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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찰총경·구청장 소환‘호프집 비호’집중추궁

    인천 호프집 화재사고에 대한 경찰수사가 경찰 및 구청 고위간부로 확대되고 있다. 인천지방경찰청은 7일 인천중부서 서장 재직 당시 불법영업으로 적발된 ‘라이브Ⅱ’ 호프집 업주에 대한 부하직원의 구속건의를 묵살한 혐의를 받고있는 최모 총경(54)을 소환,조사했다. 또 지방청 단속지시를 받고도 방치한 혐의(직무유기)로 중부서 전 방범과장 신모 경정(51)에 대해서도 조사를 벌였다.이밖에 경찰의 조사를 받고 있는경찰간부는 김모·박모 경정,김모·박모 경위 등 모두 4명이다. 경찰은 이와 함께 유흥업소 인·허가 및 단속권을 갖고 있는 중구청이 정씨의 업소에 대해 불법영업을 묵인했는지 여부를 캐기 위해 이세영(李世英) 구청장을 이날 소환,조사했다. 경찰은 이날 호프집 주인 정성갑(鄭成甲·34)씨가 운영하는 업소 총관리사장 이모(31)·박모(28)씨 등 3명의 신병을 확보,이가운데 이씨와 박씨를 긴급체포했다.경찰은 정씨의 핵심측근인 이들을 대상으로 뇌물상납과 비밀장부 존재여부 등에 대해 집중 조사하고 있다. 경찰은 이에 앞서 정씨로부터 “112신고가 오면 알려달라”는 부탁과 함께60만원을 받고 정씨 업소를 단속하지 않은 축현파출소 서흥선 경장(32)을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했다. 한편 이번 화재참사 희생자들에 대한 합동추도식은 지난 6일 인천실내체육관 합동분향소에서 유족 1,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졌다. 인천 김학준기자hjkim@
  • ‘벗 잃은 校庭’ 애도·탄식만 가득

    인현동 ‘호프 러브’ 화재 참사로 학생들을 잃은 인천시내 30여개 학교들은 1일 급우와 교사들의 애도와 탄식,자성의 목소리로 가득했다.수업이 제대로 진행될 수가 없었다.자체 애도행사를 갖고 조위금을 걷는가 하면,학교 내 분향소 등에 이들의 조문행렬과 흐느낌이 이어졌다.학교장들은 학생들이 유해업소에 출입하는 일이 없도록 적극 나서기로 다짐했다. 광성고 1학년 김현경군(16)과 박문여중 3학년 이아름양(15)의 ‘만남 백일잔치’를 축하하기 위해 모인 양측 친구 11명 중 광성고생 7명과 박문여중생 2명 등 9명이 숨진 가운데 두 학교 학생들은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에 졸지에 급우를 잃은 충격에 할 말을 잊은 듯 무거운 분위기였다. 박문여중 3학년 신(信)반 구명수(43)교사는 “학생 지도를 잘 하지 못한 죄로 얼굴을 들 수가 없다”고 고개를 떨궜다.학생들은 교내 2층 시청각실에마련된 분향소에서 분향하고 ‘아름이가 바른생활부장을 하며 우리들의 고민을 들어줬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죽다니‥”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광성고 학생들은 고인의 명복을 비는 뜻으로 검은 리본을 달고 오후에 희생자가 생긴 학급의 학생 전원이 영안실을 찾아가 조의를 표했다.김군의 담임차상삼(車相三·41) 선생은 “이번 중간고사에서 김군의 성적이 많이 올라칭찬해줬는데 이런 일이 생길 줄 꿈에도 몰랐다”고 말했다. 황미선양(18)의 생일파티를 위해 3학년 학생 9명이 난생 처음 호프집에 들렀다 모두 함께 변을 당한 인천여상은 이날 오전 교내방송을 통한 추도행사를 가진 후 ‘친구들이 죽은 것은 어른들 때문’이라며 울부짖는 학생들을진정시키느라 애를 먹었고 3학년5반 이정미양(18)은 친구 김태연양(18)의 죽음을 슬퍼하다 실신,인하대병원으로 옮겨지기도 했다. 한편 인천시 교육청은 이날 시내 82개 고교 교장단회의를 열어 유족들에게사과한 뒤 ‘5자 순찰대’(학부모회,학교운영위,민간단체,자원봉사자,교사)를 활성화해 매월 2차례씩 경찰,구청과 합동단속을 하기로 했다. 특별취재반
  • 인천화재참사 표정

    ●호프집 화재 참사 희생자들의 합동 분향소가 마련된 인천 숭의동 체육회관 강당에는 10여개의 영정이 안치된 채 유가족 50여명의 오열이 온종일 끊이지 않았다.유가족들은 분향소 이전 소식에도 아랑곳않고 영정 앞에 주저앉아눈물을 흘리며 통곡했다. 외아들 신상진군(16·계산공고)을 잃은 어머니(42)는 아들의 영정을 끌어안은 채 “우리 아가 불쌍해서 어떻게 하나.엄마는 눈뜨고 있는데 저 세상에가니 좋으냐”고 오열했다.오상윤군(16·광성고)의 아버지(49)는 영정 앞에서 6살인 상윤군의 막내 여동생을 껴안고 통곡하다가 실신했다. ●유가족들은 체육회관 강당에 마련된 합동분향소가 비좁다며 반발,일부 유가족들은 영정을 다시 병원으로 옮기는 등 소동을 빚었다.한 유가족은 “고인 한사람에 20명씩만 조문을 온다고 해도 1,000명이 넘는데 이 공간에 다들어갈 수 있느냐”고 반문하며 거세게 항의했다. 유가족대책협의회(위원장 장형렬)는 “희생자 55명의 분향소를 설치하기에200여평의 강당이 비좁고 지저분하다”며 분향소를 인천 시립체육관으로옮겨 달라고 요구했다.이에 대해 인천시 중구 사고수습대책본부는 “시립체육관에서는 오는 7일까지 불우이웃돕기 바자회가 열려 곤란하다”며 난색을 표시하다가 유가족들의 요구를 수용,“이르면 2일 오전까지 인천 시립체육관으로 분향소를 옮기겠다”고 입장을 바꿨다. ●체육회관의 합동분향소에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단짝처럼 지내던 죽마고우의 영정이 나란히 안치돼 주위의 눈시울을 적셨다.인항고 1년 김태호군(17)과 대헌공고 1년 박병구군(17)은 90년 용현초등학교부터 용현중학교까지9년을 같이 다녔다.김군과 박군의 부모들은 “이들이 친형제처럼 다정하더니 화마가 휩쓸고 간 뒤에는 주방 쪽에 나란히 엎드린 채 숨져 있었다”며 흐느꼈다. ●이세영(李世英)인천중구청장은 이날 새벽 삭발을 했다.그는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겪은 유족들 앞에서 자숙하는 의미로 삭발했다”면서 “심기일전해서 최선을 다해 사후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 인현동은 가출청소년들의 비상구? “어차피 갈 데도 없는데 잠만 재워주면 머무는 거죠” 130여명의 사상자를 낸 인천시 중구 인현동 호프러브 건물 앞은 ‘로데오거리’로 통한다.이 거리는 평소에도 10대들로 발디딜 틈이 없다.이들중 상당수는 집을 나왔거나 마땅히 갈 곳이 없는 청소년들이다. 이들의 주요 활동무대는 노래방,호프집,콜라텍,게임방이다.이곳에서 이른바 ‘삐끼’(호객꾼)나 잡일꾼으로 일한다.호프러브 건물 앞에서 만난 10대 후반 호객꾼들은 “업주로부터 거의 돈을 받지 못하지만 따돌리지 않고 받아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고 입을 모았다.업주들은 이들을 귀찮아 하면서도이들의 친구들이 업소에 찾아오면 영업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업소에서 잠을자는 것을 묵인해주고 있는 실정이다. 화재사고 당시 지하 1층 노래방에서 청소를 하다가 불을 낸 혐의로 구속영장이 신청된 임모군(15) 역시 올해 초 중학교를 중퇴한 뒤 인현동의 게임방등에서 지내왔다.임군은 당시 아는 형이 일하는 노래방의 청소를 도와주고있었다. 게임방과 호프집을 전전하고 있다는 장모군(17)은 “중학교를 자퇴한 뒤 아는 형들을 찾아다니며 일도 하고 시간이 나면 같이 논다”면서 “집에 있을수도 없고 일자리도 얻지 못하는 우리들을 받아주는 곳은 게임방과 호프집뿐”이라고 말했다. 근처 축현파출소 관계자는 “인현동 유흥가 주변을 배회하며 지내는 청소년들이 많지만 집으로 돌려보낼 강제수단은 없다”고 말했다. 특별취재반
  • [인천 화재참사] 이모저모

