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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화시대 도래”ㆍ“새강국등장”…엇갈린축하와 우려/「통독」각국반응

    ▷강대국◁ 부시 대통령은 3일 독일은 지난 40여년동안 민주주의에 대한 헌신을 우방들에 보여줬다고 칭찬했으며 제임스 베이커 미 국무장관은 『신시대가 독일에서,또 유럽에서,그리고 우리가 진실로 바라건대 전세계에서 열리고 있다』고 선언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은 『슬픔을 극복하고 과거의 피해를 기억하며 죽은자들을 기리면서 편견과 위협에 굴복하지 않고 독일문제의 평화적이고 가치있는 해결을 위해 노력한 소련ㆍ독일의 모든 국민에게』감사한다고 말했다. 독일과 함께 패전국이 됐던 일본의 가이후 도시키(해부준수) 총리는 독일통일이 『새로운 질서를 잡아가는 유럽역사의 전환점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했으며 일본의 아사히신문은 『유럽인들중 독일의 재전쟁 도발가능성을 우려하는 사람들은 극소수』라고 보도했다. 한편 프랑스 정계지도자들은 공식적으로는 통독에 대해 박수를 보냈지만 프랑스 바로 옆에 정치ㆍ경제적 거인이 존재한다는 것이 다소 꺼림칙하다는 반응. 영국의 대처 총리는 통일독일에 대해 「따뜻한 축하」를 전달했으나 언론들은 독일에 대한 감시의 필요성을 주장. 중국 관영 신화사통신은 분석기사를 통해 독일통일은 미소의 약화로 인한 다원적세계의 발전에 더욱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그러나 파업과 데모,기업파산,실업 등이 「사회적 대변동」을 야기할 경우 독일은 유럽에서 불안정의 근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경고. ▷주변국◁ 2차대전 당시 6백만명의 사망자를 낸 폴란드의 보이체흐 야루젤스키 대통령은 『이 역사적인 순간,나는 독일이 세계 모든 국가들의 독일에 대한 신뢰,특히 주변국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하고 『독일 통일이 유럽 대륙의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믿는다』고 강조. 바츨라프 하벨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은 통독을 「전쟁의 최종적 마무리」라고 지칭하고 『부자연스러운 독일의 분단은 유럽의 동서 양분과 같이 이제 과거의 문제가 됐다』고 선언했다. 또 나치치하에서 엄청난 피해를 당했던 네덜란드의 루드 루버스 총리는 통독이 유럽공동체(EC)의 힘을 강화시키는 것은 물론 동서간의 긴장을 완화시킬 것이라고 말하고 『우리가 전쟁후 유럽민주주의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기 때문에 역사의 반복을 막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낙관.
  • 통일독일 새 출범/분단 45년 종식… 동독 소멸

    ◎전독의회,베를린서 첫 회의/초대 총리에 콜… 「동쪽 인사5명」 입각 【베를린=이기백 특파원】 동서독이 지난 45년간의 분단을 극복하고 하나의 독일로 재탄생했다. 서독은 3일 새벽 0시를 기해 동독을 흡수통합했고 하나가 된 통일독일은 현재의 서독 국명인 독일연방공화국으로 새롭게 출범했다. 동서독은 이날 0시 새 수도가 된 베를린시 중심가 의사당 앞 광장에서 통일독일의 초대총리가 된 헬무트 콜 총리와 로타르 드 메지에르 동독 총리 등 동서독의 주요 지도자와 1백만명의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역사적인 기념식을 갖고 대형 독일 3색기를 게양,동서독의 통일과 독일의 출범을 선포했다. 이어서 4일 상오에는 구 제국의회 의사당에서 서독의원 5백19명,동독의원 1백44명 등 양독의원 6백63명이 참석한 가운데 통일독일의 첫 의회가 개원됐다. 이날 첫 의회에서 드 메지에르 전 동 독총리 등 5명의 동독 각료가 무임소장관으로 취임선서함으로써 통일정부가 공식 출범했으며 콜총리는 첫 연설에서 통일독일이 서방세계의 일원임을 강조하면서 세계평화에 이바지할 것을 다짐했다. 통일독일의 출범이 선포되던 3일 새벽 0시 독일전역의 성당과 교회에서는 「자유의 종」이 울려퍼졌다. 베를린시가지에 쏟아져 나온 시민들은 새 독일국가로 결정된 구서독 국가 제3절을 합창했고 수만발의 폭죽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미영불소 등 전승 4개국은 이날 독일의 통일을 알리는 기념식 전의 자유의 종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베를린에 대한 관할권을 공식적으로 독일측에 이양,독일의 통일을 받아들였다. 이로써 독일은 인구 7천8백만명,국토면적 35만7천㎢의 대국으로 등장했다. 독일은 오는 12월2일 전독총선을 실시,의회를 구성할 예정인데 그때까지 헬무트 콜 서독 총리가 통일독일의 총리직을 맡는다. 독일지도자들은 이날 세계지도자들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그들의 강력한 새 국가가 평화를 위해 노력할 것임을 다짐했으며 그들의 동포들에게는 나치의 과거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베를린 외곽의 슈트라우스버그에서 벌어진 식전에서 게르하르트 슈톨텐베르크 국방장관은 새로 흡수된 군인들에게이제 그들이 나토(북대서양조양기구)의 일원이 됐다고 말했다. 구동독 인민군은 이날 정식으로 전서독군에 흡수되어 새로운 전독군의 일부가 됐다. 한편 독일정부 대변인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독소 우호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오는 11월초 독일을 방문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독의 11개주에 동독의 5개주가 흡수돼 모두 16개주로 구성되는 통일독일은 유럽 거대국가로 새롭게 자리잡게 됐다.
  • 한ㆍ소 외무회담서 오간 얘기들

    ◎“유엔가입문제 북한 설득을” 한/“한ㆍ소 만남이 아ㆍ태안정 시작” 소 한ㆍ소 외무장관 회담은 1일 낮 12시15분경에 시작,곧바로 실질토의에 들어가 약 35분동안 진행됐다. 다음은 회담에 배석했던 정의용 외무부대변인이 밝힌 한ㆍ소 양국 외무장관의 대화내용이다. ▲최호중장관=오늘 우리의 회담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셰바르드나제장관=오늘은 역사적인 날이다. 우리의 만남은 아ㆍ태지역 평화와 안정을 위한 시작이 될 것이다. 지난번 양국 정상간의 샌프란시스코 회담은 단순한 상징에 그치는게 아니라 경제ㆍ통상부문에서 시작된 양국관계가 이렇게 정치적 차원의 유익한 회담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유도한 근거가 됐다. 이제 남한이라는 요인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세계평화와 안보를 논의할 수 없게 됐다. ▲최장관=수교 발효시기에 대해 귀측은 내년 1월1일로 하자고 얘기하고 있는 데 오늘 이렇게 만났으니 바로 국교를 수립하는게 어떠냐. ▲셰바르드나제장관=비록 내년 1월1일에 수교가 발효되더라도 법적으로는 오늘을 수교일로볼 수 있지 않느냐. ▲최장관=국교수립이라는 좋은 일을 하는데 지연시키거나 주저할 필요가 없다. 특히 아동정상회의가 열리는 날에 맞춰 한ㆍ소간 외교관계가 시작되는 것은 더욱 뜻깊은 일이 될 것이다(여기서 최장관은 수교시기와 관련한 우리측 입장을 강하게 피력했다고 정의용대변인이 설명). ▲셰바르드나제장관=좋다. ▲최장관=그럼 공동 코뮈니케문안을 수정하자(이에 셰바르드나제 장관은 문안을 가져오게 해 자신이 직접 수교일자를 9월30일로 수정). ▲셰바르드나제장관=우리가 제일 먼저 할 일은 대사관을 세우는 일이다. 방문시기는 앞으로 대사관이라는 정상적 외교경로를 통해 논의하자. ▲최장관=아울러 우리는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방한을 희망한다. 노대통령도 적절한 시기에 모스크바를 방문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셰바르드나제장관=정상들의 교환방문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찬성한다. 그러나 방문시기는 정상들의 사정도 있을 수 있는 만큼 일단 귀국해서 외교경로를 통해 협의하자. 오늘 우리의 수교결정이 남북관계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유엔가입문제는 남북간에 협의해서 결정하는 게 바람직할 것이다. ▲최장관=오는 10월16일 평양 고위급회담에서 유엔가입문제가 논의될 것이다. 소련도 유엔가입의 보편성원칙에 따라 북한을 설득해 달라. 이번 유엔총회에서도 많은 나라 대표들이 우리의 유엔가입을 지지하고 있는 사실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셰바르드나제장관=총리회담에서 북한의 입장을 다시한번 명확히 확인해라. 남북분단은 인위적인 것인 만큼 꼭 통일이 되기를 바란다.
  • 통일촉진 기대/여야,한소 수교 환영

    여야는 1일 한소 외교관계 수립을 환영하는 논평을 각각 발표했다. ▲박희태 민자당 대변인=한소간 국교가 단절된 지 근 1백년 만에 다시 외교관계를 회복하게 된 것은 역사적으로 큰 의의가 있는 일이다. 이번의 한소 관계정상화가 양국의 공동번영과 경제발전,나아가 남북 관계발전 및 통일에도 큰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한다. ▲김태식 평민당 대변인=1세기 만의 한소 수교를 환영하며 이번 수교가 한반도뿐만 아니라 동북아 평화에도 크게 이바지하길 기대한다. 한소·북일 수교 추진을 남북한 당국이 상대를 고립시키려는 방향으로 악용해서는 안될 것이며 남북은 미·일·중·소와 다같이 수교하되 오는 남북총리회담의 주의제로 상정해 진지하게 다루기를 바란다. ▲장석화 민주당 대변인=우리는 한소 수교가 불행했던 85년간의 한소 단절사를 청산하고 동북아의 냉전종식을 알리는 서곡으로서 양국간의 우호와 협력의 새 전기를 마련하는 역사적 출발이 된다는 뜻에서 크게 환영한다. 남북한 관계의 획기적인 변화 및 한중 수교를 촉진하는 새로운 계기가될 것으로 기대한다. ▲정문화 민중당(가칭) 대변인=지속되어온 동북아와 한반도의 냉전질서를 청산하고 긴장완화와 평화공존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역사적 사건으로 이를 환영한다. 한소 수교는 그러나 북한과 미국의 관계개선을 도모하고 한반도의 군축과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분단고착이 아닌 평화통일에 이바지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 수교 이후 양국 관계 전망(한·소 새 출발:1)

