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분배 정의
    2026-05-28
    검색기록 지우기
  • 의원 모임
    2026-05-28
    검색기록 지우기
  • 초선의원
    2026-05-28
    검색기록 지우기
  • 제철 음식
    2026-05-28
    검색기록 지우기
  • 소폭 하락
    2026-05-28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072
  • 민주, 시민단체 출신 진보인사… 與 공정경쟁 vs 野 분배정의

    민주, 시민단체 출신 진보인사… 與 공정경쟁 vs 野 분배정의

    민주통합당이 ‘개혁과 혁명’의 기치를 내세우고 4·11 총선에서 지역별 국회의원 후보를 선출할 핵심 권력을 쥔 공천심사위원회(15명) 진용을 발표했다. 여야의 공심위 대진표가 짜여짐에 따라 경쟁력 있는 후보를 공천하기 위한 여야 대결도 막이 올랐다. 여야 모두 경제민주화를 표방하면서도 새누리당은 ‘공정경쟁’에, 민주당은 ‘분배정의’에 초점을 맞춘 인물들을 뽑을 것으로 보인다. 검사 출신 정홍원 새누리당 공직자후보추천위원장과 공직비리수사처 도입을 강조했던 부패방지위원장 출신 강철규 민주당 공심위원장의 진검 승부에 관심이 쏠린다. 민주당은 앞서 2일 공천심사위원장에 강철규 우석대 총장을 선임한 데 이어 3일 14명의 공천심사위원을 발표했다. 외부 인사로는 ‘접시꽃 당신’의 시인 도종환(58) 한국작가회의 부이사장, 김호기(52) 연세대 교수,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소장 출신인 이남주(47) 성공회대 교수가 이름을 올렸다. 여성위원도 4명이나 포진했다. 조선희(52) 전 ‘씨네21’ 편집장, 최영애(61) 전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조은(66) 동국대 사회학과 교수, 문미란(53) 미국변호사다. 내부 인사로는 재선의 노영민(55)·박기춘(56)·백원우(46)·우윤근(55)·전병헌(54)·조정식(49) 의원과 비례대표 초선인 최영희(62·여) 의원이 공심위원을 맡기로 했다. 강 위원장을 포함해 외부인사가 8명, 내부인사가 7명이다. 민주당은 오는 6일 공심위원회 첫 회의를 열고 공천심사의 원칙과 기준, 경선방식 등을 구체화한 뒤 13일부터 본격적인 공천 심사에 들어갈 예정이다. 신경민 대변인은 “개혁성, 공정성, 도덕성을 기준으로 공심위원 인선안을 마련했다.”면서 “정당 사상 최초로 여성 공심위원을 30% 이상 구성하도록 한 당헌에 따라 여성 위원이 5명 포함됐다.”고 강조했다. 신 대변인은 “위원 인선은 한명숙 대표와 강 위원장이 충분한 협의를 거쳐 진행했다.”면서 “팀워크를 중시하면서 각계각층의 전문분야에서 활동하는 최적의 인사로 구성되도록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한 대표는 이틀간 수백통 이상의 전화를 주고받으며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민주당 공심위 외부위원들은 진보적 성향의 인사를 중심으로 여성계, 학계, 문화계, 언론계, 법조계 등 각계각층이 포함돼 있다. 개혁적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온 인사라는 평가다. 민주당은 최고위원들로부터 서너명을 추천받은 뒤 타진, 본인 승낙을 받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상당수 인사는 한명숙 대표와 관계가 깊다. 지난 경선 때 한 대표의 멘토단이었던 도종환 시인은 물론 백원우, 조정식, 전병헌, 노영민 의원은 한 대표의 서포터스로 활동했다. 해직교사 출신인 도 시인은 문학가지만 전교조 활동 등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인물로 평가된다. 김호기 교수는 중도·진보학자로 당내 정책과 정체성에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당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조선희 전 편집장은 연합통신·한겨레신문 기자 출신으로 한국영상자료원 원장도 지낸 대표적인 문화계 인사다. 이남주 교수는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소장을 지냈다. 조은 교수와 최영애 전 상임위원은 각각 한국여성학회장, 한국성폭력상담소 초대소장 등 여성운동가의 지도자급 인사로 꼽힌다. 여성 몫으로 당내에서는 최 의원이 들어갔다. 민주당은 법조계 인사 참여도 검토했으나 적절한 인물을 찾지 못해 결국 미국 변호사 출신 문 변호사가 들어갔다는 후문이다. 한편 당내 인사인 백 의원은 친노 인사로 분류된다. 대권주자인 손학규 전 대표의 측근인 조 의원은 온건한 성격으로 시민통합당과의 관계도 원만하다. 전 의원은 정세균 전 대표 시절 정책위의장을 지냈고 유일한 호남 출신인 우윤근 의원은 박영선 최고위원이 추천한 것으로 전해졌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간사인 박기춘 의원은 박지원 최고위원의 추천을 받았다. 강주리·이재연기자 jurik@seoul.co.kr
  • 與 정강 키워드 ‘선진화’→‘국민행복’… 박근혜당 출범 천명

    與 정강 키워드 ‘선진화’→‘국민행복’… 박근혜당 출범 천명

    한나라당이 30일 정강·정책 개정안 발표를 기점으로 박근혜호(號)의 출범을 공식화했다. 6년 전인 2006년 1월 이뤄졌던 전면개정 때보다도 개정의 폭과 깊이가 확연히 차이가 난다는 평가다. 1997년 창당 이후 이회창 총재 시절의 한나라당과, 이후 자신이 대표를 맡아 17대 총선을 치렀던 2004년 당시의 한나라당, 나아가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의 한나라당과는 전혀 다른, ‘박근혜의 한나라당’을 천명한 것이다. 과거 한나라당 15년과의 결별, 그리고 현 이명박 정부와의 단절이자 12월 대선을 겨냥한 ‘대선주자 박근혜’의 비전과 정책구상 청사진을 밝힌 것으로 평가된다. 바뀐 정강·정책의 키워드는 ‘국민행복’이다. 전문에만 네 차례 ‘국민행복’이 언급된 것을 비롯해 8곳에다 ‘행복’이라는 단어를 집어넣었다. 개정 전 정강·정책이 ‘대한민국의 선진화’를 당의 소명으로 제시했다면 개정된 ‘국민과의 약속’은 ‘국민행복국가 건설’을 표방하고 있다.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외교-안보-통일’ 순으로 짜여졌던 전 정강·정책 대신 ‘복지-일자리-경제민주화-사회-환경-안보-통일-정치’ 순으로 배치된 ‘10대 약속 23개 정책’은 ‘국민과 나라를 이끌어 가는 정당’이 아니라 ‘국민을 앞세우고 뒤를 받치는 정당’을 웅변한다는 지적이다. 2006년 정강·정책 개정 당시 등장했던 ‘부정부패, 지역감정, 분배지상주의, 포퓰리즘’ 등의 용어는 이번에 삭제됐다. 대신 ‘일자리 없는 성장, 양극화, 저출산, 고령화’ 등의 표현이 새롭게 포함됐다. 그동안 논란이 됐던 ‘보수’ 표현의 경우 기존 정강·정책의 전문에 담겨 있던 ‘대한민국의 비약적 발전을 주도해 온 발전적 보수’라는 문구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법치라는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보수적 가치’로 바뀌었다. ‘발전적 보수’가 ‘보수적 가치’로 대체된 것으로, 보수 정당의 틀은 유지됐다. 그러나 ‘대한민국 선진화’라는 표현은 새 정강·정책에서는 제외됐다. 같은 맥락에서 기존 정강·정책 제1조인 ‘미래지향적 선진정치’라는 표현은 9조로 밀려나면서 표현 역시 ‘미래지향적 정치’로 수정됐다. ‘선진화’가 이명박 정부를 상징하는 용어인 점을 감안하면 현 정부와의 선긋기에 나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대신 국민 행복을 위한 평생 맞춤형 복지를 ‘10대 약속’ 중 첫 번째에 올렸다. 기존 정강·정책에서는 7조였다. 모든 국민에게 생애주기별 사회보장 혜택을 받을 권리를 부여하는 동시에 기존에 없던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존중의 의미도 추가했다. 일자리(2조) 조항에서는 고용률을 경제정책의 핵심지표로 설정했다. 또 청년고용을 일자리 정책의 핵심과제로 삼고, 노인·장애인에 대한 맞춤형 일자리 대책을 추진토록 했다. 논란이 됐던 ‘경제 민주화’ 표현도 반영이 됐다. 이와 관련된 ‘공정한 시장경제’(3조) 조항은 “경제세력의 불공정 거래를 엄단해 공정한 경쟁풍토를 조성하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공정경쟁과 동반성장을 촉진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확대한다.”고 강조했다. 각 경제주체는 사회통합과 사회발전을 위한 책임과 의무를 성실히 수행토록 했으며, 시장개방과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의 단계적 확대도 포함시켰다. 기존 ‘큰 시장 작은 정부’ 표현도 ‘강한 정부’로 바뀌었다. 이는 정부 역할이 강조되는 경제 민주화를 새 정강·정책에 추가한 데 따른 것으로 해석된다. ‘747 공약’(연평균 7% 성장, 소득 4만 달러 달성, 선진 7개국 진입)으로 대표되는 현 정부의 외형 위주의 경제 성장 정책기조에서 성장잠재력 확충이라는 질적 성장 정책기조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육(4조) 조항에서는 ‘교육의 수월성과 경쟁력 제고’ 개념을 없애고 ‘교육기회 균등 실현과 공교육 강화’를 반영했다. 영·유아 보육에 대한 국가적 책임 확대와 고등학교 교육 의무화 추진 등이 눈에 띄는 새 정책이다. 외교(7조) 분야에서는 ‘실용주의’라는 용어가 사라지고 ‘국익과 신뢰에 기반한 평화지향적 균형외교’로 수정됐다. 통일(8조) 조항에서는 ‘유연한 대북정책’을 명문화했다. 기존 “북한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로의 전환을 위해 노력한다.”는 내용은 삭제됐다. 대신 “북한 핵문제 등 한반도 평화위협에는 단호히 대처하고, 북한의 인권개선과 동포애적 차원의 인도적 지원을 지속해 나간다.”면서 강·온 양면책을 동시에 제시했다. 국방 분야에서는 군 복무시스템과 병영문화에 대한 개선을 약속했다. 특히 “군 복무기간이 자아실현의 능력개발의 소중한 기회가 될 수 있도록 복무시스템과 병영문화를 획기적으로 개선하고 군 복지를 확대한다.”고 밝혔다. 정치 개혁과 관련해서는 ‘사회네트워크 정당’ 건설, 청년의 정치 참여를 위한 ‘주니어 정당’ 개념 도입 등을 내세웠다. 이와 함께 700만 재외동포 지원과 한민족 네트워크 강화, 친환경 사회와 녹색성장도 새롭게 반영된 부분이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커버스토리-선거와 재벌 ‘불편한 관계’] ‘적정분배’ 헌법 119조 기치 든 與野, 같은 듯 다른 재벌개혁 공세

