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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독,소에 차관공여 검토/30억불 규모… 시장개방 지원 일환

    ◎동독의회는 양독 경제통합 승인 【동베를린 로이터 연합】 동독 의회는 21일 지난 45년간의 독일분단을 극복하고 7월1일부터 경제사회통합을 우선 실현시키기로 한 동서독간의 경제통합조약을 압도적인 다수결로 승인했다. 동독의회는 이에 앞서 이날 통일독일이 폴란드의 현국경선을 존중할 것을 선언하는 결의안도 채택,독일통일 과정에서 동독측이 폴란드에 대해 영토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2차대전후 획정된 현국경선을 그대로 인정할 방침임을 대내외에 선언했다. 한편 서독에서도 동독과 마찬가지로 동서독간의 경제통합조약 인준 및 현폴란드 국경선 인정선언 채택 여부를 심의하기 위해 이날 의회가 소집됐으며 이 조약과 국경선 인정선언안이 통과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한편 서독은 소련의 시장개방을 지원하기 위해 30억달러의 차관공여를 검토하고 있다고 서독정부 대변인이 이날 밝혔다.
  • 전쟁의 배경과 준비(새 실록 6ㆍ25:상)

    ◎중국 공산화에 고무… 김일성,남침 서둘렀다/동서냉전 한반도 유입이 「비극의 불씨」로/김일성,스탈린 지원 업고 모의 내약받아/애치슨 발언ㆍ미군철수로 「힘의 공백」초래/여순사건등 사회혼란도 평양오판 불러/소,야크기ㆍ탱크 1백대씩 공급… 북선 통치요원 미리 임명(서울신문 6ㆍ25 40주 특집) 지금으로부터 꼭 40년전인 50년 6월25일. 그날에 시작되어 53년 7월27일에 휴전된,37개월에 걸쳤던 한민족의 동족상잔을 흔히 한국전쟁이라고 부른다. 결코 되풀이 되어서는 안될 우리 근ㆍ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을 3회에 걸쳐 다시 써보려는 것이 이 연재의 목적이다. 제1회에서는 한국전쟁의 배경과 준비를,제2회에서는 한국전쟁의 전개를,그리고 제3회에서는 한국전쟁의 휴전성립과정과 그 유산을 각각 다루기로 한다. □약력 김학준 대통령사회담당보좌역 □1943년생. 인천출신 □서울대 정치학과,동대학원 졸업,미켄트주립대 정치학석사 □미피츠버그대서 「아시아 세력균형에 있어 한국통일」논문으로 정치학박사학위 □서울대 정치학과교수,미국버클리대 동아시아연구소 객원연구원,일본도쿄대 국제관계학과 객원교수 □12대 국회의원(구 민정ㆍ전국구) □「한국전쟁 발발에 있어 중공의 비개입」등 한반도 분단,6ㆍ25동란 등에 관한 주요 논문다수. 한국전쟁이 50년 6월25일에 일어난 것은 사실이나 그 뿌리는 아무리 늦게 잡아도 45년 8월15일 일제로 부터의 해방직후에 나타난 한반도의 분단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분단이 없었다면 전쟁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때 한국전쟁에 대한 설명이 한반도의 분단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당연하다. 한반도의 분단에서는 우선 열강의 권력정치라는 국제적 요인이 짙게 깔려 있다. 지정학적으로 볼때 동북아시아의 전략적 요충을 차지하고 있는 한반도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충돌하는 이 지역의 화약고로서 주변 강대국들의 수많은 각축을 불러 일으켰던 곳이다. 한말의 청­일 전쟁과 노­일 전쟁이 그 대표적인 보기들인데 여기서 결코 간과될 수 없는 점은 이러한 전쟁이 있을 때마다 열강은 한반도의 분할을 협상했다는 사실이다. 쉽게 말해 전략적으로 탐나는 한반도의 「독식」을 위해 이전투구격으로 싸우다가 승부가 분명해지지 않으면 「분식」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 전쟁 모두에서 일본이 궁극적으로 승리하면서 한반도는 일본의 「독식」아래 들어가고 말았다. ○세계의 열강들 “눈독” 일본이 패망하게 되면서,그리하여 일본이 한반도를 내놓지 않을 수 없게 되면서,열강의 「식욕」은 다시 한번 자극받게 되었다. 소련은 물론이거니와 중화민국도,그리고 당시는 아직 대륙을 차지하지 못한 중국 공산당조차 한반도에 대한 야심을 감추지 않았으며,영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일본을 무력화시켜서는 안된다는 취지에서 은연중에 한민족의 완전한 독립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새로운 각축이 예견되는 두려워할 만한 상황에서,이 지역의 새로운 패자로 자리를 굳힌 미국은 미ㆍ소ㆍ영ㆍ중의 연합국이 함반도를 「공동관리」하게 되면 4강의 이해관계가 조정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미국은 한때 4강에 의한 공동점령 및 공동분할을구상하기도 했지만 마침내는 4강이 함께 참여하는 신탁통치로 기울어졌는데,「적당한 시기와 절차를 거쳐」 한민족에게 독립을 주겠다는 카이로선언과 포츠담선언은 미국의 그러한 뜻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적당한 시기와 절차를 거쳐」라는 원칙적 선언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청사진과 일정표를 연합국이 마련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제의 항복을 접수하게 되었다. 일제의 항복이 예상보다도 훨씬 빨리 닥쳤던 셈인데,문제를 더욱 미묘하게 만든 것은 미군은 한반도에 진공할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소련군은 이미 한반도의 동북부로 진공해 들어오고 있는 숨가쁜 현실이었으니,여기서 미국은 한반도의 절반이라도 건져야겠다는 절박한 판단에서 북위 38도선에서의 분할점령을 제의했고 이 제의를 소련을 비롯한 나머지 연합국들이 받아들임에 따라 비극의 분단이 이뤄진 것이다. 이 처럼 열강의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킨 가운데서 한반도가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점령됨에 따라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 사이에 벌어지는 국제냉전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게 되었으며,그것은 한국전쟁의 국제적 배경의 틀이되고 만다.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미국은 북위 38도선 이남의 한반도를,그리고 소련은 북위 38도선 이북의 한반도를 각각 군사적으로 점령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우리 겨레 사이에서 벌어진 이념적ㆍ사상적 대결이다. 즉 일제 치하에서 전개된 항일 독립운동을 특징지었던 좌ㆍ우익 투쟁이 해방된 한반도에서 재연된 것이다. 그것은 남한에서는 좌ㆍ우익 투쟁의 형태로,그리고 한반도에서는 남북한 대결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것은 한반도안에서도 냉전이 벌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국내냉전」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국제냉전」과 얽히고 설키면서 48년에는 한반도에 2개의 「국가」가 세워지는 데 이바지하게 되고 한걸음 더 나아가 50년에는 한국전쟁이 일어나는 데 이바지하게 된다. 이렇게 볼때 한국전쟁이 준비되는 과정에는 국제적 요인과 국내적 요인이 동시에 복합적으로 개입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미서 「38선분할」제의 48년 8월15일 남한에서는 대한민국이 세워졌으며,곧이어 9월15일 북한에서는 이른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 이때 국가로서 국제적 공인을 받은 쪽은 대한민국이었다. 제3차 국제연합 총회는 48년 12월 대한민국을 국가로서 승인했으며 이를 계기로 많은 국가들이 대한민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북한에 대한 승인은 소련권에 국한됐다. 이러한 국제적 조처들이 끝나면서 미국과 소련은 각각 자신의 군대를 철수시켰다. 한반도에 국제적 힘의 공백이 형성된 상황에서 남한은 북진통일을 부르짖고 북한은 이른바 남조선해방을 외치는 가운데 무력충돌의 위험성은 높아갔다. 이때 남한이 방어적이었음에 반해 북한은 공세적이었다. 우선 남한의 경우 미국의 군사적ㆍ경제적 지원은 많지 않았다. 트루먼 민주당행정부는 북한이 남침할 위험성이 있다는 경고를 무시했으며,그러한 판단에 입각하여 50년 1월에는 애치슨국무장관의 기자회견을 통해 남한이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제외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한 입장을 표명했다. 이 애치슨선언이 소련과 북한의 지도자들에게 정확히 어떻게 해석되었는지에 대한 공식자료는 없으나 대체로 그들을 고무시켰을 것으로 풀이되어 왔다. 국내적으로도 어려움이 많았다. 48년 가을에 일어난 여순반란사건은 신생 대한민국의 기반을 심각하게 위협했으며,그것이 비록 진압됐다고 해도 반정부적 분위기가 차차 확산되면서 50년 5월30일에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남북협상파를 비롯한 반정부적 중도세력이 승리를 거뒀다. 안팎으로 문제들을 안고 있는 남한으로서 북진통일론은 대체로 미국에 대해 군사원조를 늘려달라는 외교협박용이거나 국민적 단합을 꾀하기 위한 상징조작용에 가까웠다. 이 시기의 대한민국정부의 1차적 관심은 오로지 안보에 있었다는 사실,즉 『어떻게 하면 북한으로부터 있을 수 있는 남침을 막아낼 수 있느냐』에 쏠려 있었다는 사실은 북진통일론이 한낱 구호에 지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49년 방소때 구체화 반면에 북한의 경우 소련으로부터의 군사적 지원이 활발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김일성의 두 차례의 소련 방문이다. 우선 49년 3월의 방문에서 김일성은 「조­소 경제ㆍ문화협력협정」을 얻어냈으며 이것을 계기로 남침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안을 세워 나간 것으로 보인다. 이무렵 중국공산당의 대륙제패 가능성은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 되었고 그것은 북한의 지도층을 크게 북돋웠다. 중국공산당이 중국국민당을 대만으로 몰아내듯이 북한이 남한을 석권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강하게 갖게 되었다. 중국국민당이 쫓겨가도 미국이 아무런 구원조처를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북한으로 하여금 자신이 남한을 침략해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갖게 한 것으로 보인다. 마침내 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됐다. 북한 지도층의 사기는 크게 올라갔다. 이무렵 중화인민공화국은 자신의 인민해방군에 속해 있던 조선인 장교들과 병사들을 대거 북한으로 돌려보내기 시작했으며,이 귀환은 50년에 들어서면서 더욱 활발해졌는데 실전경험을 쌓은 이들이 이미 48년 2월에 발족한 북한 정규군에 편입되면서 북한군의 병력은 상당한 수준으로 향상되었다. 이 시점에 곧 50년 2월에 소련의 스탈린은 중국의 모택동과 더불어 모스크바에서 중ㆍ소 우호동맹조약을 체결했다. 배후의 두 공산대국이 군사동맹을 체결했다는 사실은 북한의 지도층을 다시 한번 고무시켰을 것이다. 여기서 김일성의 2차 소련방문이 이뤄졌다. 그는 비밀리에 스탈린을 찾아가 남침계획을 상세히 보고했다. 하나의 허점이 되어버린 남한은 크게 부풀려진 풍선과 같아서 칼로 한번 찌르기만 하면 그대로 터지고 말 것이라는 점,북한의 입장에 동조하는 남조선로동당(남로당) 잔존세력이 지하와 야산으로부터 호응봉기할 것이라는 점,그리고 미국의 개입이 없을 것이므로 짧은 시일안에 남한 전체를 공산화시킬 수 있다는 점 등등을 역설했다. 스탈린은 이미 귀국한 모택동에게 이 문제를 제기했다. 그렇다고 해서 전쟁계획 전체를 놓고 자세히 상의한 것 같지는 않고 그저 원론적인 수준에서 언급한 것 같다. 당시 30년 가까운 세월에 걸쳤던 내전을 겨우 끝냈기에 국내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모택동으로서 한반도에서의 전쟁계획에 대해 깊이 관여할 수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김일성이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조건아래 「미 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내기 위한 「인민해방전쟁」을 일으킨다는 데 반대할 수 없지 않느냐고 대답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김일성은 모택동에 밀사를 보내 남침계획안을 원론적인 수준에서 알리면서 군사원조 가능한가에 대해 물었다. 모는 군사원조는 어렵다고 대답하면서도 남침계획안에 대해서는 원칙적인 입장에서 동의했다. 스탈린 스스로와 김과 모 사이의 3각대화를 종합한뒤 스탈린은 김의 계획을 지지하게 되었다. 미국과의 직접적인 군사대결은 어떻게 해서든지 피하겠다는 스탈린으로서도 이것만은 승산이 큰 계획이었다. 미국이 일본을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부흥시킴과 아울러 일본을 동북아시아의 강력한 반공기지로 만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같은 전승국인 소련을 배제시킨 채 일본과 평화조약을 맺으려 하는 상황에서 북한이 신속한 군사작전을 통해 미국이 개입하기 이전에 남한을 공산화 해버린다면,그것은 일본 국민들로 하여금 친소ㆍ친공의 길로 굴복하게만들 것이며,그렇게 되면 동아시아에서의 소련의 위신은 크게 올라가고 소련의 정치적ㆍ군사적 발판은 더욱 확실해질 것이었다. ○6월22일 준비 완료 마침 북한주재 소련대사 스티코프도 남침계획을 적극 지지했다. 소련군의 북한점령 3년동안 북한의 사실상의 지배자였고 김일성의 열성적인 후원자로서 북한주재 초대 소련대사가 된뒤 북한을 사실상 「총독」하던 정치장교 출신의 스티코프가 김의 남침계획을 뒷받침하자 스탈린은 50년 봄 남침계획을 최종적으로 승인하면서 북한에 대한 군사지원을 급진전시켰다. 그리하여 49년부터 50년 6월까지 소련이 북한에 공급한 무기는 정찰기 10대,야크전투기 1백대,폭격기 70대,탱크 1백대,중포 상당수에 이르렀다. 이러한 지원을 받은 북한은 50년 6월 현재 13만5천명의 지상군을 확보했으며 남한과의 접경지대에 대한 정예부대의 배치를 완료했다. 이때 남한의 병력은 정규군 6만5천명,해안경찰대 4천명,경찰 4만5천명이었고 장비는 불충분했다. 그만큼 남북한의 병력 수준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었기에 당시 북한 민족보위상(국방상) 최용건은 『비행기ㆍ탱크ㆍ전함과 현대무기로 무장된 인민군은 어떤 전투임무도 효과적으로 완수할 수 있고 조국의 통일과 독립의 적을 분쇄하기 위해 언제나 전투할 태세가 되어 있다』고 호언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북한의 구체적인 남침준비는 50년 6월14일부터 22일 사이에 마무리된 것 같다. 이 시기에 북한은 남한에서의 토지개혁과 새로운 법령제정에 대한 준비,그리고 남한의 주요지역의 통치를 담당할 행정요원들의 임명을 완료했다. 민족보위성은 6월15일자로 각 사단에 정찰명령 제1호를,6월22일자로 역시 각 사단에 전투명령 제1호를 내려보냈다.
  • 한국전 40돌 맞아 재조명 미 유에스 뉴스지

