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분단
    2025-12-24
    검색기록 지우기
  • 이재환
    2025-12-24
    검색기록 지우기
  • 안규백
    2025-12-24
    검색기록 지우기
  • 경전철
    2025-12-24
    검색기록 지우기
  • 문화공간
    2025-12-24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8,016
  • “젊은세대 6·25가 누구와 싸운 줄도 몰라”

    “젊은세대 6·25가 누구와 싸운 줄도 몰라”

    “요즘 젊은 세대들은 6·25가 북한군과 싸운 전쟁인지, 일본과 싸운 전쟁인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너무 놀랐습니다. 또 요즘 학교에는 국사교과서가 없다고 해 더욱 깜짝 놀랐습니다.” 6·25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아 분단문학의 거장 소설가 이호철(78)씨가 24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가진 특별강연 ‘6·25와 서울과 나’에서 이렇게 한탄했다. 이 작가는 “세상이 너무 진보와 보수로 양분돼 싸우다 보니 아예 국사교과서조차 혼돈을 초래하는 전유물로 착각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된다.”면서 “정부가 이를 아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 척 외면해 버리는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이 작가는 두 시간에 걸친 강연을 통해 매일매일 속도전쟁을 하는 세상이다 보니 옳은 것이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고 있지만 “그럴수록 우리의 역사를 바로 배울 수 있는 국사교과서는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1932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그는 원산고등학교 3학년 때 6·25전쟁이 터져 인민군에 동원됐다가 국군포로가 되어 북송되던 중 풀려나자 그해 12월 단신으로 월남해 부산에서 부두노동자, 미군부대 경비원 등으로 일했다. 70여명이 경청한 이날 자리에서 고3 때 인민군에 동원됐을 당시 생생하게 목격한 전쟁의 참혹한 광경들을 마치 어제 겪은 사람처럼 전하며 부르르 떨었다. 이 작가는 지난해 가을 발표한 ‘별들 너머 저쪽과 이쪽’의 예를 들며 자리에 참석한 젊은이들에게 역사를 바로 알리기 위해 애를 썼다. 그는 초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과 조만식, 이준, 민영환 등이 나오는 저승 대담 형식으로 푼 이 소설의 예를 들면서 “이승만은 4·19의 원흉이지만 대한민국을 세웠고 키운 인물”이라면서 “그가 아니었으면 스탈린에게 우리나라가 넘어갔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동삼기자 kangtong@seoul.co.kr
  • [한국전쟁 60주년] 천안함, 60년전 보는 듯…한국 지켜낸 건 트루먼

    [한국전쟁 60주년] 천안함, 60년전 보는 듯…한국 지켜낸 건 트루먼

    한국전쟁 하면 떠오르는 미국 대통령이 있다. 참전 결정을 내렸고, 3년 뒤 휴전협정을 체결함으로써 한반도의 운명을 바꿔놓은 제33대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다. 미주리주 인디펜던스에 있는 트루먼대통령도서관의 마이클 드바인(65) 관장과 22일(현지시간) 전화 인터뷰를 갖고 한국전쟁 60주년의 의미와 한·미동맹의 미래 등에 대해 들어봤다.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특별행사들을 많이 준비했는데 트루먼 대통령과 한국전쟁과의 관계는. -한국전쟁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집권 중 가장 어려운 결정 중 하나였다. 유엔 깃발 아래 미군을 처음으로 해외에 파병한 힘든 결정이었다. 전쟁 와중에 인기가 높았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불러들여 전역시킨 것은 어려운 결단이었다. 늘어나는 사망자와 전쟁포로들로 인해 1952년 트루먼 대통령의 지지율은 20% 중반까지 떨어졌고, 이 낮은 지지율은 2008년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20% 초반을 기록할 때까지 50년 넘게 깨지지 않았다. 이처럼 트루먼 대통령에게 중요한 사건이었던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아 그 의미를 되돌아보는 것은 당연하다. 트루먼대통령도서관은 미국에 있는 13개 대통령도서관 중 하나로 문서 약 1500만쪽과 2만 5000점의 각종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60년 전과 비교해 달라진 것과 바뀌지 않은 것이 있다면. -한반도는 긴장이 여전히 높고 기술적으로 전쟁상태이다. 하지만 1953년 휴전 이후 거의 60년간 남북한간에 전쟁행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최근의 천안함 사건은 60년 전 북한의 도발적 행위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볼 수 있다. 휴전협정에 아무도 만족하지 않는다. 3차전쟁을 막은 것과 함께 한국을 자유롭게 독립된 민주주의 국가로 남아 있도록 한 것이야말로 트루먼 대통령의 업적이다. 미국, 중국, 일본 등 주변국들은 군사·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한국도 무력을 통한 통일은 원치 않는다. 주요 국가들은 지역 안정을 해쳐 가면서까지 통일을 추진하길 원치 않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남북한이 스스로 평화적으로 통일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본다. →북한 정권의 변화 가능성은. -현 김정일 체제에서는 가능성이 낮다. 북한 지도부는 개방 후 중국의 부와 파워를 부러워하지만 사회가 급격히 변화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많다. →트루먼은 남북한이 60년씩 분단상태가 지속될 것으로 예상했을까. -아니다. 수년 내에 협상을 통해 통일이 이뤄질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동·서독의 분단이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트루먼 대통령은 이임연설에서 소련의 독재체제가 내부적으로 붕괴에 이를 것으로 정확히 내다봤다. →추가로 밝혀져야 할 비사가 있다면. -한국전쟁과 관련된 거의 모든 자료들이 공개됐다. 남아 있다면 미국과 중국간에 주고받은 북한과 관련된 외교 서신 정도인데, 이 부분이 공개된다면 한국전쟁과 관련해 보다 자세한 내용이 드러나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트루먼 대통령에 대한 한국민들의 무관심에 대해 섭섭함을 토로했는데. -한국 국민들이 트루먼 대통령의 업적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 것이 아쉽다. 1970년 평화봉사단원으로 인천에 갔었다. 큼지막한 맥아더 장군 동상은 있었지만 어디에서도 트루먼 대통령의 자취는 없었다. 맥아더 사령관을 트루먼 대통령이 해임한 데 대해 한국인들의 반감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았다. 트루먼이 맥아더를 해임해 남북 통일이 안 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트루먼 대통령이 한국전쟁 발발 직후 미군을 파병하기로 결정하지 않았다면 한국은 통일될 수 있었을 것이다. 공산주의 체제로 말이다. 한국은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이나 평화봉사단원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한데 정작 트루먼 대통령에게는 인색한 것 같다. 역사학자로서 한국을 위해 트루먼 대통령보다 더 많이 기여한 개인은 없다고 본다. 워싱턴 김균미특파원 kmkim@seoul.co.kr
  • [한국전쟁 名著] 커밍스 수정주의는 반박과 극복의 대상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석좌교수가 1981년에 펴낸 ‘한국전쟁의 기원’은 한국현대사 및 한국전쟁 연구에 기념비적 업적이다. 이 시기 미국, 러시아, 중국 등 외국학자들에 의해 주로 이루어진 한국전쟁에 관한 연구 중 커밍스는 독보적이었다. 그는 한국전쟁을 분석하는 전통주의적 시각을 반박하는 수정주의의 대표 주자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연구는 반세기 넘게 한국전쟁을 해석하는 양대 패러다임 중 한 틀을 담당해왔다. 어느 학자는 “1980년대 이후 한국전쟁 연구는 사실상 ‘커밍스 콤플렉스’와 ‘커밍스 알레르기’가 대결하는 양상”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책에서 커밍스는 1945년 이후 해방공간부터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까지 한국 내부에서 발생한 사회적 모순에 천착한다. 머리말에서 “나는 한국전쟁의 원인은 주로 1945년에서 1950년 사이의 사건에서 찾아야 하며, 그 다음으로는 식민통치기간 동안 한국에 부과된 외부세력과 그것이 전후의 한국에 남긴 독특한 자취에서 검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지적했다. 즉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을 분석하면서 일제 식민통치와 해방정국의 민족해방 움직임, 미군정의 남북분단 고착화 책임을 주요 원인으로 본 것이다. 또 한국전쟁을 ‘국제적 세력이 개입된 내전’으로 정의했다. 저자는 “싸움의 성격은 내부적이며 혁명적인 것이었다.”면서 한국전쟁의 성격을 ‘시민적 혁명전쟁’, 나아가 반외세·반봉건의 ‘민족해방전쟁’으로 규정했다. 그는 “이 전쟁에서 누가 방아쇠를 먼저 당겼는가”와 같은 질문은 의미가 없다고 강조한다. 책에 담긴 커밍스의 이러한 분석은 기존의 전통주의 세력, 그리고 수정주의 이후의 새로운 시각들로부터 동시에 공격을 받았다. 커밍스에 따르면 한국전쟁은 스탈린의 사주 없이 김일성이 주체적으로 수행한 ‘민족해방전쟁’이며, 한편으로 이승만의 ‘북진통일론’과 1949년 말까지 이어졌던 38선 부근의 게릴라 투쟁이 촉발한 재래식 군사충돌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커밍스의 주장은 ‘남침 유도설’ 내지 ‘남침 묵인설’로 명명돼 북한의 남침을 믿는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또 “전쟁은 혁명과 달리 결정의 과정이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한 국내 한국전쟁 권위자 박명림 교수의 연구 등 1990년대 중반부터 수정주의의 오류와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많은 연구가 쏟아져 나오게 하는 계기가 됐다. 실제 커밍스의 수정주의는 스탈린의 공산적화 의지에 김일성이 동참해 남침을 감행했다는 전통주의, 또 1990년대 옛 소련의 외교문서가 공개된 이후 정설로 자리잡은 김일성 계획·스탈린 승인·마오쩌둥의 협의에 의한 발발이라는 사실과 배치된다. 커밍스의 저작은 주로 1980년대까지 공개된 미국 측 자료에 의존하고 있다는 한계 때문에 1990년대 들어 러시아가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 외교문서가 속속 공개되자 부분적으로 입장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커밍스는 이후 199 7년 펴낸 ‘한국 현대사’에서 김일성의 전쟁 책임론을 인정하는 언급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커밍스는 여전히 “한국전쟁은 내전이며, 내전은 어느 한 쪽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전작에서의 오류를 지적받고 나서 출간한 ‘한국 현대사’에서도 커밍스는 여전히 “1950년 6월에 전쟁이 시작된 것은 누구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한국전쟁에 대한 내 책의 전체적 강조점은 내전은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역사 속에서 자라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국전쟁의 발발 원인에 관한 커밍스의 주장은 60년을 맞이한 오늘날까지도 반박과 극복의 대상으로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다. 그의 연구결과에 대한 동의 문제와 별개로 수정주의는 여전히 한국전쟁을 분석하는 대표적인 패러다임으로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은 한국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이정표 역할을 한다. 커밍스는 옛 소련과 중국의 외교문서를 새로 반영한 ‘한국전쟁의 기원’ 개정판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개정판은 기존의 1권과 아직 한국에 번역되지 않은 2권을 합쳐 수정·보완될 예정이다. 한국전쟁에 관한 커밍스의 마지막 저작이 될 이 책에서 커밍스식 수정주의가 어떤 모습으로 소개될지 주목된다. 윤샘이나기자 sam@seoul.co.kr
  • 문화계는 전쟁 중… 당신도 사정권

