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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문이 만난사람] 연극 데뷔 50주년 맞는 이 시대의 어머니 손숙

    [김문이 만난사람] 연극 데뷔 50주년 맞는 이 시대의 어머니 손숙

    한 시대의 어머니였다. 여자이기 때문에 말 한마디 못한 채 참으로 모진 ‘여자의 일생’을 살았다. 글 공부는 근처에도 못 갔다. 첫사랑과 헤어지고 다른 남자와 억지 결혼을 했다. 남편의 바람기와 혹독한 시집살이, 게다가 자식의 죽음까지 가슴이 찢어지듯 처절하게 감내해야만 했다. 어머니는 손녀에게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배우고 죽은 남편을 따라 저승으로 가면서 유리창에 자신의 이름을 쓴다. 그렇게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분단의 현대사를 눈물로 겪은 어머니였다. 연극 ‘어머니’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연극은 1999년 2월 초연된 이후 지금까지 매년 공연되고 있다. 그래서 연극 ‘어머니’ 하면 우선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초연 당시 어머니 역으로 백상예술대상 연기상을 받았고 그해 5월 러시아 타캉가극장에 초청돼 ‘마마’라는 환호 속에 기립 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당시 공연 때 한국 기업가한테 격려금을 받았다는 구설수로 32일 만에 환경부 장관직을 그만두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바로 한국을 대표하는 연극배우 손숙(69)이다. 흔히 배우들은 타인의 삶을 산다고 한다. 자신과는 다른 사람들의 역할을 주로 맡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대에서 살아온 지 50년을 맞는다. 이를 기념해 손씨는 다음 달 1일부터 17일까지 서울 대학로 예술극장 대극장 무대에 하용부, 윤정섭, 김미숙, 김철영 등과 함께 오른다. 이 연극이 끝나면 오는 4월 임영웅 연출가와 함께 극단 산울림에서 치매 노인을 다룬 신작 ‘나의 황홀한 실종기’에 출연한다. 또 7월에는 예술의전당에서 손씨의 자전적 이야기를 다룬 연극을 공연한다. 10월쯤에는 극단 신시와의 공연이 예정돼 있다. 손씨는 연극 공연에 항상 남다른 의욕을 보이지만 올해만큼은 더욱 바쁘고 의미 있는 한 해가 될 것 같아 지난 18일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 카페에서 잠시 만났다. 단발머리에 편한 티셔츠 차림, 그리고 소탈한 웃음이 인상적이다. 50주년을 맞는 소감부터 물었더니 “글쎄 바쁘게 살다 보니 인생의 반은 다른 인생으로 산 것 같다”고 웃으면서 “힘든 시절도 있었지만 연극으로 견딜 수 있었고 다시 일어서게 됐다. 고스란히 내 인생만 살았다면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관객들의 박수에 많은 용기를 얻었다”고 말한다. 특히 ‘어머니’는 연극 인생 중 자신에게 각별한 작품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어머니’ 덕분에 자신의 고향인 밀양에서 매년 연극제가 열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어머니’는 10여년 동안 늘 밀양연극제 폐막작으로 무대에 오르는 단골 레퍼토리가 됐다. 이를 보려는 지역 주민들이 객석을 꽉꽉 채운다. 자연스럽게 고향 시절 얘기가 먼저 나왔다. “밀양에서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6·25가 발발했습니다. 우리는 학교에서 쫓겨나고 대신 육군병원으로 바뀌었지요. 그러는 바람에 입학식만 본교에서 하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강변 솔나무나 들판 돌멩이 위에 칠판 올려놓고 공부하고 겨울에는 창고를 빌려서 공부했던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전쟁과 가난이라는 환경 속에서 우유 가루와 학용품 등 구호물자를 실은 미군 트럭이 오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는 말 그대로 춥고 배고팠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초등학교 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것이 큰 축복으로 남는다고 술회한다. 또한 밀려오는 피란민들을 보면서 전쟁의 참상이 어떠한지 생생하게 목격하게 됐다. 중학교는 부산에서 다녔다. 그러다가 부산여중에 입학한 지 6개월 만에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무작정 서울로 왔다. 잠시 어머니를 회고한다. “어머니는 교육열이 대단했습니다. ‘여자도 배워야 한다. 배우지 않으면 여자의 일생이 힘들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요. 어머니는 16살에 결혼했지만 아버지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버리고 시집살이를 혼자 도맡아 했습니다. 그러던 어머니는 자식들이라도 배워야 한다며 저와 동생을 데리고 서울로 오게 됐습니다.” 서울로 온 손씨는 돈암동에 살면서 시골 아이 취급을 받아 처음엔 적응이 힘들었다. 하지만 풍문여고에 진학하면서 문학소녀의 꿈을 키워 나갔다. 글짓기 대회에서 여러 번 상을 받기도 했다. 문예반장을 맡아 인근 고등학교에 다니는 황석영·조해일 등 여러 학생들과 문학의 밤 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손숙 학생은 작가가 되려고 했다.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와 폴 발레리 등에 심취했다. 종로2가에 있는 음악홀에서 국내외 유명 시인들의 작품을 얘기하는 것이 공부보다 훨씬 재미있게 느껴졌다. 매년 신문사에서 주관하는 ‘신춘문예’에도 몇 차례 도전할 만큼 작가 지망에 대한 열의를 가졌다. 그는 살아오면서 ‘울며 웃으며 함께 살기’, ‘손숙이 만난 사람’, ‘섬마을 소년 김대중 전 대통령’ 등의 책을 썼는데 이 또한 그의 문학적 바탕에서 이루어졌다. 그 문학소녀는 고3 어느 날 서울 남산드라마센터에서 유진 오닐의 연극 ‘밤으로의 긴 여로’를 접하게 됐다. 이해랑 선생이 연출하고 황정순·장민호·여운계 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출연한 이 작품은 문학소녀의 마음을 송두리째 사로잡았다. 갑자기 찾아온 연극의 전율은 인생의 방향을 바꾸게 했다. 고려대 사학과 재학생이던 그는 1963년 개교 60주년 기념 연극 ‘삼각모자’(스페인 작가 알라르콘 이 아리사의 작품)의 여주인공으로 발탁돼 꿈에 그리던 남산드라마센터 무대에 올랐다. 남자 주인공은 당시 고대극회 선배인 김성옥(77·목포시립극단 예술감독)씨가 맡았다. 이런 인연으로 사랑이 시작돼 2년 뒤 결혼하게 된다. 1968년에는 극단 동인극장에 들어가 유진 오닐의 ‘상복을 입은 엘렉트라’에서 주인공 엘렉트라 역을 맡아 직업 배우로 연극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극단 산울림 창단(1969년)에 참여해 평생 스승으로 모시는 임영웅(77) 연출가와 인연을 맺었다. 또한 2년 뒤에는 국립극단에 들어가 이해랑(1989년 작고) 선생을 만나면서 새로운 활력을 얻었다. 그는 자신의 연극 인생을 회고하면서 “산울림과 국립극단에서 청춘을 다 바쳤다”고 말했다. 잊지 못할 작품으로는 산울림 시절의 ‘그 여자에게 옷을 입혀라’, ‘홍당무’, ‘바다의 침묵’ 등을, 국립극단 시절의 ‘파우스트’, ‘간계와 사랑’, ‘천사여 고향을 보라’ 등을 꼽았다. 그는 “15년 동안 지낸 국립극단 시절에는 훌륭한 스승과 선배들을 만나 나름대로 좋은 면도 있었으나 여러 가지 제약과 작품의 한계도 많았다”면서 “이런 분위기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맞지 않아 자꾸 반발했더니 미운털이 박히고 나중에는 싸움닭이 되더라”며 웃었다. 다시 현재 진행형인 ‘어머니’로 화제를 돌렸다. 환경부 장관과 맞바꾼 연극이기 때문이다. 하여 당시 상황을 물었다. “러시아 공연 1주일 전에 장관 제의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이전에 체결된 국가 간 약속을 도저히 취소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공연을 강행했지요. 평생 잊지 못할 무대였습니다. 관객들이 15분 동안 ‘마마’를 외치며 기립 박수를 쳤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무대에 올라온 기업인들로부터 액수도 모른 채 격려금을 받았지요. 단원들에게 나눠 주고 지방 공연을 하지 못해 위약금으로 썼는데 그게 뇌물이라고 하더군요. 장관직 사퇴 후 너무 억울해서 열흘 동안 잠도 못 자고 울었습니다.” 마음을 달래기 위해 미국 그랜드캐니언으로 친구와 함께 여행을 다녔다. 얼마 후 귀국한 그는 임영웅 선생한테 위로의 전화를 받고 다시 연극무대로 돌아오게 된다. 돌이켜 보면 ‘어머니’로 시련을 겪었지만 오히려 ‘어머니’로 빨리 제자리를 다시 찾을 수 있었다. 그는 동료 배우들이 TV드라마로 넘어갈 때에도 오로지 연극무대를 지켰다. 하지만 먹고살기는 여전히 빡빡했다. 게다가 남편이 사업에 실패한 후 많은 빚을 졌다. 때마침 라디오 진행 섭외가 들어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1989년부터 MBC ‘여성시대’를 진행하게 됐다. 이때 다양한 청취자들의 사연을 접하면서 사회에 관심을 갖게 됐다. 여성과 환경문제 등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칼럼과 강연 등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조금씩 뱉어 냈다. “연극은 관객과 같이 호흡하는 현장 예술입니다. 배우와 관객이 서로 시선을 마주하고 호흡하는 것은 굉장한 일입니다. 또 스크린이나 TV드라마와 달리 관객으로부터 치유받을 때도 많지요. 연극이 열악한 환경이긴 하지만 그걸 다 초월해 연극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는 연극 인생을 다시 회고하면서 ‘담배 피는 여자’, ‘그 여자’, ‘셜리 발렌타인’ 등 모노드라마를 잊지 못한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선 지금 자신의 인생 모노드라마를 잠시 떠올리는 것 같다. 앞으로의 인생 모노드라마는 어떻게 이어 나갈까. “대사를 외울 수 있을 때까지 연극을 하지 않겠느냐. 연극을 할 때마다 늘 새로운 관객을 만나는 일이 매우 즐겁다”고 말하고, 웃으면서 그런 관객을 위해 연습하러 가야 한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임기자 km@seoul.co.kr ■연극인 손숙은 1944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졸업 후 부산여중 시절 서울로 왔다. 풍문여중과 풍문여고를 졸업했다. 고려대 사학과 1학년 때 개교 60주년 기념 연극 ‘삼각모자’의 주인공으로 데뷔했다. 1969년 극단 산울림 창단 멤버로 참여했고 1971년 국립극단에 입단, 고 이해랑 선생 등 당대 최고의 연출가들과 작품을 함께 했다. 1989년 MBC ‘여성시대’를 시작으로 20여년 동안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1999년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를 맡았고 환경부 장관을 지냈다. 이 밖에 ‘아름다운 가게’ 공동대표(2002) 등 여러 사회단체에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활화산’(1975), ‘객사’(1979), ‘어머니’(1999)로 백상예술대상 여자연기상을 세 차례 수상했다. 이 밖에 대한민국연극제 여우주연상(1986), 이해랑연극상(1997), 은관문화훈장(2012) 등을 받았다. 저서로는 ‘울며 웃으며 함께 살기’, ‘손숙이 만난 사람’, ‘여성수첩’, ‘섬마을 소년 김대중 전 대통령’ 등이 있다.
  • [명사가 걸어온 길] 2. 의술로 인술 실천하는 김희수 건양대 총장 (상)

    [명사가 걸어온 길] 2. 의술로 인술 실천하는 김희수 건양대 총장 (상)

