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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화암사 ‘대시주’무인 성달생 위패 모신 한 칸짜리 사당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화암사 ‘대시주’무인 성달생 위패 모신 한 칸짜리 사당

    소박하면서도 단정하게 세월의 흔적을 머금은 사찰을 두고 흔히 ‘곱게 늙은 절집’이라고 표현한다. 아마도 안도현 시인이 ‘화암사, 내사랑’에서 말한 ‘잘 늙은 절 한 채’의 변주(變奏)가 아닐까 싶다. 시인이 ‘인간세(人間世) 바깥에 있는 줄 알았다’고 했던 절은 완주 화암사(花巖寺)다. 절에 오르기는 쉽지가 않다. 시인이 ‘계곡이 나오면 외나무다리가 되고 벼랑이 막아서면 허리를 낮추었다’고 한 그대로다. 그렇게 ‘마을의 흙먼지를 잊어 먹을 때까지 걸으니까’ 나타나는 절이 화암사다. 그런데 ‘화암사 중창비’의 분위기도 안 시인의 묘사와 닮아 있다. ‘바위 벼랑의 허리에 한 자 폭 좁은 길이 있어 그 벼랑을 타고 들어서면 이 절에 이른다.…바위가 기묘하고 나무는 늙어 깊고도 깊다’ 비문은 1441년(세종 23) 지은 것이다.●‘하앙식 구조’ 화암사 극락전 국보 지정 화암사라면 국보로 지정된 극락전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1981년 해체 수리하면서 찾은 기록으로 1605년(선조 38) 세운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극락전은 이른바 하앙식(下昻式) 구조로 유명하다. 복잡한 설명이 뒤따라야 하지만, 한마디로 지붕을 높여 맵시 있게 보이기 위한 건축적 장치라면 크게 망발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는 사실을 건물의 겉모습만으로 알아차리기란 전문가도 쉽지 않다. 하앙식 구조가 아니더라도 날아갈 듯 아름다운 지붕이 우리나라에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보통 사람의 눈에는 극(極)·락(樂)·전(殿) 세 글자를 한 글자씩 따로따로 내건 편액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물론 편액을 이렇게 만든 것도 하앙식 구조이기 때문일 것이다.화암사를 말할 때 강당에 해당하는 우화루도 빼놓으면 안 된다. ‘잘 늙은 절 한 채’라는 이 절의 인상은 아마도 우화루에서 결정되지 않았을까 싶다. 극락전과 우화루, 여기에 적묵당과 불명당이 마당을 감싸며 이른바 산지중정형 사찰의 모습이 완성됐다. 화암사가 아름다운 것도 각각의 전각도 전각이지만 이들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오늘은 극락전도, 우화루도 아닌 화암사에서 가장 작은 철영재(英齋)로 눈길을 돌려보고자 한다. 극락전 동쪽에 자리잡은 철영재는 불과 한 칸짜리 사당이다. 뜻밖에 조선 초기의 무신(武臣) 성달생(1376~1444)의 위패를 모셔 놓았다. 절집에 무신의 사당이라니….●철영재 현판 글씨는 문인 자하 신위가 써 철영재 현판 글씨는 자하 신위(1769~1845)가 썼다. 추사 김정희와 비교되곤 하는 조선 후기 문인이다. 자하는 금강경을 필사하고 감상을 적은 ‘서금강경후’(書金剛經後)를 남겼을 만큼 불교에 심취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런 인물이 사당의 현판 글씨를 썼다니 성달생과 화암사, 나아가 성달생과 불교의 인연이 결코 간단치 않음을 짐작하게 한다. 화암사는 창건 연대가 통일신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중창비는 전한다. 원효와 의상도 수도했다고 적었다. 1425년(세종 7)부터 1440년(세종 22)까지는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졌다. 당시의 대(大)시주가 성달생이다. 그는 1417년(태종 17)부터 이듬해까지 전라도관찰사 겸 병마도절제사를 지냈는데, 이때 화암사와 인연을 맺은 듯하다. 그런데 인연은 중창에 머물지 않는다. 조선시대 불경(佛經) 간행의 역사에서 화암사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그 중심에 성달생과의 인연이 있다. 성달생은 개성유후(開城留後)를 지낸 성석용의 아들이다. 유후는 조선의 창건 수도인 개성을 다스리는 벼슬이었다. 태종실록에 있는 성석용의 졸기(卒記)에는 ‘글씨를 잘 썼다’는 대목이 보인다. 그런데 글씨라면 그의 아들 삼형제 달생·개·허도 일가견이 있었다.●법화경 등 판각한 조선 불경 간행 중심지 성달생과 성개가 필사한 안심사판 묘법연화경은 최근 보물로 지정됐다. 완주 안심사는 화암사에서 멀지 않다. 화암사와 더불어 불경 판각이 활발했던 안심사에는 금강경, 원각경, 부모은중경 등 조선시대 한글 경판도 다수 전하고 있었지만, 6·25전쟁 때 모두 불타 버렸다고 한다. 성달생의 글씨로 찍은 화암사판 불경은 1443년(세종 25)부터 쏟아져 나온다. 법화경, 능엄경, 중수경, 부모은중경, 지장경, 육경합부, 시왕경 등 모두 12종에 이른다. 육경합부(六經合部)는 금강경, 화엄경, 능엄경, 아미타경, 관세음보살예문, 법화경의 한 대목씩을 엮은 것이다. 성달생의 아들과 손자는 단종 복위 운동으로 나란히 목숨을 잃은 성승(?~1456)과 성삼문(1418~1456)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성삼문은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성달생이 필사한 화암사판 법화경에는 성승과 성삼문도 발원자로 참여했다. 화암사판 법화경은 이후 복각본만 24종이 나왔다. 조선시대 법화경은 성달생 글씨를 판각한 것이 대부분이라고 봐도 크게 과장은 아니다. 철영재 현판을 쓴 자하 역시 ‘성달생 법화경’을 읽으며서 불교에 대한 인식 수준을 높여 갔을 것이다. 그러니 화암사는 성달생의 존재로 ‘조선시대 불경 간행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 절 경내, 그것도 큰 법당 곁에 이런 인물의 사당을 지은 것도 이해할 만하다. 화암사에 남은 성달생의 흔적은 철영재에 그치지 않을 수도 있다. 중창비는 높이 130㎝, 폭 52㎝, 두께 11㎝이니 그야말로 아담하다. 비문은 15세기 중엽 지었다지만 비석을 세운 것은 1572년(선조 5)이다. 중창비에는 비문을 누가 짓고, 글씨를 누가 썼는지 나타나 있지 않다. 매우 이례적이다. 그 주인공으로 성달생을 떠올려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비문을 지었다는 1441년은 그가 죽기 3년 전이다. 아들과 손자가 ‘역모’에 가담했으니 성달생도 무사하지 못했다. 세조실록에는 ‘예조에서 성승의 아비에 대하여 연좌를 청하여 그대로 따랐다’는 대목이 보인다. 파주 무덤의 석물(石物)을 모두 없앤 것이다. 성승과 성삼문이 복권된 것은 1691년(숙종 17)이다. 중창비를 세운 시기 그들은 여전히 ‘대역죄인’이었다. 성달승의 이름을 새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성달생은 일화도 많이 남긴 인물이다. 전라도관찰사에서 내직인 내금위삼번절제사로 옮긴 1418년 세종이 명나라 사신을 전송할 때 직책상 칼을 찼다. 세종이 즉위한 해다. 그런데 상왕, 즉 태종 앞에서 칼을 찼다는 이유로 세종으로부터 질책을 받아 파직된 것이다. 형제의 난을 일으키는 등 칼로 일어선 태종 이방원이 적지 않게 놀랐던 때문일 듯하다. ●유감동 ‘섹스 스캔들’에 연루돼 물의도 성달생은 세종실록의 표현대로 ‘명나라 황제의 친척’이 되기도 했다. 명나라는 공녀(貢女)의 악습을 원나라로부터 물려받았는데, 1408년(명나라 영락 6)부터 1433년(명나라 선덕 8)까지 7차례에 걸쳐 114명의 조선 소녀를 징발한다. 성달생의 열일곱 살난 딸도 여기에 포함됐다. 공조판서 시절이었으니 조선시대를 통틀어 공녀의 부친으로는 가장 벼슬이 높았다. 성달생은 유감동의 간부(奸夫)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유감동은 양반 가문의 딸이자 고위 관리의 부인으로 세종시대 40명 남짓한 조정의 전·현직 관리와 스캔들을 일으켜 물의를 빚었는데, 성달생도 여기에 포함된 것이다. 그는 충청도 초수로 안질을 치료하러 간 세종을 호종하다 세상을 떠났다. 이것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어벤져스’ 베네딕트 컴버배치, 조계사 방문 ‘불교 문화 심취’

