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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문이 만난사람] 6·25전쟁 당시 1사단장 백선엽 장군

    [김문이 만난사람] 6·25전쟁 당시 1사단장 백선엽 장군

    톨스토이가 쓴 명작 ‘전쟁과 평화’를 잠시 기억해본다. 마지막 부분이다. 주인공 안드레이 청년이 죽어가면서 ‘시베리아의 하늘도 파랗구나’라고 읊었다. 평화로운 파란 하늘을 진작 봤으면 전쟁을 할 일도 없을 텐데 죽어갈 때 누워서 하늘을 보니 ‘왜 피 흘리면서 전쟁을 했을까’라는 물음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6·25전쟁은 왜 했을까. 평화를 위해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했고, 세월이 지난 지금도 눈물겹도록 아프게 하는 역사를 왜 만들어야 했을까. 참으로 비통하고 영원히 기억을 할 수밖에 없는 우리 민족의 큰 상처이기에 해마다 6월이면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한다. 1950년 6월 25일 아침 7시였다. 젊은 장교의 일성은 이랬다. “사단장 각하, 전방에서 적이 전면적으로 침공해 왔습니다. 개성이 대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개성은 벌써 점령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서울과 개성 등 전방을 지키는 보병 제1사단 작전참모 김덕준 소령의 숨가쁜 목소리를 들은 것은 당시 백선엽 1사단장이다. 우리 역사에서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을 알리는 제1보였다. 백선엽 장군은 시흥에 있던 육군보병학교에서 10일 전부터 3개월 과정의 고급간부교육을 받고 있던 중 급거 귀대하여 1사단을 지휘했다. 이후 낙동강까지 후퇴한 1사단은 한국군 부대 중에서 유일하게 미1군단에 배속돼 지원 나온 미군 2개 연대와 함께 경북 칠곡의 다부동 전투를 치렀다. 전투 중 한국군 병력의 후퇴와 무단이탈이 심해지자 함께 다부동을 지키던 미군 27연대장 마이켈리스(Michaelis) 대령이 “전선 좌측의 한국군 부대가 무단 이탈하고 있다.”며 다급하게 전황을 알려왔다. 백선엽 장군은 후퇴하는 국군을 막으며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다. 저 사람들(미군)이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이럴 순 없다. 내가 앞장설 테니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도 좋다.”며 싸울 것을 호소했다. 이후 1사단은 평양 입성을 가장 먼저 했다. 백선엽 장군은 최근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라는 제목으로 6·25 전쟁 당시 1128일의 기억을 책으로 펴냈다. 6·25전쟁 얘기만 나오면 누구보다 또렷이 기억하는 살아 있는 역사로 여긴다. 6·25전쟁 61주년을 앞두고 지난 20일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관에서 백선엽 장군을 만났다. 6월이어서 그런지 강의를 해 달라는 손님들이 분주히 드나들었다. 약속 시간보다 20분 뒤에야 자리에 마주 앉았다. 1920년생이면 우리 나이로 92살. 그런데도 전쟁의 기억은 분명했다.. 차 한 잔을 마시더니 백 장군이 “고향이 어디요.”라고 물었다. 제주도라고 답을 드렸다. 그러자마자 나오는 얘기는 이러했다. “제주도 무척 많이 갔지. 6·25때 모슬포에 보충대가 있었어. 16주 동안 교육을 시키고 전쟁터에 보냈거든, 그래 육군 제1 훈련소야. 20살 전후의 청년들 10만명 정도가 훈련을 받았어, 내 동생(백인엽 장군)이 훈련소장도 했고. 태풍도 많이 왔어. 미군부대에서 지원 받은 천막을 치고 훈련했지. 하루에 상륙함정(LST) 두 척이 오고 가면서 훈련병들을 실어 날랐어. 그 병사들이 전쟁터에 많이 죽었어.” 백 장군의 눈이 잠시 감긴다. 그들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 전쟁상황에서 지금의 5~6주 교육보다 더 긴 16주 교육을 했던 이유에 대해 물었다 . “미군의 2차대전 방식을 그대로 따랐거든. 미군은 100개 사단이 있었는데 대부분 16주 동안 훈련을 받고 전쟁터에 보내졌어. 2차대전때…. 제주도 훈련소는 일제때 썼던 비행장이야, 그러니까 일본군들이 중국의 난징(南京) 폭격을 위한 중간 기지였지. 훈련소에는 미군 고문관들이 많았어.” 백 장군은 왜 제주에 자주 갔을까. “내가 육군참모총장을 했었거든. 훈련소에 물이 부족했어. 그걸 해결하기 위해 LST나 미군 비행기를 이용해서 여러 번 갔어. 아마 수십 차례 될걸. 또 동생이 1년동안 훈련소장으로 있었거든. 장도영 장군도 훈련소장을 했었지.” 백 장군은 잠시 4·3사건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1948년 4월 3일이야. 내가 부산 3여단 참모장을 했어. 제주 관할이니까 부대 시찰차 갔었지. 그때는 제주읍이야. 4월3일 아침에 비행기를 타려고 하는데 김익열 연대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가 왔어. 김달삼(金達三)이 이끄는 폭도들이 제주지역 11군데 지서를 습격했다고 말야.” 잠시 관련 자료을 들여다본다. 김달삼은 사회주의 혁명가로 제주 4·3 사건을 주도한 남조선로동당원이다. 그의 본명은 이승진이며, 고향은 대구. 일본에서 중학교와 대학을 나왔다. 1945년 1월 일본에서 강문석의 딸 강영애와 결혼했으며 김달삼이란 이름은 원래 강문석이 쓰던 가명이다. 1946년 말 제주도 대정중학교 사회과 교사로 재직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쳤다. 그는 교사로 재직 중에 남로당 대정면 조직부장을 맡았으며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책이자 군사부 책임자가 됐다. 화제를 다시 돌려 6·25 전쟁때 제1보를 보고한 김덕준 소령에 대해 물었다. “그날 아침 7시였어. 지금도 그 목소리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지. 전화를 받는 순간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북한이 탱크와 전투기를 갖고 있는거 알았거든. 전쟁을 대비해야 한다는 것도 수차례 얘기했고…” 백 장군은 이 대목에서 “이승만 대통령도 미군에게 북한의 남침 예상을 얘기했고 나도 미군 고문단과 만날 때마다 전투기와 탱크, 대포를 달라고 수차례 말했다.”고 술회했다. “우리야 그때 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지. 미군에게 그렇게 여러번 얘기해도 귀담아 듣지 않았어. 희생을 줄일 수도 있었는데 말야. 북한군은, 나중에 노획문서를 보니 깨소금까지 준비할 정도로 매우 치밀하게 전쟁을 계획했어.” 백 장군이 얘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북한군이 왜 6월 25일을 택했는지 알 수 있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북한군은 남한에서 먹을 것이 많은 계절인 6월부터 9월까지를 정했지. 3개월이면 부산까지 싹 쓸어버릴 작정이었어. 이 시기는 들판에 가면 먹을 것들이 많거든. 전쟁에서 먹거리는 매우 중요해. 북한은 추수때까지 전쟁을 끝낼 계획을 짰어.” 그렇다면 우리 군사들은 무엇을 먹고 싸웠을까. “낙동강까지 후퇴하면서 농협창고에서 쌀을 얻었고 밭에 가면 파와 배추가 있었지. 그걸 먹었어. 또 우리 선량한 아주머니들, 국민들이 갖다주는 음식도 먹었어. 아주 훌륭한 분들이야. 다부동 전투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도 우리 주민들이 갖다주는 음식이 있었기 때문이지.”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북진할 때는 어땠을까. “김일성 군대는 낙동강에서 완전히 녹았어. 북진을 하면서는 시장에서 먹을 것을 사 왔고 군에서 나오는 건빵을 먹었지. 고지 전투에서는 배가 고파 이탈하는 군인들도 더러 있었어. 북진할 때는 하복을 입었는데 나중에 동복으로 갈아 입었고…. 북한 주민들이 우리를 보더니 많이 환영했어. 먹을 것도 주고….” 백 장군은 평북 운산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과 맞닥뜨린다. “중공군은 장개석 군대 출신들의 최정예 부대야. 일본군과 10년을 싸운 군사들이었지. 전쟁경험이 아주 많아. 그런 군사 100만명이 압록강을 넘어와 매복을 하고 있었으니 우리 군이 당할 수밖에 없지. 그래도 우리 1사단을 덜 당했어. 운산 일대에 중공군 30만명이 매복하고 있다는 것을 하루 전에 알 수 있었지. 하루 밤새 싸우다가 도저히 안 되더라구. 결국 후퇴하고 말았지만….” 그러면서 백 장군은 북한군의 변화상에 대해 여러 번 강조했다. “남북한은 여전히 휴전 상태이며 두 세대가 지나는 동안 북한은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 120만명의 지상군과 20만명의 특공대를 갖고 있다.”면서 “지난 61년 동안 북한은 청와대도 습격하고 천안함을 폭침하고 연평도를 포격하는 등 별 장난을 다했다.”고 말했다. “우리 젊은이들이 경계를 잘해야 돼. 대부분 고등학교 이상 출신들이 군대를 가잖아. 자원이 아주 훌륭해요” 백 장군은 군사영어학교 출신이다. 전체 110명이었는데 지금 만나는 동기들은 겨우 15명 내외에 불과하다. 건강이 어떠냐고 했다. “아픈 데 없어. 병원도 안 가. 동기들과 만나 옛날 얘기하는 재미로 살고 있어.” 맥아더 장군이 얘기했다.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 백 장군은 “너무 오래 살았어.”하면서 껄껄 웃는다. 편집위원 km@seoul.co.kr >> 백선엽 그는 누구인가 1920년 평안북도 강서군 덕흥리에서 태어났다. 1940년 3월 평양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교사로 재직하다가 만주 봉천(奉天) 군관학교에 진학하면서 군인의 길을 걸었다. 1942년 12월 제9기로 졸업하고 견습군관을 거쳐 1943년 4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했다. 해방 직후에는 잠시 조만식 선생의 비서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1945년 2월 월남했다. 이후 1945년 12월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학했고, 1946년 2월에 임관했다. 그해 1월 창설된 국방경비대에서 제5연대장을 맡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국방경비대가 정식으로 국군으로 재편되면서 제5연대장과 육본 정보국장을 거쳐 1950년 4월에 개성을 관할하는 국군 1 보병사단 사단장(당시 계급 대령)으로 부임했다. 1951년 겨울에는 지리산의 빨치산 소탕을 위한 ‘백(白) 야전사령부’를 구성했으며 이 사령부를 모태로 이듬해 4월에는 한국군 최초로 근대화된 2군단을 창설했다. 1952년 7월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된 후 군 훈련체계의 개혁, 보급체계 개편, 상이군인들에 대한 복지 향상 등에 힘썼다. 이때 10개 상비사단 창설(11~20사단), 10개 예비사단 창설 등을 추진했다. 퇴역 후에는 외교관 생활을 한 뒤 교통부 장관을 지냈다. 대한민국 최초의 원수계급에 해당하는 예우를 받고 있다.
  • 백선엽 “깨소금까지 준비한 북한군 6월 25일 도발한 것은”

    백선엽 “깨소금까지 준비한 북한군 6월 25일 도발한 것은”

