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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치밀한 역사왜곡… 후손인 우리가 수치심 느껴야”

    “치밀한 역사왜곡… 후손인 우리가 수치심 느껴야”

    “후손인 우리가 수치심을 느껴야 하는 것 아니냐.” 한나라당 노철래 의원은 동북공정의 현장과 마주한 기분을 이렇게 밝혔다. 노 의원뿐 아니라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은 처음이라고 29명의 국회의원들은 입을 모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온 반응은 “듣던 것보다 훨씬 치밀하다.”는 것이었다. ●“이 정도로 심각한 줄 몰랐다” 지난 4일 이른 오전, 의원들은 백두산 장백폭포의 멋진 경관에 한껏 들떴다가 일순 표정이 어두워졌다. 입구에 놓여진 간이지도 표지판 때문이었다. 백두산 봉우리들을 그려놓고 양 옆에 압록강과 투먼(圖們)강으로 영토 경계를 표시해 놓았다. 국사학을 전공한 한나라당 안형환 의원이 “간도 분쟁을 피하기 위해 우리 영토를 의도적으로 축소시킨 흔적”이라고 설명했다. 안 의원은 “1712년 조선과 청나라가 세운 백두산 정계비에는 우리 영토의 경계로 표시된 ‘토문강(土門江)’을 우리나라는 송화강의 발원지로 보고 있다.”면서 “그런데 중국은 이를 의도적으로 ‘투먼강’으로 해석해 간도 일대가 조선령이 된다는 역사적 해석을 미리 막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김동성 의원은 “그동안 동북공정이 진행된다는 것은 익히 들었지만, 이 정도로 심각한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이진복 의원은 “중국의 이토록 체계적인 접근에 더욱 경악했다.”면서 “이러한 상황이 더 오래가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고 후손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게 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노 의원은 “우리가 역사적으로 남북이 분단되는 과정을 겪고 정치적으로 격동기를 경험하면서 동북 3성에 대한 관심을 가질 기회가 별로 없었다. 너무 소홀했다.”면서 “상황이 여기까지 오게 한 데 대해 후손으로서 부끄러움을 갖고 깊이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中, 독립운동사 부각 ‘부담’ 비단 고대 고구려나 발해의 역사에 국한된 일이 아니다. 중국은 큰 틀에서 우리의 민족성과 역사에 대한 흔적이 부각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다. 5일 청산리대첩 승전 90주년을 맞아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이린(海林)시 싼스(山市)진에 있는 김좌진 장군 순국지에 개관한 ‘백야광장’도 정작 중국 땅에서는 제 이름을 드러내지 못한다. 국가보훈처에서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에 예산을 지원해 조성했지만, 정작 중국 당국은 성역화 사업에 대해 거부감을 보였다. 그래서 ‘한·중 우의광장’이라고 이름을 짓고 마을에 광장을 조성해 주민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역시 하이린시에 있는 김좌진장군 기념관(2001년 개관)도 중국에서는 ‘한·중우의공원’일 뿐이다. 이러한 기념 사업도 대부분 개인이 추진하는 수밖에 없었다. 김좌진장군 기념사업회장을 맡고 있는 한나라당 김을동 의원은 “중국에서 대한민국의 국가유공자를 기리는 사업에 대해 시각 자체가 너무 날카로워 이를 이겨내는 데 한계점이 많았다.”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은 그나마 뒷전이었다.”고 토로했다. 김 의원은 중국땅에서 기념사업들을 진행하기 위해 살던 집을 팔면서 사비를 털었다. 아들인 배우 송일국씨가 힘을 보태는 정도다. 이경재 의원은 “역사를 기리는 일을 이렇게 개인의 힘으로 힘겹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게 너무 안타깝다.”면서 “그러나 당분간은 기념사업회나 역사재단 등에 지원을 더 하면서 중국에 보다 유연하게 다가가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갈등 피하려 ‘대접’ 스스로 포기 6일 오전 헤이룽장성 하얼빈역에서 의원들은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안중근 의사가 당시 이토 히로부미 통감을 저격한 거사 현장을 직접 보기 위해 5시간 남짓 기차를 타고 도착한 현장이었다. 그런데 의원들의 등장에 중국 공안들은 당황하며 출입을 막았다. 의원들의 몸을 막으며 강하게 제지했다. 다시 역 밖으로 나가서 표를 사서 들어오라는 등 갖가지 핑계를 댔다. 한참의 승강이 끝에 결국 4~5명씩 짝을 지어 조용히 현장을 보기로 하고서야 의원들은 발을 뗄 수 있었다. 이번 일정이 국회의원 신분으로 방문한 게 아니라 철저히 민간인, 일반 해외 여행객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지난 3월에도 김을동 의원이 주최해 15명의 의원이 하얼빈역을 방문했지만 그때에는 아예 역 안으로도 발을 들여놓을 수조차 없었다. 겨우 눈으로 보게 된 거사 현장이라고 해봤자 플랫폼 바닥 안 의사가 서 있던 곳에 삼각형, 이토 히로부미가 저격을 당한 곳에 사각형으로 각각 표시를 해둔 것이 전부였다. 어디에도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라는 글자는 없었다.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당초 표지판을 세울 계획이었으나 일본의 견제로 중국에서 부정적 의사를 밝혀 도형으로 표시만 할 수 있게 승인해 준 것”이라면서 “중국에서 우리의 역사현장을 보존하는 것에 계속 거부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정치인이나 정부에서 외교적 채널을 통해 양국의 양해를 얻는 방법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한·중·일 3국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동북 3성이 현재는 외교적으로 첨예한 지역이 됐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애국지사 제대로 평가해야” 특히 일본이 얽혀 있는 일제시대를 비롯한 근대사의 현장은 더욱 민감한 부분이다. 그런 만큼 더욱 전략적이고 체계적인 대응책이 필요하다는 게 의원들의 지적이다. 이진복 의원은 앞서 개인 일정으로 중국 연변(延邊) 용정(龍井)에 있는 시인 윤동주 선생의 생가와 그가 다녔던 용정중학교 등을 둘러보고 왔다. 이 의원은 “정부가 관리를 할 수 없는 상황인지, 하지 않는 건지 너무 심각하게 방치돼 있었다.”고 비판했다. 김광림 의원도 “그 당시 재산과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킨 위인들을 우리 스스로가 너무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바탕으로 역사인식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글 사진 하얼빈·하이린 허백윤기자 baikyoon@seoul.co.kr
  • [지방시대] 부산·경남 역지사지로 통해야 상생/차용범 부산시 미디어센터장