    [커버스토리-선거와 재벌 ‘불편한 관계’] ‘적정분배’ 헌법 119조 기치 든 與野, 같은 듯 다른 재벌개혁 공세

    한나라당과 민주통합당이 ‘헌법 119조’를 정책 기조의 기본 가치로 뽑아들었다. ‘균형 성장’과 ‘적정 분배’, 그리고 ‘경제주체 간 조화를 통한 경제민주화’를 향해 앞을 다투기 시작한 것이다. 4월 총선을 겨냥한 선거 전략이라는 지적도 있으나, 한국 정치의 두 축인 양당이 탈(脫)자유시장경제의 흐름을 타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한나라당은 기회 균등의 공정경제에, 민주통합당은 사회주의적 분배정의에 방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의 결은 다르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한 가지는 대기업에 대한 정치권의 대대적 정책 공세가 시작됐다는 점이다. ■與 “기회 균등의 따뜻한 경제” 한나라당이 당 정강정책의 기본 가치에 ‘경제민주화의 실현’을 담기로 했다. 정치는 뒤로 돌리고 ‘공정경제’를 바탕으로 복지와 일자리 창출을 전면에 내세우기로 했다. 박정희 정부 때의 산업화에 이은 김영삼 정부 시절의 정치민주화를 넘어 보수정당의 패러다임이 시대 변화에 맞춰 경제민주화로 넘어가고 있음을 웅변하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당명 개정과 함께 이명박 정부와의 결별이라는 함의도 담고 있다. 대기업의 사회적 역할을 크게 강조해 나갈 것임을 시사한 것이기도 하다. 당 비상대책위원회 정책쇄신분과는 27일 오전 국회에서 회의를 열고 이 같은 내용으로 정강정책 개편을 추진하기로 했다. 성장을 중시한 자유시장경제 중심의 보수주의에서 경제적 기회 균등을 강조하는 ‘따뜻한 경제’로의 전환을 선언한 것이다. 이는 헌법이 정한 경제 가치로의 복귀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헌법 제119조 2항에는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정책쇄신분과 권영진 의원은 브리핑을 통해 “지금처럼 재벌들의 과도한 탐욕이 시장질서를 무너뜨리고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의 영역까지 침해하며 생존권을 박탈하면 공정한 시장이 될 수 없다.”면서 “그런 관점에서 재벌·대기업의 사회적 책무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담아냈고 그것을 통칭해 경제민주화의 실현이라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다만 권 의원은 “야당은 경제민주화를 분배 정의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지만, 한나라당은 거대 경제세력으로부터 시장과 중소기업, 소비자를 보호하는 공정 경제의 실현 관점에서 도입하기로 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책쇄신분과 위원장인 김종인 비대위원은 이러한 정강정책 개정에 대해 “정부가 시장경제에서 해야 할 일이 뭐냐 하는 차원에서 경제민주화 조항을 넣었다.”고 설명했다. 경제민주화 조항이 담기면서 재벌에 대한 규제도 적시되는지에 대해서는 “거기에 입각해 소위 경제 세력과 관련된 정책들을 검토해야 한다.”고 밝혔다. 정책쇄신분과는 이와 함께 기존의 정강정책의 강령이 ‘미래지향적 선진정치’를 제1조로 시작했던 것을 고쳐 앞부분에 ‘모든 국민이 행복한 복지국가 건설’을 배치하고 이를 위해 일자리 창출을 경제정책의 핵심으로 내세우기로 했다. 이 같은 정강정책의 수정은 이명박 대통령의 공약이었던 ‘747공약’(연평균 7% 성장, 소득 4만 달러 달성, 선진 7개국 진입)으로 상징되는 현 정부의 외형 위주 경제성장 정책기조를 질적 수준이 향상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특히 ‘작지만 강한 정부’와 같이 독점과 불균형·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정부와 정치권의 역할을 강조했다. 정강정책 수정 작업이 완료되면 한나라당은 ‘경제민주화 실현’을 목표로 4·11 총선 공약 차원에서 재벌 개혁에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19일 현 정부에서 이뤄진 출자총액제한제도(출총제) 폐지에 따른 부작용을 보완할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한 바 있고 당내에서는 대기업의 중소기업 업종 침범 및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 등을 막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하다. 이주영 정책위의장은 이날 오전 주요당직자회의에서 대기업이 빵집이나 카페 등 골목 상권 영역에 침범하는 것에 대해 “국제무대에서 활약해야 할 박지성 같은 선수가 동네 골목 축구로 돌아와 대장 노릇하려는 것이냐.”면서 “국민들의 불만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대기업 집단의 탐욕을 규제하기 위한 여러 제도 및 조치, 정책들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재벌 개혁에 나설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 것이다. 허백윤기자 baikyoon@seoul.co.kr ■野 “양극화 없는 나누는 경제” 일찌감치 당내 ‘헌법119조 경제민주화특별위원회’를 설치하며 경제민주화의 기치를 한껏 끌어올린 민주통합당은 ‘분배정의’에 방점을 찍으며 4월 총선에서 재벌을 정조준한 공약을 내놓을 계획이다. 핵심은 ‘한국판 버핏세’인 1% 부자 증세와 재벌 개혁을 통한 중소기업 보호, 비정규직 문제 해결 등을 통한 노동시장 민주화, 조세 개혁 등이다. 대기업과 수출 중심의 경제 구조와 부자 감세로 대표되는 이명박 정부와의 차별화에 주안점을 뒀다는 게 민주당 측 설명이다. 민주당 경제민주화특위는 29일 출자총액제한제도 부활과 대기업 일감 몰아주기 근절 대책, 다음 달 7일에는 비정규직 및 정리해고 대책과 중소기업 보호·지원 정책 등을 잇따라 내놓을 예정이다. 이 가운데 민주당이 가장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은 양극화 해소를 위한 분배에 초점을 맞춘 재벌 개혁이다. 재벌 개혁의 일환으로 대기업 범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기로 했다. 사기·공갈·횡령·배임 등 불법 행위로 얻은 이득액에 따른 처벌을 기존 5억~50억원 미만 3년 이상 징역, 50억원 이상 무기 또는 5년 이상 징역에서 500억원, 5000억원 초과 시 현행보다 가중 처벌하는 규정을 신설하는 방안이다. 또 출자총액제한제 부활을 비롯해 ▲순환출자 금지 및 지주회사 규제강화 ▲대기업 일감 몰아주기 근절 ▲중소기업 단체의 하도급 분쟁 조정협의권 인정 ▲금산분리 강화 및 계열분리 청구제 ▲종업원 대표의 이사 추천권 등을 통해 재벌에 편중된 경제 구조를 개선하겠다는 방침이다. 유종일 경제민주화특위 위원장은 “재벌 독식 경제가 양극화의 주범”이라고 꼬집었다. 한국판 버핏세 도입에도 당력을 집중할 예정이다. 상위 1% 소득층에 대해 소득세뿐만 아니라 법인세·종부세 등 전 세목에 대한 증세를 추진하기로 했다. 이용섭 정책위의장은 “‘1% 부’에 대한 증세를 통해 ‘99% 국민’의 세 부담을 높이지 않으면서 복지 재원을 확보하겠다.”고 말했다. 소득세는 1억 5000만원 초과 시 기존 38%(전체 소득자 0.16%)가 아닌 40%로, 법인세는 2억~100억원 미만은 22%, 100억~1000억원은 25%, 1000억원 초과는 30%로 하는 최고세율 구간 신설을 내세웠다. 1%의 대기업에 대한 증세를 통해 99%의 중소기업을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한명숙 대표는 “부자 감세 등의 ‘MB노믹스’는 민생대란, 지방경제 고통으로 이어졌다.”고 비판했다. 부동산 보유세도 대폭 강화해 다주택자들의 부동산 투기를 막기로 했다. 소득 수준에 관계없이 소득 공제가 이뤄져 고소득자일수록 소득 공제 혜택이 커지는 조세 감면 제도도 뜯어고친다. 대기업들이 불로소득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는 것을 막기 위해 상장주식과 파생금융상품의 양도차익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기로 했다. 아울러 종합소득 과세표준 계산에 포함되는 이자 소득과 배당 소득의 종합과세 기준금액을 현행 4000만원에서 하향 조정하기로 했다. 민주당은 지난해에만 조세 감면액이 30조 6000억원에 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와 함께 민주당은 노동개혁 공약으로 기업은행 등 공공 금융기업을 중소기업 육성을 위한 전담 국책은행으로 전환하고, 정부의 예산지원으로 개발된 프로그램 등 지적재산권은 대·중소기업이 공유 연계해 자금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의 기술 독립에 힘을 실어 주기로 했다. 정보기술(IT)·벤처기업 육성을 위한 ‘젊은이 펀드’도 조성, 청년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2010년 기준 2193시간의 근로자 평균 노동시간을 다음 정부 임기 말인 2017년까지 2000시간 이내, 2020년까지 1800시간으로 줄이기로 했다. 강주리기자 jurik@seoul.co.kr
  • 여야 ‘경제민주화’ 경쟁

    여야가 4·11 총선을 앞두고 ‘경제민주화’를 정책 전면에 내세웠다. 사실상 ‘재벌 개혁’ 경쟁에 뛰어든 것이어서 향배가 주목된다.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회 산하 정책쇄신분과는 27일 국회에서 회의를 열고 “헌법에 명시된 경제민주화 실현을 당의 정강정책에 담기로 했다.”고 권영진 의원이 전했다. 경제민주화 조항은 복지국가 건설, 일자리 창출 등과 함께 정강정책의 강령 제1조에 전면 배치된다. 기존 제1조에 있던 ‘정치’ 관련 조항은 뒤로 밀려난다. 권 의원은 “야당은 경제민주화를 분배정의 관점에서 접근하지만, 한나라당은 거대 경제세력으로부터 시장과 중소기업, 소비자를 보호하는 공정 경제의 실현 관점에서 도입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한나라당은 총선 공약 차원에서 대대적인 재벌 개혁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에 따른 부작용 보완을 비롯해 중소기업 적합 업종 지정, 대기업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 차단, 프랜차이즈 불공정 거래행위 근절 등이 포함될 전망이다. 민주통합당도 경제민주화와 보편적 복지 등을 핵심으로 한 총선 공약을 29일 발표한다. 여기에는 출총제 부활과 지주회사 규제 강화, 금융·산업자본 분리 등 현 정부 경제정책에 대한 전면 재조정 방안이 포함돼 있다. 기존 ‘3+1’(무상급식·무상보육·무상의료+반값등록금)에 주거와 일자리를 더한 ‘3+3’ 보편적 복지를 내세울 것으로 보인다. 한명숙 대표는 “보편적 복지, 경제민주화는 포퓰리즘이 아니라 거역할 수 없는 시대적 요구”라면서 “1% 부자 증세, 법인세 인상을 통한 재벌 증세를 반드시 이룰 것”이라고 강조했다. 장세훈·강주리기자 shjang@seoul.co.kr
  • 더 고달파진 삶의 질 “소득세 비중 늘려야”

    더 고달파진 삶의 질 “소득세 비중 늘려야”

    1970년만 해도 우리나라 사람은 1000명 가운데 0.4명이 이혼했다. 그런데 지난해에는 2.5명으로 껑충 불었다. 이혼율 급등은 출산율에 직격탄을 날렸다. 임신 가능한 여성 1명이 낳는 아이 수가 같은 기간 4.5명에서 1.2명으로 급감했다. 출산율 저하는 경제활동인구의 감소를 초래한다. 이렇듯 삶의 질 악화는 장기적으로 경제성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사회적 지출 확대 필요성 강조 한국은행 산하 경제연구원이 지난 60년간 우리 경제가 연평균 7.6%의 고도성장을 달성했음에도 국민들의 행복도는 왜 그에 비례해 올라가지 않는지, 지금이라도 정책방향과 제도를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관심을 기울인 이유다. 유력 대선 주자들이 저마다 ‘국민 행복’을 외치며 복지 경쟁에 뛰어들고 있어 그 내용에 더욱 눈길이 간다. 경제연구원은 10일 발표한 ‘한국의 경제성장과 사회지표의 변화’ 보고서에서 “우리 경제의 지속성장을 위해서는 소득불균형 등 각종 사회지표 개선이 중요하다.”면서 “이를 위해서는 개인 소득세의 비중을 높이고 고소득 자영업자의 세원 포착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속세 과세를 더욱 엄격히 해 탈법·변칙 상속을 막고, 탈세를 유발하는 각종 제도적 미비점도 보완해야 한다는 얘기다. 자산 보유를 통해 창출하는 소득의 비중이 높아질수록 소득불균형이 악화되는 경향이 있는 만큼 일관성 있는 부동산 정책과 제도도 요구된다고 지적했다. 부동산 경기 부양을 통한 성장률 끌어올리기에 섣불리 나서서는 안 된다는 경고다. 보고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보다 우리나라 재정의 소득 재분배 기능이 취약한 만큼 조세체계 개선과 사회적 지출 확대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조윤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1953년 69달러에 불과하던 1인당 국민소득이 지난해 2만 달러를 넘어서는 등 국민소득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음에도 범죄율, 자살률, 이혼율 등 각종 사회지표는 급격히 악화되고 있다.”면서 “계층 간 이동이 원활해질수록 소득분배 효과가 있는 만큼 사교육비를 줄이고 저소득층에게 장학금 지원을 늘리는 등 인적 자본 투자를 확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ILO “한국 3%부유세→66兆 세수 늘어” 이른바 ‘개룡남’(개천에서 용이 된 남자), ‘개룡녀’가 다시 나올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유아교육에 대한 국가 지원도 늘려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3% 세율의 부유세(wealth tax)를 신설하면 우리나라에서만 약 66조원의 세수 증대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국제기구의 분석이 나왔다. 국제노동기구(ILO)는 10일 낸 보고서(‘World of Work Report 2011’)에서 세계 10%의 부자들에게 3% 세율의 부유세를 매기면 2010년 기준 4조 달러의 추가 세수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했다. 국가별 부유세 수입 예상 규모는 미국이 1조 2000억 달러로 가장 많고, 일본 4470억 달러, 중국 3510억 달러, 프랑스 2580억 달러 순서였다. 한국은 550억 달러(약 66조원)로 추정했다. 안미현기자 hyun@seoul.co.kr
  • [열린세상] 새해를 여는, 차 마시는 마음/문흥술 서울여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열린세상] 새해를 여는, 차 마시는 마음/문흥술 서울여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한강 소설 ‘몽고반점’을 보면 동물적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를 거부하는 의미에서 채식을 선언하는 여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런 여주인공에게 ‘베트남 참전 용사 출신’인 아버지는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면서 억지로 고기를 먹인다. 결국 주인공은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그런 아버지는 소설에만 등장할 뿐인가. 안타깝게도 연초 어떤 모임에서 그런 폭력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직접 목도하였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사람들이 모여 애 키우는 이야기, 돈 버는 이야기, 건강에 관한 이야기 등으로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대통령 선거에 대해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보수와 진보 진영으로 편이 갈라져 대판 논쟁이 벌어졌고, 급기야 삿대질을 하면서 멱살까지 잡는 일이 벌어졌다. 정치에 무관심한 나로서는 양쪽 모두를 비판했고, 결국 회색분자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무엇이 우리 세대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생각해 본다. 모두가 자신의 주장이 무조건 옳다고 우기면서 타인의 의견을 아예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내 편 아니면 적, 그것이 그날 ‘아버지’들의 모습이었다. 양극단의 첨예한 대립과 충돌만 있을 뿐, 그 충돌의 완충 지대는 없었다.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고 논리적으로 이것저것 따지면서 대안을 찾고 타협하는 문화는 찾아볼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상황을 비단 그날의 모임에서만 일어난 해프닝으로 치부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올해는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가 있다. 자신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보수 골통’, ‘좌파 빨갱이’라고 가차없이 단죄해 버리는 일들이 아마도 도처에서 일어날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는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자신의 의견을 쉽게 드러냈다가는 큰 봉변을 당하기 십상이다. 그만큼 상대방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문화가 실종돼 버렸다. 사태가 이 지경이라면 나라를 둘로 나누는 게 낫겠다는 상상까지 해본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기성세대의 이러한 이분법적 대립과 갈등, 그리고 폭력이 어린 세대에게 그대로 답습되고 있다는 점이다.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꿈을 키우면서 올바른 사회성을 배워야 할 어린 학생들마저 기성세대의 부정적인 측면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다. 특정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집단으로 따돌리고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른다. 주검으로까지 내몰린 피해 학생을 보면서 교육자의 한 사람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그런데 그 책임이 교육자에게만 있는 것일까. 이런 모든 불행한 사태의 책임은 전적으로 동물적 폭력과 광기를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휘두르는 우리 기성세대 모두에게 있다. 그러기에 최근 일어난 청소년 폭력과 관련된 불행한 사건은 기성세대를 향해 울리는 경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청준 소설 ‘다시 태어나는 말’을 보면 81세의 나이로 입적한 초의 스님의 ‘차 마심의 마음’이 나온다. 초의 스님에 따르면 진정한 차 마심은 “내가 누구에게 못할 짓을 하였나, 내가 누구를 원망하고 원한을 지닐 일은 해 오지 않았나. 그런 일들을 후회하고 용서하고 속죄하는” 마음, 곧 “남과 자신을 용서하고 그리고 세상사 모든 것을 용서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들어 있는 차 마심이다. 2012년 임진년 새해에 누구나 한두 가지 목표가 있다. 대개는 금연과 금주와 같은 금기 사항부터, 건강을 위한 운동,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 승진, 가정의 화목함 등을 실천 목표로 삼을 것이다. 여기다 초의 스님의 차 마시는 마음처럼 남과 자신을 용서하고 세상사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지녀보겠다는 목표를 설정하면 어떨까. 우리 사회에 만연한 대립과 갈등의 깊은 골을 메우지 못한다면 한국 사회는 힘들게 도달한 선진국의 문턱에서 주저앉고 말 것이다. 경제성장이니 분배니 하는 문제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지금 간절히 필요한 것은 한국 사회를 진정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사회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보수든 진보든, 좌파든 우파든, 그 모든 것을 포용하면서 용서하고 감사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CEO 칼럼] 420년 전 壬亂 새기고 국운 융성을 바란다/김광재 한국철도시설공단 이사장