    ◎서울­모스크바 아태 시대의 파트너로/「45년 적대 해소」의 법적 절차 마무리/4강 역학 변화… 동북아 안정에 기여 한소 양국은 「수교 고속도로」를 따라 쾌속 주행하게 됐다. 1일 새벽 유엔본부에서 양국 외무장관이 수교합의 공동코뮈니케에 서명하고 이날부터 즉시 발효한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전후 45년동안 국제정치적으로나 이념면에서나 적대관계에 있던 한국과 소련은 이날부터 우방으로서 선린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는 법적 절차를 마무리한 것이다. 앞으로 한소 관계는 수교라는 기폭제로 인해 정치외교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급진전될 것으로 보이며 점차 가속력을 더해갈 것으로 생각된다. 우선 정치외교적으로는 이달중 서울과 모스크바에 대사관을 교환설치하게 될 것으로 보이며 노태우 대통령의 방소가 11월중에 이뤄질 가능성이 크게 높아졌다. 10월 대사관 상호개설→11월 노 대통령의 방소 시나리오가 현실화된다면 뒤 이어 내년 봄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방한과도 연결될 수 있기 때문에 한소 관계는 질주할 것으로 보인다.노 대통령의 방소 정지작업을 위해 최호중 외무장관이 이달 말이나 11월초 모스크바 방문을 고려하고 있으며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도 고르바초프 대통령에 앞서 연말이나 내년초 서울을 방문,양국 우호분위기를 더욱 성숙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경제협력면에서는 이달 26일로 예정된 한소 정부대표단의 2차 서울회담에서 그 대강이 타결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동안 양국간의 최대 관심사항이었던 경협규모 확정을 비롯,경제교류·협력의 제도적 장치인 투자보장,2중과세방지협정도 체결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더욱이 수교 발효시기가 당초 소련이 복안으로 가져왔던 「내년 1월1일부터」에서 「코뮈니케 서명 동시 발효」라는 우리의 희망에 부응하게 됨으로써 우리의 대소 경협도 자질구레한 유보없이 우리 능력범위안에서 깨끗하게 타결지을 것 같다. 따라서 한소 양국은 새로운 동반자관계를 구축,한국의 대소 투자·진출,자원공동개발,소비재를 중심으로 한 상품차관,연불수출 등이 활발하게 이뤄질 것으로 관측된다. 한소 수교를 양국 관계로서만파악해서는 동북아의 새 질서재편이라는 차원에서 조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것이 갖고 있는 국제정치 역학적 측면을 간과하기 쉽다. 이런 의미에서 한소 수교는 첫째 동북아의 국제정치 구조를 진영체제에서 세력균형체제로 전환시키는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이는 전후 북한­중국­소련 대 한·미·일이라는 냉전구조 아래의 진영체제를 허물어뜨리는 한편 소련의 남북한 균형정책 구사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동시에 최근 일·북한 관계급진전과 관련시켜 볼 때 이같은 세력균형체제로의 전환은 더욱 뚜렷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둘째 남북한 관계에 있어 소련은 「각자의 제3국 관계에 결코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공동코뮈니케)이라고 명시되어 있듯이 북한과의 기존동맹 관계는 계속 유지하면서도 한국과는 경제협력의 파트너로서의 관계에 중점을 둘 것으로 전망된다. 소련이 우리와 수교함으로써 소·북한 관계는 내면적으로 상당히 냉각될 것이고 특히 북한의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남북대화에 있어 신경질적인 거부반응을 나타낼 가능성이 크다.물론 이는 단기적인 현상일 것으로 생각되나 중·장기적으로 보면 한소 수교는 북한에 「두개의 조선」 반대라는 분단고착화 논리의 전면수정을 강요케 할 것이며 또한 남북대화에 진지하게 임하도록 해 결과적으로 남북한 긴장완화,북한의 개방에 중요한 촉매제 역할을 할 것으로 분석된다. 셋째 한중 관계개선과 관련,중국이 북한의 집요한 견제를 한소 수교의 현실화를 빌미로 상당수준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대중국 관계개선의 행보가 상당히 빨라질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미 그 징후가 나타났지만 북한은 한국의 대소 수교라는 북방정책의 최대결실을 상쇄시키기 위해 대일 관계개선을 매우 서둘러 진행시킬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으로 한소 수교는 한반도주변 4강간의 새로운 역학관계 모색의 시발점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아시아·태평양세력의 일원으로 화려하게 등장하려고 하는 소련으로서는 한소 수교를 징검다리로 해서 내년엔 일본과 북방 영토문제를 타결,아태지역에서의 지분을 확실히 담보해 두자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소 수교는 양국 협력관계 기밀화에서부터 동북아의 질서재편 한반도주변국간의 균형모색 등 많은 변화의 요소를 몰고 올 것이 틀림없다. 우리의 북방외교의 궁극목표가 북한의 개방,한반도 평화정착 및 통일조국의 달성에 있다고 할 때 한소 수교가 여기에 긍정적이고 능동적인 기여를 할 수 있도록 주도면밀한 후속조치는 물론 미일 등 기존 우방국과의 관계도 더욱 다져나가야 할 것이다.〈이경형 기자〉
  • 한반도 냉전탈피의 큰 걸음 내딛다

    ◎역사적 수교… 해외 시각/남북총리회담 때 평양반응 주목 일/한국의 유엔 단독가입에 큰 도움 미 ○일본 【도쿄=강수웅 특파원】 한국과 소련의 국교수립 합의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동북아시아의 긴장완화를 위해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일본의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아시아의 신 질서」를 가속화시키는 것이며 앞으로 북한과 일본의 국교정상화,한국과 중국의 무역사무소 상호 설치,미국과 북한의 관계개선 등과 함께 사실상의 남북한 교차승인을 기정사실화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아사히(조일)신문은 『한소 국교수립은 지난 6월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정상회담에서 원칙적으로 합의된 사항이기는 하나 급템포로 이루어진 국교정상화 합의는 한반도 냉전구조를 해빙시키는 확실한 일보』라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양국 관계는 앞으로 경제를 중심으로 각 분야에서 한층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한소간의 무역량은 지난해 약 6억달러에 달했으나 올해는 상반기중 3억6천만달러로 늘어났다. 양국의 무역·항공협정도 최근 가조인되었으며 다른 경제관계협정도 가까운 장래 체결될 전망이라고 지적하고 한국은 5∼10년 동안 약 20억달러의 차관 등을 소련에 제공할 방침이라고 보도했다. 이같은 흐름은 이데올로기보다 실리우선으로 움직여온 소련 및 동구의 개혁의 물결이 확실히 한반도에 밀려들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며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는 평양에서 오는 16일 개최되는 제2회 남북총리회담이 그 바로미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도쿄(동경)신문도 해설기사를 통해 『한·소 국교수립은 대일 국교정상화를 제의한 「평양충격」으로부터 불과 이틀 만에 나온 것이지만,이것도 또한차례 놀랄 만큼 빠른 템포로 실현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마이니치(매일)신문도 『이번 국교수립은 노·일전쟁에 의해 러시아와의 국교가 단절된 이래 85년 만의 일』 이라고 지적하고 『이것은 노태우 대통령에 의해 추진되어 온 북방외교의 최대의 성과』라고 말했다. ○미국 【워싱턴=김호준 특파원】 미국정부는 30일의 한·소 외교관계수립 공식발표는노태우 대통령이 그동안 적극적으로 추진해온 북방외교가 가시적인 결실을 맺은 것이며 동북아 정세 개선에 유익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미 국무부의 한 관계자는 30일 뉴욕에서 한·소 수교합의에 관한 공식발표가 있은 후 미국이 그동안 긴밀한 협의를 통해 한국이 소련과 중국과의 관계증진 노력을 지원해온 점을 상기시키고 이를 환영한다고 말했다. 한편 워싱턴 포스트지는 1일 한소 국교수립은 북한에 엄청난 타격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동북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한국이 위기에 몰린 소련경제를 북돋우는 데 무역과 투자를 통해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이번 국교수립은 한국에 대해서도 한국이 북한과 별도로 유엔 정식회원국이 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전망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또 한소 국교수립에 대한 북한의 반응은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북한의 제1외교부 부장 강석주는 지난주 『한소 국교수립은 남북대화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던 점을 지적,이틀전 일본과관계정상화를 위한 회담을 개최키로 했던 북한에 큰 타격이 예상된다고 보도했다. ○유럽 【파리=김진천 특파원】 유럽에서도 한·소 수교는 「하나의 사건」으로 비춰지고 있다. 소련의 대한 접근과 이에 따른 샌프란시스코 양국정상회담 등을 통해 한·소 수교는 벌써부터 예상된 수순으로 유럽에서는 받아들여져 왔다. 다만 빠르면 연말이나 내년 초로 내다봤던 유럽관계자들의 예상보다 다소 빨리 이뤄졌다는 것이 차이점일 뿐. 다분히 형식적이기는 하나 한·소 수교가 한반도의 평화,나아가 동북아의 평화안정에 기여할 것이며 아울러 남·북한 관계에도 모종의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라는 전망은 유럽에서도 보편적인 것이다. 그런 가운데 유럽의 지배적인 시각은 한국에 대한 정치적 관심이 미약한 탓도 있지만 한·소 수교를 한국측의 노력보다는 소련의 방향전환으로 관측하는 것이다. 서유럽은 대체로 한·소 수교를 긍정적이며 낙관적으로 보고 있다. ◎국내 각계의 기대·전망/단절의 한세기 청산… 한중접근에 연동효과/전방위 외교의 계기… 경협엔 신중 대처 필요 ◇노진식〈무역협회 부회장〉=경제인의 입장에서 시장개척의 돌파구가 마련됐다는 점에서 앞으로 상품교역과 플랜트 수출,합작투자 등 여러가지 면에서 소련과의 경협이 활성화될 것으로 생각한다. 문제는 대소경협이 신중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소련경제나 시장이 우리나라와 수교했다고 해서 당장 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박두복〈외교안보연구원 교수〉=한소 수교는 유럽에서의 냉전체제 붕괴가 이제 동북아에서도 시작된다는 것을 뜻한다. 한소 수교는 또 북한에 대해 대내개혁과 대외개방을 위한 큰 압력요인이 될 것이다. 따라서 북한도 앞으로 대서방 관계개선에 적극 나설 것으로 보이는데 이처럼 남북한과 주변강대국간의 관계가 발전하면 결국 교차승인의 현실화에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박영석〈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타의에 의해 단절됐던 한소 양국간의 국교관계가 8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의지로 다시 이어지게 된 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국교관계를 성립시킨 것에서 끝나서는 안되고,앞으로의 정책수행에 있어서 한층 더 신중하고 완벽한 자세를 견지해야 할 것으로 본다. 학문적 입장에서 그동안 어려웠던 노영지역에서의 독립운동관계 현지답사 등 독립운동사 및 한소 관계사 연구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박정수〈국회외무통일 위원장·민자〉=북방외교정책 추진 이후 최대의 성과로 평가한다. 한소 수교가 북한을 개방시키는 외부압력의 작용을 할 것으로 예상되며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촉진하는 데도 기여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재운〈변호사〉=6·25전쟁 및 남북분단의 원인은 소련에게도 있었다. 그동안 남북 긴장관계의 배후에는 역시 소련과 중국이 북한의 종주국으로 영향력을 행사했음은 물론이다. 이번에 소련이 우리나라를 국가로 인정,국교를 맺은 것은 우리의 국제적 지위향상은 물론 북한의 대남전략을 바꾸게 하는 데도 큰 계기를 제공할 것으로 본다.
  • 「분단 41년의 벽」누가 허물었나(새 독일 탄생:2)

    ◎꾸준한 교류가 조기통일의 길 열어/동구변혁을 양독 재결합 호기로 이용/대소 경원등 통해 주변국의 우려 불식 불과 1년 전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독일보다는 한반도의 통일이 먼저 이루어질 것이란 생각을 했다. 독일이 통일되는 것을 원치않는 주변 국가들의 입장을 지나치게 염두에 둔 생각이었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독일의 통일은 하루 아침에 누구도 거스릴 수 없는 대세가 돼 버렸다. 이렇게 거센 통일의 큰 흐름을 이루어낸 원동력은 과연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독일통일의 원동력을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한다. 하나는 소련을 시발로 동유럽 전역을 휩쓴 개혁과 개방의 흐름이 통독의 외적 장애요인들을 제거함으로써 독일통일의 움직임들이 비로소 가능케됐다는 설명이다. 또다른 하나는 통독을 기본적으로 동서독 국민들의 계속된 통일노력의 결과로 보는 시각이다. 물론 외적 환경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동독 국민들의 공산정권에 대한 저항,그리고 서독경제력에 대한 매력,여기에 덧붙여 양쪽 국민들이 꾸준히유지해온 민족적인 동질의식 등이 통독을 가능케한 주 원동력이었다는 것이다. 역사적인 베를린장벽 개방을 단행한 에곤 크렌츠 전 동독 공산당서기장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당시 소련이 자신의 장벽개방조치를 전혀 반대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이 통독을 기본적으로 「유럽공동의 집」이란 큰 테두리안에서 받아들이겠다는 입장이었다는 것이다. 소련의 이러한 입장변화가 없었다면 통독은 사실 극히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외적 환경의 변화를 감안하더라도 독일국민들이 한 역할이야말로 통일을 이루어낸 결정적인 원동력이었음을 부인키 어려울 것 같다. 제일 먼저 꼽을 수 있는 공로자들은 지난해 5월부터 반년여에 걸쳐 서방으로 탈출해나간 수십만의 동독시민들이다. 전재산과 생활기반을 하루아침에 버리고 떠남으로써 이들은 가까이는 베를린 장벽을 허물어냈고 멀리는 흡수통합이라는 독일형 통일방식의 기틀을 잡은 셈이 됐다. 이들의 탈출은 동독의 사회주의 40년이 실패했음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준 드라마였다. 10월과 11월 동베를린,라이프치히 등 동독 전역에서 벌어진 반정부 시위 또한 통독과정의 큰 분수령이었다. 수많은 반정부 단체들이 지하활동을 계속했고 동베를린의 알렉산더광장에서는 매주 월요일이면 공산당 타도집회가 개최됐었다. 반정부 집회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히 통일을 외치는 분위기로 바뀌어 갔다. 길거리에서 공산당 타도와 통일을 외치는 국민들의 요구는 동독정부는 물론 주변국 누구도 대항키 힘든 큰 힘을 보여주었다. 역사는 소수의 지배층이 아니라 국민의 힘에 의해 움직인다는 사실을 동독국민들은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동독국민들은 지난 3월 분단 이래 처음 실시된 자유총선에서 조기 통일을 슬로건으로 내건 우파연합에게 50%에 가까운 압도적인 지지를 보냄으로써 통일과정을 다시 한번 앞당겨 주었다. 당시 우파연합의 압승에 대해 장벽개방 후 날로 악화되는 경제사정에 지친 동독국민들이 서독 마르크화를 선택한 것이라는 분석들이 많이 나왔었다. 동독 마르크를 가능한한 1대1의 비율로 서독 마르크로 바꾸어 주고동독경제의 조속한 부흥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콜 서독총리의 지원유세가 크게 주효했다는 설명도 나왔다. 그러나 동독 유권자들이 공산정권을 몰아내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재야세력까지 제치고 우파연합에게 표를 몰아준 데는 이러한 경제적인 고려뿐만 아니라 당시 국내외 정세의 호기를 놓치지 않고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민족적인 공감대가 그들 사이에 널리 퍼졌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통독과정에서 동독국민들이 보여준 이러한 적극적인 역할을 근거로 어떤 학자들은 통독을 동독이 서독에 「흡수」된 것이 아니라 「가입」했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민족자결의 원칙에 입각해 장기적인 안목으로 통일을 위한 제도적인 뒷받침을 꾸준히 마련해온 서독정부의 노력도 크게 돋보인다. 서독은 독소 불가침조약,1975년 헬싱키 선언,그리고 동서독 기본조약 등에서 이 원칙을 관철,국경선이 민족자결 원칙에 입각해 평화적으로 변경(통일)될 수 있다고 명시했다. 이로 인해 통일은 서독 기본법 23조에 의거,동독이 서독으로의 편입을 선언함으로써 자동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게 됐다. 인적ㆍ물적 교류를 통해 사회적인 통합을 이루고 그 다음 경제통합,마지막으로 정치ㆍ군사통합을 이룬다는 서독의 기능주의적 통일정책이 결실을 맺었다고도 할 수 있다. 초기 서독정부의 통일정책은 이산으로 인한 양쪽 국민들의 인간적인 고통을 줄이기 위한 인적 교류에 모든 역점을 두어 왔었다. 동방 정책입안자들은 일찍이 동독정부는 통일을 원치 않지만 동독 국민들은 통일을 원한다고 판단,이같은 인적교류를 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72년의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 이후 이러한 인적,물적교류는 꾸준히 증가돼 왔다. 물적교류는 사실상 서독의 동독에 대한 경제원조의 성격이 강했다. 서독은 주택,도로건설,환경보호 등 앞으로 동독의 재건에 소요될 수천억 달러 상당의 소위 통일비용도 선뜻 부담하겠다고 나섰다. 동독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서독의 튼튼한 경제력 또한 통독의 무시못할 공로자인 셈이다. 독일의 분단은 지난 40여년간 동서냉전의 상징같은 성격을 같고 있었다. 이 냉전이 와해돼가는 과정에서 서독은 끝까지 소련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엄청나게 신중한 자세를 유지했다. 소련의 경제재건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고 동독 주둔 소련군의 철수비용까지 부담하겠다고 했다. 중부유럽에서 거대 독일의 등장에 대해 불안한 시선을 지우지 못하고 있는 주변 국가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배려도 돋보인다. 폴란드에 대해서는 현 독일­폴란드 국경을 준수키로 약속했다. 독일의 분단이 그랬듯이 독일통일도 넓게 보면 유럽 내지 세계질서의 큰 테두리 안에서 그 단서가 잡힌 것임을 부인키 어렵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역시 돋보이는 것은 이 주변 정세의 호기를 놓치지 않고 통일로 연결시켜낸 독일민족 내부의 힘이다. 이 힘을 바탕으로 앞으로 이루어낼 독일민족의 「제2의 도약」에 전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 외언내언