    지금도 눈물겹도록 아프게 하는 역사를 왜 만들어야 했을까. 참으로 비통하고 영원히 기억을 할 수밖에 없는 우리 민족의 큰 상처이기에 해마다 6월이면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한다. 1950년 6월 25일 아침 7시였다. 젊은 장교의 일성은 이랬다. “사단장 각하, 전방에서 적이 전면적으로 침공해 왔습니다. 개성이 대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개성은 벌써 점령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서울과 개성 등 전방를 지키는 보병 제1사단 작전참모 김덕준 소령의 숨가쁜 목소리를 들은 것은 당시 백선엽 1사단장이다. 우리 역사에서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을 알리는 제1보였다. 백선엽 장군은 시흥에 있던 육군보병학교에서 10일 전부터 3개월 과정의 고급간부교육을 받고 있던 중 급거 귀대하여 1사단을 지휘했다. 이후 낙동강까지 후퇴한 1사단은 한국군 부대 중에서 유일하게 미1군단에 배속돼 지원 나온 미군 2개 연대와 함께 경북 칠곡의 다부동 전투를 치렀다. 전투 중 한국군 병력의 후퇴와 무단이탈이 심해지자 함께 다부동을 지키던 미군 27연대장 마이켈리스(Michaelis) 대령이 “전선 좌측의 한국군 부대가 무단 이탈하고 있다.”며 다급하게 전황을 알려왔다. 백선엽 장군은 후퇴하는 국군을 막으며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다. 저 사람들(미군)이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이럴 순 없다. 내가 앞장설 테니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도 좋다.”며 싸울 것을 호소했다. 이후 1사단은 평양 입성을 가장 먼저 했다. 백선엽 장군은 최근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라는 제목으로 6·25 전쟁 당시 1128일의 기억을 책으로 펴냈다. 6·25전쟁 얘기만 나오면 누구보다 또렷이 기억하는 살아 있는 역사로 여긴다. 6·25전쟁 61주년을 앞두고 지난 20일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관에서 백선엽 장군을 만났다. 6월이어서 그런지 강의를 해 달라는 손님들이 분주히 드나들었다. 약속 시간보다 20분 뒤에야 자리에 마주 앉았다. 1920년생이면 우리 나이로 92살. 그런데도 전쟁의 기억은 분명했다.. 차 한 잔을 마시더니 백 장군이 “고향이 어디요.”라고 물었다. 제주도라고 답을 드렸다. 그러자마자 나오는 얘기는 이러했다. “제주도 무척 많이 갔지. 6·25때 모슬포에 보충대가 있었어. 16주 동안 교육을 시키고 전쟁터에 보냈거든, 그래 육군 제1 훈련소야. 20살 전후의 청년들 10만명 정도가 훈련을 받았어, 내 동생(백인엽 장군)이 훈련소장도 했고. 태풍도 많이 왔어. 미군부대에서 지원 받은 천막을 치고 훈련했지. 하루에 상륙함정(LST) 두 척이 오고 가면서 훈련병들을 실어 날랐어. 그 병사들이 전쟁터에 많이 죽었어.” 백 장군의 눈이 잠시 감긴다. 그들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 전쟁상황에서 지금의 5~6주 교육보다 더 긴 16주 교육을 했던 이유에 대해 물었다 . “미군의 2차대전 방식을 그대로 따랐거든. 미군은 100개 사단이 있었는데 대부분 16주 동안 훈련을 받고 전쟁터에 보내졌어. 2차대전때?. 제주도 훈련소는 일제때 썼던 비행장이야, 그러니까 일본군들이 중국의 난징(南京) 폭격을 위한 중간 기지였지. 훈련소에는 미군 고문관들이 많았어.” 백 장군은 왜 제주에 자주 갔을까. “내가 육군참모총장을 했었거든. 훈련소에 물이 부족했어. 그걸 해결하기 위해 LST나 미군 비행기를 이용해서 여러 번 갔어. 아마 수십 차례 될 걸. 또 동생이 1년동안 훈련소장으로 있었거든. 장도영 장군도 훈련소장을 했었지.” 백 장군은 잠시 4·3사건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1948년 4월 3일이야. 내가 부산 3여단 참모장을 했어. 제주 관할이니까 부대 시찰차 갔었지. 그때는 제주읍이야. 4월3일 아침에 비행기를 타려고 하는데 김익열 연대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가 왔어. 김달삼(金達三)이 이끄는 폭도들이 제주지역 11군데 지서를 습격했다고 말야.” 잠시 관련 자료을 들여다본다. 김달삼은 사회주의 혁명가로 제주 4·3 사건을 주도한 남조선로동당원이다. 그의 본명은 이승진이며, 고향은 대구. 일본에서 중학교와 대학을 나왔다. 1945년 1월 일본에서 강문석의 딸 강영애와 결혼했으며 김달삼이란 이름은 원래 강문석이 쓰던 가명이다. 1946년 말 제주도 대정중학교 사회과 교사로 재직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쳤다. 그는 교사로 재직 중에 남로당 대정면 조직부장을 맡았으며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책이자 군사부 책임자가 됐다. 화제를 다시 돌려 6·25 전쟁때 제1보를 보고한 김덕준 소령에 대해 물었다. “그날 아침 7시였어. 지금도 그 목소리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지. 전화를 받는 순간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북한이 탱크와 전투기를 갖고 있는거 알았거든. 전쟁을 대비해야 한다는 것도 수차례 얘기했고?” 백 장군은 이 대목에서 “이승만 대통령도 미군에게 북한의 남침 예상을 얘기했고 나도 미군 고문단과 만날 때마다 전투기와 탱크, 대포를 달라고 수차례 말했다.”고 술회했다. “우리야 그때 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지. 미군에게 그렇게 여러번 얘기해도 귀담아 듣지 않았어. 희생을 줄일 수도 있었는데 말야. 북한군은, 나중에 노획문서를 보니 깨소금까지 준비할 정도로 매우 치밀하게 전쟁을 계획했어.” 백 장군이 얘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북한군이 왜 6월 25일을 택했는지 알 수 있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북한군은 남한에서 먹을 것이 많은 계절인 6월부터 9월까지를 정했지. 3개월이면 부산까지 싹 쓸어버릴 작정이었어. 이 시기는 들판에 가면 먹을 것들이 많거든. 전쟁에서 먹거리는 매우 중요해. 북한은 추수때까지 전쟁을 끝낼 계획을 짰어.” 그렇다면 우리 군사들은 무엇을 먹고 싸웠을까. “낙동강까지 후퇴하면서 농협창고에서 쌀을 얻었고 밭에 가면 파와 배추가 있었지. 그걸 먹었어. 또 우리 선량한 아주머니들, 국민들이 갖다주는 음식도 먹었어. 아주 훌륭한 분들이야. 다부동 전투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도 우리 주민들이 갖다주는 음식이 있었기 때문이지.”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북진할 때는 어땠을까. “김일성 군대는 낙동강에서 완전히 녹았어. 북진을 하면서는 시장에서 먹을 것을 사 왔고 군에서 나오는 건빵을 먹었지. 고지 전투에서는 배가 고파 이탈하는 군인들도 더러 있었어. 북진할 때는 하복을 입었는데 나중에 동복으로 갈아 입었고?. 북한 주민들이 우리를 보더니 많이 환영했어. 먹을 것도 주고?.” 백 장군은 평북 운산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과 맞닥뜨린다. “중공군은 장개석 군대 출신들의 최정예 부대야. 일본군과 10년을 싸운 군사들이었지. 전쟁경험이 아주 많아. 그런 군사 100만명이 압록강을 넘어와 매복을 하고 있었으니 우리 군이 당할 수밖에 없지. 그래도 우리 1사단을 덜 당했어. 운산 일대에 중공군 30만명이 매복하고 있다는 것을 하루 전에 알 수 있었지. 하루 밤새 싸우다가 도저히 안 되더라구. 결국 후퇴하고 말았지만?.” 그러면서 백 장군은 북한군의 변화상에 대해 여러 번 강조했다. “남북한은 여전히 휴전 상태이며 두 세대가 지나는 동안 북한은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 120만명의 지상군과 20만명의 특공대를 갖고 있다.”면서 “지난 61년 동안 북한은 청와대도 습격하고 천안함을 폭침하고 연평도를 포격하는 별 장난을 다했다.”고 말했다. “우리 젊은이들이 경계를 잘해야 돼. 대부분 고등학교 이상 출신들이 군대를 가잖아. 자원이 아주 훌륭해요” 백 장군은 군사영어학교 출신이다. 전체 110명이었는데 지금 만나는 동기들은 겨우 15명 내외에 불과하다. 건강이 어떠냐고 했다. “아픈 데 없어. 병원도 안 가. 동기들과 만나 옛날 얘기하는 재미로 살고 있어.” 맥아더 장군이 얘기했다.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 백 장군은 “너무 오래 살았어.”하면서 껄껄 웃는다. 편집위원 km@seoul.co.kr
  • [한국戰 전사자 유해발굴] “전우 잃은 기억 떠오를까 한국 방문 주저했죠”

    [한국戰 전사자 유해발굴] “전우 잃은 기억 떠오를까 한국 방문 주저했죠”

    모든 한국전쟁 참전용사는 자신의 공훈을 자랑하고 싶어 하고, 자신이 피 흘려 싸운 한국을 방문하고 싶어 할까. 18일(현지시간) 미국 버지니아 비에나시에서 만난 미국인 참전군인 앨 오티즈(82)는 그것이 또 하나의 편견임을 일깨워 줬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한 지 61년째를 맞은 지금까지도 당시의 기억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었다. 적탄에 사랑하는 전우를 잃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자신의 공격에 적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전쟁의 비극을 논하는 것은 애당초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의 모습이 웅변했다. 61년 전 오티즈는 텍사스 앨파소에 사는 평범한 21세의 청년이었다. 넉넉지 못한 집안 형편 탓에 그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모자 가게 점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이 그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그는 1950년 11월 강제 징집명령을 받는다. 심경이 어땠을까.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죠.” 그는 솔직했다. 오티즈는 루이지애나에서 기초 훈련을 거친 뒤 1951년 5월 일본 홋카이도에 배치됐다. 한국의 추운 날씨에 적응하기 위한 혹한 훈련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해 12월 그는 인천항을 통해 처음 한국 땅을 밟게 된다. 한국군과 유엔군, 북한군과 중공군이 38선 부근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때였다. “불확실성과 두려움, 그런 감정이 지배적이었어요.” 그는 그때 감정을 그렇게 표현했다. 오티즈는 미 45보병사단 179연대 1소대 소대장으로 강원도 철원의 ‘포크찹 힐’(255고지) 전투에 배치됐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고지의 모양이 포크찹이라는 요리를 닮아서 붙은 별명이었다. 이름은 익살스러웠지만, 그곳은 아군과 적군이 빼앗고 빼앗기기를 거듭한 가장 격렬한 전장 중 하나였다. 오티즈 소대는 중공군과 북한군의 협공을 받았다. “북한군은 사납고 잔인했어요. 총도 없이 호미 같은 것을 들고 우리한테 돌진하기도 했죠.” 중공군은 인해전술이었다. “마치 개미떼 같았죠. 수백명이 밀고 올라왔어요. 우리는 대포와 수류탄으로 맞섰어요. 특히 수류탄이 효과가 컸어요. 중공군도 나무로 된 수류탄을 던졌는데 우리는 그걸 다시 주워서 되던지기도 했죠.” 오티즈는 “한번은 중공군 포로를 잡고 보니 12살 정도밖에 안 되는 소년이어서 깜짝 놀란 기억도 있다.”고 했다. 실탄이 떨어진 양측 사이에 육탄전이 벌어지는 것도 예사였다. 오티즈는 검지와 중지로 적의 눈을 찌른 적도 있고 칼로 적의 목을 벤 적도 있다고 했다. 전쟁은 해맑은 청년을 야수로 바꿔 놓았다. “처음엔 중공군을 미워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곁에 있던 전우가 죽는 것을 보면서 피가 거꾸로 솟구쳤죠. 점점 그들을 증오하게 됐어요.” 그는 1952년 7월 박격포 파편으로 중상을 입고 후방으로 후송됐고 샌프란시스코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다시는 전쟁터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는 1953년 5월 전역한 뒤 참전군인에 대한 정부 지원으로 텍사스주립대에 들어갔고, 국무부에서 일하게 되면서 버지니아로 이사했다. 그는 결혼해서 1남3녀를 뒀다. 그에게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지 물었다. ‘한국이 엄청나게 발전해서 놀랐다.’는 답변을 겨냥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한숨과 함께 나온 그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한국에 먼저 다녀온 참전용사들은 한국이 엄청나게 발전해서 뉴욕같이 변했다고 했어요. 하지만 나는 한국에 가고 싶지 않았어요. 사랑하는 전우들을 잃은 기억이 떠오를까 봐 두려웠어요. 내가 이끌던 40명 중에 33명이 전사했죠. 그것은 너무 고통스러운 기억이에요.” 그의 목소리가 떨렸고 눈에는 이슬이 비쳤다. 하지만 부상 미군 단체(Purple Heart)의 일원이었던 그는 이 단체의 방한 요청을 끝내 거부하지 못하고 2000년대 초 한국을 찾았다. 반세기 만이었다. 한국에 있는 사흘간 동료들은 판문점 등을 돌아다녔지만, 그는 서울을 벗어나지 않았다. 옛날의 기억이 떠오를까 두려워서였다. 그는 “같은 참전용사라도 나처럼 격렬한 전투에 참여한 사람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우기 힘들다.”고 했다. “61년이 지난 지금도 악몽을 꾸죠. 육박전에서 내가 찌른 적이 죽어가던 표정이 지금도 생생해요.” 그는 “우리가 그렇게 싸웠는데 남북한이 여전히 분단국가라는 점이 걱정”이라면서 “나는 북한이 다시 도발할 것으로 확신한다.”고 했다. 그는 “한국은 다른 나라와 다르게 도와준 것을 잊지 않고 계속해서 우리(참전용사)한테 뭔가를 보답하려 한다.”면서 여러 차례 고맙다는 말을 했다. 준비해 간 질문 가운데 차마 꺼내지 못한 게 있다. ‘다시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때도 기꺼이 참전하시겠습니까.’란 질문이다. 그 질문을 준비해 간 게 미안했고 부끄러웠다. 글 사진 비에나(버지니아)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 朴 “민생 심각” 李 “힘 써달라”… 55분 단독대좌 ‘금기’ 없었다

    朴 “민생 심각” 李 “힘 써달라”… 55분 단독대좌 ‘금기’ 없었다

    ‘2007년 이후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에서의 첫 공식 간담회’. 3일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와의 오찬 회동이 어떤 분위기였을까를 알려주는 바로미터라 할 수 있다. 의원회관 545호에 수십여명 기자들이 몰려들어 자리를 차지하자, 책상 쪽 자리에 앉은 기자에게 “제 자리인데 허락도 안 받고 그렇게 앉으셨어요?”라고 농담을 건네는 등 이날의 복장 만큼이나 밝은 표정이었다. 회동설명도 1시간 이상 이어졌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도 “굉장히 좋은 분위기에서 특사 활동 전반에 대해 보고를 받았다.”고 전했다. 이전과는 달리 대화 주제도 폭넓었다. 당 문제, 계파, 역할론 등까지 그간 금기시됐던 문제까지 망라한 점이 눈에 띈다. 이를 박 대표를 통해 공개한 것 역시 대화가 상당히 순조로웠음을 암시한다. 민생과 관련, “문제가 참 심각하다는 말씀을 드렸다.”는 대목도 주목할 만 하다. 대통령의 ‘성과’에 관한 것은 대통령 스스로 언급할 때가 아니면 참모진이나 측근들은 구체적으로 거론하기 어려운 부분으로 꼽힌다. 박 전 대표는 “물가는 많이 상승했고, 전셋값도 몇천만원씩 올랐다.”면서 청년실업, 고용, 중소기업 상생, 가계부채 문제에까지 조목조목 예를 들었다. 박 전 대표가 먼저 “친이, 친박 그런 말이 나오면 안 되지 않겠느냐.”고 한 것도 큰 변화다. 그간 이 대통령이 자주 쓰던 표현과 비슷하다. 박 전 대표는 실제적 문제는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인식아래 이 문제를 대해 왔다. 계파 문제에 상당한 의견 접근이 이루어지지 않았나 추론할 수 있는 대목이다. 북한 관련 상황에도 대화가 있었다는 것은, 국정 전반을 논의했다는 방증이 된다. 회동 이후 정치권은 박 전 대표의 역할론에 관심이 쏠릴 것으로 보인다. 박 전 대표가 ‘당과 나라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자 이 대통령은 “꼭 그렇게 힘써 달라.”고 화답했다. 당 안팎에서는 당장 새 지도부를 선출하는 전당대회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회동을 앞두고 이재오 장관과 청와대 참모진이 묘한 갈등을 빚은 것도 이런 분위기의 일단을 보여준다.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 일행은 정오쯤 오찬 회동을 시작해 1시간 25분가량 점심식사를 함께했다. 이 자리에서 특사 활동 전반에 대해 얘기를 나눈 후,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는 별실로 자리를 옮겨 오후 2시 20분까지 1시간 가까이 단독 회동을 했다. 앞서 이 대통령은 청와대 인왕실에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박 전 대표 일행에게 “특사단 고생했다. 고생 많았다.”라며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 악수를 청했다. 오찬 회동에는 박 전 대표를 수행했던 한나라당 권영세·권경석·이학재·이정현 의원과, 청와대에서 임태희 대통령실장·정진석 정무수석·천영우 외교안보수석·홍상표 홍보수석이 참석했다. 이지운·허백윤기자 jj@seoul.co.kr
  • [與 당권주자 인터뷰] (1) 남경필 의원

