번 안할 정도로 40년동안 잉꼬부부로 살아오고 있다. ●하루평균 원고지 30매는 반드시 메워 대하소설을 3질이나 쓴 저력은 어디에 있을까. 즉각 “험난하고 처절한 역사가 힘이 됐다. 분단의 진실을 알리는 것이 작가의 책무요, 알면서 안쓰면 비겁한 것이고 기피가 아니냐.”고 반문한다. 작가적 사명감으로, 자신과 외롭게 싸우면서 수없이 구슬을 뀄다. 또한 부친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부친은 일제 때 한용운 선생의 청년승려 비밀조직인 ‘만당’(卍黨)에 참여해 불교개혁과 일제에 항거했다. 조씨는 “선친의 문학비가 낙산사와 고흥에 세워져 있으며 유품 몇점이 아리랑문학관에 전시돼 있다.”면서 “(자신이)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맑은 풍경소리와 목탁소리가 곧 태교음악이었다.”고 회고한다. 불교소재의 글을 쓸 때에는 (원고지)파지 하나 없이 생득(生得)적 일사천리로 쓰여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원고지로 글쓰기를 고집한다. 컴퓨터나 핸드폰 같은 것을 싫어한다. 기계에 얽매이는 것이 싫단다.‘글발’을 받을 때에는 하루 150매까지 쓴다. 하루평균 30매는 꼭 쓴다. 이 대목에 이르자 “혹자들은 ‘돈을 많이 번 작가’라고 하지만 ‘글감옥’에 갇혀 엄청난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고 말한다. ●소설 집필때마다 수차례 병원신세 예를 하나 든다. 어느 대학에서 작가 지망생들을 상대로 강의했을 때였다. 처음에는 조씨같은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던 학생들이 ‘조정래의 삶’(TV녹화자료)을 감상한 뒤에는 다들 “생각을 바꾸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작가론이 이어진다.“농부의 호미가 녹슬 겨를이 없듯이 작가 또한 열심히 밭고랑을 일구는, 인생을 끊임없이 경작하는 것이 아니냐.”고 비유했다. 이러는 동안 그는 세가지 병마와 싸웠다고 고백했다. 태백산맥을 집필할 때에는 위궤양으로 고생했다. 또 아리랑을 쓸 땐 오른팔 마비, 한강 땐 탈장 등으로 수차례 병원신세를 졌다. “피가 증발해버리고 하얗게 표백되는 현상이 거듭되고, 침대에 누우면 온몸이 조각난 것처럼 혼미해지고 ‘이대로 죽을 수도 있구나.’하며 잠에 빠지는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창밖을 응시한다. 목소리가 낮아진다.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 때 ‘태백산맥’을 쓰기 시작했어요.‘한강’을 끝내고 나니 어른이 되어 장가를 가겠다고 하더군요.‘글감옥’에 갇혀 지내느라 아들과 대화도 못해 어찌나 미안한지…, 글을 쓸 때에는 아내도 아들도 접근을 못하거든요.” 그래서 손자들한테는 무척 다정다감한 할아버지로 대해준다고 했다. 주말마다 손자의 손을 잡고 나들이하며 더할 수 없는 행복에 빠져든다.“초록빛 잔디밭에서 하늘이 주는 최고의 선물을 만끽한다.”며 어린 아이처럼 활짝 웃는다. 특히 요즘에는 6살된 첫째 손자가 “할아버지, 저도 태백산맥을 쓸게요.”하는 재롱에 몇번이고 감동을 받는다. 조씨의 아들 도현(34)씨와 며느리 이민경(31)씨가 최근 4년5개월만에 ‘태백산맥’을 베껴쓰는 일을 끝마쳤다. 손자가 그런 모습을 지켜봤던 것이다. 조씨는 향후 10년 계획을 밝히면서 동화 2편을 반드시 쓰겠다고 강조했다. 손자와 지내다보면 동화쓰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진다고 했다. 톨스토이도 말년에 동화를 썼다고 덧붙인다. 아울러 장편 3권과 역사속의 인물 10명을 택해 전기를 쓰는 것도 이미 기획돼 있다고 했다.“글이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할 수 있는 예술의 한 장르”라면서 한번밖에 없는 생애에 언어의 여력을 계속 쏟아내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1943년 전라남도 승주군 선암사에서 4남4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주로 순천과 벌교에서 지내면서 여수·순천사건과 6·25전쟁을 겪었다. 이 경험은 훗날 중요한 문학적 토양으로 작용한다.1970년 ‘현대문학’에 ‘누명(陋名)’과 ‘선생님 기행’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이후 ‘월간문학’ 편집장,‘소설문예’ 발행인으로 활동했다.78년에는 도서출판 민예사를 설립했으며 ‘한국문학’ 주간을 지냈다. 이후 83년부터 ‘대하’에서 ‘소설’이란 배를 홀로 타고 노를 젓기 시작했다. “반야심경을 자주 외며 내공의 힘을 쌓지요. 또 건강을 위해 집(경기 분당) 주변 율동공원을 매일 한시간씩 산책합니다.”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43년 전남 벌교 출생 ▲62년 서울 보성고등학교 졸업 ▲66년 동국대 국문학과 졸업 ▲70년 현대문학 ‘누명’으로 데뷔 ▲73년 월간문학 편집장 ▲75년 소설문예 발행인 ▲77년 민예사 대표 ▲83년 태백산맥 집필 ▲86년 태백산맥 전10권 발간 ▲94년 아리랑 전12권 발간 ▲2001년 한강 전10권 발간 ▲이밖에 산문집 ‘누구나 홀로 선 나무’(2003년), 조정래 문학전집 전9권,‘시간의 그늘’ 등 문학지에 소설 50여편 발표. ■ 상훈 제27회 현대문학상(유형의 땅), 대한민국문학상(인간의 문), 단재문학상(태백산맥), 노신문학상(아리랑). 제7회 만해대상 등
  • [토요일 아침에] 의식의 잠에서 깨어나자/권도갑 원불교 도봉교당 주임 교무

