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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반도 분단체제, 강대국 이해관계 속 고착화”

    “한반도 분단체제, 강대국 이해관계 속 고착화”

    1970년대 미국과 중국이 ‘핑퐁외교’ 등을 통해 관계를 개선하고 우호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이후 남한과 북한의 관계는 어떻게 전개됐을까. 냉전이 해소됐는데, 왜 남한과 북한은 가다 서다 되돌아가기를 반복하는 등 변덕스러운 것일까. 왜 북한은 광명성 3호 발사 강행처럼 남한에서 선거가 있을 때마다 군사적 도발을 일삼는가. 미국이나 중국은 과연 한반도의 평화정착에 관심이 있는가. 이 같은 궁금증을 홍석률 성신여대 사학과 교수가 ‘분단의 히스테리’(창비 펴냄)를 통해 ‘시원’하게 풀어주고 있다. 홍 교수는 1999년 미국 정부가 공개한 외교관계 문서를 분석해 1970년대 한반도를 둘러싼 정치외교사를 총체적이고 입체적으로 그려냈다. 1960년대 냉전의 절정기, 남북 간 군사적 위기감은 최고조에 이르고 있었다. 1968년 1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김신조 등 북한의 특수부대 요원 31명이 침투, 남한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같은 해 2월엔 미국의 선박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나포돼 원산항으로 끌려갔다. 이에 박 대통령은 대북 보복을 주장했고, 같은 달 존슨 미국 대통령은 밴스를 특사로 보내 이를 무마해야 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울진·삼척지구에 100명이 넘는 북한 무장간첩이 남파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은 푸에블로호 사건으로 한반도 지역에 군사력을 급속히 증가시켰다.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함이 원산 바다에 나타났고, F105 1개 비행대, F102 2개 비행대, 최신예 전투기 F4D 팬텀기 4개 비행대가 남한 공군기지에 도착했다.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베트남 전쟁이 격화되고 있는 가운데, 한반도에서는 제2의 한국전쟁이 우려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위기 국면에서 북한은 푸에블로호 위기를 활용해 미국으로부터 국가적 실체를 승인받으려고 노력했다고 홍 교수는 말한다. 위기를 고조시켜야 협상이 시작된다는 북·미 관계의 ‘이상한 공식’은 이때부터 출현했다는 것이다. 미국이나 중국은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하든지, 남북통합이 되든지 하는 한반도 분단의 근본적 해결이나 개선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다만 미·중 관계 개선을 위해 한반도 긴장이 격화되거나, 이 긴장 상태가 이어져 한국전쟁 때처럼 격돌하는 상황을 방지하는 데 주력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양대국은 1970년대 이래로 한반도에서 자신들의 개입은 축소하면서, 영향력 자체는 유지하려는 모순적인 양상을 드러낸다. 또 분단의 유지와 책임을 남북한으로 축소시켜, 국제적인 분단이 아니라 한반도 내부의 분단으로 국한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문제는 이렇게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를 남북한 문제로 축소시키면서, 분단체제가 더 완숙해졌다는 것이다. 휴전이라는 애매한 상황에서 남북관계 또한 군사적 위기와 적대적 대치 국면, 그리고 현상 유지 사이를 빈번하게 오가며 요동치게 됐다. 아울러 남한이나 북한의 정부 모두 분단체제의 변덕스러움을 완전히 제어하지 못하게 됨에 따라 한반도 주민들의 삶은 계속 불안하고, 자결권도 끊임없이 위협받는 상황에 도달하게 됐다. 문제는 완숙하긴 하되 여전히 변덕스럽고 유동적인 분단체제가 국가권력을 장악한 세력에게는 자신의 통제력을 강화하고,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작용한다는 것이다. 1972년 남한의 유신체제의 선언 등도 그 하나일 수 있겠다. 홍 교수는 “부자가 만들어낸 사회적 불평등이 범죄를 발생시키지만 그 범죄는 주로 빈민가의 가난한 사람에게 나타나듯이, 한반도 분단체제는 강대국이 조성한 모순과 갈등이 약소국에서 증폭되는 것을 용이하게 해주는 구조”라고 비판했다. 이런 모순구조를 이유로, 남북의 정치권력들은 책임지지 않는 권력의 양상을 띠게 되는데, 이야말로 ‘식민성’(coloniality)으로의 귀결이자 표상이라는 것이다. 지구화로 세계인들이 세계무역기구나 세계은행, 유엔 등 국제기구의 영향권 안에 있는데도, 투표권이 없기 때문에 이들의 정책적 오류에 대해 실질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점도 비판했다. 미국이 세계은행 후보로 한국계 미국인 김용 다트머스대 총장을 지명한 것에 대해 한국인들이 환호하고 있지만, 홍 교수의 지적을 차분히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분단체제를 변화시키기 위해 필요한 일은 무엇인가. 흔히 평화를 전제로 한 분단의 해소나 통일을 이야기하는데, 홍 교수는 평화와 분단해소를 향한 노력이 동시에 병렬적으로 진행돼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과거에 한민족이었으니 하나의 국가로 통일돼야 한다는 주장은 이미 60년 넘게 다른 체제, 다른 사상에서 살아온 두 국가의 국민들에게 쉽지 않은 주장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오바마 “北 로켓 발사시 식량지원 없다”

    오바마 “北 로켓 발사시 식량지원 없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북한이 예고한 대로 광명성 3호를 실제 발사한다면 ‘2·29’ 북·미 합의 때 약속했던 식량 지원은 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서울 핵안보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25일 방한한 오바마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뒤 공동 기자회견에서 이같이 밝혔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원 식량이 엘리트나 군에 지원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갈등 국면에서는 모니터하기 어렵다. 필요한 사람에게 식량이 도달하지 못한다면 (식량을) 지원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북한이 유엔 안보리 결의안을 위반할 때마다 국제사회가 더욱더 강한 제재 조치를 취하고 추가적인 고립 상황에 놓이게 해 왔다면 이번에도 이런 일이 일어났겠나 하는 생각을 한다.”며 엄정한 제재 의지를 강조했다. 이 대통령과 오바마 대통령은 이어 북한이 광명성 3호 발사 계획을 철회할 것을 촉구하고 추후 북한의 어떠한 위협과 도발에 대해서도 단호히 대처하기로 했다. 이 대통령은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 계획 발표는 안보리 결의와 북·미 간 합의를 위반한 것이며 국제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도발적 행위”라면서 “북한이 발사 계획을 즉시 철회하고 국제적 의무를 준수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고 밝혔다. 이어 “오바마 대통령과 나는 한·미 간 공고한 연합 방위 태세를 지속적으로 강화해 나가는 동시에 북한의 어떠한 위협과 도발에도 단호히 대처해 나가기로 했다.”고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우리 두 사람은 북한이 핵과 미사일 개발을 포기하고 평화와 협력의 길을 선택한다면 한·미 양국뿐 아니라 국제사회가 북한 주민의 삶의 질을 개선하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 나가는 데 필요한 자원을 제공할 것이라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고 밝혔다. 한·미 양자 정상회담은 지난해 10월 이후 5개월 만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26일에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과 미·러, 미·중 정상회담을 잇따라 갖고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 계획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눈다. ‘중국의 역할론’과 관련, 오바마 대통령은 “북한이 새로운 선택을 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국도 지난 몇십년 동안 유지해 왔던 북한에 대한 우려 사항 전달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한국의 탄도 미사일 사거리 연장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기술적인 문제도 있고 대통령 차원에서보다 군사적인 차원에서 논의할 것이 많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북한 김정은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에 대한 평가와 관련, “나도 처음에는 보다 개방적으로 하지 않겠는가 하고 새로운 리더십을 기대했었지만 이번에 하는 것을 보고 조금 실망했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새벽 방한한 오바마 대통령은 정상회담에 앞서 오전에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을 방문, 주한 미군 장병들을 격려한 뒤 비무장지대(DMZ)를 찾아 남북 간 분단 상황을 돌아봤다. 김성수기자 sskim@seoul.co.kr
  • [서울신문TV와 함께하는 구정 인터뷰] 박겸수 강북구청장 “개발…역사·문화·관광 패키지화”

    [서울신문TV와 함께하는 구정 인터뷰] 박겸수 강북구청장 “개발…역사·문화·관광 패키지화”