    ‘어벤져스’ 베네딕트 컴버배치, 조계사 방문 ‘불교 문화 심취’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조계사를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영화 ‘어벤져스:인피니티 워’ 홍보차 내한한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13일 오전 지인과 통역사와 함께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조계사를 찾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2일 내한 기자회견에 참석한 그는 “내일은 한국에서 개인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절이나 궁에 가보고 싶다”고 언급한 바 있다.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촬영 이후 불교 문화에 빠진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조계사를 구경한 뒤 출국했다. 한편, 영화 ‘어벤져스:인피니티 워’는 어벤져스와 역대 최강 빌런 타노스의 대결을 그린 영화다. 25일 개봉. 사진제공=예거 르쿨트르 (Jaeger-LeCoultre) 연예팀 seoulen@seoul.co.kr
  • 軍·사드 반대주민, 장비·자재 대화 ‘합의’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반대 주민과 국방부가 12일 극적인 합의를 했다. 양측은 이날 오전 트레일러 12대, 덤프트럭 8대 등 30여대 차량의 경북 성주 사드 기지 반입을 둘러싸고 충돌을 빚었으나 대화를 통해 타협점을 찾았다. 양측은 일단 오는 16일 공사 장비·자재 반입을 놓고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경찰은 오후 2시부터 병력을 철수했으며, 시위 주민도 농성을 풀고 자진 해산했다. 양측은 협상에서 트레일러 12대만 기지에 보내 지난해 11월 반입한 포클레인, 불도저, 지게차 등을 빼내기로 했다. 앞으로 협상을 통해 공사 장비·자재를 실은 덤프트럭 반입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국방부와 경찰은 이날 사드 기지 공사를 위한 장비와 자재 반입에 나서면서 사드 반대 주민과 충돌했다. 사드반대 성주·김천 주민과 성주사드배치반대대책위원회 및 원불교비상대책위 관계자 등으로 구성된 시위대 150여명은 사드 기지로 향하는 길목인 진밭교 왕복 2차로를 차량 등으로 막았다. 경찰은 이날 오전 7시 30분부터 진밭교 부근으로 경찰력 3000여명을 투입했다. 사고에 대비해 진밭교 5~6m 아래에 에어매트를 설치했다. 10시 30분부터 강제 해산을 시작했다. 사드 반대 단체 회원, 주민들은 알루미늄 막대기로 만든 격자형 공간에 한 명씩 들어간 뒤 녹색 그물망을 씌워 서로 한 묶음으로 묶은 채 맞섰다. 성주 사드 기지 앞에서의 물리적 충돌은 지난해 4월 26일 발사대 2기 등 배치, 9월 7일 발사대 4기 추가 배치, 11월 21일 공사 차량과 장비 반입에 이어 네 번째다. 경찰의 해산 과정에서 주민 3명이 다쳐 병원으로 이송됐고, 주민 다수가 찰과상을 입었다. 일부 경찰관이 가벼운 상처를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주민의 저항이 거세자 정오부터 강제 해산을 중단했고, 주민과 국방부가 대화를 시작했다. 결국 2시간여 동안 대화 끝에 일시적이나마 타협점을 찾아냈다. 국방부 관계자는 “사드 기지 내 숙소 지붕 방수, 화장실과 오·폐수 처리 시설 개선공사 등 열악한 생활환경 개선을 위한 공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성주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서울 박홍환 선임기자 stinger@seoul.co.kr
  • 베네딕트 컴버배치 합장 논란, 동양인 차별? “정중한 표현 방식”

    베네딕트 컴버배치 합장 논란, 동양인 차별? “정중한 표현 방식”

    첫 한국을 방문한 영국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때아닌 합장 논란에 휩싸였다.11일 오후 입국한 컴버배치는 두 손바닥을 맞대고 허리를 가볍게 숙이는 합장을 했다. 이를 두고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컴버배치의 인사 방법을 지적하는 글들이 올라왔다. 합장은 불교식 인사법이다. 합장을 동양에서 일반적으로 하는 인사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지와 편견이라는 지적들이 나온 것. 일부 네티즌들은 컴버배치의 합장이 넓은 의미의 인종 차별이라고 주장했다. 해당 논란에 영화 홍보사 측은 12일 “컴버배치가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촬영 후부터 불교 문화에 관심이 있었다. 합장에 대해서는 인종 차별의 의도와 의미가 없다. 팬들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하는 그의 표현 방식이었다”고 입장을 전했다. 다수 네티즌들 역시 컴버배치가 한국 팬들에게 예의를 갖춰 인사한 것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한편 12일 열린 ‘어벤져스: 인피니트 워’ 내한 기자회견에는 베네딕트 컴버배치를 비롯 톰 히들스턴, 톰 홀랜드, 폼 클레멘티에프가 참석했다.마블 스튜디오 10주년을 기념하는 ‘어벤져스:인피니티 워’는 역대급 어벤져스 군단이 우주 최강의 적 타노스에 맞서는 과정을 그린다. 오는 25일 개봉.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생애 마지막 커피 주세요”…방콕 ‘죽음 콘셉트 카페’ 인기 이유

    “생애 마지막 커피 주세요”…방콕 ‘죽음 콘셉트 카페’ 인기 이유

    ‘죽음’을 콘셉트로 한 이색 카페가 태국 방콕에서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고 비즈니스인사이더 등 해외 언론이 5일 보도했다. 방콕에 자리잡은 이 카페의 메뉴판에는 아메리카노, 카페라떼 등 흔히 볼 수 있는 커피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생의) 마지막 날’, ‘남은 일주일’(One Week Left), ‘남은 한 달’(One Month Left) 등의 메뉴를 볼 수 있다. 여기서 ‘남아있다’의 뜻은 살아있는 ‘이번 생에 남아있는 날’을 의미한다. 메뉴판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카페의 콘셉트는 바로 ‘죽음’이다. 카페 한 가운데에는 커다란 흰색 관이 놓여있다. 이 카페를 찾은 사람들은 새하얀 관에 누워 몇 분간 죽음을 떠올리고 체험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체험을 ‘인증’한 사람들은 커피를 구입할 때 할인 서비스까지 받을 수 있다. 28세의 한 고객은 “마치 내가 나의 장례식장에 온 기분이었다”면서 “관에 누워 보는 체험을 하고 초콜릿이 들어간 ‘죽음의 스무디’(메뉴 이름)를 주문했다. 매우 재미있는 체험이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독특한 콘셉트로 젊은 소비자를 사로잡은 이 카페의 주인은 “고양이부터 유니콘, 인어에 이르기까지 방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카페는 귀엽고 예쁜 이미지가 강하다”라며 “(죽음과 같은) 어두운 콘셉트는 다른 가게보다 돋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현지의 한 사회학자는 현지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태국 전체 인구의 90%는 불교도이며, 어렸을 때부터 죽음과 관련한 불교 교리를 가르친다”면서 “죽음을 인식하고 있는 태국인들에게 이러한 콘셉트의 카페는 (쉽게 각인되는) 이점이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고 있을 때, 사람들은 선(善)을 행할 것”이라면서 “관을 통해 죽음을 체험하는 것이 스마트폰 등 최신 기술에 중독된 청소년들이 중독에서 한 발 물러나 자신의 삶을 재평가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이호준의 시간여행] ‘시간의 박물관’ 군산에 가면

    [이호준의 시간여행] ‘시간의 박물관’ 군산에 가면

    경주에 가면 신라의 시간을 만날 수 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첨성대와 불국사와 안압지에는 신라의 시간이 흐른다. 전북 군산이나 충남 강경에 가면 곳곳에 일제강점기의 시간이 걸려 있다. 이른바 ‘적산가옥’에 깃들어 있는 시간이다. 적산(敵産)의 사전적 뜻은 ‘자기 나라의 영토나 점령지 안에 있는 적국의 재산 또는 적국인의 재산’을 말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이 한반도에서 철수하면서 남겨 두고 간 집이나 건물을 뜻한다. 적산가옥은 전남 목포나 포항의 구룡포 등에도 많이 남아 있다. 서울, 부산, 대구, 인천 등 대도시에서도 흔적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그중에서도 군산에는 적산가옥이 유난히 많다. 그렇다 보니 군산만큼 ‘시간여행’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도시도 드물다. ‘시간의 박물관’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일제강점기에 대표적 수탈 기지였다는 게 결정적 이유다. 일제는 호남평야 등에서 생산되는 쌀을 반출하기 위해 항만 시설을 만들고, 이곳을 통해 1934년 한 해만 해도 무려 870만석을 수탈해 갔다고 한다. 그해 전국의 쌀 생산량은 1630만석에 불과했다. 일본식 절 동국사(東國寺)도 일제의 ‘유물’ 중 하나다. 어? 한국에 이런 절이 있었어? 동국사에 처음 간 사람은 대개 한마디쯤 하게 된다. 일본 어느 사찰에 들어선 것처럼 생경한 풍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일본인이 지은 절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1913년 일본 조동종 승려 우치다(內田佛觀)라는 이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지었는데, 그때 이름은 금강사였다. 광복 이후 정부로 이관되었다가, 1955년 이름을 동국사로 바꾼 데 이어, 1970년 대한불교조계종 24교구 선운사에 증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국사에는 ‘참사문’을 새긴 비(碑)가 있다. 참사문은 진심으로 반성하고 사죄한다는 글이다. 동국사의 참사문은 일본 조동종 종단이 1992년 공식 발표한 글로, 식민 지배의 수단으로 전락했던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친다는 내용이다. 그 앞에 서면 ‘종교인들은 이렇게 참회하는데 왜 일본 정부는 사과를 외면할까’ 하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 수밖에 없다. 신흥동 일본식 가옥도 어두운 역사의 상징 중 하나다. 신흥동 일대는 일제강점기 때 유지들이 많이 거주하던 지역으로, 이 가옥은 미곡 유통을 하던 히로쓰 게이사부로가 지은 주택이다. 흔히 히로쓰 가옥이라고 부른다. 길이 131m, 높이 4.5m의 반원형 터널인 해망굴은 옛 군산시청 앞 도로인 명치통과 수산업의 중심지였던 해망동을 연결하기 위해 뚫었다. 역시 수탈 물자 반출이 목적이었다. 이 밖에도 조선은행 군산지점, 조선식량영단 군산출장소,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 사택, 군산세관 본관 등이 남아 있다. 부두에 남아 있는 부잔교 역시 일제 수탈의 잔재 중 하나다. 이런 건물들은 대부분 군산항 인근 ‘근대역사탐방로’ 범위 안에 있다. 지도 한 장 들고 한나절쯤 걸어 다니며 찾아보기 알맞은 거리다. 역사는 빛과 그림자의 직조물이다. 일제가 남긴 건축물을 없앨 것이냐, 보존할 것이냐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마침표를 찍지 못했지만, 무조건 지우는 게 능사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어두운 역사 역시 이 땅에 각인된 기록이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교과서’로 후손들에게 전해 줌으로써 다시는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내가 적산가옥에 배어 있는 일제의 시간을 만나러 자주 찾아가는 이유다.
  • 맵싸한 순무김치·하일리 노을…17명 기억 담은 ‘강화도 에세이’

    맵싸한 순무김치·하일리 노을…17명 기억 담은 ‘강화도 에세이’

