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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체독 성용승군도 입북/안기부

    ◎밀입북 임양·성군 사전영장 받아 【내외】 전대협대표로 베를린에 파견됐던 성용승군(22·건국대 행정4)이 지난 5일 입북한 박성희양(21·경희대 작곡4)에 이어 10일 하오 조선민항편으로 평양에 도착했다고 북한관영 중앙통신이 이날 보도했다. 이 통신은 성용승군이 전대협대표 자격으로 이날 저녁 김일성경기장에서 진행되는 「백두­한라대행진대회」를 환영하는 평양시 군중대회에 참석하는 것을 시작으로 이 대행진에 합류하게 된다고 밝혔다. 한편 국가안전기획부는 10일 「전대협」대표로 「국토종단대행진」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베를린을 거쳐 밀입북한 성용승군과 박성희양에 대해 국가보안법위반(탈출·회합)혐의로 미리 구속영장을 발부 받았다. ○“13일 판문점 귀환” 「전대협」은 10일 하오 「남·북해외동포청년학생통일대축전실무회담」대표로 베를린에 파견했던 성용승군이 이날 하오3시30분쯤 북경발 조선민항기편으로 평양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전대협」은 『오늘 상오 성군으로부터 9일 베를린에서 북경에 도착한뒤 계획대로 평양에들어간다는 전화를 받았다』고 밝히고 『성군은 지난 5일 북한에 가 국토종단대행진에 참가하고 있는 박성희양과 합류,활동한뒤 오는 13일 박양과 함께 판문점을 통해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 미 싱글로브장군 회고록/위험한 임무:3

    ◎해저 케이블 극비 절단… 중공군 큰 타격/“중국본토 공격” 맥아더의 도전 실패로/중공군까지 밀리자 소,돌연 휴전제의 내가 도쿄의 극동사령부를 경유,함흥에 도착한 것은 50년 11월30일이었다.각부대에 특공중대의 배치및 활용등에 대해 협의하기 위해서였다.그러나 그 무렵에는 이미 중공군의 대공세가 여기저기서 확인되고 있었다. 서부전선에서는 8군단 소속 2사단과 1기갑사단의 한 연대가 청천강을 따라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세를 받고 있었다.이른바 군우리(편집자주:평안남도 개천)전투로 알려진 청천강변의 전투에서 2사단은 엄청나게 우세한 중공군의 공세에 의해 참패했으며 뿔뿔이 흩어진 병력들은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얼어죽거나 포로로 잡혔다.이 때문에 다른 8군병력에게도 중공군 조우와 관계없이 후퇴명령이 내려졌다. ○산동∼대련 통신끊겨 동부전선의 중공군 공세 역시 야만적인 것이었지만 10군단의 대응은 다소 달랐다.압록강을 향해 전진배치돼있던 7사단은 지형관계로 소규모부대 단위로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었다. 10군단사령부는 함흥 교외의 옛 일본비행장 부근 눈덮인 벌판에 여러개의 텐트촌으로 형성돼 있었으며 포위공격을 받을 경우에는 인근의 어항인 흥남에서 철수토록 돼있었다.나는 한국에 있는 미군중에 중국의 전술에 대하여 잘아는 몇안되는 장교중의 하나였다.중공군은 미군이 보다 효율적으로 싸운다면 물리칠수 있을것 같았다.중공군은 한밤중에 소규모 단위로 이동하는데 이는 매복에 약하고 인해전술 공격은 위치선정이 잘된 포병의 공격에 취약했다. 나는 얼마후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함흥을 떠나 몇시간 후에 서울에 도착해보니 서울은 어지러운 상황이었고 남쪽으로 향하는 길은 피란민들로 뒤덮여 있었다.서울은 불과 6개월만에 공산군에 의해 두번째 점령당하게 됐으며 유엔군사령부는 반공시민들에게 남쪽으로 피란할 것을 권장하고 있었다. 나는 그후 6개월동안 노스캐롤라이나의 베닝기지에서 특공중대 훈련에 또다시 열중하고 있었다.한국전쟁은 상호 처절한 시소게임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워커 8군사령관은 서울북부에서 교통사고로 죽고 서울은 51년1월4일 공산군에 의해 다시 점령된채 매슈 리지웨이장군이 후임 8군사령관을 맡고 있었다.유엔군의 전선은 서울남쪽에서 불과 60마일 떨어져 형성돼 있었다.유엔군은 1월말부터 다시 공세를 강화,3월달에 서울은 재탈환되었다. 그러나 이해 봄 더 큰 사태진전은 군사적인 것이 아니고 정치적인 것에서 발생했다.4월11일 트루먼대통령이 맥아더원수를 극동군사령관직에서 갑작스레 해임한 것이다.그 후임에는 리지웨이장군이 임명되었으며 8군사령관으로는 제임스 밴 플리트장군이 맡게 됐다.맥아더장군의 해임은 불행하게도 필연적인 것이었다.사실 그의 임무는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이 시작됐을때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당시 한국에서의 미국정책의 목표는 군사적 대립상태를 안정시키고 남한을 재건하는데 있었다.군인의 임무는 그가 신병이건 맥아더와 같은 노련한 5성장군이건 본국정부의 명령은 어리석다 생각되더라도 합법적인 것은 따라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맥아더장군은 그같은 명령을 묵살하고 의회와의 연계를 통해 지휘계통도 무시했던 것이다.그의 목표는 중공을 무찌르는 것이었고 그같은 목적 수행을 위해 그는 중국본토에의 공습과 지상공격을 요청했다.그는 또 압록강을 잇는 다리들과 남만주의 중국 비행장들을 모두 폭파할 것을 주장했다.그러나 맥아더장군의 이같은 변칙적 작전주장은 그가 이 전쟁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입지를 높이는데 더 목적이 있는듯이 보였다.그는 결국 도박을 했고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그해 여름부터 리지웨이와 밴 플리트의 지휘를 받는 연합군은 중공군에 대대적인 반격을 가해 그들을 38선 이북으로 다시 몰아내고 있었으며 그렇게 되자 소련은 마침내 유엔에 휴전을 제의하게 됐다.이에따라 38선 근처의 도시인 개성에서 종전을 위한 예비회담이 개최되게 됐다. 워싱턴에 있는 CIA본부로 불려간 것은 51년 12월이었다. ○북 청년 게릴라 자원 나를 만난 빌 디퓨이대령과 리처드 스틸웰대령은 미국정부는 특히 한국전에 참전하고 있는 중공군의 통신망을 교란시키는등 중국본토에서의 게릴라활동을 지원함으로써 중국 공산당정권에 압력을 넣기로 결정했다고 직설적으로 말했다.그들은 이 작전은 일본에 신설된 지역본부에서 맡게되며 수송기편대와 연안상륙정부대의 지원을 받게된다고 설명하면서 육군에서는 그같은 임무를 맡아줄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내가 한국에 다시 돌아간 것은 52년 새해였다.한국전은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가운데 교착상태에 빠져있었다.중공군 교란작전의 이름은 JACK(Joint Advisory Commission Korea)이라고 명명됐고 서울에 새본부를 만들었으며 동래에 있는 벤 반더부르트대령의 지휘를 받았다. 우리는 우선 북한 서부해안의 여러개 섬에 비밀 정보망을 구축했으며 원산 앞바다의 여도를 장악,전초기지로 삼았다.이같은 작전에는 중무장된 쾌속함이 동원됐다.우리의 주된 임무는 한국인 정보원들을 공중 또는 해안으로 침투시켜 군사정보를 빼내오는 일이었다.이 일에는 북한으로부터 피란온 많은 젊은이들이 용감하게 자원하고 나서 사람을 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미 목표는 남한 재건 우리가 해낸 한국에서의 가장 큰 작전은 황해바다 한가운데를 지나 중국본토산동반도와 만주 대연을 잇는 해군 케이블선을 절단한 것이었다.그 케이블선은 한국에 침공중인 중공군사령부와 북경을 연결하는 라인으로 중공군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이 되었다.그후 중공군사령부의 북경과의 연락은 무선전화를 이용하게 됐는데 대부분이 우리 측에 도청됨으로써 휴전협상과정에서 우리측은 중공군의 정보에 대해서는 항상 앞설 수 있었다. 우리의 주된 해상공격은 주로 동해의 여도를 중심으로 벌어졌다. 그곳에서는 육상이나 해상침투는 물론 원산항에 입항하는 모든 선박까지 체크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적의 후방교란과 함께 유엔군측의 전투수행에 큰 도움을 주었다.
  • 북한체류 박성희양/통일출정식에 참석