    많은 사람들이 지금 잠을 자고 있는 것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 몸은 세상 속에 있으면서 의식은 꿈을 꾸고 있다. 그러면서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늘 상처받으며 괴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깨어나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은 이미 눈을 떠서 열린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원불교의 경전인 대종경 전망품에는 ‘지금 날이 밝은 줄 모르고 깊이 자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얼음 속에서 씨를 뿌리는 사람, 겨울에 여름옷을 입은 사람이 있어서 이들은 때를 모르고 사업을 하니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라고 비유하여 말씀하셨다. 다행히 나는 스스로의 마음을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 다른 사람이 내 마음을 대신 먹게 할 수가 없다.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마음은 자신만이 자기를 지배하고 지배당한다. 사람들은 ‘상대가 나를 괴롭힌다. 그가 나를 상처 주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나를 아프게 하지 말라. 스트레스 주지 마. 속상하게 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이들은 모두가 의식의 잠을 자고 있는 것이다. 그 누구도 나를 상처 줄 수가 없다. 오직 한 사람 나 자신만이 나를 괴롭히고 아프게 할 뿐이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외면하고 다른 사람을 탓하며 마음의 아픔을 계속 쌓아가고 있다. 자신을 명료하게 살피면 내가 스스로 내 마음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를 깨닫는다면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경험하고 느끼게 된다. 예를 들면 누가 나를 무시하고 비난할 때에 그가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생각을 믿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는 전혀 감정의 상처를 받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믿고 수용하면 속이 상하고 짜증이 나는 것이다. 이처럼 다른 사람은 나를 괴롭힐 수가 없다. 많은 이들이 이 사실에 대해서 저항하며 냉소를 보낸다. 조용히 살펴보면 누가 나를 무시할 때 정확히 그가 나를 통해 본 그의 모습을 보고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를 통해 자신을 보게 되면 깨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상대는 보는 사람의 눈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지금 내가 보는 것을 실재라고 믿는 것은 어리석음이며, 착각일 뿐이다. 현실 상황은 언제나 나를 일깨워주는 고마운 거울이다. 이를 깊이 성찰한다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면 이는 바로 그를 통해 본 나를 미워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나를 미워하고 있는 것이다. 결혼한 지 25년이 된 어떤 부인이 “이제 더는 못 살겠어요. 남편 곁을 떠나야겠어요. 너무 힘이 들어요.”하며 하소연하였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남편이 나를 인정하지 않으며, 친정 식구들을 무시하고, 자신에 대해서 무관심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를 짜증내거나 잔소리하면 한동안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답답하고 속상한 마음이 쌓이고 쌓여서 이제는 아주 사소한 일에도 화가 나며 지나온 삶이 억울하다고 하였다. 부인은 이처럼 깊은 마음의 아픔을 겪으며, 마침내 이혼을 생각하고 있었다. 정확히 살펴보면 남편은 아내를 통해 자신을 바라보며 무시하고 못마땅해 하고 있다. 그리고 아내는 남편을 통해 자신을 비추어 보고는 속상해 하며 답답해한다. 알고 보면 누구도 상대가 자신을 괴롭힌 적이 없는 것이다. 때문에 깨달은 분들이 한결같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며, 미워하면 바로 나를 미워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상대를 무시하고 경멸하면 이는 곧 나를 무시하는 것이 되며, 결국은 내가 상처를 받게 된다. 만약에 나를 살피지 못하면 언제나 남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 끊임없는 고통을 받는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할 때 마음속에서는 자신이 자기를 주먹으로 치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그리하여 몸속의 여기저기에 피멍이 들고 심한 상처를 얻게 된다. 마음이 잠들어 꿈속에 빠져있지 않다면 어떻게 두 눈을 뜨고서 스스로 자신을 학대하고 괴롭힐 수가 있겠는가? 지금은 모든 것이 밝게 드러나는 시대이다. 이제 마음을 잘 살피어서 의식의 잠에서 깨어나자. 그리하여 좋은 마음을 먹고 만나는 인연들과 서로 화합하며 여한 없이 인생을 즐겨야 할 때이다. 권도갑 원불교 도봉교당 주임 교무
  • [코드로 읽는책] 종교가 사악해질 때/찰스 킴볼 지음

    역사를 통틀어 종교만큼이나, 편협한 이기심을 초월해 고귀한 가치와 진리를 추구하는 세계도 없다. 사랑과 자기 희생, 타인에 대한 봉사 등은 대부분 종교적 세계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종교만큼 반목과 갈등, 악행, 나아가 전쟁의 원인이 되는 것도 많지 않다. 인류 역사상 그 어떤 세력보다 더 많이 종교의 이름으로 전쟁이 치러졌고, 악행이 저질러져 왔음은 슬프지만, 현실인 것이다. ‘종교가 사악해질 때’(찰스 킴볼 지음, 김승욱 옮김, 에코 라브르 펴냄)는 이같은 관점에서 종교적인 사악함의 본질과 징조를 살펴보고, 각각의 종교 안에서 타락한 행위들을 바로잡을 수 있는 방법들을 개괄적으로 제시한다. 저자는 침례교 목사이지만 그에 앞서 종교학 교수로서 각 종교의 교리와 역사, 지리적 특수성 등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고 책을 집필했다. 