    신화냐,역사냐. 국가냐,국가 이전의 형태냐. 단군조선을 두고는 이렇게 학문적으로 대립을 보여온다. 거기에 더하여 특정종교의 일부층은 단군숭배를 우상숭배로 규정짓기도 한다. ◆그렇기는 하지만,학문과 종교를 넘어 우리의 뿌리를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이론이 없어야 할 단군·단군조선 아닌가 한다. 족보만 해도 고려를 넘어서면 아리송해진다. 하물며 문자도 없었던 몇천년 전의 일이 앞뒤가 맞게 소상히 전해질 리가 없다. 하지만 우리의 오늘 있음은 그 분명하지 못한 조상이 있었음으로 해서 가능한 일. 그러므로 단군의 개국 정신을 기리자는 뜻은 오늘에 우리들의 정신적 구심점을 찾아 주체성으로서의 자아확립을 기하자는 데에 있다. 3일이 그 개천절이다. ◆개국의 근본 이념은 오늘에 오히려 구현해야 할 깊은 뜻을 담고 있기까지 하다. 경천하고 애린하자는 것이 개국이념 아니었던가. 평화지향의 겨레였음이 여기에도 나타난다. 고조선 문화의 근간을 이룬 홍범구주는 중국 문화에 그대로 이식되었다고 평가되고 있는 터. 따라서 단군 숭배는 훌륭했던 조상을 기리면서 오늘에 결의를 새로이 하는 자손된 사람들의 도리일 뿐이다. 우상숭배론과 차원이 같을 수는 없다. ◆올해 개천절은 또 각별한 의미가 있다. 개방화의 물결따라 분단 후 처음으로 백두산 개천 민족대제를 민족의 영산 백두산에서 봉행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대종교를 일으킨 항일운동가 나철 대종사가 1909년 첫번째 의식을 올린 지 80년 만의 일이기도. 민족통일에의 기운이 무르익어가는 시점인 만큼 뜻이 더욱 깊다. 영검한 감응이 있어 인위의 분단선이 스러지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해진다. ◆이번 개천절은 겨레의 명절 추석과도 겹친다. 화해무드따라 소련과 수교도 한 뒤이고. 또 그 맥락으로 독일은 하나가 되는 날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번 더 생각해 보게 하는 한핏줄 한겨레. 남과 북은 단군의 자손들인 것이다.
  • 새 「역사의 장」여는 통독의 현장에서/이기백특파원

    ◎“이제 독일은 하나”… 거리마다 샴페인 축제/“우리는 자랑스런 독일인”… 얼싸안고 환호/통일 알리는 종소리에 목메어 국가합창/동ㆍ서베를린 잇는 마라톤엔 2만5천명 참가 그것은 새 역사의 장을 여는 감격적인 축제였다. 성당과 교회의 종이 일제히 울려 퍼지면서 거리를 메운 시민들은 저마다 「아인하이트 아인하이트」(통일)를 외쳐대며 민족재결합의 기쁨을 만끽했다. 분단의 상징이었던 브란덴부르크 문 주변에 몰려든 시민들은 손에 손을 잡고 자유ㆍ평화ㆍ정의를 강조하는 국가를 목이 터져라고 불렀으며 통일을 축복하는 폭죽이 밤하늘을 현란하게 수놓았다. 이제 독일은 하나,통일축제가 시작되는 2일 자정부터 4일까지 베를린 시내에서는 기념행사가 다채롭게 펼쳐지며 금세기들어 3번째 세워지는 새 독일의 탄생을 축복하고 밝은 미래를 기원했다. ○…통일축제의 서막을 알리는 성당과 교회의 종소리가 2일 0시 일제히 울려퍼지자 축제행사가 중점적으로 진행되는 운텐 덴린덴거리와 6월17일 거리에 나와 있던 시민들은 주먹을 공중으로 치켜올리며 환호했으며 각 가정에서는 샴페인을 터뜨려 이 순간을 축복했다. 운텐 덴 린덴 거리에 부인ㆍ여동생과 함께 나온 지그마 캡슐씨(35)는 『통일이 이같이 빨리 이뤄질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감격스럽고 독일인이라는 것이 자랑스럽다』며 가족들과 얼싸안고 기뻐했다. 동베를린에 산다는 에버린 쾨러양(22)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하늘을 수놓은 폭죽의 섬광처럼 우리는 빛을 발할 것입니다』며 감격스러워했다. 10월3일이 「통일의 날」로 국경일이 됨에 따라 독일국민들은 매년 이날 휴무하게 되며 지금까지 동서독이 별도로 통일을 기원하던 기념일은 폐지된다. 동독은 지금까지 건국일인 10월7일을,서독측은 동독에서 공산정권에 항거해 시민들이 일제히 궐기했던 6월17일을 기념해 공휴일로 지정했었다. ○인산인해 교통마비 ○…베를린은 역사적인 백림마라톤대회가 때마침 통일축제 직전인 30일 열려 축제분위기를 더욱 돋웠다. 60여개국에서 2만5천여명의 선수가 참가한 이번 대회의 코스는 독일통일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서베를린 샤로텐부르크문을 출발,6월17일 거리를 지나 동베를린지역인 칼 막스거리를 거쳐 브란덴부르크 문과 통일전 체크 포인트였던 찰리 검문소를 통과하는 등 반세기만에 전 베를린 시가지를 질주해 시민들을 열광시켰다. 이 때문에 독일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과 각국의 취재기자ㆍ외국관광객으로 숙박난ㆍ교통난을 가중시켰으며 도심은 거리를 나다니기조차 힘들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호텔과 여관이 초만원을 이루자 베를린시당국은 TV방송을 통해 시민들에게 민박을 강조하는 계몽을 펼치고 있으며 축제기간중 지하철을 24시간 운행하는 한편 역주변과 광장등에서 노숙하는 행위를 당분간 단속하지 않기로 해 텐트족의 천국을 이루기도. ○…통일축제의 절정은 몸퍼 서베를린 시장이 2일 상오 9시 시의회에서의 통합을 선언하는 행사. 몸퍼시장은 이 자리에서 독일과 독일인은 영원히 하나이며 세계평화에 기여할 것임을 다짐. 이어 몸퍼시장은 연합군 사령관들에게 베를린의 자유수호에 기여한 노고를 치하하고 연합군 사령관의 고별사에 이어 곰을 상징하는 베를린기가 시장에게 되돌려 진다. 이에 앞서 독일분단 이후 베를린 시정을 담당했던 연합군 사령관 레이먼드 하드도크(미국),로버트 콜베트(영국),프랑세스 샹(프랑스)장군 등은 1일밤 마지막으로 브라보검문소에서 간단한 철수기념식을 갖고 장병들을 위문. ○일부선 통일반대 시위 ○…통일축제가 시작되고 있는 가운데 브란덴 부르크문 광장에서는 「우리는 통일 반대한다」는 플래카드를 든 3백여명의 전동독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여 눈길. 이들은 통일이 된 뒤 사회주의 국가에서 누려온 정부 복지시책의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된다는 「불이익」과 불확실한 통일후의 생활을 우려해 연일 이곳에서 통일반대시위를 벌여왔는데 이날도 축제가 시작되기 전부터 광장의 한 귀퉁이에서 시위를 강행. 그러나 통일을 환영하는 군중들의 환호에 이들의 주장은 더욱 초라하게 보였으며 1일로 독일 경찰에 편입된 전동독경찰관들이 이들의 데모를 보호. ○「통일의 횃불」기념촬영 ○…역사적인 통일이 이루어짐에 따라 지난 40여년동안 독일 통일의 열망을 불태우던 테오도르 호이스 광장의 횃불도 꺼지게 된다. 서독 초대대통령 테오도르 호이스(Theodor Heuss)가 취임하면서 독일국민의 통일염원을 북돋우기 위해 광장 한가운데 마련됐던 통일횃불은 냉전시대의 파란만장했던 베를린의 과거를 지켜보며 베를린 시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일깨워온 명소. 「Freiheit(자유)ㆍRechts(정의)ㆍFrieden(평화)」라고 새겨진 대리석 받침대 위에서 꺼질 줄 모르고 타오르던 희망의 횃불이 꺼지는 것을 아쉬워하는 베를린시민들은 연일 이곳에 몰려들어 헌화를 하고 기념사진을 찍기도. 1일 가족과 함께 통일횃불을 배경으로 가족들과 사진을 찍던 헬무트 센켄씨(52)는 『호이스의 염원은 드디어 성취돼 우리에게 기쁨을 안겨주었으나 횃불이 소멸되는 것은 슬픈 일』이라며 통일의 횃불은 독일인들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표시. ○동독군복등 기념판매 ○…독일의 신문들과 방송들은 대부분 차분한 자세로 베를린의 분단에서 통일에 이르는 과거를 재음미하며 통일행사와 관련한 프로그램을 시민들에게 소개. TV는특히 통일이후의 국내ㆍ세계정세를 논의하는 좌담회를 방영하는 가운데 ARDㆍZDF 등 전국적인 방송망을 갖고 있는 TV는 60년대초 케네디 전 미국대통령이 베를린을 방문,『이히빈 베를리너(나는 베를린시민)』이라고 연설하며 소련과 동독의 봉쇄로 고난을 겪고 있던 베를린시민들에게 용기를 북돋웠던 기념비적인 장면을 보여줘 감회를 새롭게 하기도. 또 통일축제기간동안 재빠른 상업주의가 극성을 부려 2차대전때 파괴된 상흔을 간직한채 도심 한가운데 을씨년한 모습을 하고 서 있는 카이저 빌헬름교회 주변 광장에는 상인들이 전 동독군인의 모자와 제복,계급장을 기념품으로 팔고 있는가 하면 베를린의 한 회사는 베를린 봉쇄때 시민들의 생필품을 공수했던 C46수송기를 임대해 축제기간동안 프랑크푸르트에서 베를린 템펠로프 공항까지 기념비행을 광고하면서 손님들을 끌기도. ○교민무용단 공연도 ○…이번 행사에는 우리나라 교민여자 무용단인 「아리랑무용단」이 참가,2일 하오 11시부터 동베를린 오페라하우스 앞 베벨프라츠에서 공연을 할 예정이어서눈길. 무용단 관계자들에 따르면 베를린시 당국에서 축제참가 초청장을 보내와 2차대전으로 인한 마지막 분단국인 한국이 참가하는 것이 큰 의의를 가질 것이라는 결론을 내려 참가를 결정했다는 것. 20여명으로 구성된 한국무용단은 이날 공연에서 한복으로 차려입고 30여분동안 우리나라 전통춤을 공연할 예정인데 통일의 현장에서 「통일기원춤판」이 한바탕 벌어질 것으로 보여 관심이 집중. ○…통일축제는 승전 4대국 수뇌들이 참석하지 않게됨으로써 당초 계획과는 달리 순수한 독일인 자체의 축하행사로 진행될 전망. 통일축제의 공식행사는 2일 하오 5시 동서베를린시 의회가 개최됨으로써 시작되며 4일 상오 9시 베를린에 있는 라이흐스탁(국회)에서 동서독 합동의회가 열림으로써 끝을 맺으나 기념공연 등 각종 행사는 시내 곳곳에서 잇따라 열린다. 축제의 절정은 3일의 동서베를린 경계선에서 펼쳐질 시민잔치와 국회건물의 통일독일기 게양식. 국회에 통일독일기가 게양되는 것과 동시에 동서베를린의 모든 공공건물과 대형건물,차량들에도 독일기가 게양되거나 꽂혀진다.
  • 새 독일의 탄생(사설)