    【내외】 남북해외청년학생통일대축전 행사의 일환으로 진행될 「조국통일촉진 백두∼한라대행진」출정식이 7일 상오 백두산정상에서 열렸다고 북한관영 중앙통신이 이날 보도했다. 이날 출정식에는 범민련 북측본부의장 윤기복(조평통부위원장·당비서)을 비롯해 전금철(조평통 부위원장)·여연구(조국전선의장)와 91범민족대회 및 청년학생대축전 참가 북측대표단,전대협대표 박성희양 등이 참가했다고 이 통신은 전했다.
  • “판문점 통해 13일에 귀환”/박성희양,평양 회견

    【내외】 「전대협」대표로 「백두∼한라국토종단대행진」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지난 5일 평양에 도착한 박성희양(21·경희대 작곡과4년)은 이날 하오 숙소인 고려호텔에서 북한의 내외신 기자들과 회견을 갖고 입북경위와 북한에서의 활동 및 귀환계획을 밝혔다. 박양은 『오는13일 북한청년학생대표단 5백명과 함께 도보로 판문점을 통해 귀환을 시도할 것』이라고 밝혔다. 박양은 13일 판문점으로의 귀환이 실현되지 않더라도 15일까지는 서울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 궁지에 몰린 운동권 존재부각 노려/박양 입북강행… 전대협의 계산

    ◎“무분별한 행동” 비판적 여론 부담될듯/정부통일 노력에 찬물… 교류차질 우려 「전대협」이 베를린에 가 있던 박성희양(21·경희대 작곡과4년)을 북한에 파견한 것은 정부당국이 주도하고 있는 통일문제에 대한 주도권을 되찾아 위축된 학생운동권의 활로를 모색하려는 강박관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수 있다. 「전대협」은 지난 6월24일 박양과 성용승군(22·건국대 행정학과4년)을 「남북청년학생해외통일축전실무회담」의 대표로 베를린에 파견할 때부터 방북계획을 세웠으나 무분별한 학생운동권에 대한 비판여론에 부딪혀 그동안 이를 실행에 옮기지 못해왔다. 「전대협」은 정원식총리서리 폭행사건등의 후유증에서 벗어나 강경대군 폭행치사사건으로 촉발된 이른바 「5월투쟁의 열기」를 끌어내기 위해 베를린에 있는 「조국통일범민족연합해외본부」를 통해 북한의 「조선학생위원회」 등과 치밀하게 이 계획을 추진해 왔다. 그러나 「제2의 임수경사건」이라는 국민의 여론과 김종식군 등 「전대협」 핵심간부들의 구속으로 조직력이 약화되자 『박양 등이 입북할 것인지의 여부는 국민의 여론과 청년학도의 의견수렴을 거친뒤 베를린에서 열리는 북측과의 실무회담 성과에 따라 결정할 것』이라고 한발 물러서는듯한 인상을 주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대협」은 끝내 정부당국의 제지와 국민의 비판적인 여론을 외면하고 박양을 북한에 파견했다. 「전대협」의 발표에 따르면 박양은 앞으로 5일 북한에서 예정된 「남북청년학생국토종단대행진」에 참가,백두산에서 판문점까지의 순례행진을 마친 뒤 판문점을 통해 13일 경희대에서 열리는 「범민족대회」에 북측대표단과 함께 참가하는 것으로 돼 있다. 정부는 박양의 방북에 대해 박양의 행적을 추적,귀국하는대로 국가보안법을 적용,처벌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이에따라 박양의 입북은 북한의 정치선전에 이용될 우려와 함께 우리 정부의 통일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만을 초래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박양은 법률적으로 보아도 국가보안법 제6조 잠입·탈출조항과 제8조 회합·통신조항을 위배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또 박양이북한에서 북한의 체제를 옹호하는 말을 할 경우 이 법 제7조 찬양·고무 조항도 적용 가능하다. 이와 함께 박양에게는 여권법이 적용될 것으로 보인다. 박양은 이미 알려졌듯이 관광목적으로 여권을 신고한 채 출국했기 때문에 북한에 간 것은 여행목적에 어긋나며 또한 여행목적지의 신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밀입북 박양 귀환즉시 구속”/정부 방침

    ◎북한서의 행적·발언 낱낱이 추적/허가없는 평양행 보안법 위반/검찰/독일체류 성용승군도 구속수사 검찰은 3일 「전대협」이 「남북청년학생 해외통일축전 실무회담」대표로 베를린에 파견한 박성희양(21·경희대 작곡과4년)이 북한을 방문하는데 대해 박양이 북한을 거쳐 귀국하는대로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구속하기로 했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이날 이같은 사실을 밝히고 『박양이 북한에 들어가 각종 행사에 참석할 경우 국가보안법 제6조 잠입·탈출죄 및 제8조의 회합·통신죄가,행사나 집회에서 북한을 찬양하는 내용의 발언 등을 하면 제7조의 찬양·고무죄가 적용되므로 구속수사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검찰은 박양과 함께 베를린에가 머물고 있는 성용승군(22·건국대 행정학과4년)도 박양에 이어 방북한다면 같은 혐의로 구속할 방침이다. 검찰관계자는 『국가보안법이 개정되기는 했지만 박양의 입북은 정부에서 허가해 주지 않았으므로 명백히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고 보는 것이 검찰의 입장』이라면서 『따라서 임수경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구속수사한다는 방침에는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서울지검 공안2부는 이에 따라 박양의 입북여부와 베를린에서의 행적에 대한 정보수집에 나서는 한편 북한에서의 행적도 면밀히 추적,오는 13일 판문점을 거쳐 귀국하는 즉시 구속하기로 했다. 박양과 성군은 지난 6월24일 실무회담대표로 베를린에 파견됐으며 그동안 2차례에 걸친 실무회담에 대표로 참석하는등 북한대표들과 접촉한 사실이 있어 입북하지 않더라도 국가보안법위반죄(회합·통신등)를 적용,처벌한다는 것이 검찰의 방침이었다. 검찰은 이와 함께 박양이 북한으로부터 입북하도록 직접 지령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지난달 27일 남북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베를린에서 열린 「2차실무회담」에서 박양의 입북이 결정된 사실에 따라 임수경양과 마찬가지로 국가보안법 제6조2항의 특수 잠입·탈출죄의 적용도 검토하고 있다. 6조1항의 단순 잠입·탈출죄는 벌칙이 10년이하의 징역이지만 특수 잠입·탈출죄는 사형·무기 또는 5년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규정돼 있다. 한편 「전대협」은 이에 앞서 베를린에 머물고 있던 박양이 3일 하오 북한으로 갈 것임을 발표했으며 박양은 이미 평양에 도착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 전대협,“대표 북한파견”/기자회견