    인천 중구 인현동 ‘호프러브’ 화재사고 희생자의 시신이 안치된 병원 영안실에는 유가족들의 통곡이 그치지 않았다.학생들의 문상도 끊이지 않았다. 참사의 한 단면을 엿보게 했다. ■인하대 병원과 인천 길병원 등 시신이 안치된 영안실과 응급실은 화재가난 다음날인 31일까지 그을음 냄새가 진동했다.연기에 그을려 온몸에 화상을입은 부상자들의 신음소리가 응급실을 가득 메웠다. 서영민군(15·중학 2년)의 빈소가 차려진 길병원 영안실에서는 서군의 어머니 김분녀씨(38)가 “영민이 찾아 와….어떻게 키운 자식인데…”라고 흐느끼다 끝내 실신.서군의 큰어머니 김일순씨(52)는 “짧은 시간에 어린 학생들이 한꺼번에 많이 죽은 것은 단순한 화재사고가 아닌 분명한 ‘인재’”라며 “철저한 진상규명을 통해 책임자를 엄중처벌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하대 병원측은 신분증이나 소지품 등이 발견되지 않자 사망자들의 사진을 병원 응급실 입구에 붙여 신원을 확인했다.사진이 나붙자 가족 수십명이순식간에 몰려 큰 혼잡이 빚어졌으며,사진을 확인한 뒤안도하는 가족과 사망사실이 확인된 가족들의 통곡이 터지는 등 희비가 엇갈렸다. ■가천의대 부속 길병원 응급의학과 이근(李瑾)교수는 이번 화재사고 부상자들은 앞으로 3일간이 생사의 고비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이교수는 대부분의부상자들이 유독가스 흡입자들이라며 가스 흡입량에 따라 조금 차이가 나지만 폐부종의 경우 3일 이내에 환자의 60∼70%가 사망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인천시 교육청은 31일 낮 12시 현재 이번 사고 사상자 134명 가운데 중·고교생은 인천 시내 34개교 105명인 것으로 잠정집계했다.이중 49명이 숨지고 56명이 중경상을 입었는데 고교생은 전체 82개교중 30개교 96명이,중학생은 4개교 9명인 것으로 파악됐다. ■참사가 발생한 30일 인천지역 82개 고교중 13개 학교가 이날 축제일이어서 학생 사망자가 많은 것으로 풀이.교육청은 일단 축제를 마친 학생들중 일부가 호프집에서 뒤풀이를 하다 변을 당한 것으로 추정하면서도 피해 학생들의 출신교가 무려 34개에 이른 점을 들어 이 호프집이 청소년들에게 술을 파는업소로 널리 알려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자녀를 잃은 유가족들은 31일 오전 인천 중구청을 찾아가 합동분향소 설치를 요구하며 강하게 항의했다.김준호군(16)의 아버지 김용식씨(40) 등 인하대 병원에 시신이 안치돼 있는 유가족 10여명은 “말로만 합동분향소를 세워주겠다고 하고 지금까지 아무런 대책조차 세우지 않고 있다”면서 “싸늘하게 식어가는 아이들을 냉동실에 다시 넣으란 말이냐”며 울부짖었다.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로 심하게 불에 탄 사체에서 나온 학생증이 남의 것으로 확인돼 죽은 줄 알았던 학생이 무사히 구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인천 사랑병원으로 옮겨진 사체에서 진상호군(18·인천 계산공고 1년)의 지갑이 발견돼 경찰과 진군의 부모는 진군이 죽을 줄 알았으나 확인 결과,진군은 가벼운 타박상만 입고 인하대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특별취재반]
  • ‘씨랜드’ 이모저모…눈물의 전송

