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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호 기자의 종교 만화경] ② 종교 ‘썰물’

    각 종교마다 ‘사람이 없다’고 아우성이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젊은 사람이 모자란다’는 푸념이다. 실제로 출가자가 위태로울 만큼 급속히 줄고있는 불교는 그 어느 때보다 고령화에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개신교, 천주교는 불교에 비해 고령화가 덜한 편이지만 역시 젊은 층 모시기에 여간 공을 들이는 게 아니다. 일찍부터 심각한 고령화 위기에 처했던 민족종교는 고령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데 혈안이 돼있다. ●저출산-종교계 추한 민낯이 ‘썰물’ 원인 종교계에서 사람이 빠져나가는, 아니 젊은 사람들이 종교에 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대개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저출산 사회의 종교 외면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계 자체의 모순과 갈등이다. 우선 사회의 추세를 보자. 저출산의 인구 추이에서 종교계로의 인구유입 감소는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총 인구가 감소하는 상황에서 종교계로 유입되는 인구가 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현상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종교로의 인구 유입 감소는 사회 전반의 인구 감소 추세와는 현격하게 다른 측면을 갖는다. 이를테면 종교를 갖거나 믿음을 지탱할 원인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다른 이유인 종교 내부의 모순과 갈등은 종교인구 감소, 특히 젊은 층을 종교에서 멀어지게 하는 더 심각한 원인으로 여겨진다. 속된 말로 ‘정나미가 떨어져서’ 종교 근처에 얼씬도 하기 싫다는 젊은 층의 고언은 이제 더 이상 새삼스럽지 않다. 그 정나미 떨어지는 모순과 갈등은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 정도이다. 목회자 세습이며 성직자의 성 추행, 정치판 못지않은 권력욕과 파벌 싸움, 속인 못지않은 성직자들의 윤택한 삶…. 그야말로 종교에 발을 들이기 어렵게 만드는 추한 얼굴들이 너무 많은 것이다. 종교 본연의 가치와 미덕과는 아주 먼 것들 말이다. ●이벤트성 유인대책보다 내부 모순 치유 선행돼야 이가운데 종교계가 ‘종교 썰물’의 고리를 끊기 위해 요즘 부쩍 공을 들이는 건 주로 전자인 것 같다. 젊은 층을 교회나 절, 성당에 불러모으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춤을 춘다. 그런 각고의 노력 때문인 지 일부 교회와 성당에는 젊은 층의 발길이 어느 정도 다시 모이고 있다는 관측도 없지 않다. 문제는 그 반짝의 관심과 답지가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 것인 가이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만큼의 성장을 지속해왔던 이 땅 교회들의 지난 날을 한번 반추해보자. 10∼20여년 전만 하더라도 젊은이들이 교회당과 예배당에 넘쳐났었다. 사찰과 성당에도 교회 수준은 아니지만 젊은이들이 두터운 신도층을 형성했었다. 20년도 채 안돼 종교가 이렇게 존폐를 걱정할 만큼의 젊은층 이탈을 염려해야만 하는 상황과 이유를 종교계는 이제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 같다. 종교계 내부의 모순과 갈등 척결이 먼저임은 말할 나위도 없겠지만.   김성호 선임기자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23] ‘카프’ 김복진의 20세기 불상 조각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23] ‘카프’ 김복진의 20세기 불상 조각

     카프(KAPF)라는 영문 약칭이 더 익숙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지도자였던 정관 김복진(1901~1940)은 현대적 개념의 조각가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물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한때 불문(佛門)에 귀의하기도 했다는 그는 불모(佛母)로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반면 서양미술에 바탕을 둔 조각 작품은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다. 50점 남짓한 작품 가운데 동상은 제2차 세계대전 막판 일제의 쇠붙이 공출로 사라졌고, 목조와 소조의 유작도 동생인 팔봉 김기진의 인쇄소 창고에서 6.25전쟁 때 소실됐다고 한다.  불상으로는 충북 보은 법주사의 미륵대불이 그의 작품이었다. 미륵대불은 김복진이 머리 부분을 완성하고 전체 비례를 잡아놓은 상태에서 자금난으로 중단됐다고 한다. 미완성으로 남아있던 미륵대불은 1963년에야 완성됐다. 미륵대불은 흔한 시멘트 조각이라는 이유로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지만, 김복진으로서는 오히려 시멘트라는 새로운 재료를 거대 불상 조성에 이용하는 실험이었다. 미륵대불은 1990년 금동상으로 다시 만들어졌다. 두 차례 다른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도 김복진의 체취는 여전히 남아있다.  전북 김제 금산사 미륵전의 본존불도 김복진의 작품이다. 미륵전은 내부가 아래위로 뚫려있는 3층으로 본존불은 높이가 38척이니 12m가 넘는다. 삼존불은 미륵전을 중창한 인조 13년(1635) 조성한 것이다. 서양조각의 재료인 석고로 금산사 미륵본존불은 조성한 것은 특기할 만 하다. 그런데 삼존불 가운데 좌우 협시보살은 제외하고 본존불만 조성했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그래선지 그가 본존불을 조성했다는 사실조차 한동안은 묻혀있다시피했다. 미륵전에는 본존불만 조성한 이유를 알 수 있는 기록이 남아있다.  미륵전 본존불은 특이하게 커다란 무쇠솥 위에 봉안되어 있다. 참배객들은 삼존불에 배례하고는 무쇠솥과 본존불의 대좌 사이 공간에 시줏돈을 넣고는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1934년 3월 9일 저녁 시줏돈을 거두어 가는 소임을 맡은 동자승이 촛불을 잘못 다루는 바람에 솥 내부에서 불이 났다고 한다. 불길은 곧바로 소조상 내부 목재에 옮겨 붙었고 본존볼은 무너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금산사는 미륵본존의 복원불사를 추진했다. 공모에는 김복진과 보응 문성, 금용 일섭, 이석성 등이 응모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대를 대표하는 화승들인 보응, 금용, 이석성은 서울 안양암의 천오백불상도 함께 조성한 적이 있다. 금산사 미륵불 역시 세 사람이 공동 응모했을 가능성이 큰 것 같다. 이당 김은호 화백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것도 눈길을 끈다. 김복진에게 금산사 미륵불 복원에 응모를 권유한 것도 이당이었다고 한다.  김복진은 도쿄미술대학에서 공부한 뒤 1923년 신극운동 단체인 ‘토월회’를 조직한다. 1924년에는 일본 제국미술원전람회, 1925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각각 나체 조각 작품으로 입선한다. 이듬해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나체상 ‘여인’이 특선에 올랐다. 하지만 김복진은 카프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던데다 조선공산당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1928년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일본경찰에 붙잡혀 6년 가까이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김기진은 감옥살이 당시의 형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참담한 감옥살이 중에도 김복진은 먹지 않고 남긴 밥을 주물러 점토처럼 만들고는 인물상과 불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솜씨에 놀란 간수들이 김복진을 목공소로 보내 작은 목조불상을 깎게 해서 감옥소 직매장에서 팔게했다는 것이다. 김복진이 불교조각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진 것은 이 기간이었던 것 같다. 금산사 미존불 조상에 나선 것은 풀려난 직후가 된다.  김복진의 불상 작품으로 남아있는 것은 10점 남짓이다. 금산사 미륵불과 그의 흔적이 여전한 법주사 미륵대불, 서울 영도사 석가모니불입상, 충남 예산 정혜사 관음보살좌상, 충남 공주 계룡산 소림원 미륵입상 등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소림원 불상이다. 석고로 만든 높이 117cm의 소림원 미륵입상은 금산사 미륵불을 조성하기 위한 축소모형이라고 한다. 다만 머리 부분의 비례가 소림원 쪽보다 금산사 쪽이 조금 더 커보이는 것은 높이 올려다 보아야 하는 대형 불상인 만큼 의도적인 조정이라는 것이다.  서동철 수석논설위원 dcsuh@seoul.co.kr  
  • “달마도의 달인” 이종철화백 청계천 FIFA 퍼포먼스

    “달마도의 달인” 이종철화백 청계천 FIFA 퍼포먼스

    서울 청게천 광통교에서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는 석주 이종철 화백은 1943년 일본에서 태어나 세살 때 한국에 들어와 고교시절까지 서양화를 공부했다. 우연히 연예계에 발을 디딘 후 국내에서 가장 젊은 쇼 단장으로 서영춘, 최무룡 같은 스타들과 전국을 누볐다. 예술에 대한 끼를 못버려 사진작가 생활을 15년 정도하다 1987년 팔공산 동화사에서 도운 스님을 만나 불교에 입문했다.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기간에 개최년과 참가국 수를 합한 2173개의 달마도 작품으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지난 20년 동안 달마를 그려온 그는 지금까지 무려 40여 차례 넘게 개인전과 시연전을 개최해 국내에 몇 손가락에 꼽히는 달마화가로 알려져 있다. 이명선 전문기자 mslee@seoul.co.kr
  • 민간통일운동 유공자 훈·포장 수여

