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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북이산상봉/ ‘한반도 드라마’ 세계언론 주목

    반세기 만의 남북한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진 15일 세계 언론은 일제히 한반도를 주목했다. 미국의 CNN과 영국 BBC,일본의 NHK 그리고 AFP,AP,로이터 등 서울의가족상봉 현장에 기자단을 특파, 관련 기사를 보도해온 세계 방송과신문,통신사들은 오후 서울 코엑스상봉장에서의 혈육 상봉의 감동을생생하게 전세계로 내보냈다. BBC 방송은 이날 ‘남북한의 가족들’이란 제목으로 이산가족 상봉모습을 BBC 뉴스온라인을 통해 실시간으로 그대로 내보냈으며 하루앞서부터 남북한 이산가족 상봉장면을 생방송 서비스한다는 안내코너를 개설했다.또 ‘한반도 통일 카운트다운’특집 기사를 통해 극적인이산가족 상봉 모습과 준비상황, 그리고 안타까운 사연들을 조목조목소개했다. “짐승들도 고향을 그리는 데 하물며 사람이야 오죽하겠느냐”며 상봉의 기대에 꼬박 잠을 새웠다는 한 이산가족의 혈육을 찾는 절절한 심정을 소개했다. 북한 가족의 서울 도착 모습에서부터 상봉장면 등을 내보낸 CNN은이날 극적인 상봉장면을 긴급 뉴스로 보도했다.또 인터넷 웹사이트를통해 ‘북한 개방,진지한 것으로 봐도 되는가’를 주제로 한 즉석 여론조사를 실시했다.응답자 60%가 ‘그렇다’고 답했고 40%는 ‘아니다’고 응답했다. 세계 언론들은 이날 남북한 화해및 통일의 시작이라는 역사적인 의미와 함께 이산가족들의 안타까운 사연들을 관심있게 다뤘다.AFP가투병생활을 하며 가족상봉의 희망으로 살아가다 결국 상봉 전날 사망한 박원길씨 사연을 소개했다. ‘55주년 종전기념일’을 맞은 일본의 아사히(朝日),요미우리(讀賣)등 주요 신문, 방송들도 한국의 이산가족 교환방문을 다루며 큰 관심을 보였다.상주 특파원 외에 한국에 대거 취재진을 파견한 일본 언론들은 이산가족 교환방문을 “6·15 남북공동선언이 구체화된 사례로정상회담후 남북 화해·협력 무드를 상징하는 행사”라고 일제히 보도했다.공영방송인 NHK는 매시간 일본의 ‘종전기념일’ 행사와 함께한국의 이산가족 교환방문을 주요기사로 다뤘다. 중국 베이징방송도 남북 이산가족상봉소식을 자세히 보도했다.베이징방송은 분단 55년만에 북한 민영항공여객기가 처음으로 남한으로들어갔으며 이번 이산가족방문이 남북공동선언에 따른 새 사업으로그 의의가 크다고 전했다. 김수정기자 crystal@
  • 새달 北送 비전향 장기수들 표정 “함께 살날 와야”

    “한번의 만남으로 그칠 게 아니라 갈라져 사는 모든 이들이 함께살 수 있는 통일 조국을 이룰 수 있도록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15일 서울 관악구 봉천동 우리탕제원에서 남과 북의 이산가족들이 50년 만에 상봉하는 장면을 TV로 지켜본 비전향 장기수들이 느끼는 감회는 남다르다.다음달 북으로 송환되는 비전향 장기수 유한옥(90)·조창손(72)·신인영씨(69) 등은 눈시울을 적시며 상봉 장면을 지켜보다 곧 있을 자신들의 만남에 대해서도 얘기하며 설렘을 달랬다. 이들은 ‘궁극적 상봉’이란 이산가족이나 비전향 장기수 가릴 것없이 한두 차례 만남이 아닌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것이라는데 뜻을 모으기도 했다. 조창손씨는 “이산가족들이 오늘보다 더 큰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통일뿐”이라면서 “남과 북에서 흘린 눈물이 분단을 아파하며흘린 눈물이라면 통일 조국에서는 기쁨의 웃음이 넘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들은 이날 상봉의 감격과 감흥에만 매달리지 않았다. 한양대에서 열린 통일대축전 마지막 날이기도 한 이날 대부분의 비전향 장기수들은 오후가 되자 행사에 참가했다.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과 무르익은 통일 분위기를 반영하듯 예년과는 달리 최루탄도 화염병도 없는 가운데 평화적으로 치러져 비전향 장기수들은 내내 들뜬표정이었다. 비전향 장기수 양희철(梁喜哲·65)씨는 “이산가족의 상봉은 통일로가는 큰 걸음”이라면서 “비정상을 정상으로, 분열을 통일로,갈등을화해로 바꾸는 획기적인 사건”으로 평가했다. 양씨는 “이산가족의상봉에서 통일의 필요성을 새삼 절감했다”고 덧붙였다. 특별취재반
  • [사설] ‘한반도시대’론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8·15경축사에서 ‘한반도시대‘라는 비전을 제시해 주목을 끈다.과거 한반도는 열강의 제국주의적 패권경쟁의소용돌이에 휘말려 침탈의 대상이 되었고 그 결과 분단이 초래되었다.그러나 남북한이 손을 잡아 민족경제의 균형발전과 대도약을 이루어내면 한반도가 세계의 한 중심국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 한반도시대 비전의 핵심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우리는 새천년 첫 광복절에 밝힌 김대통령의 이 비전이 민족의 미래에 대한 실현가능한 청사진이라고 본다. 김대통령은 한반도가 “해양에서 대륙으로 진출하는 거점이 되고 대륙에서 해양으로 나아가는 전진기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또 “아시아 대륙의 동쪽끝에 있는 주변국가가 당당히 세계의 한 중심국가가되는 한반도시대가 오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대통령은 한반도시대를 위한 과제로 첫째 지식정보강국을 만들고,둘째 남북의 화해와 협력을 실현해 장차 평화적 통일을 이루어야 할것 등을 들었다.다시 말해 경제분야에서 남한의 기술과 북한의 우수한 노동력과 자원이 합쳐진다면 지식정보강국으로 경제 도약이 가능하다는 것이다.‘남북이 손을 잡으면 한반도 전체로 무대가 확대될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가능한 일이다.게다가 끊어진 경의선과경원선을 연결한 뒤 해저터널을 통해 일본까지 이를 연장하면 ‘철의실크로드’가 완성된다. 이 실크로드는 남쪽에는 경제적 파급효과가막대한 유통혁명을 가져오고 북쪽에는 경제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한마디로 한반도시대 비전은 그동안 분단으로 초래된 숙명론적 패배론을 극복하고 한반도의 지정학적 이점을 되살린다는 점에서 매우긍정적이다. 우리는 민족의 자긍심과 자신감을 북돋우는 이런 시각이 충분한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다만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 이런 비전이외교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점이다.구한말 한반도는 제국주의적인 열강의 이권쟁탈로 시달려왔다.얼마전까지만 해도 냉전에 따른 4강 세력간의 팽팽한 긴장이 한반도에 조성됐다.현재 역시 열강의 이해관계가 한반도에 복잡하게 교차돼 미국, 일본, 러시아와 중국간에갈등여지도 적지 않다.미국이 추진중인 국가미사일방어(NMD)체제 구축이 북한을 빌미삼아 러시아의 미사일을 무력화시키려 한다고 러시아와 중국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중국과 일본은 한반도에 강력한국가가 출현하는 것을 내심 경계하고 있으며 미국 의회는 클린턴행정부의 대북정책에 비판적이다. 4강 외교의 중요성을 정부도 강조하고 있긴 하나 통일을 위해 특히미묘한 열강의 이해관계에 신경써야 한다.과거 서독이 통일에 우호적이지 않았던 당시 소련 등 인접국에 유연하게 대처한 사례를 귀감으로 삼아 외교적 뒷받침만 받으면 ‘한반도 시대’는 분명 열릴 것이다.
  • [사설] 상봉의 눈물, 통일의 씨앗