    5일 오전 경기도 화성군 마도초등학교에서 열린 ‘씨랜드’수련원 화재사고 희생자인 고(故)김영재(38)교사의 영결식에는 152명의 초등학생과 교사,주민 등 500여명이 참석,제자들을 구하고 숨진‘참 스승’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봤다. 김 교사가 담임을 맡았던 5학년1반 전수현(11)양이 “파도가 출렁일 때마다 선생님의 음성이 들려올 것 같고 교정 어디에선가 우리를 지켜볼 것 같은데 그 빛이 너무 밝아 우리는 보지 못하는 것 같아요”라고 울먹이며 조사를읽자 학생들은 서로 부둥켜안은 채 울음을 터뜨렸다.김 교사의 부인 최영란(34)씨와 두 딸은 사랑하는 남편,자애로웠던 아빠와의 영원한 이별이 믿어지지 않은 듯 영정을 붙잡고 오열해 슬픔을 더했다. 수련원 씨랜드 화재참사로 희생된 유치원생들의 부모들은 이날“화재현장에서 처참하게 죽은 아이들의 원만한 장례식을 위해 아이들의‘오체’(五體)를 완성해줄 것”을 정부당국에 촉구했다. 이들은 이날 오후 분향소가 마련된 서울 강동교육청에서 기자회견을 갖고“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시신확인시 아이들의 끔찍한 모습 때문에 정신적스트레스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다”며 이같이 요구했다. 이들은 이날 가현·나현 쌍둥이 자매의 아버지인 고석씨를 위원장으로 한‘씨랜드 화재참사 유족 실행위원회’를 구성,독자적인 자료수집을 통해 사고원인 규명 및 향후 대책에 직접 나서기로 했다. 이날 오전 화성경찰서에 출두한 김일수(金日秀)화성군수는 기자들에게 뇌물수수 등 자신의 혐의내용을 모두 부인. 다소 굳은 표정으로 취재진에 둘러싸인 김 군수는 “씨랜드 건축 인·허가과정에서 부하 직원들에게 압력을 행사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수사해보면 알겠지요”라고 짤막하게 대답했으며 뇌물수수 여부를 묻는 질문에도고개를 2∼3차례 가로저으며 강하게 부인. 화성 김병철기자 kbchul@
  • 씨랜드 화재 분향소·현장 이모저모

    서울 강동교육청 합동분향소에서 ‘씨랜드’ 수련원 화재 희생자 유족들은2일 사고 현장을 방문,사고원인 규명과 책임자 처벌 등이 조속히 이뤄지지않고 있다며 관계자들에게 강력히 항의했다. 오전 8시쯤 합동분향소에서 혜지(6·부천 이월드 유치원)양의 아버지 김청훈(40)씨는 딸의 영정을 끌어안고 “혜지야,어디갔니….아빠가 왔다”고 외치며 바닥에 주저앉아 40여분간 통곡했다.부천 이월드 유치원 소속 75명의원생 중 유일하게 목숨을 잃은 혜지양의 유가족들은 “223호실에서 선생님·친구들과 함께 잘 자고 있었다는 혜지가 왜 혼자 숨진 채 발견됐는지 납득되지 않는다”며 원인 규명을 요구했다. 유족들은 이날 낮 경기도 화성군 씨랜드 화재 현장을 둘러보고 사고 당시괴로워했을 아이들을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유족들은 18명이 희생당했던 301호에서는 재를 쓸어담으며 아이들의 유품을 챙겼다.재속에는 녹아내린 슬리퍼,그을린 물병,타다남은 청바지 등이 있었으며 반지와 조금 그을린 머리카락도 나왔다.유족들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현장의 유품을 모두 수거해갔다더니 이렇게 멀쩡한 머리카락이 남아있을 수 있느냐”며 흥분했다. 수련원 숙소 주변에 널려있는 소주병은 유족들을 더욱 격분시켰다.유족들은 “애들이 죽어갈 때 술을 먹고 있었어”라며 울음을 터뜨렸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이원태(李垣兌·46)법의학부장은 “신체적 특징이 발견되는 시신이 많아 빨리 신원확인 작업을 끝낼 것 같다”면서 “이르면 3일,늦어도 1주일 안에 신원확인 작업을 마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씨랜드 화재 당시 오산소방서 마도소방파견소 소속 홍세화(44)소방사는 불속에 갇힌 아들의 구조도 포기한채 진화작업에 몰두했던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홍소방사는 지난 30일 새벽 1시50분쯤 혼자 야간근무를 하다 “씨랜드에서화재가 났다”는 연락에 마침 여름캠프에 참가중이던 아들 창희(13·마도초등교 6년)군의 생명이 위험하다는 생각을 떠올렸다.그러나 홍소방사는 빨리도착,더 많은 인명피해를 줄여야 한다는 생각에 소방펌프차를 몰고 10여분만에 20㎞의 도로를 달려 화재현장에 도착,진화작업에 나섰다. 특별취재반
  • [화성 어린이캠프 참사]캠프 아르바이트 외동딸 잃은 어머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루종일 애타게 찾아 헤맸는데…이럴 수는 없습니다” 1일 새벽 뒤늦게 외동딸 박지현(23·성신여대 체육학과 3년 휴학)씨의 시신을 확인한 어머니 조혜영(51·경기도 시흥시 대야동)씨는 애써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조씨가 사고소식을 처음 들은 것은 지난달 30일 오후 6시쯤.딸과 함께 이벤트강사로 떠났던 동료로부터 “죄송하다.사고가 났다”는 짤막한 전화가 걸려왔다. 전날 아침 “화성으로 유치원캠프 강사 아르바이트를 하러 간다”고 집을나선 딸이 30일 오후부터는 휴대전화도 불통이어서 걱정을 하고 있던 터였다. 전화를 받자마자 사고대책본부가 차려진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사무소로 달려갔다. 그러나 불이 난 씨랜드 수련원 숙소에서 딸이 잔 사실은 확인했지만 생사여부는 종잡을 수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2시간 넘게 서울로 차를 달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도착했다.밤늦도록 신원미상의 시신을 확인하다 이날 새벽녘에야 딸의 검정색 손지갑을 찾을 수 있었다. 지갑에는 평소 지현씨가 끔찍이 아끼던 조카슬기(7·여)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제손으로 등록금을 벌겠다고 휴학까지 했던 착한 딸이었는데…” 조씨는 합동분향소가 차려진 서울 강동교육청에 넋을 잃은 채 앉아 있었다. 특별취재반
  • [화성 어린이캠프 참사]경기도·화성군 피해보상 속앓이

    경기도와 화성군이 ‘화성 어린이캠프 화재’ 피해자에 대한 보상문제로 속앓이를 하고 있다. 씨랜드측이 가입한 배상보험이 피해규모에 비해 턱없이 부족,유족들이 도·군에 보상을 요구해 올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군은 법적인 근거가 부족해 보상 자체가 원칙적으로는 쉽지 않다는 점에서 곤혹스러워하고 있다.사고를 낸 개인 사업자의 배상 능력이 부족하다고 지자체 예산을 지출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시·도는 유족측이 1인당 최소 1억5,000만원의 보상을 요구해 올 것으로 보고 있다.모두 합치면 34억5,000만원이 넘는다.그렇지만 화성군은 재정 부족으로 분향소 설치비와 장제비,유족관리비용조차도 버거워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도·군이 걱정하는 것은 민사소송이다.인·허가 과정에서 관리·감독을 소홀히 했던 점이 드러나 소송은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경찰 수사에서 일부 공무원들이 업무상 과실 등으로 형사처벌을 받게 되면유족들의 청구액은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돼 수사 진행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특별취재반
  • [화성 어린이캠프 참사]분향소·國科搜 표정

