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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 시티노믹스 시대-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② 재개발로 부활한 獨 드레스덴

    [뉴 시티노믹스 시대-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② 재개발로 부활한 獨 드레스덴

    “이 도시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책에서 배우지 않아도,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아도, 이 도시에서 지내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움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에리히 캐스트너) 독일인 대부분은 ‘독일 동부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는?’이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데 망설이지 않는다. ‘엘베 강의 피렌체 유럽의 발코니’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드레스덴이 있기 때문이다. 인구 50만명이 채 되지 않는 드레스덴을 찾은 관광객은 지난 5년간 350만명이 넘는다. 그러나 드레스덴이 갖고 있는 가장 큰 아름다움은 잘 지어진 건물과 교회, 박물관의 미술품 등이 아니다. 오늘날 드레스덴의 모습은 전쟁과 공산주의 체제하의 난개발 등 고난의 역사를 겪으면서 시민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수십년간 재개발과 복원을 통해 만들어낸 것이다. 1270년 작센주 마이센 지역의 행정관이었던 하인리히가 성을 세우며 본격적으로 번성하기 시작한 드레스덴은 17~18세기에 최전성기를 맞는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한창 막바지를 향해 치닫던 1945년 2월13일, 미·영 연합군은 드레스덴에 이틀간에 걸친 대폭격을 감행했다. 이 공습으로 드레스덴 시민 3만명이 목숨을 잃고 시가지의 90% 이상이 파괴됐다. 전쟁 직후 드레스덴 시민들은 시내 중심부의 츠빙거 궁을 비롯한 주요 건물들을 복원하기 시작했다. 젊은 남성들이 없어 가정주부부터 어린 아이들까지 하나하나 돌을 찾아 날랐다. 드레스덴의 주요 건물에서는 크고 작은 얼룩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드레스덴 박물관 직원인 볼프강은 “폭격으로 불에 타 버린 검은색 벽돌을 찾아 최대한 원형에 맞게 복원했기 때문”이라며 “깨끗하게 건물을 다시 세우는 것보다 원형 그대로를 보존하는 것이 우선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복원 작업은 오래 진행되지 못했다. 분단 이후 동독 정부가 폐허로 남아 있는 드레스덴 중심가에 현대식 건물을 집중적으로 짓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1990년까지 드레스덴은 중세 건물과 현대 건물이 난잡하게 얽혀 있는 도시로 전락했다. 통일 직후 드레스덴은 ‘과거로의 회귀’를 선언했다. 드레스덴의 부활을 상징하는 ‘프라우엔 교회’가 대표적인 사례다. 통일 이후 복원 작업이 본격적으로 재개된 프라우엔 교회는 2005년 말 돔 공사를 마치면서 무려 60년 만에 제 모습을 되찾았다. 드레스덴 시청 관계자는 “동독 정부는 교회터에 주차장을 만들려고 했지만 시민들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면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발견된 벽돌에 숫자를 붙여 보관하면서 복원 작업이 재개되기만을 기다렸다.”고 전했다. 현재 드레스덴에서 재건축이나 재개발의 가장 큰 키워드는 ‘보존’이다. 도시계획의 기준을 전쟁 이전으로 맞췄기 때문에 시내에서 최첨단 건물의 신축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건축 허가가 떨어진 이후에라도, 유적의 흔적이 발굴되면 공사는 전면 중단된다. 전문가들이 투입되고 복원과 공사 재개 여부에 대한 엄밀한 심사가 진행된다. 유적의 보존 가치가 크다고 판단되면 시는 공사 현장 이전을 권유하고, 대부분의 업체들은 이를 수용한다. 업체가 공사 강행 의사를 밝히면 시가 민간 기금과 협의해 아예 매입하는 경우도 있다.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드레스덴은 도시 전체를 새로 꾸미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드레스덴대 안나마리 솔 교수는 “궁극적인 목적은 동독 시절에 지어진 시내의 건물을 모두 철거하거나 리모델링해 과거의 드레스덴을 완벽히 재현하는 것”이라며 “신축건물이나 주요 시설 등을 외곽 지역으로 돌리는 방식으로 도시의 기능은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밝혔다. 이 계획은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목표의 30%를 넘는 진척을 보이고 있다. 실제로 드레스덴 시내 곳곳에서 벌어지는 공사는 다른 도시와 달리 현대식 건물을 허물고 옛 건물을 복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시내 중심부와 달리 시 외곽에는 비교적 자유롭게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다만, 도시 전체의 통일성을 해치는 건축이나 개발 계획은 엄격히 규제된다. 도시민의 삶의 질을 위해 도시 전체의 녹지 비중은 60%로 고정돼 있다. 건물 신축이나 재건축을 할 때에도 동일한 기준이 적용된다. 지난 10년간 드레스덴 도시개발 과정에서 가장 주목받은 건물은 폴크스바겐 공장이다. 2001년에 지어진 이 건물에서는 폴크스바겐의 최고급 차종인 페이톤이 수작업으로 생산된다. 특히 건물 자체가 투명한 유리로 지어져 공장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밖에서도 볼 수 있고, 공장 건너편까지도 환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모든 공정이 공개되다 보니 폴크스바겐의 기업 이미지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폴크스바겐 관계자는 “공장이 도시 내에서 동떨어진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녹지가 주를 이루는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된 것”이라며 “전 세계 도시와 기업에서 벤치마킹을 하기 위해 견학을 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전했다. 드레스덴 박건형 순회특파원 kitsch@seoul.co.kr
  • “통일경험 공유” 한·독 자문위 만든다

    “통일경험 공유” 한·독 자문위 만든다

    올해로 통일 20주년을 맞은 독일의 통일 과정에서의 교훈을 한반도 분단 극복에 활용하기 위한 한·독 공동 자문위원회가 설치된다. 양국은 또 통일 관련 문서와 자료를 공유하고 인적 교류도 추진키로 했다. 통일부는 4일 통독 20주년 기념식 참석차 독일을 방문한 현인택 통일부 장관이 지난 3일(현지시간) 옛 동독 재건 특임부처인 연방내무부와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통일 협의채널 구축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고 밝혔다. 통일부 당국자는 “통일 관련 첫 MOU로, 한반도 통일 미래 준비를 위한 국제 협력 확대의 초석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통일부는 한·독 양국의 통일 관련 원로들을 중심으로 ‘한·독 통일원로자문회의’(가칭)를 구성, 독일 통일과 통합 경험을 한반도 통일 준비과정에 효율적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자문회의에는 독일 측에서 통독 과정에 참여한 동·서독 전현직 고위관료 및 원로 학자들이, 우리 측에서 통일 관련 전직 관료 및 원로 학자들이 각각 10~15명 참여할 예정이다. 위원회는 연 1회 이상 열리며, 산하 실무위원회도 구성된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기고]나라의 일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은/남윤봉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기고]나라의 일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은/남윤봉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세상은 요지경, 요지경 속이다.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살고,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산다. 야이 야이 야들아, 내 말 좀 들어라.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 짜가가 판친다.” 1990년대 중반 세상을 풍자하며 한때 인기를 끌었던 노래의 가사가 요즘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개각을 할 때마다 소위 ‘잘난 사람들’에 대한 놀라움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예외가 아니었다. 그렇게도 멋지고 대단해 보이던 사람이 일순(一瞬) 왜소하고 초라하게까지 보이며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나.”하며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사나이라면 만 20세가 되면 당연히 국민으로서 병역의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은 기본이고 도리이다. 병역의무는 국가 존립의 바탕이며 생존권 보장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 모두에게는 엄연히 4대 의무로서 국방·납세·근로·교육의무가 있다. 이 네 가지 의무는 국민으로서 반드시 이행해야 이 나라에서 떳떳하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배울 만큼 배우고, 가질 만큼 가지고, 누릴 만큼 누리면서 일반 국민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됨직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수가 이런저런 이유로 병역의무를 수행하지 않고서도 이 땅에서 수십 년 동안 큰소리치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기이하다. 그것도 죄송한 마음으로 반성하며 사는 것도 아니고, 선량한 국민의 피와 땀으로 이룩된 번영의 혜택을 송두리째 누리는 소위 그 잘난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아마도 돈깨나 있든지 든든한 배경이 있든지 아니면 수완이 좋든지, 일반 국민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수단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대다수 일반 국민이 병역의무를 묵묵히 수행하는 동안 공부를 핑계로, 건강을 핑계로, 또는 돈과 배경 등을 이용하여 용납할 수 없는 병역면제를 받고서도 조금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가 하면 아직도 죄스러움을 망각한 채 국가의 중책을 맡겠다고 하는 행태를 보며 너무도 큰 실망감을 느낀다. 우리 일반 국민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소박한 진리 정도는 알고 있고,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평범한 상식도 알고 있다. 그런데 유독 소위 잘 났다는 사람들만 모르는 듯하니 참으로 기가 막히고 안쓰럽다. 두 손을 모아 부탁하고 싶다. 국가의 존립에 관한 병역의무를 확실히 수행하지 않고서는 이 나라 대한민국에서 살 수 없음을 알아야 하며, 부득이 수행하지 못한 경우라면 조용히 반성하며 죄송한 마음으로 살아야 그나마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는 누구를 막론하고 적법을 가장한 합법적 병역면제로는 국민으로서의 자격을 인정받지 못할 것이며, 더 나아가 국가의 중책을 운운하는 것은 대다수 일반 국민을 무시하는 처사임을 깊이 새겨야 한다. 우리 대한민국의 분단 상황이 지속되는 한 무엇보다도 병역의무는 신성하고 존엄한 국민의 의무로서 국가수호의 최고 의무임을 확인하고 수행했어야 하며 또한 수행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진정한 국민이라면.
  • [독일통일 20년-박건형 순회특파원 베를린 르포] (3·끝) 獨 학자들이 말하는 ‘한반도 통일’

