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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묘지·열사릉 교환참배(김삼웅 칼럼)

    ○유족 상호방문 성묘토록 남한이나 북한이나 일제시대 민족해방을 위해 투쟁하다 돌아가신 애국지사들을 모시는 성지가 있다. 우리는 서울 동작동의 국립묘지가 있고 북한에는 평양근교 신미리에 애국열사릉이 있다.서울 국립묘지의 애국지사 묘역에는 상당수의 항일지사가 묻혀있고 1995년에는 임시정부 요인 묘역이 새로 조성되었다.박은식 신규식 노백린 김인전 안태국선생 등 임정요인 44명의 유해가 임정묘역에 안장되었다. 1986년 9월 완공된 평양의 애국열사능에는 김규식 조소앙 오동진 양세봉 최동오 홍명희 이기영 선생 등이 묻혀있다.이곳에는 이승만 정권에 의해 처형된 조봉암 선생의 가묘도 있다고 한다. 서울 관악산 줄기 43만평의 대지에 자리잡은 동작동국립묘지는 조선조 단종에게 충성을 바쳤던 사육신의 제사를 모시던 육신사(六臣祠)가 있었던 곳으로 공작이 알을 품고 있는듯한 상서로운 기맥이 흐른다는 명당으로 꼽힌다. 평양시내에서 서남쪽으로 2㎞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애국열사릉은 오목한 분지가운데 돋아있는 곳에 위치한 전형적인 좌청룡 우백호의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으로 알려진다. 국립묘지와 열사릉의 풍수지리를 소개하자는 것이 아니다.새정부가 출범하면서 남북관계에 숨통이 트이고 각계 인사들의 방북의 발길이 잦아진다.리틀엔젤스의 평양공연에 이어 재벌총수도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넘는다고 한다. 국가가 가장 어려웠던 시절에 조국해방을 위해 한마음이 되어 항일전선에 섰던 선열들이 분단과 함께 남북으로 갈리고 사후에는 ‘이산가족’이 된 것도 비극인데 자손들이 성묘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아픈 일인가. 애국선열에 대한 국민의 도리를 생각해서라도 국립묘지와 애국열사릉에 묻힌 독립지사들의 유족이 교환방문을 통해 성묘할 수 있도록 남북한 정부가 길을 터야 한다. 국립묘지에 안장된 애국지사의 유족으로 현재 북한에 생존한 사람도 있을 것이며,애국열사릉에 묻힌 독립지사의 유족으로 남한에 생존한 사람도 많을 것이다. 남북한 정부나 양측 적십자사가 나서서 뒤늦게나마 유족이 선대(先代) 애국지사들의 묘소를 찾아 성묘를 할 수있도록 하는 것이 참다운 보훈의 정신이고 국민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항일지사는 민족동질성의 원형 분단 반세기를 넘기면서 남북한 사이에는 각가지 이질적 요인들이 켜켜히 쌓여가고 있다.이런 속에서 민족적 동질성을 찾는다면 일제강점기의 독립투쟁과 항일지사들의 존재가 아닐까 한다. 남과 북이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면서도 풍광좋은 터를 골라 애국지사들의 묘역을 만들고 성역화하는 것도 이런 연유때문일 것이다. 남북한 정부는 애국지사들의 보훈정신에서,그리고 인도주의와 겨레의 동질성 회복차원에서 이 일을 조속히 성사시켰으면 한다.그리하여 오는 광복절이나 늦어도 추석에는 남북의 애국지사 유족들이 판문점을 넘나들며 국립묘지와 애국열사릉에 묻힌 조상을 찾아 참배하고 성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白凡 재조명:2­1(정직한 역사 되찾기)

    ◎생애 재평가/利害­이념 초월… 독립­통일 헌신/애국단 의거·광복군 참전 지휘/상황논리 정치이익과 타협 배격/‘한국의 간디’ 역사성 부여해야 역사는 정직해야 한다.그러나 세계사는 일그러진 역사로 얼룩져 있다.세계사의 많은 갈등과 분쟁은 굴절된 역사의 산물이다.한국의 현대사에도 일그러진 역사가 있다.그중의 하나가 백범 金九 선생에 대한 잘못된 평가다. 백범의 독립운동은 과격한 테러에 의존했고 현실인식도 부족했다는 일부 지적이 있었다.그의 실패한 남북협상은 현실 정치가로서의 한계를 나타낸 것이라는 평가도 있었다.그러한 평가는 그러나 친일세력들의 식민사관과 백범을 죽인 권력집단의 인위적인 ‘평가절하 시나리오’의 한 부분일 뿐이다. 테러리즘 비난은 주로 ‘한인애국단’ 활동 때문이었다.백범은 애국단을 창설하고 애국단의 李奉昌 의사와 尹奉吉 의사의 의거를 지휘했다.그러나 애국단 활동을 테러리즘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일제 강점을 합법적 지배구조로 보는 민족 반역적인 친일 세력들의 식민사관에 지나지 않는다. 서울대학의 愼鏞廈 교수는 “애국단 활동은 침체된 독립운동을 부활시킨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강조한다.애국단 활동에 고무된 국내외 동포들은 임시정부의 중요성과 독립운동의 성과를 재인식하고 재정지원 등을 재개했다.그 결과 집세도 제대로 못내던 초라한 임시정부의 활동이 활성화됐다.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신뢰와 협조를 다시 얻어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이 활성화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1930년대 들어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은 꺼져 가는 불꽃과 같았다.일제가 조작한 1931년 7월의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으로 한국인에 대한 중국사람들의 증오와 적대행위가 만연되며 독립운동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尹奉吉 의사의 의거는 일본침략군에게 상하이(上海)를 점령당한 중국인들의 울분과 한을 풀어준 통쾌한 일이었다.중국 중앙군 사령관 장제스(蔣介石)는 “중국군 30만명이 해내지 못한 일을 한국청년이 해냈다”고 극찬했다.그후 중국은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 협조적이었다.애국단의 의거는 특히 국제도시 상하이·도쿄 등에서 일어났기때문에 한국민족의 독립운동을 전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역할도 했다. 백범은 국제사회의 냉엄함도 잘 알고 있었다.망명중 제국주의 열강이 중국을 어떻게 수탈하는 지를 체험을 통해 알았다.자주적 독립의 중요성을 절감했다.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광복군의 참전을 서두른 것도 자주적 독립을 위한 전략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보다 빨리 바뀌었다.광복군이 참전하기 전에 일본이 항복한 것이다.그는 백범일지에서 “일본의 항복은 내게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수년간 애써 참전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다.걱정되는 것은 우리가 이번 전쟁에서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래 국제간에 발언권이 박약하리라는 점이다”라며 아쉬워했다.프랑스의 드골 장군이 전후 프랑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연합군에 앞서 파리 입성을 고집했듯이 백범도 국제정세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있었다.그는 일본과의 전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자주독립이 보장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백범은 귀국후 독립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민족통일을 위해 헌신했다.통일한국만이 진정한 민족의 광복이라고 강조했다.일부는 백범의 이러한 통일노력을 공산주의 본질을 잘 몰랐던 현실 정치가로서의 한계라고 매도했다.그러나 그는 독립운동과정에서 이념적 갈등을 경험하면서 공산주의의 실체를 잘 알고 있었다.특히 중국에서 국공(國共)분열이 얼마나 참담한 비극이었는 지를 직접 눈으로 보았다.결국 분단국가가 성립되면 같은 민족간의 갈등과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통일한국의 건설을 위해 남북협상을 강행했다. 그는 정치적 이익과 이념을 초월하여 독립과 통일을 위해 일생을 받쳤다.그의 위대함은 상황이 불리한 줄 알면서도 정치적 이익을 위해 타협하지 않고 민족의 미래를 생각한 점이다. 그의 일생은 애국의 역사였다.그러나 현실정치는 그에게 참된 역사성을 부여하지 않았다.그러한 오류는 고쳐져야 한다.백범은 현대사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재평가되야 한다.그는 ‘한국의 간디’라 할 수 있다.백범에 대한 올바른 평가는 정직한 역사를 되찾는 일이다.정직한 역사는 민족의 밝은 미래를 보장한다.◎암살의 진상/이승만 정권­軍部 합작품 1949년 6월26일.그날은 비극의 일요일이었다.민족의 위대한 지도자 金九 선생이 암살된 것이다.분노와 애도의 물결 속에 온 겨레는 슬픔에 잠겼다. 백범은 7월5일 온 국민의 애도 속에 효창공원에 안장됐다.그의 죽음에 대한 진상도 함께 묻혀 버렸다.자신의 집무실 경교장(京橋莊)에서 당시 포병소위였던 안두희에게 피살됐으나 그 배후는 베일에 가려져 왔다. 안두희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그러나 1년도 못되어 석방된 후 육군에 복귀,대위까지 진급했다.후에 국회에서 그 사실이 문제되자 제대했다.그러나 자유당 정권의 비호아래 암살의 ‘정당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李承晩 정권이 4·19혁명으로 무너지자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민간차원의 운동이 일어났다.그러나 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후 진상조사활동은 거의 중단됐다.그 이후에도 활발한 활동은 없었다.곽태영·권중희·노송구씨 등에 의한 안두희 추적만 있었을 뿐 국가적 차원의 조사는 없었다. 본격적인 진상조사는 92년 11월5일 ‘백범 김구선생 시해 진상위원회(위원장 이강훈)’가 국회에 청원서를 내면서 시작됐다.국회의 청원심사소위원회(위원장 강신옥 의원)는 95년 12월18일 조사보고서를 발표했다.보고서는 안두희의 우발적 단독범행이 아니라 면밀하게 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 분담된 정권적 차원의 범죄였다고 결론내렸다. 안두희는 거대한 조직과 역할에서 하수인에 지나지 않았다.암살사건은 고급정보 브로커였던 김지웅이 전반적으로 조율했다.그의 지시를 받는 홍종만은 암살 하수인들을 관리했다.이들은 모두 정권적 비호를 받았다. 그러나 암살의 일차적 배후는 군부쪽 이었다.암살명령은 장은산 당시 포병사령관이 내렸다.김창룡 특무대장은 사건후 적극 개입했다.채병덕 총참모장,전봉덕 헌병부사령관,원용덕 재판장,신성모 국방장관 등은 사후 처리를 주도했다. 백범 암살에서 가장 큰 쟁점은 李承晩 전 대통령과 미국의 관련성이다.李 전대통령은 정권적 차원의 범죄라는 차원에서 도덕적 책임이 있다.사건후 개입한 것도 확인됐다.미국도 암살사건의 내막을 알 수 있었을 것으로판단된다. ◎안두희 ‘처단’ 朴琦緖씨/“정의 일깨우고 싶었습니다”/힘겨웠던 독방생활/김구 선생 떠올리며 감내/어려운 사람 잘 사는 세상 왔으면 朴琦緖(49)씨는 버스 운전기사다.보통 사람으로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다.그러나 그에게는 또다른 모습이 있다.金九 선생 암살범 安斗熙를 죽인 ‘정의의 사나이.’ 그는 정의라는 말을 좋아한다.安斗熙를 죽인 것도 사회의 정의를 일깨우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위대한 민족 지도자 金九 선생을 시해한 사람이 제명을 다하는 것은 역사의 정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1996년 10월23일.安斗熙는 朴씨의 ‘정의의 봉’에 맞아 죽었다.“옳은 일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죄의식은 크게 없었습니다.하지만 고뇌의 시간도 많았습니다.그러나 누군가 이 일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3년형의 판결을 받았다.감시 카메라가 있는 독방에서 생활했다.“교도소 생활은 힘들었습니다.추위는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귀와 발이 동상에 걸렸습니다.그러나 고통의 순간마다 金九 선생의 힘들었던 감옥생활을 생각했습니다.金九 선생과 비교하면 나는 얼마나 편한가라고 위로했습니다.”성당에 다니는 그는 성경과 백범일지,역사책 등을 많이 읽었다고 말했다. 그는 3월13일 사면으로 청주감옥을 나왔다.잠시 중단했던 운전대를 다시 잡았다.부천에 있는 소신여객 사람들은 그를 환영했다.“회사 노조원들의 석방운동이 고마왔습니다.광복회와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협회의 석방운동도 감사했습니다.” 출옥후 그의 집에는 조그만 변화가 나타났다.“아이들(딸 2명 아들 1명)의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그저 평범한 아빠로 보던 그들이 존경의 마음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살인자의 아내’라는 부담을 느끼던 아내도 자랑스런 남편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범한 운전기사로 남기를 원한다.그는 오늘도 피곤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태우고 김포공항과 월미도 사이를 달린다.“나의 버스를 타는 사람들은 대부분 어려운 사람들입니다.그런 사람들도 잘 살 수 있는 올바른 사회가 실현됐으면 좋겠습니다.”올바른 사회를 만드는 것이 金九 선생의 큰 뜻을 살리는 길이라고 그는 말했다.
  • “나의 오늘은 세계민주지도자의 승리”/金 대통령 訪美­이모저모