    1일 경기도 화성 청소년수련원 화재 희생자 합동분향소가 차려진 서울 강동교육청에는 종일 유족들의 통곡이 그치지 않았다. 오전 10시쯤 희생자 23명의 영정이 모두 합동분향소에 도착,안치돼 처음으로 분향이 이뤄졌다. 분향이 시작되면서 유족들이 통곡하는 바람에 합동분향소는 다시 한번 울음바다가 됐다. 생일을 앞두고 떠난 고가현·나현 쌍둥이 자매 어머니 장정심(33)씨는 부축을 받으며 국화 두송이를 영정 앞에 놓고 “가현아,나현아”하고 울부짖으며영정을 끌어안았다. 사고소식을 듣고 달려온 친척과 이웃들은 숨진 어린이들의 부모를 위로하면서 함께 울먹였다.일부 유족들은 “이번 사고 책임자들은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서 흥분했다. 오전 9시45분쯤에는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총재가 보낸 조화가 배달됐으나 유족들이 “화환이나 조의금은 받지 않겠다”고 거부해 실랑이끝에 화환은 1층 로비로 밀려났다.또 한 유족은 임창렬(林昌烈) 경기도지사가 보낸화환을 부수기도 했다. 이날 오후 유가족을 찾은 김일수 화성군수는 유가족의질문에 일일이 해명하느라 진땀을 흘렸다.불이 난 씨랜드 숙소를 재임기간인 지난해 12월 일반건축물로 준공허가를 내준데 대해 유족들의 항의가 빗발치자 김 군수는 “건축과장 전결사항이어서 정확한 경위는 알 수 없다”며 말꼬리를 흐렸다. 합동분향소에서는 이날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관계자들이 숨진 어린이들의신원파악을 위해 유족을 상대로 기초적인 인적사항 조사와 함께 인터뷰를 실시했다. 부모들은 아이들에 대한 기억을 하나하나 더듬다가 불길 속에서 공포에 떨며 애타게 엄마를 찾았을 생각에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수영(6)양의 아버지천현중(41)씨는 떨리는 손으로 ‘하늘색 청바지에 긴 나팔바지’,‘앞니 두개 빠짐’,‘염색한 갈색머리가 찰랑거림’ 등이라고 ‘실종자 인적사항 조사표’를 한칸 한칸 메워나갔다. 국과수측은 “오후 1시부터 성인 시신 4구에 대한 부검을 시작했다”면서“성인들의 신원확인은 이르면 다음주 중반이면 가능하고 어린이들도 한달안에 끝내겠다”고 밝혔다. 씨랜드 수련원에서 제자들을 구하다 변을 당한 김영재(39)교사가 재직했던마도초등학교측은 이날 아침 2층 과학실에 임시분향소를 설치,조문객을 맞았다. 첫 교시가 시작된 아침 9시20분 담임 선생님들로부터 김교사의 희생을 전해들은 학생들이 흐느끼면서 모든 교실이 한때 울음바다로 변했다. 화성군 일대 관광지는 이번 화재로 외지인의 발길이 뚝 끊겼다.서해횟집안경순(安敬順·42·여)씨는 “오늘 예약된 2건이 모두 취소됐고 일반 손님도 전혀 받지 못했다”고 전했다.여관업을 하는 이모(36)씨는 “어린이들이집단으로 횡사한 곳에 관광객들이 오겠느냐”고 말했다. 특별취재반
  • 어제 6·25 49주년 행사 다양

    6·25전쟁 49주년 기념식이 25일 전국에서 향군단체와 군부대 주관으로 다채롭게 열렸다. 재향군인회(회장 張泰玩)는 이날 오전 11시 서울 잠실 올림픽공원 제2체육관에서 정부요인과 합참의장,육·해·공군 참모총장,참전용사,사회단체 대표,보훈가족,우방국 참전용사 등 7,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행사를 가졌다. 이에 앞서 향군 회원과 해외 참전용사 400여명은 오전 8시30분 서울 동작동국립현충원을 방문,현충탑에 헌화·분향하고 호국종 타종행사를 가졌다. 공군본부는 오전 11시40분 계룡대에서 공군장병 2,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주먹밥 먹기 체험행사에 이어 7.4㎞ 구간 행군행사를 가졌다.육군 특전사령부는 오전 10시30분 6·25 참전국인 필리핀과 태국의 주한대사와 국방무관,산업연수생 등 43명을 초청,특공무술과 고공강화 시범행사를 가졌다. 김인철기자 ickim@
  • 28일 충무공 탄신 454돌 기념 다례행제

    28일은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태어난지 454주년이 되는 날. 정부는 이 날 오전 10시 충남 아산 현충사에서 김종필 국무총리와 신낙균문화관광부장관 등 정부 인사와 충무공 후손,지역주민 등이 참석한 가운데탄신기념 다례행제를 갖는다.헌관의 분향과 헌작,축관의 축문 낭독,헌관의재배에 이어 김종필 국무총리가 대통령을 대신해 헌화하고 분향한다. 현충사는 서지학자 이종학 독도박물관장이 발굴,기증한 함경도 초급 군관시절의 충무공 친필일기 등 충무공 관련 미공개사료 792점을 공개한다.순천향대에서는 이순신연구소가 공식 발족되고 아산시 신정호 국민관광단지에서는이순신장군 동상이 제막된다.또 충무공 생일을 맞아 29일까지 아산시 일원에서는 온양문화제가 열리는 등 다채로운 행사가 마련된다.
  • 여야지도부 4·19국립묘지 참배행렬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김종필(金鍾泌)국무총리는 19일 서울 수유동 4·19 국립묘지를 찾아 기념탑에 헌화·분향했다.여야 3당 지도부도 일제히 참배하고 민주주의를 위해 몸을 바친 희생자들의 뜻을 기렸다. 아침 일찍 부인 이희호(李姬鎬)여사,김중권(金重權)비서실장을 비롯한 전수석비서관과 함께 묘지를 찾은 김대통령은 “4·19 민주영령들의 거룩한 희생이 이 땅의 민주주의 역사를 이룩하는 데 큰 힘이 됐으며,그들의 정신이 영원히 빛날 것”이라고 말했다.김대통령은 분향을 마친 뒤 희생자 유가족 15명과 일일이 악수를 나눴다. 김총리도 오전에 열린 ‘제 39주년 4·19혁명 기념식’에서 “4·19혁명은이 땅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불의와 부정에 맞서 궐기했던 민주시민혁명”이라며 “우리가 지금 여러가지 국가적 난제를 안고 있지만,국민적 에너지를 다시 한번 모아 나간다면 반드시 새로운 희망의 천년을 열어나갈 수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민회의 김영배(金令培)총재권한대행은 김봉호(金琫鎬)국회부의장,정균환(鄭均桓)사무총장,손세일(孫世一)총무,정동영(鄭東泳)대변인 등 당3역 및 당직자 100여명과 함께 참배했다. 자민련 박태준(朴泰俊)총재도 김용환(金龍煥)수석부총재,김현욱(金顯煜)사무총장,이양희(李良熙)대변인 등 당직자 50여명을 대동하고 국립묘지를 찾아 헌화·분향했다.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총재는 신경식(辛卿植)사무총장,이상득(李相得)정책위의장,이부영(李富榮)총무 등 당직자 100여명과 함께 국립묘지를 참배한뒤 묘역을 둘러봤다.이총재는 이 자리에서 “4·19혁명 정신은 반독재와 민주주의의 구현에 있었다”면서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모든 국민들의 염원이 국정운영에도 제대로 반영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 石吾 李東寧선생 59주기 추모식

