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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북자 대책/張淸洙 논설위원(外言內言)

    북한주민 3명이 또다시 한국에 귀순해왔다.13일 북한군 중좌출신 심신복씨가 북한을 탈출해 제3국을 경유,망명한 뒤를 이어 14일에는 북한군 남자 장교 1명과 여자 하사관 1명이 휴전선 비무장지대를 넘어 함께 귀순했다. 49년 이후 탈북자는 이번 3명을 포함,모두 926명이며 90년 이후 현재까지 319명으로 크게 늘어나는 추세다.지금까지 탈북자의 90% 이상은 ‘자유와 빵’을 찾아 따뜻한 남쪽나라를 찾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최근 몇년동안에는 지난 50년동안 북한 정치사에서 권력의 핵심역할을 담당했던 고위 엘리트계층까지 잇따라 한국으로 귀순하고 있어 북한정권의 위기를 실감할 수 있다. 주체사상의 철옹성 속에서 일사불란하게만 여겨졌던 북한체제에서 사상적 일탈현상과 민심이반의 심각성을 입증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북한 군대가 총만 쏘지 않는다면 6개월 이내에 북한주민의 4분의 1이 탈출할 수 밖에 없다는 보고서 내용은 북한체제의 앞날이 결코 순탄치만은 못하다는 점에서 북한에 주는 타격은 그만큼 클 수 밖에 없다.북한 주민들의극심한 생활고와 열악한 인권문제가 개선되지 않는 한 앞으로 주민들의 탈북현상은 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다. 이에 따라 탈북자 문제는 정부의 중요한 정책과제로 대두되었다.더욱이 현재 탈북자 가운데 234명이 직업이 없이 어렵게 생활하는 것으로 밝혀져 이들에 대한 생활안정 대책이 시급하다. 탈북자의 절반 이상이 한국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으며 심한 갈등 속에서 범법자로 전락하는 경우까지 속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에 대한 보호대책은 시급히 마련돼야 한다. 분단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찾아온 탈북자들이 자유 대한민국에서 인간적 행복권을 향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정부가 탈북자들에 대한 정착금 지원을 2배로 상향조정하는 것을 비롯한 ‘북한이탈주민보호법’시행령을 연내 개정키로 한 것은 시의 적절한 대책으로 평가된다.탈북자 대책은 정착금 지원이라는 일회성 지원방법보다는 이들이 한국에서 자립할 수 있는 직업훈련이나 사회적응훈련 같은 항구적인 생활안정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탈북자를 위한 정부의 효율적 대책과 함께 국민적 관심,특히 그들이 한국인으로 살수 있도록 따뜻한 사랑과 보살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총격전이 벌어졌다면?/한충목 열사 범추위 집행위원장(굄돌)

    지난 대통령선거 때 집권여당인 한나라당의 이회창후보가 비선조직을 통해 판문점에서의 총격을 요청했다는 안기부의 주장은 참으로 가공스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일어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만약에 선거를 하루이틀 앞둔 상황에서 총격전이 발생했다면 국가 전체는 준전시 상태로 되고 국민은 공포에 질린 상태로 투표장에 가야만 했을 것이다. 기표소에서 붓뚜껑을 들고 우리 구민은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아마 열 중 아홉은 후보자의 공약이나 정견을 판단기준에서 제외시키고 유일하게 북을 상대로 한판 싸움을 벌일 수 있는 절대 반공주의자를 선택하리라는 상상은 너무 지나친 것일까? 1987년 6월항쟁의 성과로 이룬 대통령 직선 때 양김은 분열했다. 거기에다 KAL기 격추사건의 주범 김현희가 김포공항으로 들어오는 장면이 전국에 TV를 통해 생중계되었고 바로 며칠후 투표가 있었다. 선거결과는 노태우 후보의 승리였다. 만약에 양김이 분열하지 않고 단일후보로 선거에 나선 상황이라도 김현희가 등장했다면 단일후보가 선거에서 이길 수 있었을까라는 다소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지난 50년동안의 분단상황은 분단에 기생하는 권력층을 형성해왔고,지금도 그러한 상태는 지속된다. 통일이 없는 민주화나,민주화가 없는 통일에서는 모두 절름발이 민주화나 절름발이 통일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지난 군사독재 시절 반공으로써 국민을 길들이고,선거 때만 되면 간첩이 등장하는,그래서 현재 대통령이 되어 있는 분조차 한때는 용공조작에 시달린 사실은 이를 잘 말해준다. 4,000만 국민과 7,000만 겨레의 생명과 재산을 담보로 5년동안의 집권을 보장받으려 했다면 이는 천형에 처해도 부족할 민족적 반역행위다. 안기부의 고문설을 포함하여 이번 사건의 진상을 명명백백하게 규명하고,관련 책임자를 엄하게 다스려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 문화관광부 종무실장/작품집 ‘사랑의 그림자를 저울에 달다’ 출간

    문화관광부 李吉隆 종무실장이 작품모음집 ‘사랑의 그림자를 저울에 달다’를 발간했다. 한국소설가협회·한국문인협회 등의 회원이기도 한 李실장은 447쪽의 이책에서 6편의 중·단편 소설과 4편의 희곡을 담고 있다. 특히 소설 ‘통일수도 만들기’는 분단의 역사적 현실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심도있게 관찰해 역사의 굴곡,모순된 현실,왜곡된 인간성을 바로잡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신원출판사 발행.
  • 統獨 8주년 평가와 대북정책 방향/黃炳悳(기고)

    ◎獨 통일 뿌리는 적극적 평화정책 ○先평화·後통일정책 독일이 40여년에 걸친 민족분단을 극복하고 1990년 마침내 통일을 달성한지가 벌써 8년이 되었다. 독일통일은 브란트 전 총리의 신동방정책의 산물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브란트에 의해 창안되어 독일통일을 이끈 콜 총리에 의해서도 계승된 신동방정책은 독일의 분단이 동시에 유럽의 분단을 의미한다는 전제아래 유럽의 평화유지와 긴장완화를 통한 독일통일을 지향했다. 그러므로 신동방정책은 유럽분단에 따른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를 정착시키면서 독일분단을 평화적으로 관리하는 ‘선평화·후통일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성격의 신동방정책에 따라 서독은 기본적으로 독일통일이 가까운 장래에 달성될 전망이 없다고 판단하고,인간의 존엄성이 희생되어서는 안된다는 인식하에 이데올로기에 의한 대립을 지양하고 동·서독간 평화정착과 교류협력을 촉진하는 ‘선민족통일·후국가통일’정책을 취하였다. 민족통일 단계는 동·서독의 관계개선으로 인해 동·서독 주민들이 자유롭게 왕래하고전 독일이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게 되는 단계를 의미한다. 국가통일 단계는 유럽의 평화 안보질서가 확립되고 동·서독의 통일이 인근 국가들로부터 질시받지 않을 때 독일민족으로 하여금 체제비교를 통하여 통일독일의 정치·경제체제를 자유롭게 선택하게 함으로써 통일국가를 이룩하는 단계를 말한다. ○‘접근통한 변화’ 결실 이처럼 서독은 ‘공산주의는 극복되어지지 않고 다만 변화되어진다’는 시각에 입각,‘접근을 통한 변화’를 꾀하며 인내심을 가지고 동독측과 수많은 협상을 하는 ‘작은 걸음마 정책’을 구사했다. 그 결과 1987년의 경우 인적 왕래만도 900만명에 달하는 등 아주 실제적이면서 가시적인 성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실제적 통합과정을 거치면서 마침내 1990년 사회적 시장경제제도와 민주적 법치국가 체제에 기반을 둔 서독이 동독의 사회주의체제에 대한 절대우위를 입증하는 통일을 일구어 냈던 것이다. 독일통일의 이러한 과정을 교훈삼아 우리정부는 서독정부와 유사하게 통일이 실현될 가능성이 당장 낮다는 현실인식하에서 대북정책의 목표를 남북한 평화·화해·협력으로 설정하고 대북 포용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국민의 정부’ 대북정책은 과거 북한 압박을 통한 대북정책이 한반도 긴장 심화,분단의 고착화,분단 고통의 증대,인권 훼손 등의 비인간적인 상황을 초래하는 등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저해했다는 반성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서독의 신동방 정책과 기본착상을 공유하고 있다. ○한반도 안보도 ‘햇볕’ 필요 그러나 우리정부는 평화정착을 통한 남북한 평화공존을 대북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안보문제를 단지 전쟁억지력 형성을 통한 소극적 평화유지를 통해 해결하려할 뿐이다. 다양한 형태의 국제적 보장장치를 마련한 서독과는 달리 한반도에서의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통한 분단의 평화적 관리에는 적극적 의지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서독의 신동방정책은 굳건하고 적극적인 평화정책의 기반 위에서 동·서독간 교류협력정책을 펼쳤지만,우리정부의 대북정책은 한반도 평화정착 문제는 소홀히 한 채,남북한 교류협력에 대부분의 노력을경주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정부는 남북한 교류협력에만 ‘햇볕’을 비출 것이 아니라 우리민족의 평화와 안정을 적극적으로 보장해 주는 한반도 평화와 안보문제에도 ‘햇볕’을 비추면서 대북정책을 추진해야 할 것이다. 그럴 경우 국내에서의 대북정책에 관한 소모적인 논쟁이나 햇볕정책에 대한 북한의 거부감도 상당히 약화될 것이다.
  • 금강산 뱃길 월말엔 열리나/현대,이번 訪北서 최종합의 주장

