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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9­6·3세대 시국선언의 함축

    ◎“세대교체로 지역주의 막자” 한목소리/”사당정치로 불신 조장” 정치행태 맹정/전국민 참여 「개혁 국민연합」 구성 촉구 이금홍 한국학생운동자협의회장 등 4·19및 6·3세대 인사 3백여명이 29일 김대중 상임고문의 신당 창당과 「3김정치」의 재현을 반대한다는 시국선언문을 냈다. 지난 26일 30대 각계인사 1백50명이 김고문의 정계복귀를 반대한다는 연대성명을 낸지 3일만에 다시 「반(반)신당」의 선언문이 발표된 것이다. 이날 서울 소피텔앰배서더호텔에서 열린 시국선언대회에서 이들은 『지역갈등을 조장하고 구태의연한 사당정치로 사회불안을 조성하는 일부 정치인들의 국민 배신적 행위를 규탄한다』고 김고문과 김종필자민련총재를 강도 높게 비난했다. 이들은 김고문의 신당 창당과 관련,『권력욕에 사로잡혀 1인추종의 사당정치를 부활시키고 김종필 총재와 손을 맞잡아 지역갈등을 부추기는 것은 국가체제의 붕괴와 국민 분열을 초래하는 위험한 도박』이라고 규정하고 『두사람은 자신의 정치적 이해를 충족시키기 위한 망국적 행위를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또 『반독재 민주화투쟁의 지도자로 자처하는 사람이 국민의 믿음을 저버리는 행위를 계속해선 안된다』고 김고문의 정계복귀를 비난한 뒤 『추악한 정치모리배라는 오명을 스스로 뒤집어쓰는 일이 없도록 마지막 충고를 한다』고 밝혔다. 이어 김종필총재에 대해 『유신독재의 본당인 사람에게는 충고할 가치조차 느끼지 않는다』고 힐난한 뒤 『정치지도자들은 권력욕에 눈이 멀어 손바닥만한 지역분할에 몰두할 뿐 국민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다』며 세대교체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들은 또 김영삼대통령에 대해 『분단과 냉전을 종식하고 독재의 잔재를 없애면서 통일시대를 여는 일이 대통령 한사람만의 힘으로 이뤄지겠느냐』고 물은 뒤 『대통령은 지방선거의 참패를 각성과 새로운 출발의 계기로 삼아 21세기와 국가개혁을 위해 전국민이 참여하는 「개혁을 위한 국민대연합」을 구성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장을병 전성균관대총장은 「지역할거주의 이대로 둘수 없다」는 강연에서 『한 정당이 지방자치단체와 의회를독차지할 때 민주주의는 발붙일 곳이 없다』며 『지역갈등과 3김시대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신진세력들이 정계에 진입,새로운 활로를 뚫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대회에는 이금홍 회장을 비롯,이기택 민주당총재,남호명 4·19회회장,조일묵 한국재활협회장,강효식 인제대교수,김삼연 애국선열녹화사업회장 등 4·19때 학생회간부 출신들이 참석했다.
  • 21세기 향한 한·미 결속다짐(사설)

    김영삼 대통령의 미국방문이 모두 끝났다.샌프란시스코,시카고,워싱턴을 차례로 방문하며 교민들을 격려하고 미 의회연설과 한국전 참전기념비준공식 참석등을 통해 자유와 평화를 지킨 한·미 양국의 자부심을 세계에 과시했다.그리고 클린턴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21세를 지향하는 우호동맹관계를 확고히 다졌다.대단히 만족스런 성과라 생각한다. 특별한 현안이 없는 가운데 이루어진 이번 방미의 최대관심사는 역시 한·미 공동의 관심사요 중대현안인 대북정책 조율및 공조체제 강화에 있었다.북·미 경수로협상 타결과 한국형및 한국주도 그리고 북한의 대미평화협정 공세및 미국의 대응등과 관련한 양국정상의 상호 입장확인과 조율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정상회담 합의발표 등은 양정상의 입장과 견해가 완전일치했음을 보여주었다.평화협정체제를 포함해 모든 한반도문제 논의는 남북당사자간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당사자원칙과 경수로제공포함의 대북협상에서는 한국입장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재확인되었다.재확인이지만 정상간의 것이란 점에서 그 의미는 크며 정부는 이를 기초로 보다 자신있고 과감한 대북정책을 추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주목되는 것은 오는 8월15일 광복절에 발표될 것으로 예고되고 있는 대북제의다.김영삼 대통령은 CNN방송회견에서 50주년이 되는 이번 광복절이 『남북한 관계개선을 위한 가장 중요한 날이 되기를 바란다』며 『매우 획기적이고도 중대한 대북제의를 검토중』임을 밝혔다.현재로선 그 내용을 알 수 없으나 남북한평화체제문제등과 관련된 획기적인 것이 되지 않을까 관측되고 있다. 광복과 분단 50주년이 되는 이 시점의 우리민족이 시급히 해결해야 할 역사적 과제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통일이다.그것은 남·북 당국의 중차대한 역사적 소임이기도 하다.당장의 통일이 어려우면 평화공존공영의 터전이라도 마련해야 한다.김영삼대통령의 방미 조율을 거친것으로 보이는 이 제의에 북한의 건설적 호응이 뒤따르고 진정한 남북화합의 물꼬가 이번만은 트이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 “한국전은 가장 기억할만한 전쟁” 새 평가

    ◎워싱턴 참전기념비 제막식 현장/“자유실현 원동력 됐다” 두 정상 영령추모/양국국가·민요 연주속 태권발레 선보여 한국전 참전기념비 제막식이 27일 하오(한국시간 28일 새벽) 워싱턴 링컨기념관 앞쪽 광장에 새로 조성된 한국전 참전 기념공원에서 엄숙히 거행됐다.한국과 미국 양국은 이날 김영삼대통령과 클린턴대통령,참전용사및 가족등 2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전 휴전 42주년을 맞아 참전비를 제막함으로써 반세기에 걸친 혈맹의 우의를 다졌다.특히 이번 제막식을 통해 6·25전쟁을 자유세계가 공산주의의 팽창을 처음으로 단호하게 저지해 전후 세계질서를 바꾸어 놓은 사건으로 재조명되게 함으로써 그동안의 「잊혀진 전쟁」에서 「가장 기억할 만한 전쟁」으로 새로 태어나게 했다. ○냉전종식에 큰 공헌 ○…김대통령은 제막식 연설에서 『6·25 전쟁의 포성이 멎은지 42주년이 되는 오늘 전쟁의 영웅들을 기리는 성스러운 터전을 마련했다』면서 『이들이 흘린 피와 땀은 전후 세계사를 자유의 실현으로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됐다』고 한국전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했다.클린턴대통령은 『한국전은 자유의 역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승리였다』면서 『한국전은 동서 냉전을 종식하는 데 크나큰 공헌을 했다』고 역시 6·25를 새롭게 부각시켰다. 두 나라 대통령에 앞서 앨 고어 미국부통령은 『수많은 미국 젊은이들이 인간의 존엄과 기본권을 위해 피를 흘렸다』면서 『전쟁희생자와 참전용사들에게 경의를 표하자』고 제의했다. ○…제막식은 김대통령과 클린턴대통령이 기념공원에 나란히 입장해 공원을 시찰하는 것으로 막이 올랐다.김대통령과 클린턴대통령은 참전용사들의 박수 속에 도열한 의장대를 통과해 기념비에 다가가 대기하고 있던 데이비스 미국측 준비위원장으로부터 기념비에 대한 설명을 청취한 뒤 V자형으로 배열된 기념조형물 맨 앞의 병사동상 앞에 서서 기념촬영을 했다. 두 나라 국가 연주와 기념연설이 끝나고 미공군기가 축하비행을 하는 가운데 데이비스위원장은 『모두 손잡고 이 기념비의 제막을 알리자』면서 기념비 제막을 공식 선포했다.제막 선포에 앞서 미국 여가수가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를 열창해 개막식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미군악대는 「아리랑」과 「그리운 금강산」등 한국 민요와 가곡을 연주해 분위기를 돋웠고 재미동포 이준구씨가 지도하는 태권도단원 96명이 양국 국기를 손에 들고 애국가와 미국국가에 맞춰 태권발레를 선보였다.태권발레 시범단에는 이씨의 제자인 에스피 전농무장관도 끼어 있어 이채를 띠었다. 한국측에서는 3군 의장대와 전통의상을 입은 육군 취타대 2백50명이 행사에 참가했고 주최측은 단상 뒤편에 대형 점보트론을 설치해 행사장면을 중계했다.주최측은 섭씨 35도에 달하는 무더위속에 고령의 참전용사들이 참석한 점을 고려해 수만t의 생수와 수십대의 앰뷸런스를 대기시켰는데 참전용사 몇몇은 더위를 먹고 쓰러져 들것에 실려 후송되기도 했다. ○완공에 3년1개월 ○…기념비는 미의회가 지난 86년 미국재향군인회의 요청으로 기념사업위원회를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설치할 것을 의결한 것을 계기로 모금한 1천8백만달러의 재원으로 3년1개월간의 공사끝에 완공됐다.기념조형물은 49m의 화강암 석벽과 승리를 상징하는 V자형 대지 위에 행진하는 19명의 병사동상으로 구성됐다. 화강암 벽면에는 참전용사의 얼굴이 부조식으로 새겨졌으며 맞은편 화강암 보도경계석에는 한국전 참전 22개국 이름이 알파벳순으로 조각됐다.19명 병사동상 가운데 맨 앞 병사의 앞면 바닥에는 「알지도 못하는 나라,만난적이 없는 사람들을 지키려는 요청에 응한 전쟁에 참가한 미국의 아들과 딸들을 위해」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분단상징 38선 표현 병사동상 가운데는 미참전기념비준비위 이사인 윌리엄 웨버씨를 모델로 한 동상도 포함돼 있어 눈길을 끌었다.올해 69세인 웨버씨는 강원도 원주에서 낙하하면서 지뢰밭에 떨어져 오른발과 오른손을 잃고도 육군에 계속 근무하다가 지난 80년 대령으로 전역한 입지전적인 인물로 이날 행사를 단상에서 참관했다. 행진하는 19명의 병사동상은 육군 14명,해병 3명,해군특공대 1명,공군척후병 1명으로 구성됐다.그들의 모습은 화강암 석벽에 유리처럼 비쳐 모두 38명이 행진하는 모습을 연출하고있는데 이는 한반도의 분단을 상징하는 38선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행사준비위 관계자가 설명했다. ◎김대통령 제막식 연설/전문 6·25전쟁의 포성이 멎은지 42주년이 되는 오늘,우리는 이 전쟁의 영웅들을 기리는 성스러운 터전을 마련했습니다.이 참전 기념비는 그들의 희생과 헌신이 얼마나 위대한 것이며 자유와 평화가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우리 자손 만대에 전해줄 것입니다. 나는 한국 국민을 대표하여 한국전 전몰장병을 추모하며 모든 참전용사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이 뜻깊은 기념비가 제막되기까지 사업을 주관하고 지원해온 미국 정부와 의회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데이비스장군을 비롯한 건립위원들과 모금에 참여한 모든 분들,그리고 조형물 제작에 참여하신 예술가들의 노고에 대해서도 치하드립니다. 45년전 6월 북한 공산군의 기습침략으로 시작된 한국동란은 3만3천여명의 미국 장병들을 비롯하여 9만5천여명에 달하는 유엔군 용사들의 고귀한 생명을 앗아갔습니다.한국군과 유엔참전국의 총 사상자수는 무려 50만에 달했습니다. 이 기념비의 바닥에 각인되었듯이 한국동란은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는 나라,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을 지키려는 요청에 응한」 전쟁이었습니다.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한 희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이들이 흘린 피와 땀은 전후 세계사를 「자유의 실현」으로 이끈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자유세계는 6·25전쟁에서 공산주의의 팽창을 처음으로 단호하고 효과적으로 저지함으로써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그런 의미에서 나는 6·25전쟁은 먼 훗날 베를린장벽의 붕괴와 공산주의의 몰락을 예고한 전쟁이었다고 말하고자 합니다.오늘날 자유와 번영을 누리는 4천4백만의 한국인들은 아시아에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가장 성공적으로 뿌리내린,미국인들의 진정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한때 「잊혀진 전쟁」이었던 6·25전쟁이 「가장 기억할 만한 전쟁」으로 바뀐 역사의 진전에 대하여 자부심을 느낍니다.아시아·태평양시대의 개막과 함께 자유와 평화를 향한 한국과 미국 양국의 유대는 이 흑색 화강석처럼 단단하고,저포토맥강처럼 장구하게 발전할 것입니다.이 기념비에 새겨진 권리를 우리 후손들에게 길이 전합니다.자유는 희생없이 지켜지지 않는다고.감사합니다.
  • 서울대생 5명중 1명 “성경험”/8백3명 의식조사

