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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15경축사 준비 이모저모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5일 청와대에서 8·15 광복절 경축사 준비위원들과 저녁을 함께 하며 경축사에 담을 내용을 놓고 밤늦게까지 난상토론을 벌였다.이번 8·15는 분단의 아픔을 안은 20세기 마지막 광복절인데다,새천년을준비해야 하는 시점이니만큼 국민의 정부 집권 중·후반기의 국정비전과 21세기 청사진을 담아야 한다는게 김대통령의 생각이다.공동정권의 최대 걸림돌이었던 내각제 개헌문제가 정리된 상황이어서 구상의 폭과 범위가 훨씬 자유로워진 상태다. 이 때문에 첫 모임인데도 준비위 위원장인 김중권(金重權)비서실장 및 위원인 8명의 수석비서관,김태동(金泰東)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장과 최상룡(崔相龍)고려대·김한중(金漢中)연세대·황태연(黃台淵) 동국대교수 등 자문그룹 교수들이 대거 참석했다. 김대통령은 이미 한국개발연구원(KDI)과 정부 각 부처가 작성한 초안을 지난 휴가 동안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다.이날 토론은 이 초안을 중심으로 이뤄졌다고 한 참석자는 전했다.따라서 지난해 경축사의 화두(話頭)가 ‘제2건국’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새로운 천년의 이미지를 살릴 수 있는주제를 선정할 방침이다. 김대통령은 무엇보다도 분단의 비극,지역갈등 등 20세기의 ‘낡은 유산’을 정리하고 새로운 도약에 초점을 맞춘다는 구상이다.이를 위해 국민 화합과남북간 평화공존 및 공동발전 방안을 제시할 생각이라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두번째로는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소외된 중산층과 서민들을 위한 ‘생산적 복지’를 골간으로 한 새천년의 한국적 복지모델의 틀을 선보인다는 복안이다. 양승현기자
  • 문화재에도 분단의 아픔이…

    문화재에도 남과 북으로 갈린 이산가족이 있다. 호암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금동미륵반가상이 그 한 예이다.일제 말기인 1940년 평양 평천리 유적지에서 출토된 이 금동반가상은 고구려 반가상으로는유일한 것으로 국보 118호로 지정돼 있다. 연꽃 잎을 두른 둥근 의자 위에 앉은 일반적인 반가(半跏)사유상으로 뺨을짚었던 오른손이 없는데다 불상 앞부분이 녹이 슬고 불에 탄 자국이 남아있는 등 흠집이 많지만 길게 네모진 얼굴의 입술 양옆에는 보조개가 살짝 패어있다. 그러나 부리부리한 눈과 꽉 다문 입에서는 고구려 무인의 씩씩한 기상을 엿볼 수 있다.상반신은 알몸으로 가냘프며 상의(裳衣)를 입은 하체는 두다리와 의자를 덮어 아름다운 무늬를 남겼다.정제된 인체미가 청수(淸秀)한분위기를 빚고 있는 불상으로 고구려 불상의 특징을 잘보여주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문화재소장자 김동현씨가 소장해오다 해방이 된 뒤 서울로 옮긴 것이지만광배(光背)가 없어 완전한 짝을 이루지못하고 있다.고즈넉히 머리를 숙이고있는 불상의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면 왠지 허전하고 쓸쓸하다. 경희대박물관장을 지냈다 현재는 소식이 끊어진 채병서씨는 평양박물관에서금동반가상의 광배를 봤다고 말한다. 김동현씨도 불상만을 입수,불상이 광배와 어떻게 헤어졌는지는 알지 못한다. 어쨌든 분단의 아픔은 문화재에서도 다시 한번 확인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평남 평원군 덕포리 원오리 절터에서 1937년 출토된 흙으로 만든 부처들도이산가족일 가능성이 높다.당시 원오리 절터에서는 수많은 흙부처들이 나왔는데 발굴자중 한 명이 한 박스의 부처를 중앙박물관으로 옮겼다. 최근 북한이 펴낸 조선유적 유물도감에 따르면 원오리 흙부처중 상당수가목부위를 결합해 놓은 것들이 많다.짝이 맞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중앙박물관 정양모 관장은 “언젠가 통일이 돼 우리가 갖고 있는 부처와 맞추어 보면 많은 것들이 일치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임태순기자 stslim@
  • [각료에세이] 열린 마음으로-朴智元 문화관광부장관

    불과 1년반 전 우리는 IMF관리 체제를 맞아 당혹해 하는 가운데서 ‘그래도 국운이 있다’고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경제를 알고 노동자·학생은 물론서민층을 이끌고 나갈 지도력이 있는 김대중(金大中)당시 대통령 당선자에게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김대통령은 당선 후 “올해(98년)에 철저한 개혁을 하고 내년(99년)에 4대개혁을 완성하면 우리 경제는 플러스 성장이 가능하며,2000년도에는 세계 일류국가·선진국가로 진입의 길이 열릴 것”이라고 밝혔으나 당시 대다수 국민과 언론·학계는 물론 정부 기관들마저 대통령 당선자가 현실을 안이하게판단하고 미래를 너무 낙관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오늘의 대한민국은 어떤가.김대통령 취임 직전 39억달러였던 가용외환보유고는 이제 640억달러가 넘었고,IMF 외채도 올해 말까지 120억달러를 조기상환하며,경제성장률은 6∼7%에 이를 전망이다.물가인상률은 1% 미만으로 이자율은 26∼28%에서 한자리 숫자로,환율도 1달러당 1,200원대로 안정됐다.세계 모든 언론과 학자들이 외환 위기를 당한 나라치고 우리나라만큼 잘극복한 나라가 없다고 입을 모아 칭찬하고 있다.김대통령은 공약대로 경제대통령이 된 것이다. 외교적으로는 어떤가.김대통령은 취임 후 지금까지 활발한 정상 외교를 통해 과거 정부에서 소원했던 미국 일본 러시아와 원만한 외교관계를 회복했으며 중국은 물론 베트남 ASEAN, EU 등과 성공적인 외교관계를 구축했다.우리의 국제적 위상 제고와 경제협력의 공고화 특히 대북정책에 대한 세계적 지지를 감안할 때 이같은 외교적 승리는 자랑할 만한 것이라 할 수 있다.우리는 외교대통령도 가진 국민이 된 것이다. 김대통령은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인 우리에게 지금은 통일보다도 한반도의 전쟁 방지가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해 왔다.한국 미국 일본의 철저한 공조로 튼튼한 안보 속에서 북한과 교류협력을 통해 남북한 모두 전쟁없이 평화롭게 살자는 것이 이른바 햇볕정책이다.중국과 러시아가 북한과 어떤 관계였는가.건국 이래 우리 한반도 정책을 우리나라 대통령이 주도한 적이 있었던가. 사회도 많이 변했다.지난해 전국 각 대학에서 학생회장 선거가 있었지만 있었는지도 모르게 평화롭게 지나갔으며 일부에서 데모를 하고 있지만 쇠파이프 화염병 최루탄이 사라진 지 오래됐다.정해진 시간 장소에서 평화적인 데모가 있을 뿐이다.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민주적 법치국가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 IMF 외환위기,고립됐던 외교관계,전쟁위협,그리고 최루탄을 잊어가고 있다.외국으로 나가는 국내 관광객도 52%나 증가하고 있다.우리는 자신에게 적용하는 도덕기준은 너그럽지만 타인에게 잔인할 정도로 엄격한 것 같다.현정부의 노력과 성과를 인정하는 데도 너무 인색하다.그러나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그래야 우리 모두가 더불어 이길 수 있다.21세기가 바로 우리 앞에 있다.
  • 독립기념관 학술심포지엄 개최