    ◎박성희양 「통일대축전」 참가 「전대협」은 2일 하오11시 국민대 총학생회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5일부터 10일까지 북한에서 열리는 「통일대축전」행사에 현재 「전대협」대표 자격으로 베를린에 머물고 있는 박성희양(22·경희대 작곡과4년)을 파견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전대협」은 또 지난달 29일 베를린에서 열린 이 행사의 양측 실무회담 결과에 따라 북측 대표인 리금철·최경철등 2명을 12일부터 18일까지 서울에서 개최되는 「범민족대회 청년학생통일대축전」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 오는 5일 상오10시 판문점을 통과해 한국으로 들어오도록 초청했으며 이들을 맞이하기 위한 「전대협」환영단을 파견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전대협」은 이어 『북한에 파견되는 박양은 백두산에서 출발해 국토를 종단하는 「통일대축전」행진에 참가한뒤 오는 13일 판문점을 통해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에서 열리는 「범민족대회」에 합류할 예정이며 현재 베를린에 함께 체류중인 성용승군은 남북 양측간의 연락을 위해 대회기간동안 계속 베를린에 체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정책위」가 주사노선 배후 조종/당국이 밝힌 「전대협」의 실체

    ◎자민통등 4개그룹이 핵심조직/김일성부자 우상화 투쟁에 앞장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는 그동안 「대학가 민주세력의 결집체」로 자처해 왔으나 그 조직의 실체와 활동내용이 북한의 김일성 주체사상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87년5월 이른바 민주화물결을 타고 「백만학도의 결집」을 기치로 출범한 「전대협」은 지난달 1일 제5기 조직이 발족하기까지 전국의 전문대학을 포함한 2백50개대학 가운데 1백77개대학 총학생회를 수용하는 거대한 조직체로 커왔다. 국가안전기획부가 밝힌 이 조직의 규약상 체계는 의장이 주재하는 총회 아래 전국 24개 지구대협 의장으로 구성된 「중앙위원회」가 있으며 이는 다시 각 대학 총학생회를 지역별로 연락하는 각 지역·지구대표자협의회로 이어지고 있다. 중앙위원회 아래 방계조직으로는 토쟁노선과 정책을 세우는 「정책위원회」와 함께 이를 집행하는 사무국·선전국·편집국·연대사업국·투쟁국·문화국 등 6국을 둔 「중앙집행위원회」를 운영해 왔다. 그러나 안기부는 「전대협」을 실질적으로 주도하는 핵심세력조직은 주체혁명사상과 이념에 철저한 골수 「주사파」의 지하세력인 「정책위원회」라고 밝히고 있다. 안기부의 수사결과 지난 87년부터 88년까지의 「전대협」제1·제2기 조직은 북한의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의 전위조직을 자처하던 「반미청년회」가 침투해 조종해온 것으로 나타났다.이 「반미청년회」는 당국의 수사로 이미 해체됐다. 89년뒤로는 서울의 동·서·남·북지역을 중심기반으로 하면서 주체사상을 주된 이념으로 삼아 「한민전」의 지도아래 결성된 주사파 지하조직으로 밝혀진 「자주민주통일」(자민통) 「조통그룹」「관악자주파」「반제청년동맹」등 4개 조직이 「전대협」을 움직이고 있다. 「전대협」은 이같은 조직체를 배후로 전면의 조직체계를 내세우며 전국대학생의 유일한 조직과 백만학도의 전국대중체를 자처,정부의 정책이나 어두운면을 부각,비판해왔으며 이 과정에서 각종 시위를 주도했다. 특히 최근에는 북한의 「조선학생위원회」와 「범민련 해외본부」등과 긴밀히 연락하며성용승군(22)과 박성희양(22)을 대표로 북한에 파견하려 하기도 했다. ◎베일 벗은 지하조직 「정책위」/모두 20여명… 조직원끼리도 가명사용/「의장」 추대 사전조정등 전위역할 담당 형식상 「전대협」의 중앙위원회 아래 방계조직으로 돼있는 「정책위원회」는 실제에 있어서는 이 단체와 각 대학 총학생회에 투쟁지침을 제공하는 실질적인 핵심조직으로 안기부는 수사결론을 내렸다. 「정책위」는 「자민통」 「조통그룹」 「관악자주」 「반제청년동맹」등 실질배후세력에서 선별된 정책위원장등 중앙정책위원 5명과 각 지역 지구대협 정책위원 15명등 20여명으로 구성돼 있다. 이들은 「전대협」규약에 『각 지구에서 선발된 자들로 구성,월1회 정례회의를 통해 정책과 노선을 연구하고 정치사업을 수행하며 전대협의장과 중앙위원회를 보좌한다』고 규정,이 단체를 이끌어 왔다. 이론은 북한의 주체사상을 따르며 사상적으로 확고한 사람을 선별해 정책위원으로 선발하며 모두 「전대협」집행간부보다 선배들로서 의장을 배후에서 조종해 왔다. 서로서로철저히 가명을 사용해 노출되지 않는 이 조직은 김종식군을 한양대총학생회장에서 「전대협」의장으로 추대토록 내정하는등 의장선출부터 노선수립·투쟁방법 등을 지시했다. 특히 지난 2월말에는 이명곤정책위원장이 손성표정책실장과 함께 『연방제통일방안 합의를 위해 전대협대표를 밀입북시키자』고 합의,끝내는 두사람의 「전대협」대표를 베를린으로 출국시켰다. 안기부 수사결과 이들은 회의때마다 북한의 대남심리전공작기구인 「한민전」에 충성할 것을 결의하고 일부가사만 바꾼 「한민전가」노래를 부르며 북한방송을 유인물로 작성·배포하는 등 이적활동을 해왔다. 이들은 최근들어 손성표정책실장 앞으로 재일북한 공작조직인 「한통련」부의장 곽영문이 연락처를 알려주고 통일대축전내용등 활동을 논의하려하는등 재일 「한통련」과 「전대협」이 연계활동을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개인별 혐의사실 ▲김종식(24·전대협의장·한양대 사회학과4년)=지난달 정책위원장 이명곤,「조통위」위원장 한철수,「조통위」정책실장 손성표등과공모,베를린 「범민족대회 준비회의」참석 및 밀입북을 위해 성용승,박성희를 「전대협」대표로 파견.지난 4월 강경대군 치사사건 「범국민대책회의」공동의장으로 참여,불법 폭력소요 주동. ▲한철수(22·전대협 조통위위원장·경희대 신방과4년)=김종식등과 공모,성용승·박성희를 「전대협」대표로 독일에 밀파.그 뒤 「백만통일 전사여,대표의 뜻을 이어받아 통일대축전 성사시키고 조국통일의 대장정에 거침없이 나서자」는 제목의 연방제 통일방안 지지내용의 이적표현물 제작,배포. ▲손성표(25·전대협 조통위 정책실원·고려대 법과4년 휴학)=김종식등과 공모,베를린 「범민족대회 준비회의」참석 및 밀입북을 위해 성용승,박성희를 물색,이들에게 입북시 활동사항등을 교육시키고 전대협대표로 밀파. ▲허동준(23·전대협대변인·중앙대 법과4년)=지난 4월 강경대군치사사건과 관련 「범국민대책회의」부대변인으로 선임돼 제1차 범국민대회등 불법집회 및 시위주도.지난 4월 김종식등과 함께 기자회견을 갖고 「7·7판문점 통일대축전 실무회담」을 제의했으며 같은 내용의 서한을 북한 「조선학생위원회」에 전달키 위해 대표단 5명을 판문점으로 파견. ▲하태경(23·전대협 조통위 정책실원·서울대 물리학과4년)=손성표등과 공모,제5기 「전대협」산하 제2기 조통위를 구성하고,조통위정책실원으로 활동하며 연방제통일투쟁 선동.지난 4월 손성표로부터 북한 「조선학생위원회」와 해외청년학생측에 보내라며 제공받은 「통일대축전」관련 유인물 7장을 「전민련」팩시밀리로 베를린 「범민련해외본부」를 통해 북한에 발송. ▲김시몽(23·전대협 조통위 정책실원·목포대 경제과4년)=손성표·하태경등과 공모,구속된 조통위 정책실원 염동성의 후임으로 정책실에 가입,연방제 통일투쟁선동등 활동.지난 2월 김일성 주체사상 관련 논문및 「한민전」명의의 「상반기대중운동 총화」 유인물을 소지,대학노트에 요약·정리해 은닉. ▲신현욱(23·전대협의장 수행비서·한양대 사회학과4년)=지난 1월 한양대 사회학과 동기생인 김종식의 수행비서가 되어 각종 집회에 김종식을 수행,이동경로 확보및 신변안전 보호임무수행. ▲정진성(22·전대협의장 수행운전사·한양대 중문과3년)=「전대협」의장 김종식의 승용차를 운전하는 등 편의제공.「통일전선론」(부제―남한혁명 승리의 근본조건을 마련하기 위한 방도)및 「혁명 전통에 관한 이론」의 제목으로 주체사상등 이적내용이 담긴 글을 노트에 작성하여 은닉.「주체의 혁명관을 튼튼히 세운데 대하여」,「주체사상에 대하여」등의 유인물을 탐독 보관. ▲정미연(20·전대협 2차밀입북 예정자·전남대 회계학과4년)=지난달 손성표 「남총련」 조통위소속 고정훈(가명)등과 공모,「범민련」일본본부를 통해 「전대협」대표로 밀입북 추진.
  • “전대협,우리 체제 전복 기도”/안기부 수사내용