    [CEO 칼럼] 420년 전 壬亂 새기고 국운 융성을 바란다/김광재 한국철도시설공단 이사장

    임진년 새해를 맞으니 420년 전 임진왜란이 떠오른다. 일본의 침략 앞에서도 당파적 이해로 국론이 분열되어 그 결과, 온 백성이 7년 이상 고통받았던 아픈 역사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현재도 마찬가지다. 글로벌 경제위기, 재정위기의 파고 앞에서도 정치권은 정파적 이해에만 몰두하고 있다. 경제활성화와 일자리 창출 등이 제대로 되지 못하니, 수많은 국민은 하루하루를 버티기가 힘든 지경이다. 세계 193개국 중 우리나라가 갈등이 많기로 4위라고 한다. 이념 갈등, 지역 갈등, 노사 갈등에 이어 지난해 보궐선거에서 보듯 세대 간 갈등까지 극명하게 표출됐다. 공산주의의 종주국이던 구소련이 무너지고, 중국도 흑묘백묘론의 실용과 수정사회주의로 정책을 바꾼 지 오래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친북, 종북, 반북으로 남남 갈등에 시달리며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우리 내부에도 변화를 꺼리면서 진보를 막으려는 세력이 있는 것은 아닐까? 간디는 “맹목적 이기주의는 나라를 망친다.”고 말했다. 6개 경제자유구역을 지정해 놓고도 부처 간 이기주의로 자유교역을 활성화할 규제 완화는 미흡한 현실이다. 산업별 이기주의, 극단적 노조투쟁, 노동유연성 부족, 외자 먹튀 비난 등으로 인해 외국인직접투자(FDI) 유치는 성과도 거의 없다. 성장이냐 분배냐, 복지포퓰리즘 등을 두고 입씨름을 벌이는 사이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은 2001년 세계 11위에서 지난해 15위로 하강했다. 무역규모 세계 9위의 국가인데도 참여정부가 추진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반대해 수년이 지나 재협상한 결과 대미 자동차 수출 시 관세 축소 연기 등 더 불리한 합의를 하게 됐다. 사정이 이런데도 반대에만 집착하는 세력들을 보고 있노라면, 어쩌면 대외개방에 대한 일종의 피해망상을 갖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든다. 인턴 모집에도 박사, 유학생들이 몰려들고 원서를 50차례 넘게 써도 취업을 못해 좌절하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 신도 부러워하는 일부 공기업과 귀족 노조들은 6000만원 이상의 연봉을 챙기면서도 의무와 책임은 소홀히 하며 여전히 자신들의 권익 확대에 더 아우성이다. 늘어나는 공기업 부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공공기관 선진화 정책에 툭하면 파업하겠다니, 그 부채는 어떻게 줄이며 어느 세대가 갚아야 하는지 도대체 답이 나오질 않는다. 왜 청년실업은 줄지 않는지, 왜 기업투자는 늘지 않는지 그저 문제만 지적하고 대안은 제시하지 못하면서 남 탓이라는 손가락질만 있는 작금의 현실을 누군가 고쳐야 하지 않겠는가? 건설업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정부가 시행하고 있는 최저가입찰제는 건설현장에 가면 더 많은 문제가 보인다. 건설업체 난립과 과당 경쟁으로 100여개 중 30여개 업체가 법정관리 상태인데 최저가입찰제를 하니 예정가의 70% 이하 저가낙찰업체가 더 많다. 이들은 노무비를 아끼려고 값싼 외국인근로자와 불법 체류자를 고용, 확대된 공공건설사업비 중 노무비의 상당 부분이 해외로 유출되고 청년실업은 줄어들지 않는다. 더구나 설계 변경 등을 통한 총사업비 증가는 70% 이상 낙찰업체보다 무려 3.6배나 많고, 부실시공에 안전소홀까지 겹쳐 더 많은 사고에 노출돼 있다. 문제의 해답은 현장에 있다. 탁상공론, 기초원리만의 담론은 정책실패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금년은 총선, 대선의 해다. 중요한 선택의 시기다. 한·유럽연합(EU), 한·미 FTA로 우리나라는 세계 3위의 경제 영토를 가지게 됐다. 그러나 정치·경제·사회 분야에 산적한 문제와 갈등에 발목이 잡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국민도 길을 잃고 헤맬 것이 뻔하다. 더 많은 일자리 창출로 젊은이들이 기회를 잡고 국민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리더십을 발휘하는 정당과 지도자들을 뽑아야 한다. 그것이 국운 융성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 [서울신문 2012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 - 종언의 시대를 살아가기/이강진

