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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복 49돌/해묵은 이념갈등 종식을 모색한다/정담

    ◎“「자유민주」 건국이념 통일로 승화돼야”/미군정·독재정권 친일파 수용이 갈등의 불씨/자유민주=보수·민족주의=진보 「기형적 틀」 형성/남북 이념적인 통합기회 없이 분단/6·25 겪으며 반공·반미로 첨예 대립/탈냉전시대 사상논쟁 재연은 역사의 아이러니 올해로 광복 49주년을 맞았다.그러나 반세기가 지나도록 자유민주주의라는 건국이념을 다시 논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지금의 우리 현실이다.김일성사후 주사파문제가 예년에 없이 심각하게 부각되고 사회 일각에서는 우리 정부의 정통성마저 부인하며 해묵은 사상논쟁이 재연되고 있다.새로운 남북관계와 통일정책수립을 앞두고 진덕규(이화여대),이택휘(서울교대·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장),이현희교수(성신여대)가 우리의 건국이념을 재조명해보고 현재에 갖는 의미,구현방법등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이택휘교수=광복 당시 남북한은 모두 통합된 민족국가를 세우는 것이 최대의 목표였고 국민적 합의도 얻고 있었습니다.그러나 광복과 함께 남한은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를,북한은 구소련의 사회주의를 수용해 이념적으로 통합될 기회를 갖지 못하고 분단이 고착됐습니다.광복전부터 내재해 있던 이념갈등은 그후 심화됐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현희교수=건국이념의 배경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내부적으로는 민족광복세력의 왕조체제청산과 미국과 소련등 외세에 의한 영향등을 우선 꼽을 수 있습니다.임시정부가 중심이 됐던 군주제청산은 민주체제로의 자주적인 노력으로 임시헌장에 절대 자주독립과 자유민주주의,나아가 전통사상인 홍익인간과 이화세계,삼균주의정신을 담고 있습니다.그러나 광복후 남북의 이데올로기 갈등으로 건국이념은 올바로 설정되지 못했습니다. ▲진덕규교수=국민적 열망이었던 자주독립정신을 문서에 담은 것이 건국 초기의 헌법입니다.여기에는 의회정치와 개혁적인 경제정책,근대적인 시민사회와 선진문화 도입등을 분야별로 담고 있습니다.그러나 이같은 헌법정신,즉 건국이념은 이데올로기와 남북갈등으로 인해 반공으로 치우치게 됐고 결국 이데올로기의 경화는 삼균주의와 같은 임시정부의 이념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이택=그렇습니다.항일운동은 여러 갈래로 나눠 진행됐지만 군주정치로 돌아가서는 안된다는 이념적인 틀에는 모두 합의하고 있었죠.그러나 45년이후 남북간에 타율적으로 생겨난 이념갈등은 6·25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전쟁을 겪으면서 남한은 자유민주주의의 제1 요소로 반공을 부각시켰고 북한은 반미를 들고 나와 첨예하게 대립합니다.이같은 갈등은 60년대 국제적인 해빙무드와는 상관없이 계속되다 80년대 들면서 서서히 해소됐습니다.45년 당시와 마찬가지로 국제적인 역학변화가 이번에도 남북에 영향을 줘 급기야 남한에 사상논쟁을 재연시켰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현=광복직후 서구의 특정 이념을 초월해 통합된 민족국가를 수립해야 한다는 데 국민적 합의가 모아졌다는 사실을 살펴봤습니다. 하나의 민족국가를 세우겠다는 국민들의 열망은 그러나 좌우대립으로 멀어져갔고 그 과정에서 남한이 48년 먼저 선거에 의한 단독정부를 수립하게 됩니다.사회 일각에는 이같은 남한의 단독정부수립을 분단고착과 연결지어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북한의 주장처럼 단정의 책임이 전적으로 남한에 있는지,또 단정수립이 정말 불가피했는지 등을 짚어봤으면 합니다. ▲진=단독정부수립을 남한의 이승만정권이 혼자서 주도했다고 보는 것은 정확한 역사인식이 아니라고 봅니다.왜냐하면 북한에는 이미 46년 실질적으로 정부가 세워진 것과 다름없을만큼 조직이 정비돼 있었고 남쪽마저 공산정권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진행중이었습니다.그래서 남쪽에서는 북쪽에 대응해 단독정부를 수립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위기감과 절박감이 팽배했습니다. 게다가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로 끝나 미국은 결국 유엔에 남북한 정부수립문제를 위임했고 총선이 가능했던 남한에서만 선거가 치러진 겁니다.다시말해 처음부터 단독정부를 수립해 분단을 획책한 것이 아니라 당시 주변상황이 남한 단독정부수립으로 이어지게 한 거지요.때문에 이승만정권이 단정수립으로 분단을 노렸다는 것은 지나치게 자의적인 해석이며 역사에 대한 몰이해·반이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봅니다. ○무정부상태 계속 ▲이현=저 역시 단정수립에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시킬 의도가 있었다고 보지 않습니다.45년부터 48년까지 남로당은 대구폭동,여순반란사건,4·3제주사건등 전국적인 교란작전으로 정국을 무정부상태로 만들었습니다.당시 이승만박사는 「선 정부수립 후 통일」이 불가피 하다고 봤고 김구선생이 이끄는 한독당과 접촉을 합니다.한독당은 그러나 남한단독정부수립은 한반도의 영구분단을 가져온다며 반대하며 좌우연립정권 수립을 주장합니다.이박사는 공산세력을 절대로 끌여들여서는 안된다는 단호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한독당이 불참한 가운데 불가피하게 단독정부를 수립하게 됩니다. ○단정수립 불가피 ▲이택=단정수립이 과연 불가피했느냐 하는 문제는 현대 정치사의 주요 논쟁의 대상입니다.앞에서도 언급됐지만 북한은 46년에 이미 정부조직을 거의 완료해 놓고 남쪽에도 공산정권수립 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 입증된 사실입니다.사료들을 종합해보면 단정수립의 책임은 상당 부분 북한 특히 소련에 있다고 봐야합니다.그러나 남한도책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이박사와 민족세력등이 보다 적극적으로 미군정을 설득하고 단정수립을 지연시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는 점이 아쉽습니다. ▲이현=좌우합작을 시도했지만 역부족이었고 무정부상태에 가까운 치안상태와 내외의 역작용을 고려할 때 단정수립은 불가피했다고 정리를 해도 무리는 없겠군요.그렇다면 화제를 최근의 사상논쟁으로 돌려 그 원인과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운 건국이념이 현재에 갖는 의미는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진=건국이념의 현재의 의미를 논하기전에 먼저 현실인식과 당위성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단정이 수립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 까에 대한 가정은 얼마든지 해볼 수 있습니다.그러나 중요한 것은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현실인식이 선행돼야 한다는 겁니다.대한민국은 선거를 통해 수립된 합법적인 정부였지만 상해 임정세력들이 제헌의회에 불참하는 등 불완전한 부분도 있습니다.그러나 그후 5·30선거에는 임정세력들도 참여했고 특히 조소앙선생이 최다득표를 얻어 국민적합의가 생겨납니다.강조하고 싶은 것은 6·25전쟁은 자유민주주의의 건국이념을 변하게 했던 사건이 되었습니다.즉 공산주의와의 대결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건국이념으로 서의 자유민주주의를 반공으로 몰아가는 냉전적 대결성을 가열시키고 말았습니다. ▲이택=그렇습니다.이쯤에서 왜 이념적 갈등 또는 논쟁이 아직까지 정리되지 않고 있는지 그 이유를 정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가장 큰 이유는 미군정이 군정의 편의를 위해 친일인사를 수용한 겁니다.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면서 막상 항일민족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철저하게 배제됐습니다.이런 모순된 상황은 결국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회의를 싹틔웠고 「자유민주주의=보수,민족주의=진보」라는 기형적인 이념적 틀을 만들었습니다. 이념적 왜곡은 70년대를 거치면서 더욱 커졌고 지금에 이릅니다.최근의 사상논쟁의 중요배경 역시 미군정과 그후 독재정권이 친일파를 정리하지 않고 그대로 수용했다는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진=친일파처리문제가 이승만 정권에 대한 정통성시비를 일으키는 면이 있습니다.대한민국에는 48년부터 50년대 초까지 정부·경찰·학교·법조계등 국가의 중간관료급에 친일파가 다소 남아있었지만 각료의 차관급이상에는 친일파가 비교적 적지않았습니다.그러나 50년대 중반기 이후 중요정책의 결정에 참여했던 고위직에도 친일파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이는 당시 이승만정권이 국가의 1차적인 대결세력를 공산주의자들로,이들과 대립하면서 승리하기 위해 힘의 응집이 필요했기 때문에 일어났던 현상으로 여겨집니다. ○김일성 집권수단 ▲이현=최근 주사파 학생들은 남북한의 친일파숙청과정을 비교하면서 남한 정권의 정통성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북한이 광복이후 인민위원회의 주요간부급에 친일파 또는 친일한 혐의가 있는 사람을 모두 배제한 것은 사실입니다.그러나 북한은 친일파의 숙청을 그 자체보다는 김일성 반대세력을 제거,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행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이택=친일세력들은 6·25전쟁과 5·16혁명을 거쳐 80년대까지 모든 분야에서 충원됐고 이는 이념의 혼란을 가져온 주요 원인입니다.과거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은 30∼40년씩 방치해둬 어렵게 사는 반면 친일세력은 득세하는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 된 겁니다.진보적 성향의 사람들은 이를 비판했습니다.소위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친일세력이 대부분 일치하자 「이게 아니구나」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늘어났고 자연히 북쪽으로 시선을 돌리게 됐다고 봅니다.대안마련이 제대로 안된 상태에서 북쪽의 이념은 그래도 어느정도 정리된 것처럼 비친 것이 우리사회의 이념적 혼란을 가중시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진=한국전쟁이후 3·15부정선거까지만 돌이켜 보아도 자유민주주의 정치질서와 속성이 얼마나 유린되었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4·19혁명은 자유민주주의로 되돌아가서 이를 확립해 보려는 열망의 표출입니다.그러나 곧 박정희정권의 조국근대화 기치에 눌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적 열망도 빗나갔지만 6월 항쟁을 계기로 다시 국민과 정부는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으로의 올바른 자리매김을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사회적 정의실현 ▲진=먼저 건국이념인 자유민주주의의 본질과 민족국가의 개념을 짚어봐야 합니다.민족국가수립의 적시성과 국민적 욕구와 합의가 확보되어 있었는지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체제에서 말하는 민족주의의 개념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점입니다.원래 민족주의는 계급을 초월한 개념입니다.그러나 사회주이는 이를 전략적·수단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택=민주주의는 통합된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민주주의의 운영원리는 구성원들 사이에 도덕성과 사회적 정의를 과감하게 실현하기 위해 개혁을 지향하는 겁니다.정부가 먼저 주사파등을 수용,보다 과감하게 개혁을 추진해야 합니다. ▲이현=반대세력은 용인하되 자유민주주의에 역행하는 불순한 사상 제거를 전제로 한 건국이념을 정립해야 합니다.광복이전의 공산활동은 항일운동의 방편으로 행해졌기 때문에 8·15이후와는 구분돼야 합니다.따라서 대단합 차원에서 8·15이전에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공산활동을 한 사람도 독립운동자로포상하는 방안은 검토해볼 만 하다고 생각합니다.단군의 후손으로 「하나였다」는 주체적인 입장에서 45년 또는 48년이 아닌 임정의 임시헌법이 만들어진 19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경험을 토대로 한 건국이념으로 통일을 지향해야 합니다.
  • 김계수 광복50주년 기념사업 위원장(인터뷰)