    [지방시대] 부산·경남 역지사지로 통해야 상생/차용범 부산시 미디어센터장

    “통하였느냐?” 애정 사극영화 ‘스캔들;조선 남녀상열지사’에서 화제를 모은 광고 카피다. 영화가 한창 흥행몰이를 할 때 ‘통하였느냐?’가 무슨 뜻인지를 묻는 인터넷 질문도 잇따랐다. 영화에선 “정을 통했는가?”를 묻는 표현이지만, ‘서로 마음이 통하다.’, ‘가깝게 사귀다.’ 같은 쓰임도 많다. 6년여 전이던가, 평양을 방문했을 때 ‘통하다’의 중요성을 절감한 적이 있다. 오랜 분단환경 속에서 문화와 풍습은 더러 달라졌을 터, 특히 남북의 언어 역시 적잖이 변했더라는 것이다. 스위스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는 말한다, “같은 말은 공통적인 민족성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민족 통일을 이루는 데 무엇보다도 우선한다.”고. 고대 삼국시대 세 나라의 언어는 단일어였다. 영화 ‘황산벌’의 몇 장면처럼 단순한 사투리적 차이만 있었을 뿐이다. 통일신라가 고구려인과 백제인을 쉽게 흡수할 수 있었던 것도 언어적으로 같았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있다. 민선 5기 시대를 맞으며 새삼 ‘통하였느냐?’를 떠올린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자치단체와 의회, 지방과 지방 간의 불화에 대한 걱정 때문이다. ‘4대강 살리기’를 둘러싼 공개적인 충돌, 단체장의 소속정당과 의회 제1당이 서로 다른 지역의 뾰족한 갈등, 광역자치단체 간의 뿌리 깊은 대립이 있다. 지방권력 간의 충돌(우려)로 지방자치가 시험대에 올랐다는 평가가 있다. ‘통하였느냐?’를 걱정하는 대목에서 부산·경남을 제쳐둘 수 없다. ‘원래 한 뿌리’이되, 인식을 달리하며 날카롭게 대립해온 대형 현안이 많다. 부산시장-경남지사의 당적도 다르다. 두 사람은 남강댐 광역상수도 사업에 대해 벌써 정반대의 인식을 공개했다. 동남권 신공항이나 행정구역 개편 문제 역시 겉 표현과 달리 속사정은 전혀 만만하지 않다. 두 사람은 지방선거를 마치고 곧 회동했다. 허남식 부산시장은 “부산과 경남은 동일생활권·동일경제권인 만큼 서로 협력하고 공동발전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두관 경남지사는 “부산·경남이 싸우는 것을 지역주민들이 싫어한다. 주민들은 시·도지사가 자주 만나 의논하는 것을 좋아할 것”이라고 화답했다. 두 사람의 상생·협조 다짐에도, 눈앞의 현안을 풀기란 쉽지 않다. 부산신항 관할권 문제로 티격태격하고 있다. 최근 헌법재판소의 판단에 의존한 것은 지난 일이라고 치자. 동남권 신공항 문제로 재격돌할 조짐이라는 것, 남강댐 물을 부산식수로 쓰는 문제도 입장 차가 현격하다는 것이다. “원래 한 뿌리·이웃사촌인 두 시·도가 콩깍지가 콩을 삶듯 해서야.”라는 걱정이 있다. “역지사지로 풀어라.” 한 언론의 사설이다. 그렇다. 부산과 경남이 정녕 대립을 넘어 상생하려면 무엇보다 ‘통하기’에 정성을 쏟는 수밖에 없다. 부산은 밀어붙이기가 아닌 대화와 설득으로 경남의 협조를 구하고, 경남도 부산이 간절하게 원하는 건 공동번영을 위해 대승적으로 들어주라는 것이다. 결론은 분명하다, 부산과 경남은 상생차원의 소통을 거듭하며 만날 때마다 계속 되물어야 한다. 서로 생각과 ‘역지사지’를 나누려면, 귀찮아도 되물어야 한다. 영화 스캔들의 카피를 본떠 “통하였느냐?”를.
  • [어린이 책꽂이]

    ●오리발에 불났다(유강희 시, 박정섭 그림, 문학동네 펴냄) 198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 유강희가 펴낸 첫 번째 동시집이다. 그의 시세계의 배경과 주제가 됐던 농촌과 생명이 동시에서 아이들의 순정한 상상력과 만나 좀더 소박하고 친근하고 아름답게 몸을 비틀었다. 8500원. ●학원 대장(김진섭 지음, 이지현 그림, 북스마니아 펴냄) 방학이면 한 곳이라도 더 학원을 보내려는 엄마와 모처럼 놀고픈 아이의 전쟁은 더욱 치열해진다. 엄마에게 등떠밀려 학원 다니는 민기와 엄마의 대립이 이어진다. 민기는 스스로 고민하며 공부하는 모습을 보이고 엄마 역시 지나친 욕심을 부렸음을 사과하며 화해하는 결말이 훈훈하다. 9500원. ●씨나 아줌마가 들려주는 아프리카 옛이야기(씨나 믈로페 지음, 레이첼 그리핀 그림, 조선정 옮김, 북비 펴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책의 어머니’로 통하는 씨나 믈로페가 들려주는 아프리카 8개국의 대표적인 옛 이야기 8편을 모아놓았다. 춤과 음악을 사랑하는 체와족(族) 이야기며, 사냥으로 생계를 잇지만 생명을 존중하는 아프리카 부족의 철학, 바오바브나무의 전설 등 낯설고 투박하지만 신비로운 이야기들이 퀼트적 표현 기법과 어우러져 아름답다. 1만 8000원. ●갈테야 목사님(조은수 글·그림, 웅진주니어 펴냄) 문익환 목사의 삶을 상징적이며 응축적으로 담았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민족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딱 아이들 눈높이의 그림과 글로 풀어냈다. 저자는 ‘꿈쟁이 문 목사’가 현실의 철조망과 분단의 장벽을 넘나들었던 모습을 보며 우주소년 아톰을 떠올렸다고 한다. 9500원.
  • 한획두획… 역사를 담고 신념을 말하다

    한획두획… 역사를 담고 신념을 말하다

    ‘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 했다. 글씨는 곧 그 사람과 같아 인격과 성정이 서체에 고스란히 배어난다는 뜻이다.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이 한·일 강제병합 100주년 특별전으로 23일 개막하는 ‘붓 길, 역사의 길’은 이런 전제에서 출발한 흥미로운 기획이다. 망국의 시기를 전후해 역사의 흐름을 좌지우지한 주역들의 필적을 통해 근현대사의 굴곡을 반추하겠다는 자못 야심찬 시도다. 한획두획… 역사를 담고 신념을 말하다 척사와 개화, 매국과 순절, 친일과 항일 등 역사의 굽이마다 대척 관계에 섰던 인물 70여명의 필적 100여점을 한자리에 모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다. 이를 테면 이토 히로부미의 칠언시에 차운(남이 지은 시의 운자를 따서 시를 지음)을 한 박제순, 조중응 등 을사오적과 이와 정반대 입장에서 순절을 택한 민영환, 안중근 등 애국지사의 필적을 대비하는 식이다. 전시를 기획한 이동국 수석 큐레이터는 “글씨는 그 사람인 동시에 그 인물이 생존한 시대와 사회의 산물”이라면서 “필적이야말로 사회 현실을 가장 정확하게 증언하는 자료”라고 말했다. 일례로 이토 히로부미가 1908년 5월 귀국을 앞두고 쓴 칠언시는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것으로, 당시 매국에 앞장섰던 인물들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토 히로부미가 ‘뭇 사람들과 헤어지자니 더욱 더 아쉬워/고운 얼굴에 흰 머리는 바로 신선들이다/교린의 기월이 맹단에 남아 있으니/양국에 화기가 오랫동안 맴돌리라’는 칠언시를 쓰자 이 자리에 함께 있던 조중응은 ‘동풍에 돛을 달아 귀국하시고 나서도/큰 꿈이 이따금 접역에서 뒤척이시라’는 답시를 썼다. 박제순은 ‘세상에 우뚝 선 풍모는 스스로 탁월하셔서/물러나 쉬는 즐거운 곳에서 신선이 되시었네’라며 낯뜨거운 찬양가를 덧붙였다. 을사오적 중 한 명인 이완용은 초대 일왕인 신무를 기리는 칠언절구를 남겼다. 반면 민영환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명함에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하면 죽은 몸도 저승에서 기뻐 웃으리라.’는 유서를 쓰고 자결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은 옥중에서 ‘국가안위 노심초사’라는 명필을 남겼다. 이동국 수석큐레이터는 22일 “이완용은 서체에 변화가 심해 상황에 따라 성정이나 기질이 달라진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는 반면 안중근은 송곳 같고 칼 같은 필체로 직필(直筆)의 표본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해방 공간에서 남북공동정부 수립과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놓고 대립했던 김구와 이승만의 필체도 뚜렷이 구분된다. 김구는 차돌처럼 단단하고 강직한 서체인 데 비해 이승만은 서체가 부드러워 자유주의자로서의 기질이 드러난다는 평이다. 이 밖에 흥선대원군의 ‘묵란’, 민영익이 상해 망명 당시 기거했던 집인 천심죽재를 그린 그림, 갑신정변의 4인방 필적, 만해선사와 여운형의 필적 등 처음으로 공개되는 작품들이 상당수다. 문창국 예술의전당 전시사업부장은 “이번 전시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미래를 망국·분단·통일의 관점에서 조망하는 3부작 시리즈의 하나로, 내년 초 분단과 통일을 다룬 전시회를 열 계획”이라고 말했다. 8월31일까지. (02)580-1300.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사설] 한목사, 북세습체제 옳다면 북서 살텐가