    민간통일운동 유공자 훈·포장 수여

    민간분야에서 통일운동에 헌신한 사람들에게 정부가 수여하는 ‘2015년 민간통일운동 유공자’ 포상식이 24일 정부서울청사 7층 대회의실에서 개최됐다. 황부기 통일부 차관의 주관으로 진행된 이날 행사에서 김형진 민족화해범국민협의회(민화협) 공동의장과 임수빈 대한민국팔각회 총재에게는 ‘국민훈장동백장’이, 김필건 민화협 공동의장과 하재웅 민족통일불교중앙협의회 부의장에게는 ‘국민포장’이 각각 수여됐다. 황 차관은 인사말에서 “지난해 대통령께서 통일 대박 발언을 한 이후 국민들이 통일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면서 “여기 모인 분들의 헌신과 노력도 통일 열기 확산에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민간통일운동 유공자 포상식은 2012년부터 통일부 주관으로 진행돼 왔다. 올해는 국민훈장동백장, 국민포장 말고도 10명에게 대통령·국무총리 표창이 주어졌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겸재 정선 미술관에서 열리는 김시습 테마전

    겸재 정선 미술관에서 열리는 김시습 테마전

    ‘매월당 김시습, 겸재 정선을 만나다’ 전시회가 30일까지 서울 강서구 가양동에 있는 겸재정선미술관에서 열린다. 매월당김시습기념사업회(회장 소종섭)가 마련한 이번 전시회는 김시습 선생 탄생 580주년과 기념사업회 창립 4주년을 기념한다. 절의의 상징으로 역사 속에 상징화 된 김시습 선생은 1435년 태어났다. ‘금오신화’(金鰲新話)의 지은이이기도 한 선생은 사상가, 철학가, 종교인, 문학가, 여행가 등 어느 하나로 규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실로 다양한 면모를 남겼다. 유교에 바탕을 두었으면서도 불교에 정통했다. 조선 초기에 그만큼 수준 높은 불교 관련 저술을 남긴 이도 없다. ‘설잠’이라는 법명으로 승속을 넘나든 선생은 1493년 부여 무량사에서 승려로 생을 마쳤다. 그는 전국을 유람하면서 수많은 시를 썼는데 전하는 것만 2200수가 넘는다. 이번 전시회에는 역사화가로 널리 알려진 서용선 전 서울대 미대 교수의 회화 20여 점과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강선구 작가의 서예 6점, 김내혜 선생으로부터 전각을 사사한 심산 작가의 전각 20여 점 등 50점 남짓한 작품이 전시된다. 장르는 다르지만 모든 작품은 김시습을 그렸거나 김시습이 쓴 시를 작품화한 것이다. 이밖에 기념사업회 회원들이 김시습 선생의 흔적을 찾아 답사하면서 찍은 사진도 볼 수 있다. 소종섭 매월당김시습기념사업회장은 “조선 초기 국토를 기행하면서 백성의 고통과 함께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과 문화유산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글로 남겼던 김시습의 정신은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와도 맥이 닿는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서동철 기자 dcsuh@seoul.co.kr
  •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바티칸 미술관 천장의 성화(聖畵)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바티칸 미술관 천장의 성화(聖畵)