    한반도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이자 한라산과 백두산까지의 거리가 같아 한반도의 정중앙에 있는 섬. 고려의 수도 개경과 조선의 수도 한양의 관문 역할을 하며 각종 물자가 드나들던 나라의 목구멍 같은 땅. 각종 천연기념물과 멸종위기종 식물이 서식하는 자연 생태의 보고. 문화체육관광부가 2018년 ‘올해의 도시’로 선정한 강화도에 대한 여러 빛깔의 기억을 담은 책이 나왔다.출판사 작가정신이 펴낸 ‘강화도 지오그래피’(책 사진)에는 소설가 성석제·구효서, 시인 함민복, 고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를 비롯한 천문학 저술가, 역사학자, 국문학자, 여행 작가 등 강화도에서 태어났거나 이곳에서 학문 연구와 작품 집필, 사회 활동을 한 17명이 써내려간 ‘강화도 에세이’가 담겼다. 강화에서 나고 자란 소설가 구효서가 들려주는 고향에 대한 이야기는 아련하고 구수하다. 작가가 태어나 15살까지 살았던 강화군 하점면 창후리는 그에게 “모든 것을 복원 가능하게 하는 흔적” 그 자체다. 지금도 고향집에 가면 문이 바람에 열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만든 잠금목에 쓴 ‘구효서’라는 이름 세 글자와 걸터앉아 찬물에 밥을 말아 먹던 까맣게 그을린 부뚜막을 볼 수 있는 곳이다.작가는 “15년을 살았던 고향이지만, 내게는 150년을 쓰고도 남을 세계”라면서 유년 시절의 버스에 대한 일화, 섬에서 길을 잃고 황망했던 기억들을 차례대로 들려준다. ‘이야기꾼’ 성석제 작가는 맛깔나는 글솜씨로 강화도 맛집에 대한 기억을 한상 차려냈다. 강화도가 아니면 제 맛을 낼 수 없는 맵싸한 순무김치가 인상적인 맛집 ‘우리옥’, 밥도둑이 아니라 ‘술 도적’이라는 졸복탕, 비빔국수와 물국수 단 두 가지 메뉴뿐이지만 작가가 자신의 생애 두 번째 단골집으로 꼽는 강화도 국숫집까지 작가의 설명을 듣고 있자면 군침이 절로 돈다. 고 신영복 교수가 1996년 출간한 ‘나무야 나무야’에 실린 글 ‘하일리의 저녁 노을’, ‘철산리의 강과 바다’와 함민복 시인이 전등사를 향하는 길에서 느낀 소회를 담은 ‘전등사에서 길을 생각하다’도 재수록됐다. 그 외에도 강화도의 상징인 천연기념물 제205호 저어새와 한국 최초의 한옥 성당인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유불조화 사상의 산실이자 불교 대중화에 앞장선 마니산의 정수사 등 강화도의 자연, 역사, 사람, 문화를 주제로 쓴 글들도 눈에 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긴장감 도는 법원…오늘 친박 6500명 대규모 집회

    긴장감 도는 법원…오늘 친박 6500명 대규모 집회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사건 1심 선고 공판을 하루 앞둔 5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는 친박 단체들의 집회가 이어지며 긴장감이 감돌았다. 하급심 선고로는 사상 처음 생중계되는 만큼 전날 오전부터 각 방송사 중계차량들과 뉴스용 테이블 등이 민원인 주차장을 선점했다. 서울중앙지법은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6일 오전부터 법원청사 출입문을 일부 통제할 예정이다.국민계몽운동본부 등은 지난 1일부터 중앙지법 앞에서 24시간 천막 농성을 벌이고 있다. 이날 봄비가 내려 날씨는 제법 쌀쌀했지만 이들은 천막 네 채에서 ‘박근혜 대통령 무죄 석방을 위한 기도회’를 열고 기독교인은 철야 기도를, 불교인은 3000배 수행을 벌였다. 농성을 개인 유튜브로 생중계하고 있다는 지대홍(66)씨는 “30명 정도 천막에 상주하고 있으며, 하루 평균 200명 정도 천막을 방문해 응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친박 단체들은 박 전 대통령의 재판부와 검찰을 규탄하는 데 초점을 맞춘 모습이었다. 재판 생중계를 결정한 재판부를 비난하는 글귀도 눈에 띄었다. 특히 박 전 대통령의 운명을 결정지을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 김세윤 부장판사의 얼굴 사진에 눈을 뚫고 입에 엑스표를 친 피켓을 놓고 재판부를 압박하는 모습도 보였다. 선고 당일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대한애국당 등이 대규모 집회를 벌일 예정이다. 이들은 6500여명 규모의 집회를 열겠다고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1000여명의 경력을 투입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계획이다. 법원은 오전 11시 30분부터 청사 정문에 있는 차량 출입문을 폐쇄한 뒤 오후 1시부터는 정문의 보행로까지 통제하고 방청권 소지자나 신원이 확인되는 사람들만 선별적으로 들여보낼 예정이다. 선고 공판이 열리는 417호 형사대법정을 가기 위해서 통과해야 하는 서관 1층의 주요 출입구들도 오후 1시부터 폐쇄될 예정이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편히 쉬세요”…위안부 피해자 안점순 할머니 영면

    “편히 쉬세요”…위안부 피해자 안점순 할머니 영면

    지난달 30일 별세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안점순(90) 할머니의 발인이 1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아주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치러졌다. 불교식 발인제는 가족과 친지,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관계자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히 진행됐다. 이후 수원 승화원 추모의 집에 안치된 안 할머니는 한 많은 생을 뒤로하고 영면에 들어갔다. 지난달 30일 세상을 떠난 안 할머니는 1928년 서울 마포에서 태어나 1941년 중국으로 끌려가 1945년까지 위안부 피해를 봤다. 1946년 귀국한 안 할머니는 강원도와 대구 등에서 살다가 58세이던 1986년부터 수원에서 거주했다. 1993년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한 안 할머니는 2002년부터 본격적인 인권 운동가로 활동하며 자신의 피해를 증언했다. 수원시는 할머니의 가슴 속 응어리를 풀어주고자 할머니의 삶을 다룬 헌정 영상 ‘안점순 할머니의 마지막 소원’을 제작,지난 8일 공개하기도 했다. 안 할머니는 당시 영상에서 “억만금을 우리한테 준들 내 청춘이 돌아오지 않는데,가해자(일본 정부)는 자신의 죄를 모른 채 당당하고,피해자인 우리는 고통을 받고 있다”며 일본의 직접적인 사과를 요구했다. 올해 안 할머니와 1월 5일 임 모 할머니,2월 14일 김모 할머니 등 3명이 별세했다. 이제 등록 위안부 피해자 생존자는 29명으로 줄었다.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은 “올 들어 벌써 세 분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님들을 떠나보내게 되어 비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라며 “여성가족부는 고(故) 안점순 할머니를 포함한 모든 피해자분들의 상처치유와 편안한 노후 생활을 지원하기 위해 더욱 노력하고 명예와 존엄회복을 위해 기념사업을 확대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남편 여읜 고려·조선의 신분 높은 여인들 승려가 되어 ‘죄’를 씻다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남편 여읜 고려·조선의 신분 높은 여인들 승려가 되어 ‘죄’를 씻다