    ◎수행원에 “지금이 투자 적기 홍보하라”/아난,통일론 책 선물 받고 “시행은 내가” 【뉴욕=梁承賢 특파원】 金大中 대통령은 7일 새벽(이하 한국시간) 뉴욕에 도착,8박9일간의 미국 국빈방문 공식일정을 시작했다.金대통령은 숙소인 월도프아스토리아 호텔에 여장을 푼 뒤 곧 유엔본부를 방문,코피 아난 유엔사무총장을 면담하고 국제인권연맹이 수여하는 인권상을 수상하는 등 첫날부터 바쁜 일정을 보냈다. ▷유엔사무총장 면담◁ ○…金대통령은 이날 상오 7시부터 45분동안 코피 아난 유엔사무총장과 인도·파키스탄 핵문제와 북한문제를 놓고 환담했다.金대통령은 환담을 마치면서 자신의 저서인 ‘3단계 통일론’에 직접 서명한뒤선물했으며,아난 총장은 “책은 대통령이 썼지만,시행은 내가 하겠다”고 답례했다. ▲아난 총장=중요한 시기에 한국의 대통령이 돼 경제적으로 하기 어려운 결정을 해 온 것으로 안다.그런 결정의 결실이 이미 나타나고 있으며,위기극복 노력이 성공하길 기원한다. ▲金대통령=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인도·파키스탄의 핵실험 실시와 관련해 결의안이 채택된 것으로 안다.인도와 파키스탄이 포괄적 핵실험 금지조약에 가입하도록 촉구한다.북한이 얼마전 핵문제로 국제적 우려를 야기시킨 바 있어 이 문제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다. ▲아난 총장=핵비확산 노력이 문서로써 이뤄질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핵실험이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되거나 무기화되어서는 안된다. ▲金대통령=주유엔대사를 통해 인도·파키스탄의 핵실험을 강력히 규탄하도록 훈령을 내렸다.우리는 북한 핵문제에 단호한 태도를 갖고 있다.이미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선언을 채택했다.미국과 북한간 제네바협약에 따라 북한이 핵프로그램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대신 우리가 70%의 경비를 부담하면서 3개의 경수로지원 사업을 진행중이다.우리는 븍한에 지원할 것은 지원하는 양면정책이 지금까지는 매우 효과적이라고 자평한다. ▲아난 총장=유엔입장에서는 한반도가 하루빨리 정상화되길 바란다.분단상태가 오래 가서는 안된다. ▲金대통령=남북간 4년만에 베이징에서 이뤄진 정부관계자간접촉이 별로 성과는 없었으나 대화를 가진 것에 의미를 둔다.우리는 정경분리 원칙에 따라 많은 경제인과 문화·예술인이 북한을 방문하거나 방문할 예정이다.한국에서 가장 큰 기업인중 한사람이 소 500마리를 몰고 북한을 가는데,CNN이 생중계한다고 한다.남북관계는 일관성을 유지해 화해·교류를 달성하고자 한다.우리는 그동안 북한에 ‘햇볕정책’을 펼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첫째는 지난 91년 남북합의서 채택 이후 북한의 金達玄 경제부총리가 지원을 거의 애걸하다시피 했는데,이루지 못했다.두번째는 카터 전 미대통령이 성사시킨 남북정상회담이 94년 金日成의 사망으로 열리지 못한 것이다.우리는 지금도 남북관계 개선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아난 총장=유엔도 북한에 인도적인 원조를 제공하고 있다.북한의 어려운 상황을 모니터할 수 있다면 좀 더 도와줄 수 있을텐데 아쉽다. ▲金대통령=북한 농업도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북한을 효과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당사자는 한국이기 때문에 우리도 적극 참여하고자 한다.유엔은 한국을 탄생시킨 은인이고,6·25때 도와줘 고맙게 생각한다. ▷인권상 수상◁ ○…金대통령은 이에 앞서 숙소인 아스토리아호텔에서 열린 국제인권연맹 인권상 수상식 연설에서 “나의 정치적 생애와 끊을 수 없는 유대감을 갖고 있는 미국을 결코 잊지 않을 것”,“나의 오늘은 바로 여러분(국제인권연맹과 세계 모든 민주지도자들)의 승리” 등의 말로 감사의 뜻을 표시하며 자신의 경제위기 극복노력에 대한 미국측의 지원을 간접 호소했다. ▷경제외교◁ ○…金대통령은 또 수행원들과 8일 하오로 예정된 뉴욕증권거래소 연설문안을 재검토하면서 “뭐니뭐니 해도 우리가 미국에 온 것은 투자유치를 위한 것”이라며 방미 초점이 ‘경제외교’에 있음을 거듭 강조했다고 朴智元 대변인이 전했다.金대통령은 “증권거래소 조찬연설 때 각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미국측 인사들에게 한국의 경제개혁 조치들을 설명하고 지금이 대한 투자의 적기임을 적극 홍보해야 할 것”이라고 전수행원의 홍보요원화 필요성을 강조했다. 金대통령은 朴泰榮 산업자원장관에게 뉴욕에서 한국기업들이 주최하는 투자포럼에서 구체적인 상담이 이뤄지도록 적극 활동할 것을 ‘코치’하기도 했다. ▷기내 기자회견◁ ○…미국 도착에 앞서 金대통령은 기내 간담회에서 “이번 방미에선 무엇보다 경제외교에 가장 큰 역점을 둘 것”이라며 “한국의 경제회생이 미국과 아시아에도 이익이 되는 만큼 미국이 한국의 경제난 극복을 적극 지원해줘야 한다는 점을 솔직히 얘기할 것”이라고 밝혔다. 金대통령은 또 “미국투자가들에게도 한국의 새정부가 집권 100일만에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투자환경을 개선했음을 설명,상호이익을 위해 한국에 투자해줄 것을 강력히 요청할 것”이라고 말했다. 金대통령은 미국의 협력을 얻기 위해 “무엇보다 한국이 아시아에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병행 실천해 나가는 모범이 되겠다는 의지를 전할 것”이라고 밝히고 한반도 평화정착과 대북관계 발전 문제도 주요의제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동안 야당총재로서 미국을 방문하다 대통령이 돼서 방문하게 된 감회를 묻자 金대통령은 “나보다도 미국의 많은 내 친구들이 그동안은 항상 나를 걱정해 주는 입장이었는데 아마 이번에는 신기하고 감회가 클 것”이라고 말해 ‘미국 친구들’에 대한 자랑스러움을 내비쳤다.
  • 반민특위의 좌절과 개혁세력(金三雄 칼럼)

    초하의 6월이 열리면 우리는 6·25한국전쟁과 반독재 6월 민중항쟁을 생각한다. 한국 현대사의 물굽이를 바꾼 큰 사건이다. 그런데 6월이면 잊어서는 아니 될 또 하나의 사건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앞의 두 사건에 못지 않는 사건이다. 단재 신채호의 필법을 차용하여 ‘한국현대사의 제1대사건’이라면 무엇일까. 해방 건국 분단 전쟁 4월혁명 5·16쿠데타 10월유신 10·26사태 5·17쿠데타 광주항쟁 여야정권교체 등, 안정된 사회라면 1세기에 한번 겪을까말까할 일을 우리는 숨돌릴 틈도 없이 무수히 치렀다. 그 ‘다사다난(多事多難)’중에 정신사적으로나 정치사회적 측면에서 국민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건의 하나는 이승만 정부의 반민특위 해체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민족을 배반한 반역자들을 하나도 처벌하지 못하고 친일세력이 건국과정과 그 이후 권력의 핵심으로 자리잡으면서 사회정의와 민족정기가 설자리를 잃은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학계에서 ‘6·6사건’으로 불리는 친일경찰의 반민특위 습격사건은 1949년 6월6일 상오에 자행되었다. ‘웃어른(이승만)’의 양해를 받은 무장경찰은 관할인 서울 중부서장 윤기병의 지휘로 반민특위 사무소를 습격하여 요인들을 체포하고 기물을 파괴했다. 시경국장 김태선 내무차관 장경근 종로서장 윤명운 등 일제경찰출신들이 중심이 된 만행이었다. 이날 경찰에 끌려간 특위 직원들은 심한 고문을 당하고 많은 관련 자료가 폐기되었으며 지방의 특위 사무소도 피습되어 업무가 마비되었다. ○청산하지 못함 반민세력 국민적 환호와 기대를 받으면 진행되던 반민특위의 친일파 청산작업은 이렇게 하여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반면 친일파들은 이승만과 결탁하여 뿌리를 내리고 군사정권과 문민정부를 거치는 동안 가지를 쳐서 기득세력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반민특위를 와해시키려는 친일세력의 공작은 집요했다. 이들은 반민특위인사들을 ‘빨갱이집단’이라 음해하면서 정신적 지주인 김구를 살해하고 국회프락치사건을 일으켜 항일독립운동 세력을 제거했다. 친일파들이 독립운동가들을 완벽하게 제거한 6·6사건의 진상은 독재치하에서 묻혀지고, 식민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부끄러운 역사가 반세기 동안 이어지게 된 것이다. 50년만의 정권교체로 집권하게 된 김대중 정부의 책임과 사명은 막중하다. 현실적으로는 경제를 희생시켜 IMF체제에서 해방되는 일이며, 역사적으로는 반민특위의 좌절이래 전도된 가치관과 사회정의를 바로 잡는 일이다. ○개혁, 반민특위 정신으로 친일세력에 뿌리를 둔 수구세력은 그동안 키워온 인적 물적 기반을 바탕으로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들은 김대중 정부의 개혁을 훼방하고 국가적 위기상황에도 눈을 돌린채 기득권 유지에 연연하면서 사사건건 개혁의 발목을 잡는다. 반민특위의 좌절로 지난 반세기의 역사가 독재와 불의로 점철되었듯이 김대통령의 개혁이 실패하면 역사는 또 얼마나 가혹한 시련을 안겨줄 것인지, 수구세격은 이를 외면하는 것이다. 하루빨리 김대통령의 개혁의지를 뒷받침할 컨트롤 타워로서의 개혁주체(세력)가 형성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청산할 것은 청산하고 개혁할 것은 개혁하여 국난을 극복해야 한다. 뼈저린 반민특위 좌절의 역사는 한번으로도 족하다.
  • 백범 金九의 현재적 의의/李萬烈 淑大 교수·한국사(기고)