    ◎“왜곡된 역사 재평가에 역점”/민족정신 되살리고 향후 비전 제시/내년 8·15전 총독부건물 철거 노력/남북관계 진전되면 기념사업 공동개최 가능 『내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일제하에서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 국민들이 통합의식과 유대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정지작업에 최선을 다할 작정입니다』 김계수광복50주년기념사업위원장은 서울신문과의 단독 회견을 갖고 『지난 50년간을 재정리하고 앞으로 50년간의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위원회의 할 일』이라면서 이같이 말했다. 다음은 김위원장과의 일문일답. ­우선 광복 50주년의 의의와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 말씀해주시지요. ▲우리의 광복 50주년은 미국의 독립 2백주년과 프랑스의 혁명 2백주년과 다릅니다.우리는 광복뒤 지금까지 분단과 6·25를 경험했습니다.또 정치적 사건으로 따지자면 4·19 5·16 12·12 5·17등 기구하고 참을 수 없는 시련이 많았습니다.다시 말해 해방의 벅찬 감격이 곧 사라지고 고난의 길을 걸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광복 50주년이 다른 나라의 기념일과 다른것은 이 때문입니다.특히 미국의 독립 2백주년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미국은 그동안 전통을 잘 확립해온 반면 우리는 분단등 우여곡절로 인해 전통을 확립하지 못하고 국민의식의 형성과 통합에도 실패했습니다.우리는 광복 50주년을 맞아 역사를 재조명하고 재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일제하에서 왜곡된 역사를 재평가하고 재확립해야 합니다.그리고 그런 다음에 국민들이 통합의식과 유대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정지작업에 착수해야 합니다. ­친일인사들이 독립운동가로 둔갑돼 민족사의 정통성을 훼손하고 있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요. ▲일제의 민족말살정책과 민족정신 왜곡의 결과입니다.그런 주장은 지난 50년간의 역사를 정리하지 못한데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우리 국민 대다수가 공통적으로 느끼고 의식할 수 있는 역사를 재정립한다면 그런 주장은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거듭 강조하지만 해방후 50년간의 역사를 바로잡고 비판 정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우리사회 여러 분야의 공통분모를 추출해 지금의 상황을 종합분석하고 모든 국민이 공통으로 인식할 수 있는 유대감을 형성해야 합니다.또 용서할 것은 용서하고 반성할 것은 반성해서 국민들이 한 덩어리가 돼야 합니다.그런 다음에 앞으로의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광복 50주년은 남북관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광복을 기리는 것은 남과 북이 마찬가지입니다.남북관계가 진전돼 판문점이나 개성에서 공동으로 행사를 개최하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남북이 함께 기념사업을 거행하는 몇가지 안을 준비하고는 있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공동 개최를 제의할 생각은 없습니다.설사 공동으로 사업을 개최하더라도 현안이 해결되지 않고 화해무드가 조성되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위원회가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사업은 무엇입니까. ▲위원회가 직접 관여하는 부분은 아니지만 광복 50주년에 맞춰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돼야 한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시간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 절대로 안된다는 뜻을 전달했습니다.위원회에서는 내년 8월15일에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더라도 광화문 앞에서 수백만명의 국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행사를 가질 작정입니다.그런데 총독부 건물이 그대로 옛 모습 그대로 서있어서야 말이 되지 않습니다.총독부 건물이 해체되지 않으면 광복 50주년의 의의가 퇴색할 뿐아니라 행사 자체가 어려워집니다. ­위원회의 활동은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지난 3월28일 발족한 이래 25명의 위원 전원이 참석하는 본회의를 5차례 열었고 10명으로 구성된 소위원회도 11차례나 가졌습니다.분과위 회의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하지만 기념사업 성공의 관건은 정부에서 파견된 기획추진반원들이 얼마나 성실하게 사업을 수행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봅니다.위원회는 범국민적 조직이기는 하지만 법적으로는 국무총리자문기구로 돼있어 정부의 도움없이는 제대로 운영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올해 49주년 행사와 달라지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지난 50년간을 평가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나름대로 정리한 「민족선언」의 발표를 계획하고 있습니다.또 책자와 논문의 발간도 고려중입니다.마음이 든든한 것은 문민정부가 들어선 까닭에 과거를 재평가하고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데 큰 힘이 된다는 점입니다.정권의 합리화에 몰두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정신적으로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도덕적으로 긍지를 갖고 일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 정부,미에 「보안법발언」 유감 표명

    ◎한 외무,레이니대사 불러 공식 전달/“우리가 판달할 국내문제” 한승주외무부장관은 미국무부가 우리 국가보안법의 개폐필요성을 언급한 것과 관련,12일 상오 제임스 레이니 주한미국대사를 외무부로 불러 유감의 뜻을 미국정부에 공식 전달했다. 한장관은 이 자리에서 『국가보안법을 폐지할 것인지 여부는 우리가 판단해야 할 한국의 국내문제』라고 지적하고 『특히 남북분단의 현실에 비춰볼때 국가보안법은 여전히 필요하다는게 우리 정부의 방침임을 재확인했다. 한장관은 또 『과거 권위주의정부에서 국가보안법이 악용된 사례가 있었으나 문민정부가 들어선뒤 민주적 기본질서를 해친다고 판단되는 극히 예외적 경우에만 이를 적용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이번에도 민주적 기본질서를 해치는 과격 좌파학생들의 폭력행위에 대처하기 위한 법에 따른 조치일뿐』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레이니대사는 우리 정부가 밝힌 유감의 뜻을 『본국 정부에 보고하겠다』고 말하고 우리 사회의 인권신장과 정치발전이 괄목할만하게 이뤄지고 있음을 평가했다. ◎명백한 내정간섭/민자 성명 민자당의 박범진대변인은 12일 미국 국무부가 국가보안법의 개폐 필요성을 언급한데 대해 『국가보안법의 존폐문제는 우리 스스로 결정할 문제이며 결코 미국이 간여할 사안이 아니다』라는 성명을 냈다.
  • 국내외학자연구로 본 남북단정수립 과정