    정업원(淨業院)은 불교국가 고려의 국책 비구니 사찰이었다. 왕가(王家)를 비롯해 신분이 높은 여인들이 남편을 여의면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곤 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성리학을 국시로 하는 유교국가 조선에서도 정업원의 전통은 이어졌다. 업(業)이란 중생이 지은 선악(善惡)과 그 응보를 가리킨다. 정업원이란 살아생전의 잘못을 깨끗하게 씻는 사찰이라는 뜻이다. 정업원에 몸담은 여인들이 지은 가장 큰 잘못은 아마도 남편을 먼저 저세상에 보낸 죄가 아닐까 싶다.고려시대 정업원이 언제 창건됐는지는 확실치 않다고 한다. 1164년 의종이 정업원에 행차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를 임시수도로 삼았을 때도 정업원을 지정해 비구니들이 모여 살도록 했고, 환도한 이후 다시 정업원을 운영했다. 조선은 한양에 도읍하면서 개경의 정업원을 옮겨 세웠다. ●고려 의종 이전부터 존재… 창건 시기 불명확 국가가 운영하는 정업원이라는 이름의 비구니 사찰이 고려 초기부터 존재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신분이 높은 여인들이 다양한 이유로 승려가 되어 절에 머무는 전통은 건국 초기부터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전국의 세력가와 혼인해 결속력을 높인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태조는 오늘날의 평양인 서경(西京)에서도 지역의 유력호족 김행파의 두 딸과 각각 인연을 맺었다. 그런데 이후 태조가 서경의 부인들을 돌아보지 않자 두 사람은 출가해 비구니가 됐고, 태조가 이런 사실을 알고는 서경에 대서원(大西院)과 소서원(小西院)이라는 비구니 사찰을 세워 두 여인을 머물게 했다고 한다. 이들이 태조의 제19비 대서원부인과 제20비 소서원부인이다. 공민왕의 제2비 혜비(惠妃) 이씨는 고려 말을 대표하는 문인이자 학자인 계림부원군 이제현과 수춘국부인 박씨의 소생이다. 공민왕의 정비 노국대장공주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명문가의 딸을 후비로 들이자는 조정 공론에 따라 간택됐다. 혜비는 공민왕이 시해되자 비구니가 되었는데 세상을 떠나자 조선 태종이 부의를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혜화궁주로 불리던 혜비는 당시 조선왕실 정업원의 주지 직함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오늘은 서울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정업원의 흔적을 따라가 본다. 이야기는 아무래도 영조가 세운 정업원구기비(淨業院舊基碑)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정업원구기비는 한양 도성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의 동쪽 기슭에 있다. 오늘날 행정구역으로는 서울 종로구 숭인동이다. 서울 지하철 6호선 창신역에서 낙산으로 휘돌아 오르는 길 중간이다. 구기비 보호각은 청룡사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정업원구기비란 정업원 옛 터에 세운 비석이라는 뜻이다. 영조가 단종비 정순왕후를 기리고자 1771년 친필로 ‘정업원구기’ 다섯 글자를 써서 새겼다. 정순왕후는 단종이 영월에서 살해된 뒤 정업원에서 여생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여생을 보낸 것을 넘어 최근에는 정순왕후 스스로 ‘정업원주지 노산군부인 송씨’(淨業院住持 魯山君夫人 宋氏)라고 쓴 문서가 발견됐다. 정순왕후가 아예 정업원으로 출가했음을 알 수 있다.●임진왜란 때 창덕궁 일대 전소되면서 폐사 조선 초기 정업원은 창덕궁 서북쪽 원서동에 있었던 것으로 학계는 추정한다. ‘성종실록’에는 ‘정업원은 궁궐의 담장 곁에 있는데 범패(梵唄) 소리가 궁중까지 들리니 진실로 적당한 곳이 아닙니다’라는 대사헌 박건의 상소가 나온다. 하지만 정확한 위치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범패는 불교 의식에 쓰이는 음악이다. 정업원은 조선 초기 세 차례 폐지됐다가 설치되기를 반복했다. 세종 시대인 1448년 없어졌다가 호불왕(好佛王)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던 세조에 의해 1457년 옛 터에 다시 세워졌다. 정업원은 연산군이 1504년 창덕궁 주변을 사냥터로 만들면서 다시 폐지됐다. 중종반정 이후 정업원 건물은 독서당으로 활용됐다. 이후 명종의 어머니로 불교의 부흥을 꾀했던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던 1546년 다시 세워진다. ‘명종실록’에는 “인수궁을 선왕의 후궁을 위하여 수리하도록 하고, 정업원은 인수궁에 소속시켰다가 아울러 수리하여 선왕의 후궁 가운데 연고가 생기는 이를 이주시키도록 하라’는 전교가 보인다. 정업원은 임진왜란 때 창덕궁 일대가 모두 불타면서 폐사됐다. ‘선조실록’에는 “정업원 등의 옛터에 여승이라 불리는 자들이 많이 들어가 집을 짓고 감히 전철을 따르고 있다”는 상소에 임금이 “정업원의 일은 비록 옛터에다 초가집을 지어 거처하는 장소로 삼고 있지만…허물고 내쫓기까지 하는 것은 온당치 못할 듯하다”고 답했다는 대목이 보인다. 정업원의 기능이 왜란 이후에도 그런대로 이어졌음을 보여 준다. 그러다 1666년(현종 2) 실록에는 “인수(仁壽)와 자수(慈壽)의 두 이원(尼院)을 혁파하여, 자수원 것은 재목과 기와를 성균관에 내려 학사를 수리하는 데 쓰게 하고 인수원 자재는 옮겨다가 질병가를 짓도록 했다. 질병가는 궁인 가운데 질병이 든 자를 거처하게 하는 집”이라는 내용이 있다. 인수원과 자수원이란 선왕 후궁들의 거처였던 인수궁과 자수궁의 부속 사찰을 일컫는 표현일 것이다. 정순왕후가 정업원주지를 맡고 있던 시기는 연산군이 창덕궁 옆 정업원을 철폐한 이후, 명종이 복설(復設)하기 이전이다. 도성 내부에서 쫓겨난 정업원의 비구니들이 도성 바깥 인창방에 다시 절을 세운 것이다. 인창방은 오늘날 흥인지문 밖 숭인동과 창신동 일대에 해당한다.●비구니 사찰 청룡사에 정순왕후 출가설도 정업원구기비를 둘러보고 나면 담장 너머 청룡사와의 관계가 궁금하다. 오늘날 청룡사는 정업원처럼 비구니 사찰이다. 청룡사 측은 정순왕후가 출가한 절로 한때 이름이 정업원이었다고 주장한다. 고려 태조 왕건의 명으로 922년 비구니 혜원을 주석하게 했다는 역사도 전한다. 하지만 구기비를 세울 당시 주변에는 정업원도, 청룡사도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추정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선왕의 후궁들이 머무는 왕실 부속 사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은폐된 공간에서 절개를 지키며 살아가기를 강요당했던 궁녀들의 존재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 가운데 불교를 신봉하는 이들이 많았고, 정업원이라는 이름은 아니지만 사실상 같은 역할을 하는 사찰이 필요했다. 정업원구기비가 세워진 곳은 이런 절을 세울 적지가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청룡사는 19세기 이후 은퇴한 궁녀들이 여생을 보내는 사찰로 쓰였고, 역시 낙산 동쪽 기슭으로 구기비 언덕 너머에 있는 보문사도 같은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잘 알려진 것처럼 정순왕후는 수양대군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계유정난 이후 인창방에 살면서 남편이 귀양 가서 죽은 영월 쪽에 바라다보이는 집 뒤편 돌산에 올라 눈물을 삼켰다고 한다. 영조는 정업원구기비를 세우면서 이 봉우리에도 동망봉(東望峰)이라고 친필로 써서 새겼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이곳이 채석장이 되면서 영조 어필 표석도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 동망봉 봉우리는 체육공원이 됐고, 한켠에 정순왕후의 이야기를 새긴 최근의 작은 표석이 하나 보일 뿐이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30년 인내하며 번역… 난해한 작품에 재미를 느꼈죠”

    “30년 인내하며 번역… 난해한 작품에 재미를 느꼈죠”

    “책 한쪽 읽는 데 사전을 100번 넘게 들췄어요. 전체 628쪽이니까, 굉장한 작업이었죠. 이렇게 고생하느라고 다 늙어버렸네. 허허.”너무나도 난해한 작품에 골몰한 탓일까. 반세기 넘도록 제임스 조이스(1882~1941) 연구에 매진한 김종건(84) 고려대 명예교수의 머리가 희게 셌다. 지난 26일 경기 용인 자택에서 그를 만나 30일 출간되는 ‘복원된 피네간의 경야’(어문학사)에 대해 물었다. 조이스 관련 서적이 빼곡한 책장 앞에서 노학자는 잠시 서성였다. 이내 두툼한 ‘피네간의 경야’ 원서를 뽑아 들고 말을 이어 갔다. 차분히 대화를 이어 가며 힐끗 엿본 그의 손때 묻은 원서엔 지난 세월 연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읽을 수 없는 책.’ 조이스의 역작 ‘피네간의 경야’는 이런 별명이 붙을 정도로 악명이 높다. 그의 대표작 ‘율리시스’와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난해한 문학작품으로 손에 꼽는다. 구성이나 내용은 물론 작품에 쓰인 단어 하나조차 제대로 이해하기 버겁다. 60개 이상 언어로 된 6만 4000개 정도의 단어가 작품에 쓰였다. 자신이 17년 동안 쓴 ‘피네간의 경야’를 두고 조이스는 ‘괴물’(Monster)이라고 불렀다. 사전에 없는 단어도 조이스는 만들어냈다. 발음 등 음성적 특질을 이용한 언어 유희도 곳곳에서 구사했다. 남다른 언어적 직관이 없다면 외국인으로선 번역은커녕 제대로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번역은 모험이었다. 누구도 쉽게 덤벼들지 못했다. 그는 미국에서 공부하던 젊은 영문학도 시절을 떠올렸다. “여름학기였어요. 네덜란드인 교수 지도로 이 작품을 접했습니다. 눈앞이 캄캄해졌어요. 교수 충고는 따끔했지요. ‘인내하라.’ 참고 읽었습니다. 점점 재미를 느꼈죠.” 그렇게 30년쯤 흘렀을까. 2002년 김 교수는 ‘피네간의 경야’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데 성공했다. 이 책이 외국어로 번역된 건 세계에서 네 번째다. 초역 이후 2012년에 이은 세 번째 개역판. 그는 “번역을 할수록 자꾸 새로운 게 나와요”라고 설명했다. ‘피네간의 경야’엔 특별한 줄거리가 없다. 주인공 이어위커가 1938년 3월 21일 하룻밤 동안 더블린 외곽에 있는 자신의 술집에서 꾸는 꿈 얘기다. 어느 것이 현실이고, 환상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주인공의 무의식이 600쪽 이상에 걸쳐 어지러이 펼쳐진다. 신학·불교·수학·음악·고고학 등 세상의 모든 지식이 주인공의 무의식에서 쏟아진다. 작품명에 대한 해석도 분분하다. ‘경야’(Wake)는 죽은 사람 곁에서 밤을 새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단어의 다의성 때문에 제목은 여러 갈래로 읽힌다. 아직 일반독자가 편하게 읽긴 어려운, 이 소설에 대해 노학자는 확신을 갖고 말했다. “인간이란 끝없이 개발하고 연구하는 존재 아니겠어요.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죠. 어렵지만 인내해 보시길. 그렇다고 욕심을 내선 안 돼요. 하루에 반쪽이 적당합니다. 차근차근 읽어가 보세요. 끝에 도달했을 때, 작품은 무한한 즐거움을 줄 거예요.” 번역은 단순히 말을 옮기는 게 아니다. 또 다른 세계를 창조하는 과정이다. 스스로를 ‘둔재’라고 낮춘 노학자는 ‘세기의 천재’ 조이스의 작품을 번역했단 것 이상의 자부심을 가졌다.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그의 열정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조이스가 그랬어요. 수세기 동안 대학교수들이 내 작품 읽느라 바쁠 거라고. 허풍이 아니었죠. 실제로 그러고들 있으니까요. 저도 마찬가지죠. 제가 살아 있는 한 자꾸 연구하고 번역할 겁니다. 매번 봐도 새로운 게 또 보이니까요. 그러면서 점점 나아져 가는 거겠죠.” 글 사진 오경진 기자 oh3@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의상대사 창건 高雲寺, 가운루·우화루 지은 최치원 호 따 孤雲寺로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의상대사 창건 高雲寺, 가운루·우화루 지은 최치원 호 따 孤雲寺로