    ◎장전항 편의시설 현대서 맡기로/신변보호 등 미해결 아직 불투명 금강산 관광 뱃길이 이달 말에는 열릴까. 금강산 유람선 첫 배의 출항일은 지난달 25일에 이어 이달 중순에서 다시 이달 말로 연기됐다. 현대측은 성사를 낙관하지만 여전히 불투명하다는 관측이 우세한 편이다. 현대의 대북 실무단장인 金潤圭 현대건설사장 등 일행 4명은 지난 2일 북한을 방문한 뒤 4일 귀국했다. 보름간에 걸친 베이징(北京)에서의 대북 접촉에 이어 양측간 최종 협상을 마무리짓기 위해 평양을 방문한 것이다. 한 관계자는 방북 성과와 관련,“금강산 관광에 큰 걸림돌은 없다”면서 “이르면 이달 말에는 관광이 가능할 것 같다”고 말했다. 북측과의 ‘현안’에 대한 일괄타결 가능성을 내비쳤지만 아직도 구체적인 실무작업은 끝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일정이 늦춰진 것도 준비과정에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현대는 이번에 현대측이 할 수 있는 일에는 최종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전항 공사와 통신·수송·관광실무 업무 등이다. 장전항 공사의 경우북측이 이미 조성한 도로공사 등의 대금을 지급하고 추가로 필요한 부두 등 편의시설은 현대 실무진이 맡기로 했다. 통신이용과 수송수단도 원만히 합의,6일 이에 필요한 15명의 실무진이 북한을 방문했다. 이들이 돌아오면 당초 예정한 필요 장비와 인력을 북한에 보낼 예정이다. 또한 당국으로부터 유람선의 내항허가를 받고 경비를 최종 확정,관광객 모집에 나서 차질없이 이달 말 금강산을 밟는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금강산 관광의 실현은 갈수록 힘이 떨어지고 있다. 아직 남북당국간 신변보호나 재난구호체계 등에 대한 합의와 미묘한 정치군사적 요인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訪北 뒷얘기/金潤圭 사장 ‘對北협상자세 3원칙’ 화제/“단추 끼우고 웃지 않고 등 받치지 않는다”/금가산 코스답사때 쓰레기 담아와 北측 감동 현대건설 金潤圭 사장이 지난 4일 북한을 10번째 방문하고 돌아왔다. 그가 대북경협에 임하는 자세는 진지하다. 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으로부터 배웠다. 89년 鄭명예회장과 함께 처음 북한을 방문한 金사장은 이때부터 鄭회장의 가르침을 지키고 있다. 이른바 ‘3원칙’. “아무리 더워도 옷의 단추는 항상 끼우고,상대방이 웃더라도 절대 웃지 않는다. 의자에 앉을 때는 결코 등을 받치지 않는다.” 북측 인사 못지않게 엄격하고 흐트러짐이 없어야 협상에 성공한다는 교훈이다. 金사장은 올 7월 방북시 금강산 관광사업에 대해 밤 10시부터 새벽 3시까지 협상하면서 이를 실천해 북측 인사들이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금강산 관광코스를 답사할 때는 ‘작은 일’을 몸소 실천했다. 등산에 앞서 현대측 실무자들의 주머니를 전부 뒤져 담배와 라이터를 압수했다. 명산에 올라 누리는 끽연의 즐거움을 포기하며 자연보호의 일면을 북측 안내인들에게 보여줬다. 구룡폭포에 오른 뒤 내려올 때는 곳곳에 널린 쓰레기를 봉투에 담아 왔다. 북한 안내인을 감동시킨 일들이었다. 그는 鄭회장의 말에는 토를 달지 않는다. 별로 술을 즐기지 않지만 ‘왕회장’의 ‘명령’이라면 마다하지 않는다. 북한 金容淳 아태위원장 주최 만찬에서 사정을 잘 아는 鄭회장이일부러 金위원장에게 ‘술을 잘한다’고 말하는 바람에 독주를 글라스째 몇잔 마시기도 했다. 金사장의 치밀함은 북한과의 입국료 300달러 합의에서 돋보인다. 북한은 ‘민족의 명산을 분단 이후,그것도 바다로 오는 데 1,000달러면 어떠냐’는 식이었다. 金사장은 이에 세계 100대 관광·명승지의 입장료를 전부 조사,사진을 곁들인 책을 만들어 전달함으로써 현대측 요구를 관철시켰다.
  • 21세기 지도자/知詵 스님·백양사 주지(서울광장)

    독일 전역에 걸쳐 치러진 총선거에서 사민당이 기민당을 노르고 승리하였음을 보도를 통해 접하였다.16년동안 독일 총리로서 비스마르크에 비교되던 콜 총리가 그 영광의 역사를 마무리하고 물러났다. 언론을 통하여 보도된 내용을 접하면서 독일 국민들 모두가 승리하는 선거를 어떻게 만들어 가는가를 생각해 본다.콜 총리는 89년 독일 통일을 이끌었고,21세기 유럽을 만들어가는 유렵연합 건설의 핵심 인물이다.선거에서 콜 총리의 업적을 뒤로한 채 사민당은 승리하였고,콜 총리는 자신의 지역구에서 조차 낙선하는 수모를 겪었다.(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에 의해 의원직은 계속 유지) 독일이 1,2차 대전의 패전 후에도 세계를 이끌어 가는 리더국가로서 건재한 이유가 여기에 있음을 느낀다.아무리 업적이 뛰어나고 그가 갖고 있는 카리스마가 비스마르크에 비유된다 할지라도 새시대의 요구를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음을 독일 국민들은 판단하였고,이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 ○시대적 요구에 부응해야 무릇 선거를 통해 여야간의 정권이왔다 갔다하고,좌우를 넘나드는 이념의 스펙트럼이 유연할 때만이 국민들은 시대에 맞는 지도자를 선택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가질 수 있다. 어쩌면 우리는 독일을 반면교사로 삼아 민족의 통일을 이루어야 할 것이고,통일 이후 통일국가를 형성해야 할 것이다.강을 건널 때의 선장과 강을 건넌 이후 고지를 향하여 진군하는 지도자가 다르듯이 독일 국민들은 통일 이라는 강을 건널 때는 콜 총리를 선택하였고,강을 건넌 이후 21세기라는 고지를 향할 때는 사민당의 슈뢰더를 선택하였다.이것은 독일만의 바람이 분명아니다.멀리는 미국이,가까운 시기에는 프랑스·영국이 21세기로 국가와 민족을 이끌어갈 지도자를 선택하였다. 그러나 우리사회는 분단 이후 최초로 여야간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졌지만 21세기를 이끌어갈 지도자를 만들어가고 있는가 하는 자괴감이,아니 지도력이 검증된 인사가 “나 여기있소”하는 자신감이 있는가 하는 자괴감이 물밀 듯 밀려오고 있다. ○화합정신이 제1덕목 통일을 준비하고,21세기를 향한 지도자의 첫째 덕목은 화합이다.부처님께서도 나라를 이끌어가는 첫째 덕목을 주변사람들과 항상 대화로 문제를 풀어가려 하는가,어른들을 공경하고 약한 자를 배려하는가 등의 화합을 주요 골자로 하셨다.분단 조국의 총체적 모순속에서 대립과 분열을 종식시킬 수 있는 고민과 실천속에 미래를 이끌어갈 대안의 가치를 갖춘자만이 국민들을 뭉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두번째 덕목은 젊음이다.이것은 나이의 많고 적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수십년을 갈등과 분열의 토대에서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온 이들에게는 미래를 향한 가치가 도대체 나올래야 나올 수 없다. 지금 이땅에서 분단과 지역감정을 양날개로 하여 온갖 출세를 위해 추하게 살아온 사람들,좋은 세상 만들자고 외치는 사람들에게 핍박을 주던 사람들은 참회하고 반성해야 한다.먹을만큼 살면 그만이지 무얼 더 해먹겠다고 난리들인지…?
  • 24년만에 모교 강단에 선 임헌영씨