    1950년 세브란스 의대(현 연세대 의대)를 졸업한 뒤 자그마한 안과 개원의로 시작해 예순셋에 건양대학교를 설립하고, 일흔셋에 800병상 규모의 건양대 병원을 일군 사람. 3년 대학 총장 임기를 두 번이나 채우고도 모자라 임기를 4년으로 늘려 12년째 총장직을 지키는 사람. 사람들은 그를 중국의 덩샤오핑(鄧小平)에 견줘 결코 포기하거나 쓰러지지 않는다는 뜻에서 ‘부도옹’(不倒翁)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는 한사코 손사래를 쳤다. “부도옹은 무슨…. 난 그처럼 대단하지 않아. 그는 천하의 경륜을 논했지만 난 고작 대학 하나잖아. 그렇지만 듣고보니 그럴 법도 하네” 김희수. 올해 여든다섯이지만 “꿈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그에게서 물리적인 나이를 읽기란 쉽지 않다. 주변에서는 이런 그를 두고 “너무 오래 거머쥐고 있는 게 아니냐”거나 “이제는 자리 내려놓을 때도 됐다”고들 말하기도 하지만 그는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다 이유가 있어. 나는 지금도 더 일하고 싶어. 열정도, 건강도 문제가 없거든. 나도 알지. 내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걸. 세월 거꾸로 사는 사람 없잖우. 그래서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해. ‘그러니 내게 시간을 조금만 더 달라고….’” 김 총장에게 스스로의 삶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정색하고 말문을 열었다. “뭐 내세울 게 있어야지. 그렇지만 내가 헤쳐온 삶이 젊은이들에게 도전의 의미를 되새기거나 용기를 부추기는 자극은 될거야. 결코 쉬운 삶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한 번도 내가 이뤄야 할 것들을 잊어본 적이 없거든. 뭔가 성취하려는 젊은이들에게 그걸 말하고 싶어. 목표를 갖고 살라는 거지” 그가 삶의 지표로 삼아온 원칙 같은 게 궁금했다. “좌우명이라는 게 너무 평범해서 실망할거야. 살아온 날들을 돌이켜보면 ‘기본에 충실하자’는 말처럼 함축적으로 내 삶을 표현한 말이 없어. ‘정직’은 사람의 기본이고, ‘노력’은 성공의 기본이며, ‘치료’는 병원, ‘교육’은 학교의 기본이잖우. 이런 기본만 지키면 뭐든 다 돼. 공자도 그랬잖아 ‘군자무본 본립이도생’(君子務本 本立而道生·군자의 본연은 근본을 닦는 것이며, 근본이 바로 서야 도가 생긴다)이라고.”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그의 성장기는 그 시절의 대부분이 그랬듯 가난과의 동거였다. “가난했지. 아버지가 농사를 지으셨는데, 30∼40마지기 정도였으니 중농쯤 되나 그랬어. 농사뿐이 아니야. 소, 돼지는 물론 양봉에 누에까지 쳤어. 한 방의 반은 누에 잠틀이었는데, 까만 누에 똥 속에서 먹고 자고 했지, 뭐. 내 형제가 3남 4녀였는데, 형들 꼼짝 못하는 엄한 아버지 밑에서도 막내라 사랑 좀 받고 자랐어요.” 그렇지만 성장기 그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그는 주저없이 형을 꼽았다. “아, 나완 나이가 열여덟살이나 차이가 나니 형이 아니라 아버지 같았어. 나만 그런 게 아니라 그땐 다 그랬지. 가난하지, 애들은 생기는 족족 많이 났지, 그래서 젖먹이 동생을 손 위 형이나 누나가 맡아서들 키우던 그런 시절이었잖우.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살아남았나 싶지만, 그때는 다들 그러니 그게 궁핍하다거나 이상하다고 여기지도 않고 살았지. 그러려니 하고.” 평생 애써 일군 부를 악다귀처럼 그러쥐지 않고 대학 설립에 쏟아부은 데서 보듯 그는 청년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다. 1950년 연세대 의대를 졸업한 뒤 도미, 뉴욕 프랜시스 병원에서 인턴 과정을 마친 그는 일리노이주립대 안과대학원과 시카고 안과병원에서 수련을 마치고 1959년에 귀국했다. 전쟁으로 피폐하고 가난한 나라의 유학생이 미국에서 겪은 경험은 충격이었다. 전쟁과 분단으로 극심한 생활고를 겪고 살던 때, 그의 눈에 비친 미국이라는 나라는 온갖 물산이 넘치고, 큰 집에 차량이 즐비한 도로, 자유분방한 사람들의 표정이 어우러진 유토피아였다. 그런 미국을 보면서 도미 후 처음 형님한테 쓴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하느님이 계신데, 세상이 왜 이렇게 불공평한가.’ 그런 미국을 보면서 그가 가슴에 새긴 것은 ‘잘사는 나라, 건강한 국민’이었다. 이미 결혼해 고국에 처자식을 두고 홀로 이국으로 떠나온 그에게 ‘남다른 노력’은 숙명이었다. 그런 노력을 인정받아 대학원을 학비 부담없이 다닐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육영 의지를 키우는 자극제가 됐다. “생각해 봐. 전쟁통에 피죽 먹기도 어려운 때잖어. 우리 마누라가 조그만 미장원을 해서 번 돈으로 유학와서 공부하는 내가 한눈을 팔 수가 없지. 그땐 공부밖에 할 게 없었어.” 이로부터 3년 뒤인 1962년 서울에서 그의 꿈의 모태인 김안과를 개원했다. 당시 미국의 선진 의료를 체험한 그는 국내에서 안과 분야의 독보적 의사로 인정받았고, 돈도 많이 벌었다. “돈 엄청 벌었지. 진료비를 전부 현금으로 받던 시절인데, 병원이 자리를 잡은 뒤에는 하루 3000명까지 환자를 봤어. 일과를 마치고 나면 자루에 가득한 돈을 셀 수가 없는거야. 그래서 은행원에게 정산을 맡기기도 했는데, 매일 500만원씩 그러모았지. 요샛돈으로 치면 그게 얼마야.” 그러나 그는 결코 돈의 미혹에 빠지지 않았다. 그렇게 벌었지만 많은 돈을 번다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성공과는 달랐다. 가장 기억에 남는 성공의 기억을 묻자 뜻밖에 그는 ‘치료의 기쁨’을 말했다. “난 돈보다 내가 치료한 환자들이 감사하다고 인사할 때가 제일 기뻤고, 그걸 성공이라고 믿었어. 어떤 이는 두고 두고 내게 인사를 오기도 해. 의사로서 그 이상의 성공이란 게 있을 수 없잖아요.” 그는 돈을 삶의 목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일제 때 의학을 공부해 공의로 일한 큰형님의 영향을 받아 의사가 된 그가 말하는 바람직한 의사상은 ‘질병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의사’였다. “요새 어떤 병원은 전염력이 강한 바이러스성 안질환자가 오면 치료 못 한다며 다른 병원으로 보낸대. 그게 뭐야. 그건 의사가 할 일이 아니지. 내 큰형님이 공의로 일할 땐 치료비가 없어 돈 대신 달걀이나 참깨를 가져온 사람도 많았는데, 한번도 형님이 그걸 타박하지 않아. 그걸 보며 나도 의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 그렇게 일한 그가 많은 돈을 번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주변에서는 그런 그를 주시했다. ‘저 많은 돈을 어떻게 쓸까’하는 호사가적 관심이었다. 이 무렵, 그는 사람들이 놀랄만 한 결정을 한다. 그가 오랜 고민 끝에 찾은 부의 용처는 육영사업이었다. 1983년 그의 육영의지가 얻은 첫 결실은 고향인 충남 논산에 양촌고등학교를 설립한 것이었다. 작다면 작은 그 실천이 30여년 뒤 거대한 교육사업으로 결실을 맺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육영이라는 게 이를테면 미래의 인재를 키우는 일인데, 그보다 보람 있는 일이 어딨겠어. 고향 유지들이 찾아와 면리에 하나뿐인 중학교가 운영난이 심각하니 인수해달라는 거야. 고민 끝에 부채를 떠안고 1억 2000만원에 인수했지. 어쩌겠어. 애들 공부는 시켜야잖어. 그게 지금의 건양중·고등학교야.” 그렇다고 그의 시선이 우뚝하고 걸출한 인재만 바라보는 건 아니다. 딱히 분별하자면 그는 열정이 있는 청년을 좋아한다. 자신이 그런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지난해 그가 펴낸 자서전 제목도 ‘여든의 청년이 스무살 청년에게’다. 여기에는 암울한 현실 속에서 힘겨워하는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그의 고언이 담겨있다. “나도 하는데, 나보다 훨씬 젊고, 힘세고, 시간 많은 너희가 왜 못하겠는가. 해보지 않으면 잘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포기만 하지 않으면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너는 분명 할 수 있다.” 이런 그를 두고 이어령 교수도 “그 분이 평소 얼마나 젊은이들을 사랑하는지를 알면 그 분을 다시 보게 된다”고 말했다. 사실, 육영사업이라는 게 돈욕심으로는 되는 일이 아니다. 잠깐은 몰라도 오래 가지 못한다. 그런 육영사업에 그가 생애를 투자한 것은 기본적으로 교육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고, 젊은이들에게 꼭 주고 싶은 뭔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해가 1986년이었지. 당시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이던 신극범 박사가 하루는 고향에 전문대학 하나 세워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 처음엔 망설였지. 지금도 벅찬데 대학이라니….” 고민이 깊었다. 주변 의견도 찬반으로 갈렸다. 나이도 있고, 병원 경영에다 중고등학교도 만만찮은 일인데, 한 술 더 떠 당시 대학가는 온통 민주화 바람으로 학교마다 재단들이 곤욕을 치를 때였다. 당연히 반대 목소리가 높았다. 발 들여놓으면 뼈도 못 추린다는 거였다. 그러나 찬성 쪽도 적지 않았다. 어차피 육영사업이라는 게 장기적인 안목으로 봐야 하고, 지역사회를 보더라도 중고등학교를 대학으로 확장하는 게 낫다는 것이었다. <계속> 심재억 전문기자 jeshim@seoul.co.kr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 한국 ‘근대화 DNA’ 16세기부터 있었다

    한국 ‘근대화 DNA’ 16세기부터 있었다

    2002년 한국 대학들의 해외 석학 초빙 열기를 전하는 한 일간지 기사는 이렇다. 대학과 학자 이름, 그리고 그 학자를 왜 영입했는지를 설명해주는 학문적 업적이 쭉쭉 나열된다. 그런데 도쿄대에서 성균관대로 자리를 옮기는 미야지마 히로시(65) 교수를 두고는 한마디 토를 달아뒀다. “일본의 한국 지배가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주장하는 식민지근대화론자라는 점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고. 식민지근대화론자, 그것도 한국인도 아니고 일본인에게 이런 명칭을 붙인다는 것은 거의 ‘종북좌파’ 수준의 낙인이다. 그런데 2010년 한일병합 100년을 맞아 병합 무효를 선언했던 한일 양국 진보적 지식인들의 ‘한일 지식인 공동선언’에서도 미야지마 히로시 교수의 이름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무엇이 진실일까. ‘미야지마 히로시, 나의 한국사 공부’(너머북스 펴냄)는 일본인으로서 왜 한국사를 공부하게 됐는지, 식민지근대화론자라는 오해는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 그 오해가 왜 잘못됐는지, 자신의 소농(小農)사회론이 어떻게 생겨났고 궁극적으로 서구 중심의 일직선상에 놓인 근대발전사관을 어떻게 뒤엎을 수 있는지 등을 본인의 입으로 차분하게 설명해둔 책이다. 저자의 기본적인 관점은 이것이다. 19세기 이후 조선은 “정치적으로 체제변혁에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는 거대한 변혁이 순조롭게 실시됐을 뿐 아니라 그 이후 경제적, 사회적 변화도 아주 급속하게 이뤄졌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20세기 들어 근대화를 꿈꾸지 않은 나라는 없다. 그런데 왜 다들 못했을까. 이왕 식민지배 받을 거면 일제처럼 훌륭한 지배자를 만났어야 하는데 하필이면 귀축(鬼蓄) 같은 영미(英米)놈들 치하에 살았기 때문에? 아니면 어차피 군부독재할 거였다면 박정희처럼 경제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위대한 독재자를 만났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해서? 아니다.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축적되어온 한국인들의 장기적 경험이다. 그러니까 서구적 근대가 오기 전에 이미 한국 내부에 근대적인 요소가 무르익어 있었고, 그러기에 식민지에다 분단과 전쟁과 독재까지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화라는 과제를 그 어느 누구보다 빨리 흡수해서 성취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일제 덕도, 박정희 덕도 아니라는 얘기다. 주의할 부분은 저자에게 근대는 ‘평가’보다 ‘서술’에 가깝다는 점이다. 역사를 쭉 살펴보니 사실이 그러하다는 것일 뿐, 근대를 빨리 잉태하고 있었으니 뛰어나다거나 장하다거나 훌륭하다는 평가는 아니다. 그래서 식민지근대화론과 내재적발전론 양쪽 다 비판한다. 아니 이 논쟁뿐 아니라 뉴라이트, 역사교과서 개편, 우익 정권의 역사 미화 논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박정희 정권 평가 문제 같은 국내적 이슈뿐 아니라 오늘날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우경화 문제까지 짚어보려면 빼놓을 수 없는 책이다. 토지귀족의 부재, 관료제와 과거제, 미약한 신분제 등 저자 특유의 소농사회론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어느 정도 알려졌으니, 이번 책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성리학의 창시자 주희에 대한 재평가다. 주희의 이미지는 오늘날 그럭저럭이다. 대사상가로 후대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으니 무시하긴 그런데, 고리타분하고 교조적인 인상이 짙다. 심지어는 불교와 도교에서 빌려온 형이상학적 개념을 쓸데없이 가져다붙이는 바람에 고졸한 맛을 풍기던 고대 유학을 다 망쳐놨다는 험담까지 나온다. 저자는 아직 연구 중이라면서도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주희에 대한 기존 연구가 “주희의 사상 그 자체의 연구라기보다 주자학에 관한 연구, 바꿔 말하면 주희 이후에 형성된 장대한 주자학 사상체계를 통해 주희의 사상을 파악하고 분석”하는데 치우쳤다는 것이다. 이기론 논쟁도 싹 무시한다. “주자학의 일부에 불과한 이기론이 유럽적인 철학의 방법에 친근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후대에 들어 지나치게 크게 부각됐다는 것이다. 저자는 주희 사상의 핵심으로 가례와 사창(社倉)을 지목해뒀다. 알려졌다시피 주희가 살았던 남송시대는 나라는 남쪽으로 밀려났지만, 이로 인한 대규모 강남개발로 물질적인 부유함은 넘쳐흘렀던 시대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질서를 어떻게 유지할 것이냐가 주희의 주된 관심사였다. 주희는 가례로 한 사회의 최소단위인 가정을 바로 세우고, 사창으로 사회의 공공성을 확보하려 들었다. 그러니까 “공동체에 의거하지 않으면서 사회를 어떻게 구성할 수 있는가”라는 게 주희가 맞닥뜨린 시대문제였고, 이건 다름 아니라 오늘날 근대 사회에서 흔히 발견되는 문제의식과 똑같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주희는 12세기에 살았던 근대인인 셈이다. 그래서 한국사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16세기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지론이다. 19세기 말 개항 이후의 서구적 근대만 중요한 게 아니라 12세기 중국에서 발생한 주자학을 깊숙이 받아들인 16세기 이후 조선식 근대, 그리고 이 조선식 근대가 개항 이후 맞닥뜨린 일제식 근대, 미국식 근대, 소련식 근대와 어떻게 부딪히며 섞여들어갔는지를 규명하는게 오늘날 한국사 이해의 핫 포인트라는 것이다. 장기 16세기라 부를 수 있는 지점이다. 이 책은 올해로 정년을 맞은 저자의 마무리 작업 같은 성격이다. 끝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소농사회론의 관점에서 일본 우경화 문제를 다루는 책을, 족보에 대한 그간의 연구성과를 한데 모은 책을 곧 낼 예정이다. 일본에서도 조선사 통사와 소농사회론에 대한 책을 낼 계획이다. 2만 3000원. 조태성 기자 cho1904@seoul.co.kr
  • “남북관계 50년전보다 후퇴… 만날 일 있으면 무조건 만나야”