    1742년(영조 18년) 10월 보름, 임진강 우화정(羽化亭)에서 웅연(熊淵)까지 선상(船上) 연회가 벌어졌다. 참석자는 경기도관찰사 홍경보와 연천현감 신유한, 양천현령 정선이었다. 이날은 중국 북송의 시인 소동파(1037~1101)가 적벽강에서 뱃놀이를 하며 ‘후적벽부’(後赤壁賦)를 지은 660주년이었다고 한다. 우화정은 경기 연천군 중면 대사리에 있었다. 지금은 임진강댐 상류 북한 땅이다. 청천 신유한이 당대를 대표하는 문인이라면 겸재 정선은 당대를 대표하는 화가다. 이 뱃놀이에서 신유한은 ‘의적벽부’(擬赤壁賦)를 지었고 겸재는 배가 우화정에서 떠나는 장면과 웅연에 닿는 모습을 각각 ‘우화등선’(羽化登船)과 ‘웅연계람’(熊淵繫纜)이라는 그림에 담았다. 여기에 창애 홍경보의 서문이 더해진 시화첩을 세 벌 만들어 나누어 가졌으니 유명한 ‘연강임술첩’(漣江壬戌帖)이다.번데기가 날개 달린 나비로 변하는 것이 우화(羽化)다. 우화등선(羽化登仙)은 사람이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감을 이르는 도교적 표현이다. 소동파의 ‘훌쩍 세상을 버리고 홀몸이 되어 날개를 달고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오르는 것만 같다’(飄飄乎如遺世獨立 羽化而登仙)는 ‘적벽부’ 구절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겸재는 이 구절의 신선 선(仙) 자를 배 선(船) 자로 살짝 비틀어 화제(畵題)로 삼았다. 신유한(1681∼1752)은 집안 배경이 변변치 않은 탓에 늦은 나이까지 지방관을 전전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시와 문장에서만큼은 일찍부터 높은 평가를 받아 1719년(숙종 45)에는 통신사의 제술관(製述官)으로 일본에 다녀오기도 했다. 통신사 제술관은 여간 글재주가 뛰어나지 않으면 뽑힐 수 없었다. 신유한의 이름이 역사에 남아 있는 것도 통신사행이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그는 1719~1720년 일본을 여행하면서 지리·풍속·제도는 물론 자연환경까지 자세히 적었으니 곧 ‘해유록’(海遊錄)이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의승군을 이끈 사명대사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사명대사 관련 자료를 모으고 자신의 평가를 붙인 ‘분충서난록’(奮忠難錄)을 편찬하기도 했다.●오늘날 고운사 중심은 대웅전… 과거엔 극락전 오늘은 ‘컬링의 고장’으로 떠오른 경북 의성의 고운사(孤雲寺)로 간다. 의성군 동북쪽의 고운사는 안동과 경계를 이루는 등운산(登雲山) 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절 이름만으로도 신라의 대문장가 고운(孤雲) 최치원(857~?)에 자연스럽게 생각이 미친다. 신유한을 떠올린 것은 그가 평해군수 시절인 1729년(영조 5) 고운사의 사적기를 썼기 때문이다. 그의 사적기는 1918년 오시온이 지은 또 다른 사적기와 함께 이 절의 역사를 구성하는 결정적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고운사는 절의 역사를 이렇게 서술한다. ‘신라 신문왕 원년(681년) 해동 화엄종의 시조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연꽃이 반쯤 피어난 부용반개형상의 천하명당에 자리잡은 이 사찰은 원래 고운사(高雲寺)였다. 신라말 불교·유교·도교에 모두 통달해 신선이 되었다는 최치원이 여지(如智)·여사(如事) 양 대사와 함께 가운루(駕雲樓)와 우화루(羽化樓)를 건축한 이후 그의 호인 고운을 빌려 고운사(孤雲寺)로 바뀌게 되었다. 이후 도선국사가 가람을 크게 일으켜 세웠다. 현존하는 약사전의 부처님과 나한전 앞의 삼층석탑도 도선국사가 조성한 것들이다’. 고운사는 조계종 제16교구 본사로 의성, 안동, 영주, 봉화, 영양에 흩어진 60곳 남짓한 절들을 관장하고 있다고 한다. 새로 지은 산문을 지나 일주문으로 들어서면 역시 최근 조성한 대웅전을 비롯한 30개 남짓한 전각이 규모 있게 자리잡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고운사는 ‘사세(寺勢)가 번창했을 당시에는 366칸 건물에 200여 대중이 상주했던 대도량이 지금은 교구본사로는 작은 사찰로 전락했다’고 적어 놓았으니 지금보다 훨씬 화려했던 시절이 있었나 보다. 오늘날 고운사의 중심은 웅장한 대웅전 주변이라 할 수 있지만, 과거의 중심은 극락전이었다. 극락전과 마주 보는 우화루 사이 양옆으로 만덕당과 종무소가 사방에서 마당을 에워싼 일종의 산지중정형 사찰의 모습을 하고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유행한 형태다. 극락전 영역은 소박하기만 하다.●가운루, 구름 탄 누각 의미… 등운산 계곡 가로질러 종교적 의미에서 절의 중심이 어디든, 고운사의 상징은 우화루와 가운루다. 등운산 계곡을 가로질러 놓인 가운루는 과거 다리 역할을 했다. 가운루란 구름을 타고 앉은 누각이라는 뜻이다. 곧 신선의 세계다. 고운이라는 최치원의 아호에서도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우화루란 이름에서는 곧바로 홍경보, 신유한, 정선의 임진강 뱃놀이가 떠오른다. 사찰의 강당은 부처가 설법하자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는 법화경의 가르침을 빌려 우화루(雨花樓)라 이름붙이는 게 일반적이다. 지금은 찻집으로 쓰는 고운사 우화루에도 내부에는 우화루(雨花樓)란 편액이 하나 더 붙어 있다. 우화루와 가운루는 이 절이 최치원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음을 과시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우화루 명칭은 신선·부처님 가르침 동시에 상징 고운사가 신유한에게 사적기를 청한 것도 청천이 유학은 물론 불교와 도교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일 것이다. 청천은 사적기 서두에 ‘1728년 고운사 스님이 찾아와 청하는 것을 서류에 파묻힐 만큼 바빠 응하지 못했는데, 이듬해 사자(使者) 셋이 고운사 주지의 글을 다시 들고 오니 거절할 수 없었다’는 취지로 고운사의 역사를 정리한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 사적기는 신유한이 관련 사료를 엄격히 고증해 서술했다기보다는 스님들이 알고 있는 구전(口傳) 자료를 재구성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그런데 청천의 사적기에는 ‘의상대사 창건’ 다음에 최치원이 등장하지 않고 곧바로 ‘고려 건국 초 운주화상 중수’로 넘어간다. 최치원의 고운사 중창설(說)과 이후 절 이름 변경설(說)은 신유한이 사적기를 쓰던 시기에는 아직 널리 보편화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명대사가 고운사를 의승군의 전초기지로 썼다는 이야기도 전하지만 ‘사명대사 전문가’인 신유한은 역시 사적기에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운사와 최치원과의 관계로 국한하면 신뢰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보물로 지정된 고운사 약사전의 석조여래좌상은 최치원이 살았던 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미술사학계는 보고 있고 나한전 앞의 삼층석탑도 신라 후기 양식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신유한의 사적기에 왜 최치원과의 관계가 서술되지 않았고 오시온의 사적기에는 왜 들어가게 됐는지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다. ●극락전이 서쪽에 있는 건 서방정토 상징성 살린 것 가운루의 존재에서 보듯 고운사는 계곡을 사이에 두고 그 동서쪽에 전각이 있는 사찰이었다. 극락전 영역이 서쪽에 자리잡은 것은 주존(主尊)인 아미타불이 주재하는 서방정토의 상징성을 살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계곡 동쪽은 모니전(牟尼殿) 영역이었다. 석가모니 부처를 모신 전각이다. 흔히 이런 전각을 대웅전이라 부르지만 절의 큰법당이라는 느낌을 주지 않고자 이런 이름을 붙인 것 같다.대웅전은 1992년 가운루 상류의 계곡을 메우고 모니전 영역을 해체해 세운 것이다. 모니전 옛 건물은 대웅전 동쪽의 삼층석탑 위로 옮겨 지었으니 지금의 나한전이다. 조촐함에서 닮은 나한전과 삼층석탑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그렇게 있었던 것인 양 자연스러운 조화를 보여 준다. 일주문 밖으로는 화엄승가대학원이 보인다. 산내 암자인 운수암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신유한은 운수암기(雲水庵記)도 남겼으니 이래저래 고운사와는 인연이 깊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평생 ‘울울한 삶’을 산 지식인… 생육신으로 절개를 지키다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평생 ‘울울한 삶’을 산 지식인… 생육신으로 절개를 지키다