    새천년 첫 광복절의 한반도가 반세기만에 혈육을 만나는 이산가족들의 감격어린 눈물로 뒤덮였다.이들이 서울과 평양에서 저마다 백발이성성한 주름진 얼굴로 피붙이를 부둥켜안고 오열할 때 온겨레도 함께울었다.우리는 남북에서 각기 100명씩 선정된 이산가족들이 50년간참았던 단장의 눈물을 쏟아내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분단과 이산의 아픔을 새삼 실감한다.이산가족들의 한맺힌 가족사는 곧 분단으로 인한민족적 비극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통곡은 민족의 비원인 통일을 이루라는 온겨레의 애절한 합창이다.이번 상봉행사가 분단으로 말미암은 민족의 분열과 갈등을 치유하는 화해의 씻김굿이자 통일의 싹을 틔우는 무대가 되어야 할 까닭도 여기에 있다.그들의 통한의 눈물이 마침내 통일을 일구는 밑거름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따라서 우리는 이번 상봉이 제2·제3의 상봉으로 이어지고,나아가 면회소 설치·운영으로 이산가족 문제가 제도적 해결로 가는 실마리가 풀리기를 간절히 기대한다.이들이보내는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짧은 3박4일이 다시 기약없는 이별로이어지게 해선 안될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남북 당국은 역사적 6·15 공동선언에서 합의한 화해·협력의 기조를 전방위적으로 확산시켜 나가기를 당부한다.연방제니,연합제니 하는 통일방안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그러나 우리는 이산가족 교류를 포함해 경제·사회·문화 등 전 분야에 걸친 교류·협력의 활성화로 ‘사실상의 통일’ 기반을 마련하는 게 급선무라고 판단한다.상호 적대감을 청산하고 서로 돕고 오갈 수만 있다면 정치적통일도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남북의 최고 당국자들이 앞장서 이산가족 교류에 전향적인 약속을 한 것은 퍽 다행스러운 일이다.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14일 북으로 떠나는 남측 이산가족들에게 재결합하도록 최대한 노력하겠다는 심경을 피력했다.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도 방북한 언론사 사장단들에게 내년에는 이산가족들이 혈육의 가정까지 방문할 수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내년에는 이산가족들이 새로 이어질경의선을 타고 각각 남녘과 북녘의 고향집을찾는 일이 꿈이 아니길바란다. 물론 우리 사회 일각에선 아직 김위원장이나 북한의 최근 일련의 선택을 생존을 위한 전술적 변화로 평가절하하는 움직임도 있다.그러나동서독의 통일도 하루 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라 30여년에 걸친 양독 주민간 서신교환과 방문의 결과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남북이산상봉/ 北국적기 남한영공 첫 통과 순간

    “여기는 평양,Hand off(관제를 넘겨받아라)”“여기는 대구,OK.Roger(알았다)” 15일 오전 10시5분 평양 순안공항을 이륙한 북한 고려항공 IL-62 특별기는 오전 10시26분 서해상 북방한계선(NLL)을 통과하면서 대구 항로교통관제소(ACC)와 교신했다.분단 이후 처음으로 북한 국적기가 한국 영공을 넘는 순간이었다. 특별기는 북측 서해상을 일직선으로 진행하다 서해 공해상 북위 38도48분,동경 124도15분 지점에서 기수를 남으로 돌려 북위 38도,동경124도20분 지점에서 NLL을 통과했다.이어 우리측 영해인 우도에서 일직선으로 만나는 북위 37도12분46초,동경 124도24분47초 지점에서 기수를 인천방향으로 꺾는 ‘ㄷ’자 코스로 비행했다. 특별기가 남측 비행정보구역(FIR)에 들어온 10시26분부터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의 규정에 따라 항공기에 대한 관제는 대구 ACC가 맡았다.이때부터 대구 ACC를 비롯,김포관제소·합동참모본부 지휘통제실·공군작전사령부는 비상태세에 돌입,감시장비를 동원해 북측이 통보한 비행 항로를 실시간으로 정밀체크했다. 군당국은 지난 6월의 정상회담 때와 달리 공군 전투기 편대를 동원한 원거리 초계비행을 하지 않았다.다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인근공군기지에 HH-60 헬기 등 탐색 구조전력을 비상 대기시켰다.특별기는 이륙 54분만인 10시59분 서울 김포공항에 안착했다. 한편 오는 18일 3박4일동안의 일정을 끝마친 남북 이산가족 방문단의 귀환은 대한항공 특별기편을 통해 이뤄진다. 귀환용 특별기는 에어버스가 제작한 중형 여객기로 258석 규모의 A330-200 신형 기종.조종은 1만3,000여시간의 비행시간 기록을 보유한베테랑 김홍순(金鴻順·51) 기장이 맡는다. 노주석기자 joo@
  • 남북이산상봉/ 의미·해법

    평양과 서울에선 15일 이산가족들이 50년 만에 해후하고 얼싸안았다.남북한이 냉전과 대결의 외투를 벗어버리고 화해 공존·협력 동반자시대에 들어섰음을 이날의 상봉은 상징한다. [상봉의 역사적 의의] 월북자도, 월남자도 이제 겨레의 환영과 축복속에서 ‘내고향’을 찾아 가족·친지를 떳떳하게 만나고 혈육의 정을 나눌 수 있게 된 것도 시대의 변화를 보여준다.남이나 북이나 전쟁과 분단의 상처와 냉전의 이지러짐을 넘어서 용서와 화해의 민족공존의 장을 열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면회소 설치,방문단의 지속적 교환 등 북측도 이산가족 문제에 대해변모된 모습을 보였다.“정치적 문제”라며 교류를 꺼리던 북측이 보다 적극적으로 이산가족 교류에 응한 것은 개방과 교류 확대라는 좀더 큰 차원에서 대남·대외 정책을 바꾸었기 때문이었다. 이산가족 문제도 이같은 큰 틀의 변화에 따라 진전될 수 있었으며이번 상봉은 변모된 북측의 자세를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계기였다.상봉도 지난 85년처럼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점에서 이번 상봉은 정치·경제 사회문화 등 전 분야에 걸친 남북 교류 협력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자 첫 발로 받아들여진다. [남북의 변화] 북한은 대남 폐쇄정책에서 벗어나 이산가족 교류뿐 아니라 남측과 정치·경제,사회문화 전 부문에 걸쳐 교류와 협력의 물꼬를 트기 위한 실천에 나서고 있다.남북한은 실제로 교류 협력의 실천과 확대를 위한 틀과 방안을 만들고 있다.오는 29일부터 평양서 열릴 2차 장관급회담,9월 초 예정된 적십자회담 등에선 이같은 교류 협력 방안들의 구체화를 위한 논의가 진행된다.정상회담 직후 6월 말적십자회담과 7월 말 제1차 장관급회담 등에서 틀과 방안을 논의해왔다. 이산가족 상봉이 가능했고 남북 화해 공존의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었던 것은 ‘국민의 정부’의 지속적이고 일관적인 대북 포용정책이있었기에 가능했다.행동과 실천으로 북측에 남측의 “흡수통일과 적대적 행위는 없다”는 약속을 믿게 됐으며 신뢰와 협력의 분위기를만들어 온 것이다. 이러한 노력 속에서 분단 후 첫 정상회담이 가능했고 화해 교류의큰틀을 담은 6·15선언이 가능했다.이산가족 상봉은 특히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취임 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추진해온 사업.이념도,한반도의 허리를 끊어놓은 철조망도 이들의 만남을 종내는 막을 순 없었다. 이산가족들의 얼싸안은 채 떨어질 줄 모르는 모습은 냉전을 넘어 하나가 되고 있는 한반도 남과 북을 상징한다. 이석우기자 swlee@
  • 여자핸드볼선수권 준결승…남북 선수들도 중국서 만났다