    ◎“비제도권문학 적극 수용/기성문학 보수화 막아야” “비제도권문학을 제도화하는 일이야말로 이 시대의 절실한 문학적 과제입니다.재야문학을 그대로 방치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수용,‘기성문학’ 자체가 보수화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올해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24년만에 복권된 문학평론가 임헌영씨(57)는 요즘 모교인 중앙대의 겸임교수로 새로운 문학인생을 설계하고 있다. 임씨는 74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소설가 이호철씨 등과 함께 구속됐다. 그 뒤 집행유예로 잠시 풀려났던 그는 79년 남민전 사건에 또다시 연루,5년형을 받고 83년까지 수감생활을 했다.이후 줄곧 미복권 상태로 있다가 이번에 복권돼 중앙대 대학원과 학부에서 ‘문학연구 방법론 실습’‘현대 문제작 탐구’ 등의 강좌를 각각 맡게 된 것이다. 임씨는 67년 ‘현대문학’에 ‘니힐과 반항’등이 추천돼 평론가로 등단한 이래 평론집 ‘창조와 변혁’‘분단시대의 문학’등 20여권의 저서를 냈다. 그가 걸어온 문학의 길은 참여문학­민족문학­사실주의문학­민중문학으로 이어진다. “이제는 통일문학입니다.남북문화의 이질화는 위험수위를 넘고 있어요.민족동질성 회복을 위한 국민운동 차원의 대책이 시급한 때입니다” 대학의 문학교수로서 임씨는 새삼 아카데미즘에 빠져 무력증을 앓고 있는 우리 비평계를 안타까워한다.“창작의 홍수 속에 비평의 둑이 무너졌다고 할까요.적절한 비평적 통제가 없다면 우리문학은 무정부상태로 나아갈지도 몰라요.2,000년대를 향한 새로운 미학적 제방을 쌓는 일이 필요합니다” 비평전문계간지 ‘한국문학평론’ 주간도 맡고 있는 그는 현재 ‘근·현대 소설 사회사’‘문학운동사’(가제) 등의 책을 준비중이다.
  • 親日의 군상:8/월북무용가 崔承喜(정직한 역사 되찾기)

    ◎日帝에 국방헌금 내고 ‘舞踊報國’ 맹세/15세때 日 유학… 귀국후 세계순회공연하며 대활약/1942년 6개월간 만주 돌며 130여회 日軍 위문공연/해방후 前歷 비난 피해 남편과 월북… 北韓정권 참여 □엇갈리는 親日 평가 “예술위해 불가피” “자의적 친일 활동” 근대 이후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예술가 중에서 ‘스타중의 스타’는 누구일까? 1930년대 당시 전세계를 무대로 활동한 무용가 崔承喜도 그중의 한사람이다. 崔承喜는 세계적인 무용가라는 찬사를 받은 ‘전설적 예술가’였다. 바로 그 崔承喜가 최근 우리사회에서 ‘부활’하고 있다. 지난 6월 북한국적의 재일교포 무용수 白香珠씨가 내한공연을 통해 崔承喜의 춤사위를 완벽에 가깝게 복원한데 이어 한달 뒤인 7월에는 그의 이름이 국내 한 일간지에 대서특필되었다. 崔承喜(1911∼?). 언제적 이름인가. 그의 이름 앞에 ‘월북무용가’란 수식어가 필요할만큼 우리 귀에 낯선 이름 崔承喜. 해방후 남편을 따라 월북,북한정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그는 반세기 가까이 우리 기억에서 잊혀져 왔다.그가 ‘최모(某)’에서 ‘崔承喜’라는 이름 석자를 되찾은 것도 90년대 들어서다. 암울한 일제하 미국과 유럽·중남미 등 전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며 식민지 조선의 자존심을 세워주었던 ‘조선의 꽃’ 崔承喜. 그러나 그는 남한에서는 ‘월북예술가’라는 이유로,북한에서는 ‘반(反)혁명분자’로 낙인찍혀 남북한 모두에서 외면당해 왔다. 격동의 우리 현대사가 지하창고에 가둬 뒀던 한 천재 예술가를 ‘역사의 양지녘’으로 이끌어내 보자. 崔承喜는 한일병합 이듬해인 1911년 서울 종로에서 양반집 4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26년 숙명여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당초 도쿄음악학교에 진학할 작정이었으나 연령미달로 입학이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던중 큰 오빠 崔承一의 권유로 당시 일본 최고의 무용수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공연을 관람한 것이 계기가 돼 그의 문하에 입문했다. 해방후 그에게 쏟아진 ‘친일파’라는 비난은 그의 출생시점과 그가 일본으로 무용공부를 떠나면서부터 예고된 것인지도 모른다. 열여섯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3년간이시이 문하에서 무용공부를 한 崔承喜는 29년 귀국,서울 적선동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차렸다. 이듬해 2월 그는 경성(京城)공회당에서 제1회 신작발표회를 가졌는데 첫 공연 치고는 성공작이었다. 이 때 공연한 한국무용 ‘영산춤’ 등은 한국인이 춘 최초의 독자적 춤공연이었다는 점에서 우리 무용사에 한 획을 그은 일로 기록되고 있다. 이듬해인 1931년 그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가이자 당시 와세다대학 재학생이던 安漠(본명 安弼承)과 결혼,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최승희연구가 鄭昞浩(중앙대·무용과) 명예교수는 그들의 결혼배경을 두고 “崔承喜는 공연기획 분야에서 천재적인 安漠의 능력을,安漠은 崔承喜의 인기를 사회주의 건설에 이용하기 위해서였다”고 분석했다. 해방후 崔承喜의 월북은 그의 남편 安漠의 권유가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安漠은 북한정권에서 평양음악학교장·문화선전부 부부장(차관)을 지냈으나 58년 숙청의 비운을 맞았다. 한편 崔承喜는 33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이시이 문하로 들어갔다. 남편 安漠이 ‘조선독립음모사건’으로 구속되자 정치적 압박과 경제적 곤란까지 겹쳐 더이상 국내에서는 활동이 곤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두번째 일본행은 의외로 행운이 기다리고 있었다. 도쿄로 돌아온지 두 달만에 그는 한 잡지사 주최 여류무용대회에서 ‘신인 스타’로 떠올랐다. 그 때 그가 춘 춤은 ‘에하라 노아라’라는 전통 조선무용으로 술에 취한 자기 아버지의 굿거리 춤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었다. 1934년 도쿄에서 개최된 그의 제1회 신작발표회를 통해 그는 명실공히 ‘톱스타’로 자리를 굳혔다.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가와바다 야스나리(川端康成)는 “崔여사가 추는 조선무용을 보면 일본의 서양무용가들에게 민족의 전통에 뿌리박으라는 강력한 가르침을 볼 수 있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조선인 최초의 무용가’라는 점이 의외로 일본사회를 강타하여 그에게 광고모델 요청이 쇄도했다. 하늘을 찌를듯한 그의 인기는 부와 명예를 동시에 안겨주었다. 여세를 몰아 그는 마침내 해외공연을 추진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이듬해인 38년 2월 그는미국 샌프란시스코 공연을 시작으로 해외공연길에 올랐다. 이듬해에는 프랑스 파리 공연에 이어 스위스·이탈리아·독일·네덜란드 등 유럽공연을 마쳤다. 이무렵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40년 브라질 공연을 시작으로 우루과이·아르헨티나·페루·칠레·멕시코 등 중남미지역 공연을 성황리에 마쳤다. 40년말 2년여 해외공연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오자 일제 당국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인기를 군국주의 전쟁에 활용할 속셈이었다. 결국 그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친일대열에 들어서게 된다. 도쿄에 도착하자마자 崔承喜 부부는 궁성(宮城),메이지신궁(神宮),야스쿠니신사(神社)을 참배하고는 ‘무용보국(報國)’을 맹세하였다.(‘報知新聞’40년 12월7일) 며칠 뒤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구미(歐美)공연 때 마음이 든든한 것은 위대한 일본의 국력 덕분이었는데 새삼 조국에 감사하는 마음을 강하게 가졌다”며 친일성향을 드러냈다. 그의 친일과 관련,빼놓을 수 없는 일화 한토막.아사히신문 41년 2월5일자에는 ‘일독(日獨)헌금 교환,독일인 기사와 崔承喜씨’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내용인즉 일본회사에 근무하던 한 독일인 기사가 귀국하면서 여비의 일부를 국방헌금으로 써달라고 이 신문사에 기탁한 일이 있은 후 이번에는 유럽공연을 다녀온 崔承喜가 두 차례의 독일공연에서 생긴 수입금을 독일육군병원에 헌금하려고 가져왔다는 것. 이 무렵 崔承喜는 일본을 ‘조국’이라고 불렀다. 또 춤을 통해서도 그의 친일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일본춤의 비중이 점차 증가한데다 춤동작에서도 일본 전통춤인 ‘노(能)’가 차츰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가 공연 수익금의 일부,혹은 전부를 국방헌금으로 바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 부터다. 그는 수 차례에 걸쳐 일본군부와 조선군사령부 등에 국방헌금을 바쳤다. 41년말 ‘대동아전쟁’(소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예술가들까지도 전선(戰線)으로 내몰았다. 그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42년 2월초 그는 일본군 위문공연차 만주·중국으로 향했다. 8월까지 6개월 동안에 무려 130여 차례의 위문공연을 하였는데 당시 그의신분은 일본 육해공군 촉탁이었다. 해방때까지 그의 일본군 위문공연은 계속됐다.그는 상하이 주둔 한 일본군 부대에서 위문공연을 하다가 일본패망 소식을 접했다. 해방이 되자 그에게는 중국 현지에서부터 ‘친일파’란 비난이 쏟아졌다. 이듬해 5월 귀국해 보니 사정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친일전력(前歷) 때문에 그는 남한 땅에서는 설 땅이 없었다. 결국 그는 귀국한지 두 달도 채 안돼 남편을 따라 월북하였다. 격동기를 살아오면서 공과(功過)가 교차된 崔承喜의 일생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여기에는 변호와 비판이 엇갈리기 마련이다. 무용학자 鄭昞浩 교수는 崔承喜의 친일행적 자체는 인정하면서도 “그는 예술을 위해 친일을 했을 뿐”이라며 그가 한국무용사에 남긴 업적에 무게를 실어준다. 반면 金鍾旭(서지연구가·60)씨는 “崔承喜는 도일 직후부터 본명 대신 일본식 이름(崔承子,사이쇼코)으로 활동한 열성 친일파”라며 그의 친일성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전성기 시절 ‘반도의 무희(舞姬)’‘민족의 꽃’으로 불리며 조선인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崔承喜. 식민지시대와 분단기를 거치면서 그에게 씌워진 ‘친일(親日),친공(親共)’의 굴레가 ‘역사의 화해’를 볼 날은 과연 언제일까. ◎崔承喜의 知人들/동서양 명사들과 골고루 교분/美 소설가 존 스타인벡/영화배우 찰리 채플린/로버트 테일러·게리 쿠퍼/화가 피카소·시인 장콕토/周恩來 등과도 친교 전성기 당시 崔承喜는 ‘톱스타’답게 각국의 최정상급 명사·예술인들과 교류를 맺고 있었다. 우선 일본 체류시절 그를 후원해준 사람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가와바다 야스나리(川端康成)와 민예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등 당대 일본 최고의 지성인들이었다. 그와 교류한 서양인으로는 미국공연 시절 사귄 지휘자 스토코프스키,소설가 존 스타인백·루이스 레에나·존 그로프,영화배우 찰리 채플린·로버트 테일러·게리 쿠퍼 등이 있다. 유럽에서는 화가 피카소를 비롯하여 시인 장 콕토,소설가 로맹 롤랑·미셀 지몽,영화배우 샬 보아에이 등이 그와 친교를 맺고 있었다. 또 중국인으로는 周恩來 총리,무용가 梅蘭芳 등이그의 후원자이자 벗이었다. 국내에서는 呂運亨·宋鎭禹 등 민족진영 인사와 남편의 동지이기도 한 朴英熙·韓雪野 등 카프계열 작가들이 그와 친분관계를 맺고 있었다. 파리공연 때 그는 피카소로부터 그림 한 점을 선사받은 적이 있다. 시가로 수억대를 호가하는 이 그림의 행방을 두고 安씨집안(시댁)과 崔씨집안(친정)간에 한 때 불화가 있었던 적도 있다.
  • ‘품바’ 제작·연출 김시라(금지문화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10)