    문화계는 전쟁 중… 당신도 사정권

    전쟁의 기억은 쉬 지워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1950년 6·25전쟁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기념’(紀念)이 아니다. 처참함에 대한 기억(記憶)이자 평화에 대한 갈망이다. 문화계도 연극, 영화, 미술, 출판 등 여러 분야에서 그 기억을 더듬으며 갈망을 달래고 있다.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고향 떠난 화가들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이응노, 이쾌대, 배운성, 권옥연, 김흥수, 도상봉, 박고석, 장리석, 최영림….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60년 전 포화 속에서 월북했거나 월남한 화가들이다. 이들의 작품과 당시 상황을 담은 그림을 모은 ‘고향을 떠나야 했던 화가들’ 전이 25일 경기 고양아람누리 아람미술관에서 열린다. 9월26일까지 계속된다. ‘태극기 휘날리며’, ‘돌아오지 않는 해병’ 등 6·25전쟁 소재 영화들도 함께 상영되며 ‘전선 야곡’ 등 당시 대중가요를 들을 수 있는 부대행사도 마련된다. 같은 날 개막하는 사진전도 있다. 서울 통의동 대림미술관에서는 6·25전쟁 60주년 기념 ‘경계에서? On the Line’ 전이 8월20일까지 계속된다. 주요 전적지와 전후 세대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해석했다. 공연예술 관점에서 전쟁을 재조명한 ‘6·25전쟁, 공연예술의 기억과 흔적’ 전도 새달 31일까지 장충동 국립극장 공연예술박물관에서 열린다. ●분단 주제 100페스티벌·윤이상 등 연극계도 가세 젊은 극단들이 주축이 된 ‘100연극공동체’는 27일까지 대학로 동숭극장에서 ‘100페스티벌 2010’을 연다. 주제가 ‘전쟁, 그리고 분단’이다. 베트남전을 소재로 한 ‘사이공의 흰옷’(임세륜 연출, 극단 다 제작) 등을 무대에 올린다. 같은 기간 대학로 우석레파토리극장에서는 ‘윤이상 나비이마주마’(이동준 연출, 극단 은세계 제작)가 공연된다. 간첩 혐의를 받았던 세계적 작곡가 윤이상의 삶을 다뤘다. 29일부터 새달 4일까지 대학로 행복한극장에 오르는 ‘인내의 돌’(이성구 연출, 극단 가변 제작)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투영된 한 가정의 불행을 다룬다. 출판계는 체험과 증언에 무게를 뒀다. 미국의 전쟁다큐 작가 존 톨랜드는 ‘존 톨랜드의 6·25 1, 2’(김익희 옮김, 바움 펴냄)를 통해 1950년 6월24일부터 포로 교환이 진행된 1953년 9월까지를 추적했다. 국군과 미군은 물론 중국·북한군의 증언까지 생생히 전달하며 객관성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불의 제전, 낙동강, 순교자 등 소설도 잇따라 6·25전쟁 때 남편을 잃은 여성들과 그들의 자녀를 인터뷰한 ‘전쟁 미망인, 한국 현대사의 침묵을 깨다’(이임하 지음, 책과함께 펴냄)도 나왔다. 전쟁이 남기고 간 삶의 궤적이 신산하다. 원로작가 김원일은 18년에 걸쳐 탈고한 대하소설 ‘불의 제전’(강 펴냄) 다섯 권을 13년 만에 새로 개작 출간했다. 자신이 직접 겪은 전쟁과 사람 이야기를 담은 자전적 소설이다. 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던 김은국의 소설 ‘순교자’도 6·25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대중음악평론가 박성서씨의 ‘한국전쟁과 대중가요, 기록과 증언’(책이 있는 풍경)은 25일 출간 예정이다. ●체험과 증언으로 전하는 평화와 반전 메시지 일찌감치 포화 속으로 빠져들었던 영화·방송가는 포연이 자욱하다. 6·25전쟁 당시 학도병 71명의 감동 실화를 다룬 영화 ‘포화 속으로’는 개봉 5일 만에 120만명을 돌파하며 지난 주말 박스오피스 정상에 올랐다. 스무살 남짓의 앳된 군인들의 증언이 담긴 다큐멘터리 영화 ‘60년 전, 사선에서’도 24일 개봉한다. KBS는 1975년 인기리에 방영됐던 ‘전우’를 최수종, 이태란 주연의 동명 드라마로 리메이크해 내보내고 있다. MBC는 블록버스터 드라마 ‘로드 넘버 원’을 23일 첫 방송, 전쟁의 참상을 고발한다. ‘내가 겪은 6·25’를 주제로 한 원로 만화가 29명의 작품전도 열린다. 박록삼·윤창수·조태성·이경원기자 youngtan@seoul.co.kr
  • SBS, 나이지리아戰 점유율 77.0%…최고 49.0%

    SBS, 나이지리아戰 점유율 77.0%…최고 49.0%

    SBS가 생중계한 2010 남아공 월드컵 본선 조별리그 한국 대 나이지리아의 경기가 동시간대 점유율 77.0%를 기록했다.시청률 조사기관 AGB닐슨미디어리서치의 통계에 따르면 23일 오전 3시 30분부터 남아공 더반 스타디움에서 열린 한국과 나이지리아의 B조 예선 마지막 경기는 서울 기준 최고 분단위 시청률 49.0%, 평균 시청률 37.8%를 나타냈다.이와 관련 SBS의 한 관계자는 “한국 월드컵 원정사상 첫 16강 진출을 이뤄낸 이 경기가 한국시간으로는 새벽에 펼쳐졌지만 DMB, 인터넷, 그리고 거리응원 등으로 본 분들이 많아서 실질적으로 이 경기를 보신 분들은 시청률 수치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고 밝혔다.한편 한국 축구 대표팀은 이날 나이지리아전에서 2대 2 무승부를 기록하며 B조 2위로 16강에 진출해 오는 26일 밤 11시 남아공 포트엘리자베스 넬슨 만델라 베이 스타디움에서 A조 1위 우루과이와 맞붙는다.사진 = SBS 2010 남아공 월드컵 중계화면 캡처서울신문NTN 뉴스팀 ntn@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환희, 로드 넘버원 OST 참여 ‘히트예감’