    “남북관계 50년전보다 후퇴… 만날 일 있으면 무조건 만나야”

    “1961년 사상계 3월호에 ‘판문점’을 냈으니 벌써 50년이 넘었다. 그때하고 비교하면 남북관계가 더 나빠졌다. 50년 전에는 판문점에서 남한의 기자가 이북의 여기자와 남북 체제를 비교하고, 자유에 대해 토론할 수 있었다. 지금은 토론할 기회도 없고, 지적인 대화를 하기에는 북한의 체제가 안 된다.” 분단문학의 대표작이자 이호철에게 각종 문학상을 안겨준 ‘판문점’의 주인공 진수는 ‘30대의 이호철’ 그 자신이었다고 ‘판문점2’에서 커밍아웃했다. 이호철은 1960년 9월 정부 공보과의 최규정에게 애걸복걸해 가짜 통신원 자격을 얻어 판문점에 가고, 거기서 만난 예쁘고 당당한 북한 여기자와의 대화를 기초로 소설을 썼다. 당초 이호철이 판문점에 간 목적은 소설이 아니었다. 함경남도 원산 출신인 이호철은 1951년 1·4후퇴 때 혈혈단신으로 월남했다. 그의 나이 19살이었다. 북의 가족들에게 자신이 살아 있음을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판문점2’에서 처음 밝혔듯이 판문점에 가자마자 여기자에게 자신의 가족 중 일본 히도쓰바시(一敎) 상과대를 나온 이종사촌형 남인호가 북한 국가기획위원회 부위원장이고, 외육촌형 박용국이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통보한 지 불과 몇 분 만에 북한의 군인이 다가와 그의 사진을 찍어 갔으니, 이호철은 자신의 뜻을 이뤘다고 생각하고 돌아왔다.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위험천만했었는지 ‘판문점2’에서 이호철은 “옛날 70년대와 80년대에 내가 그 뭣이냐, ‘재야 민주화운동’인가 하는 것으로 두 번에 걸쳐 ‘보안사’다, 지금은 ‘기무사’지만, ‘중정’이다, 끌려가서 조사를 받을 때도 나는 나대로 그 옛날의 그때 그 일까지 수사관들이 조사 조목으로 꺼낼까 봐 마음속으로는 조마조마하고(중략)”(17쪽)라고 써 놓았다. 이호철은 1961년 5월 9일 두 번째로 판문점에 갔다. 이때는 그의 소설 ‘판문점’이 소문이 나서 소련 이즈베스차 신문의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었다. 정중하게 사양했는데 그렇지 않았더라면 큰 사단이 날 뻔했다. “만에 하나 그때 그 제안을 진수가 받아들여서 기사가 모스크바의 이즈베스차 신문에 크게 게재되었더라면, 불과 1주일 뒤 5·16이 일어났을 때에는 어찌 됐을 것인가.(중략) 그냥 무사히 넘어가지는 못했을 터였다.(중략) 일본에서 돌아와 ‘민족일보’를 창간했다가 북쪽 간첩으로 몰려서 사형에 처해지기까지 했던 조용수 사장 꼴이 날 수도 있지 않았을까”(22~23쪽). ‘이호철은 “1961년에 소설을 쓸 때는 판문점이 1988년쯤에는 박물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 그건 27~28년쯤 되면 통일이 될 것이라고 믿었지. 요즘 분위기면 2050년이나 돼야 통일이 되지 않을까 싶다”고 상심한 얼굴로 말했다. “내 나이 14살에 해방이 됐다. 그리고 분단이 됐다. 나는 14살 이전에 부산에서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기차를 타고 갔다 온 기억과 중국의 장춘과 심양까지 돌아다닌 기억이 생생하다. 짧게는 1000년 고려부터 함께 살았던 민족이 이렇게 갈라진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는 북한 동포들이 식량난으로 겪는 고통을 아프리카 튀니지나 케냐 사람들의 삶을 TV 화면에서 보듯이 무심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지 반문한다. 5000년을 유구하게 같이 살아온 동족으로, 떨어져 산 지 겨우 68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호철은 “‘국가보안법’이니, ‘반공법’이니, 심지어 우리 대한민국의 가장 기본법인 ‘헌법’ 테두리에서까지도 일단 활딱 벗어나자”(67쪽)고 주장한다. 방법은? 남한에서 엄청 돈을 벌어들인 숱한 월남인들이 자신들의 재산을 모두 싸들고 가 굶어 죽기 직전의 고향 사람들에게 왕창 풀어 주는 것이다. 이호철은 “지난 대통령 선거 때 박근혜 당선인을 찍지 않았고, 그의 아버지에게 큰 고초도 받았지만, 앞으로 기대는 크게 하고 있다. 남북도 만날 일이 있으면 무조건 만나야 한다. 남북이 자꾸 한솥밥을 먹어야 한다. 남북이 왔다 갔다 하고, 서로 익숙해져서 물이 차오르면 넘치듯이 통일이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월남한 실향민의 수가 8만명에서 7만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실향민들이 모두 돌아가시기 전에 판문점이 박물관이 되고, 고어로 소멸하는 날이 와야 할 텐데…. 글 사진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사설] 동북아 안정, 한·미·중 전략공조 성패에 달렸다

    우리와 미국·중국·일본 등 주변국들이 모두 지도체제를 정비한 상황에서 맞은 올해는 오랜 동면(冬眠) 상태에 놓인 남북관계를 중심으로 한반도 정세에 적지 않은 변화가 예상된다. 특히 남북 관계에 있어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내놓을 일성(一聲)이 향후 한반도 정세를 가늠할 방향타가 된다는 점에서 주변국 모두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북한을 방문한 빌 리처드슨 전 미국 뉴멕시코 주지사가 “박 당선인의 발언에 북한이 고무돼 있다”고 밝힌 것을 보면 북한 역시 새 정부 출범에 따른 남북관계의 진전에 사뭇 기대를 걸고 있는 듯하다. 박 당선인이 남북 관계의 첫 단추를 어떻게 꿰느냐가 그만큼 중요해진 셈이다. 그러나 한반도 문제는 분단 체제의 연원과 동북아의 지정학적 역학 관계로 인해 이미 남북 두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과 중국의 이해득실에 크게 좌우되는 현실을 간과할 수 없다. 북한의 핵·미사일이 북·미 관계와 북·중 관계를 넘어 미·중 관계에까지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받는 상황임을 감안하면 우리와 미국, 중국의 다각적 공조가 한반도 문제를 푸는 열쇠라고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박 당선인이 대선 전 대외정책의 핵심전략 중 하나로 내세운 한·미·중 3자 전략대화는 안정적인 정세를 바탕으로 핵·미사일 해법과 남북 간 교류 확대를 함께 도모할 최적의 전략기조로 여겨진다. 갈수록 거칠어지는 미·중의 아시아 패권 경쟁과 중·일 간 영토 분쟁 및 군사적 긴장 속에서 한반도 문제가 엉뚱한 방향으로 표류하지 않도록 할 방파제를 구축하는 차원에서도 한·미·중 3각 대화의 틀을 마련하는 일은 긴요하다. 관건은 중국이다. 그제 중국 정부 특사 자격으로 박 당선인을 예방한 장즈쥔 중국 외교부 상무부부장은 시진핑 공산당 총서기의 친서를 전달하며 한·중 관계의 새로운 발전을 위한 노력을 다짐했다. 그러나 대북 정책에 있어서 중국이 얼마나 한국 정부나 한·미 공조에 보조를 맞출 것인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당장 지난달 북 로켓 발사에 따른 유엔 안보리 제재 논의에 임하는 중국의 소극적인 모습만 해도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새 정부 출범까지 남은 40여일간 박 당선인은 정부 조직개편과 조각(組閣)을 통해 향후 대외정책의 뼈대와 기조·운용 방향을 정립하게 된다. 중차대한 시기다. 과거 노무현 정부는 집권 3년째인 2005년 ‘동북아 균형자’를 자임하며 독자 외교를 추진한 바 있다. 그러나 주변국의 역학관계를 소홀히 한 설익은 접근 탓에 한·미 동맹에 부담만 안겼을 뿐 외교적 실익을 거두지 못했다. 미·중을 같은 거리에 두는 게 아니라 한·미 공조의 틀로 중국을 한 발짝 더 당겨 실질적인 3각 공조를 이루는 방향이 돼야 한다. 세심한 실천구상을 짜기 바란다.
  • [열린세상] 동북아 정치 5년 그리고 햇볕의 추억/최종건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열린세상] 동북아 정치 5년 그리고 햇볕의 추억/최종건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춥다. 추워도 너무 춥다. 햇볕 가득한 춘삼월이 그리운 한파다. 이 추위에 우리는 18대 대통령을 선출하였다. 차기 정부가 책임질 5년은 21세기 대한민국 명운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시기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어느 때보다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 국제정치의 흐름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한반도의 운명은 강대국 국제정치의 비극으로부터 자유로운 때가 없었다. 한 세기 전 부상국 일본은 중국과 러시아와의 전쟁을 통해 조선을 식민화했고, 이어 우리는 태평양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그 뒤 일본의 패망으로 해방을 맞이했지만, 남북 분단에 이르게 됐다. 북한의 남침은 한반도의 냉전체제를 더욱 공고화시켰다. 따라서 냉전기간 우리는 한·미 동맹체제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단언하면, 근 한 세기 동안 강대국 정치는 식민과 해방 그리고 분단과 같은 한반도의 정치적 운명을 결정해 주었으며, 우리는 이를 소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고 우리는 자유무역과 냉전체제라는 국제환경을 활용하여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이룩하였다. 향후 동북아의 5년은 강대국 국제정치가 다시금 극단으로 치닫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갖게 한다. 미국은 외교의 전략적 중심축을 아시아로 이동하였고, 중국 견제와 자국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동북아를 활용할 것이다. 동맹국의 방위력 강화라는 명목으로 차기 정부에 고가의 무기류 판매를 늘리려고 노력할 것이다. 미국의 귀환을 환영하는 일본은 중국의 부상과 불량국가 북한을 빌미로 보통국가화를 더욱 과격하게 밀어붙일 것이다. 이는 돌아온 자민당 정권이 일본의 ‘신통합방위전략’을 통해 전방위 방위력 증강과 평화헌법을 개정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다. 중국은 부상국의 경제적 지위에 맞는 국방력과 지역정책을 통해 동북아에서 세력 확대를 도모할 것이다. 일본의 보통국가화라는 불편한 진실, 미국과 중국 간의 패권과 부상권력이 빚어내는 세력 전이의 최전방에 놓이게 될 대한민국의 동북아 정치 환경은 험난할 뿐이다. 더욱이 김정은의 북한은 쉬운 대화 상대도, 억지 상대도 아니다. 그야말로 향후 5년은 차기 정부에 매우 고단한 시기가 될 것이다. 이러한 국제정치적 한파는 다시금 동북아 안정의 핵심 축인 남북관계의 화해와 안정을 더욱 절실하게 해준다. 일각에선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의 햇볕정책으로 8조 3000억원을 북한에 퍼주었다고들 한다. 그리고 그 대가로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이는 어불성설이다. 8조 3000억원은 김영삼 정부 때 계약한 경수로 건설비용 약 1조 4000억원(17%), 남북경제협력사업 약 3조 6000억원(43%), 그리고 인도적 지원 약 2조 3000억원(27%)이다. 이로 인해 10년 동안 두 번의 정상회담과 100여 차례의 남북회담을 통해 우리가 주도하는 한반도 평화 정착의 비전과 행동계획을 수립할 수 있었다. 또한 금강산 관광사업과 개성공단 구축을 통해 남북경협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더욱이 2만명의 이산가족이 상봉하고, 44만명이 남북을 왕래할 수 있었다. 외교적으로 6자회담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즉, 우리가 한반도 환경을 평화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유리한 환경을 조성할 수 있었다. 향후 동북아 정치가 다시 강대국 정치로 치닫게 될 경우, 한반도의 운명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결정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강대국 국제정치가 던져주는 운명을 일방적으로 소비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고 주도해 나갈 것인가? 대한민국 국익의 중요한 축이 남북관계의 안정화에 있다고 동의한다면, 우리가 주도하는 한반도의 자생적 평화 노력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지난 5년 남북관계의 파국으로 더욱 확대되고 있는, 미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이 빚어낸 강대국 국제정치가 얼마나 대한민국의 국익 실현에 공헌했는지 냉철히 평가해 볼 필요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파 속에서 햇볕의 추억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일지 모른다. 차기 정부의 전략적 상상력을 기대해 본다.
  • [명사가 걸어온 길] 1.바람의 시인, 시대를 말하다(상) 고은