    1990년 10월3일. 동과 서로 갈라졌던 두 독일의 시대가 마침내 막을 내리고 새롭게 통일된 독일이 탄생한다. 전후 45년,분단 41년 만이다. 한 민족은 한 나라에서 함께 살아야 한다는 역사의 증언이 독일에서 실현되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같은 분단운명의 민족으로서 우리는 그들의 통일을 진심으로 경하하며 우리의 통일노력을 기대해 보는 것이다. 독일통일은 분단상태에서도 동서독이 지난 40여년간 교류와 접촉을 꾸준히 계속해온 데서 얻어진 결과로 평가되고 있다. 동서독이 분단현실을 인정하고 상호교류에 의한 기반을 단계적으로 조성한 뒤에 거둔 자랑스런 열매다. 양국은 69년 브란트의 동방정책으로 72년 기본조약,73년 유엔 가입,74년 양측 대표부 교환설치 등의 기반을 다져왔다. 이것은 두 나라 국민의 잠재된 통일열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또한 서독의 성숙한 민주주의와 경제력을 배경으로 서방은 물론 소련에 대해서도 신뢰를 주면서 통일에 대한 국제적 합의를 이끌어냈다. 통독은 특히 유럽에 새로운 정치 경제질서를 뜻하고 있다. 냉전상태는 종식되고 새평화시대의 선언을 의미한다. 때문에 새 독일은 국제사회에서 좀더 중요한 역할을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독일의 앞날이 순탄하리라고만 믿는 것은 아니다. 속도빠른 통일열차에 도취했던 독일국민들은 이제 사회적 심리적 통일이라는 한층 심각한 과제에 부닥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통제체제하에서 동독인들이 겪은 정서적 상처가 서독의 경제시혜만으로 치유될까 하는 문제다. 40%에 이른 동독의 생산성 감소와 내년이면 1백50만명으로 추산되는 동독실업도 또다른 숙제로 남는다. 동독이 서독과 같은 수준에 이르려면 5∼10년이 걸려야 할 것이라는 우려도 이러한 데 기인하고 있다. 주변국가들로부터 나오고 있는 통일독일의 경제적 팽창주의와 게르만 패권주의도 새 독일이 풀어야 하는 과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민족」답게 그들은 통일을 하는 것이다. 통독이 한반도 통일의 교과서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후 냉전체제로 인한 분단운명을 같이하고 있는 우리에게는 독일의 통일을 가능케 한여러 요인이 각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다. 독일분단이 전쟁을 일으킨 데 대한 죄값이라면 한반도 분단은 「무고한 희생」으로서 독일보다 일찍 해결됐어야 한다는 독일에서의 평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적지 않다. 통독과 관련되는 이 평가를 귀담아 들으면서 최근 한반도 주변에서 일고 있는 여러가지 사태발전을 우리는 고무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한국과 소련의 예상보다 빠른 수교발표를 비롯해 한국과 중국간의 관게개선 노력,일본과 북한,미국과 북한간의 접촉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주변정세 속에서 남북한 당사자들이 벌이고 있는 통일노력도 상당한 진전을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북경아시안게임에서 합의발표된 남북한 스포츠교류는 분단감정을 무너뜨리는 데 바람직한 영향을 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오는 16일에는 평양에서 제2차 남북총리회담도 열린다. 동서독이 취해왔던 커뮤니케이션의 확대와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독일의 통일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가 갖지 못한 것이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해볼 때인 것이다.
  • 동서독 내일 통일/41년 만에 공산동독 소멸

    【베를린 연합】 10월3일 0시(한국시간 상오 8시) 독일 방방곡곡의 교회탑마다에서 종소리가 울리면서 45년간에 걸친 독일 분단의 시대는 공식으로 막을 내린다.〈관련기사 5면〉 그리고 동독이라는 국가가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히틀러의 제3제국이 무너진 뒤 미국과 소련·영국·프랑스 등 4대국이 누려왔던 베를린 점령권도 상실된다. 이날 베를린의 구제국의회 의사당 앞에서는 바이츠제커 서독 대통령,헬무트 콜 총리,발터 몸퍼 베를린 시장 등 국가요인 및 정치지도자는 수많은 시민들과 함께 독일국가가 연주되는 가운데 역사적인 통일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이에 앞서 2일 하오에는 동독 인민의회와 로타르 드메지에르 총리가 이끄는 정부가 해산식을 가지며 이로써 지난 49년 10월 소련에 의해 세워진 동독국가는 만 41년 만에 완전히 소멸,점차 망각 속에 파묻혀 버릴 것이다. 통일 기념 행사를 갖고 하나가 된 독일은 4일 제국의회 의사당에서 통합의회의 첫회의를 가지며 이 자리에서 콜 총리는 통독 정부의 새 출범을 공식 선언한다. 이로써 독일은 지난 1871년 비스마르크에 의해 사실상 최초의 통일을 이룬 이래 역사상 2번째로 민족통일을,그리고 1차대전 후의 바이마르공화국,1949년 냉전의 절정기에 수립된 동서독에 이어 금세기에 들어서 3번째의 새 국가를 성취하게 된다.
  • 유럽중심부에 거듭난 「게르만」

    ◎1990년 10월3일 통일… 새독일의 위상/인구 8천만ㆍGNP 1조3천억불의 부국/향후 10년간 국부 두배로… 「제2기적」 기대 1990년 10월3일 0시. 동서로 갈리어 반세기를 살아온 게르만민족이 45년만에 다시 하나가 되는 역사적 순간이다. 통독은 전후 미소를 축으로 한 냉전체제의 종언이자 새로운 탈냉전시대를 출범시키는 출발이기도 하다. 이제 독일 민족은 지나간 분단의 세월속에 쌓인 한과 고통을 라인강물에 띄워보내고 흑적황 3색의 독일깃발을 다시 유럽 복판에 세우는 환희의 순간을 맞고 있는 것이다. 통독은 유럽,나아가 세계질서의 재편을 불가피하게 하고 있다. 동구와 소련 등 사회주의 국가들의 일당체제붕괴에 이어 바르샤바조약기구의 와해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으며 NATO의 기능도 군사조직에서 정치조직으로 변모할 기미를 보이고 있다. 이와 함께 「하나의 유럽」을향한 국제질서 재편작업이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다. 그렇다고 통일독일의 장래가 모두 장미빛으로 밝은 것만은 아니다. 아직도 넘어야할 고비가 많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진지 1년도 못돼,그것도 수십만명의 미국과 소련 군대가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통독을 실현시킨 패전 독일민족의 능력을 바라보는 우리의 감회는 실로 착잡하다. 이같은 역사적 순간을 맞아 서울신문은 김진천 파리특파원과 이기백 정치부기자를 역사의 현장에 특파,통독과정을 살펴보고 유럽의 새질서 태동을 점검해 보기로 한다. ▷인구ㆍ영토◁ 통일독일의 인구는 서독의 6천1백만명과 동독의 1천6백60만명을 합해 총 7천7백60만명. 1억명 이상의 10개국과 8천3백만명의 멕시코에 이어 세계 12번째 인구대국. 영토는 서독의 24만8천7백6㎢와 동독의 10만8천3백33㎢를 더한 총 35만7천39㎢로 한반도(22만1천㎢)의 약 1.6배 크기. 2차대전 패전으로 폴란드영토가 된 오데르∼나이세강 동쪽의 실레지아 등 10만3천㎢의 옛독일땅에 대해서는 통일후에도 영토권을 주장하지 않기로 약속된 상태. 수도는 베를린으로 결정됐으나 현재 본에 위치한 행정부가 옮겨갈지 여부는 추후 논의대상이다. 국기ㆍ국가ㆍ국명 등은 동독이 서독에 흡수통합되는 만큼 서독것을 그대고 쓰되 동독인들의 자존심을 고려한 추후변경여부는 미지수. ▷역사◁ 지난 4세기 발트해연안 및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살았던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독일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됐다. 그러나 독일민족은 중세에 들어서도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분열상태를 지속,강력한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으며 철혈재상인 비스마르크가 등장,1871년 독일제국이 탄생됐다. 제1차대전의 패배로 제정은 무너졌으며 바이마르공화국시대(1919∼1933)로 들아갔으나 소당분립,정쟁격화 등으로 혼란이 계속되던중 1933년 히틀러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히틀러는 게르만 제1주의를 내걸며 사상최대의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으나 1945년 패전으로 독일은 동서독으로 분단의 길을 걷게 됐다. 서독은 동독과 수교한 국가들과는 외교관계를 맺지않는다는 냉전시대의 할슈타인원칙을 표방했었으나 브란트전총리는 지난 1969년 집권한 뒤 동방정책을 표방,상호교류를 확대시켜 오늘의 통일을 이룬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동서독은 72년 기본조약체결,73년 유엔동시가입,74년 상주대표부 설치를 거쳐 80년대에는 양국정상의 상호방문이 실현되기도 했다. 지난해 11월에는 동서 데탕트와 고르바초프의 개방정책,동구권의 민주화열기로 지난 61년 구축됐던 베를린장벽이 철폐됐고 지난 7월 통화통합으로 사실상 통독이 가시화됐다. ▷국내정치◁ 통일과 동시에 동독정부 및 의회는 소멸되며 오는 12월2일 전독총선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현서독정부가 계속 집권한다. 다만 총선전까지 동독지역의 대표성을 인정하기위해 메지에르 총리등 독독 지도자들이 서독 행정부에 무임소장관으로 기용되며 4백명의 동독인민의회의원중 인구비례에 따른 1백44명이 서독연방의회(하원)에 자동진출한다. 전독총선에서는 상원 56석(서독지역 41,동독지역 15)과 하원6백85석(서독지역 5백41,동독지역 1백44)의 임자를 가려 하원의 다수당이 통일독일의 명실상부한 초대 집권당이 된다. 동서독의 집귄기민당을 비롯,사민ㆍ자민당 등은 이미 전독총선에 대비해 정당통합절차를 마쳤다. 지금까지의 여론조사결과를 놓고 볼때 기민당을 주축으로 한 중도우파연정이사민당의 인기도를 훨씬 앞지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통독후 총선까지 2개월 사이에 극심한 경제혼란 등 이변이 없는 한 콜 서독총리의 초대 독일재상 꿈이 실현될 가능성이 높다. ▷경제◁ 통독을 가능케 한 주요인이 서독의 경제력 때문이라는 분석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만큼 막강한 서독의 경제력은 동독과의 통합으로 더욱 힘을 발휘하여 마르크화의 위력이 유럽을 강타하게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서독은 지난 89년 총GNP(국민총생산)에서 1조2천억달러를 기록,미국 소련 일본에 이어 세계 4위를 차지하고 있는 경제대국으로 통일을 계기로 경제전망이 더욱 밝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서독은 EC(유럽공동체) 총생산량 가운데 25% 정도를 점유하고 있으나 서독경제력의 10%수준인 동독을 흡수,30%선을 상회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통독은 단순합계로 현상태에서 유럽내 라이벌인 프랑스 영국보다 경제력에서 50∼80%를 능가하게 됐다. 서독은 EC의 대 동구 및 소련교역량 가운데 3분의1 정도를 차지하고 있으나 동구권내에서우수한 공업국인 동독을 흡수함으로써 이지역을 기반으로 하게될 경우 대 동구 교역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이로 인해 동구는 독일의 영향을 받아 위성국으로 전락할 가능성까지 있는 것으로 점쳐지고 있을 정도이다. 반면 서독은 통독으로 낙후된 동독을 희생시켜야 하는 책임을 맡게되어 통일에 대한 비용을 부담하게 됐다. 서독정부는 지난 5월 1천1백50억마르크(약 7백억달러)의 통일기금을 조성키로 했으나 동독을 서독의 수준으로 상향평준화시키기 위해서는 모두 1조∼2조마르크가 필요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서독정부가 앞으로 10년간에 걸쳐 집중적으로 동독의 철도 도로 전신 등 기간산업에 투자하고 동독의 실업자들에게 수당을 지급하려면 이와 같은 엄청난 재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동독의 8천여 국영기업 가운데 이미 20%가 서독과의 경쟁에서 도태됐으며 30%만이 살아남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또한 서독은 동독의 1백50억달러에 이르는 외채를 청산해야 하며 올 하반기에만 3백30억마르크의 예산적자가 예상되는 등 열악한 동독재정을 떠맡아야 할 입장이며 동독주둔 소련군의 철수비용 및 통일에 대한 보답으로 1백80억마르크를 지불키로 되어있다. 그러나 현 동독경제의 상태 및 막대한 투자재원부담이 통독의 앞날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서독은 지난 88년 7백억달러의 국제수지흑자를 기록하는등 외환보유고 세계 2위의 부국이기 때문에 이러한 재원은 별 문제가 될 수 없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갖고 있으며 대 동독투자로 1백여만명의 새로운 일자리가 생길수 있다는 분석이다. 동독이 90년대를 통해 연평균 7∼8%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현재의 GNP보다 배로 확대돼 제2의 라인강의 기적이 동독에서 만개하게 될 것이라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의 분석도 나오고 있다. ▷군사력◁ 서독의 48만8천7백명과 동독의 17만2천명을 합해 통일독일의 총병력은 66만명인 것으로 돼 있지만 민주화이후 동독군의 탈영이 속출해 실제병력수는 이보다 다소 적은 수준이다. 그러나 통일독일은 군대를 37만명이하로 유지하고 화생방무기를 생산하거나 보유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상태여서 통일후 절반 가까운 병력감축 조치가 뒤따를 것으로 예상된다.
  • “희망과 경계의 통일”… 엇갈린 시각(새 독일 탄생:1)

