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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북정상회담 D-20/ 선발대 입북 활동

    5월31일 상오 9시.판문점 남측 지역을 떠난 몇대의 트럭이 중립국감독위 건물옆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측지역으로 들어갔다.남북정상회담 준비 선발대가평양에 체류하며 이용하게될 사무기기와 통신장비를 실은 트럭들이다. 한시간뒤.기다리던 북측 판문점 연락관들은 이들을 반갑게 맞은 뒤 미리 전달된 명단과 사진을 실물과 대조했다.간단한 확인절차후 선발대원들은 북측이 마련한 차량을 나눠 타고 개성을 거쳐 고속도로로 평양으로 달렸다. 정부가 31일 파견하는 정상회담 선발대가 북한에 들어서는 모습을 미리 구성해본 것이다. 선발대가 여장을 푼 곳은 국빈급 외국손님을 모시는 백화원초대소.세 동의건물로 이어진 초대소 구조를 도면과 실물을 대조하며 점검해 나갔다. 회담장인 만수대의사당,연회및 식사장소인 인민문화궁전 등도 같은 방법으로 점검했다.선발대는 북측이 건네준 건물설계도와 지도를 실제현장과 비교해가며 행사를 준비했다.행사장에 들어갈 사람들의 숫자와 입실 순서,좌석위치….대통령이 앉을 의자높이는 물론 푹신함과 딱딱함의정도까지도 점검 내용이다.대통령의 걸음걸이를 감안한 이동시간과 안내자,배석자,양 정상간의인사방법의 고려는 기본이다. 순안공항도착에서 숙소까지의 도로및 주변상황,회담장 및 연회 등 방문장소의 위치를 익히고 현장상황에 맞게 일정을 짜나간다.경호팀은 특히 돌발사황에 대비한 여러가지 대처 시나리오도 만든다.평양시내의 각국 외교공관들의위치파악과 각 행사장에서 이동거리의 파악도 이같은 돌발상황을 염두에 둔것이라고 한 관계자는 전한다. 선발대는 현지에서 대통령일정을 5분단위로 세분화,북측과 협의해 나간다. 선발대는 남북직통전화를 통해 서울 삼청동 남북대화사무국에 마련된 상황실에 관련사항을 보고하고 지시를 받는다. 이석우기자 sw
  • [김삼웅 칼럼] 일본총리 망언과 독도문제의 배경

    모리 요시로(森喜郞)일본총리가 28일 방한한다. 정부는 그의 ‘신국론(神國論)’발언이나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는 외무성 발간의 ‘2000년 청서’문제 등을 엄중히 따져야 한다. 일본은 기회있을 때마다 엉뚱한 수작으로 한국의 반응을 떠보곤 했다.임진왜란때나 19세기말 침략할 때도 그랬다. 본론에 앞서 두가지 문제부터 살펴보자. 하나는 일본의 국호문제다. 명치시대의 대표적인 학자 요시다다고(吉田東伍)는 1907년에 ‘대일본지명사서(大日本地名辭書)’의 국호편에서 “일본이란 이름은 한민족이 처음으로 쓰기시작했으나 우리 일본인들이 그 이름이 아름답고 나라 이름으로 쓰는 것이 어울린다고 믿어 만고불변의 국호로 삼았다”고 썼다. 다른 역사학자들도 비슷한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일본은 ‘일본’이란 국호를 한국계 도래인(渡來人)들이 사용해온 말을 701년 다이호(大寶)율령에서부터 국호로 채택하여 써온 것이다. 그 이전에는 왜(倭)라고 불렀다. 두번째는 일본의 양심적 학자 와다하루키(和田春樹)의 “소련이 참전하면한반도는 분할점령케 될 운명에 있었으므로 소련참전 이전에 전쟁(태평양전쟁)을 끝내지 않은 일본은 한국의 분할점령 나아가 분단의 책임이 있다”는지적이다. 분단의 원인제공은 물론 직접책임도 일본에 있다는 분석이다. 멀리는 일본이란 국호를 ‘차용(借用)’해서 쓰고 가까이는 민족분단의 비극을 안겨준 일본이 ‘종전’반세기가 넘는 현재, 많은 인적교류와 물적거래를 하는 ‘우방’에 대해 엉뚱한 독도영유권 주장과 잊힐만하면 망언을 서슴지 않고 군사대국화와 극우노선으로 치닫는 배경은 무엇일까. 비록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세계화에 앞섰다고는 하지만 변함없는 ‘섬나라’근성과 콤플렉스인가 아니면 16세기말부터 집착해온 이른바 ‘정한론’의 부활인가. 2002년 월드컵공동개최를 앞두고 두나라는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가 유지된다. 그러나 한꺼풀만 벗기면 해마다 쌓이는 연100억달러 규모의 무역역조와 일본군위안부로 동원된 20만 희생자의 배상문제 등 ‘미제사건’과 개선해야 할 현안이 수두룩하다. 한꺼풀을 더 벗기면 1905년의 을사조약 문제다. “회의장 주변과 궁궐·서울시내 전역이 일본군에 의해 점령된 상태에서 한국측 대표와 정부대신 심지어 국왕에게도 협박이 가해져서 한국측의 자유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을사조약은 ‘완전무효’(프랑스국제법학자 프랑시스 레이, 1906년)”라는 국제법상의 유권해석이다. 여기에 한국측대표 외부대신 박재순이나 일본측 전권대표(林權助)가 각각 국왕의 위임장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체결된 을사조약은원인무효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 이후 일체의 한일조약이나 협약은 무효가 되고, 일제는 한국을불법강점해온 것을 속죄와 배상으로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다. 1965년 박정희정권이 이러한 역사적 바탕에서 국교정상화 조약을 체결하지 못한 것은 중대한 실책이다. 그렇다고 ‘역사적 진실’이 사라지거나 일본의 불법과 책임이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일본이 지난해 여름 히노마루와 기미가요를 국기와 국가로 규정하는법률안을 통과시킨 데 이어 자위대의 지위를 격상시키고 활동영역을 확장하는 새 미―일(美日) 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관련 3개 법안을 마련하고 이달초에는 동남아시아의 군사적 교두보라고 할 수 있는 싱가포르 기지 사용권을 얻어냈다. 일본자위대는 이미 세계 제2위의 막강한 전력(戰力)을 보유하고 있다. 이같은 일련의 사태를 종합할때 일본의 ‘군사대국호’는 이미 닻을 올린상태에서 우리를 넘보고 있는 것이다. 독도문제만 해도 그렇다. 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한 1905년 시마네(島根)현의 고시(告示)는 국제법상 증거능력을 인정받을 수 없다. 영유권을 주장할수 있는 주체는 국가이므로 중앙정부가 아닌 일개 지방현의 고시는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 일본이 떼를 쓰는 것은 그들의 숨긴 의도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독도를 ‘실효적으로’지배하고 있다는 안일한 자세를 버리고 단호한 대처가 있어야 한다. 북한과 독도관련 공동대책도 필요하다. 우리가 베푼은혜와 저들이 저지른 죄악을 잊고 새로운 군국화에 열을 올리는 일본에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남북정상회담의 성공과 통일은 시급한 민족사적 과제다. 김삼웅 주필.
  • ‘세계질서와 평화’ 국제학술대회