    [명사가 걸어온 길] 1.바람의 시인, 시대를 말하다(상) 고은

    “프랑코가 곧 죽을 모양이다. 사르트르가 그자를 ‘라틴의 돼지’라고 부르고 그놈이 어서 죽기만 기다리노라고 말한 것이 통쾌하다. 거리의 사람들. 독재를 견디어내는 이 인내의 일상 체념과 방관의 일상이야말로 독재의 온상이다. 의병의 역사, 봉기의 역사가 있었으나 그것의 분출 자체가 타자 의존적인 경우도 적지 않다. 저항보다 순응과 피동의 역사가 더 길다. 혁명, 영구혁명은 관념인가. 창조는 어떤 경우도 혁명적이지 않으면 창조가 아니다.” 1975년 11월 15일 고은(당시 42세)은 청소년기 이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써온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독재를 견디어내는 이 인내의 일상 체념과 방관의 일상이야말로 독재의 온상이다’는 대목에서는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1974년 11월 18일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대표로서 ‘문학인 101선언’을 주도했던 침묵을 깨야 한다는 결단이 느껴진다. ‘창조는 어떤 경우도 혁명적이지 않으면 창조가 아니다’에는 문학이 현실과 동떨어지면 안 된다는 철학이 강하게 배어 있다. 함박눈이 쏟아진 지난 연말 경기도 안성 자택에서 만난 고은은 책으로 벽을 쌓아 지은 고분 같은 서재에서 인터뷰를 시작했다. 한쪽 창으로 햇빛이 쏟아져 서재는 어두운 듯하면서 환했다. 미닫이문을 터서 만든 10평 안팎의 장방형 서재는 시인에게 어머니 자궁 같은 안온함을 준다고 했다. 짙은 감색 셔츠에 같은 색 실크 머플러를 목에 두른 고은은 고요했다. 전설처럼 떠돌던 술에 전 낭만의 시인이나, 열정의 시인, 독재에 저항하는 시인의 모습은 사라지고, 팔순의 성찰하는 고은이 보였다. 어쩌면 이것이 본래의 고은일지도 모르겠다. 전쟁은 고흐를 열망한 내 소년기를 부쉈다 ‘한국의 고흐’가 되고 싶었던 17살 예술지상주의자였던 소년의 운명을 맨처음 뒤틀어 놓은 것은 한국전쟁이었다. 외삼촌 집에서 본 고흐의 화보집을 보며 꿈을 키우던 고은에게 한국전쟁은 감당할 수 없는 참극이었다. “좌익이 점령했을 때는 우익이 죽었고, 우익이 돌아오자 좌익이 죽었죠. 내 고향에서만도 이 죽음의 재앙이 세 번 되풀이됐다. 군인들이 와 시체를 파내서 옮기라고 했는데, 그 작업을 하고 나면 보름 동안 씻고 또 씻어도 시체 냄새가 몸에서 없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인간 하면 서로 죽이는 행위, 고향 하면 핏줄끼리도 이데올로기 때문에 싸우는 그런 것만 연상됐다. 죽음에 대해 아무 준비도 없던 10대 어린애가 그것을 만난 것이다. 소년 자체가 부서져버렸다.” 고아의 의식이 투철하다는 고은은 한국전쟁으로 조상과 끈이 끊겼다고 생각했다. 고향도 무섭고, 핏줄도 무서웠다. 극한 상황에서 인간이 얼마나 피에 주려 있는가를 본 소년의 정신은 온전해지지 못했다. 정신착란으로 집을 뛰쳐나갔고, 자살도 여러 차례 시도했다. 전쟁통에 군산고를 중퇴했는데, 전쟁 중에 그는 모교인 군산북중학교 국어교사를 맡기도 했다. 하지만 견딜 수 없는 혐오들이 밀려오던 터에 1952년 출가를 했다. 1957년에 전등사 주지를 지냈고, 1958년 ‘불교신문’을 창간해 주필을 맡았던 그는 1962년 환속했다. 등단은 1958년, 26살 때다. 시인협회 조지훈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폐결핵’이 실렸다. 현대시인이 100명 정도에 불과하던 시절이라 그는 현대문학 2세대 정도되는데도 1세대로 평가받는다고 했다. 김동리, 오상순, 김수영 등과 어울리며 살았다. 유미주의자였던 그의 예술관과 삶의 방식을 전복시킨 것은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의 분신자살이었다. 잊어버린 과거가 된 전태일의 죽음이 술에 절어 나른했던 시인의 삶을 바꿔 놓았다. “지금은 서울 무교동에 현란한 고층건물들이 서 있는데, 당시에는 바라크였다. 낮은 건물뿐이었다. 통행금지 시절이었는데, 술을 마시고 돌아갈 수가 없으니 주모에게 사정하고 아첨해서 술집 탁자 같은 데서 자곤 했다. 그날도 아마 그런 날이었다. 먼동이 틀 무렵인데 신문 쪼가리들이 바람에 굴러다니더라. 묵은 신문이었는데, 사회면과 사설면에 ‘노동자 분신자살!’이라고 써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죽음이 워낙 육친화되어 있다 보니 죽음이라는 말에 눈이 번쩍 떠지더라. 어, 이것 봐라! 일종의 죽음의 비교라고 할까. 그런데 이런 죽음이 있었던 것이다. 풀빵 10개로 점심을 때우고,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우이동 판잣집까지 버스비가 없어 한밤중까지 걸어가고, 그런 인간의 삶이 나오더라. 가슴이 서늘해졌다. 이게 뭔가. 현실을 깨달았다. 거대한 착취와 비인간화, 허리도 제대로 펼 수 없는 다락방 지옥의 밀실 같은 곳에서 소녀들이 가혹한 노동을 하고, 폐결핵으로 피를 토하고.” 민주화 전위? 뒤늦게, 엉거주춤 서 있었다 현실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던 그를 두고 사람들이 ‘초개’라고 했는데, 그는 밀물처럼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에 각성이 됐다.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1970년대 봉제공장의 노동현실을 설명하던 그는 다시 평온한 얼굴로 돌아와 “사람들은 내가 민주화 운동의 전위에 섰다고 하는데, 사실 뒤늦게 뒤꽁댕이를 따라다니면서 한 것이다. 뒤늦게 엉거주춤하게 거기에 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때 전태일의 죽음에 나만 충격받은 것이 아니다. 서울대 법대생들도 다 깨쳤다. 나중에 감옥에서 만난 조영래, 장기표, 걔네들도 다 깨쳤더라. 나는 지식인이랄 것도 없고 예술인이었는데 전태일의 죽음의 폭풍이 나까지 몰아세웠다. 그래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우리 작가들도 뭔가 해야겠다. 그때 자기 몸을 던지는 행복이 생겼다.” 동료 작가들은 물론 선후배 작가들까지 뭉치도록 앞장서서 나갔다. ‘나를 빼고 몰래 하면 안 된다’는 작가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가 설득하면 다소 보수적인 현대문학 1세대 선배들도 동참했단다. 1974년 자유실천문인협회 대표간사가 된 배경이다. 당시 자유실천문인협회의 주장은 5가지였다. 구속자를 석방하라,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라, 자유민주주의 정신의 절차에 따른 새로운 헌법을 마련하라 등이었다. 당시 세종로에서 시위하고 그와 조해일, 윤흥길, 박태순 등 7명이 연행됐다. 고은의 본격적인 빵살이(감옥살이)는 그로부터 3년이 지난 뒤부터 시작됐다. 1977년, 1979년이 자유실천문입협회 건이었다. 1980년에는 김대중내란음모죄에 연루됐다. 죽음이 목젖까지 찾아왔던 때다. 1988년 정부가 월북·납북작가 작품들을 해금하자, 고은은 더 나아가 한국작가회의와 함께 북한의 작가동맹 소속 작가들과 ‘남북작가회담’을 추진한다. 이것이 문제가 돼 1989년 다시 투옥됐다. 국가가 달아준 ’별’이 4개다. 1980년대 중반 민주화운동이 본격화될 때 그는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1987년)를 맡았다. 국가와의 갈등이 완화된 건 문민정부인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였다. 그의 나이 60세 때다. 1993년 처음으로 여권이 나왔다. 그전까지는 임시여권만 발급됐다. 시인 고은이 ‘세계의 시인 고은’이 된 시점도 그때부터다. 1970년부터 1993년까지 23년간 그는 1960~70년대 산업화 과정의 각종 폐해를 해소하고,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거리의 시인’으로 살았다. 한국전쟁으로 상처받은 그는 이제 통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나에게는 독특한 통일 이론이 있다. 다연방 통일제를 주장한다. 북한의 언어는 문화어(표준어)-평양중심의 언어로 통합된다. 남한은 표준어는 서울 종로에 사는 중산층의 언어다. 마포에서 쓰는 언어도 아니다. 그런데 표준이나 통합은 말살이다. 시인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사투리, 지역어는 다 신성한데 다 말살되고 있다. 이것은 나쁜 단일화다. 그래서 나는 사투리와 지역어가 존중될 수 있도록 제주도, 경상도, 전라도, 함경도 등 20여개 연방으로 만들어서, 수상최고회의를 국가최고의사결정기구로 하는 남북한 통일된 국가를 꿈꾼다. 스위스, 말레이시아, 미합중국, 넓게 보면 중국도 다 연방 아니냐.” 그는 100년 안에 아시아에도 유럽연합(EU)과 같은 국가연합이 탄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구상이 한낱 백일몽에 그치지는 않을 것으로 확신한다. 올해로 80세인 고은의 삶은 파란만장하다는 표현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에 태어나 식민지와 1945년 해방과 분단, 1948년 대한민국 건국, 1950년 한국전쟁, 1960년 4·19민주화혁명, 1961년 5·16군사쿠데타, 1979년 박정희 정권의 몰락, 1980년 서울의 봄과 5·18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10민주화운동, 1997년 외환위기와 극복까지. 롤러코스터보다 더 다이내믹한 인생이다. 침묵할 수 없던 시대, 그것은 선물이었다 “나에게 주어진 시대는 조용할 수 없는 시대였지만, 남들보다 더 격렬하게 부딪치며 살아온 측면이 있다. 시대가 나에게 준 것도 있고, 내가 시대에 준 것도 있다. 이것이 맞물려서 심상치 않은, 비일상적인 삶의 연대기를 갖게 됐다”며 허허롭게 웃은 뒤 “사람들은 나를 ‘풍운아’라고도 부르지만, 돌아보면 시대가 나에게 준 선물과 같은 것이 많다”고 회고했다. 마지막으로 고은은 역사와 사회에 대한 고언을 잊지 않았다. “우리는 역사의 유산을 정리해본 적이 없다. 민족끼리 싸우는 삼국시대, 후삼국시대를 고스란히 복제하고 있다. 그런 바보 같은 땅이 어디 있나. 치유되지 않은 삶을 자손들에게 넘겨줘야 할 판이다. 피의 흔적을 닦아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물론 당대의 정당성이 있겠지만, 이대로 가면 역사라고 할 수도 없다. 길들여져 있는 체제에 의해 쉽게 변경될 수 없는 관행, 제도가 있으니 현안을 다루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당대에 손가락질당하고, 역적이라는 소리를 듣더라도 미래에 대한 불온한 꿈을 꾸고 확산해야 한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사설] 北, 공동선언 이행 요구보다 대화가 먼저다