    환희, 로드 넘버원 OST 참여 ‘히트예감’

    가수 환희가 ‘로드넘버원’ OST에 참여했다.환희는 23일 첫 방송될 MBC 수목드라마 ‘로드넘버원’의 OST Part 1.에서 ‘바람이 되어서라도’를 통해 시청자와 만난다.‘바람이 되어서라도’는 주인공 이장우(소지섭 분)의 테마로, 전쟁과 분단이라는 장벽에도 굴하지 않는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을 그린 곡이다.빅마마의 ‘배반’,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가슴이 어떻게 됐나봐’, MC몽의 ‘사랑보다 아름다운 말’등을 작곡한 서재하의 곡에, 빅마마 ‘배반’, 이승철 ‘그런사람 또 없습니다’ 등을 작사한 강은경의 노랫말을 입혔다. ‘바람이 되어서라도’는 환희의 애절한 보이스를 담았을 뿐만 아니라 호소력 영상을 수놓는 가사와 멜로디, 아름답고도 화려한 선율의 스트링, 최고의 세션들의 연주,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 최고의 명품 OST 탄생을 예고한다.한편 환희의 음원 첫 공개 이후 이어서 7월 1일 가수 휘성과 백지영이 두 번째 테마곡을 공개할 예정이다.사진 = 키이스트서울신문NTN 김경미 기자 84rornfl@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데스크 시각] 화성 정치, 금성 국민/김상연 정치부 차장

    [데스크 시각] 화성 정치, 금성 국민/김상연 정치부 차장

    그때 그들은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5개월밖에 안 된 신생 정당이 총선에서 전체 의석의 과반을 석권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래서 선거 승리 직후인 2004년 4월 말 워크숍 참석차 설악산에 모인 당선자들의 으쓱한 어깨는 거의 귀에 닿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막상 워크숍이 시작되자 이 ‘행복의 표주박’에 예상치 못한 균열이 드러났다. 당선자들이 실용파와 개혁파(이념파)로 갈리면서 격렬한 노선투쟁이 벌어진 것이다. 실용파는 17대 총선의 민심은 민생 살리기에 있다고 주장했으나 개혁파가 퍼붓는 이념의 폭포수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개혁파는 앞으로 적어도 수십년간 민심의 도도한 흐름은 진보 이념의 확장에 있을 것이라는 역사적 확신을 가진 인상이었다. 2002년 대선에서 “반미(反美)면 어떠냐.”고 했던 노무현 후보가 당선된 데 이어 2004년 총선에서 ‘노무현 정신’으로 주조(鑄造)된 정당이 압승을 거둔 ‘감격스러운’ 현실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개혁파가 장악한 열린우리당은 마침내 그 ‘진가’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들에겐 너무 절박했을지 몰라도 국민 입장에서는 불요불급한 국가보안법 폐지, 사학법 개정 등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한나라당은 극력 반대했다. 당연한 반작용이었다. 본래 이념은 종교와 비슷한 것이어서 스러질지언정 타협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가 소란스러워졌고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은 곤두박질쳤다.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가 2007년 대선에서 낙승(勝)한 것은 이런 민심의 반영이었다. 국민들은 탁상에 앉아 공론만 일삼는 정치에 아주 질려버렸다. 한나라당은 실용을 내세웠다. 하지만 불행히도 발 한쪽을 이념의 강물에 담그는 우를 범했다. 지난 정권 10년의 대북정책을 부정하고 나선 것이다. 국민들은 별로 관심 없는 이 주제로 정치권이 들끓었고 남북관계가 시끄러워졌다. 금강산에서 남한 관광객이 북한군의 총에 피살됐고 몇년 뒤 멀쩡한 군함이 북한의 어뢰공격에 두 동강이 났다. 물론 이런 불행을 전적으로 현 정부의 대북정책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이른바 진보정권 집권기에도 서해에서 두 차례나 교전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지 않은 국민이 현 정부 들어 남북관계가 피곤해지기 시작했다는 인상을 갖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달 초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패한 원인 중 하나로 전쟁불안 심리가 꼽히는 점은 가볍게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국민은 민생을 챙기라고 표를 몰아주는데 정치는 왜 자꾸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일까. A당이 국민의 지지를 얻으면 그것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이념을 부둥켜안고, 그래서 화가 난 국민이 B당을 찍으면 다시 그것을 오역(誤譯)해서 이념에 목을 맨다. ‘화성 남자, 금성 여자’처럼 뇌의 인지구조가 서로 달라서 이런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도무지 원인을 찾아내기 힘드니 하릴없이 수백년을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다. 이 천형과도 같은 이념의 과잉은 조선 중기 사림(士林)의 성리학적 이념정치에서 배태됐고, 이후 소중화(小中華) 의식을 통해 우리의 DNA 깊숙이 각인됐다고 나는 생각한다. 같은 동양권인 중국, 일본보다 우리가 유난히 이념 논쟁을 즐기는 특징을 전적으로 남북분단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는 얘기다. 명색이 공산주의를 국체로 하고 있는 중국도 지금은 실용의 극치를 구가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므로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이념에 경도되는 사람이 있다면 조용히 가슴에 손을 얹고 몸 안의 DNA를 관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각 당은 이런 근본주의자들에게 휘둘리는 사태를 경계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선거 때마다 “민심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는 해묵은 고해성사를 반복해야 할 것이다. carlos@seoul.co.kr
  • [국내 학자가 본 한국전쟁] “분단과 전쟁 사이에 필연성 없다”

    [국내 학자가 본 한국전쟁] “분단과 전쟁 사이에 필연성 없다”

    박명림 연세대 대학원 지역학협동과정 교수는 세계적 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한국전쟁 권위자 중 한 사람이다. 박 교수는 17일 “한국전쟁은 우리 역사가 질주하는 데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었으며, 1950년은 한국 근대화 혁명의 시기”라고 밝혔다. 또 전후 한국의 발전상에 대해 “거대한 역사적 비극을 생산적·창조적으로 활용한 대표적 성공 케이스”라고 평가했다. 박 교수의 연구는 한국전쟁 이후 반세기 동안 자리매김해온 브루스 커밍스의 수정주의를 뛰어넘는 보편적 분석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이 ‘48년 질서’에서 시작됐다고 했는데. -내가 정의하는 ‘48년 질서’란 통일과 분단의 가능성이 공존하는 유동적 체제다. 이는 종전 후 남북간 적대가 강화되고 통일 가능성이 사라진 ‘53년 체제’와 명확히 구분된다. ‘48년 질서’는 한국인들의 주체적인 선택에 따라 분단의 고정으로 갈 수도, 통일의 성취로 갈 수도 있는 역사적 가능의 공간이었다. 그동안 한국전쟁을 설명하던 두개의 지배적 패러다임, 즉 김일성의 남침행위를 강조하는 전통주의와 식민시대부터 쌓여온 사회모순의 폭발로 보는 수정주의를 모두 극복하고 싶었다. →분단의 원인과 전쟁의 원인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나. -분단과 전쟁 사이에 필연성은 없다. 많은 나라에서 분단이 일어났지만 반드시 전쟁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다. 남북 분단이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 것은 목적과 수단이 분리돼 정치행위의 이성적 측면이 결여됐기 때문이다. 전쟁이라는 수단을 택함으로써 통일이라는 선한 목적이 무(無)화됐다. 남북한 모두 마찬가지였다. 또 다른 원인은 한국문제의 국제성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역사 이래 한반도의 갈등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승만을 제거하면 통일할 수 있다는 김일성의 믿음과 달리 한반도의 분단에는 미국·소련 등이 깊숙이 연관돼 있었다. 전쟁은 민족 차원에서만 통일을 꿈꿨던 전략적 오류의 결과였다. →한국전쟁이 가진 의미는 무엇인가. -국제적·지역적·민족적 차원 3층 수준의 복합적 의미를 지닌다. 국제적 차원에서 한국전쟁은 사실상 세계 3차 대전을 대체하는 냉전시대 가장 큰 전쟁이었다. 미국·일본, 소련·중국 등 세계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한반도에서 벌인 전면전이었다. 지역차원의 의미는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부상하고 일본이 복귀한 것이다. 북한의 든든한 후원자로 미국에 맞섰던 중국은 이후 동아시아 냉전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자로 발돋움했고 일본은 미·일동맹을 통해 전범국가에서 국제사회 일원으로 당당히 복귀했다. 마지막으로 민족적 차원에서는 분단이 항구화·세계화됐다. 남북한이 스스로 통일할 수 없는 ‘53년 체제’가 구축된 것이다. →한국전쟁이 한국민들에게 미친 영향은. -한국전쟁은 역설적으로 ‘평화의 절대성’에 대한 확신을 심어줬다. 겉으로는 상대를 증오하지만 속으로는 상호상멸, 즉 전쟁을 일으키면 양쪽 모두 멸망한다는 믿음을 갖게 했다. 한국전쟁은 적대와 증오도 낳았지만 분단상태의 평화질서를 가능케 했다. 또 한국전쟁은 삶에 대한 한국민들의 의지를 강화시켰다. 전쟁이 끝난 후 무수히 많은 교회·학교가 설립되고, 신문 발행부수도 급격히 늘어났다. 강력한 생존의지와 경쟁의지를 심어준 것이다. →천안함 사건 이후 한반도 긴장상태가 고조되고 있다. 60년 전 상황과 비교한다면. -우발적·국지적 충돌의 우려는 있지만 전면전쟁의 위험은 사라졌다. 박정희 정권 때의 1·21사태, 노태우 정권의 KAL기 폭파사건 등 한국전쟁 종전 이후에도 남북간 긴장과 갈등은 계속해서 있었다. 그러나 보복과 맞대응을 하지 않고 분단을 평화적으로 관리해 옴으로써 북한은 남북 경쟁에서 나가떨어졌다. 남북간 경쟁은 이미 끝났다. 앞으로는 ‘비판적 포용’의 자세로 어떻게 통일로 갈 것인지를 연구해야 한다. →한국전쟁 발발 60년을 정리한다면. -60년 후를 생각했으면 좋겠다. ‘돌아보기’보다 중요한 것은 ‘내다보기’다. 지난 역사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앞으로의 비전과 각오를 새기는 것이 중요하다. 지난 60년을 잘 성찰해서 전쟁을 막고, 평화·자유·민주주의 등 정신적 가치를 물질적 가치 못지않게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윤샘이나기자 sam@seoul.co.kr
  • 종교계 6·25전쟁 60주년 ‘색’다른 행사