    2000년 ‘세계 평화문화의 해’를 기념하는 국제학술대회가 오는 26∼27일서울 프라자호텔에서 열린다. 한국국제정치학회(회장 김동성 중앙대 정외과교수)와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사무총장 권태준)가 공동 주최하는 이 행사에는 ‘새천년의 세계질서와 평화’라는 주제 아래 국내외 전문가들이 모여 세계평화 질서 구축과 관련한 다양한 이슈를 평가하게 된다. 외국 참가자는 장 르카 전 세계정치학회장(프랑스·파리정치대)을 비롯한 로날드 블라이커(호주·퀸슬랜드대)스티브 찬(미국·콜로라도대)크리스틴 실베스터(호주·호주국립대)교수 등 다섯 나라의 8명.한국학자로는 이경숙 숙명여대 총장과 이상우(서강대)이호재(고려대)이정옥(효성가톨릭대)교수 들이참여한다. 이 가운데 스위스 출신인 블라이커는 비무장지대에서 스위스 외교관 자격으로 2년 근무했으며 부산대 방문교수도 지낸 한국통.그는 ‘세계화,정체성,평화 전망’이라는 발표문에서 남북한간 갈등의 핵심은 정체성 문제라고 분석했다.민족적 동질성이라는 ‘신화’에도 불구하고 반세기동안 분단현실을 겪으면서 남북한은 뚜렷이 대비되는 정체성을 각기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따라서 동질성에 관한 강력한 신화와 상반된 정체성이 한반도 갈등의 원천이라고주장했다. 그는 이를 푸는 방법으로 ?상대 입장에서 사물을 보아야 하며 ?상대와의 차이를 이해해 받아들이고 ?국경 개념을 초월해 정체성과 연대감을 형성해야 한다고 제안했다.또 이호재교수는 ‘한반도의 평화구조 구축’에서 “미국은 현재 군사적 헤게모니를 확보하고 있으므로 한반도 문제에 직접 간섭하면 ‘제국주의적 확장’이나 오만으로 간주돼 불필요한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경고하고 “남북한이 1992년의 남북한 기본협정에 기초해 스스로 해결하도록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 [기고] 실용적 자세로 과거 청산을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실무절차 합의서가 채택됨으로써 정상회담을 위한 ‘밑그림’은 그려졌다.우리는 남북정상의 만남 자체가 ‘성과’라는 인식 하에 온갖 어려움을 감내하더라도 정상회담을 성사시켜야 한다.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정상회담으로 가는 길에 나타날 수 있는 돌발변수들을 지혜롭게잘 제거해나가야 할 것이다. 남북정상회담으로 가는 길에서 예상되는 돌발변수로는 첫째,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의혹이 다시 불거져나오는 경우이다.북한의 핵·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 개발문제는 우리의 안보와 직결될 뿐만 아니라 미·일 등 주변국들의 주된 관심사항이다.한·미·일이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는 ‘페리 프로세스’의 핵심도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에 대한 억지와 포용의 병행정책이다.따라서 남북정상회담은 한·미·일이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는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억지노력과 상충되지 않을 때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특히 5월말로 예정된 미국의 금창리 지하핵 의혹시설에 대한 2차 방문조사에서 북한의 핵개발 의혹이 불거져나오지 않아야 할 것이다.조사결과 이 시설이 핵개발시설로 판명될 경우 정상회담은 난관에 봉착할 수도 있다.따라서 북한의핵·미사일 개발에 대한 결정적 증거가 포착될 때까지 한·미 양국은 신중한대처를 해야 할 것이다. 만에 하나 금창리 지하시설이 핵개발 의혹시설이라고 하더라도 준공하는 데는 많은 시간을 요하기 때문에 정상회담의 장애요인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한·미 양국의 정책조율이 있어야 할 것이다. 둘째,북한이 원하는 대량의 대북지원을 추진하기 어려운 국내외적인 제약요인이 발생하는 경우이다.이번 정상회담은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제공을통한 대화전략’에 따라 이뤄진 것이다.따라서 북한의 가장 큰 관심은 남한의 대북지원 규모일 것이다.안정 다수의석을 확보하지 못한 집권 여당의 국내 사정,페리 프로세스와 대북지원과의 상충문제 등으로 북한이 원하는 규모의 대북지원이 이뤄지기 어려울 수도 있다.원내 1당인 한나라당은 지난번 총선 공약을 통해 500만달러 이상의 남북경협 등 대북지원시 국회동의를 거칠것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의 국내외 사정으로 대량의 대북지원이 어렵다고 북한이 판단할 경우,정상회담은 난관에 빠질 수도 있다.따라서 국내적으로는 장기적 관점에서 북한의 경제난을 덜어주고 이를 통해서 남북간 신뢰를 쌓을 수 있도록 초당적협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국제적으로는 페리보고서에 따라 추진되고 있는 북한의 핵·미사일개발 억지문제와 남한의 대북지원 사이에 한·미·일간의 전략적 조율이 필요하다. 셋째,정상회담으로 가는 길에 나타날 수 있는 걸림돌은 그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서해사태의 재발 또는 잠수정 침투 등 북한의 대남 도발사태가 벌어질경우이다.북한은 서해에 통항수로를 설정하고 준수를 요구하고 있다.북방한계선(NLL)과 관련한 문제는 일차적으로 정전협정 무력화 차원에서 미국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상회담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그러나 지난해 있었던 서해교전사태는 남북간 미해결의 과제로 남아 있다.정상회담이 이뤄지면 이 문제에 대한 ‘유감’ 표명 등을 통해 해결해야 할 것이다. 분단 이후 55년만에 최초로 이뤄지는 정상회담의 길은 멀고도 험난하다.다행스런 것은 현재까지 북한이 정상회담 개최 사실과 실무접촉 과정을 상세히보도하면서 회담성사에 적극성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의 결단으로 정상회담이 개최된다’고 선전하고 있는 북한당국으로서도 정상회담이 성사되지 못할 경우 지도력에 상처를 받을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식견있는 실용주의 지도자’로 평가하고 ‘민족애와 열린 마음으로 실용주의적인 태도’로 정상회담에 응하겠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남북간의 첫 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개최되기 위해서는 걸림돌 제거와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다.그리고 남북의 두 지도자는실용주의적인 자세로 과거를 청산해야 할 것이다.정상회담을 위한 기본설계를 마친 남북당국은 남은 기간 회담을 잘 준비하여 ‘선 합의,후 불이행’으로 점철해왔던 지난 시기의 악습을 버리고 남북관계의 새시대를 열어야 할것이다. 高有煥 동국대교수·북한학
  • 남북정상회담 D-24/ 실무절차 합의서 내용·의미

    남북한은 실무절차 합의서 타결로 정상회담 개최 절차의 큰 틀을 마무리지었다.합의서에는 정상회담의 의제부터 대표단 구성,왕래절차 등 행사진행을위한 기본적인 내용을 명문화했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북한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간의 역사적인 정상회담 준비는 이로써 또 한 관문을 넘어서게 됐다.분단 55년만의 첫 정상회담의 진행일정이 가시화됐다는 역사적 의미도 있다. 남측은 31일 판문점을 통해 평양 현지에 선발대를 보내 현장을 점검하고 의전·경호,통신·보도에 대한 구체적인 준비상황에 들어가게 된다. 남북간의 위성 통신망의 구성은 분단 이후 처음이다.항공로 이용도 94년 정상회담 추진때의 절차합의서에는 없었던 새로운 시도다.남북한은 다음달 2일북측이 보내온 체류일정을 접수하면 이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일정과 회담 준비사항을 조정해 나간다. ■의제/ 지난 4월8일 정상회담 합의서 내용을 기초로 한반도 현안에 대한 포괄적 논의를 할 수 있도록 했다.7·4남북공동성명에서 천명된 조국통일 3대원칙 정신 등이 명기됐다.민족의 화해·단합,교류·협력,평화·통일을 위해협의한다는 포괄적인 표현에도 의견을 모았다.두 정상은 냉전해체·평화정착등 한반도 현안 전반에 대해 제한없는 논의를 할 수 있게 됐다. ■주요 일정/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두차례 이상의 상봉 및회담을 명문화해 일부의 의혹을 해소했다.일각에서는 북측이 김대통령과 김정일위원장간에는 ‘상봉’만 하고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의 회담을 추진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었다. ■보도 문제/ 5차 접촉에서도 논란끝에 기자단 수는 92년 고위급회담 수준인50명 수준으로 합의했다.생중계를 위한 구체적인 문제는 실무진들의 방북을통해 협의해 나간다.SNG반입여부도 평양의 실무단 협의에서 결정하기로 했다.정부 당국자들은 “정상회담 관련 주요행사를 우리인원과 장비로 직접 촬영·제작한뒤 북측의 협조로 위성을 통해 서울에 전송하는 것은 남북방송협력차원에서도 신기원을 여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평가/ 정부의 한 당국자는 “실무합의서 타결은 한반도문제의 당사자해결원칙을 확인하고 냉전종식·평화정착의 출발점”이라고 의미를 강조했다. 또 앞으로 정상회담은 가시적인 성과보다는 상호이해와 신뢰의 폭을 넓히는계기를 마련한다는 측면에서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석우기자 swlee@
  • 南北정상회담 특별취재단 가동

    대한매일은 오는 6월의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정확하고 충실하게 보도하기 위해 ‘남북정상회담 특별취재단’을 회담 D-24일인 19일부터 가동합니다.취재단은 평양 현지 취재진을 포함,모두 42명으로 구성됩니다. 분단이후 55년 만에 처음으로 열리는 남북정상회담은 그동안의 남북간 상호반목과 불신, 대결을 종식시키고 통일의 장으로 나아가는 큰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됩니다.대한매일 ‘남북정상회담 특별취재단’은 민족사에 커다란 획을 긋게 될 이번 정상회담을 충실한 기획과 정확한 취재로 민족화해,한반도냉전해소의 길에 도움이 되도록 보도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새천년 첫해 들어 전 민족의 지대한 관심속에 열리는 남북정상회담을 민족사적 입장에서 다양하고 신속,정확하게 보도하려는 대한매일 특별취재단에많은 성원을 바랍니다. ◆ 정상회담 특별취재단 명단. ■단장 이경형편집국장 ■부단장 최홍운부국장 정종석정치팀장 ■정치팀 양승현 이목희 황성기 이석우 이도운 오일만 김상연 ■경제팀 손성진 박정현 ■디지털팀박성태 함혜리 주병철 전광삼 김미경 ■사회팀 황진선 오승호 노주석 김경운 송한수 전영우 이창구 ■전국팀 최병렬 김인철 ■문화팀 이용원 서동철 ■특집팀 박재범 정운현 신준영 박찬구 김성수 장택동 ■체육팀 박해옥 류길상 ■국제팀 최철호 김규환 ■사진팀 박영군 최해국 김명국 손원천
  • 南北정상회담 실무협의 타결