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 힌두교, 불교 등 각 종교를 비교종교학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다. 그는 종교의 타락을 경고하는 징후로 다섯 가지를 든다. 먼저 절대적인 진리 주장이다. 절대진리 주장은 종교적 전통속에 배어 있고, 그 종교 전체를 지탱하는 기초가 된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 대한 특정한 해석이 엄격한 교리로 자리잡게 되면 그 종교는 타락할 가능성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다음은 맹목적인 복종이다.1994년 일본 옴 진리교의 사린가스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특정 교리이든, 사람이든 맹목적 복종을 요구하면, 이미 그 종교가 타락했다는 확실한 징후라는 것이다. 메시아 도래와 같은 이상적 시대 주장도 마찬가지다. 일부 기독교 근본주의 단체들은 지금도 신성한 템플마운트 지역에 유대교 성전이 솟아오늘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예루살렘 구시가지에 있는 최고 성직자 대학 학생들은 그 성전의 성직자로 일하게 될 미래를 기대하며 15년 과정을 밟고 있다. 국가의 이상적인 모습을 편협하게 정의하고, 자기들이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신정을 확립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위험하다. 이런 상황에서 종교는 쉽게 타락한다. 네번째는, 목적이 모든 수단을 정당화하는 경우다. 성지 수호, 집단 정체성 강화, 체제 수호 등을 위한다는 명분하에 약한 사람에 대한 측은지심을 갖고 이웃과 건설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무시하기 쉽다. 그러나 종교생활에 없어서는 안되는 다양한 요소, 즉 성지, 공동체 정체감, 제도적 틀, 안식일 등이 종교생활의 목적은 아니다. 이것들은 공동체내에서 신앙생활을 하는데 도움이 될 뿐이다. 마지막으로 성전(聖戰)이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건대 ‘성전’이란 없다. 명분은 성전일지 몰라도 실제 거룩한 전쟁은 없었으며, 전쟁의 결과는 늘 재앙이었다. 성전에 참여한 사람들이 느끼는 부당함과 불만의 뿌리가 아무리 깊더라도 성전은 해결책이 아닌 것이다. 저자는 그 어떤 종교도 이런 타락현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지만, 각각의 종교는 자신의 지혜와 전통 안에서 이런 타락의 징후들을 찾아내 바로잡을 수 있는 능력과 수단을 갖고 있음을 일깨워준다. 또 성실하게 신앙을 지키면서도 자신이 경험한 신만이 유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얼마든지 인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종교적 다원주의라는 건설적인 시각을 통해 다른 종교를 그냥 참아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다양성을 찬양하며, 그것을 힘의 원천으로 포용하라고 충고한다.1만 4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2) 변산에서 만난 정감록과 미륵신앙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2) 변산에서 만난 정감록과 미륵신앙

    ●부안행 버스 속에서 남사고는 먼젓번 내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내 책 ‘남격암’을 살펴보게나. 부안엔 호암(壺岩)이 있고 그 아래 변산 동쪽은 몸을 숨기기에 정말 적합하구나라고 했지.” 나는 이 기회에 변산의 길지를 직접 찾아 나서기로 했다. 서울서 부안까지는 고속버스 편을 이용했다. 서울남부터미널을 출발한 버스는 3시간쯤 지나 삼례를 지난다. 이 때부터 드넓은 호남평야가 눈앞에 가득하다. 지도를 꺼내 살펴보니 부안은 김제 만경평야의 서남쪽 끝에 있다. 그곳은 곡창지대이면서도 서해바다에 연해 있다. 며칠 전 우연히 부안 출신의 한학자 한 분을 만났는데, 그는 예부터 ‘생거(生居) 부안’이란 말이 있다고 자랑했다. 농수산물이 풍족할 뿐만 아니라 변산(邊山)이란 명산이 있어 부안은 무척 살기 좋은 고장이란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부안은 다소 엉뚱한 사건에 휘말려 국내외의 주목을 받고 있다. 변산에서 군산까지 이어질 새만금방조제 공사로 인해 생태환경이 심각하게 파괴될 수도 있다는 염려가 적지 않다. 잠시 옛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송기숙의 대하소설 ‘녹두장군’이 시작되는 백산이란 지역도 지금은 부안군에 속한다. 갑자기 1984년 동학농민군들의 함성이 귀에 들려오는 듯한 착각이 든다. 농민군들은 모두 흰옷에 죽창을 들고 있어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이라고 했다던가? 이런 역사적 격랑의 한복판에 변산이란 길지(吉地)가 있었다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지난밤 나는 이중환의 ‘택리지’를 꺼내놓고 혹시 변산에 관한 설명을 찾아 볼 수 있을까 해서 좀 뒤적여 보았다.“노령의 한 줄기가 북쪽으로 부안에 이르러 서해 가운데로 파고들어간다. 서·남·북 3면은 모두 바다다. 이곳은 많은 봉우리와 허다한 골짜기로 돼 있는데 변산이라 부른다.” 맞는 말이다. 변산은 3면이 바다에 닿아 있고 봉우리와 골짜기가 유난히 많다. ●변산은 백두대간의 서자 그러나 이중환의 설명과 다른 점도 있다. 자세히 검토해 보면 변산의 멧부리는 노령에 직접 연결되어 있지 않다. 백두대간의 계보를 자세히 적은 ‘산경표(山經表)’에도 변산은 보이지 않는다. 다른 고지도를 보더라도 변산은 홀로 떨어진 외로운 산이다. 말하자면 백두대간의 서자인 셈이다. 정감록의 길지는 대부분 태백산과 소백산 줄기에 확실하게 능선이 닿은 적자(嫡子)들이다. 그렇다면 서자 격인 변산은 무슨 특별한 사정이 있어 길지로 거론된 것일까? 누구도 이 문제를 직접 거론한 적은 없는 것으로 보아 답을 찾아내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다. 