    정부 승인 없이 불법으로 방북한 한상렬 목사의 최근 행보에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다. 그는 지난달 22일 평양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이명박이야말로 천안함 희생 생명들의 살인 원흉”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 “(천안함 사건은) 지방선거에 이용하고자 한 이명박 정권의 사기극일 수 있다.”고 했단다. 반면 그는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을 거론하며 “남녘 동포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의 어른을 공경하는 겸손한 자세, 풍부한 유머, 지혜와 결단력, 밝은 웃음 등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등 북한 찬양 일색의 발언을 쏟아냈다. 천안함 폭침으로 희생된 수병 46명에 대한 애도의 눈물은 아직도 마르지 않았다. 그런 시점에 나온 그의 망언은 단순히 맹북(盲北)·친북인사의 ‘소영웅주의’에서 나온 일탈 행위로만 봐서는 안 된다. 보수와 진보를 떠나 그의 발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가 있다. 그의 발언이 사실이라면 이는 분명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부정이고 도전이기 때문이다. 남북교류협력법 위반 등의 실정법 위반 여부는 그가 남한으로 귀환한 뒤 법에 의거해 처리하면 될 일이다. 최근 북한의 후견국을 자처하는 중국의 관영통신은 6·25 전쟁과 관련, 처음으로 ‘북한의 남침’임을 밝힌 바 있다. 북한은 전쟁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분단 이후 세습독재라는 체제의 속성도 변화할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그가 김정일 찬양가를 부른 것은 자유 민주주의체제보다 북한의 유일독재체제가 더 옳다고 믿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대한민국의 근간은 자유민주주의다. 자유민주국가에서는 정권을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북한에 가서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뒤흔드는 발언을 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어린 학생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심히 걱정스럽다. 학교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우월성에 대한 역사교육이 필요할 때다.
  • ‘인민루니’ 정대세 그는 누구인가

    ‘인민루니’ 정대세 그는 누구인가

    지난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때 흘린 눈물로 많은 관심을 모았던 ‘인민 루니’ 정대세. 그를 파헤쳐 보는 프로그램이 마련됐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는 일본에서 태어나 한국국적을 보유하고 있으나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축구대표선수로 뛴 ‘자이니치(在日)’ 정대세를 밀착취재한 “나는 ‘조선’의 스트라이커입니다.”편을 24일 오후 11시10분 방영한다. 월드컵 당시 정대세는 내내 화젯거리였다. 독특한 이력에다 영국의 루니에 비견되는 폭발적인 돌파력, 브라질과의 경기를 앞두고 북한국가를 부르다 울던 모습 같은 것들 때문이다. 월드컵 뒤에는 독일 분데스리가 보쿰팀으로 이적해 다시 한번 화제를 모았다. 그런 정대세를 두고 국내에서는 색깔논쟁까지 벌어졌다. 핵심은 그가 왜 북한 대표를 선택했느냐는 것이다. 일본에서 만난 정대세는 스물여섯, 평범한 청년이다. 자동차에 관심이 많고, 한국음악을 좋아하고, 만화를 즐겨봐서 독일로 갈 때 꼭 만화책을 챙겨갈거라는 청년이다. 다만, 북한팀에서 뛰는 것은 어릴 적부터의 꿈이었을 뿐이다. 경북 의성이 고향인 아버지를 따라 한국국적을 취득했으나, 학교는 조선족 출신 어머니의 뜻에 따라 총련계 ‘조선학교’를 다녔다. 때문에 북한 대표팀 선수는 어릴 적부터 이어온 자연스러운 꿈이었다. 실제 뛰어보니 북한팀의 열악한 환경에 실망도 했지만, 순수한 마음과 단단한 팀워크로 묶인 동료들과 함께 경기를 치른 것은 큰 기쁨이었다고 밝힌다. 하지만 정대세는 자신을 남한도, 북한도 아닌 코리아 대표선수라 생각한다. 한국, 북한, 일본도 아닌 제 3의 지대에 있는 자이니치라 여기는 것이다. 그렇기에 스스로 생각한 그의 국적은 분단 이전의 조선이다. 남한도 북한도 아니요, 일본인도 되지 못한 회색지대에 살아온 재일조선인의 슬픈 삶과 통일에 대한 열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또 베일 속에 가려진 북한 대표팀의 일상을 스케치한 영상도 공개된다. 숙소 안에서 자유분방하게 휴식을 취하는 선수들 모습, 침실에서 진행된 인터뷰, ‘인민 초콜릿’이라 불린 미끈한 복근으로 관심을 모았던 지윤남 선수가 자신의 별명에 보이는 반응 등이 담겨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사설] 소통과 화합으로 선진 한반도 시대 열자

    서울신문이 18일로 창간 106주년을 맞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연륜의 신문으로서 생일을 자축하는 한편 옷깃을 여미며 새출발의 다짐을 독자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서울신문의 전신인 대한매일신보는 일제가 국권 침탈의 발톱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던 한말인 1904년 구국의 깃발을 높이 내걸고 탄생했습니다. 애국지사 양기탁 선생과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영국인 배설(裵說·Bethell) 등에 의해 창간된 항일 정론지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국내 최고(最古)의 민족정론지라는 뿌듯한 자긍심만 내세우려는 게 아니라 차제에 부끄러운 과거도 있었음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대한매일신보는 1910년 국권 상실과 함께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문으로 제호가 바뀌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광복과 함께 서울신문으로 재탄생했지만, 1948년부터 정부 소유로 귀속되면서 역대 정권들이 때로 독재나 권위주의로 치달을 때 시비곡직을 가리는 데 주춤거려 독자들의 비판을 받은 적도 있었습니다. 1998년 대한매일로 제호를 바꿨다가 사원이 1대주주인 독립언론으로 거듭나면서 지난 2004년 서울신문이란 이름을 되찾아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다만 우리는 지난 세월의 공과에 대해 겸허히 자성하되 지나친 자기 비하에 빠지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나라와 민족의 안녕을 수호하려 했던 창간 취지를 되살려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의 이익을 맨 앞자리에 놓는, 공정한 보도로 독자로부터 사랑받는 일이 더 소중하다고 믿는 까닭입니다. 100여년 영욕의 시간, 겸허히 자성 서울신문이 지켜본 지난 105년 간의 민족사도 국권상실과 광복, 동족상잔의 전쟁, 그리고 눈부신 경제발전과 민주화 투쟁 등으로 영욕이 교차했습니다. 그래도 우리의 현대사는 총체적으로는 성공 스토리였다는 게 우리의 견해입니다. 미국의 잉여농산물인 옥수수 가루로 허기를 달래던 나라가 세계 15위 경제대국으로 우뚝 섰지 않습니까. 더구나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140여개 신생국 중 산업화와 민주화에 동시에 성공한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한국은 최근 십수년간 선진국의 문턱 언저리에서 맴돌고 있습니다. 올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개최국으로 국제적 위상은 높아졌지만 일류 선진국으로 가는 고지는 아직도 신기루인 양 멀어 보이기만 합니다. 미국발 금융 쓰나미에서 보듯이 세계는 지금 문명사적 전환기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유럽 주요국과 일본마저 이른바 ‘선진국의 함정’에 빠져 경제난을 겪고 있음을 보십시오. 보수·진보, 공론의 장으로 역할할 것 이처럼 갈수록 치열해지는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온 국민이 일치 단결해도 모자랄 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내부적으로 갈가리 찢겨져 성장잠재력을 스스로 좀먹고 있습니다. 남북 분단도 서러운데 지역 및 세대간 갈등에다 여당과 야당, 보수와 진보가 사사건건 부딪치고 있습니다. 올 들어 세종시 문제와 4대강 사업을 둘러싼 여야의 무한 대치는 분열과 갈등이 일상화된 우리 사회의 축도일 뿐입니다. 누가 봐도 북한의 도발임이 뻔한 천안함 폭침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맞고도 정략과 소리에 휘둘려 서로 눈을 부라리고 있지 않습니까. 이는 소통과 화합의 결핍으로 인한 필연적 결과입니다. 선진국들이 경제위기를 수반한 정치적 격랑에 휩싸여서도 국가적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소통과 타협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이미 다문화 사회의 초입에 들어선 만큼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 상생·협력하는 기풍을 확립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본지 창간 106주년을 맞아 각계 전문가 10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각계 원로와 중진들은 이명박 정부의 집권 후반기 최우선 과제로 사회통합을 꼽았습니다. 그래서 서울신문은 무엇보다 국민통합을 이루기 위해서 ‘개혁적 보수’와 ‘합리적 진보’가 소이(小異)를 버리고 대동(大同)을 추구하도록 공론의 장의 역할을 다하려고 합니다. 특히 여야와 각 지역 및 세대가 소속 집단의 이해를 넘어 국가 공동체의 공동선을 추구하는 길에서 만나도록 건전한 비판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소통이 중요하지만, 각계각층의 욕구를 모두 충족시켜 주겠다는 식의 인기영합주의로 흘러 나라 살림이 거덜나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서울신문은 머잖아 오고야 말 통일된 선진복지국가를 내다보며 공익을 앞세우는 보도자세를 꿋꿋이 지켜나갈 것임을 거듭 다짐합니다.
  • 美-러 냉전이후 첫 스파이 맞교환