    2007년 11월 1일 필자의 새로운 학문적 여정을 여는 ‘한국미술의 탄생’이 찍혀 나오는 광경을 인쇄소 2층에서 내려다보며 ‘저 책이 세계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혼자서 중얼거렸다. 이미 2005년 나의 운명을 결정지은 첫 그리스 여행에서 서양 미술 전체를 풀어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이 책의 부제는 ‘세계 미술사의 정립을 위한 서장(序章)’이다. ‘세계의 조형예술 용으로 읽다’는 그리스 첫 여행을 생각하면 꼭 10년 만에 쓰는 셈이다. 꿈이 이루어져 현실이 된 것이다. 빙켈만이나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은 유명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에 가지 않았다. 필자의 그리스 여행은 앞으로 서양 미술사에 등장할 날이 올 것이라고 확신한다. 필자가 그리스 여행을 하지 않았더라면 서양미술사학은 어둠 속에 영원히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이제 비로소 진정한 ‘세계의 르네상스’가 올 것이다. 서양의 르네상스는 참된 르네상스가 아니었다. 코린트 주두는 물론 아칸서스도 잘못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재생 혹은 부활을 이르는 르네상스라 할 수 있겠는가. 중세 미술에 비하면 르네상스 미술은 세속화됐다는 느낌을 가져왔다. 동양 미술사가 연꽃 모양을 실제 연꽃으로 잘못 알았던 것을 무량보주로 바로잡은 것처럼 잡초에 불과한 아칸서스라는 특정 식물이 서양 미술사를 지배했던 것을 만물생성의 근원인 영기잎, 즉 무량보주로 바로잡게 됐다. 그 계기를 마련한 ‘한국미술의 탄생’이 인쇄되고 있었을 때 바닥에 굴러다니는 광고 쪽지를 주워 보고는 깜짝 놀랐다. 꽤 높은 수준의 그림이었다. 하지만 어느 성당의 그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천장의 네모 틀 안 그림 밑에 적힌 ‘성 미카엘이 가르가노 산에 현신하다’(S Michael In Monte Gargano Apparet)라고 쓴 것을 실마리로 오랫동안 추적해 이 그림의 화가를 천신만고 끝에 알아냈다. 체사레 네비아(1536~1622). 대천사 미카엘을 주제로 한 그림은 바로 로마시대 지도가 양쪽에 전시된 바티칸 교황궁 미술관 ‘지도갤러리’(gallery of Maps)의 120m나 되는 엄청나게 긴 궁륭천장에 그려진 화려하고 웅장한 그림들 가운데 있음을 알았다. 8년 전 인쇄소에서 주운 그림을 추적해 오늘 채색분석하고 있으니 운명적인 인연이 아닐 수 없다. 터널 볼트에 그려진 장식들은 체사레 네비아와 지롤라모 무치아노 등 매너리스트 화가들이 그린 것이다. 미카엘 대천사 그림의 위아래에는 여인으로 표현된 두 천사의 영기화생 도상, 구획마다 무량하고 다양한 보주의 조형들, 괴기한 조형들과 다른 형태의 용들이 수없이 많다. 사방 한 면을 채색분석해 보니 안 보이던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즉 체사레의 그림 주변 그림들을 서양 학자들은 그로테스크라 부르고 쳐다보지도 않는다. 무엇인지 모르면 무조건 문양 혹은 장식이라 부른다. 그러면 성화를 유명한 화가가 그렸다면 서양 학자들이 그로테스크하다고 하는 조형들은 누가 그렸을까? 전혀 다른 양식의 그림을 한 사람이 그릴 수 있을까? 아마도 이름 없는 수많은 유능한 무명의 장인들이 참여했을 것이다. 유학자들이 말하는 ‘괴력난신’의 세계가 말 그대로 파노라마처럼 장엄하게 펼쳐지고 있다. 사람들의 시선은 대개 유명한 화가가 그린 미카엘 대천사의 현신을 보려고 가는 교황 일행 장면만이 눈에 보일 뿐이다. 그러나 그 장면을 화생하게 하는 그 주변의 그림들은 생명 생성의 놀라운 세계다. ‘주변’이 아니고 오히려 ‘주체’가 된다. 그 무엇인지 모를 조형을 최초로 밝혀 보여 드리려 한다. 미카엘 대천사는 천사들의 대군단을 이끌고 악마를 퇴치하므로 기독교는 물론이고 유대교와 이슬람교에서 수호신으로 경배한다. 그러므로 그림 양쪽의 천사는 아마도 미카엘 대천사가 이끄는 천사들을 상징하며, 나아가 성 미카엘 대천사의 영기화생을 웅변하는 것이 아닐까. 원래 미카엘 대천사는 미청년으로 묘사되다가 점점 여성적으로 나타난다. 마치 관음보살이 원래 대장부이나 점점 여성적으로 표현돼 가듯 천사들은 여성적으로 변화한다. 동서양의 같은 현상이다. 영기문은 생명이 생성하는 과정을 표현한 것이므로 반드시 채색분석해 단계적으로 보여 드려야 한다. 필자가 천사의 영기화생을 단계적으로 채색한 것은 무려 50단계가 넘는데 그중 일곱 단계만 보여 드리기로 한다. 첫 번째 단계는 선으로 그린다 ②. 그다음, 실은 천사의 몸부터 채색해야 하나 끝부분부터 시작한다. 왜냐하면 끝의 영기문에서 천사가 화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릴 때 영기화생하는 조형 과정은 역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끝 부분은 빨간 세 가닥 조형이 있는데, 동양에서도 용의 꼬리 끝을 이렇게 표현해 꼬리로부터 용이 화생하게 한다. 그런데 뜻 밖에도 용 같은 몸의 등에 작은 보주들이 표현돼 있지 않은가. 그 용 같은 꼬리와 몸은 놀랍게도 아칸서스라고 부르는 두 갈래 영기문 조형에서 나오고 있다. 즉 천사의 치마 같은 연두색 영기잎 부분에서 녹색 영기잎이 화생하고 다시 그 영기잎 갈래에서 용의 꼬리가 화생하고 있다 ③. 즉 천사의 두 다리는 용의 형태를 이루고 있으니, 천사는 용성(龍性)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한다. 용의 꼬리에 걸쳐 있는 빨갛고 커다란 제1영기싹은 만물생성의 근원으로 그 끝에서 아기 천사가 화생하고 있다. 천사 역시 현실에 없는 영기화생한 영기문이다. 마침내 하반신의 영기문에서 천사의 몸이 화생하고 ④ 다시 두 팔이 영기잎(아칸서스 모양)으로 변한다. 그 영기잎의 두 갈래 사이로부터 줄기가 제1영기싹 모양으로 도르르 말리며 나오고 ⑤, 그 끝에서 영기꽃이 피며 무량한 보주가 나오고 있다 ⑥, ⑧. 만일 필자가 보주를 몰랐다면 상태가 안 좋은 사진에서 작은 보주들을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고려 사경 표지의 조형에서, 영기꽃의 씨방에서 보주가 무량하게 쏟아져 나오는 광경을 밝히지 못했더라면 이 르네상스 시대의 조형을 읽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국내에서도 고려사경 표지를 읽어 내지 못하는 까닭은 씨앗(종자)이 보주로 승화한다는 진리를 모르기 때문인데, 아직도 연꽃이니 모란이니 보상화니 학자들마다 제각각 부르고 있다. 일본 대승사 소장 고려 사경 변상도의 표지 그림을 밝힌 적이 있다 ⑨. 마지막으로 날개 모양이 천사의 몸에서 영기문으로 발산하고 있다. 마치 동양 비천의 천의는 천의가 아니고 영기문이듯 날개는 날개가 아니고 제1영기싹으로 이루어진 영기문이다. 그 증거로 날개가 녹색으로 칠한 영기문에서 날개 모양이 화생하고 있지 않은가 ⑦. 좌우 대칭이므로 한쪽만 읽으면 전체를 읽을 수 있다. 장엄한 천사의 영기화생 광경이며 결국 무량한 보주를 발산하고 있다. 동서양이 이처럼 같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넓은 구획선에는 갖가지 모양의 보주들이 빼곡히 그려져 있다. 서양 학자들이 ‘달걀’이라 부르는 것들도 있고 ‘로제타’라도 부르는 모양도 있지만, 이미 언급한 것처럼 모두 보주, 즉 무량보주의 표현이다. 즉 천사로부터 발산한 무량한 보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 틀 위 중심에 영적 존재의 얼굴이 있고, 용의 입에서 양쪽으로 영기문이 발산하듯 아칸서스 모양 영기문에서 줄기가 화생하며 끝에서 무량보주꽃, 즉 영기꽃이 핀다. 마치 아래 천사의 영기화생을 간략화한 것 같다. 그 양쪽으로 놀랍게도 용 두 분이 꼬리가 얽히며 반대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①. 사진 상태가 좋지는 않지만 얼굴의 윤곽은 뚜렷하며 용의 배 부분에 연이은 제1영기싹 영기문이 있어서 용을 영기화생시키고 있음을 어렵게 찾아냈다. 이것도 고구려 벽화의 사신도 가운데, 특히 용의 영기화생 조형과 똑같다. 고구려 용이 연두색 제1영기싹이 연이은 영기문에서 화생하듯이 이 르네상스 시대의 용도 아칸서스가 아니라 연이은 제1영기싹 영기문에서 화생하고 있다. 그 꼬리도 빨간 제3영기싹이 아닌가. 그런데 서양 학자들이 그로테스크하다고 일축했던 엄청난 양의 조형들이 성당에 가득 차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성당에는 예수 혹은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경배의 대상으로 돼 있다. 그 두 존재는 이미 현실적인 인간이 아니라 불교의 여래와 보살처럼 영기화생한 만물생성의 근원임을 다음 회에서 증명할 것이다. 성령(聖靈)으로 잉태했다는 것은, 즉 성령화생(聖靈化生)이며 바로 영기화생(靈氣化生)을 뜻한다. 영기는 곧 성령이다. 그러면 왜 괴력난신의 세계, 그로테스크한 광경들이 사찰이나 성당에 많은가. 현실에서 본 형태로는 그러한 세계를 표현할 수 없다. 장인들은 하나님(神)처럼 새로운 조형을 창조해야 한다. 장인들은 보이지 않는 우주의 대생명력을 보이도록 창조해 표현했으므로 사제들이나 인문학자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장인들은 마음 놓고 진리의 세계를 조형적으로 표현해 왔다. 그 대생명력, 즉 성령이 바로 하나님이다. 기독교에서는 수호신 성 미카엘이 퇴치하는 악마들이 많지만 대표적인 것이 기괴한 용이다. 그러나 성당에 얼마나 용의 조형이 많은가. 영기화생하는 용을 보면 악마로 보이지 않는다. 특히 이 천장에는 형태가 다른 수많은 용 그림이 가득 차 있다. 성당이야말로 생명이 영원히 생성하는 거룩한 생명의 성전이 아닌가. 예수님이 바로 만물생성의 근원이 아닌가. “보라, 나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니 나는 세상의 생명이요 빛이니라.” 바로 이 선언이 이미지로 창조돼 우리가 수천 년 동안 보지 못했던 괴력난신의 세계, 그로테스크의 세계가 역동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므로 중앙의 유명한 그림보다 무명의 장인이 그린 주변의 넓은 공간에 가득한 기괴한 조형들이야말로 영원한 생명 생성의 세계를 표현한 참된 성화(聖畵)들이라 할 수 있다. 현대 과학의 천문학, 생물학, 의학 등에서는 허블 망원경을 발명해 눈에 보이지 않던 더 멀리 있는 별들의 존재를 밝힐 수 있었고, 눈에 보이지 않던 바이러스를 전자현미경을 통해 볼 수 있었다. 그 도구들이란 불교의 말을 빌리면 방편반야(方便般若)라 할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관찰하기 위해 그 도구들이 탄생한 것이다. 목적이 도구를 만들어 낸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문·예술 분야에서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지만, 진즉 본 사람은 없다. 필자는 그 보이지 않는 조형을 눈으로 보고 조형 원리를 파악한 후에 사상과 연관시켜 공부하고 있다. 그런 후에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내어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도구가 채색분석이다. 지금 채색분석을 통해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조형을 단계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있다. 채색분석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은 분은 필자 홈페이지의 ‘학문일기’에서 ‘채색분석법(彩色分析法)이란?’을 검색해 읽어 보시기 바란다.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 아시아 국가 교류 속 한국 불교조각의 전통을 본다

    아시아 국가 교류 속 한국 불교조각의 전통을 본다

    한국 불교조각의 전통을 인도, 중국, 베트남, 일본과의 교류 속에서 조명하는 이색 특별전이 열린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 이전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한 고대불교조각대전 ‘불상, 간다라에서 서라벌까지’이다. 반가사유상, 일본으로 건너간 삼존불 등 국내 5개 기관과 인도, 미국, 중국, 영국 등 세계 7개국 21개 기관에 소장된 불상 210점이 한자리에 모인다. 25일 개막하는 전시는 4부로 구성됐다. 1부 ‘인도의 불상-오랜 역사의 시작’은 인도에서 불상을 처음 제작한 목적과 방법에 초점을 맞췄다. 인도에선 기원 전후 간다라와 마투라 지역에서 비슷한 시기에 불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 아래 독자적으로 불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불상 모습도 다르다. 전시에선 두 지역에서 출토된 불상과 보살상을 통해 성상(聖像)에 대한 접근법과 관심사의 차이에 대해 살펴본다. 2부 ‘중국의 불상-시작부터 수대(隋代)까지’에서는 오호십육국(304~439)부터 수(581~618)로 이어지는 중국의 불상 제작 흐름을 보여준다. 인도 굽타 시대 불상, 베트남 지역에서 발견된 불상과 동 시기 중국 불상의 비교를 통해 아시아 국가들이 교류를 바탕으로 새로운 양식의 영감을 얻는 모습을 보여주는 코너도 마련됐다. 3부 ‘한국 삼국시대의 불상’에선 외래의 상을 본떠 만든 최초의 상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국적 논란을 포함해 삼국시대 불상 제작 초기 양상을 살펴보고, 삼국시대 불상이 중국 남·북조와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전개되다 6세기부터 점진적으로 한국적인 모습으로 변화해 나가는 모습을 조명한다. 4부 ‘반가사유상의 성립과 전개’에선 한국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종교적·예술적 성취를 이룬 반가사유상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전시에는 1965년 봉화 북지리에서 출토된 석조반가사유상이 출품된다. 추정 높이 3m에 달하는 이 상은 한 사원의 주존으로 모실 만큼 반가사유상이 신앙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50년 만에 처음으로 원소장처인 경북대학교박물관을 떠나 중앙박물관에 전시된다. 2004년 이후 11년 만에 국보 78·83호 두 반가사유상도 동시에 선보인다. 박물관 측은 “인도에서 불상이 처음 등장한 시기부터 우리나라에서 반가사유상 제작이 정점에 이른 700년까지 불교조각의 진수를 보여주는 불상과 보살상이 전시된다”며 “한 종교의 예배상이 창안되는 순간과 그 확산 과정을 두루 살펴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11월 15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부음] 한설희(건국대병원 병원장)씨 부친상 외