난 변산의 지리와 역사를 좀더 자세히 조사해야 한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버스는 서서히 부안읍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서울을 벗어난 지 4시간 만이다. 읍내 길거리엔 바다 냄새가 물씬하다. 남도의 봄 향기도 객을 반기는 듯하다. ●내변산 우동 정감록서 말한 길지 지인의 소개로 나는 읍내에서 지관 김철수(71·가명)씨를 만났다. 김 지관의 말을 들으니 변산은 길지에 필요한 외형적인 조건을 제법 잘 갖춘 편이란다. 변산의 산세는 용맥이 강이나 바다를 바로 앞에 두고 갑자기 멈춰선 경우에 해당해, 이른바 산진처(山盡處)의 명당이란다. 김 지관은 서남해안 일대에는 그런 명당이 몇 군데 더 있다며 가야산과 팔령산과 태안반도를 예로 든다. 그 말이 나온 김에 나는 변산의 지세를 좀더 알기 쉽게 설명해 달라고 부탁했다. 김 지관의 대답은 이러했다.“변산의 청룡, 즉 동쪽 산세는 사창재, 노승봉(상여봉), 바드재를 건너 옥녀봉으로 이어지다가 잠시 남서쪽으로 흐르는 듯하다가 내소사의 주산인 세봉을 건너서 월명암의 주산인 쌍선봉으로 반원을 그리며 내뻗어요. 그게 학치, 청림리 삼예봉에서 끝나지요. 변산의 백호, 즉 서쪽 산세는 개암사의 주산인 우금산에서 우슬재를 거쳐 의상봉으로 이어진다고 봐야지요. 이 두 흐름을 갈라놓은 것이 그 옛날 백천이었는데, 지금은 부안호가 돼 없어졌어요. 백천의 물길은 본래 우슬재에서 시작됐거든요. 백천도 그렇지만 변산의 청룡과 백호가 그려낸 형상은 결국 산 태극, 물 태극이오. 계룡산과 같다, 이런 말씀이지요.” -그럼 ‘정감록’에 나오는 변산 동쪽의 길지는 구체적으로 어딘가요? “아, 그것은 말이지요. 일단 내변산으로 통하는 입구인 우슬재나 바드재를 좀 잘 봐야 해요. 그저 그 길목만 잘 지키면 인근의 청림리와 중계리는 참 좋은 피난처가 돼요. 거 뭐더라, 정감록에 나오는 호암을 찾으려면 상서면 통정리에서 우슬재를 넘어가면 돼요. 우슬재를 살짝 넘어가면 쇠뿔바위라고 나오지요. 그런데 이게 변산 최고봉인 의상봉의 오른쪽에 있어요. 쇠뿔바위 동남쪽을 잘 살펴보면 산비탈에 실학자 반계 유형원이 우거하던 집이 지금도 있지. 몇 해 전에 복원됐지요. 그 산 아래 마을이 우동이야. 보안면 영전에서 30번 국도를 타고 곰소로 가다 보면 마주치는 동리인데 원래 이름은 우반동이란 말이오. 이 마을서 북쪽을 올려다보면 옥녀봉이 있고 멀리 그 산 끝자락에 굴바위가 보인단 말이지요. 바위 입구가 틀림없는 호리병 모양이에요. 호암이라 이거지요! 우동은 앞이 시원하게 터진 듯하면서도 천마산이 막아주고 있어 삼태기형 명당이 분명하고. 그러니까 뭐냐 하면, 난 우동이 바로 그 ‘정감록’에서 말하는 길지다, 그렇게 봐요. 안 그렇겠어요?” -김 지관님, 그런데요. 역사상으로 볼 때 길지가 있다는 내변산이 외변산보다 훨씬 더 큰 수난을 겪었습니다. 구한말이나 6·25 때도 그랬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내변산의 우동을 길지라고 주장하시겠습니까? “그거야 잘 모르겠소! 누가 그걸 알겠어요? 그래도 옛 말이 조금도 틀린 게 없어요. 우리가 사는 이 변산은 아주 옛날서부터 미륵님이 나타나신 땅이고, 관세음보살님의 성지요. 원효, 진표, 진묵 등 큰 스님들도 많이 오셔서 도를 닦으신 것만 봐도 이게 보통 땅이 아닌 것은 틀림없어요! 근세엔 증산교를 세운 강일순이도, 원불교의 소태산도 다 여기 변산서 도를 닦았단 말이죠. 그 분들이 다 세상을 구하겠다고 나선 분들인데 왜 다른 명당 다 놔두고 부안을 왔겠어요? 정감록에도 길지라고 나와 있단 말이에요. 미륵님이 현신하신 곳이니까 이건 너무 당연한 일이라고 봐요.” 김 지관의 설명을 듣는 순간, 지금까지 내가 궁금하게 여기고 있던 문제가 해결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변산은 과연 미륵신앙의 발상이요, 불교의 성지였다. 왜, 그 점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 점이 중요하게 생각돼 난 서둘러 발길을 현장으로 옮겼다. ●변산의 옛 사찰들 부안읍에서 고등학교 교사를 하는 박재환(45·가명) 선생이 길잡이를 맡아주었다. 나는 박 선생과 함께 내변산 입구에서 잠시 차를 멈추고 대형 지도에서 변산의 유적지를 다시 점검했다. 변산은 제법 큰 산 덩어리여서 변산면(邊山面)·하서면(下西面)·상서면(上西面)·진서면(鎭西面)에 걸쳐 있다. 그런데 최고봉이라는 의상봉 마천대(508m)도 실은 야트막한 편이라 웅장한 느낌은 별로 없다. 이곳 사람들은 서해안을 따라 겹겹이 포개어진 산봉우리를 외변산이라 하고, 내륙으로 뻗은 골짜기와 봉우리는 내변산이라 부른다. 외변산에는 격포리(格浦里) 해안의 채석강(彩石江)과 적벽강(赤壁江)이 특히 유명하다. 이 두 곳의 명칭은 강이지만 실제는 해안의 바위벽이다. 채석강이니 하는 이름은 시선(詩仙) 이태백(李太白)과 대문장가 소동파(蘇東坡)가 노닐던 중국 지명을 본뜬 것이다. 그만큼 경관이 수려하다는 뜻이다. 변산의 해안풍경이 그처럼 절경이라 해도 정작 변산을 전국적인 길지로 만든 것은 산속에 위치한 옛 사찰들이었다. 박 선생이 승용차로 변산을 구석구석 구경시켜 준 바람에 모든 게 뚜렷해졌다. 외변산에 해당하는 상서면 감교리의 개암사(開岩寺)는 백제 무왕 35년(634)에 묘련왕사가 창건했다고 하는데 대웅전(보물 292호)이 참으로 볼 만하다. 개암사에 딸려 있던 원효방이란 암자는 신라 때 명승 원효가 수행한 곳이라 전한다. 그런가 하면 변산면 석포리에 위치한 내소사(來蘇寺) 역시 신라 때의 고찰인데 대웅보전(보물 291호)·고려 동종(보물 277호)·법화경절본사본(法華經折本寫本 보물 278호) 등 문화재가 많다. 내소사 경내의 전나무 숲은 울창하기가 전국 최고라 하고 이 절간의 저녁 종소리는 변산8경의 하나로 친다. 내변산은 나지막한 능선을 따라 깊은 계곡이 여럿이고 나무 또한 울창해 풍광이 곱다. 그 중 산내면 중계리(中溪里)에는 신라 때 창건됐다는 월명암(月明庵)이 있다. 변산의 제2봉인 쌍선봉(498m) 중턱에 자리잡은 월명암에서 바라보는 아침 바다의 물안개는 변산8경의 하나다. 암자 뒤편의 낙조대(448m)에서 서해로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는 것도 역시 변산8경으로 손꼽는다. ●불사의방과 영산사, 한국 미륵신앙의 성지 변산에는 위에서 말한 사찰들보다 역사적으로 훨씬 중요해 뵈는 암자 하나가 있었다. 의상봉 꼭대기 있었다고 믿어지는 불사의방(不思議房)인데 이곳이야말로 미륵하생신앙의 진원지였다. 