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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 새체제 대응방식 시각차(의정초점:11일 상임위)

    ◎외통위/여,“원칙있는 자세” 촉구… 야, 유화책 주문 11일 열린 국회 외무통일위원회에서는 북한의 새체제 등장에 따른 정부의 시각변화와 대응책이 논의의 초점이었다.여야의원들은 정부가 앞으로 김정일체제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를 놓고 미묘한 시각차를 보였으며 일부 야당의원들이 제기한 김일성에 대한 정부의 조의표명문제로 논란을 벌였다. 먼저 남궁진의원(민주)은 『북한 새체제의 권력이 확립될 때까지는 북한의 어느 계층도 자극하지 말고 유화조처를 취해야 한다』면서 『미­북3단계회담의 조속개최및 핵등 북한문제의 일괄타결을 정부가 지원해야 하며 핵과 경협의 고리도 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부영의원(민주)도 『김정일체제는 우리의 인식과는 상관없이 미·중·일등 국제적으로 인정추세』라면서 『정부는 새체제의 안정에 대비,바로 대화할 준비를 갖추고 있느냐』고 물었다. 이종찬의원(새한당) 역시 『김일성 사후 미국이 대단히 유화적인데 반해 우리는 다음 현상을 예측하고 조치를 취한 바가 없다』고 지적한뒤 『북한문제는 정부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일괄타결방향으로 가는 만큼 대범함을 보이라』고 유연한 태도변화를 주문. 이에반해 노재봉·박정수·서정화의원등 여당의원들은 김일성­김정일 세습체제에 대한 성격규정과 함께 정부의 원칙있는 대응자세를 촉구,성급한 유화책을 경계했다. 먼저 노의원은 『유례가 없는 부자승계정권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이냐』면서 『지금의 교류 운운은 김정일체제를 강화시켜 한반도의 영구분단으로 갈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서의원은 특히 『김일성이 없어진 북한은 이제 가난한 동토에 지나지 않는다』며 『정부는 이러한 실체를 냉철히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책을 세우라』고 촉구했다. 이들에 비해 박찬종의원(신민)은 『북한을 그대로 놔두자』는 특이한 논리를 폈다.그는 『북한의 시행착오는 필연으로,괜히 도와줍네 하고 나서다가는 함부로 부지깽이로 쑤시다 불씨를 꺼뜨리는 우를 범할수 있다』면서 『정부는 단기 과도체제인 김정일시대 이후상황을 설정해 장기적 관점에서 대책을 세우라』고 주문했다.이날 회의는 특히 김원기·이부영·임채정·남궁진의원등 민주당의원들이 정부에 김일성 조문사절단을 보낼 것을 제의,이를 둘러싼 논쟁도 벌어졌다. 이들은 「문상회담」,「조문외교」의 이점을 강조하며 『신뢰회복과 분위기조성을 위해 조문사절단을 파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면서 『국민정서등 사절단파견이 여의치 않으면 정부의 공식적인 애도표명이라도 있어야 할 것』이라고 정부의 전향적 검토를 촉구했다. 이같은 여야의원들의 질문과 제안에 대해 이홍구부총리겸 통일원장관은 「상황의 이중성」이라는 표현으로 대북관계의 복잡하고 어려운 성격을 설명했다.그는 『북한과는 일면 대결하면서 화해도 추구해야 한다』면서 조문사절단 파견문제에 대해서는 국민적 합의가 없음을 들어 분명한 거부의사를 표명했다. ◎국방위/“북지도부동향 집중감시”/“정보 수집능력 허점없나” 신랄히 추궁 11일 국회 국방위에서는 북한주석 김일성의 사망에 따른 우리 군의 「안보시나리오」가 주된 의제로 다뤄졌다. 여야 의원들은 김일성의 급작스런 사망과 관련한 군의 대처능력과 안보태세,정보수집및 예측능력등에 대해 집중적으로 물었다.북한 지도부및 군부의 움직임에 대한 질문과 더불어 북한의 핵개발 저지와 한반도 전쟁방지라는 두가지 명제를 놓고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는 한반도 상황에 대한 총체적인 점검이 이루어졌다. 먼저 김일성의 사망 사실을 34시간이나 늦은 북한측의 발표를 듣고서야 알게 된 것은 정보능력의 불재가 아니냐는 야당의원들의 질타가 쏟아졌다.민주당의 정대철 나병선 장준익의원등은 『우리 정부의 대북관련 정보의 허점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고 지적했다.군은 물론 우리측의 모든 정보기관이 『미국의 CIA조차 몰랐다더라』면서 책임을 떠넘기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질책했다.『이처럼 정보능력도 없으면서 만일의 사태를 어떻게 예측할 수 있고,만반의 태세를 자신할 수 있느냐』는 성토였다.이러한 불만은 김일성의 사인에 대한 추궁으로 이어졌다. 여야 의원들은 북한의 권력공백기에 따른 불안감을 해소하고,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안보태세를 강화해야 한다는 원칙에는 서로 이론이 없었다.그러나 김일성의 사망이 확인된 직후 정부가 내린 군 비상경계령조치에 대해서는 확연한 시각차를 드러냈다.민주당측은 김영삼대통령이 군사적 평가를 거치지 않고 이병대국방부장관에게 직접 비상경계령을 시달한 절차상의 문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반면 김종호의원(민자)은 『안보태세강화가 가장 중요한 시점이었던 만큼 단계적 절차에 따라 제대로 대처했다』고 정부측을 옹호했다.정대철의원은 「한·미·일 위기공동관리체제」를 구성할 것을 제의했다. 의원들은 이어 앞으로 한반도정세의 최대 변수는 북한군이라는 인식 아래 북한 군부의 동향및 북한의 핵정책 변화등에 대한 전망등에 대해 질의를 계속했다.『북한의 핵 개발의지는 어떻게 변할 것인가』(나병선의원),『김영주 김평일등에 의한 궁중쿠데타 또는 군부쿠데타와 주민들의 대거 탈출사태등의 가능성이 있나』(정대철의원),『북한군의 혁명 2세대 실력자에 대한 인사정보는 있느냐』(임복진의원)등. 한반도 안보의 위협요소를 제거하는 방안도 제시됐다.강창성의원은 경제협력 모색을,정대철의원은 장기적인 남북군사교류를,임복진의원은 강경파를 견제하는 대신 온건파를 강화시키는 전략을 방안으로 내놓았다. 이에 대해 이병대국방장관은 『김일성 사망이후 북한측은 군사활동이 저조해지고 대남비방방송을 중지하는 등 특이한 상황이 포착되지 않고 있다』고 답변했다. 이장관은 『북한내부의 지도체제 변화등 동향을 집중감시하고 있다』고 밝히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군사적 즉각 대응태세를 유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 “빨리온다” “두고봐야” 통일논쟁 봇물

    ◎김일성사망은 “호재”·“악재”… 시민들 입씨름/“북체제 급속히 붕괴 될것”/낙관론/“성급한 환상은 금물이다”/신중론 남북정상회담으로 달아오르던 통일논의가 북한주석 김일성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김일성사망이 전해진 9일 저녁 각 가정과 주점에서는 가족끼리 또는 친구끼리 김의 사망원인과 통일전망을 화제의 꽃으로 삼았으며 심지어는 서로 목청을 높여 언쟁을 벌이는 장면이 많이 눈에 띄었다. 휴일인 10일 대부분의 국민들은 김주석사망의 급보가 던진 충격과 불안에서 서서히 벗어나면서 나름대로 일가견을 펴며 북한체제및 남북관계의 변화등을 화제로 얘기꽃을 피웠다. 특히 시민들은 신문·방송의 보도에 눈과 귀를 기울이면서 김의 사망이 남북통일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고 분단상황이 언제쯤 해소될지등을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이날 곳곳에서 벌어진 토론의 초점은 역시 남북통일문제였다. 가정과 비상근무령이 내려진 관청과 일부기업등에서는 『김주석이 없는 북한체제가 급격한 속도로 붕괴돼 예상보다 빨리 통일이 앞당겨질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이 비교적 우세했다.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 김종희씨(60·여·전직교사)집에서는 온가족이 모여 TV를 시청하면서 주로 김주석사망과 통일전망등에 대해 활발히 의견을 주고받으며 토론을 벌였다. 김씨동생 종호씨(51·은행원)는 『북한체제가 약간의 혼란은 있을 수 있으나 현재보다 민주적인 형태로 바뀌면서 남북대화는 오히려 급진전돼 통일이 앞당겨질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통일이 되더라도 남한의 급격한 북한체제흡수등은 막대한 통일경비등으로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으로 예상하면서 반세기를 달리한 양체제를 어느정도 인정하는 선에서 점진적인 통합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폈다. 이처럼 낙관론을 펴는 국민들 가운데 통일의 시점을 올해에 가능하다는 사람도 있는 반면 3∼5년안으로 통일이 이뤄질 것 같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같은 낙관론과는 달리 김정일을 정점으로 한 강경보수파들의 집권으로 통일이 더욱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신중론도 만만치 않았다. 이날 한강고수부지에 친구들과 놀러나온 이충구씨(33·회사원)는 『반세기 북한을 장악해온 김일성의 사망으로 권력배분의 요구가 커질 것』이라며 『북한에 당분간 혼란이 예상되며 북한측이 남북정상회담을 계속 하자고 주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처럼 마련된 대화분위기가 깨질 가능성이 크다』고 걱정했다. 따라서 우리정부는 북한동향을 예의주시하며 평화적인 분위기를 조성해가되 북한의 진의를 정확히 파악,서두르지 말고 남북대화에 임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다. 또 고향을 이북에 둔 이산가족 1∼2세들은 남북 양측의 군에 비상경계령이 내려진 가운데 십인십색의 분열된 통일논의는 자칫 북한의 오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며 성급한 낙관이나 비관 어느쪽도 경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이들은 민족분단의 장본인인 김일성에 대한 지나친 미화는 금물이며 김주석의 사망으로 갑자기 화해무드가 조성돼 통일된다는 장미빛 환상은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이와 함께 25일로 예정된 남북정상회담이 사실상 무산된 상황에서 섣부른 통일논의는 정부에 부담만주는 것이며 북한의 권력이 누구에게 돌아가든 북한은 기본적으로 무력통일의 정서를 가지고 있는만큼 경계의 고삐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그동안 사회일각에서 제기돼온 통일논의는 김의 사망을 계기로 구체성을 띠고 범국민적인 관심사로 부각되면서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 김일성 사망소식이 남다른 두사람