    ◎따끔한 풍자 뜨끔한 군정 따가운 ‘압력’/‘광주’ 작품부터 당국서 험한 눈길/통일타령 ‘남바’ 막조차 못 올려/해외무대도 숱한 훼방 시련/‘18년간 4,000회’ 최다공연 금자탑 “어허 품바 잘도 헌다/어허 품바 잘도 헌다/일자나 한장 들고나 보니/일각이 여삼춘디/40분단이 웬말이냐/두이 이자를 들고나 보니/이화 도화는 만발헌디/이산민족이 슬피운다/…중략…/장하도다 우리민족/평화통일을 기다린다/어허 품바가 잘도 헌다/어허 품바가 잘도 헌다”(金詩羅작·연출 품바중 통일품바타령) 지난 81년 첫 선을 보인 뒤 18년간 꾸준히 무대에 오르고 있는 1인극 ‘품바’.전남 무안에서 시작돼 광주를 거쳐 서울과 해외까지 진출,공연회수 4,000회로 국내 최다 공연작이 됐다. 무안 거지촌인 ‘천사촌’의 거지대장이던 천장근의 일생을 연극화한 ‘품바’는 소외되고 억울한 사람들의 애환과 한을 통해 베품의 철학을 강조한 순 ‘우리 연극’.무대와 객석의 분리를 보이는 서양연극과 달리 관객과 배우가 하나가 되는 우리의 전통 연희(演戱)형식을 띠면서 비극을 희극으로 승화시키는 묘한 정서를 갖고 있다.광주 민중항쟁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만든만큼 그 기본정서는 틀림없이 ‘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품바’는 시대가 변하면서 노동자들의 외침을,때로는 의문사의 규명을,그리고 통일에의 꿈을 사설과 타령으로 절실하게 풀어내는 상황극으로 자리잡아갔던 것이다. ‘품바’의 성격이 그랬던만큼 이 작품을 처음 만들고 유지해 오고 있는 시인 겸 연출자인 金詩羅씨(53)의 삶도 평탄치가 않다.그는 25세때 서울서 대학생활을 하다 귀향해 대학생을 중심으로 ‘인의예술회’를 만들어 연극제를 열기 시작했다.해마다 연극제를 열던중 광주항쟁의 참상을 듣고 81년 3회 연극제때 무안군 일로면 공회당서 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무대에 올린 게 바로 ‘품바’다. 소문이 나면서 광주로 진출해 가진 소극장과 상공회의소 공연에서부터 공연장에 경찰과 정보원들이 들이닥쳤고 이후 적지않은 사연들을 겪게 된다.고향 문인들의 주선으로 서울 말뚝이소극장에서 공연을 갖던 84년 당시 재야민권운동가 咸錫憲씨(1989년 작고)를 만난뒤 큰 변화를 맞았다.공연장을 찾은 咸씨로부터 “이것이 우리 연극이다.자네가 우리 연극을 살렸네”라는 격려와 함께 ‘한쪽에 치우치지 말고 살라’는 당부의 말을 들었다.咸씨와 교류하면서부터 공연장에 ‘정체모를 사람들’의 출입이 더해갔다. 그리고 2년뒤인 86년 마침내 공연금지의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됐다.85년부터 일본과 미국 교포들의 공연 초빙이 잇따랐지만 공연내용을 문제삼은 당국의 방해로 번번이 좌절돼 고민하고 있던 참이었다.86년 4월 방언연극제에 출품할 ‘남바’ 공연에 앞서 공연윤리위원회(공륜)에 심사를 신청해 놓고 막바지 연습에 몰두하고 있었다.‘남바’는 우리 민족의 주체적인 통일운동을 남도사투리로 풀어내는 ‘품바’의 변형으로 金씨의 기대가 각별했었다. 공연을 1주일 앞둔 어느 날 괴 전화가 걸려왔다.‘남바’의 내용을 꼬치꼬치 물으면서 “아직 때가 아니다”라는 말을 남겼다.다음날 신원을 알 수 없는 두 사람이 극장에 들이닥쳐 “겁이 없다”며 욕설을 퍼붓고는사라졌다. 그리고 다음날 공륜으로부터 ‘전면 공연금지’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그 다음해 여름 서독공연이 좌절됐다.재독 교수클럽과 한인회가 주선한 초청공연이었다.현지에선 포스터가 나붙고 방송에서까지 예고방송이 나온 상태였다.출국 이틀전 느닷없이 기획자로부터 출국을 못하게 됐다는 말을 들었다.‘품바’ 공연을 놓고 주독 한국대사와 영사의 말다툼이 있었고 결국 공연이 좌절됐다는 말만을 나중에 전해들었을 뿐이었다.결국 ‘품바’ 대신 여류 무용가 金三眞씨가 현지 교민들을 위로하는 공연으로 대체됐다. 87년 12월부터 그 이듬해 2월까지 열렸던 미주공연에서 또 한번 씁쓸한 실망감을 가져야만 했다.미주 한인회의 주선으로 마련된 로스엔젤레스·뉴욕·하와이·샌프란시스코 등 9개 도시 순회공연이었다.기대감에 부풀어 서울을 떠나 LA공항에 도착했는데 입국 심사대에서 입국을 막는 것이었다.나중에 알고보니 한국 영사관의 조치가 있었다는 것이었다.결국 모 언론사 현지 총국장의 노력으로 통과는 됐지만 공연내내 허무한 마음을 달랠수가 없었다.계속되는 정보 요원들의 감시도 견디기가 힘든 것이었다. 金씨가 ‘품바’를 위해 만든 극단 이름은 ‘가가’.이 극단 명칭에 얽힌 사연도 복잡하다.86년 서울시청에 극단 창설에 따른 신청을 수차례 냈으나 번번이 거부당했다.요주의 인물로 낙인된 극단주의 이름 ‘金詩羅’가 문제였다.결국 정보 관련 기관에서 일했던 선배의 도움으로 해결됐다.내놓는 이름마다 퇴짜를 맞자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낸 명칭 ‘가가대소’의 줄임말이 바로 ‘가가’다. 18년간 공연 4,000회란 기록을 남긴 모노 드라마 ‘품바’.등장하는 각설이 품바도 1대 丁奎秀씨부터 시작해 지금은 11대 품바가 대를 이어 무대에 오르고 있다.세월의 변화에 따라 예리한 풍자와 걸죽한 입담으로 관객들을 울리고 웃겼던 ‘품바’ 연출자 金詩羅씨는 요즘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그동안 써놓은 시 180편을 시집으로 엮어냈고 내년 공연을 목표로 33명이 출연하는 대형 품바 놀이굿판을 구상하고 있다. “품바는 일제 식민지 시대부터 자유당 말기까지 살았던 실존인물 각설이대장의 일대기를 뼈대로 하고 있지만 억압받는 민중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모습을 담아내려 애썼습니다.공연 과정에서 어려움이 많았지만 날카로운 비판이 담겼기에 장수하게 됐다고도 생각합니다.이제부터는 민중과의 일체감을 통일과 환경문제로 발전시킬 계획입니다” ◎그의 길 ▲1945년 전남 무안 출생. ▲64년 목포고 졸업. ▲69년 하나님의교회신학대 졸업. ▲81년 무안 일로 공회당서 ‘품바’ 초연. ▲82년 광주 소극장·상공회의소 공연. ▲83년 서울 말뚝이소극장 공연. ▲86년 ‘남바’ 공연 연습중 금지.극단 가가 창단. ▲87년말∼88년초 미국 9개도시 순회공연. ▲88년 한국백상예술대상 특별감독상 수상. ▲92년 품바전용극장 ‘왕과 시’ 마련. ▲93년 강강술래 소극장 개관. ▲98년 호암아트홀서 ‘품바’ 4,000회 기념공연.시집 ‘방언시집’‘상황시집’‘시민시집’ 출간.
  • 통일소/張淸洙 논설위원(外言內言)