    ◎김일성사상 신봉집단/한민전 지침따라 시위 주도/두 학생 밀입북 조종…「고려연방제」 추진 전국 대학생들의 대표조직인 「전대협」은 겉으로 「민주화투쟁」을 내세우고 있으나 실제로는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주사파」학생들에게 장악돼 김일성 유일사상을 전파하고 체제전복을 기도해 온 것으로 밝혀졌다. 또 「전대협」을 이끄는 핵심지도부는 선후배를 불문하고 북한의 수령관을 그대로 받아들여 「전대협」의장에게 반드시 「의장님」이라고 호칭하는 등 절대복종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26일 국가안전기획부가 발표한 「전대협의 실체 수사결과」에 따르면 지난 1월초 대학가에 배포된 「전대협 신년서한」은 북한의 심리전 공작기구인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이 1월1일 「구국의 소리」방송을 통해 발표한 「한민전 신년 메시지」와 동일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전대협」을 실질적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 「정책위원회」는 주체혁명사상이 투철한 골수 「주사파」지하세력으로 거의 매일 모임을 갖고 지하조직을 통해 전달되는 「한민전」의 지침과 북한의 「구국의 소리」방송을 청취,시국상황의 변화에 따라 각종 투쟁전략과 전술을 수립하고 이를 「전대협」의장과 「지구대협」의장으로 구성된 「중앙위원회」를 통해 각 집행기구에 시달,각종 불법집회와 폭력시위를 전개해 온 것으로 밝혀졌다. 안기부는 강경대군 사망사건이후 「범국민대책회의」이름아래 전개된 전국적인 소요사태도 실상은 「전대협」이 작성한 「5,6월 사업계획」에 따라 조직적으로 진행된 것이라고 밝혔다. 「정책위원회」는 「자민통」지하조직에서 침투된 정책위원장 등 중앙정책위원 5명과 「지구대협」정책위원 15명 등 20명으로 구성돼 있으며 특히 중앙정책위원이 핵심을 이루고 여러개의 가명을 사용하면서 철저히 신분을 은폐해온 것으로 나타났다. 또 주사파 지하혁명조직은 한양대·경희대·외국어대를 중심으로 한 동부지역의 「자민통」(1천명),연세대·서강대를 중심으로 한 서부지역의 「조통그룹」(5백명),서울대를 중심으로 한 남부지역의 「관악자주파」(3백명),고려대·성균관대를 중심으로 한 북부지역의 「반제 청년동맹」(2백명)등 4개 조직으로 구성돼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들은 3학년 2학기쯤 4∼5명 단위로 「MT」라는 이름의 수련회를 통해 「김일성·김정일에 대한 충성맹서」「한민전 지침 수행결의식」등을 갖고 완전한 「주사파」로 양성된 뒤 이론에 정통한 학생은 총학생회집행부 또는 「전대협」의 「정책위」「조통위」「선전국」「투쟁국」등에 편입되고 연설능력등 대중성이 뛰어난 학생은 총학생회장,「전대협」의장등 공개투쟁조직의 간부로 활동해 온 것으로 나타났다고 안기부는 밝혔다. 「전대협」은 또 통일투쟁을 위한 특별조직으로 「조통위원회」를 설치,올해 통일투쟁 전략전술을 「범민련 강화」및 「연방제 통일방안 합의」로 설정하는등 정부의 통일정책에 반해 북한의 대남혁명전략과 일치하는 운동을 전개해왔다. 특히 「고려연방제」통일방안을 협의하기 위한 「통일대축전」을 성사시키기 위해 「범민련남측본부준비위」「북한조선학생위원회」등과 긴밀히 연락한 끝에 지난 6월24일 성용승군(건국대 행정학과4년)과 박성희양(경희대 작곡과4년)등 2명을 비밀리에 베를린에 파견했다는 것이다.
  • 북한,“총리회담·범민족대회 연계”/「조국전선」 비상회의서 주장

    【내외】 북한은 25일 「범민련」이 추진중인 범민족대회 실현여부와 남북고위급회담 재개(8월27일·평양)를 비롯한 남북대화의 연계방침을 시사했다. 북한은 이날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비상확대회의를 개최,한국측이 범민족대회와 청년학생 통일대축전을 방해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만일 남조선당국자들이 방북인사들을 석방하지 않고 민주단체들과 통일애국인사들을 탄압하면서 8·15범민족통일대축전을 방해한다면 지금 일정에 올라있는 남북고위급회담의 재개를 포함한 그들과의 대화도 마땅히 고려되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 것으로 「중앙방송」이 보도했다. 북한은 또한 한국정부에 대해 ▲범민족대회 허용 ▲「통일·애국인사」석방 ▲국가보안법 철폐 등을 요구하면서 『남조선당국자들이 반민족적이고 반통일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민족과 통일의 입장에로 돌아서지 않는 한 그들과 대화를 해야 기대할 것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 통일대행진 준비회의/북한서 거부

    【내외】 북한은 22일 한국측이 지난 20일 김창식 통일대행진 행사준비위원장 명의의 대북전화통지문을 통해 제의한 통일대행진 준비회의(7월26일 판문점)를 『범민족대회와 청년학생통일대축전을 무산시키기 위한 고의적인 방해책동』이라고 비난,이 준비회의 개최에 거부의 뜻을 분명히 했다.
  • 북한,「통일대행진」 거부/범민련관계자 석방등 3개항 요구

