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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양한국 장보고에서 21세기까지](6)장수왕

    분단된 한반도를 중심으로 4강 외교가 숨가쁘게 펼쳐지고 있다.반세기 동안 지속되어 온 동아질서가 재편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고 있다.그러나 분명한사실은 한반도는 분단되어 있고 주변 4강은 분단을 최대한 활용하는 전략을구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역사에 동아시아의 중핵에서 능동적으로 주변국가를 요리한 나라가 있었다.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은 동서남북으로 전방위 공략을 펼치고,수군과 기마병을 동원해 백제를 공격한 다음 경기만을 장악하였다.장수왕은 즉위한 후 광개토대왕릉비를 세웠다.그 비에서 ‘고구려는 세계의 중심’이며‘하늘과 해의 자손’이라는 성스러운 선언을 국내외에 하였다.그리고 그 의지를 실천하기 시작했다.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한 고구려는 남진정책을 적극 추진했다.이러한 정책들은 국제질서 및 해양활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평양은 대동강과 예성강을 아우르며 평안도와 황해도를 동시에 장악하는 전략적인 거점이다.부채꼴로 펼쳐진 하계망(河系網)을 통해 내륙을 통치하고,바다와 연결되어 해양진출과황해북부 해상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그래서 고조선시대 이래 대외교섭과 경제의 중심이 되었다. 장수왕은 북방에서 연(燕) 북위(北魏)등과 전쟁을 하면서 남진정책을 전개하였다.신라를 계속 압박하여 468년에는 실직주성(悉直州城:현재의 삼척지방)을 공격하였다.481년에는 청송지역과 포항밑 흥해(興海)까지 공격하였다.이는 동해중부는 물론 남부지역까지 해양활동의 범위를 확대했음을 의미한다. 신라의 수도를 압박하고,일본열도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확보한 것이다.이곳을 출발하면 해류와 바람을 이용하여 일본열도의 시마네(島根)와 돗도리(鳥取)현 등지로 도착한다. 이 지역은 고구려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설이 제기된다.장수왕은 475년에 백제의 한성을 공격해 점령하였다.백제 개로왕은 죽음을 당하고 백제는 수도를 웅진(공주)으로 옮겼다. 이렇게 고구려의 국경선은 아산만에서 충주지역을 거쳐 동해안의 영덕까지이르렀고,이 땅의 패자가 되었다.그리고 황해중부 이북과 동해중부 이북의해상권을 장악하였다. 5세기의 동아시아에는 역학관계가 매우 복잡했다.중국은 남북조시대,즉 분단국가가 되어 전쟁을 하는 등 적대관계에 있었다.북방에서는 ‘유연(柔然)’이라는 유목국가가 북위와 싸우고 있었다.한편 백제와 신라는 성장을 하면서 중국지역과 교섭하며 국제질서에 진입하고자 하였다.왜도 마찬가지였다. 이때 모든 나라들을 유일하게 연결시키는 외교통로는 바다였다.육지만 장악해서는 동아시아의 강국이 될 수 없었다.장수왕은 이와같은 지정학적 현실을 인식하고,해양능력을 강화시켰다.20세기와는 정반대로 중국 남북조를 대상으로 실리를 추구하는 동시 등거리외교를 하였다.양자강 유역에 도읍한 송(宋)과는 해로를 이용한 해양비밀외교를 펼치며 당시의 기갑전력인 군마 800필과 화살,석궁 등을 배에 실어보내기도 했다.또한 북방의 유연과 남방의 송을 외해양(外海洋)으로 연결시키면서 북위를 협공하는 환상적인 포위망을 구축했다. 이러한 해양비밀외교는 양국의 사신선이 산동 해상에서 북위의 수군에게 나포되면서 외교분쟁을 야기시키기도 하였다.고구려는 황해중부의 해상권과 항로를 장악,백제와 신라가 북위와 교섭하는 것을 통제했다.이러한 질서에 도전하던 백제 개로왕은 결국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이후 백제 신라,왜는 남조(南朝)정권만 교섭하는데 그마저도 자유롭지 못하였다.고구려는 대륙과 한반도,해양을 장악한 동아지중해의 중핵국가로서 역학관계를 조정하는 위치를차지하였다. 고대사회에서 정치적 교섭은 주로 교역을 동반한다.고구려는 해양을 경제활성화에 최대한으로 활용하였다.군마 등 갖가지 물품을 송나라에 수출하고,남방의 물자를 수입하였다.고구려는 중계무역도 하였다.예를 들면 흥안령지역에서 생산되는 말과 담비가죽 등을 수입하고,대신 요동의 철을 수출하였다. 이러한 북방의 특산물은 다시 고구려 배에 실려 남방으로 수출된다.뿐만 아니라 섭라(涉羅:제주도로 추정)의 특산물인 가(珂:흰 마노로 된 구슬)라는보물을 북위에 보내기도 하였다.일본서기에 따르면 고구려는 279년부터 일본열도로 진출한 것으로 돼있다.특히 월(越:현재의 후쿠이현) 지역은 고구려와 호족들간의 교역이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러면 이러한 능력을 갖게한 고구려의 현실적인 해양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당시 고구려의 항로는 황해와 동해로 다양했으며 어느 지역으로도 항해가 가능했다.황해북부 연근해항로,황해중부 횡단항로,황해사단(斜斷)항로,동해중부사단항로 등 다양했으며,특히 홋카이도(삿포로 근처)까지 이어주는 연해주 항로도 있었다. 선박은 사신선,전투선,민간교역선 등이 있었다.800필의 말을 싣고 황해를종단 항해,양자강 유역까지 들어가는 등 큰 배로 이루어진 대선단이 있었다. 배안에 2개의 돛대를 갖추고,기록으로 보아 50∼100명 내외의 인원을 태웠다.근해 항로를 많이 활용하였지만 동해를 건너거나 황해를 종단하기 위해서는 별과 해를 관측하는 천문항법을 하였을 것이다. 이같이 고구려 장수왕은 활발한 남진정책과 해양활동을 통해 정치,외교,군사,경제,문화적으로 고구려를 동아지중해의 중핵국가로 만들었다.이러한 해양력의 강화와 ‘동아지중해 중핵조정론’은 21세기를 앞 둔 우리에게 의미있는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尹明喆 동국대 겸임교수
  •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씨 20년만의 귀국 인터뷰

    홍세화(52)씨에게 서울은 인간의 정겨운 체취가 느껴지지 않는 낯선 도시로 다가왔다.파리에서 20년간 이방인 생활을 하다 14일 잠시 서울에 온 홍씨는 인간적인 정감이 많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서울 동숭동의 한 식당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공항에서 들어오며 서울이 너무 많이 변해 얼떨떨했다.거리도 잘 정돈돼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파트숲과 한강을 보며 시멘트문화의 삭막한 도시로 변한 서울 풍경이 안타까웠다.아파트숲은 자연과 인간과의 융화를 가로막는 장벽처럼 느껴졌다.한강은 파리의 센강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규모가 큰 소중한 강으로 멋있게 꾸밀 수도 있지 않았나 생각했다.”서울의 이러한 모습은 철학의 빈곤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홍씨는 지난 79년 ‘남민전’ 사건에 연루돼 그동안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해왔다.지난 95년 자전 에세이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라는 책을 내우리나라에 그 존재를 알렸다.최근에는 문화비평 에세이 ‘쎄느강은 좌우를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한겨레신문사)를 냈다. 그는공항에서 아버지 홍승관(80)씨등 가족과 유홍준 교수등 지인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서울에 온 그는 가장 먼저 대학로를 찾았다. 홍씨는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있는 많은 실업자나 거지들을 보며 사회보장의 미흡함을 느꼈다.프랑스에서는 1930년대 자전거 타고 바캉스를 가던 시절부터 사회보장제도를 만들었는데 우리나라에는 자동차를 타고 휴가를 떠나는 오늘에도 사회보장이 제대로 안돼 있는 것이 안타깝다.분단이후 사회정의도 안보에 눌리고 경제제일주의에 밀려났다”고 말했다. 그는 파리에서의 택시운전은 좋은 경험이었다고 말했다.“내몸을 움직여 살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반가웠다.그 당시 무기력증에 빠져 있었는데 택시운전은 나를 무기력증에서 벗어나게 했다.그는 88년 4월부터 2년4개월간 택시운전을 했다.후배의 권유로 택시운전을 그만둔 그는 지난해까지 한국의상실 프랑스 지사장으로 일했다.지금은 글쓰는 것 외에 특별히 하는 일은 없다. 그는 “한국의 산과 들 등 자연을 가장 보고 싶었다.보고 싶은 사람도 굉장히 많았으며한 사람도 잊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그러나 원망하고 싶은 사람도 많았지만 지금은 다 잊었다는 그의 말에는 자신이 강조해온 관용의 자세가 엿보였다. “영구귀국할 것이다.나이가 들면 누구나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겠는가.파리의 생활은 ‘나 있는 곳에 우리가 없는 쓸쓸한 이방인의 삶’이다.”그의 부인도 파리생활은 적막한 절간 생활과 같다고 말했다.홍씨는 그러나 “당장 돌아오기는 어려운 상황이다.파리에서 글도 쓰고 한반도를 바라보며 공부도 더 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그는 “김대중 대통령 정권과 과거 정권과의 근원적인 차이는 극우집단이정권의 헤게모니를 잡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고 말했다.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재평가에는 부정적이다.“박정희를 재평가하려는 것은 철학의 빈곤때문이다.땀흘려 일한 사람이 누군데 경제발전을 박정희 한 사람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론은 이미 그 전정권에서 계획이 다 만들어진 것이다.” 그는 한국의 정치인과 지식인을 강하게 비판했다.“한국의 정치 지도층이나공부하는 사람들이 사회적 책무 의식이 너무 부족하다.”중도좌파의 감성적 사회주의자라고 스스로를 정의하는 그는 가장 힘겨운 때는 80년대 초 전두환정권이 등장했을 때였다고 말했다.“한국사회에 희망이 없어 보였다.” 홍씨는 “한국에 돌아오면 시민운동단체에서 일하고 싶다.그리고 사회진보와 자아실현을 위해 고민하는 젊은이들과 많은 대화를 하고 그들에게 사회적 책무 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다”고 말했다.그는 출판기념회,강연 등바쁜 일정을 마치고 7월7일 프랑스로 돌아갈 예정이다. 이창순기자 cslee@
  • [해양한국 장보고에서 21세기까지](5)-광개토대왕의 水軍상륙작전