    ◎남학생이 갑절… 혼전성관계 77%가 “긍정적”/통일에 부정적 영향 끼치는 나라 미·일 꼽아 서울대생들의 성의식이 날로 자유분방해지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또 이들은 대부분 낙관적인 통일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사실은 서울대 사회학과 「사회학연구실습팀」(지도교수 설동훈)이 지난 5월말부터 서울대생 8백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뒤 28일 발표한 「서울대생의 의식과 생활에 관한 연구보고서」에서 밝혀졌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성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응답한 학생이 조사대상자 전체의 18.9%(남학생 21.4%,여학생9.9%)를 차지,지난해 같은 조사때의 16.2%보다 2.7%포인트 늘어났다. 혼전성관계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13.3%),「사랑한다면 가능하다」(48%),「결혼을 약속했으면 가능하다」(15.9%)등 긍정적인 대답이 77.2%로 지난해의 75·7%를 다소 앞질렀다.또 31·6%의 응답자가 결혼과 연애상대자는 다를 수 있다고 대답했다. 남북통일의 시기에 대한 견해는 10년이내(35.7%),20년이내(27.3%),20년이상(17.5%),5년이내(13.2%),불가능(5.7%),1∼2년사이(0.6%) 등으로 절반에 가까운 학생들이 10년 안에 통일이 가능한 것으로 내다봤다. 학생들은 또 분단의 원인을 민족정치세력의 분열(22.1%)이나 민족의 역량부족(20.6%)보다는 2차세계대전 이후 세계질서의 재편과정(52·2%)에 따른 것이라고 대답했다. 통일의 장애요인으로는 정부의 노력부족(32.7%)이나 체제및 이념의 차이(17%)보다 주변 강대국의 이해관계(43.5%)를 많이 지적했으며 통일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나라로는 미국(52.5%),일본(28.3%),러시아및 중국(각각 4.4%)등을 들었다.
  • 김대통령­클린턴 2년새 4번째 대좌/김대통령­방미 여로

    ◎“6·25참전 미군 희생은 한국번영 초석”­김대통령/단독·확대회담 60분… 덕담 교환하며 우호 확인/미 각계 유력인사 4백명 부부동반 초청 환담 김영삼 대통령은 워싱턴 국빈방문 사흘째인 27일 상오 11시40분(한국시간 28일 0시40분·이하 현지시간) 백악관에서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과 단독·확대정상회담을 갖고 북한 경수로 지원문제 등 두 나라 사이의 현안을 논의한데 이어 클린턴 대통령과 함께 내외신 공동기자회견을 가졌다. 이에 앞서 김대통령은 26일 하오 조지타운대학에서 명예인문학박사학위를 수여받았으며 저녁에는 미국의 정계·재계·언론계·문화계 등 각계의 유력인사들을 초청,리셉션을 베풀고 환담을 나눴다. ○회담장 향하며 미소 ▷단독 정상회담◁ ○…김대통령과 클린턴대통령은 이날 백악관의 클린턴대통령 집무실(오벌오피스)에서 20분 남짓 단독정상회담을 가졌다. 양국 대통령은 사진기자들을 위해 잠시 포즈를 취하며 가벼운 대화를 나누다 회담에 돌입했다. 양국 정상회담은 지난 93년7월 클린턴대통령의 방한과 93년11월김대통령의 방미,지난해 11월 인도네시아 보고르에서 열린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때에 이어 이번이 네번째. 단독정상회담에는 우리측의 유종하청와대 외교안보수석과 미국의 레이크 백악관 안보보좌관만 배석했다. 두 정상은 여러차례 정상회담과 전화통화 등으로 가까워진 탓인지 회담을 갖기 위해 이동하는 도중에도 시종 웃음을 지으며 대화를 나눴다. ○통상문제 집중 거론 ▷확대 정상회담◁ ○…김대통령과 클린턴대통령은 단독정상회담에 이어 캐비닛룸으로 자리를 옮겨 확대정상회담에 들어갔다. 양국 대통령은 확대회담에 앞서 각각 배석자를 소개한 뒤 두 나라 우호관계를 화제로 덕담을 주고 받았다. 약 40분간 진행된 확대정상회담에서는 단독회담에서 논의된 내용을 토대로 그 구체적인 실천방안과 함께 양국간 통상증진 문제가 집중 거론됐다. 김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지난해 6월부터 우리 정부가 시행한 외국인 투자환경개선정책을 설명한 뒤 『미국이 지속적으로 한국에 대한 투자를 늘려달라』고 요청했다. 확대정상회담을 끝낸 양국정상은 단독회담이 열렸던 오벌 오피스로 다시 자리를 옮겨 잠시 환담한 뒤 공동기자회견장으로 이동했다. 확대정상회담에는 우리측에서 공로명외무·박재윤 통상산업부 장관,박건우 주미대사,청와대의 한이헌경제·유종하 외교안보·윤여전 공보수석,임성준 외무부 미주국장이 배석했고 미국측에서는 고어 부통령,크리스토퍼 국무·페리 국방·브라운 상무장관,파네티 백악관비서실장,캔터 USTR(미국무역대표부)대표,레이크 안보보좌관,레이니 주한대사,로드 국무부차관보 등이 배석했다. ○미의 평화지원 다짐 ▷백악관 공식환영식◁ ○…정상회담에 앞서 김대통령은 백악관 남쪽 잔디밭에서 열린 공식 환영식에 참석했다. 레이저 백악관의전실장의 안내로 입장,클린턴 대통령과 인사를 나눈 김대통령은 앨 고어 부통령내외,워런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존 섈리캐슈빌리 합참의장 등 미국측 환영인사를 소개받은 뒤 사열대로 올랐다. 김대통령은 21발의 예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애국가와 미국국가가 연주된 뒤 의장대를 사열했고 미국 고적대의 분열식을 참관했다. 클린턴대통령은 환영사를 통해 『한·미관계는 상호 고통분담의 역사와 공동목표의 미래를 공유하고 있다』면서 『김대통령의 희생과 집념에 힘입어 한국은 경제성장에 걸맞는 정치적 발전을 이룩했다』고 평가했다. 클린턴대통령은 또 『북한핵문제가 한·미·일 세나라간의 긴밀한 공조체제 아래 해결의 실마리를 찾은 것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면서 『주한미군의 지속적인 주둔,남북대화 재개,한반도의 평화와 안정확보를 위한 미국의 확고한 지원을 다짐한다』고 강조했다. 김대통령은 답사를 통해 『42년전 오늘 한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미국을 비롯한 참전우방의 젊은이들이 피를 흘린 전쟁이 3년만에 역사상 가장 긴 휴전에 들어갔다』고 상기시킨 뒤 『한국국민이 미국의 한국전 참전용사와 국민에게 보내는 진심어린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미국 젊은이들이 흘린 피와 땀의 결실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증언하러 왔다』고 말했다. 김대통령은 또 『그들의 고귀한 희생으로 4천4백만 한국인은 오늘날 민주주의와 번영을 구가하고있다』고 감사의 뜻을 밝히고 『한국은 앞으로 보다 평화로운 세계,보다 번영하는 지구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미국국민과 굳게 손잡고 나아가고자 한다』고 강조했다. ○5차례 열렬한 박수 ▷미국 유력인사 리셉션◁ ○…김대통령은 26일 하오 백악관 바로 옆쪽에 자리한 코코란 미술관 1층홀에서 톰 폴리 전하원의장,제시 브라운 육군성장관,샘 넌 상원의원 등 미국의 유력인사 4백명을 부부동반으로 초청,환담을 나눴다. 김대통령은 박건우주미대사의 안내로 리셉션장에 들어선 후 4중주 실내악단의 「아리랑」 등의 연주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중앙 플로어에서 45분간에 걸쳐 참석자 전원과 악수를 나누며 인사. 김대통령은 이어 인사말을 통해 『전쟁의 잿더미에서 실의에 빠진 우리에게 미국은 전쟁복구와 경제재건을 위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면서 『어려울 때의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고 강조했다. 참석자들은 김대통령이 『한국이 기적을 이루기까지 미국의 도움이 컸다』면서 『그동안 참으로 고마웠습니다』고 인사하자 일제히 박수를 보내는 등모두 5차례에 걸쳐 박수로 호응했다. ○자유는 번영의 열쇠 ▷명예박사학위 수여◁ ○…김대통령은 26일 하오 조지타운대학 본관 힐리홀에서 오도노반 총장등이 참석한 가운데 명예인문학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자유는 번영의 열쇠」라는 제목의 학위수락 연설을 했다. 순차통역으로 진행된 연설에서 김대통령은 『한국에서 북한공산주의의 위협은 군사독재를 불러왔고 절대빈곤의 고통은 개발독재를 정당화했다』면서 『그러나 나는 자유와 인권은 양보할 수 없는 권리로 그 모든 것에 우선하는 가치임을 확신했다』고 강조했다. ○전화통화도 10여회 ○…스탠리 로스 백악관 NSC(국가안보위) 아시아담당 보좌관은 27일 한·미 정상회담에 앞선 브리핑에서 김영삼 대통령과 클린턴 대통령이 매우 친밀한 관계라며 수치를 비교해가며 강조. 로스 보좌관은 두 정상간의 직접 대좌는 93년 여름 클린턴대통령의 한국방문으로 가진 첫대좌 이래 4번째라고 소개하고 두번째는 블레이크섬 회담후 백악관에서,세번째는 APEC 보고르회담에서라고 발표. 그는 또 양국 정상간에는 전화와 서신교환도 잦다고 설명하고 지금까지 직접 전화통화만도 10차례가 넘는다며 이는 매우 친밀한 관계라고 부연설명. ◎김대통령 미 조지타운대 명박 수락연설/요지 세계 최고수준의 학문적 업적과 교육적 명성으로 빛나는 조지타운대학으로부터 수여받은 이 학위는 나에게 최상의 영예가 될 것입니다.클린턴대통령을 비롯하여 미국과 세계를 이끌어온 이 대학졸업생들,그리고 21세기의 주역이 될 학생 여러분과 동문이 된 이 순간을 나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이 대학이 2백여년전,종교적 자유와 미국의 독립을 위한 투쟁과정에서 창설되었다는 사실에,40여년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건 투쟁을 해온 나로서는 깊은 감명을 받습니다. 태평양 너머 동북아 한가운데에 위치한 한국의 지난 반세기는 우리 모두에게 자유의 의미를 되새기게 합니다.우리는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후 국토분단과 전쟁,그리고 절대빈곤이라는 3중고를 안고 국가건설에 나서야 했습니다.우리는 절망의 어두움으로부터 희망의 빛을끌어내야 했습니다. 대학생으로서 서양철학에 심취해 있던 나는 당시 한국의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조국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숱한 고뇌를 하였습니다. 나는 미국이 이미 누리고 있던 자유와 평등,풍요와 복지는 다름아닌 민주주의라는 나무가 맺은 결실임을 확신하였습니다.나는 스물다섯살의 나이로 정계에 투신하여 40여년간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 삶을 바쳤습니다. 한국의 민주주의에는 숱한 역경이 있었습니다. 일본 식민통치가 남긴 척박한 토양에 민주주의는 뿌리내리기 어려웠습니다.북한 공산주의의 위협은 자유와 인권을 억압하는 군사독재를 불러왔습니다.절대빈곤의 고통은 개발독재를 정당화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자유와 인권은 양보할 수 없는 권리로서 그 모든 것에 우선하는 가치임을 확신하였습니다.자유민주주의가 빈곤으로부터 해방되는 지름길이며,공산주의의 위협을 극복하는 요체라고 믿었습니다.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별개가 아니라 자유라는 한 뿌리를 가진 두 가지라는 나의 신념은 흔들림이 없었습니다.이러한 신념을함께 한 한국 국민의 기나긴 민주화 투쟁은 마침내 문민 민주주의시대를 활짝 열었습니다. 나는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후,한국사회에 자유민주주의를 확고하게 뿌리내리기 위해 과감한 개혁을 단행해왔습니다. 이러한 개혁조치가 경제를 침체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없지 않았습니다.그러나 지금 한국 경제는 몇년전의 만성적 침체를 벗어나 8%이상의 높은 성장을 구가하고 있습니다.정당성과 효율성을 함께 지닌 민주정부만이 국민에게 참다운 번영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오랜 민주화투쟁을 통해 자유 없는 번영은 진정한 번영이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자유 없는 번영은 풍족한 노예생활과 같기 때문입니다.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인류는 새로운 문명을 태동시키고 있습니다.정보화의 거대한 물결이 세계를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고 있습니다.동양과 서양이 진정으로 만나 「문명의 충돌」이 아니라 「문화의 조화」를 통해 인류역사 추진의 두 수레바퀴가 되는 위대한 시대가 열렸습니다. 자유와 정의와 진리의 산실인대학을 비롯한 세계의 지성계가 새로운 문명을 이끌어나가야 합니다.나는 세계공동체의 시대이자 지식사회의 시대를 맞아 세계 대학간의 교류와 협력이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해졌음을 강조하고자 합니다.이미 조지타운대학을 비롯한 미국의 대학에서 교육받은 한국의 인재들은 한국사회의 주역으로 활약하고 있습니다.지금도 5만여명의 한국 학생이 미국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아시아는 이제 세계경제의 새로운 중심으로 떠오름으로써 여러분의 새로운 개척지가 될 것입니다. 한·미 우호관계는 자유와 번영의 가치 아래 새로운 세기의 개막과 더불어 더욱 성숙되어갈 것으로 나는 확신합니다.
  • 미국,평화와 번영의 동반자(사설)