    “북한 이겨라”“남조선 이겨라”-. 광복절이자 분단 50년만에 남북한 이산가족들이 서울과 평양에서 뜨거운 재회를 가진 15일 중국 상하이에서도 남북의 여자 핸드볼선수들이 제8회 아시아선수권대회 준결승에서 우정의 대결을 펼쳐 기쁨을함께 했다. 이번 대회에 참가한 다른 나라 선수들과는 달리 남북 선수들에게는이미 승패가 무의미해 보였다.응원나온 남북한 100여 동포들도 한반도기를 앞세우며 남북을 열렬히 응원,동포애를 꽃피웠다. 남북의 핸드볼 만남은 7개월만이다.지난 1월 일본 구마모토현 야마가시에서 열린 시드니올림픽 진출 티켓 1장이 걸린 아시아 여자선수권대회에서 맞붙어 한국은 티켓을 거머쥐었고 북한은 매서운 속공으로 2위를 차지했다.당시 남북 응원단은 서로를 아낌없이 응원했고 김기성 북한 단장도 뜻밖에 한국과의 핸드볼 교류를 희망하는가 하면오성옥·이상은·한선희 등 한국선수들과 리현실·김경희·지옥란 등북한 선수들이 활짝 웃으며 사진을 함께 찍기도 했다. 98년 방콕아시안게임 당시 냉냉했던 남북 분위기와는 극히대조적인 모습을 연출,남북 체육교류의 물꼬가 터지는 조짐으로 여겨졌었다. 장면호 협회 사무국장은 “뜻깊은 날 남북이 우정의 대결을 벌여 핸드볼인으로서 무척 기쁘다”면서 “이날을 계기로 핸드볼 등 많은 종목이 북한과의 체육 교류에 적극 나서야 할 시점을 맞았다”고 강조했다. 김민수기자
  • 한민족 하나로 남북 이산상봉/ 北 류미영 단장의 딸 최순애씨

    “그저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어머님이 연락을주셨으면 좋겠는데…” 역사적인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북녘 방문단을 이끌고 남쪽을 찾은류미영(柳美英·78·천도교 청우당 중앙지도위원장)단장의 딸 최순애(崔淳愛·49)씨는 주위에서 뭐라든 24년 세월 동안 변함없는 그리움의 대상이었던 어머니를 만나고 싶은 마음을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아버지 고 최덕신(崔德新)전 외무장은 동백림사건에 연루되는 등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다가 정치적 탄압을 받자 76년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86년 4월 북으로 넘어갔다.망명 당시 최씨는 26세였다. 이 때문에 최씨를 포함해 남한에 남아 있던 2남3녀는 10여년 동안정보기관의 감시에 시달리는 등 ‘형언하기 힘든 고초’를 겪었다.현재 장남 건국씨(58)가 독일에 있고,차남 인국씨(51)와 세 자매는 한국에 살고 있다.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분단된 한국 사회에서 ‘월북자의 딸’이라는 딱지는 떼어버릴 수 없는 낙인이었다.하지만 최씨 등 형제들은 믿고 존경했던 부모님의 ‘이해하기 쉽지 않은 선택’을 인정했다고 한다.항상 반듯한 모습,의연히 원칙을 지키는 삶을 보였던 부모님이었기에 변함없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처음 미국으로 망명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믿어지지 않았고그 뒤 정보기관과 주위의 시선으로 겪은 고생은 지긋지긋할 정도였습니다.하지만 원망보다도 큰 믿음과 그리움이 있었기에 이겨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동안 겪었던 고생과 켜켜이 쌓인 그리움을 생각하면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토로할 법도 했지만 최씨의 반응은 의외로 의연했다. 최씨는 “뵐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상봉장으로 달려가 어머니를껴안고 펑펑 울고 싶지만 어머니가 원하시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면서 “부담스러우시더라도 어머니가 연락을 꼭 주셨으면 한다”고 가없는 그리움과 믿음을 털어놓았다. 박록삼기자 youngtan@
  • “오마니… 어머니…” 남북이 눈물바다

    “오마니!…제가 왔습니다” “오빠…” “언니…” “여보…” “죽기 전에 못볼 줄 알았었는데…” 오열(嗚咽) 또 오열….서울도 울고 평양도 울었다.그리고 온 겨레가울었다. 50년 세월,분단 반세기 만에 마침내 서울과 평양에서 꿈결에서 그리던 혈육을 만난 이산가족들은 서로 핏줄의 정을 확인하며 부둥켜안고 통곡했다. 분단의 벽이 허물어진 순간이었다.억눌러왔던 단장(斷腸)의 한과 그리움에 지친 설움과 눈물이 뒤범벅돼 남과 북의 이념과 체제를 가르고,가슴마다 얼어붙었던 모진 세월을 훌쩍 뛰어넘었다. 광복 55주년인 2000년 8월15일 남과 북으로 흩어져 살던 이산가족 200명(남북 100명씩)은 분단 50년 만에 서울과 평양을 방문,가족들과극적인 상봉을 통해 서로 껴안고 오열하며 질기고 진한 혈육의 정을주고 받았다.이산가족 방문단 교환은 지난 85년 이후 15년 만에 처음이다. 북측 방문단은 오후 4시40분부터 서울 삼성동 코엑스 컨벤션센터 3층에서,남측 방문단은 이보다 늦은 시각 평양 고려호텔에서 꿈에 그리던 부모,형제,아들 딸,친척과 재회의 기쁨을 나눴다.서울과 평양의상봉장은 방문단 100명과 방문자 1명당 가족 5명 등 모두 600명의 이산가족들이 뒤엉켜 눈물바다를 이뤘다.이날 노환으로 서울 상봉장에나오지 못한 노모 민명옥(95)·박성녀(91)씨는 밤늦게 쉐라톤워커힐호텔로 앰뷸런스를 타고 와 북의 아들인 박상원(65)·려운봉(66)씨와 각각 눈물의 상봉을 했다.이산가족이 아닌 남측의 국민들도 TV생중계를 통해 ‘반세기 만의 포옹’을 지켜보며 한민족의 아픔을 함께느끼고 함께 울었다. 앞서 류미영(柳美英·78) 천도교 청우당 중앙위원장을 단장으로 한북측 방문단 151명은 이날 오전 10시5분 북측 고려항공 IL-62편으로평양 순안공항을 떠나 서해 남북직항로를 이용,11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고려항공이 민간인을 태우고 남측 땅에 착륙한 것은 분단 50년만에 처음이다.북측은 도착성명을 통해 “방문단 교환사업은 북남 공동선언을 이행하는 데 활력을 더해 줄 것”이라며 “민족단합과 통일을 위한 훌륭한 계기가 되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장충식(張忠植·68)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단장으로 한 남측 방문단151명도 이들이 타고 온 고려항공 편에 탑승,오후 1시 김포공항을 떠나 2시쯤 순안공항에 도착했다.남측도 성명에서 “남녘의 1,000만 이산가족의 소망과 기대를 안고 평양에 왔다”면서 “방문이 앞으로도계속 이어져 멀지않은 장래에 남북으로 흩어진 이산가족들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날이 올 것을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양측 방문단은 이날 2시간여에 걸친 단체 상봉을 마치고 대한적십자사와 조선적십자회 중앙위원회가 코엑스와 인민문화궁전에서 각각 베푼 만찬에 참석했으며,남측 가족들만 만찬에 동석했다.방문단은 만찬뒤 숙소인 서울 쉐라톤워커힐 호텔과 평양 고려호텔로 옮겨 남과 북에서의 설레는 첫날 밤을 보냈다. 단장과 이산가족 100명,수행원 30명,기자단 20명으로 구성된 양측방문단은 이날 집단상봉에 이어 18일까지 3박4일간 서울과 평양에서체류하며 숙소에서의 개별상봉 2차례,오찬 2차례,만찬 1차례씩 더 만나 이산의 한과 아픔을 달랜다.18일 북측 방문단을 태운 대한항공 여객기가 김포공항을출발,순안공항에 이들을 내려준 뒤 남측 방문단을태우고 귀환한다. 특별취재단
  • [매체비평] 최민희 민언련 사무총장