    ◎조평통위장 담화 【내외】 북한은 16일 8·15를 기념해 공동경축행사 등 남북 「통일대행진」을 진행하자는 정부측 제의와 관련,「범민련」이 추진중인 범민족대회 테두리내에서 수용할 입장임을 밝히면서 남측 「범민련」과 전대협관계자들의 구속자 석방등 3개항의 전제조건을 제시,사실상 거부태도를 나타냈다. 북한은 이날 「조국평화통일위원회」위원장 윤기복 명의의 담화를 통해 『남조선당국이 8·15를 민족공동으로 뜻깊게 기념할 의사가 있다면 서울에서 열리게 될 범민족대회와 「청년학생 통일대축전」이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필요한 조건을 보장해 주고적극 협조해 주면 될 것』이라면서 ▲이 행사에 한국 「범민련」 관계자 이외에 통일을 지향하는 인사.단체들을 참가시킬 것 ▲공동축제 개최문제를 협의키 위한 남북한 및 해외측준비회의를 오는 25일 서울에서 각각 5∼7명으로 진행할 것 ▲남측 「범민련」및 전대협관계자들을 준비회의 전까지 전원 석방할 것 등을 요구했다고 이날 하오 6시 북한방송들이 보도했다.
  • 「범민련」 간부 2명/파북관련 사전영장

    안기부는 8일 「전민련」소속 대학생의 베를린 「남북해외청년학생통일대축전」에 참석토록 배후조종한 혐의를 받고있는 「범민련」남측본부 준비위 김쾌상실행위부위원장(46)과 이 단체 재정소위원장 이관복씨(57)등 간부2명을 국가보안법위반(이적단체가입등)혐의로 구속영장을 미리 신청했다. 김씨등은 지난1월23일 이창복집행위원장(53)등 이적단체로 규정된 「범민련」간부들이 잇따라 구속된뒤 이 단체 간부로 활동해오면서 팩시밀리를 이용,북한과 접촉하는등 「전대협」대표의 해외파견을 배후조종한 혐의를 받고있다.
  • 「범민련」 베를린본부 “불협화음”/공개석상서 사무국장·대변인 언쟁

    ◎「전대협 2명」 처리 싼 노선갈등인듯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의 베를린해외사무국이 최근 열린 「91범민족대회준비회담」에 파견된 전대협의 성용승군(22·건국대 학추위위원장)과 박성희양(21·경희대작곡과4년)문제로 불화를 빚고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30일 베를린에서 열렸던 범민련지역대표회의가 끝난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두학생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불필요하다는 임민식사무국장(50)과 「가능한 범위내의 발설」을 주장하는 황석영대변인(49)간에 언쟁이 벌어졌다. 황대변인은 언쟁끝에 한때 기자회견장에서 퇴장했으며 사의를 표명했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30일 기자회견에서는 두사람의 다툼과 관련해 회의기간중 내부적으로 심각한 얘기들이 있었다고 범민련 대표들이 밝혀,제반문제에 대한 내부이견이 있음을 시사했으며 이러한 이견이 회의과정에서 충분히 이해되고 극복됐는지,아니면 일부의 관측처럼 이러한 이견이나 두사람의 충돌이 「조직내의 노선차이」또는 「불화」의 단면을 노정시킨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북한의 전금철 최고인민회의대의원(범민련북측부위원장)을 비롯해 유럽·미주·일본·호주등 각 지역의 대표들이 두루 참석하고 언론에도 공개된 자리에서 격한 언쟁이 조직의 대표자 사이에 오간 것에 대해서는 자체내에서 강한 비판과 대책논의가 있었을 것이라 짐작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범민련측은 「입북파견」물의를 일으키며 베를린에 와있는 전대협의 두 학생이 범민련회의와는 직접 관련이 없으며 다만 8월 서울에서 개최될 예정인 「8·15 남북해외청년학생통일대축전」준비를 위해 파견된 두 학생이 베를린에 머무는 동안 신변보호의 책임을 맡았을 뿐이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 전대협,「파북」 북한과 사전연락/안기부 확인

    ◎범민련 통해 수차례 서신교환/「자민통」 관련 여부도 수사/입북 막게 독에 신병인도 요청 국가안전기획부는 28일 평양에 가기 위해 독일 베를린에 머물고 있는 「전대협」 간부 성용승군(22·건국대 행정학과 4년)과 박성희양(21·경희대 작곡과 4년)이 출국하기 전 국내에서 북한측과 서신을 교환하고 대표단 임명식을 갖는 등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워 입북하려 한 사실을 밝혀내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안기부는 「전대협」이 지난 20일 서울에서 「통일대축전대표단 임명 및 사수결의식」을 가진 뒤 평양 「핵문제 국제회의」와 「91통일대축전」에 북한대표단과 함께 행동할 한국측 대표학생으로 성군과 박양을 선발,임명장을 수여하고 결의식을 마친 사실도 밝혀냈다. 성군과 박양은 이 자리에서 앞으로의 활동과 포부를 밝히는 「출사표」를 대표자 자격으로 발표하고 「백만학도에 드리는 글」을 자필로 작성,출국하기에 앞서 지난 23일 밝힌 사실을 확인했다. 이들은 「전대협」 의장 김종식군 등이 참석한 대표자 임명식에서 『통일대축전 대표로 임명돼 영광이며 힘차게 투쟁할 것』이라고 결의하고 김군이 수여하는 대표자 금반지를 받고 기념촬영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또 출국 전 백만 학도와 건국대생·부모 등에게도 『내 한몸 바스라져도 원한 맺힌 분단철책선을 치우겠다는 자세로 싸워갈 것』이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안기부는 「전대협」이 성군과 박양을 평양에 보내기 위해 북한의 「조선학생위원회」측과 여러 차례 서신을 교환,논의했으며 이같은 논의는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해외본부를 통해 이뤄졌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조선학생위원회」 위원장 최현덕은 지난 25일 「전대협」 앞으로 『남조선 청년학생들이 발기한 「7·7남북·해외청년학생회담」과 「8·15남북해외청년학생통일대축전」을 성과적으로 보장하는 문제의 토론을 위해 조선학생위 대표자회의가 진행됐음을 알린다』는 내용의 전문을 보냈다. 안기부는 지금까지의 수사결과 이번 「전대협」의 평양참가 계획에는 김군을 비롯해 이 단체산하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학추위) 위원장한철수군(경희대 총학생회장)과 「정책위원회」 간부 9명,「범민련」 공동의장 강희남 목사 등 「범민련」 관계자 4명 등 모두 15명과 「전대협」의 배후세력인 「자민통」 등이 깊이 개입한 혐의가 짙다고 보고 이들에 대해서도 집중 수사하고 있다. 안기부는 성군·박양이 여권에 출국목적을 허위로 기재한 사실을 중시,여권법 위반혐의로 여권물수령을 내려 입북을 막을 방침이며 독일정부에 이들의 신병인도를 요청했다.
  • 「수세국면」 탈출의 몸부림/「전대협」은 왜 2명 파북 꾀했나