    [與 당권주자 인터뷰] (1) 남경필 의원

    “한나라당을 축구팀으로 보면 신주류가 공격수를 맡고, 구주류는 수비수와 골키퍼 역할을 해야 한다.” 한나라당 쇄신·소장파의 대표 주자로 꼽히는 4선의 남경필 의원은 31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차기 전당대회에서 신구 조화, 역할 분담 등을 통해 당이 강팀으로 거듭나야 한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다음은 일문일답. →‘7·4 전당대회’의 의미는.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같은 팀을 만들어야 한다. 역할 분담이 필요하다. 인위적 물갈이는 안 된다. →이재오 특임장관과 이상득 의원이 당의 ‘투톱 공격수’ 아닌가. -이제는 수비수나 골키퍼를 맡아야 한다. 이분들의 역할은 시간이 지날수록 약화될 수밖에 없다. 영향력을 발휘하려 들면 국민 뜻에 맞지 않고 당도 죽는다. (당을) 나가라 마라 하는 것도 옳지 않다. →구주류를 공격 라인에서 빼는 이유는. -국민들이 원하는 것과 정부와 당이 한 일이 다르다. 국민들이 원하지 않는 방향에서 열심히 했다. 세계 속에 당당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국민들의 고통과 불안을 해결하는 데는 미흡했다. →새로운 공격수에 누구를 세우나. -그동안 당 운영에서 배제됐던 쇄신파와 친박계 등 새로운 세력이 맡아야 한다. 새 지도부가 산토끼를 잡아 오고, 당을 운영했던 선배들은 집토끼를 관리하면 된다. →당의 최전방 공격수는 박근혜 전 대표가 제격 아닌가. -박 전 대표 혼자 뛰는 구조는 재미없다. 많은 사람이 함께 뛸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대선후보로서 박 전 대표는 집토끼와 산토끼를 모두 잡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산토끼를 잡아 올 당 대표를 뽑자는 것이다. 문제는 인물이 아니라 방향이다. →소장파가 당권을 거머쥘 가능성은. -높다. 또다시 ‘봉숭아학당 시즌2’라는 비판을 받을 수는 없지 않나. →스스로 최전방 공격수가 될 마음은. -젊은층을 바닥으로 내모는 청년 실업과 구조조정을 통해 양산된 40~50대 자영업자들의 몰락에 대한 답을 내놓은 정치 세력이 없다.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면에 나서겠다. →남원정(남경필·원희룡·정병국)은 소장파의 아이콘이지만 지난 10여년간 성장이 멈췄다는 지적도 있다. -키는 안 컸는지 몰라도 내공은 늘었다.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시대 흐름에 맞으면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뒷방에서 찬밥을 먹다 보니 시대 흐름이 오고 있다. →4·27 재·보궐선거 패배 후 소장파 역할에 대한 평가는. -초반에는 방향이 아닌 인물이 먼저 떠올랐기 때문에 오류가 있었다. 소장파 외 모두를 적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두언 의원의 불출마 선언을 계기로 인물 논쟁을 종식시키고, 방향 논쟁에 불을 지폈다. →현재를 ‘쪽팔리는 보수의 시대’로 평가했는데. -보수를 보수라 부르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표현했다. 국민들이 원하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면 이런 이념적 차이도 무의미해진다. →‘5·24 대북 제재안’에 대한 수정을 거론한 것은 이념 문제 아닌가. -정상회담이나 6자회담과 같은 고도의 정치행위를 천안함 폭침에 대한 사과 없이 하는 것은 반대한다. 하지만 경제 문제와는 별개라는 것이다. 남북 경제협력 단절로 우리 기업이 고통받고, 소비자가 불이익을 받는 구조라면 바꿀 필요가 있다. →국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북한인권법도 정치적인 이슈 아닌가. -통과시켜야 한다. 북한인권법을 처리하면서 인도적 지원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장으로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처리 전망은. -자신 있다. 야당의 요구를 모두 들어 줄 생각이다. 야당은 매국노가 아니다. 대변하는 계층과 이유가 있다. 정부를 설득해 요구를 받아 주면 된다. 글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사진 이호정기자 hojeong@seoul.co.kr
  • [17일 TV 하이라이트]

    ●KBS특선월드(KBS1 밤 12시 35분) 한 노부부의 아름답고 애틋한 사랑이 얽혀 있는 중국 충칭의 ‘사랑의 돌계단’이 만들어진 사연을 추적한다. 19세의 나이에 10년 연상인 과부 쉬차오칭과 사랑에 빠진 청년 류궈장은 그녀와 산속으로 숨어든다. 외부와 단절된 세상에서 목숨을 이어가는 길은 모든 것을 직접 자기 손으로 해결하는 방법뿐이었는데…. ●애플 캔디걸(KBS2 오후 3시 35분) 친구들과 초코볼을 먹고 있던 찌루는 혼자 다 먹으려 하다 그만 초코볼이 목에 걸려 쓰러지게 된다. 그렇게 저승에 도착한 찌루에게 저승사자가 나타나 그동안의 죄목을 대며 지옥으로 데려가려 한다. 발버둥치는 순간 위티의 도움으로 살아나게 된 찌루는 집으로 돌아가 곰곰이 생각하며 새사람이 되기로 결심한다. ●뽀뽀뽀 아이조아(MBC 오후 4시 10분) 뽀미언니와 뽀이뽀이, 그리고 미스터 세븐과 함께하는 뽀뽀뽀 동산에는 오늘 어떤 신나는 일이 있을까. 꼭꼭이와 함께하는 ‘다칠 줄 몰랐어’에서는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숲 속 친구들을 만나러 떠난다. 재미있는 이야기 속에 숨어 있는 꼭꼭이도 함께 찾아본다. 또 엄마랑 책놀이터에서 신비랑 함께 낚시하러 출발해 본다. ●기자가 만나는 세상 현장 21(SBS 밤 8시 50분) 지난해 11월, 북한은 포 170여발을 대한민국 최북단 섬 연평도에 무차별적으로 쏟아부었다. 6개월이 지난 지금,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해병대 아들과 전우를 잃은 그때 그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전사 해병 어머니의 눈물은 마르지 않고 있다. 연평도 포격이 그들에게 남긴 것은 무엇인지 집중 취재해 본다. ●명불허전(OBS 밤 10시) 진정한 문학의 가치를 찾기 위해 ‘명불허전’이 대한민국 최고령 현역 소설가인 이호철씨를 초대해 그의 60년 문학인생 이야기를 듣는다. 이호철 작가는 지금까지 밝히지 않았던, 그의 소설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준 인물인 전혜린, 김승옥, 김지하 등과 얽힌 비화를 공개한다. 또 그의 특별한 ‘요가’ 비법도 전격 공개된다.
  • “친절한 한국인에 감동… 평양도 가보고 싶어”

    “친절한 한국인에 감동… 평양도 가보고 싶어”

    “한국은 아직 춥다. 아침 기온 영상 4도의 날씨에 캠핑을 했다.” 자전거로 세계일주 중인 일본인 오구치 료헤이(31)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한국에서의 여정을 이렇게 소개했다. 그가 일본 하카타항을 출발한 것은 지난 18일. 부산항에 도착해 550㎞를 달린 지 7일 만인 지난 24일 서울에 도착했다. ●삼성·LG 등 제품 보며 한국 영향력 실감 그는 대학 졸업 후 건설회사를 다니다 세계 사람들과 만나 문화를 접하고 견문을 넓히고 싶다는 생각에 3년 반 만에 회사를 그만뒀다. 자전거로 세계를 달리는 여행은 벌써 세 번째. 2007년 일본과 타이완을 1년간 일주한 데 이어 2009년부터 약 2년간 호주, 뉴질랜드,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 15개국을 돌았다. 이번에는 4년 동안 아시아·유럽 등의 100개 국가 총 10만㎞를 달릴 계획으로 장도에 올랐다. 바로 옆 나라인 한국을 먼저 오고 싶었지만 출발할 때마다 겨울이어서 자전거로 여행을 하기에는 너무 추운 날씨였다. 그는 “이렇게 영향력이 큰 나라가 일본 바로 옆에 있었는데도 이제서야 왔다.”면서 “다른 나라를 여행하면서 삼성, LG, 현대자동차 등 한국 제품을 보면서 한국은 늘 궁금한 나라였다.”고 말했다. 그에게 한국의 이미지는 ‘라이벌’이었다고 한다. 축구는 물론이고 도요타 vs 현대차, 파나소닉 vs 삼성 등 한국과 일본은 늘 경쟁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막상 한국에 와 보니 일본인에게 매우 친절한 한국 국민들에게 적잖이 감동했다. 서울에서는 올림픽공원에서 텐트를 치고 지냈는데, 물과 주스를 가져다 준 사람들도 있었다. “여행 중이라고 하니까 커피를 주거나 먹을 것을 주더라고요. 특히 식당에서 냉면을 먹을 때 가위를 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고 있었더니 친절하게 잘라 주고 설명해 줘서 내심 놀랐어요.” ●“남·북한 모두 평등하게 잘 살았으면” 그는 가고 싶은 곳으로 북한의 평양을 꼽았다. 북한과 일본은 국교 정상화가 되어 있지 않아 정부의 특별 허가를 받아야만 북한에 갈 수 있다. 등산을 좋아해서 백두산에 꼭 오르고 싶다고도 했다. “TV에서는 늘 미사일이나 김정일 독재정권 등 안 좋은 뉴스만 들었습니다. 직접 그곳에 가서 현지 사람들을 만나 보면 다르다는 것을 여행을 하면서 느꼈어요. 북한도 사람들을 만나 보면 다르지 않을까요?” 그는 남한과 북한이 갈린 것에 대해 “학교에서 배우기로는 원래 한 나라였는데 38도선으로 나뉘었다고 들었다.”면서 “같은 문화, 같은 언어인데 왜 분단이 됐는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깊은 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 나라였는데 남한은 풍족하고, 북한은 빈곤한 모습을 보면서 (통일이 돼서) 평등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오구치는 이번 여행을 준비하기 위해 일본에 일시 귀국했다가 이번 3·11 동일본 대지진을 겪었다. 비록 큰 피해가 없는 나가노현에 살고 있지만 진도 4 규모의 지진을 느꼈고, 식료품이나 물 등을 사재기하는 모습도 봤다. 그는 “가장 가까운 나라인 한국이 지원물자를 보내준 것에 감동받았다.”면서 “특히 독도, 과거사 문제 등으로 한·일 관계가 어려울 때도 힘이 돼준 점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본이 지진 피해와 경제불황에서 이제 겨우 일어서려고 하고 있다는 점을 많이 알아 주었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그는 이번 여행부터 자전거 뒷바퀴에 ‘Around the world, Thank you for disaster of japan’(일본 지진에 도와준 전 세계에 감사드린다)라고 쓰인 팻말을 하나 달았다. 그는 “동일본 대지진을 계기로 세계가 힘을 모으고 도울 수 있는 계기가 돼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글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사진 손형준기자 boltagoo@seoul.co.kr
  • [현대차 노조 ‘일자리 대물림’ 논란 일파만파] “죽어가는 청년실업자 외면”

    [현대차 노조 ‘일자리 대물림’ 논란 일파만파] “죽어가는 청년실업자 외면”

    최근 현대자동차 노조가 직원 자녀에 대한 ‘특혜 채용’ 조항을 단체협약안에 포함한 데 대해 가장 큰 분노를 느끼는 이들은 청년 실업자들이다. 이번 현대차 노조의 결정이 정규직의 세습화를 낳으면서 구직난을 더욱 가중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국내 최초의 백수 단체인 전국백수연대를 이끄는 주덕한(42) 대표는 현대차 노조의 결정에 대해 “우리나라가 너무 세습을 좋아하는 것 같다.”며 말문을 열었다. 주 대표는 “현대차 노조는 북한이나 재벌도 세습을 하는 마당에 약자인 노조 조합원들은 혜택을 받으면 안 되느냐고 말하지만 국내 최고 수준의 연봉을 받는 현대차 직원을 약자라고 여기는 국민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의 대표적인 대규모 사업장이라는 현대차의 상징성을 감안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고 주 대표는 말한다. “현대차가 갖고 있는 사회적 비중에 따라 ‘일자리 세습’ 현상이 다른 대규모 사업장으로 확산될 수 있습니다. 다른 기업 노조원들이 ‘현대차도 하는데’라는 생각을 못 하겠습니까. 이 소식을 들은 전국의 수많은 백수의 좌절감이 이미 커지고 있는 이유입니다.” 울산 등 현대차 공장이 있는 지역에서 느끼는 ‘특혜 채용’에 대한 분노는 수도권보다 더 크다. 주 대표는 “울산 등에서는 ‘지역 젊은이들은 현대차 하청업체로 가고, 서울 사람들이 현대차 정규직으로 내려온다’고 말한다.”면서 “취업이 안 돼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이 속출하고 있는 현실을 외면한 조직 이기주의”라고 비판했다. 그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위해 힘쓰겠다는 현대차 노조의 주장에 대해서도 변명에 불과하다고 잘라 말했다. 주 대표는 “노조나 회사가 실제로 청년 실업 해소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반성해야 한다.”면서 “일부에서는 현대차에 대한 불매 운동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주 대표는 이어 “기업은 수익의 일부를 청년 실업 해소나 취업을 위한 재교육비 등으로 지원하고 정부는 다양한 이해 당사자들의 의견을 종합해 일자리 대안을 마련하는 사회적인 합의가 필요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北, 고위관리·軍도 세습

    북한 김정은 3대 세습에 이어 고위층에서도 2세 자제들이 군과 내각에서 고위직을 꿰차고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2일 김일성 주석 생일인 태양절(4월 15일)을 앞두고 상장 2명, 중장 5명, 소장 38명을 승진시키는 내용의 군 인사를 단행했다. 이번 인사에서 단연 눈에 띄는 인물은 상장(중장)으로 승진한 오일정(57) 당 군사부장. 그는 지난해 9·28 당 대표자회를 앞두고 소장에서 중장으로 승진한 지 6개월 만에 상장을 달아 초고속 승진을 했다. 오일정은 북한의 대표적인 혁명 1세대인 오진우 전 인민무력부장의 아들로, 지난해 군사부장에 올랐다. 김 위원장의 이복동생인 김평일과 남산학교, 김일성종합대학 동기동창으로 어려움을 겪을 법도 했지만 ‘오진우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군부에서 대외업무를 주로 맡았다. 군사부장은 노농적위대, 붉은청년근위대, 교도대 등 예비병력을 총괄하는 자리로 민간 무력에 대한 교육과 관리를 통해 김정은 후계 기반을 다지는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앞서 지난달 조선중앙은행 총재로 임명된 백룡천(49)은 백남순 전 외무상의 셋째 아들이다. 49세의 젊은 그가 내각 사무국 부장에서 중앙은행 총재로 초고속 승진을 한 배경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백남순은 1999년부터 2007년 사망할 때까지 8년간 북한 외교의 간판이었다. 백 총재는 지난해 당 대표자회에서 당 정치국 후보위원에도 이름을 올려 정치적 위상도 함께 올랐다. 이날 군 인사에서 황병서 부부장도 6개월 만에 상장으로 승진했다. 올해 62세로 당 조직지도부에서 군사 분야를 담당하고 있으며 김정일의 최측근으로 알려졌다. 리용철·리제강 제1부부장이 사망한 데 이어 올해 박정순 제1부부장까지 폐암으로 사망해 조직지도부 고위직이 공석인 만큼 승진 가능성도 거론된다. 또 허영호 인민보안부 부부장 등을 중장으로 승진시켰다.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특파원 칼럼] 김정은 맞는 중국 최고지도부에/박홍환 베이징특파원