    남북한은 18일 6월 평양 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실무절차합의서를 최종 타결지었다. 양측은 판문점 남측지역 ‘평화의 집’에서 정상회담 5차 준비접촉을 갖고마지막까지 이견을 보이던 우리측 취재기자수를 50명으로 한다는 데 의견을모은 뒤 15개항의 합의서에 서명했다. 합의서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 사이에 역사적인 상봉이 있게 되며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된다”고 두 지도자간의 회담임을 명확히 했다.또 “상봉과 회담은 최소한 2∼3회 하며 필요에 따라 더할 수 있다”고 확인했다. 합의서는 수행원 130명,취재기자 50명 등 대표단을 180명으로 하고 2박3일동안의 체류일정도 연장할 수 있도록 했다.또 왕래는 항공로 및 육로로 하고항공로를 이용할 경우 남측 비행기를 이용한다는 사실을 명기했다. 의제는 “7·4남북공동성명에 천명된 조국통일 3대 원칙을 재확인하고 민족의 화해·단합,교류와 협력,평화와 통일을 실현하는 문제”를 논의하기로 했다. 합의서 타결에 따라 의전·경호,통신·보도 등 세부절차 협의를위해 남측실무전문가로 구성된 선발대 30명이 오는 31일쯤 방북,현장을 점검하고 구체적인 논의를 벌인다. TV 생방송도 원칙적으로 합의했다.합의서에 “북측은 남측에 실황중계가 가능하도록 필요 설비와 인원을 최우선적으로 보장하며 TV영상 송출을 위한 전송로 및 위성중계를 위한 편의를 제공한다”고 명기했다.양측은 또 김 대통령의 방북기간중 이미 가설된 서울∼평양간 직통전화 회선과 함께 예비통신으로 위성통신망을 이용한다는 데도 합의했다. 정부의 한 당국자는 “분단사상 최초로 남북간 위성통신망이 구성돼 운용되고 우리측 인원과 장비로 직접 주요 행사를 촬영·제작해 실황중계하게 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남측 수석대표인 양영식(梁榮植) 통일부 차관은 합의서 타결직후 종결발언문에서 “55년 만의 두 정상의 첫 만남은 한반도 평화정착과 남북간 화해·협력의 길을 열어나가는 데 획기적인 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령성 북측 수석대표도 쌍방은 합의서를 성실히 이행,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판문점공동취재단·이석우기자 swlee@
  • 동족상잔 아픔 씻는 1인극 ‘결혼굿’

    민속학자이자 1인극 배우인 심우성 한국민속극연구소장이 19∼21일 오후7시30분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에서 1인극 ‘결혼굿’을 공연한다. 분단이래 통일전선에서 목숨을 잃은 망자들의 ‘합동결혼식’으로 구성된 이작품은 지난해 10월 로스앤젤레스 시립박물관에서 발표돼 큰 주목을 받았었다.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동족상잔의 아픔을 마무리할 해원굿의 의미로 다시 무대에 올리게 됐다. 심우성의 1인극은 대사없이 소리와 춤,발림으로 구성된 것이 특징.인형,탈을다양하게 조화시키며 무대와 객석을 오가는 마당굿의 성격이 짙다. 그는 “통일이야기만 해도 마구 잡아가던 것이 엊그제인데 남과 북의 지도자가 만난다니 꿈만 같다”며 “그러나 만남에 앞서 해원의 얼싸안음이 있어야 한다”고 공연 의의를 설명했다.(02)720-7783이순녀기자 coral@
  • 서대숙교수 특별인터뷰/ 내가 본 김정일 총비서

    남북분단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상호 관계개선을 통해 분단 현실을극복하고 민족 화합을 이뤄내는 일이다.현재 미국 하와이에 머물고 있는 서대숙(徐大肅) 미 하와이대 정치학 석좌교수는 17일 대한매일과 국제전화를통해 가진 인터뷰에서 “남북이 서로 정부를 인정하고 국교를 수립,경제 교류와 긴장 완화를 이끌어 내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고 강조했다.과거 냉전논리에 젖은 무조건적 비판이나 검증되지 않은 일방적 찬양은 모두 남북관계의 진정한 개선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김정일 위원장의 성격과 인품은. 한국에서 김정일 위원장의 개인적 성격을 자세히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한두차례 만났다고 인품이나 성격을 제대로 알 수는 없다.여러가지 정황을 종합할 때 ‘괴팍하다’는 말도 있지만 ‘효자’로 평가받기도 한다.양쪽이 다 맞을 것이다. 지난 82년 제가 덩샤오핑(鄧小平)과 후야오방(胡耀邦) 등의 초대로 중국에갔을 때 통역자들이 그의 성격에 대해 ‘덩샤오핑이나 후야오방에 비해 굉장히 괴팍하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아버지 김일성 주석에 대한 효심은 후계자로 인정받기 위한 이기적차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한국에서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깊다. ■김정일 위원장의 성장배경과 지도자로서의 교육은. 아버지에 비해 교육을 제대로 받았다.한국전쟁이 일어난 8살때 만주로 피난가서 조선 혁명가 유자녀들이나 다른 빨치산의 아이들과 함께 혁명학원을 다녔다.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평양에 돌아온 그는 초등학교와 초급중학교에 이어 60년 남산고급중학교를 졸업,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하는 등 정상적인 학교교육을 받았다. 또 64년 대학을 졸업한 뒤 곧바로 당에 들어가 10여년 동안 지도자 준비 과정을 철저하게 거쳤다. ■그동안 국내에는 김정일 위원장이 대인관계를 기피하고 내성적 성격이라는말이 많았는데. 김정일 위원장이 우쭐한 자세로 별 달린 군복을 입은 사진은 찾아볼 수 없다.외국 손님이 북한을 방문할 때 화려하게 환대하거나 접대하는 일도 드물다.이를 두고 내성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나라를 이끌어 가는 처지에서자기가 해야 할 일에 주력하기때문이다.한국에서는 객관적인 입장으로 김정일 위원장이 무엇을 하려는지이해하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아버지 김일성 주석과 다른 점을 꼽는다면.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은 지도자로서 완전히 구별된다.김일성 주석은항일 빨치산이었다. 어릴때부터 목숨을 걸고 항일 운동을 했다.중국사람들과도 같이 학교에 다니면서 가까이 지냈다.또 국내파,연안파 등 정적(政敵)을자기 손으로 한사람,한사람 숙청하고 나라를 세웠다. 김정일 위원장은 정반대다.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바로 당에 들어갔다. 군복무를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군에 입대하지도 않았고,정규군의 훈련을 받은일도 없다. 아버지가 만든 국가를 인계 받았을 뿐,누구를 숙청한 경험도 없다.대신 연극 연출이나 영화 제작 등 예술계통에 관심이 높다. ■김정일 위원장이 김일성 주석의 후계자로 공인받기까지 정치적 카리스마를스스로 획득했는가. 그렇다고 본다.왜냐하면 김정일 위원장이 후계자로 나서기 시작한 것이 74년부터다.94년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기까지 20년 동안 후계자 학습을 받은것이다. 김일성 주석에게 지도를 받는 과정에서 시행착오도 겪었다.예를 들면 70년대 후계준비 사업인 3대혁명소조운동은 초창기 실패를 거쳤다.그러나 후계준비 작업이 끝날 무렵인 79년12월에는 ‘김일성 훈장’ 제1호를 받는 등 어느정도 인정을 받았다. 김정일 위원장은 또 당내 2인자로 등장한 80년 이후 91년 12월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될 때까지 11년 남짓 지도자로서 자질을 닦았다.이런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직후 자기의 확고한 카리스마를정립할 수 있었다. 정치지도자로서 아버지보다 더 배짱이 있다는 평가도 있다. 국가 주석직을차지하지 않고도 북한을 다스리고 있다.중국 공산당 당수였던 마오쩌둥(毛澤東)이 국가 주석을 맡지 않고도 대륙의 최고 지도자 역할을 한 것과 비슷하다. ■지난 98년 8월 김정일 위원장이 미사일 발사를 강행한 이유는. 김정일 위원장으로서는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본다.어느 나라든 자기 나라의처지에서 생각해야 한다. 소련이 붕괴되고 중국이 개방으로 나서고 미국·일본과 관계개선도 제대로 안되니 생존방법으로서는 핵무기와 핵무기를 운반하기 위한 미사일을 만드는 방법밖에 없었을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은 리더십을 어떻게 발휘하는지. 실례를 들면 70,80년대부터 줄곧 현장시찰을 많이 해왔다. 군 시찰이 특히잦다.선군(先軍)정치를 해야 강성대국으로 번성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기때문이다.군수공장을 자주 둘러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그는 무엇을 해야할지 알고 있고,지도력도 제대로 발휘하고 있다고 본다. ■김정일 위원장의 예술적 식견은 어떤가. 높은 편이다.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문화예술지도과에서 일하면서 여러가지 영화제작을 지도했다.특히 69년에 발표된 ‘피바다’,70년의 ‘어느 자위단원의 운명’,72년의 ‘꽃파는 처녀’ 등은 굉장한 인기를 얻었다.아버지의 빨치산 운동때 얘기를 토대로 극본을 만들었는데,김일성 주석도 감동할 정도였다고 한다. 김정일 위원장이 서양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자기 작품과 비교·연구하기 위한 측면도 있다.평양의개선문이나 주체탑도 그가 만들었다. ■서방세계의 문물에 대한 이해나 수용 정도는. 평양에서 당 간부들을 만나 얘기를 해보면 한국은 물론 서방세계에서 일어난 일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김정일 위원장도 마찬가지일 것이다.평양에서는 1주일에 한차례씩 당 간부를 대상으로 ‘평양순보’가 발행되는데 국제뉴스가 빠짐없이 실려 있다. 북한을 ‘봉쇄된 나라’,‘아무 것도 모르는 나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북한주민의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인식은. ‘좋다’는 생각과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절반 정도씩이다. 옛날 중국에서는 천재(天災)가 오면 임금이 천운을 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여겼다.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김정일 위원장이 후계자로 나서자 홍수,가뭄등 자연재해가 닥쳤다.때문에 주민들이 잘못 인식하는 점도 있다. 그러나 금년부터 이탈리아와 국교를 맺고 중국,소련,필리핀,캐나다 등과 관계 개선에 나서는 등 김정일 위원장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오는 6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간 남북정상회담의 성과를전망하면. 낙관적으로 본다.회담이 좋게 발전할 것이다. 두 정상의 만남 자체도 남북 화해라는 차원에서 의미가 있지만,악수만 하고헤어지진 않을 것이다. 북한에서 볼 때 김대중 대통령은 이승만(李承晩) 이후 자기들에게 가장 가까이 생각되는 대통령이다.북한으로서도 민족화합을 생각한다면 지금이 가장좋은 기회인 것이다. 한국이 북한에 혜택을 주는 것이 있다면 북한도 한국 대표단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다.예를 들면 휴전선 일대 지뢰를 제거한다든지,동·서해안의 해상경계선을 합의하기 위한 위원회를 만든다든지,긴장완화를 위한 대표부를 세운다든지,여러가지 가시적인 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한국은 ‘북한이 돈이 없어 일방적으로 손을 내밀려 할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북한은 차라리 굶더라도 자존심은 지키려 한다. ■김정일 위원장의 경제관은. 과거 김일성 주석은 ‘200일 전투’,‘생산고지 점령’ 등의 구호로 국가계획경제를 추진했다.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였다. 그러나 김정일 위원장은 완전히 다르다. 아버지 세대처럼 성장과정에서 큰고생을 하지 않았다.또 노동력 동원 등 국가계획경제 개념과 달리 첨단기술을 확보하고 컴퓨터를 활용하는 등 새로운 경제개발 방식에 눈을 돌리고 있다.앞으로 많은 변화가 올 것이다. 기동취재소팀 박찬구기자 ckpark@. ◆ 서대숙교수 프로필. 서대숙(徐大肅·69) 미 하와이대 정치학 석좌교수는 30년 남짓 북한을 연구한 세계적인 북한문제 전문가이다. 올 들어 북한연구 전문기관인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소장과 북한대학원 원장을 맡고 있다. 그는 70년대 이후 여러차례 방북,핵심권력층과 정책토론을 벌이는 등 북한연구에 독보적 영역을 구축해 왔다. 지난 4월 발간한 ‘현대북한의 지도자-김일성과 김정일’이란 저서는 김정일국방위원장의 권력승계 과정과 ‘김정일 체제’의 특징, 향후 과제 등을 잘분석해 요즘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주요 독서파일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 [사설] 실무합의서 이후의 과제