    ◎핵심수배·총리폭행사건 뒤 세력위축/통일열기 재부각시켜 공세전환 모색/자민통 주도… “실이 더 많다” 반대도 다수 「전대협」이 임수경양의 밀입북사건 2년 만에 또 다시 건국대생 성용승군(22)과 경희대생 박성희양(21)을 평양에 파견하기 위해 몰래 출국시킨 것은 점차 위축되고 있는 학생운동권의 분위기를 전환,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한 방편으로 해석되고 있다. 즉 「전대협」 핵심간부들이 수배중이라는 내부적 어려움과 정원식 총리서리 폭행사건을 계기로 국민들의 따가운 눈총까지 받고 있는 2중의 수세국면에서 탈피하기 위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이번 사건은 노태우 대통령의 방미에 앞서 이뤄졌다는 점에서 「반미자주화통일」 노선을 내걸고 있는 「전대협」이 강경대군 치사사건 이후 전개해왔던 「5월투쟁」의 열기가 정 총리서리 폭행사건 이후 시들해진 데다가 광역의회선거에서 자신들이 밀은 후보들이 대부분 낙선하는 등에 따른 후유증을 극복하기 위한 대책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같은 결정은 사전에 장기적으로 치밀하게 계획돼 오다 일정만 최근 들어 확정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성군과 박양은 지난 4월16일 배제여행사에 유럽배낭여행 신청을 냈으며 이는 강군치사사건 등 일련의 변수가 발생하기 훨씬 앞서 이뤄진 것으로 보아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짠 것으로 보인다. 「전대협」은 『정부당국이 한소 수교 등 적극적인 외교공세로 92년 총선 및 93년 대선에서 승리,장기집권을 꾀하고 분단고착화정책을 강화할 것』이라고 보고 8월 「범민족대회」 일정에 맞춰 「남북해외청년학생 통일대축전」을 계획했었다. 「전대협」은 이 행사를 오는 8월14,15일 이틀 동안 서울에서 열기로 하고 이를 위해 같은 달 7일 판문점에서 「북한·해외청년학생대표」와 실무회담을 갖기 위해 정부에 북한학생접촉 승인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임양사건과 지난해 「범민족대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정부의 창구단일화정책에 따른 철저한 봉쇄정책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전대협」은 정부의 승인이 없더라도 대표단을 파견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전대협」은 남북한학생이 참가하는 행사는 불가능하다는 인식 아래 임양의 경우처럼 하나의 「상징」을 내세워 정부의 탄압을 유도,남북한 학생의 공동투쟁을 벌여나가겠다는 계산을 한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이같은 결정을 하기까지에는 「전대협」 내부의 반발도 컸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임양사건으로 인해 학생운동권에 대한 대규모 검거선풍이 일어 결국 「득」보다는 「실」이 많았다는 반대의견이 내부에서 강하게 대두됐다는 것이다. 한편 수사기관은 「전대협」의 이같은 일정을 실제로 지하조직인 「자민통」 계열에서 추진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자민통」은 북한의 대남선전 선동방송인 「구국의 소리」의 강령을 그대로 옮겨 반체제활동을 벌이고 있는 지하조직이다. 따라서 「자민통」 출신의 핵심운동권 학생들이 『임양사건으로 통일열기를 고양시키고 운동권 전체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는 자신들의 논리를 앞세워 반대파를 배제하고 이같은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고 있다. 어쨌든 「전대협」은 「5월 투쟁」을 「8월 통일투쟁」으로 이끌기 위해서「또 다른 임수경양사건」을 계속 이슈화시켜나가 학생들의 투쟁심리를 자극하는 게 필요하다는 계산이 짙게 깔렸다고 판단된다. 결국 이번 사건은 「전대협」측이 자신들의 수세국면을 공세국면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볼 수 있으나 임양사건 때처럼 오히려 자신들의 활동을 크게 위축시키는 계기를 자초할 수도 있는 모험을 감행한 셈이라 할 수 있다.
  • 당시 중대장 이대용씨의 회고:「내가 겪은 6·25」 하