    ◎“평양 45년말 실질적 공산정권 수립”/「5도인민위」 조직 등 남측보다 3년 더 빨라/“「서울단정」 출발로 분단고착 ” 주장 허구 입증 대한민국 정부는 민족과 국토가 일제의 사슬에서 벗어난지 만 3년째 되는 날인 1948년 8월15일 출범했다.비록 해방된 민족의 염원인 「통일 조국」을 실현하지는 못했지만,대한민국의 수립은 민주사의 정통성을 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자못 심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 일각에는 「대한민국이 38선 이남에 세워진 단독정부」라는 이유로 그 의의를 평가절하하는 시각이 남아 있는데다 급진세력은 『남한에서 단정이 출범함으로써 분단이 고착됐다』는 주장도 펴고 있다. 분단의 책임을 대한민국의 출범에 떠넘기는 이같은 주장이 어느정도 타당성을 갖는지 학계의 연구성과를 통해 알아본다.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관한 역사적 평가를 위해서는 당시 남한지역을 통치하던 미 군정과 정치주도 세력이 통일정부를 이룩할 기회가 충분히 있었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단정을 강행했는지 여부를 따져봐야 한다. 신용하·김학준·진덕규교수등 국내 학자와 미국의 스칼라피노(캘리포니아대 명예교수)·이정식씨(펜실베이니아대 교수)등 국내외 학자 대부분이 한반도 남쪽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이 불가피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들 학자의 입장은 ▲광복이후의 정국이 남쪽과 북쪽간에 크게 달랐고 ▲남쪽에서는 새로 탄생할 국가의 주도권을 놓고 좌·우의 정파가 극한대립하고 있었던 반면 ▲이북에서는 소련주둔군의 지원아래 공산세력이 「실질적인」정부를 구성하고 있었음을 지적한다.특히 북한지역에서의 공산통치는 현실적으로 통일정부 수립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고 보고 있다. 당시 남한지역은 미군이 군정을 실시하면서 나름대로의 일정표에 따라 민의를 수렴한 정치단체가 등장하기를 기다리는 실정이었다.그러나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으로 남북을 통괄할 임시정부 수립문제를 논의하는 회의에 참가신청한 정당·단체가 4백25개에 이른 예에서 보듯 당시의 남한 정국은 지리멸렬한 상태였다.이에는 46년 9월의 「9월총파업」,10월의 「대구폭동」등 광복이후 잇따라 발생한 좌익의 준동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에 반해 이북에서는 45년 8월16일 「함경남도 인민위원회」결성을 시작으로 연내에 황해도·평안남북도·함경남북도등 5개 도의 인민위원회 조직을 완료했다.또 46년 2월에는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한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수립하는등 급속히 통치조직을 확립해 나갔다.이 과정에서 소련식 소비에트정권 수립에 반대하는 기독교·지주·지식계층등의 반대파를 일사불란하게 숙청했음은 물론이다. 「한국전쟁의 기원」이란 저서로 유명한 미국학자 브루스 커밍스마저도 자신의 책에서 『북한에서는 45년 말에 이미 실질적인 정권이 들어섰다』고 인정하는 정도이다.그는 「단정 수립은 한반도 남부를 장악하려는 미국의 의도」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하는 학파의 대표격 학자이다. 따라서 당시 남북 제 정당·사회단체의 논의에 따른 통일정부 수립은 불가능했으며 이에 따라 미국은 한반도 문제의 해결을 유엔에 넘길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유엔총회는 「남북한 전지역에서 자유총선거를 실시해 정부를 구성」할 것을 결의했지만 당초 한반도문제의 유엔상정 자체를 거부했던 소련은 유엔감시단의 입북을 거절함으로써 결국 남한의 단독선거를 가져왔다. 대한민국은 48년 5월10일의 총선거,7월17일의 헌법 공포를 거쳐 8월15일 출범했다. 이에 북한은 기다렸다는듯 8월25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치르고 9월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성립시켰다. 이로써 45년 미·소 양군의 진주로 시작된 영토분단은 48년 체제분단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에 앞서 ▲47년 2월의 「조선인민군 창설」 ▲48년 4월의 「헌법 채택」등 발빠르게 정부수립을 위한 준비를 다져왔다.막상 정부수립 일자만 한달여 늦었을 뿐 단독정부를 준비하고 이룩한 과정은 남쪽보다 북쪽이 훨씬 빨랐으며 그들이 주장하는 「단정의 분단책임론」이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입증하는 대목이다.
  • 이승만과 김일성 비교론/김학준교수,남북한단정 두주역을 말한다

    ◎끝까지 항일깃발… 사상적 뿌리 민주주의에/이승만/기독교신자서 마지막 스탈린주의자로 종말/김일성 대한민국 건국 46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새삼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들 가운데 한 분으로 대한민국의 초대 국회의장과 초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박사를 생각하게 된다.동시에 대한민국의 건국을 반대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우는데 앞장서 북한 공산정권의 초대 내각수상으로 북한 권력구조의 정상에 오른 뒤 무려 46년동안 1인장기집권을 유지하다가 최근에 죽은 김일성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이승만과 김일성은 똑같은 이북 사람으로 이승만은 황해도에서,김일성은 평안남도에서 각각 태어났다.두 사람은 37년의 시차를 두고 태어났는데 그러나 차이는 연령 하나에 국한되지 않고 많은 부분들에 걸쳐 있다. 이승만은 조선왕조의 황혼기에 태어나 고전적인 한문교육을 받다가 서울에서 배재학당을 다니며 미국 교육을 받았다.이렇게 볼때 그는 미국 교육 또는 서양 교육을 일찍받은 당대의 선진적 소수 지식인들 가운데 한사람이었다.그가 받은 교육의 내용은 서양 민주주의와 기독교에 관한 것이었다.그는 상당히 자극됐으며 그리하여 독립협회 운동과 만민공동회 운동에 참여해 싸우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석방된 뒤 그는 기독교 청년운동에 종사하다가 도미하여 조지워싱턴대에서 정치학 학사를,하버드대에서 정치학및 역사학 분야의 석사를,그리고 프린스턴대에서 정치학및 국제법 분야에서의 박사를 각각 받았다.그의 학문적 배경만을 놓고 볼때 당시의 조선사람으로는 단연 정상급의 학자였다고 할 것이다. 이승만은 곧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됐다.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안에서 벌어진 심각한 노선투쟁은,특히 무장투쟁노선을 옹호하는 세력은 외교선전노선을 앞세우는 이승만으로 하여금 미국으로 돌아가게 만들었으며 그리하여 그는 수도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만들고 이 기구를 중심으로 미국 정부와 국제연맹을 상대로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운동에 매달리게 했다. 그의 독립운동 방식이 무장투쟁 방식의 시각에서 보면 의미가 줄어들 것이다.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는 단 한차례도 일제와 타협한 일이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항일독립의 깃발을 들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김일성은 조선왕조가 무너진 뒤 망국민의 신분으로 태어났다.이승만이 기독교 교육을 받으며 자랐듯 김일성 역시 기독교 집안에서 기독교의 영향을 받으며 자라났다.그러나 이승만이 평생 기독교 신앙을 지켰음에 반해 김일성은 곧 기독교를 버리고 반기독교적 입장에 섰다는 점이 대조된다. 이승만의 교육적 배경과 활동의 무대가 미국이었음에 비해 김일성의 그것들은 만주였다.이승만이 영어를 모국어나 다름없이 썼음에 비해 김일성이 중국어를 모국어처럼 썼다는 대조도 흥미롭다. 김일성의 교육은 그러나 중학교 퇴학으로 끝났다.그는 곧 중국공산당 당원이 됐으며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 무장투쟁의 길을 걸었고 그 종착역은 소련극동군의 정보특무 대위였다. 조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되면서 이승만은 만70세의 노인으로 미국으로부터 서울로 돌아왔다.한편 김일성은 만33세의 청년으로 소련으로부터 평양으로 돌아왔다. 이승만의 사상적 뿌리는 미국식 민주주의였다.그래서 그는 북한을 점령한 소련의 국가 이데올로기,곧 공산주의를 증오하고 소련의 영토적 팽창주의를 경계하면서 소련이 북한을 발판으로 남한까지 공산화시켜 한반도 전체를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경각심을 가졌다. 여기서 그는 일찍부터 단정론을 들고 나왔다.되지도 않을 남북통일에 연연하다가는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될 위험성이 크므로.게다가 북한에서는 「소련 점령군의 앞잡이」김일성을 중심으로 소비에트 정권이 창출되고 있으므로 남한에서도 서둘러 정부를 수립해 맞서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실제로 김일성은 소련점령군의 북한 소비에트화 전략을 떠받들고 북한에 공산주의 단독정권을 세워나갔다.그는 이 단독적 공산정권이 서고나면 그것을 발판삼아 남한까지 공산화할 계획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48년8월15일에는 남한에서 대한민국이 세워졌고,같은해 9월9일에는 북한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두 국가는 각각 상대방의 존재를 부인했다.부인할 뿐만아니라 상대방을자신에게 흡수통합시키기위해 무력의 사용도 주저하려고 하지 않았다. 전면적인 선제공격을 가해 온 쪽은 김일성이었다.그는 소련및 중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50년6월25일 남침을 개시함으로써 동족상잔을 촉발시킨 것이다. 이승만은 다행히 미국의,그리고 국제연합의 지원을 받아 대한민국의 붕괴를 막을 수 있었고 한걸음 더 나아가 압록강까지 진격해 북진통일을 기대할 수 있었다.이 시점에서 김일성은 중국의 지원을 받아 북한 공산정권의 궤멸을 막을 수 있었다.여기서 전전 원상의 회복이라는 테두리 안에서의 휴전이 성립됐고 이 휴전체제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전쟁을 치르면서 이승만은 권위주의 체제의 길을 걸었다.부산 정치파동과 3선개헌을 거치면서 민심의 이반을 낳았던 그의 통치는 결국 60년의 3·15부정선거로 귀결됐으며 4·19학생의거에 따른 4월혁명을 만나게 됐다. 대한민국의 조지워싱턴이 될 수 있었던 그는 하야하지 않을 수 없었고,하와이로 망명의 길을 떠나야 했다.5년 뒤 그는 유명을 달리한 채 귀국했다. 김일성은자신의 정신적 스승인 스탈린이 걸었던 길을 그대로 걷고자 했다.그것은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 그리고 피치자에 대한 억압과 세뇌였다. 이승만이 하야한 뒤 대한민국에서는 정권이 여러차례 바뀌었다.헌정사에는 굴곡이 적지 않았으며 어두웠던 시절들이 때때로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이 쌓아올린 건국의 울타리 안에서 대한민국은 결국 민주주의와 번영의 길에 들어섰다.다행스러운 일이다. 김일성의 북한은 한때 경제적으로 대한민국을 앞선 때가 있었다.그러나 1인 장기집권의 억압체제가 반세기 가깝게 지속되면서 사람들은 활력을 잃게 됐으며 자연히 경제적 침체라는 늪속에 깊숙하게 빠져버렸다. 그리하여 북한 공산체제의 붕괴론마저 나오는 시점에서 김일성은 마침내 죽었다.이승만의 별세 이후 29년만의 일이다. 48년 이후 남쪽에서는 공화정이 여섯차례나 바뀌었고 최고권력자도 일곱사람이나 나왔다.그래서 대한민국은 비록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교체를 통한 국민적 활력이 살아도 나고 지탱도 되어 선진국을 바라볼 수 있는 민주적 신흥공업국가로 커졌다. 그러나 북쪽에서는 최고집권자가 전혀 바뀌지 않은채 지내오다보니 세포가 죽어버려 결과적으로 빈곤의 땅이 됐다.이것은 김일성이 역사적으로 너무 오래 살았음을 의미한다.역사와 민족을 위해 그는 일찍 세상을 떠났거나 권력에서 떠났어야 했다. 이제 미래가 대한민국의 편임이 확실해졌다.민주주의와 시장경제원리라는 시대적 흐름을 탄 대한민국으로서 자신감을 갖되 신중하게 남북의 평화통일을 향해 착실하게 전진할 때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서두를 필요는 없다.김정일체제의 성격과 방향을 날카롭게 주시하면서 우선은 기본적인 교류와 협력의 부문에 돌파구가 열리도록 노력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내년의 8·15는 해방 50주년이면서 분단 50주년이 되는 뜻깊은 역사적 시점이다.남과 북을 통틀어 우리 겨레의 형편이 훨씬 더 개선되기를 바란다.
  • 미 보안법 개폐거론/정부,“내정문제 유감”