    지난 6월15일 남북정상회담 이후 솔직히 말해 국민들은 다소 혼란스럽다.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만난 이후 하루아침에 ‘북녘의 괴수’가 인터넷의 스타로 둔갑하는 등 북한과 관련해 표면상으로 너무나 많은 것이 변했다.별 준비없이 정치적 ‘사건’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이같은 변화 앞에서 어리둥절한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이 점에 있어 언론도 예외는 아니다.남북정상회담을 한결같이 긍정적으로 보도하던 언론은 곧 ‘흥분’에서 벗어나 각자 자기 빛깔에따라 남북관계를 다시 보도하기 시작했다.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같은신문이라고 하더라도 정치협상 부분과 여타 부분-이를테면 8·15 이산가족상봉 문제나 경협 부분 등-에 대한 보도경향이 다르다는 것이다.역시 언론도 북녘에 대해 확실한 ‘자기 정리’가 되어있지 않은듯 하다. 이같은 상황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 초청으로 북한을 방문한 남쪽언론사 사장단과 북한 언론계 대표들이 지난 11일 ‘남북언론기관들의 공동합의문’을 채택한 것은 시의적절하다는 평가를받고 있다.언론이 남북문제에 대해 ‘고른 시각’을 가져야 국민 일반에게 남북문제에 대한 ‘정돈된 시각’을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공동합의문’은 민족단합과 통일에 도움이 되는 언론활동 전개,상호비방·중상 중지,언론분야 교류협력 추진,남북 언론 접촉창구 마련,북한 언론기관대표들의 서울방문 등에 합의했고 오늘날과 같은 분위기에서 이같은합의내용을 지키는 것에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고 언론들은 평가하고있다. 그러나 언론사들의 자평과는 달리 언론사 사장단의 방북과 이번 합의문 채택에 대해 우려하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우리는 지난 92년 남북합의서 발표 당시 이의 이행과 준수를 위한 부속합의서 등에서 이미 언론교류와 협력에 원론적으로 합의한 경험이 있다.물론 당시 북한이 소극적 태도를 보이기도 했지만 남쪽 언론 역시 북한 관련보도에 있어 한발짝도 진전하지 못했었다.요는 합의문을 채택하는 것이중요한 것이 아니라 합의문 내용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실천’을 염두에 놓고 볼 때 우리 언론에 대해 전폭적인 믿음을 보내기에망설여지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언론은 ‘합의문’을 발표하기에앞서 몇 가지 준비를 했어야 했다는 지적이다. 가장 먼저 했어야 할 준비는 북쪽이 아니라 우리 국민으로부터 신뢰받는 일이었다.지금 우리언론은 상업주의,편파·왜곡보도,보수성향(반통일적 보도태도) 및 권력지향(약자 무시)보도 등등의 행태로 인해대다수 국민들로 부터 불신받고 있다. 다음으로 남쪽의 냉전적 민주주의나 북쪽의 인민민주주의로는 가능하지 않은 한반도의 이념형을 고민하는 일이다.체제와 문화가 다른남북은 ‘민족’이라는 통시대적 개념과 50년 분단문화를 압도할 수있는 한민족문화가 아니면 하나가 될 수 없다.남과 북이 하나될 수있는 민족과 한민족문화의 이념형을 정립을 위해 언론은 먼저 고민하지 않으면 안된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균형있는’ 남북관계 보도다.우리는 하루아침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남쪽 국민의‘스타’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그를 있는 그대로 알고 싶다.‘통제되어 있던’ 북한사회가 갑자기 ‘개방형’ 사회로 바뀌는것은있지도 않고,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그동안 남북관계에 있어서 언론은 언제나 걸림돌로 작용했다.남북간 접촉에서 늘 언론문제가 거론됐던 것도 이 때문이다.우리 언론이 정녕 통일지향적 보도로 통일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우선 언론 ‘자신’이 변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소리가 높다. 최민희 민언련 사무총장.
  • 한민족 하나로 남북이산상봉/ 남측 부인 찾은 북녘 남편

    “여보…,당신 맞나…,얼굴이나 한번 봅시다” 15일 남북 상봉이 이뤄진 서울 코엑스 3층 컨벤션홀에서는 분단 반세기를 뛰어 넘는 ‘망부가’(望婦歌)가 가슴을 울렸다. 고희(古稀)를 넘어 황혼길에 남녘 아내를 찾아온 3명의 북녘 남편들.리복연씨(73·본명 이승철)와 김희영씨(72)는 반세기 동안 가슴 한쪽에 묻어두었던 남녘의 아내를 만나 서로 얼싸안고 뜨거운 눈물을흘렸다.처음 만남은 다소 어색했지만 혈육보다 가까운 ‘부부의 연’을 갈라 놓지는 못했다. 아내 이춘자씨(71·경북 안동시 동부동)를 만난 리복연씨는 “그동안 혼자 고생이 많았지”라며 아내의 두 손을 부여잡았다.홀로 두 아들을 키워 온 이춘자씨도 손수건으로 눈물만 훔치다 “건강은 어떠하냐”며 말문을 열었다. 경북 안동군 풍산면이 고향인 리씨 부부가 헤어진 것은 지난 50년여름.남편의 징용을 막기 위해 지난 43년 17·18세의 꽃다운 나이로결혼한 이들은 서울 명동에서 신문지국을 운영하며 이지걸(53)·호걸씨(50) 등 아들 둘을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전쟁 중 신문배달용 자전거를 사오겠다며 집을 나간 남편은끝내 돌아오지 않았다.인민 의용군에 끌려간 것이다.결국 부인 이씨는 홀로 시장에서 좌판을 하는 등 어렵게 생계를 꾸려가며 두 아들을 키워냈다. 정춘자씨(73·경기도 이천시 율면)와 북의 남편 김희영씨(72)는 처음엔 제대로 포옹조차 나누지 못했다. 한때 혈육보다 가까운 아내였지만 서로에겐 남과 북에 또다른 남편과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남편 김씨는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죽은 줄만 알았다”며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아내 김씨의 등을 두르리며 다른 가족들의 안부를 물었다. 정씨는 6 ·25전쟁때 남편과 헤어진 후 소식 없는 남편을 기다리며아들과 함께 8년을 살다 결국 주변 사람들의 권유에 따라 아들을 친정에 맡기고 재혼했다. 한편 하경씨(74)는 남쪽의 아내 김옥진씨(78)가 상봉장에 나오지 않아 만남이 좌절됐다.하씨는 상봉장에 나온 남쪽의 아들 하정기·문기씨에게 아내의 안부를 물으며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특별취재반
  • [해외항일전적지를찾아서](6)남만주 독립투사 양세봉 활동지 신빈