    ◎“잊혀진 전쟁”6ㆍ25… 「공산화 도미노」막았다/동ㆍ서 이념대립서 군사충돌로 급선회/「값비싼 희생」은 동구민주화와 연계성/“전쟁의 물적ㆍ심리적 유산은 한국인 모든 세대에 깊이 자리” 미국의 시사주간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지는 6ㆍ25 40주년을 맞아 「잊혀진 전쟁」을 재조명하고 이 전쟁이 남긴 유산과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남북대결의 현실을 분석하는 특집기사를 6월25일자 카버스토리로 다뤘다. 장장 14쪽에 이르는 유에스 뉴스지의 특집기사를 요약한다. 지금부터 꼭 40년전 장마비가 내리는 아침에 시작돼 그후 37개월동안 이미 수탈당한 아시아 변방의 반도를 뒤흔든 야만적인 투쟁은 마지막 전쟁(제2차 세계대전)의 후기인 동시에 다음에 일어날 전쟁의 서문이었다. 이것은 갑자기 열전으로 변한 냉전이었고 공산주의 사상 가장 담대한 「국제해방전쟁」이었으며 유엔으로서는 처음이자 아마도 마지막일 「경찰업무」였다. 판문점이라는 무인지대의 황량한 「휴전마을」에서 교착상태로 끝날 때까지 이 전쟁에는 22개국이 참전했고5백만명의 인명이 이로 인해 희생됐으며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정치적ㆍ경제적 소요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발발 40년이 지난 지금 한국전쟁은 미국인들의 기억속에 미국의 킬링필드였던 안개낀 산들만큼이나 아물거리는 존재로 남아있다. 폭찹힐이나 하트브레이크 리지에서,또는 장진호에서 퇴각하는 길에 쓰러진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에 값하는 기념비는 어디에 있는가? 베를린 장벽이 유럽 분단의 상징이라면 남북한을 가르는 경계선은 아시아의 베를린 장벽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과 한국의 노태우대통령이 2주전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났을때 이들은 냉전의 가장 뚜렷한 흔적인 한국의 분단상태를 언젠가는 끝낼 수도 있을 해빙작업을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아시아에서 화해의 봄이 무르익고 있는 지금 공산주의 양대 종주국인 중국과 소련은 자신들이 지난 1950년 파괴하려 했고 그후 40년간 무시하고 비난하고 전복시키려 애써 왔던 한국과의 외교재개를 위한 새로운 조치들을 취하고 있다. ▷냉전의 모델◁ 한국전은 유럽일변도였던 미국의 관심을 태평양쪽으로 되돌렸다. 2차 대전후 극동에 대한 미국의 관심은 약화되기 시작했었다. 트루먼행정부는 「중공」과의 타협에 접근하게 된다. 당시 칼럼니스트 월터 리프먼은 『아시아는 서방의 군사적 영향력,경제력 통제 및 사상적 영향력에서 벗어나 있다』고 기술했다. 한국전이 중국과 소련간 불화의 서막이었다는 증거가 현재 나타나고는 있지만 당시 한국전은 획일적 공산주의의 이미지를 강화했으며 미정책입안자로 하여금 이때문에 오랜기간 골머리를 앓게 해왔다. 한국전은 무엇보다도 냉전을 정치ㆍ이념적 성격에서 군사충돌로 변모시켰다. 이는 전후 봉쇄정책의 촉매일뿐 아니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표현한대로 「군사산업 복합체」를 형성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1951회계연도 미군사예산은 1백40억달러(책정기준)에서 53회계연도에는 5백40억달러로 상승된다. 보다 놀라운 점은 미국의 대외 원조계획의 군사화이다. 1950회계연도의 경우 군사원조가 대외원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2%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는 60회계연도에 41%로높아졌다. 한국전은 또한 냉전기간을 통해 미국의 외교정책을 괴롭혀온 기본적인 모순을 가져다 주었다. 미국은 한편으로 국내에서 악의에 찬 반공주의에 반대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한편에서는 공산주의 침략이 이루어지는 세계 어디서고 이를 퇴치한다는 결의를 다짐하도록 만들었다. 50년 9월30일 북한이 남침을 시작한지 3달째가 되는 날 트루먼은 국가안보회의문서 68호에 서명한다. 이 문서는 『소련의 강대국 부상을 막기위해 미국은 희생이 어떠하더라도 국내외에서 민주주의를 수호할 결의를 갖추어야 한다』고 언급한다. ▷미 극우세력의 득세◁ 다른 수준에서 한국전은 핵시대(소련은 전쟁발발 3개월전 첫 핵실험에 성공했음을 발표한다)에서 전쟁이 가열돼서는 안된다는 점을 상기시켜준 전쟁이었다. 이같은 새로운 「제한전」의 개념은 그러나 중국을 핵공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온 더글러스 맥아더장군에게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51년 3월 맥아더는 중국 로비스트였던 조셉 마틴하원의원에게 보낸 서한에서 트루먼의 제한전 개념을 공개적으로통박한다. 그는 『공산주의가 세계무대 장악을 위해 준동하는 지역이 아시아』임을 상기시키면서 『아시아가 떨어지면 유럽도 공산화를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명령에 순종하는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트르먼은 마침내 맥아더를 해임하나 공산주의 「격퇴」에 관한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맥아더가 밀려난데 자극받아 존 맥가시상원의원은 공산주의 동조세력이 트루먼 행정부안에 도사리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게 된다. 그로부터 13년후 피그만사건이 있고난후 미국이 아시아에서 또다른 제한전으로 치달을 무렵 배리 골드워터상원의원은 64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자유방위를 위한 극단주의는 악이 아니다』라고 선언함으로써 맥아더를 상기시켰다. 이같은 우익노선은 마침내 로널드 레이건에 의해 미국의 정책으로 채택된다. ▷잊혀진 전쟁◁ 한국전의 여파가 오래 지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에 관한 한 가장 놀라운 것은 거의 잊혀졌다는 사실이다. 한국전에서 전사한 미군 병사수는 5만4천여명으로 한 세대후의 베트남전의 미군희생자 5만8천명에 거의 육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미국인들의 한국전에 대한 기억은 뚜렷한 것이 없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일본으로부터 무조건 항복을 받아낸 사람들에게 북한과 중국을 상대로 싸운 전쟁에서 비겼다는 사실은 결코 달갑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트루먼대통령은 ▲징집연장 ▲세금인상 ▲임금ㆍ물가 통제부과 등을 취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상황에 비교하면 국내의 피해는 극히 미미했다고 하겠다. 또 베트남전이 TV를 통해 대대적으로 소개된 것에 비하면 한국전은 신문에나 조금 보도되는 등 일반인들의 관심밖의 일이다. 한국전이 끝난지 40년이 지난 지금 냉전이 종식되고 있는 현실을 되돌아 보건대 한국의 산하에서 치른 희생과 최근 프라하,바르샤바,부다페스트에서의 민주주의 태동은 분명한 연계성을 갖고 있다. 미국의 봉쇄정책은 성공했으며 미국과 우방국들은 한국에서 공산주의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한 값비싼 희생을 치른 것이 분명하다. 최종적인 결과를 볼때 그 희생이 가치 있는 것이었다고 역사는 결론을 내릴 것이 분명하다. ▷계속되는 남북대결◁ 한국전쟁은 총성이 멈춘지 1세대가 지났지만 아직도 남북한 국민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이 경제기적을 거두고 한소 정상회담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물적ㆍ심리적 유산은 모든 세대와 사회계급에 걸쳐 깊이 자리잡고 있다. 도쿄에서 발행되는 친북한신문의 편집인 손진형씨는 『전쟁은 민족 최대의 비극』이었다고 말한다. 휴전된지 37년이 되도록 남북한은 아직도 기술적으로 전쟁상태이며 1백51마일 휴전선에는 1백만의 병력이 마주 대하고 있다. 한국의 영화관에서는 영화상영전에 간첩과 공산주의자를 113으로 신고하라는 자막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북에서는 김일성이 또다른 전쟁 가능성을 내세워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모든 북한주민은 매년 열리는 한미 합동군사훈련 기간동안 전투비상체제하에 놓인다. 김일성은 『미제국주의자와의 전쟁경험은 금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경험』이라고 말했다. 남쪽에서는 전쟁이 재벌이라는 신흥기업군이 자랄 수 있는 혼란스럽고 독점적인 시장을 마련해 주었다. 전쟁은 남북을 합쳐 1백50만명의 사망자와 실종자를 낳았으며 수백만명의 인구가 고향을 떠나게 만들었다. 인구의 대량이동은 도시화를 촉진시켰다. 전쟁이 미친 가장 큰 영향은 남북 모두 군인들이 정치권력을 쥐도록 만든 점이다. 남에는 장성출신의 대통령이 3명이나 되고 그중 2명은 쿠데타로 집권했다. 북에서는 전현직 고위 장교들이 김일성의 강력한 지지그룹을 형성하고 있으며 당의 고위직에 앉아 있다. 경희대 나종일대학원장은 『전쟁은 우리가 정치적으로 성숙되지 못했음을 보여줬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들을 군사적인 수단과 독재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라고 지적한다. 아직도 남북 모두에게 분단상황은 마음속에 굳게 자리잡고 있으며 남한은 독일통일방식의 단계적 통일을,북한은 1국2체제 방식을 내놓고 있다. 한국전쟁의 사회적 영향을 연구한 서울대 김경동교수는 『전쟁이 왜,어떻게 발발했는지 분명히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우리는 당시 전쟁을 막을 통제능력이 거의 없었다』라고 진단한다. 전쟁이 한국민들에게 가치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적어도 남한은 자신들이 1950년에는 갖지 못했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힘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외언내언