    상해임시정부 주석과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을 지낸 石吾 李東寧선생의 ‘제59주기 추모식’이 지난 13일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묘역에서 열렸다. 石吾 李東寧선생 기념사업회(회장 姜英勳)가 주최한 이날 추모식은 선생의약사보고와 추모사,추념사,추모노래 제창,헌화·분향 순으로 진행됐다. 姜 회장은 추모사에서 “독립운동에 혼신의 힘을 다하신 선생께서 서거하신 지 6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도록 우리는 남북대치 구도를 극복하지 못하고4대 강국과의 다원적 관계 속에서 국가생존 전략을 모색하는 현실에 처해 있다”면서 “경제난국을 극복하고 민족통일의 과업을 완수하며 21세기 국제사회에서 모범국가로 건설·발전시키는 민족과업 성취에 선생의 가르침을 받들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추모식에는 선생의 손자인 李奭熙 ㈜대우 상담역을 비롯,尹慶彬 광복회장,생존 최고령 독립투사인 李康勳선생,국민회의 張在植의원,鄭大哲 전 의원,한나라당 李漢東의원,崔圭鶴 국가보훈처장,李元範 3·1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金光旭 천도교 교령,金錫源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등 300여명이 참석했다. 全永祐 ywchun@
  • 石吾 李東寧선생 오늘 59주기 일대기