    ‘歷史名城 前淸故里’(역사명성 전청고리)라고 쓴 현판을 단 높다란 채색관문이 차창위로 휙 스쳐 지나갔다.현판은 이곳이 청태조 누루하치의 고향이어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고장이라는 뜻이었다.마침내남만주의 오지인 신빈현(新賓縣:항일전쟁 시기 지명은 興京縣)에 들어선 것이다.심양(審陽)에서부터 4시간 반동안 숨가쁘게 달려온 차가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신빈은 요녕성의 동쪽 끝에 위치한 만주족 자치현으로 길림성의 통화현과 닿아 있다. 양세봉(梁世鳳·1896∼1932)장군은 유해가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모셔져 있는 탓으로 남한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항일투쟁의 명장이다. 남한에서는 김좌진이,북간도에서는 홍범도가 항일영웅으로 인구에 회자되듯이 심양과 남만주 일대의 동포들에게는 양세봉의 이름이 전설속에 칭송되고 있다.조선혁명군은 공산주의 깃발아래 싸운 부대가 아닌가 생각하기 쉽다.양세봉이 소년시절의 김일성을 도와주었고 김일성이 막 항일투쟁을 시작한 무렵 교류한 적이 있다.그러나 양세봉은처음부터 반공성향이 강했고,조선혁명군도 1920년대말 국민부 산하의무장조직으로 창건되어 1937년 해체될 때까지 민족주의 이념을 굳게지킨 독립군이었다. 양세봉은 서봉(瑞鳳)이라는 이름도 썼다.평북 철산 출신으로 스무살이 넘어 만주땅으로 건너가 중국인 점산호(占産戶.지주)의 소작농이됐다.기미년 4월 만세시위가 남만주 일대까지 퍼져 왔다.그는 시위에앞장섰고 그때부터 독립투쟁에 투신하게 됐다. 천마산대에 입대해 경찰서를 습격하는 등 무명 소졸로 투쟁하다가,참의부 중대장을 거쳐 1926년에는 남만주의 새로운 독립운동 단체 정의부에 들어갔고,1929년말 국민부 산하조직으로 조선혁명군이 창건되자 부사령(副司令)을 맡았다. 1932년 봄, 국민부와 조선혁명군은 간부들이 대거 체포되어 위기를맞았다.양세봉은 총사령으로 추대되고 즉각 왕청문(旺淸門)에서 무장봉기를 단행,지휘부를 왕청문에 두고 500명의 대원을 이끌고 무순(撫順)까지 진공해 일본군을 격퇴했다. 당시에는 흥경현의 일부,지금은 신빈현의 일부로 행정상 현(縣)보다작은 진(鎭)에 해당된다.양세봉은 흥경현의 쌍협하(雙峽河)에서 또다시 적을 격퇴하고 이름을 드날렸다.그는 영릉가(永陵街)에서 중국 의용군과 합세해 대대적으로 진공해온 일본군을 패퇴시켰다.그리고 흥경성에서 일본군과 만주군의 연합 공격을 받아 혈전을 치르고 사수했다.그 뒤에도 2차 영릉가전투,청원(淸原)전투,영릉가의 석인구(石仁溝)전투에서 승리했다.중국인 의용군과 연합한 전투도 있지만 조선혁명군의 단독전투가 더 많았다.양세봉은 한편으로 끊임없이 소규모 인원을 보내 국내 진공을 펼쳤다.기록을 보면 1932년 16차례에 걸쳐 100여 명이,이듬해는 10차에 걸쳐 140여 명이 압록강을 건너가 일본군진지와 파출소,우체국 등을 기습했다. 일제는 남만주의 영웅 양세봉을 제거하기 위한 계략을 짰다.1934년9월,일제의 지령을 받은 밀정 박창해(朴昌海)는 중국인 지주 왕가(王哥)를 통해 마적 두목 아동양(亞東洋)을 매수했다.아동양은 양세봉에게 중국인 항일부대와의 연합을 협의하자고 속여 환인현(桓仁縣) 소황구(小荒溝) 골짜기로 유인해 저격했다.온 몸에 집중사격을 받은 양세봉은 동포들의 간호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숨을 거두었다.동포들은일제의 손길을 피하려고 가까운 고려성(高麗城)에 평장했으나 통화현(通化縣)의 일본 경찰은 이를 탐지해 시신을 꺼내 목을 잘라 성루에걸었다. 취재팀은 시내로 들어가 조선족 원로들을 찾다가 운좋게도 최선주(崔善柱)선생(66)과 조만선(趙萬善)·김순화(金順化)·김순자(金順子)선생 등 원로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었다.현(縣) 인민위원회 부서기 등 고위 공직에서 은퇴한 이들은 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를 결성,조선족 사회의 발전과 모국과의 문화교류를 위해 애쓰고 있었다.1995년 조선혁명군의 주둔지 왕청문에 양세봉 장군 기념비를 세운 주인공들이다.숨이 턱턱 막히는 무더운 대낮이었으나 원로들은 취재팀을 안내하기 위해 앞장섰다.우리는 흥경성전투 현장부터 돌아보았다.네 분원로가 손을 들어 이곳 저곳을 가리켜 보였다. “일만(日滿)연합군은 서쪽에서 쳐들어오고 동쪽에서는 중국의용군이춘윤부대가 맞섰지요.양세봉이 이끄는 조선혁명군은 남쪽에서 협공했지요.대도회(大刀會)는 뒤에서 냅다 함성을 질렀구요.병력이야 이춘윤부대가 많았지만 적을 무너뜨린 건 양세봉부대였지요.참 대단했다 그래요.혼쭐나서 달아나는 왜놈들을 양장군은 무순까지 쫓아가며족쳤대요” 길목이나 구릉이 있어 실감은 났지만 이제는 모두가 시가지로 변해당시의 진지나 망루 따위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필자가 김순화 선생에게 물었다. “대도회는 뭡니까?” “2,000명쯤 되는 비무장 예비대였지요.배에다 부적을 뻘겋게 붙이고 죽창을 꼬나들고 함성을 올리며 돌진했지요.흥경성 2차전투에서많이들 죽었어요.이삼년 전까지만 해도 생존자 몇분이 있었는데 이젠안 계세요” 흥경성 2차전투는 양세봉이 조선혁명군의 주력을 이끌고 청원현에가 있을 때 적의 기습으로 시작되었다.혈전을 벌이던 중 일본군 비행기가 기총사격을 가했고 이춘윤부대는 속수무책으로 퇴각했다.대도회는 거의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취재팀은 그분들과 함께 차를 타고 왕청문진으로 향했다. 남만주 항일전쟁의 영웅 양세봉은 조선혁명군의 지휘부가 있었던 화흥(化興)중학교 안에 장려한 화강암 흉상으로 우뚝 서 있었다.6미터쯤 되는 높은 기단에 흉상은 1m65㎝,전면에는 ‘抗日名將 梁瑞鳳 將軍(항일명장양서봉 장군)’이라고 쓰여 있었다. 조선혁명군의 사령부이자 간부 양성소로 썼던 화흥중학교는 옛 자취는 사라지고 1960년대에 지었다는 교사만 덩그렇게 남아 있었다.조선족 학생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했다. 양세봉의 죽음과 관련해 잊을 수 없는 사실이 있다.일본경찰은 그의무덤에서 시신을 파내 김도선(金道善)이라는 조선족 농부에게 작두로 목을 자르라고 윽박질렀다.김도선은 ‘양세봉은 우리 조선민족의사령이다.내가 조선사람으로서 어찌 우리민족 사령의 목을 자른단 말인가’라며 거부하자 일경은 그 자리에서 그를 총으로 쏴 죽였다.양세봉 암살계략을 짠 조선인 밀정 박창해와 그의 시신의 목을 자르기를 거부하고 총살당한 농부 김도선.충성과 배반의 양극이다. 양세봉의 아내와 아들은 1946년 김일성의 각별한 배려속에 평양으로귀국했다. 북한당국은 그의 유해를 1961년에 모셔가 일단 평양 교외에 안장했다가 1986년 애국열사릉에 이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양세봉이 두 차례 대승을 거둔 영릉가를 돌아보니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취재팀은 분단모순 때문에 우리에게 제대로 알려지 않은 항일전쟁의영웅을 취재했다는 보람에 가슴이 뿌듯해진 채로 심양을 향해 차를달렸다. 신빈(중국 요녕성) 이원규(소설가·동국대 겸임교수)
  • 이산가족 상봉을 보고/ 눈물이 바다를 이룰때까지…