    ◎「경제ㆍ군사대국」의 강풍이 분다/세계질서 재편의 축으로 부상/6번째 유엔상임국 확실… 영향력 신장/“제국출현” 우려속 “유럽통합 가속” 기대 10월3일 0시. 동서독이 공식 하나로 통일되는 이 시각,독일 전역에는 일제히 폭죽이 터질 것이다. 거리를 메울 시민들은 전통적인 뿔피리를 불어대며 밤이 새도록 게르만민족의 하나됨을 경축할 계획이다. 특히 냉전체제의 상징이었던 베를린에서는 브란덴부르크문 주변과 운텐 덴 린덴가를 중심으로 2일부터 4일까지 밤낮으로 이어질 통일축제가 벌어져 반세기 분단의 아픔을 씻어버린다. 독일은 지난 7월1일 경제ㆍ사회통합에 이어 동서독이 8월31일 체결한 「통일조약」에 따라 3일 0시에 독일민주공화국(GDRㆍ동독)이 독일연방공화국(FRGㆍ서독) 헌법 제23조에 의해 정치적으로 FRG에 흡수통합 됨으로써 내부적인 통일과정을 모두 마무리 짓게 된다. 이로써 지난 45년동안 사회주의를 추구해온 동독이라는 국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같은 기간동안 시장경제로 힘을 키워온 서독을 모태로 한 통일독일인 「독일연방공화국」이 유럽중심부의 새로운 국가로 등장,유럽의 새 질서를 추구하여 세계정세에 커다란 영향력이 발휘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동안 분산되었던 독일의 국력은 통일을 계기로 동유럽을 포함한 유럽 경제권의 중심으로 부상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12개국으로 구성된 EC내에서 서독은 지난해 총 수출의 30%,자동차 생산의 35%,철강생산량의 26%,발전량의 30%를 차지하는 등 전체적으로 대략 25%를 점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여기에다 동독 편입으로 성장잠재력이 가세될 경우 통일독일의 EC내경제점유율은 33∼35%까지 올라가게돼 「경제패권주의」가 등장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이같은 독일경제력의 팽창은 EC국가들 뿐만 아니라 동구의 각국에도 기대감과 더불어 우려감을 동시에 갖게 하고 있다. EC국가들은 92년을 목표로 하고 있는 유럽단일시장화에 구동독이 합류함으로써 2차대전 후 지속되어온 동서의 냉전상태가 종식되었고 유럽내에서 동구라는 블록이 와해되었으므로 대유럽통합이라는 궁극의 목표를더욱 조속히 달성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 소련을 비롯한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들은 경제초강국 독일로부터 그들의 피폐한 경제를 재건하기 위한 지원을 기대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80년대 중반이래 동구의 민주화물결 이후 이들 국가들은 사회ㆍ정치적으로 커다란 발전을 해왔지만 경제적으로는 더욱 피폐해져 독일의 경제적 지원을 고대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동독국민들의 서독으로의 탈출을 계기로 독일통일이 가속력을 붙게 한 것도 미ㆍ영ㆍ불ㆍ소 등 승전 4개국중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소련이 경제적인 측면에서 이를 승인한 것이 가장 큰 요인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었다. 소련은 그동안 콜 서독총리와의 독일통일협상 과정에서 38만여명에 이르는 동독주둔 소련군의 철수비 명목으로 1백20억마르크(76억달러)를 받아내기로 한데 이어 지난주 30억마르크를 추가로 지원받기로 하는등 경제적인 실리에 중점을 두고 있는 분위기다. 소련은 최대의 실리를 추구하기 위해 당초 통일독일의 나토잔류를 반대하다 나토와 바르샤바조약기구에의 동시가입으로 물러섰으며 결국은 나토가입만을 허용하기에 이르는등 협상과정에서 모든 것을 내주면서 최대한의 실리만을 추구해왔다. 물론 독일이 통일을 이룰 수 있게 된 내부적 원동력은 서독의 민주주의의 실현과 경제적 성공,그리고 국민들의 잠재적인 통일열망 등을 기반으로 해 80년대 초반 폴란드의 자유노조운동에서 싹튼 동구권의 민주화운동이 동구제국에서 연속적으로 일당독재체제를 붕괴시키면서 결국 동독공산당의 몰락에 다다른 것이 큰 계기였다. 이같은 일련의 과정에서 볼때 사회주의가 이상적인 측면이 많긴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비대한 관료조직과 더불어 비현실적인 중앙집중식 계획경제에 의해 너무나 허약하게 무너진다는 교훈을 남겼다. 사회주의국가중 가장 모범적인 국가로 알려졌던 동독의 경우 그동안 생산관리나 품질향상 등 경제의 기초개념보다는 완전고용과 균등배분에만 주력,실업이 전무하다시피 했으나 결국 그것이 모양새만 그럴싸한 허수아비임이 드러났다. 한편 세계대전을 두차례나 저지른 독일의 재통일에 대한 주변국들의 의구심도 만만치 않은 것이 현실이다. 독일은 이같은 주변국의 우려와 불신을 불식시키기 위해 통일독일이 나토와 EC의 틀안에 남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진정한 EC의 정치적 통합에 기여하겠다는 점을 다짐하고 있다. 이 때문에 독일은 오는 3일의 통일에 이어 14일 동독지역에서의 주의회 선거를 실시해 사회주의 국가시절 폐지됐던 5개주 주의회를 다시 만들어 연방정부에 가입하는 한편 오는 12월2일 총선거를 실시해 연방의회(Bundestag)를 구성하는 등 정치일정을 차분히 추진해 나가는데 주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20세기 말까지는 사회주의 체제에서 상대적으로 낙후된 동독지역 재건에 국력을 총집중 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통일독일의 첫 총리가 유력시 되는 헬무트 콜 서독총리가 전승 4개국 수뇌들과 주변국 수뇌들에게 기회있을 때마다 『통일독일이 평화와 자유의 나라가 될 것이며 제4제국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 약속을 지켜 나갈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독일은 EC와 나토,그리고 유럽안보협력회의(CSCE)등 국제협렵체제의 테두리 안에서활동할 것이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6번째 상임이사국으로 가입돼 국제적인 중요한 문제의 결정에 이성적으로 행동할 것으로 보인다. 독일이 상임이사국이 돼야 하는 이유에 대해 소련은 『독일이 다른 강대국들과 마찬가지로 세계적인 위기를 조정하는데 동일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통일독일의 국제적인 부상과 책임분담은 이제 마지막 냉전의 산물로 남아 있는 한반도문제에도 큰 영향을 끼칠 것이며 그 방향은 긍정적인 쪽일 것이라는 것이 전체적인 평가이다.
  • 북경의 한국인(사설)

    북경아시아드에서 매일매일 집계되는 메달수를 보고 있으면 수십개에 이르는 아시아의 나라들 중에서 한·중·일이 차지하는 비중을 거듭 깨닫게 된다. 인구가 12억이나 되는 중국의 금메달 쓸어모으기는 오히려 당연한 일이겠으나 한반도의 분단된 작은 땅에서 갖은 시련을 이기고 일어선 한국이 대국 일본과 2위자리를 겨루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스포츠에서 만이 아니다.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아시아를 선도하는 것도 한·중·일 3국이다. 그 중에서도 갖가지 기적의 신화를 낳는 한민족의 당돌하고도 영특한 발전상은 세계인의 관심의 적이 되고 있다. 그런 한국인들이 방금 북경에서는 못보일 꼴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경기장에서는 젊은 선수들이 국위를 등에 지고 있는 힘을 다 발휘하는 중인데 몇몇 관광객들은 한약재 싹쓸이관광에 열을 올리고 더러는 여인 희롱이나 졸부의 천박한 언동으로 현지동포를 난처하게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는 소식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북한선수와 임원들이 경기장에서 보인 몰교양한 행동은 이번 아시아드의대표적인 흠이 되고 있다. 비록 체제를 달리하는 집단이기는 하나 같은 한족중의 한쪽이라는 뜻에서 공통의 우세를 하는 셈이다. 거기에 더 얹어,장외에서 보이는 「추악한 한국인」의 행동은 한민족의 망신을 상승시키는 짓이다. 중국관광객의 주류를 이루는 것인 일본과 대만 그리고 한국사람이다. 풍족하기로 말하면 일인관광객을 우리가 따를 수 없고,고국을 찾는 잘 살게 된 대만인을 당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그들은 「싹쓸이 쇼핑」같은 족적은 남기지 않고 다닌다. 시끄럽게 몰려다니지도 않고 상소리를 하며 호텔종업원을 곤혹스럽게 하는 따위 일은 벌이지 않는다. 더더구나 일하는 여자들을 상대로 별난 교섭을 하다가 망신스럽게 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소문에 의하면 북경정부의 내사에 걸려 귀국이 유보되거나 벌금형을 받은 한국인이 꽤 있다고도 한다. 몇몇 몰지각한 사람 때문에 국위에 입히는 손상이 말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 사람들이 유난히 강장제니 정력제니 하는 것에 혹하기를 잘하고 신비의 영약에 대한 미신이 강하다는 데 있다. 그러나여러가지 측면에서 이런 약들은 이제 회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우선 우황·웅담·녹용·호골 따위 한정된 재료의 약재료들이 한없이 계속된다는 일이 의심스럽고 또한 국제적 공인의 위생시설이나 과학적인 제약과정에 대해서도 입증된 바가 없다. 게다가 이제는 불량·가짜·야바위까지 횡행하는 중이다. 그래도 여전히 사들여다가 「남대문 시장에서 됫박거래할 지경의 중국 우황청심환」 사태를 벌인다는 것은 한심한 일이다. 이런 행태의 결과에 대해 책임이 많은 것은 북경행을 주선하는 여행사들이다. 관광객이 단체관광을 하는 도중도중에 절묘하도록 쇼핑장엘 들르도록 꾸며놓는 일을 중국측 여행사와 우리 여행사가 공모하는 흔적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우수하고 능력있고 지도적인 나라로 떠오르는 중이다. 경쟁국들은 그런 우리를 방해하고 싶어한다. 우리 스스로 우리를 비하하고 평가절하하게 만드는 일이야말로 어리석은 일이다. 지금 북경의 한국인들부터가 그 점을 자성해야 한다. 거듭거듭 당부한다.
  • 중국외무,남북대화 지지/유엔서 연설/“총리회담통해 통일성취 희망”