    [특파원 칼럼] 김정은 맞는 중국 최고지도부에/박홍환 베이징특파원

    요즘 베이징의 한국과 일본 기자들은 매주 화·목·토요일이면 서우두(首都)공항에 눈을 집중시킨다. 도착 게이트에 진을 친 기자들의 카메라는 평양발 고려항공 정기편에서 쏟아져 나오는 인물들을 담기에 바쁘다. “오늘은 또 누가 들어오려나….” 한동안 뜸했던 북한 노동당과 군부 인사들의 중국행이 빈번해졌다. 3월에만 인민무력부 안영기 외사국장, 노동당 국제부 대표단, 인민군 대표단, 최태복 최고인민회의 의장, 리철 합영투자위원회 위원장 등이 베이징에 모습을 드러냈다. 생각은 온통 ‘그’에게 쏠려 있지만 아직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로 확정된, 김 위원장의 3남 김정은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다. 그의 방중이 임박한 듯하다. 북한 당·정·군 인사들이 베이징을 들락거리는 것은 그 징후로 읽힌다. 이미 중국 최고지도부도 김정은을 맞을 ‘마음의 준비’는 끝낸 상태다.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은 김정은이 지난해 9월 노동당 대표자회의에서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에 올라 김 위원장의 후계자로 확정된 뒤 곧바로 저우융캉(周永康) 정치국 상무위원을 보내 축하하고, ‘새 지도부’를 공식초청했다. 후 주석은 지난 2월 방북한 멍젠주(孟建柱) 국무위원 겸 공안부장을 통해서도 재차 김정은을 초청했다. 세간에서는 김정은이 7일 열릴 최고인민회의에서 국방위 제1부위원장에 올라 15일 태양절(김일성 주석 생일) 행사를 주관한 뒤 방중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점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중국 최고지도부가 김정은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를 공식초청한 상태에서 시기는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핵심은 방중의 성격과 내용이다. 김 위원장은 김일성 주석의 후계자로 확정된 뒤 혈맹인 중국을 첫 순방 대상으로 삼았다. 1983년 9월의 일로 그의 나이 41세 때이다. 당시 중국에는 최고지도자 덩샤오핑과 후야오방(胡耀邦) 공산당 총서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덩은 79세, 후는 68세였다. 덩과 후는 혈맹국 후계자인 김 위원장을 직접 만나 양국의 ‘관심사’를 논의하는 등 극진하게 대했다. ‘개혁·개방의 총설계사’인 덩샤오핑과 개혁파의 거두였던 후야오방이 그때 김 위원장에게 ‘중국의 길’을 설명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때 그들이 김 위원장에게 “개혁·개방만이 살 길”이라며 중국과의 동행을 적극 권고했다면 북한은 지금 어떻게 됐을까. 곧 방중할 28세의 김정은은 아버지뻘인 후 주석, 원자바오 총리 등과 만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5세대 지도자로, 내년 말 이후 자신과 보조를 맞출 58세의 시진핑(習近平) 부주석과도 상견례를 할 것으로 예상된다. 후 주석이나 원 총리는 모두 후야오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후 주석은 후야오방이 터를 닦은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에서 성장했고, 원 총리는 후야오방의 비서를 지냈다. 아들과 ‘제자’들이 30여년 만에 선대의 인연을 잇는 셈이다. 덩샤오핑이 시 부주석의 아버지인 시중쉰(習仲勛)을 적극 신임했던 것을 감안하면 김정은과 시 부주석의 인연도 만만치 않다. 30여년 만에 ‘리메이크’되는 ‘영화’를 기다리면서 원작과는 다른 에필로그를 기대하는 것은 배우들에게 너무 과도한 부담을 지우는 것일까. 김정은 역시 방중하게 되면 아버지인 김 위원장과 마찬가지로 중국 최고지도부의 극진한 영접을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최고지도부 9명을 모두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김정은이 자신을 위해 뻥 뚫린 창안제(長安街)를 달리며 희열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중국의 변화상에서 북한의 살 길을 찾아내야 한다. 김정은을 맞는 중국의 4세대, 5세대 지도부도 30여년 전 2세대 지도부가 시도하지 못했던 결단을 내려야 한다. 핵을 무기삼아 문을 굳게 닫아 걸고는 결코 오래 지탱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깨우쳐 줘야 한다. 그것이 진정으로 혈맹을 위하는 길이다. stinger@seoul.co.kr
  • [열린세상] ‘위험사회’ 대책이 필요하다/이성규 서울시립대 교수·한국장애인고용공단 이사장

    [열린세상] ‘위험사회’ 대책이 필요하다/이성규 서울시립대 교수·한국장애인고용공단 이사장

    카이스트에서 또 한명의 학생이 자살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2개월 전 실업계고교 출신 학생이 입학 1년 만에 성적 문제 등을 고민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앞날이 구만리 같은 청년이 생때같은 목숨을 버릴 때 겪었을 고통과 불안, 좌절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대책이다. 자살은 전염성이 강하다. 한 사람이 자살하면 주위의 6명이 심각한 영향을 받는다는 조사 보고가 있다. 카이스트는 실업계교 학생의 자살 이후 ‘자살사고 방지 대책위원회’와 ‘새내기 지원단’ 운영 등 재발 방지 대책을 세웠으나 연이어 또 다른 자살이 발생, 매우 당혹스러워한다고 한다. 군대 내 자살도 마찬가지다. 올해 1월 국방부 ‘군 사망사고 현황’에 따르면 2009년 군내 사고로 사망한 군인은 113명으로 2008년에 비해 21명이 줄어들었지만 자살로 사망한 군인은 75명에서 81명으로 6명이 늘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국방부가 2009년 1월부터 81억원의 예산을 편성하여 ‘자살예방 종합시스템’을 정립해 시행하고 있으나 군 자살자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단 자살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지난 26일은 천안함 침몰 1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생사를 넘나드는 충격적인 사건 이후 살아남은 생존자 대부분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고 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전쟁, 고문, 자연재해, 사고 등의 심각한 사건을 경험한 후 사건 기억을 통해 계속적인 재경험을 하게 돼 고통을 느끼며,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심신을 소비하는 질환이다. 신체적 부상보다 후유증이 더 무서운 정신적 상처(Trauma)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별다른 조치가 없다는 보고가 있다. 또한 이들이 국가 유공자로 등록된다고 해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우울증 등의 심리질환은 보훈병원에서 지원대상이 아니다. 더군다나 지방보훈병원은 정신, 심리질환자 치료를 위한 전담 병실이나 전문인력, 상담 클리닉조차 없다. 천안함 침몰과 같은 대규모의 국가적 재난과 지진, 해일, 홍수와 같이 공포스러운 천재지변은 이제 언제라도 발생할 수 있는, 우리 곁에 상존하는 위험으로 자리 잡고 있다. ‘위험사회’의 저자인 사회학자 울리히 베크는 “도처에 잠복해 있다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위험, 그 위험에 대한 불안”이 현대와 다른 시대를 구별 짓는 특징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한국 사회가 ‘아주 특별하게 위험한 사회’임을 지적하고 있다. OECD 국가 중 최고의 자살률, 북한의 위협, 그리고 압축적인 경제성장을 통한 무한경쟁의 사회, 안전 불감증으로 인한 대형사고와 사건 등 개인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반복적인 위험이 우리 사회를 ‘아주 특별하게 위험한 사회’로 몰아가고 있음은 사실인 듯하다. 더군다나 이러한 위험에 대해 ‘시간이 흐르면 좋아질 거야.’, ‘난 괜찮겠지.’와 같은 근거 없는 낙관주의의 팽배는 체계화되고 조직화된 대책과 예방을 더디게 만들고 있다. 여론을 의식한 일시적 미봉책은 이제 만성화된 생존위협에 대한 공포 치료엔 역부족인 듯하다. 미국 등 선진국에선 대형 참사 피해자들을 상대로 심리치료 시스템이 구축돼 있다. 2001년 뉴욕의 아메리칸항공 여객기 추락사고 때는 피해자들을 위한 심리상담팀이 꾸려져 생존자와 유가족을 도왔다. 9·11 테러 때도 정신과 의사 수백명이 자원봉사팀을 꾸려 생존자와 목격자에 대한 치료에 나섰다. 자살률을 줄이는 데 성공한 국가들은 모두 자살 예방을 정규 교과과정에 포함시켜 자살 예방과 생명 사랑에 대한 교육을 하고 있다. 우리 사회도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위험에 대한 시민 교육이 생애 초기부터 활성화되어야 한다. 재난의 생존자뿐 아니라 만성화된 불안과 공포를 경험하고 있는 국민들에 대해 의료진의 체계적인 조율과 조정이 이루어지는 지역사회 내 공공의료 네트워크를 가동해야 할 것이다. 연평도 포격 사건이 발생한 지 벌써 4개월이 흘러가고 있다. 일본 지진에 대한 인도주의 물결속에 연평도 주민들이 지금 어디서 어떻게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가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 [WHO&WHAT] 독재자의 만찬