    백범 金九는 우리 근·현대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민족지도자의 한 분이다.그는 최근 어느 대학의 여론조사에서 복제(複製)하고 싶은 인물중 최다수를 얻었던 데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일반 국민으로부터 최고의 존경과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손수 쓴 ‘백범일지’가 수십종의 판본을 갖고 있으며 광범한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백범은 존경을 받은 만큼 관심의 대상은 되지 못했다.그에 관한 연구는 미미하고 묘소에는 참배객이 거의 없으며 기념사업회는 셋방살이를 면치 못한채 역대 정권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해방 후 우리사회를 주도해 온 기득권층과 분단세력 그리고 그들의 지원을 받는 제도언론은 철저하게 그를 소외시켰다.다음 사례들은 이를 증명한다. ○제도언론 백범 연구 외면 지난 4월24일 세종문화회관에서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협회’ 주최로 ‘남북협상 50주년 기념 강연회’가 열렸다.1948년 4월 하순에 단독정부 수립을 막기 위한 최후의 노력으로 개최되었던 ‘남북협상’이 50년만에 처음으로 대중 앞에 소개되는 순간이었다.남북협상이 당시 비현실적이었다 할지라도,민족사적으로는 다른 평가를 받고 있다.역사의식을 말할 수 있는 언론이라면,그 강연회를 적어도 취재의 대상으로 삼아야 했다.그러나 어떤 언론기관이나 정부 관계자도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작년 10월 같은 장소에서 개최된 ‘백범 김구선생 탄신 12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도 마찬가지였다.대회장이 꽉 메워졌지만 언론기관이나 정부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그때 학술대회 사회를 맡았던 필자는 청중들을 향해 “이것이 바로 오늘날 백범이 우리사회에서 어떻게 대접받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증거”라고 분노를 터뜨린 적이 있다. 백범을 가장 존경한다는 金泳三 대통령은 취임하던 해 백범의 기일(忌日) 아침 일찍이 효창공원의 백범묘소를 참배했다.전·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이다.金 전대통령은 백범기념관 건립을 위해 한때 담당 비서관까지 지정했으나,그뒤 어떠한 계획이나 진척도 보여주지 않았다.이렇게 된 것이 그의 뜻이었는 지,그를 보필하는 관료들의 반대 때문이었는 지 확인할 길이없다. 백범은 민족독립운동과 통일국가운동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지도자다.그의 사상은 조국의 ‘완전자주통일독립’과 ‘문화국가’의 실현으로 요약된다.완전자주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통일이 급선무요 필요조건이다.통일 없이는 완전자주독립은 물론 문화국가를 실현할 수 없다.우리시대의 민족사적 과제는 백범이 실현하려다 중단된 그같은 이상을 창조적으로 계승함에 있다.그래서 백범사상은 우리시대가 실천해야 할 민족사적 과제의 정확한 목표다. 백범은 임시정부 시절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좌우의 독립운동단체 및 정파간의 협력과 일치를 일궈냈다.해방 후 완전자주독립을 위해서는 반탁운동에 앞장섰던 그가,조국이 두 동강으로 쪼개질 급박한 상황에서는 과거의 찬탁세력과도 협력하여 분단만은 막아야 한다고 분연히 일어섰다.이렇게 완전자주통일독립을 위해 협력과 공존을 구사하던 그의 방략은 이데올로기와 혈연·지연 등에 의한 분열을 거듭하고 있는 오늘날의 세태에 따가운 경종이면서 좋은 귀감이다. ○통일없이 완전 독립 없다 우리세대가 민족사에 기억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통일을 이룩하여 완전자주독립과 문화국가의 이상을 실현해 내야 한다.그런 의미에서 백범은 남북,동서의 겨레 전체가 우러러보면서 귀감삼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스승이요,민족적 지표를 제시한 지도자다.바로 여기에 그의 현재적 의의가 있고,오늘의 입장에서 그를 재조명해야 할 이유가 있다.
  • 白凡 재조명:1/金九 연구 어디까지(정직한 역사 되찾기)

    ◎그의 죽음은 ‘불행한 역사’의 시작/일그러진 권력의 바람에 참역사의 불꽃 스러지고/식민유산 씻을 주체 상실 평화통일론 어둠속 유배/국가차원 연구후원 全無 이젠 정당한 평가 필요 백범 金九 선생은 우리 현대사의 거인이다.순수한 열정으로 조국의 독립과 민족통일을 위해 헌신했다.온갖 어려움속에서도 임시정부를 이끌며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됐다.독립후에는 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해 앞장섰다.그러나 그는 1949년 6월26일 암살됐다.타계한지 거의 반세기가 지났지면 현대사는 그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국민의 존경을 받았지만 권력은 그를 왜곡했다.이제 그는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로 역사의 제자리로 돌아와야한다.정직한 역사를 되찾기 위해 金九 선생을 재조명한다. 어둠의 시대에 등불이었던 민족의 큰 스승 백범 金九.그는 일제식민통치의 암울한 시대를 끈질긴 생명력으로 밝혀온 민족의 등불이었다.그의 헌신적 민족사랑은 조국독립이라는 찬란한 불빛으로 빛났다.그러나 그 불빛은 정의의 역사로 승화되지 못한 채 일그러진 권력의 바람에 꺼지고 말았다.그의 비극적 죽음은 ‘정의의 역사’가 현실에서 패배한 민족의 비극이다. 그는 1949년 6월26일 안두희에게 암살됐다.암살범은 일본인이 아닌 그가 사랑했던 같은 민족이었다.그러나 ‘암살범’은 안두희라는 개인이 아니었다.그는 거대한 음모의 한낱 조연에 지나지 않았다.金九 선생은 권력에 의해 조작된 제도적 폭력에 희생된 것이다.권력의 하수인이었던 안두희의 총성은 일그러진 현대사의 시작을 알리는 ‘조종(弔鐘)’이었다.결국 잘못된 현대사에서 파생된 권력의 폭력은 5·18 광주민주항쟁도 무력으로 진압했다. 金九 선생을 죽인 권력과 친일세력들은 그를 낡은 역사속에 묻어두려했다.그들은 金九 선생의 최고 가치였던 독립과 민족통일론을 매도했다.그의 평화통일론은 냉전체제속에 공허한 메아리가 됐다.그는 자유당 정권에 의해 현실에서의 ‘패배자’로 왜곡됐다.자유당정권은 그의 자서전 ‘백범일지’의 출판도 금지시켰다. 그는 朴正熙 대통령과 그이후 全斗煥·盧泰愚 정권에서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군사정권들은냉전체제의 분단상황에서 백범의 민족통일론을 외면했다”고 창원대학의 都珍淳 교수(한국사)는 말했다. 金九 선생을 죽게한 일그러진 현대사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현대사의 첫단추가 잘못 끼워졌기 때문이다.마땅히 단죄됐어야 할 민족반역자 친일세력들이 해방후에도 부와 권력의 핵심을 차지한 것이다.백범의 죽음은 일제식민통치의 유산을 청산할 주도세력의 상실을 의미했다.그러한 불행한 역사과정은 민족정기와 사회정의를 무너뜨리며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왔다. 굴절된 현대사의 어둡고 긴 그림자 속에서도 백범은 일반대중들의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로 추앙받아왔다.SBS방송 조사결과,金九 선생은 광복이후 50년동안 한국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나타났다.그는 고대 신문이 실시한 가장 복제하고 싶은 인물조사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백범은 국민들에게는 가장 존경을 받으면서도 권력에 의해 의도적으로 평가절하된 독특한 위치에 있었다.현대사가 권력지향적 사회였기 때문에 백범연구는 활발할 수 없었다.문민정부에 들어와 그의 연구는좀더 적극화됐지만 국가차원에서 그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은 거의 없었다.일부 정치세력이 그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려 했을 뿐이다.가장 존경받는 지도자이면서도 그의 기념관도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중국에서 돌아와 업무를 보고 임시정부 국무회의까지 열렸던 경교장(京橋莊)의 복원도 불투명하다.그가 서울에 설립했던 2개의 ‘초등학교’ 등 교육기관들은 흔적조차 없어졌다.백범 푸대접은 정통성이 약한 과거의 권력이 그의 영웅화를 두려워하고 그의 통일론과 분단상황이라는 현실과의 괴리 때문이었다.그러나 냉전체제도 무너지고 金九 선생에 각별한 존경과 관심을 갖고 있는 金大中 대통령의 등장으로 새로운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都교수는 예상한다. 金九 선생은 국가적 차원에서 올바른 역사의 제자리로 돌아오게 해야한다.그것은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중요한 일이다.역사를 왜곡하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백범의 올바른 평가가 이루어지면 세계사적 보편성을 갖는 그의 열린 민족주의와 삶의 철학은 세계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미래에도 ‘등불’이 될 것이다. ◎죽음을 초월한 생애 ▲1876년(고종13년) 해주에서 탄생 ▲1893년(18세) 동학에 입도 동학접주가 됨 ▲1896년(21세) 황해도 치하포에서 변장한 일본인 쓰치다 때려 죽임. 해주감옥에 감금됐다 인천으로 이감 ▲1898년(23세) 인천감옥 탈옥.마곡사에 들어가 승려가 됨 ▲1904년(29세) 최준례와 결혼 ▲1909년(34세) 안중근 의사 의거 관련자로 체포됐다 석방 ▲1919년(44세) 31운동 직후 상하이(上海)로 망명.임시정부 경무국장 취임 ▲1923년(48세) 임시정부 내무총장 취임 ▲1924년(49세) 부인 최준례 여사 사망 ▲1926년(51세) 임시정부 국무령에 선출 ▲1930년(55세) 이동녕·안창호·조완구·조소앙 등과 한국독립당 조직 ▲1932년(57세) 이봉창 의사의 日王 저격,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 지휘.상하이에서 자싱(嘉興)으로 피신 ▲1933년(58세) 중국의 장제스(蔣介石)와 만나 낙양군관학교에 한인훈련반 설치 합의 ▲1935년(60세) 난징(南京)에 학생훈련소 설치 ▲1938년(63세) 호남성 장사로 피신.민족진영3당 통합을 논의하던중 이운환의 저격으로 중상 ▲1939년(64세) 어머니 곽낙원(81세) 여사 사망 ▲1940년(65세) 임시정부 주석으로 선출 ▲1941년(66세) 대한민국 건국강령 제정.대한민국 임시정부 명의로 대일선전포고 ▲1945년(70세) 중국에서 귀국.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반대하여 신탁통치반대운동 전개 ▲1947년(72세) 제2차 반탁운동 전개.인재 양성을 위한 건국실천원양성소개설 ▲1948년(73세)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하는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발표.남북연석회의 위해 평양방문후 귀국 ▲1949년(74세) 백범학원·창암학원 설립.6월26일 육군소위 안두희의 저격으로 서거.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추서 ▲1969년 남산에 동상 세움(서거 20주년) □특별취재반 ▲특집기획팀=羅潤道 팀장,李昌淳·李穆熙 차장,金聖昊·任昌龍 기자 cslee@seoul.co.kr
  • 方基中 연세대 교수 역사학대회 발표논문 요지

    ◎分斷史學 극복 ‘대등통일’ 전제돼야 역사교육연구회(회장 李範稷)가 주관하는 제41회 전국역사학대회가 서울광진구 건국대학교에서 열리고 있다.29일부터 시작해 30일까지 계속될 이번학술대회의 주제는 ‘통일과 역사교육’.다음은 연세대 사학과 方基中 교수가 발표한 논문 ‘통일문제와 한국사학의 과제’의 요지다. 남북한은 분단모순과 민족모순에서 비롯된 체제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분단현실을 극복하고 새로운 민주적 통일국가와 사회체제를 수립해야 한다.역사학계에서도 현대 한국사학의 성격을 통일문제와 관련해 살펴보고 ‘통일사학론’의 진전을 위한 논점과 과제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양체제 모두 불구의 발전 한반도의 분단은 이질적인 사회구성을 수반한 체제적 분단이자 민족모순의 산물이다.이러한 분단의 이중적 체제대립성은 분단형성 과정에서 배태됐다.분단이 장기화하면서 그 체제적 이질성은 정치경제적인 측면뿐 아니라 문화양식과 의식구조에 이르기까지 심화됐다.바로 이 분단모순에 의해 남북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불구적인 발전을 겪었고,이제는 남북 모두 체제위기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이러한 상황은 휴전협정에 기초한 준(準)전시상태라는 긴장관계에 기반을 둔다.그런 만큼 민족통일에 관한 일반원칙은 이같은 분단구조의 현실적 특수성을 바탕으로 장기적인 안목에서 신중하고 현실성 있게접근해 세우지 않으면 안된다. 우선 이미 합의된 통일의 일반원칙,즉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대등통일 원칙을 남과 북 양측에서 재확인하고 이에 부합하는 실제적인 정책과 여론조성을 단계적으로 현실화하는 것이 필요하다.또한 민족연대의식과 호혜주의에 입각,남북이 당면한 체제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협조해야 한다.그리고 통일사업을 진전시키기 위한 전제로서 남북 각기 대등통일관에 부합한 민주주의 개혁을 수행해야 한다. 남북의 한국사학은 상호 대립적인 남북 양체제의 이념과 사상을 담지한 분단사학으로 전개됐다.여기서 분단성은 반공이념과 반제(反帝) 혁명이념에 입각한 남북의 지배적 역사인식의 이질성을 뜻한다. ○남북한 역사인식 이질적 상호 지배체제를 옹호하고 있는 양자는 역사관과 역사인식을 근본적으로 달리하면서 결과적으로 분단체제의 유지와 흡수통일론의 유포에 기여하고 있다.한편 남한사학 내의 극우반공주의 역사인식과 진보적 역사인식 사이의 이질성도 눈여겨 보아야 한다.남한사학의 경우 반공적 역사학·역사인식의 공세와 순(純)경제적 관점의 근대화론의 유포는 심화되는 반면,문화주의사학의 개방적·통일지향적 역사인식은 완화되고 있다.이러한 분단사학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분단사학’ 극복의 일반원칙으로서 민족공존의 원리에 기초한 대등통일이라는 민족통일의 일반원칙을 승인해야 한다.또한 통일사회를 전망하는 민족통합의 역사이념으로서 평화적·개방적·민주적 민족주의인 ‘열린 민족주의’를 수용해야 한다. ○통일지향 역사교육 강화를 우리는 이 ‘열린 민족주의’에 민주주의 이념을 적용한 ‘민족적 민주주의’를 통일을 위한 역사이념으로 삼을 수 있다. 통일에 대비하는 학계의 노력은 북한사학과의 학술교류 논의로 대표된다.남북학술 교류를위해서는 무엇보다 학계의 ‘통일사학’ 논의와 남북 학술교류를 전담하는 조직체를 구성하는 것이 긴요하다.또 남북을 포괄한 현대사연구를 활성화하고 통일지향의 역사교육 특히 현대사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 과거 청산과 미래 개척(대한민국 50년:21·끝)