장차 미륵이 이 세상에 내려와 수많은 사람들을 불교적 이상세계로 인도할 거라는 하생신앙이 처음 뿌리를 내린 곳이 변산이라니 신기한 느낌이 든다. 따지고 보면,‘정감록’에 약속된 새 세상도 미륵세상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렇게 보면 미륵하생신앙은 정감록 신앙의 뿌리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불사의방에서 미륵신앙을 체험한 승려는 신라의 진표(眞表)였다. 그는 경덕왕 19년(760)부터 3년 동안 3업(身·口·意業, 몸뚱이·언어·의지의 작용)을 닦았다. 아울러 망신참법(亡身懺法·몸을 희생시키는 참회법)에도 힘써 5륜(두 무릎, 두 손, 머리의 5體)을 바위에 마구 부딪쳐 무릎과 손이 깨져 피가 비오듯 했다고 한다. 진표의 극진한 기도에 감동한 지장보상(地藏菩薩)은 진표에게 모습을 드러내 정계(淨戒)를 주었다. 그러나 진표는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고 부근의 영산사(靈山寺)로 수행 장소를 옮겨 더욱 정진했다. 미륵보살을 친견하는 것이 그의 소망이었다. 마침내 미륵보살이 진표 앞에 나타나 그의 신심을 칭찬하고 점찰경(占察經) 2권과 증과간자(證果簡子·수행으로 얻은 果와 점치는 대쪽) 189개를 주었다. 진표는 미륵보살의 수기(授記)를 받은 셈이다. 경덕왕 21년(762), 진표는 신도들을 이끌고 금산사(전북 김제)에 16척이나 되는 거대한 미륵보살을 조성하기 시작했다.2년 뒤 마침내 미륵상은 완성되었다. 그 때부터 오늘날까지 금산사는 미륵신앙의 중심지가 된다. 진표에 관한 설화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변산에서 미륵신앙이 출범했다는 점이다. 그 뒤 우리 역사상 미륵신앙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 특히 난세에 고통을 당하는 민중들에게 많은 위로를 줘왔다. ●월명암, 또 하나의 종교적 성지 알고 보니 변산의 월명암(月明庵) 역시 종교적인 성지로 의미가 크다. 월명암은 관음보살을 모신 곳이라는데 대둔산 태고사, 백암산 운문암과 더불어 호남의 3대 영지라 한다. 월명암에 오르기 위해 나는 남여치에서 차를 내려 쌍선봉 쪽을 바라보며 가파른 산길을 올라갔다. 이 암자는 신라 신문왕 12년(692) 부설거사(浮雪居士)가 창건했다. 그 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진묵대사(震默大師)가 중건했다. 한말엔 의병들이 월명암을 근거지로 삼아 일본군과 싸웠는데 전투에 진 바람에 1908년엔 다시 잿더미가 됐다. 그 후에도 월명암은 몇 차례 심한 몸살을 겪었다. 지금 월명암 옛터에는 대웅전을 건립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월명암을 개창한 부설거사는 매우 특이한 인물이었다. 그의 행적은 ‘부설전’이란 고소설에 상세하다. 경주에서 출생한 부설은 법우(法友)인 영조·영희와 함께 구도의 길을 떠나 변산(능가산)에 들어가 묘적암을 세우고 오직 수도에만 몰두했다. 뒷날 그들 3인은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오대산으로 길을 떠나는데, 부설원(정읍군 칠보면)에 이르렀을 때 부설은 삼생연분(三生緣分)이 있는 묘화를 만난다. 두 사람은 반드시 부부가 돼야 할 운명이었다. 환속한 부설거사는 아들 등운(登雲)과 월명(月明)이란 딸을 두었는데 말년이 되자 변산에 등운암(登雲庵)과 월명암(月明庵)이란 두 암자를 지어 아들딸에게 각기 하나씩 맡겼다. 겉으로 보면, 부설과 묘화 부부는 속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들은 일평생 남몰래 수도에 정진해 도력이 출중했다. 부설거사보다 한 수 낮았다는 묘화만 해도 환한 대낮에 조화를 부려 비나 눈을 내리게 할 정도였다고 한다. 때로 묘화는 빗방울이나 눈송이를 단 하나도 땅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했다고 전한다. 월명암을 중건한 진묵대사도 많은 이적을 남겼다. 진묵은 조선 중기 호남의 대표적인 선승(禪僧)이었는데, 어느 날 탁발을 나갔다가 매운탕 한 솥을 얻어 마셨다. 그 다음 진묵은 물가에 가서 토해냈는데 탕 속에 들어 있던 죽은 물고기들이 전부 살아났다는 전설이 있다. 근대에는 백학명(1867∼1929)과 같은 고승이 월명암에 주석했다. 학명은 불교개혁의 일환으로 선농(禪農)일치를 몸소 실천했다. 그는 참선과 농사를 같은 것으로 파악해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한 것으로 유명하다. 원불교를 개창한 소태산 박중빈도 세상을 구제할 계획을 구체화하기 위해 월명암을 찾았다.1919년 소태산은 학명과 더불어 동안거를 했다. 이때 학명의 거처는 법당이었고 소태산은 그 옆방을 사용했다. 원불교의 2대 교조인 정산종사도 한때 학명의 상좌 노릇을 했다. 뿐만 아니라 증산교를 창설한 강일순(姜一淳) 역시 월명암을 찾았었다. 강증산과 소태산은 모두 새 세상을 열기 위해 부심했다고 한다. ‘부설전’을 보면 월명암에서 모두 4성인,8현자,12법사가 나온다고 했다. 월명암 스님들은 부설거사 가족 4명을 성인으로 간주한다. 옛날 이 암자에 주석했던 성암·행암·학명 스님은 3현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5현과 12법사가 더 나올 예정이라는 뜻인데 과연 그 말대로 될지 어떨지 나는 모른다. 장차 지켜볼 일이다. 요컨대 변산은 불보살과 깊은 인연이 있어 정감록이 손꼽는 길지가 되었다. 변산의 경우에서 보듯 때로 민중의 깊은 불심은 풍수조건을 능가하기도 한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19세기 일본지도 ‘동해는 조선해’ 표기

    19세기 일본지도 ‘동해는 조선해’ 표기