    ●한설희(건국대병원장, 신경과 교수)씨, 강희(하버드학원 원장)씨, 제희(분당 파인만과학교습소 원장)씨, 율희씨 부친(故 한영우)상, 우용신(인하대부속 고등학교) 빙부상=23일 오전 9시 건국대병원 장례식장 201호, 발인 25일 오전 6시. 02-2030-7901 ●박보임씨 별세, 이민수(BBS광주불교방송 사장)씨 장모상 = 22일, 전남 완도장례식장, 발인 24일 오전 9시, 061-552-4444. ●최길봉씨 별세, 이성득(KNN 라디오 야구해설위원)씨 장인상 = 23일 오후 2시, 대동병원 장례식장 3호실, 발인 25일 오전. 051-550-9991.
  • 고대불교조각대전 ‘불상, 간다라에서 서라벌까지’

    고대불교조각대전 ‘불상, 간다라에서 서라벌까지’

     한국 불교조각의 전통을 인도, 중국, 베트남, 일본과의 교류 속에서 조명하는 이색 특별전이 열린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 이전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한 고대불교조각대전 ‘불상, 간다라에서 서라벌까지’이다. 반가사유상, 일본으로 건너간 삼존불 등 국내 5개 기관과 인도, 미국, 중국, 영국 등 세계 7개국 21개 기관에 소장된 불상 210점이 한자리에 모인다.  25일 개막하는 전시는 4부로 구성됐다. 1부 ‘인도의 불상-오랜 역사의 시작’은 인도에서 불상을 처음 제작한 목적과 방법에 초점을 맞췄다. 인도에선 기원 전후 간다라와 마투라 지역에서 비슷한 시기에 불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 아래 독자적으로 불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불상 모습도 다르다. 전시에선 두 지역에서 출토된 불상과 보살상을 통해 성상(聖像)에 대한 접근법과 관심사의 차이에 대해 살펴본다.  2부 ‘중국의 불상-시작부터 수대(隋代)까지’에서는 오호십육국(304~439)부터 수(581~618)로 이어지는 중국의 불상 제작 흐름을 보여준다. 인도 굽타 시대 불상, 베트남 지역에서 발견된 불상과 동 시기 중국 불상의 비교를 통해 아시아 국가들이 교류를 바탕으로 새로운 양식의 영감을 얻는 모습을 보여주는 코너도 마련됐다.  3부 ‘한국 삼국시대의 불상’에선 외래의 상을 본떠 만든 최초의 상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국적 논란을 포함해 삼국시대 불상 제작 초기 양상을 살펴보고, 삼국시대 불상이 중국 남·북조와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전개되다 6세기부터 점진적으로 한국적인 모습으로 변화해 나가는 모습을 조명한다.  4부 ‘반가사유상의 성립과 전개’에선 한국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종교적·예술적 성취를 이룬 반가사유상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전시에는 1965년 봉화 북지리에서 출토된 석조반가사유상이 출품된다. 추정 높이 3m에 달하는 이 상은 한 사원의 주존으로 모실 만큼 반가사유상이 신앙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50년 만에 처음으로 원소장처인 경북대학교박물관을 떠나 중앙박물관에 전시된다. 2004년 이후 11년 만에 국보 78·83호 두 반가사유상도 동시에 선보인다.  박물관 측은 “인도에서 불상이 처음 등장한 시기부터 우리나라에서 반가사유상 제작이 정점에 이른 700년까지 불교조각의 진수를 보여주는 불상과 보살상이 전시된다”며 “한 종교의 예배상이 창안되는 순간과 그 확산 과정을 두루 살펴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11월 15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1700년간의 수행 경전 한문-한글본 나왔다

     외길 김경호(54) 한국사경연구회 명예회장이 전통사경 교본 1차분 4권을 완간했다. ‘불교 경전을 옮겨쓰는 행위’쯤으로 알려진 사경(寫經)은 1700년간 수행의 방편으로 이어져왔던 문화유산이다. 합천 해인사의 대장경판을 비롯한 다양한 목판과 금속활자 제작의 기초였으며 고려시대엔 원나라 요청으로 수차례에 걸쳐 사경 전문가 100여명씩을 파견하기도 했다.  이번 발간된 전통사경 교본은 단절 위기에 처한 사경을 대중에게 널리 전하는 노력을 해온 김 명예회장이 고생 끝에 세상에 내놓은 성과물.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 한문본·한글본, ‘의상조사법성게(義湘祖師法性偈)’ 한문본·한글본으로 구성됐다. 불교의 전통적 수행법으로서 사경 이론을 설명하면서 사경에 쓰이는 도구와 재료를 관리, 보존하는 방법까지 정리해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 사경의 기본인 서예의 핵심 요소를 상세히 제시해 쉽게 따라할 수 있도록 꾸몄다. 특히 ‘의상조사법성게’ 한문본에서는 2000여년간 서예가들이 추상적으로 다뤄온 ‘俗書’(속된 기운이 있는 글씨)에 대해 최초로 12가지의 예시를 통해 구체적으로 규명했다. 교본 중간중간에 ‘팁’과 ‘종합’이라는 설명을 통해 명쾌하게 이론을 제시한 것도 특징이다.  김 회장은 “사경은 아주 오래된 수행법임에도 불구하고 방법이나 기법에 대한 기록과 자료가 전무하다”면서 “단절된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교본을 출간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서예 월간지에 기고한 글들을 모아 ‘전통 사경의 핵심개념 정리’와 ‘사경의 기법’도 펴낼 계획이다.  김성호 선임기자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대한불교천태종 총무원장 춘광 스님 ‘청년희망펀드’에 1천만원 기부

    대한불교천태종 총무원장인 춘광 스님이 청년 일자리를 지원하는 ‘청년희망펀드’에 1000만원을 기부한다고 21일 밝혔다. 춘광 스님은 “청년 일자리 창출과 지원을 위한 국가적 노력에 천태종도 힘을 보태고자 1000만원을 기부키로 했다”며 “취업난으로 고통받는 청년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에 모든 국민이 동참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책꽂이]

    남겨진 자들을 위한 미술(우정아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다양한 상실의 사건 뒤에 겪게 되는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증후들을 미술의 관점에서 읽어 낸다. 오노 요코, 양혜규, 이불, 마르셀 뒤샹 등 현대미술 작가 16인이 어떤 방식으로 시대의 트라우마를 애도하고 증언했는지를 보여 준다. 360쪽. 2만원. 신앙, 그 넓고 깊은 바다(양재오 지음, 책과나무 펴냄) 인간의 가장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종교와 신앙에 대한 견해를 다양한 종교적 관점에서 살펴본다. 인간과 종교, 종교 경험과 본질, 종교와 상징, 그리스도교와 불교, 부활, 기적 등을 다룬다. 300쪽. 2만원.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19] 도굴꾼에 남아나지 않는 묘지명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19] 도굴꾼에 남아나지 않는 묘지명

    조선시대 장례의식의 마지막 절차는 무덤 앞에 비석을 세우고 지석을 묻는 것이었다. 묘표(墓標)나 묘갈(墓碣), 신도비(神道碑)라고 하는 묘비에는 죽은 이에 관한 정보가 담기게 마련이다. 신도비는 일반적으로 묘표나 묘갈보다 죽은 이의 행적을 더욱 자세히 새겨 놓은 것을 일컫는다. 신도비는 글자 그대로 ‘귀신이 오가는 길에 세워진 묘비’라는 뜻이다. 죽은 이의 혼령이 비석이 세워지는 무덤 동남쪽으로 오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지석(誌石)은 별도로 만들어 봉분 앞에 묻는다. 죽은 이의 행적을 담는 것은 묘비와 다르지 않지만 무덤의 위치와 방향이 내용에 덧붙여진다. 조선시대 문집을 엮은 ‘대동야승’(大東野乘)은 ‘묘갈은 묘밖에 세우고, 지석은 묘 앞에 묻는 것인데, 이는 만일 세월이 오래되어 비갈이 없어지면 지석을 상고하여 누구의 묘인가를 알고자 하는 데 있다’고 적었다. 죽은 이의 덕과 공을 후세에 전하고자 묘비나 지석에 적는 글이 묘지명(墓誌銘)이다. 죽은 이의 성씨와 벼슬·고향 같은 기본적인 정보를 지(誌)라 하고, 죽은 이를 칭송하는 문학적인 글을 명(銘)이라 했다지만 실제로는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요즘엔 지석이라는 표현과 묘지명이라는 표현도 굳이 구별해서 쓰지 않는 것 같다. 지석의 가장 이른 사례는 4세기 중엽 고구려 안악3호분에서 보인다. 백제 무령왕릉의 주인을 알 수 있었던 것도 지석 때문이었다. 1971년 발굴 당시 널길 입구에서 2개의 장방형 판석을 발견했는데, 무령왕(462~523)과 왕비의 지석이었다. 특히 왕비의 지석 뒷면에는 왕의 매지권이 새겨져 있었다. 매지권(買地券)이란 죽은 사람이 지신(地神)으로부터 묻힐 땅을 사들인 증서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불교의 화장 풍습으로 지석의 모습을 찾기 어렵다. 같은 불교국가라도 고려시대로 접어들면 화장 이후 매장하는 풍습에 따라 검은 석판에 글을 새겨넣은 지석이 보인다. 조선시대가 되면 성리학의 가르침에 따라 매장이 일반화됐고, 도자기 산업의 발전으로 도자 지석이 크게 유행한다. 도자 지석은 시기별로 청자, 분청, 백자, 옹기 등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문제는 이 지석을 무덤이 아니라 무덤 앞에 묻은 만큼 도굴꾼의 손을 타기 쉽다는 것이다. 지난해는 한 사립 박물관장이 무려 558점의 지석을 숨기고 있다가 경찰에 적발되기도 했다. 모두 도굴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대가인 송강 정철(1536∼1593)의 지석도 같은 운명이 됐다. 송강의 무덤은 경기 고양시에서 현종 6년(1665) 충북 진천으로 이장됐다. 그런데 진천의 송감 무덤 앞에 묻혀있어야 정상인 묘지명이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는 것이다. 대전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가 붙잡은 장물아비의 치부책에 송강 묘지명도 들어있었다고 한다. 26.5x18㎝ 크기의 사각형 백자 23개로 이루어진 송강 지석은 조선시대 묘지명의 백미라고 해도 좋다. 중앙박물관은 이 묘지명을 지난 2000년 안팎에 구입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송강의 후손들은 묘지명이 도굴된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도굴 사실이 확인되면 묘지명은 송강 후손들에게 다시 돌려주게 된다고 한다. 도굴꾼과 장물아비는 법에 따라 처벌을 받을 것이다. 그래도 죽은 자의 안식마저 빼앗은 죄에 대한 하늘의 처벌은 남는다. 서동철 수석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시리즈 전체보기
  • [글로벌 인사이트] 中, 경제 개발 ‘당근책’… 티베트·위구르인 안정 vs 저항 ‘갈림길’