    ◎혹한속 중공군 6개 사단의 포위 돌파/평양서 재편성… 「인해전술」과 싸우며 남하/51년 7월 대대장으로… 금성·금화서 공방전/저격능선 「고지쟁탈」 전투중 미 유학 명령 1950년 10월28일 하오 6시45분. 겨울로 접어드는 시기여서 벌써 어둠이 깔렸다. 제7연대 제1중대는 5대의 트럭에 분승,주둔지인 압록강변을 떠나 초산읍으로 철수했다. 다음날인 29일 새벽 5시쯤 제1대대 수색대를 태운 군용차 한 대가 초산읍에서 다시 남쪽을 향하여 떠났다. 제1대대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하여 북한공산군의 출몰이 염려되는 구용동 남쪽 고개를 수색·점령·확보하기 위해 먼저 떠난 것이다. 그날 아침 6시30분쯤 제7연대 제1대대는 군용트럭을 타고 초산읍을 출발,남쪽으로 내려가 고장에서 연대본부와 합류했다. 이때 중공군은 고장 남쪽에 있는 풍장 일대에서 아군이 남하하는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아침 식사가 끝나자 제2대대와 제3대대는 이들 중공군을 일제히 공격,돌파작전을 개시했다. 우리 공군 전폭기들이 중공군 진지를 강타하면서 제7연대의 돌파작전을 근접지원해주었다. 중공군은 남으로 좀 밀려나는 듯했으나 그들의 두꺼운 포위망을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달이 없는 어두운 밤이 됐다. 지형은 폭이 50∼1백50m 가량 되는 좁은 계곡이 길게 남북으로 놓여 있고 계곡 양쪽의 산줄기들은 가파르고 높았다. 이날 밤 12시 정각,중공군은 야간공격을 감행했다. 그들의 야간전투는 혀를 찰 만큼 아주 능숙했다. 얼마 안가서 제7연대의 전방부대가 무너지고,전방에서 흩어진 연대병력은 하나밖에 없는 자동차도로를 따라 북쪽을 향하여 달아나고 있었다. 후방으로 멀리 떨어져서 재편성을 해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후방에서는 이미 다른 중공군 부대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숨 돌릴 새없이 달려들었다. 재차 흩어져서 다시 더 먼 후방으로 달려가 보아도 그곳에서도 전황은 마찬가지였다. 결국 우리 제7연대는 중공군 제40군예하 1개 사단과의 첫 전투에서 크게 패배했다. 중공군은 우선 병력면에서도 우리 제7연대의 약 3배나 됐다. 군용트럭 수백 대와 사단포병 야포 6문,대전차포,기타보급품을 버린 채 제7연대는 낭림산맥의 지맥인 유령산맥 깊은 산중으로 이리저리 흩어져 들어갔다. 중공군은 이 분산병력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들은 악착같이 우리 부대를 추격하며 남쪽으로 통하는 길목을 모두 차단하고 있었다. 중공군과의 싸움에 들어가기 전 필자의 지휘하에 있던 병력은 제1중대원 약 1백60명,배속된 중기관총반원 약 10명,귀순 동화된 북한공산군 포로 남녀 약 25명,간호학생 2명,한국청년단원 약 10명 등 모두 2백명이 넘었으며 이 중 여자 등 비무장인원을 제외한 전투가능 인원은 약 1백85명 정도였다. 필자는 이 전투가능병력 중에서 약 60명을 잃은 채 잔여인원을 이끌고 유령산맥으로 들어갔다. 높은 산에는 먹을 것이 없었다. 그곳은 벌써 깊은 겨울이어서 뜯어 먹을 풀조차 없었다. 중공군을 만나면 싸우기도 하고 피해 달아나기도 하면서 남으로 남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포위망을 계속해서 뚫어봐도 눈에 보이는 것은 중공군뿐이고 아군은 도대체 전혀 보이질 않았다. 중공군과 만나 교전이 이루어질때마다 아군의 병력은 자꾸 줄어만 들었다. 중공군 6개 사단의 포위망을 뚫는 데서 우리 제7연대의 인명피해는 엄청났다. 당시 제7연대에는 8명의 영관급 장교가 있었는데 이 중 6명의 손실이 있었다. 부연대장 최영수 중령,제2대대장 김종수 중령,제1대대 부대대장 조현묵 소령,연대정보주임 김재강 소령 등 4명은 포로가 됐고 제3대대장 조한섭 소령은 전사했으며 연대작전주임 조윤재 소령은 무참히 학살당했다. 포위망을 뚫고 용케도 살아나온 사람은 연대장 임부택 대령과 제1대대장 김용배 중령 두 사람 뿐이었다. 그러나 김용배 중령은 그후 전사했다. 더욱이 장병들의 손실은 말할 수 없이 컸다. 내가 덕천지방 동쪽 송정리에서 대동강을 건너 남중리의 적군과 최후의 교전을 갖고 포위망을 뚫은 뒤 제6사단 사령부에 도착,사단장 장도영 준장에게 신고를 한 것은 그해 11월9일 오후 3시경이었다. 나는 중공군 포위망을 뚫고 나와 사단장에게 첫번째로 신고식을 갖는 장교가 된 것이다. 군악이 울려 퍼졌다. 군인 20명을 3렬 횡대로 하여 세워놓고 마지막에 서울적십자병원 간호학생 2명을 세웠다. 중대장인 나는 3렬횡대의 6보 앞 중앙에 섰다. 나는 사단장에게 다음과 같이 신고했다. 『경례! 바로! 제7연대 제1중대장,이대용 대위는 적포위망을 돌파하고 사병 20명,민간인 간호학생 2명을 지휘하여 1950년 11월9일 사단사령부에 도착했기에 이에 삼가 신고합니다. 경례! 바로!』 사단장의 위로와 격려사가 있었다. 군예대 여자 가수가 나의 목에 하늘색 머플러를 걸어주었다. 사단사령부에서 할당해주는 민중 사랑방에서 하룻밤을 자고 서울적십자병원 간호학생 박태숙·정정훈양에게 하사관 1명을 딸려 서울로 떠나 보냈다. 깨끗이 보호하고 온 처녀들이 도중에서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든든한 하사관을 경호원으로 배정,서울까지 가게 한 것이다. 11월22일까지 제7연대장 임부택 대령과 김용배 중령이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나왔고 후방에서 신병들과 육군종합학교 출신 신임 소위들이 보충돼 제7연대는 11월25일 재편성을 했다. 병력숫자로는 제7연대가 제대로 모습을 갖춘 셈이었다. 재편성이 끝나기가 바쁘게 제7연대는 덕천 남쪽 북창으로 이동하여 중공군과 대결하게 됐다. 북창과 가창 사이에 있는 미럭고개에서 큰 접전이 벌어졌으나 신병들인 아군이 중공군의 공격을 견뎌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중공군의 진격은 계속되었고 우리 제7연대는 평양 상원 서흥 시변리 삭녕 전곡을 거쳐 다시 38선에 배치되었다. 북한공산군이 남침한 1950년도 저물어 갔다. 그해 12월31일 밤이었다. 중공군의 대공세에 밀린 제7연대 제1중대는 동두천 의정부를 거쳐 서울 북방 창동에 배치되었다. 해를 넘겨 1951년 1월6일 경기도 광주를 거쳐 백암리로 가는 도중에 나는 제1대대 부대대장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대대장 대리로 제1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영하의 매서운 바람이 살을 에듯이 불어댔다. 1·4후퇴라고 일컬어지는 설상의 피란민대열이 남으로 남으로 이동을 하고 있었다. 중공군도 각종 보급품들이 달리고 장티푸스까지 만연하자 지칠 대로 지친 모양이다. 중공군은 양지리 북쪽에서 더 이상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 제7연대는 그동안 중공군과 싸우면서도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처음엔 대단한 적군으로 생각했으나 나중에 알고보니 그들도 별것이 아니었다. 절대로 불패의 군대가 아니었다. 이때부터 우리는 그들과 싸워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 나는 약 2개월간 제1대대를 지휘하고 나서 대대장이 새로 부임함에 따라 부대대장 직책을 수행하게 되었다. 용문산지구 전투,춘천지구 전투,구만리지구 전투,풍산리지구 전투,백암리지구 전투를 끝으로 나는 그해 7월9일 제7연대를 떠나 제2사단 제32연대 제1대대장으로 부임했다. 같은 해 10월27일에는 제32연대 제3대대장으로 보직이 변경됐다. 금화지구 파조봉­이실골 전투,금성지구 전투를 하면서 제32연대 제3대대는 금성 바로 앞산인 424고지까지 1개 소대를 진출시켰다. 여기서 중공군과 매일같이 폭격전과 수색전으로 투덕거리며 한겨울을 보냈다. 미군과 교대하고 금화 쪽으로 빠져나왔다. 제32연대는 제3대대는 금화 동북방에 있는 저격능선에 배치됐고 한국군에도 임시계급제도가 도입되어 일선 보병대대장들에게는 1952년 3월부터 모두 육군중령 계급이 부여됐다. 저격능선은 지형상 항상 긴장상태에서 적과 공방임무를 수행해야 했달. 그러던 중 나는 미 육군보병학교 초등군사반 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2년여의 전진을 씻고 부산항에서 미국행 군용수송선을 탄 것이 1952년 9월2일이다. 이때의 군복은 카키색 군복이고 모자도 카키색 군모였다. 6·25가 일어났을 때,내가 춘천도서관으로 가던 때의 군복도 카키색 군복,모자도 카키색 군모였다. 카키색 군복으로 맞이한 나의 6·25는 카키색 군복으로 막을 내렸다.
  • 전대협 간부 2명 입북위해 출국/성용승군·박성희양

    ◎관광객 위장,베를린 잠입/“7월 중순 「평양 핵문제 국제회의」 참석할듯”/안기부 국가안전기획부는 「전대협」이 북한과의 치밀한 사전연락 아래 이 단체 간부인 남녀학생 2명을 오는 7월 중순 평양에서 열리는 「핵문제 국제회의」에 참가시키기 위해 몰래 출국시켰다는 정보를 입수,이들의 행적 등을 추적하고 있다고 27일 밝혔다. 안기부가 내사를 벌이고 있는 「전대협」 간부는 성용승군(22·건국대 행정학과 4년)과 박성희양(21·경희대 작곡과 4년)으로 이들은 「전대협」의 지시에 따라 지난 24일 관광객으로 가장,김포공항을 통해 출국한 뒤 독일 베를린에서 열리는 「91서울범민족대회준비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현재 베를린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은 베를린에서의 일정을 마치면 북한에 들어가 7월 중순 평양에서 열릴 예정인 「핵문제 국제회의」에 참석,「남북 동시 핵사찰」 「남한에서의 핵무기 철수」 등을 주장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또 「범민족대회」관련행사의 하나인 「통일대장정」에도 참가,북한의 대학생들과 함께 백두산에서 판문점까지 행진한 뒤 8월12일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 귀환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편 「전대협」은 이날 『성군 등 「전대협」 대표 2명이 지난 24일 하오 9시30분 서울을 출발,일본과 오스트리아를 거쳐 베를린에 머물고 있으며 오는 7월20일 이후 베를린에서 평양으로 들어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전대협」 산하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학생추진위원회」(위원장 한철수·경희대 학생회장)의 한 간부는 『성군 등은 7월14∼15일에 열릴 예정인 「남북청년학생해외통일대축전」에 「전대협」 대표로 참가하고 같은날 7일과 20일 두 차례 열릴 예정인 「범민족대회」 예비실무회담에 남한쪽 「범민련」 대표자격으로 북한 및 해외동포 대표들과 협의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북한,조총련청년 반한선동 밀봉교육/타스통신 전 평양특파원 폭로