    [독일통일 20년-박건형 순회특파원 베를린 르포] (3·끝) 獨 학자들이 말하는 ‘한반도 통일’

    통일 이후 20년간의 사회 변화를 지켜본 독일 학자들은 통일의 성과와 문제를 어떻게 평가할까. 또 독일의 통일과정에서 한국이 배워야 할 점은 무엇일까. 지난달 30일(현지시간) 헬가 피히트 훔볼트대 전 교수, 이은정 베를린 자유대학 교수, 하랄트 뮐러 헤센평화연구소장 겸 프랑크푸르트 괴테대학 교수 등 독일 학자 3명과의 인터뷰를 통해 통일의 시사점과 조언을 들어봤다. 20년 이상 에리히 호네커 구동독 공산당 서기장의 한국어 통역을 맡아 한반도 정세에 능통한 피히트 전 교수는 “현재 독일 사회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들의 근본 원인은 사전준비나 충분한 연구 없이 경제적 힘에 의해 이뤄진 흡수통일”이라며 “동독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40년간 일군 것들이 한순간에 왜곡되거나 사라지도록 방치한 역사적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회주의 장점은 적극 수용해야” 문화적 차이나 태어나고 자란 배경의 차이 등을 고려하지 않고 구서독의 체제를 독일 전역에 일방적으로 적용하다 보니 내적 통합에 많은 시간이 걸리고 있다는 얘기다. 특히 전면적인 사회주의 정책의 폐기는 독일인의 가치관에 상당한 혼란을 줬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피히트 전 교수는 “동독 사회주의 시스템의 장점을 서독의 서구식 자본주의와 잘 결합시켰다면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사회구조를 창조할 수 있었다.”면서 “슈타지(국가보안국)의 억압, 비효율적인 경제시스템, 유일정당의 독재 등 사회주의의 현실적 병폐만 부각시킨 나머지 장점은 외면했다.”고 진단했다. 완전 고용제·남녀평등·사회적 육아와 교육, 복지제도 등 구동독의 장점이 통일과 함께 묻혀버렸다는 것이다. 이은정 교수는 최근 발표된 여론조사 결과를 인용해 독일의 내적 통합이 구조적인 한계에 직면해 있다고 전했다. 그는 “구동독 지역의 고급 고등학교(김나지움) 졸업생 중 90%가 석달 안에 구서독 지역이나 베를린으로 일자리를 찾으러 고향을 떠나는 것으로 조사됐다.”면서 “1년이 지나면 거의 남는 사람이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가장 큰 원인은 일자리 문제다. 이 교수는 “통일 직후에는 사명감을 갖고 구동독 지역 재건을 위해 사람들이 이 지역으로 모였지만, 고급 일자리가 만들어지지 않다보니 한 세대도 안 돼 이런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자리 늘려 ‘내적통합’ 부축을” 피히트 전 교수는 ‘구동독 지역에 집중된 지원’ 논란에 대해서도 ‘명백한 오해’라고 지적했다. 통일 이후 동독지역의 인프라 구축에 대대적인 자금이 투자됐지만 실제로 이를 통해 이득을 본 것은 서독 지역의 건설회사나 자본들이다. 동독지역의 재건사업조차도 서독지역의 부를 늘리는 역할을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 교수 역시 “이같은 사업들이 동독 기업들을 키우거나 지역경제에 이바지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셈”이라고 강조했다. 뮐러 교수는 지금 세대가 겪고 있는 문제보다는 미래세대의 관점에서 통일 독일을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수십년간 분단된 상황을 감안하면 독일의 경제와 사회는 빠른 속도로 하나가 되고 있다.”면서 “통일 이후에 등장한 세대에서는 기성 세대의 갈등 문제가 크게 부각되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 역시 “현재 통일둥이인 대학 신입생들은 아예 동독과 서독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면서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하나의 독일’이라는 개념이 심어진 것은 사실”이라고 분석했다. 뮐러 교수는 남북한이 통일될 경우 사회 통합의 관건은 얼마나 빠른 시간 안에 경제 균형을 잡느냐에 달려 있다고 조언했다. 경제적 만족도가 높아지면 자연스럽게 심리적 갈등이 치유될 수 있는 만큼 남북간의 빈부격차를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민족이 같더라도 50년 이상 분단돼 있었고, 시스템과 사상마저 다른 만큼 남북한의 차이는 아예 나라보다 더 멀다.”면서 “최소한 30년, 길면 60년 이상을 내다보고 점진적으로 차이를 없애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이 교수는 통일 이후 한국에서 남북한 갈등이 고질적인 지역감정과 맞물려 복잡한 상황이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독일의 경우 선거 때마다 남북 지역이 전혀 반대의 양상을 나타내는 오래된 지역갈등이 있다. 이 같은 문제가 통일 이후 동서 갈등과 합쳐지면서 통일 정책의 선거이슈화 등 수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이 교수는 “다음 선거를 이기기 위해 통일 관련 공약을 만들 게 아니라 장기적인 안목으로 사회를 통합할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면서 “통일 문제를 고민하면서 한국 내부의 지역갈등이나 정치 이슈와 분리해 긴 안목으로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자본주의 이해도 제고 교육 중요” 독일은 교과서 개편은 물론 동독 출신 국민들의 민주시민 교육에 많은 자금과 노력을 투입했다. 성인들에게는 서독식 자본주의·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참여를 유도했다. 그러나 ‘동독의 사회주의가 잘못된 것’이라는 내용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피히트 전 교수는 “실질적으로는 동독의 체제가 버려진 것이지만, 동독 출신들에게 동독을 비판하는 것은 그들의 삶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라며 “사람들에게 서독식 자본주의·민주주의의 장점을 알려주고 생각은 그들 스스로에게 맡기는 방식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만약 한국에서 통일이 이뤄지더라도 북한의 문화와 정책 중에 바람직한 것들은 적극적으로 수용할 필요도 있다.”고 덧붙였다. 최근 한국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통일세’의 취지에 대해서는 세 학자 모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피히트 전 교수는 “독일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통일은 어느 순간에 갑자기 올 수 있다.”면서 “이를 대비하기 위한 재원을 마련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보완점에 대한 주문도 나왔다. 이 교수는 “통일을 준비하면서 강제로 징수한다는 ‘세금’이라는 명칭을 붙이는 것 자체가 사람들에게 통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kitsch@seoul.co.kr
  • [사설] 통독 20년… 분단 65년 한반도에 주는 교훈

    내일이면 독일 통일 20주년이다. 그러나 한반도는 범세계적 해빙의 물결을 타지 못한 채 냉전의 마지막 고도로 남아 있다. 분단 65주년을 맞았지만 남북간 대치와 이질화는 외려 심화되고 있다. 천안함 참사와 북한의 3대 권력세습 공식화가 그 징표다. 분단의 상흔을 성공적으로 극복 중인 독일이 우리에게 단순한 선망의 대상이 아니라 통일한국의 나침판이 돼야 한다. 통일 독일도 막대한 통일비용을 치르면서도 여태껏 적잖은 후유증을 앓고 있다고 한다. 양독 간 경제적 격차와 주민들 간의 이질적 정체성 때문이다. 하지만 남북 간 격차와 이질화에 비할 바는 아니다. 지난해 기준으로 37.3대1로 벌어진 남북 간 소득격차는 오히려 작은 문제일 게다. 북한사회가 60여년 주체사상과 ‘우리식 사회주의’라는 폐쇄회로에 갇히는 바람에 심화된 남북의 이질성은 통일 후에도 커다란 트라우마로 남을 게 뻔하다. 그렇다고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가서야 되겠는가. 서독이 그랬듯이 대한민국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두 축으로 통일의 주도권을 행사해야 한다. 유무형의 통일비용을 다 합치더라도 통일로 인한 편익보다 적을 것이라는 적극적 사고가 긴요한 시점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북한의 시대착오적인 3대 세습이 통일로 가는 여정에서 가장 큰 걸림돌임은 분명하다. 북한은 그제 김정일 위원장의 3남 김정은의 얼굴과 함께 당대표자회의 결정내용의 일부를 공개했다. 헌법보다 상위 규범인 노동당 규약 서문에서 ‘혁명적 마르크스-레닌주의 당’이란 문구를 삭제, ‘김일성의 당’으로 못박고 ‘김일성 조선’이란 표현을 추가했다. ‘김씨 왕조’의 후계자가 김정은임을 선포한 꼴이다. 세계적 조롱거리인 이런 세습쇼는 북측으로선 인민 생활과 남북관계의 개선이나 개방, 비핵화 등은 뒷전일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이런 북을 상대로 통일을 추구해야 하는 게 우리의 숙명이다. 북한이 시대역행적인 길을 걷더라도 퇴로마저 막고 압박하는 것도 능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지난 10년간처럼 ‘묻지마 지원’ 또한 북한정권의 퇴행을 부추기고 주민의 고통을 연장·가중시키는 일일 수도 있다. 이런 딜레마에 직면한 우리에게 한스 울리히 자이트 주한 독일대사가 최근 유용한 조언을 했다. 그는 “서독은 동독이 응하지 않더라도 끊임없이 협력을 제안했다.”고 강조했다. 그 대신 동독의 체제변화와 개혁을 반드시 요구했다는 부연 설명도 잊지 않았다. 인도적 지원이나 경협에는 적극적으로 임하되 상응하는 개혁·개방을 당당히 요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 [독일통일 20년-박건형 특파원 현지르포](2)끝나지 않은 동·서 갈등