    종언의 시대를 살아가기/이강진 1. ‘저항’의 시대와 그 기원 누군가 제게 2000년대 문학에게 주어질 단 하나의 이름을 꼽으라 한다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그것을 ‘저항의 시대’라고 명명할 것입니다. 물론 이 저항은 여러분이 알고 있는 ‘저항’의 기표, 이를테면 세계에 대한 저항이나 주체를 둘러싼 폭력들에 대한 투쟁 등과는 다른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최근의 문학이 보여주는 강렬한 ‘저항’들은, 오히려 역사적 투쟁이 끝났다는 저 냉엄한 현실과 맞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제 말을 의아하게 생각하고 계실지도 모르겠네요. 실제로 지난 몇 해간 문학은 끊임없이 그가 떠맡을 수 있는 정치적 가능성들에 대해 고민해왔고, 또 우리 앞에 그 실천적 노력을 내놓았으니 말입니다. 실은 저의 고민도 이곳에서 출발합니다. 최근 갑작스럽게 대두된 ‘시와 정치’에 대한 격렬한 저 논쟁의 배경에는, 과연 일반적인 평가에서처럼 단지 촛불시위나 용산참사와 같은 문학 외적인 요인만이 작용했던 것일까요?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러한 진단은 문학이 예술적인 층위에 안주하면서도 대중적 관심을 추수하는, 일종의 권위적 시장주의를 드러냈다는 음울한 기억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적인 관심사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반응이라고 보기에, ‘시와 정치’논쟁은 지나치게 끈질기고 또 적극적이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단순한 사회적 정세 이상의 무언가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여기에, ‘저항의 시대’가 숨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입을 모아 2000년대 들어서 낯선 감각과 새로운 어법으로 무장한 젊은 시인들이 ‘집단적’으로 출현했다고 말한다. 이들의 출현과 반응, 이 집단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다. 소통불능의 자폐적이고 이기적인 문학이라는 신랄한 비판이나 조금만 더 자아 밖으로 나오라는 애정 어린 충고에서부터, 여러분이야말로 ‘도래’할 문학적 민중이 될 거라는 뜨거운 격려에 이르기까지, 상이한 반응들의 폭발에 정작 시인들은 당황했다. 새로운 시들을 둘러싼 이 논의들은 여러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나를 난감하게 만드는 문제, 즉 문학과 윤리 또는 미학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 영원 회귀하는 질문들 그리고 그 대답들로 느껴진다.(진은영, ‘감각적인 것의 분배: 2000년대의 시에 대하여’, ‘창작과 비평’ 2008년 겨울호. 69쪽) 문학이 고민하는 정치가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시와 정치’논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진은영의 ‘감각적인 것의 분배: 2000년대의 시에 대하여’에서부터 이미 드러납니다. 하지만 시가 미학적인 완성을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직접적으로 정치적이어야 한다는 귀결은, ‘문학과 윤리 또는 미학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 영원 회귀하는 질문들’에 대한 당연한 정답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글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진부한 결론이 아니라, 오히려 ‘2000년대의 시에 대하여’라는 그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어째서 진은영은 특정한 것으로 정의 내릴 수 없는 낯선 시들의 출현으로부터 시의 정치성에 대한 고민을 읽어냈던 것일까요? 80년대와 결별한 후 정치에 대한 반동적인 면모를 보여 왔던 문학이, 촛불시위와 용산참사를 목격한 후 뒤늦게 정치성에 대한 필요를 느꼈다는 해석은 지나친 음모론같이 보입니다. 반면에 이 글의 출발점이었던 ‘젊은 시인’들을 주목하는 순간,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진은영이 가진 문제의식이란 현실과 문학 사이의 괴리에 대한 즉흥적인 고민이 아니라, 포스트모던 담론 이후 등장한 새로운 시에 대한 오래된 고민이었던 것입니다. 랑시에르의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문학을 비롯한 예술 전반의 문제는 ‘감각적인 것을 분배하는’ 문제이며 그런 면에서 예술은 필연적으로 ‘정치’와 관계한다―책제목 ‘감각적인 것의 분배: 감성론과 정치’라는 말 자체에 이미 그의 문제의식과 결론이 압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진은영, 앞의 글, 71쪽) 진은영이 소개한 랑시에르의 감성론은, 미적 자율성의 이름으로 정치를 함께 담보할 수 있는 매력적인 이론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당시 문단에서 이 이론을 열렬하게 환영했던 데에는, 혹시 ‘시와 정치’에 대한 고민과는 별개의 이유가 있지는 않았을까요? 저는 그것이 우리 문학이 직면했던 거대한 과제,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을 넘어설 방법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학은 어디까지나 ‘근대문학’이며, 근대의 사회구조가 만들어낸 일종의 상상적 권위에 불과하다는 이 충격적인 선언 앞에 당시 우리 문단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때마침 유령처럼 배회하던 ‘문학의 위기’에 대한 우울과 겹치면서, 가라타니의 종언론은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폭탄으로 다가왔던 까닭이죠. 한참 후에야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른 비평가들은, 이후 너나 할 것 없이 앞을 다투어 ‘문학의 종언-이후’에 대한 갖가지의 견해들을 내놓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나는 더 이상 문학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습니다’라는 가라타니의 태도가 지나치게 자극적인 종언의 기표일 뿐이라거나, 그가 논의하는 내용이 일본문학만의 특수한 상황을 전제하고 있다는 식의 비생산적인 사족에 그칠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애초에 가라타니가 종언을 이야기한 맥락이 문학의 소멸을 말하는 비관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가라타니가 문학에 요구한 것은 종언을 받아들이고 그 이후에 전개될 ‘종언의 시대’를 살아가는 태도였습니다. 이것은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표제를 내걸었음에도 실제로 그가 집중적으로 조명한 것이 세계자본주의의 전개양상이었던 점을 통해 확인할 수 있지요. 따라서 문학에 대한 기대를 그만두겠다는 그의 말은, 철저하게 ‘근대문학’에 부여된 상상적 층위의 정치적 역할과 그 권위에 기대지 않겠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가라타니에게 문제의 핵심은 ‘정치’에 있었지만, 당시 우리 문단은 그것을 성급하게 ‘문학’에 국한시키며 오해를 낳은 셈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렇게 급조된 대응담론이 아니라, 고진이 ‘종언’을 선언한 이후에 등장했던 우리의 문학 그 자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2. ‘정치’의 자유, ‘정치’로부터의 자유 ‘근대문학의 종언’이 등장했던 해는, 우리 문단에서 ‘미래파’라는 새로운 바람이 막 불기 시작하던 시기였습니다. 처음 그 갑작스러운 등장에 대해 보내던 우려와 달리, ‘미래파’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을 환영하는 이들과 비판하는 이들 모두에게 중심담론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새로 등장하기 시작한 시인들이 과거와 같이 (담론화하기 쉬운)특정 논의의 틀 안에 규정되는 일이 드물었던 까닭도 있었겠지만, 미래파 논의가 이토록 빠르게 문단의 중심담론으로 부상한 데에는 분명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죠. 이후 전개된 ‘미래파 논쟁’의 주된 핵심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과연 ‘미래파’란 존재하는가, 둘째는 이들이 진정으로 우리 시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재미있는 사실 하나가 숨어있습니다. 논쟁에 참여한 거의 모든 이들이, 별다른 합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새로움’을 보여준다는 데에 동의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미래파 논쟁’이 얼마 지나지 않아 기세가 한풀 꺾였던 것에 비해,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시적 ‘새로움’에 대한 믿음은 ‘미래파’라는 분류가 유명무실해진 지금까지도 굳건히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단순히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적 작업을 분석하여 그것이 ‘미래파’의 증거가 되느냐를 따질 것이 아니라, 어떤 이유로 우리 문단에 이러한 논의가 등장했고 또 불붙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일인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 시의 미래는 이들이 적어나갈 것이다. 이들에게는 80년대 시인들이 걸머져야 했던 역사와 시대에 대한 채무의식이 없고, 90년대 시인들이 내세운 그럴듯한 서정, 고만고만한 서정이 없다. 그 대신에 다른 게 있다. 그리고 이들의 시는 무엇보다도 먼저, 재미있다.(권혁웅, ‘미래파: 2005년, 젊은 시인들’, ‘미래파’, 문학과지성사, 2005. 149~150쪽) 가라타니는 문학의 종언을 가져온 중요한 전제로서, 이제 더 이상 문학이 현실의 ‘정치’나 ‘실천’을 대리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들고 있습니다. 반면에 권혁웅은 ‘채무의식’이 없어짐으로써 우리 시가 시적인 새로움을 폭발시킬 수 있었던 원동력을 마련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두 사람의 차이로부터 시의 ‘새로움’이 가진 기원을 엿보게 됩니다. 이제 시는 80년대적인 ‘역사와 시대에 대한 채무의식’, 즉 ‘실천’이라는 기표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당당할 수 있는 자유를 획득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의 현실이 80년대의 시가 직면했던 폭력적인 억압을 그대로 내재하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현실의 억압이 보이지 않게 되면서, 시는 더 이상 불가능한 실천을 상상적으로 담보하던 과거의 역할을 해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더는 ‘우리에게/아무도 총을 겨누지 않는’(진은영, ‘70년대産’) 사회가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는 여전히 존재하는 폭력들과 맞설 것을 요구받습니다. 가라타니가 ‘정치의 자유’로 인해 발생한 이 모순적 상황을 종언의 원인으로 인식했다면, 우리는 이 모순된 상황을 ‘정치로부터의 자유’를 획득한 후 겪는 일시적인 홍역으로 여겼습니다. 저는 바로 이 분기점이야말로 어째서 진은영이 랑시에르의 감성론을 급히 ‘수혈’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설명해준다고 봅니다. ‘시와 정치’에 대한 논의는 ‘정치로부터의 자유’를 획득한 ‘새로운’ 시가, 어떻게 여전히 남아있는 저 정치에 대한 요구를 떠맡을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직접적으로 정치적이면서도 첨예하게 미학적이’고 싶다는 진은영의 고백에는, 전자에 의한 ‘실천’의 획득과 후자에 의한 ‘새로움’의 향유를 동시에 소유하고픈 욕망이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바로 이곳에서, 제가 진은영이 랑시에르를 소개한 배경에 ‘근대문학의 종언’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숨어있다고 말한 이유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시적인 ‘새로움’에 대한 요란한 환영, 심지어는 강박적인 것으로마저 여겨지는 저 ‘새로움’에 대한 추수는 단순한 예술사조의 변천이나 시대적 흐름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의지로 얻어낸 것이 아니었던 ‘정치로부터의 자유’에 대한 강한 채무감에서 기인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대다수의 논의들은 ‘채무의식’의 극복이 ‘새로움’의 원동력이라고 말해왔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였던 셈이지요. 아마도 신형철은 이러한 진실에 일정 부분 닿아 있는 듯 보입니다. 그가 황지우의 시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야기하는 미학과 정치의 논의는, 앞선 것들과는 조금 다르게 나타납니다. 이렇게 아주 엄밀한 의미에서, 미학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이 한몸이었던 사례가 우리 시사(詩史)에 있는가? 물론 있었다. 예컨대 황지우의 시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가. 그의 시가 대표적으로 보여준, ‘회의하면서 긴장하는’ 그 언어의 배후에는 권력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의 억압이라는 외적 상황이 있었다. 할 수 있는 말과 해야만 하는 말의 분열 속에서, 언어의 회의 혹은 언어의 긴장은 (시인 자신의 의지나 역량에 힘입은 바 못지않게) 상당부분 ‘역사적으로’ 성취되었다. 덕분에 그의 시는 첨예하게 미학적이면서 동시에 직접적으로 정치적일 수 있었다.(신형철, ‘가능한 불가능’, ‘창작과 비평’ 2010년 봄호, 375쪽) 과연 최근 우리 시는 80년대의 채무의식을 ‘극복’하였을까요? 신형철은 여기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는 과거의 시가 정치를 떠맡을 수 있었던 원인이 현실정치의 불가능함에 있었다는 가라타니의 견해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날 ‘시’와 ‘정치’가 확고한 동반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시인이 가진 분노의 감정이 미학의 이름을 통해 고스란히 정치적 정념의 형태로 분출될 수 있었던 역사적 맥락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신형철 또한 이 이상으로 나아가는 데에는 실패하고 맙니다. 새로운 시와 비평에 대한 요구가 ‘아무도, 적어도 시에서는, 그 어떤 발화도 억압하지 않는’ 오늘날의 상황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그가 제시하는 방향이란 ‘첨예하게 미학적인 시들에서 우선 그 미학적인 것의 핵심을 정확하게 읽어내고, 그 이후에 거기에서 정치학적인 것까지를 읽어내는 일’에 그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치적’인 것과 ‘정치학적’인 것을 구분하는 신형철의 화법에서, ‘실천’의 강박과 ‘새로움’의 강박을 서로 다른 것으로 떼어놓으려는 시도를 명백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언컨대, 이들이 지니는 동일성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또 인정하지 않는 이상, ‘시와 정치’는 영원한 제자리걸음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3.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정치를 ‘고유한 주체의 합리성에서 유래하는 특정한 행위 양식’으로, 시를 ‘주체가 스스로의 자유 안에서 건네는 내밀한 고백’이라고 정의할 때, 시와 정치가 본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명백해 보입니다.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시인을 거부했던 이유는, 시가 가지는 본연의 속성이야말로 가장 정치적이었던 데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훌륭하게 완성된 공동체에게 시는 위협적인 존재가 됩니다. 왜냐하면 시가 가지는 힘이란 공동체의, 세계의 질서가 보지 않으려 하는 것들을 목격함으로써 얻어지기 때문입니다. 정치의 과정 또한 이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논의하던 랑시에르의 표현을 빌자면, ‘정치는 권력 행사가 아니’며, ‘정치는 그 자체로, 즉 고유한 주체 때문에 현실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세계의 상징체계 속에 ‘없음’으로 규정된 ‘자리-없음’(placelessness)들이야말로 가장 정치적인 실재의 공간이라고 말했던 라캉의 언명과 동일한 맥락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정치란 처음부터 통치 과정(치안)의 바깥,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만이 가능한 행위인 셈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바깥의 존재양식이야말로 시와 정치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임을 입증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놓쳐버린 권위’라고 생각했던 과거 문학의 정치성을 되돌아보면, 그것들이 방금 이야기한 ‘정치’와는 사뭇 다른 층위에 있었다는 것을 알아내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정치적인 시’라고 불러온 것들은, ‘정치’의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인 것’에 더욱 가깝게 다가서 있었던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어떤 것은 실체가 있는 폭력들에 맞서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였고, 다른 곳에서는 도래할 혁명을 향해 나아갈 것을 소리 높여 외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신형철도 이미 지적했듯이, 과거 우리 시들이 ‘정치적인 것’에 대한 행동을 통해 스스로의 정치적 역할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역사적 맥락에 기댄 결과였습니다. 때문에 이제부터 시가 추구해야 할 정치성이란 랑시에르의 진단과 같이 본래적인 의미의 ‘정치’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최근의 논의는 단순히 이전과 다른 ‘정치’의 정의에만 집중한 나머지, 스스로 경계할 것을 주장했던 전위적 언어에 대한 맹신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비평가들은 ‘감성의 분할’이라는 개념을 통해 그것을 벌충하려 하였으나,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을 둘러싼 논쟁에서 가장 혹독한 비판을 받았던 ‘텅 빈 해체’의 문제를 그대로 답습하는 오류를 저지르고 말았던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 시 비평의 영역에서 그동안 관성적으로 제기되어온 ‘소통’에 대한 요구가 지닌 본질적 문제점은, 개인과 사물 세계를 ‘자명한 것’들로 번역하려는 ‘투명성’에 대한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오히려 시적 공간에서 보존해야 할 것은 개인과 사물의 불투명성이며, 빛의 언저리에 드리워진 기이한 그림자와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아닐까? (…) 그러므로 낯선 현전의 형식들에 직면해 여전히 소통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우리 시대의 비평이 우선 대결해야 하는 것은, 텍스트 자체라기보다는 오히려 의사소통 공동체의 지평에 나타난 저 낯선 얼룩을 깨끗이 지우고자 하는 순백을 향한 비평 자신의 욕망이 아닐까? (함돈균, ‘균열, 불면, 기화, 그리고 여백은 어떻게 정치적인 것이 되는가’, ‘얼굴 없는 노래’, 문학과지성사, 2009, 133쪽) 함돈균이 내놓은 ‘불투명성’의 문제의식은 이러한 오류를 확연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자명한 것’과 ‘투명성’을 추구하는 질서란 개인과 사물을 명확하게 재단함으로써 그것들을 교정하고 규정지으려 하는 힘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랑시에르가 ‘세계의 감성분할행위’라고 불렀던 것과 동일한 행위를 뜻하지요. 언뜻 생각하기에 이들에 대한 저항이란 혁명의 의지를 내포하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세계의 규정들을 무화하는 시도는 그 자체로 하나의 저항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려한 수사와 문장들을 걷어내고 함돈균의 주장을 다시 읽어보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집니다. 그가 비평이 나아가야 할 목표로 제시하고 있는 ‘비평 자신의 욕망’과의 대결이란, ‘낯선 얼룩’을 보존하고 ‘불투명성’을 획득하는 작업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함돈균이 이것을 결국 우리들이 직면한 ‘낯선 현전의 형식’에 대한 옹호를 위해 주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의 논리는 세계에 대한 전위의 저항을 제시한 이후에 실제로 태어나고 있는 ‘낯선 형식’들을 조명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새롭게 출현한 시들을 ‘낯선 현전’과 ‘낯선 형식’으로 명명한 뒤, 이들에게 ‘소통의 문제를 제기하’는 태도의 반동성을 비판하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비단 함돈균만이 보여주고 있는 문제가 아니며, 전반적인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이 공통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문제점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그의 논리적 모순을 합리화해줄 수는 없을뿐더러, 오히려 우리 문학담론 전체의 병폐를 폭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저만이 아닐 것입니다. 한마디로 해체나 전위를 통한 저항의 대부분은, 다분히 사후적인 평가를 위해 ‘만들어진’ 정치성이었던 셈입니다. 백낙청은 자신의 글에서, 시의 정치성에 대한 논의들이 가지는 이러한 환원론적 오류에 대해 일침을 가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런 통상적인 의미의 윤리 내지 도덕을 거부하는 것 자체가 문학의 진정한 윤리임을 강조하는 데 머물 경우 그것은 구체적인 정치현실과 무관한 또하나의 정언명령을 발하는 것밖에 안 된다.’(백낙청, ‘우리시대 한국문학의 활력과 빈곤’, ‘창작과비평’ 2010년 겨울호, 20쪽)고 강조합니다. 그의 이러한 지적은 매우 정확한 것이어서, 대부분의 논의들이 가지는 정치성이 단지 제스처에 불과한 껍데기라는 것과 함께, 이제는 그러한 논의방식들이 하나의 새로운 정형이 되어가고 있음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백낙청은 그 너머로 논의를 이어가지 못한 채, ‘동아시아 전통에서 말하던 도덕, 즉 도(道)와 ‘도의 힘’으로서의 덕(德)에 대한 사유가 실종되고 만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며 방향을 선회합니다. 그의 글에서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정확히 드러나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그가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도(道)는 노자의 ‘道’ 개념으로 이해해볼 수 있습니다. 규정적 명명을 거절하는 상태로서의 이 개념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적 사고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부분이지요. 그리고 덕(德)을 일종의 공동체적 당위성, ‘세계-내-존재’가 되기 위한 최소한의 합의점으로 바라본다고 할 때, 우리는 백낙청의 이 진술이 포스트모더니즘 담론들의 한계를 재차 강조하고 있음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즉 ‘동아시아 전통에서 말하던 도덕’을 이야기함으로써, 포스트모더니즘이 도달할 수밖에 없는 허무주의가 앞뒤 없이 계속된 막무가내식 해체의 결과임을 꼬집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백낙청의 지적은 매우 합당함에도 불구하고 선명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 지적을 어디까지나 ‘모더니즘 논의’의 문제로 국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백낙청은 (모순을 드러낸)이들과 달리 ‘다른 흐름’들이 있음을 주장하며, 그것의 구체적 성과로 자신이 전개해 온 리얼리즘 논의를 들고 있습니다. 한국적인 리얼리즘 논의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면, 랑시에르의 감성론보다 훨씬 우리의 현실에 밀착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논쟁적인 문제제기를 피하기 위해 자세한 검토를 하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역시, 마구 가거나 너무 가서는 잘 갈 수가 없다’는 경구적 발언을 인용하는 백낙청의 태도로부터, 우리는 자신이 발전시켜온 리얼리즘론의 우월함을 주장하는 그의 함의를 어렵지 않게 발견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날 문학이 직면한 문제가 이전부터 계속되어온 리얼리즘 대 모더니즘의 구도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전에 없던 시적 변화들은 문학이 직면한 고민을 그대로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모더니즘 논의’로 한정짓는 태도는 여전히 ‘시’와 ‘정치’를 별개의 것으로 보려는 자세를 드러내고 있는 셈입니다. 강동호는 이러한 오류를 극복하고 정치성의 논의를 상당 부분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재현행위가 가질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한계를 오롯이 인정하고, 그 실패로부터 가능성을 발견하기 위한 우회로를 탐색하기 시작합니다. 시가 할 수 있는 일은 어쩌면 여기까지인지도 모른다. 시의 잠재적 정치성을 긍정적 어법인 잠재성의 정치로 바꾸는 일은 오롯이 독자에게 남겨진 몫일 것이다. 아울러 저 시적 언어들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찾아주는 것, 즉 시의 유물론적 조건을 탐사하고 그것을 현실의 언어로 변환시키는 ‘목숨을 건 비약’(salto mortale)을 감행하는 일은 어디까지나 비평가의 몫이다. 이러한 작업은 오늘날의 미학과 사회적 현실 간의 상관도를 상세히 규명하는 사회학적 분석에 해당하며, 이를 근거로 이 세계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를 던지는 복화술사의 정치에 속할 것이다. (강동호, ‘존재론적 비명으로서의 시적인 것’, ‘창작과비평’ 2009년 가을호, 312쪽) 시의 언어는 삶을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는 없지만, 그것이 처한 시공간을 써냄으로써 제 기능을 수행한다는 그의 주장이 기존의 ‘텅 빈 해체’와 결별할 수 있는 것은, ‘시가 할 수 있는 일은 어쩌면 여기까지인지도 모른다’는 진실에 과감하게 다가서는 태도가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궁극적으로 강동호가 ‘비평의 의무’라고 여기고 있는 ‘시의 유물론적 조건’을 탐색하는 행위란, 어디까지나 시가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예외성 너머에서만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시가 세계에 대한 어떠한 물리적 강제를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양식을 이끌어내기 위한 선전이 되는 순간, 그것이 이미 시로서의 생명력을 상실한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와 시인에게 ‘예술가의 의무’라는 이름하에 불가능한 것들을 요구하는 일이란 기만에 다름 아닌 셈입니다. 물론 제가 여러분에게 ‘시는 정치적일 수 없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시가 가진 예외성을 인정하는 것은, 오히려 강동호가 지적했듯 오로지 시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발견하는 초석이 됩니다. 왜냐하면 시의 예외적 속성에 대한 고의적인 망각이란, 시가 ‘정치적인 것’에 봉사할 것을 요구하는 논리의 한가운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현실정치에 대해 물리력을 행사할 수 없는 시를 가지고 통치행위에 연관된 영향력을 고민하려다 보니, 우리 시는 필연적으로 스스로의 불가능성을 은폐하고 왜곡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형철이 말한 ‘역사적 맥락’이 소멸한 지금, 더 이상 망각의 방법은 통용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문학은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있을 수밖에 없다는 자신을 첨예하게 인지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조건’들을 낳았던 본래의 ‘정치’로 회귀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4. ‘상상적 대리자’에서 ‘상상의 대리자’로 앞서 저는 새로운 시대에 요구되는 문학의 의무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이분법적 구분을 모두 넘어서는 것으로만 가능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모더니즘-리얼리즘의 이분법적 구도를 해체하자는 맥락의 이야기가 아니라, 분리된 담론으로 여겨져왔던 각각의 한계들을 한번에 조망하고, 그것들을 총체적으로 극복할 고민이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가라타니는 자유로워진 ‘정치’의 시작이 ‘문학의 종언’을 가져왔다고 했지만, 제 생각은 약간 다릅니다. 기실 오늘날 우리 문학이 직면한 위기는 달리 보면 ‘정치’의 위기이기도 했습니다. 격렬한 투쟁의 시대가 이미 지나갔음에도, 우리에게 ‘80년대적 실천’은 커다란 그림자가 되어 여전히 드리워져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굴레를 벗어던지기 위해 두 가지 과제를 오늘의 정치에 요구합니다. 하나는 우리가 지난 역사를 통해 이미 민주화를 달성했다는 승리의 착각을 극복하는 일이며, 다른 하나는 투쟁의 과정을 경험하며 우리에게 각인된 ‘실천’의 기표에 대한 강박을 벗어던지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두 과제는, 흥미롭게도 문학이 직면한 과제이기도 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의 유입 이후, 이제까지 문학은 더 이상 대문자로 적어야 할 정치행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 위를 내달려왔습니다. 지금에야 그 유행이 거의 수그러들었지만, 몇 해 전만 하더라도 ‘거대담론이 사라졌다’는 구호가 굉장한 인기를 얻었음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지요. 그러나 80년대의 투쟁이 맞서왔던 억압의 구조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사회의 깊은 이면에 내재된 채 현존하며, 오히려 더욱 교묘한 전술로 우리를 구속하고 있습니다. 허용된 자유의 형태로 드러나는 자본주의의 자유는 문학이 겨냥할 만한 명확한 적대를 제공하지 않았지요. 이후 문학은 진퇴양난의 고민에 휩싸였던 것입니다. 해체주의의 대안적 담론을 추수하자니, 그것은 이미 ‘거대담론의 붕괴’라는 잘못된 필요조건을 요구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었고, 과거의 실천적 구호를 답습하자니 오히려 그 적대행위 자체가 초자아적 정언명법이 되어 주체를 구속할 뿐이었습니다. 확고한 결단이 불가능했던 문학은 결국 두 가지 사이에서 모호하게 표류하였고, 그 결과 등장한 것이 기형적인 ‘미래파’의 규정과, 그들의 부족한 정치성을 벌충할 ‘시와 정치’의 논의였던 셈입니다. 흑백논리의 모순을 회색이 되어 피해보고자 한 것이죠. 그러나 이러한 자기합리화는 문학의 생명력을 더욱 옥죄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며, 가라타니의 진단대로 문학은 독자들에게 더 이상 스스로의 권위를 내세울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몇몇 비평가들은 이러한 현상을 ‘미적 모더니티의 운명’으로 설명해보려는 시도를 했지만, 그것이 억지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것은 그들 자신이 더욱 잘 알고 있었을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문학이 지향해야 할 진정한 방향성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문학이 철저하게 현실정치의 바깥에 존재하는,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의 역할을 재인식할 것을 주장합니다. 과거의 문학이 불가능했던 정치의 ‘상상적 대리자’ 역할을 통해 권위를 획득했다면, 이제부터 문학은 그것을 넘어서서 현실정치의 불가능한 감성을 떠맡는 ‘상상의 대리자’가 됨으로써 그것을 넘어서야만 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벤야민은 이미 1929년에 이러한 개념의 기초를 제시한 바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초현실주의자들이 그 ‘공산주의자 선언’이 오늘날에 내리는 지령을 파악한 유일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들의 얼굴 표정을, 매분 60초 동안 째깍거리는 자명종의 숫자판과 맞바꾸며 짓고 있다. (발터 벤야민, ‘초현실주의’, ‘발터 벤야민 선집 5’, 길, 2008, 167쪽) 오늘날의 문학은 현실정치가 절대로 수행할 수 없는 두 가지의 역할을 짊어짐으로써 스스로의 정치성을 획득해내야 합니다. 우선 첫째는 ‘정치적인 것’들에 발목이 잡혀 있는 현실정치를 대신하여 ‘정치’만의 고유한 미래적 지향을 상상하는 일입니다. 수많은 조건들의 제약을 받는 ‘실천’을 대신하여, 문학은 자신의 자유로움을 통해 ‘정치’가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아나키스트적 상상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억압의 구조가 주관적 폭력에서 객관적 합리성으로 이행된 이상, 현실정치의 조직적인 치밀함만으로는 저 합리성을 넘어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문학은 이들에게 객관을 넘어설 상상력을 부여함으로써, 저 ‘정치’에 부재하는 ‘미래에의 의지’를 대신하는 역할을 부여받는 것입니다. 벤야민에게 ‘초현실주의자’로 상징된 예술가의 의무가 다음 시대로부터의 지령을 파악하는 것이었듯이, 시인이 세계를 조망하는 소실점들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란 처음부터 저 상상력을 지켜내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문학에 부여된 두 번째 역할은, 우리 주변의 ‘얼굴 표정’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바라보는 일입니다.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역사는 한 번도 진보하지 않았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친부살해를 통해 권력구조를 뒤집은 형제는 결국 그들 중 한 사람이 아버지의 권좌에 앉음으로써 권력을 더욱 강하게 재생산하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혁명’을 자처했던 지난 역사의 모든 변화들은, 대개 그 결과가 새로운 지배구조를 낳는 반복을 가져왔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문학이야말로 이러한 역사의 악순환을 끊어낼 수 있는 최후의 희망이 됩니다. 이제까지의 혁명이 다시 권력이 된 까닭은, 그 전개과정 안에서 필연적으로 소외되는 이들을 끌어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학은 현실정치의 과정이 미처 목격하지 못하는 그늘에까지도 자신의 시선을 가져갈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문학이야말로 모두를 끌어안을 영구한 혁명, 벤야민이 희구했던 단 한 번의 진보를 완성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정치적 사명을 띠고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수식을 붙인다 하더라도, 문학이 감행하는 정치란 처음부터 예외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문학이야말로 라캉적 ‘없음’이 된 자리들, 상징체계에서 추방된 이들과 초대받지 않은 미래를 세계 속에 드러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세계의 감성분할을 재분할하는, 상징계를 넘어설 ‘미학적 예술 체제’의 실재인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시와 정치’에 대한 논의가 이제 끝났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입니다.
  • [열린세상] 사회적 정의와 줄탁동시/박광철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