    ◎이데올로기·개발독재 넘어 통일로/反民특위 “실종”… 건국 최초 과거청산 실패/‘제주 4·3’ ‘거창사건’ 아직도 어둠 속에/지역할거 정경유착 파당정치 악습 깨고 군사정권 시대 숱한 의문사도 밝혀내야 1948년 8월15일 신생정부 출범 당시의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약소국이었다.한반도 면적 22만1,487㎢ 가운데 3·8선 이남인 9만9,221㎢만 확보했고 인구도 2,002만명(48년 미군정청 추정치)에 불과했다.또 국민 가운데 80%가량이 농업 등 1차산업에 종사했고,그해 수출액이 2,230만달러에 그칠만큼 경제력도 볼품없었다. 정부수립 50돌을 눈앞에 둔 지금 대한민국의 자화상은 어떠한가.97년 말 현재 인구는 4,666만명,수출액은 1,361억6,430만달러,1인당 GNP는 9,511달러에 이른다. ○‘삶의 질’ 향상되지 않아 지난 50년동안 인구는 2.3배,수출규모는 6,106배로 급증했다.1인당 GNP는,가장 이른 통계치인 53년의 67달러에 비교해도 142배나 늘었다.가히 ‘세계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의 비약적인 성장’이라는 찬사가 부끄럽지 않은 양적 팽창이었다.그러면 이같은 성장이 우리 사회의 내적(內的) 발전이나 국민의 삶의 질 향상을 그대로 동반한 것일까.여기서 한국에 대한 외국의 시각을 잠깐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미국 의회도서관이 펴낸 책자 ‘South Korea’(92년 간)는 한국의 기본사항을 소개한 데 이어 ‘재벌 중심으로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었으나 독재정권 시대에 고착된 퇴행적인 정치질서에,통제받는 사회구조를 가진 나라’라고 덧붙였다.또 65만의 군대와 한해 100억달러(89년 기준)에 이르는 군사비도 주요항목으로 들었다.다른 나라의 일반적인 한국관을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미 의회도서관 책자의 표현이 비록 유쾌하지는 않지만,우리 현실을 상당히 정확하게 지적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대한민국 성장의 뒤안길에는 필히 청산해야 할 역사적 잔재가 누적돼 있기 때문이다.이는 정치·경제 등 사회 각 분야에서 구조적으로 드러나기도 하고,특정사건의 진상을 은폐·왜곡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정치 분야에서의 청산대상은 분단체제에서 파생한 반공이데올로기의 악용과 개발독재 논리이다.해방이후 정치의 흐름을 살펴보자.3년동안의 극심한 좌우대립 끝에 남과 북에는 상호 배타적인 정부가 들어선다.2년이 채 못돼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져 분단체제는 더욱 굳어진다.이후 한국에서는 李承晩 정부가 장기집권하고 그에 따른 부정부패가 만연한다. 4·19혁명이 일어나 민주주의가 되살아나는 듯 했지만 곧바로 5·16쿠데타로 무너진다.朴正熙 정권은 개발논리를 앞세워 독재권력을 무소불위로 휘두른다.군사정권은 全斗煥­盧泰愚 시대까지 이어졌지만 80년의 5·18광주민중항쟁,87년의 6월항쟁 등 국민의 극심한 저항에 부딪쳤고 그 결과 93년에 문민정부가,그리고 50주년이 되는 올해 국민의 정부가 탄생한다. 대한민국 50년 정치사를 일별하면,그것은 정치적 억압과 이에 맞서 민주사회를 추구한 국민의 대항으로 요약할 수 있다.그 과정에서 억압적 정권이 양손에 든 무기가 반공이데올로기와 경제개발 논리였다. ○가치관 대혼란 초래 남북이 체제의 존립을 걸고 대립하는데다 6·25라는 비극을 겪은 마당에 반공이데올로기는 필연적인 역사의 부산물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문제는 권력이 이를 정치적 대항세력을 억누르는 수단으로 악용한 점에 있다. 멀게는 한국전쟁 전의 ‘국회 남로당 프락치 사건’에서 가깝게는 지난 대선의 ‘吳益濟 월북 및 편지사건’‘흑금성 프로젝트’에 이르기까지 집권세력은 늘 ‘용공조작’을 통해 정적을 제거하려고 시도했고 대부분 목적을 달성했다. 朴正熙 정권이 들어서서는 경제성장을 내세운 개발독재 논리가 못잖게 위력을 발휘했다.국민 대다수가 절대빈곤에 시달리는 상태에서 ‘잘 먹고 잘 살려면 민주주의니 인권이니 하는 추상적 가치는 유보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는 쉽게 먹혀들어갔다.시민의식이 어느정도 성숙하기 전까지 ‘중단없는 전진’과 ‘잘 살아 보세’는 국민적 합의처럼 보였다. 이같은 정치적 적폐(積弊)는 지금도 파당정치·지역할거주의·정경유착 등 여러 유형의 악습으로 고착됐을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의식 형성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전통을 잇는 문화와 사상은 ‘전근대적’이거나 ‘비효율적’이란 이유로 외면받는 대신 출세지상주의·이기주의가 넘쳐나면서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왔다.재벌의 소유 집중,극심한 빈부격차 등 경제 분야의 해묵은 과제도 해결이 쉽지 않은 부분이다. 정치사의 굴절이 가져온 또다른 폐해는 역사적 진실의 은폐·왜곡이라 할 수 있다.대한민국 최초의 ‘과거청산 실패’사례로는 48∼49년에 걸친 ‘반민특위 사건’이 꼽힌다.일제강점기에 친일과 반민족 행위를 한 자를 처벌하고자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한 제헌국회는 곧이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한다.위원회는 반민족행위자 305명을 검거하지만 참다운 활동을 벌이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고 만다.친일파에 권력기반을 둔 李承晩 행정부의 반발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나쁜 선례는 길이 남게 마련인가.해방정국에서 수차례 벌어진 정치지도자 암살사건,6·25를 전후해 빚어진 ‘제주 4·3’이나 거창사건을 비롯한 양민학살,군사정권에서 발생한 민주인사·학생들의 숱한 의문사와 실종들이 아직껏 그 실상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로 어둠에 묻혀 있다. 사건 발생 자체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례도 있다.예컨대 49년 12월24일 경북 문경군에서 일어난 국군의 양민학살 건이다.미국 국립공문서 보존관리청(NARA)에서 최근 발굴한 주한미군 군사고문단 보고서에 나타난 실상은 이렇다. 육군 25연대 7중대 병력이 석달이라는 산간벽지 마을에 들어가 주민들을 모은 다음 빨치산에게 협조했다는 죄목으로 무차별 살해한다.보고서는 “(주민들이) 도발하지도 않았는데 카빈 소총·수류탄·바주카포 등으로 공격해 성인 86명,학생 9명,어린이 3명이 숨졌다.또 집 27채 가운데 23채를 불태웠다”고 밝혔다.이 사건이 세상에는 빨치산의 만행으로 알려졌다. 청산하지 못한 역사는 ‘민족의 성지’국립묘지에도 존재한다.문민정부 출범 초기인 93년 7월 국가보훈처가 金性洙·李甲成·尹致暎·李殷相·徐椿·李鍾郁·尹益善·全協 등 8명에 대한 친일행각을 조사해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이들은 모두 독립유공자로서 각종 훈·포장을 받았고 사회의 지도층인사로 행세했다.이 조사 역시 결말없이 끝났고 뒤이은 문민정부의 ‘역사바로 세우기’도 정치적인 의도라는 오해만 샀을 뿐 결실을 맺지 못했다. ○국민의 정부 특별한 책무 한민족이 빛나는 21세기를 향해 전진하려면 두가지 전제조건이 이뤄져야 한다.하나는 물론 통일이요,또 하나는 역사에 덕지덕지 낀 찌꺼기를 걷어내는 일이다.통일은 북한이라는 상대와 더불어 장기간에 해결해야 할 민족의 숙원이지만 잔재 청산은 우리의 의지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국민의 정부는 우리 현대사를 정화하는 데 앞장서야 하는 특별한 책무를 안고 있다.
  • 서울신문 제정 6회 공초문학상 수상 詩人 신경림씨