    [독일통일 20년-박건형 특파원 현지르포](2)끝나지 않은 동·서 갈등

    “저 어린 소녀의 사진을 보세요.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이 순수한 표정으로 아버지의 무동을 탄 채 촛불을 들고 있는 모습을요. 우리는 매년 10월이면 저 때의 감동을 되살립니다.” 베를린에서 고속철도로 1시간10분가량 떨어진 구동독 최대도시 라이프치히는 흔히 ‘독일 통일의 시발점’으로 불리는 곳이다. 1980년 중앙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니콜라이 교회에서 20여명이 모여 열었던 ‘평화 기도회’가 점차 커져 시민운동, 통일운동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지난 28일(현지시간) 니콜라이 교회에서 만난 신자 엘리아스 슈미트(46)는 “베를린 장벽 붕괴 직전인 1989년 10월9일 월요기도회와 시위 행진에는 시민 7만 5000명이 참여했다.”고 전했다. 이 시위는 하루가 다르게 규모가 커져 불과 4주 만에 베를린 장벽 붕괴로 이어졌다. 니콜라이 교회를 비롯한 라이프치히 시내 곳곳에서는 당시 시위에 참가한 한 여자아이의 사진이 담긴 포스터를 발견할 수 있었다. 라이프치히 시민들은 오는 9일 이 행진을 재현할 계획이다. 라이프치히는 2차 세계대전 이전 유럽 최대의 방적도시였다. 1915년 세워진 중앙역은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그러나 공산주의 체제의 영향과 산업 자체의 하락세로 인해 끝없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도시 인구도 절반 이하로 줄었다. 하지만 통일 이후 20년이 지난 현재 라이프치히는 빠른 속도로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새 건물들이 지어지고, 정부의 지원과 기업유치도 비교적 성공적으로 진행됐다. 이 같은 변화는 비단 라이프치히만의 현상은 아니다. 드레스덴, 예나 등 구동독의 대도시는 물론 중소도시에 이르기까지 대대적인 자금이 투입됐고 지금도 끊임없이 공사가 이어지고 있다. 동서가 공존했던 베를린의 모습도 비슷하다. 총리 집무실을 비롯해 정부기관이 들어서 있는 중앙역은 베를린 중심에 위치해 있다. 1990년 통일 이후 베를린의 대규모 사업은 이곳을 기준으로 동쪽에 집중됐다. 알렉산더 광장, 바르샤바길, 슈트라스부르크 광장 등 주요 교통수단이 지나는 길마다 초대형 쇼핑센터가 집중적으로 건설됐고 관광코스도 개발됐다. 반면 서베를린 지역은 과거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마부르크대학에서 정치사회학을 전공한 김기민 박사는 “통일에 대해 막연히 잘됐다고 생각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정부 지원의 차이가, 보이지 않는 동서 갈등의 주요원인이 되고 있다.”면서 “서독 출신들은 드러내지는 않지만 동독 출신을 무시하고, 동독 출신은 열등감 때문에 위축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지방으로 가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이는 독일 통일이 이뤄진 시기의 경제구조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당시 서독의 도시들은 상당수가 성장동력의 한계 때문에 어려움을 겪으며 중앙정부의 도움을 절실히 원하고 있었다. 자브리켄 등 중공업 위주로 소위 ‘잘나가던’ 도시들은 폐업과 실업률 증가, 인구감소 등으로 1970년대 이후 극심한 정체기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정부 예산이 동독 재건사업에 집중되면서 이 지역은 여전히 낙후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브리켄에 있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유럽본부의 변재선 실장은 “동독 지역은 시골 도시까지 길을 새로 닦고 건물을 지어주는데, 서독 지역에는 세금만 내고 지원이 없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고 전했다. 30년 이상 분단을 겪으면서 생긴 문화적 차이도 주된 갈등 요인이 되고 있다. 같은 게르만 민족인데도 드레스덴과 라이프치히 등 구동독 사람들은 프랑크푸르트나 뮌헨 등 구서독 사람들과 뭔지 모를 차이가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견한 차이의 정체는 ‘식습관과 지나친 자기절제’였다. 공산주의 체제에서 구동독의 여성들은 ‘살이 찌는 것은 죄악’이라는 교육을 받았다. 실제로 드레스덴이나 라이프치히 등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마른 사람이 많다. 통일 이후 20년이 지났지만, 부모 세대가 받은 교육의 영향이 여전히 힘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전 세계 없는 곳이 없는 중국음식점조차 구동독 지역에서는 현지 주민이 아닌 관광객을 대상으로 영업을 한다. 드레스덴 오페라단의 김재석씨는 “기름기가 많은 음식을 먹으면 일부 여성들은 받아내지 못하고 토할 정도”라며 “구서독 지역 출신들은 이런 행동을 유별나다며 혐오시하는 측면이 있다.”고 밝혔다. 동서독 통합의 핵심인 인력 교류 역시 요원하다. 우수한 인재를 유치해 낙후된 구동독 지역을 일으켜 보려 했던 노력들은 번번이 실패하고 있다. 서독 출신들이 아예 동독 지역으로 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의 연구소인 막스플랑크와 프라운호퍼는 통일 이후 동독 지역 여러 도시에 부설 연구소 이전 계획을 세우고 실제 초호화 건물을 신축하는 등 야심찬 계획을 세웠으나 라이프치히와 드레스덴 등으로 이주하기를 꺼리던 연구원들 상당수가 아예 직장을 그만두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계획을 접어야 했다. 막스플랑크 플라스마연구소의 유정하 박사는 “결국 현지에서 새로운 인력을 뽑아서 연구소를 운영해야 했기 때문에 엄청난 비효율 논란에 시달렸다.”면서 “숙련된 기술과 지식이 없는 인력들로 인해 시간을 다투는 연구들까지 지장을 받았다.”고 전했다. kitsch@seoul.co.kr
  • [독일통일 20년-박건형 특파원 현지르포] 統獨 정치·외교 파워

    하나된 독일은 통일의 가장 큰 장점, 즉 몸집이 커지면 힘이 세진다는 단순한 진리를 고스란히 확인시켜주고 있다. 독일은 경제적으로는 통일 후유증을 겪었지만 정치·외교적으로는 강력한 주권국가의 위상을 누리고 있다. 2차 세계대전 패전국으로서의 ‘원죄’와 분단국의 비애에서 벗어나 정상적이고 떳떳한 강대국으로 변신했다. 2003년에 발발한 이라크전쟁에 미국은 독일의 참전을 여망했지만 독일은 끝내 외면했다. 서독이 미군의 후원에 힘입어 동독과 대치하던 시절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통일 이전 서독은 평화헌법에 의해 자국이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맹국이 침략을 당한 경우에만 무력 대응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통일된 독일은 1999년 나토 동맹국도 아닌 유고 사태에 처음으로 전투병을 파견했다. 올해 5월 호르스트 쾰러 독일 대통령은 독일의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해외에서의 군사작전이 필요하다고 발언한 것이 논란이 돼 결국 사임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이른바 ‘함포(艦砲) 외교’를 운운하는 분위기 자체가 통일 이전에는 꿈도 못 꾸던 일이었다. 독일은 통일을 통해 유럽연합(E U) 결성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며 영향력을 키웠다. 동유럽 국가들의 EU 가입을 주선했고 러시아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동서 간 균형자’로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기후변화 등 환경위기와 미국발 세계 금융위기 해결에서도 국제적인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 독일은 지금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자리까지 주장하고 있다.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한국, 北교류 실용적으로 접근해야”

    “한국, 北교류 실용적으로 접근해야”