    【뉴욕=한종태 특파원】 전기침 중국 외교부장은 28일 유엔총회 기조연설을 통해 『남북한은 총리회담을 시발로 대화를 통해 적대심과 오해를 제거하기 바란다』고 어느 때보다도 남북대화를 강력히 지지했다. 전 부장은 이날 연설에서 지난해 총회때와 마찬가지로 『중국은 북한의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통일성취 노력을 지지한다』고 말했으나 이어 『남북 분단 후 최초의 총리회담 성사는 남북 관계개선에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고 평가하고 『우리는 남북한이 이 회담을 시발점으로 궁극적으로 평화통일을 염두에 두고 대화를 통해 적대심과 오해를 제거하기 바란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정의용 외무부 대변인은 『중국측의 발언이 북한에 대한 지지입장을 여러 차례 강조했던 지난해 총회 발언보다 훨씬 중립적인 것』이었다고 평하고 『중국이 총리회담과 남북대화를 강조한 것은 최근의 남북관계와 한중관계에 비추어 고무적』이라고 말했다.
  • 한반도에 「교차승인」 기운 감돈다/북한·일본 급속접근의 파장

    북한이 27일 일본에 국교정상화 협의를 제의,일본은 물론 한국을 비롯한 주변국가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지금까지 일본과의 수교는 「2개의 조선」을 인정,분단을 고착화시킨다는 이유로 반대해온 북한이 갑작스레 태도를 돌변,수교협상을 제의하고 나온 데 대해 갖가지 추측이 쏟아지고 있다. 소련과 중국이 한국과 접근하고 있는 데서 오는 고립감 탈피가 가장 중요한 이유로 꼽히고 있으나 그렇다면 과연 북한이 「2개의 조선」 반대정책을 포기했느냐는 점이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북한의 태도변화를 바라보는 한국과 일본의 시각을 정리해본다. ◎도쿄의 반응/“수교 앞세워 경협흥정 치중” 의구심/한·소 수교 견제 전술적 전환 시각도 북한의 전격적인 대일 수교제의는 일본에도 큰 충격파를 던졌다. 전혀 「예상밖의 사태」로서 각계가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이번 제안의 배경에는 어떤 판단이 작용했는가,일본 외무성을 비롯한 관계전문가들은 그 저의 분석에 골몰하고 있다. 외무성은 자민·사회 양당 북한방문단과 동행한 가와시마 유타카(천도유) 아시아국 심의관으로부터 상세한 귀국보고를 들은 뒤 대응책을 결정할 방침이다. 27일 평양에서 개최된 북한·일본간의 사상 첫 정부레벨 접촉인 외교 실무담당자 협의에서의 제안 당시 상황은 다음과 같다. ▲천용복(북한 외교부 부부장)=곧바로라도 국교정상화 교섭을 개시하자. ▲가와시마 유타카=그렇다면,(북한의) 방침이 변했다는 것이냐. ▲천=그렇다. ▲가와시마=지금까지 한반도에 2개의 국가를 인정하는 것은 분단을 고착화시킨다고 반대해오지 않았는가. 동·서독은 분단국가이면서도 통일국가가 되었다. 게다가 북과 남을 2중 승인하고 있는 국가가 84개국이나 되지 않는가. 일본 외무성은 이같은 북한의 대일정책 전환의 요인으로서 다음 3가지를 꼽고 있다. 첫째 한국의 활발한 북방정책에 의한 소련·동구제국과의 눈부신 관계진전에 압도되어 있는 점. 둘째 어린이들의 영양부족마저 지적되고 있는 심각한 경제적 궁핍. 셋째 지난 9월 초순 평양을 방문한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으로부터 한국과의 국교수립방침을 통고받고 충격을 받았다는 점 등이다. 북한의 정책전환에 대해 일본 외무성 수뇌는 27일 밤 『북한의 지금까지의 공식발언으로 미루어볼 때 예상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북한은 김일성 주석의 주체사상을 기초로 자주·자립노선을 견지하고 있으며,일본 정부의 한반도정책에 대해 『한국 일변도로 북한에 적대정책을 취하고 있다. 분단고착화를 위한 한·미군사동맹에 가담하고 있다』는 등 격렬하게 비판해왔다. 이번 일본의 북한방문단이 평양에 도착한 당일인 지난 24일 밤 조선 로동당 주최 환영연에서도 국제부장인 김용순은 인사말을 통해 「2개의 조선」을 합법화하는 것에 의한 한반도 분단고착화는 결코 허용할 수 없다며 종전의 원칙론을 고수하고,한국과의 국교수립을 서두르고 있는 소련을 격렬히 비난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대일 국교정상화 제안이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같은 북한이 일본측에 대해 국교정상화 교섭을 제의한 것은 더이상 국제사회에서 고립될 수 없다고 판단을 내린 한편,『통일의 깃발은내리지 않지만 당분간 정책을 변경,경제중심으로 힘을 쌓아 한국에 대항하려는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여기에 김일성 주석의 78세라는 나이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고 있다. 자신이 건재해 있을 때 정책을 전환하겠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김 주석이 이달 중순 중국을 방문했던 것도,한국과의 경제관계를 착실하게 확대해나가고 있는 중국에 대해 『최소한 중국만은 배신하지 않도록 못을 박아두려 했던 것』(외무성 간부)이 아닌가 보고 있다. 북한에 있어서 「2개의 조선」 불인정은 「국시」와 같은 것이다. 그 근간에 영향을 미치는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문제와 대일 국교정상화는 응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북한은 남북대화가 진행되고 있던 다나카(전중) 내각시절인 지난 72년을 계기로 『한·일기본조약의 파기가 북한·일본 국교정상화의 전제』라는 방침을 완화,일본과의 국교정상화에 유연한 자세를 취했던 일도 있다. 그러나 그후 관계개선은 기대했던 것 만큼 진전되지 않았으며,78년 일본 사회당의 아스카다 이치오(비조전일웅) 위원장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는 국교정상화를 거부,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이제와서 느닷없이 국교정상화를 제의한 배경에 대해 일본 외무성 관계자는 『한·소 국교수립을 앞두고 한국을 견제하겠다는 의미가 있다』고 본다. 「전술적 전환」이라는 것이다. 30일 뉴욕에서 개최될 예정인 한·소외무장관회담에서 양국의 국교수립은 결정적인 사실로 되어 있으며,북경아시안게임을 계기로 한국과 중국과의 경제교류도 심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같은 상황에서 어느 정도의 「균형감각」을 취해 서방측과의 관계개선에 나서지 않으면 국제적 고립은 더욱 심화되고,후계자인 김정일에의 정권이양이 원활하게 될 수 없다는 고도의 정치판단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라는 견해도 유력하다. 또 외무성에는 『북한측에는 제18후지산마루(부사산환)호 석방과 때를 맞춰 일본측으로부터 배상·청구권 문제 등 경제협력의 구체적인 내용을 조속히 끌어내려는 계산이 깔려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차가운 시선도 없지 않다. 게오(경응)대오고노기 마사오(소차목정부) 교수는 이렇게 분석한다. 『북한의 진의는 일본과의 국교정상화 교섭을 시작함으로써 배상을 빠른 시일내 받아내려는 것이 아닌가. 일본은 국교정상화가 안된 상태에서는 북한에 보상금을 지불할 수 없다는 의견도 있으며,정상화 교섭 없이는 대규모 경제협력을 얻기도 힘들다. 따라서 우선 국교수립을 목표로 한다는 형식을 내놓았다고 본다. 그러나 북한이 통일을 전제로 하지 않고 일본과 국교를 맺는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다. 한편 시즈오카(정강)대학 이즈미 겐(이두견원)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북한은 지난 연초부터 줄곧 일본과의 관계개선 준비를 해왔다. 일본의 국내정치가 당시 안정되지 못해 시간이 걸렸던 것뿐,의외성은 없다. 북한측은 배상 문제를 해결하려면 국교수립이 전제가 된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 북한의 논리로는 일본과 국교를 수립하더라도 「2개의 조선」을 인정하는 것으로는 되지 않는다. 일본이 북한을 적시하지 않고 한반도 통일에 반대하지 않는다면 지금까지라도 국교를 맺는 것은 가능했다.북한은 기본자세를 변치 않고 있다. 일본이 통일을 방해하고 있다는 「오해」가 풀린다면 분단고착화가 아니라 통일을 위한 국교수립이라는 것이 된다. 다만 교섭은 쉽사리는 진전되지 못할 것이다. 우선 배상 문제에 대해 일본 국내의 합의조성이 필요한데,거기에는 꽤 시간이 걸린다. 일본 정부는 또 한국의 반응에도 배려하며 교섭을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서울의 대응/핵협정 가입 등 평화보장장치 선결/남북한 대화 고려,속도조절을 희망 한소 양국이 30일 외무장관회담을 갖고 양국 수교 문제를 공식 협의하는 등 한소 수교가 임박한 가운데 북한이 일본측에 오는 11월 국교정상화 협의를 공식 제의함으로써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 질서에 새로운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 또한 방북중인 일본의 가네마루(김환신) 전 부총리 일행이 『북한과 수교 전이라도 배상 문제를 정치적 결단으로 해결하겠다』고 발언하는 등 일·북한 관계개선이 급진전하고 있는 것으로 비쳐지고 있다. 정부는 일·북한 관계 급진전 관련보도에 대해 깊은 우려의 뜻을 일본 정부측에 전달하는 한편 이 보도가 사실로 밝혀질 경우 강력한 대일 대응조치를 강구할 방침이어서 일·북한 관계개선 문제는 한일간 외교마찰을 불러일으킬 소지를 배제하지 않고 있다. 우리 정부가 일본의 대북한 관계개선에 반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일·북한 접근 문제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추구하는 범위내에서 진행되어야 하며 특히 남북대화와 관계진전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정부는 7·7선언에서 북방정책 추진과 함께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시킬 여건조성을 위해 북한이 미국·일본 등 우리 우방국과 관계를 개선하는 데 협조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정부는 북한이 대남 적화통일노선을 포기하거나 핵안전협정에 가입하지 않고 남북 관계개선이 진전되지 않는 상황에서의 일·북한간 급속한 접근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도리어 해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일·북한이 접근하게 된 근본 동인은 한소 수교인 것으로 외교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즉 한소 수교로 인해 일본과 북한의 「충족욕구」가 맞아떨어졌다는 것이다. 과거 독점적인 동맹국이었던 소련을 잃게 된 북한은 일본을 경제협력 파트너로 인식하게 됐으며 일본은 동북아의 주도권을 소련에 뺏기지 않기 위해 「북한카드」를 이용하게 됐다고 관측된다. 경제적 위기에 처한 북한이 남북대화를 통해 남북간 경제협력을 모색하지 않고 일본과 긴밀한 경제협력을 하게 되면 결코 남북 문제 개선과 한반도 평화정착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정부관계자의 공통된 지적이다. 일본이 경제적 활로를 찾고 있는 북한을 이용,핵안전협정 가입 등 한반도 평화를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대북 관계개선을 추구하는 것은 한일관계에도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지적되고 있다. 일본이 대북접근에 적극적인 이유로는 또 ▲미·중국 수교의 닉슨쇼크(70년초) 이후 북한과의 수교는 미국보다 먼저 하겠다는 내부방침 ▲경제력에 상응한 국제정치적 위상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한 압박감도 들 수 있다. 더욱이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한반도 4강중 내심 한반도 통일에 가장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 일본인 점을 감안할 때 「북한 카드」를 활용해 정치대국으로 운신하고 한반도 문제에 대한 발언권을 강화하겠다는 속셈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일·북한 관계개선을 장기적으로 볼 때는 북한의 개방과 개혁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정부가 일·북한 관계 급진전과 관련,우려하고 있는 핵심은 현상황에서 북한에 일본의 돈이 들어가면 중단기적인 면에서 북한의 대화·개방에 부정적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소련의 원조 중단,중국의 대북 경제협력 한계성에 비추어 북한은 지금 상당한 경제적 곤경에 처해 있기 때문에 개방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이다. 이런 때에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돈이 들어가면 오히려 전반적인 대외개방보다는 김일성 노선의 고수 강화쪽으로 기울어질 공산이 큰 것이다. 우리 정부가 불쾌하게 생각하는 대목도 없지 않다. 가네마루 전 부총리가 북한과 수교전 배상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발언한 것은 지난 65년 한일 국교정상화 과정에서 보상 문제를 오랜동안 어렵게 처리했던점을 감안할 때 한일 관계를 고려치 않은 처사라는 지적이다. 북한측은 일본과의 국교정상화 제의에 대해 『그동안 견지해온 「1개의 조선」 정책의 변경』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북한이 교차승인과 2개의 조선 정책으로 전환했는지는 오는 10월16일 제2차 평양총리회담에서 그들이 어떤 태도로 나오는지를 보면 그 허구여부가 확연히 드러날 것으로 관측된다. 앞으로 일·북한 관계개선 속도조절 문제는 한일 양국간 첨예한 외교 문제로 부각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전망된다. 일본이 우호적인 한일 관계를 계속 유지하려면 대북 관계개선 속도를 상당히 늦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이미 북한의 조속수교 의사를 읽은만큼 일단 대북관계 속도를 조절한 뒤 한소 수교 진전과정을 지켜보면서 대북 관계개선을 추진할 것으로 외교관계자들은 관측하고 있다.〈박정현 기자〉 ◎일 자민·사회당 대표 방북 4박5일/수교원칙엔 접근… 배상액수 등 난제/예상밖 성과로 되레 큰 짐 떠안은 셈 「가네마루 북한방문단」은 너무 많은 것을 안고 돌아왔다. 가네마루 신(김환신) 전 부총리와 다나베 마코토(전변성) 부위원장을 각각 단장으로 하는 일본의 자민·사회 양당 대표단의 출발 당시의 계산은 제18후지산(부사산)호 선원 2명의 석방과 쌍방의 연락사무소 설치만 합의되면 대성공이라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24일부터 28일까지 4박5일간의 짧은 교섭과정에서 대표단은 스스로 당황할 만큼 많은 것을 얻었다.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국교정상화」 교섭 문제가 공동성명에까지 포함됐다. 가네마루 단장은 묘향산 초대소에서 이틀밤을 머물며 김일성 주석과 3차례의 회담을 가졌다.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외교적 성과」로 치부한다는 것은 피상적 관찰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성과로 볼 수 없다. 오히려 북한측의 치밀한 「전술적 전환」에 타케트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욱 정확하다. 「성과」란 하나의 목표를 놓고 대등한 입장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한쪽이 다른 목적을 갖고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것은,아무리 상대편이 원하고 있던 사항이라 하더라도 성과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상대방 전략에 대한 「대응의 필요」라는 짐만 지는 셈이다. 북한은 종래의 대일 파이프라인이었던 일본 사회당을 제치고 집권 자민당의 최고실력자 가네마루 전 부총리를 조준,전략의 카드를 마음껏 펼쳤다. 국제적 고립상황의 탈피,경제적 핍박의 해소,한국에 대한 견제 등 필요에 의한 카드였다. 어쨌든 이번 자민·사회 양당 대표단의 북한 방문결과는 엄청났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물론 국교정상화 제의였다. 김일성 주석을 비롯한 북한당국자들이 27일 여러 경로를 통해 일본과의 수교를 제의해온 것에 대해 일본 정부는 한때 당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으나 『원칙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방침을 세워놓고 있다. 다만 『한반도 전체의 안정,긴장완화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한국·미국과도 의견을 교환해가며 교섭을 진전시킨다』는 입장이다. 이번 북한 방문에서 가네마루 전 부총리는 자민당의 첫번째 대표단 단장으로서 김일성 주석과 회담했다. 이 자리에서 가네마루 전 부총리는 과거 식민지 지배를 사죄하는 가이후(해부)총리의 자민당 총재 명의 서한을 전달하고 충분히 보상하겠다는 뜻을 전달했으며,북한·일본 쌍방은 전면적으로 관계를 개선,새로운 우호관계를 수립한다는 데 인식의 일치를 보았다. 28일 하오 발표된 북한 로동당과 자민·사회 3당의 공동성명에는 국교정상화 교섭을 양쪽 정부에 요청한다는 것을 비롯,과거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일본측의 사죄와 반성을 명기했으며 보상의 실현을 위해 정부간 교섭을 개시한다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다. 또 일본 정부발행 여권에 북한 제외조항을 삭제한다는 사실,도쿄∼평양간 직행편 개설,연락사무소 설치,통신위성의 이용 등 현안도 명기됐다. 전문 8장으로 된 이 공동성명은 당초 28일 상오 발표될 예정이었으나 보상 문제에 의견이 엇갈려 난항을 거듭,이날 하오 5시 넘어 조인됐다. 기초작업은 자민당의 이시이(석정) 대표단 사무총장,사회당 야마하나(산화) 부서기장 및 북한 로동당 김양건 국제부 부부장 등 사이에 27일 밤부터 28일 상오 8시에 걸쳐 철야로 진행됐으나 결론을 보지 못했다. 이에 따라 가네마루 다나베 양단장과 로동당 김용순 서기가 대표자회의를 열어 조정했다. 이날 문제가 된 보상 문제에 대해 자민당측은 『앞으로 양국 정부간의 교섭을 개시,하루라도 빨리 실현에 노력한다』는 취지로 표현하자는 데 대해 북한측은 『실행해야 할 것은 당장 해야 한다』며 직접적 표현을 고집,가네마루 전 부총리의 정치적 결단을 요구했다. 북한측은 대일 국교정상화를 제안해놓기는 했으나 교섭의 본격화로부터 국교수립까지의 타임테이블이 불투명한 상태에서 보상 문제의 조기타결과 확약을 받으려 했던 것으로 관계자들은 분석하고 있다. 어쨌든 이번 「가네마루 북한방문단」은 많은 과제를 안고 돌아왔다. 특히 한일관계에 새로운 과제를 안겨주었다. 일본 외무성 관계자들은 『몇년 전 같았으면 한국으로부터 맹렬한 반발을 받았을 것이다. 이번에는 그런 일은 없겠으나,한국에 대한 배려 때문에 「황신호」의 서행운전을 해야 할 것은 틀림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일본·북한 관계의 급속한 접근은 한국과의 관계는 물론,한반도 정세에 커다란 영향력을 갖는 미국·소련·중국 등 주변제국의 주목을 끌 것은 틀림없으며,일본 정부 자체로서도 일·소 관계 등과 관련되어 극히 어려운 외교교섭이 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 남북 축구 10월 교환경기 확정/양쪽 대표팀