    ◎“문학의 임무는 현실 변화 담는 것”/우리가락·사회참여 거쳐 어머니 품으로 돌아와/체험 못살린 기교 위주 신세대 詩세계 안타까워 “공초선생과는 문학경향이 달라 처음엔 상받기를 주저했어요.그러나 작품세계가 달라도 작품 자체의 완성도를 잣대로 상을 준다는 말을 듣고 망설임이 줄더군요.” 덤덤한 수상소감.사람좋아 보이는 순박한 미소 뒤의 단단함.수상의 기쁨보다 자기 시세계에 더 애정을 쏟는 시인 신경림.그의 겸허에는 고집이 묻어있다. “문단의 존경을 받는 공초선배가 불교나 허무주의에 중심을 두었다면 저는 현실참여에 무게를 두면서 살아왔지요.서로 다른 시정신이 빚을 부조화에 대한 우려 같은 거죠” 우리 문학사에서 그가 남긴 자취는 크다.문학을 떠받치는 양대 축의 하나인 현실주의 흐름에서 그를 빼놓고 이야기 한다는 것은 힘들다. 농심(農心)의 한과 신명을 우리 가락에 절묘하게 담아 70년대 시단에 첫징소리(‘농무’)를 울린 뒤 그의 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체제에 버림받은 ‘못난 놈들’의 현장을 민요 가락에 실어 한올한올 뽑아내면서 ‘새재’를 넘었다.발로 뛰며 보듬어 온 변두리 인생에 대한 참여관찰은 장시 ‘남한강’이라는 절창을 낳았다.그러나 갑작스런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에서 비롯된 흔들림 앞에서 한동안 호흡을 고른다. “단재 신채호 선생도 나라를 걱정하는 글에서 지적했듯 우리 민족에게는 냄비기질이 있어요.저는‘시의 시대’라는 80년대의 불기가 사윈 정신적 배경으로 이 점을 지적하고 싶네요” 더 큰 목소리들이 잽싸게 변신을 모색하던 시절.시인은 다시 특유의 더딘 걸음으로 지난 날의 모습을 추스렸다.‘쓰러진 자의 꿈’을 달래가며 절망의 우물에서 작은 위안과 오래갈 희망을 길어 올린다.91∼92년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을 맡아 지친 문학계를 끌어안았다.다시 6년만에,법인체로 바뀐 이단체의 이사장으로 돌아와 문단의 버팀목을 맡고 있다. 그의 수상시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은 시인의 여정과 닮아 보인다.그러나 시인은 입을 다문다. “시가 설명되어 버리면 실패라고 생각해요.수상시도 그런 맥락에서 읽어주면 좋겠네요” 램프와 칸델라 시절을 거쳐 전등불로 바뀌면서 시인의 눈도 넓어졌다.대처로 나와 많은 것을 보고 들었다.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커지는 건 어머니와 할머니의 모습,그들이 재봉틀로 빚던 노동에 대한 기억이다.다시 램프 시절이 전부가 된 것이다.(‘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문학은 어차피 현실을 떠나서는 숨쉴 수 없다고 봐요.이런 점에서 달라진 상황을 직시하는 ‘실사구시’의 정신이 더 절실한 거구요.미몽에 사로잡힌 정치구호보다 현실의 변화상을 바로 보고 작품으로 얘기하는 게 문학의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적 구호로 급하게 달구어진 80년대에 대한 냉철한 반성이다.바뀐 세태를 시인은 어떻게 보는가. “IMF한파 여파가 우리같은 글쟁이들에게 심해요.작가들이 마음놓고 글쓸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게 ‘작가회의’의 과제이기도 합니다.하지만 좋은점도 있어요.상업주의에 편승한 문단의 거품을 뺄 좋은 기회죠” 상업성에 대한 시인의 경계는 곧장 신세대 작가들을 향한 우려로 나아간다. “감각과 기교만 난무하지 삶의 체험이 안보여요.시나 문학에는 체험이 실려야 합니다.요즘 젊은이들이 너무 테크닉에만 신경쓰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여기에는 자본의 상업성도 한 몫 한 것 같아요.” 후학들에 대한 웅숭깊은 기대와 걱정.수상시가 수록된 시집의 다음 구절과 그 울림이 같다. “…사람들이 모두 한곳으로만 몰려간다./ 떼밀리고 엎어지면서 뒤질세라 달려간다/ 바위만이 어깨 내밀어 길을 내주고 있다…/그 얼굴에 웃음 서글프다 그 /얼굴에 웃음이 아름답다” □주요 경력 △1935년 충북 충주 출생 △동국대 영문학과 졸업 △1956년 ‘문학예술’에 ‘갈대’ 등으로 추천 등단 △1973년 첫번째 시집 ‘농무’ △1979년 두번째 시집 ‘새재’ △1985년 세번째 시집 ‘달 넘세’ △1987년 장시 ‘남한강’ △1988년 네번째 시집 ‘가난한 사랑노래’ △1990년 다섯번째 시집 ‘길’ △1993년 여섯번째 시집 ‘쓰러진 자의 꿈’ △1974년 만해문학상 △1981년 한국문학작가상 △1990년 이산문학상 △1994년 단재문학상 △현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심사평/깨달음 과정속에 시인의 인생론 함축 공초문학상은 등단 20년 이상 되는 시인이 최근 1년동안 발표한 작품(시 혹은 시집)중 공초 오상순 선생의 문학정신과 이념에 걸맞는 시를 그 심사대상으로 삼고 있다. 심사위원 일동은 각자 후보자 2명씩 천거하여 그 추천의 변과 각 시인들의 특장 등을 논의한 뒤 3명으로 압축된 후보를 대상으로 면밀한 토의과정을 거쳤다.심사위원 일동은 그간 공초문학상이 한국 시단의 대가급 시인들에게 수여된 점을 주시하는 한편 권위있는 문학상일수록 중앙문단 중심적으로 운용되고 있다는 점을 적시하면서 지방문단에도 앞으로 넉넉한 관심을 보일 것을 촉구했다. 충분한 토의 뒤 심사위원 일동은 저마다 충분한 수상자격을 갖춘 3명의 후보자를 대상으로 무기명투표를 실시했는데 만장일치로 신경림 시인을 1998년도 제6회 공초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하게 되었다.수상작은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동명의 시집이 창작과 비평사에서 지난 3월 간행됨)이다. 신경림 시인은 70년대 이후 어두웠던 한국 정치사회적 현실에 대하여 시종 서정성 짙은 인간주의적 문학사상으로 서민대중들의 삶을 전통적인 민요 형식의 기법으로 형상화하여 현대 한국시문학사의 한 흐름을 형성시켰다. 특히 이번 수상작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은 시인 자신의 인생 여정이 ‘불’이라는 이미지의 변모로 축약되어 있는데,“멀리 다닐수록,많이 보고 느낄수록 / 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만 남는다는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노래하여 그간 시인의 추구해온 인생론이 미학적으로 절묘하게 진테제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공초사상이란 무엇일까.식민지와 분단시대의 모순과 갈등속에서 그 지향할 바를 허무혼을 화두로 삼아 암중모색했던 게 아니었을까 생각하면 그 허무혼이 이제 신경림 시인의 인생론과 접점을 이룬다는 게 오늘의 우리 시문학을 위하여 얼마나 큰 축복이겠는가. 심사위원 일동은 공초의 문학사상이 신경림 시인의 수상을 계기로 더 큰지평으로 열릴 것을 기대해 마지 않는다. 심사위원 章湖 李根培 任憲永 宋秀權 李憲淑
  • 소떼가 판문점을 넘으면(사설)

    鄭周永 현대그룹명예회장이 1천마리의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넘어 북한을 방문할 것이라고 한다.瑞山농장에서 방목으로 살찌운 소들에 대한 검역도 이미 마쳤고 소들을 싣고 갈 트럭까지 준비한채 다음달 초로 예정된 방북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 鄭회장과 소떼의 판문점 통과는 앞으로 남북간의 교류와 협력을 더욱 활성화시킬 새로운 전기(轉機)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국내외의 관심과 기대를 모으고 있다.鄭회장 개인으로서도 어린 소년시절 맨주먹으로 집을 나와 세계적으로 성공한 기업인이 되어 푸짐한 선물을 갖고 북의 고향을 찾는 엄청난 감회와 기쁨을 느낄 것이다.그러나 개인적인 성취를 넘어 鄭회장 일행의 판문점 통과는 분단후 민간 차원으로서는 처음이며 물자의 경우도 84년 북한이 남한수해지원품을 보낸 이후 처음이라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북한은 지난 94년 金日成의 사망이후 판문점에서의 남북간 접촉을 의도적으로 기피해왔다.판문점을 ‘화해와 대화의 장소’가 아니라 ‘긴장과 대결의 장소’로 부각시키려는 의도에서였다.경제협력이나식량·비료지원을 위한 남북간 접촉도 굳이 북경이나 제네바등 3국을 고집하고 인적·물적 교류도 중국을 거치거나 해상으로만 허용해왔었다.따라서 鄭회장일행의 판문점통과가 성사되면 판문점을 통한 남북간 대화가 다시 열리는 계기가 될 것이며 인적·물적 교류도 보다 편리하고 활발하게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가지 주목할 것은 판문점 통과의 성사가 金大中 대통령이 취임이후 천명해온 새정부의 남북교류원칙이 거둔 구체적 성과라는 점이다.金대통령은 인도적 대북지원 무조건 허용,경제 협력 자유,정부 대 정부지원만 상호주의적용등의 3대원칙을 제시했다.이는 그동안 남북간에 서로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만을 내세워 대화와 협력을 어렵게 만들어왔던 과거의 정책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난 실질적인 변화이며 북한으로서도 쉽게 거부할 수 없도록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鄭회장일행의 판문점 통과가 성사되어 판문점이 더이상 분단의 아픔이 아니라 남북교류의 통로가 되고 나아가 남북 화해와 대화의 장(場)이 되기를 바란다.좀 더 욕심을 낸다면 정회장이 89년 방북때 북한과 합의했던 금강산 개발계획까지 잘 마무리되어 북의 개방이 더욱 확대되었으면 한다. 단 이번 정회장의 방북이 행여 국내기업들의 무분별한 대북진출 경쟁을 재발시키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것이다.
  • 鄭周永 회장 새달 9일 訪北 의미

    ◎南北 민간차원 經協 활성화 신호탄/남북관계 개선 획기적 계기… 정상회담 실현 기대/분단후 처음 민간인 판문점 통한 왕래 물꼬도 터 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다음 달 9일 판문점을 통해 소떼를 몰고 북한을 방문하게 됐다.앞으로 남북한의 민간차원의 경제협력을 활성화하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진다.또 민간차원의 교류가 활성화되면 정부차원의 교류도 자연스럽게 활발해 질 전망이다.나아가 남북간의 정상회담 가능성도 보다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남북 분단이후 민간인이 판문점을 통해 방북(訪北)을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최근 리틀엔젤스 대표단이 북한을 방문한 것도 중국을 거쳐 이뤄졌다.90년대 초 남북간 고위급(총리)회담은 판문점을 통해 이뤄졌지만 정부간의 회담이었다.민간차원의 방북은 제 3국을 거치는 방북만 있었다.이번 방북은 결국 정부간의 접촉에서도 제 3국보다는 판문점을 거쳐 교류나 회담이 이뤄질 수 있는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됐다.그동안 북한은 판문점을 통한 방북 허용 문제를 두고 고민을 해왔다. 북한 당국은 鄭명예회장의 ‘새로운 방식’에 의한 방북을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강경파인 군부는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그 동안 판문점을 화해의 장(場)이 아닌 대결과 냉전의 장으로 이용해온 탓이다.북한의 군부는 鄭명예회장의 방북이 이뤄지면 판문점이 화해의 장으로 바뀌는 데다 북한 주민들이 한국측에서 소를 지원하는 것을 확실히 알수 있기 때문에 반대해왔다.하지만 날로 악화되고 있는 북한의 경제사정이 군부의 입김을 약화시켰다는 분석이다. 鄭명예회장은 방북하면 금강산 개발 등도 논의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鄭명예회장의 방북은 남북간 정상회담의 가능성도 그 만큼 높여줄 수 있는 것으로 예상된다.북한은 이에 앞서 지난 20일에는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를 통해 오는 7월26일 최고인민회의 제 10기 대의원대회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통상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대회를 거친 뒤 1개월이 지난뒤 1차 대의원대회를 열어 국가주석을 선출해왔다.때문에 빠르면 8월 말쯤에는 金正日 당 총비서를 국가주석으로 선출할 것으로 관측된다.그렇게되면북한에도 명실상부한 국가주석이 등장하게 돼 남북한 정상회담을 가질 수 있는 외형상의 ‘격’은 맞게된다는 지적이다. 康仁德 통일부장관은 지난 20일 도산아카데미 초청 조찬간담회를 통해 “남북 정상회담이 필요하지만 북한의 당 총비서와는 만날수 없다”고 말해 金大中 대통령이 金正日 총비서를 만나는 것은 격은 맞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었다.이에 따라 鄭명예회장의 방북이 무사히 이뤄지고 북한에 국가주석이 등장하게 되면 분단이후 첫 남북 정상회담의 그림이 구체화 될 것이라는게 관계자들의 조심스런 전망이다. ◎鄭씨 70년만에 소떼 몰고 고향으로/구제역 발생·북 미온반응으로 한때 긴장/수송 트럭 100대는 북한에 두고 귀환 “자유의 다리를 건너고 싶다” 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70년 만에 ‘소몰이 목동’으로 고향을 찾는다.우여곡절 끝에 소 1,000마리를 트럭에 싣고 판문점을 거쳐 내외 언론의 플래쉬를 받으며 북녘 고향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한민족의 화합을 위해 한사내가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열정일 지도 모른다. 鄭 명예회장이 고향 통천을 멀리하고 남녘으로 내려와 이룬 ‘세계 최고급의 자동차’를 몰고 고향 땅을 밟겠다던 염원을 마침내 이루게 됐다.그는 얼마전 자신의 회고록 출판기념회에서 “다이너스티를 타고 자유의 다리를 건너고 싶다”고 했다. 그의 ‘소박한 꿈’은 지난 4월 금강산 개발사업 등을 논의하러 북한을 방문했던 현대실무단(임직원 3명)에 의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이후 鄭명예회장은 “소 1,000마리를 몰고 북한을 방문하겠다”는 뜻을 각계에 전달했다.처음엔 반응이 좋았다.그러나 때마침 중국에서 발생한 구제역(소·돼지에 발생하는 치명적인 전염병)이 북한전역으로 확산됐다는 소문이 돌면서 鄭회장의 구상이 차질을 빚는 듯했다. 정부는 차로 소를 수송할 경우 수송차량 등이 구제역에 감염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우려했다.북한도 소떼의 판문점 통과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鄭회장의 염원은 ‘꿈’으로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이번에 수송차량을 북한에 두고 오기로 한 것도 이점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鄭회장의 소에 대한 애정은 남다르다.그가 어린 나이에 고향 산천과 부모를 뒤로 했던 것도 소때문이었다.鄭회장은 금강산 자락인 강원도 통천군 아산에서 태어났다.그가 호가 아산인 점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어려서부터 찢어지게 가난했던 당시 상황과 부모의 한을 그는 잊지 못한다. 그는 통천에서 두번 가출에 실패한 뒤 소 판 돈 70원을 훔쳐 마지막 가출을 시도했다.남쪽에 내려와 그는 오늘의 현대그룹을 일구었다.그래서 그의 남행은 소와 떼어 내 생각할 수 없다. 소 한마리만 있었으면….鄭회장이 충남 아산 목장에서 소를 키우기 시작했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인 지도 모른다.그는 94년 서산목장에 150마리의 한우를 방목하기 시작했다.이후 목장을 방문하면 축사를 먼저 둘러보곤 했다.이제는 1,700마리를 웃돈다. ‘북한으로 시집가는 鄭회장의 소들’은 논밭갈이에 사용될 것으로 알려졌다.鄭회장의 소는 1,000만 이산가족의 염원을 가슴에 안고 굳게 닫힌 북녘의 문을 두드리게 됐다.어쩌면 그의 방북은 인간 鄭周永과 분단시대의 상황이 빚은 이 시대의 축복이자 불행이다.
  • 가감없는 실체 규명을/許萬鎬 경북대 교수·정치학(기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올해로 18주년을 맞이한다.이제 ‘광주폭동’과 같은 왜곡담론은 어느정도 시정되었다.그리고 5·18은 국가기념일이 되고 5·18 특별법도 제정되었다.그러나 5·18에 대한 이해들은 아직도 상당히 왜곡되어 있다.그리고 그것은 지역간에 상당한 편차를 보이고 있다.그간 5·18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노력들이 끊임없이 경주되어 왔지만 아직 중요한 부분들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가장 심각한 문제는 5·18이,올바른 사회적 담론이 형성되지 못한 채 역사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간 5·18에 대한 담론의 변화과정은 한국의 민주화 과정과 궤를 같이해왔다.점진적인 한국정치의 민주화와 함께 ‘폭동’이 ‘민주화운동’으로 자리하게된 것이다.이러한 ‘민주화론’과 더불어 5·18은 운동의 계승과 승화·발전 과정속에서 새로운 담론들을 확대·재생산해왔다.이른바 민족의 실질적인 ‘자주화’와 분단된 조국의 ‘통일’ 및 ‘국민통합’의 담론들이 그것이다.그중에서도 ‘실질적 민주화’는 가장 핵심적인 담론으로서 여타의 모든 다른 세부 담론들을 규정할 수 있는 요체로 자리하고 있다. ○국민정부와 시대적 과제 이렇듯 현재적 의미에서 제시된 5·18담론의 정치사회화 자체가 5·18의 실체를 규정하는 것이고 그것이 현재적 과제로 남아있는 진상규명을 마무리 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이것은 바로 현 金大中 정부의 역사적,시대적 과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5·18은 한국의 근현대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국민대중의 숭고한 애국의 역사다.그것은 분명 국헌문란을 일삼은 독재집단에 대한 국민대중의 애국 열정이었으며 민주주의에 대한 염원이었다.강조되어야할 것은 바로 5·18의 역사성이다.국민대중의 숭고한 애국의 역사인 5·18이 더이상 정치권력의 이해관계에 근거한 정치적 협상이나 타협물 내지는 정치적 고려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참된 역사성 부여해야 그 누구보다 광주항쟁 당시 ‘준가해자’의 위치에 있었던 언론이 자기반성적 자세로 이에 적극 나서야될 것이다. 본 현안에 대한 가장 강력한 규정력은 역시 현 金大中 정부의 역할에 있다.그리고 그것은 金大中 정부의 올바른 역사의지와 시대정신에 달려있다.5·18은 80년 당시도 그러했지만,80년대의 변화·발전과정 속에서 이미 광주만의 문제가 아니며 전체 한국민중의 숭고한 애국의 역사로 자리하고 있다.역사적 사실에 참된 역사성을 부여하지못하고 이를 정치적 고려나 타협에 의해 각색하는 민족은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는 불행한 민족이다.그런데 지금까지 5·18은 현실정치권의 논리에 빠져 정치적 고려나 타협의 대상으로 전락해 있었다.5·18의 참된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서는 이제라도 정치권력이 실천의지를 가지고 가감없는 실체 규명에 나서야한다. 金大中 정부가 5·18의 직접적 당사자이고,지역주의라는 크나큰 현실적 벽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참과 거짓이 바뀌어 있었던 왜곡의 역사를 바로잡고 묻혀 있었던 민주의 역사를 발굴하여 그 진실을 밝혀간다는 관점에서 5·18의 해법들을 풀어간다면 그러한 노력들은 윤리적 정당성을 국민들로부터 획득하여 현실적 장애들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 건국이후 인구변화(대한민국 50년:19)