    “과거 서독과 동독 사이에서도 동독은 뭐든지 서독한테서 얻어가려고만 하고 대가는 내놓지 않으려 했다. 서독에서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동독과 협상을 했다. 상대가 응하지 않더라도 협력을 제안하는 것이 더 유용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제안을 하면 동독 정부가 절대 거부하지 못할까 항상 고민했다. 대신 협력을 제안할 때는 분명하게 ‘체제 변화와 개혁을 원하기 때문’이라고 대놓고 말했다. 동독이 일단 제안을 받아들이면 그 다음에는 그걸 계기로 정치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방안을 고민했다.” ●“상대 응하지 않아도 협력 제안해야” 다음 달 3일이면 한때 서독과 동독으로 불리던 두 국가가 ‘독일’이라는 이름을 회복하며 통일된 지 20주년을 맞는다. 이를 기념해 서울 동빙고동 주한독일대사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한스 울리히 자이트 대사는 최근 급격히 냉각된 남북관계와 북한 후계문제 등 민감한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면서도 분단과 통일 경험을 들려주며 한반도 통일을 위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그는 ‘실용적 접근’이란 말을 여러 차례 써가며 교류협력을 통한 긴장완화를 주문했다. 그는 ‘상호주의’와 ‘민족우선’을 둘러싼 우선순위 논쟁과 관련, “두 원칙을 조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며 그것을 위해서는 실용적으로 접근하는 자세가 필수”라고 강조했다. 그는 “서독은 동독 정부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도움을 제공하면서 다른 분야에서 비용이 적게 드는 양보를 요구했다.”면서 가령 대규모 경제적 지원을 하는 대신 정보를 좀 더 공개할 것을 주문하는 식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정보 교류는 당장 돈이 들어가는 게 아니어서 파급효과가 작아 보이지만 장기적으로 훨씬 긍정적인 효과를 낸다.”고 밝혔다. 자이트 대사는 급작스러운 독일 통일과정에서 겪었던 두 가지 시행착오를 반면교사로 삼을 것을 조언했다. 동독의 경제력을 너무 과대평가한 점과 서독의 사회보장제도를 동독에 하루아침에 적용한 점이다. ●“北 경제수준 직시… 점진적 통일을” 그는 “서독에서 우수한 사회보장제도가 가능했던 것은 고도로 발달한 경제가 뒷받침됐기 때문이었다.”면서 “경제가 붕괴된 동독에 서독 시스템을 그대로 이식한 것은 오류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경제발전 잠재력이 높다는 것과 별개로 북한의 현재 경제수준을 올바로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결국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통일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독일통일 20년 박건형 특파원 현지르포] (1) 역사의 현장 베를린을 가다

    [독일통일 20년 박건형 특파원 현지르포] (1) 역사의 현장 베를린을 가다

    ‘벽화’된 장벽 의외로 조용 경제통합은 종착점 눈앞 동독인들 “우린 2등국민” 가슴속 장벽 현재진행형 폭이 20㎝ 조금 넘을까. ‘장벽’은 초라했다. 30년 넘게 한 민족을 갈라 놓았던 ‘냉전의 상징’은 망치 하나로도 깨부술 수 있을 정도로 얇았다. 자유를 갈망하며 담을 넘고, 그 뒤에서 총부리를 겨누던 얘기는 이제 흑백사진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아련한 얘깃거리가 됐다. 강산이 두 번 변하는 시간. 20년이라는 세월은 언뜻 ‘통일’이라는 감동조차 과거로 밀어내기에 충분한 시간으로 비쳐졌다. 다음 달 3일, 독일 통일 20주년을 앞두고 찾은 베를린의 모습은 역사의 감격을 되새기기에는, 그렇게 너무나 조용했다. 어느덧 통일은 독일인들에게 일상의 하나로 체화된 듯했다. ●통일둥이 “아픈만큼 강해졌다” “분단은 우리의 뜻과 상관없이 벌어진 일이었지만, 통일은 우리 힘으로 해냈다는 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죠.” 지난 28일(현지시간) 베를린 시내 오스트역에서 바르샤바길로 이어지는 ‘베를린 장벽 이스트사이드 갤러리’에서 만난 여대생 노라는 “통일은 어떤 의미냐.”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뮌헨에서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왔다는 노라는 1990년 태어난 ‘통일둥이’다. 그는 “태어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지만, 부모님 세대한테 얘기를 많이 들어 장벽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면서 “아픈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 독일이 유럽에서 다시 강자의 위치에 올라설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동독 소득 서독의 70% 달해 동독 주민들의 탈출을 막기 위해 1961년 155㎞에 걸쳐 세워진 베를린 장벽은 통일과 함께 대부분 모습을 감췄다. 분단의 아픔을 기억하기 위해 남겨 놓은 1.3㎞의 장벽은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라는 이름의 거대한 미술관으로 남았다. 전세계 21개국에서 초청된 118명의 작가들이 그린 벽화로 가득 채워져 있다. 뒤편의 황량한 모습만이 이곳이 한때 ‘장벽’이었음을 일깨워 줄 뿐이다. 근처에서 조그마한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한 터키인은 “장벽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관광객들이고, 독일인은 열 명 중 한 명 정도”라고 전했다. 독일인들을 감격케 한 ‘통일’은 이제 관광객들에게 내다 파는 상품으로 남았을 뿐이라는 얘기로 들렸다. 베를린 한복판 코크 슈트라세에 있는 ‘찰리 검문소’가 이런 현실을 보여 줬다. 1990년 통일 때까지 유일하게 동서 베를린을 이어주던 이곳은 지난 2000년 복원과 함께 관광명소로 탈바꿈했다. 길 주변으로는 ‘베를린 장벽 1961~1989’라고 쓰인 블록 표지만이 장벽이 있었던 곳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흔히 ‘장벽 박물관’으로 불리는 이 곳의 찰리검문소 박물관은 장벽투어의 필수코스로 꼽힌다. 장벽의 일부분이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고, 수많은 문서와 동서독의 군사무기 등이 전시돼 있다. 그러나 정작 이를 지켜보는 독일인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역사는 뒷전이고, 상혼만이 판치고 있다는 것이다. 동베를린에서 공장 기술자로 일했다는 니클라스 볼프(55)는 “역사적 가치가 높은 검문소를 복원해서는 12유로가 넘는 비싼 입장료를 받고 가짜 스탬프를 찍어주거나 사진을 같이 찍고 돈이나 받는 게 말이 되느냐.”면서 “자유를 찾기 위해 탈출하다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진짜 역사에서 교훈을 찾기 위해서는 상업적인 부분은 배제하는 것이 옳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독일의 통일은 지난 20년의 격랑을 헤쳐 오면서 이제 ‘현재완료형’의 마침표만 남겨놓은 듯 했다. 적어도 독일인들에겐 그랬다. 지난해 기준으로 독일은 국내총생산(GDP) 세계 4위의 경제대국이고 세계 3위의 무역대국으로 복귀했다. 통일 직후 서독인들의 42.9%에 불과했던 동독인들의 생활 수준은 이제 소득 기준으로 서독인들의 70% 중반 정도까지 올라섰다. 지역갈등의 핵심요인으로 작용했던 동독인들의 생산성도 서독인들의 80%까지 상승했다. 지역의 통합에 이어 경제의 통합이 어느 정도 완성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제지표상의 수치가 통일독일 20년의 모든 것을 말해 주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사회 통합이 여전한 과제로 남아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동독인들의 소외감이다. 경제적 격차가 많이 좁혀졌다고는 하나 지난 20년간 동독인들이 겪어온 소외감과 상실감, 패배감은 쉽사리 치유되지 않고 있다. ‘오스탈기(Ostalgie)’라는 조어가 이를 웅변한다. 동독을 뜻하는 ‘오스트(Ost)’와 향수를 의미하는 ‘노스탈기(Nostalgie)’를 결합한 이 말은, 지금도 동독인들이 얼마나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지를 보여 준다. 2008년 독일의 베를린-브란덴부르크 사회과학연구센터가 실시한 여론조사만 보아도 동독지역 주민 가운데 자신을 진정한 독일인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22%에 불과했다. 반면 자신을 통일독일의 국민이라고 느끼지 않는다는 사람은 62%나 됐다. 과거 동독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사람도 16%나 있었다. 찰리 박물관에서 만난 한 동독 출신 여성은 이런 정서를 보였다. “통일이 된 지 20년이라지만 여전히 우리를 2등 국민으로 여기는 서독인들이 적지 않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반면 정부가 사회 통합에만 매달리느라 과거 청산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다.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 동독 군인이었고, 장벽 바로 앞에서 시위대를 맞았다는 얀 좀머(50)는 “부모님들은 아직도 슈타지라면 치를 떤다.”면서 “동독 사람들을 비인간적으로 탄압하던 밀케가 고작 6년형을 받은 것을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과거 동독 공산당 시스템의 핵심이었던 ‘슈타지(국가공안국) 박물관’ 관계자는 “슈타지 총수였던 밀케는 통일 전 수많은 동독인들을 체포하고 살해했지만 대부분 무죄 판결을 받았고 그나마 건강이 악화됐다는 이유로 병원도 아닌 요양원에서 편하게 죽었다.”면서 “통일 이후에 통합에 너무 급급한 나머지 과거에 대한 처벌이나 정리가 이뤄지지 않은 것에 대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한다.”고 강조했다. 정치와 국경의 통일은 이제 20년 전의 역사가 됐다. 독일 정부가 각고의 노력을 펼쳐 온 경제의 통일도 이제 종착점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러나 동·서독인들의 가슴 속 깊이 뿌리박힌 장벽은 아직껏 철거되지 않았다. 베를린에서 바라본 독일 사회의 통일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글 사진 베를린 박건형 순회특파원 kitsch@seoul.co.kr
  • “6·25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전쟁”