    정부는 11일 미국 국무부가 우리 국가보안법의 개폐문제를 언급한데 대해 『국가보안법의 존폐문제는 우리 정부가 판단해야 할 국내문제』라고 지적,유감의 뜻을 밝혔다. 외무부 장기호대변인은 이날 미국국무부의 언급에 대한 기자들의 논평을 요구받고 『현재의 남북분단 현실에 비쳐볼 때 국가보안법이 필요하다고 우리는 생각한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장대변인은 이어 『과거 권위주의 정부에서 국가보안법이 악용된 사례가 있었지만 문민정부가 들어선 뒤 민주적 기본질서를 해친다고 판단되는 극히 예외적 경우에만 적용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미국 국무부대변인은 뉴욕타임스의 9일자 사설과 관련된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국가 보안법의 개폐를 희망했다.
  • 조회찬씨(진보 정당추진위대표)의 체험적 학생운동 비판

    ◎“주사파 친북통일운동은 시대착오”/“국민의 지지 못받는 통일운동 가치없어/북인권 눈감으며 독재노선 추종은 모순”/사회주의 체제가 낙원아님은 동구몰락으로 증명 『맹목적인 김일성주체사상에 사로잡혀 있는 주사파 학생들은 이제 케케묵은 이념의 틀을 깨고 새롭게 거듭 나야 합니다.변화를 두려워한 노동·학생·통일운동은 이제 외면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때 노동자 계급의 전위정당 결성을 통한 민중혁명으로 사회주의정권 창출을 꿈꾸며 학생운동에 깊숙이 관여했던 노회찬씨(39).진보정당추진위원회 대표인 그는 『국민적인 지지가 없는 학생운동·통일운동은 더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다』며 『최근 일부 주사파학생들의 친북통일운동은 한마디로 시대착오에 불과하다』고 평가절하했다. 태풍 더그의 영향으로 비가 내리는 10일 하오 1시 서울 마포구 서교호텔 커피숍에서 만난 노씨는 소탈하게 인사를 나누자 담배를 피워 물고 스스럼없이 말문을 열었다. 『기존의 학생·재야단체의 노동·학생·통일운동이 실패한 것은 친북적인 이미지로 국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며 이는 거슬러 올라가면 재야운동권의 일부 사회주의체제에 대한 무비판적인 시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지요』 노대표는 최근 「주사파의 배후에는 북한이 있다」는 서강대 박홍총장의 발언과 관련,『주사파 학생들이 북한의 민주화·인권문제등은 도외시하거나 옹호·방관하면서 북한 노동당의 입장이나 정책을 비판없이 무조건적으로 수용했다』고 비판했다. 『주사파 학생들의 무모한 주체사상 몰입이 결국 재야 운동권전체가 친북성향의 통일운동을 하는 것으로 치부됐으며 순수한 통일운동세력들마저 국민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게 된 겁니다』 통일운동에 대한 균형있는 시각과 객관적인 관점만이 국민들의 호응을 얻는다고 강조하는 노대표는 주사파 학생들의 낙후된 의식,즉 「가자,오라」는 등 만남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감상적인 통일논리,범민족대회의 비순수성등이 기존 통일운동에 염증을 느끼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고려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80년 노동운동계에 발을 들여놓은뒤 87년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을 결성해 노동운동을 하다 89년 국가보안법위반혐의로 구속돼 92년 출소한 경력이 말해주듯 사회주의 이념에 충실했던 노대표가 기존의 사회주의 노선에 나름대로 비판을 가하기 시작한 것은 89년부터.폴란드·루마니아등 동구권 국가와 구소련의 사회주의 몰락을 계기로 사회주의에 대한 재평가와 함께 기존의 노동운동에 자체반성을 하게 됐다는 것. 『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동구권에 불어닥친 민주화바람은 사회주의가 낙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 것이죠.사회주의는 일당독재로 점철됐고 부의 공평한 분배도 제대로 안됐다는 사실에 시민들이 분노하고 항변했던 것입니다』 노대표는 불행히도 우리나라 대학가만이 이데올로기에 파묻혀 있다는 현실이 안타깝다면서 『이를 막기 위해서는 민간통일운동의 활성화와 정부규제의 완화가 절실한 실정』이라고 말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정부당국의 무분별한 공권력투입이 오히려 주사파들의 결속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때문에 비주사파가 제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주사파에 끌려다니는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최근 통일운동을 위한 순수민간단체들의 잇따른 발족과 관련,그는 『「어떤 방법으로든 통일만 되면 그만이다」라는 식의 무분별한 통일논의와 「무조건 만나고 보자」는 감상론적 통일논의에 쐐기를 박는다는 점에서도 바람직한 현상』이라며 『이념적 다양성과 개방성으로 국민적인 참여를 유도해 공개적인 지지를 받고 룰에 의해 심판받는 의식개혁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92년 4월 민중당의 해체와 동시에 발족된 「진보정당추진위원회」를 이끌고 있는 노대표는 『북한의 「우리식 사회주의」와 주체사상을 맹종하는 주사파는 조만간 설 자리를 잃을 수밖에 없다』고 진단하고 『분단의 고통을 경감할 수 있는 건전한 통일운동을 위한 제도와 정책대안마련에 혼신의 힘을 다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 거꾸로 도는 시계바늘/이근배(일요일 아침에)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올 여름처럼 무덥고 지루한 여름을 두번 만날까 걱정이 된다.특히 지난 7월 한달은 몇십년만에 처음이라는 불볕 더위와 가뭄까지 겹쳐 정말 대지가 목이 탄다는 것이 무엇인가 실감나게 했고 찾아올까 겁을 냈던 태풍마저 오기를 마음으로 빌어야 했다. 하늘에서는 태양계의 큰 별인 목성이 뉴메이커 부부가 처음 봤다는 혜성과 충돌하는 우주쇼를 연출했고 땅에서는 반세기동안 이 나라와 겨레를 죽음과 공포와 고통속으로 끌고다닌 김일성의 죽음으로 한동안 시끌시끌 했다. 김일성은 그 특유의 선전전술을 죽음마저 교묘하게 써먹고 갔다.분단이후 반세기만에 어렵사리 잡아놓은 남북정상회담의 날짜를 며칠 앞두고 덜컥 죽어서 그가 빨리 죽기를 바랐던 사람들까지도 정상회담이 얻어냈을지도 모를 어떤 변화를 기대했던 때문에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재주를 부린 것이다. 그런 틈을 타서 정치권 한 구석과 재야·운동권 학생들은 거리낌없이 「애도」를 표명했고 대학구내에 분향소를 설치하고 애도대자보가 나붙는 등 김일성 사망신드롬이 일파만파로 번져갔다.그때 「운동권학생의 뒤에는 김정일이 있다」는 서강대 박홍총장의 발언이 나왔고 이어서 「북한의 장학금을 받은 사람이 대학교수가 되었다」는 일지와의 회견으로 충격파는 더 커질 수 밖에 없었다. 박총장의 폭탄적 발언의 사실여부를 확인할 겨를도 없이 이번에는 지방의 한 국립대학에서 9명의 교수가 공동집필한 「한국사회의 이해」라는 대학교양과정의 교재가 마르크스주의를 적극 옹호하고 나아가서 북한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당국에 의해 발표되어 또 한차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다만 일부 철없는 학생들의 한 때 스쳐가는 지적 호기심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그 주사파가 이렇게 뿌리가 깊다니 놀라움을 넘어서 두렵기까지 하다.도대체 주사파가 신봉하는 김일성이 내놓은 주체사상의 실체가 무엇일까 이미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붕괴되고 동유럽이 돌아선지 오랜데 어째서 이땅의 일부 지식층에서는 그 망령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지난봄 KBS의 해외동포상 수상자로 서울에 온 연변의조선족 원로작가 김학철옹의 말이 생각난다.몇해전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소설가 박경리씨로부터 주체사상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그때 「주체사상은? 그거 정신병입니다」그렇게 대답했더니 박경리씨가 깜짝 놀라는 표정이더란다.왜 그렇게 놀라느냐고 했더니 박경리씨 얘기가 「바로 얼마전에 소련에서 교수 한분이 와서 같은 질문을 했더니 대답이 너무 꼭 같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느냐」는 것이더란다. 해방전에는 중국에서 항일투쟁을 했고 해방후에는 공산주의자가 되어 북한에 들어가 김일성의 집권에도 도왔으나 김일성에게 실망,중국으로 다시 탈출,모택동치하에서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20세기의 신화」라는 소설을 집필중 밀고로 체포,1천여명의 군중앞에서 인민재판을 받고 10년 복역한 사회주의 반체제작가 김학철옹,그 분은 분명 「주체사상은 정신병」이라고 단정지었다.주체사상이 있다면 그것은 김일성부자의 세습체제와 독재,주민수탈을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 김옹의 부언이었다. 모택동치하 20년간 풀떼기죽(잡곡에다푸성귀를 썰어넣고 쑤운죽)하루 두그릇으로 살았다는 김옹.화젓가락으로 가죽허리띠 구멍을 네번이나 뚫으면서 배고픔을 견뎌야 했다는 김옹,일찍이 마르크스­레니주의에 빠져들었으나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환상이었나를 목매인 소리로 증언하는 김옹 내외의 증언을 들으면서 밥이 목에 넘어가지 않았었다. 작년여름 문단의 선배,동료들과 백두산에 갓을 때 들은 얘기도 다른 것은 아니었다.묵은 강냉이로 하루 두끼만 먹는 주체사상,텃밭 물려주듯 자식에게 권력을 넘겨주는 주체사상,그런 주체사상을 믿고 따르겠다는 학생들이 있고 교수들이 있으니 아무래도 이땅의 한쪽에서는 시계바늘이 거꾸로 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 북한 단편선 「뻐꾹새…」 출간/「조선문학」에 발표된 12편 수록