    “개발이라는 관점으로만 보면 강북구는 낙후된 게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눈으로 보면 역사와 문화가 살아 있고 제주도보다 미세먼지 농도가 적습니다. 이런 장점을 살리고 역사·문화·관광을 묶어 서울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박겸수 강북구청장이 취임 이후 줄곧 강조한 ‘역사·문화·관광 중심지’ 실현을 위해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고 있다. 그는 19일 인터뷰에서 열정적으로 구의 역사유산과 문화유산, 관광 입지를 강조하며 서울시 지원과 구민 관심을 호소했다. 그는 “해마다 개최하는 3·1 만세 재현 행사를 더욱 발전시키고 내년부터는 4·19 음악제도 축제로 승화시킬 계획”이라면서 “16위(位) 순국선열 어록을 담은 시비를 세우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서울시가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기념관 건립을 위한 연구용역비 5억원을 지원하기로 했다.”며 “지난해 자체적으로 연구용역까지 벌였기 때문에 착공을 자신한다.”고 말했다. 그는 “우이령 접근성을 높이고 시민 캠핑장을 설치하려 한다.”면서 “우이령과 북한산 백운동 등산로도 정비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최근 청자가마터를 발굴하는 등 역사 문화적 가치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박 구청장이 역사·문화·관광을 비전으로 앞세우는 데엔 지역 자산을 살려야 한다는 인식이 크게 작용했다. 그는 “이준, 손병희, 여운형, 이시영 선생 등 근현대 위인 16위를 비롯해 4·19 민주묘지를 모시고 있다. 화계사·도선사와 같은 유서 깊은 사찰도 품었다.”면서 “빼어난 풍광 속에서 분단의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는 우이령고개, 휴식처인 북한산도 한데 묶어 시민들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되뇌었다. 북한산 둘레길 활성화도 호재다. 구에는 모두 4개 구간이 조성돼 있다. 우이령길(6.8㎞)은 1968년 북한 특수부대가 침투로로 사용한 뒤 2009년까지 민간인 출입을 통제했기 때문에 뛰어난 생태계 보전 지역으로 꼽힌다. 우이동 우이령길 입구에서 솔밭근린공원을 잇는 소나무숲길(2.9㎞)은 지천에 뿌리내린 소나무 향기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게 한다. 솔밭근린공원~이준 열사 묘역 구간인 순례길(2.3㎞)엔 독립운동가 묘역과 4·19 묘지가 손님을 반긴다. 이준 열사 묘역~북한산 생태숲 흰구름길(4.1㎞)을 걷다가 구름전망대에 오르면 서울 도심까지 훤히 살펴볼 수 있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열린세상] 탈북자 문제, 우리 사회가 해결 방안 찾아야/임강택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열린세상] 탈북자 문제, 우리 사회가 해결 방안 찾아야/임강택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탈북자 강제송환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부상하면서 한달 넘게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악화되고 있는 탈북자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면 오히려 이례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언론의 적극적인 관심, 정부의 공개적인 행보, 시민단체와 유명 연예인들의 참여와 호소, 정치인의 단식 등이 시너지 효과를 거둔 것이라고 하겠다. 우리의 이러한 노력에 국제사회도 관심을 보이면서, 국제 외교무대에서도 중요한 이슈로 다뤄지고 있어 중국의 변화를 끌어낼 수도 있다는 일말의 희망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러나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탈북자들이 북송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기존의 노력들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상황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소위 ‘조용한 외교’가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지만 북한당국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탈북자 일부라도 한국으로 오게 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당분간 그조차 힘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탈북자 문제를 다루는 방식에서 ‘공론화 또는 이슈화’와 ‘조용한 외교’라는 정책적 선택 문제가 다시 쟁점화되고 있는 것이다. 탈북자 문제를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 어떤 것이 보다 효과적인지는 관점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해 있는 탈북자들을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점에는 모두가 같은 생각이라고 본다. 따라서 여전히 중국에 체류하고 있는 수많은 탈북자들이 강제송환의 위험에 직면해 있고 탈북자 송환문제는 이미 국제적인 이슈가 되었다는 현 상황을 출발점으로 삼고, 우리 모두가 염원과 지혜를 모아 합리적인 해결책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힘을 모았을 때 변화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이념과 정치적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동포와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손을 맞잡아야 할 때이다. 탈북자 문제는 발생 원인을 중심으로 다양한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 당장에는 강제송환 중단이 가장 중요한 문제로 인식되고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북한의 장기화된 경제난과 폐쇄적인 정치체제의 경직성 때문에 야기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보다 본질적으로는 남북이 분단되었기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해법 모색도 단계적이면서 종합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획기적인 해결책 마련이 어렵다면, 강제송환 시 생존권이 심각하게 위협을 받게 될 그룹을 중심으로 일부라도 난민지위를 획득할 수 있도록 중국 정부를 설득하고 국제사회와 공조할 필요가 있다. 특히 한국에 먼저 와서 정착한 식구가 있는 탈북자들은 송환될 경우 혹독한 탄압이 예상된다. 현재로서는 중국 정부가 탈북자들에게 난민지위를 인정하는 선례를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이와 함께 중국이 탈북자들의 의사에 반하여 강제적으로 북송하지 않도록 ‘정책 전환’을 이끌어 내는 노력도 요구된다. 북한 주민들의 삶을 개선시키는 노력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목숨을 걸고 국경선을 넘는 대다수가 굶주림 때문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북한 사회 내부에서도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어 한쪽에서는 ‘강성대국의 문’을 열겠다고 분주하지만 일반 주민들의 삶은 피폐한 상황을 면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한 주민들의 삶에 직접 도움을 줄 수 있는 인도적 지원과 경제협력을 고민해야 한다. 통일을 이루기 위한 실질적인 노력도 확대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수많은 일들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두 가지만 꼽아 보자. 하나는, 우리 사회에 정착한 탈북자들이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상을 극복하는 일이다. 중국에 있는 탈북자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면서 정작 우리 사회에 있는 그들을 따뜻하게 껴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통일시대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젊은 세대들의 통일에 대한 무관심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데도 개선책 마련에 무관심하다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통일이 이루어진다고 한들 남북한이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 [선택! 역사를 갈랐다] (3) 연개소문과 김춘추