    최근들어 부쩍 정말로 낯선 사람들이 서울에 오고 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어서 세상의 변화를 실감케 하고 있다. 북한의 전고위관리,6ㆍ25때의 북한군 장교,소련내의 유력 한국계 인사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중에는 남북분단직후의 대남공작총책이 들어 있는가 하면 북한측 정전위대표,한국군과 6ㆍ25때 교전까지 벌인 인민군 고급간부,그런가 하면 소련군 전투조종사까지 끼여 있어 만감이 오고 간다. 재소동포들가운데는 북한에도 여러번 다녀온 사람들이 많아 이들의 방한소감이 무척 기다려진다. 이들 소련거주 전북한의 고위간부들말고도 미국등 다른 나라에 있는 북한군 관계자들의 서울방문도 최근 두드러지고 있다. ◆이들의 방한목적은 대체로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6ㆍ25」와 남북인사들의 근황및 생활상에 대해 증언하고 국내의 산업현장,전방의 격전지를 돌아보는 일. 이들에게서 공통적인 것은 북한의 남침사실을 다시 확인해 주고 한국의 발전상에 놀라고 있다는 것. 북한군의 전장교들은 물론 소련의 관계자,헝가리ㆍ체코와 같은 동구권의 당시 외교관들까지 실례를 들어가며 북한의 남침을 증언하고 있다. 그러면서 한결같이 한국의 눈부신 발전에 입을 모으고 있다. ◆이들 가운데서 주영복씨(67ㆍ전인민군공병소좌ㆍ미 로스앤젤레스 거주ㆍ호텔경영)의 경우가 무척 인상적이다. 주씨는 6ㆍ25때 춘천전투에 참전했고 서울의 인민군전선사령부공병부에서 소련군의 공병관련 작전서류의 번역및 통역으로 있다가 포로가 된 뒤 제3국을 택함으로써 뉴스의 초점이 됐던 사람. 최근 6ㆍ25발발 40주년을 맞아 마련된 학술회의 참가차 내한했다. 그는 『소련이 6ㆍ25남침을 주도했다』고 당시의 경험과 자료를 들어가며 밝히고 있다. ◆이처럼 자유스런 왕래가 가능하게 됐는데도 못오는 재소한국인들이 많다고 전해진다. 주로 경제적인 이유때문. 보다 왕래가 폭넓게 이뤄질 때 한소교류도 본격화될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것을 보면서 오가고 싶어도 오갈 수가 없는 1천만 이산가족들의 그 아픔은 언제나 되어야 해결될지 그날이 기다려진다.
  • “북의 재침위험성 높다” 76%/6ㆍ25 40주년… 국민여론 조사

    ◎조기통일 가능성엔 59%가 부정적/“2∼3년새 대북관념 좋아졌다” 47%/“우리 체제 우월… 북과 논쟁에 자신” 71% 우리 국민의 북한에 대한 인식은 지난 2∼3년전에 비해 좋아지고 있으며 남한체제의 우월성에 자신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보처가 6ㆍ25 40주년을 계기로 대륙연구소(이사장 장덕진)에 의뢰,지난달 18일부터 28일까지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의 만 20세 이상 남녀 2천3백명을 대상으로 한 개별 면접형식의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조사대상자의 47.3%가 지난 2∼3년동안 북한에 대한 느낌이 좋아졌다고 응답한 반면 나빠졌다는 사람은 3.2%에 불과했다. 북한이 우리의 적이 아니라고 한 의견도 44.6%나 돼 주목을 끌고 있다. 북한사람을 만나 남한체제의 우월성을 자신있게 논쟁할 수 있다는 응답자는 71.5%로 나타났으며 28.2%는 자신이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를 응답자 배경별로 보면 전쟁 비경험세대(58.8%)에 비해 경험세대(76.9%)에서,그리고 경영ㆍ관리ㆍ전문직(84.1%)에서 자신있다는 응답이 상대적으로 많았던 반면 20대 연령층과 학생층에서 자신이 없다는 응답이 많았다(만 20∼24세 38.1%,만 25∼29세 36%,대학생 39.7%). 또 남북한 통일가능성과 관련,응답자의 59.9%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통일의 가장 큰 장애로는 남북한간의 사상대립(34%),북한의 적화야욕(31.1%),남북한의 이질화(19.7%),국제적 이해대립(12.2%)등을 들었다. 통일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는 사회적 안정(34.3%)이 가장 중요한 과제이며 정치적 민주화(29%)와 경제적 발전(21.9%)도 필수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주한미군의 완전 철수때 우리 자체의 현재 방위능력에 대해 41.6%가 믿을 수 없다고 응답한 반면 33.3%가 믿을 수 있다고 응답했다. 주한미군의 철수 시기에 대해서는 ▲빠른 시일내의 철수 15.9% ▲우리의 자주국방능력이 완전해질 때까지 계속 주둔 63.6% ▲통일될 때가지 주둔 20.3%의 반응을 보였다. ▷통일◁ 남북한의 통일 후 체제에 대해서는 자본주의(59%),혼합절충 사회(32%),사회주의(8.3%) 순으로 희망했는데 전쟁경험세대와 나이가 많을수록 자본주의를 선호하고 있으며 교육수준이 높을수록 혼합절충사회에 대한 선호도가 높은 것으로 분석됐다. 특히 가능성에 대해서는 높다가 22%,낮다가 59.9%,모르겠다가 18%로 나타나 남북통일의 가능성은 높지않게 보고 있는 것으로 평가됐다. 그러나 통일이 가능하다는 사람일 경우 그 시기에 대해서는 10년이내로 보는 사람이 42.2%로 가장 많았고 20년이내가 23.1%,알 수 없다가 15.8%,20년이후가 10.1%를 차지했다.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주변 강대국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보는가에는 필요하다가 62%로 나타났으며 도움이 필요할 경우 바람직한 중재자로는 미국(38.8%),유엔(38%),소련(14.8%)등을 꼽았다. ▷안보◁ 팀스피리트 훈련은 남북대화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중지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응답자의 33.1%가 찬성한 반면 66%는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또 국가안보를 위해서는 핵무기를 보유해야 한다는 데에는 찬성과 반대가 각각 62.8%와 36.7%를 차지했다. 이와함께 북한의 남침가능성에 대해서는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쪽이 23.4%,그렇지 않다는 쪽이 76.2%로 나타나 북한의 남침가능성을 우려하는 응답자가 훨씬 많았다. 특히 분단상황보다는 자유민주주의를 포기하더라도 통일이 되는 것이 낫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찬성 17.3%,반대 81.7%를 보여 통일지상주의에 대한 경계의 시각이 우세하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다. ▷남북관계◁ 남북관계개선을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로는 이산가족찾기ㆍ서신왕래 45.7%,남북지도자의 대화 18.7%,문화예술ㆍ스포츠교류 16.2%,경제교류 13.3%를 보였으나 군축ㆍ군사활동 상호감시는 5.8%에 지나지 않았다. 남북한 유엔동시가입에 대해서는 찬성 87.4%,반대 12%였으며 북한이 동시가입을 방해할 경우 남한만이라도 단독가입해야 한다는 의견은 87.9%였다. 또 남북대화가 잘 이뤄지지 않는 책임에 대해서는 52.6%가 북한단독책임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남북한 모두에게 있다는 주장도 44.3%나 됐다. 북한에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날 것으로 보는 견해는 응답자의 51.7%였다. ▷6ㆍ25 인식◁ 6ㆍ25로 인한 분단에 가장 책임이 있는 나라로 북한이 가장 많이 지적됐으며 (44.2%) 소련(26.6%) 미국(17.6%)남한(4.7%) 순으로 나타났다. 한편 대륙연구소측은 이번 조사결과는 95% 신뢰수준이며 추정치의 최대표본오차 허용한계는 ±2.04%라고 밝혔다.
  • “군비통제 대비,군구조 개편을”/21세기위 건의

    ◎「통일정책 대강」 선포해야/“95년까지 남북관계 획기적 변화” 노대통령 대통령직속기구인 21세기위원회의 통일ㆍ국가위상분과위(위원장 이상우)는 능동적인 외교ㆍ통일정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군사정책의 재조정이 필요하다고 전제,포괄적인 안보체제 구축,과감한 전력구조 개편단행과 군비통제의 구체적인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18일 노태우대통령에게 건의했다. 분과위는 이날 낮 청와대에서 노대통령과 가진 오찬간담회에서 이같이 건의하고 북한과의 관계개선 및 통일과업 추진과 관련,현실적이고 구체적인 통일정책 대강은 국민의 합의로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위원들의 개별연구 건의에서 차영구위원(국방연구원 정책기획연구부장)은 통일에 대비하고 군비통제시대에 적응하는 국방체제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한미 군사관계재조정 10개년 계획을 수립,『오는 2000년까지는 최소한 주한미군 잔류병력 수준을 2만명 선으로는 해야한다』고 말했다. 이위원장은 통일정책대강과 관련,향후 10년정도의 통일정책의 추진기본지침을 담되 국회결의로안을 작성,대통령이 선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히고 이 대강에는 평화통일,자주통일,민족을 위한 통일,민주통일원칙이 담겨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각 위원들의 노고를 치하한 뒤 『분단 50년이 되는 오는 95년까지는 남북관계에 획기적인 변화가 올 수 있도록 모든 역량을 경주할 것』이라고 말했다.
  • 「한ㆍ소 정상회담과 남북관계」 세미나

    ◎“북 「하나의 조선정책」 수정 국면에”/개혁압력에 적화통일 명분잃어 북한동향/개방하면 통합분위기는 곧 성숙 남북관계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는 18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한소 정상회담이후의 통일정세에 관한 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날 세미나에서 서울대 박봉식교수는 한소 정상회담이후의 동북아정세,남북한 관계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우리 주변에서 이미 분위기가 충만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이 개방만하면 단시일내에 통합을 위한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연세대 이기탁교수는 「한소 정상회담이후의 북한의 동향」이라는 주제발표에서 한소 정상회담은 북한의 기본정책인 「하나의 조선」 정책을 수정해야 할 단계에 직면토록 했다고 주장했다. 다음은 주제발표 요지이다. ◇한소 정상회담 이후의 동북아정세,남북한관계(박봉식 서울대교수)=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 역사에서 가장 적대적이었던 나라중의 하나가 소련이었다. 소련은 한반도분단과 6ㆍ25전쟁에 대해 어는 나라보다 무거운 책임을 져야할 것이다. 그러한 나라의대통령과 노태우대통령이 만났다는 사실 자체가 역사흐름의 전환점을 상징해준다 하겠다. 고르바초프의 크라스노야르스크연설은 소련의 아시아정책이 자유선택과 평화공존에 입각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소련의 정책원리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는 한국과의 관계수립을 통해 냉전적인 체제와 의식을 깨는 것이 첩경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소련의 입장으로서는 아태지역 진출에 장애가 되고 있는 북한과 일본에 충격을 줄 뿐 아니라 한소수교가 이루어 진다면 이는 군사전략상으로도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소련이 서울에 깃발을 세울 수 있다면 이는 소련을 가상적 또는 위협의 배후세력으로 보는 한미 협력중심의 아태지역 군사협력체제의 대의명분을 수정케 하는 것이며 평화를 앞세워 이 지역에 무임상륙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태진전이 소련에 주는 정치적 상징적 의미는 대단히 크다. 소련은 그들의 새로운 정책실현을 위해서 북한이 변해주어야 하고 한국으로서도 북한의 자세변화가 절실하다. 한소양국에 북한은 이제 공동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북한은 60년대 중소대립시 중국편을 들었다가 소련으로부터 경제원조를 중단당한 일이 있다. 체제개방과 한국과의 관계게선은 김일성에게는 40여년간의 정치명분을 포기하거나 바꾸어야 하는 것이 된다. 북한은 어떠한 형태든 가까운 시일내에 변화를 시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가능한 한 체제에 영향을 받지 않는 길을 택하겠지만 완전히 안전한 길은 없을 것이다. 89년 소련과 동유럽 혁명의 바람은 아시아로 오면서 약해지고 있다. 바람을 몰고 올 실체는 소련인데 소련내에서 문제가 생겨 북한까지 그 바람이 전달되는 데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동서독간에는 오랜 교류가 선행됐지만 남북한간에는 그렇게 긴 교류가 필요 없을지 모른다. 주변의 분위기가 이미 충만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이 개방만 하면 단시일내에 통합을 위한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체제의 붕괴를 동반하지 않는 개방은 어려울지 모른다. 한반도에 개방과 화해의 바람은 중국대륙과 시베리아를 거치는 동안 우리는 기존의 대화채널을 유지하면서 북한의 지배층이 개방과 화해의 불가피성을 인식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한소 정상회담 이후의 북한의 향방(이기탁 연세대교수)=한소 정상회담은 북한의 기본정책인 「하나의 조선」정책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 셈이 됐다. 북한은 「하나의 조선」정책을 어떤 형식이나 형태로 견지하거나 이를 수정해야 할 단계에 직면하게 됐다. 북한으로서 「하나의 조선」정책을 수정한다는 것은 북한의 모든 권력의 논리를 수정해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북한의 대남정책,남북한정책 또는 북한의 대외정책 모든 측면에서 북한의 기본정책을 수정해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의 조선」정책으로 설득하여 오던 북한의 「대내정책」의 논리를 수정해야 한다는 문제점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북한의 정치적인 전면적 재편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이번 정상회담은 북한의 국제적 지위의 기반이었던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의 와해를 의미한다. 한소 정상회담에 대한 북한의 공식반응이 「범죄행위」라는 평가에서 알 수 있다. 「하나의 조선」정책을 이탈해야 할 북한으로서는 두가지 길이 있다. 그 하나는 수정주의의 길을 가는 것이며 또 하나는 권력의 재편성이라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북한이 수정주의의 길을 가든 권력의 재편성을 실천하든간에 문제가 되는 것은 북한사회에 구조적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다. 북한의 수정주의는 우선 개인숭배문제에서 부터 출발하리라고 본다. 그 이유는 김일성 스스로의 「권력의 논리」인 「하나의 조선」정책과 통치이론이 한소 정상회담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으며 이는 곧 남조선해방이라는 정치적 명제를 수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북한의 권력 재편성문제라고 본다. 이는 북한의 사회구조가 정치구조와 깊은 관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북한지역에 시민사회를 구성하고 있었던 모든 인구가 남하함에 따라 농촌의 지역적인 집단화가 이루어지고 사회계급이 획일화돼 완벽한 병영국가가 형성됐다. 이 점은 「김일성 이후」라는 한반도의 현상을 본질적으로 야기케 할 정치변동에서 중요한 전환적인 사회적 요인이 된다고 본다. 이같은 점을 감안할 때 북한사회구조에서 김일성 이후의 「힘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세력은 북한의 군부밖에 없다고 본다. 북한의 군부가 김일성 이후의 권력을 메울 경우 한반도는 또 하나의 역사적인 기간에서 많은 문제점과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 「청와대 대좌」 의제별 대화록