    美-러 냉전이후 첫 스파이 맞교환

    미국과 러시아가 8일(현지시간) 각각 자국에 수감 중인 스파이 ‘맞교환’에 합의, 최근 불거진 미국 내 러시아 스파이 사건을 11일 만에 속전속결로 매듭지었다. 과거 동서로 분단돼 있던 독일 베를린에서 스파이를 교환하는 대신 스파이들을 유죄 판결한 뒤 사면을 통해 해외로 추방한 형식을 빌렸다. 맞교환은 중립국인 오스트리아 빈에서 이뤄졌다고 미국 법무부가 밝혔다. 양국 언론들은 미국 전세기와 러시아 정부 비행기가 9일 빈 국제공항의 활주로 외곽 구역에서 잠시 머무는 동안 스파이가 맞교환됐다고 보도했다. 러시아 비행기는 이날 오후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미국 전세기는 영국에 착륙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종 행선지는 분명치 않다. 미국과 러시아는 ‘미녀 스파이’ 안나 채프먼 등 미국에서 활동하다 지난달 27일 체포된 러시아 스파이 10명 전원과 러시아에서 미국과 영국 등 서방 정보기관을 위해 암약한 혐의로 감옥에 있는 러시아인 4명을 각각 풀어 주기로 합의했다. 이 같은 대규모 스파이 맞교환은 20여년 전 베를린 장벽 붕괴, 동서냉전이 종결된 이후 처음이다. 풀려나는 러시아인 4명은 핵잠수함 기술 등 군사기밀을 미국으로 빼돌린 혐의로 15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이고르 수티아긴 박사, 영국을 위한 첩보활동으로 13년 형을 받은 세르게이 스크리팔, 알렉산데르 자포로즈스키, 제나디 바실렌코 등이다. 4명 가운데 3명은 러시아 군인과 정보기관원이다. 미·러 양국은 신속한 합의 이행을 위해 폴리바게닝(유죄인정조건 형량 감경)과 대통령 사면 형식을 취했다. 실무는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러시아 해외정보국(SVR)이 맡았다. 미국 뉴욕 법원은 이날 ‘러시아 정보원으로 활동한 죄’로 기소된 스파이 10명이 스스로 혐의를 시인하자 체포된 이후 구금된 날짜만큼만 형을 선고한 뒤 즉각적인 추방 및 재입국 금지를 명령했다. 러시아 정부도 이날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자국민 수감자 4명을 사면했다고 발표했다. 마크 토너 미 국무부 부대변인은 “국가안보와 인도주의 차원에서 신속하고 포괄적인 해법을 찾기 위한 결정이 이뤄졌다.”면서 “러시아 스파이 10명을 장기 구금해서 얻을 수 있는 중차대한 국가안보상 이익이 없다.”고 밝혔다. 합의에 대해서는 미국과 러시아가 양국 간 주요 현안들에서의 협력을 위해 성사시킨 정치적 거래라는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다. 서방 언론들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역점을 두고 있는 대(對) 러시아 관계 재설정, 핵무기 감축, 이란 핵프로그램 저지 등과 관련해 러시아의 도움이 필요한 미국과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때 미국의 지지를 얻으려는 러시아가 타협점을 찾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대러시아 외교에서 유약하다는 공화당 측 비난을 야기할 수 있고, 법적 안정성을 해쳐가며 나쁜 전례를 남김으로써 앞으로 미국에서 불법적으로 활동하는 외국 스파이 문제를 처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부정적인 관측도 없지 않다. 워싱턴 김균미특파원 kmkim@seoul.co.kr
  • “출구 없는 천안함사태 이젠 덮어야”

    9일 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과 한겨레통일문화재단 공동주최로 ‘인문학, 분단을 보다’라는 주제의 토론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 참석한 박한식 조지아대 교수,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천안함 사태에 대한 우리 정부의 대응에 대한 강한 우려를 쏟아냈다. 최근 평양에서 닷새 동안 머문 뒤 이날 서울에 도착한 박 교수는 먼저 “남한에서는 북한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라하는데 어떻게 할 거냐고 했더니 웃고 말면서 ‘우리가 안 했는데 안 했다는 증거를 밝힐 아무런 의무가 없다.’고 냉소하더라.”고 북한의 분위기를 전했다. 박 교수는 천안함 사태를 두고 “케네디 암살사건처럼 미궁에 빠질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라고 전제한 뒤 “그럼에도 우리 정부는 사과와 책임자 처벌이라는 가장 강도높은 카드를 던졌기 때문에 출구가 없는 상황이 됐다.”고 진단했다. 이어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불만족스럽더라도 작전상 일단 천안함 사태를 묻어둘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진실을 찾아내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야 하겠지만 이런 극한 상황에서 북한이라는 증거가 나온들, 또 남한의 조사가 잘못됐다는 증거가 나온들 어느 누가 인정하고 승복하겠느냐는 것이다. 박 교수는 “국가로 따지면 이번 일을 일으켰을 만한 국가는 손에 꼽을 정도로 뻔하다.”면서 “진실을 찾는다는 명목 아래 자꾸 이 사태를 파헤치고, 조사결과 감당할 수 없는 결과가 나온다면 그 정치적 후폭풍을 어떻게 감당할 것이냐.”고 반문했다. 평화를 위해 참자는 것이다. 조지아대 세계문화연구소장인 박 교수는 북한을 수십 차례 드나들면서 북핵 위기가 고조됐던 1994년과 2004년에는 북·미간 중재자로 직접 나서기도 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강연내용 마음에 안 든다” 日 대사에 콘크리트 던져

    서울 남대문경찰서는 강연 중이던 시게이에 도시노리 주한 일본 대사에게 “강연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콘크리트 덩어리를 던진 김모(50)씨를 검거해 조사 중이라고 7일 밝혔다. 김씨는 이날 오후 7시20분쯤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한·일 신시대, 공동번영을 지향하며’라는 주제로 특별강연을 하던 시게이에 도시노리 대사를 향해 주먹 크기의 콘크리트 덩어리를 던진 혐의를 받고 있다. 시게이에 대사를 빗나간 콘크리트 뭉치는 옆에 있던 여성 통역사의 왼손을 맞혔으나 가벼운 찰과상 정도에 그쳤다고 경찰은 설명했다. 자신을 우리마당 독도지킴이 대장이라고 밝힌 김씨는 “강연회 내용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랬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는 대사의 강연이 끝난 뒤 질의 응답 시간에 남북이 분단된 원인은 일본의 강점이라고 주장하며 콘크리트 덩어리를 던진 것으로 조사됐다. 이와 관련, 외교통상부는 사건 직후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이 시게이에 대사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위로의 말을 전했다.”고 밝혔다. 일본 대사관 측은 시게이에 대사 개인은 물론 일본 대사관 및 대사 공관 등에 경비를 강화해 줄 것을 한국 정부에 공식 요청했으며 외교부는 “경찰에 경비 강화를 요청했다.”고 밝혔다. 김상연·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北·美관계 전문가 박한식교수 방한