    ◎도·농 갈등등 북한 현실 다뤄 90년대 북한 문학의 흐름을 들여다볼 수 있는 단편소설선 「뻐꾹새가 노래하는 곳」이 살림터에서 나왔다. 90년부터 지난해까지 북한 제일의 문학지로 꼽히는 「조선문학」에 발표된 작품 12편을 가려 수록했는데 북한 사회주의 현실과 관련된 주제를 골고루 담고 있다. 90년대 북한 문학의 가장 큰 특징은 혁명적 낭만주의의 강세.80년대 북한문학이 비교적 북한 현실에 비평적으로 접근하려는 시도를 보인데 반해 최근 북한 문단은 사회주의 몰락과 그에따른 체체 수호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혁명적 낭만주의의 강조가 두드러지고 있다는 관측이다. 「뻐꾹새…」은 이런 분위기에서도 북한 현실을 테마로 다룬 대표 작품집으로 도농간의 갈등,여성문제,육체노동과 정신노동사이의 갈등,관료주의,남녀간의 사랑,세대차이,과학기술문제,분단문제등을 다루고 있다. 이 단편집의 작품을 선정한 문학평론가 김재용씨는 『최근들어 북한문학에서 현실변호적 성격이 강해지고 있는 것은 혁명적 낭만주의의 경향이 점점 강한 비중을 갖게돼 공식적 이데올로기와 목소리에 의해 작품이 지배 돼 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 서독,동독정치범 “사들였다”/통일에 앞서 「거래 선례」를 보면

    ◎현물 등 34억마르크 들여 3만명 구해/양측 변호사 중개… 종교단체 등 적극 협조 79년 북한에 강제납치됐던 고상문씨가 북한 정치범수용소에 갇혀 있음이 국제사면위 발표를 통해 확인됨으로써 강제납북된 4백41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아울러 과거 동·서독이 서로 정치범을 교환했던 전례가 이들 납북자 송환에 원용될수 없을지 시선이 모아진다. 물론 분단상태라 해도 왕래와 교류가 완전히 끊기지는 않았던 동·서독과 휴전선을 가운데 놓고 접촉이 전혀 불가능한 남·북한을 직접 비교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그러나 과거 서독의 경우 이미 통일 오래전부터 동독내 정치범들에게 큰 관심을 갖고 이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등 이들의 전례에서 우리가 얻어야할 교훈이 적지 않다. 동·서독간의 정치범 석방은 한마디로 서독이 내세운 「인도주의에 입각한 분단고통의 완화」와 동독이 필요로 한 「돈」간에 서로 이해가 맞아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이같은 노력에 대해 일각에서 「인신매매」라는 비난이 제기되기도 했다.그러나 그것이 분단상태의 동·서독을 묶는 하나의 연결고리로 작용한 것만은 통일이 이뤄진 지금 분명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분단 초기의 동·서독은 동·서 베를린간 왕래가 허용되는 등 완전 분단의 상태는 아니었다.이같은 상황속에서 서독은 50년대초 동독측과 계속 접촉을 갖고 있던 서독의 사회단체들을 동원,동독내의 정치범 현황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실향민단체,적십자 등 사회구호복지단체,노조,동베를린에 지부를 둔 정당및 서독으로 탈출한 피란민들이 정보를 제공했다. 서독 내독부에 설치된 「법률보호실」은 55년 이렇게 수집된 정보들을 바탕으로 정치적 박해자 명단을 만들었다.정치범들의 구속사유,형량 등을 바탕으로 우선순위를 매겨 작성된 명단은 석방요구서와 함께 동독측에 전달됐다. 이때 서독의 종교단체들이 인도적 견지에서 대가를 지불하고 동독정치범을 석방시키는 노력을 개시했다.그러나 당시의 냉전상황에서 적대국일 수 있는 동독에 자금을 제공하는 결과가 된다는 문제점등이 제기돼 이 사업은 자연스럽게 서독정부로 이관됐다. 서로를 적대시하던 동·서독정부가 정치범 석방을 위한 접촉을 갖도록 하기위해선 중개창구가 필요했다.이같은 중개창구 역할은 동·서독의 변호사들이 맡았다.동독에선 볼프강 포겔이,서독에선 위르겐 스탕게변호사가 각각 양측을 대표하는 중개인으로서 접촉을 가졌다.스탕게로부터 동독내 정치범들을 석방해주는 대가로 돈을 지불하겠다는 서독정부의 의사를 전해받은 동독은 이를 비밀에 부친다는 조건하에 1천명의 정치범을 석방시키기로 했다. 이같은 합의는 서독이 이를 선전전에 이용하지 않을까하는 동독측의 의구심으로 인해 실행단계에서 숱한 장애에 부닥친다.동독은 당초 1천명이었던 석방대상을 5백명으로,또 1백명,50명으로 단계적으로 줄여 최종적으로는 8명까지 깎아내렸다.그러나 서독이 사업계속 보장을 전제로 동독측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정치범석방은 성사될 수 있었다. 서독은 63년 8명의 정치범 석방 대가로 32만마르크를 동독에 지불했다.이후 90년 통일이 이뤄지기까지 27년간 서독은 34억6천만마르크를 동독에지불한 대가로 3만3천7백55명이나 되는 동독내 정치범을 석방시켰고 25만의 이산가족을 상봉시키는 개가를 올렸다. 그러나 실제로 동서독간에 현금이 오간 것은 63년 첫 석방때 32만마르크가 지불된것 한번 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현물을 동독에 제공하는 방식으로 결제가 이뤄졌다.서독내 교회들이 동독의 교회들을 지원하는 형식으로 물자제공이 이뤄졌던 것이다.초기에는 동독주민들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버터 등 생필품이 제공됐으나 나중에는 산업원자재들이 주종이 됐다.돈과 물자가 동원된 정치범 석방 사업에 대해선 아직도 비판적 시각이 남아있다.그러나 이같은 노력이 결과적으로 통일을 앞당기는데 적지않은 기여를 했다는 긍정적 견해가 다수인 것만은 분명하다.
  • “6·25는 민중해방위해 불가피”/경상대교수 9명저서 문제부분