    현대그룹 鄭周永 명예회장이 지난 6월 판문점을 통해 500마리의 소떼를 북측에 기증했을때 우리는 이 소떼가 통일을 가져올 것이란 상징적 의미를 부여해 ‘통일소’로 이름붙였다. 소가 우직하게 힘든 농사일을 도우면서 우리민족과 애환을 함께하며 살아온 가축이었기 때문에 북으로 가는 소떼에게 통일의 염원을 담아 통일소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산가족들이 소떼가 지나가는 통일로까지 나와 듣지도 못하는 쇠귀에 대고 “꼭 통일을 이룩해 달라”고 눈물어린 기원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북으로 간 통일소떼 가운데 4월개도 못돼 몇십마리가 죽었다고 하니 안타깝기 그지없다.그것도 남쪽의 통일부와 안기부가 의도적으로 소에게 먹여서는 안될 비닐쓰레기와 불순물을 먹였기 때문에 죽었다는 어처구니 없는 북한의 생떼는 씁쓸한 뒷맛을 느끼게 해준다. 우리가 정성들여 먹이고 기른 소를 북한에 보낸 것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북한을 조금이나마 도와준다는 인도주의적 동포애의 발로에서였다.굶주리는 북녘동포들을 돕는다는 순수한 마음을 전한 것이다. 또 이러한 인도적 남북교류가 분단의 높은 장벽을 허물고 평화적 통일을 이룩하는 밑거름이 됐으면 하는 소망을 함께 담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우리가 북한에 보내는 소에게 고의적으로 불순물을 먹여 죽게 만들었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생떼다. 더구나 현대그룹측이 지정기탁한 통일소 500마리가 엉뚱한 곳으로 분배됐다는 소식까지 접하고 보니 솔직히 괘씸한 생각도 없지 않다. 우리 국민들의 한결같은 통일 염원을 가득 싣고 판문점을 넘어간 소떼들의 운명이 애처롭다는 생각마저 든다. 북한당국자들이 말못하는 짐승까지 정치목적에 이용하는 것을 보면서 통일의 길이 얼마나 멀고 험난한가를 재삼 확인하게 된다. 아무쪼록 통일의 여망을 싣고 북으로 간 통일소떼가 더 이상 별탈없이 남북의 화해를 이어주는 전도사 역할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민족이 그토록 갈망하는 평화통일을 하루속히 이어주는 아름다운 연(緣)을 만들어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금강산관광 반대?/임수경 통일운동가(굄돌)

    벌써 9년 전의 오랜 기억이지만 금강산의 수려한 절경은 잊을 수가 없다. 갖가지 형상의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만물상,선녀와 나무꾼의 전설이 있는 팔담,바다와 어우러져 더욱 아름다운 해금강.금강산은 어느 하나도 놓치기 아까운 자연의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안내원은 직업상 매일 금강산에 오르지만 그때마다 모습이 다르다며 다양한 비경을 소개했다.그래서 금강산은 계절마다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리나 보다. 한해에 50만명의 남쪽 사람들이 금강산에 오른다는 것은 이러한 비경만을 감상하는 단순한 관광 차원이 아닐 것이다.아무리 북한과의 교류,왕래가 다양해졌다 해도 방북 신청서는 아무에게나 허가되지 않고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 현실 속에서 하루 1,000명 이상이 북한 땅을 밟고,북한 사람들과 얼굴을 대하는 일은 분단 50년사에 실로 획기적인 사건이다.수천,수만의 사람들이 드나들면서 예기치 못한 돌발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여러가지 사건,사고를 남북한이 서로 해결해 나가면서 대화의 장이 펼쳐진다면 바로 그것이 통일의 길을 열어가는첫걸음이 될 것이다. 물론 금강산 관광에는 부작용도 따른다.최근 북한의 여러가지 대남 위협요소,많은 비용과 경제난 등을 이유로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온다.심지어 ‘금강산관광 중단을 촉구하는 국회의원 모임’까지 만들어 시내 한복판에서 결의대회를 갖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반대 이유도 나름대로 근거가 있겠지만 역으로,그렇게 우려되는 사안들을 북한에 직접 제기하고 함께 논의하는 계기로 만들 수도 있다. 지금처럼 남북 대화가 단절돼 대결과 갈등으로 지속되는 시점에서는 더욱 절실한 문제이다.이것이 입법기관의 구성원이며 유권자의 대표인 국회의원들이 나서서,극우적 논리로 장외집회까지 가지며 반대할 일인지는 생각해 볼만한 문제이다.
  • 남북 대학 교류/張淸洙 논설위원(外言內言)