    [선택! 역사를 갈랐다] (3) 연개소문과 김춘추

    642년 초겨울 신라의 김춘추가 살을 에는 삭풍을 뚫고 고구려 평양성을 방문하여 막 정권을 장악한 연개소문을 만났다. 김춘추는 ‘양국의 오랜 다툼을 중단하자.’고 제안하면서 백제 공격을 위한 군사 지원을 요청한다. 이에 연개소문은 ‘한강유역을 돌려주면 구원병을 보내주겠다.’며 매몰차게 대답했다. 김춘추가 ‘신하의 몸이라 영토와 같은 중대한 문제를 결정할 수 없다.’며 사실상 거부의사를 밝히자, 연개소문은 그를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두 사람의 운명적 만남이 엇갈린 선택으로 돌변하는 순간이었다. 그 뒤 두 사람은 끊임없이 엇갈린 선택을 하면서 고구려와 신라의 운명마저 엇갈리게 만들었다. 양자에 대한 후세의 평가도 극명하게 대조되었다. 유교 명분론이 지배하던 고려와 조선시대, 연개소문이 임금을 죽이고 대국의 명을 거역해 나라를 망친 악인으로 지목된 반면, 김춘추는 사대의 예를 다하고 대국의 위엄을 빌려 삼국을 통일한 성군으로 칭송받았다. 이에 비해 민족의 자주독립을 쟁취해야 했던 20세기 전반, 연개소문은 자주적 대외투쟁가로, 김춘추는 외세의존적 음모가로 뒤바뀐 평가를 받았다. 그럼 유교명분론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고, 근대 민족국가의 국경선마저 낮아지고 있는 오늘, 두 사람의 선택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과연 그들의 삶과 선택으로부터 남북분단을 극복하고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할 지혜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신흥귀족의 후예 vs 방계 왕손 김춘추는 602년에 태어났다. 정복군주 진흥왕을 증조부로 두었지만, 할아버지인 진지왕이 폐위된 다음 그의 집안은 진골귀족들의 배척을 받았다. 다만 김춘추가 정치활동을 개시할 무렵에는 그의 집안도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50여년간 재위하면서 왕권을 다진 진평왕이 진골귀족을 견제하기 위해 같은 혈족인 그의 집안을 중용한 것이다. 그리하여 아버지 용춘이 진평왕의 둘째 딸과 결혼하고, 왕실업무를 총괄하며 왕족의 위상을 조금씩 회복했다. 이와 더불어 금관가야의 후예인 김유신 집안과도 각별한 관계를 맺었다. 그런데 진평왕을 이어 선덕여왕이 즉위함에 따라 왕권에 제동을 걸려는 진골귀족의 움직임이 재연되었다. 이런 가운데 642년 여름 김춘추는 일생 최대의 시련을 맞았다. 사위의 잘못으로 인해 서방의 요충지인 대야성(경남 합천)이 백제에 함락당한 것이다. 김춘추는 패전의 책임을 떠안아야 할 위기에 몰렸다. 신라로서도 무언가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김춘추의 평양행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결행되었다. 한편, 연개소문 집안은 대대로 병권을 장악하고 국권을 좌우하던 유력한 귀족세력이었다. 다만 조상의 연원을 시조 주몽과의 관계가 아니라 물에서 탄생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신흥귀족으로 파악된다. 이 무렵, 고구려 정치체제를 보면, 왕권은 약화되고 최고위 귀족인 대대로(大對盧)가 실권을 행사하는 귀족연립체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唐)이 강온 양면전략을 구사함에 따라 귀족세력은 강온 양파로 분열되기 시작했다. 특히 640년 고창국을 멸망시킨 당이 압박을 가해오면서 귀족세력의 갈등은 더욱 고조되었다. 이때 영류왕을 중심으로 한 온건파 귀족들이 연개소문을 장성 축조 책임자로 임명하여 중앙정계에서 축출하려고 모의했다. 642년 늦가을, 대동강 변에서 벌인 피의 만찬은 극단적 위기상황에 몰린 연개소문의 자구책이었다. 정치상황이 복잡했기 때문에 그의 쿠데타는 쉽게 성공할 수 있었지만, 쿠데타의 명분이나 권력기반은 미약했다. 연개소문으로서는 무언가 전리품이 필요한 시기에 김춘추가 평양성을 방문한 것이다. ●국가권력의 사유화 vs 정치제도의 개혁 642년 두 사람의 엇갈린 선택에는 개인의 정치적 이해가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김춘추가 방계 왕손으로서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사선을 넘었다면, 연개소문은 명분 없는 쿠데타의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강경한 입장을 견지했던 것이다. 이러한 두 사람의 위기와 한계의 연원을 찾다 보면 양국의 유동적인 정치상황과 만나게 된다. 당시 양국의 귀족세력은 분열되어 있었고, 왕권도 약화되거나 많은 한계를 안고 있었다. 그런데 양국의 정치상황은 겉으로는 유사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이한 역사시간 속을 걷고 있었다. 고구려가 중앙집권체제에서 귀족연립체제로 전환한 상황이라면, 신라는 중앙집권체제를 향해 도약하는 중이었다. 또한 두 사람의 정치적 입지에도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양자 모두 다수 귀족으로부터 배척받고 있었지만, 연개소문이 일반 귀족에 불과했던 반면 김춘추는 방계 왕손이지만 잠재적인 왕위 계승권자였다. 실제 연개소문은 왕족이 아닌 한계로 인해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 이에 연개소문은 보장왕을 옹립한 다음, 반대파 귀족세력을 제압하려다 여의치 않자 주로 사적 권력기반을 강화하는 데 치중했다. 어린 자식에게 높은 관등을 수여하고 군사권을 부여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로써 국가권력을 사유화하여 종신집권을 도모할 수 있었지만, 귀족연립체제의 모순을 개혁하고 권력을 정당화하는 데는 실패했다. 오히려 귀족연립체제의 모순은 오랫동안 잠복했다가 665년 그의 죽음과 함께 폭발했다. 한편, 김춘추는 647년 비담의 난을 평정하고 김유신과 함께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다. 그리고는 국정을 총괄하다가 진덕여왕 사후 귀족회의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연개소문과 달리 합법적 절차를 거쳐 최고 권력을 획득한 것이다. 또한 중앙집권체제를 향해 도약하던 역사적 상황을 활용해 당의 육전조직에 준하는 정치제도를 갖추고, 유교사상을 받아들여 새로운 시대정신을 마련하려고 노력했다. 이처럼 양자는 동시대 인물이었지만 상이한 역사시간 속에서 살았고, 정치적 입지도 달랐다. 김춘추가 유리한 역사시간과 정치적 상황을 활용해 합법적으로 권력을 획득하고 제도개혁에 주력한 반면, 연개소문은 자신의 한계를 이겨내지 못하고 국가권력의 사유화라는 유혹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러한 차이는 궁극적으로 대외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 ●독자세력권 유지 vs 당(唐) 중심 국제질서의 활용 양국은 국제관계에서도 상이한 역사시간을 걷고 있었다. 5세기만 하더라도 고구려가 동북아 일대에 독자세력권을 구축한 반면, 신라는 고구려에 예속된 상태였다. 그런데 6세기 중반 신라의 한강유역 장악으로 양국 관계는 점차 대등한 양상으로 변모했다. 더욱이 중국대륙을 통일한 수와 당이 ‘일원적 국제질서’를 추구함에 따라 고구려는 이들과 맞서야 했던 반면, 신라는 고구려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수나 당이 추구하던 신국제질서가 양국에 정반대의 역사시간으로 다가온 것이었다. 물론 고구려가 당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길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또한 고구려와 신라가 영원히 적으로 남아 있으란 법도 없었다. 가령 630년대 당이 대수(對隋) 전승기념비인 경관을 파괴하자, 고구려는 천리장성 축조로 맞서면서 세자를 파견하는 강온 양면책을 구사했다. 그리고 김춘추가 평양성을 방문했듯이 고구려의 대외전략에 따라 얼마든지 신라와 손을 맞잡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연개소문은 당과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시도하면서도 신라에 대해서는 강경 자세를 취했다. 이는 하루빨리 전과를 올리려는 성급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선택의 화살은 이미 날아간 뒤였다. 당은 그의 불법적 쿠데타를 명분 삼아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 연개소문으로서도 대당(對唐) 강경책으로 선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개소문은 입체적 군사방어체계 덕분에 당의 침공을 물리칠 수 있었지만, 행운은 거기까지였다. 648년 김춘추가 당으로 건너가 군사동맹을 체결한 것이다. 이로써 고구려는 남북에서 협공을 받는 상황으로 몰렸다. 연개소문이 다양한 방안을 강구했지만, 대세를 뒤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렇지만 신라라고 ‘중국만이 태양이다.’는 당의 대외정책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실제 당은 660년 백제 멸망 직후부터 신라를 병탄하려는 야욕을 드러냈다. 이를 간파한 신라는 왜와의 적대관계를 개선하고 군사역량을 강화하는 등의 대비책을 세워 고구려 멸망 이후 전개된 나당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경쟁 vs 연대 이렇게 본다면 고구려 연개소문이 독자세력권을 고집하며 당에 맞서다가 멸망한 반면, 신라 김춘추는 당 중심 국제질서를 활용해 삼국통일을 달성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신라가 고구려 영역의 일부만 관할한 데서 보듯이 삼국통일은 명확한 한계를 띠었다. 김춘추로서는 최선의 선택을 했을지 모르지만, 긴 역사적 흐름에서는 역시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이는 동족의식이 희박했고 또 정치적 이해관계도 달랐던 연개소문과 김춘추가 상대방을 생존경쟁의 대상으로만 인식한 결과이다. 바로 이 점이 남북분단을 극복하고 국제정세에 대처할 지혜를 얻기 위해 곱씹어 보아야 할 대목이다. 남북한이 불필요한 경쟁을 자제하고 진정한 연대의 대상으로 인식할 때,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도 남북한에 의해 형성된 구심력을 중심으로 재편되어 나갈 것이다. 중국이나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한 진정한 대응책도 바로 이 속에 담겨 있다. 그런 점에서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642년 초겨울 연개소문이 김춘추의 손을 맞잡는 장면을 상상해 보는 것이 그렇게 헛된 망상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호규(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교수)
  • “남북, 분단평화 넘어 통일평화로 가야”

    두 나라를 줄여 표기하거나 부를 때 앞에 내세우면 그 국가는 더 친밀하거나 중요하다는 것을 반영한다. 이를테면 미국과 한국을 함께 표현할 때는 ‘한·미’라고 하고, 중국과 미국은 ‘미·중’, 미국과 일본은 ‘미·일’, 미국과 북한을 부를 때는 ‘북·미’라고 한다. 북한을 혈맹이라는 미국보다 더 가깝게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을 가장 가까운 나라라고 느낀다는 응답 비율은 2007년 23.8%를 정점으로 2008년에는 20.3%, 2009년에는 15.9%, 2010년에는 14.8%까지 하락했다. 민족적인 호감도나 연대가 점차 희미해지고, 북한에 대해 삐끗 잘못 한마디라도 하면 ‘종북좌파’라고 욕을 먹는 상황에서, 과연 한반도는 통일될 수 있을까? 박명규(57)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는 최근 펴낸 ‘남북 경계선의 사회학’(창비 펴냄) 에서 “지금까지 ‘분단평화’가 유지됐고 그 속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성과를 이뤄냈다.”면서 “하지만, 21세기에 도약을 이뤄내려면 ‘분단평화’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통일을 통한 평화질서, 즉 ‘통일평화’를 향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6일 “21세기는 세계화로 국가 간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데, 남북만이 계속 냉전이란 경계 속에서 잘 살아갈 수는 없다.”면서 “지난 60년의 성과에 집착해 현재를 고수하는 전략을 택하면, 남한이 누려온 삶의 풍요로움을 후대에 넘겨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을 이념적으로 적대적이고, 민족적으로는 동질성인 집단으로 분류해 접근한다면 북한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그는 말한다. 60년간 떨어져 살아온 남과 북이 더는 적(敵)도 아니고, 형제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체제에서 다른 경험을 하며 살아온 젊은이들이 북한을 생각할 때 무관심하고, 어색하고, 때론 불편하게 느끼는 감정도 이해할 만하다는 것이다. 전쟁의 참상을 겪지 못한 세대가 이념적으로 해이해졌다든지, 통일의식이 희박해졌다든지 하는 식으로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현실을 인정하고, 분단평화를 통일평화로 변환시킬 방안을 모색하자는 것이다. 박 교수는 책에서 ‘1980년대 유럽의 반핵평화운동은 탈냉전으로 가는 길을 열었듯이 비핵화에 대한 관심을 강화시키고, 이 비핵화를 한반도의 21세기 발전론의 차원에서 거론해야 한다.’고 말한다. 비핵화는 한반도 통일 국가의 성격과 관련해 기본적인 대원칙으로, 주변국들도 한반도의 통일을 긍정적으로 사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씨줄날줄] 21세기판 차르의 귀환/구본영 논설위원