    [WHO&WHAT] 독재자의 만찬

     ‘민주’(民主)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오늘날, ‘독재’(獨裁)란 말은 듣는 것만으로도 유쾌하지 않은 단어다. 다른 사람의 운명을 멋대로 좌우하고 과장된 논리나 종교와 다를 바 없는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하는 독재에 대한 거부감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한국인에게도 ‘독재’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길거리로 뛰쳐나와 군사정권에 맞서 밑으로부터의 민주화를 일궈냈다는 자부심,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최장수 독재체제(북한)와 마주하고 있는 현실 등 우리는 독재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에 몰아닥친 ‘재스민 혁명’에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수십년간 그래온 것처럼 아랍권의 민주화 운동이 ‘찻잔 속 태풍’이 될 것이라는 전망은 이미 빗나갔다. 권력을 지키고자 하는 자들과 권리를 찾고자 하는 이들의 싸움은 점점 격해지고 있고, 이젠 국제사회의 개입도 본격화됐다.  가상 인터뷰 ‘WHO&WHAT’의 이번 주인공은 역사 속 인물들이다. 이름 자체가 공포가 되고, 금기어가 됐던 이들. 현대 정치사를 피로 물들이며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악몽’ 그 자체였던 네 명의 독재자들을 만찬장에 초대해 그들이 생각하는 재스민 혁명과 ‘독재’ 그리고 ‘민주화’에 대해 들어봤다. 사회:독재돼지 나폴레옹(소설 ‘동물농장’의 주인공)  식당으로 들어서는 네 사람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살아생전 서로 배신의 총부리를 겨눴던 사이도 있었고, 서로 ‘사상적 동지’로 돈독한 관계를 자랑하던 이들도 있었다. 그들 사이에 가로놓인 반세기의 시간도 서먹한 분위기를 가시게 하지는 못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이 사전에서 바로 튀어 나온 듯한 이들은 같은 자리에 마주앉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마뜩치 않아 보였다.  콧수염을 기른 사람이 셋, 군복을 입은 사람이 셋이었다. 앞에 이름표를 놓을 필요조차 없이 얼굴만으로도 누구인지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 이오시프 스탈린, 마오쩌뚱, 사담 후세인. 인류 또는 자기의 민족을 위해 떨쳐 일어났다는 대의명분을 앞세웠지만 결국엔 자기자신의 안위와 비뚤어진 욕망으로 가득찬 이미지만 역사에 남긴 공통점을 가진 이들. 한 사람만 있어도 공포를 느끼게 할 만한 20세기 정치가 네 명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날 만찬 자리는 현재 국제정세를 감안하면 상당히 늦은 감이 있었다. 시대적 차이는 있지만, 각자의 전성기 시절 국내외 정치에 대해서라면 남부럽지 않을 역량을 과시했던 이들에게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강타하고 있는 ‘쟈스민 혁명’에 대해 묻지 않는다면 과연 누구한테 물어야 한단 말인가. 더구나 만찬의 주제가 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독재’인데 말이다.  네 사람의 만남에 적합한 사회자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민주화 전문가나 학자는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이들을 통제하기엔 늘 역부족이기 마련. 결국 메이너 농장의 절대권력자 나폴레옹(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에 등장하는 독재자 돼지)에게 어려운 역할을 부탁했다. 1945년 처음 세상에 알려진 이후, 지금까지 농장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는 나폴레옹의 능력이라면 참석자들도 특별한 불만이 없을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오웰이 묘사한 것처럼 나폴레옹은 ‘사람이 돼지인지, 돼지가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능수능란하게 만찬장의 분위기를 이끌어갔다. 화제는 자연스럽게 본인들의 얘기와 현재 상황을 비교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오늘의 메뉴●  애피타이저 - 당신은 떳떳한가  메인 디시1 - 당신의 국민은 왜 당신을 버렸을까  메인 디시2 - 당신은 부패했나  디저트 - 당신의 사랑은 진짜였나      <애피타이저> 당신은 떳떳한가.   →나폴레옹 인간 세상 최고의 독재자들을 한 자리에서 만나게 돼 기쁘다. 나야 동물 100여마리 거느리는 수준이지만, 당신들은 수백만명에서 수억명에 이르는 사람의 목숨을 한 손에 좌우했던 사람들이지 않은가. 실제로 죽이기도 많이 죽였고…. 당신들보다 훨씬 잔혹하거나 무자비한 사람도 없진 않지만, 20세기 이후 독재자들 중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다는 점에서 선정됐다는 점을 밝혀둔다. 우선 당신들이 지금 이 테이블에서 떳떳하게 고개를 들고 있을 수 있는 자신감의 근원부터 묻고 싶다.   히틀러 정당성을 묻는거냐. 어디까지나 국민들이 원해서 적합한 위치를 맡았을 뿐이다. 내가 총통이 됐을 때 4500만명이 투표에 참가했고 그중 3800만명이 찬성했다.(히틀러는 1934년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죽은 직후 1시간 만에 대통령직과 총리직을 통합하고 최고사령관 직까지 합쳐 그 자리에 오른 다음 투표를 실시했다.) 국민들이 내가 이루고자 하는 바에 자발적으로 동참해서 내가 그 위치에 올랐다는 증거다. 정당성의 측면에서 과거의 왕들과는 평가부터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왕 중에서도 네로나 헤롯 같은 사람이 있었고, 나름 성군(聖君)으로 존경받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그들은 왕으로 태어나 왕으로 살면서 그 권력을 조금 더 쓰느냐 마느냐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스탈린 난 볼셰비키 혁명을 주도했고 성공시킨 레닌이 직접 지목한 정당한 후계자다.(실제로는 레닌이 그의 위험성을 경고한 편지를 공개하려고 했지만, 스탈린이 의도적으로 막았다. 뿐만아니라 스탈린은 레닌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여러 장의 사진과 역사기록을 조작했다.) 그루지아 출신이라는, 심지어 러시아어를 잘 하지 못한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범 러시아 지역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데 대해 지금까지 의심해 본 적이 없다. 국민의 지지가 없으면 독재고 뭐고 간에 아예 정권을 잡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최소한 총과 칼로만 쿠데타를 일으켜서 최소 몇 년 이상 유지한 사례가 얼마나 될지 지난 100년 간을 꼽아봐라. 처음엔 그렇게 잡더라도 국민에게 비전을 제시하지 않으면 유지가 안되는 게 정치다.   →나폴레옹 그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이 역사에 악인으로 이름을 남긴 것 자체가 불가사의한 일이다. 듣다보니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가 요새 연설을 통해 계속 반복하고 있는 논리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그 얘기는 나중에 이어가기로 하고, 최근 전 세계 최고 관심사인 ‘쟈스민 혁명’에 대해 들어봤나.   마오 내용이야 어떻든 오랜만에 가슴이 뛰는 기분이다. 지난해 12월 한 청년이 분신을 하면서 벌어진 일이 불과 석달 만에 이렇게까지 커지다니. 벌써 두 나라(튀니지·이집트)의 정권이 뒤집혔고 리비아, 시리아, 바레인도 내전이 한창이지 않은가. 난 ‘공산당’을 알리고 ‘혁명 동지’를 모으기 위해 10만여명을 이끌고 1934년 370일 동안 1만 5000㎞를 걸어야했다.(마오는 12개의 지방을 지나고 18개 산맥과 24개 강을 건넜다. 마오의 짐은 두 장의 담요와 홑이불, 외투 한 벌, 책 몇 권 뿐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고도 15년 이상 지나서야 중국을 세울 수 있었다. 고작 석달이라니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지금 같은 세상이라면 보다 완벽한 혁명을 꿈꿀 수 있을 것 같다.   히틀러 거기엔 100% 동감한다. 요즘처럼 다양한 수단이 있었으면 내가 연설을 일부러 석양무렵에 하면서 다양한 무대장치를 동원하는 수고는 덜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이런 아이디어는 히틀러의 선전장관이었던 요제프 괴벨스의 능력이라는 얘기가 정설이다.) 아! 물론 난 연설 대신 다른 방법으로 국민들을 설득해야 했겠지만 말이다.   후세인 참석한 다른 사람들은 딱 와닿지 않을 수도 있는데, 내 입장에서 쟈스민인지 뭔지는 정말 충격적인 일이다. 아랍에는 ‘하마’라는 게 있다. 1980년대 초반에 시리아의 하마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민란이 일어났는데, 정부는 마을 전체를 지도에서 지워버리다시피 했다.(2만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시리아 정부는 그 숫자를 본보기 삼아 일부러 널리 공포했다.) 그 이후 ‘하마’는 절대권력에 대항하는 반항에 대한 응징을 뜻했다. 아랍권에서 조금이라도 목소리를 내던 반 체제 인사들은 힘을 잃었고, 일반인들은 조용해졌다. 그게 지금까지 아랍권을 지탱해온 버팀목이었다. 왕정이든 사회주의 체제든 광범위하게 사용돼 왔다. 물론 무력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국영TV와 신문을 장악하고, 시골에서 도시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공략해 세뇌시켰다. 나름 치밀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한 순간에 무너질 줄은 솔직히 상상도 못했다.   →나폴레옹 후세인 당신과 카다피가 유난히 비슷한 점이 많다고 들었는데.   후세인 카다피와 나는 소위 말하는 ‘역경의 자식들’이다. 전통적인 아랍사회가 혈통과 명문을 높이 떠받드는 점이 가장 큰 타도의 목표가 됐다는 점에서 일면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다. 아랍에서는 아버지의 이름이 중요시되지만 혹시 내 아버지나 카다피의 아버지 이름을 아는가? 뭐 사실 이 만찬장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말이다. 우리는 기존 사회의 합의나 계급은 무시하고, 아랍의 전통적인 가치들이 권력에 장애가 된다면 과감히 지워버렸다.  <메인디시1> 당신의 국민은 왜 당신을 외면했나.   →나폴레옹 슬슬 본격적인 식사로 들어가보자. 여러분은 다들 수십년에 걸쳐 자기 나라는 물론 주변국가, 나아가 전 세계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앞서 스탈린이 말한 것처럼 독재는 총칼 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많은 국민의 열광적 지지를 받는 지도자의 위치에 오르는 게 선행돼서 가능했다. 그런데 끝까지 초심을 유지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인지 통치스타일이 변하면서 서서히 독재자가 돼 가는 공통점이 나타났다. 말은 자꾸 바뀌고, 점점 잔혹해지면서 다른 사람의 말을 안듣게 되었는데.   스탈린 국민들에게 제시했던 내 목표는 무조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적이었다. 어떤 수단을 써서든 달성하는 것이 최우선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모두가 내 뜻에 복종해야 했다. 의견이 다른 사람들은 틈만 나면 배신하려 하고, 권력을 잡기 위해 나를 밀어내려고 했다. 심지어 공장 노동자들도 내 목표량에 미달했다. 충분히 열심히 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5개년 경제계획을 세워 모든 농민들이 국가 소유의 조합에 가입하게 했다. 그러나 대부분 농민들은 재산을 내주는 대신 땅을 불태우고 가축을 죽였다.) 결국 나는 그들을 피로 다스릴 수 밖에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가까운 사람들조차 나에게서 등을 돌리는 것처럼 생각됐다. 잠도 잘 오지 않았다. 나에게 있어 가장 큰 기쁨은 적을 정하고, 만반의 준비를 한 다음 철저하게 복수를 하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었다.   히틀러 난 독일 국민에게 약속한 것을 대부분 다 지켰다.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정책에는 본인의 증오 이외에 ‘독일 국민들에게 잘 통할 것’이라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고, 실제로 주효했다.) 솔직히 내가 세운 모든 계획 중에 딱 하나 틀린 게 있었는데, 바로 전쟁에 졌다는 것이다. 난 거창하게 세계정복 같은 공약을 내세우지 않고, 우리가 받을 수 있을 걸 받자고 얘기했을 뿐이다. (히틀러의 전쟁은 세계를 상대로 한 전쟁이라기보다는 영국과 프랑스 양강으로 구분돼 있던 유럽 내에서 독일의 정당한 위치를 인정해 달라는 권리찾기에 가까웠다. 세계를 상대로 한 전쟁이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히틀러 본인이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우리 독일 사람들은 1933년부터 2차대전이 본격화되기 이전, 내가 제3제국을 이끌던 시기를 역사상 가장 행복했던 시기로 기억한다.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지지만 않았다면 난 절대로 여기 다른 ‘실패한 독재자’들과 함께 앉아있지 않을거다.   마오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공통된 적이 필요했다. 사회를 뒤집어 엎으려면 당연히 원동력이 필요하고, 그 힘은 밑에서부터 나온다. 히틀러는 그것을 외부(유대인)에서 찾았고, 나와 스탈린은 노동자·농민을 앞세워 인민의 적을 만들어내는 수법을 썼다. 그런데 정권을 잡고 공공의 적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 당연히 사회적 결집력과 추진력이 떨어지지 않겠나. 난 1950년대 중반에 무조건 억누르기만 했던 스탈린과는 다른 길을 가려고 했다. 지식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도록 허용했는데 금방 사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졌다. (마오는 헝가리에서 검열 완화 이후 폭동이 일어난 것을 보고 ‘모든 의견’을 허용하는 대신 ‘공산당의 입지를 굳히는 의견’만을 허용했다.) 고작 6주간 ‘백화제방·백가쟁명’(쌍백) 정책을 펼쳤는데 불온성을 이유로 잡아들인 사람이 100만명이 넘었다.   →나폴레옹 뭐 결국엔 자기가 옳다는 생각을 계속해서 주장했고, 국민들이 그에 부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폭압적인 독재자들로 될 수 밖에 없었다는 논리인 것들 같은데. 국민들이 언제 돌아서는 것을 느꼈나.   스탈린 독재에 대한 대중의 영합은 독재권력이 국민들이 원하는 것을 주기 힘들어지면 힘을 잃기 시작한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 일반 국민들에게 정치적인 이데올로기가 가장 중요했던 적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정권이 제시하는 조건이나 삶의 질에 만족하면 그 권력을 지지하지만 그게 안 되면 외면하는 게 국민들의 속성이다. 내 영향력이 다소간 줄어든 것도 ‘산업화’라는 당면과제가 생각만큼 잘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도 큰 문제는 아니다. 영향력이 떨어지면 그걸 보완하기 위해 총과 칼이나 숙청, 강제노동 등을 동원하면 충분히 되돌릴 수 있다. (스탈린은 꾸준한 생산력 증대를 원했고, 만족하지 못하면 계속해서 무력을 사용했다.) 이런 것이 독재자와 왕의 가장 큰 차이점이자 독재자에게 불리한 점이다. 독재자는 국민들이 실망하면 이를 되돌리기가 군주보다 훨씬 힘들다. 엘리자베스1세 말기에 영국 국민의 생활수준은 역사상 최저였지만, 아무도 그런 사실은 기억하지 않는다.   히틀러 이번 아랍혁명이 ‘빵의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고 들었다. 식량값 폭등 같은 단편적인 시각에서 볼 수는 없는 문제다. 원래 독재자는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명확한 미래상을 제시하고 조금이라고 가까이 가고 있다고 믿게 해야 한다. 정권을 지지하는 국민들 입장에서 ‘어제보다 조금 나아진 오늘’은 별 의미가 없다. 독재자가 “5년 후에 우리가 이 정도 수준에 살고 있을 것”이라고 제시하면 반드시 거기에 가 있어야 한다. (히틀러가 뚜렷하게 정책에 실패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표방하는 제3제국이 명확한 수치를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게 이뤄지지 않으면 위기가 찾아오는 거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표방했던 독재정권들이 망가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조금씩 나아지는 건 왕정 아래서도 얼마든지 가능한데, 정권을 잡으려는 독재자들은 국민들에게 “우리 모두 잘 살 수 있다.”고 소리친다. 결국 삶에 찌들어 있는 대중의 지지를 받아 순식간에 정권을 장악할 수 있지만, 결코 그들이 약속한 삶은 만들어낼 수 없다.   후세인 아랍권의 문제가 심각한 건 사실이지만, 구조적으로 ‘복지독재’라는 희한한 형태가 있어 국민들이 모두 돌아서는 시기를 간단히 전망할 수는 없다. 사우디아라비아나 쿠웨이트 같은 왕권독재 국가에서는 독재의 정도가 다른 나라보다 심하면 심하지 덜하지 않은데, 국민들의 삶은 다른 나라보다 풍요롭다. 일자리도 주고 의식주 걱정도 없다. 대학도 보내준다. (아랍의 왕조 체제에서는 가진 자의 수가 극히 제한돼 있고, 이들은 인자한 독재자의 모습을 띤다. 이들은 국부를 독점하는 만큼 그것을 나눠주는 방식에 관심이 많다.) 그럼 이 상황을 뒤집어서 민주화가 되고 완전한 자본주의 국가가 되면 어떻게 되느냐. 가진 자의 수가 늘어나면 전혀 혜택을 받지 못하는 절대 빈곤층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민주화라는 것은 결국 허상이다. 위와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고 가정했을 때 민주화를 원하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난 가진 자의 입장에 설 기회가 생긴다.”는 생각만 한다. 결국 ‘기회’라는 게 어느 순간 현재 생활에 대한 불만을 뛰어넘느냐가 관건이 아닐까 싶다.  <메인디시2>당신은 부패했나.   →나폴레옹 ‘권력은 부패하고,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고 영국의 역사학자 로드 액튼 경이 말했다. 독재와 관련된 경구 중 가장 유명한 말이 아닐까 싶다. 흔히들 독재자는 부패하기 때문에 망한다고 생각한다. 정말 부패가 독재의 종착점인가.   히틀러 진정한 목표가 있는 독재자는 부패할 시간이 없다. 난 채식주의자에 담배조차 피우지 않는다. 가끔 맥주를 마시기는 하지만, 내 뒤를 아무리 캐봐라. 내가 부정적인 일에 연루됐다는 어떤 증거도 발견하지 못할 거다. 심지어 난 평생 두 여자(의붓여동생의 딸인 겔리 라우발, 최후를 같이 했던 에바 브라운)만을 사랑했고, 한명이 죽은 후에야 다른 사람을 만났다. 만약에 지금 세상처럼 청문회가 있다면 난 무조건 100% 무사 통과다. 오로지 위대한 제3제국을 세우겠다는 목표 이외에 개인적인 욕심 따위는 없었다. 제3제국이 부패해서 망했다고 말할 수 있나. 난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스탈린 나 역시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한다. 사람들이 나를 ‘금욕주의자’라고 부를 정도로 난 개인적으로 즐기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내 딸 스베틀라나가 나중에 쓴 책을 보면 알 수 있지만, 내 가족들조차도 화려한 옷이나 식사는 꿈도 꾸지 못했다. (스탈린은 부인을 잃은 후 스베틀라나를 사실상 ‘어린 퍼스트레이디’로 대접했고, 자식 중 유일하게 애정을 쏟았다.) 오로지 대업을 완수하는 것만이 내가 평생을 생각했던 유일한 관심사였다. (얄타 회담에서 스탈린을 만난 윈스턴 처칠의 부관들은 스탈린에 대해 “지금까지 만나본 중 가장 철두철미하고 명석한 지도자”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나폴레옹 최근 아랍권의 가장 큰 문제는 본인은 물론이고 부인이나 아들, 측근들이 부패한 경우가 많다는 것인데 후세인 당신도 자식 간수에 실패한 대표적인 사례 아닌가.   후세인 독재자는 외로운 존재다. 누군가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앉았으면, 언젠가 자신도 똑같은 일을 당하지 말란 보장이 없다. 결국에 믿을 사람은 가족 밖에 없다. 그런데 가족은 통제가 불가능하다. 각자 욕심을 부리게 마련이고, 절대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대부분 용서 받는다. (후세인의 큰아들 우다이는 공식 행사에서 사람을 총으로 쏘아 죽이거나 싸움을 벌이는 등 난폭했다. 정신박약아라는 설도 있다.) 튀니지의 벤 알리, 이집트의 무바라크, 리비아 카다피 모두 가족이 문제였고 자식한테 권좌를 물려주기 위해 무리수를 뒀다. 결국 ‘부패’의 진정한 원인은 독재자의 개인적인 성향보다는 독재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1인 중심적인 체제에서 찾아야 한다.   마오 아무리 독재라도 권력은 최소한의 시스템이라도 갖추고, 그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 권력을 사유화하고 개인적으로 대놓고 이용하기 시작하면 그게 부패한 거다. 난 솔직히 주지육림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방탕한 생활을 즐기기도 했지만, 최소한의 기구를 갖고 있었고 그걸 이용해서 모든 것을 움직였다. (그의 문화혁명을 앞장서서 주도했던 홍위병은 결국 스스로 부패하고 갈라져 사라져갔다.) 간단히 말해서 사회를 바꾸기 위한 목표를 갖고 조직이 사회를 지배하는 것이지 개인이 가진 것을 오로지 지키려는 목적으로 조직을 운영한다면 그건 독재자 중에서도 가장 저질이라고 생각한다. 카다피나 북한의 김일성, 저기 앉아있는 후세인이 대표적인 인간들이다.  <디저트>당신의 사랑은 진짜였나   →나폴레옹 곧 무너질 것 같았던 카다피가 계속 버티고 있다. 심지어 쟈스민 혁명이 곧 사그라들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쟈스민 혁명은 어디까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나.   히틀러 국민을 장악하는 수단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내가 연설을 통해 국민을 사로잡았다면 카다피한테는 TV로 보여지는 강력한 모습과 반미 감정몰이가 결정적인 힘을 줬다. 그런데 최근 유행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그걸 뛰어넘을 수 있다. 결국엔 모든 것이 정보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왜 저렇게 폐쇄정책을 고집하겠나. 밖에서 국민들이 정보를 얻기 시작하면 바깥세상이 더 낫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러면 지금까지 주장해 온 모든 것들이 허사가 된다. 결국 정보가 공개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럴듯한 꼬임이나 세뇌만으로 할 수 있던 독재의 시대가 끝났다. 결국 총과 칼을 통한 억압만이 가능하다는 얘기인데, 이번에 혁명이 실패해도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니까 나중에 또다시 내란이 일어나는 건 불을 보듯 뻔하다. 한번 떨쳐 일어났던 기억은 생각보다 오래가는 법이다.   마오 그래도 중국은 꽤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리비아가 여러 개의 부족이라서 마지막 한 고비를 넘을 원동력이 부족한 것처럼 중국 역시 민족이 다양하고 워낙 지역도 넓기 때문에 하나로 모으는 추진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중국은 아직 폭발적인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국민들이 뭔가를 추가적으로 기대할 여지가 남았다는 얘기다. 특히 연안지역만 개방해서 충분히 통제가 가능하도록 하고 조금씩 열어가면서 개방과 통제라는 두가지 토끼를 모두 잡았다는 점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반면 북한 같은 경우에는 특정지역만 열고 통제하는 게 불가능하다. 결국에 경제적 몰락을 극복하기 위해 체제붕괴를 피하기 힘들다.   후세인 내가 보기엔 미국이 얼마나 나서느냐가 관건이다. 군사적, 외교적으로 영향력이 절대적이니 말이다. 여기 있는 네 사람 모두 미국과는 좋은 감정이 아니겠지만, 내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솔직히 대량 살상무기라는 말도 안되는 이유를 달아서 억지로 쫓아낸 것 아니냐. 이번에도 이집트에는 개입 안하고, 리비아에만 개입하려고 꼼수를 쓰는 모습이라니…. 결국 다른 나라의 민주화를 자기 입맛대로 골라서 이용하겠다는 것 밖에는 안된다. 민주화니 어쩌니 떠들지만 실제로 국제사회를 독재하고 있는 건 미국이다.   →나폴레옹 이제 마무리할 시간이다. 철저하게 자기자신의 논리로 무장한 당신들에게 물어보나 마나겠지만, 당신들은 정말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하나.   스탈린 1994년 김일성이 죽었을 때 눈물을 흘리던 평양 시민들을 기억하나. 그 원조가 바로 나다. 내 시신을 보겠다고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수백명이 깔려 죽었다. (영하의 날씨였지만 방부처리된 시신을 보기 위해 몰려든 조문객의 일부가 바리케이드에 부딪히거나 밟혀서 목숨을 잃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마오 내가 죽은 후 숱한 변화 속에서도 난 중국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존재다. 톈안먼 광장에 걸려있는 내 초상화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마오가 죽은 1976년 그의 문화혁명으로 쌓인 불만이 폭발한 톈안먼 사건이 일어났다. 1981년 그의 후계자 덩샤오핑은 마오의 문화혁명을 ‘내란’으로 규정했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도움말 주신 분들 임지현 한양대 사학과 교수 김한지 한국외대 중동연구소 책임연구원 최 진 대통령리더십연구소 소장 류한수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장대익 동덕여대 교양학부 교수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 김정은 새달 7일 국방위 부위원장에?