    ◎이북5도민회 강제문의장/“분단 고착 장애물 사라져”/동족상잔 원흉… 정상회담 진의 의심 『남북이산가족의 한맺힌 염원은 한걸음 앞당겨 실현되겠지만 한편으로 김일성이 저지른 죄악에 대해서는 누구한테 사과를 받아야 할지 가슴이 답답합니다』 1천만 실향민들의 정신적 고향역할을 해온 이북5도민회 중앙연합회 강제문 대표의장(72)은 김일성의 죽음을 『남북분단 고착화의 큰 장애물이 사라진 것』이라고 평가했다.25살때인 지난 47년 공산당학정을 피해 월남한 강의장은 김일성이 좀더 살아 남북화해의 기틀을 정착시켰으면 좋았겠다는 일부 견해에 대해 거부감을 보였다. 그는 최근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국민적 기대감 때문에 그같은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북한공산정권이나 김일성의 본질과 죄과를 망각한 감상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강의장은 이어 오는 25일로 잡혔던 1차 평양남북정상회담에 이어 2차 서울회담을 약속하지 않았다는 점등을 새겨보면 이번 남북정상회담에 김일성이 진심으로 민족화해를 위해 응하려 했는지 의심스럽다고 덧붙였다. 김일성이 「불바다」발언 파문때 죽지않고 남북정상회담을 목전에 두고 「남북화해에 혹시나 기여하지 않았을까」하는 한가닥 아쉬움을 남긴채 죽은 것을 보면 『김일성은 「팔자좋은 사람」』이라고 쓴웃음을 짓는 강의장은 『그는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쉽게 남북의 창을 열지를 않았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마디로 민족적으로나 개인적으로 김일성은 잘 죽었다』고 말하는 강의장은 『김일성은 분명 민족분단의 원흉이요 동족상잔이라는 반역사적인 전쟁을 일으킨 전범으로 살아생전에 꼭 사과와 참회를 받아 냈어야 했다』고 아쉬워 했다. 강의장은 『김일성은 북한주민들에게는 인간이 아닌 신이었지만 김정일은 숙명을 지닌 인간으로 인식되어 있기 때문에 김일성이 휘둘러온 절대권력을 그대로 이어 받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김정일이 당장은 절대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비록 김일성처럼 강도높은 주민통제정책을 실시하더라도 올해를 넘기지 못하고 개방과 개혁으로 대내외정책기조를 전환하게되고 따라서 이산가족들의 고향방문이나 제한적인 「만남의 장」을 마련할 수밖에 없을것이라고 기대감을 표시했다. 독실한 기독교신자로 원로 장로회 회장(대한예수교합동)이기도 한 강의장은 일요일인 10일 교회에서 『실향민들의 한풀이 마당이 하루라도 앞당겨지도록 간절히 기도했다』며 말을 맺었다. ◎군번1번 예비역대장 이형근씨/“사죄 한마디 없이 죽다니”/세계유일 분단국 멍에 벗는 계기로 6·25참전용사는 물론 그 미망인이나 유족들이 말하는 북한주석 김일성의 사망에 대한 느낌은 남달랐다. 『김일성은 우리에게는 불구대천지원수입니다.민족상잔의 전쟁을 일으킨 전범이라는 사실외에도 그가 이 땅에 저질러 놓고 간 일들이 어디 한두가지입니까』 6·25전쟁중 아내와 동생(이상근 당시 대령)을 한꺼번에 잃은 예비역 육군대장 이형근씨(74)는 『당시 참전용사와 그 미망인,그리고 유족들도 나와 똑같은 생각일 것』이라며 『그를 자연사하도록 버려둔 것이 오히려 죄스럽다』고 울분을 삭이지 못했다. 그는 『오늘아침 미국대통령이 사망한 김일성에게 「미국국민들을 대신해 북한주민들에게 심심한 애도를 표한다」는 뉴스를 들었다』며 『아마 미국대통령은 김일성이 한국전쟁에서 미군과 UN군 15만2천명,한국군 25만7천명,민간인 86만명을 사상케 한 전쟁 책임자라는 것을 잊은 모양』이라고 꼬집었다. 『물론 인간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지요.그러나 그는 우리 민족에게 뿐만아니라 죽는 날까지 전세계 평화애호 국민들을 위협한 장본인이었습니다』이씨는 김일성이 최근까지 「핵」문제를 둘러싸고 국제사회의 제재에 직면했던 사실등을 예로 들고 『사죄한마디 하지않고 사망한 그에게 개인적으로 연민의 정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예비역 육군대장이라는 영예외에 「대한민국 군번 1번(10001)」·「창군의 주역」·「최연소 육군참모총장」등 군최고의 영예를 지니고 있는 그는 6·25전쟁때 2사단장으로 의정부전투에 참가,북한군의 남침을 저지하기위해 최일선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역전의 용사.그는 『현재 우리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조국수호를 위해 목숨을 바쳐가며 싸웠는데도 아직껏 세계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있다』며 『이번 김일성의 죽음이 우리민족에 통일을 앞당기는 계기가 될 수있도록 국민 모두가 국력을 결집해 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북한이 아직은 체제유지에 급급한 만큼 당장 어떤변화를 기대하기란 힘들 것이라고 밝힌 그는 그러나 북한이 과거 김일성때보다는 개방과 개혁에 눈을 돌려 남북대화등에도 보다 적극적으로 응해 올 것으로 보인다며 우리정부와 국민들이 이에 신중히 대처해 나갈것을 다짐했다.
  • 오두산 전망대에 실향민 1만 몰려

    ◎휴일 빗속에 혈육상봉 날짜 손꼽아/“남북 정상회담 꼭 열어 아픔 덜어주길”/북녘땅 가리키며 눈시울 붉혀 김일성의 사망으로 한반도 정세가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는 가운데 10일 경기도 파주군 오두산 통일전망대에는 북녘땅을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보려는 실향민 등 관람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아침부터 비가 내린데다 짙은 안개로 북측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궂은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평소와 다름없이 이곳을 찾은 1만여명의 관람객들은 분단의 현실을 몸으로 느끼며 통일에의 염원을 달래고 있었다. 관람객들가운데에는 실향민들은 물론이고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나온 젊은 부부 등 가족단위 관람객들도 많았다. 이들은 2·3층 전망대에서 폭 3㎞정도의 임진강 너머 짙은 안개로 가려져 있는 북녘땅을 쳐다보며 김일성의 사망에 따른 앞으로의 남북관계전망 및 이산가족문제등을 서로 나누고 있었다. 또 일부 관람객들은 준비해온 손망원경으로 북녘땅을 관측하는가 하면 2∼3곳의 북측 확성기에서 나오는 대남방송을 듣느라 손을 귀에 가까이 대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이날 낮12시쯤 2층 전망대에서 황해도 해주가 고향인 송원순(74·인천구 남구 학익1동)·임이순(68·여)부부는 개성직할시가 있는 북녘땅 관산반도를 손으로 가리키며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고향 평양에서 9살때 월남했다는 권세정씨(57·여·서울 성동구 용답동)도 『어릴 때 평양시내 거리 곳곳에 걸린 김일성 얼굴사진을 보면 무조건 「김일성 장군 만세」를 외치곤 했다』면서 『주체사상을 고집하며 외부와의 단절을 고수해온 김주석이 사망한 만큼 북한도 이제는 개방화 정책으로 주민들의 생활을 좀더 나아지도록 해야 할 것』이라며 준비해온 망원경으로 북측을 바라봤다. 강원도 고성의 통일전망대에도 여느때의 1천5백여명보다 5백여명이 많은 2천여명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서울에서 새벽차로 통일전망대까지 왔다는 심우규할아버지(82·서울 은평구 녹번동)는 『고향인 강원도 통천에 어머니를 남겨놓고 전쟁통에 피난온뒤 지금까지 망향의 한을 안고 살아왔다』며 『김일성이가 죽었다니 어머니께 불효했다는 죄책감이 솟구쳐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같아 분통함을 가눌 길이 없다』고 말했다. 김일성의 사망소식에 한평생을 고향을 그리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나 이곳을 찾았다는 이조원씨(36·상업·경기도 화성군 태안읍)는 『김일성이 몇년만 빨리 죽었으면 어머니가 그렇게 그리던 고향을 한번은 가볼 수 있었지 않았겠느냐』며 『김일성사망이 남북이산가족들의 한을 풀어주는 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을 맺었다.
  • 「과대망상증」 부자가 닮은꼴/김일성­김정일 인물비교

    ◎형세 판단력 뛰어난 카리스마형/김일성/행동 거칠고 충동적… 방약무인형/김정일 분단 반세기에 걸쳐 북한의 절대권력자로 군림한 김일성과 권좌를 대물림한 김정일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통치스타일은 물론 취향이나 생활 습관 등에 이르기까지 부자의 성향이나 스타일이 여러 면에서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우선 김일성은 훤칠한 키,호남형에다 듬직한 체구에서 풍기는 외모로 주위사람들를 압도한다.오랜 빨치산 생활을 통해 습성화된 동물적 정치감각과 주도면밀한 성격을 바탕으로 권모술수와 조직장악력이 뛰어난 인물이다. 즉 「간특할」정도로 형세판단에 탁월하며 이 판단을 기초로 『상대가 약할때 공격하고』『상대가 강할때는 과감히 후퇴하며』『후퇴시에는 적절한 상대의 약점을 잡아 협상으로 국면전환』을 시도한다. 김일성의 이같은 빨치산식 전술은 「68년의 푸에블로호 납치사건」「7·4남북공동성명」에서도 적절하게 구사됐다. 굳이 두 부자의 공통점을 찾자면 과대망상증 정도라고 할 수 있다.거대한 카드섹션쇼의 김일성모습,특권층만의 차량통행이 허용된 장대한 개선문,김부자의 영광과 안락을 위해 전국에서 뽑혀온 「여성접대원」들이 고급벤츠 승용차 앞에서 머리 숙여 절하는 모습에서 이들의 공통분모가 읽혀진다.또 원래 금박을 입혔다가 등소평의 핀잔을 듣고 금박을 벗겼다는 거대한 김일성동상,외국인 방문자의 눈을 속이기 위한 급조 통행인,형식적인 교회,전시용백화점등도 이들 부자의 과대망상증을 뒷받침해주는 한 단면이다. 김일성은 늘 미소를 짓고 어린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한 말투로 포옹하는 등 이미지 관리에도 능하다.「친애하는 위대한 수령」이라는 호칭에 걸맞는 교묘한 연기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은 아버지와 달리 카리스마도 없으며 행동이 거칠고 충동적이다.85㎏의 비만 때문에 몸가짐이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또 1백65㎝의 작은 키에 다른 사람을 내려다보기 위해 뒷굽이 높은 구두를 신는다.시력은 극히 나빠 0.1∼0.2의 근시. 김정일은 주말마다 자신이 주최하는 파티에서 위스키와 코냑을 즐겨 마시면서 경음악밴드에 맞춰 춤을 추고 한국의 히트대중가요를 부르기도 한다.그의 애창곡은 「하숙생」「이별」 「찔레꽃」등이며 요즘은 「사랑의 미로」를 즐겨부르는 것으로 알려졌다.그는 또 영화보기를 무척 좋아한다. 그는 화가 나면 총을 꺼내들고 상대방에게 겨누거나 재떨이를 던지는 괴벽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또 주민들에게는 겸손한 체하나 측근에 대해서는 오만하다.평소의 말투는 아주 거칠고 방약무인이다.측근중 인민무력부장 오진우에게만 경어를 쓸 뿐이다.각종보고를 받을 때 기분이 좋은 경우는 1만달러 정도를 줄 때도 있는데 절대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을 만큼 고집이 세다. 한번 결심한 것은 끝까지 밀고 나가는 성격을 갖고 있는데 이때문에 시행착오나 부작용이 많아 북한주민들은 그의 성격을 난폭하다고 혹평한다. 「베이비 김」은 소년시절 생모의 사망(7살)과 부친 김일성의 재혼(11살)을 계기로 성격이 비뚤어지고 난폭해졌다. 윗사람들의 얘기는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버렸다.공부에 전혀 흥미가 없어 한글도제대로 읽고 쓰지 못한다고 혹평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그대신 어릴때부터 일찍 섹스에 눈을 떠 중·고등학교 시절 그에게 당해 임신한 교사가 자살하는 소동이 벌어졌다는 얘기도 들린다. 성장한 이후에도 그의 여자 사냥벽은 계속되고 있다.자신의 비밀,특히 정사에 관한 일을 조금이라도 외부에 누설하거나 방탕한 생활에 충고를 하는 자가 있으면 아무리 측근이라도 총살에 처하는 비정한 면이 있다. 그는 67년9월 결혼했으나 딸 하나를 둔뒤 70년에 이혼했다.첫 부인이 보통교육부의 전부부장(우리의 차관)김일천이라는 추측도 있다.72년 청진시 공산대학 부학장 김용준의 둘째딸 김애숙과 재혼,아들 하나를 두어 자식이 두명이다.소련여성 알라와의 사이에 주라라는 아들이 하나있다. 외제차 수집광에 스피드광인 그는 벤츠스포츠카등 독일·일본제의 고급승용차 30대를 가지고 있다.
  • 실향민마을/“분단원흉 사라졌다” 막걸리파티