    서울과 평양에서 마침내 눈물의 큰 강이 흐르기 시작했다.흔히 눈물은 슬프고 안타까워 흘리는 것이지만 이번만은 너무나 가슴이 벅차서 흘리는 눈물일 줄이야!우리겨레가 역사적으로 기쁨의 눈물을 흘린적이 과연 몇번이나 될까.반세기 동안 맺히고 맺힌 한과 응어리를 단숨에 확 풀어버리는 순간의 이 뜨거운 것.기쁨에 겨우면 눈물이 절로 난다는데 이산가족의 눈물이야말로 기쁨을 초월한 인간이 누릴수 있는 최상 최고의 경지에서 치솟은 환희의 상징물이 아닐까. 지금까지 우리는 꾸준히 이산가족 상봉을 시도해왔다.15년전 KBS가북에서 온 이산가족의 상봉과 결합을 도모하여 눈물의 홍수를 자아낸바 있지만 그때 필자가 쓴 시 ‘바보상자가 나를 울렸다’는 바로 이산가족의 심정을 토로한 것이었다. 나는 18세 때 고향인 원산을 떠나 혈혈단신 38선을 넘어와 지금 백발이 성성한 칠순에 접어들었지만 부모의 생사와 형제들의 소식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다.분단의 아픔과 한을 해학과 유머로 얼버무리고있지만 패전국도 아닌 우리가 왜 독일모양 남북으로 갈려야만 했는지그게 원망스러울 뿐이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 어머니! 부르는 소리를 잊은지 50여년! 그래서 이산가족을 다룬 작품에서 ‘죽는 그날까지 단 한번만이라도 좋으니아버지 어머니 부르게 해다오’라고 절규하기도. 몇해전 일본의 시지 ‘시와 사상’이 인권문제 특집을 했을 때 내게도 청탁이 있어 이 작품을 번역해서 보냈더니 권두에 다룬 것을 보고 우리의 이산가족이 세계적인 인권문제로 부상되어 있는 것을 알게되었다. 우리 주변에는 이산가족이 너무 많은 탓인지 나의 절규쯤은 귓등으로 흘려 버리고 있는듯 하지만 이웃나라에서는 꽤 관심을 보이고 있다. 심지어 나를 두고 한국의 윤리시즈라고까지 부르고 있지만 율리시즈는 만년에 고향에 돌아가지 않았느냐고 그보다 더 혹독한 처지임을 실토한바 있다. 하지만 해방 55주년을 맞는 이 시점에서 율리시즈 신세는 일단 회복한듯 하다. 남북의 비행기 KAL과 고려항공이 남북을 오가기도 처음 있는 일. 남북이산가족의 상봉이 이뤄진 오후 4시40분 대동강이 남쪽의 눈물을,그리고 한강이 북쪽의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자식의 얼굴을 제대로 식별하지 못한채 기진해버린 95세의 할머니,오빠를 부등켜 안고 통곡하는 누이,피는 이데올로기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상봉의 기회를 아직 누리지못하고 있는 이산가족은 백두산과 한라산의 수목을 합친 것만큼이나 많다.나도 그중의 한 사람이지만당장에 상봉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부모들의 생사확인이나 가족들의소식만이라도 알았으면 일단 恨은 풀릴 것이다. 6·25 사변전처럼 안부를 전하는 편지 왕래만이라도 될 수 있다면오죽이나 좋을까.겉치레의 효과보다 실속있는 결속이 더 절실하다. 그동안 남북간의 대화를 통한 좋다만 있는 간혹 있었지만 지속성이없었다. 바라건데 이번의 이산가족 상봉이야 말로 남과 북에서 흘린 강물이바다를 이룰 때까지 온 겨레여 울고 또 울자. 김광림 시인·원산출생
  • 남북이산상봉/ 첫 서울行 北국적기 고려항공

    북한 유일의 민간 항공사인 고려항공 소속 IL-62 특별기는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한 영공을 비행한 항공기로 기록되게 됐다. 북측 이산가족 방문단 151명을 태우고 15일 김포공항에 도착한 북한IL-62기의 뒤쪽 날개에는 인공기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동체에는‘고려항공’‘AIR KORYO’라고 표기돼 있다. 조종석 바로 뒤 동체에‘두루미’가 그려져 있는 점도 눈에 띈다.이는 지난 92년 10월‘조선민항’이었던 항공사 명칭을‘고려항공’으로 바꾸면서 채택한 상징 마크.당시 북한 관영 중앙방송은“김정일동지의 따사로운 품을 형상화한 것으로,붉은 색으로 두른 원 안에 기쁨과 행복의 상징으로 날개를 펼쳐 날아가는 두루미의 모습을 그려넣게 됐다”고 보도했다. IL-62 항공기는 러시아의 항공제조업체인 일류신사에서 만든 중형항공기.장거리 운항용으로 개발된 이 항공기는 기본형의 경우 지난 67년부터,서울에 온 IL-62M형의 경우 성능이 개선된 것으로 74년부터취항했다. 93년 생산이 중단될 때까지 모두 250여대가 제작돼 동유럽 등에 수출돼 각 국의국내 및 국제노선에서 운항되고 있다. 길이는 53.12m이며 좌석수는 162∼186석(IL-62MK형의 경우 195명까지 탑승가능)이다.평균 운항속도는 시속 820∼850㎞,운항거리는 1만㎞이며 승무원은 5명.러시아 극동항공사가 주 2회 운행하는 서울∼하바로브스크 노선에 투입되고 있어 낯설지 않다. 김경운기자 kkwoon@
  • [오늘의 눈] 이념 녹여버린 혈육의 情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다.15일 이산가족 상봉장인 서울 삼성동 코엑스 컨벤션 홀은 삽시간에 ‘눈물의 광장’으로 변했다. 북측 이산가족 방문단과 남측 혈육들이 흘린 눈물은 홀을 가득 채우고 한반도 산하로 흘러넘쳤다.평생의 한을 풀지 못하고 끝내 눈을 감은 실향민들,이제나 저네나 북녘 땅만 바라보는 1,000만 이산가족들의 보이지 않는 눈물까지 더한 까닭이다. 50여년 동안 차곡차곡 가슴속에 묻어야 했던 이들의 한(恨)은 이날차라리 통곡이 되어 전국에 메아리쳤고 분단 현실의 아픔을 어떤 필설보다 생생히 전달했다.이념과 냉전의 국제질서에 희생된 우리 현대사의 비극을 새삼 확인했던 역사의 장(場)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이산가족 상봉이 며칠동안 안방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일회성 신파극’에 그쳐서는 안된다.역대 남북 정권들이 그랬듯 체제와 권력 유지를 위한 도구가 돼서도 더더욱 안될 것이다. 이들의 눈물은 단순한 눈물이 아니다.50여년간 분단의 고통이 농축된,민족의 슬픔이 고스란히 녹아든 역사적 결정체란 의미다. 눈물을 눈물로 그치지 않고 대승적으로 승화·발전시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다.반세기 전,남북한이 서로에게 겨눴던 분노와 증오가 우리 민족을 갈라놓았다면 상봉의 눈물과 그 감격은 분단의 벽을 허무는 역사적 추진력으로 활용해야 한다. 20여 전 혹독한 냉전기에도 서슬퍼런 이념의 굴레를 녹이며 독일 민족의 화합과 통일의 엔진이 된 것이 바로 동서독의 이산가족들이 아니었던가. 이날 TV를 지켜본 많은 국민들은 화면에 비친 것 이상을 온 가슴으로 느꼈을 것이다.이산가족들의 상봉이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진정한남북 화해와 통일로 이어가는 ‘징검다리’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것도 이런 연유일 것이다. 진정한 정치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라고 했다.15년 전역사적 이산가족 상봉이 남북의 체제와 정권유지를 위해 왜곡됐던 사실을 국민들은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6·15 공동선언이라는 역사적 기념비를 세웠던 남북 정상들이 이산가족은 물론 분단으로 고통받는 7,000만 겨레의 눈물마저 닦아줄 날을 기대해본다.[오 일 만 정치팀 기자 oilman@]
  • [사설] 상봉 감격 지속하도록