    北·美관계 전문가 박한식교수 방한

    북·미관계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는 재미 정치학자 박한식(70) 조지아대 교수가 방한한다. 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과 한겨레통일문화재단은 9~10일 건국대에서 ‘인문학, 분단을 보다’라는 주제로 ‘제1회 석학들의 대화’를 연다고 7일 밝혔다. 9일 오후 2시 대화시간에는 박 교수뿐 아니라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이 참가해 천안함 사태로 경색된 남북관계 해법과 ‘통일인문학’에 대해 얘기를 나눈다. 박 교수는 조지아대 부설 세계문화연구소 소장 직을 맡으면서 북한을 수십차례 드나들었고,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북·미 민간전문가 대화인 ‘워싱턴·평양 트랙 Ⅱ 포럼’을 꾸준히 개최하는 등 북·미관계 전문가로 꼽힌다. 북핵 위기가 고조됐던 1994년과 2004년에는 실제 중재자 역할로도 나서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대사로부터 ‘북·미 간 평화설계자’라는 평을 받았다. 둘째날인 10일에는 ‘분단의 아비투스와 생활문화’를 주제로 국제학술대회가 열린다. 기조발제자인 박 교수는 미리 배포한 발제문에서 “민족 재통일(National Reintegration)을 위해서는 두 정치공동체 사이에서 발견되는 가치와 생활양식의 모순 혹은 상호 배타성을 ‘인간 발전’과 ‘인간 존엄성의 증진’이라는 가치를 향해 변증법적으로 해소해 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주한 일본대사 강연중 청중에 돌멩이 피습

    시게이에 도시노리 주한 일본대사가 강연을 하던 중 한국인으로부터 피습을 받았다. 시게이에 도시노리 대사는 7일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한일신시대, 공동번영을 지향하며’라는 주제로 특강을 하던 중 관객석에서 갑자기 뛰어나온 한국인에게 습격을 받았다. 이날 주일 대사를 피습한 김기종 씨는 강연 후 이어진 질의 응답 시간에 “남북 분단의 원인은 일본의 강점”이라고 주장하며 연단으로 뛰어나가 대사를 향해 손바닥 반만한 크기의 돌을 던졌다. 그는 대사가 자신이 세 차례나 보낸 편지에 답장을 안했다며 편지를 직접 전달하기 위해 연단쪽으로 나아간 후 갑자기 돌을 던져 강연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다행히 대사는 날아오는 돌을 피해 다치지는 않았으나 주한일본대사관 소속 여성 통역사 마유미 호리에 씨가 손에 부상을 입었다. 한편 자신의 신분을 우리마당 독도지킴이 대장이라고 밝힌 김 씨는 현장에 출동한 경할에 연행됐다. 서울신문NTN 김수연 인턴기자 newsyouth@seoulntn.com
  • 대자연의 비경 품은 베트남 속으로

    대자연의 비경 품은 베트남 속으로

    베트콩, 베트남 전쟁, 국제 결혼…. ‘베트남’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다. 남북 분단과 전쟁, 경제적 궁핍으로 인한 결혼 장사까지, 아쉽게도 이 이미지에는 베트남의 뼈아픈 역사와 현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하지만 베트남은 대자연의 비경과 순박한 사람들의 삶을 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EBS ‘세계테마기행’은 사람과 풍경으로 가득한 베트남으로 시청자를 안내한다. 1부 ‘물의 도시, 닌빈’은 빼어난 경치로 유명한 닌빈 지역을 소개한다. 이곳은 지질학적으로 중국 남서부의 석회암 지대에 속한다. 특히 베트남을 대표하는 카르스트 지형이다. ‘육지의 하롱베이’라 불리는 땀꼭도 찾아간다. 논 사이 수로를 ‘삼판’이라 부르는 나룻배를 타고 이르는 땀꼭은 석회암 바위산과 동굴의 환상적인 풍경을 보여준다. 특히 석회암 바위산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이곳은 베트남 최초 통일 왕조의 수도이기도 했는데 천년 고도 호아루에는 고대 왕궁터가 남아 있다. 2부 ‘베트남의 이방인, 롤로족’에서는 베트남의 최북단 하장에서 둥지를 틀고 살아온 롤로족 마을 이야기를 다룬다. 산비탈에 집을 짓고, 옥수수와 벼를 경작하며 살아가는 롤로족. 그들의 생활엔 아직까지 조상과 자연을 숭배하는 원시 신앙이 남아 있다. ‘비모’라 불리는 제사장은 가축을 잡을 때나, 장례식 등 마을의 크고 작은 행사에서 종교 의식을 행한다. 처음 보는 외지인에게도 친절한 미소와 함께 술과 식사를 대접하는 롤로족의 해맑은 웃음을 전한다. 3부는 ‘역사가 남긴 유산’이다. 2세기부터 15세기까지 무려 1300년간이나 베트남 중부와 남부를 지배해 왔던 참파왕국. 참족 문화의 핵심 본거지였던 ‘미선’과 과거 베트남과 참파왕국의 국경이었던 고갯길, 하이반 패스. 그곳에서 독특한 참족의 문화를 감상한다. 마지막 4부 ‘1번 국도에서 만난 희망’에서는 1번 국도를 밟아가며 그곳의 정겨운 이야기를 전한다. 1번 국도는 호찌민과 다낭, 훼, 하노이 등 베트남의 주요 도시를 관통하고 있다. 이 길을 따라 오늘을 살아가는 베트남 사람들의 다양한 삶이 펼쳐진다. 이 길을 통해 베트남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내다본다. 5일부터 8일까지 오후 8시30분 방송.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월드이슈] 안영학 등 3만명… “국적으로 우릴 규정짓지 마세요”

    [월드이슈] 안영학 등 3만명… “국적으로 우릴 규정짓지 마세요”