    ◎속초 아바이마을·철원 대마리 르포/“「일부국민 실망」 보도 도저히 이해안가”/“이제 멀잖아 고향방문길 열릴것” 기대 「내 잠시 다녀오지요」라는 한마디만을 남긴채 어스름 달빛을 밟고 고향땅을 떠난지 어언 반세기­한치라도 고향가까이에 머물고 싶은 비원을 안고 휴전선을 따라 만들어진 실향민촌 주민들의 얼굴마다에는 김일성이 죽었다는 소식에 한평생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한이 조금이라도 풀리는듯 감회어린 표정이 역력했다. ▷속초아바이촌◁ 1·4후퇴때 원산과 함흥항을 떠나 피란길에 올랐다가 끝내 고향가는 길을 잃어버린 함경도 실향민들이 대거 몰려 살고 있는 강원도 속초시 청호동 속칭 「아바이」마을의 실향민들은 전날에 이어 10일에도 노인정에 모여 「김일성 사망」을 축하하는 막걸리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함경도 북청이 고향으로 1·4후퇴때 부모님,아내와 4남매를 고스란히 두고 부산으로 왔다가 아바이촌에 정착했다는 조일랑할아버지(78)는 『김일성이 죽었다가 고향에 두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더 솟구친다』며 멀리북쪽하늘로 시선을 모았다. 함경도 영흥이 고향이라는 아바이마을의 최연장 이춘섭할아버지(92)는 『하루에도 몇번씩 김일성을 저주해왔는데 하느님이 이제야 소원을 들어 주었다』며 『10살이나 아래인 김일성이 먼저 죽은 것은 「천벌」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산가족들의 고향방문기회를 마련하기 위한 돌파구가 마련될지도 모를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인지 「또 고향가는 길이 물거품이 되는게 아니냐」는 탄식도 적지 않았다. 전날 정오뉴스에서 김일성 사망 소식을 처음듣고 고향사람들과 모여 만년한을 쏟아내기라도 하듯 통곡을 했다는 함경도 북청출신의 박춘심할머니(66)는 『김일성이가 죽어 혹시나 했던 이산가족의 고향방문길이 또 막히는게 아닌지 모르겠다』고 울먹였다. 할아버지를 아바이라고 부른다해서 흔히 「아바이」로 통하는 이들 함경도출신 실향민 대부분은 『그래도 민족분단의 원흉이 죽었으니 고향에 돌아갈 날도 시간문제 아니겠느냐』며 이구동성으로 한결 마음은 가볍다고 말했다. 갈대만이 아무렇게 자라던 바닷가를 억척스레 보금자리로 탈바꿈시켜놓은 함경도 실향민들은 파도소리에 고향소식이 실려올까 해서 북풍한설을 마다하지 않고 창문을 북쪽 바닷가쪽으로 내놓고 살고 있다고 했다. ▷철원 대마리◁ 『진작 죽었어야할 위인이…』 혀를 끌끌차는 70대 촌로의 얼굴에 가득한 주름살이 분단반세기 인고의 아픔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김일성주석 사망」소식 이틀째인 10일 낮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대마1,2리. 민통선 바로 남쪽 널따란 철원평야 한쪽에 자리잡은 아담한 이곳 마을주민들의 감회는 사뭇 남달랐다. 모두 2백여가구 1천여주민들 가운데 휴전선이북에 고향을 둔 실향민이 60여가구 4백여명.일부는 지금도 눈에 잡히는 철책선 바로 너머에 고향을 둔 사람들이고 나머지는 함경도와 평안도에서 피란을 내려와 조금이라도 고향 가까운데 자리를 잡았다가 못돌아간 이들이 모여사는 곳이다. 『내 살아생전 김일성이 죽는 것을 보고 싶었다』는 이동윤옹(75)은 고향 함경남도 고산이 불과 40여리 지척이지만피란때 못모시고 내려온 어머니 생각을 잊은 적이 없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휴전과 함께 빤히 바라보면서 못가는 고향에 더욱 속을 태운 김동래씨(50)는 『수년전에 돌아가신 아버님이 가르쳐준 조상님의 산소 위치가 이젠 가물가물할 뿐』이라고 말한다. 『어렵사리 합의한 남북정상회담이 불투명하고 김일성사망에 일부 국민들이 실망한다는 보도를 우리는 의아스럽게 생각합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장마비를 맞으며 논물을 보러 나가던 실향민 이인성씨(64)는 『한반도 분단과 6·25전쟁의 원흉이 죽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 「김정일 전처오빠」 서울 산다/분단 비극 또한명의 희생자 성일기씨

    ◎“배우출신 동생 성격차로 결혼 실패”/월북한 가족 생전에 만나보는게 꿈” 김일성의 사망으로 북한의 최고 권좌에 오를 것이 확실시되는 김정일의 첫번째 부인이었던 성혜임씨(57)의 친오빠 일기씨(62)가 서울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화제가 되고 있다. 은평구 갈현 1동에 살고 있는 성씨는 10일 자택으로 찾아간 기자에게 『우리 가족의 비극적인 역사는 이제 그만 땅속에 묻혀져야 한다.가족의 비극적 역사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않다』며 사진 촬영을 극구 사양했다. 그는 동생 혜임씨가 김정일의 첫 부인이었다는 사실을 6년전 당국과 다른 경로를 통해 들었다고 소개했다.뛰어난 미모의 영화배우 출신인 그녀는 첫 결혼에 실패한 뒤 67년 당시 30세의 나이로 5살 연하였던 김정일과 결혼,71년 첫아들인 정남군을 낳았다. 그녀는 그러나 김정일과의 성격차이로 또다시 원만한 결혼생활에는 실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씨는 동생이 김정일과 결혼한 배경에 대해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동생이 북에서 영화배우를 했기 때문에 예술분야에 관심이 많은 김정일과 연이 닿게 됐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고 말했다. 성씨 가족의 비극은 일기씨의 아버지 유경씨가 48년 일기씨만 서울에 남긴 채 어머니 김원주씨와 세 딸(혜랑,혜임,화자)을 데리고 월북하면서 시작됐다. 아버지 유경씨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 30년대 중반부터 서울에서 남로당 고위 조직원으로 활동하다 월북,노동당 고위직을 지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기씨도 가족들이 월북한 직후인 49년 북으로 가 유격대원 교육을 받은뒤 6·25에 참전,경남·북 일대에서 빨치산 활동을 3년 넘게 벌이다 53년 12월 당국에 체포됐으나 김창용 당시 특무대장의 「배려」로 옥고를 치르지 않고 풀려났다. 성씨는 『우리 가족이야말로 분단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가장 뼈저리게 겪었다』면서 『아직 생존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죽기전에 한번 만나보았으면 하는게 마지막 소망』이라고 밝혔다.
  • 비정한 권력투쟁가… 유례없는 반세기 독재/김일성 82년의 인생역정