    |워싱턴 이도운·도쿄 이춘규 특파원|일본이 19세기에 동해를 ‘조선해(朝鮮海)’로 표기한 지도가 발견됐다. 서울신문이 28일(현지시간)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확인한 일본 승려 존토(Zonto·存統)의 세계지도 ‘염부제도부일궁도(閻浮堤圖附日宮圖)’는 동해를 조선해로 표시하고 있다. 또 1830년 제작된 이 지도에 따르면 일본해(大日本海)는 현재의 동해가 아니라 도쿄 동쪽의 일본 연해였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본지 美의회도서관서 확인 이 지도는 존토가 불교의 세계관을 표현하기 위해 그린 ‘세계대상지도(世界大相之圖)’ 세 폭 가운데 한 점이다. 미 의회도서관에 함께 보관돼 있는 나머지 두 폭은 인도를 그린 ‘천축여지도(天竺輿地圖)’, 수미산 등 불교의 세계관을 표현한 ‘세계대상도(世界大相圖)’이다. 일본 문헌에 따르면 존토가 태어난 해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사망한 해는 1842년이다. 존토는 일본 정토종의 승려로 ‘불법을 지킨다.’는 입장에서 지도와 그림을 그려 불교적 세계관을 주창한 인물로 기록돼 있다. ●대영박물관 ‘존토지도’에도 조선해 표시 일본 외무성 자료에 따르면 존토가 1808년 그려 대영도서관에 보관중인 ‘염부제도부일궁도’에도 역시 동해를 조선해로 표시했다. 또 대영도서관에 보존된 고지도 중에는 존토 승려의 지도 말고도 서양인이 동해를 조선해로 표기한 지도들이 소장돼 있다. 영국인 로버트 윌킨슨이 1802년과 1808년 그린 아시아 지도에 동해가 ‘Gulf of Corea(조선해)’로,1805년 프랑스인 로베르 드 보공디가 그린 지도에도 역시 동해가 조선해로 표시돼 있다. dawn@seoul.co.kr
  • [송두율칼럼] 종교에 대한 단상

    [송두율칼럼] 종교에 대한 단상

    재작년 가을 37년만에 가족과 함께 일시 귀국했다가 예상치 못한 사나운 폭풍을 맞았기 때문에 원래 계획대로 정말 보고 싶은 많은 곳들을 직접 찾을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겨우 며칠동안 들른 곳 중에는 절과 교회도 있다. 그러나 절도 교회도 너무나 많이 변해 있었다. 서울의 밤하늘에 붉은 네온 빛을 발하는 수많은 교회의 십자가는 1970년대 초 뉴욕의 할렘지역에서 처음 본 흑인교회의 네온십자가를 연상시켜 묘한 느낌마저 들었다. 또 법정으로 가는 도중 호송버스의 차창 밖으로 보였던 도로변 상가건물에 붙어있는 교회간판들이며 중세서양의 고딕 건축양식을 본받아 지붕 위에 세운 뾰쪽한 종각들은 한국기독교의 현주소의 일면을 보여주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 근처에는 100년이 넘은 큰 개신교교회당이 있다. 찾는 사람이 거의 없어 그 근처를 지나가다 보면 왠지 쓸쓸한 느낌마저 들 정도다. 신자 수가 점점 줄어들어 이제는 교회건물 유지하기조차 힘든 것이 이곳의 현실이다. 이와는 달리 한국에서 기독교는 정말 번창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슬로베니아출신의 철학자 지제크(S Zizek)가 아시아와 유럽이 서로 맞바꾸고 있는 최고의 탈(脫)현대적인 아이러니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최근 유럽에서는 불교나 샤머니즘과 같은 아시아적 신앙체계에 대한 관심이 오히려 더 높아지고 있다. 내가 있는 대학에서 많은 한국유학생이 기독교신학을 공부하고 있고, 결코 많지 않은 교민 숫자인데도 불구하고 한인교회도 여럿 있다. 독일출신으로 현재 시카고대학에서 종교사회학을 가르치고 있는 리제브로트(M Riesebrodt)는 한국사회는 물론 해외동포사회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이러한 특이한 현상을 남미의 그것과 비교하면서 한국기독교의 특성을 분석하고 있다. 그는 유교의 가부장적인 이념과 위계질서가 기독교에 그대로 관통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특히 교회 내의 여성의 제한된 역할과 위치를 문제삼았다. 남미의 교회가 전통적인 남성주의(machismo)를 극복하고 있는 것과 상당히 대조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도 문제지만 한국의 기독교가 타종교와의 공존 속에서 얼마나 관용을 보이고 있는가 하는 문제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불상이 우상이라며 이를 훼손해서 사회적으로 문제된 적도 있고, 기독교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쓰나미의 피해를 받았다는 어떤 목사의 설교처럼 종교의 다원성에 대한 인식부재는 심각하다. 또 개인의 영적 구원에 과도하게 집착하다 보니 바람직한 사회적 관계수립에 너무나 좁은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도 문제이다. 십자가가 담고 있는 보편적인 뜻이 성조기나 태극기로써 전달될 수 있겠는가. 기독교신앙의 핵심이자 구원의 완성인 예수의 부활의 뜻이 교세의 양적 확대와 배타성, 그리고 반공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겠는가. 종교는 정보와 과학기술의 시대에 살아 남을 수 없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이제 곳곳에서 정치적, 그리고 도덕적 힘의 요소로서 부활하고 있다.‘종교의 복귀(復歸)’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종교는 오늘날 미국의 정치에서도, 또 이슬람의 근본주의적 저항에서도 그 힘을 다시 드러내 보이고 있다. 세계화가 몰고 오는 엄청난 충격은 지구촌 곳곳에서 위기감과 무력감을 증폭시켜 종교의 형식을 빌린 위기의 예방과 처방을 요구하고 있다. 이렇게 종교의 역할이 중요해지면 중요해질수록 종교는 과거보다 더 다른 종교와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또 종교만이 유일하게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식으로 지적 권위를 배타적으로 행사해서도 안 된다. 종교는 이제 ‘시민종교’로서 민주적 공동체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한 정치적 윤리규범을 설정하면서도 ‘비종교적인 것’에 대해서도 보다 더 열린 태도로 임해야 한다.‘종교의 복귀’는 ‘탈(脫)세속화’가 아니라 일종의 ‘재(再)세속화’의 현상이다. 천상으로 올라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날이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는 이 지상의 문제 때문에 종교는 다시 돌아온 것이다.