    ◎49년 첫조사 20,188,641명… 96년엔 갑절로/55년 간이조사 전에는 추계… 정확성 의문/6·25전쟁기간 150만명 희생… 사망률 4%/60년대부터 공업·도시화 영향 대규모 이동 대한민국 정부 수립후 최초의 인구조사는 49년 5월1일에 실시된 ‘대한민국 제1회 인구조사’였다.이 때 인구는 2천18만8천641명으로 파악됐다. 한국전쟁 중인 50년과 51년에는 보건사회부의 발표가 남아있다.50년 2천35만6천명,51년 2천44만1천명이었다.그런데 이 인구조사 발표는 실제 조사를 한 것이 아니라 49년의 조사를 토대로 각도 도지사의 보고에 의한 추계였다. 52년과 53년에는 내무부의 추계가 남아있다.52년 2천52만6천명과 53년 2천1백54만6천248명이었다.53년의 인구가 전년도보다 1백만명 이상 급증한 것은 배급을 늘리기 위한 유령인구 때문으로 추측된다.54년 보건사회부의 인구통계는 2천1백91만3천명이었지만 이도 실제조사가 아니라 전년도에 기준한 추계이다.결국 정부가 발표한 50년부터 54년 사이의 인구 수는 정확하지 못하다. 55년 제1회 간이 총인구조사가 실시됐는데 상주인구가 2천20만2천256명이었다.이는 현역 군인과 형무소 수형자 등을 뺀 숫자이다.한국전쟁 시기의 인구 증가율은 1.1%였다.그러나 한국전쟁후 베이비 붐이 일어 55년 이후 66년까지 인구 증가율은 2.8%를 기록했다.그러다가 산아제한 정책이 실시된 66년부터 85년까지는 1.7%로 떨어졌다. ○증가율 2.8% ‘베이비 붐’ 정부 수립후 인구의 변동은 경제문제와 가장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는다.1인당 국민소득은 44.5달러에 불과했다.따라서 국민총생산의 5분의 1에 달하는 미국으로부터의 원조액 1억7천9백59만3천달러는 기아를 막기 위한 것으로도 부족했다.한국전쟁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인구에 비해 보잘 것 없는 생산시설은 ‘저고용­저소득­저고용’의 악순환 고리를 이어갔다.폭발적인 인구문제의 해결은 60년대 경제개발을 통한 지속적 성장 밖에 해답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국전쟁의 인적 피해로 인한 가장 직접적이고 충격적 결과는 무엇보다도 특이한 인구구조를 형성시켰다는 점이다.우선 한국전쟁은 일시적 사망률의 상승과 출생률의 저하를 초래했다.한국전쟁으로 인한 인명 손실 중 사망자는 약 1백만∼1백50만명으로 추정되며 이로 인한 인구의 사망률은 1천명당 36∼47명,즉 4% 안팎으로서 평소 한국인의 사망률인 평균 2%의 2배나 됐다.이같은 현상은 60년과 66년의 인구 센서스에서 각각 30∼49세 및 35∼49세의 연령층에서 과부가 많은 것으로 조사된 것과 상통하는 것이다.반면 전쟁기간 동안의 0∼9세의 영아 및 아동의 사망자 가운데는 남아보다 여아가 더 많았다.이것은 새로 태어난 신생아들과 아이들의 경우 전통적 남아 선호사상으로 인해 남아를 되도록 보살핀 때문으로 사회학자들은 보고 있다. ○45만∼72만명 월남 추정 전쟁기간 중의 출생률은 극도로 저하돼 같은 기간의 높은 사망률과 더불어 인구의 절대 감소현상을 초래했다.이때의 출생률은 평상시보다 1%나 낮아졌으나 인구 증가율이 당시에는 1년에 1천명당 23명으로 늘어났었던 데 비해 전쟁기간 중이었던 49∼55년 사이에는 연평균 1천명당 11명 정도 밖에 늘어나지 않았다. 전쟁으로 인한 인구변동의 또다른 충격은 인구의 대규모 이동현상이다.한국전쟁 기간 동안의 월남인구의 추정치는 45만∼72만명에 이르고 있다.반면 남한에서 북한으로 강제로 납치되거나 그 밖의 이유로 넘어간 이들의 수도 대략 3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대규모 인구이동이 시작된 것은 60년대부터인데 60년대 이후의 인구이동은 물론 공업화의 영향을 받은 도시화의 결과였다. 61년 이후 인구 분포에 있어 가장 큰 변화를 경험한 지역은 수도 서울이었다.서울은 정부수립 직후인 49년에는 전인구의 7.1%를 차지했고 11개 시·도 중 인구 수로 따져 9위에 지나지 않았으나 75년에는 이미 전인구의 20%에 해당하는 6백90여만명의 인구를 갖게 됐다.또 오늘날에는 전인구의 22%가 넘는 1천여만명의 인구를 갖게 됐다. ○86년 도시인구가 65% 그러나 서울과 부산,그리고 경기도를 제외한 모든 도는 전국 인구에 대한 구성비에 있어 감소 추세를 보였다.인구이동을 도시와 농촌으로 구분하면 도시인구의 비율은 55년 25%에 불과했던 것이 80년에는 57%,86년에는 65%에 달해 도시인구가 급증했음을 알 수 있다.그러나 70년 이후 서울로의 인구집중은 어느 정도 둔화되는 추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농촌인구가 서울 이외의 다른 도시로 이동하기 시작했다.특히 마산 울산 포항 등의 새로운 공업도시와 수도권의 성남 안양 수원 등에는 우리나라 전도시의 평균 인구증가율보다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정부수립후 49년 첫 인구조사에서 남한의 인구는 2천18만8천여명이었으나 96년 조사된 인구는 4천6백43만4천여명으로 50년동안 두배로 불어났다. ◎日 전쟁 동원 인구 해방후 엄천난 逆유입/日帝와 美 군정 시기의 인구/도시주변 戰災民으로 반공체제 정착 큰 역할/46년 1,936만명 조사/이듬해 국민등록 실시 한국은 일제 식민통치 기간 동안 특히 37년 이후의 전시 총동원체제 아래서 대규모의 인구이동을 경험했다.가혹한 수탈로 인해 농촌을 떠나 일본과 만주 등으로 이주했다.또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전시체제 기간동안 이른바 노무 동원 또는 강제 징용 등에 의해 북한의 광공업지역과 일본으로 동원됐다.39년에서 해방 전까지의 기간에 국내외에 걸쳐 전시체제와 관련한 유동인구는 약 7백만명으로 45년 현재 국내 총인구 수의 약 30%에 달한다는 사실은 인구이동 규모의 방대함을 말해 준다. 일제 말기의 인구이동 현상은 해방직후에는 역으로 대규모의 인구유입 즉 귀환을 초래했다.여기에다 남북 분단의 체제대립적 성격을 반영하는 이른바 월남민들이 발생했다.해방 직후 남한사회는 단기간 안에 엄청난 인구유입을 경험했다. 이는 해방정국을 이해하는 데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첫째는 유입인구가 자신의 성장지역인 농촌사회에 안정적으로 정착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도시지역의 경제활동 인구로 흡수되지도 못하면서 상당수가 도시 주변에 전재민(戰災民)으로 퇴적된 것으로 보인다.이는 해방정국의 사회적 불안정성과 긴장을 높이는 주요한 변수가 됐다. 둘째는 유입인구가 계급적 성격과 사회적 경험 등에 따라 비교적 뚜렷한 정치적 지향성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해방정국의 정치적 격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해방 직후 월남민들이 우익세력의 선봉대였으며 남한사회가 반공체제로 귀착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점은 역사가들이 입증하고 있다. 해방 후 최초의 인구조사는 미군정청에 의해 46년 8월25일 실시되었다.소련군이 진주한 북한은 제외됐다.이 통계는 44년 조선총독부의 국세(國勢)조사 인구에 미군측이 파악한 식량배급 인원과 외부로부터의 유입인구를 고려해 작성됐다.이 때 조사된 남한 인구는 총 1천9백36만9천270명이었다.따라서 이 통계는 실제 인구수를 넘는 것으로 평가된다.미군정청은 이어 47년 국민등록을 실시했다.등록 인구는 총 1천9백88만6천234명.다음해 다시 실시한 국민등록에서는 2천2만7천393명의 인구가 등록됐다.미군정청이 실시한 국민등록은 의식주 및 생활 필수품의 확보와 배급계획의 수행,앞으로의 선거 등을 대비한 것이었다.
  • 군필자 고시가산점 “주자” “안돼”(쟁점)