    종교계 6·25전쟁 60주년 ‘색’다른 행사

    6·25전쟁은 민족과 인류에게는 비극이었고, 종교계에는 고난과 시련의 시간이었다. 3년간 전쟁으로 피폐해진 한국 사회는 사랑과 자비를 갈구했으나 여러 교단들은 이념 문제로 억압받거나 또는 난리 중에 흩어져 공동체가 와해되곤 했다. 올해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시련의 시기’를 되돌아 보는 종교계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그런데 대대적인 60주년 행사가 교단별로 조금씩 색채를 달리하고 있어 흥미롭다. 호국영령을 기리고 평화를 비는 마음은 비슷하지만 불교·원불교는 ‘위령’에 무게를 둔 반면, 기독교는 ‘분단과 평화’에 초점을 맞췄다. ●불교계 20일 대법회… 천안함 사병 위패 모셔 먼저 조계종은 6·25전쟁 관련 행사를 군종특별교구(교구장 자광 스님)에서 주관한다. ‘호국불교’ 기치를 살려 군(軍) 내 포교를 담당하는 군종특별교구는 지난달부터 5군단 등 주요 군부대를 순회하며 전몰장병을 위한 ‘호국영령 합동 위령 대재(大齋)’를 지내고 있다. 20일에는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총무원장 스님, 국방부 장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호국영령 천도 대법회’를 연다. 6·25 전몰장병뿐 아니라 그간 군 복무 중 사망한 모든 장병을 기린다. 천안함 순국 사병들의 위패도 모신다. 원불교도 6·25를 전후한 일요일에 전국 500여개 교당에서 합동 위령재를 진행한다. ●개신교 22일 대규모 기도회…‘부시 간증’ 논란 개신교는 성도 10만여명이 모이는 대대적인 기도회를 연다. 순복음교회(담임목사 이영훈)와 극동방송, 기독교TV 등이 주축이 돼 22일 오후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6·25전쟁 60년 평화기도회’를 개최한다. ‘분단을 넘어 평화로’라는 주제로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 김삼환 명성교회 담임목사 등이 기도를 이끈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참석해 ‘자유는 대가를 치러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란 내용으로 간증을 할 예정이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의 주역이라는 점에서 부시 전 대통령의 간증 자격을 두고 논란도 적지 않다. 이에 앞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총무 권오성 목사)는 17일 서울 연지동 기독교회관에서 민족화해주간 연합기도회를 연다. NCCK가 2년 동안 논의했던 대북 관련 교회 활동 방안을 담은 성명문도 발표할 예정이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회장 이광선 목사)도 6·25를 전후해 기념예배를 진행한다. 천주교는 오는 20일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정했다.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위원장 김운회 주교)가 주축이 돼 전국에서 남북통일 기원미사를 봉헌하며, 민족화해 운동을 위한 특별헌금도 모은다. 이산 가족, 새터민, 북한 복음화 등을 주제로 ‘9일 기도’(17~25일)도 연다. ●전쟁 경험과 사회적 역할 차이에서 비롯 각 교단들의 ‘닮았지만 다른’ 추모행사에 대해 전문가들은 6·25전쟁에 대한 경험과 한국 사회에서의 역할 차이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 김종서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는 “위령재는 죽은 자들뿐 아니라 살아 있는 자들의 마음의 빚을 덜어주는 종교의례”라면서 “위령재는 심리 치유의 색채가 강한 불교의 특성을 잘 반영한 행사”라고 지적했다. 분단·평화 등 거국적 주제의 기독교 행사는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발전한 기독교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고 분석했다. 기독교는 전쟁 전 주로 서북지역에서 강세였다. 하지만 전쟁 당시 공산당의 억압으로 교인들이 대거 남하하며 남쪽의 교세가 커졌고, 이후 성장 과정에서 이승만·박정희 정부와 일부 친분을 두기도 했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日학자가 본 한국전쟁] “60년전 동북아 정세 지금과 판박이”

    [日학자가 본 한국전쟁] “60년전 동북아 정세 지금과 판박이”

    한국전쟁의 발발 원인과 관련해 일본내 진보적인 학자로 꼽히는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는 15일 “한국전쟁은 북한이 명확하게 무력으로 통일하려는 목적으로 남한을 침입한 것”이라고 규정했다. 와다 교수는 브루스 커밍스와 같이 한국전쟁과 관련해 주로 진보적인 입장을 취해왔다. 당초 전공은 러시아 근대사였지만 1980년대부터 북한 연구로 이름을 날렸다. 다음은 와다 교수와의 일문일답. →한국에선 한국전쟁의 원인과 관련해 북침설과 남침유도설 등이 여전히 존재한다. -러시아연방 대통령문서보관소에 있던 스탈린과 마오쩌둥(毛澤東)간 왕래 편지가 공개됐지만 한국전쟁은 북한이 명확하게 무력으로 통일하려는 목적으로 남한을 침입한 것이다. 북한의 남침을 스탈린과 마우쩌둥이 지지했고 이제는 이러한 사실을 누구도 의아하지 않게 생각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단순하게 북한이 남한을 갑자기 침입한 전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1948년 당시 남한도 북한도 분단된 상황에서 서로를 유일한 합법 단일 국가로 생각했다. 당시 북한은 국토완정(國土完整·국토완전통일)을, 남한은 북벌통일(北伐統一)을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서로를 무력으로 통일하려고 노렸다. 이런 상황에서 김일성이 세 번 정도 스탈린에게 남침을 요청했는데 결국 스탈린이 이를 받아들여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스탈린은 원래 ‘3대 남침 불가론’을 내세워 김일성의 남침 요구를 거절해오다 입장을 바꿨는데. -미군과 소련이 2차 세계대전 이후에 38선 유지 등 동북아시아에 대한 협정을 맺었다. 소련은 당시 미국의 파워가 너무 세서 동북아시아에서 미국과의 대립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김일성의 집요한 요청이 있었고, 마우쩌둥의 중국 통일이 스탈린에게는 상당한 자극이 됐다. 이런 와중에 미국 국무장관인 딘 에치슨이 1950년 1월12일 전미국신문기자협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태평양에서 미국의 방위선에 한국을 포함시키지 않는다고 밝히자 스탈린은 김일성이 남침을 해도 미군이 지원에 나서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허락한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의 한반도 주변 정세는. -한국전쟁은 남북한뿐만 아니라 주변 국가들이 어떤 형식으로든 참가한 동북아시아의 상황을 규정하는 전쟁이다. 남북한은 물론 일본, 중국 등도 이후에 많이 변했지만 정치적인 상황은 60년전과 비교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한반도는 아직 휴전상태로 남아 있다. 일본은 전쟁과정에서 일·미 안보조약을 맺어서 자위대가 생기고 오키나와에서는 사실상의 미군점령이 계속되고 있다. →일본과 타이완의 역할은 뭐였나. -일본과 타이완은 한국전쟁의 참전국이 아니다. 하지만 두 나라는 사실상 전쟁에 참여해 경제적으로 큰 이익을 봤다. 미군은 전쟁기간 일본 군사기지를 활용했다. 한반도로 출격한 미군 전투기들은 일본 군사기지에서 출발했으며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된 미군의 전차상륙탱크(LST)들은 대부분 일본인 승무원에 의해 움직였다. 미군은 또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타이완을 방어하기 위해 제7함대를 파견했다. 타이완은 이 과정에서 미국의 지지로 일본과 국교를 맺고 지위를 확립했다. →천안함 사태 이후 신냉전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지금 동북아 정세를 보면 남북관계 파탄과 북·미관계 정체 등 두 가지가 겹쳐서 매우 좋지 않은 상황에 놓여있다. 한국 정부는 북한이 천안함을 공격했다고 결론을 내렸지만 이게 사실이라면 북한이 도대체 어떤 의미로 그런 것을 해야 했는지 의문이 많다. 북한이 했다면 국제적 비난을 당연히 받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군사적 긴장상태를 초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한국정부가 유엔을 통한 북한제재에 나서고 있지만 북한이 저렇게 막무가내인 상황에선 제재를 한다고 한들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한국 정부가 제재를 하고자 하는 심정은 알겠지만 숨을 고르고,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한국의 지자체 선거 결과 예상외로 여당이 패했는데. -한국 국민이 현명하게 대처한 결과다. 한국 국민은 대단한 선택을 했다. 더이상의 냉전을 원치않는다는 신호인 셈이다. 한반도에 또 한번의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정대세의 ‘발칙한 도전’ 한반도 아픔도 날린다