    남북 양측은 18일 5차 준비접촉에서 실무절차합의서를 채택함으로써 남북정상회담의 기본틀을 마련했다.이로써 6월 12∼14일 평양에서 분단이후 최초의역사적 남북정상회담이 순조롭게 열리게 됐다. 5차 준비접촉에서 서명·발표된 15개조 31개항의 실무절차합의서는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기본 설계도라는의미에서 큰 중요성을 갖는다. 정상회담의 실질적인 출발이라는 점에서 민족사적 의미도 크다.반세기가 넘도록 반목과 대립으로 지속되고 있는 분단의 역사를 청산하고 21세기 민족통일 실현을 위한 새로운 장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합의서 내용에서 남측 취재단 규모가 50명으로 축소된 것은 옥에 티로 지적된다.또한 베를린선언의 4대과제를 정상회담의 의제로 사전에 구체화하지 못한 부분도 아쉬운 대목이다.물론 모든 협상에서 100% 만족은 있을 수없는 만큼 정상회담 성사를 위한 타협과 양보는 필수적이라고 생각된다. 앞으로의 정상회담에서 알찬 내용의 성과를 도출하는 문제가 더욱 중요한 과제인 것이다. 어렵게 성사된 남북정상회담의 성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일회성 회담성과에 집착해서는 안될 것이다.남북 양측이 지난 50년 이상 나름대로의 국가체제를 운영해왔고 또 특성을 갖고 있는 만큼 어디까지나 상대방측 견해를 존중하면서 효율적 회담성과를 이끌어내는 것이 바람직하다.남북간의 엄연한현실의 벽을 인식하고 실현 가능한 부문에서부터 회담성과를 도출하는 협상전략이 필요하다.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남북정상회담에서 과욕을 부리지않고 가능한 문제부터 풀어나가는 실용주의적 태도로 임하겠다”는 입장을밝힌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난마처럼 얽히고 설킨 남북문제가 단 한차례 정상회담으로 한꺼번에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은 우리 한반도 역사의 자명한 진리일 것이다. 그리고 또하나 중요한 과제는 회담의제에서 현실적 해결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점이다.남북문제는 남북 당사자 원칙에서 해결돼야 마땅하지만 주변국가들의 이해관계가 함께 작용하는 것이 현실이다.미국이 북한 핵과 미사일문제를 남북정상회담 의제로 요구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미국의요구가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은 아니다.다만 북·미간의 첨예한 현안보다는 한반도 평화보장과 이산가족의 인도적 문제를 생산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다.쟁점현안보다는 실현 가능한 문제를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회담성과가 더욱 중요하다. 아무튼 실무절차합의서 타결을 계기로 통일민족사에 큰 사건으로 기록될정상회담이 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 하겠다.
  • 남북정상회담 D-24/ 평양회담 가상 시나리오

    6월13일 오전 9시50분 평양 중심부에 위치한 만수대의사당 현관 앞.김대중(金大中) 대통령 일행을 태운 차량들이 조용히 들어섰다.북측 의전요원이 방탄차량의 문을 열자 김 대통령이 내렸다.인민복을 입은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이 현관 앞까지 김 대통령을 맞으러 나와 있었다.이례적인 예우였다. 김 국방위원장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다”고 인사했고,김 대통령은 “반갑습니다”고 화답했다.분단 55년만의 역사적 회담을 눈앞에 두고 평양땅을밟고 서있는 김 대통령은 콧날이 시큰해질 만큼의 만감이 스쳐지나가는 표정이었다. 물론 이는 가상 시나리오다.회담장소나 의전 등 세세한 부분은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담장소/ 최소 2∼3회 단독회담 형식으로 열리는 남북 정상회담 장소로는만수대 의사당이 가장 유력하다.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등 고위간부들이 외교사절을 만나 회담하는 곳이기도 하다. 다음으론 남북 고위급회담이 열렸던 인민문화궁전도 회담장으로 거론된다. 북측이 ‘인민에 대한 애정’을 과시하는 건물로 인민문화궁전을 소개하고있다는 점에서 이 곳을 이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의제/ 실무절차 합의서에서 포괄적인 의제를 설정해 놓은 만큼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협력을 위한 모든 것들이 회담 테이블에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사회간접자본 지원,이산가족문제,남북기본합의서 이행방안,한반도 비핵화선언이행,민간교류 활성화 등 다양한 메뉴들이 김 대통령과 김 국방위원장 사이에 오갈 것으로 전망된다. 김 대통령은 남북 정상회담을 정례화해 한반도 평화정착의 기틀을 만드는희망을 가진 만큼 김위원장에게 서울 방문을 초청할 것으로 예상된다.몇차례나 만날 것인지도 관심거리로 회담 외에 만찬행사 등에서 김 국방위원장이김 대통령을 비롯한 남측 대표단에게 건배를 제의하는 모습도 가능할 것으로보인다. ■일정/ 회담을 빼면 김 대통령은 평양 부근을 관광할 것으로 예상된다.정부는 ‘김일성 묘소’ 조문이나 단군릉 방문 등 북한의 이념적 조형물 방문 행사는 제외시키고 대신 북한내 고구려 유적지 방문 등 공통된 역사적 유적지를 방문하는 방안을 검토해 북측과 협의할 방침이다. 이 모든 과정은 사실상 생방송이 가능한 실황중계 형식으로 남측에 즉각 보도되며 이 과정에서 남측 관계자가 직접 촬영이 가능하도록 북측은 필요한지원과 편의를 제공한다. 김상연기자 carlos@
  • 문명자씨 특별기고/ 내가 본 김정일 총비서