    [글로벌 인사이트] 中, 경제 개발 ‘당근책’… 티베트·위구르인 안정 vs 저항 ‘갈림길’

    9월 1일은 티베트가 중국에 강제 편입돼 시짱(西藏) 자치구가 된 지 50주년 되는 날이었다. 10월 1일은 신장(新疆) 위구르 자치구가 선포된 지 60주년을 맞는 날이다. 두 지역의 독립세력은 그동안 자치확대·분리·독립이라는 단계적 목표를 위해 끊임없이 저항해 왔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응징이라는 채찍과 경제 성장이라는 당근으로 두 ‘화약고’를 집요하게 관리했다. 시짱과 신장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살펴봤다. ●분신으로 저항해 온 시짱, 멀어지는 독립의 꿈 지난 1일 시짱의 성도 라싸에 있는 포탈라궁 광장. 자치구 선포 50주년을 기념하는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다. 열병식에 나선 군인들은 마오쩌둥(毛澤東), 덩샤오핑(鄧小平),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胡錦濤) 등 전직 국가주석과 시진핑(習近平) 현 주석의 대형 초상화를 들고 행진했다. “나라를 다스리려면 반드시 변경을 다스려야 하고, 변경을 다스리려면 먼저 시짱을 안정시켜야 한다”(治國必治邊, 治邊先穩藏)는 시 주석의 어록이 쓰인 대형 플래카드가 행사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여 줬다. 기념식에 맞춰 저항의 목소리도 나왔으나 주목받지 못했다. 인도 다람살라에 있는 티베트 망명정부(CTA)는 “지난 50년은 티베트 역사의 암흑기였다”는 성명서를 냈다. 쓰촨성의 한 라마교(티베트 불교) 스님은 달라이 라마 14세의 사진을 들고 시위를 하다가 공안에 끌려갔다. 13세기 이후 중국과 영국의 영향을 번갈아 받아 오던 티베트는 1911년 신해혁명 이후 독립의 기쁨을 누렸다. 그러나 신중국이 건설된 이듬해인 1950년 10월 인민해방군이 티베트를 점령했다. 1959년 티베트 곳곳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대규모 봉기가 분출했고 진압 과정에서 13만명이 사망했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이때 인도로 망명했다. 1965년 시짱 자치구로 공식 편입됐다. 2009년 이후에만 140여명이 분신하며 독립을 외쳤다. 중국의 시짱 관리는 치밀했다. 경제 개발은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었다. 티베트 국내총생산(GDP)은 1965년 3억 2700만 위안에서 지난해 920억 8000만 위안으로 50년간 281배가 늘었다. 올해 티베트 관광 수입만 180억 위안에 이를 전망이다. 현재 시짱의 한족은 800만명으로 티베트족 600만명을 훌쩍 넘어섰다. 소수민족을 전통적인 생활터전에 남겨둔 채 한족을 이주시켜 소수민족 구성 비율을 낮추는 중국 특유의 소수민족 관리 방식 탓이다. 중국은 소수민족에 대입 가산점 부여, 한 자녀 정책 예외 등과 같은 혜택도 주고 있다. 중국의 시짱 통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전략이 티베트의 정신적 지주인 달라이 라마 무력화이다. 최근 미국의 팝 밴드 본 조비와 마룬5의 중국 공연이 잇따라 취소됐는데, 밴드 멤버 중 일부가 달라이 라마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기념식을 맞아 달라이 라마가 1995년 선정한 ‘판첸 라마’ 게둔 초에키 니마의 근황을 공개했다. 판첸 라마는 티베트 불교의 2인자로 최고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가 입적하면 그의 ‘환생자’를 찾아내는 임무를 맡는다. 중국 정부는 당시 6세였던 니마를 비밀 장소에 연금했다. 중국은 20년 전 니마를 감춘 대신 5세 소년이던 기알첸 노르부를 판첸 라마로 정했다. 시 주석은 지난 6월 ‘어용’ 판첸 라마를 만나 “티베트 불교와 중국 사회주의가 조화를 이루도록 노력해 달라”고 당부했다. 노르부는 시 주석에게 “민족 단결을 수호하겠다”며 충성을 맹세했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자기가 사망한 뒤 어용 판첸 라마가 달라이 라마를 낙점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 “우매한 달라이 라마가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슬픈 일이지만 누대로 내려온 전통을 지금 끝내는 게 낫다”고 말했다. 지도자의 환생을 믿는 티베트 불교 고유의 ‘활불전세’(活佛轉世)를 포기해야 할 정도로 달라이 라마 14세는 위기에 처해 있다. ●신장 위구르 독립세력 10월 테러 감행 가능성 ‘일촉즉발’ 중국 입장에선 분신으로 항거하는 시짱보다 신장 위구르족의 테러가 훨씬 위협적이다. 특히 2009년 7월 한족과 위구르족이 충돌해 197명이 숨지고 1700여명이 다친 대참사 이후 중국은 위구르족을 강력히 통제하고 있다. 이슬람교 특유의 히잡을 쓰는 것과 수염을 기르는 것도 금지했다. 시진핑 체제 들어서도 톈안먼(天安門) 차량 테러, 쿤밍 철도역 흉기테러, 우루무치 기차역 폭탄 테러가 잇달아 발생했다. 10월 1일 신장 자치구 선포 60주년을 계기로 테러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특히 최근 들어 위구르 분리주의자들이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인 이슬람국가(IS) 쪽으로 급속히 기울고 있어 중국 당국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IS는 그동안 중국을 향해 위구르족 탄압을 중지하라고 경고해 왔다. 지난 9일에는 중국인과 노르웨이인 인질을 ‘판매’하는 광고까지 냈다. 신장 출신 위구르인 300명 정도가 IS에 가담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관광객 20명이 사망한 최근의 방콕 테러도 위구르 무장독립단체인 동투르키스탄 이슬람운동(ETIM)이 저지른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검거된 용의자와 잠적한 핵심 용의자는 모두 신장 위구르인이다. 용의자들은 지난 7월 태국 정부가 위구르족 난민 109명을 중국으로 강제 송환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이번 테러를 자행했을 가능성이 크다. 터키계 인종인 위구르족은 2차 대전 후 한때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을 세우고 독립했으나 중국은 1949년 신장 지역을 합병한 뒤 1955년에 자치구를 출범시켰다. 중국에 신장은 전략적·경제적 가치가 큰 지역이다. 고대 실크로드가 통과하던 이곳은 중앙아시아와 중동, 유럽을 잇는 대외 교역로이다. 특히 미국에 비해 해양력이 약한 중국으로서는 석유 등 필수 물자의 공급을 위한 전략 루트이다. 시 주석이 추진하는 일대일로(一帶一路·육해상 실크로드)의 핵심 거점도 신장이다. 1992년에는 대유전이 발견되기도 했다. 시짱과 마찬가지로 중국이 신장을 관리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경제 개발이다. 국가 통계국에 따르면 신장의 GDP는 지난 5년 동안 평균 11.1%씩 성장했다. 1인당 GDP도 지난해 7037달러로 5년 전보다 3배 이상 올랐다. 창업 기업들 사이에선 “상하이, 선전, 푸둥에서 기회를 잡지 못했다면 이젠 신장에서 기회를 잡으라”는 경구가 회자되기도 한다. 하지만 개발의 과실을 이주해 온 한족이 주로 차지해 위구르족의 분노는 더욱 치솟고 있다. 인민일보는 요즘 ‘신장 도약 60년’이란 제목으로 신장의 발전상을 연일 보도하고 있다. 지난 10일자 르포 기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저녁 10시, 베이징의 상점은 영업을 끝내는 시간이지만 신장의 야시장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양꼬치를 파는 위구르족 아주머니의 호주머니는 점점 두둑해지고 있다.” 아랍인처럼 생겼고 이슬람교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60년 동안 멸시와 차별을 당한 위구르인들이 호주머니가 조금 두둑해졌다고 분노를 억누를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베이징 이창구 특파원 window2@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17] 서울 낙산 안양암 마애관음보살의 상징성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17] 서울 낙산 안양암 마애관음보살의 상징성