    ◎11일 평양(모란봉경기장)·23일 서울(올림픽주경기장)서/우리팀 북경서 평양 직행/경평왕래는 판문점 통과 【북경=본사 특별취재단】 남북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한 축구대표팀이 오는 10월 평양과 서울에서 한차례씩 상호교환경기를 갖는다. 남북 축구대표팀은 아시안게임이 끝나는 직후인 오는 10월11일 평양 모란봉경기장에서 남북 축구친선경기 1차전을 가진 뒤 23일 서울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2차전을 갖기로 일정을 확정한 것으로 밝혀졌다. 현재 북경아시안게임에 참가중인 남북한 축구대표팀은 오는 10월9일 북경에서 평양으로 향하고 그 이후 남북간의 왕래는 모두 판문점을 경유하는 것으로 합의됐다. 이같은 사실은 아시안게임과 관련,현재 북경에 머물고 있는 정부 및 체육관계자들에 의해 28일 확인됐다. 이 관계자들은 『남북한 축구 상호방문경기는 지난 23일 북경에서 열린 남북체육장관회담과는 별도로 당초 계획했던 대로 추진되고 있으며 최근 북경에서 양측의 고위관계자들간에 완전히 타결돼 이미 구체적인 실무접촉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들에 따르면 한국의 박철언 의원과 북한의 리종옥 부주석이 북경에서 세차례 접촉을 통해 남북 축구교류 문제를 마무리하고 리종옥 부주석은 25일 북한으로,박철언 의원은 26일 대연으로 각각 떠났으며 중국측으로부터도 이와 관련한 모든 업무의 협조를 약속받았다는 것이다.
  • 「남북공존」으로 체제유지 모색(평양의 변화 이렇게 본다:4)

    ◎비현실적 「대남혁명」 보류,노선전환 꾀할 듯 최근 북한은 대남·대외 관계에서 전례없이 유연한 자세를 보여 북한은 정말 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북한은 남북고위급회담 예비회담에서,회담외적인 문제로 회담자체를 공전시켜오던 종래의 상투적인 태도를 바꿔 본회담 개최에 완전 합의를 하였다. 북한은 서울에서 개최된 1차 본회담에서 과거에는 보기드문 「진지하고 성실한 태도」를 보였고 2차 회담을 평양에서 개최할 것에도 합의했다. 그후 북한은 남한음악인들을 대거 초청하는 한편 북경에서는 남북공동 응원단 구성이 논의되었고,양측 선수들의 여느 때보다 다정한 소식들이 연일 들어오고 있다. 또 북한은 일본의 적극적인 대북한접근을 뜻밖에도 수용해버리는 대외전략 변화를 보였고,미국과의 정부간 접촉 촉진 등 대외관계의 모든 부문에서 유연성을 동시다발적으로 보였다. 폐쇄체제 속에서 제한된 변화만 해오던 북한이 동구를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급격한 변화와 함께 이러한 변화의 조짐을 한꺼번에 보이는 것은무슨 까닭인가. 한마디로 말해 그것은 소련·중국 등 북한의 전통적 우방의 동요에 따른 고립의 심화,내부경제의 핍박 등 국가적 난경을 타개하고 「하나의 조선」을 가시적으로 실증시켜,이른바 분단고정화를 추구하는 한·소 수교와 한국의 유엔단독가입 추진의 부당성을 나타내려는 종합적인 처방이라는 것이다. 북한의 그러한 태도가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 위한 일시적인 방편이라면 북한의 대외적인 상황이 바뀌면 또다시 굳어진 자세로 바뀔 것은 정해진 이치다. 우리의 관심사는 그것이 북한의 대남전략의 근본적인 변화로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제한적인 북한의 태도 변화조짐에 그러한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한 일이며,그러한 판단을 내리기에는 아직 충분한 증거가 없다. 북한의 1인 독재 체제는 폐쇄사회의 기초와 대남혁명 완성이라는 과업을 가지고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북한을 개방함으로써 기존체제의 기초를 동요시키거나 대남혁명을 공공연하게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대남 적화전략도주변상황이 불리하게 변하면 어쩔 수 없이 일시 보류를 시키거나 크게 수정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북한의 변화는 이미 오래 전부터 사회전반에 걸쳐 시작이 되었고,앞으로도 그러한 변화는 지속될 것이라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북한의 변화는 폐쇄사회의 특수한 성격상 급격한 변화를 수용할 수는 없으며,점진적인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북한에서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 것들 중 우리에게 관심있는 분야를 몇가지만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점진적인 개방을 통한 변화이다. 북한은 지금 폐쇄와 개방의 기로에 서있지만,개방을 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숙명적인 것이다. 체제와해의 위기를 최소한으로 피해가면서 서방국가들에 경제를 개방시켜,신속한 체제보강을 겨냥하는 것이다. 미·일을 비롯한 서방선진국가들로부터 자본과 기술을 끌어들여 침체된 경제(89년도 2.4% 성장)를 활성화시키지 않고서는 체제의 유지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한국의 성공적인 북방외교로 심화된 북한의 고립을 모면할 길도 없기 때문이다. 북한은 서울올림픽이 끝난 직후 88년 12월 연형묵 총리를 기용하면서 종래의 자력갱생을 앞세운 폐쇄적인 주체경제 스타일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제정책 주력방향을 제시하는가 하면 합영공업부 전자자동화공업위원회 및 도시경영부 등 새로운 경제부서를 증설하는 등의 변화를 보였던 것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둘째는 북한주민들의 의식구조의 변화다. 세계적 추세인 개혁·개방·자유화·민주화의 영향이 북한사회에 점진적으로 침습됨에 따라 북한주민들이 인권회복과 민주화를 위한 독재권력에 항거하는 의식의 변화를 일으킬 가능성이 증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 사노청 국제부위원장 김창영은 당의 지속적인 이데올로기 교육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비롯한 젊은 층의 당으로부터의 일탈현상은 점증되고 있다고 솔직하게 인정한 바 있고 로동신문(9월21일)은 「제국주의자들이 썩어빠진 부르주아문화와 생활양식을 퍼뜨려 새세대 청년들을 정신적 불구자로 만들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일본 산케이신문(2월15일)은 도쿄의 관계소식통을 인용,최근 평양시내에서 「민주화요구 데모」가 발생했다는 미확인보도가 나돌고 있다고 했으며 통일일보(3월13일)는 김일성 독재를 타도,「북」과 그에 추종하는 조총련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재일동포 사이에서 처음 표면화되었다고 했다. 이러한 상황은 북한의 중앙집권체제가 한번 흔들리게 되면 주민들의 조직적인 자유화·민주화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다. 셋째 북한의 대남전략의 변화이다. 김일성이 생존하는 한 가까운 장래에 북한의 기존 대남전략이 획기적인 변화를 보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공산권의 본질적 변화 및 대한국수교,남북한 국력격차의 확대,한국의 민주화 발전을 통한 정치적 안정과 남북한 군사력의 균형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짐에 따라 북한은 남북평화공존 이외의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북한은 앞으로 대남 「인민민주주의혁명」의 기대를 포기하자마자 비현실적인 대남혁명노선을 일단 보류하고 남북공존으로 노선전환을 하게 될 전망이다. 김일성도 그동안남북공존에 반대했었으나 88년 신년사를 통해서 「남북한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고 했으며 9월8일 40주년 9·9절 행사 연설에서는 「통일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공존원칙을 따라야 한다」고 태도를 바꾼 바도 있다. 그러나 북한의 이러한 태도변화는 통일을 외면하고 체제유지를 위한 자기적응이기 때문에 결국 조국의 통일은 그만큼 지연되는 것이다. 한반도의 북쪽에 다른 체제가 공존하는 한 남북한간의 경쟁과 대결은 불가피하게 될 것이며 평화공존의 기초위에서 통일을 성취하는 일은 앞으로 우리 민족의 큰 과제가 될 것이다.〈유석렬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 남북 경제교류 당분간은 제한적(평양의 변화 이렇게 본다:3)