    북한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가 어제 신년사에서 남북공동선언 이행을 남측에 주문했다. 대규모 경제지원을 뜻하는 것이겠으나, 북측은 이를 위해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를 자각해야 한다. 무력도발의 허튼 미몽을 접고 남북협력 분위기 조성을 위한 대화 채비를 서두르란 뜻이다. 올해로 6·25 정전 체제가 60년을 맞았다. 강산이 여섯 차례나 바뀌었을 긴 세월이다. 이 기간 남북은 첨예한 무력 대치 속에 각자 제 길을 걸었고, 그 결과는 수치상 비교할 수 없는 국력의 차이로 이어졌다. 2011년 기준으로 북한의 명목 국민총소득(GNI) 32조 4380억원은 남한 1240조 5000억원의 38분의1에 불과하다. 무역액은 무려 171배나 차이가 난다. 22만㎢의 좁은 땅덩어리에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지닌 20-50클럽(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인구 5000만명 이상) 국가와, 인구의 3분의1인 800만명이 일상적 굶주림에 신음하는 지구촌 최빈국 중 하나가 적대적 공존을 이어가며 180여만명의 병력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게 분단 65년, 종전 60년이 만들어낸 한반도의 초상이다. 물론 남북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시작으로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2007년 10·4 남북공동선언에 이르기까지 대치의 간극을 좁히기 위한 노력을 힘겹게 펼쳐왔다. 통일을 목표로 상호 불가침을 약속했고,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발전시키기로 다짐했다. 한반도 비핵화를 전제로 대규모 경제협력에도 합의했다. 그러나 1968년 무장공비 31명의 청와대 기습을 비롯해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 1983년 미얀마 아웅산 테러, 1987년 대한항공 여객기 폭파, 1999년 제1연평해전, 2002년 제2연평해전, 2010년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에 이르기까지 헤아리기 힘들 만큼 북한의 무력도발은 끊임이 없었고, 그때마다 애써 쌓아올린 남북 간 합의와 신뢰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지금도 북한은 미국과의 직접 담판을 염두에 둔 채 위성 발사를 가장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실험을 자행한 데 이어 3차 핵실험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우리 새 정부를 시험하고 있다. 1953년 계사년에 시작돼 어느덧 60갑자를 일순한 정전체제, 남북 대치의 분단사도 이제 변할 때가 됐다. 무엇보다 북한은 박근혜 정부 출범을, 자신들의 잇단 도발로 이명박 정부 5년 내내 굳게 닫힌 대화의 문을 다시 활짝 열 기회의 장으로 삼아야 한다. 각종 남북공동선언의 구체적 이행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서도 진정성 있는 대화가 선행돼야 한다. 박 당선인은 대선 기간 수차 남북대화 의지를 천명한 바 있다. 북측은 대화 재개, 교류 및 협력 확대, 남북 간 신뢰 구축으로 이어지는 한반도 평화 정착의 선순환 구조가 자신들에게 달려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 [박근혜 정부 대한민국의 과제] (2)잠재성장률을 올려라

    [박근혜 정부 대한민국의 과제] (2)잠재성장률을 올려라

    우리 속담에 ‘3대 가는 부자 없다’라는 말이 있다. 바꿔 말하면 물려받은 재산을 제대로 관리해야만 상당 기간 먹고살 수 있다는 얘기다. 이는 국가 경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각종 자원이 풍부하거나 내수시장이 큰 부자 국가는 위기가 몇 년 지속돼도 큰 문제 없이 굴러간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물려받은 재산이 변변찮은 ‘자수성가형’ 국가는 위기 대응이 매우 중요하다. ‘달리는 자전거’처럼 끊임없이 페달을 밟아야 일정 정도의 성장을 유지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2.1%(추정치) ‘저성장’을 기록한 데 이어 올해도 자칫 2% 성장에 그칠 것이라는 우려가 높다. 잠재성장률을 계속 밑도는 수준이다. 1일 기획재정부와 국내 연구기관 등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잠재성장률은 3% 중후반이라는 게 대체적인 공감대다. 2011년부터 2020년까지의 연평균 잠재성장률에 대해 한국개발연구원(KDI)과 현대경제연구원은 3.8%, 삼성경제연구소는 3.6%를 제시하고 있다. LG경제연구원 추산치는 3.4%로 가장 낮다. 한국은행과 KDI, 현대연 등의 분석에 따르면 우리나라 잠재성장률은 고도성장기였던 1970년대 10% 정도에서 1980년대 8~9%로 하락했다. 1990년대 들어 6~7%로 다시 떨어졌다가 1997년 환란을 계기로 4%대 후반으로 급락한 것으로 추정된다. 2008년 금융 위기를 거치며 3% 후반대로 더 쪼그라들었다. 잠재성장률 하락은 앞으로도 지속될 전망이다. KDI는 2021년부터 2030년까지 2.9%, 2031년부터 2040년까지 1.9%로 떨어질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삼성연은 같은 기간 각각 2.8%, 2.2%, LG연은 2.8%, 2.5%를 제시했다. 해외 시각은 더 비관적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우리나라의 잠재성장률이 2011년부터 2030년까지 2.7%를 기록한 뒤 2030년 이후 30년간 1.0%로 처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1.0%의 잠재성장률은 국가 부도 상태인 그리스(1.1%)보다 낮은 수준이다. 미국(2.1%), 영국(2.2%)과 비교해도 절반 수준이다. 더 큰 문제는 잠재성장률 하락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것이다. 2031년 우리나라 잠재성장률은 2001년 대비 3.4% 포인트나 떨어질 것으로 OECD는 예측하고 있다. 이는 룩셈부르크와 더불어 34개 OECD 회원국 중 가장 가파르다. 우리와 경제 규모가 비슷한 스페인(-2.0% 포인트), 호주(-1.0% 포인트) 등보다도 감소 폭이 크다. 멕시코(0.6% 포인트), 일본(0.7% 포인트) 등은 되레 잠재성장률이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기관차(국가)의 속도(잠재성장률)를 높이려면 더 많은 땔감(노동, 자본 등 생산요소)을 넣는 동시에 엔진(생산성) 효율을 높여야 한다. 생산성을 단기간에 높이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생산요소 투입이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하지만 최근 우리 경제는 생산요소 투입 감소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잠재성장률 하락이라는 ‘비극’에 직면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투자 부문은 외환 위기 이후 급격한 침체 국면에 진입했다. 실질 고정투자 증가율은 1970년대 연평균 17.8%에서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1.3%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해 8월 이후부터는 설비투자가 아예 감소세로 돌아섰다. 국내 자본의 해외 투자 비율 역시 1980년대 1% 미만에서 2010년에는 8% 안팎까지 뛰어올랐다. 인구 고령화에 따른 노동력 약화도 심각하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3656만명인 국내 생산가능인구(15~64세)는 2017년부터 감소세로 전환돼 2060년에는 2187만명으로 뚝 떨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교역 조건 악화에 따라 수출로 인한 실질 이익도 감소하고 있다. 여기에 우리의 성장 동력인 정보기술(IT) 산업의 수출 비중이 2000년 이후 점차 낮아지고 있어 신성장 산업 모색이 절실한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잠재성장률 하락 속도를 늦추려면 지금까지 주춤했던 자본 축적 확대를 적극 추진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임희정 현대경제연구원 거시경제실장은 “기업들이 투자 활성화에 나설 수 있도록 정부가 실효성 있는 투자 인센티브 패키지를 제공해야 한다”면서 “정부와 기업이 함께 중장기 투자 계획을 짜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고용과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고부가가치 지식서비스 업종의 육성도 과제로 꼽힌다. 제조업으로 고용과 성장률을 늘리기에는 우리 경제가 한계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오정근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1인당 국민소득이 5만 달러에 육박하는 싱가포르의 전례처럼 투자 대비 실적이 높으면서도 고용 효과가 큰 금융과 교육, 의료, 관광 등의 서비스 업종 발전을 통해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남북 통일도 잠재성장률 확충에 도움이 될 변수로 꼽힌다. 우리나라 잠재성장률 하락의 가장 큰 요인인 고령화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재정부에 따르면 2050년 기준으로 통일이 될 경우 생산가능인구 비중은 67.9%에서 70.2%로 증가한다. 반면 노인인구 비중은 22.1%에서 17.2%로 크게 감소한다. 대북 설비투자 증가와 분단 비용 감소 등도 이점으로 지적된다. 최광해 재정부 장기전략국장은 “2030년대에 통일이 된다고 가정하면 통일 비용에 따른 재정 부담에도 불구하고 잠재성장률이 0.86∼1.34% 포인트 정도 상승할 것”이라고 말했다. 세종 이두걸 기자 douzirl@seoul.co.kr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용어클릭] 잠재성장률 노동과 자본 등 동원 가능한 생산요소를 모두 투입해 한 나라의 경제가 물가 상승 등의 부작용 없이 성장할 수 있는 최대의 생산 능력. 경제 규모가 커질수록 어느 정도의 잠재성장률 하락은 불가피하지만 우리나라는 속도가 가파르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 [열린세상] 북한 위성의 궤도 진입으로 본 남북관계/장철균 서희외교포럼 대표·전 스위스 대사

    [열린세상] 북한 위성의 궤도 진입으로 본 남북관계/장철균 서희외교포럼 대표·전 스위스 대사

    지난 12월 12일 북한의 은하3호가 궤도 진입에 성공했다. 북한은 구소련, 미국, 프랑스, 일본, 중국, 영국, 인도, 이스라엘, 이란에 이어 자력으로 위성을 쏘아 올린 10번째 국가로 ’스페이스 클럽‘에 가입했다. 우리는 2018년에나 가입한다는 계획이어서 로켓 기술의 격차가 이렇게 컸는지 놀라움을 주고 있다. 더욱 충격적인 일은 발사 전날까지도 이 로켓이 궤도 진입에 성공할 것이라고 예측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과 북한의 위성기술이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와는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북한에 관한 정보파악 능력이 의문시된다. 부족한 정보를 갖고 우리의 잣대에 따라 희망적 사고로 북한을 평가해 온 것이 아닌가 우려된다. 이 중대한 사건은 대선을 치르면서 정치권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여야 모두 북한의 성공을 평가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현 정부도 정보 오판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언론도 대선에 집중하고 싶었을 것이다. 국내정치 때문에 뒷전으로 밀려나기는 했지만 은하3호의 성공은 매우 심각한 안보문제를 함축하고 있다. 우선, 김정일이 호언하던 강성대국의 실체이다. 북한은 지난 4월 김정은 체제가 등장하면서 헌법에 핵보유국임을 명시했다. 고농축 우라늄(HEU)도 상당히 진척시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은하3호는 1만㎞ 이상의 장거리미사일 발사 능력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된다. 머지않아 소형 핵탄두 개발에 성공하면 핵탄두를 장착한 대륙간탄도탄(ICBM)이 미국을 사거리에 두게 된다. 미국도 북한을 무시하기 어려워졌다. 남북관계에서 힘의 균형도 변화될 수 있다. 한국도, 미국도 대북관계를 재검토해야 할 상황이 된 것이다. 둘째로, 은하3호는 정통성과 경륜이 부족한 김정은의 세습을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김정일이 예상보다 빨리 사망하면서 남긴 경제 파탄의 유산에도 불구하고 김정은 체제는 핵과 장거리 미사일로 무장하면서 순항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내년에는 핵을 내세워 협상을 제의하고 경제적 대가를 흥정할 가능성도 있다. 중국은 북한의 붕괴를 바라지 않기 때문에 북한이 중국식 경제발전으로 경제가 차츰 좋아지면 28세의 김정은 체제는 30년 이상도 지속할 수 있다. 이러한 남북관계를 우리가 진정 희망하는 것인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셋째, 남북 분단이 고착화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북한은 몇 차례나 붕괴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에 합의한 후 시간을 벌면서 핵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가뭄과 홍수로 200여만명이 굶어 죽는 상황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한국은 북한이 머지않아 붕괴할 것으로 판단하고 ‘연착륙’이라는 유화책으로 경수로를 지어주었으나 북한은 붕괴되지도, 핵과 미사일 개발을 멈추지도 않았다. 한국의 정세 오판과 왜곡된 대북정책의 결과이다. 분단을 관리하는 비용이 통일비용보다 적지 않음을 상기해야 한다. 넷째, 북한이 군사대국을 자신한 데는 남한의 정치가 한몫을 했다. 국내 정치판이 좌우로 시계추처럼 요동치고, 응징을 뒷전으로 한 유화책이 계속되는 동안 북한은 시간벌기와 함께 경제적 보상을 받으면서 핵과 대륙간탄도탄을 개발할 수 있었다. 사활적 국가이익인 안보와 대북정책은 국내정치가 출발점이며 초당적 외교가 왜 필요한지를 설명해 주고 있다. 내년 2월에는 새 정부가 출범한다. 새 정부는 과거와 같이 유화책으로 북한의 변화를 유도할 수 있다거나, 시간이 흐르면 붕괴 조짐이 나타날 것이라는 안이한 판단에 기초해 대북정책을 추진해서는 안 된다. 은하3호의 충격을 계기로 사실에 기초한 한반도 안보균형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남북관계에 대한 중장기적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 필요하면 대선공약도 수정, 보완해야 한다.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대화와 제재를 병행해야 할 딜레마에 직면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과의 대화는 필요하지만 우리 측이 서두를 이유는 없다. 국제공조를 통해 북한을 압박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대화를 내세우고 나중에 압박하는 것은 과거를 반복하는 것으로 효과도 없다. 새 정부의 새로운 남북관계를 기대해 본다.
  • 동아시아의 유구한 관료제, 민주주의 장애물