    최근 민간차원의 교류·협력이 확산되는 가운데 남북대학과 대학생의 교류도 활기를 띨 조짐을 보이고 있어 관심을 모은다. 지난 5월 성균관대학은 개성에 있는 고려성균관과 학술교류협정을 체결함으로써 분단 50년 이래 최초로 남북대학간 자매결연을 했다.이같은 남북대학간 자매결연을 통한 학술교류는 민족교육의 동질성을 상호보완하고 남북대학간의 공동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바람직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또한 17일에는 북한 시·도학생위원회 59개 대학이 다음달 방북을 추진하고 있는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산하 71개 대학에 방북 초청장을 보내왔다.물론 정부는 이적·불법단체인 한총련의 방북을 승인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그것을 알면서도 북한에 가겠다는 한총련이나 오라고 초청한 북한의 의도는 뻔하다. 그동안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운동권 대학생들을 북한에 보내 궁핍한 북한 실정을 직접 보여주는 것이 좋다는 의견도 있었다.그들이 북한을 직접 보고 북한을 알고 나면 지금과 같은 일방적 과격 사상투쟁은 자제할 것이라는 견해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점을 고려하더라도 앞으로 남북대학의 학술교류는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정책과제다.특히 남북한 대학과 대학생들의 학술교류가 제도화되고 활성화돼야 할 이유는 북한 사회주의의 민주화를 촉진시키는 촉매역할로서 크게 기여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남북간 최고 지성의 전당인 대학과 대학생간의 학술적 교류는 남북 이데올로기의 높은 장벽을 허무는 단초를 제공할 수 있다.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통일문제에도 긍정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그러나 남북간 대학교류가 갖는 긍정적 당위에도 불구하고 단기적으로 활성화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최근들어 북한대학생들의 혁명성이 약화되고 사상적 일탈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의식변화를 감안할때 북한의 지식사회가 쉽사리 개방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몰락에 따른 사상적 희의와 한국발전상에 대한 패배의식 같은 상대적 모순과 열세를 의식하고 있는 북한으로서는 대학사회의 개방을 기피할 수밖에 없다. 아무튼 성균관대학이 자매결연을 하는 과정에서3,000만원(2만달러)이라는 뒷돈 거래가 있었다는 씁쓸한 후문도 있지만 사상과 체제를 극복하는 통일을 구현하기 위해서도 남북대학의 학술교류는 될수 있는 한 활성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이다.
  • 서울올림픽 10주년과 DJ(청와대 취재수첩)

    국가도 인생과 마찬가지로 매듭이 있기 마련이다.백일,돌,이립(而立),불혹(不惑),지천명(知天命)….사람들은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흐트러진 마음을 다시 추스르고,새롭게 나려는 의지를 다진다. 마치 대나무가 해마다 나이테로 매듭을 만들듯이…. 대통령 임기중 이런 매듭을 많이 갖는 분도 있고,적게 맞는 이도 있다.매듭은 국론을 한데 모을 수 있는 자연스런 계기다.그런 점에서 金大中 대통령은 ‘복’이 많은 대통령이다.지난 8·15는 대한민국 건국 5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金대통령이 경축사에서 ‘제2건국’을 제창할 수 있었던 것도 이같은 반세기라는 절묘한 매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오는 10월1일은 3공 이후 문민정부 이전까지 한국 정치를 권위주의로 물들게했던 건군(建軍) 50주년 기념일이다.내년은 일제 강점기·남북분단과 같은 불행한 역사로 점철된 1900년대의 마지막 해이고,그 해 가을에는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10주년을 맞게된다.그 다음해는 재도약을 다짐할 절호의 찬스인 21세기의 시작 2000년,2001년이고,그 뒤 2002년에는 대망의월드컵행사가 열린다. 金대통령은 17일 청와대에서 사마란치 IOC위원장과 金雲龍 IOC위원을 접견했다.성공적이었던 88 서울올림픽 1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의 하나다.10년이 지난 오늘도 그때의 함성과 열기가 느껴질 만큼 우리 민족의 저력과 높은 문화수준을 전세계에 유감없이 과시한 행사였다. 사마란치 위원장은 이날 남북한 스포츠교류를 위해 IOC위원중 1명을 평양에 파견하겠다고 했다.또 2010년 동계올림픽의 전북 무주 개최를 검토하고 있으며,한국이 원하면 선정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전했다.정치권 사정한파 속에도 10주년이라는 매듭으로 생긴 삽상한 가을 바람같은 메시지다.
  • 姜元龍 크리스찬 아카데미 이사장·목사(국난극복의 지혜를 듣는다)

    ◎회개하라 정치인이여/IMF 검은 태풍속 한심한 잇속 다툼/국민분노 폭발 직전/반성 모습 보여야 예수님의 세상을 향한 처음 메시지는 ‘회개하라’였다.왜냐하면 지옥같은 역사 속에 임하여 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이어온 모든 분야에 먼저 대전환이 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전통과 특히 기층문화 속에는 21세기의 세계안에서 큰 빛을 끌어낼 수 있는 잠재능력을 가지고 있다.그러나 회개(패러다임의 전환)없이는 이 시대를 맞이할 수 없다.오래전에 베네딕트란 사람은 동양문화는 서구의 죄책문화 대신 수치문화(Shame Culture)라고 했다. 간단한 예를 들면 히틀러의 야수같은 정치가 붕괴된 후 독일지도자들은 한결같이 회개운동을 전개했다.많은 예가 있지만 빌리 브란트가 총리가 된 후 학살당한 유대인 무덤에 엎드려 통곡을 했었다.이런 회개의 힘이 전후 독일을 폐허에서 구해내고 큰 피해를 주었던 유럽국가들과의 관계도 정상화될 수 있었다.10월7일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는데 일본은 독일이 전후에 보여준 이런회개를 전혀 한 일이 없다.문제는 한·일관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흥망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이 분명하다.21세기는 5,000년간 축적된 우리의 잠재능력을 세계사 속에서 꽃피우느냐,아니면 역사의 무대에서 탈락하느냐의 기로다.가장 시급한 것은 회개문화의 형성이다. 해방후 역사만 보아도 우리는 일제의 유산을 회개를 통하여 청산하지 못한 채 정부를 세웠고 6·25를 겪으면서 미·소 강대국이 덮어 씌운 국토와 민족분단정책을 그대로 수용한 잘못도 회개하지 못했다. 4·19 학생의거에서 회개의 기회를 가졌으나 민주당 정부는 추잡한 신·구파 싸움만 하다가 군사혁명을 유발했으며 그들이 저지른 잘못을 오늘까지도 회개한 일이 없다.박정희정권 하에서 19년동안 민주주의의 토대를 무너뜨리고 생태계를 파괴하고 정경유착으로 돈과 권력을 숭배해온 과오를 회개한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역대 최고의 국가원수로 치켜세우기까지 하고 있다. 문민정부 하에서 외채 400억달러가 1,650억달러가 되어 IMF 사태를 초래했다고 하는데그런 기막힌 역사를 만들어온 장본인들이 회개의 모습은 고사하고 전 국민의 분노가 폭발 직전인데도 구태의연한 추잡한 정치에 몰두하고 있다. 새로운 국민정부는 길고 긴 야당생활로 불가피하게 개미군단같은 조직과 저항을 해오다가 집권당이 되었으니 과감한 방향전환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의 개혁으로 방향전환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이번에 ‘제2의 건국’도 대한민국이란 배가 도착해야 할 항구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 민주주의 시장경제는 과거에 비해 훨씬 새로운 것이다.그러나 그것은 수단은 될지언정 목표가 될 수는 없다.우리의 목표를 뚜렷하게 하고 그리로 가는 길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바꾸어야 한다.IMF사태는 우리의 항로에 태풍이 온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이 태풍권을 벗어나기까지는 내 보따리 찾는 싸움을 하지 말고 모든 힘을 하루빨리 이 태풍권을 벗어나는 일에 모아야 한다. 국민들에게 태풍권을 벗어나면 우리가 도착할 항구의 모습,즉 민족의 비전을 뚜렷이 제시해야 한다.그리고 지금까지 내려온 권력과 금력이 숭배받는 사회의 계승이 아니라 권력도,경제도 수단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주고 정치권 경제권만이 아니고 각계각층에 걸쳐 과감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 因果를 안다면/知詵 스님·백양사 주지(서울광장)