    생후 8개월 만에 글을 알고 세 살에 시를 짓고 다섯 살 때 ‘중용’, ‘대학’에 통달해 신동으로 불렸던 사람. 이런 기이한 재주를 세종 임금이 전해 듣고 직접 불러 시험하고 ‘뒷날 크게 쓰겠노라’ 다짐했던 사람. 그러나 평생 울분과 방랑으로 전국을 떠돌아다니다 충청도 허름한 절간에서 생을 마감했던 사람. 우리 한문소설의 명편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은 김시습(金時習·1435∼1493)이다.그가 쓸쓸한 삶을 살게 된 계기는 거듭된 가정사의 참극으로 지쳐 가던 중 접한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사건이었다. 불의의 소식을 들은 젊고 순수했던 21세 김시습은 문을 걸어 잠근 채 몇 날 며칠을 통곡했다. 그러다 돌연 서책을 모두 불태워 버리고 나서 승려의 행색으로 전국을 떠돌기 시작했다. 어린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 영월로 쫓아 보낸 뒤 죽음으로 내몰았던 그의 반인륜적 행위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전국을 방랑하던 끝자락, 경주 금오산 용장사에서 한동안 지내며 금오신화를 지었다. 그리고는 “뒷날 반드시 나, 김시습을 알아줄 자가 있으리라”면서 그 책을 석실에 감췄다. 당대 현실과 화해할 수 없던 자신의 고뇌, 그리고 한번도 펼쳐보지 못했던 자신의 꿈을 기이한 이야기에 은밀하게 담아두었음을 짐작게 하는 일화이다. 그런 점에서 금오신화는 울울한 삶을 살아간 한 중세 비판적 지식인의 소설적 독백이라 일컬을 만하다. 우리는 지금 그의 바람처럼, 그의 이름과 삶을 뚜렷하게 기억한다. #산사를 전전하던 자의 자기 초상 평생 전국을 전전하며 지내던 김시습은 충청도 홍산 무량사에서 59세를 일기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이런 최후는 자신이 젊은 시절 썼던 ‘금오신화’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너무도 닮았다. 소설 속 주인공들도 모두 깊은 산속으로 홀연 자취를 감춰 버리거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삶을 마감했는데, 김시습은 자신의 비극적 최후를 젊은 시절부터 그렇게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는 궁벽한 산사에 몸을 의탁하고 지내며 자신의 초라한 몰골을 직접 그림으로 그린 뒤, 거기에 다음과 같은 찬시를 적어두기도 했다. 나의 초상에 쓰다(自寫眞贊) 俯視李賀(부시이하) 이하(李賀)도 내려 볼 만큼 優於海東(우어해동) 조선에서 최고라고들 했지. 騰名譽(등명만예) 높은 명성과 헛된 칭찬 於爾孰逢(어이숙봉) 네게 어찌 걸맞겠는가. 爾形至(이형지묘) 네 형체는 지극히 작고 爾言大閒(이언대동) 네 언사는 너무도 오활하네. 宜爾置之(의이치지) 너를 두어야 할 곳은 丘壑之中(구학지중) 이런 산골짝이 마땅하도다. 흔히 이백을 ‘적선’(謫仙)으로 부르듯, 당나라 시인 이하는 ‘귀재’(鬼才)로 불리던 천재 시인이었다. 김시습은 찬시 첫머리에서 당시 사람들이 자신을 ‘오세 신동’으로 부르며, 그런 이하와 견주었던 어린 시절을 회고한다. 아름다운 과거였다. 하지만 이하가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처럼 그 자신도 뛰어난 재주를 타고났음에도 세상에 한번도 쓰이지 못한 자신의 현실에 몸서리치고 있다. 깊은 자괴, 아니 자조와 자기 경멸이 뼛속까지 배어들었다. 실제로 김시습의 문집 ‘매월당집’에는 이런 소외된 자의 울울한 심경을 담아낸 작품이 많다. 자신의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져 줄 것이라고는 오로지 시밖에 없었던 셈이다. 그의 “마음이 세상살이와 어긋나기만 하니, 시를 빼놓으면 즐길 것이 없다네(心與事相反, 除詩無以娛).”라는 고백은 결코 허투가 아니었다. 불의에 영합하지 않고 평생 방외인, 곧 ‘아웃사이더’로 살아간다는 것은 혹독한 일이었다. 물론 그런 대가를 치러낸 덕분에 지금 우리는 그를 생육신(生六臣)이라는 이름으로 기억하고 있지만.#서울로 복귀한 또 다른 삶의 면모 김시습을 기억하는 우리 대부분은 머리를 깎고 승려의 복색을 한 채, 평생 산사를 전전했던 행적만을 주목한다. 그러나 김시습은 삶의 가장 중요한 장년기에 서울의 저잣거리를 누비며 다니기도 했다. 그가 38세 때인 성종 3년(1472년) 경주에서 서울로 올라오고 나서 49세 때인 성종 14년(1483년) 다시 관동으로 떠날 때까지다. 이 12년 동안 수락산에 거처를 정해 놓고 종종 도성으로 내려와 당대 인물들과 교유했다. 어린 시절 교분이 있던 서거정, 김수온과 같은 고관대작도 만났지만, 진정 마음으로 교유한 부류는 자기보다 스무 살쯤 어린 젊은 선비들이었다. 그들 중 가장 절친했던 남효온은 그런 사실을 ‘사우명행록’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사람들은 김시습의 행동을 위태롭게 여기고는 교유하던 자들이 모두 절교하고 왕래하지 않았다. 그러자 홀로 저잣거리의 미치광이 같은 자들과 놀다가 술에 취해 길가에 쓰러져 자기도 하고, 바보처럼 웃고 돌아다니기도 했다. 뒤에 설악산에 들어가기도 하고 춘천 산에서 살기도 하여 드나듦에 일정함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그 종말을 알지 못했다. 그가 좋아한 사람은 이정은, 우선언, 안응세 그리고 나 남효온이다.” 남효온은 김시습이 영의정 정창손의 행차를 만나자 길거리에서 “너 같은 놈은 벼슬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소리쳤다는 일화를 소개한다. 모두 위태롭게 여겨 절교할 만하지만, 이정은, 우선언, 안응세, 남효온 등과는 절친하게 지냈다. 이들은 모두 20대의 젊은이들이다. 수양대군 왕위 찬탈을 용납할 수 없어 서울을 떠났던, 바로 그 혈기 왕성한 나이들이었다. 김시습은 그런 맑고 순수한 그들에게 자신이 20대 때 목도한 반인륜적인 비화를 들려줬다. 성종대의 젊은 신진사류들이 세조대의 일그러진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분투를 시작하는 결정적 계기도 생겼다. 김시습보다 스무 살 어린 남효온은 성종 9년(1497년) 스물다섯 나이에 단종의 생모인 소릉을 복위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림으로써, 모두 침묵하고 있던 세조의 행태를 역사 무대 위로 끄집어냈다. 또한 역적의 이름으로 죽어간 인물들을 충절의 인물로 복권하기 위해 ‘육신전’을 짓기도 했다. 그 대가로 남효온 또한 김시습처럼 평생 전국을 떠돌며 울울한 삶을 살게 된다. 이처럼 김시습은 승려의 행색으로 산사에 숨어 살며 은둔의 길만 걸었던 것은 아니다. 잘못된 과거를 바로 잡아 바른 세상을 만들기 위한 시대정신을 당대 젊은이들과 함께 벼려가기도 했다. 뒷날, 선조 임금의 분부를 받아 ‘김시습전’을 지은 율곡 이이는 그런 면모를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그는 절의를 세우고 윤기를 붙들어서 그의 뜻은 일월과 그 빛을 다투게 되고, 그의 풍성을 듣는 이는 나약한 사람도 용동하게 되니, ‘백세의 스승’이라 한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애석한 것은 김시습의 영특한 자질로써 학문과 실천을 갈고 쌓았더라면, 그가 이룬 것은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율곡은 김시습을 미친 자가 아니라 ‘백세의 스승’으로 마음에 간직했다. 실제로 김시습은 서울로 복귀해 지내다 환속해 머리를 기르고 결혼도 하며, 유자의 삶을 살아가겠노라고 굳게 다짐도 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런 그를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김시습은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승려의 행색으로 관동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꼿꼿한 삶의 자세 덕분에 그가 서울을 떠났다 해도 결코 감춰질 수 없었다. 그 뒤로도 많은 지식인이 그를 추모했던 까닭이다.#마음은 유자, 자취는 불자(心儒跡佛) 율곡은 김시습의 삶을 ‘심유적불’(心儒跡佛)이라는 네 글자로 집약했다. 마음은 유자였지만, 불자의 행적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 실제로 김시습은 승려 생활을 하면서도 머리는 깎았지만, 수염은 깎지 않았다. 그 이유를 “머리를 깎은 것은 세상을 피하기 위함이요, 수염을 남겨둔 것은 장부의 뜻을 드러내기 위함”이라 설명하기도 했다. 김시습은 유교와 불교의 삶을 함께 살았다고 할 수 있지만, 도교의 세계에도 조예가 깊었다. 유·불·도에 정통했기에 많은 사람이 그를 다양한 사유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 자유인으로 치켜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김시습의 그런 삶은 그 어디에도 심신을 잠시도 누이지 못했던, 극심한 방황의 흔적으로 읽는 게 올바른 독법일 것이다. 정출헌 한국고전번역원 밀양분원장·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매월당집’은 김시습 사후 이자가 첫 유고 수집…선조의 명으로 총 23권 9책 발간 남효온은 ‘사우명행록’에서 “그가 지은 시문은 수만 편이 되는데,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바람에 거의 모두 흩어져 없어졌다. 조정의 신하들과 선배들이 혹 그의 글을 절취해 마치 자신의 작품인 양 하기도 했다”고 증언한다. 작품을 도적질해 갔던 것이다. 실제로 김시습의 시문을 그의 사후, 그를 존중하던 이자가 중종 16년(1521년) 여기저기 흩어진 유고를 수습해 겨우 3권으로 묶을 수 있었다. 그 뒤에도 박상, 윤춘년 등이 꾸준히 모아 가며 정식 간행했다고 하는데, 현재 그 매월당집은 사라지고 없다. 지금 전해지는 매월당집은 선조 16년(1583년) 임금의 명을 받아 경진자 활자로 간행한 중간본이다. 분량은 총 23권 9책으로, 시집이 15권이고 문집이 8권이다. 매월당집 서두에는 이산해가 쓴 서문과 이이가 쓴 ‘김시습전’이 실렸다. 1927년 후손이 김시습 관련 기록을 부록으로 덧붙여 신활자로 간행하기도 했다. 1979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5책으로 번역·출간했다.
  • [인사]

    ■병무청 ◇서기관 승진△기획조정관실 손진길△입영동원국 류정길 박현숙 조상학△감사담당관실 오재덕 ■대한불교 조계종 △사서실장 금곡스님 ■시청자미디어재단 △시청자진흥본부 본부장 김혁△경영기획실 실장 류재영△시청자권익부 부장 최종숙△부산시청자미디어센터 센터장 류위훈△광주시청자미디어센터 센터장 박대식△강원시청자미디어센터 센터장 김동규△대전시청자미디어센터 센터장 홍미애△인천시청자미디어센터 센터장 이충환 ■한국경제신문 △전무이사 경영지원실장 이봉구△상무이사 광고국장 겸 수석논설위원 김정호△대외협력국장 겸 신사업추진위원장 유근석△기획조정실장 현승윤△편집국장 하영춘 ■BNK경남은행 ◇임원 승진△창원영업본부 상무 한기환△울산영업본부 상무 김갑수△리스크관리본부 상무 심종철
  • MB, 대선 직후 능인선원 주지 지광스님에게 손수 전화 “고맙다”

    MB, 대선 직후 능인선원 주지 지광스님에게 손수 전화 “고맙다”