    ◎지자제는 여야가 한발씩 양보… 타협해야/보안법은 북한 변화없어 신중대처 필요/내정개혁 함께 대소 자주외교 펼칠 때 노태우대통령과 김대중 평민당총재는 16일 상오 청와대에서 회담을 갖고 북방정책,내각제개헌문제와 지자제법을 비롯한 입법문제등 현안전반에 대해 폭넓게 협의했다. 이날 회담에서 논의된 내용을 이수정 청와대대변인과 김총재의 발표를 통해 의제별로 소개한다. ▷국정운영및 북방정책◁ ▲노대통령=세계정세와 강대국관계가 변하고 있으며 특히 한소 정상회담이후 한반도주변정세가 급격히 변하고 있다. 남북관계및 분단상황에 변화가 올 수 있는 중대한 시기를 맞은 만큼 통일및 외교문제에 있어서 초당적인 결정과 대처가 필요하다. 통일문제에 대한 국민적 준비태세를 갖춘다는 점에서도 초당적 협조가 긴요하다. 여야가 기본적 신뢰의 바탕위에서 국정을 운영해 나가야 하며 이를 위한 대화와 타협을 진전시켜 정치안정을 이뤄야 한다. ▲김총재=북방정책은 국민적 합의와 기대속에 추진돼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격변하는 세계정세에 대처할 수 있는 내정개혁을 단행,우리나라를 서독화해 소련과 미국등에 자주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내각제개헌◁ ▲노대통령=지금은 민생문제등 국가적으로 시급히 해결해야 될 과제가 많은 만큼 개헌논의 시기가 아니라고 본다. 그렇지만 6ㆍ29선언 당시에도 밝혔듯이 개인적으로 내각제가 우리나라 민주발전을 위해 바람직한 제도라고 생각한다. 지난 대통령선거 때의 지역감정 격화나 과열양상은 대통령직선제가 혼란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런 일이 되풀이 되면 안보까지 위협받는 국가적 위기가 조성될 수 있으므로 언젠가는 이 문제를 다함께 깊이 생각해야 한다. 내각제는 3김씨에게 기회를 줄 수 있다는 점 때문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국민이 원하지 않는 개헌을 무리하게 하지는 않는다. 내각제가 되건 이원집정부제가 되건 남은 2년반 임기가 끝나면 나갈 것이며 더 이상 관여 않는다. 헌법이 보장한 암기이상 하거나 장기집권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해 둔다. ▲김총재=노대통령은 6ㆍ29선언으로 국민의 뜻에 따라 대통령직선제를 받아들인 이상 임기중 내각제를 추진해서는 안된다. 여권은 국회의석의 3분의2를 확보했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내각제 개헌을 비롯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대통령이 임기중 개헌을 강행,대국민 약속을 위배한다면 정치도의상 용납할 수 없다. 대통령이 꼭 내각제개헌을 하고 싶다면 의원직 총사퇴후 총선거를 실시해 3분의2 의석을 확보해야만 한다. 만일 내각제를 강행한다면 국민의 저항에 부딪칠 것이며 우리 당은 이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의 동의없이 야당이 여당이 되고 여소야대가 여대야소가 된 13대 국회는 선거때 전혀 약속하지 않은 내각제를 심의,의결할 자격이 없다. ▷지자제◁ ▲노대통령=지방자치선거에 정당공천을 허용할 경우 선거에서 과열현상이 빚어지고 정치적 대결양상이 심화된다. 이에따라 지역감정악화도 피할 수 없게 된다. 국민들도 이를 우려하고 있으니 우리 현실의 특수성에 비춰 엄청난 혼란을 빚지않도록 한발짝 물러서 서로 협상해야 한다. 정당공천에 너무 집착말아 달라. 여야협의를 통해 가능한한 연내에 지자제를 실시해야 한다. ▲김총재=지자제실시를 미루는 것은 더이상 용납할 수 없다. 평민당은 지자제를 얻어내기 위해 광주문제,5공청산문제 등에서 많은 양보를 했다. 지방의회와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위한 입법이 지난 2월 임시국회때 이뤄지도록 지난해 12월 4당이 합의해 정당추천제ㆍ연합공천제 등 선거법의 구체적인 내용까지 합의사항을 발표했으나 민자당의 약속위반으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정당추천제등 지난해 지자제에 관한 여야합의는 우리 정국의 앞날을 가늠하는 중대한 약속일 뿐만 아니라 여야간 신뢰를 가늠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양보할 수 없다. ▷국가보안법등 개혁입법◁ ▲노대통령=국가보안법은 정세변화에 따라 전향적 개정을 검토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북한측의 변화가 없기 때문에 신중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 남북교류특별법과 남북교류기금법은 여야가 합의해 제정토록 해야 한다. 김총재=국가보안법ㆍ안기부법의 개폐,경찰중립화법의 제정,노동관계법의 민주적 개정,종합의료보험법의 실시 등이 조속히 이뤄져야 한다. 한소 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추진하려는 마당에 북한을 적으로 규정한 국가보안법은 폐지되고 민주체제수호법으로 대체입법을 해야한다. 안기부가 국내문제에 대한 관여를 포기하는 것은 국내외에 우리의 민주주의와 통일의지를 천명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광주보상법및 국군조직법◁ ▲노대통령=광주시민의 명예회복과 조속한 보상을 위해서 광주보상법이 반드시 이번 국회에서 통과되어야 한다. 광주시민들도 조속한 보상을 바라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안보적 차원에서 군조직의 효율성제고를 위해 국군조직법 개정안처리도 꼭 이뤄져야 한다. ▲김총재=광주문제는 피해자에 대한 배상과 명예회복및 기념사업등 3가지 측면에서 이뤄져야 한다. 국군조직법은 전시나 연합 작전시에만 합참의장에게 3군의 군령권을 부여하는 정도로만 고쳐야 한다. ▷3당통합문제◁ ▲노대통령=여소야대의 정치불안속에서는 경제위기등을 극복키 어렵기 때문에 통합했다. 평민당과 합치려는 노력도했으나 찬동하는 세력만 합당했다. 정당법상으로도 타당하다. 다음 선거에서 심판받으면 되므로 새로 선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다른 당 통합에 시비를 거는 것은 옳지 않다. ▲김총재=연두기자회견과 지난 1월 영수회담이 인위적 정계개편이 없다고 약속해놓고 3당합당을 단행했다. 3당합당에 대한 국민의 심판을 받기 위해 의원직 총사퇴후 총선거를 실시해야 한다. ▷기타◁ ▲노대통령=최근 발생한 광주 미문화원 화염병투척행위는 다시 일어나선 안된다. 구속자석방문제와 관련,범법자를 정치범으로 동일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동안 인내와 관용으로 대응해왔으나 이제는 법에 따라 폭력등 범법자를 분명히 다스리는 것이 민주주의를 위해 불가피하다. ▲김총재=수감중인 정치범들은 법집행의 형평을 위해서도 대폭 석방돼야 한다. 인명을 살상한 간첩인 김현희를 석방하는 마당에 정치범을 감옥에 둔다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 합법적인 집회는 보장돼야 하고 폭력을 쓰면 사후에 처벌할 수도 있다. 물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추경을2∼3개월 유보해야 하며 총통화증가율을 20%이하로 내리는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 「북방바람」타고 거여의 자신감 고취/민자,지방당직자 연수 이모저모

    ◎「통합」당위성 부각,동질성회복 주력/최고위원 3인,연고지 바꿔 돌며 열기확산 독려 민자당은 6월초 서울 가락동 정치연수원에서 중앙당 및 전국 시도지부ㆍ지구당 간부에 대한 합숙 연수를 실시한데 이어 14일부터 김영삼 대표최고위원과 김종필 박준태 최고위원 등 고위당직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충북 도지부를 시작으로 시도지부 및 지구당 당직자 연수교육에 들어갔다. 총 5천7백여명을 대상으로 18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연수교육은 3당통합 이래 지구당개편 대회에 이어 두번째로 고위당직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리는 대규모 행사로 계파간의 단합과 동질성 회복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김대표가 민정ㆍ공화계가 우세를 보이고 있는 강원ㆍ충북지역을,김종필 최고위원이 민주계의 아성인 부산ㆍ경남지역과 민정계의 본거지인 대구ㆍ경북지역을,박 최고위원이 공화계의 표밭인 대전ㆍ충남지역과 광주ㆍ전남지역을 순회ㆍ방문하는데서 연수교육이 겨냥하고 있는 목적을 단적으로 읽게 해준다. 이와 함께 한소 정상회담 이후 모처럼 상승세를 타고있는 집권여당에 대한 국민의 관심도를 이 기회에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확산시켜 6월 임시국회에서 정국 주도권을 확보하겠다는 계산도 깔린 것으로 분석된다. ○“보선패배 교훈으로” ○…김영삼 대표최고위원은 이날 상오 청주의 충북도지부 강당에서 열린 이 지역 3백50여명의 지구당 간부연수에 참석,격려사를 통해 3당 통합의 당위성을 재강조하고 북방정책ㆍ임시국회 대책등을 상세히 설명한뒤 『용기와 자신을 갖고 국가의 장래를 이끌자』고 역설. 김대표는 이어 『소련ㆍ동구 등의 변화나 우리와 같은 분단국인 독일의 실질적 통일 등을 생각할 때 우리도 변할 수 밖에 없으며 3당 통합은 그 기초』라면서 『앞으로 우리들의 행동이 국가와 국민의 장래에 결정적 영향을 준다는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 김대표는 『앞으로 국회운영 등에 있어서 할 것과 하지 않을 것을 명확히 구분,실천해 나가겠다』고 거여의 절제된 세과시가 있을 것임을 천명한뒤 『음성ㆍ진천 보궐선거 패배를 교훈으로 삼아 92,93년에는 이런 우를 되풀이 말자』고 다짐.김대표는 또 『노태우대통령과 고르바초프대통령과의 회담은 역사의 큰 장을 넘기는 것이며 멀지 않은 장래에 한소 국교정상화가 이룩될 것』이라면서 『일부에서는 북한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으나 멀지 않은 장래에 북한도 변하리라 확신한다』고 피력. 김대표는 『그런 의미에서 한반도에 닥쳐올 모든 문제에 여러 형태변화를 상정,충분히 대비해야 하며 이것이 바로 민자당에 주어진 중요 정치책무중 하나』라며 『곧 미래에 대한 용기와 꿈을 심어주는 청사진을 밝히게 될 것』이라고 예고.〈청주=이목희기자〉 ○“합당전 사고 청산을” ○…영남지역 당원교육에 나선 김종필 최고위원은 이날 부산 시민회관과 마산 한일여실고 강당에서 각각 40분간씩의 특강을 실시. 김최고위원은 이날 특강에서 『세상은 변하고 이 변화의 흐름위에서 현명하게 서야할 위치를 찾기 위해 합당을 했다』고 말하고 『아직도 밑바닥에는 합당이전의 사고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나 이제는 새로운 걸음걸이를 해야한다』고 강조. 김최고위원은 이어 90년대에 우리가 해야할 일을 민주화 다지기,국민소득 3∼4배 배가,통일이라고 제시하면서 『이같은 3대 목표를 추진할 주체세력은 민자당과 여러분 밖에 없다』고 다짐. 김 최고위원은 특히 이날 특강지역이 김영삼 대표최고위원의 영향력이 큰 곳임을 감안한 듯 『위로는 노태우대통령을 모시고 당에서는 김영삼 대표를 깍듯이 모시겠다』고 강조해 당원들로부터 박수세례.〈부산=김영만기자〉 ○7백여명 참석 성황 ○…이날 하오 광주시 서구 시민회관에서 열린 광주ㆍ전남지역 지구당 당직자 연수대회는 박태준 최고위원을 비롯,각지역 간부 7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예상보다 높은 열기속에 진행됐으나 대회장 주변 및 시내 곳곳에는 반민자당시위 등에 대비,전경들이 배치돼 대회장 분위기와는 대조적인 모습. 박최고위원은 격려사를 통해 『호남지역에서는 지금까지 여당이면서 여당이라고 말한마디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이젠 더이상 기죽어 지낼 이유도 없고 더이상 좌절속에 지낼 필요도 없다』고 지적하고 『정계일각에서 3당통합을 「야합」 또는 「호남배제」라고 매도하고있으나 통합 과정에서 평민당 측에도 진지하게 정치질서 재편의지를 타진했고 통합에 참석한 기존 정치인들은 기득권을 포기하면서 흔쾌히 결단을 내렸다』고 강조. 박최고위원은 이어 『최근 우리가 세계열강과 대등한 위치에서 자주적 정상외교를 펼 수 있었던 것도 내부적으로 3당 합당이라는 정치적 기적을 이루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성공적인 한소 정상회담의 성과를 국내정치에 효율적으로 연결시켜 정치 사회적 안정 확립은 물론 통일에 대비하자』고 강조.〈광주=최태환기자〉
  • 북한의 대화거부(사설)