    김영삼대통령의 이번 미국방문은 종전및 광복50주년 기념의 뜻이 강하다.지난 50년간의 밀접했던 혈맹관계를 과시하고 보다 돈독한 21세기 우호협력관계를 다지자는 여정이다.26일 김대통령의 미 상하양원 합동회의 연설 「21세기 아태시대를 향한 협력­평화와 번영의 동반자」는 그런 점에서 특별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김대통령은 지난 반세기의 성공적인 동맹관계 전반을 높이 평가하고 아시아·태평양시대를 맞아 한·미 두 나라가 자유·평화·번영을 향한 동반자로서 더욱 굳게 결속해나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등 미래지향적인 21세기 한·미관계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미 상하양원의원들의 큰호응을 받았다. 한국대통령의 미의회연설은 6·25직후인 54년의 이승만 대통령과 올림픽 다음해의 민주화열기속이었던 89년의 노태우대통령에 이어 민주주의가 만개한 광복50주년의 김영삼대통령이 세번째다.미의회는 자유민주주의 발상지의 한 곳이다.그리고 김대통령은 한국민주화투쟁의 화신이다.김대통령의 미의회연설은 그런 점에서 특별한 의미와감회를 느끼게 했다.김대통령은 우리국민이 이룩한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가 바로 민주주의를 활짝 꽃피운 것임을 강조했다. 자유민주주의와 평화안보,그리고 경제번영의 달성이라는 한국의 성공은 한·미 양국국민의 공동승리라고 지적한 김대통령은 이제부터 한국이 지향해가야 할 지상과제가 남북평화공존과 화해협력을 통한 점진적 통일에 있으며 통일한국이 분단한국보다 인류와 세계에 더 기여할 것임을 강조했다.남북통일이 한국뿐 아니라 미국과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것임을 미국조야는 잊어서 안된다는 당부다. 김대통령의 연설은 나아가 미국과 자유세계의 지원으로 오늘을 건설한 한국도 국제사회에서의 책임과 역할을 확대해나갈 것임을 천명했다.한국민은 통일한국을 이루어 미국민과 함께 세계와 인류의 평화와 번영에 더욱 크게 기여하자는 의지로 충만해 있으며 이것이 『여러분에게 전하고자 하는 한국민의 메시지』라고도 강조했다.21세기 한·미동반자관계가 지향해야 할 방향제시라 생각한다.
  • 「남북 공동발전 계획」 추진/김대통령 미 의회 연설

    ◎화해·협력통해 「1민족 1국가」로/“한·미결속 강화… 아태시대 열자”/내일 클린턴과 정상회담… 한국전 기념비 제막 【워싱턴=이목희 특파원】 미국을 국빈 방문중인 김영삼 대통령은 26일 상오(현지시간) 『북한핵문제 해결을 위한 한·미간의 공동보조는 북한의 핵개발 의혹이 분명히 풀릴 때까지 강력하게 유지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대통령은 이날 미 상·하 양원합동회의에서 「21세기 아·태시대를 향한 협력­평화와 번영의 동반자」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는 그 실질적인 당사자인 남북간 대화와 협력에 의해서만 정착될 수 있다』고 전제,『클린턴대통령과 미국의회가 그동안 남북대화의 핵심적인 중요성을 강조해온 데 대해 감사한다』고 말했다. 김대통령은 『우리는 광복 50주년이자 분단 50주년인 올해를 남북관계에 새로운 장을 여는 역사적인 해로 만들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고 밝히고 『남과 북이 평화공존과 화해·협력을 통해 점진적으로 하나의 민족공동체를 형성해 나감으로써 궁극적으로 1민족 1국가를 만들자는 것이 한국의 통일정책』이라고 설명했다. 김대통령은 『여기에는 북한의 안정이 필수적』이라고 지적하고 『우리는 남과 북이 함께 번영하는 「민족공동발전계획」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한미 두나라는 일방적인 도움을 주고 받던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도움을 주고 받으며 자유와 번영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성숙한 동반자가 되었다』면서 『더욱 강력한 결속으로 본격적인 아·태시대를 열어나가자』고 역설했다. 김대통령은 특히 『한반도의 평화는 물론 아·태지역 전체의 안정을 위해 주한미군은 필수불가결한 존재』라며 미군이 계속 주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미 상·하 양원합동회의에서 연설하기는 이승만·노태우전대통령에 이어 김대통령이 세번째다. 김대통령은 미 의회 연설에 이어 워싱턴의 캐피털 힐튼호텔에서 최종현 전경련회장등 수행경제인 38명과 오찬을 나누며 우리 기업의 미국진출문제 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김대통령은 27일 낮(한국시간 28일 새벽) 백악관에서 클린턴 미국대통령과단독·확대정상회담을 갖고 북한핵문제 해결을 위한 한미 공조체제를 재확인하고 남북대화와 미·북한 관계개선의 속도조절,한반도문제의 당사자 해결원칙 등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다. 김대통령은 이어 이날 하오 한국전 참전 기념비 제막식에 클린턴대통령과 함께 참석,연설한 뒤 백악관에서 열리는 국빈만찬에 참석한다. 이에 앞서 김대통령은 25일 하오(한국시간 26일 새벽) 워싱턴에 도착,캐피털 힐튼호텔로 지역 교민들을 초청,리셉션을 베풀고 격려했다. 김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대북 쌀지원과 관련,『북한사정이 참으로 어려우며 우리는 순전히 동포애의 입장에서 쌀을 지원하는 것』이라며 『앞으로도 힘 닿는 데까지 동포애의 입장에서 도울 것』이라고 밝혀 쌀의 추가지원 의사를 분명히 했다.
  • 21세기 아·태시대 향한 협력­평화·번영의 동반자

    ◎김대통령 미 상·하양원 합동회의 연설­전문 위대한 미국국민을 대표하는 이 숭고한 민주주의의 전당에서 연설하는 영예를 주신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나는 고향을 찾아 옛 친구를 만난 듯한 따뜻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스물다섯의 나이로 국회의원이 된 이래 40년 가까운 의정생활을 통해 의회는 어느 덧 나의 「고향」이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또한 나의 고난에 찬 기나긴 민주화투쟁을 한결같이 성원해주신 의원 여러분에게 평소 깊은 감사와 함께 동지의식을 지녀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국민들은 오직 피와 땀과 눈물로 오늘의 한국을 이루기까지 언제나 든든한 벗이 되어 온 미국 국민에게 뜨거운 우정을 느끼고 있습니다.나아가 온 인류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새로운 세기를 향해 우리 두 나라의 두터운 유대관계를 더욱 성숙시켜 나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빈국서 부국으로 1945년 2차대전의 종전은 우리 민족에게 해방과 독립이라는 축복을 안겨주었습니다.그러나 그것도 잠시,우리는 민족분단이라는 역사적 비운을 다시 맞게 되었으며 5년후 동족상잔이라는 참극으로 이어졌습니다. 한국인은 식민통치의 잔재와 빈곤의 유산,그리고 전쟁의 폐허와 공산주의의 위협 속에 나라를 세워야 했습니다.우리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번영을 향한 의지,단지 그것만으로 지난 40여년을 줄기차게 달려왔습니다. 이렇게 하여 최빈국으로 출발했던 한국은 이제 경제규모에 있어 세계 열한번째의 나라로 뛰어올랐습니다.그러나 우리 국민이 이룩한 것중에 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민주주의를 활짝 꽃피운 것입니다. 한반도의 분단과 남북간의 군사적 대치는 한국의 민주주의에 두텁고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여기에서도,한국 국민은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향한 끈질긴 투쟁끝에 마침내 문민민주주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우리는 지난 2년여동안 과감한 「변화와 개혁」을 통해 군사독재시대의 적폐를 청산하고 참다운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또한 지난해부터 우리는 「세계화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지구공동체의 번영에 크게 기여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매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무것도 없는 맨주먹으로 일어나 짧은 기간에 민주화와 산업화를 모두 이룩하고 이제 세계로,미래로 나아가는 한국의 이야기입니다. ○참전용사에 감사 한국의 성공은 무엇보다도 평화가 가져온 결실입니다.한반도의 평화가 지켜지지 않았다면 한국 국민은 오늘의 자유도,번영도 결코 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평화는 대가 없이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많은 미국의 젊은이들이 피를 흘렸습니다. 내일은 우리 모두가 이 의사당 맞은편 포토맥강변에서 한국전의 영웅들을 다시 만나는 뜻깊은 날입니다.6·25전쟁의 휴전 42주년이 되는 이날을 맞아 제막될 한국전 참전기념비는 우리에게 언제나 평화의 소중함을 웅변해줄 것입니다. 나는 이 자리에서 우리 국민을 대신하여 한국의 전선에서 고귀한 젊음을 바친 영령들을 추모하고 모든 참전용사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당시 약관 19세의 나이로 참전하신 찰스 랑겔의원을 비롯한 스물여덟분의 의원들께도 경의를표합니다. 아울러 지난 40여년간 한국의 전선을 지켜온 모든 미군장병과 그 가족에게 한국 국민의 사의를 전합니다. 반세기전까지만 해도 태평양 너머 멀리 느껴졌던 우리 두 나라는 이제 가장 가까운 벗이 되었습니다.일방적인 도움을 주고 받던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도움을 주고 받으며 자유와 번영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성숙한 동반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 두 나라가 함께 키워온 평화의 유대는 값진 열매를 맺었습니다.한국의 성공은 한·미 양국 국민의 공동승리입니다. 아시아·태평양시대의 막은 이미 올랐습니다.한·미 두 나라는 더욱 강력한 결속으로 본격적인 아·태시대를 열어나가야 합니다.아·태지역이 역동적 성장을 거듭하여 세계의 새로운 중심으로 떠오르게 된 것은 미국이 장기간 이 지역의 안정과 평화를 유지해왔기 때문입니다. ○아·태 미 역할 긴요 아·태시대가 활짝 꽃피기 위해서는 미국이 앞으로도 이 지역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역할을 계속해야 합니다.특히 동북아의 중심에 위치한 한반도의 평화보장은 이 지역 전체의 안정에관건이 되고 있습니다. 한반도는 아직도 1백50만의 중무장한 병력이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지구상의 마지막 냉전지대입니다.주한미군은 지난 40여년간 한반도에서 전쟁을 억제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해왔습니다. 한반도의 평화는 물론 아·태지역 전체의 안정을 위해 주한미군은 필수불가결한 존재입니다.북한의 핵문제를 둘러싸고 고조되었던 긴장은 한반도가 얼마나 불안정한 지역인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핵문제와 관련하여 미·북간에 이뤄진 콸라룸푸르합의를 지지하는 바입니다.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한·미간의 공동보조는 북한의 핵개발 의혹이 분명히 풀릴 때까지 강력하게 유지되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정부는 미·북 제네바합의가 충실히 이행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한반도의 평화는 그 실질적 당사자인 남북간의 대화와 협력에 의해서만 정착될 수 있습니다.대화 없이는 그 어느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나는 클린턴대통령과 미국 의회가 그동안 남북대화의 핵심적인 중요성을 강조해온 데 대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광복 50주년이자 분단 50주년인 올해를 남북관계에 새로운 장을 여는 역사적인 해로 만들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남과 북이 평화공존과 화해협력을 통해 점진적으로 하나의 민족공동체를 형성해 나감으로써 궁극적으로 1민족 1국가를 만들자는 것이 한국의 통일정책입니다.이에는 북한의 안정이 필수적이며 이에 따라 우리는 남과 북이 함께 번영하는 「민족공동발전계획」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한국이 북한 경수로 건설비용의 대부분을 부담하면서 한국형 원자로를 제공하고 그 중심적 역할을 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뜻에서입니다.같은 취지에서 남북경제협력을 확대하고 있습니다.우리는 또 순수한 동포애적 차원에서 북한의 어려운 식량사정을 덜어주기 위해 북한에 쌀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의 통일로 가는 길이 비록 멀고 험하더라도 우리는 인내심을 가지고 쉼없이 전진해갈 것입니다.한반도가 다시 하나가 되는 그날,동북아에는 진정한 평화와 번영이 올 것입니다.분단된 한국보다통일된 한국이 인류와 세계에 더욱 크게 기여할 것입니다. ○균형통상 급선무 아시아·태평양지역 전체의 번영을 위해서는 이 지역에 자유무역과 개방주의가 뿌리내리게 해야 합니다.2차대전후 미국의 지도력 아래 자유세계에서 이뤄져온 자유무역은 빈곤과 공산주의를 퇴치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한국 역시 자유무역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입었습니다.나는 아·태지역의 모든 나라가 자유무역의 수혜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바로 이런 이유에서 나는 클린턴대통령과 더불어 APEC의 발전을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 한국정부는 또한 WTO 규범에 따른 다자간 협력도 적극 지지하고 있습니다.미국은 한국의 최대 교역국이며 한국도 이제 미국의 여섯번째 시장으로 성장했습니다.지난해 양국간 교역은 4백억달러를 넘어섰고 금년에는 5백억달러 수준에 달할 것입니다. 한·미간의 무역은 대체로 균형을 이루어왔으나 최근에 이르러 한국의 대미 적자폭이 급속도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는 세계화정책을 통해 경제를 비롯한 사회 각 부문의 개방과 자율화를 적극 추진해왔습니다. 우리는 나아가 OECD 가입을 통하여 선진국 수준의 개방화시책을 본격적으로 펴나갈 것입니다.한국은 개발도상국으로서는 가장 빠른 속도로 문을 열어왔습니다.앞으로도 한국은 지속적인 자율과 개방정책을 통해 아·태지역의 번영을 촉진하는 미국의 강력한 동반자가 될 것입니다. ○국제적 책임 확대 우리 앞에는 21세기의 신세계가 펼쳐지고 있습니다.미국의 역할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한국도 국제사회에서의 역할과 책임을 확대해나갈 것입니다.우리의 발전경험을 살려 개도국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고 범세계적 문제의 해결을 위한 국제적 노력에도 적극 동참할 계획입니다. 한국 국민은 한·미양국이 「21세기 아·태시대를 향한 협력」아래 역사의 수레바퀴를 함께 전진시켜나가려는 희망에 차 있습니다.통일한국을 이루어 미국국민과 함께 「평화와 번영의 동반자」로서 세계와 인류에 더욱 크게 기여하자는 의지로 충만해 있습니다. 이것이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전하고자 하는 한국 국민의 메시지입니다.그것은 이 신대륙에 위대한 나라를 세운 미국의 정신에도 합치할 것입니다. 우리,어깨를 나란히 하여 앞으로 나아갑시다.그리하여 인류에게 무한한 희망과 가능성을 안겨줄 새로운 세기,새로운 세계를 함께 열어 나갑시다.모든 것은 유한하나 평화와 번영을 향한 인류의 열망은 영원할 것입니다.
  • 모택동의 협상전략(모스크바 새 증언:24)