    다음 달 7일 열리는 북한 최고인민회의에서 김정은이 당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혹은 제1부위원장에 오를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로써 김정은 후계 체제 구축 3단계 가운데 2단계가 완성된다는 분석이다. 과연 김정은은 지난 6개월간 추가로 권력을 승계할 만큼 충분히 입지를 쌓은 것일까.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 교수는 “김정은은 공안기구를 장악하는 등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름의 지지 기반을 확대해 왔다.”면서 “당 우위의 노동당 규약 개정은 후계 작업이 체계적이고 안정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군부나 평양시민들의 특이 동향이 포착되지 않고 있으며, 최근 방북한 멍젠주 중국 공안부장으로부터 북한의 권력 승계에 대한 지지 발언도 받아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당 조직 비서로 인사권에 개입해 왔고 김정일에게 올라가는 보고를 검열하는 통제 체계도 구축했다.”면서 “리영호와 김정각이 군부 핵심 측근으로 남아 김정은 보위에 나서고 있어 누구도 도전하기 어려운 형국”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6개월 동안 김정은의 뚜렷한 업적이 없는 것은 큰 맹점이다. 김진하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김정일의 공식 행사에 수행을 하거나 코멘트를 하는 정도”라면서 “딱 떨어지는 성과도 인민들에게 보여준 것이 없었다.”고 말했다. 군부 장악력도 아직 부족하다. 김정은에게 대장 칭호를 주기는 했지만 아직 혁명 1.5세대 등 구세대가 군을 장악하고 있고, 김정은이 자기 사람을 만들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한 대북 소식통은 “당·정·군에 40대 전후의 테크노크라트를 수혈하는 등 엘리트 중심으로 세대교체가 일어나고 있다.”면서도 “그러나 상명하복이 확실한 북한 정권에서 정책 결정까지 하기는 어렵다.”고 분석했다. 김정은의 입지가 아직 부족한 또 다른 이유는 아버지 김정일이다. 전문가들은 현 상황을 김정일·김정은 공동 정권으로 보고 있다. 대북 소식통은 “김정일은 권력에 대한 집착이 큰 권력광”이라면서 “김정일의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돼 유고 상황에 이르지 않는 한 권력 분점을 쉽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런 점들을 종합해 볼 때 4월 최고인민회의에서 김정은이 당 국방위 부위원장 직함을 받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는다. 이조원 중앙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군의 쿠데타인데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다.”면서 “서른살의 젊은 청년에게 대장 계급장을 준 것도 무리였는데 6개월 만에 국방위 부위원장 자리까지 주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후계 구도 안착의 핵심은 김정은 본인의 성과에 달려 있다. 사상 강국(김일성), 군사 강국(김정일)에 이어 김정은은 경제 강국을 만들어야 한다. 전영선 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연구교수는 “장마당 등 통제 불능의 경제 문제가 본격화되면 후계 구도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면서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얼마나 보여줄 것인지가 후계 체제 확립의 관건”이라고 진단했다.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힙합 래퍼로 변신 김정호 자유기업원 원장

    힙합 래퍼로 변신 김정호 자유기업원 원장

    책 속에 파묻혀 지낸 40여년, 경제학과 법학 박사학위 타이틀에 무어 아쉬운 게 있을까. 더욱이 이순(耳順)이 멀지 않은 연배에, 자유시장 이념의 선봉장이 되겠다고 작정한 김정호(55) 자유기업원 원장이 힙합 래퍼로 변신했다. 7년째 이 ‘액션 & 싱크 탱크’를 꾸려 오고 있는 그가 마이크를 잡고 리듬에 몸을 맡긴 이유가 궁금했다. 김 원장은 3일과 10일 두 차례 인터뷰에서 “딱딱한 메시지를 전하는 데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라며 “미래 동력인 젊은이들이 사상적으로 방황하고 목표를 상실한 것 같아 이들에게 올바른 시각을 심어줄 수단을 찾은 결과가 힙합”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변신 자체도 놀라움이지만 지난 1월 프로젝트그룹 ‘김 박사와 시인들’이 출시한 앨범에 담긴 3곡의 가사는 의미심장하다. 트로트계 ‘이 박사’가 힙합계의 ‘김 박사’로 현신했다고나 할까.‘개미보다 베짱이가 많아’란 노래에는 ‘일자리를 달라고만 하니…공짜는 없어…독립문이 왜 서대문에 있는 줄 알아?…김정일은 벌써 북한 팔아먹어’ 등 신랄한 어조로 가득하다. 3분 50초 뮤직비디오에는 강의 도중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이내 힙합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고 손동작을 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차 안에선 리듬에 맞춰 손가락으로 ‘탭’(tab) 하고 어깨를 들썩인다. 김 원장은 “주요선진20개국(G20)에 안주하지 않고 G5로 진입하기 위해 젊은이들이 단순한 저항을 뛰어넘어 긍정적인 변화의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주 연세대, 중앙대, 숭실대에서 랩을 곁들여 2~3시간 강연했고 인터넷TV를 통해 ‘프리스타일 코리아’ 강연을 계속하고 있다. 다음은 일문일답. →자유기업원부터 소개해 달라. -액션 & 싱크 탱크다. 보통 싱크 탱크라고 하는데 우리는 생각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행동까지 담보하는 싱크 탱크라 보면 되겠다. →표방하는 바는. -한민족은 굉장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 그런데 본격 발휘된 것은 대한민국에 들어와서였다. 보통 반만년 역사라고 하는데 대한민국 이전에는 그다지 잠재력이 발휘되지 못했다. 이걸 이어나가자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최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우리도 고래가 되자, 될 수 있다는 메시지 말이다. →그런데 왜 하필 랩인가. -강연으로 전달하려니까 몇 사람 안 되고 강연 끝나면 다 잊어먹고 그렇더라. 국민들의 마음에 직접 다가가 행동을 이끌어 내려면 감성에 호소해야 하는데 그 방법은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노래가 좋겠다, 해보자 했는데 노래를 잘 못하니까 노래 못하는 사람이 잘할 수 있는 노래가 랩이었다. 리듬감만 있고 조금 용감하면 되겠다 싶었다. 나처럼 나이 많은 사람이 랩을 한다면 관심을 많이 가질 것 같더라. 그런데 때마침 하드코어 랩으로 유명한 힙합 그룹 ‘거리의 시인들’ 리더 노현태씨가 도와주겠다고 나서 프로젝트 그룹까지 만들게 됐다. →그래도 뭔가 특별한 계기가 있었을 텐데. -2009년 5월 대학을 졸업한 딸이 ‘꿈꾸는 다락방’이란 책을 건네며 아빠가 꿈을 잃은 것 같다고 말해 충격을 받았다. 돌아보니 자유기업원에 다니는 직장인으로 그저 목표 없이 떠돌았다는 성찰을 하게 됐다. 그래서 ‘아침형 인간’으로 거듭나고자 했고 사회운동가로서 좌표를 다시 설정하게 됐다. 그 연장이 힙합인 것이다. →랩을 배우면서 재미있는 일 많았겠다. -힙합은 생각보다 빨리 배울 수 있어서 나도 놀랐고 젊은 친구들도 놀랐다. 지난 1월에 뮤직비디오를 18시간 걸려 촬영하는데 굉장히 추웠다. 바지를 갈아입을 일이 있었는데 젊은 친구들은 바지를 올리니까 바로 맨 다리가 드러나더라. 그런데 난 내복을 껴입고 있었다. 무지 창피했다. →주위의 반응은. -‘하던 일이나 잘하지.’ 하는 분들이 많다. 직원들도 ‘왜 저러나?’ 한다. →잘한 일이라고 보나. -아주 잘한 선택이라고 본다. 힙합을 하면서 젊어졌다. 몸뿐만 아니라 정신도. →앨범 수록곡을 소개해 달라. -‘개미보다 베짱이가 많아’는 젊은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내용이다. 대한민국이 얼마든지 세계 최고의 나라가 될 수 있는데 그렇게 되려면 우리가 바뀌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챔피언 한국’은 대한민국이 우리의 국호이고 1948년에 건국돼 63년 동안 이만한 성과를 거뒀으며 이 대척점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있다는 점을 알려주고 싶었다. →‘똥파리들’이란 곡에 거친 표현도 보이더라. -젊은이들에게 정신 차리라고 꾸짖고 싶었다. 악플만 달고 있지 말고 국가와 사회에 긍정적인 역할을 해달라고 주문하는 것이다. 스펙만 쌓지 말고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기업가 정신을 가져 달라고 주문했다. 사실 욕설에 가까운 내용도 있는데 원래 힙합이 욕설에서 시작한 것이다. 전혀 거리가 먼 사람이 그런 노래에 참여하는 게 부담스럽고 불편하기도 하지만 래퍼가 되려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3곡 모두 지상파 3사에서 계층 간 갈등 조장, 특정 정당 및 국가 언급 등을 이유로 방송 불가 판정을 받았다.) →젊은이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반항과 저항은 청년들의 특권이다. 생물학적 특권이기도 하고 도덕적으로 봐도 그렇다. 그런데 저항을 통해 무엇을 지향하느냐가 문제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미국의 반대편, 우리의 반대편을 지향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래서 북한과 비슷해지는 것을 진보라고 오해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걸 오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북한이나 중국 체제와 비슷하게 가는 것을 진보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있다면 위험하다. 지금 중동의 민주화 운동이 한창인데 이것이 이슬람 독재나 중국처럼 공산당 일당독재 비슷한 무엇을 꿈꾸고 있다면 진보가 아니다. →진보에 냉소하는 건가. -진정한 진보라면 김정일 정권을 제거하고 북한 인민에게 자유를 주는 진보를 꿈꿔야 한다. 우리 사회도 완벽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가야 한다고 꿈꾸는 것이 진정한 진보다. 내가 돈을 벌어서 남을 돕고 기업을 만들어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진보다. 그런데 남의 호주머니 털어 그걸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 것을 진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것은 도둑질이다. 내가 변해서 세상을 구하는 것이 진정한 진보이며 모든 사람이 그렇게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영국의 1940년대와 비슷한 구석이 적지 않다. 지식 지형이 완전히 왼쪽으로 기울고 있다. 예전에 남로당 지원을 받던 좌파가 아니라 자생적 사회주의자들이 생겨나고 그 여파로 ‘강남 좌파’란 말이 등장할 정도다. 이들이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달라고 국가에 생떼를 쓰게 만들고 이도저도 안 통하면 짱돌을 들라고 가르친다. 어쩌자는 것인가. 심지어 기업도 우파 싱크탱크를 외면하고 좌파에 돈을 갖다 받치고 있다. 이런 사상 지평을 바꾸고 싶다. →트위터에 ‘우파 문선대’란 비아냥도 있더라. -그런 지위를 내게 부여해 준다면 영광이다. →앞으로 활동 계획은. -랩을 2~3분 들려주고 젊은이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2~3시간짜리 강연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2017년까지 이런 활동을 계속할 것이며 언제든 어디든 달려갈 것이다. →왜 2017년인가. -차차기 대선이 실시되는데 그때까지 진정한 자유시장경제, 보수 이념을 표방하는 정권과 정부가 출범할 수 없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까지 진정한 보수로 보지 않는다는 얘기인가. -이 정부가 한번도 진정한 보수임을 표방하지 않았다. 늘 중도 보수라고 물을 타왔다. 그런데 사람들은 착각을 하고 잘못된 비판을 가하곤 한다. →젊은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은. -먼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나도 2009년 5월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사람 만나기 두려워하고 게으름 피우다 밤늦게 잠들곤 했던 내가 이만큼 달라질 정도로 인간의 잠재력은 놀랍다. 여러분의 잠재력을 지금 살리고 있나? 아니면 ‘잠 재’우고 있나? 그건 여러분 태도에 달려 있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강의를 묶은 ‘대한민국 이야기’(이영훈 지음)와 우리 사회의 집단주의 문화를 파헤친 ‘개인이라 불리는 기적’(박성현 지음)을 권한다. 임병선·강경윤기자 bsnim@seoul.co.kr ●김정호 원장 ▲1956년 서울 출생 ▲1979년 연세대 경제학과 졸업 ▲1988년 미국 일리노이대학 경제학 박사 취득 ▲2003년 숭실대 법학 박사 취득 ▲2009년 12월 인터넷방송국 ‘프리넷 뉴스’ 개국 ▲2004년~ 자유기업원 원장
  • 상업영화 닌자활극 들고 온 ‘하드보일드 장인’ 최양일 감독