  • [인사]

    ■ 과학기술부 △우주기술개발과장 崔銀哲△평가정책과장 尹憲柱 ■ 국무총리비상기획위원회 ◇전보△정책홍보관리관 崔在景△동원기획국 동원정책과장 權栗△비상관리국 교육평가〃 任用彬△정책홍보관리관실 홍보협력담당관 權五廷△동원기획국 정부기능과장 金元植◇과장 신규임용△정책홍보관리관실 혁신기획관 金鍾大 ■ 원자력의학원 △진료부장 趙澈九△진료지원부장 田大根 ■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과장급 승진△기획관리실 대외협력담당관 양옥종◇서기관 승진△위원지원국 국내1담당관실 권영석 ■ 신흥증권 ◇승진 (이사대우) △준법감시인 朴興基△기업금융팀장 崔昌民 (1급)△준법감시팀장 洪守玄△인천연수지점장 朴哲亨△성남지점장 文泰雄△기업금융팀 金榮國(2급)△석계지점 金知萬△충주지점 崔忍濟△기획팀 金東駿△감사 李相勳△파생상품 李在植△기업금융 具城民 金泰範 ◇전보 (팀장) △투자공학 鄭用允△법인사업지원 林熙鎭△상품운용 金成鎬△종금사업지원팀 林承雨 ■ 서울보증보험 ◇1급 승진 △경영연구실 수석조사역 金國鎭 ◇전보△인사부장 郭在奉△보상지원팀장 李仁杓 (지점장)△서초 朴根益△순천 鄭炳圭△제주 宋憲洙△신사 高一錫△동래 金鳳來△김해 金善雄 (강북보상서비스센터)△센터장 李秀雨△구상1팀장 劉永韓△구상2〃 成基昌△구상3〃 元鎭成△구상4〃 安裁泓△구상5〃 金一坤△보상서비스1〃 林在根△보상서비스2〃 朴明攝 (강남보상서비스센터)△센터장 金基周△구상1팀장 宋東胄△구상2〃 金定鉉△구상3〃 金鉉哲△구상4〃 朱健△보상서비스1〃 趙有湜△보상서비스2〃 洪明植 ■ 플러스자산운용(주) △전무이사 朴燦興△상무이사 具滋烈 ■ 아이투자신탁운용(주) △마케팅본부장 전무이사 韓相在△채권운용본부장 金耕植 ■ 한국한의학연구원 △행정부장 馬天 ■ YTN △상임이사 고광남△비상임이사 박성목△사외이사 장지인△〃 박성주△〃 박종만 ■ 한국경제신문 △편집국장 李熹周 ■ 예당엔터테인먼트 △공동 대표이사 이성재△이사 김준범 ■ 헤럴드미디어 △기획조정실장 겸 경영전략팀장 조진래(헤럴드경제)△경제부장 권충원△생활경제부장 장용동△정치사회부장 권용국△문화레저부장 강근주 ■ 불교조계종 총무원 △기획국장 東出△감사국장 三慧△사회국장 正業△호법국장 泰震△조사국장 仁悟 ■ 하나은행 ◇등기 부행장△가계고객사업본부담당 金正泰△전략담당 徐槿宇 ■ 한국무역정보통신(KTNET)△IT본부장 문용숙 △경영지원실장 김태형 ■ 한겨레신문사 ◇국(실)장△경영기획실장 朴泳昭 △논설위원실장 金志錫◇부국장△기획담당 부국장 趙弘燮 △뉴스총괄 담당 부국장 金利澤 △콘텐츠 담당 부국장 文炳權 △온라인 담당 부국장 직무대행 安永瑃 △편집국 기획위원 張正秀◇부장△편집기획부장 安在承 △편집부장 李基俊 △국제부장 郭魯弼 △정치부장 余峴鎬 △경제부장 鄭泳武 △사회부장 吳泰圭 △여론매체부장 文賢淑 △문화생활부장 林範 △스포츠부장 金景武 △사진부장 李政宇◇논설위원△논설위원 金炳秀 △논설위원 申基燮 △논설위원 鄭南求
  • [공직자 윤리와 부동산] 도덕성 잣대 ‘껑충’…공직자 윤리는 ‘제자리’

    [공직자 윤리와 부동산] 도덕성 잣대 ‘껑충’…공직자 윤리는 ‘제자리’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를 비롯해 고위 공직자들이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줄줄이 낙마하면서 공직자의 재산 증식 문제가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특히 여야 정치권이 도입을 추진 중인 주식백지신탁제도에 부동산도 포함하는 방안을 본격 제기하면서 정치권의 화두로 또다시 부각되고 있다. 이를 계기로 공직자에 대해 부동산 투기와 투자를 구분하는 합리적인 잣대가 서둘러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지난 1993년 공직자 재산공개 제도가 도입된 이후 부동산은 국회의원, 장·차관, 고위 공직자들의 ‘무덤’이 돼 왔다. 여론은 공직자에게 공직을 택할 것이냐, 재산을 택할 것이냐를 때로는 강요하고 있다. 무엇보다 부동산의 과다 보유를 문제삼던 초기에서, 취득 과정의 불법성 여부나 매각과정의 투명함을 요구하는 쪽으로 시각이 전환돼야 한다는 지적이 각계각층에서 제기되고 있다. ●공직자의 투기 잣대는 강화중 부동산 소유문제가 논란이 될 때마다 시민단체는 ‘투기’라고 공격하고, 공직자는 ‘단순 투자’라며 방어해 왔다. 그러나 일단 논란이 되면 해당 고위 공직자들은 여론재판에 떠밀려 대부분 낙마하거나, 어렵게 임용된다고 해도 도덕성에 상당한 타격을 입어 업무수행에 차질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한화 리서치센터장 이종우 이사는 “선진사회로 진행하면서 도덕성의 잣대는 계속 강화될 수밖에 없다.”면서 “미국처럼 공직을 맡는 사람은 국민의 최소 의무인 국방·납세의 의무를 준수했는지 여부가 임명의 잣대가 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서강대 손호철 교수는 “사회 지도층은 본질적으로 반성해야 한다. 불법적 행위가 공소 시효가 지났다고 해서 국민들이 눈감아주지는 못한다.”면서 “앞으로는 부정한 재산 증식이 있어서는 고위 공직자가 될 수 없다는 시금석이 이헌재 전 부총리 등의 사례”라고 지적했다. 김영삼 정부 때 도입된 이 제도의 첫 희생자는 뜻밖에도 여당 소속의 국가 서열 2위이자 입법부의 수장인 박준규 전 국회의장이었다. 1993년 3월 1차 재산공개에서 아들을 포함해 고위 공직자로서 지나치게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는 비난에 직면한 박 전 의장은 결국 국회의장직을 사퇴했고, 나중에는 의원직까지 내놨다. 당시 들끓었던 여론의 비난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짐작할 만한 상황이다. ●매도과정 적법성도 중시 경제전문가뿐만 아니라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은 공직자의 부동산 과다소유를 두고 투자 또는 투기라고 딱 잘라서 말하지 못한다. 경제적 논리로만 볼 경우 투기도 투자의 일환이라고 경제전문가들은 말한다. 즉 높은 위험을 감수해 많은 이윤을 얻어내는 투자기법이라는 논리다. ‘토지정의시민연대’ 남기업 사무국장은 “투기와 투자를 구별하기는 어렵다.”면서 “전국민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부동산 투자의 진흙탕 속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분석한다. 