    산행을 하면서 보니 올 가을 단풍은 그렇게 곱지는 않을 듯싶다.엘니뇨 현상으로 여름내내 비가 많이 내려 이 땅 곳곳에 수해가 나더니 결국은 나무잎새마다 햇빛 공급량이 적어진 까닭인 것 같다. 농작물도 남북이 다같이 풍성한 수확을 기약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금년 가을·겨울이 풍요롭지 못하게 되니 인심도 각박해질 것 같다.가뜩이나 IMF 한파로 경제가 어렵고 실직자 문제가 심각한데 수해로 인한 피해 또한 엄청나니 예전 산행 때보다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우울한 북한 소식이나 남한 정치권의 부정 비리 인사에 대한 전례없는 사정 소식이 이 가을을 더욱 슬프게 한다. 어찌 보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죄악처럼 느껴지는 요즘의 세상살이로 너무도 혼란스럽고 무가치해 보이곤 한다.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한층 불행해지는 현실은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 낸 인과응보의 모습인 것이다.의식주가 해결되면 참가치로만 살아가야 하건만 그러지 못했으니 말이다. ○비판뒤에 실천은 없어 요즘 사회가 점점 어렵게 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몇 가지만 얘기한다면 첫째로 사람들의 가치관에 문제가 있지 않나 싶다.부와 권력,즉 부귀영화를 행복의 조건으로 삼는 자본주의 사회의 잘못되고 유치한 인생관이 그것이다. 도덕윤리는 그만두고 간단한 공공질서 하나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종교를 가진 사람들도 대개가 개인의 영적 위안만 기구하는 데 안주하거나 신앙의 대상에 매달려 부귀영화를 비는 기복신앙으로 흐른다.아는 자와 가진 자들의 신앙에는 지적 호기심이나 고급 취미,대형 집단에의 소속감으로 흐르는 경향마저 있다. 이런 것이 나쁘다고 매도하려는 소리가 아니다.우리가 살고있는 이 땅의 현실고(現實苦)를 먼저 나서서 극복하고자 하는 실천이 없음을 아쉬워하는 것이다.잘못된 현실에 대해 분석과 비판은 잘 하지만 그것을 극복하며 개혁하려는 실천력이 담보되지 않아 이 잘난 사람들은 너무 비과학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는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인과(因果)를 믿지 않는다(모른다)는 점이다.지구 온난화,이상기온,환경공해,IMF,수해,부정비리및 사회병리 현상 등 은 모두 우리 스스로가 지은 업의 필연적 결과다.그런데도 스스로 지어낸 과보를 남들에게 떠넘긴다. ○IMF·수해도 필연의 결과 비리 정치인들을 보면 인과응보가 내생에까지 가지 않고 현생에 이뤄지고 있어 ‘스피디한’ 세상에 걸맞은 법칙처럼 보인다.그들은 과보를 빨리 받아서 좋고 현정권의 더딘 개혁에 복통이 날 지경이던 서민들은 시원해서 좋다. 잘 나가던 때 죄업 많이 지은 정치인들이여,과보 받을 준비를 미리 하시라. 그간의 분단 독재 체제 속에서 지역감정 이용,각종 조작과 부정부패 등으로 일신의 영달을 일궈온 변신의 천재들은 발악같은 변명을 그치고 인과의 역사 앞에서 참회할 일이다.모든 사람들이 앞으로도 인과를 불신하면 무서운 세상이 될 것이다.윤회라는 것도 긴 질서와 다름 없다.과거를 반영 못한 현재,현재를 바탕하지 않는 미래는 없다.삼세(三世=과거·현재·미래)가 하나의 올바른 질서(道)여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고 예외 없는 인과의 법칙에 우리 모두가 겸허해지는 가을이 되자.
  • 금강산 관광의 남은 과제(사설)

    통일부가 7일 현대에서 추진하고 있는 금강산 유람선 관광사업에 대해 최종 투자승인을 했다. 금강산 관광객의 북한방문 절차에 대한 특례도 의결했고 관세청의 배려로 9월25일 첫 출항이 가능케 됐다. 빠르면 이번 주말부터 관광객 모집에 들어가 이달안에 최소한 2,000명 정도가 금강산 관광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금강산 관광사업이 계속 추진될 경우 내년부터 하루 1,000명씩 연 30만명이 금강산을 구경할수 있다고 하니 생각만 해도 마음설레는 일이다. 하지만 금강산 관광사업이 분단 50년만에 이루어진 초유의 사업이라는 점에서 마지막까지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또한 출항전에 미비한 후속과제들도 손질해야 한다. 우선 관광비용을 최소화 시켜야한다. 현재 관광비가 북에 대한 1인당 300달러 지불 금액을 포함해서 1,000달러로 결정됐지만 다른 대북사업과의 형평성을 고려,국내관광이라는 규정을 풀지 못하면 2,000달러까지 올라갈 수도 있다고 한다. 이럴 경우 비용이 너무 비싸 호화관광이라는 비난과 함께 국민적 호응을 잃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이같은 부작용을 방지하게 위해서도 관광상품 가격은 저렴한 것이 좋다. 다음으로 신변보장에 대한 보완조치도 강구해야 한다. 현대와 북한간 금강산 관광사업계약서에서 신변안전에 관한 보장장치가 마련돼 있지만 동해상에서의 관광객이나 유람선에 대한 남북군사당국간의 안전보장 장치도 강구돼야 한다. 만약 이같은 보장장치 없이 안전사고가 발생할 경우 관광사업 자체가 중단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요한 과제는 현대가 금강산 관광사업을 통일사업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의 금강산 관광 관련 대북 투자규모는 부두건설 7,216만달러,합영회사 설립 2,365만 달러 등 모두 9,582만 달러(약1,200억원)로 대북투자설립면에서 사상 최대규모다. 지난해 남북교역량의 30%수준이며 북한의 총 대외투자유치 규모의 15%에 해당하는 대형경제사업인만큼 현대는 금강산 관광사업을 영리적 목적에만 치우치지 말고 민족통일의 씨앗을 심는 사명의식을 갖고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특히 금강산 관광사업은 정부의대북포용정책과 정경분리 원칙에 따른 남북교류협력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통일사업이다. 이같은 역사적 중요성 때문에 금강산 관광사업에 거는 국민적 기대는 매우 크다고 본다.
  • “양심 걸고 국민단합 이룩”/金 대통령 부산 방문

    ◎공정인사·치우치지 않는 지역사랑 역설 “나는 헙법에 보장된 4,500만 국민의,그리고 7000만 민족의 운명을 걸머진 대통령으로서 내 양심을 걸고 정성과 노력을 다해 국민단합과 망국적인 지역감정을 불식시키겠다” 金대통령은 4일 安相英 부산시장으로부터 업무보고를 받은 자리에서도 지역갈등 해소를 거듭 역설했다.이를 위해 공정한 인사와 예산집행,그리고 국민사랑을 실천하겠다고 다짐했다. 金대통령은 먼저 “전쟁을 거쳐 1,300년전에 이룩한 통일국가가 지난 61년 군사쿠데타 이후 이렇게 됐다”며 “자유당 시절에도 내 고향인 목포에서 대구 분이 출마했는데,내가 그 밑에서 선거운동을 한 적 있다”고 운을 뗐다. 이어 “지역감정이 우리에게 무슨 이득을 가져줬느냐”며 “53년동안 분단되어 있는 것도 억울한데,여기에서 또다시 동서로 갈라져 나라가 이꼴이 난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金대통령의 목소리 톤이 갈수록 높아졌다.“어느 지역은 후하게 대하고,어느 지역은 박하게 대하는 일을 결단코 하지않겠다”고 강조했다. 金대통령은 이곳에서도 역시 굵직한 ‘선물꾸러미’를 풀어놓았다.노트를 꺼낸 뒤 安시장이 건의한 지역경제활성화 방안과 부산지하철 2호선 예산지원 등 6개 지역현안 지원방안을 소상하게 설명했다.특히 “아시안게임과 부산2기 지하철 지원을 위해 300억원을 추경예산에 반영했다”고 말하면서 골프장·승마경기장 등은 그린벨트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또 부산지역 카지노 허용 건의에 대해 “되는 방향으로 해결하겠다”고 말했다.부산신항만 건설에도 340억원의 예산지원을 약속했고,중소기업종합지원센터 건립에는 50억원의 지원을 다짐했다. 金대통령은 업무보고후 울산·창원·부산지역 기자들과 기자회견을 가진데 이어 부산시청 구내식당에서 지역인사들과 오찬을 함께 했다.이 자리에서도 제2의 건국운동과 더불어 지역감정 해소에 대한 당부를 빼놓지 않았다.
  • 金 대통령 “지역갈등 해소” 역설/울산·창원 방문 이모저모