    상업영화 닌자활극 들고 온 ‘하드보일드 장인’ 최양일 감독

    ‘하드보일드’(hard-boiled)는 장르가 아닌 스타일이다. 인물·사건을 군더더기 없이 비정하고 냉정하게 묘사한 소설·영화를 이른다. 그에겐 줄곧 ‘하드보일드의 장인’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악마 같은 사내로 변해 가는 재일교포 김준평의 삶을 그린 기타노 다케시 주연의 ‘피와 뼈’(2004)를 떠올린다면 와 닿을 터.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1993), ‘개 달리다’(1998) 등 ‘자이니치’(재일한국인)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 유명한 최양일(62) 감독이 한국을 찾았다. 17일 개봉한 블록버스터 닌자 활극 ‘카무이외전’을 들고서다. 1960년대 일본 전공투(전학공투회의의 줄임말. 1968~1969년 각 대학에 결성된 학생운동 조직) 세대에겐 바이블 같은 고전이라는 시라토 산페이의 동명만화를 원작으로 한 ‘카무이외전’은 17세기 에도시대가 배경이다. 천민으로 태어난 카무이는 살기 위해 닌자가 됐지만 의미 없는 살육에 질려 도망친다. 조선 시대 ‘추노’처럼, 에도시대에는 ‘추닌’(도망친 닌자들을 쫓는 닌자)이 있었다. 뫼비우스의 띠에서 벗어나려는 카무이의 사투는 컴퓨터그래픽(CG)을 비롯한 특수효과를 차용하는 등 상업영화의 외피를 쓰고 있다. 그렇다면 주변부 인생들의 비루한 삶에 천착해 온 최 감독은 ‘전향’한 것일까. 속내를 들어봤다. ●“카무이전은 전공투 세대의 바이블” →사전 정보가 없다면 최 감독의 영화인 줄 모를 것 같다. -지금까지의 작품하고는 다른 면이 있다. 내 영화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고 느꼈다면 기쁜 일인 것 같기도 하다. 그만큼 내 영화의 폭이 넓어진 게 아닐까. →원작은 산페이의 닌자만화다. 만화에서 소재를 많이 찾는 편인가. -만화의 세계관에 강하게 공감할 때가 있는데 대개 컬트적인 작품들이다. ‘국민 만화’나 ‘통과의례적인 만화’와는 거리를 두게 된다. ‘허리케인 조’(지바 데스야 원작으로 1960년대 일본 대학생에게 큰 영향을 준 만화)가 영화로 만들어지고 흥행에도 성공했지만 나는 관심이 없다기보다 싫어했다. →그렇다면 ‘카무이외전’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나. -17세기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단순히 권력과 민중의 계급 투쟁뿐 아니라 민중 내부의 분열과 그 안의 복잡한 인간관계, 사랑과 증오를 디테일하게 그려냈다. 연재 당시 사상적으로 오른쪽(보수)이든, 왼쪽(진보)이든 관계없이 큰 영향을 받았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사회와 개인을 고민했던 1960~1970년대의 청년에게 바이블 같은 작품이다. 다만 ‘카무이전’은 상업성을 얻기 어려운 측면이 있어 엔터테인먼트적 요소를 강조한 스핀오프 작품인 ‘카무이외전’을 선택하게 됐다. →‘카무이’란 캐릭터도 독특한데. -카무이란 말 자체가 일본어가 아니라 아이누족의 말이다. 배경은 오카야마 지방인데 왜 카무이가 훗카이도 원주민의 이름을 가졌는지 미스터리다. 카무이는 오카야마의 천민 부락에서 자란다. 원작에서는 홋카이도 원주민들을 에도막부가 침략하면서 처절한 싸움이 벌어진다. 카무이가 거기에 참여하면서 출생의 비밀이 밝혀질 것으로 생각했는데 작가의 의도적 절필로 중단됐다. 그런 수수께끼들이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만든다. →CG 장면이 독특하다. 카무이가 절벽을 뛰어올라가는 장면은 일부러 어설프게 보이려고 한 것인가. -의도적이다(손바닥을 치면서 웃었다). 스스로 통제가 안 될 때가 있다. 발작적으로 희화화하거나 만화적으로 그리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 아무리 절정의 무공을 지닌 닌자라도 그러진 못할 거란 걸 알면서도 ‘뿅!뿅! 날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웃음). →해피엔딩은 아니다. 따뜻한 결말은 싫은가. -즐겨 보는 영화는 해피엔딩이 많다. 그런데 찍다 보면 비극적 종말을 맞는 경우가 많다. 내 영화 속 주인공들은 주류가 아닌 경계선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인물들이다. 자칫하면 어느 한쪽으로 떨어지는 인물들을 그리기 좋아하기 때문에 행복하지 못한 결과를 맞이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메인 스트림에 관심 없다… 밑바닥 얘기에 끌린다” →그동안 자이니치의 삶을 많이 다뤘다. 더는 관심이 없나. -내가 자이니치로 태어나고 자란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재일한국인을 그리는 게 영화감독 최양일의 본질은 아니다. 내 관심은 한·일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아시아의 근대화 과정에서 소외된 사람들, 근대화를 겪으면서 어쩔 수 없이 개인에게 남게 된 전근대성 등에 관심이 있다. 세상의 중심에 있는 인물은 관심 없다. 주변에 사는 사람들에게 끌린다. 나조차도 어디에 서 있는지는 모르겠다. 핀볼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행선지가 불분명한 존재로 앞으로도 남고 싶다. →당신은 ‘경계인’이다(그는 1994년 북한 국적을 버리고 한국 국적을 취득했지만 일본영화감독협회장이다). 다른 자이니치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최근 마에하라 세이지 외상이 자이니치에게 정치헌금을 받은 것이 문제가 돼 사퇴한 사건은 한국에서 파장이 있었는데. -마에하라 외상 문제에 대해 한국에서는 헌금자가 한국 핏줄이기 때문에 불이익을 당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고깃집을 하는 (자이니치)아줌마와 개인적인 인연이 있다고 해도 법을 어긴 것은 사실이다. 현지 언론이 코멘트를 요청하기에 “법률 위반은 맞다. 하지만 일본이 시민참가형 민주국가를 지향한다면 납세를 하고 3~4대를 거주한 재일한국인의 지위와 지방참정권 문제를 어떻게 할지 본격적인 논의를 할 좋은 계기”라고 말했다. 결국 자이니치의 지위에 대해 법을 개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지 않는다면 달라질 건 없다. 현장에서 치열하고 무섭기로(?) 소문난 그이기에 인터뷰 전 살짝 긴장했다. 하지만 무서운 게 아니라 너무 진지하기 때문이란 걸 알아차리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뉘앙스까지 꼼꼼히 헤아려 대답했지만, 가끔 농담도 툭 던졌다. 최 감독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박명재 세상 추임새] 춘래불사춘, 그들에게 진정 봄이 오게 하라

    [박명재 세상 추임새] 춘래불사춘, 그들에게 진정 봄이 오게 하라

    자연은 이제 완연한 봄이다. 산과 강·들의 온갖 꽃과 나무들 그리고 땅속의 갖가지 생명들이 탄생과 부활의 소생을 시작하고 있다. 봄을 찬미하고 노래한 시인과 문인들이 참으로 많지만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이 “봄이란 봄의 출생이며, 여름은 봄의 성장이며, 가을은 봄의 성숙이며, 겨울은 봄의 갈무리(收藏)이다.”라고 말한 것만큼 봄의 계절적 의미를 잘 압축해서 표현한 것이 없을 것 같다. 그렇다. 봄은 자연 속에 싹이 움트고 꽃이 피는 생명과 향기의 계절이다. 동시에 우리 인간들에게는 고난의 겨울을 이기고 새로운 시작과 출발 그리고 전진과 성장의 아름답고 행복한 희망과 꿈을 주는 계절이다. ‘낡은 말뚝도 봄이 돌아오면 푸른빛이 되기를 희망한다.’라는 핀란드의 속담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와도 봄 같지 않은 우울하고 답답한 마음 탓에 이 땅의 아름답고 약동하는 봄의 기운과 희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진정한 봄을 느끼게 될 때 이 땅의 봄은 완전한 자연의 봄, 참다운 인간의 봄이 될 것이다. 먼저, 지난 겨울 내내 구제역과 폭설, 가축 전염병 등으로 한없는 실의와 좌절에 빠져 있는 농어민, 축산 농가들이 하루빨리 시름을 털고 재기할 수 있도록 실효성 있는 정책과 완벽한 후속 대책이 지속적이고 효율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경제논리와 축산주권 이론이 부딪치는 혼선과 정책의 갈등을 하루빨리 수습하고 그들의 얼어붙은 가슴에 희망의 봄 강물이 다시 흐르게 하여야 한다. 매몰된 가축의 침출수가 겨우내 얼었다 녹아 흐르는 강물에 스며들어 우리의 산하를 더럽히지 않도록 철저한 관리와 완벽한 대책이 이루어져야 한다. 둘째, 졸업과 함께 대학을 떠나 사회 속으로 취업의 문을 찾아 나서는 젊은이들에게 최대한 일자리가 보장될 수 있도록 청년 실업대책이 효율성 있게 추진되기 바란다. 봄을 가장 강렬하게 느끼고 받아들여야 할 이 땅의 젊은이들이 얼음 두께보다 더한 무거운 가슴과 답답함, 막막함으로 이 봄을 맞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경제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청년들을 위한 취업정보, 취업지도, 취업알선 등 청년 일자리 창출에 사활을 다해 우리 젊은이들이 희망과 꿈을 실은 봄의 전령사가 되게 하여야 한다. 봄은 누가 뭐래도 무릇 젊은이들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셋째, 북한의 못된 만행으로 자식과 가족, 삶의 터전을 잃고 겨울보다 더 혹독한 시련과 고통을 겪고 있는 천안함 유족과 연평도 주민들에게 재기와 새 출발의 기운을 북돋아 그들의 가슴에 봄의 온기를 느끼도록 해야 한다. 이 땅을 수호하고 지킨 자랑스러운 호국 용사로서, 접적지역의 용감한 국민으로서 그들에게 정부의 각종 지원 정책 못지않게 진정어린 국민들의 존경과 감사, 고마움을 느낄 때 그들의 가슴에 남아 있는 통한의 잔설이 조금씩 녹아내릴 것이다. 끝으로 7000만 대한민국 국민 전체와 삼천리 금수강산 전 국토에 봄의 햇살이 구석구석 골고루 비치기 위해서는 우선 경색된 여야 관계가 원활하게 작동되어 산적한 국정현안과 민생대책이 효율성 있게 추진되고, 좌초한 남북관계에 대화와 타협의 물꼬가 터져 더 이상의 포격과 폭침 그리고 핵전쟁의 위험이 사라져 평화와 공존의 남북관계가 이루어져야만 진정 이 땅에 완전한 봄, 진정한 봄이 오게 될 것이다. 어디 그들뿐이랴. 혹한과 폭설 못지않은 사회의 높은 벽과 단절에 응어리진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고통받는 이들의 가슴에도 진정 봄이 오게 될 때, 우리의 산천에 버들잎은 제대로 가지마다 푸르고(楊柳絲絲綠) 복숭아꽃 또한 제대로 송이송이 붉게(桃花點點紅) 피어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올해는 이 땅에 봄이 와도 봄이 온 것 같지 않다는 춘래불사춘이 아닌, 봄이 오니 진정 봄 같다는 춘래여진춘(春來如眞春)이 되었으면 한다.
  • [김문이 만난사람] 김흥광 NK지식인연대 대표

    [김문이 만난사람] 김흥광 NK지식인연대 대표

    #상황1. 2008년 3월 1일. 북한 당국은 ‘김정은 청년대장 동지의 위대성을 체득시키자.’는 제목의 긴급 전문을 각 시·도당에 내려보냈다. 일반 주민들이 아닌 당 간부들만 보도록 하는 전문이라는 점에서 비밀 문건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문건의 주요 내용은 ‘김정은의 영도 업적을 깊이 학습시키기 위해 토론과 강연을 체계적으로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당 차원에서 ‘김정은’이란 이름 석자가 처음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이날 저녁 일본의 NHK 방송은 국내의 한 소식통을 인용해서 이 같은 사실을 보도했다. #상황2. 2009년 11월30일 오전 10시. 북·중 국경지역의 통신원으로부터 남한의 한 지인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가 걸려왔다. ‘오늘 낮 12시를 기해 화폐개혁을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북한의 국가안전보위부 요원들이 주민들의 동향파악과 함께 화폐개혁 단행으로 인한 불평 불만자들을 색출하라는 명령까지 받았다고 했다. 너무나 큰 뉴스거리여서 지인은 한 시간동안 국내의 몇몇 단체를 통해 황급히 크로스체크를 했다. 북한의 정권기관과 연줄이 닿는 다른 통신원들에게 확인해 본 결과 ‘중대발표’가 있을 것임을 감지할 수 있었다. 지인은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이날 오후 1시에 북한의 화폐개혁과 관련된 소식을 독점뉴스로 올렸다. 하지만 오보이면 어떡하나 싶어 30분 후 그 소식을 내렸다. 결국 이날 오후 3시 북한방송을 직접 청취한 중국내 통신원을 통해 확인한 뒤 종합적으로 다시 올려 화폐개혁 사실을 국내외에 알렸다. 위 ‘상황1’과 ‘상황2’에 등장하는 ‘국내의 한 소식통’과 ‘남한의 한 지인’의 주인공은 바로 김흥광(51·전 북한공산대학 컴퓨터강좌장) NK지식인연대 대표이다. 그는 북·중 국경지역에 있는 통신원들로부터 전해들은 북한 내의 따끈따끈한 소식을 시시각각 인터넷 등을 통해 국내외에 알리고 있다. 또한 계간지 ‘탈북 지식인들이 말하는 북녘마을’을 통해 북한 내의 생활뉴스를 계절별로 종합해 전하고 있다. 2003년 10월 탈북한 그는 북한 이탈주민 중에 컴퓨터 전문가와 석·박사급 인사를 주축으로 2년 전 ‘사단법인 NK지식인연대’를 설립했다. 아울러 서울 구로동에서 ‘삼흥학교’라는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이 학교는 이달 초 문을 열었다. 지난 9일 오전 구로동 사무실에서 김 대표를 만났다. 인터뷰 도중에도 미국과 중국 등 여기저기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느라 분주했다. 우선 북한 소식을 전해주는 통신원은 어떤 사람들로 이루어졌는지 물었다. “대개 북한과 중국의 국경지역을 오고 가는 상인들이나 비즈니스맨들입니다. 주로 휴대전화를 통해 연락을 받고 있지요. 자원봉사자도 있고 중국으로 출장 나온 북한의 관리나 유급 당일꾼도 더러 있습니다.” 그렇다면 북한 내에서는 어디까지 휴대전화 통화가 가능하며 통신원의 활동범위는 어느정도일까. “두만강과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반경 5㎞ 내에서는 중국 기지국을 이용해 얼마든지 통화가 가능합니다. 통신원들은 신의주를 포함 수개 지역에서 은밀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각자의 권한과 범위안에서 휴대전화를 이용해 소식들을 그때그때 전하고 있지요. 국경지역을 중심으로 직·간접적으로 운용되는 휴대전화 숫자는, 통신원들이나 또 통신원들과 평소 알고 지내는 제2, 제3의 여러 파트너(북한주민 등)들 것까지 모두 합쳐 아마 5000대 정도 되지 않을까 추산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다른 단체나 조직에서 운용하는 통신원들과 그 파트너들도 포함되겠지요. 정보내용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극비자료나 중앙당에서 하급당으로 내려보내는 지시사항 등도 있지만 주로 일상의 정보가 많습니다.” 김 대표는 수시로 이들과 통화를 하면서 북한의 바닥부터 상급기관에 이르기까지의 정보를 수집한다. 고급정보인 경우 한달에 10여건이며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열린 북한방송’ 등의 단체와 양해각서(MOU)를 맺어 정보를 서로 체크한 뒤 2~3건을 선별해 인터넷에 올리고 있다. 하지만 고민도 많다. 정보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는 것도 그렇지만 북한 당국에서 일부러 역정보를 흘려 통신원을 잡아들이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2년 전에는 한 남자 통신원이 이 같은 공작에 걸려들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고 했다. 그저 단순한 사람들의 얘기를 전했을 뿐인데 북한 당국에서 간첩으로 몰아세웠다는 것. 김 대표는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미어진다고 했다. 최근들어 통신원들이 전해오는 김정은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생각은 어떠한지를 물었다. “북한 주민들의 정서는 김일성 왕조라는 체제 아래에서 3대세습까지 가는 것에 대한 논의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지만 ‘왜 하필이면 장남이 아닌 3남이냐.’는 얘기를 종종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요즘 북아프리카와 중동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시민혁명 소식을 북한 주민들이 어느정도 알고 있을까. “국경 안쪽의 내륙지방 주민들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평양은 좀 다릅니다. 외화벌이꾼들은 일반 상인들과는 달리 머리회전이 아주 빠르지요. 군부대 외화벌이꾼도 있고 정권의 외화벌이꾼도 있습니다. 따라서 평양에서는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소식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북한에서 ‘중동’이라고 하면 이집트의 무바라크와 리비아의 카다피를 대표적으로 떠올립니다. 김일성 주석 당시부터 가까운 친구의 나라로 여기고 있지요. 이집트와 리비아는 북한보다 잘사는 나라로 알고 있는데 그 나라에서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독재자를 무너뜨렸다면 그보다 훨씬 못한 북한은 어떻게 되느냐 하는 의구심을 갖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면서 김 대표는 북한이 북아프리카나 중동에서 일고 있는 시민혁명의 불길을 차단하기는 쉽겠지만 만약 중국의 국경도시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다면 북한으로의 확산이 불가피하다고 설명했다. 중국이 북한보다 훨씬 잘사는 나라로 인식하는데다 국경을 수시로 드나드는 유동인구가 많기 때문이다. 화제를 바꿨다. 북한에서는 남한의 TV프로그램이나 영화를 즐겨본다는 얘기가 있는데 어느 정도인지 궁금했다. 지체없이 김 대표의 대답이 돌아온다. “한해에 탈북자가 3000명이 됩니다. 이들이나 북한주민에게 남한의 영화를 봤느냐고 물어보면 시대에 뒤떨어졌다며 우습게 여깁니다. ‘요새 무슨 영화봤니.’ ‘어느 배우를 좋아하니.’라고 물어보는 것이 유행이지요. 작년에는 ‘천국의 계단’(2004년 2월 종료된 SBS 수·목 드라마)이 인기를 끌었으며 올해에는 ‘풀하우스’(2004년 9월 종료된 KBS2 수·목 드라마)를 즐겨보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북한주민들은 요즘 ‘풀하우스’에 나오는 송혜교를 가장 좋아하는 배우로 여기고 있지요. 이전에는 송승헌을 꼽았습니다. 북한에 ‘소년장수’라는 인기 애니메이션이 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주인공이 송승헌처럼 눈썹이 짙고 잘생겼기 때문이지요.” 북한에서는 어떤 경로로 남한 영화나 드라마를 접할 수 있을까. 북한 주민들이 실시간으로 남한의 방송을 볼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김 대표의 대답이 흥미롭다. “중국과 북한 국경지역에서 CD나 DVD의 밀거래가 성행합니다. 예를들어 두만강이나 압록강가에서 주로 이루어지는데 중국쪽에서 CD나 DVD를 비닐봉지에 담아서 끈을 길게 매달아 북한 쪽으로 던져줍니다. 물론 국경 경비병들 몰래 은밀하게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이지요. 옛날에는 중국에서 싸구려 CD플레이어를 엄청나게 들여보냈고 지금은 DVD플레이어가 공급되고 있습니다.” 이때였다. ‘통신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잠시 후 전화를 끊은 김 대표가 내용을 간략히 설명해준다. “요즘 외국 영화나 드라마에 대한 통제는 어느 정도인가 하고 물었더니 통제가 심해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CDR집’에서 은밀히 볼 수 있다고 합니다. ‘CDR집’은 간판을 달지 않고 몰래 영업하는 집을 말합니다. 그곳에서 드라마나 영화를 본다고 하는군요. 주로 어떤 것을 보는가 하고 물었더니 70부작으로 된 ‘영웅시대’(2005년 3월 종료된 MBC 월·화드라마)를 많이 본다고 합니다. 맨 밑바닥에서 최고의 기업가로 커가는 과정에 많이 흥미를 느끼는 것 같습니다.” 계속 걸려오는 전화로 더 이상의 인터뷰는 무리였다.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그는 “우리 NK지식인연대는 북한 소식을 생생하게 국내외에 알리면서 북한에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어 개방을 촉진시키고 기아위기에 빠져 있는 무고한 주민들을 구하는 일을 계속하겠다.”면서 “매년 늘어나는 탈북자 자녀들이 우리 사회에 적응을 잘 할 수 있도록 대안학교를 통해 프로그램을 운용하겠다.”고 다짐했다. 편집위원 km@seoul.co.kr ●김흥광은 누구 1960년 함흥에서 태어나 1984년 평양 김책공업종합대학에서 컴퓨터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함흥 컴퓨터기술대학에서 9년동안 컴퓨터를 가르쳤고 1994년부터 탈북 직전인 2003년 8월까지 함흥 공산대학 컴퓨터강좌장(학과장)을 지냈다. 공산대학에서 한국 드라마 CD, 외국 도서들을 단속하는 조직에서 기밀자료 관리를 맡았다가 회수물품 몇 개를 친구에게 빌려준 것이 적발돼 집단농장으로 쫓겨나면서 그는 탈북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2003년 10월 두만강 쪽 국경을 넘어 탈북해 중국에서 3개월 동안 지내다가 남한으로 와 한신대에 출강하면서 경남대북한대학원에서 경제·IT분야 석사과정을 마쳤다. 2006년 (재)북한이탈주민후원회에 몸담으면서 그는 북한의 민주화를 앞당기려는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탈북자 중에서 고등교육 수료자들을 만나 동참을 호소했고 2008년 12월 500여명의 회원들을 모아 탈북학술단체인 ‘NK지식인연대’를 출범시키는 데 앞장섰다. NK지식인연대에는 현재 수학, 철학, 과학 등 다양한 전공자 250여명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서울 공덕동에 북한 전통음식점 ‘류경옥’을 사회적 기업형태로 운영하고 있는 그는 최근 탈북자 청소년학교인 ‘삼흥학교’도 열었다. 같은 연령대의 학생들과 정규교육을 받을 수 없는 아이들, 한국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인성교육은 물론 음악, 미술, 태권도 등의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현재 기숙형태의 학생만 33명이며 교사진은 상근 교사 외에 자원봉사자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다. 저서(공저)로는 ‘북한 엘리트들이 보는 10년후의 북한’(2006, 한울)이 있으며 부인과 함께 슬하에 1녀를 두었다.
  • [생각나눔 NEWS] 日 마에하라 전 외무상 사퇴의 ‘그늘’