    ◎모,「개성에 중립지대 설치」 미제의 수용/협상 주도권 노려 파견한 밀사 통해 합의 지시/“38도선 군사분계선으로” 고수… 지루한 공방전 협상초기 모택동이 총지휘하는 북측대표단은 휴전을 성사시키기 위해 비교적 적극적으로 임했다.협상전략과 관련,스탈린의 답전을 받은 모택동은 같은날인 51년 7월14일 자신의 특별지시로 개성에서 비밀리에 협상을 현장지휘하는 이극농외교부 부부장과 김일성·팽덕회 앞으로 다음과 같은 지시문을 하달했다.그리고 모택동은 이 전문사본을 동시에 스탈린 앞으로도 보냈다.(전문번호 N21813) 『협상의 이니셔티브를 잡기 위해 우리는 적이 제의한 중립지대 설치안과 적대표단에 기자를 포함시키는 안을 받아들이기로 했음.이렇게 하면 적이 만든 모든 협상장애물이 제거되는 것임.…중략…양측 대표단의 신변안전을 위해 중립지대로부터 민간인을 소개시키는 방안을 고려중임.물론 이 경우 그곳 거주 주민들이 물질적 손실을 당하지 않도록 대응책을 마련해야함』 같은날 이극농은 모택동앞으로 전문을 보내 38도선 분계선 설정에 대한 입장이 확고하다는 점을 거듭 다짐했다.(전문번호 N22945). ○회담장주변 검문 강화 『유엔군측 수석대표인 조이 미해군중장은 우리가 정치적으로 분단(군사적으로 분단을 이루지 못하게되니까)을 꾀한다고 비난하며 자기들의 공군력·해군력이 막강하다는 점을 계속 과시했음. 내일 회담에서도 우리는 우리 입장을 확고히 고수해 적이 입장을 바꾸도록 만들겠음』 이튿날인 7월15일 모택동앞으로 보낸 보고전문에서 이극농은 이 날자로 개성 일원에 중립지대를 설치키로 합의했다고 밝혔다.(모택동은 이극농으로부터 받은 보고전문을 당일날 혹은 하루뒤 모두 스탈린에게 보냈기 때문에 이 전문사본들은 모두 러문서소에 보관돼 있게 된 것이다.전문번호 N21890)그리고 북측은 중립지대 인근 고속도로 주변에 사는 주민들을 보호키 위해 민간인 복장을 한 비무장 군대병력을 보내기로 했다고 보고했다.아울러 회담장 주변에 검문검색을 강화하고 야간에는 지상군 병력을 투입해 경비를 강화한다고 밝혔다.이같은 조치를 하게된 이유는 『새로운 상황변화로 적 스파이가 침투할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이극농은 보고했다. 같은날 보낸 다른 전문에서 (모택동이 스탈린에게 보낸 이극농의 보고전문.전문번호 N21840.51년7월16일)이극농은 또한 38도선 군사분계선 획정문제와 관련,『우리 대표들은 38도선을 따라 전쟁이 시작됐기 때문에 그곳에서 전쟁이 종결돼야한다는 논리를 폈음.적대표들은 이 논리가 타당치 않다고 반박했음.우리가 판단키에 적은 우리로부터 다른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 38도선문제에 반대하고 있는듯 했음』이라고 보고했다.이 보고서는 또한 이날 회담장분위기가 비교적 화기애애했다고 적고 있다.『적대표단에 30명의 기자가 참가했음.사진촬영때 질서가 지켜지지 않은 점만 빼고는 기자들 모두 얌전하게 행동했음』이라고 이극농은 보고했다. 7월17일 모택동은 개성의 협상대표단에 다음과 같은 지시문을 하달했다.(모택동이 스탈린에게 보낸 지시문 사본.N21960.51년 7월18일) 『조선에서 적대행위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가 필수조건이라는 점을 강조해야함.지난 수일간 우리는 중립지대 설치,기자단 참여문제등 여러가지 양보를 했음.아마도 적은 우리가 외국군 철수문제에 있어 양보를 할 것으로 잘못 생각할지도 모름.앞으로 2∼3일동안 외국군 문제에 있어 적의 양보를 끌어내도록 힘써야함.예를들어 만약 적이 휴전발효 직후 외국군 철수협상을 바로 시작하겠다고 하면 이는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임.그러나 이 양보를 하지 않겠다면 우리도 우리의 요구를 계속 밀고나가겠음』 이같이 외국군대 철수문제에 있어서는 상당한 신축성을 갖기로 내부 의견을 모은 것이다. 7월20일 개성의 이극농은 모택동앞으로 다음과 같이 보고전문을 보내왔다.(모택동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전문번호 N22073.51년 7월21일) 『외국군대 철수문제에 있어 미군측의 양보가능성은 매우 희박함.…중략…내일 회담에서 우리가 먼저 병력철수 문제를 제기하겠음.만약 적들이 기존 입장을 되풀이하며 아무런 양보를 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3일간 휴회를 제의할 예정임. 그리고 휴회가 끝난 뒤부터는 거의 회담종결 때까지 같은 입장을되풀이하겠음.그러면서 우리는 우리의 최종 요구선이 외국군대철수 문제를 의제에만 포함시키자는 것이라는 힌트를 주겠음.일단 의제에만 포함시킨다면 추후 다른 회담에서 이 문제를 토의해도 좋다는 뜻임』 ○분계선 놓고 교착상태 7월25일 이극농은 다시 모택동에게 보낸 보고전문을 통해 『적은 회담이 무산될 가능성에 대해 우려하고 있음.적대표는 우리의 제안을 신중히 검토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고 밝혔다.그리고는 『내일 회담에서는 무엇보다도 38도선 군사분계선 설정문제를 제기하겠음.그리고 적어도 모레 상오 혹은 하오 회담 전까지는 우리측 양보안을 내지 않겠음』이라고 보고했다.이극농은 38도선 문제에 있어 적대표도 당장 양보안을 낼 것같지 않다고 전제,3∼5일 정도 격론을 거쳐야 결말이 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보고에 대해 모택동은 7월28일 협상관련 지시문을 이극농에게 하달했다.『귀하가 보낸 조이 미군대표의 연설문을 읽었음.그의 연설은 어리석고 허황됨.군사행동을 끝내기 위해 협상을 하는게 아니라 전장에서 소리치는 고함소리 같이 들렸음.다음번 연설에서 귀하는 조이장군에게 진짜 휴전을 원하는지 아니면 전쟁을 계속할 구실을 찾는 것인지 물어볼 것.…중략…지상군이 군사행동을 중지한 뒤에도 해군·공군이 군사행동을 계속한다면 이는 진정한 휴전의도가 없다는 뜻임.38도선 군사분계선 입장은 끝까지 고수할 것.적이 허황된 주장을 계속하는 한 우리가 먼저 양보할 수는 없음』 38도선 군사분계선 문제를 놓고 양측이 1주일간을 팽팽한 줄다리기를 계속하는 가운데 회담은 교착상태에 빠졌다.이극농은 7월31일 모택동에게 보낸 보고전문에서 이 교착상태를 타개하기 위한 몇가지 방안을 제시했다.(전문번호 N22446.모택동은 이극농에게서 받은 전문을 51년 8월2일자로 스탈린에게 보고) 『(a)모든 매스 미디어를 총동원하여 적의 위선을 폭로할 것.(b)북경과 평양의 언론기관들을 동원해 여론을 선동해 비난전을 전개할 것.(c)군사행동을 강화해 적의 공군·해군이 저지르는 야만적인 군사행동에 대응할 것』 이극농의 전문에 대해 모택동은 신문기자들을 이용하는 방안에 대해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이와함께 자신들의 최대목표인 38도선 군사분계선 획정안에 대해서도 모택동은 매우 낙관적인 분석을 했다.(모택동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이극농에게 보낸 전문사본.8월1일.전문번호 N22446) 『적이 논의의 초점을 제3의 의제로 바꾸려할 가능성이 있음.제3의 의제에서 얻은 수확을 가지고 다시 본론에 도전할 의향일 것임.적의 의도가 어떻든 우리는 38도선 문제를 끝까지 고수할 것.이 문제는 우리가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제시한 것이기 때문에 적은 수동적인 방어밖에 할 수 없음.회담교착상태가 계속되면 적내부 여론이 그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임.적은 이를 우려하고 있음.적이 회담결결을 원치 않는다면 교착상태 뒤 돌파구가 마련될 것임.기자들을 이용해 적 제의의 부당성을 홍보할 묘안을 궁리할 것』 미군측이 휴전선 기준을 현전선으로 하자고 주장한 반면 북측은 38도선을 기준으로 하자고 맞선 가운데 양측은 지루한 공방을 계속했다.미군측은 아울러 현전선을 기준으로 휴전선을 만들고 이 주위에 비무장지대와 완충지대를 설치하자고 제의했다.반면 북측은 일단 38도선을 기준으로 휴전을 성사시킨 다음 완충지대등 구체문제는 추후논의할 것을 제의했다.이 원칙 위에서 양측은 지루한 제의·수정제의·역제의등 갖은 말장난과 계략을 총동원해 회담을 끌어갔다. ◎새로 밝혀진 사실/중요결정 모스크바­북경 협의/평양은 휴전협상서 완전 배제 이번 자료를 통해 한국전쟁중 공산측 휴전협상의 중심 정책결정라인은 모스크바­북경­개성이었음이 밝혀졌다.일상적인 결정은 북경­개성(중국대표)의 라인이었지만 기본적이고 중요한 결정은 모스크바­북경 라인이었음도 확인되었다.모택동과 그의 현지 파견대리인이 사실상 휴전협상을 총괄하고 있는 것이다(물론 모택동은 회담의 중요진행상황과 내용을 전부 스탈린에게 통보,보고하고 있었다).가장 중요한 평양은 찾아 볼수 없다.즉 문서를 통해 볼 때 그들은 정책결정라인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아주 미세한 사항 하나 하나에 대해서까지 모택동이 현지 협상대표에게상세하고도 직접적인 지시를 내려 협상을 이끌어가고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그는 협상의 전략적·정책적 총괄자일 뿐만 아니라,단지 위치만 멀리 떨어져있는,사실상의 현지 대표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자료에는 공산측이 당시 협상에서 어느 항목을 중요시하였고 끝까지 고수하려하였으며 어느 항목을 양보하려하였는지도 처음으로 밝혀져있다.즉 내부의 협상전략이 비밀자료를 통해 처음으로 공개되는 것이다.이를테면 모택동을 비롯한 공산측은 38도선에 의한 군사분계선 설정은 끝까지 고수하려 한 반면,당시에 매우 중요하게 집착하였던 외국군대의 철수문제에 대해서는 미군측의 완강함을 알고 내부적으로 이미 신축적으로 응하려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모택동이,전쟁이 장기화되면 미국을 비롯한 서방진영의 내부에서 이를 반대하는 여론이 형성될 것이고 그들은 이를 우려하고 있다는 점까지 고려,미군을 상대하고 있음도 밝혀져있다.여기에는 공산측 내부의 의도와 전략이 잘들어나 있다.
  • 신생 한국의 정치상황(새로쓰는 한국현대사:27)