    “6·25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전쟁”

    지난 1981년 ‘한국 전쟁의 기원’을 출간, 당시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에 큰 파장을 일으켰던 미국 역사학자인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석좌교수가 다시 6·25전쟁 저서를 냈다. ‘한국전쟁(The Korean War)’이라는 제목을 단 288쪽의 책은 30년 남짓만에 6·25전쟁을 다시 다룬 저작으로, ‘한국전쟁의 기원’의 증보판 격이다. 이달 중순 출판됐다. 커밍스는 책 서두에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헌정한다’ 라고 써 김 전 대통령을 추모했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누가 방아쇠를 먼저 당겼느냐는 것은 의미가 없다.”며 6·25전쟁을 1945년 이후 해방공간에서 형성된 한국 내부의 모순에서 비롯된 ‘내전’으로 성격을 규정했다. 때문에 논쟁의 중심이 됐고 1980년대 금서 목록에 올랐다. 커밍스의 시각은 주로 1980년까지 공개된 미국 측 자료에 의존했고, 1990년대 옛 소련의 6·25전쟁 당시 외교문서가 빛을 보면서 김일성의 전쟁 책임론을 입증하는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나 자료에 한계가 있었다는 지적도 받았다. ‘한국전쟁’은 지금껏 제기된 비판들에 대한 커밍스의 답변이자 현재의 북한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을 정리한 책인 셈이다. 커밍스는 여전히 6·25전쟁을 ‘내전’으로 해석했다. 커밍스는 “지금 미국인들에게 한국전쟁은 1950년 6월에 시작돼 1953년 7월에 끝났고, 미국인들이 주역이었다는, 불과 몇 마디로 요약된 이야기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라며 저술 배경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결코 미국의 적(북한)을 몰랐고, 지금도 여전히 모른다.”면서 대다수 미국인들이 모르고, 또 아마 알기를 원치 않는 진실, 때때로 미국인의 자부심에 상처를 줄 만큼 충격적인 진실들을 밝히려는 시도가 담겨 있다.”고 강조했다. 책은 6·25전쟁의 전개과정과 미국인들의 의식, 냉전시대 미국의 세계 정책에 미친 영향 등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다루지 않았던 주제까지 분석했다. 커밍스는 결론에서 6·25전쟁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전쟁이라고 규정했다. “순수하게 한국인끼리의 내전이었다면 식민주의·민족분단·외세개입으로 잉태된 긴장을 해소할 수도 있었을 것인 만큼 진짜 비극은 전쟁 그 자체가 아니다.”라면서 “비극은 전쟁이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전전(戰前) 상태가 그대로 복원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미국의 해외군사기지 구축을 구조화시키고, 미국을 세계의 경찰로 탈바꿈시킨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아니라 바로 한국전쟁”이라며 6·25가 미국의 향후 대외전략에 미친 영향도 지적했다. 워싱턴 김균미특파원 kmkim@seoul.co.kr
  • [책꽂이]

    ●iWAR(손영동 지음, 황금부엉이 펴냄) 지난해 겪은 디도스 대란은 사이버 테러의 심각성과 철저한 보안대책 마련의 필요성을 새삼 확인시켜 줬다. 책은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사이버전이 될 것이라고 단언하며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물론 기업과 개인이 준비해야 할 미래 사업의 방법, 인재 육성 방법 등을 제시한다. 가상 사례를 구체적으로 들어 광범위한 사이버 보안 이슈들을 풀어냈다. 1만 8000원. ●김구 전태일 박종철이 들려주는 현대사 이야기(함규진 지음, 철수와영희 펴냄) ‘역돌이’가 백범 할아버지, 태일이형, 종철이형과 가상 채팅과 이메일을 나누며 일제강점기부터 시작해 해방 전후, 분단과 전쟁 등 현대사까지 짚어 본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지내온 오욕의 세월, 아빠와 엄마가 지내온 격동의 과정들을 한국전쟁, 4·19, 5·18, 6월항쟁 등 주요 쟁점 중심으로 쉽고 일목요연하게 보여 준다. 1만원. ●중국사유(마르셀 그라네 지음, 유병태 옮김, 한길사 펴냄) 1934년에 씌어진 책이다. 인간과 우주의 연계를 도모함으로써 인간과 사회, 사회와 자연을 분리하지 않는 ‘중국사유’는 이성적 추론에 입각한 서구의 인식론적 비평체계와 다르다고 얘기한다. 서구에서 중국 연구의 대가로 꼽히는 그라네가 내놓았던 저서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문화에 드러난 문자와 언어, 숫자, 사상의 주개념들을 포괄적이며 유기적으로 정리했다. 3만 2000원. ●청소년을 위한 사랑과 성의 역사(루츠 판 다이크 지음, 전은경 옮김, 비룡소 펴냄) 사랑과 성. 쉬쉬하던 옛 시절과 달라져 온갖 정보와 자료들이 돌아다니고 있는 세상이 됐건만 여전히 대를 이어 가는 호기심, 시인·소설가의 깊이 있는 성찰과 탐구는 계속되고 있다. 폭력과 범죄의 수단으로 쓰이고 있음 또한 물론이다. 저자는 사랑과 성의 역사는 인간성의 역사라고 얘기하며 동서고금에 드러나 있는 사랑과 성의 역사를 인문학적으로 성찰하고 있다. 책의 결론은? 솔직한 드러냄 이상은 없다. 1만 6000원.
  • “분단의 상처 한땀한땀 꿰매는 중”

    “분단의 상처 한땀한땀 꿰매는 중”

    천안함 사태 이후 냉각됐던 남북 관계에 훈풍이 불 조짐이 보인다. 양측 정부의 이산가족상봉 재개 논의 소식은 모처럼 반가웠다. 그러나 이산가족 상봉 예정자의 34%가 이미 사망했다는 보도에 반가움이 줄어들었다. 한 달 평균 250명 가까이 세상을 등지고 있다고 하니 안타깝다. 한반도가 반으로 갈라진 지 60년. 가고 싶은 고향 땅과 그리운 가족을 끝내 다시 보지 못하고 세상을 등지는 실향민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뉴스는 마치 우리 민족의 통일에 대한 염원이 희미해지고 있음을 꼬집는 것처럼 들려 가슴 한쪽이 뜨끔하다. 서울과 평양은 자동차로 한 시간도 못 되는 거리에 있지만 심리적 거리는 더욱 멀어지고 있는 듯하다. 북녘에 고향을 둔 실향민들이 하나둘씩 사라진다는 것은 그들의 절절한 목소리를 들을 기회를 잃어버린다는 것과 같다. 애끓는 절규가 없으니 젊은 세대들이 통일에 대한 염원과 당위성을 가지기란 쉽지 않다. 무엇보다 경제적 효율성을 따지는 요즘 일부 젊은이들은 통일을 귀찮은 짐으로 여기기도 한다. 통일세 문제가 나왔을 때의 반응만 봐도 그렇다. 현실 가능한 대북지원책은 제쳐 두고 통일세를 불쑥 꺼낸 정부의 처사가 거북했기 때문이라지만, 이 문제가 언제 다시 나오든 심리적 저항감을 누그러뜨리기는 어려워 보인다. 갈라진 땅이, 사람이 반드시 하나가 돼야 한다는 진지한 ‘발성’(發聲)이 끊임없이 나오는 것은 그런 까닭에 더욱 심장한 의미를 가진다. 성공한 재미 한인 의사이면서 통일운동가로도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오인동(71) 박사가 쓴 두 권의 책에는 그러한 목소리가 실려 있다. 나란히 출간돼 더욱 눈길을 끄는 ‘평양에 두고 온 수술가방’(창비 펴냄)과 ‘통일의 날이 참다운 광복의 날이다’(솔문 펴냄)는 남북문제와 통일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 준다. 저명한 정형외과 의사인 저자는 황해도 옹진 출신으로 가톨릭 의대를 졸업하고 1970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인공고관절수술법 개발과 고관절기 고안으로 11종의 발명특허를 획득하고 수차례 학술상을 받은 그가 남북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계기는 1992년 재미한인의사회 대표단으로 북녘 땅을 처음 밟으면서. ‘평양에 두고 온 수술가방’은 그의 네 차례에 걸친 생생한 방북기다. 천안함 사건으로 남북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던 지난 6월까지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지켜본 북한과 그곳 사람들의 변화상, 소통에 대한 희망과 통일에 대한 깨달음 등을 따뜻한 시선으로 풀어 놓고 있다. 그가 전해 주는 북한 이야기는 우리가 여전히 막연하게 품고 있는 편견을 깨뜨리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그도 시작은 어려웠다. 북한의 의료실태 파악을 위해 처음 북녘 의사들을 만난 자리에서 그는 답답한 마음에 분통을 터뜨리고 만다.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의학을 얘기하러 온 사람이지 여러분들의 의술을 훔치러 온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미국 CIA 지시를 받고 온 사람도, 남한의 안기부 끄나풀로 온 사람도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럴 수가 있습니까?” 화끈하고 솔직한 그의 면모는 마음의 장벽을 걷어내게 했다. 17년 만에 다시 만난 그때 그 의사들과 의기투합해 첫 합동 수술을 집도한 저자의 감격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같은 말을 하면서 의학 용어가 서로 달라 어려움을 겪는 대목에선 분단의 골이 더이상 깊어져서는 안 되겠다는 자성이 저절로 들게 한다. “북한 방문 뒤 통일의 상대방인 북녘은 미국과 적대관계이고, 남녘은 미국과 동맹이라는 이 묘한 삼각관계, 그 속에서 어리석게 희생되고 있는 우리 민족의 참담함이 실질적으로 보였다.” 이 같은 자각은 밀려드는 환자 보기에도 벅찰 저자가 “분단의 시원과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 모국의 근현대사를 다시 공부”하는 계기가 됐다. 의사이자 통일운동가로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을 다시 정립한 그는 1997년 뜻을 같이하는 동포들과 ‘Korea-2000’이라는 통일연구 모임까지 만들었다. 그는 통일에 대한 한민족의 견해를 알리기 위해 왕성한 기고 활동을 펼쳤다. 뉴욕타임스, 로스앤젤레스타임스, 노틸러스 등 미국 유력 매체가 그의 글을 실었고 지지했다. 이뿐 아니다. 1998년 남북한 양측 정부에 통일정책건의서를 보내기도 했고, 클린턴 정부는 물론 오바마 정부에도 정책 건의서를 전달하는 등 조국 통일을 위해 쉬지 않고 달렸다. ‘통일의 날이 참다운 광복의 날이다’는 그동안 발표했던 논문과 칼럼을 묶어 낸 책이다. 그의 견해는 서재에서 나 홀로 형성된 것이 아니다. 북한을 방문하면서 만난 여러 고위 관계자들과 나눈 대화, 남한의 정부 관계자, 지식인들과 끊임없이 교류하면서 객관적 타당성을 지니려고 노력했다. 미국 여권을 소지한 한인이자 남·북·미 3국 사이에 낀 운동가인 그가 한반도 바깥에서 바라본 남북문제에 대한 애정 어린 제언은 잔잔한 감동까지 일으킨다. 각 1만 5000원, 1만 8000원. 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 달빛에 물들어 신화가 된 이병주