    독립기념관(관장 박유철)은 제54주년 광복절과 3·1의거 80주년 및 독립기념관 개관 12주년을 기념해 3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실에서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3·1운동과 국내외 민족운동’이란 주제로 개최된 이날 행사는 3·1의거가 일제하 민족해방 투쟁에 끼친 영향을 처음으로 집중조명한데다 기존의 주장을 뒤엎는 새로운 학설이 제기돼 관련학계의 비상한 관심과 열띤 토론속에 진행됐다. 주제발표자들의 발표내용을 요약한다. 첫 주제발표자인 장석흥 국민대 교수는 ‘3·1운동과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이라는 발표문을 통해 “3·1의거로 인해 민중들의 정치적 각성이 촉구되고 시위가 독립운동의 새로운 양태로 출현하였다”고 지적하고 “3·1의거는 이후 상하이 임시정부수립과 20년대의 각종 비밀결사 활동,학생·노동·여성운동,나아가 6·10만세의거,광주학생의거와 같은 민족통일전선운동으로 계승·발전되었다”고 분석했다. 지수걸 공주대 교수는 ‘3·1운동과 국내 사회주의계열의 독립운동’에서“국내 공산주의운동은 3·1운동의 이념과 노선을 계승한 운동이 아니다”고 밝히고 “당시 국내 사회주의자들은 오히려 3·1의거를 실패한 것으로 보고 여기서 사회주의계열 운동의 합법칙성(필연성)을 도출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지 교수의 이같은 주장은 3·1의거가 국내 대중운동과 사회·공산주의 운동을 활성화시켰다는 종래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어서 향후 학계내에서 논란이 예상된다.지 교수는 특히 “해방전후를 막론하고 각 독립운동집단이 자신들의 정치적·도덕적 권위나 정통성 확보를 위해 자의적으로 3·1운동사상(史像)을 만들어왔다”고 지적하고 “이 시점에서 필요한 것은 3·1운동에 대한 무관심과 화석화 된 해석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3·1운동과 국외 민족운동’을 발표한 반병률 외국어대 교수는 “만주·노령지역의 독립운동이 3·1운동을 거치면서 민족운동의 양적 확대,무장투쟁의 고양,그리고 대동단결과 통합을 촉진한 반면 이 지역에 대한 일제의 첩보할동 강화와 친일세력 침투 등을야기시켰다”고 분석하고 “3·1운동을 주도했던 1세대가 소멸된 후 이 지역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소련·만주출신의민족운동 세력들은 해방후 이념대립,국토분단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주장했다.반 교수의 이같은 주장은 남북분단의 내인설(內因說)로 규정할 수있는데 이 역시 논란의 소지가 다분하다. 마지막으로 한상도 건국대 강사는 ‘중국 관내 독립운동 세력의 3·1운동인식과 계승’에서 “중국 관내의 독립운동세력들은 3·1운동을 ‘대중투쟁의 효시’‘반제국주의 국제연대의 출발점’으로 평가하였다”며 “이들은 3·1운동의 소산으로 임시정부를 세우면서 자신들이 3·1운동 정신의 계승자임을 자임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세력의 통합노력을 주도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이날 행사는 이밖에도 이만열 숙명여대 교수가 사회자로,김호일(중앙대)·오세창(영남대)·노경채(수원대) 교수,임경석 성균관대 강사 등이 토론자로 참석했다. 정운현기자 jwh59@
  • [사설] 금강산관광 재개 이후

    정부가 현대와 북한 아태평화위원회간에 타결된 금강산 ‘관광세칙’ 및 신변보장 합의서를 승인함에 따라 금강산관광이 오는 5일부터 다시 시작된다. 관광객 민영미(閔泳美)씨의 억류사건으로 중단된 지 45일 만이다.금강산관광 재개는 서해교전사태와 북한의 미사일재발사 움직임으로 경색됐던 남북교류의 물꼬를 트는 것으로 일단 다행스럽고 환영할 만한 일이라 하겠다. 현대측과 북한 아태평화위간의 주요 합의내용은 앞으로 금강산 관광객이 지켜야할 주요내용을 명시하고 이를 위반할 때는 최고 50달러의 벌금으로 처리하고 민씨와 같이 ‘문제의 발언’을 한 경우라도 관광중단 및 관광선으로추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는 것이다. 다만 살인·강도와 같은 엄중한 형사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현대와 북측 대표 3∼4명으로 구성한 조정위원회에서 협의하여 처리키로 했다.관광객의 발언을 북한이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일방적으로 억류하는 사태는 막을 수 있게됐다는 점에서 관광객들의 신변보호를 위해 완벽하지는 않지만 한걸음 진전된 것으로 보인다. 남북화해협력과 교류의 상징인 금강산관광사업이 재개된 것은 다행스러운일이지만 이번 합의가 관광객이 안심하고 금강산을 찾거나 제2의 민씨사건을 막는 데는 아직도 미흡하다고 생각된다.지난해 11월18일 금강산 관광사업이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131차례의 관광선 출항에 8만6,140명이 금강산을 다녀왔다.이 중 175건이 위반사례로 적발되어 6,635달러의 위반금을 물었으나대부분 환경훼손이나 금지된 사진촬영 등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사례들이었다.그러나 민씨의 경우는 달랐고 지금도 우리로서는 서해사태의 보복이 아니었던가 하는 이상의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다.필요없는 마찰을 일으키지 않도록 관광객들에 대한 우리측의 철저한 교육도 필요하겠지만 자연스럽게 나오는 관광객의 말 한마디를 꼬투리잡게 하는 소지는 없애야 한다.금강산 관광객의 신변을 근본적으로 보장하는 남북 당국간의 기본협약이 필요하다. 금강산 관광사업의 의의는 크다.분단 50여년 만의 남북 왕래라는 상징적인뜻 외에도 핵개발의혹과 미사일문제 등으로 조성된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경제난에 허덕이는 북한으로서도 주요한 외화 수입원이 됐을 뿐 아니라 남북간 경제협력의 필요성을 실감하는 계기였을 것이다. 금강산관광의 재개로 끝낼 일이 아니라 남과 북이 앞으로 계속 협의하여 관광객이 마음놓고 금강산을 찾도록 해야 할 것이다.
  • [대한광장] 세계의 변화를 제대로 읽자