    검찰, 현금 3억원 수수 구속영장에 적시불교대학원 설립 청탁 뇌물…지광도 시인이명박 전 대통령이 2007년 말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뒤 능인선원 주지인 지광 스님에게 직접 전화해 “고맙다”고 감사 인사를 한 것으로 조사됐다. 검찰은 이 당선사례가 수억 원대 불법자금을 지원받은 데 대한 감사의 의미가 포함된 것이라고 판단했다. 20일 사정 당국에 따르면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송경호 부장검사)는 이 전 대통령이 제17대 대선 직전인 2017년 12월 지광 스님으로부터 현금 3억원을 받았다는 혐의사실을 구속영장에 적시했다. 검찰은 당시 김백준 전 청와대 총무기획관이 이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지광 스님을 찾아가 현금을 건네받았다는 진술을 김 전 기획관으로부터 받았다. 검찰은 지광 스님이 능인선원의 숙원사업인 불교대학원대학교 설립을 도와 달라는 청탁과 함께 돈을 건넨 것으로 파악했다. 지광 스님도 최근 검찰에 출석해 이 전 대통령 측에 돈을 건넨 사실을 시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전 대통령은 얼마 후 제17대 대통령에 당선되자 지광 스님에게 전화해 “접니다. 고맙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당선사례를 했다. 검찰은 이 전화가 금품을 지원받은 데 대한 감사 표시라고 판단했다. 지광 스님 외에도 이 전 대통령 측에 불법 자금을 건넨 이들이 이 전 대통령의 구속영장에 나와 있다. 자금 거래의 통로 역할을 맡은 사람은 이 전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전 의원과 대선캠프 내 핵심 측근들인 것으로 조사됐다. 금품 제공자들은 100대 기업이 아닌 중소기업이나 개인회사를 운영하는 이들이었다. 불법 자금을 거래하는 과정에서 ‘뒤탈’이 없도록 규모가 큰 기업보다는 상대적으로 작은 업체를 거래 대상으로 고른 것으로 검찰은 보고 있다. 나아가 금품을 제공할 만한 사람을 상대로 나중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만한 인물인지를 선별하는 과정을 거쳐 은밀히 자금을 건네받았다고 판단했다. 레미콘 회사 등을 소유한 재력가인 김소남 전 새누리당 의원도 대학 최고경영자과정 동문 모임에서 이 전 대통령을 비롯해 측근인 천신일 세모 회장, 김 전 총무기획관과 친분을 쌓은 뒤 김 전 기획관을 통해 4억원을 건네고 2008년 제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비례대표 공천을 받은 것으로 검찰은 파악했다.김 전 의원은 청와대 인근 도로변에서 김 전 기획관이 기다리고 있으면 자동차에 탄 채로 창문만 내린 채 현금 5000만원을 담은 검은색 비닐봉지를 건네는 식으로 자금을 전달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이밖에 최등규 대보그룹 회장이 관급공사나 인허가에 있어 편의 기대 등을 위해 대선 직전인 2007년 9∼11월 5억원을, 손병문 ABC상사 회장이 해외 현안 사업 등과 관련한 편의 기대 등을 위해 2007년 12월 2억원을 각각 김 전 기획관을 통해 건넨 것으로 검찰은 파악했다. 손 회장의 장남은 이명박 정부 시기인 2009∼2013년 청와대에 7급으로 임용됐다가 5급으로 승진까지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 전 대통령은 이런 불법자금 수수 혐의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일”이라며 지난 14일 검찰 조사에서 진술했다. 불법자금 수수와 관련해 이 전 대통령이 직접 지시를 내렸거나, 관련 보고를 받았다는 측근 진술에 대해서는 “자신의 처벌을 경감하기 위해 허위진술을 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라는 입장을 보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MB, 당선되자 ‘3억 뇌물’ 지광스님에 “고맙다” 전화

    MB, 당선되자 ‘3억 뇌물’ 지광스님에 “고맙다” 전화

    이명박 전 대통령이 2007년 말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능인선원 주지인 지광 스님에게 직접 전화해 “고맙다”라고 감사 인사를 한 것으로 조사됐다.20일 사정 당국에 따르면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송경호 부장검사)는 이 전 대통령이 제17대 대선 직전인 2017년 12월 지광 스님으로부터 현금 3억원을 받았다는 혐의사실을 구속영장에 적시했다. 검찰은 당시 김백준 전 청와대 총무기획관이 이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지광 스님을 찾아가 현금을 건네받았다는 진술을 김 전 기획관으로부터 받았다. 검찰은 지광 스님이 능인선원의 숙원사업인 불교대학원대학교 설립을 도와 달라는 청탁과 함께 돈을 건넨 것으로 파악했다. 지광 스님도 최근 검찰에 출석해 이 전 대통령 측에 돈을 건넨 사실을 시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전 대통령은 얼마 후 제17대 대통령에 당선되자 지광 스님에게 전화해 “접니다. 고맙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당선사례를 했다. 검찰은 이 전화가 금품을 지원받은 데 대한 감사 표시라고 판단했다. 지광 스님 외에도 이 전 대통령 측에 불법 자금을 건넨 이들이 이 전 대통령의 구속영장에 나와 있다. 자금 거래의 통로 역할을 맡은 사람은 이 전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전 의원과 대선캠프 내 핵심 측근들인 것으로 조사됐다. 한편 이 전 대통령은 이런 불법자금 수수 혐의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일”이라며 지난 14일 검찰 조사에서 진술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기독교 장로 MB, 지광스님에게 3억원 받았다”

    “기독교 장로 MB, 지광스님에게 3억원 받았다”

    기독교 장로인 이명박 전 대통령이 지광스님으로부터 3억원을 받았다는 복수의 언론보도가 나왔다.검찰에 따르면 이 전 대통령은 지난 2007년 12월 대선이 일주일 임박한 시점에 김백준 전 청와대 총무기획관을 능인선원에 보내 돈을 요구했다. 불교대학 설립을 추진 중이던 지광 주지스님은 당선이 유력한 이 전 대통령 측에게 현찰 3억을 건넸다는 내용이다. 이 전 대통령은 “지광스님으로부터 돈 받은 사실이 없고 전혀 모르는 일”이라며 혐의를 부인했다. 그러나 능인선원 관계자는 뉴스1에 “김백준 전 청와대 총무기획관이 구속됐을 당시 지광스님도 검찰 조사를 받았다. 3억원을 이 전 대통령 측에 보낸 사실을 지광스님이 먼저 (능인선원에) 알려 왔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지광 스님은 ‘민원 편의를 봐줄 테니 당선 축하금을 보내라’는 MB측의 제안에 따라 돈을 보냈다고 순순히 인정했다”며 “지광스님은 사찰 신도인 김 전 기획관의 지인을 통해 돈을 전달했다고 털어놨다”고 전했다. JTBC 뉴스룸은 19일자 보도를 통해 김백준 전 기획관이 지광 스님에게 “자금이 바닥나 사정이 어렵다. 기독교계(개신교)에서도 다 돈을 줬는데, 능인선원이 불교계를 대표해 돈을 마련해 달라”고 요구했다는 내용을 전했다. 일부 네티즌들은 이에 대해 ‘돈신을 믿는구나’, ‘장로와 스님의 종교 간 화합’, ‘장로가 스님을 갈취했다’는 등의 반응을 내놓았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MB, 스님에게도 뇌물 ‘꿀꺽’... 불교대학 설립 대가로 2억 수수 의혹

    MB, 스님에게도 뇌물 ‘꿀꺽’... 불교대학 설립 대가로 2억 수수 의혹

    이명박 전 대통령이 대선을 앞둔 2007년 말 불교계 인사로부터 2억여 원을 받은 혐의에 대해 검찰이 수사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19일 검찰 등에 따르면 이 전 대통령은 2007년 12월 대선을 며칠 앞두고 김백준 전 청와대 총무기획관에게 능인선원 주지인 지광 스님을 만나라고 지시했다. 서울 강남구에 있는 능인선원은 신도 수가 25만명에 달하는 국내 최대 선원(禪院·불교 교육기관)의 하나로 꼽힌다. 능인선원은 부산 지역 언론사 ‘국제신문’의 대주주로, 지광 스님은 국제신문의 회장직도 맡고 있다. 김 전 기획관은 이 전 대통령 지시에 따라 서울 모처에서 지광 스님을 만났고 “불교대학 설립에 편의를 제공해 달라”는 청탁과 함께 2억여 원을 받은 것으로 파악됐다. 김 전 기획관은 이런 내용을 검찰에 진술했고, 지광 스님도 최근 검찰 조사에서 돈을 건넨 사실을 시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전 대통령은 검찰 조사에서 “지광 스님으로부터 돈 받은 사실이 없고 전혀 모르는 일”이라며 혐의를 부인했다고 한다. 그러나 검찰은 김 전 기획관 등의 진술이 구체적이어서 이 전 대통령의 뇌물 혐의에 추가한다는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이 전 대통령의 뇌물 혐의 액수가 큰 데다 이 전 대통령이 혐의를 부인하고 있어 구속영장 청구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도 지난 16일 이런 내용의 수사 결과를 문무일 검찰총장에게 보고했다. 문 총장은 이르면 이날 이 전 대통령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할지를 결정할 방침이다. 한편 검찰은 이 전 대통령의 부인 김윤옥 여사를 비공개로 소환해 조사하는 것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이 전 대통령 사위인 이상주 삼성전자 전무는 이팔성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으로부터 받은 22억 5000만원 중 5억원을 김 여사에게 건넸다고 검찰에서 진술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내륙 위치한 남원, 곳곳에 왜구가 할퀸 상흔 … 황산엔 승전의 역사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내륙 위치한 남원, 곳곳에 왜구가 할퀸 상흔 … 황산엔 승전의 역사