    북한 체제내부에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반김일성세력이 있다고 전해지던 날 평양방송은 남북 정상회담에 응할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북한측은 그동안 우리쪽이 한반도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방안으로 여러 차례 제의해온 남북 정상회담은 물론 기존의 몇갈래 대화채널도 빠른 시일내에는 재개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했다. 북한측은 최근 한소 정상회담등 여러 형태에 걸친 우리측의 한반도 문제 해결 노력을 「분단주의적 입장」이라고 했고 유엔정책이 「두개의 조선」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지금까지 들어온 북한쪽 주장과 입장을 단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되풀이 비난이요 허구 투성이의 주장이다. 여러가지 정황에 비추어 예측된 일이기는 하나 이같은 북한측 입장과 자세에 대해 우리는 한반도문제의 장래와 관련하여 안타깝고 암담한 심정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다시 묻건대 남북 정상회담에서 왜 얻어질 것이 없으며 유엔에의 동시 또는 단독가입이 왜 분열상태의 고정화인가. 최근 한소등지에서 터져 나오는 「6ㆍ25남침」 증거가 아니더라도 6ㆍ25동족전쟁은 김일성의 도발에 의한 남침으로 비롯되었음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김일성 자신은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단 한반도 자신이 전쟁도발자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아직도 남한을 「해방되지 않은 남반부」라는 인식아래 또다른 전쟁적 해결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 남북 정상회담을 거부함은 그의 이러한 과거의 죄과와 현재의 야욕을 은폐하려 함이다. 유엔에의 단독 또는 동시가입도 결코 분열주의적 정책은 아니다. 오늘날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는 동서독과 남북예멘의 경우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분단 상태의 양 당사자가 유엔에 가입된 상태에서 통일을 이루려 할 때 그것은 밖에서 대결하고 있을 때보다 휠씬 수월할 뿐더러 동시에 국제적인 지원과 인정을 쉽게 얻을 수 있다. 우리는 그 보다 이 거부와 비난속에 담겨진 북한의 폐쇄와 고립의 지속을 더 안타깝게 여긴다. 이와함께 지금 북한에 반김일성세력이 엄존하고 있다는 사실쪽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그들 폐쇄및 고립정책의 지속이 체제내의 반대파존재와 함수관계를 이루고 있을지 모른다는 이유에서이다. 오늘의 세계적인 화해와 민주화 변혁속에서 북한 김일성이 그나마 현실감각을 갖고 있다면 그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과제와 고민은 40여년 독재체제와 이른바 유일주체사상의 유지일 것이다. 아마도 그는 그것이 흔들리고 자신의 입지가 약화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 할 것이다. 지금 그는 안팎으로부터 심한 개방압력과 체제 도전을 받고 있다. 이번의 거부적인 자세는 여기서 비롯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북한의 당과 언론계에 반김일성세력이 조직돼 있음을 폭로한 루마니아 집권당 지도자 브루칸씨는 『조작된 개인숭배와 진정한 대중적 지지를 혼동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의 말대로 북한은 공산정치체제가 붕괴하지 않은 유일한 곳이다. 북한 당국자들은 그것을 알고 세계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한반도문제 해결의 실마리도 여기서 풀어야 하는 것이다.
  • 북은 왜 대화 거부하나(전문가의 시각)

    ◎「개방외압」 차단… 평양의 고육책/체제안정 노려 「버티기 작전」 선택한 듯/“내부정비→적절한 시기에 대화” 속셈 북한이 13일 남북 정상회담을 거부하는 한편 각종 남북대화도 재개할 의사가 없음을 밝힌 것은 노태우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 까지 이른 소련의 급격한 변화및 한국의 거듭된 대화촉구등 일련의 외압에 대응,이제까지 고수해왔던 주체적 자주외교 노선을 견지하는 동시에 남북관계에 있어서도 주도권을 결코 상실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분석된다. 또한 소련을 비롯 동구 공산국가들의 대변혁이후 밀어닥치고 있는 개혁의 물결에 맞서 변화보다는 현상유지를,개방으로 초래될 수 있는 체제위기 보다는 강력한 내부통제를 통한 체제안정을 선택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뿐만 아니라 남북간의 긴장을 유도함으로써 한소관계의 급진전이 한반도문제의 해결을 위해 순기능보다는 오히려 역기능을 초래한다는 점을 대ㆍ내외에 과시함으로써 한소 정상회담이후 빠르게 추진될 수밖에 없는 양국간의 수교와 아시안게임을 계기로예상되는 한중간의 관계개선 움직임에 쐐기를 박기 위한 전략이라는 게 북한문제 전문가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이들은 또 한소 정상회담과 관련,「두개의 조선」 정책을 책동하는국제적인 범죄행위』라는 로동신문의 비난(6일자),『남한 당국은 분단을 고착화하거나 유엔에 각자 가입하려는 기도를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한 김일성의 발언(11일ㆍ중앙통신)등 북한이 보인 일련의 반응은 북한이 한소수교에 강력히 반발하고 있으며 남한주도의 한반도문제 해결시도에는 어떠한 형태라도 호응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밝힌 것으로서 이에따라 북한은 당분간 외교보다는 내부단속에 치중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창순씨(북한문제연구소 이사장)는 『각종 외풍에 맞서 체제정비가 시급한 북한으로서는 남북대화 거부등과 같은 한반도 긴장유도조치가 불가피한 선택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상당기간 남북관계의 경색화가 예상된다고 내다봤다. 김갑철교수(건국대)는 『북한의 변화는 기본적으로 외압에 의해서도 또 동구에서와 같이 밑으로부터의 혁명의의해서도 이뤄질 수 없으며 오로지 집권세력의 주도에 의해서만이 가능하다』는 전제를 내세우면서 이같은 맥락에서 볼때 한소 정상회담에 이른 소련의 압력이나 한국의 대화분위기 조성등은 북한을 더욱 위축시킬뿐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기 어렵다는 것은 이미 예상했던 일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사회주의혁명에 있어 「주체」의 문제를 중시하는 북한이 현시점에서 한국 정부가 조성해가고 있는 남북 대화분위기에 휩싸일때 한국의 북방정책에 호응하는 꼴이 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을 것이며 이 때문에 내부체제를 정비한 후 「김일성의 의지와 필요에 따라」 남북대화에 임하는 형태를 취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편 북한이 보이고 있는 이같은 강경방침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에 대해 북한문제 전문가들은 중국과 한국과의 관계개선 움직임이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아시안게임을 계기로 또한 한소수교의 속도에 따라 한중 관계개선을 예상할 수 있고 이에따른 북한의 불가피한 변화도 기대할 수 있으나 이같은 결과가 올해안에 나올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갑철교수는 『소련이 경제ㆍ군사원조 중단시사와 같은 보다 강력한 대북압력을 행사하고 아시안게임을 계기로 중국의 태도가 변화할때 북한의 태도도 좀더 유연해질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정경분리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중국이 「두개의 한국정책이 곧 두개의 중국정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대외명분적인 입장과 실리적인 필요 사이에서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는 쉽게 예측할 수 없다』고 말했다. 윤병익교수(통일연수원)는 『한소간 정식수교가 이뤄질때 중국의 운신의 폭도 넓어질 것이 확실하며 이 경우 북한의 저항도 약화될 것으로 예측되지만 북한이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대남 자세의 변화 또는 북한체제의 변혁이 이뤄지지 않고서는 실질적인 대화가 이뤄지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김창순씨도 아시안게임이후 한중관계의 변화를 예측할 수 있고 북한의 대소 반발도 한계가 있겠지만 한국을 「전민족적 통일전선」의 일부 대상으로 보는 대남관이 교정되지 않는 한,또 남조선 혁명노선을 포기하지 않는 한 북한의 대남정책이 변화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북한이 이번에 보인 반응은 궁지에 몰린 입장에서 국제정세의 변화에 맞서 달리 선택할 수 있는 뾰족한 대안이 없음을 입증하는 것으로서 스스로 변화하기보다 「우리식대로 살자」는 구호아래 가능한 한 현상을 고수하면서 「버티는 데까지 버텨보자」는 선택 아닌 선택을 택한 것으로 풀이된다.
  • 「한국전 기원과 성격」… 「6ㆍ25」 40돌 국제학술회의