    조선시대의 문장가이자 풍류아였던 백호 임제(林悌)는 생전에 자신이 죽으면 절대로 향을 피우지 말고 곡도 내지 말라고 유언한 바 있다.땅이 좁은 반도에서 태어난 것도 서글픈데,서로 싸움질만 하는 당시의 정치 풍토가 밉도록 싫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인구밀도가 세계에서 네번째로 높지만,통일을 전제로 할 때 인구규모나 국토면적에서 결코 작은 나라는 아니다.독일보다 땅은 비좁지만 영국보다 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 나라이다.지구의(地球儀)위의 한국을 들여다보면 중국,일본,러시아,미국 등 열강의 이해가 서로 교차하는 특이한 지정학적 위치를 지니고 있다. 우리역사에서 외풍의 영향을 항시 지울수 없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그런데 문제는 나라안의 세력다툼이 외세를 불러들이고 이 와중에서 국권과 주체성을 잃게 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데 있다.지난 한 세기만 보더라도 개항이후 일본에 의한 식민지화,해방 이후 미·소에 의한 민족분단,그리고 OECD가입 이후의 개방이 IMF구제금융을 초래한 바 있지 않은가.작금 세계는 무서운 속도로 바뀌어가고 있다.우리가 그러한 변화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어보지 못할 때 또다시 역사의 낙오자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최근 필자는 세계사회경제학회에서 만난 유럽 및 미국 저명 학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최소한 세가지 정도를 확인할수 있었다.첫째,자본주의에 의한 전(全)지구화로서 세계화의 경향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이는 시장의 힘에 의해국경과 이념의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뜻한다.그러므로 민주주의도 국제적으로 시장개방과 자본축적을 원활히 하기 위한 것이지 그 이상 그 이하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와 같은 후발 발전국에서 민간정부가 들어서도 민주주의가 정쟁 아래더이상 진전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이다.세계화의 기본바탕은 미국식 주주모델이다.투자자와 소유자를 중심으로 이윤극대화를 위한 인수합병,인원감축,공장폐쇄를 구조조정이란 이름으로 수행하면서 미국식 자본주의가 지구적인 표준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이와같은 미국식 주주모델은 빈부격차를 더욱 벌려 사회의 통합을 저해하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둘째,지금까지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으로 성공한 나라보다 실패한 나라가더 많다는 점이다.비록 성공한 경우에도 국민경제의 기본 축이 외국자본의이해에 의해 무너지고 ‘부익부 빈익빈’ 현상에 의해 중산층의 와해와 불평등의 악화를 겪고 있다는 무서운 사실이다.우리가 성공으로 지목한 멕시코에서 시장친화적 구조조정이 가져온 탈(脫)국적화된 국민경제와 지역·계층간의 불평등 심화가 이를 잘 입증해 준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외환위기를 잘 극복하여 왔다는 자신감에서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무조건 보약이라고 판단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주식과 채권,외화,회사,토지,건물 등 한국경제가 이제 열려질 대로 개방돼있는 상태에서 미국식 주주모델에 입각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우리 국민 중 소수만 살아남는 발가벗은 나라로 만들 우려를 전혀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셋째,유럽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국가연합을 기존의 국민국가의 해체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미국이나 일본과 대항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유럽연합이 아시아와 중남미 지역 국가들을 전략적 동반자로 삼으려는 의도에서 지역주의의 숨겨진 의미를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전지구화의 과정에서 국민국가의 입지가 약화된다고 해서 국가의 역할을 포기하는 우를 범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이 점에서 한국정부는 국가안보의 유지,대외무역의 협상,하부구조의 건설,지식사회의 형성,복지제도의구축 등 시장과는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해야 될 과제가 많다. 이제 문명사적 대전환기를 맞아 우리는 세계의 변화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안목과 비전을 가져야 한다.그리하여 미래를 단순히 맞이하기보다는 앞을내다보면서 ‘창조하고 발명하려는’ 역사적 상상력을 부단히 키워야 할 것이다. 林玄鎭 서울대교수·정치사회학
  • [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28.한승헌의 ‘어떤 弔辭’(하)

    200자 원고지 15매 분량의 이 글로 270여일간 갇힌 몸이 되었으니 어림잡아 원고지 1매가 18일간의 징역을 살린 셈이 된다.검찰의 공소장은 이 글을 “북괴 간첩 김규남을 애도함으로써 북괴의 선전활동에 동조하였다”는 것을범죄의 주요 요건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 글 어디에도 김규남이란 이름이나 그를 상징할만한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중정 취조 때부터 이 점을 강조하면서한변호사는 ‘어느 사형수’란 ‘당신’은 특정인물이 아닌 상징적 존재라고 밝혔으나 당시의 사법절차가 이를 수용할 분위기는 아니었다.변호인단은 “어느 사형수가 강도살인범인지 간첩범인인지 그밖에 무엇인지 전혀 표시되어 있지 않으며 그저 사형수와 사형제도에 대한 일반론을 전개하였다”고 변론하고 있다. 이 글 마지막 부분에는 “당신은 하나의 구체적 개인이라기 보다 권력과 법의 이름밑에 횡사한 추상적 인간의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란 구절이 있는데,이것은 바로 이 글의 주인공이 특정인이 아닌 문학에서 말하는 전형성을 지닌 인물임을 강력히 입증해 준다. 공소사실의 주축을 이루는 이른바 간첩옹호론의 논리는 너무나 설득력이 없었던지 제1심 판결문에서는 슬그머니 사라진 채 “북괴의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폐지 주장에 동조하였다”는 것으로 둔갑하여 나타났는데 이것은 아예 공소장에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재판 도중 전혀 심문이나 추궁도 없었던 생뚱한 사실을 판결문에다 느닷없이 뒤집어 씌운 격이란 평을 받았다. 법정을 웃음바다로 몰아넣은 또 하나의 코미디는 이 글 맨 끝부분인 “이세상에서 좌절된 당신의 소망이 명부의 하늘 밑에서나마 이루어지기를 빕니다.한을 잠재우고 편히 쉬십시오”란 대목에서였다. 여느 필화와 마찬가지로 복역 중인 간첩,월남 전향자,대공 심리요원,공안 기관원 등이 검찰측 증인으로 나와 막무가내로 피의자를 ‘북괴 동조자’로 몰아가기 십상인데 바로 이 마지막 대목을 일러 가로대,저승에 가서라도 적화통일의 꿈을 이루기 바란다는 뜻으로 증언했겠다.그러자 한 재치있는 변호인이 “저승에도 남북이 분단되어 북쪽에는 공산당이 정권을 잡고있나요?”하고 되받은 것이다. 그 다음 문제된 구절은 “말하기 좋게 ‘조국’을 들먹이지만 바로 그 잘못 태어난 조국 때문에 어처구니 없이 죽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였다.“만일당신이 한국 아닌 다른 나라에 태어났더라면 최소한 오랏줄에 목을 매이는그런 최후는 면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란 대목과 함께 거론된이 구절에 대하여 검찰측은 체제 도전으로 몰아 갔으나 ‘어떤 조사’를 차분히 읽어가노라면 다음과 같은 내용과 만나게 되면서 전혀 다른 의미임을느끼게 된다. “후진국에 태어난 목숨이라고 해서 선진국 사람의 그것보다 가벼운 것도아니고 천한 것도 아닌데 실상은 엄청나게 다른 대접을 받는구나 싶습니다. 이 지구상에는 이미 사형을 폐지한 나라가 40여개국에 이르고 있습니다.아예 법률상으로 폐지한 나라가 있는가 하면,법에는 사형제도가 남아 있어도 사실상 사문화한 나라도 있습니다.혹은 사형을 선고는 하지만 실제로 사형집행을 하지 않는 나라까지 있습니다” 사형폐지론을 주장한 이 글은 그 이유로 가장 먼저 오판을거론하고 있다. “인간은 아무리 높은 지존의 자리에 있다 해도 전능일 수 없다는 것,심판하는 단상의 성직자도 하나의 불완전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그러기에그들의 판단,그들의 권한으로도 뛰어 넘을 수 없는 한계가 엄연히 있다는 것”을 적시하며 사형제를 반대했다. 작고한 작가 안수길.유주현,문학평론가 이어령,시인 홍윤숙,수필가 박연구,강원룡목사,이우정 교수 등 당대의 석학들이 이 글의 무죄를 주장했으나 필화사건이 매양 그렇듯이 때가 되면 풀어준다는 법칙에서 이 사건도 예외가아니었다. 任軒永 문학평론가
  • [외언내언] 남북청년 평화캠프