    뭔가 답답하면 ‘나무관세음보살’하고 되뇌이는 할머니들을 본다. 대표적인 불교경전의 하나인 ‘법화경’의 ‘관세음보살보문품’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중생이 온갖 고통과 고뇌에 시달릴 때 한 마음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준다고 가르친다. 불교의 깊은 가르침을 알 길 없고, 해탈에 이르기는 더 더욱 어려운 중생이라도 그저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하고 마음을 모아 부르기만 하면 구원해준다는 것이다. 불교는 인도에서 티베트를 거쳐 중국, 한국, 일본으로 퍼져나가면서 수많은 관음성지를 만들었다. 관음보살이 살고 있다는 전설의 산 포탈라카(Potalaka)는 스리랑카에서 멀지 않은 인도 남동쪽에 자리잡은 것으로 믿어졌다. 따라서 관음성지, 즉 포탈라카의 상징성이 부여된 도량은 바닷가에 위치한 산을 중심으로 세워졌다. 바다가 없는 티베트조차 키추강을 바다로 상정하고 수도 라사를 포탈라카로 의미를 부여했다. 라사의 포탈라(Potala)궁은 글자 그대로 관음보살이 살고 계신 곳이다. 그러니 포탈라궁의 주인 달라이라마는 관음보살의 화신이다. 티베트 사람들이 인도에서 망명정부를 이끄는 달라이라마를 변함없이 정신적 지도자로 여기는 까닭이다. 중국에서 포탈라카는 다양한 음역(音譯)이 이루어졌지만, 일반적으로 보타락가(補陀洛迦)로 표기한다. 저장(浙江)성 닝보(寧波) 저우산(舟山)군도의 보타도(補陀島)가 대표적 관음성지다. 우리나라에서는 의상대사가 신라 문무왕 11년(671)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관음굴을 지었다는 강원 양양 낙산사 홍련암을 최초의 본격 관음도량으로 보아야 한다. 양양 낙산사를 비롯해 인천 강화 석모도의 낙가산 보문사, 경남 남해 보광산 보리암은 우리나라의 3대 관음성지로 꼽힌다. 여기에 전남 여수 돌산도의 향일암을 포함시켜 4대 관음성지로 부르기도 한다. 낙산이나 낙가산은 모두 보타락가의 줄임말이다. 서울의 낙산 역시 보타락가산을 상징한다. 연극의 거리로 유명한 대학로 뒷산이다. 안앙암은 낙산 남동쪽 기슭인 창신동 산기슭에 조금은 위태롭게 자리잡고 있다. 커다란 바위에 관음보살이 새겨졌는데, 지붕을 씌우고 문을 달아 전각의 역할을 하도록 했다. 높이 3.53m의 관세음보살상 곁에는 마애불을 조성한 내력도 새겼다. 관음보살이 조성된 1909년은 일본제국주의의 한국 병탄이 이루어지기 바로 전해가 된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긴 대한제국의 고통이 갈수록 깊어지던 시기다. 이후 6.25전쟁으로 낙산이 피난민의 판잣집으로 가득찬 뒤에도 관음보살은 위안을 주는 존재였을 것이다. 불교적으로 낙산 관세음보살은 서울 주민 모두, 나아가 국민 모두의 구원자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초의 조각이라고는 해도, 안양암 마애관음보살상이 갖는 과소평가되고 있는 듯 하다. 창신동은 청계천과 함께 한국 봉제산업의 역사가 깃들어 있는 곳으로, 지금도 동대문 패션타운의 배후생산기지로 역할을 해내고 있다. 창신동이 서울의 새로운 문화적 부심(副心)으로 떠올랐을 때 안양암 마애관음보살상은 매우 중요할 역할을 해낼 것이다. 서동철 수석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시리즈 전체보기
  • 최성 고양시장 “유엔 제5사무국 고양시 유치 적극 추진”

    최성 고양시장 “유엔 제5사무국 고양시 유치 적극 추진”

    유엔 제5사무국을 대한민국에 유치하기 위한 범국민추진운동이 고양시에서 시작됐다. ‘유엔 제5사무국 대한민국 유치를 위한 고양시 범시민추진위원회’는 최성 고양시장을 비롯해 김태원(새누리당), 유은혜(새정치), 심상정(정의당) 국회의원과 선재길 시의장 및 이화우 부의장 등 1000여 명이 모여 활동하는 모임으로, 지난 8일 고양시 어울림누리 극장에서 그 막을 올렸다. 국회의원 재직 시절 외교전문가로 활동한 바 있는 최성 시장은 이날 축사에서 “유엔 제5사무국 고양유치 범시민추진위의 출범은 고양시 여야 국회의원을 비롯해 기독교, 가톨릭, 불교 및 각 사회단체장이 모두 함께 뜻을 모은 초당적이고 범종교적인 명실상부한 범시민추진위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크다”면서 “세계적 국제회의 인프라인 킨텍스가 있고, 남북접경지역에서 평화통일특별시를 지향하는 고양시에 반드시 유치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최 시장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외교부장관으로 재직할 당시 외교통상위원회에서 오랫동안 함께 일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뉴욕에 본부를 두고 있는 유엔은 스위스 제네바에 제2사무국,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제3사무국, 케냐 나이로비에 제4사무국을 운영하고 있으며, 현재 45억 인구가 살고 있는 아시아에 인권과 평화 증진을 위한 유엔 제5사무국 유치 필요성에 대해 내부적으로 활발히 논의 중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인생 이모작 준비 베이비부머 “사회적경제포럼에 모여라”

    은퇴 후 소득이 고민되고 경험을 다시 살려보고 싶은 베이비붐 세대는 서울시 사회적경제포럼에 참여해보자. 서울시와 시니어사회적경제지원조직네트워크는 11일 오후 2시 서울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에서 ‘50+사회적경제 포럼’을 개최한다. 발표에서 김만희 앙코르브라보협동조합 이사장은 50대 이상 세대가 취약계층이 아니며 사회 적재적소에 효율적으로 배치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박주언 불교사회적경제지원본부장도 이들 세대의 창업 지원 정책이 확대돼야 한다고 밝힌다. 분야별 발표 후에는 정진우 서울시 사회적경제과장, 최영미 서울협동조합협의회 대표, 이재민 가톨릭카리타스사회적기업지원센터장, 박향희 나는조합 사무국장이 토론을 펼친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세종로의 아침] 종교의 파격/김성호 문화부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세종로의 아침] 종교의 파격/김성호 문화부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종교는 보수적인 영역으로 인식된다. 현실의 안정과 평화의 공존을 중시하는 속성 탓이다. 하지만 인류사를 보자면 보수보다 진보와 개혁을 추구했던 종교가 더 성했고 높이 평가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나에게 오라’고 외쳤던 예수는 지배층과 권력이 아닌, 소외되고 약한 이의 편에 줄곧 서 있었다. 그래서 예수는 실천적 개혁가로 평가되곤 한다. ‘성전을 허물라‘며 부패한 종교와 민심에 호통쳤던 파격은 변혁과 파격의 상징이다. 그러나 보편의 인식과 통념을 깨는 변혁의 측면에서 종교는 대체로 더딘 영역에 속한다. 특히 인간 생명과 존엄의 카테고리를 지키려는 의지와 집단의 대응은 확고하다. 종교계에서 ‘이단’의 대부분은 천부의 생명 가치를 저버린 파격에 대한 엄한 단죄다. 실제로 한국 천주교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죽음에 이르게 한 안중근(토마스)을 신자로 공식 인정한 건 2010년의 일이다. 오래도록 지우지 않았던 ‘살인자’의 오명을 털고 일제에 대항한 천주교 형제로 받아들인 그 전환에 많은 이들이 박수를 보냈었다. 그런가 하면 ‘순혈’이라는 초기의 원칙에 충실해 수혈을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은 국내 개신교계로부터 여전히 이단 취급을 받는다. 불교계가 우리 사회의 모순적 사안들에 대한 발전과 개혁의 실천적 대응에 나선 것도 근래 들어서의 일이다. 종교계에 통념과 보편의 상식처럼 만연한 구각을 깨고 소외되고 약한 이들을 보듬으려는 변혁의 몸짓들이 일어 일반의 시선을 잡아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자비의 희년(禧年)’을 맞아 12월 8일부터 ‘그리스도 왕 대축일’인 내년 11월 20일까지 낙태 경험 있는 여성을 용서하는 권능을 사제에 부여하는 교서를 내렸다. 한시적 사면이지만 낙태를 언급조차 하기 어려운 금기로 여긴 천주교로선 엄청난 파격이다. 취임 이후부터 줄곧 개혁 드라이브를 걸었던 교황의 또 다른 역사적 전환이 세계인들의 귀와 눈을 집중시키고 있다. 그런 한켠에서 국내 개신교계 진보 교단들로 구성된 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동성애자에게 눈길을 돌려 주목된다. 천부의 성(性)을 거스르고 배반한다며 혐오 대상으로 여겨 왔던 성소수자를 이해하고 더불어 살자는 배려 운동이다. 우리 개신교의 뿌리인 미국 개신교계에선 많은 교단이 성소수자를 껴안고 있다. 동성애자를 교인으로 받아들이고 목사 안수까지 주는 교단이 늘고 있다. 그런 추세 말고도 약자와 소수자 배려와 껴안기가 종교의 큰 가치라고 할 때 우리 사회가 그 파격에 관심 가질 이유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NCCK는 성소수자 보듬기에 나서기 앞서 고민이 많다고 한다. 우선 사회적 통념이 넘어야 할 큰 벽이라는 걱정을 숨기지 않고 있다. 같은 개신교 보수 교단들의 반대와 견제는 더 넘기 힘든 장애라고 호소한다. 실제로 보수 개신교단들은 크고 작은 집회나 예배에서 ‘동성애자 절대 불가’의 목소리를 더욱 높여 가고 있다. 개신교계가 함께 동성애자를 품어 안기까지는 어쩔 수 없이 많은 진통과 곡절이 따를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kimus@seoul.co.kr
  • 해외여행 | 몽골-여자들만의 캠핑 7 Days in Mongolia①울란바토르 Ulaanbaatar