    6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대한매일은 회담의 상대방인 북측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 겸 노동당 총비서의 면모를 알아보는 특집을 마련했다. 이 특집은 재미언론인 문명자(文明子)씨의 ‘내가 본 김정일 총비서’특별기고와 북한문제 전문가인 서대숙(徐大肅) 미 하와이대 정치학 석좌교수(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장)의 국제전화 인터뷰로 구성했다.이번 기획특집은북한을 현실적으로 이끌고 있는 김위원장의 품성과 지도자적 자질이 어떠한지를 전문가들을 통해 파악해보자는 것이다.이는 김정일 위원장을 ‘성격이괴팍한 영화광’쯤으로 인식하고 있는 많은 독자들에게 20여일 앞으로 다가온 남북정상회담의 성격과 배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최근 북한연구자들이 김정일 위원장을 재평가하는 연구서를 잇따라 출간하고 있는 것도이같은 의미로 풀이된다.문씨의 기고는 지면사정으로 절반가량 압축한 것이며 함께 실린 사진은 문씨가 제공했다. [편집자주]■나는 지난 92년 4월 김일성(金日成) 주석을 인터뷰했다.참으로 어렵게 마련된 자리였다.인터뷰 성사까지는 꼬박 2년이 걸렸는데 그것은 오찬을 겸한 인터뷰였다.장소인 금수산기념궁전 접견실에는 식탁 가운데에 김정일화가 장식되어 있었다.김 주석은 그 꽃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꽃을 개발한 일본 사람의 요청에 따라 ‘김정일화’라는 이름을 붙이기는 했는데 사실 저 꽃이 너무 고와서 조직비서 성격하고는 맞지 않는단 말이오.우리 조직비서는 통이 크고 사나이 답거든.” 김 주석은 아들을 꼭 ‘조직비서’라고 불렀다.나는 내심 갸우뚱했다.서방에 알려진 ‘내성적인 영화광’이라는 평과는 다른 얘기였기 때문이다.그러나 자식을 가장 잘 아는 것은 부모다.계속 연구해 보리라 마음먹었다. 내가 비로소 김정일 총비서와 만나게 된 것은 94년 7월 14일 김일성 주석의장례식 시기였다. 비록 국장의 마당이었지만 나는 조문객들을 맞이하는 그를세밀하게 관찰했다. 나의 차례가 되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렇게 멀리서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몸가짐은 정중했고 목소리에는 무게가 있었다.최은희 신상옥 부부의 주장과는달리 말을 더듬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얼굴은 여위고 눈자위가 붉어져 있었지만 손은 따뜻했고 손아귀에 힘이 있었다.전혀 건강에 이상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조문 후 잠시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그는 말했다. “지난 4월 쓰신 수령님 인터뷰 기사를 잘 읽었습니다.제가 글자를 크게 확대해서 수령님께도 가져다 드렸습니다.” “혹시 잘못된 곳은 없었습니까.” “아주 정확히 쓰셨습니다.잘 읽었습니다.” 나는 김정일 총비서와의 면담을 포함해 김일성 주석의 언급,측근들의 증언,주변 취재,북한 인민들과의 대화 등을 통해 그의 진면목에 다가서 보고자 했다.단지 김정일 총비서와의 94년 7월 이후의 면담에 대해서는 지금으로서는자세히 밝힐 수 없어 양해를 구한다. 나는 김정일 총비서의 생일 명절인 2.16 기간에 북을 방문한 일이 있다.다채로운 행사가 진행되었지만 본인은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이전에도자신의 생일 행사에 나타난 적이 없다는 얘기였다.그 시기 그는 어디로 갔을까.나는 그 점이 궁금했는데 뒤에 알게 되었다.그는 매년 그 무렵이면 백두산을 찾는 듯 했다.특히 99년 2월에는 백두산 천지를 등반한 후 2월 16일 갑무(갑산-무산) 경비도로를 달리다 차에서 내려 10리를 걸었다고 한다.갑무경비도로는 길 양편으로 하늘을 찌를 듯 곧게 뻗은 한대림이 끝없이 이어진 풍치 좋은 길이다.그러나 이 무렵의 백두산 지역은 영하 40도를 오르내린다.혹한 속에서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을 걸으며 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그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겨울이며 특히 백두산의 겨울을 좋아한다고 한다. 서방의 관측통들은 지금까지 그가 “내성적이며 대인관계를 기피하는” 일반적이지 않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해왔다.그가 사람들 앞에 나서지않는 것은 사실이었다.김일성 주석의 급서 후 나는 당시 북미 회담의 북측대표이던 강석주 외교부 부부장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국가원수가 서거하셨는데 회담 진행에 차질이 없겠습니까.” “물론 회담은 수령님의 결재로 진행되어 왔지만 장군님께서 직접 지도해오신 사업이기 때문에 예정대로 계속될 것입니다.” 지금은 상식으로 되어 있지만 그 때만 해도 김정일 총비서가 막후에서 북미회담을 진두지휘하고 있다는 사실은 뉴스였다. 그러나 김일성 주석 사후에도 김 총비서는 외교 의전 일선에 나서는 시기를계속 미루어 왔다. 서방의 관측통들은 그 이유 중 하나를 그의 ‘내성적인성격’ 때문으로 평가해 왔다.반면 그의 측근 인사인 김용순 비서는 그를 “박력 있고 한 번 한다면 하는” 성격의 소유자라 평했다.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총비서. 나는 종종 두 인물을 비교해 달라는 요청을받는다.물론 차이가 있다.소년 김정일은 대단히 영리했던 것 같다.김정일 총비서는 아버지를 꼭 ‘수령님’이라 불렀다.그런데 김정일 총비서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라 외친 일이 있었다고 한다.바로 94년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였다.남북정상회담 성사에 고무된 김일성 주석은 김영삼 대통령을 맞을 준비로 분주했다.7월 한여름 더위에도 불구하고 김영삼 대통령이 들르게 될 묘향산 특각을 직접 돌아보기 위해 평안북도로 떠났다.묘향산 인근협동농장을 현지지도하고 묘향산 특각에 도착한 김 주석은 김영삼 대통령 부처가 묵게 될 방의 냉장고 문까지 열어보았다고 한다. 연일 계속되는 강행군에 노인의 건강을 염려한 김정일 총비서는 김일성 주석에게 전화를 걸어 평양으로 돌아올 것을 계속 권유했다.그러나 남북정상회담 성공의 일념에 가득차 있던 김 주석은 말을 듣지 않았다.계속 설득하던김 비서가 마침내 전화통에 대고 소리쳤다. “아버지! 제발 돌아오십시오.” 김정일 총비서가 스타일상 김 주석과 다른 점이라면 표현 방식의 차이를 들수 있을 것이다. 김 주석과 달리 김 총비서는 노기를 표현하는 인물이다.그만큼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김일성 주석 사후 대부분의 평자들은 김정일 정권의 앞날을 비관적으로 점쳤다.짧으면 3개월,길어야 3년 안에 붕괴한다는 것이다.그 유력한 논거 중하나가 북의 새 지도자 김정일은 아버지의 후광으로 후계자가 되었을뿐 아버지만큼의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었다.오늘날 페리 보고서조차 ‘김정일 정권의 안정성’을 공언하는 것을 보면 이같은 문제는 해소되었다는 얘기가 된다.지난 95∼97년 사이의 ‘고난의 행군’ 시기에 김정일 총비서는 대내외적으로 자신의 지도력을 입증한 것이다.그의 정책 결정의 특징중 하나는 ‘의외성’이라 할 수 있다. 김일성 주석의 장지가 금수산기념궁전이 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현재 금수산기념궁전은 북의 사회 통합의 구심이 되고 있다. 98년 8월 북이 발사한 ‘물체’는 우리를 놀라게 했다.며칠 후 북이 그것을‘인공위성’이라 발표했을 때 세계는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결국문제의 인공위성은 한반도의 정세를 뒤바꾸어 놓았다. 미국에게 북은 ‘붕괴시켜야’ 하거나 ‘변화를 유도해야’ 하는 대상에서 ‘있는 그대로의 체제를 인정해야’ 하는 대상으로 변화했다.물론 심각한 식량난 속에서 막대한외화를 들여 인공위성을 개발했어야 하는가라는 비판도 있다.이에 대해 북의한 인사는 다음과 같이 항변했다. “우리에게 그같은 능력이 없었다면 미국은 우리를 이라크나 유고처럼 대했을 것이다.그것은 조선반도에서 전쟁을 막기 위한 노력이었다.” 북의 인민들은 김 총비서의 정책적 의외성을 ‘누구도 생각하기 어려운 일들을 해나가는’ 강점으로 인식하지만 서방에서는 ‘예측불가’라는 그다지긍정적이지 않은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내가 아는 김 총비서는 다양한 방면에 대해 화제가 풍부한 다재다능한 인물이다.이같은 측면이 성격적 대담성과맞물려 정책의 ‘의외성’을 빚어내는 것으로 생각된다. 김정일 총비서는 64년 6월 19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지도원으로 당사업을 시작했다.총비서에 이르기까지 37년간의 당 사업에서 그는 여러 가지 일화를남겼다.업무스타일과 관련해 가장 유명한 것은 ‘한밤중의 전화’다.나는 북의 여러 고위인사들로부터 이같은 얘기를 들었다.김 총비서는 “서류를 결재하던 중 의문이 생겨 늦은 시간이지만 부득이 전화했다”며 낮에 올린 결재서류에 대해 보다 자세히 묻곤 한다고 한다. 그가 반드시 묻는 말 중의 하나가 “인민들이 뭐라고 하겠소?”라는 것이다.그러니 부하들 역시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듯하다.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것도 김 총비서 업무스타일의 한 특징이라 한다.“새로 작곡된 음악을 틀어놓고 평가하면서 눈으로는 결재 서류를 검토하는 한편 전화로는 누군가에게 업무 지시를 하는” 식이다. 김정일 총비서는 서구식 양복을 입지 않는다.그가 서구식 양복을 입지 않는이유를 물었을 때 한 측근 인사는 “화려한 옷차림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라는 말씀이 계셨다”고 했다.가장 좋아하는 꽃이 목화꽃이라는 점은 같은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목화꽃은 화려하지 않으나 유용하다. 서방과의 교류가 많지 않은 북의 지도자 김 총비서가 세계적인 추세를 제때에 파악해 나가는 수단은 무엇일까.김 총비서가 서방의 방송,영화를 많이 본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이것은 단순히 영화를 좋아해서라기 보다는서방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으로 보인다. 나는 특히 그가 영어를 이해하는 것으로 느꼈다.그가 구사하는 것은 전통적인 영국식 영어가 아니라 현대미국어였다. 김일성종합대학에는 ‘김정일 사적관’이 있다.전국에서 유일한 곳이라 한다.이 곳에서는 김정일 총비서의 대학시절을 잘 볼 수 있다.사적관에서 필자는 그가 재학중 쓴 ‘3국통일 문제를 다시 검토할 데 대하여’라는 논문을특히 관심깊게 보았다.핵심내용은 “신라의 3국 통일은 통일이 아니다”라는것이다. 동시대 조선반도에 발해라는 다른 주권국가가 존재하고 있었으며,신라는 영토를 넓히려는 야심만 있었을 뿐 통일국가를 세우려는 지향이 없어서외세를 끌어들여 동족의 국가를 멸망시켰다는 것이다. 따라서 최초의 민족통일은 3국중 통일 지향이 가장 강했던 고구려를 이어 받은 고려의 후삼국 통일이라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적관에는 김정일 학생과 동료들이 군사 강의,사격훈련,점호,야간습격 전투훈련,군사야영훈련 등을 받고 있는 다양한 모습들이 전시되어 있다.사적관에 전시된 사진들을 보다 보면 재미난 공통점이 발견된다.학급 동료들과 함께 찍은 여러장의 사진에서 김정일 학생은 사진의 가운데 있는 인물이 아니다.그의 모습은 항상 맨 뒷줄 한켠에서 발견된다. 남북정상회담이 발표되던 4월 10일 나는 평양에 있었다.4일부터 8일까지 계속된 제9차 조일회담 취재차 방북했다가 역사적인 뉴스에 접하게 됐던 것이다.남북정상회담에 대해 김 총비서의 한 측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분단이후 여러차례 최고위급 회담 성사를 위한 노력이 있었지만 우여곡절 끝에이루어지지 못했다.특히 94년에는 수령님의 서거로 최고위급 회담이 무산되었는데 이제 드디어 성사되었으니 우리 민족의 손으로 통일문제를 풀어야 하는 것 아닌가.장군님께서는 지금 회담 준비로 대단히 바쁘다.그 분의 건강을지켜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그는 특히 “지난날 조문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며 이번에는 아무런 전제 없이 서로가일단 부딪혀 보자”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오는 6월 12일 역사적인 만남을 갖게 될 남북의 두 정상.그 한 당사자인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 나는 30년간의 취재 파일을 바탕으로 지난해 책을 한 권출간한 바 있다. 나의 눈에는 두 정상의 스타일이 상당히 다르게 비친다.오는 정상회담에서 이 두 정상의 서로 다른 캐릭터가 어떻게 어우러져 분단 50년의 역사를 청산해 나갈지 기대되는 바가 크다. ◆ 문명자씨 프로필. 문명자(文明子)씨는 올해 71세의 재미 원로언론인으로 미국 ‘US아시안 뉴스서비스’의 주필이며,아직도 미 백악관을 출입하고 있는 현역이다.61년 조선일보 워싱턴 특파원을 시작으로 국내 여러 언론사의 워싱턴 특파원을 지낸문씨는 73년11월 당시 보도금지 사항인 ‘김대중 납치사건’을 보도한 직후미국에 망명했다.90년 이후 10여차례 방북 취재했고 두 차례에 걸쳐 김일성주석을 회견했다.김정일 국방위원장과도 면담한 바 있다.그녀는 서방기자중‘최고의 북한소식통’으로 불릴 정도로 북한 지도층과 북한 사회에 이해가깊다.
  • 남북 5차준비접촉 합의 안팎