그는 그러나 “고위 공직자들은 높은 도덕성이 요구되므로 ‘여론재판’이라는 지적이 있더라도 엄격한 잣대로 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전 경제부총리의 사퇴를 몰고온 ‘부동산 취득 및 매각’과정은 그러나 현재 국민들이 갖고 있는 ‘도덕성의 잣대’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의 부동산 파문은 경기 광주 소재의 전답을 취득하는 과정에서 불거졌다. 당시 전답은 현지인이 아니면 소유할 수 없으므로 주소지 이전을 통해 부동산을 취득했다. 이것은 위장 전입으로 ‘불법’이 된다. 국민들은 고위 공직자의 부동산 매수뿐만 아니라 매도 과정도 적법한가, 또 그 과정에서 부가되는 세금을 제대로 냈는지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초기 재산공개를 보면서 ‘국민정서법’이 작용했다면 이제 ‘법적 합법성’을 더 강조하는 상황이다. ‘참여연대’ 이재근 투명사회국 간사는 “우리가 문제삼는 것은 투기와 투자의 분류가 아니라, 재산축적 과정의 불법성 여부”라면서 “이헌재 전 부총리나 최영도 전 인권위원장은 모두 20년 전의 일이라고 해도 위장 전입을 통해 토지를 취득했고, 그것은 명백한 불법”이라고 지적했다. ●투기 의혹 부동산을 기증하기도 투기 논란을 ‘증여’ 등을 통해 해결한 공직자들도 있다. 한나라당 박세일 의원은 지난해 부동산투기 의혹이 일자 문제의 경기 동두천의 70평짜리 땅을 ‘지구촌 나눔운동’에 기부했고, 충남 홍천의 임야 3000평도 ‘탄허불교재단’에 기증해버렸다. 이보다 앞서 이명박 서울시장은 민자당 비례대표시절 과도한 부동산 소유로 문제가 되자 서초동 주변의 노른자위 땅을 공시가격 이하의 무척 싼 가격에 매각해 여론을 무마해 나갔다. 참여정부의 공직자 검증 강화는 다른 한편으로는 현직의 공직자들에게 반면교사 역할도 하고 있다. 중앙부처 공무원의 한 부인은 최근 5억원 상당의 서울 강남의 재개발 아파트를 처분하려고 했으나 양도세가 3000만원이라 ‘방법’을 찾고자 했다. 양도세를 피하기 위해 무주택자인 동생에게 ‘위장 매매’를 통해 세금을 줄여보려고 했지만, 최종적으로 그 부인은 현재 참여정부의 공직자 인사검증이 강화되고 있는 추세를 감안해 탈세행위를 포기했다. 중앙부처의 또 다른 고위 공무원도 지방발령으로 갑작스레 서울집을 팔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아파트 가격이 한 차례 폭등한 탓에 양도세는 2500만원 수준이었다. 그는 아파트 구매자가 취득세를 적게 낼 수 있도록 매매가를 낮춘 ‘다운계약서’를 작성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사문서 위조”라며 거절했다. 현재는 부동산 실명제와 실거래가 신고 등이 도입되고 있는 상황에서 70·80년대식 불법·편법의 사례들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 부동산 업계의 이야기다. 현재 시중에서 동원되는 불법·편법의 방식으로는 ▲주소지 이전을 통한 농지구입 ▲가족이나 친척의 이름으로 명의신탁하는 경우 ▲형질변경전까지 현지주민 이름으로 위장매입 ▲매매가보다 낮은 가격으로 작성하는 ‘다운(Down)계약서’ 작성을 통한 탈세 등이 거론된다. 문소영 박준석 김준석기자 symun@seoul.co.kr ■ 공직자는 ‘부동산 완패’? ‘부동산 불패’라는 말이 있다. 부동산에 투자하면 절대 손해보지 않는다는 것을 빗댄 말이다. 그러나 이제 고위 공직자들은 부동산문제에 걸리면 웬만해선 살아올 수 없다는 ‘부동산 완패’의 두려움에 떨고 있다. 올해도 부동산의 덫에 걸려 낙마한 ‘높으신 분들’이 속출하고 있다. 반면 의혹은 받았지만 여론재판을 무사히 통과한 인사도 있다. 요즘 공직자들 사이에선 부동산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고위직은 어렵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 최근 물러난 최영도 전 국가인권위원장,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이기준 전 교육부총리는 청와대가 이들을 구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지만 허사로 돌아간 경우이다. 아무리 사회기여도가 높더라도 부동산에서 깨끗하지 못하면 ‘국민정서법’이 가만 두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1월 이기준 전 총리는 부임 57시간 만에 물러났다. 안동수 전 법무장관이 지난 2001년 43시간 만에 사퇴한 것에 이은 역대 2위의 단명장관으로 이름을 올렸다. 이 전 총리는 미국 국적의 장남 명의로 거액의 부동산을 은닉한 의혹을 받았다. 잠잠하던 부동산 망령은 지난달 말 다시 불거졌다. 경제수장인 당시 이헌재 경제부총리가 도마에 올랐다. 공직자 재산공개과정에서 부동산 분야만 재산이 7년 사이에 46억원이 불어 투기의혹이 강하게 제기됐다. 이어 부인이 경기 광주시 전답을 매입하면서 위장전입을 했다는 것이 추가로 드러났다. 올해 국정 최대의 화두를 경제회복으로 잡은 청와대로서는 이 부총리를 살리려고 했지만 끝내 여론에 두손을 들고 말았다. 최근엔 높은 도덕성이 필수적인 최영도 국가인권위원장마저 부동산 덫에 걸려들었다.20여년전 농지를 사면서 위장전입한 사실이 드러났다. 최 위원장은 사퇴는 하지 않겠다고 끝까지 버텼다. 청와대도 위장전입한 때가 오래 됐고 사회봉사활동을 높이 사 그냥 넘기려고 했다. 그러나 결론은 마찬가지였다. 반대로 이주성 국세청장, 허준영 경찰청장은 인사청문회에서 부동산 관문을 무사히 뚫었다. 크고 작은 부동산 의혹이 제기됐지만 설득력있는 해명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주성 국세청장은 미성년자인 장남이 외조모로부터 아파트를 물려받은 사실에 대해 “우리부부가 장모를 모시고 살아 손자를 배려하는 차원이었을 것이다.”고 말했다.‘효’를 내세워 의원들을 설득했다. 허 청장도 2003년 부인이 대전에 아파트를 산 뒤 1년도 안돼 되판 사실에 대해 행정수도 이전에 따른 투기라는 의혹을 받았다. 이에 허 청장은 “동생이 아버지의 노후를 위해 구입했다가 되판 것”이라고 말해 역시 ‘효’를 내세워 청문회 의원들의 예봉을 피했다. 뚜렷한 부동산 의혹이 제기되지 않은 양승태 대법관은 청문회에서 단번에 합격점을 받았다. 박준석기자 pj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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