    정대세의 ‘발칙한 도전’ 한반도 아픔도 날린다

    북한의 주전 공격수 정대세(26)는 ‘축구’라는 소재로 한국과 소통한다. 한국과 함께 남아공월드컵 B조에 속한 그리스, 나이지리아와 평가전을 치른 뒤 한국에다 그들의 장단점과 필승전략을 전했다. 낙관적 예상까지 더했다. 한국의 한 포털사이트에 칼럼도 연재한다. 천안함 사태로 꽁꽁 얼어붙은 정세 속, 유일한 남북한의 소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정대세는 북한뿐만 아니라 한국팬들의 열렬한 응원을 받는다. ‘7000만 한민족의 공격수’로 떠오른다. 마냥 밝고 당당해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재일교포 3세인 정대세의 삶에는 지난 100년 동안 우리 민족이 겪었던 아픔과 이로 인한 모순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일제강점기, 전쟁과 분단, 이념갈등, 그리고 재일 조선인에 대한 차별 등…. 일본 나고야에서 한국 국적의 재일교포 2세 아버지와 ‘조선’ 국적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정대세는 우리말을 가르치는 조총련계 조선학교에 입학했다. 여학생들의 치마·저고리가 찢기는 뿌리깊은 차별과 ‘조센진’이라는 놀림 속에 오롯이 공을 찼다. 일본은 싫었지만 축구는 계속하고 싶었다. 2006년 일본 프로축구 J-리그 가와사키 프론탈레에 입단해 2년 만에 최고의 공격수가 됐다. “꿈꾸던 무대”인 월드컵 무대를 ‘조선의 스트라이커’로 누비고 싶은 정대세의 욕심은 점점 커졌다. 어머니의 나라, 북한의 국가대표로 뛰기 위해 아버지의 나라, 한국 국적을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한국은 북한 국적을 인정하지 않아 국적은 그대로 한국. 재일조선인축구협회의 도움 속에 국제축구연맹(FIFA)에 남북한의 상황과 자신의 독특한 가족사를 설명한 자필 청원서를 보내는 등의 우여곡절 끝에 북한 국가대표가 됐다. 정대세는 축구에 대한 열망 하나로 삶의 질곡을 정면으로 돌파한 것이다. 몸싸움을 피하지 않는 저돌적인 드리블과 폭발적인 슈팅으로 설명되는 그의 플레이스타일과 꼭 닮았다. 드디어 꿈의 무대를 밟는 정대세는 불행하게도 엄청난 상대들을 만난다. 브라질, 포르투갈, 코트디부아르. 축구 를 잘하는 팀들만 있는 ‘죽음의 G조’다. 조별리그에서 결승상대를 만난 셈. 또 그가 존경하는 박지성(맨체스터 유나이티드)과 경기를 하려면 결승까지 가야 한다. 한국과 북한은 월드컵에서도 이렇게 만나기 힘들다. 그러나 정대세는 “브라질도 잡을 수 있다.”고 했다. 16일 요하네스버그의 엘리스파크에서 오전 3시30분 열릴 조별리그에서 브라질을 상대할 정대세의 활약이 기대되는 이유다. 장형우기자 zangzak@seoul.co.kr ■ 정대세 ▲출생 1984년 3월2일 일본 나고야생 ▲신체 181㎝, 80㎏ ▲국적 대한민국 ▲소속 북한 월드컵대표팀 / 일본 프로축구 J-리그 가와사키 프론탈레 ▲성적 20경기 12골(A매치) / 83경기 27골(J-리그)
  • 李대통령 “민심 무겁게 수용…4대강 계속”

    李대통령 “민심 무겁게 수용…4대강 계속”

    KBS, MBC, SBS 등 공중파 3사를 비롯한 각 방송사가 14일 오전 이명박 대통령의 TV연설 내용을 보도했다.KBS 1TV 뉴스는 이날 이 대통령의 연설이 끝난 직후 “이명박 대통령이 지방선거에 반영된 민심을 수용하고 소통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국정운용 시스템과 인사 쇄신을 단행할 것이며 세종시 문제는 국회 표결 결과를 따르겠다고 밝혔다”고 전했다.KBS의 보도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선거를 통해 표출된 민심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다. 앞으로도 국민들이 원하는 변화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도록 하겠다”며 청와대와 내각 시스템 개편 의사를 시사했다.또한 이 대통령은 “국회의원 한 분 한 분이 여야를 떠나 역사적 책임을 염두에 두면서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시기를 바란다. 정부는 국회가 표결로 내린 결정을 존중할 것”이라며 4대강 사업에 대한 지속적 추진 입장을 분명히 했다.한편 이 대통령의 TV연설은 공중파 3사와 케이블 보도채널 YTN의 실시간 시청률 합계 29.7%(AGB닐슨미디어리서치), 점유율 57.5%를 기록했다. 오전 8시 2분에는 4개 채널 전체 합계 최고 분단위 시청률 31.2%를 나타내기도 했다.사진 = KBS 1TV 뉴스 방송화면 캡처서울신문NTN 뉴스팀 ntn@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6·15 남북공동선언 10주년 성과와 한계