    ‘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伐殘國軍…取五十八城村七百…’ 광개토대왕이 즉위 6년 되던 병신년에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군을 토벌한 다음 58개 성과 700촌을 얻었다는 내용의 광개토대왕 비문의 기사이다. 삼국사기가 실수(?)로 빠뜨린 대왕의 수군작전을 동양에서 가장 큰 금석문이 새겨놓았다.이 비(碑)의 주인공은 우리 역사상 가장 넓게 영토를 확장했고 군사전략에 탁월했으며,세계국가적인 성격이 강했던 시대의 대왕,왕중의왕인 태왕,즉 광개토대왕이었다. 사람들은 광개토대왕을 군사전략에 능하고 영토확장에만 힘쓴 정복군주 정도로 간단히 이해하고 있다.그러나 4∼5세기의 동아시아와 고구려는 국제질서가 재편되는 시대였고,그 힘의 중핵에서 자리잡고 있었다.4세기 후반 중국지역은 남북분단과 혼란의 시대였다. 고구려는 요동을 중심으로 북방종족들과 화전 양면의 정책을 구사하고 있었다.특히 해양을 활용,군사외교를 펼쳤다.이때 백제는 근초고왕이 황해도지역으로 북진하였다.경기만을 장악하고 황해중부 해상권을 획득해 일본열도와한반도 중부이남,그리고 중국으로 이어지는 광범위한 교역망을 구축하고자하였다.그리고 백제 중심의 국제질서로 재편하려는 의도도 있었다.이러한 상황에서 고구려와 백제는 정면 충돌을 하였고,결과는 고구려의 좌절로 일단락 되었다. 이같은 시기에 광개토대왕이 등극하였다.18세에 즉위한 청년군주인 광개토대왕은 첫해부터 왕성한 정복활동을 펼쳤다.북방종족들과는 화전 양면책을구사하였다.그러나 숙군성,요동성을 공격하고,406년에는 3,000리를 행군해온 연(燕)을 물리치면서 요동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였다.이는 요동반도와 서한만,대동강 하구를 잇는 황해동안의 해상로를 확보했다는 의미가 있다. 비문에 의하면 대왕은 즉위초에 비려(碑麗)를 토벌하고,3개부락 6,700영(營)을 공파했으며,수많은 우마군양(牛馬群羊)을 획득했다고 한다.요동과 동몽고지역을 가로지르는 시라무렌강의 상류 초원지대까지 진출했다.410년에는동부여를 친정하여 두만강 유역과 연해주 일대도 영역으로 하였다.북부여의옛땅도 이때 영토로 완전히 편입되었다. 그런데 비문에는 백제와 관계 등 주로 대왕의 남진정책에 비중을 둔 듯하다.그리고 해양활동이나 수군작전이 여러번 기록되고 있다.대왕은 즉위 2년에4만의 군사로 백제의 10현을 함락하고,10월에는 최전방기지이자 수군함대사령부가 있음직한 관미성(關彌城:강화도 북부)을 함락시켰다.그 후 6년(396)대규모 수군을 투입해 백제의 58성과 700촌을 탈취했다.기병과 수군을 활용한 선제공격 및 협공의 수륙양면작전이다.관미성 외에도 당시 비성(沸城:김포) 아단성(阿旦城:아차산) 미추성(彌鄒城:인천) 모로성(牟盧城:용인)등이점령된 것으로 보아 육군외에 수군은 3개방향으로 상륙했던 것 같다. 첫째는,대동강유역에서 출발,예성강하구와 한강이 만나는 강화북부에서 한강하류를 거슬러 오면서 김포반도와 수도를 직공하는 것이다.두번째는,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한성으로 진입하는 것이다.그리고 세번째는 남양만으로상륙하여 수원 용인 등을 거쳐 한성의 배후를 치는 것이다. 이런 전쟁양상은 경기만 쟁탈전및 서해안의 해상권 장악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경기만은 해상교통및 한반도의 중부지역을 통합시키는 내륙수로교통의 요충지였으며,백제의 해양활동 근거지였다.광개토대왕은 한성을 공멸하면서 서해연안의 요충지들을 점령하여 백제의 수군활동을 마비시키고,황해중부연안의 해상권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강했을 것이다. 이처럼 고구려가 해양봉쇄를 통한 차단전략을 꾀하자 외교적으로 고립된 백제는 왜(倭)와 본격적인 관계를 맺는다.비문에는 영락(永樂)10년 경자년(400년) 대왕이 보병과 기병 5만을 파견,백제 가야 왜의 군대를 물리치고 신라를구원했다고 한다. 이는 신라를 복속시키고, 해양을 고리로 부상하는 백제와가야, 왜의 외교질서를 신라를 이용하여 제어하려는 것이었다. 대왕은 이어 가야 영역까지 침범하였다.함안 말산리,고령 지산동,동래 복천동 고분군 등에서 고구려 계통의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가야지역은 일본열도로 건너가는 출구이자 교섭 창구였다.고구려가 일본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의도를 읽을수 있다.대왕 14년에는 백제와 왜의 연합군이 황해도지역인 대방계를 침입했으나 대왕의 친정군이 수군을 거느리고 궤멸시켰다. 이러한 상황과 동아지중해의 역학관계를 고려할 때 고구려는 이미 일본열도에 진출했을 가능성이 있다.대왕 18년(실성왕 7년),신라는 대마도를 정벌하려다 중지하였다.이같은 사실은 당시 고구려군이 신라 영내에 주둔해 있을가능성으로 보아 공조체제가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 이렇듯 광개토대왕은 전통적 육지질서를 기반으로 새롭게 성장하는 해양질서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동아지중해 내부의 각 국을 연결함으로써 자국 중심의 거대한 망(중핵)을 구성하는 정책을 추진했다.황해 해상권를 확보함으로써 대륙의 남부와 한반도 북부,황해중부 이북의 해양에 걸쳐 있는 동아지중해의 중핵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1,600년 가까이 만주벌에 서 있는 광개토대왕비.글자 하나하나는 21세기를맞으면서 우왕좌왕하는 후손들에게 해양력의 강화와 국제질서 재편전략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웅변하고 있다. 尹明喆 동국대 겸임교수
  • [대한광장] 朴正熙와의 화해는 잘못된 것인가

    우리사회는 좁은 시야에서 비롯된 단견과 경박함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사안의 경중도 가리지 못하고 여론이라는 이름의 장단에 휩쓸리기도 한다.감정이 지배하는 가운데 이성을 회복하지 못하는 양상도 나타난다.도대체 목표가 분명치 않고 중심도 없다. 고위층 여인네들의 철없는 행동에 여러날 동안 온 나라가 들썩거렸고 신문들은 신바람이 나서 연일 지면을 도배질하다시피 했다.그게 그렇게 온 나라를 뒤흔들 만큼 큰 일이었을까? 무슨 중대한 로비가 성사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지나치게 요란을 떤 게 아니냐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물론 가볍게 넘길 일은 아니었다.그러나 정도가 너무 심했다. 그 와중에 정작 중요한 남정네들의 비리의혹은 쟁점이 되지 못했다.최순영리스트 말이다.옷 로비로 그렇게 요란법석을 떤 결과 6·3 재선거는 당초 예상과는 달리 야당의 압승으로 끝났다.고급옷 로비사건이 선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주관없이 여론과 감정에휩쓸려 투표장으로 달려간 보통 여인네들은 선거결과에 만족할까? 대부분의 주요 신문들은 여당의 참패를 1면 머릿기사로 올렸다.그런데,남북간에 차관급 회담을 하기로 했다는 사실보다 재선거 결과가 더 중요한 뉴스였다고 할 수 있을까? 차관급 회담은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 외교와 북한에 대한 일관된 포용정책이 결실을 낳은 소중한 결실로서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염원하는 사람들에게 더없이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이산가족들은벌써 가족과 상봉하는 꿈에 부풀어 있을 것이다. 개혁을 등한시해서도 안되겠지만 우리시대에,그리고 정부가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해야 하는 과제는 동서와 남북의 화합 및 통일이라고 생각한다.이 둘은 동시에 가야 한다.동서가 지역감정으로 갈라져 대립하는 현실을 모른 체하고 남북통일만을 추진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따라서 남북관계의 개선을소신있게 밀고 나가고 있는 정부로서는 동서갈등의 해소도 동시에 추진하는것이 순리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김대중대통령이 지난 달 대구에서 박정희 전대통령과화해선언을 한 것은 의미있는 사건이었다.그런데 일부 언론과 시민운동단체,그리고 지식인들이 일제히 비난하고 나섰다.그 이유는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가 이뤄지지 않은 가운데 내린 정략적인 판단이란 것이었다.그리고역사학자의 몫을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빼앗아갔다는 주장이었다. 그럴까? 그런 논리라면 이제 역사학자들은 할 일을 잃고 손을 놓고 있어야한다.김대통령의 선언은 지역감정을 풀기 위한 대통령으로서의 선택이고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여전히 역사학자들의 과제로 남아있다.설령 정략적인 선택이라고 해도 그 결과는 마찬가지다.기념관 건립을 정부에서 지원하느냐 않느냐는 방법론의 문제일 뿐이다. 호남지역의 상징이었던 김대통령이 박정희를 포함한 전직 대통령들과 대립하고 있는 한 지역감정의 해소는 요원하다.그러면 김대통령이 자신을 박해했던 전직 대통령들과 계속 반목하면서 원칙만을 고집해야 옳을까? 그럴 경우뭇사람들은 이를 두고 정치보복이라고 할 것이다.김대통령의 선택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지역감정의 해소를 말하지 말아야 한다.김대통령은 지금지역감정을 해소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물론 박정희 전대통령은 공보다 과가 훨씬 많다.그러나 공과를 따지고 역사적 평가를 내리는 것과 동서갈등을 푸는 일은 별개라고 할 수 있다.왜냐하면 영남지역의 정서가 거기에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 엄연한 현실을 무시하고 동서화합을 얘기하는 것은 공염불에 불과하다.지금은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나 큰 마음으로 동서가 하나가 된 가운데 남북의분단구조를 청산하여 민족의 통일을 이루어나가야 할 때라고 믿는다. 金 東 敏 한일장신대 교수·언론학
  • 남북한 불교도 금강산서 통일기원 합장