    해외여행 | 몽골-여자들만의 캠핑 7 Days in Mongolia①울란바토르 Ulaanbaatar

    Mongolia camping 얼마 전에 <천재 유교수의 생활>이라는 만화책을 읽고 기록해 둔 글이 있다. 몽골 유목민들은 여정 중에 ‘어워Ovoo, 일종의 성황당’를 만나면 세 바퀴를 빙글빙글 돌며 기도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주인공이 만난 몽골 소녀는 이런 이야기를 한다. ‘기도를 하는 이유는 신이 이루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간절하게 꿈을 향해 내가 노력하겠다는 다짐이라고.’ 그 에피소드를 보며 꼭 몽골에 가 보리라 다짐했었다. 몽골로 캠핑 가실래요? 끝없이 넓고 푸른 하늘과 풀과 흙이 펼쳐진 초원, 그 사이를 달리는 우리. 어워에서 빌었던 소박하고도 간절한 소원만큼이나 몽골은 특별한 곳이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세계 곳곳을 여행해 왔지만, 언젠가는 꼭 가 보리라 맘에 담아 두었던 여행지가 몇 군데 있다. 그중 하나가 몽골이었다. 몽골을 떠올리면 막연히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는 유목민과 게르가 생각난다. 이런저런 단순하고 당연한 고정관념 덕에 몽골 여행에 대한 두려움이나 걱정은 없었다. 마냥 아름다운 하늘과 초원, 말을 타고 바람을 가르는 멋진 나를 상상하며 비행기에 올랐다. 세 시간 남짓의 길지 않은 비행을 하고 도착한 울란바토르 칭기스칸 국제공항은 생각보다 작았다. 공항 밖에서 만난 현지 가이드와 운전사가 안내한 곳에는 빈티지한 디자인의 러시아제 차량 푸르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캠핑 전문가 주안나다 언니와 미술큐레이터 최윤정 언니, 여행작가인 나(봉현)까지 여자 셋이 함께하는 몽골에서의 ‘세븐데이즈’. 몽골에서의 첫 순간부터 우리들은 새로움과 설렘에 떨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어워에 허락을 구하다 사방에 지평선을 끼고 있는 초원을 다니다 보면 그 거리조차 가늠하기 힘든 곳, 곳곳에 오색 천으로 장식된 돌탑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몽골에서는 이를 ‘어워’라고 부르는데, 우리의 서낭당과도 같은 곳으로 이정표 역할도 한다. 그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삶과 자손의 안녕을 기도하는 장소이고, 낯선 자들에게는 그 땅을 지배하는 신령에게 ‘내가 이 땅을 지나가도 되겠습니까’ 공손히 허락을 구하는 장소다. 돌탑을 구성하는 돌무더기뿐만 아니라, 짐승의 두개골, 종교적 장식품, 아끼는 물건들, 미처 다 녹지 않은 초, 사진 등이 ‘어워’ 주변을 장식하기도 한다. 행여나 장난 삼아 재미 삼아 오는, 무작위 다수의 사람들이 어지럽히는 기운 때문에, 신성한 ‘어워’ 주변이 악령으로 덮히기도 한다고. ●울란바토르 Ulaanbaatar Улаанбаатар 캠퍼들의 전초기지 도심에 자리한 선진그랜드 호텔. 낯선 도시의 아늑한 호텔 방에 모여 다음날 일정을 이야기한 후 잠자리에 들었다.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밤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반짝거렸다. 아침 일찍 일어나 한국식과 서양식을 모두 맛볼 수 있는 호텔 조식을 든든히 먹고, 마트에 들러 생필품과 먹거리를 구입해 잔뜩 차에 싣고 울란바토르를 떠났다. 인구수보다 차가 더 많다는 울란바토르의 교통정체를 힘겹게 벗어나는 동안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순간 눈을 떠 보니 거짓말처럼 사진으로만 접해 왔던 몽골의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차에 에어컨이 없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 왔다. 햇빛은 뜨거웠지만 습도가 높지 않아 끈적임이 없어 더위도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곳곳에 말이 있고 말을 탄 사람이 있고 양떼와 소가 있고 어워와 게르가 보였다. 잠시 멈춰 서서 발을 디딘 몽골의 땅 위에서, 펼쳐진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여자 셋이 두 팔 벌려 뛰기 시작했다. 난감한 문제에 봉착하다 우리의 첫 목적지는 울란바토르에서 350km, 차를 타고 약 대여섯 시간 떨어진 어기호수였다. 비포장도로로 달리는 길은 아름다운 초원의 풍경에도 불구하고 길고 피로했다. 차 안에서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관즈’가 나타났다. 한국의 휴게소 같은 개념이지만 제대로 된 휴게시설이라기보다는 몽골인들의 집 겸 식당이다. 그곳에서 양고기 덮밥과 고기완자 그리고 당근과 감자로 만든 샐러드, 양고기를 넣은 국수 등 몽골의 음식을 맛보았다. 도시의 레스토랑에서 먹은 잘 구워진 양고기 스테이크와는 다르지만 투박하고 짭짤한 것이 꽤나 맛있었다. 음식과 함께 수테차소젖을 넣은 몽골식 밀크티를 끓여 만든 전통차를 주전자 가득 내준다. 몽골을 여행하다 보면, 제일 난감할 때가 화장실을 가야 할 때다. 나무 한 그루 없는 초원을 달리던 중에 차를 멈추고 볼일을 봐야 할 때는 우산이 필수다. 긴 치마를 위에 입는 것도 좋다. 땡볕 아래에 나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 부끄러워 관즈에서 해결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금물. 관즈의 화장실은 아래를 차마 내려다볼 수 없을 정도로 깊고 어두운 구멍에 널판지 몇 개를 올려놓은 것이 전부다. 우리는 차라리 초원의 풀들에게 실례를 범하겠노라며 그렇게 몽골에 적응해 가기 시작했다. 음양이 조화된 몽골의 국기 몽골의 국기를 보면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잇는 무구의 형상과 음양의 조화를 상징하는 문양이 그려져 있다. 여러 종교의 유입에도 불구하고 몽골의 풍토에는 샤머니즘과 불교 등이 가장 적합하여 현재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종교는 삶의 방식과 다르지 않다. 바람도 물도 하늘도 땅도 그리고 초원에 함께 살아가는 동식물 모두 하나하나 의미를 지닌 신이자 신의 자손이다. 에디터 천소현 기자 글 Travie writer 봉현, 최윤정 큐레이터 일러스트 봉현 사진 Travie photographer 이승무 취재협조 몽골리아 세븐데이즈 www.mongolia7days.com, 미야트 몽골항공 www.miat.com, 02 756 9761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 해외여행 | 몽골-여자들만의 캠핑 7 Days in Mongolia③하라호름 Karakorum