    ◎“동족상잔 막자”… 김구중심 「대북협상」 강격 제기/5·30선거서 「보수」 약화… 이대통령 자유당 추진 분단정권의 수립후 남과 북에서는 각각 정권을 확고히 하기위해 총력을 기울였다.신생 대한민국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대립하지 않을 수 없었던 좌익과 북에 대한 견제를 강화해 나갔다.또 정치적으로 적과 동지가 생겨나고 정치상황도 변화했다.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도 통일독립촉진회를 주축으로 한 남북협상파는 미소 양군의 철수와 민족자주권을 주장하며 북한과의 평화협상 노력을 기울였다.그러나 목적은 한 번도 이루지 못했다.이런 와중에 북한의 조종을 받는 좌익의 대정부 무장봉기가 거세지기 시작했다.남한에서는 마침내 19 50년 5월 5·30선거를 통해 다시 국회를 구성하고 반공정책쪽으로 기울었고 얼마후 이 땅에서는 전쟁이 발발하고 만다. ○좌익·대북견제 강화 우리는 분단정권 수립후 전쟁발발까지의 기간중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던,즉 당시 정치세력의 흐름을 적지않게 주도했던 통일독립촉진회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주로 남북협상파를 주축으로 결성한 이 통일독립촉진회는 세력을 가진 한독당을 얼마만큼 끌어들이느냐를 놓고 고심했다.남로당의 반정부 무장봉기가 극성을 부리고 좌우의 대립이 거세지는 과정에서 남북협상파는 동족상잔의 전쟁을 막자는 환상에 기울었다. 이 통일독립촉진회 결성에는 김구 엄항섭 조완구 등이 발기인회를 만들 때까지 참여했다.통일독립촉진회의 주장은 ▲미소 양군의 한반도 동시 철수를 통한 민족자주권 쟁취▲남북 제정당및 사회단체의 정치협상등이었다.김구등 한독당의 일부인사는 초창기 다소 적극적인 참여의사를 밝혔다. 1948년이 지나가고 49년에 접어들면서 38선과 산악지대에서의 남북간 무력대립이 심해져갔다.이때 북한은 남북 제정당지도자협의회를 열어 그 협의회에서 남북총선거를 실시할 수 있는 선거지도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제의해왔다.그 내용은 「남북에 현존하는 정권에 남북총선거를 지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여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고 외국군대를 철거시켜 통일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북한의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운동」제의에 대해 김구는 일단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반면 김규식은 소극적이었다.당시 김구의 심경은 그가 1949년 3월21일 「신민일보」사장과의 회견에서 밝힌 내용에 잘 나타나 있다.김구는 그때 이렇게 말했다.『우리민족의 생존권과 우리의 주권을 획득하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그것은 민족자결정신에서 미소 양군의 즉시 철퇴를 요구하고 남북협상에 의해 우리의 통일정부를 우리의 손으로 세우는 것입니다.혁명세력과 반역집단이 합작할 수는 없으나 혁명세력끼리의 합작이나 협상이라면 성립되지 않을 하등의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김구는 이 회견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공격하고 혁명세력간 좌우합작과 남북협상등을 통해 자주적 통일민족국가 수립을 호소했던 것이다.「혁명세력끼리의 남북협상」으로써만 동족상잔의 불행을 막을 수 있으므로 그 운동이 실패하더라도 그 길을 가야한다는 주장이었다.이에 대해 김규식은 상당히 회의적이었다.김규식은 이미 서로 다른 정권이 성립한만큼 현실적으로북한의 제의가 불가능하며 자칫 북한 공산당의 계략에 빠져들 수 있다는 신중론이었다.한독당내의 반공주의자들은 물론 김규식의 견해에 동조하는 편이었고 끝내 통일독립촉진회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1949년 4월을 넘기면서 북한은 남조선민전과 북조선민전을 합하고 인공수립에 참가했던 남한의 우익 혹은 중도좌파 정당을 참가시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을 서둘렀다.북한은 남한의 한독당,민족자주연맹,통일독립촉진회를 이 전선에 끌어들이기 위해 전전긍긍했지만 성과는 없었다.그러던중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결성대회가 6월25일부터 평양에서 열렸다. 김구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가 이틀째 접어든 19 49년 6월26일 안두희라는 현역장교의 저격으로 그의 거소 경교장에서 생애를 마쳤다.혁명세력끼리의 합작이나 협상이라면 성립되지 않을 어떠한 이유도 없다고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이상을 추구해온 김구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그렇게 마감했다.그 나이 73세였다. 해방공간에서 한때 김구는 이승만과 우정을 나누었다.그들은반탁운동에서는 협력했다.그러나 김구는 단독선거와 단독정부에는 반대의사를 분명히 함으로써 이승만과 사실상 정적의 사이가 되었다.특히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후 더욱 그러했다.그리고 김구는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남북협상의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이승만은 김구를 못마땅하게 여겼다.이승만은 김구가 남북협상을 주장하면서 지난날 임시정부 지지를 맹세하는 단체를 조직한다고 비난했다.또 김구가 다음해 예정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자기 지지자들을 당선시키려는 준비를 서두르는 가운데 반정부 운동을 선동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협상에 미련” 못마땅 이승만은 김구의 저격범 안두희를 김구의 측근으로 보았다.이승만은 1949년 6월28일 미국의 친지 RT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에서 안두희를 한독당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인물로 단정했던 것이다.이어 이승만은 이 편지에서 안두희가 김구를 방문했을때 비서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내고 둘이서 비밀대화를 나누었다고 전하고 세발의 총성이 울렸다고썼다.그러면서 마지막으로 편지내용을 어느 한구절도 인용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제헌국회 안에도 이승만을 반대하는 세력이 많았다.그러나 부분적으로나마 반대파들을 통제해나갔다.이승만은 자신이 유엔대사로 임명한 조병옥도 사실상 경계했다.유엔에 남아있기를 희망하는 대통령의 뜻도 능히 거역할 수 있고 모든 사람들이 쪼들려도 개인자금을 조달할 능력을 가진 사람이 바로 조병옥이라고 평가했다.특히 경찰을 장악하고 있는 내무부장관 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 이승만 대통령의 생각이었다. ○민족주의세력 득세 어떻든 이승만은 임시변통으로 사람들을 쓰고 부려먹었다.조병옥도 그러한 케이스였고 뒷날에는 정적이 되었다.초대 주미대사였던 장면도 예외가 아니었다.그리하여 서서히 정치판도가 변화하는 가운데 1950년이 다가왔다.그해 5월30일 제2대 국회로 가는 5·30선거가 실시되었다.그 결과 대한국민당,민주국민당,국민회등 기성 보수정파의 원내세력이 줄어들었다.반면 민족주의 세력을 포함한 중간파가 약간 두두러졌다.특히 여당입장에있던 대한국민당과 원내 제1당이었던 민주국민당이 무소속에 밀려 소수로 몰락해버렸던 것이다. 19 50년 5·30선거는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기반을 약화시켰다.무소속으로 자기 주장을 국민들에게 호소해왔던 이승만은 정당을 등에 업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이승만은 자기가 만들었던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중심으로 자유당을 서서히 엮어나갔다. ◎이정권·민국·한불업계 낙선 공작/“김성수·김준연 남감찹과 내통” 몰아/현야 경찰서장 교체… 중진들 대거 탈락 1950년 5월 실시된 5·30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승만 정권이 카운터파트인 민주국민당과 한국독립당등 경쟁 상대들에 대해 조직적인 선거방해를 시도한 사실이 드러났다.이같은 사실은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미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에서 긴급 입수한 조인트 위카(JOINT WEEKA),즉 주한미국대사관 주재 무관들이 작성한 주간보고서에서 밝혀졌다. 이 조인트 위카에 따르면 당시 이승만 정권은 선거전 민국당과 한독당 후보들을 낙선시키기 위해 간첩사건을 조작했으며 대대적인 경찰인사도 단행했다.조인트 위카 13편(50년3월31일자)에 따르면 이승만정권은 대한정치공작대를 통해 민국당 중진들이 군경에 잠입한 남파간첩들과 연계된 것으로 조작했다.이는 남북 분단정권 수립후 남쪽에서 좌익에 대한 경계심이 고조되던 시기에서 주효한 전략으로 작용한 것으로 이 보고서는 풀이하고 있다 정치공작대는 그해 3월20일 국가보안법 위반 범죄수사를 위해 경찰 1백명으로 구성한 정보조직으로 김성수,조병옥,백관수,김준연등 민국당 중진들이 간첩과 내통한 것으로 조작했다.이 공작에는 윤치영 임영신 이범석등이 가담했고 특히 윤치영이 이끈 여당격의 대한국민당이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조인트 위카는 기록하고 있다(조인트 위카 16,50년4월14일자).대한국민당은 70여명의 입후보자를 내세워 민국당의 이슈를 혼란으로 몰아갔으며 민국당을 패배시키려는 선거전략도 구사했다(조인트 위카 13,50년 3월31일자). 조인트 위카는 이어 정치공작대 사건은 결국 4월중순경 조작극으로 드러났지만 당시 이승만 지지세력의 가장 큰 적수였던 민국당과 한독당은 큰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결론지었다.한편 이 정보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정권은 선거에 앞서 5월초 미군정 시기부터 민국당이 장악했던 지방 경찰서장직을 대폭 바꾸는 바람에 민국당의 중진들이 선거에서 대거 낙선한 사실도 들추어냈다.
  • 「새로쓰는 한국현대사」 속의 두거인 재조명

    ◎이승만·김구의 우정과 갈등/황해도출신 한살산… 상해 임정활동 공통점/해방후 우남은 「군정」·백범은 「협상」을 추구 조선왕조 끝시기로부터 오늘날 남북대립시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정치지도자들이 배출됐다.그 가운데 우남 이승만과 백범 김구는 앞자리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우남은 18 75년에,백범은 18 76년에 태어났다.모두 황해도 출신으로 사실상 동년배지만 백범은 우남을 평생동안 형님으로 모셨다.어려서 한학을 공부한 우남은 성장하면서 서양문물에 눈을 떠 미국 조지워싱턴대학,하버드대학,프린스턴대학 등에서 국제정치와 국제법을 전공했다.그리고 일찍 기독교 정신문화를 받아 들였다.이와는 달리 토착적 성장의 길을 걸은 백범은 서당 글공부가 교육의 전부였다.또 토착종교 동학에 가담해 왜병과 싸우는 등 민족적 정열을 불살랐다. 두사람은 1919년 3·1운동 직후 시차를 두고 상해 임시정부를 통해 연결고리를 맺는다.우남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백범은 마지막 주석으로 선출되어 독립운동 일선에 나섰던 것이다.그러나우남과 백범은 임정과의 연결에서 질적 차이를 드러냈다.백범은 임정을 떠나지 않은 채 그 간판을 해방의 시점까지 지킨데 비해 우남은 미국을 무대로 외교 선전 측면의 독립운동을 벌였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들은 해방된 조국에 환국해서는 독립정부 수립운동에 앞장 섰다.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한반도 문제에 관한 미·소·영·중 4개국 외무장관 합의 의정서」가 발표되었을 때는 손을 맞잡고 싸웠다.그러나 두 지도자 사이에는 차츰 노선의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다.우남은 강력한 반소·반공론에 입각해 남한의 단선·단정노선을 제기하고 나섰다.이 노선에 반대한 백범은 이데올로기보다 민족을 앞세웠다. 1947년에 공식화된 미국과 소련 사이의 냉전은 미국으로 하여금 우남이 주장해온 단선·단정론을 지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그리하여 미국의 주도아래 국제연합은 19 48년 5월10일 남한에서 총선거를 실시해 대한민국을 건국시키는 일을 서두르게 됐다.남한의 단선·단정은 분단체제의 고착은 물론 동족상잔의 비극을 불러 일으키게될 것이라고 비판한 백범은 남북협상을 추진했다.백범은 김규식과 함께 1948년 평양 남북정치지도자 연석회의에 참석한다.그러나 북한은 곧 세워질 공산정권의 합법성을 쌓는데 두 애국지도자의 충정을 이용했을 뿐이다. 5·10총선거에 따라 대한민국 제헌국회가 성립됐다. 국회의장에 선출된 우남은 헌법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초대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5·10총선을 거부했던 백범은 자신이 이끌던 한국독립당을 중심으로 통일운동을 벌였다. 백범의 통일운동은 고귀했으나 외로웠다.결국 1949년 6월26일 육군대위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지고 말았다.통일된 독립국가 수립을 꿈꾸던 그의 숭고한 사상은 오늘날 까지도 우리의 지표가 되고 있다. 우남은 건국 초기에 험난한 길을 걸었다.특히 1950년6월25일 북한의 전면 남침을 맞아 미국과 국제연합 지원아래 싸워서 국가를 수호했다.대한민국의 건국과 수호는 확실히 그의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그러나 사사오입개헌과 1960년 3·15부정선거는 그에게 오명을 안겨 주었다.그는 전 국민을 분노시킨 4·19혁명에 의해 하야할 수 밖에 없었다. 돌이켜 종합해 생각해 보건대 백범 두분 모두 우리 배달겨레에게 소중하게 기억된다. 우남은 건국과 국가수호라는 업적을 남겼으며 백범은 분단상황에서 민족의 통일을 잊지 않게 하는 정신적 자산을 남겼다.두분은 훌륭한 저술가이기도 했다. 우남의 「독립정신」과 「일본내막기」는 그의 뛰어난 국제정치 안목을 보여 주고 백범의 「백범일지」는 그가 민족의 자유와 자존을 얼마나 존중했는지 말해 준다.
  •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미 상원외교위 증언