    국토분단후 처음으로 ‘겨레의 영산’인 금강산에서 민족화합과 조국통일을기원하는 법회가 열렸다. 고산(고山) 한국불교종단협의회 회장(조계종 총무원장)등 승려 200여명과불자 350여명은 지난 3일 오전 금강산 신계사터에서 ‘민족의 화합과 나눔을 위한 불교도 금강산순례’법회를 갖고 민족의 화합과 남북의 통일을 염원했다.남한측 불교지도자들이 범종단 차원에서 대거 금강산을 방문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법회는 승려들의 탑돌이를 시작으로 삼귀의례,반야심경 봉독,법어,사홍서원 순으로 30여분간 진행됐다.마지막으로 통일기원 발원문 봉독도 있었다.고산 총무원장은 법어를 통해 “분단후 북녘에서 첫 법회를 가져 감격스럽다”고 말하고 “남북으로 나뉜 동족이 화합해 이 땅에 불국토(佛國土)를건설,세계평화에 이바지하자”고 호소했다. 불교계는 이번 법회가 남한불교계의 지도자들과 신도들이 한자리에 모인 가운데 분단후 북한 땅에서 처음으로 개최됐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신라 법흥왕때 창건된 신계사는장안사,표훈사,유점사와 더불어 금강산 4대 명찰로 꼽혀왔으나 한국전쟁때 폭격으로 모든 전각이 불타고 지금은 3층석탑과 돌기둥만 남아있다.불교계는 북한의 조선불교도연맹,금강산 관광사업자인 현대그룹과 신계사 복원문제를 논의중이다. 이에 앞서 금강산 순례단은 2일 동해항 출항직후 ‘민족화해와 평화통일기원 방생대법회’를 금강호 선상에서 가졌으며 북한에 전달할 금동좌상불과오존(五尊)괘불도 점안식도 봉행했다.금동좌상불은 높이 55cm이며 오존괘불도는 가로 145cm,세로 205cm규모의 탱화로,올 하반기 고산 총무원장의 방북이 이뤄질 경우 북한측에 직접 전달할 계획이다. 한편 금강산을 찾은 불자들은 금강산행을 이구동성으로 ‘성지순례’로 표현했다.이는 우선 ‘금강산’이란 산 이름이 ‘일체의 번뇌를 깨뜨림’을 뜻하는 불교용어에서 연유하고 있기 때문이다.또 비로봉,관음연봉,문수봉 등주요 봉우리의 이름도 부처와 보살의 이름을 따 붙여졌다. 또 신계사,유점사,표훈사,장안사 등의 명찰등이 있으며 서산대사를 비롯한 만공·동산·효봉·청담스님 등의 고승이 금강산에서 배출됐다.이밖에 금강산에는 ‘8만9암자’란 말처럼 골마다 사찰과 암자로 가득했고 아직도 그 유적이 곳곳에 남아산 전체가 가히 불교박물관이라 할만 하다. 효봉선사의 손(孫)상좌인 보성(菩成) 송광사 방장은 “노스님이 득도하신신계사를 찾으니 감개무량하다”며 풀밭에 덥썩 엎드려 주위를 숙연케 했다. 금강산 정운현기자 jwh59@
  • 불교대표 4명 첫 入北

    남측 불교계 대표가 분단 이후 처음으로 북한을 공식 방문했다.민족화합불교추진위원회(총재 고山 조계종 총무원장)는 지선(知詵)상임추진위원장(전백양사 주지),성조(性照)공동집행위원장(조계종 총무원 사회부장),유지원(柳智願)사무총장,김기창(金基昌)후원회장(파주 보광사 신도회)등 4명이 고려민항편으로 8일 오전 중국 베이징을 출발,이날 오후 2시30분 평양 순안공항에도착했다고 밝혔다. 불추위 대표단은 15일까지 북한에 머물며 조선불교도연맹과 남북통일기원법회에 참석하고 남북 불교간 지속적인 교류 협력방안을 논의하는 한편 평양광법사,묘향산 보현사 등 사찰을 참배할 예정이다. 박찬기자 parkchan@
  • 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23)-남정현의 분지②

    1964년 12월에 넘겨진 소설 ‘분지’는 이듬해인 1965년 3월호 ‘현대문학’지(2월 중순께 발간)에 게재되었는데,당시의 한국문단 풍토에서는 충격적인 풍자였지만 의외로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그런데 그로부터 근 석달이 지난 5월 어느날 작가 남정현은 충일기업사란 곳으로 연행돼 상상할 수 없었던 심문을 당하기 시작했다.으리으리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일식 건물로연행된 그에게 던진 점잖은 첫 질문은 “이 소설은 당신이 쓴 게 아니라 북괴의 어떤 인사가 써서 당신에게 건내 주어 발표시킨 것이 틀림없으니 그 경위를 밝히라”는 것이었다.언제,어디서 누구로부터 전달받았느냐는 것만 털어 놓으면 당장 풀어주겠다는 신사적인 위협은 점점 닥달로 바뀌는가 싶더니 슬그머니 고성과 육체적인 학대를 겸한,말하자면 음악적인 효과와 체육적인기능을 겸한 고문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어떤 학대를 받았을까.그 고통의 상처는 너무도 혹독하여 심한 고문을 당한 사람들 누구나처럼 그 역시 지금도 쉬 공개를 꺼린다.기발하고 기상천외한심리적 육체적인 학대 속에서 남정현은 완전히 정지된 시간에 박제된 채 매달린 한 객체로만 존재했다.그는 가끔씩은 집에 가기도 했으나 오라면 가야했고,대개는 아예 그 기업사에서 자며 봄과 초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심문 기간이 길어지면서 ‘분지’가 북한의 ‘통일전선’(1965.5.8)과,‘조국통일’(7.8)에 전재된 것이 발단이었다는 낌새를 챘지만,1965년이란 해는5·16군부 세력에게는 워낙 넘기기 어려운 때이기도 했다.지식인과 문학인들이 앞장 서서 전개했던 한일협정과 국군 파월을 둘러싼 비판의 소리는 높아만 가고 있었다. 특히 1965년 7월 9일자로 발표된 재경 문학인 82명 연서로 된 ‘한일 조약의 즉각 파기와 국회 비준 거부를 요구하는 성명서’는 분단 이후 문인들이처음으로 집단적인 사회비판 운동에 나선 사건이었다.“일본측 일방에만 유리하도록 되어 있으며 민족적 자존과 현실적 이해,미래의 전망에 한결같이모욕과 재침 그리고 실질적인 예속을 초래하도록 되어있다”고 지적한 이 성명서는 전체 문학인이 더 이상 관망적인 자세를 버리고 “주권과 권익의 옹호를 위해 투쟁하는 대열에 적극 참여하겠다”는 투지를 밝히면서,“한일협정 반대 데모로 구속된 애국 학생들을 즉시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서명명단에는 박종화 김광섭 모윤숙 곽종원 안수길 조지훈황순원 등 원로급과,조병화 김남조 김수영 홍윤숙 신동엽 유경환 성춘복 등시인,박경리 선우휘 최일남 한말숙 등 작가에다 전숙희 등 수필가들이 대거참여한 범문단적 면모를 띠었다는 점이다.문단의 유명인으로 이 명단에서 빠진 인사로는 서정주 조연현을 비롯한 소수였다(총 명단은 임헌영 ‘민족의상황과 문학사상’ 393쪽). 바로 이 성명서가 발표된 7월 9일에 작가 남정현은 중앙정보부에서 정식 구속돼 서대문 구치소로 이송,그 닷새 뒤인 14일 검찰로 송치(김태현 서울지검 공안부장)되었다.김부장 검사의 제자였던 시인 박재삼이 ‘대한일보’에 근무하면서 틈을 내어 검찰청으로 찾아가 “선생님,남정현은 착한 사람입니다. 당장 풀어주셔야 합니다”고 강변했던 일화는 60년대 문단의 한 삽화이다.그는 계속 ‘분지’ 공판에다녔는데 구형이 있던 날 법정에서 오랫동안 서 있다가 나가던 길에 쓰러져 그 뒤 일생을 고생하다가 작고했다.이 무렵에 또다른 어떤 일이 있었을까.‘현대문학’ 8월호(7월 중순 발매)가 광복 20주년 기념으로 ‘광복 후의 문예지 문학단체’ 특집을 냈는데,이 경하할 해방 기념 특집호의 ‘편집 후기’에는 아래와 같은 글이 실려 있다. “본지 지난 3월호에 발표된 남정현씨의 소설 ‘분지’는 본지의 부주의로인하여 게재된 것으로서 이로 인하여 사회의 물의를 일으킨데 대하여 정중히사과하는 바이다” 이후 ‘남정현’이란 이름이 ‘현대문학’에 다시 등장하는데는 무려 33년이 걸렸다.‘현대문학’은 1998년 10월호에서 ‘현대문학의 문제작 재조명’이란 기획을 마련하여 ‘분지’를 재게재했는데,‘편집 후기’에다 이렇게쓰고 있다. “…최초로 문학작품을 반공법으로 문제 삼았던 남정현 선생의 ‘분지’를싣는다.외세로 인한 당대의 전도된 가치관과 민족의 정체성 부재의 문제를한 가정의 비극을 퉁하여 통렬한 풍자로 비판한 작품이다.강진호씨의냉철한 작품론에서 언급되었듯이 작가의 시대의식에 대한 인식의 깊이로써 전후문학을 한단계 끌어올리는 성과를 거두었던 이 작품은 33년이 지난 오늘날,극도로 혼란해진 사회적 현실을 숙고하게 만든다”[任軒永 문학평론가]
  • 이북5도委 파악 실태