    ◎유년 평양·만주 전전… 20세에 빨치산 활동/해방후 구소점령군 배경업고 권력장악/도전세력 가치없이 제거… 1인체제 구축/민족통일 빙자 6·25남침… 「전범」 낙인/67년 주체사상 만들어 사회주의 통치도구로 활용하기도 김일성.현대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장기집권을 누린 독재자이다.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난 45년 소련군을 등에 업고 한반도의 절반인 북한땅의 통치자가 된 뒤 거의 반세기동안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휘둘러왔다.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주석과 당총비서라는 사회주의 체제 특유의 어마어마한 권력집중적 직책도 모자라 북한주민들에게 「위대한 수령」,「민족의 태양」으로 부르기를 강요한 전제군주적 독재자였다. 김은 어찌보면 사이비 종교집단의 교주처럼 전지전능하고 무오류의 존재로 인식되도록 주민들을 세뇌시켜왔다고 할 수 있다.먹을 것이 모자라 하루 두끼 먹기운동을 벌이면서도 철저한 사상무장과 외부 정보통제로 주민들로 하여금 지상낙원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믿도록 만드는능력을 갖춘 인물이 바로 김일성이기 때문이다. 김은 1912년 4월15일 평양의 한 농가에서 아버지 김형직과 어머니 강반석을 부모로 하여 철주와 영주를 동생으로 둔 삼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본명은 성주였으나 만주에서 빨치산활동을 할 때 일성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에 대한 기록은 우상화과정에서 지나치게 미화되거나 엄청나게 날조되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그의 출생지가 평남 대동군 룡산면 하리 칠골에 있는 외가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이름도 성주에서 일성을 거쳐 다시 일성으로 바뀌었다는 얘기도 있다. 어쨌든 김일성의 「공식」생가는 평양 대동강변 언덕에 자리잡은 지금의 만경대이며 이른바 「혁명의 요람」으로 북한의 모든 주민들에게는 참배의 대상이 되어왔다. 김은 어린 시절 한때 외할아버지가 개신교 장로를 지내는 등 독실한 기독교 집안인 외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 강반석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다니기도 했다. 그는 만경대에서 짧은 유년시절을 보낸 뒤 가족과 함께 만주로 이주했다.그후 김은 만주의 중국계 소학교인 모예산소학교,팔도구소학교와 평양근교 외가인 칠골에 있는 외조부 강돈욱이 교감으로 있던 창덕학교 등을 전전하며 파란많은 소년기를 보내다 26년 역시 중국계인 무송소학교를 졸업한다. 이후 32년 유격대활동에 적극 가담하기까지의 기간은 뚜렷한 활동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다만 북한에서 나온 그의 전기들은 이 기간중 장춘과 길림 사이에 있는 가륜에서 한인농민들에게 사상교화작업을 했다고 쓰고 있다. 그는 31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32년 중순부터 중국 공산당 산하의 항일 빨치산집단에 참여한다.이때 이름도 성주에서 일성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김의 항일투쟁경력은 그가 북한정권을 장악한뒤 유일체제를 강화하면서 그에 대한 우상화를 합리화하기 위해 터무니없이 과장·미화되었다.북한의 선전용 김일성 전기들은 만주사변이 일어난 32년 그가 조선공산당을 창설했다고 하지만 당시 불과 19세였던 그는 당시 그럴만한 힘이 없었다. 그는 2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양세봉이라는 한인이 이끄는 유격조직에 들어감으로써 항일빨치산 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후 그는 중국공산당 산하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에 사병으로 들어가 활동하다 우수한 중국어 실력을 인정받아 나중에 대대장급으로 승진했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만주 일대에서 소규모 유격활동을 벌이던 김은 37년 유격대원 2백명을 이끌고 국경 마을인 함남 보천보를 습격했다.일본경찰지서와 우체국 등을 방화하고 추격해오는 경찰서장을 비롯한 일경 7명을 살해한 이른바 「보천보전투」를 벌여 순식간에 유명해졌다. 김은 이 전투가 자신이 참여한 빨치산 전투중 가장 성공적인 전투였다고 자랑하며 보천보에 자신의 동상과 혁명박물관까지 세우고 북한 주민들에개 참관을 강요했다.하지만 보천보사건을 일으킨 사람이 김일성이 아니라는 소수 의견을 내는 학자들도 있다.즉 보천보사건의 김일성은 그해 11월 죽었으며 그의 부하였던 사람이 소련으로 도피한 뒤 그의 이름을 도용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보천보사건 이후 일본이 중국 본토 침략의 전초전으로 만주의 빨친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전에나서는 바람에 동북항일연군은 급속히 와해되기 시작했다.때문에 김도 41년 8월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 서쪽으로 피신해야 했다. 소련은 이 무렵 만주에서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중국인과 한인유격대원들을 모아 블라디보스토크 근교 등지에 「88독립저격여단」이라는 부대를 창설했다.김도 김책,최용건,이동화 등 빨치산 동료들과 함께 이 부대에 들어가 43년에는 대위급으로 진급한다. 김은 여기서 만주에서 함께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김정숙과 결혼했다.그녀는 16세 때인 35년에 김일성의 빨치산부대에 가담해 주방일 등 잡일을 보았던 여자였다. 김은 42년 그녀와의 사이에 첫아들인 정일(소련명 유라)을 낳았다.하지만 그녀는 49년 평양에서 사산아를 낳다가 사망했다. 해방과 함께 무명의 소련군 장교로 평양에 입성한 그는 이후 소련의 절대적 후원과 타고난 권모술수로 재빨리 권력을 장악한다.소련 점령군은 친소세력에 의한 공산정권 수립의 필요성에 따라 자신들의 협조자들 가운데 하나를 북한지도자로 만들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고 김이 바로 그같은소련의 의도를 기민하게 포착한 것이다. 소련점령군이 46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만들어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지명하면서 정치지도자로서의 그의 기반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1949년 3월에서 4월까지 한달동안 자신을 도와준 소련에 감사를 표시하기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인 6월 24일 북로당과 남로당 중앙위원회연석회의를 열어 당 위원장자리를 차지했다.이 회의에서 당의 명칭도 북조선노동당에서 조선노동당으로 바꾸었다. 당과 정부기관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김일성은 자신에게 도전하는 세력을 가차없이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아무도 넘볼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그는 자신에게 협력했던 인사도 자신에 도전할 정도로 위험하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숙청 또는 암살이라는 수단을 동원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는데 심지어 자신과 유격대활동을 함께했던 빨치산대원들까지 가차없이 제거하기도 했다. 그는 조만식과 같은 민족주의자뿐 아니라 박헌영,김두봉등과 같이 자신에게 협력했던 수많은 인물들을 한국전쟁에 대한패전책임을 덮어씌우거나 종파주의를 부추키고 있다는등의 갖가지 죄목을 걸어 제거함으로써 결국 북한정권을 족벌체제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소련의 힘을 빌려 48년 북한정권의 초대수상에,49년 조선노동당 초대위원장에 오른뒤 도전세력들을 가차없이 제거하기 시작했다.그는 조만식 등 민족주의자는 물론 현준혁 등 국내파,박헌영 등 남로당계,김두봉을 위시한 연안파,허가이 등 소련파를 차례로 숙청해 결국 아무도 넘볼 수 없는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김은 자신의 권좌가 어느 정도 다져진 50년 6월25일 한반도의 적화통일이라는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마침내 무력 남침을 감행한다. 그 자신이 식은죽먹기라고 여겼던 적화통일이 유엔의 개입으로 실패로 끝났음에도 그는 전혀 책임을 느끼지 않았다. 김일성이 무력 적화통일이라는 야욕을 공공연히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47년부터였다.그는 신년사를 통해 『단합된 민주조선의 건설은 남한에 있는 반동적인 매국노들에 대한 궁극적인 승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인민군과 보안대를 강화시켜야한다』고 역설했다. 김일성은 모든 상황이 유리하다고 판단,밤도둑처럼 새벽야음을 틈타 남침을 했으나 유엔군이 참전하고 중국의용군이 자신을 도와주러 왔을때는 이미 전쟁이 자신의 관리능력 밖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되었다.국제정세를 너무 단순하게 보았던 판단착오의 결과였다. 김일성은 자신의 실수로 엄청난 결과가 빚어지자 동료들을 숙청했다.그는 1950년 12월 21일 강계에서 열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에서 그의 빨치산 동료들을 비롯한 거의 모든 사람들을 공격했으며 그 가운데서 김일,최광,임춘추,김열,무정등은 당에서 축출해버렸다. 김일성은 뒤이어 당의 재조직문제를 놓고 자신과 이견을 보인 소련파의 거두 허가이를 숙청했으며 박헌영을 비롯한 국내파들도 정부전복을 기도하고 미국을 위해 스파이활동을 했다는등의 죄목으로 체포해 사형에 처하는등 자신에게 도전하거나 더이상 쓸모가 없다고 생각되는 세력은 여지없이 제거하는 비정함을 보였다. 김일성은 50년대 중반 자신에게 정치적으로 도전하는 세력들을 숙청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이래 67년에 「주체사상」을 만들어 냈으며 72년에 와서 북한의 사회주의헌법에 통치이념으로 명문화시켜 통치의 도구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같은 주체사상과 김일성에 대한 극단적인 우상화가 맞물리면서 북한정권이 안에서부터 서서히 허물어지는 요인이 됐다. 북한의 선전매체들이 김일성에 대해 『가랑잎을 띄우고 대하를 건너가는 만고의 영웅이며 그가 한번 노려보기만 하면 원쑤도 가을 풀같이 쓰러진다』고 보도할 정도로 북한은 이후 유사종교집단적 사회구조를 띠면서 경직적인 김일성 1인체제가 굳어지기 시작했다. 70년대 이후 김일성은 남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완전히 밀리면서 철저한 폐쇄체제로 주민들을 통제하면서 다른 한편 아들인 김정일에게로 후계세습작업을 가시화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나름대로의 준비과정을 거쳐 지난 72년 12월 비공개리에 당중앙위 전원회의를 거쳐 김정일을 자신의 후계자로 내부적으로 결정했다.그도 소련의 스탈린 등의 전례를 보고 자신의 사후에 대해 대비를 시작한 것이다.다시 말해 스탈린 사망후 대대적인 격하운동에 충격을 받은 김이 사후 안전판으로 세계사에 유례없는 부자간 권력승계라는 희화적 구도를 상정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그는 자신에 대한 우상화 이상으로 김정일에 대한 상징조작을 단계적으로 확대해나가면서 권력을 하나씩 아들에게 이양하기 시작했다.김정일에 대한 호칭을 「당중앙」에서부터 「경애하는 지도자 동지」,「향도의 별」 등으로 격상시켜나가면서 노동당 조직비서(73년),노동당 정치 상무위원회 위원(80년),인민군 최고사령관(91년),국방위원장(93년) 등 핵심요직을 하나하나 물려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북한주민들에게 「살아있는 신」으로 우상화작업을 펴온 김일성도 끝내 죽음을 거부할 수 없는,한 평범한 인간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그 자신도 70년대 이후 각종 질병에 시달리면서 건강유지에 발버둥쳐온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김일성의 질환은 지난 73년께부터 확인된 뒷머리의 혹에서부터 고혈압·당뇨·난청·신경통·뇌일혈을 비롯해 그를 8일 새벽 마침내 죽음으로 몰고간 심근경색 등 10여가지에 이르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어쨌든 그는 분단 반세기만에 초유의 역사적 사건인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급사했다.그를 갑작스런 죽음으로 몰고간 원인이 그의 일생일대의 도박이라고 할 수 있는 정상회담에 대한 준비과정에서의 과로 때문인지,아니면 경제난과 대외적 고립에 따른 누적된 스트레스 탓인지는 아무도 모른다.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북한주민들에게 영생불사의 존재로 신격화된 그도 죽음 앞에 아무도 예외일 수가 없다는 철리를 그의 맹목적인 추종세력들에게 마침내 일께워 준것이다. 그의 공과는 후세의 사가가 엄정하게 평가해줄 것이다.그가 역사의 장에 어떻게 기록되든 과대망상에 빠진 권력의 화신이었다는 사실은 동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이미 뚜렷이 각인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일성 연표◁ △1912.4.15 평남 대동군 고평면 남리 만경대출생(본명은 김성주) △1923 만주 장백현 팔도구 소학교 졸업 △1926 만주 길림 육문중학 중퇴,재학중 공청 가입 △1930 김성주를 김일성으로 개명 △1931 중국공산당 입당 △1932 중국공산당 조선인부대 지대장 △1935 김일성으로 재개명 △1936 조국광복회 조직 △1937.6 함남 보천보 습격 △1937.9 함남 증평리 습격 △1940말 소련으로 망명 △1945.8 소련군 소좌 △1945.9 소련점령군 비호하 입북 △1945.10 조선공산당 서북5도당책임자 및 열성자대회 참석 △1945.10 「김일성장군」환영 평양시군중대회에 등장 △1945.12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 △1946.2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1946.7 북조선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의장단 의장 △1946.8 북조선노동당 부위원장 △1947.2 북조선 인민위원회 위원장 △1948.8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1948.9 수상(제1차 내각) △1949.3 경제문화 협정체결차 소련방문 △1949.6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1950.6 군사위원회 위원장 △1950.7 인민군 최고사령관 △1953.2 원솔칭호 △1953.7 영웅칭호 △1956.4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1957.9 수상(제2차 내각) △1957.11 당 및 정부 대표단장으로 소련 10월혁명 40주년 기념식 참석 △1959.1 소련 제21차 공산당대회 참석 △1959.9 중국 정권창건 10주년 기념식 참석 △1961.7 우호협조 및 상호 원조조약 체결차 소련 중국 방문 △1961.9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및 정치위원회 위원장 △1961.10 소련공산당 제22차대회 참석 △1962.10 수상(제3차 내각) △1966.10 노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 △1967.1 소련방문 △1967.12 수상(제4차 내각) △1970.11 노동당 총비서 겸 정치위원 △1972.12국가주석 △1972.12중앙인민위원회 위원겸 국방위원회 위원장 △1975.4중국방문 △1975.5루마니아·알제리·모리타니·불가리아·유고 순방 △1977.11국방위원회 위원장 △1977.11인민군 최고사령관(원수) △1977.12 국가주석 △1980.5 유고 티토대통령 장례식 참석 및 루마니아 방문 △1980.10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1980.10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총비서·군사위원장 △1982.4 국가주석 △1982.9 중국 방문 △1984.5 소련등 동구권 8개국(소련·폴란드·동독·체코·헝가리·유고·불가리아·루마니아)순방 △1986.10 소련 방문 △1986.12 국가주석 △1988.6 몽골 방문(중국·소련 경유) △1989.11 중국 방문 △1990.5 국가주석 △1991.10 중국 방문 △1992.4 대원솔 칭호 △1993.4 「전민족 대단결 10대강령」발표 △1994.4.8 사망
  • “북 내부혼란… 돌발사태 우려”/김일성급사 각계의 소리

    ◎신중 대처… 통일 앞당기는 계기로/이산가족 고향방문 변함없이 추진을/“동족상잔 책임자… 생전에 사과했어야” 9일 정오 북한 김일성주석의 갑작스러운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은 사태의 진전에 큰 관심을 나타냈다. 국토분단 반세기만에 극적으로 성사될 예정이던 남북정상회담이 사실상 어렵게 되자 모처럼의 화해와 대화분위기가 흐려져 통일로 가는 길목에 걸림돌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했다. 또 북한내부의 혼란이 한반도전체의 혼란으로 번지지 않을까 우려하는 소리도 높았다. 이런 가운데서도 국민들은 김주석의 사망이 통일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기를 염원했고 남북정부 모두 차분하게 대처해 화해무드를 지속시키도록 노력을 배가할 것을 당부했다. ▲최병호씨(72·실향민·황해도 연백군)=얼마 남지 않은 남북정상회담때 더없이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을 고대하고 있었는데 김주석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정상회담이 불투명해져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그러나 이에 상관없이 이산가족재회나 고향방문등 인도적인 문제는 계속 추진되어야 한다. ▲이문렬씨(소설가)=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하다.더구나 김주석은 최근 남북관계개선을 위해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왔기 때문에 아쉽기조차 하다. 그의 사망이 한반도 긴장고조의 원인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내심 걱정된다.따라서 한반도의 안정을 위해서는 북한정권의 안정이 급선무라고 생각된다. ▲최종현씨(전경련의장)=이런 때일수록 냉정한 판단과 대처로 「돌발사태」를 슬기롭게 극복해나가야 한다.특히 우리 경제계는 북한의 점진적인 민주화를 돕기 위해 경제협력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마땅하다. ▲임수경씨(27·서강대 대학원)=지난 89년 북한에 가 김주석을 만났을 때는 매우 건강한 모습이었는데 돌연한 사망소식을 들으니 놀랍다. 일부에서는 김주석의 사망이 남북관계진전에 걸림돌이 될 것으로 생각하는 듯하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그동안 김주석은 분단체제의 일부로 작용해왔기 때문에 그의 사망은 오히려 통일을 앞당기는 촉매로 작용할 수도 있다. ▲손양현씨(27·가정주부)=민족분단의 책임자로서 맺힌 것을 풀고 가기를 바랐는데 민족에게 많은 짐을 남기고 떠난 것같아 애석하다.남북한 모두 민족의 장래를 위해 평화와 안정의 노력을 배가할 때다.
  • “북은 어찌될까” 전문가 긴급진단