    지난달 16일 북한과 브라질이 남아공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맞붙었을 때 북한 대표팀의 정대세 선수가 국가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잊지 못할 장면으로 남았다. 정대세 못지 않게 눈부신 활약을 한 안영학 선수도 국내 K리그에서 활약해 우리에게 낯이 익다. 하지만 두 사람은 같은 북한 팀에서 뛰었지만 국적은 달랐다. 안영학은 조선적(朝鮮籍), 정대세는 한국 국적을 소유하고 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이들의 남다른 인생역정을 통해 60만 재일동포들의 국적문제를 되짚어 본다. K리그 수원과 부산에서 주전 미드필더로 활약하며 올스타로 선정되기도 했던 안영학의 국적은 한국도 북한도 아니다. 법적으로 ‘조선적’인 안영학은 엄밀히 말해 무국적자다. 정대세도 아버지는 한국 국적이지만 어머니는 ‘조선적’이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자 그때까지 내국인으로 간주하던 식민지 조선인들을 외국인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한반도 남북에서 각기 다른 정부가 들어서기도 전인 1947년 일본은 외국인 등록령을 발효하면서 한반도 출신자로 일본에 남아있던 60여만명을 일률적으로 ‘조선’으로 표시했다. 한국과 일본이 외교관계를 수립하기까지 20년 가까이 재일동포는 ‘조선’이라는 가상국가의 소속원일 수밖에 없었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재일동포들은 조선에서 한국으로 국적으로 바꾸는 것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한국을 택하는 것이 분단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정치적으로 북한에 우호적이거나, 남북 어디도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은 ‘조선적’으로 남게 됐다. ‘조선적’은 외국여행에 제한을 받고 외국에 나가서도 이들을 도와줄 대사관이 없는 등 상당한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안영학은 일본에서 출국할 때는 일본 정부가 발행하는 재입국허가증을 취득한다. 북한대표팀으로 외국에 나갈 때는 북한 정부가 발행한 ‘신분증명서’를 갖고 간다. 한국에서 일본이 아닌 다른 나라로 갈 때도 한국 정부가 발행하는 ‘여행 증명서’를 소지한다. 외국 공항에서 “왜 여권을 3개나 갖고 있느냐.”는 이유로 붙잡힌 적도 있다고 한다. 다행히 그는 K리그에서 뛸 당시 ‘북한과 재외동포는 국내선수로 취급한다.’는 대한축구협회 규약 덕분에 ‘외국인’ 용병 취급을 받진 않았다. 조선적 동포들은 개인사업을 하는 경우에는 은행 대출도 받을 수 없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20여만명에 이르던 조선적은 최근 3만명 이하로 급감했다. 2002년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와의 북·일 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이 일본인 납치를 공식 인정한 뒤 조선적을 포기하고 대거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정대세와 안영학이 재일동포 3세인 것에서 보듯 재일동포 사회는 3세와 4세가 중심이다. 한국어를 못하는 경우도 많고 일본으로 귀화하는 사례도 느는 등 존립 기반이 약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현실 한편에선 일본어로 재일동포를 가리키는 말인 ‘자이니치(在日)’로 자신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삼는 재일동포들도 나타난다. 재일동포 3세로 스포츠전문 기고가인 신무광씨가 재일동포 축구선수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은 ‘우리가 보지 못했던 우리 선수’에서 안영학은 자신의 정체성을 이렇게 표현했다. “북이요, 남이요, 일본 등 나를 그 어디라고 규정짓고 싶지 않아요. 그래도 굳이 한다면 나는 ‘자이니치’라는 생각이 들어요.” 정대세도 “내 모국은 일본이 아니라 일본 속에 있는 ‘재일’이라는 또 다른 나라”라면서 “골을 통해 ‘재일’의 존재를 널리 알리면서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중화경제공동체 ‘차이완 시대’ 열렸다

    중화경제공동체 ‘차이완 시대’ 열렸다

    중국과 타이완을 하나의 시장으로 묶는 중화 경제공동체 시대가 열렸다. 중국과 타이완은 29일 중국 충칭(重慶)에서 제5차 양안회담을 열어 관세 철폐와 서비스 시장 개방 등을 내용으로 하는 경제협력기본협정(ECFA)에 서명했다. 양안 사이에 사실상의 자유무역협정(FTA)이 타결된 것이다. 외신들은 ‘차이완(CHIWAN: 차이나와 타이완의 합성어) 시대’가 열렸다고 타전했다. ●108개 품목은 발효직후 무관세 양안 관계를 전담해 온 천윈린(陳雲林) 중국 해협양안관계협회(해협회) 회장과 장빙쿤(江丙坤) 타이완 해협교류기금회(해기회) 이사장은 이날 양측 정부를 대신해 ECFA 문서에 서명했다. 협정은 타이완산 539개 품목과 중국의 267개 품목에 대한 상호 무관세(단계적 관세 철폐) 혜택과 20개 업종에 대한 시장 개방을 핵심 내용으로 했다. 이들 조기수확 대상 품목들은 즉시 관세 폐지 또는 감면 등 단계적 철폐를 거쳐 2년 내에 관세를 없애게 된다. 타이완의 539개 조기수확 품목 가운데 108개는 ECFA 발효 직후 무관세 혜택을, 나머지는 2년 동안 3단계를 거쳐 무관세 혜택을 누리게 된다. 서비스 분야에서 중국은 은행, 증권, 보험, 회계, 컴퓨터 서비스, 연구·개발, 컨벤션, 전문설계, 수입영화쿼터, 병원, 민용항공기 수리 등 11개 업종을 우선 개방한다. 반면 타이완은 연구·개발, 컨벤션, 전시, 특제품 설계, 수입영화쿼터액, 위탁판매, 엔터테인먼트, 항공위치추적서비스, 은행 등 9개 업종을 개방한다. 타이완계 은행들은 중국에 지점을 설립한 뒤 2년 뒤부터 위안화로 여·수신 업무를 볼 수 있게 돼 중국 진출 타이완 기업들의 재무 상황 호전이 예상된다. 협정은 이밖에도 지적재산권 보호 협정도 포함했다. 분야별로 보면 타이완의 조기수확 품목에는 농산품 18개, 석유화학 88개, 기계 107개, 방직 136개, 운수공구(자동차부품포함) 50개, 은행·보험·증권 등 금융서비스업 3개, 비금융서비스업 8개 항목이 포함됐다. 중국의 조기수확 대상 품목은 석유화학 42개, 기계 69개, 방직 22개, 운수 공구 17개 등이다. ‘양안 FTA’로 불리는 ECFA 타결로 국내총생산(GDP) 기준, 일본시장을 넘어서는 5조 3000억달러(약 6444조원) 규모의 중-타이완의 단일 거대시장이 구체화되게 됐다. 중국 자본과 노동력, 타이완 자본과 기술이 합쳐져 이미 중국에 편입된 홍콩, 마카오까지 연결하는 ‘대중화 경제공동체’의 비약적인 발전도 예상된다. ●타이완은 경제·중국은 정치이득 타이완은 무관세 혜택에 힘 입어 세계 최대 소비시장으로 성장한 중국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게 됐다. 특히 정보통신분야 등 고부가 가치산업에서 한국과 일본 추격에 속도를 낼 수 있게 됐다. 이를 통해 타이완은 2020년까지 최소 5.3%의 추가 경제성장을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분석됐다. 이번 협정으로 중국에 비해 타이완이 더 큰 경제 이익을 거둘 수 있게 됐다. 상품무역의 조기 수확 품목에 있어서 타이완의 품목이 중국보다 배나 많을 정도로 중국 당국이 양보했다. 이는 경제적 요인보다 타이완에 대한 영향력 확대와 통일에 대비한 정치적 계산을 담은 것으로 풀이된다. 중국으로서도 홍콩, 마카오에 이어 타이완까지 포함시킨 중화경제권 형성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실리가 적지 않다. 무역협회 국제무역연구원의 이봉걸 연구위원은 “타이완 집권 국민당은 오는 7월달 안으로 협정을 비준할 것이 확실하다.”면서 “중국과 타이완은 연말까지 협정 이행의 파급효과를 본 뒤 내년부터 관세 폐지 품목과 서비스시장 개방을 확대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한편 협정 체결에 따른 후유증도 예상된다. 당장 타이완 제1 야당인 민진당과 중소기업 및 노동계에서 ECFA 체결에 반발하고 나섰다. 민진당은 28일 “타이완은 결국 중국 경제에 예속될 것”이라며 비준 거부의사를 명백히 했다. 협상 발효를 위한 의회 비준 과정에서 진통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이석우기자 jun88@seoul.co.kr
  • 평생 역작 ‘불의 제전’ 13년만에 개정판 낸 소설가 김원일