    지난 주말 경기도 가평군에 위치한 두밀수련원에서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캠프가 열렸다.남북한 어린이들의 교류를 주선하는 사단법인‘남북어린이 어깨동무’에서 자원봉사를 했던 대학생들이 주축이 된‘남북한 사회문화 통합을 준비하는 여름 청년 평화캠프’가 바로 그것이다.남과 북의 어린이들이분단상황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그 실천을 목적으로 한‘남북어린이 어깨동무’모임에서 주선한 학술캠프다.사선을 넘어 귀순한 북녘둥이와 곱게 자란 남녘둥이 젊은이들이 참가한 이번 평화캠프의 목적은 남북의 젊은이들이 서로를 알고 문화적차원의 사회통합을 모색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캠프 시작부터 남북의 청년들은 살아온 사회·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된 가치기준의 혼돈과 어법(語法) 구사의 차이 등으로 상당한 갈등을 빚었다.심지어 자기들이 살아온 사회구조에 대한 일방적 편견을 바탕으로 상대편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까지 서슴지 않았다.젊음의 패기로 충돌 일보 직전까지 가는 상황도 있었다.북쪽 젊은이들은 남한사회가 인간의 기본적 자유는보장됐지만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경쟁논리가 치열한 데 대해 당황할 수밖에없다. 또 자유방임과 부도덕한 사회병리현상의 극치를 보면서 고민하는 것은당연하다. 반면 남한 대학생들이 북한사회의 폐쇄성과 억압받고 있는 인권 등 북한사회가 안고 있는 총체적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남북 젊은이들의 이같은 가치관의 갈등은 어떻게 보면 반세기를 넘긴 분단상황에서 나타나는 필연적 문제점으로 인식된다.지난 90년 통일을 이룩한 독일이 10년이 되는 지금까지도 과거의 분단이 빚은 사회·문화적 갈등으로 진정한 의미의 사회통합을 실현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있겠다. 우리도 분단시대의 사회·문화적 통합을 이룩하지 못하고 통일을 실현할 경우 독일보다 더 큰 갈등과 혼란의 부작용이 초래될 것이 자명하다.남북한의사회·문화적 이질성을 극복하고 민족고유의 동질성을 회복하는 것은 시급한과제다. 그런 관점에서 이번 남북 젊은이들의 평화캠프에서 남북한의 이질화된 사회문화가 심도 있게 제기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그리고 젊고 패기 있는 탈북 젊은이들이 남한사회를 체험하는 동안 느꼈던 부정적 인식을 털어버리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행사로 평가된다.남한 젊은이들과의 우의를 돈독히 다짐으로써 한국 생활에 자신감을 갖게 된 것도성과로 꼽힌다.탈북 청년들과 남쪽 대학생들간의 이같은 학술캠프는 통일 과정의 남북사회 통합에 작은 밑거름이 될 수 있다고 본다. [張淸洙 논설위원 csj@]
  • [김삼웅 칼럼] DJP협력의 역사인식

    한국현대사에서 지도자들의 협력이 절실할 때 분열함으로써 국가의 진운에큰 타격을 입힌 경우가 적지 않았다.정치지도자들의 갈등과 반목이 역사를그르친 사례가 크게 네 차례나 있었다.첫번째는 여운형과 송진우다. 해방직후 이들이 손을 잡았다면 건국준비위원회의 좌경화를 막고 임시정부를 봉대하여 정통성 있는 정권을 수립했을지 모른다. 여운형은 해방직전부터 송진우에게 민족해방에 대비할 것을 제의했다.측근을 보내 제휴를 희망하고, 해방당일에는 직접 자택을 방문하여 함께 일할 것을 간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송진우가 여운형의 거듭되는 합작요청을 거절한 것은 일제협력의 자격지심과 들러리가 되지 않겠느냐 하는 우려에서였다. 그 결과 해방정국은 엉뚱하게 흘러가고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암살당했다. 두번째는 해방공간에서 이승만과 김구의 분열이다. 두사람이 통일정부 수립이라는 대의(大義) 아래 협력했다면 독립운동세력이 중심이 되는 정통성을갖춘 정부가 수립되고 친일파는 발붙일 곳을 상실했을 것이다. 당시 이승만과 김구는국민의 희망이었고 신화적 존재였다. 두 영수가 개인자격으로 귀국했지만 국민은 힘을 합해 혼란을 수습하고 통일정부를 세워줄 것으로 기대했다. 당시 두 영수의 비중이 얼마나 컸는지는 한민당과 인민공화국이 각기두 사람을 영수급으로 추대한데서도 드러난다. 만약 이승만이 집권 후 김구를 보호하고 후계로 삼아 제2대 대통령으로 지원했다면,그리하여 김구가 북한측과 새로운 남북협상을 시도했다면 6·25전쟁과 자유당의 12년 폭정은 나타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세번째는 4월혁명으로 집권한 윤보선과 장면의 분열이다. 구파의 윤대통령과 신파의 장총리는 민주당의 한 뿌리이면서도 학생혁명이 갖다바친 정권을독식하고자 꼴사나운 이전투구를 벌였다. 내각제 대통령인 윤보선의 책임이컸다.힘을 모아 이승만정권의 부패와 사회악을 청산하며 경제건설과 민주발전에 전력해야 하는데도 권력다툼으로 1년여 만에 군사쿠데타를 맞아 탈권당하고 30여년의 군사통치가 자행되었다. 네번째는 김대중과 김영삼의 분열이다. 1980년 ‘서울의 봄’때 양김이 협력했다면 신군부의 쿠데타는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또 6월항쟁 이후 후보단일화에 성공했다면 노태우정권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후 헌정의 파행과 양민학살,그리고 전·노씨의 천문학적 부패의 사슬이 끼어들지는못했을 것이다. 역대 지도자들이 협력보다는 분열을 일삼아온 데 비해 김대중대통령과 김종필총리는 협력하여 50년만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고 IMF국난을 극복하면서 개혁을 서두르고 있다.두사람의 협력은 민주화세력의 본류와 근대화세력의 본류가 합류하는, 한국정치사(사상사)에서 획기적 의미를 갖는다. 5·16이래 갈등과 대립관계를 지속해온 두 세력이 공동정권을 수립한 것은 근현대사에서 개화와 쇄국, 독립운동과 친일매족, 통일정부와 분단정부, 민주화와근대화의 대립선상에서 처음으로 합치점을 찾았다는 의미가 부여된다. 이것은 부차적인 문제들, 예컨대 40년 특정지역의 패권주의가 소외지역으로교체되었다든가, 반세기의 지배구조가 바뀌었다는 가치보다 우선한다고 하겠다. 또 진보(상대적)진영과 보수(상대적)진영이 협력함으로써 ‘용공 매카시즘’을 극복하면서 대북 포용정책을 펴게되고 민족민주운동의 희생자들이 재평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DJP협력의 진정한 가치는 신의냐 대의냐, 대통령제냐 내각제냐를 뛰어넘는, 협력해야 할때 협력할 줄 모르는 우리 지도자들의 잘못된 생각을 처음으로바로잡는 ‘역사인식’이라 하겠다. 칠순을 넘긴 두 지도자와 측근들이 항상이 점을 명심했으면 한다.
  • [대한매일의 오늘]’개혁인사 칼럼’ 여론형성 길라잡이

    지난해 공익정론지로 재탄생한 대한매일은 여론형성의 길라잡이가 되는 오피니언 페이지의 운영도 혁신했다.각계의 권위있는 학자와 종교인,시민사회단체 대표 등 개혁적 인사와 전문가를 초빙,대표적인 고정칼럼인 ‘대한광장’과 ‘대한시론’을 운영해오고 있다. 여기에는 역사비평의 혜안을 가진 강만길(姜萬吉) 고려대 명예교수를 비롯,시민사회를 이끌며 직필로 일관해 온 이재정(李在禎) 성공회대 총장,장기표(張琪杓) 신문명연구소장,성유보(成裕普) 민주언론시민연합 이사장 등이 참여했다.또 각 분야에서 전문가로,사회비평가로,혹은 문명비평가로 맹활약중인김성동(金聖東·소설가),박석무(朴錫武) 학술진흥재단 이사장,황태연(黃台淵) 동국대 교수,김동민(金東敏) 한일장신대 교수,도진순(都珍淳) 창원대 교수 등 20여명의 필진이 지난 6개월동안 국내외 정세와 사회 문화현상 등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21세기 우리가 나아갈 길을 제시해 왔다. 올 하반기부터는 재미사학자이자 한림대 객원교수인 방선주(方善柱)씨를 비롯해 이만열(李萬烈·숙명여대·한국사),최갑수(崔甲壽·서울대·진보평론공동대표),김유남(金裕南·단국대·한국정치학회장),박지동(朴智東·광주대·언론학),김효석(金孝錫·중앙대·한국정보통신연구원장),이만우(李晩雨·고려대·경제학),박종화(朴宗和) 한국기독교장로회 총무 등이 필진에 가세하고 있다. 이밖에 문화면에는 문학평론가 임헌영(任軒永·중앙대 겸임교수)씨가 군사독재권력과 남북분단으로 인한 한국문학사의 공백기를 새로이 메워가는 ‘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를 연재하고 있다. 박찬기자 parkchan@
  • [대한매일 95년] 역사성과 그 정신계승의 의미