    ◎“후계 기반약해 당장 도발 없을것”/북·미 핵협상 등 승계… 외교안정에 주력/내부 권력조정뒤 개방 적극 수용 가능성 ◇김경원사회과학원장=김일성의 사망으로 당분간 북한권력구조와 사회가치관의 혼란이 불가피할 것이다.북한이 얼마만큼 빨리 혼란을 수습하느냐에 따라 남북관계에 미칠 영향은 달라질 것이다.특히 김일성의 사망 원인이 무엇인지에 따라 북한체제의 변화속도와 방향이 달라질 것이다. 김정일이 장례위원장으로 발표된 점으로 미루어 일단 현재로서는 그가 주석직을 승계할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인다.그가 주석직을 승계하면 김일성이 생전에 추진하려던 북·미 고위급 회담등 외교정책의 기본노선을 당분간 지속할 것으로 본다.다만 김정일은 김일성이 향유하던 카리스마를 갖고 있지 못하며 이 때문에 북한내 반발세력의 도전을 받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김정일이 북한주민들의 가치관 혼란을 어떻게 안정시키느냐가 북한체제 및 남북관계의 안정에 직결될 것이다. ▲김대중 아·태평화재단이사장=사태를 관망하면서 침착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권력이 김정일에게 승계되느냐 아니면 권력투쟁이 벌어지느냐 뿐아니라 여러가지 변수가 많아 현상황에서 북한내부의 변화나 앞으로의 남북관계를 예측하기는 어렵다.일시적인 사태로는 남북관계의 대세를 알 수 없다.지연되거나 또는 그 반대로 진전될 수 있겠지만 큰 흐름에는 별차이가 없을 것이다.문제가 풀려가던 차에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나 남북대화가 중단상태로 접어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관적 속단은 금물이다.통일에 대한 자신감과 반드시 통일이 된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정부가 잘 대응할 것으로 믿는다. ▲서대숙씨(미국 하와이대 정치학과교수)=당장은 남북한 관계에 큰 변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 내부의 권력구조가 다시 짜여지고 안정을 찾게 되면 남북관계는 지금까지보다는 훨씬 나아질 것으로 본다. 김정일이 사실상 권력을 계승하겠지만 혼자서 당과 정부를 모두 장악하지는 않을 것이다.주석에는 현 부주석들 중에서 박성철이나 이종옥을 내세우고 자신은 군과 당을 장악하고 총리도 자신의 사람을 기용하는 선에서권력기반을 구축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통치기반 유지를 위해 기왕의 강압적인 통치가 아니라 주민들의 생활수준을 높이는 유화정책을 쓸 가능성이 높다.아울러 남한과의 관계도 실질적인 평화공존과 경제교류의 물꼬를 틀 수 있는 계기를 모색할 것이다.따라서 남북관계의 장래는 상당히 낙관적으로 전개될 것으로 본다. ▲오관치씨(국방연구원 부원장)=김일성이 사망했어도 당분간은 남북관계가 더 긴장될 우려는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김정일도 자신의 체제를 강화하는데에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권기반이 흔들릴 위험성도 있는 군사도발적인 자세를 취할 것같지는 않다. 김정일은 아버지인 김일성에 비해 중국의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김정일이 이같은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중국에 대해 과거보다도 더욱 저자세 외교를 취하는등 중국의 대북영향력이 커질 것으로 보여 중국이 원치않는 한반도의 긴장조성은 국제적 측면에서도 어렵다. 일단 김정일의 체제가 자리를 잡는다 해도 이것이 장기적으로 지속될 가능성은 50%를 넘지 않을 것이다. ▲윤덕민씨(외교안보연구원교수)=남북정상회담이 일단 취소되고 남북간 긴장이 일시 유지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남북대화분위기가 이어질 것이다. 현재로서는 김정일이 권력을 승계할 가능성이 가장 높지만 누가 권력을 잡더라도 경제사정 악화와 외교적 고립을 피하기 위해서 북한은 대화국면으로 나올수밖에 없을 것같다. 이에따라 북한은 남북정상회담,북미핵협상등 김일성의 대남노선을 계속 승계할 것으로 보인다. ▲백종천씨(육사교수)=북한의 현재사정으로서는 우선 내부를 정리하는 데에 몰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북한은 그 어떤 사회주의국가와 달리 독재체제의 내부단속기구가 특이해 내부조정기간중 사회체제가 급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북한이 김일성사망이라는 비상사태를 맞아 루마니아처럼 예기치 않게 무너질 수도 있으나 동구국가들과는 달리 주변국들과 격리돼 있어 단순비교하기는 어렵다. 북한과의 관계에 관련된 시나리오는 북한내부의 갈등을 체제밖에서 해결하려는 군사적 도발에서부터 남북정상회담을 포함하는 각종 회담의 개최와 남북교류등 여러가지가 있으나 지금으로서는 단정짓기에 어려운 상황이다. ▲이명영씨(성균관대 명예교수)=남북관계에 있어 최대의 장애물은 김일성이었다.따라서 김일성의 사망은 남북관계변화,즉 분단을 마감하고 통일을 이룰 수 있는 하늘이 내린 기회라고 할 수있다. 당장은 부자세습체계에 따라 김정일이 권력을 승계할것으로 본다.김정일은 아버지의 절대적인 후광에 따라 만들어진 후계자이어서 당분간은 권력기반을 확고히 하는데 전력할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정권은 1년을 버티지 못할 것으로 본다. 김일성이라는 절대권위가 무너진만큼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북한내 개방·개혁론자들의 목소리가 더욱 커지고 대세를 장악할 것이기 때문이다.이렇게 되면 한반도에는 진정한 평화공존의 길이 열리고 통일의기틀이 마련될 것이다.결국 앞으로 남북관계는 김정일정권이 얼마나 유지되는냐에 따라 큰 변화를 맞게 될 것이다. ▲정용석씨(단국대 행정대학원장)=북한은 새로운 권력구조의 재편을 위해 단기적으로는 내부문제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남한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기존의 틀을 벗어나는 관계개선이 당장 이뤄 지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자신들의 내부문제가 일단락되면 남북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느껴 적극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고 본다. 이는 북한의 권력구조가 종래 이념에서 실용적인 측면으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김일성의 사망은 결국 남북관계개선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본다.
  • 김일성 마침내 죽다(사설)

    북한주석 김일성이 사망했다.갑작스러운 심근경색이 사인이라고 한다.한마디로 놀랍고 충격적이다.카터 전미국대통령을 만난것이 불과 20여일 전의 일이다.건강하고 10년은 더 살것같다던 것이 카터의 평이었다.앞으로 2주후면 우리대통령과 분단후 처음이 될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도 가질 예정이었다.핵문제도 실마리가 풀릴것 같던 참이었다.그래서 더욱 충격적인지 모르겠다.그러나 충격보다 더 깊고 아프게 느껴지는 감정은 착잡한 심정 그것이다. ○착잡한 심정이다 김일성.그가 누구인가.이유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몰라도 최근 갑작스러운 태도변화의 화해공세로 우리인식의 혼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그는 지금 와 생각하면 무의미하기 짝이 없는 이데올로기를 이유로 한 한반도분단의 가장 중요한 책임자의 하나였다.적화통일을 위한 6·25남침의 최고 지령자요 지휘자이기도 하다.그로인해 우리민족이 겪고 감수해야 했던 고통과 희생이 그얼마였던가.그 고통과 희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마침내 이번에는 핵포기와 남북정상회담등으로 그 죄값의 일부나마 치르려 하는것이 아닌가 하던 시기에 사망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그에대한 평가와 단죄는 후세의 역사가가 할것이다.당장 중요한것은 그의 사망으로 인한 한반도 통일안보상황의 급변을 정확히 파악하고 대처해 나가는 일일 것이다.지금 가장 급한일은 그의 사망원인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라 생각한다.그의 죽음이 자연사냐 아니냐에 따라 상황이 크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심근경색이 북한측 발표내용이며 우리정부도 자연사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으나 외국의 조문을 받지않는다든가 석연치않은 대목도있다. ○북한 변화 시작 신호 자연사일 경우라면 이미 후계자로 굳어져 있는 김정일의 승계로 혼돈의 여지는 있으나 일단은 비교적 신속한 안정을 회복할수 있을 것으로 보아야 할것이다.그러나 핵포기와 개방개혁을 반대하는 강경파의 반발로 인한 정변의 결과라면 문제는 심각하지 않을수 없다.복잡하고 위험천만한 상황의 전개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당장의 권력투쟁은 물론 내란사태로의 발전가능성도 충분히 있다.우리로서는 정말 대응하기 어렵고 위험한 상황의 전개가 아닐수 없을 것이다.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의외로 통일을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올수 있다는 사실도 명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로서는 김일성의 죽음이 자연사이기를 바란다.그리고 질서있는 권력승계를 통한 안정이 조속히 회복되기를 희망한다.그리하여 김일성이 시작하려 했던 것으로 보이는 핵문제의 해결과 점진적인 대외개방을 계승해 주기를 기대한다.그러나 사태는 우리가 희망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줄지 의문이다.자연사이건 정변이건 북한을 지탱해온 최대의 안전판이었던 김일성이 없어진 것이다.그것은 북한은 물론 한반도상황의 대전환이 시작되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김일성시대와는 다른 불확실성시대의 시작인 것이다.그러한 대전제위에서 완전히 새로운 대북및 한반도정책을 추진해 나가야 할것이다. ○개방개혁 계기되길 우선 김일성의 사망은 그것이 곧 북한의 체제붕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북한사회주의체제 종언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일수 있다.그런 의미에서우리는 북한이 질서있고 점진적인 개방과 개혁을 통해 우리와 같은 자유민주체제로 전환해 가는 계기가 될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고 적극 유도및 협력하는 장기적인 시각의 정책을 조심스럽게 추진해나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기적으로는 초미의 위급한 상황인만큼 추호의 빈틈도 없는 만반의 대응을 철저히 해나가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대통령과 정부가 비상안보대책회의를 잇따라 소집하고 전군에 즉각적인 비상태세를 발령하는 등의 신속 대응을 함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어떤 돌발사태가 발생할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이다.보수·개혁파간의 권력투쟁,내란,인민봉기,갑작스런 체제붕괴,혹은 대남도발등 모든 가능성을 상정한 철저한 대응에 빈틈이 없어야 할 것이다. ○의연하게 대응하라 김일성의 사망사태로 인한 한반도 평화와 안정의 붕괴를 방지하기 위한 주변강대국들과의 공조 내지는 협조체제강화도 서둘러야 할것이다.한반도정세에 이해관계가 깊은 미·일·중·러와 긴밀한 협조체제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특히 북한에 영향력이 가장큰 중국과의 협력은 한반도 평화와 안보유지의 측면에서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중국은 북한과의 간접적인 대화창구도 될수있을 것이다. 김일성의 사망은 한반도 분단사의 최대 전환점을 의미한다.가장 큰 변화요,변화의 예고다.쓸데없이 북한을 자극하는 말이나 행동같은 것은 삼가야 하겠지만 정부는 물론 온국민도 최대한의 긴장된 자세를 유지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그러나 지나친 흥분은 금물이다.의연한 자세로 침착하고 냉철하게 북한의 사태전개를 예의 주시하며 자신있게 대응해 나가야할 것이다.
  • 「혁명1세대」 향배가 최대변수/북권력 어디로 갈까