    평생 역작 ‘불의 제전’ 13년만에 개정판 낸 소설가 김원일

    ‘불의 제전’은 소설가 김원일(68)이 18년 동안 쓴 작품이다. 1980년 ‘문학사상’에 연재를 시작해 1997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일곱 권으로 완간했다. 그가 ‘불의 제전’을 구상하고 첫 메모를 노트에 쓴 것은 스무살 때인 1962년. 작품 소재를 처음 얻은 날을 생각하면 그 시기는 1950년으로 올라간다. 그가 여덟살 되던 해이자, 6·25전쟁이 발발한 해다. 그렇게 셈을 하면 최근 그가 1년여의 개작 작업을 거쳐 다시 내놓은 ‘불의 제전’(전5권, 강 펴냄)은 무려 60년의 무게를 가진 책이다. 김원일은 거의 평생에 걸쳐 이 작품의 소재를 모아서 메모하고 또 글로 쓰고 고쳐왔다. ●대화 간략하게 줄이고 객관성 살려 그 지난한 작업을 끝낸 그를 지난 24일 서울 서초동 집필실에서 만났다. 몇 년 전 고혈압으로 쓰러져 지금도 하루 네 번씩 약을 챙겨먹고 있지만, 표정은 무척 밝았다. 평생의 역작을 마무리한 소감을 “목욕하고 머리깎은 기분”이라고 했으니 그 후련하고 상쾌한 기분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불의 제전’은 1950년 1월부터 10월까지 경남의 작은 마을 진영과 서울, 평양을 무대로 6·25전쟁을 그려냈다. 남로당원부터 촌로에 이르기까지 이념과 계급을 넘나드는 다양한 계층의 인물을 통해 전쟁의 비인간성을 다룬 것으로, ‘분단의 소설가’ 김원일 문학의 정수로 꼽힌다. “개작은 주로 덜어내는 작업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의욕만 앞세워 쓰다보니 산만하고 불만스런 부분이 생길 수밖에 없었어요.” 개작 작업을 거쳐 나온 ‘불의 제전’은 이야기에 압축성과 긴박감이 더해졌다. 큰 스토리에 별 상관이 없는 장면들은 드러내고, 길게 이어지던 대화도 간략하게 처리했다. 전체적으로 부사나 형용사의 사용도 줄여 담백한 맛과 함께 객관성을 살렸다. 그러다보니 분량은 2권이나 줄어들었다. 아까울 만도 하지만 그는 “요즘은 ‘토지’나 ‘아리랑’이 유행하던 때와는 다르다.”고 냉정하게 말한다. 온갖 매체가 넘쳐나는데 아무리 소설 독자라도 책을 그리 오래 잡고 있지 않는다는 것. 즉, 소설이 너무 지리하게 길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다. 그는 “소설은 집중적으로 한 문제를 파고 들어야 된다.”며 “이야기 하나에다 당시 사회상, 생활상 모두를 담겠다고 생각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시도”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말이 안 되는 시도라고 했지만 ‘불의 제전’ 정도면 6·25전쟁 시기 사회상을 폭넓게 담고 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작품은 남로당 간부였던 실제 작가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6·25전쟁 및 전후시대를 경험한 자전적 체험이 깊이 반영돼 있어 자연스럽게 사실성을 획득하고 있다. ●“이런 글 쓸 때마다 역사의 증인된 기분” 김원일은 소설가들 중에는 6·25전쟁을 직접 겪은 마지막 세대다. 사실상 아직 붓을 꺾지 않은 작가 중에서 전쟁과 분단에 대한 체험을 글로 옮길 수 있는 이는 그가 유일하다고 문단은 말한다. 그 스스로도 “이런 글을 쓸 때마다 ‘역사의 증인’이 된 심정”이라고 털어놓았다. 자기 세대마저 죽고 나면 더이상 6·25전쟁의 비극성과 여전히 유효한 상처들에 대한 ‘사회적 환기’를 불러올 서사가 나오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그는 전집을 묶어 문학세계를 정리하면서도 전후시기를 다룬 다음 작품을 또 준비하고 있다. 그는 “전쟁은, 생각이 달라도 공동체 차원에서 서로 공존하던 사람들마저 서로 날을 세우게 만들었다.”며 “공동체 원리를 해체한 전쟁의 비극성을 작은 농촌마을을 배경으로 보여줄 것”이라고 전했다. 글·사진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바비킴, ‘6.25 60주년’ 창작곡 열창 ‘뭉클’

    바비킴, ‘6.25 60주년’ 창작곡 열창 ‘뭉클’

    ‘솔의 대부’ 바비킴이 6.25 전쟁 60주년 기념 창작곡 ‘우리 모두 사랑한다면’(이하 ‘우모사’)을 부르며 울컥한 사연을 공개했다. 바비킴은 25일 방송되는 KBS 1TV 6.25 전쟁 60주년 특집방송 ‘나라사랑 음악회’ 녹화에서 Ab에비뉴의 보컬 한보라와 함께 무대에 올라 ‘우모사’를 열창해 박수를 받았다. 분단 상황을 극복하자는 노랫말의 ‘우모사’는 바비킴이 6.25 전쟁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창작곡이다. 이날 무대를 지켜본 관객들은 ‘우모사’를 한국판 ‘위아더 월드’라 칭하며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바비킴은 “녹음 당시에도 노래를 부르면서 코끝이 찡할 만큼 곡이 가슴에 와 닿았다. 특히 분단과 갈등이 반복되는 현실에서 모든 이기적인 것을 버리고 하나 되어 사랑하고 용서하자는 노랫말은 가슴을 울컥하게 만들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한편 지난 4월 40개월 만에 정규 3집 음반 ‘하트 앤 소울’(Heart & Soul)을 발표한 바비킴은 오는 7월부터 전국투어 막바지 공연에 돌입할 예정이다. 사진 = 오스카엔터테인먼트 서울신문NTN 정병근 기자 oodless@seoulntn.com
  • [월드컵 新풍속도] 老兵들도 길거리 응원

    우리나라와 아르헨티나가 맞붙은 지난 17일. 젊은이들로 가득찬 서울 반포시민공원 한쪽에 백발의 노병(兵)들이 자리했다. 붉은색의 응원복 대신 얼룩덜룩한 군복을 입었다. 이들은 다리가 불편한 옛 전우의 느린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걸어가 자리를 잡았다. 우렁차지는 않아도, 강단 있는 목소리로 “대~한민국”구호를 목놓아 외쳤다. 정확한 박자는 아니어도, 손바닥이 벌게지도록 짝짝~ 박수도 쳤다. 젊은이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뜨거운 응원과 대한민국의 선전이 누구보다 즐거웠던 이들, 바로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이다. 1950년 6·25때 수병으로 참전했던 김승봉 옹(80)은 전쟁 때 다친 다리가 덧나 절뚝이는 옛 전우 손경우(80)옹을 부축하고 회원 8명과 함께 거리로 나왔다. 나이리지아전은 손옹이 입원한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함께했다. 그는 “2002년과 2006년엔 집에서 경기를 지켜봤다.”면서 “천안함에, 정치에, 분열된 남과 북의 요즘 현실이 가슴 아파 젊은이들에게 화합의 메시지를 주고 싶어 전우들과 함께 응원을 나왔다.”고 말했다. 월드컵이 ‘노병’들을 일깨우고 있다. 2002년과 2006년, 무심히 축구경기를 지켜봤던 6·25와 베트남 전쟁 등 참전용사들이 이번 월드컵에는 ‘특별한 사명감’을 갖고 거리로 나오고 있다. 고령의 나이도, 이른 새벽시간도 개의치 않은 채 응원전에 ‘충성’중이다. 전문가들은 천안함 사태와 6·25를 통해 촉발된 사회적 관심이 국가대항 성격을 띤 스포츠 행사로까지 확산됐다고 분석했다. 또 이들이 월드컵을 계기로 분열된 사회분위기를 하나로 모으고, ‘소통과 화합, 통일’을 희망하는 메시지를 사회 안팎에 전하려는 것으로 평가했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참전용사의 경우 경기 자체를 즐기는 젊은 층과 달리 국제적 스포츠 행사에서의 승리를 더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해석할 수 있다.”면서 “천안함과 6·25 등으로 동기를 부여받아 사회안팎에 ‘통일’과 ‘화합’의 뜻을 전파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맹호부대 소속으로 1969년 월남전에 참전했던 월남전 참전용사 전우회원들도 23일 모여 응원전에 나섰다. 13명의 강서지구 회원들은 강원 고성 통일전망대 등 전적지 순례를 마치고 강서구 일대에 모여 새벽 응원전을 펼쳤다. 이상호(63) 월남참전용사 전우회 강서지부장은 “거리응원에 나선 젊은이들과 소통하고, 단합된 대한민국의 모습을 보고 싶어 나왔다.”고 말했다. 해외 참전용사도 가세했다.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한국을 방문한 파란 눈의 노신사 등 300여명의 해외 참전용사들도 거리 곳곳에서 “대~한민국”을 외치며 힘을 북돋웠다. 응원에 참가한 미국인 멀리 제이 피터슨(79)은 “한국전에 참전한 지 벌써 60년이 흘렀는데 아직 분단된 한국을 보니 마음이 아프다.”면서 “다음 월드컵엔 꼭 두 팀이 같이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병상에서 참전용사 전우들과 월드컵을 응원한 손경우옹은 “빨리 통일이 되어 남과 북이 하나로 뛰는 모습을 보고 죽으면 여한이 없겠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백민경기자 white@seoul.co.kr
  • 한국전쟁 60주년, 방송사별 특집편성