    ◎가까운 장래의 미 외교정책 목표/미국은 한·일·중과 불필요한 대결말라 헨리 키신저 전미국국무장관은 13일 미상원 외교위원회에 출석,「가까운 장래의 미국 외교정책목표」에 관해 증언했다.키신저의 증언을 요약한다. 냉전이후의 외교정책 방향을 어떻게 세워야할 것인가의 문제는 진정 미국이 국제사회로부터 받은 역사상 가장 어려운 난제중의 하나이다.냉전 때의 문제보다도 덜 위험하지만 한층 복잡해 거의 모든 기본요소가 동시에 사라져버린 세계에서 방향감각을 되찾는 것과 흡사하다. 너무도 많은 미국인들이 외교적으로 이뤄져야 할 일들이 모두 달성되었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그러나 세계는 지금 틀을 짜면서부터 미국이 배제된 결정들이 가면 갈수록 많아지는 추세다.이같은 추세는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미국은 건설적인 세계질서의 틀을 잡아갈 능력을 아직도 보유하고 있다. 미국인들은 제한없는 선택의 장으로 외교정책을 여기고 있고 국제적 약속에 대해 참여나 철회의 결정을 언제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선에서 이해한다.냉전에서 이긴 미국인들은 외교란 영원한 승자가 없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군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은 점점 줄어드는 대신 경제와 기술의 중요성은 급속도로 높아져 간다.현재 세계에는 비군사적 결정에서 힘을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6,7개의 주요국가들이 있다. 이같은 국제질서에서는 한 국가의 지배적 우세 아니면 힘의 균형 등 두가지 길만이 안정을 보장한다.그런데 국민 여론을 통한 미국의 정치는 곤란하게도 이 두가지 접근 모두를 거부하는 경향을 보여왔다.헤게모니는 힘의 소진을,힘의 균형은 끝없는 긴장을 뜻하기 때문이다.새로운 세계질서는 균형개념에 바탕을 두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현실적 판단이다.과거에는 정복을 통해서만 균형의 변화를 끌어낼 수 있었으나 지금은 경제와 기술이 획기적인 변화를 만들어낸다. 미국 뿐아니라 모든 주요국가들은 지금 과도기에 놓여있다.이럴 때 이론적으로 미국은 지난 19세기 최강국 영국이 취했던 「아주 특별한 경우외에는 특정 편을 들지 않고 모두와 좋게 지내고자 한」「멋있는 고립주의」를 추구할 수 있으나 걸림돌이 너무 많다.또 미국은 자신들이 믿는 가치가 전세계에 보편적으로 통용될 수 있다는 신념이 강한 국가다.세대간에 역사적 경험의 상이함이 정책결정의 혼란을 부추기고 있는데 결국 배타적이지 않는 국익바탕 주의냐 아니면 소위 다자간 국제주의냐의 갈등으로 귀결된다고 할수 있다. 클린턴 대통령의 외교노선은 다자간주의 쪽에 기울어져 있다.심한 국수적 고립주의자가 아니라면 국익과 국제 콘센서스를 양 극단으로 구별하지 않는다.실제 세계에선 뉘앙스의 차이일 따름이다.이런 점들을 명심한 뒤 유럽과 함께 현 미국 외교정책의 「사고지역」이라 할 아시아를 살펴보도록 하자. 미국은 최근 수년간 때로 불필요하게 중국·일본등 여러 아시아국가들과 동시에 불화에 휩싸임으로써 아시아정세에서 나오는 이득을 얻는데 실패했다.미국은 아시아 주요국가들과 동시에 대결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외교정책의 좌우명으로 삼아야한다. 현재 거의 모든 아시아 국가들의 정치적 상황은 극도로 취약해지고 있으며 대부분 국가는 과도기에 처해 있고 이같은 변형은 내부적으로 민족주의와 국제주의간의 긴장을 조성한다.기존의 동맹관계도 수정될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정치제도의 틀이 근본적으로 바꿔지는 중이며 외교정책의 방향도 똑같이 그럴 전망이다.자신을 낮추고 숨기는 정치시대는 끝나 한층 민족적이 되고 지금보다 훨씬 「정치적」이 될 것이다. 중국은 등소평으로부터 차세대 지도층으로의 권력이행이 거의 완료된 것으로 짐작된다.그럼에도 등이후가 안정되는 데는 수많은 변수의 터널을 통과해야 한다.경제적 성장은 어쩔수 없이 정치체제로 하여금 최소한 산업정보사회에 발맞추는 시늉을 내도록 할 것이다. 한국은 통일에 대한 욕망과 고립에 대한 두려움이 동시에 마음을 휘어잡고 있다. 이같은 변화는 아시아에서 경제의 세계화가 요구하는 국제주의와 정치적 결속에 큰 효과를 발휘하는 민족주의간에 긴장을 야기하고,미국의 정책이 변화의 와중에 있음을 감지한 결과등으로 현존의 동맹및 우방정책에 대한 재고압력을 일으키고 있다. 최후로 남아있는 분단국인 한국은 통일문제에 국가의 온 신경이 집중될 것이다.합법적인 상대로 취급해 주지 않으려는 북한의 전략과 맞서야 하는데 핵문제 때와 같이 북한은 미국과 직접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미국은 북한의 경직성이 세계경제에서 배제된 데서 연유한 만큼 접촉을 통해 그들의 고립감을 풀어줘야 한다는 입장이나 한국은 이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갖고있어 충돌의 소지마저 안고 있다.나아가 한국은 중국 그리고 일본까지 자신의 통일추구에 전적으로 동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배경으로 해서 민족주의적 성향을 확대하고 있다.따라서 중국과 미국이 계속 지금처럼 사이가 좋지 않다면 한반도의 상황도 나쁜 국면으로 빠질 수 있다. 미·중 관계가 조속하게 회복되지 않고 대립이 심화되면 미국의 일본에 대한 영향력은 극적으로 감소할 것이며,한국은 어쩌면 화염통으로 변할는지 모른다.
  • 뜨거운 설전/DJ­“구당의 결단”/KT­“사리의 표출”

    ◎김대중씨 내외연모임 발언/나눠먹기식 당 운영 더이상 안돼 지난 92년12월19일 정계은퇴시에는 정치를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사실 (신당 창당으로) 정치를 재개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국민과의 약속을 못지키는 것이 된다.그러나 이에 대해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겠다. 민족의 운명이 중대한 기로에 서 있고 여야가 자기 몫을 다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조그만 힘이라도 보태야 겠다고 생각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지역감정과 용공음해로 당선됐지만 축복해 주었고 영국으로 떠나면서도 잘하기를 바랐다.영국에서 이기택총재에 대해서도 아낌 없는 지원과 성원을 했다.그러나 현실은 배신감마저 느끼게 했고 이는 나의 부덕의 소치로 생각한다. 국정현실은 큰 혼란에 빠져있고 개혁 마무리도 실패했으며 권력은 보복차원으로 악용되고 있다. 이제 우리당은 당권만 생각하고 당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는 나눠먹기식 정당으로 당다운 모습을 잃어버리고 국민에게 희망을 줄 수 없는 정당이 됐다.이러한 모습의 정당 총재를 과거에 보지 못했고 지도부도 이를 묵인한 책임이 있다. 우리당은 지방자치 단체장을 책임지고 관리,지원해야 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전유권자의 57%인 20·30대의 지지를 정착시키는 노력도 시급하다.안정 희구 보수세력들이 이번 선거에서 지지해 주었는데 차제에 중산층을 끌어안는 모습으로 개혁되어야 한다. 많은 여성유권자들의 지지를 정착시키기 위한 정책개발도 시급하다.특히 통일문제는 우리당이 그간 각고의 노력으로 추진해왔다.경제와 문화가 지배하는 시대인 21세기에 대처하는 당개혁도 필요하다. 비록 도덕적으로 깨끗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여건을 버리고 일시적으로 비난을 받더라도 국정의 혼란과 마비된 제1야당의 정당기능을 그대로 바라만 볼 수 없다. 정기국회부터 당이 일대 개혁,잘하는 모습으로 심기일전하면 서울과 경기 호남을 축으로 다음 총선에서 제1당이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6개항의 개혁결의가 당에서 수용되고 나눠먹기 체제의 지양이 보장되고 당개혁의 걸림돌인 이총재의 사퇴가 확보되면 당내 개혁으로 갈 수 있다. ◎이기택 총재기자회견 내용/당 깨라고 국민이 표 준것 아니다 6·27지방선거는 민주당에 지역감정 극복과 수권정당 건설,정권교체신화의 목표를 향한 새출발을 요구하고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아태재단이사장은 신당창당을 통해 당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으며 나는 이에 한없는 비애를 느끼고 있다. 총재인 내가 책임질 일이 있으면 8월 전당대회를 통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순수집단 지도체제를 요구한 인사들이 지금에 와서 신당의 명분으로 당운영을 문제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총재직 사퇴요구는 정치적 음모다.나는 이런 음모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총재사퇴요구는 먼저 김이사장이 정계복귀 의도를 포기하고 신당창당을 백지화할 때 당의 개혁을 위한 분위기 조성차원에서 수용할 수 있다. 나는 김이사장의 정계복귀에 반대한다.그의 은퇴선언은 정치적·역사적 의미와 무게가 실린 것이다.누구의 강요가 아니라 김이사장 스스로가 정권교체를 위해 내린 결정이며 국민들은 이를 양 김씨의 은원 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역사의 물꼬를 여는 계기로 인식했다.김이사장이 국민적 비판을 무릅쓰고라도 다시 뛰겠다면 정도를 걸어야 한다.형체도 없는 신당논리를 내세워 자신이 만든 당을 때려 부수려 해서는 안된다.국민들이 당을 깨라고 표를 던진 것이 아니다.국민들은 신당창당을 「정통야당의 송가」라고 일컫고 있다. 내각제 개헌론은 국민의 바람과 동떨어진 소모적 정치논쟁에 불과하며 국론분열의 상처만 안길 뿐이다.일개 정치인의 이해 때문에 국민들이 피흘려 얻은 대통령직선제를 바꿀 수는 없다.아울러 시대가 바뀌면 사람도,역할도 바뀌어야 한다.신진대사가 막히면 사회는 정체되고 퇴행할 뿐이다.지역등권론 역시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것으로 이를 정치적으로 악용해서는 안된다. 나는 한평생 야당의 길을 걸어오면서 이 순간까지 국민앞에 떳떳하다.앞으로 성패를 떠나 원칙과 합리를 바탕으로 정치의 정도를 걷겠다. ◎김대중씨의 “정치재개” 선언을 보고/「삼풍」처럼 무너진 정치신뢰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와 김대중씨의 신당창당 및 정계복귀에 관한 기사가 연일 언론의 지면을 덮고 있다. 하나는 사회적 사건이고 또하나는 정치적 사건이다.그러나 두 사건 모두 국민에게 충격과 놀라움을 안겨주고 있다. 슬픔과 비통속에 온 국민이 잠겨 있는 동안 여의도 정치무대에서는 삼풍백화점의 붕괴 못지않게 「신뢰의 붕괴」가 시작되고 있다. 김대중씨의 정계복귀는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다.정계은퇴도 개인의 자유다.지난 92년12월19일 정계은퇴를 선언한 것은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요,법적으로 규제한 것도 아니다.그렇듯이 개인의 자유는 존중을 받아야 한다.그러나 정치인의 자유에는 그만한 책임이 뒤따른다.그분이 언급한 「장사하는 사람이나 글쓰는 사람」과는 다르다.온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정말 진지하게 정계은퇴선언을 하던 그 모습을 TV로 지켜본 기억이 너무 생생하다.그 분위기는 장엄하기까지 했다.눈시울을 붉힌 사람도 있다고 한다.많은 국민은 명예의 선택이라고 자랑스러워 했다.그분의 정치적 약속과 시중의 장사하는 사람의 약속은 그분이 장사꾼이 아니라는 차이만큼 클 수밖에 없다. 먼저 국민은 궁금하게 생각한다.왜 박수를 받았던 정계은퇴선언을 다시 거두어들이는 것일까.이번 지방자치선거에서 압승한 민주당을 차버리고 왜 신당을 만들려고 하는 것일까. 많은 사람이 명약관화한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그래도 본인의 설명을 듣고 싶어한다.아태재단이 이 나라 21세기를 위해,그리고 통일한국을 위해 진정 준비하는 세계적 연구기관이 될 것이라는 그분의 말에 대한 믿음을 버리기 어렵기 때문이리라.우리사회에도 한 분쯤은 정계의 대원로로서 존경과 신망을 한몸에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기대가 가슴에 묻혀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의 그분의 언행에 대한 내용과 과정이 어떠했다는 사실을 빨리 알아차리는 것이 현명하다는 주위사람의 말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김대중씨의 정계복귀에 대한 논란이 있었던 지방선거에서 「당원으로서 당을 지원할 뿐」이라는 그분의 말씀과 민주당 대변인의 말을 우리는 기억한다. 차라리 지방선거를 그분의 정계복귀에 대한 평가라고 미리 규정했더라면 궁색한 변명이나 여론의 날카로운 질책을 피해갈 수 있었을 것이고 또한 매우 떳떳했을 것이다. 이제는 어쩌랴.지방선거를 문민정부의 중간평가라고 몰고가서 압승한 민주당이 수권정당으로서 체질을 정비하기는커녕 한사람의 「야당」을 추스리지 못해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고 새로운 정당을 만들겠다는 「과감한 결단」을 함으로써 『국민쯤이야』하는 대접을 국민에게 주고 있다. 그분이 대정객으로서 이 나라 민주주의를 쟁취한 만큼 아직도 그러한 열의가 살아 있다면 8월 전당대회를 통해 당원의 결정을 묻는 절차적 민주주의에도 모범을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언제까지 이 나라에서 줄서기정치를 강요하고 지역할거주의를 볼모로 국민의 판단을 흐리게 할 것인가. 분단된 이 나라의 통일을 위해 앞장섰던 그분이 지역등권주의라는 신조어로 동서를 또 쪼개려는 참뜻은 무엇인가.상황과 여건에 따라 정치철학과 주장이 뒤바뀐다면 이 나라에 비전 있는 정치는 언제나 이루어질까. 민주주의 지도자로서 명예롭게 남길 원했던 뜻있는 국민은 삼풍백화점 붕괴만큼이나 신뢰가 무너지고 있음을 가슴쓰리게 생각하고 있다. 몇 푼 더 벌어보겠다고 백화점 문을 못닫게 한 삼풍백화점 경영진이나 지방선거 승리를 여세로 멀쩡한 당을 버리고 새살림을 차리겠다는 것이나 과거시대가 남긴 일방통행적 오만과 독선의 끈질긴 유산인가.
  • 국제전화료 초단위 계산/경장관 국회보고