    ◎좌익은 독립운동·우익은 친일파/반공이념 타파해야만 민족통일 문제가 된 「한국사회의 이해」라는 책자는 진주 경상대 경제학과 장상환교수(43)등 사회과학관련 학과 교수 9명의 강의노트내용등 논문 11편이 수록돼 있다.이 책자는 올해초 개정 출간돼 「한국사의 새로운 인식」이라는 교양강좌로 개설돼 1학기에 2개반 4백70명이 수강했으며,2학기에도 강의신청을 받고있는 중이다. 지난 91년 처음 출간된 이 책자는 최근 내용을 대폭 보완,4백8쪽으로 된 개정판에는 11편의 논문을 서설(시각과 방법)과 근·현대사,사회구조,사회운동등 3부로 나눠 세분화했다. 「한국사회의 이해」의 서론부분에서는 러시아와 동구의 사회주의 발흥이나 몰락은 그들 사회의 한 역사적 경험으로 그 자체가 마르크스주의의 실현이나 실패가 아니라는 내용이 실려있다.또 문민정부 출범이 군사정권에 종지부를 찍기는 했지만 개혁이 한국사회의 본질적인 모순은 건드리지 못한채 정경유착에 기초를 둔 한국자본주의의 부패구조를 개혁하려는데 그칠 뿐이라고 기술돼 있다. 또 2장 「한국근대민족운동의 전개」는 『좌익은 독립운동을 했고 우익은 친일파였다』,3장 「분단국가의 형성과 한국전쟁」은 『친일세력은 미국에 추종해 해방후 분단을 고착화시켰고 좌익은 분단해결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6·25는 도발이 아니라 남한 민중을 해방시키기 위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고 적고 있다. 또 4∼8장도 『한국경제는 미국경제의 종속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매판자본만 살아 남는다』『미제국주의자들의 반공이데올로기를 타파해야 민족국가와 통일을 이룰수 있다』고 주장하며 책전체의 결론을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계급혁명이 필요하다』는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다. 경찰대학 부설 공안문제연구소의 감정결과에 따르면 그동안 이 책의 내용을 분석한 결과 마르크스주의의 시각에서 자본주의체제를 비판하는 많은 부분에서 이적성 표현이 드러나 있다고 밝혔다. 국가의 법을 지배계급의 통치수단으로 규정하고 있고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해결하는 방안은 마르크스주의밖에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남한은 미국 식민지로 미국이 남한을 실제적으로 지배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남한은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이 중첩된 사회로 규정』하고 있다. 이와함께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해 우리나라를 신식민지·독점자본주의·종속적 국가등으로 규정,노동자 중심의 혁명투쟁을 선동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밖에 문민정부는 「이완된 종속적 파시즘체제」로 규정,정권타도투쟁을 선동하고 있다(32,41,242,243쪽등). 이처럼 이 책자는 남한을 미국식민지로 규정하고 미국과 우리정부를 타도대상으로 하고 있는등 북한의 주장을 여과없이 담고있다. 한편 검찰관계자는 대학이 아무리 학문의 자유를 추구하는 곳이라고는 하나 이같은 이적성이 담긴 책자가 어떻게 4년동안이나 교양교재로 쓰여 일방적으로 교육돼 왔는지 한마디로 충격적이라고 밝혔다.
  • 아내·두딸 북수용소 억류 확인 자수간첩 오길남씨

    ◎“가족들 생지옥서 비참한 생활”/3차례 자살기도로 특별감시대상/「주체사상 십계명」 어기면 바로 수용 『요즘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실상이 속속 알려질 때마다 통한의 몸서리가 엄습해 옵니다.아내와 두 딸녀석을 생지옥에 남겨 놓고 나온뒤 하루하루 자괴감에 짓눌려 살아왔는데 이번에 정치범수용소의 명단을 실제로 보고는 정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바로 나자신이 몹쓸 짓을 두번 한 것입니다.가족을 북녘에 데리고 간 것도,함께 데리고 나오지 못한 것도 차마 있을 수 없는 짓이었습니다』. 남북분단현실의 생채기가 온몸과 마음에 뒤엉켜 있는 오길남씨(52). 독일유학중 북한체제에 동경을 느껴 85년 아내 신숙자씨(52)와 두 딸 혜원(18)·규원양(15)을 데리고 월북했다가 1년만에 혼자 탈출,6년간의 독일망명생활을 거쳐 92년에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최근 북한 정치범수용소에 갇혀 있는 강제납북자들의 명단발표를 계기로 이곳의 비참한 실상이 밝혀지면서 가족생각에 장탄식이 갈수록 길어지고 있다. 『아내와 두딸이 수용소에 갇혀 있다는 소식을 접한 것은 92년 북한 요덕수용소에 감금돼 있다 탈출한 귀순자 안혁씨를 통해서였습니다.백방으로 수소문해도 소식을 알 수 없었던 가족들이 생지옥이나 다름없는 수용소에 있다는 얘기를 전해듣는 순간 온몸이 마비될 지경이었지요』 오씨가 2년전 안씨로부터 전해들은 가족들의 수용소생활은 생각마저 끔찍할 정도로 비참한 것이었다. 안씨가 수용돼 있던 요덕수용소 대숙지구에 이들이 수용된 것은 87년 11월말쯤으로 안씨의 독신자숙소와 매우 가까운 가족세대숙소였다. 오씨의 아내 신씨는 도착한 이튿날 방안에서 목을 매 자살을 꾀했으며 1주일 간격으로 3번이나 방안에 불을 질러 두딸과 동반자살하려다 보위부원에게 발각되어 특별감시 대상으로 지목받아 아예 감금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안씨는 보위원 몰래 신씨를 도와주면서 그녀가 독일원에서 간호원생활을 하다 남편을 따라 월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며 『남편과 같이 북한에 들어와 고급 주택가인 평양창광거리에 살다 남편은 행방불명되고 나머지 가족들은 보위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이곳에 왔다』는 얘기와 『어린 딸들과 같이 이곳에서 짐승같은 생활을 하다 병들어 죽을 것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하다』는 하소연을 들었다고 한다. 신씨는 88년부터 수용소내 결핵요양소 간호원으로 배치되었으나 식량이 없어 두 딸이 산나물을 캐러다니는등 비참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북한에서 지낸 1년동안 오씨는 철저한 감시하에 제한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정치범수용소나 집단수용소에 관한 자세한 얘기는 알지 못했었다.단지 밤에 끌려간뒤 소식이 끊긴 사람들의 얘기는 종종 들었다. 오씨는 『당시 북한주민들사이에선 입조심하지 않으면 「시골」에 끌려간다』는 말이 나돌았는데 시골은 수용소를 뜻하는 은어였다』고 말했다. 오씨는 또 『북한에는 「유일사상확립의 10대원칙」이라는 십계명 비슷한 것이 있어 어길 경우 누구나 곧바로 수용소로 직행했다』며 『김일성일가에 대한 비판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언급자체가 범법사유였다』고 밝혔다. 70년 서울대를 졸업하고 독일로 유학가 경제학을 전공하던 오씨는 80년에 독일에 정치적 망명을 한뒤 반정부단체인 「민주사회건설협의회」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하다 북한에 대한 동경으로 아내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85년 12월 가족들과 자진월북했다. 오씨는 북한에서 대남선전방송인 「구국의 소리」에 근무했으며 이때 69년 납북된 대한항공 여승무원 성경희·정경숙씨등과 함께 일했었다고 한다. 자신과 가족들의 운명을 송두리째 망가뜨려버린 자신의 선택에 대한 자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오씨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자신의 어리석음을 실토하는 수기 「내 아내와 아이들을 돌려주오」를 지난해 발간하기도 했다.
  • 핵시대,한국의 미래/김학준 지음(화제의 책)

    ◎국내외 정세변화 진단한 시사칼럼 서울대 교수 출신으로 청와대 대변인,대통령 공보수석비서관을 거쳐 현재 단국대 재단이사장으로 있는 지은이의 시사칼럼 모음. 냉전체제가 무너진 새로운 세계질서 속에서 미국·일본·중국·러시아등 한반도 주변 4국의 외교정책은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또 「김정일시대」로 들어선 한반도의 통일전망은 어떤지 등을 깊이있게 다루었다.또 국내 정치·경제·사회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시대변화에 따라 지향해야 할 바를 제시했다. 「열린 사회」를 추구하는 우리나라의 위치찾기와 분단 반세기를 앞둔 한민족의 내일에 대한 예측을 통해 통일의 미래상을 보여주는 책이다. 학문적 바탕 위에 실무경험을 더한 지은이의 날카로운 시각이 돋보인다는 평이다. 현대문학사 6천원.
  • 중­대만 최고위회담/이달 대북개최 합의/분단후 처음

    【홍콩 연합】 중국과 대만은 1949년 분단후 양국 관리들간 최고위급 회담을 8월 대북에서 개최키로 합의했다. 양측의 상호접촉을 위한 반관영기구들인 중국의 해협양안관계협회(해협회)와 대만의 해협교류기금회(해기회)는 31일 대북에서 제5차 실무회의를 개최해 이같이 합의했다고 홍콩언론들이 일제히 대북발로 보도했다.
  • 87년부터 북노선 나팔수 노릇/주사파의 북방송 전파 실상