    해외 여행이 쉽지 않았던 1980년대 후반이었던가. 모스크바 출장을 다녀온 선배가 기념품을 선물로 줬다. 나무로 만든 인형으로, 러시아에서 흔한 여자 이름인 마트료나의 애칭이기도 한 ‘마트료시카’였다. 몸체를 벗기면 사이즈만 작은 똑같은 소녀가 계속 나와 퍽 흥미로웠던 기억이 난다. 어제 뚜껑이 열린 러시아 대선 결과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마침내 그의 소망대로 3선에 성공한 것이다. 그는 대통령 3연임을 금지하는 러시아 헌법을 우회하기 위해 기발한 꼼수까지 동원해야 했다. 자신이 대통령이었을 때 총리였던 메드베데프를 대통령으로 옹립한 뒤 그 밑에서 총리로 ‘수렴청정’한 게 그것이다. 러시아 안팎에서 푸틴 3기시대의 개막을 ‘현대판 차르(황제)의 귀환’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장기 집권을 위한 레일이 깔렸다는 뜻이다. 하지만 마트료시카 인형놀이도 오래 하면 싫증 나는 것과 같은 이치일까. 러시아 민심은 예전 같지 않다고 한다. 푸틴은 ‘완전한 승리’를 선언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지만, 정작 유권자들의 지지 열기는 시들했다. 잘나갈 때 지지율이 80%대에 육박했지만, 이번 대선에선 60%대의 득표율에 그친 게 그 증거다. 더욱이 야권의 부정선거 주장에 동조하는 유권자들이 대규모 반정부 시위 동참을 벼르는 상황이다. 이론상 푸틴은 1·2기 12년을 포함해 최장 24년 집권이 가능하다. 그는 러시아 국민이 원한다는 것을 전제로 4선 도전 가능성도 열어 뒀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제정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 이후 ‘차르’가 부활하는 격일 게다. 하지만 그가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다. 무엇보다 푸틴의 비민주적 통치 스타일에 피로감을 느끼는 국민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게 걸림돌이다. 전문가들은 푸틴이 이를 돌파하기 위해 실리 추구 경제정책과 러시아 민족주의에 더욱 기댈 것으로 전망한다. 푸틴의 한반도 정책도 그런 기조를 띨 것으로 점쳐진다. 국익을 극대화하는 실리외교를 적용할 공산이 크다는 얘기다. 즉, 현상유지를 전제로 남북 분단이 제공하는 기회이익부터 챙기는 ‘이북제남’(以北制南) 노선이다. 과거 북한의 김일성이 중·러 갈등을 비집고 양국 간 줄타기 외교를 벌였던 사례에 비견된다. 이른바 남북 간 ‘신(新)등거리 외교’로, 우리에겐 달갑지 않은 시나리오다. 자칫 분단 고착화를 부를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푸틴 3기 러시아 정정의 불확실성이 우리 외교에 새로운 과제를 던지고 있다. 구본영 논설위원 kby7@seoul.co.kr
  • 사랑·분단 현실 읊던 노작가, 소설의 본령 정의하다

    사랑·분단 현실 읊던 노작가, 소설의 본령 정의하다

    “역시 소설의 본령은, 몇 백년이 지나도 죽지 않는, 사랑이었습니다. 요즘 사랑과 우리 시대 사랑에 차이가 있을까요. 세대를 초월해 달라지지 않은 사랑의 본질을 담아냈습니다.” 27일 서울 인사동 한 한식당에서 만난 정소성(68) 작가는 7년 만에 내놓은 신작 장편소설 ‘설향(雪鄕·시와에세이 펴냄)’을 이렇게 압축했다. 기자를 만나자마자 대뜸 “표지가 참 잘 나오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눈이 소복이 덮인 너른 벌판에 한 사람이 빨간 문 앞에 서있는 그림이다. ‘설향’ 제목 그대로다. 그는 “사랑을 너무 본능에 충실해 쓰면 추악해보일 수 있다.”면서 “순백의 모습으로, 아름답게 써보자라는 생각으로 접근했는데, 딱 그 모습을 담아냈다.”고 설명했다. 온갖 인생사를 다 맛봤을 법한, 원로 소설가는 책에서 사랑을 미화한다. 미술을 전공하는 현우의 시점에서, 미대 친구인 태현과 혜란, 미라를 중심으로 관계를 맺고 이야기를 풀어간다. 예술적인 측면에서나 사랑에서나 모범생인 현우는 혜란을 향한 사랑과 욕망을 자제하면서 태현과 우정을 지키려고 애쓴다. 간혹 균열이 있지만, 균형감이 더 크다. # 순백의 사랑으로 ‘전향’한 셈 이런 사랑 이야기는, 그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면 전향이나 다름없다. 197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정 작가는 1983년 첫 장편 ‘천년을 내리는 눈’을 시작으로, ‘여자의 성’(1990), ‘소설 대동여지도’(전 4권·1994·월탄문학상 수상), ‘태양인’(1997), ‘두 아내’(1999), ‘바람의 여인’(2005) 등 장편 14편을 냈다. 1985년에는 중편 ‘아테네 가는 배’로 17회 동인문학상(1985)을, ‘뜨거운 강’으로 제1회 윤동주문학상을 받았다. 다른 중편인 ‘말’로는 1988년 만우 박영준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 대부분이 분단 현실과 이데올로기, 그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내면에 집중한다. 그런 그가 청춘 남녀의 사랑을 들고 나온 것이다. “그동안 사회인으로서, 소설가로서, 역사를 탐구하고 사회상을 담아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었습니다. 그 산물이 지금의 작품들이죠. 하지만 이제 이 나이가 되니 그것들에서 초탈하고, 순수문학의 본령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자극적인 애정관계에 익숙한 젊은 독자에게는 고루해보이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받자 작가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말문을 열었다. “쉽고 편한 친구 같은 연애를 많이 하는 요즘 세대와 괴리가 있지는 않을까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사랑이 세대를 거쳐 변신을 거듭해도, 끊임없이 그립고 가지고 싶은, 사랑 바탕에 깔린 감정은 그대로이지 않나 싶습니다. 세대를 넘어선 공감이 있을 것이라 믿는 거죠.” # 쓰는 게 즐거워… 사랑 탐구 계속 그는 “소설의 배경인 된 경기도 연천은 아들이 군복무를 했던 곳”이라면서 “자주 면회를 하면서 아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젊은이들의 사랑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고 귀띔했다. 그는 2009년, 단국대 교수직 퇴임 직후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다들 병환 탓에 창작활동에서 멀어지나 했지만 그 사이 중편 6편, 단편 10편 등 열정적으로 글을 썼다. “병마를 겪어보니 늙음과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초조함, 시간과 싸움을 하는 듯하다.”는 그는 “앉아서 쓰는 게 이렇게 즐거우니 집필에서 손을 놓을 수가 없다. 앞으로도 인간의 사랑에 대한 탐구를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간도 공동통치 협약 대한제국·러시아가 1902년에 체결했다”

    대한제국과 러시아가 간도(間島) 지역에 대한 공동 통치를 규정하는 특별 협약안을 1902년 작성했다는 기록이 발견됐다. 러시아의 저명한 동방학자 H B 큐네르(1877~1955)의 저서 ‘한국개관’에 따르면 대한제국과 러시아는 1902년 간도 지역에 대한 공동 통치 특별 협약안을 작성했다. 큐네르는 1908년 편찬된 ‘간도문제’라는 책을 인용해 “러시아 정부는 한국에 파견된 자국의 공사 베베르를 통해 이 문제(간도 문제)에서 한국 정부를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간도 지역에 대한 한국과 러시아의 공동 통치를 규정하는 특별 협약안이 1902년 이미 양국 정부 간에 작성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77쪽) 라고 기술했다. ‘간도문제’는 중국의 혁명가 쑹자오런(宋敎仁. 1882~1913)의 저서로 추정된다. 특별협약안이 체결되던 무렵에 간도에 살고 있던 한국인들은 이 지역이 고래로 한국에 속하는 지역이라는 근거에 따라 중국의 통치에 복속되기를 거부하기 시작했고, 한국의 함경북도 관청 역시 이런 한국인의 편을 들면서, 간도에 대한 논쟁을 다시 점화시켰다. 1888년 중국과 조선이 두만강 상류와 중류를 따라서 10개의 국경비를 세우며 간도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했던 결정이 십수년 만에 깨진 것이다. 또 정계비를 검사하고자 수시로 백두산을 오르내렸던 경원 군수는 두만강이 국경선이 아니라는 보고서를 1898년에 제출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대한제국은 1902년 이범윤을 간도시찰사로 파견하는 등 간도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려 노력했다. 동북아역사재단 김영수 연구위원은 “러시아가 청나라와 일본을 배제하고 대한제국과 간도를 공동 통치하려 했다는 것은 국제법상으로 한국의 간도 영유권을 인정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 연구위원은 “지금까지 학술적인 연구는 1902년에 러시아가 대한제국에 간도를 공동으로 통치하자고 제안했다는 것이었지만,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특별 협약안이 작성됐기 때문에 간도 문제에 대해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 연구위원은 “실질적인 문서가 있다고 알려졌기 때문에 학계가 이 문서를 찾고자 노력해야 할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이미 100년이 지난 자료들이 뒤늦게 나타나는 이유에 대해 학계에서는 남북 분단으로 러시아나 중국 등의 자료에 접근하기 어려웠고, 그 결과 연구가 미흡했다고 밝혔다. 큐네르에 따르면 1881년 무렵 함경도 관리가 간도 지역 토지 이용에 관한 서류를 발급하지만, 1880년 중반 이후 중국이 간도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 한국 이주민 수는 오히려 증가했는데 1909년 일본 간도파출소가 한 주민조사에 따르면 간도 지역 한국 이주민의 수는 8만 2999명으로, 중국인 거주자 2만 7371명을 압도했다. 한편 두만강의 어원이 되는 만주 지방 토착어인 ‘투만울라’는 “1000개의 강으로 이루어진 강”이라는 뜻이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박재범 칼럼] 뽑아쓰고 내버릴 때 옳음을 따라야