    해외여행 | 몽골-여자들만의 캠핑 7 Days in Mongolia③하라호름 Karakorum

    ●하라호름 Karakorum Хархорум 웅장하고 소박한 역사의 흔적 게르 캠프는 하라호름이라는 소도시에 위치해 있었다. 하라호름은 칭기스칸이 만들었다는 몽골 최초의 도시다. 하라호름을 관통하며 흐르는 오르혼강 유역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데 번성기의 하라호름은 이슬람 사원, 가톨릭 성당, 교회, 사원 등의 다양한 종교시설과 궁전 등이 있는 국제적 도시였으나 수많은 전쟁을 겪으며 현재는 에르덴 조 사원만이 남았다. 도시라고 하기에 너무나도 소박한 건물들 사이에 에르덴 조 사원이 자리해 있었다. 100개의 보석이라는 뜻의 몽골 최초의 라마불교 사원은 이 사원을 둘러싼 108개의 스투파와 더불어 바깥에서 보아도 웅장하고 거대했다. 해발 1,400m의 고원에 이룩한 왕궁의 터에 자리 잡은 사원. 남아 있는 몇 채의 건물과 절들 사이로 느린 걸음의 스님들과 손을 곱게 모은 몽골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잘 정돈되고 복원된 사원들을 마주하고 왼편에는 그저 빈 터만이 남아 있다. 바람을 따라 이동하고 또다시 떠나는 몽골 사람들의 삶처럼, 소중한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고자 세워 둔 유적지 한 켠은 미처 시간의 힘을 이겨내지 못한 듯 허물어져 그 자리에 길게 자란 풀들만이 무성했다. 갈래 머리 소녀를 그리다 사원을 나와 밥을 먹고 돌아보니 동네에서 나름 가장 세련된 디자인으로 꾸민 ‘커피’와 ‘피자’, ‘치킨’이라는 간판이 눈에 띄었다. 조용한 가게로 들어서니 주인과 아이들이 반겨 주었다. 여행에서 만나는 아이들은 언제나 예쁘듯, 몽골에서 만난 아이들 또한 그랬다. 통통한 볼에 빨갛게 그을린 피부와 꾸밈없는 웃음은 여행자로 하여금 행복함을 느끼게 해준다. 몽골의 아이들과 할머니들에게 한국에서 준비해 온 폴라로이드 사진기를 꺼내자, 할머니는 집으로 다급히 들어갔다. 5분 후 곱게 화장을 하고 옷매무새를 다듬은 할머니는 아기를 안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카메라 앞에 섰다. 나는 몽골 전통의상을 입고 양 갈래로 머리를 묶은 두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에게 그림을 그려 주었다. 동네 사람들이 다 모인 듯,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은 그림과 폴라로이드 사진을 소중하게 손에 꼭 쥐고 인사를 건넸다. 하라호름에 남은 불교 지금은 불교 사원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과거 하라호름에는 국제도시의 명성답게 세계의 온갖 종교들이 들어와 있었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몽골의 삶과 가장 닿아 있는 불교와 토템사상을 기반으로 한 샤머니즘만이 남아 있다. ‘돌궐’이 아닌 튀르크족 튀르크족은 북방민족 가운데 최초로 문자를 만들어 사용한 민족이다. 보통 돌궐족이라 표기하지만 중국에서 폄하하여 표기하였던 것이라 그들 표현인 ‘튀르크’로 표기하기로 한다. 튀르크족은 야만적인 북방오랑캐라며 그들을 낮추어 기록하였던 중국문헌의 내용들을 일축하면서, 국제적 도시이자 문명사회로서 기능하였던, 그들의 자존감을 표출하는 몇 기의 돌궐비문을 남겨 놓았다. 어떤 비석은 벽으로 둘러친 정방형 벌판에 손길 한 번 닿지 않은 듯 풀숲에 함께 방치되듯 덩그러니 놓여 있어 묘하게도 튀르크제국의 흥망성쇠를 상상할 수 있게 한다. 튀르크의 시조, 낭생설화 튀르크인의 시조에 대한 이야기로 ‘낭생설화’라는 것이 있다. 먼 고대 튀르크인들은 주변의 공격을 받아 어린 사내아이 하나만 남겨두고 모두 죽는다. 이 아이는 인간의 아이를 긍휼히 여긴 늑대에 의해 양육되는데, 훗날 이 아이가 늑대와 결혼하여 열 명의 아들을 낳게 된다. 그 중 ‘아사나(늑대)’라는 이름을 지닌 막내아들의 후손들이 돌궐제국의 칸들을 배출시킨 부족의 조상이 되었다는 이야기. 이는 우리의 단군설화와도 같은 맥락으로 고대의 역사 및 토템사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게르’라는 우주에 잠들다 소나기가 멈출 것 같지 않아 무작정 오늘 머물기로 한 아나르 게르 캠프로 향했다. 비를 맞으며 배낭을 메고 서둘러 들어선 게르 캠프 안은 놀라울 정도로 아늑했다. 양과 말을 기르기 위해 풀을 찾아 여기저기 이동하면서 살기 위한 주거형태인 게르는 나무와 천, 펠트들을 이용해 만들어졌다. 둥근 형태의 게르에는 ‘우주가 둥글다’라는 몽골인의 인식이 담겨 있다는데 자연과 어우러지는 몇 가지 특징들에서 샤머니즘을 중시하는 그들의 마음이 느껴진다. 가운데 기둥을 두어 화로를 피우고 둥글게 거주 공간을 두고 있다. 흰색 천은 강렬한 햇빛을 막아 주어 시원하고, 화로에 불을 때면 가운데 지붕을 통해 연기만 빠져나가고 내부에는 온기만이 남게 된다. 크게 보면 나무로 뼈대를 만들고 천을 두른 형태의 게르는 쉽게 조립과 해체가 가능해서 유목생활에 걸맞게 이동 또한 간편하다. 이동 중에 유목민들의 게르를 방문했는데, 안에는 작은 불단이 놓여 있고 화로 위에서 말젖을 끓여 마유주를 만들고 있었다. 둥근 게르 안에는 침대와 테이블 몇 개가 놓인 중앙 주거공간이 있었고 또 다른 게르에서는 양고기를 말리는 동시에 감자와 쌀 등을 보관하고 있었다. 한 켠에는 불을 때서 요리를 할 수 있는 주방도 있고 언제든 손님을 맞이할 수 있는 또 다른 여유공간도 마련해 두고 있었다. 이날 머문 게르 캠프는 하라호름의 지역적 특색을 그대로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옆에는 강이 흐르고 있었고 그 사이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가까워 보이지만 멀리 자리한 산 중턱에는 양을 기르는 어떤 유목민의 거처가 보였다. 산과 강 사이에는 오래된 배가 움직이지 않고 지난 기억을 담은 채 정박해 있었다. 우리가 하루를 머물기로 한 1호 게르 안에는 세 개의 침대가 둥글게 둘러 놓여 있었고, 깨끗하게 세탁된 침대커버와 수건이 담요 위에 곱게 놓여 있었다. 게르를 지탱하고 있는 나무들에는 알록달록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화로가 통해 있는 천장에서는 빛이 살며시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우리는 침대를 하나씩 선택한 후에 가방을 내려놓고 제일 먼저 비에 젖은 스카프를 머리맡에 걸어두었다. 게르 또한 우리들의 또 다른 텐트이기에 알록달록한 가렌다도 걸어 놓았다. 하루만 머물 공간이지만 애정을 담아 정리하고 단장하는 시간으로 인해 더욱 아늑하고 편안해졌다. 초원 너머의 지평선 비가 내린 후 몽골의 하늘은 더욱 신비롭다. 해발고도가 1,600m에 이르는 고원국가인 몽골은 그만큼 하늘이 가깝게 느껴진다. 아주 먼 초원의 끝이 가깝게 보이듯, 하늘의 구름과 별이 손에 잡힐 것만 같다. 오후에 비가 많이 내린 탓일까. 이날 밤은 별이 많이 보이지 않았다. 몸이 시릴 만큼 기온이 뚝 떨어졌다. 입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패딩점퍼를 꺼내 입었다. 밤 10시가 넘어서야 해가 지기 시작하고 11시가 되어서야 어스름이 깔린다. 노을이 너무나 아름다웠기에 새벽 4시에 일어나 다시금 옷을 챙겨 입고 일출을 보러 나갔다. 5시쯤 뜰 거라고 생각한 해는 6시쯤에야 떠올랐다. 매일 뜨고 지는 해지만 하늘이 가깝고 평야가 드리운 몽골에 와 있다면 꼭 일출을 느껴 보자. 두 눈을 뜨고 보기 어려울 만큼 강렬한 둥근 해가 지평선을 넘어 선명하게 떠오른다. 카메라에 담을 수 없는 감동적인 풍경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여행을 할 때의 잠자리는 낯선 누군가의 공간을 잠시 빌리는 것이다. 짐을 놓아 두고 잠만 자는 공간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평생이라는 긴 시간 중 특별한 어느 하루라고 생각한다. 어떤 날이든 단 한 번의 추억이고 순간이다. 그러는 사이 예쁜 미소의 몽골 아가씨가 따뜻한 물과 차를 가져다주었다. 화로에 불을 때고 차 한 잔을 마시며 몸을 녹이는 우리들의 공간은 지금 이 순간, 그 어느 곳보다 평화로웠다.” 에디터 천소현 기자 글 Travie writer 봉현, 최윤정 큐레이터 일러스트 봉현 사진 Travie photographer 이승무 취재협조 몽골리아 세븐데이즈 www.mongolia7days.com, 미야트 몽골항공 www.miat.com, 02 756 9761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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