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北의 회담복귀 결단보다 중요한 것/정세현 이화여대 석좌교수·전 통일부 장관
지난 2월10일 북한이 핵억지력 보유와 핵무기고 증대 방침을 선언했을 때 미국은 많이 듣던 얘기고 예상했던 바라는 반응을 보이면서 놀라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3월31일 북이 6자회담을 군축회담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나, 그후 원자로 가동을 중단했다고 발표했을 때도 미국은 정책차원에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북한의 벼랑끝 전술에 미국은 ‘악의의 무시(Malign Neglect)’ 전술로 대응한 것이다. 다만 대통령을 비롯한 미 고위관리들의 자극적인 대북 표현은 오히려 심화되는 추세를 보였다. 당연히 북한도 말싸움의 수위를 높여나갔다. 그러는 와중에 4월부터는 누군가에 의해 ‘핵억지력’이 ‘핵탄두’로 둔갑하고, 탄두수도 최소 2∼3개에서 6∼8개로 보도되면서 북한의 핵실험 임박설까지 유포되기 시작했다.6월위기설 속에 국민의 불안이 극에 달했다. 북한의 벼랑끝 전술, 미국의 악의의 무시 전술과 외곽때리기 전술의 틈바구니에서, 적어도 2월중순부터 5월중순까지 석달여, 한국정부는 안팎곱사등이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러나 북한이 5월11일 폐연료봉 인출을 끝냈다고 공표한 뒤부터 미국의 행보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남북관계에도 해빙의 조짐이 감지되었다. 유럽순방 중이던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다시 주권국가론을 거론하고,5월13일 미국의 디트라니 북핵담당대사가 뉴욕으로 찾아가 박길연 북한대사를 만나고 돌아온 직후인 14일 북한은 남북당국간 대화채널 복원에 호응해 왔다. 보도에 의하면, 미국은 뉴욕 채널을 통해 주권국가론을 설명하고 6자회담 틀 내에서 미·북회담을 하겠다는 입장을 북한에 통보한 것으로 보인다.5월8일 북한이 주권국가론과 6자회담 틀내 미·북회담 문제에 대해서 미국으로부터 직접 설명을 듣고 싶다는 입장을 표명했을 때만 해도 별무반응이던 미국이 연료봉인출 완료 보도가 나오면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원자로 가동을 중단한 북한이 장차 어떤 수순을 밟을 것인지는 1993년 선례가 있기 때문에 뻔히 내다보이는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미국이 진즉 선택할 수 있었던 대응을 왜 연료봉 인출이라는 벼랑끝전술까지 지켜보고 비로소 시작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동안 남북대화 복원을 촉구하는 우리측 요구를 못들은 척하다가 미국의 태도변화가 감지되니까 그때서야 호응해 나오는 북한의 태도도 못마땅한 것은 마찬가지다.
경위야 어찌 되었건 비료지원을 계기로 남북관계는 서서히 복원되는 중에 있고,6·15행사와 15차 장관급회담을 전후해서는 1년전의 분위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아마도 금주 중에는 북한이 지난 13일 설명받은 미국의 입장에 대한 답을 내놓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6자회담 복귀를 위한 결단을 내리려고 하는 이 시점에 미국은 제발 말로써 북한을 자극하는 일을 좀 삼갈 필요가 있다.13일 전후해서 약간 누그러졌던 대북 표현들이 다시 거칠어지는 경향이 있고, 거기에 대해 북한이 반발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미국이 다른 계획을 가진 것이 아니고, 진정으로 북한의 6자회담 복귀를 바란다면 적어도 북한이 결정적으로 저울질하는 시점에 자극하는 우를 범하지 말기를 바란다. 북한에만 “할 말이 있으면 회담장에 나와서 하라.”고 할 것이 아니라 미국도 할 말이 있으면 북한이 회담장에 돌아온 뒤 그 자리에서 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북한의 6자회담 복귀 결단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미국의 대북정책상 전략적 유연성이 바로 그것이다. 이번부터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해결해 나가고, 북한이 회담복귀를 카드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참가국들은 북한이 다시 회담장 밖으로 뛰쳐나가지 않도록 붙들어 두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의 유연한 대응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회담은 훈계하는 자리도 아니고 벌주는 행위도 아니다. 상대가 문제를 일으켰다고 하더라도, 일단 회담을 하기로 했으면 속이 쓰리고 울화가 치밀어도 기본적으로 이익의 교환을 전제로 해야 한다. 북핵문제를 풀자는 6자회담에 도덕적인 기준을 들이대면 회담은 겉돌게 되고, 그리되면 미국내 전문가들이 지적하듯이, 결국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만들어 주는 결과만 남게 될 것이다. 결코 바람직스럽지 않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국이 잘 해주기를 바란다. 물론 북한도 이제는 적정한 선에서 타협하고 문제해결에 동참할 자세를 갖춰야 한다.
정세현 이화여대 석좌교수·전 통일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