    3·4일 통일부에는 이산가족 문의전화가 쇄도했다.베이징 차관급회담 성사로 이산가족 문제 논의의 장이 마련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북한 당국이 파악중인 이산가족 실태에 관심이 모아진다.흔히들말하는 ‘1,000만 이산가족’은 엄밀한 통계숫자는 아니다.남북에 흩어져 살고 있는 전체 실향민의 ‘상징적’ 규모일 뿐이다. 우리측 이북5도위가 추산하고 있는 남한의 이산가족은 2·3세대를 포함 약767만명.이중 월남해 분단을 직접 경험한 이산1세대는 123만명.특히 상봉이시급한 60대 이상의 고령자도 69만여명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정부는 유사시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원활히 하기 위해 이산가족정보통합센터를 운용중이다.통일부에 설치된 이 전산망에 데이터베이스화된 남한내 이산가족 명단은 약 13만명.이들이 찾고 있는 재북 가족은 모두 36만여명이나된다. 반면 북한은 대체로 월남자 가족을 ‘복잡군중’(적대계층)으로 분류하고있다.이들 세대 중 상당수를 수용소나 독재대상구역에 보낸 데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때문에 주민들중 이산가족임을 밝히기를 꺼리거나 숨기는 사람도 있다는전문이다. 그러나 북측도 내부적으로 이산가족 명단을 확보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사회안전성 산하에는 지난해 3월 주소안내소가 설치됐다는 소식이다.이 안내소에서는 지난해 12월 말까지 북한내에 거주하는 460여명의 내부 이산가족 상봉을 주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구본영기자 kby7@
  • [특별기고] 6·25를 잊지말자?

    6·25와 현충일이 든 ‘잔인한 달’ 6월이 또 돌아왔다.우리는 6·25 전쟁후 반세기 동안 이 달이 돌아올 때마다 ‘6·25를 잊지 말자’고 외쳐 온 셈인데,김대중정부의 대북 화해정책이 어느 정도 정착돼 가는 시점에서 맞는이 6월도 북녘에 대한 경계심과 적개심을 높이기만 하는 한 달이 돼야 할 것인가 생각해볼 만하다.그보다는 이제 평화롭게 통일해갈 수 있는 지혜를 배우고 그 방법을 생각해 보는 한 달이 돼야 하지 않을까 한다. 6·25전쟁은 통일전쟁이었다.처음에는 북쪽에 의해 무력통일이 될 뻔했으나 미군을 주력으로 하는 유엔군의 참전으로 불가능했다.다음에는 인천상륙과유엔군의 38선 돌파로 남쪽에 의한 무력통일이 될 뻔했으나 이번에는 중국군의 참전으로 좌절됐다.결국 어느쪽도 무력으로 통일할 수 없었는데,그 원인은 한반도 지역이 처한 지정학적 위치가 중요한 원인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통일을 목적한 전쟁이 3년간이나 계속됐으나 200만명 이상의 목숨이 희생되고 전 국토가 황폐화했을 뿐 통일은 되지 않았다.여러번 말했지만 6·25전쟁은 한반도 지역이 지정학적 조건 때문에 전쟁의 방법으로는 통일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 전쟁이었으며,그 때문에 평화통일론이 정착돼 가고 있다.이 사실을 역사학은 정확하게 이해하고 가르쳐야 할 것이다. 얼마전 어느 국제학술회의에서 우리쪽 참가자가 중국 참가자에게 만약 한반도가 남쪽에 의해 흡수통일되면 중국은 어찌하겠느냐고 물었더니 중국으로서는 용납하기 어려울 것이라는,국제학술회의 참가자 치고는 비교적 솔직한 대답이 나왔다. 아마 러시아 참가자가 있었고 같은 질문을 받았다면 같은 답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봤다. 그리고 지금은 가능성이 희박해졌지만 만약 한반도가 북쪽에 의해 흡수통일되는 경우 어찌하겠느냐 하고 일본이나 미국 참가자에게 물었다면 비슷한 답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했다. 6·25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한반도 통일과 주변 세력의 이해관계를 생각해보면 대체로 보아 해양쪽의 미국과 일본이,그리고 내륙쪽의 중국과 러시아가 이해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상황 아래서 전쟁통일도,흡수통일도 아닌 ‘대등’통일을 어떻게 이루어낼 것인가 하는 것이 한반도 통일문제의 초점이라 할 수 있다. 6·25를 침략전쟁으로만 보고 누가 먼저 침략했는가를 따지는 역사인식에한정되는 한 6월은 계속 침략자에 대한 적개심과 재침에 대한 경계심을 높이는 달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적개심과 경계심을 높이는 일만으로 주변 열강의 대립된 이해관계속에서 평화통일을 이뤄내기는 어렵다.지난 50년간 남북 사이의 이 적개심과 경계심은 한반도 지역을 세계 무기상인들의 좋은 시장이 되게 했다. 중국에 예속됐다가 일본의 식민지가 됐고 남북으로 분단돼 싸웠던 한반도지역이 평화롭게 통일돼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제3의 독자적 위치를 확보할수 있을 때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시아 전체의 항구적 평화가 올 수 있을 것이며,그것이 21세기 전체 동북아시아 주민의 과제이기도 하다.그리고 그것은 ‘6·25를 잊지 말자’는 구호가 없어질 때 가능하게 될 것이다. 언제쯤에나 ‘6·25를 잊지 말자’는 말이 나오지 않게 될까.언제쯤에나 ‘6·25를 잊지 말자’는 구호가 없어져야 한다는 말이 불온하게 취급되지 않게 될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6·25를 잊지 말자’는 구호가 없어질 때 옳은 의미의 평화통일이 가능하다는 사실일 것이다. 강만길/고려대학교 명예교수
  • MBC스페셜 판문점의 감춰진 모습 첫 공개

    지난 50년간 남북한 긴장과 대립의 상징이었던 판문점의 감춰진 얼굴들이 4일 밤 11시15분 ‘MBC스페셜,판문점은 말한다’에서 공개된다.관광코스 이외의 판문점 모습이 방송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우선 눈길을 끄는 것은 판문점의 하루를 밀착취재한 화면.새소리로 시작하는 평화로운 아침은 여느 동네와 다를 바 없다.한낮의 정적과 드문드문 오가는 관광객,장엄한 일몰,평온한 밤으로 이어지는 24시간은 50년 역동의 세월을 말없이 증언하는 듯하다.평화의 마을 대성동에 걸린 대형 태극기 역시 인상적이다.바람에 종일 펄럭이는 덕에 쉽게 낡아 3개월에 한번씩 교체하는데,가로 18m,세로 12m로 천값만 100만원에 이른다. 군사분계선(DMZ)에서 불과 20m떨어진 중립국 감독위원회 막사에서 생활하는 스위스와 스웨덴 군인의 독특한 복장과 평화로운 캠프생활도 시선을 붙잡는다.아울러 최전선 정예부대인 판문점 공동경비대(JAS)의 비상훈련 모습이 공개된다.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군화도 벗지않고 취침하는데,수시로 실시되는야간비상소집 훈련은 실전을 방불케한다. 이와함께 남북을 잇는 단 하나의 전화선,적십자 라인을 통해 남북연락관이통화하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취재진이 판문점을 찾았을 때 마침 북한비료지원을 위한 접촉이 이뤄지고 있었던 것.서로의 안부를 묻는 이들은 마치오랜 친구처럼 정겨워보였다. 제작진은 이밖에 72년 시작된 적십자 회담부터 오늘날까지 판문점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을 돌아본다.판문점 도끼사건,군사정전위원회 회담장의 에피소드 등이 20년간 남북대화를 담당했던 김달술씨와 UN군의 일원이었던 이문항씨 등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전달된다.제작진은 “분단의 상징이 아니라 교류와 화해의 장으로서 판문점의 가능성을 부각시키고 싶었다”고 기획의도를 밝혔다. 이순녀기자 coral@
  • [대한광장] ‘사실상 통일’ 달성의 선결조건