    “선생은 재덕(才德)이 출중하나, 일생을 자기만 못한 동지를 도와서 선두에 내세우고, 스스로는 남의 부족을 보충하고 고쳐 인도하는 일이 일생의 미덕이었다. 최후의 한순간까지 선생의 애호를 받은 사람은 오직 나 한사람이었다.”김구선생이 ‘백범일지’에서 石吾 李東寧선생을 기리며 쓴 내용이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석오만큼 폭넓고 헌신적이며 종시일관 독립운동에 생애를 바친 분도 흔치 않다. 그에 비해 평가와 관심이 크게 뒤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실제로 임시정부는 석오의 애국심과 포용력으로 유지된 바 크다고 하겠다. 8·15해방까지 임정이 유지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한 것은 석오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후계자’백범은 석오에 의해 발탁되고 지도되었다. 두사람은 7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혈맹의 義’관계에서 항상 석오가 백범을 발탁하고 지도하는 입장이었다. 석오가 아니었다면 백범의 존재는 나타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1904년 석오는 항일청년단을 만들면서 무명청년 백범을 상동교회 청년회에 가입시켰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혈맹의 동지가 되었다. 1919년 4월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된지 며칠후 백범은 임정의 문지기라도 하겠다고 석오를 찾았고 그의 노력으로 당시 내무총장이던 안창호 밑에서 경무국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이(利)를 보면 겸양을 생각하고 의(義)를 보면 위험을 무릅쓰는” 석오의 인품을흠모해온 백범은 항상 그와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해방후 백범은 아들 信을 시켜 중국땅에 외롭게 묻힌 석오의 유해를 고국으로봉환하여 서울 효창공원에 안치하였다. 석오의 생애는 국내에서 선각적 개화운동의 전기와 임정을 이끌면서 망명생활로 생애를 마친 후기로 나눌 수 있다. 만민공동회의 연사로 나서 잘못된정치를 탄핵하다가 이준·이승만과 함께 옥고를 치루고, ‘제국신문’논설위원, YMCA운동, 을사조약 반대 결사대로 대한문 앞에서 연좌시위, 안창호·양기탁등과 신민회조직, 안창호·이회영과 전국에 교육단을 조직하고 ‘대한매일신보’발행 지원, 상동학교 설립 등 37세때까지 국내에서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한일합병 뒤 만주로 망명,서간도에서 이회영·이시영 등과 한국인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와 신흥학교를 설립한데 이어 한국군관학교를 세우다가투옥되는 등 만주지역의 항일투쟁을 주도하다가 3·1항쟁후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으로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석오는 망명길에 나서면서 자식들에게“우리가 이제 합병의 참변을 당하였으니 왜놈들은 우리를 금수와 같이 다룰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도 아버지를따라 중국으로 망명의 길을 떠나자. 나라없는 백성은 어디를 가나 서럽고 비참한 것이다. 만리타향 객지에서 고생할 각오를 한 몸, 그러나 내가 죽기 전에 조국이 광복되는 것을 볼 수만 있다면 나는 그 이상의 더 큰 소망이 없겠다.”고 당부하면서 다시 못올 고국을 떠났다. 석오는 임정의 내무총장, 대통령직무대행, 국무령, 주석 등 요직을 지내고 백범과 함께 임정을 이끌었다. 1935년에는 한국국민당을 조직, 당수로 추대되어 항일 구국투쟁을 지도하였다. 1940년 3월 13일 중국 사천성 기강현 임시정부 청사의 초라한 이층방에서한 많은 생애를 접을 때그의 나이 72세였다. 임정은 간소한 국장으로 그의장례를 치렀다. 해방은 그러고도 5년 뒤에야 찾아왔고 석오의 유해는 3년 뒤에야 그리던 고국에 안장되었다. 뒤늦게나마 석오선생의 독립정신과 애국혼이 선양되어 정직한 역사가 쓰였으면 한다. 김삼웅주필kimsu@- 李東寧선생 연표 ●1869년 충남 천안서 출생●1892년 국가고시 응제진사에 합격●1897년 독립협회 활동으로 7개월간 옥고 치름●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항의,연좌데모로 2개월 옥고치름●1907년 신민회 조직에 참여●1910년 만주서 신흥학교 설립,초대소장 취임●1919년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장,국무총리,내무총장 ●1926년 임시정부 국무령●1929년 한국독립당 이사장·의정원 의장●1935년 임시정부 세번째 주석 취임●1939년 임시정부 네번째 주석 취임,전시내각 구성●1940년 급성폐렴으로 치장서 타계,임시정부 첫 국장(國葬)지냄●1948년 유해봉환,사회장으로 효창원에 안장 - 손자 李奭熙씨 및 후손 근황 “어릴 때부터 조부님께서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치셨다는 얘기를듣고 자랐습니다만 그동안 기업경영에 전념하느라고 손자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해죄스럽습니다.이제는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으니 조부님의 기념·현창사업에 여생을 바칠 생각입니다.” 석오 이동녕 선생의 손자인 李奭熙(67)(주)대우 상담역은 석오 선생 기념사업에 관한 포부로 말문을 열었다.경기고·서울대 법대를 졸업(55년)후 중소기업체에 근무하다가 68년 대우실업에 입사한 그는 대우개발 사장·대우자동차 회장·대우 부회장·경총 부회장·대우증권 회장·대우통신 회장·대우일본법인 회장 등 대우그룹 주요계열사의 최고경영자를 두루 거친 ‘대우맨’이다. 그의 부친,즉 석오 선생의 아들 李義植씨(1900년생)는 유명한 내과전문의였다.일제때 보성전문학교의 교의(校醫)를 지낸 그의 부친은 미군정 당시 민주의원·한독당 조직부장 등 정계에서 활동하기도 했다.또 반민특위의 특별검찰관으로도 활동했으며 이듬해 6·25 와중에 납북됐다. 2남3녀의 형제 가운데 그는 차남이다.그의 형 喆熙씨(75년 작고)는 경기고·보성전문 출신으로 보사부장관비서관,문교부 편수국장·기획관리실장,서울교대 학장 등을 지냈다. 그동안 그는 석오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을 널리 알리기위해 소리없이 많은일을 해왔다.우선 그는 ‘이동녕연구’의 일어판(94년)·중국어판(98년)을사재로 출간했다.89년에는 ‘백범일지’의 필사본을 책으로 출간,앞서 출간된 ‘백범일지’가 원본의 상당부분을 누락시킨 사실도 밝혀냈다.또 작년에는 석오 선생이 상해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초대의장(현 국회의장격)을 지낸 사실을 토대로 국회의사당 내에 석오선생의 흉상을 건립하였는데 그는 이를 큰 보람으로 여기고 있다. 정운현- '臨政 의 거인' 李東寧 석오(石吾) 李東寧(1869∼1940) 선생은 임시정부 탄생의 주역이자 임정의‘기둥’이었다.임시정부가 공식출범하기 직전인 1919년 4월 10일 임시의정원의 초대의장으로 선출된 선생은 국호(國號)와 임시헌법·관제(官制)를 제정,3일후인 4월 13일 임시정부 수립을 만천하에 선포하였다.선생은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을 비롯해 의정원 의장 3회,주석(主席) 4회 등 무려 일곱 차례나 임정의요직을 역임하였는데 이는 임시정부사를 통털어 선생만이 유일한 기록이다. 석오 선생이 임정내 이념·계파간의 갈등 속에서도 별다른 ‘잡음’없이 요직을 중임한 것은 선생이 공명정대한 업무처리와 온후한 인품으로 존경을 한 몸에 받은 때문이다.이 때문에 선생은 임정이 내부갈등이나 일제의 탄압으로 난국을 맞을 때마다 중책을 맡아 임정을 위기에서 구하곤 했다.일제는 이러한 선생을 회유,이용하기 위해 조선인 관리 洪承均을 시켜 선생에게 추파를 던졌으나 이를 즉석에서 일축,이 일로 선생의 부친이 원산에서 일경에 체포돼 옥고를 치뤘다. 합리주의자였던 선생은 출신지역·계급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다.기호(畿湖)지방의 양반출신들이 주축을 이루던 신민회(新民會)에 황해도 출신의‘무명인사’ 백범 金九를 추천하여 가입시킨 것이 대표적 사례다.이 일로두 사람은 남다른 ‘관계’를 맺게 되었다.백범은 ‘백범일지’ 곳곳에 선생의 행적과 개인적인 친분에 대해 언급해놓고 있는데 이는 평소 백범이 선생을 독립운동계의 선배 이상으로 예우한 것으로 보인다.48년 ‘남북협상’차북한을 다녀온 백범이 아들 信을 시켜 모친(곽낙원)과 처자(최준례·김인)의 유해를 봉환해오면서 이 때 같이 봉환해온 분이 바로 석오 선생과 임정 국무위원겸 비서장 출신 車利錫 선생이었다.62년 선생은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받았는데 이를 두고 적절치 못하다는 지적이 많다.임정 정부수반급은 대개 1등급을 받았으며 심지어 李承晩의 비서 출신 임병직씨도 1등급을 받았다. 임정요인 출신 趙擎韓 선생은 생전에 “선생은 지위나 돈 따위를 탐내지 않는 순결무구한 분으로 모든 독립운동가들의 으뜸이었다”고 회고했다. 정운현- 李東寧 선생 효창공원 묘소서 오늘 추모식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80주년을 맞아 임시정부 주석과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을 지낸 石吾 李東寧 선생의 ‘제59주기 추모식’이 13일 오전 11시 서울용산구 효창공원 석오선생 묘소에서 열린다. 석오선생 기념사업회(회장 姜英勳)가 주최하는 이 추모식은 추모기도와 석오선생 약사보고,추모사·추념사,추모가 제창,헌화분향의 순으로 진행된다. 행사 진행을 맡은 석오기념사업회 金錫營 부회장(69)은 “3·1독립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80주년을 맞아 거행하는 올해의 추모식은 감회가남다르다”고 말했다.60주기인 내년에는 추모 학술세미나를 개최하고 재정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장학사업도 추진할 계획이다. 추모식에는 崔圭鶴 국가보훈처장, 高建 서울시장,尹慶彬 광복회장,朴維徹독립기념관장,국민회의 張在植·李錫玄·鄭漢溶의원,자민련 李東馥의원,한나라당 李漢東·吳世應·徐廷和·朴明煥의원,李奭熙 석오선생 유족회장,李元範 3·1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李榮載 대종교 총전교,金信 백범선생기념사업회고문을 비롯한 각계 인사 300여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이상록
  • 현장-외롭지 않은 마지막 길