    전북 남원 시내에서 순창으로 방향을 잡아 시내를 막 벗어나면 오른쪽으로 널찍한 절터가 나타난다. 만복사가 있던 자리다. ‘춘향가’의 몇몇 고전소설 판본에는 이몽룡이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관아로 행차하기에 앞서 만복사를 찾아 노승들이 춘향을 위해 재를 올리는 모습을 구경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 장면은 김연수제 판소리 ‘춘향가’에도 있다. 춘향을 월매가 만복사에 시주하고 불공을 드린 공덕으로 낳은 자식으로 그리고 있다.잘 알려진 대로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은 ‘금오신화’의 한 편으로 ‘만복사저포기’를 남겼다. 저포(樗浦)는 윷놀이다. 양생(梁生)은 부처님과 내기를 해서 이긴 다음 아름다운 처자를 만나 이승의 3년에 해당하는 꿈같은 사흘을 지내고는 헤어진다. 이 처자는 왜구에 죽은 혼령으로, 이후 양생도 장가들지 않고 지리산에 들어가 약초를 캐며 살았다는 줄거리다.소설 속 여주인공이 부처님에게 바친 축원문에는 당시 사정이 담겨 있다. ‘지난번 변방의 방어가 무너져 왜구가 쳐들어오자, 싸움이 눈앞에 가득 벌어지고 봉화가 여러 해나 계속되었습니다. 왜적이 집을 불살라 없애고 노략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동서로 달아나고 좌우로 도망쳤습니다.…그런데 날이 가고 달이 가니 이제는 혼백마저 흩어졌습니다.’지금 만복사에 가면 텅 빈 마당에서 높이 1.6m의 당당한 석제 불좌(佛座)를 만날 수 있다. 소설에서도 양생이 불좌 뒤에 숨어 아름다운 처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대목이 나온다. 아마도 이 불좌가 아닐까 싶다. 매월당과 시대를 초월해 같은 공간에서 호흡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최척전’을 지은 현곡 조위한(1567∼1649)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덕령 휘하에서 종군한 인물이다. 이 소설은 최척과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여성 옥영의 사랑이야기를 뼈대로 정유재란 당시 남원이 왜군에 함락됨에 따라 가족이 붙들려 가거나 뿔뿔이 흩어지는 모습과 기적적인 재회를 그렸다. 소설 속에서 최척은 만복사에서 가까운 동네에 산다. ‘춘향전’이 조선 후기 남원의 사회상을 드러내고 있다면 ‘만복사저포기’와 ‘최척전’은 각각 조선 초기와 중기 왜적의 침입에 따른 살육과 파괴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남원은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지리산 기슭이다. 왜구의 세력은 단순한 해적 수준을 크게 넘어섰다. ‘만복사저포기’가 묘사한 대로 왜구는 고려말, 조선초에 가장 극성을 부렸다. 특히 14세기 후반기 피해가 가장 커서 고려 멸망의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됐다는 시각도 있다. 역사학계는 고려시대 왜구의 발생을 크게 두 시기로 나누고 있다. 1223년 현재의 김해인 금주에 나타난 것을 시작으로 1265년까지 10차례 이상 침입했는데, 대부분 선박 2~3척 규모였다. 왜구는 1350년부터 연안뿐 아니라 내륙에도 출몰한다. 해안 조창에서 걷은 세곡을 수도로 나르는 조운선이 공격 목표가 되자, 고려가 세곡 운송의 상당 부분을 육운(陸運)으로 전환한 것이 이유의 하나가 됐다. 대형 선단을 이룬 왜구는 개경이 지척인 강화 교동도에도 출몰했고, 조정은 천도를 고민하는 단계에 이른다. 조선 건국 이후에도 왜구는 태조가 즉위한 뒤 5년 동안에만 53차례나 침입했다. 황산대첩비는 고려시대 왜구의 남원 침입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런 대목이 보인다. ‘신우(辛禑) 6년(1380) 경신 8월, 왜적의 배 500척이 진포에 배를 매고 하삼도에 들어와 연해 주군(州郡)을 도륙하고 불살라서 거의 없어지고, 인민을 죽이고 사로잡은 것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조선은 우왕을 신돈의 자식이라 하여 ‘신우’라 했다. 왜구가 충청·전라·경상도를 휩쓴 참상은 ‘만복사저포기’와 매우 닮아 있다. 당시 고려는 금강 하구 진포에 정박한 왜구의 선단을 최무선 장군의 화포로 모두 불사르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자 퇴로를 잃은 왜구는 지금의 충북 옥천과 경북 상주, 경남 함양을 떠돌며 살인, 약탈, 방화를 자행한다. 이어 남원으로 몰려들어 운봉 인월역 황산에 진을 친 왜구를 당시 양광·전라·경상 삼도도순찰사 이성계가 섬멸한 것이 황산대첩이다. 황산대첩비는 1577년(선조 10) 이 싸움의 현장에 세운 것이다. 만복사는 남원 시내 서쪽에 자리잡고 있지만, 황산대첩비를 찾으려면 자동차를 타고 시내에서 동쪽으로 20분쯤 달려야 한다. 이성계가 어린 두목 아지발도(阿只拔都)가 이끈 왜구를 무찌른 현장이다. 당시 지명 인월(印月)은 이후 인월(引月)로 바뀌었다. 부처의 교화가 세상 곳곳에 비친다는 월인천강(月印千江)에서 따온 듯한 불교적 이름이 황산대첩 당시 피아를 구분할 수 없는 어두운 밤 보름달을 끌어올려 왜구를 물리쳤다는 설화 속 의미로 대체됐다. 황산대첩비는 일제강점기 수난을 겪는다. 조선총독부는 ‘학술상 사료로 보존의 필요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 존재가 현 시국의 국민사상 통일에 지장이 있는 만큼 철거함은 부득이한 일’이라면서 ‘서울로 가져오기엔 수송의 곤란이 적지 않고, 그 처분을 경찰 당국에 일임하는 바’라고 했다. 결국 1945년 1월 폭파됐고, 지금의 비석은 1957년 복원한 것이다. 그러니 대첩비는 받침돌과 지붕돌만 옛것이다. 하지만 파비각(破碑閣)에 비석 조각이 남아 있으니 역사적 의미는 훨씬 커졌다. 100m 남짓 떨어진 곳에는 어휘각(御諱閣)이 있다. 이성계는 대첩 이듬해 함께 싸운 원수와 종사관들의 이름을 이곳 바위에 새겼다. 일제는 이 글씨도 정으로 쪼아내 지금은 알아볼 수가 없다. 황산에 승전의 역사가 있다면 남원 시내에는 패전의 역사가 곳곳에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은 곡창 호남에 진입하지 못했다. 이를 패전의 원인으로 지목한 왜군은 정유재란을 벌이면서 전라도를 먼저 점령하고 북진하는 계획을 세웠다.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가 이끈 왜군 5만 6000명은 1597년 8월 13일 남원을 공격했다. 남원성은 전라 병사 이복남과 명나라 부총병 양원의 3000명 군사가 지키고 있었다. 남원 백성들까지 모두 1만명이 합심해 싸웠지만 모두 순절하고 말았다. 왜란이 끝난 뒤 시신을 합장하고 1612년(광해군 4) 사당을 세웠다. 지금의 만인의총은 옛 남원역 근처에 있던 것을 1964년 옮긴 것이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을 남원성의 흔적은 시내에서 만인의총으로 가는 중간에 일부가 남아 있다. 옛 남원읍성의 서북쪽 모서리에 해당한다. 시내 남문로 골목 안에 있는 관왕묘도 왜란의 흔적이다. 남원싸움 이듬해 명나라 장수 유정은 대군을 이끌고 왔는데, 1599년 자신들의 수호신인 관우의 사당을 지었다. 성 동문 밖에 있던 것을 1741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관왕묘는 문이 굳게 잠겨 있어 담 너머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이응노와 수덕여관을 넘어서 만나는 예산 수덕사(修德寺)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이응노와 수덕여관을 넘어서 만나는 예산 수덕사(修德寺)

    “모두 같은 민족 아닙니까? 여러분들도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동백림에 간 것은 자식의 소식을 듣고, 거기서 만날 수 있다고 해서 간 것입니다...그 아들을 만나게 해 주겠으니 오라고 했을 때, 거절합니까, 만났다가 어떻게 될까를 생각해 그만둡니까.” 세계적인 추상화의 거장, 고암(顧庵) 이응노(李應魯·1904~1989) 화백이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법정 구속되기 전의 마지막 최후 진술이다. 동백림 사건은 1967년 7월 8일 중앙정보부에서 발표한 간첩단 사건으로 194명에 이르는 유학생들과 교민들이 동베를린에 위치한 북조선 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고 간첩교육을 받아 대남적화활동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음악가 윤이상을 비롯하여 천상병 시인 등이 연루되었고, 결국 34명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졌으나 대법원 최종심에는 간첩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이가 한 명도 없는 ‘구름같은’ 간첩단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이응노는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풀려난다. 이후 이응노는 수덕사 앞 수덕여관에서 삶의 한 부분을 내려 놓는다. 이응노의 삶과 수덕여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충청남도 예산 수덕사로 가 보자. 충청남도 덕숭산(德崇山)에 위치한 수덕사(修德寺)는 충청도의 절답다. 겉으로는 무심한 듯 소란스럽게 이름 내지는 않았으나, 내실은 진즉부터 으뜸인 불교 도량임에는 분명하다. 왜냐하면 수덕사는 백제계 사찰 가운데서는 유일하게 현존하는 유서 깊은 절집일 뿐만 아니라, 맞배지붕 양식으로 이름 알려진 고려시대(1308년)의 대웅전이 세월에 푹 곰삭은 나무 기둥들과 함께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한 때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노래로 불리어 알려질만큼 훌륭한 비구 스님들을 배출하는 명문 선원인 ‘견성암’도 수덕사에 위치한다. 여기에 더해 현재 수덕사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5대 총림 가운데 하나인 덕숭총림으로 많은 스님들이 강학과 참선정진하는 종합교육도량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충청남도 내포 일대의 36개 말사를 관장하는 제7교구본사이기도 하니 중부 지역에서는 단연 손꼽히는 사찰임에는 분명하다. 이런 수덕사를 더욱더 유명하게 만든 것이 바로 수덕사 일주문 옆에 위치한 수덕 여관이다. 수덕여관은 이응노 화백이 1945년 3월, 일본 패망을 앞두고 징용을 피해 수덕사 인근 비구니가 쓰던 절집을 손수 구입한 곳이다. 이후 이응노 화백의 처(妻) 박귀희 여사(1909~2001)가 이곳을 여관으로 운영하며 프랑스로 떠나버린 남편을 기다리면서 자식을 길러내었다. 지금도 수덕여관 주변에는 이응노 화백이 동백림 사건의 옥고를 치른 후 이곳에 머물면서 손으로 직접 새긴 문자 추상 암각화가 곳곳에 남아 있다. 만물의 흥망성쇠를 표현한 것으로 알려진 이 암각화는 지금도 50여년 전의 이야기를 생생히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수덕사에 대한 여행 10문답>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야? - 충청도 근역에는 단연 으뜸인 사찰이다. 수덕여관의 역사를 함께 2. 누구와 함께? - 나이드신 부모님과 천천히 3. 가는 방법은?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 안길 79 - 예산버스터미널 → 수덕사 (요금 1,760원/ 1시간 소요) 4. 감탄하는 점은? - 고려시대의 대웅전, 수덕여관 인근의 이응노 화백의 암각화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 주말에는 인산인해를 이루는 곳이다. 6. 꼭 봐야할 장소는? - 수덕여관 인근의 암각화, 대웅전, 범종루 7. 토박이들이 추천하는 먹거리는? - 소머리국밥 ‘한일식당’, 곱창 ‘신창집’, 수제비 ‘대흥식당’, 국수 ‘쌍송국수’ 8. 홈페이지 주소는? - http://www.sudeoksa.com/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 추사고택, 한용운 생가터, 장영실 과학관 10. 총평 및 당부사항 - 수덕사는 가파른 계단이 많은 사찰이어서 천천히 올라가도록. 이응노 화백의 삶을 이해한 뒤 수덕여관을 둘러 본다면 한 예술가의 파란만장한 삶을 예술로 이해할 수 있다.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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