    ◎이희호 여사는 여성계인사 간담 金大中 대통령은 3일 취임후 처음으로 울산과 창원지역을 방문,沈完求 울산시장과 金爀珪 경남지사로부터 업무보고를 받고 지역갈등 해소와 정치개혁을 역설했다. ○…金대통령은 울산시청과 경남도청 업무보고에서 강한 어조로 “시대착오도 유만부득이지 우리나라 장래를 어떻게 하려고 지역감정이 사라지지 않는지 모르겠다”며 “나는 다시 표를 달라고 할 이유가 없으므로 대통령으로서 지역차별 일소에 노력할테니 도와 달라”고 당부했다.또 “남북분단도 부끄러운 일인데,동서분열은 삼국통일을 이룬 조상에게 정말 부끄러운 일”이라며 지역구도 타파를 거듭 다짐했다. 이어 “지금 이나라에서 어디서 태어난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나도 김해 김씨인데 따지고 보면 경남사람 아니냐”고 반문했다. 특히 울산에서 심시장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자리에서는 “오랫동안 야당을 같이하고 민추협에서 같이 일한 경험이 있다.”,김경남지사에게는 “탁월한 지도력으로 경남도가 가장 우수한 자치단체로 평가받은데치하한다”고 한것 치켜세운뒤 지역현안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다. ○…金대통령은 지역인사들과 울산에서는 오찬,창원에서는 만찬행사를 베풀고 부정부패 일소와 지역갈등 해소에 앞장서 줄 것을 당부했다. 한편 부인 李姬鎬 여사는 진해에서 경남지역 여성계 인사 30여명을 초청,간담회를 가졌다.
  • 민족의 살길과 지도자의 결단/金承均(서울광장)

    나는 8월 21일 반나절 거리밖에 되지않는 평양을 가기 위해 반 백년 민족분단의 한을 품은 채 전 통일원 부총리 韓完相 박사와 북경행 비행기에 올랐다. 얼마나 가보고 싶던 금단의 땅 북녘에의 나들이인가? 그러나 이상하리만큼 아무런 설레임도 기쁨도 없었다. 담담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분단의 아픔을 생각하니 자꾸만 눈물이 났다. 분단의 아픔은 왜 북한에 가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었다. 식량이 부족해 굶주림과의 전쟁을 치르는 북쪽에 가서 배고픈 어린이를 한 눈으로 쳐다보고 수려한 자연을 감상하는 한가한 구경꾼으로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귀여운 남북어린이가 한데 어울려 어른들의 한을 풀고 어린이들 대에서는 상호신뢰하고 화해하는 아름다운 모습의 시발점을 만들고자 남북어린이종합축전(미술·음악·체육)과 이산가족의 아픔을 다소나마 풀기 위해 이산가족 생사확인 민간기구 창구를 개설하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가는 길이었다. 북경에서 우리를 만나러 나온 사람은 지난번 북경 비료회담의 북측 수석대표였던 전금철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 일행이었다. 그는 얼굴에 풍을 맞은채 마침 비행기가 없어서 아픈 몸으로 23시간의 긴 기차여행 끝에 가까스로 북경에 도착했다는 것이었다. 韓完相 전 부총리와 전금철 부위원장은 여러가지 현안에 대해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했다. 두 사람은 ▲우리 민족은 세계의 어느 민족보다 우수하다 ▲민족간에는 가슴에 칼을 숨기고 손을 내밀어서는 안된다 ▲민족의 이익은 계급의 이익에 우선되어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 그러나 많은 분야에서는 견해가 달랐다. 하지만 남북의 책임있는 인사들이 서로 터 놓고 얘기를 나누었다는 것은 중요한 수확이었다. 전금철 부위원장은 비료회담이 국민정부 대북정책의 시금석이었는데 무산되어 무척 아쉽다면서도 회담 결렬의 원인이 된 상호주의가 통일부 장관의 결정이지 대통령의 지시가 아니기를 은근히 바라며 대통령에게 기대를 접지 않고 있었다. 방북연기 요청의 이유로는 지금 국가적 사업이 중첩되어 있고,귀빈을 모시면 직접 모셔야 하는데 손이 모자라고,우리가 제안한 것들은 아직 연구 중이라 빈 손으로 보낼 우려가 있으니 8월22일 방북예정을 10월말 이후로 연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다. 북의 지체 높은 사람이 그런 악조건속에 북경까지 와서 예의를 갖추어 간곡히 동의를 구해왔으므로 서운하지만 발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민족은 예의를 숭상하여 경조사를 중시한다. 지난번 김일성 주석 사망시의 정부 태도가 적절치 못했다는 논의가 있는 터에 김정일 주석 취임 때는 어떤 모습을 보일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 늘 있는 죽음도 아니고 늘 있는 취임도 아니다. 북쪽이 주석 취임식에 특사를 요청할 수도 있고 남쪽이 특사파견을 제안할 수도 있지 않는가? 경조사를 통해 민족의 한을 푸는 계기로 삼는다면 먼 미래 역사가는 어떻게 기록할까? 남이고 북이고 간에 말한마디에 천냥 빛을 갚는다 하지 않는가?또 오는 정이 있으면 가는 정도 있다지 않는가? 남북지도자의 숙고가 절실할 때다.
  • 제주의 갈옷/임수경 통일운동가(굄돌)

    평소 옷이나 머리 모양 등 치장에 무심하던 내가 팔자에 없는 패션모델을 하게 되었다.제주에서 옛부터 전해져오는 갈옷을 널리 확산하고 갈옷에 담긴 소중한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취지였다.70년대 후반 유행한 노래 ‘꽃반지 끼고’의 주인공 은희씨가 그녀의 고향인 제주의 갈옷에 담긴 정신과 미학을 이어받아 우리 옷의 세계화 가능성을 제시하는 일을 하는데 그 취지에 공감한 내가 갈옷전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갈옷은 독특한 감물 염색법으로 만든,제주인의 삶의 지혜와 체취가 배어 있는 옷이다.그들은 매년 장마가 끝나고 햇볕 좋은 날을 택해 감을 따고 즙을 내어 무명에 감물을 들였다.그리고 열흘동안 강한 햇볕과 이슬,공기,바람을 쐬고 나면 뻣뻣한 감촉의 갈옷이 만들어진다.감에 들어 있는 탄닌 성분은 오래 입어도 옷감이 상하지 않게 하고,뻣뻣한 옷감은 몸에 달라붙지 않아 피부를 보호한다. 척박한 땅과 부족한 자원으로 모든 물자를 자급자족해야 했던 제주인들은 변방이라는 지역적 특성때문에 관리들의 무차별적인 수탈 등 이중고에 시달려왔다.그들은 공동체생활과 강인한 정신력으로 억압과 불의에 맞섰고 이는 제주의 역사를 항쟁의 역사라고 할만큼 수 많은 항쟁을 기록하였다.대표적인 1948년의 4·3항쟁은 외부의 간섭과 수탈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생존권 투쟁이자 분단을 거부하는 통일염원의 상징이었다.참된 삶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정신은 불의를 참을 수 없던 제주인들의 올곧은 의지의 표현이었고 그들과 항상 함께해 온 갈옷에는 그 의지와 혼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다. 갈옷전을 하면서 나는 어색하고 서투른 몸짓으로 많은 관중의 폭소를 이끌어냈지만 제주의 혼을 이어가고 우리 문화가 세계 속에 꽃피울 수 있다면 하는 바람을 가졌다.청바지 대신 갈옷바지를 전 세계인이 애용하게 될 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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