    6·15 남북공동선언 10주년 성과와 한계

    15일로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2000년 6월 처음 만나 한반도 화해·협력시대를 천명했던 6·15 남북공동선언이 10주년을 맞는다. 남북 간 교류·협력이라는 큰 물꼬를 튼 6·15 공동선언은 지난 10년간 남북 간 상호 화해·협력의 증진을 도모하는 실천적 노력으로 이어지면서 한반도 긴장완화에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남북 교류·협력시대 열어 실제로 남북은 경의선과 동해선 철도·도로 연결을 통한 ‘혈맥 잇기’에 나서 2003년에 도로 통행을, 2007년에는 경의선 철로운행을 시작했다. 2005년부터는 남한의 풍부한 자본과 기술에 북한의 값싼 노동력과 토지를 결합시킨 개성공단을 본격 가동하면서 남북 교류·협력 시대를 열었다. 이 덕분에 2000년 4억 2500만달러에 불과했던 남북교역 규모가 2007년에는 4배가 넘는 17억 9700만달러로 증가했고, 개성공단 생산액도 2005년 1491만달러에서 2009년 2억 5647만달러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룩했다. 인적 교류도 2000년 7986명에서 2007년 15만 9214명으로 20배 가까이 늘어났고, 선박 운항은 2000년 2073회에서 2007년 1만 1891회, 항공기 운항은 19회에서 153회로 급증했다. 2007년 제2차 남북정상회담과 ‘10·4선언’ 이후 남북 교류·협력이 더욱 탄력이 붙으면서 한층 다양해져 수산·농업·광업·보건의료 등 부문에서 당국 간 회담이 잇따라 열렸다. 여기에 2000∼2007년 남북 간에 1만 3593명의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진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과다. 이수훈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장은 “6·15 공동선언은 남북 기본합의서에 따른 화해·협력을 정책화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면서 “무엇보다 이를 통해 경협사업 등이 활발해지면서 남북 간 화해와 협력,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 완화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평가했다. ●군사적 신뢰 구축은 실패 하지만 한계점도 드러냈다. 경제협력 부문과는 달리 정치·군사 부문 등에서는 공동선언의 의미가 크게 바랬기 때문이다. 공동선언 이후 남북은 장관급회담 21회, 국방장관회담 2회, 장성급회담 7회, 군사실무회담 35회를 개최했으나 분단 극복이라는 근본 문제를 푸는 데는 남북이 이견을 노출했다. 서해상의 우발적 충돌 방지와 군사분계선에서 심리전 수단 제거, 남북교류의 군사적 보장 등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낸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군사적 신뢰 구축에는 실패한 것이다. 특히 북한이 핵개발을 포기하지 않고 1·2차 핵실험을 강행하면서 남한 내에서 ‘퍼주기’ 논란이 거세져 경제·사회·문화 등 부문의 교류가 위축됐고, 2008년 집권한 이명박 정부가 ‘선(先) 핵포기, 후(後) 관계개선’을 대북정책의 기조로 삼으면서 남북관계는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3월 천안함 사태마저 발생하면서 공동선언의 의미는 사실상 빛을 잃었다. 북한 전문가는 “공동선언이 남한 내부에서 합의절차 부족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어 갈등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면서 “이렇다 보니 이행 과정에서 남북 문제가 지나치게 정치화되는 바람에 공동선언의 남북 간 합의라는 타당성마저 크게 훼손돼 계승되지 못해 아쉽다.”고 지적했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20~30년전 소설 읽으며 격정 다시 느껴”

    “20~30년전 소설 읽으며 격정 다시 느껴”

    뙤약볕이 들면 느티나무 숲의 큼직한 그늘 밑으로 들어갔다. 숭덩숭덩 썰어 놓은 수박은 달았다. 마을 주민들은 한창 가을걷이 중이건만 경운기 소리조차 애써 아껴줬다. 소슬한 바람 불어오면 옹기종기 붙어 앉았다. 빗줄기 쏟아지는 날에는 누옥 지붕 아래에서 퉁당퉁당 빗소리와 함께했다. 별이 총총한 여름밤이면 띄엄띄엄 모깃불 피웠다. 동네 누렁이, 흰둥이들은 마침 숨을 죽였다. 2006년 9월부터 2008년 9월까지 매달 사람들이 함께 모여 소설을 읽고 이야기하며, 문학과 인간 존재의 비의(秘意)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곤 했던 경기 고양시 선유리 154의2번지, 소설가 이호철(78)의 집필실 안팎 풍경이다. 이들은 이곳을 ‘소설의 느티나무숲’이라고 불렀다. 일생에 걸쳐 분단 문제에 천착한 작가로 한국 문학사에 굵은 획을 새긴 이호철은 이곳 선유리에서 2년 동안 소설 독회(讀會)를 가졌다. 신선이 놀았다고 선유리(仙遊里)였으리라. 신선은 간데 없지만 흰 머리, 흰 수염 노() 작가의 문학을 아끼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매달 그의 작품 하나씩을 골라 함께 읽고, 토론했다. 걔중에는 직업으로 소설, 혹은 시를 쓰는 이도 있었고, 평범한 직장인, 주부, 학생도 있었다. 또한 그의 작품에 지대한 관심을 보내는 외국인이 일부러 먼 길을 찾아오기도 했다. 날이 궂으면 열댓 명 남짓만 모이기도 했고, 우연히 서로 마음이 맞은 날에는 70~80명을 훌쩍 넘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나눈 얘기들이 책으로 묶여 나왔다. ‘선유리-이호철 소설 독회록’(민병모 엮음, 미뉴엣 펴냄)이다. 11일 서울 인사동에서 만난 이호철은 “행복한 신선 놀음이 2년을 훌쩍 넘겼다.”면서 “덕분에 20~30년 전 소설을 다시 읽으며 그때의 격정과 환희를 새롭게 느낄 수 있었다.”고 환하게 웃었다. ‘소설 독회’는 낯설다. 보편화된 시 낭송회와는 달리 소설을 읽고 얘기 나누는 형식은 국내에서 그때까지 거의 없었던 탓이다. ‘선유리’는 일종의 창작 노트이거나 소설 창작 강의록이며, 이호철 작품 세계의 시원(始原)을 확인시켜 주는 ‘이호철 문학론’이다. 독회에서는 등단작 ‘탈향’을 비롯해 장편 연작소설 ‘남녘사람 북녁사람’, ‘오돌할멈’, ‘닳아지는 살들’, ‘나상’, ‘소시민’ 등 작품 하나하나, 문장 구절구절마다 현미경과 망원경이 동시에 들이대졌다. 그가 사람들 앞에 낱낱이 발가벗겨지는 셈이다. 그래서 그는 때로는 자신의 의도와 다른 작품 해석에 강하게 반박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조차 인식하지 못한 접근에 무릎 치며 동의를 보내기도 한다. 편안하게 술술 읽혀지는 문장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치열한 사유의 결과물이었는지 짐작케 한다. 독회에서 택해진 작품들은 대부분 영어, 불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 10여개 나라 말로 번역됐다. 독일에서 국제적으로 예술문화 공로가 큰 이들에게 주는 프리드리히 실러 메달을 받았고, 브라질에서는 ‘닳아지는 살들’을 일컬어 “오늘날 세계 문학의 대표적인 단편소설집이 있다면 마땅히 수록되어야 할 작품”(젠틸 지 파리아 브라질 상파울루주립대 교수)이라는 상찬을 듣기도 했다. 그가 놓인 현실 속의 좌표는 독특하다. 북쪽 고향을 등진 ‘탈향민’이자 군사독재정권 시절 재야 활동을 하며 여러 시국사건으로 툭하면 감옥소를 들락거려야 했다. 그렇게 끊임없이 한반도의 분단 모순을 핵심적인 작품 주제로 삼았건만 문학의 이념적 도구화를 어떤 것보다 경계하는 순정의 작품 세계를 지향했다. 그는 1950년 열아홉 살 소년병으로 인민군에 끌려가 총알 한 방 쏘지 않고 ‘따발총’을 내버린 뒤 국군에 포로로 붙잡힌다. 그리고 홀로 떨궈진 부산에서 부두 노동자로, 미군 경비원으로 일하게 된다. 그럴 때도 그의 손에는 얼기설기 바늘로 꿰맨 종이수첩과 토막연필이 늘 들려 있었다. 순정한 예술의 영혼을 가진 그에게는 살륙과 파괴의 전쟁, 가난과 외로움조차 인간성 본연의 것에 대한 성찰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였던 것이다. 그는 “남북 문제가 젊은 작가들에게 외면받는 것에 대해 이해한다, 나도 지긋지긋하니까.”라면서도 “한국 문학이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모순인 분단을 빼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라고 일상에 빠진 후배 작가들을 에둘러 비판했다. 세계 근대 인류사의 슬픈 유산인 전쟁과 분단을 현재의 상처로 여전히 싸매고 있는 한반도에 살고 있기에 해외 문단은 그를 주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호철이 우리 문학이 세계 문단과 맺는 접점에서 소중한 자산으로 평가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조만간 재외동포 문제를 다룬 장편소설 ‘흐르는 세월과 막힌 사람’(가제)을 내놓을 계획이다. 글 사진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영화단신]

    ●국내 프로야구 사상 최고 라이벌로 꼽히는 ‘무쇠팔’ 최동원과 ‘무등산 폭격기’ 선동열이 펼친 명승부가 영화로 만들어진다. 영화 제작사 초이스컷픽처스는 최동원-선동열의 명승부를 다룬 가칭 ‘퍼펙트게임’을 제작한다. ‘인사동 스캔들’을 연출한 박희곤 감독이 메가폰을 잡는다. 현재 시나리오 작업 중이며, 내년 상반기 개봉을 목표로 올 하반기 촬영에 들어간다. ●국내 최초 휴전선 로케이션 촬영작이자 한국 영화사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박상호 감독의 ‘비무장지대’(1965)가 DVD로 나왔다. 한국영상자료원은 올해 고전영화 컬렉션의 첫 번째 작품으로 두 어린아이의 시선을 통해 분단의 비애를 우화적으로 표현한 ‘비무장지대’를 골랐다. ●국내 간판 배우 송강호와 샛별 신세경이 영화 ‘푸른소금’(가제)에서 호흡을 맞춘다. 영화 제작사 스튜디오블루는 은퇴한 조직의 보스 두헌(송강호)에게 정체불명의 킬러 세빈(신세경)이 접근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고 설명했다. ‘시월애’의 이현승 감독이 각본과 연출을 맡았다. 다음 달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영화 ‘타짜’, ‘전우치’의 최동훈 감독이 오는 24일부터 다음달 1일까지 CGV 압구정에서 열리는 제9회 미쟝센단편영화제의 대표집행위원을 맡았다.
  • [문화마당] 한반도와 로마 제국/김기봉 경기대 역사학 교수