    “정구,정말 잘 살았다.자네와 인생의 길을 함께 걸었던 모든 사람들을 대신해서 이 한마디는 꼭 하고 싶네” 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관 앞 광장.고(故) 諸廷坵 의원의 영결식이 국회장으로 엄숙하게 치러졌다. 朴浚圭 국회의장은 영결사에서 투병중임에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서면질의를 통해 ‘병상 국감’을 펼친 고인의 투철한 책임감을 회고했다. 이어 諸의원과 ‘30년 지기’인 벽안(碧眼)의 鄭日佑 신부가 떨리는 목소리로 조사를 읽어내려갔다. “73년 12월 한양대 뒤 청계천 둑방에서 29세의 서울대 제적생인 자네를 처음 만났지.도시빈민을 위한 자네의 뜨거운 정열이 국적,연령,사회적 위치 등모든 벽을 녹여 우리를 하나로 만들었네.이제 여기 자네와 뜻을 함께 했던사람들이,특히 젊은이들이 이렇게 조문객으로 많이 모여있는 것을 보니 자네가 정말 잘 살았다는 것이 확인되는군….” 鄭신부의 조사가 이어지는 동안 경기도 시흥 두레마을 주민 등 諸의원이 내몸처럼 아꼈던 도시빈민 300여명은 숨죽여 흐느꼈다. 갑작스런 한파에 찬바람까지 몰아쳐 살속까지 추위가 파고들었지만 누구 하나 자리를 뜨는 사람이 없었다. 諸의원의 후원회장인 두레마을 金鎭洪목사가조사를 이어갔다. “그가 청계천 빈민촌에 나를 찾아온 이후 우리는 친구가 되었습니다.그는젊은이들을 모아 넝마주이팀의 총무가 됐습니다.청계천 가족들은 그를 정말사랑했습니다.이제 당신이 남긴 사람과 사람사이의 정과 의리를 우리가 이어나가겠습니다.마음 놓고 떠나세요” 金壽煥 추기경은 분향예절로써 천주교 신자인 ‘제정구 바오로’의 마지막가는 길을 기렸다.민주화와 정치개혁에 대한 열정을 담은 고인의 육성녹음이 식장에 울려퍼지자 부인 申明子여사 등 유족들과 추모객들은 더 이상 눈물을 참지 못했다.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던,그러나 초라하지는 않았던 한 정치인의 마지막 길은다행히 외롭지는 않았다.
  • 유신정권에 항거하다 73년 의문사/崔鍾吉 교수 명예 되찾는다

    ◎17일 서울대 백주년기념관서 25주기 추모식/선·후배 100여명 모임 결성… 진상규명 나서 유신 정권에 항거하다 지난 73년 의문의 죽음을 당한 전 서울대법대 崔鍾吉 교수의 25주기를 맞아 그의 죽음의 진상을 밝히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그를 아끼는 선·후배 100여명이 ‘崔鍾吉 교수를 추모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결성,오는 17일 서울대 교내 근대법학교육 백주년기념관에서 추모식을 갖고 역사적 진실을 회복하기 위한 진상규명에 앞장서기로 했다. 모임을 주도한 裵載湜 서울대 명예교수는 “침묵을 강요하던 유신독재 시절 崔교수는 불의에 항거한 참 지식인이었다”면서 “그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지 어느덧 사반세기가 흐른 지금 우리는 지난 날의 반성과 함께 과거 어둠에 가렸던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崔교수는 지난 73년 10월16일 오전 8시30분 유럽거점 대규모 간첩단 사건과 관련,당시 중앙정보부에 자진출두해 조사를 받다가 19일 오전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崔교수가 간첩혐의를 인정한 뒤 양심의 가책을 느껴7층에서 투신자살했다고 밝혔지만 이듬해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전기 고문기 조작 실수에 의한 심장파열’이라고 사인을 주장하는 등 끊임없이 의혹이 제기돼 왔다. 추모식은 裵교수의 개식사와 金裕盛 서울대법대학장,咸世雄 신부 등의 추모사에 이어 추모시,분향·헌화 등이 이어진다. 서울신문은 지난 8월20일자 민주열사 열전에 ‘유신사죄 외친 참지식인’이란 제목으로 崔교수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 金 대통령 光州·全南 방문 이모저모/“민주항쟁 정신 받들겠다”

    ◎望月洞 참배때 학생 등 500여명 환호 호남지역을 방문중인 金大中 대통령 내외는 고향인 목포에서 하루를 묵은뒤 26일 상오 5·18 묘역을 참배,헌화·분향한 뒤 전남도청과 광주시청에서 업무보고를 잇따라 받았다. 金대통령은 1박2일간의 호남지역 방문일정을 마치고 이날 하오 대통령 전용기편으로 귀경했다. ○…金대통령은 許京萬 전남지사와 高在維 광주시장으로부터 업부보고를 받고 5·18을 ‘민중항쟁’으로 정의한뒤 의미를 되새기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金대통령은 “5·18 광주민중항쟁의 중심지였던 도청에 와서 대통령으로서 도정보고를 받으니 만감이 교차한다”며 ‘5·18 당시 중앙정보부에 갇혀 2개월 뒤에 광주사태를 알게된 경위’등 당시의 고초를 상세히 소개했다. 이어 “세계 각국에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과 희생이 많았지만 그 가운데서도 광주는 위대하다”고 역설한 뒤 “항상 광주정신을 받들어 대통령으로서 최선을 다해 직무를 수행하겠다”고 다짐했다. ○…金대통령은 전남도청의 업무보고가 끝난 뒤 광주 민속박물관에 도착,이 지역 인사 300명과 함께 오찬을 함께 했다. 高광주시장은 인사말을 통해 “광주가 침체되고 낙후되긴 했지만,정권창출도시의 긍지를 갖고 대통령에게 무리한 요구를 자제하겠다”고 전제,“스스로 선진도시를 만드는데 힘을 기울이겠다”고 강조했다. ○…이에 앞서 金대통령 내외는 망월동 묘역을 참배했다. 金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안내를 맡은 광주시청 宋泰柱 5·18 지원협력관에게 묘역조성 사업 현황에 대해 물었다. 金대통령내외가 묘역에 도착하자 수학여행온 학생과 시민 등 500여명이 박수와 환호로 환영했으며,金대통령은 가벼운 목례로 인사하거나 악수를 나누기도 했다. 묘역에는 국민회의 朴光泰 趙洪奎 金泳鎭 李榮一 林福鎭 徐廷華 鄭東采 의원과 자민련 池大燮 의원,그리고 李基洪 5·18 기념재단이사장을 비롯한 관련단체 대표 100명이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金대통령 내외를 맞았다. ○…한편 金대통령은 숙소인 신안비치호텔에서 망월동 묘역까지 헬기를 이용하려던 당초 계획을 바꿔 무안,나주,송정리 등 육로로 이동했다. 이는 金대통령이전날 목포를 방문했을 때 경호때문에 창문이 반도 열리지 않는 승용차를 이용하는 바람에 시민들의 환호에 제대로 답례하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표시하면서 문이 제대로 열리는 차량으로 바꿔 육로로 이동키로 결정했기 때문이라는 것. 특히 金대통령은 5·18묘역 참배를 마치고 항쟁의 중심지였던 충장로와 금남로를 지나면서 환영시민이 보일 때마다 서행하면서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 두 빈소(朴康文 코너)