    [박재범 칼럼] 뽑아쓰고 내버릴 때 옳음을 따라야

    바야흐로 선거의 계절이다. 총선이 불과 50여일 앞으로 다가왔다. 연말이면 대선이 치러진다. 민주국가에서 선거는 국민이 지도자를 뽑는 행사이기에 관심이 쏠리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문제는 후보마다 화장을 짙게 해 민낯 파악이 힘들다는 점에 있다. 어떤 관점에 의거해야 선택한 다음 후회를 덜 할 수 있을까. 미흡하지만 아쉬운 대로 고전에 실린 잣대를 빌려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본다. 논어 등에 따르면 지도자는 하늘인 백성, 즉 국민이 바라는 바를 따라야 한다. 과연 국민은 무엇을 바랄까. 간략하게 정리하면 네 가지라고 한다. 목숨이 위태롭지 않게 오래 사는 수(壽), 호주머니가 넉넉한 유(裕), 몸과 맘이 편한 강녕(康寧) 등이다. 잠깐 시선을 현재로 돌려 보면 한국인의 삶을 규정하는 조건은 크게 세 가지이다. 남북 분단에 따른 무장대치, 소규모의 자원빈국으로서 개방형 수출경제 구조, 세대·빈부·이념·지역 등 부와 자원의 배분을 둘러싼 다양한 갈등이라 할 수 있다. 목숨과 호주머니 사정, 옆집 살림과의 비교에서 생기는 불편함 등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 수유강녕의 뜻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도자는 이런 요구를 해결하면서, 국민을 독려해 한국을 세계 속에 자리잡게 하는 이율배반적 난제를 동시에 풀어나가야 한다. 자신을 뒤로한 채 나와 모두를 위해 열심히 일할 일꾼을 짧은 시간에 어떻게 감별할 수 있을까.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을 모른다는 속담대로 사람은 겪어보지 않는 한 결코 알 수 없다. 겉으로 드러난 태도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다시 고전으로 돌아가면 공자의 제자 자공은 온량공검양(溫良恭儉讓) 다섯 가지를 제시했다. 따뜻하며, 솔직하고 선량하면서, 태도가 공손하고, 말에 쓸데없는 수식이나 자기자랑 없이 검소하며, 좋은 것이라도 사양할 줄 아는 사람을 꼽았다. 한마디로 보통보다 약간 나은 수준이되 전반적으로 어리숙해 보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일을 할 때 속임수나 잘난 체 없이 매사를 쉬운 방법으로 곧게 하는 인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피해야 할 사람은 말을 현란하게 잘하고 상황에 따라 낯빛을 쉽게 달리하는 사람이다. 즉, 주인인 국민을 속이지 않고 주인의 이익을 가로채지 않을 사람은 너무 똑똑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웃집 삼촌처럼 부탁도 쉽게 할 수 있고, 의지하고 싶으며, 대하기 편해 괜히 정이 가는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가장 중시할 대목은 거짓이나 술수와 거리가 멀어야 한다는 점이다. 대학은 명명덕 신민 지어지선(明明德 新民 止於至善)이라고 했다. 인간마다 갖고 태어난 밝은 빛을 더 밝힐 수 있는 지도자여야 사람을 새롭게 바꿔나갈 수 있으며, 그때 사람들은 비로소 ‘나도 그렇게 살아야지.’ 하고 마음먹게 된다는 얘기다. 뒤집어 보면 거짓과 술수에 능하면 국민의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없으며, 이는 지도자로서 제격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공자 이후 1000년 만에 나타난 거유 정자는 이를 한마디로 압축했다. 뽑아 쓸 사람과 내버릴 사람을 고를 때 옳음을 따르라는 거조득의(擧錯得義)이다. 노나라 왕 애공이 아랫사람인 계강자의 국정농단을 개탄하자 공자는 애공의 정실인사가 원인임을 지적하며 이 말을 했다. 정실인사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굽은 사람을 곧은 사람 위에 올려놓게 된다. 이런 탓에 정실인사는 대개 국가와 사회의 건강성을 해친다. 선거는 국민이 내리는 인사 명령이라는 점에서 국민 스스로 옳음의 원칙에 따라 표를 던지는 게 절실하다. 인사권자 스스로 바람에 휩쓸리거나 눈앞의 이익에 매몰돼 정실인사를 단행해 놓고서 애공처럼 후회해 본들 별무 소용이다. 솔직한 사람, 술수 없는 사람, 따뜻한 사람, 자기자랑 없는 사람, 사양하는 사람을 뽑는다면 최선은 아니라도 차선은 될 성싶다. 갖은 영악한 방법으로 혹세무민하는 정치 기술자들이 판 치는 세태 속에서 유권자들은 인사권자로서 자신만의 인사 원칙을 한번쯤 정리해 놓을 필요가 있다. jaebum@seoul.co.kr
  • [열린세상] 협력위주의 미·중관계와 한반도 운명/이문기 세종대 중국통상학과 교수

    [열린세상] 협력위주의 미·중관계와 한반도 운명/이문기 세종대 중국통상학과 교수

    흔히 미·중 관계를 전략적 경쟁자로서 협력과 갈등의 복합적 관계로 규정한다. 그런데 ‘협력’과 ‘갈등’이 동시에 복합적으로 존재한다는 성격 규정은 양국 관계의 가변성을 포괄적으로 설명해 주기에는 편할지 몰라도, 종종 우리를 헷갈리게 만들기도 한다. 향후 미·중 관계의 향배가 한반도에 미치는 절대적 영향력을 고려한다면, 이런 식의 양가론적 인식 틀을 넘어서는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렇다면 향후 미·중 관계의 전략적 성격은 ‘협력’과 ‘갈등’ 중에서 어디에 더 큰 방점을 찍어야 할까? 최근 미·중 관계에 관한 국내 언론의 보도는 ‘갈등적 측면’에 더 큰 방점을 두는 경향이 강하다. 지난 13일부터 17일까지 진행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부주석의 방미에 대한 국내 언론의 보도내용도 대부분이 그렇다. 실제로 양국 간에는 환율·인권·남중국해 문제, 그리고 눈앞의 현안인 이란과 시리아 제재 문제 등 첨예한 갈등 사안은 매우 많다. 양국 관계는 기본적으로 경쟁 관계이고, 더구나 서로 다른 정치 체제에서 비롯되는 가치규범과 문화적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에 크고 작은 갈등 사안은 계속 생성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보면 미·중 관계의 성격은 갈등구조가 근본이고, 눈앞의 갈등요인을 관리하면서 그럭저럭 유지되는 ‘위태로운 협력상태’인 것처럼 보인다. 지금 위태로워 보이는 양국 간 협력관계가 미래 언제쯤엔가는 파탄날 수도 있고, 아니면 장기간 이런 상태를 유지하거나 혹은 진전된 협력의 틀을 구축할 수도 있다.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다. 하지만 필자의 판단으로는 적어도 향후 10년 정도 중·단기적으로는 충돌보다는 협력 중심의 시대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 이후에도 양국의 정치지도자들이 지혜를 발휘한다면 한 차원 높은 협력의 시대를 이어갈 가능성도 있다. 양국 관계가 중·단기적으로 충돌보다는 갈등 현안을 적절히 관리하면서 새로운 협력의 틀을 모색할 가능성이 높은 이유는 무엇보다도 양국이 처한 국내사정과 현실적 국익 때문이다. 미국은 심각한 국가 재정적자와 경제침체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중국은 극심한 빈부격차와 사회불안 해소를 위해서 양국 간의 협력이 절실하다. 특히 경제적 상호 의존에 따른 ‘공존의 길’ 모색에 대한 요구가 매우 높다. 과거 냉전체제 하에서 미·소관계가 적대적 경쟁관계이면서도 ‘공포의 핵균형’을 유지했다면, 21세기 미·중관계는 적어도 향후 10년 혹은 그 이후 상당기간 동안 경제적 상호 의존을 바탕으로 ‘공포의 재정균형’이 유지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전략적인 차원에서 양국 관계의 이익구조가 타협과 협력으로 구조화되는 경향은 최근 동아시아 정세변화에서도 그대로 반영된다. 북한의 김정은 후계체제에 대한 미·중 양국의 신속한 동시 승인이나, 연초 타이완 총통선거에서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민진당 후보보다는 친중국 성향의 국민당 마잉주(馬英九) 후보를 미·중 양국이 동시에 막후 지원한 사례가 그렇다. 양국 모두 동아시아 지역의 급격한 변화보다는 ‘안정’ 그 자체를 중시하는 전략적 이해관계를 반영한 것이다. 20세기 미국 외교사에 최고의 브레인이자 1970년대 극비리에 중국과의 수교협상을 성사시킨 헨리 키신저 박사는 최근에 출판한 저서 ‘중국 이야기’(On China)에서 향후 미·중 관계는 단순한 파트너십의 유지를 넘어서, 새로운 역사를 함께 써나가야 할 ‘공동진화’의 관계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만약 그의 희망처럼 향후 미·중 관계가 새로운 단계의 협력관계로 발전한다면 한반도의 운명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미·중 간 협력관계의 구조화는 우리에게 단기적으로는 외교적 숨통이 트이는 기회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위기일 수도 있다. 향후 미국과 중국이 세계적 차원은 아니더라도, 동아시아 지역 차원에서 21세기판 ‘신얄타체제’를 구축하지 말란 법도 없다. 그렇게 되면 한반도의 운명은 또다시 양대 강대국의 이익놀음에 의해 결정되고, 남북관계는 영구분단으로 갈 수도 있다. 기회는 10년이다. 기회를 살리고 위기에 대비하는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외교력이 절실한 시기다. 특히 남북관계에서 말이다.
  • [23일 TV 하이라이트]