    [문화마당] 한반도와 로마 제국/김기봉 경기대 역사학 교수

    천안함 사태로 우리가 새삼 깨닫는 것이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다. 한반도는 지리적으로는 대륙 세력인 중국과 해양 세력인 일본 사이에 끼여 있는 샌드위치 신세고, 정치적으로는 G2로 불리는 미국과 중국이 신냉전적 대결을 벌이는 전장이다. 한반도의 운명이 주변 세력의 판도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공식화하는 이론이 반도 사관이다. 반도 사관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역사학적으로 옹호하는 식민 사관의 일종이다. 식민 사관은 전근대에서는 중국에 사대하여 왕조 국가의 정통성을 유지했던 조선이, 중국 대신에 일본이 동아시아의 맹주로 등장한 근대에서는 일제 식민지가 되는 것을 합리화하는 역사 이데올로기다. 해방 후 한국의 역사가들은 식민 사관에서 탈피하여 한국사의 독자성과 자주성을 재인식하는 과학적 한국사학을 정립하는 것을 제일과제로 삼았다. 하지만 1945년 이후 한국사는 과연 독자적이며 자주적으로 전개됐는가? 일제로부터의 해방이 독립투쟁의 성과가 아니라 연합군이 승리한 결과로 주어진 것이었기에, 이후 한반도의 운명은 주변 열강의 세력관계 속에서 결정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시작된 미국과 소련의 냉전은 해방을 기점으로 출발한 한국 현대사를 분단시대로 만들었다. 천안함 사태는 우리가 여전히 분단시대에 살고 있음을 확인시켜준 사건이다. 북한 어뢰를 맞고 천안함이 침몰했다면, 북한은 가해자고 우리는 피해자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미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의 동의와 협조 없이는 북한에 대해 어떤 효과적인 제재도 할 수 없는 현실이다. 북한과 남한은 같은 민족이다. 하지만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공동 운명체가 되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한국사의 비극이다. 이 같은 한국사의 비극은 삼국 시대부터 있었다. 삼국 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사이에 ‘동족상잔’이 벌어졌다. 신라의 삼국 통일이 중국 당나라와의 연합을 통해 이룩됐듯이, 오늘의 한반도 통일도 미국과 중국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세계를 주도하는 선진국 모임인 주요 20개국(G20)의 주최국이 되는 위대한 국가를 이룩했다고 아무리 자랑해도, 강대국을 향해 사대외교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역사적 운명인가? 우리가 반도 사관을 반증하는 역사적 사례로 드는 것이 로마 제국이다. 이탈리아 반도의 작은 도시 국가로 출발한 로마는 시작은 미미했지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이 같은 로마의 힘은 어디서 비롯했는가? 인종과 종교가 다른 민족에게 시민권을 부여한 관용이 로마를 보편 제국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일반적 설명이다. 에이미 추아는 ‘제국의 미래’(이순희 옮김, 비아북 펴냄, 2008)에서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초강대국들은 관용을 토대로 하여 위대한 국가를 이룩했음을 밝혀냈다. 그녀는 어떤 시대와 세계에서도 가장 독창적이고 진취적이며 숙련된 사람이 한 지역과 민족에서만 나올 수는 없으므로, 어느 특정 국가가 세계를 제패하려면 자본과 인적 자원을 ‘세계’로부터 충원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분단시대 대한민국이 강대국이 되기엔 너무나 작은 나라다. 북한은 당위적으로는 같은 민족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가장 위험한 적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힘은 로마처럼 우리 공화국 안에 들어온 타자들을 대한민국 시민으로 포섭하는 것으로부터 나올 수 있다. 대한민국이 점점 다문화 사회로 변하는 것은 민족 정체성의 위기이자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다. 이제 지방선거도 끝났다. 국민은 선거를 통해 여러 지역에서 기존의 정치가를 해고하고 새로운 지도자를 선택했다. 이번 선거에서 국민의 선택을 받은 정치가 가운데 로마 제국처럼 반도 국가를 선진 조국으로 디자인하는 위대한 지도자가 있기를 기원한다.
  • [한국전쟁 60주년 기획] “통일은 결코 무력으로 안 된다”

    [한국전쟁 60주년 기획] “통일은 결코 무력으로 안 된다”

    한국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을 일으켜 한민족의 분단에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역사 너머로 사라졌다. 그러나 민족의 통일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출판물과 영화로 신세대에 전해지고 있다. 전쟁이 발생한 지 60년이 지났는데도 한반도는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폭발 가능성이 큰 곳이다. 불안정한 휴전하에서 남북한은 준전시 상태로 유지됐다. 금방이라도 군사적 충돌이 재현될 것 같았지만 위기를 극복했다. 그동안 남한에서는 경제발전이 우선, 군사문제는 이차적인 순위로 밀려났고, 북한은 선군 정치로 일관해 왔다. 지난 세기 러시아도 소비에트시대의 군사적 분쟁에 휩싸여 있었다. 러시아사람들 사이에서도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이 잊혀져 가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 파견됐던 옛 소련 공군 출신과 한반도의 현황을 좀 더 깊이 연구해 보려고 하는 학자들만이 잊지 않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 서방세계의 정보를 자유롭게 얻는 러시아 신세대는 한국전쟁을 북한의 돌발적인 남침으로 알고 있다. 그들은 한국전쟁을 그 전쟁에서 승리해 공산주의 체제를 한반도의 남쪽까지 확산시키고 미국을 중국과의 군사대결에 끌어넣는다는 것에 목적을 두고 스탈린이 직접 주도해 행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대부분의 러시아 전문가들은 한반도에서 발생한 한국전쟁은 외부적인 영향보다도 내부적인 요소가 더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필자는 더 나아가서 제1차 대전의 마지막 단계에 일어난 제정 러시아 붕괴의 결말이었던 적군(赤軍)과 백군(白軍) 간에 벌어진 내전과 제3차 전쟁의 서곡이 충분히 될 수 있었던 남북한 간 동족상잔의 유혈전쟁, 그 두 전쟁 사이에 일종의 유사성이 있다고 본다. 결국은 러시아에서 적색테러와 백색테러, 한국의 공산테러와 반공테러 등은 우리 양국에서 시민적 자유와 민주사회의 형성과정을 수십 년 거꾸로 돌려놓았다고 볼 수 있다. 흥미로운 유사성이 또 하나 있다. 러시아는 제정 러시아가 남긴 폐허 위에서 일어나 20년 만에 세계 역사상 가장 유혈적인 제2차 대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반세기에 걸쳐 미국과의 군사 정치적 세력균형을 유지해온 강대국으로 변했다. 전후 한국에서도 같은 능력을 볼 수 있다. 3년 동안의 한국전쟁으로 수백만 명의 희생자를 내고 전 국토가 폐허가 되었다. 예를 들어 민간인의 피해는 여러 통계에 의하면 150만명 내지 400만명에 달해 제일 컸다. 제2차 대전 당시 소련의 인구손실과 대비할 수 있다. 남북한은 경제적으로도 큰 피해를 보았다. 남한의 경제적 피해 규모는 30억달러로 평가되었으며 북한은 4200억원이었다. 북한의 피해는 남한보다 훨씬 더 컸다. 왜냐하면 2년 동안 미 공군의 공습으로 북한의 경제기반이 깡그리 파괴됐기 때문이다. 남한은 전쟁의 피해에도 단 한 세대 만에 아시아 국가 중에 일본에 버금가는 산업대국이라는 지위와 세계 12대 경제 강대국 대열에 드는 국가로 성장했다. 북한의 발전은 그다지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자기보존과 생존에 있어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고, 핵클럽에 사실상 가입을 선언한 상태다. 올해는 한국전쟁 발발 60주년과 동시에 한국전쟁에 개입했던 러시아와 수교한 지 20주년이 되는 해다. 한반도에는 1950년 전쟁 직전의 긴장이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통일은 무력으로 할 수 없다는 교훈을 한국사람 자신들이 잘 알고 있다. 물론 그동안 힘의 배분이 변화되어 북한과 남한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예전과 비교해 뒤바뀌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60년 전에 무력통일을 실패한 대가로 수많은 희생과 고통을 치러야 했다면 오늘날은 휴전선 쌍방에서 대량 살상무기를 포함한 군비의 축적규모를 살필 때 어떤 전쟁 시나리오도 전쟁이 발생하게 된다면 아예 한민족의 존재 여부 자체가 의심스럽게 될 확률이 높다고 볼 수밖에 없다. 러시아로서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극동에 평화가 유지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 [한국전쟁 60주년 기획] 러 문서보관소 ‘한국전쟁사 寶庫’ 자료공개로 ‘북침설’ 사장시켜