    ◎「구국의 소리」 녹취… 며칠뒤 대자보로 “중계” 검찰이 27일 발표한 「주사파의 북한방송내용 전파사례」는 한총련등을 중심으로한 주사파학생들이 북한이 내려 보내는 각종 대남 투쟁노선을 앵무새 처럼 그대로 읊조려온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특히 박홍 서강대총장의 주사파 북한배후조종설 폭로에 대한 이들의 일관된 부인에도 불구하고 한총련의 전신인 전대협이 결성(87년5월)되기 이전인 87년 3월부터 북한방송을 유인물로 제작해 배포해 왔음도 드러났다.실제로 87년 3월 31일자 북한 구국의 소리방송이 한민전중앙위원회명의로 「반미자주화투쟁,반파쇼 민주화투쟁,조국통일투쟁을 전개하자」는 내용의 이른바 「구국선언」을 보도하자 6일 뒤인 4월6일 서울대에 유인물이 일제히 나돌았다. 이밖에 검찰이 밝힌 26건의 각종 전파사례는 그동안 많은 국민들이 설마하는 심정으로 바라봤던 북한배후설을 사실로 확인해 줬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주사파가 만들어 돌린 유인물및 대자보,그리고 기관지등에서 나타난 전파통로로는 북한의 대남선전방송인 구국의 소리방송이 주를 이루고 있다.이밖에 평양방송·중앙방송도 이용된 것으로 나타났다. 87∼88년의 경우 북한방송에 대한 녹취및 유인물제작은 서울대지하 주사파조직인 「반미청년회」가 맡은 것으로 파악됐다.그러나 88년 4월4일자 북한 중앙방송이 보도한 김일성종합대학과의 회담환영건은 8일뒤 국민대에서,같은해 5월17일 평양방송의 「남조선학생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10일뒤 부산대등에서 대자보와 유인물로 나붙어 지방에까지 녹취팀이 따로 구성돼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후 88년 6월10일자 구국의 소리가 올림픽 이전에 현정권을 타도할 것등을 담은 34개항의 투쟁구호를 내보내자 이 내용이 7월4일 서총련 조통위연합의 기관지 통일의 길에 「서울올림픽을 치른뒤 민주·인권 초토화 된다」「영구분단,군정연장 위한 올림픽단독개최결사반대」등으로 인용·게재 됐다.또 90년 1월 발표된 한민전의 90년대 신년메시지는 전대협에 의해 「노학연대로 공동투쟁활성화」등의 투쟁지침화된 사실을 드러낸다. 90년대 들어 주사파는 전대협 기관지 「통일기관차」를 통해 김일성의 조국통일 5대방침을 그대로 인용했으며 89년 1월부터 90년 8월까지는 전대협의 배후지하조직인 「자민통」산하에 북한방송청취팀을 구성,모두 30여 차례에 걸쳐 북한 한민전이 지시한 각종 투쟁지침,투쟁구호,조기총선투쟁등 선전·선동물을 만드는 등 북한방송녹취활동을 더욱 활성화 했다.또 90년 당시 전대협의장이었던 송갑석도 전남대핵심주사파 4명으로 북한방송청취팀을 운영하는 등 주사파 학생운동권은 북한의 대남방송에 따라 투쟁노선을 정해 왔다.
  • 탈냉전시대의 동북아 안보(사설)

    아세안의 제1차 지역안보포럼(ARF)에 참석하고있는 한승주외무장관은 미국과 일본 중국 러시아 그리고 남북한을 포괄하는 동북아 다자안보 협의체(NEASD)창설을 공식 제의했다.탈냉전이후 불확실의 유동상태를 지속하고있는 동북아및 한반도 안보환경 개선을 위한 우리정부의 주도적 외교이니셔티브다. 우선은 국방백서 교환토의,재래무기 자료제공,국방관계자회의 정례화,군관계자및 군함 교환방문등 덜 민감하고 기초적인 협력에서부터 시작해 안보면에서의 상호 이해와 신뢰를 증진시켜 나간다는 구상이다.장기적으로는 ARF와의 보완협력을 통해 유럽군축및 평화정착에 지대한 공헌을 한것으로 평가되는 유럽안보협력회의(CSCE)의 아시아판 안보기구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옛소련의 해체와 중국의 개방개혁및 미국의 아시아로부터의 상대적 후퇴,그리고 일본의 적극적인 정치·군사대국화 지향 등으로 탈냉전이후의 아시아,특히 동북아시아 안보상황은 질서재편의 과도기적 공백상태를 노출하고 있다.특히 중국과 일본의 21세기를 겨냥하는 아시아패권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질 전망이다.새로운 질서의 향방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한반도는 바로 그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구한말의 과도기적 새질서에 적응하지 못하고 열강들에게 압도당함으로써 망국과 분단및 전쟁을 거치면서 오늘날까지 우리가 감수해야 했던 민족적 손실과 낭비,겪어야 했던 비극을 생각하면 이제 또다시 시작되고있는 새질서형성에 적극 참여하고 주도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대단히 바람직한 일이 아닐수 없을 것이다. 다행히 구한말과는 달리 우리는 지금 정치·경제적으로 우리 환경을 어느정도는 우리 뜻대로 주도할 수 있는 충분한 힘과 능력도 갖추고 있다.잘만 하면 중국과 일본의 중간에 설수 있고 미국과 러시아를 활용할 수도 있는 중심적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문제는 그것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지혜롭게,그리고 적극적으로 활용하느냐라고 생각한다.NEASD창설제창은 그런 의미의 노력으로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남북한관계의 차원에서도 그것은 대단히 바람직한 구상일 수 있다.사실 동북아안보의 핵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에 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그리고 NEASD는 남북한의 안보에 대한 국제적 보장장치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북한이 체제안보 수단으로서의 핵개발을 포기할수 있는 대안의 하나로서도 효과적일 수 있을 것으로 우리는 생각한다. 북한의 참여는 핵문제가 해결된 이후 논의할 방침인 것으로 밝혀진 이상 북한은 하루속히 핵투명성을 보장하고 NEASD같은 기구를 통한 체제안보의 국제적 담보를 확보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 동북아 「다자안보 협의체」 제의/한 외무,아세안포럼 연설

    ◎남·북·미·일·중·러 참여/아태안보협력 5원칙 제안/중외무/핵 비보유등 3원칙 재천명/일 외무 한승주외무부장관은 25일 태국 방콕에서 아시아·태평양지역 18개국 외무장관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아세안 지역 안보포럼(ARF)에 참석,남북한을 포함,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등 한반도 주변 6개국으로 「동북아 다자안보 대화(NEASD)」를 창설할 것을 공식 제의했다. 한장관은 이날 회의 모두연설을 통해 이같이 밝히고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상이한 정치체제나 경제발전 수준등을 감안해 점진적인 접근방식에 의한 안보대화가 필요하다』면서 참가국들의 지지와 협조를 요청했다고 외무부가 밝혔다. 정부는 이에 앞서 지난 5월 방콕에서 열린 ARF 고위관리회의에서 처음으로 동북아 다자안보체제의 창설안을 제의했었다.동북아 다자안보 대화는 김영삼대통령이 신외교 구상의 하나인 예방외교 차원에서 지난해 5월 태평양 경제협력회의(PBEC)때 처음 제기한 기구로 북한등 관련국들의 참여및 반응이 주목되고 있다. 한장관은 이날 모두발언에서『냉전의 유산인 한반도의 분단은 동북아지역 긴장의 주요 원천으로 남아있으며 특히 새로운 국제현안으로 대두된 북한 핵문제는 이 지역의 안보를 심각히 위협하는 요인이 되고있다』고 지적하고 『이같은 특수한 안보상황을 감안,이 지역의 안보환경을 개선하고 평화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이 기구의 창설을 제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방콕 연합】 전기침 중국부총리겸 외교부장은 25일 방콕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아태지역의 안보협력은 유엔헌장과 중국의 이른바 평화공존5원칙에 입각해 상호존중과 우호의 바탕위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제안했다. 전외교부장은 이날 아태지역 안보협력을 위한 5개항(원칙)을 제의하면서 이같이 밝히고 아태지역국가들이 공동의 경제적 번영을 증진하기 위해 평등과 호혜,상호지원의 바탕위에 경제적 유대를 이뤄야한다고 강조했다. 【방콕 연합】 고노 요헤이(하야양평) 일본외상은 25일 방콕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핵무기의 생산과 보유,반입을 하지 않는다는 일본정부의 비핵3원칙을 재천명했다.
  • 구소외교문서를 보고/“러시아는 당·군문서도 내놔야”/이명영(기고)