    ◎스탈린,49년 3월 김일성 만나 “남침”확정 한국전쟁연구회(회장 김철범)가 주최하고 통일원이 후원한 한국전쟁 40주년기념 국제학술회의가 14일 서울 힐튼호텔에서 열렸다. 「한국전쟁과 한반도의 평화 정착」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회의에서는 한국전쟁의 기원과 미소가 한국전쟁에 미친 영향 등이 집중 토의됐다. 이중에서 한국전쟁은 미소의 갈등으로 빚어진 특수한 내전이면서도 국제전의 양상을 띠었다고 주장하는 존 메릴 미국무성연구관의 논문 「한국전쟁의 기원 대답없는 질문」과 소련이 서유럽에 대한 미국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북한을 사주 한국전쟁을 도발했다는 윌리엄 스투웨크 미조지아대교수의 논문 「소련과 한국전쟁의 기원」을 소개한다. ◎6ㆍ25의 기원/윌리엄 스투웨크 미 조지아대교수/크렘린,미ㆍ서구 밀착 저지 겨냥/극동에 긴장 조성… 미 경제난 유도 속셈도 한국전쟁은 주모자인 북한과 주요 군사물자 제공자이자 군사고문단 및 병력의 결정적인 공급자였던 소련,그리고 중국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일어났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정보다. 그러나 하필 이 시기에 소련이 이같은 모험을 추진할 것을 결정했느냐의 의문이 남는다. 당시 소련은 팽팽한 긴장속에 미국의 핵무기와 잠재된 기동력에 눌려 극도로 취약한 상황에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은 49년 가을 마샬플랜의 시행,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결성,서독정부의 출범,미의회의 대서유럽군사원조결의 등 일련의 사태로 미루어 볼때 미국의 관심이 서유럽에 집중됐다고 판단,미국과 서유럽 동맹국들의 단결을 막아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당시 국내외 문제의 최종결정권자였던 스탈린은 대외정책에 관한한 공개토론을 허용했다. 49년에서 50년에 걸쳐 프라우다지는 몰로토프,스슬로프와 같은 온건관료층의 견해를 주로 반영했고 이즈베스티야지는 말렌코프,베리야와 같은 강경군국주의자들을 지지했다. 강경파들은 미국경제가 점차 퇴조하고 있으므로 소련이 서유럽에 압력을 가중한다면 미국은 곧 해외원조를 포기하고 서유럽에서 물러날 것으로 믿었다. 반면 온건파들은 서유럽에서의 미국의 영향력 강화와 경제적으로 유리한 여건을 강조,소련의 압력이 오히려 서방국가를 결속시켰으므로 긴장상태를 완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온건파의 주장을 받아들여 서유럽에서는 평화정책을 쓰는 대신 극동지역으로 관심을 돌려 팽팽한 긴장상태를 유지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이같은 결정의 배경에는 국제긴장상태 조성을 통해 ▲국내에서 권력을 유지하고 ▲소련주변 위성국들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며 ▲유럽에 대한 미국의 관심을 분산하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스탈린은 소련의 정책전환에 따라 미국이 아시아 문제에 휘말리게 되면 미국의 경제적 위기가 촉진되고 상대적으로 중국이 소련에 의존하게 되리라는 계산도 했음직하다. 이에 따라 스탈린은 가장 위험성이 높은 북한의 남침 등 여러조치들을 아시아 지역에서 잇따라 시행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남한으로부터 미국이 멀어져 가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이같은 모험을 할 수 있었다. 49년 한햇동안 미국은 남한주둔 미군을 모두 철수시켰으며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50년 1월12일 연설을 통해 미국의 태평양 방위체계에서 남한을 제외시켰음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어 1월 중순에는 미하원에서 남한에 대한 경제원조안이 거부됐다. 스탈린은 이같은 상황이라면 남한이 위기에 처하더라도 미국동맹국들의 집단적인 개입은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스탈린과 김일성은 49년 3월 김의 모스크바 방문시 북한의 침공을 논의했을 것이다. 스탈린은 마지막 남아 있던 미군이 철수하게 되니 침공계획을 세우라고 격려했을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은 북한 김일성과 군사원조 합의안에는 서명했지만 상호안전보장 조약의 체결은 피했다. ◎6ㆍ25의 성격/존 메릴 미 국무성연구관/초강국갈등서 비롯된 「특수내전」/이해 엇갈린 미ㆍ소ㆍ중의 대리전 양상도 지녀 김일성이 살아있는 한 북한은 결코 그들이 전쟁을 시작했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폐쇄체제의 영웅적인 자화상을 훼손하고 평양 당국으로 하여금 1백50만명에 달하는 한국인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을 일으켰다는 죄를 스스로 인정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일성에 대한 영웅적인자화상은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갖고 지속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앞으로 수년동안 평양에서 열리는 반미투쟁월의 경축행사를 계속 지켜보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누가 먼저 전쟁을 일으켰는가에 관해 북한사람들이 형식주의에 의존한다는 것은 그들이 전쟁을 시작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어느 정도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자신의 입장을 아주 자신있게 변호하지도 않는다. 평양 당국은 전쟁초기의 며칠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상세한 설명을 결코 출판물을 통해서 밝히지 않고 있다. 또 한국전쟁에 관한 학술토의에 참가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인민공화국에서 발간한 한국전쟁사를 유심히 살펴본 비판적인 독자라면 북한이 먼저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을 인정하는 모호한 표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도 평양을 격하하거나 40년전의 엄청난 사건에 대해 그들을 비난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 사람들은 이러한 역사적인 짐에 얽매여서는 안된다. 특히 그들이 남한과의 신뢰를 구축하고 통일이라는 공동목표를 공유하려면 이러한 태도는 더욱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알 수 있듯이 남한도 나름대로의 짐을 지고 있다는 얘기다. 바로 이 대목에서 시작한 문제,즉 한국전쟁은 침략인가 아니면 민족해방전쟁인가에 대한 해답은 두가지 모두 해당된다고 간단하게 말할 수 있다. 북한 사람들은 그것을 두고 「조전해방전쟁」이라고 부른다. 강제적으로 가로놓여진 경계선이 존재하고 있는 동안 1950년에 국토의 분단을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발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 그것을 영구적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도 드물었을 것이다. 수단과 기회가 주어졌더라면 이승만대통령도 김일성이 남한으로 쳐 들어왔던 것처럼 북진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국전쟁이 국제전인가 아니면 내전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여기에서도 해답은 양자가 모두 해당된다는 것이다. 한국의 분단은 일본으로 부터의 해방과 마찬가지로 미국과 소련에서 비롯된 것이다. 초강대국의 불간섭과 그에 따른 한국에서의 경쟁적인 양체제의창출은 한국내의 좌익과 우익간 투쟁의 국내적인 측면을 강화했다. 이제 소련이 미묘하게 표명하고 있듯이 한국전쟁은 그 이후 미국과 중국의 개입(현재 우리가 조심스럽게 표명되고 있는 것을 듣고 있듯이 소련의 개입도 있었다)에 따라 국제화의 성격도 띤 것으로 볼 수 있다. 오늘날은 냉전의 종식과 함께 두개의 한국이 상호 경쟁하는 국내적 성격이 다시 중요성을 더하고 있다.
  • “남북대립ㆍ경쟁 지양 통일조성 외교 펼 때”/김일성 연설

    【도쿄 AP 연합 특약】 북한의 김일성은 남북한이 각각 통일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외교관계를 펼쳐나가야 한다고 선언했다고 북한관영 중앙통신이 11일 보도했다. 도쿄에서 수신된 이 통신은 김일성의 연설에 관한 노동신문의 논평을 발췌,소개했으나 김의 연설이 언제 행해졌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김일성은 남북한이 독자적이고도 평화적인 통일에 우호적인 국제 분위기를 조성해 나간다는 원칙에 입각해 각자의 외교관계를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이 통신은 전했다. 이 논평은 또 남북한이 동일조국이라는 관점에서 외교관계가 펼쳐져야 하며 남북한 공동의 이익에 최우선권이 주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남한당국은 조국의 영원한 분단과 개별적인 유엔가입을 추구하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고 이 논평은 밝혔다. 남북한은 민족의 권위에 손상을 주고 외세에 이익을 주는 행동은 피해야 한다고 이 논평은 주장했다. 이 논평은 남북한의 국제무대에서의 대립과 경쟁은 분열을 이용하려는 외세에 도움을 줄뿐 조국에 손상을 가져올 것이라고 이 논평은말했다. 이같은 논평은 노태우대통령의 일본방문을 비난하고 한소 정상회담이 한반도 분단을 영구화시킨다는 등 이제까지의 북한입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화적인 것이다.
  • 가까워지는소련…“펜팔희망”쇄도/양국수교기대반영,소비에트문물급속확산

    ◎소유학기 「레닌그라드… 」베스트셀러도/문물전에 1백30만 인파… 목각인형·보드카매진/「고르비」술집· 「소비에트」옷가게 속속등장 우리나라와 소련이 정상회담을 갖는 등 양국간의 협력관계가 진전됨에 따라 「철의 장막」 저쪽으로 멀게만 느껴졌던 소련이 각 분야에 걸쳐 우리 생활속에 성큼다가오고 있다. 소련관련 서적들이 불티나게 팔리고 소련사람과 펜팔을 맺으려는 사람이 느는가 하면 고르바초프의 얼굴이 그려진 T셔츠까지 등장했다. 주로 소련관련 서적만을 출판하는 슬라브연구사(대표 최숭)는 지난달 「한국인을 위한 러시아어 첫걸음」이라는 책을 1천5백부 발간했으나 1주일만에 모두팔려 곧바로 재판을 찍어야 했다. 교보문고에는 지난달 초부터 한국인 최초의 소련유학기인 「레닌그라드에서 온편지」가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교보측은 소련관련 서적을 찾는 사람이 늘어나자 지난주 인문사회과학 도서매장에 「소련 어제와 오늘」이라는 특설 코너를 마련,문학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 걸쳐 60여종의 책을 전시해 팔고 있다. 해외펜팔알선업체인 서울 퇴계로1가 「국제친선협회」 (회장 서정주·57)에는 하루 4∼5건씩 소련인과의 펜팔을 의뢰하는 사람들이 잇따르고 있다. 회장 서씨는 『올림픽이후 약 70여명의 회원이 소련사람과 펜팔을 하고 있다』면서 『지금까지 대학생 회사원 등에 한정됐으나 최근에는 고등학생까지 확대되는 추세』라고 말했다. 서울 용산구 이태원의 한 옷가게에서는 「고르비」의 얼굴이 그려진 T셔츠가 등장해 어제의 적성국가 소련에 대한 시각이 크게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주인 변모씨(46·여)는 『TV뉴스를 통해 미국이나 유럽의 젊은이들이 고르비셔츠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것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면서 『아직은 미군이나 일부 젊은 층에서 조심스럽게 사가고 있지만 곧 인기를 끌 것』이라고 말했다. 또 서울 강남에는 「고르비」라는 상호의 술집이 문을 열었고 서울 노원구 한 아파트단지에는 「소비에트」라는 옷가게가 성업중이다. 서울 S극장에서 최근 개봉된 소련직수입영화 「인터걸」은 이미 5만여명의 관객을 모았다. 지난 4월18일부터 5월13일까지 롯데백화점에서 열린 「소련문물전」에는 하루평균 5만여명의 인파가 몰려 모두 1백30만원이 다녀간 것으로 집계됐다. 이 기간동안 백화점특설매장에 전시,판매된 소련도자기·보석 등 각종 상품가운데 원판레코드·목각인형·시계·보드카 등은 행사시작 4일만에 모두 팔렸다. 지난달 27일부터 5일까지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러시안 푸드 페스티벌」행사에도 1천명 이상의 손님이 몰려 철갑상어알과 보드카 등 소련의 고유음식을 즐겼다. 이밖에도 일부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영어의 「굿」이나 「오케이」대신 「하라쇼」라는 소련말이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이같은 현상에 대해 너무 성급한것 같다는 우려와 함께 한·소 관계개선 및 경제협력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나 민족분단의 원인이 된 6·25전쟁에 소련군이 개입됐으며 대한항공 여객기 격추사건에 대한 소련정부의 경위해명 등이 선행돼야 한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 한반도에 감도는 「독일증후군」/서병철 외교안보연 교수(세평)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토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에 이르는 가장 바람직한 처방은 독일식 접근방법인데 그 가능성이 보이고 있어 이는 우리에게 신선한 희망을 갖게한다. 독일식 방법이라 하는 것은 분단국가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무력사용을 배제하고 상호간 위협대상이 아니라는 신뢰를 구축한 속에서 접근을 통하여 실직적인 협력을 하는 것이다. 국민들이 서로 방문하고 경제적으로 도와주며 필요하면 정상회담도 개최하고 유엔에서 옆자리에 앉아 국제문제에 의견을 일치시키는 가운데 국경선을 개방한 후 민족자결에 의하여 통일에 이르는 합리적 방법이 독일식이다. ○독일식 접근 바람직 지금까지 동서독에서와는 달리 남북한 관계개선이 전혀 진척되지 않은 것은 북한의 후기 스탈린주의적 경직성 때문이었다. 그런데 북한으로 하여금 고집을 꺾고 타협과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는 국제적 추세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계기가 지난 6월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노태우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간의 회담을 통하여 마련되었다. 소련이 회담에서 경제문제에 치중하는 인상을 주려 했어도 국교수립이 안된 한국과의 정상회담 개최에 나선 것은 이미 양국간 관계에 급변을 예고해 주는 것이다. 한소 정상이 불과 1시간 동안 만났지만 양국간의 수교,서울과 모스크바 상호방문,한반도의 평화정착 공동노력,남북대화를 통한 교류 증진,그리고 경제협력 등 당장 필요한 모든 사항에 합의함으로써 근본적인 교류기틀이 마련되었다. 이로써 한반도의 긴장과 남북한간 대립을 조성한 배후의 근원인 소련이 결자해지의 원칙에 따라 냉전시의 산물을 정리하고 신사고를 한반도에 적용하려는 단호한 의지를 표현하였다. 북한은 고르바초프의 개혁ㆍ개방정책이 체제유지에 장애물이라는 관점에서 외면해 왔으며 현상 유지에 도움이 안되는 외풍을 원천봉쇄하려 함으로써 소련에는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이제 고르바초프는 북한으로 하여금 현실을 깨닫게 하는 충격요법을 활용하게 된 것으로 풀이된다. 소련은 대세에 동조하지 않는 나라는 과거의 브레즈네프 독트린과는다른 방법으로 벌을 받는다는예를 동유럽에서 보여온 바 있다. 특히 루마니아에서는 「페레스트로이카는 사회주의를 망치는 정책」이라고 비난하며 분수에 넘치는 저항을 하다가 차우셰스쿠가 쓰러졌다. 동독에서도 「자주성」을 내세우는 오만을 보인 호네커가 권좌에서 물러나는 결과가 초래되기도 하였다. ○소,북한에 충격요법 고르바초프는 한걸음 더 나가 분단국을 통일시키는 산파역할까지 하는 실적을 올리고 있다. 통독을 가로막는 빚장을 잠갔던 소련이 민족자결원칙에 따른 통일에 청신호를 보임으로써 가장 큰 장애물이 제거되었고 이에대한 반대급부로 「한지붕 밑의 유럽」 계획을 성사시키는 결심을 얻게 되었다. 고르바초프는 세계질서를 재정립하는 데 마지막 저해요소는 북한이 자신의 선택에 따라 탈바꿈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는 이미 1987년 11월 볼셰비키혁명 70주년 기념연설에서 소련과 동맹국들의 관계가 수직에서 수평으로 조정되었음을 분명히 하였고 다음해 12월 유엔총회 연설에서도 각국이 독자적 사회주의 노선을 채택할 수 있음을 허용한 바 있다. 이는 소련이 자국의 행동 반경과 정책방향의 선택폭을 스스로 확대한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이 지나치게 소련에 기대하지 못하게 쐐기를 박은 것으로 이해된다. 오늘날 소련과 동맹국들간의 관계는 50년대 중반기 상황을 방불케 한다. 당시 탈스탈린 정책이 소련에서 시작되어 다른 공산국에 전파되었고 얼마 가지않아 위성국들이 오히려 소련을 앞질러 스탈린 망령에서 벗어났었다. 이와 비슷하게 오늘날 공산체제 개혁과 해체가 바로 그 진원지에서 시작되었으며 주변국들이 질적인 면에서 소련을 추월하고 있다. 그런데 현재 오직 북한만은 45년전과 흡사하게 소련의 권유에 냉담한 반응을 보여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소련이 탈스탈린운동 때와는 달리 「신사고」 실현을 중단할 의지가 없기 때문에 북한도 계속해서 소련의 희망을 묵살할 처지에 있지 못하다. 소련은 북한이 계속해서 고집을 부리고 페레스트로이카 파급을 방해할 경우 전격적으로 한소 정상회담을 개최했던 것과 같이 가까운 시기안에 한국과의 일방적인 국교수립을 단행할 가능성도 있다. 과거에도 소련은 동유럽 동맹국가중에서 가장 중요한 동독의 반발을 외면하고 1955년 10월 서독과 수교한 예가 있다. 이는 동독이 미국과 국교를 수립한 1974년 9월보다 19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소련의 입장에서 서독의 경제적 잠재력이 협력대상으로서 매력적인 것이었는데 이는 마치 오늘날 소련이 시베리아 개발을 위한 한국의 자본과 기술,그리고 생활필수품 제공을 기대하는 것과도 비유된다. ○집안단속 강화할 듯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은 단기적으로는 체제유지를 목적으로 집안단속을 위한 경직성을 강화할 것이 예상된다. 그러나 북한이 최신군비를 전적으로 소련에 의존하고 있으며 무역 60%,외채 80%를 소련이 점하고 있는 현실에서 볼때 계속해서 소련의 비위를 거스를 입장이 못된다. 소련의 군사원조가 중단되면 잠재적 저항세력인 군부를 자극하게 되고 이는 체제를 위태롭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따라서 결국 북한이 할 수 있는 선택은 소련이 원하는 대로 동독이 택했던 것과 같은 협력정책을 답습하는 일 뿐이다. 따라서 한국은 한반도문제의 독일화를 위하여 서독이 추진했던 예를 참고삼아 「북방정책」으로 주변 분위기를 조성하는 한편 「한반도 정책」으로 북한을 회유하는 신축성 있는 정책을 구사함이 바람직하다.
  • 이제 북한이 선택할 차례다(사설)