    오늘 코흘리개 소년이 백발의 노인으로,갓 시집온 새댁이 허리 휜노부인으로 바뀌어 50년만에 부모형제와 배우자를 만난다.반세기 동안 별리(別離)의 한을 품고 살아온 남북 이산가족이 마침내 서울과평양에서 각기 그리운 가족과 재회한다. 이번 이산가족 교환방문은 남북 정상이 합의한 6·15공동선언의 첫가시적 성과로,지켜보는 이들도 눈물을 감출 수 없는 대 드라마가 될 것이다.우리는 오랜 세월 생이별의 아픔을 삭여온 이들과 상봉의 감격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고통은 나누면 줄어들고 기쁨은 함께하면더욱 커진다지 않던가. 새천년의 첫 광복절을 맞아 이산가족들이 부둥켜안고 오열하는 장면을 떠올리며 민족의 통일도 멀잖았음을 예감한다.아울러 이번에 상봉을 못하는 이산가족들에게도 순차적으로 상봉의 기회가 꼭 주어지기를 간절히 기대한다.그런 점에서 북한의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이 지난 12일 방북 언론사 사장단에게 오는 9월과 10월에도 이산가족교환방문을 계속하고 내년에는 집에도 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한 사실을 환영해 마지않는다. 그럼에도 이번 상봉은 전체 이산가족중 남북 각기 100명씩 제한된인원을 선발,3박4일간 진행되는 시범사업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작은 불상사라도 생기지 않아야 후속 방문단 교환으로 순조로이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당사자인 이산가족과 관계당국이 각별히 유념해야 한다.남북 당국은 행정적 지원에 만전을 기해야 하고 언론도 상대체제를 자극하지 않도록 보도를 자제해야 할 것이다. 이번 상봉 방식은 지난 85년의 첫 방문단 교환때에 비해 진일보했다.예컨대 불필요한 의전행사를 줄이는 대신 가족간 상봉 횟수와 시간을 늘린 것은 잘한 일이다.그러나 김위원장도 언급했듯이 이산가족들이 서울과 평양에서 일괄 상봉하는 것보다는 혈육이 사는 가정을 방문해 체온을 나누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본다.남북 당국이 당사자인 이산가족의 입장에 서서 앞으로 방문 방식에 대한 전향적인 개선책을 협의해나가기 바란다.특히 이번에는 방문단이 항공로를 이용하지만 앞으로 2차 이산가족 방문단 교환이 합의된다면 판문점 등을 통한 육로 이용에 남북 당국이 뜻을 모으기를 당부한다. 비행기로 서울과 평양을 상호 방문하기로 한 것도 남북 직항로를 여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단의 사슬을 끊는다는 상징성이나 비용과 안전성 등을 감안하면 육로 방문이 더 바람직하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마침 지난96년 이래 가동하지 않았던 판문점 남북연락사무소도 14일 정상화되었다.멀게만 보이던 통일이 성큼 다가선듯 하여 광복절 아침에 가슴설렌다.
  • “남북이 서로 용서를”鄭鎭奭대주교 광복절 메시지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인 정진석(鄭鎭奭)대주교는 14일 8·15 광복절과 성모승천 대축일을 앞두고 메시지를 발표,“북녘과 남녘의 형제자매들이 진리와 사랑 안에 참다운 해방을 누리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자”고 당부했다. 정 대주교는 메시지에서 “분단과 전쟁으로 동족끼리 총부리를 겨누고 싸웠던 지난날을 돌아보면 부끄럽기 그지없다”며 “이제는 서로가 용서를 청하고 용서하는 겸허함을 보여 잘못된 과거를 뼈저린 참회로 씻어내면서 민족의 미래를 설계하고 새로운 역사를 기록해 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김성호기자 kimus@
  • 한민족 하나로 남북離散 상봉/ 선물꾸러미에 절절한 사연 담아