    ◎평양서 40일씩 군중 동원방법등 집중주입/한국학생층 시위 부추기려 다수 서울 잠입 북한은 한국에서의 반정부시위를 선동할 목적으로 조총련계 청년들을 한 번에 20명씩 평양으로 끌어들여 40일 정도씩 여러회에 걸쳐 비밀교육을 실시한 사실이 소련의 한 언론인에 의해 폭로됐다. 지난해 5월까지 7년3개월간 타스통신 평양특파원으로 지내다 추방당한 알렉산드르 제빈씨는 타스통신 발행의 시사주간지 「에코 플라네트」 최신호에 기고한 「평양도심에서의 어느날」이라는 기사에서 이같은 내용을 밝혔다. 제빈씨는 북한에서 특별교육을 수료한 조총련계 청년들이 일본에 돌아온 후 북한당국의 지시에 따라 한국인 관광객,특히 젊은층을 대상으로 반정부 활동을 벌이도록 적극 권유했다고 말했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바 있는 제빈 기자는 한국 언론종사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입북훈련을 받은 조총련계 청년들 가운데 다수가 『한국으로 들어가 반한활동을 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말했다. 다음은 그의 기사의 요약이다. 『한국에서는 정치제도나 특히 주한미군문제로 반정부·반미시위가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으나 반소시위는 흔치 않은 일이다. 그러나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노태우 대통령간 제주정상회담을 놓고 한국의 급진적 학생들이 항의시위를 벌였다는 서울발 AP통신 보도를 보고 평양의 어느 술집에서 있었던 재일교포 청년들과의 만남이 기억에 떠올랐다. 평양 중심 대동강 기슭에 있는 이 술집은 경화만을 받는 특별한 곳으로 동경이나 홍콩처럼 흥청대는 분위기였으며 김일성 배지를 가슴에 단 사람들이 가격을 아랑곳하지 않고 마셔대고 있었다. 손님 가운데 북한인은 별로 없고 거의가 재일교포 청년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조총련계였으며 필자가 만난 김호일은 일본 모리오네지방 조총련 책임자였다. 김을 통해 그의 동료 김상호·김배봉·김재진과도 인사했다. 이들 청년들은 「우리는 40일 동안 사회주의 조국에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과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의 혁명적 위업을 연구했으며 동시에 조국통일사업에 관한 문제들을 공부했다」고 말했다. 필자는 대화를 통해 이들이 「반인민독재투쟁을 위해 군중을 어떻게 동원해야 하는가」를 집중적으로 연구했음을 알게 됐다. 그들은 분명히 「반민족적 체제와의 투쟁에 인민이 앞장서야 할 것」이라는 명제하에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과정을 졸업한 사람들은 일본으로 돌아가 반한 선전자료들을 한국의 보통사람들에게 보내는데 적극 참여하도록 지시받았다는 것이다. 자료를 보내는 방법으로는 일본을 관광하는 한국인들에게 접근,주소를 알아낸 후 이 주소를 통해 선전물을 발송토록 했으며 조총련계가 한국으로 들어갈 경우 친척·친구와 특히 젊은층을 대상으로 선전활동을 벌이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선전의 주요목적은 한국인에 대해 평양의 인상을 좋게 하고 조국통일에 대한 북한노선을 심어주는 반면,서울측은 통일에 대한 말로만 떠들고 실천을 하지 않고 있다는 식으로 강조하는 데 있었다. 비밀교육을 받은 재일교포 청년들은 이미 한 번 이상 북한을 방문했던 것으로 확인됐는데 이들은 평양으로 떠나기 전에 일본정부에 대해 「친지방문」이라는 구실을 항상 내걸었다. 그러나 이들이 북한체류중 친지를 방문한 것은 단 한 번뿐이고 그 나머지는 이같은 비밀강습을 받는 데 보낸 것이다』
  • 진통하는 오늘의 한국상황/일 하세가와 의원의 충고

    ◎“정부권위 존중이 민주화 당기는 길”/「총리폭행」,일 안보파동 때도 없던 일/북방정책 놀라운 성과… 한국민 자긍심 가질만 일본 자민당의 하세가와 다카시(장곡천준) 의원은 8순 노령에도 매우 바쁜 사람이다. 다나카(전중) 내각과 미키(삼목) 내각 때의 2차례에 걸친 노동상을 비롯,운수,법무상을 지냈다는 경력 자체가 그의 일과가 분망함을 짐작케 한다. 1953년 미야기(궁성) 2구에서 첫 당선한 이래 13차례의 당선을 거듭했다는 관록도 그의 정치적 비중을 가늠케 하는 자료가 된다. 이 같은 정치적 비중을 가진 하세가와 전 법상이 아베 전 간사장의 자민당장(13일)을 하루 앞둔 12일 저녁 2시간여에 걸쳐 저녁을 함께하는 시간을 내주었다. 일본 정계에 가장 친한파에 속한다고 알려진 그답게 한국의 정국을 염려하는 배려에서였다. ­한국과 한국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언젠가 서울에서 지하철을 탔는데 앞에 앉아 있던 학생이 벌떡 일어서며 자리를 양보해요. 내가 그만큼 늙어 보였는가 한편 섭섭한 감도 없지 않았으나 지금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미덕이지요. 한국은 유교정신이 매우 강해서 아버지 앞에서는 아직도 담배를 못 피우지 않습니까. 그런 훌륭한 정신을 한국은 지금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런 정신은 일본이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세가와 전 법상의 양미간은 찌푸려진다) 그런데,그런 유교정신과 분신자살하는 학생이 나오는 것을 어떻게 연결시켜 생각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힘듭니다. ­얼마전 한국에서는 국무총리가 학생들에게 봉변을 당한 일이 있었는데요. ▲신문에서 잘 보았습니다. 좌익을 중심으로 한 일본의 학생운동이 격렬하던 60년대와 70년대초에도 일본에서는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60년대 미일 안보조약 개정 파동 때는 자민당만을 빼고 전 일본이 안보조약 개정에 반대했습니다. 국회의사당 주변은 늘 수많은 데모대에 둘러싸여 의사진행이 불가능한 형편이었습니다. 개정안을 국회에서 비준할 때 국회의장은 자리에도 앉지 못하고 12분 만에 전격통과시키는 판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국민들은 국회와 국회의원의 존재는 국가명운에 걸리는 존재라고 뚜렷이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정부도 학생이라는 존재는 일본의 장래를 짊어지고 있다고 인식했습니다. 이때의 소동이 정부권력으로 눌러진 것이 아닙니다. 정부는 국민들의 것이며,그 권위가 존중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는 사회양식이 일본을 위기에서 건진 것입니다. 한국의 총리가 학생들로부터 폭행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몹시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학생들은 필경 이데올로기에 물든 학생들일 것입니다. 그것이 큰 일입니다. 지금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북한이 있지 않습니까. 학생들의 그런 행동은 국가를 파는 행동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일본과 한국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합니까. ▲지난해 5월 노태우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한 국회연설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일본국회에서는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을 비롯해 많은 국가원수들이 연설했는데,노 대통령의 연설이 가장 훌륭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연설의 최후 대목이었다고 기억되는데,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일본의 청년이 도쿄(동경)에서신칸센(신간선)을 타고 출발해 서울∼북경을 거쳐 모스크바까지 여행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는 대목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한국과 일본뿐만이 아니고 북동아시아 모든 지역의 청년들이 손을 함께 잡고 나아가야 합니다. ­한국에 대해서는 어째서 좋은 감정을 갖게 되었습니까. ▲한국과 한국민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애국혼과 옥중에서의 자세는 놀랍지 않습니까. 노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다가 곧바로 미국으로 가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만나고,또 불러들이고 하는 것은 일본의 외교보다 10배 20배 훌륭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국민들은 자기 나라에 대한 프라이드를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너무 평등이라는 문제를 잘못 받아들이고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릴 때에는 거의 비슷한 속도로 달리기를 하지만,그 가운데 노력해서 뛰어난 기록을 가진 사라만이 올림픽선수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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