    동구권 국가들의 눈부신 변화와 개혁에 머물러 있던 세계의 이목이 이제 아시아와 한반도로 옮겨지고 있다. 미소,한소,한미정상들의 연쇄회담은 필연적으로 아시아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며 무엇보다 한반도의 냉전해소와 분단상태해결에 돌파구가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희망에서 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북한의 변화여부는 관심이 초점이 되고 있다. 한소 양국이 수교를 포함하여 협력을 강화하고 한반도의 긴장완화에 의견을 같이한 데 대해 북한이 이해하고 동참할 경우 남북한 관계개선은 물론 평화정착과 통일에 큰 진전이 이룩될 것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한소,한미 정상회담을 보는 북한의 자세는 부정적이고 냉소적이다. 그들의 시각은 여전히 교조적인 냉전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소 관계증진과 한ㆍ중국 관계개선등 주변국들과의 화해와 협력은 남북한 스스로에 의해 아직 이루지 못하고 있는 긴장완화와 평화통일 여건을 조성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측은 북방외교의 성공을 과장하지도 않았고 북한측의 입장과 자존심을 건드리지도 않았다. 또한 우리는 같은 취지에서 북한이 우리 우방들인 미국과 일본등 서방국가들과 관계를 개선하는 것을 환영하고 협력하겠다는 의사까지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한소 정상회담등으로 비롯된 주변정세변화를 여전히 외면하려는 자세이다. 심지어는 『두개의 조선정책을 책동하는 국제적인 범죄행위』라고 극단적인 비난을 가했다. 한소 관계정상화와 남북한 유엔동시가입이 분단을 고착시키는 것이라는등의 억지주장의 테두리를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계속되는 폐쇄와 완강한 고립정책은 그들 자신에게 결코 이롭지 못하다. 뿐더러 북한에 대한 부정적인 세계여론을 불러일으켜 그들 고립을 가중시킬 것이다. 그 폐쇄와 고립정책의 끝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바로 엊그제 글라이스틴 전주 미대사는 한소 정상회담뒤 고립이 심화될 경우 북한이 어떤 위험한 행동을 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경고했다. 또 북한의 개방과 변화를 위해 그들과 수교 검토의사를 비쳤던 이웃나라 일본의 방위청장관은북한측의 좌절감이 커질 경우 그들이 비이성적인 행동으로 나올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북한측은 이같은 지적과 예측을 그들에 대한 경고와 질책으로만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겸허한 반성의 소재로 삼아야 할 줄 안다. 우리는 노태우대통령이 지적했 듯이 북한의 혼란과 고립을 원하지 않는다. 또 그들이 정말로 무력통일노선을 포기한다면 주한미군사력뿐 아니라 우리의 군사력도 조정할 수 있다고 노대통령은 언명했다. 북한은 이를 받아들여 과감한 개방과 변화를 꾀해야 할 것이다. 동서독과 남북예멘이 보여준 국가통일의지와 노력을 북한은 배워야 한다. 평화통일이란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받아들여 평화공존을 하다가 신뢰와 여건이 조성됐을 때 가능하다는 교훈을 그들은 우리에게 일깨워 줬다. 민족문제 해결에 있어 더없이 좋은 기회와 여건이 성숙돼 있다. 남은 것은 북한의 선택뿐 이다. 이제 그들 차례인 것이다.
  • 한ㆍ소 정상회담 이후의 과제/한승조 고려대교수ㆍ정치학(특별기고)

    ◎“북방외교는 내치가 밀어준다” ○억센 행운 지난 한소 정상회담과 그를 이은 한미 정상회담의 연속적 성공으로 노태우대통령은 예사롭지 않은 행운의 향수자임을 다시 증명하였다. 그는 언제나 정치적 궁지로 몰릴 때마다 그 입지를 살려주는 사건이 생겨서 살아나곤 하였다. 87년 대통령선거때도 끔찍한 KAL기 폭파로 그의 입지가 보강되었다. 대통령취임후에도 여소야대의 정국으로 몰렸지만 88년 서울올림픽의 성공이 야당의 공세를 지연시켜 주었다. 89년의 중간평가문제와 5공비리문제로 인한 궁지가 야권내부의 경쟁격화와 대립,그리고 보선에서의 여당승리로 모면되었다. 금년 봄의 총체적 난국으로 인한 정치ㆍ사회불안을 벗어나게 해준 것이 6월4일과 7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한소ㆍ한미 정상회담임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또 한편 생각해 보면 이것은 단순히 노태우대통령 개인의 운수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요행에서 요행으로 이어지는 이 나라 이 민족의 국운 때문일 것 같다. 하기는 요행으로 보이는 것조차 사실은 누군가의대단한 정치적 경제적 대가와 큰 희생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노태우대통령은 선임자들 노력의 열매를 거둬들이는 입장에 있었을 뿐이다. 금년 봄의 난국도 5월위기와 6월항쟁으로 이어질 때 민자당 정권이 치명타를 입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불안요인을 말끔히 씻어주고 국민을 희망적 기대에 부풀게 만든 것이 한소ㆍ한미 정상외교의 효과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잘되는 나라는 엎어져도 소득이 있는 모양이다. ○연쇄회담의 성과 이번 한소 정상회담은 한편 노태우대통령이 역점사업으로 추진해 오던 북방정책의 소산이다. 또 한편으로는 60년대 이래로 박ㆍ전정권의 역점사업이었던 경제개발정책과 서울올림픽의 성공이 가져온 결실이다. 한국과의 경제협력과 그것이 가져올 수 있는 이익이 소련 고르바초프대통령으로 하여금 노태우대통령에게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나자는 제의를 하게 만든 원인이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양국의 정상회담의 의의를 애써 외면하려고 든다. 첫째 소련은 한반도분단에 책임이 큰 나라이다. 더구나 북한을 앞세워서 한민족안의 분열과 적대행위를 조장하였다. 또 KAL기 격추사건으로 수많은 인명도 살해하였다. 이에대한 사과ㆍ배상도 받음이 없이 왜 서둘러 국교를 정상화하는가. 둘째 한 나라의 국가원수가 정상적 외교프로토콜도 무시하고 외국여행중의 다른 국가원수의 제의를 받고 허둥지둥 만나러 가는 것은 체통없는 행위가 아닌가. 셋째 고르비가 북한에 영향력도 적고 또 국내 지지기반도 약하므로 언제 권좌로부터 물러나게 될지 모른다. 그런데 왜 무엇때문에 거액의 경제원조를 약속하면서 그를 만나려고 했는가. 이것이 모두 정권생명을 연장하려는 짓들이 아닌가. 그외에도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이들은 대체로 현정부에 적대적인 좌파세력이 아니면 냉담한 우파들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민들은 이번 연쇄적 정상외교에 획기적인 의의를 부여하며 높이 평가한다. 도리어 건국후 처음있는 역사적 쾌거로 환영한다. 그리고 외국의 매스컴에서 크게 다루어주는 것을 흐뭇해 한다. 국민이 기뻐하는 논거는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세계의긴장완화와 화해무드가 한반도에도 미쳤다는 것이다. 이런 화해무드는 남북한의 평화통일을 촉진할 수가 있으며 이 때문에 평화통일의 전망이 밝아졌다. 둘째 그동안 적대관계에 있었던 두 나라가 상호의존ㆍ협력하는 관계로 발전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고 있다. 한소의 긴밀한 협력은 한반도의 분단을 극복하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이다. 셋째는 그동안 미,영등 자유진영에 편향되어 있었던 종속적 외교관계에서 탈피하여 공산권을 포함하여 전방위적 자주외교를 할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넷째는 이러한 한국의 지위상승이 자주성 확대,대미관계와 기존 자유우방과의 관계를 조금도 변화시킴이 없이 도리어 그들의 지지와 축복를 받으면서 추진할 수가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북한이다. 노­고 회담에 충격을 받은 북한은 일시적이나마 더욱 강경한 노선을 추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래 보았자 별로 소용없는 짓들이다. 북한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긴장완화와 화해의 바람에 거역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바람과 파도에 올라 타야만 한다.이것이 한국을 비롯한 모든 인접국가들이 바라는 우리의 정책목표일 것 같다. ○앞으로의 과제 첫째는 내치를 바로잡는 일이다. 후진국의 정치지도자들은 내치가 잘 안될 때마다 외교문제에 국민의 관심과 욕구를 외부로 배설하고자 국제적 갈등을 야기하나 외교에서 공적을 세우려고 시도하기 일쑤이다. 그러나 건실한 내치에 뒷받침되지 않는 외교적 성공은 지속될 수가 없다. 한국이 공산국가들보다도 훨씬 풍요롭게 살고 있다고하나 과연 공산국가나 신생국들이 찬양하고 배울만한 나라인지 다시 한번 반성하고 그 시정책을 찾아내야만 한다. 둘째는 국민화합과 단결의 과제이다. 이것없이 한국의 외교목표는 달성될 수가 없다. 더구나 여야가 싸우는 극한적 상황에서는 기대할 수가 없으므로 국민들간의 자생적 노력으로 추진되는 민간주도적인 국민운동이 요망된다. 민주화나 복지사회건설은 물론 평화통일 역시 그 예외일 수가 없다. 셋째 이 국민운동의 리더십을 위한 핵심조직이 형성되어야 한다. 그 조직은 정부ㆍ여당은 물론 야당ㆍ재야세력으로부터 독립해야 하며 도리어 이들에게 주문도 하고 협조도 할 수 있어야 한다.
  • 6월의 전쟁과 평화/이재근 논설위원(서울칼럼)