    과거 잠수정 침투와 같은 북한의 대남도발,미사일 및 핵개발 의지 등에도불구하고 우리 정부는 대북 포용정책의 기조를 일관성있게 유지해왔다.최근미국 대북정책조정관 겸 대통령 특사 페리가 북한을 방문,한·미·일의 대북 포괄적 접근방안을 설명하는 등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를 위한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이러한 정부의 냉전구조 해체는 ‘남북이 서로 오고 가며 돕고 나누는 사실상의 통일상황’ 달성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분단국간의 인적·물적 교류협력을 추구하는 ‘사실상의 통일’은최소한 교류협력을 통해 어느 일국이 흡수통일되지 않는다는 전제조건이 충족돼야 가능하다.인적·물적 교류협력은 열위체제 하의 주민들의 정체성을우위체제 지향적으로 형성시켜 흡수통일을 촉진시키는 기능을 한다. 그러므로 국제적 동맹관계 구축을 통한 세력균형 유지 등 최소한의 힘의 균형상태가 구축되어야 교류협력의 폐해로 인한 흡수통일을 방지하고 ‘사실상의 통일’ 상태로 진입할 수 있다. 동·서독은 통일 직전 900만여명의 동서독 주민들이상호 왕래를 하는 등‘사실상의 통일’ 상태를 달성하였다.동독은 동서독간 교류협력의 심화로인한 부정적인 효과를 잘 인식하고 있었으나,동서 냉전체제 하의 유럽의 분단이 지속되는 한 소련의 동독 비호로 인해 동독이 서독으로 흡수병합될 수없었다. 중국과 대만의 경우는 중국의 ‘하나의 중국’ 정책과 대만의 분리 독립정책의 충돌로 양안관계는 정상화되지 않고 있으나,중국의 국력 우위와 대만의 생활수준의 우위 및 미국의 안보상의 대만 지원 등 체제비교상의 힘의 균형으로 인해 흡수통일 우려가 불식되고 양안간 교류·협력관계의 활성화를 통한 ‘사실상의 통일’ 상황을 맞고 있다. 그러나 남북한의 경우는 어떤가? 1990년대 구소련의 붕괴와 중국의 사회주의적 시장경제체제 채택으로 소련·중국·북한의 사회주의 3각동맹체제가 해체된 반면,미국·일본·한국의 자유민주주의 3각동맹체제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또 북한의 국민총생산 규모는 남한의 25분의 1밖에 되지 않는 등 체제비교상의 힘의 균형은 이미 파괴되었다. 따라서 국제적 세력균형의 와해,체제비교상의 열위 등 요인이 존재하는 한,교류협력이 강화되는 남북한간의 ‘사실상의 통일’ 상태는 북한체제의 와해를 야기할수 있으므로 결코 북한이 응할리 만무하다.그러므로 북한이 한·미·일 3국의 대북 포괄적 방안을 적극 수용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태도라고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북한은 미국과 불편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중국 및 러시아에 대한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바,이는 새로운 힘의 균형관계 형성을 통해체제변화에 따른 위험을 분산시키려는 북한의 의도로 보여진다. 우리정부는 미국과 중·러간의 관계악화,북·중·러의 관계개선 등 최근 동북아 정세가 한반도를 둘러싼 신냉전구조를 형성,대북 포용정책이 유실될 수 있다고 우려할 필요가 없다.최근 중국과 러시아는 세계시장을 제국주의적지배도구로 간주,세계시장 분리전략을 취했던 과거 냉전시대와는 달리 경제발전을 위해 미국 주도의 세계시장이 필요한 나머지,미국은 물론 한국을 적대시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체제전환 요구에 당면하고 있는 북한이 세계시장 통합적인 중국·러시아의국가발전전략을 추종한다면,북한은 교류협력에 따른 체제동요를 억제하기 위해 중·러·북의 새로운 3각동맹체제 구축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이는 남북한간의 힘의 균형상태를 최소한의 수준에서 복원하는 결과를 초래,역설적으로 정부의 남북한간 ‘사실상의 통일’상태 추구를 용이하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정부는 북한의 중국·러시아 관계개선이 중장기적으로는 ‘사실상의 통일’상태 달성을 위한 선결조건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黃炳悳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각료 에세이] 열린 마음으로-洪淳瑛 외교부장관

    우리가 사는 오늘의 시대 특징들 가운데 하나는 미국이 세계 질서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 압도적인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이다.그 힘은 미국이세계의 보편적 가치인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서 가장 앞서가고 있으며 자유의 정신과 다원주의에 입각한 끊임없는 자기 혁신의 과정 속에서 나라의 활력을 유지하고 있는 데에서 나온다. 오늘날의 지구적 과제들,즉 핵비확산(核非擴散),테러리즘,인종분규 및 인종청소,환경보존 등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미국은 앞장서서 지도력을 발휘하도록 요구받고 있다.미국은 이러한 책무에 관해서 때로는 불평하고 저항하지만,이는 유일 초강대국으로서 지불해야 하는 대가임을 미국 국민 대다수가인정하고 있다.지구촌 그 어느 곳에서 전쟁이 일어나거나 빈곤과 기근이 발생할 때에는 미국의 자유와 번영도 결국에는 영향을 받는다는 인식이 있기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의 지도력은 무한정한 것이 아니다.옳은 것을 지향할 때,그리고 이를 위하여 스스로의 희생을 각오할 때 미국의 지도력은 국제사회의 지지와 지원을 받을수 있다.과거의 패권국들과 달리 오늘날의 유일 초강대국인미국은 민주적 지도력,모범에 의한 지도력(leadership by example)을 발휘해야 하는 것이다.코소보사태는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보여준다. 우리의 외교는 이러한 미국을 비롯한 주변 4강을 주된 대상으로 삼고 있다. 4강과의 관계는 우리의 국운과 직결된다.남북한 분단의 비극도 4강에 의해우리에게 강요된 운명이었으며 앞으로 남북한의 평화공존,그리고 통일국가로 가는 과정도 4강의 지원과 지지 없이는 전개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지평이 유일 초강대국을 포함한 주변 4강에서 끝나서는 안된다.세계는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가고 있고,각국이 지향하는 가치관과 발전전략도 동질화되어 가고 있다.우리의 안녕과 발전은 궁극적으로 4강너머 세계공동체 전체의 평화와 번영의 일부로서 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의 국가발전 전략과 정책도 지구촌 전체를 향해 당당하게 내놓을 수 있는 유익한 것,옳은 것이어야 한다.일상생활에서도 우리는 인접 환경을 넘어 유럽,CIS,중동아프리카,중남미지역의 많은 나라들을 보는 것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그래야만 세계 공동체의 지지와 지원을 받고 그 책임있는구성원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4강으로부터도 더 큰 존중을 얻을 수 있다. 이러한 세계관 위에 우리의 대북한 포용정책과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외교정책이 서 있어야 한다.4강 외교의 성공도 세계 공동체를 향한 외교의 성공 위에 기초한다고 본다.
  • [특별기고] 白凡정신으로 위기 극복을