    남북한이 18일 5차 준비접촉을 갖기로 합의한 것은 기자단 수 등 그동안 막판 쟁점에 대한 조율을 끝마쳤음을 뜻한다. 따라서 5차 접촉에선 16개 항으로 구성된 합의서의 최종 타결이 이뤄질 전망이다.이로써 정상회담을 위한 준비절차의 틀이 마련되게 됨에 따라 이를바탕으로 의전·경호,통신·보도 등 세부 실무준비가 급진전되게 됐다. 남측 수석대표인 양영식(梁榮植)통일부차관도 4차 접촉 이후 여러차례 “5차 접촉에선 합의서를 타결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남북 양측은 지난 9일 판문점 연락관사무소의 전화통지문을 통해 이견을 조정하면서 의견을 좁혀왔다.월요일인 15일 북측은 기자단 수를 비롯한 합의서절차 전반에 대한 입장을 보내왔다.범부처적으로 구성된 정상회담 준비기획단은 15일 남북대화사무국에서 북측이 보내온 입장을 면밀하게 검토,최종입장을 정리해 북측에 이를 통보한 뒤 16일 다시 최종입장을 통보받은 것으로알려졌다. 쟁점이 됐던 기자단 규모는 남측이 제시했던 80명에서 후퇴한 60명선에서결정된 것으로 알려지고있다.정부의 한 관계자는 “기타 사안은 4차까지의합의사항을 따르기로 했다”고 밝혔다.이에 따라 대표단은 130명,회담형식은단독회담으로 두 차례 이상 갖고 보좌요원은 2∼3명씩으로 하기로 했다. 왕래절차는 항공과 육로를 다 이용할 수 있으며 경호·의전,통신·보도 부문의 논의를 위한 선발대 파견 및 평양체류 일정과 규모 등도 명기된다.의제는 지난 4월8일 베이징(北京)정상회담 합의서 정신을 존중,7·4남북공동성명과 조국통일 3대 원칙 등 포괄적으로 정했다.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의 답방문제는 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이 논의한다는 선에서 의견을 모았다. 이밖에 체류기간중 서울∼평양간의 행낭운반 등 편의보장,총리명의의 신변안전보장서 사전 전달,회담장 시설·회담 보도 및 기록관련 사항도 명기하기로 했다. 정부의 한 당국자는 “사실상 17일 2차 통신·보도 실무자접촉 이후 준비업무는 실무전문가들의 방북을 통한 현장답사 단계로 넘어가게 됐다”고 말했다. 이석우기자 swlee@. *경호·의전 대강의 실무접촉 마쳐. 남북정상회담 준비를 위한 현장답사가 초읽기에 들어갔다.판문점 실무자 접촉이 마무리되면 평양의 회담현장에 대한 남측 실무자들의 답사와 실무절차에 대한 현지 조율이 이어진다. 시기는 이르면 다음주 중에도 가능하다.앞서 남북한은 16일 판문점 북측지역 통일각에서 의전·경호부문 실무자 접촉을 마쳤다.정부 당국자도 “의전·경호의 후속 접촉은 없고 현장에서 논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17일 통신·보도부문의 2차 실무자 접촉과 18일 5차 준비접촉을 마치면 곧바로 회담장과 숙소,만찬장,평양의 주요 거리 등 현장 답사체제로 들어가는것이다. 회담장 위치,출입구와 계단,시설물의 배치,이동 거리와 소요 시간 등을 분단위로 면밀하게 계산하고 의전과 경호문제를 구체적으로 협의하게 된다.회담장은 평양 시내 중심부에 있는 만수대의사당이 유력하다.국회의사당 격으로 중구역 만수동에 있다.94년 당시 정상회담장으로 예정됐던 주석궁은 김일성의 시신을 안치한 금수산기념궁전으로 바뀐 상태다. 숙소는 국빈들을 모시는 백화원초대소가 될 가능성이 높다.국빈급 영빈관으로는 흥부초대소도 이용된다.만찬장은 목란관·인민문화궁전 등도 거론된다. 체류기간에 청류관과 옥류관 등 평양의 대표적인 식당도 이용될 가능성도 있다.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은 대부분 중구역에 있는 조선노동당 본청사에서집무를 보고 숙소는 대동강구역의 85호 관저로 알려져 있다. 이석우기자
  • [역사를 바꾼 정상회담](7.끝)살레 이스마일 회담

    *79년 남·북예멘 회담. 5월22일 통일 10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옛 남예멘 수도 아덴에서 100㎞ 떨어진 다라라는 곳에서 14일 폭탄이 터져 민간인 1명이 숨지고 여러명이 다쳤다. 통일과 함께 석유개발로 경제적 번영이 기대됐지만 여전히 전체 인구의 40%가량이 가난과 싸우고 있는 등 통일 예멘은 정치·경제적으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1990년 5월22일 합의로 통일된 지 4년만에 내전이 발발,무력으로 재통일을이룬 예멘의 분단 역사는 1857년 영국의 아덴 점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이후 1962년 북예멘에서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젊은 장교들이 쿠테타를 일으켜예멘아랍공화국을,남예멘에서는 민족해방전선이 1967년 남예멘인민공화국을세우면서 분단이 고착됐다.남예멘 독립후 예멘인들은 통일을 추진했지만 남북예멘 정치인들의 이해대립과 사우디 아라비아와 소련의 개입으로 통일은요원하게만 보였다. 1세기를 넘는 분단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기까지는 아랍 ‘형제국’들의 중재와 80년대에 불기 시작한 동서화해바람과 냉전체제의 붕괴가 주효했다.18년간의 남북예멘간 통일논의는 1972년 9월 국경분쟁 이후 리비아를 비롯한 아랍 국가들의 적극적 중재로 같은해 10월 28일 카이로 정상회담이 개최되면서 시작됐다.77년까지 5차례의 정상회담을 갖는 동안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않던 통일 논의는 79년 전기를 맞았다. 79년 2월 2차 국경분쟁때 아랍연맹은 ‘남북 예멘간 전쟁종식을 위한 평화안’을 가결한 뒤 양국에 이를 따를 것을 종용하는 등 보다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섰다.3월28일부터 3월30일까지 쿠웨이트에서 아랍연맹에 떠밀린 알리압둘라 살레 북예멘 대통령(현 대통령)과 압둘 파타 이스마일 남예멘대통령이 얼굴을 맞대고 앉았다.군 출신인 살레 대통령과 남예멘사회당을 창당한좌익 성향의 이스마일 대통령은 카이로협정,트리폴리 성명에 기초한 통일국가 수립을 재확인하고 4개월이내에 통일국가 헌법안을 마련하자는데 합의,통일논의를 가속화시켰다. 살레-이스마일 대통령의 쿠웨이트 정상회담을 계기로 특사의 상호방문이 이뤄졌고 급기야 81년 살레 북예멘 대통령의 남예멘 방문이 이뤄지면서 통일에관한 합의가 구체화됐다.문화·예술단체들의 상호 방문도 허용됐다.경제교류·협력도 정부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추진됐다.언론자료의 개방과 공보 출판물의 교환,단일 역사교과서의 사용 등 사회통합을 위한 움직임의 출발점이됐다. 80년 이스마일 남예멘 대통령이 권력투쟁에서 밀려 모스크바로 망명을 떠나면서 정상회담의 파트너가 바뀌었지만 남북예멘간 통일논의는 79년 합의내용을 토대로 흔들림없이 이어졌다. 80년대 중반 소강기에 접어들었던 통일논의는 국경지역에서 대규모 석유가매장된 사실이 밝혀지면서 다시 활발해졌다.석유를 공동발굴함으로써 통일이양측에 경제적 번영을 가져다 줄 것으로 확신했기 때문이다.88년 5월3∼4일살레 대통령과 예멘 사회당 서기당 알비드는 북예멘 사나에서 정상회담을개최,국경지대의 석유를 공동개발키로 합의하기에 이르렀다.사나 정상회담은그때까지 반복돼 온 통일 논의와는 달리 2년 뒤 실질적인 통일로 이어지는이정표가 됐다. 90년 통일을 일궈낸 예멘은 4년이 지났는데도 남북예멘 정치인들간에 상호불신을 해소하지 못하고 결국 전면적인 내전을 치뤘다. 1994년 7월7일 살레대통령의 북예멘 군대가 남예멘 수도 아덴을 함락함으로써 무력으로 재통일됐다. 김균미기자 kmkim@
  • [격동의 남북관계 반세기](5)체육회담