    대한매일신보(이하 대한매일)는 구국 필봉으로 일본 침략을 규탄한 민족언론의 본산이었다.국운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기울던 시기에 항일운동의 구심점이 되었고,민족진영의 길잡이 구실을 했다.비극적 역사의 현장을 지켜본 증인이면서 나라의 운명을 바꾸어보려고 분투한 역사의 주체였다. 일본은 네 분야에서 한국 침략정책을 추진하였다.무력침략,외교침략,경제침략,언론침략이 그것이다. 대한매일은 이 네 가지 일본의 침략에 맞서 투쟁하였다.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치르면서 중국과 러시아를 물리치고 한반도에서의 독점적인 지배권을 확보하였다.국내의 무장항일 투쟁을 무력으로 제압하였으며 한일의정서와 을사조약 등의 국권 탈취도 무력을 앞세운 강압으로체결했다. 대한매일은 일본의 무력을 앞세운 침략을 신랄히 비판하고 항일 의병투쟁을고무,격려하였다.대한매일의 기사와 논설에 감동하여 항일 무장투쟁을 벌인의병들이 많았다.일본은 이 신문의 선동으로 항일 무장투쟁이 격렬하여 많은 인명피해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영국에 발행인 배설(裵說·Ernest Thomas Bethell)을 추방하라고 요구하였던 것이다. 외교침략에 대해서도 대한매일은 그 실상과 일본의 야욕을 폭로하고 강력히저항하였다.일본은 한국의 외교권을 탈취하였고,형식상의 조약 또는 협약을강제하여 국권을 단계적으로 강탈하였다. 국제적으로는 미국과 맺은 태프트(Taft)­가쯔라(桂太郞)협약,제2차 영일동맹,러시아와의 포츠머스조약과 같은 조약 또는 협약으로 한반도에서의 우월적인 지위를 확보하고,열강으로부터 한국 강점의 동의를 얻어내었다. 대한매일은 이때마다 부당함을 역설하였으며 고종이 영국 특파원 더글러스스토리에게 전달한 밀서를 보도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일본은 경제침략으로 한국 경제를 파탄상태에 이르게 하였다.이에 저항하여 거족적인 민중운동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매일은 국채보상의연금 총합소가 되었다. 일제는 이를 와해하기 위해서 신문 제작을 실질적으로 총괄하는 양기탁을 투옥하여 영·일 간에 외교마찰을 빚기까지 했다.통감부는 침략을 선전하고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신문을 활용하였다.일제는 친일지 지원과 민족지 탄압이라는 양면정책을 쓰면서 일인들이 직접 한국에서 한국어로 신문을 발행하여친일선전을 일삼도록 하였다. 그러나 국민의 지지를 받는 대한매일의 위력을 당할 수는 없었다. 역사적 격동 속에서 대한매일이 창간된 지 95년의 세월이 흘렀다.서울신문은 대한매일의 구국정신을 계승하겠다는 결의를 천명하면서 제호를 대한매일로 바꾸었다. 대한매일의 역사적 사명은 막중하다.우리의 지정학적 위치는 구한말 대한매일이 창간되던 때나 근 1세기의 세월이 흐른 오늘이나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다.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강국은 이해관계를 교차하면서 더욱 복잡미묘한 역학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당시와 비교하면 일본이라는 하나의 침략자가 아니라 더욱 복잡한 도전을 받는 것이 현실이다.군사적으로는 분단의 고통과 동족상잔의 큰 전쟁을 치른후유증이 아직도 청산되지 않았으며 북한의 군사적 위협은 상존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도 IMF가 끝나지 않았고 앞날도 결코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다.외교적으로는 더욱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국익의 증대와 통일을 위한 외교력의 강화는 절실하다. 이같은 상황에서 언론의 사명은 막중하다.사회적 위화감과 지역간·계층간갈등이 해소되지 않은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슬기롭게 해소하고 밝은 미래를 향해서 전진할 것인가. 대한매일은 해답을 제시하고 이를 해결하는 노력을 기울일 책무가 있다.언론사상 가장 빛나는 민족지의 정신을 계승하는 길이 그것이다. 95년 전 창간한 대한매일의 정신을 거울삼아 민족 번영과 화합을 선도하고역사를 긍정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철학과 비전을 제시하여야 한다.한국 언론의 자랑스러운 역사,이에 따른 각오가 새로워야 한다. 정보양 한국외대 교수·언론학
  • [대한광장] 노벨평화상과 한반도 냉전 해체

    일본인은 그동안 8명이 노벨상을 수상했다.1949년,핵력의 정체를 밝히는 등 물리학 3명,의학 1명,화학 1명,문학상 2명,평화 1명 등이다.노벨상은 인류발전에 기여한 공로 인정에 있어서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권위가 인정되는상이며,인류 전체 감사의 표징이다.그러나 74년 사토 에이사쿠 총리의 평화상 수상에 대해선 일본 내에서도 문제가 됐다.“미국의 베트남 정책에 적극동조했고 중공(중국)과의 관계개선에 반대했다” “세계 평화에 기여한 것이 무엇인가” 등. 73년 노벨위원회는 키신저 미 국무장관과 레둑토 월맹 정치국원에게 파리합의의 공로로 평화상 수여를 결정했다.그러나 당시 뉴욕 타임스는 ‘노벨전쟁상’이라고 비꼬았다.워싱턴 포스트는 “노르웨이 사람들은 사람을 잘 웃긴다”고 했다.우방 일각에선 “미군을 무책임하게 철수시키기 위한 구실 마련”이라고 비난했다.“주변 국가를 침공하고 지키지도 않는 휴전협정에 동의했다고 평화상을 주다니…”라고 했다.레둑토는 수상을 거절했다.파리합의후 미군철수를 기다려 일거에 무력통일을 계획하고 있던 월맹으로서는 위장외교 전략으로 평화상을 받기에는 국가의 품위와 양심이 허용치 않았을 것이다. 얼마전 한 TV가 키신저와의 회견에서 파리합의는 결국 ‘사기’가 아니었느냐고 추궁했다.회견도중 자리를 박차고 나간 그의 착잡하고 부끄러웠을 심정을 헤아릴 수 있다.노벨평화상은 전쟁을 예방하고 민족간·이념간 분규를 해소하는 데 역사적 공헌을 한 인사에게 주어진다.수상자 몇 사람을 살펴본다. 1971년 대동독 강경노선 할슈타인 정책을 수정해 동구권 화해의 동방정책을 과감히 추진,독일통일의 초석을 놓은 브란트 서독총리,78년 네 차례의 중동전쟁후 평화협정 체결을 추진한 베긴 이스라엘 총리와 그후 극우파에 의해살해당한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93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350년간 계속돼온 인종차별정책 철폐를 위해 27년 동안 옥고를 치르며 이를 이룩한 만델라아프리카민족회의 의장과 데 클레르크 남아공 대통령,64년 흑인 비폭력운동가로 후에 암살당한 킹 목사,94년 3,000년 이상 지속돼온 민족갈등을 지속하고 이스라엘 재건국이후 분쟁을 거듭해 왔던 팔레스타인과 평화를 정착시키고 결국 후에 반대 강경파에 의해 암살당한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아라파트PLO의장 등 모두 거시적인 안목을 가진 용기있는 지도자들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한반도에서 냉전구조를 해체하겠다고 했다.그러나 서해교전과 베이징 차관급회담 결렬 등을 우리는 보고 있다.분단은 우리민족의 의사와 관계없이 외세에 의해 주어졌다.5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 이 책임을 마냥 외국에만 돌릴 수는 없다.고래싸움에 새우등이 터진다.반대로 작은 새우가 고래를 마구 끌고 흔들어 서로 등 터지도록 싸우게 했다.6·25가 그렇고1894년 청일전쟁,1904년 러일전쟁이 그렇다. 우리 역사는 생존을 위한 투쟁의 역사다.소의 꼬리에 안주하기보다 닭의 머리로 떳떳하게 살려고 했다.광개토대왕의 웅지가 있었고 살수(薩水)의 용맹이 있었다.왕건의 통일 포용력이 있었고 이순신 장군의 살신성인이 있었다. 김구의 민족자주 의식이 있었고 항일투쟁의 빛나는 전통이 있었다. 지도자는 대중의 뜻을 따라가는 추종자가 아니다.자기신념에 남이 따라오도록 하는 능력을 가진 자를 말한다.인구팽창,자원고갈,식량부족,환경오염,이념·민족분쟁의 새 천년에서 남북 가릴 것 없이 지금의 분단상태로는 자랑스런 국가로 살아남을 수 없다.2,500년전 철학자 플라토는 “오직 죽은 자만이 전쟁의 끝을 봤다”고 했다.남북한이 그럴 수는 없다.폐쇄적인 민족주의가 아니다.같은 민족으로 세계의 멸시와 조롱을 더이상 참을 수는 없다.오늘날 남북이 안고 있는 어려움의 큰 원인이 분단 사실에 있다.문제를 근본에서 해결해야 한다.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가장 부강한 나라보다 높은 문화의 나라.’김구의 나라상이다.민족을 위해,세계 평화를 위해 노벨평화상이 우리 민족에게 수여되는 날이 있기를 기대한다. 손장래 前 말레이시아 대사
  • [공무원 스터디그룹] 행자부 ‘통일 준비 연구모임’