    ◎일단은 「김정일체제」 유지/식량·에너지난 지속땐 「봉기」 가능성 분단 반세기 동안 한반도 북반부를 통치하던 절대 권력자 김일성 북한 주석이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한반도의 대지각변동이 예고된다. 그의 사망이 단순히 북한의 정치권력의 변화를 촉발시키는 정도를 넘어 남북관계나 통일문제에 결정적인 변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그가 북한의 권력구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만큼 그의 퇴장으로 인한 파장도 현재로선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심대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김의 사망에 따른 북한 권력의 진공상태는 「일단」 그의 아들인 김정일이 메울 것이 확실시된다.김일성이 지난 70년대 초반부터 자신의 사후에 대비,부자 세습체제를 위한 갖가지 안전장치를 마련해 놓았기 때문이다. 노동당 총괄비서를 비롯해 당중앙위 정치위원 등 당요직과 원수,최고사령관,국방위원장 등 북한권력을 지탱하는 군부 요직을 독차지해 온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김일성의 사전조치가 김정일의 정치적 장래를 확고히 보장하는 「보험」은 어차피 되기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더욱이 김정일이 일단 원활한 권력승계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북한체제의 안전판이 확실히 구축되기는 어렵다는 것이 국내외 북한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왜냐하면 핵문제를 둘러싼 북한과 전세계의 줄다리기에서 보듯이 김정일의 운명이나 북한정권의 장래도 한반도를 둘러싼 세계사의 큰 흐름과 떼놓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북한정권은 김일성이 생전에 실토했듯이 대내외적인 「엄혹한 환경」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북한의 곤경은 하루에 두끼먹기 운동이 벌어질 만큼 극심한 경제난과 핵문제로 인한 대외적 고립상황으로 요약된다. 이같은 정황을 염두에 둔다면 김정일 후계체제의 성공의 열쇠는 군부와 당정의 지원과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는 경제의 회생여부라는 데 이견이 없다. 전자는 단기적인 요인이다.김일성부자도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북한 군부내에 김정일 친위세력을 부식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온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인민무력부장인 오진우 등 이른바 혁명1세대 등 김일성 직계세력 이외에 김용순·김기남·오극렬·장성택 등 이른바 혁명2세대로 불리는 김정일의 측근인사들을 당정 요직과 군부에 포진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일성이라는 후광이 사라진 마당에 아직도 북한체제의 상층부를 차지하고 있는 이른바 혁명1세대들이 김정일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을 바칠지는 그야말로 미지수다.김일성과는 달리 군경력이나 그럴싸하게 내세울 만한 이력이나 카리스마가 없는 「충동적 성격」의 김정일에게 위기관리 능력을 기대하기 어려울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경제문제는 북한체제의 장래를 어둡게 하는 보다 구조적 요인이다.북한은 연4년째 계속된 마이너스 경제성장으로 식량·에너지난에다 기본적인 생필품난으로 말기적 위기상황을 맞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 관측이다.이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선 최소한 중국식 부분 개방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중론이나 북한이 체제동요를 감수하고라도 이를 감행할 수 있느냐는 의문인 것이다. 때문에 김정일이 권력승계를 하든,다른 「대안」이 나타나든 이같은 당면한 경제적 곤경을 극복하지 못할 경우 북한권력은 소용돌이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김일성 이후 북한정권에 대한 도전은 국제적 고립과 경제난 등 당면한 대내외적 위기를 끝내 극복하지 못할 경우 당권투쟁이나 군부쿠데타 등의 형태로 나타날 가능성도 배제키 어렵다.일부 전문가들은 그 가능성은 크지 않으나 권력하부 구조에서의 대중봉기라는 보다 극단적인 형태로 표출될 가능성도 점치고 있는 형편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김일성의 돌연사로 조성된 현재의 불안정한 한반도 상황이 통일을 대망하고 있는 우리에게는 위기인 동시에 기회라는 사실이다.
  • “먹는 문제 절실… 쌀은 곧 공산주의”/김일성 어록

    ◎“혁명가의 일생은 투쟁으로 끝나/조선분단은 전적으로 외세때문” ▲노력을 가진 사람은 노력으로,지식이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돈있는 사람은 돈으로,참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민주를 사랑하는 전민족이 완전히 단결하여 우리 조국을 민주주의 자주독립국가로 건설하여야 하겠습니다.(45년 10월14일 김일성환영 평양시 군중대회 연설) ▲경제적으로 외세에 의존하는 나라는 정치적으로 다른 나라의 추종국가가 되며 경제적으로 예속된 민족은 정치적으로 식민지 노예의 처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67년12월16일에 발표한 정부정강) ▲만일 적들이 무모하게 전쟁을 일으킨다면 우리는 전쟁으로 단호히 대답할 것이며 침략자들을 철저히 소멸할 것이다.이 전쟁에서 우리가 잃을 것은 군사분계선이고 얻을 것은 조국의 통일일 것이다.(75년 4월18일 사이공함락 직전의 방중연설) ▲나는 농사를 지어본 일도 없고 농업대학을 나오지도 못하였지만 농민들속에 들어가 그들한테서 배우고 그들의 좋은 경험을 받아들여 일반화하는 과정에 주체농법을 내놓았습니다.(82년 4월6일 정무원회의 연설) ▲사회의 물질생활분야에서 가장 절실한것은 먹는 문제이며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데서 기본은 쌀을 많이 생산하는 것입니다.쌀은 곧 공산주의입니다.쌀독에서 인심이 난다고 먹을 것이 풍족해야 인민들의 의식상태도 더 좋아지고 모든 일이 다 잘되어 나갑니다.(82년4월14일 당·정·의회 합동회의 시정연설) ▲우리는 한순간도 투쟁을 멈출수 없습니다.혁명가의 일생은 투쟁으로 시작되고 투쟁으로 끝나야 하며 혁명은 대를 이어 계속되어야 합니다.중도반단함이 없이 투쟁을 계속하며 끊임없이 전진하는 것은 혁명의 요구이며 혁명가의 인생행로입니다.(82년 4월15일 70회 생일연회 연설) ▲만일 우리 대에 조국을 통일하지 못하면 대를 이어가며 투쟁하여 김정일시대에 가서라도 반드시 조국을 통일할 것입니다.(85년 6월9일 일본 「세계」편집국장 회견) ▲우리는 남침하지 않겠다는 것을 한두번만 천명하지 않았습니다….금강산발전소 건설에 대하여 말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사회주의경제건설 전망계획에 따라 진행되는 평화적인 건설로서 남조선당국자들이 여기에 위협을 느낄 근거란 아무것도 없습니다.(86년 12월30일 최고인민회의 8기1차회의 시정연설) ▲조국통일은 누가 누구를 먹거나 먹히지 않는 원칙에서 하나의 민족,하나의 국가,두개 제도,두개 정부에 기초한 방식으로 실현되어야 한다.(91년신년사) ▲민족의 운명을 우려하는 사람이라면 북에있건 남에있건 유신론자이건 무신론자이건 모든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 단결하여야 하며 조국통일의 길을 함께 열어 나가야 한다.(93년 4월7일 발표된 민족대단결 10대 강령) ▲조선반도 분단은 민족내부의 모순 때문이 아니다.전적으로 외세에 의한 것이다.(91년 8월1일 조평통·범민련 간부들과의 담화) ▲국제사회는 우리에게 있지도 않은 핵무기를 내보이라고 요구하고 있다.핵무기를 가지는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93년 4월15일 CNN북경지국장과의 회견)
  • 김일성 사망/북 공식발표/8일 상오2시 심근경색으로… 17일 장례

    ◎김 대통령,“남북평화공존 불변”/긴급각의/평양정상회담 사실상 무산/49년 독재 마감… 김정일 승계 할듯 북한주석 김일성이 8일 상오 2시 사망했다.김주석은 1912년 4월15일생으로 올해 82세. 북한의 중앙방송과 평양방송은 9일 정오 특별방송을 통해 『위대한수령 김일성동지가 8일 상오 2시 급병으로 서거했다는 것을 가장 비통한 심정으로 온나라 전체 인민들에게 알린다』고 발표했다.북한 방송들은 『김주석이 심근경색에 심장쇼크가 겹쳐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이로써 한반도 분단의 주역으로 49년간 북한의 절대독재자로 군림 해 온 김주석은 국제적 고립과 경제난 등을 북녘 주민들에게 유산으로 남겨놓은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김주석의 승계문제와 관련,평양방송은 『오늘 우리혁명의 진두에는 위대한 지도자이며 최고사령관이신 김정일동지가 서 계신다』고 밝혀 아들인 김정일이 권력을 이어받을 것임을 강력히 시사했다.지난 72년 공식후계자로 지명된 김정일은 지난해 4월 최고인민회의에서 국방위원장에 추대되는등 당·정·군에걸쳐2인자 자리를 굳혀 왔다. 김일성의 장례에 대해 북한 방송들은금주석의 영구를 금수산의사당(주석궁)에 안치하고 장례를 17일 평양에서 치른다고 밝혔다.이와함께 김정일,인민무력부장오진우,정무원총리강성산,부주석리종옥,박성철,김영주,외교부장금영남 등 노동당 정치국위원겸 후보위원들이 모두 포함된 장의위원회를 구성했다고 발표했다. ◎“외국조문객 사절” 또 9일부터 장례일까지를 애도기간으로 정해 북한 전역에서 추도행사를 갖기로 했다고 밝혔다.그러나 추도기간중 외국조문객들을 받지않겠다고 발표했다. ◎“사태 만전대비” 정부는 9일 북한주석 김일성의 사망에 따른 한반도 정세변화에 대비,비상체제에 들어갔다. 정부는 이날하오 청와대에서 김영삼대통령 주재로 긴급국가안전보장회의와 국무회의를 잇따아 열어 김주석사망과 관련한 북한움직임과 이에 따른 대책을 논의,점검했다. 김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전군은 바로 비상경계태세에 들어갔다. 김대통령은 이날 안전보장회의에서 『어떤 사태에도 한반도의 안전과 평화를 지킬 수 있는 준비가 돼있다』고 강조하면서 『국민들은 정부를 신뢰하고 확고한 자신감과 냉철한 자세를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김대통령은 『한반도의 평화를 지키는 우리의 기존정책에는 추호의 변동이 없을 것』이라고 밝혀 평화와 공존으로 상징되는 우리의 대북정책에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임을 재확인했다. 김대통령은 『정부는 한반도의 평화와 7천만의 안전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생각』이라고 거듭 밝혔다. 이날 회의에서는 통일원장관,외무·국방장관,안기부장이 김일성의 사망에 따른 다각적이고 구체적인 보고를 했으며 진지한 토의가 있었다고 주돈식대변인이 발표했다. 이날 회의에는 정부에서 이영덕국무총리,정재석경제·이홍구통일부총리,한승주외무·최형우내무·홍재형재무·이병대국방·서청원정무1·오린환공보처장관,김덕안기부장,천용택비상기획위원장이,청와대에서는 박관용비서실장,박재윤경제·정종욱외교안보·주공보수석이 참석했으며 이양호합참의장이 배석했다. 김대통령은 안보회의에 이어 열린임시국무회의에서 관계장관들에게 『상황을 계속 면밀히 파악하고 앞으로 있을 수 있는 모든 사태해 대비한 신속하고 의연한 대응책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김대통령은 『어떤 사태 아래에서도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지키고 국민의 안녕을 보호할 대책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국민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해달라』면서 북한과의 모든 문제를 대화를 통해 해결하고 남북간 화해와 협력을 추구한다는 정부의 기본입장에 변화가 없음을 강조했다고 정부대변인인 오린환공보처장관이 전했다. ◎“북한군 경계태세 돌입”/일 통신보도 【도쿄 연합】 북한 인민군은 김일성주석이 사망한 뒤 경계태세에 돌입했다고 러시아 국방부당국자가 밝힌 것으로 일 교도(공동)통신이 9일 모스크바발로 보도했다.
  • “여름휴양 미룬채 「YS연구」” 관측/김일성주석 요즘 뭘 하나