    ●한국인의 밥상(KBS1 밤 7시 30분) 마음대로 올 수 없고, 마음대로 나갈 수도 없다는 섬 백령도. 이곳은 사람들의 말처럼 긴장과 평화가 공존하고 있다. 가까운 거리만큼이나 음식 문화에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또 민족분단의 아픔을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망향의 섬이다. 더불어 살아온 사람들의 잊지 못할 맛, 오래된 그리움을 담은 백령도의 겨울 밥상을 만나본다. ●호루라기(KBS2 밤 8시 55분) 지난 8개월 동안 숨 가쁘게 달려온 코너 김남훈의 ‘원펀치’. 전국에 퍼져 있는 각종 불법과 탈법 현장에 출동해 대한민국의 상식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싸워 왔다. 그렇다면 지난 8개월 동안 ‘원펀치’를 이끌어온 김남훈이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지난 방송들을 통해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단면들을 정리해 본다. ●고향을 부탁해(MBC 오후 6시 50분) 바람 맛도 짭짤하고 물맛도 짭짤한 경남 통영. 그곳에서는 ‘입춘대길’ 대신 ‘도다리 쑥국’으로 봄을 시작한다. 도다리가 앉았던 뻘만 건져다 국을 끓여도 맛있다는 통영 봄 도다리가 드디어 제철을 만났다. 양식이 안 돼서 100% 자연산이라는 도다리는 제주도에서 지난겨울을 보내고, 산란을 위해 통영 앞바다로 돌아온다는데…. ●퀴즈쇼 곱하기 9(SBS 오후 6시 30분) 이번 주 도전 팀은 현대 홈쇼핑의 간판 쇼 호스트 9명으로 구성된 명품 쇼 호스트팀들이다. 항상 활기찬 에너지를 몰고 다니며, TV 홈 쇼핑에 마법 같은 생명력을 불어넣는 이들이 과감히 ‘곱하기 9’에 도전장을 던졌다. 넘쳐흐르는 끼와 재치로 MC 남희석에 못지않는 입담을 과시하는 이들. 과연 상금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TV입학사정관(EBS 낮 12시 10분) 새 학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 곧 3학년이 되는 학생들은 입학 사정관 전형을 준비할 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은 채워 가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예비 고3 학생들이 입학사정관전형을 어떻게 준비하는 것이 좋을지, 서울 금옥여자고등학교를 찾아가 학생들과 선생님의 상담을 받아 본다. ●검색녀(OBS 밤 11시 5분) 방송인 홍석천은 자신의 레스토랑에 한류 스타와 아이돌 스타 커플들이 많이 이용한다고 폭로했다. 하지만 친한 연예인에게도 이 사실을 밝히지 않고, 그들의 비밀을 지켜주기 위해 차량도 시간차를 이용해 이동시킨다고 한다. 한편 자신의 레스토랑에서 데이트를 즐기다 결혼에 골인한 스타도 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 [문화마당] 서해 5도를 생각하며/신동호 시인

    [문화마당] 서해 5도를 생각하며/신동호 시인

    백령도에 아우가 삽니다. 연안부두에서 만나자고 하고서 번번이 지키지 못하는 아우입니다. 바람이 거세고 파고가 높으면 어김없이 배가 출항하지 못하는 탓입니다. 고등학생인 아들을 육지로 보내놓고서 얼굴을 제때 보지 못해 안달인 아우입니다. 해병대의 해상사격을 두고 북한이 “무자비한 대응타격”을 한다 하니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피했어?”라 물으니 “형, 백령도는 따뜻한 가슴으로 지켜야 해.”라고 선문답처럼 대답합니다. 이 어처구니없는 느긋함은 일상의 소중함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언제부턴가 ‘한반도의 화약고’로 불리고 있지만, 우리처럼 서해 5도의 사람들도 일상을 벗어나 긴장만 가지고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혹시 그곳의 분쟁을 통해 우리의 안전을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곳의 분쟁이 계속될수록 우리는 더 안전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프랑스 철학자 푸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신병자를 감금함으로써 우리는 정상인이라고 착각한다.”고. 그들의 고통을 두고 우리는 연속극을 보듯이 미디어 속의 세상이라 치부합니다. 사격, 폭격, 죽음 같은 무자비한 단어들을 피부에 와 닿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그럼으로써 우리의 고통은 서해 5도의 고통을 통해 비교적 안심에 가깝다고 여기는 건 아닐까요. 분쟁을 방기하고 아니, 오히려 더 빈번하게 함으로써 우리는 위협에 훈련되고 있습니다. “까불지 마, 국가와 정부를 믿어! 널 지켜줄게. 돈도 벌게 해줄게. 대신 말 잘 들어.”라는 말에 저항할 근거도 잃었습니다. 의심하는 순간 우리는 감옥에 갇힙니다. 고분고분해집니다. “첨단 무기를 들여놓을 것이 아니라 평화를 정착시켜야 한다.”는 인천광역시 송영길 시장의 주장은 분쟁을 통해 이득을 유지하는 이들에 의해 무시됩니다. “생태와 환경을 지키고 중국 관광객들을 백령도로 유치하면 포격도 사라질 것”이라는 그의 말은 분단 기득권자들에 의해 묻혀 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누가 서해 5도의 일상을 지켜줍니까. 북한이 중국에 넘겨 버린 동해안의 어업권 가격은 1년에 200억원이고, 동해안 물고기를 싹쓸이한 중국 어선들이 공해상에서 일본 배에 넘기고 얻는 이득은 하루에 200억원이랍니다. 동해안의 어부들은 아슬아슬하게 삶을 이어갑니다. 때로 그들은 고기를 찾아서 해상분계선에 접근합니다. 삶은 이념보다 더 오래 전에 시작되었습니다. 이념이 삶을 억압하면 인간은 그저 국가의 종속물이 됩니다. 어떤 위험요소도 삶보다 먼저일 수는 없습니다. 조기가 사라진 서해바다,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줄 꽃게마저 북방한계선(NLL)을 교묘하게 넘나드는 중국 어선들의 몫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는 동안 분쟁은 어두운 웃음으로 자기만 풍족할 뿐입니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이 있은 후 “이곳에 사는 것, 그것이 그 자체로 애국입니다.”라고 말했던 주민들의 말이 기억납니다. 진먼다오(門島)는 타이완에 속해 있는 섬으로, 중국 사회주의를 적으로 삼아 요새화했던 섬입니다. 1958년엔 중국으로부터 47만발의 포탄이 날아왔고 군인과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연평도를 진먼다오처럼 요새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아픈 과거를 멀리하고 지금의 진먼다오는 중국 본토의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그곳 관료는 이렇게 말합니다. “평화란 첨단무기가 아닌 끊임없는 교류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라고. 백령도 아우의 “따뜻한 가슴으로 지켜야 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싶습니다. 우리는 서해 5도를 너무 먼 땅으로 생각했던 건 아닐까요. 우리의 일상과 동떨어진 곳으로 취급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연평도 포격 이후 송영길 시장은 “가장 아픈 곳이 가장 중요한 곳이다.”라고 말하더군요. 누가 서해 5도를 중요하게 여겨주고, 우리의 일상으로 가져와 줄까요. 정치의 계절이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가슴 따뜻한 분이 그곳의 동량으로 선택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 프랑스 초기 유학파 작가·작품 조명… ‘1958 에콜 드 파리’展

    프랑스 초기 유학파 작가·작품 조명… ‘1958 에콜 드 파리’展

    지금은 많이 약해졌지만 파리는 곧 예술의 중심지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19세기 이후 유럽의 문화수도라고까지 불리면서 단 한번도 가보지 못한 사람들조차도 파리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가지게 한다. 실제 파리가 예술도시로 명성을 날리게 되는 것은 1차 세계대전 뒤 파리에 몰려든 일군의 예술가들, 가령 마크 샤갈, 파블로 피카소, 모딜리아니 같은 작가들의 실험적인 작품들이 주목을 받으면서다. 나중에 이 시기 파리에서 전위적 작업을 선보인 작가들을 묶어 ‘에콜 드 파리’(Ecole de Paris)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식민지, 분단, 전쟁을 겪은 한국 작가들이 본격적으로 파리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이후다. 이들 한국 작가들에게도 ‘에콜 드 파리’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3월 19일까지 서울 충무로 신세계백화점 본점 12층 신세계갤러리에서 열리는 ‘1958 에콜 드 파리’전은 ‘그렇다’고 답한다. 6·25전쟁의 참화 속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1950년대 중반부터 파리로 건너가기 시작한다. 이들은 파리에 머물면서 그동안 유럽 작가들이 진행한 서정적인 추상운동을 고스란히 온몸으로 빨아들이면서 새로운 화풍을 만들어나가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한국적인 소재나 주제, 미의식을 놓지않기 위해 애썼다. 동시에 이들은 한국으로 돌아가 전시회를 열면서 그동안 일본을 통해 간접적으로 수입되던 서양화풍을 직접 소개함으로써 후대 한국 화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전시를 통해 이 영향의 뿌리를 확인해보는 셈이다 가령 남관(1911~1990)은 1955년 파리로 건너간다. 원래는 인물과 풍경을 주제로 삼았지만, 파리 생활을 거치면서 앙포르멜 추상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권옥연(1923∼2011)도 마찬가지. 원래 평면적 이미지 작업을 위주로 했는데 유학 기간 동안 추상적 실험 작업으로 전환했다. 1960년 작품 ‘추상’은 두툼한 질감, 절제된 색채, 형태가 없는 그림으로 추상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자신이 걸어갈 길에 대해 더 확신을 얻고 온 경우도 있다. 원래 국내에 있을 때부터 추상적 화풍을 선보였던 김환기(1913∼1974)는 파리에서 감격적인 경험을 했다. 그는 거장들의 작품을 보니 작품들마다 모두 노래가 숨어있었는데, 그 덕분에 이제껏 자기가 부르기 위해 애썼던 노래가 무엇인지 알게 됐노라 고백했다. 한국적 소재를 바탕으로 한 1950년대 작품 ‘항아리’ ‘산월’ ‘새’ 같은 작품들에서는 이 노래의 리듬을 느껴볼 수 있다. 거꾸로 오히려 한국적인 맛에 더 깊이 빠져든 작가도 있다. 이세득(1921~2001)은 파리로 건너간 직후 마티스를 떠올리게 하는 화려한 작품들을 많이 그렸다. 그런데 나중에 가서는 오히려 향토적인 주제에 천착하되 추상적 기법을 합치는 작품들을 남긴다. ‘념’(念)과 ‘허’(虛)를 키워드로 삼은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손동진(91)도 시간이 흐를 수록 탈춤과 달빛, 어릴 적 경험이 녹아 있는 경주의 풍경 같은 토속적인 소재에 집중했다. 독특한 융합도 있다. 이성자(1918~2009)는 동양적인 향취를 절제된 한국적 미감으로 잡아내면서도 서양적 해석을 통해서 동서양 모두의 공감을 얻어냈다는 평을 받는다. 덕분에 재불 1세대 작가 가운데 드물게 프랑스 화단 중심에서 그들과 직접적으로 경쟁했다. 본점 전시 뒤 인천점(3월 21일~4월 23일)과 센텀시티점(4월 25일~5월 21일)에서 순회전시된다. (02)310-1924.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경평전·서울시향 평양공연 추진