    동아시아의 유구한 관료제, 민주주의 장애물

    자생적 근대화에 실패하고 식민지로 전락했다는 역사적 아픔 때문이라 한다면 어떨까. 역사를 해석할 때 어떤 대목을 지나치게 우상화하거나 지나치게 자학하는, 자존감 부족에서 나오는 조울증 같은 태도 말이다. 그래서 저자가 다른 얘길하다 툭 던져둔 문장 하나가 가슴을 때린다. “위기가 외부에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들이 형성해온 기질 자체에 위기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근대성들’(알렉산더 우드사이드 지음, 민병희 옮김, 너머북스 펴냄)은 근대성을 중국, 베트남, 한국 3개국 간 비교 설명으로 파고들었다. 근대성을 분석하겠다는 대상은 동아시아 3개국이고, 수식어는 ‘잃어버린’이고, 복수형 표현 ‘들’을 붙였다. 이쯤이면 ‘서구 중심의 일직선상 역사 개념으로서의 근대’에 대한 비판이란 것쯤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저자도 “자본주의자들 및 그들과 연계된 산업과 과학 부문만이 근대성의 유일한 창출자라고 보는 식의, 세계사를 자본주의의 역사로만 축소시키는 접근방식”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동아시아는 과연 몇시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뒀다. 여기까지였다면 사실 좀 뻔한 얘기다. 저자의 차별성은 서구 제국주의 역사에 대한 혐오와 반성(?) 차원이건, 해당 지역 연구자로서의 단순 립서비스(?) 차원이건 ‘앞으론 동아시아 시대!’라는 식의 뻔하고도 지겨운 레퍼토리를 반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열관계가 싫다고 역우열관계를 그려내는 대신, 저자는 민주주의에 방점을 찍는다. 동아시아의 오래된 근대성에는 오늘날 서구사회가 배워야 할 부분이 있지만, 그 오랜 근대성에는 민주주의가 없어 동아시아 자체를 위기에 빠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반복해보자. 위기는 바깥에 있는 게 아니라 “주인공들이 형성해온 기질 자체”에 있다. 이 미묘한 균형감각이 흥미로운 읽을거리를 제공해준다. 저자는 ‘이원제 시대’란 표현을 쓰는 데 우리에게 더 익숙한 표현은 ‘근세’다. 서양사에선 이 시기를 17~18세기쯤으로 본다. 신분, 혈통, 봉사의 중세봉건사회에서 공부, 지식, 성취의 근대시민사회로 넘어가는 사이에 낀, 짧은 기간이다. 이 잣대를 동아시아사에 가져다 대면 어색해진다. 중국, 베트남, 한국 등 3개국의 근세는 10~12세기쯤 이미 시작됐고, 14~15세기쯤 성숙한 형태를 갖췄고, 19세기까지 지속됐다. 사이에 잠깐 끼어 있다기엔 길어도 너무 길다. 그러니 중세와 근대가 병존했다는 의미에서 이원제 시대라 불러뒀다. 근대적 요소가 그렇게 일찍 나타났다고 판단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중국식 관료제’, 과거시험을 통해 선발된 학자-관료가 정치가나 행정가의 지위에 오르는 제도의 채택이다. 이는 동아시아 3개국이라면서 일본 대신 베트남을 집어 넣은 이유와도 연결된다. 일본은 유학을 거부했고, 따라서 과거제와 관료제가 없었다. 저자는 인문학 열풍 시대를 맞아 오늘날 우리가 즐겨 입에 올리는 유학이나 유학자의 뛰어난 주장에는 별 관심이 없다. 저자의 초점은 유학의 존재 자체가 상징하는 바, 그러니까 “책에 기반을 둔 박식함, 이 세상을 순전히 행정적으로 다스릴 수 있다는 전통적인 관료주의 신념”이다. 능력있는 행정으로 존경을 얻는다는 관념, 그 능력을 표준화된 시험을 통한 선발로 가려낼 수 있다는 관념 자체가 더 의미있다는 것이다. 유학을 높게 평가하는 부분도 이 지점이다. 관료제는 관료제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여러 문제와 부딪힌다. “관료들의 자부심이 귀족적 덕성을 성공적으로 실천함으로써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만족감에 따른 것이 아닌” 시대에 유학은 “점점 더 빈약해져만 갔던 관료들의 자부심을 관료제 이전의 윤리를 통해 고양시키려 했던 위대한 실험장”이었기 때문에 가치 있다. 주의해서 볼 점은 “위대”하지만 여전히 “실험장”이라는 대목이다. 개인의 능력을 중시하는 “능력주의 사회는 정치적으로 사회를 안정시키기보다 오히려 불안정하게 만든다.” 이유는 간단하다. “세습 왕자는 아버지나 다름없지만, 여피족은 과도한 특권을 가진 동기간에 불과”해서다. 능력에 따른 차별이라 말하지만, 차별이 능력에 따른 것이라 받아들이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더구나 어느 수준 이상의 지식과 능력을 갖춘 사람들 사이에서라면 말이다. 그래서 “인식론적 독선”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된다. “품위와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세습 재산과 사회적 지위보다 인식론적 독선에 의거해야 했기 때문”이다. 파벌·당파로 상징되는 이데올로기적 극단성이다. 가장 큰 문제는 “정치 문제를 행정의 문제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중국식 관료제란 결국 모든 문제가 “이성적인 통제를 위한 관리자적 기법”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이는 “여러 이익집단과 이권이 정치와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위선”으로 연결된다. 이런 전통이 없는 서구에서는 정치가 지나칠 정도로 “폭력적 행동주의”에 매몰돼서 문제였다면, 동아시아에서 정치란 많이 배우고 훌륭하신 전문가들이 다 알아서 해주는 것이어서 곧장 “공중의 무관심”, “대립없는 소외”로 전락해버렸다는 것이다. 저자가 “귀족제가 지니고 있던 소소한 원칙들이 너무나 일찍 관료제 원칙으로 대체된 데 따른 대가”라는 냉정한 평가와 함께 4장에다 ‘중국식 관료제와 경영이론의 위험한 만남’이란 제목을 붙여둔 것은 이 때문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음미할 내용이 수두룩한데, 한국인으로서 더 흥미로운 대목은 저자가 책 여기저기 흩뿌려둔 중국, 베트남, 한국 3개국 간 비교다. 저자는 3개국 가운데 한국이 가장 봉건적이었다고 평가하는데, 그 이유와 의미는 직접 읽어 보길. 이 문제는 당연히 오늘날 이 땅의 민주주의와 연결된다. 분단 상황을 감안해 저자의 질문을 흉내내자면, 북한은 지금 몇 시인가? 그리고 한국은 지금 몇 시인가? 다시 한번 더 반복해보자. 위기는 바깥에 있는 게 아니라 “주인공들이 형성해온 기질 자체”에 있다. 필요한 건 조울증이 아니라 이 ‘기질’에 대한 깊은 시선이다. 동아시아 연구의 최고 권위자에게 주어지는 미국 하버드대 라이샤워강의에서 2001년 발표한 내용을 보충해 2006년 출간된 책의 번역본이다. 1만 7000원.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공주가 여성 대표하는 일은 봉건사회에서나 가능”

    “공주가 여성 대표하는 일은 봉건사회에서나 가능”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의 안도현 시민캠프 선거대책위원장은 29일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에 대해 “공주가 여성을 대표하는 일은 봉건사회에서나 가능하다.”고 ‘여성 대통령론’을 정면 공박했다. 시인인 안 위원장은 불교방송 라디오에 출연해 “여성 지도자는 언제든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박 후보가 여성을 대표하거나 상징하는 인물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여성지도자는 필요… 朴은 아니다” 그는 박 후보 지지를 선언한 김지하 시인이 “어머니와 아버지가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은 다른 사람하곤 좀 다르지 않겠느냐.”고 한 발언에 대해 “부모가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이 어떻게 박 후보 혼자뿐이겠느냐. 그 사실만으로 본다면 박 후보는 인간적으로 측은한 후보로 인정한다.”고 말했다. 이어 “박 후보의 부모가 왜 총에 맞아 죽었나 이걸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며 “박정희 전 대통령은 20여년간 권력의 중심에서 분단 체제를 끌어왔고 장기 집권해 권력 누수 현상이 생겼다. 그 장본인이 박정희라는 점을 놓치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지하 시인에 대해서는 “박정희 군부 독재 유신에 항거한 대표 시인이 그 딸에게 지지를 표한 것은 안타깝지만 변절이라기보다는 오판이라고 생각한다.”고 평가 절하했다. ●공지영 “文당선 염원” 단식기도 안 위원장은 이날 “작가 공지영씨가 문 후보의 당선과 성공적인 정권교체를 염원하며 12월 1일부터 12일 동안 단식 기도를 한다.”고 전했다. 안동환기자 ipsofacto@seoul.co.kr
  • 문단 데뷔 50주년 맞아 장편소설 ‘여울물 소리’ 펴낸 황석영