    “통일이 언제,어떤 형태로 올지 모르는 만큼 미리 대비해야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지요.” ‘통일을 준비하는 행정자치부 연구모임’의 대표 서효원(徐효源)재정경제과장이 말하는 모임의 발족취지다. 통일부에 있을 법한 이 모임을 내무관료들이 만든 이유는 뭘까. “독일 통일 이후 독일 내무부가 옛동독의 난민대책 및 행정체제 재구축,통일조약 체결 등 주도적 역할을 한 것에 비춰볼 때 한반도 통일과정에서 행자부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이죠.” 서과장의 설명이다. 모임은 97년 11월 ‘통일내무부를 준비하는 연구모임’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됐다.회원은 7명으로 단촐하다.분단국이었던 서독에서 유학을 한 경험이있거나 통일에 관련된 업무를 맡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지금까지 모두 8번 세미나를 가졌다.매월 마지막 목요일을 모이는날로 정해두고 있으나 정부 구조조정 등으로 다달이 모임을 갖지는 못하고있다. 그러나 “탈북 주민의 수용대책’‘독일 내무부의 역할과 기능’‘남북 통일과정에서의 민간단체 역할에 관한 연구’ 등 나름대로 심도 있는 논의를하고 있다는 게 주위의 평가다. 특히 지난해 5월에는 북한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다 귀순한 강모씨를 초청,북한 지방행정실태에 대한 간담회를 가져 눈길을 끌었다.자치행정과의 최훈(崔薰)사무관은 “북한의 공무원들 가운데에도 아침에 출근 도장 찍고는 지역시찰간다는 명목으로 외출해 놀다가는 퇴근 무렵에 들어와 다시 도장 찍고 나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 등 생생한 정보를 많이 들었다”며 “북한의 지방행정 체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소개했다. 지난 4월에는 통독 당시 동독에서 행정관으로 있었던 한스자이델재단의 게르하르트 미셸 서울소장을 초청,“통일전후 행정자치부의 역할과 관련된 독일연방 내무부의 사례’에 대한 강연을 듣는 등 활동폭을 넓히기도 했다. 기획예산담당관실의 박동훈(朴東勳)서기관은 “동·서독 주정부 및 자치단체간의 자매결연은 옛동독 지역인 신연방주(州)의 행정체계 구축에 가장 효과적이었다”면서 “우리도 행정수준의 격차를 해소하고 북한 지방행정체계의 조기 재구축을 위해 남북 지자체간 교류협력을 적극 유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박현갑기자 eagleduo@
  • 내년 6.25 50돌 대대적 행사

    6·25전쟁 발발 및 휴전협정 조인 50주년인 2000년 6월25일부터 2003년 7월27일까지 ‘분단 50년,희망의 새 천년’을 주제로 각종 기념사업이 국내외에서 다채롭게 펼쳐진다. 국방부는 13일 6·25전쟁을 역사적으로 재조명하고 참전용사들의 명예선양및 전후 세대들의 국가관과 안보의식 고취를 위해 450억여원의 예산을 들여모두 51건의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열기로 했다고 밝혔다. 국방부는 이와 함께 전쟁의 아픔을 상기하는 숫자 50을 가운데 놓고,국민화합을 통해 우리나라가 희망의 새천년을 주도한다는 의미로 한국 전통의 황색연화문(蓮花紋)으로 둥글게 두른 기념 엠블렘(사진)을 확정,발표했다. 국방부는 우선 2000∼2003년까지 기존의 자료는 물론,북한 및 러시아,중국등의 새로운 전쟁기록과 참전자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6·25전쟁사를 새로편찬키로 했다. 또 2000년 6월25일 50주년 중앙 기념식을 미국 등 참전국 대표가 참석하는국제적인 행사로 치르며 6·25전쟁 50주년을 상징하는 조형물을 2003년 7월까지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 설립한다.이어 2000년 9월28일 국내외 참전용사와 주한 외교사절 등이 참석한 가운데낙동강 반격작전 및 인천상륙작전 재연 및 서울수복 기념행사를 개최한다. 이밖에 부산 유엔묘지 추모행사(2001년 10월24일),평화박람회(PEACE-EXPO 2002,2002년 5·6월),평화선언식(2003년 7월27일) 등 모두 51개 사업이 정부및 중앙 부처,지방자치단체 등의 주관으로 펼쳐진다. 김인철기자 ickim@
  • [대한포럼] 금강산관광 재개의 선행조건