    항일투사 海平 李在賢 선생이 세상을 떴다는 기별을 받고 빈소로 향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병원의 장례시설에 모셨다고 했다. 안양에 있는 작은 집에서 검박하게 살던 그에게 사후에 누리는 이런 호사란 좀 뜻밖이었다. 유족이 퍽 애쓴 것 같았다. 장례식장 건물 앞에는 연신 검은색 고급 승용차가 와닿고 차림새가 말쑥한 사람들이 내렸다. 해평 선생을 조상하러 온 손님들이거니 하고 인파에 묻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빈소 문전은 분향 재배 순서를 기다리고 서 있는 사람들로 이미 꽉 차 있었다. 고인의 고매한 인품이 이렇듯 사람을 모으는가 생각하며 둘러보는데 생소한 이들 뿐인 것이 이상했다.해평 선생의 빈소가 아니었다. ○광복군 장교와 친일고관 거기서는 높은 관직에 있던 어떤 분이 조객을 맞고 있었다.그 가족이 별세한 것이었다.그 전직 고관은 일제때 유능하고 충성심 있는 관리로서 신임을 받았다.대한민국에서도 오랫동안 여러 요직을 맡았다.관직에서 물러났건만 영향력이 여전하다는 것은 거기 모인 조객의 숫자로 알 만했다.정작,해평 선생 빈소의 분위기는 고인의 성품처럼 고즈넉했다. 아니,쓸쓸했다고 해야 옳다. 평소 선생을 존경하던 이들이 상 두어개를 둘러싸고 앉아 조용조용 이야기를 나누는 몇 시간 내내 새로 온 조객은 거의 없었으니까. 해평 선생은 광복군 장교로서 미국 전략정보처(OSS)와 합작해 8월 말로 예정한 국내 진입을 준비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광복군 안에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 총지휘부가 구성되고 이범석 장군이 총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해평 선생은 본부요원이 되었다.안춘생 선생은 평안·황해·경기지역을 맡은 제1지구 대장,장준하 선생은 제1 지구의 경기도반장이었다. 국내 정진군은 국내에 들어와 적의 군사시설을 파괴하고 무장세력을 조직하여 미군이 상륙할 때 내응하는 것이 임무였다. 미군 훈련관이 실시한 3개월간의 특수훈련이 거의 끌나는 8월초 국내정진군은 편성되었다. 곧 미국 잠수함으로 국내에 침투하여 임무를 수행할 참이었다. 일본 항복이 조금만 늦었더라면,광복군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승리를 거두고 우리나라는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으로서 발언권을 행사할 수있을 터였다.모든 광복군과 임시정부 인사들은 통한의 눈물을 뿌려야 했다. 해평 선생은 광복후 귀국해 수십년이 되도록 국가 보훈의 혜택을 받지 않았다.이역 땅에서 갖은 신고를 겪으며 싸우다 광복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간 투사들께 죄스러워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지 않았다. ○수십년간 공적 숨겨 그는 에스페란토­한국어사전 편찬을 필생의 사업으로 삼았다.그 작업이 마침내 끝났을 때,출판비용을 조달할 방도가 달리 없자 유공자로서 훈장과 함께 받게 된 돈을 여기에 썼다.그래서 국내에서는 이 분야 최초인 사전이 해평 덕분에 나오게 되었다. 이번 광복절을 하루 앞둔 오늘,서울 남산에서 3·1 독립운동기념탑 건립기공식이 있다. 그 건립위원회 구성원 명단에,앞서 말한 전직 고관의 이름이 끼인 것을 보았다. 해평 선생을 영결한 것은 지난해 일이었지만,그 때 대조적이던 두 빈소의 풍경이 눈앞에 떠올랐다.
  • KAL機 괌추락 참사 1년­현지 추모행사 표정

    ◎不歸의 넋 위로… 위령제 준비 분주/오늘 유족 352명 참가 추모비 제막/사고뒤 심야노선 폐지… 관광객 격감 6일은 대한항공 801편이 괌에 추락한 지 1년이 되는 날이다. 희생자 229명의 유족 대부분은 아직도 당시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괌 현지에서는 5일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행사가 열린다. 유족들의 지난 1년과 보상 문제,지금까지 드러난 사고 원인과 문제점 등을 짚어본다. 대한항공기 괌 추락사고 1주기 추모위령제가 5일 상오 괌 현지에서 열린다. 추모식에서는 희생자 유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비 제막식도 갖는다. 추모비는 괌 한인회가 괌 주정부의 일부 지원을 받아 모두 19만달러를 들여 건립했다. 추모비에는 희생자와 부상자 명단,추모시,추모비 제작에 기부한 괌 한인회의 기부자 명단 등이 새겨졌다. 추모식은 추모사에 이어 기독교,불교,천주교식의 종교 행사와 함께 헌화 및 분향 순서로 진행된다. 이에 앞서 4일 하오 유족 352명과 건설교통부 관계자,대한항공 직원 등 승객 396명을 태운 대한항공 특별기가 괌 현지에 도착했다. 이들은 2박3일간의 행사를 마치고 6일 하오 서울로 돌아온다. 한편 지난해 8월6일 사고 이후 많은 변화가 생겼다. 대한항공측은 세계 70개 취약 공항을 집중 점검,이 가운데 심야에 도착하는 항공노선을 폐지했다. 괌의 아가나 공항을 비롯,중국 삼아(三亞) 공항,몽고 울란바토르 공항,튀니지 제르바 공항,마카오 공항 등 심야에 도착하는 5곳이다. 또 미국 연방항공국(FAA)의 기준에 따라 조종사들의 야간 비행에 따른 업무 부담도 대폭 줄였다. 대한항공은 또 현재 A­300,F­100 두 기종에만 적용하던 비행분석관리시스템(AIMS)을 연말까지 B­747을 비롯한 전 기종으로 확대,안전도를 높일 계획이다. 사고 항공기처럼 기령이 20년 이상된 항공기 12대의 매각도 추진중이다. 사고 이후 괌으로 떠나는 관광객도 크게 줄었다. 괌정부 관광청 한국사무소에 따르면 사고 전 한달 평균 1만5,000∼2만명에 달하던 여행객이 사고 이후 90% 이상 줄었다. 이에 따라 괌현지에서 한국인을 대상으로 운영됐던 50여개의 여행사도 3∼4개로 줄어든 것으로알려졌다.
  • 金九 선생 큰뜻 기리며/어제 49주기 추모제

    ◎김 대통령 묘소 참배 金大中 대통령은 26일 상오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있는 金九 선생 묘소를 참배했다. 金대통령은 이날 백범 김구 선생 기념사업협회(회장 李壽成)가 주최하는 金九 선생 49주기 추모제에 앞서 백범 묘소를 찾아 헌화·분향하고 金信 전교통 부장관등 金九 선생 유족과 백범기념사업협회 간부들을 면담했다. 참배행사에는 李壽成 기념협회 회장과 張忠植 전회장,金信 전장관,金義在 국가보훈처장 등이 참석했다. 金대통령의 참배에 이어 이날 상오 11시부터 백범 묘소에서 49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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