    [열린세상] 사회적 정의와 줄탁동시/박광철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

    정의(正義)란 의(義)를 바르게 한다는 말이다. 개인의 의로움은 마음에 의하여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자기의 능력을 역할에 맞게 마땅히 지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의 모든 사물이 존재의 이치에 따라 움직이고 변화하는 것과 유사하다. 정의는 항상 모두를 아우르고 베풀며 올바르기 때문에 세상이 잘 다스려지고 더불어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도리라고 말할 수 있다. 정의는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와 함께하면서 보다 나은 삶이 무엇인지를 구현해 보라는 화두이기도 하다. 사회적 정의란 끊임없이 진화하는 사회를 효율적으로 구성·유지시킬 수 있는 올바른 원리가 무엇이며 시대 상황에 맞춰 어떻게 도출할 것인가 하는 개념이다. 개인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참여할 때 사회 전체에서 지켜야 할 덕목을 말한다. 마땅히 지켜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옳고 그름 등 분별력과 연계되어 있다. 분별은 때와 장소,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 달라지지만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기준은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안배하는 것이다. 사회적 정의가 당위성을 갖고 추진동력을 얻는 근원적 이유가 바로 배려와 보살핌의 분배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정의는 각자의 능력과 역할에 맞게 균형적인 보상이 이루어지고 서로를 이롭게 하여 만족스러운 결과가 도출될 때 모두로부터 인정받음으로써 힘을 갖게 된다. 사람은 지구상에서 수천년 동안 진화하면서 가장 강인한 영장류로 자리매김하였다. 이 진화는 막대한 물질의 혁명을 통해 일견 윤택한 삶을 제공해 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부의 편재를 초래했고 소수의 경제적 독점이라는 치명적 약점을 노출시켜 사회적 갈등만 심화시켜 왔다. 사람의 마음도 동시에 진화했다고 보면 정신적 도덕혁명은 별로 이루어진 것이 없으니, 세상이 시끄럽고 어수선한 것이 당연한 것이리라. 중요한 것은 사회적 정의가 작동되지 않고 있어 중대한 변화의 기로에 우리가 서 있다는 점이다. 줄탁동시(?啄同時)란 벽암록 16칙에 나오는 말로 깨달음으로 나가고자 하지만 어리석음의 껍질을 혼자만의 힘으로 깨기 어려우니 큰스님께서 쪼아서 깨트려 주십사 하는 제자의 간청이다. 본래 병아리가 알에서 부화될 때가 되면 새끼는 알의 안쪽을 쪼지만 워낙 힘이 약해서 반드시 어미가 지껄이면서 동시에 알 밖의 같은 곳을 쪼아야 껍질이 깨져 세상에 나올 수 있다는 말이다. 세상의 이치는 혼자만의 힘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람이 역할에 맞게 힘을 보탤 때 조화를 이루며 한 껍질씩 변화가 모색되고 각자의 몫이 완성된다는 설명이다. 사회적 정의도 줄탁동시로 풀어야 할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 요즈음 우리는 어느 때보다 행복해질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을 훨씬 다양하게 많이 갖고 있지만 행복한가에 대하여 물으면 대부분 부정한다. 전쟁이 남긴 잿더미 속에서 가장 시급했던 것은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외자를 끌어들여 기업에 특혜를 주면서까지 산업을 일으켜 경제적 부를 축적하는 데 성공하여 굶는 일은 없어졌다. 그러나 박정희식의 경제개발은 60여년 동안 공룡이라는 거대한 재벌을 탄생시켰고 치유하기 어려울 만큼 소수가 국가의 부를 독식하도록 허용함으로써 세습되는 기업제국, 즉 이단아를 낳게 만들었다. 시대적 아픔에서 만들어진, 분배를 무시한 정의가 오늘날 도전에 직면한 것은 당연하다. 과거 방식으로는 행복할 수 없으며 도저히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는 거대한 저항의 물결이 지금까지의 사회적 정의를 거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기의 능력에 따라 역할이 부여되고 그 결과에 걸맞은 보상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정의이고 이것이 하늘의 뜻일 것이다. 이렇게 변화되어야 한다. 하늘은 항상 세상의 모든 것을 이롭게 아우르기 때문이다. 이 땅에 다시 정의가 숨쉬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우습게 보고 해치는 일이 없어야 하고, 가진 자는 가난한 자의 몫에 나누어 보태줄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사회적 정의는 모두가 합심하여 만들어 나가는 공동의 선이요, 희망의 동력임을 알아야 한다.
  • [최동호 새벽을 열며] 노벨상 시상식에서 바라본 한국