    지난 90년 10월 평양의 남북 통일축구대회 남측선수단 환영 만찬장.남북 대표단이 한데 어울려 화기애애하게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을 때 갑자기 한바탕웃음바다가 펼쳐졌다. 정동성(鄭東星·99년 작고)체육부장관이“통일을 위해”라고 건배를 제의하고 노래를 부른 데 이어 세 차례나 ‘몸 뒤로 젖혀 뒷머리 땅에 대기’묘기를 펼쳤기 때문.북측 임원·기자들과 일일이 술잔을 주고받는 바람에 얼큰하게 취한 정장관이 특유의 주흥 돋우기를 시작한 것이다. 정장관의 돌출 행동은 오히려 남북 체육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데 도움이 됐다는 평가다.김유순(金兪順)북한 올림픽위원장의 경우 검지로 상대방손바닥을 긁는 정장관의 악수 방법에 같이 화답해올 정도로 가까워졌다. ■남북 단일팀 구성 정장관과 김위원장의 친숙함은 통일축구대회 기간중 회담을 통해 체육회담 개최에 합의하는 밑거름이 됐다.그해 11월부터 91년 2월까지 4차례에 걸쳐 판문점 평화의 집과 통일각을 오가며 회담을 열어 선수단호칭을 우리말로 ‘코리아’,영문으로 ‘KOREA’로 하는등 남북 단일팀 구성과 관련된 문제를 완전타결짓고 합의서에 서명했다. 합의서 덕분에 분단 후 처음으로 남북 단일팀을 구성,91년 4월 일본 지바세계 탁구선수권대회와 6월 포르투갈 세계 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 참가했다. 탁구대회에서는 남쪽 현정화와 북쪽 이분희 황금 콤비가 맹활약,남북 단일여자팀이 중국의 벽을 무너뜨리고 우승을 차지했다.최철 등 북한측 선수들이선전한 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서는 8강까지 올라 한민족의 우수성을 대내외에 과시했다. 하지만 지난 50여년동안 남북은 체육회담을 20여차례 가졌지만 정치상황과궤를 같이하는 바람에 국민들에게 기대와 좌절을 번갈아 안겨줬다. ■60년대 분단 이후 냉각기가 지속되다 63년 1월 59차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도쿄올림픽 남북단일팀 권고안의 통과와 함께 스위스 로잔에서첫 체육회담을 가졌다.회담은 서로의 입장 차이만 확인한 채 별 성과없이 끝났다. ■70,80년대 10여년동안 소원했던 남북은 ▲79년 2월 평양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남북 단일팀 파견을 위한 탁구협회 대표들간의 4차례 회담 ▲84년 4월로스앤젤레스올림픽 ▲86년 아시안게임 ▲88년 서울올림픽 등 국제 체육경기에 남북 단일팀 구성을 위해 세 차례 회담을 벌였으나 역시 무산됐다. ■90년대 90년 남북을 오가며 통일축구대회를 개최하는 등 ‘잘 나가던’체육회담은 91년 8월 북한 유도선수 이창수가 한국으로 망명해 오는 바람에북한측이 전면 중단시켜 맥이 끊기고 말았다. ■평가 체육회담은 63년 첫 회담 이후 북한측의 필요 여부에 따라 좌우돼왔다.따라서 91년 2월 회담의 성사는 옛소련 등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에 따른 체제위기를 돌파하려는 북한의 의도가 작용했다는 게 전문가들의평가다. 김규환기자 khkim@. *회담 주역 대부분 역사의 뒤안길로. 남북 체육회담의 주역들은 회담에 참석한 지 10∼40년 가까이 흐른 때문에일부는 작고했고 대부분 역사의 현장에서 비켜나 있다. 지난 63년 첫 체육회담에서 대좌한 남측 수석대표 정상윤씨는 농구계 원로로 왕성한 활동을 벌이다 91년 노환으로 별세했다.당시 북측 수석대표였던김기수씨의 행방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상태. 79년 탁구협회 회담 대표로 참석했던 채영철(蔡永喆·74)씨는 군사문제연구소장 등을 거쳐 민족중흥회 부회장으로 일하고 있다.파트너였던 북측 대표김득준(金得俊)씨는 국가체육위원회 부위원장직을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남북 통일축구대회와 91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단일팀 구성을 위한 남북 체육회담을 처음으로 성사시킨 정동성(鄭東星) 당시 체육부장관과 그의 상대역 김유순(金兪順)북한 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은 90년대 후반 모두 유명을 달리했다. 제6공화국 ‘북방외교의 밀사’로 활약하며 체육회담 성사를 위해 막후에서뛰었던 박철언(朴哲彦·57)전체육청소년부장관은 4월 16대 총선에서 고배를마시고 칩거하고 있고,막후 파트너였던 이종옥(李鍾玉)은 국가부주석 등 핵심 요직을 거친 뒤 지난해 사망했다. 84년 체육회담에 남측 수석대표로 참석한 김종규(金鍾圭·72)씨는 서울신문(현 대한매일)·연합통신 사장 등을 역임한 뒤 노후생활을 즐기고 있으며,북측 수석대표였던 박무성(朴武成)씨는 98년 9월 체육성 부상에 올랐다.85년회담 남측 수석대표였던 김종하(金宗河·65)씨는 재계로 돌아가 고합그룹 상임고문으로 재직중이다. 김규환기자
  • [사설] 정상회담, 초당적 참여를

    6월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여야 3당 대표가 참여하는 방안과 관련,논란이빚어지고 있다.대표단에 3당 대표를 포함시킬 것이라는 여권의 구상에 대해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총재가 사전 협의가 없었음을 들어 불쾌감을 나타냈기 때문이다.청와대나 정부로부터 어떠한 요청도 받은 바 없는 상황에서 대표 선정 문제까지 불거져 이총재의 불만을 산 것이다.지난달 24일 청와대 영수회담에서 정상회담에 대한 초당적 협력을 약속했음에도 불구,여권이 자신을 외면하고 정보도 제공해 주지 않는 데 따른 불만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같은 이총재의 불만 표출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며 여권의 정치적 배려가 다소간 미숙했다는 지적이다.특히 이총재는 야당 인사를 대표단에 포함시킬 경우 북한의 통일전략전술에 이용당할 위험이 있다는 점을 들어 정당 참여의 신중론을 제기했다.북한이 그동안 우리 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남북정당·사회단체간 연석회의를 주장해 왔던 점을 감안할 때 북한의 전략에 이용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논리다.물론 북한의대남전략이 포기되지않은 것이 사실이다.정상회담에서 우리가 기대한 만큼 얻게 될지도 의문이다. 이같은 맥락에서 이총재의 우려는 일단 경청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회담의성공을 위해 신중한 대책을 주문한 것으로 이해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른 일도 아닌 남북정상회담의 경우 초당적 참여와 지원이 매우 바람직하다고 판단한다.무엇보다 남북정상회담은 실현 자체가 갖는 상징적 성과뿐만 아니라 분단 이후 최초로 민족의 중대 현안을 협의하는 만큼 국민 모두의합의와 지원으로 반드시 성공시켜야 하는 지상과제다.정상회담은 정권차원의 일회용 행사가 아닌 민족통일의 대장정(大長征)으로 승화·발전시켜야 하는 민족적 과제라는 점에서 볼 때 정치권의 거시적 참여는 당연한 책무다. 더욱이 북한의 냉전적 대남전략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국민의 단합과 초당적 지원을 통해 정부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필요하다.최근 북한도 정상회담을 앞두고 전향적 외교를 강화하는 등 회담준비에 열린 모습을 보이고 있어회담성과에 많은 기대를 갖게 한다.따라서 우리는 정상회담의 정당 대표 참여를 야당에서 우려하듯 일회용 들러리 역할이나 대북정책 비판으로 자승자박하는 결과로는 보지 않는다.오히려 야당이 직접 평양을 방문하고 북한 실상을 확인함으로써 향후 국회와 정당차원에서 생산적 대북정책을 추진하는 데 중요한 경험이 될 수 있는 것이다.정치권은 남북정상회담이 한반도 평화와 민족의 화합 그리고 남북협력의길을 여는 통일의 시발점이 될 수 있도록 초당적 참여와 지원을 아끼지 말것을 기대한다.
  • 여야 3당 지도부 인사 방북대표단 포함 검토