    올해는 백범선생 서거 50주년이다.백범은 ‘나의 소원’이라는 글에서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하나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치 않고,‘내 소원은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오,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라고 썼다. 백범은 대한민국이 어떠한 완전 자주독립국가로 되기를 소원했을까? 통일된 창조적 선진 문화국가가 되어 약소국·후진국들을 돕고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모범적 국가로 되기를 소원했다. 그는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한다.…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그래서 진정한 세계평화가 우리나라에서,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고 썼다. 생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조국독립과 통일을 위해 싸운 백범의 민족주의는 이와같이 ‘열린 민족주의’였다.‘열린 민족주의’가 백범정신의 핵심인것이다. 일찌기 인도의 자와하랄 네루는 세계사에서 민족주의에는 반드시 구분해야할 두개 유형이 있음을 강조했다.그 하나는 제국주의와 결합하여 약소민족을 침략하고 수탈한 민족주의이다.과거 서양열강과 일본의 민족주의가 이 유형이라고 했다.이 유형의 민족주의는 인류의 절대다수인 약소민족들에게 큰 고통을 주고 인류발전과 세계평화에 큰 해악을 끼쳤다. 다른 하나의 민족주의는 열강의 제국주의침략에 대항하여 자기민족의 자유·해방·독립·통일을 추구한 약소민족들의 민족주의,제3세계의 민족주의이다.이 유형의 민족주의는 희생당해 죽어가는 약소민족들을 구원하여 자유와해방과 독립을 준 민족주의이다.이 유형의 민족주의는 인류의 행복과 발전,세계평화와 세계사의 진전에 크게 기여하는 참으로 위대한 이념이라고 했다.백범의 민족주의,한국의 민족주의는 후자 유형의 민족주의이다.백범의 민족주의,한국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자들의 침략과 압박으로부터 한국민족의 자유·해방·독립·통일만을 추구했지,단 한번도 다른 나라나 민족들을 침략하거나 지배할 것은 상상해본 적도 없는 민족주의이다.그것은 언제나 ‘열린 민족주의’였으며,세계평화를 추구하고 약소민족들을 도우려는 민족주의였다. 그러므로 민족주의의 두개 유형을 구분하지 못하고,서양열강과 일본이 민족주의를 비판하면서 세계화·세계주의를 주창하니까,덩달아 한국인들이 한국민족주의를 비판하고 ‘세계화’를 주창하는 것은 실사구시적인 것이 아니며,옳은 것이 아니다. 열강은 부강국들이므로,약소민족·후진국·중진국들이 민족주의를 버리고‘세계화’만 주창해야 약소민족들의 저항을 받지 않고 열강의 ‘국가이익의 극대화’를 달성할 수 있기 때문에 세계화를 권고하고 압력을 가하는 것이다.아직 인류사에는 ‘세계정부’도 없고 ‘보편적 세계화’도 없다.내용을들여다보면 그것은 열강의 ‘국가이익 극대화’를 분장하기 위한 열강의 ‘세계화’의 측면이 강하다. 아직도 인류사의 현단계는 모든 민족과 국가들이 자주독립을 강화하고 불평등과 차별을 해소하면서 국제협력과 세계평화를 강화해 나가는 ‘민족독립국가들의 국제적 협력강화’의 단계이다.그러므로 우리 한국과 같이 겨우 중진국 단계이고 분단국가로서 ‘통일’을 성취해야 할 나라의 국민들은 ‘열린민족주의’를 오히려 강화해야 한다.한국은 민족주의를 버리면 열강에게 종속당하고 희생당하며,선진국도,통일도 달성하지 못하게 된다. 한국의 ‘열린 민족주의’는 선진국과 통일을 성취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다.애국심과 민족문화를 고취하고,국민경제를 발전시키며,국가이익을 철저히 수호하면서,다른 약소민족들과 후진국들을 돕고 세계평화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민족·국가와 세계를 균형·조화시켜야 하지,민족국가를 경시하거나 버리고 ‘세계화’만 강조하면,한국민족은 또 열강에게 희생당하기 십상이다. ‘열린 민족주의’의 모범이 백범의 민족주의이다.우리는 백범의 ‘열린민족주의’를 배우고 계승 발전시켜 당장의 IMF 사태,WTO 세계체제의 도전을극복하고,궁극적으로는 민족통일을 달성하며,창조적 선진 문화국가를 건설하여 진정한 세계평화와 국제협력의 모범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우리 20세기 기회주의자 유달리 많았다

    역사학자 강만길 교수는 금년봄 한 인터뷰에서 우리의 20세기를 ‘비극’이라는 한 단어로 압축한 바 있다.전반기 일제의 식민지통치기와 해방후의 분단시대를 아우를 수 있는 단어는 ‘비극’ 밖에 없다는 것이 강교수의 ‘20세기관’이다. 역사종합계간지 ‘역사비평’ 여름호는 20세기에 등장한 우리사회의 부정적인 면을 되짚어 ‘자아확인’의 장을 마련하고 있다.‘20세기 한국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란 기획특집물이 그것으로 복고주의·사대주의·반공주의·한국적 민주주의·가부장제·가족이기주의·물신숭배·기회주의·기복주의·지역 연고 정실주의 등을 소항목으로 잡고 있다.물론 이 모두가 20세기에 등장한 ‘부정적 현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중국에 대한 사대주의,가부장제·기복주의 등은 지난 역사 곳곳에 기록돼 있다.차이점이라면 이번 기획에서는 이들을 근대적 개념에서 접근했다는 것이다. 박광용 가톨릭대 교수는 첫머리에서 93년 북한의 단군릉 발굴로 상징되는 20세기의 ‘복고주의’에 대한 경계론을 펴고 있다.특히 ‘새로운’ 광개토대왕,장보고,대륙백제를 표방한 ‘웅비사관’이 사실은 일본인들의 단골메뉴라고 일깨우고 있다. ‘사대주의’와 관련,임대식 서울대 강사는 약소국의 입장에서 사대는 존립과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불가피한 면이 없지 않았다고 보고 그 배경을 물적 기반과 계급성에서 찾고 있다.결국 친일이나 친미는 동일한 것으로하나의 선택이자 노선이었다는 것. 강경성(서울대 외교학과 박사과정 수료)씨는 ‘주장의 과잉’과 ‘연구의결핍’이라는 현상은 ‘반공주의’의 상징적 실상이라고 말한다.김세균 서울대 교수는 유신시절에 등장한 ‘한국적 민주주의’는 ‘한국적 파시즘체제의 완성된 형태’라고 규정하며 집권세력과 유신 옹호 이론가들이 한국적 민주주의로 정당화했다고 주장한다. 새 천년을 앞두고 21세기는 ‘여성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그러면‘가부장제’는 사라질 것인가?답은 부정적이다.이승희 성공회대 강사는 가부장제 밖으로 나간 여성들은 남성이 씌워주는 우산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비바람 부는 광야에서 혼자 모든 걸 감당해야 하는 격이라고 말한다. ‘내 자식 제일주의’ 등 ‘가족이기주의’는 전쟁과 산업화가 낳은 가족주의의 산물로 근본적으로는 시민의식·공공의식 부재에서 비롯됐다는 김동춘성공회대 교수의 지적은 한걸음 더 나아가면 ‘패거리주의’와 동일선상에서 만난다. 김상태 항공대 강사는 오늘날의 ‘지역·연고·정실주의’는 금세기 전반부기호세력과 서북세력간의 갈등이 후반부 들어 영·호남의 지역갈등으로 증폭돼 왔다며 해결책으로 지역간 균형발전을 우선과제로 들었다. 안동대 임재해 교수가 20세기의 ‘굴절’ 가운데 하나를 ‘기회주의’로 본 것은 탁견이다.변절자·기회주의자가 유달리 20세기에 많은 것은 치열하지못한 역사의식과 이들을 배태시킨 사회적 토양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 파리 홍세화씨 두번째 에세이집 ‘세느강은 좌우를‘

    파리에서 20년간 이방인으로 살아온 홍세화(52)씨가 두번째로 쓴 책의 제목‘세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에는 냉소적 현실 비판이깔려 있다.프랑스에서는 좌·우파가 화합하고 있는데 한반도의 남북 분단상황은 여전하며 그 분단이 많은 문제의 원류라는 인식이 밑바탕에 흐르고 있다.그의 현실 비판에는 남북통일에 대한 열망과 함께 분단상황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기득권 세력에 대한 강한 분노가 담겨 있다. ‘남민전’ 사건과 관련,지난 79년부터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해온 홍씨는95년에 ‘나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라는 자전적 에세이를 냈다.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며 그동안 잊혀졌던 그를 다시 한국의 현실로 불러왔다.두번째 책은 프랑스와 한국을 비교하고 한국의 권위주의·교육·사회문제 등을 비판하는 문예비평 에세이다. 유럽문화 중심지에 있던 그는 프랑스라는 거울을 통해 한국사회의 문제를보고 있다.그는 오랜 세월동안 지구 반대편에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언제나한국사회 중심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나는 나무 하나하나는 보지 못했지만 한국사회라는 숲을 20년동안 보아왔다”고 말한다. 그의 한국진단은 매우 냉소적이고 비판적이다.“한국사회라는 숲에서는 병든 나무들이 슬픈 춤을 추고 온통 탁류가 흐르고 있다.그 거대한 탁류는 뻔뻔스러움,약삭빠른 냉소,절망과 체념의 신음소리라는 세 가지 냄새를 뿜어내고 있다.돈없고 힘없는 사람들은 ‘강요된 굴종’이라는 춤을 추고 냉소적소시민들은 ‘적당한 타협’이라는 약삭빠른 춤을 추며 수치심조차 모르는기름낀 얼굴들은 산허리를 깎은데서 골프라는 허리춤을 추고 있다.” 그의 사회비판은 극우세력 비판과 연결된다.“한국의 극우세력은 스스로 극우라 칭하지 않았고 보수라 칭했다.그리고 자유민주주의자라고 자처했다.극우와 자유민주주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흘러야 하는데 한국의 보수는 극우와 자유민주주의 사이를 제멋대로 왔다 갔다 한다”고 비판한다. 그는 한국에는 극우만 있을 뿐 세련된 보수는 없다고 말한다.정치이념에서의 ‘세련성’을 강조하는 그는 한국의 진보세력은 세련된 성숙함을 보여야한다고 말한다.“진보는 스스로 세련됨으로써 세련되지 않은 보수가 파놓은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 극우와 선을 분명히 하는 세련된 보수를 이끌어내야 한다”. 그는 그랑제콜 신고식을 통해 한국과 프랑스 대학생들의 의미있는 차이를설명한다.“녹슨 다리 교각에 한사람씩 달라붙어 녹을 제거하는 시합이 벌어진다.선배들의 고함 속에 신입생들은 교각을 윤이 날 때까지 닦아야 한다.토목공학과 신입생들에게 다리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신고식은 대개 술파티로 끝나는 한국대학생들의 신입생 환영회와는 차원이 다른다”. 한국사회를 비판적 시각으로 보는 홍씨에게 한국 사회와 프랑스 사회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무엇일까.그는 이렇게 말한다.“프랑스 사회는 사회정의가 질서(안보)에 우선하는데,한국 사회는 질서(안보)가 사회정의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우선한다”.그러나 한국사회도 안보지상주의와 획일성에서 벗어나 그가 바라는 관용과 다양성의 사회로 바뀌고 있다.
  • [사설] 한·러 정상회담의 성과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3박4일간의 러시아 방문을 마치고 30일 다음 방문국인 몽골로 떠났다.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의 건강문제로 당초 떠날 때의 우려와는 달리 정상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됐고 이를 통해 한때 외교관 상호 추방사태까지 빚었던 양국관계가 전면 복원(復元)되게 됐다는 것은 커다란 외교적 성과일 뿐만 아니라 동북아 정세 전반을 위해서도 더없이 다행한일이 아닐 수 없다. 정상회담의 성과는 러시아측이 공동성명에서 “한반도에서 긴장을 완화하려는 한국정부의 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한반도뿐 아니라 지역 전체의 평화와 안정을 공고하게 할 남북한 사이의 접촉과 생산적 대화를 촉진하려는김대중정부의 정책에 지지를 표명한다”고 적시(摘示)한 대목에 잘 나타나있다. 러시아는 한반도 분단은 물론 6·25전쟁과도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엄연한주변국이다.뿐만 아니라 러시아는 앞으로도 통일문제·긴장완화·군축문제등 한반도와 관련해 결코 소외될 수 없는 세력이다.그런 점에서 김대중대통령이 러시아와 일본을 포함한 ‘6자회담’을 통해 통일문제를 풀어가려는 구상은 합리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4자회담’ 당사국들이 각기 이해관계가 달라서 ‘6자회담’으로건너뛰기가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그런 사정은 러시아도 잘 알고 있다.그럼에도 원칙과 정책방향을 그렇게 잡아두면 언젠가는 길이 트일 것으로 믿는다. 우리는 특히 양국이 모든 국가의 핵확산금지조약(NPT)·화학무기금지협약(CWE) 가입을 희망하면서 94년 미국과 북한간 제네바 핵합의의 성실한 이행을강조한 부분에 주목한다.러시아는 아직도 북한의 군비체계나 핵문제와 관련해 결코 작지 않은 지렛대 기능을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러시아가 관심을 갖고 노력한다면 북한의 핵문제나 미사일 수출문제 해결이 한결 쉬워지리라 믿는다.이 분야와 관련,러시아의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기대한다. 한국과 러시아는 또한 한동안 위축됐던 양국간 경제협력 관계를 강화하기로 했다.그중에서도 나홋카 공동공단 개발협정은 눈에 띄는 대목이다. 현지 인프라에 취약성이 없지 않고 러시아의 계속되는 정치적 불안정성으로해서 조심스럽기는 하나 잘만 된다면 11년 뒤에는 한반도 접경과 인접한 연해주에 무려 100만평에 달하는 합작공단이 조성된다.이는 양국에 경제적 이득 외에도 여러가지 긍정적인 과실을 안겨주게 될 것이다. 한국과 러시아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상호 협력한다는 것은 동북아 정세 전개의 중요한 변수라 할 수 있다.그런 점에서 이번 김대통령의 방문외교는 의미가 매우 크다.
  • KBS ‘시청자 칼럼’국민의 ‘작은 권리찾기’로 자리매김