    경평전·서울시향 평양공연 추진

    서울시가 남북 교류협력사업으로 구상 중인 남북 축구대회인 ‘경평전’과 서울시향의 평양공연이 본격 추진된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15일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서 류우익 통일부장관을 만나 경평전과 서울시향의 남북 교환 공연에 대한 정부의 협조를 요청했다. 박 시장은 “류 장관께 협력을 요청드렸고, 장관께서도 긍정적으로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박 시장은 면담 후 배웅에 나선 류 장관에게 “경평전이 열리면 장관님이 오셔서 시축을 하면 얼마나 좋으시겠느냐.”고 말했다. 통일부 당국자는 “류 장관은 비정치적 분야의 교류는 민족 동질성 회복 차원에서 좋은 취지라고 박 시장에게 밝혔다.”며 “순수성이 훼손되지 않고 부작용이 발생하지 않는 범위에서 남북관계 상황을 보고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추진됐으면 한다는 의견을 전달했다.”고 말했다. 통일부는 서울시와 실무 협의를 갖고 북한에 공식 제의하는 방식 및 구체적인 행사 시기를 결정하기로 했다. 남북 교향악단 합동공연은 2000년 8월 서울 예술의전당 등에서, 2002년 9월에는 평양 봉화예술극장에서 개최됐다. 경평전은 1929년 경성중학이 주축이 된 경성팀과 숭실학교가 주축이 된 평양팀이 서울 휘문고보 운동장에서 첫 경기를 가진 뒤 매년 한 차례씩 서울과 평양에서 열렸다. 1935년 일시 중단된 뒤 해방 직후인 1946년 3월 서울에서 재개된 후 분단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안동환기자 ipsofacto@seoul.co.kr
  • [씨줄날줄] 북아일랜드 독립선언/구본영 논설위원

    남북한은 지구촌의 마지막 분단국으로 일컬어진다. 동병상련을 앓던 독일·베트남·예멘 등이 잇따라 통일되면서 한반도만 비극의 땅으로 남은 꼴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본래 한 나라였으나 분단된 나라들은 더 있다. 같은 핏줄에 같은 언어를 써야 통일국가가 될 수 있다는 기준을 완화했을 때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오셀로의 무대인 키프로스가 그런 나라다. 지중해 동부의 이 섬나라는 1974년 그리스계 장교들의 쿠데타 직후 터키군이 북부에 진주하면서 남북으로 분단됐다. 이후 통일협상을 벌이고 있지만, 민족 간 갈등으로 인한 유혈충돌이 빈번하다. 주민 80%는 그리스계이지만, 나머지 20%가 터키계인 탓이다. 인종·언어는 유사하지만, 이념·체제를 달리하면서 갈등이 내연 중인 중국-타이완의 분단 사례와는 대비된다. 엊그제 로이터통신은 북아일랜드 독립을 위한 국민투표론이 공식화됐다고 보도했다. 아일랜드 민족주의 정당 신페인당 소속 마틴 멕기네스 북아일랜드 제1부장관이 2016년에 국민투표를 실시하자고 깃발을 든 것이다. 영국과 분리해 아일랜드와 통합하려는 수순이다. 이미 스코틀랜드가 오는 2014년 영국으로부터 독립 여부를 주민투표에 부치겠다고 선언했다. 한때 5대양 6대주 곳곳에 식민지를 둬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불리던 영국의 핵분열이 재연되는 형국이다. 북아일랜드는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와 함께 영국의 4개 자치국 중 하나다. 이들은 축구 제전인 월드컵에도 따로 대표팀을 내보낼 만큼 인종과 언어가 서로 이질적이다. 앵글로-색슨족이 절대 다수인 잉글랜드와 달리 북아일랜드는 켈트족이 다수다. 종족을 보면 당연히 아일랜드와 합쳐야 하겠지만, 문제는 종교다. 가톨릭이 국교 격인 아일랜드와 달리 잉글랜드처럼 신교가 우세하기 때문이다. 종교는 차치하더라도 북아일랜드 독립을 어렵게 하는 요인은 많다. 주민투표에서 스코틀랜드에 비해 독립안이 통과될 확률이 적다는 관측이 우세할 정도다. 스코틀랜드는 북해 유전과 조선업으로 영국경제에서 점하는 비중이 높지만, 북아일랜드 경제는 영국정부의 수액주사에 기대는 형편인 까닭이다. 평화통일이 지상과제인 우리가 유념해야 할 대목이다. 통일이냐, 분리독립이냐는 결국 구심력과 원심력의 차이에서 결정된다는 게 역사의 법칙이 아닌가. 경제력뿐 아니라 사회보장제도와 복지시스템에 이르기까지 동독을 압도했던 서독의 구심력이 통독의 원동력이었음을 잊어선 안 되겠다. 구본영 논설위원 kby7@seoul.co.kr
  • ‘3·1문화상’ 최종고·이익춘·이호철·이창건씨

    ‘3·1문화상’ 최종고·이익춘·이호철·이창건씨

    제53회 3·1 문화상 수상자에 원로 소설가 이호철씨 등 4명이 선정됐다. 삼일문화재단(이사장 문인구)은 ▲학술상(인문사회과학부문) 최종고 서울대 법대 교수 ▲학술상(자연과학부문) 이익춘 인하대 명예교수 ▲예술상 소설가 이호철 ▲기술상 이창건 한국원자력문화진흥원장을 부문별 수상자로 각각 선정했다고 31일 밝혔다. 최 교수는 한국과 동아시아 법철학 정립에 이바지했으며, 이 명예교수는 530여편의 논문을 발표해 기초과학인 화학 분야에 뚜렷한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고 재단은 밝혔다. 원로 소설가 이호철은 평생 남북 분단의 비극을 그려온 분단 문학의 ‘큰 산’으로 평가받았으며, 이 원장은 국내 원자력법 제정과 관련 행정조직 및 연구소 설립에 이바지한 공을 인정받았다. 시상식은 3월 1일 오후 3시 30분 서울 마포구 도화동 서울가든호텔에서 열린다.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어머니…선생님…당신의 향기를 多 담았습니다