    달빛에 물들어 신화가 된 이병주

    ‘태양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월광(月光)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대하소설 ‘지리산’으로 잘 알려진 선 굵은 소설가 이병주(1921~1992)가 평소 즐겨 내뱉곤 했던 말이다. 그의 호방한 문체 속에 감춰진 대표적 아포리즘이다. 고향인 경남 하동 섬진강가에 세워진 문학비에 새겨졌음은 물론이다. ‘알렉산드리아’, ‘관부연락선’, ‘지리산’, ‘산하’, ‘소설 남로당’, ‘그해 5월’ 등 우리 민족의 굴곡진 역사와 그 골짜기 어느 자락에서 신음해온 사람들의 모습을 다뤘던 대가의 통찰과 혜안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그는 일제 강점기 때 학병으로 징집됐고, 한국전쟁의 혼돈을 겪은 뒤 1956년부터 부산의 ‘국제신보’ 주필 겸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4·19혁명 뒤에는 경남교원노조활동을 했고, 5·16 쿠데타에 대한 비판을 담은 필화사건으로 10년형을 선고받고 2년 7개월간 복역하기도 했다. 이렇게 이병주는 한국 현대사의 한복판에 버티고 서 있었다. 이러한 극적인 체험은 마흔 넷의 나이에 늦깎이로 등단한 뒤 써내는 작품마다 핍진한 서사를 풀어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이병주는 실제 문단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다산(多産), 다작(多作)이었다. 등단 이후 27년 동안 한 달 평균 원고지 1000장 분량을 집필, 80여권의 저서를 남겼으니 초인적이라는 평가가 늘 뒤따른다. 그럼에도 그가 남긴 에세이, 산문 등은 아직도 발굴되지 않은 것들이 허다하다. 문학평론가 김윤식·김종회가 그의 18주기를 맞아 최근 엮어낸 에세이집 ‘문학을 위한 변명’(바이북스 펴냄)에 시선이 가는 이유다. ‘문학’ 은 이병주가 품고 있던 문학 정신의 근간을 확인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1부는 자전적 에세이다. 문학과 역사, 철학에 대한 이병주의 고뇌와 즐거움을 함께 보여준다. ‘지적 생활의 즐거움’은 그의 독서 편력이 대단히 광범위하면서도 균형잡힌 체계성을 갖고 있음을 알게 한다. 2부 ‘이병주 문학론’에 담긴 ‘문학의 고갈’을 보면 일본 문예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이 던진 ‘문학의 종언’이라는 화두를 붙든 채 여전히 논란 중에 있는 요즘 한국 문단의 상황을 일찌감치 갈파 예언했음에 새삼 놀라게 된다. 그는 ‘이 각박한 정신의 풍토는 문학의 고갈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라면서 ‘정치적 지식과 경제적 지식, 법률적 지식의 인간화를 위해 괴테, 도스토옙스키, 김동리, 안수길의 문학이 좀 더 깊고 넓게 침투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문학에 인구를 흡수하지 못한 것은 문학자의 정열과 기능이 부족한 탓’이라고 일갈하며 ‘문학자가 정신 지도의 주류에 서지 못했다는 사실에도 반성이 있어야 한다.’고 문단 내부의 반성을 촉구했다. 에세이집과 함께 그의 소설집 ‘변명’(바이북스 펴냄)도 나왔다. 이병주의 문학적 뿌리와 삶의 곡진한 체험 내역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중·단편 소설 3편을 모아놓았다. 세 편 모두 한결같이 분단이 낳은 비극, 또는 일제에 학병으로 끌려간 내용 등을 담고 있다. ●16~18일 하동서 ‘이병주 국제문학제’ 열려 때마침 고인의 고향인 경남 하동에서는 지난 16일부터 사흘간 ‘2010 이병주 하동 국제문학제’가 열렸다. 이병주 추모식과 함께 소설가 조정래의 ‘세계 문학 속의 민족 문학’을 주제로 한 강연,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 등이 참석한 국제문학 심포지엄 등이 진행됐다. 3회째를 맞은 이병주 국제문학상은 일본 작가 가라 주로(60)가 차지했다. 메이지대학 출신인 가라는 일본 문단에서도 아쿠타가와상, 기시다 희곡상 등을 받았다. 이병주가 떠난 지도 벌써 18년이 됐다. 1960~1970년대 한국 문단의 활화산과 같았던 이병주는 지금 역사가 됐을까, 아니면 신화가 됐을까. ‘문단 최후의 거인’, ‘한국의 발자크’ 등으로 평가 받는 이병주를 내리쬐고 있는 것은 태양과 달빛 모두다. 굳이 표현하자면 ‘신화가 된 역사’쯤 될까.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한·중·일 ‘동아시아 인문서 100권 출간’ 프로젝트 시동