    KBS ‘시청자 칼럼-우리 사는 세상’은 평범한 시민이 쓰는 칼럼이다.지난해 6월 15일에 시작돼 지난 1년동안 350명의 칼럼니스트를 배출했다. 1TV에서 매일 저녁 6시55분에 방송하고 2TV에서 오후 4시30분 재방송하는불과 5분짜리 미니프로지만 영향력은 엄청나다. ‘시청자칼럼’은 제보전화(02-781-5050)와 팩스(02-781-3539)로 접수받는데 하루 20∼30통씩 ‘제보’가 쏟아진다.이메일 주소는 http:///www.column.kbs co.kr 제보의 옥석을 구별하는 일은 쉽지 않다.채무 채권문제와 민원 등 개인적인 이해는 철저히 배제시킨다.공익적이란 판단이 내려져도 제보자 스스로 문제해결을 위해 얼마나 적극적으로 뛰었느냐는 점을 먼저 방송의 1차기준으로삼는다.“그래서 어떻게 해보셨어요” “어떤 노력을 하셨나요”라고 제작진은 묻는다.책임연출자 이규환PD는 “소재선택의 원칙은 공익성과 스스로의노력 여부”라고 강조한다. 참여하는 사람들은 12세 초등학생부터 80대의 할머니까지 아무런 제한이 없다.얼마전 아파트 관리인으로 일하다 퇴직한 76세 노인의퇴직금을 받기 위한 헌법소원까지 제기했다.이 노인이 다닌 업체는 전체종업원수가 5명 이하로 근로기준법의 적용대상이 아닌 곳이었다.초등학교 졸업이 최종학력인 이노인은 “법이 잘못됐으면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고집쟁이’였다.이방송이 나간 뒤 제작팀은 폭주하는 전화로 인해 일손을 잡지 못할 정도였다. 전화를 건 사람들은 그 노인처럼 ‘답답하고 무모할 정도로’ 원칙을 따졌다. “공중전화요금을 1분단위로 잘라 책정하라”는 사람,당국이 발부한 6만원짜리 범칙금의 부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직장일까지 내팽개치고 동분서주하는 사람,이중부과된 양도소득세를 바로 잡기위해 7년간이나 싸운 주부 등 숱한 시민이 전화를 걸어왔다.이들은 어떻게 보면 한결같이 ‘작은 일에 목숨을거는’ 이 시대의 ‘왕따’인지도 모른다.‘대도는 영웅’이라는 말에 비춰보면 한심할 정도로 ‘좀스러운’ 사람들이다. “작은 원칙이 지켜지지 않아 우리 사회가 총체적 부실에 빠졌다는 것을 우리 모두 잘알고 있잖습니까.우리 칼럼니스트들은 내가 손해보더라도 잘못된것은 고쳐야한다는 용기와 자신감,자존심을 가진 시민들입니다” 이 프로의뼈대를 만든 박혜령PD는 당초 ‘3개월짜리 캠페인프로’로 계획했던 것이 이렇게 장기프로로 자리를 잡은 것은 시민의식을 가진 시청자의 덕이라고 말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시청자칼럼’이 의미를 갖는 것은 자신의 문제가 해결됐음에도 근본적인문제점이 고쳐지지 않았을 경우 만족하지 않는,보다 사회적인 눈을 시청자에게 주기 때문이다. 일례로 한 제보자는 조리사자격증 취득의 문제점을 제기한 이후 수많은 취업제의를 받았지만 아직 자신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됐다고 여기지 않는다.그는 ‘자격증 취득의 불합리성’이 모두 고쳐져야 자신의 문제도 끝이 나는것이라고 주장한다.문제를 개별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땜질해결’로서 ‘완벽한 해결’과는 거리가 멀다는 게 ‘시민 칼럼니스트’의 생각이다. ‘시청자칼럼’은 넉달후 ‘큰일’을 치른다.그동안 6개월마다 1시간짜리특집으로 방송이후 개선여부를 알아보던 데서 한발 나아가,9월중 60분 6부작 ‘시민이 세상을 바꾼다’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한다. 참여연대사무처장인 박원순변호사는 ‘시청자칼럼’에 대해 “진정한 시민운동을 TV프로그램이 해낼 수 있음을 보여준 특별한 경우“라고 칭찬한다.또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은 이 프로를 ‘좋은 방송’으로 꼽았다.시민의 작은권리찾기를 다뤄 의식개혁까지 이루고 있는 ‘시청자칼럼’은 ‘TV의 힘’을 여실히 증명해보이고 있다.‘가장 KBS적인 프로’‘공영방송 KBS의 소금’이란 표현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 제3회 참전수기 호국문예작품공모 /최우수작

    대한매일신보사와 국가보훈처가 공동으로 주관한 제3회 참전수기 및 호국문예작품 공모에서 구일모(안산 석수초등학교 3년)군이 출품한 ‘현충일’이 초등부 시부문 최우수작으로 뽑혔다. 초등부 수필부문 최우수작은 변유영(대구 불로초등학교 6년)양의 ‘할아버지의 눈물’이 선정됐다. 중·고등부 시부문 최우수상은 이한주(경북 청송여중 2년)양,수필부문 최우수상은 김보경(부천 시온고 3년)양에게 돌아갔다. 일반부 시부문 최우수상은 곽홍란(여·대구 수성구 시지동 135-14)씨,수필부문은 강정(여·대구시 수성 수성4가 보성아파트 101동 1906호)씨가 선정됐다. 참전수기 부문에서는 최종태(경기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 112 주공하얀마을6단지 608동 402호)씨의 ‘국군이 된 인민군분대장’이 최우수작으로 뽑혔다. 응모 작품은 모두 3,500편이었으며 당선작은 모두 35편이다. 입상자에게는 상패와 10만∼100만원의 상금을 수여한다.오는 6월3일 오후 3시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시상식을 갖는다. - 호국문예 詩 최우수작 현충일 구일모(초등부) 난 현충일에 생각했어요 동작동 국립묘지 언덕에 앉아서 수많은 비석이 보였어요 너른 언덕에 가지런히 서 있는 비석의 날짜와 이름이 선명했어요 목숨 바쳐 가신 분들 한사람 한사람이 보이는 것 같았어요 이런 것이 애국심이구나 혼자 생각했어요 이젠 나도 더욱 바르고 씩씩하게 생활하겠다고 다짐했어요 소나무 가지에 지저귀는 새 한마리 푸드득 날아가는 언덕에서 난 물끄러미 하늘을 보며 현충일날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일기에 적어 볼래요나의 꿈 이한주(중고등부) 나는 화가가 되고 싶습니다 분단된 우리 땅 휴전선 싸악 지우고 평화를 그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는 한 마리 새가 되고 싶습니다 하얀 꿈을 싣고 평화의 날개로 떠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는 한줄기 강물이 되고 싶습니다 한움큼 햇살이 뿌려둔 행복의 씨앗을 남에서 북으로 북에서 남으로 전해 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는 작은 눈물이 되고 싶습니다 가슴속 깊숙히 새겨둔 아픔과 슬픔을 싸악 지우고 자유를 싹틔우고 평화를 피워서 행복이란 열매를 맺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해 봅니다 우리의 작은 행복이 통일을 위한 존재라는 것을…다부원에 피는 꽃 곽홍란(일반부) 아버지 다부원에는 풀꽃이 느낌표로 핍니다 초록보다 더 푸르른 청춘을 내어 걸고 산허리 솟은 혈맥을 골골이 넘습니다 한 마리 풀벌레조차 못 죽이던 사람들이 제주에서 평양으로 뜻 다른 이 찾아 총부리 겨누던 한숨이 저리 피고 있습니다 아버지 다부원에는 뭇별들도 꽃이 됩니다 이름을 가진 장미나 백일홍,목련꽃보다 제 이름 알 수 없는 꽃이 여기선 더욱 곱습니다 주리고 비틀어진 낙강의 허리채 안고 끝끝내 깍지 끼어 목숨으로 바꾼 이들, 오늘은,그 넋들이 내려 꽃으로 피고 있습니다 아버지 다부원에는 풀꽃들도 꿈을 꿉니다 흩어진 전우들의 깊은 잠,잠시 깨워 생채기진 군복일랑 벗어 색동으로 갈아입고 차마 못다 푼 한은 두견에게 맡겨 두고 피어린 능선을 넘고 넘어 그리운 이름들과 백두대간 오고 가는 저 환한 웃음에 오늘은,내가 잔을 올립니다
  • 한국세계지역연구協 통일학술회의 주제발표