    ◎「김일성 정체」 규명할 귀중한 사료 6·25남침전쟁과 관련된 구소련의 외교문서가 드디어 공개됐다. 러시아 외무부의 대외관계문서중 6·25관련 문서만 추린 것으로서 시기적으로는 1949년1월부터 1953년9월까지의 해당문서라고 하니 전쟁발발 1년반전부터 휴전이 성립한 두달후까지에 걸친 문서들이다.전쟁준비를 위해 북한과 소련과 중공이 어떻게 협력하며 움직였는가,또 그들이 일으켜놓은 전쟁의 진행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어떤 경위로 중공으로 하여금 참전케 했는가.그러고도 전선이 교착되자 어떤 순서로 휴전에 도달했는가 등이 소상히 기록된 문서의 공개였다. 이 문서들 속에서 우리는 몇가지 의미있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새로운 기록들을 찾을 수는 있으나 전체적으로 보아서는 새로울 것이 없는 문서들이다.그 중요한 의미를 알려주는 내용들은 이미 모스크바의 신문이나 단행본으로 밝혀진 것들이다.그 기사나 논문들이 의거했던 출처가 바로 이번에 우리가 접한 문서들인 것이다.이 문서들로써 6·25전쟁이 남침이었다는 사실은 더이상 왈가왈부할 여지가 없어졌다는 말도 일부에서 나오고 있으나 그것은 단견이다.남침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하면 북한의 당·정·군의 제1차 자료를 구사한 일본공산당의 기관지 적기의 평양특파원이었던 사람이 쓴 「조선전쟁」이란 책이 더 웅변으로,더 감동적으로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그는 워싱턴의 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되어 있는,6·25때 미군이 북한지역에서 노획한 1백60만쪽에 달하는 방대한 자료를 통독한 사람이다. 여기 우리는 하나의 침통한 사실에 직면한다.6·25는 어느 한 사람이 숨어서 당한 일이 아니다.우리 국민 모두가 다 같이 한꺼번에 당한 일이다.6·25세대의 그 엄청난 역사적 재난의 증언이 바로 사실이며 그들의 머리속에 있는 기억이,그들이 남겨놓은 글들이 바로 역사다.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역사가 부정되고 역전되기 시작했다.새로 자라나는 세대들이 부형들의 역사를 믿지 않게 된 것이다.아들딸들에게 거부당한 천하의 어버이들이 모여 사는 곳이 한국이다.자식들에게 불신당하는 기성세대의 초췌한 모습을 보라.자기의 언어를 잃어버리고 남침을 입증해주는 외국의 자료들을 찾아헤맨 허무한 세월이 거기에 있지 않은가. 그래서 소련 외교부의 문서는 더욱 반가운 것이리라.그러나 그래도 끄덕하지 않을 젊은 세대는 얼마든지 있다.「남침이면 어떠냐,해방전쟁이면 그만이지」하는 논리가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당파성의 원칙에 따라 조선노동당이 만들어낸 허위이론이 그만큼 깊이 젊은 세대 속에 침투되어 있는 것이다.김일성이 자기권력의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 남한을 「미제의 식민지」로,남한정부를 「미제의 괴뢰정권」으로 규정해놓고 해방과 혁명을 정당화해온 그 당파성 이데올로기에 심취한 젊은이들이 있다.그 평양바람에 놀아난 사람들이 자라서 교수 국회의원·작가·신부·목사·기자,심지어는 정부관리까지 된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이들을 재교육시키는 데는 6·25남침문서만 가지고서는 아니된다 함을 이 나라는 하루 속히 깨달아야 한다. 거기에 필요한 문서를 러시아는 가지고 있다.그것을 공개해야 한다.그것을 우리는 요구해야 한다. 이번에 공개된 문서는 모두 외교부 문서인데 러시아과학 아카데미 산하 외교아카데미의 서고에 가면 다 볼 수 있는 것들이다.당문서와 군문서는 아직도 깊은 데 숨겨져 있다.이것이 공개되어야 한다.그래야만 동북항일연군시절의 북한 김일성의 정체가 규명되며,스탈린의 지령으로 김일성이 조국을 분단하던 상황이 밝혀진다.그래야만 6·25남침의 원설계자가 스탈린임이 밝혀진다.이번 문서는 교묘하게도 소련의 책임을 희석시킨 것들이다.마치 김일성이 스탈린이나 모택동과 동급으로 논 것같이 되어 있는데 어림없는 일이다.이미 모스크바에서는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남침결행을 독촉한 사실들이 밝혀져서 중대한 화제가 되었던 것이다. 전에 옐친은 노태우대통령에게 귀중한 선물이랍시고 KAL기 격추에 관한 블랙박스란 것을 선사한 일이 있다.열어봤더니 별것이 아니었다.우리는 중대한 모욕을 당한 것이다.이번엔 또 6·25문서란 것을 받았다.별것이 아니었다.진짜 별것은 딴데 있는 것이다.또 우리는 모욕을 당했음을 알아야 한다.왜 옐친대통령은 한국을 깔보는 것인가.우리가 제대로 요구할 줄모르기 때문이다.정부의 역사의식이 천박하고 관계정보가 미숙하기 때문이다.평양바람에 놀아나는 사람들은 김일성의 혁명역사가 출중하고 조국분단도 「미제와 이승만역도」들이 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전혀 사실이 아님을,사실은 그 정반대임을 입증할 문서들이 러시아에 있는 것이다.
  • 한·일·조총련 고교생 3각 토론/새달7·8일 개최…분단·통일 논의

    한국의 고교생들과 재일 조총련계 고교생들이 서로 만나 한반도분단 및 통일문제를 토론할 예정이어서 관심을 끌고 있다. 한국고교생들과 조총련계 고교생들의 이번 만남은 일본학생들의 제안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일본남부의 한 고교교사인 가미오카 교헤이씨는 밝혔다. 일본고교생들이 이번에 한국 및 조총련계 학생을 함께 초청한 것은 3자간의 과거 및 장래관계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고 싶어서라는게 관계자들의 설명. 다음달 7∼8일 이틀간 예정으로 시코쿠 고치현의 나카무라시에서 열리는 한국·조총련계·일본고교생의 이번 3각토론회 프로그램 중에는 한국과 조총련계 학생들만의 토론시간도 따로 편성돼 있다. 가미오카교사는 이번 토론회가 민감한 정치적 사안들에 대한 학생들의 솔직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이번 고교생 3각 토론회가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이번 모임이 김일성 사후에 이뤄지기 때문이다. 일본고교생과 조총련계 고교생들은 일제의 한반도 침략사 등을 연구하기 위해 10년전에 처음토론회를 가진 후 기회있을 때마다 만나 일제의 조선인 강제징용실상 등 관심사에 관해 격의없이 토론을 하곤 했는데 이번에는 한국고교생들도 참가,한층 유익한 토론의 장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토론회에서 주로 다뤄질 주제는 「가깝고도 먼」 관계로 지칭되는 한일 양국의 현안문제와 한반도분단의 원인,36년 일제 식민통치의 유산,일본군의 잔학성,정신대문제 등이다.
  • 당중앙위 중심 「집단지도체제」 가능성/추도사로 본 김정일체제·노선

    ◎“김일성 주체혁명 유지 계승” 천명/대미·일 비난 자제… 고립탈피 시도 20일 열린 김일성 추도대회는 사실상의 김정일 추대식의 성격을 띠었지만 동시에 김정일체제의 불안한 앞날을 알리는 예고편이었다는 지적이 많다. 북한은 이날 김일성의 사망에 따른 권력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김정일체제의 출범을 사실상 선언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추도사를 통해 권력서열 8위인 김영남정무원부총리겸 외교부장이 당정을,혁명1세대의 막내격인 김광진인민무력부 부부장이 군을 대표해 김정일에 대한 충성을 서약한 데서 분명해진다..즉 북한정권이라는 한배를 탄 핵심 기득권 세력들이 북한체제의 난파를 막기 위해 일단 김정일 후계구도를 기정사실화한 것이다. 그러나 이날 김영남이 읽은 추도사에는 종래의 수령 중심이 아닌 「당중앙위」를 중심으로 하는 단결을 강조한 데서 김정일체제가 과거 김일성체제와 같은 절대권력을 휘두르지는 못할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즉 모든 권력이 김정일로 집중되기 보다는 1백45명의 실력자로 구성되는 당중앙위원회,그중에서도 핵심권력자 10∼15명정도로 구성되는 정치국을 중심으로 권력이 행사될 지도 모른다는 분석이다.결국 김정일은 일단 권력의 정점인 국가주석과 당총비서를 맡더라도 실질적 정책방향은 당정치국의 원로급들의 합의에 의한 이른바 「당적 지배체제」방식으로 결정될 것이라는 전망인 것이다. 이날 추도사에서 천명된 김정일체제의 대내외적 정책노선에서 새로운 방향제시를 찾아볼 수 없는 것도 김정일의 이같은 취약한 입지와 무관치 않다는 해석도 있다. 북측은 이날 대내적으로 이른바 「주체혁명 위업」이라는 김일성의 유지를 계승할 것임을 천명했다.노동당 중심의 단결과 사상·기술·문화 등 3대혁명을 강조함으로써 이미 「배고픈 사회주의」로 판명된 「우리식 사회주의」를 고수할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북측은 또 이날 대남 노선에서는 자주·평화·민족대단결 등 평화통일 3대원칙과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 」의 실현을 거듭 주장했다. 이는 분단 이래 북한의 지상목표였던 적화통일이 당분간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보고 남한으로부터의 흡수통일 우려를 없애는 방어적 성격을 지닌다.그러면서도 장기적으로는 대남 혁명이라는 그들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통일전선전술,즉 우리 정부와 민간을 분열시키는 공세적 측면도 포함되어 있다. 왜냐하면 김일성이 직접 작성했다는 「10대 강령」에는 우리측이 수용하기 힘든 주한미군 철수 등의 실천적 요구가 부가되어 있고,북한이 주장하는 민족대단결도 우리의 당국과 비당국을 갈라놓으려는 「통일전선」형성을 염두에 둔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날 추도사의 대외정책 기조도 김일성이 올해 신년사에서 제시했던 내용과 큰 차이가 없다.이같은 기조를 구체화하는 각론에 대해선 구체적 언급이 없었다.다만 종래 「주적」으로 설정했던 미·일에 대한 비난이 전혀 없었다는 점에서 예의 「핵카드」를 통해 대미·대일 관계개선으로 고립 탈피를 시도할 것이라는 추론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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