    한·중·일 ‘동아시아 인문서 100권 출간’ 프로젝트 시동

    “동아시아 출판·독서 공동체는 사실 근대 이전에 존재했다고 봅니다. 예전에 같은 한자 문화권 아래서 같은 책을 읽지 않았습니까.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도 중국, 일본뿐 아니라 베트남까지도 전해졌습니다. 이 운동은 100년 동안 단절됐던 문화 공동체를 복구하자는 취지입니다.” 한국, 중국, 일본, 타이완, 홍콩 등 동아시아 5개국, 3개 지역을 대표하는 인문서를 한·중·일 3개 언어로 동시에 출간하는 ‘동아시아 인문서 100권 출간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동아시아출판인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언호 한길사 대표는 13일 서울 인사동에서 프로젝트 의미를 설명하는 자리를 가졌다.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한국측 출판사인 사계절의 강맑실 대표, 사월의책의 안희곤 대표, 동아시아의 한성봉 대표, 일조각의 김시연 대표 등도 함께했다. “서양문명에 억눌려온 동양문명의 부흥과 인문학 위기 타개”에 뜻을 모은 5개국의 인문학 출판사들은 동아시아출판인회의를 결성했고, 2005년 일본 도쿄에서 첫 회의를 가진 이래 6년간 한해 두 차례씩 만나 토론을 가져왔다. 인문서 100권은 지난해 10월 전주에서 열린 제9회 총회에서 선정됐다. 선정된 책들은 1950년 이전 출간된 인문 서적 가운데 학술가치가 높았으나 상호 번역이 어려웠던 책을 위주로 선정했다. 한국, 중국, 일본에서 각각 26권씩, 타이완과 홍콩에서 각각 15권, 7권이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김윤식)’ ‘뜻으로 본 한국역사(함석헌)’ ‘흔들리는 분단체제(백낙청)’ 등 한국 인문학 서적과 더불어 중국의 ‘미의 역정’(리쩌허우), 일본의 ‘문화와 양의성(야마구치 마사오)’ 등 역작들이 포함돼 있다. 2012년 상반기에 1차 번역분이 나올 예정인 가운데 먼저 3개 언어로 된 100권에 관한 해제집 ‘동아시아 책의 사상 책의 힘’이 나왔다. 김 대표는 “동아시아 출판 역사에서 이런 일은 없었다.”고 강조하고 “출판을 통해 지식을 교류하고 네트워크를 넓혀가는 일은 한국 출판 영역 확장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목록을 보면 거의 대중의 관심과 거리가 멀고, 특히 젊은이들이 어려워할 만한 책이 대부분이다. 김 대표는 “단순히 100권 출판을 넘어서 이 책들이 어떻게 읽힐 것인가를 고민할 것”이라면서 “앞으로 대학, 언론, 기업, 연구소 등과 연계해 책을 읽고 토론하는 운동을 펼칠 것”이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 한·중·일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100권의 책을 읽고 동아시아 사상과 이론을 학습할 수 있는 ‘동아시아독서대학’을 구상하고 있다. 김 대표는 “벌써 대학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다.”며 “일단 내년에 일본에서 열리는 정례 회의는 일본 메이지대학과 동경외국어대학이 참여한다.”고 말했다. 한국 측 출판사로는 한길사, 돌베개, 사계절, 일조각, 동아시아, 마음산책, 사월의책, 지호 등 9개 출판사가 참여한다. 현재 번역자 선정 작업이 진행 중인 프로젝트는 5년 완간을 목표로 하고 있으나 “번역 작업이 워낙 까다로워 정확한 시점을 말할 수 없다.”고 김 대표는 밝혔다. 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 [연극리뷰] ‘썽난 마고자’

    [연극리뷰] ‘썽난 마고자’

    먼저 자문자답 하나. 이명박 대통령에게 무엇을 기대했나. ‘산업화 세대의 신화’라는 사람에게. 개인적인 기대를 꼽으라면 그 세대에 대한 책임감이다. 그 세대의 빛나는 신화를 뒷받침한, 묵묵한 일꾼들을 위무(慰撫)해줄 의무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그럴 기미는 별로 없어 보인다. 재정 건전성을 이유로 노인들에게 공돈을 못주겠다고 하더니 기초노령연금 대상자마저 줄이는 방안도 검토한단다. 비교해보자. 대통령이 휴가지에 들고갔다는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 교수는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의 예를 든다. 조던이 그렇게 돈을 많이 벌 수 있었던 것은 ‘다섯 명이 빨간 공 적당히 튀기면서 주고받다가 그물에 집어넣는 기술을 높게 쳐주는 사회 덕분’이다. 경쟁을 이겨낸 자유시장의 영웅은, 그 경쟁의 장을 제공해주는 사회적 조건과 배경 덕을 본다는 얘기다. ‘오마하의 현인’이라는 워런 버핏도 자신의 부와 명성에 대해 “금융·주식시장이 발달한 미국에서 태어난 덕분”이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조던은 세금을 더 내고, 버핏은 아낌없이 재산을 기부한다. 일본 자민당의 전후 50년 집권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전쟁세대를 깍듯이 모셨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2차대전 총동원 체제를 겪고 피폭까지 당했던 그 세대들의 노고에 ‘복지’라는 이름으로 국가 차원의 보상을 제공한 것이다. 대한민국 정체성과 고도성장 신화를 칭송하는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식민지, 분단, 전쟁, 개발독재 시절을 살아낸 산업화 세대들에게 어떤 보상을 제공했던가. 그들 중 일부는 지하철이나 동네어귀에서 폐지를 줍고 있다. 다음달 3일까지 서울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3관 무대에 오르는 ‘썽난 마고자’(민복기 작·연출, 극단 차이무 제작)는 이 문제를 다룬다. G20(주요 20개국) 회의를 앞두고 정부는 탑골공원 성역화 작업에 나선다. 실제 목적은 ‘국격’을 위해 허름한 차림의 노인네들을 탑골공원에서 몰아내자는 것이다. ‘썽’이 난 탑골공원 ‘마고자들’은 철거반대 투쟁에 돌입한다.작품이 너무 무거울 것 같다고? 그런 걱정은 접어도 좋다. 순도 100% 코미디다. 현실 풍자가 강렬해 공연 내내 마음껏 웃겨준다. 특히 탑골공원 사수를 위해 골리앗 농성, 아니 ‘등나무 휴게터 농성’을 벌이는 전직 선생님 황 영감(이중옥), 방앗간 사장 이 영감(송재룡), 마도로스 출신 성 영감(성요한), 미모의 최 여사(공상아)가 선보이는 앙상블은 최고다. 애드리브마저도 능청스럽다. 그 중에서도 김 여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인 3명이 선보이는 만담 장면은 백미로 꼽을 만하다. 동시대를 다루는 예술은 반시대적이라는, 프랑스 문학 비평가 롤랑 바르트의 명제도 함께 음미해보길. 2만~2만 5000원. (02)747-1010.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지리산서 만나는 청학동·반달곰…

    지리산서 만나는 청학동·반달곰…

    ‘초가을 비 맞으며 산에 오르는/ 사람은 그 까닭을 안다/ 몸이 젖어서 안으로 불붙는 외로움을 만드는/ 사람은 그 까닭을 안다/ 후두두둑 나무기둥 스쳐 빗물 쏟아지거나/ 풀이파리들 더 꼿꼿하게 자라나거나/ 달아나기를 잊은 다람쥐 한 마리/ 나를 빼꼼히 쳐다보거나 / 하는 일들이 모두/ 그 좋은 사람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이런 외로움이야말로 자유라는 것을/ 그 좋은 사람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이성부의 ‘좋은 사람 때문에’ 중에서) 그곳을 오르는 일은 정말 힘들다고 한다. 다신 오지 말아야지 하면서, 문득 다시 생각나 찾게 된다는 지리산. 금강산, 한라산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영산으로 불리는 곳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이며, 한반도의 등뼈를 이루는 백두대간의 종착점이기도 하다. 전체 면적 485㎢. 전북(남원), 전남(구례), 경남(산청·함양·하동) 등 세 도(道)에 걸쳐 있는 만큼 풍부한 역사와 문화도 함께 깃들어 있다. 오래 전 우리 선조들이 환란을 피해 찾아들었다는 전설의 이상향이 있는 곳이며 불과 반세기 전에는 분단의 비극으로 피눈물이 뿌려졌던 곳이기도 하다. 올해 시간이 없어서 지리산에 가지 못했다면, 또는 조만간 처음으로 지리산을 찾을 예정이라면 EBS가 6~10일 오후 9시30분 방송하는 ‘한국기행’ 프로그램에 채널을 고정하는 게 좋겠다. 우리의 아름다운 산천, 그리고 그곳에 깃든 시간과 문화의 향기를 담아내는 한국기행의 제작진과 함께 지리산을 거닐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3년 동안 지리산의 다양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온 사진작가 강병규씨와 함께, ‘노고단의 호랑이’로 불리는 지리산 최초의 산장지기 함태식옹의 마중을 받으며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25.5㎞의 황금 능선을 걷는 것으로 지리산을 호흡하기 시작한다. 비탈진 언덕에 자리잡은 다랭이 논이 눈길을 끄는 창원 마을에서는 닥나무를 활용해 3대째 전통 한지를 만들고 있는 이상옥옹 등 지리산 화전민들의 땀과 눈물을 느낄 수 있다. 지금도 서당 문화가 이어져 오고, 과거의 예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청학동(하동 묵계리)도 전설의 이상향을 더듬어 본다는 뜻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다. 인간의 욕심으로 멸종 위기를 맞았으나 이제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지리산 반달 가슴곰과도 마주할 수 있다. 설악산의 천불동 계곡, 한라산의 탐라 계곡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계곡으로 꼽히는 칠선 계곡이 마지막 방문지다. 1999년부터 9년 동안 출입이 통제돼 원시 그대로의 자연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지금도 1년에 4개월, 일주일에 왕복 2회 40명의 한정된 인원만 방문할 수 있는 칠선계곡의 9.7㎞ 물길을 따라가 볼 수 있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코믹 軍뮤지컬 ‘스페셜레터’ 서울-뉴욕 동시 오픈