    한국전쟁 60주년, 방송사별 특집편성

    25일은 한국전쟁 발발 60주년 기념일이다. 우리 민족 질곡의 역사와 전쟁의 참상을 되새길 수 있는 기념비적인 날이다. 각 방송사마다 기념일 특집 준비에 열심이다. MBC는 이날 오후 1시40분 현대사 특집극 ‘노근리는 살아 있다’ 1부와 2부를 연속 방송한다. 노근리 사건은 1950년 7월25일부터 닷새간 충북 영동군 노근리 일대에서 발생했던 미군의 양민 살상 사건이다. 제작진은 노근리 사건의 진상과 피해 생존자들의 지난했던 삶, 어려웠던 진상규명 운동 과정을 조명한다. 오후 9시55분에는 ‘코레 아일라(Ayla)’를 마련했다. 유엔군의 일원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터키군 장교와 전쟁 고아인 다섯 살 한국 소녀 ‘아일라’ 사이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그려진다. 빛바랜 사진 한 장과 ‘아일라’라는 예명만 가지고 소녀를 찾아나서는 외국 군인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SBS는 오후 8시40분 ‘소련으로 끌려간 국군 포로-그 이송설의 진실’을 방송한다. 제작진은 6개월에 걸친 취재를 통해 국군 포로 2만여명이 소련에 이송됐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국군 포로 이송 지역으로 지목된 현장을 취재하고, 같은 시기 강제 노동 수용소에 억류돼 있던 북한 정치범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국군포로의 행적을 추적한다. 아리랑TV의 아리랑 투데이는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특집 방송을 준비했다. 오전 7시 1부에서는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이란 주제로 ‘민·관·군 한마음 625㎞ 이어달리기 행사’를 소개한다. 이 행사 3만여명의 참가자들은 호국영령 추모행사와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풍선 625개를 날리고 DMZ 박물관에서 참전용사 위로의 시간을 갖는다. 오전 11시에 방송되는 2부 ‘한국전쟁 또 하나의 얼굴, 소년 학도병’에서는 학도병들의 활약상이 전시돼 있는 경북 포항의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에서 그들의 희생을 되새긴다. tvN은 특집 다큐멘터리 ‘625인의 6·25’를 오전 11시에 방송한다. 한국전쟁 참전 용사와 실향민, 유엔 참전 군인들을 직접 만나 전쟁에 대한 기억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전쟁의 잔혹함과 분단의 아픔 등을 전할 예정이다. 딱딱한 다큐멘터리보다 영화를 통해 전쟁의 참상을 느끼고 싶다면 채널 CGV를 참고하면 좋겠다. CGV는 전쟁의 아픔을 담은 영화들을 방영한다. 오후 3시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를 시작으로 오후 5시30분에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볼 수 있다. 오후 9시에는 멜 깁슨 주연의 ‘브레이브 하트’, 밤 12시30분에는 나이지리아 내전을 소재로 한 ‘태양의 눈물’이 준비돼 있다.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국내 학자가 본 한국전쟁] “외세개입으로 무력통일 불가능 증명”

    [국내 학자가 본 한국전쟁] “외세개입으로 무력통일 불가능 증명”

    김대중 전 대통령은 역사에 대한 남다른 식견 때문에 설화에 휘말린 적이 많았는데, 6·25전쟁도 예외는 아니었다. 김 전 대통령은 재임 중 한국 역사에서는 세 번의 통일전쟁이 있었는데, 삼국통일전쟁과 후삼국통일전쟁 그리고 6·25전쟁이 바로 그것이라고 주장했다. 동족상잔의 비극으로만 여겨온 6·25전쟁에 통일전쟁이라는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이 때문에 김 전 대통령은 재향군인회 회원들로부터 거센 비난과 항의에 직면해야 했다. 독일의 전쟁사가 클라우제비츠가 설파한 것처럼 모든 전쟁은 정치의 연장인 것이 분명하다. 전쟁은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6·25전쟁의 목적이 통일에 있었다는 해석이 그렇게 비난받을 만한 것은 아니다. 전쟁 발발 당시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면 남북의 지도자들은 모두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전쟁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라도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보았다. 김일성은 1949년에 들어서자 공공연히 ‘국토완정=공산화 통일’을 주장했다. 결국 6·25전쟁의 방아쇠를 먼저 당긴 것도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설득에 성공한 김일성이었다. 남한 지도자들의 북진통일 주장은 인민군의 기습남침으로 빛이 바래 버렸지만, 인천상륙작전 이후 반격에 나선 국군은 38선의 회복에 만족하지 않고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격해 자유의 깃발을 꽂으려 했다. 남북의 지도자들은 형태는 다르지만, 전쟁을 통해 통일이라는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6·25전쟁을 통일전쟁이라고 보는 것은 행위자들의 주관적 의도만을 고려한 역사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는 행위자들의 의도와 관계없이 전혀 다른 길로 전개되는 과정과 그 결과도 함께 고려해서 평가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전쟁은 어떠한 과정을 거쳐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가? 3년여에 걸쳐 폭력과 학살의 광기에 지배된 전쟁은 엄청난 인명의 손실을 초래했고,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물적 자원과 생산력도 파괴했다. 전쟁은 남북대립 및 좌우대립을 통해 서로 죽고 죽이는 동족상잔으로 몰고 갔다. ‘미제와 그 주구에 대한 적개심’ 및 ‘공산당에 대한 반감’은 극한적으로 증폭되고 내재화되었다. 전쟁은 남북화해와 좌우합작에 의한 통일을 더욱더 어렵게 만들고, 분단을 더욱 고착화한 것이다. 이러한 전쟁의 결과를 놓고 보면 6·25전쟁을 통일전쟁으로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안이한 역사인식이며, 전쟁으로 통일을 달성할 수 있다는 주장이 얼마나 무책임한 것이었는지 분명해진다. 전쟁이 통일이 아니라 분단의 고착화로 귀결된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6·25전쟁으로부터 얻어야 하는 교훈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문제는 지극히 단순하다. 한반도가 처한 지정학적 여건상 전쟁으로 어느 한 편을 말살하여 통일을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반도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각축하는 전략적 요충지, 사회주의진영과 자본주의진영이 각축하는 열전의 최전선이 되었다. 북한이 기습남침을 감행하자 미국은 신속히 참전해서 공산화 통일을 저지했고, 국군과 미군이 38선을 넘어 진격하자 중국은 신중국의 운명을 걸고 인해전술로 맞서 자유통일을 막았다. 6·25전쟁은 무력을 통해 한반도 전체에 통일 자본주의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나 반대로 통일 사회주의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 그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불가능했음을 극명하게 증명한 전쟁이었다. 전쟁 초기에는 한반도 전체가 사회주의 체제로 통일될 뻔했고, 그 중반에는 반대로 자본주의 체제 아래 통일될 뻔했다. 그러나 한반도 전체가 그 적대 세력에 의해 통일되는 것을 반대하는 외세의 개입으로 남북의 무력통일 기도는 모두 실패하고 도로 분단상태가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상충하는 반도라는 지정학적인 위치와 남북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원인이 되어 분단된 한반도 지역에서, 적어도 1950년대의 상황에서는,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이지만, 분단국가의 어느 한 쪽 세력이 주도해 한반도 전체를 무력으로 통일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 바로 6·25전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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