    탈냉전의 세계사적 흐름에 맞춰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대북 포용정책을 국제적 차원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26일 한국언론회관에서 열린 한국세계지역연구협의회 주최 통일학술회의에서 최성(崔星)박사(정치학·청와대 외교안보수석실 근무)는 “북한의 금창리 지하의혹 시설문제 등은 냉전구조에 뿌리를 둔 국제문제”라면서 이같이 지적했다.‘김대중정부의 포괄적 대북 포용정책’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최박사의 발제논문 요지는 다음과 같다.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점진적 평화통일을 위해서는 우리 앞에 두가지의 당면과제가 놓여 있다.하나는 분단상황을 평화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북한을 어떻게 다뤄 나가느냐 하는 대북 정책의 문제다.이는 민족 내부문제다. 다른 하나는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기 위해 통일과정에 가로 놓여 있는 냉전구조라는 장애물들을 어떻게 제거하는가 하는 문제다.국제 냉전이 끝난지 10년이 됐으나 냉전의 희생자인 한반도만이 아직도 반세기나 지속된 냉전구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최근 현안이 되고 있는 북한의 금창리 지하의혹 시설문제라든가 미사일 문제 등은 모두 냉전구조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문제다.이는 국제문제적 속성을 띤다.이러한 복합적 구조적 문제로한반도 문제의 해결과정과 대북 정책의 추진 과정은 근본적이고 포괄적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대북 포용정책과 포괄적 접근은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다.모두가 북한의 점진적인 변화,경색된 남북관계의 실질적 개선,냉전적 질서가 유지되고 있는한반도의 안보위협 제거를 통해 평화분위기 조성 등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 정부’는 미국,일본과 더불어 국제공조 하에서 대북 포용정책을추진하기 위해 ‘포괄적 대북 접근’을 추구하고 있다.북한의 핵과 미사일문제 등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한반도 문제를 보다 거시적이고 근본적인 시각에서 보고,전술적이 아닌 전략적 견지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한반도 문제의 복합성을 무시한 사안별 대증요법은 사안의 발생과 북한의 협상카드화 그리고 타협이라는 북한 특유의 ‘벼랑끝 전술’을 일상화시켜 줄 한계성을 가진다. 따라서 포괄적 대북접근은 당면한 현안 해결 노력과 함께 한반도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병행 추진하자는 구상이다.요컨대 안보문제와 동시에 정치·외교·경제·통상문제 등에 포괄적으로 접근하자는 것이다. [崔星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실]정리 구본영기자 kby7@
  • [특별기고] 金대통령 訪러와 보완적 동반자관계

    세계가 얼마나 좁아졌나.서울에 머물고 있지만 나토 유고 공습의 반향이 여기까지 들리는 듯하다.러시아 정책은 발칸위기를 평화적·정치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동북아를 포함한 아·태지역과 다른지역에서의 분쟁도 똑같은 해결방법을 추구하고 있다. 넓은 시장과 잠재력 있는 인력을 가진 아·태지역은 세계의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다.유라시아 국가인 러시아는 여기서 이뤄지고 있는 발전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역내 세력균형이 변화되는 가운데 군사블록 형성을 방지하고극동지방의 국경 안전 보장에 노력할 것이다.러시아는 세계 안보,위기사태공동대응,새로운 대륙횡단의 도전에 적당한 답을 찾아내 아·태 및 동북아동반자들과 협력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지역 정세는 아직도 복잡하다.오랜 영토분쟁,분리주의 운동,종교 및 인종 갈등,깊은 역사적 뿌리를 가진 불신,최근의 무역분쟁 등이산적해 있다. 이 지역에서 나타나는 군사·정치적 야심들도 심각한 불안정을 야기한다.동북아의 대미사일 방위 전술체제를 만들려는미·일의 무리한 방안도 이런 야심들과 무관하지 않다.이는 러·미 조약을 손상시키는 것일 뿐더러 다른 나라를 협박할 군사·기술적 우위 확보 의도라는 평가가 있다.이것은 당연히소모적인 군비경쟁을 일으킬 것이다. 일본의 군사 역할과 범위가 확대될 때 결과가 염려스럽다.일본 중의원에서채택된 미군 작전의 후방지원은 지리적으로 애매한 ‘일본과 인접한 지역’에서 비상사태가 일어났을 경우도 해당된다.물론,러시아 영토가 이런 지역에 포함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아·태,동북아 지역 나라들이 다각적인 협력을 기울여온 것도 사실이다.아·태지역에서는 다단식의 ‘안전망’이 생기고 있다.러시아는 이 모든 노력에 적극 동참할 것이다. 많은 나라가 세계의 다극적 모델을 지지한다.한국 러시아 일본 중국 미국아세안국가들이 참가하고 있는 ARF(아·태 안전 및 협력을 위한 아세안 지역 포럼)는 최근 국제무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러시아는 동북아 경제에 특히 주목하며 이 지역에서 21세기 인프라 프로젝트의 기초가 마련되고 있다.러·중 에너지 프로젝트,러시아 남북한 일본 몽골 등이 참가하는 대규모 경제체제,두만강 자유경제지대,러시아 천연가스 공급체계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와 극동 개발,아·태 경제와의 조화가 시급하다.동북아는 경제이익 중심지를 마련하기 위한 조건을 갖췄다.경제이익을 결합시킴으로써 정치안정까지 도모할 수 있다.‘경제를 통한 안전’은 군사·정치의 신뢰 및 투명함을 만든다. 서울에 있으면서 한국과 러시아의 과거와 미래를 생각한다.1884년 7월 7일조·러간의 조약이 체결됐고 이후 100년이 넘었다.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6·25를 비롯한 수많은 지역분쟁을 겪은 20세기의 역사는 비극적이다.한국의 분단도 너무 길어졌다. 1992년 두 나라 정상이 체결한 기본관계에 대한 조약에 의해 한·러는 계속 우호관계를 발전시킬 것이다.국제 평화와 안전을 지키는 데 유엔의 역할을높이기 위해 협력할 것이다. 옐친 대통령은 92년 방한 때 극동지방과 시베리아 자원개발을 가장 강조했다.이와 관련,야쿠티아 천연가스 개발,북한영토를 통한 가스관 공사,나홋카기술센터 설립을 주장했다. 이번 김대중 대통령의 모스크바 방문도 양국 관계 발전에 획기적인 주춧돌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상호보완적인 동반자 관계를 더욱 강화시키는 것이 러시아의 대한 정책의 핵심이다. 한·러간 무역 경제 과학 기술협력 공동위원회 활동도 많은 결과가 기대된다.지난해 양국 교역이 24억달러에 이르렀고 지난 3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차 한·러포럼도 성공적이었다. 러시아는 한반도 정책을 균형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러·북 관계도 우호적으로 발전시킬 방침이다.북한과 지난 3월17일 평양에서 러·조간 우호관계 및협력에 관한 조약에 가조인했다. 남북 관계는 아직도 답보상태다.한국정부의 ‘햇볕정책’은 협력과 화해를통한 한반도 통일에 목적을 두고 있다.21세기를 바라보면서 한반도 정세를완화시킬 포괄적인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러시아는 기본적으로 한반도 정상화는 남북한 국민들의 의지와 이익을 반영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이것은 러시아 국익에도 도움이 된다.러시아가 여기에 중요한 역할을할 것이다. 러시아는 남북한과 미국 중국이 참가하는 4자회담에서 성과가 있기를 바라지만 유감스럽게도 아직 실체적인 결과는 없다.한반도 정세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국가가 참여하고 넓은 차원의 안전문제가 논의되는 대화가 바람직하다. 20세기는 이제 역사적 고비와 고난을 마치고 있다.다음 세기가 모든 나라국민들에게 평화적인 세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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