    정부가 내년부터 5급 국가고시 1차시험에 군필자에게 3%(2년 이하)또는 5%의 가산점을 주는 방안을 추진중이라는 본지 9일자 보도가 나가자 고시준비생은 물론 여성단체관계자,일반 시민들 사이에 찬·반 여론이 들끓고 있다.“7·9급에 실시중인 제도를 5급고시에 까지 확대적용하는 것은 당연하다”란 찬성론에서부터 ”군 미필자의 응시자격 자체를 봉쇄하는 것”이란 비판여론까지 다양한 내용들이다.대표적 찬·반 양론을 들어본다. ◎찬/인생 황금기 조국에 바쳐 젊은이 희생 인정받아야/고용형평성 논리는 단순/보상차원 도입해야 마땅/金德模 호남대 교수·신방학 이번 조치는 일부 사회지도층 인사의 자제들이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에 착안,병역의무에 대한 우대정책을 통해 잘못된 풍토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바람직한 측면이 있다. 무엇보다도 인생의 황금기인 청춘의 시기를 분단이라는 특수한 역사환경에서 조국에 헌신한 우리 젊은이들의 노고는 인정받아야 마땅하다.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많은 국민들이 안정과 평화속에 자신들의 생업에 종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같은 선진국에서도 군대에 갔다온 젊은이들에게 대학진학은 물론,취업 등에 혜택을 주고 있는 것도 주목해 보아야한다. 이번 조치는 시행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형평성 시비가 제기될 수 있다.얼마전 국방부에서 기업이나 정부기관 등에서 신규채용시 군필자에 대해 군복무기간을 100% 산정하도록 하겠다는 발표에 이어 나온 것이어서 그 시비의 강도도 매우 강하리라고 본다.병역미필 남성과 병역의무가 원천적으로 면제된여성의 불만들이 불거져나올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러나 이번 법 개정의 취지가 신성한 병역의무를 마친 사람을 우대하겠다는 데 있는 것이지,정당한 미필자나 면제자에게 불이익을 주는 데 있지는 않다고 본다. 또한 고용 형평성의 원칙이라는 단순논리만 가지고 이번 방안을 문제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군복무를 정상적으로 한 사람은 단순히 그기간 만큼의 시간적 손해만 보았으니,거기에 해당하는 보상만 이루어지면 된다는 논리는 근시안적 접근 방법이다. 20대 초반의 30여개월의 기간은 한 젊은이의 미래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시기다.따라서 공백이 없는 사람과의 차이는 공백기의 2배 이상일 수도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된다. 헌법 제2장 39조에는 ‘누구든지 병역의무의 이행으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고 명시되어 있다.군복무 기간의 사회경력 인정과 공무원시험 가산점 제도는 군필자들이 그동안 유·무형으로 불이익한 처우를 받아왔던 것을 바로 잡아나가는 과정인것이다. 물론 새 정부가 들어선 만큼,여성에 대한 공직의 일정비율할애,여성차별 기업에 대한 적극적인 제제 등 우수한 여성인력의 사회활동을 적극 지원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들이 병행될 때 군필자에 대한 우대정책도 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반대/경력 산정·호봉승급 수궁/5급고시 가산점은 특혜/군에 못간 여성·면제자 임용기회 봉쇄 납득못해/崔榮熙 여성단체협의회장 지난 해 말 치루어진 대통령 선거를 기점으로 하여 군복무 여부로 국가와사회에의 공헌도를 가늠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게 표출되고 있다.이러한 경향을 반영해서인지 최근 들어 군필자에게 취업과 관련하여 혜택을 부여하는 것을 골자로한 논의가 부쩍 눈에 뜨인다.물론 인생의 전성기 중에서도 가장 핵심이 될 시점에 국가의 부름에 응하느라 개인적 희생을 감수한데 대해 국가적으로 보상을 해주어야 마땅하다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그러나 그 정도가 보상의 차원을 넘어 지나친 특혜를 주는 것은 부당하다. 일주일전 국방부에서는 병역제도 개선안을 마련,발표했다.내년부터 신규채용시 병역의무를 마친 사람이 국가기관이나 일반 기업체에 취업했을 때 근무 경력에 100% 산정되고 복무기간 동안의 호봉 승급도 인정한다는 내용이다.이는 형평성의 측면에서 볼 때 일면 수긍이 가는 조치로 생각된다. 그러나 며칠전 또다시 군필자가 정부기관이나 지방자치단체의 5급 국가고시에 응시할 때 1차시험에서 2년이상 복무한 사람에게는 만점의 5%,2년 미만에게는 3%의 가산점을 주는 것을 검토한다는 소식을 접했다.확인 결과 6급이하 공무원 채용시 그동안 적용되어오던 가점제도를 7월부터 시행되는 제대군인지원법 시행령에 담아내는 과정에서 약간은 잘못 불거져나온 이야기로 판명되었다. 정부에서는 여성의 사회참여 확대를 위한 장기계획까지 세우고 일정비율 여성채용목표제를 추진하고 있는 중이다.그런 상황에서 여성들의 취업문호를 차단하게 되는 발상이 일각에서나마 거론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 아닌가 한다.실제로 이런 이야기를 전해들은 여성 고시준비생들이 낙담해 여성단체에 이를 강력히 항의·대응해줄 것을 요청해오고 있는 상황이다. 몇 년전에도 이러한 논의가 행정쇄신위원회에서 제기되어 정부의 각 부처에서 의견개진을 한 바 있었고,그 결과 가점 비율을 약간 낮추는 선에서 조정이 되었었다.공직시험시 군경력 가산 특전은 군복무가 원천적으로 제한되어있는 여성 또는 군미필자들에게 불리한 정도를 넘어 임용기회를 봉쇄하는 결정적 조건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따라서 이 제도는 궁극적으로 폐지되어야한다고 본다.1,2점 차이로 당락이 결정되는 상황에서 수십점을 가산점으로 준다는 것은 채용의 기회를 제한하는것이나 마찬가지 결과이기 때문이다.채용후 보수 등에서 군 경력을 인정하여 혜택을 부여함으로써 군필자에 대한 보상을 하면서 채용시험에서까지 과다한 가산점을 부여한다는 것은 이중의 혜택으로 형평성의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므로 반드시 재고되어야 한다.
  • “北 어린이예술단 서울 공연”/리틀엔젤스와 합의

    ◎올 가을 구체일정 협의 북한의 어린이 예술단체인 만경대 학생소년궁전 예술단의 연내 서울공연이 성사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2일 북한을 방문,3차례 평양 공연을 갖고 12일 귀국한 리틀엔젤스 예술단의 朴普熙 단장은 북한 체류기간동안 만경대 학생소년궁전 예술단측과의 접촉에서 서울 공연에 합의했으며 올 가을 구체적인 일정 협의에 들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리틀엔젤스의 평양 공연에 이어 만경대 학생소년궁전 예술단의 서울 공연이 이루어지면 분단 이후 최초로 민간차원의 남북 교환 방문 공연이 실현되는 것이다. 한편 리틀엔젤스는 이날 상오 평양 순안공항을 출발,북경을 거쳐 하오 서울에 도착했다.
  • 5·10 제헌국회 총선 50주년­역사적 의의

    ◎봉건사회 종언… 독립정부 토대 구축/사상 첫 민주선거… 王朝국가서 국민국가로/냉전체제속 ‘반쪽선거’ 분단고착화 초래 ‘역사의 등불은 선미(船尾)만을 비추는가’-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사람은 잘못된 전철(前轍)을 밟기 마련이다.특히 새로운 세기를 준비하는 시대인들에게 제헌국회 총선 50주년의 의미를 교훈으로 되살리는 작업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국민의 정부’를 맞아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새김질하는 차원에서도 더욱 그렇다. ‘5·10 선거’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실시된 보통선거다.지리적 이념적으로 ‘반쪽선거’에 그쳐 분단을 고착화했다는 비판도 있지만 대한민국건국을 위한 합법성의 기초가 됐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정치적으로는 통치엘리트의 교체를 공식화한 의미를 갖는다.국왕을 정점으로 양반계급내에서 통치엘리트가 충원되던 봉건적 신분제 사회가 막을 내리고 시민계급이 통치행위의 전면에 부상한 계기가 된 것이다.‘5·10 선거’를 기초로 48년 5월 31일 제헌국회가 구성되고 7월17일에는대한민국헌법이 공포되어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다.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라는 논리도 ‘5·10 선거’의 유효성에 근거한다. ‘5·10 선거’가 남한 단독선거로 치르진 것은 한반도를 둘러싼 미·소간의 치열한 패권주의적 신경전 때문이다.일제 패망이후 한반도내 민주적 임시정부의 구성 문제를 논의하던 미·소 공동위원회가 정부 구성에 참여할 정당·사회단체의 범위를 놓고 합의점을 찾지 못하자 미국은 47년 9월17일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한다.미국은 유엔에서 인구비례에 따른 남북총선거실시안을 추진하지만 소련이 “인구비례에 의한 선거는 남한진영의 승리와 소련에 비우호적인 정부의 수립으로 연결된다”며 반대,결국 남한 단독선거로 귀결된다.국내에서도 단독선거 반대 주장이 제기됐지만 “정부수립을 더이상 늦출 수 없다”는 의견이 대세를 탄다.이에 따라 한반도의 공산화를 우려하며좌익소탕 작업을 벌이던 미군정은 48년 3월1일 ‘조선인민대표의 선거에 관한 포고’를 통해 ‘선거실시’를 공식 발표하고 단독선거와 단독정부수립운동을 적극 지원한다.당초 선거날짜는 일요일인 5월9일이었지만 기독교계의 변경 요청으로 하루 늦춰진다. 정치권에서는 선거 참여파와 불참파,남북협상파 등으로 나뉘어 치열한 세다툼이 벌어진다.李承晩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한국민주당,민족청년단,대동청년단,서북청년회,대한노총 등 반탁·반공의 우익세력들은 선거를 적극지지한다.특히 朴憲永계의 좌익세력 ‘조선인민공화국’에 맞서 결성된 한민당은 “선거를 반대하는 것은 소련의 앞잡이인 남로당이나 북로당의 모략에빠져 사회혼란을 초래하는 행위”라고 규정한다.반면 남로당과 민주주의민족전선 등 좌익세력은 파업,시위,방화 등 폭력행사를 통해 선거반대 투쟁을 벌인다. 양쪽의 치열한 대립 속에 金九와 金奎植 등 우익 중간파들은 “남한 단독선거는 민족분단을 영구화한다”며 남북협상을 추진한다.金九 등은 ‘3천만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성명에서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데는 협력하지 않겠다”고 절박한 심정을 토한다.우여곡절끝에 4월20일 평양을 방문한 이들은 ‘전조선 정당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단독선거배격운동을 촉구하는 결정서를 채택하지만 취약한 국내 기반과 국제적 냉전체제의 가속화,협상의 전략적 실패 등으로 ‘통일정부 수립’의 꿈을 접고 만다.이처럼 ‘5·10선거’는 독립정부 수립이라는 긍정적 측면과 분단의 고착화라는 부정적 측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그러나 왕조국가에서 국민주권국가로 발돋움한 토양을 마련,건국의 출발점이 됐다는 점에서 ‘5·10선거’의 역사적 의미는 결코 퇴색될 수 없다.
  • 5·10 제헌국회총선 의미/徐仲錫 성균관대 교수·사학(특별기고)