    [최동호 새벽을 열며] 노벨상 시상식에서 바라본 한국

    지난 10일 스톡홀름에서 거행된 노벨상 시상식에 참여했다. 한국 문인으로서는 처음 참여한 이 자리에서 복잡다단하게 뒤엉클어진 한국의 현실을 떠올려 보게 됐다. 먼저 강하게 부딪쳐 온 것은 부의 재분배다. 우선 자신이 축적한 부를 인류문화 발전에 전액 희사한 노벨의 유언을 합리적인 절차와 운영으로 실천한 노벨상이 세계에서 가장 권위를 인정받는 상이 됐을 뿐만 아니라 모범적인 부의 분배로 스웨덴이 남유럽과 같은 재정 위기를 겪지 않는 복지국가가 됐다는 사실을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부의 양극화 현상이며 이를 완충시켜 줄 중산층의 몰락이다. 최근 한 통계에 따르면 중산층은 점점 몰락해 가고 있으며 자신의 다음 세대도 이를 극복할 가능성이 없다고 믿는 세대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고 한다. 이런 현상은 한국 사회의 디지털적인 발전 속도에 적응하지 못하는 계층이 느끼는 소외감을 말해 주는 것일 터다. 그로 인한 적대감이 사회 전체에 점증하고 있는데 이를 치유할 복지선진화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다음으로 생각나는 것은 자원 빈국인 스웨덴이 오늘과 같은 강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창의적인 인재 양성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최근 한국 학생들을 가르쳐 본 외국의 석학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한 것은 한국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질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학생들 자체가 잠재력이 없는 것이 아니다. 진도를 위해 질문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라 여기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스웨덴의 교육은 기존의 지식을 전하는 데 집중하지 않는다.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기 위한 질문을 통해 학생들의 지적 성장을 유도한다. 기존의 지식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지식에 의문을 갖도록 하고 스스로 이를 해결해 나가는 것을 교육의 중심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지식 중심 교육은 일시적으로 빠른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인류문화 발전에 기여하는 창의적 발견이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내는 데 동적인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스웨덴인들의 정치적 싸움이다. 스웨덴 격언 중에 ‘잘난 척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그들도 누가 잘나가는 것을 참고 보지 못하는 질투심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과가 나오는 과정에서는 온갖 싸움을 다 걸지만 일단 결과가 나오면 이를 수용하고 협조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정치적인 문제를 막론하고 온갖 문제에서 쉽게 합의하지 못한다. 또 일단 합의했다고 하더라도 자신과 의견이 다를 경우 이에 불복하고 끝까지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가 빈발한다. 이는 기득권자들에 대한 소외 집단의 분노로 발전하기도 한다. 이런 분노가 유발하는 행동들은 정의감으로 나타나며, 그것이 때로는 한도를 넘어설 경우에도 너그럽게 통용된다. 어떤 주장이 사실이냐, 아니냐가 판단의 기준이 아니다. 그것이 어떻게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기존 세력의 부당성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호소하느냐가 중요성을 갖는 것이다. 지금까지 말한 세 가지 요소는 서로 밀접한 상관성을 갖는다. 부의 양극화, 질문 없는 지식 교육, 절차적 과정의 정당성 결여 등은 모두 사회질서를 왜곡하고 양극단의 충돌을 심화시키는 요인들이다. 경제적 발전만이 모든 것은 아니다. 사회 발전에 따라 다양한 욕구가 분출하고 이를 충족시켜야 할 필요가 발생한다. 한국 사회가 한 단계 더 성숙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속도주의가 아니라 균형감각을 회복하고 복지 선진화를 위한 속도조절이 요구된다. 정치적 이익만을 위해 복지주의 경쟁을 한다면 한국은 내적 갈등 요인의 심화로 불안정하고 위험한 성장의 엔진을 멈추고 말 것이다. 노벨상은 누가 받고 싶어 외친다고 주어지는 것 같지는 않다. 100년 이상 이 상을 주관하면서 세계적 권위를 지켜 온 그들의 신중하고 확고한 자세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를 느낀다.
  • [최종찬 따뜻한 사회] 노인정과 청소년 공부방

    [최종찬 따뜻한 사회] 노인정과 청소년 공부방

    소득의 양극화로 절대 빈곤층이 늘어나는데 그중에서도 노인층 빈곤 비중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높은 편이다. 노인복지의 중요성이 점점 더해지고 있다. 노인복지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이 노인정이다. 경제사정이 좋은 사람은 다양한 취미생활을 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 활발한 육체 활동을 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노인정에서 소일하는 경우가 많다. 웬만한 아파트 단지에는 노인정이 있다. 자연히 노인정은 노인세대 여론의 집합장이 된다. 국회의원, 시·도의원, 시장, 군수 등 선거직은 누구나 노인정을 무시할 수 없다. 추석, 설날 때는 물론 수시로 방문하여 노인정의 애로사항을 청취한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노인정 시설도 개선되고 지원도 확대된다. 노인정에 비해 청소년 공부방은 국가적 지원이 훨씬 적다. 최근 이혼이 늘어나 결손가정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홀어머니, 홀아버지는 물론 할아버지 또는 할머니가 키우는 경우도 많다. 심지어는 부모가 이혼한 후 아버지가 새어머니와 재혼한 후 다시 이혼하여 새어머니와 함께 사는 경우도 있다. 요즈음 초등·중·고등학교의 공교육이 무너져 많은 학생들이 교육을 학원, 과외 등 사교육에 의존하는 것이 현실이다. 부모가 제대로 챙겨주는 아이들은 학원에 가거나 나름대로 취미활동을 하지만 그러지 못한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거리를 배회할 가능성이 크다. 나쁜 짓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방과후 수업이 있지만 이것도 선생님이나 부모들이 챙겨주어야 할 터인데 그러지 못한 경우가 많다. 정부나 사회에서도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여 지역아동센터에서 여건이 불우한 아이들을 돌봐주고 있다. 지역아동센터는 대부분 수업 후에 부모를 대신하여 아이들을 관리한다. 영어, 수학 등 보충교육을 하고 음악, 체육 등 취미활동도 시키며 저녁도 제공하는 등 다양한 기능을 한다. 문제는 지역아동센터가 충분치 못하다는 점이다. 그것도 대부분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중학생 대상은 별로 없다. 여건이 나빠 초등학교 공부방에 오는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었다고 갑자기 달라진 것도 아닌데, 중학교로 진학하면 갈 곳이 없어지는 것이 현실이다. 일부는 초등학교 공부방에 잔류하지만 중학생을 위한 프로그램이 제대로 없는 경우가 많다. 공부방 시설도 열악하고, 아이들을 돌보는 사회복지사의 처우도 나빠 이직률이 높은 것도 문제이다. 청소년 시기는 감수성이 예민한 때이다. 청소년 시절을 잘못 보내 적기에 교육을 못 받거나 범죄 등에 연루될 경우 이것은 그들의 불행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막대한 부담이 된다. 최근 연간 청소년 범죄 증가율은 10% 수준으로 성인 범죄 증가율의 2배 가까이 된다. 가난의 대물림을 막고 사회가 안정되려면, 가정형편이 어려운 경우라도 청소년 시절을 잘 보내도록 돌보아 주는 사회적 시스템이 필요하다. 그런데 불우 청소년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보다 사회적 관심이 낮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이들을 대변할 정치적 목소리가 작기 때문이다. 필자가 매주 월요일 저녁 중학생 공부방에서 자원봉사로 경제교육을 하는데 정치인 방문은 거의 없다고 한다. 노인정에 수시로 방문하는 것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공부방에 지원을 늘려도 청소년들은 유권자도 아니고 그들의 부모는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므로 생색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KT 등 기업들이 청소년 공부방에 지원을 확대하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아직은 미흡하다. 경기도 안양시의 경우 2011년 시에 신고된 노인정은 240개소이나, 공부방은 초등학생 대상이 22개이고 중·고등학생 대상은 1개에 불과하다. 개천에서 용 나는 사회, 소득분배가 개선되는 사회는 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아이들이 부모를 잘못 만났다고 계속하여 가난 속에 살도록 하는 것은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노령화시대의 노인복지도 중요하지만 미래세대에 대한 투자나 지원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전 건설교통부 장관
  • [커버스토리-월가의 99%시위] 자본주의 부정 아닌 승자독식 시스템 거부

    월가의 반(反)자본주의 시위는 자본주의의 부정이 아닌 따뜻한 모습의 자본주의가 탄생하길 바라는 쪽으로 발전하고 있다. 현재 전문가들이 진단하는 새로운 자본주의의 핵심은 ‘국가의 귀환’으로 요약된다. 탈규제와 시장 만능주의를 지향했던 신자유주의가 2008년 금융 위기 등 많은 부작용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가 민간경제에 양적으로 개입해 소비를 늘리는 1950~60년대 케인스학파의 논리와는 다르다. 시장의 실패를 거울삼아 정부가 공정한 분배를 위해 조율하고 개입하는 형태를 의미한다. 부(富)가 1%에 집중될 정도의 양극화를 미리 방지하고 금융 자본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을 갖는 것이다. 사실 자본주의는 그간 수없이 진화를 거듭해 왔다. 국부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의 자유방임 자본주의는 1930년대 불황을 통해 국가가 민간경제에 개입해 소비를 촉진해야 한다는 케인스식 자본주의로 전환됐다. 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1970년대 국가 개입의 실패가 가시화되면서 시장의 복권이 시작됐다. 이렇게 등장한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는 복지를 강조하는 모습으로 조금씩 보완되면서 발전했다. ●“정부는 공정분배 개입하라”… 99%의 반발 하지만 장하성 고려대 교수(경영학)는 자본주의는 독주 때문에 진화의 기회를 잃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자본주의는 현실적이지만 모두를 품는 이상적인 면이 부족해 사회주의에서 사회보장제도 등을 배워 보완했다.”면서 “하지만 자본주의는 승자 독식(시장만능주의) 시스템 때문에 기존 20%대80%의 사회가 1%대99%의 사회로 갔다고 대중은 믿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시위를 하는 대중이 시장체제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왜 너희만 잘 먹고 잘사느냐고 반발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 역시 현재의 상황을 기존의 신자유주의 자본주의가 ‘포스트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로 옮겨 가는 과정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금융 자본의 영향력은 커졌지만 통제 수단이 없고 사회 양극화가 커진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지적했다. 유승경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금융권의 높은 임금이 비판받는 이유는 긴 시간 동안 기술 개발 등을 하면서 꾸준하게 노력한 결과로 이득을 창출한 게 아니고, 한 번의 선택에 따라 큰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라면서 “결국 상품 교환 관계나 임금 계약 형태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가 필요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금융 의존도 줄이고 규제 강화해야 강석훈 성신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의 역할이 커지지만 예전과 같은 모습의 케인스식 수정자본주의는 아닐 것으로 예상했다. 그는 “금융 부문 의존도를 줄이고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동의는 이미 이뤄진 것 같다.”면서 “하지만 재정이 불안해 정부가 통화정책으로 개입할 여지가 줄었기 때문에 양적완화 등의 방식보다 공정한 분배를 위한 역할이 강화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경주·임주형기자 kdlrudwn@seoul.co.kr
  • ‘복지천국’ 스웨덴식 보편적 복지국가 핵심은