    코믹 軍뮤지컬 ‘스페셜레터’ 서울-뉴욕 동시 오픈

    코믹뮤지컬 ‘스페셜레터’이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 무대에 오른다. 대학로와 브로드웨이를 한꺼번에 접수할 뮤지컬 ‘스페셜레터’는 분단상황과 징병제라는 한국적 특수성과 20대 청춘들의 꿈과 우정, 사랑을 코믹하게 그린 창작극이다. 지난해 개막해 관객들에게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던 ‘스페셜레터’는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의 후원으로 2010년 뉴욕뮤지컬 페스티벌 ‘full production’부문에 한국대표로 공식 초청을 받았다. 오는 9월 국내 재개막을 앞둔 뮤지컬 ‘스페셜레터’는 더블 팀으로 구성돼 한국과 미국공연을 나뉘어 선보인다. 9월 29일부터 10월 6일까지 총 6회의 브로드웨이 공연이 예정된 미국팀은 향후 국내팀에 합류해 번갈아 가며 무대에 오른다. 새롭게 업그레이드 된 뮤지컬 ‘스페셜레터’는 지난 3일 오전 10시 인터파크를 통해 1차 티켓 예매를 시작했다. 국내 공연은 9월 24일부터 서울 대학로SM아트홀에서 상연된다. 사진 = 악어컴퍼니 김예나 기자 yeah@seoulntn.com ▶ ’스무살’ 우리, 흐느끼는 전라샤워신 ‘서버마비’▶ 연예인 해외봉사 망신… ‘무개념’ 여배우A 네티즌수사대 확인▶ 하리수-안선영, 친분샷 공개 "안타까워" 소감…왜?▶ 김옥빈, 시사회-시상식 각기 다른 ‘패션센스’…만점감각▶ 이승기 "내 얼굴 보기 안좋아" 망언…"구미호에 홀렸나?"▶ 이영아, 이기적인 얼굴크기…윤시윤-유진 ‘굴욕’
  • 법원 “좌편향 교과서 수정지시 위법”

    금성출판사의 근·현대사 교과서를 수정하도록 한 교육과학기술부의 명령이 위법하다는 판결이 나왔다. 그러나 절차적 결함만 지적하고 내용의 적합성은 판단하지 않아 교과서를 둘러싼 이념 논쟁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서울행정법원 행정5부(부장 이진만)는 2일 김한종 한국교원대 교수 등 금성출판사의 근·현대사 교과서 공동저자 3명이 교과부 장관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교과서 수정명령을 취소하라.”며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재판부는 “교과부의 지시는 오기(誤記)나 기타 명백한 잘못의 정정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서 새로운 검정을 실시한 것으로 봐야 한다.”면서 “초·중등교육법 등이 규정한 교과용도서심의회의 심의를 거치지 않아 위법하다.”고 밝혔다. 교과부는 2008년 11월 ‘분단의 책임을 미국이나 남한 정부 수립으로 돌리는 등 내용이 편향됐다.’는 보수단체의 문제제기 등을 토대로 국사편찬위원회의 검토를 거쳐 금성출판사의 교과서 일부를 수정하도록 명령했다. 김 교수 등은 “수정 명령이 법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아 무효”라며 행정소송을 냈다.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문화마당] ‘미스 사이공’과 민족통일/김기봉 경기대 역사학 교수

    [문화마당] ‘미스 사이공’과 민족통일/김기봉 경기대 역사학 교수

    얼마 전 세계 4대 뮤지컬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미스 사이공’을 봤다. ‘사이공’이라는 도시는 베트남전쟁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오늘날에는 ‘호찌민’으로 불린다. 미스 사이공은 도시 이름처럼 역사 속으로 사라진 한 여인에 관한 이야기다. 이 뮤지컬은 민족과 국가 또는 사상과 이념이 아니라 인간 삶을 위해 베트남전쟁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노래한다. 전쟁이란 적군이라는 이유만으로 개인적으로는 아무런 원한이 없는 타자를 죽이는 것을 합법적으로 승인하고, 적군을 많이 죽이면 죽일수록 애국자로 영웅 대접을 받는 가장 비인간적인 상황이다. 전쟁을 수행하는 힘이 증오와 복수라면, 그것과 정반대되는 감정이 사랑이다. 인간은 가장 더러운 곳에 있으면 있을수록 가장 깨끗한 것을 더욱 더 갈망하는 존재다. 그래서 진흙탕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듯이, 인간은 전쟁의 한가운데서도 사랑을 한다. 미스 사이공은 전쟁에서 꽃 핀 사랑 속에서 인간을 발견하고 무엇으로 인간이 사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뮤지컬의 결말처럼 현실은 냉혹하고 비극적이다. 전쟁 속에서 꽃핀 사랑이란 것도 결국 현실이 더럽고 추하면 추할수록 깨끗함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이 만든 허상임을 깨닫게 한다. 그래서 사랑은 슬프고 인생은 허무하다. 모든 인간의 이야기는 인류학자 말리노프스키의 말대로, “그들은 태어나서, 사랑하다, 죽었다.”로 요약할 수 있다. 이 ‘그들’ 가운데 미스 사이공은 전쟁의 최대 피해자이며 가장 역사의 변두리에 있던 사람들을 위해 노래한다. 생존을 위해 몸을 팔아야 했던 베트남 여인과, 프랑스인 아버지와 베트남 여인 사이에 혼혈로 태어난 ‘엔지니어’라는 포주, 그리고 베트남전쟁에서 미군과 베트남 여인 사이에 태어나 버려진 혼혈아 ‘부이도이(Bui Doi)’가 바로 ‘그들’이다. 민족해방전쟁으로서 베트남전쟁은 마침내 외세를 몰아내고 민족국가를 세움으로써 ‘엔지니어’에서 ‘부이도이’까지 이어지는 비극적 역사의 고리를 끊었다. 하지만 베트남전쟁을 민족해방전쟁으로만 기억하면 전쟁이 국가를 만드는 과정에서 희생시킨 ‘그들’의 삶은 망각된다. 연극의 위대함은 이 역사가 망각한 ‘그들’의 삶을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베트남전쟁과 비견되는 것이 6·25전쟁이다. 베트남인들은 전쟁으로 통일을 이룩했지만,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분단을 고착화했다. 민족국가 수립을 근대 기획의 완성으로 보면, 베트남이 대한민국보다 선진국이다. 하지만 오늘날 누가 더 성공한 국가가 됐는가? 베트남인들은 대한민국의 성공을 그들이 이룩하고 싶은 미래로 여긴다. 북한정권의 위기가 가시화되면 될수록 우리에게 통일은 현실의 문제로 다가온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통일을 해야 한다.’가 아니라 ‘무엇을 위한 통일인가.’를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전쟁의 위험을 무릅쓰고 통일을 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하다. 아직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라 휴전상태에 있는 한반도에서 또 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면 남북한 대다수 주민의 인생이 불행해질 뿐만 아니라 그동안 피땀으로 이룩한 모든 성과가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 이 같은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분단체제를 해소하고 평화체제를 구축하려는 노력을 가장 먼저 해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광복절 기념식 경축사에서 ‘통일세’ 신설을 제안했다. 이 같은 제안은 결국 북한정권의 붕괴에 따른 흡수통일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냐는 논란을 일으켰다. 실현 불가능한 꿈일 때는 민족의 소원이었던 통일이 실현가능한 현실로 다가오면서, 통일을 세금과 같은 사회적 비용으로 계산하는 것은 이기적인 인간의 모습이다. 따라서 이제는 통일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토대로 남북관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지 않으면, 통일은 우리에게 행복이 아닌 불행이 될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 [사설] 국치 100년, 이제 한반도 주변 격변 주체 돼야

    어제로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에 나라를 빼앗겨 식민지로 전락한 국치(國恥) 100년을 맞았다. 36년의 일제 식민통치 기간 우리 민족은 존재를 깡그리 부정당했다. 비참한 처지였다. 이런 굴욕은 일제의 침략 야욕도 문제였지만 우리 민족 내부의 준비 부족에도 기인했다. 서구 제국주의가 세계 이곳저곳에서 정복 쟁탈전을 벌이던 19세기 후반 무능한 조선의 지배층은 눈과 귀를 닫고 국제정세에 무지했다. 뒤늦게 서구 제국의 힘을 빌려 일본의 야욕을 분쇄하려 했지만 미국과 일본, 영국과 일본 등 제국주의 국가 간 뒷거래에 무참하게 농락당하고 말았다. 일제 패망 뒤엔 남북으로 분단됐다. 오늘 한반도 주변 국제 정세는 격변의 소용돌이를 예고하고 있다. 지난 100년을 제외하고 민족사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쳤던 중국이 올 2분기에는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부상했다. 미국과 G2(양강 체제)를 형성했다. 중국은 한반도 안보에 열쇠를 쥔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정면으로 시비를 걸고 있다. 자연 한·미, 북·중 대결 구도가 고착화되고 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의 올해 두 번째 정상회담은 한·미와 북·중 간 대결구도 심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북한과 중국의 접근에 미국은 이번 주초 추가 대북 금융제재 조치를 발표하는 등 한반도 주변 동아시아에 긴장의 파고가 높아지고 있다. 대한민국은 한반도 주변 격변에서 이번에는 객체가 아니라 주체가 되어야 한다. 면밀한 정세분석을 통해 빈틈없는 질서 재편 대응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국제정세를 이끌 외교전략을 펴자. 100년 전 국치의 굴욕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 교훈을 살려내야 한다. 특히 북한이라는 변수는 오늘 대한민국 외교에서는 숙명이다. 정부나 국민 모두가 정신 바짝 차리고 북한과 중국의 접근을 포함한 동아시아 격변에 주체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국가의 치욕, 더 이상은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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