    마에하라 세이지 전 외무상에게 정치헌금 20만엔(약 270만원)을 준 재일동포 장옥분(72·여)씨는 한국말을 전혀 못한다. 경북 예천이 고향인 부친이 1930년대 일본에 건너 온 뒤에 태어난 재일동포 2세다. 뿌리는 자이니치(在日·재일 한국인)이지만 한국말을 배울 기회가 없었고, 동네 일본인 사람들과도 곧잘 어울려 지냈다. 33년전 교토에서 불고기 음식점을 하던 장씨 집 근처로 이사온 15세의 마에하라 전 외상도 그런 이웃들 중의 한명이었다. 동년배인 둘째 아들과 친구로 지내던 마에하라가 12세때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에 부대끼자 장씨는 그를 손수 가게로 불러 일본식 불고기인 야키니쿠를 배불리 먹이곤 했다. 아들과 다름없는 동네 청년이 정치인으로 승승장구하자 장씨는 그를 달리 도울 방법이 없을까 고심했다. 그러던중 2005년 마에하라의 홍보물에서 후원금 계좌용지를 우연히 발견하고 매년 5만엔씩 보냈다. 하지만 일본 실정법(정치자금 규정법)상 장씨는 그 돈을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 일본인과 혈육같이 지냈더라도 일본인으로 귀화를 하지 않는 이상 장씨는 어디까지나 외국인 신분이었다. 그런 사실을 지난 4일 문제가 불거진 뒤에야 알았던 장씨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불고기 음식점을 38년간 운영하며 매년 세금도 꼬박꼬박 내고 있고 매달 국민보험도 3만~4만엔씩 납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납세 의무만 있지 권리는 전혀 없는 셈이다. 일본은 선진국 중 영주외국인에게 지방참정권을 허용하지 않는 거의 유일한 나라다. 한국 등 외국에 살고 있는 ‘일본인 영주권자’는 대부분 선거권을 행사하고 있다. 일본 민주당은 지난해 1월 재일 한국동포 등 영주외국인들에게 지방참정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정기국회에 제출하려고 했다. 하지만 자민당과 일부 수도권 지자체 등 우파들이 반대해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외국인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데 적극적이었던 오카다 이치로 전 간사장이 정치자금 문제로 검찰 수사를 받고,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의 지지율이 급격히 떨어지자 아예 없던 일이 돼 버렸다. 60만 재일동포는 한·일 과거사의 비극이 만들어낸 존재다. 만약 한·일 간에 불행한 과거사가 없었다면 수많은 재일동포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이들이 일본 땅에서 정치적 기본권조차 누리지 못하는 존재로 살아가는 상황도 없었을 것이다. 일본의 원죄 때문에 일본 땅에 터전을 마련하고 일본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재일동포들이 정치적 이해타산 때문에 투표권도 행사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이번 마에하라 전 외무상의 퇴진을 불러 온 셈이다. 한편 마에하라 외무상이 장씨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은 사실이 폭로된 것과 관련해 음모론도 제기되고 있다. 마에하라 외상이 북한과의 북·일 수교 가능성을 언급한 뒤 자민당 등 보수세력이 나섰다는 관측에서부터 대립각을 세워온 오자와 이치로 전 간사장이나 차기 총리 자리를 놓고 다투고 있는 오카다 가츠야 간사장 쪽에서 정치자금 문제를 흘렸다는 얘기도 나돌고 있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글로벌 시대] 동구혁명 관점에서 본 중동혁명/고토 노부유키 홍익대 교양외국어학부 교수

    [글로벌 시대] 동구혁명 관점에서 본 중동혁명/고토 노부유키 홍익대 교양외국어학부 교수

    나는 리비아의 청년과 이야기한 적이 있다. 1989년 1월이었으니까, 벌써 20여년이 지난 옛일이다. 유럽 여행을 갔을 때 브뤼셀의 유스호스텔에서 그 청년과 같은 방에 묵게 되었다. 그때 리비아의 지도자인 카다피에 대해서 열변을 토하던 그의 모습을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에게 카다피라고 하는 인물은 영웅이었다. 카다피는 구미에 대해 겁내지 않고, 정론을 피력할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 그렇구나. 대단해. 당신 나라의 지도자는 훌륭하다.”고 맞장구를 칠 수밖에 없었다. 그후 22년이라고 하는 긴 세월이 흘렀지만, 현재 중동에서 날마다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보면 격세지감이 든다. 또다시 시대가 크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다. 나는 1989년 1월부터 2개월간 서유럽 여러 나라와 동베를린, 폴란드를 여행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같은 해 가을 무렵부터 동유럽의 공산권이 동독 사람들의 헝가리행 하이킹을 시발점으로 해서 붕괴되기 시작했다. 그후 나는 일본인 친구와 둘이서 1990년 1월부터 2개월간 동유럽을 여행했다. 20세기의 공산주의 국가가 어떤 사회인지를 눈여겨봐 두고 싶었고, 또 그 체제가 붕괴되는 모습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 기억 속의 동독은 어쩐지 현재의 북한을 연상시킨다. 1989년 당시 동베를린 사람들은 길을 물어봐도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고 도망쳐 갔다. 나중에 들어서 알게 된 일이지만, 서방세계의 정보원에게 정보를 제공했다는 혐의를 추궁당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외국인과는 말을 주고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1990년의 라이프치히에서는 관광객들이 괴테가 즐겨 찾았다는 찻집에 들어가려는데, 찻집 입구에 지켜 서 있는 종업원은 우리를 일렬로 줄을 세워서 들어가게 했다. 종업원은 몸집이 크고, 삼엄한 얼굴을 하고서 미소짓는 얼굴 표정은 한군데도 보이지 않은 중년의 아줌마였다. 열이 흐트러지면 아줌마에게서 곧바로 줄을 서도록 주의를 받았다. 찻집이나 레스토랑에서 동독 사람들은 우리 쪽을 훔쳐 보면서 소곤소곤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당시 유고슬라비아는 아직 분리되지 않았으며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 중에서는 가장 자유롭고 우호적이며 평화로웠다. 동구 혁명은 공산권의 위성국가로부터 시작되어 종국적으로는 소련마저 붕괴되었다. 이번 중동 국가들의 체제 붕괴도 독재 정권에 대한 민중의 저항이라고 하는 점에서 그것과 일치한다. 이러한 움직임이 이대로 진행되면, 예멘·바레인·카타르·쿠웨이트 등을 거쳐 마지막에는 사우디아라비아로 향하는 것은 아닐까? 중동의 체제 변화는 세계의 에너지를 보급하고 있는 석유 이권이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정치와 경제의 양면에서 세계적인 격동으로 몰아갈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이 체제 붕괴의 움직임이 중동 전역으로 퍼져나갈 경우, 이란과 시아파 정권이 된 이라크, 이집트의 무슬림 연대 그리고 레바논의 헤즈볼라나 팔레스타인의 하마스처럼 아랍 민중에게서 지지를 받은 조직들의 연계 속에서 중동 지역의 새로운 질서가 잡혀 갈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석유나 천연가스의 이권을 둘러싸고 민족들 사이의 이권 갈등 및 세계 여러 나라 사이에 쟁탈전이 전개될지도 모른다. 이슬람교 내의 종파 간, 민족 간 혹은 부족 간 대립을 부추기는 공작이 외부에서 끼어들지도 모른다. 우리는 동구 혁명 후, 옛 유고슬라비아 지역이나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그루지야·우크라이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익히 보아서 잘 알고 있다. 또 옐친 대통령 집권 시에 러시아의 지하자원 이권을 노리고 쇄도한 금융 마피아에 의해 러시아 경제가 어떤 상태에 놓였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그 리비아 청년은 이제는 건장한 어른이 되었겠지만,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있을까? 아무튼 중동 지역의 민의를 반영한, 건전한 질서에 의한 체제가 실현되기를 기원할 뿐이다.
  • 중동발 재스민향 北전파 4대루트

    지난 26일 평양에서 열린 ‘선군청년총동원대회’는 강성대국 건설에서 청년들의 역할을 강조한 이례적 행사였다. 중동발 재스민향이 북한에까지 전달되지는 않을지 북한 지도부의 우려가 묻어나 있다. 27일 군 소식통에 따르면 최근 북한에 이집트, 리비아 민주화 시민혁명 내용과 ‘세습정권, 독재정권, 장기정권은 망한다.’는 내용이 담긴 전단 수만장을 새로 제작해 뿌린 것으로 알려졌다. 대북심리전을 강화해 북한 내부의 변화를 유도하려는 의도다. 복수의 탈북자들 말에 따르면 북한에서 USB 사용은 보편화됐다. 대부분이 중국을 통해 들어가는 것으로 한 탈북자는 북한에 USB가 200만개 이상 있을 것으로 추산했다. 이 탈북자는 “지난해 북한 장마당(시장)에서 한개 2만~3만원에 팔렸다. 대학생들이 자료를 저장해서 다니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USB와 전단이 실린 풍선은 지상 5000~6000m까지 올랐다가 터지도록 타이머 장치를 한다. 함경남도 지역이나 평양에서 USB를 발견했다는 탈북자의 증언도 있다. 최근 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북한에는 AM라디오 100만대, 단파 라디오 20만대가 보급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KBS한민족방송과 극동방송 외에 열린북한방송 등 민간방송이 북한으로 전파를 쏘고 있으며, 최근 중동 민주화 소식을 집중적으로 전하고 있다. 최근 당 간부들만 보는 참고신문에 이집트 무바라크 대통령의 하야소식이 실렸다. 참고신문은 알려진 것과 달리 열람 후 반납하지 않고 각자 집에서 보관한다고 한다. 한 탈북자는 “간혹 친구집에 갔다가 보기도 했다. 다만 돌려 보거나 밖으로 내돌리면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외부로 빼돌리지는 않는다.”고 전했다.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이거나 중국 사람들과 전화통화를 한 사람들은 중동의 민주화 시위 소식을 접했을 것으로 보인다.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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