    복지정책의 쟁점은 수혜자가 아니라 부담자다. 결혼, 출산, 육아, 교육, 실업 등 삶에서 누구나 부딪히게 될 위험에 국가적 차원의 대응책을 마련하자는 데 뭐라 할 사람은 없다. 해서 반대론자들은 늘 부담자 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한다. 복지논쟁이 불붙으면서 이 부분도 비교적 상세히 거론되기 시작했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최근 내놓은 ‘역동적 복지국가의 길’(도서출판 밈 펴냄)에서 주목되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이들이 복지국가를 좌파적 이념이 아니라 새로운 자본주의로 본다는 점이다. 좌파가 아니라는 점은 보편적 복지가 결국 자본가들에게도 이득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결혼, 육아, 실업 등에 대한 노동자들의 부담이 적어야 임금인상 압박이 줄고, 구조조정이 용이해진다. 역사적으로도 복지국가론은 우파보다 좌파들의 공격 대상이었다. 무크지 창간 형식이다. 2, 3, 4권을 내면서 지속적으로 ‘계몽’하겠다는 의미다. 또 한 가지는 복지국가소사이어티라는 단체 자체가 야권과 깊은 연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민주당이 내건 ‘증세 없는 복지’를 비판한다는 점이다. 정치인에게 증세 주장이란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와 같다. 그래서 국민적 공감대가 필요하다. 때문에 이들의 목표는 정치권 비판 그 자체라기보다, 증세 주장의 토양을 마련해주는 쪽에 초점을 맞췄다. 13편의 논문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글은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연구위원의 글 ‘복지국가의 조세재정-역사에서 배운다’이다. 국민대 교수를 지낸 정 위원은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교수와 함께 베스트셀러 ‘쾌도난마 한국경제’를 쓰기도 했다. 복지재정 확충을 위한 증세라고 하면 흔히 부유세를 떠올린다. 고소득층에게 고도의 누진적 과세를 부과하자는 것이다. 정 위원은 한국적 상황에서 참고할 점은 있으나, 문제가 있는 방식이라고 본다. ‘복지의 전범’으로 꼽히는 스웨덴 사례를 예로 든다. 1930년대 사민당 집권기에 가장 먼저 추진된 정책 가운데 하나가 법인세 인하다.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권의 법인세 인하를 비판하는 사람들로서는 다소 뜻밖이다. 아울러 재분배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부가가치세율이 한국은 10%, 스웨덴은 25%다. 그런데 스웨덴은 복지천국이다. 정 위원이 보기에 부유층에게 고액의 소득세를 매기는 행태는 정치적 불안정의 결과다. 실제 미국과 영국은 1929년 대공황 이후 개인소득세 최고세율을 80~90%대까지 높였다. 가장 손쉬운 방법이 부자를 쥐어짜는 것이어서다. 대공황과 세계대전 와중이라 반대할 명분도 없다. 반면, 스웨덴은 최고세율이 47%를 넘지 않았다. 그럼에도 미국·영국의 조세 수입 가운데 소득세와 법인세 비중은 40%에 그친 반면, 스웨덴은 1940년대부터 50%를 넘어섰다. 정 위원이 분석해 보니 미국, 영국은 급하게 세율을 올리는 데 따른 정치적 저항을 무마하기 위해 각종 공제제도와 감면제도를 마련했다. 명목상 최고세율은 치솟는데 조세 수입은 크게 늘지 않은 이유다. 반면 스웨덴은 세율을 높이지 않되 예외가 되는 구멍을 막았다. 예나 지금이나 인구의 대다수는 고소득층이 아니라 중·저소득층이다. 조금 적더라도 더 넓게 걷다 보니 더 많은 조세가 가능했다. 정치적 필요에 따라 등장한 고도의 누진적 과세는 정치적 변동에 따라 언제든 급격히 사라진다. 최고세율을 79%에서 33%로 대폭 깎아내린 미국 레이건 정권이 대표적 예다. 정 위원은 이런 비교작업을 통해 복지국가는 재분배에 역진적이라는 소비세 비중이 오히려 높고, 복지에 후진적인 나라들은 개인소득세와 법인세에 크게 의존한다는 역설적인 상황을 제시한다. 결론적으로 보편적 복지란 부자가 가진 것을 뺏어와 나눠 갖는 개념이 아니라, 낸 것을 다시 되돌려받는 개념이라고 말한다. 물론 소득에 따라 부담하는 세금의 차이는 있지만 이 차이는 좀 더 부드러워야 하고, 대신 감면·공제제도는 대폭 간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 위원은 “이렇게 해야 왜 내가 낸 돈으로 남들이 이득을 보느냐는 정치적 불만을 제압할 수 있고, 이는 복지정책 자체의 제도적 안정성에 기여한다.”고 지적한다. 보편적 복지를 위해서는 보편적 증세가, 다시 말해 “돈 많은 너희들이 세금 다 내라.”가 아니라 “돈 없는 나도 버는 만큼 세금을 내겠다.”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日기업 올여름 작년보다 전력 최대수요 29% 줄인 비결은

    지난 15일 정전대란으로 인해 한국에서 전력수급에 비상이 걸린 가운데 올여름 일본의 전력사용내역이 공개돼 관심을 끌고 있다. 가정보다 기업 쪽이 절전에 훨씬 많이 기여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일본 수도권에 전력을 공급하는 도쿄전력은 27일 전력사용 제한령이 발령된 지난 7월 1일∼9월 9일 전력수급 상황을 분석한 결과를 공개했다. 도쿄전력은 올해 최대수요(4922만㎾)를 기록한 8월 18일 오후 2∼3시와 지난해 여름 최대수요(5999만㎾)를 기록한 7월 23일 오후 2∼3시를 비교한 결과 올해가 지난해 보다 18%(1077만㎾) 줄어들었다고 밝혔다. 1077만㎾ 감소 내역을 분석한 결과 15% 절전 의무가 부과된 기업, 빌딩 등 500㎾ 이상 대규모 사용자의 수요는 지난해 7월 23일 약 2050만㎾에서 올해 8월 18일에는 약 1450만㎾로 내려갔다. 감소량은 약 600만㎾(29%)였다. 500㎾ 미만 소규모 사용자의 수요는 지난해 약 2150만㎾에서 올해는 약 1750만㎾로 400만㎾(19%) 줄었고, 가정의 전력수요는 지난해 약 1800만㎾에서 올해 약 1700만㎾로 100만㎾만 (6%) 내려갔을 뿐이다. 이처럼 기업의 절전 기여도가 훨씬 높아진 것은 지난 7월 1일부터 수도권과 도호쿠지역내 대기업을 중심으로 절전을 의무화하는 전력사용 제한령을 발동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도요타 등 자동차 업계를 비롯해 일부 대기업이 목·금요일에 쉬고, 토·일요일에 공장을 가동하는 방식으로 근무를 조정한 것이 전력수요를 줄이는 데 상당한 영향을 줬을 것으로 분석된다. 제1차 석유파동 후인 1974년 이래 37년 만에 발동된 전력사용 제한령은 평일 낮 전력 사용량을 전년대비 15%가량 절전하도록 의무화했다. 고의로 지키지 않을 경우 100만엔(약 1536만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됐다. 실제로 전력 제한령을 발동한 7월 1일부터 9월 2일까지 도쿄전력과 도호쿠전력 권내의 평일 최대수요 평균은 지난해보다 각각 약 21% 줄었다. 도쿄전력은 최대 사용량이 4922만㎾로, 사전에 예측됐던 5500만㎾를 크게 밑돌았다. 도쿄전력 관계자는 “기업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1일 전력 수요를 900만~1000만㎾ 가량 줄일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한국의 전력요금은 일본보다 약 3분의1 정도 싸다. 전체 전력 사용량중 51.5%은 산업용인 반면 가정용은 14.9%에 불과하다.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위해서는 산업용 전력의 효율적인 관리가 필요한 셈이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대학 구조조정 시작됐다] 17개大 학자금 대출 제한… ‘돈줄 죄기’로 퇴출 본격화

    [대학 구조조정 시작됐다] 17개大 학자금 대출 제한… ‘돈줄 죄기’로 퇴출 본격화

    교육과학기술부가 5일 대학 구조조정을 위해 ‘재정 카드’를 꺼냈다. 돈줄 죄기다. 학자금 대출을 제한하는가 하면 재정지원 신청 자체를 할 수 없는 대학 43개교를 공개했다. 부실 대학의 베일이 벗겨진 것이다. 이른바 ‘반값 등록금’ 논쟁에 따른 대학 구조조정의 본격적인 신호탄이다. 결국 43개 대학은 이미 부실화됐거나 부실 조짐을 보이고 있는 만큼 ‘퇴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해당 대학들은 지난해 정부로부터 1300억원을 지원받았던 만큼 돈이 막힐 경우 학교 운영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더욱이 이들 대학에 입학하는 신입생의 경우 정부가 주중 발표하는 등록금 완화 지원 대상에서도 제외되기 때문에 입학 단계부터 유의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재학생은 형평성 차원에서 지원이 계속된다. 홍승용 대학구조개혁위원회 위원장은 “현지 실사와 경영 컨설팅을 통해 연말까지 부실 대학을 선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홍 위원장은 “당초 논의한 대로 9개 지표를 충실하게 반영해 1차적으로 대학 순위를 매긴 뒤 지역별 분배, 지역별 상한제 도입 등 다양한 조정 절차를 거쳤다.”고 밝혔다. 평가지표 중에서는 취업률과 재학생 충원율에서 희비가 갈렸다. 4년제 평가배점에서 재학생 충원율은 30%, 취업률은 20%, 전문대 평가에서 재학생 충원율은 40%, 취업률은 20%다. 교과부는 지표를 바탕으로 수도권과 지방을 통합해 하위 10%가량을 선정한 뒤 수도권과 지방을 구분해 각각 하위 5% 내외를 추가로 고르는 단계를 거쳤다. 지표에서 구조적으로 취약한 지방대를 배려한 조치다. 또 특정 광역자치단체에 구조조정 대상 대학이 편중돼 해당 지역 학생들이 학교 선택권 등에서 불이익을 받게 될 경우를 고려, 선정 대학의 학생 수가 지역 전체 학생 수의 30%를 넘지 않도록 상한 기준도 적용했다. 때문에 전북에서 4년제 2개교 및 전문대 3개교, 강원의 전문대 3개교 등이 구제됐다. 내년 학자금 대출한도 제한 대학은 모두 17개로 ‘제한대출 그룹’ 13개와 ‘최소대출 그룹’ 4개다. 제한대출 그룹 대학 신입생은 등록금의 최대 70%까지만 대출이 가능하고 최소대출은 30%까지만 지원받을 수 있다. 다만 소득이 낮은 1~7분위 학생은 등록금 대비 전액 대출이 가능하다. 루터대학, 동우대학, 벽성대학, 부산예술대학, 영남외국어대학, 건동대학, 선교청대 등 7개교는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선정돼 2학년까지 대출 제한을 받는다. 교과부 측은 “지난해 23개교보다 다소 숫자가 줄어든 것은 심사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 종교 계열 대학 21개 가운데 15개가 평가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대학 구조조정의 핵심으로 꼽은 재정지원 사업 제한을 받는 하위 15% 대학도 드러났다. 4년제 200개교, 전문대 146개교 등 전체 346개 대학 가운데 4년제 28개교, 전문대 15개교 등 43개 대학이 문제의 대학이다. 대출제한 대학 17개도 포함됐다. 이들 대학은 각종 경영지표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지원이 끊기면서 퇴출 위기에 직면하게 될 처지다. 지역별로는 수도권 11개(4년제 8개, 전문대 3개), 지방 32개(4년제 20개, 전문대 12개)다. 대출제한 및 평가순위 하위 대학은 교과부 구조개혁의 우선 대상이다. 교과부는 ‘구조개혁 우선 대상’을 유형화해 현장 실사 등 재정 실태 감사를 실시, 경영부실 대학을 지정해 연말쯤 발표한다. 박건형·김효섭기자 kitsch@seoul.co.kr
  • “불량 납세자에도 과세증명 책임지게 하라”

    “불량 납세자에도 과세증명 책임지게 하라”

    공정세정 실현을 위해 과세당국이 납세자를 조사해 탈루 등을 밝혀내야 하는 과세 증명책임을 불량 납세자에게도 분배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현재 판례에 따라 이뤄진 우리나라의 과세당국 책임주의는 납세 증빙을 많이 보유·제출한 납세자보다 증빙을 은닉·파기하거나 제출 자체를 거부하는 납세자를 우대하는 결과를 초래, 조세정의가 훼손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국세청과 한국조세연구원이 23일 서울 중구 태평로 1가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공동 개최한 ‘공정세정 포럼’에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신호영 교수는 ‘과세절차상 증명책임과 분배의 합리적 조정’이라는 주제 발표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탈루율 사우나 98% 1위… 주점·여관順 신 교수는 “현행 신고납세제도 아래에서 납세 순응을 확보하려면 과세절차상 과세 증빙의 유지·제출에 대한 증명 책임의 합리적 배분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증명책임이란 과세요건을 뒷받침하는 사실관계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을 때 결과적으로 누가 불이익을 받게 되느냐의 문제다. 외국의 경우 증명책임을 일방적으로 과세관청이 부담하는 사례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신 교수는 “증명책임의 분배기준은 공평과세와 재정수입 확보를 고려해 성실 납세자에게는 과세관청에 증명책임을 부여하고, 자료 접근이 어렵거나 곤란할 경우 또는 납세자가 협력의무를 위반하는 경우 납세자에게 이를 부담하도록 하는 것이 타당하다.”며 입법적 대응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현동 청장 “근본적인 정책대안 모색” 한국조세연구원 박명호 연구위원은 ‘숨은 세원 활성화를 위한 과세 인프라 개편 방향’에서 “현행 과세인프라가 자료상, 무자료거래, 현금매출 누락 등 문제에 취약하다.”며 “금융기관이 보유한 사업용계좌와 비사업용계좌에 대한 국세청의 접근 권한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 위원은 최근 5년간 고소득 자영업자 1만 1500명에 대한 국세청의 세무조사 누적결과를 인용, 업종별 소득 탈루율의 경우 사우나 업종이 98.1%로 가장 높았고 주점(86.9%), 여관(85.7%), 나이트클럽(79.3%), 스포츠센터(72.6%), 룸살롱(71.5%), 호텔(66.7%) 등의 순이라고 밝혔다. 이현동 국세청장도 축사를 통해 “세금을 민주시민의 권리와 책임으로 받아들이는 새로운 패러다임과 함께 현행 과세인프라 및 세무조사 시스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근본적인 정책대안의 모색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국세청은 이번 포럼에서 제시된 의견을 검토해 실효성 있는 방안을 마련, 시행하고 법령 개정 등이 필요한 사항은 관계부처와 협의해 나갈 방침이다. 오일만기자 oilman@seoul.co.kr
  • [사설] 숨은 세원 찾아낼 조세시스템 시급하다