    문단 데뷔 50주년 맞아 장편소설 ‘여울물 소리’ 펴낸 황석영

    “자생적 근대화운동의 기점이 1894년 동학혁명인데, 내년이 동학에서 말하는 상원갑 120년의 마지막 해다. 동학은 상원갑이 끝나면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하원갑이 120년간 지속된다. 길고 고통스러운 ‘근대’가 마감되고 어서 개벽의 시대가 왔으면 좋겠다.” 올해로 문단 데뷔 50주년을 맞은 황석영(69)은 지난 22일 인터뷰에서 장편소설 ‘여울물 소리’(자음과모음 펴냄)를 출간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1962년 단편 ‘입석부근’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곰곰이 생각한 뒤 그는 “‘황석영 아바타’를 만들자, 자생적 근대가 좌절된 시대를 배경으로 19세기 이야기꾼으로 살아간 몰락한 지식인 ‘이신통’의 이야기를 풀어 써 보자.”고 맘을 먹었다. 이신통은 조선시대 패관문학에 나오는 장풍운이나 괴짜 선비 정수동(1808~1858)과 같은 인물이다. 그리고 지난 4월부터 10월까지 꼬박 7개월 동안 200자 원고지 1500장을 채워 나갔다. ●7개월간 200자 원고지 1500장 채워 ‘여울물 소리’의 화자는 박연옥이다. 어미인 구례네는 기생으로 시골 양반의 첩살이를 하다가 어린 연옥을 데리고 나와 색주가를 연다. 연옥도 어미의 삶을 닮은 듯 후처살이를 들어갔다가 아이 없이 3년 만에 도망 나와 구례네의 객주 일을 돕고 산다. 연옥에게 정인이 있었으니, 열 살이나 차이 나는 30대의 이신통이다. 20대 초반의 이신통은 어미가 종인 얼자 출신이었지만, 과거를 보겠다며 한양으로 도망치듯 집을 나와 전기수(소설을 읽어 주는 사람)로 살아가다가 1882년 하급 군인들이 들고일어나 도시 폭동으로 발전하는 임오군란을 겪고 그 와중에 동학 도인들을 만나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혁명적 사상에 빠져든다. 그러니까 소설은 임오군란에서 갑오농민 혁명기의 망국을 앞둔 격변의 시대를 다루고 있다. “임오군란은 봉건왕조로 대표되는 일부 기득권층과 세도정치에 대한 저항이었고, 조선이란 나라의 정체를 파악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또 갑오농민운동은 자생적 근대가 좌절된 이야기라서 이런 어수선한 세상을 살아야 했던 서얼 출신의 지식인들과 도시 빈민, 하층 군인 등 중인 이하의 잡직에 종사하는 인물들 이야기를 써 보려고 한 것”이라고 했다. 정치가 안정되지 못하고 시대가 혼란하면 기층민은 삶의 무게에 시대의 무게까지 짊어지고 세월을 건너가야 했다. 황석영의 아바타 이신통을 제외하면, 여성 명창 심백화를 비롯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대체로 실존 인물이다. 심백화는 조선 최초의 여성 명창 진채선(1847~?)을, 김봉집은 녹두장군 전봉준(1855∼1895)을, 천지교의 1·2대 교주인 최성묵과 최경오는 각각 천도교의 1·2대 교주인 최제우(1824∼1864)와 최시형(1827∼1898)을 말한다. 서일수와 박인희·박도희 등 동학 도인들도 모두 실존 인물들이다. 황석영은 “천도교를 천지교라고 하거나 실존 인물들의 이름을 살짝 바꾼 것은 역사적 사건을 피해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번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시대 야담과 민담을 집대성한 ‘대동야승’(大東野乘) 등 패관문학과 역사책을 충분히 읽고 삭였다고 했다. ●서울 종로통 등 손바닥 보듯이 설명 ‘여울물 소리’를 읽는 또 다른 재미는 한성 도성 안을 손바닥처럼 들여다보면서 서울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린낙지로 유명한 서울 종로통은 의금부와 서장옥이 있던 곳이다. 매운 낙지를 혓바닥을 호호 불면서 먹는 이유가 터가 센 곳인 탓 같다. 종로4가에서는 죄인을 효수했다. 홍제동에는 색주가가 많았고, 공덕동에는 주막이 많았다. 임오군란을 일으킨 군졸들은 이태원에서 주로 살았다. 그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의 르 클레지오나 일본의 오에 겐자부로는 ‘너는 서사가 많은 나라에서 살아서 좋겠다’고 부러워하는데 나는 ‘너도 한번 겪어 봐라. 얼마나 힘든데’라고 속으로만 응수한다.”면서 “서사가 많은 땅은 고통이 많은 땅인데, 이제 우리 민족도 고통스러운 근대를 마감해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억압·고통 넘어 미래 맞이할 준비 필요 황석영은 “21세기를 포스트모던한 세상이라고 하지만 동아시아 3국은 아직도 근대를 넘어서지 못했다. 일본은 성공적으로 근대에 진입했다고 하지만,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적 상징인 천황을 넘어서지 못했다. 또 중국은 공산당이 독재하고 경제는 자본주의를 받아들여 기형적 성장을 하고 있다. 한국은 분단으로 근대적 민족국가를 아직 완성하지 못했다.”고 진단한 뒤 “근대의 상처가 대선 때마다 나타나고 있는데, 억압과 고통을 넘어 미래를 맞이할 준비를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위기의 한국호 해법 전문가에게 묻다] (5-끝) 한반도 생존전략

    [위기의 한국호 해법 전문가에게 묻다] (5-끝) 한반도 생존전략

    최근 미국과 중국의 권력 교체 등으로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 환경이 새로운 도전을 맞고 있다. 과거사·영토 문제에 대한 역내 국가들의 민족주의적 성향 등으로 불안정성이 가중되는 가운데 동아시아 질서의 재편 과정에서 주요 변수는 중국의 부상에 따른 미·중 강대국 관계의 향방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아울러 남북 관계의 회복은 위기의 한국호에 또 다른 과제로 제기된다. 전문가들은 유력 대선 후보들에게 이 같은 과제에 대응하기 위한 외교안보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하며 다양한 제언을 내놓았다. 우리나라는 분단 국가라는 특수상황과 동북아의 불안한 안보환경 때문에 한·미 동맹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로 발전한 중국의 부상과 이에 따른 미·중의 경쟁 및 갈등 가능성은 우리에게 새로운 도전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 같은 도전과 위기의 극복을 위해 전문가들은 대체로 한·미 동맹과 더불어 한·중 간의 전략적 협력관계를 실질적으로 어떻게 조화롭게 발전시켜 나갈 것이냐를 주요 과제로 본다. 김열수 성신여대 교양교육원 교수는 19일 “미국이 미얀마와 라오스 등 동남아 국가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등 전략적 경쟁이 심화되면 향후 한국 주도의 한반도 통일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기에 긴장을 완화시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구본학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국제학과 교수는 “중국의 새로운 지도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다양한 초청·방문 외교를 통해 인적 관계 강화에 힘써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열수 교수는 “지난해 9월 서울에 마련된 한·중·일 3국 협력 사무국은 협력을 촉진시킬 수 있는 초보적 메커니즘”이라면서 “한·미·중 대화체를 만들어 안보협력을 논의 할 수 있는 틀을 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전재성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미·중 관계가 충돌보다 협력으로 갈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면서도 “한·미 동맹 일변도의 외교를 지양하고 중국과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뿐 아니라 시민사회까지 포함한 다차원적 교류를 활성화시켜야 한다.”고 제언했다.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에 대비해 정부의 위기관리 체제를 개편해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김열수 교수는 “차기 정부는 2015년 군의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에 대비해 상부지휘구조 개편 등 국방개혁을 완수하고 국내총생산(GDP)의 2.7% 수준인 국방비를 3.5% 수준으로 증액할 필요가 있다.”면서 “청와대의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를 복원하고 위기관리실을 활성화시켜 전반적인 컨트롤타워 역할을 수행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돈독한 한·미 관계를 차기 정부에서 이어 갈 방안도 제시됐다. 구 교수는 “미국은 재정적자로 인해 향후 약 10년간 5000억 달러의 국방비 삭감을 계획하고 있는 만큼 동맹국에 대한 방위비 분담과 국제평화유지 활동을 요구할 것”이라며 “이를 회피할 수 없기 때문에 국제평화유지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신성호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미 FTA 재협상론 등 국내 정치 이슈를 한·미 관계에 끌어들이는 태도는 동맹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종훈기자 artg@seoul.co.kr
  • 美 합참의장 판문점 방문… 북한군 ‘비상’

    마틴 뎀프시 미국 합참의장이 방한 중 비무장지대(DMZ) 인근을 전격 방문하자 북한군에 ‘비상’이 걸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12일(현지시간) 미 국방부에 따르면 뎀프시는 지난 11일 제임스 서먼 주한미군사령관 등과 함께 판문점, 평화의 집 등을 둘러보고 현지에서 근무하는 한·미 양국 군장병들을 격려했다. 서울 용산기지 미8군 추모비 앞에서 열린 미국 재향군인의 날 행사 참석 차 방한한 뎀프시는 당초 항공편으로 비무장지대 인근 부대에 도착할 예정이었으나 날씨가 나빠 서울에서 육로를 통해 전방 지대로 이동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뎀프시 의장 일행이 판문점 내 회의장에 도착하자 북한군 장병들이 카메라를 든 채 허둥지둥 나타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고 미 국방부는 전했다. 북한군 공동경비구역(JSA) 경비병들은 뎀프시 의장 일행이 미군 관계자들로부터 현안 브리핑을 받은 뒤 회의장 북측으로 걸어가자 창문을 통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기도 했다. 뎀프시는 이 자리에서 자신과 서먼 사령관이 과거 독일 분단 시절 독일에서 국경 경비군으로 군대 생활을 시작했다고 소개한 뒤 “당시 삼엄한 경비가 이뤄지던 국경은 이제 과거로 사라졌다.”고 말했다. 뎀프시는 지난 7월 육군참모총장 겸 합참의장 내정자 자격으로 방한했을 때도 판문점 JSA를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뎀프시 의장은 이날 정승조 합참의장을 만나 양국 군사동맹 등 현안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2015년으로 예정된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을 언급하며 “미국은 한국의 방위에 지속적으로 기여하겠지만 지휘 관계는 변화할 것”이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미 국방부는 밝혔다. 워싱턴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 [기고] NLL은 ‘실효적’ 영토선이다/문순보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기고] NLL은 ‘실효적’ 영토선이다/문순보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영토선은 영토의 경계를 구분하는 선이다. 북방한계선(NLL)을 영토선으로 간주하는 경우, 일각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는 셈이 된다. 이 경우 ‘NLL=영토선’이란 주장은 헌법 제3조 소위 ‘영토조항’에 위배된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NLL을 영토선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 같은 인식의 혼란을 어떻게 극복할까. 독도 문제를 보자. 독도가 자기들 영토라는 일본의 가당찮은 주장에 대해 우리는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관계에 따라 일일이 대응하지 않기로 중지를 모은 바 있다. 우리는 역사적인 ‘실효성’을 내세워 현명하게 논란을 피해 가고 있는 것이다. 작년에 기밀해제된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서해한국도서’라는 문서에 따르면 NLL은 1965년 설정됐다. 정전협정 체결 당시였던 1953년에 그어졌다는 우리의 상식과 괴리가 있다. 이 문서에 따르면, NLL은 ‘유엔사령부 해군구성군 사령관’이 “한국 해군사령관의 지휘권 및 작전통제권 하에 있는 군사력에만 적용되는 선”으로 규정하여 선포됐다. NLL의 목적이 남측 해군이 북으로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여 북한과의 충돌을 피하자는 것이라는 내용으로, NLL은 임의적 성격의 ‘적대적 수면분계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NLL이 설정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그것은 ‘실효적’ 영토선으로 기능해 왔다. NLL을 영토선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면 김대중 정부 당시 발생했던 두 차례의 연평해전은 무엇이었던가. 당시 목숨을 잃은 우리 젊은 장병들은 실체도 없는 수면 위의 선을 지키려 했던 해프닝의 희생양인가. 북한은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의 부속합의서 제11조에 ‘쌍방이 관할하여온 구역’이라는 문구로 NLL을 인정한 바 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북한이 어깃장을 놓는다고 하여 NLL을 무효화한다면 우리 스스로 남북기본합의서를 휴지조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과 다름없다. 남북공동어로수역을 설정하자는 일각의 주장도 북한의 실체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이상주의적 발상이다. 우리가 그토록 NLL을 사수하려 하는데도 수시로 넘나드는 그들이 공동어로수역을 지킨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북한은 그 이남으로 진출을 시도할 것이며 이는 북한 해군에 대남공작을 활성화시키는 통로를 제공하는 격이 될 것이다. 또한 서해를 앞마당으로 생각하는 중국도 북한과의 친분관계를 이용하여 어장 확보 등을 빌미로 서해 깊숙이 진출하려 할 것이다. 이는 이어도 분쟁에 이어 또 다른 한·중 갈등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최근의 NLL 쟁점은 헌법과 현실이 충돌하는 모순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존재하는 모든 모순을 다 해결하기는 어렵다. 예컨대 한반도의 분단 자체가 민족모순이요, 북한 핵문제는 국제사회가 풀지 못하고 있는 국제적 모순이다. NLL과 관련하여 영토주권을 내세우는 입장을 헌법적 모순이라고 공격하면서 공동어로수역 설정을 주장하는 것 또한 국민들의 일반적인 법 감정에는 모순으로 비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바다를 지키겠다는 의지요, 국가안보를 튼실히 다질 수 있는 방법의 모색임을 정치권은 명심해야 한다.
  • “탈북자 사회적응 도와야 통일 앞당겨져”

    “탈북자 사회적응 도와야 통일 앞당겨져”