    관광객 민영미(閔泳美)씨 억류사건으로 빚어진 금강산관광사업 중단사태가장기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게다가 12일로 예정됐던 현대그룹 남녀농구팀의방북이 취소됐고 8월10일 평양에서 개최예정인 남북노동자 축구대회도 불투명한 상태다.북한이 서해사태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운데 베이징(北京)남북차관급회담이 결렬되는 등 일련의 부정적 상황은 금강산관광의 재개를어렵게 하고 있다. 정부도 관광객에 대한 신변안전 보장장치마련이 선행되지 않는 한 금강산관광사업의 재개는 고려할 수 없다는 입장이어서 북한의 자세변화가 없는 한금강산관광 중단은 불가피한 실정이다.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이 12일 평양방송을 통해 금강산관광객의 신변안전 문제와 관련,현대그룹과 협의기구를 구성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밝힌 것은 매우 고무적인 반응으로 평가된다.북한이 금강산관광사업의 재개의사를 간접적으로 시사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특히 금강산관광객 신변안전 보장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베이징에 머물던 현대그룹 대표단이 철수한 직후 나온 북한의대응이라는 점에서 그 진위에 관심이 크다. 엄밀한 의미에서 금강산관광 중단은 결자해지(結者解之)원칙에 따라 북한이 조건없이 풀어야 할 문제다.북한이 우리 관광객을 귀순공작원으로 몰아 억류한 것은‘금강산관광을 위한 부속계약서’를 정면 위반한 사건이기 때문이다.북한 아태평화위원회가 지난해 7월6일 현대와 체결한 이 부속합의서는 우리 관광객이 북한측의 관습을 따르지 않거나,사회적·도덕적 의무를 따르지않는다는 이유로 관광객을 북한 내에 억류하지 않을 것을 보장하고 있다. 어쨌든 북한이 현대와 금강산관광객의 신변안전을 협의할 기구구성의 의사를 밝힌 것은 퍽 다행한 일로 평가된다.금강산관광 재개를 바라고 있는 국민적 여망을 고려할 때 환영할 일로 받아들여진다.지난해 11월18일 금강산관광선 첫 출항 이후 7개월 동안 금강산을 다녀온 관광객은 모두 8만7,229명에이른다.북한의 관광객 억류사건 여파로 금강산관광선의 출항이 중단됐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명산인 금강산을 보려는 관광예약자수가 3만4,191명에 이른다는 것은 우리국민들이 금강산관광 재개를 얼마나 고대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북한은 금강산관광객의 신변안전을 보장하는 법적 장치를 마련하고하루 속히 금강산관광사업을 재개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이같은 선행조건 없이 금강산관광을 재개할 경우 또다른 관광중단사태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금강산관광사업은 민족통일의 상징적 시범사업일 뿐만 아니라 연간 3억달러의 경제적 이익이 보장되기 때문에 북한 자신을 위해서도 이 사업은조속히 재개시켜야 한다.그리고 차제에 현대측에 당부하고 싶은 것은 북한과의 협상을 통해 완벽한 금강산관광사업의 위상을 확보하라는 것이다.현대가북한이 추가로 제기한 관광세칙에 대한 보완합의 없이 서둘러 첫 출항을 강행함으로써 결국 이번과 같은 관광 중단사태를 초래시켰음을 인식하고 깊이반성해야 한다.대북경협의 입지를 선점하겠다는 성급한 경쟁논리가 정부와국민들에게 엄청난 폐해를 끼쳤다는 점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정부 아닌 민간차원에서 추진된 대북사업의 한계와 책임을 인식해서 관광객의 신변안전 보장대책을 최우선으로 확보하는 협상력을 발휘하기 바란다.북한과의 원만한 타협을 통해 금강산관광사업이 앞으로 아무런 사건·사고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이 사업이 민족분단의 비극을 청산하고 민족의 화해와번영의 기틀을 마련하는 역사적 이정표 역할을 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장청수 논설위원csj@
  • [대한매일을 읽고] 통일대비 언론 냉전적 시각 재고할 때

    ‘관용,공존의 정신 바탕-통일의 개념 정리해야’ 제하의 기사를 보면서 일부 언론의 대북 관련 보도가 생각났다. 햇볕정책이 대북정책의 기조로 유지되고 통일에 대비한 사전작업을 하고 있는 마당에도 북한의 돌발적인 상황을 냉전적 시각에서 접근하는 언론이 있다.냉전 사고방식과 북한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은 이젠 분명히 재고돼야 할것이다.특히 ‘평화적 분단관리론’은 이제 다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토론회 발제문도 지적하듯이 관용과 공존을 바탕으로 북한을 이해하고 통일의 개념을 정리해 북한을 보다 가깝게 주지시키고 나아가 통일을 이루기 위한 사전 준비작업을 언론이 먼저 실천해야 할 것이다.그나마 대한매일이 대북 관련 보도에 있어서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승경 [학생·전북대 정치외교학]
  • [대한포럼] 국가보안법

    미국과 캐나다를 방문중인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5일 현지에서 “오는 8·15광복절을 기해 시국사범과 장기수들을 대거 사면하고 독소조항이 들어있는 국가보안법도 대폭 개정하거나 다른 법으로 고칠 준비를 하고 있다”고밝혔다.20세기를 정리하고 21세기에 들어가는 오늘의 시점에서 비록 분단상황은 극복되지 않았지만 ‘분단’에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라도 뿌리를 두고있는 시국사범과 장기수를 사면하는 것은 냉전시대의 상처를 조금이나마 씻어주려는 노력이 아닐 수 없다. 현재 구속돼 있는 시국사범은 모두 278명으로 그 가운데 177명(63%)이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이다.나머지는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또는 노동관련법위반 사범이다.국보법 위반 사범 숫자가 말해주듯 이 법은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옥죄어 온 ‘차꼬’였다.김대통령이 ‘필라델피아 자유의 메달’ 수상연설에서 밝혔듯이 우리는 ‘관용이 있는 자유의 새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정부는 이번 ‘8·15특사’의 이같은 역사적 의미를 깊이 새겨서 특사의 폭을 넓히기 바란다.아울러 수배중인 노동자들에게도 ‘관용’의 혜택이 돌아갔으면 한다. 석방도 좋고 특사도 좋다.그러나 우리의 분단상황은 내다볼 수 있는 가까운 장래에 해소될 것 같지는 않다.따라서 현행 국보법이 존속하는 한 ‘잡아들이고 풀어주는’ 공안행위는 계속될 것이다.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어쭙잖은 주장을 펼치기 전에 명색이 언론인이라는 필자가 10여년 전에 독일에서 겪었던 ‘망신’을 털어놓겠다.독일이 통일되기 이전이다.인구 2,000명도 안되는 한 작은 시골 마을의 젊은이들의 모임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이런저런 얘기가 오고가던 끝에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돕기가 화제에 올랐다. “한국에서도 산디니스타를 돕고 있느냐?” “산디니스타는 사회주의자들인데 그들을 돕다니 말이 되는가?” “정부 차원이 아니라 시민의 차원에서 말이다.” “한국에는 국가보안법이라는 게 있다.서독으로 치면 ‘반공법’ 같은 것이다.사회주의자를 돕다니,그건 바로 감옥행이다.” “아니,국가보안법인가 뭔가 하는 법이 시민 자격으로 국제적 약자를 돕는‘양심의 자유’까지 규제하는가?” “한국과 독일은 둘 다 분단국이지만 한국의 경우는 6·25라는 전쟁을 겪었다.우리가 보기엔 독일의 분단은 분단도 아니다.” 필자는 손짓 발짓까지 하면서 한국의 특수상황을 역설했지만 그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왜냐하면 입으로는 국보법을 옹호하면서도마음 속으로는 ‘한국에서 지식인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에 치욕을 느꼈기때문이다. 국보법을 개폐하자는 논거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북한을‘반국가단체’로규정한 것이 북한을 ‘협력의 대상’으로 규정한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과 모순되고,‘고무·찬양죄’와 ‘불고지죄’ 등이 오용되거나 남용되고 있는 것을 들 수 있다.그러나 국보법은 무엇보다 국제적 규범인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가적 치욕이다.국보법을 당장 폐지하는 것은 보수층의 반대 때문에 어려울 것이다.그러므로 독소조항을 없앤 ‘민주질서수호법’으로 대체하는 것이 차선(次善)일 수도 있다. [장윤환 논설고문 yhc@]
  • 金대통령 ‘보안·시국사범 대사면’ 의미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올 8·15에 밝힐 전향적인 조치를 미리 선보였다. 방미중인 5일 국가보안법 사범 대사면 의사를 피력한 것이다. 이같은 결단은 나라 안팎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작품’으로 보인다.국제인권기준,남북관계,노동계 등을 모두 감안했다는 점에서다. 국가보안법은 분단의 아픔이라고 할 수 있는 이념 시비를 규율하는 수단이었다.그런만큼 냉전적인 남북대결 구도에서는 많은 범법자를 양산할 수밖에없었다.현재 국가보안법 구속자가 시국사범 278명 중 63.6%인 177명이나 된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국가보안법은 우리 체제를 보호하는 기능적 측면을 가졌지만 그 자체가 정부에게 부담이기도 했다. 때문에 이 조치는 남북 화해협력시대를 앞당기려는 이니셔티브로 풀이된다. 새 밀레니엄을 앞두고 과거로부터 더 이상 발목을 잡혀서는 안된다는 역사인식일 수도 있다.김성재(金聖在)청와대민정수석도 “20세기의 상흔을 마감하는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이는 다음 세기에는 인권선진국으로 발돋움한다는 정부 목표와도 무관치 않다. 따라서 국가보안법 사범의 대폭 사면은 이 법개정 움직임과도 궤를 같이한다.국가보안법의 조기 개정이나 대체입법을 앞당기는 촉진제가 될 것이라는뜻이다. 이를 경제위기 극복 노력의 일환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시국 혹은 노동운동 관련 구속·수배자가 있는 노동계에 대한 대화합 제스처라는 차원에서다.김 대통령을 수행중인 박준영(朴晙瑩)청와대대변인은 “시국사범,특히 노동운동 관련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사면과 수배해제가 이뤄질 것”이라고 설명했다.국민회의 유선호(柳宣浩)인권위원장도 “당에서 큰 폭의 사면·복권을 대통령에게 건의했다”고 밝혀 이미 오래 전부터 이같은 조치가 준비되어 왔음을 엿보였다. 그러나 박 대변인은 “정치인 중에는 시국사범으로 구속·수배된 사람이 별로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해 정치인은 사면·복권 대상에 대부분 해당되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김영삼(金泳三)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賢哲)씨 등의사면·복권 여부가 관심사다. 구본영기자 kby7@
  • [양승현의 취재수첩] 필라델피아의 ‘DJ열기’

