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제네바 북·미 회담과 실용외교/홍현익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정부가 남북관계를 북핵 문제의 진전과 연계시키고 북한은 간접 경고를 보내면서 탐색전을 벌이는 가운데 제네바에서 북·미 핵 협상 대표들이 만났다. 회담에서 양측은 북핵 폐기 2단계의 최대 걸림돌인 북한의 신고 문제를 집중 논의하였고, 이에 대한 미국의 상응조치로서 테러지원국 명단 제외, 그리고 마지막 3단계 협의방안도 논의하였다.
특히 북한 핵 신고의 세 가지 대상 중 과거의 핵인 북한-시리아 핵 협력설과 고농축우라늄프로그램을 현재와 미래의 핵인 플루토늄프로그램과 분리하여 북한이 후자만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에 신고하고 전자는 북·미간에 비밀문서로 타결하는 방향으로 신고 형식에 대한 접근이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일단 미국측이 교착상태 타개를 위해 유연성을 발휘하여 북한 수뇌부의 결정을 수월하게 해 준 점은 높이 평가된다. 그러나 김계관 부상이 회담 직후 고농축우라늄프로그램과 시리아와의 핵 협력은 과거, 현재, 미래 어디에도 없다고 단정하였기 때문에 북한이 미국이 바라는 대로 이를 시인하고 3단계로 넘어갈 가능성은 크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중국이 제안한 상하이 코뮤니케 방식대로 미국의 의혹과 북한의 해명을 병기한 문서를 작성하고 넘어갈 수는 있을 것이다.
주목되는 것은 핵 실험을 감행하고 유엔 안보리 제재까지 받고 있는 북한이 자못 당당한 태도를 보이는 데 비해 오히려 미국은 사태를 수습하는 데 급급한 모습을 보이는 점이다. 동북아 정세를 5년 이상 불안하게 한 제2차 북핵 위기를 발생시킨 북한의 새로운 핵 개발 의혹이 확실한 고급 증거에 입각하지 않았고, 대북 강경 일변도의 경직된 정책이 오히려 북한의 핵 물질 보유와 핵 실험까지 초래하게 하여 미국의 대북 협상력이 위축된 데 그 원인이 있다. 쇠뿔을 바로잡으려다 소를 죽인 격이니 수세에 몰린 것이다.
정부의 대북 관망정책 또는 북핵-남북관계 연계정책의 장래도 불투명해졌다. 현 국면이 미국이 북한의 체면을 살려주는 차원에서 북한이 미국의 체면을 살려줄지를 결정하는 쪽으로 전환되고 있는데 정부는 미국의 대북 협상에만 기대를 걸고 있기 때문이다. 핵 문제의 진전 여부를 가릴 주도권은 북한이 가지게 되었고, 미국은 북한과의 협상 타결에 열중하고 있다. 따라서 정부가 보다 엄격한 상호주의에 입각하여 남북관계를 전면 재검토한다는 이유로 남북관계를 관망만 하고 있으면, 북한은 자연히 1994년 제네바 합의 때처럼 남한을 무시하면서 미국과 협상을 타결하여 경제적 부담만 남한에 넘기려 할 것이다. 정부의 대북 협상력 제고 방안 마련이 시급하다.
한편 북·미 협상이 실패하면, 정부는 경제난에 처한 북한이 남북관계를 파국으로 몰고 가는 선택은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낙관론에 의거, 미국과 공조하여 대북 압박에 나설 것이다. 문제는 이때 북한이 이에 굴복하기보다는 오히려 한반도 정세를 긴장국면으로 몰고 갈 모험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는 데 있다. 이는 가뜩이나 어려운 한국 경제를 곤경에 밀어넣을 수도 있다. 따라서 정부는 실용외교를 대북관계에도 적용하여 북한의 비핵화시 남북경협에 응한다는 수동적인 정책보다는 국가안보와 경제적 실익 증진을 위해 호혜적인 남북경협을 추진하여 북한의 비핵화를 적극적으로 유도하는 것이 현명하다. 미운 상대라도 말썽 피우는 것을 그저 방관하기보다는 잘 통제·관리하는 것이 실용 아닌가.
홍현익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