    “오랜 타향살이 끝에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온 기분입니다. 인연 따라 당연히 맡겨진 소임으로 믿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6일 원불교 제3대 평양교구장에 임명된 김대선(59) 교무. 임명장을 받기에 앞서 이른 아침 서울신문 편집국에서 만난 김 교무는 “일각에선 (평양교구장을) 한직으로 여기지만 그동안 개인적으로 해 왔던 일들을 원불교 교단에서 인정받은 것 같아 기쁘다.”며 활짝 웃었다. 김 교무는 원불교 원불교학과와 대학원을 마치고 제주교당 부교무를 시작으로 대구·경북교구, 서울교구 사무국장과 서울 역촌·성동교당 교무를 거쳐 지난 5년간 문화사회부장을 지낸 원불교 중역이다. 이력으로만 친다면 평양교구장이 생뚱맞은 소임으로 여겨질 터. 하지만 그는 종교계에선 남북교류에 관한 한 빼놓을 수 없는 산증인이다. 대북 종교교류에 앞장서 온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창설의 주역으로 초대 사무국장을 맡았고 원불교 교단에서도 으뜸으로 대북 창구 노릇을 해 왔다. “돌이켜보면 북한에서도 원불교를 항상 논외의 교단으로 치부했었습니다. 개신교, 천주교, 불교에 가려진 원불교 입장에선 마땅히 접촉할 북측 상대도 없었으니까요.” 그래도 1994년 평양에 빵 공장을 세워 매월 밀가루 40t씩을 보냈고 분유, 기저귀 등을 꾸준히 지원해 온 끝에 지난 2007년 평양의 조선불교도연맹(조불련)회관에 원불교 법신불, 일원상을 봉안한 교당을 개설하는 성과를 얻었다. “일반인들은 잘 모르겠지만 원불교는 대북 교류에 있어 여느 종단에 뒤지지 않는 공을 들여왔습니다. 교단의 대북교류 지침인 ‘원불교 북한교화위원회 규정’을 마련한 게 1986년의 일이니까요.” 원불교 제3대 대산 종법사는 생전 ‘통일 후를 대비하라.’는 유시를 내렸다고 한다. 그 유시를 받들어 통일 이후 북한에서 교역할 교무 40여명이 이미 훈련을 마쳐 대기하고 있다. 그가 북한과의 교류에 공을 들인 게 그저 대산 종법사의 영향 때문일까. “글쎄요. 개인적인 인연도 없지 않아요. 제 성본이 연안 김씨이고 어머니도 원불교에 입교해 북한 개성교당에서 시무했던 분이죠.” 그 말마따나 그가 탈북자의 정착 지원에 쏟아온 공은 유명하다. 2002년 자신이 개척한 성동교당 한편에 탈북자들을 위한 자활쉼터인 ‘평화의 집’을 마련했고 지금도 흑석동 회관에서 그 지도교무를 맡고 있다. 그에게 감화받은 탈북자 한 사람은 안성 한겨레학교에서 봉사 중이며 탈북인단체총연합회 회장도 그를 만나 원불교에 입교했다. “탈북자들이 한국사회에 빨리 적응하도록 돕는 게 통일을 앞당길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찌 보면 탈북자는 통일의 전위대가 될 수 있어요. 탈북자들의 문화적 정착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탈북자들에게 전통문화와 종교문화 체험의 기회를 꾸준히 제공해 왔고 그 운동의 구심체로 지난 2010년 사단법인 원림문화진흥회를 만들어 운영해 오고 있다. “초대 평양교구장 박청수 교무와 그 뒤를 이었던 김정덕 교무 등 선배 평양교구장들의 숨은 노력이 많았습니다. 이젠 그 결실을 볼 때가 됐어요. 그 결실 중 하나가 분단 전 어머니가 시무했던 개성교단 복원이 됐으면 합니다.” 비단 탈북자뿐만 아니라 정상의 삶에서 소외된 다문화가정 지원도 그냥 넘길 수 없는 큰 과제라는 김 교무. 인터뷰 말미에 “비록 지금은 상징적인 위상이지만 번듯하게 ‘평양교구청’ 간판을 달 수 있는 날을 절실히 기대한다.”며 자리를 떴다. 글 사진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佛각료 38명 성평등교육 불려간다

    佛각료 38명 성평등교육 불려간다

    프랑스 장관들이 줄지어 성평등 교육에 불려 가고 있다. 나라를 구한 여전사 잔다르크, 여성 사상가 시몬 드 보부아르 등 ‘페미니스트 아이콘’들을 배출한 프랑스. 지난 5월 사상 처음으로 남녀 동수의 ‘성평등 내각’을 꾸린 프랑스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佛총리 45분 강의 ‘필참’ 엄명 이달 초 스테판 르폴 농업장관의 망언(?)이 장관 성평등 교육의 빌미를 제공했다. 르폴 장관은 프랑스 주간지 렉스프레스와의 인터뷰에서 여성들은 전문적인 일에 적합한 두뇌를 지니지 못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 공분을 샀다. 정확한 코멘트는 “우리 업무는 매우 전문적이지만 최대한 많은 여성들을 승진시키려 한다.”였다. 이에 장마르크 에로 총리가 결단을 내렸다. 성평등부에 각료들을 대상으로 한 성차별 방지 교육을 마련하라고 특단의 지시를 내린 것이다. ‘성평등 감수성 기르기’라는 이름으로 회당 45분간 진행되는 이 연속 강좌는 이미 ‘만원’이다. 38명의 장관 모두가 등록을 했거나 등록 절차를 밟고 있다고 AP통신이 30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미셸 사팽 노동장관, 크리스티안 토비라 법무장관 등 10여명의 장관들은 벌써 교육을 받았다. 이 강의에서 장관들은 정치적인 의사소통 과정에서 성차별적 고정관념을 피하고, 일상생활 속에서 성 불평등을 가려내는 훈련을 받게 된다. 프랑스 내 성불평등 실태를 보여주는 통계 등을 동원해 성에 대한 관념이 유년기 때부터 어떻게 고착화하는지도 보여준다. 강의 기획자인 카롤린 드 하스는 프랑스 방송에 등장하는 정치인 80%가 남성이라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스스로 경계하지 않으면 불평등은 생겨나게 돼 있다. ‘프랑스가 양성평등을 이뤘다’는 ‘착각’을 깨고 싶다.”고 말했다. 장관들에 대한 성평등 교육은 고위직 남성들이 여성 동료·부하직원을 무시하거나 추근대는 관행과 더불어 프랑스 정계에서 일상적으로 이뤄져온 성차별적 언행을 뿌리 뽑으려는 노력으로 평가받고 있다. 실제 지난 7월에는 세실 뒤플로 주택장관이 꽃무늬 드레스를 입고 업무보고에 참석하자 남성 의원들이 휘파람을 불며 환호를 보내 언론의 눈총을 받았다. 지난해 갖가지 성추문으로 낙마한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국제통화기금(IMF) 전 총재는 여성들을 성희롱 대상으로 전락시켰다는 비난에 휩싸였다. 결국 지난 8월 새 성희롱방지법 제정으로까지 이어졌다. 프랑스 시민들은 정부의 용단을 반기고 있다. 파리 시민 니콜레트 코스트(33)는 “자랑스럽진 않지만 이런 교육이 이뤄진다는 건 바람직한 일”이라고 말했다. ●“분단국에서 여성리더십은 시기상조” 발언 논란 프랑스의 이번 조치는 지도층 인사들의 성차별·성희롱 언행이 위험 수위에 이른 국내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실제 지난 6월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이 “분단국가에서 여성 리더십은 시기상조”라고 말해 여론의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이수경 한국여성정책연구원 평등문화정책센터장은 “프랑스의 예는 정치 지도자의 결단으로 성평등 개념에 대한 인식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 센터장은 “국내 일부 의원들도 성희롱, 성차별 발언으로 물의를 빚는 등 올바른 성평등 개념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면서 “공무원을 대상으로 하는 여성가족부 산하 양성평등교육진흥원에서 국회의원 등을 교육대상에 포함시키려 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말했다.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국군 ‘민간인 학살’ 유족에 배상”

    한국전쟁 당시 국군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 희생자 유족들이 60여년 만에 국가로부터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3부(부장 이우재)는 임모씨 등 173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고 30일 밝혔다. 재판부는 “당시 군인들이 위법한 직무집행으로 헌법이 보장하는 신체의 자유, 생명권, 적법절차에 의해 재판받을 권리 등을 침해했다.”면서 “희생자와 유족은 그로 인해 정신적 고통을 겪었으므로 국가가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어 “한국전쟁 이후 남북분단 등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받았을 차별과 경제적 궁핍, 오랜 세월 동안 물가와 소득수준 등을 고려해 위자료를 정했다.”며 유족들에게 총 21억 3000여만원을 지급할 것을 명했다. 다만 소각 작전으로 집을 태워 인근 개울가에서 자다가 동사한 희생자와 2007년 다른 사건의 진실규명 결정에 포함된 희생자 유족에 대해서는 손해배상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동사는 국가의 반인륜적 범죄로 인한 것이라 볼 수 없으며, 불법행위 사실을 안 지 3년이 넘어 제기한 소송은 시효가 소멸됐다.”고 설명했다. 국군 11사단은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8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전라도에서 빨치산 토벌작전을 실시하며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이에 대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9년 3월 이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을 결정하고, 국가의 공식 사과와 위령사업 지원 등을 권고했다. 최지숙기자 truth173@seoul.co.kr
  • [이슈&이슈] “성장線? 고통線! 경부선 지하화하라” 260만명 행동 나섰다

    [이슈&이슈] “성장線? 고통線! 경부선 지하화하라” 260만명 행동 나섰다

    이연옥(49·여)씨는 서울 금천구 독산1동에 15년간 거주했다. 아파트 옆으로 지하철 1호선과 경부선 철로가 지나간다. 창문을 열어두면 전화 통화나 TV 시청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푹푹 찌는 한여름에도 창문을 열 수가 없다. 밤에는 선로 보수 공사로 잠을 설친다. 이씨는 28일 “기차가 지나갈 때 앉아 있으면 덜덜거리는 진동이 느껴지는 수준”이라면서 “TV를 보다가 전화가 오면 소음 때문에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큰소리로 외치듯이 말한다.”고 토로했다. 이씨는 “지하로 철로가 들어가기 어려우면 아예 지붕이라도 씌워 달라고 말하고 싶다.”면서 “어려운 처지여서 지금껏 살아왔지만 수험생인 아이가 고통을 받는 것을 보면 이제는 더 참을 수 없다.”고 울먹였다. 금천구 가산동에는 가산디지털단지(서울디지털 2·3단지)의 교통 요충지인 ‘수출의 다리’가 있다. 경부선 철로가 동서를 갈라놓고 있어 철로 위로 다리를 놓은 것이다. 매일 출근시간 광명 방면 철산교에서 수출의 다리를 지나려는 차량과 반대쪽 차량이 뒤엉킨다. 불과 500m인 다리를 건너는 데 1시간이 넘게 걸릴 때도 있다. 출퇴근 시간에 한 방향으로만 시간당 1000대의 차량이 지나간다. 이 지역 근로자와 사업가, 서울로 출퇴근하는 직장인에게 이 다리는 ‘지옥의 다리’나 ‘수출을 가로막는 다리’로 불린다. 수출의 다리 인근에는 대형 아웃렛 매장이 밀집해 있어 하루 정체 시간이 20시간에 이를 때도 있다. 최근 금천구에서 도로를 확장하고 진출램프를 보강하는 한편 지하차도를 건설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지만 이마저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주변 업체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가산디지털단지 기업인 모임인 녹색산업도시추진협의회 유지홍(54) 전문위원은 “중소기업 사장과 하루 일당벌이하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몇 만명이 다리에 서 있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큰 낭비인가.”라면서 “교통혼잡으로 생기는 피해만 생각해도 매일 울분이 터져 경부선 지하화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울 금천·구로·영등포·동작구와 경기 군포·안양시 등 6개 지자체는 지난 6월 안양시청에서 공동협약을 체결하고, ‘지하철 1호선과 경부선 철도의 지하화’를 공동 추진목표로 정했다. 8월에는 독자적으로 경부선 지하화를 주장하던 서울 용산구가 힘을 보탰다. 지자체들은 서울역부터 군포시 당정역까지 32㎞ 구간 철로의 지하화를 추진하기로 했다. 조길형 영등포구청장은 “철도가 지하화되면 상부 공간을 녹색공간 등으로 활용할 수 있는 등 도시 계획에 획기적인 변화를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성 구로구청장도 “주민들의 열망에 부응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경부선 지하화에 힘을 보탤 것”이라고 밝혔다. 고통을 참다 못한 주민들도 속속 참여했다. 7개 지자체 주민이 261만명, 경부선에 직접 영향을 받는 주민이 76만명이나 된다. 7개 지역 시민단체가 지난 10일 ‘경부선철도 지하화 통합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최기찬 위원장은 “재향군인회, 새마을협의회, 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 등 수도권 서남부 지역의 거의 모든 시민단체가 지역색과 정치색에 상관없이 경부선 지하화를 요구하고 나섰다.”면서 “지역 분단으로 인한 도시 불균형 개발, 교통혼잡, 상권 공동화 현상, 구로·가산디지털단지 산업발전 저해를 일으키는 핵심 문제를 두고만 볼 수 없어 들고 일어났다.”고 말했다. 주민과 시민단체는 직접 각 지하철역과 지자체에서 200만명 서명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이달 말 서명부를 모두 취합해 다음 달 중 대선 후보와 정당, 기획재정부 등 중앙부처에 전달하고 국책사업 추진을 촉구할 계획이다.시민단체와 지자체는 지하화로 생기는 토지 매각 등의 방안을 동원할 경우 총사업비가 5조~6조 5000억원 수준에 그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교통혼잡 완화, 산업단지 및 상권 활성화 등의 효과를 감안하면 정부에서 충분히 수용 가능한 수준이라는 입장이다. 지난 총선에서 정치권을 중심으로 경인선 지하화(48㎞) 사업에 13조원의 사업비가 필요하다는 예측이 나온 만큼 이보다 적은 비용으로 사업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여기에 생태체험공원과 수경공원, 메모리얼파크 등 녹지 공간을 대폭 확충해 시민들의 환경을 대폭 개선하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정현용기자 junghy77@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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