    미국은 아직까지 15년전의 월남전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교전 당사자간의 정치적 협상에 의한 종전이며 미국으로서는 그에 따른 전략적 철군인 것이다. 건국이래 나라밖의 어떤 전장에서건 결코 패배해 본적이 없다고 자랑하는 미국이지만 그들에게 월남전은 두번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수치스러운 전쟁일 수 밖에 없다. 그러한 미국에 있어 40년전 6ㆍ25 한국전쟁은 어떤 것인가. 「한국전쟁을 가리켜 『이상한 시기에 이상한 장소에서 이상하게 일어난 전쟁』이라고 지적한 이가 있었다. 그럴듯한 표현같지만 기실 그것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전쟁자체가 정상이 아닌 비상이며 이상인 까닭이다. 오늘의 미국을 대표하는 부시대통령의 6ㆍ25관은 이러하다. 『한국전은 공산주의의 조류를 최초로 되돌린 전쟁이었으나 역사에 의해 종종 무시되어 「잊혀진 승리」로 불려진다』「잊고 싶은 전쟁」(월남전)과 「잊혀진 승리」(한국전)란 표현은 그들이 밖에서 치른 전쟁이란 한 「대상」의 앞뒤면을 설명해준다고 해도 좋다. 해방후 한반도 북쪽에서 김일성이 손쉽게 한 정권을 창출할 수 있었던 이유를 현대사가들은 다음 4가지로 꼽는다. 즉 첫째 뛰어난 공산주의자들은 모두 서울에 모여있었다. 둘째 다른 당파들은 서울이나 평양에서 모두 분열,쟁투하고 있었다. 셋째 그가 북의 군과 정보를 장악했다. 넷째 소련 진주군이 그를 한가닥으로 밀었다는 점 등이다. 그 정도의 호재를 갖는 여건위에 남한에서 미군마저 철수하자 그 힘의 공백을 틈타 김일성은 남침을 감행할 수 있었다. 사실이 그러한 터에 지금에 와서 6ㆍ25가 「민족해방전쟁」이며 「북침에 의한 것」이거나 「남침을 유도하기 위한 도발전」이라는 검증될 수 없는 가설이 한때나마 유행처럼 언설됐던 것은 객관적으로도 결코 수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북한 「인민군」에 의해 서울이 함락된 것은 6ㆍ25 사흘후인 6월28일 이었다. 그래 세상에 어느 멍청한 정권이 자기네 수도가 사흘만에 거꾸로 적의 수중에 떨어질 정도의 모험을 안고 「침략전쟁」을 일으킨단 말인가. 대개 무기를 갖고는 평화를 얘기하기 못한다. 인간의 정신과 의지만이 평화를 만들 수 있다. 그 평화는 헌장이나 협정만으로는 뿌리를 내릴 수 없다. 사람과 사람들의 마음속에 정착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전쟁에 대한 증오에 앞서 평화에의 간절한 소망과 기대 속에서 만나고 다짐해야 한다. 이 화사한 성장의 계절에 왜 6ㆍ25를 얘기하는 가는 묻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 전쟁을 다시 하지 않기 위해 전쟁에 대비해야 하는 모순의 논리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국가와 민족의 분단상태가 해소되지 않고는 해마다 6월에 우리들은 전쟁과 평화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에 대비하라는 경구가 있다. 상대가 문제해결 수단으로 무력을 택한다면 군축이나 협상에 의한 평화유지는 어렵다. 그렇다면 전쟁수행 능력을 기르지 않을 수 없다. 옛말에 일렀다. 나라가 비록 크나 싸움을 좋아하면 반드시 망하고 천하가 비록 편안하나 싸움하는 방법을 잊으면 반드시 위험하다(국수대 호전필망 천하수안 망전필위). 평화를 얘기하고 전쟁을 논할즈음 「좋은 전쟁」이니 「나쁜평화」니 하는 말은 의미가 없다. 전쟁은 전쟁이고 평화는 평화일 뿐이다. 평화와 전쟁,전쟁과 평화는 흔히 대립개념으로 보기 쉽다. 그러나 평화에 대한 평균적인 이미지를 살펴보면 그둘은 반드시 대립개념은 아니다. 교전 당사자간의 투쟁을 전쟁이라 할 때 전쟁의 개념은 명백해지지만 평화의 개념은 그렇지 못하다. 평화란 전쟁과 관련되면서도 매우 추상적인 데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중세유럽에서의 평화개념이 오히려 오늘의 그것보다 더 명료하다. 즉 『일반적으로 어느 지역이 평화롭다는 것은 그 지역민중이 공유하는 환경의 이용가치가 외부의 폭력적 간섭으로 손상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중세적 개념의 평화란 단순히 영주간에 전쟁이 행해지고 있지 않은 상태가 아니라 민중이 자신의 문화를 유지해 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물질적ㆍ정신적 기반 즉 「생존의 보호」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직접적인 전쟁의 상흔이외에 6ㆍ25가 우리에게 남긴 더큰 상처는 분단의 굴레를 우리민족 가슴속에 깊이 내면화 시킨데서 더나아가 전쟁과 평화,평화와 전쟁에 대한 위기적 인식을 생활화 시켰다는 점이다. 그나마의 「생존의 보호」가 언젠가 송두리째 파괴될지도 모른다는 전쟁신드롬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판문점ㆍ휴전선ㆍ국립묘지와 저 소모적인 콘크리트 장벽 논쟁ㆍ땅굴 등 6ㆍ25의 전쟁적 실체들을 보면서 우리들은 지금 이 평화적 생존의 보호에 대해서는 언제나 초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요즘 모두들 이제 한반도에서 전쟁의 그림자가 사라져가고 있다고들 얘기한다. 6ㆍ25때와는 상황이 다르다는 것이다. 1950년 6ㆍ25당시 소련에 있어 한국은 미국의 대소전방 기지였다. 원래 북한정권의 수립을 직접 주관했고 한국전쟁에서도 북한을 지원했던 그 소련의 대통령이 한국의 대통령을 만난 것은 소련이 더이상 한국을 미국의 대소전초기지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럴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쪽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자연의 산세는 골이 깊어 수림이 무성하다지만 인간사에선 상처가 크면 치유도 오래갈수밖에 없다. 6ㆍ25가 아직도 그 자체로서 역사적 인식이나 평가 또는 전쟁사적 해석에 있어 미진한 채로 남아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하여 6ㆍ25의 피맺힌 상처는 우리가 그것을 한과 증오의 대상으로서 보다 민족과 역사의 교훈으로 살려야만 치유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들은 그래서 6월엔 아무래도 전쟁과 평화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한반도의 「2+4」(사설)

    노태우대통령이 한소및 한미간의 연쇄적인 정상회담을 마치고 8일 귀국했다. 한반도의 평화기반 구축을 위해 최선을 다한 노대통령의 노고와 그 성과를 높이 평가한다. 우리는 이제 지금까지의 진행과 결과를 냉철하게 다시 점검하고 후속대응조치를 통해 우리가 바라는 방향으로 여건을 성숙시키는데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그 방향은 당연히 한반도의 통일이라는 국민적 염원에 맞춰져야 할 것이다. 사실 이번의 외교적 성과는 밭에 씨를 뿌린것에 불과하다. 이를 싹틔우고 잘 자라게 하는 일이야말로 이제 맡겨진 과제이다. 이같은 과제를 제대로 풀어나가야 열매를 딸 수 있다는 점에서 분발을 요청하는 것이다. 외교는 외교대로,내정역시 내정대로 하나하나씩 난제를 풀어나감으로써 보다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이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최근의 연쇄 정상회담이 가져온 가장 큰 성과는 주변여건과 분위기의 조성이다. 동서해빙이 급격히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북한간의 긴장이 풀리지 않는 상황에서 시도한 정부의 북방정책과 정상외교는 국제정세의 흐름을 바로 보고 여기에 순응한 결과로써 주변정세를 우리 힘으로 상당부분 바꿔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해 주었다. 노대통령과 한소 정상회담에서 설명 한 바와같이 북한이 문을 꼭꼭 닫고 있기에 그 우회로로서 소련을 거치기로 한 것은 적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반도주변 여건이 아직 무르익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렇게되기 까지에는 아직 많은 시일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구도는 한소 정상회담이후 전문가들 사이에 급격히 제기되고 있는 「2+4」가 될 수밖에 없다. 「2+4」는 독일의 통일과 관련하여 이미 제기된 방식으로 아주 생소하지는 않다. 2개의 분단 당자자와 영향력있는 주변 4개국의 협의와 협력으로 통일을 이루려는 방식이다. 우리도 남북한과 주변 4강,즉 미ㆍ소ㆍ일ㆍ중의 6자 협의로 평화를 유지하고 통일을 이루는 과정으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독일이 걸어온 길을 잘 살펴서 우리의 문제에 원용하는 지혜를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의 형편과는 전혀 다르게 독일은이미 통일을 눈앞에 두고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경우를 보면 「2+4」라지만 당사자인 동서독의 관계가 긴밀하고 통일의 의지가 높기 때문에 오히려 주변 4강을 설득하며 끌고간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문제는 이와 반대로 남북 당사자간에 긴장과 불신의 벽이 높다는 것이다. 따라서 독일의 경우에서 우리가 얻는 교훈은 남북간의 관계개선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제 우리는 남북간의 대화 교류 협력을 위한 실마리부터 잡아 풀어나가야 한다. 북한도 이제 폐쇄만을 고집할 수 없도록 주변여건이 변하고 있다. 이 변화를 주도한 것이 북방정책이고 그 중요한 성과가 이번 정상외교에서 나타난 것이지만 이제는 한걸음 더나가야 한다. 최근 북한이 군축을 제의하고 대화의 당위성을 제시해온 바 있다. 아직은 선전적 차원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를 능동적으로 수용하는 방안을 모색해 봄직하다. 우선 통일의 주역은 남북 당사자라는 인식 속에서 주변 4강과의 관계개선과 협조를 얻는 노력을 병행시켜나가야 할 것이다.
  • 노대통령 귀국인사

    저는 부시 미국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과의 회담을 통해 더 나은 세계와 우리나라의 더 밝은 앞날에 대한 믿음을 갖고 귀국하게 된 것을 무엇보다 기쁘게 생각합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진 고르바초프대통령과의 회담은 세계 관심의 초점이 된 만큼 우리 모두의 운명과 직결된 역사적인 만남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이 세계에서 냉전체제로 인한 마지막 분단국으로 남았습니다. 이제 한반도에 냉전의 시대를 종식시킬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저와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은 동유럽과 세계에 넘치고 있는 개방과 협력의 물결이 이제는 동북아시아에 미쳐야 하며,냉전으로 얼어붙은 한반도의 동토에 화해의 봄을 오게 해야 한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습니다. 저와 고르바초프대통령은 세계가 변화하고 있는 속에 두 사람의 만남 자체가 한반도를 에워싼 냉전의 시대를 바꾸고 있다는 데 뜻을 함께 했습니다. 우리는 한소 두 나라 정상간의 만남으로 양국 관계정상화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확인하고 멀지않은 장래에 완전한 수교관계를 이룰 것에 합의하였습니다. 한소 양국은 이제 정치ㆍ경제ㆍ과학기술ㆍ문화… 모든 분야에서 협력관계를 더욱 발전시켜 나갈 것입니다. 한소 양국간의 협력관계 발전은 한반도에 전쟁의 위협을 줄이고 안정과 평화를 굳힐 것입니다. 저는 고르바초프대통령에게 우리는 결코 북한의 고립을 원치 않으며,북한은 우리와 함께 발전을 이루는 협력의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한소 양국관계의 발전은 한반도의 통일을 여는 관건이 될 것입니다. 저와 고르바초프대통령은 이제 그 돌파구를 열었습니다. 우리는 결코 조급하거나 서두르지 않고,그렇다고 시간을 낭비하지도 말고 한소관계를 성숙시켜 나가자고 하였습니다. 고르바초프대통령과의 만남은 처음이었으나 우호적이고 정중하였으며 우리는 모든 문제의 핵심에 관해 기탄없는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저는 워싱턴에서 부시 미국대통령과 만나 미국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한소 정상회담을 지지하고 지원해 준 데 대해 사의를 표명했습니다. 부시대통령도 한소 정상회담이 동북아시아의 안정과 한반도평화에 크게 기여하게 될 것이라는 확언을 밝혔습니다. 우리는 소련과 동유럽의 개혁이 성공하도록 지원해 나가는 것이 자유와 평화의 증진을 위해 도움이 될 것임을 확인하고 한미 두 나라가 이를위해 긴밀한 협조를 계속해 나갈 것을 다짐했습니다. 지난 보름간의 짧은 기간에 저는 일본ㆍ소련ㆍ미국 세 나라와 연쇄적인 정상회담을 가졌습니다. 한반도의 분단은 우리가 풀어야 할 세계의 공동과제가 되었습니다. 미국과 소련은 이제 한반도문제의 자주적 해결과 한국의 적극적인 역할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강대국이 우리의 통일에 장애가 되었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북한은 폐쇄노선으로부터 하루빨리 개방으로 나와 우리와 함께 남북간에 화해와 통일의 길을 열어가야 합니다. 북한의 김일성주석은 우리의 거듭된 남북 정상회담 제의를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저의 일본방문이 과거를 정리하고 새로운 선린우호를 다진 것이라면 한미 정상회담은 현재를 더욱 굳건히한 것이며 한소 정상회담은 우리 모두의 미래를 여는 회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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