    어머니…선생님…당신의 향기를 多 담았습니다

    “‘젊은 작가라고 해서 젊은 줄 알았더니 30대 후반 아니냐’고 한 출판사에서 박완서 선생님을 처음 뵀을 때 그리 이야기하셨습니다. 선생님을 가까이에서 모시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작가들처럼 함께 여행을 가거나 세배를 한 추억이 없습니다. 그렇게 선뜻 저를 받아들이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아마도 (나를) 믿을 만한 작가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인생에 대해 늘 긴장하고 의심하고 질문할 때 감명받았습니다. 또한 선생님은 자신을 소수에 넣은 겸손이 있었는데, 나는 그것이 균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작가 은희경은 26일 세계사의 ‘박완서 소설전집’ 출판기념회에서 이렇게 말하며 작가 박완서를 추모했다. ‘자신을 소수에 넣는 겸손, 그것이 균형’이라는 은희경이 해석이 마음에 꽉 박혔다. 지난해 1월 22일 별세한 박완서의 1주기 기념 출판이 이어지고 있다. 세계사는 이날 22권짜리 박완서 소설의 전집 결정판이 완성됐음을 선언했다. 문학동네는 마지막 소설집 ‘기나긴 하루’를 펴냈다. 열화당에서는 박완서의 첫 소설집 ‘나목’과 이를 해석한 ‘나목을 말하다’를 500권 한정 특별판으로 출간했다. 출판계에서는 “이청준도 박경리도 이런 대우를 받지 못했던 것 같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세계사에서 펴낸 전집은 의미가 남다르다. 박완서의 팔순(2011년 10월 20일)에 맞춰 출간 예정이었던 기획이었는데, 1주기 기념 출판이 됐기 때문이다. 박완서는 2008~2009년 즈음 “여기저기 출판사에 흩어져 있는 작품을 한데 모아서 내고 싶다.”고 주변에 이야기했었다. 전집이 나오는 중에도 계속 다른 출판사에서 소설책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13권 전집(1993~1996년)과 17권으로 늘어난 개정판(2002~2008년)을 냈던 세계사가 박완서의 꿈을 다시 현실화하는 데 참여했다. 2010년 5월 3일 첫 번째 편집회의에서 박완서는 개개의 작품을 손수 교정 보고 내용도 고치는 등 모든 작품을 직접 만져 보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 꿈은 ‘나목’의 교정을 마치고 두 번째 책인 ‘목마른 계절’을 보던 중에 담낭암으로 타계하면서 미완으로 남았다. 이번 전집에는 박완서의 등단작 ‘나목’부터 작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펴낸 2004년 장편소설 ‘그 남자네 집’까지 작가의 장편소설과 연작소설 15편이 모두 담겨 있다. 근작인 ‘아주 오래된 농담’과 ‘그 남자네 집’이 추가됐고,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제목으로 바뀌었던 ‘미망’은 원제를 복원해 실었다. 1차 전집에 포함됐던 ‘욕망의 응달’은 빠졌다. 이 작품은 여성지에 1978년부터 1년간 연재했던 것인데 박완서는 결정판 편집회의 이후 수록 목록을 줄 때 ‘전집에 넣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기획위원으로 참여한 문학평론가 이경호씨는 “박완서의 특징을 4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장편, 중편, 단편 등 모든 장르에서 고르게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 둘째 특별히 전성기라 구분할 시기가 없이 노년에도 당대의 1급 작가들과 계속 문제작을 두고 겨루었다는 점, 셋째 한국 대표 작가로서 문학적 평가는 물론 대중적으로 높은 지지를 얻어낸 작가라는 점, 넷째 다양한 소재와 주제로 활동했다는 점이다.”라고 평가했다. 이어 “박완서가 다룬 주제는 전쟁과 분단, 이산가족, 1970년대의 속물 자본주의와 타락한 중산층의 삶, 여성과 노인 문제, 성장소설, 연애까지 다양했다.”고 덧붙였다. 세계사의 전집 결정판이나 열화당의 나목이나 모두 박완서의 장녀 호원숙씨의 참여가 없었더라면 쉽지 않았을 것이다. 호씨는 어머니가 타계한 뒤 교열을 책임져야 했다. 그는 출판 간담회에서 “지난 1년 동안 저에게 맡겨진 숙제가 굉장한 축복이자 동시에 큰 고통이었다.”면서 “가족이자 독자로서 어머니의 문학을 접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교정을 보다가 내팽개치기도 하고, 끌어안고 자다가 일어나 다시 읽고 하는 과정을 반복했던 것이다. “어머니의 소설을 읽는 것은 큰 산맥을 종주하는 것과 같은 어려움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어려움만 주신 것이 아니라 냇물이 흐르고 들꽃이 피고 강이 흐르고 하는 즐거움도 주셨다. 언어와 표현의 즐거움, 많은 고통이 녹아있었다.” 특히 열화당의 ‘나목을 말하다’는 호원숙씨가 엮은 것으로, 나목을 쓰던 40대 안팎의 젊은 박완서를 10대의 기억으로 되살려냈다. 또 1976년, 1985년, 1990년 나목을 펴낼 때 쓴 작가의 후기와 김윤식과 김우종의 평론, 독자들의 감상문 등이 붙어 있어 나목을 이해하는 열쇠 같다. 열화당 나목의 백미는 134쪽부터 수록된 ‘‘나목’의 달라진 표현 대조표 1970-1976-2012’다. 열화당 이기웅 대표는 “여성동아 장편소설 당선작인 나목을 35년 전 처음으로 출판했다.”고 소개한 뒤 “1주기를 맞아 책이 나올 당시의 기억을 되살리고 싶었고, 대조표를 통해 나목을 재조명하고 역사로 기록하고 싶었다.”고 했다. 열화당의 한정본은 그래서 세로쓰기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책을 읽어 내려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세배에 대한 추억 한 가지. 설날 세배 간 문인이나 출판계에서는 다 아는 이야기지만 박완서는 출판사 사람이나 후배 작가들이 세배를 오면 꼭 세뱃돈을 건넸다고 한다. 남자는 1만원, 여자는 2만원. 세배돈이 그리운 게 아니라 세배 갈 어른이 사라져 문학계는 슬퍼하고 있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서울광장] 420년 전 유성룡이 있었다면 지금은?/최광숙 논설위원

    [서울광장] 420년 전 유성룡이 있었다면 지금은?/최광숙 논설위원

    임진년(壬辰年) 새해에 임진왜란을 되돌아보게 된다. 작금의 국내 정치 상황과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를 보면 그때와 흡사하기 때문이다. 왜군이 부산을 침략해온 1592년 4월, 지금으로부터 420년 전 그해도 임진년이었다. 16세기 말 동북아가 격동의 시대였다면, 아시아 패권을 놓고 미국과 중국 간에 힘겨루기가 벌어지는 지금의 정세도 긴박하긴 마찬가지다. 과거 동인·서인 간 당쟁으로 국가 재정과 민심이 피폐해진 것도 오늘과 닮았다. 선진국으로 가느냐 못 가느냐 기로에 서 있지만 국가의 미래는 안중에 없고, 정치권은 여야 모두 포퓰리즘이 난무한다. 국가 중대사도 사사건건 보수·진보로 나뉘면서 국론이 분열돼 있다. 임란 당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은 조총을 갖고 싸웠지만 조선은 변변한 무기도 없는 병졸을 데리고 7년을 싸웠다. 오죽하면 임란에 개입했던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도망 잘 치는 군대’라고 비웃었겠는가. 그래도 우리는 어렵사리 이겼다. 조선 최고 재상으로 일컫는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1542~1607)은 임진왜란이 얼마나 힘든 싸움이었는지를 ‘징비록’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오호라 임진의 화는 참혹하도다. 20여일 사이에 국도(國都)가 떨어지고 8도(八道)가 무너져 임금이 파천(播遷)의 길에 올랐다.” 흔히들 임란 하면 이순신을 떠올리지만 백척간두에 섰던 조선의 운명을 다잡은 이는 다름 아닌 유성룡이었다. 그는 임란 1년 전 왜군의 침략을 예견하고 말직에 있던 이순신과 권율을 발탁한 인물로만 알려졌지 역사적으로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는 도망치기 바빴던 선조 대신 정치·군사 등에서 뛰어난 지략으로 전쟁을 진두지휘한 총사령관이었고, 경제·민생 등 국가 발전에 필요한 비전을 제시한 탁월한 리더였다.(이덕일의 ‘설득과 통합의 리더 유성룡’) 무엇보다 유성룡은 국혼(國魂)을 지닌 지도자였다. 서울 도성을 버리고 평양성에서 머물던 선조가 명으로 피신하려 하자 “한 발자국이라도 (국경을) 나가면 조선은 내 땅이 아닙니다. 지방의 지사들이 며칠 안으로 크게 일어날 텐데 어찌 경솔히 나라를 버리고 압록강을 건넙니까.”라며 겁에 질린 임금을 붙잡는다. 만약 선조가 도망치듯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 땅으로 도망갔다면 조선은 없어지고, 나아가 대한민국이라는 국체(國體)를 오늘날까지 온전히 이어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전세가 힘에 부치자 명을 끌어들여 반격의 기선을 잡은 인물이기도 하다.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는 저서 ‘서애 유성룡 위대한 만남’에서 “뛰어난 통찰력과 능수능란한 외교력으로 명과 왜가 조선을 분할 통치하려는 것을 막았다.”고 적고 있다. 임란이 한·중·일 3국의 국제전임을 처음 인식하고, 명이 조선에서 철수하면 위협받을 것이라는 ‘후퇴불가론’을 내세워 명으로 하여금 계속 조선과 연합전선을 펴도록 했다는 것이다. 만약 서애가 나서지 않았다면 우리도 모르게 조선이 분단될 수도 있었다는 얘기니 참으로 아찔한 역사의 순간이라 아니할 수 없다. 올해 총선과 대선이 있다. 밖으로는 미국과 중국 등 세계 주요 국가들의 지도자 교체가 이뤄진다. 동북아 질서 새판짜기가 시도될 가능성이 높다. 그 어느 때보다 요동치는 시기다. 하지만 난세에는 영웅이 나온다고 한다. 역사상 가장 긴박한 위기에 처했을 때 나라와 백성을 지켜냈던 서애 같은 영웅 말이다. 지금도 난세라면 난세다. 흩어진 국론을 하나로 모으고, 국제 정세를 훤히 꿰뚫어 그 속에서 국가의 미래 좌표를 제시하며 국정을 제대로 이끌 리더가 필요하다. 서애가 죽자 백성들은 선조가 명한 ‘3일장’을 치르고도 “선생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찌 살아 남았겠는가.”라며 하루를 더 애도했다고 한다. 백성의 신망이 두터웠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지금 우리도 국민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을 수 있는 진정한 지도자를 갖고 싶다면 무리한 욕심일까. bori@seoul.co.kr
  • [길섶에서] AP통신 평양지국/이도운 논설위원

    1994년 3월 시베리아 한복판 비르비잔의 북한 벌목장. 러시아 측 우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벌목공 막사로 불쑥 들어갔다. 당시 북한 벌목장은 치외법권지역. 그들이 나를 잡아 가도 러시아가 말릴 수 없었다. 막사 가운데 방에서 10여명의 북한 사람과 마주쳤다. 갑자기 오금이 저리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목에 힘을 줘 “서울에서 온 목재 사업자”라고 소개했다. 5분쯤 지난 뒤 벌목공 한 사람이 수상하게 느낀 것 같았다. 나의 통역과 러시아어로 얘기를 시작했다. 안 되겠다 싶었다. 서둘러 막사를 빠져나와 기다리던 승용차를 향해 뛰었다. 나이 50이 넘은 사진부 선배가 나를 앞질렀다. 그는 가장(家長)이었고, 나는 서른살 총각이었다. 여기서 잡혀 평양으로 끌려가면 김정일 인터뷰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까지 했다. AP통신이 16일 평양에 지국을 설치했다고 한다. 중국 신화사, 러시아 이타르타스, 일본 교도통신도 평양에 들어갔다. 한국 언론은 언제나 가능할까. 분단국 언론의 씁쓸한 자화상이다. 이도운 논설위원 daw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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