    ◎대규모 교류 땐 김일성체제 불신증폭 우려 지난해말 이래로 사회주의 국가들은 급격하게 기존체제를 해체하고 시장경제체계로 이행하고 있으며,그 과정에서 민족주의 정신이 고조됨과 아울러 분단국들의 통일이 속속 이루어지고 있다. 다민족­1연방국가인 소련과 유고슬라비아가 연방해체의 위기를 맞고 있는 반면,민족분단국인 남ㆍ북예멘은 금년 5월22일 통일을 선언하고 한 나라가 되었고,동ㆍ서독 역시 금년 7월2일에 경제 및 사회통합을 이루고 10월3일에는 정치적 통일을 달성하게 되었다. 지금 북경아시아경기대회에서 화합을 다지고 있는 중국과 대만도 쌍방이 경제교류를 확대키로 함으로써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는 시기를 전후하여 경제통합을 이룰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제2차대전 후 굳어질 대로 굳어진 동서대립의 냉전구조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로서 어느 누가 이런 일들이 현실화되리라고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던 기존사고의 틀을 완전히 깨뜨려버리는 이러한 놀라운 역사적 대변혁의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지난 6월5일 한소정상회담을 보았고 그것이 수교로 이어지는 역사적 순간을 맞고 있다. 이러한 국제적 상황의 전개와 더불어 최근 남북총리회담이 열리고 북경아시아경기대회에서 남북이 함께 어울려 태극기와 인공기가 교차하는 가운데 서로간의 체육교류를 협의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관심은 다시금 통일 문제로 쏠리고 있다. 우리도 남ㆍ북예멘이나 동ㆍ서독처럼 분단의 벽을 허물고 통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한 제1차적 대답은 과연 북한이 지금 전개되고 있는 역사의 흐름에 진정으로 순응할 것이냐 하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북한체제 변화의 시나리오는 크게 ①김일성­김정일로 이어지는 세습체제 아래서 부분적인 개혁ㆍ개방이 추진되는 경우 ②현 북한 집권층이 변화의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과감한 개혁노선을 취하는 경우 ③쿠데타나 민중봉기와 같은 돌발적 사건이 발생하여 김일성과 김정일이 실각되고 새로운 지도자가 집권하여 체제변혁의 길을 택하게 되는 세가지의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단계에서 첫번째 시나리오를 제외한 나머지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두번째 시나리오의 실현 가능성이 약한 까닭은 김일성­김정일의 부자정권세습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주창해온 주체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세워진 체제와 그것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추진되어 온 기존의 정책노선을 일시에 바꾸는 개혁이 정치적 변혁없이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세번째 시나리오의 가능성을 뒷받침해주는 것으로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금년 6ㆍ25에 관한 기사에서 김일성의 권력승계 후에 쿠데타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하고,「뉴욕타임스」는 북한에 민주화운동 세력이 조직되어 있는 것으로 보도한 바 있다. 그러나 북한의 상황은 동유럽과 여러 면에서 많이 다르다는 점에서 세번째 시나리오의 실현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판단된다. 북한의 변화가 첫번째 시나리오와 같이 서서히 이루어진다고 할 때 그것을 통일의 단계에까지 발전시킬 수 있는 요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이 아닌 남북 경제교류이다. 남북 경제교류의 의의는 그것이 갖는 경제적 이익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남ㆍ북한이 여러 형태의 물적 교류와 그를 위한 인적 교류의 확대를 통해서 상호이해를 증진시키고 상호불신에서 야기되는 긴장을 완화시킴으로써 궁극적인 통일을 이루고자 하는 데 더 큰 의의가 있다. 다른 분야에 비해서 특히 경제분야에서의 교류의 의의가 큰 것은 그것을 통해서 쌍방에 서로의 물적 이익의 거점이 마련됨으로써 교류의 영속성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남ㆍ북예멘은 단일민족이기는 하지만 통일국가의 경험이 전혀 없었다. 그러면서도 극적인 통일을 이루게 된 동기는 민족분단 극복의 욕구보다는 세계 최빈국으로부터의 탈피라는 경제적 필요성이 더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동ㆍ서독의 통일 역시 동독의 서독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의 심화가 동독을 서독에 흡수통합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남북한의 경제교류는 통일의 전제가 되는 북한의 체제변화를 가져다 줄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은 1985년에 한ㆍ미 팀스피리트훈련을 이유로 경제회담을 무기한 연기하여 사실상 중단시켰던 것과 같이 최근에는 현대그룹이 북한에 제공하겠다는 장비의 무상지원을 국가체면 손상이라는 이유로 거부하는 한편 금강산개발 등 모든 공동 프로젝트의 추진까지 무효화한다고 발표하여 남북 경제교류의 길을 트는 데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더욱이 이번 북경아시아경기대회중에 북경당국이 제공하는 차량이 한국산이라는 이유로 사용을 거부했다는 소식까지 들린다. 현재 남북한 경제교류의 명맥은 우리 기업들이 홍콩,싱가포르,스위스 등의 무역상을 통해서 북한의 철강재,아연과,무연탄,전기동,한약재,생사 등을 반입하는 간접교역으로 유지되고 있다. 「7ㆍ7선언」으로 남북 경제교류가 허용된 뒤인 1988년 10월부터 금년 8월까지 북한상품의 반입 규모는 3천3백85만6천달러였으나 북한에 대한 우리 상품반출 규모는 반입액의 0.5%도 채 안되는 16만2천달러에 불과하다. 이러한 사실은 북한의 한국제품 기피현상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남북한 경제교류는 세계에서 가장 경직된 체제를 가지고 있는 북한을 상대로 하기 때문에 한국이 아무리 북한에 대해서 문호를 개방하고 유연한 자세를 취한다고 하더라도 단기적으로 성과를 기대하기는 매우 어렵다. 북한의 김일성 정권은 분단 이후 지금까지 일관되게 북한체제의 우월성과 남조선 해방을 북한 내부에 주입시켜 왔다. 그러한 상황에서 남북 경제교류가 이루어짐으로써 남한의 실상이 북한 내부에 알려지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히 북한 내부에 하나의 큰 충격이 될 것이며 김일성 체제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불신을 증폭시킬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북한의 현 체제가 유지되는 단기적 관점에서 본다면 남북한간의 경제교류는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남ㆍ북한이 동ㆍ서독과 같은 경제통합에까지 이른다는 것은 북한체제의 변혁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남북한의 경제통합을 위한 목표와 전략은 중ㆍ장기적 시각에서 모색되고 추진되어야 하며 경제통합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정부나 기업의 대내외적 과시나 선전효과를 지양하고 북한의 변화를 가속화시키는 분위기 조성과 더불어거기에 대응할 수 있는 우리의 내적 충실을 다져나가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일「경협보따리」에 은근히 기대/평양/일본대표단 맞는 북한의 자세

    ◎실리 겨냥,교섭 관례 깨고 이례적 환대/가네마루­김일성 회담일정도 앞당겨 일본의 초당파적 방문단을 맞은 북한측이 종전의 교섭관례를 깨고 몇몇 대목에서 「특이성」을 보여 일본 정계와 외교가의 주목을 끌고 있다. 그 특이사항의 첫번째는 김일성주석과 가네마루 신(금환신),다나베 마코토(전변성)단장에 의한 수뇌급회담 일정이다. 이 회담에 대해 가네마루 전부총리는 『평양도착후 즉시 김주석과 만나고 싶다』며 25일 실현을 희망했었다. 그것은 우선 톱레벨에서 전체적인 방향을 정하고 실무차원의 현안을 일사천리로 처리하자는 복안에서 나온 것이다. 이번 북한방문단의 일원인 사회당소속 참의원 후카다 하지메(심전조) 국민운동국장을 대표단 보다 한발 앞서 지난 21일 파견,회담일정을 조정토록 했던 것도 그런 뜻에서 였다. 그러나 이런 일본측 희망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북한측의 지금까지의 관례대로 교섭 최종일인 27일에 성사될 것이라는 전망이 유력했다. 북한측은 이러한 예상을 깨고 하루를 앞당긴 26일에 수뇌급 회담을 갖기로결정했다. 가네마루 단장이 희망한 25일과 북한측 관례인 27일의 중간시점,26일로 결정된 것은 여러가지 의미를 함축한다. 이것은 한마디로 북한측이 가네마루 방문단에 거는 기대가 그만큼 크다는 것을 뜻한다. 북한측의 기대는 물론 경제협력이며 돈이다. 대표단이 갖고 온 「선물」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는 시간을 버는 한편 하루를 당겨주는 선심을 보임으로써 더 많은 「실리」를 얻자는 계산이다. 일본측도 이번 수뇌급 회담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전후 45년간 단절되었던 외교상의 공백을 이번 회담 한번으로 거의 메워 보자는 희망이다. 그러나 희망의 전망은 불투명하다고 보는 것이 도쿄(동경)의 시각이다. 또 하나의 특이점은 자민ㆍ사회 양당 대표단과 조선노동당의 접촉이 25일 상오,종래의 단체교섭으로부터 시작했던 관례를 깨고 갑자기 가네마루ㆍ다나베 양단장과 조선노동당 서기 김용순국제부장의 3자회담으로 막바로 들어갔다는 점이다. 이것은 김일성주석과의 회담을 위한 일종의 예비회담의 성격을 갖는다. 이 예비회담에서 현안의 대강을 처리,26일 수뇌급 회담을 원만히 진행시키자는 준비절차이다. 25일의 3자회담에서는 일본여권의 기재사항문제,통신위성이용,연락사무소 설치 등 개별문제까지 토의했다. 보통의 경우라면 이들 현안은 실무레벨에서 협의할 성격이다. 그러나 이것을 3자회담,나아가 수뇌급 회담에까지 끌고 올라가는 것은 일ㆍ북한 쌍방의 관계개선 전제인 배상문제 및 남북통일문제 등 정치테마를 우선 협의한 뒤 개별현안을 「톱다운」방식으로 처리하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당장 필요한 것은 실무자의 결정을 거쳐 확실하게 정부간 교섭에 위임하자는 북한측의 의사를 대변하는 사항이다.이것은 가네마루 단장의 속셈과도 일치한다. 현재 북한은 「2개의 조선」을 인정하는 것을 한사코 용납하려 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는 북한의 극적인 대외정책전환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한정적이기는 하지만 북한이 나타내고 있는 「실리」에의 관심으로 볼 때 제18후지산마루(부사산환)문제 등의 현안해결은 물론 일ㆍ북한 정부당국간의직접대화 실현을 한발 앞당기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이번 북한방문단의 카운터 파트인 김용순 국제부장은 24일밤 조선노동당주최 환영만찬에서 인사말을 통해 「2개의 조선」을 합법화하고 『한반도분단 고착화는 결코 허용할 수 없다』며 종전의 원칙론을 고수했다. 그러나 「사죄」를 문제삼거나 다시 거론하는 일이 없이 기자단에 대해 『일본여권에서 북한제외조항이 삭제되고 정치활동금지의 제약이 없어진다면 일본에 가겠다고 나는 결심했다』고 말을 걸었다. 원칙론속에 감춰진 이같은 언동도 실상은 북한측 관료의 사고의 변화를 보여주는 특이점으로 관계자들은 꼽고 있다. 이번 가네마루 방북단의 평양 도착 때에는 김용순 국제부장만이 공항에 출영나왔다. 김이 북한의 실질적 외교부장의 임무를 수행하는 요직에 있다고는 하나 그의 출영은 격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 일본측의 지적이다. 가네마루 전부총리는 누가 무엇이라해도 일본집권 자민당의 최고실력자이다. 그의 북한방문을 일본정계에서는 일대 외교안건으로 받아들이고 있을정도이다. 이같은 사람에 대한 공항출영은 최소한 「총리격」이 맡았어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 점 역시 북한측 「계산」의 하나라고 보고 있다. 격을 떨어뜨려 놓고 다른 기회에 기분을 전환시켜 줌으로써 더큰 「실리」를 취하자는 전략의 하나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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