    국세청이 어제 국세행정의 역할과 과제란 주제로 ‘공정세정 포럼’을 열었다. 공평과세를 통한 조세정의 실현을 위해 과세 증명책임 분배원칙을 입법화하고, 금융정보분석원(FIU)의 금융정보 활용을 더 확대하자는 것 등이 주된 내용이다. 세정당국은 이번 포럼에서 제기된 문제점 등을 적극적으로 검토해 공평과세를 통한 공정세정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세정당국은 그동안 역외탈세 전담조직 신설, 해외금융 계좌신고제 도입, ‘첨단탈세방지센터’ 설치 등을 통해 변칙 상속·증여자, 역외탈세자, 고액체납자 등을 찾아내 불공정한 부의 대물림을 차단하는 데 노력해 왔다. 하지만 금융자료 없이도 세금계산서 등 실물거래 증빙만 갖추면 되는 현행 과세인프라로는 자료상이나 무자료 거래, 현금 매출 누락 등 고질적 세정 사각지대와 신종·첨단 탈세를 적발하는 데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국세청에 따르면 2005년 12월부터 2009년 5월까지 고소득 자영업자에 대한 10차례의 세무조사결과 평균 소득탈루율은 48.0%, 자영업자 전체로는 24.3%로 나타났다. 사우나(98.1%), 단란주점·바 등 기타주점(86.9%), 여관(85.7%)처럼 현금거래 비중이 높은 업종의 소득탈루율이 높았다. 따라서 과세인프라를 좀 더 촘촘하게 개편하는 게 시급하다. 고액현금거래 보고자료(CTR)를 과세 목적에 활용하고 금융기관이 보유한 사업용 계좌와 비사업용계좌에 대한 국세청의 접근권한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사업상 거래로 1만달러 이상의 현금을 받을 경우 15일 이내에 거래내역을 세무당국에 신고토록 한 미국의 사례를 참고할 만하다. 우리나라는 금융기관으로부터 FIU에 수집된 2000만원 이상 고액현금거래보고 자료 중 99.6%가 탈세혐의자 분석 등에 활용되지 못한다고 한다. 아울러 과세 증명책임을 일방적으로 과세관청에 부과한 제도 역시 성실납세자를 제외하고 자료 접근이 어렵거나 곤란한 경우, 납세자가 협력의무를 위반하는 경우에 한해서는 납세자가 입증하는 것으로 바꿀 필요도 있다. 외국에는 증명책임을 과세관청에 부담시키는 예가 거의 없다고 한다. 다만 세원 양성화를 위한 조세시스템 개편이 세금 탈루가 의심되는 고소득 자영업자나 전문직이 아니라, 중산층이나 서민층에만 결과적으로 부담을 주는 식으로 이뤄져서는 안 되겠다.
  • 권력 아닌 무시 때문에 사회적 갈등 표출

    권력 아닌 무시 때문에 사회적 갈등 표출

    사회적 갈등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권력 투쟁’이다. 이는 갈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지만 갈등 자체를 회의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정치 혐오증으로 귀결될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시각은 ‘계급 투쟁’이다. 경제적으로 소외된 이들의 반발에 초점을 맞추는 시각이다. 이는 분배적 정의를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환원적 속성 때문에 다양한 갈등을 모두 돈 문제로 치환시킬 우려가 크다. 그래서 나온 게 ‘인정(recognition) 투쟁’이다. 예컨대 노사 갈등은 총파업으로 월급 인상을 얻어내는 것만큼이나, 노동자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고 존중받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사회적 갈등이란 인정을 유보한 채 무시하고 냉대하고 모욕을 주는 데서 출발한다. 무시는 분노를, 분노는 투쟁을 불러온다.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분야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갈등을 하나의 키워드로 포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론적 매력이 크다는 평이 나온다. 테오도어 아도르노·막스 호르크하이머, 위르겐 하버마스에 이어 3세대 비판이론가로 꼽히는 악셀 호네트(독일 프랑크푸르트대 교수)의 저서 ‘인정 투쟁-사회적 갈등의 도덕적 형식론’(사월의책 펴냄)이 담고 있는 내용이다. 독일 철학자 헤겔에게서 빌려온 인정 투쟁은 정치적 대표성(representation)이나 경제적 재분배(redistribution)가 아니라 개인의 정체성이 문제의 핵심이요, 그 개인의 정체성은 타인의 인정에 의해서 성립한다는 것이다. 2008년 이명박 정권을 뒤흔들었던 ‘촛불 시위’도 그 예다. 아무리 광우병 발병 확률이 몇백만분의1 운운하며 과학적 근거를 들이대도 시위의 근본은 ‘정부가 국민을 무시했다.’고 느꼈다는 데 있다. 영국 폭동 등 유럽 상황도 비슷하다. 관심은 이 인정 이론이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호네트는 인정의 3가지 차원으로 ▲정서적인 측면에서의 ‘사랑’ ▲법적 제도적 차원에서의 ‘권리’ ▲사회 공동체 차원에서의 ‘연대’를 제시한다. 이는 호네트의 또 다른 책 ‘분배인가, 인정인가?’(국내 미출간)에 좀 더 자세히 소개돼 있다. 낸시 프레이저 미국 뉴스쿨 사회과학대학원 교수와의 논쟁을 담은 이 책에서 프레이저는 인정 이론이 불평등한 분배구조 해결에 도움이 안 된다는 비판을 내놓았다. 이에 대해 호네트는 불평등한 분배구조 밑에도 사회적 인정구조의 왜곡이 깔려 있다고 반박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경제적 불평등이 인간에 대한 어떤 무시에서 기인하는가를 밝혀낸다면, 분배정의를 또 하나의 도덕 원칙으로 확립시킬 수 있으리라고 주장한다. 국내에 번역 소개될 예정인 호네트의 신간 ‘자유의 권리-민주적 인륜성에 대한 소고’가 주목되는 이유다. 호네트의 제자이자 ‘인정 투쟁’ 번역자인 문성훈 서울여대 현대철학담당 교수는 “한국 사회는 단순하게 경제적 이익이나 정치적 권력을 둘러싼 갈등으로 치부하기 어려운 독특한 갈등 구조를 갖고 있는데 그게 바로 사회적 무시”라면서 “그렇기에 호네트의 인정 투쟁 이론은 한국 사회를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데 가장 적합한 틀”이라고 지적했다. 돈 없다고, 못 배웠다고, 못생겼다고, 장애자라고, 동성애자라고, 외국인 노동자라고, 여자라고 무시당하는 상황이 정치경제적 투쟁만으로 해소될 리 만무하다는 것이다. 결국 해결책은 이들의 인정 투쟁을 수용하는 것으로 결론날 수밖에 없다. 문 교수는 “호네트의 인정 이론에서 중요한 점은 사회적 인정이란 단지 상징적 차원에서 인정을 뜻하는 게 아니라 권리나 제도, 사회적 연대 등을 통해 구체화되어야 한다는 점”이라면서 “오늘날 진보적 사회운동의 규범적 목표를 새롭게 정립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 교수는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호네트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대기업 임원연봉 너무 높다” 최중경장관 발언 재계 부글

    “대기업 임원연봉 너무 높다” 최중경장관 발언 재계 부글

    ‘최틀러’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의 발언이 재계에 다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이번엔 대기업 임원 연봉을 타깃으로 삼았다. 9억원 가까이 되는 대기업 임원 연봉을 줄여 청년층에 대한 투자를 늘리자는 것이다. 이에 대해 재계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주주총회 등에 따라 결정된 임원 연봉을 정부가 왈가왈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데이터 분석 없이 책 내용 인용 1일 지경부와 재계 등에 따르면 “대기업 경영진의 월급이 지나치게 많다.”는 최 장관의 지난 30일 발언은 라센드라 시소디어 미 벤틀리대 교수 등의 저서 ‘위대한 기업을 넘어 사랑받는 기업으로’부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경부 관계자는 “데이터 분석 없이 비서진 등에서 연설문을 준비했는데 이렇게 반향이 커질지 몰랐다.”고 말했다. 최 장관이 문제 삼은 국내 대기업 임원의 연봉은 현재 9억원 정도다. 재벌닷컴에 따르면 공기업과 금융회사를 제외한 매출 상위 100대 기업의 등기임원 연봉은 1인당 평균 8억 7000만원이다. 등기임원은 최고경영자(CEO)와 최고재무책임자(CFO) 등 주요 경영진이 해당된다. 기업별로는 ‘별 중의 별’ 삼성전자의 등기임원이 가장 많이 받았다. 지난해 삼성전자는 이윤우 부회장, 최지성 부회장, 윤주화 사장 등 3명의 사내 등기이사에게 179억 4800만원을 지급했다. 1인당 평균 59억 8267만원을 받았다. 올해는 모두 370억원, 1인당 123억 3333만원을 받을 예정이다. 이어 ▲SK이노베이션(39억 8000만원) ▲삼성물산(32억 6000만원) ▲삼성SDI(30억 3000만원) 등의 순으로 지난해 등기임원의 연봉이 높았다. 금융권 등기임원의 연봉 역시 상당하다. 2009년 기준 산업은행장의 연봉은 4억 6190만원이다. 기본급 1억 6131만원에 성과급 3억 59만원이 더해졌다. 지난해 7월 취임한 어윤대 KB금융 회장은 반년치 연봉으로 5억 5000만원을 받았다. 이팔성 우리금융 회장의 지난해 연봉은 10억 5700만원이다. 대기업의 일반 임원 연봉 역시 기본적으로 ‘억대’다. 삼성그룹의 경우 상무는 통상 1억 5000만원(세전) 안팎의 연봉에 초과이익분배금(PS)과 생산성격려금(PI) 등의 성과급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대기업 임원은 받는 만큼 성과를 내야 하는 자리다. 노동조합 등으로부터 신분의 보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성과를 못 내면 당장 ‘잘려도’ 할 말이 없다. 실제로 지난해 컨설팅업체 아인스파트너 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내 100대 기업 임원 중 지난해 퇴직한 801명 가운데 임원 승진 뒤 1년 만에 퇴직한 비율은 17.4%였다. 절반 가까운 47.9%의 임원이 승진 3년 뒤에 회사를 떠났다. ●100대기업 1인평균 8억 7000만원 한 대기업 관계자는 “임원은 ‘직장인의 꽃’이자 ‘임시 직원’의 준말”이라면서 “일부 직원은 임원으로 승진해 ‘물갈이’될 바에야 차라리 부장으로 정년 퇴임하는 것을 선호하는 분위기”라고 귀띔했다. 한 10대 그룹 관계자는 “주주총회 등을 거쳐 정해진 임원 임금을 높다고 말하는 것은 민간 영역에 대한 과도한 간섭”이라면서 “이럴 바에야 정부가 임원 임금 상한선을 정하고, 대신 정년도 보장해야 맞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또 다른 대기업 관계자는 “일부 대기업 임원의 연봉이 많은 것은 그 기업의 경영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라며 “(최 장관의 기업 임원 보수에 대한 언급은) 복잡다난한 글로벌 경영 환경에서 임원 의사 결정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을 전혀 고려하지 못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두걸·홍희경·김승훈기자 douzirl@seoul.co.kr
  • [현장 행정] 헌법행정론 전파 김성환 노원구청장

    [현장 행정] 헌법행정론 전파 김성환 노원구청장

    개헌 정국도 아닌데 요즘처럼 국회와 정치권이 헌법에 관심을 쏟은 적이 없다는 게 정계 안팎의 목소리다. 관심의 대상은 정확하게 헌법 119조 2항으로,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해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는 대목이다. 복지와 분배의 문제가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 정치권에서 민주당은 지난 13일 ‘헌법 119조 경제민주화 특별위원회’를 구성했고,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도 서민경제정책을 펴다가 공격을 받으면 “헌법 119조의 경제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일갈하고 있다. ●명함에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담기 권유 헌법에 대한 주목은 국회나 정치인으로 한정된 게 아니다. ‘행정의 말초혈관’인 구에서도 최근 헌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체득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헌법=민주주의의 수호자’라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김성환 노원구청장은 입만 열면 구청 공무원들에게 헌법 7조를 강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헌법 7조는 ‘공무원은 국민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라고 못박아 놓았다. 김 구청장은 지난해 7월 1일 취임사에서도 바로 이 헌법 7조를 강조했다. 또한 그는 이 조항을 헌법 1조 2항과 묶어서 이야기하기를 즐긴다. 헌법 1조 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김 구청장은 지난 25일 “헌법 1조와 7조를 일주일에 한 번쯤 내가 잘 지키고 있는지 되돌아봐 주시길 희망한다.”고 구청 공무원들에게 말했다. 그는 “물론 쉽지 않다. 이는 본심이 못되서가 아니라 일상에 쫓기다 보니 본의 아니게 종종 까먹는다.”면서 “구민이 주인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김 구청장은 공무원들에게 이런 마음가짐을 지키도록 자신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명함에 담아서 들고 다닐 것도 권유했다. 헌법 7조의 주인공으로서 자신의 정신을 구민들에게 잘 설명하다 보면, 국민에 대한 봉사자인 공무원으로서의 자부심이 더욱 깊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공무원들에게 “업무 지시와 이행, 승진에 대한 기대와 좌절이 반복되면서 가끔 자신의 역할을 잊기도 하지만, 가까운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봐 달라.”고 당부했다. 김 구청장은 지난해 취임한 뒤로 매월 한 차례씩 직원들에게 12통의 편지를 보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역시 헌법 7조와 헌법 1조 2항에 관한 내용도 담았다는 사실이다. ●직원들에 “나무 아닌 숲 봐달라” 당부 취임 1주년이던 지난 1일 보낸 편지에서는 헌법 이야기는 아니지만, 구청장의 인간적인 면모가 드러나 구청 공무원들 사이에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나름대로 반성한 대목이었다. “지난 1년 동안 혹시 인사과정에서, 구청장과의 대화에서 마음의 상처가 생긴 분이 있다면 이 시간을 통해 미안한 마음을 전합니다. 가끔씩 일이 잘 진행되지 않을 때 제가 언짢은 말을 하기도 하는데, 그런 일이 있으면 늘 끝나고 후회하게 됩니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