    북의 혈육을 찾아가거나 맞이하게 될 남쪽의 이산가족들은 애끊는사연과 정성이 담긴 선물을 한아름씩 마련했다. 북에 있는 막내아들 김병길씨(54)를 만나러 가는 서순화씨(81·여)는 두꺼운 운동화를 가방 가장 깊은 곳에 챙겼다.살을 에는 듯이 추웠던 50년 겨울 다 해진 나막신에 버선발로 피란 길에 올랐다 헤어진 막내아들 생각에 그동안 밤잠을 제대로 못잔 기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서씨는 “아직도 꽁꽁 언 발로 대동강을 건너면서 발이 시렵다고 칭얼대던 병길이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취로사업으로 근근이 혼자 살아가는 이몽섭씨(75·경기도 안산시 반월동)는 북에서 만날 부인,아들,딸을 위해 여자용 속내의와 손목시계 3개를 마련했다.이씨는 “없는 살림에 남들처럼 많은 선물을 준비하지 못해 아쉽지만 취로사업으로 받는 20만원 중에서 담배와 술값을아껴 선물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막내동생 상흔식씨(56)를 만나러 북에 가는 상환식씨(74)는 자신이이제껏 살아온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가족사진,집안 사진,직장시절의 사진 등을 준비했다.상환씨는 “동생을 만나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맨 먼저 물어보고 싶다”면서 “가져 가는 사진이 못난 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북에서 오는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파크텔에 모인 남측 이산가족들의 손에도 선물 꾸러미가 가득했다. 동생 조재린씨(67)를 만나는 조재익(78),재하(74)형제는 용인에서부터 힘겹게 메고 온 짐가방에서 소중한 선물을 하나 꺼냈다.바로 가족들의 사진을 담은 사진첩이다.가족들이 모여 값비싼 선물을 준비하려고도 했지만 살아온 모습을 선물하는 게 가장 좋을 것이란 결론을 내렸다. 둘째아들 이춘명씨(70)를 서울에서 만나는 최인자씨(95)는 아들과헤어진 뒤 부터 50년 동안 끼고 있던 은반지를 아들에게 전할 예정이다. 형 심규황씨(65)를 만나는 순황씨(63)는 형의 가족이 얼마나 되는지 몰라 손목시계를 8개나 준비하고 고급 라이터도 10개를 마련했다.순황씨는 신발,전자계산기,속옷,화장품,영양제 등이 가득한 선물꾸러미를 풀어 보이면서 “지금까지 모은 전 재산을 다 형에게 주고싶지만 선물과 현금의 액수가 정해져 아쉽다”고 말했다. 이창구기자 window2@. *한국통신 徐容熙본부장. “한치의 오차도 없는 만반의 준비로 반세기 만에 성사된 남북 이산가족들의 뜨거운 만남을 돕겠습니다” 8·15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통신망 준비를 총괄하고 있는 한국통신 서용희(徐容熙·54)네트워크본부장은 역사적인 행사를 하루앞둔 14일 통신망 구축 상황을 최종 점검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Y2K기술문제대책반과 4·13총선,남북 정상회담 등 굵직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통신기술 설비를 총괄해온 베테랑이지만 이번 행사만큼 가슴이 설렌 적은 없었다.분단 반세기 만에 처음 이루어진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기 때문이다. 서 본부장이 상봉 준비작업에 들어간 것은 지난달 말.남북 정상회담 이후 이산가족들의 상봉이 현실로 다가오면서 통신지원대책반을 구성했다. 연인원 2,000여명을 동원,밤낮을 가리지 않고 매달린 끝에 보름 만에모든 준비를 마쳤다. 행사 준비기간 동안 퇴근한 날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상봉일에 맞춰 통신망을 구축하느라 하루하루가 힘들었지만 이산가족들이 한맺힌가슴을 달래줄 수 있다는 기쁨에 피곤함도 잊었다. 서 본부장은 “우리 역사에 한 획을 긋는 뜻깊은 행사를 준비하게돼 힘들지만 보람을 느낀다”면서 “전 세계에 우리 통신 수준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인 만큼 최선을 다해 행사를 마무리짓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서 본부장은 체신고와 서울대 행정대학원을 나왔다.64년 한국통신에 입사한 뒤 경영기획실 사업대책국장과 경영전략실 사업대책총괄실장,무선사업본부장 등을 지냈다. 김재천기자 patrick@. *자원봉사 日여대생 가네마루씨. “50년이나 가족을 만나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나 마음 아픈 일입니다” 8·15 이산가족 상봉의 남쪽 가족들이 묵게 될 서울 올림픽파크텔에는 일본인 여대생 가네마루 가요(金丸佳大·25·도야마대 언어학과 3년)씨가 안내도우미로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가네마루씨는 한국인 도우미 4명과 함께 빨간색 치마에 남색 저고리 차림의 한복을 입고 1층 엘리베이터앞에서 남쪽 이산가족들에 대한 안내를 맡고 있다.지난 4일 여름방학을 맞아 한국을 찾은 그는 이호텔에 묵고 있다가 이산가족 상봉 행사 소식을 듣고 자원봉사를 자청했다.처음 계획했던 열흘간의 여행 일정도 1주일 더 늘려 잡았다. 가네마루씨는 “한국 사람들은 정이 많은 민족인데 오랫동안 이산의 비극을 겪고 있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컸겠느냐”고 서툰 우리말로말했다. 지난 97년 9월 한·일 대학생 친선 소프트볼대회에 출전,한국과 인연을 맺은 그는 “한국에 올 때마다 한국 사람들이 너무 친절하게 대해 준 데 감격해 한국말을 배우기 시작했다”면서 “평생 이렇게 좋은 삶의 경험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가네마루씨는“생이별한 가족들의 뼈아픈 만남이기에 진심으로 도움을 주고 싶다”면서“나를 외국인으로 보지 않고 한국인처럼 대해 줘 고맙게 생각하지만 한국말이 서툴러 안내를 제대로 못하는 게 아쉽다”고 털어놓았다. 그는“앞으로 한국에서 공부도 계속하고,한국 사람과 결혼할 생각도 갖고 있다”면서“오는 18일까지 이산가족들을 위해 성심성의껏 봉사활동을 하겠다”며 환하게 웃었다. 김경운기자 kkwoon@
  • 새천년 첫 광복절 김대통령 경축사/ 어떤 청사진 담았나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새천년 첫 광복절 경축사에 담으려 한 것은 민족의 미래에 대한 비전으로 볼 수 있다.중국과 러시아를 잇는경원선·경의선의 복원을 ‘두 줄의 철의 실크로드’로 명명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그것은 ‘위대한 한반도 시대’개막으로 요약할 수있다. ◆한반도 중심론의 배경=김 대통령이 제시한 ‘한반도 중심론’은 과거 역사의 반성으로부터 시작된다.100년전 조선왕조말 국론분열과 쇄국주의라는 시대착오가 민족분단,전쟁 등 지난 100년 동안 숱한 아픔을 가져왔고,아직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바로 그것이다. 김 대통령은 시대적 소명과 과업으로 지식정보강국 건설을 통한 세계일류국가 실현과 남북 화해협력 실천을 꼽았다.즉 우리 민족의 자질인 높은 교육열과 탁월한 문화창조력,정보화시대 적응 열기를 바탕으로 남북이 협력해 나간다면 동아시아의 주변국가에서 대륙과 대양을 잇는 세계 중심국가로 도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경축사에서 “이것은 우리가 능히 이룰 수 있는 내일의 모습”이라며 “한강의 기적,외환위기극복에 이어 다시 한번 세번째의 기적을 만들기 위해 일어서자”고 호소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개혁은 선택이 아닌 필수=김 대통령은 국민과 역사에 책임지는 대통령직의 성실한 의무수행을 다짐했다.이는 한마디로 4대 개혁의 완수와 지속적인 개혁으로 정리할 수 있다.“개혁이야말로 국민과 시대가 국민의 정부에 부여한 역사적 소임이라고 믿고 개혁의 고삐를 결코 늦추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개혁과제는 크게 인권국가,모범적 민주국가 건설 등 국정 5대 목표로 요약된다.내년 2월까지 4대 개혁을 완수하고 인권법과 부패방지법을 제정,시행하며,국회 중심의 상생적 대화정치를 실현하고,남북관계도 군비축소 문제를 다루는 수준으로까지 발전,제도화한다는 구상이다. 김 대통령은 ‘위대한 한민족의 시대’는 고통을 수반하는 미래 청사진임을 분명히 했다.당장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개혁을 포기하고,지역분열주의와 대립·갈등의 정치로 나아간다면 미래가 없다는 경고가 이를 반증하는 대목이다. 양승현기자 yangbak@
  • 이산가족 방북단 초청행사

    남북 이산가족 상봉 하루전인 14일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초청해이뤄진 이산가족 방북단 청와대 오찬은 벌써부터 ‘눈물 바다’였다. 최학순(71·황해 은율)할머니가 방북소감을 밝히며 “죽은 줄만 알았던 여동생을 만나게 돼 너무 기쁘다”면서 감정에 북받쳐 흐느끼자여기저기서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김 대통령도 감회에 젖은 듯 “취임초부터 이산가족 상봉을 주장해왔지만,스스로도 언제 이뤄질까 몰랐다”면서 “나이 70이 넘어서도북에 가보지 못하고 끝나는 게 아닌가 슬픈 생각을 가졌었다”고 털어놨다.또 “북한 출신도 아닌 내가 이 정도니 고향을 북에 둔 여러분은 얼마나 안타깝고 고통스러웠겠는가”라고 위로했다. 특히 이번에 포함되지 못한 이산가족의 아픔을 따뜻이 어루만졌다. “시작이 반이며,앞으로 상호방문도 있을 것이고 면회소 설치,편지왕래,고향 방문 등도 이뤄질 것”이라고 가지 못한 가족들의 용기를북돋았다. 이재경(79·황해도 연백)옹도 “가지 못한 가족들이 많아 친구들에게 간다는 소리도 전혀 못했다”며 “모두 그런심정”이라고 상봉확대를 기대했다.김찬하(76·평북 연변)옹은 “고향산천을 어떻게든지보고,가족을 만나려는 1세대와 현재 경제권을 쥐고 있는 2세대간 생각이 달라 포기한 사람들이 많았다”며 정부의 지원을 촉구하기도 했다. 김 대통령은 이어 이산가족 상봉이 남북관계에 미치는 의미를 새겼다.“우리는 21세기와 더불어 새 시대로 들어간다.한반도 전체를 무대로 하는 8·15 해방 이전의 그 시대로 돌아가는 것”이라며 새로운 ‘한반도 시대’의 도래를 예고했다.또 “천년의 통일국가를 이뤘던 국가가 우리 탓으로 분단됐고,전쟁을 치렀고,다른 민족보다 더 미워했고,군비경쟁으로 경제도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김 대통령은 “여러분이 북녘에 다녀오면 인도적 화해를 이룬게 널리 퍼져갈 것”이라며 단순한 가족간의 만남을 넘어 민족과 국가를위해 도움이 되는 상봉을 만들어 달라고 당부했다. 오찬은 오전 11시50분부터 오후 1시20분까지 이어졌다.박재규(朴在圭) 통일부장관의 인사말과 장충식(張忠植) 방북단장의 건배사,오찬,방북대표 소감,김 대통령 당부 순으로 진행된 행사는 한마디로 “슬픈 축제였다”고 한 참석자가 전했다. 양승현기자 yangb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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