    ◎10월부터… 통화료 인하효과 빠르면 오는 10월부터 국제전화요금 징수방법이 현행 분단위에서 초단위체계로 바뀌면서 전체적인 요금수준도 인하될 전망이다. 경상현 정보통신부 장관은 13일 제176회 임시국회 통신과학기술위원회에서 주요업무 추진현황 보고를 통해 『올 하반기중에 현행 국제전화의 분단위 요금징수체계를 초단위로 세분화하겠다』고 밝혔다. 우리나라의 국제전화 요금체계는 1분을 기본으로 하고 1분 초과때마다 최초 1분요금의 75%가 가산되는 분단위제를 채택하고 있다.이러한 분단위 징수제는 1분1초를 통화해도 2분요금이 부과되는 등 불합리한 점이 있어 수익자부담원칙에 충실할 수 있도록 초단위제로 전환해야 하는 것으로 지적돼 왔다. 정보통신부는 이에따라 국제전화요금 징수제도를 초단위제로 개편한다는 방침을 확정하고 다음달 안에 요금수준등 구체안을 마련키로 했다. 현재 국제전화요금의 분단위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는 미국 중국 네덜란드 등이며 일본 대만 홍콩 인도네시아 등은 초단위로 돼있다. 경장관은 또 이동전화 설비비및 통화요금구조를 합리적으로 개편하는 한편 일반전화 설비비의 경우 전기통신 요금구조와 공기업 민영화일정등을 감안해 종합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보고했다.
  • 「2002 월드컵축구」 한·일 공동개최(쟁점)

    한국과 일본이 치열한 유치 경쟁을 벌이고 있는 20 02년 월드컵 축구대회 개최권을 놓고 한일 공동개최론이 새로운 이슈로 떠올랐다.월드컵대회의 한일 공동개최는 올해 초 일본측으로 부터 흘러 나왔으나 한국의 여론이 거세자 슬며시 들어갔었다.그러나 이번에는 한국측에서 공동개최론을 들고 나왔다.월드컵대회의 한·일 공동개최에 대해 찬반론을 들어본다. ◎찬성/경기장 신설 등 2천억이상 소요 큰 부담/「비용」절반 줄고 출혈경쟁없아 증진 한국과 일본이 유치 경쟁을 벌이고 있는 오는 20 02년의 월드컵축구대회 개최지를 놓고 한·일 공동개최론이 갑자기 대두됐다. 한국이 개최권을 따낼 수 있다는 보장만 있으면 그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출혈 경쟁을 벌이다 개최권을 따내지 못한다면 두나라의 우의에 금이 가고 국민들의 실망 등 후유증이 많이 뒤따르게 된다.따라서 공동개최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국제 스포츠대회의 성공적인 개최 여부는 그 나라의 국력과 비례한다.또 사회전반에 걸친 성장의 중요한 바로미터이기도 하다. 일본보다 경제력이 크게 뒤지고 사회기반이 약한 우리로서는 단독 개최가 그만큼 위험부담이 많은 것이다. 월드컵대회의 한일 공동개최를 바람직하게 생각한 데는 몇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는 두나라의 협력과 증진을 위해 필요하다.한국과 일본은 미우나 고우나 동반자 관계를 맺어오고 있다. 특히 양국은 21세기 태평양시대를 이끌어 가야할 입장이어서 앞으로도 계속 선린의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서로 소모적인 월드컵대회 유치 경쟁보다는 공동개최를 통해 더욱 우의를 다질 수 있을 것이다. 만일 한국과 일본이 공동개최를 하게 된다면 한나라에서 개최하는 것을 두나라가 분산 개최하면 국제축구연맹(FIFA)이 월드컵 개최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경기장 시설의 부담이 절반으로 줄어들게 된다. 한국이 단독 개최를 할 경우 5∼6개의 경기장을 신설해야 하며 비용만도 2천억원 이상이 필요하다. 이 경우는 일본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공동개최를 하게되면 양국이 현재의 시설만으로 충분히 치를수 있다는게 양국의 월드컵유치위원측의 얘기다. 아울러 양국의 합의에 따라 유치경쟁에 드는 비용을 아시아 축구발전의 기금으로 활용한다면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다음은 개최권을 따내지 못했을 때의 양국 국민의 감정을 고려해야 한다. 겉으로 보이지는 않치만 정부는 물론 국민들 사이에서도 월드컵대회 유치를 놓고 지고 이긴다는 의식이 팽배해 있다. 두나라 국민간에는 역사적 문화적으로 뽈때 절대 져서는 안된다는 정서가 크게 작용한 까닭이다. ◎반대/한국은 일본 빛내주는 조연국 정락 안될말/「단독 유치」좌절되더라도 끝까지 추진해야 올림픽과 함께 「세계적 스포츠제전」으로 꼽히는 월드컵대회는 축구라는 단일종목의 대회이지만 세계에서 30억명 이상 TV수상기를 통해 관전하는 엄청난 규모의 빅이벤트이다. 우리는 88년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바 있어 월드컵대회 마저 개최한다면 또 한번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세계화의 기틀을 다질 수 있는 기회라 하겠다. 그런데 지난해 말부터 일본쪽에서 심심잖게 흘러나오던 월드컵대회의 한·일공동 개최론이최근 우리쪽으로 부터 나오고 있어 체육계는 물론 국민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다. 우선 월드컵대회를 한국과 일본 두나라가 함께 개최하게 된다면 일본보다 뒤늦게 유치경쟁에 뛰어들면서 내세웠던 ▲3회 연속출전을 포함해 월드컵대회 본선 4회진출을 한 아시아축구의 최강국이며 ▲88년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노하우를 지녔고 ▲지구상 유일의 분단국가로 월드컵대회를 통해 남북통일의 물꼬를 트겠다는 등의 명분이 무색케 된 셈이다. 특히 국민 대다수가 월드컵대회의 한·일공동 개최를 반대하는 의견이 여론 조사를 통해 나타난 현상인데 무엇 때문에 우리나라가 이 문제를 들고 나왔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만일 일본과 공동개최를 한다면 시설 교통 통신 관광 등 모든 면에서 열세인 한국은 일본을 빛내주는 조연국으로 전략할 것이 뻔하다. 20 02년 월드컵대회 유치는 국민의 희망이다. 올림픽에서 보여준 것처럼 월드컵대회를 개최하면 대회를 어느나라 보다 더 훌륭히 치를 수 있다고 국민들은 믿고 있다.우리나라는 또 그만한 역량을충분히 갖춘 국가이다. 두나라가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다 어느 한쪽이 유치권을 따내지 못한다면 그 나라는 유치 실패에 따른 후유증에 시달리게 마련이다. 그렇치는 않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단독 개최의 자신이 없어 공동개최 쪽으로 선회했다면 한일공동 개최가 성사되더라도 국민들로 부터 호응을 받지 못할 뿐더러 대회 자체가 외면당할 가능성이 크다. 한일공동 개최가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책일 수는 있다. 그러나 실패할 때 실패하더라도 단독개최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필요하며 결과에 승복하는 것이 스포츠 정신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의견 ○대일 국민감정 고려해야 신문선 (MBC 축구해설위원)=한동안 뜸하던 월드컵대회의 한일공동 개최론이 정치권에서 흘러나온 것은 지금까지 유치활동을 벌여온 유치원회를 비롯,축구관계자들을 김빠지게 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특히 공동개최론의 진원지가 정당의 실력자라는 점에 대해 심히 유감스럽다. 월드컵대회 유치는 이제 국민적 차원으로 승화된지 오래다. 이런 마당에한일공동 개최론은 말도 되지 않는다. 특히 일본과의 국민감정을 생각할 때 있을수 없는 일이다.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 조영증(프로축구 LG감독)=스포츠는 누가 뭐래도 정정당당히 싸우고 승자는 패자를 감싸고 패자는 승자에게 축하를 보내는 것이 기본정신이다. 그런데 공동개최는 승자도 패자도 없이 무승부로 끝내자는 얘기가 된다. 경기를 치르다 보면 무승부도 나올 수 있다.그러나 한일 공동개최는 싸움도 하기전에 합의로 경기를 마치겠다는 것인데 이것은 스포츠 정신에도 위배될 뿐만 아니라 관중을 기만하는 행위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로 밖에 받아들일 수 없다. ○아시아서 첫 시도해봄직 김호(프로축구 삼성감독)=지난해 미국 월드컵대회에 우리 대표팀을 이끌고 출전했을 때 월드컵대회는 한나라가 아닌 여러나라가 공동으로 개최하는 방안이 검토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개인적으로야 한국이 단독 개최를 한다면 축구인으로서 또한 국민의 한사람으로 더 없는 영광이다.그러나 현재 국제축구계에서 일고 있는 이같은흐름은 조만간에 현실로 나타날 것으로 여겨진다 . 그렇다면 한일공동 개최로 서로의 자존심을 살리면서 아시아대륙이 제일 먼저 월드컵 공동개최의 장을 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 “한­남아공 협력관계 급진전/양국 우호관계 자랑스럽다”