    ◎“일생일대의 중대사” 대외활동 자제 평양 정상회담을 앞두고 요즈음 김일성 북한주석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지난 6월 한달 동안 비교적 활발한 외부활동에 나섰던 그가 남북정상회담일정이 확정된 지난달 28일 이후 거의 외부행사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김주석의 동정은 북한 관영매체들이 보도한 것 이외에는 전혀 알 길이 없다.일단 오는 25일로 예정된 김영삼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준비하느라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같다. 김주석의 동정이 이처럼 1주일 이상 보도되지 않는 일은 과거에도 이따금 있었던 일이나 이번의 경우 지난달의 빈번한 대외활동과 뚜렷이 대비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김주석은 6월 한달 동안 지미 카터 전미국대통령과의 두차례 회담을 포함,모두 17회에 걸쳐 공식석상에 나타나는 등 정력적인 활동을 벌인 바 있다.최소한 이틀에 한번 꼴로 공식활동을 한 셈이다. 이처럼 활발하게 공개석상에 나타났던 김주석은 남북정상회담 일정이 확정된뒤부터 대외적 활동을 중단하다시피 하고 있다. 때문에 김주석도 분단 이후 처음 열리는 이번 정상회담을 앞두고 조용히 칩거하면서 건강관리와 함께 「YS연구」등 회담준비에 착수했을 가능성이 설득력 있게 제기되고 있다. 고령의 김주석은 건강관리를 위해 과거에도 해마다 이맘때 쯤이면 삼지연·묘향산특각 등 자신의 별장에 머물면서 당정 고위간부들을 불러 업무지시를 내린곤 했다.특히 이른바 「현지지도」라는 이름의 지방시찰에 나설 때도 각 지역에 산재된 1백여개의 개인 「특각」(별장)에 머물면서 휴식을 병행하는 등 철저한 건강관리에 힘을 쏟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만 이번에는 김주석도 매년 7월 초순 연례행사처럼 치르던 지방 하계휴양지 순례도 뒤로 미룬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8일부터 제네바에서 시작된 미북 3단계 고위급회담과 25일부터 열리는 남북 정상회담은 김주석의 입장에서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생일대의 중대 사안인 탓이다. 김주석이 만일 주석궁 집무실을 떠나 칩거중이라면 측근이나 대남 전문가들과의 보고 채널 유지가 손쉬운 평양근교의 자신의 별장인 자모산 별장이나 연풍호별장에 머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 예멘,대대적 사면 약속/군사행동 전면중지 선언/유엔에 서한

    ◎재산·인명피해 보상 천명 【유엔본부 로이터 연합】 예멘정부는 7일 남예멘에 대한 승리를 선언한 몇시간뒤 모든 군사행동을 중지하고 대대적인 사면을 실시하는 한편 전쟁 피해자를 보상하겠다고 유엔에 약속했다. 사이드 알 아타르 예멘 총리서리는 이날 압둘 카림 알 이리아니 기획장관을 통해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 유엔 사무총장에게 전달한 서한에서 이같이 약속하면서 북예멘군은 전쟁으로 고초를 겪은 남예멘 수도 아덴의 시민에게 식량과 식수를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예멘정부는 이날 서한에서 군사행동을 즉각적이고도 영구히 중단하며 광범위한 사면을 실시하는 한편 전쟁으로 재산을 잃은 국민과 전쟁 희생자 가족에게 모두 보상을 하겠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민주주의,정치다원주의,의사표현과 언론 및 인권의 자유 등을 존중하고 통일 예멘에 관한 국민적 대화를 재개하겠다고 밝혔다. ◎「불완전 평화통일」의 허구성 입증/체제 이질성­문화적 갈등 해소못해/권력마찰 심화… 내전 “총칼로 해결”/남­북 예멘 무력재통일 안팎 2개월간의극심한 내전을 빚은 예멘사태는 7일 북예멘군이 남예멘의 수도 아덴을 완전점령함으로써 북예멘의 승리로 일단락됐다.이로써 지난 90년 회교정권인 북예멘과 사회주의 체제인 남예멘의 대화에 의한 평화통일을 이뤘던 예멘은 4년만에 북예멘의 무력흡수에 의한 재통일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군사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한 북예멘의 무력통일은 쌍방간에 완전한 합의가 결여된 평화통일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를 다시한번 부각시켜 준다.통일후에도 각각의 군대를 보유할 정도로 불완전한 통일을 이뤘던 남·북예멘은 뿌리깊은 정치체제의 이질성과 경제·문화적 갈등,석유를 둘러싼 이권다툼과 남북지도자간의 권력마찰을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내전에 휩싸일 수 밖에 없었다. 내전이 발발하자 아랍국들은 91년 걸프전당시 이라크를 지지했던 살레 예멘대통령에게 불만을 가졌지만 전황이 북예멘에 유리하게 전개되자 말로만 즉각적인 휴전을 종용할 뿐 남예멘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을 꺼리는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이에 따라 살레대통령은 의도했던 대로군사력에서 열세에 놓여있는 남예멘을 무력으로 진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살레대통령이 앞으로 해결해야할 문제는 산적해 있다. 국민들은 내전종식에 대해 전쟁으로 인한 참화를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단 환영의 뜻을 나타내고 있지만 해외로 망명한 남예멘의 살렘 알베이드 부통령을 비롯한 남측지도부가 끝까지 투쟁할 뜻을 비추고 있어 잠정적인 국지전의 소지는 여전히 남아 있다.또 경제적으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있는 남예멘국민의 반북정서가 강해 살레대통령의 첫번째 과제는 전쟁으로 분열된 민심을 수습하고 남북간 균형된 발전을 도모하는 일로 보인다. 이와함께 북예멘에 의한 재통일을 탐탁치 않게 보고 있는 주변국가들과의 관계는 향후 중동평화에 큰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전통적으로 남북예멘의 대립을 교묘히 이용하는 정책을 펴왔던 사우디아라비아와 중동의 다른 군주제국가들은 북예멘에 의한 흡수통일로 강력한 민주체제를 갖춘 통일예멘이 등장하는 것을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90년 대화와 합의에 의한 통일을 이루어 분단국가에 새로운 모범을 보였던 예멘이 「중동의 최빈국」이라는 오명을 떨쳐버리고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통일국가로 거듭나기까지는 험난한 앞길이 예견된다.
  • 대학총장 직선제 폐지 촉구/전국대학총장 세미나

    ◎“과열경쟁속 교수분파 심각”/미식 「총장 천거위제」 건의/정상회담 따른 남북화해·교류 대비/주체사상 모순 직시 통일교육 시급 【무주=박선화기자】 현행 직선제 대학총장선출은 선거과열,무분별한 보직약속등 많은 부작용을 낳고 있어 제도개선이 시급한 것으로 지적됐다.또 대학에서 통일교육을 교과과목으로 채택하는 안이 제시됐다. 이같은 주장은 8일 전북 무주리조트에서 한국대학교육협의회(회장 김종운서울대총장)주최로 3일간의 일정으로 열리고 있는 전국 1백57개 4년제 대학총장 하계세미나에서 제기됐다. 문선재강원대총장은 이날 「대학총장의 선임문제와 대학교수협의회 위상문제」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총장직선제는 교수사회의 분파를 조장하고 과열경쟁으로 보직약속을 남발하는등 심각한 후유증을 야기,대학을 비생산적 선거수라장으로 만들고 있다』면서 『이같은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미국처럼 총장천거위원회(Presidential Search Committee)가 추천한 후보중에서 총장을 선출하거나 선임하는 방안등이 도입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재규경남대총장도 「총장선출방식의 변천과 문제점」이라는 주제발표에서 『사립대총장선출방식이 주로 재단임명에서 교수직선제로 진행되고 있으나 총장직선제는 본래 의미와는 달리 대학공동체의 분열,대학사회의 파당화와 소집단 이기주의를 조장하는 후유증을 공통적으로 안고 있어 다른 제도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총장직선제는 지난 87년 국립 목포대에서 처음 도입된 이래 지난 4월말 현재 전국 1백31개 4년제 대학(개방대·교육대제외)중 ▲교수직선제는 국공립 25개,사립 40개등 65개대 ▲재단이사회의 직접선임이 사립 57개대 ▲교직원 선출이 사립 5개대 ▲교수회의 동의를 거친 재단임명이 3개대등이며 포항공대는 지난 5월말 재단의 직접선임에서 총장추천위원회에 의한 공개모집으로 방식을 변경했다. 한편 박홍서강대총장은 「학생들의 통일운동지도와 학생지도대책」이라는 주제 발표를 통해 『7·25 남북정상회담뒤에는 민족화해와 통일을 위한 남북교류문제가 주관심사가 될 것이며 특히 학생들은 그같은 관심을 행동으로 나타낼 것』이라며 50년간 분단돼온 남북한이 동질성을 회복하고 민족화해를 이루기 위해서는 대학에서 통일교육이 정식과목으로 수용돼야 한다고 밝혔다. 박총장은 『일부 전후세대인 학생과 노동자들이 우리 사회의 모순을 풀기 위해 답으로 내놓은 프롤레타리아독재,공산주의 주체사상이 인간의 빵과 자유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음을 깨닫게 하는 교육이 절실히 요청된다』며 『대학에서 학생·노동·재야운동이 북의 남조선 적화운동에 말려들지 않도록 교과목으로 다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 “남북경협 물꼬부터 터라”/“평양정상회담 이렇게”경실련토론회 중계

    ◎「민족공동 이익」 도모할 기회로 활용을/「기존의 합의」 이행하는 신뢰구축 긴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학계·종교계·법조계·시민단체 등 보수와 진보를 망라한 각계 인사 24명이 한자리에 모여 정상회담의 바람직한 방향을 놓고 다양한 의견을 나눴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8일 상오 서울 세종문화회관 소회의실에서 「남북정상회담,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개최한 이날 토론회는 손봉호서울대교수가 사회를 맡아 구본태 통일원 통일정책실장의 정상회담 추진경과및 현황보고,이장희 한국외대교수의 주제발표에 이어 참석자들의 자유토론형식으로 3시간여동안 진행됐다. 이날 참석자들은 대부분 분단 50년만에 열리는 남북정상회담을 환영하면서 이를 민족공동의 이익을 도모하는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이장희교수는 「남북정상회담의 과제와 고려사항」이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이번 정상회담의 개최 합의는 남북 양측이 모두 한걸음씩 양보한 결과로 앞으로 남북관계 진전에 좋은 선례로 남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교수는 이어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북한 핵동결 재확인과 이를 통한 정치적 신뢰구축,정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전환,상호실체에 대한 법적 인정,상호대화채널 마련 등이 주요의제로 논의돼야 할 것이라고 제의했다. 이교수는 또 성공적인 정상회담을 위해 양측이 상호 화해분위기를 조성하는데 노력하고 특히 우리정부는 야당과 국회·시민단체등을 회담추진 과정에 적극 참여시켜 국민적 합의와 지지를 얻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유토론에 나선 양호민한림대교수는 『남북한 상호화해에 필요한 제반 사항은 기존의 기본합의서와 비핵화 공동성명등에 이미 포함돼 있는 만큼 중요한 것은 새로운 선언보다는 기존의 남북한간의 각종 약속을 지켜나가는 자세와 믿음을 확인하는데 있다』면서 『모든 것을 일시에 해결하려는 초조함과 성과욕은 자칫 모든 것을 수포로 돌아가게 해 화를 자초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영희한양대교수는 『상호불신의 문제는 남북한이 동등한 책임을 지고 있으므로 우리 사회도 겸허하게 반성해야 한다』고 전제하고 『북한에 대한 호의적인 제스처로 북한의 3.5∼4배에 이르는 군사비를 감축할 것』을 제안해 관심을 끌었다. 또 노명식전 한림대교수는 『남북정상회담과 통일논의를 하는데 있어 보수와 진보의 구분은 이제 사라져야 하지만 「만나서 잘해보자」는 식의 자세도 곤란하다』면서 지나치게 이상적인 접근을 경계했다. 이세중대한변협회장은 『용기를 가지고 냉전시대의 대북관에 변화를 가져올 때』라면서 『정상회담에서는 기존의 남북간 협정들이 실천될 수 있도록 탈냉전시대에 걸맞는 신뢰회복을 끌어내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러한 정치논리에 대해 김태홍동국대교수는 『정상회담이 실효를 거두기 위해 우리측이 30억달러정도의 경협제공의사를 밝힐 것』을 제안해 경제논리를 앞세우기도 했다. 이밖에 조요한 전 숭실대총장,송월주스님,김성수 성공회주교,박형규목사,작가 김홍신씨 등이 이번 정상회담을 남북한 양측이 민족분단사를 종식시키고 평화공존을 제도화하는 돌파구로 발전시키자는데 입을 모았다. 한편 경실련은 이날 토론내용을 정리해 통일원에 제출키로 했다. ◎평양회담 토대로 분야별 대화 추진/상호사찰 규정 마련할 핵통제위등 정상화/이 부총리의 「후속조치」 구상 이번 역사적인 평양 정상회담의 초점은 과연 남북간 진정한 화해와 협력의 일대 전기가 마련되느냐의 여부이다. 이같은 맥락에서 남북정상회담의 성패의 관건은 역시 북한측의 태도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북측이 이번 정상회담을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한 3단계회담의 지렛대로만 이용하려 든다면 분단 이후 첫 정상대좌도 1회성 모양갖추기로 끝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홍구부총리겸 통일원장관은 8일 낮 기자간담회에서 이와 관련,주목되는 발언을 했다.즉 『2차 정상회담의 개최보다는 1차 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여 후속조치들이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밝힌 대목이 그것이다. 통일원측은 이부총리의 이같은 발언과 관련,북측이 내심 꺼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2차 서울회담에 연연치 않겠다는 뜻은 결코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다.정상회담은 상호주의 원칙에 따라 이어져야한다는 정부의 입장은 불변이라는 얘기다. 다만 이부총리가 밝힌 중요한 「후속조치」란 이번 평양에서 첫 정상대좌를 통한 합의가 이뤄질 경우 각 분야별 후속회담을 통해 가시화해나가겠다는 것이다.말하자면 정상회담 이후 기본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 등 기존 합의의 틀 안에 있는 경제공동위·핵통제공동위·사회문화교류공동위 등 상설기구들이 본격 가동되어야만 정상회담에서 다져진 「신뢰」를 확인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를테면 김주석이 카터전미대통령을 통해 애드벌룬을 띄운 70세 이상 이산가족 상호방문 주장의 진위도 북측이 이를 위한 적십자회담이나 사회문화교류공동위 개최에 성실히 응해오느냐에 따라 검증된다는 것이다. 김주석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핵문제와 관련,『핵을 개발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는 기존의 주장을 되풀이할 가능성이 많다.이 경우에도 우리측은 그렇다면 북측이 남북 상호사찰 규정 마련을 위한 핵통제공동위에 나와야만 논리적으로 핵문제 해결의 성의가 있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같은 맥락에서우리측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정상회담 이후 과제로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의 틀 안에 있는 각 분과위별 공동위와 적십자회담의 풀가동을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북측의 반응이야말로 이번 정상회담 이후 남북 화해협력시대가 열릴 수 있느냐를 가름하는 잣대가 될것이다.
  • 포용하되 말려들지 말아야/정희경(남북정상회담에 바란단)