    여권은 남북정상회담 대표단에 민주당,한나라당,자민련 등 여야 3당의 지도부 인사를 참여시키는 방안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여권의 고위 관계자는 14일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이 분단55년 만에 처음으로 열리는 역사적인 것이라는 의미를 감안, 초당적이고 범국민적 차원에서 3당에서 1명씩 방북 대표단에 공식 참여하는 방안을 적극검토중”이라고 밝혔다. 양승현기자 yangbak@
  • 정상회담 신중 행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남북 정상회담 개최일이 다가오연서 ‘낮은 기대치’를 제시하고 있다.‘한반도 평화선언’ 채택과 이산가족 상봉 등 ‘베를린선언 4개항’의 본격화 구상이 달라진 것은 아니지만 우선은 정상간 만남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있다. 지난 12일 주한 외교사절단을 청와대로 초청,가든파티를 하면서도 “남북한의 정상이 분단 55년 만에 화해의 악수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민족적 경사”라고 만남 자체에 의미를 부여했다.이에 앞서 가진 ‘법의 날’ 수상자 오찬때는 “절대 과욕을 부리지 않겠다.전쟁 위협에서 벗어나 서로 교류할 수 있는 길만 열어도 정말 다행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는 매사 신중한 김 대통령의 자세에 기인하지만 정상회담에 임하는 시각을 읽을 수 있는 단초이기도 하다.김 대통령은 남북 대화의 연속성과 지속성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있는 것이다.이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 대화가 어떠한 난관에도 흔들리지 않고 지속될 수 있는 기틀을 다지겠다는 의지이다. 김 대통령이 남북 정상 방문의 상호주의원칙이나기자단 규모 등에 연연하지 않는 자세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의제를 사전에 고정하지 말자는 북한측 생각도 수용할 분위기다.대신 현안에 따른 특사 교환 방문과 정상간 핫라인 설치 등 대화 채널의 상설화에 무게를 싣고 있다. 김 대통령의 이같은 기본 인식은 독일의 통일 과정이 많은 영향을 미치고있다.한 관계자는 “독일통일의 물꼬를 튼 브란트 전 수상의 첫 동·서독 정상회담도 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며 “독일통일의 교훈은 인내심을 갖고남북 정상회담을 지켜보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양승현기자 yangbak@
  • 노동계 31일 총파업 투쟁 결의 정부·재계 바싹 긴장

    민주노총(위원장 段炳浩)과 한국노총(위원장직대 李光男)이 법정근로시간단축 및 주5일 근무제 쟁취 등을 기치로 내걸고 오는 31일과 다음달 1일 총파업투쟁에 나서기로 결의함에 따라 정부와 재계가 긴장하고 있다. 노동계는 총파업투쟁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15∼17일 산별,단위기업별로 일제히 쟁의조정 신청을 낸 뒤 10일간의 냉각기간을 거쳐 합법적인 쟁의에 나선다는 복안이다.민주노총은 자동차산업을 중심으로 하는 금속연맹과 병원노련을,한국노총은 구조조정문제에 직면한 공공부문과 금융노련을 전위부대로내세운다는 계획까지 세워놓고 있다.특히 민주노총은 31일 시작되는 총파업투쟁의 열기를 6월10일의 민중대회로 연결시킨다는 전략 아래 노사정위 참여를 거듭 거부하는가 하면 산별 및 정부와의 직접 교섭을 요구하는 등 ‘시비거리’를 만들고 있다.민주노총의 핵심 조직인 금속연맹은 31일부터 4일간집중투쟁을 전개한다는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노동부는 장·차관이 양대 노총의 지도부와 막후 접촉을 갖고 총파업을 남북 정상회담(6월12∼14일) 이후로 늦추거나 1∼2일 정도 총파업을 한 뒤 남북 정상회담 때까지 냉각기를 갖자고 설득하고 있으나 여의치 않은 것으로전해졌다.총파업투쟁을 선언한 이상 물러서기는 어렵다는 게 노동계의 반응이라는 설명이다. 노동부는 이에 따라 막후 채널과는 별도로 총파업에 가세할 것으로 예상되는 사업장에 대해 전담 근로감독관을 지정,‘맨투맨’식 설득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노동 전문가들은 노동계가 파업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는 ‘근로시간 단축’ ‘구조조정 반대’ ‘자동차산업 해외매각 반대’ 등은 단위사업장 근로자들의 권익과는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약한 데다 양대 노총 지도부도 분단 후처음으로 열리는 남북 정상회담의 의미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어 총파업의 강도는 그리 크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오는 26일 한국노총위원장 선거,남북 정상회담 수행원에 양대 노총 위원장 포함,현장 근로자들의 미온적인반응 등도 총파업의 열기를 누그러뜨리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기획예산처가 연말까지 9,000여명을 추가감원키로 한 최근의 발표와민주노총의 단 위원장이 내년 2월 위원장 선거에서 재선되려면 ‘가시적인’전과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 변수가 될 것으로 관측된다. 우득정기자
  • [기고] 가슴을 열고

    지난 20 세기를 살아온 우리 민족은 역사 속에 많은 아픔을 안고 있다.국권의 침탈과 국토의 분열,동족간의 참혹한 전쟁과 적대관계는 아직도 아물지않은 상처로 남아 있다.5,000년의 민족사에서 가장 한 맺힌 이 고난의 역정은 나라의 안보를 소홀히 한 필연의 산물이었다.20세기,세계를 뒤흔들어 놓았던 이데올로기 싸움은 공산체제의 무너짐으로 종언을 고했으나,한반도는 21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 있다. 인류의 역사는 귀족이 노예를 지배하고 독재자가 백성을 유린하며,심지어신(神)의 이름으로 인간을 억압하던 국가·사회의 계층구조로부터 보통사람이 중심이 되는 시스템으로 바뀌었다.오랜 세월을 딛고 그렇게 사람은 조금씩 인간다워진 것이다.그럼에도 우리와 가장 가까운 땅,북녘에는 한 핏줄을타고 난 2,200만의 동포가 독재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1,000만의 이산가족은 대책없이 50년을 목메어 했으며,10만의 탈북자는 만주와 중국,시베리아동토에서 난민 대우조차 받지 못한 채 강제송환의 불안 속에 생존을 위협받고 있다. 남북은 애초에우리가 원해서 갈라선 게 아니다.동북아의 한 가엾은 식민지를 놓고,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은 강자의 논리에 따라 어느 날 지도의38도선 상에 줄을 그어놓음으로써 잘려진 강토요 통치권의 분할이었다.남들이 쪼개놓은 영토인데 이제는 우리끼리도 합치지 못하는 땅덩이가 되어 버렸다. 지난날의 아픈 상처를 들추는 것은 역사에서 배우고자 함이다.잘못된 역사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는 자각을 일깨우기 위함이다.나라를 지키는 일의 소중함을 결코 잊어서는 안되겠기에,1,000년전 만주대륙을 지배하고 동북아를 호령하던 배달족은 좁은 나라 땅 마저 두 갈래로 나눠,서로가 먹느냐먹히느냐의 무시무시한 싸움판을 벌려놓고 잠시도 편할 날이 없었다. 하지만 새 천년에는 다르다.역사가 변하고 정세가 바뀌고 있다.21세기에 한반도는 동방의 빛이 되는 세계의 중심에서 스스로의 명운을 열어갈 것이다. 우리는 한강의 기적을 되살리고 아시아의 용으로 다시 부상할 진운의 길에들어섰다.국가 부도위기를 2년만에 복원시켰으며,주변 강대국과 4강외교로한국이 주도적 입장에서 대북정책을 펴나가고 있다.정부는 남북 간에 평화공존을 실현하고 민족공동의 이익을 증진하기 위해,포괄적이고 호혜적이며 포용성있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남북기본합의서를 바탕으로,남북경제 협력을정부차원에서 구체화하고,이산가족의 만남을 주선하며,북한의 식량문제 해결을 위한 지원과,대북경수로사업을 약속대로 이행해야 할 것이다. 한편,포용정책은 무조건 주기만 하고 얻는 게 없는 정책이라는 오해를 불식시키는 일이 중요하다.북측은 변하지 않았는데 우리만 일방적으로 짝사랑하면서 그들을 이롭게 해주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귀담아들으면서,온 국민이 장기적 비전을 이해하고 동참하는 대내적 결속을 다지는데도 큰 비중을두어야 한다.대북 포용은 안보와는 수레의 양 바퀴처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인식하는데서 출발한다. 공산주의의 담담타타(談談打打) 전술과,북한의 대남 무력적화 통일전략의불변성에 대해서는 철저한 안보태세만이 대응방법이라는 전제 하에 세워진정책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군(軍) 은 포용정책의 가장 든든한 배경이다.포용은 가슴이 넓고 힘이 센 강자만이 할 수 있는 것.그래서 우리의 국군은 튼실한 거인의 모습이어야 한다.믿음직하고 강한 군대 말이다. 6월에는 남북정상회담이 열린다.분단 55년사에 새로운 장을 여는 역사적 날이다.국민의 염원을 담아 국민의 정부가 노력한 결과요,세계의 진운이 우리를 돕고 있는 소치이며,민족적 자각이 움트기 시작했음이다.모처럼의 귀한기회다.조급하지 않고,변덕부리지 말며,지혜와 인내와 정성으로 가슴을 여는남북의 만남이길 빈다. 민주평화통일 자문위원 예비역 육군 준장 정영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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