    [한국전쟁 60주년 기획] 러 문서보관소 ‘한국전쟁사 寶庫’ 자료공개로 ‘북침설’ 사장시켜

    1994년 6월2일. 당시 러시아를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마친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검은 서류상자 하나를 건넸다. 흔히 ‘옐친 문서’라고 불리는 이 서류는 1949년 1월부터 1953년 8월까지 옛 소련과 중국, 북한 간에 오고 간 극비자료였다. 모두 230여건, A4용지 800쪽 분량의 자료 속에는 김일성의 선제타격작전계획과 스탈린의 3단계 작전지침 그리고 마오쩌둥의 전쟁개입 과정 등이 소상하게 담겨 있었다. 이 자료가 공개되면서 김일성과 좌익진영에서 주장해 오던 ‘북침설’은 소설이 됐다. 한국전쟁에 관한 연구는 옐친 문서 공개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이전까지는 미국, 일본 등 서방 측 자료에 일방적으로 의지한 탓에 ‘반쪽짜리’에 불과했다. 전쟁발발자인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이 주고받은 극비문서에 대한 분석 없이는 한국전쟁의 기원과 발발에 대한 연구의 가치는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러시아와 조선이 첫 수교를 맺은 1884년부터 일제에 의해 외교권이 강탈당한 1905년까지 두 나라는 긴밀한 우호 관계를 맺었다. 고종의 아관파천(1896년)에서 알 수 있듯이 러시아는 우리 근세사에서 10년 넘게 한국전쟁 이후 미국과 같은 역할을 누렸다. 제국주의 열강 앞에 촛불처럼 흔들렸던 한반도의 정세와 이권약탈사가 러시아 비밀문서 속에 고스란히 들어 있다. 한국전쟁 발발과 휴전 이전까지, 휴전 이후 1980년까지 남북한과 러시아 두 나라 사이에 일어난 모든 공개, 비공개 외교문서가 포함돼 있다. 러시아라는 거울을 통해 조선후기와 대한제국, 남북 분단 시기의 내밀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러시아에는 20여개의 국립 문서보관소가 있다. 러시아 외무성 산하 제정러시아 대외정책 문서보관소와 혁명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문서를 보존하고 있는 러시아연방 대외정책 문서보관소가 한국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특히 제정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와 국방성중앙문서보관소에는 부지기수의 한반도관련 문서가 소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모스크바 크렘린 러시아연방 대통령 문서보관소는 한국전쟁관련 문서의 보물창고이다. 전쟁준비 단계에서 휴전협정이 이뤄진 1949년부터 1953년까지의 극비문서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서가에 꽂혀 있다. 일반적으로 문서보관소의 출입증을 받으려면 소속 학교나 연구소에서 작성한 출입신청서를 제출해야 한다. 연구할 제목을 비롯해 인적사항을 적은 신청서를 내고 나서 출입허가가 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연락이 오면 가서 문서목록 속에서 필요한 문서를 찾은 뒤 신청하게 된다. 외무성 연방문서보관소는 허가절차가 까다롭다. 3개월 만에 허가가 나오기도 해서 연구자들로부터 원성이 높다. 특히 한국전쟁 사료가 있는 연방대통령 문서보관소는 일반 연구자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특별허가를 받은 문서보관소 관계자의 협조를 얻어야 자료접촉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서보관소의 여러 부서에서 문서를 각각 접수하고 있고, 또 문서의 성격에 따라 담당자와 정리자가 달라 문서의 날짜가 다르거나 잘못된 사례도 허다하다. 옛 소련 국가안보위원회(KGB) 문서 보관소는 여전히 금역이다. 박종효 모스크바대 한국학 센터 명예교수가 최근 펴낸 ‘러시아연방 외무성 대한정책 자료1,2’(도서출판 선인)도 이 같은 발품의 산물이다. 러시아 내 한국사료 발굴의 권위자인 박 교수는 지난 16년 동안 문서보관소를 찾아다니면서 관계 문서를 찾아 번역하고 자료집으로 정리했다. 박 교수는 “한·러 관계사의 1차 사료인 러시아 대한정책 자료가 한국전쟁 등 한·러 관계사 연구에 길잡이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MB “중도실용 변함없다”

    ‘국내와 국제 문제를 투 트랙( two track)으로.’ 이명박 대통령은 31일 중도실용의 목소리를 다시 높였다. 이날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다. 이 대통령은 “우리 정부의 중도실용 기조는 변함이 없다.”면서 “자칫 천안함 사태로 우리의 중도실용기조가 흔들리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이 같은 언급은 천안함 사태 이후 두달여간 정부의 강경대응 방침이 지속되면서 보수화, 우경화에 대한 우려가 커진 것을 의식한 언급으로 풀이된다. 선거를 앞두고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때문에 국내 정치는 중도실용 노선을 유지하되, 국제 이슈인 천안함 사태는 강경모드를 지속하겠다는 취지다. 국내 문제와 국제문제를 다른 기조로 접근하고, 특히 천안함 사태는 중국의 지지를 이끌어내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는 만큼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풀어나가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이 대통령은 또 “국제사회에 원칙과 비전을 제시하면서도 국정운영과정에서 중도 실용정책이 확고하게 유지되도록 힘을 써야 할 것”이라면서 “천안함 사태를 계기로 분단된 국가상황에서 국가 정체성을 더욱 확립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와함께 청와대는 천안함 사태와 국내 정책 문제는 별개로 진행하면서, 불필요한 오해를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입장을 강조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에 하던 라디오·인터넷 연설을 31일 생략한 것도 지방 선거를 이틀 앞두고 대통령의 발언이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천안함 사태와 관련해 강경 대응 방침을 밝힌 뒤 국내 모든 정책이 보수화되는게 아니냐는 시각에 부담이 컸던 것도 사실”이라면서 “국내 정책 문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뜻을 이번에 이 대통령이 분명하게 밝힌 것으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김성수기자 sskim@seoul.co.kr
  • [사설] 北 천안함 반박 과학적 증거 부족하다

    북한 당국이 그제 천안함 폭침이 북의 소행이라는 조사 결과를 반박하고 나섰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대리인 격인 국방위 실무자가 이례적으로 회견을 갖고 “날조”라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과학적 근거가 부실한 일방적 주장에 그친 인상이다. 북측이 이런 억지 주장으로 세계의 여론을 호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임을 지적해 둔다. 북한은 분단 이후 각종 만행을 저지르고도 단 한 번도 시인·사과한 적이 없다. 청와대 폭파 기도, 아웅산 테러, 강릉 잠수함 사건 등을 자행한 후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한참 뒤 “(극좌)맹동분자의 소행이었다.”고 발뺌하는 식이었다.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북측은 연어급(130t) 잠수정이 폭침에 동원됐을 것이라는 분석에 대해 “우리에겐 연어급이나 상어급 잠수정이 없다.”고 주장했다. 한·미가 공유 중인 정보와는 동떨어진 ‘오리발’이다. 이런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북 스스로 잠수함 기지를 국제사회에 공개하겠다고 해야 했다. 북측은 결정적 증거물로 공개된 어뢰 추진체에 대해서도 “어뢰를 수출하면서 소책자까지 준 적이 없다.”며 비본질적 해명으로 비켜갔다. 추진체가 북한의 수출용 무기소개 책자에 소개된 ‘CHT-02D’어뢰의 설계도면과 일치한다는 조사결과에 대한 변명이다. 그렇다면 우리 정부가 한국민은 물론 전세계를 속였다는 얘기인데 가당키나 한 일이겠는가. 민간 쌍끌이 어선이 국제 조사단이 지켜보는 가운데 건져낸 추진체인데 말이다. 더욱 심각한 일은 북한이 억지를 기정사실화하며 남남 갈등을 기도하고 있는 점이다. 조국전선 명의의 공개편지로 천안함 사건을 남측의 모략극이라고 규정, 지방선거에서의 심판을 선동한 게 대표적 사례다. 전형적 인지 부조화 행태다. 북한은 상식과 합리성에 근거한 해명을 할 자신이 더는 없다면 이제라도 천안함 도발을 시인하고 사과해야 한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