    애당초 한반도의 분단이 제2차세계대전의 끝무렵에 맞물렸던 국제정치의 힘겨루기의 소산이었고,뒤이은 한민족의 분열과 적개심,그로해서 연유한 무서운 불신등은 두루 정치세계가 빚어낸 것이었다.따라서 한반도의 국토통일과 한민족의 화해및 융합은 결자해지의 원칙에 따라 결국 정치적 영도자의 대좌를 통한 화해없이는 불가능하다.그런 점에서 오는 25일로 예정된 남북정상회담은 지난 45년이후에 있었던 모든 남북회담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중대한 사건이 아닐수 없다.이번 정상회담을 위해 지난날의 모든 남북 대화들이 있었다고 보아도 좋으리라.「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먹구름은 그렇게 울었나 보다」란 미당의 시구가 어울릴 만한 느낌을 지금 강하게 느끼고 있다. 71년8월12일 최두선총재가 남북적십자회담의 개최를 제의했을 때의 그 신선한 감동이 일렁이던 우리의 거기에선 남북간의 적대감을 인도주의로 풀어나가고자 하는 희구로 분출되었다.그러나 그 기대가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그 무위함을 드러내기 시작했었다.나는 남북적십자본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판문점에서 열렸던 25차에 걸친 예비회담에 참여하면서 정치적문제의 해결이 선행되지 않는 회담이 얼마나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기조차 어렵다는 것을 절감할 수 있었다.그리고 어렵사리 시작된 본회담으로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열렸던 남북적십자대표의 대좌도 문제의 변죽만 울렸을 뿐 결국 문제해결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음은 정치적 접근이 두절됐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남북대화에 대한 나의 경험으로 보아 이번 남북정상회담은 그 실현의 경위를 따질것 없이 남북 문제해결에의 첩경일 뿐만 아니라 남북간에 그동안 꼬이고 꼬인 모든 문제의 실타래를 푸는 첫단계로 받아들여진다. 북한의 정권은 두말할 나위없이 지난 45년이후 김일성일인독재에다 이제 김정일로 이어지는 세습정권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자유민주주의의 원칙에서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정치적 취약성을 가지고 있지만,그것은 또한 무서운 정치력으로 응집력높은 정권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그들이 남북대화에 내세우는 인물만해도 지난 25년간변함이 없다.한마디로 대부분이 구면이고 인도주의적 문제를 다루는 적십자회담이나 고위급정치회담에서나 필요에 따라 역할분배만 달라질뿐 한결같이 그 얼굴이 그 얼굴들이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측은 변화무쌍하다.정권이 그러했고 남북대화참여인사 또한 그러해왔다.거기에도 정권의 정통성시비가 끊이지 않아온 우리나라 정치사속에선 과거의 역사란 흔히 「정권유지적 차원에서」라는 라벨이 붙으면서 거부되고 단절되고 「차별화」되어온 것이 현실이다.따라서 남북의 통일방안도 정권따라 확연히 다르게 변화해왔으며 남북대화에 참여하는 인물도 부지기수로 「물갈이」되어온게 사실이다.이같은 남북의 차이가 과연 남북정상회담에서 어떤 동인으로 작용할 것인가 걱정되지 않을수 없다. 꼭 강조하고 싶은 것은 역사의 단절이나 거부는 결코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괴롭고 부끄럽고 힘겨웠던 역사도 역사임에는 틀림이 없다.그런 역사의 험산준령을 넘으며 와신상담의 인고를 견디며 조금씩 보다 나은 방향으로 나가는데에 자유민주주의적 역사의식의매력이 있는 것이다.더구나 남북대화라는 엄청난 중임을 맡아 보았던 사람으로서 그 진지했던 민족에의 책임감,하늘의 도우심을 간구했던 그많은 헌신의 시간들이 정권유지차원의 도구등으로 표현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역사해석의 결과라고 보며 그런 해석은 엄존하고 있다. 결자해지의 마당에 대좌하는 우리대통령은 45년 이후 우리역사의 모든 것을 껴안는 큰틀의 정치지도자로서의 풍모를 유감없이 보여줄 것을 희구한다.우리사회에 엄존하고 있는 보수와 진보의 연장선상에 북한일인독재정권에의 위험한 동조세력의 끈질긴 준동도 대통령께서는 간과하지 않는 다원화사회의 국가원수로서의 순발력있는 회담의 이니시에이터가 될것을 믿고 그렇게 염원해 본다.
  • 정상회담 기대 너무 부푼다/이중호(데스크 시각)

    남북한 정상회담에 온 국민의 관심이 쏠려 있다.관심을 넘어 뜨거운 열기까지 느껴진다.저마다 바라는 것도 많고 감 놓아라 배 놓아라 말도 많다. 국회에서도 마찬가지다.방북대표단에 야당의원을 넣어야 한다거니,통일방안에 대해 국민투표를 하자거니 주문도 많다.『65세이상 실향민들을 북한에 가서 살도록 하자』『남북의 가정주부들이 판문점에서 정기적으로 만나게 하자』『노동집약적 중소기업들을 북한에 진출시키자』는 등 기발한 아이디어가 난무한다.국가보안법을 폐지하자는 주장도 나온다. 정·관가 일각에서는 월드컵 축구대회의 남북공동유치를 정상회담의 의제로 올리자는 논의도 있었다고 한다.서울과 평양의 경평축구대회를 재개하고 문화예술사절단을 교환하며 문화재를 교환전시하자는 이야기도 나오는 모양이다. 여기서 우리는 잠깐 생각을 다시 해봐야 할 것 같다.과연 그리되면 얼마나 좋으랴.그러나 그것들이 정말 실현 가능한 일이며 우리가 그렇게 들떠서 되는지…. 며칠전 김영삼대통령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국민들이 남북정상회담에 무엇을 바라는 가를 듣고 지혜를 빌리기 위해 여러 사람을 열심히 만나고 있다.그런데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을 만났는데도 말이 서로 달랐다.한사람이 이런 식으로 회담에 임하시오 하면 바로 곁에서 그것은 안되니 이렇게 하시오 하는 것이다』­대통령의 고민을 짐작하게 하는 솔직한 고백이었다. 우리는 남북정상회담을 두고 아무래도 너무 흥분해 있는 것 같다.협상이나 회담이라는 것은 원래 상대가 있게 마련이다.이쪽에서 아무리 무엇을 바라고,또 무엇을 해주고 싶어도 상대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모두가 쓸모 없는 일이 된다. 북한은 누가 뭐래도 이데올로기의 사회이다.그것 때문에 실상은 모르면서 그 사회를 동경하는 부류까지 있다.이데올로기의 사회는 모든 언어와 전략을 그 이데올로기의 목적에 맞추게 마련이다. 그들이 「민족」을 말할 때 그 뒤에는 「남조선은 미제국주의자들에게 강점돼 있다」는 주장이 숨어 있게 마련이다.스스로는 우리와의 대화 보다 미국쪽에 매달리면서도 그들은 그렇게 나온다.「군축」도 마찬가지다.10만을줄이든 10만을 남기든 그 속에는 「미군철수」가 깔려 있다.미군이 철수만 하면 남쪽은 제손 안에 있다는 꿈을 꾸는 것이다. 지금껏 공산주의자들과 협상을 해서 이긴 사례는 거의 없다.싱가포르의 이광요 같은 이는 몰라도.우리나라만 해도 그렇다.투쟁경력이나 지략에서 김일성을 훨씬 능가한다던 골수 공산주의자 박헌영이 무릎을 꿇었고 민족지도자 고당 조만식선생도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나야 했다.심지어 독립투쟁의 영웅 백범 김구선생도 실패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이른바 「적진아퇴 적퇴아진」과 「담담정정」란 모택동전략이 있다.앞의 것은 상대가 굳세게 쳐들어오면 나는 물러서고 상대가 후퇴할 때 그 약점을 친다는 전략이다.뒤쪽은 협상은 어디까지나 협상일 뿐이고 혁명투쟁은 투쟁으로서 계속된다는 뜻이다.물러서거나 협상을 하는 것이 모두 공산혁명투쟁을 완성하기 위한 한 과정일 뿐이다. 북한문제전문가들은 이번 평양회담에 나오는 북한쪽에 그런 저의가 전혀 없으리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크나큰 오산이 될 것이라고 경고 하고있다.설사 그렇기까지야 하겠는가마는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가는 지혜가 필요할 것 같다.그것은 김일성이 남북분단의 단초를 제공한 장본인이라 해서가 아니고 민족상잔의 비극 6·25사변을 일으켰다 해서도 아니다.더더구나 1·21사태며 아웅산 만행를 논할 계제도 아니다.그런 것들은 정상회담이 열리는 마당에 우리가 문제삼을 일이 아니다.그들이 스스로 과거를 뉘우치고 진심으로 사죄하면 그뿐이다. 다만 우리 사회가 너무 들뜨거나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는 조급함을 보여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김대통령이 얼마나 어려운 회담을 하러가는지부터 생각해봐야 한다.마침 흥사단이 귀중한 성명을 냈다.『회담 날 정오 온 국민이 다 함께 회담의 성공과 통일을 축원하는 묵념을 올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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