    제헌국회총선거가 오는 10일로 50주년을 맞는다.1948년 5월10일 치러진 5·10선거는 분단을 고정화하였다는 점에서 부정적 측면을 가짐과 동시에 역사상 최초로 보통선거를 통하여 민주공화국을 탄생케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역사상 첫 보통선거 1947년 미국과 소련의 대결이 치열해짐에 따라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의한 통일 임시정부 수립이 어려워지자 그해 9월 미국은 한국문제를 국제연합에서 다룰 것을 제안하였다.그리하여 국제연합 총회에서는 11월14일 남북 총선거를 통한 한국정부 수립안과 가급적 조속히 가능하다면 90일 이내에 미소 점령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할 것을 결의하였다.그러나 예상한대로 소련과 북측은 국제연합 한국임시위원단이 38도선을 넘는 것을 거부하였기 때문에,국제연합 소총회에서는 1948년 2월26일 가능한 지역에서만의 선거 실시를 건의하여,미군정에 의하여 5월10일 선거가 치러지게 되었다. 5·10선거에는 각 정치세력의 폭넓은 참가가 이루어지지 못했다.한국은 그때까지 분단을 경험한 적이 없어 한반도에는 하나의 단일 민족국가만이 존재하여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고,통일정부의 수립만이 우리 민족의 살길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좌익은 단선단정 반대운동을 격렬히 벌였다.金九 金奎植 등 민족주의자들은 남한만의 선거는 미소가 획정한 38도선을 국제적으로 합법화시키는 행위이고,따라서 남과 북에 들어서는 정부는 미소의 영향력 아래서 자주성을 갖기가 어렵고,참혹한 동족상잔을 초래할 수 있다고 하여,5·10선거를 반대하고,4월에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그러나 일부에서는 이 선거에 통일운동세력도 참가해 제헌국회에서 통일과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고 주장하였다. 曺奉岩과 지방의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은 부분적인 현상이었지만 이 선거에 입후보하였다.金九 金奎植같은 지도자들은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싸웠기 때문에 해방이 분단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고, 또 민족의 대의를 위해서도 통일운동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그런데 국제관계로 분단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이 선거에는 되도록 각 정치세력이 많이 참여하여새 정부에 대한 지지를 폭넓게 할 필요가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李承晩·한민당 세력은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이 출마하는 것에 대하여 민중은 그들의 정체와 야욕을 간파하여야 할 것이라고 선전하였다.그만큼 그들은 편협성 편파성이 강하여 자신들이 권력을 독점하고자 하였고 그것은 새 정부와 자유민주주의에 짙게 암영을 드리우는 것이었다. ○전체유권자 75% 투표 5·10선거에서는 만 21세 이상의 남녀에게 선거권을 부여하였고,상당한 지위에 있었던 친일파를 제외하고 25세 이상이면 피선거권이 있었다.선거는 소선거구제로 치러졌고,제헌국회였기 때문에 임기는 2년으로 제한하였다. 의원후보자는 선거인 명부 등록자 200인 이상의 서명 날인이 있는 추천장을 첨부하여야 했는데,이 제도는 李承晩이 출마한 동대문구에서 악용되었다.5·10선거에는 8백13만여명의 유권자중 7백84만여명이 선거인 명부에 등록하고,그중에 7백48만여명이 투표한 것으로 발표되었다.전체 유권자의 75%가 투표한 것이다.제주도의 두 지역에서는 선거가 제대로 치러지지 못하여 198명이 당선되었다.북측에서 선출할 의원 100명은 공석으로 놔두었다. 이 선거에서는 한민당이 미군정 시기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위세가 대단하였기 때문에 다수 의석을 확보할 것으로 예상되었다.그러나 개표 결과 한민당 이름으로 나온 후보들은 불과 29명밖에 당선되지 못하였고,李承晩을 영도자로 한 독립촉성국민회의가 55석을 차지하였으며,무소속으로는 85명이 당선되었다.우리나라 선거는 이변이 적지 않은데,바로 첫 번째 선거가 예상을 뒤집은 것이었다. ○우리선거사상 첫 이변 5·10선거에서 시행된 보통선거에 대해서 그것의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많은 정치학자들은 이 선거가 미국에 의하여 이식된 것이라고 말한다.선거도 민주주의도 모두다 이식된 것이라는 주장이다.그렇다면 이 선거가 보통선거가 아닌 제한선거로 치러질 수 있었을까.1910년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이후 한국인은 다른 나라에 비하여는 놀랍게도 일찍부터 민주공화국을 세우려고 생각하고 있었다.일제침략기에 왕정복고를 생각한 사람은 극소수였다.또 공화국은 보통선거로 수립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독립운동세력한테는 일반적이었다.이미 상해임시정부가 만들어질 때부터 그것은 등장하였고 趙素昻의 삼균주의에서 정치의 평등이란 보통선거를 가리켰다.일제시기에 사회주의자들은 처음에는 민주공화국을 상정하였다가 나중에는 인민공화국을 내세웠고,1930년대에는 소비에트 체제까지 구상하였다. 해방후의 혁명적 분위기에서 모든 정치세력은 당연히 보통선거를 실시할것을 주장하였다.이러한 분위기에서 보통선거를 실시하지 않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을 것이다.다만 李承晩·한민당세력은 나이 먹은 사람들일수록 보수적이고 봉건의식이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선거권자의 연령을 높이려고 입법의원때부터 노력하였지만,그것도 성사될 수 없었다.따라서 한국인은 선거할 자격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한국전쟁 이후 독재자들의 지나친 권력욕때문에 선거가 요식행위나 치장물에 불과하게 되었다는 비판을 듣게 된 것이다. ○소장파의원 발언 강화5·10선거 이후 제헌국회에서 소장파들의 발언이 강화된 것도 주목하여야할 것이다.정부수립 얼마후부터 ‘소장파 전성시대’라는 말을 듣게 되거니와,소장파의원들은 金九 金奎植과 입장을 같이하여 통일운동을 벌였고 친일파 처단을 올바로 하여 민족정기를 세우고자 하였다.그들은 농민위주의 농지개혁을 위하여 보수세력과 싸웠고,민주주의적인 지방자치법을 통과시켰다.그러나 제헌국회내 소장파 의원들은 金九 선생 암살이 있었던 시기에 일어난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무력해졌다.이로써 의회민주주의는 중대한 위협을 받게 되었다. 1948년 5월31일 소집된 국회는 제헌국회라는 이름 그대로 헌법제정에 힘을 쏟았다.권력형태는 李承晩의 고집으로 하루밤 사이에 내각제에서 대통령중심제로 바뀌었다.이 헌법은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실현시키기 위한 경제조항이 들어가 있는 것도 특색이다.한마디로 헌법자체는 서유럽의 그것에 별반 손색이 없었다. ○민중 우습게 알면 안돼 7월17일 헌법이 공포된후 제헌국회에서는 대통령에李承晩,부통령에 李時榮을 선출하였다.국회의장은 申翼熙,대법원장은 金炳魯가 되었다.8월15일 정부수립이 공포되었다.金九 金奎植은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착잡한 심정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는 6월4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는 지금 5·10선거는 두가지의 교훈을 주고있다.그것은 정치인들이 민중을 우습게 알거나 기만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선거는 결코 말의 유희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리틀엔젤스/李世基 社賓 논설위원(외언내언)

    소파 방정환 선생은 ‘마른 잔디에 새풀이 나고 나뭇가지에 새 움이 돋는다고 제일 먼저 기뻐하는 것이 어린이요,봄이 왔다고 종달새와 함께 노래부르고 나비와 같이 춤추는 이도 어린이’이라고 했다.누군가 어린이를 ‘새싹’에 비유한 것은 무한한 미래의 희망이 그속에 담겨진 탓이다. 올해 어린이날을 앞두고 노래하고 춤추는 민간사절단 리틀엔젤스의 평양방문공연은 어느때보다 값진 의미를 지닌다.지난 85년 ‘고향방문예술단’공연이나 90년 국악인들의 범민족통일음악회와는 달리 어린이들로 이루어진 예술단체로는 최초의 평양방문이기 때문이다.더구나 분단후 처음으로 남북 어린이가 나란히 한무대에 서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른다는 것은 우리 어린이들에게 북한이 남이 아닌,한핏줄 한민족이라는 동질의식을 다시한번 일깨워주는 계기가 된다.여기에 북춤과 장고춤,신고산타령과 몽금포타령 등은 남북 모두에게 낯설지 않은 장단이며 가락이다.티없이 맑고 순수한 어린이들의 예술공연으로 남북 화해와 협력의 시대를 열면서 통일의 가능성을점쳐보는 것은 여간 대견스럽지않다.이들은 지난 62년 5월5일에 창단되어 36년간 50여개국에서 5천회이상을 공연했다.90년과 91년에는 구소련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진 공연을 통해 한·러수교의 물꼬를 트는데 기여했다. 영국시인 워즈워스가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했듯이 어른들이 나서는 것보다 어느 때는 어린이의 역할이 훨씬 부드럽고 자연스러울 수가 있다.어른들의 계산된 행동보다 때묻지 않은 동심이 긴 세월 얼어붙은 북한과의 경색(梗塞)을 쉽게 녹일 수도 있을 것이다.어린이는 ‘보고 듣고 느낀 그대로를 노래하는 시인’이라고 했듯이 이번 평양방문 공연에서도 종달새처럼 노래부르고 나비처럼 춤추면서 남북통일의 새싹을 틔우는 전초를 만들기를 기대해본다. 이번 평양의 학생소년궁전에서 남북어린이가 함께 부르는 ‘우리의 소원’이 통일의 새싹이 되고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이 되어 마침내 남북통일의 알차고 단단한 열매로 맺게 되기를 온겨레가 숙연히 기원해볼만 하다.
  • 리틀엔젤스 평양 첫 공연

    한국문화재단(이사장 朴普熙) 소속 리틀엔젤스 예술단이 4일하오 5시 평양 봉화예술극장에서 민간단체로서는 분단이후 처음으로 역사적인 남북화합의 공연을 가졌다. 세계일보에 따르면 궁중무인 ‘화관무’로 첫 무대를 장식한 리틀엔젤스는 처녀총각,부채춤,시집가는 날 등 무용을 비롯,‘반갑습니다’ ‘몽금포타령’ ‘선구자’ 등 합창으로 2천석의 공연장을 가득 메운 북한 청중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다. 리틀엔젤스는 5일 봉화예술극장에서 2차 공연을 갖는다.
  • 독일의 현대문학/전영애 지음(화제의 책)

    ◎독일 문학에 나타난 분단·통일 문제 독일 현대문학에 나타난 분단과 통일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연구서.우베 욘존의 ‘야콥에 대한 추측’을 비롯 크리스타 볼프의 ‘나누어진 하늘’,라이너 쿤체의 ‘민감한 길’,볼프 비어만의 ‘프로이센의 이카루스에 관한 발라드’등 구체적 작품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독일 분단문학의 고전으로 꼽히는 ‘야콥에 대한 추측’은 불투명한 독일 분단의 시대를 그린 소설.이 작품은 ‘해체기법’ 내지 ‘파편기법’을 사용해 주목된다.소설형식의 해체는 제임스 조이스,프란츠 카프카,알렉산더 되블린 등의 소설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나타난 현상이다. 하지만 욘존의 경우는 그것이 좀더 진척돼 있다.축약이나 원근변화,시간확대 등 온갖 기법이 동원된다.욘존 소설의 기본미학은 동독의 문학규범,즉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요청에 대한 항의로 풀이된다.욘존의 작가적 성과는 무엇보다 그가 분단독일의 정치적·사회적 상황을 시적 현실로 옮겨놓았다는데 있다.그의 작품의 배경인 비와 안개에 젖은 암울한 잿빛 풍경은 불투명한 정신적 상황의 은유다.욘존은 ‘야콥에 대한 추측’을 통해 예리호우라는 허구의 도시를 문학사 지도에 올려 놓았다. 예리호우는 성서에 나오는,나팔소리에 무너지는 여리고성의 독일식 표기.한편 이 책에서는 동·서독 문학교류의 단초가 된 동독의 비판문학에 대해서도 살핀다.동독의 비판문학이라고 하면 곧바로 1960년대의 이른바 ‘서정시파도(Lyrikwelle)’ 시기에 나온 시들을 떠올리게 된다.이 시기의 시들은 이념에 대한 복무를 거부하는 대신 서정시의 본령으로 돌아가 비판의 기능을 맡았다.그 이전에는 베르톨트 브레히트나 에리히 아렌트,페터 후헬 같은 이들이 ‘건설시’나 ‘트랙터시’에 어렵게 맞서던 형국이었다.창작과비평사 1만6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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