    그냥 서있기만 해도 땀이 비오듯 흐르는 4일 밤(한국시간) 필라델피아 인디펜던스 홀 옥외광장.20세기 마지막 필라델피아 자유메달상 수상식이 거행된곳이다.60%의 시민들이 황금연휴를 즐기려 야외로 빠져나가 대도시가 텅 빈느낌을 주었으나 이곳 광장만큼은 달랐다.미국인들과 교민,그리고 여름휴가를 이용해 배낭여행을 온 한국의 대학생들로 가득했다. 이날의 주인공은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었고,이들은 아낌없이 찬사를 보냈다.짧은 연설도중 무려 10여차례의 박수가 터져나왔다.“나는 자유에 헌신한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랍니다”고 연설을 맺을 때는 국경과 피부색을 떠나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로 축하했다.동북아의 한쪽,그것도 ‘분단된 작은나라’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살고있는 교민들의 얼굴에는 뿌듯함이 넘쳐흘렀다. 김대통령은 지난해부터 수상 후보로 거론됐다.이곳 펜실베이니아 상원의원출신인 포글리에타 이탈리아 주재 미국대사가 적극 추천했다고 한다.그러나IMF 위기상황에서 ‘한가롭게’ 비칠까봐 애써 외면했다는 것이다.올해에도각국에서 엄청난 수상 희망자가 있었다고 관계자들은 전한다. 가곡 ‘그리운 금강산’이 흘러나오고 있는 가운데 자유메달을 목에 걸고“자유의 순례에는 가족의 도움이 컸다”며 부인 이희호(李姬鎬)여사를 소개한 그는 민주주의와 인권 지도자임에 틀림없다.한국 정상으로서 가장 많이준비해야 하고,어렵다는 한·미정상회담을 ‘그 나이에’ 도착하자마자 거뜬히 소화해 낸 부지런한 지도자이기도 하다.클린턴 미대통령이 대(對)중국관계에 관해 조언을 구할 만큼 국제적 식견도 갖추고 있다. 미국 ABC방송은 김대통령의 자유메달상 수상식을 두번째 헤드라인 뉴스로보도했다.미 성가대 대원이 무더위에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가는 상황에서도수많은 미국인들은 자리를 뜰 줄 모르고 김대통령을 지켜보았다. 순방기간 이런 흐뭇한 일정이 계속 이어졌지만 정례적으로 보고되는 국내정치 소식이 김대통령의 마음을 간간이 어둡게 만들고 있다.
  • 民言聯 ‘통일시대 언론역할’ 세미나 주제발표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이사장 成裕普)은 지난 1일 서울 양천구 목동 방송회관에서 ‘통일시대를 대비하는 남북한 언론의 역할과 전망’이란 세미나를개최했다.세미나에서 발표된 김창수(金昌洙) 민족회의 정책실장의 ‘남북한언론 현황과 민족 화해를 위한 과제’란 발제문을 간추린다. 지난 6월15일 서해 교전사태가 발생했을 때 우리 언론은 고질적 병폐를 여실히 드러냈다.선정적 전쟁몰이식 보도와 추측보도로 사태의 본질을 흐렸다. 북측의 사전 기획 가능성에 대해 목청을 돋우는 데 급급한 나머지 전후 상황을 차분히 지켜보는 냉철함은 뒷전이었다.남북의 무력 충돌을 방지하고 국민적 합의를 모으려는 언론의 기본 역할을 외면한 것이다. 이러한 우리 언론의 병폐는 통일을 민족사의 ‘재앙’으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심각하다.권력에 종속돼 소극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정부의 통일정책에부정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우리 언론은 남북간 갈등이 있을 때마다 대북 증오심을 키우는 보도로 일관,국민들의 반북의식을 재생산해 왔다.반북 정서 때문에 적대적 보도를 계속해야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전후세대가 전체 인구의 75.5%를차지하는 지금까지 북한에 대한 적대감을 가진 국민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95년 인공기 강제 게양사건 보도 이후 대북 식량 지원이 중단된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한편 언론 보도가 통일정책에 일방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국가이익을 내세우는 정부 논리에 언론이 따라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하지만정부가 보수에서 민족 화해나 북한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선회할 때는 가차없이 정부를 비판해 왔다. 통일을 준비해야 하는 지금 언론의 과제는 우선 통일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통일’의 개념을 재정리해 실현하는 것이다.이를 위해 언론은 ‘관용’과 ‘공존’을 제작과 보도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관용’은 가진 자가 없는 자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다.자신과 적대하는것을 용납하고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다름을 인정할 때 비로소 ‘공존’이 가능해진다. 같은 민족인 북한 동포들과 다른 제도에서 살았다는 ‘다름’을 인정하는것부터 연습해야 한다.다름을 인정하고 평화공존의 통일을 추구할 때 불행한 통일을 막을 수 있다.이러한 전제를 생략한 준비없는 통일논의는 또다른 재앙을 예고할 뿐이다. 민족 화해를 위한 언론의 역할은 이러한 ‘관용’과 ‘공존’을 국민들이익히게 하는 것이다.남북한 동포들이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터득할 수 있도록 통일교육과 통일문화를 이끌어야 한다. 한편 현상을 유지하려는 소극적 ‘평화적 분단 관리론’은 경계해야 한다. 자칫 분단의 영구화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통일은 역사발전 과정인만큼 장기적 민족발전 전략으로 이해해야 한다. 언론이 통일의 한 주체로서 통일국가 건설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하다.민족화해를 위한 과정에서 언론의 창조적 역할이 필요한 때이다. 우선 남북 긴장을 완화시키는 방향으로 보도해야 한다.정치적 관계나 필요에 얽매여서는 안된다.지금까지 남북 당사자들은 정치적 이해관계와 필요에띠라 통일정책을 결정해 왔다.언론은 공정하고 중립적 자세로 민족의 이익을 생각해야 한다. 이와 함께 남북한 정부에 대한 견제와 감시도 중요하다.남북 당국자들의 정책이 통일과는 거리가 멀 수 있기 때문이다.통일을 준비하면서 이뤄낸 성과가 정치적 이유로 무산되지 않도록 국민과 함께 지켜내야 하는 것도 언론의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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