    ◎만델라 대통령 국회연설… 어제 이한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공화국대통령은 8일 『한국과 남아공의 관계는 초기단계에 불과하지만 멀지 않아 모든 분야에서 실질적인 관계가 이룩될 수 있을만큼 협력관계가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밝혔다. 만델라 대통령은 이날 상오 국회본회의 연설을 통해 『21세기초에는 아·태지역이 세계경제의 중심지로 부상할 것』이라며 『우리가 남아공과 주변지역,나아가 아프리카 대륙의 르네상스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한국과의 우호관계를 돈독히 하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김영삼 대통령은 이날 아침 청와대 상춘재에서 만델라 대통령과 조찬을 나누며 양국의 관계증진방안등에 관해 폭넓게 의견을 교환했다. 만델라 대통령은 이날 낮 2박3일간의 방한일정을 마치고 특별기 편으로 이한했다. ◎만델라 대통령 국회연설 요지 우리는 새로운 세계의 탄생을 지켜보고 있습니다.평화,번영,조화 속에서 살 수 있도록 각국이 협력하고 노력하는 새로운 시대입니다. 미래는 국가간,지역간의 영원한 동반자 관계를 토대로 합니다.21세기초에는 아·태지역이 세계경제의 중심지로 부상할 것입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 르네상스를 시작하면서 한국과 우호관계를 돈독히 다지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 역시 한국과 같은 경제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에 여러분의 성공에 찬사를 보냅니다.우리 두나라의 민주화 투쟁을 지지해준 전세계 국민에 대해서도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우리 국민들은 그 어떠한 장애물도 민주화와 인권운동을 저지할수 없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남아공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이미 많은 진보를 이룩했습니다. 우리는 한국의 노력을 보면서 크게 힘을 얻고 있습니다.양국간 경제적 협력이 증가하고 있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두나라 관계가 지금은 초기 단계이지만 멀지 않아 모든 분야에서 실질적인 관계가 이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은 남아프리카의 13번째로 중요한 무역상대국입니다.비금속과 광물이 남아프리카의 주요 수출품이고 한국은 기계,섬유,의류,각종용품등을 우리나라에 수출하고 있습니다.이를 더욱 확대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민간의 과감한 노력으로 광범위한 잠재력을 실현시키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한국기업들이 이미 우리나라에서 주택사업 등 기업활동을 벌이고 있는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합니다.어제 양국이 서명한 문화협정과 과학기술협정은 공동의 목적을 이루는데 크게 기여하리라 확신합니다. 한국과 같은 빠른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균형된 거시경제의 촉매자로서 또한 감독자로서 정부의 관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남아공은 한국이 대외관계에서 새로 채택한 노선을 주의깊게 지켜보고 있습니다.우리는 아프리카 남부의 인접국들과 밀접한 협력관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멀지않아 한국민에게 강요되었던 국토분단이 해소되기를 바랍니다.남아공은 평화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한국의 노력을 전폭적으로 지지합니다. 양국은 지리적으로 먼 나라입니다.그러나 공동의 인간애,공동의 희망,평화와 정의와 민주주의를 향한 공동의 꿈들이 우리를 이웃으로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 「통일의 소망」 뱃고동에 싣고…/씨 아펙스호 청진항으로 떠나던날

    ◎남녘 동포애 한시라도 빨리 전달됐으면…/「우리의 소원」 가락속 힘찬 출항/실향민들 “마음도 함께…” 눈시울 【동해=조성호 기자】 「우리의 소원은 통일…」 25일 우리 쌀을 싣고 북한으로 떠나는 씨 아펙스호를 환송하는 동해항에 통일을 염원하는 「우리의 소원」이 울려퍼졌다. 국민들은 『6·25 발발 45주년을 맞은 바로 그 날 북한에 쌀을 보내게 돼 감회가 깊다』며 『하루 빨리 북한 동포들에게 골고루 나눠졌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중앙 부두에서 비가 내리는 가운데 하오 5시부터 시작된 「우리 쌀 북한수송 출항행사」는 통일원 송영대 차관의 경과보고,농림수산부 최인기 장관의 「정부양곡 인도증」 전달 등에 이어 화동 김상년군(10·송정국교 3년)이 김예민 선장에게 꽃다발을 걸어주는 것을 마지막으로 20분만에 끝났다. ○…씨 아펙스호는 5시20분 쯤 북평고교 밴드부가 연주하는 「우리의 소원」에 맞춰 고동을 울리며 출항했고,시민들은 박수와 환호로 환송. 행사장에 나온 표성례 할머니(73·동해시 천곡동 주공 5차아파트)는 『6·25 전쟁이 한창이던 28살 때 남편과 함께 월남,동해시에서 살았다』며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또 『평양에는 남동생을 비롯한 친인척들이 많이 산다』며 『쌀을 싣고 가는 배에 내 간절한 마음도 함께 실어 보내고 싶다』고 눈물을 글썽였다. 이모와 함께 부두에 나온 황선아양(9)은 『우리나라가 자랑스럽다』며 『하루 빨리 통일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동해항은 행사시작 30분전인 하오 4시30분부터 갑자기 번개와 천둥이 치는 등 폭우가 쏟아지다 출항 뒤인 하오 5시30분 쯤 그쳤다. ○…빗속에서도 씨 아펙스호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아 행사장 주변 곳곳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기도. ○…씨 아펙스호는 행사에 앞서 환송객들을 위해 7개의 화물창고 가운데 1개를 활짝 열어 화물칸에 실려있는 쌀을 공개해 박수를 받았다. ○…동해시청은 행사 준비를 위해 상오 비상연락망을 통해 전 공무원을 출근시켰고 동사무소는 출항하는 씨 아펙스호를 보려는 주민들을 위해 군용 및 관용버스,쌍용양회 동해공장의 통근차 등 23대의 버스를 동해항 노선에 긴급 배치. ○…우리 국적선으로는 분단 이후 처음으로 북한 항구에 입항하는 「씨 아펙스」호는 동해항을 떠나 12마일 밖 영해까지 해양결찰대 소속 경비정 4척의 호위를 받았다. 그 이후에는 해군 함정이 레이더로 항로를 점검하며, 북한 영해에 들어서면 북한 당국의 지시를 받게 된다. 씨 아펙스의 항해거리는 약 2백80마일(약 5백30㎞)로 최고 12노트로 달려도 목적지인 청진항까지는 24시간 이상 걸린다.
  • 6·25 45주년을 맞으며/이호철 작가(일요일 아침에)

    강원도 동해항에서 태극기를 단 국적선이 남북분단 이후 처음으로 2천t의 쌀을 싣고 북한 나진 항을 향해 첫 출발할 예정이다.이어서 3천t,5천t급 우리 국적선들이 잇따라 남한 곳곳에서 쌀을 싣고 목포·군산·마산항 등지를 출발,북한측이 지정한 남포·원산·청진·나진항 등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금년 6·25 45주년의 뜻은 바로 이 엄연한 사실로 함축되지 않을까.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너무 기이하다.하필 어째서 6·25인가.하필 어째서 6·25 45주년을 맞아 북한에 가게 되는가. 하늘의 뜻 같은 것이 문득 와닿는다.45년 전,바로 이날에는 똑같은 최단거리 항로로 무시무시한 남침이 자행되었던 것이다.그리고 이날 이때까지 1백55마일 휴전선을 비롯한 남북 대치 상황은 애오라지 철통처럼 이어져 오기만 했던 것이다.아아,그렇다.이게 하늘의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보도에 따르면 동해항에 첫 도착한 쌀은 강원도 고성에서였다고 한다.이 점도 남달리 뭉클하게 와닿는다.역시 그렇지,그 곳은 45년전 6·25때까지는 북한 체제에 속해 있었고,지금도그 지방에는 6·25 피난민들이 가장 많이 터를 잡고 살며 몽매에도 잊지 못하는 고향하늘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그이네들이 어찌 이 일에 화끈하게 나서질 않을 것인가. 김영삼 대통령도 「남북관계 해빙의 대전기」를 획하게 된 남북한간의 쌀 협상이 타결되고 나서 지난 22일,『앞으로 더 주겠다.보유량 중 여유분이 없으면 외국에서 사서라도 주겠다』고 언명했다. 요컨대 이일에 화끈하게 들어서는 데는 위 아래가 없고 정부당국과 민간의 차이가 없는 것이다.굶기 직전의 북한 동포들에게 쌀을 보내주자는 일에 어느 누가 망설인다는 말인가.다만 여기서 다음 두가지 사실만은 명백하게 못 박아두어야겠다. 그 첫째는 이 쌀이 과연 남쪽 민초들의 뜻대로 정말로 굶주리기 직전의 북쪽 민초들에게 가 닿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사실은 북쪽의 민초들도 벌써 환히 알고는 있을 것이다.남쪽 동포들이 1차분으로 1천8백억원어치나 되는 쌀의 일부를 보내주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런 소식은 공기 알갱이의 기별과도 같은 「눈치」로 이미 훤히 꿰고 있는것이다.그것이야말로 유구하게 이어져 내려오는 바로 민초들,백성들의 지혜인 것이다.이것을 모르거나 소홀히 여길때 그 권력은 볼장 다 보게 된다.반드시 망한다.이 이상의 만고의 진리가 없다.남쪽 쌀이 들어왔다는 것을,남쪽 민초들의 피와 땀이 어린 갸륵한 정성이 가 닿은 것을 추호나마 속이려고 들거나 어물쩍하게 넘기거나 왜곡하려고 들때는 하늘의 철퇴가 내려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금년 초에 귀순한 한 농업 전문가는 『남한 정부가 북한에 쌀을 지원해주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김정일은 남한이 준 쌀을 끝까지 숨기면서 인민들에게 나누어 주지도 않고,설령 나누어준다 해도 자신의 은덕으로 선전하는데 이용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었는데,설마 그러기야 할까.아무리 악독한 권력자라 할지라도 그런 종류의 행태 끝이 어떠리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선전? 선동? 그런 것들은 벌써 오래 전에 끝장나 있는 정보화 시대인 것이다.아무리 알 길을 막으려 들어도 막아지지 않는 것이 작금의 지구촌 세계이다. 둘째,이번 「쌀협상」에서도 북한측은 안간힘으로 우리 「당국」과 민간을 분리시키려고 하였는데 북한 당국의 그 저의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을, 우리 남쪽의 민초들은 이미 속속들이 훤히 꿰고 있다.그리하여 이 자리서 다시 한번 분명하게 밝히거니와 이제 이 남쪽 세상은 이런 문제에 관한한 「당국」과 「민간」이 따로 없고 우리 국민 한사람 한사람이 바로 「당국」이기도 하고 「민간」이기도 한 것이다.얼핏 「난장판」처럼도 보일 터이지만 이틀 뒤에 있게 될 우리 지자제선거는 바로 우리 민초 한사람 한사람이 진짜 진짜 당국자임을 보여주고 바로 이 힘으로써 딱한 처지에 있는 북한 민초들을 도우려고 나선 것이다.
  • 변화기류속 「6·25」45돌(사설)

    6·25전쟁 45돌을 맞는다.이제는 기억도 희미해진 전쟁이지만 동족상잔(동주상잔)의 참담했던 그 아픔과 고통을 세월이 흘렀다해서 어느 누가 잊을 수 있겠는가. 최근 탈냉전의 국제질서속에서도 한반도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있으며 휴전선을 사이에 둔 남북한의 군사적 대치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다.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라 정전상태에 들어가 있는게 엄연한 우리의 현실인것이다. 6·25전쟁은 남북 통틀어 2백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고 전국토를 초토화 하였으며 1천만명이상의 이산가족을 만들어냈다.북에 의해 도발된 적화야욕의 이 엄청난 민족적 비극과 고통에 대해 당사자인 북한정권은 아직 한번도 반성과 사죄를 한 일이 없는 것은 유감이 아닐수 없다. 남북관계는 그동안 「기본합의서」가 채택되고 평양과 서울에서 여러차례 고위급회담을 가졌음에도 북한측의 무성의와 회피로 실질적인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그러나 최근 한국형 경수로 지원과 인도적 차원의 한국쌀제공이 성사됨으로써 남북한 관계의 새로운 변화가예고되고 있음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경수로지원이나 조건없는 쌀제공은 한반도에서의 평화정착을 희구하는 우리정부의 간절한 염원과 순수한 동포애의 발로임을 북한당국은 잊어서 안될 것이다. 북한이 진정한 평화를 추구한다면 순수한 인도주의적 차원의 남북 이산가족상봉과 노부모의 고향방문을 1차적으로 실현시켜야 할 것이다.분단의 땅 저쪽 지척에 부모형제와 고향을 두고 반세기 가까이 오가지 못하는 것은 얼마나 통한스런 일인가.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더 이상 미룰수 없는 일이라고 본다. 아울러 북한은 에너지·식량난의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회생시키기 위해 남북경제협력에 적극 나설 것을 촉구한다.21세기 아시아·태평양시대에 남북한이 경제협력과 교류를 통해 공동의 번영을 모색하는 일이야말로 세계평화에 기여하고 민족사의 위대한 전진을 기약하는 일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 미­대만/고위급 경제회담 정례화/79년 분단후 첫차관급회담서 합의

    【워싱턴 교도 AFP 연합】 미국과 대만은 정례 고위급 경제회담을 개최하기로 22일 워싱턴에서 합의했다고 미재무부 대변인이 전했다. 이 대변인은 양국이 지난 79년 국교를 단절한 이후 이날 처음으로 열린 경제문제에 관한 차관급 회담에서 그같이 합의했다고 밝히고 이 조치는 작년 9월 미국이 대만정책을 일부 완화한 후 시작된 양국간의 비공식 경제접촉과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22일의 차관급 회담에 관해 재무부 대변인은 로렌스 서머스 재무차관을 단장으로 한 미대표단과 허가생 경제부 부부장을 단장으로 한 대만정부 대표단이 재무부에서 만나 양국간의 경제 및 무역관계를 검토했다고 말했다. 이 대변인은 『양국대표단이 이 대화를 지속해야 하며 다음 회담을 대만에서 열기로 합의했다』고 전하고 『이 대화가 정례적으로 해마다 열릴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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